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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2025. 8. 24.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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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朱熹集 卷八十四

발문[]

 

 

 

조검할의 묘지에 발문을 붙임[跋趙鈐轄墓誌]

 

 

 

선왕(先王)은 자제들을 제후로 봉하여 왕실을 보호함으로서 인륜을 두텁게 하고 천하를 안정시켰으니, 이는 자기를 위해 힘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다. ()나라와 진()나라에 이르러서도 이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으니 비록 치란과 득실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나 종묘사직을 장구히 하려는 계책으로 반드시 요구되었다. 당나라 때 명황(明皇)이 여러 왕들을 의심하여 궁중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부터 마침내 서로 이를 좇아서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따라서 3백여년 동안 천하를 향유했으나 그 자손들 중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자는 결코 없다. 그렇다면 신조(神祖: 송나라 신종황제)가 종지(宗支)를 벗어나 주현에서 벼슬한 일은 고대 성왕을 본받아 후대 왕에게 거울이 된 것이니 거룩한 계책이 원대하였다. 이 때문에 정강(靖康)의 재앙 때에 측근 관료들은 대부분 북쪽으로 옮겨갔으나 멀리 외직에 있던 관료들은 능히 공훈과 업적을 세우곤 했다. 그 중에는 도둑 떼에 대항하거나 오랑캐를 막다가 임지에서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강동(江東)의 검할(鈐轄) 조공(趙公) 같은 이가 이에 해당된다.

그의 손자 숭준(崇遵)이 이 서축(書軸)을 꺼내 보였다. 나는 제공들이 기록한 글을 반복해서 읽고 아울러 이전의 일에 감동하여 장탄식하며 발문을 썼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동래(東萊) 여사인(呂舍人)이 지은 비명(碑銘)을 지금 보존하지 못한 점이다. 마땅히 여사인의 집에서 구하여 보충해야 할 것이다. 또 몇 해 전에 담주(潭州)에서 벼슬할 때 그 사전(祀典)을 살펴보니, 소흥(紹興) 초년에 국난에 죽은 선비가 네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중에 한 명은 병관(兵官) 조율지(趙聿之)였는데 또한 종실의 아들이었다. 성이 함락되자 항전(巷戰: 시가 전투)을 펼치다가 적을 꾸짖고 죽었다. 오랑캐가 물러가고 그 일이 알려져 조칙으로 우감문위장군(右監門衛將軍)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당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임시로 제사를 올리니, 절로 탄식이 나오고 매우 비통하였다. 곧바로 강기(綱紀: 군의 종사관을 말함)를 시켜 진()나라 자사(刺史) 초민왕[譙閔王: 이름은 사마승(司馬承)] 등의 위패를 만들어 사당에 봉안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케 했다. 채 열흘 도 못되어 곧장 허락한다는 전갈을 받았고 충절지묘(忠節之廟)'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성덕(聖德)의 뜻이 더해져서 죽은 자나 산 자나 공경하고 감동했으니, 이는 제군들의 혼령이 귀의할 것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들어보니, 조검할의 여러 손자들이 또 장차 사적을 적어서 시호를 받으려하고 있다. 내가 사액을 청한 일로 미루어보면, 골육의 은혜를 두텁게 하고 절의의 권장을 높이는 창원에서 조정이 이 일에 대해 분명 인색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초왕(譙王)도 진나라의 종실 사람인데 사적을 본전(本傳)에다 갖춰 놓았다고 한다. 경원(慶元) 병진년(1196) 7월 경자일에 구위(具位) 주희가 삼가 씀.

 

先王封建子弟, 蕃屛王室, 所以厚人倫而寧天下, 非獨私其爲力於己而已. 下及漢晉, 莫不由之, 雖其治亂得失有不齊者, 然要爲宗社久長之計也. 明皇疑忌諸王, 不令出閣, 後遂相踵, 以爲家法. 是以享有天下餘三百年, 而其子孫絶無聞於今者. 然則神祖之出宗支以仕州縣, 其所以法前聖而鑒後王者, 聖謨遠矣. 以故靖康之禍, 近屬雖頗北遷, 而疏遠在外者往往能建勳績. 其抗羣盜, 拒仇虜而死其官守者, 亦不乏人. 江東鈐轄趙公是已. 其孫崇遵出此軸以見示, 因得反復諸公所記, 幷感前事, 爲太息而書其後. 獨恨東萊呂舍人所撰碑銘今不復存, 當爲求之其家, 以附益之. 又記頃年守, 考其祀典, 紹興初年死難之士四人, 其一兵官趙侯聿之, 亦宗室子, 城陷巷戰, 罵賊而死. 寇退事聞, 詔贈右監門衛將軍. 然皆未有廟貌而寓祭他所, 因竊仰歎而深悲之. 卽敎綱紀, 故剌史譕閔王等立象奉祠而爲請於朝. 不旬日間, 卽蒙報可, 賜其號曰 忠節之廟. 德意所加, 神人歆動, 非獨諸君之靈爲有歸也. 今聞鈐轄諸孫且將自列, 求所以易其名者, 所爲請額之事推之, 竊計厚骨肉之恩, 崇節義之勸, 聖朝於此正有所不宜吝也. 譙王宗室, 事具本傳云. 慶元丙辰七月庚子, 具位朱熹謹書.

 

: 原作 , 宋閩, 本改.

유잡단의 주의와 문정공 사마광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

[跋劉雜端奏議及司馬文正公帖]

 

 

 

사대부는 관직에 나가 군주를 섬길 때, 위로는 그 군주를 요순 같은 군주로 만들고자 하고 아래로는 그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충간이 행해지지 않고 충언을 들어주지 않으면 몸을 깨끗이 하여 떠나니, 어찌 그 마음이 즐거워서이겠는가? 따라서 성현이 이런 지경에 처해있다 해도 발걸음을 머뭇거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는 미련을 갖고 배회하다가 사흘을 묵은 뒤에 그 곳을 떠나기도 한다. 군주와 신하간에 큰 인륜과 은혜, 의리를 돈독하게 지켜야 하기에 참으로 한 때의 헛된 명예를 얻는 것을 기뻐하여 경솔하게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 희령(熙寧) 때 잡단(雜端) 유공(劉公)의 주의(奏議)를 살펴보고, 그가 군주를 보필하여 백성을 살찌우려는 소원을 간절하게 품어 몸으로 고통스러워했음을 알았다. 문정공(文正公) 사마광(司馬光)의 유첩을 살펴보고 그가 군주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여 정도로서 서로 권면한 뜻이 또한 참되고 정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 성대하다. 그러나 도를 부각시키고 명분을 세운 말을 혹자는 오히려 병폐로 여기기도 했다. 내 생각으로는 그는 격정적으로 말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미 실질을 갖추면 명분은 저절로 따르니 내 입장에서 참으로 사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는 풍속이 돈후하고 습속이 진실함을 숭상하여 또한 이를 혐의로 삼지 않았다. 더구나 충성스런 현신이 나라를 떠날 때 한 때의 마음은 참으로 개연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뜻을 같이한 사대부가 이를 매우 우려하여 이를 두고 답답하게 세상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이런 말을 하여 관대하게 깨우치는 것이 곧 군주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허물인데 오히려 훗날에 깊은 소망이 있는 것이다. 어찌 명예를 가까이 한 것으로 흠을 삼아 고의로 회피하려고 했겠는가?

유공(劉公)의 일은 소흥(紹興)의 대참(大參)인 진릉(晉陵) 장공(張公)이 이미 상세하게 기록했고, 한때의 현인들이 또 뒤를 이어 밝혔으니 또한 모두 흠모하는 뜻을 볼 수 있다. 공의 세손 군방(君房)이 또 이를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고 성명을 적어주길 부탁했다. 스스로 생건대, 만학 후생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다시 한 편의 글을 덧붙이겠는가? 특별히 혹자가 의심하여 망령되이 논하는 것을 계기로 발문을 붙여둔다. 경원(慶元) 병진년(1196) 8월 무신 초하루에 신안 주희(朱熹)가 삼가 씀.

 

士大夫出身事主, 上則欲致其君爲堯舜之君, 下則欲使其民爲堯舜之民, 至於諫不行, 言不聽而潔身以去, 豈其心之所樂哉? 是以雖聖賢之處此, 不免遲遲其行而不忍爲苟去. 甚或眷戀徘徊, 三宿而後出境. 其於君臣大倫恩義之際篤矣, 固不以苟得一時之虛譽爲喜而輕去之也. 今觀熙寧雜端劉公之奏議, 知其致君澤民之願勤懇切至, 不啻其身之疾痛. 司馬文正公之遺帖, 見其忠君愛國而相勉以正之意, 又不勝其拳拳也. 鳴呼盛哉然而道勝名立之言, 或者猶竊病之. 而慮, 彼蓋有激而云爾. 不然, 夫豈不知旣有其實則名自隨之, 在我固有不得辭者? 而當時風俗之厚, 習尙誠慤, 亦不以是爲嫌也. 又況忠賢去國, 一時之心固不能無慨然者. 同志之士憂之過甚, 恐其以是而不能鬱鬱以久也, 則姑爲是說以寬譬之, 是乃忠君愛國之尤者, 而猶深有望於他時也. 豈以近名爲累而故爲回隱以避之哉? 劉公之事, 紹興大參晉陵張公記之已詳, 一時衆賢又從而推明之, 亦皆足以見其鄕慕之意矣. 公之囗世孫君房又出以示, 使得託姓名焉. 自惟晩出, 何敢復贊一詞於其間? 特因或者所疑而妄論之, 以附于後云. 慶元丙辰八月戊申朔, 新安朱熹謹書.

 

此句原僅 朱熹二字, 宋浙本補.

 

 

장충확공의 편지에 발문을 붙임[跋張忠確公家問]

 

 

 

나는 일찍이 장 충문공[張忠文公: 이름은 숙야(叔夜)]의 사당에 명()을 붙인 것을 계기로 그의 유서를 읽고서 그의 기풍에 감탄하고 흠모했었다. 이제 또 공의 아들 충확공(忠確公) 분주(汾州)의 편지를 얻어 보고 더욱 깊이 추앙하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국가가 태평성세를 연 지 백년 동안에 덕이 높고 은택이 성대하여 세신교목(世臣喬木)이 그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갑자기 위난이 닥쳐왔을 때에 충의의 절개가 유독 장씨의 한 가문에 모였으니 그 또한 성대한 일이다. 공의 큰 절개는 청천백일과 같아서 참으로 찬술이 있은 뒤에 밝혀지는 것이 아닌데, 나는 홀로 그의 세밀하고 근엄한 편지에서 그 정신과 기운이 편안함을 보았고, 그 집안의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죽음을 맹세하는 이외에 오직 남은 고아를 거두어 의탁하게 하고 조금도 아랫사람을 되돌아보는 사사로움을 남기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 그 마음에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했겠는가? 선각(先覺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비분강개하여 죽는 것은 쉽지만 조용히 의리에 나아가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공의 죽음은 참으로 이른바 조용히 의리에 나아간 것이리라. 공의 손자 행검(行儉)이 친구 여극충(余克忠)을 통해 이 서축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여러 차례 읽어보니 감동하여 눈물이 났다. 그래서 삼가 발문을 짓는다. 경원(慶元) 병진년(1196) 10월 기사일.

 

嘗銘張忠文公之廟, 因得讀其遺書而歎慕其風烈. 今又得觀公子忠確公汾州家問, 尤深敬仰. 竊惟國家承平百年, 德隆澤茂, 世臣喬木不爲無人, 而一旦危難之際, 忠義之節乃獨萃於張氏之一門, 其亦盛矣. 公之大節如靑天白日, 固不待贊述而後明. 獨於其筆札之精謹, 見其神氣之安閒, 於其家人父子之間, 見其誓死之外, 唯以收卹遺孤爲寄, 而無一毫內顧下流之私也. 鳴呼非其胸中有以大過人者, 何以及此? 先覺有言, 慷慨殺身者易, 從容就義者難. 若公之死, 其眞所謂從容就義者邪公孫行儉因友人余克忠以此軸見視, 三復以還, 爲之感沸, 因敬識其後云. 慶元丙辰十月己巳.

 

 

동양 곽덕보의 행장에 발문을 붙임[跋東陽郭德輔行狀]

 

 

 

동양(東陽) 곽덕보(郭德輔)를 장사지내려 할 적에 그의 아들 기()가 수백 리를 멀다하지 않고 건계(建溪)로 나를 찾아와 행장 한 통을 꺼내 보이면서 묘명을 청했다. 그런데 이제 사명수수(四明帥守) 임화숙(林和叔)과 전 태부승(前太府丞) 여자약(呂子約)이 또 각각 편지를 보내 곽군의 사람됨됨이는 행장과 다름이 없으니 묘명을 지어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비록 덕보를 알지 못하지만 두 군자의 말을 근거로 그 행장을 읽어보고 나서 그가 학문을 좋아하고 선행을 베풀기를 즐겨한 성의와 진실한 마음으로 깨끗이 물러난 실질을 알고 마음으로 기쁘게 쓰고자 했다. 되돌아보니, 요사이 병이 많고 마음과 눈이 모두 쇠약해져, 묘명에 대한 부탁을 허락했다가 지어주지 못한 경우가 전후로 10여 건이고, 사양하여 허락하지 않은 것이 또한 이것뿐이 아니었다. 이제 다시 어찌 차례를 뛰어넘어 지어주어 원망과 험담을 초래하겠는가? 그래서 지을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기()의 청탁이 더욱 거세었다. 나는 그의 뜻을 슬피 여겨 이처럼 행장에 발문을 붙여 돌려보냈다. ()() 두 군자는 모두 사람을 가볍게 인정하지 않는 자이고 그들의 말은 참으로 후세에 믿음을 줄 만하니, 또 어찌 내 묘명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경원(慶元) 2(1196) 9월 정축 초하루 아침에 신안 주희(朱熹)가 씀.

 

束陽郭君德輔將葬, 其子不遠數百里, 過予於建溪之上, 狀其行事一通以請銘. 而今四明帥守林公和叔, 前太府丞呂君子約又皆以書來, 言君之爲人如狀不誣, 可銘無愧也. 予雖不及識德輔, 然以二君子之言而讀其狀, 見其好學樂善之誠, 忠厚廉退之實, 心固樂爲之書. 顧念比以多病, 心目俱衰, 凡銘之請, 所諾而末及償者前後以十數, 所辭而不敢諾者又不止此. 今復安敢越次開端, 以來怨詈? 因謝不能, 請益堅. 予悲其意, 乃爲書其行狀之後如此而歸之. , 二君子皆非輕許人者, 其言固足以信後世矣, 又何竢於予銘哉? 慶元二年九月丁丑朔旦, 新安朱熹.

 

 

허시랑의 시권에 발문을 붙임[跋許侍郞詩卷]

 

 

 

시랑 허공(許公)의 일을 경영하고 사물을 다루는 재주는 이미 시험을 거쳤고, 그의 문장은 대개 가슴속에 쌓인 것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여 번거롭게 이와 같은 말을 쓴 적이 없었다. 그의 손자 건양승공(建陽丞公)이 나에게 공이 직접 쓴 시권을 보여주었는데, 그 장편의 시구를 살펴보니 참으로 웅장호방하고 거침이 없어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신택서회(新宅書懷)와 같은 근체시들도 모두 율격이 정밀하여 틈을 보이지 않았으니 또한 그의 넉넉한 재주와 역량을 충분히 펼칠 수 있음을 증험할 수 있었다. 나는 공과 함께 강동(江東)사람으로 거주하고 있는 휘주(徽州)와 요주(饒州) 사이는 백 리가 못되어 서로 바라다 보였다. 다만 나는 민() 땅의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공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 한스러웠다. 이제나마 여기에서 그의 필적을 살펴보고 그이 사람됨됨이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경원(慶元) 병진년(1196) 10월 병오 초하루 아침에 무원(婺源) 주희(朱熹)가 씀.

 

侍郞許公經事綜物之才見於已試, 其爲文章, 蓋直吐出胸中之蘊, 未嘗屑屑焉爲如是之言也. 其孫建陽丞公視以公手書詩卷, 觀其長篇大句, 固自雄健豪逸, 磊落驚人, 新宅書懷近體諸作, 又皆律切精穩, 不留縫鏬, 亦足以驗其才力之有餘, 無所施而不可矣. 與公俱江東, 所居, 之間, 相望不百里. 獨恨生長, 不及識公. 顧今於此乃獲窺其筆蹟而因以得其爲人, 豈非幸耶慶元丙辰十月丙午朔旦, 婺源朱熹.

 

 

하도락서의 뒤에 씀[書河圖洛書後]

 

 

 

세상에는 “1에서 9에 이르는 숫자는 하도(河圖)가 되고, 1에서 10에 이르는 숫자는 낙서(洛書)가 된다고 전해졌는데, 이를 고문에서 고증해보면 반대로 배치되어 있다. 나는 󰡔역학계몽(易學啓蒙)󰡕에서 이를 상세히 논변했다. 대덕(戴德)󰡔대대례(大戴禮)󰡕를 읽고서 또 하나의 증거를 얻었다. 명당(明堂)편에는 “294, 753, 618”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씨(鄭氏)거북의 무늬를 본뜻 것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렇다면 한()나라 사람은 본래 이 9수로 낙서를 삼은 것이다. 각조(閣皂) 감숙회(甘叔懷)군이 두 그림을 산중에다 새기고자 했는데, 보는 사람이 깊이 고증해보지 못하면 또한 논쟁이 크게 벌어질 것으로 보여 노파심에 이렇게 써서 알린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정월 보름날에 둔옹(遯翁)이 씀.

 

世傳一至九數者爲河圖, 一至十數者爲, 考之於古, 正是反而置之. 予於啓蒙辨之詳矣. 大戴禮書, 又得一證. 明堂篇有 二九四七五三六一八之語, 鄭氏注云: 法龜文也.然則人固以此九數者爲洛書. 閣皂甘君叔懷欲刻二圖山中, 覽者未必深考, 又當大啓爭端, 聊書以諗之. 慶元丁巳上元節日, 遯翁.

 

 

만군의 행적 뒤에 씀[書萬君行事後]

 

 

 

향거리선(鄕擧里選)의 법이 폐지된 이후 유사(儒士)를 뽑는 자가 재능이나 내실보다는 문예(文藝)를 앞세웠다. 이에 재야에는 버려진 현인이 많고 조정에는 헛된 벼슬자리가 많아져서, 정치의 도구와 백성의 풍속이 이전의 세상에 비해 늘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었다. 정보(正父)가 그의 외삼촌 만군(萬君)의 행적을 논하여 저술한 것을 읽어보았는데, 당세의 인재와 비교해보면 또한 볼만한 점이 많았다. 정보는 옛것을 좋아하고 배운 게 많아 정치의 도리에 깊이 뜻을 두었는데, 그의 필력은 종횡무진했고 말투는 고아하고 웅건하기가 또 이와 같았으니, 역시 ‘’가문의 성씨를 닮았다고 말하리라.

 

自鄕擧里選之法廢, 取士者先文藝, 後材實, 於是野多遺賢, 朝多曠位, 而治具民俗每不能無愧於前世. 正父所論著其舅氏萬君之行事, 而以視於當世之人材, 其亦足以觀矣. 正父好古多學, 深有志於治道, 而其筆力縱橫, 詞氣雅健又如此, 亦所謂似其家姓者耶

 

 

범 두 사람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呂范二公帖]

 

 

 

󰡔후산담총(後山談叢)󰡕은 소단명(蘇端明)이 국상을 당했을 때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기록했는데, 마땅히 위로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의심이 들어 파기했다가 이내 선배들이 주고받은 위장(慰狀)을 실어 이를 바로잡았다. 이제 여정헌공(呂正獻公)의 서첩을 살펴보고서 당시에 이러한 예법이 이미 통용되었음을 알았고, 또 신자(臣子)의 마음으로 그만 둘 수 없는 일이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소공(蘇公)이 어찌 의심했겠는가? 인종(仁宗)황제의 자애롭고 검소한 덕은 모든 군주에 으뜸이었는데, 국장을 치를 적에 이처럼 많은 비용이 들었으니 어찌 그의 마음이었겠는가? 노소[老蘇: 소순(蘇洵)]선생이 화원악거(華元樂擧)’의 비판을 남겼고 충헌(忠獻) 한공(韓公)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서첩에서 이른바 감사를 두어 손실을 제재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여전히 한공이 국정을 맡았을 때의 일이니 또한 그가 뉘우친 실상을 증험할 수 있다. 이것이 한공의 됨됨이 이리라. 여공(呂公)이 한 폭의 종이에서 군주를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으니 유공(劉公)과 마음으로 함께 할 기약이 필시 약속하지 않았어도 같았던 것이다. 이를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여 마지않게 한다.

범 충선공[范忠宣公: 이름은 순인(純仁)]은 성품이 담백하고 충서(忠恕)하여 평소에 지혜로운 명성이나 용맹스런 공적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희풍(熙豊) 연간에 부월(斧鉞)을 주어 변방을 맡겼으나 자주 질책을 받았으니 두 번째 서첩을 보면 개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평생의 발자취는 복왕(濮王)을 숭봉하자는 논의를 배격하고 신법(新法: 왕안석의 정책)을 쟁론하다가 군주와 재상의 뜻을 거슬려도 조금도 회피함이 없었다. 최후에는 원우(元祐)의 현인들을 구제하려다가 끝내 함께 귀양을 갔다. 대개 종신토록 굽힌 바 없었다면 또한 어찌 인자(仁者)의 용기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유씨(劉氏)와 인척으로 매우 친밀했는데 또한 목소리나 기운이 저절로 같아서 구차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자이(子夷)는 그 가학을 전승하여 하찮은 관직을 낮게 보지 않고 자기의 신념을 올곧게 말했기 때문에 동래(東萊) 여사인(呂舍人)이 자주 칭송했다. 독자는 이 점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7월 보름날 이틀 전에 주희가 삼가 씀.

 

後山談叢蘇端明當國恤時與人書疏, 疑於當慰與否而罷, 乃載前輩往還慰狀以正之. 今觀呂正獻公, 乃知當時此禮固已通行, 亦臣子之心不能已者, 不審蘇公何所疑也. 仁宗皇帝慈儉之德冠冕百王, 而因山之奉煩費若此, 豈其心哉? 宜乎老蘇先生有華元樂擧之譏, 忠獻韓公不敢辭其責也. 然此帖所云置司裁損, 仍是韓公當國時事, 亦足以驗其悔悟之實矣. 此其所以爲韓公者耶呂公幅紙之間, 愛君及民, 拳拳不舍, 其於劉公心期所會, 必有不約而同者, 覽之令人感歎不能已. 范忠宣公平淡忠恕, 雅不欲以智名勇功自見, , 間授鉞臨邊, 數被譙讓, 觀第二帖可槪見矣. 然迹其平生, , 爭新法, 干忤君相, 無少顧避. 最後論救元祐諸賢, 卒與同貶. 蓋終身無所屈, 則又豈非所謂仁者之勇哉? 其於劉氏姻好綢繆, 蓋亦聲氣之同, 非苟然者. 子夷得其家學之傳, 不卑小官, 直道自信, 東萊呂舍人亟稱之. 覽者其亦考焉. 慶元丁巳中元節前二日, 朱熹敬書.

 

 

도정의 집안에 보관된 이천 선생의 편지 뒤에 발문을 붙임

[跋度正家藏伊川先生帖後]

 

 

 

[]는 삼가 행관(行館: 관원이 잠시 머무는 곳)에 나아가 장관비서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10월 모일에 하남(河南) 정이(程頤)가 씀.

도정(度正)이 수령(遂寧)의 하급관리가 되었는데 친구 왕세후(王世垕)가 자주 나에게 말하기를 성의 서쪽에 사는 부광(傅光)의 집에 선정(先正) ()() 등 여러 분의 수적이 매우 많이 보관되어 있다. 자네의 조부 대부공(大夫公)이 가우(嘉祐) 초기에 실제로 염계 주선생을 합양(合陽)에서 뵙고 가르침을 구했는데 선생이 손수 가인설(家人說), 간설(艮說), 구설(姤說)등을 써서 주었다. 그 뒤 정태중공(程太中公)이 한주(漢州)의 지사가 되었는데 대부공은 그 때 서천(西川)의 읍재가 되었고, 또 이천(伊川)형제와 교분을 맺어 손수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물은 것이 대부분 모두 남아있다고 했다. 나는 왕군을 만날 적마다 반드시 마음을 다해 간청하여 주자와 정선생 등의 수적을 찾고자 했다. 경원(慶元) 2(1196) 정월 4일에 왕군이 홀연히 산 속에서 나와 나를 찾아주었다. 인사를 마친 뒤에 이천 선생의 편지 한 폭을 소매에서 꺼내주었다. 천천히 고증해보니 거의 선생이 촉()으로 들어갔을 때의 필적이었다. 대부공이 필적을 모아 일기책을 만들었는데 이 판본은 6월에 시작하여 716일에 끝났다. 내용에다 왕씨 부자와 여씨 형제의 발탁을 실었다. 희령 연간의 일보(日報)를 작은 글씨로 써서 뒷면이 모두 가득했으나 선생의 글자는 생략되어 분명하지 않았다. 또 염계의 편지를 묻자 없어졌다고 답했다. 나는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왕군에게 말하기를 내가 명민하지는 않지만 여러 선생이 남긴 글을 읽고 그 학문을 배우고 그 도를 구한 지 어언 10여 년이 되었다. 당시의 하나의 일과 하나의 사물을 볼 때마다 마치 남국(南國)의 아가위, 곡부(曲阜)의 신발과 같아 방황하다가 차마 떠나지 못했다. 이제 이 편지는 다행히도 문드러진 고지 더미 속에서 벗어났으나 여러 선생이 후세를 일깨우고자 한 것을 세상이 바야흐로 도학의 기화(奇貨)로 모함하고 있으니, 어찌 숙손무숙(叔孫武叔)의 무리들이 보면 물과 불 속에다 던져버리지 않겠는가? 나를 위해 부군에게 사례하여 내가 받들어 간직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해주게라고 말했다. 그 해 가을에 부군이 찾아와 말하기를 선생의 글은 말한 대로 따르겠다. 대부공의 휘는 기()이고 자는 백수(伯壽)이며 이름이 원부(元符)의 당적에 실려있다고 했다. 부광의 자는 용지(用之)이고 세후의 자는 숙재(叔載)이다. 후학 낙활(樂活) 도정(度正)이 삼가 씀.

부군(傅君)은 주자와 정자의 사제 간을 드나들어 주로 벗을 삼았던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천 선생이 손수 찾아가 사례하고 예법을 갖추기를 공손히 했다면, 그 사람의 어짊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도군(度君)이 애써 편지를 찾아온 일은 뜻이 매우 아름다웠다. 염계선생과 주고받은 유적은 그 마을에 사는 일가나 인척들이 보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도군이 널리 수소문해보면 분명히 찿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명도 선생의 안락정(顔樂亭)시를 읽어보니, 그 마지막 장에서 우물을 차마 폐할 수 없고 동산을 차마 묵힐 수 없다. ! 올바른 학문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도군에게 바라는 것도 또한 오로지 이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군은 더욱 힘써 공부하라!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22일에 주희가 씀.

 

謹詣行館, 拜謝長官秘書. 十月日, 河南程頤.

遂寧戶掾, 友人王君世垕數數爲, 城西傳君光家藏先正, 諸公手蹟甚富. 乃祖大夫公嘉祐初實見濂溪周先生合陽, 求敎, 先生手書家人, , 等說贈之. 其後程太中公漢州, 大夫公時爲邑西川, 又得交伊川兄弟間, 手筆相問, 往往皆在. 每見王君, 必悉意咨懇, 屬以訪求, 諸先生手蹟. 慶元二年正月四日, 王君忽自山中來謁, 講禮已, 袖出伊川先生手狀一幅. 徐加考訂, 殆先生入時筆也. 大夫公集以爲日記冊, 此版起六月, 終七月十六日, 內載王氏父子, 呂氏兄弟遷擢, 熙寧間日報, 作細字, 背面皆滿. 先生字處闕之, 獨得不謾. 又問濂溪, 日亡矣. 且悲且喜, 王君: 不敏, 讀諸先生遺書, 學其學, 求其道, 今十年餘矣. 每見當時一事一物, 如南國之棠, 曲阜之履, 旁皇不忍去之也. 今此紙幸脫於敗爛之中, 然諸先生所以開示後世者, 世方以爲奇貨, 安知叔孫武叔輩見之不遂投之水火耶? 爲我謝傳君, 奉藏之, 俾勿壞.其年秋, 傳君, 言曰: 先生之書謹如命. 大夫公諱, 伯壽, 名在元符黨籍.用之, 世垕叔載. 後學樂活度正謹書.

傳君周旋, 師弟子間, 知所主友, 伊川先生手刺謁謝, 爲禮亦恭, 則其人之賢, 不問可知. 度君求訪之勤, 意欲甚美. 濂溪先生往還遺蹟, 計其族姻閭里之間猶有存者, 度君其廣詢之, 當可得也. 嘗讀明道先生顔樂亭, 其卒章曰: 井不忍廢, 囿不忽荒.鳴呼正學其何可忘? 然則之所望於度君, 又不專在於此也. 度君其益勉之哉慶元丁巳七月二十二日, 朱熹.

 

 

장경부가 풍공에게 준 첩에 발문을 붙임[跋張敬夫與馮公帖]

 

 

 

이는 장경부가 진운(縉雲) 풍당가(馮當可)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 말뜻을 살펴보면 그가 한때 가정에서 조용히 부모를 모셨지만 일찍이 먹을 때나 쉴 때나 중원의 회복을 잊은 적이 없음을 알게 되니, 사람을 감개무량하게 만든다. 풍공(馮公)은 안면이 없으나 고인이 된 단전(端殿) 왕공[汪公: 이름은 응진(應辰)]이 그를 깊이 추앙한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근자에 그의 문집을 얻어 읽어보니, 논의가 훌륭하였다. 그런데 군주가 마음을 바르게 하고 현자를 친근히 함이 이른바 표준을 세우는 것이라고 논한 부분은 우임금과 기자의 메시지를 밝혀 유자들의 비루함을 깨뜨린 것이다. 마침 내 뜻과 합치되었는데 그의 모습을 한 번 보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이 더욱 한스럽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725일에 건안 곤협(坤峽)의 객점에서 신안 주희가 씀.

 

張敬夫縉雲馮當可書也. 味其詞意, 知其一時家庭之間定省從容, 未嘗食息不在中原之復, 令人感慨不已. 馮公獨不及識, 然嘗見故端殿汪公甚推重之. 近得其文集讀之, 論議偉然. 而所論人主正心親賢爲所謂建極者, 禹箕之傳, 破諸儒之陋, 乃適與鄙意合, 尤恨不得一見其面目而聽其話言也. 慶元丁巳七月二十五日, 新安朱熹書于建安坤峽之野店.

 

 

공군의 집안에 보관된 당고에 발문을 붙임[跋孔君家藏唐誥]

 

 

 

궐리(闕里: 공자가 살던 마을 이름)의 후손 공중량(孔仲良)이 지방에서 명경과에 합격하여 당나라 정원(貞元)대화(大和) 연간에 벼슬을 했다가 보전령(莆田令)에 이르러 벼슬을 그만두고 그곳에 집을 마련했다. 자손들은 흩어져 일반백성으로 살았는데 다시는 현달한 사람이 없었다. 소흥(紹興) 시절에 나의 친구 괄창(括蒼) 오임(吳任)이 그 집안으로 장가들어 틈틈이 그 집안에 소장된 고신(告身: 관리로 임명된 자에게 수여한 증서), 가첩(家牒), 세보(世譜)를 보여주었는데 모두 당나라 시절의 옛 유물이었다. 가첩은 또한 그가 과거에 응시할 때에 썼던 것으로 3대의 관직과 휘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증조 문정(文整)은 이름이 세보 속에 보이는데 문선왕(文宣王)을 이은 제경(齊卿)의 별자이다. 그리고 제경은 공자의 제 37세손이다. 원풍(元豐)의 판본을 고증해보니, 습봉(襲封)과 가보(家譜)는 모두 합치되었다. 미루어 내려가면 보전령을 얻은 분은 제 41세가 된다. 가첩은 떨어져 나간 곳이 많아 주리(州里)가 없었는데 홍주(洪州)의 인본으로 때운 곳을 기록했다. 고신을 보면 사주(泗州)의 연수현(連水縣) 임회향(臨淮鄕) 진현리(進賢里) 사람이라고 했으니, 어찌 홍주에서 우거했겠는가? 고신은 모두 7통인데, 그 두 번 째 고신에는 보전령의 아버지 승공(丞公)이 남돈(南頓)과 율수(溧水) 두 현위(縣尉)를 거쳤다고 하고, 다섯 번 째 고신에는 보전령이 명경과와 동집(冬集)을 거쳐 전초위(全椒尉), 청양승(靑陽丞), 보전령(莆田令) 벼슬의 고과에서 모두 좋은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 보전령 만이 등사본을 만들었는데 그 가문은 보전령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9세가 지났다.

나는 그 문서를 얻어 살피고 수정하여 오류가 없게 한 뒤에 보전수(莆田守) 부자득(傅自得)과 보전령 구탁(丘鐸)에게 알려서 그 판적(版籍)을 고쳐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의 제 49세손 공의(孔宜)의 집이라고 하도록 청했는데 두 사람이 기꺼이 허락해서 곧장 그렇게 시행했다. 이때가 소흥(紹興) 25(1155)인 을해년이다. 26년이 지나 공의의 아들 유하(幼夏)가 향거(鄕擧)로 예부(禮部)에서 시험을 치렀고, 또 몇 년이 지나 지현사(知縣事) 요덕명(廖德明)이 그 고신을 현재(縣齋)에다 모각했다. 그러나 그 발문에서 보전령을 38세라고 적은 것은 약간 차이가 있다. 유하가 그 묵본(墨本)을 가지고 왔기에 옛 일을 기록하여 속히 써 주었으며, 또 그 가보와 세보, 남돈과 율수의 두 고신을 모사하여 집안에서 판각토록 하고 보전령 이래의 세차(世次)를 덧붙여서 훗날 고증할 수 있도록 했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중추일에 조봉대부(朝奉大夫) 주희가 씀.

 

闕里裔孫孔仲良以鄕貢明經仕唐貞元, 大和, 莆田令卒官, 因家焉. 子孫散居民伍, 無復顯人. 紹興, 之友括蒼吳任授室其門, 間以其家所藏告身, 家牒, 世譜相視, 世舊物. 牒又其應擧時所通, 具列三世官諱, 獨曾祖文整名見譜中, 乃襲文宣王薺卿之別子, 齊卿寔先聖第三十有七世孫也. 考之元豐版本, 襲封家譜皆合. 推而下之, 莆田令君, 則爲第四十有一世矣. 牒頗殘缺, 無州里, 而以洪州之印欸其縫. 視其告, 則以爲泗州連水縣臨淮鄕進賢里, 豈其寓於? 告身凡七通, 其二爲令君之父丞公所歷南頓, 溧水二縣尉, 其五爲令君明經, 冬集, 全椒, 靑陽丞及莆田考課, 皆尙全好. 莆田令爲謄本, 而其家自令君至此又已傳九世矣. 得其書, 審訂不謬, 乃以告於傳侯自得, 丘君鐸, 請得更其版籍爲至聖文宣王第四十九世孫孔宜, 二公欣然許諾, 卽施行之. 紹興二十五年乙亥歲也. 後二十有六年, 之子幼夏乃以鄕擧試禮部. 又數年, 知縣事廖德明爲摹刻其告於縣齋. 然其跋語以令君爲三十八世, 則爲小差. 幼夏以其墨本來, 因記舊事, 輒爲書之, 且使摹其家譜, 世譜及南頓, 溧水二告幷刻于家, 而附以令君以來世次之屬, 使後有考云. 慶元丁巳中秋日, 朝奉大夫朱熹.

 

 

공의부의 󰡔담원󰡕에 발문을 붙임[跋孔毅夫談苑]

 

 

 

공의부(孔毅夫)󰡔담원(談苑)󰡕은 청강(淸江) 장원덕[張元德: 이름은 흡()]이 그 수고본을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강인기(江鄰幾)󰡔가우잡지(嘉祐雜志)󰡕 속의 말을 뽑은 것이다. 이 판본은 지금 하나가 전해오는데 교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이미 탈자와 오자가 많다. 또 세상에 전해오는 공의부의 글에 󰡔형황신론(珩璜新論)󰡕이라는 것이 있는데 대부분 고금의 사실 중에 근사한 것을 분유, 편집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판본에는 근세에 보고들은 수십 가지의 사실을 덧붙여 기록해 두었으나, 조헌공(趙獻公) 이하는 그 비방을 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세밀하게 고증해보니, 필세(筆勢)가 너무 닮지 않았는데 아마도 호사가가 덧붙여서 후생을 어지럽게 한 것으로 보여 매우 가증스러웠다. 이 책을 보면서 발문을 붙여 이를 밝혀둔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8월에 회옹(晦翁).

 

孔毅夫談苑, 淸江張元德藏其手稿, 然多是抄取江鄰幾嘉祐雜志中語. 此本方是一傳, 以失校, 已多脫誤. 又世傳書有珩璜新論, 多是類集古今事實之近似者. 而一本附記近世見聞數十事, 趙獻公以下, 無不遭其詆毁. 嘗細考之, 筆勢不甚相似, 或好事者附益之, 惑亂後生, 甚可惡也. 因閱此帙, 筆其後以曉之. 慶元丁巳八月, 晦翁.

 

 

왕희지의 십칠첩에 발문을 붙임[跋十七帖]

 

 

 

관청에서 출판한 법첩(法帖)을 가완(佳玩)이라 부르지만 그 진위는 이미 흐려져 버렸다. 예컨대 유차장(劉次莊)은 글씨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가 판각한 글씨에도 중분(中分) 한 글자가 있는데 절반은 앞줄의 아래에 위치하고 절반은 뒷줄의 머리에 위치해 있으니 매우 우스웠다. 오직 이 십칠첩(十七帖)은 서로 전해온 것이 사실적이어서 당시에 이미 관청의 첩권(帖卷) 속에 들어있었으나 원본은 사람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어지럽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첩본은 마장보(馬莊甫)가 모각한 것이다. 그 필력과 내용을 살펴보니 침착하고 느긋했으며 기상이 고매하여 필법에 얽매이지도 않고 필법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참으로 이른바 하나 하나가 자신의 흉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삼가 생각건대, 서예가들은 그 아름다움을 알겠지만 그것이 아름다운 까닭을 반드시 알지는 못한다. 왕희지가 쓴 글에는 촉() 땅의 산천과 인물, 집과 도화(圖畵)를 묻는 내용이 매우 섬세하고 자세했다. 대개 유람하고 싶은 생각을 간절히 두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으니, 불후의 성대한 일은 참으로 만나기 어렵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근래에 여부(廬阜)에서 임기가 만료되었을 때를 추억해 보았다. 제공들은 나를 촉()으로 파견하려고 논의했으나 효종은 가련하게 여겨 먼 곳으로 보내려고 하지 않아 중간에 논의가 그쳤다. 그러나 동쪽에 머물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서쪽으로 유람할 기회만 잃어버려 늘 한으로 여겼다. 이제 이 서첩을 보니 거듭 개연한 생각이 든다. 또 효종이 붕어한 때가 멀어지니 다시는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는다. 주희(朱熹)가 적음.

 

官本法帖號爲佳玩, 然其眞僞已混殽矣. 劉次莊有能書名, 其所刻本亦有中分一字, 半居前行之底, 半處後行之顚者, 極爲可笑. 唯此十七帖相傳眞的, 當時雖已入官帖卷中, 而元本故在人間, 得不殽亂. 此本馬莊甫所摹刻也, 玩其筆意, 從容衍裕而氣象超然, 不與法縛, 不求法脫, 眞所謂一一從自己胸襟流出者. 竊意書家者流雖知其美, 而未必知其所以美也. 書詞問訊道山川人物, 屋宇圖畫至纖至悉, 蓋深有意於遊覽而竟不遂. 豈所謂不朽之盛事信難偶耶? 因念頃年廬阜終更, 諸公議遣使, 孝廟記憐, 不欲使之遠去, 議乃中寢. 然東留訖無補報, 而徒失西遊之便, 每以爲恨. 今觀此帖, 重以慨然. 又念仙遊之日遠, 無復有意於人世也. .

 

 

두보의 동곡칠가에 발문을 붙임[跋杜工部同谷七歌]

 

 

 

두릉(杜陵: 두보를 말함)의 이 노래는 호탕하고 기특하여 시인들 중에 이를 따를 자가 적다. 다만 그 마지막 장에서 늙음은 탄식하고 비천함을 한탄한다고 했으니 뜻이 또한 비루하다. 사람이 도()를 듣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杜陵此歌豪宕奇崛, 詩流少及之者. 顧其卒章嘆老嗟卑, 則志亦陋矣, 人可以不聞道哉

 

 

이백시그림에 발문을 붙임[跋李伯時馬]

 

 

 

용면(龍眠)비기도(飛騎圖)를 보고, 연지(延之), 정수(廷秀), 대방(大防) 삼군자의 아름다운 시구를 읽었다. 이어 법운(法雲) 수공(秀公)의 말을 생각하니, 빼어난 물건이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격이어서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경원(慶元) 3(1197) 108일에 주희(朱熹) 중회(仲晦).

 

龍眠飛騎圖及讀延之, 廷秀, 大防三君子佳句, 因思法雲秀公, 尤物移人, 甚可畏也. 慶元三年孟冬八日, 朱熹仲晦.

 

 

소동파가 쓴 이백두보 제공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東坡書李杜諸公詩]

 

 

 

소동파의 이 시권은 그 도장을 살펴보니 소흥(紹興)의 왕실 서고에서 소장하던 것인데 무슨 이유로 민간으로 흘러나왔는지 모르겠다. 여러 차례 음미해보니 존경심과 감탄을 이길 수 없다. 다만 그가 쓴 이백의 행로난(行路難)에는 자서(子胥), 굴원(屈原), 육기(陸機), 이사(李斯)의 일을 언급한 중간의 여덟 구절이 빠져있었다. 이 분이 잊었을 리는 없으니 그 부분을 빼버린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노옹정시(老翁井詩)는 노소(老蘇: 소순)가 촉() 땅의 스님 거진(去塵)을 보내기 전에 있었으니, 분명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우집(嘉祐集)󰡕에 보이지 않고 또 그것이 무엇을 설명하는지 모르겠다. 우물 속의 노인을 얼굴을 고치고 옷을 바꾸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후편에서는 갑자기 수척함을 싫어하여 거문고 타기를 폐한다는 탄식을 남겼으니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그가 원망하되 성내지 않고 홀로 백세가 흐르도록 후현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그의 마음씀도 또한 원대하다 할 것이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월 정축일에 신안 주희는 옥산(玉山) 왕계로(汪季路)의 소장본을 보고 이처럼 발문을 쓴다.

 

東坡此卷, 考其印章, 紹興御府所藏, 不知何故流落人間. 捧玩再三, 不勝敬嘆. 但其所寫李白行路難闕其中間八句道子胥, 屈原, 陸機, 李斯事者, 此老不應有所遺忘, 意其刪去, 必當有說. 老翁井詩老蘇僧去塵之前, 必非他人之作. 然不見於嘉祐集, 亦不省其何說也. 彼欲井中老翁改顔易服, 不使人知, 而後篇遽有嫌瘦廢彈之嘆, 何耶? 然其言怨而不怒, 獨百世以俟後賢而不惑, 則其用意亦遠矣哉. 慶元丁巳十月丁丑, 新安朱熹玉山汪季路所藏, 而識其後如此云.

 

 

두기공이 구양 문충공에게 준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杜祁公與歐陽文忠公帖]

 

 

 

두공[杜公: 이름은 연()]은 초서(草書)로 저명한 사람인데 그의 맑고 굳센 해서(楷書) 필법도 절로 사랑할만하다. 마음과 필획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월 정축일에 신안 주희가 봄.

 

杜公以草書名家, 而其楷法淸勁, 亦自可愛. 諦玩心畫, 如見其人. 慶元丁巳十月丁丑, 新安朱熹.

 

 

동방삭의 화상찬에 발문을 붙임[跋東方朔畫贊]

 

 

 

평생 동방생(東方生)의 화상찬을 보았으나 이 화본(畵本)과 같은 정신은 보지 못했다. 필력과 내용은 대개 하첩표(賀捷表), 조아비(曹娥碑)과 서로 유사했다. 누가 새겼고 비석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보배로 여길만하다.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

 

平生所見東方生畫贊, 未有如此本之精神者. 筆意大槪與賀捷表, 曹娥碑相似, 不知何人所刻, 石在何處, 是可寶也. 朱熹仲晦.

 

 

채단명이 쓴 두보의 전출새시에 발문을 붙임[跋蔡端明寫老杜前出塞詩]

 

 

 

채공(蔡公)의 큰 글씨는 많이 보았는데 그 붓 놀림과 서체 구성은 흔히 달랐으니 아마도 나이로 보아 초년이나 만년, 공력으로 보아 얕음과 깊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암학노인[巖壑老人: 이름은 주희진(朱希眞)]은 필법서적을 많이 보아 필법이 고매하고 오묘했는데 유독 채공의 글씨는 굳세고 기발하다고 칭송했으니 분명 헛된 말은 아니다. 경원(慶元) 3(1197) 10월 무인일에 주희(朱熹).

암학노인이 필세가 마치 날아다니는 듯하다고 다시 썼는데 글씨가 나이를 따라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蔡公大字蓋多見之, 其行筆結體往往不同. 豈以年歲有蚤晩, 功力有淺深故耶? 巖壑老人多見法書, 筆法高妙, 獨稱此爲勁健奇作, 當非虛語. 慶元三年十月戌寅, 朱熹.

巖壑再題, 勢若飛動, 可見字隨年長也.

 

 

오도자의 그림에 발문을 붙임[跋吳道子畫]

 

 

 

근년에 장경부[張敬夫: 이름은 식()] 집안에 소장된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호천관(昊天觀) 벽의 초본을 보았는데 이것과 매우 유사했으나 인물만 조금 컸을 뿐이다. 이 초본은 종이를 쓰고 색상을 입히지 않았으며 또 머리, 얼굴, , 발을 보충해 그린 곳도 분명 초본이었다. 장씨(張氏)의 소장본은 장안(長安) 안씨(安氏)에게 나왔는데, 후에 장운수[張芸叟: 이름은 순민(舜民)]가 화제를 적기를 그 형제가 재산을 나줄 때에 쪼개어 둘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중 절반일 뿐이다. 접때 임안(臨安)의 화재를 겪어서 이제는 그것의 존재유무를 모른다. 이 초본은 잘리고 찢어진 나머지이니, 이른바 천룡팔부(天龍八部)’라는 것도 머리가 타고 이마가 데는 객이 됨을 면치 못한 것이다. 아마도 삼재(三災)의 재앙을 선성(仙聖)도 피할 수 없었으리라라고 했다. 이는 가소로운 말이다. 오도자의 필력의 오묘함은 고금에 가장 뛰어났다. 이른바 생각하지 않고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도()에 들어맞은자이니, 이것이 바로 그가 성인을 그린 이유일 것이다. 계로(季路)가 소장한 법서(法書)와 명화(名畫)는 매우 많지만 이보다 뛰어난 것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이것을 본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 뒤에다 시기를 적어놓는다. 때는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10일 기묘일이다.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

양양(襄陽) 장사인(張舍人)의 필법은 그 집안의 존성자(存誠子)에게서 나왔다. 내 선친이 매우 사랑했으나 세상에 그를 귀하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그의 유묵을 살펴보고 비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주희가 삼가 씀.

 

頃年見張敬夫家藏吳天觀壁草卷, 與此絶相類, 但人物差大耳. 此卷用紙而不設色, 又有補畫頭面手足處, 應亦是草本也. 張氏所藏本出長安安氏, 後有張芸叟題記云: 其兄弟析産, 分而爲二, 此特其半耳. 頃經臨安之火, 今不知其在亡. 而此卷斷裂之餘, 所謂天龍八部者, 亦不免爲焦頭爛額之客. 豈三災厄會, 仙聖所不能逃耶?是可笑也. 筆之妙, 冠絶古今, 蓋所謂不思不勉而從容中道者, 玆其所以爲畫聖與. 季路所藏法書名畫甚富, 計無出其右者. 旣以得觀爲幸, 因記歲月於其後. 慶元丁巳十月十日己卯也, 朱熹仲晦.

襄陽張舍人筆法出其家存誠子, 先君子甚愛之, 而世莫之貴也. 因覽遺墨, 不勝悲歎. 謹書.

 

 

문충공 구양수가 유시독에게 준 서첩에 발문을 붙임

[跋歐陽文忠公與劉侍讀帖]

 

 

 

구양공(歐陽公)이 유시독[劉侍讀: 이름은 창()]에게 준 척독(尺牘) 한 권을 왕계로(汪季路)가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어다. 삼가 살펴보니, 선배학자들의 담소하는 기풍과 멋을 여기에서 그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를 당해 조정은 맑았고 풍속은 순후하여 국가정치의 아름다움이 이보다 성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공은 오히려 야박하고 사납다는 탄식을 남겼으니 이는 오늘날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홀로 선을 미워하는 말들이 공론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것이 치란의 갈림이 되었을 뿐이다. 여러 번 읽은 뒤에 책을 덮고 장탄식하며 발문을 적는다. 계로(季路)는 잘 보관하라. 경원(慶元) 3(1197) 10월 기묘일에 씀.

 

歐陽公劉侍讀尺牘一卷, 汪季路持以見示, 因得竊觀, 前輩之笑談風味, 於此猶可想見其彷彿. 然當是時, 朝廷淸明, 風俗醇厚, 國家致治之美, 莫此爲盛. 而公猶有薄惡之歎, 蓋其所不可及者, 獨有嫉善之言, 不勝公論, 此爲治亂之分耳. 三復之餘, 掩卷太息而記其後. 季路其謹藏之. 慶元三年十月己卯書.

 

 

구석본 악의론에 발문을 붙임[跋舊石本樂毅論]

 

 

 

심존중(沈存中)󰡔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이르기를, “황우(皇祐) 중에 고신(高紳)의 아들 전당주부(錢塘主簿) 안세(安世)의 집에서 이 돌을 보았다. 10여 년 뒤에 안세가 소주(蘇州)에 있을 때에 돌은 이미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쇠로 묵어놓았다. 그 뒤 안세가 죽자 돌의 향방을 알 수 없었다. 혹자는 소주(蘇州)의 한 부자 집에서 차지했다고 하는데 또한 다시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심존중의 기록과 구양공의 기록은 이처럼 달랐다. 연지(延之)가 말한 석산(錫山) 서씨(徐氏)는 또 어찌 소주의 부자 집에서 얻었는지? 연지(延之)는 또 글씨가 떨어져 나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돌이 비록 다행스럽게 남아있다 해도 또한 다시는 이 판본처럼 깨끗하고 강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속각첩(續閣帖)중에 새겨진 전문은 또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근년에 절자명(折子明)의 집에서 그 소장된 구본을 본 적이 있는데 필력과 내용이 서계해[徐季海: 이름은 현()]의 것과 매우 유사했지만 요컨대 모두 이 판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월 기묘일에 주희(朱熹).

 

沈存中筆談, 皇祐, 嘗於高紳之子錢塘主簿安世家見此石. 後十餘年, 安世蘇州, 石已破爲數片, 以鐵束之. 安世, 石不知所在. 或云蘇州一富家得之, 亦不復見. 存中所記, 歐陽公不同如此. 延之所謂錫山徐氏, 豈又得之蘇州富家耶? 延之又謂損泐模糊, 則石雖幸存, 亦無復如此本之淸勁矣. 續閣帖中所刻全文, 又不知所自來. 頃年曾於折子明家見其所藏舊本, 筆意絶類徐季海, 要皆非此本之比也. 慶元丁巳十月己卯, 朱熹.

 

 

소동파가 범촉공에게 올린 제문에 발문을 붙임[跋東坡祭范蜀公文]

 

 

 

왕계로(汪季路)가 소장한 소문충공이 범충문공(范忠文公)에게 올린 제문을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월 기묘일에 주희(朱熹)가 고정(考亭)의 냇가 집에서 보았다.

 

汪季路所藏蘇文忠公范忠文公文稿, 慶元丁巳十月己卯, 朱熹觀于考亭溪居.

 

 

부 문충공이 낙양부윤에게 준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富文忠公與洛尹帖]

 

 

 

부 문충공[富文忠公: 이름은 필()]이 낙양부윤에게 준 서첩을 역사를 통해 고증해보았는데 부윤은 이중사(李中師)였다. 희령(熙寧) 원년(1068)에 부공이 하양(河陽)에서 부름을 받고 서울로 들어가서 병을 들어 여주(汝州)에 임명해 줄 것을 청해 돌아갔다. 낙양을 지나다가 잠시 머물렀는데 세 차례 상을 당했고, 여주에 부임한 뒤에 또 한 차례 상을 당했다. 그래서 차자(箚子)에서 어른과 아이 네 가족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 때에 이중사는 천장각 대제(天章閣待制)로 하남부(河南府)를 맡아 다스리면서 응천(應天), 회성(會聖) 두 어전(御殿)을 지어 받들었다. 따라서 이 한 권의 서첩에서 스스로 하남의 속읍인 여주를 맡은 것과 가족을 잃은 것을 말했고 이사중이 두 가지 공사를 마쳤음을 찬미했다. 이것이 첫 번 째 편지이다. 공이 이미 여주에 이르자 신종황제는 중귀인(中貴人: 내시) 풍종도(馮宗道)를 보내면서 태의(太醫) 진이간(陳易簡)을 데리고 가 부공의 발병을 치료하게 했다. 따라서 이 한 권의 서첩에서 내시와 태의를 말한 것이 두 번 째 편지이다. ‘이수(移囚)’는 무슨 일이지 모르겠고, ‘풍래(馮來)는 곧 종도(宗道)인 것 같다. 따라서 이것이 서첩에서 세 번째로 편지이다. 부공은 이듬해에 부름을 받고 승상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 한 권의 서첩에서 조사(詔使)가 군에 이르니 주사를 곧장 바꿔 채비를 차려 동쪽으로 갔다고 말한 것이 네 번째 편지이다. 3년에 이중사가 스스로 삼사(三司)를 꾀하여 용직(龍直)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낙양부윤이 되었기 때문에 이 서첩에서 치하하고 비로소 용도각 급사(龍圖閣給事)라고 칭한 것이 다섯 번째 편지이다. 4년에 부공은 박주(亳州)에 있었는데 청묘법(靑苗法)을 시행하지 않은 죄목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미처 이르기 전에 여주의 판관으로 전직되었기 때문에 이 한 권의 서첩에서 근자에 작은 읍에 부임하니 곤궁하게 향리에 앉아있는 것보다 낫고 또 군주와 재상의 두터운 은혜에 감동했으나 때때로 만나서 담소를 나눌 수 없음이 한스럽다고 한 것이 여섯 번째 편지이다. 공은 여주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낙양으로 돌아가기를 청했기 때문에 이 한 권의 서첩에서 날을 가려잡아 집으로 간다고 말한 것이 일곱 번째 편지이다. 이윽고 연로함을 고하고 결국 사공사상(司空使相)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이 한 권의 서첩에서 단보(單報)를 봉하여 제시한다고 한 것이 여덟 번째 편지이다. 모두 13통의 편지는 시간의 선후에 따라 이처럼 고찰할 수 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낙양에 있을 때에 주고받은 편지로 보인다. 대개 이중사가 부공을 섬긴 것이 근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부공이 이중사를 대우한 것도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중사는 면역(免役)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면서 이내 부공의 집을 적몰하고 샘을 파서 일반 백성과 같이 취급하여 권세가에게 아첨했다. 소인배가 시류를 살펴 권세가를 따르고 괴이한 행태를 반복하는 것이 어느 세상에나 없었겠는가? 이 서첩을 보는 자는 한 바탕 크게 웃을 수 있으리라.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월 경진일에 주희(朱熹).

 

富文忠公尹帖, 以史考之, 尹者, 李中師. 熙寧元年, 公自陽被召入京, 以病請而歸. , 少留連. 遭三喪, , 後又一遭喪. 箚子云 喪骨肉大小四口.是時天章閣待制知河南府, 營奉應天, 會聖兩神御殿, 故此一帖自言附庸悲惱, 而贊二役畢工者爲第一. 公旣至, 神廟遣中貴人馮宗道挾太醫陳易簡來治足疾, 故此一帖言中璫太醫者爲第二. 移囚不知何事, , 恐亦卽宗道, 故此帖爲第三. 明年被召入相, 故此一帖云 詔使到郡, 卽交州事, 辦行而東者爲第四. 三年, 自權三司使進龍直, 再尹, 故此帖致賀, 始稱龍圖給事者爲第五. 四年, 公在毫州, 坐不散靑苗罷歸. 未至, 改判汝州, 故此一帖言 近赴小邑, 勝於窮坐里閭. 且感君相厚恩, 而恨不得時奉談笑者爲第六. 公至不久, 卽請歸, 故此一帖言 擇日就第者爲第七. 旣而告老, 遂以司空使相致仕, 故此一帖答其封示單報老爲第八. 凡十三帖, 其歲月先後可考者如此, 其餘似亦皆是在時往還者. 之事公不爲不謹, 而公之遇亦不爲不厚矣. 而其後因奉行免役之令, 乃籍公戶, 使出泉同於編甿以媚用事者. 小人觀時狥勢, 反覆異態, 何世無之? 覽此卷者, 可爲發一大笑也. 慶元丁巳十月庚辰, 朱熹.

 

 

한위공이 문충공 구양수에게 준 서첩에 발문을 붙임

[跋韓魏公與歐陽文忠公帖]

 

 

 

장경부(張敬夫)가 일찍이 말하기를 평소에 왕형공(王荊公: 왕안석)의 편지를 볼 때마다 모두 몹시 바쁜 가운데 쓴 것으로 보이는데 형공은 어찌하여 이처럼 일에 바빴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는 비록 희롱하는 말이긴 하지만 참으로 그 병폐를 절실히 지적했다. 이제 이 서첩을 살펴보고 평소에 보았던 한공(韓公)의 편지를 되돌아보니, 비록 친척이나 낮고 어린 사람에게 준 편지라 할지라도 모두 단정하고 엄중하기가 대략 이것과 같아서 일찍이 행서나 초서로 일필휘지한 경우가 없었다. 대개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상밀(詳密)했으며 화락하고 여유로웠다. 따라서 잠시라도 바쁜 때가 없었고 또 조금이라도 바쁜 뜻이 없어서 형공(荊公)의 조급함과 정반대였다. 서찰은 작은 일이지만 사람의 덕성과 관련됨은 이와 같기 때문에 나는 이를 통해 스스로 경계하고 왼쪽에다 그 말을 적어둔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월 경진일에 주희(朱熹).

 

張敬夫嘗言, 平生所見王荊公, 皆如大忙中寫, 不知公安得有如許忙事? 此雖戲言, 然實切中其病. 今觀此卷, 因省平日得見韓公書蹟, 雖與親戚卑幼, 亦皆端嚴謹重, 略與此同, 未嘗一筆作行草勢. 蓋其胸中安靜詳密, 雍容和豫, 故無頃刻忙時, 亦無纖芥忙意, 荊公之躁擾急迫正相反也. 書札細事, 而於人之德性其相關有如此者, 於是竊有警焉. 因識其語於左方. 慶元丁巳十月庚辰, 朱熹.

 

 

주희진이 쓴 󰡔도덕경󰡕에 발문을 붙임[跋朱希眞所書道德經]

 

 

 

암학노인(巖壑老人)이 작은 해서로 쓴 󰡔도덕경(道德經)󰡕 두 편은 정밀하고 오묘하고 순정하고 고아했다. 근세에 해서로 쓰는 필법 중에 진벽허(陳碧虛)상학(相鶴)이나 황장예(黃長睿)황정(黃庭)같은 것도 모두 미칠 바 아니었다. 오직 단석(湍石) 유공(喩公)전인(典引) 여러 책이 필적할 수 있을 뿐이다. 계로(季路)가 이를 얻어 멀리까지 찾아와 보여주었는데 눈이 이미 어두워져 그 오묘한 곳을 다 볼 수 없음이 한스럽다. 감상한 것으로 부족하여 발문을 붙여 돌려보냈다. 계로(季路)가 돌을 다듬어 이를 새겨서 호사가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대 이 책은 좋은 판본을 얻기 어려워 몇 장을 읽어가다 보면 약간의 오류가 있는 듯하지만 또한 전할 만한 것이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월 경진일에 운대자(雲臺子)가 사사로이 적음.

예컨대 근엄하게 손님을 대하듯이 한다는 구절은 말뜻이 가장 정밀하다. 현행 판본은 대부분 ()’으로 잘못 되어 있어 본지를 너무 그르쳤는데, 이 판본은 그릇되지 않았다.

 

巖壑老人小楷道德經二篇, 精妙醇古. 近世楷法, 陳碧虛相鶴, 黃長睿黃庭, 皆所不及, 湍石喩公典引諸書爲可方駕耳. 季路得之, 遠以相視, 恨目已昏盲, 不得盡見其妙處. 把玩不足, 因記其後而歸之. 季路能攻石傳刻, 以與好事者共之, 卽大幸. 蓋此書難得善本, 讀此數章, 似少譌謬, 又爲可傳也. 慶元丁巳十月庚辰, 雲臺子私記.

儼若客, 語意最精. 今本多誤作 , 殊失夲指. 此本爲不誤也.

 

 

조 청헌공 집안의 글에 발문을 붙임[跋趙淸獻公家書]

 

 

 

조 청헌공의 사람됨은 공정하고 진실하고 효성스럽고 자애로워 안과 밖이 환하니 참으로 흠잡을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만년에 부도법(浮屠法: 불교)을 배워 스스로 해득함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형제나 일가, 인척 사이에 이것으로 권면하지 않음이 없었다. 전후로 그의 집안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런 곳이 많다. 예컨대 이 서첩에서도 그 아우를 마음이 이미 밝아 본성을 보고 근원을 회복했다고 일컬었고, 그 조카를 바른 생각을 잃지 않아 순수하고 전일하여 섞임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공사간에 삼가고 두려워하여 실천에 어긋남이 없어야 초심으로 부처를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 옛사람의 삼업(三業)이 청정해야 곧 부처처럼 세간을 벗어난다는 말을 인용하여 이것 또한 사람이 되는 절실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처를 배우는 자가 큰 소리로 죄업이 하늘에 닿아 몸과 마음이 뒤집어져서 눈을 둘 곳이 없다고 말하는 자와는 사이가 있다. ! 성학(聖學)이 전해지지 않아 길을 잃고 들판에서 구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볼만한 점이 있어 이를 드러내 보인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1011일 경진일에 주희(朱熹)가 적음.

 

趙淸獻公之爲人, 公忠孝慈, 表裏洞徹, 固所謂無間然者. 然其晩歲學浮屠法, 自謂有得, 故於兄弟族姻之間無不以是勉之. 前後見其家間手帖多矣. 如此卷稱其弟心已明瑩, 見性復元, 敎其姪以不失正念, 要使純一不雜, 又敎以公私謹畏, 踐履不失, 便是初心佛事, 且引古人 三業淸淨, 卽佛出世之語, 以爲此亦直截爲人處, 則與今之學佛者大言滔天而身心顚倒, 不堪著眼者蓋有間矣. 鳴呼聖學不傳, 其失而求諸野者若此, 尙爲有可觀也. 予是以表而出之. 慶元丁巳十月十一日庚辰, 朱熹.

 

: 原作 , 宋閩, 本改.

 

 

탕숙아의 묵매에 발문을 붙임[跋湯叔雅墨梅]

 

 

 

묵매시(墨梅詩)는 진간재(陳簡齋)이래로 대부분 흰색과 검정색으로 표현했다. 그 말류에 이르러서는 거의 선종의 󰡔오위정편도송(五位正偏圖頌)󰡕과 같았다. 따라서 탕군(湯君)은 비로소 새로운 의견을 제출하여 흰 바탕에 도운(倒暈)하는 기법을 만들어 반대로 나갔다. 그래서 방백모(方伯謨)생 얼굴에 얼음 눈이라는 구절을 남겼다. 그러나 흰색과 검정색이 나뉘지 못했을 때라는 한 구절은 결국엔 말한 적이 없었다. 시사(詩社)의 고인(高人)들이 시험삼아 각각 한 마디씩 해 본 것이다. 탕군은 스스로 말하기를 그의 외삼촌 양보지(楊補之)가 남긴 화법을 터득했고 조금 차이나는 곳은 또한 전수 받은 바가 있다고 했다. 그 온화하고 풍요로움을 보면 참으로 스승보다 나은 점이 있으나, 다만 그 호방하고 초탈한 기운은 유뇌지(劉牢之)와 비교하여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눈병으로 시력이 어두워 치밀하게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제군들과 함께 평론하기를 원한다. 무오년(1198) 3월에 병을 털고 일어나 장난 삼아 씀.

 

墨梅詩自陳簡齋以來, 類以白黑相形. 逮其末流, 幾若禪家五位正偏圖頌矣. 湯君始出新意, 爲倒暈素質以反之. 伯謨因有 冰雪生面之句也. 白黑未分時一句, 畢竟未曾道著. 詩社高人, 試各爲下一轉語看. 湯君自云得其舅氏楊補之遺法, 其小異處則又有所受也. 觀其醞藉敷腴, 誠有靑於藍者, 特未知其豪爽超拔之韻視牢之爲何如爾. 病眼眵昏, 不能覈論, 故願與諸君評之. 戊午三月, 病起戲書.

 

 

왕신신의 행적에 발문을 붙임[跋王信臣行實]

 

 

 

경원(慶元) 기원 초기에 내 친구 여자약(呂子約)이 여릉(廬陵)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틈틈이 사람을 보내 그의 동정을 살폈다. 자약(子約)은 답장에서 여러 가지 내용을 말하였다. “죄는 크건만 질책은 가벼우니 내 허물을 생각하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 왕씨(王氏)의 별관(別館)에는 멋들어진 정자와 꽃과 나무들이 있고 강과 산, 구름과 경치가 조석으로 다양하게 변하니, 눈으로 즐기면서 회포를 달랠 수 있습니다. 분수에 넘쳐 쓸쓸하지 않습니다.” 이어 왕군(王君)의 사람됨됨이를 자세히 언급하였다. “현인을 좋아하고 선을 즐겨 행하여 교유하는 자가 모두 그 고을의 저명한 공경(公卿)이요 재주 있는 대부(大夫)이며, 또 그들과 능히 근심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 세속을 따라 우왕좌왕하지 않았습니다.” 또 편지를 보내서 왕군(王君)의 아들 현()이 지금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마땅히 일깨워주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고 나에게 말했고, ()도 편지를 가지고 와서 가르침을 받기를 매우 성근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읽어보니 자약(子約)의 말이 틀림이 없음을 믿겠다. 얼마 되지 않아 여자약은 고안(高安)으로 이배되어 죽었고 현()도 왕군(王君)의 죽음을 알려왔으며, 또 그의 행장 한 통을 기술하여 묘명을 청했다. 나는 병이 깊어 오랫동안 저술을 폐했기에 조문을 마치고 지을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현()의 요청의 더욱 거세었다. 이에 발문을 지어 돌려보내면서 내 뜻을 나타냈고, 또 현()이 지은 행장은 부족함은 있을지언정 넘치는 것은 없음을 밝혔다. 4(1198) 11월 병신 초하루 아침에 운곡노인(雲谷老人)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가 씀.

 

慶元紀號之初, 余友呂子約謫居廬陵, 間遣詗其動息. 子約報書具言罪大責輕, 念咎之餘, 復何所道? 獨所寓居得王氏別館, 有臺榭花木之勝, 而江山雲物晨夕萬變, 足以遊目騁懷, 尤過望, 不落寞耳. 因極道王君之爲人, 以爲好賢樂善, 所交盡其鄕之名公卿, 才大夫, 又能同其憂樂, 不隨世俗爲俛仰. 旣又以書來, 王君之子爲方有意於學, 謂余當有以告語之者, 亦以書來贄甚勤. 余讀之, 子約之言不誣也. 無幾時, 子約內徙高安以卒, 亦以王君之沒來赴, 且述其事狀一通, 而以銘墓爲請. 余病疾, 久廢筆硏, 旣弔, 且謝不能, 請益堅, 乃記其後而歸之, 以見余意, 又以見之狀君詞有不盡而無所溢也. 四年戊午中冬丙申朔旦, 雲谷老人朱熹仲晦父書.

 

 

정사수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程沙隨帖]

 

 

 

󰡔이소(離騷)󰡕 「구장(九章)에서 악저(鄂渚)에 올라서 뒤돌아보며 추동의 찬바람을 탄식한다라고 말했다. 󰡔설문(說文)󰡕에서는 ()는 대답한다[]는 뜻이고, ()와 개()의 반절, 또는 언()과 개()의 반절이다고 했다. 󰡔사기󰡕에서 범증(范增)이 옥두(玉斗: 술 마시는 그릇)를 깨부수면서 []’라고 했다고 한다. 󰡔설문󰡕에서는 ()는 대답한다[]는 뜻이고 오()와 개()의 반절이다고 했다. 두 글자의 음과 뜻이 모두 같다. 예컨대 탄()과 탄(), ()와 해()는 본래 한 글자였다. 그 소리는 모두 초()나라 말이다. 따라서 원차산(元次山)애내곡(欸乃曲)을 남겼는데 유종원의 시에서도 이 두 글자를 차용했으니 모두 상()과 초() 사이에서 지은 것이다. 유종원의 글 구본에서는 애오(靄襖)라는 음을 썼는데, 윗 글자는 바로 아()와 개()의 소리를 합쳐 놓았다. 󰡔집운(集韻)󰡕에서도 개()의 운에 애()자를 수록하고 해()의 운에 애()와 애() 두 글자를 수록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니, 그 설명이 󰡔설문󰡕과 차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내()자를 오()로 읽는 것은 고증할 바 없다. 근세에 이를 거꾸로 읽는 경우가 있고, 또 애()를 관()으로 적기도 하니, 그 오류가 더욱 심하다. [애내가(欸乃歌)]

당나라 숙종(肅宗)이 중흥(中興)을 이룬 업적은 위로 한나라의 동경(東京)과 비교하면 참으로 부끄럽지만 아래로 진()나라 원제(元帝)에 견주면 남음이 있다. 따라서 허우승(許右丞)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또한 격분해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차산(元次山)의 사()는 공적을 노래하고 덕을 송축하지 않았으니 어찌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산곡(山谷)의 시에 이르러 지극히 은미한 것을 미루어 군신과 부자의 교훈을 밝혔으니, 이는 곧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대방(大防: 엄격한 한계와 규칙)이어서, 한때 이익을 꾀하고 공을 셈하는 말과는 더욱 함께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근년에 다시 아첨하는 무리들이 망령되이 모략을 세워 비방하고 손상시키니, 그 말의 비루함은 허공(許公)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한바탕 웃음거리일 뿐이다. [오계시(浯溪詩)]

안공(顔公)의 굳센 충성심은 하늘에서 타고났지만 그 학문이 불순하여 도교에 아첨하고 불교에 아첨했음은 본래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에 뜻을 둔 자는 스승으로 섬길만한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고 경계해야 할 것을 경계하는 것이 옳다. (도교와 불교의) 천박한 견해와 비루한 논의가 쉽게 사람을 빠뜨린 것을 본보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독자는 자세히 살펴 보라. [마고산시(麻姑山詩)]

나는 젊어서 글씨를 배운 적이 있었으나 완력이 약한 흠이 있어서 붓을 세워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이를 끊어버리고 다시는 하지 않았다. 이제 사수(沙隨) 정장(程丈)요아(饒娥)서권을 살펴보니, 대개 황견(黃絹)의 비()에 뜻을 둔 것이어서 또한 사랑할만했다. 요아(饒娥)는 옛집의 소묘(小廟)로 낙평현(樂平縣) 동쪽 20여 리에 있다. 나는 일찍이 특별히 찾아가 차를 올렸으나 정려의 문설주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주현(州縣)에 말하여 마땅히 보수토록 하고 또 편액을 청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했으나 응답하는 자가 없으니 매우 탄식할 일이다. [변요아(辨饒娥)]

나는 일찍이 사수(沙隨)에게 말한 적이 있다. “󰡔효경(孝經)󰡕은 편 머리 67장이 본경(本經)이고 나 뒤는 전문(傳文)이다. 그러나 모두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의 비루한 유자들이 좌씨(左氏)의 여러 책 속의 말을 끌어 모아 만든 것으로 전혀 문리(文理)가 닿지 않은 곳도 있다. 전한 사람이 또 그 차례를 대부분 잃어버려 󰡔대학󰡕․󰡔중용󰡕 두 전문(傳文)의 짝이 되지 못한다.” 정장(程丈)은 답장에서 나도 일찍이 옥산(玉山) 왕공[汪公: 이름은 응진(應辰)]에게 들었는데 역시 그대의 말이 옳다고 말했다. 이제 그가 손수 쓴 논문을 보고 그 뒤에 발문을 붙여둔다. [효경론(孝經論)]

경원(慶元) 무오년(1198) 1126일에 유용지(劉用之)가 유백순(劉伯醇)을 위해 이 서권을 가지고 와서 발문을 구하니 이렇게 써서 돌려보낸다.

 

離騷九章云: 鄂渚而反顧兮, 欸秋冬之緖風.說文: , 譍也, 亞改切, 又焉開切.史記范增撞破玉斗, !」 說文: , 膺也, 烏開切.二字音義並同, , , 實一字耳. 其聲則皆語也. 元次山欸乃曲, 詩亦用此二字, 湘楚間作. 文舊本作 靄襖, 上字正協亞改之聲. 集韻亦於 韻收 , 韻收 , 二字爲一, 其說蓋與說文不異. 字之讀如 , 未有考耳. 近世乃有倒讀之者, 又或寫 , 則其誤益甚矣. 欸乃歌唐肅宗中興之業上比漢東京固有愧, 而下方晉元帝則有餘矣. 許右丞之言如此, 蓋亦有激而云者. 元次山之詞歌功而不頌德, 則豈可謂無意也哉. 山谷之詩, 推見至隱以明君臣父子之訓, 是乃萬世不可易之大防, 與一時謀利計功之言, 益不可同年而語矣. 近歲復有諂子妄爲刻畫以謗傷之, 其說之陋, 許公所不道, 直可付一笑云. 浯溪詩〕○顔公剛毅忠烈, 得之天資, 與其學之不純而諂道佞佛自不相掩. 有志於道者, 師其所當師而戒其所可戒可也. 淺聞卑論, 易以溺人, 不足爲法, 覽者詳之. 麻姑山詩余少嘗學書, 而病於腕弱, 不能立筆, 遂絶去, 不復爲. 今觀沙隨程丈此卷饒娥一紙, 蓋有意於黃絹之碑者, 亦可愛也. 饒娥故居小廟在樂平縣東二十餘里, 余嘗特往沃茗酹之. (+아래)闕已不復存矣, 因語州縣宜增葺之, 且爲請敕額, 列祀典, 而莫有應者, 甚可歎也. 辨饒娥余嘗爲沙隨, 孝經獨篇首六七章爲本經, 其後乃傳文, 然皆齊魯間陋儒纂取左氏諸書之語爲之, 至有全然不成文理處. 傳者又頗失其次第, 殊非大學, 中庸二傳之儔也. 程丈報書云: 吾嘗聞之玉山汪公, 亦若吾子之言是也.今覽其手書遺論, 因記其語於後云. 孝經論.

慶元戊午十一月二十六日, 劉用之劉伯醇携此卷來求跋, 爲書以歸之.

 

: 正訛改作 .

: 四庫全書本及右引改作 .

: 原作 , 正訛.

 

 

조대 벽 사이에 어떤 사람이 적어놓은 글 뒤에 씀[書釣臺壁間何人所題後] 이 글은 사실은 선생이 지은 것이다.

 

엄부자(嚴夫子)가 보이지 않으니 부춘산(富春山)이 적막하구나. 천 길 높은 돌만 남아 저문 구름 끝에 솟구쳤네. 양털 갓 옷을 풀어헤치고 한바탕 웃으며 신세를 모두 잊은 채 낚싯대를 드리웠지. 어찌 숲 사이를 날개 짓하며 천천히 날다가 비로소 돌아올 줄 알았겠나? 중흥의 군주가 공업을 이루니 수염은 희끗희끗하네. 일세의 인물을 몰아다가 더불어 시국을 구제하기가 어렵구나. 홀로 미치광이의 마음을 지니고 어리석은 아이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어리석은 듯 사네. 시원한 기운이 북두성을 움직여 예로부터 숲 봉우리를 비추네.

 

근년에 여러 번 칠리탄(七里灘)을 지나가다가 벽 사이에 호명중(胡明仲) 어른이 써서 새긴 글자를 보았다. 그 중에서 엄공(嚴公)인을 품고 의를 돕는다[懷仁輔義]’는 말을 뽑아내어 오고가는 사대부를 권면하고, 이를 어루만지며 장탄식하곤 했으나 또한 그 말을 다 적을 수 없었다. 수십 년이 뒤에 다시 지나다가 그 돌을 찾아보니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혹자가 듣기가 싫어서 부수어 없앤 것 같았다. 나이 80여 살이 된 한 노승만이 매우 능숙하게 그 말을 암송하여 나에게 들려주면서 책에다 써 놓도록 했다. 근래에 내가 오래지 않아 돌아와 보니 또한 호사가들이 찢어가 버렸다. 양봉(兩峰) 조수(趙叟)취필조대(醉筆釣臺)라는 악부(樂府)를 살펴보다가 우연히 과거에 보았던 하나의 말이 기억나는데 바로 그 악부와 같은 음조였다. 아울러 호공(胡公)의 옛 말에 느낀 바 있어 이렇게 써본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정월 7일에 운곡노인(雲谷老人)이 말함.

조대(釣臺)에는 옛날 범공(范公)의 기문(記文)이 있었는데, 말뜻이 매우 장대하여 후인이 다시 손볼 곳이 없었다. 중간에 강자아(江子我)의 기문이 있었는데 유독 새로 지은 시기를 적어 가장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양구헌(羊裘軒)과 객성각(客星閣)으로 명명한 의미를 약술했는데 명칭의 의미도 고매하고 아름다웠다. 이제 여러 번 화재를 겪어 이 돌이 아직도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근년에 기문을 지어서 엄공(嚴公)은 괴이하고 과격하고 은밀함을 추구하지 않은 사람임을 강력히 변론했다. 옛날 소강절(邵康節)안락와(安樂窩)에서 괴이함을 좋아했네라는 시를 짓자, 명도(明道) 정선생(程先生)은 화답하여 때에 맞게 그치고 행하는 데 모두 명()이 있으니 선생은 괴이함을 행한 사람이 아니네라고 했고, 강절(康節)이 또 화답하여 이에 괴이함을 행하지 않은 사람임을 어찌 아는가라는 시구를 남겼으니, 이 말은 맛이 있다. 엄공(嚴公)을 다시 일으킨다 해도 분명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不見嚴夫子, 寂寞富春山. 空留千丈危石, 高出暮雲端. 想象羊裘披了, 一笑兩忘身世, 來揷釣魚竿. 肯似林間翮, 飛倦始知還? 中興主, 功業就, 鬢毛斑. 驅馳一世人物, 相與濟時艱. 獨委狂奴心事, 未羨癡兒鼎足, 放去任疏頑. 爽氣動星斗, 終古照林巒.

頃年屢過七里灘, 見壁間有胡明仲丈題字刻石, 拈出嚴公懷仁輔義之語, 以厲往來士大夫, 未嘗不爲之摩娑太息也, 然亦不能盡記其語. 後數十年再過, 因覓其石, 則已不復存, 意或者惡聞而毁滅之也. 獨一老僧, 年八十餘, 能誦其詞甚習, 爲予道之, 俾書之冊. 比予未久而還, 則亦爲好事者裂去矣. 因覽兩峰趙叟醉筆釣臺樂府, 偶記向所嘗見一詞, 正與同調, 幷感胡公舊語, 聊爲書此. 慶元己未人日, 雲谷老人.

釣臺故有范公記文, 詞義甚偉, 後人不容復措手矣. 中間有江子我一記, 獨書作新歲月, 最爲得體, 而粗述以 羊裘題軒, 客星命閣之意, 名義亦爲高雅. 今屢經火, 不知此石尙存否也. 近年乃有作記, 力辨嚴公非詭激素隱者. 邵康節安樂窩中好打乖, 明道程先生和之曰: 時止時行皆有命, 先生不是打乖人.康節又復之, 乃有 安知不是打乖人之句. 此言有味也. 使嚴公而可作, 當爲此發一大笑云.

 

 

여씨의 󰡔세시잡기󰡕에 발문을 붙임[跋呂氏歲時雜記]

 

 

 

이상은 여공[呂公: 이름은 희철(希哲)]󰡔세시잡기(歲時雜記)󰡕이다. 나는 얻어서 삼가 읽어보고 이미 주퇴부(周退傅)와 육방옹(陸放翁)이 탄식한 바에 또한 깊은 느낌이 있었다. 또 공이 이것을 지은 것은 선현이 약방서(藥方書)를 모아 기록한 유지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훗날의 군자도 장차 내 말에 감흥이 있을 것이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2월 신사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呂公歲時雜記, 得而伏讀之, 旣於周退傅, 陸放翁之所嘆竊亦深有感焉, 又意公之爲此, 亦前賢集錄方書之遺意也. 然則後之君子又將有感於余言也夫. 慶元己未二月辛已, 新安朱熹.

 

 

장안국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張安國帖]

 

 

 

안국(安國)의 타고난 바탕은 명민하고 문장과 정사는 모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는 글자를 쓸 적에 대부분 옛사람이 운필한 뜻을 터득하여 늘그막에도 더욱 배움의 힘을 쏟아 한층 기이하고 웅건했다. 건양(建陽)의 장대부(張大夫)가 이 서첩을 소중히 보관했는데 틈틈이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펼쳐 보면 황홀하여 마치 그를 만나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그 뒤에 글을 써서 돌려보낸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38.

 

安國天資敏妙, 文章政事皆過人遠甚. 其作字多得古人用筆意, 使其老壽,更加學力, 當益奇偉. 建陽張大夫珍藏此紙, 間以視予. 展玩恍然如接談笑, 書其後而歸之. 慶元己未三月八日.

 

 

황산곡 의주첩에 발문을 붙임[跋山谷宜州帖]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의 호]이 의주(宜州)에서 쓴 서첩은 가장 노년의 필치이니 본래 기교가 뛰어나고 뛰어나지 못함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한때의 충신과 현인이 유배를 떠나 쇠락했음을 회상하면 탄식만 나올 뿐이다. 운곡노인(雲谷老人)이 이 서첩을 살펴보고 삼가 기록한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38.

 

山谷宜州書最爲老筆, 自不當以工拙論. 但追想一時忠賢流落, 爲可歎耳. 雲谷老人因覽竊識, 慶元己未三月八日.

 

 

미원장의 하촉강산도에 발문을 붙임[跋米元章下蜀江山圖]

 

 

 

미로(米老)하촉강산도(下蜀江山圖)에 대해 일찍이 여러 도본을 보았는데 얼추 서로 비슷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에 미로(米老)는 가슴속에서 산수가 가장 뛰어난 곳을 한꺼번에 뱉어내어 참다운 경치를 표현했을 뿐이다. 소장수중(蘇丈粹中)에는 감상이 이미 정밀하고 필어가 더욱 뛰어났다. 근세에 종유할 기회를 얻었고 이제 유묵을 살펴보니 오래도록 감탄이 나온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38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

 

米老下蜀江山嘗見數本, 大略相似. 當是此老胸中丘壑最殊勝處, 時一吐出, 以寄眞賞耳. 蘇丈粹中鑒賞旣精, 筆語尤勝. 頃歲嘗獲從游, 今觀遺墨, 爲之永歎慶元己未三月八日, 新安朱熹仲晦.

 

 

채단명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蔡端明帖]

 

 

 

채공(蔡公)의 글씨는 여러 서체를 갖추었다. 이 서권의 평서(評書) 한 통에는 구양순과 우세남의 필의(筆意)만 들어있어 매우 사랑할 만했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38일에 운곡노인(雲谷老人)이 현()의 대부 장후(張侯)의 소장품을 보고 발문을 적음.

 

蔡公書備衆體, 此卷評書一紙, 獨有, 筆意, 甚可愛也. 慶元己未三月八日, 雲谷老人觀縣大夫張侯所藏, 爲識其後.

 

 

문충공 구양수의 편지에 발문을 붙임[跋歐陽文忠公帖]

 

 

 

문충공 구양수(歐陽脩)가 채 충혜공(蔡忠惠公)에게 보낸 편지인데, 선배들이 돈독하고 두텁게 정을 나누고 진실하게 말하는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38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가 씀.

 

歐陽文忠公蔡忠惠公手帖, 前輩交情篤厚, 語意眞實, 於此可見. 慶元己未三月八日, 新安朱熹仲晦父書.

 

 

소동파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東坡帖]

 

 

 

동파(東坡)의 필력은 웅건하여 다른 사람에게 뒤쳐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 임고첩(臨古帖)의 빛깔과 생김새는 다시 형태로 비교하여 헤아릴 수 없으나, 그 뛰어난 기풍과 초탈한 기운은 옛사람에 견주어도 누더 더 나은지 모르겠다. 성도(成都)의 강당에 있는 화상 한 첩은 여러 번 보았는데 본래 왕우군(王右軍: 왕희지)의 득의에 찬 필력이니 공도 또한 마침 마음에 합치됨이 있었으리라. 경원(慶元) 기미년(1199) 38일에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는 영복(永福) 장씨(張氏)가 소장한 묵적(墨蹟)을 보고 한없이 감탄하다가 그 왼편에 글을 붙인다.

 

東坡筆力雄健, 不能居人後, 故其臨帖物色牝牡, 不復可以形似校量. 而其英風逸韻高視古人, 未知其孰爲後先也. 成都講堂畫象一帖, 蓋屢見之, 故是右軍得意之筆, 豈公亦適有會於心歟? 慶元己未三月八日, 朱熹仲晦父觀永福張氏所藏墨蹟, 歎賞不足, 因記其左方.

 

 

증남풍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曾南豐帖]

 

 

 

내 나이 20세쯤에 남풍(南豐)선생의 글을 즐겨 읽고 속으로 흠모했었는데, 끝내 재주와 힘이 얕고 짧아서 소원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50년이 지나 그의 유묵을 얻어보니 간엄(簡嚴)하고 정중(靜重)하여 또한 그의 문장과 같았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38.

 

余年二十許時, 便喜讀南豐先生之文而竊慕效之, 竟以才力淺短, 不能遂其所願. 今五十年, 乃得見其遺墨, 簡嚴靜重, 蓋亦如其爲文也. 慶元己未三月八日.

 

 

팽감승의 문집에 발문을 붙임[跋彭監丞集]

 

 

 

내가 접때 절동제거(浙東提擧)로 있을 때에 군민들이 보오(保伍)의 역이 불편하다고 서로 말한 자가 많았는데, 태주(台州)의 임해현(臨海縣)만이 그런 일이 없었다. 그 까닭을 묻자, “이전에 현령(縣令) 팽군(彭君)이 취락의 가난함과 부유함을 살펴서 그 토지정리를 조금 바로잡아 획정하여 가난한 마을로 하여금 잦은 부역의 고통을 면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모두 기꺼이 역사(役事)에 달려가 하소연이 없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취락의 빈부의 차이가 가장 역법(役法)에 큰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다. 요사이 헐역(歇役: 부역을 중지함)을 해마다 곱이나 절반 정도로 시행했으나 오히려 통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이제 팽군(彭君)이 시행한 것은 비록 율령(律令)에는 없으나 또한 금한 것은 아니었으니 참으로 법 밖의 뜻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간에 다른 군현으로 그 법을 확대 시행하니 사람들이 과연 모두 편리하다고 말했다. 후에 조사할 일로 태주(台州)에 이르렀다가 매우 오랫동안 머물면서 임해현의 사민(士民)들이 온통 팽군의 정치를 칭송함을 들었다. “우리 고을은 수년 전에 오직 시랑(侍郞) 안도(顔度)를 위해 거사비를 세웠다. 근세에는 팽군(彭君)을 얻었는데 그 사랑을 베풀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모습은 매우 닮았고 자상하고 정밀히 정사를 처리함은 더 낫다.” 또 그가 만든 호구(戶口)와 재부(財賦)의 문서를 얻어 읽고 팽군의 뜻이 백 리를 다스릴 도량뿐만이 아님을 한층 더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때 파직하고 돌아가 다시 출사하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또한 팽군이 조정에 들어갔다가 지방관으로 나가 사자(使者)의 부절(符節)을 지녔지만 끝내 재능을 시험해보지도 못하고 죽었음을 듣고 늘 깊이 한스러워했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에 팽군의 외사촌 임보(林補)가 이 문집과 섭경(葉卿)이 지은 묘명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거듭 감탄하고 옛적에 들었던 것을 써 붙여서 백성에게 뜻을 둔 자가 취하여 보도록 했다. 3월 정축 16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余頃使浙東, 諸郡民以保伍之役不便, 相與自言者衆. 臨海爲無有, 問其故, 則曰前此縣令彭君視其聚落之貧富而稍正定其疆理, 使貧里得免頻役之苦, 以故皆樂趨事, 無所爲訴. 余念聚落貧富之不均, 最爲役法大害. 間者雖設歇役年歲倍半之差, 而猶有所不通. 彭君所行, 雖律令所無有, 然亦非有禁也, 眞可謂得法外意矣. 間頗推其法於他郡縣, 人果皆以爲便. 後以按事至, 留甚久, 臨海士民稱彭君之政不容口, : 吾邑數年之前, 顔侍郞度爲有去思, 而近歲乃得彭君, 其惠愛惻怛酷相似, 而綜理詳密殆過之.旣又得其所爲戶口財賦之書讀之, 益知彭君之志不但爲百里規模而已也. 然余自是罷歸, 不復出者累年, 亦聞彭君登朝出守, 持使者節, 而竟不及試以卒, 每深以爲恨也. 慶元己未, 君之中表林生補持此集及葉卿所撰墓銘過余, 三復感歎, 因書疇昔所聞以附焉, 以爲有志於民者尙有取也. 三月丁丑旣望, 新安朱熹.

 

 

유사리의 행실에 발문을 붙임[跋劉司理行實]

 

 

 

장락(長樂) 유지(劉砥)와 그의 아우 려()가 함께 찾아와 여기에서 여러 해를 공부했는데 다시 변고를 거치면서 뜻이 오히려 더욱 견고해졌다. 집에서는 효우(孝友)하고, 붕우를 사귐에 신실하고, 일에 임하여 삼가고 두려워하여 감히 법도를 어기지 않는 모습을 살펴보면, 평소에 교습(敎習)을 잘해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하루는 벗 조창보[趙昌父: 이름은 번기(蕃己)] 군이 작성한 그의 선친의 행장(行狀) 한 통을 꺼내어 보여주면서 묘명(墓銘)을 나에게 청하였다. 내가 그 글을 읽어보고 그 일을 상고해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오랜 질병과 근심 때문에 글을 쓸 수가 없었고, 근년 이래로 거절한 것이 또한 십여 집안이나 되었기 때문에 비록 유군(劉君)의 어짊을 알았지만 두 유생의 뜻에 조그만 보답도 하지 못한 채, 발문만 적어서 돌려보냈다. 훗날에 군자가 있다면 오히려 이러한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두 유생이 힘써 공부하여 들은 것을 높이고 안 것을 행하여 끝내 그 덕업을 성취한다면, 그 어버이에 대한 현양(顯揚)이 여기에서 크게 드러날 것이니, 묘명의 있고 없음은 애초에 경중(輕重)의 척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4월 을유일에 신안 주희가 씀.

 

長樂劉砥及其弟相與來學, 累年于玆, 更歷變故, 志尙愈堅. 察其居家孝友, 交朋友信實, 臨事謹畏, 不敢畔繩墨, 知其敎習之有素也. 一日, 出友人趙君昌父所狀其先府君行事一通, 因以銘墓爲諸. 余讀其文, 考其事, 有以信余所知之不繆矣. 然余久以疾病憂畏不能文, 比年以來, 所辭且十數家, 以故雖知劉君之賢, 而不能有以少答二生之意, 獨識其後而歸之. 後有君子尙有以識此心也. 雖然, 二生勉旃, 尊聞行知而有以卒就其德業, 則所以顯揚其親者於是爲大, 銘之有無, 初不足爲重輕也. 慶元己未四月乙酉, 新安朱熹.

 

 

집안에 보관된 유병옹의 유첩에 발문을 붙임[跋家藏劉病翁遺帖]

 

 

 

병옹[病翁: 주자의 스승 유자휘(劉子翬)의 호] 선생은 젊은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단정하게 거처하며 도를 음미했으니, 서실(書室)이 쓸쓸하고 조용하여 선방의 승려와 다름이 없었다. 세상의 성색(聲色)과 권리(權利)를 다투어 좇는 사람과 견주어보면, 아득히 드러남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일찍이 동자(童子)로 좌우에서 모시게 되었는데, 선생도 처음에는 과거공부로만 기대를 보였다. 그러나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선생 자신의 행동과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서로 같지 않음을 알고, 한가한 틈을 타 외람되이 그 까닭을 여쭈었다. 선생은 흔연히 학문에 뜻이 있음을 가상히 여겨 비로소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조석으로 일깨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후에 선생이 병이 드니 나는 때마침 행역(行役)으로 밖에 있다가 속히 돌아와 문안을 살폈다. 선생이 매우 기뻐하여 돌아보고 말하기를 병중에 더불어 말할 사람이 없었는데 그대가 돌아오니 다행이다고 했다.

이로부터 날마다 탕약을 올리니, 선생의 가르침이 더욱 상세해지고 기대를 더욱 무겁게 하여 평생 학문할 차례를 남김없이 두루 말해주었다. 하루는 조용히 시 한편을 꺼내어 주었다. 선생은 성품이 글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항상 시문을 대부분 말로 전달하여 제생으로 하여금 받아쓰도록 하였는데, 유독 유치명(劉致明) 어른에게 준 장구(長句)는 모두 손수 쓴 것이었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유치명에게 준 시에 작은 책상에 맑은 향기가 이별을 위로하니, 만 가지 인연의 가벼움을 분명히 알겠네라는 구절이 있었다. 자질(子姪) 중에 혹자가 그 말이 상서롭지 않음을 싫어하자, 선생은 웃으면서 이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또한 너를 위해서 고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별도로 수절(愁絶)’자로 교정하였다.] 또 오래된 상자를 열어서 쇄지(碎紙) 수십 장을 얻으니, 모두 평일에 자신을 성찰하면서 격려한 말이었다. 겨우 선후의 차례를 매겨 한 책을 만들고 나와 동문 황수(黃銖)에게 명하여 필사하도록 하였다. 다시 취하여 열람해 보고 손수 다시 수십 자를 교정한 뒤, 하루도 못되어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여러 자질들이 앞서 봉함해 둔 유서(遺書) 여러 장을 함께 열었는데 모두 내가 돌아오기 전에 남긴 것으로, 여러 가지 일 처리를 남겨진 자질들에게 두루 언급했다. 또 조각편지가 있었는데 나를 부탁하기 위해 장공(張公)에게 쓴 편지였고, 끝에 공부에 힘써 학업을 크게 이루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비로소 울먹이면서 받아 가지고 보배처럼 간직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감히 그 가르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몸소 실천함에 전력을 쏟지 못하여 늙도록 크게 이룬 것이 없으니, 당시에 나에게 준 뜻을 받들어 부응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끄러움과 한스러움을 안고서 장차 지하에서 선생을 뵐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 병이 매우 중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선 유묵(遺墨)을 취해 한 책을 엮어 그 전말을 서술하여 자손에게 보여주고 또 여러 동지에게 보여주어, 앞서 닦은 스승의 아름다운 덕에 매우 흠모할 바가 있음을 알게 하고, 또 나의 용렬하고 나태하여 명성을 남기지 못한 점을 보여주어 전거(前車)의 경계로 삼고자 한다. ()의 자는 원회(元晦)인데, 또한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그 축사(祝詞)가 갖추어져 있지만 임종에 손수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도로 다른 책에 붙여둔다. 선생이 돌아가신 것은 소흥(紹興) 17년 정묘년(1147)이다. 53년이 지난 경원(慶元) 기미년(1199) 5월 병신일에 문인 주희가 삼가 쓴다.

 

病翁先生壯歲棄官, 端居味道, 一室蕭然, 無異禪衲. 視世之聲色權利, 人所競逐者, 漠然若亡見也. 蚤以童子獲侍左右, 先生始亦但以擧子見期. 竊窺觀, 見其自爲與所以敎人者若不相似, 暇日僭有請焉. 先生欣然嘉其有志, 始爲開示爲學門戶, 朝夕誨誘, 亹亹不倦. 其後先生屬疾, 適行役在外, 亟歸省問. 先生喜甚, 顧而語曰: 病中無可與語, 幸吾子之來歸也.自是日奉湯藥, 先生所以敎詔益詳, 期許益重, 至爲具道平生問學次第, 傾倒亡餘. 一日從容, 因出詩一篇見授. 先生性不喜書, 常時詩文率多口占, 使諸生執筆, 獨此與贈劉致明丈長句皆手書之, 其意可見也. 詩有 小几淸香慰臨別, 極知了了萬緣輕之句, 子妷或惡其語之不祥者, 先生笑曰: 此何足諱? 然亦爲汝更之.因別定爲 愁絶. 旣又發故篋, 得碎紙數十, 皆平日省躬自厲之言, 稍以先後次爲一篇, 與同舍生黃銖筆之. 復取閱視, 手自更定數十字. 間不一日, 遂啓手足. 諸子妷乃共發其先所緘封遺書數幅, 未歸時所留. 處畫庶事, 遍及遺孤. 復有片紙屬爲作張公, 末有 勉力大業之語. 始得泣受而寶藏之, 以至于今, 不敢失墜. 然而躬行不力, 老大無成, 不能有以仰副當日付授之意. 抱此愧恨, 每念將無以見先生於地下. 今病已力, 何所復云? 姑取遺墨, 聯爲一編, 而序其本末, 以示子孫, 且以示諸同志, 使於前脩景行之懿 知所跂慕, 而又視之慵惰亡聞以爲前車之戒也. 元晦, 亦先生所命. 其祝詞具在, 以非臨終手筆, 別附他卷. 先生沒以紹興十七年丁卯, 後五十三年, 慶元己未五月丙申, 門人朱熹謹書.

 

: 宋閩本作 .

 

 

병옹 선생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病翁先生詩]

 

 

 

달 밝은 밤에 아쟁을 타노라니

소리는 비단 창문 따라 들어오네.

바람 따라 다시 까마득한데

구름에 매여 잠시 망설인다

여운을 감상할 만하건만

바쁜 시위는 서로 재촉하네

아쟁 타는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멀리서도 마음 속 회포를 아는구나

차라리 옛사랑 버린 것을 슬퍼할지언정

어찌 새로운 기약 어긋남을 생각하랴?

머금은 정을 답답하게 펴지 못하다가

노래에 부쳐 남은 슬픔을 쏟아본다

한번 퉁기니 서리가 날아 떨어지고

다시 만지니 빛이 흘러내리네

늘 한스러웠지. 듣는 이 드물어

은갑(銀甲)에 티끌이 생긴 것을

유유히 외로운 봉황이 읊는데

뭇 새들 화답하기 어렵구나

젊은 날에 불우함을 탄식하니

하물며 꽃이 쇠함을 용납하랴

도가 같아 반승낙을 얻었는데

뜻이 달라 일 처리가 수고롭네

서성대는 담장 동쪽의 나그네가

또한 능운(凌雲)의 재주를 지녔었지.

 

이는 병옹(病翁)선생이 젊었을 때에 지은 문쟁(聞箏)이란 시이다. 시의 형식과 의태(意態)는 철저히 󰡔문선(文選)󰡕의 여러 악부(樂府)들을 본 뜬 것으로 근세의 속체(俗體)가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운(氣韻)이 고아하고 음절(音節)이 화창하여 시류배들은 거의 여기에 미칠 수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필력이 노숙, 강건하여 여러 저작을 출입하면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니, 이미 이 형식을 점차 변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천하의 만사는 모두 일정한 법칙이 있으니 이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순서를 따라 점점 나아가야 한다고 여겼다. 만약 시를 배우면 마땅히 이와 같은 것으로 법을 삼아야 옛사람의 본래 체제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후로 만일 능히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지는 참으로 쉽게 추측할 수는 없으나 변화도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과연 변화하여 그 정당함을 잃지 않으면 종횡으로 오묘하게 응용한들 어찌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불행하게도 한번 그 정당함을 잃으면 도리어 옛 법칙을 지켜서 한 몸을 평온히 마치는 것만 못할 듯싶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도 처음에는 모두 󰡔문선(文選)󰡕의 시를 배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두보와 한유는 변함이 많고 유종원과 이백은 변함이 적었다. 변한 것은 배워서는 안되고 변하지 않은 것은 배워야 한다. 따라서 그 변한 것으로부터 배움은 그 변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배우는 것만 못하다. 이는 곧 노()나라가 남자가 유하혜(柳下惠)를 배우는 뜻이 될 것이니, ! 학자는 법칙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는 설에 휘둘려 경솔하게 멋대로 짓다가 자신을 속이는 데 이르지 말아야 하리라. 기미년(1199) 522.

 

月高夜鳴箏, 聲從綺窗來. 隨風更迢遞, 縈雲暫徘徊. 餘音若可玩, 繁弦互相催. 不見理箏人, 遙知心所懷. 寧悲舊寵棄? 豈念新期乖? 含情鬱不發, 寄曲宣餘哀. 一彈飛霜零, 再撫流光頹. 每恨聽者稀, 銀甲生浮埃. 幽幽孤鳳吟, 衆鳥聲難諧. 盛年嗟不偶, 況乃容華衰. 道同符片諾, 志異勞事媒. 栖栖牆東客, 亦抱凌雲才.

病翁先生少時所作聞箏詩, 規模意態, 全是學文選樂府諸篇, 不雜近世俗體, 故其氣韻高古而音節華暢, 一時輩流少能及之. 逮其晩歲, 筆力老健, 出入衆作, 自成一家, 則已稍變此體矣. 然余嘗以爲天下萬事皆有一定之法, 學之者須循序而漸進. 如學詩則且當以此等爲法, 庶幾不失古人本分體製. 向後若能成就變化, 固未易量, 然變亦大是難事, 果然變而不失其正, 則縱橫妙用, 何所不可? 不幸一失其正, 却似反不若守古本舊法以終其身之爲穩也. , , , 初亦皆學語者, , 變多而, 變少. 變不可學而不變可學, 故自其變者而學之, 不若自其不變者而學之, 男子學柳下惠之意也. 嗚呼學者其毋惑於不煩繩削之說, 而輕爲放肆以自欺也哉己未五月二十二日.

 

 

선친 이부랑 위재기와 명 및 유범 두 사람의 서첩 뒤에 씀

[書先吏部韋齋記銘幷劉范二公帖後]

 

 

 

이것은 검포(劍浦) 나중소(羅仲素) 선생이 나의 선친을 위해 지은 위재기(韋齋記)인데, 사양(沙陽) 조영덕(曹令德) 어른이 또 명()을 지어주어, 집에서 유적을 간직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선친이 서재에 이름을 붙인 뜻은 스스로 경계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후인에게 교훈을 남기고자 한 것이니, 또한 지극히 깊고 지극히 두터워 더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실천하고 닦는 것을 삼가지 못하고 몸을 위태롭고 욕되는 곳에 빠트렸다. 이제 병들어 죽어갈 때에 지하에서 어버이의 얼굴을 뵐 면목이 없을까 크게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유문을 수집해서 가묘(家廟)에 수장하여 자손에게 보여주어, 오래도록 받들고 실추함에 이르지 않도록 하니, 허물을 살피고 잘못을 생각하는 일을 만에 하나라도 펼 수 있을 것 같다. 횡거(橫渠)󰡔서명(西銘)󰡕은 실로 장인인 초당(草堂) [: 이름은 면지(勉之)]선생이 전수 받은 것으로, 맨 처음과 맨 끝에 선생이 손수 쓴 글이 20자가 있었다. 병옹(病翁) [: 이름은 자휘(子翬)])선생이 지어준 자사(字辭)와 비각(祕閣) 범공[范公: 이름은 如圭]이 보내준 수첩은 이제 모두 뒤에 붙였다. 세 분은 모두 선친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로 나를 가르친 사람인데, 이제는 모두 부응할 수 없게 되었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5월 병신일에 고자(孤子) ()가 삼가 씀.

 

劍浦羅先生仲素爲先君子作韋齋記, 沙陽曹丈令德又爲之銘, 家藏遺蹟, 數十年矣. 恭惟先君子名齋之意不唯自警, 乃其所以垂裕後人者, 蓋亦至深至厚而無以加. 踐脩不謹, 陷身危辱. 今病且死, 大懼無以奉慈顔於地下, 故敢收輯遺文, 藏之家廟, 以示子孫, 使永永奉承, 不至失墜, 庶幾得以少伸省愆念咎之萬一. 橫渠西銘寔外舅草堂劉先生所授, 首尾有先生手筆二十字. 造字祝辭, 疾翁劉先生所作, 及祕閣范公手帖, 今皆以附于後. 三公皆先君子執友, 其所以敎, 今皆不能有以副也. 慶元己未五月丙申, 敬書.

 

: 原作 , 宋閩本改.

 

 

선친 이부랑이 정오 스님에게 준 편지 뒤에 씀[書先吏部與淨悟書後]

 

 

 

()는 아룁니다. 근래에 조용히 얘기할 기회를 얻었으니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북암(北巖)은 다시 멀리 출행했는데 삼복 더위에 때때로 비가 내리니 법체(法體)가 다복할 것입니다. 스님이 거처하는 곳에 갑자기 사람을 보내고 싶지 않아, 결심하고 성()에 들어와 곧바로 서신을 보냅니다. 성에 며칠을 머물었는데 인사(人事)가 복잡하여 돌아와 여러 날을 정좌(靜坐)하니 생각이 비로소 예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운감사(雲監寺)에게는 별도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공석두(空石斗) 1매를 사간(謝諫)이 가는 편에 부쳤습니다. 만약 두 사람을 빌린다면 곧 두 바구니에다 나누어 함께 메고 오도록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곧 또 고전(古田) 병자지(丙字紙) 다섯 축()을 취하여 사간(謝諫)에게 부쳐주십시오. 공수좌(珙首座)에게도 아울러 소식을 전해 주십시오. 서로 만나보지 못하니 아끼는 마음이 더합니다. 윤달 3일에 모()는 존승사(尊勝寺)의 장로 정오(淨悟)에게 올립니다. 세미(世美) 형제를 보거든 소식을 전해 주십시오. 성안이 소란스러워 다정히 얘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미쳐 편지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선친은 젊어서 세속을 벗어난 고결한 사람들과 왕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정오(淨悟) 스님에게는 더욱 두텁게 했다. 나중에 존승사(尊勝寺)의 불전(佛殿)에 기록을 남긴 적이 있는데 지금도 새긴 돌이 남아있으니 살펴볼 수 있다. 정오(淨悟)는 건양(建陽) 후산(後山) 사람이며, 만년에 존승사에서 물러나 남산(南山)의 운제원(雲際院)에서 살았는데 선실(禪室)이 고요했다. 선정(禪定) 외에 예불(禮佛)을 최상의 계책으로 여겼다. 여든 살이 지났어도 눈빛이 형형하니 범상한 스님은 아니었다. 항상 나에게 부 문충공(富文忠公)과 조 청헌(趙淸獻公)이 불교를 배운 일을 말해주었는데, 그 말이 수렴되고 확실하여, 호언장담하여 세상을 속이는 근세 승려들의 병폐는 없었다. 이로써 선친이 두텁게 대우한 것이 구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전(古田) 임몽정(林蒙正) 유생이 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손때가 묻은 편지를 받들어 완미하니 비감을 이기지 못하겠다. 그래서 그 본말을 대략 기록해둔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616일에 운곡(雲谷) 주희(朱熹)가 삼가 씀.

 

某啓: 比獲從容, 良慰. 北巖重動遠出, 伏暑中時得雨, 法體多福. 安下處未欲遽以干人, 須決成人城, 卽自有書信去. 城中數日人事紛紜, 歸來靜坐累日, 意緖始復舊. 雲監寺不別書. 空石斗一枚, 付去人謝諫. 若借得兩人, 卽分付兩籠, 令共舁來. 不然, 卽且取古田丙字紙五軸付謝諫. 珙首座並煩致意, 未相見, 加愛. 閏月三日, 某啓上尊勝長老淨悟. 世美兄弟致意, 城中滾滾不欸, 未及爲書.

先君子少日喜與物外高人往還, 而於淨悟師爲尤厚. 後嘗爲記尊勝佛殿, 今刻石具在, 可考也. 淨悟, 建陽後山, 晩自尊勝退居南山雲際院, 一室翛然. 禪定之餘, 禮佛以百萬計. 年過八十, 目光炯然, 非常僧也. 常爲余道富文忠, 趙淸獻學佛事, 其言收歛確實, 無近世衲僧大言欺世之病. 以是知先君子之厚之非苟然也. 古田林生蒙正持此卷來, 捧玩手澤, 不勝悲感, 因爲略記其本末云. 慶元己未六月旣望, 雲谷朱熹謹書.

 

 

덕본이 소장한 장남헌의 주일잠에 발문을 붙임[跋德本所藏南軒主一箴]

 

 

 

()’ 한 글자에 학자들이 실제로 힘을 쓸 수 있다면, 비록 정자(程子)가 두 가지 말로 해석을 했다하더라도 오히려 군더더기 말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말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복잡해져서 경()에 병이 되는 것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경부(敬夫)의 잠()을 읽은 자는 마땅히 이러한 뜻을 알아야 한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초복에 운곡노인(雲谷老人)이 씀.

 

敬之一字, 學者若能實用其力, 則雖程子兩言之訓, 猶爲剩語. 如其不然, 則言愈多, 心愈雜, 而所以病乎敬者益深矣. 敬夫之箴者, 要當以識此意云. 慶元己未初伏, 雲谷老人.

 

 

오화중의 감추부뒤에 적음[題吳和中感秋賦後]

 

 

 

화중(和中)감추부(感秋賦)를 지어 이미 깊은 성찰을 표명하고 이내 국얼(麴蘖: )의 사이로 도망치려고 하자, 숙통(叔通)석과(碩果)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그를 면려했으니, 붕우의 직분을 다했다고 말할만하다. 다만 내가 간사한 위학(僞學)으로 배척을 당하고 있는 차에 어찌 이를 알 수 있겠는가? 두 군자가 더불어 절차탁마할 때에 경계하는 말이 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816일에 운곡노인(雲谷老人)이 씀.

 

和中感秋作賦, 旣發深省, 乃欲逃之麴蘖之間, 叔通以碩果不食者厲之, 可謂得朋友之職矣. 顧予姦僞排擯之餘, 何足知此? 二君子其相與切磋之時, 有以見警焉, 則區區之望也. 慶元己未八月旣望, 雲谷老人.

 

 

장이도의 집안에 보관된 소동파의 고목괴석에 발문을 붙임

[跋張以道家藏東坡枯木怪石]

 

 

 

소공(蘇公)의 이 글은 언젠가 골계(滑稽)회소(詼笑)를 나눌 때 튀어나온 것으로, 애초에 깊은 생각을 거치지 않았지만, 바람과 우레를 타고서 고금을 살펴보는 기상은 오히려 그 사람됨을 상상하기에 족하다. 장이도(張以道)는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니느라 편안하게 거처한 적이 없으면서도 능히 이것을 가지고 보배로 여겨 완미하기를 싫어하지 않았으니, 그의 뜻이 이미 범상하지 않다. 또 왕공(王公)과 귀인(貴人)에 견주지 않고 다만 기인(畸人)축객(逐客)으로 과시하니, 또한 이해할 수가 없다. 운곡노인(雲谷老人)은 이 글을 살펴보고 기록한다. 때는 경원(慶元) 기미년(1199) 816일이다.

우수[愚叟: 여자약(呂子約)을 말함]의 묘에도 이미 묵은 풀이 났다. 유묵을 완미하면서 서로 보고 감개하여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만약 강려(羌廬)로 돌아가 서파(西坡)를 본다면 분명 똑같이 탄식할 것이다.

* “우수(愚叟)는 여자약(呂子約)을 이른다. 만년에 고안(高安)에 유배되어 대우사(大愚寺)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대우노수(大愚老叟)라 불렀다. 서파(西坡)는 황상백(黃商伯)을 이른다.”

 

蘇公此紙出於一時滑稽詼笑之餘, 初不經意, 而其傲風霆, 閱古今之氣, 猶足以想見其人也. 以道東西南北, 未嘗寧居, 而能挾此以俱, 寶玩無斁, 此其意已不凡矣. 且不以視王公貴人而獨以誇於畸人逐客, 則又有不可曉者. 雲谷老人因覽爲識, 慶元己未仲秋旣望.

愚叟之墓已有宿草矣, 撫玩遺墨, 相視感慨, 泫然久之. 若歸羌廬以視西坡, 當同此嘆也.

 

底本文末原注: 愚叟呂子約, 晩謫高安, 大愚寺, 自號大愚老叟. 西坡黃商伯.

 

 

유자면의 행장에 발문을 붙임[跋劉子勉行狀]

 

 

 

나는 동자 시절부터 병옹[病翁: 유자휘(劉子翬)] 선생의 곁에서 대부공(大夫公)을 보고, 그가 정시(程試)의 글을 외우는 것을 들으니, 의기가 뛰어나고 음절이 화창하여 이미 그 사람됨을 존경하게 되었다. 나중에 공의 고향에서 어버이 장례를 치르게 되어 비로소 공과 화락하고 친밀하게 종유하면서, 공이 집에 거처하고 향리에 거처하면서 행하는 언행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가 정사에 베푼 것을 들었는데 안과 밖을 남김없이 다 발휘하여 충후신실(忠厚信實)과 자혜공검(慈惠恭儉)하는 뜻이 아닌 것이 없었다고 하니, 여기에서 비로소 더욱 그 사람됨에 심복하게 되었다. 공의 죽음에 미쳐서 그의 자식들이 이 글을 보여주었는데, 대개 장차 그의 묘문을 지어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나는 우울증이 있어서 편차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 글을 거듭 읽고 평생 듣고 본 것을 대조해 보니, 대개 한마디 말도 실제가 아닌 것이 없었다. 회고해보니, 세월이 빨리 흘러가 선배를 따르려는 후생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풍속도 더욱 투박해지니, 한숨을 쉬면서 그 뒤에 기록한다. 신안 주희가 씀.

 

余自爲童子時, 得見大夫公於病翁先生之側, 聞其自誦所爲程試之文, 意氣偉然, 音節華暢, 已知敬愛其人. 後因葬親於公之鄕, 始得從公遊好欸密見公居家居鄕言行之詳. 及聞其所以施於官政者, 表裏殫盡, 莫非忠厚信實, 慈惠恭儉之意, 於是始益心服其爲人. 及公之沒, 其諸子示以此書, 蓋將使志其墓. 會余方有幽憂之疾, 不遑序次. 然三復其文而參以平生所聞見, 蓋無一詞之非實也. 願念歲月逾邁, 後生之及見前輩者日加少而俗愈婾也, 爲之太息而識其後云. 新安朱熹.

 

 

길수 주군의 집안에 보관된 소첩에 발문을 붙임[跋吉水周君家藏訴牒]

 

 

 

길수(吉水)의 향공(鄕貢: 진사) 주군(周君)의 소첩(訴牒) 7통을 그 집안에서 8대를 거쳐 200여 년을 보물처럼 간직해 왔는데, 보는 자가 그 실마리를 찾을 틈이 없었다. 하루는 승상 익국공(益國公)이 이를 끄집어내어 밝혀서 해를 상고하고 사실을 추론하여 위로 정삭(正朔)과 명휘(名諱)에 대해 지극히 섬세하고 자세하게 갖추었다. 이에 주군(周君)의 사적은 그 본말을 자세하게 볼 수 있고, 후손들은 더욱 엄격하게 지켜서 다른 데서 구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 흡()이 이내 그 향당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에게 두루 부탁하여 모두 곧 찬술하여 들춰내도록 했지만 이것은 이미 군더더기의 병통이 있었다. 그러나 뜻을 오히려 그만 두지 않고, 또 다시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소개를 통해 나에게 맡기었다. 이것도 군거더기의 일이니 어찌 더욱 심하지 않은가? 나는 사양하고 물리치고자 했지만 또 생각해보니 먼길을 어렵게 찾아온 성근함에 보답할 방법이 없어 이내 이것을 써서 고한다. 유생은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두문불출하고 독서하여 그 배우지 못한 것을 구하여 이내 할아버지의 업을 잇고, 다시 분주히 알현을 청하여 쓸모 없는 발문을 구하여 시간 낭비를 하지 말라. ! 슬프다. 나의 말도 또한 쓸모 없는 것이지만 유생으로 하여금 이것을 통해 일깨워줄 수 있다면 오히려 쓸모가 있게 될 것이로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3월 갑자일에 신안 주희(朱熹).

 

吉水鄕貢周君訴牒七通, 其家寶藏閱八世, 餘二百年矣, 覽者不暇尋其端原. 一旦丞相益國公表而出之, 爲之稽考歲年, 推校事實, 上及正朔名諱, 至纖至悉, 於是周君之事得以備見其本末, 其後之人可以益嚴奉守而無所事於他求矣. 而其孫乃徧以屬其鄕黨知名之士, 悉便贊述而揄揚之, 是則已病於贅而意猶未已, 又復不遠千里, 夤緣紹介以諉於余. 此其爲贅, 豈不又甚矣? 余欲謝而却之, 又念無以答其累舍重趼之勤, 乃書此以諗焉. 生其持歸, 杜門讀書, 求其所未學者, 以繼乃祖之業, 毋庸復爾奔走請謁而求無所用之跋語以老歲月爲也. , 若余之言, 固亦無所用者, 然使生因是而有發焉, 則猶足爲有用也夫慶元己未三月甲子, 新安朱熹.

 

 

황산곡의 초서 천자문에 발문을 붙임[跋山谷草書千文]

 

 

 

이단숙[李端叔: 이름은 지의(之儀)]이 숭녕(崇寧) 3(1104) 81일에 쓰기를, “소성(紹聖) 연간에 원우(元祐)의 사관(史官)에게 매우 급하게 조칙을 내려 모두 기현(畿縣)에 구류시키고 묻는 것에 답하게 했는데, 대개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노직[魯直: 황산곡의 자()]만이 물음에 따라서 답하는데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니 일시에 숙연하여 그가 단순한 유생 문사(儒生文士)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소성(紹聖)의 사화(史禍)에 제공들이 심문에 대답한 말이 지금 모두 문집에 보이지 않지만, 일찍이 소위공[蘇魏公: 이름은 송()] 집안에서 육좌승(陸左丞)이 분석한 몇 조목의 글을 얻었는데 모두 원우(元祐)를 헐뜯는 말이었다. 그 사이에 황태사(黃太史: 황정견)가 왕형공(王荊公)폐하가 알도록 하지 말라는 서첩을 기록하려고 했는데 힘써 저지했다. 황공(黃公)이 매우 고통스럽게 쟁변하다가 만약 공의 뜻과 같다면 아첨하는 사관[佞史]이 될 것이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육좌승(陸左丞)이 관장(官長)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끝내 기록되지 않았고 황공(黃公)도 오히려 나중에 사화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후에 또 수십 년이 지나 다시 그의 말에 의지하여 일의 본말이 세상에 다 전하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 있는 것이다. 애석하다!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기록으로 드러내어 후세에 믿음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사필(詞筆)을 칭하여 융성한 아름다움으로 삼는 구나. 이 책에 붙인 이단숙(李端叔)의 발문을 보니 감개하여 한숨이 나와 곧 그 뒤에 기록한다. 그의 서법 같은 것은 세상에서 감상하는 자가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1116일에 운곡노인(雲谷老人) 주희(朱熹)가 적음.

 

李端叔崇寧三年八月一日題云: 紹聖, 元祐史官甚急, 皆拘之畿縣, 以報所問, 例悚息失據. 魯直隨問爲報, 弗隱弗懼, 一時栗然, 知其非儒生文士而已也.

紹聖史禍, 諸公置對之辭, 今皆不見於文集, 獨嘗於蘇魏公家得陸左丞畫一數條, 皆詆元祐語也. 其間記黃太史欲書王荊公 勿令上知之帖, 而己力沮止之. 黃公爭辨甚苦, 至曰: 審如公意, 則此爲佞史矣.是時爲官長, 以是其事竟不得書, 黃公猶不免於後咎. 然而後此又數十年, 乃復賴彼之言而事之本末因得盡傳於世, 是亦有天意矣. 惜乎秉史筆者不能表而出之, 以信來世, 而顧獨稱其詞筆以爲盛美. 因觀此卷李端叔跋語, 爲之感慨太息, 輒記其後. 若其書法, 則世之有鑒賞者自能言之, 故不復及云. 慶元己未十一月旣望, 雲谷老人朱熹.

 

 

진광택의 집안에 보관된 소동파의 죽석에 발문을 붙임

[跋陳光澤家藏東坡竹石]

 

 

 

동파(東坡) 노인은 빼어난 굳센 지조와 견고하여 옮기지 않는 자태를 지녀 죽군석우(竹君石友)와 거의 닮았다. 먼 훗날에 이 그림을 보는 자는 오히려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발문은 소식(蘇軾)의 절조(節操)를 찬송했지만 주희의 일관된 논의와는 부합되지 않으니, 주희의 저작이 아닌 듯하다.

 

東坡老人英秀後凋之操, 堅確不移之姿, 竹君石友, 庶幾似之. 百世之下, 觀此畫者尙可想見也.

 

此跋贊頌蘇軾節操, 朱熹一貫議論不符, 疑非.

 

 

진대부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陳大夫詩]

 

 

 

보통 사람의 정서는 조금이라도 선행을 하게 되면, 스스로 보기를 크게 남음이 있는 것 같이하고, 보답을 구하기를 서운한 듯 항상 부족하게 여긴다. 따라서 선은 날마다 사라지고 악은 날마다 자라서 끝내 이욕(利欲)의 횡류(橫流)에 빠지더라도 스스로 알지를 못한다. 대부 진공(陳公)은 청렴과 편안함을 스스로 지켜 권문세가에게 뜻을 굽히지 않고 차라리 하급관리에게 머리를 숙이고도 죽도록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만년이 되어서야 겨우 연로(年勞: 여러 해 동안 쌓은 관로)함으로 그 자손에게 벼슬이 주어졌다. 그러나 몸을 성찰하고 만족을 아는 뜻이 단장(短章: 짧은 시)에 드러남이 이와 같으니, 그가 뜻과 생각을 간직하는 것이 용렬한 자와는 거리가 멀다. ! 어진 자손들이여, 또한 깊이 생각하여 공경히 그것을 지켜야 하리라. 경원(慶元) 기미년(1199) 1116일에 신안 주희가 기록함.

 

常人之情, 小有一善, 則自視眵然若有餘, 而其責報也欿然常若有所不足. 所以善日消而惡日長, 卒以陷溺於利欲之橫流而不自知也. 大夫陳公廉靖自守, 不肯屈意權門, 寧俯首於下寮, 終身而不悔. 比其晩歲, 僅以年勞得官其世, 而所以省身知足之意, 見於短章者乃如此, 其志念之所存, 與庸者遠矣. 鳴呼, 子孫之賢, 其亦深念而敬守之也哉慶元己未十一月旣望, 新安朱熹.

 

 

진현 부군의 행실에 발문을 붙임[跋進賢傳君行實]

 

 

 

정사를 돌보던 진현(進賢) 부군(傅君)이 이미 죽고 장차 장례를 치르려고 할 때에, 그의 아들 수()가 그의 행장(行狀) 한 통을 가지고, 천리를 멀게 여기지 않고 나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선친은 일찍이 공명을 얻는 것에 뜻을 두었는데 중간에 불행하게도 국난을 만났습니다. 대개 일찍이 유복(儒服)을 벗고 전쟁터를 누볐는데 실제로 선무사(宣撫使) 악공(岳公)을 따라 허주(許州)와 낙주(洛州) 사이에 전투를 벌여 누차 승전보를 올렸습니다. ()을 올려도 보고가 없는데다가 남북이 화친을 맺었고 악공(岳公)이 마침내 참소하는 말에 걸려 병권을 잃고 기막힌 재앙을 당했습니다. 선인이 비분강개하여 관훈(官勳)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가인(家人)의 생산 작업을 다스리고 자식에게 책 읽은 것을 가르치고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것으로써 스스로 세월을 보내면서 그의 몸이 늙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경은(慶恩)을 만나 세 차례나 벼슬을 내리는 은총을 입고 마침내 문신의 품계가 바뀌었는데, 늙어 장수하면서 강녕하니 향리에서 감탄했습니다. 이제 불행하게도 돌아가시게 되니 불초 자식은 슬픔을 머금고 차마 죽지 못한 채 매장하는 일을 받들어 이미 기일을 정했습니다. 다만 당세의 대인군자를 얻어서 그 잠덕(潛德)의 빛을 밝혀서 오래도록 전하여 후손들에게 은택을 내려주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이 때문에 포복하면서 찾아와 예를 갖춰 집사(執事)에게 글을 청합니다. 오직 공께서 애달프게 여겨서 명()을 지어주신다면 죽은 자도 지각이 있으니 또한 지하에서 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차림새와 예법을 보니 슬퍼하는 용모와 걸맞고, 언사가 간절하고 진실했으며 뜻이 신산(辛酸)하여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니, 평소에 어진 부형의 교훈(敎訓)을 익혔음을 알겠다. 이 때문에 비록 부군(傅君)과는 면식이 없지만 여기에서 그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다. 회고해보니, 죄를 범해 자숙하는 중이어서 언어로 당세에 중함을 취할 수 없는데다가 질병으로 꺾이고 무너져서 뜻의 실마리가 거칠고 소홀하여, 또한 다시 심력(心力)으로 붓을 다스려 글을 지을 수가 없다. 다만 멀리서 와서 울면서 청하는 애달픔 때문에 보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행장 뒤에 이것을 써서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경원(慶元) 기미년 (1199) 11월 신축일에 신안주희가 씀.

 

從政進賢傅君旣沒將葬, 其子抱其行實一通, 不遠千里, 辱以顧予, 流涕言曰: 先人蚤歲有志功名之會, 中間不幸遭罹國難, 蓋嘗解儒服以事戎行, 實從宣撫岳公轉戰, 之間, 屢以捷告. 上功未報, 而南北通和, 岳公遂罹讒口, 失兵柄, 得奇禍. 先人爲之感慨憤激, 棄其官勳以歸故里, 復治家人生産作業, 敎子讀書, 酌酒賦詩, 以自排適, 倏然不知其身之老也. 晩値慶恩, 三蒙錫命之寵, 遂易文階, 老壽康寧, 閭里嗟歎. 今者不幸至於大故, 不肖之孤銜哀忍死, 以奉窀穸之事, 旣有期矣, 顧恨未得當世之大人君子發其潛德之幽光, 傳之久遠, 以覆露其後嗣, 是以匍匐而來, 再拜以請于執事. 惟公幸哀而與之銘, 則死者有知, 亦無恨於泉下矣.予視其冠屨應禮, 而戚容與之稱, 言詞懇慤, 情旨酸辛, 爲惻然動心焉, 知其平日習於賢父兄之敎訓也. 以是雖不及識傳君, 而於此得其爲人. 顧念罪戾之餘, 言語不足以取重當世, 而疾病摧頹, 意緖荒忽, 亦無復心力可以治筆硏, 作文詞矣. 特以其遠來泣請之哀, 不可以不答也, 因爲書此于行狀之後, 使幷以視來者云. 慶元己未十一月辛丑, 新安朱熹.

 

 

할아버지 승사랑 부군의 행장에 발문을 붙임[跋大父承事府君行狀]

 

 

 

이것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증 승사랑부군(贈承事郞府君)의 행장인데 선친 태사(太史), 이부(吏部), 증 통정대부부군(贈通議大夫府君)이 찬술한 것이다. 당시에 이미 정화(政和) 주부(主簿) 노점(盧點) 군에게 명()을 청하였는데 비석을 다듬기도 전에 도둑들이 봉기하여 문서가 산일(散逸)되어 지금에는 겨우 원고의 반만이 보존되어 다시 판각할 수 없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가문은 흡()에서 민() 땅으로 들어와 부군을 처음 이곳에서 장사지냈는데 후대의 자손으로 하여금 그 시세(時世), 세월(歲月)과 덕을 쌓아 베풀고 후손을 열어준 깊은 뜻을 알게 하지 않을 수 없어 공경히 표석을 세우고 아래쪽에다 글을 새겨 묘소의 왼쪽에 세운다. 무원(婺源)에 있는 선세의 분묘와 할머니 유인(孺人) 이하 따로 있는 묘소도 비석의 뒷면에 새겨서 후손들로 하여금 상고할 수 있게 하였다. 노군(盧君)의 자는 사여(師予)이며, 늙은 유학자로 학문이 넓고 청렴하고 근신하여 착한 행실이 있다. 묘 자리를 정한 자는 익양(弋陽)의 김생(金生)으로 자는 확연(確然)이며, 또한 청렴하고 절개 있는 선비로 자못 방외(方外)의 학문에 통달하였다. 성과 자는 모두 선친의 문집에 보인다. 경원(慶元) 5(1199) 12월 갑자일에 효손 구위(具位) ()가 삼가 기록함.

 

右先大父贈承事郞府君行狀, 先君太史, 吏部, 贈通議大夫君所撰也. 當時旣以請銘於政和主簿盧君點, 未及襲石而群盜蜂起, 文書散逸, 於今僅存半稿, 不可復刻矣. 竊惟念吾家自, 而府君始葬於此, 不可使後之子孫不知其時世歲月與其所以積德垂慶, 開祐後人之深意, 敬立石表, 刻狀下方, 立于墓左. 先世墳廬在婺源者及祖妣孺人以下別葬所在, 亦具刻于碑陰, 使來者有考焉. 盧君師予, 老儒博學, 淸謹有馴行. 定宅者弋陽金生, 確然, 亦廉節士, 頗通方外之學, 姓字皆見先集云. 慶元五年十有二月甲子, 孝孫具位謹記.

 

 

양자직이 왕재신을 읊은 절구의 발문[跋楊子直所賦王才臣絶句]

 

 

 

왕마힐[王摩詰: 이름은 유()]망천칠원시(輞川漆園詩)에서, “옛사람은 오리(傲吏)가 아니었건만, 스스로 경세의 일을 젖혀놓았네, 우연히 미관에 몸을 붙여, 몇 그루 나무 밑에서 배회하네라고 했다. 나는 이 시를 매우 사랑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했으나 곧장 나의 뜻을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지금 자직(子直)의 이 시를 읽었는데 남곡(南谷)편에서 그윽이 느끼는 것이 있어서 그 뒤에 적는다. 다시 재신(才臣)에게 부쳤는데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경원(慶元) 경신년(1200) 127일에 회옹(晦翁)이 씀.

양자직의 시는 이렇다. “남산은 높고 밝으니, 그 밑에 깊은 골짜기가 있네. 얼룩 표범도 드러내고 숨을 때를 알아, 아침 내내 내리는 안개에 목욕하네.”

 

王摩詰輞川漆園詩: 古人非傲吏, 自闕經世務. 偶寄一微官, 婆娑數株樹.余深愛之, 而以語人, 輒無解余意者. 今讀子直此詩, 而於南谷之篇竊有感焉, 因識其後. 復以寄才臣, 果以爲何如也. 慶元庚申正月二十八日, 晦翁.

詩曰: 南山高且明, 其下有深谷. 文豹識顯藏, 終朝霧如沐.

 

 

황호은이 보관한 사설에 발문을 붙임[跋黃壺隱所藏師說]

 

 

 

우강(旴江)의 황남[黃柟: 자는 달재(達材)]이 그의 선군자인 호은거사(壺隱居士)가 손수 뽑은 이 책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바로 내가 옛날에 받은 사설(師說)이었다. 수서(手書: 스승의 편지)는 앞에 있고 기록은 뒤에 있어, 삼가 읽으니 수심에 잠기면서 다시 스승을 모시고 좌우에 앉아 그 말씀을 듣는 듯하였다. 다만 용렬하고 나태하여 가르침을 성실히 새겨서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지 못한데다가 거칠고 천박하고 우매하고 고루하여 서둘러 기록할 또 그 깊고 은미한 뜻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 한스럽다. 거듭 반복해서 읽고 나니 송구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호은거사가 학문을 좋아하여 자강불식하고, 선을 즐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이내 여기에 이르렀음을 보니, 내가 비록 안면은 없지만 여기에서 또한 그가 간직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그 뒤에 기록하여 돌아보낸다. 달재(達材)의 형제 또한 잘 보관하여 경건히 지켜서 정밀하게 궁구하여 학문에 힘써 앞사람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원(慶元) 경신년(1200) 28일에 신안 주희가 삼가 씀.

 

旴江黃柟達材以其先君子壺隱居士手抄此冊見示, 昔年所受師說. 手書居前, 記錄在後, 伏讀愀然, 如復得侍坐左右而聞其緖言也. 顧恨慵惰, 不能拳拳服膺, 以報萬一, 而荒淺昧陋, 趣錄之際, 又不能無失其深微之意. 三復以還, 不勝悚愧. 然觀壺隱好學自强, 樂善不倦, 乃至於此, 雖不及識面, 而於此亦足以窺其所存矣. 因竊記其後而歸之. 達材昆弟其亦寶藏敬守, 精究而勉學焉, 以無忘前人之訓. 慶元庚申二月八日, 新安朱熹謹書.

 

 

원주 평향현의 사창기에 발문을 붙임[跋袁州萍鄕縣社倉記]

 

 

 

평향(萍鄕) 호안지(胡安之) 군이 나를 찾아와 공부하였는데, 하루는 그 고향의 사군자(士君子)의 뜻을 전하면서 나로 하여금 사창(社倉)의 역()을 기록하도록 했다. 그 상세한 내용을 물으니 이 책 한 권을 꺼내면서 이는 읍의 선비 종영(鍾詠) 군이 지은 것입니다. 이 사창을 만들 때에 종영과 팽공수(彭公脩) 군이 참으로 힘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등재한 것이 이처럼 상세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본디 그의 일에 민첩하고, 또 능히 글로써 기술할 수 있는 것을 가상히 여겼다. 생각건대 소희(紹熙) 갑인년(1194)에 장사(長沙)의 진()에 부임할 때에 길이 이 읍으로 나 있어서 읍의 선비들이 나를 인도하여 그 학()에서 보고 기록해주기를 청하였다. 당서(堂序)로 가니 이미 죽은 벗 유청지(劉淸之) 군이 새긴 것이 그곳에 있었다. 내가 두 손을 모으고 읽고는 되돌아보며 탄식하기를 아름답구나, 자징(子澄)의 말이여! 제군들이 날마다 외우고 때때로 살핀다면 또한 나의 말로써 삼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곧 사양하고 떠나 굳이 짓지 않았는데 제생이 지금도 오히려 나에게 바람이 있었다. 더구나 이 사창의 완성은 이미 종영의 손에서 나왔고 이 문장 또한 그의 필적에서 나왔으니, 또한 어찌 학()에 기문이 있는 것과 다르겠는가? 다시 어찌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 또 더군다나 천하의 일은 시비득실이 본디 정해져 있어 그 흥망성쇠 또한 시세에 연계되어 일정할 수 없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쇠하고 시들고 영락해서 한갓 이 사창의 누가 되기에 족하고, 그 사창의 중함을 더하기에는 부족하다. 제군들은 또한 무엇을 믿고 구하기를 이와 같이 부지런히 하는가? 제군을 위해 계책을 말하자면, 종영(鍾詠) 군의 기록을 새겨서 후인에게 보여주어 읽는 자로 하여금 그 완성의 쉽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차마 허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렇게 하면 또한 족하리라. 호안지(胡安之) 군이 돌아간다고 고하기에 그 말미에 발문을 써주어 상서(庠序: 학교)의 제군에게 보내 자징(子澄)의 가르침을 잊지 않게 하고자 한다. 경원(慶元) 경신년(1200) 2월 신사 춘분에 회암병수(晦庵病叟) 주희가 씀.

 

萍鄕胡君安之來學於余, 一日, 致其鄕人士君子之意, 欲余爲之記其社倉之役. 及扣其詳, 則出是書一卷曰: 此邑士鍾君詠之所爲也. 是倉之成, 鍾君彭君公脩實有力焉, 故所登載詳悉如此.余固嘉其敏於事, 而又能述以文也. 因念紹熙甲寅之歲赴鎭長沙, 道出玆邑, 邑之士子導余以觀於其學而請記之. 及行堂序間, 則旣有亡友劉君淸之之刻在焉. 余拱而讀, 顧而歎曰: 美哉乎, 子澄之言也諸君日誦而時省之, 則亦無以余言爲矣.卽謝去不敢爲, 而諸生至今猶有望於余也. 矧曰是倉之成, 旣出鍾君之手, 而此文又出其筆, 則亦何以異於學之有記? 而復何待於余言哉? 又况天下之事, 是非得失固有定在, 而其盛衰興廢, 亦有繫於時勢而不可常者. 顧余之衰謝淪落, 徒足以爲是倉之累, 而不足以增其重, 諸君亦何所賴而求之若是其勤耶? 爲諸君計, 莫若具刻鍾君之記以示後人, 使讀之者有以知其成之之不易如此而不忍壞焉, 斯亦足矣. 胡君告歸, 因跋其尾以授之, 日以寄謝庠序諸君, 使毋忘子澄之敎也. 慶元庚申二月辛巳春分, 晦菴病叟朱熹.

주사령이 소장한 소동파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周司令所藏東坡帖]

 

 

 

소공(蘇公)의 한묵(翰墨)은 세상에서 보배로 여겨 간직했기 때문에 세속에 위작이 많았다. 내 집에는 그가 덕수(德叟) 선배에게 준 두 통의 편지가 있는데 사의(詞意)가 초연하고 필세가 비동(飛動)하여 보는 자가 오히려 의심하기도 했으나 나 또한 분별할 수 없다. 이제 작숙(作肅)이 소장한 것을 보니 전승된 유래가 뚜렷하고 두 분의 감상하는 식견이 또한 이와 같아 의심할 수 없다. 51일에 주희가 말함.

 

蘇公翰墨爲世寶藏, 故流俗多僞作者. 余家有其與德叟先輩書兩紙, 詞意超然, 筆勢飛動, 觀者尙或疑之, 余亦不能辨也. 今觀作肅所藏源流有自, 而二公賞識又如此, 其亦可以無疑矣. 五月朔日, 朱熹.

 

 

장국화가 집주한 두시에 발문을 붙임[跋章國華所集注杜詩]

 

 

 

장국화(章國華)가 산간으로 나를 방문해서 집주한 두시(杜詩)를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노력이 성근했지만 그가 인용한 󰡔동파사실(東坡事實)󰡕은 소공(蘇公)이 지은 것이 아니라, 장로(長老)에게 듣자니 바로 민() 땅 가운데 정앙[鄭昻: 자는 상명(尙明)]이 허위로 만든 것이었다. 인용한 일은 모두 근거가 없는데 도리어 두시(杜詩)에 인용하여 구절의 증감을 드러내어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앞사람의 이름을 견강부회하여 그 말에 가탁하니, 시세(時世)의 선후가 전도되어 차례를 잃어버린 경우가 생겨났다. 일찍이 고증해보니 그것은 결코 소공(蘇公)의 글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두시(杜詩)의 아름다운 곳은 용사(用事), 조어(造語)의 밖에 있으니, 오직 마음을 비우고 읊어야만 이내 볼 수 있다. 장국화(章國華)가 다시 내 말을 구하니, 비록 삼백 편을 읽더라도 좋을 것이다.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가 씀.

 

章國華過予山間, 出所集注杜詩示予. 其用力勤矣, 然其所引東坡事實, 蘇公, 聞之長老, 鄭昂尙明僞爲之. 所引事皆無根據, 反用杜詩見句增減爲文, 而傅其前人名字, 託爲其語, 至有時世先後顚倒失次者. 舊嘗考之, 知其決非蘇公書也. 杜詩佳處, 有在用事造語之外者, 唯其虛心諷詠, 乃能見之. 國華更以予言求之, 雖以讀三百篇可也. 朱熹仲晦.

 

 

임여기의 󰡔논어집설󰡕 뒤에 적음[題林汝器論語集說後]

 

 

 

친구 범백숭(范百崇)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논어󰡕․󰡔맹자󰡕에 성현의 말은 본래 평이하고, 또 여러 선생들이 서로 밝혀내어 의리가 밝게 드러난 것이 마치 해와 별과 같다. 그러나 학자가 마음에서 맛을 체인하고 생각하기를 그만 두지 않아야만 자연히 혈맥이 관통하여 막힌 것이 없게 된 연후에 내 몸에 이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여러 책을 섭렵하고 억지로 기억하느라 푹 잠겨 발효되어 나오는 공부가 없으면 그가 바탕을 삼은 것이 또한 천박하게 될 뿐이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좋아했기에 임여기(林汝器)가 편찬한 󰡔논어설(論語說)󰡕 뒤에 쓴다. 여기(汝器)가 이 말로써 증험한다면 그 편찬서의 시비득실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友人范百崇嘗爲予言, , 聖賢之言, 本自平易, 又有諸先生相爲發明, 義理昭著如日星. 然學者體味於心, 念念不已, 自然血脈通貫, 無所底滯, 然後可言有益於吾身. 不然, 涉獵强記, 無沉浸釀郁之功, 則其所資亦淺淺焉耳. 予愛其言, 因書於林汝器所編論語說. 汝器以此說驗之, 則其所編之是非得失當自見矣.

 

 

이태백의 시에 적음[題李太白詩]

 

 

 

하루가 다르게 타락하는 세상 모습, 야박한 풍속은 순박한 근원을 변화시켰네. 계수나무 가지를 구하지 않고, 도리어 사나운 나무 뿌리에 깃든다. 복숭아나무오얏나무는, 꽃을 피우고 끝내 말이 없구나. 큰 운수는 흥기하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며, 짐승들은 날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네. 돌아온 광성자(廣成子)는 무궁한 문()으로 들어가네.

임광지(林光之)가 진광택(陳光澤)이 소장한 광성자(廣成子) 화상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는데, 우연히 이태백의 이 시가 생각나 써서 보여 주었다. 요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시를 짓되 입만 열면 문득 이백과 두보를 말한다. 그러나 이 시로 미루어 본다면, 그들이 어찌 꿈속에선들 그 각판(脚板: 발바닥)을 보았다고 하겠는가?

 

世道日交喪, 澆風變淳原. 不求桂樹枝, 反棲惡木根. 所以桃李樹, 吐華竟不言. 大運有興沒, 羣動若飛奔. 歸來廣成子, 去入無窮門.

林光之陳光澤所藏廣成子畫像來看, 偶記太白此詩, 因寫以示之. 今人捨命作詩, 開口便說, , 以此觀之, 何曾夢見他脚板耶?

 

 

󰡔주역참동계고이󰡕의 뒤에 씀[書周易參同契考異後]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는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것이다. 위군(魏君)은 후한 사람이다. 편제(篇題)는 대개 위서(緯書)의 목차를 모방했고, 사운(詞韻)은 모두 그윽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읽는 자가 견문이 천박하여 망령되이 고치기 때문에 다른 책에 비하여 더욱 어그러진 것이 많다. 이제 여러 판본을 합하여 다시 서로 교정했지만, 그 사이에 아직도 의심스런 곳이 많아 다 제거할 수가 없다. 우선 아는 것에 근거하여 써서 정본을 완성하고, 여러 같거나 다른 부분은 다 그대로 놓아두어 참정(參訂)에 대비하게 한다. 공동도사(空同道士) 추흔(鄒訢).

 

周易參同契, 魏伯陽所作. 魏君後漢, 篇題蓋放緯書之目, 詞韻皆古奧, 雅難通. 讀者淺聞, 妄輒更改, 故比他書尤多舛誤. 今合諸本更相讎正, 其間尙多疑晦, 未能盡法. 姑據所知寫成定本, 其諸同異因悉存之, 以備參訂云. 空同道士鄒訢.

 

 

불양출모의의 뒤에 적음[題不養出母議後]

 

 

 

󰡔예기(禮記)󰡕에는 가모(嫁母: 개가한 어머니)에 대해 복을 입는 것이 나와 있지 않지만 율령(律令)에는 그것이 있다. 혹자가 그것이 같지 않음을 의심하기에 내가 상고해 보았다. 󰡔예기󰡕에는 가모(嫁母)를 비록 친()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계()라고 말했고, 또 출모(出母: 쫓겨난 어머니)의 복은 나와 있으니, 모두 가벼운 것을 들어서 중한 것을 밝혔다. 그러나 친모(親母)로 개가한 자는 더욱이 복을 입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으니, 율령의 뜻과 애초에 다르지 않다. 또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에 대해서도 다만 출모(出母)의 무복(無服)을 말했지만 가모(嫁母)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 또한 가벼운 것을 들어서 무거운 것을 구별한 것이요, 가모(嫁母)는 오히려 응당 복이 있어야 함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여정보(余正父)공사(貢士)의 첩모(妾母)는 비록 아버지가 죽고 자식이 어려서 개가한 것은 아니나, 칠출(七出)의 죄가 없는데도 그 떠나는데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가모(嫁母)이지 내친 것이 아니다라고 변론한 것을 살펴보았다. 낙평(樂平) 영윤(令尹)이 논한 바의 잘못은 바로 가모를 출모로 여겨서 복이 있는 것을 복이 없다고 말한 것에 연루되었고, 정보(正父)가 변론한 것도 오직 이 두 가지 것이 급한 문제가 될 뿐이다. 지금 홀로 이것은 가모(嫁母)이다라는 하나의 말이 있지만, 내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복이 있는 까닭을 논하지 않고, 도리어 그 편()의 머리에 출모(出母)를 부양하지 않는다라고 적고, 또 다만 그것이 옛날의 출모와 같지 않아서 상복을 입지 않는다는 문구를 따를 수 없다고 논한다면, 또한 저절로 서로 모순이 생겨 도리어 영윤의 잘못된 설을 증명해주게 될 것이다.

나는 독자가 의심이 없을 수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이것을 적어서 질정한다. [정보(正父)가 비록 출모(出母)가 되지 않음을 깊게 밝히지는 못했으나, 또한 감히 곧장 출모로서 지목해서는 안 된다. 다만 편말의 한 곳에 출모를 부양하지 않는다[不養出母]”라는 글자를 써두고 스스로 ()’자를 ()’자로 고쳤으니, 또한 큰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만하다. 다만 힘을 기울여 분명하게 설파한 것이 적을 뿐이다.] 정보(正父)는 부인[夫人: 공사(貢士)를 말함]으로 하여금 이 어미(첩모)를 봉양케 하려 했는데, 장차 어떻게 하여 봉양한단 말인가? 내가 들으니, 어미가 개가했는데 자식이 따라 가는 경우는 계부(繼父)가 가문(家門) 밖에다 사당을 지어서 그 자식에게 제사하게 하고, 아내는 감히 그곳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다. 설자(說者)는 은혜는 비록 지극히 친밀하지만 가족이 이미 끊어졌으니, 남편이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가모(嫁母)는 살아서는 사당에 들어갈 수 없고, 죽어서는 사당에 합사할 수 없으니, 또한 집에서 부양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식된 자가 그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어미의 집으로 가서 혹 그 곁에다 집을 짓고 부양한다면, 예법에 적절할 것이다. 혹자는 이는 어미를 위한 집이 있는 것으로 말하면 옳겠지만, 불행하게도 집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말했는데, 밖에다 집을 지음이 옳을 것이다.

 

不著嫁母之服, 而律令有之. 或者疑其不同, 以予考之, 於嫁母雖不言親, 而獨言繼, 又著出母之服焉, 皆擧輕以明重, 而見親母之嫁者尤不可以無服, 與律令之意初不殊也. 又於爲父後者但言出母之無服而不及嫁母, 是亦擧輕以別重, 而見嫁母之猶應有服也. 余觀余正父之所辨貢士之妾母雖非父卒子幼而更嫁, 然無七出之罪而其去也有故, 則其實乃嫁母而非出也. 樂平令尹所論之失, 正坐以嫁母爲出母, 謂有服爲無服, 正父之辨之也, 亦唯此二者之爲急耳. 今乃獨有是嫁母也之一言, 而不論其所以不爲出而猶有服者, 顧反題其篇端曰 不養出母, 又但論其與古之出母者不同, 而不可從於不喪之文, 則亦自相矛盾而反以證成令尹之誤說矣. 予懼夫覽者之不能無疑, 故書此以質焉. 正父雖不能深明其不爲出母, 然亦不敢正以出母目之. 但篇末一處有 不養出母, 而自改 字爲 , 亦可見其大指之所在矣. 但少著力分明說破耳. 正父之欲使夫人養是母也, 將使如何而養之耶? 予聞之, 母嫁而子從者, 繼父爲之築廟於家門之外, 使其子祀之, 而妻不敢與馬. 說者以爲恩雖至親, 族已絶矣, 夫不可二故也. 此則是嫁母者生不可以入于廟, 死不可以祔于廟, 而亦不可以養於家矣. 爲之子者, 率其婦子就母之家, 或舍其側而養之, 則於禮也其節矣乎. 或曰: 此爲母之有家者言之則可矣, 不幸而無以爲家, 則如之何?築室于外可也.

 

: 宋浙本作

 

 

장백화의 시사 뒤에 씀[書張伯和詩詞後]

 

 

 

이것은 자미(紫微)의 사인(舍人) 장백화(張伯和)가 그 부자의 시사(詩詞)를 써서 나에게 촉탁한 것인데, 읽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분연히 원수인 오랑캐를 잡아 없애고 중원(中原)을 깨끗하게 쓸어버리는 뜻을 품게 했다. 순희(淳熙) 경자년(1180)에 판각하여 남강군(南康軍)의 무관(武觀)에 비치하여 문무(文武)의 관리들에게 보여준다.

 

紫微舍人張伯和父所書其父子詩詞以見屬者, 讀之使人奮然有擒滅讎虜, 掃淸中原之意. 淳熙庚子, 刻置南康軍之武觀, 以示文武吏士.

 

 

 

서기성이 전서로 쓴 항왕정부의 뒤에 발문을 붙임

[跋徐騎省所篆項王亭賦後]

 

 

 

기성(騎省)만년에 과변법(諣匾法)을 터득했다고 스스로 말하였는데, 지금 이 책을 보니 종횡으로 호방하여 조금도 아름답게 꾸미는 뜻이나 태도가 없어, 그가 늙어서 쓴 것임에 의심이 없다. 순희(淳熙) 신축년(1181) 11월 을유일에 신안 주희가 왕백시(汪伯詩)가 서안(西安) 부석(浮石)의 배 속에 소장한 것을 봄.

 

騎省自言晩乃得諣匾法, 今觀此卷縱橫放逸, 無毫髮姿媚意態, 其爲老筆亡疑. 淳熙辛丑仲冬乙酉, 新安朱熹汪伯詩所藏於西安浮石舟中.

 

: 原作 , 宋閩, 本改.

 

 

난정서에 발문을 붙임[跋蘭亭叙]

 

 

 

왕순백(王順伯)원기암(袁起巖)이 논한 난정서(蘭亭序)를 보니 마치 우연지(尤延之)의 말과 같아서 오히려 의심스런 논의를 면치 못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다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겠는가? 다만 무관(務觀)의 말을 음미해보면 또다시 개연히 초()나라 죄수의 탄식이 있을 뿐이다. 주희(朱熹).

 

王順伯, 袁起巖蘭享序, 尤廷之著語, 猶未免有疑論, 余乃安敢復措說於其間? 但味務觀之言, 亦復慨然有囚之歎耳. 朱熹.

 

 

왕계로가 소장한 그의 외할아버지 단석 유공이 쓴 문중자의 언행록 뒤에 발문을 붙임

[跋汪季路所藏其外祖湍石喩公所書文中子言行卷後]

 

 

 

옥천(玉泉) 유공(喩公)이 손수 쓴 왕문중자[王文中子: 이름은 통()]의 언행록을 그의 외손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말없는 가르침이라고 말할 만하다. 후학 주희(朱熹)가 삼가 보았는데 때는 순희(淳熙) 임인년(1182) 1월 경신일이다.

 

 

玉泉喩公手書王文中子言行以授其外孫, 其可謂不言之敎矣. 後學朱熹敬觀. 淳熙壬寅十二月庚申.

 

 

󰡔태산진전보󰡕에 발문을 붙임[跋泰山秦篆譜]

 

 

 

건도(乾道) 정해년(1167)에 나는 장사(長沙)에 사는 장경부(張敬夫)를 방문했다. 하루는 함께 유자구(劉子駒) 어른을 배알하고 그 선조가 소장한 법서(法書)고각(古刻)과 근세의 제공들이 주고받은 서첩을 열람했는데 하루 종일 보아도 다 볼 수 없었다. 󰡔태산진전보(泰山秦篆譜)󰡕를 꺼내어 말하기를, “이것은 비록 묵본(墨本: 인쇄본)이지만 구장본은 겨우 이것만 남아있다. 지난해에 이를 취하여 돌에다 새겨 넣으려 했으나 손때가 묻어있어 차마 헐어버릴 수 없어서 마침내 그만 두었다라고 하였다. 󰡔학역(學易)󰡕․󰡔양성(養性)󰡕 두 편만 중각본(重刻本)이었는데 이를 취하여 물려주어 내가 받아 소장하였다. 후에 여러 해 지나 이내 왕계로(汪季路)에게서 󰡔전보(篆譜)󰡕의 신본을 얻었는데 그것이 어떤 판본으로 판각되었는지 몰라서 두 책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전의 일을 추억해보니 마치 어제 저녁과 같았다.

유자구(劉子駒) 어른은 견문이 많고 잘 기억하고, 청빈하고 절개가 굳세었으며 젊어서 주현(州縣)에서 벼슬을 했다. 희령(熙寧)원풍(元豐) 년간의 고가(故家)의 자손으로 갑자기 인피(引避)를 당해, 죽도 이어갈 수 없게 되어 혹 종일 피곤하여 드러누워 있으면서도 태연하게 거처하였다. 서로 만났을 때는 이미 늙었지만 오히려 지나간 일을 잘 이야기할 때는 물이 흐르듯 쉬지 않았고, 기품과 용모가 순박하고 예스러워 선배의 기풍과 법도가 있었다. 지금은 다시 이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지난해에 담주(潭州)에서 벼슬할 때에 옛날 종유했던 일을 회고하니 거의 한 세대가 지나 유자구(劉子駒) 어른과 장경부(張敬夫)는 모두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유씨의 자질들은 욕심이 없고 허물이 없으며, 홀로 문을 닫고 곤궁함을 참으며 가법을 근실하게 지키니,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하여 크게 탄식하게 한다. 경원(慶元)으로 연호를 바꾸기 전해인 을묘년(1195) 5월 정미일에 병중에 󰡔양성(養性)󰡕을 읽고 나서 발문을 기록한다.

 

乾道丁亥; 予訪張敬夫長沙. 一日, 相與謁劉子駒, 閱其先世所藏法書古刻及近世諸公往來書帖, 竟日不能徧. 因出泰山秦篆譜: 此雖墨本, 然舊藏僅存此紙. 頃歲有欲取以入石者, 顧手澤所在, 不忍壞, 遂已.學易, 養性二篇乃重刻本, 因取以見遺, 予受藏之. 後累年, 乃得篆譜新本於汪季路, 不知其何從得本以刻也. 因合二書通爲一卷, 追省前事, 如宿昔也. 劉丈多聞彊記, 淸貧苦節, 少仕州縣, , 故家子孫輒引避, 饘粥不繼, 或憊臥終日, 而處之泰然. 相見時已老, 尙能談說往事, 滾滾不休, 氣貌醇古自然, 有前輩風度. 今不復有斯人矣. 去歲守, 俯仰昔游, 幾閱一世, 劉丈敬夫逝去皆已久, 劉氏子妷無欲無咎, 獨能閉門忍窮, 謹守家法, 又足令人感慨太息云. 明年慶元改號, 歲在乙卯, 五月丁未, 病中讀養性, 因記其後.

채조의 붓에 발문을 붙임[跋蔡藻筆]

 

 

 

채조(蔡藻)가 붓을 만들면 능숙하게 글씨를 쓰는 사람은 그 붓을 알아보았다. 이것은 옛날 원주(沅州) 여사군[呂使君: 이름은 승기(勝己)]의 말이다. 그가 만든 대추씨 모양의 붓을 시험해보고 나서 오래되어도 더욱 정밀함을 좋아했고, 아울러 산양(山陽)의 이웃집 피리소리에 깊은 감회가 일었다. 경원(慶元) 병진년(1196) 겨울 동지 5일전에 회옹(晦翁)이 씀.

 

蔡藻造筆, 能書者識之, 此故沅州呂使君語也. 因試其所製棗心樣, 喜其老而益精, 幷深山陽鄰笛之感. 慶元丙辰冬至前五日, 晦翁.

 

 

원기중이 교정한 󰡔참동계󰡕의 뒤에 적음[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내가 지난해에 순창(順昌)을 지나가다가 운당포(篔簹鋪)에서 쉬면서 벽에 쓰여진 휘황한 영지(靈芝), 한 해에 세 번 줄기를 뻗는데, 나는 홀로 무엇을 하나? 뜻이 있어도 이루지 못했네라는 시어를 보았다. 그 말을 반복해서 읽으니 비애가 느껴졌는데 지은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내 뜻과 일치했다. 경원(慶元) 정사년(1197) 87일에 그곳을 다시 들렀는데 옛 글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나간 세월을 손꼽아 헤아려 보니 어느덧 40여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이 뜻은 실로 이루지 못하였다. 길가는 사이에 우연히 이 글을 읽으니 아울러 전에 일이 느껴져서 장난 삼아 절구(絶句)를 지었다. “덧없이 빠른 백 년 인생 그 얼마나 되느냐? 영지(靈芝)가 세 번 줄기 뻗음은 무엇을 위함인가? 금단(金丹)은 한 해가 저물도록 소식이 없는데, 운당포(篔簹鋪) 벽 위의 시를 거듭 탄식하노라.” 회옹(晦翁).

 

予頃年經行順昌, 篔簹鋪, 見有題 煌煌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之語於壁間者, 三復其詞而悲之, 不知題者何人, 適與予意會也. 慶元丁巳八月七日, 再過其處, 舊題固不復見, 而屈指歲月, 忽忽餘四十年, 此志眞不就矣. 道間偶讀此書, 幷感前事, 戲題絶句: 鼎鼎百年能幾時? 靈芝三秀欲何爲? 金丹歲晩無消息, 重歎篔簹壁上詩.晦翁.

 

 

주익공과 양성재가 감숙회에게 보낸 시문권 뒤에 발문을 붙임

[跋周益公楊誠齋送甘叔懷詩文卷後]

 

 

 

퇴부[退傅: 주익공(周益公)을 말함]는 작은 물건에도 정밀하고 성근하여 틈이 없는 곳에 들어감이 있지 않았다. 노감[老監: 양만리(楊萬里)를 말함]은 오묘한 작용을 종횡으로 구사하니 여러 가지 상()들이 곧 상()은 아니었다. 또 두 분이 운용하는 곳을 말하면, 같은가 다른가? 숙회(叔懷)는 이 책 속에서 곧장 이해하여 터득했으니 기특하다고 할 것이다. 만약 혹 그렇지 않다면, “네가 한 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다 마시기를 기다려서 그 때 너에게 알려 줄 것이다.” 경원(慶元) 기미년(1199) 4월 갑신에 주희(朱熹).

 

退傳精勤小物, 無有入於無間. 老監縱橫妙用, 諸相卽是非相. 且道二公用處, 是同是別? 叔懷於此卷中直下薦得, 不妨奇特. 如或未然, 待汝一口吸盡西江, 卽向汝道. 慶元己未四月甲申, 朱熹.

 

 

진강중의 시첩에 발문을 붙임[跋陳剛中帖]

 

 

 

진강중(陳剛中)의 시에 제공의 발문이 이미 갖추어져 그 전말을 볼 수 있다. 주계굉(周季宏) 군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발문을 쓰게 하였다. 돌아보건대, 내가 어찌 드러내어 밝힐 수 있겠는가? 다만 소흥(紹興) 경신년(1140)으로부터 올해 기미년(1199)까지 육갑오자(六甲五子)를 계산해보면 마침 한 바퀴를 돌았다. ()()은 비록 죽었으나 오히려 생기(生氣)가 있는데 분분하게 떠든 자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탄식으로도 부족하여 우선 가만히 그 왼쪽에 기록해둔다. 10월 갑자일에 운곡노인(雲谷老人).

 

陳剛中, 諸公跋語已具見其顚末. 周君季宏持以示余, 使題於後. 復何能有所發明? 但計紹興庚申距今己未, 六甲五子, 適一周矣. , 雖死, 尙有生氣, 而彼紛紛者, 果安在哉? 嗟歎不足, 姑竊識其左方. 十月甲子, 雲谷老人.

 

 

남강군 여산을 유람하고 적음[記遊南康廬山]

 

 

 

회옹(晦翁)은 정정사(程正思), 정복지(丁復之), 황직경(黃直卿)과 함께 와서 강산의 뛰어난 경치를 유람하고 즐기다가 돌아갈 것을 잊은 듯하였다. 순희(淳熙) 기해년(1179) 중오(重午: 단오)에 회옹의 아들 재(), 생질 위각(魏恪)이 모시고 갔다.

 

晦翁程正思, 丁復之, 黃直卿俱來, 覽觀江山之勝, 樂之忘歸. 淳熙己亥重午日, 翁子, 魏恪侍行.

 

宋浙本此篇在卷七十八 . 此文又見別集卷七題疊石庵.

 

 

주렴계의 광풍제월정에 씀[書濂溪光風霽月亭]]

 

 

 

순희(淳熙) 8년 신축년(1181) 여름 46일에 후학 주희(朱熹), 장양경(張揚卿), 왕원(王沅), 주이(周頣), 임용중(林用中), 진조영(陳祖永), 허자춘(許子春), 왕한(王翰), 여우(余隅), 진사직(陳士直), 장언선(張彦先), 황간(黃榦)은 염계(濂溪)선생의 서당 아래에서 삼가 재배를 올렸다. 선생이 천명을 받들고 도통을 이어 단서를 세우고 드리워 우리 후인들을 계발하고 도와준 것이 애초에 이 사당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모두 감탄하고 사모하여 배회하다가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선생의 태극도(太極圖)를 꺼내어 읽고, 그 뜻을 풀이하여 여러 사람에게 설명하니, 모두 아름답구나!”라고 했다. 물러 나오자, 선생의 증손 정경(正卿), 언경(彦卿)과 현손 도()가 광풍제월정(光風霽月亭)에 술자리를 마련하니, 기진경(祁眞卿), 오겸선(吳兼善), 스님 남지(志南)와 주희가 공경히 써서 기록한다.

 

淳熙八年, 歲在辛丑, 夏四月六日, 後學朱熹, 張揚卿, 王沅, 周頣, 林用中, 陳祖永, 許子春, 王翰, 余隅, 陳士直, 張彦先, 黃榦, 敬再拜于濂溪先生書堂下: 惟先生承天畀, 系道統, 所以建端垂緖, 啓佑于我後之人者, 厥初罔不在斯堂, 用咸歎慕低回, 弗忍去. 乃復出所誦說先太極圖, 贊其義以曉衆, 咸曰休哉. 退, 先生之曾孫正卿, 彦卿, 玄孫設饌光風霽月亭, 祁眞卿, 吳兼善, 志南敬書以誌.

 

宋浙本此篇在卷七十九 .

 

 

밀암을 유람하고 적음[遊密菴記]

 

 

 

순희(淳熙) 신축년(1181) 가을 7월 계미일에 주중회(朱仲晦), 유안집(劉彦集), 경보(敬父), 평보(平父), 황덕원(黃德遠), 방백휴(方伯休), 진언충(陳彦忠)이 밀암(密菴)을 유람하였다. 중회(仲晦)의 아들 숙()과 재(), 언집(彦集)의 아들 근(), 평보(平父)의 아들과 조카인 학아(學雅), 학문(學文), 학고(學古), 학박(學博), 학구(學裘)가 모셨다. 저녁이 될 무렵에 큰비를 무릅쓰고 시내들을 건너 주한정(晝寒亭)에 올라가서 폭포를 보니 매우 장관이었다. 이튿날 중회(仲晦)는 다시 언집(彦集), 평보(平父)와 더불어 야학정(野鶴亭)에서부터 걸어 내려와 시내 가를 찾아 수석이 아름다운 곳을 서너 군데 발견하여 정자를 짓기로 계획하고 둘러보았다. 그런데 진역취[陳力就: 자는 심보(深父)]가 뒤따라 와서 그곳을 보고 기꺼이 공역을 돕기로 허락하여 마침내 다시 주한정(晝寒亭)에 올라갔다. 마침 비가 오다 잠시 개니 햇살이 찬란하여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돌아와 청단(淸湍)을 마시고, “높은 산과 험준한 봉우리,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 맑은 시냇물과 거센 여울이 좌우에 서로 비쳐 띠처럼 둘러 있네[崇山峻嶺, 茂林脩竹, 淸流激湍, 映帶左右]”로 운을 나누어 시를 지었다. 이튿날 다시 시내를 따라 천석(泉石)을 정리하고 술을 마신 뒤 돌아왔다. 도인(道人) 종혜(宗慧)와 종귀(宗歸)는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오지 않았다.

 

淳熙辛丑秋七月癸未, 朱仲晦, 劉彦集, 敬父, 平父, 黃德遠, 方伯休, 陳彦忠來遊密菴. 仲晦父之子, , 彦集之子, 平父子姪學雅, 學文, 學古, 學博, 學裘. 向夕, 冒大雨, 涉重澗, 書寒亭, 觀瀑布壯甚. 明日, 仲晦父復與彦集, 平父步自野鶴亭, 下尋澗底, 得水石佳處三四, 規築亭以臨之. 陳力就深父繼至, 見之欣然許相其役, 遂復登晝寒. 曾雨小霽, 日光璀璨, 尤覺雄麗. 歸飮淸湍, 崇山峻嶺, 茂林脩竹, 淸流激湍, 映帶左右分韻賦詩. 明日, 復循澗疏理泉石, 飮罷而還. 道人宗慧, 宗歸有約不至.

 

宋浙本此篇在卷七十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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