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九十二
묘지명[墓誌銘]
악주사군 곽공 묘갈명(岳州史君郭公墓碣銘)
공의 성은 곽(郭)씨이고, 휘는 빈(份)이며 자는 중질(仲質)이다. 그 선조는 길수(吉水)에서 신감(新淦)으로 옮겼는데, 증조 단(亶)과 조부 휘(麾)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미약(彌約)이 비로소 벼슬을 했는데, 유능하여 칭송을 받았고, 조산랑(朝散郞)에 이르러서 졸하였다. 그의 행적을 조문한 자는 모두 당세의 직위가 높은 명사(名士)들이었다.
공은 어려서 침착하고 영민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을 할 수 있었다. 약관이 되어 진사에 급제하여 진주(辰州)․도주(道州)․남웅(南雄)의 주학(州學) 교수(敎授)와 형호남로(荊湖南路) 전운사간판공사(轉運司幹辦公事)가 되었다. 호남(湖南)은 군(軍)이 전함(戰艦)을 일으켜 관리하면서부터 마당에 재목을 쌓아놓고 오래되자 부패하였는데, 서로 이어서 정졸(丁卒)을 모아서 지키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공은 그것을 대(臺)에 아뢰어 재목을 헐어 땔나무로 쓰니, 정졸의 한해 옷과 식량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관은 남는 돈이 수십만이 있어 조정에 바치려고 의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계승할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사자가 그것을 중지하였다. 예릉(醴陵)에 호족이 있었는데, 백성의 밭을 취하여 살집을 지었다. 상류에 오래된 물막이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것을 옮기니, 밭이 잡초가 우거지고 망가져 송사가 수 십 년간 끊이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분별하기 어렵지 않다”고 하고 땅을 주위의 당과 함께 이어서 그림과 함께 그것을 보고, 한번 신문을 하고는 결단하니, 물막이를 상류로 돌려놓아 밭에 물을 대기가 처음과 같아졌다. 전운사(轉運使) 황약(黃約) 등의 추천을 받아 통판상덕군부사(通判常德軍府事)가 되었고, 비의(緋依)와 은어(銀魚)를 하사하였다. 상덕(常德)은 호북(湖北)에 있는 유명한 고을인데, 두 태수가 공적이 없었는데, 공이 가서 간곡하게 그를 도왔다. 정(靖)의 오랑캐가 법을 어기니, 왕사가 그를 토벌하였다. 공이 운송을 감독하는 일을 주관하였는데, 산행은 너무 어려웠고, 물길은 약수의 작은 성을 지나는데, 100여리를 물을 거슬러 오르니 더욱 더 험악하여 조운이 거의 통할 수 없었다. 공은 가볍게 차비를 하고 작은 배를 써서 수륙을 함께 진행시켜 군용이 모자라지 않도록 명하였다. 사(師)가 돌아와서 공적에 등급을 매기고 자리를 옮겼는데 흥국군수(興國軍守)로 발탁되었다. 군에 이르러 이전 수령이 죄를 지어 떠난 나머지를 물려받았는데 창고는 비어있었다. 북군(北軍)은 녹미를 주는 것이 때에 맞추어 도착하지를 않아 무리가 관청 이래서 떠들기도 하였다. 공은 유수(留守)에게 만곡(萬斛)을 공급하여 군(郡)의 쓰임을 넉넉하게 해 줄 것을 주청하여, 엄정한 명령을 펴서 벼슬아치들을 경계하고 또 녹봉을 지급하는 것을 아래로부터 하니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오래지 않아 근심이 사라졌다. 상을 벗고 궁궐에 일을 아뢰니 즉시 지악주(知岳州)로 제수되었다. 또 연수와 공로가 쌓여 조산랑(朝散郞)으로 옮겼다. 풍성(豊城)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병을 얻어 관사에서 졸하니 나이 57세였다.
공은 이(李)씨를 아내로 맞았고, 교(喬)씨를 재취하였다. 아들은 몽(蒙)이라 하는데, 지금은 적공랑(迪功郞)․신공주(新贛州) 서금현(瑞金縣) 동위(東尉)가 되었다. 딸은 둘이 있는데, 장녀는 팽호(彭浩)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고, 차녀는 시집가지 않았다.
공은 성품이 순수하고 검소하여 옷을 입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집안사람들은 습관이 되어 교만하고 사치할 줄을 몰랐다. 관직에 있을 때 세금 거두는 것을 잘못하여 혁혁한 이름은 갖지 못했으나 가는 곳의 상관들은 추천해주었다. 평시에는 온화하여 함부로 기뻐하거나 화내지 않았고, 일을 대하면 간사함을 없애고 숨은 것을 드러내니 다른 사람들 역시 어지럽힐 수 없었다. 공은 의(義)를 가장 좋아하였고 또 하는 일에는 용감하였다. 먼 친척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 공이 그것을 듣고 급하게 문서와 폐물을 보내어 속바치고 시집을 가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죽은 자가 있으면 공은 사체를 관에 넣어서 집으로 그 널을 돌려보냈다. 옛 동료 관리 중에 지역이 먼데, 가난하여 갈 수 없는 자가 있었다. 공은 그에게 행장(行裝)을 보냈는데 비록 신이나 포(袍), 건(巾), 복(幞)과 같은 것들이나마 다 갖추어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급한 일을 당하면 모두 이렇게 하였다. 일찍이 치도(治道)를 강(講)하였는데, 의역(義役) 절목(節目)을 문인인 이백현(李伯賢)에게 주어 그것을 받들어 행하도록 하여 그 고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지금 강서(江西)의 여러 군(郡)의 의역은 공이 실천한 것이다.
일찍이 문인에게 말하기를 “임금은 모범이 될 넓은 뜻이 있는데 문사와 무사는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널리 구휼하는 명령이 여러 번 내려져도 백성은 굳고 단단한 마음이 없다. 북군(北軍)은 동남(東南)에 나아가 먹고, 돈은 주현에 가득 찼는데 그 다음을 잘 하지 못한다. 이것이 세 가지 근심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임금을 뵌 것이 있었는데, 건의하기를 “상덕(常德)은 오랑캐의 출몰이 끊이지 않는 곳이고, 몇 년 사이에 또 차 도둑으로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만 둔병(屯兵)은 겨우 200명이어서 그것을 막기에 부족합니다. 호북(湖北) 한 도(道)는 북은 변경이고, 남은 골짜기가 있어 도적들이 많은데 성벽은 모두 수리되지 않아 뜻밖의 재난을 대비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형악(荊鄂)의 병사 천명을 상덕에 수자리를 살게 하여 여러 군의 좋지 않은 성들이 빨리 수리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곧 또 말하기를 “감옥이라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는 것이므로 추리(推吏)는 받는 녹봉이 후합니다. 그런데도 뇌물을 받는 것은 항상 중한 법으로 논죄해야 합니다. 옥졸(獄卒)이 몰래 형구(刑具)와 태형을 하는 채찍의 경중(輕重)을 조절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데에 이르면 참혹하고 가혹하기는 더욱 심한데, 지금 녹봉이 없으므로 간사한 이익을 위하는 자들은 쉽게 죄를 입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청컨대 유사에게 고하여 옥졸의 녹미를 의논하게 하시고 그 법을 중하게 하십시오. 의창(義倉)은 해마다 과부와 고아, 홀아비들을 진휼하는 것이 매우 두텁습니다. 그러나 그 혜택이 시정에 치우치고 산골짜기에는 미치지 않습니다. 향촌에 흩어져 있는 사관(寺觀) 거양원(居養院)을 나누어 배치하여 먼 곳에 사는 의지할 곳 없는 백성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은 당시 세상에 대한 뜻은 매우 많이 가지고 있었고 또 관리의 일에는 더욱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몇 가지 일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에 근거하여 보면 또한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능력을 다 했다면 어떻겠는가?
타고난 자질이 선을 좋아하여 당시의 덕 있는 사람과 훌륭한 선비를 보면 반드시 따라서 함께 사귀었다. 장사(長沙)에 있을 때는 고 시강(侍講) 장경부를 훌륭하게 여겼고, 경부는 그의 고요하고 단정하며 지조가 있는 것을 칭찬하여 자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이끌어 칭찬하였다. 시골에 살 때는 상주(常州) 유자징을 후대하여 자제들이 모두 그를 따라 배워 입지(立志)가 있었다. 공이 돌아가시자 몽(蒙)은 선(善)을 행하는데 더욱 스스로 힘써 일찍이 밭 2경을 의장(義莊)으로 삼아 가난한 친척에게 혜택이 미치게 하니, 사람들은 공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뜻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졸한 것은 순희(淳熙) 모년 모일인데, 장례는 9년 정월 을유(乙酉)에 치렀으며, 무덤은 길수현(吉水縣) 동수향(同水鄕) 적석담(赤石潭)의 들에 있다. 몽(蒙)이 유자징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저의 부친은 하풍(下風)의 의(義)를 매우 높게 여겼는데, 불행히도 끝내 벗이 되기를 정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또 불효하여 그 돌아가신 분의 생각을 위로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묘갈을 쓰지 못하였으니 감히 상주(常州) 유자징 선생의 소개로 청합니다. 선생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허락해주시면 돌아가신 부친께 주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슬퍼하여 그 사장(事狀)을 읽고 또 공이 사람됨이 이러한 줄을 알게 되었고, 또 이전에 공을 종유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 일을 서술하고 또 명(銘)을 지어 거기에 이어놓는다. 명에 이르기를,
단정하고 조용하여 지조가 있었고, 경건하고 영리하여 행하는 것이 있었네. 어찌하여 그 나이를 아껴 그 베풂을 끝내게 하지 않는가? 오직 뒷사람이 있어 당의 터를 만들려 하지 않고 기업(基業)을 버리지 않으니, 나는 이 돌에 새겨서 기약없이 알리노라!
公姓郭氏, 諱份, 字仲質. 其先自吉水徙新淦, 曾祖亶․祖麾皆不仕. 父彌約始仕, 有能稱, 至朝散郞以卒. 誄其行者, 皆當世達官名士.
公幼沈敏, 能自力學問. 甫冠, 中進士第, 爲辰州․道州․南雄州州學敎授, 荊湖南路轉運司幹辦公事. 湖南自軍興治戰艦, 積材於場, 久而腐敗, 相承募丁卒守視不已. 公白之臺, 毁材爲薪, 歲省衣糧萬計. 官有羨緡數十萬, 議欲獻諸朝. 公曰:‘此非可繼也.’ 使者爲止. 醴陵有豪族, 取民田以治居室. 上流有古陂, 輒從之, 田以蕪廢, 訟數十年不息. 公曰:‘是不難辨.’ 以地比與圖視之〔一〕 , 一訊而決, 還陂於上流, 漑田如初. 用轉運使黃鈞等薦, 得通判尙德軍府事, 賜緋衣銀魚. 尙德在湖北爲望郡, 更二太守無善狀. 公至, 委曲扶持之. 靖獠干紀, 王師討之. 公主督運, 山行旣艱, 而水道經若水寨, 遡流百餘里, 尤險惡, 漕幾不通. 公命輕裝淺舟, 水陸俱進, 軍用不乏. 師還, 第功遷秩, 擢守興國軍. 至郡, 承前守罪去之餘, 帑庾空乏. 北軍以壞假不時至, 或羣噪府下. 公奏留上供萬斛以寬郡計, 而申著令以戒有司, 凡給倭賜, 以下爲先, 衆乃悅服. 末久, 以憂去. 免喪, 奏事闕下, 卽日除知岳州. 又積年勞, 轉朝散郞. 還至豐城, 暴得疾, 卒於館舍, 年五十有七.
公娶李氏, 再娶喬氏. 男曰蒙, 今爲迪功郞․新贛州瑞金縣東尉. 女二人, 長適彭浩, 前卒, 次未嫁.
公性純儉, 被服如寒儒. 家人習慣, 不知爲驕奢. 居官歛晦, 不爲赫赫之名, 然所至爲上官所推擧. 平時溫溫, 不妄喜怒, 及其遇事, 破姦發伏, 人亦不能回也. 公最樂義, 亦勇於有爲. 有疏屬之女, 受鬻于人. 公聞之, 遽投牒道幣, 贈而嫁之. 鄕人有旅死者, 公爲棺歛, 歸其柩于家. 有舊同僚之宮, 地遠, 貧不能行. 公爲裝遣之, 雖靴袍巾幞之類畢具. 周人之急, 皆此類. 嘗因講治道, 以義役節目授其門人李伯賢, 令推行之, 自其鄕始. 今江西諸郡義役, 公實發之.
嘗謂門人曰:‘九重有規恢之志, 而文武士不任其責. 寬恤令屢下, 而百姓無固結之心. 北軍就食東南, 布滿州縣, 無以善其後. 是三患也.’ 嘗因賜對, 建言:‘常德當夷獠出沒之衝, 比年復有茶寇之警, 而屯兵財二百人, 不足用以彈壓. 湖北一道, 北被邊, 南控溪洞, 多寇賊, 而城壁皆不治, 尤非所以備不虞者. 請以荊鄂千人戍常德, 而諸郡城惡者亟治之.’ 便又言: ‘獄者, 人命所繫, 故推吏賦祿厚, 而受賕輒以重法論. 至獄卒陰操木索笞箠輕重之權, 慘虐尤甚, 而今以無祿, 故爲姦利者得從輕坐, 甚亡謂. 請詔有司議廩獄卒而重其法. 義倉歲賑矜寡孤獨甚厚, 然其惠偏於市井而不逮山谷. 請卽鄕落寺觀分置居養院, 以活遠民之無告者.’ 蓋公雅有當世之志, 而於吏事尤不苟. 其所欲爲固不止數事, 然卽此而觀, 亦足以見其所存矣. 使究其用, 當如何哉!
天資樂善, 見當世德人莊士, 必慕與遊. 在長沙, 善故張待講敬夫, 敬夫稱其靖端有守, 數爲延譽諸公間. 居鄕厚今劉常州子澄, 子弟皆從之學, 有立志. 公沒, 而蒙愈自力於爲善, 嘗以田二頃爲義莊周貧族, 人以爲猶用公平日之意也.
公卒以淳熙某年某月某日, 葬以九年正月乙酉, 墓在吉水縣同水鄕赤石潭之原. 蒙以子澄之狀來曰:‘吾先君子甚高下風之義, 顧不幸, 不得卒其定交之願以死. 蒙又不孝, 無以慰其泉壤之思. 唯是表墓之碣未有以書, 敢介常州以請. 吾子惠而許之, 則爲有賜於吾先矣.’ 予聞其言而悲之, 讀其事狀, 又知公之爲人如此, 亦恨前此之未始得從公遊也. 旣次其事, 又作銘以系之. 銘曰:
端而靖, 足以有守. 敬而敏, 足以有爲. 胡嗇於年, 不卒其施? 惟後有人, 克堂厥基. 我銘斯石, 以詔無期!〔一〕與: 疑當作‘輿’.
의인 왕씨 묘지명[宜人王氏墓誌銘]
우조청대부(右朝請大夫) 임(任)공 휘 현신(賢臣)의 처 의인(宜人) 왕(王)씨는 명주(明州) 자계현(慈谿縣) 사람으로, 고 조봉대부(朝奉大夫)․중서문하검정제방공사(中書門下檢正諸房公事) 휘 정수(庭秀)의 딸이다. 나이 열일곱에 임씨에게 시집갔다. 임씨는 대대로 미산(眉山)인인데, 후에 채주(蔡州)로 옮겼다. 정강(靖康)의 난 때 대부공의 곤제(昆弟)가 처음 그 모친 위국태부인(魏國太夫人)을 모시고 남쪽으로 멀리 달아나 살림이 적막해졌다. 의인이 시집갔을 때 차비가 매우 후하였는데, 모두 내놓아서 조석의 비용을 도왔다. 태부인을 모시고 사랑과 공격을 다하였고,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에 빠짐이 없도록 하였다. 이유없이 곁에서 떠난 적이 없었고, 병이 생기면 옷을 벗지도 못하였고, 죽과 약은 맛을 본 다음에 올렸다.
대부공과 서로 공경함이 손님과 같이 하였고, 보좌(補佐)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대부공은 무창(武昌) 통수(通守)였는데, 오래 군(郡)의 일을 대신 돌보았다. 전례에, 일을 대신 돌보는 자는 봉급을 받고 관아에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며 왕래하는 것이 모두 진짜 태수와 같이 하였다. 대부공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의인(宜人)에게 말하였다. 의인이 말하기를 “다른 때에 매우 가난하여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을 때의 일이 오늘날까지 이른 것입니다. 지금은 다행히 대강이나마 족하니 어찌 이것으로 스스로 욕되는 행위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부공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대부공은 여러 군의 태수를 거쳐 만년에 봉사(奉祠)로 돌아왔다. 어떤 사람은 그 정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으나 의인은 그칠 때와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한다고 경계하니 대부공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의인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먼저 약 한달 전부터 경계하고 대비하여 기간이 되면 엄숙히 재계하였으며, 매사를 반드시 친히 하여 비록 병이 들어도 억지로 일어나 술과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하는 것을 종신토록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자손을 가르치고 신칙하는 것은 매우 엄하여 말과 안색을 꾸민 적이 없었으며,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나 추위와 더위의 때를 맞추는 일이 모두 조리가 있었다. 은의(恩意)를 내릴 때가 있어도 떨어진 옷을 함부로 주지는 않았다. 병이 들고 나서도 가사를 그만두지 않아 안팎이 숙연한 것이 10년이었다. 순희 9년 11월 3일에 졸하였다. 향년 OOOO였다.
아들이 셋 있는데 황(瑝)은 선교랑(宣敎郞)․지강주 덕화현사(知江州德化縣事)를 역임했다. 개(玠)는 승무랑(承務郞)․지임강군 청강현사(知臨江軍淸江縣事)였는데, 모두 앞서 죽었다. 장(璋)은 적공랑(迪功郞)․원주 만재현승(袁州萬載縣丞)을 역임하였다. 딸 하나는 통직랑(通直郞)․용주(容州) 통판(通判) 정설지(程說之)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일곱이 있는데, 희이(希夷)는 진사에 올랐고 적공랑(迪功郞)․건녕부(建寧府) 포성현(浦城縣) 주부(主簿)로 옮겼다. 도남(圖南)은 적공랑(迪功郞)․엄주(嚴州) 건덕현(建德縣) 위(尉)가 되었다. 두남(斗南)․응남(應南)․붕남(鵬南)․단남(摶南) 등이 있다. 손녀는 셋이다.
장(璋)과 희이(希夷)가 10년 7월 OO에 의인(宜人)의 관을 받들어 소무군(邵武軍) 소무현(邵武縣) 장락(長樂)의 들에 장사지내고, 그 친구인 방사요(方士繇)에게 의인의 벌열(閥閱)과 사장을 짓게 하여 나에게 와서 묘지명을 청했다. 나는 선군자께서 일찍이 대부공과 형제처럼 어울렸으므로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고, 희이와 사요는 또 모두 나에게 와서 공부한 적이 있으므로 그 말이 의당 허망하지는 않았다. 이에 그 큰 줄기만을 산정하고 묘지명을 붙인다. 묘지명에 이르기를,
음식을 받들고 당(堂)에 올라 공경을 다하였고, 부자(夫子)의 다스림을 도와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네. 엄군(嚴君)처럼 숙연하여 주(周)의 예를 지니고 있었고, 고종명(考終命)을 맞아 길지를 정하여 여기에 묻혔네. 땅은 평평하고 물은 굽어졌으며 산은 우뚝하니, 장락(長樂)의 즐거움이 손자를 깨우치는구나!
右朝請大夫任公諱賢臣之妻宜人王氏, 明州慈谿縣人, 故朝奉大夫․中書門下檢正諸房公事諱庭秀之女. 年十七歸任氏. 任氏世爲眉山人, 後徒蔡州. 靖康之亂, 大夫公昆弟始奉其母魏國太夫人奔走南渡, 生理蕭然. 宜人嫁時裝甚厚, 盡捐以佐朝夕之用. 事太夫人盡愛敬, 甘旨無闕供. 無故末嘗輒去左右, 遇有疾, 衣不解帶, 粥藥嘗而後進.
與大夫公相敬如賓, 所以輔佐之者甚至. 大夫公嘗通守武昌, 久攝郡事. 前例, 撮事者受俸給與諸司問遺往來皆如眞太守. 大夫公疑之, 以語宜人. 宜人曰 : ‘異時貪甚, 宜不聊生, 亦且至今日矣. 今幸粗足, 何以是自汗爲哉? ’大夫公以爲然, 皆謝不取. 大夫公歷守數郡, 晩歲奉祠以歸. 或以其精力未衰, 猶可以復仕, 而宜人深以止足爲戒, 大夫公乃不行.
宜人治家嚴而有法, 歲時祭祀, 先旬月戒具, 至期齋肅, 每事必親, 雖疾亦强起, 中饋酒食之事, 蓋終身不以諉人. 敎飭子孫甚嚴, 未嘗假以言色, 而視其飮食․時其寒燠皆有條理. 遇下有恩意, 然敝衣袴亦不妄與. 旣病, 猶治家事不廢, 中外肅然者十年. 以淳熙九年十一月三日卒. 享年□□□□.
子男三人, 璜, 宣敎郞․知江州德化縣事. 玠, 承務郞․知臨江軍淸江縣事. 皆先卒. 璋, 迪功郞․袁州萬載縣丞. 女一人, 適通直郞․通判容州程說之. 孫男七人〔一〕, 希夷, 擧進士, 調迪功郞․建寧府浦城縣主簿. 圖南, 迪功郞․嚴州建德縣尉. 斗南․應南․鵬南․摶南. 女三人.
璋․希夷將以十年七月□□奉宜人之柩葬於邵武軍邵武縣長樂之原, 使其友方士繇述宜人閥閱事狀來請銘. 予先君子嘗與大夫公昆弟游, 義不可辭, 而希夷․士繇又皆嘗來學, 其言宜不妄. 乃刪取其大者而系以銘. 銘曰:
奉饋高堂恭敬止, 佐夫子治成厥美. 肅如嚴君秉周禮, 考終卜吉藏於此. 土平川紆山崛起, 長樂之樂詔孫子!
〔一〕記疑云‘七’疑當作‘六’.
지남강군 석군 묘지명[知南康軍石君墓誌銘]
내 친구 군자 석중(石重) 휘 모는 그 선조가 회계(會稽) 신창(新昌)의 우족(右族)이었다. 증조부는 벼슬하지 않았고, 조부는 경자(庚子)의 난을 피하여 비로소 태주(台州) 임해현(臨海縣)에 거주하였고 후에 유일(遺逸)로 부름을 받아 우적공랑(右迪功郞)에 제수되고 죽었다. 부친은 조봉랑(朝奉朗)에 증직되었다. 모친은 안인(安人) 주(朱)씨이고, 조모는 의인(宜人) 진(陳)씨이다.
군은 어려서 단정하고 성실하였으며, 민첩하고 총명하기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나이 12살에 스스로 뜻을 새기고 공부하여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18세에 진사에 뽑혔다. 부친상을 당하고 복을 벗고는, 좌적공랑(左迪功郞)․침주(郴州) 계양현(桂陽縣)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마침 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안간공(李安簡公)이 군(郡)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성품이 엄중하여 가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을 한 번 보고는 그를 매우 중한 그릇으로 여겨 그 집에 묵으며, 날마다 함께 예전의 일들에 대하여 논설하며 훌륭한 정치를 하도록 격려하였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살펴본 사람이 많은데 아직 석(石)군과 견줄만한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임기가 차서 종사랑(從事郞)을 거쳐 천주(泉州) 동안현승(同安縣丞)에 임명되었다. 날이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현(縣)은 부(府)에 아뢰어 옛일과 같이 그 해의 세금을 없앨 수 있도록 청했다. 태수(太守)는 노하여 군에게 격문을 보내어 주동한 아전을 매질하게 하였다. 군은 태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한 아전을 매질하는 것은 작은 일일뿐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연관된 일은 큰일입니다. 백성들은 지금 허둥지둥하며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는데도 그냥 놓아두고 구원할 수가 없는데, 차마 다시 그 입에 재갈을 물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수는 화내기를 그치지 않고, 막부의 관리를 보내어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관리가 와서는 태수의 뜻에 맞추어 세금을 없애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였다. 군은 힘을 다하여 따졌는데, 부(部)의 사자가 그것을 듣고는 그 일을 군에게 맡겼다. 군은 이미 조사한 결과를 행하고, 방을 내걸어 백성들에게 알려 세금의 열 중 아홉을 없애고 난 다음에 부(府)에 말하였다. 또 향리를 급하게 불러 관아에 가두고 고을에 하나의 방을 걸게 하고는 세금을 면제받은 집과 운송해야할 수를 나열하게 하였다. 방이 다 만들어지자 곧 마을의 아전에게 주어 달려가서 그 마을에 내걸게 하였다. 그리하여 상관이 그 말을 바꾸지 못하였고, 향리는 그 간사함을 다할 수 없게 되어 읍인들이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다시 선교랑(宣敎郞)이 되고 지상주무진현사(知常州武進縣事)가 되었다. 백성들의 송사 중에 수년간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군이 한번 신문하여 판별하니 비록 간사하고 교활한 백성이라도 모두 경복하고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그 읍에 체류된 송사는 대부분 군에게 맡겨 해결되었다. 군수(郡守)가 객을 머무를 집을 짓기 위하여 현에 부역을 부탁하였는데, 그 비용이 또 수십만이었다. 군은 옳지 않다며 말하기를 “나는 천자를 위하여 백성을 기르는데, 어찌 그 사람을 위하여 집을 짓겠는가? 또 내 백성들의 고혈을 앗아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짓은 나는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군수가 노하여 법으로 해롭게 하려고 하여 그의 잘못을 캐 모으려고 하였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마침 군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법으로 다른 현과 서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군은 돌아보지 않고 파직을 청하여 서둘러 돌아갔다. 백성들 수천인이 군에 와서 군을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되지 않으니, 서로 군수가 나가는 것을 살피다가 길을 막고 호소하다가 군수의 수레 회장을 빼앗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군수는 막지 못했다.
군이 다시 남검주(南劍州) 우계현(尤溪縣)에 임명될 차례를 기다리며 3년을 집에서 지냈는데 비록 가난하지만 서글퍼하지는 않았다. 관직에 나아가자 아전이 재물 함을 가지고 백성의 조세를 장려하기를 청했는데 군은 답하지 않고 다만 날마다 세금 장부를 살펴서, 백성이 도망하여 없어져 밭이 지금 있는 집으로 들어간 것과 재산을 팔았으나 그 장부를 고치지 못한 것을 모두 바로잡았다. 또 그 출납할 때를 잘 살펴서 간이하게 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고자 하였으며, 아전은 그 간사함이 용납될 수 없었다. 요지에 있는 시장에서 세금을 받는 것 역시 그 수를 줄였으니, 이에 관은 가혹하고 어지러움이 없고, 농업과 상업은 그 직분을 얻어 세금 수입이 때에 맞추어 이루어지고, 역역(力役)은 질서가 있었으니, 먼저 이정(里正)이 되려고 다투는 자까지 있었다.
현은 본래 궁벽하여 학교는 오래전에 폐하고 선비는 견문이 적어 학문을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군이 가서 그 친구인 고전(古田) 임용중(林用中)에게 명하여 와서 가르치는 일을 맡게 하고, 읍의 자제 중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자를 뽑아 제자원(弟子員)을 체웠다. 처음 가르치는 날 친히 좌사(佐史)와 빈객을 거느리고 거기에 가서 임하여, 성현이 가르치고 배운 것을 말하였는데, 수기치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 지금 말하는 자들과 같지 않아 듣는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움직였다. 이로부터 5일에 한번 가서 북을 쳐 생도를 모아 당에 올라서는 제생들에게 학업에 나아가는 차제를 묻고, 서로 반복하여 의리가 마땅히 귀착될 바를 구하게 하였다. 원외(員外) 제생들이 수 십 명이었고, 혹은 다른 지방의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 양식을 가지고 와서 취학하였다. 군은 이전의 학궁이 적합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 규모를 넓혀 건물을 새롭게 하고 책 만권을 사고, 밭 수백 무를 사서 거기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다 완성되고 나서는 고제(古制)를 살펴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여 낙성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비로소 배움을 알게 되고 백성의 풍속 역시 달라졌다.
군은 또 아름답지 못한 옛 풍속 몇 가지를 찾아서 글로 타일러 노력하도록 훈계하여, 백성들이 모두 베껴서 외우고 익히도록 하였다. 먼 시골이 험하다는 것을 핑계로 하여 스스로 호민으로 자처하여 조세와 부역을 수십 년 간 내지 않고, 날마다 함께 무리지어서 고을의 구적(仇敵)이 된 자가 있었는데, 군은 매질을 하여 깨우쳐 함부로 날뛰지 않고 명령을 듣고 조세를 내고 구적에서 벗어나 다시 다른 백성들과 같이 되게 하였다. 백성 왕(王)모라는 자가 형벌을 받아 옥에 옥안(獄案)이 이미 작성되고 선고문까지 갖추어졌는데, 관청의 아전이 지치지 않고 구하는 것을 막아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자 하였다. 군은 그것을 따졌으나 듣지 않자 스스로 옥에 가서 만나서 아전과 변론하여 백성을 대신하여 죽을 것을 청하여 백성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어느 해에 큰 돌림병이 있었는데, 대부분을 약을 지어 치료하고, 의원을 흩어져 있는 촌락에 나누어 파견하고, 자신은 시를 지어 그들을 권면하니 그에 힘입어서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그가 관직이 바뀌어 떠나자 백성들 중에는 그의 형상을 그려서 사당에 모시는 사람도 있었다.
감찰어사(監察御使) 진거선(陳擧善)이 그가 어질다는 것을 듣고 그를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군은 스스로 이부(吏部)의 전선(銓選)을 따라서 복건로(福建路) 안무사(安撫司) 간관공사를 제수받아서 갔다. 마침 승상 사공(史公)이 다시 들어와 일시에 명사 몇 명을 천거하였는데, 군은 다시 거기에 들었다. 불러서 보려는 임금의 특별한 명령이 있었는데, 군은 사양할 수가 없어 들어가 알현하였다. 먼저 인군(人君)의 도와 천(天)이 뜻이 같음을 말하였는데, 천심(天心)은 지극히 공정하므로 인군의 마음은 조금의 사심도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시사(時事)를 두루 끌어다 질문하니 말이 아주 사리에 맞고 적절하였다. 임금은 모두 긍정하고 감등문검원(監登聞檢院)으로 파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를 제수하고, 다시 태상(太常)으로 바꿔 제수하였다. 잠시 거기에 머물렀는데,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어,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뵙고는 봉사(奉祠)로서 부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를 제수받고 가려고 하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상을 마치지 않았는데, 재감자거자(材堪刺擧者)로 기용한다는 조칙이 있었다. 이부상서(吏部尙書) 정병(鄭丙)이 군을 만나보려 하였으나 군은 이미 그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가 졸한 것은 순희 9년 6월 을축(乙丑)이었고, 향년 55세였으며 관직이 조산랑(朝散郞)에 이르렀다.
군의 사람됨은 밖으로는 온화하고 안은 강직하여 평소에는 온화하고 공손하여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일을 당하여 결단을 하면 의연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색이 있었다. 계모를 모시는 것은 뜻에 따라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고, 형제간에는 화목하였다. 친척 중에 가난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면 밭을 팔고 금을 내놓아서라도 생계를 구제하였다. 그 아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아들과 같이 하였고, 고아가 된 처녀를 시집보내어 많은 사람이 의탁할 곳이 있게 하였다. 길에서 버려진 아이를 만나면 사람을 불러서 어미가 되게 하고, 달마다 (식량을) 공급하여 주었다.
그가 정치를 한 것은 한결같이 애민(愛民)을 주로 하였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매우 간절하여, 어진 인재를 쓰고 물리침과 정령(政令)의 득실에 있어서 하나라도 들리는 것이 있으면, 근심하고 기뻐하는 순수한 마음이 말과 안색에 드러나서 혹은 며칠씩이나 풀어지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는 매우 간소한데 처하였고, 스스로는 매우 엄하게 규율하여, 주현(州縣)에 있을 때는 윗사람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굽힌 적이 없었고, 조정에 있을 때는 권력을 잡은 사람을 찾아간 적이 없었다. 천자를 알현하였는데, 말을 다하고 충을 다하여 조금도 우회하거나 피하려는 계략이 없었다.
그가 학문하는 것은 빙군조봉(聘君朝奉)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그 업을 전하였으며, 후에 다시 외숙부인 태자첨사(太子詹事) 진량한(陳良翰)을 따라서 글을 배웠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들으면 반드시 손으로 써서 마음으로 그를 사모하였다.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비록 어리고 천하거나 구석지고 먼 곳이라도 꺼리지 않았다. 그가 나와 함께 어울릴 때 서로 좋게 여김이 더욱 도타와졌다. 만년에 그가 한가하게 지내던 집에 이름을 붙이기를 “극재(克齋)”라 하고, 거기에서 독서하며, 죽을 때까지 게으르지 않았다. 학문을 굳게 지키며 바른 데로 나아가는 후생은 모두 군에 의지하여 나아갈 바를 알았으나 군은 조금도 스스로 만족한 적이 없었다. 그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나는 전해에 남강(南康) 군수였는데, 조정에서는 군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 교대하여 제수하였다. 나 역시 밤낮으로 군이 오기를 기다리며 늙고 지친 무지한 학자가 기댈 수 있기를 바랐으나 군은 결국 오지 못하였다. 당년에 절동(浙東)에 왕명을 받들고 가서 신섬(新剡)의 기민(饑民)이 태(台)의 지경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급히 군에게 맡겼다. 군은 곧 흔쾌히 자신의 임무로 맡아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 굶어죽기를 면하고 돌아간 자가 수백 인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일로 태(台)에 이르렀는데, 이미 군을 볼 수 없었고, 그 빈소에서 곡하였다. 아, 슬프다!
군의 아내는 주(朱)씨, 유(劉)씨, 이(李)씨인데, 모두 안인(安人)을 증직하였다. 강(姜)씨는 안인에 봉해졌다. 아들은 넷인데, 계미(繼微)․계유(繼喩)․계선(繼善)․계주(繼周)다. 딸은 다섯인데, 장녀는 번적(范籍)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상월경(商月卿)과 혼인하도록 약속되었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군의 글은 분명하고 곧아서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러나 이유가 없으면 짓지 않았다. 지금 문집 10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주역․대학․중용의 해(解)를 모은 것이 또 수십 권 학자에게 전한다.
계미 등은 12월 경신(庚申)에 군을 용곡산(龍谷山) 운계(雲溪) 선영의 옆에 장사지내려고 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그 때 나는 이미 병이 들어 고향에서 쉬고 있어 가서 군의 가는 길을 전별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일을 서술하고 묘지명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나는 이 사람의 병을 슬퍼하면서도 낫게 해주지 못했네. 이 학문이 외롭게 됨을 슬퍼하면서도 함께 짝하지 못했네. 또 군이 뜻이 있음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서로 사귀지 못함을 슬퍼하네. 시간은 기다릴 수가 있다고 해도 군은 머물지 못했구나. 용곡의 성과 운계의 유택은 망망(茫茫)함을 알리니 이것을 새길 데가 없구나!
吾友石君子重諱某, 其先世爲會稽新昌右族. 曾大父諱某, 不仕. 大父諱某, 避庚子之亂, 始居台州臨海縣, 後以遺逸召, 授右迪功郞以沒. 父諱某, 贈朝奉郞. 母安人朱氏. 太宜人陳氏.
君幼端慤, 警悟不群. 年十二, 卽自知刻意爲學, 晝夜不怠. 年十八, 擢進士第. 丁外艱, 服除, 授左迪功郞․郴州桂陽縣主簿. 會故參知政事李安簡公謫居郡下, 性嚴重, 不經許可. 一見君, 深器重之, 授館其家, 日與論說前言往行, 勵以致遠之業. 常請人曰:‘吾閱人多矣, 未有石君比者.’
秩滿, 循從事郞, 調泉州同安縣丞. 天旱民饑, 縣白府, 請得蠲歲租如故事. 太守怒, 檄君杖主吏. 君移書太守曰:‘杖一吏細事耳, 然其所繫則大. 民今皇皇無以爲命, 縱不能救, 忍復箝其口乎? ’守怒未已, 遣幕府官按驗, 至則希守意, 以爲不當蠲. 君爭益力, 部使者聞之, 因以其事諉君. 君旣行視歸, 卽揭牓喩民, 蠲之什九, 然後言府. 且亟召鄕吏閉廨中, 使鄕爲一榜, 戶列所蠲與其當輸之數. 旣成, 立授里胥, 使走揭於其所. 於是上官不得變其說, 鄕吏無所逞其姦, 邑人便之.
改宣敎郞, 知常州武進縣事. 民訟有數年不決者, 君一訊立辦, 雖姦民健猾者亦皆驚服愧謝而去. 它邑滯訟, 多請屬君以決. 郡守欲爲寓客治第而屬役於縣, 其費且數十萬. 君不可, 曰:‘吾爲天子牧民, 豈爲若人治第者耶? 且浚吾民之膏血以媚人, 吾不忍也.’ 守怒, 欲中以法, 掇拾亡所得. 會君有親嫌, 法當兩易. 君不顧, 求罷徑歸. 民數千人詣郡請留君, 不可, 則相與伺守出遮道號訴, 至有褫其襜帷者, 守不能禁.
君因更調南劍州尤溪縣待次, 家食三年, 雖貧不戚也. 至官, 吏以財匱請借民租, 君不答, 但日治稅籍, 凡民逃絶而田入見戶者與鬻産而不能更其籍者皆正之. 又謹視其出內之際, 要爲簡易以便民, 而吏不得以容其姦. 關市之征亦損其數, 於是官無苛擾, 農商得職, 租入以時, 力役有序, 至有爭先爲里正者.
縣故窮僻, 學校久廢, 士寡見聞, 不知所以爲學. 君至, 卽命其友古田林用中來掌敎事, 而選邑子願學者充弟子員. 始敎之日, 親率佐史宿賓客往臨之, 因爲陳說聖賢敎學, 凡以爲修己治人之資, 而非如今之所謂者, 聞者皆動心焉. 自是五日一往, 伐鼓升堂, 問諸生進業次第, 相與反復, 以求義理至當之歸. 員外諸生數十, 或異邦之人, 皆裏糧來就學. 君視故學宮爲不稱, 乃廣其規模, 新其棟宇, 市書萬卷, 買田數百畝以充入之. 旣成, 爲考古制, 擧鄕飮酒禮以落之. 於是士始知學而民俗亦變.
君又摭其舊俗之不美者數事, 爲文以訓飭之, 民皆傳寫誦習焉. 遠鄕有據險自豪, 不輸租賦數十年, 日與比鄕爲仇敵者, 君爲榜以喩之, 卽歛手聽命, 輸賦解仇, 復與齊民齒. 民王某者有刑罪, 具獄上, 府吏以邀求不厭, 欲致之死. 君爭之不聽, 則請自對獄, 與吏辯, 代民死, 民乃得免. 歲大疫, 多治藥劑, 分遣醫者散之村落, 自爲詩以勸之, 賴以活者甚衆. 及代去, 民或畵象祠之.
盛察御史陳公擧善聞其賢, 薦之朝, 而君自從吏部選授福建路安撫司幹辦公事以去. 會丞相史公再入, 薦一時名士數人, 君復與焉. 有旨召對, 君辭不獲, 乃入見. 首陳人君之道與天同方, 天心至公, 故人君之心不可以有一毫之私. 因歷引時事以質之, 言甚剴切. 上皆然之, 差監登聞檢院. 未幾, 除將作監主簿, 尋改太常. 居頃之, 有所不樂, 因謁告歸省, 請得奉祠終養. 除知南康軍事, 將行而遭內艱. 未終制, 有詔擧材堪剌擧者. 吏部尙書鄭公丙以君對, 然君已不及聞矣. 其卒以淳熙九年六月乙丑, 享年五十有五, 積官至朝散郞.
君爲人外和內剛, 平居恂恂, 如不能言者. 而遇事立斷, 毅然有不可犯之色. 事繼母承順不違, 兄弟之間怡怡如也. 族黨有貧不能自活者, 買田捐金以振業之. 敎其子與己子等, 嫁孤女多得所歸. 道遇棄子, 募人母之, 月有給焉.
其爲政一主於愛民, 而憂國之心又甚切, 於賢材之用舍, 政令之得失, 一有所聞, 憂喜之誠形於言色, 至或累日不解. 然自處甚約, 自律甚嚴, 在州縣未嘗屈意上官, 在朝廷末嘗造請當路. 繇疏賤一旦見天子, 盡言竭忠, 未嘗少爲迂回避就之計.
其爲學自聘君朝奉時已傳其業, 後更從舅氏太子詹事陳公良翰受書焉. 聞人之善, 必手記而心慕之. 其人可見, 雖少賤僻遠不憚. 其與予遊, 相好尤篤也. 晩名其燕居之室曰‘克齋’, 讀書其間, 沒身不懈. 後生執業就正者, 皆賴君知所鄕, 而君未嘗少自足也. 此其志豈可量哉!
予前年守南康, 朝廷以君與予善, 除以爲代. 予亦日夜望君至, 冀得用疲甿學子爲寄, 而君不果來. 當年奉使浙東, 聞新剡饑民轉入台境甚衆, 亟以屬君. 君卽慨然以爲己任, 其得免於饑凍捐瘠而歸者蓋數百人. 然其後予以事至台, 則已不及見君而哭其殯矣. 鳴呼悲夫!
君之配朱氏․劉氏․李氏, 皆贈安人. 姜氏, 封安人. 子男四人, 繼微․繼喩․繼善․繼周. 女五人, 長適范籍, 次許嫁商月卿, 餘尙幼.
君爲文明白徑切, 似其爲人. 然非有故, 未嘗作. 今有文集十卷藏於家. 所集周易․大學․中庸解又數十卷傳學者.
繼微等將以十二月庚申葬君龍谷山雲溪先塋之側, 使來請銘. 時予已病, 歸臥故山, 念不得往而祖君之行也, 乃敍其事而銘之. 其詞曰:
予悲斯人之病, 而莫與瘳也. 悼斯學之孤, 而莫與儔也. 又哀君之有志, 而久不酬也. 時若可竢, 而君不留也. 龍谷之城, 雲溪之宅, 詔彼茫茫, 不在斯亥
영국부인 관씨 묘지명[榮國夫人管氏墓誌銘]
고 참지정사(參知政事)․회계(會稽) 이안간공(李安簡公)의 아내는 영국부인(榮國夫人)이라고 하는데, 성은 관(管)씨이다. 그 선조인 제(齊)의 대부 경중(敬仲) 상(相)은 환공(桓公)이 제후를 제패하는데 공이 있어 대대로 제에서 제사를 지냈다. 중간에 말릉(秣陵)으로 옮겼고, 후에 오계(五季)의 난의 피하여 다시 처주(處州) 용천현(龍泉縣)으로 옮겼는데, 오래도록 드러나는 자가 없었다. 부인의 증조부 대충(大忠)에 이르러 아들 사인(師仁)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어, 태자소사(太子少師)를 증직받아 비로소 군에서 드러나는 성(姓)이 되었다. 추밀의 동생 사순(師醇)은 승사랑(承事郞)에 증직되고, 아들 시가(時可)를 낳았는데, 경전에 밝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여 향리에서 으뜸이 되어 원근에서 수업한 선비가 매우 많았다. 일찍이 그를 조정에 천거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아 끝내 벼슬하지 않고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선생으로 그를 불렀고, 후에 역시 승사랑(承事郞)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그 작은 딸이다. 나면서부터 정숙한 덕이 있어 친척들이 그 유순함을 칭찬하였는데, 이(李)공이 그것을 듣고 아내로 맞았다. 그 때 공이 바야흐로 시어사(侍御史)로서 언사(言事)로 인하여 귀양을 가서 매우 가난하였다. 부인은 집안에 들어와서 태연하였고,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뜻이 없었다. 후에 공이 다시 당시에 필요한 인재로 등용되어 시종(侍從)으로 참여하고, 궁궐을 나와 번방(藩邦)의 요지로 나갔다가 드디어 묘당(廟堂)에 오르고, 승상 다음의 지위에 올라 녹봉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부인은 검소하게 지내어, 음식과 거처에서 스스로 봉양하는 것이 전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공을 따라 군(郡)을 지키면서 번번이 집안사람들이 벼슬하는 곳에서 하나의 물건도 살 수 없게 경계하였다. 선성(宣城)에 있을 때 거도(巨盜)가 갑자기 닥쳐서 매우 심하게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공은 힘을 다하여 성을 막아 지켰으나 부인은 아이를 낳고 병을 얻어 매우 위급하니, 공이 근심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니 공은 마땅히 한결같이 적을 막고 나를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은 그 말을 장하게 여겨 기력을 떨쳐 성을 순시하니 적이 흩어져 달아났다. 공이 진회를 거슬러 령외(嶺外)로 귀양을 갔다가 드디어 해남(海南)으로 떠나 담이(儋耳)에 거하였는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집안은 고향에 남아있었는데, 날로 더욱 곤궁해졌다. 부인은 비녀와 귀고리를 팔아 씀씀이를 대었고, 자신이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10여년 이었으나 그다지 슬퍼하지도 않았다. 진회가 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한하여 공의 아들 맹견(孟堅)을 잡아 정위(廷尉)에 메어놓고 이광이 지은 사서(史書)의 일로 무고하여 관리를 보내 그 집안을 수색하였다. 어떤 사람이 “부인 역시 잡힐 것이다”라고 하며 문을 닫고 놀라 떨었다. 부인은 홀로 태연히 동요하지 않고 말하기를 “화복이 오는 것은 피하거나 쫒을 수 없으니 본래 이것을 탓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하니, 결국 다른 일이 없었다.
처음에 부인이 시집갔을 때 시부모를 뵙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해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청결히 재계하고 엄하게 삼가, 씻고 음식을 삶고 끓이는 모든 일을 반드시 친히 하여, 노인을 모시는 것보다 더욱 도타웠다. 여러 자녀 중 첫 부인인 황(黃)씨의 소생이 많았고, 부인은 2남 2녀만을 낳았으나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은 똑같아 이간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남쪽으로 옮길 때 2남은 모두 비로소 몇 살이 되었을 뿐이다. 부인은 그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약관이 되었을 때는 모두 문행(文行)으로 칭송받았다. 공이 와서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이들을 가르쳤어도 이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며느리들을 대우하기를 자신의 딸처럼 하였고, 가까운 사람을 만나면 너그러우면서도 절도가 있었고, 미치지 않는 바가 있으면 힘써서 덮고 가려주었다. 평소에는 단정하고 엄숙하며 한결같이 고요하며, 거동에 상도(常度)가 있어 내외의 친척들이 모두 그 어짊을 모범으로 삼았다. 일찍이 조용히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마음 씀은 공정해야하고, 사물을 대할 때는 너그러워야 한다. 내가 비록 배우지 않았으나 이것에 대해서는 터득한 것이 있으니 종신토록 그것을 행하여 감히 하루도 잊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대개 이공은 평생 강직함으로 이름이 났고, 만년에 참소를 당하여 나라를 떠나 변방으로 유배되어도 지조를 지켜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고, 또 부인의 덕은 이와 같이 그와 짝이 되었으니, 역시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겠다.
여러 번 진운군부인(縉雲郡夫人)으로 봉해졌는데, 순희 2년 2월 모일에 훙(薨)하니 향년 72세였다. 10월 병신(丙申)에 회계현(會稽縣) 태평향(太平鄕) 관양촌(官漾村)에 장사지냈다. 후에 아들 맹진(孟珍)이 관직을 올려서 봉호를 더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영국(榮國)의 칭호를 갖게 되었다.
아들은 다섯인데, 맹박(孟博)은 우선교랑(左宣敎郞)․태주 숭도관(台州 崇道觀)을 주관하였다. 맹견(孟堅)은 우선교랑(右宣敎郞)․회동 상평차염공사 제거(淮東 常平茶鹽公事 提擧)이다. 맹순(孟醇)은 벼슬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먼저 죽었다. 맹진(孟珍)은 통직랑(通直郞)․강음군 권발견사(江陰軍 權發遣事)이다. 맹전(孟傳)은 종사랑(從事郞)․절동 제거 상평사간판공사(浙東 提擧 常平司幹辦公事)이다. 딸은 다섯인데, 장녀는 좌조산랑 조수(左朝散郞 曹粹)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등사랑 진여즙(登仕郞 陳汝楫)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진사 육권지(進士 陸權之)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승직랑 심정(承直郞 沈程)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봉의랑 장구(奉議郞 章駒)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조봉대부(朝奉大夫) 반치(潘畤)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여덟인데, 지상(知常)은 종사랑(從事郞)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지미(知微)는 종사랑이다. 지언(知言)과 지이(知易)는 모두 승무랑이다. 지퇴(知退)와 지효(知孝), 지화(知和)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손녀는 열 하나인데 그 중 넷은 이미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는 각각 하나인데 모두 어리다.
처음에 대리경(大理卿) 장공(章貢) 증봉(曾逢)이 딸을 절동(浙東) 종사(從事)인 맹전에게 시집보냈는데, 부인의 행사의 실질을 깊이 알았다. 이미 행장을 쓰고 나서 묘지명을 청하려 하였으나 아직 부탁하지는 않았다. 증공이 졸하고 강음사군(江陰使君)이 행장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이미 늙고 또 궁벽한 고을에 머물러 있어, 그 집에 가서 정성을 다하여 부인 집안의 관리를 볼 수가 없었고 또 증(曾)공이 또 먼저 하던 것이므로 처음에는 감히 맡지 못하였다. 선군자께서 일찍이 안간공을 알던 것을 생각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묘지명을 쓴다.
부덕의 아름다움은 유순함이지. 유순함을 줄기로 삼으면 그 덕은 다스려진다네. 사람들이 부인을 말하기를 자애가 아니면 효인데, 나는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생각하니 꺾을 수가 없네. 가난하면 편안하고 부유하면 절제하며, 예를 행하며 사사로움을 이겼네.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험한 일을 겪으면서도 평탄한 듯이 하였네. 굳세고 강직함을 한결같이 척도로 삼았네. 그 어려움을 쉽게 하여 편안하고 즐거워하였네. 오직 공과 부인은 덕을 합하고 시행하기를 결심하였네. 부인은 편안하고 안간공은 위태로웠네. 그 끝을 맞으면서도 둘 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네. 전(箋)도 아니고 사(辭)도 아니라 어찌 죽음을 알리는가?
故參知政事․會稽李安簡公之配曰榮國夫人, 姓管氏. 其先齊大夫敬仲相桓公霸諸侯有功, 世祀於齊. 中徙秣陵, 後避五季之亂, 復從處州龍泉縣, 久未有顯者. 及夫人之曾大父諱大忠, 以子師仁同知樞密院事, 贈太子少師, 始爲郡著姓. 樞密之弟師醇贈承事郞, 生子時可, 以明經飭行爲鄕里所宗, 遠近受業之士甚衆. 嘗有欲薦之朝者, 謝而不許, 竟不仕以卒. 鄕人皆以‘先生’稱之, 後亦贈承事郞.
夫人其季女也. 生有淑德, 族姻稱其婉嫕, 李公聞而聘之. 時公方以侍御史言事謫官, 貧甚. 夫人入門泰然, 無纖芥不樂意. 後公復爲時用, 入參侍從, 出殿藩維, 遂登廟堂, 位亞丞相, 祿賜豐矣. 而夫人處之以約, 食飮居處, 所以自奉者不少異於前日也. 從公守郡, 輒戒家人無得買官下一物. 在宣城時, 巨盜猝至, 攻圍甚急. 公方悉力拒守. 而夫人以免乳得疾, 危甚. 公以爲憂. 夫人曰:‘死生命也, 公宜一意捍賊, 無念我.’ 公壯其言, 厲氣循城, 賊爲解去. 及公以忤秦檜謫嶺外, 遂浮海南, 居儋耳, 久不得還. 家留故里, 日復窮空. 夫人至斥賣簪珥以給用度, 身不肉食者十餘年, 而亦無甚戚戚也. 檜憾公不釋, 捕公子孟堅繫廷尉, 誣以私史, 遣吏索其家. 或以告曰:‘夫人亦且逮矣.’ 闔門恟懼. 夫人獨夷然不爲動, 曰:‘禍福之來, 非可避就, 自是無愧斯已矣.’ 已而卒無它.
始, 夫人嫁不及舅姑, 以爲恨. 歲時祠祀齋潔嚴敬, 凡滌濯烹飪之事, 必身親之, 比老愈篤. 諸子女多出元妃黃氏, 夫人獨生二男二女, 而撫愛均一, 人無間言. 公南遷時, 二男者皆方數歲. 夫人敎之學, 旣冠, 皆以文行稱. 公及見之, 喜曰:‘吾自敎之亦不過如是耳.’ 待諸婦如己女, 遇左右寬而有節, 有所不及, 務掩覆之. 平居端莊靜一, 擧動有常度, 內外親黨皆法象其賢. 嘗從容語諸子曰:‘凡人處心宜公, 待物宜恕. 吾雖不學, 然於此若有得焉, 行之終身, 不敢一日忘也.’ 蓋李公平生以剛直聞, 晩歲遭讒去國, 投荒蹈海, 九死不悔, 而夫人之德所以配之者如此, 亦可以無悗矣.
累封縉雲郡夫人, 以淳熙二年二月某日薨, 享年七十有二. 十月丙申, 葬會稽縣太平鄕官漾之村. 後以子孟珍請貤所遷官以益封, 於是乎有榮國之贈.
子男五人, 孟博, 左宣敎郞․主管台州崇道觀. 孟堅, 右宣義郞․提擧淮東常平茶鹽公事. 孟醇, 不仕. 皆先卒. 孟珍, 通直郞․權發遣江陰軍事. 孟傳, 從事郞, 浙東提擧常平司幹辦公事. 女五人, 長適左朝散郞曹粹, 次適登仕郞陳汝楫, 次適進士陸權之, 次適承直郞沈程, 再適奉議郞章駒, 次適朝奉大夫潘畤〔一〕. 孫男八人〔二〕, 知常, 從事郞, 早卒. 知微, 從事郞. 知言․知易, 皆承務郞. 知退․知孝․知和, 皆未仕. 女十一人, 其四已適人. 曾孫男女各一人, 皆幼.
初, 大理卿章貢曾公逢以女妻浙東從事, 深知夫人行事之實. 旣爲之狀, 將以請銘而未有所屬也. 曾公卒, 江陰使君乃以狀授熹. 熹旣晩出, 又滯窮鄕, 不及升堂盡敬以觀夫入門內之治, 而曾公又先達也, 初不敢當. 顧先君子實嘗爲安簡公所知, 則義又有不得辭者. 敬爲之銘. 銘曰:
婦德之美, 維順以柔. 有以幹之, 其德乃修. 人曰夫人, 匪慈則孝. 我相其中, 不可屈撓. 貧安富節, 執禮勝私. 逢世之紛, 蹈險若夷. 維其堅剛, 以一其度. 俾易其艱, 以燕以譽. 惟公夫人, 合德殊施. 此內而安, 彼外以危. 要其所終, 兩絶慚悔. 匪篆匪辭, 曷詔冥昧?
〔一〕畤:原作‘時’, 據宋閩․浙本改.
〔二〕八: 記疑云疑富作‘七’.
조청대부 이공 묘갈명[朝請大夫李公墓碣銘]
우조청대부(右朝請大夫) 이(李)공 진(縝)은 자가 백옥(伯玉)이며 제주(濟州) 거야(巨野)인이다. 고 가부랑중(駕部郞中)․증태자소부(贈太子少傅) 경산(景山)의 증손이고, 조청대부․증소사(贈少師) 전(瑑)의 손자이며, 참지정사(參知政事)․증태사(贈太師) 병(邴)의 사자(嗣子)다. 공의 집안은 소부(少傅)의 넷째 아들 악정(樂靜)선생 소기(昭玘)가 고우(高郵) 손각(孫覺)과 미산(眉山) 소식(蘇軾)의 문하에서 배우면서부터 글이 매우 높고 청렴하고 맑으며 도를 즐겨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원우(元祐)와 건중정국(建中靖國)년간 까지 벼슬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태사공에 이르러서 드디어 문자로 조정에서 일하여 정화(政和) 의화(宣和) 년간에 명성을 널리 떨쳤다. 건염(建炎) 대정(大政)에 참여하여 또 충절(忠節)로 포장하도록 명을 내렸다. 물러나서 강해(江海)에서 늙어가기를 이십여 년이었으니 당시에 더욱 우러러보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민첩하고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열 두세 살이 되었을 때 분지시(盆池詩)를 읊었는데, “의여월상탄(疑與月相呑)”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고 재상 하율(何㮚)이 보고 감탄하였다. 어른이 되어서는 더욱 확고하게 뜻을 세워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는데 힘쓰고, 사장(詞章)을 하여 그 말이 깊고 바르며 정숙하여 당시의 문사 중에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깊이 숨기고 사람들이 혹 알까 두려워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태사공과 모친 화국(和國) 부인을 모시는데 온화하고 공순하며 공경하여 이유없이 곁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비록 몇 리의 가까운 곳으로 나가더라도 반드시 때가 되면 돌아왔다.
젊어서 부음(父陰)으로 승무랑(承務郞)으로 부임하여 남옥묘(南獄廟)를 감독하고, 복건로 전운사 간판공사(福建路 轉運司 幹辦公事)를 맡았다가 다시 전운사 주관문자(轉運司 主管文字)로 임명되었다. 공은 부모와 멀리 떨어진다고 하여 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태사공이 억지로 보냈다. 관직에 이르러서 결국 일 년도 안 되어 주관 돈종원(主管 敦宗院)과 서로 바꾸어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부모의 상을 당하였다. 복을 벗고 숭도사관(崇道祠官)이 되어 집안으로 물러나서는 다시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바야흐로 이 때 승상 진회가 국정을 맡고 있었는데 의심하고 난폭하기가 헤아릴 수 없어 고가(故家) 대족(大族)이 일거에 비어(飛語)에 걸려 깨어지지 않은 집이 없었다. 공이 비록 쉬면서 한가롭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벗어날 수 없을까를 두려워하여 더욱 숨는데 힘써 교유를 끊어 친척이라도 그 얼굴을 조금밖에 보지 못했다. 이렇게 해가 지나자 다른 사람들 역시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살고 있는 집의 동쪽에 동산을 사서 오두막을 짓고 나무를 심어 거기에서 초탈하게 지내면서 만여거사(萬如居士)라고 자호하고 전(傳)을 지었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사(居士)가 독서할 줄을 조금 알고, 훈고(訓詁)에 통하였으나 당시의 유자들과 같이 널리 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또한 읽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는 주고받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의(義)로 하고 사물을 접하는 것은 반드시 성(誠)으로 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경솔하게 행하여 가치없이 명예를 훼손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길에서 어려움을 겪어 이루지 못하더라도 한 때 동류들이 관직이 높고 녹이 후한 것을 보아도 전혀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동종(同宗)끼리 화목하게 지낸 지 무릇 30년이 되었는데 관직이 바뀌지 않아 집안이 더욱 가난해졌다. 항상 선조의 가르침을 외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려고 하면서 어찌 자신에게서 구하려고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에게 천한 일을 시키는 것보다는 스스로 천한 일을 하는 것이 낳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관직에 있거나 집안에 머물거나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란 적이 없으니, 그를 아는 사람은 항상 뜻밖에서 나왔다. 젊어서 원사광(阮思曠)과 상자평(尙子平)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는데, 고아가 되고 나서 집 동쪽에 있는 노는 땅을 겨우 5무(畝)를 사서는 집을 짓고 꽃 수십 본과 대나무 백 개를 심고는 항상 보는 책 수십 권을 두고 조석으로 그 사이에서 노닐었다. 비록 금석사죽(金石絲竹)의 음이나 궁녀의 귀고리 장식, 거마(車馬)와 깃발의 행렬, 잘 차린 오정(五鼎)의 음식이라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못하였다. 성품은 매우 게을러 글짓기를 싫어하고, 술자리 흥취가 일어나면 때때로 시로 생각을 펼쳤다. 뜻대로 되는데 이르면 감탄하고 강개하며 스스로 고인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성품이 신중하고 치밀하며 가슴속이 소연하여 친하고 소원한 바가 없었다. 속된 사람과 함께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도 종일 한 말도 나누지 않기도 하였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수건을 두르고는, 갑자기 흥이 나면 한가한 때 고사(高士)를 찾아 세외법(世外法)을 이야기하며 혹 돌아오는 것을 잊기도 하였다. 간간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어 그 뜻을 겨우 알았으나 도리를 깨닫지는 못했다”
그 마음 속의 본래 취향은 이와 같았으나 공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글은 부족하지만 실제는 여유가 있다고 여겼다.
진승상이 죽자 많은 현자들이 조금씩 등용되었다. 승상 진노공(陳魯公)이 공을 매우 잘 알아 힘을 다하여 추천하고 끌어주었지만 이루지 못하고, 통판복주사(通判福州事)를 삼을 것을 아뢰었으나 공은 이미 병이 들었다. 연수(連帥) 왕응진(王應辰) 역시 공이 어질다는 것을 알아 그를 예경(禮敬)하였으나 일로 귀찮게 하려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녹을 받고 그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 어찌 내 마음이겠는가?”라고 하고, 다시 봉사(奉祠)를 얻어서 돌아가기를 힘써 청하였다. 2년을 거하다가 졸하니 이때 나이 56세였고, 융흥(隆興) 2년 12월 모일이었다.
공은 조(趙)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보문각(寶文閣) 대제(待制) 사성(思誠)의 딸이다. 재취는 마(馬)씨인데, 중대부(中大夫) 안인(安仁)의 딸이다. 모두 의인(宜人)에 봉해졌다. 아들은 둘이 있는데, 간(諫)은 승무랑이다. 정신이 맑고 슬기로우며 기량과 재주가 빼어나 나이 13세에 독서하고 작문하는 데 다른 사람의 공보다 두 배가 되니, 공이 그를 뛰어나게 유달리 사랑하였는데, 불행이 요절하였다. 공이 애통해하며 곡하는 것은 오래되어도 평온해지지 않았다. 눌(訥)은 지금은 종사랑(從事郞)․복구(福州) 장락현(長樂縣) 주부(主簿)가 되었다. 손자는 하나가 있는데, 계종(啓宗)이라 하고 장사랑(將仕郞)이다.
처음에 공이 태사공을 천주(泉州) 남안현(南安縣) 석고산(石鼓山)에 장사지냈는데, 그 북쪽 백여 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는 내가 올 곳이다”라고 하였다. 졸한 다음해 3월 모일에 눌(訥)은 공의 관을 모셔다 묻었다. 또 공이 지은 글 십 권과 매백영(梅百詠) 한 편을 모아 집안에 두었다. 나의 선군자 태사공은 일찍이 태사공을 종유하고 추천을 받을 수가 있었고, 내가 천주(泉州)의 속읍(屬邑)에 관리 시험을 볼 때 또 공을 모시고 학문을 강론할 수가 있었다. 부하(府下)의 일을 매번 아뢸 때마다 번번이 공에게 가면 공은 반드시 술을 두고 날이 다 가도록 오래 머물러 있게 하며, 고금을 논하고, 문자를 평가하였는데, 모두 그 취향을 다하였다. 아래로 관리의 도와 물정, 장점과 결점을 말하는 데에 이르면 모두 섬세하게 하여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말하기 힘든 점이 있는 일에 이르면 슬퍼하고 탄식하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정이 미간에 울적하게 나타나지 않는 적이 없었다. 나는 그리하여 공이 진실로 세상에 뜻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공이 나아가서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뒤에 다시 온릉(溫陵)에 가서 공의 무덤에 참배하였는데 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옛날과 지금을 생각해보다 눈물이 흘렀다. 대개 황량한 들풀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공의 죽음이 불우함을 거듭 탄식하였다. 이에 눌(訥)이 행장을 와서 묘지명을 청하므로 나는 사양하지 못하고 명을 지었다.
우사(右史)의 덕을 가지고 마음속이 고요하여 침묵하였네. 태사의 글을 가지고 마음대로 마음을 움직였네. 공이 그 집을 이어 그 경사가 극히 돈독해졌네. 다만 덕(德)과 문(文)이 이미 쌓여서 성하네. 어찌 때를 만나지 않고 사공(事功)에 달할까? 호연히 영귀(永歸)하여 이 유궁(幽宮) 머무는구나. 만여(萬如)의 편은 공이 실로 스스로 찬한 것이다. 명을 지어 그것을 밝히니 탄식함이 멀지 않구나!
右朝諸大夫李公諱縝, 字伯玉, 濟州巨野人. 故駕部郞中․贈太子少傳諱景山之曾孫, 朝請大夫․贈少師諱瑑之孫, 而參知政事․贈太師諱邴之嗣子也. 公之家自少傳之第四子樂靜先生諱昭玘者學於高郵孫公覺․眉山蘇公軾之門, 文甚高而廉靜樂道, 不求人知. 仕元祐及建中靖國中, 爲起居舍人. 至太師公, 遂以文字行中朝, 有重名於政․宣之間. 及參建炎大政, 又以忠節爲詔所褒. 退而老於江海之上, 餘二十年, 當世益高仰之.
公生有奇質, 警悟絶人. 年十二三時, 賦盆池詩, 有‘疑與月相呑’之句. 故相何栗一見嗟賞. 旣長, 益自植立, 務記覽, 爲詞章, 其言奧雅覩深, 有非一時文士所及者. 而深自閉匿, 惟恐人之或知也. 性至孝, 事太師公及母和國夫人油油冀(8-4684)翼, 無故未嘗輒去左右. 雖近出數里, 必取期以還.
少以父任補承務郞, 監南嶽廟, 差充福建路轉運司幹辦公事, 再除轉運司主管文字. 公以去親遠, 不欲行, 太師公强遣之. 至官, 竟不一歲, 兩易主管敦宗院以歸. 未幾, 丁內外艱. 服除, 連丐宗官舊秩及爲崇道祠官, 退處于家, 不復有仕進意. 蓋方是時, 秦丞相檜當國, 猜暴叵測, 故家大族一罹飛語, 無不糜碎. 公雖棲遲冗散, 猶懼不得脫, 於是益務潛晦, 息絶交遊, 雖親戚少見其面. 如是累年, 人亦莫測其意也.
買園居第之東, 結廬種樹, 翛然其間, 自號萬如居士而爲之傳. 其詞曰:‘居士少知讀書, 通訓詁, 不能洽浹如當世儒者, 然亦無所不讀. 其於授受必以義, 接物必以誠. 逕情直行, 不屑毁譽. 雖仕宦連蹇不遂, 視一時儕輩官尊祿厚而不肯一動其心. 爲敦宗凡三十年, 官不易而家益貧. 常誦其先訓曰:與其有求於人, 曷若無欲於己;與其使人可賤, 不若以賤自安. 以是當官及家居未嘗求人知, 而人之知之者常出於意外. 少慕阮思曠․尙子平之爲人, 旣孤, 買宅東隙地僅五畝, 爲屋數楹, 植花數十本, 竹百箇, 而置常所閱書數十卷, 朝夕徜徉於其間. 雖金石絲竹之音, 姬嬙環珥之飾, 車馬旌旗之列, 五鼎方丈之食不以易其樂. 性懶甚, 不喜爲文, 酒酣興發, 時爲詩以舒懷. 至其得意, 擊節慷慨, 自以爲未後於古人. 性謹密而胸次蕭然, 無所適莫. 顧不喜與俗子語, 稠人廣坐, 或終日不交一談. 而藜杖幅巾, 率然乘興訪高人勝士於閑暇時, 談世外法! 至或忘歸. 間問祖師西來意旨, 僅識其趣, 不能悟解也.’ 其胸懷本趣蓋如此, 然知公者猶以爲文不足而實有餘也.
秦丞相死, 衆賢稍稍登用. 丞相秦魯公雅知公, 推挽甚力而不能致, 乃白以爲通判福州事, 而公已病矣. 連帥汪公應辰亦知公賢, 禮敬之, 且不欲煩以事. 公曰:‘食焉而怠其事, 豈吾心哉? ’力請得復奉祠以歸. 居二年而卒, 時年五十有六, 隆興二年十二月某日也.
公娶趙氏, 寶文閣待制思誠之女. 再娶馬氏, 中大夫安仁之女. 皆封宜人. 子男二人, 諫, 承務郞. 爽慧秀發, 年甫十三而讀書作文有兼人之功, 公奇愛之, 不幸蚤卒. 公哭之哀, 久而不能平也. 訥, 今爲從事郞․福州長樂縣主簿. 女四人, 其壻右通直郞徐樗․文林郞劉琉․進士周庭實․承信郞陳時可. 孫男一人, 啓宗, 將仕郞.
始, 公葬太師公泉州南安縣石鼓山, 而指其北百餘步曰:‘此吾之所歸也.’ 卒之明年三月某日, 訥奉公柩藏焉. 又集公所爲文十卷․梅百詠一編藏于家.
熹之先君子太史公嘗獲從太師公遊而辱知焉, 及熹試吏泉之屬邑, 又得拜公函丈. 每白事府下, 退輒詣公, 公必爲置酒, 留連竟日, 論說古今, 商略文字, 皆極其趣. 下至吏道物情, 利病蠲悉, 亦無不盡. 至於有所難言, 則其悼歎閔惻之情未嘗不鬱然見於眉睫之間. 熹以是知公非眞無意於世者, 意公猶且進而有爲也. 後三十年, 再至溫陵而拜公墓, 則其木拱矣. 俯仰今昔, 爲之流涕. 蓋不唯荒煙野草之悲, 亦以重歎公之終不遇也. 於是訥狀公行來請銘, 熹不得辭, 乃爲銘曰:
右史之德, 冲靖淵黙. 太師之文, 泆爲忠勳. 公承厥家, 克篤其慶. 惟德與文, 旣積而盛. 胡不逢遇, 達于事功? 浩其永歸, 閟此幽宮. 萬如之篇, 公實自贊. 銘以昭之, 不遐有歎!
부인 우씨 묘지명(夫人虞氏墓誌銘)
건양현(建陽縣) 숭정향(崇政鄕) 백락리(百樂里)에 군자(君子)가 살고 있는데, 그는 좌선교랑 강공(江公)으로, 휘(諱)는 기(琦)이고, 자는 전숙(全叔)이며 덕행으로 이름이 났고, 그와 함께 어울리는 사람은 대부분이 당세의 거인(鉅人) 장자(長子)들이었다. 죽어서 휘유각(徽猷閣) 직학사(直學士) 호인(胡寅)이 그 명을 썼다. 그 부인 우(虞)씨 역시 현덕(賢德)이 있었는데, 공보다 41년 후에 졸하였다. 그 뒤를 이은 아들은 장차 순희(淳熙) 갑진(甲辰) 2월 경신(庚申) 초하루 아침에 살고 있는 동리인 보광(普光)의 들에 장사지내고 서자(庶子) 사(嗣)의 편지와 승의랑(承議郞)으로 같은 마을에 사는 가응(賈應)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했다. 내 집은 건양(建陽)과 숭안(崇安)의 사이로 부인이 살던 곳과 100리도 안되게 떨러져 있다. 일찍이 부인의 두 아들과 어울렸는데, 그로인하여 부인의 일을 들을 수 있어 가만히 그를 높이 우러러보면서 나아가서 당하에서 절하지 못하고 부인이 돌아가신 것을 홀로 한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제 다행히 이름을 빌려서 돌을 세워 후세에 알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부인의 휘는 도수(道水)이고 자는 무진(無盡)이며 본래 유(劉)씨의 딸인데, 그 부친인 처사 비(棐)의 동복 남매중에 우통(虞恫)에게 시집간 사람이 있었는데, 부인이 어려서부터 그를 사랑하여 이끌어서 우씨에게 보내 기르게 하였으므로 그 성을 받게 되었다. 조금 자라서는 총명하고 의리(義理)을 알아 세속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일을 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양가를 왕래하며 애경(愛敬)을 다하고 은의(恩義)를 양쪽에서 받았고, 양가의 부모가 모두 어여삐 여겨 배필을 정하여 강공에게 시집보냈다.
집안에 들어갈 때 시부모의 연세가 매우 많았는데, 예법이 엄정하여 여러 며느리들 중에 조금만 그 뜻을 당할 수 있었다. 다만 부인이 곁에서 받들어 모셨는데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모든 음식을 조리하고 삶고 끓이는 일에 그 수고를 몸소 하였으며, 불을 때는 절도 역시 반드시 공손히 물어보고 재빨리 드리도록 애써 깊은 뜻이 있음을 칭찬받았다. 음식을 가지고 나가면 또 물러나서 곁에 서서 공손히 명을 들으며 다만 조금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가만히 그 찬(饌)을 모아두고 다시 찾을 것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비록 난리가 나서 위급하고 궁핍한 중에 있더라도 여러 방법으로 만들어 바쳐 조금이라도 뜻에 차지 않는 것이 없게 하였다. 돌아가신 시아버지 조봉공이 나이 90여 세가 되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나를 잘 받든다”고 하였다. 집안에 거하는 것이나 지아비를 받드는 것이나 아들을 가르치는 것이 모두 법도가 있었고, 규문(閨門)의 안이 숙연하면서 엄숙하고 온화하게 화합하였다. 강공의 성품이 강직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가부가 있으면 반드시 극력 논변(論辨)하였다. 다른 사람이 잘못이 있으면 면전에서 그를 질책하였다. 부인은 혹 그것이 지나치게 심한 것을 보고 번번이 조용히 비유로 깨닫게 하니 강공이 공경하였다. 강공이 돌아갔을 때 아들들이 모두 어렸다. 부인의 나이 40이었는데 예법으로 몸소 거느리고 문호를 지키며 여러 아들을 가르치고 경계하며, 친히 경적을 가르쳐주었다. 세시(歲時)에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면 세세한 일과 큰일을 반드시 몸소 하였다.
강공이 관직에 나아갔을 때 이전의 사람이 형제의 의식을 묻지도 않고 방자하게 하였다. 죽고 나자 부인은 아들들에게 모두 그것을 돌려주라고 명하고 장부를 구별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앞사람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우(虞)군이 늙고 또 아들을 잃어 부인이 귀양(歸養)이 더욱 공손하였으니, 그 마지막 보내는 슬픔이 심하여, 목욕하지 않고 소금과 술을 먹지 않은 것이 3년이었고, 또 그를 위하여 친척 중에서 종인(宗人)에서 사람을 뽑아 봉사(奉祀)하고 재물을 주었다. 강공의 시집간 손위 누이가 늙고 가난하였는데, 부인이 맞아 돌아오게 하여 후하게 봉양하고 삼가 갖추어 예경하여, 15, 6년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그를 위하여 아들에게 집을 갖게 해 주었다. 다른 사람의 선함을 들으면 자신에게서 나간 듯이 하였고, 사람이 병들고 곤궁한 것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보호해주어 다만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성품이 책을 보는 것을 좋아하여 역․논어를 읽어 그 대의를 터득하였다. 아래로는 도가의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술수(術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평소에 일을 처리할 때는 자세하고 익숙하고 꼼꼼하였고,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는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의하였으며, 말은 매우 간이하였으나 이치는 부족하지 않았다. 안팎의 친척이 모두 그 행실을 높게 여겨 그 말에 복종하였고,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가서 물었다. 비록 바로잡기 어려운 일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흩어지지 않더라도, “부인의 말이 이와 같다”고 알려주면 종종 흡연(翕然)히 정해지곤 하였다.
늦게 불교를 배워 하루아침에 탈연(脫然)히 마음에 깨달음이 있는 것 같았으니, 곧 비녀와 귀고리를 막고 술과 고기를 물리쳐 베옷과 거친 음식으로 죽을 때까지 지냈다. 순희(淳熙) 년간의 경수은(慶壽恩)을 만나 봉호를 받아 마땅하였다. 아들들이 유사에게 말하고 그 일을 상주하려 하였다. 부인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이미 인간사를 버린 사람인데 어찌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명이 있어도 사례하지 않으면 이는 임금을 속이는 것인데 내게 감히 편안하겠느냐?”라고 하니, 결국 그 문서를 두고 다시 올리지 않았다. 순희 9년 임인(壬寅)년에 부인의 나이가 80이었다. 하루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가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아들들이 놀라 재빨리 의원을 불러 약을 올렸는데, 모두 물리쳐버리고 말하기를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하고, 6일 동안 달게 자고서 돌아가시니 3월 15일이었다.
아들은 넷이 있는데, 환(渙)․명(明)․소(紹)․사(嗣)라 한다. 환과 소는 일직 죽고, 명과 사는 모두 문행으로 이름이 알려져 선사(選士)하여 경사(京師)에 천거되었다. 손자는 다섯이고, 손녀는 넷이다.
가(賈)군이 형용한 부인의 행실은 이와 같은데, 대체로 내가 들은 것이다. 일찍이 부인의 자품이 고명하고 도량이 넓으며, 꿋꿋하고 의젓하게 강한 장부의 지조를 가지고 있다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옛날 잘 다스려지고 예의가 융성한 시대에 살았다면, 부인의 인륜과 물리의 정미함을 다한 것으로 익히 여스승으로 칭송을 받았을 것이니, 세상에 스스로 선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그러나 지금 그 이룬 것을 논하면 자식이 되어서는 효성스러웠고, 며느리로서는 순종하였으며, 아내로서는 발랐으며, 어머니로서는 자애로웠으며, 받는데는 인색했고, 베푸는 데는 풍부했으며, 의(義)에는 후하고, 재(財)에는 박하였으니, 사람이 사람이 되는 까닭에 있어서 또한 거의 부족함이 없으니, 그러한 즉 어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는 혹 불학으로 그를 일컫지만 역시 그 말하는 것이 소견이 얕은 것이다. 명을 지어 말하기를,
선비는 성현의 말을 외어 그 세상에 숨는다. 누가 들림이 있지 않은가? 몸이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은 극히 드물다. 어찌 부인과 같이 배우지 않고 아는가? 앎이 지극하면 그 행동 역시 따르는 것이다. 천리의 궁극을 연구하게 하면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이겠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또한 허물은 적은 것이다. 저 아득한 것은 선(禪)이고, 이 밝은 것은 천(天)이다. 만약 믿지 못함이 있으면 여기 새긴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建陽縣崇政鄕百樂里有君子居焉, 曰左宣敎郞江公諱琦〔一〕, 字全叔, 以學行有聞, 所與遊多當世鉅人長者. 沒而徽猷閣直學士胡公寅賓銘之. 其夫人虞氏亦有賢德, 後公四十有一年卒. 其嗣子明將以淳熙甲辰二月庚申朔旦葬于其居里普光之原, 而使介子嗣奉書及承議郞同里賈君應之狀來請銘. 予家建陽․崇安間, 距夫人之居不百里. 蚤得與夫人二子遊, 因得講聞夫人之行事而竊高仰之, 獨恨未及進拜堂下而夫人沒. 今乃幸得託名立石以詔後世, 其何敢辭?
夫人諱道永, 字無盡, 本劉氏女, 其父處士棐同産有適虞君恫者〔二〕, 自夫人之幼而愛之, 携以歸鞠虞氏, 因冒其姓. 少長聰明, 議義理, 不樂爲世俗華靡事. 往來兩家, 愛敬曲盡, 恩義兩得, 兩家父母皆憐之, 擇其配以歸江公.
入門時, 舅姑年皆甚高, 禮法峻整, 諸婦少得當其意者. 獨夫人左右奉承, 禮無違者. 凡調胹烹飪之事, 旣躬服其勞, 而薪火之節, 亦必謹候視, 務爲敏給, 以稱微指. 旣進饋, 則又退屛側立, 踧踖以聽, 唯恐小不中度. 至或陰儲它饌, 以備更索. 雖在亂離顚沛乏絶之中, 亦必多方營致, 不使有蠲芥不滿之意. 皇舅朝奉公年九十餘, 每語人曰:‘是善事我.’ 其居家․事夫․敎子皆有法度, 閨門之內肅然以莊, 雍然以和. 江公性剛直, 居官遇事有可否, 必極力論辨. 人有過失, 至面質責之. 夫人視其或過甚者, 輒從容諷解, 江公敬焉. 江公沒時, 諸子皆幼. 夫人年甫四十, 以禮法自將, 持守門戶, 敎督諸子, 親授經訓. 歲時薦享, 細大必親.
江公從官時, 先疇之入恣兄弟衣食無所問. 旣沒, 夫人命諸子悉推與之, 且別其籍曰:‘此前人之志也.’ 虞君老且失子, 夫人歸養益謹, 送其終哀戚甚, 蓋不沐浴․不鹽酪者三年, 且爲之選於宗人以奉祀而歸其貲産. 江公女兄適人, 旣老且貧, 夫人迎以歸, 厚其養給, 禮敬飭備, 十五六年不少懈. 旣又爲之室其子焉. 聞人之善, 如出諸己, 見人疾病困窮, 閔惻調護唯恐不及. 性喜觀書, 讀易․論語得其大意. 下至練養醫藥, 卜筮數術, 無不通曉. 平居處事詳練縝密, 與人言必依於孝弟忠信, 詞甚簡而理無不足. 族姻內外咸高其行, 服其言, 有疑必就咨焉. 事有難平者, 衆口方讙呶不解, 有告曰:‘夫人之言如是’, 則往往翕然以定.
晩學浮圖法, 一旦脫然若有會於心者, 卽屛簪珥․却酒肉, 布衣蔬食以終其身. 遭淳熙慶壽恩, 當得封. 諸子言於有司, 將上其事. 夫人聞之曰:‘吾已棄人間事, 何以此爲? 且命而不謝, 是爲欺君, 吾敢安乎? ’竟留其狀不復上. 九年, 歲在壬寅, 夫人年八十矣. 一日, 語諸子曰:‘我將行矣.’ 諸子驚, 遽呼醫進藥, 皆揮去曰:‘毋勞我.’ 蓋甘寢六日而沒, 三月十五日也.
子男四人, 曰渙, 曰明, 曰紹, 日嗣. 渙․紹早卒, 明․嗣皆以文行知名, 嘗以選士貢京師. 孫男五人, 女四人.
賈君所狀夫人之行如此, 大抵予所逮聞也. 蓋嘗竊謂夫人資稟高明, 器宇恢廓, 凜然有烈丈夫之號. 使其生於治古禮義隆洽之時, 習聞姆師之誦盡夫人倫物理之精微〔三〕, 則其所以自立於世者詎止於此? 然今以其所就而論之, 則爲子孝, 爲婦順, 爲妻正, 爲母慈, 嗇於奉而豐於施, 厚於義而薄於財, 於人之所以爲人者, 亦幾可以無憾, 是則可不謂賢乎哉? 而世或以佛學稱之, 亦淺乎其爲言矣. 爲之銘曰:
士誦聖賢, 以沒其世. 孰不有聞? 鮮克身詣. 豈如夫人, 弗學而知. 知之所至, 其行亦隨. 俾究而窮, 曷內而外? 藉令不然, 亦寡其悔. 彼幽者襌, 此明者天. 有如不信, 訂此豐鐫!
〔一〕公: 原作‘君’, 據宋閩․浙本改.
〔二〕棐: 原作‘某’, 號右引改.
〔三〕誦:宋浙本作‘訓’.
독행 조군 언원 묘갈명[篤行趙君彦遠墓碣銘]
순희(淳熙) 4년 겨울 12월 무인(戊寅)에 숭도(崇道) 조선응(趙善應)공이 여간(餘干) 私第의 正寢에서 졸하였다. 다음해 현의 동북쪽 華林岡에 장사지냈다. 6년 후 지금 소부(小傅) 복국진공(福國陳公)이 그 비의 첫머리에 크게 쓰기를 “황송독행조군언원지묘(皇宋篤行趙君彦遠之墓)”라고 하였다. 이에 조공의 사자(嗣子) 여우(汝愚)가 비로소 박문각대제(敷文閣待制) 지복주(知福州)로 복건로(福建路) 안무사(安撫使)로 임명되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손수 조목별로 진술하여, 사람을 시켜 그 편지를 받들고 고 형주목(荊州牧) 장후식(張侯栻)․ 악주수(鄂州守) 나원(羅願)에게 가서 진술한 행실이 행장과 같이 서로 통하므로, 그것을 신안 주희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묘지명을 얻어서 바로 새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에 들은 태종(太宗)황제의 원자 한(漢) 공헌왕(恭憲王)이 실로 지덕(至德)과 고행(高行)으로 송 태백(太伯)이 되었는데, 후에 비록 정권을 넘겨주고 소원(疎遠)해졌고, 작위가 바뀌어 미미해졌지만 많은 사람이 그 어짊을 본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대개 7대가 지나서 공을 얻었으니, 또 효우(孝友) 인후(仁厚)함과 유학의 감화를 받아 집안에는 지극히 신실하였고, 나라에는 칭송을 들었으니, 뚜렷하게 종실의 의표가 되었다. 비록 어질고 예가 있는 사대부라도 모두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 아들을 가르치고 효를 옮겨 충을 하고, 조정에서 대책(對策)을 할 때는 회피하는 것이 없었다. 천자를 그를 특별하게 여겨 발탁하여 천하 제일로 삼았다. 후에 관각시종(館閣侍從)을 거쳐 명을 받들어 주(州)를 관장하였는데, 모두 풍격 절조와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당시에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아들은 어질게 여기지 않아서 자직(子直)이 이것을 할 수 있으면 그것은 아버지의 가르침이라고 탄식하였다. 아! 그는 진실로 독행(篤行) 군자(君子)라고 할 만하다. 진(陳)공이 그를 지목한 것이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이 모범은 마땅히 새겨 놓아야 한다. 진공 서법(書法)의 엄함은 이미 충분히 세상에 전해졌으나 나는 어리석고 천하여 또 얻지 못하였다. 예를 갖추어 사양했으나 명을 받지 못하였으니 삼가 그 글을 살펴서 남김없이 차제(次第)한다.
대개 공의 증조부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건녕군(建寧軍) 절도사(節度使)․건국공(建國公) 중기(仲企)로 공헌왕(恭憲王)의 증손이다. 실제로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 사려(士慮)를 낳았고, 공봉은 성충랑(成忠郞) 불구(不求)를 낳았는데, 성충이 제양(濟陽) 조(晁)씨를 아내로 맞아 공을 낳았다.
공은 정화(政和) 무술(戊戌)년에 태어나 졸할 때의 나이가 60이었다. 건염(建炎) 초에 승신랑(承信郞)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여덟 번 옮겨 수무랑(脩武郞)에 이르렀다. 수주(秀州) 숭덕(崇德)․요주(饒州) 여간(餘干)․안인현(安仁縣)․경덕진(景德鎭)의 주세(酒稅)를 감독하고, 담주(潭州) 남악묘(南嶽廟)․강남(江南) 서로(西路) 병마도감을 거쳐, 주관(主管) 태주(台州) 숭도관(崇道觀)으로 졸하였다. 5년 뒤에 여우(汝愚) 종사은(宗祀恩)을 맞아 비로소 통직랑(通直郞)으로 다시 증직되었다.
공은 바탕이 순수하고 독실하며 효성스럽고 공손하여 어릴 때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의원을 찾아 병이 낫기를 기원하고 더위에도 띠를 풀지 않았다. 상을 당하여 조금의 따뜻한 국물도 먹지 않았다. 빈례(殯禮)를 치르고는 여막에 살면서 죽을 마셨으며, 장례를 치르고 나서는 나물과 과일을 먹고, 상례를 마치고는 부인을 시중들게 할 수 있을 때가 되었는데도 방에 들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면서는 더욱 긍긍하며 지극히 봉양하였는데, 추운 밤에 멀리에서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종자가 문을 두드리려고 하였다. 공이 갑자기 그것을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하지마라. 어머니께서 놀라실 것이다”라고 하고는 한데 앉아서 아침까지 있다가 문이 열리고 나서야 들어갔다. 어머니가 큰소리를 무서워하여 밤에 혹 큰 소리를 들으면 분명 옷을 입고 그곳으로 달려와서 문 틈으로 빛이 있는 것을 보고는 끌어 들일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고 가리고 서서 기다린 것이다.
관직이 낮고 녹이 궁하니 여러 동생들이 옷을 짓지 않으면 감히 짓지 않았고, 이미 지었어도 입지 않으면 감히 입지 않았다. 비록 하나의 오이라도 반드시 함께하기를 서로 기다려 맛보았다. 먼 곳으로 시집간 여러 누이에게는 극력 그것을 보내어 서로 즐거이 돌보고 가까이 지냈다. 내외의 여러 자손이 귀천을 합하고 모든 식구를 합하여 나물국과 거친 음식을 먹어도 사랑하는 뜻으로 모두 넉넉하여 이간질 하는 사람이 없었다. 멀고 가난한 종자매에게도 역시 녹봉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것이 55세였다. 처음 병들었을 때 모셨는데 피를 내어서 약과 합하여 올렸다. 상을 당하여서는 곡읍하여 피를 토하여, 섶나무처럼 여위어서 종일 관 옆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천둥소리를 듣고 일어나 곁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무릇 입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술과 고기는 절대 아니었고, 몸에 입을 수 있는 옷은 화려한 것이 색이 아니었으며, 들어서 기쁜 소리는 반드시 음악이 아니었으니 모두 차마 몸으로 접할 수가 없었다. 비록 곡하는 것은 때가 있더라도 애통한 마음은 잊을 때가 없었다. 3년 이후에도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사당에서 곡을 하였다. 예를 행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향하여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말이 부모님에게 미칠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때가 없었다. 진릉(晉陵) 우무(尤袤) 연지(延之)가 그를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날의 군자와 같구나”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폐질(肺疾)로 돌아가셨는데 죽을 때까지 여러 동물의 폐를 차마 올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태어난 해가 바로 묘(卯)해인데, 토묘신(兎卯神)이라고 하며 역시 종신토록 먹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 사는 사람 중에 그 어머니를 모실 수 없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뉘우치고는 드디어 효를 칭송하였다.
아는 것이 뛰어나게 밝아 유무를 따지지 않고 평소에 스스로를 봉양하는 것은 매우 검약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물에까지 미치는 것을 일로 삼는데 급급하였다. 고인 허규(許珪)가 죽었는데, 지반이 가난하여 딸이 시집갈 곳이 없었다. 공이 맞아들여 둘째 아들의 아내로 삼았다. 일직이 태(台)인 장이(蔣彛)라는 사람과 동료였는데 후에 그 고향에 가서 먼저 그에 대해 물어보니 죽은 지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가난하여 장례도 치르지 못하였고, 아들도 밖에서 생계를 도모하니 가서 곡하고 그 아들을 돌려보내고 돈을 주어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와 같은 것들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길에서 병자를 보면 반드시 거두어 진휼하고 몸소 약을 달였다. 병이 나으면 혹은 옷을 벗어 주기도 하였다. 기근이 든 해에는 뜰에 그릇을 설치하고 먹을 때마다 그 반을 먼저 주니, 집안사람들이 따라하니 그것을 가지고 굶주린 자를 구제하였다. 그 마음 씀이 세심하고 깊어 심지어는 여름에 풀을 베지 않고 겨울에 파괴하지 않았는데, 놀거나 겨울잠 자는 벌레들이 그 거처를 잃을까 두려워서였다.
사람됨이 겸손하고 온화하며 너그러워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는 다만 말의 상황을 잃을까 걱정하였다. 의논하는 것이 옳지 않은데 이르면 분연히 돌아보는 것이 없었다. 비록 왕족으로서 멀리 떨어져 강호에 머물러 있었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깊은 마음은 조정에 있는 것과 같았다. 당시에 한 훌륭한 사람이 등용되었다는 말을 듣고 하나의 선정(善政)이 시행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이길 수 없이 기뻐하였고, 원근에서 홍수와 가뭄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근심이 안색에 나타났다. 신사(辛巳)년에 강(江)회(淮)의 경계할 일이 있었는데, 며칠이나 눈물을 흘리며 먹지 않았다. 동료 중에 같이 술을 마실 때가 있었는데, 공이 홀로 슬퍼하면 북족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때가 어찌 제군이 즐겁게 마실 때인가?”라고 하니 사람들이 실색하여 흩어졌다. 독서를 좋아하여 소장한 것이 3만권에 이르렀다. 저작은 당서록유(唐書錄遺)30권과 행암견문록(幸庵見聞錄)3권, 태주권론혼장문(台州勸論婚葬文)1권이 있다. 짐안에 조약을 만들지 않고, 자제들에게 비교하거나 단속하는 것이 없었으나 몸소 실행하는 것은 점점 스며들어 흥기시킨 자가 매우 많았다. 살면서 항상 말하기를 “성현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객기(客氣)를 없애고 쇄소응대(灑掃應對)해야 하니 이것이 입문처이다.”라고 하였다.
여우(汝愚)가 종실의 족보를 따라서 많은 선비의 우두머리가 되고부터 국조 고사가 없다. 사람들은 공을 위해 기뻐하였으나 공이 처신하는 것은 평소와 같았다. 입관(入館)한다는 것을 듣고 보전(莆田)․임광조(林光朝) 겸지(謙之)와 같은 곳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기뻐함을 알 수 있었다. 그 수(守) 상요(上饒)가 와서 맞아했으나 일부러 가지 않았다. 하루는 두 농부를 불러 견여(肩輿)를 타고 그 경계에 잠입하여 민정(民情)을 물었는데, 하루 이틀을 자면서 둘러보아도 뜻에 거스르는 바가 없으므로 점점 나아가 근교에 이르자 사람들이 비로소 그를 알았다. 그 사람됨이 대략 이와 같았다.
종실의 덕망이 있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중요한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사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 숨은 덕행과 그 뜻의 정미함에 이르면 사람들은 또 알지 못하고 말하는 자도 있다. 아! 그는 진실로 독행군자라고 할 수 있다. 진공이 그를 지목한 것이 어찌 헛되겠는가?
그 아내인 영인(令人) 이(李)씨는 승상 문정공의 7세손으로 가호(家號)는 서리(西李)이고 사마공이 말하는 선법(先法)을 지킬 수 있으면 오래도록 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평한 시대에는 종실의 혼인은 모두 공이 있는 제후와 귀척(貴戚)인데 공의 부자는 두 대를 유가(儒家)에서 아내를 맞았다. 명인은 밝고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집안에 있을 때 효를 칭송을 들었다. 혼인하고 나서는 시어미니를 모시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여 넓적다리를 베어서 그 병을 낫게 하였다. 공이 숭덕(崇德)에서 물러나 돌아올 때 조부인(晁夫人)은 병이 없었다. 상자에 넉넉한 금이 있어 장차 내어서 바치려고 하였는데 찾아도 얻지 못했는데, 영인이 이미 받들고 시어머니에게 바쳤다. 복식(服飾)을 갖추는 것은 새롭고 좋은 것을 가려서 공의 누이들을 받들고 자신은 오래되고 헌것을 가졌다. 공이 집안에서 일하면 일전도 아끼지 않았으나 영인은 안빈(安貧)하고 몸소 힘썼으므로 공의 뜻이 대부분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공보다 12년 앞서 졸하여 현의 서쪽 조봉(雕峰)에 장사지냈는데, 공의 묘에서 30리 떨어진 곳이다. 아들은 넷이 있는데, 여우는 이미 명경(名卿)이 되었다. 둘째 여졸(汝拙)은 승신랑(承信郞)이다. 여노(汝魯)는 보의랑(保義郞)이고, 여실(汝悉)은 벼슬하지 않았다. 이들 또한 밝고 공손하며 질박하여 그 가법을 지킬 수 있다. 딸은 셋인데, 장녀는 宣敎郞 逢維石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將仕郞 路希傅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는 시집가지 않았다. 손자는 열두이고 손녀는 일곱니다. 그 장손자는 崇憲이라 하는데 진사에 뽑혔는데 과거에 급제하였다.
나는 공의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으나 알지 못하여 평소에 한으로 여겼다. 이제 덕의 아름다움을 서술하여 공덕을 찬양하여 진(陳)공이 쓴 비석에 덧붙일 수 있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이다. 그러나 행실을 쓴 것을 일을 때마다 여백공의 말에서 글을 덮고 한숨을 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못 그 뜻을 택하여 명(銘)에 잇는다. 명에 이르기를,
한저(漢邸)의 별자(別子) 종자(宗子)를 물리치고 서자가 되었네. 마음은 도에 융합하였으나 자취가 없으니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는다. 건토하여 분봉하니 두 대가 떨치지 못했지. 공에 이르러 드러났는데, 그것은 작위 때문이 아니라 어질기 때문이었네. 효는 늙어서가 아니라 쇠하였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은혜는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풀어주는 것이지. 충은 멀리서도 잊지 않고 그 아들에게 주는 것이네. 독행(篤行)이 드러남은 화림(華林)의 언덕이네. 오직 부끄러워하지 않고 날이 멀어질수록 점점 높아졌네. 이! 후인들이여 더욱 삼가고 게으르지 말라. 나아간 자는 뛰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이 덕우(德友)가 경계한 것이니.
淳熙四年冬十有二月戊寅, 崇道趙公善應卒于餘干私第之正寢. 明年, 葬縣東北華林岡. 後六年, 今少傳福國陳公乃大書其碣之首曰:‘皇宋篤行趙君彦遠之墓.’ 於是趙公嗣子汝愚方以敷文閣待制知福州, 充福建路安撫使, 涕泣手疏, 使人奉其書及故荊州牧張侯栻․鄂州守羅君願所序行實若狀兩通, 致之新安朱熹曰:‘請得銘而刻于下方〔二〕.’
熹竊惟念平日所聞太宗皇帝之元子漢恭憲王實以至德高行爲宋太伯, 後世雖屬籍疏遠, 爵秩寢微, 然猶多法象其賢者. 蓋歷七世而得公, 則又以孝友仁厚․被服儒雅, 克篤于家而聞于邦, 卓然爲宗室儀表. 雖士大夫之賢而有禮者, 皆自以爲不及. 益敎其子移孝爲忠, 對策庭中, 無所諱避. 天子異之, 擢以爲天下第一. 後歷館閣侍從, 奉使典州, 皆以風節惠愛有聞於時. 然天下不以賢其子, 而曰子直之能爲此, 嗟乃其父之敎也. 嗚呼, 其眞可謂篤行君子者矣!陳公之目之也, 豈虛也哉. 是法宜銘. 顧陳公書法之嚴已足傳世, 而熹愚賤, 又所不當得爲. 旣禮辭不獲命. 則敬考其書而悉次第之.
蓋公之曾大父曰開府儀同三司․建寧軍節度使․建國公仲企者, 恭憲王之曾孫也. 實生東頭供奉官士慮, 供奉生成忠郞不求, 成忠娶濟陽晁氏, 生公.
公生於政和戊戌, 卒時年六十. 自建炎初補承信郞, 八遷至脩武郞. 歷監秀州崇德․饒州餘干․安仁縣․景德鎭之酒稅, 潭州南嶽廟, 江南西路兵馬都監, 主管台州崇道觀卒. 後五年, 汝愚逢宗祀恩, 始更贈爲通直郞.
公資純篤孝謹, 少時父病, 訪醫行禱, 暑不解帶. 遭喪, 不內勺飮. 旣殯. 居廬歠粥;旣葬, 乃食菜果;終喪, 比御猶弗入也. 事母益兢兢致養, 嘗以寒夜遠歸, 從者將扣門. 公遽止之曰:‘無, 恐吾母爲也.’ 露坐達旦, 門啓而入. 以母畏雷, 夜或聞雷, 必披衣走其所, 視門隙有光, 則扣而入, 否則屛立以待.
官薄食貧, 諸弟未製衣不敢製, 已製矣, 未服不敢服. 雖一瓜果, 必相待共嘗之. 諸妹遠嫁者, 極力致之, 相與娛侍親側. 內外諸孫合貴賤且百口, 菜羹疏食, 恩意均洽, 人無間言. 從姊妹之遠而貧者, 亦以令分俸給之.
遭母喪時, 年五十有五矣. 始侍疾時, 嘗刺血和藥以進. 至是哭泣嘔血, 毁瘠柴立, 終日俯首柩旁. 聞雷猶起, 側立垂涕. 凡食之可於口者, 不必洒肉 ; 衣之適於體者, 不必華采 ; 費之悅於耳者, 不必音樂, 皆弗忍以身接. 雖其哭泣有時, 而哀痛之心無時忘也. 三年之外, 生朝必哭于廟. 有欲爲禮者, 號泣向之. 其後累年, 言每及親, 猶未嘗不揮沸. 晉陵尤袤延之見而歎曰:‘古君子也.’ 父以肺疾終, 終身不忍以諸肺爲羞. 母生歲直卯, 謂兎卯神, 亦終身不食也. 墓戶有不能事其母者, 觀公之爲, 惕然悔悟, 遂以孝稱.
識度超曠, 不計有無, 平居自奉甚約, 而汲汲然惟以愛人及物爲事. 故人許珪死, 家貧, 女無所歸. 公卽聘以爲次子婦. 嘗與台人蔣彝者同獠, 後至其鄕, 首問之, 則死久矣. 貧不克葬, 而子亦謀食于外, 卽往哭之, 還其子, 予貲使葬. 它若是者不勝紀. 道見病者必收養, 躬爲煮藥. 比瘉, 或解衣遺之. 歲饑, 設器於庭, 每食先舍其半, 家人繼之, 則取以濟饑者. 其用心之微密, 至於夏不去草, 冬不破壞, 懼百蟲之游且蟄者失其所也.
爲人謙和坦易, 與人語惟恐失詞色. 至諠有不可, 則奮然無所顧. 雖以公族疏遠留落江覩, 而憂國之深, 如在廊廟. 聞當世進一善人, 行一善政, 則喜不自勝 ; 聞還近或水旱, 則憂見顔色. 辛巳江淮之警, 爲流涕不食者數日. 同獠有會飮者, 公獨悵然北望曰:‘此豈諸君樂飮時耶!’衆爲失色罷去. 好讀書, 所藏至三萬卷. 所著有唐書錄遺三十卷․幸庵見聞錄三卷, 台州勸諭婚葬文一卷. 居家不設條約, 於子弟無所程督, 而躬行之實所漸漬而興起者甚衆. 居常稱曰:‘欲學聖賢, 當消客氣, 灑掃應對, 是其入處也.’
汝愚從屬籍․冠多士, 國朝故事所未有. 人爲公喜, 而公處之如平時. 及聞其入館, 適與莆田林光朝謙之同舍, 然後喜可知也. 於其守上饒而來迎也, 故不往. 一日, 呼二田夫肩與潛入其境, 訪問民情, 閱信宿, 意無所忤, 因稍進至近郊, 人始知之. 其爲人大略如此.
顧宗室之在右列者, 例不得爲要官, 故其事業無以見於世. 至其潛德隱行與其志念之精微, 則人又有不得而言者. 嗚呼, 其眞可謂篤行君子矣!陳公之目之也, 豈虛也哉!
其配令人李氏, 丞相文正公七世孫, 家號西李, 司馬公所謂能守先法, 久而不衰者也. 方承平時, 宮宅婚姻皆勳侯貴戚, 公父子獨再世娶儒家. 令人明達剛果, 居家以孝聞. 旣嫁, 事姑如母, 嘗到股以愈其疾. 公罷崇德歸時, 晁夫人尙無恙. 篋有餘金, 將出以獻而探之不獲, 蓋令人已奉而致之姑矣. 服飾之具, 擇其新美以奉公諸妹而躬取其故敝者. 公旣動其家, 不吝一錢〔二〕, 而令人安貧自力, 所以成公之志爲多. 先公十二年卒, 葬縣西雕峰, 距公墓三十里所. 子男四人, 汝愚, 旣爲時名卿. 次汝拙, 承信郞. 汝魯, 保義郞. 汝悉, 未仕. 亦皆斤斤謹質, 能守其家法. 女三人, 長適宣敎郞逢維石, 次適將仕郞路希傳, 季未行也. 孫男十二人, 女七人. 而其長曰崇憲, 亦擧進士, 中其科云.
熹聞公之名蓋久而不及識, 居常以爲恨. 今乃獲敍德美以贊誄事, 而附於陳公所書之石, 則旣幸甚. 然每讀行實之書, 而於呂伯恭氏之言又未嘗不廢卷太息也. 因頗采其意, 銘以系焉. 銘曰:
漢邸之別, 去本而支. 心融迹泯, 世莫予知. 建土分封, 再世弗振. 逮公而顯, 匪爵其仁. 孝不老衰, 惠不約弛. 忠不遠忘, 以畀厥子. 篤行之表, 華林之臯. 惟其不愧, 日遠彌高. 嗟爾後人, 益謹毋怠. 出者難工, 德友所戒!
〔一〕于: 宋浙本作‘諸’.
〔二〕吝: 右引作‘名’.
적공랑치사 왕군 묘갈명(迪功郞致仕王君墓碣銘)
순희(淳熙) 11년 가을 8월에 적공랑(迪功郞)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번양(番陽) 왕언휘(王彦暉)가 졸했다. 겨울 10월에 그 가산(家山) 선영(先塋)의 오른쪽에 장사지냈다. 졸곡(卒哭)하고 나서 그 아들 안(安)이 묵최질(墨衰絰)로 달려와서 건안(建安) 담계(潭溪)의 위에 있는 나를 만나서, 절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제가 불행하여 지난해에는 제 어머니를 잃었는데, 동래(東萊)선생께서 욕되다하지 않으시고 명을 써주셨는데, 지금 거듭 불행을 당하여 제 아버지를 잃었는데, 동래선생 역시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형제가 모여서 의논하였는데, 불후의 부탁을 할 곳이 없음을 매우 걱정하였는데, 감히 저를 시켜 동래선생의 글을 소개한 것을 중하게 여겨 선생님께 보내도록 계획하였습니다. 다만 저희들은 슬퍼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병들고 쇠약하여 오래도록 붓을 잡지 않았고, 사방에서 지인들이 글을 부탁하는 것을 거절한 것이 무려 수십 집이었다. 이미 다 물리칠 수는 없고, 안(安)이 온 것을 보니 베옷에 소식(蔬食)을 하고, 굳은살이 백이도록 10리를 가서 하루를 자면서 험한 곳을 넘어오면서 서리와 눈을 맞고 밟으며, 그 부모의 뜻을 무시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차마 빈손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또 우리 백공(伯恭)께서 병이 들었는데도 역시 이미 그 어머니의 묘지명을 썼으니, 내가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승낙하였다. 이에 안이 그 친구인 안원(安遠) 절도사가 맡아서 기록한 장수(章洙)의 글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왕(王)씨는 당 말에 재앙을 피하여 옮겨 비로소 요주(饒州) 덕흥(德興)인이 되었다. 그 중에 신보(申甫)라는 유명한 사람이 아가(雅歌)를 잘하여 군박사제자원(郡博士弟子員)에 임명되었다. 나이가 많은 교수 중에, 현의 동쪽 30리에 있는 자계(柘溪)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산수가 뛰어난 것을 좋아하여 생도들이 세시(歲時)에 바친 포수(脯脩)를 팔아서 그 땅을 사서 살았다. 아들 넷을 낳았는데, 가운데 아들은 기(畿)라고 하는데, 은거하여 스스로 자유롭게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를 높게 여겼다. 그 후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드디어 자계의 땅을 다 가졌는데,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그 집안을 불렀다.
기(畿)가 지순(之純)을 낳고 지순은 거립(居立)을 낳았는데, 군은 거립의 아들이다. 자는 자충(子充)인데, 어려서 고아가 되어 자립하여 근검함으로 그 집안을 지켰다. 정(程)씨를 아내로 맞아 아들 넷을 낳았는데, 빈(賓)․안(安)․헌(憲)․종(宗)이라 하는데 모두 학문을 가르쳐, 집안의 재물을 흩어서 서사(書史)를 사고 사유(師儒)를 초빙하였다. 날마다 기장 술을 빚어 사방의 명사를 불러들여 그들과 교제하게 하여, 비록 재산을 다 없애고 힘을 다하더라도 따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안(安)의 학업이 홀로 먼저 이루어져서 향리의 부형이 그를 현명하게 여기고 많은 자제들을 보내어 종유하게 하였다. 군의 관리 역시 과거시험에 벽서에 응하여 두 번 예부(禮部)에 보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마침 천자가 덕수궁(德壽宮)에 봉상하고, 기로(耆老)에게 위로하고 물품을 내려주었는데, 군 부부가 모두 안(安)으로 인하여 사로 앞뒤로 관봉(官封)을 얻었다. 군이 졸할 때 나이가 72세였고, 네 아들 모두 엄연히 유관을 쓰고 있었다. 두 딸은 먼저 죽고 손자와 손녀가 이미 열 넷이 있었다.
군은 성품이 깨끗하며 엄중하고 구차하지 않았다. 가는 곳 마다 반드시 닦고 자리를 바르게 하고 나서 앉았으며, 가려고 하면 주위를 돌아보고 나서 갔다. 평생 예를 지켰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 단정하였다. 고을의 가까운 곳에 경조사가 있으면 반드시 앞장서서 비록 어리고 천하더라도 반드시 몸소 나아갔다. 친척이 상을 당하면 문 안을 경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친소에 따라 경계하는 날짜를 길고 짧게 하는 차등을 두었다.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성취시켜 주기를 좋아하였다. 사람에게 좋지 않은 점이 있으면 진실로 그것을 알아서 반드시 일러주었는데, 비록 미움을 산다고 해도 스스로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근심과 같이 탄식하였다. 강(姜)씨의 두 딸을 시집보낸 일은 백공이 이미 정(程)씨의 묘에 쓴 것이다. 대개 군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아내가 도운 것이다.
나는 비록 왕(王)군을 알지 못하지만, 그 아들이 수신하는 것을 훌륭하게 여겨 선생군자가 되기를 바라고, 또 시종(始終) 매우 힘들게 부모가 무궁히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을 애도하여 그것을 승낙하였다. 이제 또 왕군의 행실이 이와 같은 것을 보니, 대개 공자께서 말씀하신 ‘십실지충신(十室之忠信)’이라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그리하여 두세 번 그 글을 반복하여 보며 탄식하고, 그 일을 모아서 시로 지어서 묘상에 새기도록 하니, 왕군의 덕을 드러내고, 또 백공이 남긴 뜻을 펴서 그 후인들을 권면한다. 그 시에 말하기를,
녹명(鹿鳴)선생 시와 예가 전하여지니, 이 석계를 다스려 멀리까지 제사가 이어지네. 군에이르러 아들을 가르치니 아들은 능하고 어질어, 천리에 나를 찾아와 군의 무덤에 명을 구하네. 지극하구나! 내 벗이 아들에게 준 말이. 황황(皇皇)하고 업업(業業)하여 다함이 없다고 하였네. 멀리 생각함은 공명(功名)에 있지 않으니, 이것에 힘쓰면 그 선조를 영화롭게 하리라.
淳熙十有一年秋八月, 迪功郞致仕番陽王君彦暉卒. 冬十月, 葬其家山先塋之右. 旣卒哭, 其子安墨衰絰走謁予於建安潭溪之上, 拜泣且言曰:‘安不天, 往歲失吾母, 東萊先生旣不鄙辱而銘之, 今重不幸而失吾父, 則東萊亦旣沒矣. 兄弟聚謀, 大懼不朽之託無所於歸, 敢使安也介東萊之文以爲重, 而謀於下執事. 惟吾子之有以哀之也.’ 予以病衰, 久廢筆硯, 四方知舊文字之屬所拒者無慮數十家. 旣以例謝不能, 而視安之來, 布衣蔬食, 重趼十舍, 踰越險阻, 蒙犯霜雪, 所以不死其親之意, 有非人所及者, 不忍使之徒手而歸也. 且吾伯恭父之病矣, 而亦旣銘其母焉, 我其得辭之耶? 則應曰諾. 於是安乃出其友安遠節度掌書記章洙之狀以視予曰:
王氏唐末避地, 始爲饒州德興人. 中有名申甫者, 以能雅歌, 補郡博士弟子員. 晩歲敎授縣東三十里所曰柘溪者, 樂其山水之勝, 郤諸生歲時脯脩而易其地以居焉. 生四子, 其仲曰畿, 隱居自放, 里人高之. 其後子孫益蕃昌, 遂盡有柘溪地, 人因以里名其家.
畿生之純, 之純生居立, 君居立之子也. 字子充, 少孤, 自植立, 以勤儉持家. 娶程氏, 生四男子, 曰賓, 曰安, 曰憲, 曰宗, 皆敎之學, 斥家貲爲市書史․聘師儒. 日釀黍爲具, 博延四方名士, 使與之接, 雖殫貨詘力不計. 旣而安業獨先就, 鄕里父兄賢之, 多遣子弟從之遊. 郡有司亦以其程試應書再送禮部, 未第. 會天子奉觴德壽宮, 勞賜耆老, 而君夫婦皆以安故相先後得官封. 君卒時年七十有二, 四子皆儼然服儒冠. 獨兩女前卒, 而孫男女已十有四人矣.
君性修潔, 嚴重不苟. 所至必拂拭正席乃坐, 及將去, 猶徘徊周視乃行. 生平謹禮, 比老益虞. 鄕鄰慶弔必先, 雖幼賤必躬造. 族姻有喪, 戒門內毋食肉, 以屬親疏, 爲日久近有差. 輕財好施, 樂成人之美. 人有未善, 苟知之必告, 雖以買僧不自悔, 更爲竊歎如己憂. 其嫁姜氏二女事, 則伯恭父已書之程氏之墓矣. 蓋君之志而其室有以相之也.
予雖不及識王君, 然旣嘉其子之能修身以幸於先生君子也, 又哀其能始終勤劇以覬顯其親於無窮也, 而旣諾之矣. 今又觀於王君之行事如此, 蓋亦庶乎孔子所謂十室之忠信者. 是以三復其書而歎息焉, 因輯其事而詩之, 俾歸刻墓上, 旣以表王君之德, 而又申伯恭父之遺意, 以厲其後之人. 其詩曰 :
鹿嗚先生詩禮傳, 荒此柘溪祀邈綿. 逮君敎子子能賢, 千里丐我銘君阡. 至哉我友授子言, 皇皇業業無窮年. 眇思所屬非華軒, 有能力此榮其先!
통판공주 강군 묘지명(通判恭州江君墓誌銘)
군의 휘는 개(介)이고 자는 방직(邦直)이며 성은 강(江)씨이다. 증조부는 시(時)이고, 조부는 몽부(夢符)이며, 부친은 연(衍)인데, 대대로 휘(徽)의 무원(婺源)에 살았는데, 벼슬한 사람이 없었다. 군에 이르러 요(饒)의 덕흥(德興)에 살기 시작하여 향거에서 급제하여 통조적(通朝籍)에 이르렀고, 그 부친은 선교랑(宣敎郞)에 증직되어, 드디어 덕흥인이 되었다.
군은 어려서 총명하여 나이가 15,6 세가 되어서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고을의 선생이 그를 매우 칭찬하였으나 군은 자만하지 않았다. 하루는 정자(程子)의 글을 읽다가 ‘물이 맑은 것은 성(性)이 선한 것’이라는 설에 이르자 크게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 배운 것을 보면 이록(利祿)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아 부족함이 있었다. 급히 달려가서 구주(衢州) 서(徐)선생 성수(誠叟)를 뵙고 글로 그 뜻한 바를 말하고 학업을 청했다. 서선생이 글을 읽고 기뻐하며 무리에게 말하기를 “이는 같이 배울만하다”고 하니, 수년을 거하다가 돌아와 다시 그 학설을 학자에게 가르쳐 흥기한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 적공랑(迪功郞)․흥국군사호참군(興國軍司戶參軍) 벼슬을 하였다. 이에 앞서, 녹봉으로 받은 쌀이 대개 다른 사람보다 배가 되니 군이 홀로 받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준 것 또한 그러하였다. 군장(郡將)이 어려운 일로 시험하자 또 모두 편안히 빨리 처리하니 드디어 청렴한 관리로 천거하였다. 종사랑에 올라 융흥부(隆興府) 진형령(進賢令)에 임명되었다. 부임지로 가려고 하는데, 마침 날이 가물어 백성이 굶주리고 있었는데, 벼슬아치가 도착하면 또 일을 하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재빨리 글을 보내어 백성들이 보리를 널리 기르라고 고하였다. 백성들이 군이 자신들을 아끼는 것을 알고, 그가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서로 다투어 잡고 끌며 말머리에 절하며 영접하였다. 도착하고 나서 연회를 할 겨를도 없이 급히 걸어 관청에 나가서 구제할 대책을 진술하는데 매우 잘 갖추어진 것이었다. 부유한 백성 서(舒)씨가 마땅히 곡식 만 곡(斛)을 환곡으로 내야 하는데, 스스로 관청에 돈을 내기를 청하고 환곡을 면하고 상을 받기를 바랐다. 군이 그것을 극력 따지니, 수수(帥守) 공무량(龔茂良)이 좋아하지 않았으나 군은 의견을 더욱 굳게 지켰다. 공공(龔公)이 비로소 깨닫고 군의 의논을 따랐다. 그러나 군은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이미 먼저 서씨가 환곡을 내도록 깨우쳤다. 굶주리는 백성과 괴롭고 피곤한 사람을 보면 거두어서 봉양하고 치료하여 그에 힘입어 온전히 소생한 자가 매우 많았다. 얼마 안되어 곁에 있는 읍의 관리 대부분이 기아를 구제한 것으로 상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은 군이 왜 스스로 말하지 않는가를 일깨우기도 하였다. 군이 말하기를 “백성이 굶주리면 수령은 먹여주는 것은 자식이 굶주리면 어머니가 먹이는 것과 같은데 감히 상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 민전(民田)의 조세를 반으로 줄이라는 조칙이 내려졌는데, 군이 부의 사자(使者) 정대창(程大昌)에게 말하기를 “평상시에 조세를 낼 때는 비록 합(合) 작(勺)을 내야하는 밭뙈기라도 또한 반드시 수를 채워서 내도록 했습니다. 지금 만약 단지 그 반만을 감하면 모든 집이 한 되를 내야하는 자는 명목은 오합을 감하더라도 실제로는 한 되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세 되 이하를 내는 모든 집에서부터 모두 감해주면 빈민이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공은 군의 말을 듣고는 그것을 따르도록 하였다. 정공은 기뻐하여 술을 들어 공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군은 백리를 주관하지만 혜택은 일로(一路)에 미치니 어진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군이 비로소 관에 이르렀는데, 연도(沿道)에 새로 역참을 설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때 백성들은 바야흐로 굶주리고 병들어 있었으므로 이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을 듣고는 서로 이끌어 도망가고자 하였다. 군은 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또 부호(富戶)에서 금을 걷고, 길옆에 있는 나무를 베고, 절을 철폐하여 그 역(役)을 도왔다. 백성들이 기뻐하여 일을 따랐고, 역졸 역시 그것을 편안하게 여겼다. 얼마 되지 않아 밀원(密院)이 또 역참의 신도(新圖)를 반포하고 조대(漕臺)는 고치도록 매우 심하게 재촉하였다. 군이 말하기를 “앞의 역(役)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뒤의 역이 다시 일어나니 백성이 감당할 수 없다. 하물며 광서(廣西)의 말은 한해에 30망(網)에 불과하고, 망은 오십 필(疋)에 불과한데, 신도(新圖)는 240필이 되니 또 어찌하겠는가? 또 말이 늘고 주는 것은 말먹이가 차고 비는 것에 달려있다. 지금 병리(兵吏)가 그 창고를 훔치는 것을 살피지 않으면 분명 백성을 병들게 하여 그 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니, 또 즐겁게 나누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사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현에서는 역을 파하고 옆의 읍 역시 거기에 힘입어 면한 것이 있었다.
천자가 해를 이어 가뭄과 기아가 드는 것 때문에 관리와 백성들에게 조칙을 내려 보와 제방을 수리하고 쌓아서 대비하도록 하였다. 관리가 게을러 수행하지 않고는 죄를 두려워하여 상 받기를 바라니, 심지어는 한 번도 저수지를 수리하지도 않고서 일을 끝냈다고 보고한 자도 있었다. 군은 홀로 두렁을 출입하며 천자의 어진 뜻을 받들어, 실질적인 이해로 백성을 깨우치고 몸소 권면하고 단속하였다. 백성은 군의 성의(誠意)에 감복하여 법대로 수리하였다. 후에 비록 힘든 해가 있어도 곡식의 반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군은 또 옥사를 깊이 생각하여 자기의 걱정과 같이 하고, 도망 간 사람들의 밭은 조세를 거두어 죄수들의 음식과 의약 비용으로 처리하였다. 헌대(憲臺)에 말하고 그 일을 돌에 새겼다. 한가한 날 학자를 불러서 보고 효제충신으로 가르쳐 힘써 게으르지 않았다. 또 당의 은자인 최(崔)군을 학(學)에서 제사하여 풍속으로 권장하였다.
선교랑․지흥국군영흥현사(知興國軍永興縣事)로 바뀌었다. 군은 예전에 군의 하급관리였기 때문에 그 풍속을 익히 알았다. 관직에 이르러 여러 관청에 글을 보내어 다섯 가지 일을 진술하였다. 하나는 세금이 무거운 폐단이고, 둘째는 준의(准衣)의 폐단이고, 셋째는 계속 일어나는 상공(上供)의 폐단이고, 넷째는 여러 해 홍수와 가뭄을 내치지 못한 폐단이고, 다섯째는 어지(魚池) 각세(榷稅)의 폐단이었다. 그 말이 명백하고 간절하여 그것을 본 자는 마음을 움직였으나 결국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도적이 윤혜정(尹惠政)의 집안에서 그 종을 죽이고 달아났다. 위(尉)는 고과를 두려워하여 혜정을 협박하여 종을 죽인 것을 스스로 무고하도록 하였다. 군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전에게 뇌물을 주어 군옥(軍獄)으로 옮겨서 국문하였다. 군은 의심스러운 것 아홉 가지를 조목별로 쓰고 의연히 일의 추세를 따져 혜정이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천신절에 잔치를 베풀었는데, 구례(舊例)에 따라서 모든 물품을 다 백성에게서 취하였는데, 아전이 연루되어 속여서 비용이 몇 배가 되었다. 군은 태수에게 시장에서 사서 바로 주도록 아뢰니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군(郡)은 사방으로 통하는 큰길에 있어서 객이 끊이지 않고 왕래하였으나 역역(力役)이 고르지 않아 한 해에 여러 번 역(役)을 하는 자도 있고, 종신토록 한 번도 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 군이 와서 비로소 장부를 만들어 고르게 하였다. 그가 백성을 편하게 한 것은 대부분 이러한 것들이다.
봉의랑(奉議郞)․사천(四川) 총령사주관문자(總領司主管文字)로 옮겼다. 총령은 대군의 군량을 주관하여 평시에는 백성들의 일을 하지 않았다. 이때 동천(東川)이 크게 기근이 들어 군이 그 우두머리인 태부경(太府卿) 이창도(李昌圖)에게 말하여 창고에 가득한 돈으로 가서 구휼할 수 있도록 청했다. 이공이 옳게 여기고 민전(緡錢) 54만을 가지고 갔다. 쌀을 사서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기를 권하고 힘을 다하여 구조하였다. 또 피해를 입은 군현의 전조(田租)를 없애주고 관전(官錢)을 가져다가 대신 보냈다. 물과 땅에서 바삐 다니며 더위 먹는 것을 무릅써 병이 들어 돌아왔다. 과(果)․합(合)․창(昌)․보(普)․광안(廣安) 여러 군의 백성들이 다투어 형상을 그리고 사당을 세워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금주(金州) 백성 천여 가구가 차(茶) 세를 지고 체포되어 갇히고 태형을 맞는 것이 10여년인데 풀리지 않았는데, 군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없애니, 기뻐하고 감읍하며 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수녕(遂寧) 수령 이도(李燾)공이 그것을 듣고 편지를 군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공이 두 읍(邑)에서 한 정사(政事)는 옛날의 어진 관리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또 문자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실과 곡식과 같이 세상에 유용합니다. 지금 와서 군사를 먹이는 것을 도와주시고 막부(幕府) 시설에는 충후한 칭송이 있으니 대개 현자의 도움이 큽니다”라고 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여러 사자(使者)들이 그를 만류하여 외전(外銓)을 따라 통판공주사(通判恭州事)에 임명되도록 하였다. 그 뜻이 아니었으므로 격서를 가지고 무창(武昌)에 가니 이미 일이 생겨서 돌아갔다. 강릉(江陵)에 배가 닿았는데 불행히 질병으로 졸하였다. 이때의 나이가 58세였고 순희 10년 12월 21일 이었다.
군의 사람됨은 성실하고 도탑고 중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뜻이 서로 맞으면 마음을 열고 진실됨을 보였고, 서로 다른 취향이면 비록 종일을 대하여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어려서 가난하여 헤진 베옷도 다 입지 못하였으나 흔쾌히 거기에 처하여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함부로 취하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심하게 여위고 상하였다. 형을 사랑과 존경으로 모시는 것이 다른 사람을 지났고, 스스로를 봉양하는 것은 간소하게 하면서도 친척들을 두루 구휼하는 것은 매우 후하게 하였다. 서(徐)선생의 상에는 위패를 만들어 곡하였다. 기일(忌日)이 되면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정직하여 굽힐 수가 없었고 부지런히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없애 자신이 즐기고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였다. 자신의 이해에 있어서는 조금도 생각에 두지 않았다. 상관과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복하여 따져 분별하였는데, 말과 뜻이 강개하였다. 처음에는 비록 조금 거슬려도 그것이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므로 결국에는 받아들여지거나 자신을 알아주게 되었다. 공(龔)공과 같은 사람은 서로 더욱 애중하여 조정에 돌아가서 그를 천거하고자 하여 전법(銓法)에서 시읍(試邑)에 해당되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군은 소송을 듣고 옥사를 결단하고 재지와 식견을 잘 관찰하여 풍속을 깨우치고 인도하여 결국 대부분이 인서(仁恕)로 돌아갔다. 두 읍을 다스린바 옥이 빈 것이 모두 일 년여였다. 그날 길을 나서서 경계에 이르렀는데 늙은이와 어린아이가 서로 끌고 붙들어주고, 길모퉁이에 나란히 서서 절하며 눈물이 가루처럼 떨어뜨리며 마차를 붙잡고 보내주지 않는 자도 있었고, 그를 전송하며 경계를 넘은 후에 돌아가기도 하였다. 군은 글을 써서 새기는데 힘쓰지 않았으며 종횡으로 변설(辨說)하여 사기(詞氣)가 뛰어났으며, 사리(事理)를 다하였다. 옥녀당집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군의 아내는 유인(孺人) 호(胡)씨이다. 아들이 넷인데, 원공(元恭)․중공(仲恭)․숙공(叔恭)․의공(懿恭)인다. 딸은 둘인데, 사위는 서송(舒竦)․왕승지(汪升之)이다.
군이 졸한 다음 해에 원공 등이 군의 관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왔다. 또 다음해 2월 임술(壬戌)에 무원(婺源) 영산(瀛山) 대전(大田)의 들에 드디어 다시 장례를 지냈다. 원공이 나와 군이 잘 지냈기 때문에, 군의 문인인 정단몽(程端蒙)에게 그 행사(行事)를 행장으로 쓰게 하여 와서는 절하고 읍하며 묘지명을 청했다. 그 일이 모두 내가 본래 들은 것이고 또 군의 명이 여기에서 그쳐 그 행함이 다하여 우리 백성들에게 그 혜택이 두터이 할 수 없게 된 것을 슬퍼하니, 그를 위하여 명을 짓는다.
학문은 나를 위한 것이고, 벼슬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청렴하고 정직하여 어지럽지 않고 뜻이 있으면 반드시 펼쳤다. 은택이 일동(一同)을 채우고 사린(四隣)에 넘쳤다. 선비는 넉넉한 공에 만족하고, 들에서 굶어죽어도 인(仁)을 생각한다. 재주가 출중한 사람이 기가 굳세어 한 마디가 만균(萬鈞)이나 된다. 물러나서 그 자신을 반성하니 겸손하고 진실되도다. 마땅히 천조에 올라 엄숙히 큰 띠를 드리우고, 역린(逆鱗)을 건드리고 뿔을 꺾어, 결국은 우리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쳐야 한다. 어찌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고 나이 오십에 꺾어버리는가? 그 덕을 밝히고자 하여 이 묘문을 바로잡는다.
君諱介, 字邦直, 姓江氏. 曾大父時, 大父夢符, 父衍, 世居徽之袤源, 未有仕者. 至君始居饒之德興, 以鄕擧中第, 至通朝籍而贈其父宣敎郞, 遂爲德興人.
君少穎悟, 年十五六治擧子業, 鄕先生亟稱之, 君不自多. 一日, 讀程子書至水渭性善之說, 喟然太息. 視平日所學, 不過爲利祿, 有不足爲者. 亟走謁衢州徐先生誠叟, 以書道其所志而請業焉. 徐讀書, 喜謂其徒曰:‘此可與共學矣.’ 居數年而歸, 更以其說授學者, 多所興起.
初仕迪功郞․興國軍司戶參軍. 先是, 受俸米者率倍其券, 君獨不取, 其予人也亦然. 郡將試以難事, 又皆從容以決, 遂以廉吏薦之. 陞從事郞, 調隆興府進賢令. 將行, 會天旱民饑, 度比至官, 且不及事, 亟移文喩民廣殖牟麥. 民知君之愛己也, 聞其且至, 爭相扶携, 拜迎馬首. 旣至, 不暇燕饗, 倍道趨府, 極陳所以拯救之策甚備. 富民舒氏當出穀餘萬斛以糶, 而自請以緡錢輸府, 冀得免糶規賞. 君爭之力, 帥守龔公茂良不悅, 而君執議愈堅. 龔公始悟, 從君計. 而君不俟報, 已先喩舒氏出其穀矣. 視饑民尤困憊者收養療治, 賴以全活者甚衆. 旣而旁邑官吏多以救饑受賞, 或喩君盍自言. 君曰:‘民饑而令食之, 猶子饑而母乳之也, 敢幸賞乎? ’
會詔蠲民田半租, 君白部使者程公大昌曰:‘常時輸租, 雖合勺之畸, 亦必使就盈數. 今若但減其半, 則全戶輸一升者名減五合, 而實猶輸一升也〔一〕. 若自全戶三升以下悉蠲之, 則貧民被實惠矣.’ 程公以君語聞, 詔從之. 程公喜, 擧酒屬君曰:‘君宰百里而惠加一路, 可謂仁人之言矣.’
君始至官, 有旨新沿道廐置. 時民方饑瘁, 聞是令下, 欲相率逃去. 君喩以不得已之故, 且爲率溫戶金, 伐道旁木, 徹廢佛屋, 以助其役. 民喜趨事, 而執牽者亦便安之. 未幾, 密院又頒新圖, 漕臺趣使改爲甚亟. 君言:‘前役末旣, 後役復興, 民且不堪. 况廣西之馬歲不過三十綱, 綱不過五十疋, 新圖乃度爲容二百四十疋者, 亦何爲乎? 且馬之息耗, 在芻秣之盈虛. 今不察兵吏之盜其廩, 而必病民以豐其屋, 尤非分之所安也.’ 使者是其言, 縣得罷役, 而旁邑亦有賴以免者.
天子以連歲旱饑, 詔吏敕民修築陂塘以爲之備. 吏惰不供而畏罪以希賞, 至有未嘗一施畚鍤而以訖事告者. 君獨出入阡陌, 推上德意, 喩民以利害之實而身勸督之. 民感君誠意, 作治如法. 後雖惡歲, 猶得半稔. 君又深以獄事爲己憂, 籍逃田, 收其租爲繫因食飮醫藥之費. 言於憲臺, 而刻其事於石. 暇日延見學子, 敎以孝弟忠信, 亹亹不倦. 且祠唐故隱者崔君於學, 以風勵之.
改宣敎郞․知興國軍永興縣事. 君舊爲郡掾, 習知其俗. 到官, 移書諸台, 爲陳五事: 一曰稅重之弊, 二曰淮衣之弊, 三曰續起上供之弊, 四曰累年不放水旱之弊, 五曰魚池榷稅之弊. 其言明白懇切, 覽者動心, 然卒無有能行之者. 盜劫民尹惠政家, 殺其奴而逸. 尉恐負課, 脅惠政使自誣爲殺奴者. 知君不可欺, 賂吏移鞠軍獄. 君條其可疑者九事, 毅然以去留爭之, 惠政乃得免. 永興田多水少, 君以水種豐凶不可期, 則兼課陸種, 立賞勸募, 父老傳誦, 至於感泣. 天申錫宴, 舊例百物皆取之民, 吏緣爲姦, 費且數倍. 君白太守和市予直, 民甚便之. 郡當通衢, 使客接踵而力役不均, 有一歲而數役者, 有終身不一行者. 君至, 始爲籍以均之. 他所以便民者多此類也.
轉奉議郞․四川總領司主管文字. 總領主餉大軍, 平時未嘗與民事. 至是, 東川大饑, 君言於其長太府卿李公昌圖, 請得庫之羨錢往賑之. 李公以爲然, 得緡錢五十四萬以行. 漕米勸分, 極力拯救. 旣又盡蠲被災郡縣田租, 而以所賫官錢代輸. 水浮陸走, 衝冒暑暍, 至感疾以歸. 而果․合․昌․普․廣安數郡之民爭繪像立祠以報其德. 金州民千餘家以負茶租逮繫笞箠十餘年不得釋, 君一旦白除之, 無不鼓舞感泣而去. 遂寧守李公燾聞之, 以書遺君曰;‘公兩邑之政, 可比古之循吏. 而見於文字者, 又皆如絲麻穀粟之有用於世. 今來佐饋軍而幕府施設有忠厚之稱, 蓋賢者之助多矣.’ 秩滿將歸, 而諸使者留之, 使從外銓調補通判恭州事. 非其志也, 因以檄書至武昌, 已事而鰄. 舟次江陵, 則不幸而以疾卒矣. 卒時年五十八, 淳熙十年十二月二十一日也.
君爲人誠慤敦重, 不妄言笑. 意所與合, 開心見誠 ; 卽與異趣, 雖對之終日, 如未嘗有人. 少時貧窶, 裋褐不完, 而處之怡然, 不妄以一毫取諸人也. 喪觀, 毁瘠甚. 事兄敬愛有過人者, 自奉省約而周贍族姻甚厚. 徐先生之喪, 爲位以哭. 遇諱日, 爲却酒肉以報. 居官廉直, 不可屈撓, 孜孜焉以愛民爲事. 興利除害, 如己嗜欲. 至於身之利害, 則未嘗有毫髮顧藉意也. 於上官有所不合, 爭辨反復, 詞旨慷慨. 始雖小忤, 然以其發於誠心, 卒多聽網, 或遂爲知己. 如龔公, 尤相愛重, 還朝欲薦之, 迫銓法當試邑不果. 君於聽說折獄察見底蘊, 而風喩開誘, 卒多歸於仁恕. 所治兩邑, 獄空皆歲餘. 它日道出其竟, 民老稚相携持, 羅拜道周, 有屑沸扶輿而不去者, 送之或越竟而後反. 君爲文不務雕刻, 而辦說縱橫, 詞氣卓犖, 曲盡事理. 有玉汝堂集藏於家.
君之配孺人胡氏. 子男四人, 元恭〔二〕․仲恭․叔恭․懿恭. 女二人, 其壻舒竦․汪升之也.
君卒之明年, 元恭等乃克以君柩還里中. 又明年二月壬戌, 遂反葬於婺源瀛山大田之原. 元恭以予之與君善也, 使君門人程端蒙狀其行事, 來拜泣請銘. 其事皆予素所聞者, 且哀君之命止於此而不得盡其用以厚其澤於吾民也, 爲之銘曰:
學以爲己, 仕以爲人. 廉直不撓, 有志必伸. 惠滿一同, 溢于四鄰. 士飽餘功, 野殍懷仁. 才雄氣剛, 一言萬鈞. 退省其私, 嗛嗛恂恂. 宜登天朝, 正色垂紳. 嬰鱗折角, 卒惠我民. 云胡不弔, 隕于中身? 欲考其德, 訂此墓文.
〔一〕實: 原作‘亦’, 據宋閩․浙本改.
〔二〕元: 宋浙本作‘允’, 下文同.
종사랑감담주남옥묘 유군 묘지명(從事郞監潭州南獄廟劉君墓誌銘)
순희 12년 여름 6월 23일에 종사랑(從事郞)․감담주 남옥묘(監潭州 南嶽廟) 건안 유군 평보(建安 劉君平甫)가 집에서 졸하였다. 나는 가서 재삼 곡을 하였는데, 그 형의 아들 학아(學雅)와 아들인 학고(學古) 등이 드디어 묘지명을 청하였다. 나는 처음에 평보 선군자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데, 그리하여 평보와는 서로 같이 성장하였다. 그 후에 평보의 여러 형들이 사방으로 떠나 벼슬을 했는데, 평보는 대부분 집에서 거하고 따라가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보와 특히 서로 사귄 것이 40여년이었다. 그러나 내가 평보보다 8~9세 많았고, 또 고달프고 초췌하여 일찍 쇠하였고, 평보는 유유자적하고 강건하여 비록 소년이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어찌 지금 평보를 반곡(反哭)하고 그 무덤에 명을 쓸 생각을 했겠는가? 평보와 가장 오래 어울렸고, 그를 아는 것이 나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여 차마 사양할 수가 없었다.
평보의 이름은 평(玶)이고 건(建)의 숭안현(崇安縣)사람이다. 휘가 자휘(子翬)인 병산(屛山)선생의 아들이고, 태사(太師) 문안(文安)에 증직된 충현공(忠顯公)의 손자이다. 충현공은 충의(忠義)로 나라를 위하여 죽어 정강(靖康)․건염(建炎) 년간에 저명하여 국사(國史)에 전(傳)이 있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자는 보문각 직학사․증(贈)소부(少傅) 자우(子羽)이고, 병산선생은 막내아들이다. 젊어서 일찍이 한번 벼슬하여 보양군(莆陽郡) 승(丞)이 되었다. 임기가 차자 병을 칭탁하고 봉사(奉祠)로 돌아왔다. 도를 즐기고 글을 쓰며 17년을 지내고 졸하였는데 그 글이 모두 세상에 전한다.
평보는 소부공(少傅公)의 어린 아들을 후사로 삼았는데, 관직에 임명된 것이 30여년 이었으나 하루도 주현(州縣)에서 벼슬하지 않았다. 비록 만남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일은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은 가법(家法)의 전함이 역시 본래 있는 것 같다. 대개 평보는 처음 벼슬할 때부터 남악(南嶽) 사관(祠官)이 되었는데, 일찍이 제로제점갱야주전사간판공사諸路提點坑冶鑄錢司幹辦公事)․복건로안무사주비차견(福建路安撫司準備差遣) 등에 임명이 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는데 인원을 줄여 파직되었다. 최후에는 형 충숙공이 억지로 벼슬에 임명되도록 하여 소무군(邵武軍) 사호참군(司戶參軍)이 되었으니, 평보의 산림의 취향은 이미 이루어져서 머리를 숙여서 관리의 일을 하게 할 수 없었다. 또한 마침 충숙공이 훙(薨)하자 평보는 항구히 물러날 계책을 결단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힘껏 청하여 다시 사관(祠官)을 얻어서 초연히 죽을 때까지 스스로 자유롭게 지냈다.
나이가 젊을 때는 기질이 매우 호방하였는데, 거듭 인원이 줄여 파직을 당하자 스스로 불우함을 알았다. 선대의 거처인 병산(屛山) 아래는, 앞에는 담계(潭溪)가 둘러 있었는데, 집이 고요하고 깊었으며, 대나무가 빽빽이 둘러싸고 있어 둘러보고 좋아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한가한 날에 널리 살펴보고 노닐면서 나무를 심고 물을 트며 골짜기를 오르내려 종일 싫증을 내지 않았다. 스스로 집으로 물러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농사짓고 고기를 잡으며 땔나무를 하는 일을 겸하면서 인연을 따라 세상을 보면서 선(善)을 회복하고 몸을 수양하였으니, 고인(古人)이 일손일익(日損日益)의 의미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스스로 그 집을 “칠자지료(七者之寮)”라고 하고는 벽에 글자를 새겨서 그 조목에 뜻을 두었다. 중년에 그 아내를 무이(武夷) 동남쪽 10리 떨어진 곳에 장사지내고 그 옆에 자신의 무덤 자리를 미리 정해 두었다. 그리하여 산전(山田)에 누대와 집을 넓혀 계곡 위에까지 이르고, 길하고 아름다운 날에 두 산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객을 불러 시(詩)를 지었으니, 그 즐기는 것은 다른 사람과 같았으나 그것은 익히 들은 선군자의 유풍(遺風) 여운(餘韻)과 당세의 앞서고 뛰어난 유자의 아치(雅致)였다. 아득히 그 마음에 맞고 그 몸에 따르는 것이 있으면 심지어 작록(爵祿)을 생각하거나 세리(勢利)의 기쁨도 알지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것이 있었다.
타고난 자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세모(世母) 경국부인(慶國夫人)과 충숙공을 섬기는 것이 매우 공손하여 그 상을 입을 때는 모두 예를 뛰어넘었다. 가장의 집안 살림을 잇고는 많은 친척을 모아서 법도를 수정(修整)하여 은의(恩意)가 고루 미치게 하였다. 젊어서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과거공부를 하는 것을 싫어하고, 시를 짓는 것은 매우 민첩하고 공이 있었으나 그 또한 깊이 뜻을 둔 적은 없었다. 사람됨이 간이하고 질탕하여 의관과 음식을 갖추는데 가리는 것이 없었으나, 선대의 유문(遺文)과 일사(逸事)를 수집하는 데는 남김없이 섬세하였다. 책을 모으고 아들을 가르치며, 교정하고 감독하는 일은 모두 규범이 있었다. 주현의 사창(社倉)에서 거두고 푸는 것을 감독하고, 관리를 이끌어 빈민(貧民) 거자(擧子)를 구휼하며, 이해를 궁구하고, 장부를 대조하여 조사할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하여 관직에 있는 자도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어질게 여겼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논자는 평보가 막연히 세상에 뜻이 없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그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만약 그에게 직무를 맡겨 보았더라면 이룬 것이 어떠했겠는가?
평보는 같은 군의 범(范)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직비각(直秘閣) 여규(如圭)의 딸이다. 아들은 없었으나 아들들은 자신이 낳은 듯이 사랑하였다. 경국부인을 모시는데 효애가 매우 돈독하여 실로 그 병을 낫게 할 수 있으면 비록 자신의 몸이라도 아끼지 않았다. 평보보다 6년 먼저 졸했다. 평보는 6남 7녀가 있는데, 학고(學古)는 적공랑(迪功郞)․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 주부다. 학박(學博)은 장사랑(將仕郞)이다. 학포(學圃)는 아직 어리다. 또 학정(學正)․학기(學箕)․학가(學稼)는 모두 형들 다음에 태어났다. 그 차녀도 시집가서 일찍 죽었다. 평보가 졸할 때 나이 48세였고, 이 해 12월 12일에 장사지냈는데, 묘는 범부인의 무덤에서 동쪽으로 18보 거리에 있다. 그 명에 말하기를,
아! 평보여, 어찌하여 그 자질을 펴지 않았는가? 그 뜻을 굽힘을 차마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그 몸을 편히 하지 않았는가? 그 고을의 가엾은 사람들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정(幔亭)의 남쪽 그 내는 깊고 넓으며, 산은 길고 높다. 살아서 그 자적함을 즐기고, 죽어서는 그 언덕에 명(銘)을 새겼으니, 백세(百世)에 두루 미쳐 없어지지 않으리라!
淳熙十二年夏六月二十三日, 從事郞․監潭州南嶽廟建安劉君平甫卒于家. 予往哭之再三, 其兄子學雅與諸孤學古等遂以墓銘爲請. 予初嘗受學于平甫先君子之門, 因得與平甫相長大. 其後平甫諸兄遊宦四方, 平甫多家居不從, 以故予於平甫又獨得久相與, 於今四十有餘年矣. 然予長平甫八九歲, 又以勞悴早衰, 而平甫優游彊健, 雖少年有不及. 豈意今乃反哭平甫而遂銘其藏哉!顧與平甫遊最久而知之深莫如予者, 不忍辭也.
平甫名玶, 建之崇安縣人. 屛山先生諱子翬之子, 而贈太師文安忠顯公之孫也. 忠顯公以忠義死國, 著名靖康․建炎之間, 國史有傳. 生三子, 長曰寶文閣直學士․贈少傳諱子羽, 而屛山先生其季也. 少嘗一仕, 爲莆陽郡丞. 秩滿, 卽稱疾奉祠以歸. 樂道著書十有七年而卒, 其書皆傳世.
平甫以小傳公幼子爲之後, 補官餘三十年, 亦未嘗一日仕州縣. 雖其邂逅不遭, 事有適相似者, 抑其家法之傳亦有自也. 蓋平甫自始仕卽爲南嶽祠官, 嘗調諸路提點坑冶鑄錢司幹辦公事․福建路安撫司準備差遣, 皆未及赴而以省員罷. 最後從兄忠肅公强使出爲注官, 得邵武軍司戶參軍, 則平甫山林之趣已成, 不能俛首從吏役矣. 亦會忠肅公薨, 平甫遂決長往之計, 力請諸公, 復得爲祠官, 超然自放以歿其身.
蓋其年少時氣甚豪, 自再直廢省, 卽自知其不偶. 而先廬屛山之下, 前帶潭溪, 館宇靚深, 竹樹蒙密, 顧而樂之, 不忍去也. 因以暇日廣其觀游, 種木疏泉, 上下澗谷, 竟日不厭. 自以爲退隱于家, 兼農圃漁樵之役, 而隨緣閱世, 復善修身, 又庶幾古八日損日益之意, 則自名其室曰‘七者之寮’而刻文壁間以志其目. 中葬其妻武夷東南十里許, 卽預卜壽藏其旁. 因山田闢臺館以達于溪上, 良辰勝日, 往來兩山之間, 弦琴觴酒, 屬客賦詩, 其樂雖與人同, 而其習聞先君子之遺風餘韻與夫當世之儒先長者之雅致, 泯然有以曾於其心而適於其身, 至於不知爵祿之可懷․勢利之可悅, 則人有所不能及也.
天資孝友, 事世母慶國夫人及忠肅公甚謹, 服其喪皆過禮. 嗣主家政, 聚族衆多而法度修整, 恩意均洽. 少有逸才, 而不肯事擧子業, 賦詩甚敏而工, 然亦未嘗深留意也. 爲人簡易跌宕, 衣冠食飮取具無所擇, 而蒐輯先世遺文軼事蠲悉無遺. 聚書敎子, 校讎課督皆有程品. 爲州縣董社倉歛散, 爲帥司賑貧民擧子者, 詢究利病, 鉤校簿書, 其夙夜之勤, 居官者有不及, 鄕人德之. 而論者於是乃知平甫非漠然無意於世者, 於其死也, 莫不哀之, 以爲使得試用, 所立當何如也!
平甫娶同郡范氏, 直秘閣如圭之女. 無子, 而撫愛諸子如己出. 事慶國夫人孝愛尤篤, 苟可以已其疾, 雖體膚無所愛也. 先平甫十六年卒. 平甫有六男七女, 學古, 迪功郞․泉州同安縣主簿. 學博, 將仕郞. 學圃, 尙幼. 而學正․學箕․學稼皆出爲諸兄後. 其次女亦嫁而夭云. 平甫卒時年四十八, 葬以是歲十二月十二日, 墓在范夫人塋東十有八步. 其銘曰:
嗚呼平甫!寧其材之不信, 而不忍其志之詘也. 寧其躬之不燕, 而不忘其鄕之卹也. 幔亭之南, 其川奫淪, 岡崷崒也. 生樂其遊, 死銘其丘, 彌百世而不歿也!
공주조사군 묘갈명(贛州趙使君墓碣銘)
순희(淳熙) 12년 11월 모일에 지공주군주사(知贛州軍州事)․조청랑(朝請郞) 조공(趙公)이 관청에서 졸하였다. 다음해 2월 모일에 거주하던 소무군 성 서남쪽 초남산(樵嵐山)에 돌아와 장사지냈다. 그 벗인 원주(沅州) 여사군승기(呂使君勝己)가 그 행실을 명으로 새겨 광중(壙中)에 넣고, 그 동생인 선걸(善傑)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중형(仲兄)의 뜻은 대개 당세에 스스로 드러남이 있기를 항상 바랐으나 지금 불행이 요절하여 그 평일의 바람을 보상받지 못하였습니다. 서로 알던 선비와 벗들이 그를 애통해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고인에게 고하는 것은 다행히 원주(沅州)의 글이 있으나 그 무덤위에 놓는 것은 백세(百世) 후에 지나가는 자로 하여금 그 사람됨을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하니, 아직 청탁하지 않았습니다. 중씨(仲氏)는 일찍이 장형주(張荊州)를 종유하고, 늘그막에 선생님과 사귀었으니, 선생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편지를 보내어 흔쾌히 말하기를 “내가 좌경(佐卿)과 사귄 것은 참으로 오래 되었으나 공주(贛州)의 수령이 되면서부터 비로소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동생이 이것으로 부탁을 하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처음 좌경이 진(鎭)에 부임하였을 때 편지로 먼저 해야 할 정사를 물은 적이 있어 나는 알고 있는 것을 알려 주었다. 좌경이 관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왕래하는 자가 그 정사가 말할 것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오래되어 좌경이 와서 말하기를 “이전에 들은 것은 지금 그것을 찾으면 모두 말씀하신 것과 같은데, 이미 한 두 가지는 행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여기에 그치지 않으니, 이러이러한 일과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임기가 차서 돌아가면 장차 상에게 고하여 그것을 바꾸면 모두 영구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것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는데, 좌경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공(贛)의 사람들을 위해 기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좌경의 부고를 들으니, 또 그를 위하여 슬퍼하여 눈물이 흘러 그칠 수 없었다. 좌경이 본래 강건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갑자기 병을 얻어 경각에 구할 수 없이 되었다. 주(州)의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며 울부짖으며 노인과 어린아이가 서로 부축하고 이끌어 관청 아래로 달려와 곡하며 모두 실성하였다. 물러가서는 서로 그 형상을 그려서 그를 제사지냈다. 아!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리하여 여사군이 기록한 것을 살펴보니, 거기에 말하기를,
공의 6대조 상(商) 공정왕(恭靖王) 원빈(元份)은 우리 송 태종황제의 넷째아들이다. 증조부 仲O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증태사(贈太師)로 성왕(成王)에 추봉되었다. 조부 사은(士訔)은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졸하였다. 부친 불최(不衰)는 무경랑(武經郞)․복건병마검할(福建兵馬鈐轄)로 조산랑(朝散郞)에 증직되었다. 모친 만(滿)씨는 태석인(太碩人)이다. 검할공은 조용하고 담박하며 욕심이 적었고, 태석인은 명가의 자녀로 현행(賢行)이 있고, 규문(閨門)이 엄숙하고 화목하여 사대부가 칭찬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시원하며 배우기를 좋아하여, 학교에 취학하여 명성이 있어 같이 학업을 하는 자들이 모두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종실자식으로서 관리의 시험을 보아 이어서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절랑(承節朗)에 임명되었다가 좌승무랑(左承務郞)․지남검주 장락현승(知南劍州將樂縣丞)으로 바뀌어 제수되고, 첨서무안군판관청공사(簽書武安軍判官廳公事)가 되었다. 통판 진강부(通判 鎭江府)로 파견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지태주(知泰州)로 바뀌었다가 지상덕부(知常德府)로 옮겼으나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어 가지 않았다. 이때 공주(贛州)에서 해를 넘기고 나이 52세가 되어 드디어 졸하였다. 아! 애통할 뿐이다.
좌호남군(佐湖南軍)으로 있을 때에 지방 장관인 장효상(張孝祥) 공이 그를 깊이 알았고, 심개(沈介) 공 또한 그 자질을 특별하게 여겨 드디어 전운부사 황균(轉運副使 黃鈞) 공과 글을 써서 그를 천거하였다. 군(郡)에 부임하여서는 법을 받들고 백성을 사랑하여 검소함을 권하여 스스로 검약하고 경계하여 공가(公家)의 일전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구하여 응답이 없으면 비록 협박하며 오는 자가 있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에 있을 때 가뭄을 만났는데 사당에 빌고 재물을 베풀어 구제하는 일에 오로지 그 힘을 다했다. 유연(遊宴)을 절제하고, 토목을 그만두며, 백성에게 보리를 심고 물을 막아 저장할 것을 권하며, 여러 현의 체납한 세금을 경감해주고, 시장 사람들의 주세(酒稅)를 줄여주어 사람들이 그것을 매우 편하게 여겼다. 평상시에 주군(州郡)은 따로 사신(使臣)이 아병(牙兵)을 맡고 있었는데 공은 그것을 파하고 그 임무를 병관(兵官)에게 귀속시키고, 기율(紀律)을 엄하게 하고 훈련을 근실하게 할 것을 책임 지웠다. 얼마 되지 않아 병영이 숙연해지고 벼슬아치가 모두 쓸만하게 되어 범금(犯禁)하는 자가 드물어졌다. 관리를 쓸 때에는 반드시 출신은 한미하지만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우선하였고, 권세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부탁하는 것은 모두 상관하지 않으니 관리들이 그 공변됨에 감복하였다. 이에 주인들이 서로 앞장서서 그 치행(治行) 수십 언을 사자(使者)의 관청에 아뢰었다. 공이 듣고는 재빨리 그것을 그만두도록 타이르며 말하기를 “태수(太守)의 덕이 박하고 정사가 거칠어 성천자(聖天子)의 관대한 조칙을 넓게 펴지 못하고 가뭄이 이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부로(父老)들이 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이미 다행인데, 무슨 칭찬할 만한 잘한 일이 있겠습니까? 부로들은 빨리 돌아가 자제들을 가르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하며, 작은 분노는 참고, 큰 믿음은 돈독히 하여 태수의 정사가 그 풍속을 착하게 할 수 있게 하면 곧 부로(父老)의 은덕이 두터운 것입니다. 날씨는 덥고 길은 머니 부로들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감탄하여 더욱 서로 깨우치고 경계하여 공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장사에 있을 때 장경부를 종유하여 그 배움을 받고 돌아왔다. 그 후에 임관의 차례를 기다리며 우환을 당한 적이 있어 몇 년을 한가하게 지내며, 예전에 들은 것을 생각하고 궁구하며 강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역에 더욱 마음을 다하였다. 거처의 남쪽에 집을 짓고 조석으로 거기에서 독서하고, 우물을 트고 나무를 심으며 스스로 즐겼다. 그것은 진퇴(進退) 득실(得失)의 사이에 급급하는 것이 없었으며, 사람들 역시 그 수명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뜻을 두지 않다가 드디어 여기에 장사를 지낸다.
처음에 왕(王)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복건(福建) 안무참의(按撫參議) 강공(康功)의 딸이다. 재취는 황(黃)씨인데, 호남(湖南) 전운판관(轉運判官) 유(洧)의 딸이다. 모두 먼저 졸하였다. 아들은 하나인데 여액(汝掖)은 아직 어리다. 공이 몰하고 삼년인데 태석인(太碩人)은 본래 강녕하였고, 백씨(伯氏) 용각공(龍閣公)은 규칙을 열거하고 번을 크게 하여, 너그러운 혜택으로 기강을 보였다.
나는 공의 뜻이 비록 때에 크게 시행되지 못했으나 두 지방의 정사가 사람들에게 미친것이 이미 넓다고 생각한다. 그 지역이 멀고 또 문인과 본래부터 있던 관리의 기록이 없어서 글을 보지 못하였다. 공(贛)의 일을 깨우친 글을 아들에게 주었는데, 또 없어져 남아있지 않고, 가까이 지내며 만날 수가 없어 훗날의 군자를 기다리니, 나는 이것이 공(公)의 한일뿐만 아니라 또 공(贛) 사람들의 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을 써서 비석에 새기도록 하고 또 묘지명을 지었다. 묘지명에 말하기를,
황상(皇上)께서 성스러우시어 우리 백성을 사랑하시고, 관리는 그 흐름을 막고 입을 다물어 막아놓았네. 다만 이때 이 사람이 옛적의 일을 들은 것이 있었으니, 그 임한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하여 가랑비가 제때에 오는 고마운 비와 같았지. 장공(章貢)의 사이에 벼와 기장이 풍성하네. 공은 어찌 갑자기 돌아가시어 초남(樵嵐)의 언덕에 계시는가? 나는 그 무덤에 명을 써서 후래의 사람을 권면하니, 혜문관(惠文冠)으로 장보관(章甫冠)을 바꾸지 말지어다.
淳熙十二年十一月某日, 知贛州軍州事․朝請郞趙公某卒於官. 明年二月某日, 歸葬所居邵武軍城西南樵嵐山. 其友沅州呂使君勝己實銘其行內壙中, 而其弟善傑以書來曰:‘仲兄之志蓋常欲有以自見於當世, 今不幸蚤死, 未有以償其平日之願. 士友之相知者, 莫不痛之. 其所以告諸幽者, 旣雖幸有沅州之文矣, 而所以表其墓上, 使百世之下過者讀之而想見其爲人, 則未有託也. 仲氏蚤從張荊州遊而晩交於子, 子其哀之.’
予發書慨然曰:‘吾交於佐卿固久, 而自其守贛, 知之始深. 今其弟以是爲屬, 其何可辭? ’蓋始佐卿赴鎭時, 嘗以書來問政所宜先, 予以所聞告之. 佐卿至官末幾, 往來者稱其政不容口. 久之, 乃來告曰:‘曏所聞者, 至是訪之皆如言, 旣一二罷行之矣. 顧所以病吾民者, 猶不止於是也, 如某事, 如某事. 吾代而歸, 將以告於上而革之, 則一方永久之利也.’ 予聞之喜甚, 蓋不獨爲佐卿喜, 又爲贛人喜也. 然未久而聞佐卿之訃, 則又爲之悲歎出涕而不能已. 佐卿素彊健, 至是暴得疾, 頃刻遂不可救. 州人聞之, 驚悕啼號〔一〕 , 老稚相扶携, 走哭府下, 皆失聲. 退, 相與畵其象而祠之. 嗚呼, 是豈人力之可爲者耶!因考呂使君所記, 則曰:
公六世祖商恭靖王元份〔二〕, 我宋太宗皇帝之第四子也〔三〕. 曾祖仲□, 開府儀同三司․贈太師, 追封成王. 祖士訔, 擧進士中第, 未仕而卒. 父不衰, 武經郞․福建兵馬鈐轄, 贈朝散郞. 母滿氏, 太碩人. 鈴轄公恬淡寡欲, 太碩人名家子, 有賢行, 閨門肅穆, 爲士大夫所稱.
公天資闓爽好學, 遊庠序有聲名, 同業者皆自以爲不及. 以宗室子試有司, 連中其科. 初補承節郞, 改授左承務郞․知南劍州將樂縣丞, 簽書武安軍判官廳公事. 差通判鎭江府, 未赴, 改知泰州, 從知常德府, 以家難不行. 及是爲贛州踰年, 年甫五十有二而遂以卒. 嗚呼, 是可哀已!
其佐湖南軍時, 帥張公孝祥深知之, 沈公介亦奇其材, 遂與轉運副使黃公鈞合章薦之. 爲郡奉法愛民, 以勤儉自約飭, 不妄費公家一錢. 干請無所應, 雖有挾而至者不爲動也. 在贛遇旱, 禱祠賑貸必盡其力. 節遊宴, 罷土木, 勸民藝麥瀦水, 寬諸縣逋負, 損市人酒課, 人甚便之. 常時州郡別以使臣掌牙兵, 公罷之而歸其職於兵官, 責以嚴紀律․謹訓練. 未幾營部肅然, 吏士皆可用, 鮮犯禁者. 擧吏必先寒畯, 權貴請屬皆置不問, 吏服其公. 於是州人相率以其治行數十言於使者之臺. 公聞, 亟喩止之曰:‘太守德薄政荒, 不能布宣聖天子寬大之詔, 使旱至此. 父老不以爲有罪, 則已幸矣, 何善之可稱? 父老其亟歸敎子弟, 孝於親, 弟於長, 忍小忿, 敦大信, 使太守之政爲能善其俗者, 則父老之賜厚矣. 天暑道遠, 毋苦父老爲也.’ 聞者感歎, 益相告戒毋違公令.
在長沙, 從張敬夫遊, 受其學以歸. 其後待次遭憂, 閒居累年, 尋繹舊聞, 請習不倦, 而尤究心於易. 築室所居之南, 朝夕讀書其間, 疏泉種樹, 有以自樂. 其於進退得失之際, 有未數數然者, 人亦不意其壽之不永而遂葬於此也.
初娶王氏, 福建安撫參議康功之女. 再娶黃氏, 湖南轉運判官洧之女. 皆先卒. 子男一人, 汝掖, 尙幼. 公沒三年, 太碩人故康寧, 而伯氏龍閣公數典巨藩, 亦以寬惠見紀. 蓋其家法傳有自云.
予惟公之志雖未克大施於時, 而二邦之政所以及人者已廣. 以其地遠, 且無門人故吏之記, 故不得書. 其與子書諭贛事者, 又逸不存, 而不得附見, 以俟後之君子, 則予於此不獨爲公恨之, 又爲贛人恨也. 爲書其事, 使以刻於其碣, 且爲之銘. 銘曰:
於皇上聖, 哀此下民. 吏壅其流, 澤唫以屯. 惟時若人, 有聞于古. 肆其所臨, 霂若膏雨. 章貢之間, 禾黍油油. 公胡遽歸, 樵嵐之丘? 我銘其阡, 用勸來者. 毋以惠文, 易此章甫!
〔一〕悕: 原作‘俙’, 據宋閩本改. 宋浙本作‘怖’.
〔二〕元份:原作‘某’, 據宋史卷二百四十五宗室二補.
〔三〕四:原缺, 據宋史卷二百四十五宗室二補.
곽덕의 묘명(郭德誼墓銘)
동양(東陽) 곽군 덕의(郭君德誼)의 묘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명(銘)을 쓴다. 그 사(詞)에 이르기를
재주는 많은 사람 중에 특출했으나 몸은 한 목숨에도 이르지 못했다. 사방의 먼 곳까지 뜻을 두었으나 행함은 한 고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자제(子弟)가 사유(師儒)의 가르침에 복종하니 주려(州閭)는 손제(孫弟)의 바름을 알았다. 갑자기 호협(豪俠)의 굴(窟)을 바꾸어 예의(禮義)의 장을 열러 환하게 하였다. 이것이 곧 그 생각이니 백세토록 오래 갈 것이다. 이어받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널리 번창할 것이다.
東陽郭君德誼之墓, 新安朱熹銘之. 其詞曰:
才百夫之特, 而身不階於一命. 志四方之遠, 而行不出乎一鄕. 然而子弟服師儒之訓, 州閭識孫弟之方. 霍然其變豪俠之窟, 煥乎其闢禮義之場. 是則其思, 百世而長. 勿替繩之, 有永彌昌.
부인 허씨 묘갈명(夫人許氏墓碣銘)
부인 허(許)씨는 그 선조가 태악(太岳)의 후손이다. 삼대(三代)에 강(姜) 성이 되어 진(陳)․정(鄭) 사이에 나라를 세워, 그 후에 자손 중에 고양(高陽)에 사는 자가 명망있는 집안이 되었다. 중간에 단양(丹陽)으로 옮겼다가 다시 영가(永嘉)로 옮겼다. 당말에 이르러 영괴(令瓌)란 자가 강좌(江左)에서 벼슬을 하여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가 되었다가 산양(山陽) 령(令)으로 내쳐졌는데 건주(建州) 관예진(關隸鎭)에 적거(謫居)가 있었으므로 집안이 오동촌(梧桐村)이라고 하는 것이다. 관예의 수령이 정화현(政和縣)을 다스렸는데, 오동의 허(許)씨가 특히 성하였다. 사방에 널리 흩어져 잇는 것이 무려 사백 가(家)가 있었는데, 천우(天祐)․보대(保大)의 보첩(譜牒)이 서로 전하여 세대를 이어서도 아직 상고할 수가 있다.
부인의 부친 이름은 질(瓞)인데 같은 군의 구(丘)씨를 아내로 맞았다. 구씨 역시 유문(儒門) 명문세족(名門世族)이므로 부인은 나면서부터 정숙하고, 베 짜고 바느질 하는 것이 모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나이 19세에 읍의 선비 황조좌(黃朝佐)에게 시집갔다. 시집가서 8년 만에 졸하였다. 일찍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잃었다. 또 아들 하나를 낳아 석(石)이라 하는데, 겨우 두 살에 부인이 병이 들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그 시어머니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곧 죽을 것이니 이 아이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가르칠 때는 반드시 엄하게 하고, 어미가 없다고 하여 지나치게 사랑하지 마십시오. 만약 다행히 자립하게 되면 저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석(石)이 자라고 나서 태학에 유학하여 칭송을 듣고 드디어 진사(進士) 갑과(甲科)에 발탁되어 돌아왔다. 안팎의 장로들이 비로소 부인이 임종에 한 말을 서로 전하여 외우며 그 멀리 내다볼 줄 안 것을 감탄하였다. 부인은 비로소 옥산(屋山)의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난을 만나 지키지 못하고 다시 어느 고을 어느 동리 연복(延福) 승사(僧舍)의 왼쪽으로 옮겼다.
석(石)은 일찍이 모 주학(州學) 교수였다가 다시 돈종원(敦宗院) 교수가 되고, 소흥(紹興府) 상우현(上虞縣) 승(丞)이 되었다. 나이가 얼마쯤 들어 수족의 병으로 그 일을 그만두고 종정랑(從政郞)에서 통직랑(通直郞)으로 특별히 옮겨 비의(緋衣)와 은어(銀魚)을 하사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느 날 그곳을 지나다가 그가 병이 들어 비록 그만두었으나 정신은 쇠하지 않아, 고 악주(鄂州) 교수 오특(吳特)이 쓴 부인의 세계(世系)와 행실(行實) 한 통을 꺼내어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제가 불행하여 저희 어머니를 알지 못하니 종신토록 근심을 풀 수가 없습니다. 처신에 욕되지 않으시면 마침내 제 어머니를 무궁토록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병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또 그 뜻을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묘도(墓道)의 명(銘)이 세워지지 않았으니 제가 그것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말을 다하지 못하고 다시 감개하여 흐느껴 울어 눈물이 자주 흘러내렸다. 나 역시 우러러 뵙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급히 승낙하고 글을 받아 나왔는데, 차마 그 마음을 위로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서(序)하여 명을 쓴다.
부인의 세가(世家)는 고양(高陽)에서 나와 대대로 세첩(世牒)이 있는데 당 말에서부터 있어왔다. 죽음을 보아도 슬프고 두려움이 없이 소리가 낭랑(琅琅)하여, 자식을 가르치되 사랑하지 말하고 하여 후손이 창성하였다. 어질고, 효성스러워 멀리 가도 잊히지 않으니, 나는 그 실상을 다하여 이 언덕을 높이도다.
夫人許氏, 其先太岳之後. 在三代爲姜姓, 國於陳․鄭之間, 其後子孫居高陽者爲望族. 中從丹陽, 又徒永嘉. 至唐末〔一〕, 有令瓌者仕江左, 爲集賢院學士, 貶山陽令, 謫居建州關隷鎭, 因家所謂梧桐村者. 關隸今爲政和縣, 而梧桐之許特盛. 其散漫四出者無慮數百家, 猶以天祐․保大譜牒相傳, 世次尙可考也.
夫人父名瓞, 娶同郡丘氏. 丘亦儒門令族, 故夫人生而靜淑, 治絲枲鍼縷皆過人. 生十九年, 嫁邑士黃君朝佐. 嫁八年而卒. 嘗生一女, 失之. 又生一男, 曰石, 纔二歲而夫人屬疾, 自度且不起, 指以屬其姑曰:‘新婦卽死, 願以是兒爲託. 然敎之必嚴, 勿以其無母而厚於慈也. 使其幸而有立, 則新婦爲不亡矣.’ 旣而石長, 遊太學有聲稱, 遂擢進士甲科以歸. 中外長老始相與傳誦夫人臨絶之言, 而歎其識之遠也. 夫人始葬屋山之東, 遭亂不保, 再遷得某鄕某里延福僧舍之左.
石嘗敎授某州學, 又敎授敦宗院, 丞紹興之上虞. 年甫若干, 以末疾致其事, 自從政郞特遷通直郞, 賜緋衣銀魚以還故里. 予一日過之, 見其病雖廢而神氣不衰, 出故鄂州敎授吳君特所狀夫人世系行實一通, 泣語予曰:‘石生不幸, 不及識吾母, 無以解終身之憂. 猶冀行身不辱, 有以卒顯吾親於無窮也. 今病若此, 恐又不克其志. 且墓道之銘未立, 吾子其有以哀之.’ 語未旣, 復感慨嗚咽, 泣數行下. 予亦悲不能仰視, 亟許諾, 受書而出, 不忍無以慰其心也. 乃序而銘之. 銘曰:
夫人系家出高陽, 世祀有牒存餘唐. 睨化罔怛音琅琅, 敎而弗愛後以昌. 賢乎孝哉遠弗忘, 我最其實崇斯岡!
〔一〕末: 原作‘宋’, 據宋閩․浙本改.
반씨 부인 묘지명(潘氏婦墓誌銘)
신 해문(海門) 위(尉) 금화(金華) 반우공(潘友恭)이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젊어서 곡숙(穀熟)의 왕(王)씨에게서 아내를 얻었는데, 지금 15년입니다. 그와 함께 부친을 따라서 남해(南海)에 갔는데, 불행이 질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부모님은 곡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며 슬퍼하시고, 저 또한 스스로 그 슬픔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내 왕씨는 자신의 집에 있을 때부터 부모를 효로 모시며 친애하였습니다. 나이 열아홉에 시집을 와서는 자신의 부모를 모시는 마음으로 시부모를 모셨고, 시부모 역시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동서와 장유(長幼)의 사이에 처할 때는 엄숙하고 화목하여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사람을 부릴 때는 관대하고 절도가 있었으며, 사람됨이 간소하고 조용하고 장중하며, 삼가고 검소하며 신실하였습니다. 부공(婦功)에 있어서는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나 화려한 습속에는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싫어하지 않고, 가난하고 약소한 것을 편히 여기며, 또 다른 사람이 어려워하는 바가 있었다. 논어 대학 중요 맹자 등 여러 책을 읽기를 즐겨 대의에 대략 통하였다. 매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항상 종일 간에 윗사람을 잘 받들고 아랫사람을 잘 거느렸는지를 반성하여 다행히 하나의 실수도 없었으면 그렇게 한 다음에야 물러나 쉬면서 조금 편안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의 의미는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순희 병오(丙午) 모월 모일에 졸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 지금 그 관을 가지고 돌아와 회계 상우의 서산에 장사지내려고 하는데, 선생께서 다행히 불쌍히 여겨 명을 써주신다면 작은 위로가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왕씨의 증조부는 신(甡)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였다. 조부는 영수(令洙)인데 조의대부(朝議大夫)였다. 부친은 종(琮)인데 봉의랑(奉議郞)이다. 어머니는 유인(孺人) 반(潘)씨이다. 왕씨는 우공(友恭)에게 시집가 아들 이손(履孫)을 낳았는데, 가군(家君)의 상소를 써서 장사랑(將仕郞)에 임명되었는데 나이가 13세이다.”
나는 예전에 우공의 부친인 호남(湖南)공을 종유하였는데, 관에 시행하는 것은 잘 다스려지는 것을 보았다. 우공의 형제가 모두 와서 배웠는데, 자신에 대한 것은 삼가는 것을 보았다. 이손이 일곱 살 때 조부를 모시고 곁에 서 있었는데, 그 듣고 보는 것이 전일하고 진나아가는 것이 법도가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 우공의 편지를 읽고 이로써 그것을 질정해보니 그 아내의 현명함에 의심할 것이 없음을 알겠다. 그를 위하여 그 말을 모아서 명을 짓는다.
월(越)강의 물가와 서산(徐山)의 언덕은, 누가 이 언덕에 묻혔는가? 우공의 아내로다. 아내일 뿐만 아니라 실은 좋은 벗이었다. 나의 묘지명은 그를 백세토록 장구케 하리라.
新海門尉金華潘友恭以書來曰:‘友恭少受室于穀熟之王氏, 於今十有五年矣. 與之俱從家君以適南海, 而不幸疾病以沒. 二親哭之過時而哀, 友恭亦不自勝其悲也. 惟王氏婦自居家時事親孝, 親愛之. 年十有九而嫁, 移所以事親者事舅姑, 舅姑亦愛之. 處娣姒長幼之間, 肅穆無間言. 御下寬而有節, 爲人簡靜莊重, 恭儉信實. 於婦功不少懈, 然不務爲纂組華靡之習. 所以謹嫌微․安貧約, 又有人所難者. 喜讀論語․大學․中庸․孟子諸書, 略通大義. 每語人曰:吾常自省終日之間承上接下幸無一失〔一〕, 然後得以退休而少安. 此意日新而未已也. 淳熙丙午某月某日卒, 年甫三十有三. 今將以其柩歸葬會稽上虞之徐山, 惟先生幸哀而與之銘, 則猶足以少慰也. 王氏曾祖甡, 光祿大夫. 祖令洙, 朝議大夫. 父琮, 奉議郞. 母孺人潘氏. 王氏歸友恭, 生子曰履孫, 用家君奏補將仕郞, 年十有三矣.’
予昔從友恭尊君湖南公遊, 見其施於官者治 ; 友恭兄弟皆來學, 見其飭於身者嚴;履孫七歲, 侍立王父之旁, 見其視聽專一而進趨有度. 今讀友恭之書而以是質之, 知其婦之賢不疑也. 爲之最其語而銘之曰:
越江之潯, 徐山之阜. 孰臧斯丘? 恭叔之婦. 匪婦則然, 是實良友. 我銘畀之, 百世其久!
〔一〕常:原作‘嘗’, 據宋閩․浙本改.
선교랑 방군 묘지명(宣敎郞方君墓誌銘)
내가 처음 벼슬할 때 천주(泉州) 동안(同安)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보전(莆田) 방덕명(方德明)을 대신한 것이었다. 한 번 보고 경도(傾倒)되어 예전부터 서로 아는 것 같았다. 가고 나서 안부를 주고받으며 그냥 지나간 달이 없었다. 그 사이에 그가 시를 나에게 보냈는데, 그 말 역시 맑고 고우며 깊고 넓어서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후에 격서(檄書)를 가지고 보중(莆中)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군은 반드시 나를 위하여 술을 베풀어주고 계속하여 정성스럽게 대접해 주었다. 그 몇 년 후에 나는 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봉사(奉祠)로 마을에 있었는데, 군이 건(建)의 옥연(獄掾)이 되어 와서 또 서로 만나게 되어 손을 잡고 옛날 일을 이야기하기를 평생의 기쁨과 같이 하였다. 또 12년에 지나서 나는 다시 일로 보(莆)에 갔는데, 군의 무덤 위의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이 되어 있었다. 그 아들 주(注)가 와서 만났는데, 또 나에게 울면서 군의 주리(州里) 세계(世系)와 관벌(官閥)을 기록한 문서 한 통을 내놓으며 군의 묘지명을 청하였다. 나는 참으로 군의 불우함을 슬퍼하고 또 오랜 벗의 죽음을 탄식하였다. 대개 무릇 30여 년 사이에 동안(同安)의 동료 중에 교대하거나 같이 근무했던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니 차마 사양할 수가 없어 그 글을 가지고 돌아왔다. 병으로 아직 글을 쓸 수가 없었는데, 주(注)가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청하는데 그 말이 더욱 슬펐다. 이에 그 글을 꺼내어 서술한다.
대개 방(方)씨의 선조 중에 휘가 모(某)라는 사람이 처음 보중(莆中)에 집을 정하였는데, 여섯 아들의 관직이 모두 지위가 높고 명성이 드러나 드디어 군(郡)의 저명한 성이 되었다. 군은 그 다섯째 아들인 예부랑중(禮部郞中) 인달(仁達)의 8대손이다. 부친의 휘는 O이고 모친은 임(林)씨이다.
군의 휘는 사단(士端)으로 어려서 힘들게 배워서 나이 18세에 향천(鄕薦)으로 남성(南省) 시험을 봤으나 되지 않아서 더욱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며 거자(擧子)의 학업만을 오로지 하지 않았다. 실(室)종(宗)저(邸)를 제수하여 등사랑(登仕郞)에 임명되었는데, 이부(吏部)에 시험을 보아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우적공랑에 지수하였다가 동안(同安) 주부(主簿)로 옮겼다. 위(尉)의 일을 섭행(攝行)하여 도둑을 잡았는데, 마땅히 상을 받아야 했지만 내버려두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드디어 건영부(建寧府) 좌사리참군(左司理參軍)이 되었다. 선교랑(宣敎郞)으로 바뀌어 지복주복청현사(福州福淸縣事)가 되었다. 복청은 본래 다스리기 어렵기로 알려져 많은 수령들이 죄로 물러났다. 군이 처음 가서 개탄하여 공정하고 근면함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 년이 되지 않아 결국 공사(公事)로 해직되었다. 군은 근심하지 않고, 귀가하여 날마다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손과 벗들을 불러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서로 즐겼다. 후에 비록 은혜를 입어 이전의 관직으로 복귀했지만 군은 이미 다시 벼슬할 뜻이 없었다. 건도(乾道) 6년 윤월 8일에 드디어 병으로 졸하니 나이 45세였다.
부인은 복국(濮國) 조(趙)씨였는데, 무략대부(武略大夫) 사괴(士㚍)의 딸이며 군보다 3년 후에 역시 졸하였다. 순희 을미(乙未)년에 풍령(楓嶺) 삼산(三山)의 들에 합장할 수 있었다. 아들은 셋인데 주(注)․청(淸)․왕(汪)으로 모두 진사(進士) 업을 하였는데, 청(淸)은 일찍이 승절랑(承節郞)으로 예부(禮部)에 시험을 임용되었는데, 왕(汪)과 함께 모두 일찍 죽었다. 딸은 넷인데 그 사위는 임관(林瓘)․임숙자(林叔子)․정탁(鄭鐸)이고, 막내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손자와 손녀는 각 넷씩인데 모두 어리다.
아! 군의 재주는 남에게 뒤지지 않으나 벼슬에서는 결국 불우하여 벌써 물러나서 쉬었고, 또 오래 살지도 못하여, 유유자적하고 싶은 원을 이루었으니 이는 슬픈 일이다. 그를 위하여 명을 쓴다.
아름다운 군의 재주는 스스로 분발할만했으나, 벼슬은 불우하였으나 즐거워하여 번민함이 없었네. 그 명수(命數)에 트임과 막힘이 있는데, 어찌 또 나이대로 살지도 못하였는가? 바라건대 후손들을 덮어서 백세(百世)에 인도함이 있으라.
予始仕, 爲泉州同安主簿, 得莆田方君德明而代之. 一見傾倒, 如舊相識. 旣去, 聲問往來無虛月. 間以其詩遺予, 語亦淸麗奧博, 非常人所及也. 予後數以檄書往來莆中, 君必爲予置酒, 留連款曲. 其後數年, 予以病不能事, 奉祠里中, 而君來爲建獄掾, 又得相見, 握手道舊, 如平生懽. 又二十年, 而予復以事至莆, 則君宰上之木已拱矣〔一〕. 其子注來見, 且爲予泣出君州里世系官閥之狀一通, 請銘君墓. 予固悲君之不遇, 而又歎交舊之零落, 蓋凡三十餘年之間, 而同安寮友所繼所同無一人在, 則不忍辭而受其書以歸. 顧以病未及作, 而注數使來請, 其詞益悲. 乃出其書而敍之.
蓋方氏之先有諱某者始家莆田, 六子宦皆通顯〔二〕, 遂爲郡著姓. 君其第五子, 澄部郞中仁達之人世孫也. 父諱□, 母林氏.
君諱士端, 少苦學, 年十八以鄕薦試南省不利, 益務記覽, 不顓爲擧子業. 以授室宗邸補登仕郞, 試吏部, 復高選, 授右迪功郞, 調主同安簿. 攝尉得盜, 當受賞, 棄不顧, 遂爲建寧府左司理參軍. 改宣敎郞, 知福州福淸縣事. 福淸故號難治, 令多以罪去. 君始至, 慨然以公勤自勵曰:‘是豈不可爲哉!’然不一歲, 竟亦以公事免. 君不戚戚, 歸家日治具, 召賓友飮酒賦詩以相娛樂. 後雖以恩得還舊秩, 而君已無復仕宦意矣〔三〕. 乾道六年閏月八日, 遂以疾卒, 年四十五.
夫人濮國趙氏, 武略大夫士(多+貴)之女, 後君三年亦卒. 淳熙乙末, 乃得合葬於楓嶺三山之原. 子男三人, 注․淸․汪, 皆業進士, 而淸嘗以承節郞試禮部, 與汪皆蚤卒. 女四人, 其壻林瓘․林叔子․鄭鐸, 季未行也. 孫男女各四人, 皆幼.
嗚呼!君之才不後人而仕竟不偶, 旣退而休矣, 又不得永終壽考, 以遂其優游閒適之願, 是可悲夫. 爲之銘曰:
猗君之才, 足以自奮. 仕而不遭, 樂亦無悶. 乘除有數, 奚又不年? 尙覆來者, 百世之延!
〔一〕宰:原作‘塚’, 據宋閩․浙本改.
〔二〕宦: 原作‘官’, 據右引改. 注〔三〕同.
주자대전 93권 朱子大全 卷九十三
묘지명[墓誌銘]
여사매명(女巳埋銘)
주(朱)씨의 딸로 계사(癸巳)년에 낳았으므로 그것을 이름으로 지었으며, 숙(叔)은 자이다. 부친은 회옹(晦翁)이고, 모친은 유(劉)씨다. 난지 4년 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15세에는 계이(笄珥)를 하였고, 조(趙)가 폐백을 들였는데, 갑자기 죽었다. 애통하구나, 네가 났을 때 어여쁘고 총명하였다. 비록 배우지 않았어도 아비의 뜻을 얻었다. 말이 끊어짐에 임하여서도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며, 공손하였다. 어머니의 묻힌 곳을 따르는 것이 그 뜻이었다. 아비가 너의 명을 쓰고, 어미는 너를 보는구나. 너는 알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거라. 송 순희 정미(丁未)년 5월 임인(壬寅)에 쓰다.
朱氏女, 生癸巳, 因以名, 叔其字. 父晦翁, 母劉氏. 生四年, 呱失恃. 十有五, 適笄珥, 趙聘入, 奄然逝. 哀汝生, 婉而慧. 雖未學, 得翁意. 臨絶言, 孝友悌. 從母藏, 亦其志. 父汝銘, 母汝視. 汝有知, 尙無畏!宋淳熙歲丁未月終辜壬寅識.
강군청경 묘지명(江君淸卿墓誌銘)
순희 14년 봄 2월 경오(庚午)에 학산(鶴山) 강청경(江淸卿)이 졸했다. 겨울 11월 경신(庚申)에 그 동리에서 조금 동쪽인 하령(夏嶺)의 들에 장사지냈다. 지난번에 그 동생 사(嗣)가 편지로 임강(臨江) 통수(通守) 가후응(賈侯應)의 글을 보내어 명을 청했다. 나는 다행이 일찍이 청경을 종유하였으나 집이 백 여리나 떨어져 있어 아침저녁으로 서로 절차탁마하며 그 학문을 궁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로 한 번 볼 때마다 마음으로 그를 더욱 경애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병 때문에 조문을 하러 갈 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 하서 곡하였다. 그 문을 들어가 그 궤연(几筵)에 상(像)을 바라보고, 그 아들을 보니 매우 어려 힘들게 복상(服喪)하고는 서상(西廂)에서 관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알지 못하는 사이에 통곡하였다. 돌아와서 가후의 글을 꺼내어 또 내가 아는 것을 덧붙여 갖추어 논한다.
군의 휘는 명(明)이고, 청경은 그 자(字)다. 건양현(建陽縣) 북악리(北樂理)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증조부의 휘는 측(測)인데, 학행으로 향당(鄕黨)에서 가르치고 벼슬이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에서 그쳤는데, 증직한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조부는 위가 입(立)으로 좌조봉랑(左朝奉郞)이었는데, 관리로서의 다스림이 법을 지키고 선량하여 사마문정공(司馬文正公)에게 지우(知遇)를 받았다. 부친의 휘는 기(琦)로, 좌선교랑(左宣敎郞)․영주(永州) 주학교수(州學敎授)였다. 춘추의 학을 깊이 생각하여 구산(龜山) 선생 양(楊)공이 그 글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으며, 또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로 당세에 이름을 알렸다. 같은 현의 우(虞)씨를 아내로 맞아 청경을 낳았다.
청경은 태어나면서 남다른 천품이 있어 글을 눈으로 지나가도 쉽게 외웠다. 글을 짓는데, 붓을 잡으면 곧 완성하였는데 모두 의취가 있었다. 보는 사람은 경탄하여 강씨 아들이라고 하였다. 동자(童子)로서 장위공(張魏公)을 만났는데, 입을 열면 천하의 일을 논하는데, 엄연히 성인(成人)과 같으니 공 또한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17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상례를 예에 맞게 집행하였다. 성년이 되고서는 더욱 여러 장로들을 종유하였다. 독서(讀書) 문학(問學)하고 탐구하고 토론하기에 게으르지 않았으나 가벼이 논설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절조를 지키고 실천하여 위급한 때라도 반드시 법도대로 하였으나 모나고 지나치게 분명한 행동을 하는데 힘쓰지는 않았다. 그가 사물을 대하는 것은 온화하게 조화되었으나 또한 구차하게 아첨한 적은 없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친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고요하고 환하며 욕심없고 고원한 생각과 편안하고 독실한 지조가 마음을 진실되게 하여 밖으로 드러나 다른 사람들 또한 바라보고 공경하여 감히 업신여길 수가 없었다.
처음에, 교수공이 병이 없을 때 일찍이 선세의 유업(遺業)을 다하여 그 형을 기르려고 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죽었다. 청경은 끝내 그 뜻을 이루었는데, 자처하는 것은 그러나 약소하여 근심하지 않았다. 모부인은 현행(賢行)이 있어 과부로 살면서 종신토록 베옷에 거친 음식으로 지냈다. 연세가 많아지자 드디어 병이 들고 쇠약해졌다. 청경은 곁에서 봉양하여 어김이 없었다. 돌아가시고 나서 장제(葬祭)를 법식대로 하였다. 부친의 동복 중에 시집간 사람이 늘고 병든 사람이 있으면 맞아다가 봉양하고 구제하여 그 집안을 세워주었는데 시종 게으르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은 먼 환로(宦路)에서 죽은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친척을 규합하여 상을 치르고 묻어주었다. 형제 중에 그 선대의 유표(遺表)를 송사하여 몇 년이 되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은의(恩義)의 중함으로 깨우쳐 한 마디로 해결하였다. 대개 그 뜻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준 것이 하루가 아니었다.
일찍이 진사로 예부에 시험을 보아 합격하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다시는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그러나 홀로 수신하고 덕에 힘쓰는데 더욱 부지런하여 나이가 많다거나 질병이 들었다고 하여 조금도 스스로 안이한 뜻을 갖지 않았다. 처음에 불학을 할 뜻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부질없이 사람을 어지럽힐 뿐이다”라고 하였다. 졸할 때의 나이가 62세였는데, 상자에는 온전한 옷을 간수해 놓은 것이 없었고, 하나 있는 아들 종노(宗老)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친소(親疎)와 현부(賢否)를 불문하고 곡하며 모두 눈물을 흘렸다. 물러나서 서로 함께 탄식하고 슬퍼하는 자들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처 오(吳)씨는 먼저 졸했다. 두 딸이 있는데, 옹익(翁益)․이회조(李懷祖)에게 시집갔다. 그의 유문 십여 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아! 군의 집안은 삼대를 이어서 유학으로 가문을 일으키고 관직에 나갔으나 모두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는데, 군에 이르러 학문이 더욱 밝아지고 행이 더욱 닦여서, 사람들이 분명 세상에 등용되어 그 가문을 크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관직에도 오르지 못하고 나이도 되지 않아 몰하였으니, 이에 사람들이 조물(造物)의 이치를 의심하고 군을 위하여 애석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나는 다만 군의 뜻을 알고 있는데, 그것이 기쁨과 슬픔이 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문경(文卿)이 나에게 명을 부탁하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에 말하기를,
지금 사람과 같지 않도다, 군의 즐거움은. 옛날 사람은 미치지 못하는구나, 군의 근심에. 대개 즐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근심하는 것이었고, 근심하는 것은 내가 기쁘게 여기는 것이었다. 명을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니 자손은 이것을 받아 새기라.
淳熙十有四年春二月庚午, 鶴山江君淸卿卒. 冬十有一月庚申, 葬于其里少東夏嶺之原. 前期, 其弟嗣以書致今臨江通守賈侯應之狀來請銘. 予幸蚤得從淸卿游, 然家居相距百餘里, 不得旦暮相與切磋琢磨以究其學也. 然每一相見, 則心愈益敬愛之. 及聞其死, 以病未克赴弔. 至是乃輿疾而往哭之. 入其門. 望其几筵像設, 見其子甚幼, 纍然服喪, 撫其柩於西廂, 不自知其慟也. 歸乃發賈侯之狀, 又附以予所知者而具論之.
君諱明, 淸卿其子也. 世家建陽縣北樂里. 曾大父諱測, 以學行敎鄕黨, 仕止將作監主簿, 而贈官至太中大夫. 大父諱立, 左朝奉郞, 以吏治循良受知於司馬文正公. 父諱琦, 左宣敎郞․永州州學敎授. 覃思春秋之學, 龜山先生楊公見其書而種之, 尢以文學行義知名當世. 娶同縣虞氏而生淸卿焉.
淸卿生有異禀, 書過目輒成誦. 作文操筆立成, 皆有思致. 見者驚歎, 以爲江氏有子矣. 以童子見張魏公, 卽開口論天下事, 儼然如成人, 公亦奇之. 年十七遭外憂, 執喪如禮. 旣冠, 益從諸長老遊. 讀書問學, 探討不倦, 而不肯輕爲論說. 持守踐行, 造次必以規矩, 而不務過爲崖異斬絶之行. 其接物薰然以和, 然亦未嘗苟然有所阿狥, 鄕人無不悅而親之, 然其恬曠虛遠之懷, 安靖篤實之操, 誠於中而形於外者, 人亦望而敬之, 不敢有以加也.
始, 敎授公無恙時, 嘗欲盡以先世遺業奉其兄, 未及而卒. 淸卿卒成其志, 自處雖約, 不以爲慮. 母夫人有賢行, 自寡居卽布衣疏食以終身. 及春秋高, 遂抱羸疾. 淸卿左右奉養無違. 旣沒, 葬祭如法. 父同産有適人而老且貧者, 迎養周給, 以立其家, 始終不懈. 鄕人有死於遠富者, 爲之紏合親故, 還其喪而窆之. 有以昆弟訟其先人之遺澤而累歲不決者, 喩以恩義之童, 一言而解. 蓋其志行之所以.信於人者非一日也.
嘗以進士試禮部, 不合而歸, 遂無復有進取之念. 而獨於脩身進德益孶孶焉, 不以歲年之晩․疾病之侵而少有自安之意也. 始亦嘗有意爲浮圖學, 至是乃喟然曰:‘徒亂人耳.’ 卒時年六十有二, 篋無完衣以歛, 而一子宗老才七歲. 鄕人無問親疏賢否, 哭之皆出涕. 退而相與答嗟悼歎者無異詞也. 妻吳氏, 先卒. 二女, 適翁益․李懷祖. 其遺文十餘卷藏於家.
嗚呼!君家比三世以儒學起家從宦, 而皆不大顯, 至君而學益明, 行益修, 人曰是必且爲世用而有以大其門矣, 而又不位不年以沒于地, 於是人莫不以是疑於造物之理而爲君惜之. 予獨有以知君之志, 其所以爲欣戚者, 有不在是也. 然則文卿之託銘於予也, 豈不有以也哉. 銘曰:
不同乎今人者君之樂, 不及乎古人者君之憂. 蓋其所樂者人以爲戚, 而其所憂者我以爲休. 銘焉不慚, 子孫是收!
전운판관 황공 묘갈명[轉運判官黃公墓碣銘]
공의 위는 유(洧)고, 자는 청신(淸臣)이며, 성은 황(黃)씨로 건녕부(建寧府) 사람이다. 그 선조는 대대로 서로 전하여 광주(光州) 고시(固始)로부터 민(閩)으로 들어와 건양(建陽)의 물가 동 쪽에 살았는데, 후에 구녕(甌寧)의 연평(演平)으로 옮겼다. 증조부는 집구(執矩)이고, 조부는 백견(伯堅)으로 승의랑(承議郞)을 증직받았다. 부친 예(銳)는 조청랑(朝請郞)․제점(提點) 강(江) 회(淮) 형(荊) 절(浙) 복건(福建) 광남(廣南) 갱치공사(坑治公事)이다.
공은 음보관(廕補官)으로 균주(筠州) 고안위(高安尉)로 선발되었다. 이 때 강서(江西)에 도둑떼가 많았는데, 왕의 군대가 계속하여 토포(討捕)하였다. 공은 사사(射士)로서 대군(大軍)의 앞에서 나아가며 자주 적과 만났다. 일을 마치고 대부분 가벼운 상을 받았는데, 다시는 공(功)으로 스스로 말하지 않아 논자가 그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군옥(郡獄)에서 도둑을 다스렸는데, 백금(白金) 백량이 모처에 묻혀 있다는 말이 있어 공을 불러서 그것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금을 도적들이 말한 것보다 몇 배를 얻었는데, 종자(從者)가 그 나머지를 사사로이 취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옳지 않다고 하여 모두 관에 보내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임기가 차서 흥화군(興化軍) 사리참군(司理參軍)을 제수하였다. 일을 물어서 이미 그 정황을 알았는데, 곧 다시 법으로 마땅히 받을 벌을 고하고는 또 묻기를 “이렇게 하면 어찌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반드시 반복하여 다른 말이 없으면 옥안을 작성하고 선고문까지 갖추어 관청에 올렸다. 그러므로 공이 국문하는 모든 것은 비록 무거운 죄라도 모두 손을 합하고 이마를 두드리며 스스로 원망하지 않았다. 군원관(軍院官)이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두 옥은 하나이니 곧 옮겨서 국문하기도 하는데 다행히 다르지 않으면 나 역시 감히 스스로 공과 다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일은 오직 옳은 것을 할 뿐이니, 하물며 옥을 맡아보는 사람의 목숨이 달인 것인데, 내가 참으로 공을 위하여 감히 주창하지 않으면 공 역시 나를 위하여 주창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이원(理院)에서 옮긴 것이 부당한 것이 있어 공이 그것을 고치고 싶으면 꺼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부(部)의 사자가 사사로이 한 중죄인을 내보내려고 하였는데, 공이 불가함을 고집하자 이에 부에서 죄수를 상세히 살피고 물어서 그를 풀어주었다. 공이 태수(太守)에게 아뢰어 다시 그를 감옥에 가두어 결국 그 죄를 처벌하였다. 태수 왕대거(汪待擧)는 이 일로 공을 어질게 여겨 더욱 더 대우해주고 한 군(郡)의 일은 반드시 물은 후에 행하였다. 공 역시 더욱 진력하여 경내(境內) 정치가 칭송되었다.
감소흥부전청염장(監紹興府 錢淸鹽場)으로 선교랑(宣敎郞)으로 바뀌고, 지복주후관현(知福州侯官縣)이 되어 관대함과 간소함으로 다스려 먼저 가르치고 나중에 형벌을 내렸다. 소송하는 사람은 반복하여 분명하게 깨우쳐서 혹은 그 소송할 것을 잃고 물러가기도 하였다. 백성들이 먼저 이정(里正)이 되려고 다투며 말하기를 “관에는 조세를 거둠이 없고, 마을에는 도적이 없고, 아전은 감히 촌락(村落)에서 크게 부르지 않으니 이 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였다. 모친인 태석인(太碩人) 강(江)씨의 본가가 복주라서 친척들이 매우 많아 세시(歲時)에 왕래하며, 친친(親親)의 뜻이 더욱 두터워졌으나 한사람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을 하지 않았다.
첨서평해군절도판관청공사(簽書平海軍節度判官廳公事)가 되었는데, 군수(郡守) 신차응(辛次膺)․등작(鄧柞)․범여규(范如圭)는 모두 당대의 현대부들로 모두 중임을 맡고 있었다. 임기가 차서 조정에 나아갔는데, 급사중(給事中) 황조순(黃祖舜)이 공이 재능이 힘든 일을 다스리는 것을 감당할 만하고, 청렴하여 탐욕을 단속할 만하다고 추천하여 경관(京官)으로 머물게 하고자 하였다. 공이 모친이 연로하다고 사양하고 통판복주(通判福州)를 구하여 돌아갔다. 관직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태석인이 변고가 있어 상을 당하니 몹시 슬퍼하여 몸이 여위었으나 장례를 치르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집안은 더욱 곤궁해져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구휼하고자 하였으나 살펴보고 의롭지 않으면 취하지 않았다.
진정헌(陳正獻) 공이 당시 종반(從班)에 있었는데, 조칙에 응하여 공을 천거하여 주(州)를 맡게 할 수 있었다. 상을 마치고, 지남웅주(知南雄州)에 제수되었다. 자신의 직분을 가지고 들어가 아뢰었는데, 오늘날 군현(郡縣)의 우두머리와 아전들이 교화를 도탑게 하지 않고, 옥사와 송사를 다스리지 않으면서, 상하가 하나같이 재화와 부세(賦稅)에 급하여 백성은 명령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논하였다. 만역 조칙을 내려서 경계하고 엄하게 하지 않으면 근본을 중히 여기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가 아닐 것이다. 이 때 조정에서는 역법(役法)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공은 또 굳이 법을 개정할 필요는 없으며, 마땅히 법의 뜻을 펴서 연화도적을 그치게 하는 것은 이정(里正)에게 책임지워야 한다고 논했다. 개인을 독촉하여 대납하도록 하는 것과 조세 납부를 독촉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키면 백성의 생산이 파탄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임금께서 훌륭하게 여겨 권면하여 “경은 백성들의 일에 익숙하니 더욱 유의하여 소홀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다. 관직에 부임(赴任)하고 나니, 군(郡)이 작고 용도가 넉넉하지 않아서, 예전에는 항상 법 외에 거듭 바치게 하여 비용을 취하고, 또 술을 전매하고, 세책(稅柵)을 늘려서 백성들은 병이 들었으나 관의 비용은 오히려 부족하였다. 공이 부임하여 일체를 없애버리니 사람들이 편안하였고, 군(郡) 역시 궁핍한 적이 없었다. 주(州)는 본래 건주(建州)․요주(饒州)․공주(贛州)와 갱야사가 주조한 세공(歲貢) 백금 각 약간 량을 대납하였는데, 이전 일은 모두 백성에게서 취하여 갖춘 것이다. 공이 군의 대소에 따라 차등을 두도록 청하여, 조칙을 내려 그것을 없애니 군(郡)의 사람들이 이익을 받게 되었다.
광남동로제거시박(廣南東路提擧市舶)으로 바뀌었는데, 수(帥)와 수(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의 향에 값을 치르지 않았다. 공이 법을 들어 주에 공문을 보내어 따지자 수(帥)가 부끄럽고 두려워서 빨리 그것을 돌려주었다. 다시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학조(學租)를 넓히고 명사를 예우하여 제생들을 학문으로 더욱 권면하였다. 번우(番禺) 령(令)은 수수(帥守)의 여러 관리가 다스리는 곳 가까이에 있었는데, 마음대로 간사한 짓을 하는데도 저지하거나 바로잡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본래 그것을 듣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깨우쳐주려 하였으나 바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속(吏屬)을 체포하여 죄상을 물었다. 하루 저녁에 옥안이 갖추어져 조사하여 확인한 사실을 위에 아뢰고 죄에 해당하는 벌을 주어 내쫓았다. 그 나머지 법도를 따르지 않아 백성을 병들게 한 자들은 죄의 대소에 따라 차례대로 징벌하였다. 이에 모두가 숙연해지고 관리는 비로소 스스로 법을 지키게 되었다.
시장 사람들이 관리가 시세를 마음대로 올리고 내려 받게 하여 곤란을 당하고 있었는데, 공은 공문을 보내어 관리가 값을 정하는 것을 폐지하고 시장 장부를 없애니, 많은 장사들이 직분을 얻고, 물가가 고르게 되었다. 다시 상소를 올려 여러 방면에 그 법을 널리 시행하도록 청하니 조칙을 내려 그것을 시행하였다. 정적(丁籍)을 오래도록 펼쳐보지도 않고 수록하여 인두세 체납한 것은 이웃에 나누어 내게 하니 도망하여 떠도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공은 관리를 선발하여 나누어 보내어 그 실상을 조사하여 없애도록 하니, 한 방면에서 없앤 것이 모두 15만 구(口)였으니,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점점 돌아왔다. 바닷가에 사는 단호(蜑戶) 수만 명이 생계가 매우 미미한데도 그들 역시 주현(州縣)에서 역을 했으니, 공이 그것을 모두 면해주었다. 관할하는 곳을 안행(按行)하였는데, 비록 습기와 안개가 자욱한 거칠고 먼 지역이라도 꺼리지 않았다. 질고(疾苦)를 묻고 이치를 따라 억울함을 펴 준 것이 헤아릴 수 없고, 외전(外銓)에서 자리를 숨기고 사사로운 욕심을 좇는 폐단을 혁파하나 사람들이 원망하는 말이 없어졌다.
강(江)․절(浙) 지역에 기근이 들었는데, 임금의 뜻에 따라 이광(二廣)의 의창미를 꺼내어 바다를 건어 영가(永嘉)에 이르도록 하였다. 옛날에 이러한 역(役)이 있었는데, 관리가 인연에 따라 백성을 어지럽혀 쌀이 때에 맞게 도착하지 않았다. 공은 거기에 대처할 방법이 있었는데, 서도(西道)에서도 나란히 출발하여 거기에 이르도록 하니, 달을 넘기지 않고 영가에 도착한 것이 8만 곡(斛)이었다. 영가의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나루에서 절하며 영접하며 말하기를 “이 광동운사(廣東運使)가 우리를 살리는구나”라고 하였다.
사정지(史正志)가 발운사(發運使)가 되었는데, 오직 여러 도의 남는 돈을 모아들이는 것을 자신의 공으로 삼으니, 여러 도는 상관의 뜻에 따라 명령을 듣느라 겨를이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영외(嶺外)는 가난하고 박한데 어찌 다른 곳과 같이 볼 수가 있는가?”라고 하고 비로소 민전(緡錢) 수천을 주었다. 정지(正志)가 노하여 공을 죄에 빠트리려 하였는데, 공의 사람됨을 고하는 자가 있어 그만두었다.
사형호남로(使荊湖南路)로 바뀌었는데, 먼저 말하기를 “여러 주는 조미(租米)로 형(荊)․악(鄂)․양양(襄陽) 여러 군(軍)을 먹이는데 거리의 원근이 같지 않으니 백성에게서 나오는 실어나르는 비용이 마땅히 많고 적음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 주는 도착해야할 곳을 미리 알지 못하므로 모두 먼 곳을 기준으로 해서 그 비용을 거둡니다. 만약 담주(潭州)가 한해에 30만 곡(斛)을 나른다면 세금 외에 한 해에 운수 비용 십만 민전을 감당하여야 하니 백성이 어찌 힘에 겹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총괄하는 사람이 미리 기약한 것을 여러 주에 내리도록 조칙을 내려서 도착해야 할 곳을 알게 하고, 그 원근에 따라서 운송비를 거두면 조금이라도 백성을 힘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때에 군현은 민전의 조세를 미리 끌어다 썼는데, 그것은 법에 따라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차조(茶租), 갑찰(甲札), 호첩(戶帖), 유향(乳香), 다인(茶引)의 종류와 같은 것이었는데, 하나같이 그것을 금하여 끊어버리고, 죄가 있는 관리는 혹 아뢰어 형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주현에 격문을 내려 백성들이 보와 저수지를 더욱 넓히도록 권하고 돈과 곡식을 빌려주니, 달을 넘기지 않고 수리하고 복구한 것이 매우 많아, 조칙을 반포하여 모든 도에서 모범으로 삼도록 하였다.
마침 뢰양(耒陽) 령(令) 정자충(程資忠)이 도를 박하고 부정하게 경영하여,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법응 따르지 않고, 패하고 달아나는 것을 일삼는 것을 하소연하는 일이 있었고, 또 서리(胥吏)가 사정(私情)을 두고 법을 굽혀서 사인(士人)을 들어 귀양보낸 것을 하소연한 일도 있었다. 공은 법관의 처분에 맡겼는데, 그 일은 이어서 제거상평관(提擧常平官) 호앙(胡仰)이 뇌물을 받았다. 증거가 분명하여 공은 어쩔 수 없이 갖추어서 위에 알렸다. 호앙의 무리는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도리어 좋은 관직으로 옮겨갔다. 공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었고, 옥에 갇힌 죄수의 일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거듭 제군(諸郡)을 안행(按行)한다는 뜻을 들었다. 용릉(舂陵) 지경에 들어가서 침(郴)과 계(桂)의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모여서 사납게 위협한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수레를 돌려서 산을 헤치고 길을 뚫어서 하루 이틀도 안되어 침주(郴州)에 도착했다. 도적이 모여 있는 곳을 물어서 밤을 틈타 깊이 들어갔다. 도적떼는 공이 뜻밖에 빨리 오니 서로 돌아보고 놀라서 하루 저녁에 흩어져 갔다. 공은 또 그 두목을 불러서 화복을 깨우쳐주고 그 나머지 무리들을 위안하고 주(州)에 편지를 보내어 쌀을 운반하여 몸소 나누어 주는 것을 주관하니, 드디어 아무 일도 없었다. 양 군(郡)의 백성들이 공이 한 것을 어질게 여겨 모두 그 모습을 그려서 그를 생사(生祠)하였다. 관청으로 돌아와 얼마 안되어 어느 날 병을 얻어 졸하였다. 관직이 조산랑(朝散郞)에 머물렀고 향년 62세였으며, 순희 원년 5월 17일이었다. 오래되어 대신(臺臣)이 호앙의 간사한 형상을 논하였다. 이에 호앙은 형벌을 받으니 공의 말이 비로소 진실이 되었다.
공은 일찍 고아가 되어 어머니를 효로 모셨으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공손하고 고요하여 재물을 가벼이 보고 의(義)를 중히 여겼다. 가난의 고통이 핍절(乏絶)하여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도 있었으나 거기에 태연히 처하였다. 또 한가한 날에는 서사(書史)를 외우고, 당대의 현인군자를 종유하여 수기치인의 방법을 부지런히 물으니, 한때의 선배가 중요한 인재로 추천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됨이 안은 굳세고 밖은 온화하여 사물을 접할 때 겸손하여 비록 어리이나 부리는 사람이라도 소홀히 하는 것이 없었다. 사람이 작은 선행이 있으면 그를 칭찬하기를 입이 닳도록 하였다. 천하의 일을 논하는데 이르러 그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어도 빌리는 것이 없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소송을 듣고 결단을 내리고 곡직을 분별할 때는 상세히 살펴서 명쾌하고 마땅하게 하였다. 비록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는 송사가 있어 살펴볼 문서가 산더미 같아도 한번 보면 그 사정을 다 알았다. 평소에는 조금이라도 스스로 한가하게 지낸 적이 없어 비록 병이 들어도 휴가를 청하지 않았다. 집안 사람과 말할 때 역시 반드시 효제충신에 의거하였다. 오래 관직에 오래 있어도 이루지 못하면 더욱 청렴함과 곧음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보전하였다. 늦게 비록 소시(小試)였지만 또한 그 등용에 이르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죽는 날 집안에 남은 재물이 없어 그 고향에 돌아갔는데, 처자들이 의탁하여 머무를 곳이 없어 어진 사대부들이 그를 가슴 아파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거처인 자선향(慈善鄕) 풍악리(豊樂里) 하원(下原)의 볕바른 곳에 장사지냈다. 아내 이(李)씨는 문정공(文正公)의 자손으로, 조의대부․지건녕부(知建寧府) 패(佩) 딸인데, 안인(安人)에 봉해졌다. 아들이 넷이 있는데 개(槪)는 지금 문림랑(文林郞)․감문사원문(監文思院門)이 되었다. 격(格)은 향공진사(鄕貢進士)이다. 다음은 역(棫)이고, 다음은 예(棿)이다. 딸은 일곱인데, 장녀는 복주(福州) 정농경(鄭農卿)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같은 군의 장백유(張伯愈)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조청랑(朝靑郞)․지공주군주사(知贛州軍州事) 조선좌(趙善佐)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그런데 장씨와 조씨에게 시집간 딸은 모두 일찍 죽었다. 손자는 아홉이고, 손녀는 하나다.
개(槪) 등이 공이 나와 잘 지냈다는 이유로 그 일을 적어 와서 명을 청하였다. 나는 젊어서부터 공과 종유하였으므로 공의 시종(始終)과 표리(表裏)를 잘 알아 이른바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에 가깝다. 또 공의 관직이 제7품이므로 마땅히 비를 세워야 한다. 이에 그 일을 서술하고 시를 엮어서 새겨 공의 묘 위에 두도록 하여, 공의 자손과 모든 관직에 나간 고을 사람들에게 보여 두려움과 흠모해야 할 것을 알아서 흥기하게 하려고 한다.
아! 황공은 고귀한 인품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네. 반생을 하급관리로 있었지만 느긋하고 편안하였네. 만년에 남으로 가서 뜻을 조금 펼 수 있었네. 이에 청렴하고 굳셈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권호(權豪)를 두려워하게 하고 은택이 홀아비와 고아에까지 미쳤네. 영원히 돌아감에 관은 거처하는 곳에서 멀어졌네. 고산(故山) 북동쪽 기슭에 구덩이가 있네. 나는 그 자취를 가장 잘 아니, 방머리를 깨끗이 하고 단정히 앉아서, 후인들이여, 그 처음을 미혹하지 말라. 지나가는 자는 덕을 생각하고 또한 수레의 가로대에 손을 올려 경의를 표하라.
公諱洧, 字淸臣, 姓黃氏, 建寧府人. 其先世相傳自光州固始入閩, 居建陽之水東, 後徙甌寧之演平. 曾祖執矩. 祖伯堅, 贈承議郞. 父銳, 朝請郞․提點江淮荊浙福建廣南坑冶公事.
公以遺廕補官, 調筠州高安尉. 時江西群盜充斥, 王帥討捕相繼. 公以射士爲大軍前行, 數與賊遇. 已事, 例受薄賞, 不復以功自言, 論者多之. 郡獄治盜, 詞有白金百兩藏某處, 檄公取之. 得金數倍, 從者請私其餘. 公不可, 悉以送官, 人服其廉.
秩滿, 授興化軍司理參軍. 問事旣得其情, 卽復告以法所當得之罪, 且問‘若此寧有寃乎’, 必反復無異詞, 已乃具獄上府. 以是凡公所鞠, 雖重辟皆合爪扣顙, 自以不寃. 軍院官謂公曰:‘兩獄一也, 卽有移鞠, 幸勿爲異, 吾亦不敢自異於公也.’ 公愀然曰:‘事惟其是而已, 况司獄人命所繫, 吾固不敢以徇公, 公亦安得以狥我乎? 自今理院所移有不當者, 幸公改之, 勿以爲嫌也.’ 部使者私欲出一重囚, 公持不可, 乃因行部慮間釋之. 公白太守, 復致之獄, 而竟按其罪. 太守汪公待擧以是賢公, 待遇有加, 一郡之事必咨而後行. 公亦益爲盡力, 境內稱治.
監紹興府錢淸鹽場, 改宣敎郞, 知福州侯官縣, 治以寬簡, 先敎後刑. 訟者反復曉譬之, 或失所爭而去. 民爭先爲里正曰:‘官無賦歛, 里無盜賊, 吏不敢嘂號村落間, 此時不可失也.’ 母太碩人江氏故家福州, 族黨衆盛, 歲時往來, 親親之意甚厚, 而無一人敢以私事爲請者.
簽書平海軍節度判官廳公事, 郡守辛公次膺․鄧公柞․范公如圭皆當世賢大夫, 咸委重焉. 秩滿造朝, 給事中黃公柤舜薦公材堪治劇, 淸可律貪, 欲留官中都. 公辭母老, 求通判福州以歸. 未上, 而太碩人物故, 執喪哀毁, 治葬勤劇. 家益窮空, 當路有欲周之者, 顧非其義不取.
陳正獻公時在從班, 應詔擧公可奉使典州. 喪畢, 除知南雄州. 遵近制入奏, 論今日郡縣長吏不惇敎化, 不理獄訟, 而上下一以財賦爲急, 民不堪命. 若不降詔戒厲, 非重本愛民之道. 時朝廷議役法, 公又論不必議改法, 當申明法意, 止以煙火盜賊責里正. 至於催私代納․追呼應辦悉行禁止, 則可免民産破蕩. 玉音嘉獎, 有‘卿熟於民事, 更留意勿忽’之語. 旣之任, 郡小, 用度不饒, 舊常法外重贖以取資, 且榷酒酤․增稅柵, 民告病矣, 而官用猶不足. 公至, 一切罷之, 人以便安, 而郡亦未嘗乏事也. 州故與建․饒․贛州代輸坑冶司歲貢白金各若干兩, 故事皆取於民以辦. 公請以郡大小爲差, 詔悉蠲之, 郡人賴焉.
改廣南東路提擧市舶, 帥守市費胡香不償苴. 公擧法移州, 帥愧且懼, 亟召歸之. 更爲轉運判官, 廣學祖․禮名士, 益勸諸生以學. 番禺令近在帥守諸司治所, 肆意爲姦, 無按擧者. 公素聞之, 至是誨厲之, 不能改, 乃捕其吏屬劾之. 一夕而獄具, 奏上閱實, 抵罪以去. 其餘不循法度以病民者, 隨罪大小, 以次繩治. 於是一路肅然, 官吏始知有法守矣.
市人困於官估丐奪之擾, 公爲移書一路, 罷官估․除市籍, 百賈得職, 物價爲平. 復上奏請均其法於諸路, 詔施行之. 丁籍久失開收, 口賦之通均及鄰伍, 流亡日衆. 公選吏分行, 覈其實而除之, 一路所蠲凡十有五萬口, 流冗浸復. 瀕海蜑戶數萬生理至微, 亦有役於州縣, 公悉免之. 按行所部, 雖煙瘴荒遠無所憚. 訪問疾苦․伸理寃抑不可勝計, 革外銓匿闕狥私之弊, 人無怨言.
江浙歲饑, 有旨發二廣義倉米航海詣永嘉. 往時嘗有此役, 吏竝緣以擾民而米不時達. 公處之有方, 且幷西道所發轉致之, 不越月而至永嘉者八萬斛. 永嘉之人焚香迎拜步下曰:‘此廣東運使活我也.’
史正志爲發運使, 專以括取諸道羨錢爲己功, 諸道承風聽命不暇. 公曰:‘嶺外貧薄, 安得視它路? ’財予緡錢千數. 正志怒, 欲陷公以罪, 有以公爲人告者, 乃巳.
改使荊湖南路, 首論: ‘諸州以祖米饋荊․鄂․襄陽諸軍, 地里之遠近不同, 則運載之費出於民者宜有多寡. 今諸州不能前知所當詣, 因悉以遠地爲準而取其費. 如潭州歲輸三十萬斛, 則稅外當歲輸錢十萬緡, 民力安得不重困? 謂宜詔總領所前期下諸州, 使知所當詣, 而隨其遠近以收運費, 庶以少蘇民力.’ 異時郡縣預借民田祖稅及它非法取民, 如茶祖, 如甲札, 如戶帖, 如乳香, 如茶引之屬者, 壹禁絶之, 官吏或奏紙罪. 檄州縣勸民益廣陂塘, 貸以金穀, 不越月而所修復以萬計, 詔頒諸道以爲法.
會有訴耒陽令程資忠營道薄咼, 貪殘不法, 事敗而逸者, 又有訴胥吏挾私枉法, 黥配士人者. 公以屬吏, 則其事乃連提擧常平官胡仰貨賂關通. 證驗明白, 公不得已, 具以上聞. 仰黨援衆, 反得美遷而去. 公力不勝, 獄囚久不決, 尋以被旨按行諸郡. 入舂陵界, 聞郴․桂饑民相聚剽劫, 卽日還車, 披山通道, 不一二日而至郴州. 問賊所巢, 乘夜冞入. 群盜不意公來之速, 相願駭愕, 一夕潰去. 公又召其酉豪, 譬以禍福而慰安其餘衆, 檄州運米, 躬視賑給, 遂以無事. 兩郡之民德公之爲, 悉畵其象生祠之. 還臺未幾, 一日得疾遂卒. 積官朝散郞, 享年六十有二, 淳熙元年五月十七日也. 久之, 臺臣乃有論胡仰姦狀者. 於是仰抵罪, 而公言始信.
公早孤, 事母孝, 持身廉介謹密, 輕財重義. 貧苦乏絶, 有人所不能堪者, 而處之泰然. 益以暇日誦書史, 從當世賢人君子遊, 孜孜焉問所以修己治人之術, 一時先達無不推重器許之. 爲人內剛外和, 接物謙卑, 雖童隸無所忽. 人有片善, 稱之不容口. 至論天下事, 有不可其意者, 則未嘗有所假借也. 居官聽斷, 分別枉直, 詳審愜當. 雖累歲不決之訟, 案牘如山, 一閱盡得其情. 平居未嘗少自暇逸, 雖疾病不謁告. 與家人言, 亦必依於孝弟忠信. 久官不遂, 益以廉直自將. 晩雖小試, 然亦未究其用而忽焉以沒. 死之日, 家無餘財, 還其鄕, 妻孥無所託宿, 士大夫之賢者莫不傷之.
葬所居慈善鄕豐樂里下原之陽. 娶李氏, 文定公孫, 朝散大夫․知建寧府佩之女, 封安人. 子男四人, 槪, 今爲文林郞․監文思院門. 格, 鄕貢進士. 次棫, 次(木+兒). 女七人, 長適福州鄭農卿, 次同郡張伯愈, 次適朝請郞․知贛州軍州事趙善佐, 次尙幼. 而某與張趙氏女皆早卒. 孫男九人, 孫女一人.
槪等以公之與予善也, 狀其事來請銘. 予自少從公遊, 察公始終表裏, 殆所謂俯仰無愧怍者. 又按公官第七品, 當立碣. 乃敍其事而系以詩, 使刻寘公墓上, 以示公之子孫與凡鄕人之從宦者, 使知有所畏慕而興起云. 其詩曰:
嗟若黃公, 懷瑾握瑐. 半生下僚, 坦其舒舒. 晩使于南, 志則少攄. 乃其淸剛, 之死弗渝. 威讋權豪, 澤流鰥孤. 而其永歸, 柩靡所廬. 故山北東, 有坎其墟. 我最其蹟, 圭首方趺. 咨爾後人, 毋迷厥初. 過者考德, 亦式其車!
조산 황공 묘지명(朝散黃公墓誌銘)
처음에 내가 천주(泉州)의 동안(同安)에 관리의 시험을 실시했는데, 옆 읍인 영춘(永春)에 황공(黃公)이라는 어진 영윤(令尹)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공은 청렴하고 굳세며, 은미한 일을 살펴서, 아전이 속일 수가 없고 백성은 차마 속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현의 백성이 원통한 송사가 있으면 공에게 부탁하여 해결하였다. 그 명령과 법규에 의해 지시를 내리고, 문안을 가지고 진위를 증험하며 그 법령을 상고해보고 그 시비를 결단하여, 사람들이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법으로 삼았다. 그간에 격서(檄書)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그 경계를 넘어서 길가의 백성들이 영윤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였다. 그 금지하고 통제하는 것은 대개 모두 예의를 돈독하게 하고, 풍속을 후하게 하며, 관리의 간사함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숨은 뜻이 있었다. 그 말은 명백하고 간절(簡切)하여 그것이 전달되면 원근의 숨어 있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문을 지나다가 들어가 뵈면 공은 당상에 단정하게 앉아 학관 제자들의 과정(課程)을 보고 있고, 관아에는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공이 이렇게 하는 까닭을 물으면 공은 어리석게 여기지 않고 모두 다 말해주었다. 일을 처리하는데 과정이 있어 오래 머물면서 공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천(泉)의 사대부가 나에게 말하기를 영춘(永春)은 예전부터 사간(司諫) 강민표(江民表) 공이 수령이었는데, 선정이 있어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을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지금 황군은 절조를 지키는 것이 강공에 부끄러움이 없으며, 관리의 일을 보는 것의 정밀함은 그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갔는데, 근신(近臣)이 공을 천거한 사람이 있어 천자께서 발탁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공이 그 뜻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병으로 물러나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식자들이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10여년 후에 마을에 은거하고 있는데 와서 수학을 청하는 서생이 있었는데, 생각이 깊고 학문이 정미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해졌다. 그 출신을 물으니 공의 막내아들이었다. 하루는 그 형의 편지와 그 어머니의 외제(外弟)의 글, 그리고 지금의 제거(提擧)인 광동(廣東) 시박(市舶) 강문숙(江文叔)의 글을 꺼내어 울면서 청하기를 “선군자와는 다행히 과거에 서로 잠깐 함께하였으니 감추어두고 있던 것을 꺼내어 감히 명(銘)을 청합니다”라고 하니, 나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의 휘는 우(瑀)이고, 자는 덕조(德藻)이며, 그 선조는 대대로 복주(福州) 장락현(長樂縣) 청산(靑山) 아래에 살았는데, 후에 군성(郡城)의 동쪽으로 옮겼는데, 민현(閩縣)인 6대가 되었다. 증조부 휘(徽)와 조부 시(時)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남중(南仲)은 예부에 일곱 번 시험을 보았는데, 뽑히지 못하였는데, 공으로 인하여 조봉랑(朝奉郞)에 증직되었고, 모친인 진(陳)씨 역시 태안인(太安人)에 봉해졌다.
공은 소흥(紹興) 8년 진사과에 급제하여 처음에 요주(饒州) 사호참군(司戶參軍)을 맡았다. 제점주철관(提點鑄鐵官)이 야공(冶工)의 남는 양식을 팔아서 영리(嬴利)를 도모하고자 하여 공에게 억지로 그 값을 높이도록 하였다. 공이 불가하다고 하니 노하여 법으로 중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죄를 찾아도 얻지 못하자 다시 공을 천거하고자 하였다. 공은 사례하고 받지 않았다. 가뭄이 든 해에 군(郡)에서는 격문을 내걸어 현에 속한 민전(民田)에 조세를 당연히 면해주었다. 공은 10분의 9를 면해주도록 청했으나 그 현의 일을 시행하는 자는 10분의 1로 고하였다. 태수 홍충선공(洪忠宣公)이 의심스럽게 여겨 곡이 올린 문서를 물리치고 그것을 고치도록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벼슬은 그만둘 수 있으나 이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또 나는 이미 그것을 사자(使者)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홍공이 여러 현을 살펴보도록 하니 공이 시행한 현의 백성들만이 도망하는 무리가 없었으니, 이에 다시 공이 한 일을 훌륭하게 여겨 그를 천거하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가난이 심하여 힘을 다하여 걸어서 돌아왔다.
다시 호북(湖北) 전운사장사(轉運司帳司)에 임명되었는데, 사자(使者) 향백분(向伯奮)이 어느날 공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천거를 구하는데 군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 것은 왜인가?”라고 하고 소매 속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꺼내어 공이 백성을 친히 할 만한 사람이며, 또 심원(心源)이 깊고 고요하며, 평탄하든 험하든 지조가 한결같다고 말하여 올렸다. 공은 이에 관직이 바뀌었고, 사람들은 또한 향(向)공을 어질게 여겼다.
영춘(永春)에 올 때 외환과 내란이 오래 계속된 폐단의 여파를 이어받아서 밭이 묵어서 황폐하고 민력은 초췌하였다. 공이 와서 먼저 그 묵은 짐을 없애버렸다. 백성은 업(業)을 팔았는데도 세금 장부에서는 없애지 않은 것이 많아 그것을 모두 고쳤다. 그 문서가 혹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곧 스스로 증험해보고 그 세를 고르게 하였다. 이에 호민(豪民)은 다행히 면하기를 바랄 수가 없었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은 구제받을 수 있었다. 백성이 부세를 낼 때 혹 기한보다 늦으면 아전을 간여하게 하지 않고, 홀로 그 성명을 저자에 내걸어 날짜를 알려서 그것을 들은 자들이 서로 먼저 도착하였다. 한 해가 안 되어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사람을 모두 복귀시켜 부세 수입이 그 처음보다 두 배가 되었다. 공은 또 매우 청렴하고 검약하며 스스로 절약하고 삼갔는데, 예를 들면 마땅히 얻어야할 공해전(公廨錢)을 모두 관에 넘겨주었다. 임지에 도착하고 그만둘 때 집안을 거느리는데, 법으로는 당연히 품삯을 따져 받아야 하는데 또한 받지 않았다. 심지어 잔치를 베풀어 놀거나 음식을 보내는 비용도 모두 일체 거절하였다. 출납을 조사하면 반드시 몸소 그것을 하여 아전이 그 간사함을 용납될 수 없게 하였다. 이에 곳집에는 남은 곡식이 있고, 창고에는 남은 돈이 있었다. 백성이 힘든 것을 보고 모든 전날의 명목이 없는 부세 중에 없앨 수 있는 것, 예를 들면 부염전(浮鹽錢)과 같은 것들은 모두 없애버렸다. 상공은(上供銀)과 같이 없앨 수 없는 것은 거짓된 매매 값을 덜어버렸다. 종자미(宗子米)는 돈으로 대신 주었는데, 한해에 수백만에 이르렀다.
좌익군(左翼軍)이 장(漳)에서 옮겨와서 군(郡) 아래에 주둔하였는데, 마땅히 군영의 집을 지어야 했다. 군은 속현(屬縣)에 나누어주고 그 현은 실어 나르는 세금을 징수하여 백성이 힘듦을 감당하지 못했는데, 공은 홀로 고전(庫錢)을 내어 일하는 사람들을 보내어 죽목을 취하고 기와를 구웠고, 돌아가는 배편에 나누어서 보내니 집이 천여간이 되어도 읍인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였다. 이정(理正)은 예전에는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하여 파산하는 것이 앞뒤가 서로 이어지니 그 일을 맡게 된 자는 두려워서 백방으로 피해 다니며 오직 벗어날 수 없을까를 걱정하였다. 이에 이르러서는 공문서를 보내어 서로 먼저 하려고 다투는 자들이 있게 되었다. 또 일찍이 소를 팔아서 조세를 내려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가엾어 하며 말하기를 “어찌 너에게 한해의 경영을 잃게 하겠는가? 만약 봄에 잠시 너를 면해주면 가을에 이루어서 내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흔연히 명령을 듣고 기한이 되어서 약속한 것과 같이 하였다. 대개 백성의 큰 일에 이르러서는 이미 두루 통하였고, 그 세세한 일에 있어서는 모두 이렇게 곡진하였다. 다만 호족과 대성(大姓)이 힘없는 백성들을 침범하고 괴롭히면 체포하여 신문하고 끝까지 다스리기를 조금도 관대함이 없었다. 그가 소송을 듣고 결단하며, 숨어있는 것을 적발하는 것을 사람들은 신묘하다고 여겼으나 끝내는 인서(仁恕)로 돌아갔다.
학관(學館)을 크게 수리하여 큰 길을 멀리 피하고, 시끄럽고 번잡한 것을 없애서 그 앞에 정자를 짓고는 말을 새겨서 학자를 격려하였는데, 말의 뜻이 매우 훌륭하였다. 훌륭한 선비를 뽑아 들여 때에 따라 시험을 보았으며, 뵙기를 청하는 선비는 학관에서 만났다. 강학하는 외에는 조금의 사사로움도 감히 언급하지 않았다. 유관(儒冠)을 쓰고 도박에 관한 일을 다투는 자는 자리를 마련하여 일을 듣는 곁에서 논어와 맹자를 시험하였다. 통한 자는 방면하여 돌려보내고, 통하지 못한 자는 그 부형을 불러서 개오동나무 매와 가시나무 매로 징벌하니, 이로 말미암아 풍속이 일변하였다.
처음에 와서 여러 사당에 제사지내며 정성스럽게 배알하고는 글을 지어 고하기를 “수령이 혼미하고 탐하면 신께서는 그를 죽이소서”라고 하고는 사직사단(社稷詞壇)이 심하게 무너지고 피폐해진 것을 보고는 명령을 내려 개수하고, 귀한 나무를 심었으니, 지금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키며 공을 생각하며 그것을 이름 짓기를 ‘어사림(御史林)’이라고 한다. 가뭄을 당하여 녹봉을 내어 희생과 술을 사고는 몸소 여러 산으로 달려가서 깊고 험한 곳까지 다 하여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으니 비가 와서 응답을 이루었다.
어리석은 백성이 부처를 받들어 종종 사사로이 탑묘(塔廟)를 세우고, 승려는 이로써 저자와 동네에 섞여서 거처하여 윤리를 어지럽히고 풍속을 해쳐 양민의 근심이 되었다. 공이 율령을 살펴 그것을 모두 철거하고 또 승려가 다시는 절 밖에서 거처할 수 없도록 하여 묵은 폐단이 없어졌다. 승(丞)이 여병(女病)이 있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빙자하는 사람이 있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죽은 나졸 모가 죽어서 성황의 신을 부리니 실로 높여야 한다”고 하였다. 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감히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고는 그 토우를 잡고 계곡에 던져버리니 여병이 나았다. 처음에 현인(縣人)이 많이 그를 신으로 모시니 무당이 그것에 가탁하여 괴이한 일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없어졌다.
군수(郡守)가 여러 관직에 천거하여 떠나서 양절(兩浙) 전운사간판공사(戰運司幹辦公事)가 되었다. 공전(公田)을 팔 계책을 올린 자가 있어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것을 보았다. 여러 군을 거쳐서 그 다과와 경중이 고르지 않은 폐단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았다. 돌아와서 그 편치 않은 것을 다 말하고, 또 말하기를 “공전은 해마다 약간 들어오는데 가축을 기르고 마른 풀을 거둡니다. 이제 하루아침에 그것을 팔면, 손에 넣는 것을 계산하면 몇 년의 수입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부터 백성에게서 함부로 거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귀족 장수 양존중(楊存中)이 땅을 청하여 그 군영을 넓히고자 하였는데, 실은 구경하며 노는 장소를 만들어 권력있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을 받들려고 도모한 것이다. 공이 또 서신을 보내어 가서 보고는 돌아와서 말하기를 “군영의 병졸은 약간의 인원이니 필요한 땅을 헤아리면 약간의 무(畝)이면 족하다. 지금 청한 땅은 또 그 몇 배이니 만약 그 청을 따르면 이는 민전(民田)과 집과 무덤을 무너뜨리는 것이 얼마인지 알 수도 없다. 이는 단지 양존중이 한 권세 있는 사람을 기뻐하며 만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줄 수 없다”고 하고는, 끝내 그것을 모두 그만두었다.
권수주화정현사(權秀州華亭縣事)가 되었는데 그 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니, 공이 상평사자에게 아뢰어 창고를 열어 구휼하기를 청하였다. 사자는 상소에 대한 답을 기다려야 하므로 어렵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백성의 목숨이 조석에 있으니, 실로 그를 살릴 수가 있다면 비록 중죄를 얻어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물러나서는 현에 있는 상평(常平)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 만여 명을 온전히 살렸으나 사자는 역시 죄를 주지 못하였다. 이부시랑(吏部侍郞) 왕응진(汪應辰)․시어사(侍御史) 왕철(汪澈)이 번갈아 공의 자질이 어사에 적당하다고 천거하여 어사대검법관(御史臺檢法官)에 제수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감찰어사로 발탁되었으나 공은 이미 병이 들었다. 병으로 얻은 휴가가 다 차서 외직을 청하니, 강남동로 제점형옥공사(江南東路 提點刑獄公事)에 제수하였다. 거기에 나아가지 않고 전운부사(轉運副使)로 옮겼다. 열흘간 일을 보다가 지장주(知漳州)로 바뀌었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돌아와서 상을 벗고는 한가로이 지내며 병을 돌보기를 청하여 주관태주숭도관(主管台州 崇道觀)을 얻었다. 건도(乾道) 4년 8월 2일에 졸하였으니, 나이가 60이었다. 관직은 좌적공랑(左迪功郞)에서 일곱 번 옮겨서 조산랑(朝散郞)에 이르렀다. 곧 그해 11월 경신(庚申)에 회안현(懷安縣) 영산향(靈山鄕) 장기산(長箕山)에 장사지냈다.
공은 섭(葉)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중봉대부(中奉大夫) 대임(大任)의 딸로, 안인(安人)에 봉해졌다. 아들이 다섯인데, 고(杲)는 진사로 뽑혀 관직이 선교랑(宣敎郞)․강남서로(江南西路) 제점형옥사검법관(提點刑獄司檢法官)에 이르렀는데, 공보다 12년 후에 졸하였다. 동(東)은 종정랑(從政郞)․남검주(南劍州) 사현승(沙縣丞)이다. 사(查)와 간(榦)은 모두 진사에 종사했고, 순(栒) 역시 일찍 졸하였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승의랑(承議郞)․강회호광로총영사간판공사(江淮湖廣路總領司幹辦公事) 임문무(任文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봉의랑(奉議郞)․지천주동안현(知泉州同安縣) 여원일(余元一)에게 시집갔다. 간(榦)이 와서 공부하고 명을 청한 자이다.
공의 자질은 강직하고 곧아 어려서부터 각고자려(刻苦自勵)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시장에서 누룩을 팔면서 책을 끼고 그것을 따랐다. 실로 의(義)가 아니면 비록 춥고 배가 고파도 옷과 밥을 얻지 않았다. 민(閩)의 풍속이 대부분 화장을 하였는데, 공이 부친상을 당하자 친척들이 가난을 가엾게 여겨 풍속을 따르도록 말하였다. 공은 슬피 울면서 답하지 않고 집안 사람의 옷과 도구를 다 팔아서 끝내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모친을 모시면서 경계하고 조심하여 오직 그 뜻을 조금이라도 상할까 걱정하며, 꾸짖음이 있으면 감히 스스로 변명한 적이 없었다. 자신은 간이라고 담박함을 받들었으나 어버이를 모시는데는 그 후함을 다하였고, 형제와 친척 간에는 궁핍함을 구제하여 그 힘을 아끼지 않았다. 번양(番陽)에서 벼슬할 때 읍에 사는 사람이 두연(紏掾)이 되었는데, 그 직책이 맞지 않는다하여 계속하여 근심하였다. 공이 그를 극력 보살피고 보호하였는데, 그 사람이 처음에는 감히 이로써 공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워하고 사죄하였다. 거자(擧子)가 되었을 때 글을 모두 손수 베끼고 외웠다. 글을 짓는 것은 당시의 기호를 따르지 않았고, 관리가 되어서는 일심으로 직무를 경영하였다. 그 맑은 지조는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 없었고, 총명하고 인자하여 백성에게 혜택이 미치는 것 역시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한결같이 바른 도를 자임하였고, 일찍이 조금이라도 안색과 말을 낮추어서 천거되거나 사랑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어사(御史)가 되었을 때 병이 심하였다. 임안(臨安) 수(守) 조자숙(趙子潚) 역시 청렴함으로 유명하였는데, 임금의 뜻에 의해 공의 가사를 보았다. 관이 숙연하고 옷이 모두 맞는 것이 없는 것을 보고는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졸하는 날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무릇 이것은 모두 사람이 매우 어려워하는 것이지만 공은 매우 쉽게 여겼으니 사람들은 실로 재능이 많다고 말하였다. 그 중에는 오히려 이보다 큰 것도 있으나 불행히 시험해보지 않아서 사람들 역시 그것을 알지 못한다.
대개 공이 관청에 있을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두신로(杜莘老)와 매우 사이가 좋아 항상 절의(節義)로 서로 권면하였다. 하루는 두신로가 공의 질병을 문안하러 와서 이어서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크게 부르며 말하기를 “나는 오늘 왕계선(王繼先)을 내쳤다”고 하니 공이 기운이 솟아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군이 능히 직책을 맡고 있으니 나는 괴롭지 않다”고 하며 베게 속에서 편지를 찾아 보여주니, 계선의 죄상을 모두 다 적은 상소였다. 계선이라는 자는 의원으로 운을 얻었는데, 죄악이 가득 차 공은 마음속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안되어 두신로는 환관 장거위(張去爲)가 본받을 만하지 않음을 논하고 물러나기를 구하였다. 공은 나아가서 서로 헤어지며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군은 자애함이 두터우니 나 역시 이를 따라 갈 것이다”라고 하고는 바로 상소를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이것으로 공의 뜻의 보면 어찌 다만 그만두는 것을 하고자 한 것뿐이겠는가? 이것은 마땅히 돌을 잘라서 말을 새겨서 후세의 군자에게 알려야 한다. 이에 그 일을 서술하고 명을 쓴다.
내가 황공은 보니 고인의 풍모로다. 그 강직하고 단정하며, 깨끗하고 청결한 것은 의로운 지조이다. 그 자애롭고 은혜로운 것은 인(仁)의 공(功)이다. 그 인(仁)이 비록 겨우 작은 무리에 베풀어질 수 있었고, 그 의(義)는 여러 작은 칼끝을 꺾는데 이르지 않았지만, 그 나머지를 재빨리 잡아 여기에 쉬니, 바라건대 무궁토록 후세를 깨우쳐 주기를.
始予試吏泉之同安, 聞旁邑永春有賢令尹曰黃公, 公廉强介, 察見微隱, 吏不能欺而民不忍欺. 它縣民有寃訟, 率請諉公以決. 其條敎科指․操驗稽決, 人皆傳誦以爲法. 間嘗以檄書案事涉其境, 道傍小民稱說令尹不容口. 其禁令要束, 大抵皆敦禮義․厚風俗․戢吏姦․恤民隱之意. 其言明白簡切, 其達之也, 遠近幽隱無不曁焉. 過門入謁, 則公方危坐堂上, 閱學官弟子程課, 廷中闃然無人馨. 問公所以爲此者, 公不鄙, 告語甚悉. 恨所案事有程, 不得久留聽公語也. 泉之土大夫爲予言, 永春自故司諫江公民表爲令, 有善政, 民稱思之, 以爲無能繼者. 今黃君節守始無愧江公, 而吏事精密有過之者. 予旣罷歸, 聞近臣有薦公者, 天子擢以爲監察御史, 謂公得以行其志矣. 未幾, 聞其以病去, 竟不復起, 識者恨之. 後十餘年, 屛居里中, 有書生來請受學, 思苦業精, 久而益篤. 問其出, 則公之季子也. 一日, 出其兄東之書與其母之外弟․今提擧廣東市舶江君文叔之狀, 泣而請曰:‘先君子幸相與有一日之舊, 敢請銘以賁其幽.’ 予不得辭也.
公諱瑀, 字德藻, 其先世居福州長樂縣靑山下, 後乃從家郡城之東, 爲閩縣人六世矣. 曾祖徽․祖時皆不仕. 父南仲, 七試禮部不偶, 以公故贈朝奉郞, 而妣陳氏亦封太安人.
公中紹興八年進士第, 初任爲饒州司戶參軍. 提點鑄錢官欲市治工餘糧以規贏利, 强公高其估. 公不可, 則怒, 欲中以法. 而求其罪無所得, 乃更欲薦之. 公謝不受. 歲旱, 郡檄視屬縣民田當免祖者. 公請免之什九, 而行它縣者以什一告. 太守洪忠宣公以爲疑, 却公所上文書, 俾更之. 公曰:‘官可罷, 此不可易. 且吾已聞之諸使者矣.’旣而洪公使視諸縣, 則公所行縣民獨無流從, 乃復善公所爲而薦之. 罷官貧甚, 與一力徒步以歸.
更調湖北轉運司主管帳司, 使者向公伯奮一日謂公曰:‘人皆求薦, 君獨未嘗一言, 何也? ’卽袖中出奏牘, 上公可親民者, 且以心源淵靜․夷險一操目之. 公於是孜官, 而人亦以賢向公焉.
及來永春, 承寇亂蠱弊之餘, 田萊多荒, 民力凋瘁. 公至, 首蠲其宿負. 民有鬻業而稅籍不除者, 悉釐正之. 其文書或不具, 則履畝而均其稅. 於是豪民無得幸免, 而貧弱以蘇. 民輸賦或後期, 不使吏與其間, 獨揭其姓名於市, 爲之期日, 而聞者相先以至. 間不一歲, 流庸盡復, 賦人再倍其初. 公又痛以廉儉自約飭, 凡例所當得公廨錢悉輸之官. 到罷挈家, 法當計傭受直, 亦不取. 至於燕遊饋送之費, 又皆一切屛絶. 而鉤考出內, 則必以身親之, 吏無所容其姦. 於是廩有餘粟, 庫有餘錢. 乃視民所病, 凡前日無名之賦可罷者, 如浮鹽錢之屬, 皆罷之. 不可者, 如上供銀, 亦爲損其虛估之直. 宗子米則以它錢代輸, 一歲至數百萬.
左翼軍自漳從屯郡下, 當治營屋. 郡分以屬縣, 它縣征調輸載, 民不勝擾, 公獨出庫錢, 僦工徒, 取竹木, 具陶瓦, 而分寓便舟以往, 爲屋餘千間而邑人不之知也. 里正舊以誅求破産, 前後相屬, 當役者畏避百方, 惟恐不得脫. 至是乃有投牒爭先爲之者. 嘗有寡婦負祖而逃, 公寬其期以召之, 來則使之傭織於人以漸償所負. 又嘗有請鬻牛以輸負祖者, 公閔然曰:‘柰何使汝矢一歲之計? 今春姑以丐汝, 秋成而輸未晩也.’ 其人欣然聽命, 及期果如約. 蓋其及民之大者旣已周浹, 而於其細者又皆曲盡如此. 獨豪宗大姓侵刻細民, 則捕劾窮治之無少貸. 他所․聽斷, 發擿隱伏, 人以爲神, 而卒亦歸於仁恕也.
大治學館, 闢其衢路, 斥去暄雜, 作亭其前, 而刻詞以厲學者, 語意甚偉. 延擇修土, 課試以時, 士子上謁者接之於學. 講學之外, 一豪之私不敢及也. 有儒冠而以博訟者, 爲設席聽事之旁, 課以論․孟. 通者罷歸, 否者呼其父兄懲以二物, 由是俗爲一變.
始至, 款謁羣祀, 以文告曰:‘令有昏墨, 神其殛之.’ 視社稷祠壇隳敝甚, 卽命改爲, 而又植以名木, 至今人猶指以思公, 名之曰‘御史林’. 遭旱, 出俸錢․具牲酒, 躬走羣望, 窮極幽險, 不以勞爲憚, 雨爲立應.
愚民奉佛, 往往私立塔廟, 僧以是得雜處市里間, 亂倫敗俗, 爲良民患. 公按律令盡撤之, 且禁僧無得復居外, 宿弊頓革. 丞有女病, 若有物憑之者. 巫曰:‘故邏卒某也, 死而役於城隍之神, 實爲崇.’ 公怒曰:‘是安敢然? ’杖其土偶而投之溪流, 女病卽愈. 始時縣人頗神事之, 巫史因託以爲妖, 至是乃息云.
以郡守諸司薦, 去爲兩浙轉運司斡辦公事. 有獻鬻公田之策者, 檄公視之. 歷諸郡, 盡得其多寡輕重不均之弊. 還, 極言其非便, 且曰:‘公田歲入若干, 而畜牧芻藁取具焉. 今一旦鬻之, 計其獲不過數歲之入, 自是以往, 能無橫歛於民乎? ’貴將楊存中請地以廣其營, 實規爲觀游, 以奉權幸. 公又以檄往視, 還曰:‘營卒若干人, 度地若干畝而足. 今所請地且數倍, 若從其請, 是壞民田廬冢墓不知其幾, 而獨爲存中結驩於一幸臣也, 不可予.’ 卒皆罷之.
權秀州華亭縣事, 歲惡民饑, 公白常平使者, 請發廩以賑焉. 使者以當俟奏報難之, 公曰:‘民命在朝夕, 苟可以生之, 雖重得罪不悔.’ 退卽發常平廩粟之在縣者, 全活萬計, 而使者亦不能有以罪也. 吏部侍郞汪公應辰․侍御史汪公激交章薦公材中御史, 除御史臺檢法官. 未幾, 擢監察御史, 而公已病矣. 告滿請外, 除江南東路提點刑獄公事. 未行, 徙轉運副使. 視事旬日, 改知漳州. 旋丁內艱, 免喪, 請就閑養疾, 得主管台州崇道觀. 乾道四年八月二日卒, 年六十. 宮自左迪功郞七遷至朝散郞. 卽其年十一月庚申葬懷安縣靈山鄕長箕山.
公娶葉氏, 中奉大夫大任之女, 封安人. 五男子, 杲, 亦以進士選官至宣敎郞․江南西路提點刑獄司檢法官, 後公十二年卒. 東, 從政郞․南劍州沙縣丞. 査․斡, 皆業進士, 栒亦蚤卒. 二女子, 長適承議郞․江淮湖廣路總領司幹辦公事任文茂, 次適奉議郞․知泉州同安縣余元一. 而幹卽來學請銘者也.
公資剛介, 自少卽刻苦自厲. 家貧, 鬻麴於市而挾書隨之. 苟非其義, 雖寒且饑, 不可得而衣食也. 閩俗多火葬, 公遭父喪, 親黨憐其貧, 喩使從俗. 公哀號不答, 盡鬻家人衣具, 卒葬以禮. 事母兢兢, 唯恐少傷其意, 卽有譴責, 未嘗敢自辯數也. 自奉簡薄而於奉親極其厚, 至於兄弟族姻之間, 周貧振乏, 亦無所愛其力. 官番陽時, 有邑子爲紏掾, 以職事不相中, 尋以憂去. 公極力調護之, 其人初不敢以此望公, 涕泣慚謝. 爲擧子時, 書皆手寫成誦. 爲文不追時好, 爲吏一心營職. 其淸苦之操非人所堪, 而聰明仁愛, 所以惠於民者亦非人之所能及也. 平生一以直道自任, 未嘗小降色辭以希薦寵. 爲御史時, 嘗病甚. 臨安守趙公子潚亦以廉節著, 被旨視公家事. 見其篋櫝蕭然, 衣無兼副, 俯仰歎息者久之. 卒之日, 家亡餘財. 凡此皆人之所甚難而公之所甚易, 人固多能言之. 顧其中猶有大於此者, 不幸未試, 而人亦莫之知也.
蓋公在臺時, 與殿中侍御史杜公莘老雅相好, 每以節義相勸勉. 一日, 杜以公疾來問訊, 連呼不應, 乃大呼曰:‘吾今日擊去王繼先矣.’ 公矍然起坐曰:‘君能任職, 吾不病矣.’ 探枕中片紙示之, 乃疏繼先罪狀甚悉. 繼先者, 以醫得幸, 罪惡盈溢, 公意蓋有待也. 居無何, 杜以論宦者張去爲不効求去. 公就與別, 喟然太息曰:‘君厚自愛, 吾亦從此逝矣.’卽日上疏請去. 以此視公之志, 豈但欲爲其所已爲者而止哉!是直伐石刻辭以告後世之君子. 乃爲之序其事而銘之. 銘曰:
我觀黃公, 古人之風. 其剛方而潔廉者, 義之操;其慈愛而惠利者, 仁之功. 其仁雖僅得施於十室之聚, 其義則未及折乎百壬之鋒. 速抱其餘, 以息乎此, 尙有以啓厥後於無窮!
승사랑치사 반공 묘지명(承事郞致仕潘公墓誌銘)
반(潘)씨는 대대로 괄창(括蒼)의 죽계(竹溪)에 살았는데, 이미 저명한 성으로 불렸는데, 후에 금화(金華)로 옮겨서 더욱 유명한 가문이 되었다. 군의 증조부는 우조의대부(右朝議大夫)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처음 유학으로 가문을 일으켰고, 벼슬이 좌조봉대부(左朝奉大夫)에 이르렀다. 부친은 우조산랑(右朝散郞)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여러 번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증직되었다.
군의 휘는 경헌(景憲)이고, 자는 숙도(叔度)이다. 어려서 영민하여 하루에 수만 문구를 외웠다. 나이 아홉에 동자(童子)로 경사(京師)에 천거되어 13서를 외우고, 육경의 대의를 설했으며, 삼체(三體)를 썼으니, 조칙으로 특별히 예부에 시험을 보고, 또 속백(束帛)을 내렸다. 후에 태학에 입학하여 더욱 스스로 힘써 당시의 학관인 왕응진․예엽(芮燁)․왕십붕(王十朋)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높이 평가하였다. 융흥(隆興) 원년에 진사과에 발탁되어 형문군학교수(荊門軍學敎授)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지 않고 남악사관(南嶽祠官)이 되기를 청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재상이 군의 현명함을 알고는 중도관(中都官)로 삼아 머물게 하려 하였다. 그런데 군은 홀로 다음 임기가 많이 남은 태평주학교수(太平州學敎授)를 맡아 돌아가고자 힘껏 청하였다. 재상이 그 이유를 묻자 군이 말하기를 “본래 관직에는 뜻이 없어 한 관직에 급급한 것이니, 정치는 부모님의 바람을 위로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 두 부모님께서 모두 연로하시니 임기가 많이 남을 관직을 얻어 날마다 그 곁에서 편안히 모시기를 바랄 뿐 다른 바람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재상은 탄식하며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군은 동래 여조겸 백공과 동년이거나 나이가 많은데, 그 논설과 행신(行身), 도를 탐구하는 뜻을 듣고는 개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드디어 자신이 배우던 것을 버리고 배웠다. 이윽고 태중공(太中公)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살이를 하여 여위어서 뼈가 드러났으며, 이를 보이지 않고, 자고 일어나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고례(古禮)를 규칙으로 삼았다. 복을 벗고는 드디어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날마다 여(呂)씨 문하에서 종유하며 몸소 제자의 예를 지키고, 시를 외고 서를 읽으며, 사가(史家)들의 책까지 두루 관통하여 아래로는 지금 여기에까지 이르기까지 널리 보지 않은 것이 없으며, 특히 정씨의 역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였다. 다른 서사(書史)까지도 고정(考訂)하고 수집하여, 날마다 정해진 분량이 있었다. 서적을 교감하고 문장을 첨삭하여 손을 놓은 적이 없었다.
사람됨이 엄격하고 강직하며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지조가 있으며, 세속과 부합하는 것이 적었다. 그러나 부모를 모시고 형을 따르며, 동생들에게 우애 있고 즐겁고 화목하여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집안은 본래 부유하였지만 몸소 검소함을 행하여 베옷에 거친 음식을 먹고, 한집안 식구들이 얽매이는 바 없이 초연하였다. 그 고고(枯槁)함과 담박(淡薄)함은 다른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군은 거기에 매우 편안히 처하였다. 그리하여 집 안팎의 사람들이 교화되어 감복하여 감히 조금이라도 경박하고 화려한 일을 하지 않았다. 친척들은 모두 그를 사모하고 숭상하였으며, 군은 스스로를 항상 만족스럽지 않게 여기고 부족한 듯이 하였다.
처음에는 불학을 배웠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여(呂)씨에게서 배웠다. 만년에 거듭 처가 죽어 금화(金華)의 섭산(葉山)에 장례를 지내고 그 사이를 비워 자신의 무덤으로 삼고는 그 옆에 집을 짓고, “조문석사(朝聞夕死)”의 뜻을 취하여 ‘가암(可菴)’이라고 명명하였다. 한가한 날에 가서 놀며 다시 오래된 책을 꺼내어 읽고 한적하게 자득하여 유학과 불학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밭을 팔아 책을 쌓아놓고는 사방의 학자들을 기다렸다. 또 일직이 건녕(建寧)의 사창법(社倉法)을 취하여 개인의 곡식 수백 곡을 내어 세시(歲時)에 거두어서 나누어주었다. 섭산(葉山)에서부터 태중공(太中公)이 예전에 살던 곳과 무덤 아래에까지 각각 한 사(社)를 짓고, 한해마다 넓혀나가 아홉이 되어서 그쳤다. 나는 일찍이 그 일을 기록하였으나 또한 그 뜻을 다하지 못한 것 같다.
군은 이미 당세(當世)에 바람이 없어 그 마음을 아는 벗, 예를 들면 상서(尙書) 한원길(韓元吉)․좌사(左司) 장식(張栻)․경(卿) 증봉(曾逢)․경(卿) 정백웅(鄭伯熊)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였으니 감히 추천하거나 이끌어 줄 생각을 갖지는 못하였다. 다만 시랑(侍郞) 증체(曾逮) 만이 이끌어서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다. 근년에 대부들이 현명한 천하의 선비들 30여 인을 주승상(周丞相)에게 천거하였는데 군의 성명 역시 그 중에 있었다. 그러나 승상도 등용할 수가 없었으니 여러 공들이 혹 애초에 군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군 역시 막연히 묻는 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혹 그를 끌어다가 홀로 위연(喟然)히 증(曾)과 정(鄭) 두 경(卿)을 지기(知己)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소희(紹熙) 경술(庚戌)에 군의 아들 자각(自覺)이 진사로 예부에 시험을 보아 급제하였다. 군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이는 나를 대신할 만하다”고 하며 유사에게 스스로 진술하고는 그 일을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청이 이루어져 경관(京官)으로 바뀔 수 있었다. 비로소 명령이 내려졌으나 군은 이미 졸하였으니, 이 해 유월 기해(己亥)였다.
군은 먼저 형(邢)씨를 아내로 삼았는데, 고 용천(龍泉) 주부(主簿) 방직(邦直)의 딸이었다. 계실(繼室)은 주(朱)씨인데, 그 부친 익(翌) 신중(新仲)은 소흥 년간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자각(自覺)이고 차남은 자회(自晦)이다. 딸은 셋인데, 장녀는 주숙(朱塾)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소반(蘇虨)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형문욱(邢文郁)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둘인데 문학(問學)․문례(問禮)이다. 대개 자각이 소산(蕭山)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었고, 반(虨)은 지금 임해(臨海) 주부가 되었다.
군이 졸할 때 나이가 57세였는데, 병이 들어도 눕지 않고 임종 무렵에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떴으며, 그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자각(自覺)은 10월 정유(丁酉)에 군을 섭산(葉山)에 마련해놓은 곳에 장사를 지내고 편지를 보내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처음에 백공으로 인하여 군을 알았는데, 뜻이 같고 기질이 맞아 혼인을 맺을 만큼 좋아하게 되었다. 지난해에 강서(江西) 사사(使事)로 들어가 아뢸 일이 있어 배로 난계(蘭溪)를 지나갔다. 난계는 금화에서 백리도 떨어지지 않았고, 금화는 친구가 종종 와서 서로 위문하였다. 다만 군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한 번 보고 떨어져서 찾는 것을 위로하기를 매우 바랍니다. 그러나 그대의 오늘 행차는 명색이 부름 받은 객이니 나는 그 때문에 부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반박하기를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군이 또 시를 보내어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 거의 칠리탄(七里灘)을 지나고 있을 것이니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나는 답하지 못하고 이로써 그 사람됨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이에 명을 짓는다.
굳센 절조는 세상의 옥설(玉雪)이 되었다. 물러나서 그 자신을 반성하고 삼가 순종하고 즐거워하였다. 길을 쓰는 일을 그만두고는 책을 즐기며, 스스로를 낮추어 도를 물었다. 먹을 것과 근심을 잊어 노년에 이루었다. 예전부터 본래 출사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어디로 돌아갈까? 때는 다르지만 마음은 같은 이는 자평(子平)과 효위(孝威)로다. 섭산(葉山)의 양지쪽에 봉분을 올려 무덤을 만들었다. 나의 명이 없어지지 않으면 군이 어찌 서운해 하겠는가?
維潘氏世居括蒼之竹溪. 已號著姓, 後從金華, 益爲聞家. 君之曾大父諱某, 贈右朝議大夫. 大父諱某, 始以儒學起家, 仕至左朝奉大夫. 父某, 以右朝散郞致仕, 累贈太中大夫.
君諱景憲, 字叔度. 幼穎悟, 日誦數萬言. 年九歲, 以童子貢京師, 通念十三書, 說六經大義, 作三體字, 詔許特試禮部, 且賜束帛. 後入太學, 益自刻屬, 一時學官如汪公應辰․茂公烽․王公十朋皆推重焉. 擢隆興元年進士第, 調荊門軍學敎授. 不行, 請爲南嶽柯官. 秩滿, 宰相知君之賢, 欲留以爲中都官. 君獨力諸太平州學敎授遠次以歸. 宰相問其故. 君曰:‘本無宦情, 以汲汲於一官, 政欲以慰親望耳. 今二親俱老, 得遠次尙可日從容於其側, 它非所望.’ 宰相歎息, 以爲不可及.
君與東莢呂祖謙伯恭父同年而齒長, 聞其論說行身探道之意, 慨然感悟, 遂棄所學而學焉. 旣而遭太中公之喪, 廬於墓者三年, 毁瘠骨立, 未嘗見齒, 寢興食飮皆以古禮爲節. 服除, 遂不復仕. 日遊呂氏之門, 躬執弟子之禮, 誦詩讀書, 旁貫史氏, 下至于滋, 靡不該覽, 而尤於程氏之易爲盡心焉. 至它書史, 考訂蒐輯, 日有程課. 鉛黃朱墨, 未嘗去手.
爲人峭直耿介, 與世俗少所合. 而事親從兄, 友愛諸弟, 怡愉肅穆, 人無間言. 家本富樂, 躬率儉素, 布衣蔬食, 一室翛然. 其枯槁淡薄, 有人所不可堪者, 而君處之甚安. 以是中外化服, 不敢爲纖芥浮摩事. 族黨皆慕尙之, 而君自視欿然, 常若不足也.
始嘗學浮屠說, 旣而學於呂氏. 晩再悼亡, 因葬金華之葉山, 而虛其中以自處, 築室其旁, 取‘朝聞夕死’之意, 命之曰‘可菴’. 暇日往而遊焉, 復取舊書讀之, 悠然自得, 不知儒釋之有間也.
買田儲書, 以待四方之學者. 又嘗取建寧社倉法, 出私穀數百斛, 歲時歛散. 自葉山以至太中公故居大墓之下, 各爲一社, 期歲廣之, 及九而止. 予嘗爲記其事, 然亦未及盡如其志也.
君旣無當世之願, 士友知其心者, 如韓尙書元吉․張左司栻․曾卿逢․鄭卿伯熊, 皆愛敬之, 而不敢有推挽意. 獨曾侍郞逮嘗引以自代. 頃年, 諸夫夫薦天下士之賢者三十餘人於周丞相, 君姓名亦在數中. 而丞相不能用, 蓋諸公或未始識君, 而君亦漠然無所問. 人或扣之, 乃獨喟然以曾․鄭兩卿爲知己, 人莫測其意也. 紹熙庚戌, 君之子自覺以進士試褞部中選. 君聞之曰:‘此足以代我矣.’ 卽自列於有司, 請致其事. 遂請, 得改京秩. 命甫下, 而君已卒矣, 是歲六月己亥也.
君先娶邢氏, 故龍泉王薄邦直之女. 繼室朱氏, 其父翌新仲紹興間爲中書舍人. 子男二人, 長卽自覺, 其次自晦. 女三人, 長適朱塾, 次適蘇虨, 次適邢文郁. 孫男二, 曰問學․問禮. 蓋自覺嘗調蕭山主簿, 而虨今爲臨海主簿.
君卒時年五十七, 病不伏枕, 比終, 猶歛襟端坐而沒, 語未嘗及其私也. 自覺將以十月丁酉葬君葉山之藏, 而以書來屬予銘. 予始因伯恭父以識君, 志同氣合, 遂結婚姻之好. 往年以江西使事入奏, 舟過蘭溪. 蘭溪距金華不百里, 金華親故往往來相勞問. 獨君以書來曰:‘甚願一見, 以慰離索. 然子今日之行名爲召客, 吾是以不果來也.’ 比以口語罷歸, 君又以請來, 若曰:‘子今幾過七里灘矣, 可以已乎? 其末耶? ’予不能答, 而嘗以是愧其爲人, 乃爲之銘. 銘曰:
介剛之節, 爲世玉雪. 退省其私, 敬順怡悅. 却掃耽書, 貶身訪道. 忘食與憂, 以遂于老. 昔本不出, 今復何歸? 異世同心, 子平孝威. 葉山之陽, 上盈下坎. 我銘不亡, 君則奚憾!
우사 장공 묘지명(右司張公墓誌銘)
공은 성이 장(張)씨이고, 휘는 유(維)이며 자는 진강(振綱)인데, 또 다른 자는 중흠(仲欽)으로 남검주(南劍州) 검포인(劍浦人)이다. 세상에서 장자(長子)로서 베풀기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을 나는 마을에서 들었다. 증조부와 조부, 부친은 모두 벼슬하지 않았으나, 부친은 공(公)으로 인하여 조의대부(朝議大夫)에 증직되고, 모친 나(羅)씨 역시 공인(恭人)에 증직되었다.
공은 약하여 희롱을 즐기지 않았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썼다. 조의(朝議)공은 입지(立志)가 있는 것을 알고 항상 어루만지면서 가르쳐 말하기를 “귀한 관직은 말할 것도 없고, 항상 청백(淸白)함으로 우리 가문을 크게 하기를 구하라”고 하였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때 고아가 되어 나공인(羅恭人)이 몸소 검소하게 옷을 입으면서 힘을 다하여 공의 학문을 도왔다. 소흥 8년 진사에 급제하여 하주(賀州) 사리참군(司理參軍)에 임명되었다. 부임하지 않고 정주(汀州) 군사추관(軍事推官)으로 옮겼다. 일에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힘껏 따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군(郡)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실패하는 일이 드물었다. 속읍(屬邑)에서 도적이 일어났는데 따르는 무리가 만여 명이나 되었고, 세 군(郡)의 지경을 노략질하였다. 공은 순위병(巡尉兵)을 거느리고 대군(大軍)을 모아서 그를 토벌하고, 몸소 소굴에 들어가서 그 남은 무리를 무마하여 돌려보냈다. 공(功)의 등급은 마땅히 제일이지만 상은 미치지 않았으나 공은 뜻에 두지 않았다.
임기가 끝나고 다시 장주(漳州) 용계(龍溪) 승(丞)이 되었다. 좌선교랑(左宣敎郞)과 지복주민현(知福州閩縣)으로 바뀌었다. 먼저 차역(差役) 조약을 정하고, 재물이 배가 되는 자는 그 정년(停年)을 반으로 하니 백성이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의 정사가 구차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이 공이 있을 때에 그것을 하려고 하여 많고 적은 차례를 다투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제도가 내려와 다시 역법(役法)을 정하였는데 마침 공이 생각한 것과 들어맞았으니, 이제 드디어 법령이 정하여졌다. 관에서 정장(丁匠)과 주즙(舟楫)을 백성 중에서 소집하였는데 법도도 없고 고르지도 않았으니, 공이 백성과 약속하기를 한해에 정장의 역을 3일을 넘지 않고, 배 약간을 따로 모아서 갑(甲)을 만들고 갑은 바로 열흘을 채우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놓아주기로 하였다. 현의 부세(賦稅)는 본래 사원에서 많이 취하는데, 공이 구획하여 그 무리로 하여금 서로 살펴보게 하니 승려들은 이졸(吏卒)의 어지럽힘이 없이 더욱 힘쓸 수 있게 되었으니, 지금 역시 본보기가 되었다. 승려들은 해마다 여자(荔子)를 주현(州縣)에 세금으로 냈는데, 공이 처음 사절하며 말하기를 “어찌 입과 귀로 나의 지조를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음식 값 수십만을 쌓아놓고 스스로 취하지 않았다. 마침 큰 비가 와서 관사가 부서졌는데, 장역(匠役)이 혹 전에 한 약속을 넘기기도 하니 음식 값을 모두 취하여 보상을 하여 보내며 말하기를 “내가 백성에게 믿음을 잃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그 공정함에 감복하고 그 청렴함을 사랑하여 그를 부르기를 ‘장태청(張太淸)’이라 하였다. 어사의 집이 송사로 승전(僧田)을 빼앗은 것을 보았는데, 공은 임기가 차서 교대해야할 때여서, 아전을 보내어 문서를 조사하게 하여 밭을 승려에게 돌려주고 떠났다. 어사(御史)가 노하여 그를 중상할 생각을 가지고 그의 과실을 찾았으나 조금도 얻지 못하여 그만두었다.
부모님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주관(主管) 숭도관(崇道觀)을 얻어서 돌아왔다. 마침 진정헌공(陳正獻公)이 지건강부(知建康府)로 벽공통판부사(辟公通判府事)였는데, 큰 일과 작은 일 없이 모두 맡겼다. 또 보내어서 수(守) 당도(當塗)를 돕게 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편안해 하였다. 조정에서도 그 치행(治行)을 알고 발탁하여 광남서로제점형옥공사(廣南西路提點刑獄公事)로 삼았다.
오랑캐가 다시 친교를 맺고자 하였는데, 공이 매번 말하기를 부리(符離)의 일은 가벼이 움직인데서 실수를 했다고 하였지만 인심(人心)은 끝내 그르다고 여기지 않았다. 네 개 군(郡)을 버리는 것은 휴식에 급했기 때문이었으나 인심은 끝내 옳다고 여기지 않았다. 먼저 일을 보는 사람에게 고한 것은 마땅히 순종하여 공을 이루게 돕고, 구원을 바르게 하여 임금의 뜻이 기거하고 먹고 쉬는 동안에도 좌신상담(坐薪嘗膽)하는 정성을 폐하지 않게 하고, 정사를 닦아 밝혀, 인심이 조정이 중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입대(入對)할 때에 확고한 뜻으로 임금의 마음을 열고, 또 익(益)이 순임금을 경계한 것을 인용하여 말하여, 금일에는 마땅히 스스로를 다스리는데 급급해야 하며 소강(小康)을 탐하여 태평(太平)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짐이 어찌 순임금을 바라겠는가?”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하신 것은 역시 이와 같으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보다 낫기를 생각하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또 부내(部內) 수령을 살펴서 좋고 나쁨을 평가하여 알리도록 했다.
공이 부(部)에 도착하여 군현(郡縣)을 두루 돌아보고 남으로 먼 바다에까지 이르러 배를 늘어놓고 건너가려고 하였다. 이졸이 머리를 두드리며 다시 간하니 공은 돌아보지 않았다. 반 쯤 건넜는데 바람이 일자 뱃사공은 놀라 떨었으나 공은 또 동요하지 않았다. 도착한 곳의 백성들이 탄식하고 외치니, 백 년 동안 보지 못하던 사자(使者)의 깃발과 부절(符節)을 비로소 보았기 때문이니, 관리들은 바람을 바라보다가 지니고 있던 인장과 끈을 풀어버리고 떠났다. 관청에 돌아와서 위에서 말한 좋고 좋지 않은 관리 약간 명을 조목별로 써서 그날로 시행하고 또 명령을 내렸다. 한 해를 채우지 않고 직비각(直秘閣)․지정강부(知靜江府)로 제수되어 경략안무사공사(經略按撫司公事)를 주관하였다.
공이 정사를 하는 것은 평이하고 백성을 가까이하며,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고 두루 흡족하게 하였다. 간간이 장로를 불러 편안히 대화하며 법령과 규칙을 주어서 서로 알리고 경계하게 하였다. 관리가 함부로 조세를 걷는 것을 금하고, 관리하는 액수를 감해주도록 상소를 올렸다. 송사가 지체되어 수년씩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사건 문서를 취하여 별실에 두고 한가한 날에 몸소 검열하여 살펴보고 그 사정을 다 알아서 주고 빼앗으니 백성이 편안하였다. 또 군사를 다스림은 매우 엄하여 난폭하게 함부로 행동하고 숨은 자가 있으면 바로 베도록 명령을 내려 관대함이 없었다. 사자(使者)가 도적 수백 명을 잡았는데 가두어서 부에 이르러서 모두 죽이려 하였다. 공은 구별하여 앞장서 이끈 몇 명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보냈다. 군학(郡學)이 집이 낮아서 제생들이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의논하였는데, 모두가 이런 까닭에 시안군(始安郡)의 관리가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래되어서 불교의 건물과 같이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실화(失火)하여 모두 타버렸다. 공이 그 땅을 취하여 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이교에 미혹되어 몰래 그것을 저지하였다. 할 수 없게 되자 화복(禍福)으로 막으려 하였다. 공이 또 듣지 않자 결국은 일을 쫒았다. 또 거기에 밭을 더하여 관부에서 주는 양식을 이어 나가 학자들을 권장하였다. 빌고 제사지내는 일을 석가나 노자 등 다른 음사(陰祀)에게 하지 않았고, 이전의 전적을 살펴서 사직․풍우․뇌사(雷師)의 제단을 새롭게 하여 달마다 관속을 보내어 깨끗이 쓸어 조역(兆域)을 드러내고, 다듬고 정리하며 오르는 자리를 매우 경계하였다. 수재나 가뭄이 들면 번번이 재계하고 기원하였는데,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남단(南丹) 요(徭)의 막(莫)씨가 영락(永樂) 왕(王)씨와 뇌물로 결연하고 군사를 빌려서 그 형을 쫒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그 약속을 등지니 왕씨가 군사로 그를 공격하였다. 막씨가 곤란을 당하여 급박해지니 변방의 밭과 은야세장(銀冶稅場)을 바치며 군사를 구하였는데,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것을 받는 것이 편하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막씨와 왕씨는 군사를 연합하면 바로 앉아서 이를 찾을 것인데, 또 장차 우리를 먹여주겠습니까? 하물며 저들 국가는 오랑캐이고 중국은 종주인데, 속국이 조약을 받들지 않으면 마땅히 의(義)로써 그를 꾸짖어야 하는데, 도리어 이익 때문에 움직이면 저들은 우리를 엿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병졸의 우두머리 한 사람을 보내어 격문으로 그들을 깨우치니 두 추장이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고는 그날로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갔다. 막씨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변경의 환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이르러 순종하고 자청하여 나전마(羅殿馬)를 이끌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또 자제를 보내어 공의 장수를 위하여 명마(名馬)를 바쳤는데, 공은 받아서 군(軍) 마구간으로 보내고, 또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소주(昭州)에 본래 도둑 감문성(甘文誠)이라는 자가 모반을 하여 군을 떠났는데 그를 민첩하게 묵어서 죽이려 한다고 하였다. 공은 그것이 죄가 아님을 살피고는 그를 달래서 보냈다. 얼마 안있어 상군(象郡)의 요(徭)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자가 군사를 보내어 쫒아가 잡으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관병(官兵)이 바구니 안에 들어간 것처럼 험한 곳을 지나가서 원숭이와 승부를 다투는 것과 같으니 좋지 않은 계책이다”라고 하고는 보좌하는 장교를 보내어 산 입구를 막고 또 글로 그에게 알렸다. 요(徭)가 말하기를 “전년에 능철(凌鐵)을 죽였고, 예전에는 왕선(王宣)을 죽였으며, 금년에는 또 감문성을 죽였는데, 이들은 부름을 따른 자들이 아닌가? 누가 감히 명을 듣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감문성을 보내어 보이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여 아들을 들여보내어 사죄하였다.
강호(江湖) 유민(游(民)과 해변의 어부와 염부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혹 노략질하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는데, 그들을 핍박하면 무리가 더욱 합쳐지니 조정에서는 걱정을 하여 형주(荊州)군을 보내어 주둔하여 그것을 지키기에 이르렀다. 공이 아뢰기를, 효용군(効用軍) 오백인을 창설하여 모두 도둑의 무리를 모집하여 은밀히 도둑의 근본을 없애고 또 그 쓰임에 힘을 실어주니, 형주군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를 모두 돌려보냈다. 통솔하는 관리는 예전에는 순환전(循環錢)으로 변방에 방비했는데 법이 오래되어 점차 없어졌다. 공이 오자 비로소 경리가 고르게 되었다. 첫해에는 돈이 사천만에 불과했는데, 마지막 해에는 수만만을 헤아렸다. 그 몇 년 후에 다시 도적을 평정했는데, 모두 효용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었고, 군은 군량이 모자라지 않았으니 모두가 공의 힘이다.
조정에서는 공이 등용할 만한 사람임을 알고는 여러 번 헤아려서 번갈아 임명하고 그 사람을 꾸짖어서 휘유각(徽猷閣)에 등용하여 5년을 머물러 있었다. 임금은 바야흐로 북벌을 꾀하여 군(軍)을 건강(建康)에 옮기고 사자가 통솔하여 둔영(屯營)을 지었는데 위의 지시와 같지 않으니 사졸이 폭로하였다. 이에 공을 불러서 강남동로(江南東路) 계도전운부사(計度轉運副使)로 삼고 달려가 입대(入對)하여 대면하여 공의 치적을 장려하고 또 군영이 주둔하는 일집을 맡겼다. 공이 다시 물이 많은 곳을 피하여 지대가 높고 건조한 곳에 지으니, 옥이 2만 3천간이었다. 먼저 한 간을 관리하는 집으로 삼아 이를 사용하여 무리의 일을 계획하고, 재용(材用)을 생각하며, 역(役)을 시키고 공을 내리며, 손가락을 꼽아서 정하였다. 전의 사자(使者)는 일을 이루는 것을 탐하여 중요한 일은 약하게 하면서 덮개는 갈대로 짜서 비용이 이만만이 들었다. 공은 기와로 바꾸고 그 앞을 깊고 넓게 단단히 엮어서 비용을 반으로 줄였다. 관청의 관리들이 그 병영을 나누어 경영하였는데, 사사로운 정으로 군중(軍中)에 부탁하여 먼저 이루지 않은 곳을 이루었다고 알리니, 공의 하급 관리들이 그것을 따라 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하나의 서까래도 모으지 않았으니 이것은 임금을 속이는 일이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침 군의 장수 역시 공과 의논의 서로 맞지 않아서 은밀히 공이 지체한다고 아뢰니 가까이서 모시는 환관을 보내어 조칙을 가지고 힐책하였다. 공이 문서로 대답하니 상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짐은 실로 장모(張某)가 반드시 이것을 판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라고 하며 다시 환관을 보내어 권면하고, 나아가 비각수찬(秘閣修撰)을 더하여 위로하였다.
강동(江東)은 해마다 화적(和糴)으로 곡식을 사서 갖추어 쌓아놓았는데, 이에 앞서서는 30만을 샀는데, 혹은 주는 값이 너무 높다고 하여 그 반을 덜기도 하였다. 공이 힘껏 따졌으나 그치게 할 수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공에게 명하고, 또 조칙을 내려 화상(畫狀)을 경영하는 까닭을 묻고 또 말하기를 “전의 실수를 살펴서 백성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공은 곧 조목별로 아뢰기를 “전 일의 실수는 백성이 폐하를 알지 못하므로 다만 그 원망이 유사에게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이미 그것을 아니, 이에 실로 거울로 삼을 것이나 보상할 수는 없다고 하면 천하는 장차 공언(空言)으로 밝은 조칙을 의심할 것입니다. 또 강상에서 쌀을 사는 것은 오중(吳中)에서보다 귀한데 그 값은 오히려 낮으니, 폐하께서는 모두를 차별없이 인자하게 대하시는데, 어찌 돈 십수 만을 아껴서 강상의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러 관리들이 선물을 보내도 하나도 받지 않고, 물리칠 수 없는 것은 따로 쌓아놓았는데, 쌓인 것이 삼백여 만에 이르렀다. 마침 화적에 보상하지 않은 값이 있었는데,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곧 그것으로 주었다.
얼마 후 불러서 궁궐로 들어가 정치에 대해 아뢰고 그로 인하여 군무(軍務)의 득실에 대해 물었다. 이때에는 여러 해를 이어서 여러 병단(兵團)의 교수부(敎帥府)를 임명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남방병(南方兵)은 마땅히 안정되어야 하는데 부당하게 자주 징발하여 인심을 흔듭니다. 강동(江東) 병단은 한 달에 다섯 번 검열하니 비용으로 쓰이는 돈이 또 이천만인데, 여러 곳이 이것을 줄이지 않기로 계획했습니다. 마땅히 장수를 택하여 병사를 나누어서 여러 주를 지키게 하고 나아가서 조사하여 익히게 하면 큰 비용을 없애고 간사한 싹을 잘라서 묘당의 의논이 전일한 뜻으로 북방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사는 뛰어나서 승리를 취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지금 병사가 비록 많지만 꼭 모든 사람이 다 용감한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장수들에게 고하여 날래고 재빠른 병사를 면밀히 골라서 따로 장부를 만들어 그들을 후하게 길러 완급한 상황의 쓰임에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깊이 동의하고, 상서우사랑중(尙書右司郞中)으로 머무르게 하였다. 일을 만나 편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도좌(都坐)에 가서 아뢰었다. 어떤 사람이 미워하며 말하기를 “자질구레한 일을 따지고 묻는 것은 조관(朝官)의 체모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도사(都司)는 재상이 다스리는 것을 돕는 것이니 실제로 기미가 관련된 것입니다. 만약 관리를 살펴볼 때 표시를 하고 헤아려 곧 붓으로 글을 쓰면 가부(可否)를 남겨둘 수가 없으니 어찌 우리를 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한 달 여를 머물렀는데 모친상을 당하였다. 처음에 임금을 만났을 때는 서남 국경 밖의 오랑캐에 이르렀는데, 도정(道程)이 넓고 길어서 임금이 그림을 그려서 올리기를 명하였다. 이에 이르러 그림이 완성되었으나 올리지 않고 떠났다. 복을 벗고는 불러서 뵈었는데 이에 그것을 아뢰었다. 그림의 서문에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말한 정사를 확고히 세울 때 간사한 사람으로 하지 말고 오직 어진선비가 있은 연후에야 군사를 꾸짖을 수 있으며, 우(禹)의 치적을 받들어 국경 밖의 먼 곳까지 복속시키라고 하였다. 말이 모두가 가리키는 것이 있고 뜻이 절실하고 말이 궁색하지 않으니 식자는 그 정성이 거침이 없음을 알았다.
다음해에 사농소경(司農少卿)에 임명되었다. 아뢰기를 “제도의 양식은 대강 한 해에 백 수인데 관청의 배를 쓰는 자는 흠을 가리는 것이 많고, 상선(商船)을 빌려서 쓰는 자는 흠이 없습니다. 대개 상인들은 그 배를 스스로 아끼므로 옳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관청의 배를 부리는 사람은 모집에 따른 것으로, 손을 놀리며 관에서 입히고 먹이는데, 살펴서 기록하는 것도 없이 한해에 대강 삼만 곡이 없어집니다. 가난한 백성은 아주 작은 것을 모아서 공적인 일에 바칩니다. 그런데 한해 사이에 번번이 삼만 곡을 버려서 간사한 일에 내려주니 어찌 심히 아깝지 않습니까? 또 배 삯은 세금과 같이 내는데 관은 상선을 빌려 나르지 않으니, 배 삯의 이익은 주군(州郡)이 사사로이 합니다. 새어서 없어진 것은 대농(大農)이 그것을 맡으니 누가 배삯을 아껴서 상선을 빌려 쓰는 것을 편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다시 좌사랑중(左司郞中)이 되었다. 희(熙)․풍(豊) 년간에 의창법을 행하였는데 남방에만 미치지 않았다. 공이 계(桂)의 수령으로 청한 적이 있는데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이 해에 이르러 굶주리는 곳을 아뢰면 조정은 비로소 황정(荒政)을 강하였는데, 공이 또 말을 하여 청할 수 있었다. 령섬군주관(領贍軍酒筦)을 겸하여 그 이익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세금 수입이 크게 늘어 이 해에 남는 돈이 백여만이었다. 한해의 세금을 회계하는 것은 마땅히 관직을 옮겨야 하는데 공은 사양하고 명을 받지 않고, 비로소 속관에게 옮겨주도록 청하였는데, 마침 집정 중에 그만두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참소하는 사람은 공이 그와 함께 친구하고 생각하고, 또 공이 여러 번 권세 있는 신하를 거역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일을 가지고 물러나게 할 것을 논하였다.
이보다 먼저 공이 이미 연평(延平) 계곡 남산수의 사이에 오두막을 짓고는 샘을 트고 돌을 골라내어 반간(盤澗)이라고 불렀다. 이에 이르러 그 사이에서 노닐며 마음대로 고서를 보며 스스로 즐겼다. 또 춘추를 좋아하여 경은 폄하는 있지만 칭찬하는 것은 없고, 전(傳)이라는 것은 성인의 뜻을 다하지 못했다고 하여, 비로소 그 설에 단서를 정리하고 서차를 바로잡았으나 끝내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공이 도읍을 떠난 이유를 아는 자가 있어서 사관(祠官)의 녹(祿)을 청하여 주관무이산충우관(主管武夷山冲佑觀)을 얻었다. 공이 받지 않으려고 몇 달을 머뭇거리다가 명을 받았다. 임기가 다 차서 해를 넘겼으나 다시 청하지 않고 다음해 7월에 치사(致仕)하기를 기약하였으나 거기에 이르지 않고 졸하였다. 순희 8년 6월 계해(癸亥)이다.
처음에 계(桂)인들이 공을 위하여 생사(生祠)를 세웠는데, 이에 이르러 상(喪)을 듣고 서로 그 아래에서 곡을 하였다. 후에 이호(李浩)․장식(張栻)과 같은 어진 목수(牧守)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공이 있을 때의 일을 살펴서 모범으로 삼았다. 그러나 형옥사자(刑獄使者) 정병(鄭丙)이 일을 해결한 예전의 문서를 조사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판결은 바꿀 수 없으니 바르기가 남산(南山)과 같다”고 하였으니, 세상에 널리 퍼져서 추앙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여러 번 조청대부(朝請大夫)에 올랐고, 나(羅)씨를 아내로 삼았고, 종(宗)씨를 재취하였는데, 모두 공인(恭人)에 봉해졌다. 아들 사전(士佺)은 지금 조봉랑(朝奉朗)․통판융주사(通判融州事)가 되었다. 둘째 사한(士僩)은 수직랑감(修職郞監) 번봉주고(藩葑酒庫)가 되었으나 졸하였다. 또 다음 사신(士㐰)은 수직랑(修職郞)․상덕부사호참군(常德府司戶參軍)이다. 사엄(士儼)은 승신랑(承信郞)이다. 딸은 진사(進士) 종대동(宗大同)․사서(謝舒)․선의랑(宣義郞) 진선경(陳善慶)․문림랑(文林郞) 황동(黃東)에게 시집갔다. 지은 글은 반간집(盤澗集) 약간권이 있고, 주청(奏請) 약간권이 있다.
사전(士佺) 등은 공을 태평향(太平鄕) 천축리(天竺里) 대운당(大篔簹) 반룡산(蟠龍山)에 장사지내고, 고 우사랑중(右司郞中) 하후만(何侯萬)의 행장을 가지고 명을 청하였다. 나는 일찍이 공은 민현(閩縣)에서 한번 보았는데, 후에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의 행사는 모두 듣고 보아서 행장이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안다. 하후는 또 공의 타고난 바탕이 바르고 넉넉하여 기뻐하고 성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집안에는 첩이 없어 녹봉을 일가와 마을에 나누어 주었다. 평소에 사물을 대하는 것은 매우 온화하였으나 굳은 절조가 있어 일을 만나면 드러났다. 뜻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원망하고 화를 내도 피하지 않았다. 스스로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현달하거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중외를 막론하고 명성이 무성하였으니, 조정에서 훌륭하게 여겨 칭찬한 것이 실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천자가 그것을 알고 사론(士論)이 그와 함께 하였으나 끝내 세상과 맞지 않아 계획하고 시행하는 데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니 또한 이것 때문인가? 강동에 있을 때 임금의 명을 받들어 논의를 돕는 것은 모두 사랑을 받는 가까이서 모시는 환관이었는데, 힘이 사람을 등용하고 물러나게 하기에 충분하였는데 공은 사사로이 아첨하는 것이 없었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갔는데, 가까이서 모시는 총애받는 사람들은 임금의 뜻이 공을 향한 것을 알고는 임금이 칭찬한 말을 친히 말하여 보내기도 하고 또 그를 만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도 하였다. 혹은 한번 보면 가까이 등용될 것이라고 권하기도 하였으나 공은 뜻대로 가지 않았다. 회계를 하는 신하가 재물을 굴려서 넉넉하게 바치는 자가 종종 그 자질로 칭찬을 받고 등용되기도 하였다. 집정(執政)이 자주 말하기를 공은 넉넉한 주세(酒稅)로 내탕을 바치라고 하였는데 공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물러나서 말하기를 “일전도 모두 공가(公家)의 재물이니 조정에서 쓰고자 하면 마땅히 스스로 취할 것인데 내가 어찌 직접 바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천관(天官)이 자리가 비었는데 임금이 반열을 적은 장부를 보고는 집정에게 말하기를 “장모는 자질과 경력이 높고 노력을 베푼 지도 오래되었다”고 하고는 장차 공을 등요하려고 하였다. 공은 내외 양쪽에 이미 화합하고 친근히 지내는 사람이 없어 결국 도움을 주는 자가 없었다. 공이 지킨 것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세상과 서로 어긋남이 이와 같았으니, 대저 합치되기가 어려워 다 등용되지 못할 것을 공이 이미 마음속에서 판단한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공의 마음이 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로써 전일에 스스로 교유를 따르지 않은 것이 더욱 한스럽다. 그러나 사전(士佺)은 나의 망우(亡友) 장경부를 따라서 관리로서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알려져 재능을 쓰는 것을 증험하였으니 참으로 공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이에 그 말에 다 서차를 하여 명을 쓴다.
장공은 청렴하고 곧아 일찍이 명성이 있었고, 총명하고 인애로우며 또 글에 재주가 있었네. 중년에 군대를 통솔하여 서남으로 달려가니 모든 오랑캐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백성은 은혜를 품었다네. 조정에 들어가 재부(宰府)를 도와 경륜(經綸)을 돕고, 일로 인하여 비유하는 글을 바쳤는데 진실되고 부지런하였네. 하루아침에 가볍게 속기(俗氣)를 물리치니 연선(演仙)산의 신선이 떠났으니 누가 무리와 함께 할까? 운당의 늪의 물은 말고 맑게 흐르고, 무덤은 울울히 먼 후손들을 덮어줄 것이니, 나의 묘지명이 없어지지 않으면 공 역시 오래도록 남으리라.
公姓張氏, 諱維, 字振綱, 一字仲欽, 南劍州劍浦人. 世以長者好施予聞於鄕. 曾祖某․祖某․父某皆不仕, 而父以公故贈朝議大夫, 母羅氏亦贈恭人.
公弱不喜弄, 自力於學. 朝議公知其有立, 常撫而誨之曰:‘貴仕不足言, 要當以淸白大吾家耳.’ 未冠而孤, 羅恭人躬服儉素而悉力以奉公學. 中紹興八年進士第, 調賀州司理參軍. 不行, 從汀州軍事推官. 事有不可, 未嘗不力爭, 郡以故鮮敗事. 盜起屬邑, 附從萬衆, 抄掠三都之境. 公護巡尉兵會大軍討平之, 身履巢窟, 撫其餘衆而歸. 第功當爲第一, 而賞不及, 公不以爲意也.
秩滿, 更爲漳州龍溪丞. 改左宣敎郞, 知福州閩縣. 首定差役絛約, 貲倍者半其停年, 民以爲便. 然以公政不苛, 多欲及公時爲之, 無爭承者〔二〕. 已而制下, 更定役法, 適與公所議合, 今遂定著令云. 官募丁匠舟楫於民無度而不均, 公與民約, 一歲丁匠之役不過三日, 舟別若干爲甲, 甲直旬日滿, 則縱之唯所適. 縣賦故多取具於俺坊, 公爲區畵, 使其從自相督, 僧得無吏卒之擾而輸益辦, 今亦爲例. 僧歲以荔子餉州縣, 公一謝郤曰:‘豈可以口腹易吾操耶? ’積餐錢數十萬, 義不自取. 會淫潦敗官舍, 匠役或過前約, 悉取以僦之曰:‘毋使吾失信於民也.’ 民服其公而愛其廉, 號之曰‘張太淸’. 見御史家以訟奪僧田, 公當受代矣, 趣吏具案閱之, 以田予僧而去. 御史怒, 思有以中傷之, 求其過纖芥無所得, 乃已.
以便親自請, 得主管崇道觀以歸. 會陳正獻公知建康府, 辟公通判府事, 事無大小悉委. 又遣攝守當塗, 吏戢而民安之. 朝廷亦知其治行, 擢以爲廣南西路提點刑獄公事.
自虜再通好, 公每謂符離之役失於輕擧, 而人心終不以爲非. 四郡之棄急於休息, 而人心終不以爲是. 先嘗告執事者, 直將順正救, 使上意於起居食息不替坐薪嘗膽之誠, 修明政事, 使人心曉然知朝廷未忘中原. 及對, 遂以立志開上心, 且引益之所以戒舜者爲言, 以謂今日正當汲汲以自治, 不可狃於小康, 便謂太平, 語甚切. 上曰:‘朕何敢望舜? ’公對曰:‘有爲者亦若是, 願陛下加之意而已.’ 上嘉納之, 且俾察部內守令臧否以聞.
公到部, 按行周徧郡縣, 南薄瘴海, 陳船欲渡. 吏卒扣頭更諫, 公不顧. 半濟(8-4736)風作, 舟師震駭, 公又不爲動. 所至邊氓歡噭〔三〕, 以爲百年未始見使者旌節, 官吏有望風解印綬去者. 還臺, 條上件臧否若干人, 卽日施行, 且著爲令〔西〕. 未滿歲, 就除直秘閣․知靜江府, 主管經略安撫司公事.
公爲政平易近民, 拊循周治. 間召長老從容與語, 授以敎倏, 使轉相告戒. 禁吏妄賦, 奏減經總之額. 滯訟或數歲不決者, 取故牘․置便坐, 暇日躬閱視, 予奪咸得其情, 民以便安. 而治軍甚縣, 有暴橫若亡匿者, 立命誅所亡所貸. 使者得盜百數, 檻致之府, 欲盡殺之. 公爲區別, 誄其渠率數人, 餘悉遣去. 郡學庳下, 諸生議從它處, 咸以故始安郡治爲直. 而久爲浮屠氏之室矣, 至是遺火, 燔燒略盡. 公取其地以爲學, 使者惑異敎, 陰沮止之. 不得, 至箝以禍福. 公又不聽, 乃卒就功. 而益之田以繼廩食, 學者用勸. 禱祠不於釋老房祀, 始至, 按故典新社稷․風雨․雷師壇壝, 月遺官屬潔除, 爲圖以著其兆域․陳脩․登降之位甚飭. 水旱輒齊宿致禱, 無不立應.
南丹徭莫氏以賂結永樂王氏, 藉兵以逐其兄而自立. 旣立而背其約, 王氏以兵攻之. 莫氏困急, 請輸竝塞田及銀淪稅場以乞師, 寮屬皆以爲受之便. 公曰:‘莫王連兵, 正坐貪此爾, 又將以啗我耶? 矧國家爲夷夏宗主, 屬國不奉絛約, 正當以義詰之, 顧反以利而動, 彼且有以窺我矣.’ 於是遣一小校持檄喩之, 二酋頓顙受命, 卽日釋兵去. 莫氏前此數爲邊患, 至是帖服, 自請導羅殿馬以報國恩. 又遣子弟效名馬爲公壽, 公受而歸之郡廐, 且厚遣之.
或告昭州故盜甘文誠者謀叛去郡, 給而縛之, 欲致之死. 公察其非辜, 撫而遣之. 未幾, 象郡徭反, 使者欲調兵逐捕, 公曰:‘以官兵入箐歷險, 與猿猱角勝負, 非計也.’ 遣裨校戌山口, 且文告之. 徭曰:‘前年殺凌鐵, 往年殺王宣, 今年又殺甘文誠, 是非從若招者耶? 誰敢聽命!’公遣文誠示之, 則皆大喜, 亟遣子入謝罪.
江湖游民竝海趨漁鹽, 所過或掠爲盜, 急之則黨益合, 朝廷以爲憂, 至遣荊州軍屯守之. 公奏創効用軍五百人, 悉募儔輩爲之, 陰鎖盜本, 且賴其用, 悉上還荊州兵. 帥司舊以回易備邊, 法久浸弊. 公至, 始爲經理均節. 初年錢不過四千萬, 季年乃以累萬萬計. 其後數年, 再平劇賊, 皆以効用取勝而軍無乏興, 皆公力也.
朝廷知公可用, 屢擬除代而難其人, 乃進直徽猷閣, 留鎭五年. 上方謀北略, 移軍建康, 使者護作屯營不如指〔五〕, 士卒暴露. 乃召公爲江南東路計度轉運副使, 趣入對〔六〕, 面獎公治績, 且屬以營屯事. 公更營高燥以違淫潦, 屋凡二萬三千間, 先爲一間於治舍, 用是計徒庸, 慮材用, 令役賦功, 僂指而定. 前使者苟於就事, 幹植脆撓, 衣以織葦, 費二萬萬. 公易以瓦, 深廣堅緻於前而費半之. 府司分作它營, 以情屬軍中, 先以辦聞, 屬吏欲効之. 公曰:‘一椽未集, 是亦欺君, 吾不能也.’ 會軍帥亦與公議不相中, 密白公積緩, 遣近璫持詔詰責. 公以狀對, 上大喜曰:‘朕固料張某必辦此.’ 遣再獎諭, 就加秘閣修撰, 以寵其勞.
江東歲和糴以備儲積, 先是嘗糴三十萬, 或以予直太高而損其半. 公力爭不能止, 至是復以命公, 而詔問所以經畵狀, 且曰:‘監前矢, 毋傷民.’ 公卽條奏曰:‘前事之失, 民以陛下爲不知, 故獨歸其怨於有司. 今旣知之, 乃曰姑以爲鑒而不能償, 則天下將有以空音疑明詔者矣. 且江上糴貴於吳中, 而其直反下, 陛下一視同仁, 何愛十數萬緡而獨使江上之民觖望乎? ’諸司餉遺一不受, 有不可却者別儲之, 積至三百餘萬. 會和糴有末償之直而失於上聞者, 卽以丐之.
尋召入奏事, 因訪軍務得失. 時頻年調諸郡兵團敎帥府, 公言: ‘南方兵直安靜, 不當數調發以搖人心. 江東團敎五閱月, 費緡錢且二千萬, 諸道計不減此. 直擇將分兵戍諸州, 俾就閱習, 以息大費, 折姦萌, 使廟堂之議得專意以圖北方.’ 又言: ‘兵無奇不足以取勝. 今兵雖多, 未必人人皆勇. 直詔諸將精擇驍銳, 別藉而厚善之, 以備緩急之用.’ 上深然之, 留爲尙書右司郞中〔七〕. 遇事有未便, 輒詣都坐白. 或惎曰:‘瑣瑣辨切非朝官體.’ 公曰:‘都司助調鼎, 實幾微所關. 若視吏籤擬, 卽涉筆書, 不置可否, 安用我輩邪? ’
居月餘, 丁內艱. 初對, 因及西南徼外夷落, 道里廣袤, 上令爲圖以進. 至是圖成, 未上而去. 服除召見, 乃奏之. 序言周公戒成王立政勿以憸人, 惟吉士然後可以詰戎兵, 陟禹蹟, 服海表. 言蓋有指, 意切而辭不迫, 識者知其忠蓋.
明年, 除司農少卿. 奏:‘諸道糧綱歲凡百數, 用官舟者多負, 而雇商船者不虧. 蓋商人自愛其舟, 故不爲姦. 櫂卒率募遊手, 衣食於官, 無所顧藉, 歲率虧三萬斛. 細民勺聚撮累以輸公上, 而一歲之間輒捐三萬斛以惠姦, 豈不甚可惜哉? 且運脚與祖同輸, 官不僦運, 運脚之利州郡私之, 侵漏之失大農任之, 執若惜運脚以僦商船之爲便乎? ’
復爲左司郞中〔八〕. 熙․豐行義倉法, 獨不及南方. 公守桂, 嘗以爲請, 不報. 至是歲適薦饑, 朝廷方講荒政, 公又以爲言, 乃得請. 兼領膽軍酒筦, 不盡其利而課入大增, 歲羨緡百餘萬. 會課當遷官, 公辭不獲命, 方請貤之其屬, 會執政有罷去者, 讒者意公其與也, 又知公屢與權幸忤, 因捃他事論去之.
先時公已結廬延平溪南山水之間, 疏泉發石, 號曰盤澗. 至是徜徉其間, 縱觀古書以自娛. 尤玩意於春秋, 謂經有貶而無褒, 傳者末盡得聖人意, 方且緖正其說而未竟也. 旣而有知公去國之所以然者爲請祠官之祿, 得主管武夷山冲佑觀. 公不欲受, 逡巡數月, 乃拜命. 秩滿踰年, 不復請, 期以明年七十致仕, 未及而卒, 淳熙八年六月癸亥也.
始時桂人爲公生立祠, 至是聞喪, 相與哭於其下. 後有賢牧守如李公浩․張公栻, 多視公時行事以爲法. 而刑獄使者鄭公丙閱其決事故牘, 歎曰:‘此判不可移, 端如南山矣.’ 其爲名流所推伏蓋如此云. 累階朝請大夫, 娶羅氏, 再娶宗氏, 皆封恭人. 子士佺, 今爲朝奉郞․通判融州事. 次士僩, 嘗以修職郞監潘葑酒庫而卒. 又次士信, 修職郞․常德府司戶參軍. 士儼, 承信郞. 女適進士宗大同․謝舒․宣義郞陳善慶․文林郞黃東. 所爲文有盤澗集若干卷, 奏議若干卷.
士佺等葬公太平鄕天竺里大篔簹蟠龍山之原, 而以故右司郞中何侯萬之狀來請銘. 予嘗一見公於閩縣, 後不復相値, 然公之行事則皆接於耳目, 知狀爲不誣矣. 何侯又謂公姿禀端裕, 不見喜慍. 家無姬媵, 祿稍以班族里. 平居接物甚夷, 剞劂之節, 遇事乃見. 意謂當然, 怨怒不避也. 中不自快, 顯寵不顧也. 敭歷中外, 聲績藹然, 爲朝廷所嘉重獎寵者固以此 ; 然天子知之, 士論與之, 卒不能與世合, 不大見於設施者, 抑亦以此歟. 在江東時, 啣命獎諭者皆寵眤信臣, 力足以進退人者, 公無所私媚. 再還朝也, 嬖近知上意向公, 遣所親道上所稱賞語, 且致顧見之意. 或勸一見卽近用, 公義不往. 計臣斡利, 以羨餘獻者往往見謂材, 被進用. 執政數語公以洒羨課獻內帑, 公笑而不答. 退曰:‘一錢盡公家物, 朝廷欲用當自取之, 吾寧以獻自媒邪? ’天官虛席, 上閱班薄, 謂執政曰:‘張某資歷高, 宣勞久.’ 且將用公. 公於內外旣兩無所謂附, 竟莫有爲助者. 遡公所守, 與世相違如是, 則夫難合而不盡用者, 公已逆處縣斷於胸中久矣, 不足爲公憾. 此又爲知公之深者. 予以是益恨前日之不獲蚤自附於交遊也. 而士佺從予亡友張敬夫宦學有聞〔九〕, 驗其操執器能, 信其有似公者. 乃悉序次其語而銘之. 銘曰:
張公廉正蚤發聞, 聰明仁愛又敏文. 中歲仗鉞西南奔, 百蠻震讋民懷恩. 入掾宰府贊經綸, 因事納諷忠且動. 一朝翩然謝垢氛, 演仙仙去孰與羣? 篔簹之皐水潛淪, 佳城鬱鬱茂仍冕, 我銘不減公長存!
〔一〕右:原作‘左’, 據宋浙本改. 注〔七〕同.
〔二〕記疑云‘無’字疑誤.
〔三〕歡:原作‘嘆’, 據宋浙本改.
〔四〕著: 原作‘者’, 據宋閩․浙本改.
〔五〕護: 原作‘謀’, 據宋閩․浙本改.
〔六〕對:原與下句‘面’字互倒, 據宋閩․浙本乙.
〔八〕左: 疑當作‘右’.
〔九〕宦: 原作‘官’, 據宋浙本改.
운판 송공 묘지명(運判宋公墓地銘)
공의 휘는 약수(若水)고 자는 자연(子淵)이며 성도부(成導府) 쌍류현(雙流縣) 사람이다. 그 선조는 당(唐) 재상 문정공(文貞公) 예손(裔孫) 단(旦)인데, 급사중(給事中)으로 희종(僖宗)을 따라 촉(蜀)에 들어왔으며, 미(眉)의 팽산(彭山)에 가문을 이루었다.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성도(成都)․공촉(邛蜀) 사이에 흩어져 살았는데 오방(五房) 송(宋)씨로 불렸으며, 쌍류는 그 중의 하나이다. 공의 증조부 우언(右言)․조부 걸(傑)․부친 유(維)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그 부친 은 공으로 인하여 여러 번 봉의랑에 증직되었고, 모친 건(蹇)씨 역시 안인(安人)에 증직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지가 있었고 매우 애써서 공부하여 임연(任淵)․이도(李燾)와 같은 읍의 어진 수령들이 모두 그 글과 행실을 아껴 선후배의 순서를 꺾고 서로 교유하였다. 장차 과거에 나아가려고 할 때 공을 옮겨서 조대(漕臺)에 시험을 보게 하려는 자가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임금을 속이고 조상을 속이는 짓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고 하고 마침내 주(州)의 과거를 따라서 외성(外城)에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조정에서 대책(對策)을 하였는데, 간절하고 곧아서 피하는 것이 없었다. 검토하는 관리가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을과(乙科)의 으뜸으로 뽑아 좌적공랑(左迪功朗)․가주(嘉州) 용유현(龍遊縣) 주부(主簿)를 제수하였다. 부임하지 않았는데 부친의 상을 당했다. 다시 영주(龍州) 인수현(仁壽縣) 주부(主簿), 감영강군 청성현 미강진세(監永康軍 靑城縣 味江鎭稅) 겸(兼) 합동장(合同場)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먼저 다금(茶禁)이 매우 엄하였는데 사사로운 매매가 더욱 많아져, 영업세가 매우 무거웠는데도 한해의 세액은 오히려 줄었다. 공이 도착하여 금지를 없애고 조세를 가볍게 하여 오래된 폐단을 한꺼번에 바꾸어버리니 세금 수입이 크게 늘었다. 어떤 사람은 그 남은 것을 바쳐서 상을 구하라고 권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단지 후인(後人)을 위한 계책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물과 샘의 이익을 다투어 때지어 모여서 서로 치고 받았으며, 또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공이 홀로 말을 타고 그들을 깨우치니 모두 무기를 놓고 명을 들었다. 공은 또 영추(靈湫)에서 빌어 채 하루 밤도 비가 오지 않았으나 물이 가득 차고 봇도랑이 모두 가득 차 바짝 마른 것들이 소생하고 물정이 안정되었다. 다음해에 다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또 서로 모여서 사납게 노략질하여 식량을 구하여 모(某)일에 진(鎭)의 백성 모씨를 노략질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공이 여러 호가(豪家)를 불러 말하기를 “기민(饑民)이 식량을 구하는 것은 다루기가 쉽다. 사사로이 판매하는 무리가 스스로 용기를 믿고 법을 희롱하니, 기민이 이들과 하나로 합해지면 작은 변란이 아니다. 지금 능히 힘을 내어서 그 무리에 보내어 일대의 지경을 지키게 하면 다만 그 간사한 마음을 막을 뿐만 아니라, 기민도 우리가 방비가 있는 것을 알아 또한 꺼려서 감히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한번 움직여 두 가지 효과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호가들이 모두 승낙하고 모두 돈과 예물을 내어, 소를 잡고 술을 걸러서 그 무리를 불러서 주어 보내고, 살고 있는 백성의 보오(保伍) 사이에 섞여서 날마다 병사로 저자를 순시하게 하였다. 공 또한 그 사이에서 검을 차고 말을 타니 군중이 모두 두려워 복종하고 기민들도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는 일찍이 우리를 위하여 추(湫)에서 빌어 물을 나오게 한 사람이니 나는 마땅히 그를 삼가 피할 뿐이다”고 하였다.
진은 본래 학교가 없어 공이 공자묘를 짓고 고대의 제도와 기물을 고찰하여 제생을 이끌고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사유(師儒)를 불러들여 몸소 강설하여, 선비를 다투어 권장하였다.
제치사(制置使) 왕(汪)공 및 여러 사자(使者)들이 그 현명함을 듣고 다투어 그를 천거하여 지신천현(知神泉縣)으로 옮겼다. 처음에 도착하여 부서지고 느슨한 나머지를 이어받고는, 처음에 세금 납부를 독촉하는 관리의 폐단을 없앴다. 그러나 종이에 부담한 세금을 쓰고 백성과 기약하니 감히 늦는 자가 없었다. 며칠이 되지 않아 이전 수령의 묵은 체납한 세금을 다 갚았다. 주가(州家)에 말을 하여 이전 수령이 좋게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읍은 황작(黃雀)을 생산했는데 해마다 여러 관청에 바치는 것이 백만을 헤아렸다. 공이 그것을 없애도록 청하여 백성의 쓰임이 어지럽지 않고 물생(物生) 역시 순조로우니, 지금은 법이 되었다.
여러 관청에서 그 치행을 알아 지가주(知嘉州) 건위현(犍爲縣)으로 옮겼다. 신천의 백성이 서로 그를 만류하여 빼앗을 수가 없었다. 공은 두 읍에 모두 그 학교를 관리하여 미강(味江)에서 한 것과 같이 하였다. 송사를 하는 백성이 있으면 몸소 의리(義理)와 은의(恩意)로 분별하여 알려주고 끝까지 타일러서 모두가 크게 감사하며 기뻐하여 다시 범하는 자가 없었다. 더욱 좋지 않고 명령을 듣지 않으며 감히 무단(武斷)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잡아서 신문하고 주(州)에 옥안을 올려 유배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에 마을이 바르고 깨끗해져 선량한 사람은 모두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
선교랑(宣敎郞)․간판제사양료원(幹辦諸司糧料院)으로 바뀌었다. 태상시주부(太常寺主簿)에 발탁되었는데, 재계하여 반드시 경건하게 하였고, 깨끗이 씻어 반드시 청결하게 하니, 동료들이 부끄러워하여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신번(新繁)은 본래 예조(藝祖)의 화상이 있었는데 촉수(蜀守)가 성도(成都)에 궁을 개축할 것을 청하였다. 일이 태상(太常)에 내려왔는데, 공이 그것을 들으니 또 토목을 크게 일으켜 사치함과 화려함을 다하려고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니, 그것을 처리하는 것을 논박하여 일이 중지되었다. 국자감승(國子監丞)으로 옮겨 다시 태상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다가 다시 승(丞)이 되었다. 이부고공랑관(吏部考功郞官)을 겸하고 병부(兵部)로 바뀌어 비서승(秘書丞)에 임명되고 다시 이부(吏部)를 겸하였다. 삼관이 장차 고사(故事)에 따라 폭서회(曝書會)를 하려고 하였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비가 올 것을 걱정하여 피전(避殿)하고 식사를 낮추었다. 공이 관장(官長)에게 말하기를 “군부(君父)는 이렇게 애태우고 근심하는데, 신하는 서로 모여 잔치를 열어 즐기면 실로 스스로 편안하지 않음이 있다”고 하니, 관장이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는 그것을 중지한다고 아뢰었다. 가뭄이 들어 관직(館職)에게 고하여 그 정사에 대하여 조목별로 올리도록 하였다. 공이 쓴 글이 수만 언인데, 당시 형상(刑賞)의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이것이 음양의 조화를 막는 것이라고 하였다. 재상이 그것을 보고 노하여 공을 제거강동상평등사(提擧江東常平等事)로 내쫒았다. 임금이 공의 성실함을 칭찬하여 복건(福建)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민(閩)의 풍속은 본래 과거를 보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공이 수사(帥司)와 의견이 맞아 율령을 살피고, 보오(保伍)를 엄하게 하여 가르침을 막는 까닭이 되는 것을 모두 없애버리니 몸을 온전히 한 자들이 많았다. 정주(汀州)는 멀고 도 도적이 많아 장향(瘴鄕)으로 불렸는데, 평시에도 사자(使者)들이 안행(按行)하면서 대부분 피하고 가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도적의 무리가 크게 평정되어 사상자들이 길에 가로 누워있고, 전염병이 크게 일어나니 또 평소에 비할 수가 없었다. 공이 홀로 개연히 수레를 끌고 깊이 들어가 약을 끓여 스스로를 따라서 친히 문병한 자에게 그것을 마시게 하였다. 백성 중에 도적이 공격하고 위협한 자와 분격(奮激)을 막아 관군(官軍)을 도운 자들과, 노력하여 본받을 것이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조세를 없애주었다. 정(汀)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모든 사람이 공의 덕을 높이 받들었다. 건양(建陽) 초현리(招賢里)는 본래 항상 상평미(常平米) 수천 곡을 따로 저장해 놓았다가 훙년에 꺼내어 백성을 구휼하였다. 본래 은사(隱士) 위섬지(魏掞之)가 한 일이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자 진부(陳腐)해져서 때가 아닌데도 출납하여 도리어 백성을 괴롭게 하였다. 호부(戶部)에서 내린 사창법을 고하는 자가 있어 공이 기뻐하며 바로 공문을 보내어 속향(屬鄕) 사람인 사군자(士君子) 주명중(周明仲)에게 해마다 거두어들이고 풀게 하고, 한편으로는 또 그 이익을 취하였다.
호남제점형옥공사(湖南提點刑獄公事)에 제수되었는데, 건(建) 사람들이 노인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가로막고 연모하여 저녁에 이르기까지 출발할 수 없었다. 호남은 더욱 도둑이 많았는데, 모두 낮에는 호민(豪民)의 집에 엎드려 있다가 밤이 되면 갑자기 나오기 때문에 도적이 일어나도 때에 맞추어 잡을 수 없었다. 공이 도착하여 보오(保伍)의 법령을 거듭 밝히고 서로 검거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도적이 용납될 수가 없자 마차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고 귀순할 수 있게 보증을 받아 농업에 복귀하도록 해달라고 청하는 자도 있었다. 공이 모두 타일러서 보냈다. 또 여러 군(郡)에 격문을 보내어 금군(禁軍)을 자세히 검열하여 과실을 순시하고, 칭찬할 것을 살펴서 법대로 하도록 하였다. 달마다 제 현(縣)의 궁병(弓兵)을 골라서 그 기예를 가르치고 잘한 사람은 상을 주고 못한 사람은 벌을 주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모든 음악이 쓰이고 도적이 일어나면 항상 잡혔다. 옥관(獄官)은 그 직책을 겸할 수 없도록 아뢰고 또 일곱 가지 일을 조목별로 나열하여 거듭 경계하였다. 법을 의논하는데 있어서는 더욱 삼가, 매번 사형을 논할 때는 반드시 재계하여 향을 피워 하늘에 진실되게 맹세한 후에 감히 결정하였다. 결정하는 날에는 항상 주연을 베푸는 것을 그만두고 그 삼가 불쌍히 여기는 뜻을 지극히 하는 것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속군에 큰 돌림병이 있자 관리를 보내어 의원과 함께 약을 가지고 달려가서 구하게 하였다.
형산(衡山)의 유민(流民)이 토착민과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궐에 가서 말하기를 “형산은 나라의 수악(壽嶽)으로 사당이 있는 성 동쪽은 본래 계곡이 있고, 아울러 성 남쪽으로 나갑니다. 후에 혹 성 북쪽 터를 파서 물을 끌어다가 서쪽으로 가게 하면 지맥을 끊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산을 쌓고 물을 터서 다시 본래 길로 가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에게 상소를 분명히 따져보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물이 서쪽으로 나간 시일이 오래되었고, 그러므로 길은 모두 백성의 거처에 있다. 지금 동쪽으로 가게 하면 수백 집이 뿔뿔이 흩어져 거처를 떠나는 고통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수악이라는 말은 경서에 나온 바가 없다. 그 말을 따른다면 국가가 중흥하고 고종(高宗)이 장수하신 것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가고 난 다음의 일이니, 의당 함부로 고쳐 지을 수는 없다”고 하니, 일이 끝날 수 있었다.
형주(衡州)는 본래 석고서원(石鼓書院)이 있었는데 폐허가 된 지 대단히 오래되었다. 전 사자(使者) 반후치(潘侯畤)가 비로소 그것을 다시 짓고, 공이 그 마무리를 완성하여 제자원(弟子院)을 증설하여 설치하고 영가(永嘉) 대계(戴溪)를 스승으로 삼았다. 밭을 나누어 서적을 사고 도리에 맞게 가르쳐 길렀다. 또 처사 유모(劉某)가 현명함을 알고는 군수 유청지(劉淸之)와 함께 번갈아 상소하여 천거하여 특보관으로 명하였다. 이에 학자들이 공이 어진 이를 좋아하고 덕을 높이는 생각을 알고는, 단지 과거를 위해서만 계획하지는 않았다.
임금의 뜻에 의해 수사(帥事)를 도왔는데, 비호군(飛虎軍)이 원래 무례하고 사나워 백주에 사람을 약탈하였는데 관리가 감히 묻지 못하였다. 공이 한꺼번에 군율로 그를 묶고, 신상필벌(信賞必罰)하니 사민(士民)이 이로써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게 되고 군리(軍吏) 역시 모두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마침 오래 비가 오지 않아서 지나치게 열심히 빌다가 드디어 병을 얻었다.
강남서로전운판관(江南西路轉運判官)으로 바꾸어 임명되었는데, 강서는 이 해에 매우 크게 가물어, 마차에서 내러 먼저 황정(荒政)에 해야 할 바를 묻고, 창고를 열고 부유한 사람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기를 권하고, 조세를 없애고 조정에 쌀을 청하여 이어서 시행하였다. 그가 주청한 것 역시 대부분 가하다는 답을 받았다. 또 수사(帥事)를 행하여 일이 더욱 많아 공은 몸소 힘쓰며 조금도 쉬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그만둘 것을 간하였는데 모두 뿌리치고는 큰병이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 마치 평상시와 같이 일을 보았다. 밤이 반쯤 지나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니 순희 15년 2월 갑자(甲子)였고, 나이는 58세였다.
바야흐로 병세가 위급한 때에 백성들이 서로 이끌고 공을 위하여 빌고 기도하는데 오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새벽과 밤에 관청의 문으로 달려가 기거(起居)하는 상태를 물었다. 졸함에 이르러 모두가 소복을 입고 조곡하였다. 장사지내는 날에 울부짖고 수레를 잡아당기며 애도하며 전성하는 사람들이 수십 리를 끊이지 않았다. 호남(湖南)의 관리와 백성들이 그것을 듣고 천리를 달려와서 부의하는 자도 있었다. 대개 공의 타고난 품성이 순후(醇厚)고, 효우(孝友)에 극진하며, 내외 친척과 장소(長少) 존몰(存沒)의 사이에 처함에 조금이라도 유감(遺憾)을 보이지 않았다. 학문을 하는데는 부지런하고 경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이미 과장(科場)을 벗어나고서도 더욱 성현의 의리지학에 뜻을 두었다. 가까이는 주(周)․정(程)․장(張)․마(馬)의 말에서부터 경전에 통달하였고, 음풍(吟諷)변설(辨說)하며 헛말을 한 적이 없었다.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칠 때는 한결같이 인애(仁愛)와 이익을 베푸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다. 선(善)을 들으면 곧 행하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다. 예전에 부임한 곳에서는 사민(士民)이 사랑하고 존경하여 풍요(風謠)에 나타났으니, 한때의 아첨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 경전에 의거하여 정도를 지켰으며 구차하게 합치되려 하지 않아 우옹공(虞雍公)이 그를 알아주었다. 우옹공을 위하여 한 말은 인재를 등용하고, 수비(守備)를 엄하게 하여 적의 허점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일찍이 윤대(輪對)하여, 아랫사람들이 사심을 품어 다른 의견을 세우고, 영합하여 어지럽히고 바꾸는 폐단을 경계하고, 종척(宗戚)이 세시(歲時)에 하사하는 것, 귀신(貴臣)들이 급사를 빌리는 것, 모든 관리에게 녹봉을 주는 비용을 줄이고, 경기지역의 집세를 덜어주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임금이 모두 그 선함을 칭찬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인 대계(大計)를 회복할 것을 극론하여 수백 마디를 반복하였다. 임금이 더욱 기뻐하여 돌아보고 말하기를 “곧 서로 더불어서 공명의 모임에 나아가야 할 뿐이다”라고 하고 일을 관리에게 내렸으나 다 시행되지는 못했으나 집세의 혜택은 천하에 미치게 되었다. 그는 공거(貢擧) 전주(銓注) 법을 의논하고, 또 은혜를 넓혀서 노인을 우대하고, 박한 것을 바꾸어 후한 것을 따르라는 뜻을 두루 말하였다. 조칙에 응한 언사는 곧 바로 재상을 가리켜 사사로운 정을 가지고 임금을 속이는 잘못을 말하여 피하는 것이 없었다. 비록 이것으로 조정에서 오래 있지 못하였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수황(壽皇)이 공의 깊은 뜻을 알아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짐이 주대(奏對)하는데서 얻었다”고 하였다. 그가 호남(湖南)에 있을 때 불러서 등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제상이 이전의 분한 마음으로 그것을 막았으니, 식자들이 한스러워하였다.
글을 짓는 것은 풍부하고 넓으며 융합하여 녹아들어 사정을 힘써 다하였다. 늦은 나이에 다시 약속을 만들어 역 읽기를 더 좋아하여, 일찍이 꿈에, 역 한 경전은 무엇이 문호가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대답하기를 “음양 두 획이 역의 문호가 아닌가?”라고 대답하였으니, 그 정묘한 조예와 익숙함이 이와 같았다. 저서는 경해(經解) 다섯 권 과 서소전(書小傳)10권, 사론(史論) 10권, 고금시(古今詩) 백 권, 잡저 30권, 주의(奏議) 다섯 권이 있다.
전 안인(安人) 장(張)씨는 촉(蜀)의 고가(故家) 한(漢) 어사(御使) 강(綱)의 후손으로 천여년을 지나도 보첩(譜牒)이 상고하기에 어지럽지 않았다. 안인(安人)은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럽고 서사(書史)를 읽고, 필찰(筆札)을 잘하였으며, 고금에 통하고 의리를 알았으나 사장(詞章)을 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부친 기(岐)는 영강(永康)의 재상이었는데,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안인은 항상 고의(古義)를 진술하며 간하였다. 공에게 시집가고 나서는 시부모를 공손하게 모셨으며, 제사를 받들 때는 장엄하였고, 시누이와 화합하는데는 예의가 있었고, 친척을 만나면 인정이 있었다.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공이 주관하여 예의에 맞게 치상하는 것을 힘을 다하여 도왔는데, 사람들이 어렵게 여겼다. 공이 사이에 거하는 것이 오래되자 상관이 부서의 일을 돕게 하려고 하였는데 안인은 기뻐하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의 재물은 생활을 지탱하기에 충분한데 녹(祿)을 구하여 사람을 따르면 본래의 뜻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그 말을 좋게 여겨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의 단정하고 곧은 지조는 사부(士夫)가 혹 부끄러움이 있었으니 부인의 현명함만이 아니었다. 공보다 19년 먼저 졸하였다. 후 안인(安人) 우문(宇文)씨는 선교랑(宣敎郞) 척(隲)의 딸이었다. 아들 셋이 있는데, 지원(之源)․지윤(之潤)․지왕(之汪)이 모두 학문을 좋아하고 글재주가 있다. 딸이 하나인데, 웅응(熊應)에게 시집갔는데, 일직 졸하였다. 모두 장(張)씨의 소생이다.
지원 등이 16년 12월 갑자에 공과 장안인(張安人)을 성도현(成都縣) 양후향(楊侯鄕) 계산(癸山)의 선영의 뒤에 장사지내고 사람을 건안(建安)에 보내어 명을 청하였는데 해를 넘겨 도착하게 되었다. 또 내가 마침 임장(臨漳)의 역(役)이 있어 사자가 글을 돌려보냈다. 다음해에 다시 와서 나를 만났는데, 내 아들을 곡하는 슬픔이 심하여 말을 글로 쓸 수가 없었다. 공과 서로 늦었으나 깊이 알게 된 것을 생각하고, 사창(社倉)과 서원(書院)을 지은 것을 모두 기술한 적이 있는데, 또 거듭 지원 형제의 청이 있어 수천 리를 넘어서 해를 연이어 거듭 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의 뜻을 다하여 힘써 명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자품(資稟)이 두텁고 학문은 넓었으며, 물러나서는 순순(循循)하였고, 나아가서는 바른말을 하였네. 세 지방에서 변함없이 절개를 지켜 생각에 실증남이 없었는데, 무덤에 돌아와 누워 일어나지 못하네. 나는 그가 있는 곳에 명을 써 저승에 고하니, 이 사람을 알려면 이 돌을 보라.
公諱若水, 字子淵, 成都府雙流縣人. 其先唐相文貞公裔孫旦, 以紿事中從僖宗入蜀, 遂家眉之彭山. 生五子, 散居成都․邛蜀之間, 號五房宋氏, 雙流其一也. 公之曾大父右言․大父傑․父維皆不仕. 其父以公故累贈奉議郞, 母蹇氏亦贈安人.
公自幼卽知刻苦爲學, 邑之賢令如任公淵․李公燾皆愛其文行, 屈輩行與交. 及將就擧, 有欲移公試漕臺者. 公曰:‘欺君誣祖, 吾不忍也.’ 卒從州擧試外省, 得奏名, 對策廷中, 切直無所避. 考官不說, 猶以冠乙科, 授左迪功郞․嘉州龍遊縣主簿. 未上, 丁外艱. 更謫龍州仁壽縣主簿, 監永康軍靑城縣味江鎭稅, 兼合同場. 先時茶禁甚急而私販益多, 商算甚重而歲額反耗. 公至, 弛禁薄征而舊弊頓革, 課入大增. 或勸獻其贏以規賞, 公曰:‘獨不爲後人計耶? ’
歲旱, 民爭水泉之利, 羣聚相毆擊, 且欲爲亂. 公單馬喩之, 皆釋仗聽命. 公又爲禱於靈湫, 一夕不雨而水溢, 溝澮皆滿, 焦槁以蘇, 物情乃安. 明年薦饑, 民又相聚剽掠以求食, 有期以某日掠鎭民某氏者. 公召諸豪語曰:‘饑民求食, 此易與耳. 私販之徒負勇玩法, 一與之合, 非小變也. 今能出力以致其黨, 使爲一境之衛, 不唯足以鎖其姦心, 饑民知吾有備, 亦憚不敢進. 此一擧而兩得也.’ 諸豪皆應曰諾, 悉出金幣, 椎牛釃酒, 召致其徒, 雜於居民保伍之間, 日以兵狥于市. 公亦帶劍躍馬其間, 衆皆畏服, 而饑民遂不敢犯. 且曰:‘是嘗爲我檮湫出泉者, 吾當謹避之耳.
鎭故無學, 公爲作孔子廟, 考古制器, 率諸生行釋奠禮, 延師儒, 躬講說, 士子競勸.
制帥汪公曁諸使者聞其賢, 爭薦之, 移知神泉縣. 始至, 承廢弛之餘, 首罷追胥之擾, 但以幅紙書負祖, 與民爲期, 無敢後者. 不數日, 盡償前令宿逋. 爲言州家, 使得善去. 邑産黃雀, 歲供諸司至以百萬計. 公請罷之, 民用不擾而物生亦遂, 至今爲法.
諸司知其治行, 從知嘉州犍爲縣. 神泉民相率留之, 不能奪也. 公於二邑皆治其學校, 如味江所爲. 民有訟者, 躬以義理恩意辦告諄悉, 皆大感悅, 無復犯者. 其尤無良․不聽令, 敢以武斷病齊民者, 乃捕劾之, 上獄于州, 罪至流徙. 於是閭里正淸, 善良皆得其所.
改宣敎郞, 幹辦諸司糧料院. 擢太常寺主簿, 齊宿必虔, 濯漑必潔, 同列愧歎, 以爲非所及. 新繁故有藝祖神御, 蜀帥請改築宮于成都. 事下太常, 公聞其且將大興土木, 窮極侈麗, 使民不得安, 爲處駁議, 事乃得寢. 遷國子監丞, 再入太常爲博士, 轉而爲丞. 兼吏部考功郞官, 改兵部, 除秘書丞, 復兼吏部. 三館將以故事爲暴書會, 而上方閔雨, 避殿降食. 公爲官長言: ‘君父焦勞如此, 而臣子相與燕樂, 誠有不自安者.’ 官長是其言, 白罷之. 以旱故, 詔館職絛上闕政. 公爲書數萬言, 歷數當時刑賞之鏐․以爲是所以干陰陽之和者. 宰相間之怒, 出公提擧
江東常平等事. 上稱公誠實, 俾移福建.
閩俗故多不擧子, 公與帥司合議, 接律令, 縣保伍, 爲所以禁防誨誘之具甚悉, 全活者衆. 汀州遠且多盜, 又名瘴鄕, 常時使者按行多避不往. 至是羣盜甫平, 死傷橫道, 疫癘大作, 又非常歲之比. 公獨慨然引車深人, 煮藥自隨, 親問病者飮之. 民爲盜所攻劫與能捍禦奮擊以助官軍, 有勞効者, 皆弛其祖. 汀民大喜, 人人知戴公德. 建陽招賢里故常別貯常平米數千斛, 凶歲發以賑民. 本隱士魏君掞之所爲, 而歲久陳腐, 出納不時, 反以病民. 有以版曹所下社倉法告者, 公喜, 立爲移書․更屬鄕人士君子歲歛散之, 一方尤賴其利.
除湖南提點刑獄公事, 建人老稚邀遮戀慕, 至竟日不得發. 湖南尤多盜, 皆晝伏豪民家, 抵夜輒出, 以故發不時得. 公至, 申明保伍之令, 使相收司. 盜無所容, 至有扣頭車下, 請得召保, 復歸農業者. 公皆撫而遣之. 又檄諸郡精閱禁旅, 按行所過, 察視激犒如法. 月調諸縣弓兵, 校其藝而誅賞之. 由是皆樂爲用, 盜發輒得. 奏獄官毋得兼攝它職, 又條七事以申儆之. 於議法尤兢兢焉, 每論死刑, 必齊戒露香, 要質于天, 然後敢決. 決日輒罷燕設, 所以致其欽恤之意者無不盡也. 屬郡大札, 遣吏挾醫載藥馳以救之.
衡山浮戶有與土人不相中者, 詣闕言: ‘衡山國之壽嶽, 祠城東故有溪, 竝城南出. 後或鑿城北址, 導水使西, 不能無斷地脈. 請築山決水, 使復故道.’ 下公平奏, 公言: ‘水西出歲久, 故道皆爲民居. 今欲東之, 則是數百家者不無蕩析離居之苦. 且壽嶽之云, 無所經見. 就如其言, 則國家中興․慈皇壽考皆在西流之後, 尤不直妄有改作.’ 事乃得已.
衡州故有石鼓書院, 墟廢亦久. 前使者潘侯畤始復營之, 公成其終, 爲增置弟子員, 以永嘉戴溪爲之師. 割田置書, 敎養如法. 又知處士劉某之賢, 與郡守劉淸之交章論薦, 詔特補官. 於是學者乃知公好賢尙德之意, 不獨爲科擧計也.
被旨攝帥事, 飛虎軍素驕悍, 白晝掠人, 吏不敢問. 公一以軍律繩之, 賞信罰必, 士民以是得安其居, 而軍吏亦皆悅服. 會久不雨, 請禱過勤, 遂得疾.
改除江南西路轉運判官, 而江西是歲亦大旱, 下車首問荒政所直, 發廩勸分, 蠲祖乞米, 以次施行. 其奏請者亦多報可. 又行帥事, 事益叢委, 公自力不少休. 家人有諫止者, 皆麾而却之, 遂以大病. 然夙興, 猶視事如常時. 夜過中, 遂不起, 淳熙十五年二月甲子也, 年五十有八.
方病革時, 民相率爲公禳禬無不至, 晨夕走府門, 偵起居狀.’ 及卒, 皆縞素吊哭. 行日, 號泣挽重, 哀送數十里不絶. 湖南吏民聞之, 有千里來赴義者. 蓋公資禀醇厚, 隆於孝友, 處內外族姻․長少存沒之間, 不見其少有遺憾〔一〕. 爲學勤恪不懈, 旣脫場屋, 益玩意於聖賢義理之學. 近自周․程․張․馬之言以達于經, 吟諷辦說, 未嘗虛口. 推以及人, 一以仁愛惠利爲心. 聞善卽行, 如恐不及. 故所臨涖, 士民愛戴, 見於風謠, 非一時諛說空言也.
其在朝廷, 據經守正, 不爲苟合, 雅爲虞雍公所知. 其爲之言, 不過用人材․縣守備. 以俟敵人之覺而已. 嘗因輪對, 請戒羣下懷私立異․迎合紛更之弊, 損宗戚歲時賜予․貴臣紿使宣借․百司吏祿之費, 及減畿甸房緡, 以惠貧弱, 上皆稱善. 公因極論恢復大計, 反覆數百言. 上益喜, 顧曰:‘卽當相與赴功名之會耳.’ 事下有司, 不得盡施行, 而房緡之惠遂及於天下. 他議貢擧銓注之屬, 又皆廣恩優老․革薄從厚之意. 而其應諸言事, 則直指宰相挾私罔上之失無所避, 雖以是不得久於朝廷不悔也. 壽皇知公深, 嘗語近臣: ‘斯人乃朕於奏對間得之.’ 其在湖南, 蓋嘗有召用意. 宰相猶以前忿尼之〔二〕, 識者恨焉.
而爲文汪洋融液, 務極事情. 晩歲乃更造約, 尤好讀易, 嘗夢有問易之一經孰爲門戶者, 應曰:‘陰陽兩畵〔三〕, 非易門戶也耶? ’其精詣純熟蓋如此. 所著書有經解五卷, 書小傳十卷, 史論十卷, 古今詩百卷, 雜著三十卷, 奏議五卷.
前安人張氏, 蜀之故家漢御史綱之後, 歷千餘年而譜牒可考不紊. 安人性賢孝, 讀書史, 善筆札, 通古今, 識義理, 而不肯爲詞章. 父岐嘗宰永康, 頗以縣治. 安人每陳古誼以諫. 旣歸公, 事舅謹敬, 奉祀莊肅, 和叔妹有禮, 遇族黨有恩. 舅喪, 悉力佐公辦治如法, 人以爲難. 公居間久, 上官有欲使攝局者, 安人不懌, 曰:‘吾之貲尙足以支伏臘, 狥祿從人, 得無驗素志乎? ’公善其言, 爲謝不往. 其方直之操, 士夫或有愧焉, 不但爲婦人之賢而已. 先公十九年卒. 後安人宇文氏, 宣敎郞隲之女. 子男三人, 之源․之潤․之汪, 皆嗜學而有文. 女一人, 適熊應, 早卒. 皆張出也.
之源等以十六年十二月某甲子葬公及張安人於成都縣楊侯鄕癸山先墓之次, 遣人來建安請銘, 踰年乃達. 而予適有臨漳之役, 使者以書還. 明年復來, 則値予哭子悲甚, 言不能文. 顧與公相得晩而相知深, 其爲社倉․書院, 皆嘗爲記述, 又重之源兄弟之請, 越數千里, 連歲再至而不倦也, 勉爲之銘, 以致吾意. 銘曰:
資之厚兮學之博, 退循循兮進諤諤. 三方一節思無斁. 九原歸掛不可作. 我銘其居詔冥漢, 欲知斯人視斯石. 〔一〕憾: 原作‘恨’, 據宋閩․浙本改.
〔二〕猶: 原缺, 據右引補.
〔三〕畵: 原作‘書’, 據右引改.
태유인 진씨 묘지명(太孺人陳氏墓誌銘)
태유인(太孺人) 진(陳)씨는 건양현(建陽縣) 삼계리(三桂里) 사람이다. 부친 안세(安世)는 열심히 공부하여 견문이 넓었고, 일찍이 의제(義齋)를 현 남쪽에 세워 종학(從學)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何)씨를 아내로 맞아 태유인을 낳았다. 나이 열일곱에 같은 마을의 주(周)군에게 시집갔다. 주군은 사람됨이 너그럽고 쾌활하고 온화하여 집안사람의 생계가 되는 일을 일삼지 않았다. 태유인인 부지런하고 민첩하게 도와 집안이 검소하고 법도 있게 유지 되었다. 아들들을 가르치고 경계하기가 매우 엄했으며, 친척들을 접대하고 이웃을 만나는데 이르지까지 또 모두 은의(恩意)가 있었다. 어려서 그 부모를 잃고 슬프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았다. 시집을 가서도 또한 시부모를 뵙지 못하였으나 세시(歲時)에 제사를 올릴 때는 반드시 친히 일을 주관하였다. 일이 끝나면 항상 소리내어 울며 눈물을 흘렸다. 늦게 불교를 좋아하여 그 대지(大指)를 얻어 드디어 다시는 가사(家事)를 묻지 않았다. 나쁜 옷과 간소한 음식으로 20년을 지냈다. 다른 사람의 근심을 근심하고, 어렵고 곤궁하며 병든 사람을 구휼하여 힘을 다해도 게으르지 않았다. 둘째 아들이 진사에 올라 왕조의 관리에 등용되고, 다시 경사스러운 은혜를 만나 주(周)군은 승의랑으로 치사(致仕)할 수 있었고, 태유인은 후에 종사(宗祀)되는 은혜를 입고 또한 지금의 호칭을 하사받았다. 고을 사람들은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겼으나 태유인이 자처하는 것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소희(紹熙) 원년 3월 모일에 병으로 집에서 졸하였다. 졸할 때에 깨끗하고 밝아 어지럽지 않았으니, 향년 68세였다.
주군은 이름이 의(誼)이고, 자는 소가(少賈)인데, 5년 전에 졸하였는데 가증(加贈)되어 통직랑에 이르렀다. 세 아들은 명좌(明佐)․명중(明仲)․명작(明作)이다. 명중은 일찍이 승의랑으로 지소무군(知邵武軍) 광택현사(光澤縣事)로 임명되었는데, 독서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면밀하고 민첩하여 남보다 훨씬 뛰어나 미치는 곳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딸은 다섯인데, 그 사위는 진순(陳錞)․소사제(蕭思濟)․정필현(程必顯)․진유(陳瀏)이고, 막내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손자는 둘인데, 손정(巽亭)․진정(震亭)이다. 손녀는 셋인데 아직 어리다.
다음해 모월 모일에 아들들이 태유인을 현 서쪽 신령(新嶺) 천호(天湖)의 양지쪽에 장사지냈는데, 동쪽으로는 주(周)군 광평산(廣平山)의 묘가 겨우 수백 보 거리에 바라다 보인다. 명중이 명을 청하여 왔는데, 나는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으므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명에 이르기를,
어머니의 어짊은 그 아들을 이루어주기에 충분하였고, 아들의 현명함은 그 부모를 드러내주기에 충분하였네, 서령(西嶺)의 무덤길은 백세토록 새롭네. 나는 그 명을 써서 후인들을 이끌어주려 하네.
太孺人陳氏, 建陽縣三桂里人. 父安世强學博聞, 嘗立義齋縣南, 從而學者甚衆. 娶何氏, 生太孺人. 年十有七, 歸同里周君. 周君爲人寬和樂易, 不以家人生産爲事. 太孺人佐以勤敏, 持家儉而有法. 訓督諸子甚縣, 至待姻黨․遇鄰曲, 則又咸有恩意. 少時喪其親, 哀慕不懈. 及嫁, 亦不逮舅姑, 而歲時烝享, 執事必親. 訖事, 常嗚咽流涕. 晩好浮屠法, 得其大指, 遂不復問家事. 惡衣菲食, 逾二十年. 而憂人之憂, 賑其厄窮病苦, 雖極力不倦. 中子擧進士, 登王官, 再逢慶恩, 周君得以承奉郞致仕, 太孺人後以宗祀霈澤, 亦錫今號. 鄕人榮之, 而太孺人
所以自處者不少異於平日也. 紹熙元年三月某日, 以疾卒于家. 卒時精爽不亂, 享年六十有八.
周君名誼, 字少賈, 前五年卒, 加贈至通直郞. 三男子, 明佐․明仲․明作. 明仲嘗以承議郞差知邵武軍光澤縣事, 讀書處事精敏絶人, 所至未可量也. 女五人, 其壻陳錞, 蕭思濟․程必顯․陳瀏, 而季未行. 孫男二人, 巽亨․震亭. 女三人, 尙幼.
明年某月某日, 諸子莽太孺人縣西新嶺天湖之陽, 東望周君廣平山之墓才數百步. 明仲以銘來請, 予雅知之, 不得辭也. 銘曰:
母之賢, 足以成其子;子之賢, 足以顯其親. 西嶺之阡, 百世而新. 我其銘之, 以相後人!
의인 정씨 묘지명(宜人丁氏墓誌銘)
호주(濠洲) 사군(使君) 유후중광(劉侯仲光)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저의 돌아가신 부모님은 모두 어진 행실이 있는데, 정해진 수명이 그 덕과 맞지 않았습니다. 중광(仲光)은 이미 불행하여 일찍 고아가 되었고, 또 덕업(德業)에 힘써 나아갈 수가 없었고, 밝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한갓 남은 은택에 힘입어 말제(末第)에 올라 벼슬에 나아가 공을 쌓을 수 있었고, 외람되이 군(郡)을 맡기까지 하였습니다. 녹사(祿賜)가 풍후하여 처자를 배불리 먹이고 종들을 먹이기에 충분하지만 어머니와 영원히 떨어져 보잘것없는 까마귀의 봉양도 조금도 펴지 못하여 항상 한결같이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살아있지 않음만 못합니다. 다만 다행히 몇 년을 계속하여 국가의 큰 경사를 자주 만나 돌아가신 아버님께 여러 번 증직되어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이르렀고, 어머님은 의인(宜人)에 이르렀으니, 오히려 아들 된 자의 망극한 생각을 조금 위로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의인(宜人)의 명을 오래도록 세울 수가 없어 스스로 늙음을 생각하니 혹 죽어서 일려지지도 않으면 후생들이 장차 앞사람이 가문을 세운 본말을 알지도 못할 것이니, 이 불효가 무겁고, 또 선인을 지하에게 뵐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다행히 명을 써주시면 중광이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피눈물을 흘리고 재배하여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편지를 보고 다 읽지 못하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 바야흐로 시골에 병으로 누워 숨 쉬는 것도 끊어질듯 하여 글쓰기를 그만둔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 뜻에 감격하여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이에 그 사장(事狀)을 살펴보고 차례대로 쓴다.
의인은 성이 정(丁)씨인데, 대대로 영가(永嘉)의 대성(大姓)이 되어 좋은 일을 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고을에서 유명하였다. 부친의 휘는 유(瑜)인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이다. 형제는 모두 진사로서 주현에서 벼슬하였고, 숙련되고 통달하며 유능함으로 이름났다.
의인은 같은 군(郡)의 자가 원묵(元黙)인 유(劉)군에게 일찍 시집갔는데, 유군의 사람됨 역시 성실하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선을 즐기고 선비를 좋아하였다. 기거(寄居)에 항상됨이 있어 비록 매우 덥더라도 옷을 벗지 않았고, 집안에 부들자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급박함을 진휼하기를 좋아하였고, 아랫사람을 대하는데 인정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에 거처할 때는 엄하여 아직 밝지 않아서 일어나고, 내외에 반듯하게 조리가 있었다. 자제(子弟)를 가르치는 것은 더욱 법도가 있었으나 의인이 그와 짝하여 남은 덕이 없었다.
처음에 그 집에 들어갈 때 시부모가 모두 병이 들었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예를 어기지 않았다. 안으로는 동서들과 화목하여 시누이들을 시집보내는 것을 계획했으며, 밖으로는 친척을 접하고 이웃 사람들을 모아서 은의(恩義)를 모두 칭찬하였고, 무거움과 가벼움에 법칙이 있었으니, 이에 모두가 현부(賢婦)로 칭송하였다. 오래되어 시아버지가 중풍이 들었는데, 의인이 모시고 봉양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고, 국을 손수 조리하지 않으면 드리지 않았고, 시아버지 역시 의인이 드린 것이 아니면 맛보지 않았다. 시누이가 비구니가 되었는데, 의인과 나이가 서로 가까웠다. 병이 들어 집으로 맞아 들였는데, 함께 눕고 일어나며 부축하여 음식을 먹이니, 죽을 때까지 노고를 잊지 않았다. 시누이가 매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병이 나으면 종신토록 당신을 어머니처럼 섬기겠다”고 하였다. 죽을 때를 임하여 또 말하기를 “곧 죽을 것인데 마땅히 지하에서 당신에게 보답하겠다. 다행히 다시 사람이 되면 당신의 자손이 되어 당신을 섬기겠다”고 하였다. 친척과 친구 사이에 과실이 있으면 번번이 깨우치고 되풀이 하였으며, 심하면 혹 눈물을 흘리면서 이끌어주어 듣는 사람들이 감격하여 깨닫고 변화해야 그쳤다. 유씨는 같은 마을의 호(胡)씨와 오랜 동안 잘 지냈는데, 의인이 그를 만나고 은의(恩意)가 더욱 돈독해져 호씨 장로가 지금까지 말을 한다. 마을 사람의 아들이 있었는데, 책읽기를 좋아하고 유자(儒者)가 되고 싶어햇으나 부친이 그것을 꾸짖었다. 그 모친이 고하자 의인이 잘 깨우치고 또 금전으로 비용을 주어서 그 아들이 태학에 시험 보게 하여 그 뜻을 이루었다. 그 사람이 후에 항상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다시는 이런 풍조가 없다”고 하였다.
대부공이 아들을 가르치는데 본래 엄하였고, 의인은 또 그 사이를 잘 보충하여 줄 수 있었다. 딸들을 가르치는 데는 자신을 모범으로 삼아, 계례(笄禮)를 하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일찍 일어나 씻고 빗질하고 약이(藥餌)를 받들게 하였다. 밤에는 항상 몸소 자물쇠를 살피고, 물을 뿌리 불을 껐으며 항상 등불을 들고 앞에 가게 하였다. 계례를 하고 나서는 술과 장을 담고 음식을 삶고 끓여 저장하는 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것을 가르치고, 또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매 말을 싫어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마땅히 그 힘을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들들이 모두 문행으로 칭송받았으며, 시집간 딸 역시 그 집안을 지킬 수 있었다. 모년 모일에 질병으로 졸하니 나이 49세였다. 모현 모향 모리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셋인데 쿤 아들은 소(昭)로 태학에 들어가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죽었다. 다음 아들 역시 일직 죽었다. 막내는 중광(仲光)으로 지금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호주군주사(濠洲軍州事)로 임시로 파견되었다. 딸은 다섯인데, 주(周)씨․섭(葉)씨․반(潘)씨에게 시집가소, 나머지는 시집가지 않고 졸하였다. 손자는 셋인데, 이(邇)․적(適)․지(遲)라고 한다. 증손은 일곱인데, 인실(仁實)․인근(仁近)․인수(仁守)․인급(仁及)․인임(仁任)․인원(仁愿)․인리(仁履)이다. 호주(濠州)는 행실이 독실하고 후하여 일찍이 문학으로 백성을 다스려 아름다운 이름이 드러났다. 조정에서 벼슬하여 또 통달하고 드러났는데, 하루아침에 먼 곳의 군을 구하여 떠나니 만류하는 자가 있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대부는 그 청렴하고 맑은 것을 높이고 밝은 지혜에 종사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 모친의 현명함이 그가 바탕으로 삼아서 이와 같이 고원하게 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의인의 행실이 명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부모를 따르고 인척을 화목하게 하였네. 힘이 어찌 많아서이겠냐만 사랑은 넓힐 수 있었네.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하고 세밀한 일까지 경계하였네. 남자는 힘써 배우고, 여자는 공손히 받들었네. 무덤을 아름답게 하고, 여러 번 노고를 위로하는 글이 이르렀네. 막내의 현명함이 따르기에 넉넉하네. 깊은 슬픔을 머금고 숨은 덕을 살펴보네. 나의 명을 주니 끝없이 알리기를 바라네.
濠州使君劉侯仲光以書來曰:‘惟吾考妣皆有賢行, 而祿壽不配其德. 仲光旣不幸蚤孤, 又不能勉進德業, 以求無負於明訓, 徒賴遺澤, 得階末第, 從宦積勞, 至叨郡寄. 祿賜豐厚, 足以飽妻孥․飫童僕, 而慈顔永隔, 不及少伸區區鳥烏之養, 每一痛念, 不如無生. 獨幸累年以來數逢國家大慶, 累贈皇考至朝散大夫, 皇妣至直人, 尙有以少慰人子罔極之思者. 而先直人之銘久未克立, 自念老矣, 或遂泯沒而無聞, 則後生小子將不復知前人立家本末, 重此不孝, 且無以見先人於地下. 惟吾子幸哀而與之銘, 則仲光知免矣. 敢泣血再拜以請.’ 余讀其書不能終篇, 爲涕下不自禁. 時方臥病田間, 氣息奄奄, 筆硏廢棄久矣. 然感其意, 不忍辭也, 乃考其事狀而次第之.
宜人姓丁氏, 世爲永嘉大姓, 以積善好施聞於鄕. 父諱瑐, 尤長者. 兄弟皆以進士官州縣, 練達有能名. 直人早歸同郡劉君諱某, 字元黙, 而劉君之爲人亦誠實無表襮, 樂善愛士. 起居有常, 雖甚暑不袒裼, 家無蒲博之具. 喜賙人急, 遇下有恩. 然其居家縣, 未明而起, 內外井井. 敎子弟尤有法, 而直人配之無遺德焉.
始入門時, 舅姑皆亡恙, 晨昏無違禮. 內睦娣姒, 謀嫁諸姑 ; 外接親戚, 輯鄰里, 恩義俱稱, 重輕有則, 於是翕然稱爲賢婦. 久之, 舅病痱, 直人侍養尤勤, 羹非手調不進, 舅亦非直人所進不嘗也. 姑爲比丘尼, 與直八年相近. 病, 迎歸, 與共臥起, 扶掖飮食, 終歲忘勞. 姑每感涕, 謂曰:‘病愈當終身事汝如母.’ 臨沒又讀曰:‘卽死, 當報汝地下. 幸復爲人, 顧爲汝子孫以事汝.’
姻舊間有過失, 輒爲曉譬諄複, 甚或垂涕泣而道之, 聞者感悟遷革乃已. 劉氏與同里胡氏有奮好, 直人遇之, 恩意尤篤, 胡氏長老至今以爲言. 里人有子, 好讀書, 欲爲儒而父難之. 其母以告, 直人旣好喩之, 又資以金錢, 使與其子俱試太學, 以遂其志. 其人後常以語人, 且歎息曰:‘今人不復有此風矣.’
大夫公旣縣於敎子, 直人又能彌縫其間. 敎諸女以身爲法, 自末笄時, 已令夙興, 備盥櫛․奉藥餌. 夜常躬視扃鐍〔一〕․灑煬竈, 輒令持燭行前. 旣笄, 則敎之洒漿烹飪蓋藏之事, 祭祀賓客之奉, 且戒之曰:‘爾曹毋厭吾言, 異日當蒙其力耳.’ 以故諸子皆以文行稱, 而女適人者亦能持其家. 某年某月日以疾卒, 年四十有九. 葬于某縣某鄕某里.
子男三人, 長曰昭, 入太學, 被薦, 未第而卒. 次曰某, 亦早世. 其季卽仲光, 今以朝散大夫權發遣濠州軍州事. 女五人, 嫁周氏․葉氏․潘氏, 餘未行而卒. 孫三人, 曰邇, 曰適, 曰遲. 曾孫七人, 曰仁實․仁近․仁守․仁及․仁任․仁愿․仁履也. 濠州行篤厚, 早以文學吏治著美稱. 仕於朝且通顯, 一旦求遠郡去, 有挽而留之者弗顧也. 士大夫莫不高其廉靜而服其明識, 不知其母之賢, 所以資之者如此其遠也. 然則直人之行其可以不銘? 銘曰:
順尊卑, 睦婣黨. 力豈多? 惠能廣. 勤夙宵, 謹微細. 男敏學, 女恭蹟. 賁幽壤, 疊閔書. 季之賢, 慕有餘. 銜深悲, 考潛德. 授我銘, 詔無斁!
〔一〕常: 原作‘嘗’, 據宋閩․浙本改.
의인 황씨 묘지명(宜人黃氏墓誌銘)
의인(宜人) 황(黃)씨는 지금 선의랑(宣義郞)으로 치사한 진형(陳衡)의 아내이다. 대대로 복주(福州) 후관인(侯官人)이었다. 증조부 소(紹)․조부 천(遷)․부친 중문(仲文)은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의인은 성품이 순박하고 질박하여 세상의 중요한 일을 알지 못하여 자주 속임을 당했으나 스스로 후회하지 않았다. 시집가고 나서 시부모를 모시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오직 공손히 하였고, 지아비를 도와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매우 삼갔으며, 몸소 입고 먹는데 근검하였으며 아들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치는데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아들들이 모두 학문에 스스로 힘썼고, 중씨(仲氏)는 드디어 진사에 급제하여 무주호연(婺州戶掾)에 임명되었다. 의인은 그가 옥안과 선고문을 검토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경계하여 말하기를 “인명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원통함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태형을 내리려 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경계하기를 “가볍게 하여 중상을 입게 하지 마라”고 하였다. 조정에 인재를 천거한다는 격문을 보면 반드시 말하기를 “네가 거자(擧子)였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불서(佛書)를 좋아하여 독송하고 절하기를 종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홀연히 물리치고 섬기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에 있지 않으니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족하다”고 하였다. 그는 탄신을 축하하는 은의가 세 번 내려서 지금의 호칭에 이르렀다. 소희(紹熙) 2년 7월 을묘(乙卯)에 졸하니 나이가 OO세였다.
아들은 여섯인데, 공숙(孔夙)은 일찍이 고을에 천거되었다. 공석(孔碩)은 문림랑(文林郞)․처주(處州) 주학교수(州學敎授)이다. 공이(孔易)는 역시 일직이 천거 문서에 올랐다. 공시(孔時)는 8년 먼저 죽었다. 딸은 다섯인데, 큰 사위는 번자수(潘子修)인데, 일찍 세상을 떴다. 다음은 수직랑(修職郞)․천주사호참군(泉州司戶參軍) 조언기(趙彦夔)에게 시집갔다. 작은 딸은 아직 어리다. 그리고 2남 2녀는 모두 요절하였다. 손자가 넷이고, 손녀는 하나인데, 손녀 역시 일찍 죽었다.
아들들이 선의군(宣義君)의 명으로 명년 모월 모일에 의인을 모현 모향 모리 모처에 장사지내려 하였는데, 공숙과 공석이 모두 일찍이 나를 종유하였으므로 그 행사를 이와 같이 써서 묘지명을 청해왔다. 사양할 수 없었다. 명에 이르기를,
부덕(婦德)이 있었고, 어머니의 모범이 있었네. 그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이 저승으로 돌아갔네.
宜人黃氏, 今宣義郞致仕陳君衡之配也. 世爲福州侯官人. 曾祖紹․祖遷․父仲文皆不仕. 宜人性淳質, 不解世俗機事, 數見欺不自悔. 旣嫁, 事舅姑夙夜唯謹, 相其夫理家事甚飭, 躬勤儉以衣食, 撫敎諸子甚恩. 故諸子皆得以自力於學, 而仲氏遂以進士中第, 補婺州戶掾. 宜人見其閱具獄, 必戒曰:‘人命至重, 毋使有寃.’ 聞當笞人, 必戒曰:‘輕之, 毋使重傷.’ 見其被檄考貢士, 必戒曰:‘詳之, 毋忘汝爲擧子時也.’ 初好佛書, 讀誦拜跪, 終日忘倦. 一旦忽屛不事曰:‘不在是也, 無愧心足矣.’ 以慶壽恩三錫至今號. 紹熙二年七月乙卯卒, 年□□.
子男六人, 孔夙, 嘗貢于鄕. 孔碩, 文林郞․處州州學敎授. 孔易, 亦嘗預貢藉. 孔時, 先八年沒. 女五人, 長壻潘子修, 蚤世. 次適修職郞․泉州司戶參軍趙彦夔, 季尙幼. 而二男二女皆夭. 孫男四人, 女一人, 而女亦夭.
諸子以宣義君之命, 將以明年某月某日葬直人某縣某鄕某里某處, 而孔夙․孔碩皆嘗從予遊, 狀其行事如此, 來請銘. 不得辭也. 其銘曰:
有婦之德, 爲母之則. 無愧其心, 反此眞宅!
적공랑치사 동공 묘지명(迪功郞致仕董公墓誌銘)
군의 휘는 기(琦)이고, 자는 순지(順之)이며, 요주(饒州) 덕흥인(德興人)이다. 동(董)은 덕흥의 유명한 성으로 대대로 유과(儒科)에 오른 사람이 있다. 군의 증조부O는 좌조봉랑(左朝奉郞)․태의령(太醫令)이었다. 조부 임(林)은 우종정랑(右從政郞)․처주(處州) 진운현령(縉雲縣令)이었다. 두 세대를 이러서 모두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부친인 육(陸)은 애초에 벼슬하지 않았으나 또한 절조로 유명하였다.
군은 나면서부터 영특한 기가 있고,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기뻐할 만한 일에 힘쓰고 규제받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진운군이 그가 지나칠까 걱정하여 집유(執柔)라고 이름 짓고, 자를 순지(順之)라고 하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네가 자신의 단점을 고치도록 스스로 권면하도록 경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은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삼가 경계하였고 다시 지금의 이름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예전의 자(字)의 뜻대로 행동하여, 감히 잊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나이 스물다섯에 비로소 고을의 선생 한계(韓溪) 정공(程公)을 따라 춘추를 수학하였다. 정공은 궤안(几案)을 설치하라고 명하고 날마다 춘추좌씨전및 근세 호(胡)씨의 전을 날마다 마주하여 외우고 때때로 대의(大義)를 설하며 점차 예법으로 열어주었다. 군은 이로부터 점점 잠기어 깨달음이 있었고, 통렬히 스스로 힘써 비록 풍의(風義)로 더하는 것을 받아들였으나 다시는 소년의 호사한 습성을 일삼지 않았다.
정당하게 역법(役法)을 행하여 먼저 전속(田粟)을 내어 이끌었고 때에 맞추어 일을 정하니, 마을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였다. 일찍이 수장(壽藏)을 가려서 이미 길한 곳을 얻었으나 가난한 사람이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젊어서 일찍이 정척(程倜)과 그 동생 주(舟)를 종학(從學)하였는데, 두 사람이 죽은 지 오래되어 그 아들을 만나면 자신의 자손과 같이하여 은의(恩意)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 호의(好義)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늦게 제공의 가제례(家祭禮)를 얻어 그것을 읽으며 말하기를 “이는 실로 힘쓸만하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세시의 사향(祀饗)에 깨끗이 제계하고 정성스럽게 올리고 꿇고 일어나기를 도리에 맞게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않았다. 이미 진취하기를 단념하고, 점차 집안일을 하지 않으며, 거처하는 것에 꽃나무와 채소 과일을 섞어서 심고 스스로 즐겼다. 객이 오면 술독을 열고 따르도록 하여 종일토록 이야기 하였다. 그 사이에 세상일에 이야기가 미쳐서 그 시비와 성패를 처리하면 비록 속세에서 늙은 사람이라도 미치지 못했다. 순희 13년 천자가 덕수궁(德壽宮)에 봉상(奉觴)하면서 기로(耆老)를 추은(推恩)하였다. 아들 수(銖)로 인하여 적공랑(迪功郞)에 제수되어 치사하였다. 소희(紹熙) 3년 8월 경인(庚寅)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 76세였다.
대개 군의 사람됨은 날쌔고 용맹스러웠으며, 의논(議論)은 분명히 결단하는 것을 훌륭하게 여겨 애매하고 분명하지 않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기쁘거나 화나는 일이 있으면 여물이 내려가지 않은 듯하여 반드시 털어놓고서야 그만두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평온하여 묵은 원한이 없었다. 혹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종종 다시 은의(恩意)로 사귀어 스스로 부끄럽고 뉘우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어진 선비들은 그를 사랑하고 불초한 사람들은 마음을 다하여 섬겼다. 그가 졸할 때 모두 가슴 아파 하였다. 젊어서 일찍이 馬援傳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개연히 그를 사모하였다. 이미 불우한 세상을 겪고 또 선생은 장자(長者)의 여론(餘論)을 두루 들었으니, 이에 다시 평소의 생각을 바꾸어 유생이 되어 스스로 선(善)에 힘쓰니, 그를 아는 사람들은 예전의 그를 보면 마치 두 사람인 것 같다고 하였다. 아!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지는데 선비가 공명(功名)이 없으며, 세상과 섞여서 하나가 되며, 죽음에 이르렀는데도 칭함이 없으면,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군과 같은 사람은 만약 조금이라도 맞는 세상을 만났으면 그 재주가 한 세상을 오르내렸을 것을 알 수가 있다.
주(周)씨와 이(李)씨를 아내로 맞았으나 모두 먼저 졸하였다. 아들은 넷인데, 호(鎬)․수(銖)․석(錫)․자(鎡)이다. 딸은 셋인데 여재(余梓)․정철(程徹)․왕중(王中)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주씨의 소생이다. 그런데 호(鎬)와 자(鎡), 정(程)씨에게 시집간 딸 역시 먼저 졸하였다. 손자는 셋이고, 손녀는 둘이다.
다음해 수(銖)가 군을 호산(湖山)의 들에 장사지내면서 주씨를 합장하고, 또 이어서 신(新)길주(吉州) 녹사참군(錄事參軍) 정순윤부(程洵允夫)가 군의 행실을 이와같이 써서 명을 청해왔다. 나는 군을 알지는 못했으나 한계(韓溪) 선생이 선군자의 처남이고 윤부(允夫)는 그 아들이다. 수(銖)는 또 와서 배웠으므로 군의 행사가 자세히 들었으나 사양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군이 스스로 학문이 늦었음을 한스러워하여 아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다하였으므로 아들들이 재주가 많아서 호(鎬)와 수(銖)가 모두 진사에 올랐다. 수(銖)는 더욱 학문을 좋아하여 자립하였으니 군의 뜻을 이루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명에 이르기를
재주가 훌륭하고 기질이 굳세어 구하면 반드시 허여된 것은 옳은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능하나 시험보지 않고, 늙어서 그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아! 이 무덤에 돌아왔구나!
君諱琦, 字順之, 饒州德興人. 董爲德興著姓, 世有登儒科者. 君之曾大父□, 左朝奉郞․太醬令. 大父林〔一〕, 右從政郞․處州縉雲縣令. 比兩世皆以才稱. 父陸始不仕, 而亦以氣節聞.
君生有英氣, 務爲倜儻可喜事, 不肯踐繩約. 縉雲君憂其過, 名之曰執柔, 而字以順之, 曰:‘以是爲爾章絃之戒.’ 君佩服唯謹, 及更今名, 而猶以舊字行, 示不敢忘也.
年二十五, 始從鄕先生韓溪程公受春秋學. 程公命設几案, 日與對誦春秋左氏及近世湖氏傳, 時時爲說大義, 稍以禮法開之. 君自是寖若有省, 涌自刻厲, 雖益以風義自許, 而不復事少年豪習矣.
義役法行, 首出田粟倡之, 事以時定, 里人賴之. 嘗卜壽藏, 旣得吉, 而所知有貧不克葬者, 擧以畀之無吝色. 少嘗從程軍倜欄及其弟舟學, 二君沒久, 遇其子若孫恩意不少衰. 其好義多此類. 晩得諸公家祭襤, 讀之曰:‘是固可勉.’ 自是歲時祀饗, 齋潔灌薦, 跪起如法, 比老不倦. 旣絶意進取, 漸屛家務, 卽所居旁雜藝花木蔬果以自娛. 客至, 開尊命酌, 劇談終日. 間及世事, 而處其是非成敗, 則雖老於朝市者不逮也. 淳熙十三年〔二〕, 天子奉觴德壽宮, 推恩耆老. 以子銖故, 授迪功郞致仕. 紹熙三年八月庚寅, 以疾終, 年七十有六.
蓋君爲人精悍, 議論貴決白, 不爲模稜含胡態. 有所喜怒, 若茹物不下, 必吐出乃已. 然已過則夷然, 未嘗宿怨. 人或待以橫逆, 往往更結以恩意, 使自愧悔. 以是士之賢者愛之, 其不肖者傾事之. 及其卒也, 皆傷之. 少嘗讀馬接傳, 慨然慕之. 旣涉世不偶, 又頗聞先生長者餘論, 乃更所節爲儒生, 自力於善, 識之者謂其視疇昔猶兩人也. 嗟夫!天下平治, 士無功名, 才否一區, 之死無聲, 昔人嘗恨之. 如君者, 使少有所遇合, 以其才頡頏一世, 可量哉!
娶周氏․李氏, 皆前卒. 子男四人, 鏑․銑․錫․鎔. 女三人, 嫁余梓․程徹․王中, 皆周出也. 而鎬․鎡及程氏女亦前卒. 孫男三人, 女二人.
明年, 銖將葬君湖山之原, 以周氏祔, 且屬新吉州錄事參軍程洵允夫狀君行如此, 來請銘. 予不及識君, 而韓溪先生者, 先君子之內弟, 允夫卽其子也. 銖又來學, 故聞君之行事爲詳, 其可辭? 始君自恨知學晩, 敎子甚力, 故諸子多材, 而鏑․銖皆擧進士. 銖尤好學自立, 庶能成君志者. 銘曰:
才之良, 氣之剛, 有求必予義之方. 能不試, 老其鄕, 鳴呼歸哉此其藏!
〔一〕林:宋浙本作‘材’.
〔二〕三:原作‘二’, 據宋閩․浙本改.
주자대전 94권 朱子大全 卷九十四
묘지명[墓誌銘]
직현모각 반공 묘지명(直顯謨閣潘公墓誌銘)
공의 휘는 치(畤)이고, 자는 덕부(德鄜)이며 성은 반(潘)으로, 무주(婺州) 금화현(金華縣) 사람이다. 증조부의 휘는 종간(宗簡)이고, 조부는 중봉대부(中奉大夫)에 증직된 휘 조인(祖仁)이다. 부친은 통봉대부(通奉大夫)에 증직된 휘 양좌(良佐)엔데, 유학교수(儒學敎授)로 시작하여 여러 아우가 모두 따라서 배웠는데, 중서공(中書公) 양귀(良貴)가 드디어 청직(淸直)으로 대명(大名)을 이루었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민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장중하기가 성인과 같았다. 고아가 되고 나서는 중서공이 아껴서 거두어 가르쳤고,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공은 부모가 돌아가시어 명령을 받을 곳이 없었는데, 이에 음서로 추천되어 등사랑(登仕郞)이 되었고, 이장간(李莊簡)공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공 역시 인재로 여겨 허락하였다. 처음에 원주(袁州) 분의주부(分宜主簿)에 임명되었는데, 몸소 장부를 교정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추우나 더우나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 시골 사람들이 의지하여 편안하게 여겼다. 감임안부조선장(監臨安府造船場)이 되었는데, 부(部)의 사자(使者)가 능력이 있다고 여겨 많은 일을 맡기고, 모든 일이 쉽게 곧바로 해결되었다. 또 상관이 좋아하고 싫어함으로 향배(向背)를 결정하지 않으니, 어사(御史) 두신노(杜莘老)가 그것을 듣고서 어질게 여겨 끌어다가 부하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마침 떠나게 되어 그렇게 되지 못했다. 공 역시 천거를 구한 적이 없었으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알아주어 통직랑(通直郞)으로 바뀌었다. 재상이 중도(中都)에 관직을 주어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공은 굳이 봉사(奉祀)를 구하여 가버렸다. 얼마 되지 않아 제할잡매무잡매장(提割雜買務雜賣場)에 임명되어 금지하는 것을 엄하게 하고, 물화(物貨)의 순서를 정직하게 하여 대관(大官) 요인(要人)이라도 감히 사사로이 간여할 수 없었다. 황성(皇城)의 나졸(邏卒)이 힘을 믿고 기율을 어겼는데, 공은 그 죄를 살펴서 조금도 관대히 다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공이 위태롭다고 여겼으나 공을 청렴결백함으로 스스로를 지키니, 그 무리가 비록 그를 원망하더라도 결국은 보복하지 못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재상이 또 그를 붙들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어, 드디어 지흥화군(知興化軍)으로 나갔다.
보(莆)의 풍속은 교만하고 송사가 많았는데, 공이 가서는 병통에 잘 듣는 시행할 방법을 궁구하여 조문을 분류하여 관리에게 맡겨, 간이하고 엄밀하게 하고 치우침이 없게 하니 군이 잘 다스려졌다. 이때 곧 학관에서 제생을 불러서 가르쳐 경계하니 드디어 감히 일로 관청에 오는 사람이 없었다. 여관(女官) 도사(道士)가 요망한 것에 의탁하여 칙사(勅賜)를 구하여 그 거처에 내놓았는데, 협첨추(挾簽樞) 장열(張說)이 써서 공에게 그 일을 올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공이 불가하다고 하자 열이 다시 부(部)의 사자를 끌어다가 공을 움직이려 하였다. 공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날이 가물어 비가 오기를 기원해도 응답이 없었다. 공이 옥에 원통한 사람이 있는 것을 근심하여 재빨리 가서 신문하니 과연 두 사람이 있어 형틀을 풀고 그를 보내고 그 죄를 관리에게 물었다. 수레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큰비가 바로 내렸다. 군에는 본래 양성(洋城)․진패(陳覇) 두 개의 수문과 목난피(木蘭陂)와 물을 대는 밭 수만 경(頃)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다. 공이 일으켜 쌓았는데, 굳세고 튼튼하여 백성이 지금은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해를 거듭하여 기근을 당하여 객의 배를 불러서 돈을 주고 널리 쌀을 구하는데, 그 기간을 넉넉히 하였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쌀을 사는 자가 그 사이에 한 두 번 왕복한 다음에 기한이 되었는데, 쌀을 사는 값이 이미 스스로 바로잡혀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되니, 사람들이 비로소 공이 계책을 갖고 한 일임을 승복하였다. 해마다 내는 정미전(丁米錢) 천만을 없애달라고 청하였는데 오래되어도 답이 없자 다시 속현(屬縣)으로 옮겨서 내는 것을 늦추어달라고 청하였다. 조사(漕司)에서 좋아하지 않아 감독이 더욱 엄해졌다. 공이 조정에 하소연하여 결국 내는 것을 파하고 나서야 그쳤다.
소환하여 임금과 대면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군현은 조정의 근본이고, 백성은 또 군현의 근본입니다. 지금 주현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모든 것을 처리하고, 또 인재의 능함과 그렇지 않음을 가리지 않고 가벼이 관직을 주면서 근본이 굳고 나라가 편안하고자 하니 그것이 가하겠습니까?” 임금이 그 말을 좋게 여겨 랑(郞)을 삼이 머물게 하려 했으나 공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므로 힘껏 외직을 청하니, 이에 제거양절서로상평다염공사(提擧兩浙西路常平茶鹽公事)를 제수하였다. 부임하여 중도 군자금 중에 법에 맞지 않는 것은 없애니 호귀(豪貴)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다. 또 평강(平江)의 고전(庫錢)이 새어나가고 있었는데, 수(守)가 이로 인하여 부자집을 무고하여 보상을 받았는데, 일 군(郡)이 크게 어지러워져 죽은 사람도 있었다. 공이 그것을 격파하니 수(守)가 이 일로 원한을 가져 몰래 금병을 백직에게 주고 그를 꾀어서 그 일을 아뢰었다. 공이 죄를 입고 일관(一官)이 깎이어 강서(江西)로 옮겨졌는데, 아직 가지 않아서 다시 강동(江東)으로 옮겼다.
경계에 들어가서 부정하게 재물을 모은 관리 한사람을 적발하였는데, 예전의 재상이 청함이 있던 자인데, 듣지 않고 결국 탄핵하여 내쫒아 성에 늘어놓고 위엄을 떨쳤다. 지나는 곳의 관할하는 부서를 순시하며 관리의 치적을 살피고, 부로(父老)들을 맞아들여 접견하였는데, 현(縣)별로 무리를 만들게 하여 차례로 불러서 괴로운 일과 관리의 다스림의 득실을 물었다. 주현에 경계하여 관청을 소제하지 말도록 하고, 물건을 공급하여 벌여 놓는 것을 삼가고 수행하는 이졸(吏卒)을 막아서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니 지나가는 곳이 숙연해졌다. 부로들이 탄식하며 아직 있지 않은 일이라고 하였다. 지(池)의 수령 조수중(趙粹中)이 함부로 불법을 자행하고, 전령의 봉급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으니 몰래 변방의 상소를 올리면서 익명의 상소를 숨겨서 알린 자가 있어 명령을 내려 군(郡)에 맡겼다. 수중이 두렵고 노하여 병졸 왕청(汪淸)을 잡아 묶어서 신문하여 억지로 자복을 받아 재빨리 아뢰고 그를 베어버렸다. 형옥(刑獄) 사자(使者) 정시발(丁時發)이 군을 지나다가 그 원통함을 듣고 옥안(獄案)을 가져다가 조사하여 그 일을 밝혀내었다. 수중이 그 부하를 보내어 전사(傳舍)에 돌입하여 곧 궤간에서 빼앗아 달아나고, 함부로 꾸짖고 업신여기고 모욕하니, 일군(一郡)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공이 이 때 옆 현에 나가 있다가 빨리 돌아와서 정시발과 함께 그것을 조사하였다. 마침 정시발이 사호북(使湖北)으로 바뀌어 일이 오래 되어도 답이 없자 공이 그것을 제재하는 것이 더욱 급해졌다. 글이 세법이나 올라하고 나서 드디어 모두가 끝났다. 후에 참으로 편지를 숨긴 자를 알아서 조정에서는 비로소 수중을 죄주고 왕청의 집안을 구휼하였다.
거듭하여 다시 공을 제거형호북로상평다염사(提擧荊湖北路常平茶鹽事)로 기용하였는데, 들어가서 아뢰면서 임금에게 말하기를, “근년에 호부(戶部)의 조도(調度)가 이어지지 않고 부세(賦稅)를 감독하는 것이 가혹하며, 주현(州縣) 감사(監司)는 뜻을 구하여 죄를 피하니 다시 백성으로 마음을 삼을 겨를이 없습니다. 아래서는 인화(人和)를 잃고 위에서는 천변(千變)을 범하니, 그 근원은 여기 있습니다. 원컨대 관리에게 고하여 주현 백성의 오래 체납된 세금을 다 없애고 금전(禁轉)을 몰래 내어서 모자라는 상공(上供)을 보충하십시오. 위졸(衛卒)을 모으고, 무기를 없애며, 경제전(經制錢)과 총제전(總制錢)을 남겨두어 비용을 충당하도록 허락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또 그쳐서 다른 때를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다시 대신들에게 고하여 관리를 뽑고 국(局)을 설치하여 소흥(紹興) 이래 나가고 들어온 회계를 대조하여 살펴보고 서로 참고하여 아끼고, 계속 보조하여 장구한 계책을 경영하소서. 항상 호부로 하여금 계획에 여유가 있게 하면 주현이 관대하고 백성의 힘이 펴져서 화기(和氣)가 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공의 말을 뜯고 탄식하며 칭찬하고 또 말하기를 “짐이 호부에 처치한 것이 많은데, 민간에 체납된 조세와 궁중의 관고에 오래 쌓여있는 것 역시 이미 깨끗이 내놓았다. 경은 주현이 백성을 어지럽히는 일을 말하였는데, 짐 또한 그것을 들었으니, 이른바 임금은 세금을 감면하여 주었는데, 주군(州郡)에서는 독촉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미 세금을 없앳는데, 또 호부를 질책하면 이것이 실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정당하게 하나하나 더불어 보수하고 보상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재상이 역시 공을 전선(典選)에 머무르게 하려고 했으나 공은 부(部)에 가는 것을 극력 사양하였다.
홍수와 가뭄의 여파를 이어서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이 그치고, 편안하게 하고 진휼하는데 그 힘을 다하였다. 백성을 또 역병이 들어 의원을 보내 치료하니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그 일을 하여, 죽고 사는 사람의 많고 적음을 고과(考課)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살아난 자가 많았다. 풍속이 시신을 화장하는 것을 좋아하니, 공이 여러 현에 경계하여 각각 한곳에 모아서 무덤을 만들고 화장하는 것을 금하니 백성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호북(湖北)에는 본래 못이 많았는데, 관청이 막지를 않았으므로 빈민들이 거기에서 고기를 잡아서 거기에 의지하여 먹고사는 자가 매우 많았다. 얼마 안되어 어떤 사람이 조세를 내고 스스로 점거하여 그 이익을 제 마음대로 하니 백성들이 실로 심한 병통으로 여겼다. 이에 이르러 의논하는 자가 다시 조세를 늘리기를 청하니 아전이 그로 인하여 간계를 부려 빈민이 고기를 잡는 것을 모두 물리치고 부자집에 주니 생업을 잃고 낭패한 자가 셀 수 없었다. 공이 그 법을 분명하게 시행하여 모두 빈민에게 돌려주었다. 얼마 안되어 남로제점형옥공사(南路提點刑獄公事)로 옮겼다. 가려고 하는 때에 본도의 황정(荒政) 수십 가지 일을 조목별로 아뢰니 조칙을 내러 모두 시행하였다. 가는 날에 사민(士民)이 스스로 관리에게 말하여 공을 머물도록 비는 자가 천여 명이었다. 경계를 나가는데 길을 막고 매달리며 눈물을 흘리며 보내려하지 않았다.
도적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었다. 상인 양만사(梁晩四)를 무고하여 지목해서 죄수가 되었는데 마땅히 베어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전후로 일곱 번을 죄를 인정하도록 국문하고 그 일을 기록하여 죄인을 심문하는데 번번이 굴복하지 않았다. 최후에 공이 와서 친국(親鞫)을 하니 바야흐로 사람을 죽이고 도적질 하던 때에 양만사는 실제로 다른 곳에 있었다. 행유인력(行由印曆)을 참고하여 증험하니 아주 짧은 시간도 어긋나지 않으니 누명을 쓴 상황이 인정되어 곧 처리하여 내보내고 관리가 잘못 잡아들인 것을 탄핵하였다. 이금이 크게 기뻐하여 가공이 아뢴 것을 옳게 여기고 제로(諸路)에 명을 내려 모범으로 삼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법은 옥사를 다스리는데 두 번 추국하도록 하여 말이 혹시 조금이라도 다르면 반드시 처음 국문한 관리가 죄를 인정받은 문서를 가져다가 함께 살펴보고 거슬러서 갔다가 돌아오니 혹 열흘씩 머무르기도 합니다. 두 번째 국문하는 관리는 머물러 지체되는 것을 꺼려 비록 원통함이 있어도 감히 아뢰지 않습니다. 이로써 옥사가 오판을 바로잡는 일은 적고 잘못되어 억울한 사람은 많습니다. 청컨대 다시 구법을 쓰소서”라고 하였다. 임금 역시 그 말을 옳게 여겼다. 直秘閣․知廣州에 제수하고 주관동로경략안무사공사(主管廣南東路經略安撫司公事)를 겸하였다. 가려고 할 때 郴州의 용도가 부족함을 아뢰었는데, 정해진 세액 이외의 부세(賦稅)를 많이 걷어서 군(軍)에 주어 차츰 큰 도적이 되는데 전후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사(漕司)를 내려 보내 융통성 있게 보조하여 후환을 없앨 것을 청하였다.
광동(廣東) 땅은 침(郴)․계(桂)․공(贛)의 경계와 접하고 있었는데, 네 개 주의 백성이 한해에 한 번 령(嶺)을 넘어 무역을 하였는데, 물건 값을 손해를 보면 서로 모여서 도적이 되어 큰 무리는 수천인에 이르렀다. 공이 그 곳에 들어가 바로 우두머리 여덟 사람을 체포하고는 곧 베고서 호령하기를 “삼일 만에 가는 자는 관리가 치지 않을 것인데, 기간이 지났는데도 가지 않으면 다시 처음과 같이 체포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에 모두 흩어졌다. 양(梁)씨 형제라는 자가 있었는데 망명한 사람을 불러 모아서 전후로 죽인 사람이 셀 수 없었고, 또 그 재물을 노략질하여 치부하였다. 주현(州縣)을 오고 가서 관리가 감히 따질 수가 없었는데, 백성을 그를 재난으로 여겨 ‘사표(四彪)’라고 불렀다. 공이 생포하여 목베어 죽이고 그 거처를 물웅덩이로 만드니 다른 도적들이 풍문을 듣고 매우 놀라 두려워하였다. 대해산(大奚山)이 바다 가운데 험준하게 모가 져서 도적들이 모이니, 비록 양민이 고기잡이와 염업으로 생계를 잇는다고 해도 군색해지면 적중에 흩어져 들어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는데, 유래가 오래 되었다. 이에 이르러 새로 도염사(都鹽使)라는 것을 설치하여 날카롭게 금지하고자 하였는데, 수군이 쫒아가 잡도록 격문을 보냈다. 공이 말하기를 “수군은 오직 부(府) 절도사의 지휘만을 받으니 다른 관리가 다스릴 수는 없다. 또 작은 이익을 다투고 대도가 일어나면 장차 누가 그 책임을 맡겠는가?”라고 하고는 끝내 집행을 거부하고 보내지 않았다. 양민이 이미 조금 편안해졌는데, 이에 은밀하게 그 추호(酋豪)를 모아서 적을 체포하는데 힘을 바치게 하였다. 이로부터 도적이 나오면 번번이 잡으니, 공이 있는 자는 아뢰어서 관직에 임명되도록 하고, 싸우다 죽으면 바로 그 아들을 임용하고, 그냥 앉아서 보면서 구원하지 않는 자에게 무거운 책임을 물었다. 관속이 불행히 죽는 자는 후하게 부의를 보내어 돌려보내고, 죽은 노인이나 어린아이를 살펴서 한 사람도 빠지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30여 집이었다. 사족(士族) 여자가 다른 문벌이나 신분이 다른 사람에게 정조를 잃은 사람은 죄를 면해주고 돌려보냈다.
임금이 공이 마음을 다한 옥사를 듣고는 조칙을 내려 조의대부(朝議大夫)․진직회유각(進直徽猷閣)․지담주(知潭州)․안무호남(安撫湖南)으로 특전(特轉)되었다. 다시 흉년을 만나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고 널리 자문하고, 조세를 없애주며, 체납 세금의 징수를 늦추어주니 백성이 조금 편안해져서 기근이 해를 입히지 못했다. 비호군(飛虎軍)의 교만 방자함이 통제할 수 없게 되었는데, 믿는 곳이 있어서 취하여 칼을 차고 사람을 해친 자가 있어, 군법에 따라 그를 베니, 이에 순종하여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다음해 소환하니 병으로 사양하고 직현모각(直顯謨閣)․지태평주(知太平州)에 등용하였다. 관직에 오르지 않고, 또 다음해에 상서좌사랑중(尙書左司郞中)에 제수되었는데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태평(太平)에 부임하라는 명을 거듭하였는데, 가지 못하고 병으로 졸하니 향년 63세였다. 관직이 중대부에 올랐고, 금화현(金華縣) 개국남(開國男)의 작위와 식읍(食邑) 3천호를 내렸다.
그 아내는 이(李)씨인데 휘는 맹염(孟琰)이고, 자는 문정(文靚)이며, 효도와 우애가 있고 총명하며 식견과 취향이 높고 깊었다. 장간공(莊簡公)이 남쪽으로 옮겼을 때 나이가 아직 열다섯이 안되었으나 이미 아주 힘들게 노력하고 가난을 달게 견디며, 친척들을 두루 구휼하여 비록 흉사라고 해도 거리낌이 없었다. 공에게 시집가고 나서 여러 여동생들이 많이 시집가시 않았는데, 필요한 혼수를 조금도 아낌없어 미루어 주었다. 제사를 받들면 반드시 정성과 공경으로 하고 의(義)로 공을 섬기고, 옷은 반드시 스스로 짓고, 음식은 반드시 몸소 맛보며, 약은 반드시 친히 끓였다. 공을 따라서 관청에 살 때는 일찍이 바깥일을 간섭하지 않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지 않았으며, 문 안의 관리는 비록 세세한 일도 스스로 하였는데, 조리가 정밀하여 엄하기가 관부와 같았다. 매번 관직을 물러나 떠날 차비를 하 때는 모두 하루에 갖추었다.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나 가혹하게 조사하지 않았고, 치가(治家)는 엄정(嚴整)하였으나 아랫사람을 다스릴 때는 인정이 있었다. 옷을 재단하고 바느질 하는 것은 반드시 정밀하게 하였고, 빨래는 반드시 깨끗이 하였으나, 수를 놓아 화려하게 하지는 않았다. 공과 말을 할 때는 작위와 녹봉의 진퇴로 기뻐하거나 슬퍼한 적이 없고, 아들들을 가르칠 때 역시 그러하여 아는 사람들은 그를 높이 여겼다. 여러 번 영인(令人)에 봉해졌고, 공보다 3년 뒤에 졸하였다. 아들은 우단(友端)․우공(友恭)이 있는데, 모두 힘써 공부하여 지조가 있었다. 우단은 진사에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고, 지금은 함께 종사랑(從事郞)이 되었다. 딸 우송(友松)은 태상시주부(太常寺主簿) 사미원(史彌遠)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이손(履孫)인데, 장사랑(將士郞)이다. 손녀 둘은 아직 어리다. 우단 등이 공을 소흥부(紹興府) 상우현(上虞縣) 영풍향(永豊鄕) 장우(張澳)의 들에 장사지내고 영인(令人)과 합사하였다.
공은 어려서 중서공(中書公)을 종학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이(李)씨의 사위가 되었고, 또 장간공(莊簡公)에게 의탁할 수 있게 되었다. 중년에는 장경부․여백공 사이에서 지내며 갈고 닦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만년에는 독서를 하며 뜻을 세우는 것이 넓고 독실하였다. 소관(小官)이 되고부터는 곧 치행(治行)으로 칭송을 들었다. 군(郡)을 다스릴 때는 먼저 교화하였으며, 송사(訟事)와 옥사(獄事)의 기간에는 삼가지 않음이 없었고, 부역을 면제해 주는데 힘썼고, 출납의 섬세한 부분까지 남김이 없었다.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는 에에 모두 공적이 있었다. 부사(部使)가 되어서는 파면하고 임용하는데 권문(權門)을 피하지 않았고, 고하고 캐묻는 데는 큰 벼슬아치를 꺼리지 않았다. 묻고 위로하는 것은 숨겨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관장하는 방면에 이르면 위엄과 장중함을 지키고, 대체(大體)에 힘썼으며, 번거롭고 가혹하지 않았다. 승(丞)과 사(史)는 면밀하게 골랐고, 재주에 따라 임무를 주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병사를 가르칠 때는 간사함을 금하고 난폭함을 없애니, 하나라도 본받을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다스리는 것은 관대함을 주로하고 관대한 명성을 듣고자 하지 않으며, 엄격함으로 바르게 하지 엄격한 행적이 남게 하지 않는다. 다만 법도가 총괄하여 다스려지고 맥락이 유통하면 이로서 앉아서 모든 관리들을 움직이고 나는 항상 하는 것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바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이로움과 해로움, 근본과 말단을 궁구해본 다음에 명령을 내렸다. 일시적 관용과 작은 은혜로 헛된 명예를 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매번 말하기를, 민력(民力)을 넉넉하게 하려면 먼저 주현(州縣)을 구휼해야 하니, 주현이 풍족하면 세금을 거두는 것이 저절로 불어나고 마을이 편안해진다고 하였다. 술과 차와 소금을 전매하는 것은 고법(古法)이 아니니 차마 모두 율령으로 종사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옥사(獄事)에는 더욱 삼갔으나 또한 죄가 있는 사람을 함부로 풀어주지는 않았다.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인재를 묻고 학교를 일으켰다. 담주(潭州) 악록(嶽麓)과 형(衡)의 석고(石鼓)는 모두 일신하여 학자가 열심히 하였다. 선비를 천거하는 것은 오직 공론(公論)으로 허여하고, 사사로이 친고를 따지지 않고, 청탁을 받지 않았다. 천거함이 있으면 항상 문을 닫아걸고 아뢰는 문서를 초하여, 관리가 감히 말하지 못하고, 비록 천거받는 사람이라도 일이 내려온 다음에야 알았다. 여백공이 듣고서 탄식하기를 “반(潘)공이 선비를 천거하는 것은 진선진미(盡善盡美)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부에 홍수나 가뭄이나 도적이 있으면 크고 작음이 없이 반드시 찾아가서 상서(祥瑞)를 알리고 곧 물리쳐서 살피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아들과 같이 사랑하고, 관리는 동복(童僕)과 같이 부렸으며, 벼슬아치는 친구와 같이 접대하고, 관청의 금고는 자신의 재산과 같이 아꼈으며, 공사(公事)는 집안일과 같이 다스렸다. 일이 문법에 불편함이 있으면, 항상 자신이 그것을 맡아서 아랫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투어 진력하니 가는 곳마다 치적을 칭송하였다. 근세의 사대부 간에는 관리의 도리가 정밀하며 법령의 조목의 취지에 익숙하며, 관대함과 엄함을 적절하고 마땅하며, 대소를 적절히 헤아리는 것이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그의 몸가짐은 특히 공손하고 경계하였으며, 말과 웃음은 항상 절도가 있었다. 그가 벼슬에 나가는 것은 사람에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에게 나아갔는데, 그러나 조금이라도 싫은 점이 있으면 항상 벗어나서 머무르지 않았다. 증적(曾覿)이 빈천할 때 시문(詩文)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귀해지고 나서는 끊어버리고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만약 사람이 와서 은근함을 간곡하게 하면 번번이 갚지 않고 편지로 일을 청하고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강동(江東)에서 돌아오고부터 거처하는 곳이 숙연하여 거문고를 타고 독서하며 자적함이 있어 일찍이 제공(諸公) 귀인(貴人)들과 소식을 통한 적이 없다. 늦은 나이에 소환되어 장차 거기에 머물려 하였으나 공이 병이 들었다. 또한 마침 재상을 내치려고 꾀하는 자가 몰래 그를 저지하니 드디어 끝내 등용되기에 이르지 못하였다. 논자들이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공은 초연하게 대처하였다.
젊어서 글씨 쓰기를 배우기를 좋아하여 구(歐)와 안(顔)의 해법(楷法)을 얻었는데, 강건하고 곧으며 엄밀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불교의 속이는 설을 매우 불신하여 일찍이 석교록(釋橋錄)을 지어 그 허망함을 배척하였다. 상제(喪祭)는 유속(流俗)을 따르지 않았으며, 평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병이 들고 나서는 정신이 쇠하지 않아 기거(起居)의 엄숙하고 정중함이 평상시와 같았다. 아들들을 돌아보고 증자(曾子)가 자리를 바꿀 대의 말을 외우며 숨이 그쳤다. 이는 곧 세상에 공을 아는 자들이 그 방정함을 의논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공을 종유한 것이 비록 오래지는 않지만 서로 아는 것이 가장 깊었다. 우단(友端) 등이 또 와서 배웠으므로 그 장사에 와서 명을 청하니 사양할 수 없었다. 명에 이르기를,
선비는 배우지 않음을 근심하고, 학자는 행하지 않음을 근심한다. 입은 성하나 마음은 시들고, 물(物)은 무거우나 몸은 가볍다. 아름답도다! 반공(潘公)이여. 옛날부터 뛰어남이 있었네. 실천함이 미세하고 세밀하여, 늙을수록 더욱 굳세고 엄숙하였네. 호수는 맑고 바다는 고요하니 임금이 그에게 마음을 두었네. 돌아감이여, 고달프구나! 길은 실로 굴곡이 졌네. 다만그 덕과 학문은 아는 자가 드무네. 내가 그 유택에 명을 써서 오래도록 고하노라!
公諱畤, 字德鄜, 姓潘氏, 婺州金華縣人. 曾大父諱宗簡, 大父贈中奉大夫諱祖仁. 父贈通奉大夫諱良佐, 始以儒學敎授, 諸弟皆從受學, 而中書公良貴遂以淸直致大名.
公生穎悟. 少長, 莊重如成人. 旣孤, 中書公愛而收敎之, 欲使後己. 公以親沒無所受命辭, 乃任以爲登仕郞, 爲娶李莊簡公女. 李公亦器許焉. 初調袁州分宜主簿, 躬校簿書, 蚤夜寒暑不少懈, 田里賴以安. 監臨安府造船場, 部使者以爲能, 多屬以事, 皆迎刃立解. 且不以上官喜怒爲向背, 御史杜莘老聞而賢之, 欲引以爲屬, 曾去不果. 公亦未嘗求薦, 而當路爭知之, 改通直郞. 宰相欲留官中都, 公固求奉祠以去. 已而差提轄離買務雜賣場, 嚴禁防․謹次第, 大官要人無敢干以私. 皇城邏卒挾恃干紀, 公按致其罪不少貸. 人爲公危之, 然公以廉白自將, 其黨雖怨之, 卒無以報也. 終更, 宰相又欲留之, 不可, 遂出知興化軍.
莆俗險健多訟, 公至, 究其利病施置之方, 爲科條以屬吏, 簡易巖密, 無所偏倚, 都以大治. 時卽學官召諸生而敎飭之, 遂無敢以事至廷中者. 女官道士託妖妄求勅賜以表其居, 挾簽樞張說書屬公上其事. 公不可, 說復喩意部使者以撼公. 公卒不爲動. 歲旱, 禱雨不應. 公慮獄有寃, 亟往訊焉, 果得二人, 破械遣之而歸其獄於吏. 車未及旋, 大雨立至. 郡故有洋城․陳覇二斗門及木蘭陂, 漑田數萬頃, 歲久廢壞. 公爲興築, 壯固牢實, 民至今詠歌之. 適歲薦饑, 募客舟予錢博糴而寬其期〔一〕. 人始莫喩其意, 旣而糴者得以其間往返一再然後及期, 則糴價久已自平而民不饑矣, 人始服公爲有謀也. 請蠲歲輸丁米錢千萬, 久之未報, 輒移屬縣緩其輸. 漕司不悅, 督愈峻. 公訴於朝, 竟得罷乃已.
召還賜對, 公言 : ‘郡縣者, 朝廷之根本, 而百姓又郡縣之根本也. 今不計州縣之事力而一切取辦, 又不擇人材之能否而輕以畀之, 欲本固而邦寧, 其可得乎? ’ 上善其言, 欲留以爲郞, 而公有所不樂, 力諸外, 乃除提擧兩浙西路常平茶鹽公事. 至則罷中都饋餉之不如法者, 豪貴已多不悅. 而平江庫錢失漏, 守因是誣富室以取償, 一郡大擾, 有死者. 公檄罷之, 守以是怨, 陰以禁兵給白直而訹它司上其事. 公坐削一官移江西, 未行, 又移江東.
入境發贓吏一人, 故相有爲請者, 不聽, 竟按逐之, 列城震聳. 行部所過, 延見父老, 使縣別爲輩, 以次召問所疾苦及吏洽得失. 戒州縣毋得除舍館․飾供張, 鈐鍵吏卒, 所過肅然. 父老歎息, 以爲未始有也. 池守超粹中恣橫不法, 遞卒廩給不時, 有盜發邊奏, 匿名書以訴者, 詔以屬郡. 粹中恐怒, 捕繫卒汪淸, 訊治强服, 亟奏誅之. 刑獄使者丁時發過郡, 聞其寃, 取具獄閱之, 將發其事. 粹中遣其屬突入傳舍, 卽几間奪去, 嫚罵陵折, 一都大駭. 公時出按旁縣, 馳歸, 與時發共劾之. 會時發改使湖北, 事久不報, 而公繩之愈急. 章三上, 遂與俱罷. 後得直書者, 朝廷始罪粹中而恤淸家.
尋復起公提擧荊湖北路常平茶鹽事, 立奏 : ‘比年戶部調度不繼, 督賦苛急, 監司州縣希意避罪, 不暇復以百姓爲心. 下失人和, 上干天變, 其原在此. 願韶有司悉蠲州縣民間舊逋, 而內出禁錢, 以補上供之缺. 其招衛卒․除戎器, 皆許留經總制錢以充費, 不則且止, 以俟他年. 更詔大臣選官置局, 考校紹興以來出內之會, 參互省嗇, 繼續補助, 爲經久計. 常使戶部支計有餘, 則州縣寬而民力紓, 和氣應矣.’ 上聞公言, 歎息稱善, 且曰 : ‘朕於戶部應副多矣, 民間逋租․內藏積久亦已鞠放. 卿言州縣擾民之事, 朕亦聞之, 蓋所謂黃紙放, 白紙催者. 若已蠲之而又責於戶部, 此誠何益? 正當一一與補還耳.’ 因諭所以寄任之意甚悉. 宰相猶欲留公典選, 公力辭之部.
承水旱之餘, 敎喩懲戢, 安集賑救, 曲盡其力. 民又病疫, 則遣醫視療, 家至而日課之, 以其死生多寡爲殿最, 由是全活者衆. 俗喜焚尸, 公敕諸縣各治叢冢, 焚者有禁, 民莫敢犯. 湖北故多陂澤〔二〕, 官不障, 故使貧民得漁其間, 賴以食者甚衆. 旣而或以輸租自占而顓其利, 則民固已病之. 至是議者請復增租, 而吏緣爲姦, 盡斥貧民所漁以給富家, 矢業狼狽者不可計. 公爲申明其法, 悉以還之. 未幾, 改南路提點刑獄公事. 將行, 猶爲條奏本道荒政數十事, 詔悉施行. 行之日, 士民自言諸司, 乞留公者以千數. 出境猶遮道攀戀, 涕泣不肯去.
有盜殺人, 而誣指賈人粱晩四爲罪首, 論當殊死. 前後七推具伏, 錄問輒不承. 最後至公親鞫, 則方盜殺人之時, 晩四實在他所. 參驗行由印曆, 晷刻不差, 乃得其寃狀, 卽理出之, 而劾官吏失入者. 上大喜, 可公奏, 下諸路以爲法. 又秦 : ‘新法獄經再鞫, 詞或少異, 必取初鞫官吏承伏而幷按之, 追逮往返, 或淹旬歲. 再鞫官憚於留滯, 雖或有寃, 亦弗敢白. 以此獄少平反, 枉濫者衆. 請得復用舊法.’ 上亦可之. 除宜秘閣․知廣州, 兼主管廣南東路經略安撫司公事. 將行, 猶奏郴州用度不足, 多橫賦以供軍, 馴致巨寇, 前後非一. 請下漕司通融補助, 以息後患.
廣東地接郴․桂․汀․贛之境, 四州之民歲一踰嶺貿易, 所閱卽相聚爲盜, 大羣至數千人. 公入境, 適捕得渠帥八人, 卽斬以狥曰 : ‘三日而去者, 吏不得格, 期外不去, 復捕如初.’ 於是皆散. 有粱氏兄弟者, 招納亡命, 前後殺人無數, 而掠其貲以致富. 交通州縣, 吏不敢語, 民患苦之, 號爲‘四彪’. 公擒捕誅殺, 汙瀦其居, 它盜望風破膽.〔三〕. 大奚山斗人海中, 寇攘所聚, 雖良民亦以漁鹽爲命, 急之則散入賊中不可禁, 所從來久. 至是, 新置都鹽使者, 銳欲禁之, 檄水軍逐捕. 公曰 : ‘水軍專受帥府節度, 非它司可得而調也. 且爭小利․起大盜, 將誰使任其責耶? ’ 卒拒法不爲發. 良民旣得少安, 乃陰募其酋豪, 使以捕賊自効. 由是盜發輒得, 有功者爲奏捕官, 鬪死卽官其子而重責其坐視不赴救者. 官屬不幸死者, 厚賻遣歸, 存沒老稚, 無一人流落. 如是者三十餘家. 士族女失身非類, 贖而歸之.
上聞公究心獄事, 詔特轉朝議大夫․進直徽猷閣․知潭州, 安撫湖南. 復値凶歲, 精蔡禱․廣答詢․纖稅租․弛適負, 民得小康, 饑不爲害. 飛虎軍驕橫不可制, 有恃醉挾刃傷人者, 案軍法誅之, 於是帖服無敢犯. 明年召還, 以疾辭, 進直顯謨閣․知太平州. 未上, 又明年, 除尙書左司郞中, 竟辭不就. 乃申太平之命, 未行而以疾卒, 享年六十有三. 累官中大夫, 爵金華縣開國男․食邑三百戶.
其配李氏, 諱孟琰, 字文靚, 孝友聰明, 識趣高遠. 莊簡公南遷時, 年末及笄, 已能刻苦自厲, 甘忍貧薄, 周恤親黨, 雖凶事無所憚. 旣歸公, 諸妹多未行, 奩具所須, 推予不少斬. 奉祭祀必誠敬, 事公以義, 衣必覩製, 食必親嘗, 藥必親煮. 從公居官, 未嘗問外事․買市物, 而門內之治雖細必親, 絛理精密, 如嚴官府. 每罷官治裝, 皆一日辦. 警敏絶人而不爲苛察, 治家嚴整而御下有恩. 縫紉必精, 漱澣必潔, 而不爲組繡華靡. 與公言, 未嘗以爵秩進退爲欣戚, 其敎諸子亦然, 有識高之. 累封令人, 後公三年卒. 子男友端․友恭, 皆力學有志操. 友端嘗以進士高選, 今俱爲從事郞. 女友松, 嫁太常寺主簿史彌遠. 孫男履孫, 將仕郞. 女二人, 皆幼. 友端等葬公紹興府上虞縣永豐鄕張澳之原, 以令人祔.
公少從中書公學, 長壻李氏, 又得莊簡公爲依歸. 中年遊張敬夫․呂伯恭間, 切劘不倦. 晩歲讀書, 厲志彌篤. 自爲小官, 卽以治行有聞. 治郡先敎化而訟獄期會無不謹, 務施舍而出納纖細無所遺. 興利除害, 皆有成績. 爲部使者, 廢置不避權門, 斛劾不憚大吏. 咨詢撫摩, 無隨不達. 至典方面, 舂威持重, 務大體, 不細苛. 精擇丞史, 隨才授任. 治民訓兵, 禁姦除暴, 無一不可法者. 蓋嘗自謂:‘吾之爲治, 主於寬而不使有寬名, 輔以嚴而不使有嚴迹. 唯其綱維總攝而脈絡通流, 是以坐走百吏而我常無爲也.’ 有所弛張, 必先究見利病本末, 然後出令. 恥爲姑息小惠以掠虛譽, 每言欲寬民力, 先恤州縣, 州縣足則科歛自息而田里安矣. 謂榷酤荼鹽非古法, 不忍盡以律今從事. 於犴獄尤兢兢, 然亦未嘗縱釋有罪也. 所至必問人材․興學校. 潭州獄麓․衡之石鼓, 皆一新之, 學者用勸. 薦士唯公論是與, 不私親故, 不受請囑. 有所薦輒閉閤草奏敕, 吏莫敢言, 雖被薦者亦事下然後知. 伯恭聞而嘆曰 : ‘潘公薦士, 可謂盡善盡美矣.’ 所部水旱盜賊無巨細必以聞, 以祥瑞告, 則抑而不省. 其愛民如子, 馭吏如童僕, 接寮屬如朋友, 惜官帑如私財, 治公事如家事. 事有不便於文法, 輒身任之, 不以累其下. 是以人爭爲盡力, 所至稱治. 近世士大夫間, 號精吏道․有科指, 而寬猛適宜․大小中度者, 無出其右.
其持身尤謹飮, 言笑有常度. 其仕進不卽人而人卽之, 然有小嫌, 輒避不處. 曾覿貧賤時, 嘗以詩文見. 及貴, 絶不與通. 使人來致慇懃, 輒不報, 以書請事, 亦不從. 歸自江東, 環堵蕭然, 彈琴讀書, 有以自適, 未嘗一與諸公貴人通聲問. 晩歲召還, 蓋將有以處之, 而公病矣. 亦會有謀傾宰相者陰尼之, 遂竟不獲究其用. 論者莫不歎息, 而公處之超然.
少喜學書, 得歐顔楷法, 勁挺嚴密, 如其爲人. 雅不信浮屠詭異之說, 嘗著石橋錄以斥其妄. 喪祭不狥流俗, 平居無所嗜好. 旣病, 神明不衰, 起居莊敬如常時. 顧諸子, 誦曾子易簀時語而絶. 是則世之所以知公者, 猶未足以議其方也. 熹從公遊雖不久, 然相知爲最深. 友端等又來學, 故於其葬來請銘, 不得辭也. 銘曰 :
士患不學, 學患不行. 口榮心悴〔四〕, 物重身輕. 偉歟潘公!夙有奇尙. 蹈履密微, 老益堅壯. 湖淸海謐〔五〕, 百辟儀之. 歸歟憊矣, 道固委蛇. 唯其德學, 知者蓋鮮. 我銘其幽, 以告悠遠!
〔一〕博 : 原作 ‘傳’ , 據宋閩․浙本改.
〔二〕故 : 原缺, 據宋浙本捕.
〔三〕它 : 原作 ‘宅’ , 據宋閩․浙本改.
〔四〕心 : 原作 ‘身’ , 據宋閩․浙本改.
〔五〕謐 : 原作 ‘謚’ , 據宋閩․浙本改.
부문각직학사 이공 묘지명(敷文閣直學士李公墓誌銘)
공의 휘는 춘(椿)이고, 자는 수옹(壽翁)이며, 명주(洺州) 영년현(永年縣) 사람이다. 증조부 안(安)과 조부 태(泰)는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승(升)은 진사로 집안을 일으키고 관리가 되어 청렴함과 정직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관직을 더하여 조봉랑(朝奉郞)에 이르고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증직되었다. 모친 양(楊)씨․조(趙)씨․장(張)씨는 모두 석인(碩人)에 증직되었다.
정강(靖康)의 난에 변도(汴都)가 지켜지지 않아서 태중공이 부친이 부상을 당한 것을 지키다가 부자가 함께 졸하였다. 공의 나이가 아직 어려 절에 초빈(草殯)하고 불교에 심취하여 자세히 알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 호령(湖嶺)으로 가서 어렵고 궁함을 모두 겪으며 힘을 다해 봉양하였고, 모자가 서로 사랑하고 효도하니 사람들이 그가 조씨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유택(遺澤)으로 관직에 임명되어 담주(潭州) 형산(衡山) 위(尉)에 임명되었다. 간사함을 들추어내고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니 사람들이 속일 수가 없었다. 일을 해결하는데 이치가 어떠한가를 물으니 힘으로 빼앗을 수가 없었다. 다시 계양감사리참군(桂陽監司理參軍)으로 옮겼는데, 도적이 임무(臨武)에서 일어나 장위가 60여 인을 묶어서 바쳤다. 공이 분명히 재판하여 겨우 여섯 사람만 죽임을 당했으니, 그가 살린 사람 역시 매우 많다. 자주 옥사를 따져서 지키던 뜻을 잃으니, 떠나고자 하였지만 하지 못하였다. 지방관이 깨닫고 이에 다시 서로 알게 되었다. 임금에게 아뢰어 임무현(臨武縣)을 다시 설치하니, 도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20년이었다. 형주(衡州) 군사판관(軍事判官)으로 옮겨 지방관과 부사(部使)가 서로 미워하여 공이 그칠 것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군 전체가 연루되어 탄핵을 받아서 물러났는데 공만 면하였다. 소(邵)의 백성중에 두 사람이 도적이라고 고한 자가 있어 군에서 그 하나를 잡아서 법으로 가두려 하니 죄인의 집에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공이 그를 국문하고, 고한 자를 부르도록 하였는데 그 사람이 없었다. 한 패를 물으니 이미 길에서 죽었다. 본래의 문서를 조사하니 죽은 사람은 도둑질한 저녁에 다른 주에 있었고, 증인도 있었으니, 죄인은 곧 석방되었다. 영국군(寧國軍) 절도추관(節度推官)으로 옮겼는데, 호민(豪民)이 위조 문서를 가지로 진(陳)씨의 밭을 취하니, 진씨 부자가 옥에서 죽고, 처도 죽으려고 하였다. 공이 그 거짓을 가려내어 밭을 빼앗아 진씨에게 돌려주었다. 오랑캐 량(亮)이 평(平)을 넘보니 서둘러서 지방관에게 아뢰어 성벽을 수리하고, 무기를 수리하며 백성과 군사를 다스림이 매우 가지런해지니 사람들이 믿고 편안해 하였다.
장충헌공이 양회(兩淮) 병마를 절제하였는데, 준비를 위해 임시로 파견되었다. 선무도감(宣撫都監)을 배알하고 모두가 스스로 따랐다. 공이 처음 호문정공(胡文定公)을 뵙고 물러나 그 아들들과 사귀었는데, 편안하게 말하기를 “춘(椿)은 천하의 사람들이 오직 옳은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호공이 듣고 그를 특별하게 여겼다. 그 아들 인중(仁仲)이 후에 공을 만나서 부천(富川)의 여섯 가지 일을 논하였는데, 역시 경제(經濟)의 재주가 있다고 말하였다. 장공이 그를 알았으므로 취하여 속관으로 삼으려 했다. 회전(淮甸)을 운영하고 계획하는 일을 맡기니 공이 두 곳을 분주히 다니며 유민을 위무하여 모여들게 하고 둔병(屯兵)을 배치하며, 여(廬)와 수(壽)의 군정(軍情)을 살피고, 성채의 험요를 자세히 살펴, 장공에게 왕복한 것이 모두 20번이었으니, 상세하고 면밀하게 살펴 도움이 된 것이 많았다. 그것은 장수가 있는 군영은 마땅히 무위(無爲)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전차(戰車)를 만들어서 창과 같은 것들과 바꾸기를 청하였으나 행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많다. 일이 할 수 없는데 이르면 실로 억지로 같게 만든 적이 없다. 선무사(宣撫司)가 일을 마치고 관속의 차례를 정하여 상을 줄 것을 청할 것을 의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지금 공(功)이 없는데 군색하게 상을 구하는 것은 이미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 고급 무관을 우선하면 사졸을 권면할 수가 없고, 상을 두루 미치게 하면 공을 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모두 불편합니다”라고 하였다. 장공이 옳다고 여겨 그만두고 아뢰지 않았다. 나중에 여러 장수들이 북벌의 의논을 들은 자들이 있어 일이 막부(幕府)에 내려와 그것을 따르려고 하였다. 공이 밖에 있다가 재빨리 장공에게 문서를 올려 말하기를 “원수를 갚고 적을 치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분이 바르게 정해지고, 세력을 기르고 결점을 살펴본 다음에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계획이 독부(督府)에서 나오지 않고 여러 장수들에게서 나왔으니 이미 여시(輿尸)의 흉입니다. 하물며 변경이 굳지 않고, 비축된 것이 풍성하지 않으며, 장수들은 대부분 재주가 없고, 병사들은 약하고 단련되지 않았으며, 절제(節制)가 신실하지 않으며, 의논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비록 그 땅을 얻는다 해도 지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글이 들어가지도 않아서 군사가 이미 움직이니, 또 말하기를 “대장은 용감하나 무모하니 이미 결정된 계획을 내려서 진퇴를 자세히 볼 수 있게 하시어 위엄과 중후함을 일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과연 공이 없고 나서야 장공이 그것을 후회하였다. 하루는, 위연히 실로 재목을 얻기가 어려움을 탄식하니, 공이 천천히 대답하여 말하기를 “열 집이 있는 마을이라도 반드시 충신(忠信)이 있으니, 천하가 큰데 어찌 감쪽같이 속일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이르고자 하면 다만 귀에 거슬리는 것을 싫어하고 뜻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만 하여도 때맞추어서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장공이 다시 우상(右相)을 배수되니 공은 일이 불가함을 알고 그를 권하여 물러났다. 다음해 봄에 또 나가서 군사를 관장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소인의 당이 이미 이겼고 공은 무고하게 묘당을 떠나니 이는 반드시 위태롭습니다”하고 다시 전에 의론한 것을 매우 간곡히 되풀이 하였다. 장공은 마음은 그것을 옳게 여겼으나 스스로 종신(宗臣)으로서 천하의 중한 일을 맡고 있으니 아마 물러날 계획을 결단하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정말로 파면되었다.
공은 막부(幕府)에 나가서 감등문고원(監登聞鼓院)이 되었다. 몇 달을 재직하고 좋지 않은 일이 있어 통판염주(通判廉州)를 청하여 돌아갔다. 도임하지 않고 소대(召對)하였는데, 먼저, 광서(廣西) 주현(州縣)이 소금을 운반하기를 회복하고 세금과 화적(和糴), 초적(招糴)의 어지러움을 줄일 것을 청하고, 두 번째는 군중(軍中)의 백전지사(百戰之士)를 빼내지 않아서 군세(軍勢)를 성하게 하고, 군현을 너그럽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세 번째는 간전(墾田)을 제일로 과세하고, 부법(賦法)과 녹령(祿令)을 고쳐 곡식과 비단으로 주는 것을 많게 하고 돈으로 주는 것은 줄일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임금의 뜻에 마땅하였다.
지악주(知鄂州)에 제수되어, 다시 소대하였는데, 간황전(墾荒田)에 조세를 삼분하고, 삼년에 그 1을 증액하여 세 번 증액하면 다 내도록 하는 칙령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경총제전을 파하여 모두 상공(上供)으로 하고, 모두 장부에 목록을 만들어 아전의 농간을 줄일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그 간전(墾田)에 대한 말은 옳다고 여겼다. 악주에 이르러 그것을 행하니 복호(復戶)가 수천이고 빈 땅이 크게 개간되었다. 악주의 땅은 중요한데 지방관의 권위는 가볍고, 부세는 박한데 쓸 곳은 많았다. 공은 정성껏 교제하고 제도를 고르게 하고 간소하게 하니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진작되고 여유가 있었다. 불에 대비를 엄하게 하고 간도(姦盜)를 금하는 것이 모두 방략이 있었다. 군민의 다툼은 법으로 단번에 결단하니, 주장(主將)이 열복(悅服)하였다.
광남서로제점형옥공사(廣南西路提點刑獄公事)로 옮겼다. 광서(廣西)는 예전에 유람하던 곳이어서 그 민정(民情)이 바라고 싫어하는 것과 고치고 바꿀 것이 있는 것을 알아 경계하지 않아도 믿었다. 관리가 죄가 있으면 해직시킬 뿐이고 끝까지 다스리지 않았다. 끝내지 않은 옥사가 있으면 한결같이 가볍게 다스려 석방된 사람이 수천인이었다. 성하(盛夏)에 안행(按行)하여 모두 근심하고 물으며 타일렀다. 물러나 문서를 조사하였는데 하루 저녁에 천 장이나 되었다. 소주(昭州) 금갱(金坑)에 회복한 발운사를 그만두도록 아뢰고, 해남(海南)에서 벼슬하는 자가 토산물을 거래할 수 없도록 금할 것을 청하니 이 일들이 모두 시행되었다.
형호남로전운판관으로 옮기고 조정에 들어가서 일을 아뢰도록 하였다. 가서 경기 가까운 곳에 이르렀는데, 당시의 재상이 그를 미워하여 곧바로 부임하도록 재촉하였다. 마침 그 해에 크게 흉년이 들어 관에서는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비축한 구휼미를 팔았는데, 백성들이 다투어 사들이니, 쌀값이 뛰고 귀해지자 다시 쌀값을 누르니, 상선(商船)이 오지 않았다. 공이 부임하여 쌀값을 뛰지 않게 하고 쌀값을 정하는 것을 없애니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았다. 한해에 쌀 10분의 2를 사들여서 명주나 돈으로 대신하여 상납하는 것을 없애주고, 민전(緡錢)을 내서서 지폐로 만들어서 쌀을 살 때는 마땅히 시가를 써야하고, 지나치게 값이 싸서 백성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주청하니 사람들이 편하게 여겼다. 소리(少吏)가 된 때부터 이미 감사(監司)가 부서를 행하는 것이 이졸(吏卒)을 따르는 병통이 있어 주현을 어지럽혔다. 이에 이르러 나갈 때가 되었는데, 갑자기 나아가서 아전을 경계하여 주현에서 물어야 할 일들을 모두 목록으로 만들어서 행하고, 항상 따르던 자들은 그만두게 하였다. 간 곳의 주에서 이졸(吏卒)을 골라서 사령(使令)으로 삼고, 본보기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그가 한 것을 본받고, 임금에게 충간하여 정사를 의논하는 자도 여러 도(道)가 법으로 삼도록 명령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부름을 받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이 되어 다시 광서의 염법(鹽法)을 논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시행할 목록을 조목으로 써서 올리도록 하고 드디어 법을 바꾸었다. 그 후 20년간 법이 비록 여러 번 변했으나 절묘(折苗)․화적(和糴)․초적(招糴)의 어지러움은 결국 없어졌으니, 백성들이 의지하여 편안하였다. 추밀원검상제방문자에 제수되었는데, 소리(小吏)가 남단(南丹) 막씨(莫氏)의 표(表)를 가지고 와서 의주(宜州)에서 말을 거래하기를 청하였는데, 첨서(簽書) 장열(張說)로 인하여 듣게 되었다. 공이 장열에게 말하기를 “옹(邕)은 멀고 의(宜)는 가까운 것을 사람들이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 전날에 일부러 길을 옮겨서 멀게 하면 어찌 의도가 없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막씨가 바야흐로 횡행하는데 이에 그를 위하여 길을 없애고 저들이 호시(互市)의 이익을 제멋대로 하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소리(小吏)가 망령되이 일으키면 장차 국경 지대의 분쟁을 열 것이니 청컨대 법대로 논하소서”라고 하였다. 장열이 또 여러 군(郡)에 의논하여 군(軍)을 불러 마땅히 입법하여 전최(殿最)를 메겼다. 공이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공(贛)․길(吉)․건(建)․검(劍) 등 주의 민중은 습속이 사나워서 비록 많이 모집하여도 이르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회(淮)․한(漢)․형(荊)․호(湖)는 피폐함이 회복되지 않아서 만약 액수로 제한하면 아마도 강요하고 머리채를 잡는 어지러움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건이 쌓여 장열을 거스르니 장열이 노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하나도 할 수가 없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그것을 듣고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것을 알고 빨리 편안한 직책으로 위로하고 깨우치도록 명령을 내렸다. 얼마 되지 않아 장열이 그만두니, 이에 공이 좌사원외랑으로 옮기고 국론을 밀접하게 보좌하고, 관리의 간사함을 심히 억누르니 재능이 그 직무에 맞는다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삼아(三衙)는 어전의 병사로 쓰임이 있으니 마땅히 더해야 하고, 제주(諸州)의 상금병(廂禁兵)은 쓸모가 없으니 마땅히 없애야 합니다.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죽으면 보충하지 않는 것이니, 20년 후에는 다시 쓸모없는 병사가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안정되어 어지럽지 않으면 어전병을 여러 주에 나누어 주둔시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처음 공이 독부(督府)d- 있을 때 군민(軍民)이 함께 경작하는 계책을 세운 적이 있었다. 얼마 후 그 장단점을 상세히 논하고, 이에 모두 내 놓아 제군(諸軍)에 주어 해마다 병졸의 반을 나누어 경작하여 그 식량을 더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한 상언(上言)한 것이 모두 갖추어졌다.
다시 외직을 청하여 직용도(直龍圖)․지융흥(知隆興)․강남서로안무(江南西路安撫)에 제수되었다. 조상의 휘를 피하여 형호남로전운부사(荊湖南路轉運副使)로 바꾸었다. 도착하여 한 달이 안되어 도대제거사천다마(都大提擧四川茶馬)로 옮기고 갑자기 본래의 관직에 복귀하였다. 열세가지 일을 아뢰어 청하였는데, 같은 날 가함을 알렸다. 큰 것은 계양군(桂陽軍)의 월장전(月樁錢) 만 이천 민(緡)을 줄이고, 백성의 세금을 줄이고 은의 값을 꺾으니 백성들이 그것을 돌에 새겨 기념하였다. 호부(戶部)에서 유향(乳香)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면제하니 여러 곳도 아울러 면할 수 있었으니, 지금은 다시 부과되지 않기에 이르렀다. 형악묘(衡嶽廟)에 불이나자 공이 말하기를 “묘(廟)에 불이 난 것은 하늘이 참으로 그것이 법도가 아님을 싫어한 것이니 청컨대 집을 다시 짓지 말고 단을 쌓아 망제(望祭)를 지내고 예전(禮典)을 따라 쓰고 재력(財力)을 살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답을 받지 못하였다. 차 도적이 일어났는데, 장수는 법령을 잃어서 해직되고 공이 그 일을 대신하였다. 이 때 강서(江西) 병사가 이미 모여니, 도적의 세력이 군색해져서 다시 남쪽으로 달아날 것을 꾀하였다. 공이 재빨리 흩어져 달아난 것을 거두어서 요해(要害)를 지키니 도적들이 달아날 수가 없었으므로 강서(江西)가 쫒아서 생포할 수 있었다. 간민(姦民)들이 그것을 모방하여 무리를 모아서 도적에 응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토호(土豪)를 모아서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아서 목베어버리니 나머지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일이 평정되자 조정에 청하여 해마다 병졸을 나누어서 차가 나는 곳에 수자리를 살게 하니 도적이 더욱 쇠하여졌다. 또 말하기를 “차상(茶商)은 관에서 공문을 사서 다시 원호(園戶)에서 차를 매매하니, 염상(鹽商)이 공문을 사서 곧 관에서 소금을 받는 것은 종류가 다릅니다. 지금 그 값이 같으니, 차상만이 홀로 곤란하여 사사로이 매매하는 자가 많습니다. 차상이 문서를 사는 액수가 넉넉하지 않아 백성이 어지러움을 당하여 그것이 심하면 다투어 빼앗고 공격하고 위협하여 도적 때가 되기도 하니, 전날의 일 역시 증험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그 값을 줄여서 일을 편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사가 출납을 아껴 문서를 작게 쪼개어 하나를 여섯으로 만드니, 실은 줄이는 것을 없으면서 비용을 번잡하게 하여 무겁게 하니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졌다.
다시 불러들이니, 임금을 뵙고 먼저 군정(軍政)의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악저(鄂渚)에 소속된 대군은 삼천이고, 체포된 차 도둑은 수백인데 반이 넘게 군사를 잃었습니다. 작은 도적도 이러한데 큰 적은 어떻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그 이유를 찾아보았는데, 대저 장수는 사람을 얻지 못하고, 많은 사람을 부리는데 수단이 없으며, 관에서 주는 양식은 너무 적으니 또 남의 재물을 약탈합니다. 노성(老成)하고 전투에 익숙한 병사는 하나같이 피로하여 도태되었으니, 그 강장한 자제를 이끌어 보내고, 군중에는 오직 억지로 얽매어 있는 사람들뿐이고, 게다가 모두 전투와 진법에 익숙하지 않아 쓸 수가 없습니다. 대우하는 것은 또 고르지 않아서 늘고 오래된 병졸들로 하여금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가슴아파하게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또 스스로 대접받은 것이 포로만큼도 후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진실로 빨리 도모하시어 이 여러 가지를 돌이키면 군성(軍聲)이 진작되고 국세가 커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다시 차법(茶法)의 폐단을 힘껏 펼치니, 염수(鹽數)가 조금 늘어날 수 있었으나 공의 생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부가 사농소경(司農少卿)을 모방할 것을 아뢰니 임금은 스스로 공을 등용하여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경사(京師)는 한달에 쓰는 쌀이 14만 5천석이었는데, 성의 창고에 쌓인 것은 두 달 치를 넘지 않았다. 공이 남상의 국고금을 올려서 성의 창고에 보태어 한해에 사들이는 쌀의 수를 충족시킬 것을 청하고, 또 홍(洪)․길(吉)․담(潭)․형(衡)의 군식(軍食)의 여유분과 악(鄂)의 상선을 사들이고, 아울러 강서(江西)․호남(湖南)에 쌓여있는 쌀을 취하여 삼총령(三總領)으로부터 수송하여 중도(中都)에 이르러서 항상 이백만 석에 이르게 하여 한해의 준비를 할 것을 청하였다. 오래되어도 시행되지 않자 공은 그 직책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고, 또 재상에게 아뢰기를 “지금 창고와 남상고(南上庫)에 풍부하게 쌓여있는 것은 모두 동쪽에 잇는 것을 서쪽으로 옮겨서 임금의 귀를 현혹시키니 조정과 호부(戶部)로 하여금 스스로 피차를 구분하게 하고, 임금에게 고하여 빌리고 찾아서 돌려주는 것도 마찬가지로 시도(市道)가 있습니다. 원컨대 그것을 혁파하여 바로잡으소서. 모든 정사를 각각 맡은 곳에 맡기고, 위임하여 그 이루어진 것을 규명하면 명목이 바로잡히고 실질이 올라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안(臨安)에서 수령을 고르는데 공은 의논 중에 있었다. 집정(執政)이 혹 공을 사람들에게 자세한 상황 없이 이야기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로 이러한 사람을 얻기를 바란다”고 하고는 권임안부사(權臨安府事)를 겸하게 하였다. 수(守)는 이어서 그 사람을 얻지 못하고 날마다 권문(權門)에 달려가 약속을 받들 뿐이고 백성들의 일은 모두 아전들의 손에 맡겨두어 아전들이 세력을 과시하여 간사해질 수 있었다. 공은 이미 일을 알고 친히 문서를 조사하여 몸소 결정을 내려 사람들이 청하고 부탁하는데 하나도 들은 것이 없게 하였다. 부(府)는 원래 환자(宦者)를 승수공사(承受公事)로 삼고, 수(守)가 이르러서 예에 따라 그것을 아뢰었다. 공이 가지 않자 승수가 노하여, 임금의 뜻은 일부러 시간을 끌어 다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공이 정부에 아뢰어 승수가 쓸모없다는 것을 아뢰고 그것을 파할 것을 청하였다. 저자에 불이 나서 거당(巨璫)의 사는 집 가까이까지 이르니, 거당이 불을 막는 데 전심하지 않은 것에 노하여 두 병졸을 보내어 공의 거처에서 시끄럽게 하였다. 공이 그 상황을 아뢰고 두 병졸을 대리옥(大理獄)에게 내려 보냈다. 대리(大理)는 관망하며 도리어 관청의 이졸(吏卒)을 체포하였다. 공은 곧 집안에서 스스로 신문하여 두 병졸을 장을 치고 관청의 이졸은 풀어주고 묻지 않았다. 승려가 호귀(豪貴)에 의지하여 사우(私宇)를 세워 수백간이 되었는데, 마침 간사하고 추접스러운 일로 죄에 저촉된 자가 있었는데 끝까지 법전(法典)으로 몰입하여 승려를 쫓아 그가 본래 맡고 있던 일로 돌려보냈다. 부(府)에 석 달을 있었는데, 마침내 임금의 총애를 받는 간사한 사람으로 인하여 불편해져서 재빨리 벗어나 물러났으나 백성들은 지금까지 그를 일컫고 있다.
공이 조정에서 일이 있으면 항상 말하니 집정은 그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전대(轉對)하였는데, 또 말하기를 “역은 구(九)가 오(五)에 거하고 육(六)이 이(二)에 거하는 것을 마땅한 자리이나 어려운 일이 많다고 하고, 육(六)이 오(五)에 거하고, 구(九)가 이(二)에 거하는 것은 마땅한 자리가 아니나 좋은 일이 많다고 하니, 대개 임금은 강건함을 체(體)로 삼아 허한 가운데 작용하고, 신하는 유순함을 체로 삼아 강한 가운데 작용을 합니다. 임금이 진실로 허한 가운데 그 강건함을 행하고, 신하가 지실로 강한 가운데 그 유순함을 지키면 상하가 교류하여 그 뜻이 같아질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허중지도를 얻어서 강건한 덕을 행하는데, 조정의 신하들은 그 강중(剛中)으로 유순함을 지켜 폐하를 섬기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상(象)을 보시고 사(詞)를 완미하시어 강중(剛中)의 신하를 구하시고, 부드럽게 아첨하는 선비를 멀리하시어 경의(經義)에 응하시고 다스림의 공을 일으키소서”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집정이 더욱 좋아하지 않아 공의 차에 관한 의견을 막아서 시행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은 더욱 편안하게 일을 논하였고, 오래되어 물러나기를 구하여 다시 강남서로전운부사(江南西路轉運副使)에 제수되었다.
임금에게 나아가 하직을 고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멀리 보낼 수가 없다”고 하고는 지무주(知婺州)로 바꾸고 비각수찬(秘閣修撰)에 승진시켰다. 임금의 뜻은 공을 머무르게 하고자 하였으나 공은 군정이 피폐해지고 군비(軍備)가 약하면 필경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간절하게 말하였으나 임금의 뜻에 맞지 않으니, 이에 군(郡)으로 갔다. 수개월을 머무르니 군이 크게 다스려졌다. 마침 소 힘줄 오천 근을 산다는 조칙이 있었는데, 공이 소 한 마리의 힘줄은 겨우 네 냥이니 지금 반드시 이것을 구하려면 소 이만 마리를 잡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깨닫고는 앞의 조칙을 거두어들이고 또 공이 전에 한 말을 생각하고는 불러서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삼았다. 공이 또 임금에게 말하기를 “백성은 가난하고 도둑은 많으니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원컨대 중외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각각 맡고 있는 곳의 불필요한 경비를 기록하여 줄일 수 있는 것을 알리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금이 그것을 좋게 여겼으나 역시 시행되지는 않았다.
이부(吏部)에 있을 이사(吏史)와 약속하기를, 선비를 임용하고 물러나게 하는데, 선비가 자신의 자질이나 경력과 같은 것을 진술하면 옮기거나 품계를 올릴 명령을 그 이름 아래에다 적어 그 가부를 굳게 정하여 시행하고, 이미 행하였는데 빠트리고 마땅하지 않은 것이 있는 자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관리는 이로써 마음대로 그 간사함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수저(秀邸)가 관객(館客)으로 주의 관리에 임명되었는데, 공이 그 사람은 시험을 보지 않았고, 또 대기하고 있는 다음 사람과 충돌한다고 말하며, 다시 원외(員外)로 받아서 놓아두고 공사(公事)에 서명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집정이 건의는 사사로운 것을 이루려고 하면서도 이부의 공문을 칭탁하였는데, 공은 이 일은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해도 관련되어 있는 것은 크므로 궁구하여 다스리도록 청하였다. 임금은 가납(嘉納)하였다. 임금이 친히 죄수들을 옮겨 적고 공과 지합문사(知閤門事) 장윤(張掄)에게 명하여 그 일을 배열된 차례대로 알리게 하였다. 장윤은 스스로 관직을 승선사(承宣使)로 하여 공의 오른쪽에 이름을 쓰려고 하였다. 공은 옳지 않다고 하여 그것을 승상에게 아뢰고 또한 장윤의 오른쪽에 썼다. 공이 아뢰기를 “신은 실로 승선사의 차례는 권시랑(權侍郞)의 위라고 알고 있고, 다만 문서를 맡은 하급관리는 합문부시랑(閤門副侍郞)으로써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지(聖旨)에 의해 신은 실로 장윤보다 앞서게 되었으니 오직 폐하께서 판단하여 선택하시어 다행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장윤을 정직하지 않다고 하여 그를 파면하였다.
공은 임금이 항상 혼자서 기무(機務)를 쥐고 신하들은 눈앞의 안일만을 꾀하며 구차하게 면하는 것을 보고 역의 상(象)을 살펴 임금에게 말하기를 “건(乾)은 머리이고, 곤(坤)은 배이며 여섯 괘는 각각 그 일을 형상하고 있으므로, 성현의 가르침은 모두 임금을 원수(元首)가 되고 신하는 복심(腹心)․고굉(股肱)․이목(耳目)․후설(喉舌)이니 각각 주로 하는 바가 있습니다. 지금 임금은 애쓰고 신하는 한가한 것은 다스림의 체(體)가 아닙니다. 또 명령은 내리고 사람을 쓰는 것이 혹 좋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곧 과실은 위로 돌아가고 정사는 아래에서 어지러워집니다. 원컨대 역 괘의 상을 보시어 건(乾)의 강건함을 체로 하시어 복심(腹心)․고굉(股肱)․이목(耳目)․후설(喉舌)의 신하로 하여금 각각 그 직책을 맡게 하시고, 또 근신(近臣)의 문하에서 자적하는 신하가 있는지를 살피시어 그것을 엄하게 금하시며, 더하여 공도(公道)로 사람을 등용하고 명예와 절조로 취사(取士)하시면 사풍(士風)이 진작되고 인재가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일시에 나쁜 일들이 일어났는데, 위병(衛兵)이 사원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약탈하는데 조정이 잘 평정하지 못하고, 언사관이 탄핵하여 직책을 물러날 수밖에 없는데도 풍문을 따르는 자는 경형(黥刑)을 받고, 군중(軍中)에는 나졸(邏卒)을 모아서 군포(軍舖)를 열서 주장(主將)을 흔드는 등의 일들이었으니 모두가 그것을 극언하였다. 또 감사(監司)를 대군수와 같이 선발하는데 마땅히 시종(侍從)을 도당(都堂)에 모이게 하여 공이 아는 바를 천거하면 재상이 나은 자를 뽑아서 알려야 한다고 건의하였는데 모두가 절실한 다스림의 체였다. 또 주어야 하는 구휼미는 모두 창향사(倉鄕社)에 두어 보관하다가 흉년에 다시 그것을 주어 일하기에 편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시행되지 못하고 다만 형주감목(衡州監牧)만이 군(軍)이 돌아가면서 쉬는 것을 공의 말과 같이 그만두었다.
또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지난날 내시가 성하여 결국 정강(靖康) 명수(明受)의 변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다시 성해지니 그를 억제하시어 점점 자라나지 못하게 하소서. 관에 잠실(蠶室)을 두고 자식을 바치는 자의 수를 제한하십시오. 관직이 높은 자가 밖에서 보충하면 궁궐의 문에서 바깥을 금하고 경계하어 그가 참여할 수 없게 하십시오. 사대부와 병장관들이 그들과 교통하는 것을 엄하게 금하시면 상하가 모두 편안하고 화변(禍變)이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정강 명수의 말을 듣고 오랫동안 찡그리고 말하기를 “어려서도 이것을 들었다”고 하고는 상소를 받아서 소매 속에 넣었다. 최후에 변방에 대한 방비를 미리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극언하였는데, 만약 회수(淮水)를 지키고자 한다면 초주(楚州)․우이(盱眙)․소신(昭信)․호량(濠粱)․와구(渦口)․화엽(花靨)․정양(正陽)․광주(光州)는 지키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양자강을 지키려고 한다면 고우(高郵)․육합(六合)․와량(瓦粱)․유수(濡須)․소호(巢湖)․북협(北峽)역시 요지이다. 그 형세의 완급과 병력의 많고 적음, 계책의 날카롭고 둔함이 모두 차례대로 펼쳐지는 것이 손바닥의 손가락과 같았다. 또 응성(應城)이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므로 마땅히 한 군(軍)을 주둔시켜 양양(襄陽)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논하였다. 형남(荊南)의 병사가 양양에 주둔하면 마땅히 그 가속을 옮겨 강남을 경영하여 오랑캐가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병으로 사관(祠官)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대면하여 더욱 힘껏 청하니 이에 집영전수찬(集英殿修撰)․지영국부(知寧國府)를 제수하였다. 며칠 만에 태평주(太平州)로 바뀌고 상방(尙方)의 진귀한 약제를 하사하여 보냈다. 당도(當塗)는 중요한 곳으로 대개 一面을 맡고 있었다. 공이 이로 인하여 적을 막는 제방을 맡아볼 것을 자청하여 중요한 일이 치밀하고 서툰것이 바로 전달될 수 있었으니 임금이 모두 그것을 따랐다. 도착하고 나서 상류의 방비를 힘써 도모하여, 횡강(橫江) 수군 천명을 모집하여 유수(濡須)․동관(東關)․채석(采石)의 성원(聲援)을 삼을 것을 청하였다. 채석의 수군은 군사는 많은데 군사가 적어 마땅히 보졸(步卒)의 반을 수전용으로 삼아 배와 육지 모두에서 싸울 수 있게 하고 소호(巢湖)를 왕래하며 반드시 유수를 지킬 계책을 세웠다. 그러면 모든 강에 연한 나루는 모두 남안(南岸)에 닿아 있게 해야 한다. 근래에 화주(和州)는 영업을 하기에 편하였는데, 번번이 항구를 관통하여 지나서 배를 들였는데, 수미가 모두 양자강에 속해있어 이것이 천험(天險)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되었다. 변방의 백성들은 오랑캐의 말을 훔치고 혹은 그 도적이 와서 귀순하는 자도 있었는데, 유사가 불문에 붙이고, 심하게는 상을 주어 그것을 권하기도 하니 모두가 불편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어 명령을 내려 항구를 막고 그 또한 두루 시행되었다.
일 년 여를 지내고 나이가 69세가 되었는데, 곧 임금에게 글을 올려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떠나는 것을 애석해하였는데, 세 번 청하니 이에 박문각대제로 치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두 해를 넘기고 임금이 호남(湖南) 병역(兵役)의 여파로 공사가 곤란하고 피폐하고 상하가 의심하며 두려워하여, 그것을 진안(鎭安)하려고 생각하였는데, 공이 중후하여 의지할 만 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공을 현모각대제지담주(顯謨閣待制知潭州)․형호남로안무사(荊湖南路安撫使)로 기용하였다. 사사로운 예를 갖추는 글에는 안무사란 관함(官銜)을 쓰지 않았는데 家諱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공은 다시 출사할 뜻이 전혀 없어 거듭 사양했으나 하지 못하고 억지로 나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근심할 일이 없어지고 의심스러운 일들이 풀려서 일체의 기상이 성시(盛時)와 같아졌다. 세주법(稅酒法)을 회복하니 사람들이 편하게 여겼다. 이전에 관에서 백성의 물건을 사면서 값을 주지 않은 것은 모두 갚아주었다. 한말의 술과 천전(千錢)이라도 함부로 쓰지 않았고, 친구와 빈객을 조금이라도 두루 도왔는데 대개 사전(私錢)으로 하였다. 주의 집이 불이 나서 모두 수리하였는데 한 사람도 조절하지 않고 그 이전대로 복구하였다. 여러 현(縣)에는 넉넉한 조세가 있었는데, 주(州)가 그것을 다 가져가니 현(縣)은 할 수가 없었다. 공이 그 반을 돌려주면 말하기를 “해가 기근이 들어 용도가 부족하여 그것을 조금 썼는데, 모두 돌려주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날이 가물어 구휼미를 나누어주기를 권하고, 조세 11만을 감해주고, 상평미(常平米) 이만을 공급하고, 수만의 쌀을 팔아서 백성이 유랑하거나 죽지 않았다. 비호군(飛虎軍)이 새로 세워졌는데 어떤 사람은 편하지 않게 여겼다. 공이 말하기를 “장사(長沙) 한 도회는 호(湖)․령(嶺)이 막고 있어 오랑캐의 약탈을 진압하였는데, 20년간 큰 도적이 세 번 일어났으니 어찌 한 군(軍)을 없앨 수 있겠는가? 또 이미 현 관청의 민전(緡錢) 42만을 썼고 백성의 재력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것을 부릴 뿐이다”라고 하니 의심하는 말들이 없어졌다. 침(郴)의 백성들이 조세를 내는데 아전이 부세(賦稅)를 더한 것이 몇 배가 되니, 그것을 제재하기를 힘써 청하여 셋 중 하나를 없애니 백성들이 조금 넉넉해졌다. 전에 두 주(州)에 있을 때 거듭 귀양보내는 법의 폐단을 말하였는데, 무릇 귀양 보내야 하는 자는 다만 가역류법(加役流法)만을 적용시켜, 칼을 차고 지내기를 3년을 하면 면해주고, 묵형(墨刑)을 없애어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도록 하며, 멀리 유배를 가다가 도망가고 죄인을 차례로 보내는 것을 면하고 지극한 은혜를 넓히고 화기(和氣)를 부르라고 청하였다. 이에 이르러 장사에 한해에 유배되는 자를 헤아려보니 천이백오십 명이었으므로 다시 그 설을 되풀이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일을 내려 보냈는데, 의논하는 자들은 경시하여 혹은 우원하다고 웃기도 하여 바굴 수가 없었다.
해를 채우지 않고 다시 돌아가기를 고하여 부문각직학사(敷文閣直學士)로 치사하였다. 아침에 명을 받고 저녁에 배에 올라 형양(衡陽)의 본래 살던 야당(野塘) 위에서 사직하고 노년을 한가로이 지냈다. 순희 10년 11월 단일(旦日)에 훙(薨)하였으니 향년 73세이다.
공은 15세에 재앙을 피해 남쪽으로 옮겨왔는데, 가난하여 양생할 수가 없었고, 학문에 힘을 쏟을 수 없었다. 나이 30에 비로소 역을 배웠다. 군의 송사를 두 번 국문하였는데, 물어야 할 것을 수십 일을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주야로 역리(易理)를 연구하니, 터득한 것이 있는 듯하니, 드디어 즐기고 완미하기를 평생토록 하였다. 그가 조정에서 하는 말과 조치한 일들은 여기에 들어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불교와 노자의 사설(邪說)을 싫어하여 임안(臨按)에 있을 때 영은사주(靈隱寺主)를 뽑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로 인하여 다시 임금에게 말하기를 “천지의 변화와 만물의 종시(終始), 군신․부자․부부의 도와 성명(性命)의 이치, 사생(死生)의 이유, 귀신의 정상(情狀)은 역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데, 어찌 그것을 다른데서 구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그 때는 승려가 후원에서 임금이 불러서 만나기도 하였는데, 다시 그 잘못에 대해 상소를 올려 선왕의 도를 높이고, 인륜의 근본을 바르게 하며, 빈둥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점차 없애어 농상(農桑)으로 복귀하기를 청하였다. 그가 당도(當塗)에 있을 때 거듭 금하는 법을 행하고, 승려가 속이고 꾀는 행위를 그치게 하며, 가르침을 내어 백성을 깨우쳤는데, 말이 끈까지 정성스러움을 다하였다. 이때 병이 위독하여져서 시(詩) 일장(一章)을 제하여 아들에게 보여주고, 목욕하고 의건(衣巾)을 바로하고 서거하였다. 사람들은 이로써 공이 역을 헛되이 말씀하신 것뿐이 아님을 더욱 더 알게 되었다.
공은 장중(莊重)하고 간결하며 담백하고, 의젓하고 단정하게 지키는 것이 있었고, 태평스레 욕심이 없었고, 기쁨과 노여움이 안색에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친하거나 멀게 대할 수 없었다. 또 마음이 온화하고 고르고 곧고, 청렴하여 명예를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절개가 있으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고, 일에 대응하여 마음을 지켰으며, 모든 것에 후함을 주로 하였다. 평생 권행(權倖)에 절개를 잃지 않았으나, 교만함으로 높아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육원(六院)에 있을 때 연(淵)․적(覿)이 총애가 바야흐로 성하여 같이 사는 사람들이 날마다 그 문으로 달려갔는데, 공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이끌고 떠났다. 늦게 종열(從列)에 올랐는데, 적(覿)은 이미 사상(使相)의 위치에 올라 있었으나 끝내 가서 만나지 않았다. 그 한 두 무리가 공무에 관계되는 일이 미칠 때마다 번번이 서로 어긋났는데, 또 임금을 위하여 그 간사함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 있었다. 그 무리가 서로 모여서 공을 헐뜯었고, 태위(太尉)가 다만 이모(李某)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그 말을 반복하면서 말하기를 “실로 그가 관직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공이 생각이 깊다는 것을 알고, 그 순박하고 정직함은 여러 번 칭찬하였기 때문에 소인들이 그 계책을 실행할 수 없었다. 공이 중외(中外)와 크고 작은 일에 대하여 알고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가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은 변비(邊備)․군제(郡制)․부법(賦法)․녹령(祿令)․차염(茶鹽)․둔전(屯田)․경청제전(經總制錢)․간태(揀汰)․귀정(歸正)․배법(配法) 등이었다. 대개 어렸을 때부터 날마다 몸소 병난을 겪었고, 변경의 분쟁을 반복하여 거쳤으며, 주현(州縣)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썼으며, 사수(使守)에 올랐고, 내관을 살피는 것을 실천하였으니, 크고 작은 직무를 모두 몸소 이행하고 마음으로 깨우쳤으니, 다른 사람들이 경망스레 듣고 대충 말하며 핑계를 대며 시험삼아 해보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 그 따르고 위반함과 거스르고 합치되는 것이 비록 범상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견해를 종신토록 바꾸지 않음을 유지하고, 간절하게 말한 것은 43세에 이르렀다. 그 재주는 두루 통하고, 그 식견은 고원하였으며, 임금이 좋아하는 것에 영합하지 않았고, 당시의 칭찬을 속여서 받지 않았으며, 서생(書生)의 가벼움과 속리(俗吏)의 누추함이 없었다. 그가 온축한 것이 널리 드러나고 궁구될 수 있으면 이 세상은 거의 태평성대에 가까울 것이다.
공은 방(龐)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일찍 돌아갔다. 한(韓)씨로 계실하였는데 현행(賢行)이 있고, 부부가 서로 공경함이 빈객과 같았으니, 모두 영인(令人)에 증직되었다. 아들 둘이 있는데, 의부(毅夫)는 승무랑으로 공보다 3년 뒤에 졸하였다. 정부(正夫)는 선의랑(宣義郞)․광남서로제거상평사간판공사(廣南西路提擧常平司幹辦公事)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조산랑(朝散郞)․제거형호남로상평차염공사(提擧荊湖南路常平茶鹽公事) 임천(臨川) 오일(吳鎰)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감단(邯鄲) 유동(劉仝)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여덟인데, 대유(大有)와 대래(大來)는 모두 수직랑(修職郞)이다. 대겸(大謙)은 적공랑이고, 대용(大用)․대림(大臨)․대정(大鼎)․대관(大觀)․대내(大鼐)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손녀 둘은 아직 어리다.
공이 집에 거처할 때는 상도(常度)가 있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나 또한 엄하고 사납지 않았고, 간략하나 곤궁하지는 않았고, 풍부하나 사치하지는 않았으니 종신토록 어긋남이 없었다. 관직에 있을 때는 검소하고 법도가 있어 관촉(官燭)을 중문(中門)으로 들이지 않았으며, 집안사람이 공가(公家)에서 공급한 물건들을 쓰지 않았다. 처음에 새로운 장막을 받으면 반드시 거두어서 보관하였다가 보존하여 후임을 맞았다. 떠나는 날에 한 물건도 사사로이 하지 않아 집안에는 지금까지 헤어진 휘장 하도 없다. 대개 음식을 보낸 것이 사사로운 것이어서 법도에 맞지 않게 들어왔으면 공탕(公帑)에 쌓아놓았고, 공급된 것이 공적으로 법에 맞지 않는 용도이면, 나머지는 두었다가 보내어 문 안에서 그것을 없애어 거리낌 없이 청소(淸素)하였다. 바탕이 독실하고 풍모가 의로워서 일찍이 장공(章貢)과 이섭(李燮)이 안륙(安陸)에서 죽었는데, 딸이 민간에 버려져 있었다. 공이 대가를 치르고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한영인(韓令人)이 그를 자신의 딸처럼 사랑하여 사족에게 시집보냈다. 처음 벼슬할 때 역시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관작(官爵)과 살고 있는 마을을 문서로 만들어 상관에게 보낸 적이 있는데, 마음이 두려워 편안하지 못하였는데, 이로부터 구하거나 청하지 않았다. 도둑을 잡아 왔다가다 한 적이 있었는데, 상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것을 내버려두고 고하지 않았다. 자질을 따라 나아가고 나서 말하기를 “나는 외임(外任)에 노련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나이 52세에 경직(京職)으로 바뀌었는데, 이로부터 나아가서 당시에 필요한 인재가 되었다. 그러나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잊은 적이 없어 처음에는 집안을 이끌고 중도(中都)에 들어가지 않았고 또 경기의 고을에 이르지 않았다. 50년 벼슬을 하니 위로는 임금이 공경하고 믿었으며 아래로는 사대부들이 존중하고 사모하여 조금이라도 비방하거나 헤치지 않았다. 중외에 출입한 것이 여러 번인데, 들어온 것은 모두 특별히 부른 것이고, 나간 것은 모두 힘껏 청한 것이다. 벼슬을 그만둘 때가 오자 급히 돌아갔으나 부득이하여 억지로 기용되었으나 기용하면 또 끝내 돌아가서 끝내 본래 품은 뜻을 가지고 숨졌다. 나아가고 처하는 뜻을 온전히 다하였다.
이해 윤 11월 11일에 형주(衡州) 화광사(花光寺)의 산 2리 뒤에 한영인과 같은 무덤에 장사지냈다. 장사지내는 날이 닥쳐도 알지 못하였는데, 오일(吳鎰)이 공의 행실을 대략 이와같이 기록하였다. 10년 뒤에 정부(正夫)가 그것을 가지고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공의 명을 쓰기에 부족하지만 공의 명성과 인망을 익히 알고 있는 것이 오래고, 중간에 한 두 번 편지를 주고받아 공이 나에게 아름답고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받았다. 이제 또 오일의 글과 공이 평생 의논하고 상주한 글을 읽고, 그 행신이 법도를 실천하였으며 하나의 일도 이치에 맞지 않음이 없고, 일을 논한 것이 명주실과 삼실․곡식과 같아 한 마디도 용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며, 그 충후하고 순수하고 독실한 기와 또 풍성하게 행사와 말의 밖으로 넘쳐나는 것을 보고는, 글을 그만두고 세 번 탄식하고 송연히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그 일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을 쓰고 이어서 명을 짓는다. 명에 이르기를
“대역의 온축은 미묘함이 다함이 없네. 누가 그 밝음을 엿보고 그 안을 헤아리겠는가? 훌륭한 저 이공은 마음은 잠기고 몸은 이르렀네. 새롭게 바뀜에 이르러 숨음과 드러남이 일치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아뢰고, 물러나서 은밀하게 간하였네. 득실을 헤아려 알고 시귀(蓍龜)를 빌지 않았네. 하늘과 백성을 걱정하여 임금과 나라에 충성하였네. 예전에 평(評)이 있으니, ‘서상길사(庶常吉士)’라고 하였네. 어찌 백년이 않되어 그 베풂을 다 궁구하겠는가? 질장구를 두드리며 노래하고, 기운해가 걸려있음을 길게 말하였네. 형산(衡山)의 양지는 그 고향은 아니니, 무덤에 명(銘)을 하지 않으면 누가 먼 훗날까지 알려주겠는가?
公諱椿, 字壽翁, 洺州永年縣人〔一〕. 曾祖安․祖泰皆不仕. 父升進士起家, 爲吏以廉正稱. 累官朝奉郞, 贈太中大夫. 母楊氏․趙氏․張氏, 皆贈碩人.
靖康之難, 汴都不守, 太中公以衛父見傷, 父子偕卒. 公年尙少, 藁殯佛屋, 深竁而詳識之. 奉母南走湖嶺間, 備嘗艱窘而竭力以養, 母子相慈孝, 人不知其趙出也. 用遺澤捕官, 調潭州衡山尉. 擿姦發伏, 人不能欺. 決事問理如何, 不爲勢奪. 再調桂陽監司理參軍, 盜發臨武, 將尉縛六十餘人以獻. 公辦理之, 才六人抵死, 它所活亦甚衆. 以數爭獄事失守意, 求去不獲. 守悟, 乃更相知. 建復臨武縣, 盜以不作者二十年. 徙衡州軍事判官, 守與部使者交惡, 公諌止之, 不聽. 後闔郡坐劾去, 公獨免. 邵民有告兩人爲盜者, 郡得其一, 將寘之法, 而囚家訴寃. 公被檄鞫之, 使召告者, 則無其人. 問其同徒, 則已斃於路矣. 閱故牘, 則斃者是夕乃在他州, 有左驗, 囚乃得釋. 徙寧國軍節度推官, 豪民執僞券取陳氏田, 陳父子斃于獄, 妻又將斃矣. 公辦其僞, 奪田歸陳氏. 虜亮將渝平, 亟白守將修城壁․葺軍械․料民兵甚整, 人恃以安.
張忠獻公節制兩淮軍馬, 辟準備差遣. 及拜宣憮都督, 皆以自隨. 蓋公始見胡文定公, 退與其諸子遊, 從容言曰 : ‘椿願天下之人無不唯是之求耳.’ 胡公聞而異之. 其子仁仲後見公所論富川六事, 亦謂有經濟才. 張公知之, 故取以爲屬. 諉以經晝淮甸事, 公爲奔走兩路, 綏集流民, 布置屯兵, 察廬․壽軍情, 相視山水寨險要, 凡四五反, 詳審精密, 所助爲多. 它如謂督府當鎭無爲, 請制戰車以易拒馬之屬, 未及行者尙衆. 至於事有不可, 則固未嘗爲苟同也. 宣司乾事, 議請第賞官屬. 公曰 : ‘今未有功而遽求賞, 已非所宜. 且先將佐則無以勸士卒, 溥及之則無以待有功, 皆不便.’ 張公然之, 爲止不上. 後諸將有以北討之議聞者, 事下督府, 將從之. 公在外, 亟奏記張公曰 : ‘復讎討賊, 天下之大義也. 然必正名定分․養威觀釁而後可圖. 今議不出於督府而出於諸將, 則已爲輿尸之凶矣. 況藩蘺不固, 儲備不豐, 將多而非才, 兵弱而未練, 節制未尤, 議論不定, 雖得其地, 不能守也.’ 書未入而師已行, 則又言曰 : ‘大將勇而無謀, 願授成算, 俾進退可觀, 毋損威重.’ 旣而果無功, 張公悔之. 一日, 喟然歎實材之難得, 公徐對曰 : ‘十室之邑, 必有忠信, 天下之大, 豈可厚誣? 誠欲致之, 唯不惡逆耳而甘遜志, 則庶乎其肯來矣.’ 張公復拜右相, 公知事不可爲. 勸之去. 明年春又出視師, 公曰 : ‘小人之黨已勝而公無故去廟堂, 此必危.’ 復申前議甚苦. 張公心是之, 而自以宗臣任天下之重, 不忍決去計也. 未幾果罷.
公出幕府, 得監登聞鼓院. 在職數月, 有所不樂, 請通判廉州以歸. 未上, 召對, 首請復廣西州縣運鹽而罷所稅․和糴․招糴之擾, 二請無汰去軍中百戰之士以壯軍勢․寬郡縣, 三請以懇田爲課最, 而更賦法․改祿令, 多以穀帛, 少以錢, 皆當上意.
除知鄂州, 再對, 請令墾荒田者三分其租, 三年乃增其一, 三增而畢輸. 請罷經總制錢, 悉爲上供, 一其帳目以省吏姦. 上可其墾田說. 至鄂行之, 復戶數千, 曠土大辟. 鄂地重而守權輕, 賦薄而用廣. 公交際以誠, 調度從約, 未幾, 遽振而贏. 嚴火備․禁姦盜, 皆有方略. 軍民之爭, 一決以法, 主將悅服.
移廣南西路提點刑獄公事. 廣西舊遊, 習其民情之欲惡, 有所更革, 不戒而孚. 官吏有罪, 免之而已, 無所窮治. 未竟之獄, 一以輕平, 所縱釋數十百人. 盛夏按行, 慮問諱悉. 退閱文書, 一夕千紙. 奏罷發運司所復昭州金坑, 請禁仕海南者無得市土物, 事皆施行.
移荊湖南路轉運判官, 俾入奏事. 行及近甸, 時宰忌之, 促便道之部. 適歲大侵, 官配民備賑糶〔二〕, 民爭糴, 米踴貴, 復抑米價, 商船不來. 公至, 損配數․除米估, 人用不饑. 奏請蠲歲糴代發二分米, 出緡錢權楮幣, 和糴米宜用市直, 毋使太賤傷民, 人以爲便. 自爲少吏時, 已病監司行部從吏卒擾州縣. 至是當出, 輒前戒吏具州縣所當問事目以行, 而罷諸常從者. 所至州取吏卒使令, 凡以例致饋一不受. 自是人多效其所爲, 言事者亦請下諸道以爲法.
召爲吏部員外郞, 復論廣西鹽法. 上是其說, 俾條施行之目以上, 遂改法焉. 其後二十年間, 法雖屢變, 而所苗․和糴․招糴之擾竟罷, 民賴以安. 除樞密院檢詳諸房文字〔三〕, 小吏持南丹莫氏表來, 請於宜州市馬, 因簽書張說以聞. 公語(說 : ‘邕遠宜近, 人孰不知? 其前日故遷其塗, 豈無意哉? 况今莫氏方橫, 乃欲爲之除道而擅以互市之饒, 誤矣. 小吏妄作, 將啓邊釁, 請論如法.’ 說又議諸郡招軍, 宜立法以課殿最. 公語之曰 : ‘贛․吉․建․劍等州民衆俗悍, 雖多募不難致. 淮․漢․荊․湖凋弊未復, 若限以額, 恐有抑粹之擾.’ 積二事忤說, 說怒, 語人曰 : ‘吾乃無一可耶? ’ 公聞之求去, 上問知之, 亟今慰愉安職. 未幾說免, 乃遷公左司員外郞, 密裨國論, 深抑吏姦, 號爲稱職. 嘗言: ‘三衙御前之兵有用, 當益 ; 諸州廂禁兵無用, 當鎖. 鎖之之術, 死亡勿捕, 二十年之後, 無復無用之兵矣. 它時寧壹, 以御前兵分屯諸州可也.’ 始, 公在督府, 嘗建軍民雜耕之策. 旣而詳其利病, 乃欲盡捐以予諸軍, 使歲分半卒以耕而益其食. 至是亦爲上言甚悉.
尋復請外, 除直龍圖․知隆興․江南西路安撫. 避祖諱, 改荊湖南路轉運副使. 至未一月, 移都大提擧四川茶馬, 俄復歸故官. 建請十三事, 同日報可. 大者減桂陽軍月椿錢歲萬二千緡, 而損民稅所銀之直, 民刻石紀之. 免戶部配鬻乳香, 諸路倂得免, 訖今不復配. 衡嶽廟火, 公言: ‘廟洊火, 天寔厭其非制, 請毋復屋而築壇以望, 用遵禮典, 省財力.’ 不報. 茶寇作, 帥以失律免, 公攝其事. 時江西兵已集, 寇勢窘, 謀復南走. 公亟收散亡分守要害, 寇不能越, 故江西得蹙而擒之. 姦民有規聚徒應賊者, 公募士豪捕其魁桀誅之, 餘悉散走. 事平, 請於朝, 歲分卒成産茶處, 盜以益衰. 又言: ‘荼商買券於官而復市茶於園戶, 與鹽商買券而卽受鹽於官者殊科. 今一其賈, 是以茶商獨困而私販多, 歲額不敷而民被擾, 甚則鬪敓攻劫爲羣盜, 前日之事亦可驗矣. 請損其直以便事.’ 而有司吝出納, 乃析小券, 以一爲六, 實無所損而重以煩費, 人益病焉.
召還, 見上首論軍政之弊曰 : ‘屬者鄂渚大軍三千, 捕茶寇數百, 亡失過半. 小寇尙爾, 如大敵何? 臣嘗求其故矣, 大抵將不得人, 馭衆無術, 廩食旣薄, 又苦侵漁;老成習戰之士一以疲老被汰, 則挈其强壯子弟以去, 軍中唯有抑勒寄招之人, 又皆不習戰陳而不可用. 至於待遇, 復不均壹, 使吾老舊之卒自傷其不及歸正之人, 而歸正者又自以爲待之不如俘虜之厚也. 誠亟圖之, 反此數者, 則軍聲振而國勢張矣.’ 因復力陳茶法之弊, 乃得頗增鹽數, 而公意未已也. 政府白擬司農少卿, 上自用公爲正卿. 京師月須米十四萬五千石, 而省倉之儲多不能過兩月. 公請給南庫錢以足歲糴之數, 又糴洪․吉․潭․衡軍食之餘及鄂商船, 幷取江西․湖南諸寄積米, 自三總領所送輸以達中都, 常使及二百萬石, 爲一歲備. 久之不行, 公以不得其職求去, 不獲, 又以白宰相曰 : ‘今豐儲倉․南上庫皆移東就西以眩主聽, 而使朝廷․戶部自分彼此, 告借索遠, 有同市道. 願革而正之. 凡百政事, 各付攸司, 委任而責其成, 則名正而實擧矣.’
臨安擇守, 公在議中. 執政或謂公於人無委曲, 上曰 : ‘正欲得如此人’ , 遂兼權臨安府事. 守比非其人, 日走權門․奉約束耳, 民事悉付吏手, 吏得狥勢爲姦. 公旣視事, 親閱文書, 躬自予決, 要人請囑, 一無所聽. 府故以宦者爲承受公事〔四〕, 守至例謁之. 公不往, 怒, 因喩旨故遷延以相沮傷. 公白政府無所用承受, 請罷之. 市有火, 近巨璫所居舍, 怒不專挾護, 遣兩卒喧厲公所. 公奏其狀, 下兩卒大理獄. 大理觀望, 覆逮府吏卒. 公卽家居自劾, 詔杖兩卒, 釋府吏卒勿問. 僧倚豪貴立私宇至百數, 會有以姦穢事覺抵罪者, 因悉以今沒入之而逐僧, 還所隸事. 在府三月, 竟以權倖不便亟解去, 而民至今稱之.
公在朝遇事輒言, 執政故不悅. 及是轉對, 又言: ‘易以九居五․六居二爲當位而詞多艱, 以六居五․九居二爲不當位而詞多吉, 蓋君以剛健爲體而虛中爲用, 臣以柔順爲體而剛中爲用. 君誠以虛中行其剛健, 臣誠以剛中守其柔順, 則上下交而其志同矣. 陛下得虛中之道以行剛健之德矣, 而在廷之臣未見其能以剛中守柔順而事陛下者也. 願觀象玩詞, 求剛中之臣, 遠柔佞之士, 以應經義․起治功.’ 由是執政滋不悅, 沮公茶議, 使不得行. 公益論事自若, 久之求去, 復除江南西路轉運副使.
陛辭, 上曰 : ‘卿未可遠去.’ 改知婺州, 進秘閣修撰. 上意猶欲留公, 而公亟言軍政敝․武備弱, 必誤事, 不合旨, 乃之郡. 居數月, 郡以太治. 會詔市牛飭五千斤, 公奏一牛之筋才四兩, 今必求此, 是欲屠二萬牛也. 上悟, 爲收前詔, 且思公前言, 召以爲吏部侍郞. 公又爲上言: ‘民貧多盜, 非國之福. 願詔中外有司各條所部冗費可省者以聞.’ 上善之, 而亦不果行也.
在吏部, 與吏史約, 予奪命士所陳身計, 當悉疏著令, 堅定其可否乃行. 旣行而有遺若未尤者重坐. 吏以此不能肆其姦. 秀邸館客特注州掾, 公言其人未試, 且衝待次人, 請更受員外, 置不簽書公事. 執政建議欲有所私而託以吏部所啓, 公言是事雖小, 所關則大, 請究治. 上嘉納焉. 上親慮囚, 命公與知閤門事張掄次比其事以聞. 掄自以官承宣使, 欲列名公右. 公不可, 白之丞相, 亦右掄. 公奏言: ‘臣固知承宣使序權侍郞上, 但使事以閤門副侍郞耳, 故所被旨臣實先掄, 唯陛下財幸.’ 上不直掄, 罷之.
公以上常獨攬機務而羣臣偸安苟免, 乃按易象爲上言: ‘乾首坤腹而六子之卦各象其事, 故聖賢之訓皆以君爲元首, 臣爲腹心․股肱․耳目․喉舌, 各有攸主. 今君勞臣逸, 非治之體. 且使出令用人或有未善. 則過歸於上而政亂於下. 願觀易卦之象, 體乾剛健而使腹心․股肱․耳目․喉舌之臣各任其職, 且察臣下有遊近習之門者, 嚴禁絶之, 而益以公道用人, 名節取士, 則士風振而人材出矣.’ 一時弊事, 如衛兵壞僧廬․掠都市而朝廷不深治, 言事官彈劾不勝去職而取從風聞者坐黥隸, 軍中結邏卒開鋪以搖主將, 皆極言之. 又建白凡選監司若大郡守, 宜使侍從集都堂, 公擧所知, 而宰相拔其尤者以聞, 皆切治體. 又請凡應輸義米者皆置倉鄕社以藏, 而凶歲還以予之, 亦便於事. 然皆不得行, 獨衡州盛牧諸軍回易竟罷如公言.
又嘗抗言 : ‘往者閹寺之盛, 卒階靖康明受之變. 今復盛矣, 請抑制之, 不使寢長. 官置蠶室, 限其進子之數. 官高者使捕外, 而門禁宮戒之外, 它毋得有所預. 嚴士大夫兵將官與之交通之禁, 則上下俱安而禍變潛弭矣.’ 上聞靖康明受語, 嚬蹙久之, 曰 : ‘幼亦聞此.’ 因納疏袖中以入. 最後極言邊備不可以不予, 如欲保淮, 則楚州․盱眙․昭信․濠粱․渦口․花靨․正陽․光州皆不可以不守. 如欲保江, 則高郵․六合․瓦粱․濡須․巢湖․北峽亦要地也. 其形勢之緩急, 兵力之多寡, 計策之利鈍, 皆歷陳之, 如指諸掌. 又論應城四達之衝, 宜屯一軍以爲襄陽近援. 荊南兵戍襄陽, 宜徙其家屬營江南, 毋使爲虜所襲.
以病請祠, 不許, 面請益力, 乃除集英殿修撰․知寧國府. 數日, 改太平州, 賜尙方珍劑以遣焉. 當塗重地, 蓋以一面爲寄. 公因自請以時行視圩垾, 有機事得以密疏直達, 上皆從之. 旣至, 力圖上流之備, 請選募橫江水軍千人, 以爲濡須․東關․采石費援. 采石水軍舟多卒少, 宜以步卒之半爲水戰之用, 使可舟可陸, 往來巢湖, 爲必保濡須之計. 而凡沿江津渡, 宜使皆隸南岸. 比來和州利商算, 輒穿支港以內舟, 首尾皆屬之江, 此爲自隳天險. 邊民盜虜馬或爲它盜來嚴者, 有司不問, 甚或賞以勸之, 皆不便. 上納其言, 亟命塞港, 它亦頗施行.
居年餘, 年六十九, 卽上章請老. 上初惜其去, 三請, 乃許以敷文閣待制致仕. 越再歲, 上以湖南兵役之餘, 公私困敝, 上下恫疑, 思有以鎭安之, 謂公重厚可倚, 復起公以顯謨閣待制知潭州․荊湖南路安撫使. 私禮免繫帥銜, 以避家諱. 公雅無復出意, 再辭不獲, 乃勉起. 至無幾何, 悴者蘇, 疑者釋, 氣象一切如盛時. 復稅酒法, 人以爲便. 前此官市民物不予直者, 悉爲償之. 斗酒千錢, 不妄(8-4775)用, 故人賓客薄少周助, 率以私錢. 州宅火, 徐葺之, 不調一夫而復其舊. 諸縣有羨賦, 州竭取之, 縣以不可爲. 公歸其半曰 : ‘歲饑用不足, 少須之, 當悉歸矣.’ 歲旱, 賑廩勸分, 蠲租十一萬, 給常平米二萬, 糶又數萬, 民以不流死. 飛虎軍新立, 或以爲非便. 公曰 : ‘長沙一都會, 控阨湖嶺, 鎭撫蠻徼, 而二十年間大盜三起, 何可無一軍? 且已費縣官緡錢四十二萬, 民財力不可計, 何可廢耶? 亦在馭之而已.’ 異論乃息. 郴民輸租, 吏所加賦幾再倍, 力請裁之, 三去其一, 民以小寬. 前在兩州, 再言配法之弊. 請使凡應配者秖坐加役流法, 髡鉗居作, 三年而免;毋或黥涅, 使得自新 ; 免爾逸․免遞送, 廣至恩, 召和氣. 至是, 計長沙一歲所遞配卒千二百五十餘人, 復申其說. 朝廷爲下其事, 而議者狃常, 或笑以爲迂, 不能革也.
未滿歲, 復告歸, 進敷文閣直學士致仕. 朝拜命, 夕登舟, 歸老衡陽故居野塘之上. 淳熙十年十一月旦日薨, 享年七十有三.
公生十有五年, 避地南來, 貧無以爲養, 不得專力於學. 年三十, 始學易. 兩鞫郡獄, 須盧問者累旬不至, 因得晝夜硏考, 乃若有得, 遂樂玩而沒身焉. 其言於朝廷, 措諸行事, 無適而不於是也. 尤惡佛老邪說, 在臨安被詔擇靈隱寺主, 因復于上曰 : ‘天地變化, 萬物終始, 君臣․父子․夫婦之道, 性命之理, 死生之故, 鬼神之情狀, 易盡之矣, 曷爲求之他? ’ 他時僧或宣對後苑, 復疏其失, 請崇先王之道, 正人倫之本, 漸汰游惰, 歸復農桑. 其在當塗, 申法禁․戢誑誘, 出敎喩民, 語極諄悉. 至是病革, 題詩一章, 以示諸子, 沐浴正衣巾而逝. 人以是益知公之於易非徒誦說而已也.
公莊重簡淡, 嶷然有守, 泊然無欲, 喜怒不形見於色, 故人不可得而親疏. 而中夷易平直, 廉不近名, 介不絶物, 應事存心, 悉主於厚. 平生未嘗失節於權倖. 然非有意以矯厲爲高也. 在六院時, 淵․覿寵方盛, 同舍日走其門, 公恥之, 自引去. 晩登從列, 覿已位使相, 竟不往謁. 它一二輩職事所及輒與忤, 又嘗爲上指言其姦. 其徒相與聚而訕公, 有言太尉獨不柰李某何者. 其人復之曰 : ‘誠無柰其不顧官職何耳.’ 賴上知公深, 屢歎其樸直, 故小人無以行其計. 公於中外鉅細知無不言, 其尤致意焉者, 邊備․軍制․賦法․祿令․茶鹽․屯田․經總制錢․揀汰․歸正․配法也. 蓋自少日親罹兵難, 復歷邊事, 盡悴州縣, 乃登使守, 乃踐省寺, 於大小之務皆身履而心喩焉, 非如它人剽聞掠說而籍口嘗試者也. 其從違忤合雖不可常, 然持其見終身不易, 言之懇懇, 至於四三. 其才通, 其識遠, 不阿主好, 不詭時譽, 無書生之輕, 俗吏之陋. 其所縕畜使得宣究, 斯世其庶乎!
公娶龐氏, 早沒. 繼室以韓氏, 有賢行, 夫婦相敬如賓, 皆贈令人. 男二人, 毅夫, 承務郞, 後公三年卒. 正夫, 宣義郞․廣南西路提擧常平司幹辦公事. 女二人, 長適朝散郞․提擧荊湖南路常平茶鹽公事臨川吳鎰, 次適邯鄲劉仝. 孫男八人, 大有․大來, 皆修職郞. 大謙, 迪功郞. 大用․大臨․大鼎․大觀․大鼐未仕. 女二人尙幼.
公居家有常度, 不惰替, 亦不嚴厲, 約不戚, 豐不泰, 終身一致. 在官儉而法, 官燭不入中門, 家人不用公家供張. 初臨有新帟幕, 必撤而藏之, 存以迎新. 去之日, 不私一物焉, 家至今無有敝帷. 蓋凡例所饋餉私不應法之入, 率積之公帑, 以供公不應法之用, 餘則委置而去, 門內化之, 落然淸素. 素篤風誼, 嘗僚章貢李燮, 死于安陸, 有女棄民間. 公贖而育之, 韓令人愛之如己子, 以歸士族. 初仕, 亦嘗從衆投上官爵里狀, 心怵然不寧, 自是不干請. 嘗獲盜委曲, 可以被賞, 置之弗問. 旣循資, 則曰 : ‘吾老於職官耳.’ 年五十有二, 乃改京秩, 自是出爲時用. 然未嘗忘歸志, 未始携家入中都, 亦不至畿郡. 仕五十年, 上爲人主敬信, 下爲士大夫尊慕, 無纖謗微累. 出入中外數四, 其入也皆以特召, 其出也皆以力請. 年至亟歸, 不得已而勉起, 起又竟歸, 以終素志而沒. 出處之義, 特爲全盡.
以是年閠十一月十一日葬于衡州花光寺之山後二里, 與韓令人同穴. 以葬日迫不及識, 而吳鎰狀公行大略如此. 後十年, 正夫乃以其銘見屬. 熹不足以銘公, 然熟公聞望蓋久, 中間一再通書, 荷公見予良厚. 今又得吳狀及公平生議奏讀之, 觀其行身如履繩蹟矩, 無一事之不合於理, 論事如縣麻穀粟, 無一言之不適於用, 而其忠厚純篤之氣又有藹然溢於行事言語之外者, 未嘗不廢書三歎而悚然心服也. 乃最其事而系以鎔. 銘曰 :
大易之縕, 微妙不窮. 孰窺其表, 而測其衷? 懿彼李公, 心潛窮詣. 逮其渙然, 隨顯一致. 進矢于廷, 退諗于私. 迎知失得, 不假蓍龜. 閔天越民, 忠君及國. 在古有評, 曰庶常吉. 胡不百年, 以究其施? 長言鼓缶, 奄昃其離. 衡山之陽, 非其故土. 竁而弗銘, 曷詔終古?
〔一〕洛 : 原作 ‘洛’ , 據宋浙本改.
〔二〕糴 : 原作 ‘糴’ , 據右引改.
〔三〕檢 : 原作 ‘驗’ , 據宋閩․浙本改.
〔四〕宦 : 原作 ‘官’ , 據宋浙本改.
등군희윤 묘지명(滕君希尹墓誌銘)
군의 성은 등(滕)씨이고, 휘는 수(洙)이며 자는 희윤(希尹)으로 대대로 휘(徽)의 무원(婺源)에 살았는데, 처음에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중간에 알려진 사람이 있으므로 한림학사 달도(達道)가 찾아와서 물었으니 이에 동양(東陽)과 동원(同原)임을 알 수 있으나 그 옮기고 모이고 흩어진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 군의 증조부는 곡(谷)이고, 조부는 위(爲)이며, 부친은 순(恂)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부(叔父) 개(愷)는 일찍이 문학논의(文學論議)로 당시에 알려졌고, 진사로 기용되어 신(信)의 호연(戶掾)으로 졸하였으니 사우들이 애석해하였다.
군은 어려서 가학(家學)의 남은 실마리를 들었고, 자라서는 고을의 선생 유송우(兪宋祐)와 한 두 사람의 이름 있는 선비를 종유하여 더욱 기람(記覽)에 힘써 그 온축이 매우 풍부하여 거자문(擧子文)을 짓는 것 역시 정치하여 정도(程度)가 있었다. 그러나 운수가 불우하여 버리고 떠나서 다시 정치를 하지 않고 홀로 아들들을 가르치며 학문하였고 과거를 위한 계책에 오로지 하지 않았다. 평소에 엄하게 독지(篤志)와 역행(力行)의 가르침을 다하여 두 아들이 등과하여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 또 때때로 평일 마을에서 듣고 본 정위(情僞)와 득실(得失)의 변화를 말하여 절실하게 깨우쳐 주었다. 그러므로 두 아들이 모두 주현(州縣)에서 스스로 명성을 수립할 수 있었다. 만년에 사지(四肢)의 병을 얻었는데, 오히려 공자와 맹자가 인(仁)을 말한 대강 한편을 손으로 써서 주야로 완미하며 외우고, 또 “몸소 자책하기를 후하게 하고 남을 질책하는 것은 가볍게 하라”는 말을 벽에다 써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그 호학하고 자신을 단속하는 것을 늙어서도 이와 같이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병이 위중한데도 의약(醫藥)을 물리치고 손으로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는 두 마디를 써서 아들들에게 보여주고 졸하였으니, 소희4년 7월 27일이었고, 나이는 65세였다.
부인 호(胡)씨는 현행(賢行)이 있었는데, 군보다 1년 전에 졸하였다. 다섯 아들이 있는데, 린(璘)은 종정랑(從政郞)․악주주학교수(鄂州州學敎授)이다. 공(珙)은 적공랑(迪功朗)․영국부(寧國府) 정덕현(旌德縣) 주부(主簿)이다. 관(瓘)과 정(珵)은 모두 진사에 종사하고 있고, 수(琇)는 먼저 졸하였다. 두 딸이 있는데 진사 정만경(程萬頃)․정유지(程槱之)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일곱이고, 손녀는 넷이다.
군의 사람됨은 공손하고 검소하며 질박하고 진실하였으며, 만나는 사람은 젊고 나이가 많고에 상관없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여 큰 손님을 만나듯이 하였다. 무릇 세상에는 소년의 호습(豪習)과 편안히 즐기는 방종한 일이라는 것이 있는데, 한 번도 자신에게 접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 매우 담박한 것을 받들어 죽을 때까지 하루와 같이 하여 풍족함과 검소함을 그 한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집에 거할 때 성심(誠心)과 효애(孝愛)로 부모를 섬겼고, 누항(陋巷)의 예(禮)와 경박한 풍속의 태도는 비록 억지로 하게 하더라도 차마 하지 못하였다. 경수은(慶壽恩)을 두 번 만났는데 어떤 사람은 나이를 늘려서 가도록 허락을 받으라고 하엿으나 군은 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자 곧 말하기를 “임금을 속여서 작위를 받으면 또한 어찌 영예롭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도 갈지 않은 사족(士族) 어린 여자가 창가(倡家)에 떨어진 사람이 있었는데 군이 그를 속바치고 데려오려고 꾀하였다. 거간꾼이 군이 가난함을 알고는 문서를 위조하여 그 값을 높여서 그것을 어렵게 하였는데, 군은 어떤 일을 꾀한 적이 없었다. 마침 린(璘)이 추천장을 받아 참여하게 되어, 군(郡)에서 금전 약간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나아가기를 권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그것을 모두 창가에 주고 여자를 데리고 와서 시집보내고 다시는 그 거짓을 꾸짖지 않았다. 현재(賢宰) 장안중(長安中)이 그것을 어질게 여겨 그 기록을 써서 드러내었다. 군의 사람됨은 대개 이와 같았다. 아! 이 또한 선인(善人) 군자(君子)라고 할 수 있구나. 그러나 그 뜻과 자질은 이미 당세에 조금도 스스로 드러내지 못하였고, 그 수명은 또 고년(高年)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다만 아들들만이 이미 그 뜻을 이어 받아서 또 장차 현양할 것이니 사람들은 혹 이것으로 하늘의 갚아 줌이 과연 어긋나지 않았다고 여길 것이다.
린(璘) 등이 장차 명년 5월 24일에 군과 부인을 만안향(萬安鄕) 용피(龍陂) 사목(四牧)의 들에 합장하려 하면서 공(珙)으로 하여금 길주(吉州) 녹사참군(錄事參軍) 정순(程洵)의 행장을 받들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게 하였다. 나는 질병으로 오래도록 쇠하였으나 사양할 수가 없고 공(珙)의 청이 더욱 굳어서 나는 가만히 그것을 슬퍼하여 이에 그 일을 차례로 쓰고 묘지명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행함은 몸소 다하였고, 배움은 힘을 다하였네. 쌓은 것은 풍부하고, 드러내는 것은 아꼈네. 하늘이 어둡다고 생각하면 이 새긴 글을 보기 바라네.
君姓滕氏, 諱洙, 字希尹, 世家徽之婺源, 蓋莫詳其始所自來. 中間有見故翰林學士達道者, 扣之, 乃知與東陽之族同原, 而亦不能言其遷徙合散之所由也. 君曾祖谷․祖爲․父恂皆不仕, 而叔父愷蚤以文學論議有聞於時, 起進士, 官信之戶掾以卒, 士友惜之.
君幼聞家學緖餘, 長從鄕先生前君宋祐及一二知名士遊, 益務記覽, 其蓄甚富, 爲擧子文亦精緻有程度. 而數以不偶, 卽棄去不復爲, 獨敎諸子爲學, 而不專爲場屋計. 平居厲以篤志力行之訓甚悉, 及二子登科從仕, 則又時時爲道平日閭里間所聞見情僞失得之變以開曉風切之, 以故二子皆以能自樹立有聲州縣間. 晩得末疾, 猶手抄孔孟言仁梗槪一編, 日夕玩誦, 而又大書‘躬自厚而薄責於人’ 之語於壁以自警. 其好學檢身, 雖老不倦如此. 病革, 却醫藥, 手書 ‘死生有命, 富貴在天 ’ 兩言以示諸子而卒, 紹熙四年七月二十七日也, 年六十有五.
夫人胡氏, 有賢行, 前君一年卒. 五男子, 璘, 從政郞․鄂州州學敎授. 珙, 迪功郞․寧國府旌德縣主簿. 瓘․珵皆業進士, 琇前卒. 二女子, 嫁進士程萬頃․程槱之. 孫男七女四.
君爲人恭儉質實, 遇人無少長, 俛首接語, 如見大賓. 凡世所謂少年豪習․饒樂放縱事, 未嘗一接於身. 自奉甚薄, 終身如一日, 不以豐約易其度. 居家事親誠心孝愛, 委巷之禮․薄俗之態, 雖於强之, 不忍爲也. 兩逢慶壽恩, 或勸增年以應格, 君不可. 或問之, 則曰 : ‘欺君而受爵, 亦何榮之有哉!’ 有士族女未齔落倡家, 君謀贖之. 倡儈知君貧, 立僞券高其直以難之, 君未有以爲策也. 會璘預薦書, 郡致金錢若干爲勸駕禮, 盡以予倡, 得女嫁之, 不復詰其僞. 縣宰張安中賢之, 爲書其牒以表焉. 君之爲人大抵如此. 鳴呼, 是亦可謂善人君子矣!然其志與材旣不得少自見於當世, 其壽命又不得究於高年, 獨諸子旣能順承其志, 而又將有以顯揚之, 則人或以是爲天之報施果不繆也.
璘等將以明年五月二十四日合葬君․夫人於萬安鄕龍陂四牡之原, 使珙奉吉州錄事參軍程君洵之狀以來請銘. 余以疾病久衰謝不能, 而珙請益堅, 餘竊哀之, 乃爲次其事而銘之. 銘曰 :
行之躬, 學之力. 積之豐, 施之嗇. 謂夫夢夢, 請視斯刻!
승무랑 이공 묘지명(承務郞李公墓誌銘)
건도(乾道) 6년 성도부로전운판관(成都府路轉運判官)․권안무사(權安撫司事) 조열(趙說)․지한주사(知漢州事) 여시언(余時言)이 함께 주(州)의 사람 이(李)군이 의(義)를 행함을 조정에 알렸는데, 아직 응답이 없었다. 그런데 또 사천선무사(四川宣撫使) 왕염(王炎)․안무사(安撫使) 설량붕(薛良朋)․전운부사(轉運副使) 왕번(王璠)․판관(判官) 조불우(趙不憂)가 서로 이어서 표를 올리니, 효종(孝宗)황제가 그것을 듣고 그를 훌륭하게 여겨, 9년 윤 정월 정유(丁酉)에 명하여 말하였다. “절약에 힘쓰고 부자에게 나누어주기를 권하는 것은 벼슬아치의 정사이고, 창고를 열어 가난을 구휼하는 것은 인자(仁者)의 마음씀이다. 너는 포의(布衣)로서 구석진 곳에 살면서, 해마다 흉년이 들어 부족한데, 의개(義槪)를 움직여 명성이 있었다. 여러 번 개인적으로 저장한 것을 내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았다. 계해(計偕)를 주기에도 이미 늙었고, 관첩(官牒)에 나아가는 것이 헛된 노력이다. 관의 번영에 힘써 복무하여 향리에 가르침을 돌려주어라. 특별히 적공랑을 제수하여 치사할 수 있도록 한다.” 마을 사람들이 군의 행실을 높이 여기고 그 은혜에 만족하여 서로 감탄하며 그것을 읊어 노래하였다. 군이 죽은 후 17년에 그 손자 인중(寅仲)이 비서성(秘書省) 좌저작(佐著作)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사관으로 나아가 벼슬이 올라갈 수 있었으니, 청하기를 거듭하여 군을 언급하게 되었다. 이에 또 명을 내려 승무랑을 특별히 증직하니, 사람들이 이로써 더욱 공의 적선의 보답이 다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또 몇 년 후에 저작군(著作君)이 그 집안의 사인(使人)이 군의 행실을 서술하여 나에게 보내어 이것으로 군의 묘지명을 청하였다. 나는 본래 군 부자와의 사이에 교류가 없었고, 또 질병으로 글을 폐한지 오래여서 할 수 없다고 사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閩)과 촉(蜀)이 서로 수 천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생각하니, 저작군이 그 고을의 선생군자들을 두고 멀리 나에게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헛되이 욕보일 수가 있겠는가? 이에 그 글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을 골라서 서술하였다.
군의 휘는 발(發)이고, 자는 호연(浩然)으로, 그 선조는 농서인(隴西人)이다. 당(唐) 명황제(明皇帝)가 난을 피하여 촉(蜀)에 들어왔는데, 한(漢)을 지나다가 조금 머물렀는데, 그 가까이서 모시며 따라온 자들이 인하여 가(家)를 이루기도 하였는데, 군은 그 후손이다. 대대로 십방현(什邡縣) 옹순향(邕順鄕)에 살다가 후에 장원(長原)으로 옮겼다. 증조부 보영(保榮)과 조부 우질(有質), 부친 세통(世通)은 모두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군은 타고난 자질이 고원하여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글을 읽는데 큰 뜻이 있어 과거를 업신여기고 공명은 곧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향공(鄕貢)으로 벽응(辟應)에 들어가 내사(內舍)에 들어갔다. 오래되어도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환관 양사성이 바야흐로 임금의 총애를 받아 뜻을 얻지 못한 선비들은 재물에 따라서 관직을 얻었다. 어떤 사람은 이로써 군을 꾀었으나 군은 정색을 하고 거절하였다. 경사(京師)가 포위되자 상소를 올려 대계(大計)를 진술하였는데, 응답이 없자 곧 녹첩(錄牒)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그 선부군은 만년에 인사(人事)를 싫어하여 항상 홀로 한 방에 거하였고, 집안일은 모두 군에게 맡겼다. 군은 옷과 음식을 절약하고 줄여서 자신을 여위어 높이 받들었다. 책을 사서 학교를 열어서 수사를 맞아들여 자손을 가르쳤다. 또 충효입신의 대의에는 더욱 뜻을 다하여 관직에 등용되기를 청탁하거나 녹을 구할 계책에만 전념하지 않았다. 부모가 병에 걸리자 치료에 힘을 다하여 비록 자신은 훼상되어도 꺼리지 않았다. 상을 벗은 지 오래되고 나서도 부모를 언급하면 눈물을 흘렸고, 무덤 곁에서 여묘살이를 하여 거듭 해를 넘겼다. 아우가 죽고 아들을 잃어 유복자로 딸 하나를 낳았는데, 부복(婦服)을 다하지 못하자 쉽게 그 전대를 은밀히 열어서 행하였다. 군은 의(義)로 바로잡았으나 그 집안은 부끄럽고 원망하여 혹독한 법으로 중상하려고 하였다. 군은 굴하지 않았고, 아전은 또 그 말을 치우치게 주장하였으나 끝내 욕보이지 못하였다. 그 유복녀를 보살피기를 자신의 소생처럼 하였을 뿐 아니라 또 후하게 비용을 들여서 명족에게 시집보내어 조금도 남은 서운함이 없었다. 그가 젊어서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을 때부터 늙음에 이르자 많이 불어났는데, 재산을 양보하고 사양하였으며, 고아와 어린아이를 구휼하고 품어주고, 위급한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형제와 친척에서부터 소원한 의지할 곳 없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물러나서는 스스로를 자랑하는 기색이 없었다. 평생 빛을 준 문서를 없애서 그 책임을 없애준 것은 헤아릴 수가 없다. 마을 사람들이 송사를 다투는 사람이 있으면 나아가서 억울함을 구하여 그 말을 들어주어 모두가 다툴 일을 잃어버리고 갔다. 병자에게는 약석(藥石)을 주고, 해산한 사람에게는 나무와 쌀을 주는 일까지 살펴서 오래되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뭄이 든 해에는 더운 날에 수십 리를 걸어서 향인(鄕人)을 위하여 빌자 비가 바로 오니 사람들이 그를 더욱 어질게 여겼다. 곡식이 여물지 않은 해에는 밥을 하여 굶주린 사람을 먹이기를 봄부터 겨울까지 하였는데 날마다 수천 사람을 먹었다.
건도(乾道) 무자(戊子)년에 백성의 굶주림이 심하자 관에서는 창고를 털고 부자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도록 권하였는데, 군의 집에 나아가 밥을 먹는 자는 날마다 3~4만 명에 이르렀다. 다음해 유랑하며 떠도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황정(荒政)은 이미 파하니 백성들은 더욱 곤궁하여 수백 리 사이에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끌고, 솥을 들고 나무를 묶어서 군에게 돌아오는 자들이 그 무리가 이전의 배가 되었다. 대개 군이 이 일을 한 것은 소흥(紹興) 병진(丙辰)년으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인데, 해마다 변함이 없어 내놓은 것이 그 얼마쯤인지는 알 수 없고, 온전히 살아난 자가 몇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다. 이에 이르러 혜택이 더욱 넓어지고, 공로가 더욱 많아져 본래의 주군(州郡)과 여러 사자(使者)들이 비로소 그 일을 아뢰어 드러나 상을 받게 되었다.
군은 처음에는 원하지 않았으나 그칠 수가 없었다. 이미 일어나 명을 받고 인하여 조칙의 말을 골라내어 그 거처에 ‘의개지당(義槩之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말하기를 “잠시 내 자손에게 보여 그로 하여금 성조(聖朝)께서 포상하여 권면한 뜻을 잊지 않게 하고, 더욱 더 힘써 다른 사람에게 혜택이 미치도록 한다”고 하였다. 대개 이 때 군의 나이 77세였다. 다음해 병이 들고 또 위급해지자 좌우를 돌아보고 오늘 밥을 먹은 사람이 몇이냐고 물었다. 공이 죽자 굶주림에서 살아나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뒤를 이은 아들 의(儀)가 이미 군은 그 고을인 고괴(古魁)의 들에 장사지내고 또 군의 행사를 이와 같이 차례대로 적어서 그 대강을 논하여 말하기를 “군의 재주는 비록 높았으나 움직임을 법도를 스스로 지켜 무릇 행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예율(禮律)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그 몸가짐이 겸손하여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였고, 오직 의(義)의 소재에 대하여 분연히 몸소 나아갔으니, 비록 공경(公卿)의 힘으로 눌러도 빼앗을 수 없었다. 큰 환란에 임하여 죽음이 임박하여도 기상은 조금도 막히지 않았다. 막내아들이 언사(言事)로 죄를 얻어 령(嶺)으로 귀양 보내는 표가 이르러도 군은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교류할 때는 마음을 열어 진심을 보였으며 남이 속일까 미리 짐작하지 않았다. 더욱 공손히 승낙하고 이익을 위해 거절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작은 선이 있으면 그것을 끊임없이 칭찬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대놓고 꾸짖고는 또한 다시 가슴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를 종유하는 자는 그를 좋아하고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혹은 협명(俠名)을 그에게 주기도 하였으니, 대개 세상에 무력으로 규칙을 범하는 자가 바로 공이 아주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관에서 맡은 직책은 없었으나 사방의 수재나 가뭄, 역질이 있다는 말을 들으며 문즉 근심이 말과 안색에 드러났다. 천하의 일을 논하여 격앙 강개하였으며 이해가 분명하여 듣는 자들이 피로를 잊었다. 그러므로 상위국(相魏國) 장충헌공(張忠獻公)이 공을 매우 잘 알아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 어짊을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장공이 도독정토(都督征討)가 되었는데, 군이 편지를 보내 역량을 헤아려 승리를 꾀하는 방법을 매우 간절하게 진술하였다. 아! 군의 사람됨이 이와 같아 강성한 나이에는 그 힘을 당세에 쓸 수가 있었으니 그가 이룬 것은 마땅히 다른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다. 지금 이미 시행될 수는 없지만 그 남은 공은 천만인의 죽을 목숨을 살리기에 족하다. 비록 그 살고 죽음에 다행히 거듭 사랑과 기림을 받았으나 하늘이 군에게 갚아줌이 어찌 이와 같이 하고 그치겠는가?
군이 졸하던 해는 순희(淳熙) 갑오(甲午) 2월 병인(丙寅)이고, 신축(辛丑) 5월의 임인(壬寅)에 장사지냈다. 군의 부인은 같은 군의 양(楊)씨인데, 먼저 졸하였다. 두 아들이 있는데, 의(儀)는 여러번 천거되어 저작(著作)의 관직을 얻어 조적(朝籍)에 올랐으며, 선교랑에 여러번 봉해져 치사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하였다. 횡(竑)은 진사제에 급제하여 선교랑에 이르렀는데, 공보다 몇 년 늦게 모두 졸하였다. 딸 하나는 조산대부(朝散大夫)․지가주(知嘉州) 왕충(王种)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다섯인데, 인중(寅仲)이 맏이이고, 다음은 빈중(賓仲), 다음 강(康)인데 일찍 죽었다. 다음은 헌중(憲仲), 치중(寘仲)이다. 인중은 현명하고 문사(文辭)가 있었는데, 지금은 봉의랑(奉議郞)․지보주(知普州)가 되었다. 군의 경사를 무궁토록 독실하게 할 까닭은 장차 여기에 있는가보다.
나는 비록 군을 알지는 못하였지만 군의 일에 의심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은 행장만으로도 믿을 수 있다. 또 의개(義槪)의 여러 시를 읽으니 모든 촉(蜀)의 명사들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행장이 과연 속이지 않음을 더욱 알 수 있다. 이에 모두 순서대로 논하고 묘지명을 이어놓는다. 명에 이르기를,
덕이 있으나 재주가 없으면 덕은 그 덕이 아니고, 재주가 있으나 덕이 없으면 재주를 해친다. 어질구나! 이 사람은. 덕을 품고 은거하였네. 창고를 연 공은 날마다 만 명의 사람을 살렸네. 훌륭한 덕업이 이미 올랐고, 황제가 그 공적을 훌륭하다 하였네. 명복(命服) 명서(命書)는 예전에 베푼 것을 행하였네. 집에는 이미 총애가 내렸고, 또 유택을 아름답게 하였다. 오직 이것을 자손에게 들려주어 그 아름다움을 더욱 성하게 하라. 내가 그 무덤에 명을 쓰니 천고에 갈라지지 않으리라. 의개(義槪)의 이름은 영원토록 싫어함이 없으리라.
乾道六年, 成都府路轉運判官․權安撫司事趙公說․知漢州事余時言共以州人李君之行義聞於朝, 未報, 而四川宣撫使王炎․安撫使薛良朋․轉運副使王璠․判官趙不憂相繼表上, 孝宗皇帝聞而嘉之, 乃九年閠正月丁酉制曰 : ‘務穡勸分〔一〕, 有司之爲政;發廩賑乏, 仁者之用心. 爾以布衣, 居于下土, 因年饑之不足, 動義槪以有聞. 屢出私藏, 多所全活. 與計偕而已老, 從官牒則徒勞. 勉服官榮, 歸敎鄕里. 可特授廸功郞致仕.’ 里之人高君之行而飽其惠, 旣相與嗟歎而詠歌之. 君沒之後十有七年, 其孫寅仲入秘書省佐著作, 會進史得增秩, 因請貤以及君. 於是又詔特贈承務郞, 人以是益知君積善之報爲未艾也. 又後數年, 著作君乃自其家使人以書致君行述一通於予, 請以是銘君之墓. 予故未得交君父子間, 又以病賤書久, 欲謝不能. 而惟閩蜀相望數千里, 著作君乃近舍其鄕之先生君子而遠以屬我, 是其可以虛辱哉? 乃最其書之言曰 :
君諱發, 字浩然, 其先隴西人. 唐明皇帝逃難入蜀, 過漢小留, 其近屬之從行者因或家焉, 君其後也. 世居什邡縣邕順鄕, 後徙長原. 曾祖保榮․祖有質․父世通皆隱不仕.
君資稟高邁, 自少俶儻不羣. 讀書有大志, 傲睨場屋, 謂功名可立致. 以鄕貢入辟廱, 捕內舍. 久之未第, 宦者粱師成方貴幸, 士之不得志者類資以得官. 或以是怵君, 君正色拒之. 京師被圍, 疏陳大計, 不報, 卽棄錄牒, 歸養于家. 其先府君晩厭人事, 常獨居一室, 家務一以諉君. 君節衣縮食, 瘠己以崇養. 買書闢館, 迎脩士以敎子孫. 而於忠孝立身之大義尤致意焉, 不專爲覓擧干祿計也. 親疾, 療治不遺力, 雖毁傷無所憚. 免喪旣久, 語及親猶泣下, 廬墓側再踰歲. 弟沒亡子, 遺腹生一女, 婦服未竟, 輒謀私其橐以行. 君以義正之. 其家愧恨, 欲以危法中君. 君不爲屈, 吏又偏主其詞, 而卒不能有以汚也. 已而撫其遺女如己生, 且厚資之以歸名族, 無蠲芥餘憾. 自其少日生理未裕之時以至于老而豐殖, 推財讓産, 恤孤懷幼, 賙人之急, 自兄弟族黨以及于疎遠之無告者, 無不必盡其力, 而退無自多之色. 平生所券棄責不勝計. 里人有鬪訟者, 就以求直, 聞其言皆矢所爭而去. 其微至於病者予藥石, 産者給薪米, 亦久不懈. 歲旱, 犯烈日徒步數十里爲鄕人致禱, 雨爲立應, 人尤德之. 歲或不登, 輒爲食以食餓者, 自春徂冬, 日以千數.
乾道戊子, 民饑甚, 官爲振廩勸分, 而就食君家者日至三四萬人. 明年, 流庸未復而荒政已罷, 民愈困弊, 數百里間, 扶老携幼․挈釜束薪而以君爲歸者, 其衆又倍於前. 蓋君之爲此, 自紹興之丙辰至此三十餘年, 歲以爲常, 所出捐不知其若干斛, 所全活不知其幾何人矣. 及是而惠益廣, 績愈茂, 以故州郡及諸使者始上其事而蒙顯賞焉.
君初不欲, 而不能止也. 旣起拜命, 因摘詔語, 牓其所居爲‘義槩之堂’ 曰 : ‘姑以示吾之子孫, 使之無忘聖朝所以褒勸之意而益勉於及人也.’ 蓋於是時, 君之年七十有七矣. 明年, 屬疾且革, 猶顧左右, 問今日所飯凡幾人. 旣沒, 所活餓人過其門者無不流涕也.
嗣子(立+義)旣葬君其鄕古魁之原, 又次君行事如此, 而論其槪曰 : ‘君才雖高而動以繩墨自守, 凡有所爲, 必問禮律如何. 其中退然如不勝衣者, 唯於義之所在, 則奮然以身先之, 雖壓以公卿之勢弗奪也. 臨大患難, 瀕死而氣不少沮. 季子以言事得罪, 至徙嶺表, 君不爲動. 與人交開心見誠, 不逆其詐. 尤謹然諾, 不爲利回. 人有小善, 稱之不容口, 不則必面所之, 而亦不復留胸中也. 故從之遊者莫不愛敬而嚴憚之, 或者至以俠名歸之, 蓋不知世之以武犯禁者正君所深恥也. 雖無官守之責, 而聞四方水旱疾疫輒憂見言色. 論天下事激昂慷慨, 利害曉然, 聽者忘倦. 故相魏國張忠獻公雅知君, 書疏往來, 未嘗不稱歎其賢. 張公都督征討, 君移書爲陳量力慮勝之戒甚切. 嗚呼!君之爲人如此, 使及强盛之年得用其力於當世, 則其所立宜必有大過人者. 今旣不獲施用, 而其餘功猶足以活千萬人之死命. 雖其存沒, 幸嘗再被寵褒, 然天之所報君者, 豈若是而休耶?
君卒之歲淳熙甲午二月丙寅, 葬以辛丑五月之壬寅. 君夫人同郡楊氏, 先卒. 二子, (立+義)以累擧得官著作, 陞朝籍, 累封宣敎郞致仕, 賜緋魚袋. 竑中進士第, 至宣敎郞, 後公數年皆卒. 一女適朝散大夫․知嘉州王种〔三〕. 孫男五人, 寅仲爲長, 次賓仲, 次康, 早世. 次憲仲, 次寘仲. 寅仲賢而有文辭, 今爲奉議郞․知普州. 所以篤君之慶於無窮者, 將於是乎在.
予雖不及識君, 而於君之事無所疑者, 獨以行述爲可信. 又讀羲槪諸詩, 而全蜀名士無不在焉, 益知行述之果不誣也. 乃悉論次而系以銘. 銘曰 :
德而不才, 德匪其德. 才而不德, 乃才之賊. 賢哉若人, 抱道隱居. 振廩之功, 日活萬夫. 茂實旣騰, 帝偉其績. 命服命書, 于以往錫. 旣寵于堂, 又賁于幽. 惟是聞孫, 益鴻厥休. 我銘其藏, 千古不泐. 義槩之名, 永世無斁!
〔一〕穡 : 原作 ‘衣+嗇’ , 據宋閩․浙本改.
〔二〕正 : 正訛改作 ‘止’.
〔三〕种 : 原作 ‘禾+申’ , 據宋閩․浙本改.
선교랑치사 진공 묘지명(宣敎郞致仕 陳公 墓誌銘)
군의 성은 진씨(陳氏)요 휘는 형(衡)이며 자는 공권(公權)이다. 증조는 확(確)이고, 조부는 □이며 아버지는 □인데 모두 벼슬을 하지 않고 대대로 복주(福州) 후관현(侯官縣)에서 살았다. 군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정직하고 엄중하였으며 조심스럽게 승낙하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음식을 먹거나 기거할 때에도 항상 법도를 지켜 춥거나 더울 때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고 처자를 대할 때에도 치아를 보인 적이 없었다. 비록 집안에서는 엄숙했지만 고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겸손하고 편안함을 즐겨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얼굴빛을 변할까봐 두려워했다. 허심탄회하게 사물을 대하고 다른 사람이 기만할 것을 의심하지 않아 거짓으로 물건 값을 취하는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남에게 빚을 지는 것을 마치 자기가 빚을 진 것처럼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자기의 생활을 돌보지 않고 가난을 편안하게 여겼다. 그리고 일찍이 “나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또한 나 자신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도한 내 자신도 업신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여, 장년이 되어서는 더욱 가난해져 문을 닫고 자식 가르치는 것을 일삼았다. 자신을 봉양하는 데는 매우 검소하고 인색했지만 자식들은 사우(師友)를 따라 강학하게 하여 옷을 벗어주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인색함이 없었다. 새벽이나 밤에 기거할 때에도 반드시 몸소 실천하여 그의 부지런함과 검소함은 남이 견딜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여유롭게 거처했다. 이윽고 여러 자식들이 진사에 올라 명성을 얻게 되었다. 중자인 공석(孔碩)이 등과(登科)하여 벼슬을 했는데 가는 곳마다 기강을 갖추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간략함을 따라 조금 느긋해질 것을 생각할 텐데 군은 더욱 경계하는데 매진하여 일찍이 말과 얼굴빛을 구미지 않았다. 그가 평소 거처할 때에 말을 일러주는 자가 일마다 다르게 했지만, 귀결하고자 하는 요체는 반드시 도를 지키고 이치에 따르며 사람을 사랑하여 사물에까지 도달하는 뜻에서 나왔다. 공석이 소무(邵武)의 읍재가 되어 바야흐로 총명함과 자애로움으로 백성들을 얻었는데, 군이 갑자기 병을 얻어 사사(寺舍)에서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마치 친척을 슬퍼하듯이 실성하거나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때가 소희(紹熙) 5년 12월 병인(丙寅)이었다.
君姓陳氏, 諱衡, 字公權. 曾祖確 ․ 祖□ ․ 父□皆不仕, 世爲福州侯官縣人. 及君之生, 質直嚴重, 謹然諾, 寡言笑, 飮食起居有常度, 寒暑不易. 危坐終日, 對妻子未嘗見齒. 雖嚴于家, 而與鄕人處則歛退樂易, 唯恐失色於人. 虛懷待物, 不疑人欺, 遭詐取直無慍. 責逋於人, 愧若己負, 以故不能治生而安於貧. 嘗曰 : ‘吾不怨人, 亦莫余怨 ; 不侮人, 亦莫余侮也.’ 中歲益貧, 乃闔門以敎子爲事. 奉養靳靳, 而資其子使從師友講學, 至解衣無吝色. 起居晨夜, 必以身率之, 其勤約人所不堪, 而君處之裕如也. 已而諸子擧進士有名, 仲子孔碩登科, 從宦所涖多可紀. 人意其繩約少寬, 而君訓飭彌厲, 未嘗假以言色. 其平居所以告語之者隨事不同, 而要其歸, 必出於守道循理 ․ 愛人及物之意. 孔碩爲邵武宰, 方以聰明慈愛甚得其民, 而君遽以疾終于寺舍. 市里聞之, 無不失聲嘆吒, 如悲親戚, 紹熙五年十二月丙寅也.
평생토록 불교나 무속의 현혹된 학설을 좋아하지 않아 병이 들어도 후인을 위해 끼친 경계를 모두 물리치고 쓰지 않았다. 타고난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 비록 묻고 배우지 않았어도 마침내 이와 같이 세속에서 저절로 특출하였다. 처음에는 경수(慶壽)에 모관(某官)을 은혜롭게 받고 사양하였으나 이윽고 다시 효종과 광종이 등극하여 명당(明堂)의 은혜를 입고 여러 차례 선교랑에 올라 오품의 관복을 제수받았다.
平生不喜僧道巫覡誑誘之說, 及病, 遺戒悉擯不用. 蓋其天資有過人者, 故雖未嘗問學, 而卒能有以自拔於流俗乃如此. 初以慶壽恩授某官致仕, 旣再遇登極及明堂恩, 累階宣敎郞, 賜五品服.
같은 고을의 황씨(黃氏)와 혼인했는데 의인(宜人)에 봉해졌지만 먼저 세상을 떠나 민청현(閩淸縣) 하은리(賀恩里) 대장의 들에 장사지냈다. 이에 이르러 공숙(孔夙) 등이 장차 공의 시신을 받들어 이곳에 합장하고 삼가 글을 써서 가져왔다. “여러 자식들이 불효하여 거듭 민망하고 흉측한 일을 당했습니다. 전일에 선생께서 이미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명(銘)을 지어주었는데 지금은 잃어버리고 없으니 공숙 형제가 지하에서 선인을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감히 눈물 흘리며 청하옵건대 오직 선생께서 가엽게 여기소서.” 이 때에 나는 바야흐로 죄를 짊어지고 문을 걸어 닫고 질책을 기다리며 감히 다시 붓과 벼루를 가까이 하지 않고 사장(辭章)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행장을 읽어보니 마음속에 부끄러운 바가 있어 몰래 서술하여 명을 짓는다. 자손과 남녀는 이미 모친 전지(前志)황씨의 지(志)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드러내지 않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말을 하면 문지방을 넘지 않았고 길을 가는 것은 고을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허물하지 않으니 내가 어찌 남의 근심이 되겠습니까? 남은 즐거움을 여기에 실어 언덕으로 갑니다. 천한 내가 장부가 된 것이 어찌 그 기회를 틈타 세속에 편승한 것이겠습니까?”
娶同郡黃氏, 封宜人, 先卒而葬于閩淸縣賀恩里大將之原. 至是孔夙等將奉公柩以合焉, 亟以書來曰 : “諸孤不孝, 薦遭閔凶. 前日先生旣嘗幸哀而賜之銘矣, 今而闕焉, 是使孔夙兄弟無以見先人於地下也. 敢泣以請, 惟先生憐之.” 時予方以負罪杜門俟譴, 不敢復近筆硯, 爲辭章. 然讀其狀, 於中若有愧焉, 因竊敍而銘之. 其子孫男女已具前志, 此不復出. 銘曰 :
言之出, 不踰閾. 行之長, 不滿鄕. 人莫我尤, 我豈人憂? 載此餘驩, 以適其丘. 吾淺之爲丈夫者, 又安能窺其際而涉其流乎!
범직각 묘기(范直閣墓記)
송나라의 옛 좌조산랑(左朝散郞), 직비각(直秘閣)은 태주 숭도관의 휘 여규(如圭)요 자 백달(伯達)인 범공(范公)이 주관했다. 증대부(曾大父)는 이겸(履謙)이었으며 비(妣)는 원씨였다. 대부(大父)는 보지(補之)요, 비(妣)는 이씨(李氏)와 동씨(童氏)였다. 부(父)는 순거(舜擧)인데, 종사랑(從事郞)으로 여러 차례 좌조의대부를 증직 받았다. 비(妣)는 호씨(胡氏)요, 계비는 섭씨(葉氏)였는데 모두 공인(恭人)으로 증직받았다. 대부(大父) 이상은 대대로 건주(建州) 건양현(建陽縣)의 유원(由原)에 거처하였으며, 선대부(先大夫)가 비로소 장강(漳江) 가에 거처하여 마침대 형문군(荊門軍) 당양현(當陽縣) 사람이 되었다.
宋故左朝散郞 ․ 直秘閣 ․ 主管台州崇道觀范公諱如圭, 字伯達. 曾大父履謙, 妣阮氏. 大父補之, 妣李氏 ․ 童氏. 父舜擧, 從事郞 ․ 累贈左朝議大夫. 妣胡氏, 繼葉氏, 俱贈恭人. 大父以上世家建州建陽縣之由原, 先大夫始居漳濱, 遂爲荊門軍當陽縣人.
숭녕(崇寧) 원년 임오(壬午) 9월 기축(己丑) 사시(巳時)에 구씨(舅氏) 호문정공 형남 학관의 관아에서 태어나 이미 고아가 되어 스스로 분발하였으며, 문정공으로부터 춘추학(春秋學)을 배웠다. 진사에 올라 건염(建炎) 2년 조정에서 대책을 세우는데 말이 간절하고 반듯했다. 장화공(張和公)이 당시에 고관(考官)이 되어 급제자 가운데 수석으로 선발되었는데 같은 반열에 설 수 없어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종사랑(從事郞)을 제수받고 무안군(武安軍) 절도사로 관직을 옮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관직을 그만두고 상(喪)이 끝나자 외삼촌 섭공(葉公) 벽(辟)을 따라 강남동로(江南東路)의 안무사가 되었는데 글을 기계로 베끼는 것처럼 문자가 아름다웠다. 시관직의 부름으로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를 제수받고 예전처럼 사관교감(史館校勘)을 겸하였다. 소흥(紹興) 10년 봄에 휴가를 청하여 형문으로 가서 선대부(先大夫)와 공인(恭人)의 영구를 옮겨 건양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공이 관청에서 시정을 논할 때에는 자주 재상과 뜻이 합치되지 않았으나 이에 이르러 마침내 봉사(奉祠)를 청하여 태주의 숭도관을 주관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도 번번이 다시 청하여 10년에 걸쳐 세 번이나 사관(祠官)이 되었다. 19년에 소주(邵州)에 통판으로 부임했다. 임기가 만료되어 형남부의 통판으로 옮기고 비단이 하사되었다. 27년에 부름을 받고 임금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임금께서 직비각과 강남서로의 상평다염공사에 제수했다. 임기가 남았는데 이주로(利州路)의 제점형옥공사에 제수되었다. 가는 도중에 건저(建儲)에 대한 대책을 상서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때마침 눈에 병이 들어 사양하고 가지 않았는데, 숭도관을 주관하게 되었다. 29년 가을, 다시 천주(泉州)를 다스렸다. 10월에 군에 이르러 폐단을 개혁하고 강자들을 억누르자 사람들이 바야흐로 은덕을 받고 귀한 권세에 아첨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궁관이 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어 논리를 세워 스스로 청하여 궁관이 되었다. 다음해 정월이 지나 비로소 궁관의 명을 받고 곧바로 그날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4월에 칙령을 받고 다시 숭도관을 주관했지만 공은 이미 병이 들었다. 6월 을축에 소무군 우거(寓居)의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9세요, 이 해는 소흥 30년(1160) 경진(庚辰)이다.
以崇寧元年玄黓敦䍧九月己丑巳時生於舅氏胡文定公荊南學官廨中, 旣孤自奮, 從文定公受春秋學. 擧進士, 建炎二年對策廷中, 語切直. 張和公時爲考官, 第爲首選, 同列不可, 於是以乙科賜及第, 授從事郞 ․ 武安軍節度推官. 以母喪解職, 服除, 從外舅葉公辟, 爲江南東路安撫司書寫機宜文字. 召試館職, 除秘書省正字, 兼史館校勘如故. 紹興十年春, 謁告如荊門, 遷奉先大夫 ․ 恭人之柩歸葬建陽. 始, 公在館數陳論時政, 與宰相意不合, 至是遂請奉祠, 差主管台州崇道觀. 秩滿, 輒復請, 由是歷十載, 三爲祠官. 十九年, 添差通判邵州. 秩滿, 差通判荊南府, 賜緋. 二十七年, 召赴行在. 上殿, 直秘閣 ․ 提擧江南西路常平茶鹽公事. 歲餘, 除利州路提點刑獄公事. 在道上書論宗社大計, 有人所難言者. 會有目疾, 辭得不行, 差主管崇道觀. 二十九年秋, 起知泉州. 十月到郡, 革弊抑强, 人方受其賜而貴勢不以爲便, 俄有旨與官觀, 理作自陳. 越明年正月, 始被命, 卽日罷歸. 四月受敕, 復爲主管崇道觀, 而公已病矣. 六月乙丑, 卒于邵武軍寓居之正寢, 享年五十有九, 而是歲紹興三十年上章執徐也.
공의 부인은 섭씨(葉氏)로 우문전 수찬인 종악(宗諤)의 딸이며 안인(安人)에 봉해졌다. 아들은 셋을 두었는데 장남 염조(念祖)는 우적공랑(右迪功郞)이다. 차남은 염덕(念德)이고 그 다음은 염자(念玆)이다. 염자는 공이 돌아가시고 18일 뒤에 죽었는데 17세였다. 딸은 두 명인데 장녀는 우승무랑(右承務郞) 절지상(折知常)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등사랑(登仕郞) 유평(劉玶)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남자 네 명과 여자 한 명이 있는데 모두 너무 어렸다. 그 해 9월 갑신(甲申)에 여러 자식들은 공의 상을 받들어 건양현 위곡산(渭曲山)으로 돌아가 장사지냈다. 삼가 공의 가계와 벼슬과 고향과 시종의 대강을 적어 광중에 넣는다. 경술(經術)과 행의(行誼), 출처의 상세함은 장차 선생과 군자들 가운데 공을 잘 아는 사람에게 청하여 묘좌에 새겨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 종표질, 좌적공랑(左迪功郞) 감담주남악묘(監潭州南嶽廟)의 주희 삼가 쓰다.
公娶葉氏, 右文殿修撰宗諤之女, 封安人. 子男三人, 長念祖, 右迪功郞. 次念德, 次念玆. 念玆後公十八日而亡, 年十有七矣. 女二人, 長適右承務郞折知常, 次適登仕郞劉玶. 孫男四人, 女一人, 皆尙幼. 其年九月甲申, 諸孤奉公喪歸葬建陽縣渭曲山. 謹次公姓系 ․ 爵里 ․ 始終梗槪納諸壙中以識. 若經術 ․ 行誼出處之詳, 則將請于先生君子深知公者, 刻辭墓左, 以明示後世云. 從表姪 ․ 左迪功郞 ․ 監潭州南嶽廟朱熹謹記.
황고 좌승의랑 수상서리부원외랑 겸 사관교감 주부군 천묘기
(皇考左承議郞守尙書吏部員外郞兼史館校勘朱府君遷墓記)
선부군(先府君)의 휘는 송(松)이요, 자는 교년(喬年)이며, 성은 주씨(朱氏)이고, 휘주(徽州) 무원(婺源) 출신이다. 증조의 휘는 진(振)이고, 조의 휘는 현(絢)이며 비(妣)는 모두 왕씨(汪氏)이다. 고(考)의 휘는 삼(森)이며 비(妣)는 정씨(程氏)이다. 삼대가 모두 벼슬하지 않았으며 부모님은 부군(府君) 때문에 돌아가신 후 승사랑(承事郞)과 유인(孺人)으로 추증되었다.
先府君諱松, 字喬年, 姓朱氏, 徽州婺源人. 曾祖諱振, 祖諱絢, 妣皆汪氏. 考諱森, 妣程氏. 三世皆不仕, 考妣以府君故贈承事郞 ․ 孺人.
부군은 소성(紹聖) 4년 윤2월 무신에 태어났는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고상한 지조와 큰 절개를 가지고 있었으며, 글 솜씨가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화(政和) 8년(1118년) 동상사(同上舍) 출신으로 적공랑, 건주 정화현 위관을 제수받았다. 승사공이 돌아가시자 가난하여 장례를 치루지 못하다가 읍에서 장사지내고 유관(遊官)으로 민중(閩中)을 왕래했다. 처음에는 구산(龜山) 양씨(楊氏) 문인으로부터 대학과 중용의 학문을 배우고 남검주(南劍州) 우계현(尤溪縣)의 위관으로 부임하여 천주(泉州) 석정진(石井鎭)의 세무를 담당하고 좌종정랑(左從政郞)을 역임했다. 소흥 4년9(1134) 불러서 비서성 정자(正字)를 제수했다. 집안의 우환을 당하여 복이 끝나자 부름에 응하여 선교랑(宣敎郞)으로 옮기고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을 제수받았다. 저작좌랑(著作佐郞), 상서도지원외랑(尙書度之員外郞) 겸 사관교감(史館校勘)으로 옮겼다. 사훈(司勳), 이부(吏部) 양조(兩曹)를 역임했는데 모두 예전과 같은 사직(史職)을 제수받았다. 사로전봉의랑(史勞轉奉議郞), 연로전승의랑(年勞轉承議郞)에 등용되었다. 승상 조충간공(趙忠簡公), 장충헌공(張忠獻公)은 모두 부군을 잘 알았지만 등용하지 못하고 떠났는데, 진회(秦檜)는 이것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부군은 또한 바야흐로 동열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오랑캐와 화합하는 것이 유리한 일이 아니라고 심하게 논하자 진회가 더욱 분노하여 부군을 요주(饒州)의 지사로 보내버렸다. 아직 청간(請間)이 도달하기 않아 태주 숭도관을 주관하게 되었다. 13년 3월 신해(辛亥)에 건주(建州) 성남(城南)의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47세였다. 문집으로는 『위재집(韋齋集)』 12권이 있다.
府君生於紹聖四年閏二月戊申, 性至孝, 有高志大節, 落筆語輒驚人. 政和八年, 以同上舍出身授迪功郞 ․ 建州政和縣尉. 承事公卒, 貧不能歸, 因葬其邑, 而遊官往來閩中. 始從龜山楊氏門人爲大學 ․ 中庸之學, 調南劍州尤溪縣尉, 監泉州石井鎭稅, 循左從政郞. 紹興四年召試, 除秘書省正字. 丁內艱, 服除召對, 改直敎郞, 除秘書省校書郞. 遷著作佐郞 ․ 尙書度支員外郞, 兼史館校勘. 歷司勳 ․ 吏部兩曹, 皆領史職如故. 以史勞轉奉議郞, 以年勞轉承議郞. 丞相趙忠簡公 ․ 張忠獻公皆深知府君, 未及用而去, 秦檜以是忌之. 而府君又方率同列極論和戎不便, 檜益怒, 出府君知饒州. 未赴請間, 差主管台州崇道觀. 以十三年三月辛亥卒于建州城南之寓舍, 年四十有七. 所爲文有韋齋集十二卷.
같은 군의 축씨(祝氏)와 혼인했는데, 처사 확(確)의 딸로 유인(孺人)에 봉해지고 부군보다 27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희(熹)는 일찍이 좌적공랑(左迪功郞), 추밀원편수관(樞密院編修官)이 되었다. 딸은 우적공랑인 장정현(長汀縣) 주부(主簿) 유자상(劉子翔)에게 시집보냈다. 손자 숙(塾), 야(埜), 재(在)와 손녀 손(巽), 태(兌)는 모두 어리다.
娶同郡祝氏, 處士確之女, 封孺人, 後二十七年卒. 男熹, 嘗爲左迪功郞 ․ 差充樞密院編修官. 女嫁右迪功郞 ․ 長汀縣主簿劉子翔. 孫男塾 ․ 埜 ․ 在, 女巽 ․ 兌皆幼.
처음 부군이 장차 돌아가시려고 할 때, 숭안(崇安)의 오부(五夫)에 장사지내려고 했다. 돌아가신 다음 해에 드디어 마을의 영범원(靈梵院) 옆에 묻었다. 당시 주희는 어려서 일을 고치지 못하였는데 점을 쳐보니 상서롭지 못했다. 이윽고 혼백이 편안하지 못할까 두려워 건도 6년 7월 5일에 마을의 백수(白水) 아자봉(鵝子峰) 아래로 옮겼다. 주희는 울부짖으며 따르면서 마음과 몸이 몹시 아팠다. 거듭 선군께서 이미 그 뜻을 믿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며 희는 또한 닮은 바가 없어 만분의 일이라도 드러낼 방법이 없어 감히 성명과 가계, 관직, 지업(志業)의 대강을 차례대로 서술하여 돌에 새겨 묘에 넣어두고 장차 작문을 청하여 수(隧)에 나타내고자 생각하였다. 넓은 하늘도 끝이 없으니 아아, 슬프구나.
初, 府君將沒, 欲葬崇安之五夫. 卒之明年, 遂窆其里靈梵院側. 時憙幼未更事, 卜地不詳. 旣懼體魄之不獲其安, 乃以乾道六年七月五日遷于里之白水鵝子峰下. 熹攀慕號殞, 痛貫心骨. 重惟先君旣不得信其志以沒, 而憙又無所肖似, 不能有以顯揚萬分, 敢次敍姓系 ․ 官閥 ․ 志業梗槪, 刻而揜諸幽, 且將請文作者, 以表其隧. 昊天罔極, 嗚呼痛哉!
상서이부원외랑 주군 유인 축씨 광지(尙書吏部員外郞朱君孺人祝氏壙誌)
선비(先妣) 유인(孺人) 축씨(祝氏)는 휘주(徽州) 흡현(歙縣) 사람이다. 그 선조는 휘주의 대성(大姓)으로 아버지의 휘는 확(確)인데, 처음부터 유학을 업으로 삼아 고상한 행실이 있었다. 같은 군의 유씨(喩氏)와 혼인하여 원부(元符) 3년 7월 경오에 유인(孺人)을 낳았다. 성품이 인후하고 정숙하여 18세에 휘 송(松), 자 교년(喬年), 성 주씨(朱氏)인 우리 선군과 혼인했다. 시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군께서 교중비서(校中秘書)로 금호(今號)를 내렸다. 선군이 돌아가셨을 때 나[주희]의 나이는 겨우 14세였다. 그런데 유인께서 겨우 교육을 시켜 향할 바를 알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장성했는데도 어리석어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고 가난과 병마로 곤궁하게 지냈다.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일이지만 유인(孺人)께서는 의연하게 처리하셨다. 건도(乾道) 5년(1170년) 9월 무오에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70세였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일찍 죽고 희(熹)가 막내이다. 일찍이 좌적공랑(左迪功郞)이 되고 추밀원 편수관으로 파견되었다. 딸은 하나인데 우적공랑 장정현(長汀縣) 주부(主簿) 유자상(劉子翔)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숙(塾), 야(埜), 재(在)가 있고, 손녀는 손(巽)과 태(兌)인데 모두 어리다. 다음 해 정월 계유를 지나 건영부 건양현 뒷산 천호(天湖)의 양지에 장사지냈는데, 선군 백수(白水)의 묘와의 거리가 동북쪽으로 백여 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불효자 희는 모운절(慕隕絶)을 부르며 감히 광중에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하노라. 넓은 하늘도 끝이 없으니 아아, 슬프구나.
先妣孺人祝氏, 徽州歙縣人. 其先爲州大姓, 父諱確, 始業儒, 有高行. 娶同郡喩氏, 以元符三年七月庚午生孺人. 性仁厚端淑, 年十有八, 歸于我先君諱松, 字喬年, 姓朱氏. 逮事舅姑, 孝謹篤至, 有人所難能者. 以先君校中秘書賜今號. 及先君卒, 熹年才十有四. 孺人辛勤撫敎, 俾知所向. 不幸旣長而愚, 不適世用, 貧病困蹙, 人所不堪, 而孺人處之怡然. 乾道五年九月戊午卒, 年七十. 生三男, 伯仲皆夭, 熹其季也. 嘗爲左迪功郞, 差充樞密院編修官. 一女, 適右迪功郞 ․ 長汀縣主簿劉子翔. 孫男塾 ․ 埜 ․ 在, 女巽 ․ 兌皆幼. 越明年正月癸酉, 葬于建寧府建陽縣後山天湖之陽, 東北距先君白水之兆百里而遠. 不孝子熹號慕隕絶, 敢竊記壙中如此. 昊天罔極, 嗚呼痛哉!
지현하공광지(知縣何公壙誌)
군의 성은 하씨(何氏)요 휘는 호(鎬)이며 자는 숙경(叔京)이고 소무군 소무현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태(兌)이며 좌조봉랑(左朝奉郞)이었다. 어머니 진씨(陳氏), 유씨(劉氏), 임씨(林氏), 등씨(鄧氏)는 모두 안인(安人)으로 봉해졌으며 군은 유씨 소생이다. 조봉공은 은보장사랑을 물러나자 다시 우적공랑, 천주(泉州) 안계현(安溪縣) 주부(主簿)를 제수받았다. 강남서로 안무사가 되었는데 글을 기계로 베끼는 것처럼 문자가 아름다워 정주(汀州) 상항현(上杭縣)의 승(丞)으로 발탁되고 종정랑(從政郞) 담주 선화현 현령에 올랐다. 벼슬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순희(淳熙) 2년(1175년) 11월 정축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8세였다. 같은 고을 이씨(李氏)와 혼인하여 아들 셋을 두었는데 염(琰), 섭(王燮), 우(瑀)이다. 딸도 셋을 두었는데 첫 번째 사위는 오대동(吳大同)이고 둘째 사위는 풍동(馮棟)이며 셋째는 혼인하지 않았다.
君姓何氏, 諱鎬, 字叔京, 邵武軍邵武縣人. 父諱兌, 左朝奉郞. 母陳氏 ․ 劉氏 ․ 林氏 ․ 鄧氏, 皆封安人, 而君劉出也. 以朝奉公致事恩補將仕郞, 更授右迪功郞 ․ 泉州安溪縣主簿. 辟江南西路安撫司書寫機宜文字, 調汀州上杭縣丞, 陞從政郞 ․ 潭州善化縣令. 未上, 以淳熙二年十一月丁丑晦卒于家, 年四十有八. 娶同郡李氏. 子男三人 : 琰 ․ 王燮 ․ 瑀. 女三人, 長壻吳大同, 次馮棟, 季未行也.
군은 타고난 자질이 소탈하고 관대하며, 검소하고 정숙하여 욕심이 적었으며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처음에 조봉공은 옛 전원(殿院)이었던 동평(東平) 마공신(馬公伸)에게 학문을 배우고, 하남정씨(河南程氏)에게 중용(中庸)의 설을 전수받았으며, 독실하게 믿고 힘껏 행하여 죽을 때까지 게으름이 없었다. 그리고 군은 또한 전수 받은 것을 침착하게 길러 선대의 위업을 돈독하게 했다. 고을을 돕는 데는 은혜와 사랑이 있었고 저서도 수만 언(言)이 있다. 아들 염(琰) 등은 장차 4년 3월 모일에 대계 동석의 들에 군을 장사지내고 친구인 신안 주희가 광중에 이와 같이 기록하며, 장차 상세한 서술은 묘상에 밝힌다.
君天資夷曠, 廉靜寡欲, 有過人者. 始, 朝奉公學於故殿院東平馬公伸, 受河南程氏中庸之說, 篤信力行, 沒身不怠. 而君又得其傳, 培殖從容, 克篤前烈. 佐邑有惠愛, 著書數萬言. 琰等將以四年三月某日葬君臺溪東碭之原, 其友新安朱熹爲識壙中如此, 且將敍次其詳, 以表于墓上云.
유추밀묘기-대유평부(劉樞密墓記代劉平父)
공의 휘는 공(珙), 자는 공보(恭父), 성은 유씨(劉氏)이며 대대로 건녕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 사람이었다. 증조의 휘는 민선(民先)으로 예전에 승사랑을 역임했고 여러 차례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증직되었다. 비는 황씨(黃氏)로 팽성군부인(彭城郡夫人)이다. 조의 휘는 겹(韐)으로 예전에 자정전(資政殿) 학사(學士)를 역임했고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현(忠顯)인데 이로 인하여 태사(太師)에 증직되었다. 비는 이씨(李氏)로 진국부인(秦國夫人)이다. 계비 여씨(呂氏)는 한국부인(韓國夫人)이다. 아버지의 휘는 자우(子羽)로 예전에 우조의대부(右朝議大夫)를 역임했고 휘유각(徽猷閣) 대제(待制)를 겸하고 이로 인하여 소부(少傅)에 증직되었다. 비는 웅씨(熊氏)로 복국부인(福國夫人)이다. 계비 탁씨(卓氏)는 경국부인(慶國夫人)이다.
公諱珙, 字恭父, 姓劉氏, 世爲建寧府崇安縣人. 曾祖諱民先, 故任承事郞, 累贈太子太保. 妣黃氏, 彭城郡夫人. 祖諱韐, 故任資政殿學士, 銀靑光祿大夫, 謚忠顯, 累贈太師. 妣李氏, 秦國夫人. 繼呂氏, 韓國夫人. 父諱子羽, 故任右朝議大夫, 充徽猷閣待制, 累贈少傅. 妣熊氏, 福國夫人. 繼卓氏, 慶國夫人.
공은 선화(宣和) 4년(1122) 2월 10일 묘시(卯時)에 태어났다. 건염(建炎) 3년(1129)에 충현공이 은보승무랑(恩報承務郞)에서 물러났다. 소흥 12년(1143)에 진사에 급제하여 소흥부(紹興府)에 있는 성도(城都)에서 세무를 담당했다. 부임하기 전에 담주 남악묘를 담당했다. 소흥 15년 서외돈종원(西外敦宗院)을 주관했다. 16년에 전승사랑을 마감했다. 10월에 소부공(少傅公 : 아버지)의 근심을 당했는데 복을 벗기도 전에 한국부인이 돌아가시자 공은 적손(嫡孫)으로 승중(承重)했다. 21년에 복을 벗고 왕궁(王宮)의 대소학 교수로 파견되었다. 24년 4월에 비서성(秘書省) 교감서적관(校勘書籍官)을 임시로 맡고 또 예부랑관(禮部郞官)을 임시로 맡았다. 6월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맡았다. 12월에 전선교랑(轉宣敎郞)을 마감했다. 25년 5월에 그만두었다. 26년에 태주 숭도관을 주관했다. 28년에 행재소로 부름을 받고 가는 길에 대종정승(大宗正丞)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9년에 전봉의랑(轉奉議郞)을 마감하고 비서승(秘書丞)으로 옮겼다. 30년에 이부랑관(吏部郞官)을 겸했다. 4월에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에 임관했다가 다시 찰어사(察御史)를 맡았다. 10월에 다시 이부원외랑이 되었다. 31년 정월에 비서소감(秘書少監)을 겸했다. 6월에 기거사인(起居舍人)에 부임했다. 9월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겸직했다. 10월에 직학사원(直學士院)을 겸직했으며 임금을 따라 건강(建康)으로 행차했다. 32년 3월에 중서사인을 제수받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5월에 바로 직학사원을 겸했다. 8월에 임금을 호위했던 공으로 승의랑(承議郞)으로 옮겼다. 지금의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은택이 미쳐 조봉랑(朝奉郞)으로 옮겼다. 조의대부(朝議大夫)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도와 대금(大金)에 봉사했다. 임금께서 공이 사사로움이 없이 일을 마땅하게 처리하자 특별히 어찰(御札)을 하사해 표창했다. 당시에 처음으로 금나라 사람과 의논할 때 적국의 예로 대할 것인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경을 나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융흥(隆興) 원년 2월에 조산랑(朝散郞)으로 옮겼다. 11월에 집영전(集英殿) 수찬을 제수받고 지천주(知泉州)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년 2월에 구주(衢州)로 옮겼다. 건도(乾道) 원년 3월에 부문각(敷文閣) 대제(待制), 담주 지사, 형호남로(荊湖南路) 안무사에 제수되었다. 침(郴) 지역에서 이금(李金)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어찰을 하사해 표창하고 또한 부문각 직학사(直學士)로 부임했다. 3년 정월에 임금이 불러서 궁궐로 갔다. 8월에 궐에 도착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 겸 시독(侍讀)을 제수받았다. 교사(郊祀)의 은전으로 건안현 개국남에 봉해지고 삼백호의 식읍을 받았다. 11월에 중대부(中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4년 7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겸했다. 8월에 단명전 학사를 제수받고 외궁관(外宮觀)에 있었다. 융흥부 지사와 강남서로 안무사로 옮겼다. 5년 4월 자정전(資政殿) 학사, 형남부 지사, 형호북로 안무사를 제수받았다. 6월에 왕의 뜻을 받아 형양(荊襄)의 변면(邊面)에 조치되었다. 6년 9월에 경국부인(慶國夫人)의 우환을 당했다. 7년 3월에 동지추밀원사로 다시 회복되고 나아가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지고 식읍 4백호가 더해졌는데 실제는 1백호에 봉해졌다. 공은 거듭 사양하며 따르지 않았는데 또 형양 선무사로 임명되고 옛 동지추밀원사에 의지했다. 내시성(內侍省) 내시전의 우두머리 서칭(徐偁)에게 가서 어찰을 주고 선압주사(宣押奏事)했다. 공은 또한 네 번 말하고 마침내 죽일 수 있었다. 8년 12월에 복을 벗고 담주 지사, 형호남로 안무사로 부임했다. 벼슬도 오르고 식읍도 더해졌는데 실지로는 예전과 같았다. 9년 3월에 궐주사(闕奏事)로 가서 대학사로 나아가 행했다. 순희 2년 정월에 건강부 지사, 강남동로 안무사로 부임하여 행궁유수(行宮留守)를 겸했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임금의 은혜로 팽성군(彭城郡) 개국후(開國侯)를 봉해받고 식읍 3백호가 더해졌다. 7월에 성을 다스린 공로로 하나의 관직이 바뀌었지만 공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0월에 진발금군교열(津發禁軍敎閱)로 바뀌었는데 허락하여 받아들였다. 3년 3월에 장수를 축하하는 은혜로 식읍 3백호가 더해졌으나 실제는 1백호를 봉해받았다. 6월에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바뀌었다. 7월에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끝내자 임금에게 표창을 받았다. 11월에 또 어찰, 안마(鞍馬)와 기물을 받았다. 4년 3월에 거수적효(居守績效)가 현저하여 관문전(觀文殿) 학사를 제수받았다. 4월에 3년간의 교사를 행한 은택으로 식읍 3백호가 더해졌다. 5년 윤6월, 병 때문에 거듭 봉사(奉祀)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내시성 서두공봉관 육언례(陸彦禮)에게 조서를 보내 한림의전진어맥(翰林醫痊診御脈) 주소(周昭)가 공의 병을 살펴보고 치료하도록 했다. 아직 도착하기 전인 7월 3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7세였다. 통의대부로 바뀌어 물러났는데 광록대부에 증직되고 임금이 하루 동안 조회를 멈추고 건강부(建康府)에 조서를 내려 사람들을 보내도록 하고, 건녕부에 조서를 내려 장례를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몸소 후은(後恩)을 말하여 유사에게 뜻을 잘 갖추도록 명령했다.
公生於宣和四年二月十日卯時. 建炎三年, 以忠顯公致仕恩補承務郞. 紹興十二年, 中進士第, 調紹興府在城都稅務. 未赴, 改監潭州南嶽廟. 十五年, 差主管西外敦宗院. 十六年, 磨勘轉承事郞. 十月, 丁少傅公憂, 服末除, 而韓國夫人薨, 公以嫡孫承重. 二十一年, 服除, 差諸王宮大小學敎授[一]. 二十四年四月, 權秘書省校勘書籍官, 又權禮部郞官. 六月, 權中書舍人. 十二月, 磨勘轉宣敎郞. 二十五年五月罷. 二十六年, 差主管台州崇道觀. 二十八年, 召赴行在, 除大宗正丞, 未赴. 二十九年, 磨勘轉奉議郞, 改秘書丞. 三十年, 兼權吏部郞官. 四月, 除吏部員外郞, 改監察御史. 十月, 復爲吏部員外郞. 三十一年正月, 兼權秘書少監. 六月, 除起居舍人. 九月, 兼權中書舍人. 十月, 兼權直學士院, 從車駕幸建康. 三十二年三月, 除中書舍人, 賜紫金魚袋. 五月, 正兼直學士院. 八月, 以扈從恩轉承議郞. 今上登極, 覃恩轉朝奉郞. 借朝議大夫 ․ 禮部尙書奉使大金. 上以公辟置官屬公當, 特賜御札獎諭. 時始議與金人爲敵國之禮未決, 以故未出疆而復. 隆興元年二月, 磨勘轉朝散郞. 十一月, 除集英殿修撰 ․ 知泉州, 未赴. 二年二月改衢州. 乾道元年三月, 除敷文閣待制 ․ 知潭州 ․ 荊湖南路安撫使. 以平郴賊李金功, 賜御札獎諭, 又除敷文閣直學士. 三年正月, 召赴行在. 八月到闕, 除翰林學士 ․ 知制誥, 兼侍讀. 以郊祀恩, 封建安縣開國男, 食邑三百戶. 十一月, 除中大夫 ․ 同知樞密院事. 四年七月, 兼參知政事. 八月, 除端明殿學士, 在外宮觀. 改知隆興府 ․ 江南西路安撫使. 五年四月, 除資政殿學士 ․ 知荊南府 ․ 荊湖北路安憮使. 六月, 被旨措置荊襄邊面. 六年九月, 丁慶國夫人憂. 七年三月, 起復同知樞密院事, 進封開國伯, 加食邑四百戶 ․ 實封一百戶. 公再辭不允, 又除荊襄宣撫使, 依舊同知樞密院事. 差內侍省內侍殿頭徐偁賜以御札, 宣押奏事. 公又四辭, 乃得終喪. 八年十二月, 服除, 除知潭州 ․ 荊湖南路安撫使. 進爵 ․ 加食邑 ․ 實封如前. 九年三月, 赴闕奏事, 進大學士以行. 淳熙二年正月, 除知建康府 ․ 江南東路安撫使, 兼行宮留守. 未幾, 復以恩徙封彭城郡開國侯, 加食邑三百戶. 七月, 以脩城功轉一官, 公辭不受. 十月, 又以津發禁軍敎閱轉一官, 許回受. 三年三月, 以慶壽恩, 加食邑三百戶 ․ 實封一百戶. 六月, 又轉太中大夫. 七月, 以賑濟事畢賜詔獎諭. 十一月, 又賜御札 ․ 鞍馬 ․ 器物. 四年三月, 以居守績効顯著, 除觀文殿學士. 四月, 以三年郊祀恩, 加食邑三百戶. 五年閠六月, 以疾再請奉祠[二], 不允, 遂乞致仕. 詔遣內侍省西頭供奉官陸彦禮宣押翰林醫痊診御脈周昭胝治公疾. 未至, 七月三日薨, 享年五十有七. 轉通議大夫致仕, 贈光祿大夫, 輟視朝一日, 詔建康府應副人夫津發, 又詔建寧府應辦葬事, 身後恩數, 令有司具條取旨.
공은 여씨(呂氏)와 혼인했는데, 병부상서 지(祉)의 딸이었으며 신정군부인(新定郡夫人)에 추봉되었다. 계실(繼室) 한씨(韓氏)는 위국 충헌공(忠獻公)의 원손(元孫)으로 신흥부인(新興夫人)에 추봉되었다. 또 그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숙인(淑人)에 추봉되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학아(學雅)는 승무랑(承務郞)이다. 학구(學裘)는 아직 어리다. 딸이 둘 있는데 장녀는 장사랑(將仕郞) 여흠(呂欽)에게 시집갔는데 공의 일을 맡았다. 차녀는 출가하지 않았다.
公娶呂氏, 兵部尙書祉之女, 追封新定郡夫人. 繼室韓氏, 魏國忠獻公之元孫, 追封新興夫人. 又娶其女弟, 追封淑人. 子男二人, 曰學雅, 承務郞. 曰學裘, 尙幼. 女二人, 長適將仕郞呂欽, 公所任也. 次在室.
점을 쳐서 6년 2월 을사에 구녕현(甌寧縣) 자선향(慈善鄕) 풍악리(豐樂里) 현양(顯揚) 묘담(妙湛) 선사(禪寺)의 남쪽에 장사지냈는데 공의 뜻을 따른 것이다. 평(玶)은 공이 평생토록 조정에서 큰 절개를 드러내어 해내(海內)에 전해졌지만 진실로 기술되어 전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스림을 행한 계책과 정미한 곡절에 대해서는 또한 후세에 상세하게 서술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바야흐로 장차 토론하여 찬(撰)을 짓고 이어서 명(銘)을 작자에게 청했는데 돌이켜보건대 또한 완성하지 못하고 장례 날이 이미 임박해버려 삼가 공의 경력과 문벌을 이상과 같이 대략 서술하여 돌에 새겨 광중에 넣는다. 논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수도(隧道)의 비에 드러내길 바란다. 종제(從弟) 종사랑(從事郞) 평(玶)이 눈물 흘리며 서술한다.
卜以六年二月乙巳葬於甌寧縣慈善鄕豐樂里顯揚妙湛禪寺之南, 從公志也. 玶惟公平生大節顯於朝廷, 傳於海內, 固已不待夫記述而傳矣. 然其謀猷行治曲所精微之際, 則又有不可不詳載以俟後世者. 方將討論撰次而請銘於作者, 顧又未及就篇而葬日已迫, 謹略敍公始終閥閱如右, 刻而納諸壙中. 它所欲論著者, 尙見於隧道之碑云. 從弟從事郞玶涕泣敍次.
정복지묘기(丁復之墓記)
복의 이름은 요(堯)이고 성은 정씨(丁氏)이며 건녕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 상매리(上梅里)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애(愛)이고 어머니는 모씨(某氏)이다. 복의 사람됨은 돈후하고 인자하여 깊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나를 따라 여러 해 동안 교유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어 붕우들이 슬퍼하지 않음이 없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아무개와 아무개이다. 순희(淳熙) 12년(1186년) 겨울 11월 모일에 세상을 떠나자 모월 모일에 아버지가 모처에 장사지냈다. 친구인 채군계통(蔡君季通)이 그 일을 실제로 도왔다. 신안 주희 쓰다.
復之名堯, 姓丁氏, 建寧府崇安縣上梅里人. 父名愛, 母某氏. 復之爲人篤厚慈良, 深有志於爲己之學. 從予遊數年, 不幸早死, 朋友莫不哀之. 有子二人, 曰某 ․ 某. 淳熙十有二年冬十有一月□日卒, □月□日, 其父葬之某處. 友人蔡君季通實相其事. 新安朱熹記.
망사자광기(亡嗣子壙記)
송주숙(宋朱塾)의 자는 수지(受之)요 선조는 휘주(徽州) 무원(婺源) 사람이다. 큰아버지의 휘는 송(松)인데 소흥(紹興) 때 사관이었다. 아버지는 희(熹)로 오늘날 홍경(鴻慶)의 사관(祠官)이 되었다. 어머니는 안씨(顔氏)로 빙사(聘士) 면지(勉之)의 딸이다. 숙은 소흥 계유(癸酉) 7월 정축에 태어나 소흥 신해(辛亥) 정월 계유에 죽었다. 반씨(潘氏)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진(鎭)이요 차남은 은노(恩老)이다. 딸이 넷인데 귀(歸) ․ 소(昭) ․ 접만(接滿) ․ 진만(鎭滿)이며 모두 어려서 죽었다. 다음 해 11월 갑신에 대동(大同) 북쪽 산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위로 천호(天湖)가 가득 찼다. 그의 아버지가 지(志)를 지었다. 아아, 슬프구나.
宋朱塾, 字受之, 其先徽州婺源人. 大父諱松, 紹興史官也. 父熹, 今爲鴻慶祠官. 母劉氏, 聘士勉之之女. 塾於紹興癸酉七月丁酉生, 紹熙辛亥正月癸酉卒. 娶潘氏, 生二男, 長曰鎭, 次恩老. 四女, 歸 ․ 昭 ․ 接滿 ․ 鎭滿, 皆夭. 明年十有一月甲申, 葬大同北麓, 上實天湖. 其父爲之志. 嗚呼痛哉!
진군렴부광지(陳君廉夫壙誌)
진렴부(陳廉夫)의 이름은 지(址)이며 보전(莆田) 사람이다. 옛 소사(少師)이며 관문전(觀文殿) 대학사, 증태보(贈太保), 위국(魏國) 정헌공(正獻公)의 손자이며, 오늘날 조정에서 대부, 신제거(新提擧) 복건로(福建路) 상선(商船)을 청한 식(寔) 사시(師是)의 아들이다. 성품이 후덕하고 명민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정헌공(正獻公)이 기이하게 여겨 그를 사랑했다. 임금의 은혜를 사양하였으나 승봉랑(承奉郞)을 제수받았으며, 승사랑(承事郞)으로 옮겨 진강부(鎭江府) 호부(戶部) 대군창을 맡았다. 부임하기 전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다시 천주 남안현(南安縣)에서 염세(鹽稅)를 맡았다. 경원(慶元) 3년 7월 22일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28세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악공(岳公) 림(霖)의 딸과 혼인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사시(師是)는 장차 경원(慶元) 4년(1199년) 11월 3일 렴부를 용급산(龍汲山)에 있는 정헌공의 대분(大墳) 오른쪽에 합사했는데, 일찍이 나에게서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와서 명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노병(老病)으로 오랫동안 글 쓰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에 또한 렴부의 어짊과 그 뜻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글을 짓지 못하고 짐짓 사실만을 기록하니 돌에 새겨 관중에 넣어주기를 바란다. 10월 기묘 기망(旣望 : 16일)에 신안 주희 쓰다.
陳廉夫, 名址, 莆田人, 故少師 ․ 觀文殿大學士 ․ 贈太保 ․ 魏國正獻公之孫, 今朝請大夫 ․ 新提擧福建路市舶寔師是之子. 厚重明敏, 自幼卽有志於學, 正獻公奇愛之. 用致仕恩, 奏授承奉郞, 轉承事郞, 差監鎭江府戶部大軍倉. 未赴, 丁母憂, 再調監泉州南安縣鹽稅. 慶元三年七月二十有二日卒, 享年二十有八. 娶兵部侍郞岳公霖之女, 女子一人. 師是將以慶元四年十一月三日祔廉夫龍汲山正歔公大墳之右, 以其嘗學於余也, 使來謁銘. 余以老病, 久廢筆札, 亦悲廉夫之賢而不克就其志也, 不能文, 姑記其實, 請刻石納壙中. 十月己卯旣望, 新安朱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