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114

황성 2025. 9. 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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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八十九

비[碑]

 

 

 

우문전수찬(右文殿修撰) 장공(張公) 신도비(神道碑)

(右文殿修撰張公神道碑)

 

순희(淳熙) 7년 봄 2월 갑신(甲申)에, 비각수찬(祕閣修撰) ․ 형호북로(荊湖北路) 안무사(按撫使) ․ 광한(廣漢) 장공(張公)이 강릉(江陵)의 부사(府舍)에서 졸(卒)하였다. 그의 동생 형주(衡州) 사군(史君)인 표(杓)가 공의 영구(靈柩)를 호위(護衛)하고 돌아와 담주(潭州) 형양현(衡陽縣) 풍림향(楓林鄕) 용당(龍塘)의 언덕에 장례(葬禮)하였다. 법식(法式)에 따라 신도비(碑墓道)를 세우고 희(熹)에게 글을 보내와서 말하기를 “나의 형(兄)을 아는 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깊이 아는 사람은 당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명문(銘文)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희(熹)는 일찍부터 가만히 성문(聖門)의 학(學)이 전해지지 않고 도술(道術)이 드디어 천하의 학자들에 의해 분열(分裂)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선비들 중에 순각(醇慤)한 자는 기송(記誦)에 구애(拘礙)되고 있고 민수(敏秀)한 자는 사장(詞章)에 현혹(眩惑)되고 있는 형편이어서 양쪽 모두 ‘천리(天理)를 발명(發明)하여 그것을 인사(人事)에 드러내기’에는 부족(不足)하다. 이에 리(理)를 말하는 자는 노불(老佛)에 귀의(歸依)하고, 사(事)를 말하는 자는 관상(管商)에 힘쓰고 있으니, 이사(理事)의 정반(正反) 모두에 병통이 있게 되고, 나아가 도(道)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중간(中間)에 하락(河洛) 사이에서 선생(先生) 군자(君子)들이 나와 그 전해지지 않던 도(道)의 단서(端緖)를 터득하여 이를 추명(推明)하였다. 그러나 이제 10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학자(學者)들은 또 그 지의(旨意)를 잃고 있었다. 그런데 근세(近歲)에 다행스럽게도 오우(吾友) 경부(敬夫)를 만나게 되었다. 천하의 선비들이 이에 ‘리(理)는 처음부터 사(事)에 갖추어져 있으며, 사(事)는 처음부터 리(理)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또 경부(敬夫)는 그가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중도(中道)에 죽게 됨에 따라 그가 ‘숙고(熟考)하여 세상에 남겨놓은 것’이 없다. 이에 나는 후세의 군자들이 장차 우리 무리들에게 유감(遺憾)을 품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희(熹)는 어리석어 본래 이런 중대한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함께 공부한 무리에 속했던 사람으로 우연히 나 혼자 늦게까지 살아있게 되었고, 더구나 정수(定叟)의 촉탁(囑託)이 또 이와 같으니 어찌 사양(辭讓)할 수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질병(疾病)으로 인해 틈이 나지 않아 정수(定叟)의 부탁을 받은 5-6년 후에야 경부(敬夫)의 사적(事跡)을 고람(考覽)하여 아래와 같이 서술(敍述)한다.

淳熙七年春二月甲申, 祕閣修撰․荊湖北路安撫․廣漢張公卒于江陵之府舍. 其弟衡州史君杓護其柩以歸葬于潭州衡陽縣楓林鄕龍塘之原, 按令式立碑墓道, 而以書來謂熹曰: ‘知吾兄者多矣, 然最其深者莫如子, 今不可以不銘.’ 熹嘗竊病聖門之學不傳, 而道術遂爲天下裂. 士之醇慤者拘於記誦, 其敏秀者衒於詞章, 旣皆不足以發明天理而見諸人事, 於是言理者歸於老佛, 而論事者騖於管商, 則於理事之正反皆有以病焉而去道益遠矣. 中間河洛之間, 先生君子得其不傳之緖而推明(8-4545)之. 然今不能百年, 而學者又失其指. 近歲乃幸得吾友敬夫焉, 而天下之士乃有以知理之未始不該於事, 而事之未始不根於理也. 然又不得盡其所爲而中道以沒, 不有考焉以垂於世, 吾懼後之君子將有憾於吾徒也. 熹之愚固不足以及此, 然於共學輩流偶獨後死, 矧定叟之所以見屬者又如此, 其何以辭? 顧以疾病之不間, 後五六年乃得考其事而叙之曰:

 

공의 휘(諱)는 모(某), 자(字)는 경부(敬夫)이니 승상(丞相) 위국충헌공(魏國忠獻公)의 사자(嗣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특이(特異)한 자질(資質)이 있었으며 영오(穎悟)하고 조숙(早熟)하여 충헌공(忠獻公)이 사랑하였다. 그가 처음 공부할 무렵부터 교육받은 것은 충효(忠孝)와 인의(仁義)의 실질(實質) 아닌 것이 없었다. 이미 장성(長成)한 후에는 또 충헌공(忠獻公)의 명(命)을 받아 남악(南嶽) 호공(胡公) 인중선생(仁仲先生)에게 가서 그를 따르면서 하남정씨(河南程氏)의 학문(學問)을 물었다. 인중선생(仁仲先生)은 공을 한 번 보고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아보았다. 이에 곧 인중선생(仁仲先生)은 들은 바 공문(孔門)의 ‘인(仁)을 논한 친절(親切)한 뜻’을 공에게 알려 주었다. 공은 물러나 이를 사려(思慮)해 보니 터득한 것이 있는 듯하였다. 이에 글을 써서 질정(質正)하니 인중선생(仁仲先生)이 알려오기를 “성문(聖門)에 사람이 있으니 오도(吾道)는 다행(多幸)하다.”라고 했다. 공은 이 일로 인해 더욱 스스로 분려(奮厲)하게 되었고, 다만 옛 성현(聖賢)과 같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期約)하고 『희안록(希顔錄)』1편(篇)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관성(觀省)하며 스스로 경책(警策)하였다. 공이 도(道)에 나아간 것은 이미 심원(深遠)하였지만 그래도 오히려 감히 스스로 만족(滿足)하지 않고 곧 사방에서 벗을 취(取)하여 더욱 그의 학문이 도달하지 못한 경지(境地)를 추구하는 데 힘썼다. 대체로 끊임없이 완색(玩索) 강평(講評)하고 천행(踐行) 체험(體驗)해 나간 것이 10여년이나 되었는데, 그런 연후(然後)에는 이전에 이미 도(道)에 심원(深遠)하게 나아간 것이 더욱 심원(深遠)해져서 도리어 간이(簡易) 평실(平實)한 경지(境地)를 터득할 수 있었다. 공은 천하의 리(理)에 대해 대체로 마음과 눈 사이에서 명료(明瞭)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실(其實) 그 리(理)를 실천에 옮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은 그 결단(決斷)이 용감했고 그 행동에 힘이 있었으며 그 지킴이 견고(堅固)했다. 공이 군친(君親)에 대해 돈독(敦篤)하고 도의(道義)에 대해 한결같이 하여 이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애초부터 [공이 군친(君親)을] 힘써 사모(思慕)하고 [도의(道義)를] 억지로 실천에 옮긴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公諱某, 字敬夫, 故丞相魏國忠獻公之嗣子也. 生有異質, 穎悟夙成, 忠獻公愛之. 自其幼學, 而所以敎者莫非忠孝仁義之實. 旣長, 又命往從南嶽胡公仁仲先生問河南程氏學. 先生一見, 知其大器, 卽以所聞孔門論仁親切之指告之. 公退而思, 若有得也, 以書質焉. 而先生報之曰: ‘聖門有人, 吾道幸矣.’ 公以是益自奮厲, 直以古之聖賢自期, 作希顔錄一篇, 蚤夜觀省, 以自警策. 所造旣深遠矣, 而猶未敢自以爲足, 則又取友四方, 益務求其學之所未至. 蓋玩索講評, 踐行體驗, 反覆不置者十有餘年, 然後昔之所造深者益深, 遠者益遠, 而反以得乎簡易平實之地. 其於天下之理, 蓋皆瞭然心目之間, 而實有以見其不能已者. 是以決之勇, 行之力而守之固, 其所以篤於君親․一於道義而沒世不忘者, 初非有所勉慕而强爲也.

 

젊어서 음보(蔭補)로 우승무랑(右承務郞)이 되었고, 천자의 부르심을 받아 선무사도독부서사기의문자(宣撫司都督府書寫機宜文字)가 되고, 비서각(直秘閣)에 제수(除授)되었다. 이 때 천자(天子)가 새로 즉위(卽位)하시어 개연(慨然)히 오랑캐 원수를 분벌(奮伐)하고 신주(神州)를 극복(克復)하는 것을 당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다. 충헌공(忠獻公) 또한 적적(謫籍)에서 기용(起用)되어 주상(主上)의 중대(重大)한 부탁(付託)으로 개부(開府)에서 군대(軍隊)를 다스렸는데, 그 참좌(參佐)가 모두 일시(一時)의 선량(善良)들이었다. 그런데 공은 묘연(藐然)한 소년(少年)으로 그 사이를 주선(周旋)하면서 안으로는 밀모(密謀)를 돕고 밖으로는 서무(庶務)에 참여하였는데, 공의 전반적인 계책(計策)에 대해 막부(幕府)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미칠 수 없다 여겼다. 그 사이에 군(軍)과 관련된 일로 인해 조정에 들어가 상주(上奏)하면서 비로소 주상(主上)을 배알하고 곧 진언(進言)하여 말하기를 “폐하(陛下)께서 위로는 종사(宗社)의 수치(讎耻)를 염려(念慮)하시고 아래로는 중원(中原)이 도탄(塗炭)에 빠진 것을 걱정하시면서, 마음속이 척연(惕然)하시어 이 모든 상황을 새로이 진작(振作)시킬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이에 신(臣)이 보기에, 주상(主上)의 이 마음이 발동(發動)한 것 속에 곧 천리(天理)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원하옵건대 주상께서는 이 마음을 더욱 성찰(省察)하시어 옛 것을 계고(稽考)하고 현자(賢者)를 가까이 하여 스스로 보좌(輔佐)케 하시되 잠시라도 휴식(休息)함이 없도록 하신다면, 금일(今日)의 공(功)을 기필코 이루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고(千古)에 인순(因循)되어오던 폐단(弊端)도 거의 개혁(改革)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상(主上)께서 그 말을 특이(特異)하게 여기셨는데, 대개 이 때 비로소 군신(君臣) 간의 계합(契合)이 정(定)해진 것이다.

(8-4546)少以蔭補右承務郞, 辟宣撫司都督府書寫機宜文字, 除直秘閣. 是時天子新卽位, 慨然以奮伐仇虜․克復神州爲己任. 忠獻公亦起謫籍, 受重寄, 開府治戎, 參佐皆極一時之選. 而公以藐然少年周旋其間, 內贊密謀, 外參庶務, 其所綜畫, 幕府諸人皆自以爲不及也. 間以軍事入奏, 始得見上, 卽進言曰: ‘陛下上念宗社之讎耻, 下閔中原之塗炭, 惕然於中而思有以振之, 臣謂此心之發, 卽天理之所存也. 誠願益加省察而稽古親賢以自輔焉, 無使其或少息也, 則不惟今日之功可以必成, 而千古因循之弊亦庶乎其可革矣.’ 上異其言, 蓋於是始定君臣之契.

 

얼마 후, 충헌공(忠獻公)이 위(位)를 사양하고 떠났다. 조정의 일을 주도하는 자들은 드디어 파병(罷兵)하고 오랑캐와 화의(和議)하였다. 오랑캐는 그 틈을 타고 도리어 군대를 풀어 회전(淮甸)에 침입하였다. 중외(中外)가 크게 진동(震動)했다. 그러나 묘당(廟堂)에서는 여전히 화의(和議)를 주장(主張)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장(諸將)들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오랑캐를 향해 군사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충헌공(忠獻公)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공은 군친(君親)의 염려(念慮)를 이기지 못하여, 처음으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실(事實)을 다 드러내어 절한 뒤 상소(上疏)하여 아뢰기를 “우리는 오랑캐들과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입니다. 지금까지 조정(朝廷)에서 비록 일찍이 흰 상복을 입은 군대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 사이에 옥백(玉帛)을 갖춘 사신(使臣)을 보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가슴 속에 강화(講和)에 관한 생각이 잊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성(至誠) 측달(惻怛)한 마음이 ‘천인의 즈음(天人之際)’에까지 감통(感通)하여 이를 수 없었습니다. 일을 자주 실패(失敗)하고 공(功)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사특한 무리들의 거듭된 오도(誤導)로 인해, 나라를 위축(萎縮)시키고 원수(怨讐)를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늘이 이 일을 통해 성심(聖心)을 열어주시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주상(主上)께서는 마땅히 이 이치를 깊이 살피시어 우리의 가슴 속을 명료(明瞭)하게 하시고 조금의 의혹(疑惑)조차도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이를 중외(中外)에 밝게 알리고 상벌(賞罰)을 공평(公平)히 하여 군민(軍民)의 괴로움을 어루만져 주신다면 인심(人心)은 기뻐하고 사기(士氣)는 충일(充溢)될 것이니, 오랑캐의 퇴각(退却)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이러한 뜻을 더욱 견지(堅持)하시어 ‘강화(講和)를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자강(自强)에 힘써 비록 꺾이더라도 굽히지 않겠노라.’고 맹서하심으로써 이 마음을 순일(純一)하게 하시고 이를 상하(上下)에 관철(貫徹)하신다면 세월(歲月)이 지연(遲延)되더라도 또한 어찌 공(功)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소장(疏章)이 들어갔으나 답이 없었다.

己而忠獻公辭位去, 用事者遂罷兵, 與虜和. 虜乘其隙, 反縱兵入淮甸, 中外大震. 然廟堂猶主和議, 至勑諸將毋得以兵向虜. 時忠獻公已卽世, 公不勝君親之念, 甫畢藏事, 卽拜疏言: ‘吾與虜人乃不共戴天之讎, 向來朝廷雖亦嘗興縞素之師, 然玉帛之使未嘗不行乎其間, 是以講和之念未忘於胸中, 而至誠惻怛之心無以感格乎天人之際. 此所以事屢敗而功不成也. 今雖重爲羣邪所誤, 以蹙國而召寇, 然亦安知非天欲以是開聖心哉? 謂宜深察此理, 使吾胸中了然, 無纖芥之惑, 然後明詔中外, 公行賞罰, 以快軍民之憤, 則人心悅, 士氣充, 而虜不難却矣. 繼今以往, 益堅此志, 誓不言和, 專務自强, 雖折不撓, 使此心純一, 貫徹上下, 則遲以(8-4547)歲月․亦何功之不成哉!’ 疏入不報.

 

6년 후에 비로소 보군(補郡)으로 임견(臨遣)되어 다시 주상(主上)을 배알했다. 당시 재상(宰相)은 비록 중원(中原) 회복(恢復)을 설득(說得)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그 길과는 다른 부류(部類)였다. 또 망령(妄靈)되게도 공의 평소(平素) 지론(持論)이 응당 자기와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자주 사람을 보내 은근(慇懃)함을 다하였다. 이에 공은 응답(應答)하지 않고 주상(主上)을 배알하고 가장 먼저 상주(上奏)하기를 “선왕(先王)의 다스림을 볼 때, 그 일을 세우고 공(功)을 확립(確立)함이 모두 뜻대로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흉중(胸中)의 정성(精誠)이 천인(天人)의 마음에 감동적(感動的)으로 도달하여 [선왕의 정성과 천인의 마음 사이에]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규획(規畫)에 힘쓰고 있으나 사공(事功)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폐하(陛下)께서는 진실로 이 점을 깊이 살피시되, ‘일용(日用)하는 사이와 염려(念慮)하는 즈음에 또한 사의(私意)가 드러나 나의 정성(精誠)을 해치는지’를 반성하시어 만약 그러한 점이 있다면 그 사의(私意)를 극복하고 제거하여 나의 중경(中扃)을 통연(洞然)하게 하여 다른 것이 섞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되어야만 의리(義理)를 인식하는 것이 정미(精微)해지고 의리(義理)를 지키는 것이 반드시 견고(堅固)해져서 구(求)하지 않아도 천인(天人)의 감응(感應)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저 중원(中原)의 땅을 회복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그 곳에 살고 있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백성을 마음을 얻고자 하신다면, 그에 앞서 내가 다스리고 있는 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합니다. 내가 다스리고 있는 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함에 어찌 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힘을 소진(消盡)시키지 말고 그들의 재물을 손상(損傷)시키지 않을 뿐입니다. 금일(今日)의 일은 진실로 대의(大義)를 명확(明確)히 하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선후(先後)가 있으니 그 완급(緩急)을 상세(詳細)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힘쓰는 곳에는 명(名)과 실(實)이 있는 법이니, 그 취(取)하고 버림에 있어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현명(賢明)한 군주가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後六年, 始以補郡臨遣, 得復見上. 時宰相雖以恢復之說自任, 然所以求者類非其道. 且妄意公素論當與己合, 數遣人致慇懃. 公不答, 見上, 首言: ‘先王之治, 所以建事立功無不如志, 以其胸中之誠足以感格天人之心而與之無間也. 今規畫雖勞而事功不立, 陛下誠深察之, 日用之間, 念慮云爲之際, 亦有私意之發以害吾之誠者乎? 有則克而去之, 使吾中扃洞然, 無所間雜, 則見義必精, 守義必固, 而天人之應將不待求而得矣. 夫欲復中原之地, 當先有以得其百姓之心. 欲得中原之心, 當先有以得吾百姓之心. 而求所以得吾民之心者, 豈有它哉, 不盡其力, 不傷其財而已矣. 今日之事, 固當以明大義․正人心爲本, 然其所施有先後, 則其緩急不可以不詳; 所務有名實, 則其取舍不可以不審. 此又明主所宜深察也.’

 

명년(明年)에 공이 소환(召還)되었을 때, 재상(宰相)은 또 바야흐로 “오랑캐의 세력이 쇠약(衰弱)하니 도모(圖謀)해볼 만하다”고 하면서 ‘사신(使臣)을 띄워 보내어 오랑캐 진영(陣營)에 가서 능침(陵寢)을 꾸짖게 할 것’을 건의(建議)하였기 때문에, 사대부(士大夫) 중에는 그가 대비(對備) 없이 군대를 불러들이는 것을 걱정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재상을 이들을 모두 배척했다. 이 즈음에 공이 주상을 배알하게 되었는데, 주상께서 “경(卿)은 오랑캐 진중(陣中)의 일을 아는가?”라고 물으셨다. 공이 대답하기를 “알지 못합니다.”하고 하니, 주상께서 “오랑캐 진중(陣中)에 기근(饑饉)이 여러 해 계속되고 도적(盜賊)이 사방에서 일어난다고 하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비록 오랑캐 진중(陣中)의 일에 관해서는 신(臣)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지경(地境) 안의 일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 “일이 어떠한가?”라고 하자 공은 드디어 아뢰기를 “신(臣)이 가만히 살피건대, 해마다 우리 경내의 여러 도(道)에도 여러 차례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빈궁(貧窮)함이 날로 심해지고 있고 국가(國家)의 병력(兵力)은 약해지고 재물은 바닥이 났습니다. 게다가 관리(官吏)는 탄만(誕謾)하여 믿고 의지하기에 부족합니다. 참으로 가령 그들 오랑캐를 실제로 도모(圖謀)할 수 있다 해도, 신(臣)이 보기에 저들을 도모(圖謀)하기에는 우리가 아직 부족(不足)한 듯하여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께서는 오랜 동안 침묵(沈黙)하셨다. 이에 공은 이전에 상주(上奏)한 글을 꺼내 낭독(朗讀)하여 아뢰기를 “신(臣)은 가만히 말씀드립니다만, 능침(陵寢)이 격절(隔絶)된 것은 참으로 신자(臣子)된 입장에서 차마 말할 수조차 없는 지극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문사(文詞)를 받들어 그들을 토벌(討伐)할 수도 없고, 또 명분(名分)을 바로잡아 그들을 거절(拒絶)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 말을 낮추고 예(禮)를 후(厚)하게 하여 그들에게 구(求)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대의(大義)에 미진(未盡)한 것입니다. 이론(異論)을 내는 자들은 여전히 근심할 것이고, 그에 따라 몽매(蒙昧) 비루(鄙陋)한 채 두려워 겁냄이 또한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가만히 그 마음을 헤아리건대, 그들의 우려 에는 혹 또한 ‘우리가 아직은 필승(必勝)의 형세(形勢)를 지니지 못함을 알고 이를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 표현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개 필승의 형세는 마땅히 ‘미리 매사를 단정(端正)히 하여 평소 [그 필승의 형세를] 확정한 때’에 있는 것이지 [전쟁(戰爭) 당일] ‘양 진영(陣營)에서 승기(勝機)를 결단하는 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주상께서 두려워하며 들으신 후 안색을 바로 하여 재삼(再三) 칭선(稱善)하셨다. 공이 다시 낭독하여 아뢰기를 “금일(今日)에는 다만 마땅히 애통(哀痛)함을 표(表)하는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복수(復讐)의 의리(義理)를 분명(分明)히 하시며, 드러내 놓고 오랑캐를 끊어내시어 그들과는 사신을 교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 연후에 덕(德)을 닦고 정사(政事)를 바로 세우며 현신(賢臣)을 등용하고 백성을 길러야 하며 아울러 장수(將帥)를 선발하고 군대(軍隊)를 훈련(訓練)하여야 합니다. 또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 적(敵)을 물리치는 것’과 ‘나아가 싸우고 물러나 지키는 일’을 하나의 일로 소통(疏通)시키고 또 반드시 그 실질(實質)을 다스리고 허문(虛文)을 짓지 않도록 하신다면 필승의 형세는 은연(隱然) 중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비록 천루(淺陋)하고 두려워 겁내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 또한 분발(奮發) 용약(勇躍)하여 앞을 다투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주상께서 탄식(嘆息)하고 포유(褒諭)하시며 이전에 이 의론(議論)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明年召還, 宰相又方謂虜勢衰弱可圖, 建遣泛使往責陵寢之故, 士大夫有憂其無備而召兵者, 皆斥去之. 於是公見上, 上曰: ‘卿知虜中事乎?’ 公對曰: ‘不知也.’ 上曰: ‘虜中饑饉連年, 盜賊四起.’ 公又對曰: ‘虜中之事臣雖不知, 然境中之事則知之詳矣!’ 上曰: ‘何事?’ 公遂言曰: ‘臣竊見比年諸道亦多水旱, 民貧日甚, 而國家兵弱財匱, 官吏誕謾, 不足倚仗. 正使彼實可圖, 臣懼我之(8-4548)未足以圖彼也.’ 上爲黙然久之. 公因出所奏書讀之曰: ‘臣竊謂陵寢隔絶, 誠臣子不忍言之至痛. 然今未能奉詞以討之, 又不能正名以絶之, 乃欲卑詞厚禮以求於彼, 其於大義已爲未盡. 而異論者猶以爲憂, 則其昧陋畏怯又益甚矣. 然臣竊揆其心, 意其或者亦有以見我未有必勝之形而不能不憂也歟. 蓋必勝之形當在於蚤正素定之時, 而不在兩陳決機之日.’ 上爲竦聽, 改容稱善, 至于再三. 公復讀曰: ‘今日但當下哀痛之詔, 明復讎之義, 顯絶虜人, 不與通使, 然後修德立政, 用賢養民, 選將帥․練甲兵, 通內修外攘․進戰退守以爲一事, 且必治其實而不爲虛文, 則必勝之形隱然可見. 雖有淺陋畏怯之人, 亦且奮躍而爭先矣.’ 上爲嘆息褒諭, 以爲前未始聞此論也.

 

그 후에 또 사대(賜對)가 있을 때마다, 이전의 언설(言說)을 반복(反復)하였는데, 주상(主上)께서는 더욱 가탄(嘉歎)하고 면유(面諭)하시기를 “마땅히 경(卿)을 강관(講官)으로 삼아 수시(隨時)로 오어(晤語)할 수 있기를 바라노라.”고 하셨다. 이 당시 공은 조정(朝廷)에 돌아온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는데도 소대(召對)한 것이 6-7회에 이르렀다. 이에 공은 주상(主上)과의 만남이 비상(非常)한 것이라는 점에 감격(感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아뢰지 않음이 없었는데, 대저(大抵) 그 내용은 모두 ‘몸을 닦고 학문에 힘쓸 것’과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긍휼(矜恤)히 여길 것’, 그리고 ‘권신(權臣)이나 요행(僥倖)을 바라는 자를 억누르고 참소하거나 아첨하는 자를 물리칠 것’ 등과 같은 뜻을 담은 것들이었다. 복수(復讐)의 의리(義理)를 의론(議論)함에 이르러서는 곧 명분과 실제를 분변(分辨)하게 되는 근거를 반복(反復) 추명(推明)한 것이 더욱 상세(詳細)하였다. 이에 재상은 공을 더욱 꺼리게 되었고, 근행(近幸)은 더더욱 공을 기뻐하지 않았다. 드디어 이들은 중외(中外)의 힘을 모아 공을 배척(排斥)하였고 공은 도성(都城)을 떠나게 되었다. 대개 공은 이 때부터 퇴거(退去)한 지 3년 만에 다시 양진(兩鎭)을 경력(經歷)하였다. 비록 다시는 국론(國論)에 참여하여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부지런히 힘쓰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덕을 닦았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군대를 다스렸으니, 이는 공이 ‘국가(國家)에서 의리(義理)를 떠받치고 명분(名分)을 바로잡는 거사(擧事)’가 있을 때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한 것이어서, 더욱 지극하고 간절하였던 것이다. 이에 천자(天子)께서는 공이 등용(登用)될만한 사람임을 더욱 아시게 되었으니, 일찍이 수서(手書)를 하사(下賜)하시어 공의 충실(忠實)을 칭찬하신 것은 대개 장차 공을 다시 크게 쓰실 생각이었던 것인데, 아쉽게도 공은 이미 병이 든 상태였다. 병세가 위독하여 장차 죽게 되었는데도 공은 여전히 직접 상소문(上疏文)을 작성하여 주상께 권면(勸勉)하였으니, 그 내용은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할 것’과 ‘대신을 신임(信任)하고 군주 일신(一身)의 치우친 견해를 막을 것’, 그리고 ‘호오(好惡)를 천하의 이치(理致)에 따라 공평(公平)히 함으로써 사해(四海)를 청정(淸正)하게 하여 비도(丕圖)를 공고(鞏固)히 하되 권권(眷眷)하여 잊을 수 없는 듯이 할 것’ 등이었다. 이에 글을 마치고 이를 봉하여 관부(官府)의 요속(僚屬)에게 부탁하여 역리(驛吏)로 하여금 주상께 올리도록 하였다. 그 얼마 후에 공은 절명(絶命)하였다.

其後又因賜對, 反復前說, 上益嘉歎, 面諭 ‘當以卿爲講官, 冀時得晤語也.’ 時還朝未期歲, 而召對至六七. 公感上非常之遇, 知無不言. 大抵皆修身務學․畏天恤民, 抑權倖․屛讒諛之意. 至論復讎之義, 則反復推明所以爲名實之辨者益詳. 於是宰相益憚公, 而近倖尤不悅, 遂合中外之力以排之, 而公去國矣. 蓋公自是退居三年, 更歷兩鎭, 雖不復得聞國論, 而蚤夜孜孜, 反身修德, 愛民討軍, 以俟國家扶義正名之擧, 尤極懇至. 於是天子益知公可用, 嘗賜手書褒其忠實, 蓋將(8-4549)復大用之, 而公已病矣. 病亟且死. 猶手疏勸上以親君子․遠小人, 信任防一己之偏, 好惡公天下之理, 以淸四海, 克固丕圖, 若眷眷不能忘者. 寫畢, 緘付府僚, 使驛上之, 有頃而絶.

 

오호(嗚呼)라! 정강(靖康)의 변고(變故)에서, 국가의 화란(禍亂)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대소(大小) 신료(臣僚)들 중에 떨치고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 책임(責任)을 자임(自任)한 자는 대개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문을 이을 효성(孝誠)과 나라를 허여(許與)할 충성(忠誠), 그리고 판결(判決)의 명쾌(明快)함과 계려(計慮)의 자세(仔細)함이라는 점에 있어서 또한 공과 같이 훌륭한 사람은 없었다. 비록 타고난 수명이 길지 못하여 끝내 그 업(業)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가 품은 지의(志義)는 참으로 훌륭하여 죽은 뒤에야 그치게 되었다. 이점은 귀신(鬼神)에게 질정(質正)해 보더라도 속일 수 없다.

鳴呼! 靖康之變, 國家之禍亂極矣. 小大之臣, 奮不顧身以任其責者蓋無幾人. 而其承家之孝, 許國之忠, 判決之明, 計慮之審, 又未有如公者. 雖降命不長, 不克卒就其業, 然其志義偉然, 死而後已, 則質諸鬼神而不可誣也.

 

처음에 공이 막부(幕府)에서 나오자 곧 외간(外艱)을 당했다. 이에 공은 낡은 여막(廬幕)에 병거(屛居)한 채 인사(人事)조차 교환(交換)하지 않았다. 마침 침(郴)과 계(桂) 지방 사이에 도적이 일어나 그 성세(聲勢)가 여러 로(路)를 요동(搖動)시켰다. 호남(湖南)의 수수(帥守) 유공공(劉公珙)이 평소에 공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자주 공을 방문하여 계책(計策)을 문의하였는데 마침내 공의 계책을 이용하여 도적을 격파하였다. 그는 조정에 돌아와서 주상께 공의 학행(學行)과 지업(志業)이 보통 사람에 비(比)할 바 아님을 극언(極言)하였다. 주상 또한 공의 의론(議論)의 본말(本末)을 기억(記憶)하시고 공을 무주(撫州) 지사(知事)에 제수(除授)하셨다. 임지(任地)에 오르기도 전에 엄주(嚴州) 지사(知事)로 改授(개수)하셨다. 공은 임지(任地)에 도착하여 백성들에게 그들의 질고(疾苦)를 물었더니, 가장 먼저 정염(丁鹽)과 전견(錢絹)이 너무 무겁다고 했으므로, 공은 이 해의 반수(半輸)를 탕감(蕩減)해 주었다.

始, 公出幕府, 卽罹外艱. 屛居舊廬, 不交人事. 會盜起郴․桂間, 聲搖數路. 湖南帥守劉公珙雅善公, 時從訪問籌策, 卒用以破賊. 還朝, 爲上極言公學行志業非常人比, 上亦記公議論本末, 除知撫州. 未上, 改嚴州. 到任問民疾苦, 首以丁鹽錢絹太重爲請, 得蠲是歲半輸.

 

불려가서 상서리부원외랑(尙書吏部員外郞)이 되었고 좌우사시립관(左右司侍立官)을 겸권(兼權)하였다. 당시 묘당(廟堂)에서는 바야흐로 사정지(史正志)를 등용(登用)하여 발운사(發運使)로 임명했는데, 그는 명목상으로는 균수(均輸)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만 주군(州郡)의 재부(財賦)를 철저히 수탈(收奪)하면서 주상의 귀와 눈을 현혹(眩惑)시키고 있었다. 이에 원근(遠近)이 소연(騷然)했고 사람들이 불안(不安)해 했다. 현명(賢明)한 사대부들은 다투어 그것이 불가(不可)함을 언급했지만 그 요령을 얻은 자는 드물었다. 공도 또한 주상께 아뢰었다. 주상께서는 “사정지(史正志)는 ‘지금은 다만 제군(諸郡)에서 취(取)하는 것일 뿐이니 백성들에게서 취(取)한 것이 아니다’고 여기고 있소. 무슨 문제가 있소?”라고 하셨다. 공에 응대(應對)하기를 “금일 주군(州郡)의 재부(財賦)는 대체로 겁겁(劫劫)하여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계속해서 취(取)하게 되면 경상(經常) 비용(費用)조차 모자라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그것은 명색(名色)만 교묘(巧妙)히 할 뿐 결국 백성에게서 취(取)하는 것에 불과(不過)할 뿐입니다.” 주상께서 듣고 나서 놀라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공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이 일을 의론(議論)한 자는 많았지만, 이 점을 언급할 수 있었던 자는 아직 없었소. 만약 경(卿)의 말씀대로라면, 이는 짐(朕)이 발운사(發運使)의 손을 빌어 나의 백성들을 괴롭힌 꼴이오.”라고 하고 곧바로 그 실상(實狀)을 열람(閱覽)하니 과연 공의 말과 같았다. 이에 곧 발운사(發運使)를 파면(罷免)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리셨다.

召爲尙書吏部員外郞, 兼權左右司侍立官. 時廟堂方用史正志爲發運使, 名爲均輸, 而實但盡奪州郡財賦以惑上聽, 遠近騷然, 人不自安. 賢士大夫爭言其不可, 而少得其要領者. 公亦爲上言之, 上曰: ‘正志以爲今但取之諸郡, 非取之於民也, 何傷?’ 公對曰: ‘今日州郡財賦大抵劫劫無餘, 若取之不已而經用有闕, 則不過巧爲名色而取之於民耳.’ 上聞之矍然, 顧謂公曰: ‘論此事者多矣, 未有(8-4550)能及此者. 如卿之言, 是朕假手於發運使以病吾民也.’ 旋閱其實, 果如公言, 卽詔罷之.

 

시강(侍講)을 겸(兼)하여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에 제수되셨다. 경연(經筵)이 열리자 공을 시(詩)로 입시(入侍)하였는데, 갈담(葛覃)편을 진설(進說)하여 아뢰기를 “다스림은 항상 경건(敬虔)과 외구(畏懼)에서 생겨나고 어지러움은 항상 교만(驕慢)과 음란(淫亂)에서 생겨납니다. 가령 군주(君主)가 매양 가색(稼穡)의 노고(勞苦)를 생각하고 그 후비(后妃)는 직임(織紝)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면 마음이 보존되지 않는 경우가 적을 것입니다. 주(周)나라는 앞뒤에서 이처럼 근검(勤儉)했는데도, 그 후세(後世)에 부인들이 누에치는 일과 베 짜는 일을 버리고 조정의 일을 간섭함으로써 난(亂)의 계제(階梯)가 된 경우가 있었으니, 흥망(興亡)의 효칙(效則)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후 또 그 말을 추광(推廣)하여, 위로 조종(祖宗)의 선왕(先王)들이 가(家)로부터 시작하여 국(國)에 모범(模範)이 되었던 그 아름다움을 진술(陳述)하고, 아래로는 당시 나라의 이로움을 일으키고자 백성을 동요(動搖)시키는 정책의 해로움을 하나하나 배척(排斥)하였다. 이에 주상께서도 감탄(感歎)하시며 “이것이 왕안석(王安石)이 이른바 ‘남의 말을 주휼(賙恤)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이니 [부인이나 내시들의 말에 휘둘리다보면] 국사(國事)를 그르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兼侍講, 除左司員外郞. 經筵開, 以詩入侍, 因葛覃之篇以進說曰: ‘治常生於敬畏, 亂常起於驕淫. 使爲國者每念稼穡之勞, 而其后妃不忘織紝之事, 則心之不存者寡矣. 周之先后勤儉如此, 而其後世猶有以休蠶織而爲厲階者, 興亡之效, 於此見矣.’ 旣又推廣其言, 上陳祖宗自家刑國之懿, 下斥當時興利擾民之害詳焉. 上亦歎曰: ‘此王安石所謂人言不足恤者, 所以誤國事也.’

 

얼마 안 있어, 조정에서는 지합문사(知閤門事) 장열(張說)을 추밀원사(樞密院事) 첨서(簽書)로 임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공은 밤을 세워가며 수소(手疏)를 기초(起草)하여 그 일이 불가(不可)함을 극언(極言)하였다. 또 재상(宰相)에게 나아가 이 일을 질책(質責)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절(激切)하였다. 이에 재상은 부끄러움과 분함을 감당(堪當)하지 못했으나 주상(主上)께서는 홀로 오역(忤逆)이라 여기지 않으시고 친(親)히 서찰(書札)을 보내 공의 상소문(上疏文) 말미(末尾)를 재상(宰相)에게 부촉(付囑)하여 그 취지(趣旨)를 깨닫게 하셨다. 공은 다시 상주(上奏)하여 “문무(文武)의 형세(形勢)는 참으로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상께서는 좌문(左文)과 우무(右武)가 두 권병(權柄)을 균등(均等)하게 견지(堅持)케 하려 하시면서 이와 같은 사람을 등용(登用)하시니, 이는 문리(文吏)의 마음을 승복시기에도 부족하거나와 곧바로 도리어 무신(武臣)의 노여움을 격발(激發)시키지나 않을까 두렵사옵니다.”라고 했다. 이에 주상의 뜻이 감오(感悟)함이 있어 중침(中寢)에서 [공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명(命)을 내리셨다. 그러나 재상은 기실(其實) 장열(張說)과 남몰래 가까이 지냈다. 그리하여 명년(明年)에는 기어이 공을 원주(袁州) 지사(知事)로 내보내고 장열(張說)에게는 이전의 명(命)을 되풀이 하였다. 이에 중외(中外)가 몹시 시끄러웠다. 장열(張說)은 후에 끝내 적소(謫所)에서 죽었다고 한다.

俄而詔以知閤門事張說簽書樞密院事, 公夜草手疏, 極言其不可, 且詣宰相質責之. 語甚切. 宰相慚憤不堪, 而上獨不以爲忤, 親札疏尾付宰相, 使諭指. 公復奏曰: ‘文武之勢誠不可以太偏, 然今欲左文右武以均二柄, 而所用乃得如此之人, 非惟不足以服文吏之心, 正恐反激武臣之怒也.’ 於是上意感悟, 命得中寢. 然宰相實陰附說, 明年, 乃出公知袁州, 而申說前命, 於是中外讙譁, 而說後竟謫死云.

 

순희(淳熙)로 개원(改元)한 그 해로부터 공은 여러 해 가거(家居)하였다. 주상께서는 공을 다시 생각하시어 조서(詔書)를 내려 구직(舊職)을 제수(除授)하시며 정강부(靜江府) 지사(知事) 광남서로(廣南西路) 경략안무사(經略按撫使)에 임명하셨다. 광서(廣西)는 조정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광서(廣西)에 속한 여러 주(州)의 토지는 비어 있었고 백성들은 가난했다. 항상 부입(賦入)이 지출(支出)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종전(從前)에는 법(法)을 세워, 여러 주(州)는 조사전(漕司錢)으로 소금을 사서 운반해 팔고 그 이식(利息)의 10분의 4를 주(州)의 비용(費用)을 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주(州)에는 어느 정도의 물량을 확보하고 백성들에게는 추가되는 부세(賦稅)를 없앴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 후에 간혹 그 이식(利息)의 절반을 탈취(奪取)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리되면 주(州)에서 소금을 다 운반할 수 없게 되고, 조사(漕司) 또한 세액(歲額)으로 그 빈 이식(利息)을 책임(責任)지워야 하기 때문에 고가(高價)로 억매(抑賣)하는 폐단이 발생하여 공사(公私) 양쪽 모두에 병통이 되고 있었다. 이에 공은 처음 그곳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오로지 ‘그 도(道)의 이병(利病)이 무엇인지를 두루 물어 파악하는 것’에 힘썼다. 그리하여 그 원인을 파악하고 나서는 곧 ‘염식(鹽息)의 십 분의 3을 군(郡)에 줄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또 공은 조대(漕臺)를 겸섭(兼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쌓아둔 민전(緡錢) 40만(萬)을 내어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한 몫은 여러 창고(倉庫)에서 소금 사들이는 밑천으로 삼게 하고, 나머지 한 몫은 여러 주(州)에서 소금 운반하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 또 공은 ‘이제부터는 조사(漕司)가 또다시 여러 주(州)로부터 규정보다 많이 취(取)하거나 억매(抑賣)를 자행(恣行)할 경우에는 모두 법제(法制)를 위반(違反)한 것으로 간주하여 죄(罪)를 묻도록 하고, 또 감히 모여서 연음(燕飮)하거나 서로 예물(禮物)을 보내는 자에 대해서는 뇌물죄(賂物罪)에 연좌(連坐)시키도록 하는 등’의 입법(立法)을 주청(奏請)하였다.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공의 주청(奏請)을 모두 허락하였다.

淳熙改元, 公家居累年矣, 上復念公, 詔除舊職, 知靜江府, 經略安撫廣南西路. 廣西去朝廷絶遠, 諸州土曠民貧, 常賦入不支出. 故往時立法, 諸州以漕司錢(8-4551)運鹽鬻之, 而以其息什四爲州用, 以是州得粗給而民無加賦. 其後或乃奪取其息之半, 則州不能盡運, 而漕司又以歲額責其虛息, 則高價抑賣之弊生而公私兩病矣. 公始至, 未及有爲, 專務以訪求一道之利病爲事. 旣得其所以然者, 則爲奏, 以鹽息什三予諸郡. 又因兼攝漕臺, 出其所積緡錢四十萬而中分之, 一以爲諸倉買鹽之本, 一以爲諸州運鹽之費. 奏請立法, 自今漕司復有多取諸州, 輒行抑賣, 悉以違制議罪. 其敢以資燕飮․供饋餉者, 仍坐臟論. 詔皆從之.

 

공이 통괄(統括)하는 25개 주(州)는 멀고 황량한 곳이어서 도적(盜賊)이 많았다. 또 변경(邊境) 밖의 만이(蠻夷)의 풍속(風俗)은 원수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숭상하고 침략(侵掠)하기를 좋아했는데 간혹(間或) 우리 변방에 침입하여 난폭한 짓을 일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병(州兵)은 모두 취약(脆弱)하고 게을렀으며 군량(軍糧)이 결핍(缺乏)되었다. 그리하여 주병(州兵) 중 사망자(死亡者)가 생기면 그 부족한 액수(額數) 만큼의 군량(軍糧)을 다시 보충(補充)하지 못했다. 향촌(鄕村) 부락(部落)의 보오(保伍) 또한 이름만 있었지 실제로는 폐지(廢止)된 상태였다. 옹관(邕管)은 여러 만이(蠻夷) 가운데로 진입(進入)하는 관문 중에 가장 중요한 땅인데, 그곳을 지키는 수병(戍兵)이 1 천(千) 명도 되지 않았다. 오직 좌(左) ․ 우강(石江)의 동정(洞丁) 10여 만(萬)을 믿고 이들을 번폐(藩蔽, 울타리)로 삼고 있는 형편이었고, 부선(部選) 제거순검관(提擧巡檢官)은 애초부터 사람을 뽑지도 않았다. 공은 그 폐단을 알아차리고 곧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병(州兵)을 간열(簡閱)하여 쓸 데 없는 것은 없애고 빠진 것은 보충하였으며, 여러 주(州)에서 뽑혀온 경졸(黥卒)들의 호적(戶籍)을 검토하여 체격(體格)이 강건(强健)한 자를 효용군(效用軍)에 편입시키고 이들을 친병군(親兵軍) 최봉군(摧鋒軍) 등과 통합(統合)하여 날마다 연습시키고 달마다 어루만지며 훈련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부역(負役)을 모두 금지(禁止)했는데도 여러 다른 주(州)에 비해 여전히 군량(軍糧)의 지급(支給)이나 모든 과갑(戈甲)의 비용(費用)에 부족한 점이 있었다. 이에 다시 조사(漕司)에게 ‘소금의 경우, 선전(羨錢)에 근본(根本)하여 [이와 같은 부족분(不足分)을] 돕는 것임을 지적하고, 거듭 보오(保伍)에 대한 명령을 엄중히 하여 그 상벌(賞罰)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유인(流人) 사세견(沙世堅)이 용맹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깨우쳐서 토적(討賊)을 통해 자효(自效)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사로잡거나 죽인 도적이 전후(前後) 1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또 조정에 글을 올려 ‘옹주(邕州) 제거순검관(提擧巡檢官)을 선벽(選辟)하여 동정(洞丁)을 어루만지도록 해 줄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또 계동(溪洞)의 추호(酋豪)에게 령(令)을 전하여 ‘원망을 중지하고 이웃과 화목할 것이며, 사람의 목숨을 애석(愛惜)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자손의 장구(長久)한 안녕(安寧)을 위한 계책(計策)이니, 이제부터는 문득 서로 노략(虜掠)질을 하지 말고 원수끼리 서로 살생(殺生)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깨우쳤다. 아울러 그들이 감히 경내(境內)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은혜(恩惠)와 신의(信義)를 확립하고 관문(關門)의 방비(防備)를 신중히 하고 형제(形制)를 보여주는 것 또한 갖추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에 경내(境內)는 바로잡혀 깨끗해지고, 방외(方外)는 부드럽게 복종해왔다. 이에 막부(幕府)에서는 남쪽의 만이(蠻夷)를 향한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所統州二十有五, 遼夐荒殘, 故多盜賊. 徼外蠻夷俗尙讎殺, 喜侵掠, 間亦入塞爲暴. 而州兵皆脆弱慵惰, 又乏糧賜, 死亡輒不復補, 鄕落保伍亦名存而實廢. 邕管斗入群蠻中, 最爲重地, 而戌兵不能千人, 獨恃左․石江洞丁十餘萬爲藩蔽, 而部選提擧巡檢官初不擇人. 公知其弊, 則又爲之簡閱州兵, 汰冗補闕, 籍諸州黥卒伉健者以爲效用, 合親兵摧鋒等軍, 日習而月按之. 悉禁它役, 視諸州猶有不足於糧賜若凡戈甲之費者, 更斥漕司鹽本羨錢以佐之, 申嚴保伍之令而信其賞罰. 知流人沙世堅才勇, 喩以討賊自效, 所捕斬前後以十百數. 又奏乞選辟邕州提擧巡檢官以撫洞丁, 傳令溪洞酋豪, 喩以弭怨睦鄰, 愛惜人命, 爲子孫長久安寧之計, 毋得輒相虜掠,讎殺生事. 而它所以立恩信․謹關防․示形制者, 亦無不備. 於是境(8-4552)內正淸, 方外柔服, 幕府無南鄕之慮矣.

 

조정(朝廷)에서는 횡산(橫山)에서 전마(戰馬)를 구매(購買)해 왔는데, 해가 오래 지남에 따라 폐단이 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변맹(邊氓, 즉 邊民)이 고통을 호소했고, 말은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도착한 말도 길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공은 그 이해(利害)관계를 연구(硏究)하여 모두 60여 조목(條目)을 알아내었다. 예를 들어 옹수(邕守)가 전마(戰馬)를 구매(購買)하는 것을 상변(上邊)으로 하다 보니, 빈강(瀕江)에서 배를 구매하는 동요(動搖)가 생겨나게 되었고 ; 강마(綱馬)가 도중(道中)에 있을 때는 그 연도(緣道)에 사는 백성들이 강제 노역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었다. 또 말이 도중(道中)에 죽을 경우 곧 그 고기를 민간에 강매(强賣)함으로써 거듭 인근(隣近) 주민들에의 환난(患難)이 되고 있었다. 이 모두는 말에게도 무익(無益)하고 사람에게도 해로운 일이었다. 이에 공은 가장 먼저 이를 개혁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그 나머지 문제들, 예를 들어 ‘급납등량지권(給納等量支券)’의 간특(姦慝)함에서부터 ‘관교참사명차(官校參司名次)’의 폐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근본 문제점을 궁구하여 미리 예방하는 데 힘썼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 만이(蠻夷)가 감열(感悅)하여, 다투어 그들의 좋은 말을 보내 왔다. 세액(歲額)도 대체로 항상 기일에 앞서 갖추게 되었으므로 말은 체류(滯留)되는 일이 없어졌고, 사람들도 말을 애석(愛惜)히 여길 줄 알게 되어, 또 다시 말이 도로(道路)에서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朝廷買馬橫山, 歲久弊積, 邊氓告病而馬不時至, 至者多道死. 公究其利病, 得凡六十餘條. 如邕守上邊, 則瀕江有買船之擾; 綱馬在道, 則緣道有執牽之勞. 其或道死, 則抑賣其肉, 重爲鄰伍之患. 是皆無益於馬而有害於人, 首奏革之. 其他如給納等量支券之姦, 以至官校參司名次之弊, 皆有以究其根穴而事爲之防, 由是諸蠻感悅, 爭以其善馬來, 歲額率常先期以辨, 而馬無滯留, 人知愛惜, 遂無復死道路者.

 

주상께서는 공의 치행(治行)에 관해 들으시고 또 공이 일찍이 년로(年勞)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여, 이에 조서를 내리시어 특별히 공을 승사랑(承事郞)에 전임(轉任)토록 하고 나아가 곧바로 보문각(寶文閣)에 재임(再任)토록 하였다. 5년에 비각수찬(祕閣修撰)과 형호북로(荊湖北路) 전운부사(轉運副使)에 제수되었고, 다시 강릉부(江陵府) 지사(知事) 및 형호북로(荊湖北路)의 안무사(按撫使)에 개수(改授)되었다. 호북(湖北)은 더욱 도적이 많았다. 주현(州縣)에서는 이 문제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함께 관용을 베풀어 도적을 풀어주기까지 함으로써 양민(良民)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공은 경내(境內)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도적을 풀어준 대리(大吏)를 탄핵(彈劾)하여 그를 파면(罷免)하고 도적을 놓아 준 간민(姦民)을 체포하여 그를 참수(斬首)하였다. 이에 군도(群盜)가 극도로 놀라 서로 거느리고 도망가 버렸다. 공은 또 조목조목 가르치는 데 더욱 힘을 들였고, 조목별로 이로움과 해로움을 일러주어 그들을 깨우침으로써 그들 자신의 마음을 바꿀 줄 알게 해 주었으며, 아울러 그 무리들과 더불어 서로 포고(捕告)함으로써 죄(罪)를 면제(免除)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 나머지 금령(禁令)과 방략(方略)은 대체로 광서(廣西)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이에 하나의 로(路) 전체가 숙청(肅淸)해져서 선량(善良)한 백성들이 비로소 안거(安居)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북변(北邊)에서 멀지 않은 군(郡)에는 비록 대군(大軍)을 나누어 주둔(駐屯)시킨 경우가 자못 있었지만 주병(主兵)의 관솔(官率)이 항상 수수(帥守)와 서로 맞지 않았다. 그런데 수수(帥守)가 거느리는 것은 오직 친병(親兵)인 신경군(神勁軍) 과 민병(民兵)인 의용군(義勇軍) 약간명인데 매년 또 간열(簡閱)을 폐지(廢止)하여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공은 제장(諸將)을 예우(禮遇)하여 그들의 환심(驩心)을 얻었고, 또 그 사졸(士卒)들 개개인을 주휼(賙恤)하는 데도 많은 힘을 들였다. 이에 제장과 사졸들은 공에게 감열(感悅)하여, 번번이 공의 령(令)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서로 경계하였다. 또 공은 매양 친병(親兵)을 어루만져 그들로 하여금 반드시 대군(大軍)과 함께 서로 섞여 시험해보게 함으로써 서로 격려(激厲)하게 했다.또 호상(犒賞)을 고르게 하였으며 의(義)를 닦고 과감하게 법(法)을 집행하여, 그들로 하여금 현도(縣道)의 계급(階級)에 따르도록 했다. 또 농사 틈에 무사(武事)를 훈련(訓練)하고 연습(演習)하도록 가르친 다음, 불시(不時)에 안험(按驗)하여 그 결과에 따라 상벌(賞罰)을 행하였다. 그 후 단체(團體) 교육(敎育)을 할 때에는 또 직접 그들을 대면(對面)하여 그들을 위로(慰勞)하며 깨우쳤으며, 충성(忠誠)과 의리(義理)에 힘쓰게 하고 돈독(敦篤)하고 화목(和睦)하라고 가르쳤다. 또 수령(首領) 중에 도적(盜賊)을 사로잡은 이가 있으면 주청(奏請)하여 관직(官職)에 보임(補任)토록 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융정(戎政)이 나날이 닦여져 갔고, 그에 따라 병사(兵士)들의 마음 또한 더욱 감분(感奮)하게 되었다. 때마침 누군가가 조정에 진언(進言)하여 ‘객호(客戶)의 호적(戶籍)을 모두 조사하여 이들을 의병(義兵)으로 만들 것을 주청(奏請)’한 일이 있었다. 이에 공은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유망(流亡)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을 우려(憂慮)하고 또 당혹(當惑)하여, 급히 정적(丁籍)을 취(取)하여 열람(閱覽)한 다음 ‘한 호(戶)에 정(丁)이 셋 있는 경우는 그 중 한 정(丁)을 적(籍)에 올려 의용부군(義勇副軍)을 삼게 하라’고 명(命)하고, 별도로 총수(總首)를 두어 사람마다 쇠뇌 하나씩을 지급(支給)하여 각 가정에서 그것을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 3년에 한 차례 관리를 보내 각 가정에 나아가 그들을 어루만지도록 조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의병(義兵)에 간여(干與)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또 그들 객호(客戶)를 다 취(取)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조정에 상주(上奏)하였다. 이에 합경(闔境)이 모두 공의 의견을 신뢰(信賴)하게 되었다.

上聞公治行, 且未嘗叙年勞, 乃詔特轉承事郞․進直寶文閣再任. 五年, 除祕閣修撰․荊湖北路轉運副使, 改知江陵府, 安撫本路. 湖北尤多盜, 州縣不以爲意, 更共縱釋, 以病良民. 公入境, 首劾大吏之縱賊者罷之, 捕姦民之舍賊者斬之, 群盜破膽, 相率遁去. 公又益爲條敎, 喩以利害, 俾知革心, 開其黨與, 得相捕告以除罪. 其餘禁令方略, 大率如廣西時. 於是一路肅淸, 善良始有安居之樂. 郡去北邊不遠, 雖頗有分屯大軍, 而主兵官率常與帥守不相中. 帥守所將獨神勁親兵及義勇民兵若干人, 比年亦廢簡閱, 不足恃. 公旣以禮遇諸將, 得其驩心, 而所以恤其士伍之私者亦無不至, 於是將士感悅, 相戒無輒犯公令. 每按親兵, 必使與(8-4553)大軍雜試.以相激厲. 均犒賞, 修義勇法 便從縣道階級. 喩以農隙閱習武事, 以俟不時按驗而加賞罰焉. 其後團敎, 則又面加慰諭, 勉以忠義而敎以敦睦. 首領有捕盜者, 爲奏補官. 由是戎政日修而士心亦益感奮. 會有獻言於朝, 請盡籍客戶爲義勇者. 公慮惑民聽, 且致流亡, 亟取丁籍閱之, 命一戶而三丁者乃籍其一以爲義勇副軍, 別置總首, 人給一弩, 俾家習之. 三歲一遣官就按, 它悉無有所與. 且爲奏言所以不可盡取之故, 闔境賴焉.

 

진(辰) ․ 원(沅)의 여러 주(州)에서는 정화(政和) 연간(年間)에서부터 민전(民田)울 빼앗고 유타(游惰)한 자들을 모아들여 이들을 도노수(刀弩手)라 불렀는데, 대개 이들을 이용하여 여러 만족(蠻族)들을 공제(控制, 즉 掌握)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이들을 활용(活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다시 수리(修理)하였는데, 의론하는 자들 중에는 이 제도가 불편(不便)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제사(諸司)와 더불어 이 일을 공평하게 처리할 방안을 상의하고 그 내용을 나열하여 조정에 올리라는 조서(詔書)가 내렸다. 공은 ‘백성에게 고통을 주거나, 엉터리없이 주상(主上)을 속이는 몇몇 조목(條目)을 제거(除去)해야 함’을 상주(上奏)하였다. 그 결과, 공의 의견을 그대로 시행하라는 조서가 내려왔다. 사람들도 편리하다고 여겼다. 또 변방을 나가 도적질하던 회(淮)의 간민(姦民)을 물리쳐서 그들을 모두 법에 따라 사형(死刑)에 처했다. 다른 때에는 관리(官吏)들이 덮어 숨기고 다스리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여러 사람을 체포(逮捕)하였는데, 그 무리 중에 호로(胡奴)가 섞여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아직도 명분을 바로 세워 도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강장(疆場)의 일에서조차 ‘우리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오명(汚名)’을 자주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 후, ‘그들을 참(斬)하여 지경(地境)에 조리돌리라.’고 명(命)하고 또 그 도망 온 호로(胡奴)는 포박(捕縛)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북인(北人)들이 공의 일 처리(處理)가 정직(正直)한 데 감탄(感歎)하며, “남조(南朝)에도 이제 사람 같은 사람이 있구나.”라고 말하였다.

辰․沅諸州自政和間奪民田募游惰, 號刀弩手, 蓋欲以控制諸蠻而實不可用. 中廢復修, 議者多不以爲便, 詔與諸司平處列上. 公爲奏去其病民罔上者數條, 詔皆施行, 人亦便之. 並淮姦民出塞爲盜, 法皆處死. 異時官吏多蔽匿弗治, 至是捕得數人, 仍有胡奴在黨中. 公曰: ‘朝廷未能正名討賊, 則疆場之事不宜使數負吾曲.’ 命斬之, 以狥於境, 而縛其亡奴歸之. 北人歎其理直, 且曰南朝於是爲有人矣.

 

신양(信陽) 태수(太守) 유대변(劉大辯)이라는 자는 무주(婺州) 사람인데, 세력을 믿고 상(賞) 받기를 희구(希求)하여, 유민(流民)을 유치(誘致)하여 그들에게 현호(見戶)의 숙전(熟田)를 빼앗아 그들에게 준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군(郡) 전체가 흉흉(洶洶)하여, 공이 관리를 보내 평장(平章)하였더니 이에 안정(安定)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유대변(劉大辯)은 북인(北人) 중에 회수(淮水) 근방에 있던 도적들을 쫓아내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또 공연히 놀라 밤에 성곽(城郭)을 버리고 가재(家財) 도구를 다 챙겨서 남쪽으로 수십 리(里) 도주(逃走)한 일이 발생하여, 군민(軍民)이 또다시 크게 동요(動搖)했다. 공은 바야흐로 그를 탄핵(彈劾)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유대변(劉大辯)의 청(請)에 따라 현호(見戶)의 황전(荒田)을 유민(流民)들에게 주었다. 이 일이 본도(本道)에 하달(下達)되었고, 유대변(劉大辯)이 청한 소장(疏章)과 같이 시행(施行)되었다. 이에 공은 또 다시 상주(上奏)하여 “폐하(陛下)께서는 변민(邊民)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어 전에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이미 개간(開墾)한 땅을 차지한 자의 경우는 다시 통검(通檢)하지 아니하고, 그 아직 개간(開墾)하지 않은 땅을 차지한 자의 경우는 2년을 개간하지 않으면 이에 거두어 들여 영전(營田)으로 만든다.’고 하셨는데 폐하의 덕(德)이 지극히 두텁습니다. 이제 기한(期限)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대변(大辯)은 폐하께서 선포(宣布)한 내용을 봉승(奉承)하는 데 힘쓰지 않고 도리어 거짓을 설(設)함으로써 나라의 큰 믿음을 어그러지게 하고 흉학(凶虐)한 자를 도와주었습니다. 또 불러들인 유민(流民)은 100 명에도 차지 않는데 헛되이 그 10배를 아뢰었습니다. 청컨대 대변(大辯)이 이전에 주청(奏請)한 것을 물리치고 법에 따라 논죄(論罪)하소서.”라고 하였다. 소장(疏章)이 여럿 올라갔다. 대변(大辯)은 그래도 [법에 따라 논죄(論罪)되지 않고] 바뀌어 다른 군(郡)으로 가게 되었다.

信陽守劉大辯者, 婺州人也, 怙勢希賞, 誘致流民而奪見戶熟田以與之, 一郡洶洶. 公爲遣吏平章, 乃定. 及是聞北人逐盜有近淮者, 則又虛驚, 夜棄城郭, 盡室南走數十里, 軍民復大擾. 公方劾奏之, 而朝廷用大辯請, 以見戶荒田授流民. (8-4554)事下本道, 施行如章. 公復奏曰: ‘陛下幸哀邊民, 前詔占田已墾者不復通檢․其未墾者二年不墾, 乃收爲營田, 德至渥也. 今未及期, 而大辯不務奉承宣布, 反設詐諼, 虧國大信, 以濟凶虐. 且所招流民不滿百數, 而虛奏且十倍. 請幷下前奏, 論罪如法.’ 章累上, 大辯猶得易它郡以去.

 

대체로 당시 주상께서는 이 일로 인해 공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고, 공을 미워하는 자의 시기(猜忌)도 이 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공은 이 때부터 그 직책(職責)을 마음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자주 물러갈 것을 요구했으나 주상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이윽고 병(病)이 나자 물러갈 것을 요청(要請)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러나 여러 번 조서(詔書)를 내려 공을 우문전수찬(右文殿修撰) ․ 제거무이산충우관(提擧武夷山冲佑觀)으로 삼았지만, 공은 이미 이를 배수(拜受)할 수 없었다. 졸(卒)할 때 공의 나이는 48세였다. 공의 영구(靈柩)가 강릉(江陵)을 빠져 나올 때, 늙은이와 어린 아이들이 영구차를 붙들고 부르짖으며 통곡했고, 이 행렬이 수 십리를 끊이지 않았다. 공의 부고(訃告)를 듣고 주상께서도 깊이 차도(嗟悼)하셨다. 사방의 현명(賢明)한 사대부들 중에는 왕왕(往往) 눈물을 흘리며 서로 공의 죽음을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강(靜江)사람들이 더욱 애통(哀慟)해 하며 통곡(慟哭)했다. 대개 공의 사람됨은 탄탕(坦蕩)하면서도 명백(明白)하고 표리(表裏)가 통연(洞然)하였으며, 리(理)에 대한 조예(造詣)는 이미 정밀(精密)하였고 도(道)에 대한 믿음 또한 돈독(敦篤)하였다. 공은 누군가 자신의 허물을 지적해 줄 때 이를 듣는 것을 즐겨하였으며 의(義)로 옮겨가는 데 용감했다. 이 때문에, 매사에 분발하여 명쾌하게 결단(決斷)하였으며 조금도 인색(吝嗇)한 뜻에 막히지 않았다. 심지어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입으로 ‘천리(天理) 인욕(人欲)의 사이’를 끊임없이 읊조렸으니 평일(平日)에 그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공의 덕(德)은 날로 새로워졌고 공의 업(業)은 날로 넓어졌다. 그러한 공의 그 덕업(德業)이 공의 논설(論說)과 행사(行事) 사이에 드러나게 되었기에,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이와 같은 정도로 공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 비록 소인이 그의 사적인 호오(好惡)에 입각하여 일시(一時)에 공을 옹해(壅害)하는 것을 가능했지만, 장구(長久)한 공론(公論)에 이르러서는 대체로 그 누구도 공을 덕업을 가려 덮을 수 없었다.

蓋方是時, 上所以知公者愈深, 而惡公者忌之亦愈力. 公自以不得其職, 數求去不得, 尋以病請, 乃得之. 然比詔下, 以公爲右文殿修撰․提擧武夷山冲佑觀, 則已不及拜矣. 卒時年四十有八. 柩出江陵, 老稚挽車號慟, 數十里不絶. 訃聞, 上亦深爲嗟悼. 四方賢士大夫往往出涕相弔, 而靜江之人哭之尤哀. 蓋公爲人坦蕩明白, 表裏洞然, 詣理旣精, 信道又篤, 其樂於聞過而勇於徙義, 則又奮厲明決, 無豪髮滯吝意. 以至疾病垂死而口不絶吟於天理人欲之間, 則平日可知也. 故其德日新, 業日廣, 而所以見於論說行事之間者, 上下信之至於如此. 雖小人以其好惡之私, 或能壅害於一時, 然至於公論之久長, 蓋亦莫得而揜之也.

 

공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반드시 피교육자로 하여금 먼저 의(義)와 리(利)의 사이를 살핀 후 명리(明理) 거경(居敬)하여 그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도록 하였으니, [의(義)와 리(利)의 사이를] 쪼개고 나누고 열어 밝힐 뿐만 아니라 기울여 그 내부까지 속속들이 검토함으로써 반드시 양단(兩端)을 다 파헤친 이후에 그만두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다스린 군(郡)에서는 반드시 공의 학문(學問)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특히 정강(靜江)이 그러하였다. 공은 한가한 날이면 제생(諸生)을 모아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타일렀고, 백성들 중에 일이 있어 관청에 오는 자가 있으면 또 반드시 그 일에 따라 가르치고 경계(警戒)하였는데, 효제충신(孝悌忠信)과 목인임휼(睦婣任恤)의 뜻에 더욱 힘썼다. 그렇게 했는데도 공은 백성들이 여전히 공의 가르침을 두루 받아들이지 못할까 우려되어 또 문장(文章)을 새겨 그들을 깨우쳤다. 그리하여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혼인(婚姻)에 관한 법도 및 풍토(風土)와 습속(習俗)의 폐단(弊端)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되는 사안(事案)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훈계(訓戒)하였다. 또 여정(閭井)에 명(命)하여 제각기 기숙(耆宿)을 향로(鄕老)로 추천하여 그분들께 가초(夏楚)를 주어 조목조목 가르침을 내려 그 자제들을 훈계하고 면려하도록 하였다. [이분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자제들의 문제행동이] 변화되지 않을 경우, 유사(有司)에게 말하여 법에 따른 형벌을 가(加)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광서(廣西)의 형옥(刑獄)의 사자(使者)였던 육제(陸濟)의 아들이 집을 버리고 부도(浮屠)가 되었는데 아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분상(奔喪)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이에 공은 여러 로(路)에 이 사실을 알리는 이문(移文)을 보내 그 사람을 잡아들이게 하여 그의 집에 보냈다. 또 관리(官吏)들 중에 명교(名敎)를 범(犯)한 자가 있을 경우 그들을 모두 배척하여 내 보냈으며, 심한 경우는 당사자를 탄핵(彈劾)하는 글을 올려 죄(罪)에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조처하였다. 공은 더욱이 세속에서 숭상하던 귀신설(鬼神說)과 노불(老佛)의 설(說)을 미워하여 공이 이르는 곳이면 반드시 이들을 막아 단절시켰다. 그리하여 대체로 공이 헐어버린 음사(淫祠)가 전후(前後) 100여 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사직(社稷) 제사와 산천(山川) 제사 및 옛 성현(聖賢)들이 정성스레 받들었던 제사에 대해서는 비록 법령(法令)에는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의리(義理)에 따라 그 제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 따른 공의 도사(禱祠, 즉 제사)는 감응(感應)되지 않음이 없었다.

公之敎人, 必使之先有以察乎義利之間, 而後明理居敬, 以造其極. 其剖析開明, 傾倒切至, 必竭兩端而後已. 所爲郡必葺其學, 於靜江又特盛. 暇日召諸生告語不倦, 民以事至廷中者, 亦必隨事敎戒, 而於孝弟忠信․睦婣任恤之意尤孜孜(8-4555)焉. 猶慮其未徧也, 則又刻文以開曉之. 至於喪葬嫁娶之法, 風土習俗之弊, 亦列其事以爲戒. 命閭井各推耆宿, 使爲鄕老, 授之夏楚, 使以所下條敎訓厲其子弟, 不變, 然後言之有司而加法刑焉. 在廣西, 刑獄使者陸濟之子棄家爲浮屠, 聞父死, 不奔喪. 爲移諸路, 俾執拘以付其家. 官吏有犯名敎者, 皆斥遣之, 甚或奏劾抵罪. 尤惡世俗鬼神老佛之說, 所至必屛絶之. 蓋所毁淫祠前後以百數, 而獨於社稷山川․古先聖賢之奉爲兢兢, 雖法令所無, 亦以義起. 其水旱禱祠, 無不應也.

 

평생(平生) 저서(著書)한 것 중에 오직『논어설(論語說)』이 가장 늦게 나왔고, 『수사언인(洙泗言仁)』과『제갈충무후전(諸葛忠武侯傳)』이 각각 완성된 책으로 이루어졌다. 그 나머지 시(書) ․ 서(詩) ․ 맹자(孟子) ․ 태극도설(太極圖說) ․ 경세편년(經世編年)과 같은 등속에 대해서는 조금 더 원고를 다시 정리(定理)하고자 하나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저서에서 그 강령(綱領)을 추린다면 그것은 곧 ‘후학(後學)을 계발하고 깨우쳐 그들로 하여금 그 지향(志向)이 혼미(昏迷)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니 그 공(功)이 이미 대단하다. 대개 공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늘 해오셨다. 즉 “배움에 있어서는 의리(義利)를 분변(分辨)하는 것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의(義)란 본심(本心)에서 우러나온 바의 당위(當爲)로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지 의도적인 노력을 가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단 한 번이라도 의도적인 노력을 가한 이후에 이루어진 행위라면 그것은 모두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지 천리(天理)가 보존된 것이 아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호(嗚呼)라! 지극하도다. 이 말씀이여! 공의 이 말씀은 또한 전성(前聖)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것을 확충(擴充)한 것이니, [맹자(孟子)의] 성선(聖善) 양기(養氣)의 학설과도 같은 공(功)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平生所著書, 唯論語說最後出. 而洙泗言仁, 諸葛忠武侯傳爲成書. 其它如書․詩․孟子․太極圖說․經世編年之屬, 則猶欲稍更定焉而未及也. 然其提綱挈領, 所以開悟後學, 使不迷於所鄕, 其功則已多矣. 蓋其常言有曰: ‘學莫先於義利之辨, 而義也者, 本心之所當爲而不能自已, 非有所爲而爲之者也. 一有所爲而後爲之, 則皆人欲之私, 而非天理之所存矣.’ 嗚呼, 至哉言也! 其亦可謂擴前聖之所未發, 而同於性善養氣之功者歟!

 

공의 주리(州里)와 세계(世系)는 이미 충헌공(忠獻公)의 비문(碑文)에 나타나 있으니 여기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배우(配偶)는 우문씨(宇文氏)인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사중(師中)의 따님이시다. 구고(舅姑)를 잘 섬겨 효성(孝誠)으로 알려졌으며 군자(君子)를 보좌(保佐)함에 거스르는 덕(德)이 없었다. 안인(安人)에 봉(封)해졌고 공보다 앞서 졸(卒)하였다. 공의 자(子) 작(焯)은 승봉랑(承奉郞)인데 그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공의 두 따님 중에 장녀(長女)는 오봉선생(五峰先生)의 아들 호대시(胡大時)에게 시집갔고, 차녀(次女)는 시집가기 전에 죽었다. 공의 손(孫)은 여럿 있으나 아직 어리다. 수년 뒤에 호씨(胡氏)의 딸과 공의 손(孫) 아무개도 일찍 죽었다. 오호(嗚呼)라! 경부(敬夫)가 가버렸구나! 내 차마 내 친구를 위해 명문(銘文)을 짓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마 명(銘)하여 가로대 :

公之州里世系已見於忠獻公之碑, 此不著. 其配曰宇文氏, 朝散大夫師中之女, 事舅姑以孝聞, 佐君子無違德, 封安人, 前卒. 子焯, 承奉郞, 亦蚤世. 二女, 長適五峰先生之子胡大時, 次未行而卒. 孫某某, 尙幼. 後數年, 胡氏女與(8-4556)某亦皆夭. 鳴呼! 敬夫已矣! 吾尙忍銘吾友也哉? 銘曰:

 

투윤(鬪尹)의 충성(忠誠)과 문자(文子)의 청렴(淸廉)이 사욕(私欲)을 따른 것이 아닌데도 인(仁)이라 일컬어지지는 못했도다. 그 누가 정곡(正鵠)을 펼쳐내어 후학(後學)을 가르치셨는가? 공이 그 기미(機微)를 타고 잠자다 깨어난 듯 하였도다. 이로부터 그 후에는 공의 모든 움직임에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도다. 공의 효성은 어버이의 뜻을 이어받았고 공의 충성은 천심(天心)을 바로잡았도다. 오직 효도(孝道)하고 오직 충성(忠誠)함으로써 그 의리(義理)를 한결같이 이어갔도다. 오직 천명(天命)은 존엄(尊嚴)하시니 어찌 리(利)를 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에 사특한 무리들이 방자하고 허탄(虛誕)함에 공은 이들을 피하여 돌아왔도다. 또 양진(兩鎭)의 남은 공(功)은 덕(德)으로 위엄(威嚴)을 삼은 것이었도다. 이에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깊이 품으리라. 너의 충성(忠誠)과 진실(眞實)을. 우선 외용(外庸)을 마치고 와서 나를 돕고 나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하셨도다. 상천(上天)은 매우 신령(神靈)하신데 어찌하여 밝게 비추어 주심을 잃어버리셨는가? 그리하여 저 완악(頑惡)한 자들은 빨리 요절(夭折)케 하지 않으시면서 이 철인(哲人)을 시들게 하시는가! 지난날은 망망(茫茫)하고 내금(來今)도 다함이 없도다. 인(仁)을 구(求)하여 인(仁)을 얻었으니 공이야말로 어찌 한(恨)할 것이 있겠소?

鬪尹之忠, 文子之淸. 匪欲之狥, 而仁弗稱. 孰的孰張, 以詔後學? 公乘厥機, 如寐斯覺. 自時厥後, 動罔弗欽. 孝承考志, 忠格天心. 唯孝唯忠, 惟一其義. 惟命有嚴, 豈曰爲利. 群邪肆誕, 公避而歸. 兩鎭餘功, 以德爲威. 帝曰懷哉, 汝忠而實. 姑訖外庸, 來輔來拂. 上天甚神, 曷監而遺? 彼頑弗夭, 此哲而萎. 往昔茫茫, 來今不盡. 求仁得仁, 公則奚恨?

 

 

 

직비각(直秘閣)으로 조의대부(朝議大夫)에 추증되신 범공(范公)의 신도비(神道碑) (直秘閣贈朝議大夫范公神道碑)

 

소흥(紹興) 초에 천자께서는 종묘(宗廟) 사직(社稷)이 오랜 동안 점위(阽危)의 치욕(恥辱)을 당하고도 이를 되갚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시어 오매불망(寤寐不忘) 준걸(俊傑)을 찾아 사공(事功)을 도모하려 하셨다. 그 결과 조충헌공(趙忠簡公)과 장충헌공(張忠獻公)을 얻어 재상으로 삼았고 또 이 두 분 공(公)으로 하여금 널리 천하의 영재(英材)를 구해 관사(官使)에 대비토록 하셨다. 이에 충신(忠臣)과 현신(賢臣)들이 다 모여들어 당언(讜言)을 연일(連日) 진상(進上)하니 나라가 이로 인해 크게 왕성(旺盛)하였고 구로(仇虜)는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 후 두 공이 연이어 자리를 떠나게 되자, 진회(秦檜)가 드디어 강화(講和)를 주장함으로써 나라를 오도(誤導)하고 주상(主上)를 위협하여 권력를 천단(擅斷)했다. 이에 일시(一時)의 제현(諸賢)이 그의 주장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다 물리침을 당하였다. 그 후 20년간 [사로(仕路)가] 막히고 [충현(忠賢)들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다행히 진회(秦檜)가 죽었으나 다시 거두어 쓸 수 있었던 충현(忠賢)들은 열에 둘이나 셋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또 왕왕(往往) 점차 나이가 들어 안타깝게도 이 때에 돌아가심으로써 그 할일을 다하지 못한 분들도 있었다. 오호(嗚呼)라, 이 어찌 선비들만의 불행이겠는가! 고직비각(故直祕閣) 범공(范公) 역시 그 중 한 분이시다.

紹興之初, 天子痛念宗社阽危之辱久而未報, 寤寐俊傑, 以圖事功. 旣得趙忠簡公․張忠獻公而相之, 又俾兩公博求天下之英材以備官使. 於是忠賢畢集, 讜言日進, 國以大競, 仇虜讋焉. 其後兩公相繼去位, 秦檜遂以講和誤國, 脅主擅權, 一時諸賢率以異議擯逐. 二十年間, 堙阨淪謝. 其幸及檜死, 復見收用者什不二三, 然亦往往遲暮奄忽, 而不及究其所爲矣. 鳴呼, 此豈獨士之不幸也哉! 若故直祕閣范公, 則其一人已.

 

공의 휘(諱)는 여규(如圭)이고 자(字)는 백달(伯達)이며 건주(建州) 건양현(建陽縣) 사람이다. 공의 증대부(曾大父)인 이겸(履謙)과 대부(大父)이신 보지(補之)는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공의 부(父) 순거(舜擧)가 처음으로 진사(進士)에 등제(登第)되어 종사랑(從事郞) 벼슬을 하다 졸(卒)하였다. 그의 학행(學行)과 지업(志業)에 대해서는 연평(延平) 양문정공(楊文靖公)의 명문(銘文)에 기록되어 있다. 또 그는 아들인 공으로 인해 좌조의대부(左朝議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모(母) 호씨(胡氏)와 섭씨(葉氏)는 모두 공인(恭人)에 봉(封)해졌다.

公諱如圭, 字伯達, 建州建陽縣人. 曾大父履謙․大父補之皆隱德不仕. 父舜擧始登進士第, 官從事郞以卒. 其學行志業, 延平楊文靖公實銘之. 以公故, 贈左朝議大夫. 母胡氏, 葉氏皆封恭人. 공인(恭人)

 

공은 태어난 지 수년(數年) 만에 모상(母喪)을 당했는데 그 애훼(哀毁)함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아직 관례(冠禮)를 치르기도 전에 고자(孤子)가 되었으나 계모(繼母)를 더욱 근엄(謹嚴)하게 봉양(奉養)했으며 어린 동생들을 곡진(曲盡)한 은의(恩意)로 어루만졌는데 이는 보통 사람이 잘 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구씨(舅氏)인 호문정공(胡文定公)으로부터 춘추학(春秋學)을 전수(傳受)하였는데, 향거(鄕擧)와 유시(類試)에서 모두 제일(第一)이었다. 정시(廷試)에서 올린 대책(對策)에서는 인주(人主)의 정심(正心) 입지(立志)의 방법(方法)에 대해 극론(極論)하였고 화의(和議)와 연안(宴安)으로 인한 실책(失策)을 힘써 비판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장쾌(壯快)하고도 절실(切實)하였다. 당시 장공(張公)이 고관(考官)이었는데, 공의 대책(對策)을 읽고 기이(奇異)하게 여겨 공을 최우수자로 선발했다. 그러나 동렬(同列)에 있던 고관(考官) 가운데 공의 말에 병통이 있다고 여긴 자는 공을 눌러 을과(乙科)에 두었다. 그 후 공은 좌종사랑(左從事郞) 및 무안절도추관(武安節度推官)에 제수되었는데, 처음 임지(任地)에 도착했을 때 그 곳 장수(將帥)가 장차 사람을 참(斬)하려 함에 공이 그 잘못을 말하였더니 장수(將帥)는 이미 서명(署名)했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이에 공은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절하(節下)는 어찌하여 ‘바꿀 역(易)자’ 한 글자는 무겁게 여기면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헤아립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그 장수는 확연(矍然)히 놀라 공의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할 것 없이 부중(府中)의 일은 모두 공에게 자문(咨問)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수개월이 지난 뒤, 공은 상(喪)을 당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이미 장사(長沙)를 함락(陷落)시켰기 때문에 상중(湘中)은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공은 재화(災禍)를 피해 험한 도로를 옮겨 다녔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더욱 지업(志業)을 닦았다. 그리하여 공의 논의(論議)는 모두 당세(當世)의 업무(業務)에 절실한 것들이었다. 이에 여러 공들이 일 때문에 공을 방문(訪問)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문정공(文定公) 역시 자주 공을 칭찬(稱讚)했다. 이에 강동안무사서사기의문자(江東安撫司書寫機宜文字)에 벽소(辟召)되었고 근신(近臣)들의 교천(交薦)에 따라 황제께서 공을 불러 시험한 다음 비서성정자(祕書省正字)와 선의랑(宣義郞)에 제수하였다. 그 후 교서랑(校書郞)으로 옮겨가 사관교감(史館校勘)을 겸하였다.

公生數歲, 遭母喪, 哀毁如成人. 未冠而孤, 奉繼母尤謹. 撫弟妹曲盡恩意, 有人所難能者. 從舅氏胡文定公受春秋學, 鄕擧類試皆第一. 對策廷中, 極論人主正心立志之方, 力詆和議宴安之失, 言甚壯切. 張公時爲考官, 讀而異之, 第以爲(8-4558)選首, 而同列有病其言者, 抑寘乙科. 授左從事郞․武安節度推官. 始至, 帥將斬人. 公白其誤, 帥爲已署, 不易也. 公正色曰: ‘節下奈何重易一字而輕數人之命?’ 帥矍然從之, 自是府中事無大小, 悉以咨焉. 居數月, 以憂去. 時虜騎已陷長沙, 湘中大亂. 公崎嶇避地, 艱苦百罹而志業益修. 開口論議, 皆切當世之務. 諸公多訪以事, 而文定亦亟稱之. 辟江東安撫司書寫機宜文字, 近臣交薦, 召試, 除祕書省正字, 改宣義郞, 遷校書郞, 兼史館校勘.

 

때마침 진회(秦檜)가 힘써 화의(和議)를 건의할 무렵 오랑캐 사신이 정(鼎)을 가지고 왔는데 당시 조정(朝廷)이 초창(草創)인지라 그 오랑캐 사신을 묵게 할 장소가 없어서 장차 비서성(祕書省)을 비워 그곳에 그들을 묵게 하려 했다. 이에 공은 급히 조공(趙公)을 뵙고 말하기를 “비부(秘府)는 모훈(謨訓)이 소장(所藏)된 곳이니, 평시(平時)에 아름다운 사신(使臣)을 묵게 하는 것도 오히려 해서는 안 될 일이거늘 하물며 금일(今日) 원수(怨讐) 오랑캐의 사신들로 하여금 이를 더럽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조공(趙公)은 두려운 마음으로 듣고 있다가 곧바로 이들의 숙소를 바꾸었다. 이에 얼마 있다가 오랑캐 사신이 와서 패오(悖傲)한 짓을 하며 따를 수 없는 의론(議論)을 많이 늘어놓았기 때문에 중외(中外)가 분울(憤鬱)하였다. 공은 동성(同省)에 있던 10여 인(人)과 합의(合議) 하에 배소(拜疏, 즉 上疏)하여 그 문제를 쟁점(爭點)화하기로 하였다. 이미 상소문의 초고(草藁)가 갖추어지자 두려워하면서 이를 물리치도록 이끄는 자가 많았다. 공은 이에 홀로 수서(手書)를 통해 진회(秦檜)와 맞닥트려 그의 ‘곡학배사(曲學倍師)와 망수욕국(忘讎辱國)의 죄’를 질책(叱責)했으며 또 말하기를 “공이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광병(狂病)에 걸린 것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까? 만약 이 모책(謀策)을 바꾸지 않는다면 반드시 만세(萬世)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오.”라고 했다. 진회(秦檜)는 이로 인해 진노(震怒)하였고 공이 의론(議論)한 주초(奏草)는 마침내 사관(史官) 6인(人)의 것과 함께 진상(進上)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랑캐들은 하남(河南)으로 돌아가 우리를 시험하였고 진회(秦檜)는 바야흐로 스스로 자신에게 공(功)이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런 상황이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금일(今日)의 의리(義理)는 곧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윤대(輪對)로 인해 상주(上奏)하기를 “양경(兩京)의 판도(版圖)에까지 이미 오랑캐가 침입해왔으니, 그들은 우리의 구묘(九廟) 팔릉(八陵)조차 지척(咫尺)에서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조회(朝會)를 닦을 사신(使臣)조차 파견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우러러 신령(神靈)을 위로하며 아래로 백성의 뜻을 모울 수 있겠습니까?” 이에 주상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경(卿)이 아니면 이런 말을 듣지 못하노라”라고 하시고 곧바로 사신을 파견하라 명하셨다. 이에 진회(秦檜)는 공이 먼저 이 사실을 자기에게 아뢰지 않았다 하여 더욱 진노하였다. 공은 또한 선묘(先墓)가 오랫동안 형문(荊門)에 맡겨져 있었는데 중간에 다시 변란(變亂)을 만난 것을 이유로 이에 이 사실을 주상께 고한 후 영구(靈柩)를 받들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장례(葬禮)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공은 거친 음식과 상복(喪服)차림으로 수 천리를 왕래(往來)하다보니 이에 하관(下棺)을 마치자마자 곧 병(病)이 났음을 고(告)하게 되었다. 이에 차출(差出)되어 태주(台州) 숭도관(崇道觀)을 주관(主管)하게 되었는데 전후(前後) 세 차례 주청하여 이 관직에 머무르면서 문을 닫아걸고 독서(讀書)하여 인사(人事)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10여년이나 되었다.

會秦檜力建和議, 虜使鼎來, 而朝廷草創, 無所於館, 將虛祕書省以處之. 公亟見趙公曰: ‘秘府謨訓所藏, 平時以館好使猶不可, 況今日之仇虜, 而可使腥羶之乎?’ 趙公竦聽, 卽爲改館. 旣而使至悖傲, 所議多不可從者, 中外憤鬱. 公與同省十餘人合議, 拜疏爭之, 旣具草而駭懅引郤者衆. 公乃獨手書抵檜, 責以曲學倍師․忘讎辱國之罪, 且曰: ‘公不喪心, 不病狂, 奈何一旦爲此? 若不改圖, 必且遺臭萬世矣.’ 檜以是怒, 而公所議奏草卒與史官六人者上之. 未幾, 虜歸河南以嘗我, 檜方自以爲功, 公曰: ‘是亦安能久有? 顧今日之義, 則有不可不爲者.’ 乃因輪對言曰: ‘兩京之版圖旣入, 則九廟八陵瞻望咫尺. 今朝修之使未遣, 何以仰慰神靈․下萃民志?’ 上泫然曰: ‘非卿不聞此言.’ 立命遣使. 於是檜以公不(8-4559)先白己也. 益怒. 公亦以先墓久寄荊門, 中更變亂, 乃謁告, 奉柩歸葬故鄕. 飯蔬帶絰, 往返數千里. 旣窆, 卽以病告. 差主管台州崇道觀. 前後三請, 杜門讀書, 不與人事者十餘年.

 

이윽고 공은 소주(邵州) 통판(通判)에 기용(起用)되었으며 또 통판형남부사(通判荊南府事)가 되었다. 형남(荊南)의 호구(戶口)는 이전에는 수십만이었는데 도적들의 난(亂)으로 인해 황폐해진 나머지 인적(人迹)이 없을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구부(口賦)를 견감(蠲減)해 줌으로써 백성을 안집(安集)하려 했지만 100에 한 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의론(議論)하는 자들은 진회(秦檜)의 뜻대로 되기를 희구(希求)하여 문득 유용(流庸)이 점차 복귀(復歸)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조금 열에 둘 정도는 [옛 터전으로] 옮겨가게 하여 해마다 [호구(戶口)가] 불어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을 감당할] 관리(官吏)들을 공급(供給)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돌아보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 당시 적포(積逋)는 통털어 20여만 민(緡)이었고, 다른 부채(負債) 또한 수십만이었다. 호부(戶部)는 연일 글을 내려 매우 다급하게 책상(責償)하여 말하기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또 견책(譴責)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진회(秦檜)는 만절(晩節)의 패란(悖亂)함으로 인해 희로(喜怒)를 예측할 수 없었는데, 호부(戶部)를 다스리는 자 또한 그의 인당(姻黨)으로써 흉염(凶焰)이 혁연(赫然)하였다. 이에 장수 손여익(孫汝翼)이 그를 두려워하여 백성들에게 부세(賦稅)함으로써 색책(塞責)하려 하였다. 이에 공은 불가(不可)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차라리 내가 견책(譴責)을 당할지언정 이런 짓은 차마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어찌할 수 없어 손여익(孫汝翼)이 물러난 뒤에, 공은 그 후임 장수(將帥)인 왕공사심(王公師心)에게 말하여, 이 모두를 주청(奏請)하여 견감(蠲減)시켜주도록 하였다.

尋起通判邵州, 又通判荊南府事. 荊南戶口舊數十萬, 寇亂荒餘, 無復人迹. 朝廷爲蠲口賦以安集之, 百未還一二也. 而議者希檜意, 遽謂流庸浸復, 可使稍輸什二而歲增之. 吏不能供, 顧無敢言者. 至是, 積逋二十餘萬緡, 他負亦數十萬. 戶部日下書責償甚急. 曰不且有譴. 時檜晩節悖亂, 喜怒不可測, 爲戶部者又其姻黨, 凶焰赫然. 帥孫汝翼懼, 欲賦於民以塞責. 公持不可, 曰: ‘吾寧被譴, 此不忍爲也.’ 無何, 孫去, 公言於後帥王公師心, 悉秦蠲之.

 

 이 때 이미 진회(秦檜)가 죽은 후인지라 공과 함께 동시에 나라를 떠난 자들이 많이 불려와 등용되었는데, 공도 또한 명을 받고 입대(入對)하였다. 주상께서는 여전히 공이 이전에 한 의론(議論)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공을 위로하며 하문(下問)하셨다. 공은 이에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지인(知人)을 우선으로 하고 지인(知人)은 청심(淸心) 과욕(寡慾)을 근본으로 삼아야 함’을 진언(進言)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절실하고도 지극하였다. 또 ‘동남(東南) 지방에는 태어난 자식을 내버리는 풍속이 있는데, 이는 인리(人理)를 손상시키고 끊어버리는 일임’을 의론(議論)하면서 ‘한(漢)의 태양령(胎養令)을 들어 그들을 온전히 살릴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니, 이는 또한 월왕(越王)의 구천(勾踐)이 국력을 양성하여 오(吳)나라에 대해 원수를 갚아준 바로 그 뜻이었다. 주상께서는 공의 말을 훌륭하다고 여기셨다. 그 당시는 진문공공(陳文恭公)이 정사(政事)를 주관(主管)하고 있으면서 또 공을 조정에 머물러있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렬(同列) 중에 진회(秦檜)의 당인(黨人)으로 갑자기 등용되어 일을 맡은 자가 있었는데, 그는 공의 전배(前輩)가 미사(媚事)를 즐겨하지 않음을 꺼려서 공을 직비각(直祕閣) 겸 제거강서상평다염공사(提擧江西常平茶鹽公事)로 임명하여 조정 밖으로 내보내버렸다. 이에 공은 하직하고 임지로 떠나면서 다시 상주(上奏)하여 말하기를 “금일(今日)의 둔전법(屯田法)에 따르면 한 해 수확한 것을 관(官)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므로 전졸(田卒)들이 하사받는 의복과 늠식(廩食)은 그 이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는 농사에 힘쓰는 자들로 하여금 약간의 잉여물(剩餘物)에 대한 기대조차 가질 수 없도록 하는 처사이고, 반면에 농사를 게을리 하는 자들로 하여금 기아(饑餓)에 대한 우려(憂慮)를 없애주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작은 이익을 탐(貪)하여 큰 계책을 잃어버린 것이며, 단 시일의 효과(效果)를 꾀하다 원대(遠大)한 도모(圖謀)를 방해(妨害)하는 처사입니다. 이 때문에 이 법을 시행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고 힘 들인 것이 많지만 결국 아무런 성공(成功)도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형(荊)과 회(淮)의 광토(曠土)를 거적(擧籍)하고 구정(丘井)을 구획(區劃)하여 옛 조법(助法)을 모방(模倣)하되 지금의 편의(便宜)를 짐작(斟酌)하여 별도로 과조(科條)를 만들어 정역(政役)을 시행할 것을 명령(命令)하신다면, 농사(農事)로 인한 이익이 수리(修理)되고 무비(武備)가 신칙(申飭)되어 점차 고제(古制)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주장(奏章)이 내려오자 일 맡은 자들 가운데 조소(嘲笑)하며 공의 의견이 우활(迂闊)하다고 여기는 자가 있어 공의 주장을 잠재워 두고 아뢰지 않았다.

 時檜已死, 公所與同時去國者多召用, 公亦被命入對. 上猶記公前議, 勞問久之. 公因進言爲治以知人爲先, 知人以淸心寡慾爲本, 語甚切至. 又論東南不擧子之俗, 傷絶人理, 請擧漢胎養令以全活之, 抑亦勾踐生聚報吳之意也. 上善其言. 時陳文恭公知政事, 亦欲留公朝著, 而同列有以檜黨暴起秉事者, 忌公前輩, 不肯媚事己, 乃以直祕閣․提擧江西常平茶鹽公事出之. 公辭行, 復奏言: ‘今日屯田之法, 歲之所穫, 官盡征之, 而田卒賜衣廩食如故, 使力穡者絶嬴餘之望, 惰農者(8-4560)無饑餓之憂, 貪小利, 失大計, 謀近效, 妨遠圖. 是以歷年久 ․ 用力多而無成功. 謂宜擧籍荊淮曠土, 畫爲丘井, 放古助法, 酌今之宜, 別爲科條以令政役, 則農利修․武備飭而復古亦有漸矣.’ 章下, 任事者或笑以爲迂闊, 寢不奏.

 

공이 평시(平時)에 지극한 관심을 가진 것은 만사(萬事)의 이병(利病)을 물어 연구하거나 인재(人材)를 수소문(搜所聞)하여 탐방(探訪)하는 것이었는데 공은 이를 즐기고 욕구(慾求)하듯 급급(汲汲)히 하였다. 또 공이 강서(江西)에 이르러 논주(論奏)한 몇 가지 일들은 모두 한 지방 전체에 구원(久遠)한 이익을 가져다 줄만한 것들이었다. 공은 또 임천(臨川)의 관리(官吏)인 진정(陳鼎)이 옛 순리(循吏)의 기풍(氣風)이 있다 하여 그를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그 내용을 들은 자들은 모두 공의 처사가 합당하다고 여겼다. 이주로(利州路) 제점형옥공사(提點刑獄公事)에 개수(改授)되자 병(病)이 났고, 이에 다시 주청(奏請)하여 사관(祠官)이 되어 돌아왔다. 그 당시 종번(宗藩)은 나란히 세우면서 저립(儲位)이 아직 확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도로(道路)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가만가만히 기이(奇異)한 말들을 하고 다녔다. 공은 비록 먼 외지(外地)에 있었지만 홀로 이러한 사태를 깊이 우려했다. 그리하여 일찍이 지화(至和) 및 가우(嘉祐) 연간에 활약했던 명신(名臣)들의 주장(奏章) 36편(篇)을 묶어 한 권의 서책(書冊)을 만들어 두었다가 이 때 이르러 그것을 낭봉(囊封, 즉 封事)하여 바치면서 또 진언(進言)하기를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군언(群言)을 깊이 고찰하시고 우러러 성헌(成憲)을 스승으로 여기시며 공도(公道)로 판단(判斷)하시어 두 마음을 품지도 마시고 의심도 하지 마소서. 그렇게만 되신다면 천하(天下)가 매우 다행(多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람들 중에는 간혹 이는 공이 월직(越職)한 것이니 이로 인해 공에게 위해(危害)가 될 것이라 여기는 자들이 있었지만 공은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주상께서 공의 말에 감동(感動)하시어 보신(輔臣)에게 탄식(歎息)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여규(如圭)야말로 임금을 아낀다고 말할 수 있겠다.”라고 하시고 드디어 진공(陳公)을 만류(挽留)하여 대계(大計)를 결정하시고 즉일(卽日)로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보안군왕(普安郡王)을 황자(皇子)로 삼으시고 나아가 건왕(建王)에 봉하셨다.

公平時所至詢究利病, 搜訪人材, 汲汲如嗜慾. 至江西, 論奏數事, 皆一方久遠之利. 薦臨川宰陳鼎有古循吏之風, 聞者亦以爲當. 改利州路提點刑獄公事, 以病, 復請爲祠官以歸. 時宗藩幷建而儲位未定, 道路竊竊有異言. 公雖在遠外, 獨深憂之. 嘗剟至和․嘉祐間名臣章奏凡三十六篇, 合爲一書, 至是囊封以獻, 且言曰: ‘願陛下深考群言, 仰師成憲, 斷以公道, 無貳無疑, 則天下幸甚.’ 人或以越職爲公危之, 公不顧也. 上感其言, 以語輔臣而歎之曰: ‘如圭可謂愛君矣.’ 遂留陳公決定大計, 卽日下詔, 以普安郡王爲皇子, 進封建王.

 

이 일로 인해 조정에서는 다시 공을 천주(泉州) 지사(知事)에 기용(起用)하였다. 이에 공은 사양(辭讓)하려 했으나 이를 청(請)할 수 없어 임지로 갔다. 천주(泉州)에 이르자 공은 곧 대체(大體)를 파악하고 아래 사정을 다 헤아린 다음 승사(丞史)를 택하여 그에게 맡겼다. 이리하여 군(郡)이 크게 다스려졌다. 속현(屬縣)에 대해, 오랜 기간이 지나도 부족분의 부세(賦稅)를 갚을 수 없는 자들의 부세(賦稅)를 견감(蠲減)시켜 준 것이 열에 서넛이었고, 때로는 각자의 역량을 헤아려 그 시기를 너그럽게 책정해주기도 했다. 이에 각 현(縣)에서는 공의 성의(誠意)에 감격하여 수장(輸將)을 신중하게 하였으며 재용(財用)을 느슨하게 하였다. 천(泉) 땅은 바다 가로서 통상(通商)이 활발한 곳이라 민물(民物)이 번과(繁夥)하고 풍속(風俗)이 착잡(錯雜)하여 경상(經常) 비용(費用)이 늘 부족했는데, 사람들이 처음에는 공이 치민(治民)과 이재(理財)를 고치지 않는 것을 걱정했는데, 이에 이르러 공에게 크게 감복(感服)하게 되었다. 또 남외종관(南外宗官)으로 군중(郡中)에 치소(治所)를 기탁한 자가 있었는데 위세를 믿고 포악(暴惡)한 짓을 일삼았다. 그러나 공이 오기 이전의 지방관(地方官)들은 감히 그를 힐난(詰難)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심지어 상인들을 약탈하면서 멋대로 거함(巨艦)을 바다에 띄우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피해를 입은 자들이 주(州)에 소송(訴訟)을 하기도 했으나, 시박사(市舶司)에서도 3년이 지나도록 이 일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금병(禁兵)을 점거(占據)하여 부린 것이 100을 헤아릴 정도였으며, 게다가 그는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소금으로 인한 이익을 도적질하였고 산염법(産鹽法)을 어지럽히는 등의 악행(惡行)을 저질렀는데 이 모든 것이 백성들의 병고(病苦)가 되었다. 이에 공은 이 모든 악행에 대해 법(法)과 정의(正義)에 따라 바로잡았다. 그 결과 그는 공을 크게 방해하고 한(恨)하여, 은밀(隱密)히 참소하여 공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중지(中旨)가 내려 공을 파면(罷免)하고 예전처럼 사관(祠官)을 맡도록 처리되었다. 이에 방인(邦人)들이 눈물을 흘리고 공을 사모(思慕)하면서 서로 더불어 이 일을 조정에 호소(呼訴)하고자 하였으나 공이 이를 금지(禁止)하여 가지 못하도록 했다.

因復起公知泉州, 公辭不得請而行. 旣至, 擧大體, 盡下情, 擇丞史任之, 郡以大治. 蠲屬縣負課久不能償者什三四, 度其力而寬與之期. 縣感公誠意, 輸將惟謹, 財用以紓. 泉地瀕海通商, 民物繁夥, 風俗錯雜, 而經用常不足, 人始以公不更治民理財爲憂. 至是, 乃大服. 南外宗官寄治郡中, 挾勢爲暴, 前守不敢詰. 至奪賈胡浮海巨艦, 其人訴於州․於舶司者三年不得直. 占役禁兵以百數, 復盜煮海(8-4561)之利, 亂産鹽法, 爲民病苦. 公皆以法義正之, 則大沮恨, 密爲浸潤以去公, 遂以中旨罷公領祠如故. 邦人涕慕, 欲相與號訴於朝, 公禁之不得行.

 

결국 소무(邵武)에서 공은 추사(僦舍)에 거처하게 되었다. 이에 문항(門巷)이 소연(蕭然)하였으나, 사대부들을 공을 더욱 높이고 우러렀다. 그리하여 원근(原根)의 학자들이 공을 따르며 육경(六經)과 제자서(諸子書) 가운데 의심나는 뜻을 질문(質問)하는 자들이 많았다. 공도 또한 부지런히 그들을 맞이하여 이끌었으며 조석(朝夕)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병이 나자, 정부(政府)에 공문을 보내 오랜 친구들에게 영결(永訣)을 고하면서 사적인 것은 말하지 않았고, 오직 ‘중원(中原)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과 ‘민력(民力)이 아직 소생(蘇生)하지 않고 있는 것’ 그리고 ‘유현(遺賢)이 아직도 등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 등을 기탁(寄託)하였다. 또 여러 자녀들에게는 힘써 공부할 것을 경계(警戒)하였으며 또 부도(浮屠)의 법에 따라 자신의 상(喪)을 다스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소흥(紹興) 경진(庚辰) 6월 18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59세였다. 2년 후에 지금의 천자께서 드디어 청궁(靑宮)으로부터 내선(內禪)을 받아 황제(皇帝)에 즉위(卽位)하셨다. 아버지는 요(堯)와 같고 자식은 순(舜)과 같아 해내(海內)가 크게 안정(安定)되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이러한 경사를 목격할 수 없었고 세상 사람들도 또한 공이 일찍이 이 일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근세(近歲)의 사대부들은 자못 소흥(紹興) 시기의 일력(日曆)과 진공(陳公)의 수기(手記)를 본 연후에라야 ‘공의 그러한 충정(忠精)은 아무나 미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遂邵武僦舍以居, 門巷蕭然, 士大夫益高仰之. 遠近學者多從質問經子疑義, 公亦孜孜引接, 朝夕不倦. 屬疾, 移書政府舊交告訣, 語不及私, 惟以中原未復, 民力未蘇, 遺賢未用爲寄. 戒諸子强學, 且毋得用浮屠法治吾喪. 以紹興庚辰六月十八卒, 享年五十有九. 後兩年, 今天子遂由靑宮受內禪卽皇帝位, 父堯子舜, 海內大安, 而公已不及見, 世亦莫知公之嘗有言也. 近歲士大夫頗有見紹興日曆及陳公手記者, 然後乃知公之忠精爲不可及.

 

공의 사람됨은 돈독(敦篤)하고 중후(重厚)하고 간이(簡易)하고 정직(正直)하였으며 또 변폭(邊幅)을 꾸미지 않았다. 공의 충효(忠孝)와 성실(誠實)함은 하늘로부터 타고 난 것이었다. 공의 학문은 경술(經術)에 근본(根本)을 두었으며 무용(無用)한 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집(文集) 10권이 있는데 모두 서(書)와 소(疏), 그리고 각종 문제를 의론(議論)하는 말들인데 모두 공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이 둔전(屯田)을 의론(議論)한 것은 일찍이 그 시행 조목 수천 언(言)을 갖춘 별도의 초고(草稿)가 있었는데 미처 상주(上奏)하지 못했다. 그 후에 장공(張公)이 강(江) 회(淮)의 총사(總師)가 되었을 때, 공의 집에 아뢰어 그 글을 취(取)해 갔고 이에 장공(張公)은 그 내용을 다 살펴보았다. 그러나 결국 시행(施行)하지는 못했기에 의론하는 자들은 이를 한탄(恨歎)한다.

公爲人篤厚易直, 不飾邊幅. 忠孝誠實, 得之於天. 其學根於經術, 不爲無用之文. 有集十卷, 皆書疏議論之語, 藏于家. 所議屯田, 嘗別草具其施行之目數千言, 未及上. 其後張公總師江淮, 奏下公家取其書, 而張公尋罷, 亦不果行, 議者恨之.

 

공은 여러 차례 좌조산랑(左朝散郞)의 관직(官職)을 거쳤고 조의대부(朝議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부인(夫人) 섭씨(葉氏)는 안인(安人)에 봉(封)해졌고 후에 공인(恭人)으로 추증(追贈)되었는데 공의 계모(繼母)의 동생이자 우문전수찬(右文殿修撰)인 종악(宗諤)의 따님이다. 정숙(靜淑)하고 검소(儉素)하였으며 공의 배우자(配偶者)로서의 덕성(德性)에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 공이 졸한 5년 후에 졸(卒)하였으며 공과 함께 건양(建陽)의 위곡촌(渭曲村)에 합장(合葬)하였다. 이 곳은 공이 이전에 일찍이 복거(卜居)하고자 한 곳이다. 자(子)로는 남(男) 3인(人)이 있다. 염조(念祖)는 통직랑(通直郞)으로 무주(撫州) 의황현(宜黃縣) 지사(知事)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염덕(念德)은 지금 조봉랑(朝奉郞) 겸 강남동로안무사주관기의문자(江南東路安撫司主管機宜文字) 벼슬을 하고 있다. 염자(念玆)는 일찍 죽었다. 또 여(女) 2인(人)이 있는데, 각각 통직랑(通直郞) ․ 이주로제점형옥(利州路提點刑獄)인 절지상(折知常)과 종사랑(從事郞) 유평(劉玶)에게 시집갔다.

公累官左朝散郞, 贈朝議大夫. 娶葉氏, 封安人, 後贈恭人, 公繼母之弟․右文殿修撰宗諤女也. 靜淑儉素, 配公無遺德. 後五年卒, 與公合葬建陽之渭曲村, 公始嘗欲卜居處也. 子男三人, 念祖, 通直郞, 知撫州宜黃縣致仕. 念德, 今爲朝(8-4562)奉郞․江南東路安撫司主管機宜文字. 念玆, 早卒. 女二人, 通直郞․利州路提點刑獄折知常, 從事郞劉玶其壻也.

 

처음, 공의 장례(葬禮) 시에는 아직 명문(銘文)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미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공의 여러 고자(孤子)들이 비로소 그들의 옛 빈객(賓客)인 위군염지(魏君掞之)에게 공의 행장(行狀)을 부탁하였고, 장차 상요왕공(上饒汪公)께 글을 청(請)하여 돌에다 새겨서 그 수도(隧道)를 표(表)하려 하였다. 그러나 또 아직 전갈이 닿기도 전에 왕공(汪公)께서 훙거(薨去)하셨으니 이제는 공과 동시대를 살았던 배류(輩流)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에 이들은 그 글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며 희(熹)에게 부탁하게 된 것이다. 희(熹)는 어리석고 늦게 세상에 나온 자로서 어찌 이런 중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건대 나의 선인(先人)께서 사관(史官)으로 계실 때 기실 일찌기 공과 함께 연명(連名)으로 상주(上奏)한 일이 있다. 또 파면(罷免)되어 돌아오실 때도 또 공과 함께 같은 날에 국문(國門) 밖에서 배로 떠날 준비를 하였으며, 그 서로 고궁(固窮) 수사(守死)를 기약(期約)하는 뜻은 만년(晩年)이 될 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선인(先人)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시자 공께서 희(熹)를 가련(可憐)히 여기심이 더욱 두터우셨다. 심지어 친히 강화(講畫)하시며 반복(反復)해서 분변(分辨)해 알려주시기까지 하셨다. 이는 대개 희(熹)가 미혹(迷惑)과 몽매(蒙昧)에 빠져 지켜야 할 것을 상실(喪失)함으로써 선인(先人)을 욕되게 할 것을 공께서 두려워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공의 이 뜻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이에 그 글을 받아 고람(考覽)하고 이상과 같이 그 큰 것을 논하여 드러낸다. 또 이어서 명(銘)을 부친다. 그 명(銘)에 가로대 :

始, 公之葬不及銘. 旣葬, 諸孤始屬其故賓客魏君掞之狀公行, 將請文於上饒汪公, 而刻石以表其隧. 又未及, 而汪公薨, 則公之同時輩流已無復在者矣. 乃奉其書泣以屬熹. 熹愚晩出, 何以及此? 然惟先人爲史官時, 實常與公連名奏事. 及罷而歸, 又與公同日艤舟國門外, 其相與期於固窮守死之意, 晩而愈篤. 先人旣沒, 公所以憐熹者亦益厚. 至於親爲講畫, 反復辨告, 蓋惟恐其迷昧沒溺, 喪失所守, 以辱其先人也. 此意豈可忘哉! 乃受其書考之, 而論著其大者如此, 且系以銘. 銘曰:

 

오호(嗚呼)라! 생각건대 공은 광박(廣博)하면서도 이량(易良)하셨으니, 그 문장(文章) 빛나게 하지도 않았고 그 방도(方途)에 상처를 입하지도 않으셨도다. 그 용태(容態)는 근근(斤斤)하였고 그 행위(行爲)는 탄탄(坦坦)하였으며, 그 말씀은 간간(懇懇)하였고 그 정사(政事)는 순순(循循)하였도다. 강의(剛毅) (勁切)함이 수시(隨時)로 드러나니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 비록 강(强)하다지만 그 누가 공의 [강의(剛毅)와 경절(勁切)을] 빼앗을 수 있으리오? 만년(晩年)에 그 모계(謀計) 다하시어 드디어 명성(明聖)을 열어주셨으니, 만세(萬世)에 전(傳)함이 공의 한 마디 말로 안정(安定)되었도다. 무릇 지금의 모든 경사(慶事), 그 무엇이 공의 공(功)이 아니라 하리요? 내 이 궐문(闕門)에 글을 새겨 무궁(無窮)토록 그 공(功)을 알리리라.

嗚呼惟公, 廣博易良. 不耀其章, 不劌其方. 斤斤其容, 坦坦其行. 懇懇其言, 循循其政. 剛毅勁切, 以時發之. 賁育雖强, 孰能奪之? 晩殫厥猷, 遂啓明聖. 萬世之傳, 一語而定. 凡今有慶, 孰匪公功? 我銘斯闕, 以詔無窮.

 

 

 

조의대부(朝議大夫)로 벼슬을 그만둔 후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추증되신 황공(黃公)의 신도비(神道碑) (朝議大夫致仕贈光祿大夫黃公神道碑)

 

선화(宣和) 말(末)까지는, 국가의 승평(承平)함이 100여년 지속되어 중외(中外)가 무사(無事)했다. 그러나 두셋 농신(弄臣)이 나라의 대병(大柄)을 도적질하여 연운(燕雲)을 건취(建取)함으로써 비상(非常)한 변고(變故)를 불러들였다. 이에 유식(有識)한 선비들은 이미 남몰래 이를 근심했으나 대중들은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오랑캐와 전쟁이 시작되자] 첩서(捷書)가 연일 들려오니 관리(官吏)들이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그러나 홀로 신덕부(信德府) 사록사(司錄事) 스릉(邵武) 황공(黃公)만은 근심어린 안색(顔色)을 보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축연(蹙然)히 말하기를 “태평(太平)한 시일(時日)이 오래 지속되던 중 갑자기 군대(軍隊)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창고에는 겸세(兼歲)의 양식도 쌓아둔 것이 없으니, 백성들에게서 취(取)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일을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올해도 [작년에 이어] 거듭 흉년인지라 백성들이 무수(無數)히 죽어나가고 있다. 하물며 하북(河北)은 천하의 근본인데 [이번 일로] 또 그들을 거듭 곤궁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 가운데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하북(河北)의 도적(盜賊)이 과연 봉기(蜂起)하였고, 이 때문에 신덕성(信德城)의 수비(守備)가 여러 차례 위험에 처했다. 금(金)나라 오랑캐들이 이 틈을 타고 들이닥치니, 드디어 나라가 지탱(支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관리들은 서로 더불어 포복(匍匐) 배항(拜降)하여 오로지 남들보다 뒤처질까 두려워할 뿐이었지만 공은 홀로 분연(奮然)히 일어나 죽어도 굴복(屈服)하지 않겠노라 맹세하였다. 오랑캐가 이미 입성(入城)하여 사방으로 병사들을 풀어 놓았을 때에는 칼을 뽑아 공을 위협(威脅)하며 항복(降伏)하도록 하려는 자도 있었다. 이에 공이 좌우를 돌아보자, [그들은] 넘어지고 자빠지며 도망하여 성명(姓名)을 바꾸고 이항(里巷) 가운데 숨어 있다가 오랑캐들이 물러난 뒤에야 나타났다. 그러니 먼저 항복한 자는 모두 이미 죄(罪)에 저촉(抵觸)되었지만 선무사(宣撫使)는 홀로 공의 절개(節介)를 기특(奇特)히 여겨 공으로 하여금 부(府)의 일을 하도록 하였다. 공은 또한 창이(瘡痍)를 무마(撫摩)하여 다시 안정(安定)을 되찾게 할 것을 기약(期約)하였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아니하여, 내선(內禪)으로 인해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전임(轉任)되었다. 그러나 공은 그 고결(高潔)한 천자(天資)로 인해 또 다시 몸을 굽혀 좌군(佐郡)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해 이 일을 생파(省罷)하고 돌아갔다.

宣和之末, 國家承平百有餘年, 中外無事, 乃有二三弄臣竊國大柄, 建取燕雲以召非常之變. 有識之士已私憂之, 而衆莫之覺也. 捷書日聞, 官吏相慶, 獨信德府司錄事邵武黃公有憂色. 人問其故, 公蹙然曰: ‘太平日久, 軍旅遽興, 廩無兼歲之儲, 不取於民, 將何以濟? 顧今歲薦饑, 民死無數, 况河北天下根本, 又可重困之邪?’ 聞者莫不笑之. 俄而河北盜賊果蜂起, 信德城守屢危. 金虜乘之, 遂不能支. 官吏相與匍匐拜降, 唯恐居後, 而公獨奮然, 誓死不屈. 虜旣入城, 放兵四出, 有挺刃脅公以降者. 公顧左右, 踣之而逸, 變姓名匿里巷中, 虜退乃出. 則先降者皆已抵罪, 而宣撫使獨奇公節, 俾行府事. 公亦撫摩瘡痍, 期復按堵. 未幾, 以內禪轉朝議大夫, 則以資高, 不當復屈佐郡而省罷以歸矣.

 

  정강(靖康) 원년(元年), 공이 경사(京師)에 돌아와 머물 무렵 때마침 성(城)이 포위당하는 변고(變故)를 만나게 되었고, 그 명년(明年)에 흠종(欽宗)께서 오랑캐 진영에 출행(出幸)하셨다. 오랑캐들은 드디어 무력으로 성중(城中)을 위협(威脅)하여 장방창(張邦昌)을 옹립(擁立)했다. 이로 말미암아 일시(一時)에 공경(公卿)의 수가 천백(千百)을 헤아릴 정도였고, 이에 서로 돌아보며 머리를 조아리며 고분고분 명령을 들을 뿐이었다. 공은 홀로 감분(感憤)하여 ‘의(義)에 비추어 몸을 욕(辱)되게 할 수 없다’하여 즉일(卽日)로 이격(移檄)하고, 그 맡은 일을 그만두고 떠났다. 대개 이 때를 당(當)하여 약속(約束)하지 않고 이곳을 떠난 사람이 40인(人)이었다. 그러나 수일(數日)이 되지 않아 공은 마침내 병(病)으로 졸(卒)하였으니 2년 2월 병자(丙子)일이었다.

  靖康元年, 還次京師, 遭圍城之變. 而明年, 欽宗出幸虜營, 虜遂以兵威脅城中擁張邦昌而立之. 一時公卿繇千百數, 相顧俛首, 唯唯聽命. 公獨感憤, 義不辱身, 卽日移檄, 致其事而去. 蓋當是時, 不約而去此者亦四十人, 然不數日而公竟(8-4564)以病卒矣, 二年二月丙子也.

 

오호(鳴呼)라! 조종(祖宗)이 100년에 걸쳐 예의염치(禮義廉耻)를 교화(敎化)해왔으니, 사인(斯人)을 함양(涵養)해온 것이 지극히 심원(深遠)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저 희녕(熙寧) 이래로, 여러 소인배들이 서로 본받으며 도리(道理)를 멸(滅)하고 사욕(私欲)을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지금의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마침 이미 60년이나 되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이러한 못된 풍토에] 감환(酣豢)한 나머지 심지(心志)가 궤란(潰爛)되어 수습(收拾)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당연히 재화(災禍)로 인한 변고(變故)가 생겨나고 위기(危機)가 임박(臨迫)해 와도 모두들 그것을 우려할 줄을 알지 못했으며, 또 싸움에 져서 적을 맞아 항복하는 상황에 처했는데도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으며, 임금을 버리고 아비를 배반(背叛)하며 도적(盜賊)을 받들어 그들에 대해 칭신(稱臣)을 하면서도 모두들 그것이 욕된 일인 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공 등(等)과 같은 분들이 다행히도 그 사이에서 출현(出現)했으니, 이는 비록 사람의 병이(秉彛)는 민멸(泯滅)을 용납(容納)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또한 사인(斯人)을 선(善)으로 함양(涵養)한 조종(祖宗)의 지극히 깊고도 원대한 정신이 있었기에, 그 끼친 나머지가 아마도 여기서 조금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鳴呼! 祖宗百年禮義廉耻之化, 其所以涵養斯人者可謂至深遠矣. 夫以熙寧以來, 羣小相師, 滅理窮欲, 以逮于玆, 適已六十年矣. 士大夫酣豢之餘, 心志潰爛, 不可收拾, 宜其禍變危迫而皆不知以爲憂, 敗衂迎降而皆不知以爲耻, 棄君叛父․奉賊稱臣而皆不知以爲辱也. 而猶復有如公等者出於其間, 是雖人之秉彝不容泯滅, 然而祖宗所以涵善斯人至深且遠者, 亦豈不於此而少見遺餘哉?

 

공이 졸(卒)할 때의 나이는 63세였는데, 부인(夫人) 임씨(林氏)가 여러 고자(孤子)들을 이끌고 공의 영구(靈柩)를 받들어 병화(兵火)의 난리(亂離) 가운데 험한 산길을 지나고 육로(陸路)와 수로(水路)를 헤치며 5년 만에 고리(故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소흥(紹興) 을축(乙丑)년이 된 연후에야 비로소 공의 장례(葬禮)를 치를 수 있었다. 공의 자(子) 영존(永存)은 점차 그 재능(材能)이 세상에 알려져, 마침내 주상(主上)께서 그의 이름을 들으시고 그를 불러 상서랑(尙書郞) ․ 군기감(軍器監)을 삼으셨다. 또 지방으로 내보내 회남전운부사(淮南轉運副使)에 임명하여 공으로 하여금 농전(農戰)에 관한 업무(業務)를 수리(修理)하도록 하여 점차 북향(北向)할 수 있는 터전을 닦도록 하였다. 전후(前後)하여 공을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추증하였다. 공의 부인(夫人)은 공이 생존 당시에 이미 의인(宜人)에 봉(封)해졌었고 또 자(子)가 귀(貴)하게 되자 여러 차례 주상(主上)의 경사(慶事)스런 은혜(恩惠)를 입었다. 관피(冠帔)를 하사(下賜)받았고 여러 차례 봉(封)함을 받아 시흥군태부인(始興郡太夫人)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순희(淳熙) 을미(乙未) 8월 5일, 나이 97세에 훙거(薨去)하였는데, 또 교은(郊恩)으로 기춘군부인(蘄春郡夫人)에 추증되었다. 그런데 부사(副使)가 회남(淮南)으로부터 돌아와 사람을 시켜 동군(同郡) 서군복(徐君復)의 글을 가지고 신안(新安) 주희(朱熹)에게 와서 일러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의 덕(德)이 이와 같습니다만, 장례(葬禮)를 행한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명문(銘文)을 지어 올리지 못했습니다. 또 선부인(先夫人)께서는 예(禮)에 따라 집안을 단속하셨으며 상수(上壽)를 향유하실 수 있었는데 세상사람 중에 이런 복을 누리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니 선부인(先夫人)의 덕(德)을 또한 선군(先君)의 유사(遺事)에 부쳐 후세에 드리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디 그대는 도모(圖謀)하소서.”라고 하였다. 희(熹)가 글을 받아 고람(考覽)해 보고서야 광록대부(光祿大夫)와 기춘부인(蘄春夫人)의 행사(行事)의 본말(本末)을 갖추 알게 되었다. 이에 오랫동안 탄식(歎息)한 다음 인(因)하여 그 대강(大綱)이 이와 같음을 논(論)하고 아울러 그 주리(州里)의 세차(世次)와 벌열(閥閱)을 기록한다.

公卒時年始六十有三, 夫人林氏携挈諸孤奉公之柩, 崎嶇兵火亂離之中․川陸五年, 乃能達於故里. 紹興乙丑之歲, 然後始克葬焉. 而公之子永存寖以材能有聞於世, 上聞其名, 召以爲尙書郞․軍器監, 出爲淮南轉運副使, 俾脩農戰之業, 以爲北向之漸. 前後贈公至光祿大夫, 而夫人自公時已封宜人, 又以子貴, 屢逢慶恩, 得賜冠帔, 累封至始興郡太夫人. 淳熙乙末八月五日, 年九十七而薨. 又以郊恩, 贈蘄春郡夫人. 而副使歸自淮南, 則使人以同郡徐君復之狀來謂新安朱熹曰: ‘吾先君之德如是, 而葬久未銘. 且先夫人率履持家, 克享上壽, 世鮮及之, 亦當得附先君遺事, 以垂後世. 子其圖之.’ 熹受書考之, 具得光祿大夫․蘄春夫人行事本末, 歎息久之. 因論其大者如此, 幷記其州里世次閥閱.

 

공의 휘(諱)는 중미(中美)이고 자(字)는 문소(文昭)이다. 처음에 공의 선조(先祖)는 조(潮)에서 민(閩)으로 들어와 건(建)의 포성(浦城)에 거주하다가 소무(邵武)로 이사(移徙)하였는데, 이 때 비로소 건(建)과 구별되었고 드디어 본 군(郡)의 사람이 되었다. 증대부(曾大父) 몽신(夢臣)과 대부(大父) 경(扃)은 모두 은행(隱行)이 있었으나, 공의 부(父) 몽(蒙)에 이르러 비로소 진사(進士)에 천거(薦擧)되었고 후에 중봉대부(中奉大夫)에 추증되었다. 중봉(中奉)은 시씨(施氏)를 부인(夫人)으로 맞이하였는데, 시씨(施氏)는 아들 공을 낳은 지 7년 만에 졸(卒)하였고 후에 영인(令人)에 추증되었다. 중봉(中奉)이 돌아가실 때, 공의 나이는 겨우 관례(冠禮)를 치를 나이였다. 분발하여 학문(學問)에 뜻을 두었으나 가난하여 책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항시 남에게 빌려서 독서(讀書)하곤 했는데, 대충 한두 번 훑어본 후 돌려주었지만 벌써 그 내용을 다 외웠고 [한 번 외운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원우(元祐) 9년 진사(進士)에 등제(登第)되었고 이어 진정부좌사리참군(眞定府左司理參軍) 및 형주평향현(邢州平鄕縣) 지사(知事)에 발탁되었는데 그 직무(職務)를 모두 잘 감당했다. 공은 언제나 정도(正道)를 지켰으며, 상관(上官)에게 아부하거나 상관을 거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난 지 오래되자 매우 가난하였으나 개의(介意)치 않았다. 친우(親友)들이 공을 억지로 일으켜 추천했기에 공은 다시 진서군절도추관(鎭西軍節度推官)에 발탁되었다. 그 곳은 변경(邊境)에 매우 인접(鄰接)한 곳이라 태수(太守)가 무장(武將)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법령(法令)이나 료속(僚屬)을 멸시(蔑視)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이런 일에 흔들리지 않았고, 태수(太守)의 일처리에 불가(不可)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조정에 올려 논변(論辯)하였고 이에 태수(太守)는 참괴(慙愧)하며 굴복(屈服)하였다. 선덕랑(宣德郞)에 개수(改授)되어 지준주위현령(知濬州衛縣令)이 되었다. 그런데, 현(縣)의 백성 가운데 살인(殺人)으로 무함(誣陷)을 당한 자가 있었기에, 공은 그 소원(訴冤)을 자세히 살핀 후 그를 풀어주었다. 공과 동렬(同列)에 있던 자 중에 공을 해(害)하려는 자가 있어 이 일을 두고 ‘공이 고의(故意)로 죽을죄를 지은 죄인을 놓아주었다’라고 일렀다. 태수는 이를 의심했다. 그러나 공은 걱정하지 않았다. 때마침 [오랑캐에 의해] 하(河)가 결단(決斷)나고 여러 군(郡)이 패퇴(敗退)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여러 영장(令長)들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각각 정부(丁夫)를 거느리고 제장(隄障)을 소착(疏鑿)할 것을 지시했는데, 홀로 위현(衛縣)만 어지럽지 않게 집결(集結)했다. 이 공(功)으로 공은 봉의랑(奉議郞)이 되어 하북도전운사속관(河北都轉運司屬官)에 제수되었고, 북경유수(北京留守)에 벽소(辟召)되어 진정부록사(眞定府錄事)가 되었다. 이 당시 하북(河北)은 연이어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모여들어 도적이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군수(郡守)는 평시(平時)와 같이 즐겁게 잔치하고 거만하게 노닐었다. 이에 공은 홀로 그러한 상황을 우려(憂慮)하여 매양 마땅히 참여해야 할 모임이 있을 때조차도 문득 사양(辭讓)하며 참여하지 않았다. 군수(郡守)가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공이 사실(事實)에 근거하여 대답했더니 군수(郡守)는 묵연(黙然)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신덕(信德)으로 옮겨갔고 마침내 물러나 졸(卒)하였다.

(8-4565)公諱中美, 字文昭, 其先自潮入閩, 居建之浦城, 徙邵武, 始別于建, 遂爲郡人焉. 曾大父夢臣․大父扃皆有隱行. 至公父蒙始擧進士, 後贈中奉大夫. 中奉娶施氏, 生公七年而卒, 後贈令人. 中奉沒時, 公年甫冠, 勵志爲學, 而貧不能得書, 常假於人以讀. 率一再過而歸之, 則已成誦而不忘矣. 中元祐九年進士第, 調眞定府左司理參軍, 知邢州平鄕縣, 皆善其職. 以守正不阿忤上官, 罷退久之, 貧甚, 不以爲意. 親友强起之, 乃更調鎭西軍節度推官. 鄰極邊, 守武將, 視法令僚屬蔑如也. 公不爲撓, 事有不可.必庭辯之, 守愧屈焉. 改宣德郞, 知濬州衛縣令. 縣民有被誣殺人者, 公察其寃, 縱之. 同列有害公者, 謂公故出死罪, 守疑之, 公不恤也. 會河決, 敗數郡, 詔諸令長各護丁夫疏鑿隄障, 縣獨不擾而集. 以功轉奉議郞, 除河北都轉運司屬官, 北京留守辟以爲眞定府錄事. 是時河北連歲不登, 民多相聚爲盜, 而郡守歡燕敖逸如平時. 公獨憂之, 每當集輒辭不與. 守問其故, 公對以實, 守黙然不說. 於是乃移信德, 而遂去以卒焉.

 

공의 사람됨은 탄이(坦易)하여 변폭(邊幅)을 일삼지 않았으며, 남들과 교제할 때는 반드시 정성(精誠)을 다했다. 관직(官職)을 맡아 혁혁(赫赫)한 명성(名聲)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미세(微細)한 일에서조차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웃 군(郡)에 의심스런 옥사(獄事)가 있으면 부(部)의 자사(刺史)들 중에는 공에게 아뢰어 그 일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리하여 왕왕(往往) 그 실정(實情)을 얻기도 하였다.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즐겨,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남이 비록 공의 뜻을 저버리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요구가 있으면 문득 또 다시 그를 주휼(賙恤)했다. 공이 진(鎭)에 있을 때, 부승(府丞) 진소부(陳紹夫)가 죽었는데 이 때 공은 자신의 봉전(俸錢, 즉 俸給)으로 그의 상(喪)을 치르기도 했다. 또 공의 여형(女兄)이 과부(寡婦)로 살고 있었는데, 그녀를 맞아 30년을 진휼(賑恤)하면서도 시종(始終) 한결같이 대하였다. 오랜 친구 중 통귀(通貴)한 자가 공을 초치(招致)하면 사례(謝禮)하고 가지 않았다. 도전운사(都轉運使)인 여공이호(呂公頤浩) 및 그의 시자(使者)들이 공의 재능(材能)을 잘 알았기에 공을 추천(推薦)하고자 했으나 이 일은 성사(成事)되지 못하였고 마침내 공은 세상을 떠났다. 논자(論者)들은 이 점을 애석(哀惜)해 한다.

其爲人坦易, 不事邊幅, 而與人交必以誠. 當官不爲赫赫之名, 而於事細微無不謹. 旁郡有疑獄, 部刺史多奏以屬公, 往往得其情. 樂施予, 不問識否, 人雖負之不悔, 有求輒復周之. 在鎭時, 府丞陳紹夫死, 公以俸錢遣其喪. 女兄寡居, 迎(8-4566)養三十年, 始終如一日. 故人有通貴者招致之, 謝不往. 都轉運使呂公頤浩及他使者多知其材, 欲薦之, 未果而竟沒, 論者惜之.

 

공의 초취(初娶)는 완구류씨(宛句劉氏)인데 화의군부인(和義郡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기춘(蘄春)은 공의 계실(繼室)로 연평(延平) 사람인데 소사(少師)에 추증되신 적(積)의 따님이다. 부인(夫人)은 혼후(渾厚)하고 정전(靜專)한 성품으로 황공(黃公)이 매우 가난한 처지가 되었는데도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대처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비록 풍태(豐泰)하였지만 또한 일찍이 평소 지켜오던 그 법도(法度)를 바꾸지 않았다. 공의 여형(女兄)을 시어머니처럼 섬겼으며, 공이 세상을 떠나자 상(喪)을 마친 후, 그 자녀(子女)들이 충언(忠言)과 직절(直節)에 입각하여 그들 자신의 뜻을 세우도록 힘써 가르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자녀들이 명망(名望)있는 사람이 되어 그 가문(家門)을 크게 빛내게 된 것이다. 부인의 나이가 거의 100살이 다 되었는데도 그 신명(神明)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기거(起居)도 쇠약(衰弱)해지지 않았으니, 또한 건강을 지키는 그녀 나름의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듯하였다. 가인(家人)이 무려 100명이나 되었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자애(慈愛)로 그들을 어루만지면서, 매사에 힘쓰고 신칙(申飭)하라고 쉬지 않고 가르치고 충고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사람들은 그녀가 엄려(嚴厲)한 기색(氣色)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도 중외(中外)가 정정(整整)하여 감히 궤도(軌度)를 넘는 자가 없었으며 이는 향당(鄕黨)에까지 전해져 법(法)이 되었다. 공의 장지(葬地)는 소무현(邵武縣) 인택향(仁澤鄕) 보륭산(寶隆山)의 언덕이고, 부인의 장지(葬地)는 영성향(永城鄕) 황계보(黃溪保) 동청산(銅靑山) 아래인데, 두 곳이 약 10리(里) 정도 떨어져 있다. 자녀로는 아들이 다섯인데, 그 중 단원(端願)과 단평(端平)은 모두 빼어난 재능(才能)이 있어서 총각(總角)때 이미 조정에 천거(薦擧)된 바 있지만 모두 일찍 졸(卒)하였다. 그 다음인 단방(端方) 역시 지금은 죽고 없다. 그 다음인 영존(永存)은 지금 조청대부(朝請大夫)로 무이산(武夷山) 충우관(冲佑觀)을 주관(主管)하고 있다. 그 다음이 영년(永年)인데 우유림랑(右儒林郞)으로 정강부(靜江府) 이정현(理定縣) 지사(知事)가 되었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공의 따님은 다섯이 있으니 사위는 선덕랑(宣德郞) 주강년(朱康年), 보의랑(保義郞) 주욱(朱郁), 수직랑(修職郞) 조순신(趙舜臣), 통직랑(通直郞) 두탁(杜鐸)과 진사(進士) 이선지(李先之)이다. 손자(孫子)는 10인(人)이 있으니, 구붕(龜朋)은 우림랑(儒林郞)이다. 그 밖에 격(格) ․ 월(鉞) ․ 남경(南卿) ․ 범(範) ․ 유(槱) ․ 훈(勛) ․ 하(夏) ․ 흠(欽) ․ 균(鈞) 등은 모두 아직 벼슬하지 않았는데 그 중 격(格) ․ 월(鉞) ․ 흠(欽)은 죽었다. 손녀(孫女)는 모두 여섯이니 사위는 주돈서(周敦書) ․ 이방(李厖) ․ 이휘(李徽) ․ 장사랑(將仕郞) 오시만(吳時萬) ․ 상관규(上官珪) ․ 상관양(上官揚)이다. 증손자(曾孫子)는 모두 17인(人)이니, 대정(大正) ․ 대시(大時) ․ 대춘(大椿) ․ 대전(大全) ․ 대유(大猷) ․ 대학(大學) ․ 대창(大昌) ․ 대연(大淵) ․ 대□(大囗) ․ 대성(大聲) ․ 대소(大韶) ․ 대수(大受) ․ 대엄(大嚴) ․ 대임(大任) ․ 대용(大用)은 이름이 있지만, 그 나머지는 아직 이름을 없다. 증손녀(曾孫女)는 모두 열 넷이다. 사위로는 임두남(任斗南), 임사(林祀), 이개(李价)가 있으며 나머지 증손녀는 아직 어리다. 현손자(玄孫子) 여섯이 있으니 공진(公震), 공승(公升), 공현(公顯), 공회(公回), 공환(公煥), 공장(公章)이다. 오호(嗚呼)라, 이 얼마나 성(盛)한가! 이로써 황씨(黃氏)가 세상에 창부(昌阜)할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로다! 이에 명(銘)에 가로대 :

公初娶宛句劉氏, 贈和義郡夫人. 蘄春其繼室也, 延平人, 贈少師積之女. 夫人渾厚靜專, 歸黃公甚貧, 處之自若. 晩雖豐泰, 亦未嘗改其度也. 事公之女兄如姑, 公之沒而歸其喪, 敎其子務以忠言直節立其志, 使卒爲聞人, 以大其家. 歲幾滿百, 而神明不耗, 起居不衰, 又似有道者. 家人百口, 撫之一以慈愛而敎告勉飭隨之, 未嘗見其有嚴厲之色, 而中外整整, 莫敢越軌度, 鄕黨傳以爲法. 公葬邵武縣仁澤鄕寶隆山之原, 夫人葬永城鄕黃溪保銅靑山下, 相距蓋十里. 子男五人, 曰端願․端平, 皆有俊才, 丱角已與薦送, 而皆早卒. 次端方, 亦卒. 次永存, 今爲朝請大夫․主管武夷山冲佑觀. 次永年, 右儒林郞․知靜江府理定縣, 亦先卒. 女五人, 其壻宣德郞朱康年, 保義郞朱郁, 修職郞趙舜臣, 通直郞杜鐸, 進士李先之也. 孫男十人, 龜朋, 儒林郞. 格․鉞․南卿․範․槱․勛․夏․欽․鈞, 皆未仕, 而格․鉞․欽亡矣. 孫女六人, 其壻周敦書․李厖․李徽․將仕郞吳時萬․上官珪․上官揚. 曾孫十七人, 大正․大時․大椿․大全․大猷․大學․大昌․大淵․大囗․大聲․大韶․大受․大嚴․大任․大用, 餘未名. 女十四人, 其(8-4567)壻任斗南, 林祀, 李价, 餘尙幼. 玄孫男六人, 公震, 公升, 公顯, 公回, 公煥, 公章. 鳴呼, 是亦盛矣! 黃氏之昌阜於世也, 其可量哉! 銘曰:

 

기기(曁曁)하신 황공(黃公)께서 위난(危難)의 때를 만났구려. 공의 자취는 중조(衆兆)를 따랐으나 그 사려(思慮)는 묘미(眇微)에 속하였도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의리를] 더럽힘 없이 온전하게 돌아가셨도다. 온온(溫溫)하신 부인(夫人)은 당신 남편 훌륭히 도우셨고 그 자녀를 훌륭히 가르쳐 집안을 대성(大成)하였도다. 장수(長壽)하시고 존영(尊榮)도 하시어 백세(百歲)가 되어 돌아가셨네. 공이 묻히신 보륭(寶隆) 언덕과 부인이 묻히신 황계(黃溪) 마을은 동서(東西)로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공과 부인의 두 묘문(墓門)이 짝을 이루어 서 있구려. 앞에 자손이 가득하니 뒤에도 증현(曾玄)이 가득 하리라. 아직도 공을 향한 천자의 총령(寵靈)이 남아 있으니 멀지 않아 또다시 공의 자손에게 도래하리라.

曁曁黃公, 逢時之危. 跡隨衆兆, 思屬眇微. 之死弗汙, 以全其歸. 溫溫夫人, 克相其夫. 又詔其子, 以成厥家. 壽考尊榮, 百歲而徂. 寶隆之阿, 黃溪之里, 東西相望, 兩闕對起. 子孫盈前, 曾玄滿後. 尙有寵靈, 不遠來又.

 

 

 

충문공(忠文公)과 위민공(威愍公)의 충절(忠節)을 드러내는 묘비(廟碑)(旌忠愍節廟碑)

 

소희(紹熙) 3년 10월 기유(己酉)에 신주(信州)의 수신(守臣) 왕자중(王自中)이 다음과 같이 진언(進言)하였습니다. “신(臣)은 다행히도 부부(剖符)의 은혜를 받자와 임시로 지군(支郡)을 지키면서 일을 보던 중 어느 날 어떤 도첩(圖牒)을 자세히 살피게 되었는데, 가만히 보아하니 옛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였던 충문공(忠文公) 장숙야(張叔夜)와 옛 지동주사(知同州事)였던 위민공(威愍公) 정양(鄭驤)의 의관(衣冠)이 모두 본 군(郡)의 경계(境界) 안에 소장(所藏)되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체로 들은 바에 따르면, 옛 정강(靖康)의 난(難)이 있을 때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몰아닥쳐 성(城) 전체가 위급(危急)해지자 사면(四面)의 근왕병(勤王兵)조차 준순(逡巡)하며 진퇴를 거듭할 뿐 선뜻 달려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충문공(忠文公)은 홀로 남도(南道)의 군대를 이끌고 천리 길을 달려 국난(國難)의 현장에 당도하였습니다. 군대의 선봉(先鋒)은 매우 예리(銳利)하여 매번 전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이겼습니다. 그러나 묘산(廟算)이 유예(猶豫)되자 마침내 공(功)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전패(顚沛)하며 힘을 다해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존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일이 더 이상 성취(成就)되지 않자 드디어 입을 닫고 음식을 끊어 순사(殉死)하였습니다. 그 후에 오랑캐들이 군대를 나누어 서쪽으로 관(關)과 섬(陝)을 엿보아 군대가 향하는 곳마다 아군이 항복함으로써 모든 것이 그들의 돌아가는 상황에 또 위민공(威愍公)과 같은 훌륭한 분이 나타나, 홀로 외로운 성(城)에 피곤한 병졸(兵卒)을 이끌고 오랑캐의 그 승승(乘勝) 염예(焱銳)한 예봉(銳鋒)과 맞닥뜨리며 삼진(三秦)을 폐차(蔽遮)함으로써 황제의 순행(巡幸)에 대비(對備)하였습니다. 대규모의 오랑캐 군대가 밀어닥치는데 이웃 아군(我軍)의 구원(救援)조차 사방(四方)으로 끊어지자 계속해서 성(城)을 지켜낼 수 없음을 알았지만 용기(勇氣)는 더욱 엄려(嚴厲)하였으며 반드시 본 군(郡)과 함께 모두 존망(存亡)을 함께 할 것을 맹서하였습니다. 성(城)이 함락(陷落)되던 날 공은 드디어 그 목숨을 버려 아무런 후회(後悔)가 없었습니다. 이는 공의 견위치명(見危致命)하심과 살신성인(殺身成仁)하심이 모두 신하된 자로서의 의리(義理)에 비추어 아무런 참괴(慙愧)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점들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조(聖朝)께서 침통(沈痛)하게 애도(哀悼)하시고 여러 차례 포상(褒賞)하고 주휼(賙恤)하셨으며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하사하심으로써 뚜렷이 사전(祀典)에 보존토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개 지하(地下)에 계신 공의 충혼(忠魂)을 위로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실 만세(萬世)토록 신자(臣子)들에게 충의(忠義)의 대훈(大訓)을 밝게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 관리가 나태하여 그 해야 할 직분을 잃어버리거나 수봉(脩奉)함이 경건(敬虔)하지 못했습니다. 충문공(忠文公)의 경우는 비록 분묘(墳墓)에서 제사를 거행함으로써 나름의 엄숙한 형식을 갖추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영풍(永豐)의 영취산(靈鷲山)이라는 궁벽(窮僻)한 심산(深山)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이미 주상(主上)의 은혜를 널리 펴지도 못하고 있으며 대중(大衆) 뜻을 격려(激厲)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위민공(威愍公)의 경우는, 원래의 장지(葬地)와 제지(祭地)가 풍익(馮翊)인데 그 곳의 도로가 이미 막히고 끊어진 상태이며, 위민공(威愍公)의 고향(故鄕)인 옥산(玉山)의 동곽(東郭)에도 분묘(墳墓)는 있으나 묘당(廟堂)은 없기에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신(臣)이 불녕(不佞)합니다만 더욱 [이 점을] 가만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삼가 이미 두 현(縣)의 경계(境界) 중 탁 트인 도로 옆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物色)해 두었사오니, 주전(州錢)을 마련해 내고 관리(官吏)들에게 부탁하여 공인(工人)들을 모아서, 두 분을 함께 제사하는 쌍묘(雙廟)를 만들되 순(巡) ․ 원(遠)을 본받아 만든다면, 경건하게 두 분의 영령(英靈)을 안치(安置)하여 충의(忠義)를 드러내 권장(勸獎)하게 될 것이니, 우러러 건염(建炎) ․ 소흥(紹興) 시기의 명조(明詔)의 유지(遺旨)에 걸맞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광령(光靈)을 빌려주시어 그 명호(名號)를 확정(確定)해 주시고 책서(策書)를 내리시고 명(命)을 펴시어 다함없는 가르침을 내려 주소서. 신(臣)은 대원(大願)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간청(懇請)하옵니다.” 이 일이 예부(禮部)로 내려가자 태상(太常)이 조주(條奏)에 합의(合議)하여 함께 이르기를 “이전에 두 충신(忠臣)의 묘(廟)에 이미 사액(賜額)한 바 있으니, 마땅히 그 이전의 것을 근거로 해서 합(合)하여 명호(名號)를 확정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황제께서 명(命)하시기를 “예관(禮官)에서는 이 일을 상의(相議)하여, ‘충문공(忠文公)과 위민공(威愍公)의 충절(忠節)을 드러내는 사당(旌忠愍節之廟)’이라는 액자(額子)를 내리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상서(尙書)에서 군주(郡主)에게 이문(移文)을 보내 ‘글과 같이 시행하라’ 하였고 왕후(王侯)는 이미 소환(召還)되었다.

紹熙三年十月己酉, 信州守臣王自中言: ‘臣幸得蒙恩剖符, 假守支郡, 視事之日, 考按圖牒, 竊見故簽書樞密院事張忠文公叔夜․故知同州事鄭威愍公驩衣冠之藏皆在郡境. 蓋聞在昔靖康之難, 虜騎長驅, 都城危迫, 四面勤王之兵逡巡前却, 莫有至者. 而忠文獨以南道之師千里赴難, 軍鋒銳甚, 每戰必克, 乃以廟算猶豫, 卒不能有成功. 而崎嶇顚沛之餘, 竭力致死, 猶以必存宗社爲己任. 事復不就, 則遂閉口絶食而以身殉焉. 其後虜人分兵西闚關陝, 所向降下, 無不如意, 則又有如威愍者, 獨以孤城憊卒嬰其乘勝焱銳之鋒, 蔽遮三秦, 以備巡幸. 虜兵大至, 鄰授四絶, 知不能守, 而勇氣彌厲, 誓必與郡俱爲存亡. 城陷之日, 遂隕其生而不悔. 是其見危致命, 殺身成仁, 皆足以無愧於人臣之義. 是以聖朝痛悼, 褒恤屢加, 立廟賜名, 著在祀典. 蓋非獨以慰忠魂於地下, 實以昭示萬世臣子忠義之大訓. 而吏惰失職, 脩奉弗虔. 忠文雖得卽墓爲祠, 以嚴貌象, 然而僻在永豐靈鷲深山之中, 旣無以侈上恩․厲衆志; 至於威愍, 葬祭在馮翊者, 道旣阻絶, 而其故鄕(8-4569)玉山東郭有墳無廟, 則行路之人所爲愴惻. 而臣不佞, 尤竊懼焉, 謹已相地兩縣之境, 通涂之側, 出留州錢, 屬吏鳩工, 度爲雙廟, 擬則巡․遠, 庶幾有以揭虔妥靈, 表勸忠義, 仰稱建炎․紹興明詔之遺旨. 謂宜假以光靈, 定其名號, 策書申命, 以詔無極. 臣不勝大願, 敢昧死請.’ 事下禮部, 太常合議條奏, 咸謂二臣之廟前已賜額, 宜因其故, 合而名之. 制詔禮官議, 是其以 ‘旌忠愍節之廟’ 爲額. 於是尙書符郡主者施行如章, 而王侯已召還矣.

 

처음에, 왕후(王侯)께서 이미 옥산(玉山)의 령(令)인 예립언(芮立言)과 영풍(永豐)의 령(令)인 반우문(潘友文)에게 역사(役事)를 부탁하고 또 희(熹)에게 편지를보내 명문(銘文)을 청(請)하였다. 이에 두 령(令)들이 공사를 감독하여 법에 따라 다스려 나감에 따라, 또 다시 내게 사람을 보내 왕후(王侯)의 명(命)을 확인했다. 희(熹)는 이미 두 공(公)의 일을 즐겨 말하고 있었고 또 왕후(王侯)의 청(請)을 중(重)히 여겨 이에 서문(序文)을 짓고 시를 지어 사당이 낙성(落成)되기를 기다려 피제사를 지낸 후 이를 새기도록 했다. 왕후(王侯)의 자(字)는 도부(道夫)이니 영가(永嘉) 사람이다. 젊은 시절부터 건장(健壯)하였고 기특(奇特)한 절개(節介)가 있었다. 일찍이 수황성제(壽皇聖帝)를 위해 당세(當世)의 급무(急務)를 진언(進言)하였는데 수황(壽皇)께서 공의 말에 기뻐하여 공을 크게 등용하려 했으나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수황(壽皇)께서 공을 크게 등용하려 하신 것은] 아마도 정치를 행함에 먼저 힘써야 할 곳을 앎이 본래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그 시(詩)에 가로대:

始, 侯旣屬役於玉山令芮立言․永豐令潘友文, 又以書來請銘於熹, 於是兩令課功, 作治如法, 復使人來申致侯命. 熹旣樂道二公之事, 又重侯請, 乃序而詩之, 俾俟廟成, 釁而刻焉. 王侯字道夫, 永嘉人, 自少魁壘有奇節, 嘗爲壽皇聖帝極陳當世之務. 壽皇悅其言, 欲大用之而未及也. 是其爲政知所先務, 固宜如此. 其詩曰:

 

황황후제(皇皇后帝)께서 하민(下民)에게 중정(中正)의 덕을 부여하셨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義理)와 부자(父子)간의 사랑이 그것이로다. 신하(臣下)가 군주(君主)를 섬김에 이름을 신적(臣籍)에 올리고 폐백을 바치며, 삶에 대한 보답을 죽음으로써 하나니 어찌 내 한 몸 주휼(賙恤)할 겨를이 있으리? 만약 물고기와 웅장(熊掌)이 취사(取捨)하는 사이에 있다면 사람들은 이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아마 본성도 또한 그러하나니, 저 숲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지만 그 누군들 이 본성이 없겠는가? 다만 이해(利害)가 본성을 겁탈(劫奪)하기에 간혹 그 올바름을 잃기도 하느니라. 문무(文武)를 겸비하신 장공(張公)께서는 목숨을 던져 거듭 호위(扈衛)하셨으며, 고자(孤子)를 옹호(擁護)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셨고, 몸이 죽는 것을 흡사 집으로 돌아가듯 편안히 하셨도다. 간간(侃侃)하신 정공(鄭公)께서는 외로운 보루(堡壘)를 소요(逍遙)하시다가 성(城)이 망하자 함께 돌아가셨으니 그 절개 또한 위대하도다. 바야흐로 때가 크게 변동하니 무리들이 흐르는 시냇물처럼 어지러우나, 두 공께서는 서로 바라보며 저주(砥柱)와 같이 우뚝 솟아 있도다. 위난(危難)에 임(臨)해 강개(慷慨)하셨으니 그 마음 고요한 물과 같이 한결같으셨도다. 이는 실(實)로 그 천(天)을 온전히 하신 것이니 만세(萬世)토록 죽지 않으리라. 초혼(招魂)하여 신주(神主)로 삼으니 황제(皇帝)께서 마음아파하시는 글을 보내오셨도다. 관리(官吏)들의 나태함이 두 공의 충절(忠節)에 걸맞지 않아, 이 때문에 신령(神靈)께서 거(居)하지 않으셨도다. 그 누가 이 사실을 보고 들으셨는가? 그 누가 이를 탄식하고 한탄하셨는가? 그 누가 증(烝)제사를 지내고 상(嘗)제사를 지내셨는가? 그 누가 능히 면려(勉勵)할 수 있겠는가? 바로 수후(守侯)께서 명(命)을 청(請)하여 이 신궁(新宮)에서 전(奠)을 올리셨도다. 황황(煌煌)한 큰 편액(扁額)은 옛 것을 합(合)하여 더욱 숭상(崇尙)하였도다. 희생을 묶어두는 석비(石碑)에는 뿔 없는 암 용(龍)이 서려있고 거북이 이를 짊어지고 있구나. 내 거기에 명문(銘文)을 새기나니 이 곳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禮)를 갖추시라.

皇皇后帝, 降衷下民. 君臣之義, 父子之仁. 臣之事君, 策名委質. 報生以死, 身豈遑恤? 若魚熊掌, 取舍之間, 是孰使之? 其性則然. 林林之生, 孰無此性? 利害劫之, 或失其正. 文武張公. 投命重圍. 擁孤弗遂, 視死如歸. 侃侃鄭公, 遙遙孤壘. 城亡與亡, 其節亦偉. 方時大變, 衆潰如川. 二公相望, 砥柱屹(8-4570)然. 慷慨臨危, 一心如水. 實全其天, 萬世不死. 招魂作主, 帝有閔書. 吏惰不稱, 神用弗居. 孰見孰聞? 孰嗟孰歎? 孰烝孰嘗? 孰克用勸? 守侯請命, 奠此新宮. 煌煌巨扁, 合舊增崇. 麗牲有碑, 螭蟠龜負. 我其銘之, 過者必下.

 

소희(紹熙) 4년 5월 무인(戊寅)에 구위(具位)하고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찬(撰)하노라.

紹熙四年五月戊寅, 具位新安朱熹撰.

 

희(熹)가 이미 이 비문(碑文)을 새기고 난 그 명년(明年)에 주상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 나아가 주상께 사당(祠堂)에 관해 말씀드리고 장차 가서 배알(拜謁)하려 했다. 그러나 모상(貌象)이 아직도 설치(設置)되지 않고 있었고 그 역사(役事)도 아직 완공(完工)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후(王侯)께서 이미 떠나셨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는데다 두 수령(守令)께서도 이윽고 또 끝내 바뀌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금 옥산(玉山)의 총재(冢宰)이신 온국(溫國) 사마군(司馬君)께서 급히 이 일을 시작하여 장차 마무리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마군(司馬君)은 문정공(文正公)의 여러 자손들 중의 한 분인데, 그의 대부(大父)이신 충혈공(忠潔公)도 또한 임금을 호종(扈從)하여 북(北)으로 순수(巡狩)한 바 있으며, 충절(忠節)을 지켜 죽을 때까지 그 몸을 더럽히지 않으신 분이다. 그러니 그가 이공(二公)의 일에 남다른 감회(感懷)가 있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그는 주가(州家)의 명(命)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침내 왕후(王侯)의 뜻을 이루어내었다. 마침내 10월 임자(壬子)에 역사(役事)를 마쳤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희(熹)는 이상과 같은 사실도 비문(碑文)에 부서(附書)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이에 그 일을 간략히 기록하여 비문(碑文)의 좌방(左方)에 새기도록 한다.

熹旣銘此碑, 明年祗召造朝, 道出祠下, 將往拜焉, 則貌象未設, 而它役亦未訖功. 問其故, 則曰王侯旣去, 而歲惡民饑, 兩令尋亦終更. 而今玉山宰溫國司馬君방[辶+方]始將終之也. 君文正公諸孫, 其大父忠潔公亦以扈從北狩, 守節不汙沒其身, 宜其有感於二公之事, 不待州家之命而卒有以成王侯之志也. 十月壬子, 以訖事來告, 熹以爲是亦宜得附書, 因紀其事, 使寫刻于碑之左方.

 

 

 

중봉대부(中奉大夫) 직환장각(直煥章閣) 왕공(王公) 신도비명(神道碑銘) (中奉大夫直煥章閣王公神道碑銘)

 

효종(孝宗) 황제(皇帝)께서 사복(嗣服)하시던 처음에, 우리의 능묘(陵廟)가 오랑캐 원수로부터 당한 부끄러움을 갚지 못한 것과 중원(中原)의 판도(版圖)가 회복되지 않고 있음을 개연(慨然)히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오매불망(寤寐不忘) 준걸(俊傑)을 등용하여 일을 도모해보려 하였으나 군신(群臣)이 노하(駑下)하여 일찍이 주상(主上)의 이와 같은 뜻을 감당해낼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러던 중 대개 10여년이 지난 후, 마침내 주대(奏對)하는 사이에서 금부랑관(金部郞官) 왕공(王公)을 얻게 되었는데, 주상께서는 용연(聳然)하여 공의 말을 기특(奇特)하게 여기셨다. 이미 공이 물러간 뒤에도 주상께서는 또 수찰(手札)을 보내어 공을 예방(禮訪)한 다음 공으로 하여금 그 하고자 하는 말을 남김없이 다하여 응답(應答)하도록 하셨다. 그 때까지 공은 스스로 외롭고 소원(疎遠)하다 여겼는데, 하루아침에 인주(人主)를 뵙고 천하의 일을 논(論)할 수 있게 되었고, 인주(人主)께서도 곧바로 공이 논한 내용을 받아들이시어 조묵(詔墨)을 내려 자문(諮問)하시었다. 군신(君臣) 간에 그 근로(勤勞)하심이 또 이와 같았으니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군신간의 만남이었다. 공은 드디어 매사에 극언(極言)하여 숨기는 바가 없었고 주상(主上)께서는 더욱 가탄(嘉歎)하시어 공에게 숭정강관(崇政講官)을 겸(兼)하라는 조서를 내리시고 공이 야직(夜直)을 할 때는 반드시 불러 반복(反覆)해서 자방(咨訪)하시느라 구각(晷刻)을 보낸 것이 여러 번 있었다. 대신(大臣)이 이를 꺼려하여 주상께 계고(啓告)하여 공을 회동수(淮東帥)에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주상께서는 불허(不許)하시며 “왕모(王某)는 간관(諫官)이나 어사(御史)의 재질(材質)을 지녔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일로 말미암아 공을 꺼려하는 자들이 더욱 공에게 반목(反目)하면서도 곧 사람을 보내 은근(慇懃)함을 통(通)하면서 더욱 훌륭한 관직을 가지고 공에게 미끼를 던졌다. 이에 공이 굴(屈)하지 않자, 저들은 온갖 계략을 서슴지 않았으며 공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은 더욱 깊어갔다. 때마침 공은 본조(本曹)의 상서(商書)와 직무(職務)상의 일로 다투게 되었는데, 이에 저들은 서로 표정과 내심을 숨긴 채 교묘한 말로 공을 표적으로 겨냥해 맞추었고, 급기야 공을 보군(補郡)으로 내보냈다. 대개 공이 이로부터 외직(外職)에 옮겨 다닌 것이 거의 20년이다. 그러나 공에 대한 효종(孝宗)의 생각은 시종(始終) 바뀌지 않았다. 그리하여 효종(孝宗)께서는 여러 차례 근신(近臣)들에게 공이 오히려 대간(臺諫)의 재질이 있다는 언급을 하셨던 것이다. 근래에 다시 공을 소환(召還)하였으나 이미 이어(移御)에 임박(臨迫)한 상황이라 직접 면대(面對)하지는 못했다. 이로써 공은 마침내 다시는 조정(朝廷)의 의론(議論)에 참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마치게 되었는데, 이를 아는 자들은 공을 위해 한탄(恨歎)했으나 공은 도리어 기쁜 듯이 대처하며 조금의 낌새조차 말이나 얼굴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공이 주상(主上)께 진언(進言)한 것에 대해서도 공은 일찍이 한 글자도 남들에게 말한 적이 없었으니 비록 친자제(親子弟)라 할지라도 들을 수 없었다. 대개 공의 위인(爲人)이 어떠한지에 대해 여기에서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군신(君臣)간의 교제(交際)는 예로부터 어려운 것인데, 참으로 이 모두가 감탄(感歎)할만하도다! 이 모두가 감탄(感歎)할만하도다!

孝宗皇帝嗣服之初, 慨念陵廟之讎恥未報, 中原之版圖未復, 寤寐俊傑, 以圖(8-4571)事功. 而羣臣駑下, 曾莫有以當上意者. 蓋十餘年, 乃得金部郞官王公於奏對間, 意聳然異其言. 旣退, 又出手札以訪焉, 俾悉其詞以對. 公自以孤遠, 一朝得見人主, 論天下事, 便蒙開納, 而詔墨下詢, 其勤又如此, 誠爲不世之遇, 遂極言無所隱. 上益嘉歎, 詔兼崇政講官, 夜直必召, 反覆咨訪, 屢移晷刻. 大臣忌之, 啓以爲淮東帥. 上不許, 曰王某諫官御史材也. 由是忌者愈側目, 則使人通慇懃, 更以美官啖公. 公不爲屈, 彼計無所施, 而猜懼益深. 會公與本曹尙書爭職事, 乃潛相表裏, 爲巧語以中公, 使出補郡. 蓋公自是轉徙於外幾二十年, 而孝宗念公終始不替, 數對近臣及公, 猶有臺諫語. 比復召還, 則已迫移御, 不及對矣. 以是公訖不得復與朝廷議以沒. 有識爲公歎恨, 而公處之怡然, 無幾微見言面. 其所以言於上者, 亦未嘗以一字語人, 雖親子弟, 莫得聞焉. 蓋公之爲人, 於此可見其梗槪, 而君臣之際, 從古所難, 可勝歎哉! 可勝歎哉!

 

공의 집안은 세세(世世)로 무주(婺州)에 거주(居住)했는데, 공의 8세조(世祖)가 처음 의오(義烏)의 봉림(鳳林)에서 금화군(金華郡)의 성(城) 아래로 이사해 와서 살았다. 공의 증조(曾祖) 囗 ․ 조(祖) 囗, 부(父) 囗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 부(父)는 공이 귀(貴)하게 되자 이로 인해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추증되었고, 모(母) 가씨(賈氏) 또한 영인(令人)으로 추증되었다.

公世爲婺州人, 八世祖始自義烏之鳳林徒居金華郡城下. 曾祖囗․祖囗,父囗皆不仕, 而父以公貴贈中散大夫, 母賈氏亦贈令人.

 

공의 휘(諱)는 사유(師愈)이고 자(字)는 여정(與正)인데 제현(齊賢)이라 하기 한다. 태어난 지 7년 만에 병란(兵亂)을 만났는데 아비를 따라 영성(嬰城)하면서 ‘죽는 한이 있어도 아비의 곁을 잠시라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점점 나이가 들자, 홀로 교외(郊外)의 정사(精舍)에서 독서(讀書)하였는데, 향선생(鄕先生)인 반사인의영(潘舍人義榮)이 놀러 나갔다가 공을 보고 기이(奇異)하게 여겨 ‘암자 앞의 대나무’를 가리키며 시(詩)를 지어보라고 말했다. 이에 공은 한 두 차례 공손히 사양한 다음 필(筆)을 잡고 금방 시를 지었는데, 그 시의 졸장(卒章)에 “바라건대 송백(松栢)과 같은 굳건한 지조(志操)를 지녀, 세한(歲寒)의 마음을 함께 보전(保全)하고자 하노라.(願堅松栢操, 同保歲寒心)”라는 구절이 있다. 반공(潘公)은 매우 감탄하며 공을 찬상(贊賞)하고 그 말을 대나무 위에 새기라 명(命)했다. 공은 그 후에 또다시 반공(潘公)에게 ‘서(書)를 통해 글을 짓고 기운을 기르는 법’을 논(論)했는데, 그 당시 공의 나이는 겨우 열 셋이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올바르고 말이 통달(通達)되었으며 의상(意象)이 조화(調和)되고 우아(優雅)하여 울연(蔚然)히 성인(成人)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반공(潘公)이 더욱 공을 기특하게 여겨 공을 문하(門下)에 불러들여 자식이나 조카처럼 여기며 가르쳤다. 또 구산선생(龜山先生) 양공(楊公)을 뵙고『역(易)』과『논어(論語)』에 관한 학설을 수업(受業)하였다. 공은 또 스스로 동래여사인(東萊呂舍人) 거인(居仁)을 쫓아 중조(中朝)의 여러 원로(元老)들의 아름다운 언행(言行)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에 관해 알게 되었다. 양공(楊公)과 여공(呂公)은 모두 공의 기량(器量)을 인정(認定)하였다. 이에 공은 더욱 스스로를 각고(刻苦) 면려(勉勵)하였고 육경(六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그리고 역사서(歷史書) 및 여러 사람들의 저서들을 연구하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손으로는 베끼고 입으로는 외워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公諱師愈, 字與正, 一字齊賢. 生七年, 逢兵亂, 從父嬰城, 誓死不暫去其側. 少長, 獨書郊外精舍, 鄕先生潘舍人義榮出游, 見而異之, 指菴前竹命賦詩. (8-4572)公遜謝一再, 操筆立成, 其卒章有 ‘願堅松栢操, 同保歲寒心’ 之句. 潘公大嗟賞之, 命刻其語竹上. 後復以書論爲文養氣之法於潘公, 時年甫十三, 而義正詞達, 意象和雅, 蔚然有成人之度. 潘公益奇之, 召致門下, 敎視均子姪. 與見龜山先生楊公, 受易․論語之說, 公又自從東萊呂舍人居仁問知中朝諸老言行之懿, 二公皆器許之. 於是益自刻厲, 大肆其力於六經子史百氏之書, 手抄口誦, 晝夜不息.

 

그러던 중 갑자기 부상(父喪)을 만났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지(葬地)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에 공의 족인(族姻)들은 공으로 하여금 당시 풍속에 따라 화장(火葬)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공은 여러 날 동안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먹지도 않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감동(感動)하여 힘을 합해 공을 도왔고, 이에 일을 성사(成事)시킬 수 있었다. 상(喪)을 마칠 무렵 집이 더욱 궁핍(窮乏)하고 비게 되자, 공은 교학(敎學, 즉 敎育)을 통해 어머니를 봉양(奉養)했는데 스스로를 기르는 데는 매우 박(薄)하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난감(難堪)할 정도였다. 공이 자제(子弟)를 교육(敎育)하고 신칙(申飭)할 때는 매우 간관(懇款)하였고, 부형(父兄)과 말할 때조차도 또한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의거(依據)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항(閭巷)이나 전야(田野)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위(情僞)와 휴척(休戚)에 대해서도 공은 모두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공이 어떻게 하여 그처럼 동심인성(動心忍性)하며 갈수록 더욱 어지러움을 제거함으로써 날로 새로워지는 경지에로 나아가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또한 공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俄遭父喪, 貧不得窆, 族姻欲使從俗爲火葬. 公號泣不食者累日, 見者感動, 合力助之, 乃克襄事. 終喪, 家益窮空, 敎學以養母, 而自奉甚薄, 人所難堪. 其敎飭子弟極懇款, 與其父兄言, 亦未嘗不依於孝弟忠信. 而閭巷田野之間, 情僞休戚皆習知之, 其所以動心忍性․拂亂增益而進於日新者, 又非他人所及知也.

 

공은 나이 27세에 진사(進士)에 등제(登第)되었고 건주숭안위(建州崇安尉)에 발탁되었다. 아직 임지로 떠나기 전에 모상(母喪)을 만났으며, 그 슬픔으로 인해 공은 크게 몸을 손상하여 거의 병이 날 정도였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임강군군학교수(臨江軍軍學敎授)에 발탁되었다. 강서(江西)의 풍속은 문사(文詞)를 숭상하고 학행(學行)을 덜 중시했는데, 공이 부임해 오자 제생(諸生)들이 공의 온화(溫和)한 안색(顔色)과 기운(氣運)을 보고 또 공의 언동(言動)에 법도(法度)가 있음을 알게 되자 그들은 이미 깊이 공에게 경복(敬服)하게 되었다. 강석(講席)을 열어 공은 또 ‘배움을 통해 군자(君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고(告)했는데, 이를 들은 자들이 모두 마음에 감동(感動)되었다. 그들 중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간절(懇切)하면서도 통절(痛切)하게 가르치고 훈계하였더니 또한 스스로 후회(後悔)하며 고치는 자들이 많았다. 행승(行僧) 종고(宗杲)가 그 당시 이름이 있었다. 그는 총령(葱嶺) 밖에서 달아나 돌아왔는데, 그가 지나가면 사대부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예경(禮敬)하곤 하였다. 그런데 종고(宗杲)가 임강(臨江)에 이르자 그곳 군수(郡守)가 그를 불러들여 그로 하여금 높다란 자리에 올라 불법(佛法)을 강설(講說)하도록 한 다음 자신은 요속(僚屬)들을 이끌고 가서 청취(聽取)하면서 공을 불러 함께 참여하자고 했다. 이에 공은 사례(謝禮)하면서 말하기를 “저들의 학설(學說)에 대해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관(儒官)으로서 강학(講學)하는 일을 내버리고 저 불자(佛者)에게 북면(北面)하는 일은 [사실상 오도(吾道)를 욕(辱)되게 하는 짓인데], 내 비록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긴 하지만, 어찌 오도(吾道)를 욕(辱)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군수(郡守)는 강권(强勸)하지 못했고 식자(識者)들은 ‘공이 옳다’고 하였다.

年二十有七, 乃登進士第, 調建州崇安尉. 未行, 遭母喪, 哀毁骨立, 得疾幾殆. 服除, 調臨江軍軍學敎授. 江西之俗, 右文詞而左學行. 及公之來, 諸生見其色溫氣和, 言動有法, 固已深敬服之. 及開講席, 則又告以學爲君子之說, 聞者亦動心焉. 其不率者敎詔懇惻, 亦多自悔改. 行僧杲有時名, 竄嶺外得歸, 所過士大夫爭先禮敬. 至臨江, 郡守延致, 俾升高坐說佛法, 而率其屬往聽焉. 召公與俱, 公謝曰: ‘彼之說某所不能知, 然以儒官委講而北面於彼, 某縱自輕, 奈辱吾道(8-4573)何?’ 守不能强, 識者韙之.

 

거듭 화주교수(和州敎授)에 발탁되었으나, 군(軍)이 흥(興)함에 따라 이곳의 관원(官員)이 줄게 되었기 때문에 또다시 제점갱치사간변공사(提點坑治司幹辨公事)에 제수(除授)되었다. 아직 부임(赴任)하기도 전에, 담주남악묘(潭州南嶽廟)에 개수(改授)되었다. 대개 이 직책을 맡으며 한가(閑暇)히 7-8년을 보내자 공의 생사(生事)는 더욱 몰락(沒落)했으나 공의 덕(德)과 학문(學問)은 더욱 정진(精進)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사이 붕우(朋友) 중에는 요로(要路)에 오른 자도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이들 보기를 막여(漠如)히 하였다. 이윽고 경관(京官)에 개수(改授)되어 담주(潭州) 장사현(長沙縣)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공이 정사(政事)를 행할 때는 한결같이 사랑과 용서 그리고 편안함과 고요함을 근본 원칙으로 하였다. 강목(綱目)이 엄정(嚴整)하였으며, 항상(恒常) 원칙을 꾸준히 지켜나갔기 때문에 사람들도 함부로 법을 범(犯)할 수 없었다. 사건이 발생하여 관청(官廳)에 오는 백성이 있으면 의기(意氣)를 낮추어 순순(循循)히 그들을 어루만졌고, 그 내용을 분변(分辨)해서 알려줌이 간절하고도 상세하였다. 처리하기 힘든 일이 발생하면 반복(反復)해서 깊이 있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며 그 일을 따져보았으니, 하루아침에 재빨리 시비(是非)를 결단(決斷)하는 것을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백성이 수십 년 후에까지 폐(弊)를 입지 않도록 일을 처리하는 것을 자신의 편안함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사람들 중에 처음에는 공이 우활(迂闊)하다고 비웃던 자들이 오랜 후에는 공의 마음 둠이 두텁고 사람 사랑이 주밀(周密)한 데 대해 감복(感服)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 사정을 보건대, 이정(里正)의 역사(役事)로 인한 과요(科擾)에 곤란을 당하여, 백성들 중에는 숨거나 피하는 자들이 많았다. 또 아전(衙前)들도 선후(先後) 여탈(予奪)의 권병(權柄)을 쥐고 백성들의 다툼을 이끌었기 때문에 그 다툼이 오래되어도 결판(決判)을 내주지 않고 반드시 그들을 파산(破産)케 한 후에야 끝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공이 부임하여 뚜렷한 명분(名分)없이 거두어들이던 각종 세금이나 부역을 없앴더니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역사(役事)에 나아가게 되었다. 당대(當代)에 이르러서는, 또 그 정산(丁産)의 고하(高下)와 정년(停年)의 원근(遠近)에 따라 차례를 정하여 기한(期限)에 앞서 아전들에게 그 사실을 하달(下達)함으로써 [아전들이] 스스로 추택(推擇)하여 마땅히 부역(負役)해야 할 사람을 확정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이에 백성들이 역송(役訟)으로 상평사자(常平使者)의 대자(臺者)에까지 가는 일이 없어졌다. 이에 대(臺)의 아전들은 이점을 병통으로 여겨 도리어 사자(使者)에게 아뢰어 글을 내려 ‘공이 법(法)을 왜곡하고 인정(人情)에 따르는 자’임을 꾸짖도록 했다. 그러나 공은 이를 변경(變更)시키지 않았다. 초(楚) 지방에는 무귀(巫鬼)를 숭상하는 풍속(風俗)이 있었는데, 당시 궁벽(窮僻)한 산 속에 총사(叢祠)를 두고 이를 영주신(影株神)이라 부르며 숭상한 일이 있었다. 이에 수많은 우민(愚民)들이 무기를 잡고 모여 제사하고 또 반란(反亂)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에 군(郡)에서는 군대를 내어 이들을 토벌할 것을 의론(議論)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반란(叛亂)을 다스리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 물러나 한 두 사람의 토호(土豪)를 불러 은밀하게 의논한 다음, 사사(射士, 즉 弓手)를 붙이고 가서 불의(不意)에 그들을 내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그 곳에 가서 그 괴걸(魁桀, 즉 首領)을 몽땅 사로잡아 주(州)에 송치(送致)하게 하고 그 무리들을 해산시키도록 하였다. 나아가 그 사당을 철거(撤去)함으로써 또다시 제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 민간(民間)에 질병(疾病)이나 혼사(婚事)가 있을 경우 예전에는 모두 무사(巫史)에게 가서 결정했다. 이는 풍속(風俗)에 끼친 폐단(弊端)이 심(甚)했는데도, 관(官)에서는 도리어 그들 무사(巫史)들에게 유향(乳香)을 많이 팔 수 있음을 이롭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금하지 않고 있었다. 공은 또다시 [관(官)에서는] ‘무당에게 향(香)을 가지고 장사하지 말라’는 령(令)을 내리고, 기이하고 사특한 짓을 하여 대중(大衆)을 미혹시키는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벌을 가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풍속이 조금 변했다. 이 당시 문상(汶上)의 유자구(劉子駒)와 한광(廣漢)의 장경부(張敬夫)가 모두 공과 같은 군(郡)에 거(居)하고 있었다. 공은 한가한 날이면 그들과 더불어 노닐며 종용(從容)히 강관(講貫, 즉 講習)했다. 그리하여 공은 진리에 나아감이 더욱 심원(深遠)하였다. 어느 날 아침, 막부(莫府)에서 내려 보낸 문서(文書)에 백성에게 불편(不便)한 것이 있었다. 공은 이해(利害)로 이를 쟁론(爭論)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였다. 경부(敬夫)가 의심(疑心)하면서 말하기를 “가신다 해도 비용이 없으니 어찌할 것입니까?”라고 했다. 이에 공이 말씀하기를 “나는 이 곳에 올 때 본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돌아갈 채비를 갖추어 두었습니다. 어찌 금일(今日)을 기다린 이후에 이를 계획(計劃)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경부(敬夫)는 면전에서 감탄(感歎)하며 그를 더욱 공경(恭敬)하였고 이 사건도 마침내 잠잠해졌다.

再調和州敎授, 軍興官省, 更授提點坑治司幹辨公事. 未赴, 改潭州南嶽廟, 蓋居閒又七八年, 生事益落而德學益進. 朋舊間有去登要路者, 視之漠如也. 尋改京官, 知潭州長沙縣事. 其爲政一以仁恕安靜爲本, 而綱目嚴整, 守之有常, 人亦莫得而犯也. 民以事至廷中, 降意循撫, 辨告諄悉. 事有難處, 爲之反復計慮深遠, 不以一旦決遣快健爲己能, 而要以民不受弊於數十年之後爲己安. 人始而或笑其迂, 久而後服其存心之厚․愛人之周也. 里正之役困於科擾, 故多隱避. 吏又操先後予奪之柄以導其爭, 而又久不爲決, 使必破産而後已. 公至, 罷諸無名之歛, 人已欣然就役. 至有當代, 則又第其丁産之高下, 停年之近遠, 先期下之, 俾自推擇定當役者以告. 於是民無以役訟至常平使者之臺者. 臺吏病之, 反白使者下書詰公爲骩法狥情者. 公不爲變. 楚俗尙巫鬼, 窮山中有叢祠, 號影株神, 愚民千百輩操兵會祭, 且欲爲亂. 郡議發兵討之, 公曰: ‘此非所以靖亂也.’ 退, 密召語一二土豪, 貼以射士, 出其不意, 往悉禽其魁桀以送州, 而散其黨與. 因撤其廟, 禁勿復祠. 民間疾病婚嫁, 舊皆決於巫史, 俗以甚弊. 而官利其多鬻乳香, 不之禁也. 公復下令毋以香市於巫, 其爲奇衺以惑衆者, 必罰無赦, 俗爲少變. 時汶上劉(8-4574)子駒․廣漢張敬夫皆居郡中, 公以暇日與之遊, 從容講貫, 所造益深遠. 一旦莫府所下文書有不便於民者, 公以利害爭之不得, 退將引去. 敬夫疑之曰: ‘行而無資, 柰何?’ 公曰: ‘吾之來也固已慮此, 而先辨歸裝矣, 豈待今日而後計耶?’ 敬夫面歎加敬, 而事亦竟得寢.

 

수수(帥守) 장안국(張安國) 사인(舍人)이 공을 깊이 이해하고 이미 공을 섬천(剡薦)하였는데 형주(荊州)에 옮겨가서도 또 ‘공을 자신의 속관(屬官)으로 해 줄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소명(召命)을 받은 상태였다. 입대(入對)하여 공은 가장 먼저 ‘인주(人主)는 자신의 총명(聰明)을 자용(自用)함으로써, [대신(大臣)에게] 위임(委任)해야 하는 [군주로서의] 체통(體統)을 잃어서는 아니 됨’을 논했으며, 또 ‘재이(災異)가 도래(到來)하면 마땅히 공구(恐懼) 수성(修省)함으로써 하늘에 대해 진실(眞實)을 다해 응대(應對)해야 함’을 논했는데, 그 언론(言論)이 매우 사리(事理)에 적절(適切)하였다. 이에 주상(主上)께서 모두 가납(嘉納)하셨다. 공은 또다시 진언(進言)하기를 “신사(辛巳)의 변고(變故)는 하늘이 실로 우리에게 중원(中原)을 돌려주시는 것이니만큼 우리가 이에 적절히 대비(對備)하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기회(機會)를 상실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마땅히 ‘덕을 닦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과 ‘준걸(俊傑)들을 빠짐없이 찾아내는 일’과 ‘요해(要害)에 주둔하여 국토를 지키는 일’을 도모하시어 이에 지극히 힘쓰신다면 다른 날 기회(幾會)가 다시 도래(到來)할 때 거의 대비(對備)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인(因)하여 공은 변방(邊方)의 일을 매우 상세하세 진언(進言)하였는데 주상(主上)께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경(卿)이 어떻게 이런 일을 알게 되었는고?”하고 물으셨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신(臣)이 장사(長沙)에 있을 때 수자리 살던 사람들이 장차 오고 가곤 했는데, 그 때 신은 반드시 그 곳 사정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곳 실정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주상께서는 더욱 기뻐하시면서 “경(卿)은 현(縣)의 일을 하면서도 이 곳에 유의(留意)할 수 있었구려!”라고 하시며 공을 엄주(嚴州) 지사(知事)에 제수(除授)하셨다.

帥守張安國舍人知公深, 旣剡薦之, 及移荊州, 又奏取以爲屬, 而公已有召命矣. 入對, 首論人主不可自用其聰明以失委任之體, 又論災異之來, 當恐懼修省, 以盡應天之實, 言甚剴切, 上皆嘉納. 公復進言: ‘辛巳之變, 天實授我以中原, 而我無以待之, 坐失機會. 今當亟爲修德惠民․搜羅俊傑․屯據要害之計, 庶幾異日幾會復來, 有以待之.’ 因及邊事甚悉, 上意良悅. 問: ‘卿何以知此?’ 對曰: ‘臣在長沙, 戌將往來, 臣必詢之, 故得其實.’ 上益喜曰: ‘卿爲縣, 乃能留意於此耶!’ 除知嚴州.

 

이에 잎서, 장경부(張敬夫)가 이 고을을 맡아 다스렸는데, 백성들이 안락(安樂)하였다. 그러나 장경부(張敬夫)가 이미 소환(召還)되자 제공(諸公)은 그를 대신할 후임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공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다. 공은 그곳 임지에 도착하여 [장경부(張敬夫)가 다스리던] 그 옛 자취를 한결같이 답습(踏襲)하여 바꾸는 일이 없었다. 이에 백성들이 더욱 기뻐하였다. 경부(敬夫)가 일찍이 ‘정염(丁鹽)과 주견(紬絹)의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여 1년을 면제(免除)토록 해 줄 것’을 조정에 주청(奏請)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공이 또 아뢰어 말하기를 “본 주(州)의 땅은 궁척(窮瘠)하여 오직 잠상(蠶桑)을 생산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그 주견(紬絹)을 취하지 않고 절전(折錢)하도록 하시니 이는 이미 임토(任土)하는 뜻이 아닙니다. 또 그 절전(折錢)한 가격도 너무 무거우니, 이로 인해 백성들이 더욱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의 사정으로 보아 아직은 이를 다 파(罷)해주실 수 없으시다면, 조금 1년의 부세(賦稅)만이라도 감면(減免)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다만 해마다 본색(本色)을 실어가도록 하는 것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민력(民力)을 늦추는 데는 충분합니다.”라고 했다. 때마침 그 해에 가뭄이 들었기 때문에 조정에 청(請)하여 무주(婺州)의 쌀 5천 곡(斛)을 옮겨와 민간에 내 팔고, 또 백성들로 하여금 가을 추수 때 미곡(米穀)을 사들여 갚게 할 수 있었다. 공은 또 상주(上奏)하여 말하기를 “군(郡)에는 양전(良田)이 없어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입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다른 날처럼 또다시 기근(饑饉)을 만난 후에 주청(奏請)하여 조정의 대책을 기다리게 된다면 아마도 일처리를 제 때에 하지 못하게 되는 후회(後悔)가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본 군(郡)은 평소에도 미곡(米穀)이 적으니, 미곡을 사들여 보상하게 하는 것 또한 계책(計策)이 아닙니다. 원하옵건대 유사(有司)에게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혹 다른 때에 엄주(嚴州)에 기근(饑饉)이 들면, 올해와 같이 무주(婺州)의 곡식을 옮겨오고 곧 그 가격 그대로 갚아주게 하라’고 하신다면 일로서 볼 때 양쪽 모두에 득(得)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모두 공의 뜻을 따랐다. 공의 위정(爲政)의 대략(大略)은 장사(長沙)에서 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권호(權豪)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엄격히 하고 관대히 대응하지 않았다. 대성(大姓)과 권세(權勢)에 의지하는 무리들이 합당(合黨)하여 민전(民田)을 탐뢰(貪賴)한 일이 있었는데, 공은 그 죄를 일일이 나열하여 그들을 장형(杖刑)으로 다스리고 전(田)을 도로 빼앗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무릇 대장(大駔) 가운데 간악(奸惡)한 자가 있어 백성을 속이고 침범하거나 멸시하는 일이 있으면, 관리(官吏)를 내려 보내 실상을 상세히 조사하여 모두 법에 따라 조처했다. 상벌(賞罰)을 엄격히 하고 위령(威令)을 숙연(肅然)히 행함에 따라 간흉(姦凶)들이 순복(馴服)하여 감히 간범(干犯)하지 않았으며 선량(善良)들이 각자의 업무(業務)에 편안히 전념할 수 있었다. 이에 방인(邦人)들이 공을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지금까지도 “어찌 또다시 왕봉의(王奉議)의 때와 같아질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그런데 엄(嚴)은 행도(行都)에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사대부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는데, 공은 엄숙함과 정직함으로 스스로를 견지하면서 그들을 예(禮)로서 접대(接待)하였고 그들의 형세(形勢)를 보아 우러러 보거나 깔보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공의 처사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공의 행정(行政)이 지나치게 엄격(嚴格)하다고 말하면서 서로 멋대로 입을 놀리며 공을 흔들어댔다. 때마침 상요(上饒)에 교병(驕兵)이 있어 시끄럽게 다툰 일이 있었는데, 대신(臺臣)이 노장(露章)을 보내어 공에게 신(信)의 수신(守臣)으로서 그를 탄압(彈壓)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개 명분(名分)상으로는 공의 재질(材質)을 보아 이 일의 적임자로 공을 선발(選拔)한 것이었으나 실제(實際)는 선의(善意)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의 위망(威望)은 평소부터 미더웠기 때문에 교병(驕兵)이 공의 풍모(風貌)를 듣고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는 이전과 같은 행태(行態)를 보이지 않았다. 공이 그곳에 이르러, 더욱 거듭해서 기율(紀律)을 분명히 하고 한결같이 관용과 은혜로 어루만졌더니 마침내 무사(無事)하였다. 그 해 또다시 큰 가뭄이 들어 타군(他郡)의 유민(流民)들이 와서 먹는 자가 많았다. 공은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계획을 마련해 두었는데, 그 때가 바야흐로 중추(中秋)인지라 공은 ‘창고를 열어 민간에 쌀을 내다 팔 것’을 의론했다. 혹자는 ‘그 시기가 너무 빨라 후에까지 계속되지 못할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공은 “이는 그대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르다. 구제(救濟)가 조속(早速)하면 민심이 안정되어 백성들의 이동이 줄어들고 또 각각 그 옥려(屋廬)의 생업(生業)을 사랑하게 되어 다른 이들과 더불어 난(亂)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진다. 하물며 나는 이미 미곡(米穀) 20만 곡(斛)을 마련해 두었으니 이 일이 계속되지 못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고 곧 ‘방문(榜文)을 게시(揭示)하고 진조(賑糶)하되, 금일부터 시작하여 내년 8월까지 계속한 후에 그만두라’고 명(命)했다. 이 당시 민간의 쌀값이 이미 폭등(暴騰)하였으므로 공은 ‘관조(官糶)의 가격을 재탁(裁度)하여 [민간의 가격보다] 조금 싸게 함으로써 [관과 민의 가격이] 너무 크게 격절(隔絶)되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여 [관조(官糶)의 가격이] 사가(私價)와 저절로 균평(均平)해지면 또 [관조(官糶)의 가격을] 더욱 낮추라’고 명했다. 이 때문에 모람(冒濫)하는 간사(姦邪)함이 생기지 않았고 사가(私價)도 폭등하지 않았다. 이에 인심(人心)이 첩연(帖然)해지고 부잣집들도 스스로 큰 이익을 취(取)할 바 없음을 알게 되어 다시는 폐적(閉糴)하는 자가 생겨나지 않았다. 또 현관(縣官)을 보좌하는 자가 공의 명을 듣기를 원(願)하는 경우가 있어도 또한 강제(强制)하지는 않았다. 공은 또 금전(金錢)을 늘여 선속(船粟)을 초치(招致)했는데, 오는 자들의 축로(舳艫)가 서로 이어져 날마다 천 곡(斛)의 쌀을 내다팔아도 오히려 모자라지 않았다. 이때 마침 상평사(常平司)에서 글을 내려 보내와 ‘오만 곡(斛)의 쌀을 심양(番陽)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이에 관리(官吏)들은 모두 주지 말라고 말하고, 부로(父老)들도 길을 막고 읍소(泣訴)하였다. 공은 그들을 깨우치며 말하기를 “저들과 여러분들은 모두 국가의 적자(赤子)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식량이 이미 여유가 있는데, 또한 어찌 차마 저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면서도 가서 구(救)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급히 배를 준비하여 곡식을 실어 보냈다. 심양(番陽)은 이러한 공의 조처에 힘입어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다. 명년(明年)에는, 유민(流民) 중에 자기 군(郡)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에 대해서 행자(行資)를 주어 갈 수 있도록 했다. 촉(蜀) 사람인 황균(黃鈞)과 중병(仲秉)은 지혜 있는 명사(名士)였는데, 이들은 공이 조처한 이러한 실상을 전해 듣고 글을 보내와 공을 찬미(贊美)하기를 ‘부공청사(富公靑社)의 공(功)조차 이를 넘어선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공의 정치적 명예(名譽)가 날이 갈수록 드높아지게 되었다.

先是, 張敬夫守此邦, 民安樂之. 旣召還, 而諸公難其代, 故特以授公. 公至, 一躡其故迹, 無所更改, 民又益喜. 敬夫嘗奏請蠲丁鹽紬絹之稅, 得免一年. 至是公又奏曰: ‘州土窮瘠, 唯産蠶桑, 乃不取其紬絹而使折錢, 已非任土之意. 而所折又太重, 是以民尤苦之. 今未能盡罷, 而僅免其一年, 不若但令歲輸本色, (8-4575)猶足以少紓民力也.’ 會歲旱, 爲請於朝, 得移婺州米五千斛以糶, 且俾糴於秋成以償. 公又奏曰: ‘郡無良田, 多水旱, 有如異日復致饑饉而後奏請俟報, 則恐有不及事之悔. 况郡素少米, 使糴以償, 亦非計也. 願詔有司異時嚴州饑, 則移婺州之粟如今歲, 而卽以其直歸之, 則於事爲兩得矣.’ 詔皆從之. 公爲政大略如長沙時, 然於權豪則用法無所貸. 大姓倚勢合黨, 貪賴民田, 公數其罪杖之, 而奪田歸其主. 凡姦民大駔, 詐冒侵誣, 皆下吏案驗, 悉置之法. 賞信罰必, 威令肅然, 姦凶帖息不敢犯, 而善良獲安其業. 邦人畏而愛之, 至今猶曰: ‘安得復如王奉議時也.’ 然嚴距行都密邇, 士大夫往來無虛日. 公莊正自持, 接遇以禮, 不以形勢有所低昂, 以故多不悅者. 因謂公政過嚴, 相與騰口以撼公. 會上饒驕兵讙譟, 臺臣因露章請移公守信以彈壓之. 蓋名以材選, 而實非善意也. 然公威望素孚, 驕兵聞風畏讋, 不敢復爲故態. 公至, 更爲申明紀律, 而壹以寬惠撫之, 遂以無事. 歲復大旱, 它郡流民就食者衆. 公先事定計, 時方仲秋, 卽議發廩以糶. 或咎其太蚤, 恐後無以繼. 公曰: ‘此非若所知也. 救之早則民心安而流移少, 且各愛其屋廬生業, 而無與爲亂. 矧吾已致米二十萬斛矣, 不患其無以繼也.’ 卽命揭牓賑糶, 始自今日, 以盡來年八月而後已. 時民間米價已騰踴, 公命官糶之直財少損之, 使不(8-4576)至大相絶. 視私價自平, 則又益下之, 故無冒濫之姦而私價亦不得起. 於是人心帖然, 而富室自知無所牟大利, 莫復有閉糴者, 願有以佐縣官者聽之, 而亦弗之强也. 公又益以金錢致船粟, 來者舳艫相銜, 日糶千斛而猶不乏. 常平司下書, 俾移五萬斛於番陽, 官吏皆言勿予, 父老亦遮道泣訴. 公曉之曰: ‘彼與若曹皆國家赤子, 吾食旣有餘矣, 亦何忍視彼之莩死而不之救乎?’ 亟具舟輸之, 番陽賴以濟. 明年, 流民欲歸其郡者復予行資以遣之. 蜀人黃鈞仲秉, 知名士也, 聞其事, 貽書贊美, 以爲富公靑社之功不是過, 以是政譽日聞.

 

성지(聖旨)에 따라 소대(召對)하고 금부랑관(金部郞官)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를 겸임(兼任)하였으니 건도(乾道) 7년의 일이다. 이 때 공의 나이는 이미 50이 넘었다. 여러 차례 소대(召對)하여 많은 일들을 말씀드렸는데, 주상께서 공에게 내린 글 가운데는 “근자에 주대(奏對)한 것을 들어보니 자못 치도(治道)를 구비(具備)할 것을 언급하였으나 상세하지 못하다. 바라건대 정체(政體)에 보탬을 줄만한 것과 지금 당장 마땅히 시행해야 할 것을 갖추어 급히 다시 조목조목 아뢰라”고 하신 것도 있다. 주상께서 공을 두텁게 대접(待接)함이 이와 같았으니 일시(一時) 조정(朝廷)의 선비들 중에 아무도 이를 바랄 수 없을 정도였다. 집정(執政) 증회(曾懷)가 재리(財利)로 나아가기 전에 판조(版曹)에 있으면서 내부(內府, 즉 왕실의 창고)의 민전(緡錢) 수백만을 빌려주고 이를 상환(償還)하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하루는 주상께서 그 일을 호부상서(戶部尙書) 양담(楊倓)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양담(楊倓)은 어찌 대답해야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물러나, 제군(諸郡)의 적포(積逋) 중 민전(緡錢) 7백만을 취(取)하여 이를 금부(金部)에 부탁하여 독촉(督促)하도록 했다. 이에 공이 “이 돈은 한갓 명목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독촉한다고 해서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공문(公文)이 한 번 내려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요(騷擾)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 중외(中外)가 일체가 되어, 만약 방계(邦計)에 아직 여유가 없다면 차라리 군부(君父)께 귀성(歸誠)하여 너그러이 면제받도록 조처하는 것이 다행한 일입니다. 어찌 이 허적(虛籍, 즉 積逋를 말함)을 들어 주상을 속이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그 일을 잡고 아래로 내려 보내지 않았다. 양담(楊倓)은 크게 기뻐하지 않으면서 이에 은밀하게 주상께 아뢰기를 “왕모(王某)는 학술(學術)로 자부(自負)하면서 금곡(金穀)의 일을 달갑게 여지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했고, 증회(曾懷) 또한 ‘공이 주상의 좌우에 있으면서 자신의 단점(短點)을 배척(排斥)할 것’을 두려워하였기에 ‘공이 성중(省中)의 일을 누설(漏泄)했다’고 참소(讒訴)하였다. 주상께서 비로소 노(怒)하여 공을 파직(罷職)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마침 대간(臺諫)에 공을 위해 변명(辨明)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주상께서는 다시 증회(曾懷)에게 ‘왕모(王某)가 무슨 말을 누설했는지’를 물었다. 증회(曾懷)는 대답하지 못했고, 이에 주상께서 진상을 깨닫게 되어, 드디어 공을 요주(饒州) 지사(知事)에 개수(改授)한 것이다.

有旨召對, 除金部郞官, 尋兼崇政殿說書, 乾道七年也. 公時年已五十餘矣, 數召對言事, 上所賜書若曰: ‘比聞奏對, 頗及治道之具而未詳也. 尙有可裨政體而宜於今者, 亟復條奏.’ 其眷待之渥, 一時在廷之士莫得望焉. 執政曾懷以財利進, 而前在版曹, 貸內府緡錢數百萬, 未有以償. 一日, 上以問戶部尙書楊倓, 倓不知所對. 退, 取諸郡積逋緡錢七百萬付金部, 使督之. 公曰: ‘此錢徒有名耳, 督之未必有得, 而文移一下, 所擾者不知幾何人. 且中外一體, 若邦計未裕, 不若歸誠君父, 以幸寬免, 豈宜擧此虛籍以罔上而病民耶?’ 持其事不下. 倓大不樂, 乃密言於上曰: ‘王某以學術自負, 不肯屑意金穀事.’ 而曾懷亦畏公在上左右斥(8-4577)其短, 又譖公漏洩省中語, 上始怒, 詔罷公. 而臺諫有爲公辨明者, 上復問懷所洩何語, 懷不能對. 上悟, 遂改知饒州.

 

2년 동안 대차(待次)하면서, 공은 관례(慣例)에 따라 조정에 들어가 상주(上奏)하면서 ‘현령(縣令)은 마땅히 3년을 임기(任期)로 해야 함’을 논한 바 있는데, 이 일 또한 시행되었다. 당축(當軸)이 혹 공을 머물러 두어 자신을 돕게 하고자 하였으나 공은 공손히 사양하고 물러났다. 주상께서 명하시어 공을 또 다시 경서로(京西路)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삼으셨는데, 공은 양담(楊倓)이 바야흐로 호북(湖北)의 장수(將帥)로 있었고, 두 로(路)의 일이 서로 관련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에 공은 마침내 심양(番陽)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심양(番陽)은 오랫동안 내버려져 다스려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공사(公私) 간 모든 일이 무기력하고 폐단(弊端)이 많았다. 공이 군(郡)에 이르러 강유(綱維, 즉 法度)를 떨치고 해묵은 송사(訟事)를 결단(決斷)하니 정사(政事)에 비로소 조리(條理)가 갖추어지게 되었고, 또 온갖 폐단의 원천을 막아버리고 쓸데없는 낭비가 생기지 않도록 바꾸었더니 재용(財用)에 기율(紀律)이 서게 되었다. 군(郡)에서는 해마다 미곡(米穀) 12만 곡(斛)을 건강(建康)에서 실어왔는데 추재(僦載)할 때 드는 물자(物資) 중 일정한 수(數)를 백성들에게서 취(取)했다. 후에 총소(總所)에서 대부분 다른 곳으로 옮겼으나 그 거리가 혹 배 이상이 되는 곳도 있었는데, 그 비용을 취할 곳이 없었다. 이에 군(郡)에서는 항상 다른 돈으로 보충하여 이 일을 계속해왔다. 이 때문에 군(郡)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가난해지고 강운(綱運)도 또한 실기(失期)하여 절열(折閱)하는 근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 공은 힘써 조정에 주청(奏請)하기를 ‘무릇 강운(綱運)은 모두 고치거나 없앨 수 없도록 하고 부득이한 경우는 그 시기에 앞서 미리 아래에 고(告)해 줌으로써 미리 그 비용을 분담하여 시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의 청을 따랐다. 강운(綱運)은 드디어 모실(耗失)이 없게 되었고 군(郡)에서는 해마다 민전(緡錢) 6-7만을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군(郡)에서는 이전부터 도적이 많았는데, 그 중 한정(韓政)을 추수(酋帥, 즉 頭領)로 한 요적(妖賊)의 무리들이 날로 번성하여 장차 난(亂)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에 공은 방략(方略)을 설(說)하여 그들을 사로잡았다. 공이 장차 수대(受代)하려 할 무렵, 회전(淮甸)의 극적(劇賊, 즉 大盜)인 유오(劉五)가 간악(奸惡)한 젊은이 50여명을 거느리고 멋대로 노략질을 하며 경내(境內)로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 이들은 관군(官軍)을 만나자 문득 아홉 사람씩 세 부대(部隊)로 나누어 대적(對敵)해 왔는데 그 예봉(銳鋒)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들은 혹 포위(包圍)를 당하면, 그 무리들을 모아 원진(圓陣)을 만들어 외부를 향해 어지럽게 출격(出擊)하여 매우 많은 관군(官軍)과 민병(民兵)을 살상(殺傷)하였다. 이에 공은 마땅히 ‘번갈아 감으로써 스스로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병사(兵士)들을 조율(調律)하고 계획을 조정하여 ‘도적(盜賊)들과 직접 전투를 하지 말고, 다만 진요(津要)를 엄격히 지키면서 연일(連日) 그들을 구축(驅逐)하여 밤낮으로 휴식(休息)할 수 없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이와 같이 한 후 어느 날 아침 그들이 극도로 지쳐있는 틈을 타고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에 군도(群盜)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그 후 여러 해 동안 그들끼리 ‘심양(番陽)은 침범(侵犯)할 수 없다’며 서로 고계(告戒)하였다.

待次兩年, 以例入奏, 所論縣令宜以三年爲任, 事亦施行. 當軸或欲留公以自助, 公遜辭謝去. 上命更以公爲京西路轉運判官, 公以楊倓方帥湖北, 兩路事多相關, 不欲行, 乃卒赴番陽. 番陽久廢不理, 公私凋弊. 公到郡, 爲振綱維․決滯訟, 政始有經; 塞弊源․革浮蠹, 財用有紀. 郡歲輸米十二萬斛於建康, 僦載之資取之民者有常數. 後多爲總所移它處. 而道里或過倍, 則其費無所取, 郡常輟它錢以續之, 以故郡日益貧而綱運亦有愆期折閱之患. 至是, 公力請於朝, 凡綱運皆無得改撥, 有不獲已, 卽先期告下, 俾得預辨其費以行. 朝廷從之, 綱運遂得無耗失, 而郡歲省緡錢六七萬云. 郡故多盜, 妖賊酋帥韓政黨衆日盛, 且爲亂. 公說方略禽捕獲之. 及將受代, 淮甸劇賊劉五從惡少五十餘人轉掠入境, 殺人縱火. 與官軍遇, 輒以九人分三隊以迎敵, 其鋒不可當. 或被圍, 則合其衆爲圓陳, 外向潰出, 所殺傷官軍民兵甚衆. 公不以當去自弛, 調兵定計, 命毋得與賊戰, 但嚴守津要而日驅逐之, 晝夜毋得休息. 一旦乘其憊盡獲之, 於是羣盜震懾, 其後累年猶相告戒, 以番陽爲不可犯也.

 

공은 곧 본로(本路, 즉 江東路)의 전운판관(轉運判官)에 제수(除授)되었다. 그 당시 여러 군(郡)에는 어진 지방관이 많았지만, 정사(政事)의 재능(才能)에 장단(長短)이 없을 수 없었다. 송사(訟事)를 결단(決斷)하지 못하여 대(臺)에 상소(上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공은 서로 교대로 자신의 입장을 말하도록 위촉(委囑)해 두고 가만히 뜻으로 깨우치게 하여, 소송(訴訟)하는 자가 자신의 속사정을 다 펼쳐보이게 하고 송사를 듣는 자가 이를 폄하(貶下)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에 로(路) 전체가 공이 잘 다스린다고 칭송하였다. 때마침 그해에 큰 가뭄이 있었는데, 공은 주청(奏請)하기를 “장적미(樁積米) 백만 곡(斛)을 내어 여러 군(郡)에 나누어 주어 이를 진조(賑糶)로 삼아 백성을 안정(安定)시킨다면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용사자(用事者)들이 인색하여 겨우 그 십분의 일만을 얻을 수 있었다. 공은 또 하세(夏稅) 중 남은 부분을 면제해 줄 것과 갑찰(甲札)을 제조에 쓰이는 우피(牛皮), 마곡(馬穀) 등 여러 부세(賦稅)를 면제해 줄 것을 상주(上奏)하였는데,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모두 공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에 기민(饑民)이 힘입게 되었다.

(8-4578)就除本路轉運判官. 時諸郡多賢守, 而政事之才不能無短長. 有訟不決而訴於臺者, 公爲更互委屬而陰喩以意, 要使訟者得伸而聽者無所貶, 一路稱治. 會歲大旱, 奏請出椿積米百萬斛分予諸郡, 使爲賑糶, 以安民心, 人以爲便. 而用事者靳之, 僅得其什一. 又奏閣畸零夏稅, 免甲札牛皮馬穀諸賦, 詔皆從之, 饑民賴焉.

 

공은 다시 형호북로(荊湖北路) 전운판관(轉運判官)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런데 호북(湖北)의 가뭄은 강동(江東)보다 심(甚)했기에 공은 진휼(賑恤)에 온갖 마음을 다 기울여 이를 위한 계획(計劃)을 최대한 곡진(曲盡)하게 할 것을 주청(奏請)하다가 드디어 한질(寒疾)을 얻게 되었다. 이에 공은 무이산(武夷山) 충우관(冲佑觀)을 주관(主管)할 것을 청했으나, 양절동로(兩浙東路) 제점형옥공사(提點刑獄公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아직 임지로 떠나기도 전에 복건로(福建路) 전운판관(轉運判官)에 개수(改授)되었다. 공이 그곳에 처음 이르러서는 공핍(空乏)한 뒤를 이은지라 수입이 지출(支出)을 충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은 ‘하나의 로(路)가 기탁(寄託)할 곳은 오직 조사(漕司)를 우러러보는 것인데 경비(經費)는 여전히 공급(供給)되지 않으니 어떻게 완급(緩急)을 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곧 원류(源流)를 조사하여 찾아내고 정도(程度)를 조정(調整)하고 신칙(申飭)하며, 쓸 데 없이 지출되는 낭비를 절약(節約)하고 간악(奸惡)한 관리(官吏)를 단속함으로써 한 해 비용으로 쓰고 남은 것이 항상 [그 전(前) 해의] 배로 쌓이게 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를 시행에 옮기되 일정한 법도에 의거함으로써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해 나가자, 얼마 되지 아니하여 탕장(帑藏)이 날로 확충(擴充)되어 백성들이 고통을 호소하지 않게 되었으니, 후에 공의 뒤를 이은 자 가운데 아무도 공이 이룬 이러한 성과에 미칠 수 없었다. 민(閩)지방 네 고을(四州)에서는 관(冠)에서 소금을 팔아 세비(歲費)를 공급(供給)했는데 이것이 처음부터 모두 백성들에게는 고통이 되었다. 후에 여러 차례 법을 개정(改正)하여 세 군(郡)에서는 약간 나아질 수 있었으나 정(汀) 군(郡)은 유독 병구(兵寇)의 피해를 입은 나머지 전세(田稅)가 은함(隱陷)되었기 때문에 공사(公私)간의 온갖 계책(計策)이 모두 소금으로 인해 주관(主管)되고 있었다. 그런데 소금이 이 곳으로 오게 되는 경로를 보면, 관(官)에서 운반하는 경우는 그 거리가 멀고 사적(私的)으로 매매(賣買)하는 경우는 판로(販路)가 가깝기 때문에 관염(官鹽)의 가격은 비싸고 사염(私鹽)의 가격은 평상(平常)을 유지하였다. 또 이 곳은 제사(諸使)의 치소(治所)와도 모두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억배(抑配)나 겁가(劫假)가 공공연히 이루어져도 백성들이 소송(訴訟)할 곳이 없어 지극히 곤란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자주 들고 일어나 난(亂)을 일으키다가 문득 이멸(夷滅)되곤 했던 것이다. 의론(議論)하는 자들은 ‘관(官)에서 팔던 것을 바꾸어 초인(鈔引)을 발급하여 구제(救濟)’하고자 했지만, 공은 홀로 말하기를 “[지금처럼 관(官)에서] 소금을 파는 것은 본래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때에 초(鈔)가 혹시라도 팔리지 않으면 과매(科買)의 해독(害毒)이 반드시 관(官)에서 소금을 팔 때보다 더욱 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만 정주(汀州)에서 이전부터 밀려온 부세(賦稅)와 조사(漕司)의 민전(緡錢) 약간(若干)을 모조리 견감(蠲減)해주고 그 소금 값을 한 근(斤)당 15전(錢)씩 내리며, 그 마땅히 조사(漕司)에 보내어 전향(轉餉)하는 것 약간(若干)과 제사(諸司)에 나누어 예속시키는 것 약간(若干)을 모두 빌어서 주(州)의 비용(費用)으로 유치(留置)할 수 있다면, 한 해 사이 공사(公私)간에 손실(損失)된 것은 합(合)해도 민전(緡錢) 5만이 조금 넘는 정도일 것입니다. 여기에 만약 다시 수령(守令)을 정택(精擇)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봉행(奉行)한다면 저절로 유구(悠久)한 이익이 될 것이고 법(法) 또한 반드시 고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초(鈔)에 관한 의론이 잠잠해지자 공의 설(說)도 결국 시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정주(汀州) 백성의 고통은 지금까지도 치유(治癒)되지 못하고 있기에 의론하는 자들은 대개 거듭 이를 애석(哀惜)해 한다.

改除荊湖北路轉運判官. 而湖北之旱甚於江東, 公究心賑恤, 奏請規畫曲盡其至, 遂得寒疾, 得請主管武夷山冲佑觀, 除兩浙東路提點刑獄公事. 未行, 改福建路轉運判官. 始至, 承空乏之後, 入不支出. 公念一路之寄獨仰漕司, 而經費猶不給, 柰緩急何? 卽爲校索源流, 整飭程度, 節冗費․檢吏姦, 要使歲用之餘常有倍積而後已. 行之有常, 不徐不疾, 未幾, 帑藏日充而民不告病, 後之繼者皆莫能及也. 閩上四州官鬻鹽以給歲費, 始皆爲民病. 後屢改法, 三郡得少蘇, 而汀之爲郡, 獨以兵寇之餘, 田稅隱陷, 故公私百計皆倚鹽以辨. 而鹽所自來, 則官運遠而私販近, 故官價高而私直平. 又以距諸使治所皆絶遠, 故抑配劫假之公行而民無所訴, 困極無聊, 數起爲亂, 輒見夷滅. 議者欲變官鬻爲鈔引以救之, 公獨言: ‘鬻鹽固不能無弊, 然異時鈔或不售, 則科買之害必有甚於鬻鹽者. 今但盡蠲汀州宿負漕司緡錢若干, 而下其鹽直斤十有五錢, 其當送漕司以轉餉者若干, 分隸諸司(8-4579)者若干, 皆丐之以足留州之用, 則一歲之間, 公私所損合爲緡錢五萬有奇矣. 若更精擇守令, 一意奉行, 自爲悠久之利, 而法亦不必改也.’ 然鈔議旣寢, 而公說亦竟不行, 汀民之病迄今不得瘳, 議者蓋兩惜之.

 

효종(孝宗)께서는 여전히 공을 생각하며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공을 불러 쓰고자 하였다. 그러나 보신(輔臣)이 공을 자신과 같은 종속(宗屬)이라 혐의(嫌疑)하여 끝내 이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임기가 만료되자, 이에 조정에서는 공에게 ‘직비각(直秘閣)으로 이전에 있던 관직에 거(居)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공의 만년(晩年)에, 주상께서 재상(宰相)을 바꾸어 등용하시자 이에 공을 양절서로(兩浙西路) 제점형옥공사(提點刑獄公事)에 제수(除授)하였다. 공은 급히 부름을 받고 입대(入對)하였는데, 마침 효종(孝宗)께서는 이미 만기(萬機)를 싫어하시어 제위(帝位)를 물리신 터라, 지금의 수강황제(壽康皇帝)를 배알하였는데, 여기서 공은 곧 ‘마땅히 [효종(孝宗)께서 금상(今上)께] 엄중(嚴重)히 부탁(付託)하신 뜻을 체득(體得)하고, 아직도 갚아주지 못하고 있는 원수(怨讐)를 잊지 말 것’을 상주(上奏)하였으며 아울러 ‘중외(中外)의 각종 경중지사(輕重之事)의 대세(大勢)’에 관해 언급하였다. 이에 주상께서도 재삼(再三) 칭찬하고 감탄하셨다. 처음 임지에 도착하여 공은 평강(平江) 통수(通守)가 간사(姦邪)하게도 거금(鉅萬)을 뇌물로 받아 쌓아두고 있음을 적발(摘發)하였다. 이로 인해 기전(畿甸)이 숙연(肅然)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 때 이미 물러나 쉴 뜻을 품고 있었다. 수개월이 지나지 않아 곧 글을 올려 한직(閑職)을 빌었다. 주상께서는 공의 직책(職責)을 한 등 높여 제거무이산충우관(提擧武夷山冲佑觀)에 제수(除授)하였다. 공은 종용(從容)히 집으로 돌아와 한가(閑暇)하게 자적(自適)하며 글을 읽고 이치를 완미(玩味)하며 후진(後進)을 교유(敎誘)하였다. 이리하여 공의 덕망(德望)은 은연(隱然)히 동주(東州)의 중진(重鎭)이 되었다. 명년(明年) 소희(紹熙) 개원(改元) 7월 7일, 질병(疾病)으로 거재(居第)의 정침(正寢)에서 임종(臨終)하였으니 당시 공의 나이 69세였다. 공의 위계(位階)는 중봉대부(中奉大夫)에 이르고, 공의 직위(職位)는 환강각(煥章閣)에 도달하였으며, 공의 작위(爵位)는 금화현(金華縣) 남작(男爵)으로 읍호(邑戶) 300에 봉(封)해졌다.

孝宗猶念公不忘, 屢欲召用, 而輔臣以宗屬爲嫌, 竟不果. 垂滿, 乃詔公以直秘閣居故官. 餘年, 上更用宰相, 乃除公兩浙西路提點刑獄公事. 促召入對, 會孝宗已厭萬機, 乃見今壽康皇帝, 卽奏宜體付託之重, 勿忘未報之讎, 幷及中外輕重大勢, 上亦褒歎再三. 始至, 卽發平江通守姦臟累鉅萬, 畿甸肅然. 然公於是時已決退休之志, 未數月, 卽上章丐閑. 詔進職一等, 提擧武夷山冲佑觀. 公從容還家, 燕閒自適, 讀書玩理, 敎誘後進, 德望隱然, 爲東州之重. 明年, 紹熙改元七月七日, 以疾終于居第之正寢, 時年六十有九矣. 階至中奉大夫, 職直煥章閣, 爵金華縣男․邑戶三百.

 

대체로 공의 사람됨은 심정(沉靜) 독실(篤實)하고 간담(簡淡) 화수(和粹)하였으니 이는 타고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얻은 자질(資質)이었다. 공이 평소 거처할 때는 장엄(莊嚴)하면서도 묵연(黙然)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으며, 비록 암실(暗室)에 있을 때라도 큰 손님을 대하듯이 경건(敬虔)하였다. 공이 사람들을 접(接)할 때는 온화(溫和)하고 공손(恭遜)하였으며 정성(精誠)되고 신실(信實)하였다. 또 이런 덕목들이 마음속에 쌓여 남음이 있었으며, 밖으로 드러날 때는 근엄(謹嚴)하고 제량(劑量)이 있는 듯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가까이 할 수는 있게 하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도록 처신(處身)하였다. 공은 일찍이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 가난하여 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음식(飮食)과 의복(衣服) 그리고 각종 비용(費用)에 있어 종신(終身)토록 차마 어버이 살아계실 때보다 더 낫게 하지 않았다. 세시(歲時)에 제향(祭享)을 드릴 때는 문득 이겨낼 수 없는 듯이 애모(哀慕)하였다. 또 서사(書史, 즉 典籍) 외에는 담연(泊然)하여 달리 즐기는 것이 없었으며, 궤안(几案) 사이에는 단 하나의 장물(長物)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무엇을 취(取)하거나 줄 때는 법(法)이 어떠한지를 물었고, 현재(賢才)를 추달(推達)하였으나 위세(威勢) 때문에 굴(屈)하지는 않았다. 그 시설(施設, 즉 實行)로 드러낼 때 공의 취(取)한 대요(大要)는 ‘성현의 말씀은 반드시 행(行)할 수 있다’고 여기고, ‘사우(師友)의 논설(論說)은 반드시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공은 비록 그 속에 자수(自守)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써 늠연(凜然)하여 빼앗을 수 없는 지조(志操)를 지니고 있었지만, 남의 선(善)을 칭찬함에 있어서는 또한 안색을 기쁘게 하고 정신을 화창하게 하여 흡사 그것이 공 자신의 것인 양 하였다. 정무(政務)로 바쁜 가운데서도 공은 흡사 뼈를 발라내듯 해악을 끼치는 좀 같은 존재를 척결(剔抉)하고 흡사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듯이 간사(姦邪)한 무리를 골라내었는데, 일에 따라 적절한 변통(變通)을 행했으나 매사에 조리(條理)가 있었다. [이처럼 매사를 엄격히 처리하면서도] 그러나 공의 인후(仁厚)한 뜻과 측달(惻怛)한 정성(精誠)은 애연(藹然)히 그 가운데 행(行)해지고 있었으니 또한 한 때 이치(吏治)에 장기(長技)를 지닌 자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년(晩年)에는 공의 숙련(熟練)이 더욱 정미(精微)해지고 공의 함양(涵養)은 더욱 두터워져서, 혼연(渾然)하여 어떠한 규각(圭角)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은 병이 위독해지자 여러 자식들을 위해 전현(前賢)의 사업(事業)을 송설(誦說)하면서 면려(勉勵)하고 훈칙(訓飭)하였는데, 그 말씀을 마치고 곧 서거(逝去)하셨다. 그 사이 사생(死生)의 즈음에 있어서도 또 이와 같았다. 공은 글을 구차(苟且)히 짓지 아니하였다. 공의 의주(議奏) 또한 그 원고(原稿)가 깎여버린 것이 많은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던 약간(若干)의 권질(卷帙)이 공의 집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蓋公爲人沉靜篤實, 簡淡和粹, 得之天資. 平居莊黙, 不妄言笑. 雖在暗室, 如對大賓. 其於接物溫恭誠信, 充積有餘, 而出之謹嚴, 如有劑量, 使人可親而不可狎. 嘗念親在時貧無以養, 食飮服用終身不忍有所加. 歲時祀享, 輒哀慕如弗勝. 書史外, 泊然無所嗜, 几案間無一長物. 居官取予, 問法如何. 推達賢才, 不(8-4580)爲勢屈. 其見於施設者, 大要以聖賢之言爲必可行, 師友之論爲必可信. 雖其中所以自守者凜然有不可奪之操, 至於稱人之善, 則又色愉神暢, 如己有之. 雖剸繁治劇, 剔蠹鉏姦, 隨事制變, 各有條理, 然仁厚之意․惻怛之誠藹然行於其中, 則又有非一時長於吏治者所能及. 晩年更練益精, 涵養益厚, 渾然不見圭角. 病革, 猶爲諸子誦說前賢事業, 勉勵訓飭, 語訖而逝. 其間於死生之際又如此. 公於文不苟作, 議奏又多削稿, 今次其存者若干卷藏于家.

 

공은 동군(同郡)의 유씨(兪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유씨(兪氏)는 후에 영인(令人)에 봉(封)해졌다. 유씨(兪氏)의 아비 지국(持國)은 척당(倜儻)하여 원대한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일찍이 문(文)으로 유사(有司)를 시험하였으나 합격(合格)하지 못함에 따라, 드디어 마음 내키는 대로 산수(山水) 사이에 노닐면서 서계노인(溪西老人)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영인(令人)이 공에게 시집올 당시, 공은 매우 가난하였다. 이에 영인(令人)은 공을 도와 어버이를 봉양함에 그 힘을 다하였다. 또 화장 상자 속의 화장(化粧) 도구들을 꺼내 공의 여러 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후에 공이 여러 해 벼슬하지 않고 지낼 적에는 함께 각고(刻苦)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안온(安穩)하게 대처하였다. 또 공으로 하여금 덕업(德業)에 뜻을 두도록 격려(激厲)하고 집안을 돌보는 근심이 없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인(令人)에게 힘입은 것이 많았다. 공이 환달(宦達)하였을 때에도 영인(令人)은 검소(儉素)하고 근면(勤勉)하여 평일(平日) 늘 해오던 것을 바꾸지 않았다. 영인의 치가(治家)는 매우 단정(端整)하였고 자식 교육은 매우 엄격(嚴格)하였다. 또 족인(族姻)을 대우(待遇)함이 매우 후덕(厚德)하였고 제사를 받들거나 빈객에게 향연을 베풀 때는 매우 공경하면서도 정결(淨潔)하였다. 공이 서거하실 때 공을 위해 너무나 애통(哀慟)히 곡(哭)한 나머지 3개월 후에는 영인(令人)도 또한 병석(病席)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자녀 중 남(男) 4인이 있는데, 장남(長男) 한(瀚)은 종사랑(從事郞)으로 새로이 무당군절도추관(武當軍節度推官)이 되었다. 차남(次男) 한(漢)은 적공랑(迪功郞)으로 새로이 임안부인화현위(臨安府仁和縣尉)가 되었다. 삼남(三男) 흡(洽)은 아직 벼슬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남(四男) 담(潭)은 적공랑(迪功郞)으로 새로이 소흥부회계현주부(紹興府會稽縣主簿)가 되었다. 여(女) 5인이 있는데, 장녀(長女)는 진사(進士)인 진사(陳思)에게 시집갔다. 차녀(次女)는 태학사(太學上) 사생(舍生)인 시경(時涇)에게 시집갔으며, 삼녀(三女)는 진사(進士) 유곤(兪袞)에게 시집갔다. 또 사녀(四女)는 진사(進士) 엽소팽(葉紹彭)에게 그리고 오녀(五女)는 장사랑(將仕郞) 반진손(潘晉孫)에게 시집갔다. 손자(孫子)로 남(男) 6인이 있는데, 동(桐), 집(集), 조(操)가 있고 나머지 셋은 아직 이름이 없다.

娶同郡兪氏, 封令人. 其父持國倜儻有遠志, 蚤以文試有司, 不合, 遂放意山水間, 自號溪西老人. 令人歸公時, 公甚貧, 佐公養親盡其力, 斥奩中裝以遣諸妹無少吝. 後公居閑累年, 相與攻苦食淡, 處之甚安. 使公得以厲志德業而無內顧之憂者, 令人之力爲多也. 及公宦達, 而令人儉素勤力不改平日之舊. 治家甚整, 敎子甚嚴, 遇族姻甚厚, 奉祀享賓甚敬而潔. 至是哭公過哀, 後三月, 亦不起疾. 子男四人, 長瀚, 從事郞․新武當軍節度推官. 次漢, 迪功郞․新臨安府仁和縣尉. 次洽, 未仕. 次潭, 迪功郞․新紹興府會稽縣主簿. 女五人, 長適進士陳思, 次適太學上舍生時涇, 次適進士兪袞, 次適進士葉紹彭, 次適將仕郞潘晉孫. 孫男六人, 桐, 集, 操, 餘未名.

 

명년(明年) 10월에 공의 여러 고자(孤子)들은 공과 영인(令人)의 영구(靈柩)를 받들고 금화현(金華縣) 백사향(白沙鄕) 석순원(石筍原)의 대산(臺山)에 장사(葬事)하였다. 그 3년 후에, 태부사승(太府寺丞) 여조검(呂祖儉)이 쓴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명(銘)을 청(請)하였다. 희(熹)는 공과 비록 같은 해에 진사(進士)가 되었지만 공을 전배(前輩)로 본다. 공이 장사(長沙)에 있을 때, 처음 종유(從遊)할 수 있었는데, 본래 그 전부터 이미 공의 사람됨을 경애(敬愛)해 왔었다. 희(熹)는 공이 민(閩)에 들어갔을 무렵에, 공의 그 의론(議論)을 전해 듣고 공의 그 행사(行事)를 보고는 또한 더욱 공을 친숙(親熟)히 여겼다. 그러니 의리(義理)로 보아 이 청(請)을 사양할 수 없었다. 또 여조검(呂祖儉)이 쓴 공의 행장을 읽어보니 공에 관한 일이 모두 실상(實狀)을 상세히 기록하여 무고(誣告)함이 없었다. 이에 그 요점을 추려내고 아울러 이에 명(銘)을 부친다. 명(銘)에 가로대 :

(8-4581)明年十月, 諸孤奉公及令人之柩葬于金華縣白沙鄕石筍原之臺山. 後三年, 乃以太府寺丞呂君祖儉之狀來請銘. 熹與公雖同年進士, 視公爲前輩. 自公在長沙時, 始獲從遊, 固已敬愛其爲人. 及公入閩, 而聞其議論, 觀其行事又益熟, 義不得辭. 且讀呂君之狀, 事皆詳實不誣, 乃刪其要而系以銘. 銘曰:

 

천부(天賦)의 기특(奇特)함에 또 순수(純粹)하고 온화(溫和)함을 더했도다. 돈독(敦篤)하게 실천하고 민첩하게 배워 근본(根本)도 갖추고 문(文)도 갖추었도다. 성의(誠意)가 통(通)하는 바, 선비들이 감복(感服)하고 백성들이 신뢰(信賴)했도다. 조정(朝廷)에 들어가 고(告)함에 황제(皇帝)의 청문(淸問)이 계셨도다. 그 누가 중매(中媒)하여 합(合)하였는가? 그 누가 간극(間隙)하여 떠나갔던가? 그 남은 공력(功力)을 빌어 흉악(凶惡)한 자를 주륙(誅戮)하고 주린 자를 먹이셨도다. 백수(白首)가 되어 돌아오셨으나, 전일(前日)의 계합(契合)과 부합(符合)한다고 이를만하도다. 때와 일이 어긋남에 끝내 크게 시험하지는 못하셨구려. 백사(白沙)라는 이름의 마을, 석순(石筍)이라는 이름의 언덕이로다. 한 무덤이 닫혔으니 만세(萬世)의 안녕(安寧)이로다. 석순(石筍)이라는 이름의 언덕과, 백사(白沙)라는 이름의 마을을 그 누가 무궁(無窮)토록 알려 주리요? 이 애뢰(哀誄)를 보소서.

天賦之奇, 又粹以溫. 篤行敏學, 有本有文. 誠意所通, 士服民信. 入告于廷, 帝有淸問. 孰媒而合? 孰隙以離? 歛其餘功, 梟凶哺饑. 白首來歸, 謂諧曩契. 時與事違, 卒不大試. 白沙之里, 石筍之原, 一丘之閟, 萬世之安. 石筍之原, 白沙之里, 孰詔無窮? 視此哀誄.

 

 

 

의령을 위한 묘비(義靈廟碑)

 

 경원(慶元) 원년(元年) 봄 2월에, 대주(台州) 사민(士民)의 소청(所請)에 따라 조정에서는 고(故) 직비각(直祕閣) 등후(滕侯)의 사당(祠堂)을 의령묘(義靈廟)로 조성하라는 칙서(勅書)를 내렸다. 주(州)의 사람들은 늙은이 어린이 모두 이 명(命)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환희(歡喜)하고 시끄럽게 부르짖으며 달려가 서로 맞이하여 예배(禮拜)하고 사당(祠堂) 아래로 인도(引導)해 들어가 잔을 올리고 고하였다. 또 편방(扁牓)에 대서(大書)하고 금주(金朱)로 위황(煒煌, 즉 輝煌)하게 장식하여 문미(門楣)에 걸어 놓고 이에 주상(主上)께서 하사하신 것을 벌려 놓았다. 그리고 그 기애(耆艾) 학사(學士) 대부(大夫) 엽성우(葉聖耦) 등 40여 인이 사당(祠堂)의 뜰에 모여 서로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왕세(往歲, 즉 往年)에 도적(盜賊)이 방원(幫原)에서 일어나 연이어 여섯 주(州)를 함몰(陷沒)시켰는데 여기에 오랑캐의 병독(病毒)이 더해짐에 백성들 가운데는 초류(噍類)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대주(台州) 사람들은 유독 그 실가(室家)를 보전(保全)할 수 있었기에, 위로는 아비를 우러러보고 아래로는 자식을 굽어보며 끊임없이 세계(世系)를 전(傳)하여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등후(滕侯)의 힘이다. 그런데도 그 분이 죽은 후에 제사(祭祀)조차 모시지 않는다면 이는 참으로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慰勞)하는 것이 아니다. 또 제사를 모신다 해도 황제의 명(命)이 없다면 또한 우리 등후(滕侯)의 덕(德)을 표창(表彰)함이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제 묘사(廟事)는 이미 수리(修理)되었고 또 다행스럽게도 주상의 은덕(恩德)을 입어 [등후(滕侯)의 제사가] 사전(祀典)에 나열(羅列)되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금석(金石)에 그 본초(本初)를 저록(著錄)해 두지 않는다면 그 무엇으로 장구(長久)히 [등후(滕侯)에 대한 우리의] 보사(報事)를 밝힐 수 있겠는가? 또 당일(當日)에 성(城)을 버리고도 모상(冒賞)한 사람의 자손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대개 일찍이 그들이 멋대로 망설(妄說)을 지어 억지로 그 조상을 합사(合祀)함으로써 그들의 그 침무(侵誣)하려는 계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州) 사람들은 또 그들의 그 거짓을 배척(排斥)하여 조정에 고(告)하고 그들을 물리침으로써 되갚아 주었다. 그러나 혹 오래되어 전(傳)하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경우 감히 그 후환(後患)이 없을 거라고 기필(期必)하지는 못한다”라고 하고, 이에 나에게 글을 보내와 그 일을 전각(篆刻)해 줄 것을 청(請)하였다. 희(熹)는 쇠후(衰朽, 즉 衰落)하여 이를 사양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또 나 스스로 생각해보니 지난 날 절동(浙東)에 근무할 때 대주(台州)에 가장 오래 머물렀었는데, 그때 나는 이미 이 일을 익숙하게 들어 마음에 감동(感動)을 받았었다. 하물며 여러분들이 함께 청(請)한 그 원력(願力)을 볼 때, 어찌 내가 이 일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곧 응낙(應諾)했으나, 병(病)이 나서 이 청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慶元元年春二月, 敕以台州士民所請, 故直祕閣滕侯之祠爲義靈廟. 州人老穉聞是命下, 驚喜讙呼, 奔走迎拜, 導致祠下, 酌奠以告. 大書扁牓, 金朱煒煌, 揭于門楣, 庸侈上賜. 而其耆艾學士大夫葉君聖耦等四十餘人亦會祠廷, 相與言曰: ‘往歲盜起幫原, 連陷六州, 戎毒所加, 民無噍類. 而吾台人獨得全其室家, 仰父俯子, 傳世不絶, 以至于今者, 滕侯力也. 沒而弗祀, 固無以慰吾民之心; 祀而弗命, 又無以彰吾侯之德. 今則廟事旣修, 而亦幸蒙上恩, 列祀典矣, 顧無金石以著本初, 其何以昭報事於長久? 且當日棄城冒賞之人, 其子孫猶有存者, 蓋嘗肆爲妄說, 强祔其祖, 以遂侵誣之計. 吾州之人亦斥其僞, 以控于朝而報絀之矣, 然或久而不傳, 則未敢必其無後患也.’ 乃以書來請篆其事. 熹以衰朽, 欲謝不能, 而復自念往使浙東, 留台最久, 固已熟聞玆事而有感於中矣. 矧以諸君之請之力, 其何可辭? 則應曰諾, 而病未能也.

 

이에 지금 태수(太守)인 주부군후(周府君侯)가 또 은현(鄞縣)의 주부(主簿)인 조생사공(趙生師䧆)이 내게 종문(踵門)한 것으로 인해 이 일을 청(請)해 왔다. 이에 나는 곧 전(前)에 진사(進士)로 있던 대주(台州) 사람 진군사공(陳君思恭)이 쓴 일기(日記) 및 고(故) 예부시랑(禮部侍郞) 진공공보(陳公公輔) 등 여러 사람이 쓴 명(銘) ․ 서(序) ․ 찬(贊) ․ 송(頌) 등을 고안(考按, 즉 稽考)하였다. 이들은 모두 난(亂)이 처음 일어났을 때 들은 것을 언급했는데, [그 내용을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그 당시 군(郡) 전체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태수(太守) 조자도(趙資道)와 군승(郡丞) 이경연(李景淵)은 모두 악이(愕眙)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도망가려고만 했다. 그 서리(胥吏)들도 서로 돌아볼 뿐 감히 한 마디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당시 등후(滕侯)는 바야흐로 호조(戶曹)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이에 홀로 개연(慨然)히 그 직책(職責)을 맡기를 청(請)하자 이의(異議)를 가진 자가 문득 면전(面前)에서 그를 질책(叱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즉시 글을 보내 그 부모형제(父母兄弟)와 작별을 고(告)하고 관사(官舍)에 그 처자(妻子)를 머물러 둔 채, 주(州) 사람들을 모두 불러 이해(利害)를 따져가며 그들을 깨우쳤다. 이에 사람들은 감읍(感泣)하여 용약(踊躍)하면서 그의 명(命)을 들었다. 이에 그는 급히 다음과 같은 명(命)을 내렸다. 즉 장정을 보내 험지(險地)를 지키게 하라. 그리고 성가퀴를 증축하고 해자를 파내며, 병기(兵器)를 수치(修治)하고 병사(兵士)를 모집하라. 양식(糧食)을 쌓아 소용(所用)에 힘써 대비하라. 그리고 적절히 분산해서 진을 치고 목책(木柵)을 나열(羅列)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낼 계책을 세우라. [이상과 같은 명을 내린 후 그는] 밤낮으로 부하들을 순무(循撫, 즉 安撫)하며 고락(苦樂)을 함께하였다. 이에 성중(城中)의 사람들이 비로소 굳건한 의지를 지니게 되었지만 태수(太守)와 군승(郡丞) 이하 관리들은 모두 도망간 지 오래였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산민(山民) 여사낭(呂師囊)이 기병(起兵)하여 도적(盜賊)들에 부응(副應)하였는데, 그들은 그 수가 십여만이라 일컬으며 이끌고 성(城)을 공격(攻擊)해왔다. 이들의 공격은 전후(前後) 네 번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등후(滕侯)는 기미(機微)를 살펴 응(應)하면서 적절한 함정을 설치하여 바로 그들을 꺾고 깨트렸다. 도적(盜賊)의 궁수(弓手)가 성(城)에 임박(臨迫)해 왔을 때는 그 거수(渠帥)를 죽이자 도적들이 드디어 물러나 달아났고 마침내 그 외성(外城)을 보전(保全)했다. 그 당시 주(州)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갖가지 계책(計策)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乃今太守周府君侯又因鄞縣主簿趙生師䧆踵門以請, 則爲考按台人前進士陳君(8-4583)思恭所爲日記及故禮部侍郞陳公公輔諸人之銘․序․贊․頌, 皆言聞亂之初, 闔郡震恐, 太守趙資道․郡丞李景淵咸愕眙不知所爲謀, 欲遁去. 它吏相顧, 亦無敢出一語者. 侯方司戶曹事, 乃獨慨然請任其責, 有異議者輒面叱之. 卽日移書訣其父母昆弟, 而閉其妻子於官舍, 悉召州人諭以利害. 人人感泣, 踴躍聽命. 乃亟下令, 發夫守險, 增陴濬隍, 除器募兵, 積糧致用, 分屯列柵, 爲死守計. 日夜循撫, 甘苦同之. 城中之人始有固志, 而守丞以下則皆已遁去久矣. 旣而山民呂師囊起兵應賊, 號十餘萬, 導以攻城, 前後數四. 侯皆應機設械, 立摧破之. 手弓臨城, 殪厥渠帥, 賊遂退走, 卒全其郛. 凡所存活, 以大萬計.

 

그 말들을 이리 저리 검토해 보니, [서로 간에] 말이 다른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는 등후(滕侯)가 행한 공렬(功烈)이 너무나도 장장(章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유독 사적(史籍)을 계고(稽考)해보니 ‘당시에 실제(實際)로 성(城)을 지키고 도적을 깨트린 것은 승(丞)의 공(功)이라 했고, [이 때문에 그는] 승진하여 군부(郡符)를 받았으며 나아가 직질(職秩)을 더 보태기까지 하였다’는 내용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는 들은 것과는 다른 것으로써 망설(妄說)에 도리어 도움을 주는 내용이었다. 이에 다시금 여러 글을 참고하여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추구(追求)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즉 그 당시 태수(太守)와 군승(郡丞)이 비록 달아나 숨었지만 등후(滕侯)가 문서(文書)를 작성할 때는 여전히 그들의 위(位)와 호(號)를 반드시 보존(保存)했다. 또 도적들이 물러나고 포위(包圍)가 풀리자 등후(滕侯)는 급히 이들을 맞이하여 돌아오게 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공장(功狀)을 올리도록 하고 자기는 그 일에 간예(干預)하지 않았던 것이다. 승(丞)의 집안은 대개 희녕(熙寧) 및 원풍(元豐) 이래의 고가(故家)였고 그의 여러 아들들이 또 모두 귀(貴)한 벼슬에 있었기 때문에 유독 그가 두드러지게 공을 탐하여 상을 받게 되었고 책서(策書)에 진애(塵埃)를 끼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등후(滕侯)는 도리어 아래로 도적(盜賊) 일곱을 체포(逮捕)한 공을 이룬 사람과 나란히 취급받아 겨우 경질초계(京秩初階)에 개수(改授)되어 옆의 군(郡)으로 이관(移官)되어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엄윤(閹尹)이 병권(兵權)을 천단(擅斷)하고 적신(賊臣)이 국권(國權)을 장악한 데 따른 것이었는데, 이 일로 인해 후에 망론(妄論)을 침무(侵誣, 침해하고 모멸함)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한 때의 잘못이 두루 흘러 만세(萬世)를 미혹(迷惑)시키는 법이다. 접때 충분한 증거를 제공해준 대주(台州)의 문헌(文獻)이 아니었더라면, [등후(滕侯)를 향한] 백성들과 관리들의 칭사(稱思)가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까지 나태(懶怠)해지지 않았다 해도 또한 무엇에 근거하여 이를 질정(質正)하여 그 시비(是非)를 결단(決斷)해낼 수 있었겠는가? 오호(嗚呼)라, 이 또한 너무나도 탄식(歎息)할만한 일이로다!

參伍其說, 一無異詞. 是則侯之爲烈, 章章明矣. 獨稽史籍, 則見當時實以守城破賊爲丞之功, 進領郡符, 就加職秩, 乃與所聞不類, 而於妄說反有助焉. 於是更卽諸書以求其故, 然後乃見當時守丞雖遁, 而侯於所下文書猶必存其位號, 寇退圍解, 亟迎以歸, 俾上功狀而己不預焉. 丞蓋熙豐故家, 諸子又皆貴仕, 故得獨冒顯賞․塵策書, 而侯反下從捕盜七人之比, 僅改京秩初階, 移官旁都以去. 是則閹尹擅兵․賊臣柄國之所爲, 而後來侵誣妄論所由起也. 一時之謬, 流惑萬世, 向非台之文獻有足證者, 民吏稱思久而不怠, 則亦何所質正而決其是非哉? 鳴呼, 是又(8-4584)可歎也已!

 

  등후(滕侯)의 이름은 응(膺)이고 자(字)는 자근(子勤)이다. 후에 남도(南都)를 보(保)하였고 진(陳)과 채(蔡)를 수(守)하였다. 승리의 기세를 타고 불꽃처럼 날카로운 기세로 공격해온 광로(狂虜)에 항거(抗拒)함으로써 그 훈적(勳績)이 더욱 왕성(旺盛)하였다. 제주(濟州)에서 대원수(大元帥)를 권진(勸進)하면서 [등후(滕侯)께서] 진술(陳述)한 것은 또 모두 당시(當時) 천하(天下)의 대계(大計)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모두 적절(適切)히 기회(機會)에 맞았다. 그 건염(建炎) ․ 소흥(紹興)의 사서(史書)를 볼 때, 법(法)에 따라 응당 [등후(滕侯)의] 전(傳)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희(熹)는 이 사서(史書)에 대해, 대개 일찍이 조서(詔書)를 받고 그 필삭(筆削)에 참여한 바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비문(碑文)을 쓰면서 아울러 이와 같이 그 진위(眞僞)를 고핵(考覈)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주(台州) 사람들의 뜻을 조금은 채운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후에 집필하는 자로 하여금 고구(考究)할 것이 있도록 한 것이다.

  滕侯名膺, 字子勤, 後保南都․守陳․蔡, 以抗狂虜乘勝炎銳之鋒, 勳績尤盛. 勸進大元帥於濟州, 所陳又皆當時天下大計, 切中機會. 其於建炎․紹興之史, 法當立傳. 而熹於是書, 蓋嘗受詔參筆削矣. 是以因書此碑而幷覈其眞僞如此, 不唯少塞台之人意, 亦使後之執筆者有以考焉.

 

사당(祠堂)을 자주 옮겼는데, 지금은 성(城)의 서북(西北)쪽 모퉁이, 영경사(永慶寺)의 동쪽에 있다. 이 성(城)은 실로 등후(滕侯)께서 거듭 구축(構築)하여 힘을 다해 싸워서 도적(盜賊)을 격파(擊破)한 곳이다. 대주(台州) 사람들은 등후(滕侯)의 계실(繼室)인 조부인(趙夫人)과 중의(仲宜) 등 여러 손자(孫子)들을 등후(滕侯)의 사당 곁에 거(居)하도록 하였다. 통판주사(通判州事) 여군조검(呂君祖儉)이 밭은 구입해서 등후(滕侯)를 받들고 그 사당을 지키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려 했으나, 이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떠났다. 이에 이 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애석(哀惜)하게 여긴다. 그러나 대주(台州) 사람들이 등후(滕侯)의 덕(德)을 기림이 이와 같으니, 나는 여조검(呂祖儉)이 추진했던 이 일을 계승(繼承)하여 완수(完遂)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 해 8월 계축(癸丑) 삭(朔)에, 구관(具官)주희(朱熹)는 찬(撰)하노라.

廟數遷徙, 今在城西北隅永慶寺東, 實侯所再築而力戰破賊處. 台人迎侯繼室趙夫人及諸孫仲宜等使居其旁. 通判州事呂君祖儉謀爲買田, 以資奉守, 未就而去, 談者惜之. 然以台人之德侯如此, 吾知其繼而成之者無難也. 是歲八月癸丑朔, 具官朱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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