728x90

2025/08/24 5

주자113

88권 朱子大全 卷八十八정강부(靜江府) 우제(虞帝) 묘비(廟碑)(靜江府虞帝廟碑)[주 ; 우제(虞帝)의 묘(廟)에는 옛날에 비정신(鼻亭神)과 당(唐)의 무■조(武■[=明+空]照)의 상(象)이 있었는데, 모두 배척하여 없애버렸다.] [廟故有鼻亭神及唐武■(明+空)象, 皆斥去之.] 정강부(靜江府)에 옛날부터 있어왔던 우제사(虞帝祠)는 성(城)의 동북(東北) 5리(里)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산(虞山)의 아래에 있는 황택만(皇澤灣)에서 가깝다. 대체로 그것을 누가 처음 건립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당(唐)나라 때 새긴 글이 존재하며 또 송(宋)나라 순희(淳熙) 2년 봄 2월에 지금은 직비각(直祕閣)이신 장후(張侯) 식(栻)이 처음 정강부(靜江府)의 일을 시행하면서 전(奠)을 받들고 나아가 배..

주자112

85권 朱子大全 卷八十五명(銘)․잠(箴)․찬(贊)․표(表)․소(疏)․계(啓)․혼서(婚書)․상량문(上梁文) 강좌명(講座銘) 소흥(紹興) 23년(1153)에 신안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는 동안현 주부로 와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되었다. 이듬해 5월에 새로 강좌(講座)를 만들어 제생들을 가르쳤다. 강좌를 만든 뜻을 되돌아보고 명(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스승의 도가 끊어지고 막혀 그 집이 허물어졌네. 이제 높고 크게 지었으나 또한 내가 거처하며 스승이 될 수 없지. 옛 성인과 스승이 있으니 글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혹여 이를 본다면 생각을 근엄하게 갖춰라. 강단에 서고 보니 오직 엄숙할 뿐이네. 환하게 임하여 그대들이 보는 것을 바로 잡으리라. 紹興二十三年,..

주자111

84권 朱熹集 卷八十四발문[跋] 조검할의 묘지에 발문을 붙임[跋趙鈐轄墓誌] 선왕(先王)은 자제들을 제후로 봉하여 왕실을 보호함으로서 인륜을 두텁게 하고 천하를 안정시켰으니, 이는 자기를 위해 힘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다. 한(漢)나라와 진(晉)나라에 이르러서도 이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으니 비록 치란과 득실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나 종묘사직을 장구히 하려는 계책으로 반드시 요구되었다. 당나라 때 명황(明皇)이 여러 왕들을 의심하여 궁중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부터 마침내 서로 이를 좇아서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따라서 3백여년 동안 천하를 향유했으나 그 자손들 중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자는 결코 없다. 그렇다면 신조(神祖: 송나라 신종황제)가 종지(宗支)를 벗어나 주현에서 벼슬한 일은 고대..

주자110

83권 朱子大全 卷八十三발문[跋] 주봉사의 주장에 발문을 붙임[跋朱奉使奏狀] 이것은 작은할아버지 봉사직각공[奉使直閣公: 이름은 주변(朱弁)]이 오랑캐의 포로로 있다가 돌아와서, 주소(朱昭) 등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일을 알린 글이다. 작은할아버지의 자는 소장(少章)이며, 젊어서 경우(景迂) 조공(晁公)선생에게서 배웠다. 건염(建炎) 초기에 제생으로 응모하여 오랑캐 조정에 사신으로 갔다가 절개를 지켜 굴하지 않고 운중(雲中)에 억류되어 16년을 머물렀다. 소흥(紹興) 계해년(1143)에 화친을 맺어 겨우 돌아왔다. 부름을 받고 편전에서 공은 “오랑캐의 심술이 간사하여 화친을 믿을 수 없으니 마땅히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오랑캐의 형세가 비록 강하다고 하더라도 도의로서 굳건히 하지 ..

주자109

82권 朱子大全 卷八十二발 跋 동파가 임자중에게 준 수첩 발문(跋東坡與林子中帖) 【해제】 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년, 52세) 11월 12일에 쓴 발문이다. 순희 신축 한겨울(11월) 12일(을유), 구주(衢州) 부석담(浮石潭)의 배에서 이것을 보았다. 당시 절동 지방에 흉년이 매우 심하여, 나는 사사(使事)로서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상주하였는데, 그 말을 반복하고서 더욱 깊이 감탄하였다. 마땅히 여러 돌에 새겨서 세상의 군자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신안 주희 쓰다. 淳熙辛丑中冬乙酉, 觀此於衢州浮石舟中. 時浙東饑甚, 予以使事被旨入奏, 三復其言, 尤深感歎. 當摹刻諸石, 以視當世之君子. 新安朱熹書. 다시 쓴 발문(再跋) 순희 신축, 절동지방에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