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九十
묘표[墓表]
유병산(劉屛山) 선생 묘표(墓表)(屛山先生劉公墓表)
병산선생(屛山先生) 유공(劉公)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21년이 되던 어느 날, 그 사자(嗣子)인 평(玶)이 체읍(涕泣)하며 선생의 오랜 제자인 주희(朱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평(玶)이 불행(不幸)하여 일찍이 고자(孤子)가 되었습니다. 선인(先人)의 장례(葬禮)를 마쳤는데도 아직 명(銘)을 마련하지 못했고 묘도(墓道) 또한 지금까지 표창(表彰)할 수 없었습니다. 몹시도 두려운 것은, 평(玶)의 불효(不孝)가 또 유명(幽明) 간에 획려(獲戾)하게 된 점입니다. 이에 급히 돌을 세우고 탁사(琢辭)하여 후세(後世)에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생각건대, 선인(先人)께서는 세상에 쓰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업(事業)으로는 칭도(稱道)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그 훌륭했던 도덕(道德)에 대해서만은 아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인(先人)을 아는 자가 또한 매우 드물어 글을 부탁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대는 일찍이 선인(先人)께 배운 적이 있으니, 어찌 그대가 보고 들은 것을 나를 위해 써 주지 않으십니까?” 이에 희(熹)는 가만히 엎드려, 내가 선생의 문하(門下)에 유학(遊學)할 수 있게 된 유래를 더듬어 생각해내고 그 전말(顚末)을 갖추어 놓고 보니, 금일(今日)의 정의(情誼)에 대해서는 진실로 감히 사양(辭讓)할 수 없지만, 또한 감히 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점도 있다. 대개 나의 선인(先人)께서는 당시의 병이 깊어지자, 일찍이 희(熹)를 돌아보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적계(籍溪) 호원중(胡原仲)과 백수(白水) 유치중(劉致中) 그리고 병산(屛山) 유언충(劉彦冲) 이 세 분은 나의 친구이다. 그들의 학문은 모두 연원(淵源)이 있어 내가 경외(敬畏)하는 바이다. 내가 죽거든 너는 그분들을 찾아가서 아비처럼 섬겨라. 네가 그분들의 말씀을 경청(敬聽)한다면 나는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이에 희(熹)는 눈물을 삼키며 선인(先人)의 말씀을 들었고 이를 감히 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고자(孤子)가 되고 나서 곧 선인(先人)의 이 말씀을 받들어 세 군자(君子)에게 가서 고(告)하고 이분들로부터 배움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선생의 형 시랑공(侍郞公)은 더욱이 외롭고 궁(窮)한 나를 가엾게 여겨 거두는 것을 당신의 책임으로 여기셨다. 이 때문에 희(熹)는 홀로 선생 곁에서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릴 수 있었는데, 선생께서 나의 어리석음과 치졸(稚拙)함을 비루(鄙陋)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약 일년 남짓 내게 가르침을 베푸셨으니 이 모든 것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 이에 다행스럽게도 내가 글을 지어 그간의 일을 기록함으로써 이 역사(役事)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돌아보건대 나로서는 이 일에 참여하지 못함을 한(恨)할지언정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나는 재능(才能)이 저열(低劣)하여 나이가 들었는데도 들은 것이 없으니, 대체로 선생께서 지난 날 내게 뜻하신 바에도 부응(副應)하지 못하고 아울러 저승에서 나를 생각해주시는 나의 부친(父親)을 위로(慰勞)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 은미(隱微)한 점을 궁구(窮究)하여 드러내어 신뢰(信賴)할만한 내용을 구원(久遠)토록 보여드릴 수 있겠는가? 이 점이 또한 희(熹)가 감히 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니, 이 청(請)을 받은 나로서는 마땅히 일어나 절하고 감히 이 일을 감당(勘當)할 수 없다며 사양(辭讓)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평(玶)이 무겁게 큰 정의(情誼)를 내세워 내게 책임을 요구하니, 이에 나로서는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문득 그 일을 다음과 같이 순서에 따라 논하는 바이다.
屛山先生劉公旣沒二十有一年, 一日, 其嗣子玶涕泣爲其故學者朱熹言曰: ‘玶不幸蚤孤, 先人葬旣不及銘, 而墓道亦至今未克表. 大懼不孝, 獲戾幽明, 亟欲建石琢辭以覺于後. 而惟先人不及用於世, 其事業無得而稱. 唯道德之懿不可以不白, 而知者又益鮮, 未有所屬筆. 獨吾子嘗學於先人, 盍以所見聞者爲我書之?’ 熹竊伏原念所以得遊先生之門者, 具有顚末, 其於今日之誼, 固不敢辭, 而又有不敢不辭者. 蓋先人疾病時, 嘗顧語熹曰: ‘籍溪胡原仲․白水劉致中․屛山(7-4586)劉彦冲, 此三人者, 吾友也. 其學皆有淵源, 吾所敬畏. 吾卽死, 汝往父事之, 而惟其言之聽, 則吾死不恨矣.’ 熹飮泣受言, 不敢忘. 旣孤, 則奉以告于三君子而禀學焉. 時先生之兄侍郞公尤以收卹孤窮爲己任, 以故熹獨得朝夕于先生之側. 而先生亦不鄙其愚穉, 所以敎示期許, 皆非常人之事. 今乃幸得屬辭比事以相玆役, 顧恨弗獲, 其何敢辭? 惟是駑劣, 老矣無聞, 蓋未有以副先生疇昔之意, 而慰吾父泉壞之思, 其何能有以究闡幽微, 信示久遠? 此又熹之所以不敢不辭者, 則起拜辭謝不敢當. 而玶重以大誼要責, 於是不得終辭, 而輒論次其事如左方:
삼가 살피건대 건(建) 지방의 유씨(劉氏)는 충현공(忠顯公)에 이르러 비로소 대가(大家)가 되었다. 충현공(忠顯公)은 정강(靖康)의 난에 순절(殉節)하였는데, 그 고향인 숭안현(崇安縣) 공진산(拱辰山) 남쪽에 모셔와 장사(葬事)하였다. 지금 그 충현공(忠顯公)의 묘소(墓所)로부터 서쪽으로 25보(步) 이동한 다음 약간 남쪽으로 내려가면 언덕이 하나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선생께서 묻히신 곳이다. 선생은 충현공(忠顯公)의 막내아들로서 휘(諱)는 자휘(子翬)이고 언충(彦冲)은 그의 자(字)이다. 선생 세계(世系)의 본말(本末)은 충현공(忠顯公)의 사비(賜碑)에 모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謹按建之劉氏至忠顯公始大, 公以節死于靖康之難, 而歸葬其鄕崇安縣拱辰山之南. 今其墓西二十有五步少南有丘焉, 則先生之所藏也. 先生忠顯公之季子, 諱子翬, 而彦冲其字也. 世系本末, 具刻于忠顯之賜碑, 此不復著.
선생은 이려서부터 기재(奇才)를 지녀, 아직 관례(冠禮)를 치르기도 전에 태학(太學)에 유학(遊學)하여 그 명성(名聲)이 동년배(同年輩)들 가운데 특출(特出)하였다. 부임(父任)으로 승무랑(承務郞)에 보임(補任)되어 진정(眞定)의 막부(幕府)에 벽소(辟召)되었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화란(禍亂)을 만나게 되었고 충현공(忠顯公)이 경사(京師)에서 훙거(薨去)하였다. 선생은 국가의 비상(非常)한 변란(變亂)에 대해 통분(痛憤)하였으며, 그 집상(執喪)이 상례(常禮)를 초과(超過)하여 무련 3년동안 부친의 묘소에서 곡(哭)하였다. 상기(喪期)가 끝나자 선생은 흥화군(興化軍) 통판(通判)의 일을 맡았는데, 임기가 만료(滿了)되었는데도 치적(治績)이 가장 우수하다하여 고관(故官)에 그대로 복무하라는 조서가 내렸다. 선생은 처음부터 애훼(哀毁)로 인한 이질(羸疾)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더 이상 관리(官吏)로서의 직책(職責)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드디어 한직(閒職)을 맡게 해 달라고 주청(奏請)하였고, 이에 무이산(武夷山) 충우관(冲佑觀)을 주관(主管)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先生少負奇才, 未冠遊太學, 聲譽出等夷. 以父任補承務郞, 辟眞定幕府. 旋屬禍亂, 忠顯公薨京師. 先生痛憤家國非常之變, 執喪過禮, 哭墓三年. 服除, 通判興化軍事. 秩滿, 以最聞, 詔還蒞故官. 先生始以哀毁致羸疾, 至是自以不復堪吏責, 遂丐閒局, 主管武夷山冲佑觀以歸.
세세(世世)로 병산(屛山) 아래 담계(潭溪) 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곳에는 원림(園林) 수석(水石)의 승경(勝景)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그 사이를 부앙(俯仰)하며 인간사(人間事)를 모두 버린 채, 병옹(病翁)이라 자호(自號)하고 작은 집에 독거(獨居)하였다. 혹 위좌(危坐)하여 날밤을 보내면서 탑연(嗒然)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뜻에 터득된 것이 있으면 글로 쓰기도 하고 혹 노래를 읊조리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기도 했다. 수일(數日) 간격으로 문득 한 걸음에 공진(拱辰)의 묘(墓)에 달려가 처다 보고 방황(彷徨)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嗚咽)하였는데, 간혹 여러 날이 지난 후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성경(誠敬)을 다해 계모(繼母)인 여부인(呂夫人)을 섬겨 형제(兄弟) 사이가 이이(怡怡)한 듯 하였다. 시랑공(侍郞公)의 아들 공(珙)은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상냥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는데, 선생께서 그를 아끼고 기특(奇特)하게 여겨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문행(文行)과 경업(經業)을 교육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기필코 원대(遠大)한 일에 힘쓰도록 하였다. 호(胡) ․ 유(劉) 두 선생과는 도의(道義)로 교제(交際)하였는데 서로 만나서도 강학(講學) 외에는 단 한 마디의 잡언(雜言)도 하지 않았다. 그 밖에 선생께서 교유(交遊)한 사람들도 모두 해내(海內)에 알려진 명사(名士)들이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선생의 심원(深遠)함에 탄복하여 스스로 선생의 경지에 미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마음에는 일찍이 조금도 스스로 만족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께서는 비록 ‘보통 사람이 한 마디 선한 말을 하는 것’을 듣더라도 종용(從容)히 그에게 자문(咨問)하고 가르침을 구하여, 반드시 양단(兩端)을 철저히 검토한 이후에 그만두었다. 족당(族黨)의 후생(後生)들이 찾아와 묻거나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그 기질(器質)에 맞게 성취(成就)할 방도를 알려주었는데, 종일(終日)토록 게을리 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와 같이 생활한 것이 대개 17년이나 되는데, 네 차례 숭도사관(崇道祠官)이 되었고 여러 차례 우승의랑(右承議郞)에 올랐다. 향년(享年) 47세로 소흥(紹興) 17년 12월 병신(丙申)에 졸(卒)하였다.
世家屛山下潭溪之上, 有園林水石之勝, 於是俯仰其間, 盡棄人間事. 自號病(7-4587)翁, 獨居一室, 危坐或竟日夜, 嗒然無一言. 意有所得, 則筆之於書, 或詠歌焉以自適. 間數日, 輒一走拱辰墓下, 瞻望裴回, 涕泗嗚咽, 或累日而後返. 事繼母呂夫人盡誠敬, 兄弟之間怡怡如也. 侍郞公之子珙幼開爽嗜學, 先生愛且奇之, 敎以文行經業不少懈, 而必使務其遠者大者. 與胡․劉二先生爲道義交, 相見講學外無一雜言. 他所與遊, 亦皆海內知名士, 靡不歎服深遠, 自以爲不及. 而先生之心未嘗少自足, 雖聞常人有片言之善, 無不從容咨叩, 必竭兩端而後已. 至族黨後生來問學者, 則亦隨其器質, 告語成就, 終日無倦色. 如是者蓋十有七年, 四爲崇道祠官, 累階右承議郞, 享年四十有七, 以紹興十七年十有二月丙申卒.
처음 병을 얻어 매우 쇠미(衰微)해지자, 선생은 곧 가묘(家廟)에 나아가 모부인(母夫人) 앞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작별(作別)하고 또 글을 써서 평소 서로 왕래하던 사람들과 두루 이별을 고하였다. 또 공(珙)을 불러 가사(家事)를 부탁(付託)하며 자신이 죽으면 묻힐 곳을 알려주었다. 중외(中外)의 고유(孤遺)들에 대해서는, 이들 모두를 위해 모두 구원(久遠)한 계책(計策)을 마련하여 혼취(婚娶), 사환(仕宦), 거처(居處), 학업(學業) 등에 대해 일일이 안배(按排)하고 처리(處理)해 주었다. 그런 후에는 곧 배우는 자들과 함께 연일(連日) 수신(修身) 구도(求道)의 핵심을 논설(論說)하고, 훈계(訓戒) 수백(數百) 언(言)을 지었으며,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담연(澹然)히 평일(平日)과 같이 하였다. 희(熹)는 당시 동자(童子)로서 선생의 병환(病患)에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하루는 선생께 ‘지난 날 입도(入道)하신 차제(次第)’를 청(請)해 물었다. 이에 선생께서는 흔연(欣然)히 내게 다음과 같이 고(告)해 주셨다. “내가 젊은 시절 보전(莆田)에서 벼슬 할 무렵, 질병(疾病)으로 인해 처음으로 붇다와 노자(老子)의 무리들을 접(接)하고, 그들의 이른바 ‘청정(淸淨)’ 혹은 ‘적멸(寂滅)’에 관한 논설을 듣고 마음에 기뻐하여 도(道)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근자에 귀가(歸家)하여 우리 유교(儒敎)의 글을 읽으니 마음에 계합(契合)되는 점이 있었다. 그런 연후에 우리 유교의 진리가 위대하며, 그 체용(體用)의 전체(全體)가 이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나는『주역(周易)』에서 ‘덕(德)에 들어가는 문(門)’을 얻었으니 이른바 [지뢰(地雷) 복괘(復卦) 초구(初九) 효사(爻辭)인] ‘멀지 않아 회복한다(不遠復)’는 말은 곧 나의 삼자부(三字符)이다. 나는 이 삼자부(三字符)를 가슴에 품고 매사에 대응해왔으며 감히 이를 실추(失墜)하지 아니하였다. 그러기에 나는 일찍이「복재명(復齋銘)」과 「성전론(聖傳論)」을 지어 나의 의지를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예전에 내가 한 말을 잊은 지 오래다. 이제 이처럼 너에게 말해 주니, 너는 힘쓸지어다.” 희(熹)는 머리를 조아리고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런 일이 있은 지 이틀 후에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始得疾甚微, 卽入詣家廟, 泣別母夫人前, 徧以書告訣素所與往來者. 召珙付以家事, 指示葬處. 中外孤遺, 人人爲計久遠昏官舍業之旣已, 則日與學者論說修身求道之要, 作訓戒數百言, 彈琴賦詩, 澹然如平日. 熹時以童子侍疾, 一日, 請問先生平昔入道次第. 先生欣然告之曰: ‘吾少未聞道, 官莆田時, 以疾病始接佛老子之徒, 聞其所謂淸淨寂滅者而心悅之, 以爲道在是矣. 比歸, 讀吾書而有契焉, 然後知吾道之大, 其體用之全乃如此. 抑吾於易得入德之門焉, 所謂不遠復者, 則吾之三字符也. 佩服周旋, 罔敢失墜. 於是嘗作復齋銘․聖傳論, 以見吾(7-4588)志. 然吾忘吾言久矣, 今乃相爲言之, 汝勉哉.’ 熹頓首受敎, 居兩日而先生沒.
선생께서 지은 서(書)와 시(詩)를 합하니 문집(文集) 20권이 되었다. 선생은 육씨(陸氏)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에 육씨(陸氏)는 유인(孺人)에 봉(封)해졌다. 선생보다 17년 먼저 졸(卒)하였고 아들은 없다. 충현공(忠顯公)의 묘소(墓所)에서 동쪽 35보(步)쯤 되는 거리에 육씨(陸氏)를 장사(葬事)했는데, 그 곳에는 선생이 그 가세(家世)의 덕선(德善)을 기념(紀念)하여 새긴 비석(碑石)이 있다. 대개 선생은 부인 육씨(陸氏)가 졸(卒)한 후에는 다시 장가들지 않고, 시랑공(侍郞公)의 어린 아들인 평(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평(玶)은 지금 우수직랑(右修職郞)이 되어 실(實)로 이 묘표(墓表)를 세웠다. 희(熹)가 바야흐로 그 글에 순서를 정하고 있던 차에 서부(西府)의 건안공(建安公)이 편지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숙부(叔父)의 묘(墓)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니 이는 공(珙)에게 책임(責任)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희(熹)는 이 편지를 읽고 놀라 “이는 나의 죄(罪)입니다”라고 하고, 이에 급히 일어나 돌에다 글을 쓰고 이를 새겼다. 그 명(銘)에 가로대 :
所著書詩合爲文集二十卷. 娶陸氏, 封孺人, 先先生十七年卒. 無子, 葬忠顯公墓東三十有五步, 有先生所紀其家世德善刻焉. 蓋先生不再聘, 則以侍郞公之幼子玶爲後. 今爲右修職郞, 實立此表. 熹方爲次其文, 而西府建安公亦以書來曰: ‘叔父之墓弗識, 珙則與有責焉.’ 熹讀之瞿然曰: ‘是乃吾之罪也.’ 乃亟起書石而系以銘. 銘曰:
신심(神心)이 황홀(恍惚)하시어 만방(萬方)을 경위(經緯)하셨도다. 그 누가 선생의 그 기(機)와 그 강(綱)을 파악(把握)해낼 수 있으리오? 아!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덕(德)의 근본(根本)을 세우셨도다. 이미 깨달아 보존하시고 그 회복(回復)하심도 멀지 않으셨도다. 또 벼슬살이에 관해 말씀하셨으니, 벼슬에 나아갈 때나 물러나 집에 머무를 때나 나는 편안하다 하셨고, 더 나아가 살아있든 죽게 되든지 간에 나는 또한 편안하다 하셨도다. 공진(拱辰)이 누워 계신 그 서남(西南)쪽, 선생의 이 묘갈(墓碣)에 글을 새기나니, 훌륭하신 나의 후인(後人)들이여! 선생께서 끼친 공렬(功烈)을 우러러 볼지어다!
神心惚恍, 經緯萬方. 孰握其機, 而挈其綱? 嗟惟先生, 立德之本. 旣覺而存, 復則不遠. 亦曰于仕, 我止我行. 亦生而死, 我安且寧. 拱辰西南, 有銘斯碣. 嘉我後人, 仰止遺烈!
조봉랑(朝奉郞) 유공(劉公)의 묘표(墓表)(朝奉劉公墓表)
순희(淳熙) 5년 정월(正月) 병진(丙辰)에, 조봉랑(朝奉郞)으로 태주(台州) 숭도관(崇道觀) 주관(主管)으로 계시던 유공(劉公)이 예장(豫章)의 사제(私第)에서 졸(卒)하였다. 4월 계유(癸酉)에 사자(嗣子) 맹용(孟容) 등이 공의 영구(靈柩)를 뫼시고 임강군(臨江軍) 청강현(淸江縣) 사현향(思賢鄕) 안양리(安陽里) 전당(全塘)의 언덕에 와서 장사(葬事)하였다. 명년(明年)에 맹용(孟容)이 상복(喪服)을 입은 채 당시 여산(廬山) 아래 살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공(公)의 족제(族弟)로 악주(鄂州) 통수(通守)로 있던 청지(淸之) 유자징(劉子澄)이 쓴 공의 행장(行狀)을 받들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내게 고(告)하기를, “맹용(孟容)의 선인(先人)이 불행(不幸)하여 선생을 좇아 교유(交遊)하지 못했습니다만, 생각건대 맹용(孟容)은 묻고 배워 좌우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선인(先人)의 묘(墓)에 응당(應當) 묘갈(墓碣)은 있으나 아직 거기에 새길 글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숙부(叔父)를 사이에 넣어 숙부께서 쓰신 선인(先人)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선생께 청하오니, 부디 선생께서는 우리를 애련(哀憐)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내와 자징(子澄)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오래된 벗인데, 이제 나를 찾아온 맹용(孟容)을 보니 근결(謹潔) 자호(自好)하고 학문에 방도(方道)가 있으니, 참으로 그가 고가(故家)의 유업(遺業)을 전(傳)한 것이 유래(由來)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행장(行狀)을 읽어보니 또한 공의 덕성(德性)과 그 실천(實踐)의 자상(仔詳)함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공을 알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더니, 모두 행장(行狀)의 말과 틀림없이 같았다. 이에 나 또한 나 자신이 불행하여 공을 알지 못했던 것을 한탄(恨歎)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공의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명문(銘文)을 짓게 되었다.
淳熙五年正月丙辰, 朝奉郞, 主管台州崇道觀劉公卒于豫章之私第. 四月癸酉, 嗣子孟容等奉其柩葬于臨江軍淸江縣思賢鄕安陽里全塘之原. 明年, 孟容衰絰來見予廬山下, 奉公族弟鄂州通守淸之子澄之狀, 泣而以告曰: ‘孟容之先人不幸不及從先生遊, 而孟容顧得問學承敎於左右. 惟是先人之墓當有碣, 而未有文以刻焉, 敢介叔父以其狀爲請, 惟先生幸哀憐之.’予與子澄故友善, 今孟容來, 又謹潔自好, 學問有方, 固知其故家遺業之傳爲有自來. 讀其狀, 又知公德性履行之詳如此, 問之嘗識公者, 皆如狀言不誣, 則亦自恨其不幸而不及識公也. 旣乃爲序其事而銘之.
공의 휘(諱)는 구년(龜年)이고 자(字)는 저로(且老)이다. 공의 선조(先祖)는 이씨(李氏)를 따라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하였다. 이로 인해 처음으로 원주(袁州) 임강(臨江)으로부터 개봉부(開封府) 상부현(祥符縣) 위릉향(魏陵鄕) 오아촌(吳兒村)으로 그 호적(戶籍)을 옮겨왔고 마침내 세상에 알려진 가문(家門)이 되었다. 공의 증조부(曾祖父) 공비선생(公非先生)은 휘(諱)가 반(攽)인데, 문학(文學)으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원우(元祐) 시기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신분으로 졸(卒)하였다. 조부(祖父) 방(方)은 웅주(雄州)의 방어추관(防禦推官)을 지냈고 우통봉대부(右通奉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부(父) 양(襄)은 우조청대부(右朝請大夫)로 조의대부(朝議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公諱龜年, 字且老, 其先從李氏朝京師, 始自袁州臨江徙其籍開封府祥符縣魏陵鄕吳兒村, 遂爲聞家. 公之曾祖公非先生諱攽, 以文學致大名, 元祐中爲中書舍人卒. 祖方, 雄州防禦推官, 贈右通奉大夫. 父襄, 右朝請大夫, 贈朝議大夫.
공은 종조(從祖)의 주명(奏名)으로 장사랑(將仕郞)이 되고, 또 대부공(大夫公)의 주명(奏名)으로 종사랑(從事郞)이 되었으며, 협주(峽州) 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발탁되었으나, 상(喪)을 만나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이에 임안부전당현주부(臨安府錢塘縣主簿)에 개수(改授)되었다. 도주군사판관(道州軍事判官)을 거쳐, 선교랑(宣敎郞)과 상덕부무릉현(常德府武陵縣) 지사(知事) 및 통판원주사(通判沅州事)에 개수(改授)되었으며 태주숭도관(台州崇道觀)을 주관(主管)하였다. 여러 차례 조봉랑(朝奉郞)에 올랐으며 제 5품(品)의 복(服)을 하사(下賜)받고 졸(卒)하였다. 공의 사람됨은 정중(靜重)하고 순수(純粹) 독실(篤實)하였다. 나이 13세에 어머니 오부인(吳夫人)의 상(喪)을 당했는데, 애모(哀慕)함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공은 또 대부공(大夫公)을 따라 약 20년 동안 심양(番陽)에서 살았는데, 날마다 독서(讀書)와 작문(作文)을 일삼았으며 일찍이 일 없이 살던 집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웃 마을 사람들 중에 간혹 공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대부공(大夫公)의 성격은 엄격(嚴格)하여 남들과 서로 거스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공은 좌우(左右)에서 대부공(大夫公)을 공손히 받들어 한결같이 근신(謹愼)하였고, 물러나 그 향당(鄕黨) 족인(族姻)을 접대할 때는 또한 그 정의(情誼)를 곡진(曲盡)히 다 하였다. 이 때문에 대부공(大夫公)에게 유감(遺憾)이 없을 수 없었던 자라 해도 또한 왕왕(往往) 그 유감(遺憾)을 다 해소(解消)하여 다시는 마음속에 원한(怨恨)을 쌓아두지 않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대부공(大夫公)이 자식을 훌륭하게 교육했다”고 말하곤 했다. 젊을 시절에는 견결(堅決)한 의지로 과거고시에 응(應)하였으나, 점점 불우(不遇)해지자 곧 그만두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처할 때는 언제나 조용히 침묵(沈黙)하고 스스로 재주나 공(功)을 자랑하지 않았다. 삼가고 엄숙하였으며 스스로를 단속하고 두려워하여, 멋대로 법도(法度)를 어기는 일이 조금도 없었다. 단 하루를 거(居)하더라도 반드시 그 곳을 수리(修理)하였고 일용품 하나라도 반드시 그것을 정돈(整頓)하였으며, 한 여름에도 의관(衣冠)과 버선, 신발조차 잠시도 함부로 풀어놓지 않았다. 한가할 때에도 반드시 닭이 우는 시간이면 일어났으며 암실(暗室)에 있을 때라도 큰 손님을 마주하듯 경건하였고 동복(童僕)이나 소인(小人)을 대접(待接)할 때도 정성(精誠)을 다하였다. 공이 거처하는 집에는 반드시 ‘근독(謹獨)’과 ‘정심(正心)’이라는 문자를 써서 좌우(左右)에 걸어두었다.
公以從祖奏爲將仕郞, 又以大夫公奏爲從事郞, 調峽州司戶參軍. 遭喪不赴, (7-4590)改臨安府錢塘縣主簿. 歷道州軍事判官, 改宣敎郞, 知常德府武陵縣事, 通判沅州事, 主管台州崇道觀. 累階朝奉郞, 賜服五品而卒. 其爲人靜重純篤, 十三歲遭母吳夫人喪, 哀慕如成人. 從大夫公居番陽餘二十年, 日以讀書作文爲事, 無故未嘗出齋扉, 鄰里或不識其面. 大夫公性嚴, 與人多忤. 公左右承順唯謹. 退而接其鄕黨族姻, 又皆曲盡其情, 以故其不能無憾於大夫公者, 亦往往銷釋, 無復芥蒂, 皆曰公之能子也. 少時銳意決科, 稍不遇, 卽舍去. 居常晦黙, 不自矜伐, 謹嚴拘畏, 無一毫自放繩墨之外. 所居一日必葺, 服器一物必整, 盛夏衣冠襪履不暫釋. 居閑亦必雞鳴而起, 處闇室如對大賓, 待童僕小人亦盡誠慤. 所居之室, 必書 ‘謹獨’ ․ ‘正心’字揭之座右.
이제 전당(錢塘)이 적현(赤縣)이 되었는데, 그 당시 공은 전당(錢塘)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였다. 그 즈음 진회(秦檜)가 바야흐로 용사(用事)할 때인지라, 향당(鄕黨)의 인척(姻戚)과 고구(故舊)들 증에는 간혹 문자(文字)를 통해 진회(秦檜)에게 알려져서 현사(顯仕)에 오른 자가 있었는데, 그가 공에게 “어찌 그대도 진회(秦檜)에게 높은 벼슬을 구하지 않는가?”라고 말하자, 공은 이에 불응(不應)한 채 물러나 관청의 문서를 더욱 신중하게 다스렸다. 맡은 일로 인해 공은 귀(貴)한 요인(要人)들과 만날 경우가 많았지만 더욱 스스로를 은폐(隱閉)하고 숨겼다. 이 때문에 끝내 진씨(秦氏)가 패망(敗亡)했지만 공은 그로 인해 더럽힘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공과 같이 되기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주(道州)에 있을 때, 태수(太守) 계공남수(季公南壽)가 공을 깊이 알아주었다. 그는 공의 정사(政事)와 문사(文詞)가 훌륭하다 하여 공을 조정에 추천(推薦)하였는데 그가 임지를 떠날 때에 그가 지니고 있던 여장(餘章)을 지니고 있다가 이를 후임(後任) 태수(太守)에게 주며 말하기를 “판관(判官)은 어질면서도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구(求)하지 않으니, 그대가 혹 빠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있다가 그대에게 주는 것이니, 그대는 이 점에 유의(留意)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후임(後任) 태수(太守)는 이를 허락(許諾)하였고 그가 임지를 떠날 때도 또 그와 같이 하였다. 공은 이 일로 인해 개관(改官)하게 되었다. 무릉(武陵)에 있을 때, 공은 백성들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관대(寬大)했지만, 관리(官吏)들에게 죄(罪)가 있을 경우는 즉시 이를 다스려 조금도 너그럽게 처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그들의 과오(過誤)를 억지로 찾아내어 책망(責望)하지는 않았다. 현(縣)의 지경(地境)에는 황전(荒田)이 많아 모경(冒耕)하는 자가 많았다. 그 중 교만한 자는 관리(官吏)들과 한 통속이 되어 침탈(侵奪)하는 소송(訴訟)을 벌여 엎치락뒤치락 그침이 없었다. 이에 공은 [모경(冒耕)의 그] 본시(本始)를 추리(推理)하고 궁구(窮究)하여 반드시 그 단서(端緖)를 밝혀내어 인정해주거나 빼앗거나 했기 때문에 소송(訴訟)이 조금 완화되었다. 초(楚) 지방의 풍속(風俗)은 귀신(鬼神)을 숭상(崇尙)했는데, 그들이 행하던 음사(淫祀) 중에 반선옹(潘仙翁)이라 불리는 것이 있었다. 세시(歲時)에 사람들이 모여 금고(金鼓)를 두드리며 과모(戈矛)를 잡고서 그를 영접(迎接)하여 올리던 제사였다. 이에 공은 교위(校尉) 두사안(杜師顔)에게 명(命)하여 그들이 제사하던 가옥(家屋)을 철거하고 반선옹(潘仙翁)의 상(像)을 헐어버리도록 했다. 아울러 그들이 사용하던 병인(兵刃)을 회수(回收)하고 그 음사를 주창(主唱)한 자에게 죄(罪)를 주게 하였다. 그런 연후에 대중(大衆)들이 안정(安定)되였다. 또 본 현(縣)에서는 10년 동안 민호(民戶)의 등차(等次)를 올리거나 내리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부역(賦役)이 균평(均平)하지 않아 모두들 이를 병통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에 공은 처음으로 장적(帳籍)을 다시 만들었는데 이를 두고 백성들 중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사(部使)들이 서로 더불어 이와 같은 공의 치행(治行)을 조정에 알리니, 공의 성명을 기록하여 중서성(中書省)에 보내라는 어지(御旨)가 내렸다. 그러나 공은 임기가 만료(滿了)되자 곧 상서성(尙書省)의 전차(銓次)를 담당하는 관원을 만나고 돌아왔을 뿐, 끝내 한 번도 승상(丞相)을 만나지 않았다. 원(沅)의 옆 주변지방은 만인(蠻人)의 침략(侵掠)이 잦아 매년 편안한 해가 없었다. 공이 그 군(郡)의 일을 보좌(補佐)할 때, 료(獠)라는 오랑캐가 무리를 지어 크게 소동(騷動)을 일으킨 일이 있었는데,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도망가려 하였다. 이에 공이 그 일을 맡아 주변(周邊)을 안무(按撫)하고 구법(舊法)에 따라 이들을 방어(防禦)하였다. 아울러 그들을 방문(訪問)하여 일마다 신중히 재량(裁量)하여 처리하고 곧바로 조약(條約)을 맺었다. 또 그 내용을 변경(邊境)의 관리(官吏)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가르칠 것은 분명히 가르치고 금(禁)할 것에 대해서는 위세(威勢)를 보여주도록 함으로써 무사(無事)히 그들을 진무(鎭撫)하였더니 만인(蠻人)들이 결국 순종(順從)했다. 공이 주(州)를 보좌(補佐)할 때는 늘 말씀하기를 “장(長)과 이(貳)가 서로 화목(和睦)하지 못한 경우는 주로 아랫사람이 이기려는 마음을 품고 그 윗사람에게 기어오르는 데서 말미암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선의(善意)라 해도 간혹 그 뜻을 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내가 장관(長官, 즉 上官)을 섬기는 예(禮)를 다하고 또 내가 장관(長官, 즉 上官)을 보좌하는 의(義)를 다한다면 거의 장관(長官)의 신임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錢塘今爲赤縣, 公爲主簿時, 秦檜方用事, 鄕黨姻舊或以文字見知登顯仕者, 謂公曰: ‘盍亦求之?’ 公不應, 退治簿書益謹. 至他職事, 亦多與貴要人接. 公益自閉匿, 以故得竟秦氏敗無所汚, 人以爲難. 在道州, 太守季公南壽深知公, 旣以政事文詞薦諸朝, 比去, 懷其餘章以授後守曰: ‘判官賢而不求人知, 恐君或失之也. 故留此以竢, 惟君留意.’ 後守許諾, 及其去, 又如之. 公以是改官. 在武陵, 遇民以寬, 吏有罪則立治之不少貸, 然亦不求其過也. 縣境田多荒, 冒耕者(7-4591)衆, 其健者與吏爲一, 侵漁訴訟, 展轉不止. 公爲推窮本始, 必見端緖而予奪之, 訟爲少息. 楚俗右鬼, 其淫祀有曰潘仙翁者, 歲時集會, 摐金鼓․執戈矛, 迎而祭之. 公命尉杜師顔撤屋毁像, 收其兵刃, 罪其倡之者, 衆然後定. 縣十年不升降戶等, 賦役不均, 咸以爲病. 公始爲改造帳籍, 民無異詞. 部使者相與以其治行聞于朝, 有旨記姓名中書. 然公秩滿, 則詣尙書銓注官以歸, 卒不一見丞相也. 沅並邊, 蠻人侵掠無寧歲. 公佐郡時, 群獠大動, 守懼求去. 公攝其事, 按邊防舊法, 訪問財處, 立爲條約, 以授邊吏, 明諭威禁而以無事鎭之, 蠻果帖服. 公佐州, 常言長貳失和, 多由下有勝心以駕其上, 故雖善意, 亦或不得伸. 惟盡吾所以事長官之禮, 而行吾所以佐長官之義, 則庶其見信矣.
만년(晩年)에 공은 맹용(孟容)이 자징(子澄)을 좆아 배우는 것을 보고 또 그가 배운 것을 외거나 강설(講說)하는 것을 듣고서는 기뻐하며 자징(子澄)에게 말하기를 “군(君)의 말이 선(善)하여 나도 또 장차 이 공부에 종사(從事)해보려 하나, 돌아보니 나이가 들어 너무 늦어버린 것이 한(恨)이 된다.”라고 했다. 하루는 여러 아들을 불러 고(告)하기를 “성력서(星曆書)를 보니, 나는 거의 이쯤에서 끝날 것 같구나.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여 우리 가문(家門)의 수치(羞恥)가 되지 말라.”고 하고 아울러 ‘성실(誠實)한 자세로 매사를 상세히 살필 것’과 ‘삼가고 예의바르게 벗을 가려 사귈 것’ 그리고 ‘분(分)을 엄격히 하여 이를 지키고 성찰(省察)할 것’ 등 세미(細微)한 여러 가지 일들을 훈계하였는데, 애연(藹然)히 모두 장자(長者)의 말씀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2년 후에 병이 났다. 그러나 이미 병들었는데도 여전히 부액(扶掖)을 받아 집안 제사를 받들었다. 공의 병환(病患)이 위독해지자 맹용(孟容)이 눈물을 흘리며 공이 평일(平日) 행하던 정심(正心)의 가르침을 외웠더니 공은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공의 사람됨의 시종(始終)이 대개 이와 같았으니, 오호(嗚呼)라! 공은 선인(善人)이요, 신인(信人)이라 말할 수 있도다! 그런데도 공은 관(官)에서 그 뜻을 다 펴지 못했고 길지 않은 수명(壽命)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비통(悲痛)한 일이로다!
晩見孟容從子澄學, 聽其誦說而悅之, 謂子澄曰: ‘君言之善, 吾亦且將從事於此, 顧恨晩矣.’ 一日, 召諸子告之曰: ‘觀星曆書, 吾殆止此. 汝曹勉旃, 毋爲門戶羞也.’ 因誡以誠實詳審, 謹禮擇交, 嚴分守察細微數事, 藹然皆長者之言. 居二年而病, 旣病, 猶扶掖以奉家祭. 病革, 孟容泣而誦其平日正心之訓, 則微視而頷之, 蓋其爲人始終之槪如此. 嗚呼, 是亦可謂善信人矣! 而其官不遂, 壽不長又如此, 其可悲夫!
공은 창려한씨(昌黎韓氏)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長男)인 맹용(孟容)은 상기(喪期)를 마치고 진사(進士)에 천거(薦擧)되었으나 곧 진사과(進士科)에 합격(合格)하여 적공랑(迪功郞) 겸 신원주분의현주부(新袁州分宜縣主簿)에 제수(除授)되었다. 차남(次男) 맹장(孟將)은 공의 유택(遺澤)으로 장사랑(將仕郞)에 보임(補任)되었다. 공의 따님인 맹진(孟蓁)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내가 본 맹용(孟容)은 참으로 어질었고 듣자하니 맹장(孟將)도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흥성(興盛)한 공의 일생(一生)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그로서 또한 조금은 위로(慰勞)를 받을 수 있겠다! 그 명(銘)에 가로대:
(7-4592)公娶昌黎韓氏, 生兩男子, 孟容爲長, 免喪擧進士, 中其科, 授迪功郞․新袁州分宜縣主簿. 孟將, 以公遺澤補將仕郞. 一女孟蓁, 未行. 予觀孟容固賢, 而聞孟將亦好學, 然則公世之興蓋未艾也, 其又足以少慰也夫. 其銘曰:
아! 유공(劉公)의 독실(篤實)함을 세상이 아름답게 여기나니, 도(道)를 들은 것은 비록 늦었지만 덕(德)을 닦은 것은 빨랐도다. 먼 길 달려오니 세월은 머물러 있지 않으나, 공의 지업(志業) 이어갈 사자(嗣子) 있으니 더 이상 걱정할 것 없도다. 청강(淸江)의 곡조(曲調)는 그윽한 전당(全塘)에 울려 퍼지는데, 바야흐로 그 곳에 공을 기념(紀念)하는 규수(圭首)가 영원(永遠)토록 서 있을 것이니, 이 곳을 지나는 자 이를 보고 공의 무덤에 예(禮)를 표(表)할지어다!
吁嗟劉公篤世休, 道雖晩聞德蚤脩. 長途方騁歲不留, 志業有嗣無餘憂. 淸江之曲全塘幽, 方趺圭首千千秋, 過者視此式其丘!
『회요(會要)』에 따르면, 지금의 임강군(臨江軍)은 옛 균주(筠州) 청강현(淸江縣)이 있던 자리인데, 신유(新喩)는 원주(袁州)로부터 그리고 신감(新淦)은 길주(吉州)로부터 와서 닿습니다. 그런데 구양공(歐陽公)이 지은 주객(主客)과 집현(集賢)의 묘비(墓碑)에는 모두 “길주(吉州) 임강(臨江) 사람이다.”라고 했고, 지금 공의 행장에는 또 “원주(袁州) 임강(臨江) 사람이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모두 차오(差誤)가 있는 듯하니 다시 상세히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按會要, 臨江軍以筠州淸江縣置, 新喩自袁州․新淦自吉州來隸. 而歐陽公作主客․集賢墓碑皆云 ‘吉州臨江人’, 今狀又云: ‘袁州臨江人’, 恐有差誤, 請更詳之.
한계옹(韓溪翁) 정군(程君)의 묘표(墓表) (韓溪翁程君墓表)
한계옹(韓溪翁)은 선군자(先君子) 위제선생(韋齋先生)의 내제(內弟)인 정군(程君)이다. 휘(諱)는 정(鼎)이요 자(字)는 복형(復亨)이다. 휘(徽)의 무원(婺源) 사람이다. 어려서 고자(孤子)가 되어 민(閩)에서 선군자(先君子)를 좆아 배웠다. 이로 인해 일시(一時)의 유선(儒先)과 장자(長者)의 여론(餘論)을 강문(講聞)할 수 있었는데, 정군(程君)은 마음에 기뻐하여 이를 베끼고 철(綴)하여 외고 익히며 아침저녁으로 조금도 나태(懶怠)하지 않았다. 선군자(先君子)는 그의 근민(勤敏)함을 사랑하여 정군(程君)이 돌아갈 때 육언(六言)을 써 주었는데, 모두 사친(事親) ․ 수신(修身) ․ 위학(爲學)의 요체(要諦)였다. 정군(程君)은 절하고 나서 그 육언(六言)을 받아 돌아가서는 더욱 스스로 [자신의 학문세계를] 수립(樹立)하였는데, 기송(記誦)과 열람(閱覽)에 힘쓰고 사장(詞章)에 매진함으로써 자못 그 문호(門戶)를 크게 키울 방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군(程君)의 사람됨이 워낙 탄이(坦夷) 호방(豪放)하여 수식(修飾)을 일삼지 않았다. 또 좌씨(左氏)의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글을 지을 때면 문득 좌전(左傳)의 문체(文體)를 모방(模倣)하였는데, 정군(程君)으로서는 이러한 자신의 뜻을 굽히고 거자(擧子)의 척도(尺度)가 되는 문체를 순순히 따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영영 과거고시에는 불리(不利)하였다.
韓溪翁, 先君子韋齋先生之內弟程君也. 諱鼎, 字復亨, 徽之婺源人. 少孤, 從先君子學於閩中, 因得講聞一時儒先長者之餘論, 而心悅之, 抄綴誦習, 晨夕不少懈. 先君子愛其勤敏, 於其歸書六言以贈之, 皆事親․修身․爲學之要. 君拜受其言以歸, 益自樹立, 務記覽․爲詞章, 思所以大其門者. 然君爲人坦夷(7-4593)跌宕, 不事脩飾, 好讀左氏書, 爲文輒傚其體, 不能屈意用擧子尺度, 以故久不利於場屋.
집이 옛날부터 가난했으나 정군(程君)에 이르러 더욱 곤궁(困窮)하였다. 중년(中年)이 되자 정군(程君)은 어버이를 뫼시고 궁벽한 산속에 옮겨 가 살며 한계옹(韓溪翁)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산전(山田) 100무(畝)에 집을 두른 담장은 소연(蕭然)하여 장차 한 해도 갈 수 없을 듯하였지만, 정군(程君)은 그런 상황에도 박여(泊如)히 대처(對處)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더욱 뜻을 얻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술과 술잔 사이에서 자방(自放)하였다. 술이 무르익으면 좌씨(左氏)의 글로 풍자(諷刺)하되 간혹 국풍(國風)과 아(雅), 송(頌) 등 시편(詩篇)을 섞기도 하였는데, 이럴 때면 앉아서 이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용연(聳然)하여 정군(程君)의 말을 경청(傾聽)하였다. 그는 굽어보기도 하고 우러러보기도 하며, 빠르게 말하기도 하고 천천히 말하기도 하는 사이에 문득 억양(抑揚)을 꺾기도 하여 그 말에 흡사 절주(節奏)가 있는 듯하였다. 추방(追放)된 신하(臣下)와 고자(孤子) 및 원부(怨夫)나 과부(寡婦)가 말을 끌어와 이야기 할 때는 또한 너무나 감개(感慨)하여 언제나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였다. 이에 용부(庸夫)나 유자(孺子)가 곁에서 이를 가만히 관찰(觀察)하다가, 때로 비웃으며 업신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군(程君)은 오연(謷然)하여 [자기주장에 대해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개의(介意)치 않았다. 대개 정군(程君)은 그 마음속에 품고 있던 포부(抱負)를 다 실현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들에 의탁하여 자견(自遣)한 것이다. 그 밖에 그가 행(行)한 일은 이치에 합당치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건도(乾道) 원년(元年), 나이 59세에 병으로 졸(卒)하였다. 그 10년 후에 군부인(君夫人) 호씨(胡氏)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괴금향(壞金鄕) 복림(福林) 냉수(冷水)의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家故貧, 至君益困. 中歲奉親徒居窮山中, 自號韓溪翁. 山田百畝, 環堵蕭然, 無以卒歲, 而君處之泊如也. 晩益不得志, 因自放於杯酒間. 酒酣, 諷左氏書, 雜以國風․雅․頌之篇. 坐者聳然傾聽, 其俯仰疾徐之間, 頓挫抑揚, 如有節族. 至於放臣孤子․怨夫寡婦之辭, 又未嘗不三復感慨而出涕流漣也. 庸夫孺子從旁竊觀, 時或笑而侮之. 君謷然不以爲意, 蓋其中所抱負有不得騁者, 故託此以自遣. 至它行事, 則其不合於理者固鮮矣. 乾道元年, 年五十九, 以疾卒. 後十年, 君夫人胡氏亦沒, 遂合葬于壞金鄕福林冷水之原.
대체로 신안(新安) ․ 심양(番陽) ․ 신안(信安) 등 여러 정(程)씨들은 모두 양(梁)나라의 진서장군(鎭西將軍)이었던 충장공(忠壯公) 영세(靈洗)에서 나왔다. 그 중에서도 집이 무원(婺源)인 사람들은 또 흡(歙)의 황돈(黃墩)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사는 사람들인데, 그 내력이 담긴 보첩(譜牒)이 모두 간직되어 있다. 선군자(先君子)께 들은 바에 따르면, 충장공(忠壯公)을 황돈(黃墩)에 장사(葬事)하고 그 무덤은 돌로 봉분(封墳)을 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다. 정군(程君)의 집은 그의 대부(大父) 상(翔)이 처음으로 향천(鄕薦)에 참여하였고, 그의 부(父) 착(著)도 또한 군학(郡學)의 상사(上舍)로 경사(京師)에 공거(貢擧)되었으나 모두 불행히도 일찍 졸(卒)하였다. 정군(程君)에 이르러 배움에 더욱 근면(勤勉)하여 그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이 점차 더욱 심원(深遠)한 바 있었으나, 돌아보건대 그 배움을 세상에 발휘할 수 있는 때를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정군(程君)에게는 순(洵)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는데,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을 이해하는 것이 명민(明敏)하였다. 정군(程君)이 이를 기특(奇特)히 여겨 사랑하면서, “이 아이가 나의 뜻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여러 번 추천(推薦)되었으나 급제(及第)하지 못하고, 지금은 특은(特恩)으로 신주문학(信州文學)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아는 자들은 그 점을 한탄(恨歎)하곤 한다. 그러나 순(洵)은 짐짓 일찍이 희(熹)를 좆아 ‘배움의 대요(大要)’를 논(論)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 때 들은 바] 그의 뜻에 따르면 정군(程君)의 뜻을 이루는 것은 ‘여기’에 있지 ‘저기’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蓋新安․番陽, 信安諸程皆出梁鎭西將軍忠壯公靈洗, 其家婺源者又自歙之黃墩徙而來, 譜牒具在. 聞之先君子, 忠壯公葬黃墩, 其墓以石爲封, 今尙在也. 君家自其大父翔始與鄕薦, 父著亦以郡學上舍當貢京師, 皆不幸蚤卒. 至君學益勤, 而其師友淵源所漸者益遠, 顧亦不逢以沒其世. 而有子曰洵, 好學而敏於文, 君奇愛之, 曰: ‘是足以成吾志矣.’ 旣又屢薦不第, 今乃以特恩授信州文學, 識者恨之. 然洵故嘗從熹論爲學大要, 意其所以成君之志者, 在此而不在彼也.
희(熹)의 조모(祖母)는 정군(程君)의 고모이다. 이 때문에 나는 정군(程君)을 숙부(叔父)라 부른다. 희(熹)가 어려서 선군자(先君子)를 좆아 임안(臨安)에 있을 때, 수시로 정군(程君)이 오는 것을 보았는데, 선군자(先君子)가 간혹 머물면서 정군(程君)과 함께 술이나 차를 마시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정군(程君)은 어김없이 한껏 취한 채 논설(論說)이 곤곤(袞袞)하여 스스로 그칠 수 없었다. 희(熹)가 장성(長成)한 뒤 향리(鄕里)로 돌아와서 또 정군(程君)께 인사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정군(程君)께서는 몸소 내게 가르침을 주셨으나 이전에 비해 더욱 늙으셨다. 그러나 술을 드시면 문득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또 호탕하게 웃으며 담론(談論)하였는데, 그 의기(意氣)가 여전히 쇠약(衰弱)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또 30여년이 지났다. 이에 순(洵)은 정군(程君)의 학도(學徒)인 이군증(李君繒)이 쓴 행장(行狀)을 동봉한 서신을 보내, 내게 정군(程君)의 묘표(墓表)를 청(請)했다. 그 간에 시종(始終) 겪었던 일을 생각하며 뒤돌아보니 나의 선군자와 숙부 정군(程君) 모두 지금은 뵐 수 없다. 희(熹)와 순(洵)도 곧 떨어지게 될 외로운 이슬과도 같은 신세가 되었으니, 두 사람 모두 너무나 늙어버렸도다. 이에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쓴다. 대개 이 일로 인해 정군(程君)의 가문이 불우(不遇)했던 것을 거듭 탄식(歎息)하고, 또 [희(熹)가] 요도(潦倒)하여 지난날 정군(程君)의 뜻을 보좌(補佐)하지 못했음을 생각하고 스스로 슬퍼하노라. 오호(鳴呼)라! 순(洵)은 여전히 면려(勉勵)할지어다! 순희(淳熙) 8년 8월 을묘(乙卯)에 표질(表姪) 주희(朱熹)는 구위(具位)하고 이 글을 술(述)하노라.
(7-4594)熹祖母君之姑, 因謂君叔父. 幼從先君子在臨安時, 時見君來, 先君子或留與飮, 君必盡醉而論說袞袞, 不能自休. 旣長歸鄕里, 又得拜君. 而君辱敎誨之, 則君益以老矣. 然得酒輒歌呼談噱, 意氣猶不衰也. 今又三十餘年, 洵乃以書奉君學徒李君繒之狀, 請表君墓. 惟念始終, 顧二父於今皆不可見, 而熹與洵孤露之餘, 亦俱老大, 乃流涕而書之. 蓋以重歎君家之不遇, 又惟潦倒, 無以副君疇昔之意而自悲也. 鳴呼, 洵尙勉之哉! 淳熙八年八月乙卯, 表姪具位朱熹述.
(7-4595)
조립지(曹立之)의 묘표(墓表)(曹立之墓表)
순희(淳熙) 을미(乙未)년에 나는 여백공(呂伯恭)을 신(信)의 아호(鵝湖)에서 전송(餞送)했는데, 강서(江西)의 육자수(陸子壽)와 그의 동생 자정(子靜) 및 유자징(劉子澄) 등 여러 사람들이 그 곳에 와서 들은 것을 서로 강론(講論)하였는데 매우 즐거웠다. 자수(子壽) 형제(兄弟)는 학자(學者)들에 대해 칭허(稱許)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그 즈음에 나에게 유독(惟獨) 여간(餘干) 조립지(曹立之)의 사람됨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으니, “입지(立之)는 그대가 쓴 글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한 차례 그대와 장경부(張敬夫)를 만나보기를 매우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런 지 5년 후 내가 남강(南康)에서 벼슬살이 하고 있을 때, 입지(立之)가 과연 나를 찾아왔다. 그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가 일찍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종사(從事)했음을 알 수 있었고, 참으로 자수(子壽) 형제(兄弟)가 나를 속인 것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나는 그가 함께 머무르기를 바랐으나 입지(立之)는 얼른 승낙하지 않더니 과연 그렇게 되지 못했다. 내가 후임자와 교대 후 임지를 떠나게 되었을 무렵, 이전에 내가 주청(奏請)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 대한 사액(賜額)’을 나의 주장(奏章)과 같이 시행해도 좋다는 교지(敎旨)가 내렸다. 오군(吳郡)의 군수(郡守)였던 전후자언(錢侯子言)이 내가 이 문제에 권권(惓惓)함을 알고 급히 내게 편지를 보내와 ‘누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스승이 될만한 지’를 물었다. 나는 이에 입지(立之)를 추천(推薦)했다. 자언(子言)은 나의 의견을 듣고 흔연(欣然)히 기뻐하며 글과 예(禮)를 갖추어 사자(使者)를 보내 여간(餘干) 조립지(曹立之)에게 달려가게 했다. 조립지(曹立之)의 문(門)에 달려가 청(請)했으나 입지(立之)는 병(病) 때문에 갈 수 없었다. 10년 2월 신해(辛亥)에 입지(立之)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자정(子靜)은 편지를 가지고 와서 서로 조문(弔問)하였다. 자정(子靜)에 따르면 입지(立之)는 장차 죽으려 할 즈음에도 그의 말은 또렷이 도(道)를 언급하여 평일(平日)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한다. 이에 서로 깊이 탄식(歎息)하고 애석(哀惜)히 여겼다. 오호(嗚呼)라! 오도(吾道)가 쇠퇴(衰頹)함이 오래로구나. 근년(近年) 이래로, 경부(敬夫) ․ 자수(子壽) ․ 백공(伯恭)이 모두 한창 나이인데도 서로 이어 세상을 떠났고, 또 장래(將來)에 이 일을 이어갈만한 후진(後進) 가운데서도 일찍 죽은 사람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입지(立之)를 잃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정(子靜)과 내가 [입지(立之)의 죽음을 두고] 서로 위로한 것이 어찌 단순히 그와 우리가 함께 서로 즐겁게 노닐었던 사정(私情)때문이었겠는가!
淳熙乙末歲, 予送呂伯恭至信之鵝湖, 而江西陸子壽及弟子靜與劉子澄諸人皆來, 相與講其所聞, 甚樂. 子壽昆弟於學者少所稱許, 間獨爲予道餘干曹立之之爲人, 且曰: ‘立之多得君所爲書, 甚欲一見君與張敬夫也.’ 後五年, 予守南康, 立之果來. 目其貌, 耳其言, 知其嘗從事於爲己之學, 而信子壽昆弟之不予欺也. 欲留與居, 而立之有宿諾, 不果. 及予受代以去, 而所請白鹿洞書院賜額有旨施行如章, 郡守吳郡錢侯子言以予之惓惓於是也, 亟以書來問孰可爲師者. 予因以立之告, 子言聞之, 欣然具書禮授使者, 走餘干, 踵立之之門以請, 而立之病不能行矣. 十年二月辛亥, 竟不起, 年方三十有七. 子靜以書來相弔, 具道立之將死, 其言烱然在道, 不少異於平日, 相與深歎惜之. 鳴呼! 吾道之衰久矣. 比年以來, 敬夫․子壽․伯恭皆以盛年相繼淪謝, 而後進之可冀以嗣事於方來者, 亦多夭沒. 今(7-4596)又失吾立之, 然則子靜與予之相弔也, 豈徒以遊好之私情也哉!
입지(立之)의 이름은 건(建)이다. 그의 선조(先祖)는 금릉(金陵)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移徙)했는데, 그 때부터 입지(立之)까지는 8세(世)이다. 입지(立之) 부친의 휘(諱)는 천명(天明)인데 처음 유자(儒者)가 되었다. 입지(立之)는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여 매일 수천(數千) 언(言)을 욀 정도였다. 조금 장성(長成)해서부터는 스스로 각려(刻勵)할 줄 알아 고금의 글을 배웠는데 모두 볼만하였다. 하루는 하남정씨(河南程氏)의 글을 읽고 비로소 성현(聖賢)의 학문(學問)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어, 개연(慨然)히 이전까지 그가 일삼던 것을 다 버리고 여러 경서(經書)들에 대해 매우 깊이 사색(思索)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보다 먼저 성현의 도(道)를 밝힐 수 있었던 당세(當世)의 선배 유학자를 두루 방문(訪問)하여 배우고자 하였다. 그는 장경부(張敬夫)가 호상(湖湘)에서 도(道)를 강론(講論)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만나보려 했으나 그 소원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사수정씨(沙隨程氏)가 옛 것을 배워 행실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그를 찾아가 배워 그 지귀(指歸)를 터득하였다. 그 후에 또 ‘육씨(陸氏) 형제가 홀로 마음에 터득한 것을 바탕으로 학문 활동을 하는데, 그 학설이 문자 언어로는 미칠 수 없는 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또 그들을 찾아가 그 학문을 전수하였는데 오랜 후에는 이를 터득한 듯하였다. 자수(子壽)는 그의 학문을 깊이 인정하였으나 입지(立之)는 아직도 감히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에 곧 또다시 편지를 부쳐 장씨(張氏)에게 학문을 강(講)하였다. 장경부(張敬夫)는 그의 편지를 열어보고 또한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참으로 함께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있지 아니하여 장경부(張敬夫)는 세상을 떠났고, 입지(立之)는 끝내 그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입지(立之)는 그 후에 남강(南康)에 이르러 장경부(張敬夫)의 유문(遺文)을 다 모아서 그 학문의 시종(始終)이 보여준 극치(極致)를 고구(考究)하였다. 이에 위연(喟然)히 탄식(歎息)하며 말하기를 “나는 평소(平素) 지금까지 학문(學問)에 대해 참된 것을 들은 바가 없었기에 그 귀취(歸趣)를 궁구(窮究)하지 못했는데, 지금부터는 이에 정론(定論)을 갖게 되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입지(立之)의 궁리(窮理)공부는 더욱 정미(精微)해졌고 반궁(反躬) 공부는 더욱 절실(切實)해졌으며, 붕우(朋友)와 강습(講習)할 때에도 반드시 그가 터득해낸 것을 고(告)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입지(立之)가 쓴 글 가운데 “학(學)에 있어서는 도(道)를 아는 것을 귀중(貴重)하게 여긴다. 그러나 도(道)는 한 번 들어서 깨닫거나 단번에 뛰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학(下學)의 규칙(規則)을 따르고 여기에 궁리(窮理) 공부를 더하여,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나아가고 가까운 데서부터 원대(遠大)한 곳으로 나아간다면 거의 인정받을 수 있는 공부법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기필코 먼저 한 번 깨우치기를 기약하여 드디어 온갖 구체적인 일들을 포기(抛棄)하고 그것을 뛰어넘은 경지에 이르려 한다면, 아직 깨닫기도 전에 이미 낭패(狼狽)가 심(甚)할 것이 분명할 듯하다. 게다가 하물며 갑자기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뛰어오르는 경우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단순히 운이 좋아 그런 경지를 터득하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라고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만년(晩年)에 그가 힘써 공부해 나감에 있어 표준으로 삼은 법도(法度)였던 것이다.
立之名建, 其先自金陵來, 徙家至立之八世矣. 立之父諱天明, 始爲儒. 立之幼穎悟, 日誦數千言. 少長, 知自刻厲, 學古今文皆可觀. 一日, 得河南程氏書讀之, 始知聖賢之學爲有在也, 則慨然盡棄其所爲者, 而大覃思於諸經. 歷訪當世儒先有能明其道者, 將就學焉. 聞張敬夫講道湖湘, 欲往見之, 不能致. 有告以沙隨程氏學古行高者, 卽往從之, 得其指歸. 旣又聞陸氏兄弟獨以心之所得者爲學, 其說有非文字言語之所及者, 則又往受其學, 久而若有得焉. 子壽蓋深許之, 而立之未敢以自足也, 則又寓書以講於張氏. 敬夫發書亦喜曰: ‘是眞可與共學矣.’ 然敬夫尋沒, 立之竟不得見. 後至南康, 乃盡得其遺文, 以考其爲學始終之致. 於是喟然歎曰: ‘吾平生於學無所聞而不究其歸者, 而今而後, 乃有定論而不疑矣.’ 自是窮理益精, 反躬益切, 而於朋友講習之際, 亦必以其所得者告之. 蓋其書有曰: ‘學必貴於知道, 而道非一聞可悟, 一超可入也. 循下學之則, 加窮理之工, 由淺而深, 由近而遠, 則庶乎其可矣. 今必先期於一悟, 而遂至於棄百事以超之, 則吾恐未悟之間, 狼狽已甚, 又况忽下趨高, 未有幸而得之者耶?’ 此其晩歲用力之標的程度也.
금년 원일(元日)에 입지(立之)는 그의 병이 나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워있던 방의 창문에 ‘아직 죽기도 전에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未死之前, 不可自棄.)’라고 써 붙이고 더욱 돈독하게 개과천선(改過遷善)해 나갔다. 죽던 날에는 일어나 의관(衣冠)을 바로하고 평일(平日)과 다름없이 위좌(危坐)한 다음 그의 동생인 정(廷)에게 “내가 비록 심(甚)한 병(病)에 걸렸지만, 배움이 더욱 증진(增進)되고 나의 이 마음은 영결(瑩潔)하여 더 이상 조금의 장애(障碍)도 없다. 이와 같이 하여 죽게 된다면, 그것은 거의 명(命)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자 자리에 나아가 자리를 편안히 고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오호(嗚呼)라! 입지(立之)는 불행히도 일찍 죽어 그의 뜻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수립(樹立)해 놓은 훌륭한 학문방법론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니 이 어찌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경지이겠는가!
(7-4597)今歲元日, 知病之不可爲矣, 猶書其牖曰: ‘未死之前, 不可自棄.’ 遷善改過, 自是愈篤. 死之日, 起正衣冠, 危坐如平日, 語其弟廷曰: ‘吾雖甚病, 而學益進, 此心瑩潔, 無復纖翳. 如是而死, 庶其可以言命矣.’ 語訖, 就枕未安而沒. 鳴呼! 立之雖不幸蚤死, 不卒其志, 然所以自樹立者至此, 亦豈他人所及哉!
입지(立之)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孝)를 다하여 숙수(菽水)로나마 즐거운 듯이 어버이를 봉양(奉養)하였다. 또 그 동생을 너무나도 지극히 사랑했는데,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기를 흡사 엄(嚴)한 사우(師友)와 같이 하였다. 누이가 시집가서 죽게 되자, 부모를 잃은 조카를 돌보아 장성(長成)케 하였다. 남들과 교제(交際)할 때에는 경건(敬虔)하고 충직(忠直)했으며, 진실로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비록 스승의 말이라 해도 굽혀서 순종(順從)하지 않고, 반드시 반복(反復)하여 옳은 결론에 귀착하고서야 그만두었다. 그는 나에 대해서도 매우 절실하게 나의 잘못을 규정(規正)해 주었다. 남들이 위난(危難)을 당하는 것을 보면 온 힘을 다해 그들을 주휼(賙恤)하였는데, 비록 자신이 가난하고 병들었지만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입지(立之)는 그의 서재(書齋)에 ‘무망(無妄)’이라는 글귀를 써 붙인 채 종일 문을 닫아걸고 밖에 나오지 않은 적이 많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중에는 그의 얼굴을 모르는 자도 있었다.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언제나 스스로 반성(反省)하였는데, 조금이라도 과오(過誤)나 차질(差跌)이 있으면 곧 이를 책(冊)에다 기록했다. 또 경학(經學)을 토론(討論)하다가 터득되는 것이 있어도 이를 모두 기록했다. 그는 경학 이외의 다른 종류의 글을 지은 것도 매우 많았는데, 병중(病中)에 그것을 모두 거두어 태우려 하였지만, 그의 동생 정(廷)이 차마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입지(立之)가 이미 죽고 나서 그가 남긴 책 상자들을 살펴보니 이미 그 반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에 정(廷)은 입지(立之)가 “정론(定論)을 갖게 되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된(定論而不疑矣)” 그 이후에 쓴 글들을 모아 10여권의 책을 얻었다. 그 밖에도 세상에 전(傳)할만한 글들이 많았지만 입지(立之)의 유의(遺意)를 고려(顧慮)하여 감히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
立之事親孝, 菽水之養驩如也. 愛其弟甚至, 與相切磋, 如嚴師友. 姊嫁而卒, 撫其孤以有成. 與人交敬而忠, 苟心所未安, 雖師說不曲從, 必反復以歸於是而後已. 其於予規正尤切也. 視人有急難, 周之必盡其力, 雖貧病不計. 榜其齋曰 ‘無妄’, 杜門終日, 里巷有不識其面者. 日用間自省, 小有過差, 卽書之冊. 其討論經學有得, 亦悉記之, 及爲他文甚衆. 病中欲擧而焚之, 廷弗忍. 旣沒而視諸篋, 則已亡其半矣. 乃裒自論定以來所作, 得十餘卷, 其他猶多可傳者, 顧以立之遺意, 弗敢出也.
입지(立之)는 일찍이 장가든 적이 있지만, 부인이 시어머니를 기쁘게 뫼시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를 가르쳤으나 그녀가 따르지 않아 결국 내쫓았다. 이 때문에 입지(立之)는 죽을 때까지 자녀가 없었다. 입지(立之)가 죽자 정(廷)은 어머니의 명(命)에 따라 종인(宗人)의 아들인 원(愿)을 입지(立之)의 후사(後嗣)로 삼았다. 그리고 만춘향(萬春鄕) 속전원(粟田原)에 있는 선영(先塋) 오른 편에 입지(立之)를 장사(葬事)하였다. 또한 정(廷)은 입지(立之)의 유문(遺文) 여러 편(篇)과 그의 벗 성충랑(成忠郞) 조군백역(趙君伯域)이 쓴 행장(行狀)을 가지고 수백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나를 찾아와 명(銘)을 청(請)하였다. 나는 비록 입지(立之)와 만난 지가 오래지만 그를 깊이 알고 있었고 그를 신망(信望)함이 두터웠기에, 나는 그의 죽음을 애통(哀慟)히 여기며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어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했겠는가? 그러나 입지(立之)는 이미 땅 속에 묻혔으니 광중(壙中)에 있는 그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다. 이에 저간의 일을 기록하여 그의 묘(墓) 위에 표(表)하도록 하고자 한다. 또 이어서 말하기를 :
立之嘗娶婦, 不悅於姑, 敎之不從而去, 故卒無子. 至是廷以母命立宗人之子愿爲後, 而葬立之萬春鄕粟田原先塋之右. 且以立之遺文數篇及其友成忠郞趙君伯域之狀, 不遠數百里來請銘. 予於立之相得雖晩, 而知之深, 望之厚, 哀其死而屢出涕焉, 其可以無從乎? 然立之已葬, 不及識于壙中, 乃書其事, 使以表于墓上.(7-4598)又系之曰:
호자(胡子)께서 하신 말씀이 있으니, “배움에 있어서는 박학(博學)하고 싶지만 잡박(雜駁)하게 되고 싶지는 않으며, 또 요약(要約)하고자 하나 비루(鄙陋)하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네. 아! 그 말씀 믿을만하도다! 입지(立之)의 경우는 박학(博學)하면서도 잡박(雜駁)하지는 않으며 요약(要約)되면서도 비루(鄙陋)하지 않다고 할 수 있도다. 가령 하늘이 그에게 몇 년을 더 허락해 주시어 그의 힘을 다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면, 사도(斯道)가 전해짐이 거의 이루어질 뻔 했도다. 오호(嗚呼)라! 그러나 그는 이제 단명(短命)하여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이 어찌 애통(哀慟)히 여길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가 죽은 이 해 5월 을유(乙酉)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술(述)하노라.
胡子有言, 學欲博不欲雜, 欲約不欲陋. 信哉! 如立之者, 博而不雜, 約而不陋, 使天假之年, 以盡其力, 則斯道之傳其庶幾乎. 鳴呼! 今短命而死矣, 豈不可哀也哉! 是歲五月乙酉, 新安朱熹述.
서산(西山) 선생 이공(李公)의 묘표(墓表)(西山先生李公墓表)
서산선생(西山先生) 이공(李公)은, 구산선생(龜山先生) 양문정공(楊文靖公)의 문인(門人)이다. 구산(龜山)은 하남정씨(河南程氏)로부터 학문(學問)을 전수(傳受)하고나서 돌아와 하남정씨(河南程氏)의 학설에 근거하여 동남(東南)지방에서 교수(敎授)하였는데, 일시(一時)의 학자(學者)들이 흡연(翕然)히 그를 추종하였다. 구산(龜山)은 매번 배우는 자들에게 고(告)하여 말하기를 “당우(唐虞) 이전(以前)에는 전적(典籍)이 갖추어 있지 않았는데도 그 당시(當時)에 성현(聖賢)이 그와 같이 많았다. 주(周)나라 말기 이래(以來) 아래로 진(秦) ․ 한(漢)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자(文字)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공허(空虛)하기만 하여 그 사이에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같은 분을 한 사람이라도 구해보려 하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도(道)가 전해온 뿌리는 진실로 문자(文字)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옛 성현이 그와 같은 훌륭한 성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용심(用心)함에 있어서 반드시 염두에 둔 곳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공(李公)이 여항(餘杭)에서 뵙기를 청(請)했을 때도, 구산선생(龜山先生)은 그에게 “배우는 자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인(古人)이 학문(學問)함에 있어서 용심(用心)하는 곳이 어디인가’하는 것과 ‘배운 것을 장차 어떻게 적용(適用)할 것인가’하는 것 등이다. 만약에 ‘공문(孔門)의 베움은 인(仁)인 뿐이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만 그것을 인(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만약 ‘인(仁)은 인심(人心)이다.’라고 한다면 그 무엇을 인심(人心)이라 말할 수 있는가?”라고 고(告)해 주었다. 이에 이공(李公)은 구산(龜山)의 그 말씀을 듣고 물러나 그 학설을 추구해 나갔는데, 받아들이려하면 할수록 더욱 합치되지 않았다. 이에 홀로 『논어』,『맹자』등을 취(取)하여 엎드려 읽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년을 그렇게 연구한 후에 비로소 온갖 의문들이 환연(渙然)히 풀려 터득한 것이 있는 듯하였다. 구산(龜山)은 그를 깊이 인정하였다. 이공(李公) 역시 자신에게 배우는 사람들에게 “배우는 자는 경(經)을 읽고 또 읽어서, 그 무미(無味)한 곳에서 더욱 생각을 극진히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온갖 의심이 나란히 흥기(興起)하여 잠자고 밥 먹는 사이에도 그 의심을 내려놓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니 그런 연후에 비로소 빠른 진취(進就)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구산(龜山)이 죽고 나서 후진(後進)들 중에 이공(李公)을 종유(從遊)하는 이가 많았다. 이공(李公)은 후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소대(召對)하였으며 마침내 복건로안무사주관기의문자(福建路安撫司主管機宜文字)라는 관직에 올랐다. 고향인 소무군(邵武軍) 광택현(光澤縣)의 동쪽에 있는 황령(黃嶺) 언덕에 장사(葬事)하였다. 배운 자들이 모두 서산선생(西山先生)이라 추호(追號)하였다.
西山先生李公者, 龜山先生楊文靖公之門人也. 龜山旣受學於河南程氏, 歸以其說敎授東南, 一時學者翕然趨之. 而龜山每告之曰: ‘唐虞以前, 載籍未具, 而當是之時, 聖賢若彼其多也. 晩周以來, 下歷秦漢, 以迄于今, 文字之多, 至不可以數計. 然曠千百年, 欲求一人如顔, 曾者而不可得, 則是道之所以傳固不在於文字, 而古之聖賢所以爲聖賢者, 其用心必有在矣.’ 及李公請見於餘杭, 則其告之亦曰: ‘學者當知古人之學何所用心, 學之將以何用. 若曰孔門之學仁而已, 則何爲而謂之仁; 若曰仁人心也, 則何者而謂之人心耶?’ 李公受言, 退求其說以進, 愈投而愈不合, 於是獨取論語, 孟子之書而伏讀之, 蚤夜不懈, 十有八年, 然後渙(8-4599)然若有得也. 龜山蓋深許之, 而公之語學者亦曰: ‘學者於經讀之又讀, 而於其無味之處益致思焉, 至於羣疑並興, 寢食不置, 然後始當驟進耳.’ 龜山旣沒, 後進多從之遊. 後擧遺逸召對, 卒官福建路安撫司主管機宜文字, 而葬其鄕邵武軍光澤縣東黃嶺之原. 學者共追號爲西山先生云.
공의 휘(諱)는 욱(郁)이고 자(字)는 광조(光祖)이니, 원우(元祐) 당인(黨人)인 조산랑(朝散郞) 심(深)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인현군(安仁縣君) 진씨(陳氏)이니,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추증(追贈)된 진충숙공(陳忠肅公)의 여형(女兄, 손윗누이)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희롱(戱弄)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앉거나 서 있을 때 언제나 반드시 엄숙(嚴肅)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조금 장성(長成)해서는 구씨(舅氏)인 진공기지(陳公器之)에게 배웠다. 관례(冠禮) 치르는 나이인 20세가 넘어서는, 이에 구산(龜山)을 뵙고 수업(受業)을 청(請)했다. 구산(龜山)은 공을 한 번 보고 그를 기특(奇特)히 여겨 곧 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이공(李公)은 조산공(朝散公)의 유명(遺命)에 따라 숙부(叔父)인 장사랑(將仕郞) 정(庭)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중간에 태학(太學)에 유학(游學)하기도 하고 향천(鄕薦)되기도 하였으나 모두 급제(及第)하지 못하였다. 소희(紹熙) 초(初)에 천자(天子)께서 개연(慨然)히 대업(大業)을 중흥(中興)하실 뜻을 품고, 산림(山林)의 유일지사(遺逸之士)와 괴걸(魁傑)하고 비상(非常)한 재질(材質)을 지닌 자들을 발탁하여 등용하실 생각을 했다. 이에 어사(御史) 주이(朱異)를 보내 군국(郡國)을 다니며 수방(搜訪)하여 조정에 알리라는 조서를 내렸다. 주이(朱異)는 이공(李公)의 이름을 듣고, 이공(李公)으로 하여금 나아가 주상(主上)을 알현하게 했다. 이에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했을 때, 이공(李公)이 진술한 것은 모두 당세(當世)에 크게 힘써야 할 것들이었다, 주상(主上)은 얼굴빛을 바꾸며 경청(傾聽)하였고 ‘물러나 머물 것을 청한 것’이 두 차례나 되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이공(李公)을 우적공랑(右迪功郞)으로 삼으려다가 이윽고 상정일사래령소산정관(詳定一司勑令所刪定官)을 제수(除授)하였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이공(李公)은 친상(親喪)을 만나 임지를 떠났다. 주상(主上)께서는 진서(進書)에 따른 은사(恩賜)로 특별히 이공(李公)을 승무랑(承務郞)으로 개수(改授)하셨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때마침 승상(丞相) 진회(秦檜)가 이미 용사(用事)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공(李公)은 스스로 ‘벼슬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드디어 읍(邑)의 서산(西山)에 집을 짓고 그 사이를 왕래하며 독서하였다. 집은 더욱 곤궁(困窮)해져 보통 사람은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이공(李公)은 홀로 광연(曠然)하여 개의(介意)치 않았다. 그러나 당세(當世)의 현명한 사대부들은 이공(李公)을 더욱 높이 추앙(推仰)하였으며 관직을 옮긴 자들 중에는 스스로 이공(李公)의 삶을 따르려는 자들이 많았다. 한참 시일이 지난 후에, 이공(李公)은 기가(起家)하여 민수(閩帥)의 막부(幕府)를 보좌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자리가 공이 마땅히 있을만한 자리가 아니라고들 말했다. 그러나 이공(李公)은 이를 사양(辭讓)하지 않았다. 임지에 이르자, 사람들은 이공(李公)께서 이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이공(李公)은 오로지 신중(愼重)하게 문서(文書)를 다스렸으며 연일(連日) 민정(民情)의 척휴(戚休)와 이병(利病)을 널리 조사하여 그 수장(首長)에게 보고하고 업무를 마쳤다. 하루는 민수(閩帥)가 소인(小人)의 말을 듣고 백성들이 거주하던 가옥 수십 채를 허물어 그 자리에 가게를 벌이고 술을 팔아 이익을 탐(貪)하려 하였다. 이에 이공(李公)은 그렇게 하는 것이 편(便)한 일이 아님을 아뢰었다. 민수(閩帥)는 기뻐하지 않았고 자못 안색을 바꾸며 싫은 소리를 했다. 이에 공은 곧 병(病)을 핑계로 고로(告老)했다. 민수(閩帥)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사과(謝過)하였다. 공은 만류(挽留)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27년 7월 임진(壬辰)에 마침내 이공(李公)은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그의 나이 65세였다.
公諱郁, 字光祖, 元祐黨人朝散郞深之子. 母安仁縣君陳氏, 贈諫議大夫陳忠肅公之女兄也. 公幼不好弄, 坐立必莊. 少長, 學於舅氏, 陳公器之. 踰冠, 乃見龜山而請業焉. 龜山一見奇之, 卽妻以女. 旣而以朝散公遺命, 出爲叔父將仕郞庭之後. 中間游大學, 被鄕薦, 皆不第. 紹熙初, 天子慨然有志中興大業, 思得山林遺逸魁傑非常之材而用之. 會遣御史朱異行郡國, 詔俾搜訪以聞. 異聞公名, 使還以對. 召對便殿, 所陳皆當世大務, 上爲改容傾聽, 請退而留者再. 詔以爲右迪功郞, 尋除詳定一司勑令所刪定官. 未久, 以憂去. 用進書恩, 特改承務郞. 及免喪, 會秦丞相檜已用事, 公自度不能俯仰祿仕, 遂築室邑之西山, 往來讀書其間. 家益窮空, 人有不堪其憂者, 公獨曠然不以爲意. 然當世賢士大夫益高仰之, 遷官者多引以自代. 久之, 起家佐閩帥幕府. 人謂非公所宜處, 而公不辭. 旣至, 人謂公且不屑爲. 而公治文書惟謹, 日訪民情戚休利病以告其長而罷行之. 一日, 帥用(7-4600)小人言, 欲毁民居數十爲列肆, 酤酒以牟利. 公白其非便, 帥不樂, 頗見色詞. 公卽移病告老. 帥悟慚謝, 公爲强起. 二十年七月壬辰, 竟以疾卒, 年六十有五矣.
공은 천자(天資)가 수미(粹美)하였을 뿐만 아니라 함양(涵養)에도 방도(方道)가 있었다. 윗사람을 섬길 때는 공손(恭遜)하면서도 예의(禮義)가 있었고,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엄숙(嚴肅)히 하면서도 은혜(恩惠)를 베풀었다. 평소 거처할 때도 일찍이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도 종일(終日)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자신을 위한 일에는 매우 절약(節約)했으나 어버이를 섬길 때는 지극히 풍후(豊厚)히 하였다. 어버이의 일을 승계(承繼)함에 있어서는 더욱 긍긍(兢兢)하여 효(孝)를 극진히 다하였고 상중(喪中)에는 몸이 헐고 수척(瘦瘠)하였으나 예법(禮法)에 맞았다. 상사(喪事)를 다스릴 때는 반드시 성신(誠信)을 다하여 비록 재물이 다 떨어져도 인색(吝嗇)하게 하지 않았다. 공의 가형(家兄)인 계(階)가 항주(杭州)에서 관직(官職)생활하던 중에 도적(盜賊)을 꾸짖다가 죽게 되었다. 공은 과부(寡婦)가 된 형수(兄嫂)를 어머니와 같이 섬겼으며 아비를 잃은 조카들을 교육하고 조카딸들을 시집보내었는데 모두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공은 세무(世務) 인정(人情)과 관정(官政) 법규(法規)에서 아래로 행진(行陣) 농포(農圃)에 관한 일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연구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세상에 등용(登用)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에 식자(識者)들은 이를 한탄(恨歎)한다.
公天資粹美而涵養有方, 其事上恭而有禮, 其御下嚴而有恩. 平居未嘗有惰容, 誨人終日無倦色. 自奉甚約而事親極其厚, 於所後尤兢兢致孝, 服喪毁瘠如禮, 治喪必誠信, 至竭其貲不吝. 兄階官杭州, 罵賊死, 公事寡嫂如母, 敎孤姪․遣遺女, 皆如己子. 其於世務人情․官政文法, 下至行陣農圃之事, 靡不究知. 然竟不及用於世以沒, 識者恨之.
공의 저서(著書)로는『역전(易傳)』,『참동계(參同契)』,『논맹유병(論孟遺秉)』 등이 있는데, 여기에 공이 평소(平素)에 남긴 유문(遺文)을 합(合)하면 수십(數十) 권(卷)이 되니, 모두 집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夫人) 양씨(楊氏)는 구산선생(龜山先生)의 셋째 따님으로 행실(行實)이 어질었고 경사(經史)의 대의(大意)를 통(通)했다. 평소(平素) 자손(子孫)들을 교회(敎誨)하고 신칙(申飭)하며 내외(內外)를 가지런히 다스렸는데 모두 예법(禮法)에 맞게 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 뒤에 졸(卒)하였다. 공의 아들 규(揆)는 승무랑(承務郞)으로, 진공(陳公)이 장사(將仕)의 묘(墓)에 기록한 묘지명(墓誌銘)에서 말한 ‘연손(延孫)’이 바로 그이다. 만년(晩年)에는 덕수궁(德壽宮)의 경은보관(慶恩補官)으로 있다가 졸(卒)하였다. 공의 따님은 동군(同郡)의 상관묵경(上官墨卿)에게 시집갔다. 공의 손자(孫子)는 한(閑), 천(闡), 원(䦎), 환(闤)이 있고, 손녀(孫女)는 누구에게 시집갔는지 알 수 없다.
所著書有易傳 ․ 參同契 ․ 論孟遺秉及平生遺文, 合數十卷, 藏于家. 夫人楊氏, 龜山先生第三女, 有賢行. 通經史大意, 平居誨飭子孫, 整齊內外, 皆中禮法. 後公十六年卒. 子揆, 承務郞, 陳公誌於將仕之墓, 所謂延孫者也. 晩以德壽慶恩補官而卒. 女適同郡上官墨卿. 孫男閑․闡․䦎․闤, 女適某人.
공의 손자(孫子)인 한(閑)이 적공랑(迪功郞)으로 전주주학교수(全州州學敎授)로 있으면서 비로소 장차 돌을 다듬어 공의 묘소(墓所)에 명(銘)을 세우고자 결심하고 나를 찾아와 글로 기록해 줄 것을 청(請)했다. 오호(嗚呼)라, 성현(聖賢)은 멀어졌구나! 그러나 말을 세우고 가르침을 드리워 후학(後學)들에게 열어 보여주는 것 역시 지극(至極)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돌아보건대 진(秦) ․ 한(漢) 이래(以來) 도학(道學)이 전해지지 않아 유자(儒者)들은 스스로 반성(反省)하며 잠심(潛心)할 줄 모르고 한결같이 ‘본 것을 기억하고 남이 말해 놓은 것을 외는 것(記覽誦說)’을 일삼아 왔으니, 이 때문에 도(道) 있는 군자들은 이를 깊이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들 군자들이 일찍이 ‘서책은 묶어놓고 읽지 않고, 앉아서 공묘(空妙)한 말을 늘어놓음’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요행을 바란 적은 없었다. 구산(龜山)께서 가르치신 것과 서산(西山)께서 배우신 것에는 또한 볼만한 것이 있다. 내가 이 때문에 글을 지어 이 두 분의 행사(行事)를 나란히 기록하나니, 이후의 군자들이여 부디 고구(考究)할지어다. 순희(淳熙) 12년 가을 8월 기묘(己卯)에, 주희(朱熹)는 구위(具位)하고 이 글을 술(述)하노라.
閑於是以迪功郞爲全州州學敎授, 始將伐石以銘其墓, 而來請文以識焉. 鳴呼, 聖賢遠矣! 然其所以立言垂訓, 開示後學, 其亦可謂至哉. 顧自秦漢以來, 道學不傳, 儒者不知反己潛心, 而一以記覽誦說爲事, 是以有道君子深以爲憂. 然亦未嘗遂以束書不讀․坐談空妙爲可以徼幸於有聞也. 若龜山之所以敎與西山之所(8-4601)以學, 其亦足以觀矣. 予是以著之而幷記其行事, 後之君子尙有考也. 淳熙十有二年秋八月己卯, 具位朱熹述.
태유인(太孺人) 소씨(邵氏)의 묘표(墓表)(太孺人邵氏墓表)
금화(金華)의 시호(時鎬)는 모부인(母夫人) 소씨(邵氏)의 영구(靈柩)를 뫼시고 순리향(循理鄕) 구리원(九里原)에 있는 선부군(先府君)의 묘소(墓所)에 합장(合葬)하고 나서, 그 아들 원(源)을 시켜 영가(永嘉)의 엽적(葉適)이 기록한 ‘소씨(邵氏)의 행적(行迹)을 서술한 글과 소씨(邵氏)와 관련한 사실(事實)을 특별히 기록한 글’ 각 1통(通)을 가지고 내게 찾아와 고(告)하기를 “선인(先人)의 상(喪)을 당했을 때는, 다행히도 선사(先師) 동래부자(東萊夫子)께서 명(銘)을 주시고 선생께서 글을 써 주셨습니다. 이제 또 저의 불효(不孝)로 인해 큰 화난(禍難)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비록 다행히도 장례(葬禮)절차는 마쳤습니다만, 유당(幽堂)에 새겨 영구(永久)히 드리울만한 묘표(墓表)를 아직 부탁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에 감히 이전의 은혜(恩惠)에 의지하여 거듭 절하고 청(請)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당시 병이 나서 전간(田間)에 누워있던 터였는데, 일어나 엽적(葉適)이 쓴 그 글을 받아 읽어보니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金華時鎬旣奉母夫人邵氏之柩祔于循理鄕九里原先府君之墓, 使其子源以永嘉葉適所爲行述及別記事實各一通來告曰: ‘先人之喪, 先師東萊夫子幸與之銘, 而吾子書之矣. 今又以不孝罹大禍, 間雖幸畢藏事, 惟是幽堂之刻所以垂永久者未有所屬. 敢介前惠, 重拜以請.’ 予時病臥田間, 起受其書讀之曰:
“부인(夫人)은 무주(婺州) 금화현(金華縣) 사람이다. 부인의 증조(曾祖)는 경(瓊), 조부(祖父)는 열(悅), 그리고 부친(父親)은 지재(之才)이시다. 그 현(縣)의 청강(淸江) 시군여익(時君汝翼)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시군(時君)은 평생 창락(昌樂)하였는데 키가 크고 침착(沈着)하고 중후(重厚)하였다. 방랍(方臘)의 난(亂)에 도적들이 불을 질러 집안이 텅 비다시피 했으나, 시군(時君)은 집을 하나하나 다시 건립(建立)하였는데 모두 이전 사람이 지은 것에 비해 뛰어났다. 부인(夫人)이 민첩(敏捷)하게 이 일을 좌우(左右)에서 도울 수 있었기에 그르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집이 완성(完成)되자 시군(時君)은 드디어 법도(法度)에 따라 내외(內外)를 엄(嚴)히 하고, 문학(文學)으로 자손(子孫)은 훈육(訓育)하였다. 또한 신의(信義)를 세우고 베풀기에 힘써 동향(同鄕) 사람들로부터 무거운 칭예(稱譽)를 받았다. 부인(夫人) 또한 정성을 다하여 시군(時君)의 뜻을 잘 받들어 안일(安逸)한 뜻을 품지 않았다. 이에 시씨(時氏) 가족(家族)은 훌륭한 거족(巨族)이 되었고 자손들은 문과(文科)를 겨루게 되었다. 자손들의 이름을 천거(薦擧)해 올릴 때 사람들은 모두 시군(時君)과 부인(夫人)을 아끼고 존경(尊敬)하였다. 시군(時君)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夫人)도 장차 가사(家事)를 전(傳)했는데, 가인(家人)들을 모두 불러 함께 약조(約條)하고 친(親)히 글씨를 써서 새긴 병풍(屛風)을 주었다. 그 글의 내용은, ‘자손들이 함께 거처(居處)함에 예(禮)를 갖추고, 서로 모여 화목하게 음식을 나누고, 가산(家産)을 어느 한 사람이 전단(專斷)하지 말도록 함’으로써 시군(時君)이 세운 법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청강(淸江) 동남(東南)쪽에 휴호(畦戶) 수백(數百) 채가 있었는데 모두 물에 가깝고 풀로 지붕을 덮은 집이었다. 이 때문에 때때로 큰 비가 오면 그 위를 덮치게 되어, 백성들이 왕왕(往往) 나무 위에 거처를 마련하여 스스로 구(救)하려다가 물에 떠내려간 사람도 있었다. 이에 부인은 배에 미식가루와 밥 등을 싣고 가서 그들을 도와주었고, 이 일을 해마다 한결같이 행하였다. 또 미리 관(棺)을 만들어 두었다가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있으면 거두어주었는데, 사람들이 부인(夫人)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품었다. 부인(夫人)은 만년(晩年)에 ‘태상황제(太上皇帝)와 황후(皇后)의 장수(長壽)를 경하(慶賀)하며 베푼 은사(恩賜)’를 입어 태유인(太孺人)에 봉(封)해졌으며 아울러 모자(帽子)와 피견(披肩)도 함께 하사받았다. 순희(淳熙) 10년 7월 경인(庚寅)에 졸(卒)하니 나이 71세였다. 세 아들을 두었으니, 호(鎬)와 기(錡) 그리고 종(錝)이다. 또 두 딸을 두었으니 각각 유안(劉晏)과 진포(陳褒)에게 시집갔다. 손자(孫子)로는 우(氵+雩), 원(源), 기(淇), 연(演), 주(湊), 법(灋), 숙(潚), 담(潭), 조(澡), 악(湂) 등이 있고, 손녀(孫女) 둘은 각각 진지망(陳之望)과 왕숙이(汪叔貽)에게 시집갔다. 나머지 손녀들은 아직 어리다. 증손자(曾孫子)는 구(榘), 율(㮚), 고(杲)가 있고, 증손녀(曾孫女)로는 장(莊)과 복(葍)이 있다.”
‘夫人婺州金華縣人, 曾祖瓊, 祖悅, 父之才. 嫁其縣淸江時君汝翼. 時君世昌樂, 而魁尨沉厚. 方臘之亂, 寇燔略空, 君一一自建置, 盡絶其前人. 夫人能左右以敏, 無荒事焉. 家旣成, 時君遂用法度嚴內外, 文學訓子孫, 立信務與, 稱重(7-4602)鄕閭. 夫人又能奉承以恪, 無逸志. 時氏族良家巨, 子孫競於文科. 擧上其名, 人皆尊愛時君以及夫人. 時君沒, 夫人亦將老矣. 具呼家人與爲條約, 親寫刻之屛, 使合居有禮, 綴食無專, 以不忘時君之法. 淸江東南畦戶數百, 臨水而茇舍, 時潦出其上, 民往往棲木自救, 有浮去者. 夫人始命舟糗飯拯之, 歲以爲常. 豫蓄棺, 告疫死者以歛, 人懷其惠, 晩遭太上皇帝․皇后慶壽恩, 得封太孺人, 加賜冠帔. 淳熙十年七月庚寅卒, 年七十有一. 三子, 鎬․錡․錝. 二女, 適劉晏, 陳褒. 孫●[(氵+雩)]․源․淇․演․湊․灋․潚․潭․澡․湂. 孫女其二適陳之望․汪叔貽, 餘尙幼. 曾孫榘․㮚․杲. 女莊․葍.’
대개 엽군(葉君)이 ‘소씨(邵氏)의 행적(行迹)을 서술한 글’의 내용은 이상과 같다. 그의 이 서술은 부인(夫人)과 연관된 일의 시종(始終)에 대해 상세(詳細)하다. 그러나 ‘소씨(邵氏)와 관련한 사실(事實)을 특별히 기록한 글’에는 ‘소씨(邵氏)가 자손들과 약조(約條)한 말’이 필사(筆寫)되어 있는 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손(子孫)은 가법(家法)을 신중히 지키고 어기거나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한다. 둘째, 새벽에 일어나 판(板)을 울리면 장유(長幼) 모두 영당(影堂, 즉 家廟)에 나아가 조참(早參)한 다음 중당(中堂)에 모여 차례로 늘어서서 읍(揖)한다. 셋째, 남녀(男女)의 출입(出入)과 재화(財貨)의 출납(出納)과 복첩(僕妾)의 증감(增減)이 있을 때는 반드시 가장(家長)에게 품의(稟議)한다. 넷째, 무릇 자부(子婦)가 된 자는 사재(私財)를 비축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여복(女僕)은 일 없이 중문(中門)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창두(蒼頭, 즉 奴僕)는 쉽사리 당실(堂室)에 오르거나 포주(庖廚)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즉 나는 여기서 부인(夫人)이 가르친 것이 제가(齊家)의 핵심을 터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엽군(葉君)의 별기(別記)에 따르면, ‘부인의 천성(天性)은 검소(儉素) 질박(質朴)하며 화려(華麗)하거나 사치(奢侈)하지 않았고, 부인의 복식(服飾), 거마(車馬), 기용(器用) 등은 상도(常道)가 있어 일찍이 시류(時流)의 호오(好惡)를 추종(追從)하여 변역(變易)한 적이 없었으며; 아울러 세시(歲時)에 제사(祭祀)를 매우 신중(愼重)하게 받들었다. 일찍이 부인께서 겨울 제사에 할육(割肉)을 올리는데 손이 차서 칼을 떨어뜨리자 여러 며느리들이 대신할 것을 청(請)했지만 허락하지 않은 일도 있었고; 또 부인의 어머니인 하씨(何氏)가 만년에 말질(末疾)을 얻게 되자 귀성(歸省)하고는 문득 권권(惓惓)하여 차마 떠나지 못했고, 근래(近來)에 하씨(何氏)가 졸(卒)하자 부인은 거의 60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식(蔬食)하며 상(喪)을 마친 일도 있었으며 ; 또 여형(女兄)이 과부(寡婦)가 되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한결같이 두루 살피고 돌봐주었으며, 그 자제(子弟)들에 대해서는 더욱 은의(恩意)로 대우(待遇)해주었고 ; 시군(時君)이 자제(子弟) 교육에 독실(篤實)하다 보니 일시(一時)의 모준(髦俊)들이 그 문(門)에 객(客)으로 많이 모여들었는데, 부인은 날마다 음식 차림을 신칙(申飭)하고 반드시 몸소 가서 임(臨)하였다. 이처럼 부인은 비록 근고(勤苦)하고 신로(辛勞)할지언정 게으른 뜻이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여기에서 또 부인이 가르친 것은 대개 ‘몸소 솔선수범한 것’이고 ‘오로지 언어(言語)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호(嗚呼)라, 이는 참으로 숭상(崇尙)할만한 일이로다! 나는 이미 병이 나서 제대로 명(銘)을 완성할 수 없다. 이에 그 사실(事實)을 이와 같이 기록하고 이를 원(源)에게 주어, 원(源)이 이를 가지고 돌아가 돌에 새기고 묘상(墓上)에 표(表)하게 하였다. 순희(淳熙) 12년 겨울 10월 무진(戊辰)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찬(撰)하노라.
蓋葉君所叙云爾. 其於夫人始終之際詳矣, 而別記手書條約之詞, 一曰子孫謹守家法, 毋得違悖. 二曰晨興鳴板, 長幼詣影堂早參, 次會中堂叙揖. 三曰男女出入, 財貨出納, 僕妾增減, 必禀家長. 四曰凡爲子婦, 毋得蓄私財. 五曰女僕無故不許出中門, 蒼頭毋得輒升堂室․入庖廚. 則予於是有以知夫人之所以敎者得齊家之要. 至其又謂夫人天性儉質, 不徇華靡, 服御有常, 未嘗追逐時好, 有所變易; 歲時奉祭甚謹, 嘗以冬享割肉, 手寒刀墜, 諸婦請代而弗許也; 母何晩得末疾, 歸省輒惓惓不忍去, 比卒, 年幾六十矣, 猶蔬食以終喪; 女兄孀居貧病, 護視周悉, (7-4603)遇其予弟恩意有加; 時君篤於敎子, 一時髦俊多客其門, 夫人日飭饌具, 必躬臨之, 雖勤劇無倦意, 則予於是又有以見夫人之所以敎者蓋以其身而不專在於言語之間也. 鳴呼, 是可尙已! 旣以病不果銘, 姑記其實如此以授源, 使歸刻石表墓上. 淳熙十有二年冬十月戊辰, 新安朱熹撰.
동군경방(董君景房)의 묘표(墓表)(董君景房墓表)
번양(番陽)의 동군경방(董君景房)은 휘(諱)가 위량(爲良)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덕흥(德興)의 해구(海口)에서 살아왔다. 대부(大父) 준(濬)이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갔는데 관직이 종정소경(宗正少卿)에 이르렀다. 부친(父親) 원일(元一)은 수주(秀州)의 사법참군(司法參軍)을 지냈다. 동군(董君)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일찍이 강산(江山)의 서공(徐公) 성수(誠叟)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그 학설을 전수(傳受)하여 돌아왔다. 그 후 더욱 힘써 훌륭한 벗을 구하여 함께 강학(講學)하고 수양(修養)하였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지 수년(數年)이 지나지 않아, 드디어 주향(州鄕)에 그의 문행(文行)이 알려지게 되었다. 예부(禮部)에서 주관(主管)한 과거에 두 차례 응시했으나 급제(及第)하지 못했다. 이에 집에 물러나 머물면서 독서(讀書) 강학(講學)하고 다시는 명성(名聲)이나 이익(利益) 혹은 영달(榮達)을 일삼지 않았다. 이에 향인(鄕人)들이 서로 더불어 동군(董君)을 더욱 높이고 추앙(推仰)하였고 동군(董君)의 학문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측량하기 힘들 정도로 진보하였다. 순희(淳熙) 11년 9월 어느 날 아침에 병을 얻어 죽으니, 그 당시 그의 나이가 겨우 54세였다. 사우(士友)들이 이 소문을 듣고 애통(哀慟)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番陽董君景房者, 諱爲良, 世家德興之海口. 大父濬始仕, 至宗正少卿. 父元一, 秀州司法參軍. 君少有大志, 嘗學於江山徐公誠叟先生之門, 受其說而歸. 益務求友, 講而修焉 不數年, 遂以文行聞於州鄕. 再試禮部不第, 退處于家, 讀書講學, 不復以聲利榮達爲事. 鄕人相與益高仰之, 而君之學蓋日進月益而未可量也. 淳熙十一年九月, 一旦得疾卒, 年甫五十有四. 士友聞者莫不哀之.
대개 동군(董君)의 위인(爲人)은 기개가 있고 호탕하여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집이 원래 풍족(豊足)했으므로 형제(兄弟)들이 따로 분가할 것을 요구했으나 동군(董君)은 이를 극력(極力) 저지(沮止)했다. 그러나 동군(董君)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곧 형제들이 택(擇)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자신은 홀로 형제들이 가져가고 남은 것과 오래된 책 몇 상자를 가졌다. 그 후 형제 중에 간혹 파산(破産)한 자가 있었는데, 동군(董君)은 그들을 극력(極力) 도와주고 자신의 가산(家産)이 망실(亡失)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형제들 중에 누군가 죽으면 장사(葬事)지내주고 그 고자(孤子)들을 무양(撫養)했다. 족인(族姻)이나 향당(鄕黨) 가운데 가난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이 있으면 의복과 음식을 제공하고, 피폐하여 스스로 설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자립할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고, 불행하여 급난(急難)을 당한 자들을 구호(救護)해 주는 등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동군(董君)은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지극히 근면(勤勉)하고 간절(懇切)하였다. 또 해결되지 않고 있는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당사자들을 위해 비유(譬喩)를 들어가며 의리(義理)로 깨우쳐주곤 하였는데, 왕왕(往往) 쟁송(爭訟)의 당사자들이 마음으로부터 이 말에 복종하여 쟁송(爭訟)을 그만두고 떠나가기도 하였다. 흉년이 들면 간민(姦民)들이 멋대로 노략질을 했기 때문에 민심(民心)이 이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에 동군(董君)은 관(官)을 위해 계책(計策)을 내고 편의(便宜)로 창고를 열어 기민(饑民)들을 구제(救濟)함과 동시에 은밀(隱密)하게 병사를 보내어 그 거수(渠帥)를 엄습(掩襲)하여 잡아다 법정(法庭)에 세우니,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비로소 안정(安定)되었다. 평소 동군(董君)은 당세(當世)의 뜻을 지니고 있었기에, 관(官)의 정사(政事)나 민속(民俗)이 이장(弛張)하는 즈음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일찍이 동군(董君)은 그가 보고 듣고 생각해온 것을 기록(記錄)하여『활국서(活國書)』한 편을 지었는데, 그 말이 질박(質朴) 성실(誠實)하고 지극히 상세(詳細)했으나 화려하거나 사치하지 않았는데, 그 책의 규획(規畫)이 언제나 ‘아래를 두텁게 하고 근본을 단단히 함’을 우선으로 하였다. 이에 식자(識者)들이 모두 ‘옳다’고 여기면서, 그것이 세상에 사용(使用)되지 못한 것을 한탄(恨歎)하였다.
蓋君爲人儻蕩無城府, 家故饒給, 兄弟始求分異, 君力止之, 不可, 則盡聽其(7-4604)所擇, 而獨取其所遺及故書數篋藏焉. 旣而兄弟或破其産, 君極力資奉, 不計有亡, 死者葬之而撫其孤焉. 族姻鄕黨之貧無歸者衣食之, 罷不能者敎誨之, 不幸而有急難者救護之, 皆極勤懇. 鬪訟之不決者, 爲曉譬以義理, 往往心服, 失其所爭而去. 歲饑, 姦民肆掠, 物情大恐. 君爲官畫策, 以便宜發廩振貸, 而密以兵掩其渠帥寘于法, 人賴以安. 雅有當世之志, 於官政民俗弛張之際尤孜孜焉. 嘗記其見聞思慮所及者, 作活國書一編, 其言質慤詳盡, 不爲華靡, 而所規畫常以厚下固本爲先, 識者韙之, 恨其不得見於用也.
동군(董君)은 주씨(周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으니, 종기(從起)와 종치(從治)이다. 또 딸 여섯 중에 셋은 이미 출가(出嫁)하였는데, 진사(進士) 제절(齊節)과 정구(程矩), 제목(齊牧) 등이 그 사위들이다. 부인 주씨(周氏)는 동군(董君)이 죽은 그 다음 달에 그 동리(洞里)의 황백원(黃栢原)에 장사(葬事)하였다. 사수선생(沙隨先生) 정공가구(程公可久)께서 평소부터 동군(董君)을 알고 있었기에 기실 그 무덤에 명(銘)을 지어 묻게 되었다. 그런데 종기(從起)가 또 동군(董君)의 우인(友人)이자 태학사(太學生) 정단몽(程端蒙)이 쓴 행장(行狀)을 가지고 내게 와서 글을 지어 그 무덤 위에 표(表)할 것을 청(請)했다. 나의 옛 집이 동군(董君)이 살던 옆 현(縣)에 있었기 때문에 근년(近年)에 내가 마을로 돌아오던 중에, 동군(董君)은 그가 논한 경서(經書)와 제자(諸子)에 관한 학설(學說)을 가지고 와서 나와 만난 적이 있다. 서로 헤어진 후에도 동군(董君)은 여러 차례 글을 보내 와 질문(質問)을 하거나 논변(論辨)을 펼치곤 하였다. 그 당시 동군(董君)은 여전히 천하(天下) 국가(國家)를 경영하려는 원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 나는 내가 들은 바 고인(古人)의 위기(爲己)에 관한 학설을 그에게 고(告)해 주었다. 동군(董君)은 나의 말이 그르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동군(董君)의 죽음에 당하여 나로서는 어찌 아무 할 말이 없겠는가? 이에 정생(程生)의 행장(行狀)을 취(取)해 그 중 기념(紀念)할만한 큰 것들만 잘라내어 동군(董君)을 위한 묘표(墓表)를 쓰노라. 그리고 이를 종기(從起)에게 주어, 그가 돌아가서 이를 새기도록 하노라. 오호(嗚呼)라! 동군(董君)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도다! 그러나 동군(董君)에 대한 나의 이 말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백세(百世) 후에도 여기서 오히려 상고(詳考)할 것이 있으리! 순희(淳熙) 병오(丙午)년 3월 경진(庚辰)에, 선교랑(宣敎郞) 겸 직휘유각(直徽猷閣) 겸 주관화주운대관(主管華州雲臺觀) 벼슬을 하고 있는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술(述)하노라.
君娶周氏, 子男二人, 從起․從治. 女六人, 其三已適人, 進士齊節․程矩․齊牧其婿也. 君卒之明月, 葬其里之黃栢原. 沙隨先生程公可久雅知君, 實銘其壙. 而從起又以君友人太學生程端蒙之狀來請文, 以表墓上. 予故家君旁縣, 頃歲還里中, 君以所論經子諸說來見. 別後又數以書來, 有所問辨. 時君猶有四方之志, 予因以所聞古人爲己之說告之, 而君不以其言爲非也. 然則其可無詞? 乃取程生狀, 摭其可紀之大者, 書以授從起, 俾歸刻之. 鳴呼, 君則已矣! 而予言不沒, 則百世之下於此尙有考也. 淳熙丙午三月庚辰, 宣敎郞․直徽猷閣․主管華州雲臺觀新安朱熹述.
영인(令人) 나씨(羅氏)의 묘표(墓表)(令人羅氏墓表)
고(故) 좌사랑중(左司郞中) 장공(張公)의 배우(配偶)는 영인(令人) 나씨(羅氏)인데, 남검주(南劍州) 사현(沙縣) 사람이다. 나씨(羅氏)는 대대로 그 현(縣)의 명망(名望)있는 성(姓)이었고 그 집안의 가법(家法)은 엄정(嚴整)했다. 영인(令人)은 나이 스물 둘에 장공(張公)에게 출가(出嫁)했는데, 시어머니 나공인(羅恭人)을 잘 섬겨 효순(孝順)함과 공근(恭謹)함으로 인근에 소문이 났다. 이에 공인(恭人)은 나씨(羅氏)를 자기 딸과 같이 사랑했다. 장공(張公)은 본래 가난했다.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하던 터라 장차 그 여동생을 시집보내려 함에 혼인 물자(物資)가 없었다. 이에 영인(令人)은 자신이 간직해온 소중한 물건을 꺼내 주면서도 아끼는 기색(氣色)이 없었다. 또 장공(張公)의 두 형(兄)을 섬기는데, 아침저녁으로 여러 어린 아이들을 거느리고 차례로 두 분의 기거(起居)를 문후(問候)하였는데 하루도 예(禮)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아들이나 조카가 학문을 익히고 휴가를 얻어 돌아오면 번번이 탕병(湯餅)을 준비하고 여러 제사(娣姒) 및 남녀(男女) 친지들을 모아 서로 담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영인(令人)은 종용(從容)히 그 동안의 학업(學業)에 관해 묻기도 하고 여러 조카들을 위로하고 면려(勉勵)하며 아울러 영인(令人)의 자식도 함께 격려(激勵)했는데 유유(油油)한 듯하였다. 나공인(羅恭人)은 일찍이 말질(末疾)로 고생하였는데, 영인(令人)은 고요한 밤이면 반드시 향(香)을 피워놓고 ‘자신의 수명을 줄여 시어머니의 수명이 늘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祈禱)했다. 수개월을 이와 같이 하고나자 공인(恭人)의 병이 갑자기 평안(平安)해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3년 뒤에 영인(令人)께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에 공인(恭人)은 통곡(慟哭)하였다. 공인(恭人)은 더 나이가 들어서도 영인(令人)을 생각하여 잊을 수가 없었으며,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반드시 영인(令人)의 효성(孝誠)을 칭찬(稱讚)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아울러 ‘뜻하지 않게 내 아이가 이 같은 현명한 내조(內助)를 잃게 되었다오.’라며 탄식(歎息)하였다. 영인(令人)의 성품은 검약(儉約)하고 겸손(謙遜)하고 예법(禮法)을 좋아하였으며, 식견(識見)과 도량(度量)을 갖추고 있었다. 시집올 때 상자 속에 연한 청흑색(靑黑色)의 고운 갈포(葛布)옷을 가지고 왔는데, 기일(忌日)이 되면 그 옷을 입고 제사를 받들었고 예의(禮儀)에 맞게 칭위(稱慰)하였다. 영인(令人)이 늘 입던 예복(禮服)과 횡피(橫帔)는 민간(民間)의 법도(法度)와 같았다. 이에 혹자가 고(告)하기를 ‘장공(張公)께서 또 조적(朝籍)에 두루 미치시는데, 어찌하여 영인(令人)께서는 명복(命服)으로 바꾸어 입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영인(令人)은 이에 ‘장공(張公)께서 아직은 권귀(權貴)의 추천이나 발탁을 받은 것이 아닌데, 어찌 감히 명복(命服)을 입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예(禮)에 따라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영인(令人)은 정화(政和) 무술(戊戌)년에 태어나서 소흥(紹興) 계유(癸酉)년에 졸(卒)하였고, 검포현(劍浦縣) 오장씨(吳張氏) 대묘(大墓)의 몇 걸음 왼편에 장사(葬事)하였다.
故左司郞中張公之配曰令人羅氏, 南劍州沙縣人. 世爲縣望姓, 家法嚴整. 令人生二十有二年而歸張公, 事姑羅恭人以孝謹聞, 恭人愛之如己女. 張公故貧, 初仕, 將遣其女弟而無資. 令人悉出橐中裝以奉之, 無吝色. 事公二兄, 旦暮率諸幼稚以次問起居, 無一日闕禮. 子姪就學歸沐, 輒具湯餅, 會諸娣姒男女, 語次從容問所學業, 勞勉諸姪, 以勵其子, 油油如也. 羅恭人嘗苦末疾, 令人靜夜必露香致禱, 願損己壽以延姑年. 如是者數月, 恭人疾頓平. 而後三年, 令人一旦暴卒. 恭人哭之慟, 至老念之不能忘. 與人言必稱其孝, 至於泣下. 且歎曰: ‘不意吾兒失此內助之賢也.’ 令人性儉約謙下, 好禮法, 有識度. 嫁時篋中有黲色絺衣, 忌日輒被以奉祭, 稱慰如儀. 常所服禮衣橫帔, 如民間法. 或告以張公且通朝籍, 盍改用命服, 令人曰: ‘此非拜恩, 何敢服也?’ 卒以禮終. 生以政和戊戌, 卒以紹興(7-4606)癸酉, 葬劍浦縣吳張氏大墓之左若干步.
영인(令人)이 졸(卒)한 지 38년 후에, 영인(令人)의 사자(嗣子)인 사전(士佺)이 임장(臨漳)에 있는 나를 찾아와 방문(訪問)하고 좌사공(左司公)의 묘(墓)에 쓸 묘지명(墓誌銘)을 청(請)하였다. 하루는 그가 또다시 다시 영인(令人)의 일을 받들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청(請)하기를 “나의 어머니의 현명(賢明)과 효성(孝誠)이 이와 같았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전(士佺) 형제(兄弟)는 어머님 살아생전에 봉양(奉養)한 번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고, 이미 종천(終天)의 애통(哀痛)함을 짊어지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또 어머니의 덕(德)과 선행(善行)을 서술(敍述)하여 이를 영원(永遠)토록 후세에 드리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지하에서 어머니를 뵐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오자(五子)께서는 이 점을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했다.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에 나는 영인(令人)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받아 읽어보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효도(孝道)와 자애(慈愛) 그리고 화목(和睦)과 근신(謹愼)은 부도(婦道)의 떳떳한 덕목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인(令人)은 자신의 온 몸을 바쳐 시어머니의 죽음을 대신했으며 종신(終身)토록 예(禮)를 엄수(嚴守)하였으니 보통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도 현명(賢明)한 일이다. 그러니 어찌 이를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나는 이상과 같이 이 사실을 서술(敍述)하여 영인(令人)의 묘(墓)에 표(表)하노라. 영인(令人)은 아들 둘을 낳았다. 사전(士佺)은 지금 조봉랑(朝奉郞)으로 융주(融州) 통판(通判)의 일을 맡고 있다. 그의 동생 사한(士僩)은 일찍이 수직랑(修職郞)으로 번봉(藩葑)의 주고(酒庫)를 감독(監督)하는 일을 하다가 졸(卒)하였다. 영인(令人)의 네 딸은 모두 출가하였으니, 진사(進士) 종대동(宗大同)과 사서(謝舒) 그리고 선의랑(宣義郞) 진선경(陳善慶) 문림랑(文林郞) 황동(黃東) 등이 영인(令人)의 사위들이다. 소희(紹熙) 2년 2월 모일(某日)에 주희(朱熹)는 술(述)하노라.
後三十八年, 嗣子士佺來訪予於臨漳, 請銘左司公之墓. 一日, 復奉令人之事, 涕泣以請曰: ‘吾母之賢孝如此, 而不幸蚤終. 士佺兄弟生不及養, 已負終天之痛矣. 今又不能述其德善以垂久遠, 其何以見於地下? 惟吾子哀之.’ 予不忍辭也, 旣受其書而讀之, 因竊惟念孝愛和謹, 婦道之常, 世猶有難之者, 而令人至委身以代姑死, 守禮以終其身, 是其賢於人也遠矣, 其可以無傳也哉? 因爲叙此, 以表其墓. 令人生二男, 士佺, 今爲朝奉郞․通判融州事. 其弟士僩, 嘗爲修職郞․監藩葑酒庫以卒. 四女, 進士宗大同․謝舒․宣義郞陳善慶, 文林郞黃東其婿也. 紹熙二年二月日, 朱熹述.
정군정사(程君正思)의 묘표(墓表)(程君正思墓表)
선비는 배움(學)을 알지 못함을 근심하나 배움(學)을 알더라도 또 선택(擇)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올바른 선택이 가능하고, 또 그 선택한 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충분하다 해도, 안으로 자기의 사심(私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밖으로 속습(俗習)에 견제(牽制)당하지 않는 것, 이것이 또 어렵다. 오호(嗚呼)라! 번양(番陽) 정군단몽(程君端蒙) 정사(正思)와 같은 사람은 이른바 ‘선택할 줄도 알고 그것을 능히 실천할 수도 있었던 분’이라 하겠다. 정사(正思)는 과거(科擧)에 한번 급제(及第)한 일도 없고 오래 살지도 못하고 죽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덕업(德業)으로 성취한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슬퍼할만한 일이다. 정사(正思)의 천자(天資)는 단아(端雅)하면서도 신실(信實)했다. 어려서부터 이미 자호(自好)할 줄 알았으며, 조금 장성(長成)해서는 곧 널리 사우(師友)를 구하여 스스로 개익(開益)할 수 있었고 드디어 사예(詞藝)로 그 이름이 추천서(推薦書)에 오르게 되었다. 정사(正思)는 무원(婺源)에서 이미 나를 만나보았으며 또 여러 노선생(老先生)들이 사람들을 가르친 대지(大指)를 듣고 물러나 개연(慨然)히 발분(發憤)하였으며, 구도(求道)와 수신(修身)을 자신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토론(討論)과 탐색(探索)에 들인 그의 공력(功力)은 보통 사람의 두 배나 되었다. 비록 그는 철저하게 그 정미(精微)함을 궁구(窮究)하지는 못했지만 굳게 지키고 힘써 실천해나간 공력(功力)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처음에 [정단몽(程端蒙)이라는 그의] 이름의 아래 글자가 주정(周程)과 같았으나 이에 그는 급히 그의 부친(父親)에게 청(請)하여 이를 바꾸었다. 정사(正思)는 집에서 어버이를 섬길 때,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의리(義理)을 열어 보이곤 함으로써 어버이를 감오(感悟)케 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어버이의 환심(歡心)을 잃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모친(母親)의 상(喪)을 만나, 그는 장례(葬禮)와 제례(祭禮)를 모두 고경(古經)을 추본(推本)하여 행함으로써 유속(流俗)의 오류(誤謬)를 바로잡았는데, 향인(鄕人)들 중에는 이것을 법으로 여긴 이가 많았다.
士患不知學, 知學矣, 而知所擇之爲難; 能擇矣, 而勇足以行之, 內不顧於己私, 外不牽於俗習, 此又難也. 嗚呼!若番陽程君端蒙正思者, 其所謂知所擇而能行之者歟. 乃不及一試, 而又無年以死, 使人不得見其德業之所成就, 是可哀已.(7-4607)正思天資端慤, 自幼已知自好. 稍長, 卽能博求師友以自開益, 遂以詞藝名薦書. 旣乃見予於婺源, 聞諸老先生所以敎人之大指, 退卽慨然發憤, 以求道修身爲己任. 討論探索, 功力兼人. 雖其精微或未究極, 而其固守力行之功, 則已過人遠矣. 始時名下之字同於周程, 至是亟請其父而更焉. 其居家事親能開義理於幾微之際, 多所感悟而不失其驩心. 喪母, 葬祭推本古經, 以正流俗之謬, 鄕人多以爲法.
정사(正思)가 태학(太學)에 있을 때, 그 동년배(同年輩)들은 모두 세속에서 애호(愛好)하는 것들만 추구하고 성현(聖賢)의 학문을 외면했다. 이에 정사(正思)는 말이 통할만한 동년배를 골라 일마다 정성(精誠)을 다하고, 또 이들을 설득하고 유도(誘導)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사(正思)의 노력으로 인해 교화된 자가 자못 많았다. 또 정사(正思)의 사람됨은 강개(剛介)하여 구차히 영합(迎合)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학문을 강론하거나 정사(政事)를 의론하는 것을 듣고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을 때는, 문득 그 사람의 집에 찾아가 논변(論辨)하고 질정(質正)하거나, 편지를 보내 비유(譬喩)로 풀거나 분명하게 따졌는데, 반드시 그 시비(是非)와 가부(可否)를 지극히 분명히 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때마침 대신(大臣) 중에 호종(豪縱)을 즐기고 명검(名檢)을 천시하는 자가 있어, 도덕을 수양하는 선비를 보면 곧 이를 사기(邪氣)라고 지목(指目)하는가 하면, 또 주상(主上)께 “이런 무리들이 장차 나라를 망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에 학관(學官)에서도 대신의 그 풍지(風旨)를 받들어 [학생들에게] 시험(試驗)을 부과(賦課)했으니, 곧 왕(王), 정(程), 소씨(蘇氏)의 학(學)으로 질문(質問)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는 대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향배(向背)를 기준으로 취사(取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응대(應對)하는 자들은 미연(靡然)히 이런 풍지(風旨)를 쫓기만 하고 감히 그 잘못에 대해 바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사(正思)는 홀로 이 일에 대해 분연(奮然)히 직언(直言)하고 반론(反論)을 제기하여 의위(依違)하는 바가 없었고, 정(正)과 사(邪)의 차이를 구분하고 심천(深淺)의 정도를 따진 그의 논변(論辯)은 모두 이치에 맞았다. 정사(正思)는 비록 끝내 이 일 때문에 그들과 영합(迎合)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위는 당시 선비들이] ‘사(邪)를 억제하고 정(正)을 따르는 기풍’을 조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其在太學, 儕輩類趨時好, 不復知有聖賢之學. 正思擇其可告語者, 因事推誠, 誨誘不倦, 從而化者亦頗衆. 然其爲人剛介, 不苟合. 聞人講學議政有所未安, 輒造門辨質, 或移書譬曉, 必極其是非可否之分而後已. 會大臣有樂豪縱而賤名檢者, 見修士卽以邪氣目之, 而又言於上曰: ‘是屬且能亡人之國.’ 於是學官承其風旨, 因課試發策, 直以王 ․程 ․ 蘇氏之學爲問, 蓋將以其向背爲取舍, 對者靡然, 無敢正言其失. 正思獨奮筆抗論, 無所依違, 而所以分別邪正之間, 輕重淺深又皆中理. 雖竟以是無所合而歸, 然其抑邪與正之助亦多矣.
고향으로 돌아오자, 정사(正思)는 곧 병이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 때가 소희(紹熙) 11월 1일이니, 향년(享年) 49세였다.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바야흐로 병이 위독해지자, 정사(正思)는 직접 편지를 써서 내게 보내와 말하기를 “단몽(端蒙)은 죽음을 한(恨)하지 않습니다. 다만 끝까지 수양(修養)하여 선생의 문(門)에서 학업(學業)을 마칠 수 없는 것이 한(恨)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선생께서는 부디 자애(自愛)하시어, 좀 더 일찍 많은 저서(著書)에 착수(着手)하시어 후세의 철인(哲人)을 기다려 주십시오.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 해도, 하늘조차 어찌 나를 알아주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부터 ‘정사(正思)가 도(道)를 자임(自任)한 것이 용감했고 그의 용지(用志) 또한 전일(專一)했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정미(精微)함이 온축(蘊蓄)된 [우리의 유교적 진리를] 마침내 궁구(窮究)하여 이 도(道)를 널리 전(傳)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편지를 읽고서는 나도 모르게 목이 쉬고 눈물이 흘렀다. 잠시 후에 그 필적(筆跡)을 살펴보니 평일(平日)과 다름없이 근엄(謹嚴)하면서도 훌륭하였다. 이에 또한 ‘그가 생사(生死)의 즈음에 틈을 내어 쓴 필적이 이와 같음’을 깨닫고는 그 때문에 더욱 통석(痛惜)하였고 오랫동안 평안(平安)하지 않았다.
旣歸, 卽以病不起, 紹熙二年十一月一日也, 享年四十有九. 聞者莫不哀之. 方疾革時, 手書來曰: ‘端蒙死不恨, 恨不克終養而卒業於門耳. 然已無可言, 願(7-4608)先生自愛, 蚤就羣書以竢來哲. 世不我知, 天豈亦不我知也哉!’予雅意正思任道勇而用志專, 必能卒究精微之蘊, 以廣斯道之傳者. 遽讀其書, 不覺失聲流涕. 旣而視其筆跡謹好如常日, 又知其間於死生之際如此, 爲之痛惜, 久而不能平也.
그 명년(明年)에 정사(正思)의 부친(父親)은 그의 고향 어느 곳에 정사(正思)를 장사(葬事)했다. 그리고 정사(正思)의 두 동생인 단림(端臨)과 단본(端本)을 시켜 정사(正思)의 일을 기록하게 한 다음, 이 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정사(正思)의 묘표(墓表)를 부탁하게 했다. 이에 나는 그들의 말과 글에 따라 이 글을 쓴다. 정사(正思)의 증조(曾祖) 굉(宏)과 조부(祖父) 여능(汝能)은 모두 고향에서 훌륭한 행실로 이름이 있었다. 정사(正思)의 부친(父親) 역(易)은 지금 수직랑(修職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어머니는 유씨(兪氏)이다. 처(妻)는 왕씨(王氏)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그 이름은 사성(師聖)이다. 또 딸 하나가 있는데, 그녀는 같은 현(縣)에 살던 동준(董濬)에게 시집갔다. 그 나머지도 모두 내가 들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또 그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정사(正思)는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근신(謹愼)하고 신실(信實)하였다. 이에 정사(正思)의 대부(大父)는, 자신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정사(正思)가 [집안을] 맡길만한 아이임을 알고 한 늙은 여종에게 그를 특히 부탁(付託)했다. 그 때 정사(正思)는 14-5세였는데 눈물을 흘리며 조부(祖父)의 명(命)을 들었고 근실(勤實)하고 간절(懇切)하게 조부(祖父)를 보호하며 돌보았다. 그 이후 16년 동안 시종(始終) 조금도 나태(懶怠)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때쯤 병(病)이 났는데, 비록 병중(病中)이라도 존친( 尊親)이 왕림(枉臨)하면 반드시 두건(頭巾)을 쓰고서야 감히 만나 뵈었다. 정사(正思)가 장차 세상을 떠날 무렵, 그는 부녀(婦女)를 모두 문 밖으로 물리친 후, ‘치상(治喪)에는 부도(浮屠)의 법을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계(警戒)하였다. 두 동생과 붕우(朋友)에게도 모두 인륜(人倫)의 대법(大法)과 연관된 것을 고(告)했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마땅히 글로 써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다. 이에 이를 앞에서 논한 것과 함께 써서 묘(墓) 위에 새겨 두나니, 후세(後世)의 군자(君子)들이 거의 상고(上考)함이 있을 것이다. 소희(紹熙) 3년 가을 9월 을해(乙亥)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술(述)하노라.
明年, 正思之父將葬正思於其鄕之某處, 使其二弟端臨․端本狀其事以來, 請所以表其墓者. 予按其言, 正思曾祖宏, 祖汝能, 皆有鄕行. 父易, 今以修職郞致仕. 母兪氏, 妻王氏. 生一男, 師聖, 一女, 適同縣董濬, 而它則與予所聞者皆不異. 又觀其言, 正思自少謹信異常兒, 大父將沒, 知其可託, 以一老婢諉焉. 正思時年十四五, 涕泣受命, 護視勤懇, 十有六年, 始終無少懈. 至是屬疾, 雖病, 尊親臨之, 必冠巾乃敢見. 將卒, 悉屛婦女戶外, 戒治喪無用浮屠法. 所以告二弟朋友, 皆人倫大法所繫, 不雜它語. 是皆宜書, 因幷前所論者書之, 使碣墓上, 後之君子庶有考焉. 紹熙三年秋九月乙亥, 新安朱熹述.
정군공재(程君公才)의 묘표(墓表)(程君公才墓表)
소희(紹熙) 2년 겨울에, 번양(番陽) 정군정사(程君正思)는 자신의 병세가 장차 위독(危篤)해자 내게 편지를 보내와 영결(永訣)을 고(告)하고, 또 그의 선대부(先大父) 부군(府君)의 행사(行事)를 써 보내와서, 나로 하여금 그 묘표(墓表)를 기록해 줄 것을 요구(要求)하였다. 나는 이미 ‘정사(正思)가 배움에 힘쓰고 도(道)를 자임(自任)해 왔는데도 불행(不幸)하여 일찍 죽게 된 것’을 슬퍼하고 있던 차에 또 ‘그의 대부(大父)의 현명(賢明)함이 이와 같은데도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그 명성(名聲)이 전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물며 정사(正思)가 장차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깊은 슬픔을 간직한 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이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참으로 정사(正思)의 요청(要請)에 대해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었다.
紹熙二年冬, 番陽程君正思病且革, 以書抵予告訣, 且書其先大父府君之行事, 而求識其墓. 予旣哀正思之力學任道而不幸蚤死, 又知其大父之賢如此而無所聞於後世, 矧其將死, 深悲之屬不在它人, 是固不可以無言也.
정사(正思)의 말에 따르면, 부군(府君)의 휘(諱)는 여능(汝能)이고 자(字)는 공재(公才)이다. 천자(天資)가 순수(純粹) 독실(篤實)하여 학문(學問)을 말미암지 않고서도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저절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 부친(父親)의 성격(性格)이 엄격(嚴格)했지만 부군(府君)은 순종(順從)하며 섬겼다. 그러나 그 행사(行事)하는 가운데 미안(未安)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 간(諫)했고, 간(諫)해도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면 물러나 근신(謹愼)하며 가만히 헤아려 보고, 뜻이 이해되면 다시 간(諫)하였는데, 부친께서 끝내 들어주신 다음에라야 그만두었다. 모친(母親)은 말질(末疾)을 얻어 3년 동안 옷을 입고 벗을 때 띠를 풀 수 없었고 앉아 있다가 혼자서는 방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에 부군(府君)은 몸소 모친의 기거(起居)와 음식(飮食)을 때에 맞추어 조절(調節)해드리며 봉양(奉養)을 극진히 했다. 비록 똥오줌을 받아내는 일조차 타인(他人)에게 누(累)를 끼치지 않았다. 부군(府君)은 또 형(兄)을 섬김에 있어서도 매우 근신(謹愼)하였다. 그의 형은 술을 마시고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에 부군(府君)은 형의 잘못이 드러나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게 될까 두려워, 그 사이에 위곡(委曲)하여 지극히 미봉(彌縫)했고 끝내 이간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버이께서 돌아가시자 그 유산(遺産)을 나누는데, 형(兄)이 좋은 전택(田宅)을 가지고 싶어 했다. 이에 부군(府君)은 형이 취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서도 아무런 난색(難色)도 하지 않았다. 평소(平素) 악언(惡言)이나 망어(妄語)를 입에 담지 않았으며, 그의 족적(足跡)이 관부(官府)의 문(門)을 밟을 일이 없었다. 향리(鄕里)의 사람들을 대할 때는 순순(恂恂)하면서도 근엄(謹嚴)하고 신칙(申飭)했기에 그가 성내는 일이 없어도 사람들이 공경(恭敬)하고 두려워하였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으면 기필코 온 힘을 다해 그를 도와주었는데, 간혹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있어도 따져 문제 삼지 않았다. 향인(鄕人) 중 자식 없이 사망(死亡)한 자가 있었는데, 부군(府君)은 매우 신중하게 그의 상(喪)을 돌봐주었다. 혹자가 그 망인(亡人)이 남긴 재산을 빼앗으려 함에, 부군(府君)은 관(官)에 고(告)하여 그의 후사(後嗣)를 세워주었고 지금까지 그 후사(後嗣)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집을 돌볼 때 부군(府君)은 자애(慈愛)하면서도 근엄(謹嚴)을 잃지 않았다. 이에 자제(子弟)들이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조금도 저지르지 않았다. 지금 부군(府君)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향인(鄕人)이나 행려(行旅, 나그네) 중에 부군(府君)의 일을 말하면 아직도 그를 사모(思慕)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 오호(嗚呼)라! 정사(正思)의 부군(府君)이야말로 공부자(孔夫子)께서 이른바 “10호(戶)쯤 되는 조그만 읍(邑)에 있는 나처럼 충신(忠信)한 자”가 바로 그 분이 아닌가? 이런 분은 삼대(三代)의 유민(遺民)으로서 금세(今世)의 선비들로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가령 정사(正思)의 부군(府君)께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듣고 강학(講學)을 통해 그 가르침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더라면, 그가 어떤 경지에 도달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로다!
按正思言, 府君諱汝能, 字公才, 天資純篤, 不由學問而孝弟忠信自有以絶人者. 父性嚴, 府君事之順焉. 於其行事有未安者, 必以正諫, 諫而不入, 則退而謹伺之, 意解復諫, 卒聽從乃已. 母得末疾, 三年衣不解帶, 居不入室, 時其起居飮食之節而躬致養焉. 雖矢溲之役, 不以累它人也. 事兄謹甚, 兄好飮佚遊, 府君懼顯兄過以貽親憂, 委曲其間, 彌縫甚至, 卒以無間言. 親沒析其産, 兄欲善田宅, 恣所取無難色. 平生口無惡言妄語, 足迹不涉官府之門. 居鄕接物恂恂謹敕, 不怒而人敬畏之. 周人之急必盡其力, 雖或負之不計也. 鄕人有死而亡子者, 治其喪甚飭. 或欲沒入其貲産, 爲告官立後, 至今不絶. 處家慈愛而能嚴, 子弟不敢爲纖芥非理事. 今沒三十年, 鄕人行旅言之, 猶有思慕出沸者. 鳴呼! 玆非夫子所謂十室(7-4610)之邑, 忠信如己者乎? 是乃三代之遺民, 而非今世之士所能及也. 使其得聞聖賢之敎而講學以明之, 其所至可量哉!
정사(正思)의 병이 그토록 다급했는데도, 그가 써 보낸 글의 내용이 이처럼 상세했고 또 그 자획(字畫)이 근엄(謹嚴)하면서도 세밀(細密)함이 평상시와 같았다. 정사(正思)는 또 ‘그 밖에도 부군(府君)의 아름다운 행실이 있지만 이를 다 편지에 쓰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 정사(正思)의 집안을 묻고 이에 그 세계(世系)를 얻었으니, 곧 번양(番陽) 정가(程哥)들은 모두 양충장공령세(梁忠壯公靈洗)를 조상으로 여긴다. 당(唐) 건부(乾符) 연간에, 유(維)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겸 해주염철사(海州鹽鐵使)로서 군대를 거느리고 도적(盜賊)인 황소(黃巢)를 토벌(討伐)했으나 상황이 불리(不利)하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요주(饒州) 낙평(樂平)의 은성(銀城)에 거주(居住)하게 되었다. 후에 신건(新建)으로 옮겨갔는데 그 지역이 나뉘어져 덕흥현(德興縣)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지금 덕흥(德興) 사람이 되었다. 그 염철사(鹽鐵使)로부터 12세(世) 내려와서 부군(府君)의 부친 굉(宏)이 태어났다. 그도 또한 향리(鄕里)에서 덕행(德行)이 있었으며 제씨(齊氏)에게 장가들어 부군(府君)을 낳았다. 부군(府君)은 囗씨(囗氏)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 성(晟)과 역(易)을 낳았다. 성(晟)은 부군(府君)보다 먼저 죽었고 역(易)은 지금 수직랑(修職郞)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게다가 정사(正思)가 그 집 아들이니 아마도 정씨(程氏)는 앞으로 흥성(興盛)해질 것이로다! 이제 정사(正思)는 비록 불행하였으나, 그의 두 동생 역시 학문(學問)에 대한 안목을 지니고 있으니, 이 집안이 앞으로 얼마나 흥성(興盛)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이에 이 글을 써 주어, 이를 돌에다 새겨 묘(墓) 왼쪽에다 두게 하고 후인(後人)을 기다리노라. 정사(正思)의 부군(府君)의 묘(墓)는 囗향(囗鄕) 囗리(囗里) 모처(某處)에 있다. 성(晟)의 아들에 단우(端友)와 백운(伯雲)이 있다. 또 역(易)의 아들로는 단성(端誠)과 단몽(端蒙)과 단림(端臨)과 단본(端本)이 있는데 정사(正思)가 바로 단몽(端蒙)이다. 나는 또 이들의 이름을 그 묘(墓)에 특별히 기록해 둔다. 3년 임자(壬子) 가을 9월 병자(丙子)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이 글을 쓰노라.
正思病亟, 作書其詳如此, 而字畫謹細如常時. 且謂它行之懿, 猶有不及書者. 今問其家, 得其世系, 則番陽之程皆祖梁忠壯公靈洗. 唐乾符間, 有名維者, 以金紫光祿大夫․海州鹽鐵使將兵討巢賊不利, 始居饒州樂平之銀城. 後徙新建, 而地析爲德興縣, 故今爲德興人. 自鹽鐵十二世而生府君之父諱宏, 亦有鄕行. 娶齊氏, 生府君. 府君娶囗氏, 生二子, 曰晟․曰易. 晟先卒, 易今以修職郞致其事, 而又有正思爲之子, 意者程氏其將興乎!今正思雖不幸, 而二弟亦知爲學, 是固未可知也. 乃書此, 碑刻石墓左以竢. 墓在囗鄕․囗里某處. 晟之子曰端友, 曰伯雲. 易之子曰端誠, 曰端蒙, 曰端臨, 曰端本. 正思卽端蒙也, 予亦已別識其墓云. 三年壬子秋九月丙子, 新安朱熹書.
안인왕씨묘표(安人王氏墓表)
국자박사(國子博士) 성도(成都) 범문숙(范文叔)이 편지로 그 모부인의 일을 나에게 보내왔는데, 거기에서 말하기를 “중보(仲黼)가 하늘의 복을 타고나지 못하여 일찍이 선인(先人)의 가르침을 잃었습니다. 선부인(先夫人)께서 정성들여 돌보시고 이루어 주심이 매우 신중하시고 정성스러워 여기에 이르렀는데, 장례를 지내는데 명(銘)을 짓지 못하여 그 깊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이 근심스러워 감히 편안할 수가 없어 무례하게 청을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편지를 읽고, 감당하지 못할까 불안하였고, 또 그 행장을 읽어보니 문자가 더욱 난잡하고 천박하여 부인의 덕을 후세에 알릴 수가 없었다. 문숙의 어짊을 마음에 두고 있어 면식이 없어도 마음으로는 이미 그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또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렇게 극진하여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행장을 살펴보니 첨서(簽書) 동천절도판관청사(東川節度判官廳事) 노도지(盧蹈之)가 지은 것이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인은 성도 화양인(華陽人)으로 성은 왕(王)씨이다. 조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추증받은 연(延)이고, 조모는 문안군부인(文安郡夫人) 구룡씨(勾龍氏)이다. 부친은 좌조의대부(左朝議大夫) 보(輔)이고, 모친은 의인(宜人) 하씨(何氏)이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조용하고 재질(才質)이 명민하여 집안에서 칭찬을 받았는데, 나이가 차서 같은 군의 범최(范漼)에게 시집갔다. 대개 범씨는 촉군(蜀郡) 충문공․중서(中書) 영국공 대부터 허(許)․락(洛)에 옮겨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다. 문헌(文獻)을 멀리하지 않아 자제들은 모두 법도가 있어 청빈한 집안의 선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쉽게 상대하지 않았다. 부인이 일단 그 집 뜰을 밟으면 예용(禮容)이 엄숙하고 미세한 것까지 모두 빠짐없이 섬세하고 절도에 맞았다. 비록 방안에 있어도 예의와 정중함을 스스로 지켰다. 편안하게 쉴 때의 말도 외부에 말할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범군은 처음에 선정감(仙井監)의 녹사참군(綠事參軍)이 되었고, 후에 선교랑(宣敎郞)으로 아주(雅州) 노산현(盧山縣)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부인은 집안에 기거하면서 검약하여 출납의 자질구레한 일로 그 남편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범군은 구옥(具獄)을 조사하면 새벽이건 한밤중이건, 춥건 덥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인은 오히려 곁에서 그를 권하여 말하기를 “거리끼거나 감추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하지만 그에게 억울한 죽음을 지워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범군은 청백리로 유명하였고, 옥사를 다스리는데 진실하고 공평하였는데, 거기에는 부인의 조력이 있었을 것이다.
범군이 시종관(侍從官)이 되고나서 다시는 생리(生理)를 묻지 않았으니, 그가 죽고 나서는 가사(家事)가 더욱 더 영락하였다. 부인은 기꺼이 자신의 힘으로 그 어려움을 구제하였다. 두 아들을 학문에 진력하게 하여 대를 이어 과거에 올랐다. 사람들은 영예로 여기었으나 부인은 기쁜 안색을 띠지 않았다. 도리어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네 아버님이 이것을 보지 못한 것이 슬프다. 그렇지만 네 집안은 대대로 청렴과 바른 도로 문벌이 되었으니 너희들은 묻고 배워서 근본이 되는 것이 알아야 한다. 벼슬은 달하지 못할까를 걱정하지 말고 공평하지 못할까를 걱정하여라. 여구(藜糗)가 맛있다고 갑자기 세 개의 솥에다 그것을 만들어서는 없다”고 하였다. 두 아들이 이 말에 더욱 더 학문에 힘써서 중보(仲黼)는 몇 십 년을 문을 닫아걸고 벼슬에 나아가기에 급급하지 않았으니, 촉 사람들이 그 행실을 높이 여겼다. 동쪽의 오(吳)와 초(楚) 지방으로 유학하였는데 장경부와 여백공이 한번 보고는 모두 칭찬하였고, 자신들의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 조정에 있는데 알고 있는 것은 우러러 지키고, 세습을 따르지 않으면서 충군애국하고 정성스럽고 충실하기 그지없어 식자들이 모두 그를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이것은 또 부인의 가르침으로 이룬 것이다.
처음에 범군의 중형 홍아군(洪雅君)이 아들이 없이 일찍 죽었는데, 범군은 막내아들인 중예(仲藝)로 후사를 이으려 했으나 하지 못하고 죽었다. 6년 뒤에 중예가 성시(省試)에 합격하자 부인은 친척들은 모두 모아서 범군의 명을 조녜(祖禰)에 고하고 결국은 그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으니,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하기 힘든 일이라고 여겼다. 홍아의 처는 그 전에 이미 재가를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복(服)을 입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 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말하기를 “예(禮)에는 재가한 어미의 복은 입지 않는다고 되어 있으나, 율(律)에는 ‘심상(心喪) 3년’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또 이 사람은 일찍이 홍아의 아내였으니 예(藝)의 어미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는 곧 그날에 중예에게 율(律)과 같이 복상(服喪)할 것을 명하였다.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해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가 되면 몸을 깨끗하게 하고 예절을 다하여 빈객과 친척들을 접대하였으며, 한결같은 자애로움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렸다. 평소에 자손들을 가르칠 때는 옛 성현들의 언행을 인용하여 질정하였는데 또 그것이 모두 본말이 있어 써서 외울 만 하였다.
순희(淳熙) 8년 6월 갑진(甲辰)에 졸하여 13년 8월 병신(丙申)에 장사지냈는데, 묘는 쌍류현(雙流縣) 의성향(宣城鄕) 조지산(曹池山)에 있으니, 실로 노산군(盧山君)의 무덤을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남편으로 인하여 유인(孺人)에 봉해졌고, 뒤에 아들로 인하여 안인(安人)으로 추사되었다. 중보는 지금 통직랑(通直郞)으로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고, 황제의 조카 허국공(許國公)의 부교수를 겸하였다. 중예는 일찍이 종정랑(從政郞)으로 팽산령(彭山令)이 되었는데 먼저 죽었다. 딸 다섯은, 하나는 왕희맹(王晞孟)에게, 또 하나는 정사기(程師夔)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시집가기 않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아! 부인께서 그 지아비를 돕고 자식들을 이루어준 것들에 대해서는 노군의 행장에 자세하게 나오는데, 항상 하는 일과 같은 것들이다. 그 작은 아들을 보내서 중부(仲父)의 후사를 잇게 한 것이나 또 그 아들에게 후사로 간 집의 재가한 어미의 상복을 입게 하였으니, 일에 따라 변동성 있게 일을 처리하였으나 그 권도를 잃지 않았으니, 당세의 사대부도 매우 어려워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어질구나! 이것이 우리 문숙의 어머니가 된 까닭이로다. 아 어질구나! 소희(紹熙) 3년 임자 가을 9월 무자(戊子), 구위(具位) 주희 씀.
國子博士成都范君文叔以書致其母夫人之事於熹曰: ‘仲黼不天, 蚤失先人之(7-4611)敎. 先夫人撫育成就甚艱且勤, 以及于玆, 而葬不及銘, 無以發其潛懿. 吾心惄然不敢寧也, 敢拜以請.’ 熹讀其書, 旣蹙然不敢當, 又讀其狀, 益惟文字之蕪淺, 而無以信夫人之德於後世. 顧文叔之賢, 未及識面而心已敬之. 且其所以屬我者又如此其重也, 乃不敢辭. 而按其狀, 則簽書東川節度判官廳事盧君蹈之所述也. 其言曰:
夫人成都華陽人, 姓王氏. 祖曰贈金紫光祿大夫諱廷, 妣文安郡夫人勾龍氏. 父曰左朝議大夫諱輔, 妣宜入何氏. 夫人自幼以專靜才明稱於其家, 年甫笄, 歸同郡范君諱漼. 蓋范氏自蜀郡忠文公․中書榮國公徙居許, 洛, 至是始還故鄕. 文獻未遠, 子弟皆有典刑, 非淸門淑質, 不易作對. 夫人一踐其庭, 禮容肅穆, 纖悉中度. 雖在房闥, 禮敬自將. 燕私之言, 無一不可道於外者. 范君始爲仙井監錄事參軍, 後以宣敎郞知雅州盧山縣事. 夫人居家儉約, 不以出內細故累其君子. 范君閱具獄, 晨夜寒暑不少懈. 夫人猶從旁從臾之曰: ‘毋憚淹晷之勞, 而使彼負沒世之寃也.’ 故范君爲吏以淸白著, 其治獄以平允稱, 夫人蓋有助焉.
范君旣從官, 不復問生理, 身後家事益落落. 夫人慨然自力, 以濟其艱. 使二子得以盡力於學, 繼踐世科, 人以爲榮而夫人不色喜. 顧語之曰: ‘吾悲汝父之不
及見也. 雖然, 汝家世以淸德直道爲門閥, 汝曹問學宜知所本. 仕不患不達, 患無以稱耳. 藜糗吾能甘之, 毋遽以三釜爲也.’ 二子以是益自厲於學, 而仲黼杜門幾十年, 不汲汲於進取, 蜀人高其行. 東游吳․楚, 張敬夫․呂伯恭一見皆歎賞, 具以其學告之. 今在朝列, 尊守所聞, 不狥世習, 而忠君愛國, 悃款無已, 識者皆倚重焉. 此又夫人之敎有以成之也.
初, 范君仲兄洪雅君蚤卒無子, 范君將以少子仲芸後之, 未及而終. 後六年, 仲芸奏名南省, 夫人大合族黨, 申范君之命以告于祖禰, 而卒使奉其祀焉, 聞者皆以爲難. 洪雅之妻前已更嫁, 至是乃卒, 人以其服爲疑. 夫人曰:‘禮不爲嫁母服, 而律有心喪三年之文, 且是嘗爲洪雅配, 得不爲芸母乎?’卽日命仲芸服喪如律, 聞者益以爲難. 歲時典祀, 身親蠲潔, 待賓客․接宗姻曲盡禮節, 而御下一以慈恕. 至其平居敎詔子孫, 援前言․質往行, 又皆有本有末, 蓋可書而誦也.
卒於淳熙八年六月甲辰, 葬於十三年八月丙申, 墓在雙流縣宣城鄕曹池山, 實從盧山君之兆. 始以夫封孺人, 後以子贈安人. 仲黼今以通直郞爲國子博士, 兼皇姪許國公府敎授. 仲芸嘗以從政郞爲彭山令而先卒. 女五人, 一適王晞孟, 一適程師夔, 一未行, 餘皆夭.
鳴呼! 夫人之所以相其夫而成其子者, 盧君狀之詳矣, 然猶事之常也. 至其出少子以後仲父, 旣又使之服其所後嫁母之喪, 則處變事而不失其權, 有當也士大夫之所甚難而深愧焉者. 鳴呼賢哉! 玆其所以爲吾文叔之母也歟. 鳴呼賢哉! 紹熙三年玄黓困敦秋九月戊子, 具位朱熹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