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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2025. 8. 24.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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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권 朱子大全 卷八十八

정강부(靜江府) 우제(虞帝) 묘비(廟碑)(靜江府虞帝廟碑)

[주 ; 우제(虞帝)의 묘(廟)에는 옛날에 비정신(鼻亭神)과 당(唐)의 무■조(武■[=明+空]照)의 상(象)이 있었는데, 모두 배척하여 없애버렸다.] [廟故有鼻亭神及唐武■(明+空)象, 皆斥去之.]

 

정강부(靜江府)에 옛날부터 있어왔던 우제사(虞帝祠)는 성(城)의 동북(東北) 5리(里)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산(虞山)의 아래에 있는 황택만(皇澤灣)에서 가깝다. 대체로 그것을 누가 처음 건립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당(唐)나라 때 새긴 글이 존재하며 또 송(宋)나라 순희(淳熙) 2년 봄 2월에 지금은 직비각(直祕閣)이신 장후(張侯) 식(栻)이 처음 정강부(靜江府)의 일을 시행하면서 전(奠)을 받들고 나아가 배알(拜謁)하였는데, 동우(棟宇)를 우러러보니 기울어지거나 빠지거나 하여 지탱할 수 없었고, 도상(圖象)은 착잡(錯雜)하게 진열되어 있었으며, 거기에 음려(淫厲)가 뒤섞여 있었다. 이에 송연(竦然)한 기분이 되어 말하기를 :

靜江府故有虞帝祠, 在城東北五里而近虞山之下, 皇澤之灣, 蓋莫詳其始所自立, 而有唐世刻詞在焉. 有宋淳熙二年春二月, 今直祕閣張侯栻始行府事, 奉奠進謁. 仰視棟宇傾墊弗支, 圖象錯陳, 簉以淫厲, 則竦然曰:

 

‘제덕(帝德)은 사람에게 있으나, 그 신(神)은 하늘에 있도다. 위령(威靈)이 더해지는 곳, 원근(遠近)은 있지 않으니, 이 땅에서 내림 제사 올리니, 이에는 오랜 법도가 있도다. 그런데도 비루(鄙陋)함을 그대로 두고 거짓을 쫓아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데도 도모(圖謀)하지도 않고 개혁(改革)하지도 못했으니, 내가 실로 이를 두려워하노라.’ 하였다.

‘帝德在人, 其神在天, 威靈所加, 無有遠邇. 降祠玆土, 粤有故常. 而因陋踵訛, 以至于此, 弗圖弗革, 某實懼焉.’

 

일이 끝나고 곧 철거(撤去)한 후 새롭게 단장할 것을 명했다. 이 때 또 국전(國典)에 따라 방사(旁祀) 중 법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들은 헐어버렸기 때문에 거기에서 미재(美材) 문석(文石)을 가져다가 이 역사(役事)를 봉행(奉行)했다. 정치적 상황이 나아졌을 무렵 이 일을 마쳤다고 고(告)했다. 이제 문관(門觀)은 엄숙하게 드러났으며 방잡(龐雜)함은 멀리 제거되었다. 밖은 조정(朝廷)이요 안은 정침(正寢)이라, 오직 우제(虞帝)와 두 황비(皇妃)의 신령(神靈)만이 자신을 공손히 하여 남면(南面)하면서 의젓하게 임(臨)하고 계신다. 가을 7월 계미(癸未)에 장후(張侯)는 그의 신료(臣僚)들을 거느리고 뇌례(牢醴)를 봉승(奉承)함에 부복(俯伏)하여 강신주(降神酒)를 땅에 붓고 제물을 올려서 우제(虞帝)의 신령(神靈)을 편안케 하였다. 성(盛)하게 일어나 이미 소통(疏通)되니 배수(拜手)하고 말하여 가로대 :

已事, 則命撤而新之. 時又方按國典, 毁諸旁祀不如法者, 因悉致其美材文石以奉玆役. 作治逾時, 訖事以告. 門觀嚴顯, 龐雜遠屛. 外朝內寢, (8-4502)惟帝及二妃之神, 恭己面南, 儼然臨之. 秋七月癸未, 侯率其僚奉承牢醴, 俯伏灌薦, 以妥皇靈. 肹蠁旣通, 拜手言曰:

 

‘하늘이 생민(生民)을 내려 보냄에, 상성(常性)을 지니게 하였도다.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입각하여 부자(父子)와 군신(君臣) 그리고 곤제(昆弟)와 부부(夫婦)와 붕우(朋友)는 인륜의 질서가 있어 이를 천서(天叙)라 부르나니, 백성이 늘 지켜야 할 상도(常道 즉 彛倫)인 것이다. 이 상도(常道)를 조금이라도 잃어버리면 천지(天地)가 뒤집히게 되는 법이다. 오직 우제(虞帝)는 몸소 성인(聖人)의 일을 행하시어 성명(誠明)이 저절로 그러하셨다. 가정에서는 자애와 효도를 행하시고 나라에서는 인(仁)과 공경(恭敬)을 행하셨으며 동생에게는 우애(友愛)를 처(妻)에게는 모범을 보이셨도다. 사람을 취(取)함에는 선(善)을 더불어 했으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종용(從容)히 대처하시면서 각각 그 지극함을 다하셨도다. 흡사 콤파스가 원(員)에 대한 것과 같이 또 곡척(曲尺)이 모난 것에 대한 것과도 같이 모든 천하 후세의 인륜(人倫)을 행하는 사람들은 우제(虞帝)에게서 법도를 취하지 않음이 없었도다. 고명(高明)하고 광대(廣大) 심후(深厚)하시고 교화(敎化)와 배육(培育)을 나란히 유행(流行)하셨으니 그 누가 하추(遐陬)라 하여 감히 그 베풂을 사사롭다 하리요? 오직 창오(蒼梧)의 들판만이 우제(虞帝)가 소장(所藏)하신 것을 말해주도다. 이 나라를 인연(寅緣)하시며 공손히 명사(明祀)를 받으시도다. 이에 군리(群吏)를 거느리고 신궁(新宮)에서 흔(釁)하셨도다. 목목(穆穆)하고 위엄(威嚴)있으신 신령(神靈)이시여, 불인자(不仁者)를 멀리 추방하셨으니, 감히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지 않겠나이까. 바라옵건대 우제(虞帝)의 신령(神靈)께서는 임(臨)하시어 밝게 비추소서!’라고 하였다.

‘天降生民, 厥有常性. 仁義禮智, 父子君臣. 爰及昆弟, 夫婦朋友. 是曰天叙, 民所秉彝. 失之毫分, 穹壤易位. 惟帝躬聖, 誠明自然. 慈孝于家, 仁敬于邦. 友弟刑妻, 取人與善. 從容鉅細, 各極其極. 如規之圓, 如矩之方. 使凡天下後世之爲人倫者, 莫不取則. 高明博厚, 化育並流. 孰是遐陬, 敢私其施? 惟蒼梧野, 謂帝所藏. 寅緣此邦, 獲恭明祀. 玆率群吏, 釁於新宮. 穆穆威神, 不仁者遠. 敢不再拜稽首, 惟帝之神實臨照之!’

 

이에 삼헌(三獻)하여 예(禮)를 이루니, 신령(神靈)과 인간(人間)이 서로 화합(和合)하고 관리(官吏)와 서민(庶民)이 함께 급하고 분주하여 영탄(咏嘆)하며 흥기(興起)하였다. 말씀을 모아 간청(懇請)하며 소원(所願)을 석장(石章)에 드러내고 사람을 보내 내게 문사(文辭)를 청하되 무극(無極)함을 고(告)하였다. 희(熹)가 가만히 생각건대, 우제(虞帝)는 하늘을 짝하여 표준을 세우시고 무궁(無窮)한 법도(法度)를 베푸신 분이시니, [그의 덕(德)은] 이미 문자(文字)의 형용(形容)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전기(傳記)에 ‘우제(虞帝)께서 남쪽으로 순수(巡狩)하시다 돌아오지 못하시어 드디어 창오(蒼梧)에 장사(葬事)지냈다’라고 한 것도 또한 경(經)의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고신(考信)할 수도 없으니 이 모든 것에 대해 나는 감히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오직 천리(天理)와 인륜(人倫)의 즈음에 있어, 우제(虞帝)께서 후세(後世)에 행교(幸敎)하신 소이(所以)에 대해서는 대개 일찍이 장후(張侯)와 더불어 강론하며 마음을 두었었다. 장후(張侯)의 뜻에는 우제(虞帝)께서 행교(幸敎)하신 그 소이연(所以然)이 무엇인가에 대해 거의 인식(認識)하신 듯했다. 이에 경건히 전서(篆書)로 시(詩)를 지어 그 소이연(所以然)이 드러나게 하고, 이를 새기도록 하였다. 그 시에 가로대 :

於是三獻成禮, 神人浹和, 吏民駿奔, 咏嘆興起. 合辭懇請, 願著石章. 伻來謁辭, 以詔無極. 熹竊惟帝之所以配天立極․法施無窮者, 旣非文字形容所及, 而傳記所稱南巡不反, 遂葬蒼梧者, 又非經言, 無所考信, 則皆罔敢知. 惟是天理人倫之際, 帝之所以幸敎後世者, 蓋嘗與侯講而志之. 於侯之意, 庶幾識其所以然者. 乃敬篆而顯詩之, 俾歸刻焉. 其詩曰:

 

우산(虞山)의 땅이요, 이수(灕水)의 물가로다. 그 누가 우제(虞帝)의 제사(祭祀)를 닦는가? 구가(九歌)에 소무(招舞 즉 韶舞)로다. 장후(張侯)를 돕는 이 있어, 이 남주(南州)에서 목민(牧民)하도다. 우제(虞帝)의 인(仁)함을 생각함이여, 그를 도움이 아름답다고 응답하도다. 이에 사우(祠宇)를 바라보니, 지주(支柱)는 퇴박(頹剝)하도다. 명령(明靈)은 밝지 못하고 음오(淫傲)는 나란히 대오(隊伍)를 이루었구나. 이에 강기(綱紀)가 잡히도록 하고, 옛 것을 허물고 새롭게 단장하여, 이에 당(堂)을 만들고 이에 기반(基盤)을 다지니, 높고 큰 옥우(屋宇)가 우뚝한 성(城)과 같도다. 우제(虞帝)의 탄강(誕降)이 더디지 않으시니, 사문(四門)이 목목(穆穆)하도다. 장후(張侯)는 그 낙성(落成)을 즐거워하여, 음식을 올이며 축하(祝賀)하도다. 생각건대 우제(虞帝)의 덕(德)은 흡사 콤파스가 원(員)에 대한 것과도 같고 곡척(曲尺)이 모난 것에 대한 것과도 같아서, 만물에 나아가 법칙(法則)이 되시니 큰 질서로 빛나도다. 이에 측미(側微)한 것에서부터 동식물(動植物)에 이르기까지 잠잠(潛潛)히 그 은택을 입게 되었도다. 자신을 공손히 하여 하늘을 대하니, 구름이 지나가며 비를 뿌리도다. 그 은혜 내세(來世)의 억만사년(億萬斯年)에까지 미치리니. 높은 하늘과 넓은 땅 우뚝 솟은 산악(山嶽)과 흐르는 시내는 말할 것 없으니, 하물며 오랜 성교(聲敎)를 입은 이 훼상(卉裳)은 두 말할 나위 없으리. 정색(正色)하고 본다면 누구나 흥기(興起)하여 본받으리라. 그리하여 자식은 효(孝)를 높이고 신하는 힘써 충성(忠誠)을 다하리라. 장후(張侯)는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오직 우제(虞帝)의 공(功)이로다!

虞山之土, 灕水之滸. 誰修虞祀? 九歌招舞. 有翼張侯, 牧此南州. 懷帝之仁, 答其祐休. 載瞻祠宇, 頹剝支柱. 明靈弗蠲, 淫傲騈伍. 乃敎綱紀, 乃夷乃攻. 乃堂乃基, 峻宇崇墉. 帝降不遲, 四門穆穆. 侯樂其成, 來饋來祝. 惟帝之(8-4503)德, 規圓矩方. 卽物而則, 大倫以光. 爰自側微, 動植潛被. 恭己當天, 雲行雨施. 惠于來世, 億萬斯年. 穹天博地, 峙嶽流川. 矧是卉裳, 舊惟聲敎. 愀然見之, 興起則效. 子隆于孝, 臣力其忠. 侯拜稽首, 惟帝之功!

 

 

 

소부(少傳) 유공(劉公) 신도비(神道碑)(少傳劉公神道碑)

 

순희(淳熙) 5년 가을 7월 모일(某日) 관문전(觀文殿) 학사(學士) 팽성(彭城) 유후공(劉侯珙)께서 건강(建康)의 부사(府舍)에서 훙거(薨去)하셨다. 병(病)이 위급할 때, 손수 글을 써서 그 동생 평(玶)에게 주면서 그의 벗인 주희(朱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게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공(珙)이 불효(不孝)하여 선공(先公) 소부(少傳)의 묘목(墓木)이 크게 한 아름이나 되도록 아직도 비(碑)를 건립(建立)하지 못했는데, 이는 대개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지금 국가(國家)의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한 상태로, 공(珙)은 한(恨)을 머금고 죽게 되었다. 결국 이 일로 그대에게 누(累)를 끼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에 희(熹)는 편지를 열어보고 통곡(慟哭)하며 말하기를 : ‘오호(嗚呼)라! 공보(共父)께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셨는가? 나는 일찍이 아비를 잃었는데, 소부공(少傳公)께서 기실(其實) 나를 거두어 가르쳐 주셨다. 공보(共父)의 책임은 곧 나의 책임이다’라고 하고 곧 그 집을 방문하여 공의 아우 병산선생(屛山先生)께서 정리해 놓으신 행장(行狀)을 얻고 또 지금 강릉(江陵)의 장후(張侯) 식(栻)이 쓴 명(銘)을 얻어 그 사적(事蹟)을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가로대 :

淳熙五年秋七月某日, 觀文殿學士彭城劉侯珙薨於建康之府舍. 疾革時, 手爲書,授其弟玶, 使以屬其友朱熹, 若曰: ‘珙不孝, 先公少傳之墓木大拱而碑未克立, 蓋猶有待也. 今家國之讎未報, 而珙銜恨死矣, 以是累子, 何如?’ 熹發書慟哭曰: ‘鳴呼! 共父遽至此耶? 且吾蚤失吾父, 少傳公實收敎之. 共父之責, 乃吾責也.’ 卽訪其家, 得公弟屛山先生所次行狀, 又得今江陵張侯栻所爲銘, 以次其事曰:

 

공의 성(姓)은 유씨(劉氏)이고 휘(諱)는 자우(子羽)이며 자(字)는 언수(彦修)이다. 선대(先代)에 장안(長安)으로부터 건주(建州)에 이사해 왔는데, 지금은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 사람이다. 공의 증대부(曾大父 즉 曾祖父)는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추증(追贈)되신 태소(太素)이시고, 공의 대부(大父)는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추증(追贈)되신 민선(民先)이시니 모두 유학(儒學)으로 향리(鄕里)에서 교수(敎授)하셨다. 그리고 공의 황고(皇考)로서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이자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신 충현공(忠顯公)은 드디어 충효(忠孝)의 대절(大節)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하셨으니, 그 사적(事蹟)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公姓劉氏, 諱子羽, 字彦修. 其先自長安徙建州, 今爲崇安縣五夫里人. 曾大(8-4504)父贈朝議大夫太素, 大父贈太子太保民先, 皆以儒學敎授鄕里. 而皇考資政殿學士․贈太師忠顯公遂以忠孝大節殺身成仁, 事載國史.

 

소부공(少傳公)은 충현공(忠顯公)의 사자(嗣子)이다. 젊어서 부임(父任)으로 장사랑(將仕郞)에 임명되었고, 노력(勞力)을 쌓아 선교랑(宣敎郞)으로 전임(轉任)되었으며, 절동안무사서사기의문자(浙東安撫司書寫機宜文字)를 권섭(權攝)하였다. 그 후 조정에 들어가 태복(太僕)과 태부부(太府簿)를 지냈으며, 광록승(光祿丞)으로 옮겼다. 벽소(辟召)되어 하북(河北)과 하동(河東)의 선무사서사기의문자(宣撫司書寫機宜文字)를 지냈고, 공(功)이 있다 하여 조청대부(朝請大夫)로 전임(轉任)되었으며 직비각(直祕閣)에 제수(除授)되었다. 건염(建炎) 3년에 충비각수찬(充祕閣修撰)과 지주(池州) 지사(知事)에 발탁되었고, 집영전수찬(集英殿修撰)과 태주(秦州)지사로 변경되었다. 이직 행(行)하기 전에, 어영사사삼찬군사(御營使司參贊軍事)에 제수(除授)되었고, 벽소(辟召)되어 천합선무처치사사삼의군사(川陜宣撫處置使司參議軍事)가 되었다. 검염(建炎) 4년에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에 제수(除授)되었다. 소흥(紹興) 2년에 이주로경략사(利州路經略使) 겸 흥원부(興元府) 지사(知事)를 영수(領受)하였고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제수(除授)되었으며, 팽성현(彭城縣) 개국남(開國男)에 봉(封)해져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下賜)받았다. 소흥(紹興) 3년에 단주단련부사(單州團練副使)에 책수(責授)되면서 백주(白州)에 안치(安置)되었다. 소흥(紹興) 4년에, 옛 관직으로 돌아와 제거강주태평관(提擧江州太平觀)이 되었다. 다시 집영전수찬(集英殿修撰)과 악주(鄂州) 지사(知事)가 되었으며 도독부삼의군사(都督府參議軍事)를 권섭(權攝)하면서 천(川)과 섬(陝)을 선유(宣諭 ; 曉諭)하였다. 해를 넘기고 환보(還報)하였으며 다시 대제(待制)하다가 천주(泉州) 지사(知事)가 되었다. 소흥(紹興) 8년에 봉사(奉祠)로 낙직(落職)되었으며, 이윽고 산관(散官)에 책수(責授)되었다가 장주(漳州)에 안치(安置)되었다. 소흥(紹興) 10년에 사면(赦免)되어 귀환(歸還)할 수 있었다. 소흥(紹興) 11년에 다시 옛 관직을 회복하여, 연강안무사(沿江安撫使) 및 진강부(鎭江府) 지사(知事)에 기용(起用)되었다. 소흥(紹興) 12년에 다시 대제(待制)하다가 자작(子爵)으로 승진(陞進)되어 200호(戶)가 더 봉(封)해졌다. 이 해가 끝나자, 다시 태평사관(太平祠官)이 되었고 5년 후에 훙거(薨去)하였으니 50세였다.

公其嗣子也, 少以父任, 補將仕郞. 積勞, 轉宣敎郞, 權浙東安撫司書寫機宜文字. 入主太僕, 太府簿, 遷光祿丞. 辟河北․河東宣撫司書寫機宜文字, 以功轉朝請大夫, 授直祕閣. 建炎三年, 擢充祕閣修撰․知池州, 改集英殿修撰․知秦州. 未行, 除御營使司參贊軍事, 辟川陜宣撫處置使司參議軍事. 四年, 除徽猷閣待制. 紹興二年, 領利州路經略使, 兼知興元府. 除寶文閣直學士, 封彭城縣開國男, 食邑三百戶. 三年, 責授單州團練副使, 白州安置. 四年, 還故官, 提擧江州太平觀. 復爲集英殿修撰․知鄂州, 權都督府參議軍事, 宣諭川陜. 踰年還報, 復待制, 知泉州. 八年, 落職奉祠, 尋責散官, 漳州安置. 十年, 以赦得還. 十一年, 復故官, 起爲沿江安撫使․知鎭江府. 十二年, 復待制, 進爵子, 益封二百戶. 是歲罷, 復爲太平祠官. 五年而薨, 年五十矣.

 

공의 천자(天姿)는 영의(英毅)하여 어릴 적부터 탁월(卓越)하고 출중(出衆)하였다. 나이 24-5세 때에 충현공(忠顯公)을 보좌(保佐)하여 월(越)을 지킬 때 이졸(羸卒) 수백 명으로 목(睦)의 도적(盜賊) 방납(方臘)의 군사 수십만 명을 깨트리고 끝내 그 성(城)을 보전(保全)하였다. 또 충현공(忠顯公)을 보좌(保佐)하여 진정(眞定)을 지킬 때, 마침 여진(女眞)이 들어와 도적질을 하면서 대병(大兵)으로 그 성(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이에 공은 방략(方略)을 세워 성가퀴에 올라가 수개월 동안을 저항하며 성을 지켰다. 이에 오랑캐들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퇴각(退却)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충현공(忠顯公)은 순절(殉節)하였다. 공은 충현공(忠顯公)의 영구(靈柩)를 호송(護送)하고 돌아와 장례(葬禮)를 행하였으며,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고 피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원수들로부터 당한 이 수치(羞恥)를 갚아 주리라 스스로 맹서(盟誓)하였다. 조정(朝廷)에서도 평소(平素) 공의 재질(材質)을 알고 있었기에 공으로 하여금 참어영사군사(參御營使軍事)가 되게 하였다.

公天姿英毅, 自少卓犖不羣. 年二十四五時, 佐忠顯公守越, 以羸卒數百破睦寇方臘數十萬衆, 卒全其城. 復佐忠顯公守眞定, 曾女眞入寇, 以大兵圍其城. 公設方略, 登陴拒守數月, 虜不能下而去. 忠顯公旣以節死, 公扶喪歸葬. 號天(8-4505)泣血, 以必報讎恥自誓. 朝廷亦素知其材, 使參御營使軍事.

 

당시 반장(叛將) 범경(范瓊)이 강병(彊兵)을 손에 쥐고 상류(上流)에 근거지를 확보한 채 불러도 오지 않고 와서도 기꺼이 석병(釋兵)하려 하지 않자 중외(中外)가 흉흉(洶洶)하였다. 이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장충현공(張忠獻公)이 공과 함께 밀모(密謀)하여 그를 주살(誅殺)하였다. 어느 날, 이 일을 위해 [조정에서는] 장준(張俊)을 보내 1,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그 도적을 체포케 하기 위해 모두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범경(范瓊)과 장준(張俊) 및 유광세(劉光世)를 불러 도당(都堂)에 나아가 일을 의논하게 하고, 그들을 위해 음식(飮食)을 진설(陳設)하였다. 다 먹고 난 다음, 제공(諸公)이 서로 돌아보며 아직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데, 공이 처마 밑에 앉아 있다가 범경(范瓊)이 사변(事變)을 눈치 채게 될 것을 걱정하여 갑자기 황지(黃紙)를 취(取)하여 손에 쥐고 빠른 걸음으로 그의 앞에 가서 황지(黃紙)를 들고 범경(范瓊)에게 손짓하여 부르면서 말하기를 : ‘아래에 조칙(詔勅)이 있으니, 장군(將軍)께서는 대리(大理)에 나아가셔서 치대(置對)하심이 옳을 것이요’라고 했다. 이에 범경(范瓊)은 놀라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공이 좌우를 둘러보며 범경(范瓊)을 겨드랑이에 끼고 수레 가운데 태우게 한 다음, 장준(張俊)의 병사로 하여금 호위(護衛)하여 감옥(監獄)으로 보내게 했다. 한편 유광세(劉光世)로 하여금 나가서 그 무리들을 진무(鎭撫)케 하였는데, 여러 차례 범경(范瓊)이 적군에게 포위된 성(城) 안에서 적로(賊虜)를 가까이 하면서 이성(二聖)을 협박(脅迫)하여 수장(狩狀)을 내보내도록 하였기에, 또 공이 말하기를 : ‘주륙(誅戮)할 자는 오직 범경(范瓊)에 그칠 뿐이니 너희들은 본래 천자(天子)께서 몸소 거느리시는 병사들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좋소’라고 하면서 허락하였고, 모두들 다른 군대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되어 빠른 시간 안에 안정(安定)을 되찾게 되었다. 범경(范瓊)은 마침내 사형(死刑)에 처해졌다.

時叛將范瓊擁彊兵․據上流, 召之不來, 來又不肯釋兵, 中外洶洶. 知樞密院事張忠獻公與公密謀誅之. 一日, 爲遣張俊以千人度江捕他盜者, 使皆甲而來. 因召瓊․俊及劉光世詣都堂計事, 爲設飮食. 食已, 諸公相顧未發, 公坐廡下, 恐瓊覺事變, 遽取黃紙執之趨前, 擧以麾瓊曰: ‘下有敕, 將軍可詣大理置對.’ 瓊愕不知所爲, 公顧左右擁置輿中, 衛以俊兵送獄. 使光世出撫其衆, 數瓊在圍城中附賊虜迫脅二聖出狩狀, 且曰: ‘所誅止瓊耳, 汝等固天子自將之兵也.’ 衆皆投刃曰諾, 因悉麾隷他軍. 頃刻而定, 瓊竟伏誅.

 

장공(張公 ; 張俊)은 이 일로 인해 공을 더욱 기특(奇特)하게 여겨 공을 천(川)과 섬(陝)으로 가는 사자(死者)를 삼고자 했는데, 드디어 벽소(辟召)되어 함께 가게 되었다. 진주(秦州)에 이르러 막부(幕府)를 세우고, 오로(五路)의 절도사(節度) 제장(諸將)들에게 5년 간 법도를 익힌 이후에 출사(出師)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명년(明年)이 되자, 오랑캐들이 강(江)과 회(淮)를 엿보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장공(張公)은 금위군(禁衛軍)이 수가 적고 힘이 약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적의 병세(兵勢)를 분요(分撓)시킬 수 있는 계책(計策)을 강구하던 중, 드디어 오로(五路)의 군대를 병합(竝合)하여 진격(進擊)하기로 하였다. 이에 공은 본계(本計)가 아니라 하여 쟁론(爭論)하였다. 이에 장공(張公)이 말하기를 : ‘내가 어찌 이 점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동남(東南)의 일이 바야흐로 급박하게 된 점을 고려한다면 부득불(不得不)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드디어 북으로 나아갔다. 부평(富平)에 이르러 오랑캐와 조우(遭遇)하게 되었는데 전세(戰勢)는 불리(不利)했고, 오랑캐는 승세(勝勢)를 타고 전진(前進)해왔다. 선무사(宣撫司)는 퇴각(退却)하여 흥주(興州)를 지켰다. 이에 인정(人情)이 크게 진동(震動)했다. 관속(官屬) 가운데 기주(夔州)를 따라 다스리자는 대책(對策)을 건의(建議)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공은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 ‘유자(孺子)는 참수(斬首)당할 만하다! 사천(四川)이 전성(全盛)하기 때문에 오랑캐들이 들어가 도적질하고 싶어 한 지 오래되었다. 다만 천(川)의 입구에는 험준한 철산(鐵山)의 잔도(棧道)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감히 쉽사리 엿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를 견고히 지키지 않아 그들이 멋대로 깊숙이 침입하게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후미진 기협(夔峽)에 내몰리게 되어 결국 관중(關中)의 성원(聲援)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나아가려 하던지 물러가려 하던지 모두 계책(計策)을 세울 수 없게 된다. 후회(後悔)가 장차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 이제 다행히도 오랑캐들이 바야흐로 멋대로 노략질하면서도 군(郡)가까이로 핍박(逼迫)해 들어오지는 않고 있으니, 선사(宣司)는 다만 흥주(興州)에 주둔(駐屯)해서 밖으로는 관중(關中)을 노리는 오랑캐들의 소망(所望)을 격퇴(擊退)하고, 안으로는 촉(蜀)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 우리 조정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니 급히 관속(官屬)을 관(關) 밖으로 내보내어 제장(諸將)을 불러들이고 산망(散亡)된 병졸들을 거두어들여서 군대를 험애(險隘)한 곳에 적절히 배치하여 성벽(城壁)과 보루(堡壘)를 견고(堅固)히 하여 적의 틈을 엿보아 아군을 움직인다면, 거의 이전의 허물을 보상(補償)하고 이후에 닥칠 잘못을 대속(代贖)할 수도 있으련만,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장공(張公)은 공의 말을 옳다고 여겼고, 따라서 여러 참모(參謀)와 보좌(補佐)들이 감히 그 관속(官屬)의 대책을 시행하지 못하였다.

張公由此益奇公, 及使川陝, 遂辟以行. 至秦州, 立幕府, 節度五路諸將, 規以五年而後出師. 明年, 虜窺江淮急, 張公念禁衛寡弱, 計所以分撓其兵勢者, 遂合五路之兵以進. 公以非本計爭之, 張公曰: ‘吾寧不知此? 顧今東南之事方急, 不得不爲是耳.’ 遂北, 至富平, 與虜遇, 戰不利, 虜乘勝而前. 宣撫司退保興州, 人情大震. 官屬有建策從治夔州者, 公叱之曰: ‘孺子可斬也! 四川全盛, 虜欲入寇久矣. 直以川口有鐵山棧道之險, 未敢遽窺耳. 今不堅守, 縱使深入, 而吾乃僻處夔峽, 遂與關中聲援不復相聞, 進退失計, 悔將何及? 今幸虜方肆掠, 未逼近(8-4506)郡, 宣司但當留駐興州, 外繫關中之望, 內安全蜀之心, 急遣官屬出關, 呼召諸將, 收集散亡, 分布險隘, 堅壁固壘, 觀釁而動, 庶幾猶或可以補前愆, 贖後咎, 奈何乃爲此言乎?’ 張公然公言, 而諸參佐無敢行者.

 

공은 곧 자청(自請)하여 명(命)을 받들고 북(北)으로 출정(出征)하였으며, 또다시 단기(單騎)로 진주(秦州)에 이르러 복심(腹心)을 나누어 파견(派遣)하여 도망간 여러 장수들[亡將]을 불렀다. 도망간 여러 장수들은 공의 이 명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모두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회합(會合)했다. 공은 효장(驍將) 오개(吳玠)에게 명하여 화상원(和尙原)에 목책(木柵)을 만들어 대산관(大散關)을 수비(守備)하게 하고, 병사를 나누어 여러 험한 요새(要塞)를 빠짐없이 지키도록 하였다. 오랑캐의 첩자(諜者)가 와서 아군(我軍)이 대비(對備)가 잘 되었음을 확인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명년(明年)에 오랑캐가 또 다시 군대를 모아 재차 공격해 왔지만 오개(吳玠)가 이를 패퇴(敗退)시켰다. 이 때 잡은 포로가 1만을 헤아렸다. 촉(蜀)땅이 이를 계기로 하여 평안(平安)하게 되었다. 선무사(宣撫司)는 군대(軍隊)를 낭주(閬州)로 이동시켰다. 이에 공은 청(請)하여, 홀로 관(關) 밖에 머물면서 제장(諸將)을 조호(調護)하여 내외(內外)의 성원(聲援)을 소통(疏通)시켰다. 그 결과 군민(軍民)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되어 공을 향하게 되었다.

公卽自請奉命北出, 復以單騎至秦州, 分遣腹心, 召諸亡將. 諸亡將聞命大喜, 悉以其衆來會. 公命驍將吳玠柵和尙原․守大散關, 而分兵悉守諸險塞. 虜諜知我有備, 引去. 明年, 虜復聚兵來攻再爲玠所敗, 俘獲萬計, 蜀土以安. 宣撫司移軍閬州, 公請獨留關外, 調護諸將, 以通內外聲援, 軍民之心翕然向之.

 

또 명년(明年)에 한중(漢中)에 큰 기근(饑饉)이 닥쳤다. 여러 장수들이 폐경자수(閉境自守)하니, 이로 인해 건의(建議)하는 말이 있어 모두 공과 함께 연병(連兵)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장공(張公)은 승제(承制)하여 그의 청을 허락하였다. 공은 진(鎭)에 이르러 관문(關門)을 열고 상인(商人)을 소통시키며 곡식을 옮길 수 있도록 했다. 인근(鄰近)의 원병(援兵)들과 화목(和睦)하게 지내면서 군대(軍隊)를 정돈(整頓)하고 병졸(兵卒)을 훈련(訓練)했으며 험지(險地)에 목책(木柵)을 만들어 적(敵)의 침입에 대비했다. 마침 오랑캐가 들어와 도적질을 하면서 장차 금주(金州)와 상주(商州)를 거처 사천(四川)을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공은 편지를 써서 금주(金州) 경략사(經略使)인 왕언(王彦)으로 하여금 험지(險地)에 강(强)한 쇠뇌를 매복시켜 놓고 적을 기다리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왕언(王彦)은 단병(短兵)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작은 도적들을 여러 번 평정(平定)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의 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오랑캐가 그 곳에 밀어닥치자 왕언(王彦)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적을 맞아 싸우다 과연 패주(敗走)하여 석천(石泉)을 지키고 있었다. 그 당시 오개(吳玠)는 진(秦)과 봉(鳳)의 경략사(經略使)가 되어 있었다. 공은 왕언(王彦)이 수비(守備)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대를 이동시켜 요풍령(饒風嶺)을 지키면서 또 오개(吳玠)에게 전갈을 보냈다. 이에 오개(吳玠)는 크게 놀라 지경(地境)을 넘어 동(東)쪽으로 이동하였는데, 하루 밤에 300 리(里)를 달렸다. 중도(中道)에 조금 그치자, 공에게 서현(西縣)에서 일을 계획(計劃)하자고 청했다. 이에 공은 다음과 같이 알렸다 : ‘오랑캐가 조만간에 요풍(饒風) 아래 당도할 것인데, 급히 이 곳을 지키지 않으면 촉(蜀) 땅은 적에게 넘어가게 된다. 공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가야 한다. 이제 또 [내가] 서쪽으로 이동하면 알지 못하는 자는 내가 적이 두려워서 도망한다고 말할 뿐이니, 제장(諸將)들이 해체(解體)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오개(吳玠)는 편지를 받고 곧바로 다시 요풍(饒風)으로 달려가 영채(營寨)를 벌이고 적을 막아 지켰다. 오랑캐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공격해왔고 이에 사상자(死傷者)가 쌓일 정도로 많았다. 이에 다시 사사(死士)를 모집하여 간도(間道)를 따라 조계관(祖溪關)에 침범해 들어가 오개(吳玠)의 후방(後方)을 에워싸며 나갔다. 오개(吳玠)는 급히 말을 달려 한중(漢中)으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와서 공을 맞이하여 공과 함께 가고자 하였다. 이에 공은 불가(不可)하다 하면서 오개(吳玠)를 그 곳에 머물게 하여 함께 목책(木柵)을 마련하여 정군산(定軍山)을 지키고자 하였다. 오개(吳玠)가 불가(不可)하다 하였기에 공은 부득이 물러나 삼천(三泉)을 지켰는데 따르는 병사가 300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에 공은 사졸(士卒)과 조려(粗糲를 함께했으며 심지어 초아(草牙)와 목갑(木甲)을 취해서 먹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오개(吳玠)에게 편지를 보내 영결(永訣)을 고했다. 오개(吳玠)는 편지를 받아 쥐고 눈물을 흘리며 공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이를 아직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의 애장(愛將)인 양정(楊政)이라는 장수가 군문(軍門)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 ‘공이 지금 가지 않으신다면 이는 유공(劉公)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정(政)의 무리도 또한 공을 버리고 떠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오개(吳玠)는 삼천(三泉)으로 와서 회합(會合)했다. 당시 오랑캐의 유기(游騎)가 매우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이 때문에 오개(吳玠)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어나 공을 보니 공은 태연자약(泰然自若)한 모습으로 달게 잠을 자고 있었고, 곁에는 경계(警戒)하며 검문하는 자도 없었다. 이에 급히 공을 깨워 공손히 말하기를, ‘지금이 어떤 시절입니까? 이처럼 간이(簡易)하게 하시다니요’라고 했다. 이에 공이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나는 죽고자 각오했소. 그러니 또한 무슨 말을 하겠소?’라고 하자, 오개(吳玠)는 부끄러워 탄식(嘆息)하며 눈물을 흘렸고 마침내 끝까지 만류(挽留)하지 못했다.

又明年, 漢中大饑, 諸帥閉境自守, 因有建言, 皆願得公與連兵. 張公承制, 可其請. 公至鎭, 開關通商輸粟, 輯睦鄰授, 飭兵練卒, 柵險待敵. 會虜復入寇, 將道金商以鄕四川. 公以書諭金州經略使王彦, 使伏彊弩於險以俟之. 彦習用短兵, 屢平小盜, 不以公言爲意. 虜猝至, 不知所爲, 逆戰, 果敗走, 保石泉. 時吳玠爲秦鳳經略使, 公聞彦失守, 亟移兵守饒風嶺, 且以語玠. 玠大驚, 卽越境而東, 一日夜馳三百里. 中道少止, 請公會西縣計事. 公報曰: ‘虜旦夕至饒風下, 不亟守此, 是無蜀也. 公不前, 吾當往. 今又西走, 不知者謂吾懼而逸爾, 諸將得無解體乎?’ 玠得書, 卽復馳至饒風, 列營拒守. 虜人悉力仰攻, 死傷如積. 更募(8-4507)死士由間道犯祖溪關以入, 繞出玠後. 玠遽走還漢中, 且來邀公, 欲與俱去. 公不可, 留玠共柵定軍山以守. 玠不可, 公不得已退守三泉, 從兵不及三百人. 與士卒同粗糲, 至取草牙木甲嘉噉之. 遺玠書與訣, 玠持之泣下, 欲馳赴公. 未果, 其愛將楊政者大呼軍門曰: ‘公今不行, 是負劉公, 政輩亦且舍公去矣.’ 玠乃來曾三泉. 時虜游騎甚迫, 玠夜不寐, 起視公方甘寢自若, 旁無警何者. 遽起公, 請曰: ‘此何等時? 而簡易若是.’ 公慨然曰: ‘吾死命也, 亦何言?’ 玠慚嘆泣下, 竟不果留.

 

 공은 담독산(漳毒山)이 높고 험준(險峻)한데다 그 위가 관평(寬平)하고 천수(泉水)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 보루(堡壘)를 구축(構築)하고 지키면서, 군량 10여 만석도 비축했다. 또 장사(將士)의 가속(家屬)들을 모두 목책(木柵)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돌을 수십(數十) 수백(數百) 수만(數萬) 개를 쌓아, 촉(蜀)으로 가는 길에로 굴러 내릴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 수일(數日)이 지나자 과연 오랑캐들이 영루(營壘)와 수십(數十) 리(里) 사이를 두고 다가왔다. 어느 날 저녁 후기(候騎)가 오랑캐의 대군(大軍)이 장차 밀어닥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제장(諸將)이 모두 실색(失色)하고 들어가 공에게 계책을 물었다. 이에 공은 ‘처음에 여러 공들과 함께 무어라 했는가? 이제 도적이 오니 피하고 싶은가?’ 라고 말한 다음, ‘모두 욕식(蓐食)하라.’ 그리고 ‘지명(遲明)하여 출동하라’고 하명(下命)했다. 그리고 공은 먼저 전쟁(戰爭)을 치를 곳에 나와 산각(山角)에 자리를 잡고 호상(胡牀)에 앉아 있었다. 제장(諸將)이 급히 뒤따라 와서 읍소(泣訴)하며 청(請)하기를 ‘저희들이 이 곳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마땅히 공이 계실 곳이 아닙니다.’라고 했지만 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랑캐들은 공격이 불가능함을 알고 또한 군대를 이끌고 퇴각(退却)하였다.

 公以潭毒山形斗拔, 其上寬平有泉水, 乃築壘守之. 儲粟十餘萬石, 盡徒將士家屬柵中, 積石數十百萬, 下臨走蜀道. 數日, 虜果至營數十里間. 一夕候騎報虜大軍且至, 諸將皆失色. 入問計, 公曰: ‘始與公等云何? 今寇至, 欲避邪?’ 下令蓐食, 遲明上馬, 先至戰地前, 當山角․據胡牀坐. 諸將追及, 泣請曰: ‘某輩乃當致死於此, 非公所宜處也.’ 公不爲動, 虜知不可攻, 亦引退.

 

오랑캐들이 양주(梁州)과 양주(洋州)에 들어오면서부터 촉(蜀)땅은 또다시 크게 진동(震動)하였다. 선무사(宣撫司)의 관속(官屬)들은 다투어 공에게 허물을 돌렸고 더욱 뜬 말을 만들어 서로 공동(恐動)하면서 장공(張公)이 동천(潼川)으로 옮겨가 다스리게 해야 한다고 힘써 주청(奏請)하였다. 령(令)이 내리자 군사(軍士)들은 분노(憤怒)하여 방문(榜文)을 헐어버리는 자도 있었다. 공도 또한 편지를 써서 힘써 다음과 같이 장공(張公)을 위하여 말하였다. ‘이 담독산(潭毒山)의 목책(木柵)이 사수(死守)된다면 오랑캐들이 감히 우리를 넘어 남으로 침입해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가령 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면 내가 죽고 난 뒤에 시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하루아침에 이처럼 가볍게 움직이신다면, 사졸(士卒)과 장수(將帥)가 모두 분노(忿怒)할 것이니, 장차 공의 무덤까지 파헤치는 자가 생기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장공(張公)이 편지를 열어보고 크게 깨달아 그 자리에서 중지하고 시행에 옮기지 않았다. 오랑캐는 10여 명의 사람을 보내, 그들로 하여금 편지와 기(旗)를 가지고 와서 공과 오개(吳玠)를 부르게 했다. 이에 공은 그들을 참(斬)하고 한 사람을 남겨 돌려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위해 너희 도적 무리들에게 말하라. 오고 싶으면 오라.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니, 어찌 너희가 나를 부를 수 있단 말이냐?’ 이에 다시 오개(吳玠)와 도모(圖謀)하여 정예군(精銳軍)을 내어 적의 앞뒤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예정된 기한이 되기 전에 오랑캐들은 이미 숨어버렸다. 대체로 오랑캐들이 아직 밀어닥치지 않고 있을 때, 공은 이미 양주(梁州)와 양주(洋州)의 관사(官私)에서 비축한 것을 다른 곳에 옮겨 두었다. 그러기에 오랑캐가 아미 깊이 침범해 들어왔을 때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게 되었고 양식은 날이 갈수록 궤핍(匱乏)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뒤에서 괴롭히며 공격하니 사상자(死傷者)가 열에 5-6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또 공이 자기들을 장차 습격(襲擊)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 숨어버린 것이다. 공은 급히 군사들을 파견하여 그들을 추격(追擊)했고 이에 계곡(谿谷)에 떨어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스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없었던 그 나머지 무리들은 여전히 수십 개의 목책(木柵)에 갇힌 상태로 모두 항복하였다. 이 때 오랑캐의 대추장(大酋長)인 살리갈(撒離喝) 올출(兀朮)의 무리들이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새롭게 군대를 일으켜 기필코 촉(蜀)을 탈취(奪取)하여 중국의 동남(東南)을 엿볼 계책을 꾸몄다. 그들이 진공(進攻)을 위해 인력과 물자를 선발함에 있어 대체로 여력(餘力)을 남겨두지 않고 총력을 다 했기 때문에, 우리의 모신(謀臣)과 전장(戰將)들 또한 감히 기필코 지켜내겠다는 계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홀로 공과 장공(張公)만은 마음을 합하고 죽을힘을 다하여 의연(毅然)히 몸소 군사 요충지(要衝地)를 장악하여 적에 맞섰다. 이에 장군(將軍)들과 병사(兵士)들이 공을 보고 감격하여 다투어 분발하였기에 마침내 촉(蜀)의 지경(地境)을 온전히 지켜냄으로써 강(江) 상류(上流)를 적의 수중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었다. 도적들이 물러나자, 사람들은 또다시 바야흐로 서로 더불어 계책을 정하고 군정(軍政)의 기강(紀綱)을 바꾸어가며 재거(再擧)를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장공(張公)은 이미 참소(讒訴)로 인해 곤궁을 당했고 공도 또한 뒤이어 죄를 얻게 되어 백주(白州)에로 옮겨 갔다.

自虜入梁洋, 蜀中復大震. 宣撫司官屬爭咎公, 更爲浮言相恐動, 力請張公徙治潼川. 令下, 軍士憤怒, 或取其牓毁之. 公亦以書力爲張公言: ‘此已爲死守, 虜必不敢越我而南. 藉令不能守, 我死行未晩也. 今一旦輕動若此, 兵將忿怒, 恐(8-4508)將有齮齕公墳墓者, 柰何?’ 張公發書大悟, 立止不行. 虜遣十餘人持書與旗來招公及玠, 公斬之, 餘一人使還曰: ‘爲我語羣盜, 欲來卽來, 吾有死耳, 何可招也?’ 因復與玠謀, 出銳師腹背擊之. 未及期, 而虜已遁矣. 蓋方虜未至, 公已悉徙梁․洋官私之積置他所. 虜旣深入, 無所得而糧日匱, 前後苦攻, 死傷十五六, 又聞公之將襲己也, 懼, 故遁. 公亟遣兵追擊之, 墮谿谷死者不可計. 其餘衆不能自拔者猶數十柵, 皆降之. 是時, 虜大酉撒離喝兀朮輩主兵用事, 計必取蜀以窺東南. 其選募戰攻, 蓋已不遺餘力, 而我之謀臣戰將亦無敢爲必守計者. 獨公與張公協心戮力, 毅然以身當兵衝, 將士視公感激爭奮, 卒全蜀境, 以蔽上流. 寇退, 又方相與定計, 改紀軍政, 以圖再擧. 而張公已困於讒, 公亦相次得罪, 徙白州矣.

 

처음 오개(吳玠)가 비장(裨將)으로 있을 때, [장공(張公)은] 아직 그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홀로 그를 기특(奇特)하게 여겨 장공(張公)에게 말했다. 장공(張公)이 그와 더불어 대화(對話)한 후, 크게 기뻐하여 그로 하여금 제장(諸將)을 진호(盡護)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 때 상소(上疏)하여 임시로 빌린 절전(節傳)과 계극(棨戟)을 환수(還收)함으로써 공의 죄(罪)를 대속(代贖)해 달라고 주청(奏請)하였다. 사대부(士大夫)들이 이 일을 통해 오개(吳玠)의 의로움을 인정하게 되었고 또 공의 지인(知人)에 감복(感服)하였다.

始, 吳玠爲裨將, 未知名. 公獨奇之, 言於張公. 張公與語, 大悅, 使盡護諸將. 至是上疏, 請還所假節傳棨戟贖公罪. 士大夫以是多玠之義而服公之知人.

 

장공(張公)께서 재상으로 입각한 후 크게 병력을 모아 북쪽 오랑캐를 토벌할 계책을 논의했는데, 이 때 공을 불러 대궐(大闕)로 오게 하여 서쪽의 군사 정황에 관해 의사(意思)를 표명하도록 하고 또 국경의 방비(防備)의 허실(虛實)을 감찰(監察)하도록 했다. 공은 돌아와 아뢰기를, ‘아직은 오랑캐를 도모(圖謀)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훈련에 더욱 힘쓰고 널리 둔전(屯田)을 경영(經營)하면서 기회(機會)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또 바야흐로 회서(淮西)의 대장(大將)을 교체하고 그 병사들을 공에게 귀속하는 문제를 놓고 의론이 있었는데, 공은 거듭 이를 불가(不可)하다 하고 드디어 친로(親老)를 데리고 면군(丐郡)으로 돌아왔다.

旣張公入相, 大議合兵爲北討計, 召公赴闕, 使諭指西師, 且察邊備虛實. 公還, 奏虜未可圖. 宜益治兵, 廣營田以俟幾會. 時又方議易置淮西大將, 且以其兵屬公. 公復以爲不可, 遂以親老丐郡以歸.

 

천주(泉州)의 승려(僧侶)인 가도(可度)는 뇌물을 이용하여 면군(丐郡)의 귀인(貴人)들을 결속(結束)시켜 척리(戚里) 진씨(陳氏)를 무주(誣奏)해 달라고 부탁하여 진홍진(陳洪進)의 수총사(守冢寺)를 빼앗은 다음, 천주(泉州)에 증거를 보내 이 일을 봉행(奉行)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작은 일일 뿐이다. 그러나 소인(小人)이 윗사람을 이처럼 기망(欺罔)하는 것은 점차 더 큰 재앙을 불러들일 수 있는 일이니 키워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곧 그 일을 상소(上疏)하여 조정에 알리고자 했다. 속관(屬官)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감히 연서(連署)하지 못했다. 공은 이에 홀로 상주(上奏)하여 극언(極言)했다. 가도(可度) 등은 모두 지은 죄에 따른 벌을 받았다. 그 후에 또 크게 학교(學校)를 일으켜 그 곳 사람들을 교육하였다. 그 당서(堂序)의 규모(規模)는 대략 태학(太學)을 모방하였는데, 지금까지 민(閩) 지방의 여러 군(郡) 가운데서도 이것이 으뜸이다. 오래지 않아 회서군(淮西軍)이 과연 어지러워졌다. 의론(議論)하는 자들은 도리어 공이 사태가 그렇게 되도록 조성(助成)했으니, 공을 책(責)하지 않으면 반장(叛將)이 남귀(南歸)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임장(臨漳)에로의 행차(行次)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자는 모두 냉소(冷笑)했고 공은 스스로 변명(辨明)하지 않았다.

泉僧可度以賂結中貴人, 屬戚里陳氏誣奏, 奪陳洪進守冢寺, 符州奉行. 公(8-4509)曰:「此細事爾, 然小人罔上如此, 是乃履霜之漸, 不可長也.」卽疏其事以聞. 僚屬相顧, 莫敢連署, 公乃獨奏極言之, 可度等皆抵罪. 旣又大興學校, 以敎其人, 堂序規模, 略放大學, 至今爲閩中諸郡之冠. 已而淮西軍果亂, 議者反謂公實使然, 不責, 無以係叛將南歸之望. 於是有臨漳之行, 聞者嗤之而公不自辨也.

 

진강(鎭江)에서 마침 금(金)의 오랑캐들이 다시 맹약(盟約)을 배반했다. 이에 공은 청야(淸野)를 건의(建議)하여, 회동(淮東) 사람을 모두 경구(京口)로 옮기고 위엄(威嚴)과 신의(信義)로 어루만지니, 병사(兵士)와 민간인이 잡거(雜居)해도 감히 서로 침범(侵犯)하거나 어지럽히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도적이 들어 그 진상을 조사해보니 하는데 이에 초주(楚州) 수령(守令)인 아무개가 저지른 짓이었다. 또 그를 전후(前後)에서 도와 죄를 저지른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에 관련자 모두 구옥(具獄)하고 사형에 처했으며 그 아무개 또한 멀리 귀양 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경내(境內)는 첩연(帖然)하여 길에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당시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었다. 이에 추밀사(樞密使) 장준(張俊)이 강(江) 가에서 군대를 시찰(視察)하면서 공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들 오랑캐가 다른 때에는 풍우(風雨)와 같이 표연(飄然)히 침입하여 도적질해 갔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머뭇거리며 배회하고 있으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과연 그들이 또다시 강화(講和)를 요청해왔다. 사자(使者)가 도착하여 배 위에 큰 기를 세웠는데 그 기에는 ‘강남무유(江南撫諭)’라고 썼다. 공이 이를 보고 노(怒)하여 밤에 다른 기로 바꾸어 놓았다. 그 다음 날 접반사(接伴使)라는 자가 기(旗)가 달라진 것을 보고 크게 위협하면서 황급히 원래의 기를 찾았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수신(守臣)인지라, 조정의 의론(議論)에 참여한 바 없다. 그러나 내가 지키는 주(州)의 경내(境內)에서 이 기를 세우고 싶다면 나는 이 곳에서 죽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원래의 기를 찾기를 그만두지 않자 이에 사람을 보내 경외(境外)에서 그것을 넘겨주었다.

在鎭江, 會金虜復渝盟, 公建議淸野, 盡徙淮東之人於京口, 撫以威信, 兵民雜居, 無敢相侵擾者. 嘗得盜, 劾之, 乃楚州守某者所爲. 前後攻劫不可計, 悉具獄棄之市, 某者亦坐遠竄. 於是境內帖然, 道不拾遺. 旣而虜騎久不至, 樞密使張俊視師江上, 以問公. 公曰: ‘此虜異時入寇飄忽如風雨, 今更遲回, 是必有他意.’ 已而果復以和爲請. 使至, 植大旗舟上, 書曰: ‘江南撫諭.’ 公見之, 怒, 夜以他旗易之. 翌日, 接伴使者見旗有異, 大懼, 索之急. 公曰: ‘吾爲守臣, 朝論無所與. 然欲揭此於吾州之境, 則吾有死而已.’ 索猶不已, 乃遣人境外授之.

 

그 때 마침 장준(張俊)이 돌아가 이 일을 상주(上奏)하였기 때문에, 상(上)께서 공의 치상(治狀)과 공이 적의 동태를 헤아린 말[料敵語]에 관해 듣게 되었다. 이에 다시 대제(待制)하라는 명(命)이 있었다. 공은 오랑캐와 강화(講和)하는 것은 본래 구원(久遠)한 계책이 아니니 틈이 나기만 하면 마땅히 성루(城壘)를 보수(補修)하고 병기(兵器)를 다스리고 선박(船舶)을 미리 준비(準備)해서 때의 변동(變動)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상(宰相) 진회(秦檜)는 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풍언(諷言)하는 자가 공의 생각을 논란(論難)하였다. 이에 공은 파면(罷免)되어 돌아왔고 드디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훙거(薨去)하신 지 16년 만에 결국 화의(和議)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오랑캐의 기마병(騎馬兵)이 곧바로 채석(釆石)과 과주(瓜洲)에 밀어닥쳤고, 아군은 강(江)의 나루조차 거의 지켜내지 못했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공이 품었던 이전(以前)의 생각이 심오(深奧)한 데 대해 감복(感服)하였고 또한 공이 등용되지 못한 것을 한탄(恨歎)하였다.

會張俊歸奏事, 上聞公治狀及料敵語, 於是復有待制之命. 公以和戎本非久遠計, 宜及間暇時修城壘․除器械․備舟楫以俟時變. 宰相秦檜不悅, 諷言者論之. 罷歸, 遂不復起. 薨後十有六年, 和議果敗, 虜騎直抵釆石瓜洲, 江津幾不守. 於是人始服公前慮之深而恨其不及用也.

 

희(熹)의 선인(先人)이 만년(晩年)에 공을 종유(從遊)하였는데, 병이 심해지자 편지를 써서 가사(家事)를 공에게 기탁(寄託)하였다. 이에 공은 측은(惻隱)하고 가련(可憐)하여 희(熹)를 거두어 친 자식이나 친 조카와 같이 가르쳐 주셨다. 이 때문에 희(熹)는 어려서부터 공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공께서 융적(戎狄)을 다스리기 위해 개부(開府)하실 때의 일에 미칠 수는 없었으며, 오직 공께서 거가(居家) 접인(接人)하시면서 보여주신 효우(孝友)의 낙이(樂易)함과 마음을 열어 정성을 보여주심과 할연(豁然)하시어 조금도 막히거나 인색한 뜻이 없음과 어진 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심과 재물을 경시하고 베푸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目擊)할 수 있었으니, 인친(姻親) 고구(舊故) 중에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곤궁(困窮)에 빠진 자가 있으면 더욱 부지런히 도와 주셨다. 일찍이 공의 문하(門下)에 있던 선비와 한두 분 옛 장수(將帥)들께 공의 평생(平生) 대절(大節)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분들의 말씀을 통해 희(熹)는 또 공이 지니신 만신순국(忘身狥國)의 충성심과 기회(機會)를 결단(決斷)하고 적의 동태를 헤아릴 수 있는 공의 명철(明哲)하심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공은 장사(將士)의 마음을 얻으셨기에 사람들마다 즐겨 다 죽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실로 위대(偉大)하다 할 수 있으니 비록 옛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공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공께서 정치를 하실 때는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예우(禮遇)하여 독실하게 교화(敎化)를 숭상하셨고, 간악(奸惡)한 자를 결단내고 숨어있는 나쁜 일을 들추어내셨으며 강어(彊禦)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니, 이에 옛 양리(良吏 ; 선량한 관리)의 기풍이 있었다. 공께서 돌아가시고 난 연후가 되어서야 나는 공이 의주(議奏)하신 여러 글들을 얻어 읽어볼 수 있었다. 나는 이 글들을 통해 공의 통분(痛憤)이 단 하루도 원수 오랑캐에로 향해 있지 않은 날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고, 또 공이 오랑캐를 이처럼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감개(感慨)하여 책을 어루만지다가 글쓰기를 그만두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8-4510)熹之先人晩從公游, 疾病, 寓書以家事爲寄. 公惻然憐之, 收敎熹如子姪. 故熹自幼得拜公左右, 然已不及見公履戎開府時事. 獨見其居家接人孝友樂易, 開心見誠, 豁然無纖芥滯吝意. 好賢樂善, 輕財喜施, 於姻親舊故貧病困阨之際, 尤孜孜焉. 因嘗從公門下士及一二故將問公平生大節, 又知其忘身狥國之忠, 決機料敵之明, 得將士心, 人人樂爲盡死, 事皆偉然, 雖古名將不能過. 至其爲政, 則又愛民禮士, 敦尙敎化, 決姦擿伏, 不畏彊禦, 乃有古良吏風. 及公旣沒, 然後得其議奏諸書讀之, 知其痛憤無日不在於讎虜, 而其識慮之深又如此, 未嘗不慨然撫卷廢書而歎也.

 

공의 원비(元妃)는 복국부인(福國夫人) 웅씨(熊氏)인데, 공진산(拱辰山) 충현공(忠顯公)의 묘차(墓次)에 장사(葬事)했으며 병산선생(屛山先生)께서 표정(表旌)하셨다. 공의 계실(繼室)은 경국부인(慶國夫人) 탁씨(卓氏)인데 공이 돌아가시고 난 후 20여 년 동안 가업(家業)을 보지(保持)하였다. 작은 일이나 큰일을 처리해 나감에 모두 법도가 있어 안팎이 정숙(整肅)하였다. 팽성후(彭城侯)는 비록 공의 원비(元妃)인 복국부인(福國夫人) 웅씨(熊氏)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그러나 탁씨(卓氏)는 그를 잘 어루만지고 엄격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많은 덕업(德業)을 성취하였다. 족당(族黨)을 만나면 친소(親疏)를 불문하고 곡진한 은의(恩意)를 베풀었다. 형남부(荊南府)의 관청(官廳)에서 훙거(薨去)하여 구녕현(甌寧縣) 연평(演平)에 있는 언덕에 장사(葬事)했다. 공의 아들은 셋이 있다. 팽성후(彭城侯)가 장자(長子)이고, 그 다음이 상(瑺)이니 승무랑(承務郞)이다. 상(瑺)은 공의 동생 비각공(祕閣公)에게 출계(出後)했으나 일찍 죽었다. 그 다음이 평(玶)이니 종사랑(從事郞)이다. 그도 또한 공의 명(命)으로 병산선생(屛山先生)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공의 손자(孫子)로 남아(男兒) 두 사람이 있는데, 학아(學雅)는 승무랑(承務郞)이 되고, 학구(學裘)는 아직 어리다. 공의 손녀(孫女)는 두 사람인데, 장녀(長女)는 장사랑(將仕郞) 여흠(呂欽)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公元妃福國夫人熊氏, 葬拱辰山忠顯公墓次, 而屛山先生實表之. 繼室慶國夫人卓氏, 公沒, 持家二十餘年, 細大有法, 內外斬斬. 彭城侯雖熊出, 然其撫之厚而敎之嚴, 所以成就其德業爲多. 遇族黨親疏, 曲有恩意. 薨荊南府舍, 葬甌寧縣演平之原. 公子三人: 彭城侯爲長;次瑺, 承務郞, 出後公弟祕閣公, 早卒; 次玶, 從事郞, 亦以公命爲屛山先生後. 孫男二人: 學雅, 承務郞; 學裘, 尙幼. 女二人, 長適將仕郞呂欽, 次未行.

 

희(熹)는 생각건대 공의 가문(家門)은 삼세(三世)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효(忠孝)를 서로 전승(傳承)했다. 그 사업(事業)은 모두 기념(記念)할만하지만 공의 처신(處身)이 더욱 간난(艱難)하고 근고(勤苦)했으며 그 공적(功績)이 가장 현저(顯著)하여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에 힘입고 있다. 이에 그 실상(實相)을 모두 거론하여 기재(記載)하고 나서 또 눈물을 흘리며 명문(銘文)을 지어 마지막으로 팽성후(彭城侯)의 유명(遺命)을 따르고자 한다. 그 명(銘)에 가로대 :

熹惟公家三世一心, 以忠孝相傳, 事業皆可記, 而公所處尤艱且勤, 績效最(8-4511)著, 人至于今賴之. 於是旣悉論載其實, 又泣而爲之銘, 以卒承彭城侯之遺命. 其銘曰:

 

하늘이 황제의 덕(德)을 경계(警戒)하여, ‘그 평평한 것도 기우는 법이다.’라고 하시고, 또 다시 인걸(人傑)을 내리시어 그 기울어진 것을 부지(扶持)하라 하시네. 천박한 말이지만 시험 삼아 말해보리라. 공은 [충현공(忠顯公)을 도와] 월(越)에서 진(鎭)에서 그리고 마침내 서쪽 촉(蜀)에서 [나라를 수호하느라 애쓰셨으니] 또한 나라의 위험(危險)이 이에 안정(安定)되었도다. 처음 진(秦)에서는 도리어 표요(飄搖)함이 밀어닥쳤으나, 일사(一士)를 얻은 후에는 공의 도(道)가 밝아졌도다. 다시 양(梁)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죽음에 이르게 되지는 않았노라. 또 요충지(要衝地)에 장애물을 설치하시니, 그 공적이 더욱 위대(偉大)하였도다. 민(岷)과 파(嶓)가 이미 정(定)해지고 나서, 강(江)과 한(漢)은 도도(滔滔)하였도다. 네가 오로지 안일(安逸)을 위주로 한다면 나는 그 노역(勞役)을 맡으리라 하셨네. 일찍이 도모(圖謀)한 것도 아닌데 참소(讒訴)하는 입들이 오오(嗸嗸)하였도다. 이에 북(北)으로 이에 남(南)으로 옮겨 다니며 노고(勞苦)하셨는데, 포상(褒賞)해야 공의 공적을 갑자기 폄하(貶下)하는구나. 화목(和睦)하라 하시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으셨으며, 은미(隱微)한 것도 알아내시되 원대한 것을 염려(念慮)하셨도다. 이 어찌 순순(諄諄)한 것이 아니리요? 그러나 끝내 공은 당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셨도다. 이에 공께서는 숲을 나로 삼고 샘을 나로 삼으시어, 나를 흥기(興寄)하심이 천박(淺薄)하지 않으셨도다. 노년(老年)에도 장년(壯年)의 마음이었기에, 앞으로 나감은 있어도 뒤로 물러남은 없었도다. 생각건대 공의 충성심과 효심은 바로 공의 선공(先公)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리라. 힘쓸지어다. 사현(嗣賢)이여, 능(能)히 그 공(功)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 어찌 함께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마는 또한 완성(完成) 단계에서 훼상(毁傷)됨이 있도다. 시(詩)로서 내자(來者)에게 권(勸)하노니, 공의 그 아름다운 명성(名聲)을 영원히 기억하시라!

天警皇德, 曰陂其平. 復畀人傑, 俾扶厥傾. 薄言試之, 于越于鎭. 卒事于西, 亦危乃定. 始却于秦, 偪仄飄搖. 一士之得, 厥猷以昭. 再蹶于梁, 莫相予死. 亦障其衝, 校績愈偉. 岷嶓旣奠, 江漢滔滔. 爾職于佚, 我司其勞. 曾是弗圖, 讒口嗸嗸. 載北載南, 倏貶其褒. 曰和匪同, 識微慮遠. 豈不諄諄? 卒莫予展. 我林我泉, 我寄不淺. 莫年壯心, 有逝無反. 惟忠惟孝, 自我先公. 勉哉嗣賢, 克咸厥功. 豈不咸之? 又毁于成. 詩勸來者, 永其休聲!

 

 

 

붙임(附) :

우조의대부 충휘유각대제 치사팽성현 개국자식읍오백호 증소부유공신도비(右朝議大夫充徽猷閣待制致仕彭城縣開國子食邑五百戶贈少傅劉公神道碑銘)

 

휘유각대제증소부팽성류공(徽猷閣待制贈少傅彭城劉公)께서 훙거(薨去)하신 지 33년이 지났다. 그의 들인 관문전(觀文殿) 학사(學士) 팽성(彭城侯) 또한 질병으로 건강(建康)의 부사(府舍)에서 훙거(薨去)하셨다. 병(病)이 위급할 때, 손수 글을 써서 그 동생 평(玶)에게 주면서 그의 벗인 주희(朱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게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공(珙)이 불효(不孝)하여 선공(先公) 소부(少傳)의 묘목(墓木)이 크게 한 아름이나 되도록 아직도 비(碑)를 건립(建立)하지 못했는데, 이는 대개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지금 국가(國家)의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한 상태로, 공(珙)은 한(恨)을 머금고 죽게 되었다. 결국 이 일로 그대에게 누(累)를 끼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에 희(熹)는 편지를 열어보고 통곡(慟哭)하며 말하기를 : ‘오호(嗚呼)라! 공보(共父)께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셨는가? 나는 일찍이 아비를 잃었는데, 소부공(少傳公)께서 기실(其實) 나를 거두어 가르쳐 주셨다. 공보(共父)의 책임은 곧 나의 책임이다’라고 하고 곧 그 집을 방문하여 공의 아우 병산선생(屛山先生)께서 정리해 놓으신 행장(行狀)을 얻고 또 지금 강릉(江陵)의 장후(張侯) 식(栻)이 쓴 명(銘)을 얻어 그 사적(事蹟)을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가로대 :

徽猷閣待制贈少傅彭城劉公旣薨三十有三年, 其子觀文殿學士彭城侯亦以疾薨于建康府舍. 疾革時, 手爲書, 授其弟玶, 使以屬其友朱熹, 若曰: ‘珙不孝, 先公之基木大拱, 而碑未克立, 蓋猶有待也. 今家國之讎未報, 而珙銜恨死矣. 以是累子, 何如?’ 熹發書慟哭曰: ‘鳴呼! 共父遽至此耶? 且吾蚤失吾父, 少傅公實收敎之. 共父之責, 乃吾責也.’ 卽訪其家, 得公弟屛山先生所次行狀, 又得今江陵張侯栻所爲志銘, 以次其事曰:

 

공의 휘(諱)는 자우(子羽)이고 자(字)는 언수(彦修)이다. 선대(先代)에 장안(長安)으로부터 건주(建州)에 이사해 왔는데, 지금은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 사람이다. 공의 증대부(曾大父 즉 曾祖父)는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추증(追贈)되신 태소(太素)이시고, 공의 대부(大父)는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추증(追贈)되신 민선(民先)이시니 모두 유학(儒學)으로 향리(鄕里)에서 교수(敎授)하셨다. 그리고 공의 황고(皇考)로서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이자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신 충현공(忠顯公)은 드디어 충효(忠孝)의 대절(大節)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하셨으니, 그 사적(事蹟)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公諱子羽, 字彦脩, 其先自長安徙建州, 今爲崇安縣五夫里人. 曾大父贈朝議大夫太素, 大父太子太保民先皆以儒學敎授鄕里, 而皇考資政殿大學士贈太師忠顯公遂以忠孝大節殺身成仁, 事載國史.

 

소부공(少傳公)은 충현공(忠顯公)의 사자(嗣子)이다. 젊어서 부임(父任)으로 장사랑(將仕郞)에 임명되었고, 노력(勞力)을 쌓아 선교랑(宣敎郞)으로 전임(轉任)되었으며, 절동안무사서사기의문자(浙東安撫司書寫機宜文字)를 권섭(權攝)하였다. 그 후 조정에 들어가 태복(太僕)과 태부부(太府簿)를 지냈으며, 위위승(衛尉丞)으로 옮겼다. 벽소(辟召)되어 하북(河北)과 하동(河東)의 선무사서사기의문자(宣撫司書寫機宜文字)를 지냈고, 공(功)이 있다 하여 조청대부(朝請大夫)로 전임(轉任)되었으며 직비각(直祕閣)에 제수(除授)되었다. 건염(建炎) 3년에 비각수찬(祕閣修撰)과 지주(池州) 지사(知事)에 발탁되었고, 집영전수찬(集英殿修撰)과 태주(秦州)지사로 바뀌었다. 이직 행(行)하기 전에, 어영사사참찬군사(御營使司參贊軍事)에 제수(除授)되었고, 벽소(辟召)되어 천섬선무처치사사참의군사(川陝宣撫處置使司參議軍事)가 되었다. 건염(建炎) 4년에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에 제수(除授)되었다. 소흥(紹興) 2년에 이주로경략사(利州路經略使) 겸 흥원부(興元府) 지사(知事)를 영수(領受)하였고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제수(除授)되었으며, 팽성현(彭城縣) 개국남(開國男)에 봉(封)해져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下賜)받았다. 소흥(紹興) 4년에 단주단련부사(單州團練副使)에 책수(責授)되면서 백주(白州)에 안치(安置)되었다. 소흥(紹興) 5년에, 옛 관직으로 돌아와 제거강주태평관(提擧江州太平觀)이 되었다. 다시 집영전수찬(集英殿修撰)과 악주(鄂州) 지사(知事)가 되었으며 도독부참의군사(都督府參議軍事)를 권섭(權攝)하면서 천(川)과 섬(陝)을 선유(宣諭 ; 曉諭)하였다. 해를 넘기고 환보(還報)하였으며 다시 대제(待制)하다가 천주(泉州) 지사(知事)가 되었다. 소흥(紹興) 8년에 낙직(落職)되어, 제거태평관(提擧太平觀)으로 있다가, 이윽고 단주단련부사(單州團練副使)에 책수(責授)되었다가 장주(漳州)에 안치(安置)되었다. 소흥(紹興) 11년에 다시 옛 관직을 회복하여, 연강안무사(沿江安撫使) 및 진강부(鎭江府) 지사(知事)에 기용(起用)되었다. 소흥(紹興) 12년에 다시 대제(待制)하다가 자작(子爵)으로 승진(陞進)되어 200호(戶)가 더 봉(封)해졌다. 이 해가 끝나자, 다시 제거태평관(提擧太平觀)이 되었고 5년 후에 훙거(薨去)하였다.

(8-4513)公其嗣子也, 少以父任補將仕郞, 積勞轉宣敎郞, 權浙東安撫司書寫機宜文字. 入主太僕․太府簿, 遷衛尉丞, 辟河北河東宣撫司書寫機宜文字, 以功轉朝請大夫, 授直祕閣. 建炎三年, 擢祕閣修撰, 知池州, 改集英殿修撰, 知秦州. 未行, 除御營使司參贊軍事, 辟川陜宣撫處置使司參議軍事. 四年, 除徽猷閣待制. 紹興二年, 領利州路經略使, 兼知興元府. 除寶文閣直學士, 封彭城縣開國男, 食邑三百戶. 四年, 責授單州團練副使, 白州安置. 五年復宮, 提擧江州太平觀, 復爲集英殿修撰, 知鄂州. 權都督府參議軍事, 宣諭川陜. 踰年還報, 復待制, 知泉州. 八年落職, 提擧太平觀, 尋責授單州團練副使, 漳州安置. 十一年復官, 起爲沼江安撫使․知鎭江府. 十二年, 復待制, 進爵子, 益封二百戶. 是歲罷, 復提擧太平觀, 五年而薨.

 

공의 천자(天姿)는 영의(英毅)하여 어릴 적부터 탁월(卓越)하고 출중(出衆)하였다. 나이 24-5세 때에 충현공(忠顯公)을 보좌(保佐)하여 월(越)을 지킬 때 이졸(羸卒) 수백 명으로 목(睦)의 도적(盜賊) 방납(方臘)의 군사 수십만 명을 깨트리고 끝내 그 성(城)을 보전(保全)하였다. 또 충현공(忠顯公)을 보좌(保佐)하여 진정(眞定)을 지킬 때, 마침 여진(女眞)이 들어와 도적질을 하면서 대병(大兵)으로 그 성(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이에 공은 방략(方略)을 세워 성가퀴에 올라가 수개월 동안을 저항하며 성을 지켰다. 이에 오랑캐들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퇴각(退却)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충현공(忠顯公)은 순절(殉節)하였다. 공은 충현공(忠顯公)의 영구(靈柩)를 호송(護送)하고 돌아와 장례(葬禮)를 행하였으며,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고 피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원수들로부터 당한 이 수치(羞恥)를 갚아 주리라 스스로 맹서(盟誓)하였다. 상기(喪期)가 끝난 후 조정에 나아가 글을 올려 재상(宰相)을 비판하면서 천하의 병세(兵勢)는 마땅히 진(秦)과 롱(隴)을 근본(根本)으로 해야 한다고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진주(秦州)에 나아가라는 명(命)이 있어 드디어 참어영사군사(參御營使軍事)가 되었다.

公天姿英毅, 自少卓犖不羣. 年二十四五時, 佐忠顯公守越, 以羸卒數百破睦寇方臘數十萬衆, 卒全其城. 復佐忠顯公守眞定, 會女眞入寇, 以大兵圍其城. 公設方略, 登陴拒守數月, 虜不能下而去. 忠顯公旣以節死, 公扶喪歸葬, 號天泣血, 以必報讎耻自誓. 免喪造朝, 以書抵宰相, 論天下兵勢當以秦隴爲根本, 於是有秦州之命, 遂參御營使司軍事.

 

당시 반장(叛將) 범경(范瓊)이 강병(彊兵)을 손에 쥐고 상류(上流)에 근거지를 확보한 채 불러도 오지 않고 와서도 기꺼이 석병(釋兵)하려 하지 않자 중외(中外)가 흉흉(洶洶)하였다. 이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장충현공(張忠獻公)이 공과 함께 밀모(密謀)하여 그를 주살(誅殺)하였다. 어느 날, 이 일을 위해 [조정에서는] 장준(張俊)을 보내 1,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그 도적을 체포케 하기 위해 모두 갑옷으로 무장하고 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범경(范瓊)과 장준(張俊) 및 유광세(劉光世)를 불러 도당(都堂)에 나아가 일을 의논하게 하고, 그들을 위해 음식(飮食)을 진설(陳設)하였다. 다 먹고 난 다음, 제공(諸公)이 서로 돌아보며 아직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데, 공이 처마 밑에 앉아 있다가 범경(范瓊)이 사변(事變)을 눈치 채게 될 것을 걱정하여 갑자기 조서(詔書)가 기재되어 있는 황지(黃紙)를 취(取)하여 손에 쥐고 빠른 걸음으로 그의 앞에 가서 황지(黃紙)를 들고 범경(范瓊)에게 손짓하여 부르면서 말하기를 : ‘아래에 조칙(詔勅)이 있으니, 장군(將軍)께서는 대리(大理)에 나아가셔서 치대(置對)하심이 옳을 것이요’라고 했다. 이에 범경(范瓊)은 놀라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공이 좌우를 둘러보며 범경(范瓊)을 겨드랑이에 끼고 수레 가운데 태우게 한 다음, 장준(張俊)의 병사로 하여금 호위(護衛)하여 감옥(監獄)으로 보내게 했다. 한편 유광세(劉光世)로 하여금 나가서 그 무리들을 진무(鎭撫)케 하였는데, 여러 차례 범경(范瓊)이 적군에게 포위된 성(城) 안에서 적로(賊虜)를 가까이 하면서 이성(二聖)을 협박(脅迫)하여 수장(狩狀)을 내보내도록 하였기에, 또 공이 말하기를 : ‘주륙(誅戮)할 자는 오직 범경(范瓊)에 그칠 뿐이니 너희들은 본래 천자(天子)께서 몸소 거느리시는 병사들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좋소’라고 하면서 허락하였고, 모두들 다른 군대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되어 빠른 시간 안에 안정(安定)을 되찾게 되었다. 범경(范瓊)은 마침내 사형(死刑)에 처해졌다.

時叛將范瓊擁强兵, 據上流, 召之不來, 來又不肯釋兵, 中外洶洶. 知樞密院事張忠獻公與公密謀誅之. 一日, 爲遣張俊以千人渡江捕它盜者, 使皆甲而來, 因召瓊․俊及劉光世詣都堂計事, 爲設飮食. 食已, 諸公相顧未發, 公坐廡下, 恐瓊覺事變, 遽取寫敕黃紙, 趍(8-4514)前以麾瓊曰: ‘下有敕, 將軍可詣大理置對.’ 瓊愕不知所爲, 公顧左右擁置輿中, 衛以後兵送獄. 使光世出撫其衆, 數瓊在圍城中附賊虜迫脅二聖出狩狀, 且曰: ‘所誅止瓊耳, 若等固天子自將之兵也.’ 衆皆投刃曰諾, 因悉麾隸它軍, 頃刻而定, 瓊竟伏誅.

 

장공(張公 ; 張俊)은 이 일로 인해 공을 더욱 기특(奇特)하게 여겨 공을 천(川)과 섬(陝)으로 가는 사자(死者)를 삼고자 했는데, 드디어 벽소(辟召)되어 함께 가게 되었다. 진주(秦州)에 이르러 막부(幕府)를 세우고, 오로(五路)의 절도사(節度) 제장(諸將)들에게 5년 간 법도를 익힌 이후에 출사(出師)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명년(明年)이 되자, 오랑캐들이 강(江)과 회(淮)를 엿보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장공(張公)은 금위군(禁衛軍)이 수가 적고 힘이 약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적의 병세(兵勢)를 분요(分撓)시킬 수 있는 계책(計策)을 강구하던 중, 드디어 오로(五路)의 군대를 병합(竝合)하여 진격(進擊)하기로 하였다. 이에 공은 본계(本計)가 아니라 하여 쟁론(爭論)하였다. 이에 장공(張公)이 말하기를 : ‘내가 어찌 이 점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동남(東南)의 일이 바야흐로 급박하게 된 점을 고려한다면 부득불(不得不)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드디어 북으로 나아갔다. 부평(富平)에 이르러 오랑캐와 조우(遭遇)하게 되었는데 전세(戰勢)는 불리(不利)했고, 오랑캐는 승세(勝勢)를 타고 전진(前進)해왔다. 선무사(宣撫司)는 퇴각(退却)하여 흥주(興州)를 지켰다. 이에 인정(人情)이 크게 진동(震動)했다. 관속(官屬) 가운데 기주(夔州)를 따라 다스리자는 대책(對策)을 건의(建議)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공은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 ‘유자(孺子)는 참수(斬首)당할 만하다! 사천(四川)이 전성(全盛)하기 때문에 오랑캐들이 들어가 도적질하고 싶어 한 지 오래되었다. 다만 천(川)의 입구에는 험준한 철산(鐵山)의 잔도(棧道)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감히 쉽사리 엿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를 견고히 지키지 않아 그들이 멋대로 깊숙이 침입하게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이에 동쪽으로 내달려 후미진 기협(夔峽)에 내몰리게 되어 결국 관중(關中)의 혈맥(血脈)과 더 이상 서로 소통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나아가려 하던지 물러가려 하던지 모두 계책(計策)을 세울 수 없게 된다. 후회(後悔)가 장차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 이제 금일(今日)의 계책을 위해서는 우선 군대를 흥주(興州)에 주둔(駐屯)시켜서 밖으로는 관중(關中)을 노리는 오랑캐들의 소망(所望)을 격퇴(擊退)하고, 안으로는 촉(蜀)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 우리 조정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니 급히 관속(官屬)을 관(關) 밖으로 내보내어 제장(諸將)을 불러들이고 산망(散亡)된 병졸들을 거두어들여서 군대를 험애(險隘)한 곳에 적절히 배치하여 성벽(城壁)과 보루(堡壘)를 견고(堅固)히 하여 적의 틈을 엿보아 아군을 움직인다면, 거의 이전의 허물을 보상(補償)하고 이후에 닥칠 잘못을 대속(代贖)할 수도 있으련만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장공(張公)은 공의 말을 옳다고 여겼고, 따라서 여러 참모(參謀)와 보좌(補佐)들이 감히 그 관속(官屬)의 대책을 시행하지 못하였다.

張公由此益奇公, 及使川陜, 遂辟以行. 至秦州, 立幕府, 節度五路諸將, 規以五年而後出師. 明年, 虜窺江淮急, 張公念禁衛寡弱, 計所以分撓其兵勢者, 遂合五路之兵以進. 公以非本訐爭之, 張公曰: ‘吾寧不知此? 願今東南之事方急, 不得不爲是耳.’ 遂北, 至富平, 與虜遇, 戰果不利. 虜乘勝而前. 宜撫司退保興州, 人情大震. 官屬有建策徙治夔州者, 公叱之曰: ‘孺子可斬也! 四川全盛, 虜欲人寇久矣. 直以川口有鐵山棧道之險, 未敢遽窺耳. 今不堅守, 縱使深入, 吾乃東走, 僻處夔峽, 遂與關中血脈不復相通, 進退失計, 悔將何及? 爲今日計, 且當留駐興州, 外繫關中之望, 內安全蜀之心, 急遣官屬出關, 呼召諸將, 收集散亡, 分布險隘, 堅壁固壘, 觀釁而動, 庶幾猶或可以補前愆․贖後咎, 柰何乃爲此言乎?’ 張公然公言, 而諸參佐無敢行者.

 

공은 곧 자청(自請)하여 명(命)을 받들고 북(北)으로 출정(出征)하였으며, 또다시 단기(單騎)로 진주(秦州)에 이르러 복심(腹心)을 나누어 파견(派遣)하여 도망간 여러 장수들[亡將]을 불렀다. 제장(諸將)은 공의 이 명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모두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회합(會合)했다. 공은 기장(騎將) 오개(吳玠)에게 명하여 화상원(和尙原)에 목책(木柵)을 만들어 대산관(大散關)을 수비(守備)하게 하고, 병사를 나누어 여러 험한 요새(要塞)를 빠짐없이 지키도록 하였다. 오랑캐의 첩자(諜者)가 와서 아군(我軍)이 대비(對備)가 잘 되었음을 확인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명년(明年)에 오랑캐가 또 다시 군대를 모아 재차 공격해 왔지만 오개(吳玠)가 이를 패퇴(敗退)시켰다. 이 때 잡은 포로가 1만을 헤아렸다. 촉(蜀)땅이 이를 계기로 하여 평안(平安)하게 되었다. 선무사(宣撫司)는 군대(軍隊)를 낭주(閬州)로 이동시켰다. 이에 공은 청(請)하여, 홀로 관(關) 밖에 머물면서 제장(諸將)을 조호(調護)하여 내외(內外)의 성원(聲援)을 소통(疏通)시켰다. 그 결과 군민(軍民)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되어 공을 향하게 되었다.

公卽自請奉命北出, 復以單騎至秦州, 分遣腹心, 召諸亡將. 諸將聞命大喜, 悉以其衆來會. 公命騎將吳玠柵和尙原, 守大散關, 而分兵悉守諸險塞. 虜諜知我有備, 引去. 明年, 復聚兵來攻, 再爲玠所敗, 俘獲萬計, 蜀土以安. 宣撫司移軍閬州, 公請獨留關外, 調護諸將, 以通內外聲援, 軍民之心翕然向之.

 

또 명년(明年)에 한중(漢中)에 큰 기근(饑饉)이 닥쳤다. 여러 장수들이 폐경자수(閉境自守)하니, 이로 인해 위언(違言)이 있어 모두 공이 흥원(興元)의 장수가 되어 연병(連兵)하기를 원했다. 장공(張公)은 승제(承制)하여 그 청을 허락하였다. 공은 진(鎭)에 이르러 관문(關門)을 열고 상인(商人)을 소통시키며 곡식을 옮길 수 있도록 했다. 인근(鄰近)의 원병(援兵)들과 화목(和睦)하게 지내면서 군대(軍隊)를 정돈(整頓)하고 병졸(兵卒)을 훈련(訓練)했으며 험지(險地)에 목책(木柵)을 만들어 적(敵)의 침입에 대비했다. 마침 오랑캐가 들어와 도적질을 하면서 장차 금주(金州)와 상주(商州)를 거처 사천(四川)을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공은 편지를 써서 금주(金州) 경략사(經略使)인 왕언(王彦)으로 하여금 험지(險地)에 강(强)한 쇠뇌를 매복시켜 놓고 적을 요격(邀擊)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왕언(王彦)은 단병(短兵)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작은 도적들을 여러 번 평정(平定)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의 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오랑캐가 그 곳에 밀어닥치자 적을 맞아 싸우다 과연 패주(敗走)하여 석천(石泉)을 지키고 있었다. 그 당시 오개(吳玠)는 진(秦)과 봉(鳳)의 경략사(經略使)가 되어 있었다. 공은 왕언(王彦)이 수비(守備)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대를 이동시켜 요풍령(饒風嶺)을 지키면서 급히 오개(吳玠)에게 전갈을 보냈다. 이에 오개(吳玠)는 크게 놀라 지경(地境)을 넘어 동(東)쪽으로 이동하였는데, 하루 밤에 300 리(里)를 달렸다. 중도(中道)에 조금 그치자, 공에게 서현(西縣)에서 일을 계획(計劃)하자고 청했다. 이에 공은 다음과 같이 알렸다 : ‘오랑캐가 조만간에 요풍(饒風) 아래 당도할 것인데, 급히 이 곳을 지키지 않으면 촉(蜀) 땅은 적에게 넘어가게 된다. 공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가야 한다. 이제 또 [내가] 서쪽으로 이동는 것을 보고 알지 못하는 자는 내가 적이 두려워서 도망한다고 말할 뿐이니, 제장(諸將)들이 해체(解體)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오개(吳玠)는 편지를 받고 곧바로 다시 요풍(饒風)으로 달려가 영채(營寨)를 벌이고 적을 막아 지켰다. 오랑캐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공격해왔고 이에 사상자(死傷者)가 쌓일 정도로 많았다. 이에 다시 사사(死士)를 모집하여 간도(間道)를 따라 조계관(祖溪關)에 침범해 들어가 오개(吳玠)의 후방(後方)을 에워싸며 나갔다. 오개(吳玠)는 급히 말을 달려 한중(漢中)으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와서 공을 맞이하여 공과 함께 가고자 하였다. 이에 공은 불가(不可)하다 하면서 오개(吳玠)를 그 곳에 머물게 하여 함께 목책(木柵)을 마련하여 정군산(定軍山)을 지키고자 하였다. 오개(吳玠)가 또한 쫓지 않았기에 공은 부득이 물러나 삼천(三泉)을 지켰는데 따르는 병사가 300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에 공은 사졸(士卒)과 조려(粗糲)를 함께했으며 심지어 초아(草牙)와 목갑(木甲)을 취해서 먹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오개(吳玠)에게 편지를 보내 영결(永訣)을 고했다. 오개(吳玠)는 편지를 받아 쥐고 눈물을 흘리며 공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이를 아직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의 애장(愛將)인 양정(楊政)이라는 장수가 군문(軍門)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 ‘공이 지금 가지 않으신다면 이는 유공(劉公)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정(政)의 무리도 또한 공을 버리고 떠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오개(吳玠)는 삼천(三泉)으로 와서 회합(會合)했다. 당시 오랑캐의 유기(游騎)가 매우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이 때문에 오개(吳玠)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어나 공을 보니 공은 태연자약(泰然自若)한 모습으로 달게 잠을 자고 있었고, 곁에는 경계(警戒)하며 검문하는 자도 없었다. 이에 급히 공을 깨워 공손히 말하기를, ‘지금이 어떤 시절입니까? 이처럼 간이(簡易)하게 하시다니요’라고 했다. 이에 공이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나는 죽고자 각오했소. 그러니 또한 무슨 말을 하겠소?’라고 하자, 오개(吳玠)는 탄식(嘆息)하며 눈물을 흘렸고 마침내 끝까지 만류(挽留)하지 못했다.

(8-4515)又明年, 漢中大饑, 諸帥閉境自守, 因有違言, 皆願得公帥興元, 與連兵. 張公承制, 可其請. 公至鎭, 開關通商輸粟, 輯睦鄰援, 飭兵練卒, 柵險待敵. 會虜復入寇, 將道金商以鄕四川. 公以書諭金州經略使王彦, 使以强弩據險邀之. 彦習用短兵, 婁平小盜, 不以公言爲意. 虜猝至, 逆戰, 果敗走, 保石泉. 時吳玠爲奏鳳經略使, 公聞彦失守, 亟移兵守饒風嶺, 馳以語玠. 玠大驚, 卽越境而東, 一日夜馳三百里. 中道少止, 請公會西縣計事. 公報曰: ‘虜旦夕至饒風下, 不亟守此, 是無蜀也. 公不前, 吾當往. 今顧西走, 不知者謂吾懼而逸, 諸將得無解體乎?’ 玠得書, 卽復馳至饒風, 列營拒守. 虜人悉力仰攻, 死傷如積. 更募死士由間道犯祖溪關以入, 繞出玠後. 遽走還漢中, 且來邀公, 欲與俱去. 公不可, 復留玠共柵定軍山以守. 玠亦不從, 公不得已退守三泉, 從兵不及三百人. 與同粗糲, 至取草牙木申噉之. 遺玠書與訣, 玠持之泣下, 欲馳赴公. 未果, 其愛將楊政者大呼軍門曰: ‘公今不行, 是負劉公, 政輩亦且舍公去矣.’ 玠乃來會三泉. 時虜游騎甚迫, 玠夜不能寐, 起視公方甘寢自若, 旁無警何者. 遽起公, 請曰: ‘此何等時? 而簡易若是.’ 公慨然曰: ‘吾死命也, 亦何言?’ 玠嘆息泣下, 竟不果留.

 

 공은 담독산(漳毒山)이 높고 험준(險峻)한데다 그 위가 관평(寬平)하고 천수(泉水)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 보루(堡壘)를 구축(構築)하고 지키면서, 군량 10여 만석도 비축했다. 또 장사(將士)의 가속(家屬)들을 모두 목책(木柵)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돌을 수십(數十) 수백(數百) 수만(數萬) 개를 쌓아, 촉(蜀)으로 가는 길에로 굴러 내릴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 수일(數日)이 지나자 과연 오랑캐들이 영루(營壘)와 수십(數十) 리(里) 사이를 두고 다가왔다. 어느 날 저녁 후기(候騎)가 오랑캐의 장차 밀어닥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제장(諸將)이 모두 실색(失色)하고 들어가 공에게 계책을 물었다. 이에 공은 ‘처음에 여러 공들과 함께 무어라 했는가? 이제 도적이 오니 피하고 싶은가?’ 라고 말한 다음, ‘모두 욕식(蓐食)하라.’ 그리고 ‘지명(遲明)하여 출동하라’고 하명(下命)했다. 그리고 공은 먼저 전쟁(戰爭)을 치를 곳에 나와 산각(山角)에 자리를 잡고 호상(胡床)에 앉아 있었다. 제장(諸將)이 급히 뒤따라 와서 읍소(泣訴)하며 청(請)하기를 ‘저희들이 이 곳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마땅히 공이 계실 곳이 아닙니다.’라고 했지만 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랑캐들은 공격이 불가능함을 알고 또한 군대를 이끌고 퇴각(退却)하였다.

公以潭毒山形斗拔, 其上寬平有泉水, 乃築壘守之. 儲粟十餘萬石, 盡從將士家屬柵中, 積石數十百萬, 下臨走蜀道. 數日, 虜果至營數十里間. 一夕侯騎報虜且至, 諸將皆失色. 入問計, 曰: ‘始與公等云何? 今寇至, 欲避邪?’ 下令蓐食, 遲明上馬. 明日, 公先(8-4516)至戰地前, 當山角․據胡床坐. 諸將追及, 泣請曰: ‘某輩乃當致死於此, 非公所宜處也.’ 公不爲動, 虜亦引退.

 

오랑캐들이 양주(梁州)과 양주(洋州)에 들어오면서부터 촉(蜀)땅은 또다시 크게 진동(震動)하였다. 선무사(宣撫司)의 관속(官屬)들은 다투어 공에게 허물을 돌렸고 더욱 뜬 말을 만들어 서로 공동(恐動)하면서 장공(張公)이 동천(潼川)으로 옮겨가 다스리게 해야 한다고 힘써 주청(奏請)하였다. 령(令)이 내리자 군사(軍士)들은 분노(憤怒)하여 방문(榜文)을 헐어버리는 자도 있었다. 공도 또한 편지를 써서 힘써 다음과 같이 장공(張公)을 위하여 말하였다. ‘이 담독산(潭毒山)의 목책(木柵)이 사수(死守)된다면 오랑캐들이 감히 우리를 넘어 남으로 침입해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가령 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면 내가 죽고 난 뒤에 시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하루아침에 이처럼 가볍게 움직이신다면, 사졸(士卒)과 장수(將帥)가 모두 분노(忿怒)할 것이니, 장차 공의 무덤까지 파헤치는 자가 생기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공은 이를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에 장공(張公)이 편지를 열어보고 크게 깨달아 그 자리에서 중지하고 시행에 옮기지 않았다. 오랑캐는 10여 명의 사람을 보내, 그들로 하여금 편지와 기(旗)를 가지고 와서 공과 오개(吳玠)를 부르게 했다. 이에 공은 그들을 참(斬)하고 한 사람을 남겨 돌려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위해 너희 도적 무리들에게 말하라. 오고 싶으면 오라.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니, 어찌 너희가 나를 부를 수 있단 말이냐?’ 이에 다시 오개(吳玠)와 도모(圖謀)하여 정예군(精銳軍)을 내어 적의 앞뒤를 공격하려 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공은 이미 양주(梁州)와 양주(洋州)의 관사(官私)에서 비축한 것을 미리 다른 곳에 옮겨 두었다. 그러기에 오랑캐가 아미 깊이 침범해 들어왔을 때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게 되었고 양식은 날이 갈수록 궤핍(匱乏)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뒤에서 괴롭히며 공격하니 사상자(死傷者)가 열에 5-6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또 공이 자기들을 장차 습격(襲擊)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 끝내 숨어버린 것이다. 공은 급히 군사들을 파견하여 그들을 추격(追擊)했고 이에 계곡(谿谷)에 떨어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스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없었던 그 나머지 무리들은 여전히 수십 개의 목책(木柵)에 갇힌 상태로 모두 항복하였다. 이 때 오랑캐의 대추장(大酋長)인 살리갈(撒離喝) 올출(兀朮)의 무리들이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새롭게 군대를 일으켜 기필코 촉(蜀)을 탈취(奪取)하여 중국의 동남(東南)을 엿볼 계책을 꾸몄다. 그들이 진공(進攻)을 위해 인력과 물자를 선발함에 있어 대체로 여력(餘力)을 남겨두지 않고 총력을 다 했기 때문에, 우리의 모신(謀臣)과 전장(戰將)들 또한 감히 기필코 지켜내겠다는 계책을 내는 자가 없었다. 이에 홀로 공과 장공(張公)만은 마음을 합하고 죽을힘을 다하여 의연(毅然)히 몸소 군사 요충지(要衝地)를 장악하여 적에 맞섰다. 이에 장군(將軍)들과 병사(兵士)들이 공을 보고 감격하여 다투어 분발하였기에 마침내 촉(蜀)의 지경(地境)을 온전히 지켜냄으로써 강(江) 상류(上流)를 적의 수중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었다. 도적들이 물러나자, 사람들은 또다시 바야흐로 서로 더불어 계책을 정하고 군정(軍政)의 기강(紀綱)을 바꾸어가며 재거(再擧)를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장공(張公)은 이미 참소(讒訴)로 인해 곤궁을 당했고 공도 또한 뒤이어 죄를 얻게 되어 백주(白州)에로 옮겨 갔다.

自虜入梁洋, 蜀中復大震. 宣撫司官屬爭咎公, 更爲浮言相恐動, 力請張公徙治潼川. 令下, 軍士憤怒, 或取其牓毁之. 公連以書力爲張公言: ‘此已爲死守, 虜必不敢越我而南. 籍弟令不能守, 我死行未晩也. 今一旦輕動若此, 兵將忿怒, 恐將有齮齕公墳墓者, 公奈何?’ 張公發書大悟, 立止不行. 虜遣十餘人持書與旗來招公及玠, 公斬之, 餘一人使還曰: ‘爲我語賊, 欲來卽來, 吾有死耳, 何可招也?’ 因復與玠謀, 出銳師腹背擊之. 先是, 公已預徙梁洋官私之積置他所. 虜深入無所得而糧日匱, 前後苦攻, 死傷十五六, 又聞公之將襲己也, 懼, 遂遁. 公亟遣兵追擊之, 墮谿谷死者不可計. 其餘衆不能自拔者猶數十柵, 皆降之. 是時虜大酋撒離喝兀朮輩主兵用事, 計必取蜀以窺東南. 其選募戰攻, 蓋已不遺餘力, 而我之謀臣戰將亦無敢爲必守計者. 獨公與張公協心戮力, 毅然以身當兵衝, 將士視公感激爭奮, 卒全蜀境, 以蔽上流. 寇退, 又方與定訃, 改紀軍政, 以圖再擧. 而張公已困於讒, 公亦相次得罪徙白州矣.

 

처음 오개(吳玠)가 비장(裨將)으로 있을 때, [장공(張公)은] 아직 그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홀로 그를 기특(奇特)하게 여겨 장공(張公)에게 말했다. 장공(張公)이 그와 더불어 대화(對話)한 후, 크게 기뻐하여 그로 하여금 제장(諸將)을 진호(盡護)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 때 상소(上疏)하여 임시로 빌린 절전(節傳)과 계극(棨戟)을 환수(還收)함으로써 공의 죄(罪)를 대속(代贖)해 달라고 주청(奏請)하였다. 사대부(士大夫)들이 이 일을 통해 오개(吳玠)의 의로움을 인정하게 되었고 또 공의 지인(知人)에 감복(感服)하였다.

始, 吳玠爲裨將, 未知名. 公獨奇之, 言於張公. 張公與語, 大悅, 使盡護諸將. 至是, 玠上疏, 請還所假節傳棨戟贖公罪. 士大夫以是多玠之義而服公之知人.

 

장공(張公)께서 재상으로 입각한 후 병력을 모아 북쪽 오랑캐를 토벌할 계책을 크게 논의했는데, 이 때 공을 불러 대궐(大闕)로 오게 하여 서쪽의 군사 정황에 관해 의사(意思)를 표명하도록 하고 또 국경의 방비(防備)의 허실(虛實)을 감찰(監察)하도록 했다. 공은 돌아와 아뢰기를, ‘아직은 오랑캐를 도모(圖謀)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훈련에 더욱 힘쓰고 널리 둔전(屯田)을 경영(經營)하면서 기회(機會)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또 바야흐로 회서(淮西)의 대장(大將)을 교체하고 그 병사들을 공에게 귀속하는 문제를 놓고 의론이 있었는데, 공은 거듭 이를 불가(不可)하다 여기고 드디어 친로(親老)를 데리고 군(郡)을 편안히 다스리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천주(泉州)에 돌아올 수 있었다.

旣張公入相, 大議合兵爲北討計, 召公赴闕, 使諭指西師, 且察邊備虛實. 公還, 奏虜(8-4517)未可圖, 宜益治兵, 廣營田以俟幾會. 時又方議易置淮西大將, 且以其兵屬公. 公復以爲不可, 遂以親老丐便郡, 得泉州以歸.

 

군(郡)에서 해를 넘기며 다스림에 뛰어난 공효(功效)가 있었다. 학교가 오랜 동안 폐교(廢校)되었었기 때문에 철거하고 이를 새롭게 단장했다. 그 당서(堂序)의 규모(規模)는 대략 태학(太學)을 모방하였는데, 지금까지 민(閩) 지방의 여러 군(郡) 가운데서도 이것이 으뜸이다. 승려(僧侶)인 가도(可度)는 뇌물을 이용하여 귀인(貴人)들을 결속(結束)시켜 척리(戚里) 진씨(陳氏)를 무주(誣奏)해 달라고 부탁하여 진홍진(陳洪進)의 수총사(守冢寺)를 탈취(奪取)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작은 일일 뿐이다. 그러나 소인(小人)이 윗사람을 이처럼 기망(欺罔)하는 것은 점차 더 큰 재앙을 불러들일 수 있는 일이니 키워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곧 그 일을 상소(上疏)하여 조정에 알렸다. 척수(戚竪)의 무리들이 모두 지은 죄에 따른 벌을 받았다. 얼마 되지 않아 회서군(淮西軍)이 과연 어지러워졌다. 장공(張公)이 재상의 자리를 떠났다. 의론(議論)하는 자들은 도리어 공이 사태가 그렇게 되도록 조성(助成)했으니, 공을 책(責)하지 않으면 반장(叛將)이 남귀(南歸)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이에 거듭 장공(張公)을 질책(叱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자는 모두 냉소(冷笑)했고 공은 스스로 변명(辨明)하지 않았다.

在郡踰年, 治有異等之效. 學校久廢, 撤而新之, 堂序規모[木+無]略放太學, 至今爲閩中諸郡之冠. 僧可度者以賂結中貴人, 屬戚里陳氏誣奏, 奪陳洪進守冢寺. 公曰: ‘此細事爾, 然小人罔上如此, 是乃履霜之漸, 不可長.’ 卽疏其事以聞. 戚竪輩皆抵罪. 無幾何, 淮西軍果亂, 張公去相, 議者反謂公實使然, 不責, 無以係叛將南歸之望. 於是再責, 聞者嗤之, 而公不自辨也.

 

진강(鎭江)에서 마침 금(金)의 오랑캐들이 다시 맹약(盟約)을 배반했다. 이에 공은 청야(淸野)를 건의(建議)하여, 회동(淮東) 사람을 모두 경구(京口)로 옮기고 위엄(威嚴)과 신의(信義)로 어루만지니, 병사(兵士)와 민간인이 잡거(雜居)해도 감히 서로 침범(侵犯)하거나 어지럽히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도적이 들어 그 진상을 조사해보니 하는데 이에 초주(楚州) 수령(守令)인 아무개가 저지른 짓이었다. 또 그를 전후(前後)에서 도와 죄를 저지른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에 관련자 모두 구옥(具獄)하고 사형에 처했다. 또 그 일이 조정예가지 알려져 그 아무개 또한 멀리 귀양 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경내(境內)는 첩연(帖然)하여 길에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당시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었다. 이에 추밀사(樞密使) 장준(張俊)이 강(江) 가에서 군대를 시찰(視察)하면서 공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들 오랑캐가 다른 때에는 풍우(風雨)와 같이 표연(飄然)히 침입하여 도적질해 갔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머뭇거리며 배회하고 있으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했다. 얼마 후 오랑캐는 과연 또다시 강화(講和)를 요청해왔다. 사자(使者)는 이에 배 위에 큰 기를 세우고 왔는데 그 기에는 ‘강남무유(江南撫諭)’라고 썼다. 공이 이를 보고 노(怒)하여 밤에 다른 기로 바꾸어 놓았다. 그 다음 날 접반사(接伴使)라는 자가 기(旗)가 달라진 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면서 기를 찾아 줄 것을 요청(要請)했으나 되지 않자 심지어 공을 위협하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수신(守臣)인지라, 조정의 의론(議論)에 참여한 바 없다. 그러나 내가 지키는 주(州)의 경내(境內)에서 이 기를 세우고 싶다면 나는 이 곳에서 죽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원래의 기를 찾기를 그만두지 않자 마침내 경(境) 밖으로 나가자 그것을 되돌려주었다.

在鎭江, 會金虜復渝盟, 公建議淸野, 盡從淮東之人於京口, 撫以威信, 兵民雜居, 無敢相侵擾者. 嘗得盜, 劾之, 乃楚州守某者所爲. 前後攻劫不可計, 悉具獄棄之市. 以其事聞, 某者亦坐遠竄. 於是境內帖然, 道不拾遺. 旣而虜騎久不至, 樞密使張浚視師江上, 以問公. 公曰: ‘此虜異時入寇飄忽如風雨, 今更遲回, 是必有他意.’ 居頃之, 虜果復以和爲請. 而使者乃植大旗舟上, 書曰 ‘江南撫諭’. 公見之, 怒, 夜以它旗易之. 翌日, 接伴使者見旗有異, 大懼, 請之不得, 至以語脅公. 公曰: ‘吾爲守臣, 朝論無所與. 然欲揭此於吾州之境, 則吾有死而已.’ 請不已, 竟出境乃還之.

 

장준(張俊)이 조정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상(上)께서 공의 치상(治狀)과 공이 적의 실정을 헤아린 것에 관해 듣게 되었다. 이에 급히 구직(舊職)에 복귀(復歸)하라는 조서(詔書)가 내렸다. 공은 오랑캐와 강화(講和)하는 것은 본래 구원(久遠)한 계책이 아니니 틈이 나기만 하면 마땅히 성루(城壘)를 보수(補修)하고 병기(兵器)를 다스리고 선박(船舶)을 미리 준비(準備)해서 때의 변동(變動)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상(宰相) 진회(秦檜)는 처음부터 공의 복직이 자신의 생각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여 공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노(怒)하였다. 풍언(諷言)하는 자가 공의 생각을 논란(論難)하였다. 이에 공은 파면(罷免)되어 돌아왔고 드디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당세(當世)에 뜻을 두었던 사대부들은 서로 위연(喟然)히 탄식(歎息)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조정을 위해 매우 애석(愛惜)한 일이라 여겼다.

張浚還朝, 上聞公治狀及所料虜情, 亟詔復舊職. 公以和好本非久遠計, 宜及間暇時修城壘․除器械․備舟楫以俟時變. 宰相秦檜始以復職非己出, 已不悅. 至是益怒, 諷言者論(8-4518)之. 罷歸, 遂不復起, 士大夫之有志當世者莫不相與喟然, 深爲朝廷惜之.

 

공은 소성(紹聖) 정축년(丁丑)에 태어나서 소흥(紹興) 병인년(丙寅)에 훙거(薨去)하셨으니 나이 50이다. 고리(故里) 해갱(蟹坑)에 있는 선영(先塋) 북쪽에 장사지냈다. 공의 원비(元妃)는 복국부인(福國夫人) 웅씨(熊氏)인데, 공진산(拱辰山) 충현공(忠顯公)의 묘차(墓次)에 장사(葬事)했으며 병산선생(屛山先生)께서 표정(表旌)하셨다. 공의 계실(繼室)은 경국부인(慶國夫人) 탁씨(卓氏)인데 공이 돌아가시고 난 후 20여 년 동안 가업(家業)을 보지(保持)하였다. 작은 일이나 큰일을 처리해 나감에 모두 법도가 있어 안팎이 정숙(整肅)하였다. 팽성후(彭城侯)는 비록 공의 원비(元妃)인 복국부인(福國夫人) 웅씨(熊氏)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그러나 탁씨(卓氏)는 그를 잘 어루만지고 엄격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많은 덕업(德業)을 성취하였다. 족당(族黨)을 만나면 친소(親疏)에 따라 곡진한 은의(恩意)를 베풀었다. 형남부(荊南府)의 관사(官舍)에서 훙거(薨去)하여 구녕현(甌寧縣) 연평(演平)에 있는 언덕에 장사(葬事)했다. 공의 아들은 셋이 있다. 팽성후(彭城侯)가 장자(長子)인데, 일찍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태상황제(太上皇帝)를 섬겼으며 동지추밀원(同知樞密院)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섬겼다. 금상황제(今上皇帝)를 섬김에 있어서는 풍도(風度)와 노렬(勞烈)이 전인(前人)에 짝이 될 만했으니 당세(當世) 사람들 중에는 그에 미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그 다음이 상(瑺)이니 승무랑(承務郞)이다. 상(瑺)은 공의 동생 비각공(祕閣公)에게 출계(出後)했으나 일찍 죽었다. 그 다음이 평(玶)이니 종사랑(從事郞)이다. 그도 또한 공의 명(命)으로 병산선생(屛山先生)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공의 손자(孫子)로 남아(男兒) 두 사람이 있는데, 학아(學雅)는 승무랑(承務郞)이 되고, 학구(學裘)는 아직 어리다. 공의 손녀(孫女)는 두 사람인데, 장녀(長女)는 장사랑(將仕郞) 여흠(呂欽)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公生紹聖丁丑, 薨紹興丙寅, 年五十, 葬故里蟹坑祖塋之北. 元妃福國夫人熊氏, 葬拱辰山忠顯公墓次, 屛山先生實表之. 繼室慶國夫人卓氏, 公沒, 持家二十餘年, 細大有法, 內外斬斬. 彭城侯雖熊出, 然撫之厚而敎之嚴, 所以成就其德業爲多. 遇族黨親疏曲有恩意. 薨荊南府舍, 葬甌寧縣演平之原. 公子三人: 彭城侯爲長, 嘗以中書舍人事太上皇帝, 以同知樞密院事參知政事. 事今上皇帝, 風望勞烈對于前人, 當世鮮能及之. 次瑺, 承務郞, 出後公弟祕閣公, 早卒. 次玶, 從事郞, 亦以公命爲屛山先生後. 孫男二人: 學雅, 承務郞; 學裘, 尙幼. 女二人, 長適將仕郞呂欽, 幼未行也.

 

희(熹)의 선인(先人)은 만년(晩年)에 공을 종유(從遊)하였는데, 겨우 한두 번 뵙고 불행히도 병에 걸렸다. 이에 편지를 써서 가사(家事)를 공에게 기탁(寄託)하였다. 이에 공은 측은(惻隱)하고 가련(可憐)하여 희(熹)를 거두어 친 자식이나 친 조카와 같이 가르쳐 주셨다. 이 때문에 희(熹)는 어려서부터 공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공께서 융적(戎狄)을 다스리기 위해 개부(開府)하실 때의 일에 미칠 수는 없었으며, 공께서도 또한 일찍이 당신의 공벌(攻伐)을 남에게 말하지 않으셨기에 희(熹)는 오직 공께서 거가(居家) 접인(接人)하시면서 보여주신 효우(孝友)의 낙이(樂易)함과 마음을 열어 정성을 보여주심과 할연(豁然)하시어 조금도 막히거나 인색한 뜻이 없음과 어진 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심과 재물을 경시하고 베푸는 것을 기뻐하시어 인친(姻親) 고구(舊故) 중에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곤궁(困窮)에 빠진 자가 있으면 더욱 부지런히 도와주신 일 등을 직접 목격(目擊)할 수 있었다. 또 가만히 공의 문하(門下)에 있던 선비와 한두 분 옛 장수(將帥)들께 공의 평생(平生) 대절(大節)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분들의 말씀을 통해 희(熹)는 또 공이 지니신 만신순국(忘身狥國)의 충성심과 기회(機會)를 결단(決斷)하고 적의 실정을 헤아릴 수 있는 공의 명철(明哲)하심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공은 장사(將士)의 마음을 얻으셨기에 사람들마다 즐겨 다 죽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실로 위대(偉大)하다 할 수 있으니 비록 옛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공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공께서 정치를 하실 때는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예우(禮遇)하여 독실하게 교화(敎化)를 숭상하셨고, 간악(奸惡)한 자를 결단내고 숨어있는 나쁜 일을 들추어내셨으며 강어(彊禦)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니, 이에 옛 양리(良吏 ; 선량한 관리)의 기풍이 있었다. 공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서야 나는 공이 의주(議奏)하신 여러 글들과 장공(張公)께서 진주(秦州)에서 출사(出師)하실 때의 일을 기록한 수기(手記)을 얻어 읽어볼 수 있었다. 나는 이 글들을 통해 일찍이 감개(感慨)하여 책을 어루만지다가 글쓰기를 그만두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熹之先人晩從公游, 僅一再見, 不幸屬疾, 寓書以家事爲寄. 公惻然憐之, 收敎熹如子姪. 故熹自幼得拜公左右, 然已不及見公履戎開府陦事. 公又未嘗以其功伐語人, 獨見其居家接人孝友樂易, 開心見誠, 豁然無纖芥滯吝意. 好賢樂善, 輕財喜施, 於姻親舊故貧病困阨之際, 尤孜孜焉. 因竊從公門下士及一二故將問公平生大節, 又知其忘身徇國之忠․決機料敵之明, 得將士心, 人人樂爲盡死, 事皆偉然, 雖古名將不能過. 至其爲政, 愛民禮士, 敦尙敎化, 擿姦發伏, 不畏强禦, 乃有古良吏風. 及公旣沒, 然後得其議奏諸書․張公手記秦州出師時事讀之, 又未嘗不慨然撫卷廢書而嘆也.

 

생각건대 공의 가문(家門)은 충현공(忠顯公)이래 삼세(三世)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효(忠孝)를 서로 전승(傳承)했다. 그 사업(事業)은 모두 기념(記念)할만하지만 공은 전쟁(戰爭)터를 누비시며 더욱 어렵고 위태하셨다. 비록 불행히도 참해(讒害)와 무함(誣陷)으로 곤란을 당하여 끝내 그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중년(中年)의 나이로 돌아가셨으나, 거듭 촉(蜀)을 안전(安全)하게 하여 동남(東南)을 수호(守護)하셨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공의 노고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그 공을 기리는 비(碑)가 홀로 때맞추어 건립(建立)되지 못하고 있으니, 만홀(漫忽)하여 끝내 이를 문자에 담아 후세(後世)에 알리지 않는다면 이 어찌 팽성후(彭城侯)의 구원(九原)의 한(恨)이 될 뿐이겠는가. 무릇 내가 뒤에 죽어서도 책망(責望)받게 될 것이다. 이에 그 실상(實相)을 모두 거론하여 기재(記載)하고 나서 또 눈물을 흘리며 명문(銘文)을 지어 마지막으로 팽성후(彭城侯)의 유명(遺命)을 따르고자 한다. 그 명(銘)에 가로대 :

惟公家自忠顯以來, 三世一心, 以忠孝相傳, 事業皆可紀, 而公奔走兵間, 尤艱且危.

(8-4519)雖不幸困於讒誣, 不卒其志而中世以沒, 然再安全蜀, 以屛東南, 人至于今賴之. 顧表隧之碑獨不時立, 漫無文字以詔後世, 則豈惟彭城侯九原之恨, 凡我後死, 與有責焉. 於是旣悉論載其實, 又泣而爲之銘, 以卒承彭城侯之遺命. 其銘曰:

 

하늘이 황제의 덕(德)을 경계(警戒)하여, ‘그 평평한 것도 기우는 법이다.’라고 하시고, 또 다시 재걸(材傑)을 내리시어 그 기울어진 것을 유지(維持)하라 하시네. 천박한 말이지만 시험 삼아 말해보리라. 공은 [충현공(忠顯公)을 도와] 월(越)에서 진(鎭)에서 그리고 마침내 서쪽 촉(蜀)에서 [나라를 수호하느라 애쓰셨으니] 또한 나라의 위험(危險)이 이에 안정(安定)되었도다. 처음 진(秦)에서는 도리어 표요(飄搖)함이 밀어닥쳤으나, 일사(一士)를 얻은 후에는 공의 도(道)가 밝아졌도다. 다시 양(梁)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죽음에 이르게 되지는 않았노라. 또 요충지(要衝地)에 장애물을 설치하시니, 그 공적이 더욱 위대(偉大)하였도다. 민(岷)과 파(嶓)가 이미 정(定)해지고 나서, 강(江)과 한(漢)은 도도(滔滔)하였도다. 네가 오로지 안일(安逸)을 위주로 한다면 나는 그 노역(勞役)을 맡으리라 하셨네. 일찍이 도모(圖謀)한 것도 아닌데 참소(讒訴)하는 입들이 오오(嗸嗸)하였도다. 이에 북(北)으로 이에 남(南)으로 옮겨 다니며 노고(勞苦)하셨는데, 포상(褒賞)해야 공의 공적을 갑자기 폄하(貶下)하는구나. 화목(和睦)하라 하시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으셨으며, 은미(隱微)한 것도 알아내시되 원대한 것을 염려(念慮)하셨도다. 이 어찌 순순(諄諄)한 것이 아니리요? 그러나 끝내 공은 당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셨도다. 이에 공께서는 숲을 나로 삼고 샘을 나로 삼으시어, 나를 흥기(興寄)하심이 천박(淺薄)하지 않으셨도다. 노년(老年)에도 장년(壯年)의 마음이었기에, 앞으로 나감은 있어도 뒤로 물러남은 없었도다. 생각건대 공의 충성심과 효심은 바로 공의 선공(先公)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리라. 힘쓸지어다. 사현(嗣賢)이여, 능(能)히 그 공(功)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 어찌 함께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마는 또한 완성(完成) 단계에서 무너짐이 있도다. 시(詩)로서 내자(來者)에게 권(勸)하노니, 공의 그 아름다운 명성(名聲)을 영원히 기억하시라!

天警皇德, 曰陂其平. 復畀材傑, 俾維厥傾. 薄言試之, 于越于鎭. 卒事于西, 亦危乃定. 始郤于秦, 偪仄飄搖. 一士之得, 厥猷以昭. 再蹶于梁, 莫相予死. 亦障其衝, 校績逾偉. 岷嶓旣奠, 江漢滔滔. 爾職于佚, 我司其勞. 曾是弗圖, 讒口嗸嗸. 載北載南, 倏貶其褒. 曰和匪同, 識微慮遠. 豈不諄諄? 卒莫予展. 我林我泉, 我寄不淺. 莫年壯心, 有逝無反. 惟忠惟孝, 自我先公. 勉哉嗣賢, 克咸厥功. 豈不咸之? 又圮于成. 詩勸來者, 永其休聲!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오공(吳公) 신도비(神道碑)(龍圖閣直學士吳公神道碑)

 

순희(淳熙) 10년 여름 6월 □□일,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 통봉대부(通奉大夫) ․ 임해군개국공(臨海郡開國公)으로 식읍(食邑) 2400호(戶)로 치사(致仕)하신 오공(吳公)께서 태주(台州) 선거현(仙居縣) 호산(湖山)에 있던 사제(私第)의 정침(正寢)에서 훙거(薨去)하셨다. 부음(訃音)을 듣고 천자(天子)께서 근심하시며 유사(有司)에게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고사(故事)에 따라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하여금 그 사제(私第)에 가서 고하게 하셨다. 겨울 10월 계유(癸酉)에 사자(嗣子) 진(津) 등이 공을 석정(石井) 중오(中奧)의 언덕에 장사(葬事)하였다. 장사(葬事)가 끝난 다음, 장차 법식(法式)을 고려하여 문장을 돌에 새기고 리수(螭首)를 만들어 공의 덕(德)을 현송(顯誦)함으로써 공의 덕이 무궁(無窮)하게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이에 서로 더불어 도모한 결과 중자(仲子) 홍(洪)을 시켜 공의 문생(門生)인 임천태수(臨川太守) 진후용(陳侯庸)의 서장(書狀)을 가지고 이 곳 건안(建安)의 산중(山中)에 오도록 했으니, 곧 희(熹)에게 그 글을 청하려 한 것이었다. 희(熹)가 가만히 들으니, 일찍이 소흥(紹興) 말년(末年)에 천자께서 융로(戎虜)가 중원(中原)을 빙릉(憑陵)하는 것에 분개(憤慨)하고 신인(神人)의 수욕(羞辱)을 애통(哀痛)히 여기시어, 이에 개연(慨然)히 뜻을 품고 천하(天下)의 기용(耆俊)을 발탁하여 중흥(中興)의 공렬(功烈)을 완수하고자 하셨다. 그 때 인발(引拔)되어 간쟁(諫諍)과 논의(論議)를 담당하는 관직(官職)을 맡은 자들 중에는 감히 직량(直諒)을 말할 수 있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오공(吳公)은 또 당시에 크게 이름을 떨친 분이다. 그러나 만년(晩年)에 이르러 끝내 그 강경(剛鯁)한 성품으로 인해 그 뜻을 다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이에 물러나 호산(湖山) 아래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산천(山川)을 유람(遊覽)하는 즐거움을 누린 것이 10여년인데 천하 사람들이 그를 높이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상세한 내용에 대해 세인(世人)들 중에는 다 듣지 못한 자들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비(碑)를 만들어 후세(後世)에 알리고자 한다. 그런데 비문(碑文)을 위촉(委囑)받은 희(熹)가 과연 그 적임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양(辭讓)하려 해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곧 뒤돌아 생각건대 지난 날 사사(使事)로 공의 이문(里門)을 지난 적이 있다. 그 때 공은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복(野服)에 편여(便輿)를 타고 나오셔서 나를 호수 가로 맞아들이고 오랜 동안 함께 앉아 음주하면서 평생(平生)을 논설(論說)했다. 이 때 공은 천지를 부앙(俯仰)하며 감개(感慨)하셨고 드디어 신후(身後)의 전(傳)을 내게 부탁하셨다. 그 당시는 공이 다만 희어(戱語)를 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승낙(承諾)하지도 않고 사양(辭讓)하지도 않았다. 이제 비록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가 아님을 잘 알지만, 그러나 이전에 공에게 사양(辭讓)한다고 말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또 공의 아들에게 이 일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임천(臨川)의 서장(書狀)을 살핀 후에 공의 일을 다음과 같이 순서대로 기록한다.

淳熙十年夏六月囗囗日, 龍圖閣直學士․通奉大夫․臨海郡開國公․食邑二千四百戶致仕吳公薨于台州仙居縣湖山私第之正寢. 訃聞, 天子閔焉, 詔有司以光祿大夫告其第如故事. 冬十月癸酉, 嗣子津等葬公石井中奧之原. 旣畢事, 將考令(8-4520)式, 勒文螭首, 顯誦公德, 傳之無窮, 乃相與謀, 使仲子洪以公門生臨川太守陳侯庸之狀來, 卽建安山中, 請其文於熹. 熹竊聞之, 當紹興之季年, 天子憤戎虜之憑陵, 痛神人之羞辱, 慨然有意, 收用耆俊, 以遂中興之烈. 其所引拔以爲諫諍論議之官者, 多得直諒敢言之士. 而吳公者, 又其偉然有聞於時者也. 迨其晩歲, 竟以剛鯁, 不得盡行其志, 退而老於湖山之下, 極登臨游泛之樂者十餘年, 天下莫不高之. 而其所立之詳, 世猶有未悉聞者. 幸今有碑, 以詔後世. 是筆所屬, 可非其人? 欲謝不能, 則又顧念往以使事過公里門, 公聞其來, 野服以便輿出見, 邀於湖上, 延坐與飮, 論說平生, 俯仰感慨, 遂以身後之傳爲託. 於時謂公特戲語耳, 不敢承亦不敢辭. 今雖極自知其不稱, 然昔旣不及辭於公, 今又安得辭於公之子耶? 乃考臨川之狀, 以次其事如左:

 

공의 휘(諱)는 불(芾)이요, 자(字)는 명가(明可)이니 세세(世世)로 선거(仙居)에 살았던 사람이다. 공의 상세(上世)는 덕(德)을 숨겨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무략랑(武略郞)에 추증(追贈)되시고 휘(諱)가 윤소(允昭)이신 공의 대부(大父)에 이르러 비로소 자손(子孫)을 가르쳐 학문(學問)에 힘쓰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공의 종형(從兄) 영(詠)과 겸(謙)이 드디어 연이어 과거(科擧) 고시(考試)에 합격하였다. 공이 대관(大官)이 되자 공의 부(父) 휘(諱) 사석(師錫)은 추증(追贈)되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고, 모(母) 정씨(鄭氏)는 임해군부인(臨海郡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公諱芾, 字明可, 世爲仙居人. 上世隱德不仕, 至公大父贈武略郞諱允昭, 始敎子孫爲學, 而公與從兄詠․謙遂連取科第. 及公至大官, 而贈其父諱師錫至光祿大夫, 母鄭氏臨海郡夫人.

 

공은 어려서부터 장중(莊重)하였으니, 그 억연(嶷然)함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각고(刻苦) 면려(勉勵)하며 독서(讀書)하여 침식(寢食)을 잊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소흥(紹興) 2년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하여 처음으로 온주(溫州) 낙청(樂淸)의 위(尉)가 되었다. 당시 빈해(瀕海)의 세민(細民 즉 平民)들은 어염(魚鹽)을 등에 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것을 생업(生業)으로 삼고 있었다. 마침 정법(定法)이 변경된 상황에서, 사사로이 소금을 가지고 월경(越境)한 자를 위(尉)가 모두 조사한 다음 면죄(免罪)시킨 일이 있었다. 이웃 현(縣)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분연(紛然)하였다. 공은 홀로 이 소식을 듣지 못한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자는 빈민(貧民) 중에서도 실업자(失業者)이다. 내가 차마 내 일신(一身)의 병통이 된다 하여 그를 더욱 궁지에 빠트려야 하는가?’ 또 공은 크게 학관(學官)을 정비하여 수민(秀民)의 자제(子弟)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 후 인재(人材)가 배출(輩出)되어, 직언(直言)을 통해 많은 현사(賢士)들 중에서도 으뜸이 됨으로써 급기야 명신(名臣)이 된 자도 있었다.

公幼莊重, 嶷然如成人. 讀書刻苦, 至忘寢食. 登紹興二年進士第, 始爲溫州樂淸尉. 瀕海細民以負販魚鹽爲生業, 屬更定法, 有私以鹽越境者, 尉皆劾免. 旁(8-4521)縣跡捕紛然, 公獨若不聞, 曰: ‘此貧民之失業者, 吾其忍以一身之病而愈蹙之耶?’ 大治學官, 聚其秀民子弟敎之. 其後人材輩出, 有以直言冠多士, 爲名臣者.

 

또 다시 평강부(平江府) 녹사참군(錄事參軍)에 발탁 승진하였고 또 상정일사칙령소산정관(詳定一司敕令所刪定官)을 배수(拜受)하였으며 비서성정자(祕書省正字)에 옮겨갔다. 처음부터 공은 승상(丞相) 진회(秦檜)와는 친구(親舊)사이였다. 진회(秦檜)가 정사(政事)를 전단(專斷)하기에 이르자 사대부(士大夫)들 중에 그에게 달려가 빌붙는 자들이 많았다. 공은 그런 가운데 처하면서도 홀로 일찍이 진회(秦檜)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인 듯 퇴연(退然)히 행동하면서, 한결같이 여럿이 함께 나아가 한온(寒溫) 기거(起居)를 문후(問候)할 뿐이었다. 진회(秦檜)조차 본래 이를 의심할 정도였다. 때마침 사천(四川) 선무사(宣撫使)인 정강중(鄭剛中)이 자기를 대신할 사람으로 공을 천거하면서 그 상주문(上奏文)에 ‘비록 공은 마침 하나의 관직에 힘쓰고 있지만 그 고원(高遠)한 도량(度量)은 늘 초매(超邁)한 듯 합니다.’라고 했다. 진회(秦檜)가 이를 보고 더욱 즐겁지 아니하여, 하루는 공에게 말하기를 ‘높아지면 저절로 남의 표적이 되는 법인데, 이 어찌 장자(長者)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풍자(諷刺)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조차 이에 관해서는 할말을 잃었다.

更調平江府錄事參軍, 除詳定一司敕令所刪定官, 遷祕書省正字. 始, 公與秦丞相檜有舊, 至是奏已顓政事, 士夫趨附者衆. 公處其間, 獨退然如未嘗相識者, 公坐旅進寒溫而已. 秦固已疑之. 會四川宣撫使鄭公剛中薦公自代, 其狀謂公雖適效一官, 而高遠之度常若超邁. 秦見之愈不樂, 一日, 語公曰: ‘高自標置, 是豈長者之爲乎?’ 諷言者論罷之.

 

처주(處州)통판(差通)의 일을 보도록 파견되어, 무주(婺州) 흥원부(紹興府)를 두루 보좌하였다. 진회(秦檜)가 죽자, 이에 처주(處州)지사(知事)가 되었다. 아직 행차하기 전에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만났다. 상기(喪期)가 끝난 후 상주(常州) 지사(知事)가 되었고 또 처주(處州) 지사(知事)로 바뀌었다. 처음 처주(處州)에 도착했을 때, 여러 읍(邑)에서 전례(前例)에 따라 금전(金錢)을 내어 공의 금고를 채웠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현(縣)의 경부(經賦)도 오히려 부족한데 이런 것을 이용하여 스스로 아첨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모두 배척하여 되돌려 주었다. 백성들은 오래 전부터 무거운 정견(丁絹)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공이 그것을 줄일 것을 명(命)하고, 신정(新丁)으로 하여금 그 부족한 액수(額數)를 보충하게 했다. 이에 사람들이 편리하다고 여겼다. 한 해를 넘기자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差通判處州事, 歷佐婺州․紹興府. 檜死, 乃得知處州. 未行, 丁外艱. 服除, 知常州, 又改處州. 始至, 諸邑以例獻錢實公帑. 公曰: ‘縣經賦猶不足, 而欲以此自媚, 得無病吾民乎?’ 盡斥還之. 民舊苦丁絹重, 公命損之, 而以新丁補其額, 人以爲便. 踰歲, 以憂去.

 

아직 상기(喪期)가 끝나기도 전에 간관(諫官) 하부(何溥)가 공을 재중어사(材中御史)에 천거했고 천거되자마자 소명(召命)이 있었다. 이에 공은 상기(喪期)를 끝내고 입대(入對)하여 곧바로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제수(除授)되었다. 당시 금(金)의 량(亮)이 장차 맹약(盟約)을 배반(背叛)하려 했다. 이에 공은 오로지 수덕(修德)에 힘씀으로써 오랑캐를 굴복시킬 것을 다음과 같이 주상(主上)께 권면하였다. 즉 ‘저들이 힘으로 승부하는데, 우리가 덕(德)으로 대응한다면 비록 강약(强弱)의 세력(勢力)은 같지 않지만 승부(勝負)의 형세(形勢)는 이미 드러난 셈입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참으로 적(敵)이 진퇴(進退)하는 것을 두고 근심하거나 기뻐하지 말고, 또 일의 완급(緩急)만을 보아 서두르거나 쉬거나 하지 말고, 매양 조령(詔令)을 내려 반드시 통렬(痛烈)하게 스스로를 회구(悔咎)하실 수 있다면 ; 그리고 군신(群臣)을 연견(延見)하여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힘써 주상(主上)의 궐실(闕失)을 진술(陳述)케 하실 수만 있다면 ; 그리하여 마음 속 은미(隱微)한 것이 모두 천지(天地)에 부합(符合)되며, 정사(政事)에 드러나 조종(祖宗)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 수만 있다면 인심(人心)이 열복(悅服)할 것이고 하늘도 또한 순(順)하게 도울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상(上)께서는 공의 말이 옳다 하시고, 돌아보며 탄식(歎息)하고 말씀하시기를 : ‘하부(何溥)가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구나!’라고 하셨다.

未終喪, 而諫官何溥薦公材中御史, 薦有召命. 免喪入對, 卽除監察御史. 時金亮將渝盟, 公勸上專務修德以服之, ‘彼以其力, 我以吾德, 則雖彊弱之勢不侔, 而勝負之形已見. 顧今誠能毋以敵之進退爲憂喜, 毋以事之緩急爲作輟, 每下詔(8-4522)令, 必務痛自悔咎; 延見羣臣, 必使力陳闕失; 隱之心而悉有合於天地, 發之政而盡無愧於祖宗, 則人心悅服, 天亦助順矣.’ 上韙其言, 顧而歎曰: ‘何溥知人哉!’

 

얼마 있지 아니하여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除授)되셨다. 때마침 양회(兩淮)의 전세(戰勢)가 불리하여 인심(人心)이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다투어 ‘물러나 피할 계책’을 진술(陳述)하였다. 이에 공은 홀로 분연(奮然)히 주대(奏對)하여 청(請)해 말하기를 ‘금일(今日)의 전쟁에 대해서는 진격(進擊)만 있고 후퇴(後退)는 없어야 합니다. 진격(進擊)이 상책(上策)이고 후퇴는 무책(無策)입니다. 만약 잘못하여 이들의 말을 들으신다면, 신(臣)은 사기(士氣)가 쇠갈(衰竭)해지고 인심(人心)이 저상(沮喪)되어 대사(大事)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나이다. 육비(六飛)가 아직 급하게 행차(行次)할 정도는 아니니 우선 건왕(建王)을 원수(元帥)로 삼아 먼저 가서 군대를 위무(慰撫)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옳을 듯 합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이를 옳게 여기셨다. 그러나 아직 출발하기도 전에 량(亮)이 이미 도륙(屠戮)되었다. 중원(中原)의 유민(遺民)들이 연일(連日) 왕사(王師)가 도착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에 공은 여러 차례 상주(上奏)하여, 이 기회(機會)를 틈타 친정(親征)책을 결정함으로써 속히 진격하여 빼앗긴 국토를 탈취할 것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청(奏請)하였다. 상께서 건강(建康)에 납시자 공은 또 ‘금릉(金陵)은 예로부터 영웅(英雄)들이 제왕(帝王)의 집이라 여겨왔는데, 하물며 지금은 북쪽 땅에 사는 사람들의 구음(謳吟)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대가(大駕)가 강(江)에 임(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반드시 이들은 반드시 목을 빼고 발꿈치를 쳐들면서 진발(振拔)해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마땅히 주필(駐蹕)하시어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상께서 이를 널리 받아들이셨는데 때마침 밀계(密啓)를 가지고 동(東)으로 돌아온 자가 있었다. 이 일을 두고 시종(侍從)과 대간(臺諫)들이 집의(集議)하여 상께 알렸다. 이에 공은 ‘이제 양(襄) 한(漢)을 강대(控帶)하고, 호(湖)와 광(廣)을 인수(引輸)하려 한다면 임안(臨安)보다는 건강(建康)이 더 편리합니다. 또 회전(淮甸)을 경리(經理)하고 양송(梁宋)을 응접(應接)하는 데도 임안(臨安)보다는 건강(建康)이 더 가깝습니다. 의론(議論)하는 자들이 한갓 일시(一時) 호종(扈從)하는 사람들이 속으로 사귀(思歸)할 것을 생각한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여 그들의 뜻을 기쁘게 하려 한 것이니 이 어찌 나라를 위한 계책일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 그들의 말을 너무 들으신다면, 신(臣)은 회란(回鑾)후에 서사(西師)의 성원(聲援)이 닿지 못하고 북토(北土)에서의 구음(謳吟)이 절망(絶望)상태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여 두렵사오니 이는 세사(細事)가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상하(上下)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가 많았기에 공의 말이 비록 절실했지만 끝내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고 이점을 천하(天下)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애석(哀惜)해하고 있다. 고려(高麗)의 박주(舶主)가 명주(明州)에 도착하여 ‘고려(高麗)에서 사신(使臣)을 보내 하례(賀禮)하기를 원(願)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장차 이를 허락하려 했다. 공이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금(金)나라 사람들과 국경을 접(接)하고 있으면서 그들을 위해 역속(役屬)하고 있는 처지인데 이제 특별한 연고(緣故)도 없이 이런 일이 있으니 그들이 간첩(間諜)행위를 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하여, 이에 조서를 내려 물리쳤다.

未幾, 除殿中侍御史. 會兩淮戰不利, 人情惴恐. 廷臣爭陳退避之計, 公獨奮然請對曰: ‘今日之事, 有進無退. 進爲上策, 退爲無策. 若誤聽此屬之言, 臣恐士氣衰竭, 人心沮喪, 大事去矣. 有如六飛未遽行, 且以建王爲元帥, 先往撫師, 其亦可也.’ 上然之, 未及發而亮已被屠. 中原遺民日望王師之至. 公數奏, 請乘此機會, 決策親征, 速圖進取. 旣上至建康, 公又言: ‘金陵自古英雄以爲帝王之宅, 矧今北土之人謳吟未改, 旣聞大駕臨江, 此必延頸擧踵以望振拔. 宜遂駐蹕, 以繫其心.’ 上已開納, 會有密啓還東者. 事下侍從臺諫集議以聞. 公曰: ‘今欲控帶襄漢, 引輸湖廣, 則臨安不如建康之便. 經理淮甸, 應接梁宋, 則臨安不如建康之近. 議者徒以一時扈從之人內顧思歸, 故爲是說以悅其意, 豈爲國計者哉? 過聽其言, 臣恐回鑾之後, 西師之聲援不接, 北土之謳吟絶望, 非細事也.’ 然時上下欲歸者衆, 公言雖苦, 竟不能奪, 天下至今惜之. 高麗舶主詣明州, 自言其國願得遣使入賀, 詔將許之. 公言: ‘高麗與金人接壤, 爲之役屬, 無故有此, (8-4523)安知其不爲間?’ 乃詔却之.

 

이 당시 천자(天子)께서 임어(臨御)하신지 이미 오래되었고 오로지 문덕(文德)으로 아랫사람들에게 두터운 은혜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그 말류(末流) 하리(下吏)들이 [천자를] 봉승(奉承)함에 있어서 인순(因循)의 폐단(弊端)이 없지 않았다. 이에 공은 항소(抗疏)하여, ‘이를 개혁(改革)함으로써 당시의 병폐(病弊)를 구하고 국세(國勢)를 보강(補强)해야 한다’고 역설(力說)하였다. 또 말하기를 ‘창졸(倉卒)의 시기에 사절(死節)할 수 있는 선비를 구하고자 한다면 한가(閑暇)한 날에 강직(剛直)한 선비를 추천해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지난해에 양진(兩淮)에서 적의 기세만 보고도 우리 군대가 분산(奔散) 궤멸(潰滅)되어 일찍이 하나의 성(城)도 지켜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진회(秦檜)가 언로(言路)를 옹색(壅塞)하여 사기(士氣)를 꺾어놓은 데 따른 여독(餘毒)입니다. 그 도(道)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사기(士氣)가 날로 떨치게 되어 국가의 위난을 보고 목숨을 다하는 자 또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마침내] 묘당(廟堂)에서 조조(詔條)를 지키지 못해 요행(僥倖)을 바라는 자들의 길을 열어주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고; 호종(扈從)하는 관리(官吏)들 중에는 아무런 공(功)도 없이 상(賞)을 받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대장(大將)은 군대를 잃고 장리(長吏)는 직책(職責)을 잃고 있는데도 형전(刑典)을 바로잡지 않고 있었으며; 수역(戌役)한 자가 바야흐로 돌아오자마자 또 다시 간점(揀點)함으로써 중심(衆心)을 요동(搖動)시키는 일이 있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이치에도 맞지 않고 시기에도 편(便)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을 때, 공은 뜻을 다해 곡진(曲盡)하게 진언(進言)함으로써 조정의 일에 많은 보조(補助)가 되었다. 공은 또 주조(周操), 진량한(陳良翰), 진량우(陳良祐)를 어사(御史)로 천거하였는데 이들은 후에 모두 간쟁(諫諍)으로 이름이 났다.

是時天子臨御旣久, 專以文德厚下, 故其末流下吏奉承不無因循之弊. 公於是抗疏, 力陳更化之說, 欲以救時病, 彊國勢. 又言: ‘欲求死節之士於倉卒之時, 不若進剛直之士於閒暇之日. 去歲兩淮望風奔潰, 曾無一城能拒守者. 此秦檜壅塞言路․摧折士氣之餘毒也. 能反其道, 則士氣日振而見危致命者亦有人矣.’ 至於廟堂不守詔條, 以啓僥倖; 扈從官吏無功受賞; 大將失軍, 長吏失守, 未正刑典; 戌役方還, 復行揀點, 以動衆心, 凡事有不合於理․不便於時者, 無不悉意盡言, 補助爲多. 薦周操․陳良翰․陳良祐爲御史, 後皆以諫諍顯.

 

공이 재직(在職)한 지 겨우 반년이 지나자 용사자(用事者)들이 공을 미워하였다. 이에 공이 회계(會計)로 이름이 있다하여 자주 공으로 하여금 권호부시랑(權戶部侍郞)이 되게 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실은 언직(言職)에 있는 공을 해임(解任)하려는 것이었다. 때마침 ‘식량과 군대를 풍족케 할 대책(足食足兵之策)’을 묻는 조서(詔書)가 있었다. 이에 공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지금 대농(大農)의 세입(歲入)은 경덕(景德)시대의 성시(盛時)와 비교해볼 때 40%나 증가하였는데도 내장(內藏)의 격상(激賞)에는 보탬이 되지 않으니 부세(賦稅)를 더해서는 안 됩니다. 중외(中外)의 병적(兵籍)을 천하가 안정되었던 태종(太宗) 때와 대략 비교해보면 그 양사(糧賜)가 다른 비용에 비해 열에 아홉을 차지하고 있으니 병사를 더 이상 모집(募集)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부화(浮華)하게 사치(奢侈)하던 것을 절약하고 군대 검열(檢閱)을 더욱 정미하게 하여 관속(官屬)들로 하여금 재물을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군인(軍人)을 정예(精銳)화하는 것만이 그나마 가능한 조처(措處)일 뿐입니다.”

在職才半歲, 用事者惡之. 以公有會計名, 亟白使權戶部侍郞, 實以解其言職. 會有詔問足食足兵之策, 公言: ‘今大農歲入視景德盛時什加其四, 而內藏激賞不與焉, 則賦不可以有加. 中外兵籍, 略比太宗定天下時, 而糧賜什九於他費, 則兵不可以更募. 獨有節浮侈․精簡閱, 使官不蠹財而人皆可用, 則庶乎其可耳.’

 

갑자기 집영전(集英殿) 수찬(修撰)으로 무주(婺州) 지사(知事)가 되었다. 그 당시 금상(今上)께서 처음 즉위(卽位)하였기에 공은 폐사(陛辭)하면서 배■(裴■[=土+自])가 당 헌종(憲宗)께 올린 바 ‘다스림에 있어서는 먼저 그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씀’을 가장 먼저 진술(陳述)하여 처음 임어(臨御)할 때 출치(出治)의 대원(大原)은 이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는데 상(上)께서 이를 가납(嘉納)하셨다. 아직 임지(任地)의 경내(境內)에 들어서기도 전에 먼저 읍재(邑宰)의 능부(能否)를 묻고 그 중에서도 더욱 나약(懦弱)하고 무능(無能)하여 직책(職責)을 맡을 수 없는 자를 내보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공이 말씀하기를 “수령(守令)은 백성에 대해 가장 가까운 존재인데 [그러한 수령이] 진실로 그 소임을 감당할만한 재능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태수(太守)가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를 통하여 백성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군(郡)의 재정(財政)이 공핍(空乏)하고 군량(軍糧)의 지급이 시의적절(時宜適切)하지 않았으며 부상(負上) 공과(供課)도 또한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이에 공은 ‘이런 상황이야말로 이른바 정사(政事)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고 곧 부극(掊克, 즉 聚斂)을 금지하고 정부(征賦)를 줄이고 삼루(滲漏)를 막았으며, 침어(侵漁 즉 侵奪) 가대(假貸 즉 借貸)하는 관리들을 모두 법에 따라 조처했다. 이에 한두 달도 지나지 않아 공사(公私)간에 모두 이미 풍족(豊足)함을 아뢰었다. 또 공은 차역(差役)이 균평(均平)하지 않아 쟁송(爭訟)이 많이 생겨나는 것을 늘 염려하여 백성들에게 의역(義役)을 권장하고자 하였다. 이 때 금화(金華) 장선향(長仙鄕)에는 향민(鄕民) 11가(家)가 있었는데 이들은 스스로 갑(甲)과 을(乙)로 그 산업(産業)의 순서를 정하여 차례대로 역(役)에 나아간 것이 거의 20년이나 되었다. 공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기뻐하면서 군좌(郡佐)와 현장(縣長) 및 이여(吏輿)를 거느리고 이른바 그들 11인(人)을 불러들여 평정당(平政堂)에서 함께 연회(宴會)를 베풀고 그 고을의 이름을 ‘순리(循理)’라 바꾸고, 그 마을 이름을 ‘신의(信義)’라 함으로써 특별히 포상하였다. 또 그 고을의 전배(前輩)인 매집례(梅執禮), 종택(宗澤), 반량귀(潘良貴), 정강중(鄭剛中) 공(公) 등은 모두 명절(名節)과 재행(才行)으로 당세(當世)에 알려진 분들이었다. 이에 공은 스스로 글을 지어 그들의 묘(墓)에 제사하였다.

俄以集英殿修撰知婺州. 時今上初卽位, 公陛辭, 首陳裴■[=土+自]對唐憲宗爲治先正其心之說, 以爲臨御之初, 出治大原無越於此, 上嘉納焉. 未入境, 先詢邑宰能否, 去其尤罷懦不任職者. 人問其故, 公曰: ‘令於民最親, 苟非其人, 太守雖有(8-4524)愛民之心, 亦何自而達乎?’ 郡帑空乏, 軍餉不時, 負上供課亦以大萬計. 公曰: ‘是所謂無政事者也.’ 卽禁掊克․減征賦․窒滲漏, 官吏之侵漁假貸者, 悉寘之法. 不一兩月, 而公私已告足矣. 常患差役不均, 多致爭訟說, 欲勸民爲義役. 有言金華長仙鄕民十有一家, 自以甲乙第其産, 以次就役者幾二十年矣. 公聞之喜, 帥郡佐及縣長吏輿致所謂十一人者, 與合宴于平政堂, 而更其鄕曰 ‘循理’, 里曰 ‘信義’, 以褒異之. 又以鄕之前輩梅公執禮․宗公澤․潘公良貴․鄭公剛中皆以名節才行聞當世, 乃自爲文, 以醊其墓.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이 다스리던 군(郡)에 이등(異等)의 효험(效驗)이 있다하여 공을 소흥부(紹興府) 지사(知事)로 옮기고 양절동로(兩浙東路) 안무사(安撫使)에 충당(充當)하라는 조서(詔書)가 내렸다. 처음 임지에 이르렀을 때, 저자에서 횡역(橫逆)을 일삼는 종실(宗室)의 자제(子弟)가 있어 공이 그를 옥(獄)에 가두었다. 종정사(宗正司)가 관리를 파견하여 그를 찾으니 서로 대립하는 기세가 흉흉(訩訩)하였다. 이에 공은 곧 스스로 탄핵(彈劾)하여 이를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이 무죄(無罪)하다는 조서(詔書)를 내렸고 그 종실(宗室)의 자제(子弟)를 종정사(宗正司)에 귀속(歸屬)시켜 가르침과 형벌을 받도록 조처하니 일군(一郡)이 두려워 감복하였다. 회계(會稽)의 백성은 가난한데 부세(賦稅)는 무거웠으며 절색(折色)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공은 [이곳에] 영우(永祐) 찬궁(菆宮)이 있음을 아뢰어 영안현(永安縣)의 고사(故事)를 보아 지이절변(支移折變)을 면제해줄 수 있었다. 이에 읍인(邑人)이 편(便)하다고 여겼다. 고려(高麗)가 마침내 사신을 보내왔다. 공은 그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상주문(上奏文)을 기초(起草)하여 이전에 해왔던 논의(論議)를 거듭 아룀으로써 끝내 조정에서 고려(高麗)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성(城)의 남쪽에 위치한 경호(鏡湖)는 동한(東漢) 때부터 물이 괴어 개전(漑田)으로 되어 있어 그것이 주는 이익이 매우 광범위했다. 그런데 중간에 이를 폐(廢)하여 다스리지 않고 있었는데, 남풍(南豐) 증사인(曾舍人)이 본 군(郡)을 보좌(補佐)할 때, 일찍이 이 일을 도모(圖謀)하여 그 갈래를 잡아놓았는데 그 이병(利病)을 논한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공이 전에 그 관직을 이었기에 [증사인(曾舍人)의] 그 글을 읽고 이 일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 후 공이 이 곳에 와서 진수(鎭守)하게 되자 해마다 큰 기근(饑饉)을 만나게 되었는데 상께서 친히 서찰(書札)을 통해 공에게 진구(賑救)할 것을 명하시니, 공은 이에 상평창(常平倉)의 미곡(米穀)을 풀어 기민(饑民)을 모아들여 [경호(鏡湖)에] 부역(賦役)케 해야 한다고 주청(奏請)하였다. 이 일이 이미 이루어지자, 무릇 ‘이 일을 시행(施行)할 것을 주청(奏請)한 그 말’을 돌에 새겨 호상(湖上)에 세웠다. 약속한 것을 금지(禁止)하려는 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이 떠난 후 1년이 되기도 전에 수신(守臣)이 유사(流徙)들을 편안히 모아들일 수 없었고 이에 도리어 허물을 [공이] 경호(鏡湖)를 복구(復舊)한 데 돌렸다. 간민(姦民)과 대성(大姓)들이 전답(田畓)으로 사용하는 것이 유리(有利)하다고 여겨 권귀(權貴)들을 결집(結集)하여 [경호(鏡湖)의 복구(復舊)를] 비방(誹謗)하는 의론(議論)이 비등(沸騰)하였다. 이에 호수는 다시 폐(廢)하게 되었고 논자(論者)들은 이를 애석(哀惜)해 하였다. 이전에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절강(浙江)을 건넜을 때 군수(郡守)는 성(城)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위사(衛士) 당□(唐□)는 돌을 안고 오랑캐의 우두머리 장수를 저격(狙擊)했으나 적중(的中)하지 못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오랑캐를 꾸짖어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이에 월(越)지방 사람들이 그를 제사(祭祀)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자 그 제사가 폐지되고 무너졌다. 공은 [사당의] 궁(宮)을 개축(改築)하고 그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충의(忠義)를 권장하였다.

居無何, 詔以公治郡有異等之效, 改知紹興府, 充兩浙東路安撫使. 始至, 宗室子有橫於市者, 公致之獄. 宗正司遣吏索之, 相持訩訩. 公卽自劾以聞. 詔公無罪, 而以宗室子屬宗正司施敎刑焉, 一郡竦服. 會稽民貧賦重, 而折色爲尤甚. 公以永祐菆宮在焉爲奏, 得視永安縣故事, 免支移折變, 邑人便之. 高麗竟遣使來, 公聞其至明州, 亟草奏申前議, 得卒謝遣. 城南鏡湖自東漢時瀦以漑田, 爲利甚廣. 中廢不治, 南豐曾舍人佐郡時, 嘗爲之圖而序之, 論其利病甚悉. 公前嗣其官, 讀其文而有志焉. 及來鎭守, 逢歲大饑, 上親札命公賑救, 乃得奏請, 發常平米募饑民以就其役. 旣成, 取凡奏請施行之語刻石湖上, 所以禁防者無不備. 然公(8-4525)去不一年, 守臣不能安集流徙, 反歸咎復湖. 姦民大姓利於爲田, 亦結權貴騰謗議, 而湖復廢矣, 論者惜之. 前虜騎度浙江, 郡守以城降, 而衛士唐□抱石狙擊其酋帥不中, 死罵不絶口, 越人祠之. 歲久廢壞, 公爲改築宮而記其實, 以勸忠義.

 

권형부시랑(權刑部侍郞)에 제수(除授)되어 소대(召對)하면서 말하기를 “신(臣)이 월(越)지방으로부터 이곳에 오면서, 가만히 구천(勾踐)이 와신상담(臥薪嘗膽)했던 그 뜻에 감동(感動)하였습니다. 원컨대 폐하(陛下)께서는 오랑캐가 필시 우리와 강화(講和)하게 되리라는 것만 믿지 마시고, 더욱 자치(自治)의 방책(方策)을 추구하시되 저 구천(勾踐)이 했던 것과 같이 하시어 때가 오기를 기다린 이후에 도모하신다면 반드시 일이 성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강(江)과 절(浙)의 큰물은 이에 양(陽)이 음(陰)의 허물을 이기지 못한 것임을 언급하면서 이 일로 인(因)해 강징(康澄)의 육사(六事)를 천거(薦擧)해 올렸다. 급사중(給事中)으로 옮겨가면서 사례(謝禮)하던 날에 천자로부터 직접 금대(金帶)와 상간(象簡)을 하사(下賜)받았다. 종실(宗室) 거광(居廣)의 기은(祈恩)이 법도를 지나쳤다. 이에 공은 이전의 조서(詔書)를 끌어대면서 이를 물리쳤다. 한달이 채 지나기 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개수(改授)되었다.

除權刑部侍郞, 召對, 言: ‘臣自越來, 竊感勾踐臥薪嘗膽之意, 願陛下毋恃虜之必和, 而益求所以自治, 如勾踐之爲者, 以俟時至而後圖之, 蔑不濟矣.’ 又言江浙大水, 乃陽不勝陰之咎, 因擧康澄六事爲獻. 遷給事中, 謝日, 面賜金帶象簡. 宗室居廣祈恩過制, 公引前詔却之. 不踰月, 改吏部侍郞.

 

때마침 임안(臨安)의 태수(太守)가 힐도(詰盜)를 능숙하게 해내지 못하여 강도를 면죄(免罪)시킨 잘못을 저질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에게 부문각직학사(敷文閣直學士)와 지부사(知府事) 및 양절서로안무사(兩浙西路安撫使)에 충당(充當)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명(命)이 내려오던 날, 경도(京都) 사람들은 서로 하례(賀禮)하였고 이속(吏屬)들은 숨을 죽였다. 조정에 들어가 사례(謝禮)하던 중, 내시성(內侍省)에서 어떤 사람을 추천(推薦)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또 다른 비루(鄙陋)한 일로 부탁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대해 공은 “나의 추천장(推薦狀)은 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아무개 일(某事)과 같은 것은 해당 부서(府署)에 나아가 스스로 말하면 내가 법에 따라 결정(決定)할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감히 공에게 사사로운 일로 간범(干犯)하지 못했다. 태엄(大閹) 고사총(高思聰)의 가동(家僮)이 어떤 주보(酒保)를 구타(毆打)하여 상해(傷害)한 일이 있었다. 공은 그를 체포하여 법에 따라 논죄(論罪)한 후 저자에 조리돌리도록 명(命)했다. 또 종척(宗戚) 귀인(貴人) 가운데는 사사로이 불당(佛堂)을 만들어 민전(民廛)을 착잡(錯雜)하거나 간악한 도적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는데, 관리(官吏)들이 감히 그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은 상께 주청(奏請)하여 그들을 모두 철거했다. 이로부터 권호(拳豪)들이 측목(仄目)하였으며 집정(執政) 또한 기뻐하지 않았다. 이에 [집정(執政)들이 공을] 오랑캐에 사신으로 보내야 한다고 칭탁(稱託)했기에, 또다시 공은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제수되었다. 또 의론을 거처 용대연(龍大淵)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이에 공이 “이 사람은 더불어 행사(行事)를 말할 만한 사람인가?”라고 했다. 공이 이 말을 했다는 소문이 돌자 공은 파면되어 가지 못하고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좌천(左遷)되었다. 공은 힘써 관직을 떠나고자 했다. 이에 구직(舊職)으로 강주태평흥국궁(江州太平興國宮)의 제거(提擧)가 되었다. 처음에 공은 지금은 퇴임한 태부(太傅) 진복공(陳福公)과 함께 강직(剛直)한 성품으로 인해 그 당시 재상들로부터 꺼림을 당했는데, 공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진공(陳公)은 편지를 써서 공을 치하(致賀)하면서 ‘홍곡(鴻鵠)은 높이 비상(飛翔)한다.(鴻鵠高翔)’는 말씀을 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또 이 자리조차 물러났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염안중(閻安中)이 틈을 타서 글을 올려 ‘두 대신이 떠난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니다. 운운(云云)’했다.

會臨安守坐不能詰盜免, 詔以公爲敷文閣直學士․知府事, 充兩浙西路安撫使. 命下之日, 都人相賀而吏屬屛氣. 入謝廷中, 內侍省爲人求薦, 及以他鄙事爲屬者. 公曰: ‘吾薦章不可以求而得, 若某事, 則詣府自言, 吾得以法決之耳.’ 自是人莫敢干以私. 大閹高思聰家僮毆傷酒保, 公命捕論如法, 以徇于市. 宗戚貴人私營佛屋, 錯雜民廛, 藏匿姦盜, 吏不敢捕. 公奏請盡撤之, 由是權豪仄目, 而執政亦不悅. 託以使虜, 復除吏部侍郞, 且議以龍大淵爲副. 公曰: ‘是可與言行事者耶?’ 語聞, 得罷不行, 而下遷禮部侍郞. 公力求去, 乃以舊職提擧江州太平興國宮. 始, 公與今退傅陳福公俱以剛直見忌於時宰, 至是陳公以書(8-4526)賀公, 有 ‘鴻鵠高翔’ 之語. 未幾, 亦引去. 而中書舍人閻安中乘間爲上言, 二臣之去, 非國之福云.

 

거가(居家)한 지 2년이 지나 공은 태평주(太平州) 지사(知事)에 기용(起用)되었다. 당도(當塗)의 백성은 순박(淳朴)하고 일을 간단(簡單)하였다, 오랜 낙토(樂土)였지만 해를 이어 조발(調發;徵發)되어 조채(凋瘵;困乏)가 특히 심각하였다. 공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들을 어루만져 상부(常賦) 외에는 일호(一毫)도 백성으로부터 취하는 것이 없었다. 성(城) 위의 누각(樓閣)이 무너졌기 때문에 해마다 여러 현(縣)으로부터 징발(徵發)하여 이를 수리하다 보니, 백성들이 [누각(樓閣)이] 끝없이 형제(形制)가 쇠삭(衰削)해지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이에 공은 이를 철거(撤去)하고 신축(新築)할 것을 명(命)했다. 또 오직 배를 고계(姑溪)로 갈 수 있는 다리로 삼아 건널 수 있도록 하였다. 조정에서 벽(甓)의 여러 군(郡)에 부세(賦稅)하여 양회(兩淮)에 성(城)을 쌓으라고 명(命)하였다. 이에 공은 선재(羨財)로 도공(陶工)을 모집(募集)하되 또 조정의 명(命)이 있기 전에 이미 이 일을 시행하고 있었으나 백성들은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역양(歷陽)의 축성자(築城者)들이 오랜 역사(役事)를 마치고 어지럽게 귀환(歸還)하면서 볼멘소리를 내면서 군(郡)의 경역(境域)에까지 향해가려 하였다. 관리와 백성들이 이를 두려워하였다. 이에 공이 호소(呼訴)하면서 성하(城下)에 이르러 그들을 후(厚)히 호궤(犒饋)한 다음 돌려보냈으며 난(亂)을 주도한 자를 비밀리에 체포(逮捕)하여 옥에 가두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포상(褒賞)하라는 조서(詔書)가 있었다.

居再歲, 起知太平州. 當塗民淳事簡, 舊爲樂土, 而連年調發, 凋瘵特甚. 公一意拊摩, 常賦外一毫不以取民. 城樓圮壞, 歲調諸縣葺之, 民病無窮而形制衰削. 公命撤而新之. 又維舟以梁姑溪, 令可度. 朝命賦甓諸郡, 以城兩淮. 公以羨財募陶旊, 又先事以集, 而民皆莫之知也. 歷陽築者久役潰歸, 聲言欲趨郡境, 吏民振恐. 公呼至城下, 厚犒遣之, 而密捕倡亂者, 繫獄以聞, 有詔褒諭.

 

2년 후에 휘유각직학사(徽猷閣直學士)에 나아가 융흥부(隆興府) 지사(知事)가 되었으며 강남서로안무사(江南西路安撫使)에 충당(充當)되었다. 강서(江西)는 지역이 넓고 도적이 많았으며 대성(大姓)들이 향곡(鄕曲)을 무단(武斷)하여 양민(良民)에게 해(害)를 끼치고 있었다. 공은 이를 법(法)에 따라 바로잡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낭유(稂莠)가 제거된 연후에 가곡(嘉穀)이 번성(蕃盛)하는 법이니 나로서는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때마침 해마다 크게 역려(疫癘)가 돌아 무격(巫覡)들이 이 틈을 타고 사람들을 미혹(迷惑)시키면서 의약(醫藥)을 금단(禁斷)함에 따라 요절(夭折)하거나 횡사(橫死)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공은, 상(賞)을 걸고 이들을 금절(禁絶)시킬 것이며, 많은 의원(醫員)을 모아 이정(里井)으로 나누어 배치하여 치료(治療)하도록 하고,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 생활(生活)을 보전(保全)해줌으로써 무격(巫覡)들의 계교(計巧)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命令)했다. 성(城)에는 오래 전부터 예장구(豫章溝)가 있었는데 이것이 예전에 비해 인색(湮塞)되어 백성들이 도료(塗潦)를 불편(不便)히 여기고 있었다. 이에 공은 “구혁(溝洫)이 소통되지 않고 기운(氣運)이 막혀 새나가지 않는 것이 역려(疫癘)가 발생하는 이유이다”라고 하고 급히 막힌 곳을 파내어 물길을 통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백성들이 밝고 건조한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공은 모두 여섯 차례 군수(郡守)를 역임했는데, 그곳 풍속에 따라 때로는 너그럽게 때로는 엄격하게 정교(政敎)를 시행했으므로 실제로 공이 베푼 혜택(惠澤)이 백성들에게 미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또 교화(敎化)에 관련되는 일인 경우, 일찍이 솔선(率先)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은 일찍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그 다스림의 혜택(惠澤)이 이려(里閭)에까지 두루 미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그러나 특히 양세(兩稅)를 받아 조정으로 수송(輸送)하는 일에 있어서는 삼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공은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청렴(淸廉)한 관리(官吏)를 가려내어 이 일을 맡겼으며, 그 연납(沿納)의 여러 비용을 살펴서 그 중 그만둘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장문(場門)에 이를 게시(揭示)하도록 하여 곡식을 수송하는 자가 스스로 그 개략(槪略)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관리(官吏)들이 그 교묘(巧妙)함을 용납할 곳이 없도록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이를 편리하다고 여겼다. 당도(當塗)로부터 이 때까지 무릇 여섯 차례 글을 올려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였으나 윤허(允許)받지 못하였고, 또 세 차례나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글에 화답(和答)함으로써 공의 뜻을 드러내었는데, 이 시기에 드디어 납록(納祿)을 청하여 이에 또다시 태평사관(太平祠官)의 자리를 얻어 돌아왔으니, 기실(其實) 건도(乾道) 6년의 일이었다.

二年, 進徽猷閣直學士․知隆興府, 充江南西路安撫使. 江西地廣多盜, 而大姓武斷鄕曲, 爲良民害. 公繩以法, 不少貸. 曰: ‘稂莠去然後嘉穀蕃, 吾非得已也.’ 會歲大札, 巫覡乘間惑人, 禁斷醫藥, 夭橫者衆. 公命縣賞禁絶, 集群醫分井治療, 貧者食之, 全活不可計. 城舊有豫章溝, 比久湮塞, 民病塗潦. 公曰: ‘溝洫不通, 氣鬱不泄, 疫厲所由生也.’ 亟命疏濬, 民得爽塏以居. 公凡六爲郡, 政各因其俗爲寬猛, 實惠之可以及人者爲多. 事有關於敎化者, 未嘗不以爲先. 嘗言: ‘爲邦之惠, 欲其有以徧於里閭, 唯受兩稅之輸爲不可以不謹.’ 故所至必擇廉吏以司之, 省其沿納諸費, 而揭其所不可已者於場門, 輸粟者使得自槪量, 吏無(8-4527)所容其巧, 人甚便之. 自當塗及是凡六上章丐閑, 不允, 三和陶公歸來之章以見意. 至是, 遂以納祿爲請, 乃復得太平祠官以歸, 實乾道之六年也.

 

공은 젊었을 때부터 기절(氣節)이 있음을 자부(自負)하였고 사람됨이 이광(夷曠)하여 성부(城府)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태학(太學)에 유학하였는데 그 때 이미 남들이 공을 지목하여 ‘호오(豪吳)’라 불렀다. 건염(建炎) 초에 종택(宗澤)이 동도(東都)에 유수(留守)로 있을 때, 천하(天下)가 그를 의지하여 무겁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사녀(士女)가 모두들 다투어 남(南)으로 내려와 실성(失聲)할 정도로 곡(哭)하면서 종공(宗公)이 죽었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공은 아직 출사(出仕)하지 않았을 때인데, 나그네로 임안(臨安)에 있던 차에 이 소식을 듣고 오열(嗚咽)하며 눈물을 흘렸다. 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시(詩)를 지어 곡(哭)했는데 그 말이 매우 비장(悲壯)했다. 그리하여 이 시가 즉일(卽日)로 전파(傳播)되어 우정(郵亭)의 전사(傳舍)마다 이 시를 베끼곤 했는데, 이 시를 읽는 자는 지극히 감읍(感泣)했다. 식자(識者)가 이 일로 인해 공을 더욱 기특(奇特)하게 여겼다. 소관(小官)으로 있을 때부터 일시(一時)의 경상(卿相)과 명인(名人)들로서 공을 본 자들은 공을 추중(推重)해 마지않았다. 책부(冊府)로부터 돌아오니, 벼슬길에 오르내린 지 18년이었다. 요우(僚友) 가운데는 먼저 나아가 등용(登用)되어 묘당(廟堂)에 있었던 자가 있었지만, 공은 일찍이 천인(薦引)을 요구하는 한 마디의 말조차 이들에게 한 적이 없었다. 거(居)할 때는 항시 강개(慷慨)하여 “직도(直道)라야 반드시 시행(施行)할 수 있고, 훈업(勳業)이라야 세워서 성취할만하다”고 말했다. 중간(中間)에 입조(立朝)했을 때는 너무나도 항장(骯髒)하여 짝이 없을 정도였으며, 또 [당시 관료사회의 관례에 따라] ‘적게 폄하(貶下)함으로써 영합(迎合)을 추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에 이 때 비소로 호연(浩然)히 벼슬을 떠나 돌아갈 뜻을 가졌다. 이 때문에 일찍이 그의 향리(鄕里)인 석정(石井) 서쪽에 거처할 곳을 정해 두었는데, 그 곳은 산을 등지고 호수(湖水)에 임(臨)한 곳이다. 여기에 아름다운 대나무를 잡다하게 모종하고 그 사이에 정관(亭館)을 축조(築造)하니 사방의 길이가 수 리(里)나 되었다. 이에 ‘호산(湖山)’이라는 방패(牓牌)를 붙였는데, 그 청광(淸曠)하고 요조(窈窕)한 것이 동중(東中)에서 제일이었다. 그러던 중 책부(冊府)로부터 돌아왔을 때 공은 드디어 이 곳에서 생을 마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에 ‘휴휴(休休)’라는 이름의 당(堂)을 짓고 시(詩)를 지어 스스로 ‘마땅히 쉬어야만 하는 일곱 가지 이유(七宜休)’가 있음을 노래하였다. 연이어 글을 올려 고로(告老)하였으나 물러날 수 없었다. 공의 나이 71세가 됨에 따라 더욱 힘써 주청(奏請)하였고 이에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치사(致仕)할 수 있었다. 이에 공은 또 ‘경소당(景疏堂)’과 ‘희백당(希白堂)’을 만들고 ‘호산거사(湖山居士)’라 자호(自號)한 다음 연일(連日) 빈객(賓客)들과 함께 배를 띄우거나 지팡이에 의지하여 그 사이를 상양(徜徉)하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곤 하였는데, 조석(朝夕)으로 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처럼 한 것이 14년이나 되었으니, 공은 대개 이미 유연(翛然)하여 마치 세상에 뜻이 없는 듯했지만, 홀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만은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중간에 태상황제(太上皇帝)께서 공의 장수(長壽)를 경하(慶賀)하고 추은(推恩)하기 위해, 공이 시신(侍臣)이자 질로(耋老)이기도 하다고 하여, 공을 중대부(中大夫)로부터 통봉대부(通奉大夫)로 파격적(破格的)으로 승진(昇進)시키셨다. 훙거(薨去) 시 공의 연세(年歲)는 80세였다.

公自少卽以氣節自負, 爲人夷曠無城府. 早歲游太學, 人已自目爲 ‘豪吳’ 矣. 建炎初, 宗澤留守東都, 天下倚以爲重. 一日, 士女傾都南下, 皆行哭失聲, 言宗公死矣. 公時未仕, 客臨安, 聞之嗚咽流涕, 終夕不寐. 爲詩哭之, 語甚悲壯. 卽日傳播, 郵亭傳舍處處題寫, 讀者至爲感泣, 識者因是益以奇之. 自爲小官, 一時卿相名人見者無不推重. 歸自冊府, 徊翔十有八年, 僚友有先進用․居廟堂者, 公未嘗以一言求薦引. 居常慷慨, 謂直道可必行, 而勳業可立就. 中間立朝, 多骯髒不偶, 又不肯少貶以求合, 始浩然有歸志矣. 故嘗卜居其鄕石井之西, 負山臨湖, 雜蒔華竹, 築亭館其間, 延袤數里, 牓曰 ‘湖山’, 淸曠窈窕, 甲於東中. 至是來歸, 遂決終焉之計. 乃作 ‘休休’ 之堂而賦詩焉, 自謂有七宜休者. 連上章告老, 不得謝. 及年七十有一, 請愈力, 乃得以龍圖閣直學士致仕. 於是又作 ‘景疏’ ‘希白’ 之堂, 而自號曰湖山居士, 日與賓客浮舟倚杖, 徜徉其間, 酌酒賦詩, 竟日夕不倦. 如是者十有四年, 蓋已翛然若無意於世者. 而獨其愛君憂國之心未嘗一日忘也. 中以太上皇帝慶壽推恩, 故侍臣, 加以耋老, 自中大夫特遷通奉大(8-4528)夫. 薨時年適八十矣.

 

 공은 공주(贛州) 흥국현(興國縣) 현승(縣丞) 민(澠)의 딸인 진운곽씨(縉雲郭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여러 차례 석인(碩人)에 봉(封)해졌으며 효근(孝謹) 화의(和懿)하고 치가(治家)에 법도(法度)가 있었다. 공보다 두 달 먼저 졸(卒)하였다. 자식으로는 아들 5인이 있으니, 진(津)은 승의랑(承議郞)으로 통판소흥부사(通判紹興府事)이고, 홍(洪)은 선무랑(宣敎郞)으로 절동제거상평사간변공사(浙東提擧常平司幹辨公事)이며, 옥(沃)은 승사랑(承事郞)으로 첨서진강군절도판관청공사(簽書鎭江軍節度判官廳公事)이며, 박(泊)은 승봉랑(承奉郞)으로 영강현승(永康縣丞)이다. 심(深)은 장사랑(將仕郞)이다. 또 딸 3인이 있으니 승의랑(承議郞) 왕용(王鏞)에게 시집간 딸과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 진양선(陳揚善)에게 시집간 딸은 모두 공보다 먼저 졸(卒)했고 막내딸은 어려서 아직 걷지도 못한다. 손자 손녀는 모두 20명이다. 기(機)는 종사랑(從事郞)이고, 박(樸)은 승무랑(承務郞)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증손(曾孫)으로는 남(男) 1인이 있다.

 娶縉雲郭氏, 贛州興國縣丞澠之女, 累封碩人. 孝謹和懿, 治家有法度, 先公兩月卒. 子男五人, 津, 承議郞․通判紹興府事. 洪, 宣敎郞․浙東提擧常平司幹辨公事. 沃, 承事郞․簽書鎭江軍節度判官廳公事. 泊, 承奉郞, 永康縣丞. 深, 將仕郞. 女三人, 嫁承議郞王鏞․將作監主簿陳揚善者, 皆先卒. 幼未行也. 孫男女二十人, 機, 從事郞; 樸, 承務郞; 餘皆幼. 曾孫男一人.

 

처음에 공은 선대부(先大夫)를 석정(石井)에 장사(葬事)했다. 그리고 그 곁에 약 100여 보(步)되는 곳에 자리에 미리 공의 수장(壽藏)을 마련해 두었었다. 그리하여 공이 훙거(薨去)하자 공의 맏아들 진(津) 등이 공을 받들어 이 곳에 하관(下棺)하고 석인(碩人)을 부장(附葬)했다.

始, 公葬先大夫於石井, 而度其旁百許步, 預爲壽藏. 至是津等奉公以窆, 而碩人附焉.

 

공의 성품(性品)은 지극히 효성(孝誠)스러워 상(喪)을 만나면 반드시 묘(墓)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상기(喪期)가 끝날 때까지 인사(人事)조차 교환(交換)하지 않았으며 최질(衰絰)을 검게 물들이지도 않았다. 선인(先人)께서 남기신 자산(貲産, 즉 財産)은 모두 두 형들께 미루었으며, 그들의 고녀(孤女)를 양육(養育)하여 재물을 두텁게 챙겨서 시집보내주었다. 또 그 형제의 자손 두 사람을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바야흐로 의장(義莊)과 의학(義學)과 의총(義冢)을 만들어 가난한 종족(宗族)을 기다려 도우려 했으나 이 일은 끝내 실현할 수 없었다. 공은 또 향읍(鄕邑)에 대해 더욱 권권(拳拳)하였는데, 흉년(凶年)을 만나면 자신의 자산(資産)을 덜어내어 공사(公私)간 모든 힘을 합해 아낌없이 기민(饑民)들을 진휼(賑恤)하였다. 선행(善行)을 좋아하기를 흡사 그것을 자신이 해낸 것인 듯 여겼고, 악행(惡行)을 미워하기를 마치 그것이 사적(私的)인 원수인 것처럼 여겼으며, 후진(後進)들을 연접(延接)함으로써 그들이 많은 것을 성취(成就)하도록 도왔다. 평일(平日)에는 엄숙(嚴肅)하고 강의(剛毅)하여 감히 범접(犯接)할 수 없을 듯 했지만 그러나 겸허(謙虛)히 묻기를 좋아했으며, 상대가 비록 미천(微賤)한 자일지라도 그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말해주는 것을 경청(敬聽)하기를 즐겨하였다. 자제(子弟)의 교육(敎育)에 더욱 힘써, 자제들에게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너희들이 만약 환로(宦路)에 나가게 되거든 관물(官物) 보기를 마땅히 자기 자신의 물건(物件)과 같이 여겨야 할 것이며, 공사(公事) 보기를 마땅히 자기 개인의 일인 듯이 여겨야 할 것이다. 기필코 부득이(不得已)한 경우, 백성에게 죄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상관(上官)에게 죄를 얻는 것이 낫다. 나의 경우, 평소(平素) 다른 장점(長點)은 없으나, 오직 감히 일호(一毫)나마 스스로를 속이는 짓만큼은 하지 않았다.” 대체로 조정(朝廷)에 드러나고 사방(四方)에 통달(通達)된 공의 대절(大節)은 탁연(卓然)하여 덮어 가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공의 사행(私行) 또한 이처럼 섬실(纖悉)하였다. 어려서부터 노년(老年)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문장을 찬사(撰寫)할 때는 조각(彫刻)을 일삼지 않아 호건(豪健) 준정(峻整)하면서도 주제(主題)가 분명(分明)하였다. 또 공이 지은 시(詩)는 평담(平淡)하면서도 낙천(樂天)의 기풍을 흠모(欽慕)하여 혼후(渾厚) 장율(莊栗)하였으니, 또한 공의 성품이 낙천(樂天)의 사람됨과 그 류(類)를 같이하였다. 공의 저서(著書)로, 표주(表奏) 5권과 시문(詩文) 30권, 화도시(和陶詩) 3권, 당도소집(當塗小集) 및 호산유로전(湖山遺老傳) 각 1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오호(嗚呼)라! 이들은 새겨둘만한 것이로다. 이에 명(銘)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公性至孝, 遭喪必廬墓側, 終制不交人事, 無墨衰絰. 先人貲産, 悉推與二兄, 育其孤女, 厚齎以遣之. 官其兄弟之子孫二人. 方爲義莊․義學․義冢, 以俟宗族之貧者, 而未克就. 尤拳拳於鄕邑, 遇歉歲, 捐己資, 合公私之力以賑之無所愛. 好善如己出, 嫉惡如私仇, 延接後進, 多所成就. 平居嚴毅, 若不可犯. 然謙虛好問而樂聞其過, 不間微賤. 敎子弟尤力, 嘗語之曰: ‘若等從宦, 視官物當如己物, 視公事當如私事. 必不得已, 與其得罪於百姓, 寧得罪於上官. 吾平生無他長, 惟不敢以一毫自欺耳.’ 蓋其大節之見於朝廷․達於四方者已卓然不可掩, 而(8-4529)其私行纖悉又如此.自少至老, 手未嘗釋卷, 屬文不事彫刻而豪健峻整, 指意明白. 爲詩平淡慕樂天, 而渾厚莊栗, 又自類其爲人. 有表奏五卷, 詩文三十卷, 和陶詩三卷, 當塗小集․湖山遺老傳一卷藏於家. 嗚呼! 是可銘已. 銘曰:

 

어떤 선비가 쓸 수 없는 재목인가? 기절(氣節)이 병든 자로다. 바야흐로 봄이 되면 다투어 꽃을 피우나 [기절이 병든 선비는] 아직 얼지도 않아 먼저 꺾여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偉大)한 호오(豪吳)가 있었으니 일세(一世)의 호걸(豪傑)이었노라. 저 권상(權相)을 흘겨보며 아첨(阿諂)하지 않고 곧은 말을 아뢰었으니, 처음에는 비록 언건(偃蹇)하였으나 마침내 명철(明哲)과 짝을 이루었도다. 저들이 우리의 인(仁)을 학대(虐待)했으나 대론(大論)을 횡발(橫發)하였으니, 이에 오랑캐를 쳐야 한다는 모의(謀議)를 이끌어, 돌아가려는 천자의 수레바퀴에 버팀목을 괴었도다. 공의 말이 비록 채용(採用)되지 않았다 해도 공을 향한 당시의 추앙(推仰)은 장렬(壯烈)하였으니, 중간에 조정(朝廷)을 떠나 명도(名都)에 언식(偃息)하였도다. 부세(賦稅)는 공평(公平)하였고 부역(賦役)은 의(義)에 합당했으니 혜택(惠澤)이 두루 미치어 모두가 미더워했도다. 월성(越城)의 남쪽에서 매일 만부(萬夫)를 살렸고, 경수(鏡水)를 생각하며 즐거워했으니 거북도 있고 물고기도 있었노라. 천읍(天邑)이 엄엄(嚴嚴)하여 귀족(貴族)과 강호(强豪)들도 숨을 죽이는데, 공이 전기(旜旗)를 펼쳐 오랑캐 진영으로 사신가려 할 때 ‘그 누구를 나의 부사(副使)로 삼는가?’라고 했으며, 공이 돌아보고 웃으며 ‘이 사람은 함께 일을 도모할 만한 사람인가?’라고도 했도다. 때로는 조정(朝廷)에서 그리고 때로는 번진(藩鎭)에서 공은 ‘나의 의지(意志)’에 따라 만사를 처리해 나갔도다. 고계(姑溪)는 유유(油油)하여 혜택(惠澤)이 봄처럼 흘렀으나 종릉(鍾陵)에 낭유(稂莠)가 있었을 때는 이들을 제거하여 가을에는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였도다. 나의 호수는 공명(空明)하고 나의 대나무는 수수(修修)하니, 나 피로하면 돌아가 쉬리니 그 즐거움이 휴휴(休休)하도다. 대질(大耋)의 나이에 종용(從容)히 위태(委蛻)하신 바,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일을 놓고 천지를 부앙(俯仰)한들 어찌 참괴(慙愧)함이 있으리오. 중오(中奧)의 언덕에 공의 묘도(墓道)가 심원(深遠)하도다. 나의 명문(銘文)이 간행(刊行)되지 않더라도 그 뿐이지만, 부디 후세의 자손들을 돈독(敦篤)케 하시시를!

士孰不材? 病氣與節. 方春爭華, 未凍先折. 有偉豪吳, 一世之傑. 睨彼權相, 弗媚而謁. 始雖偃蹇, 竟偶明哲. 彼虣我仁, 大論橫發. 乃贊征謀, 乃軔還轍. 言雖弗用, 時仰壯烈. 中去朝行, 偃息名都. 賦平役義, 惠達信孚. 越城之南, 日活萬夫. 思樂鏡水, 有龜有魚. 天邑嚴嚴, 貴彊屛氣. 張旜以行, 孰俾吾貳? 公顧曰嘻, 是足與治. 于廟于藩, 姑適吾意. 姑溪油油, 惠澤春流. 鍾陵有莠, 則廩其秋. 我湖空明, 我竹修修. 我倦而歸, 其樂休休. 大耋之年, 從容委蛻. 循始訖終, 俯仰奚愧. 中奧之原, 有窅其隧. 我銘不刊, 以篤來裔!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유공(劉公) 신도비(神道碑)(觀文殿學士劉公神道碑)

 

순희(淳熙)5년 여름,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 태중대부(太中大夫) ․ 건강부(建康府) 지사(知事) ․ 강남동로안무사(江南東路安撫使) ․ 행궁유수(行宮留守)를 지낸 팽성(彭城) 유공(劉公)께서 관사(官舍)에서 병상(病床)에 눕게 됨에 따라, 곧 절하고 상소(上疏)하여 “신(臣)은 병이 들어 부사(府使)의 일을 감당할 힘이 없으니, 원하옵건대 부약(符鑰)을 올리고 고향(故鄕) 산천(山川)에 돌아가 죽기를 바라오니 폐하(陛下)께서는 부디 애긍(哀矜)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당시 천자께서는 바야흐로 공에게 의지하며 별도(別都)를 중시하시어 조만간에 공을 불러 쓰시려 했기 때문에 공의 상소 내용을 곧바로 청허(聽許)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차에 공의 병이 이미 위급해졌기 때문에 또 다시 상소(上疏)하여 노퇴(老退)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상께서 매우 우려(憂慮)하시며 급히 중귀인(中貴人) 보내 의원(醫員)을 데리고 달려가 진찰(診察)토록 조처하셨다. 그런데 공은 이들이 도착하기 전인 가을 7월 갑자(甲子)에 문하생(門下生)을 불러 천여언(千餘言)을 구술(口述)하여 전하면서 이를 문장으로 갖추어 상주(上奏)케 하였는데, 시폐(時弊)의 근본(根本)을 극언(極言)하였으며 또 쓸만한 여러 신하들을 천거하는 내용이었다. 글을 마치고 이를 봉(封)하여 올리고 나서 얼마 있지 아니하여 공은 훙거(薨去)하였다. 상께서는 공의 상주문(上奏文)을 열람(閱覽)하시고 놀라 탄식하셨다. 이에 그날 즉시 공이 이전에 노퇴(老退)를 주청(奏請)한 글을 가져오게 하시고 통의대부(通議大夫)로 치사(致仕)토록 조처하셨다. 공의 부고(訃告)가 조정에 도착하자 상께서는 더욱 탄식하고 애도하셨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공을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추증(追贈)하라 하시고, 하루 동안 조회(朝會)를 파(罷)하라 하셨다. 또 유사(有司)에게 명(命)하여 공의 상(喪)을 극진히 비호(庇護)하고 또 장사(葬事) 비용을 공급(供給)하라고 하셨다. 명년(明年) 2월에 공의 사자(嗣子)인 학아(學雅) 등이 마침내 공의 영구(靈柩)를 봉승(奉承)하여 건녕부(建寧府) 구녕현(甌寧縣) 풍락리(豐樂里) 신력(新歷)의 언덕에 장사(葬事)하고 조정(朝廷)에 청하여 그 이름을 바꾸어주기를 희망하였다. 이 일이 봉상(奉常)으로 내려가자, [봉상(奉常)에서는] 공의 공덕(功德)이 ‘염공방정(廉公方正)하고 위덕극취(威德克就)하다’하여 마땅히 ‘충숙(忠肅)’을 시호(諡號)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했고, 고공(考功)의 심사를 거처 이사(異詞)가 없었기 때문에 ‘가(可)함을 알리라’는 조서(詔書)가 있었다. 이에 공의 애락(哀樂)의 시종(始終)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묘수(墓隧)의 비(碑)는 오랫동안 세워지지 못했다. 학아(學雅)등이 두려워하며 자주 서로 더불어 체읍(涕泣)하면서 내게 와서 글을 청하였다. 희(熹)는 일찍이 제부(諸父) 사이에 공을 기탁(寄託)하였는데 드디어 공과 더불어 서로 길러주고 키워주는 사이가 되어 공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공께서 만년(晩年)에 나를 도와주심이 또한 더욱 돈독(敦篤)하였다. 돌아보건대 공은 비록 훌륭한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의(義)에 있어서만은 남에게 사양(辭讓)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淳熙五年夏, 觀文殿學士 ․ 太中大夫 ․ 知建康府事 ․ 江南東路安撫使 ․ 行宮留守彭城劉公寢疾府舍, 卽拜疏言: ‘臣病, 力不任府事, 願上符鑰, 歸死故山, 惟陛下哀之.’ 時天子方倚公以重別都, 旦莫且召用之, 未卽聽許. 而公疾已革矣, 再疏請老. 於是上乃深以爲憂, 亟遣中貴人挾侍醫馳驛診視. 未至, 秋七月甲子, 公召門下生, 口授千餘言, 使具爲奏, 極言時弊根本, 且薦群臣之可用者, 畢封上之, 有頃而薨. 上覽奏驚歎, 卽日出公前請老章, 使以通議大夫致仕. 及訃聞, 益嗟悼, 詔贈光祿大夫, 罷朝一日, 且命有司護致其喪, 仍給葬事. 明年二月, 公之嗣子學雅等遂奉公柩葬於建寧府甌寧縣豐樂里新歷之原, 而請於朝, 冀有以易其名者. 事下奉常, 以公廉公方正, 威德克就, 宜謚 ‘忠肅’. 過考功無異詞, 詔報曰可, 於是公之終始哀樂無所不備. 獨墓隧之碑久未克立, 學雅等懼, 數相與涕泣來請文. 熹蚤託公諸父間, 遂與公相長大, 知公爲詳. 而公晩歲相予亦益篤, 顧雖不文, 義有所不得辭也.

 

공의 가문(家門)은 당(唐)나라 말엽(末葉)에 장안(長安)으로부터 남쪽으로 옮겨와서 드디어 건(建) 지방 사람이 되었다. 대대로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에서 살았다. 휘(諱)가 민선(民先)인 분은 돈독(敦篤)하고 순박(純樸)하여 훌륭한 행실이 있었으며 안정선생(安定先生)을 따라 춘추학(春秋學)을 전수(傳受)하였다. 만년(晩年)에 여러 차례 천거(薦擧)되어 관직(官職)을 얻었다가 귀가(歸家)하였는데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자가 수백 인이었다. 거듭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추증(追贈)되었으니 바로 공의 증조부(曾祖父)이다. 태자태보(太子太保)께서 충현공(忠顯公) 겹(韐)을 낳았는데, 정강(靖康)의 난(難)에 의(義)를 따라 굽히지 않고 죽었다. 거듭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충현공(忠顯公)께서는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 자우(子羽)를 낳았는데, 건염(建炎)과 소흥(紹興) 연간에 천(川)과 섬(陝)의 군대(軍隊)를 보좌하여 공(功)이 있었다. 거듭 소부(少傳)에 추증(追贈)되었다.

(8-4531)公家唐末自長安南徙. 遂爲建人, 世居崇安縣五夫里. 有諱民先者, 敦樸有行, 從安定先生受春秋學. 晩以累擧得官歸家, 敎授學者至數百人. 累贈太子太保, 於公爲曾祖. 太保生忠顯公諱韐, 靖康之難, 秉義不屈而死, 累贈太師. 忠顯公生徽猷閣待制諱子羽, 建炎․紹興之間佐川陝軍有功, 累贈少傳.

 

공은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 자우(子羽)의 장자(長子)이니, 휘(諱)는 공(珙)이고 자(字)는 공보(共父)이다. 어릴 때 시은(施恩)에 의해 승무랑(承務郞)을 보임(補任)했고 자라나서는 계부(季父) 병산선생(屛山先生)을 따라 배웠다. 진사(進士) 을과(乙科)로 합격했다. 소흥부(紹興府) 도세무(都稅務) 및 담주(潭州) 남악묘(南嶽廟)를 조감(調監)하였고 서외(西外) 돈종원(敦宗院)을 주관(主管)하였다. 이에 소부(少傅) 및 조모(祖母) 한국부인(韓國夫人) 여씨(呂氏)의 상(喪)을 당했으며, 상기(喪期)가 끝나고 나서는 왕궁(王宮)의 대학(大學)과 소학(小學)의 교수(敎授)가 되었다. 비서성(秘書省) 교감서적관(校勘書籍官) ․ 예부낭관(禮部郞官) ․ 중서서인(中書舍人)을 권섭(權攝하였는데, 그 당시 진씨(秦氏)가 권세를 부린 지 오래되어 사대부(士大夫)들이 이미 절절(竊竊)히 부참사(符讖事)를 말하고 있었다. 진회秦(檜)는 이를 계기로 그의 아비를 추시(追諡)하고자 예관(禮官)을 소집(召集)하여 그 방법을 의론하고 묻고자 하였는데, 공이 시간에 맞추어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노(怒)하여 공을 축출(逐出)한 것이다. 해를 넘기고 진회(秦檜)가 죽고 나자 이에 공은 대주(台州) 숭도관(崇道觀)을 주관(主管)할 수 있었다. 또 부름을 받아 대종정승(大宗正丞)이 되었고 비서승(祕書丞)에 개수(改授)되었으며 상서이부원외랑(尙書吏部員外郞)으로 옮겨가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러나 공은 천주(薦主)를 피하여 이전의 관직으로 되돌아 왔다. 전조(銓曹)의 법이 은밀(隱密)하여 관리(官吏)들이 간특(姦慝)한 짓을 해도 관(官)에서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은 조정(朝廷) 안에 영식(令式 ; 規定)을 두어 선집자(選集者)로 하여금 그것을 위반한 자를 지목하여 해당 관리를 힐문(詰問)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매우 편(便)하게 여겼다.

公其長子也. 諱珙, 字共父, 少以恩補承務郞, 長從季父屛山先生學. 擧進士乙科, 調監紹興府都稅務․潭州南嶽廟, 主管西外敦宗院. 遭少傅及祖母韓國夫人呂氏憂, 除喪, 爲諸王宮大小學敎授, 權秘書省校勘書籍官․禮部郞官․中書舍人. 時秦氏用權久, 士大夫已竊竊言符讖事. 檜欲因以追諡其父, 召會禮官議問其法, 以公不時至, 怒而逐之. 踰年, 檜死, 乃得主管台州崇道觀. 召爲大宗正丞, 改祕書丞, 遷尙書吏部員外郞, 除監察御史. 避薦者, 還故官. 銓曹法密吏姦, 官不能制. 公寘令式庭中, 使選集者得指其違以詰吏, 人甚便之.

 

 겸(兼)하여 비서소감(祕書少監)을 권섭(權攝)하고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옮겼으며, 겸(兼)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권섭(權攝)하였다. 금(金)의 량(亮)이 맹약(盟約)을 어김에 천자(天子)께서 진노(震怒)하시어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북벌(北伐)하였다. 그리하여 일시(一時)의 조서(詔書)와 격문(檄文)이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는데, 사기(詞氣)가 격렬(激烈)하여 그 내용을 들은 자 중에는 간혹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어사(御史) 두신로(杜莘老)는 태엄(大閹) 장거위(張去爲)가 교지(敎旨)를 거스르고 항복(降伏)을 도왔다고 하여 그를 탄핵(彈劾)하였는데, 공이 조서(詔書)를 봉환(封還)하였기에 신노(莘老)는 제거(除去)되지 않을 수 있었다. 또 공은 주상(主上)을 따라 건강(建康)에서 신고(辛苦)하였고 겸(兼)하여 직학사원(直學士院)을 권섭(權攝)하였다. 당시 장충헌공(張忠獻公)은 머무르며 행궁(行宮)을 지키고 있었는데, 뭍사람들은 그의 거가(車駕)가 동으로 돌아가야 하며 기필코 정토군(征討軍)의 일을 그에게 기탁(寄託)해야 한다고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서(詔書)를 내려 양존중(楊存中)을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에 임명했고, 중외(中外)는 크게 실망(失望)하였다. 이에 공은 그것이 불가함을 상주(上奏)하였다. 주상(主上)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다만 장준(張浚)의 입장을 위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시고 거듭 명(命)을 내리시니, 재상(宰相)이 공을 불러 황제의 뜻을 이해시키려 하면서 또 말하기를 “이를 재론(再論)한다면 장공(張公)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나는 국가(國家)를 위한 계책(計策)을 말한 것이다. 어찌 장공(張公)을 위해 도모(圖謀)할 겨를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더욱 힘써 재론(再論)하였다. 이 일은 마침내 조용하게 되었다.

 兼權祕書少監, 遷起居舍人, 兼權中書舍人. 金亮渝盟, 天子震怒, 悉師北伐. 一時詔檄, 多出公手, 詞氣激烈, 聞者或至泣下. 御史杜莘老劾大閹張去爲忤旨左降, 公封還詔書, 莘老得不去. 從上幸建康, 兼權直學士院. 時張忠獻公留守行宮, 衆謂車駕東還, 必以征討軍事爲寄. 俄而詔下, 乃以楊存中爲江淮宣撫使, (8-4532)中外大失望. 公奏論其不可, 上曰: ‘此特爲張浚地耳.’ 命再下, 宰相召公諭旨, 且曰: ‘再論, 則累張公矣.’ 公曰: ‘某爲國家計, 豈暇爲張公謀哉!’ 再論愈力, 事乃寢.

 

중서사인(中書舍人) ․ 직학사원(直學士院)에 진제(眞除)되었다. 때마침 건왕(建王)을 황태자(皇太子)로 세우라는 조서(詔書)가 있어, 공은 황제의 조명(詔命)에 따라 조정에 들어가 조초(詔草)를 살폈다.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자 시험 삼아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 당시는 남북(南北)이 크게 파병(罷兵, 즉 停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양국(兩國)이 서로 대등(對等)한 예(禮)를 행할 참이었다. 그러나 사자(使者)가 가자마자 곧바로 곤욕(困辱)을 당하고 돌아왔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공을 위해 그 위태(危殆)함을 말했다. 그러나 공은 [금(金)나라에 사자로 가라는 조정의] 명(命)을 받고 강개(慷慨)한 심정이 되어, 가인(家人)에게 구갈(裘葛)의 겸부(兼副)를 다 갖추어 행차(行次)할 터임을 알리며 말하기를 “가사(假使) 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돌아오는 것은 기약(期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주상(主上)께서는 부사(副使)가 뇌물을 받고 제리(除吏)했으나 공은 홀로 사사롭게 한 바가 없었다는 것을 듣고 수찰(手札)을 써서 포유(褒諭)하시며 매우 총애(寵愛)하시었다. 그러나 마침내 예(禮)에 관한 논의에 결론(決論)이 나지 않아 결국 사신 행차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별자리에 변동이 있고 한재(旱災)와 황충(蝗蟲)의 피해가 있었기에 주상께서는 크게 궐정(闕政)을 묻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공은 “근년(近年) 이래, 강유(綱維)가 해이(解弛)해지고 방종(放縱)해져 상(賞)은 있으나 벌(罰)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제장(諸將)이 군사(軍士)들을 각박(刻剝)하게 대하며 교결(交結)을 일삼고 있고, 안으로 조정(朝廷)은 여러 로(路)를 구휼(救恤)하지 않고 각 로(路)는 군(郡)을, 군(郡)은 현(縣)을, 그리고 각 현(縣)은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고 있습니다. 간혹 심한 경우는 거듭 탐학(貪虐)을 일삼아 자신의 사욕(私慾)만을 만족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군민(軍民)의 원망(怨望)이 아래에서 날로 쌓여가고 있어 장차 그 재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陛下)께서는 공경(恭敬)하고 검소(儉素)히 하시어 날로 새로워지는 덕(德)을 확충(擴充)하시고, 무익(無益)한 놀이에 내달리는 일이 없도록 하시며, 준량(俊良)들을 높이 등용하시고, 간사(奸邪)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 배척(排斥)하소서. 그렇게 하신 연후(然後)에 신상필벌(信賞必罰)하시고 가까운 것은 거두어들이고 먼 것을 징계(懲戒)하시어 빠진 군정(軍政)을 수리(修理)하시고, 쓸 데 없는 것들은 절약하여 부렴(賦斂)을 너그럽게 하시며, 군수(郡守)를 신중히 선택(選擇)하시고 장리(贓吏)는 주살(誅殺)하시어 우리 백성들의 삶을 두터이 하신다면 재이(災異)가 거의 소멸(消滅)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이에 또 일찍이 주상(主上)을 위해 “적(敵)을 대응(對應)함에 일정(一定)한 술책은 없으며, 나라를 부강케 함에 바꿀 수 없는 대책(對策)이란 없는 법입니다. 대저 강화(講和), 전쟁(戰爭), 수비(守備)는 모두 이른바 적(敵)에게 대응(對應)하는 세 가지 계책이지만 미리 도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정사(政事)를 닦아 국세(國勢)를 부강(富强)게 함으로써 이 세 가지를 운용할 수 있는 권병(權柄)이 나에게 있도록 하고 그리하ㅓ여 그것을 운용함에 이롭지 않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이에 바꿀 수 없는 대책(對策)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眞除中書舍人․直學士院. 會詔立建王爲皇太子, 宣入視草. 今上卽位, 借禮部尙書使金國. 是時南北甫罷兵, 始爲鈞敵之禮, 使者往輒困辱而歸, 人皆爲公危之. 公受命慷慨, 戒家人悉裘葛兼副以行, 曰: ‘藉令不死, 歸未可期也.’ 上聞副使以賄除吏, 而公獨無所私, 手札褒諭甚寵. 然竟以議禮不決, 不果行也. 詔以星變旱蝗, 大詢闕政. 公言: ‘比年以來, 綱維解縱, 有賞無罰. 外則諸將刻剝軍士, 以事交結; 內則朝廷不恤諸路, 路不恤郡, 郡不恤縣, 縣不恤民, 甚或重爲貪虐, 以快己私. 軍民之怨日積于下, 其禍將有不可勝言者. 願陛下擴恭儉日新之德, 屛馳騁無益之戲, 登崇俊良, 斥遠邪佞, 然後信賞必罰, 戢近懲遠, 以修軍政之闕; 節浮冗․寬賦歛, 精擇郡守, 誅鋤臟吏, 以厚吾民之生, 則災異庶乎其可消矣.’ 間又嘗爲上言: ‘應敵無一定之謀, 而彊國有不易之策. 夫曰和, 曰戰, 曰守, 皆所謂應敵之計, 不可預圖者. 惟修政事以彊國勢, 使三者之權在我而用無不利, 乃爲不易之策耳.’

 

노장(老將) 전사중(田師中)이 죽자 그의 집에서 경사(京師)에 사제(賜第)를 얻기를 요청하였다. 또 이가(李珂)라는 사람은 귀행(貴幸)들과 관통(貫通)하여 관직(官職)을 얻은 사람인데, 스스로 상주(上奏)하여 독부연(督府掾)이 되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대궐(大闕)에서 조서(詔書)가 내려오자 공은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불가(不可)하다고 상주(上奏)하였다. 듣지 않자 공은 재차 상주(上奏)하여 극론(極論)하였고, 마침내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공은 근습(近習)의 의사(意思)를 많이 어기게 되었고, 이에 재상(宰相) 중에도 또한 남몰래 공을 꺼리는 자가 있어, 공을 집현전수찬(集英殿修撰) 및 천주(泉州) 지사(知事)로 내보내게 되었다. 임지로 떠나기도 전에 구주(衢州) 지사(知事)로 바뀌었다. 처음 임지에 도착해서는 모든 일을 요속(僚屬)에게 맡기고 무엇 하나 묻지 조차 않았다. 이에 사람들 중에는 간혹 공이 다시는 백성 다스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며, 공의 의지(意志)가 자못 치민(治民)을 경시(輕視)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속이는 자가 득세(得勢)하고 굽은 자가 기를 펴며, 군하(羣下)는 손을 거두고 있어 일을 해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공은 비로소 그들을 크게 외복(畏服)시키고 무릇 정원(正員) 밖에 둔 자들은 모두 파면(罷免)하였다. 조미(租米)를 받을 때는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개(槪)를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발초소적(發鈔消籍)을 실시할 때에도 모두 규정과 원칙에 따라 하였다. 이에 전리(田里)가 크게 편안해졌다.

(8-4533)故將田師中死, 其家請得賜第京師. 又有李珂者, 以關通貴幸得官, 而自奏求爲督府掾. 詔從中下, 公皆奏以爲不可. 不聽, 再奏極論, 竟皆罷之. 然由此遂多忤近習意, 而宰相又有陰忌公者, 出公爲集英殿修撰,知泉州. 未行, 改知衢州. 始至, 委事僚屬, 一無所問. 人或以公未更治民, 意頗輕之. 旣而欺者得, 枉者伸, 羣下歛手, 不能有所爲, 始大畏服. 凡吏員外置者, 悉罷之. 受租米, 使民得自操槪. 其發鈔消籍, 皆有程式, 田里大安.

 

건도(乾道) 원년(元年)에 호남(湖南)에 한재(旱災)와 기근(饑饉)이 닥쳤다. 침주(郴州) 의장(宜章)의 백성인 이금(李金)은, 당시 현(縣)에서 유향(乳香)의 구매(購買)를 급히 강행(强行)함으로 인해 연유(緣由)된 바 [현(縣)에 대한] 대중들의 노여움을 틈타 마침내 난(亂)을 일으켰다. 모여든 군중은 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길을 나누어 남쪽으로 나가 광동(廣東) 및 광서(廣西)의 아홉 군(郡)의 지경(地境)을 범했다. 돌아오면서 도주(道州) 계양군(桂陽軍)의 경계(境界)에 들어가, 살육(殺戮)과 약탈(掠奪)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자행했다. 연이어 침성(郴城)과 계성(桂城) 두 성을 격파(擊破)하였다. 이에 여러 도(道)가 진동(震動)했다.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우려(憂慮)하여 공을 부문각대제(敷文閣待制) ․ 담주(潭州) 지사(知事) ․ 형호남로(荊湖南路)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 공은 이상의 직책들을 겸행(兼行)하라는 명을 받고 5월에 경내(境內)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도적(盜賊)의 무리들은 이미 수만 명이었다. 급히 이러한 실상(實狀)을 상주(上奏)하여, 형(荊)과 양(襄)에 명을 내려, 그곳 병졸들을 파견하여 분명(奔命)토록 해 줄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또 제치사(制置使) 심개(沈介)에게 공문을 보내 말하기를 “길이 멀고 도적의 형세가 치열합니다. 조서(詔書)가 내려올 때를 견주어 보니 장차 일에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에 편의(便宜)로 군대를 출동시켜 주시기를 청하오니, 혹시라도 나중에 조정에서 ‘멋대로 군대를 일으킨 것’을 죄(罪)로 여기게 되면 내가 그 죄를 감당(堪當)할 것이고 감히 공에게 누가 되지는 않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치사(制置使)는 즉시 군대를 보내었고 조보(詔報) 또한 공의 요청(要請)과 같았다. 그러나 이들 군대가 모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적(盜賊)의 세력(勢力)은 더욱 확장(擴張)되었다. 상음(湘陰) 교구(橋口)의 경우, 도적 무리 수백 인(人)이 난(亂)을 틈타 슬며시 발동(發動)하여 관부(官府)에 아주 가깝게 접근함으로써 인심(人心)이 더욱 동요(動搖)하였다. 이에 공은 역병(役兵)을 간발(簡拔)하여 그들을 공격(攻擊)하였다. 모집된 백성 중 도적을 참수(斬首)한 자에 대해서는 모두 후(厚)하게 상(賞)주었다. 또 도적(盜賊)이 은장(隱臟)한 것에 대해서는 많건 적건 관계없이 관(官)에서는 일체 불문(不問)에 부쳤다. 여러 날 지나지 않아 도적의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은 자를 모두 체포(逮捕)하여 참(斬)하였다. 이에 상(賞)은 믿을 수 있게 되고 형(刑)은 위엄(威嚴)을 되찾게 되어 사기(士氣)가 크게 진작(振作)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도적을 깨트리는 것이 기약(期約)할 수 있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乾道元年, 湖南旱饑. 郴州宜章民李金以縣抑買乳香急, 乘衆怒猝起爲亂, 衆踰萬人, 分道南出, 犯廣東․西九郡之境. 還, 入道州桂陽軍界, 殺掠萬計. 連破郴․桂兩城, 數道大震. 朝廷憂之, 以公爲敷文閣待制․知潭州․荊湖南路安撫使. 公受命兼行, 以五月入境, 則賊衆已數萬人矣. 亟以實奏, 請下荊襄發卒奔命. 且移書制置使沈介曰: ‘道遠賊熾, 比詔下, 且不及事. 請以便宜出師, 卽朝廷以擅興爲罪, 吾自當之, 不敢以累公也.’ 制置使卽爲遣兵, 而詔報亦如公請. 然皆未有至者. 而賊勢愈張. 湘陰橋口, 羣盜又數百人乘亂竊發, 密邇府下, 人心益搖. 公簡役兵擊之, 募民有得盜斬首者, 皆厚其賞. 盜所隱臟, 無多少, 官一不問. 不數日, 悉捕斬無脫者. 於是賞信刑威, 士氣大振, 人知破賊之有期矣.

 

건도(乾道) 원년(元年) 6월에, 제치사(制置使)가 보낸 장수인 전보(田寶)와 양흠(楊欽)이 이에 병사(兵士) 수천(數千)명을 거느리고 도착하였다. 공은 이들을 맞아 위로(慰勞)하고 위무(慰撫)하기를 매우 후(厚)히 하였다. 이에 제군(諸軍)이 감분(感奮)하여 사력(死力)을 다하고자 하였다. 공은 양흠(楊欽)과 함께 대화한 후 그의 능력(能力)을 알아보고, 제군(諸軍)에 격문(檄文)을 보내 모두 양흠(楊欽)의 지휘를 받으라 하고 그의 무리를 이끌고 북을 치며 전진(前進)하도록 했다. 또 명령을 내리기를, 도적의 무리를 모아 체포하거나 참(斬)하여 관리(官吏)에게 가져오는 자에 대해서는 죄(罪)를 면제하고 상을 준다고 하였다. 이에 양흠(楊欽) 등이 연이어 전투(戰鬪)에서 도적들을 격파(擊破)하였다. 공은 또 제장(諸將) 중 뒤에 도착한 자들을 사방으로 파견해서 도적들의 기세(氣勢)를 분산시키고 아군의 군량 보급로를 소통시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군(大軍)이 드디어 의장(宜章)에 진입(進入)했다.

(8-4534)六月, 制置使所遣將田寶․楊欽乃以其兵數千人至, 公所以迎勞慰撫之者甚厚. 諸軍感奮, 願盡死力. 公與欽語, 知其能, 檄諸軍皆受節度, 使率其衆, 鼓行而前. 下令募賊徒相捕斬詣吏者, 除罪受賞. 於是欽等連戰破賊, 諸將後至者亦遣四出, 以分賊勢․通糧道, 大軍遂入宜章.

 

건도(乾道) 원년(元年) 8월에, 용강(龍岡) 아래에서 최후의 일전이 있었다. 적병(賊兵) 수만(數萬)이 진(辰)방에서 신(申)방으로 이동하였다. 관군(官軍)이 조금 퇴각(退却)했다. 그러나 양흠(楊欽)은 피발(被髮)한 채 크게 부르짖고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자유자재로 도적에게 충돌(衝突)해 들어갔다. 이에 도적(盜賊)이 둘로 나뉘었다. 그들 중 전열(前列)에 있던 정병(精兵)이 섬멸(殲滅)되자 나머지는 모두 숨거나 도주했다. 이에 망산(莽山)까지 추격하였다. 도적 무리 가운데 조언(曹彦)과 황공(黃拱)이 드디어 이금(李金)과 그의 심복(心腹)인 황곡(黃谷)을 사로잡아 항복해 왔다. 양흠(楊欽)은 끝까지 추격하여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그 추호(酋豪, 즉 頭領)들을 모조리 주살(誅殺)했다. 그런데도 지당(支黨, 즉 徒黨)으로 협박을 받아 서로 따르며 산골짜기에 도망가 숨은 자들이 아직도 많았다. 이에 공은 양흠(楊欽) 등에게 군대(軍隊)를 물리고 자진하여 투항(投降)해 오는 자들을 받아들이도록 했더니 모두들 서로 이끌고 와서 명령을 따랐다.

八月, 鏖龍岡下. 賊兵數萬, 自辰至申, 官軍稍却. 欽被髮大呼, 策馬橫衝之. 賊分爲兩, 其前列精兵殲焉, 餘皆遁走. 追至莽山, 賊黨曹彦․黃拱遂執李金與其腹心黃谷以降. 欽因窮追深入, 盡誅其酋豪, 而支黨脅從竄匿山谷者尙衆. 公諭欽等郤兵而聽其自詣, 則皆相率聽命.

 

건도(乾道) 원년(元年)이 다할 무렵, 군대가 귀환(歸還)하였다. 이금(李金) 등 수십 인이 모두 사형(死刑)에 처해졌다. 나머지는 모두 조서(詔書)에 따라 석방(釋放)되었다. 옛 전택(田宅)으로 되돌아간 자가 수천이나 되었다. 이에 공은 조언(曹彦)과 황공(黃拱)에게 관직을 내리도록 상주(上奏)하였고, 제장(諸將)의 공(功)을 나열(羅列)한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또한 조금도 사사롭게 처리한 점이 없었다. 주상(主上)께서는 재삼(再三) 가탄(嘉歎)하시며 공을 부문각직학사(敷文閣直學士)로 진직(進職)하시었다. 또 쇄서(璽書)를 하사(下賜)하시며 “근세(近世)에 서생(書生)들이 다만 청담(淸談)에만 힘쓰다 보니, 경륜(經綸)에 관한 실질적(實質的)인 재능(才能)은 대개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짐(朕)은 매번 동진(東晋) 시대와 같은 상황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경(卿)은 이미 군도(群盜)를 주살(誅殺)하여 그 내용이 공장(功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제장(諸將)의 우열(優劣)과 도적(盜賊)을 격파(擊破)한 전후(前後) 사정을 역력(歷歷)히 볼 수 있다. 더욱 면전(勉旃)하여 짐(朕)의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라고 하시었다.

歲盡師還, 金等數十人皆伏誅, 餘皆稱詔釋之, 復故田宅者以千數. 奏官曹彦․黃拱而列上諸將功狀, 又不以一毫有所私. 上嘉歎再三, 進職敷文閣直學士, 且賜璽書曰: ‘近世書生但務淸談, 經綸實才蓋未之見, 朕以是每有東晉之憂. 今卿旣誅羣盜, 而功狀詳實, 諸將優劣․破賊先後歷歷可觀. 宜益勉旃, 以副朕意.’

 

도적들이 이미 평정되자 경내(境內)가 바로잡히고 맑아졌다. 이에 공은 주상(主上)의 은혜(恩惠)를 선포(宣布)하고 힘써 관용(寬容)의 정치를 시행하였다. 또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말하기를 “이제 폐하(陛下)의 신령(神靈)함에 의지하여 비록 도적을 격파(擊破)하는 다행(多幸)함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급히 훌륭한 수재(守宰)를 가려내 임명하고 부렴(賦斂)을 너그럽게 하여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해주지 않으면 한 명의 이금(李金)이 죽더라도 또 다른 한 명의 이금(李金)이 살아나게 될 것이니, 신(臣)은 호남(湖南)이 지금부터 편안할 날이 없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나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또 “악(鄂)의 군대를 머물러 두어 침(郴)과 계(桂)를 지키도록 하고, 더욱 널리 군대를 찾아 모집(募集)하여 주(州)에 주둔한 군대의 결손(缺損)을 보충해야 합니다. 또 진무(鎭撫)와 호궤(犒饋)를 후(厚)히 하고 기율(紀律)을 엄격히 하여 때때로 의무적으로 이를 연습(練習)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상주(上奏)하였다. 이에 호남(湖南)이 은연(隱然) 중에 거듭 진무(鎭撫)되어 간도(姦盜)들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상려(商旅)가 또다시 야숙(野宿)할 수 있게 되었다.

賊地旣定, 境內正淸. 於是公乃宣布上恩, 力行寬政, 且爲請於朝曰: ‘今以陛下神靈, 雖幸破賊, 然不亟擇守宰․寬賦歛以安居民, 卽一李金死, 一李金生, 臣恐湖南自是無寧歲也.’ 又奏留鄂兵以戍郴․桂, 而益廣蒐募, 以補州兵之缺, (8-4535)厚撫犒․嚴紀律而時勒習之. 於是湖南隱然爲重鎭, 姦盜屛迹, 商旅復野宿焉.

 

건도(乾道) 3년에 소환(召還)되어 주상(主上)을 배알(拜謁)하고 가장 먼저 논란(論難)하기를 ‘독단(獨斷)이 비록 영주(英主)의 능사(能事)이긴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중지(衆智)에 합당(合當)하고 지공(至公)한 기준에 의해 질정(質正)해본 연후에라야 천리(天理) 인심(人心)의 올바름에 부합(符合)되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첨모(僉謀)를 버리고 사견(私見)을 따라 독단적으로 구우(區㝢)를 다스리려 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면, 마침 그것으로 인해 사방으로 통달(洞達)해야 할 주상(主上)의 그 총명(聰明)이 가려지게 되고, 또 좌우(左右)에서 사사로이 주상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이 장차 이 틈을 타고 천하의 공의(公議)를 간범(干犯)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으로 ‘세견(稅絹) 퇴박(退剝)과 선여(羨餘) 화적(和糴)의 폐단’과 ‘주군금군(州郡禁軍)의 기율(紀律)이 명확(明確)하지 못하여 교만(驕慢)과 나태(懶怠)가 자행(恣行)되고 있음’을 논하면서 ‘급히 무신(武臣) 가운데 항오(行伍)를 떨치며 융사(戎事)에 익숙한 자를 선발하여 그들을 주장(主將)과 부장(副將)으로 삼아 훈련(訓練)을 독책(督責)하도록 하여야 하며, 귀유(貴游)의 자제(子弟)와 합문(閤門)의 국신(國信)과 오방(五房)에서 출직(出職)한 무리들은 참여할 수 없도록 해야 함’을 극론(極論)하였다. 이에 주상(主上)께서는 공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여기시고 공을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 겸 시독(侍讀)에 임명했다.

三年召還, 見上首論獨斷雖英主之能事, 然必合衆智而質之以至公, 然後有以合乎天理人心之正, 而事無不成. 若棄僉謀․狥私見, 而有獨御區㝢之心焉, 則適所以蔽其四達之明, 而左右私昵之臣將有乘之以干天下之公議者矣. 次論稅絹退剝․羨餘和糴之弊, 又以州郡禁軍紀律不明, 驕惰自恣, 請亟選武臣之奮行伍․習戎事者, 使爲將副, 責以訓練, 而貴游子弟․閤門國信․五房出職之輩不得與焉. 上皆然之, 以爲翰林學士, 知制誥, 兼侍讀.

 

중간에 또 종용(從容)히 주상(主上)께 말씀드리기를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한(漢) 고제(高帝)가 학문(學問)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유생(儒生)을 경시(輕視)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臣)은 가만히 홀로 생각하기를 ‘고제(高帝)의 명철(明哲)함으로 보아 그가 기뻐하지 않은 것은 다만 부유(腐儒)의 속학(俗學)일 뿐’이었으니, 참으로 고제(高帝) 당시의 유자들이 이제삼왕(二帝三王)의 학문(學問)을 고제(高帝)께 고했더라면 고제(高帝)는 반드시 송연(竦然)히 이를 공경(恭敬)하고 신봉(信奉)하게 되어 그가 성취한 공렬(功烈)이 그 정도에 머물지 않았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주상(主上)을 위해 ‘성왕(聖王)의 학문(學問)은 이치를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만사의 기강(紀綱)을 세우는 데 있음’을 매우 충실히 언급했기 때문에 주상(主上)께서 자주 공을 칭선(稱善)하셨다. 이 해는 곡물(穀物) 수확(收穫)이 약간 좋지 못했다. 이에 공은 ‘급히 감사(監司)와 군수(郡守)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황정(荒政)에서 마땅히 조처해야 할 일을 우선적으로 도모(圖謀)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수확이 좋지 않은 곳이 없도록 보전(保全)케 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또 ‘주병(州兵)이 운영(運營)하는 오교(伍敎)의 전법(戰法)을 잘 준비(準備)할 것’울 상주(上奏)하였는데, 공이 상주한 이 일들이 모두 시행(施行)되었다.

間復從容言於上曰: ‘世儒多病漢高帝不悅學, 輕儒生. 臣竊獨以爲高帝之明, 其所不悅, 特腐儒之俗學耳. 誠使當時有以二帝三王之學告之, 臣知其必將竦然敬信, 而功烈所就不止此矣.’ 因爲上言聖王之學所以明理正心而爲萬事之綱者甚悉, 上亟稱善. 是歲小不登, 公請亟詔監司郡守先事條畫荒政所宜, 不者亦使任其無他. 又奏州兵營伍敎戰之法甚備, 事皆施行.

 

11월에, 드디어 중대부(中大夫) 및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배수(拜受)되었다. 공은 사양(辭讓)했으나 하락되지 않았다. 이에 진언(進言)하기를 “왕응진(汪應辰) ․ 진부량(陳良翰) ․ 장식(張栻)의 학행(學行)과 재능(材能)은 모두 신(臣)으로서 미치지 못합니다. 그 중에서도 장식(張栻)은 성인(聖人)의 은미(隱微)한 진리를 깊이 탐구했으며 군무(軍務)에도 효창(曉暢)합니다. 접때 다행히도 도적(盜賊)을 격파(擊破)할 수 있었던 것은 장식(張栻)의 도모(圖謀)에 힘입을 바가 많았습니다. 원컨대 폐하(陛下)께서는 급히 그를 불러 쓰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주상(主上)께서는 그의 주청(奏請)을 옳게 여겨 차례(次例)로 등용(登用)했다. 공은 서부(西府)에 들어가 연일(連日) 여러 군(軍)의 장수(將帥)와 부장(副將)들을 조용히 방문(訪問)하여 그들의 재능(材能)과 쓰임새를 철저히 파악하여 뽑아 쓸 날에 대비했다. 어느 날, 주상께서 보신(輔臣)을 돌아보시며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恢復)시킬 방안을 도모(圖謀)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복수(復讎)하여 치욕(恥辱)을 씻어내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의 대계(大計)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신(臣)이 원(願)컨대 폐하(陛下)께서는 주(周)나라 선왕(宣王)을 법(法)으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폐하께서 몸을 기울여 수행(修行)하시고, 현자(賢者)를 신임(信任)하고 능자(能者)를 부리시어 내수(內修)의 실질(實質)을 도모하신다면 곧 장차 밖으로 외적(外敵)을 물리치는 공효(功效)는 저절로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계책(計策)이 있을 수 없는데도, 얕게 도모하고 가볍게 움직여 요행으로 성과를 이루려 하신다면, 신으로는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主上)께서 기뻐하셨다.

十一月, 遂拜中大夫․同知樞密院事. 公辭不獲, 乃進言曰: ‘汪應辰․陳良翰․張栻學行材能皆臣所不逮, 而栻窮探聖微, 曉暢軍務, 曩幸破賊, 栻謀爲多. 願陛下亟召用之.’ 上可其奏, 以次登用焉. 公入西府, 日召諸軍將佐從容訪問, (8-4536)盡得其材用所宜, 以待選用. 一日, 上顧輔臣, 圖議恢復. 公曰: ‘復讎雪耻, 誠今日之大計, 然所以求之, 必有其道. 臣願陛下以周宣王爲法, 側身修行, 任賢使能, 以圖內修之實, 則外攘之効將有不能自已者. 計不出此, 而欲淺謀輕擧, 以幸其成, 臣未見其可也.’ 上悅.

 

명년(明年) 7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겸섭(兼攝)하라는 조서(詔書)가 내렸다. 공은 바야흐로 한 두 명의 동렬(同列)과 함께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인재(人材)를 뽑아 등진(登進)시키고 민력(民力)을 너그럽게 길러주며 군정(軍政) 다스리기 위한 도모(圖謀)에 더욱 힘썼고, 마침내 주상(主上)의 뜻에 하고자 하신 일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건(福建)에서 이루어지던 한 해 액수(額數) 2억(億)의 소금 약탈(掠奪)을 없앴으며, 강서(江西)의 화적(和糴)과 광서(廣西)의 절미염전(折米鹽錢)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였고, 또 여러 로(路)에서 수년 동안 밀려온 수억(數億)의 금(金), 은(銀), 곡(穀), 백(帛) 등의 포부(逋負)를 깨끗이 면제해 주었다. 나아가 공은 더욱 주상(主上)의 덕(德)을 보성(輔成)하고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을 진숙(振肅)케 하였으며, 요행(僥倖)을 억누르고 염퇴(廉退)를 장려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근행(近幸)들이 공에게 눈을 흘기게 되었고 유속(流俗)에서도 공이 하는 일을 기뻐하지 않을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주상(主上)께서는 일찍이 오랜 가뭄에 대해 스스로 재거(齋居)하면서 비를 청(請)하면 하루 저녁에 하늘이 감응(感應)할 것이라 여기셨는데, 이에 대해 여러 공(公)들은 모두 주상(主上)께 경하(慶賀)하였다. 공이 또다시 진언(進言)하기를 “폐하(陛下)의 성심(誠心)이 하늘을 감격(感格)시킨다면 그 감응(感應)이 메아리와 같이 빠를 것입니다. 이 점을 통해 우리는 천인(天人)은 서로 함께 하여 참으로 조금의 간격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미(隱微)한 가운데 미세(微細)한 실수(失手)가 있더라도 그 감응이 어찌 또한 이와 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원(願)건태 페하께서는 이 점을 살피시고 더욱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신다면 천하(天下)가 매우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송연(竦然)하시어 얼굴빛을 바꾸시며 칭선(稱善)하셨다.

明年七月, 詔兼參知政事. 公方與一二同列夙夜悉心竭力, 益圖所以叙進人材, 寬養民力, 討理軍政, 卒成上意之所欲爲者. 蓋除福建鈔鹽歲額二萬萬, 罷江西和糴及廣西折米鹽錢, 又蠲諸路累年逋負金銀穀帛巨億計. 而公尤以輔成上德․振肅朝綱, 抑僥倖, 獎廉退爲己任, 以是近倖側目, 而流俗亦多不悅. 蓋上嘗以久旱, 齋居請雨, 一夕而應. 諸公皆賀, 公復進言曰: ‘陛下誠心感格, 其應如響, 此足以見天人相與之際, 眞有不容髮者矣. 然則隱微之間, 纖介之失, 其應豈不亦猶是乎? 臣願陛下察此而益謹其獨焉, 則天下幸甚!’ 上爲竦然, 改容稱善.

 

용대연(龍大淵) 증적(曾覿)이 축출(逐出)되고 난 후, 얼마 있지 아니하여 용대연(龍大淵)이 죽었다. 이에 주상(主上)께서는 증적(曾覿)을 가련(可憐)히 여기시어 그를 소환(召還)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제거(除去)되고 난후에 천하는 바야흐로 주상의 위단(威斷)을 추앙(推仰)하게 되었으며 주상의 성덕(盛德)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경하(慶賀)하게 되었사온데, 어찌하여 갑자기 이 자를 복직(復職)시키려 하십니까? 이 무리들은 노예(奴隸)일 뿐이오니, 가련(可憐)하다 여기신다면 재물을 후(厚)하게 내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를 끌어들여 가까이 두고 빈우(賓友)로 대접하시거나, 심지어 그로 하여금 국가 기밀에 관한 일을 논의하고 인재(人材)를 나아오게 하거나 물러나게 하는 논의에 관여시키신다면 이는 주상(主上)의 덕업(德業)을 융성(隆盛)케 하고 조정의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는 일이 아니니, 이 점을 두렵게 생각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그 말에 감복(感服)하시어, 이에 그만두고 그를 소환하지 않으셨다.

龍大淵․曾覿旣逐去, 夫幾而大淵死, 上憐覿, 欲還之. 公言: ‘二人之去, 天下方仰威斷而慶盛德之日新, 柰何遽復爲此? 且此曹奴隷耳, 憐之則厚賜之可也. 若引以自近而賓友接之, 至使得以與聞幾事, 進退人材, 則臣懼非所以隆德業而振綱紀也.’ 上感其言, 爲止不召.

 

전전지휘사(殿前指揮使) 왕기(王琪)가 일찍이 비밀리에 선비를 천거하여, 주상께서 그를 불러 쓰려 한 일이 있었다. 공은 추천된 선비와 관련된 일의 유래(由來)에 대해 말해주기를 요청(要請)했다. 공은 왕기(王琪)로 하여금 그 유래를 공에게 고하도록 했다. 공이 물러나 당상(堂上)에 좌정(坐定)하여 원리(院吏)를 불러 두인(頭引)을 만들어 왕기(王琪)를 불러들이도록 하여 그에게 힐문(詰問)하였다. 왕기(王琪)는 두려워하여 치대(置對, 즉 答辯)하지 못하고 이후에는 감히 그런 일을 하지 않겠노라며 빌었다. 이에 그를 꾸짖어 내 보내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양(揚)의 태수(太守)가 와서 말하기를, 왕기(王琪)가 일찍이 군(郡)에 격문(檄文)을 보내 ‘신성(新城) 약간(若干) 척(尺)을 증축(增築)하라’는 밀지(密旨)를 받았다고 칭탁(稱託)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은 제공(諸公)과 함께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주상께 여쭈었더니 주상은 일찍이 이런 명령을 하신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은 아직 침전(寢殿)의 문을 나오기도 전에 관리(官吏)를 파견하여 말을 달려 그 간독(簡牘)을 취(取)해오게 하였다. 왕기(王琪)는 이를 숨길 수 없었다. 드디어 그는 그 죄로 파면(罷免)되었다. 제공(諸公)이 이일로 인해 상주(上奏)하기를 “지금부터 삼성(三省)의 밀원(密院)을 거치지 않은 성지(聖旨)의 경우는, 성지(聖旨)가 내린 관(官)에서 [삼성(三省)의 밀원(密院)이] 허실(虛實)을 주심(奏審)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실행할 것을 요청(要請)하나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상께서는 흔연(欣然)히 그 의견을 따르셨다. 공은 곧 밀원(密院)으로부터 중외(中外)의 여러 관부(官府)에 이문(移文)을 보냈는데 내시성(內侍省)이 이에 관여(關與)하였다. 명일(明日)에 갑자기 또 다시 성지(聖旨)가 있었지만 주심(奏審)하기 전에는 시행하지 말아야 했다. 이 일에 기인하여 공은 제공(諸公)을 설득하기를 ‘이와 같이 되면 곧 금중(禁中)에 혹시(或時)에 음식(飮食)을 기다릴 때도 반드시 주심(奏審)을 기다린 연후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하며, 공은 곧 예조(藝祖)의 훈롱사(熏籠事)를 가지고 대답했다. 물러나서는 또 제공(諸公)과 함께 다음과 같이 상주(上奏)하였다. “조정(朝廷)이란 곧 폐하의 조정이고, 명령 역시 폐하의 명령입니다. 신(臣) 등은 출납(出納)을 주관(主管)하고 있으면서 감히 맡은 일을 폐할 수 없을 뿐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구전(舊典)을 거행(擧行)하시어 기강(紀綱)을 바로잡음에 이미 낸 명령을 다시 거두어들이시니, 중외(中外)가 황공(惶恐)하고 미혹(迷惑)합니다. 신 등은 가만히 폐하를 위하여 이 일을 애석(哀惜)하게 여기나이다.”라고 하였다.

(8-4537)殿前指揮使王琪嘗密薦士, 得召用. 公請其所自, 上以琪告. 公退, 坐堂上, 呼院吏作頭引召琪至而詰之. 琪恐懼, 不能置對, 請後不敢, 乃叱遣去. 無何, 揚守來言, 琪嘗檄郡, 稱受密旨增築新城若干尺. 公與諸公請之, 則上未嘗有是命也. 公未出殿門, 遣吏馳取其牘. 琪不得隱, 遂以罪罷. 諸公因奏: ‘自今聖旨不經三省密院者, 所下之官皆請俟奏審乃得行.’ 上欣然從之. 公卽從密院移中外諸官府, 而內侍省與焉. 明日, 忽復有旨, 前奏審事勿行. 因諭諸公, 卽如此, 則禁中或時須一飮食, 亦必待奏審然後可得耶? 公卽以藝祖熏籠事對. 退, 又與諸公合奏言曰: ‘朝廷者, 陛下之朝廷; 命令者, 陛下之命令. 臣等典司出納, 不敢廢職而已. 今方擧行舊典, 以正紀綱, 而已出復收, 中外惶惑, 臣等竊爲陛下惜之.’

 

이 때 제공(諸公)이 비록 또 다시 나아가 함께 아뢰었으나 공이 더욱 격절(激切)하여 전중(殿中)이 모두 경동(驚動)하였다. 이 때문에 공이 홀로 파면(罷免)되어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가 되어 외사(外祠)를 봉헌(奉獻)하게 되었다. 주상의 뜻에 이윽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급히 조서를 내려 공의 직책을 웅흥부(隆興府) 지사(知事) 및 강남서로(江南西路) 안무사(安撫使)로 바꾸셨다. 공이 입조(入朝)하여 이를 사양(辭讓)하면서도 주상께 ‘언로(言路)를 넓힐 것’과 ‘성학(聖學)을 강명(講明)할 것’과 ‘근본(根本)을 돈독(敦篤)히 하고 쓰임새를 절약(節約)할 것’과 ‘자기를 비우고 현신(賢臣)에게 맡길 것’과 ‘사녕(邪佞)한 자들을 배척하여 멀리할 것’과 ‘장수를 엄선(嚴選)하여 군대(軍隊)를 진무할 것’ 등 몇 가지 일을 아뢰었다. 주상께서는 축연(蹴然)하여 “경(卿)이 비록 국도(國都)를 떠나면서도 충언(忠言)을 잊지 않고 있으며, 경(卿)의 재능(材能)은 또한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 가시더라도 경(卿)을 다시 부르겠소.”라고 말씀하셨다. 진(鎭)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세무(稅務)의 신액(新額)를 분명히 하고 묘창(苗倉)의 대곡(大斛)을 없앴다. 속읍(屬邑)인 봉신읍(奉新邑)에서 조세(租稅)를 중복(重複)해서 거두는 일이 발생하였으므로 여러 고을에서 고루 분담(分擔)하여 분배(分配)했다. 시간이 갈수록 곤궁(困窮)한 백성들은 서로 거느리고 도망(逃亡)했으므로 정세(正稅)를 상실(喪失)한 것이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에 공은 그 만큼의 정세(正稅)를 면제(免除)해줄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또 공은 이세(二稅)의 합령(合零)과 조미(租米)의 암모(暗耗) 그리고 면역법(免役法)과 족전(足錢)의 폐단(弊端)을 제거했다. 사람들은 간혹 공을 위해 조세 수입의 부족을 우려하기도 하였으나 공은 들어올 것을 헤아려 지출을 했기 때문에 일찍이 결핍된 적이 없었다.

時諸公雖更進合辭, 而公尤激切, 殿中皆驚. 以故獨罷爲端明殿學士, 使奉外祠. 上意尋寤, 亟詔改知隆興府․江南西路安撫使. 公入辭, 猶以開廣言路․講明聖學․敦本節用․虛己任賢․斥遠邪佞․選將撫軍數事爲獻. 上蹴然曰: ‘卿雖去國, 不忘忠言, 而材又非他人所及, 行召卿矣.’ 至鎭, 首蠲稅務新額, 及罷苗倉大斛. 屬邑奉新有複出租稅, 攤配諸鄕, 歲久民窮, 相率逃去, 反失正稅不勝計, 亦奏除之. 又除二稅合零․租米暗耗, 免役足錢之弊. 人或爲公憂不足, 而公(8-4538)量入爲出, 未嘗有所乏也.

 

명년(明年)에는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 ․ 형남부(荊南府) 지사(知事) ․ 형호북로안무사(荊湖北路安撫使)에 제수(除授)되었다. 처음 부임(赴任)하여, 형(荊)과 양(襄)의 병력이 줄고 재정이 바닥난 상황(狀況)을 조목조목 상주(上奏)하였다. 이에 공의 경영(經營)과 재량(裁量)에 맡긴다는 조서(詔書)가 내려왔다. 공은 이로 인해 양(襄)과 악(鄂)의 둔병(兵屯)과 그 방변(並邊)의 형세(形勢)를 시찰(視察)하고 그 실상을 모조리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무릇 회도역사(回圖役使)와 궤명허적(詭名虛籍)의 폐단(弊端) 뿐만 아니라 부오(部伍)에서 가르치고 익히던 법(法) 중에서 좋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두 상주(上奏)하여 없앴다. 이보다 앞서, 형남(荊南) 출신의 어떤 병사(兵士)가 양양(襄陽)에 수자리 살면서 여러 해 동안 귀가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공은 상주(上奏)하여 반년마다 차례로 휴가(休暇)를 주는 법을 만들었다. 봄과 여름에는 3군(軍)이 그리고 가을과 겨울에는 4군(軍)이 바꾸어가며 왕래하도록 하니, 군사(軍士)들이 감격하며 기뻐하였다. 형(荊)과 양(襄)에는 옛날부터 민병(民兵)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농가(農家)의 자제(子弟)들로써 돈박(敦樸) 호용(豪勇)하고 그 지역에 대한 애착심이 강했다. 또 근처에 거주하여 오랑캐의 사정(事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戰鬪)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던 중 근자(近者)에 이들이 점점 타폐(墮廢)해지게 되자, 공은 더욱 이들을 검열(檢閱)하여 그 취(取)하는 장정(壯丁)의 수(數)를 너그럽게 정하고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그 부역(賦役)을 늦추어 주었으며, 향(鄕)의 단결(團結)에 따라 해마다 훈련(訓練)하고 연습(演習)하도록 했다. 그 자량(資糧)과 기계(器械)에 대해서도 충분히 헤아리고 고려하여 각각 조리(條理)가 있었다. 이들을 두루 어루만져 주휼(賙恤)하고 호궤(犒饋) 포상(褒賞)하는 데 드는 한 해의 비용이 전(錢) 일 억(億)이 되었지만 단 하나 백성들에게서 그 비용을 취한 적이 없었다.

明年, 除資政殿學士․知荊南府․荊湖北路安撫使. 始至, 條上荊襄兵少財匱之狀, 詔卽諉公經畫. 公因行視襄鄂兵屯, 並邊形勢, 盡得其實以聞. 凡回圖役使․詭名虛籍之弊, 與夫部伍敎習之法, 有不善者, 皆奏罷之. 先是, 荊南兵戍襄陽者累年不得歸. 公奏爲半歲番休之法, 春夏三軍, 秋冬四軍, 更迭往來, 軍士感悅. 荊襄故有民兵, 皆農家子, 敦樸豪勇, 土著自愛, 且居近邊, 知虜情, 輕戰鬪. 比稍墮廢, 公更爲簡閱, 寬其取丁之數, 貧者弛其賦役, 隨鄕團結而歲閱習焉. 其資糧械器, 亦爲處畫, 各有條理. 撫循犒賞, 歲費錢一萬萬, 而不以一介有取於民也.

 

명년(明年)에 계모(繼母) 경국부인(慶國夫人) 탁씨(卓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또 그 명년(明年)에는 다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 형양선무사(荊襄宣撫使)에 기용(起用)되었다. 파견된 중사(中使)가 새서(璽書)를 받들고 상차(喪次)에 나아와 어압(御押)을 펼쳐 황제께 일을 아뢰도록 하였다. 이에 공은 경전(經傳)과 예법(禮法)을 끌어대고 체읍(涕泣)하며 간절(懇切)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무릇 대 여섯 차례가 넘자 더 이상 청(請)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는 재상(宰相)이 바야흐로 중원(中原)을 회복(恢復)하겠다고 큰 소리치고 있었는데, 이것이 비록 주상(主上)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기는 하나 정사(政事)는 닦여지지 않고 거동(擧動)만 번요(煩擾)하였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이 우려하고 있었다. 공은 이에 손수 상소문(上疏文)을 써서 특별(特別)히 언사(言辭)를 갖추어 아뢰기를, “천하의 일을 두고 볼 때, 그 실질(實質)은 있지만 그 형적(形迹)을 노출시키지 않은 경우의 일은, 추진해서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질(實質)은 없는데 먼저 그 형적(形迹)이 드러나는 경우의 일은, 추진해서 실패(失敗)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잘 다스려 중원을 회복해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그 실질(實質)’이 과연 어떠합니까? 우리는 밖으로는 투항(投降)해오는 자들을 불러들이고 있고, 안으로는 둔전(屯田)의 병사(兵士)를 옮기고 있지만 규모(規模)있는 계획(計劃)이 아직 확립되지도 않고 있는 상황인데, 이미 우리의 수족(手足)이 먼저 적에게 드러났으니, 그 형세로 볼 때 재화(災禍)를 촉진하고 도적을 불러들이기에 딱 알맞습니다. 신으로서는 이런 논의를 하는 자가 장차 어떻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 형(荊)과 양(襄)이 사지(四支)라면 조정(朝廷)은 복심(腹心)의 원기(元氣)입니다. 이제 원기(元氣)가 피로(疲勞)해진 것은 걱정하지 않고 사지(四支)가 강(彊)하지 못한 것만 우려하고 있으니 이는 신이 감히 알 바 아닙니다.”라고 했다. 주상(主上)께서는 그 말을 가납(嘉納)하시어 정침(正寢)에서 전소(前詔)를 내리셨다.

明年, 遭繼母慶國夫人卓氏憂. 又明年, 起復同知樞密院事․荊襄宣撫使. 遣中使奉璽書, 卽喪次宣押奏事. 公引經援禮, 涕泣懇辭, 凡五六上, 不得請. 時宰相方以恢復大言中上意, 而政事不修, 擧動煩擾, 識者憂之. 公乃手疏別奏, 具言: ‘天下之事, 有其實而不露其形者, 無所爲而不成; 無其實而先示其形者, 無所爲而不敗. 今吾所以自治而爲恢復之實者爲如何? 而乃外招降附, 內徙營屯, 規算未立, 手足先露, 其勢適足以速禍而致寇, 臣不知爲此議者將何以待之也? 且荊(8-4539)襄, 四支也; 朝廷! 腹心元氣也. 今不憂元氣之憊而慮四支之不彊, 非臣之所敢知也.’ 上納其言, 爲寢前詔.

 

8년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이에 다시 담주(潭州) 지사(知事) 및 호남(湖南) 안무사(按撫使)에 제수(除授)되었다. 이에 대궐(大闕)에 나아가 주상을 뵙고 상주(上奏)하기를, “인군(人君)은 천하의 이치에 순종(順從)한 연후(然後)에 천하의 민심(民心)을 얻어 천하의 일을 건립(建立)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至誠)으로 자신을 겸허(謙虛)히 하고 또 겸(兼)하여 듣고 아울러 보아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이 공동(空洞) 청명(淸明)해져서 물욕(物欲)이 조금도 가리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하지 않으면, 또한 천하의 이치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인(因)하여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였는데, 그 언사(言辭)가 매우 적절하고 지극하였다. 주상께서 재삼(再三) 공을 위로(慰勞)하시면서 대학사(大學士)로 직책을 높여 떠나게 하셨다. 공은 재차(再次) 옛 진(鎭)에 도착하여 매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경건(敬虔)히 처리했다. 그리하여 대체로 공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은 더욱 엄격해졌으나 백성을 진무(賑撫)함에 있어서는 더욱 너그러웠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공을 더욱 외복(畏服)하며 경애(敬愛)하였다. 그 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주리게 되었다. 공은 급히 관리를 보내 법에 따라 세금을 면제(免除)하도록 조처(措處)하고 또 전운(轉運)과 상평사(常平司)에 격문(檄文)을 보내 여러 다른 군(郡)으로부터 양식을 옮겨오게 했다. 또한 간민(姦民)이 이러한 틈을 타고 도적질하는 일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장수(將帥)를 파견하고 병사를 증원(增員)하여 이를 지키게 하여 결국 무사(無事)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호북(湖北)의 다도(茶盜) 수천 명이 경내(境內)로 들어왔으나, 공은 군대의 함성소리를 크게 내어 그들을 위협하면서 그들이 반성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더니 도적들 대부분은 흩어져 가고 남아있는 자는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공은 이에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공은 여전히 ‘요격(邀擊)하는 자들만 맞아 싸운다.’는 말로써 그들을 깊이 경계(警戒)하였다. 이로 인해 도적들의 의지가 더욱 느슨해졌다. 이에 한 차례 전투를 벌여 도적을 깨트린 다음 그들 모두를 사로잡아 돌아왔으나 오직 그 수악(首惡)자 수인(數人)만 주살(誅殺)하고 나머지는 모두 노예(奴隸)로 만들어 군적(軍籍)에 올렸다. 명년(明年)에 도적의 여당(餘黨)인 뢰문정(賴文政) 등이 또다시 경내로 들어왔다. 공의 후임(後任) 장수(將帥)는 그들을 모두 주살(誅殺)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도적들이 있는 힘을 다하고 죽을 각오로 싸움을 했다. 그리하여 이미 호남군(湖南軍)을 공격하여 지치게 만든 후 드디어 강서(江西)로 침입해 들어왔으며 나아가 광동(廣東)까지 침범(侵犯)했다. 관군(官軍)은 여러 차례 패배(敗北)하였다. 장위(將尉) 수십 인이 사망하였으며 소비된 물자는 대만(大萬, 즉 巨萬)을 헤아릴 정도였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공의 지모(智謀)에 탄복(歎服)하였다.

八年免喪, 乃復除知潭州, 安撫湖南. 過闕, 見上言曰: ‘人君能循天下之理, 然後有以得天下之心而立天下之事. 然非至誠虛己, 兼聽並觀, 使在我者空洞淸明而無一毫物欲之蔽, 亦未有能循天下之理者也.’ 因以極論時事, 言甚切至. 上加勞再三, 進職大學士以行. 公再臨舊鎭, 不懈益虔, 蓋所以自律者愈嚴而所以撫民者愈寬, 以是人愈畏服而敬愛之. 歲旱民饑, 公亟遣吏行田蠲租如法.而檄轉運, 常平司移粟諸郡. 且慮姦民乘時竊發, 則又遣將益兵戍守, 遂以無事. 一旦, 湖北茶盜數千人入境, 公盛軍聲以威之, 而開其自新之路, 盜多散去, 其存者蓋無幾人. 公乃遣兵, 然猶深以迎戰邀擊爲戒. 盜意益緩, 於是一戰敗之, 而盡擒以歸, 獨誅其首惡數人, 餘悉以隷軍籍. 明年, 盜之餘黨賴文政等復入境, 後帥欲盡誅之, 盜因悉力死戰. 旣勦湖南軍, 遂入江西, 犯廣東, 官軍數敗, 將尉死者數十人, 爲費以大萬計. 於是人乃服公爲有謀也.

 

  순희(淳熙) 2년에 건강부(建康府) 지사(知事) ․ 강남동로(江南東路) 안무사(按撫使) ․ 행궁(行宮) 유수(留守)에 제수(除授)되었다. 때마침 홍수와 가뭄이 닥쳤다. 이에 공은 ‘하세(夏稅)로 전(錢) 6천만 민(緡)을 거두지 말 것’과 ‘가을 묘미(苗米) 16만 6천여 곡(斛)을 깨끗이 면제해줄 것’과 ‘이에 걸 맞는 다른 물품(物品)으로 연납(沿納)하도록 해줄 것’ 등을 상주(上奏)하였다. 또 ‘조사(漕司)에도 관리를 보내 여러 주(州)의 조세(租稅) 면제(免除) 상황을 조사하여 자못 미진한 점이 있으면 모두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게 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또 ‘상류(上流)에서 세미(稅米)의 알적(遏糴)을 금(禁)하고 곧 다른 로(路)에서 이를 감히 위반(違反)하는 자가 있으면 그 이름을 알려 그 죄(罪)에 저촉(抵觸)한 것으로 할 것’ 등을 주청(奏請)하였는데, 주상께서는 조서를 내려 공의 주청(奏請)을 모두 받아들이셨다. 이로 인해 상인(商人)들로부터 미곡(米穀) 3백만 곡(斛)을 얻어 민간(民間)에 분산(分散)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제사(諸司)로부터 도합 3억의 전(錢)을 빌려서 관리(官吏)를 보내 강(江)의 상류에서 미곡(米穀) 14만 9천 곡(斛)을 사들일 수 있었다. 적(籍)이 농민(農民)인 자에게는 마땅히 진대(賑貸)하고 객호(客戶)인 자에게는 마땅히 진제(賑濟)하되, 각 호(戶)의 경우 구수(口數, 즉 사람 수)에 따라 지급하는 미곡(米穀)에 차등을 두었다. 촌락(村落)의 경우는 또 미곡(米穀)을 운반해서 장(場)에다 두고 값을 공평히 하여 진적(賑糶)하되, 빌린 자의 경우에도 또한 끝내 갚도록 하지는 않았다. 부좌(府佐) 조선각(趙善珏)과 왕이녕(王以寧) 및 우사(寓士) 이종사(李宗思)와 유위(劉煒)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主管)하게 하고, 군속(群屬)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경중(境中)을 순행(循行)하도록 하되 아무리 멀어도 이르지 않음이 없도록 했다. 공은 또 주야(晝夜)로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구하되 은거해 있는 자들의 의견도 다 청취했다. 또 현(縣)에 공문(公文)을 보내 손수 쓴 글로 고유(告諭)하며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리하여 상(賞)주는 일을 미덥게 되고, 벌(罰) 주는 일이 철저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이 그 효용(效用)을 다툰 것이 흡사 자기 일에 힘쓰는 듯이 하였다. 이 일은 이해 9월부터 시작하여 명년(明年) 4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변경(邊境) 내 모든 지방에 거주하던 수십만 명 중 단 한 사람도 굶어 죽거나 유리(流離) 실소(失所)한 사람이 없었다. 주상께서는 그 공적(功績)을 가상(嘉尙)히 여겨 글을 하사(下賜)하여 칭찬하며 유지(諭旨)를 내리셨다.

  淳熙二年, 除知建康府, 安撫江南東路, 留守行宮. 會水且旱, 公奏閣夏稅錢六千萬緡, 蠲秋苗米十有六萬六千餘斛, 沿納他物稱是. 仍請下漕司, 遣吏覆視諸(8-4540)州所蠲租, 其頗未盡者, 悉以予民. 禁上流稅米遏糴, 卽他路有敢違者, 請亦得以名聞, 抵其罪. 詔皆從之, 以是得商人米三百萬斛散之民間. 又貸諸司錢合三萬萬, 遣官糴米上江, 得十四萬九千斛. 籍農民當賑貸․客戶當賑濟者, 戶以口數給米有差. 村落又皆運米置場, 平價賑糶, 而貸者卒亦不取償焉. 以府佐趙善珏․王以寧及寓士李宗思․劉煒領其事, 分遣群屬循行境中, 無遠不到. 公又蚤夜咨訪, 幽隱畢聞. 縣給印曆, 手書告諭, 誠意旣孚, 而賞信罰必, 是以人爭效用, 如辨己事. 起是年九月, 盡明年四月, 闔境數十萬人無一人捐瘠流徙者. 上嘉其績, 賜書褒諭焉.

 

치재(治財)에 있어서 공은 백성들에게는 너그러웠으나 관리(官吏)들에게는 급박(急迫)하게 하였다. 그래서 관리들이 고기잡이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禁)하고 그들이 민간에 해악(害惡)이나 폐단(弊端)을 끼치지 못하게 철저히 감찰했는데, 여러 진(鎭)에서부터 이를 시행(施行)하여 갈수록 철저(徹底)히 해나가다 보니 결국 사람들이 더욱 깊이 그 은택(恩澤)을 입게 되었다. 무릇 속현(屬縣)에 부과(負課)한 것에 대해 갚을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모두 빌려주었고, 유독(惟獨) 불법적으로 백성을 병들게 하는 자를 엄중(嚴重)하게 금했다. 또 성지(聖旨)를 받들어, 벽성(甓城)의 면(面) 수십만(數十萬) 장(丈)에 대해, 민전(緡錢) 수만(數萬)과 미곡(米穀) 1천여(千餘) 곡(斛)을 들여 역사(役事)를 벌였으나 그 부담이 백성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주상께서는 전후(前後)에 걸친 공의 공로(功勞)를 높이 평가하시어 수찰(手札)로 위로(慰勞)하고 장려(獎勵)하셨으며 안마(鞍馬)와 기물(器物)을 매우 두터이 하사(下賜)하시었다. 명년(明年)에 공을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로 올리셨으니, 주상께서는 아마도 장차 공을 다시 등용(登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임종(臨終) 시에 공은 상소(上疏)하여 ‘근습(近習)이 용사(用事)함에 따른 재화(災禍)’를 극언(極言)하면서 ‘홍공(弘恭), 석현(石顯), 왕비(王伾), 왕숙문(王叔文)을 끌어들인 것’을 경계(警戒)하였고, 고상(故相) 위국(魏國) 진공(陳公)과 계수(桂帥) 장식(張栻) 경부(敬夫)를 추천(推薦)하였다. 또 수서(手書)를 통해 경부(敬夫)와 영결(永訣)하였고 희(熹)도 함께 하였다. 공의 말씀은 모두 ‘국가를 위해 원수(怨讐)들로부터 당한 수치(羞恥)를 씻어낼 수 없음’을 깊이 한탄(恨歎)하는 것이었으니, 대개 그의 충효(忠孝)는 정성(精誠)되고 돈독(敦篤)하여, 비록 생(生)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조차 잠시도 충효를 잊은 적이 없었다.

公治財寬於民而急於吏, 所以禁其漁取․察其蠹弊者甚悉. 自累鎭所施行, 每益加詳, 至是人被其澤尤深. 凡屬縣所負課, 度不能償者, 悉以丐之, 而獨重禁其非法病民者. 被旨甓城, 面以丈計者數十萬, 用緡錢數萬, 米千餘斛, 而役蓋不及民也. 上積公勞效, 手札勞獎, 賫以鞍馬器物甚厚. 明年, 進觀文殿學士, 蓋將復登用之, 而公病不起矣. 臨沒時所上疏極言近習用事之禍, 至引恭․顯․伾․文以爲戒. 所薦則故相魏國陳公․桂帥張栻敬夫也. 則以手書訣敬夫, 而熹亦與焉. 其言皆以未能爲國家報雪讎恥爲深恨. 蓋其忠孝誠篤, 雖蹈死生之變而未始須(8-4541)臾忘也.

 

공의 위인(爲人)은 기감(機鑒)이 정명(精明)하고 의론(議論)이 영발(英發)하여 일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판단하였는데 그 위의(威儀)를 간범(干犯)할 수 없었다. 또 공은 거가(居家) 시에 지극히 효자(孝慈)하였는데, 어머니 복국부인(福國夫人) 웅씨(熊氏)가 일찍 훙거(薨去)하자 공의 애모(哀慕)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자식으로서 받은 은혜를 다하고자 그 내제(內弟)를 관(官)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계모(繼母)를 섬김에도 예경(禮敬)이 완비(完備)되어, 그 상(喪)을 만났을 때 공의 나이 50세가 넘었지만, 슬픔을 다하다 보니 공의 몸이 상(傷)하고 병이 나서 거의 위태한 상황에 이를 정도였다. 여러 동생들과 우애(友愛)있게 지냈으며 만년(晩年)에 더욱 돈독(敦篤)하였다. 세시(歲時)에 제사(祭祀)할 때는 고금(古今)의 예법을 참작(參酌)하여 경건하게 시행하였다. 또 내외(內外)의 대공(大功) 소공(小功) 및 시복(緦服)을 입어야 하는 친인척(親姻戚)에게 조차도 반드시 소복(素服)하고 월수(月數)에 따른 상기(喪期)를 끝내었다. 상기 중에는 관(官)에서도 연락(宴樂)을 파(罷)했으며, 동료(同僚)들이 상(喪)을 만나도 또한 이와 같이 했다. 공은 장차 훙거(薨去)할 때 ‘치상(治喪)에 부도(浮屠)의 방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는데, 후에 여러 현공(賢公)들이 왕왕(往往) 공을 본받았다.

公爲人機鑒精明, 議論英發, 遇事立斷, 其威不可犯. 而居家極孝慈, 母福國夫人熊氏早薨, 公哀慕無以自致, 則以任子恩官其內弟. 事繼母禮敬飭備, 遭喪時年逾五十, 盡哀致毁, 得疾幾殆. 友愛諸弟, 晩歲彌篤. 歲時祭祀, 酌古今禮而敬以行之. 內外功緦之戚, 必素服以終月數. 在官爲罷燕樂, 同寮有喪亦如之. 將薨, 遺命治喪毋得用浮屠法, 後諸賢公往往效之.

 

공이 주군(州郡)에서 치평청찰(治平聽察)하고 명령을 내려 금지(禁止)하는 등의 정사(政事)를 행할 때는 백성을 사랑하고 풍속을 돈후(敦厚)히 하려는 뜻이 더욱 자자(孜孜)하였다. 일에 간혹(間或) 조금이라도 실수(失手)가 생기면, 비록 하급 관리가 그것을 언급하더라도 반드시 곧바로 고쳤다. 담주(潭州)의 악록서원(嶽麓書院)을 크게 수리(修理)하여 수십(數十) 인(人)의 선비를 양성(養成)하였는데 장자(張子) 흠부(敬夫)로 하여금 그 곳에 와서 고인(古人)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고(告)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공은 또 명도(明道) 정공(程公)에 대해 ‘선생(先生)께서는 일찍이 건강(建康)의 속읍(屬邑)에서 관직(官職)에 종사하셨다’고 하였으며, 그를 위해 제사하는 학관(學官)을 세우고 그 벽(壁)에 진충헌공(陳忠肅公)의 ‘책심지문(責沈之文)’을 새겨 학자(學者)들에게 보여주었다. 민간에 골육(骨肉)의 쟁송(爭訟)이 발생했을 때는 몸소 반복(反復)해서 은의(恩義)를 변고(辨告)했으며, 심한 경우 간혹 공 스스로에게 깊이 허물을 돌렸으므로 이를 듣는 자가 모두 더 이상 쟁송(爭訟)할 수가 없어 가버린 경우도 있다.

其在州郡治平聽察, 令行禁止, 而於愛民厚俗之意尤孜孜焉. 事或小失, 雖下吏言之, 無不立改. 大脩潭州嶽麓書院, 養士數十人, 而屬張子敬夫往遊其間, 告以古人爲己之學. 謂明道程公先生嘗官建康屬邑, 爲之立祠學官, 而刻陳忠肅公責沈之文於壁, 以示學者. 民有骨肉之訟, 躬以恩義反復辨告, 甚或深自引咎, 聞者皆失所爭而去.

 

조정에서 공은 위언(危言) 정색(正色)하였고, 직접(直接) 주상 앞이라 해서 피하는 것이 없었으며 충의(忠義)를 분발(奮發)하여 일찍이 생사를 걸고 주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을 적이 없었다. 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에 있어서는 신중(愼重) 치밀(緻密)하였고 엄중(嚴重)함을 견지하였으며, 요행으로 시험 삼아 거론(擧論)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대체로 공은 자신을 신칙(申飭)하여 일에 대응하였는데 규모(規模)와 과지(科指, 즉 准則)가 있었고 만년(晩年)에는 모든 일에 더욱 정밀(精密)하였다. 이 때문에 위로는 주상께서 공을 더욱 깊이 아시게 되었고 아래로는 학사(學士)와 대부(大夫)들이 공에게 거는 기대가 더욱 무거워졌으며, 심지어 아동(兒童)과 주졸(走卒)까지도 공의 충렬(忠烈)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공이 형주(荊州)에 있을 때는, 심지어 북쪽 오랑캐들도 매양 첩자(諜者)를 보내 공의 가세(家世)를 염탐(廉探)함으로써 공의 그 충의(忠義)가 가문에 세세(世世)로 전해져 온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공이 훙거(薨去)했을 때는 공이 임재(臨在)했던 곳의 군민(軍民)들이 왕왕(往往) 저자를 파(罷)한 채 거리에게 곡(哭)하고 서로 더불어 공에게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는데 건강(建康) 지방이 더욱 대단했다. 또 수년(數年)이 지난 이후에도 국가(國家)에 이런 저런 연고(緣故)가 있을 때마다 책책을 맡은 선비들이 서로 더불어 사사로이 걱정하는 자리에서 일찍이 공을 언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其在朝廷, 危言正色, 直前無所避, 忠義奮發, 未嘗以死生動其心. 而愛君憂國, 審密持重, 不肯爲僥倖嘗試之擧. 蓋其飭躬應事, 規模科指, 晩歲皆益精密. 故上則人主知之愈深, 下則學士大夫望之愈重, 以至兒童走卒, 莫不知公之忠烈. 而在荊州時, 北虜亦每使諜者詗公家世, 蓋知其忠義之有傳也. 及薨, 所臨之邦軍(8-4542)民往往罷市巷哭, 相與祠之, 而建康爲尤盛. 且自數歲以來, 國家每有四方之故, 而有識之士相與私憂, 語未嘗不及公也.

 

공은 57세에 훙거(薨去)하였고, 팽성군개국후(彭城郡開國侯) ․ 식읍(食邑) 1600호(戶) ․ 식실봉(食實封) 200호(戶)에 봉해졌다. 공의 배우자(配偶者)로 신정군부인(新定郡夫人) 여씨(呂氏)는 고(故) 병부상서(兵部尙書) 지(祉)의 딸이고, 신흥군부인(新興郡夫人) 한씨(韓氏)와 숙인(淑人) 한씨(韓氏)는 모두 위국충헌공(魏國忠獻公)의 4세(世) 손녀(孫女)이다. 아들이 둘 있으니, 학아(學雅)는 승무랑(承務郞)이고 학구(學裘)는 승봉랑(承奉郞)이다. 딸이 둘 있는데, 장녀(長女)는 적공랑(迪功郞) ․ 남검주(南劍州) 검포현위(劍浦縣尉)인 여흠(呂欽)에게 시집가고 차녀(次女)는 모관(某官) 조숭헌(趙崇憲)에게 시집갔다. 문집(文集) 8권과 주의(奏議) 10권, 내외제(內外制) 20권이 집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문학(文學)으로 명망(名望)이 있었다. 조정(朝廷)에 오른 후에 공이 한 논사(論事)와 윤색(潤色)은 당세(當世)에 더욱 체(體)를 얻었다고 일컬어졌었다. 그러나 일찍이 무용(無用)한 글을 쓴 적이 없으며, 공의 박의(駁議) 또한 원고를 깎아낸 것이 많다. 이 때문에 전(傳)해진 것이 이 정도에 그쳤을 뿐이라 한다.

公薨時年五十有七, 封彭城郡開國侯․食邑一千六百戶․食實封二百戶. 其配曰新定郡夫人呂氏, 故兵部尙書祉之女. 新興郡夫人韓氏, 淑人韓氏, 皆魏國忠獻公四世孫也. 二男子: 學雅, 承務郞; 學裘, 承奉郞. 二女, 長適迪功郞․南劍州劍浦縣尉呂欽, 次適某官趙崇憲. 文集八卷, 奏議十卷, 內外制二十卷, 藏於家. 公自少卽以文學知名, 及登朝廷, 論思潤色, 當世尤稱其得體. 然未嘗爲無用之文, 其駁議又多削稿, 故所傳止此云.

 

 학아(學雅)는 공의 종제(從弟)인 종사랑(從事郞) 평(玶)이 문서로 만든 공의 행사(行事)를 희(熹)에게 보여주었는데, 희(熹)가 그것을 받아 읽어보니 모두 옛날에 보고 들었던 것이었다. 인(因)하여 그 큰 것을 잘라내어 돌에 기록하고 이어 이를 새긴다. 그 새긴 글에 말하기를 :

 學雅以公從弟從事郞玶所狀公行事視熹, 熹受而讀之, 皆昔所見聞者也. 因剟其大者, 著之石而系以銘. 銘曰:

 

옛날 양구(陽九)에서 우리의 태평(泰平)함을 상실(喪失)하였도다. 동(東)으로 옮겨온 지 3기(紀)에 변(汴)과 낙(洛)이 오랑캐의 땅이 되어버렸도다. 효종(孝宗)께서 비로소 훌륭히 순응(順應)하셨는데 부앙(俯仰)하고 돌아보시며 탄식(歎息)하시기를, ‘조정(朝廷)에 있는 너희들 중에 그 누가 이 국난(國難)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준철(俊哲)이 있었으니 삼세(三世)가 한 마음이었더라. 그 충성(忠誠)은 정성스러웠고 그 의리(義理)는 강하고도 곧았으니, 그 나라 위한 사려(思慮)는 원대(遠大)하였고 백성을 향한 우려는 심각(深刻)하였더라. 이에 피를 튀기듯 분발(奮發)하며 말하기를 ‘오랑캐로부터 이런 수치(讎耻)를 당하고도 그들과 동맹(同盟)을 맺고 그들을 환대(歡待)한다면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나이까? 그러나 위대한 성인(聖人)이 없으면 그 누가 이 일을 염려(念慮)하고 일을 도모(圖謀)해 낼 수 있겠나이까? 그 누가 무절(武節)을 잡고 천주(天誅)를 행(行)할 것인가? 신(臣)이 들은 것이 있으니, 주(周)나라 중비(中圮)에 이미 정사(政事)를 닦아 이적(夷狄)을 물리침으로써 그 엎어진 것이 비로소 새로 일어나게 된 일이 있었나이다. 오직 성왕(聖王)께서는 이 시대를 잘 살피시어 서려 있는 비색(否塞)함을 이롭게 펼쳐내소서. 그러나 급속(急速)히 일을 이루고자 하지도 말고 안일(安逸)함에 빠지지도 마소서.’라고 하였도다. 이에 황제(皇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도다. 나, 그대의 가르침을 공경(恭敬)하리라. 이미 조정(朝廷) 가운데서 계도(啓導)하였으니 어찌 조정(朝廷) 밖에도 선포(宣布)하지 않겠는가? 은택(恩澤)이 흐르고 위엄(威嚴)이 성(盛)해졌으니, 너는 곧 돌아오라. 마침내 나의 뜻을 보조(輔助)하여 네가 하려는 일을 다하라.’라고 하셨다. 이에 공은 네 진(鎭)에서 10년을 근로(勤勞)하였는데, 황제(皇帝)께서 마침 서쪽을 돌아보셨다. 저 훌륭하신 호창(顥蒼)이시여! 어찌 갑작스럽게 공의 공적을 빼앗을 수 있으리오? 내가 공의 그 자취를 총괄해서 헤아려 보건대, 공은 효성스럽고도 충성스러웠으며, 정치(政治)와 일처리가 훌륭했으며, 후세에 남길만한 말씀과 공적(功績)이 있었나이다. 아! 그대 사인(嗣人, 즉 子孫)이 아직도 그 경사(慶事)를 계승하고 있나이다. 공(公)이시여! 모두 공을 잊지 않고 있음을 생각하소서! 천자(天子)와 성신(聖神)조차도!

昔在陽九, 失我泰平. 東游三紀, 汴洛羶腥. 帝始靈承, 俯仰顧歎. 曰汝在廷, 孰抗斯難? 爰有俊哲, 三世一心. 忠精義烈, 思遠憂深. 沬血奮辭, 曰此讎耻, 乃盟乃歡, 顙得無泚? 不有豪聖, 孰慮孰圖? 孰秉武節, 以行天誅? 抑臣有聞, 在周中圮, 旣脩乃攘, 厥仆斯起. 惟聖時監, 利伸否蟠. 毋棘其欲, 毋溺其安. 帝曰兪哉, 予欽汝誨. 旣啓于中, 盍布于外? 澤流威燀, 汝則來歸. 卒輔吾(8-4543)志, 以究汝爲. 四鎭十年, 帝適西顧. 彼皇顥蒼, 胡奪之遽? 我最其迹, 有孝有忠. 有政有事, 有言有功. 嗟爾嗣人, 尙承厥慶. 公思不忘, 天子聖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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