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九十五下
행장(行狀)
소사보 신군절도사 위국공치사 증태보 장공 행장 하
(少師保信軍節度使魏國公致仕贈太保張公行狀下)
공이 조정(趙鼎)과 함께 나라를 담당할 때, 휘종(徽宗)께서 사막에 계시니 마땅히 신통(信通)을 보내어 문안을 해야 한다고 의론하여 드디어 문안사(問安使) 하소(何蘇) 등의 일행을 파견했다. 이 해 정월 25일에 소가 돌아와 휘종황제와 영덕황후(寧德皇后)께서 잇달아 붕어(崩御)하셨음을 보고했다. 상께서 소리 내어 통곡하시고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시며[擗踊]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공이 상주하기를, “천자(天子)의 효는 사서인(士庶人)과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러러 종묘(宗廟)를 계승하고 사직(社稷)을 받드는 까닭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재궁(梓宮 : 곧 靈柩)이 돌아오지 못하였고 천하가 도탄에 빠져 지극한 원수와 깊은 치욕은 옛날에도 없었던 바입니다. 폐하께서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시고, 머리카락을 긁어모으시고 빨리 걸으시어 한번 성냄으로써 천하의 백성을 편안히 하시어도 신은 오히려 늦었다고 여깁니다.”라고 했다. 몇 일후에 상주할 일을 찾다가 깊이 국가의 재앙과 어려움을 진술(陳述)하고 울면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이로 인해 조서를 내려서 안팎을 일깨울 것을 요청했다. 상께서 공에게 초안(草案)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하시고 친서(親書)를 밖에 내붙였다. 그 글에서 말씀하시기를, “짐이 민첩하지 못하고 밝지 못한 몸으로서 사민(士民)의 위에 의탁되어 힘써 다스림의 도를 구하고 많은 어려움을 구제할 것을 생각했다. 상제(上帝)께서 벌을 내리시어 재앙을 우리 집안에 이끄시니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갈라져 휘문(諱問 : 곧 訃音)이 먼 곳으로부터 당도했다. 슬프다! 짐이 종신(終身)의 슬픔을 짊어지고 끝이 없는 한(恨)을 품었도다. 무릇 나의 신민(臣民)들은 오히려 차마 그것을 들으려느냐? 지금 짐이 크게 대업(大業)을 이루는데 힘입는 바는 군대와 백성에게 있다. 오직 너희 대소문무(大小文武) 신하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부지런히 힘을 쓰며 군대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할 것을 생각하여 짐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우라. 황천후토(皇天后土)께서 실제로 비추어 거기에 임하실 것이다. 혹여 스스로 여가(餘暇)가 없으면 짐의 상(喪)을 가엽게 여기지 말라.”라고 하셨다. 또한 공의 요청으로 여러 대장에게 삼군을 거느리고 슬픔을 드러내고 복(服)을 입게 하니 내외(內外)가 감동했다.
公與超鼎當國時, 議徽宗在沙溟, 當遣信通問, 遂遣問安使何蘚等行. 是年正月二十五日, 蘚歸, 報徽宗皇帝․寧德皇后相繼上仙. 上號働擗踊, 哀盡不自勝. 公奏:‘天子之孝, 與士庶不同. 必也仰思所以承宗廟․奉社稷者. 今梓官未返, 天下塗炭, 至讎深恥, 亘古所無. 陛下揮涕而起, 歛髮而趨, 一怒以安天下之民, 臣猶以爲晩也.’ 數日後求奏事, 深陳國家禍難, 涕泣不能興. 因乞降諮諭中外. 上命公具草以進, 親書付外. 其詞曰:‘朕以不敏不明, 託於士民之上, 勉求治道, 思濟多艱. 而上帝降罰, 禍延于我有家, 天地崩裂, 諱問遠至. 鳴呼!朕負終身之戚, 懷無窮之恨. 凡我臣庶, 尙忍聞之乎!今朕所賴以宏濟大業, 在兵輿民. 惟爾小大文武之臣早夜孜孜, 思所以洽兵卹民, 輔朕不逮. 皇天后土, 實照臨之. 無或自暇, 不卹朕憂.’ 又以公請, 命諸大將率三軍發哀成服, 中外感動.
공이 물러나, 다시 주장(奏狀)을 갖추어 죄를 청하며 말하기를, “우러러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시절이 어려움을 만나시어 몸소 험난함을 당하시고, 회복하는 사업을 도모하시느라 침식의 겨를이 없으셨습니다. 두 분 황제를 사모하시고 백성을 근심하시는 것을 일찍이 하루도 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신의 지극히 어리석음으로도 임용(任用)하여 주심을 만나 여러 신하의 선두(先頭)에 있게 되니, 매번 권유하심으로 인해서 말씀이 북쪽에 유폐(幽廢)되신 일에 이르면 마음이 슬프시어 반드시 몇 줄기 눈물을 흘리시었습니다. 신이 강개(慷慨)함을 느껴 스스로 기약(期約)하기를 죽더라도 오랑캐에게 복수하기를 바라는 것으로써 했습니다. 10년 사이에 모친을 봉양(奉養)하는 일을 빠뜨리고 이에 처자(妻子)에게까지 이르도록 사사로이 돌보지 않은 것은, 또한 폐하의 효양(孝養)하시는 지극함을 이루고 생민(生民)을 도탄의 어려움에서 건지려 한다면 신이 모친을 섬기고 집안을 보전하는 일은 거의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돕지 않아서 화변이 급작스럽게 생겨서 폐하로 하여금 무궁한 한을 품게 하고, 다함이 없는 생각을 쌓게 하니 슬픔에 다시 무슨 말씀을 하리까? 죄는 장차 누가 지겠습니까? 다시 지난 날 섬, 촉으로 떠날 때를 생각해보면 폐하께서 정중하게 경계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랑캐에게 큰 원한(怨恨)이 있는데 이 지극한 치욕을 떨쳐버리는 것은 오직 신서(臣庶)들에게 이것을 부탁한다.'라고 하셨으나, 신이 끝내 성공(成功)을 무너뜨려 적으로 하여금 거리낌이 없게 했습니다. 하물며 사막의 황폐함으로서 거친 음식을 두실 것을 걱정하시고 두 분 황제께서 여기에 거처하시기에 즐기시는 것을 멀리하심은 진실로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재앙은 단서(端緖)가 신으로부터 이른 것입니다. 오히려 자리를 외람되이 가까이서 보필을 하지만 실로 마음과 얼굴이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게 상벌(賞罰)을 내리시고 빨리 형벌(刑罰)을 바로 하시어 우러러 위로는 상황(上皇)의 하늘에 계시는 영혼(靈魂)을 위로(慰勞)하시고 굽어보아 사해(四海)의 원망하고 분노하는 기운을 그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상께서 조서를 내려 공을 불러 일을 보게 하시니, 공이 다시 상소하여 죄를 기다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公退, 又具奏待罪曰:‘仰惟陛下時遇艱難, 身當險阻, 圖回事業, 寢食不遑. 所以思慕兩宮, 憂勞百姓, 未嘗一日忘也. 臣之至愚, 獲遭任用, 在諸臣先, 每因從容語及北狩事, 聖情惻怛, 淚必數行. 臣感慨自期, 願殲虜讎. 十年之間, 親養闕然, 爰及妻孥, 莫之私顧, 其意亦欲遂陛下孝養之至, 拯生民塗炭之艱, 則臣之事親保家, 庶幾得矣. 昊天不弔, 禍變忽生, 使陛下抱無窮之痛, 積罔極之思, 哀復何言? 罪將誰執? 載念昔者陜蜀之行, 陛下丁寧告戒, 且曰:我有大隙于虜, 刷此至恥, 惟臣是屬. 而臣終隳成功, 使賊無憚. 況以沙漠之墟, 食飮憂慮, 兩宮處此, 違豫固宜. 今日之禍, 端自臣致. 尙叨近輔, 實愧心顔. 伏願明賜罷黜, 亟正典刑, 仰以慰上皇在天之靈, 俯以息四海怨怒之氣.’ 上降詔起公視事, 公再上疏待罪, 不獲請.
거가가 27일 평강을 출발하여 3월 11일 건강에 이르렀다. 이 때 공이 안팎의 정무(政務)를 총괄했는데 때마침 거가가 순행하고 또 국상(國喪)을 당하게 되어 기밀(機密)에 관한 일을 모두 위임하니 공이 한 몸으로 그것을 담당하여 지성(至誠)으로 슬픔을 다하니, 상하가 감동하였고 사람들이 공을 믿어 편안해 했다. 매번 대면(對面)할 때마다 반드시 원수와 치욕의 큼을 깊이 말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였다. 상께서 일찍이 얼굴빛을 바꾸고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상께서 바야흐로 극기(克己)에 힘쓰시고 스스로 제도를 줄이는데 힘쓰시며 궁정(宮庭)의 내시(內侍) 등을 경계하시니 감히 조금이라도 법도를 어기는 자가 없었다.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공에게 자문하셨다. 제장에게 조서를 내리실 때 종종 공에게 초안을 잡아 올리게 명하시고 일찍이 한 자(字)도 바꾸지를 않으셨다. 사방에 재이(災異)가 있으면 공은 반드시 아뢰었고, 상서(祥瑞)로운 일은 모두 억눌러 아뢰지 않았다. 과주(果州)의 지사인 우문빈(宇文彬)과 통판인 방신유(龐信孺)가 이삭이 아홉 개 달린 상서로운 벼를 올렸는데 모두 좌천(左遷)하여 파직(罷職)시키니, 사방에서 바야흐로 모두 조정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의 소재를 알았다.
車駕以二十七日發平江, 三月十一日至建康. 時公總領中外之政, 會車駕巡幸, 又値國卹, 幾事叢委. 公以一身任之, 至誠惻怛, 上下感動, 人情賴公以安. 每對必深言讎恥之大, 反復再三, 上未嘗不改容流涕. 上方厲精克己, 務自損節, 戒筋宮庭內侍等無敢少有越度者. 事無巨細, 必以咨公. 賜諸將詔旨, 往往命公擬進, 未嘗易一字. 四方有災異, 公必以聞, 祥瑞則皆抑不奏. 知果州宇文彬․通判龐信孺進嘉禾九穗, 竝鐫秩放罷, 而四方皆知朝廷好惡所在矣.
4월에 공이 회서로 가서 여러 주둔지를 위무하였고 여주(廬州)에 성을 쌓고 동서의 관문을 수리했으며 북방 오랑캐를 막을 대비를 신칙(申飭)하였다. 공이 동남으로 온 이래 태부인이 촉에 머물렀다. 다시 정부로 들어가게 되자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모시려고 했다. 태부인이 촉에 있는 것을 편하게 여겨 곧바로 나오지를 않았다. 상께서 성지(聖旨)를 내려 공의 형인 황으로 하여금 맞이하여 모시고 오게 하고 또 내시 호종회(胡宗回)를 보내 일깨우시는 뜻을 보였다. 5월에 비로소 건강에 당도했고 공 또한 회서로부터 돌아왔다. 상께서 여러 차례 대궐의 사자를 보내 태부인을 위무하셨고 많은 물품을 내려주셨다. 공이 별을 이고 나가서 국사를 처리하고 늦은 밤에나 들어와 곁에서 봉양을 하며 세세하게 뜻을 받들어 모시니 안팎에서 보고 느낀 자들이 흠모를 했고 서로 얘기를 전하면서 미담(美談)으로 여겼다. 공이 조정(趙鼎)과 함께 재상의 자리에 있던 때부터 어진 인재를 초빙(招聘)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줄줄이 요직을 맡기니 한 때의 인망(人望)을 받는 이가 많았고, 모든 집사(執事)들이 바쁘게 직책에 힘을 다하고 감히 스스로를 위해 도모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소원우(小元祐) 시대라고 불렀으며 공이 더욱 일찍이 은택(恩澤)을 친척에게 사사로이 준 적이 없었다. 둘째 형인 황은 상께서 그가 어진 줄을 아시고 여러 차례 특별한 은택을 주시려고 했으나 공이 문득 사양했었다. 진사급제(進士及第)를 내리게 되자 후성(後省)을 맡은 관리가 법을 어지럽혔다고 논박했으나 공은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신을 이유로 해서 후성의 공의를 막아서는 옳지 않다고 상주했다. 장인(丈人)인 우문시중(宇文時中)은 정화(政和)년 간에 낭(郎)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아가 큰 고을의 수령이 되어 옛날에 이미 대궐에 있었는데도 행재소로 불려가 겨우 호주(湖州)의 지사직에 나아갔다. 외숙(外叔)인 계유공(計有功)은 오랫동안 절제사의 집무소에 있었는데 휘유각(徽猷閣)을 담당하게 되었다. 공이 저지하고 비각(祕閣)에 나아가기를 요청하니 사람들의 그 공평(公平)함에 탄복하였다. 공이 임금은 마땅히 강학(講學)에 힘씀으로써 몸을 닦고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기고, 하남(河南)의 문인(門人) 윤돈(尹焞)을 천거하며 마땅히 강연(講筵)에 있어야 한다고 하니 성지가 내려 대궐로 갔다. 때마침 가뭄이 들었는데 또 태부인 이하 온 가솔이 모두 병으로 눕게 되니 공이 힘껏 사퇴할 것을 요청하여 두 번 네 번에 이르렀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四月, 公行淮西, 撫喩諸屯, 築廬州城, 治東西關, 且申防秋備. 自公來東南, 太夫人留蜀. 及再入政府, 遣人迎侍. 太夫人安于蜀, 末卽出. 上爲降旨, 召公兄滉俾迎侍而來, 又遺內侍胡宗回往喩意. 五月始達建康, 而公亦自淮西歸. 上疊遺中使勞問太夫人, 賜予稠疊. 公戴星而出, 經處國事, 至暮入侍色養, 委曲奉承, 中外觀感歆慕, 傳相告語, 以爲美談. 自公與趙鼎在相位, 以招來賢才爲急務, 從列要津, 多一時之望, 百執事奔走效職, 不敢自營, 人號爲小元祐, 而公尤未嘗以恩澤私親戚. 仲兄滉上知其賢, 累欲加以異恩, 公輒辭. 及賜進士第, 後省官繳駁, 公非惟不加忤, 且奏不當以臣故沮後省公議. 外舅宇文時中政和中爲郞, 出守大藩, 舊已寓直, 萬里召赴, 僅進職知湖州. 舅氏計有功久在幕府, 得直徽猷閣. 公止, 乞就秘閣, 人服其公. 公以人主當務講學以爲修身致治之本, 薦河南門人尹焞宜在講筵, 有旨趣赴闕. 會旱災, 且自太夫人以次闔門悉臥病, 公力求去, 至再四不得.
바야흐로 거가가 평강에 있을 때 공이 강상으로부터 돌아와서, 유광세가 수만의 군대를 거느렸음에도 다시 기율(紀律)이 없고 주색(酒色)에 탐닉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으며, 회복하는 일을 말하면 불끈 화를 내니 마땅히 파직하고 내쳐서 장수들의 경계(警戒)로 쓰시라고 상주했다. 상께서 그렇다고 여겨 광세를 파직하고 그 군대를 모두 독부(督府)의 소속으로 했다. 공이 참모(參謀)인 병부상서(兵部尙書) 여지(呂祉)를 파견하여 여주(廬州)의 절제(節制)로 보내고, 공이 다시 스스로 가서 그들을 위로하니 인정이 쫒았고 상하가 편안히 여겼다. 추밀사(樞密使) 진회(秦檜)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심여구(沈與求)가 병권(兵權)을 잡은 것으로써 독부의 혐의(嫌疑)로 삼을 것을 생각하고 무인(武人) 장수를 둘 것을 상주하여 요청했다. 대간(臺諫)에서 관망하고 요청이 이어지니 이에 왕덕(王德)으로서 도통제(都統制)를 삼고 곧 군중에서 역경(酈瓊)을 취하여 그를 보좌하게 했다. 공이 돌아와 그렇지 않다고 여겨 상주하여 그것을 논했고, 경 등이 또한 덕과 더불어 묵은 원한이 있어 그 부하 8인과 더불어 어사대(御史臺)에 연명(連名)으로 호소했다. 이에 장준(張俊)을 명하여 선무사(宣撫使)로 삼고, 양기중, 유기(劉錡)를 제치판관(制置判官)으로 삼아 그를 위무했다. 이에 군대가 왕덕이 원수(元帥)가 되었다는 것을 들은 뒤부터 종종 의혹을 품으니 역경이 드디어 몰래 다른 뜻을 가지고 앞장서서 그 틈을 흔들었다. 8월 8일에 경 등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고 여지를 잡아 행군해서 회수를 건너 유예에게 귀순코자 했다. 지가 즐겨 건너지를 않고 경 등을 욕하며 꾸짖으니 이를 부수고 머리를 잘라 죽였다. 공이 마침내 스스로 허물을 짊어지고 힘써 사직을 요구하였다. 상께서 만류하지를 못하고 대신할 만한 사람을 물으셨다. 공이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상께 말씀하시기를, “진회는 어떤가?”라고 하시니, 공이 말하기를, “가까이서 함께 일을 해보고 비로소 그가 어리석은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조정을 쓰겠노라.”라고 하시고 드디어 공에게 정을 부르는 비답(批答)을 초안하도록 명령했다. 이윽고 물러나오니 회(檜)가 공이 반드시 자기를 추천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재상 집무실로 나아가 공과 더불어 얘기를 나눴다. 한참 후에 상께서 사람을 보내 초안한 글을 올리라고 재촉하니 회가 비로소 허둥지둥 놀라서 물러나왔다. 뒤에 도리어 정에게 말하기를, “상께서 공(公)을 불렀는데 장승상(張丞相)이 주저하며 머뭇거리고 상께서 사람을 시켜 재촉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뢰러 들어갔다.”라고 하니, 회가 서로 이간질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본래 회가 정강년 간에 조씨(趙氏)를 세워야 한다고 건의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역량이 있어 함께 천하일을 할 수 있다고 여겼고, 한 시대의 어진 이들이 회를 추천하기를 더욱 힘쓰니 공이 드디어 발탁해 썼다. 이미 조정에 같이 있으면서 비로소 그 형세를 둘러보고 거취를 결정하지 아니하는 태도를 마음 깊이 감추어둔 것을 깨달은 까닭에 떠남에 임하여 상께서 물으심으로 인해서 그것을 언급한 것이다.
方車駕在平江時, 公歸自江上, 奏劉光世握兵數萬, 無復紀律, 沈酣酒色, 不卹國事. 語以恢復, 意氣怫然. 宜賜罷斥, 用警將帥. 上然之, 罷光世而以其兵盡屬督府. 公命參謀․兵部尙書呂祉往廬州節制, 公又自往勞之, 人情協附, 上下帖然. 而樞密使秦檜 ․ 知樞密院事沈與求意以握兵爲督府之嫌, 奏乞置武帥. 臺諫觀望, 繼有請, 乃以王德爲都統制, 卽軍中取酈瓊副之. 公歸, 以爲不然, 奏論之, 而瓊等亦與德有奮怨, 與其下人人列狀訴御史臺. 乃命張俊爲宣撫使, 楊沂中․劉錡爲制置判官以撫之. 此軍自聞王德爲帥, 往往懷疑, 而酈瓊遂陰有異志, 唱搖其間. 八月八日, 瓊等擧軍叛, 執呂祉以行, 欲渡淮歸劉豫. 祉不肯渡, 詈瓊等, 碎齒折首以死. 公遂引咎, 力求去位. 上不得留, 因問可代者. 公辭不對. 上曰:‘秦檜何如? ’公曰:‘近與共事, 始知其暗.’ 上曰:‘然則用趙鼎.’ 遂令公擬批召鼎. 旣出, 檜謂公必薦己, 就閤子與公語. 良久, 上遣人促進所擬文字, 檜始錯愕而出. 後反謂鼎 : ‘上召公, 而張丞相遲留, 至上使人促, 始進人.’ 檜之交諜類此. 公本以檜靖康中建議立趙氏, 不畏死, 有力量, 可與天下事, 而一時仁賢薦檜尤力, 公遂推引. 旣同朝, 始覺其顧望包藏, 故臨行因上問及之.
이에 앞서 공이 사람을 보내 직접 쓴 방(榜)을 주어 참칭(僭稱)하는 땅으로 들어가게 하고, 거기에서 이르기를, “유예는 본래 서생(書生)으로써 태상황제(太上皇帝)의 지우(知遇)하심을 입어 일찍이 언로(言路)에 있었다. 주상께서 대위를 계승하시자 고향의 수령으로 발탁하셨다. 산동(山東)의 요충을 담당하고 제남(濟南)의 위탁을 맡기시니 돌보아주시는 예우가 자못 두텁고, 책임과 신망이 지극히 깊었다. 갑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한다고 들리더니 되돌아가 절개를 버리고 대위(大位)를 점거했다. 진실로 또한 죽음을 두려워함에서 압박을 받고, 잠시 삶을 훔치는 것에 힘쓴 것이다. 만약 금(金)나라 사람들을 꾀어서 그들을 피폐하게 하고 정예한 병사와 건장한 군마(軍馬)를 점차 닳아져 없어지게 하면 이에 진실로 나라에 보답하는 좋은 방도이고 또한 너의 신하된 뒤의 효험일 것이다. 다시 모름지기 백성의 힘을 아껴서 상하거나 해치게 하지는 말라. 만약 혹여 영원히 딴 마음을 품는다면 스스로 죽임을 드러냄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황천후토만 용납하지 않는 바가 있겠는가? 또한 아마도 의사(義士)와 충신(忠臣)들이 종신토록 분노와 미움을 품을 것이다.”라고 했다. 금나라 오랑캐의 요로(要路)에 있는 자가 이 방을 보고 이윽고 예를 의심했다. 8월에 예(豫)가 왕사(王師)가 북쪽을 향한다는 말을 듣고 한원영(韓元英)을 보내 오랑캐에게 알리고, 남쪽 오랑캐의 장아무개가 오합지중을 이끌고 혹은 숙(宿)과 박(亳)을 압박하고, 혹은 진(陳)과 채(蔡)를 엿보며, 혹은 양양에서 나오고, 기계와 갑옷을 더욱 수리하고 군장(軍裝)을 마련하니 그 뜻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먼저 일어나면 남을 제압하고 늦게 일어나면 남에게 제압을 당하니 병사를 빌려서 함께 일어나고자 합니다. 오랑캐가 이 보고를 듣고 예가 참으로 자기들을 곤란하게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더욱 그를 의심했다. 때마침 경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가버리니 공이 다시 많은 세작(細作)을 보내 밀랍으로 봉한 글을 지니고 흩어져서 고의로 그것을 흘리게 했다. 대략 이르기를 예와 이미 서로 약속을 맺어 고의로 경 등을 보내 투항(投降)하게 했다고 했는데, 예가 다시 오랑캐에게 군대를 요청했다. 10월에 오랑캐 부원수 올출이 지름길로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예를 폐(廢)하여 애석하게도 그 기회가 왔으나 공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
先是, 公遣人賚手榜入僞地云:‘劉豫本以書生被遇太上皇帝, 曾居言路. 王上嗣極, 擢守鄕郡. 當山東之要衝, 任濟南之委寄, 眷禮殊厚, 責望至深. 俄聞率衆以請降, 旋乃矢身而據位. 諒亦迫於畏死, 姑務偸生. 如能誘致金人․使之疲弊, 精兵健馬, 漸次消磨, 玆誠報國之良圖, 亦爾爲臣之後効. 更須愛惜民力, 勿使傷殘. 儻或永懷異心, 自致顯戮, 豈惟皇天后土有所不容, 抑恐義士忠臣終懷憤疾.’ 金虜用事者見此榜, 已疑豫. 八月, 豫聞王師欲北向, 遣韓元英告于虜, 謂南寇張某總領烏合之兵, 或逼宿亳, 或窺陳蔡, 或出襄陽, 增修器甲, 趣辦軍裝, 其志不小. 先起制人, 後起制於人, 欲乞兵同擧. 虜得此報, 謂豫眞欲困己, 益疑之. 會瓊等叛去, 公復多遣間散持蠟書, 故遺之. 大抵謂豫已相結約, 故遣瓊等降, 而豫又乞兵于虜. 十月, 虜副元帥兀朮徑領兵來廢豫, 惜其機曾之來, 公已去位矣.
대개 공이 9월 5일에 요청을 허락받아 관문전(觀文殿) 대학사(大學士), 강주(江州) 태평흥국궁(太平興國宮) 제학(提學)에 제수되었다. 좌사간(左司諫) 왕진(王縉)이 공이 머무르게 할 것을 요청했다가 당일로 외직으로 보임되었고, 도관낭중(都官郎中) 조영금(趙令衿)이 이어서 상소했다가 또한 파직 당했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주비(周祕),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석공규(石公揆), 우정언(右正言) 이의(李誼)가 교대로 글을 올려 공을 헐뜯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다시 직책을 떨어뜨리고, 조봉대부(朝奉大夫)로서 비서소감분사(祕書少監分司)인 서경(西京), 영주(永州)에 거주케 했다. 이에 조정(趙鼎)이 다시 나라를 맡았고 거가가 강상으로부터 임안으로 돌아갔다.
蓋公以九月五日得請, 授觀文殿大學士 ․ 提擧江州太平興國宮. 左司諫王縉奏乞留公, 卽日補外. 都官郞中趙令衿繼上疏, 亦罷去. 而御史中丞周祕 ․ 殿中侍御史石公揆․右正言李誼交章詆公未已, 旋落職, 以朝奉大夫․祕書少監分司西京, 永州居住. 於是趙鼎復當國, 而車駕自江上遠臨安矣.
공이 출사(出仕)하여 국사를 맡게 되어 매번 조용하게 자식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했었다. 이윽고 조정을 떠나게 되니 태부인이 공이 물러난 곳에 즐거이 쫒아갔다. 8년 2월에 영주에 도착하여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무릇 모친의 뜻에 순응하여 받드는 것을 세세하게 다하지 않음이 없었던 까닭에 태부인이 그것을 편안하게 여겼고 좌천되어 유배된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공이 스스로 상께 나를 예우하심이 두터웠다고 여기고 비록 멀리 유배되었지만 또한 일찍이 한번이라도 생각이 조정에 있지 않음이 없었다. 가까운 곳에 초당(草堂)을 짓고 판여(版輿)를 받들어 두루 유람할 수 있도록 하고 삼성(三省)이라고 이름을 짓고 기문(記文)을 지어서 말하기를, “내가 우거(寓居)의 터, 객관(客館)의 동쪽모서리에 당을 지었는데 겨우 비바람을 가리지만 증자(曾子)가 말한 세 번 반성(反省)한다는 대목을 취하여 그것으로써 이름을 지었다. 그 반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자신을 닦는 것에 혹여 지극(至極)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대부가 성인(聖人)의 도를 배웠으면 마땅히 하늘과 사람의 사이를 꿰뚫을 수 있는 방법을 구해야 한다. 내가 세 번 반성하는 것은 장차 이에 나아감에 있어 할 수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라고 한즉 공이 깊이 성찰한 것과 스스로 터득한 것이 원대하다.
公出任國事, 每以不得從容盡子職爲念. 及旣去國, 太夫人以公退處, 欣然從之. 八年二月, 抵永, 左右侍旁, 凡所以順承親意者無不曲盡. 太天人安之, 不知其爲遷謫也. 然公自以爲上遇我厚, 雖流離遠屛, 亦未嘗一念不在朝廷. 作草堂旁近, 以奉版輿遊歷, 命以‘三省’, 爲文紀之曰:‘予作堂于寓止客館之東隅, 僅庇風雨, 取曾子三省之目以名之. 其省謂何? 思吾之忠於君․孝於親․修於己者恐或未至也. 士大夫學聖人之道, 當求所以通天人之際. 予之三省, 將有進於斯而愧其未能也.’ 則公之所深省而自得者遠矣.
이 해에 진회가 이윽고 정권을 잡아 비로소 몸을 굽혀 오랑캐와 화친(和親)을 할 의논을 결정했다. 9년 정월에 조서가 영주에 당도했다. 공이 엎드려 읽어보고 두려워서 침식(寢食)이 불안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 손근(孫近)에게 편지를 보내 대략 말하기를, “노중련(魯仲連)이 진(秦)나라가 황제(皇帝)를 일컬음을 높이지 않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차라리 동해(東海)에 빠져 죽겠다고 했으니, 대개 진이 황제가 된 재앙이 늦게 일어나지만 크게 될 것을 안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지극한 원수와 깊은 원한으로 이에 수호(修好)를 맺고자 한다면 눈앞의 적은 편안(便安)을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날 해마다 바치는 공물(供物)을 늘리라는 요구를 그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명을 받든 사자(使者)가 연이어 와서 다시 황제(皇帝)와 황후(皇后)를 바꾸어 세우고, 대신(大臣)을 바꾸며, 군대(軍隊)를 해산(解散)하라는 의론을 일으키고, 입조(入朝)하여 알현(謁見)하라는 모의를 내세우는 것도 혹여 모두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개는 때문에 엎드려 조서를 읽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율(戰慄)하여 땀을 흘렸습니다. 다행이 공은 생각이 깊어 은밀하게 흉금을 털어 놓습니다.”라고 했다. 또 옛 친구인 이광(李光)이 홍주(洪州)로부터 소환되어 정부에 들어갔다는 것을 듣고 다시 이 뜻으로써 편지를 써서 그에게 보낼 생각을 스스로 그만두지를 않았다. 또 차자(箚子)를 갖추어 상주하여 말하기를, “공경스럽게 반포(頒布)하신 조서를 보고 두세 번 엎드려 읽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늘 날 일의 허실(虛實)은 잠시 논하지 않겠사오나, 가령 오랑캐에게 변고(變故)가 있어 위아래가 이반되고, 황족(皇族)이 모두 돌아오며, 하남(河南)이 수복(收復)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두텁게 내려줌을 덕으로 여겨 삼가 약속과 맹서를 지켜야 합니다. 훗날 인정(人情)이 더욱 해이해지고, 사기(士氣)가 점차 소멸되며, 저들에게 혹여 내란(內亂)이 이미 평정된다면 흠결을 지적하여 틈을 만들고 싫증을 내지 않는 끝없는 욕심을 제멋대로 부리고 따르기 어려운 요구를 낸다면 장차 무슨 말로써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사리(事理)를 생각해보면 걱정스러운 점이 이보다 심한 것도 있습니다. 폐하께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며 군대의 정무에 뜻을 모으시니 정성에 감격하여 장사들이 차츰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루아침에 북쪽을 향하시어 오랑캐를 섬기시며 그 명령을 받으시어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선비들이 한 때에 공을 취하고 충성되고 공훈(功勳)이 있는 신하들을 쓸데없는 자리에 배치하신다면 크고 작은 장수들이 누군들 해이해져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또 하남을 경영하여 차지하시고자 해도 신은 더불어 공(功)을 향해 나아가고 함께 지킬 사람이 없을 것임을 압니다. 지금 약속(約束)을 따르는 것이 갑작스럽고, 제멋대로 사면(赦免)을 하는 것이 신속하며, 세속적(世俗的)인 선비의 일상적인 말을 써서 교활한 오랑캐의 비밀스러운 속임수에 답함에 일의 처리가 계통을 잃었으니 한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종사의 계책을 생각하시고 회복의 실현을 도모하시어 그들을 대세(大勢)로써 압박하신다면 거의 국가는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죄를 지은 나머지 한 뜻으로 모친을 봉양하며 깊이 천하의 일을 의론하지 않고자 합니다. 오직 이해(利害)가 매우 크고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차마 침묵함으로써 폐하의 지우(知遇)하심을 져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유의하십시오.”라고 했다.
是歲秦檜已得政, 始決屈己和戒之議. 九年正月, 詔書至永. 公伏讀恐懼, 寢食不安, 移書參知政事孫近, 大略曰:‘魯仲連不尊秦爲帝, 且云連寧有蹈東海而死, 蓋知帝秦之禍遲發而大. 况我至讎深隙, 乃欲脩好而幸目前少安乎? 異時歲幣求增而不已, 使命絡繹以來臨, 以至更立妃后, 變置大臣, 起罷兵之議, 建人覲之謀, 皆或有之矣. 某是以伏讀詔書, 不覺戰汗. 幸公深思, 密以數沃.’ 又聞故人李光自洪州召入政府, 復以此意移書抵之, 懷不自已. 又具箚子以奏曰 : ‘恭覩詔書之頒, 再三伏讀, 通夕不寐. 今日事之虛實姑未論, 借令虜中有故, 上下分離, 天屬盡歸, 河南遂復, 我必德其厚賜, 謹守信誓. 將來人情益解, 士氣漸消, 彼或內變旣平, 指瑕造隙, 肆無厭之欲, 發難從之請, 其將何詞以對? 顧事理可憂, 有甚於此者. 陛下焦心勞慮, 積意兵政, 精誠感格, 將士漸孚. 一旦北面事虜, 聽其號令, 遊談之士取功於一時, 忠勳之臣置身於無用, 小大將帥, 孰不解體? 陛下且欲經理河南而有之, 臣知其無與赴功而共守者矣. 今從約之遽, 肆赦之速, 用世儒之常說, 答猾虜之詭秘, 措置失緖, 不勝寒心. 願陛下思宗社之計, 圖恢復之實, 逼之以大勢, 庶乎國家可得而立. 臣罪戾之餘, 一意養親, 深不欲論天下事. 顧惟利害至大至重, 不忍鰔黙, 以負陛下之知. 惟陛下留意.’
2월에 큰 비가 내리자 다시 선봉대부(宣奉大夫), 임안부(臨安府) 통소궁(洞霄宮)의 제거(提擧)에 제수하고 거주지를 임의(任意)대로 하게 했다. 공이 다시 차자를 갖추어 말하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오늘의 일은 고금에 없는 지극한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한마디 말로 그것을 판단하면 폐하께서 힘써 일을 도모하는 데에 있을 따름입니다. 폐하께서 나아가 일을 하시고자 한다면 그 저울추는 우리에게 있게 되고 또 천하의 인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중간에 비록 위아래가 어긋남이 있었으나 끝내는 큰 복이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물러나 일을 하시지 않는다면 그 저울추는 적(敵)에게 있게 되고 또 천하의 인심을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요행이 편안하지만 훗날 큰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대저 저들에게 있는 것은 정(情)이니 지킬 수가 없고, 우리에게 있는 것은 마음〔心〕이니 잃을 수가 없습니다. 밖으로 적국(敵國)을 따르고 안으로 재해(災害)를 입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계획하고 자세히 생각하시어 대업을 왕성하게 도모하시고 창생(蒼生)을 길이 복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다시 스스로 임금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상소를 지어서 이르기를, “감히 도학(道學)을 전일(專一)하고 정밀(精密)하게 하고, 수신(修身)에 힘을 쓰는 것을 못했습니다. 모친을 섬기기를 요청하여 바야흐로 이른 새벽과 늦은 저녁의 봉양을 정성스럽게 하지만, 나라에 보답하기를 희망하나니 감히 경계가 되는 이로운 법도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공이 나라에 바친 충성이 어떠했던가?
二月, 以大霈復宣奉大天, 提擧臨安府洞霄宮, 任便居住. 公復具箚子曰:‘竊惟今日事勢處古今之至難, ラ白以斷之, 在陛下强勉圖事而已. 陛下進而有爲, 則其權在我, 且順天下之心. 間雖齟齬, 終有莫大之福. 陛下退而不爲, 則其權在敵, 且怫天下之心. 今雖幸安, 後將有莫大之憂. 夫在彼者情不可保, 在我者心不可失. 外狥敵國, 內罹實害, 智者所不爲也. 仰惟聖慈深計審慮, 茂圖大業, 永福元元.’ 又自作謝表云:‘敢不專精道學, 黽勉身修. 求以事親, 方謹晨昏之養;庶幾報國, 敢忘藥石之規? ’視此, 則公許國之忠爲如何哉!
열흘이 지난 후에 다시 차자를 갖추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돌아와 임안에 머무르신지 겨우 한 해가 지나갔지만 성심(聖心)이 경영하시는 것과 조정(朝廷)의 의론이 저울질하는 것이 한결 같이 화의를 생각하고 휴식을 희망하는 것이지만 불행히 장차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잠을 자지 않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꼽으며 헤아려보니, 오랑캐는 우리와 더불어 원한이 깊은데 마음속으로 과연 우리나라를 존속시키려고 하겠습니까? 도리어 쇠약해져서 드디어는 망해버리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그들의 힘이 약하여 겨를이 없으면 잠시 화친을 빌려서 우리의 마음을 태만하게 하고, 세력이 커져 여유가 있으면 장차 핑계거리를 찾아서 우리의 틈을 탈 것입니다. 이치가 이미 매우 명확하고 사례(事例)를 다시 보기 쉬우니 그렇다면 어지러운 이론(異論)은 폐하께서 손을 단정히 꽂고서도 결정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오랑캐의 상책(上策)은 상황폐하(上皇陛下) 내외분의 재궁(梓宮)을 돌려보내고, 모후(母后)를 돌려보내며, 땅을 돌려주고, 앞서의 맹약(盟約)을 잃지 않고 우호(友好)를 맺음으로써 우리 군대를 태만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게을러진지 몇 년이 지나면 병사는 싸울 뜻이 없게 되니, 그런 뒤에 한 명의 사신을 보내서 뜻밖의 조서를 지니게 하고, 가령 대신을 바꾸고, 황제와 황후를 바꾸어 세우라고 한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요청을 막겠습니까? 오랑캐가 중책(中策)을 낸다면 반드시 요구를 무겁게 하고 황제(皇帝)의 호칭(號稱)을 책망하여 약속을 저버리며 믿음을 어기고, 가까이는 일년 안에 중원의 땅을 장차 차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양무제(梁武帝)가 북위왕(北魏王) 호(顥)를 세운 것과 같은 일이 오히려 장차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오랑캐가 하책(下策)을 낸다면 노(怒)해서 군대를 내어 곧바로 강 건너 편에 당도하면 형세가 놀랄 만 하겠지만, 천하의 어지러움은 혹여 이로부터 정해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居旬日, 又具箚子曰:‘自陛下回駐臨安, 甫閱歲時, 聖心之所經營, 朝論之所商榷, 專意和議, 庶幾休息, 莫不幸其將成矣. 臣嘗不寐以思, 屈指而計, 虜人與我讎釁之深, 設心措意, 果欲存吾之國乎? 抑願其委靡而遂亡也? 臣意其力弱未暇, 姑借和以怠我之心. 勢盛有餘, 將求故以乘吾之隙. 理旣甚明, 事又易見, 然則紛紛異議可端拱而決矣. 料虜上策, 還梓宮․復母后, 與地來歸, 不失前約, 結懽篤好, 以怠我師. 遲之數年, 兵無戰意, 然後遣一介之使, 持意外之詔, 假如變置大臣, 更立妃后, 將何以塞請? 虜出中策, 則必重邀求․責微禮, 失約爽信, 近在期年, 中原之地, 將有所付. 如梁武之立北魏王顥者, 尙庶幾於前. 虜出下策, 怒而興師, 直臨江表, 勢似可愕, 而天下之亂或從此而定矣.’
이 달에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 지복주(知福州) 겸 복건로안무대사(福建路安撫大使)에 제수되었다. 공이 태부인께서 고향을 생각하시는 것 때문에 동쪽으로 가지 않고자 하여 두 번 세 번 힘써 사양하였다. 4월에 공이 전에 강화하는 일을 의론한 것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또 차자를 갖추어 말하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건염 초년에 일찍이 큰 어려움을 겪으시고 천의(天意)가 지극히 깊어지시고 더욱 성덕(聖德)을 드러내셨습니다. 전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본보기가 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인심을 거두어들이시고 사기를 떨치는데 힘쓰시며 권세(權勢)를 혼자 장악하시어 스스로를 조종하신다면 바깥의 추한 오랑캐가 어찌 감히 모욕하려는 꾀를 내겠습니까? 안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더욱 절개를 다하려는 뜻을 굳게 할 것입니다. 천하국가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것이며 송나라의 사직은 영원토록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이치에 가까운 이익(利益)이 있으면 또한 깊은 근심도 있는 것입니다. 천하를 가진 사람은 마땅히 기회를 살피고, 인정을 헤아려, 대의(大義)를 결단하고 권력을 장악해야지 적에게 주면 안 됩니다. 썩은 선비는 고원(高遠)한 식견이 없어 일이 이르면 후회를 하니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대저 오늘 일의 기미는 아직은 괜찮으니 권도(權道)로 알맞게 바꾸시고 빨리 약(藥)을 구하십시오. 오직 바라건대 폐하께서 결단하심에 의심(疑心)이 없으시다면 천하는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是月, 復資政殿大學士․知福州, 兼福建路安撫大使. 公以太夫人念鄕, 不欲東去, 力解至再三. 四月, 公念前論講和事未蒙開納, 又具箚子曰 : ‘竊惟陛下建炎初載嘗歷大艱, 天意至深, 益彰聖德. 前事不忘, 後事之鑑. 伏願亟收人心, 務振士氣, 權勢專制, 操縱自我, 外之醜虜, 曷發敢侮之謀? 內之羣帥, 益堅盡節之志. 天下國家, 我所自定;宋之社稷, 永永無窮. 夫理有近利, 亦有深憂. 有天下者, 當蕃機會․度人情․斷大義, 持柄握權, 不以與敵. 腐儒寡能遠見, 事至而悔, 將何及焉? 况夫今日事機尙可, 因權適變, 速於救藥. 惟望聖慈斷以無疑, 則天下幸甚!’
8월에 오랑캐가 조칙을 내려 효유(曉諭)한다는 명분(名分)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왔다는 것을 듣고, 다시 주장을 갖추어 말하기를, “신이 요사이 여러 차례 어리석은 말씀을 보내서 우러러 폐하의 밝으심을 모독(冒瀆)했으나 진실로 임금을 걱정하는 지나친 생각을 스스로도 그만 둘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천하의 일은 두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폐지함이 있고, 주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빼앗는 것이 있습니다. 오랑캐가 조칙(詔勅)으로 효유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폐치(廢置)와 여탈(與奪)의 큰 권세를 지녔습니다. 또 도모하는 것은 인심을 막아서 사기를 빼앗고 앉아서 우리나라를 기울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이 걱정하는 것은 바단 목전의 일만이 아닙디다.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큰일을 성공하려면 인심(人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존망(存亡)의 큰 계책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이 앞뒤로 상주한 바에 정신을 두시고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八月, 聞虜遺使來, 以詔論爲名, 則又具奏曰:‘臣近者累輸鼓說, 仰瀆聖明, 誠以憂君過慮, 不能自息. 竊惟天下之事有置必有廢, 有與必有奪. 虜以詔諭爲名, 持廢置與奪之大柄. 且其蓄謀起慮, 欲以沮人心․奪士氣而坐傾吾國. 臣之所憂, 不但目前也. 劉先主曰濟大事以人心爲本, 此存亡之大計. 願陛下考臣前後所奏, 留神毋忽焉.’
복주의 지사로 가라는 명을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고, 공이 이 때의 일에 걱정거리가 많은 것을 염려하고, 가까운 곳에 있으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 드디어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갔다. 9월에 민중(閩中)에 당도하니, 민중은 평소부터 소송(訴訟)이 많아 다스리기 힘든 곳이라고 일컬어졌으나, 공은 사람의 마음은 한가지인데 바로 백성에게 군림(君臨)하는 자가 먼저 거스르고 속이는 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헤아렸기 때문에 감동시켜 바로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내(境內)에 들어가자 일체를 의리(義理)로써 일깨우고 수령들에게 백성들의 일에 성의(誠意)를 갖게 하고 향리(鄕里)의 장로(長老)나 글을 아는 자들로 하여금 솔선수범해서 후생(後生)들을 권면(勸勉)하게 하고, 사나운 자들에게는 향당(鄕黨)의 수치(羞恥)가 됨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니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고 우러렀다. 매번 외출을 할 때마다 보려는 사람들이 지붕과 나무에 올라가서 마치 담장을 친 것 같았다.
福州之命旣累辭不獲, 公念時事多虞, 惟在近或可以補報萬一, 遂受命而東. 九月至閩中, 閩素號健訟難洽, 公謂人心一也, 正由臨民者先有逆詐億不信之心, 是以不能感格. 入境, 一切諭以義理, 飭守令誠意民事, 令鄕里長老知書者率勒後生, 及彊悍者無爲鄕黨羞, 民皆感仰. 每出, 觀者至升屋登木如堵牆.
10년 정월에 상께서 대내(大內)의 사신을 보내어 위문하니, 공이 그편에 감사드리는 주장(奏狀)을 부치고 또 말하기를, “원컨대 폐하께서는 정신(精神)을 온전하게 기르시고, 지기(志氣)를 강대(剛大)하게 하시며, 오직 과감하게 결단하시고, 기미를 살피시며, 말씀의 사이에서 강약(强弱)을 살피시고, 담소(談笑)하시는 사이에 화(禍)를 변하여 복(福)으로 바꾸시어, 사향노루가 자기 배꼽을 깨물듯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은 없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十年正月, 上遣中使撫問, 公附秦謝, 且曰:‘願陛下全養精神, 剛大志氣, 惟果惟斷, 見幾見微, 察彊弱於言辭之際, 轉禍福於談笑之間, 無使噬臍, 爲天下笑.’
이 때에 오랑캐가 도중에 맹약(盟約)을 바꾸고 다시 하남을 취했다. 공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신이 가만히 생각하니 여러 신하들이 난가(鸞駕)를 돌이키는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나라의 위세가 떨치지 못하고 일의 기미를 잃어버린 것이 여러 차례입니다. 지난 날 오랑캐로 하여금 상책(上策)을 내게 한다면 상황재(上皇帝)의 재궁을 돌려보내고, 연성황제(淵聖皇帝) 내외분을 귀환(歸還)시키되, 아무런 요구도 없이 제공(提供)을 하고, 종친(宗親)들이 따라서 모두 남으로 온다면 우리가 오랑캐를 덕으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깊을 것인지라, 화친의 의론은 뽑아버리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은 해이해져 나라의 위세는 차츰 미약해졌을 것입니다. 다른 날 불화(不和)의 단서가 갑자기 생기면 무엇으로써 지탱하겠습니까? 신은 천하가 폐하의 소유(所有)가 아닐 것임을 압니다. 지금 지금 다행히 상천(上天)께서 경계를 하시어 오랑캐가 잘못을 되풀이하고 사기는 아직 진작(振作)할 수 있으며, 인심은 아직도 되돌릴 수가 있습니다. 원컨대 권세로 변화를 제압하시고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며, 천하의 영재(英才)를 기용하고, 천하의 요해처(要害處)에 웅거(雄據)하여 적의 마음을 빼앗고 우리의 기세를 떨치십시오. 일의 처리가 한번 결정되면 큰 공훈은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에게 또 추측한 견해가 있으니 연산(燕山)을 새로 수복하게 되자 조정에서 곽약사(郭藥師)를 굳건히 믿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더러운 오랑캐가 맹약을 어기면 약사는 먼저 배반할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나라를 파는 수치심(羞恥心)이 없는 사람은 본래 다른 장점이 없기 때문에 더불어 일을 함께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매사의 본보기로 삼으시어 일찍이 소홀함이 없도록 제어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어서 회상(淮上)에 경계할 일이 있다는 것을 듣고 연이어서 변방에 대한 계책을 상주하여 알리고, 또 조목조목 바닷길로 배를 운용하는 이해득실을 알렸다. 상께서 공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대내의 사자를 보내 칭찬하고 일깨웠다. 공이 이 때에 바다 배 수천 척을 만들어 곧바로 산동으로 나아갈 계책을 꾸미고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군(郡)에 있으면서 작고 큰 업무를 반드시 몸소 살피니 사람마다 감격하고 기뻐하여 화기(和氣)가 가득했고 송사(訟事)가 크게 줄어들었다. 산과 바다의 도적들을 남김없이 초유(招諭)하거나 체포했고, 간간이 선비들을 초청하여 그들과 더불어 강론을 하니 민(閩) 땅의 백성들이 교화되었다.
時虜中變盟約, 復取河南. 公奏曰:‘臣竊念自群下決回鑾之議, 國勢不振, 事機之會失者再三. 向使虜出上策, 還梓宮, 歸雨殿, 供須一無所請, 宗族隨而盡南, 則我德虜必深, 和議不拔, 人心懈怠, 國勢寢微. 異時釁端卒發, 何以支持? 臣知天下非陛下之有矣. 今幸上天警悟, 虜懷反復, 士氣尙可作, 人心尙可回. 願因權制變, 轉禍爲福, 用天下之英才, 據天下之要勢, 奪敵之心, 振我之氣. 措置一定, 大勳可集. 臣又有臆見, 當燕山新復, 朝廷恃郭藥師爲固. 一旦醜虜敗盟, 藥師先叛. 何則? 賣國無恥之人, 本無它長, 難與共事. 願陛下每以爲鑑, 制御於早無忽.’ 繼聞淮上有警, 連以邊計奏知, 又條畵海道舟船利害. 上嘉公之忠, 遣中使獎諭. 公時大沿海舟至千艘, 爲直指山東之計, 以俟朝命. 在郡細大之務必躬必親, 人人感悅, 和氣薰然, 訟事淸簡. 山晦之寇招捕無餘, 間引秀士與之講論, 閩人化之.
11년 3월에, 유기(劉錡)가 순창(順昌)에서 올출(兀朮)을 대파했다. 기는 본래 늦게 출사했는데 공이 관, 섬에서 한번 보고 그를 기재(奇才)로 여겨 곧 일을 맡을 것을 요청했고 기 또한 감격하고 강개해서 자립(自立)했다. 공이 돌아와 그를 상께 천거하며 기의 재주와 식견은 제장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 때의 소인배들이 그의 재능이 자기들보다 나은 것을 질투하여 백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했다. 공이 이윽고 동정호의 도적을 평정하고 곧 악주(岳州)의 지사(知事)에 천거했다. 이윽고 행재소로 소환되어 가자 좌우에서 서로 도왔으며 왕언군(王彦軍)을 맡기고 또 발탁하여 기병(騎兵)의 장수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기가 마침내 거느린 군대를 가지고 큰 공을 이루었다. 바야흐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오랑캐의 빈틈을 타려고 하니 회(檜)가 기를 소환했다. 기가 조정으로 돌아오자 상께서 그를 접견하시고, 제일 먼저 말씀하시기를, “장아무개는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시니, 회가 낭관(郎官) 개량(蓋諒)을 보내와 공을 넌지시 떠보며 그에게 의론을 부쳐오기를, 마땅히 곧 공을 이끌어 추밀사로 삼겠다고 했다. 공이 회에게 답한 글에서 화친은 이루어지지 않고, 오랑캐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또 양(諒)을 대면해서도 말했다. 양이 돌아가니 회가 화를 냈다. 이 때에 막장(幕將) 등이 오랑캐로부터 돌아오고, 조정이 다시 유광원(劉光遠)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니 공이 또한 사록(祠祿)으로써 모친을 봉양하기를 힘써 요청했다.
十一年三月, 劉崎大破兀朮于順昌. 崎本晩出, 公一見關陜, 奇之, 卽付以事任, 崎亦感慨自立. 公歸, 薦之上, 謂崎才議諸將莫及. 而一時輩流嫉其材能出己右, 百計沮遏. 公旣平湖寇, 卽薦知岳州. 已而召赴行在, 左右扶持, 付以王彦軍, 且擢爲騎帥. 至是, 崎竟以所部成大功. 方欲進兵乘虜虛, 而檜召崎還矣. 崎還朝, 上見之, 首曰:‘張某可謂知人.’ 檜遺郞官蓋諒來諷公, 使附其議, 當卽引公爲樞密使. 公答檜書歷言和不可成, 虜不可縱, 且面爲諒言. 謂歸, 諒怒. 時幕將等歸自虜, 朝廷復遣劉光遠等奉使, 而公亦力請祠奉親矣.
11월에, 검교소부(檢校少傅), 숭신절도사(崇信節度使)에 제수되고 만수관사(萬壽觀使)에 충원(充員)되어 조봉대부로서 모친을 봉양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면하게 되었다. 복주를 떠나는 날, 전송하는 군민들이 길에 서로 잇대어서 탄식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공은 촉이 조정에서 멀기 때문에 지름길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고 드디어 태부인을 모시어 장사(長沙)에 사시게 했다. 12년에, 태모(太母)의 난로(鑾輅)가 돌아와 조칙으로 공을 화국공(和國公)에 봉하니, 차자를 갖추어 경하(慶賀)를 드리고, 또 말하기를, “주는 것은 혹여 빼앗기 위함이며 편안하면 반드시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대저 오직 농사(農事)에 힘쓰고 군대를 강하게 해야만 나라를 세워 모욕(侮辱)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원컨대 성려(聖慮)를 부지런히 하시어 끝내 원대한 계획을 궁구하십시오.”라고 했다. 공이 태부인께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실까 두려워하여 곧 장사성 남쪽에 60개의 기둥이 있는 집을 지어 봉양을 하니 태부인이 편안해했다. 당을 짓고 편액(扁額)에 ‘진심 盡心’이라고 말하고 친히 기문(記文)을 지으니, 큰 뜻은 임금과 어버이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을 더욱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거처하는 한가로운 시간에 소일거리로 육경(六經)에 뜻을 두고, 여러 사서(史書)에서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을 고찰하며, 전에 있던 일의 기미를 더욱 생각하고, 시국(時局)을 걱정하는 뜻을 밥을 먹을 때에도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다. 회(檜)가 이미 밖으로 원수와 사귀고 상께서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굴며, 바른 의론을 미워하고, 군대의 일을 말하기 꺼려하며 스스로는 시국이 이미 태평하다고 여겨 날마다 형식적인 문장(文章)과 분수(分數)에 지나친 사치를 하며 천하를 우롱하면서도 유독 공을 몹시 꺼렸다. 중승(中丞) 묵기설(万俟卨)이 회의 뜻에 영합하여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공이 집을 지은 것이 참람(僭濫)되다고 의론하며, 오봉루(五鳳樓)를 본떠서 누각을 세웠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나 상께서 그렇다고 여기지를 않았다. 회가 조사(朝士)인 오병신(吳秉信)을 사자의 일로 파견하여 호남(湖南)에 이르러 공의 분수에 넘치는 증거를 살피게 하고, 또 벼슬로써 그를 꾀였다. 병신이 공에게 나아가서 그 거처가 중인(中人)의 보통 재산으로도 마련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했고, 도리어 몰래 회의 뜻을 공에게 알리고 돌아와 또 그 실상을 상주했다. 회가 병신을 파직하고 내쫒았다.
十一月, 除檢校少傳․崇信節度使, 充萬壽觀使, 免奉朝請. 去福之日, 軍民送者咨嗟號泣, 相屬於道. 公以蜀遠朝廷, 不欲徑歸, 遂奉太夫人寓長沙. 十二年, 太母鸞輅來歸, 制封公和國公, 具劉子以賀, 且曰:‘與或爲取, 安必慮危. 夫惟務農而彊兵, 乃可立國而禦侮. 願勤聖慮, 終究遠圖.’ 公恐太夫人念歸, 乃卽長沙城之南爲屋六十楹以奉色養, 太夫人安焉. 築堂牋曰‘盡心’, 親爲之記, 大意欲益求所以盡心於君親者. 居間玩意六經, 考諸史治亂得失, 益思前事之機微, 憂時之志, 一飯未嘗忘也. 檜旣外交仇讎, 岡上自肆, 惡嫉正論, 諱言兵事, 自以爲時已太平, 日爲浮文侈靡, 愚弄天下, 獨忌公甚. 中丞万俟卨希檜旨, 論公卜宅僭擬, 至倣五鳳建樓, 上不以爲然. 檜遣朝士吳秉信以使事至湖南, 有所案驗, 且以官爵誘之. 秉信造公, 見其居不過中人常産可辦, 不覺歎息, 反密以檜意告公而歸, 且奏其實. 檜黜秉信.
16년에 공이 회가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침으로써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 혜성(彗星)이 서쪽에 나온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시국의 일을 의론하여 상의 뜻을 깨우치려고 했다. 또 태부인이 고령(高齡)임을 생각하고, 그것을 말하면 반드시 화가 이르러 견디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태부인이 공의 몸이 마른 것을 깨닫고 까닭을 물었다. 공이 까닭을 갖추어 말씀드리니, 태부인이 선인(先人) 옹공(雍公)의 소성(紹聖) 초년(初年)에 올린 방정과대책(方正科對策)의 글을 외워 말하기를, “신이 차라리 말을 하고 부월(斧鉞)에 죽을지언정, 차마 말하지 않음으로써 폐하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시며 두 번 세 번 거듭하니, 공의 뜻이 드디어 결정 되었다. 이에 말하여 가로되, “신이 들으니 비상(非常)한 은혜를 받은 자는 비상한 보답을 도모하고, 불에 타고 물에 빠진 다급함을 건지는 자는 천천히 하는 말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지금 일의 형세는 비유하자면 머리나 눈, 가슴과 배 사이에 큰 종기가 자라나 터뜨리지도 못하고 그만 둘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터뜨리는 것이 더디면 화가 커져서 헤아리기가 어렵고, 터뜨리는 것이 빠르면 화는 가볍고 다스리기가 쉽습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마음으로 그것을 도모하시고 홀로 그것을 결단하시며, 삼가 참됨과 거짓을 살피시고, 급작스러운 일을 미리 대비하십시오. 그것은 바둑과 같아서 요해처를 나누어 점거하고 상세한 곳을 살펴 생각하여,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하여금 범할 수 없는 형세를 가지게 한다면 거의 사직이 안전할 도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하루에 다시 하루를 더하면 훗날 장차 후회막급(後悔莫及)하고, 다른 날 나라를 적에게 주는 자가 도리어 죄를 바른 의론에 돌릴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먹어도 목구멍에 넘기지 못하고, 하루 저녁이라도 편안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성덕(聖德)이 사람에게 있고, 천지(天地)의 보우(保佑)하심을 얻고, 조종(祖宗)의 경사(慶事)를 계승하시어, 마음에 비추어 살핌이 있지 아니하신다면 신 또한 죄에서 도망할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일이 삼성(三省)으로 내려오니 회가 크게 화를 냈다.
十六年, 公念檜欺君誤國, 使災異數見, 彗出西方, 欲力論時事, 以悟上意. 又念太夫人年高, 言之必致禍, 恐不能堪. 太夫人覺公形瘠, 問故. 公具言所以, 太夫人誦先雍公紹聖初對方正策之詞曰:‘臣寧言而死于斧鉞, 不忍不言而負陛下’, 至再至三, 公意遂決. 乃言曰:‘臣聞受非常之恩者圖非常之報, 拯焚溺之急者乏徐緩之音. 竊惟當今事勢, 警如養成大疽於頭目心腹之間, 不決不止. 決遲則禍大而難測, 決速則禍輕而易洽. 惟陛下謀之於心, 斷之以獨, 謹察情僞, 予備倉卒. 猶之奕棋, 分據要害, 審思詳處, 使在我有不可犯之勢, 庶幾社穰有安全之理. 不然, 日復一日, 後將噬臍, 異時以國與敵者反歸罪正議. 此臣所以食不下咽, 不能一夕安也. 儻非陛下聖德在人, 獲天地之祐, 承祖宗之慶, 有以照察其心, 臣亦何所逃罪? ’事下三省, 檜大怒.
이 때에 공이 다시 천신절(天申節)로 해서 『상서 尙書』 「무일 無逸」편을 손으로 쓰고 차자를 갖추어 경하를 드리며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성인(聖人)의 경서(經書)에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고 반드시 하늘로부터 큰 복을 받고, 큰 수명(壽命)을 얻는 방법을 취할 수가 있되 단호하게 의심이 없는 것이 있어서 문득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정성을 다하여 폐하를 위해 바칩니다. 신이 엎드려 주공(周公)의 「무일」편과, 상왕(商王) 중종(中宗)의 ‘엄숙하고 삼가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하늘의 명을 스스로 헤아렸다. 백성을 다스림에는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편안하지 못했다.’와 고종(高宗)의 ‘상(商)나라가 아름답고 편안히 다스려져 크고 작은 일에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와 주문왕(周文王)의 ‘아침부터 한낮을 거쳐 해가 지기까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만백성을 화평(和平)케 하였다.’, ‘감히 놀이와 사냥을 즐기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스리심에 바른 공물(供物)로써 하였다.’를 상고하니, 세 임금은 혼자 편안함과 영화를 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나라를 가졌으니 후세(後世)라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상나라는 조갑(祖甲)의 뒤로부터 왕을 세우면, 나면서부터 편안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알지 못했고,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듣지 못했고, 오직 즐기는 일만을 따랐습니다. 때문에 아무도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고, 어떤 이는 10년, 어떤 이는 5~년, 어떤 이는 3~4년이었습니다. 하늘의 도가 밝아서 그 반응은 메아리와 같습니다. 옛 성인이 한 몸으로서 천하에 임하여 사해에 혜택을 입히되 뜻과 같지 않음이 없어 일찍이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물러나거나 겁을 내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무릇 천도(天道)로써 기필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일 뿐입니다. 신은 신자(臣子)로써 축하를 드리는 정성을 이길 수가 없사오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시며, 힘쓰시고 또 힘쓰시어 영원히 이 마음을 굳건히 하시어 하늘의 도를 받드십시오. 하늘이 우리 임금에게 보답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했다.
時公又以天申節手寫尙書無逸篇具箚子爲賀曰:‘臣嘗潛心聖人之經, 有可以取必於天, 膺大福, 獲大壽, 決然無疑者, 輒輸丹誠, 爲陛下獻. 臣伏考周公無逸篇, 商王中宗巖恭寅畏天命, 自度, 治民祗懼, 不敢荒寧. 高宗嘉靖商邦, 至於小大, 無時或怨. 周文王自朝至於日中昃, 不遑暇食, 用威和萬民, 不敢盤于遊田, 以庶邦惟正之供. 三君者, 非獨身享安榮, 而有國長久, 後世莫加焉. 商自祖甲之後, 立王生則逸, 不知稼穡之艱難, 不聞小人之勞, 惟耽藥之從. 是以罔或克壽, 或十年, 或五六年, 或四三年. 天道昭然, 其應如響. 古之聖人以一身莅天下, 惠澤四海, 無不如意, 未嘗少有憂懼退怯之懷. 凡以天道可必, 吾無愧歉于心而已. 臣不勝臣子祝頌之誠, 願陛下兢兢業業, 勉之又勉, 永堅此心, 以奉天道. 天之所以報吾君者, 宜如何哉!’
7월에, 회가 대간에 명하여 공을 의론한 글 네 개를 올리게 했다. 상께서 특별이 진언(進言)한 것 때문에 강주 태평흥국궁의 제거에 임명하고 연주(連州)에 살게 했다. 번천(樊川)의 주적(周勣)은 의기(義氣)가 있는 사람이었다. 공이 영주로 좌천되었을 때부터 곧 와서 서로 교유했다. 공이 복주의 수령이 되자 불러서 속료(屬僚)로 삼았다. 공이 장사로 오니 적 또한 따라와서 살았다. 회가 여러 차례 적을 불렀으나 얻지를 못하자 그를 원망하여 이에 공과 적이 시국의 일을 비방한다고 말하고, 또한 적의 벼슬을 뺏고 봉주(封州)로 유배를 보냈다. 공이 명을 받고 떠나니 부인(夫人) 이하로부터 모두가 머물러 태부인을 모셨는데 유독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갔다. 태부인이 그를 전송하며 말하기를, “너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성인의 책을 읽는 데에 힘쓰고 집 생각은 말아라.”라고 했다. 공이 귀양처에 이르러 한 달에 한두 번 사람을 태부인이 계신 곳에 보냈다. 낮밤으로 『역경』을 읽고 큰 뜻을 정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책에 기술(記述)하여 친히 그 아들 식(栻)을 가르쳤다. 연주고을이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한가하면 곧 지팡이를 짚고 두루 놀러 다녔다. 연주의 사람들이 공을 사랑하고 존중하여 다투어 안주와 과일을 가지고 맞이했고, 가는 곳마다 반드시 하루 종일 곡진(曲盡)하게 머물게 했다. 이 때 회는 더욱 흉악한 기세를 제멋대로 하여 귀양을 가는 자가 길에 끊이지를 않았으나 사방에서는 관망을 했다. 공이 거처하는 곳에서 편안히 여겨 모습과 기품이 더욱 충실했고, 태부인 또한 장사에서 편안히 거처했다. 공이 연주에서 「사덕명 四德銘」을 지어서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충(忠)은 하늘에 순종하고, 효(孝)는 복을 낳고, 근면(勤勉)은 생업을 발전시키고, 검소(儉素)는 마음을 편하게 한다.”라고 하니, 연주의 사람들이 서로 그것을 돌에 새기고, 집안에 전하고 사람들이 외웠다. 기사(己巳)년에 영남지방(嶺南地方)에 장기(瘴氣)로 인한 병이 크게 일어나 낮인데도 햇빛이 어두웠다. 연주에서 벼슬살이 하는 자들이 태수(太守) 이하로부터 죽은 자가 여럿이고, 군의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어 울음소리가 마을마다 이어졌고, 시골마을에는 밥 짓는 연기가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공이 약(藥)을 조제(調劑)하여 그들을 구제하니 병자들이 와서 약을 요청하는 것이 하루에 수천 명에 이르렀다. 오직 공의 집안만이 종복에 이르기까지 한사람도 병에 걸리지 않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감탄을 하고 하늘이 충성스러운 사람을 돕는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七月, 檜命臺諫論公, 章四上. 上以特進․提擧江州太平興國宮, 連州居住. 樊川周勣者, 氣義人也. 自公貶永, 卽來相從. 公帥福唐, 辟爲屬. 公來長沙, 勣亦從居焉. 檜累書招勣不得, 恨之, 乃謂公與勣誂議時事, 亦削勣官, 封州. 公被命卽行, 自夫人以下皆留侍, 獨挈子姪往. 太天人送之曰 : ‘汝無愧矣.勉讀聖人書, 無以家爲念.’ 公至貶所, 月一再遣人至太夫人所. 日夕讀易, 精思大旨, 迷之於編, 親敎授其子栻. 連爲州, 景物甚勝, 暇卽策杖遊歷. 連人愛重公, 爭持肴果以迎, 所至必爲曲留終日. 時檜益肆凶焰, 遷謫者不絶于道, 四方觀望. 公處之恬然, 形氣益充實, 太夫人亦安居長沙. 公在連作四德銘以示其人曰:‘忠則順天, 孝則生福, 勤則業進, 儉則心逸.’ 連人相與鑱之於石, 家傳人誦焉. 己巳歲, 嶺南瘴疫大作, 日色晝昏. 官于連者, 自太守而下死凡數人, 郡人無不被疾, 哭馨連巷, 鄕落至有絶釁者. 公和藥拯之, 病者來請, 日至千餘人. 惟公家下至僕廝無一人告病, 過者咨歎, 莫不以爲天相忠誠也.
연주에 거주한 것이 무릇 4년이 되는 20년 9월에 영주(永州)로 옮겼다. 호(湖), 상(湘)의 사람들이 공이 돌아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다투어 나아가 맞이했다. 공이 양생(養生)한 것이 전보다 나은 것을 바라다보고 모두 탄식하고 서로 축하를 했다. 공이 사람을 보내 태부인을 맞이하여 다음 해 4월에 영주에 당도하여 모자가 상견(相見)을 하니 강건(彊健)하기가 처음과 같았다. 영주는 옛날에 일찍이 거주했던 곳이라 인정이 더욱 서로 편안하였으나, 공의 형인 휘유공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바야흐로 조정에서 공의 관직이 떨어지게 되자 휘유공이 늘 태부인의 좌우에 머물며 그 뜻을 맞추어 기쁘게 해드리니 태부인이 그를 지극히 사랑했다. 이에 이르자 슬픔은 거의 달랠 수가 없게 되니, 비록 공이 풀려나와 당도했지만 태부인 또한 연세가 높고 질병이 많았다. 대개 공이 나라를 떠난 지가 이에 이르러 거의 20년이었는데 물러나 스스로 수양(修養)을 하니 무능(無能)한 사람과 같았다. 천하의 선비로 어질거나 못나거나 없이 마음을 기울이지 않음이 없었고, 무인(武人)이나 장수들로 공을 말하는 자들은 탄식하고 한숨을 쉬었으며, 어린 아이와 부녀자들도 또한 천하에 장도독(張都督)이 있음을 알았다. 오랑캐들이 공을 꺼리기를 더욱 심하게 하여 세시사(歲時使)가 오랑캐 땅에 이르면, 그 임금이 반드시 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바야흐로 화친을 맹약할 때에 맹서하는 글에 ‘갑작스럽게 대신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대개 공을 다시 기용(起用)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른 것이다.
居連凡四年, 二十年九月, 移永州. 湖湘之人見公歸, 喜甚, 爭出迎. 望見公所實勝前, 退皆歎息相賀. 公遣人迎太夫人, 以次年四月至永, 母子相見, 彊健如初. 永舊所嘗居, 人情尤相安, 而公兄徽猷公遽以疾終. 方公官于朝及在貶, 徽猷公常留太夫人左右, 悅適其意, 太夫人鍾愛之. 至是悲側殆不能爲懷, 雖公解釋備至, 太夫人亦年高多疾矣. 蓋公去國至是幾二十年, 退然自修, 若無能者. 而天下士無賢不肖莫不傾心, 武夫健將言公者咨嗟太息, 至小兒婦女, 亦知天下有張都督也. 虜人憚公尤甚, 歲時使至虜中, 其主必問公安在. 方約和時, 誓書有‘不得輒更易大臣’之語, 蓋懼公復用云.
이에 이르러 진회의 영예스러운 지위가 이미 지극하였으나 노병(老病)이 나날이 침입하여 비루(鄙陋)한 사내가 잃을 것을 근심하는 마음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고,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자취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먼저 해내(海內)의 어진 선비와 대부(大夫)들을 잘라내고 그러한 뒤에 하고자 하는 바를 멋대로 할 것을 생각했다. 더욱 공을 정론(正論)의 종주(宗主)가 되어 자기로 하여금 편안함을 얻지 못하게 한다고 여겨서 더욱 꺼리며 자주 해를 입히려고 했고, 대신 왕민(王珉)과 서희의 무리에게 명하여 탄핵(彈劾)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언급하게 했다. 홍주(洪州)의 지사인 장종원(張宗元)을 탄핵하는 글에 이르러 비로소 공을 국적(國賊)이라고 말하고 반드시 죽이려고 했다. 장병(張柄)이라는 자는 일찍이 회로 하여금 금근거(金根車)를 타게 하라고 주청한 그의 사당(死黨)이었는데 곧 담주의 지사로 발탁되었다. 왕소석(汪召錫)은 회의 형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이 조영금(趙令衿)의 비리를 들추어내어 고함으로써 호남의 제거관(提擧官)이 되었는데, 그들로 하여금 함께 공을 도모하게 했다. 또 장상선(張常先)으로 하여금 장종원의 옥사(獄事)를 다스리게 하여 공을 연루시키려고 했고, 부족하다고 여겨서 다시 조정의 아들인 분(汾)을 체포하여 대리옥(大理獄)에 가두고 극히 참혹한 도구로 고문을 하여 살가죽이 온전한 데가 없었는데, 그로 하여금 자기가 공 및 이광(李光), 호인(胡仁) 등과 함께 대역(大逆)을 도모했다고 무고(誣告)케 하였다. 무릇 한 시절의 어진 선비 53인이 회가 미워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옥사에 올랐다. 때마침 회의 병이 위독(危篤)해져서 수결(手決)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때가 소흥 25년이다.
至是秦檜寵位旣極, 老病日侵, 鄙夫患失之心無所不至, 無君之迹顯然著見. 意欲先剪除海內賢士大夫, 然後肆其所爲. 尤憚公爲正論宗主, 使己不得安, 欲亟加害, 命臺臣王珉․徐輩有所彈劾, 語必及公. 至彈知洪州張宗元文, 始謂公國賊, 必欲殺之. 有張柄者, 嘗奏請令檜乘金根車, 其死黨也, 卽擢知潭州. 汪召錫者, 娶檜兄女, 嘗告訐趙令衿, 遣爲湖南提擧官, 俾共圖公. 又使張常先洽張宗元獄, 株連及公. 以爲未足, 又捕趙鼎子汾下大理獄, 備極慘酷, 考掠無全膚, 令自誣與公及李光․胡寅等謀大逆. 凡一時賢士五十三人, 檜所惡者, 皆與獄上. 曾檜病篤, 不能書判以死. 時紹興二十有五年也.
상이 비로소 다시 직접 정무(政務)를 보시고 먼저 억지로 회의 아들 희(熺)를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고, 여러 흉인(凶人)들을 모두 내치니, 공의 자취가 조금 편안해졌으나 태부인이 급작스럽게 돌아갔다. 성지로 다시 공의 직책을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홍주판관(洪州判官)에 제수했으나 공은 이미 상중(喪中)에 있었다. 슬픔과 괴로움으로 영구(靈柩)를 붙잡고 보호하며 병들지 않으셨을 때 명령하셨던 대로 마땅히 옹공의 묘소로 돌아가 장사하기 위해 주청(奏請)을 드리고 장사(長沙)에서 명을 기다렸다. 천하의 일이 20년 동안 진회에게 무너지게 되어, 인심과 사기가 쇠약해져 녹아 없어졌으며, 정사(政事)에 기강(紀綱)이 없고, 변방의 방비(防備)가 흩어져 해이해졌었는데 다행히 하루아침에 죽어버려, 마땅히 바삐 새롭게 좋은 계책을 생각해야함에도 사람들의 바람을 위로하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을 홀로 생각했다. 또 들으니 완안량(完顔亮)이 찬탈(簒奪)을 하여 세력이 이미 교만하고 호대하여 반드시 장차 망령된 행동을 할 것이니 한심한 일이었다. 스스로 대신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야 하는 의리를 생각하여 감히 상중에 있는 것으로써 꺼리지 아니하고 5월에 차자를 갖추어서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큰 죄를 지고 스스로 반드시 장기(瘴氣)가 있는 땅에서 죽겠다고 말했었습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폐하께서 우악(優渥)하시게 그것을 용서하시고, 그것을 가련하게 여기시며, 그것을 보전하시니 죽을 몸이 다시 살아난 것은 모두 폐하의 조화(造化)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모두 이미 죽은 나날이지만 폐하께서 참으로 그것을 살리시는 겁니다. 신은 지금 비록 상중에 있지만 어찌 감히 근심이 없는 듯이 폐하의 은덕을 잊겠습니까? 또 한 몸을 자중(自重)하고 침묵(沈黙)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으면 만의 하나라도 보탬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그 마음 씀을 살피시고 그것을 용서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上始復親庶務, 先勒檜子嬉致仕, 盡斥群兇, 公迹稍安, 而太夫人遽薨. 有旨復公職觀文殿大學士, 除判洪州, 公己在苫塊矣. 哀苦扶護, 以洽命當嚴葬雍公之兆, 奏請俟命長沙. 獨念天下事二十年爲檜所敗壞, 人心士氣委離銷鑠, 政事無綱, 邊備蕩弛, 辛其一旦隕難, 當汲汲惟新令圖, 而未見所以慰人望者. 且聞完顔亮簒立, 勢已驕豪, 必將妄擧, 可爲寒心. 自惟大臣義同休戚, 不敢以居喪爲嫌, 五月, 具劉子曰 : ‘臣夙負大罪, 自謂必死瘴癘之地. 仰惟陛下優容之, 矜憐之, 保全之, 死 骨復生, 盡出聖神之造. 自今以往, 皆已死之日, 而陛下實生之. 臣今雖居苫塊 中, 安敢恝然遂忘陛下恩德, 且願惜一己而黙不出一言, 庶幾有補萬一哉? 惟陛下察其用心, 恕之而已.
신이 듣건대 예로부터 충신(忠臣)이 임금을 섬기며 그 임금을 성(聖)스럽게 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고, 그 임금의 이름이 해와 달처럼 드러나고 공(功)이 우주(宇宙)를 덮게 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저 국가(國家)가 편안(便安)하고 번영(繁榮)하면 또한 더불어 자신도 편안과 번영이 있음을 안 까닭에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것도 감히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간신(奸臣)은 그렇지 않으니 오직 이익을 도모하여 다시는 다른 것을 근심하지 않습니다. 임금을 잘못으로 인도하여 천하의 인심을 잃게 만들고 몰래 간사한 뜻을 제멋대로 합니다. 처음에는 곡진한 뜻과 아첨(阿諂)으로 순종을 하며 그 임금의 총명(聰明)을 속이고 가리며, 끝내는 일과 권력을 독차지 하여 몰래 살리고 죽이는 큰 권력으로 옮겨갑니다. 자취를 마음속에 깊이 감추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죽고 집안은 망하며, 일족은 망하고 대는 끊어지는 것이 역사책에 보이는 것을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천하의 후세 사람들이 그를 보기를 일찍이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다고 여기니 그가 진실로 과연 이익으로 삼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어리석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臣聞自昔忠臣事君莫不欲其主之聖, 莫不欲其主之名顯日月, 功蓋宇宙. 彼知夫國家安榮, 則其身亦與有安榮, 故犯顔逆指而不敢辭也. 姦臣不然, 惟利是圖, 不復它卹. 導君於非, 使重失天下之心, 而陰肆其邪志. 始則曲意媚順, 而欺蔽人主之聰明, 終則專事擅權, 而潛移生殺之大柄. 跡其包藏, 有不可勝言者矣. 然而身減家亡, 族覆世絶, 見於史冊, 歷歷可攷. 天下後世視之, 曾犬豕之不若. 彼誠果何所利耶? 惜乎至愚而莫之思也.
전에 폐하께서는 건괘(乾卦)의 강건함을 본받으시어, 쓰시는 것은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신 것으로써 하시며, 시행하고 설비하시기를 기미에 맞게 하시니, 천하의 여러 오랑캐들이 누군들 두려워서 복종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말을 할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신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다시는 조정의 기밀사(機密事)를 듣는데 참여하지를 못하고, 엎드려 스스로 지금 일의 형편이 극에 달한 것을 생각하니, 폐하께서는 장차 단정히 앉아서 그 자연스러움을 들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밖으로는 그 이름을 두고, 널리 은밀한 계획을 도모하시어 장구지계(長久之計)로 삼을 만한 것을 구하시겠습니까? 신이 진실로 지나치게 걱정하지만 이로부터 수년 뒤에는 백성의 힘이 더욱 고갈되고 재물이 더욱 부족하며, 사졸은 더욱 늙고, 인심은 더욱 이반되며, 충신과 용맹한 장수들은 죽어서 거의 없어지고,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서로 거듭해서 일어나면 폐하께서는 무엇으로써 대책을 삼으시겠습니까? 바야흐로 조종께서 흥성(興盛)하셨을 때, 일찍이 오랑캐와 화친으로 교통하시면서 오직 힘써 맞섬으로써 세력이 균등(均等)하였고, 국가가 서북쪽에서 군사를 취하고, 재물을 천하에서 취하며, 문무(文武)의 인재가 세상에 부족하지 않아, 이런 까닭에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40년 뒤에 정강(靖康)의 큰 변란은 일이 뜻밖에 벌어졌고 화란(禍亂)이 큰 것은 옛날에도 없었을 정도입니다. 논하는 자들이 오히려 대저 강화를 믿어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다스리지 못한 실수를 한(恨)스러워 했습니다. 지금 천하는 어떠합니까? 비유하자면 중인(中人)의 집에 도적이 그 당(堂)을 점거하고 그 사이에서 편안히 살며 배불리 먹고, 아침저녁으로 우리의 틈을 엿보는 것과 같으니 하루사이라도 우리를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런즉 폐하께서는 이 때에 깊이 생각하시고 힘써 도모하지 않으실 수가 없습니다.
日者陛下法乾之剛而用以沉潛, 施設中幾, 天下四夷孰不畏服? 是臣可言之秋也. 臣疏遠, 不復預聞朝廷幾事, 而伏自思念今日事勢極矣, 陛下將拱手而聽其自然乎? 抑將外存其名而博謀密計, 求所以爲長久歟? 臣誠過慮, 以爲自此數年之後, 民力益竭, 財用益乏, 士卒益老, 人心益離, 忠臣烈將淪亡殆盡, 內憂外患相仍而起, 陛下將何以爲策? 方柤宗盛時, 嘗與虜通和, 惟力敵勢均, 而國家取兵於西北, 取財於天下, 文武之才世不乏人, 是故得以持久. 而百四十年之後, 靖康大變, 事出不意, 禍亂之大, 亘古所無. 論者猶恨夫恃和爲安而不自治之矢. 今天下幾何? 譬之中人之家, 盜據其堂, 安居飽食其間, 而朝夕陰伺吾隙, 一日之間, 其舍我乎. 然則陛下不可不深思力圖於此時也.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오랑캐에게 일찍이 시역(弑逆)하고 옹립(擁立)한 거사가 있었다고 말하니, 대저 시역하고 옹립한 사람은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인정이 몹시 미워합니다. 진실로 어진 이를 임용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며, 덕을 닦고 정사를 세우고, 과감히 우리가 마땅히 할 바를 하며, 입으로는 강화를 끊지 않되 실상은 세력으로써 거기에 임하면 그들에게는 반드시 뿔뿔이 흩어질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오랑캐가 헤아리지 않고 가볍게 군대를 움직인다면 성벽을 튼튼히 하고 들판을 청소하는 계책으로 버티고, 역과 순을 밝게 보이면 그 무리가 스스로 이반되어 오랑캐가 위태롭고 망하는 것을 서서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사람은 반드시 거역하는 자에게 붙어 순리(順理)를 잊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5~7년을 더하게 하면 오랑캐의 군신(君臣)이 나뉘어져서, 그 나라에 사람이 있어 권력을 잡고 일을 함에 비록 어질고 지혜로운 이가 있더라도 폐하를 위해 꾸민 계책임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정밀하게 생각하시고 살펴 도모하시되 조석(朝夕)으로 잊지 마시어, 진실로 뒤늦게 후회하며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대저 쇠약할 때 강화를 약속하면 오래갈 수가 없다고 말하는데, 강한 오랑캐의 변란이 거듭해서 내부에서 생기니 이것은 하늘이 폐하를 돕는 것입니다. 하늘을 거스르는 것은 상서롭지 않으니 폐하께서는 그것을 받드십시오.
或謂虜嘗有弑立之擧, 夫弑立之人, 天地所不容, 人情所甚惡. 誠能任賢選能, 修德立政, 斷然爲吾之所當爲, 口不絶和而實以勢臨之, 彼必有瓦解之憂. 借使虜不量度, 輕爲擧動, 第堅壁淸野以持之, 明示逆順, 其衆自離, 虜之危亡可立而待. 何則? 人心必不肯附逆而忘順. 假之五七年, 而虜之君臣之分定, 彼國有人得柄用事, 雖有賢智, 莫知爲陛下計矣. 願陛下精思審謀, 無志朝夕, 無使眞有噬臍之歎. 夫約和衰弱之時, 謂不能久, 而彊虜之愛荐生於內, 是天贊陛下. 違天不祥, 陛下其承之!
신이 듣건대 임금이 천지간에 우러르고 굽어보아 그 몸을 스스로 세우는 것은 충효(忠孝) 두 글자에 지나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하의 대의니 잠시나마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신의 행동이 폐하를 저버려 외롭고 괴롭게 아직 목숨은 붙어있으나,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은 이미 베풀 곳이 없습니다. 일은 대의(大義)에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있으니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비록 머리와 눈, 손과 발이 상하고 버릴 만한 일이 있더라도 폐하를 위하여 쓰이는 자는 자중(自重)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물며 친히 성명(聖明)하심을 만나 힘을 다해 보전해 주시고 은덕이 지극히 크시니, 신으로 하여금 사사로움을 품고 몸을 돌보며, 실정(實情)을 감추고 화를 염려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면, 이것은 폐하께서 신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신이 실로 폐하를 저버리는 것이니 천지(天地)와 귀신(鬼神)이 즐겨 그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때문에 혐의(嫌疑)를 피하지 않고, 솥에 삶기는 것을 피하지 않으며, 참소(讒訴)하여 헐뜯는 것을 근심하지 않고 폐하를 위하여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군민(軍民)의 마음을 소홀히 할 수도 있고, 충성되고 좋은 말을 버릴 수도 있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대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비유하면 쟁반의 물과 같아서 한번 터져서 무너지면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그것을 생각하십시오.
臣聞人主之俯仰天地間, 所以自立其身者, 不過忠孝二字. 此天下之大義, 不可須臾少忽也. 而臣行負神明, 孤苦餘生, 親養已無所施矣. 事有大義所當爲者, 不過盡忠於陛下. 顧雖頭目手足有可捐棄而爲陛下用者, 所不當顧惜. 而况親逢聖明, 極力保全, 恩德至大, 使臣有懷私顧己․匿情慮禍之心․則是陛下不負臣, 臣實負陛下, 天地鬼神, 其肯容之哉!是以不顧嫌疑, 不避鼎획鑊, 不卹讒毁, 爲陛下陳之. 陛下勿謂軍民之心爲可忽, 忠良之言爲可棄. 夫治天下譬如槃水, 一決而潰, 有不可收拾者矣. 陛下其念之哉.
신의 지금 나이가 60이니 죽음이 머지않았는데 이에 어지럽게 강화(講和)나 전쟁(戰爭)을 주장하는 말을 가지고 서로 버티며, 오직 그 말이 이기지 못하여 자신이 등용(登用)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거나, 눈앞의 이익을 탐하여, 구원(久遠)한 계책(計策)을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다. 신은 폐하와 국가를 위해서 계획하는 것을 알 뿐입니다. 폐하께서 편안하시고 영화로우시면, 신 또한 편안함과 영화로움을 갖는 것에 참여할 것입니다. 신이 스스로 도모하는 것이 또한 어찌 살피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다행히 곧 죽지 않으면 끝내는 예제(禮制)를 얻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이 어리석다하여 갑작스레 버리지는 마십시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을 엄(嚴), 무(婺)의 사이에 거주하며 한가롭게 지병(持病)을 요양(療養)하게 하시고, 폐하를 위해 계책을 세우는 심복(心腹)의 신하로 삼아서 어리석음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거의 만의 하나라도 보탬이 있음에 가깝다면 신의 바람은 충분합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건곤(乾坤)의 도량(度量)을 크게 하시고, 정밀하게 천하의 현자(賢者)를 구하시며, 조종과 국가의 치욕(恥辱)과 부형(父兄)과 종족(宗族)의 원수를 잊지 마시고, 성대한 덕과 큰 업적을 후세에 밝게 드러내시면 신(臣)도 오히려 다행히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臣行年六十, 死亡無日, 非若紛紛互持和戰之說, 惟恐其說之不勝而身之不獲用, 貪目前之得, 忽久遠之圖. 臣知爲陛下國家計耳. 陛下安榮, 臣亦預有安榮, 臣之自謀, 亦豈有不審耶? 幸未卽隕, 得終禮制. 陛下不以臣爲愚而卒棄之, 願陛下許臣居嚴․媃間, 優游養痾, 爲陛下謀畵心腹之臣, 以畢愚盡忠, 庶幾有補萬一. 臣之志願足矣. 惟陛下廓乾坤之度, 以精求天下之賢, 無忘祖宗國家之恥, 父兄宗族之讎, 盛德大業, 昭著後世, 臣猶幸及見之.’
이어서 조정의 명을 받고 태부인의 상(喪)으로써 촉으로 돌아갔다. 8월에 행렬이 형남(荊南)에 당도했는데, 때마침 별자리에 변고가 있어 조서로써 직언(直言)을 구하였다. 공이 생각건대 오랑캐의 수년 동안의 형세가 결단코 틈을 찾아 군대를 움직이려는데, 우리는 바야흐로 편안함에 빠져 오랑캐를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씻은 듯이 대비(對備)가 없으며, 심해(沈該)와 묵기설(万俟卨)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더욱 천하의 바람을 따르지 않아 조정은 더욱 가벼워졌다. 돌아보건대 상중에 있고, 험난함을 거쳤으며,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해도 상(上)을 위해 끝내 그것을 말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편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에 다시 상주하여 말하기를,
“신이 폐하의 다시 살려주신 큰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은 몸이 상중에 있고 만리(萬里)의 험난함을 건넜으니, 늘 하루아침에 죽어 도랑이나 골짜기를 메우고 끝내 우러러 만의 하나라도 보답함이 없을 것이 두렵습니다. 품은 바를 모두 다 폄으로써 죽은 뒤에도 유감이 없을 것을 생각합니다. 신이 일찍이 속세의 선비가 전쟁과 화친의 같지 않은 말에 매여서 실상은 한 가지 일도 할 줄 모르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어떤 자는 유림(儒林)의 명의(名義)를 훔쳐서 간사(奸邪)한 일을 하면서 경전(經傳)과 사서(史書)의 이치를 모르고, 간절하게 이익과 봉록(俸祿)을 도모하면서 폐하의 귀를 속이고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심한 것이 있은즉 큰 간인(奸人)과 큰 악인(惡人)은 오랑캐를 끼고서 두 마음을 품고, 스스로 그 집안의 힘을 키우고 잘못된 이론으로 현혹시키며 천하를 우롱하고 감히 모두 그것을 펼쳐놓습니다.
繼被朝命, 以太夫人之喪歸蜀. 八月, 行至荊南, 曾以星變詔求直言. 公念虜數年間勢決求釁用兵, 吾方溺於宴安, 謂虜可信, 蕩然無備, 沈該․万俟卨據相位, 尤不厭天下望, 朝廷益輕. 顧伏在苫塊, 經歷險阻, 死亡無日, 不得爲上終言之, 懷不自安, 乃復奏曰:‘臣受陛下更生大恩, 今至憂迫身, 涉險萬里, 常恐一旦死塡溝壑, 終無以仰報萬一. 思以展盡所懷, 暝目無憾. 臣嘗病世儒牽於戰和異同之說, 而不知實爲一事. 或者竊儒爲姦, 不知經史之心, 切切焉利祿是圖, 而有以欺惑陛下之聽也. 又其甚, 則大姦大惡挾虜懷貳, 以自封殖其家, 簧鼓曲說, 愚弄天下, 敢畢陳之.
신이 들으니 천지(天地)의 큰 덕(德)을 생(生)이라고 말하는데, 천지가 만물(萬物)을 낳는 공효(功效)는 가을과 겨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대개 가을과 겨울에 그것을 삼엄하게 응축(凝縮)하지 않으면 봄과 여름에 그것이 무성(茂盛)하게 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가을과 겨울에 삼엄하게 응축하는 것은 생물(生物)의 기본입니다. 췌괘(萃卦)의 상사(象辭)에서 말하기를, ‘병기를 소제하여 예측하지 못한 것을 대비한다.’라고 했고, 태괘(泰卦) 구이(九二)의 효사(爻辭)에서 말하기를, ‘거친 것을 포용(包容)해 주고 맨 몸으로 황하(黃河)를 건너는 용맹을 쓴다.’라고 했으니, 태, 췌의 세상은 성인(聖人)도 군사적(軍事的) 대비(對備)에 있어서 엄하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니, 이와 같지 않다면 생물로써 그 마음을 행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고 이르는 것입니다. 하물며 시절이 바야흐로 어려운데 살피지 않고 다스리기를 소홀히 하여 후세에 큰 화를 끌어들이면서 도리어 이것이 이익이 된다고 말하겠습니까?
臣聞天地之大德曰生, 而天地生物之功, 本於秋冬. 蓋非嚴凝之於秋冬, 則無以敷榮之於春夏. 然則秋冬之巖凝, 乃生物之基也. 在萃之象曰:除戒器, 戒不虞. 泰之九二爻辭曰 : 包荒用馮河. 泰萃之世, 聖人謹於武備如此, 謂不如是不足以生物而行其心也. 况時方艱難, 而可忽略不省, 啓大禍于後, 反謂是爲得哉?
만약 대저 한 때의 강화는 곧 또한 성현(聖賢)께서 이득을 낳는 천하의 권도(權道)입니다.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갈(葛)을 섬겼지만 끝내는 갈을 멸했습니다. 『서경 書經』에 말하기를, ‘탕이 한번 정벌함을 갈(葛)로부터 시작했다.’라고 했고, 주(周)의 태왕(太王)이 적(狄)을 피해서 기(岐)에 궁궐을 지었으나 아직 적을 물리칠 계책을 세우지는 않았는데, 『시경 詩經』에 말하기를, ‘대사(大社)를 세우니 나쁜 오랑캐들 떠나가네.’라고 했으며, 문왕(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기고 끝내 그를 정벌(征伐)하니, ‘오랑캐들 들고 뛰며 어쩔 줄을 몰랐네.’라고 했고, 월(越)나라 구천(勾踐)이 오(吳)나라를 섬기며 섶 더미에 앉아서 쓸개를 맛보다가 끝내는 오나라를 깨뜨렸으니 『월어 越語』에서 말하기를, ‘월나라가 10년 동안 국력을 양성하고 10년 동안 가르치고 훈련시켰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처음에는 그것을 모으고 끝내는 그것을 크게 넓혔고, 서둘러 덕으로 하는 정사를 수립하여 이득을 낳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았으며, 일찍이 강화를 믿고 편안하게 여겨 스스로 그 몸을 즐겁게 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한고조(漢高祖)가 항우(項羽)와 더불어 강화를 하니 우(羽)가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를 돌려보냈고 홍구(鴻溝)를 기준으로 나누어 서쪽은 한이 되고 동쪽은 초(楚)가 되었습니다.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진언하기를, ‘지금 초나라 군대가 군량이 떨어졌는데 모두 풀어주고 치지 않으면 이것은 범을 길러 스스로 후환(後患)을 남기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한왕(漢王)이 그것을 따랐고 끝내는 대업을 성취하였습니다. 한문제(漢文帝)는 흉노(匈奴)와 더불어 강화를 했는데 일찍이 한해를 거르는 평안도 없었습니다. 한문제는 천하를 온전하게 차지하고 화친으로써 백성을 쉬게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백성은 오히려 오랑캐가 침략하여 모욕하는 고통을 면하지 못했는데, 무제(武帝)에게 이르러 비로소 한번 크게 그들을 정벌했습니다. 그 후에는 선우(單于)가 내조(來朝)하여 한나라 300년 동안 일이 없었습니다. 당태종(唐太宗)이 처음에 천하를 평정하고 위상(渭上)의 맹약(盟約)을 가졌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이정(李靖)의 군대가 깊이 사막의 땅으로 들어가 그 조정을 갈아엎고 그 추장을 사로잡으니 천하가 비로소 편안해졌습니다. 이에 어찌 강화를 권도로 삼아 또한 그것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若夫一時之和, 則亦聖賢生利天下之權矣. 商湯事葛矣而終滅葛, 書曰:湯一征自葛始;周太王避狄矣, 築室于岐, 未幾謀以却敵, 詩曰:乃立冢土, 戎醜攸行; 文王事昆夷矣, 卒伐之, 諸曰昆夷駾矣, 維其喙矣;越勾踐事吳矣, 坐薪嘗膽, 竟以破吳, 越語曰越十年生聚而十年敎訓. 彼皆翕之乎始而張之乎終, 汲汲乎德政修立而以生利爲心, 未嘗恃和爲安, 自樂其身而已也. 漢高祖與項羽和, 羽歸太公, 呂后割鴻溝以西爲漢, 東爲楚. 良․平進言:今楚兵罷食, 盡釋而弗擊, 是養虎自遺患也. 漢王從之, 卒成大業. 漢文帝與匈奴和, 曾無間歲之寧. 漢文全有天下, 謂可和以息民. 方是時, 百姓猶不免侵凌之苦, 至武帝始一大征伐之. 其後單于來朝, 漢三百年間用以無事. 唐太宗初定天下, 有渭上之盟. 未幾, 李靖之徒深人沙漠之地, 犂其庭, 係其酋, 海內始安焉. 滋豈非以和爲權而亦得之哉?
대저 석진(石晉)이 천하를 차지했던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여 그것을 취하되 그 도가 아니었고 그것을 꾀하되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상유한(桑維翰)은 강화로 시종일관하였고, 그 말에서 가로되, ‘원컨대 농민(農民)을 가르쳐서 전쟁을 익히게 하고, 군대를 양성하고 백성을 쉬게 하여, 나라에 내우(內憂)가 없고 백성들이 여력(餘力)을 가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틈을 보아 군대를 움직이면, 군대를 움직여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지모(智謀)를 가진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군신(君臣)이 하는 것을 상고해보면 명분(名分)과 실질(實質)이 위아래에서 믿음이 없었습니다. 조정은 위에서 오로지 당장에 편한 것에만 힘쓰고, 상벌(賞罰)을 법도를 잃었으며, 시설(施設)은 도리에 어긋나고, 권력(權力)은 아래로 옮겨지고, 정사는 위에서 사사로우면서도 명분이 없는 계책을 드리며 기강(紀綱)이 다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한 때에 정권을 좌우한 변경을 진압하는 신하가 종종 주색(酒色)에 빠지고,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며, 함부로 살육을 저질러 백성에게 피해가 미쳐도 조정에서는 그를 제어(制御)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른바 농민을 가르쳐서 전쟁을 익히게 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백성을 쉬게 한다는 것은 거의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한이 늘어놓은 것은 거의가 빈말이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반드시 강화의 말로써 편안함을 훔치고 자리를 도둑질할 수 있다고 짐짓 믿고자한 것일 따름입니다. 거란(契丹)이 그 마음을 살피고서 진(晉)나라에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모름지기 능멸과 모욕으로 요구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뒤를 이은 임금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비로소 경연광(景延廣)의 의론을 써서 싸움으로써 요행을 바랐으나, 그 주색에 빠지고 게으르고 오만하여 덕을 잃어버린 것이 하루아침이 아니어서, 천하의 마음이 이미 떠났고, 천하의 형세를 이미 잃어버렸으며, 천하의 재물이 이미 다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연광은 학문(學問)이 없어서 성현(聖賢)의 권도(權道)를 시행하여 그 잃어버린 인심을 회복하고, 그 형세를 세우고, 그 나라를 강하게 할 것을 서둘러 생각해야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전쟁으로 다투는 것을 서둘러서 사세(事勢)가 곤궁해져 수만의 군대가 한 사람도 그를 위해 북쪽을 향해 화살을 쏘는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군신이 쇠약해서 떨치지 못하고 이적(夷狄)을 섬긴 것을 말하자면 반드시 말하기를 ‘석진’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若夫石晉之有天下則不然, 取之非其道, 謀之非其人. 桑維翰始終於和, 其言曰:願訓農習戰, 養兵息民, 俟國無內憂, 民有餘力, 觀釁而動, 動無不成. 若有深謀者. 然考其君臣所爲, 名實不孚于上下. 朝廷之上, 專務姑息, 賞罰失章. 施設繆戾, 權移於下, 政私於上, 無名之獻, 莫知紀極. 一時用事方鎭之臣, 往往昏于洒色, 厚于賦歛, 果于誅戮以害于百姓, 朝廷莫知所以御之. 所謂訓農習戰, 養兵息民, 略無實事. 維翰所陳, 殆爲空言, 姑欲信其當時必和之說以偸安竊位而已. 契丹窺見其心, 謂晉無人, 須求凌侮, 日甚一日. 後嗣不勝其忿, 始用景延廣之議, 僥倖以戰, 而不知其荒浮怠傲, 失德非一日, 天下之心已離, 天下之勢已去, 天下之財已匱. 延廣不學, 不知行聖賢之權, 亟思所以復其心․立其勢․彊其國, 急於兵戰之爭, 事窮勢極, 數萬之師無一夫爲之發矢北向者, 至今爲天下嗤笑. 言君臣委靡不振, 服役夷狄者, 必曰石晉云.
우러러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총명성지(聰明聖智)하시고 효심은 순수하고 한결같으시어 즉위한 이래로 참된 인재를 가려서 등용하시니 오랑캐들이 소문을 듣고 그것을 두려워했는데, 이에 강화를 의론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태모(太母)를 중하게 여기시고 또 휘종황제의 재궁이 빨리 돌아오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 강화의 권도입니다. 불행이 정권을 좌우하는 신하가 하늘의 공(功)을 탐내고, 뜻한 바를 제멋대로 하고 욕심을 이롭게 하고자 하여, 이에 충량(忠良)한 신하를 제거하고 오랑캐에게 명령을 받음으로써 몰래 그 사악한 마음을 기르고자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국가가 한가한 때에, 게으름과 오만함으로 이것을 도모하여 덕(德)으로 하는 정사는 모두 폐지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제거(除去)하는 데에 전념한 것은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저 오랑캐가 밤낮으로 소원(所願)하는 것은 우리의 충량한 신하를 몰락시키고자 하는 것일 뿐이고, 우리가 천하의 인심을 모두 잃어버리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며, 우리의 장사(將士)가 해이해져서 흩어져 그 사기가 다시는 떨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며, 우리의 생각이 편안함에 빠져 짐독(鴆毒)을 달게 마시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전일에 정권을 좌우하던 자가 모든 것을 그들이 몹시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고 결국은 그것을 했으니, 거의 오랑캐를 위하고 지위(地位)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몸이 죽는 날 천하가 술을 따르고 서로 축하하는 것을 약속하지 않고서도 다같이 했습니다. 아래로 농부나 시골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이마에 손을 얹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하늘을 등지고 사람을 거스르며, 임금에게 불충하였으니 천하의 인심이 심하게 미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仰惟陛下聰明聖智, 孝心純一, 卽位以來, 簡用實才, 虜人聞風而畏之, 於是有議和之事. 陛下以太母爲重, 且幸徽宗皇帝梓宮之亟還, 和之權也. 不幸用事之臣貪天之功, 肆意利欲, 乃欲剪除忠良, 以聽命於虜, 而陰蓄其邪心. 方國家間暇之時, 怠傲是圖, 德政俱廢, 而專於異己之去, 意果安在哉? 夫虜日夕所願望者, 欲我之忠良淪沒耳, 欲我之盡失天下之心耳, 欲我之將士解體, 其氣不復振作耳, 欲我之懷於宴安以甘于酖毒耳. 前日用事者一切狥其所甚欲而畢爲之, 不幾乎與虜爲地歟? 身死之日, 天下酌酒相慶, 不約而同. 下至田夫野老, 莫不以手加額. 其背天逆人, 不忠于君, 而天下之心重惡之如此.
또 그는 일찍이 오랑캐가 우리에게 대하여 그것을 사랑하여 화친하는 것인가? 그 여력이 있으면서도 즐겨 화친하는 것인가? 그 나라 안에서 또한 간섭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근심이 있어서 화친하는 것인가? 그 훗날에 도모하고자 하여 화친하는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오랑캐와는 큰 원수와 큰 원한이 있어서 다시 화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르고 비유하기를 한 개의 잎사귀가 갈라지는 것으로써 했었습니다. 오늘의 강화는 반드시 그 추장과 장수들이 분리되고, 인심이 등을 져서 짐짓 이 거동을 함으로써 당장 쉬려는 것이지, 강, 회를 회복하는 것을 도모함으로써 훗날을 걱정하는 마음을 없애려는 것을 마음속에서 일찍이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리석고 간악한 도적 같은 사람이 부귀(富貴)에 꾀이고 정사에 어두워 일찍이 마디만한 공으로써 위로 국가에 보답하고, 터럭만한 은혜로써 아래로 백성에게 미친 적도 없으면서 붕당(朋黨)을 벌여놓고 중요한 군(郡)에다 배치하고, 보배와 재화를 거두어들이고, 홀로 자신의 집에 두터이 하며, 자신을 위해서 도모하고, 자손(子孫)을 위해서 도모하면서도 폐하를 위해서는 도모할 줄을 모르고, 국가와 천하를 위해서는 도모할 줄을 모르면서 앉아서 일의 기미를 잃어버린 20여 년 동안에 폐하와 사직의 대사(大事)를 그르쳤습니다. 식견이 있는 선비라면 누군들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且彼曾不思虜之於我, 其愛之而和乎? 其有餘力而肯和乎? 其國中亦有掣肘之虞而和乎? 其欲圖之於後而和乎? 臣謂虜有大讎大怨, 不可復合, 譬夫一葉之分. 今日之和, 必其酉帥携離, 人心睽異, 姑爲此擧, 以息目前. 而圖回江淮以去除後患之心, 其中未嘗一日忘也. 惜夫昏庸姦賊之人家於富貴, 闇於政事, 曾無尺寸之效以上報於國家, 毫髮之惠以下及於百姓, 分列黨與, 布在要都, 聚歛珍貨, 獨厚私室, 爲身謀, 爲子孫謀, 而不知爲陛下謀, 不知爲國家天下謀, 坐失事機者二十餘年, 誤陛下社稷大事. 有識之士, 誰不痛心?
또 대저 어진 인재를 쓰지 않고, 정사를 닦지 않고, 형세를 세우지 않고, 오로지 오랑캐에게 명(命)을 받는 것을 책무로 이루고자 한다면 마침내 족히 가볍게 모욕하는 마음을 인도하고 바로 그 계책 속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노중련이 이른바, ‘그가 장차 주고 빼앗는 바가 있다면 양왕(梁王)이 어찌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몹시 통탄(痛嘆)하고 한(恨)스러운 일입니다. 적국의 사람이 어찌 스스로 두려워하겠습니까? 적국의 마음이 어찌 스스로 복종하겠습니까? 적국의 어려움이 어찌 스스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세월을 천연(遷延)하면 백성의 마음이 떠나고, 장사들이 사기를 잃어, 또한 망하고 말 따름입니다.
且夫賢才不用, 政事不修, 形勢不立, 而專欲責成受命於虜, 適足以啓輕侮之心而正墮其計中. 魯仲連所謂彼將有所予奪, 梁王安得晏然乎, 而甚可痛恨者也. 敵國之人何自而畏? 敵國之心何自而服? 敵國之難何自而成? 遲以歲月, 百姓離心, 將士喪氣, 亦危亡而已矣.
신이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석진의 실패를 본보기로 삼으시고, 상탕, 주태왕, 문왕의 마음을 본받으시며 월나라 구천의 계책을 쓰시고, 당, 한나라 네 임금의 일을 상고하시어 사직(社稷)의 보존을 도모하십시오. 깊이 큰 계책을 생각하시고, 인심을 회복하시고, 국세를 펴시고, 정사를 세우시고, 기회를 보십시오. 그 화친을 끊지는 말고 한명의 사신을 보내어 그에게 분별(分別)과 곡직(曲直)과 역순(逆順)의 이치를 준다면 일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신은 불효(不孝)한 몸이라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이 이미 끊어졌고, 독을 품고 죽음을 견디나 죽을 날이 멀지 않았기에 헛되이 폐하를 위해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또 엎드려 생각하니 조종의 덕은 천하에 있어 지극히 크고 지극히 두터우며, 태평의 치세(治世)를 오랫동안 지내왔으니 삼대(三代)의 태평한 세상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제폐하는 하늘의 강건(剛健)한 자질을 타고나시었으니 계승하여 넓히는 학문으로써 도운다면 무엇을 하신들 이루지 못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다스린들 이루지 못하시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 지기(志氣)를 채우시고, 그 총명을 넓히시며, 반드시 깨끗하고 밝은 마음을 몸에 있게 하시길 하늘같이 하시고, 오직 옳은 것을 따르시고, 어진 인재를 선발하시고, 덕의 정사를 닦으시고, 기업을 크게 하신다면 천하가 크게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했다.
臣願陛下鑑石晉之敗而法商湯․周太王․文王之心, 用越勾踐之謀, 考唐․漢四君之事, 以保圖社稷. 深思大計, 復人心, 張國勢, 立政事, 以觀機會. 未絶其和, 而遣一介之使與之分別曲直逆順之理, 事必有成. 臣不孝之身, 親養已絶, 合毒忍死, 其亡無日, 徒能爲陛下言之而已. 又伏思祖宗之德在天下, 至大 至厚, 太平之洽, 多歷年所, 三代盛時, 有不能及. 恭惟皇帝陛下禀乾剛之資, 輔以緝熙之學, 何爲而不成? 何治而不致? 願陛下充其志氣, 擴其聰明, 必使淸 明在躬, 如太虛然, 惟是之從, 以選賢才, 以修德政, 以大基業, 天下幸甚!’
다시 저술한 비(否), 태괘(泰卦)의 해의(解義)를 올리며 상주하여 말하기를, “신이 지난 날 재상의 지위에서 죄를 기다릴 때, 폐하께서 신에게 친히 쓰신 『주역』 비, 태 두 괘의 괘사를 내려주셨습니다. 그 뒤에 신이 귀양을 가 연산에 거주하니 하늘의 해가 더욱 멀어 해바라기처럼 기우는 마음을 스스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반드시 꺼내서 두 번 절하고 엎드려 읽었습니다. 가만히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고 두 괘의 해석을 지어 오랫동안 그것을 바쳐서 을야(乙夜)의 독서(讀書)하심에 갖추려고 했으나 죄를 지고 두려움이 쌓여 위로 바칠 길이 없었습니다. 지금 삼가 엮어 베껴서 죽음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돌아보면 우물 안에 앉은 견해(見解)가 어찌 우러러 만의 하나라도 보탬이 되기에 충분하겠습니까? 오직 신자(臣子)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역경』은 삼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것인데, 두 괘는 그 공효가 더욱 깊고 간절하게 드러내 밝힌 것입니다. 그 일은 한 마음에 근본을 하는 것이니 오직 폐하께서는 유념하십시오.”라고 했다.
又以所著否․泰卦解義進之, 奏曰:‘臣往待罪相位, 陛下賜臣親書周易否․泰二卦辭. 其後臣謫居連山, 益遠天日, 葵傾之心, 不能自已. 遇朔望, 必取再拜伏讀. 竊不自揆, 爲二卦訓釋. 久欲獻之, 以備乙鑑, 而負罪積畏, 無路上達. 今謹繕寫, 味死以進. 顧坐井之見, 豈足以仰補萬一 ? 惟臣子愛君之誠, 則不能自已焉. 竊惟易謹君子小人之辨, 而二卦則其効之尤深切著明者也. 其事則本諸一心, 惟陛下留神.’
상께서 앞의 주장(奏狀)을 삼성(三省)에 내리니 재집(宰執)인 심해와 묵기설, 탕사퇴(湯思退) 등이 그것을 보고 크게 노하였으나, 오랑캐와 처음에 분쟁이 없을 때, 연중(年中)에 때때로 서로 안부를 물은 것이 아교(阿膠)와 칠(漆)같이 친밀한 것만은 아니라고 여겼고, 공이 아뢴바 화(禍)가 해마다 있는 것과 같은 것은, 혹자(或者)는 웃으며 미친 소리로 여겼다. 대간 탕붕거(湯鵬擧)와 능철(凌哲)이 그것을 듣고 잇달아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공이 촉으로 돌아갔으니 먼 지방이 동요(動搖)할 것이 두렵다고 했다. 전지(傳旨)를 내려 다시 영주에 거주하되 상기(喪期)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전지를 받들게 했다. 공이 스스로 영구를 붙들고 보호하며 서쪽으로 돌아가 면죽(綿竹)에 당도하자 곧 날을 점(占)쳐서 태부인의 장례를 치르고 옹공의 묘소에 합장했다. 조문객(弔問客)이 어지럽게 이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곡(哭)하여 울면서도 접대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들들과 조카들이 번갈아 연세(年歲)가 높아 슬픔으로 몸을 해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으나 공의 효성은 천성(天性)이라 그만 둘 수가 없었다. 태부인을 장사 지낸지 열흘째에 귀양 가라는 명이 당도하였고, 또 조정이 전지로 재촉하기를 심하게 하여 공이 당일로 길을 떠났고 상기가 끝나면 전지대로 직(職)을 떨어뜨리고 본관(本官)의 봉사(奉祠)로 영주에 거주하게 했다. 공이 스스로 감사하는 표(表)를 지어 말하기를, “군신이 비록 다른 형세(形勢)로 나누었으나 이해(利害)는 이에 같은 배에 탄 것처럼 묶여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충실하고 부지런히 하여 버리지 못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고 이른다. 공이 이로부터 다시는 손님을 접대하지 않고 날마다 『역경』과, 『춘추 春秋』, 『논어 論語』, 『맹자 孟子』를 궁구(窮究)하고 각각 설(說)을 짓고, 밤에는 사마광(司馬光)의 『통감 通鑑』을 보았다. 이와 같이 한 것이 다시 4년인데 우문부인(宇文夫人)이 또한 돌아갔다.
上付前奏三省, 宰執沈該 ․ 万俊卨 ․ 湯思退等見之大怒, 以爲虜初未有釁, 歲時通間, 不翅如膠漆, 而公所奏, 乃若禍在年歲者, 或笑以爲狂. 臺諫湯鵬擧․凌哲聞之, 章疏交上, 謂公方歸蜀, 恐搖動遠方. 有旨復令永州居住, 候服闋日取旨. 公自扶護西歸, 抵綿竹, 卽卜日洽太夫人葬, 附雍公之兆. 賓客紛至, 自朝及夕, 哭泣應接不少倦. 子姪交諫尊年不宜致毁, 而公孝誠自天, 不能已也. 太夫人旣葬十日而謫命至, 且有朝旨促迫甚急. 公卽日就道, 服闋得旨, 落職, 以本官奉祠, 居永. 公自爲表謝曰:‘念君臣雖分于異勢, 而利害寔係于同舟.’ 其憂國之誠拳拳不捨蓋如此云. 公自是不復接賓客, 日紬繹易․春秋․論․孟, 各爲之說, 夜則閱司馬氏通鑑. 如是者又四年, 而宇文夫人亦終焉.
경진(庚辰)년 가을과 겨울부터 조정이 오랑캐에게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자주 듣고 공경대부(公卿大夫)에서 아래로는 군민(軍民)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으로 위태롭게 여겨 날마다 공이 다시 재상의 자리로 부르라는 상소(上疏)가 끊이지를 않았다. 31년 봄에, 전지로 공을 호남로(湖南路)에서 편의대로 거주하게 했다. 이 때에 임안은 오랫동안 흐려있었는데 명령을 내리던 날에 뚜렷하게 청명(淸明)해지니 상하(上下)가 기뻐했다. 공이 돌아와 담주(潭州)에 이르렀다. 5월에, 흠종(欽宗)의 휘문(諱問)을 받잡고 큰 소리로 울고 애통해 하며 음식을 넘기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또 오랑캐에게서 업신여기는 국서(國書)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상소하여 말하기를, “흠종황제의 부음(訃音)이 북으로부터 오고, 또 무도(無道)한 오랑캐가 군대를 움직인다고 들으니 무릇 신자(臣子)가 되어서 누군들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지난날 외람되이 사명을 맡아 홀로 돌보아주시고 지우해 주심을 입었습니다.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辱)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하니 죄를 회피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또 헤아리기에 오늘날 오랑캐의 형세가 결코 그냥 그치지는 않을 것이고, 9월이나 10월 사이에 반드시 향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대신과 함께 계책을 의논하시어 일찌감치 반드시 지키고 반드시 싸울 방책을 결정하시어 위로 사직을 편안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양(亮)의 군대가 크게 쳐들어오니 안팎이 진동했다. 10월에 공을 관문전태학사(觀文殿太學士), 담주판관(潭州判官)으로 복직시켰다. 이 때에 오랑캐의 기병이 양회(兩淮)에서 발호(跋扈)를 하여 왕권(王權)의 군대가 무너지니 유기가 이끌고서 진강(鎭江)으로 귀환했고 양회의 사람들이 달아나 남쪽으로 오니 강을 따라 백성들이 이거나 지고서 늘어섰다. 드디어 명령을 바꾸어 공을 건강부판관(建康府判官) 겸 행궁유수(行宮留守)로 임명하고 명령서를 역마(驛馬)로 전달하며 재촉하는 것이 몹시 급했다. 장사(長沙)는 멀리 있어서 전해 듣는 것이 한결같지가 않으니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공이 명을 받은 다음 날 길을 떠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바야흐로 위태로움을 근심하는데 신자의 직분으로 별을 이고 달려가도 오히려 늦을까 두렵다.”라고 했다. 악양(岳陽)에 이르러 큰 눈을 만나자 서둘러 작은 배를 사서 바람과 파도를 무릅쓰고 장강(長江)에 배를 띄워 내려가며 또한 여러 주둔지를 경유하며 장사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악(鄂)에 당도하기 전에 강동(江東)으로 부터 온 사대부(士大夫)가 있어 말하기를, “오랑캐가 북채석(北采石)을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찔러서 강 남쪽의 사람들이 다시 세울 수가 없으니 공께서는 애써 가시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공이 얼굴빛을 바로 하여 말하기를, “아무개가 명령을 받고 곧바로 두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은 바로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나아가고자 한 것이오. 지금은 물을 곳이 없으나 오직 곧바로 승여(乘輿)가 계신 곳을 찾아서 나아갈 뿐이오.”라고 했다. 장강은 이 때에 한 척의 배도 다니지 않았는데 홀로 공이 작은 배로써 빠르게 내려가다 큰 바람을 만나서 위태로웠다. 북쪽 강변은 또한 오랑캐 군대와 가까워 종자(從者)들이 걱정하고 몹시 두려워했으나 공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양(池陽)을 지나다가 양이 피살(被殺)되었으나 그러나 남은 무리가 오히려 2만이나 되어 화주(和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현충(李顯忠)의 군대가 사상(沙上)에 있어서 공이 강을 건너가서 위로하고 건강(建康)의 부고(府庫)에 쌓아둔 재물로써 그들을 상주고 호궤했다. 온 부대가 공을 보고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여기고 기뻐 소리치며 사기가 더했다. 오랑캐가 첩보(諜報)를 듣고 두려워하며 하루 이틀 뒤에 달아났다. 현충이 사기가 날카로움을 틈타 그들을 추격하여 포로로 잡은 것이 많았다.
自庚辰秋冬, 朝廷頗聞虜有異志, 公卿大天下至軍民無不內懷岌岌, 日願公還相位, 表疏不絶. 三十一年春, 有旨今公湖南路任便居住. 時臨安積陰, 命下之日, 廓然淸明, 上下欣悅. 公歸至潭. 五月, 奉欽宗諱, 號働至不能食. 又聞虜有嫚書, 不勝痛憤, 上奏曰:‘孝慈皇帝訃自北來, 又聞逆虜兵動, 凡爲臣子, 孰不痛憤? 臣往叨任使, 孤負拳知. 主憂臣辱, 主辱臣死, 無所逃罪. 臣又度今日虜勢決無但已, 九月十月之間, 必有所向. 願陛下與大臣計議, 早定必守必戰之策, 上安社稷.’ 未幾而亮兵大入, 中外震動. 十月, 復公觀文殿大學士․判潭州. 時虜騎跳梁兩淮, 王權兵潰, 劉崎引歸鎭江, 兩淮之人奔迸南來, 沿江百姓荷擔而立. 遂改命公判建康府․兼行自留守, 金書疾置, 敦促甚遽. 長沙在遠, 傳閭不一, 人人危擢. 公被命明日, 卽首途曰:‘吾君方憂危, 臣子之職, 戴星而趨, 猶恐其緩.’ 至岳陽, 遇大雪, 亟買小舟, 冒風濤․泛長江而下, 且欲經歷諸屯, 慰援將士. 未至鄂, 有士大夫自江東來者云:‘虜焚北采石, 烟炎漲天, 南岸人不復可立, 公毋庸進也.’ 公愀然曰:‘某被命卽携二子來, 正欲赴君父之急. 今無所問, 惟直前求乘興所在耳.’ 長江是時無一舟行, 獨公以小舟徑下, 遭大風幾殆. 北岸又近虜兵, 從者憂惴甚, 公不少顧. 過池陽, 聞亮被殺, 然餘衆猶二萬屯和州. 李顯忠兵在沙上, 公渡江往勞, 以建康激賞犒之. 一軍見公, 以爲從天而下, 隨呼增氣. 虜諜報惴恐, 一二日遁去. 顯忠乘士氣銳追之, 多所俘獲.
공이 건강에 당도하여 상소하여 거가가 빨리 오기를 요청했다. 이미 출발했다는 것을 듣고 관리에게 대비를 갖추도록 감독하여 반달도 되지 않아 마련했으며, 풍채(風采)가 위엄(威嚴)이 있으니 군민들이 믿고서 편안해 했다. 상께서 건강에 당도하니 공이 길가에서 맞이했다. 위사(衛士)들이 공을 보고서 이마에 손을 대고 공이 다시 등용된 것을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고, 공이 오랫동안 장기(瘴氣)가 있는 곳에 살아서 모습이 여윈 것을 슬퍼하기에 이르렀다. 거가가 행궁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공을 불러 보시고 거듭 위로를 하시었다. 공이 머리를 조아려 상께 다시 살려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또 말하기를, “진회가 강성할 때 폐하께서 힘써 보전해 주시지 않았다면 이 몸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 또한 그를 위해 몹시 슬퍼하시며 말씀하시기를, “회의 사람됨이 이미 시기(猜忌)하고 또 질투(嫉妬)를 했다.”라고 했다. 6일 후에 다시 불러 대면을 하니 공이 아뢰기를, “국가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반드시 원기(元氣)가 충실해야 하고, 그런 뒤에야 사기(邪氣)가 침범하지를 못합니다. 조정은 원기입니다. 지금 사기가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원기가 약해서이니 혹은 땀을 흘리고 혹은 쏟습니다. 사기가 진실로 잠시 물러났으나 그러나 원기는 굳어지지 않았으니 사기가 다시 침범하면 이기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닦으며, 갑옷과 병기를 수리하고, 재물 쓰는 것을 아끼는 것, 이것이 모두 원기를 굳게 하는 도리입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얼굴빛을 바꾸고 받아들였다.
公至建康, 奏乞車駕早來臨幸. 聞已進發, 乃督官屬洽具, 不半月而辦, 風采隱然, 軍民恃以安. 上至建康, 公迎見道左. 衛士見公, 至以手加額, 無不喜公復用, 而悲公久處瘴癘, 形容之瘠也. 車駕入行宮, 首引公見, 問勞再四. 公頓首謝上更生骨肉之賜, 且曰 : ‘方秦檜盛時, 非陛下力賜직保全, 無此身矣.’ 上亦爲之慘然曰:‘檜之爲人, 旣忌且妬.’ 後六曰, 再引對, 公奏:‘國家譬如人之一身, 必元氣充實, 然後邪不能干. 朝廷, 元氣也. 今邪氣得以干犯, 必是元氣之弱, 或汗或下. 邪氣固暫退, 然元氣不壯, 邪再干之, 恐難勝任. 用人才․修政事․治甲兵․惜財用, 此皆壯元氣之道.’ 上改容開納.
이 때 거가가 장차 임안으로 돌아가려 하며 공에게 강, 회의 일을 주려고 하였으나 이윽고 중지되었고, 다시 어영숙위사(御營宿衛使) 양존중(楊存中)을 머무르게 하고 그로 하여금 조치를 전담하게 했다. 떠남에 미쳐 다시 공을 불러서 대면했다. 공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경성(京城)이 대단히 위태로웠을 때를 당하여 용감하게 예측하기 힘든 오랑캐에게 사신(使臣)가기를 청하셨고, 뒤에는 다시 임무를 받아 원수부(元帥府)를 열어 외로운 군대로 오랑캐의 예봉(銳鋒)을 감당하셨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폐하의 마음이 도리어 화복(禍福)과 생사(生死)가 있는 것을 아셨는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짐이 그 때 한 마음으로 나랏일을 보았으니 어찌 화복이 있음을 알았겠는가? 어찌 생사가 있는 것을 알았겠는가?”라고 했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 마음이 곧 천심(天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이 마음을 돌이키고 그것을 확충(擴充)하신다면 어찌 오랑캐를 두려워하시겠습니까?”라고 하니 상께서 수긍하셨다. 또 공을 위로하며 말씀하시기를, “짐을 경을 대하기를 골육(骨肉)처럼 했는데, 경이 이곳에 있으니 짐이 북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도다. 경이 오랫동안 귀양을 가 있어 매우 청빈(淸貧)하다고 들었는데 교사(郊祀)를 지낼 때 자제(子弟)나 친척을 천거하여 관직에 제수하고 봉읍(封邑)을 마땅히 다 경에게 돌려주리라.”라고 했다. 이어서 내시를 보내서 공에게 황금과 상아자루 붓을 하사하시니 공이 황공해서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진회가 20년간 공을 참소하여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신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홀로 상의 주장을 힘입어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상께서 공의 언사(言辭)가 온화(溫和)하고 기운이 평온(平穩)하며 오랫동안 지체(遲滯)된 것을 탄식하는 것이 없고, 충성과 사랑의 정성이 순수한 것을 보시고 그를 위해 감동하시어 재상들을 마주대하여 여러 차례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時車駕將還臨安, 欲付公以江淮之事. 已而中止, 更留御營宿衛使楊存中, 俾專措置. 臨發, 復引公對. 公奏:‘陛下當京城阽危之際, 毅然請使不測之魔, 後復受任開元帥府, 以孤軍當虜鋒. 當是時, 不知陛下之心還知有禍福生死否?’ 上曰 : ‘朕爾時一心家國, 豈知有禍福? 登知有死生? ’對曰 : ‘是心乃夫心也. 願陛下試反此心而擴充之, 何畏乎虜賊? ’上首肯焉, 且勞公曰:‘朕待卿如骨肉, 卿在此, 朕無北顧之憂矣. 卿久在謫籍, 聞甚淸貧, 郊祀合得奏薦及封邑當盡以還卿.’ 繼遣內侍賜公黃金及象筦筆, 公皇恐不敢辭. 秦檜二十年間所以譖公者無所不至, 有臣子所不忍聞者. 獨賴上主張, 不至死地. 至是上見公辭和氣平, 無淹滯之歎, 而溫乎忠愛之誠, 爲之感動, 對輔臣嘉美再三.
거가가 이미 돌아가니 어떤 사람이 공에게 관직을 그만 둘 것을 요청하라고 권유했다. 공이 오래된 신하로 다른 사람이 없고, 국가가 근심이 많은 때에 인심이 더욱 자기의 거취로서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삼는 것을 생각하여 차마 버리고 멀리 갈 수가 없었다. 날마다 부(府)의 일을 다스리며 작고 크든 반드시 직접 했다. 이 때 오랑캐의 기병이 비록 가버렸으나 인정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서 조정이 공의 우뚝함에 의지하기를 더욱 무겁게 했다. 양회의 군대가 강을 건너 돌아와 쉬었는데 달아나느라 상처를 입은 데에다 질병이 겹쳐서 세 아문(衙門)의 제군이 모두 건강에 머문 뒤로 죽는 자자 하루에 수십 명이나 되었다. 공이 친히 의원(醫員)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기고 일과(日課)를 적은 문서를 비치하고 진료(診療)케 했으며 절제부중(節制府中)에서 약값과 기타 비용을 지급하고 관리들을 보내어 감시했다. 날이 저물면 공이 친히 일과를 적은 문서를 보고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고찰하고 그들에게 상벌을 내려 온전하게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車駕旣還, 或有勸公求去者. 公念舊臣它無在者, 而國家多虞之際, 人心尤以己之去就爲安危, 不忍舍而遠去. 日治府事, 細大必親. 時虜騎雖去, 人情未安, 朝廷賴公屹然增重. 兩淮之兵渡江婦息, 而奔走瘡痍之餘, 重以疫癘, 自三衙諸軍皆留建康, 死者日數十人. 公親爲分課醫工, 置曆診候, 自帥司給藥餌及它費, 遣官屬監示. 至日暮, 公親視曆, 考其勤惰得失而賞罰之, 全活甚衆.
4월에, 양존중이 파직되었다. 공이 조서로써 양회의 조치(措置)를 겸하게 되었고, 이어서 건강, 진강부(鎭江府), 강(江), 지주(池州), 강음군(江陰軍) 주둔군마의 절제를 겸하게 되었다. 이 때에 오랑캐가 10만 군대로 해주(海州)를 포위하여 매우 위급했는데, 진강의 도통사인 장자개(張子蓋)가 군대를 이끌고 회상에 있으면서 나아가 구원하고자 했다. 공이 절제에 제수되었다는 것을 듣고 사기가 10배나 배가(倍加)되었다. 공이 명을 받던 날, 또한 글을 자개에게 보내서 공명(功名)을 세우라고 격려하고 그로 하여금 기병(奇兵)을 내어 오랑캐의 허점을 노리게 했다. 자개가 군대를 거느리고 힘써 싸워 오랑캐 군대를 대파하니 살아서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공이 지난해에 회상의 제군이 공(功)을 상주(上奏)한 것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어서 공이 있는 자는 배척해서 기록하지 않고,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과 마구간지기들이 모두 공을 사서 지나친 상(賞)을 받아서, 이름난 기명(器皿)을 가볍게 하고, 재화(財貨)의 쓰임을 허비하며, 기강(紀綱)을 어지럽히고, 군사로 하여금 다시는 권장하고 격려할 바를 알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상주하기를, “지금 해주에서 공을 상주할 때 마땅히 그 폐해를 깊이 혁파하여 훗날의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여러 대장들에게 명령하여 싸움에서 이기면 통제관(統制官)이하 기총(騎摠)과 대총(隊摠)에 이르기까지 공적(公的)으로 함께 보(保)를 두어 삼일 내로 아뢰게 하니, 점점 거짓이 적어지고 법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四月, 楊存中罷. 公被旨兼措置兩淮, 繼兼節制建康․鎭江府․江․池州․江陰軍駐屯軍馬. 時虜以十萬衆圍海州甚急, 鎭江都統制張子蓋提兵在淮上, 欲前救. 聞當受公節制, 士氣十倍. 而公受命之日, 亦卽爲書抵子蓋, 勉以功名, 令出奇乘虜弊. 子蓋率兵力戰, 大破虜衆, 得脫歸者無幾. 公謂去歲淮上諸軍奏功例不以實, 有功者擯不錄, 而庖人厮役悉沾濫賞, 輕名器․耗財用․亂紀綱, 使軍士不復知所勸激. 奏:‘今海州上功當有以深革其弊, 使可爲後法.’ 於是令諸大將戰勝則命統制官以下至旗頭押擁隊公共保明, 限三日申. 稍有繆僞, 重寘典憲.
공의 덕망과 위엄이 겉으로 드러나니 장사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사랑했다. 이에 이르러 다시 병권을 통괄하며 20년 동안 폐지되고 해이해진 뒤에 군정(軍政)을 담당하여 질병을 위문하고 노고를 근심하며, 고아(孤兒)를 어루만지고, 모질게 학대하는 것을 금하며, 장사들을 권면하여 그들로 하여금 충순(忠順)을 알게 하니 이에 사람마다 힘써 노력하고 분발하여 일을 빨리하고 공을 세우러 달려갈 뜻이 있었다. 공이 군적(軍籍)이 날로 적어지고, 중원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전쟁의 곤궁함을 겪어 우리 송나라를 사모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때로 인하여 오랑캐의 일과 힘이 강하지 않은 것을 틈타 회전(淮甸)의 요해처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충의(忠義)로써 귀순하는 사람들을 초모하여 안으로는 군세를 씩씩하게 하고 빈 땅을 채우며, 밖으로는 오랑캐의 정황을 두려워함으로써 인심을 묶으려고 했다. 상주하기를, “오랑캐가 군대를 물린 뒤로 병사와 말이 죽은 것이 거의 반이어서 장강(長江)에 말을 물먹이려는 뜻은 진실로 감히 싹트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좌우하는 여러 추장들이 각각 마음이 있어 밤낮으로 준비를 갖추니 회전을 엿보려는 계책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에 앞서서 미리 도모하는 것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군대의 서북(西北)쪽 인사(人士)는 생존한 사람이 거의 없고, 또 지난해에 대적을 방어하느라 다치고 죽고 도망하고, 이어서 병으로 죽은 사람이 또한 열에 네다섯이고 마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지금의 일과 힘을 비교해서 헤아려보면 사람마다 약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론하는 자들은 혹은 전쟁을 그치고자하고 혹은 백성을 쉬게 하고자 하니,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 말은 옳은듯합니다. 진실로 오랑캐가 도모하는 일을 그만 두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이 두려우니, 하루아침 갑작스럽게 일이 터지면 무엇으로써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또 하물며 장사를 보충하고 모집하는 것은 반드시 서북사람들이 싸움을 잘하고 고통을 참아서 의지할 만한 것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즉 기회를 타고 때에 미쳐서, 안으로는 굳게 수비를 하고, 밖으로는 적의 마음을 의심케 하며, 왼쪽으로 끌고 오른 쪽에서 제압하여, 그들로 하여금 머리와 꼬리로 달리게 하고, 인정이 동요되면 이것은 계산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회전의 중요한 곳은 우리가 먼저 도모하지 않으면 다른 날 강한 오랑캐가 일어나 업신여기며 회수를 건너 먼저 형세를 점거하면 일에 대처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公德威表著, 將士望風畏愛. 至是復總兵權, 當軍政二十年廢弛之後, 問疾痛․卹勞苦․撫孤遺․禁刻剝, 勉將士俾知忠順, 於是人人勉勵, 慨然有趨事赴功之志. 公念軍籍日益凋寡, 中原之人久困腥羶, 思慕我宋, 欲因玆時, 乘虜事力未彊, 頓兵淮甸要處, 以招集忠義來歸之人, 內以壯軍勢, 實曠土, 外以讋虜情, 系人心. 奏曰:‘虜人退兵之後, 士馬物故幾半, 飮馬長江之志固未敢萌也. 而用事羣酋人各有心, 日夜備具, 似有欲窺淮甸之謀. 先事預圖, 理不可緩. 我之甲兵方之西北之士, 所存無幾, 而又去歲捍禦大敵, 傷折逃亡, 繼以病死十亦四五, 馬固同之. 以今歲事力比量酌度, 夫人而知其爲弱也. 議者或欲弭兵息民, 以洽在我, 此說近是也. 誠恐虜之圖事未肯但已, 一旦倉卒, 何以待之? 又况補集將士, 必資西北之人, 能戰忍苦, 方爲可仗. 然則乘機及時, 內堅守備, 外疑敵心, 左牽右制, 使之首尾奔趨, 人情搖動, 斯爲成算, 不可忽也. 淮甸要處, 我不先圖, 異日彊虜起侮波淮, 先據形勢, 則事有難處者矣.’
또 상주하여 말하기를, “신이 몸소 물어서 알기로 동북지방은 올해 메뚜기가 크게 일어나 쌀값이 뛰고 비싸져서 중원의 사람들은 먹는 데에 심한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조정에서 혹은 쌀을 내고 혹은 돈을 내어 신에게 주어 조치케 해주시면 우리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싶습니다. 인심이 이미 돌아오면 오랑캐의 세력이 스스로 물러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공이 또 회, 초(楚)의 사람은 예로부터 쓸만하니 그 곤란하고 어지러워진 뒤를 틈타 마땅히 거두어들여 병사로 삼아야 한다고 하고, 또 상주하여 말하기를, “양회의 사람들은 평소에 강한 힘을 자랑하고, 회북의 의병(義兵)은 더욱 충성심이 굳은데 오랑캐의 해악(害惡)에서 곤란을 당하기를 또한 심히 했습니다. 오랑캐를 원수로 여겨 복수하려는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특별히 통솔하는 것이 엄격하지 못하고 병기와 갑옷은 갖추어지지 않아 비록 충성심이 있더라도 일을 성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강한 오랑캐가 제멋대로 잔학한 행위를 하면서부터 열 집에 아홉 집이 텅 비어, 허둥지둥 회수를 끼고 있지만 각기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신은 하루아침에 간사한 사람이 부추겨 거느리고 천명, 백 명이 무리가 되면 달리 일이 생기는 것을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말하자면 그 분(憤)하고 시기하며 근심이 있고 즐거움이 없는 마음으로 인하여 그들을 불러 모을 수가 있으니 어전의 만노영(萬弩營)에 두고자 하며, 백성의 강하고 건장한 자들을 모집하되 나이는 18세 이상 40세 이하로 궁노수(弓弩手)에 충원하고, 아울러 팔뚝에 자자(刺字)를 하지 않고 어전강노효용(御前彊弩効用)으로써 이름을 하여 각각에게 문서를 주되, 관향과 거주하는 곳 및 용모, 나이, 성명을 기록하고, 다섯 사람으로 일보(一保)를 맺게 하고, 양보로 일갑(一甲)을 맺게 하며, 십갑으로 일대(一隊)가 되게 하며 번갈아 서로 보증을 하고, 공이 있으면 함께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함께 벌을 주십시오. 건강부에 영채(營寨)를 설치하여 편안하게 머물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조서로 모두 공의 청을 따랐다. 공이 곧 명을 내려 말하기를, “양회는 해마다 여러 차례 해독을 입어 부자, 형제, 부부가 죽거나 상처를 입고 노략질을 당해 서로 지키지를 못했다. 지금 반드시 지킬 계획을 의론하여 치욕을 갚고 원한을 씻는 것은 인심의 한결같은 바다. 충원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서로 거느리고 응모하여라. 회북이 오랫동안 도탄에 빠지는 데에 이르렀어도 평소에 충의를 품고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하니 또한 마땅히 돌아와서 함께 공훈을 세우자.”라고 했다. 이에 양회의 사람들이 기뻐하며 나아가기를 원하였고, 거느려보니 모두 강하고 용맹하여 쓸만했다. 공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고 위무하였고, 또 진민(陳敏)을 임명하여 통제(統制)에 삼을 것을 주청했다. 민이 미천한데서 몸을 일으켜 명성이 떨치지를 못했다. 공이 곤궁하고 피폐한 속에서 발탁을 하니 감격하여 힘을 다해 보답할 것을 도모하여 오래지 않아 군대를 이루었다. 바야흐로 초모를 하던 처음에 헛된 소문이 요동을 치며 업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몇 달 사이에 초모에 응해 오는 자가 끊이지를 않으니 중론(衆論)이 비로소 정해졌다.
又奏曰 : ‘臣體訪得東北今歲蝗蟲大作, 米價踴貴, 中原之人極艱於食. 欲乞朝廷或撥米糧, 或錢物, 付臣措置, 招夾吾人. 人心旣歸, 虜勢自屈.’ 公又以淮楚之人自古可用, 乘其困擾之後, 當收以爲兵, 又奏曰:‘兩淮之人素稱彊力, 而淮北義兵尤爲忠勁, 困於虜毒亦已甚矣. 讎虜欲報之心, 蓋未嘗一日忘也. 特部分未嚴, 器甲不備, 雖有赤心, 不能成事. 自彊虜恣爲殘虐, 十室九空, 皇皇夾淮, 各無所歸. 臣恐一旦姦夫鼓率, 千百爲群, 別致生事. 謂可因其憤嫉無聊之心而招集之, 欲置御前萬弩營, 募民彊壯․年十八以上․四十五以下堪充弩手之人, 竝不剌腎面, 以御前彊弩効用爲名, 各給文帖, 書寫鄕貫․居住之處及顔貌․年甲․姓名, 令五人結一保, 兩保爲一甲, 十甲爲一隊, 遞相委保, 有功同賞, 有罪同罰. 於建康府置營寨安迫.’ 諮皆從公請. 公卽下令曰:‘兩淮比年累被荼毒, 父子兄弟夫婦殺傷虜掠, 不能相保. 今議爲必守之計, 復恥雪怨, 人心所同. 有願充者, 宜相率應募. 至於淮北久被塗炭, 素懷忠義, 欲報國恩, 亦當來歸, 共建勳業.’ 於是兩淮之人欣然願就, 率皆彊勇可用. 公親訓撫之, 又奏羞陳敏爲統制. 敏起微賤, 聲迹末振. 公擢於困廢中, 感激盡力圖報, 未幾成軍. 方召募之初, 浮言鼓動, 欲敗成績. 數月間, 來應者不絶, 衆論始定.
공이 말하기를 오랑캐는 기병(騎兵)에 장점이 있고, 우리는 보병(步兵)에 장점이 있으니 기병을 제압하는 것은 노궁(弩弓)만한 것이 없으며, 노궁을 보호하는 것은 수레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이에 민에게 명령하여 노궁을 만들고 수레를 만드는 것을 전담하게 했다. 또 말하기를 삼국시대(三國時代)이후로 북으로부터 남쪽을 엿보자면 청하(淸河)와 와구(渦口) 두 길을 경유하여 배로 군량을 운반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대개 회북은 넓어서 곡식을 실은 배가 회수로 나오지 못하면 청야(淸野)의 계책으로 얻는 바가 없어 앉아서 곤란을 겪는 형세가 있을 것을 두려워한다. 이에 동쪽으로 우이, 초, 사(泗)에 주둔하여 청하를 떨게 하고, 서쪽으로 호(濠), 수춘에 주둔하여 와(渦), 영(穎)을 누르고, 대병으로 나아가 대적하고 명성과 위세를 연결하여 잇대면 인심이 모두 돌아와 정예한 군사를 모을 수가 있다. 또 주장을 갖추어서 그것을 말했다. 또 복건(福建)에서 바다 배를 많이 거두어들여 동해(東海)를 거쳐서 등(登)과 내(萊)를 엿보고, 청하를 경유해서 회양(淮陽)을 엿보기를 요청했다. 성지가 내려 복건에서 배를 선발 모집했다. 장자개가 진강에 와서 뵌 이래로 공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해보고 그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계책과 사고가 정심(精深)한 것을 보고 더불어 산동(山東)을 취할 계책을 도모했다. 자개가 재주와 용맹이 있고 성품은 강직하고 기세는 곧아 그를 우악하게 수용(受容)할 것을 원한다고 상주했다. 또 정예 군대를 더하고 재화를 뒷받침하여 강, 회에 주둔시키고 초래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요청했다. 때 마침 금상(今上)께서 즉위(卽位)하시니, 공이 맨 처음 건강의 행궁을 호사스럽게 고치려는 공사를 중지해야하니 지금 운영하고 있는 것에 의거하더라도 행차를 대비하기에 충분하다고 상주했다. 그것을 따르겠다는 조서가 있었다.
公謂虜長於騎, 我長於步, 制步莫如弩, 衛弩莫如車, 乃今敏專制弩洽車. 又謂三國以後, 自北窺南, 未有不由淸河․渦口兩道以舟運糧. 蓋淮北廣衍, 糧舟不出於淮, 則懼淸野無所得, 有坐困之勢. 於是東屯盱眙․楚․泗以振淸河, 西屯濠․壽以扼渦․穎, 大兵進臨, 聲勢連接, 人心畢歸, 精兵可集. 卽具奏言之. 又乞多募福建海船, 由東海以窺登․萊, 由淸河窺淮陽. 有旨下福建選募. 張子蓋自鎭江來謁, 公與之語, 見其智識過人, 謀慮精審, 與圖規取山東之計. 奏子蓋才勇而性剛氣直, 願優容之. 且乞益以精申, 資以財用, 俾屯江淮, 措置招來. 會今上卽位, 公首奏建康行宮當罷工役華采之事, 據今所營, 足備臨幸. 有詔從之.
상께서 번저(藩邸)에 계실 때부터 자주 공의 덕망을 들었고, 조정에 임어(臨御)하시는 처음에 대신들에게 돌아보아 물으시고 감탄하고 탄식을 했다. 맨 처음 공을 행재소로 부르시고 공에게 편지를 내려서 말하기를, “짐이 처음에 부탁하심을 받고 작은 몸으로 만 가지 기미(機微)의 번거로움을 감당하여 새벽이나 저녁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했으나 성취할 바를 알지 못했다. 공은 원로(元老)이고 태상황제의 예우하심을 오랫동안 입은 것이 여러 신하들이 미치지를 못한다. 마땅히 아름다운 꾀와 지극한 계책으로 짐의 첫 정사를 도우라. 바야흐로 지금 변방 강계가 편안하지 않으니 대비하고 방어할 도리를 실로 멀리 헤아리기가 어렵다. 한번 공을 보고 얼굴을 맞대고 그 마땅함을 의론하여 눈앞에 있는 것 같이 분명하게 되기를 생각하고 있다. 이에 공에게 이것을 바라노니 공은 빨리 움직여서 짐의 지극한 뜻을 도우라.”라고 하셨다. 드디어 길을 나섰다. 국문(國門)에 당도하기 전에 여러 차례 재촉하고 당도하니 즉시 인견했다. 상께서 공을 보시고 얼굴빛과 몸가짐을 바꾸시고 말씀하시기를, “오랫동안 공의 이름을 들었는데 지금 조정이 믿는 것은 오직 공이다.”라고 했다. 내시에게 명하여 공에게 자리를 내려주고 여러 차례 위문을 내리셨다. 공이 아뢰기를, “임금은 학문에 힘쓰는 것을 위선(爲先)해야 합니다. 임금의 학문은 한 마음에 근본하나니, 한 마음이 하늘에 합치되면 어떤 일이든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 이른바 하늘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리(公理)일 뿐입니다. 임금께서 오직 좋아하는 것만 하시고자 하고 사사로움에 빠지신다면 공리를 잃어버립니다. 까닭에 반드시 삼가고 두려워는 마음을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지니시고, 성덕(聖德)을 몸에 있게 하고 오직 이것을 따른다면 상벌과 조치가 마땅하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스스로 돌아오고 더러운 오랑캐가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두려워서 몸을 소스라치시며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상공(相公)의 말씀을 잊지 않겠노라.”라고 했다. 공이 또 아뢰기를, “오늘날은 곧 창업(創業)의 처음과 같으니, 마땅히 매사를 예조(藝祖)로써 법을 삼아 한 몸과 한 집안으로부터 시작하시어 천하를 거느리십시오.”라고 했다. 공이 상을 뵈니 뛰어난 무용(武勇)을 타고나시어 매번 말씀이 두 황제께서 북쪽 변방에 계시고, 여덟 능(陵)이 멀리 떨어져 돌보지 못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서 원수와 부끄러움이 큰 것에 미치면 아픔을 느끼시는 것이 어조에 드러나니, 이로 인해 힘써 화의의 잘못을 아뢰고 상께 굳은 의지로 일을 도모하시도록 권하였다. 조서로 공을 소부(少傅), 강(江), 회 동서로선무사(淮東西路宣撫使), 건강, 진강부, 강, 지주, 강음군에 주둔하는 군마의 절제에 제수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했다. 태상황(太上皇)이 퇴위하시고 거처하시는 덕수궁(德壽宮)은 여러 신하들이 나아가 뵙기가 드물었는데 유독 다시 공을 거듭 인견(引見)하시며 갑작스레 잠깐잠깐 보셨다. 오랑캐를 방어하는 일로 다시 강상으로 가서 임안에 열흘을 머물렀는데 대내의 사자가 위문하고 음식을 내리는 등 끊이지를 않으니 예우가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
上自藩邸熟聞公德望, 臨朝之初, 顧問大臣, 咨嗟歎息. 首召公赴行在, 賜公手書曰:‘朕初膺付託, 以眇然一身, 當萬幾之繁, 夙夜祗懼, 未知攸濟. 公爲元老, 被遇太上皇帝禮遇之久, 羣臣莫及. 宜有嘉謀至計, 輔朕初政. 方今邊疆未靖, 備禦之道實難道度. 思一見公, 面議其當, 使了然如在目中. 繄公是望, 公其疾驅, 副朕至意.’ 公奏曰:‘臣敢不以前日格事太上皇帝之心事陛下. 惟一其志, 有隕無二.’ 遂就道. 未至國門, 敦促再四, 至卽引見. 上見公, 改容體貌曰:‘久聞公名, 今朝廷所恃惟公.’ 命內侍賜公坐, 降問再四. 公奏 : ‘人主以務學爲先. 人主之學本於一心, 一心合天, 何事不濟? 所謂天者, 天下之公理而已. 人主惟嗜欲私溺有以亂之, 失其公理. 故必須兢兢業業, 朝夕自持, 使淸明在躬, 惟是之從, 則賞罰擧措無有不當, 人心自歸, 醜虜自服.’ 上竦然曰 : ‘當不忘相公之言.’公又奏, ‘今日便當如創業之初, 宜每事以藝祖爲法, 自一身一家始, 以率天下.’公見上天錫英武, 每言及兩朝北狩․人陵廢隔․兆民塗炭, 讎恥之大, 感痛形於詞色, 因力陳和議之非, 勸上堅志以圖事. 制除公少傳․江淮東․西路宣撫使, 節制建康․鎭江府․江․池州․江陰軍屯駐軍馬, 進封魏國公. 太上皇退處德壽宮, 羣臣希得進見, 獨再引公, 見輒移時. 以秋防復往江上, 留臨安旬日, 中使問賜飮食等不絶, 禮遇冠一時.
공이 배로 국문을 출발하여 메뚜기가 북으로부터 와서 나는 거리가 몇 리나 되는 것을 보고 곧 상주하여 아뢰기를, “재이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즉위 하신 처음에 정사에 근심하시고 수고하시는데 어찌 이것이 있음을 용납하시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더욱 공경과 두려워함을 닦으시어 천심(天心)에 보답하십시오. 도리어 하늘이 폐하를 사랑하시어 아마도 장차 처음에 경계하고 권면함을 둠으로써 성덕을 이루시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근신(近臣)을 맞아 들여 만나보시고 시정(時政)을 자문하시어 반드시 혜택이 실제로 군민에게 미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앞서 공이 새로운 정사는 인재(人才)로써 급선무를 삼고 인재는 강직하고 바른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인하여 상소하여 마땅히 지금의 크고 작은 신하로 좌절(挫折)을 겪고서도 구부러지지 않은 사람 중에 일을 적절하고 곧게 의론하는 사람으로 무릇 십수 명을 상께 천거했고, 또 한가할 때에 자주 현자(賢者)를 맞아들여 스스로 가까이 하시고 권유함을 내리신다면 거의 흉금을 털어놓고 성의껏 인도하는 사이에 큰 이로운 바가 있기에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 다시 진준경(陳俊卿)과 왕응진(汪應辰)을 천거하여 선무사나 판관이 될만하다고 하니 조서로써 준경을 임명했다. 또 전 국자사업(國子司業)인 왕대보(王大寶)가 강론(講論)을 권하고 생각을 의론함에 충원(充員)할 만하다고 상주하니 상께서 드디어 대보를 부르라고 명하셨다. 공이 강상에 당도하여 다시 아뢰기를, “바른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진회가 정권(政權)을 좌우할 때부터 20년간 그 죄를 모함함으로써 충성되고 어진 이를 죽인 것이 몇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밝으신 조서를 내리시어 태상황제의 뜻으로써 조목을 갖추어 바른 말로써 죄를 받은 사람에게 보내어 각각 은혜를 베푸십시오. 그 모함 받은 일로써 당사자가 이미 죽었으면 본가(本家)에 일의 원인을 열어서 조정(朝廷)을 거쳐 하소연하는 바를 씻도록 하면 거의 원통하고 분한 기운을 오늘날 풀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천하의 공의(公議)를 다하여 천하의 인재를 등용할 것을 요청했다. 이 때에 홍매(洪邁)와 장윤(張掄)이 오랑캐에게 사신을 갔다가 돌아와 진강에서 공을 만나보고 처음에 오랑캐 땅에 당도하자 우관(寓館)에 감금하고 음식도 주지 않고 표문(表文) 가운데에 ‘배신(陪臣)’이 란 글자를 바꾸라고 명령한 사실을 갖추어 말했다. 공이 상주하여, “오랑캐 임금이 강함을 믿고 여러 나라를 탄압했습니다. 오늘의 일은 오직 덕을 닦고 정사를 세워 주무시고 드시는 사이에도 이 원수를 잊지 않아 위로는 천심(天心)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사람의 바람을 따르시되, 마땅히 다시는 사신을 파견하여 앞서의 실수를 거듭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公舟行出國門, 見蝗自北來, 飛長數里, 卽具奏曰:‘災異之起, 必有所因. 陛下卽位之初, 愛勞庶政, 豈容有此? 伏願益修欽畏, 以答天心. 抑天之愛陛下, 殆將有以警勉於初, 助成聖德也. 更乞延見近臣, 咨問時政, 必使惠澤實及軍民.’ 先是, 公謂浙政以人才爲急, 人才以剛正爲先, 因疏當今小大之臣有經挫折而不撓, 論事切直者凡十數人薦於上, 且乞以間暇時數引賢者自近, 賜以從容, 庶幾啓沃之間有所廣益. 復薦陳俊卿․汪應辰可爲宣撫判官, 有旨差後卿. 又奏前國子司業王大寶可備勸講論思, 上遂命召大寶. 公至江上, 復奏曰:‘直言不聞, 非國之福. 自秦檜用事, 二十年間, 誣以它罪, 賊殺忠良, 不知幾何人. 願下明詔, 以太上之意條具往以直言獲罪之人, 各加恩施. 其誣之以事而身已淪沒, 許本家開析事因, 經朝廷雪訴, 庶幾菟憤之氣得申今日.’ 又奏乞盡天下之公議以用天下之才. 時洪邁․張掄使虜回, 見公於鎭江, 具言初到虜中, 鎖之寓館, 不與飮食, 令於表中換‘陪臣’字. 公奏:‘虜主恃彊, 彈壓諸國. 今日之事, 惟修德立政, 寢食之間無忘此讎, 上慰天心, 下從人欲, 不當復遣使以重前失.’
한림학사(翰林學士) 사호(史浩)가 건의하여 과주(瓜洲)에 채석성(采石城)을 쌓고자 하니 상하가 의론을 했다. 공이 이르기를, “지금 임회(臨淮)의 중요한 땅은 모두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고우, 소현(巢縣)의 살림살이를 또한 다시 세우지 못했는데 이에 병졸을 몰아다가 강(江)에 성과 보루를 쌓는 데에 참여하게 하려한다면 어찌 오랑캐에게 깎아서 약해짐을 보이고 양회의 인심을 잃어버리고, 장사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혹여 완급(緩急)이 있다면 즐겨 양회를 지킬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먼저 사주(泗州) 쪽에 성을 쌓는 것만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상께서 공이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호가 이윽고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자 힘써 처음의 의론을 주장했고, 그 나머지 공(公)이 취했던 조치(措置)도 호가 옳게 여기지를 않았다. 공이 장자개가 일을 맡길 만 하다고 여겨 그로 하여금 회상을 진수하며 산동을 도모하게 했으나 자개가 아뢴 것을 호가 온갖 방법으로 저지(沮止)를 하고 당차(堂箚 : 長官이 屬官에게 내리는 辭令書)를 내려 힐책(詰責)하기에 이르렀고, 또 심하게 해주(海州)의 공(功)으로 받는 상(賞)을 방해했다. 공이 바야흐로 산동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이르는 자들이 구름 모이듯 했으나 호가 즐겨 전량(錢糧)으로 도와서 호응하려하지 않았고 또 말하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곤궁에 빠지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공이 상주(上奏)하여 상께 건강에 행차하시도록 요청했으나 호는 오로지 편안한 계책을 품고자 했다. 공이 동해(東海)에서 배와 노를 만든 것은 도모하는 바가 매우 원대했지만, 호가 문득 흩어 보내라고 명령했다. 무릇 공이 하는 것은 모두 괴퍅(乖愎)하고 이상하다고 주장하고 그 무리들이 화답을 하니 실로 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자개는 서쪽 사람이라 기운을 믿어 끝내는 병이 되었다. 공이 관속을 보내 위문하기를 끊임없이 하였고 또 상께서 친히 그를 타이르시기를 요청했다. 상께서 친서를 내려 위무하고 안부를 묻는 예우를 지극하게 했지만 자개가 끝내 일어나지를 못하니 앞서 산동을 도모하자고 약속을 맺었던 자들이 모두 실망(失望)을 했다.
翰林學士史浩建議, 欲築瓜洲采石城, 上下公議. 公謂:‘今臨淮要地俱未措置, 高郵巢縣家計亦復未立, 而乃欲驅兵卒但於江干建築城堡, 豈不示虜削弱, 失兩淮之心, 墮將士之氣? 或有緩急, 誰肯守兩淮者? 不若先城泗州便.’ 上以公言爲然. 浩已爲參知政事, 力主初議, 其餘公所措置, 浩輒不以爲是. 公以張子蓋可任, 使鎭淮上, 圖山東, 而子蓋所陳, 浩輒沮抑百端, 至下堂箚詰責, 又深遏海州之賞. 公方招來山東之人, 至者雲集, 而浩不肯應副錢糧, 且謂不當接納以自困. 公奏乞上幸建康, 而浩專欲爲懷安計. 公治舟楫于東海, 所圖甚遠, 而浩輒令散遣. 凡公所爲, 動皆乖異, 黨與唱和, 實繁有徒. 子蓋西人, 負氣竟以成疾. 公遣官屬勞問不絶, 且乞上親喩之. 上賜手書撫存備至, 而子蓋卒不起, 山東前所結約者皆失望.
호가 그 심복인 사농시승(司農寺丞) 사정지(史正志)를 건강으로 보내서 초모(招募)하여 받아들이는 일을 저지하는 것을 전담시키고자 했다. 공이 의론을 상주하여 말하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국가가 강 남쪽으로 건너온 이래 병세(兵勢)가 약했었는데, 섬서(陝西) 및 동북(東北)쪽 사람들이 우리 왕조를 잊지 않고 무리를 이끌고 귀부(歸附)한 것이 수만 명이 되는 것에 힘입었습니다. 신이 어영(御營)의 참찬(參贊)이 되었을 때부터 눈으로 직접 본바, 훗날의 좋은 장수와 강한 병졸은 왕왕 모두 당시에 귀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30여 년간 방어(防禦)하고 힘껏 싸움으로써 나라의 형세가 편안했습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그들을 끊어버리고자 하신다면 일에 크게 옳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이 명령이 한번 떨어지면 중원사람들이 우리가 버리고 끊어버리는 뜻을 가진 것으로써 반드시 모두 그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인심을 이미 잃어버리면 변해서 도적과 원수가 되어 안으로는 오랑캐의 쓰임이 되고, 밖으로는 우리의 도적이 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오늘의 처분(處分)이 이미 성의(聖意)에서 나왔다면 장차 회북 사람으로 다시는 회수를 건너서 우리에게 돌아올 자가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적(人迹)이 이미 끊어지면 저들의 동정(動靜)을 스스로 알 수가 없으니 세작과 염탐하는 일들은 누구를 보내서 시키느냐가 세 번째입니다. 중원의 사람들은 원래 우리의 백성으로 지금은 오랑캐에게 함락된 지 30년이 되었으나, 밤낮으로 귀순(歸順)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린아이가 부모를 우러르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몸을 빼서 찾아온 자가 있는데 부모가 문을 닫아걸고 그를 버리고 끊어버린다면 옷과 음식을 얻지 못하니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모두 순응하지 못하는 것이 네 번째 입니다. 지난해부터 군대를 써서 대군이 패주(敗走)하느라 피곤한데다, 역병(疫病)이 돌아 죽은 사람이 열에 네 다섯입니다. 폐하의 슬퍼하시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신다면 제장에게 명하여 다시 초모를 시행하게 하십시오. 만약 회북의 사람들이 다시는 건널 수가 없다면 초모하는 군졸은 어디로부터 충원하느냐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보통 제군에서 강(江), 절(浙)의 한 병졸을 초모하는 비용이 적게 잡아도 전(鐫) 백민(百緡)아래는 아닌데도, 그 사람됨이 유약(柔弱)해서 쓸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만약 회북에서 군사를 취하지 않는다면 군대의 형세는 날로 깎여서 약해지는 것이 여섯 번째 입니다. 만약 그들을 끊으시어 인심을 한번 잃으면 대사(大事)는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국가가 이어지는 바는 인심을 근본으로 합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도량을 크고 넓게 하시고 천지(天地)와 한가지로 부합되게 하시면, 순(順)을 미덥게 하심으로써 하늘이 보우(保佑)함을 얻으시리니 그 이치는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그것을 보시고 깨달으시어 일이 폐지되지 않게 되었다.
浩遣其腹心司農寺丞史正志來建康, 專欲沮招納事. 公論奏曰:‘竊惟國家自南渡以來, 兵勢單弱, 賴陜西及東北之人不忘本朝, 率衆歸附, 以數萬計. 臣自爲御營參贊, 目所親見, 後之良將精兵, 往往皆當時歸正人也. 三十餘年, 扞禦力戰, 國勢以安. 今一旦遽欲絶之, 事有大不可者. 此令一下, 中原之人以吾有棄絶之意, 必盡失其心, 一也. 人心旣失, 變爲寇讎, 內則爲虜用, 外則爲我寇, 二也. 今日處分旣出聖意, 將見淮北之人無復渡淮歸我者. 人迹旣絶, 彼之動息無自而知, 間探之類, 孰爲而遣? 三也. 中原之人本吾赤子, 今陷於虜者三十餘年, 日夜望歸, 如赤子之仰父母. 今有脫身而來者, 父母拒戶葉絶之, 不得衣食, 於天理人情皆所末順, 四也. 自往歲用兵, 大軍以奔疲疾疫死亡十之四五. 陛下慨念及此, 命諸將再行招募. 若淮北之人不復再渡, 所募之卒何自而充? 五也. 尋常諸軍招江浙一卒之費不下百緡, 而其人柔脆, 多不堪用. 若非取軍淮北, 則軍旅之勢日以削弱, 六也. 若果絶之, 人心一失, 大事去矣. 國家所系, 人心爲本. 惟陛下恢廓聖度, 同符天地, 信順獲佑, 其理必然.’ 上見之感悟, 事得不罷.
정지(正志)가 또 호의 지시를 받고 양로의 감사(監司), 수신(守臣)을 모아 과주로 가서 보루를 쌓는 일을 서로 의논하고, 공을 뵙게 되자 그 말재주를 믿고 호를 위해 달래고자 했다. 공이 대의로써 그것을 꺾어버리니 정지가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떠나려고 할 때 공이 다시 그에게 일러 말하기를, “돌아가거든 사참정(史參政)에게 내 뜻을 전하되, 진회가 화친을 주장했다가 끝내는 나라를 그르쳤는데, 참정이 임금의 신임을 받으니 전철(前轍)을 밟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했다. 호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 이 때에 호가 이미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내어 보위(寶位)에 오른 사실을 알리게 했다. 공이 상주하기를, “폐하께서 처음 등극하시어 바야흐로 회복(恢復)할 일을 도모하시고자 하시는데, 갑자기 사신을 보냈다는 말을 들으니 천하가 해이해져 흩어질 것이 두렵습니다. 전에 홍매가 오랑캐 나라로 불려 들어간 일의 정황을, 오랑캐의 추장이 죄다 기록하여 영북(嶺北)의 여러 나라를 타이른 사실을 탐문(探聞)했습니다. 오랑캐가 우리의 화의를 한다는 명분을 빌려 여러 나라를 압박하는 종류가 이와 같으니 바라건대 보내지 마소서.” 라고 했는데, 호가 끝내 사신을 보냈으나 그러나 오랑캐의 계획이 이미 시행되었고 또한 끝내 구례(舊禮)로 꾸짖으며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正志又受浩旨, 聚兩路監司守臣往瓜洲相度築壘事. 及見公, 恃其口辯, 欲爲浩遊說. 公折大義, 正志乃愧恐不敢言. 將行, 公復謂之曰:‘歸致意吏參暾, 秦檜主和, 終致該國. 參政得君, 無蹈覆轍.’ 浩聞之悚然. 時浩已遣使使虜, 報登寶位. 公奏 : ‘陛下初立, 方欲圖回恢復, 而遽聞遺使, 懼天下解體. 前日洪邁虜中供伏事狀, 尋聞虜酋備坐告喩嶺北諸國. 虜借我和議之名以迫脅諸國類如此, 願毋遣.’ 浩竟遣之, 然虜計已行, 亦竟責舊禮不納也.
11월에, 조서로 선무판관(宣撫判官) 진준경 및 공의 아들 식(栻)을 행재소로 오라고 불렀다. 공이 준경 등에게 부쳐서 상주하여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대가(大駕)가 건강에 친히 왕림하지 않으시면 결단코 묵은 폐해(弊害)를 모두 혁파할 수가 없으니, 한번 좋은 계책을 새롭게 하시어 군민의 사기를 고무시키시고 중원의 마음을 움직이십시오. 신은 태상황제때부터 이미 이 계책을 꾸몄습니다. 대개 강남(江南)의 형세가 실로 여기에 있는데도 버리고 하지 않아 아직 그 계책이 드러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또 상주하여 말하기를, “한문제가 처음 즉위하니 유사(有司)가 일찌감치 태자(太子)를 세워 종묘를 높이라고 요청했으니 천하국가를 위해 계획한 것이 매우 원대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유의하십시오.”라고 했다. 공이 9월 중에 일찍이 상주문을 갖추어서 이르기를, “근자에 들으니 오인(吳璘)의 군대가 순덕(順德)에 있으면서 아직 몇 달이 되지 않았으나 오랑캐와 더불어 크게 싸우니 그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오랑캐로 하여금 서쪽에서 뜻을 펴게 하면 기염(氣焰)이 반드시 치열해져서 울타리인 한중(漢中)을 위협하여 제압하고, 변방에서 병사를 모아 우리더러 신하로써 배속(配屬)하도록 다그치면 일은 진실로 대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오랫동안 대치하고도 결판이 나지 않았으니 큰 이해가 달려 있습니다. 만약 좌시(坐視)한 채 묻지 않으면 다른 날의 근심을 끼치게 되니 계책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양회의 군대에 명하여 회수의 연안을 노리게 하고, 그 변화를 보는 방법을 써서 수군(水軍)을 보내어 바다 길로부터 산동을 흔들고 충의(忠義)로 약속을 맺은 이들을 중원에 많이 보내어 이 오랑캐를 미혹케 하여, 그로 하여금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곁눈질하는 근심을 가지게 하면 순덕에 있는 군대가 우리에게 조서를 받들고 토벌(討伐)하러 갈 형세가 있음을 알고 장사들이 마땅히 또한 용력(勇力)을 과시하고 스스로 분격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이르러 다시 준경 등에게 그것을 힘써 말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에 호가 이미 조서를 보내서 인에게 순덕을 버리라고 명령했다. 대개 호의 뜻은 오로지 빨리 강화를 함으로써 자신의 공으로 삼고, 순덕을 이미 버렸다고 말하면 한갓 인이 무능한 사람이 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진실로 공을 흔드는 계책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상께서 준경 등을 보고 공의 동정과 음식과 용모(容貌)를 물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짐이 공을 의지하기를 장성(長城)과 같이하니 헛된 말이 흔들거나 빼앗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十一月, 有旨召宣撫判官陳俊卿及公子栻赴行在. 公附俊卿等奏曰:‘今日之事, 非大駕親臨建康, 則決不能盡革宿弊, 一新今圖, 鼓軍民之氣, 動中原之心. 臣自太上時, 已爲此謀. 蓋江南形勢實在於此, 舍而不爲, 未見其策.’ 又奏曰:‘漢文帝初立, 有司請早建太子, 以尊宗廟, 其爲天下國家計甚遠. 願陛下留意焉.’ 公於九月中嘗具奏, 以譖:‘近聞吳璘之兵在德順曾未幾月, 與虜大戰, 不可不爲之深思也. 使此虜得志於西, 則氣焰必熾, 脅制蕃漢, 聚兵邊陲, 迫我臣屬, 事固難處. 今持久不決, 有大利害存焉. 儻坐視不問, 賂憂異時, 非計之得也. 當令兩淮之師虎視淮壖, 用觀其變, 而遺舟師自海道搖山東, 及多遣忠義結約中原, 疑惑此虜, 使有左顧右眄之慮. 而德順之師知我有奉制之勢, 將士當亦賈勇自奮.’ 至是復令俊卿等力言之. 時浩已發詔, 命璘棄德順. 蓋浩志專欲亟和, 以自爲功, 謂德順旣棄, 則非徒璘無能爲, 亦固撓公之謀矣. 上見俊卿等, 問公動靜飮食顔貌曰 : ‘朕倚公如長城, 不容浮言搖奪.’
이 때에 상께서 이미 건강으로 행차하시려는 뜻이 있었으나 호는 자못 그렇게 여기지를 않았다. 상께서 내시 황보궁(黃保躬)을 보내 공에게 안장(鞍裝)을 얹은 말과 친서를 내려서 말씀하시기를, “경은 원훈(元勳)으로써 특별히 인망(人望)이 무거운데, 병란(兵亂)이 그치지 않는 것을 개탄(慨歎)하여 충의를 짚어 몸소 시행하였도다. 처음에는 변방을 굳게 하고 서서히 개척(開拓)을 도모하여 짐으로 하여금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다시는 근심이 없게 했다. 충성심을 깊이 생각하여 더욱 감탄하고 가상히 여길 수 있도록 하라.”라고 했다. 준경 등이 돌아오니 공이 거가가 건강에 오는 기일이 오히려 늦다는 것을 알고 기회를 놓칠까봐 깊이 우려를 하고 다시 주장(奏狀)을 갖추어 말하기를,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는 흥망(興亡)으로써 나뉩니다. 건강의 행차는 하루가 빠르면 하루가 빠른 만큼의 공이 있으니 바라건대 우러러 천도(天道)를 헤아리시고, 굽어보아 여러 사람의 인정을 따르시어 빨리 행차하실 기일을 정하시어 안팎의 바람을 위로하십시오.”라고 했다.
時上已有欲幸建康之意矣, 而浩殊不以爲然. 上遣內侍黃保躬賜公鞍馬手書曰 : ‘卿以元勳, 特爲重望, 慨風塵之未靜, 仗忠義以親行. 首固邊防, 徐謀開拓, 俾朕居尊, 無復軫慮. 緬思忠赤, 益用歎嘉.’ 俊卿等歸, 公知車駕來建康之期尙緩, 深慮有失機會, 復具奏曰:‘人心向背, 興亡以分. 建康之行, 一日有一日之功. 願仰稽天道, 俯狥衆情, 亟定行期, 以慰中外之望.’
이 때에 거란의 추장인 와알(窩斡)이 또한 군사를 일으켜 오랑캐를 공격하였으나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무리가 패해서 달아났다. 효장(驍將)인 소자파(蕭鷓巴)와, 야율괄리(耶律适里)가 바닷길로 투항(投降)해 왔다. 공이 여진 일국(一國)의 병사는 그 수가 한정(限定)이 있는데 지난 날 유독 강한 힘으로 중국의 백성과 여러 나라의 사람들을 협박하여 썼기 때문에 군대가 강성해서 대적할 이가 없었으니, 지금 마땅히 우리 백성을 초모하여 받아들이고 여러 나라를 두터이 위무(慰撫)하면 여진의 마음에 스스로 의혹이 생기고, 중원과 여러 나라가 그의 쓰임이 되지 않으면 오랑캐가 망할 것이라고 여겼다. 상주하여 자파 등을 두터이 위무할 것을 청했다. 상께서 그것을 따랐고, 조서로, 공이 자서 등이 받을 벼슬과 상(賞)을 헤아려 진언(進言)함으로써 그것을 시행하게 하였고, 이에 친서를 내려 공을 위로하며 말씀하시기를, “경은 문무(文武)가 완전한 인재로써 짐이 의지하고 믿는 것을 도와서 위엄을 장성(長城)에 베풀었으니 그 공이 더욱 풍성하다. 오랑캐가 귀순을 하니 안팎이 편안하게 여겼도다. 지금 경에게 담비모자 등을 내리노라.”라고 하셨다.
時契丹酋窩斡亦起兵攻虜, 爲虜所滅, 其黨奔潰. 驍將蕭鷓巴․耶律活里自海道來降. 公以爲女眞一國之兵, 其數有限, 向來獨以彊力迫脅中國之民及諸國之人爲用, 是以兵盛莫敵. 今當招納吾民, 厚撫諸國, 則女眞之心自生疑惑, 中原諸國莫爲其用, 虜可亡也. 奏乞厚撫鷓巴等. 上從之, 詔公擬官賞施行, 仍賜手書勞公曰 : ‘卿以文武全才, 副朕倚毗, 宣威塞垣, 厥功益茂. 夷虜來歸, 中外帖然. 今賜卿貂帽等.’
이 때에 오랑캐가 십만의 무리로 하남에 주둔하여 명성과 위세를 많이 떠벌리고 양회를 엿보고자 하였다. 공이 대병으로 우이(盱眙), 사(泗), 호(濠), 여(廬) 에 주둔하니 오랑캐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다만 삼성(三省)과 밀원(密院)에 문서를 보내고 선무사(宣撫司)인 공에게 문서를 보내 헛되이 큰소리를 치며 해(海), 사(泗), 당(唐), 등(鄧) 네 주와 해마다 바치는 공물(供物) 등을 요구한다고 했다. 공이 이 모두가 속임수이니 그것 때문에 움직여서는 부당하다고 상주하니 끝내 아무 일이 없었다.
時虜以十萬衆屯河南, 多張聲勢, 欲窺兩淮. 公以大兵屯盱․泗․濠․廬, 虜不敢動, 但移牒三省․密院及移書宣撫司, 虛爲大言, 欲索海․泗․唐․鄧․商州及歲幣等. 公奏此皆詭詐, 不當爲之動, 卒以無事.
융흥(隆興) 원년 정월 9일에 조서로 공을 추밀사(樞密使), 건강, 진강부, 강, 지주, 강음군 둔주 군마의 도독으로 제수하고 또 당일로 부(府)를 열고 일을 보도록 명령했다. 처음에 공이 제장에게 명령하여 사주에 두 성을 쌓도록 하여 이에 이르러 끝마쳤는데 위엄이 있어서 변방의 중진(重鎭)이 되었다. 이 때에 오랑캐의 장수인 만호(萬戶) 포찰도목(蒲察徒穆)과 오랑캐의 사주지사(泗州知事)인 대주인(大周仁)이 오천병사로써 홍현(虹縣)에 주둔했고, 도통(都統) 소기(蕭琦)가 만여 인으로써 영벽(靈壁)에 주둔하여 군량을 비축하고 성을 수리하며 세작을 보내는 것이 끊이지를 않았다. 공이 이르기를, 가을이 되면 반드시 변경에 근심이 될 것이니 마땅히 때에 알맞게 소탕해야 하고, 만약 두 성을 깨뜨리면 회, 사는 베개를 편안히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소기가 평소에 우리에게 귀순할 뜻이 있어 자주 친서를 선무사에게 보내왔다. 때마침 주관전전사(主管殿前司) 이현충(李顯忠)과 건강도통제 소굉연(邵宏淵)이 또한 두 읍(邑)을 공격할 계책을 바치고, 공이 주장을 갖추어 상주하니 상께서 친서로 가(可)함을 알려왔다.
隆興元年正月九日, 制除公樞密使․都督建康․鎭江府․江․池州․江陰軍屯駐軍馬, 且命卽日開府視事. 始, 公命諸將築泗州兩城, 至是而畢, 隱然爲邊塞重鎭. 時虜將萬戶蒲察徒穆及僞知泗州大周仁以兵五千屯虹縣, 都統蕭崎以萬餘人屯靈壁, 積糧修城, 遣間不絶. 公謂至秋必爲邊患, 當及時掃蕩. 若破兩城, 則淮泗可莫枕也. 且蕭琦素有歸我之意, 累遣覩信至宣撫司. 會主管殿前司李顯忠․建康都統制邵宏淵亦獻擣二邑之策, 公具以奏上. 上手書報可.
3월에 공을 불러 행재소로 갔다. 공이 중도에 주장을 갖추어 말하기를, “지금의 의론하는 자가 누군들 싸우거나 지키는 말을 지니지 않았겠습니까? 그 아래는 곧 다시 옛 전철(前轍)을 따라 거듭 전날의 우호(友好)를 이야기하니, 신의 입장에서 그것을 보면 싸우고 지키는 말이란 이것입니다. 그러나 싸우고 지키는 도리는 묘당(廟堂)의 승산(勝算)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천하에 임금노릇 하는 사람은 진실로 몸을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함으로써 만민(萬民)을 바르게 합니다. 전쟁을 쓰면 이기고, 지킴을 쓰면 견고해서 이치에 단호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덕으로 하는 정사는 인심을 적시지 못했고, 묵은 폐해는 천하에 혁파되지 않았는데, 그것을 헤아리기를 조정의 승산으로 하는 것은 깊이 의심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하늘의 강건함을 펴시고 홀로 판단하심을 떨치시며 한달사이에 덕과 법을 크게 펴시어 한번 안팎을 새롭게 하시고 모두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법을 따라서 남북(南北)의 사람들로 하여금 훗날에 큰 다스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시오. 인심이 이미 믿으면 사기는 반드시 떨칠 것이니 싸우고 지킴에 있어 어디를 간들 성공하지 못하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윽고 당도하자 다시 앞의 얘기를 말하였다. 상께서 거듭 감탄하며 아름다이 여기시고 공에게 마땅히 먼저 두 성을 도모하여 변방의 근심이 이미 풀어지면, 폐해는 이어서 혁파하겠다고 이르셨다. 이에 이현충에게 호주를 나서 영벽으로 가고, 소굉연에게 사주를 나서 홍현으로 가라했고, 참의(參議) 풍방(馮方)에게 따라가서 수고로움을 호궤(犒饋)하라고 명령했다. 공이 또한 스스로 거기에 왕림했다. 장차 떠나려함에 군대 일의 이익과 손해는 기필하기가 어려움을 생각하고 혹여 작은 차질이 있어 상께서 크게 일을 하시려는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 두려워, 제갈량(諸葛亮)이 건흥(建興) 6년에 상주한 후출사표(後出師表)가 그 말이 분명하고도 간절하여 일의 기미를 자세히 설명했으니 바라건대 상께서 그것을 자리의 오른쪽에 두시고 늘 보시라고 말했다. 또 기(旗)와 방(牓)을 군대 앞에 내고 말하기를, “면전(面前)에서 성지를 받들었으니, 대군이 당도하는 곳에 터럭만큼이라도 어지럽지 않음에 힘쓰고, 오로지 백성을 위로하고 편안이 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아야 한다. 감히 하나의 의롭지 못함을 행함이 있거나, 한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내 귀에 들리기에 이른다면 짐(朕)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三月, 召公赴行在. 公中道具奏曰:‘今之議者, 孰不持戰守之說? 其下則欲復遵舊轍, 重講前好. 以臣觀之, 戰守之說是也. 然而戰守之道, 本於廟勝. 君天下者, 誠能正身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用之戰則克, 用之守則固, 理有決然者矣. 今德政未洽于人心, 宿弊未革于天下, 揆之廟算, 深有可疑. 臣願陛下發乾剛․奮獨斷, 於旬月之間, 大布德章, 一新內外, 盡循太祖․太宗之法, 使南北之人知有大治于後. 人心旣孚, 土氣必振, 于以戰守, 何往不濟? ’旣至, 復伸前說. 上再三歎美, 謂公當先圖兩城, 邊患旣續, 弊以次革. 乃命李顯忠出濠州趨靈壁, 邵宏淵出泗州趨虹縣, 而令參議馮方隨往犒勞. 公亦自往臨之. 將行, 念軍事利鈍難必, 恐或小跌, 傷上有爲之心, 謂諸葛亮建興六年所上奏其言明切, 曲盡事機, 乞上置之坐右, 常觀覽焉. 又出旗牓軍前曰:‘面奉聖旨, 大軍所至, 務要秋毫不擾, 專以慰安百姓爲事. 敢有行一不義, 殺一不辜, 達於聽間․朕所不赦.’
공이 강을 건너서 들으니, 이현충이 영벽에 이르자 소기가 후회에 빠졌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대적했지만 현충이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기(琦)가 거느린 만 오천 명이 거의가 다 항복하거나 죽었고, 소굉연 또한 나아가 홍현을 포위하고 현충이 그와 합세하니 도목(徒穆)과 주인(周仁)이 궁지에 빠져 그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니 역시 만여 명이라고 했다. 공이 또 척방(戚方)을 보내어 수군을 거느리고 회양(淮陽)으로 나아가게 하고, 현충이 적을 가볍게 여겨 깊이 나아갈 것을 염려하여 친히 관속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 우이에 주둔하니 가까이서 지휘하기에 편했다. 현충이 소기를 추격하여 숙주(宿州)의 가까운 성에 이르니 기가 가속(家屬) 및 천호(千戶) 두령(頭領) 등 백여 인이 항복하니 드디어 곧바로 성 밑에 당도했다. 오랑캐의 거짓원수〔僞元帥〕가 이만 명을 보내서 싸우게 했는데 그들을 대파했다. 나아가 성을 공격하여 장사들이 개미떼처럼 붙어서 올라가 드디어 이기니 중원이 진동했고 귀부하는 자들이 나날이 이르렀다. 상께서 친서로 말씀하시기를, “요사이 변방의 보고로 안팎이 고무(鼓舞)되었다. 수십 년이래로 이와 같은 승첩(勝捷)이 없었다.”라고 했다. 공이 한 여름에 사람이 피로할 것을 걱정하여 급히 현충 등을 소환하여 군대를 돌리게 했고, 상 또한 제장들에게 몸가짐을 진중히 하도록 경계하셨다. 모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거짓 부원수 흘석렬지령(紇石烈志寧)이 대병을 거느리고 당도하니, 현충 등이 이긴 것을 믿고 다시는 성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만 성밖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니 사졸들이 자못 피곤했다. 거짓 원수가 진 앞에서 얘기를 할 것을 명하고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우리를 격파하면 마땅히 하남의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라고 했다. 이미 싸움이 벌어지니 오랑캐 군대가 퇴각했다. 다음 날 다시 와서 싸웠는데 우리 군대가 조금 불리하니 통제관(統制官)으로 도망치는 자가 있어 군심(軍心)이 자못 동요되었다. 현충 등이 군대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가니 오랑캐의 무리가 나아와 성을 공격했으나 다시 죽고 다쳐서 퇴각했다. 며칠이 지나서 오랑캐의 대병이 장차 당도할 것이라는 첩자(諜者)의 보고를 듣고 현충 등이 그것을 믿고 밤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오랑캐 역시 추격하지를 못했다. 이 때에 오랑캐의 이름난 추장이나 용맹한 장수로 항복하거나 사로잡힌 자가 길에 잇대었고 정예병으로 깨지고 죽은 것이 세배나 될 뿐만이 아니어서 이후로 다시는 영벽과 홍현에 주둔할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처음 군대가 퇴각하니 공이 우이에 있어 숙주와의 거리가 사백리가 되지 않았는데 뜬소문이 무성하고 오랑캐가 또 이를 것이라고 전해졌다. 관속 가운데 격문(檄文)을 품고 돌아가는 자가 있고, 또한 공에게 빨리 남쪽으로 철수하자고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이 대답하지 않고 드디어 북쪽으로 회수를 건너 사주성에 들어갔다. 돌아온 군사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무했으며 상처를 돌보고 질병을 구제하며 죽은 이의 일을 기록하고 공이 있는 것을 밝히니 인정이 함께 기뻐했다. 며칠 후에 상하가 오랑캐가 처음부터 숙주를 지난 자가 일기(一騎)도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인심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 때에 공이 홀로 아들인 식(栻)과 함께 몇 달 동안 우이에 머무르며 장사들로 하여금 모두 돌아와 쉬게 하고 그런 뒤에 유양으로 돌아와 주장을 갖추어 죄를 기다렸다. 상께서 친서로 위로하시니, 공이 다시 상주하여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벌을 밝히는 것이 근본이 됩니다. 벌을 시행할 곳은 마땅히 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친서로 알려 말하기를, “경이 여러 차례 죄를 기다리며 벌을 경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경의 이 말은 지극히 공변되어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는가? 짐이 경에게 믿고 맡겨서 일찍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으니 경이 이것으로써 마음에 둘 것은 없다. 바로 경의 경륜(經綸)과 계획을 의지하는데 다른 사람을 어찌 경과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조서를 내려서 특진시켜 다시 강, 회의 선무사를 삼았다. 숙주의 군대가 돌아오니 사대부로 평소에 화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틈을 타고 논의하여 비난하는 말이 여러 가지가 나왔다. 상께서 다시 친서를 내리시어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변경의 일은 더욱 경을 의지하기를 무겁게 하리니 경은 남이 말이 두려워 망설여서는 아니 된다. 전에 일을 벌이던 초기에 짐과 경이 홀로 이 일을 맡았다. 오늘 또한 모름지기 짐과 경이 끝내 이 일을 맡을 것이니 절대로 앞서서 화의(和議)를 하겠다는 말을 아뢰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셨다. 다시 거듭 내시를 보내서 공을 위로하니, 이에 공이 다시 도통제로부터 통제관 이하까지 등급을 매기어 차례대로 벌을 시행할 것을 요청했다. 이 때에 조정에서 양존중을 어영사로서 행강상수비(行江上守備)로 파견할 것을 건의하여 길을 떠날 날에 여유가 있었다. 공이 이르기를 명령(命令)이 한군데에서 나오지 않으면 장사들이 관망(觀望)을 하여 혹여 나랏일을 그르치면 몸이 죽어도 이익이 없다 하고 드디어 의론하여 그것을 상주했다. 상께서 당일로 조서를 내려 존중에게 가지 말라고 했다.
公渡江, 聞李顯忠至靈壁, 而蕭琦中悔, 以衆來拒. 顯忠大破之, 琦所將萬五千人降殺殆盡. 邵宏淵亦進圍虹縣, 顯忠會之, 徒穆․周仁窮蹙, 率其衆降, 亦以萬數. 公又遣戚方將舟師趨淮陽, 慮顯忠輕敵深進, 則親帥官屬前駐盱眙, 幾便近得以指呼. 顯忠追蕭琦至宿州近城, 琦與家屬及千戶頭領等百餘人降, 遂直抵城下. 虜僞元帥者遣二萬餘人來戰, 大破之. 進攻城, 將士蟻附而上, 遂克之, 中原震動, 歸附日至. 上手書曰 : ‘近日邊報, 中外鼓舞. 數十年來, 無此克捷.’ 公以盛夏人疲, 急召顯忠等還師, 而上亦戒諸將以持重. 皆未達, 僞副元帥紇石烈志寧率大兵至, 顯忠等恃勝不復人城, 但於城外列陣以待, 士卒頗疲矣. 僞帥令於陣前打話, 謂‘爾若破我, 當盡歸河南之地’. 旣戰, 虜兵引却. 明日復來戰, 我師小不利, 統制官有遁歸者, 軍心頗搖. 顯忠等率兵人城, 虜衆進攻城, 復殺傷而退. 居數日, 得諜者報, 虜大兵將至, 顯忠等信之, 夜引歸, 虜亦不能追也. 時虜名酉勇將降執系道, 精甲破亡不翅三倍, 是後不復能爲靈壁․虹縣之屯矣. 方初退師, 公在盱眙, 去宿不四百里, 浮言洶動, 縛虜且至. 官屬中有懷檄以歸者, 亦有請公亟甫轅者. 公不答, 遂北渡淮, 入泗州城. 軍士歸者勞而撫之, 視瘡痍․拯疾病, 存錄死事, 旌有功, 人情胥悅. 凡數日, 上下始知虜初無一騎過宿者, 人心始定. 時公獨與子栻留盱眙幾月, 俾將士悉歸愒而後還維揚, 具奏待罪. 上手書撫勞, 公復奏曰:‘今日之事, 明罰爲本. 而罰之所行, 當自臣始.’ 上手書報曰:‘卿屢待罪, 欲罰自卿始. 卿此言至公, 豈不感格? 朕委任卿, 未嘗少變, 卿不可以此介意. 正賴卿經畵, 他人豈能副卿? ’有旨降授特進, 更爲江淮宣撫使. 宿師之還, 士大夫素主和議者乘時抵(血+戲), 非議百出. 上又賜手書曰:‘今日邊事尤倚卿爲重, 卿不可以畏人言而懷猶予. 前日擧事之初, 朕與卿獨任此事. 今日亦須朕與卿終任此事, 切不可先啓欲和之言.’ 又荐遣內侍勞公, 於是公又第都統制․統制官以下, 乞以次行罰. 時朝廷建遣楊存中以御營使行江上守備, 首途有日. 公謂命令不一, 將士觀望, 或敗國事, 身死無益, 遂論奏之. 上卽日詔存中毋行.
공이 진양(眞揚)에 머물며 양회의 수비를 크게 정비하고 위승(魏勝)에게 해주를 지키고, 진민(陳敏)에게 사주를 지키고, 척방에게 호주를 지키고, 곽진(郭振)에게 육합(六合)을 지키며 고우(高郵)과 소현(巢縣) 두 성을 다스려서 대군의 살림밑천을 삼게 했고, 척주(滌州)와 관산(關山)을 수리하여 오랑캐의 요충을 누르게 하고, 수군을 회음(淮陰)에서, 마군(馬軍)을 수춘, 여주에서 모았다. 대개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사주를 공격하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우회하여 멀어지게 되어, 성안의 이만 여명의 병사가 수비를 하기에 충분했고, 그 헛점을 틈타면 이기기에 충분하다. 만약 그들이 뜻밖에 회서로부터 쳐들어오면 들판을 청소하고 성벽(城壁)을 굳건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노략질할 것이 없게 한다. 이미 나아갈 수가 없을 때, 군대를 합쳐서 그들을 공격하면 크게 깨뜨릴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 군대가 퇴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스스로 편안하지를 못하니, 공이 식에게 건강으로 가서 가속(家屬)을 이끌고 유양(維揚)으로 오라고 명령을 하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크게 안정되었다. 양회의 군현들이 모두 가옥을 늘리고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잦아져 시골의 부락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公留眞揚, 大筋兩淮守備, 命魏勝守海州,陳敏守泗州, 戚方守濠州, 郭振守六合, 治高郵․巢縣兩城爲大兵家計, 修滁州關山以扼虜衝, 聚水軍淮陰, 馬軍壽春․廬州. 大抵虜人來攻泗州, 則糧道回遠, 城中兵二萬餘足以守, 乘其弊足以勝. 如其出奇自淮西來, 則淸野堅壁, 使無所掠. 旣不得進, 合兵攻之, 可大破也. 然是時師退未幾, 人不自保, 公命栻往建康挈家屬來維揚, 衆情大安. 兩淮郡縣悉增葺屋宇, 人物熙熙, 以至鄕落亦皆成聚.
상께서 다시 식을 상주한 일로 부르시니, 공이 주장을 부쳐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크게 하려는 것이 있는 임금은 반드시 심복(心腹)의 신하가 있어서 서로 더불어 계책을 협의하고 뜻을 같이하여 치세(治世)와 공업(功業)을 이루되 터럭만큼의 틈도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런 뒤에야 상하(上下)가 메아리처럼 반응하고 그림자처럼 따라서 일을 성취했습니다. 이윤(伊尹)이 탕(湯)에게 대한 것과, 태공(太公)이 주(周)에 대한 것과, 그 다음으로 관이오(管夷吾)가 제(齊)에 대한 것과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에 대한 것 같은 것이 책(冊)과 전(傳)에 실려 있어 처음과 끝을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가에서 집을 짓는 것처럼 어찌 스스로 성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편안함과 위태로움, 재앙과 복의 기미가 그 반응이 멀지 않으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변방이 대략 안정되었고, 군대는 대략 정비 되었으며, 오랑캐는 패군(敗軍)한 까닭에 그 형세가 온 나라의 힘을 다 들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신은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몸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 되었고 움직이려면 문득 간섭(干涉)과 제지(制止)를 받아 자유롭지가 못하니 폐하께서는 장차 어찌 그것을 쓰시겠습니까? 바라건대 깊이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시고, 천하의 숨은 현자를 면밀하게 가려 뽑으시어, 안팎의 큰 권한(權限)을 주시고, 맡기기를 오로지 하시고, 믿기를 돈독하게 하시어, 앞의 몇 임금이 한 것과 같게 하시고 계책이 한군데에서 나오게 하고 소인배들로 하여금 몰래 이간질하지 못하게 하시며, 다른 의론으로 가볍게 흔들지 못하게 하시고, 내치(內治)를 먼저하고 바깥일을 나중에 하며 회복(恢復)을 도모하시면 세월이 지날수록 태평한 세상을 거의 기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지극히 어려운 시기를 만나셨고, 예로부터 일찍이 없었던 강한 적을 만나셨으니, 만약 군신이 서로 하나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회복을 도모하고 이로움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끝내는 성취할 것을 기약하지 않으면, 진실로 세월이 쉽게 흘러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여 매우 아프고 애석해 할 것이 두렵습니다. 신은 늙고 또한 병이 들었는데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가련히 여기시고 해골(骸骨)로서 산림에서 죄를 기다릴 수 있도록 은덕을 내리시며, 벼슬에 나아감과 물러남에서 실패를 하여 천하후세의 웃음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상께서 주장을 보시고 식(栻)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비록 떠나기를 요청하는 글이 매일 올라오지만 짐은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 짐이 위공(魏公)에 대하여 더함은 있어도 끝내 헛된 의론에 미혹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라고 하셨다. 공이 그것을 듣고 감히 다시는 요청하지를 않았다. 이 때 상께서 근신을 대할 때 일찍이 공(公)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는데, 유독 위공이라고 부르고 매번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공이 음식을 먹는 것의 많고 적음과 살이 찌고 수척한 것이 어떠한 지를 보게 하셨으니 그 돌보아 주시는 예우가 이와 같았다.
上復召栻奏事, 公附奏曰:‘自古大有爲之君, 必有心腹之臣相與協謀同志, 以成治功, 不容秋毫之間, 然後上下響應影從, 事克有濟. 如伊尹之於湯, 太公之於周, 其次管夷吾之於齊, 諸葛亮之於蜀, 書傳所載, 始終可考. 不然, 作舍道邊, 何自而成? 而况安危禍福之幾, 其應不遠, 可不畏哉!今邊隅粗定, 軍旅粗整, 虜以傷敗之故, 其勢未能爲竭國之擧. 而臣以孤蹝, 跋前疐後, 動輒掣肘, 陛下將安所用之? 願深惟國訐, 精選天下巖穴之賢, 付以中外大柄, 任之專, 信之篤, 如前數君所爲, 謀出於一, 不使小臣得以陰間, 不使異議得以輕搖, 先內後外, 以圖恢復, 庶幾日積月著, 太平可期. 載惟陛下當至簸至艱至難之時, 遇自古未嘗有之彊敵, 若非君臣相與爲一, 朝夕圖回, 不較利鈍, 終期有成, 誠恐歲月易流, 後悔難追, 甚可痛惜也. 臣老且病, 望陛下矜憐, 賜以骸骨, 使之待罪山林, 無令出處狼狽, 取笑天下後世.’ 上覽奏, 謂栻曰:‘雖乞去之章日至, 朕決不許. 朕待魏公有加, 終不爲浮議所惑.’ 公聞之, 不敢復有請. 時上對近臣未嘗名‘公’, 蜀曰魏公, 每遣使來, 必令視公飮食多寡, 肥瘠何如, 其眷禮如此.
8월에 조서로 공에게 도독(都督)의 호칭을 회복시켰다. 오랑캐의 도원수(都元帥) 복산충의(僕散忠義)와 지령(志寧)이 아울러 삼성과 추밀원에 글을 주어 사군(四郡) 및 세폐(歲幣) 등을 요구했다. 또 이르기를, “지금 이에 군대를 다스려서 농한기(農閑期)에 결판을 내겠다.”라고 하며 공갈로써 우리를 협박했다. 공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힘이 강하면 쳐들어오고 힘이 약하면 그치니, 처음부터 화친(和親)과 불화(不和)의 틈이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로 하여금 틈이 있어 기회를 탈 수 있게 하고 기미가 있어 머무를 수 있게 한다면, 비록 사신이 길에 줄을 이어서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도 또한 충분히 그 칼끝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거짓원수의 서신은 대개 강남의 선비로 화친을 주장하는 자가 많음을 알고 우리의 심복(心腹)을 이간(離間)하고, 우리가 이루려는 계책을 어지럽혀서 앉아서 온전한 공을 거둠으로써 그 분노(忿怒)와 해독(害毒)을 훗날 제멋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깊이 그것을 살피십시오. 신이 진실로 지나친 걱정이지만 가만히 생각건대, 썩은 선비의 의론이 큰 계책을 알지 못하고 드디어 참으로 화친을 할 것이 두렵습니다. 일찍이 몇 년 뒤를 알지 못하여, 오랑캐의 말〔馬〕이 날로 번성하고 인심이 더욱 안정이 되는데, 우리 장사의 뜻은 해이해져 흩어져가고 게을러지면, 바야흐로 이 때에 무엇으로써 버티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내치(內治)가 확립되지 않았고, 사람들이 사사로움을 품는 것이 많고 다만 일신(一身)을 도모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어 국가를 생각하지 않으니, 군민의 폐해를 특별히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치를 구하지 아니하고 말단(末端)에서 자잘하게 굴면 아마도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八月, 有旨復公都督之號. 虜都元帥僕散忠義與志寧並貽書三省․密院, 索四郡及歲幣等. 且云:‘今玆洽兵, 決在農隙’, 以恐脅我. 公奏:‘虜力彊則來, 力弱則止, 初不在夫和與不和之間. 使其有隙可乘, 有機可投, 雖使人接踵于道, 卑辭厚禮無所不至, 亦莫足以遏其鋒也. 今僞帥書蓋知江南之士欲和者衆, 離間吾心腹, 撓亂吾成謀, 坐收全功, 以肆其忿毒于後. 惟陛下深察之. 臣誠過慮, 竊恐腐儒之論不知大計, 遂爲眞和. 曾不知三數年之後, 虜馬日蕃, 人心益定, 我之將士解體怠惰, 方是時, 何以枝梧? 然今日內治未立, 人多懷私, 只貴謀身, 不思爲國, 軍民之弊, 漠不加意. 不求之此而區區於末, 恐無益也.’
이 때에 조정에서 귀순한 사람들을 사절하고 물리치려고 하여 이미 당도한 자도 모두 꺼려서 끊어버리고, 또 변경에서 불화가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공공연히 간첩(間諜)을 많이 파견하고자 하지 아니했다. 공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예로부터 창업하고 중흥한 임금이 천하의 회복을 도모할 때 처음부터 일찍이 일을 맡길 장수와 평소에 양성한 병사와 오랫동안 위무(慰撫)한 백성이 있어서 그것을 위해 썼던 것은 아닙니다. 그 시설을 상고하면 일은 한 가지 단서만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군도(群盜) 중에서 취하고, 혹은 항복한 포로에서 취했으며, 혹은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여, 허심탄회(虛心坦懷)한 큰 도량으로 우러러 천도(天道)를 의지하고 굽어보아 인심(人心)에 순종하여 큰 공을 이루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후세(後世)의 인덕은 믿음이 없고 조치는 마땅함을 잃어 길을 들인 항복한 사람들도 배반함이 많으니 이것은 한갓 인사의 잘못일 뿐만 아니라 대개 또한 천명(天命)이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조종을 계승하여 높이시고 바야흐로 회복에 힘쓰시면서 항복한 사람에 대하여 처음부터 그들을 의심하시면 좌우전후(左右前後)와 오늘의 군대의 무리 중 누군들 의심을 할만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다른 날 중원에 나아가 위무하시려면 반드시 먼저 불러서 위로하셔야지 일이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조처가 마땅함을 잃으면 도리어 그 분노를 격발시켜서 다른 날 사람들이 스스로 적(敵)이 될 것입니다. 계책이 여기에서 나온다면 어찌 그르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장차 사해(四海)를 경영하시려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정성을 미루어 사람을 대하시기를 하늘같이, 해같이 하시어야 하니 어찌 고루(固陋)한 선비를 따라서 임시로 보신(保身)하는 계책을 하시어 홀로 천명의 믿을 만함을 없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했다. 또 상주하기를, “오랑캐가 우리에게 대하여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있어 속임수를 자행하는데 힘을 남기지를 않습니다. 선화(宣和), 정강(靖康) 이래로부터 오로지 화의(和議)로써 국가를 어지럽히고, 속이고 감추는 것을 반복하여 대략 하나의 진실도 없습니다. 지금 맹약을 무너뜨리기를 이와 같이 하니 조정이 아직도 전철을 밟으며 신의(信義)라고 부르고, 군대간의 불화가 생길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이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옛날 송양공(宋襄公)이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중상(重傷)을 입히지 않고 반백(半白)인 사람을 사로잡지 않는다고 하다가 끝내 초(楚)나라에게 패하여 유례가 없는 일을 한 것이 옳습니까?”라고 했다.
時朝廷欲謝却歸正人, 已至者悉加樂切, 且不欲公多遣間諜, 恐生邊釁. 公奏曰 : ‘自昔創業中興之君圖回天下, 初非有夙任之將․素養之兵․舊撫之民爲之用也. 攷其施設, 事非一端. 或取之群盜, 或得之降虜, 或以夷狄攻夷狄, 莫不虛懷大度, 仰憑天道, 俯順人心, 以成大功. 後世仁德之不孚, 措置之失宜, 馴致降人多有背叛. 此非徒人事之謬, 蓋亦天命之不歸也. 今陛下紹隆祖宗, 方務恢復, 乃於降者而首疑之, 則左右前後與夫今日軍旅之衆, 孰不可疑? 而況它日進撫中原, 必先招徠, 事乃可濟. 若處之失當, 反激其怒, 它日人自爲敵. 計之出此, 豈不誤哉? 陛下將有經營四海之心, 推誠待人, 如天如日. 豈比固陋之士, 姑爲保身之謀, 獨無天命之可信哉? ’又奏:‘虜之於我, 有不戴天之讎, 挾詐肆欺, 不遺餘力. 自宣和․靖康以來, 專以和議撓亂國家, 反覆詭秘, 略無一實. 今敗盟如此, 而朝廷尙蹈覆轍, 號爲信義, 恐生兵隙, 臣所未喩也. 昔宋襄公謂君子不重傷, 不禽二毛, 而卒敗於楚, 得無類是乎!’
이 때에 탕사퇴가 우상이 되었는데 사퇴는 본래 진회의 당파였는데 더욱 화의를 구하기를 급하게 하여, 드디어 노중현(魯仲賢)과 이식(李栻)을 파견하여 서신(書信)을 가지고서 오랑캐에게 알리게 하고 아울러 임시로 직사관(職事官)의 호칭을 빌려서 가게 했다. 공이 또 상주하기를, “중현은 소인(小人)으로 망녕(妄佞)됨이 많으니 믿고 맡길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하직인사를 올릴 때 사군(四郡)을 허락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는데도 재상은 중현 등에게 허락해도 무방(無妨)하다고 명령했다. 식은 변경에 이르러 핑계를 대고 가지 않고 홀로 중현이 갔다. 복산충의가 위협하여 그를 두렵게 하니 중현이 드디어 쥐새끼처럼 숨어서 방관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문서(文書)로 말하기를 돌아가면 마땅히 네 군을 반환하도록 품명(稟命)을 하고 바라건대 서신을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중현이 공을 뵙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오랑캐가 수십만 군대를 가지고 변경에 접근하여 만약 빨리 네 군을 허락하지 않으면 올 겨울에 반드시 쳐들어올 것인데 우리는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또 공은 중신(重臣)으로 강밖에 있음은 마땅하지 않으니 빨리 강을 건너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공은 중현이 오랑캐에게 협박을 받은 것을 알고 곧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있으며 변경의 대비를 이미 갖추어 가령 오랑캐가 온다고 해도 마땅히 힘써 그들을 격파할 것이다. 하물며 염탐군의 보고가 날마다 당도하는데 오랑캐로 하남에 주둔한 자는 십만에 지나지 않는데, 그대는 오랑캐를 위하여 유세(遊說)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가?”라고 했다. 장식이 다시 들어와 아뢰라는 조서를 받았다. 공이 식에게 중현이 나라를 욕되게 하여 공적(功績)이 없고, 다만 그가 도모한 일이 조정의 뜻에서 나왔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며, 신이 실지로 이 의론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뢰라고 명령했다. 식이 당도하니 상께서 곧바로 불러보시고 제일 먼저 중현의 일을 물으셨다. 식이 그 실상을 갖추어 아뢰고 또 말하기를, “중현은 명백하게 그 벌을 집어내어 바로 잡지 않을 수가 없사오며, 조정이 더불어 한통속이 되었으니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노하시어 중현을 대리시(大理寺)에 내리셨다. 사퇴 등이 두려워서 도리어 중현이 오랑캐를 달래서 군신(君臣)의 예(禮)를 없애고 숙질(叔侄)사이로서 서로 왕래(往來)하게 하는데 그치게 한 공(功)이 있다고 말하며 백방(百方)으로 그를 구원하고 좌상(左相) 진강백(陳康伯) 등과 더불어 전상(殿上)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벼슬에서 떠날 것을 빌기에 이르렀다. 상께서 즐거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중현의 벼슬을 강등(降等)시키셨다.
時湯思退爲右相, 思退本檜死黨, 尤急於求和, 遂遣虜仲賢․李栻持書報虜, 竝借職事官以往. 公又奏:‘仲賢小人多妄, 不可委信.’ 上因其辭, 戒勿許四都, 而宰執則令仲賢等許之無傷. 栻至境, 託故不行, 獨仲賢往. 僕散忠義懼之以威, 仲賢遂鼠伏拱手, 狀稱歸當禀命許四都, 願持書復來. 仲賢見公, 謬稱虜有數十萬之衆近邊, 若不速許四郡, 今冬必人寇, 我無以當其鋒. 且公重臣, 不宜在江外, 當亟渡江. 公知仲賢爲虜所脅, 卽謂之曰:‘某在此邊備已飭, 借使虜來, 當力破之. 况探報日至, 虜之屯河南者不過十萬, 計議得無爲虜游說耶? ’栻復被旨, 令入奏. 公命栻奏仲賢辱國無狀, 但所謀事, 未知有無出朝廷之意, 臣實不預此議. 栻至, 上卽召見, 首問仲賢事. 栻具奏其狀, 且曰:‘仲賢不可不明正其罰, 朝廷與爲表裏, 不可不察.’ 上怒, 下仲賢大理寺. 思退等惶懼, 反謂仲賢能說虜削去君臣之禮, 止以叔姪相往來爲有功, 百端救之, 至與左相陳康伯等叩頭殿上乞去. 上不悅, 猶鐫仲賢官.
사퇴 및 그 당파(黨派)가 두려워서 더욱 화의를 크게 부르짖고 왕지망(王之望)과 용대연(龍大淵)을 통문사(通問使)와 부사(副使)로 삼아 파견할 것을 건의했다. 공이 멀리 있어 다툴 수가 없었다. 제군이 당황하고 미혹되며 귀순한 사람들이 더욱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제군에 방(牓)을 내어 이르기를, 오랑캐가 망령되이 불러들여 요구를 하는데 만약 갑자기 감히 회수를 건넌다면 마땅히 날짜를 약속하고 결전(決戰)을 하겠다고 했다. 조정에서 공이 이 방을 냈다는 것을 듣고 모두 크게 두려워 했는데 유독 상께서만 그렇다고 여기셨다. 공이 다시 상주하여 말하기를, “듣건대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는 것이 매우 빠르다고 하는데 반복해서 생각해보면 실로 편안치가 못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이 좌천되어 귀양자의 부적(簿籍)에 있던 것이 거의 20년인데, 이리저리 방랑하며 곤궁함과 괴로움을 겪었으며 근심을 더함으로써 만 가지 정황이 낭패(狼狽)했었습니다. 이 몸을 기르고 아낌으로써 감히 곧바로 죽지 않은 것은 또한 신자(臣子)의 대의(大義)로써 불구대천의 깊은 원수를 짊어졌는데 끝내는 다행히 하루아침에 평소의 뜻을 펼 수가 있었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 처음 즉위하시고 뛰어난 무예를 떨치시며 분개하시어 천하를 맑게 할 뜻을 가지셨음을 만났습니다. 신이 이에 감히 임무를 받아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장사와 인심이 날로 진작되는데, 오랑캐는 내부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군대는 밖에서 늙으니 조금만 시일이 쌓이면 형세가 끝내 드러날 것입니다. 다시 생각건대 이 오랑캐가 만약 세력에 여유가 있고 안으로 간섭과 견제가 없으면 가을과 겨울이 바뀔 때에 반드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우리에게 화의로써 요구를 할 것이니 무엇을 요구한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서신을 보내서 기일(期日)을 약속한 것은 오랑캐의 무리들이 실은 두려워하고 겁을 내고 있다는 정황을 매우 드러낸 것입니다. 명령을 내려서 감히 일단(一團)의 군대로 깊이 들어오기를 회서로부터 한다면 우리에게는 이롭고 저들에게는 복이 아닐 것입니다. 대개 300리 이내는 들에 풀과 곡식이 없으니 서로 대치하기만 하고 더불어 싸우지 않는 것은 또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도 다만 이것을 하는 데에만 서두르신단 말입니까? 거듭 생각건대 신은 늙어서 병이 많고, 보는 것과 하는 것이 실정(實情)에 어두워 들어맞는 것이 적습니다. 스스로 헤아려보면 타고난 자질(資質)이 얕아서 나랏일을 맡은 것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바야흐로 연말(年末)을 기다렸다가 물러나 쉴 것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오직 신이 사랑하는 것은 폐하의 성덕(聖德)이 천하에 들리고 크게 일을 하시는 시기(時期)를 가지시는 것입니다. 오직 신이 걱정하는 것은 오랑캐의 간사한 계책이 제멋대로 실행되는 것이니 후회한들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신의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찌 잠시의 편안함에 나아가 이 몸을 마치는 것을 하지 않고자하여 굳이 오늘과는 다른 것을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또 아뢰기를, “올해의 수비(守備)는 매우 엄중해서 가을부터 겨울이 되도록 처음부터 한 가지 일도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만약 오랑캐가 우리에게 글을 주지 않았다면 진실로 마음이 안정되어 태연했을 것입니다. 불행히 오랑캐가 한 명의 사신에게 글을 지니고 우리를 업신여기게 한 것으로 인해서 조정에서 갑자기 사람을 보냄으로써 어지러움을 자초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안팎의 인정(人情)이 각기 편안함을 품지 못하니 국가의 체통(體統)에 관계된 것이 매우 큽니다. 지금 사신이 가면 일이 형편이 더욱 중대해지니 어찌 다시 경황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생각건대 이 오랑캐가 만약 반드시 우리를 침범하고 능멸하고자 한다면 비록 간곡하게 요청하고 백번 절을 하더라고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할 수없다면 또한 무슨 까닭으로 움직이겠습니까? 하물며 원수들이 우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을 오로지 다행으로 여기고 서둘러서 한갓되이 면하기를 간청하여 구차(苟且)하게 편안해지는 계책을 쓰는 것은 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친서를 내려 타이르시고 장차 수상(首相)으로서 공을 대하겠다고 했다. 공이 상주하여 힘써 사양했다.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공을 부르니 상주할 일로 행재소로 갔다.
思退及其黨懼, 益大唱和議, 建遣王之望․龍大淵爲通問使副. 公在遠, 爭不能得. 見諸軍惶惑, 歸正人尤不自安, 卽出牓諸軍, 謂虜人妄有邀索, 如輒敢渡淮, 當約日決戰. 朝廷聞公出此牓, 皆大恐, 獨上以爲然. 公又奏曰:‘伏聞朝廷遣使甚亟, 思慮反復, 實不遑寧. 伏念臣頃居謫籍幾二十年, 流離困苦, 加以憂患, 狠狽萬狀. 所以養愛此身, 不敢卽死, 亦以臣子大義, 負不戴天之深讎, 終幸一朝得伸素志, 暝目無憾. 幸遇陛下龍飛之始, 英武奮發, 慨然有澄淸天下之志. 臣是敢受任而不辭. 今將士人情日以振作, 而虜寇作於內, 師老於外, 少稽時月, 形勢畢見. 載惟此虜若勢力有餘, 內無掣肘, 則秋冬之交必引兵長驅, 要我以和, 何求不成? 而乃遣書約期, 勢實畏怯, 其狀甚露. 縱令敢以偏師深入, 自淮西來, 爲我則利, 爲彼非福. 蓋三百里之內, 野無芻粟, 扼以不戰, 又何能爲而直爲此急急也? 重念臣衰老多病, 所見所爲迂闊寡合. 自度賦分單薄, 無以勝任國事, 方欲俟歲晩力求休退. 惟臣所愛者, 陛下之聖德聞於天下, 有有爲之時. 惟臣所憂者, 夷狄之姦計得以肆行, 而後悔何及? 不然, 臣年餘幾何? 豈不欲姑就安逸以畢此身, 而固爲異同於今日也? ’又奏 : ‘今歲守備甚嚴.自秋涉冬, 初無一事. 向若虜不貽我以書, 固自若也. 不幸因虜以一介持書慢我, 而朝廷匆遽遣人, 自招紛紛. 綠此內外之情各不懷安, 於國體所係甚大. 今玆使行, 事體尤重, 豈宜更復草草? 惟此虜若必欲侵凌我, 雖懇請百拜, 有不可遏. 如其不能, 亦何由而動? 况專幸寇讎之不我侵, 急急然徒爲懇免苟安之計, 臣之所未諭也.’ 上賜手書諭意, 將以首相待公. 公奏力辭. 未幾, 遂召公赴行在奏事.
공이 처음에 오랑캐의 서신에 답할 일을 의론하며, 다만 가볍게 한명의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과 거짓을 보고서 답신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에 이르러 조정에서 지망 등을 보냈다고 들었다. 11월 25일에 행렬이 진강에 이르렀을 때, 상주하여 말하기를, “요사이 가만히 들으니 조정에서 이미 사신을 보내는 의론이 결정됐다고 하는데 신은 밖에 있어서 처음에는 미리 참여하지를 못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휘종, 흠종황제께서 불행히 돌아오시지 못한 것은 예로부터 비상(非常)한 큰 변란으로 무릇 신하로 있는 자라면 죽는 것만 못합니다. 팔릉(八陵)이 오랫동안 가로 막혀 있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국가가 오랑캐에 있어서의 대의(大義)가 어떠합니까? 하물며 역적 량(逆賊 亮)이 침범에 의거해서 글을 보내 업신여기고 대신(大臣)을 요구하고, 앉아서 땅을 요구했으니 그 일이 가까이는 작년에 있었습니다. 지금 의론하는 자는 스스로 강해지는 계책에 힘을 쓰지 아니하고 오랑캐의 원수(元帥)가 한번 편지를 준 것으로 인해서 갑자기 조사(朝士)를 파견하여 오랑캐 원수의 휘하로 바삐 달리게 하였는데, 다시 편지를 주면 시종(侍從)과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바람처럼 달려가 명령을 듣게 하고자 할 것이며, 다시 장차 우리백성의 고혈(膏血)을 모아서 원수를 받들고, 오히려 자식의 예를 써서 원수를 섬기며, 그들에게 정성을 보인다는 명목으로 폐하를 속이고, 실제로는 그들과 화친을 할 것입니다. 그 주장(主張)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우리가 장차 그들에게 정성스럽게 하고 우리의 군대를 다스린다.’라고 하지만 정사(政事)가 사명(使命)을 한번 보내고, 세폐(歲幣)가 한번 나가고, 국서(國書)를 한번 고치면 장사들의 사기를 빼앗고, 충의(忠義)한 사람들의 뜻이 해이해져 흩어지고, 인심이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을 모르면서 어찌 군정(軍政)을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장차 그들에게 정성스럽게 하고 우리의 재화(財貨)를 다스리겠다고 말하는데 지나지 않겠지만, 지금 비록 사신을 보내도 군대는 살피지 않을 수 없고, 대비(對備)는 거둘 수 없으며, 세폐의 비용을 거듭하고, 오랑캐의 사신이 오면 또 다른 요구가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어찌 재화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로써 그들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명목으로 폐하를 속이고 실제로는 그들의 묵은 뜻을 실행하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야흐로 당여(黨與)들이 설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집안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부귀를 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니 어찌 다시 국사(國事)로써 마음을 삼겠습니까? 하물며 이대(二代)의 황제의 바람이 이미 끊어졌고, 종실과 근신들이 오랑캐의 조정에 흘러 떨어져서 살해를 당해 거의 다 죽었는데도 오히려 그들과 더불어 화친을 맺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천리(天理)에 편안함과 그렇지 않음을 모른단 말입니까? 신은 진실로 그것을 애통(哀痛)해합니다. 신은 늙고 병이 많으며, 의론하는 것이 조정과 더불어 대략 서로 맞지가 않으니 어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반열(班列)에 나아가 거듭 평소의 절개를 무너뜨리겠습니까? 또 폐하께서 묘당(廟堂)의 위에서, 사리(事理)를 분별하지 못하고 망령되어 합치되지 못하는 신하가, 외람(猥濫)되이 근신(近臣)으로서 그 사이에 있는 것을 어찌 용납하시겠습니까? 신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또한 진실로 차마 오늘날 화의를 주장하는 신하들과 더불어 조정에 함께 서지를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일찌감치 지휘를 내리시어 신의 추밀사직을 파직하여주십시오. 신은 바야흐로 힘껏 달리어 수주(秀州)의 전로(前路)에 당도하여 지휘를 듣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친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수주에서 지휘를 기다리고 싶다고 했는데 매우 짐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경의 충성이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니, 화의하는 일은 오로지 경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가 대면(對面)하여 자세한 사정을 다 얘기하겠다. 경은 마땅히 빨리 오라.”라고 하고 이어서 내시 감택(甘澤)을 보내서 공에게 친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경이 부름을 받고 들어와 뵈러오다가 어찌 중도에서 갑자기 꺼리는 것을 인용해서 스스로 진술하는 것인가?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는 바로 경과 한마음으로 화합해서 이루기를 바란다. 이미 감택을 보내서 경에게 짐의 뜻을 말했으니 마땅히 짐의 뜻을 받아들이고 빨리 앞으로 나아오라.”라고 하셨다.
公初議答虜書事, 以爲但當輕遣一介往觀其情僞而爲之所. 至是, 乃聞朝廷遣之望等. 十一月二十五日, 行至鎭江, 上奏曰:‘近者竊承朝廷已定遺使之議, 臣身在外, 初不預聞. 竊惟徽宗․欽宗不幸不反, 亘古非常之巨變, 凡在臣庶, 不如無生. 而人陵久隔, 赤子塗炭, 國家於虜, 大義若何? 况逆亮憑陵, 移書侮嫚, 邀求大臣, 坐秦壤地, 其事近在前歲. 今議者不務力爲自彊之計, 而因虜帥一貽書, 遽遣朝士奔走麾下;再貽書, 欲遣侍從近臣趨風聽命, 復將哀吾民之膏血以奉讎人, 用猶子之禮以事讎人, 欺陛下以欸之之名, 而爲和之之實. 其說固曰吾將欸之而修吾兵, 政不知使命一遣, 歲幣一出, 國書一正, 將士褫氣, 忠義解體, 人心憤怨, 何兵政之可修? 又不過曰吾將欸之而理吾財用, 不知今雖遣使而兵不可省, 備不可撤, 重以歲幣之費, 虜使之來, 復有它須, 何財用之可理? 此可見欺陛下以欸之之名, 實欲行其宿志也. 彼方惟黨與之是立, 惟家室之是顧, 惟富貴之是貪, 豈復以國事爲心哉? 况兩朝鑾輿之望已絶, 宗室近親流落虜廷, 戕賊殆盡, 猶欲與之結和, 不知於天理安否? 臣實痛之. 臣年老多病, 所論與朝廷略不相合, 豈可蒙恥更造班列, 以重敗其素節? 且陛下廟堂之上, 豈容狂妄不合之臣濫厠其間? 臣雖至愚, 亦誠不忍與今日力主和議之臣竝立於朝. 伏乞早降指揮, 罷臣機政. 臣見力疾至前路秀州, 聽候指揮.’ 上賜手書曰:‘覽卿奏, 欲在秀州候指揮, 甚非朕所望也. 卿忠誠爲國, 天下共知, 和議事專竢卿到, 面盡曲折. 卿宜速來.’ 繼道內侍甘澤賜公手書曰:‘卿赴召入覲, 何爲中道遽欲引嫌自陳? 軍國大事, 正要卿同心叶濟. 已差甘澤宣卿, 宜體朕意, 疾速前來.’
공이 상의 뜻이 매우 두터움으로 해서 감히 고사(固辭)하지 못하고 다시 상주하여 말하기를, “신이 가만히 길에서 떠도는 말을 들으니 이르기를, 지금의 화친을 의론하는 것은 폐하의 본심(本心)이 아니고 일에 부득이 함이 있다고들 합니다. 사대부들에게 자문을 해봐도 많이들 그렇게 여깁니다. 생각건대 신은 옛날 일찍이 화친의 불가함을 힘껏 아뢰어 진회의 배척하는 바가 되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태상황제께서 보전해 주시고 비호(庇護)하여주심에 힘입어 여생(餘生)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의론은 신이 국사가 지대함으로써 감히 몸을 아끼지 않고 힘껏 폐하를 위하여 진술하는데 폐하께서 끝내 그것을 주장(主張)하실 수 있을지 아닐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일에 큰 것이 있으니 인재(人才)가 뒤섞여서 알 수가 없고, 풍속(風俗)은 무너졌으며, 기강(紀綱)은 오랫동안 해이(解弛)해져 상하가 편안함만을 꾀하고, 크고 작은 폐해가 쌓였고, 내치(內治)는 스스로 강해지려는 단서를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힘껏 그것을 혁파할 방법을 도모하여 한번 바로잡기를 공적(公的)으로 하고, 헛된 의론을 근심하지 않으면 원망하고 비방하는 말들이 틈을 엿보고 끼어들어 교묘하게 마음에 상처를 입히게 되어 일은 끝내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물쭈물하고 혁파하지 않고 하루에 다시 하루를 더하면 무엇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국정(國政)이 서지 않으면 무엇으로써 도적을 방어하겠습니까? 폐하께서 안에서 힘껏 결단(決斷)을 하시고 밖에서 과감(果敢)하게 실행을 하며, 임금과 신하가 한 마음이 되어 엿볼 수 있는 틈이 없어도 이 어려운 대업(大業)을 성취할 수 있을지 아닐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이 때문에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낄 겨를이 없고, 잠을 자도 편안할 겨를이 없이 늘 걱정하는 마음은 백일(白日)과 같음이 있습니다. 폐하(陛下)를 위한 계책과 사직(社稷)을 위한 계책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잠시라도 소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늙었고 운수(運數)가 기박(奇薄)하지만 대략 도학(道學)을 아는데 어찌 감히 영화(榮華)와 은총(恩寵)을 탐내어 조정에서 자리를 훔침으로써 폐하와 사직을 저버리겠습니까? 신이 대궐에 당도하는 날, 바라건대 맑고 한가(閑暇)한 편안함을 내려주시어 저로 하여금 보잘것없는 마음을 다하도록 해주십시오. 그 옳고 그름을 헤아려서 그로 하여금 나아가고 물러나는 근거(根據)가 있게 하는 것은 그 도(道)를 어기지 않는 것이니, 매우 다행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다.
公以上意厚甚, 不敢固辭, 復上奏曰:‘臣竊聞道路之言, 謂今玆議和非陛下本心, 事有不得已者. 詢之士大夫, 多以爲然. 惟臣昔嘗力陳和之不可, 爲秦檜所擠, 瀕死者屢. 賴太上皇帝保全覆護, 獲有餘生. 今日之議, 臣以國事至大, 不敢愛身, 力爲陛下數陳, 不知陛下終能主張之否? 又有事之大者, 人才混殽, 風俗陵夷, 綱紀久弛, 上下偸安, 巨細積弊, 內洽自彊未見端緖. 若力圖所以革之, 一繩以公, 不卹浮議, 則怨謗之言投隙伺間, 巧爲傷中, 事必無成. 若因循不革.日復一日, 何以爲國? 國政不立, 何以禦寇? 不知陛下能力斷於中, 果行於外, 君臣一 心, 無間可乘, 以濟此艱難之業否? 臣是以食不遑味, 寢不遑處, 眷眷憂心, 有如皦日. 思所以爲陛下計․爲社稷計, 須臾不敢忽也. 不然, 臣年老數奇, 粗知學道, 豈敢叨踰榮寵, 竊位於朝, 以負陛下社稷哉? 臣到闕日, 願賜淸間之燕, 俾盡區區. 度其是否, 使之進退有據, 不連其道. 不勝幸甚!’
이미 당도하여 들어가 알현을 하니 상께서 제일 먼저 공에게 전권(專權)을 위임하고자하는 뜻으로 일깨우시니, 공이 다시 힘껏 화의의 잘못을 아뢰었다. 상께서 중지할 것을 맹세하는 글을 만들고, 사신(使臣)을 머물러있게 하고 통서관(通書關)인 호방(胡昉)과 양유의(楊由義)에게 먼저 가서 오랑캐 원수에게 네 군을 할양(割讓)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알리라고 명령하셨다. 이에 지망과 대연이 국경에서 명령을 기다렸고 상께서 공과 더불어 은밀히 도모하기를, 만약 오랑캐의 원수가 반드시 네 군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사신을 내쫒아 돌려보낼 것이니 화의하는 일은 깨질 것이라고 보았다. 12월 22일에 조서로 공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겸 추밀사(樞密使)에 제수했는데 도독(都督)은 전과 같았다. 사퇴(思退) 또한 좌복야(左僕射)로 전직(轉職)되었다. 상께서 당직학사(當直學士)인 전주재(錢周才)에게 뜻이 공에게 있다고 일깨운 까닭에 사퇴가 비록 좌상이 되었지만 공의 은혜와 예우가 유독 높았다. 매번 상주할 때마다 상께서 문득 공을 머물게 하고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고 다시 때때로 장식(張栻)을 불러 들어와 대면을 하시며, 공에게 어서(御書)인 『성주득현신송 聖主得賢臣訟』을 하사하셨다. 사퇴 등이 평소에 공을 꺼렸는데 이에 이르러서 더욱 심해졌다.
旣至入見, 上首諭公以欲專委任之意, 公復力陳和議之失. 上爲止誓書․留使人, 而令通書官胡昉․楊由義先往諭虜帥以四郡不可割之意. 於是之望․大淵待命境上, 而上與公密謀, 若虜帥必欲得四郡, 當遂退還使人, 罷和議事. 十二月二十二日, 制拜公尙書右僕射․同中書門下平章事․兼櫨密使․都督如故. 而思退亦轉左僕射. 上諭當直學士錢周才以注意在公, 故思退雖爲左相, 而公恩遇獨隆. 每奏事, 上輒留公與語, 又時召栻入對, 賜公御書聖主得賢臣頌. 思退等素忌公, 至是益甚.
공이 이미 재상이 되자 맨 처음으로 널리 어진 이를 초빙하여 국사를 함께 보기를 아뢰었다. 상께서 조목(條目)을 갖추라고 명령을 하시니, 공이 우윤문(虞允文), 진준경(陳俊卿), 왕응진(汪應辰), 왕십붕(王十朋), 장천(張闡)은 집정(執政)에 참여시킬만하고, 유공(劉珙), 왕대보(王大寶), 두신로(杜莘老)는 곧 소환(召還)하는 것이 마땅하고, 호전(胡銓)은 풍헌(風憲)에 참여시킬만하고, 장효상(張孝祥)은 일을 부탁하여 맡길만하고, 마시행(馬時行), 임진언(任盡言), 풍방(馮方)은 모두 근신(近臣)에 참여시킬만하고, 조사(朝士) 가운데 임률(林栗), 왕거(王秬), 막충(莫冲), 장송경(張宋卿)은 의론이 올바름에 의거를 하니 대간(臺諫)에 임명할만하다고 아뢰니 모두가 일시에 선발되었다.
公旣入輔, 首奏當旁招仁賢, 共濟國事. 上令絛具, 公奏虞允文․陳俊卿․汪應辰․王十朋․張闡可備執政, 劉珙․王大寶 ․ 杜莘老宜卽召還, 胡銓可備風憲, 張孝祥可付事任, 馬時行 ․ 任盡言 ․ 馮方皆可備近臣, 朝士中林粟․王秬․莫冲․張宋卿議論據正, 可任臺諫, 皆一時選也.
공이 태상황제때부터 곧 마땅히 어가가 건강에 머물러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고 건의했었다. 상께서 처음 즉위하시자 공이 입궁 대면하며 또한 맨 처음 그것을 말했었다. 강, 회의 총사(總師)가 되자 매번 앞의 이야기를 거듭했다. 이에 이르러 다시 상께 힘껏 말하기를, “지금 건강에 행차하지 않으시면 묵은 폐해를 혁파할 수 없고, 인심을 돌릴 수가 없으며 왕업(王業)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또 진회가 20년 동안 임안에 있으면서 편안하게 짐독(鴆毒)과 같은 계책을 행하였는데 어찌 그곳을 버리지 않고 이 계획을 새롭게 하겠습니까? 대저 오늘날 모든 일은 마땅히 예조(藝祖)께서 창업하실 때와 같이하여 줄여서 간략함을 따르는 데에 힘쓰고 오로지 군대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면 나라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에 다시 하루가 지나도 그 옳은 것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상께서 깊이 깨달으셨다.
公自太上時, 卽建議當駐蹕建康, 以圖恢復. 上初卽位, 公入對, 又首言之. 及總師江淮, 每申前說. 至是復力言於上曰:‘今不幸建康, 則宿弊不可革, 人心不可回, 王業不可成. 且秦檜二十年在臨安, 爲燕安酖毒之計, 豈可不舍去之而新是圖? 大抵今日凡事皆當如藝祖創業時, 務從省約, 而專以洽軍卹民爲務, 庶國有瘳. 不然, 日復一日, 未見其可.’ 上深感悟.
통서관 호방 등이 숙주에 이르자 복산충의가 네 군을 허락하지 않는 연고로 인해서 형틀에 매달고 협박했으나 호방 등이 굽히지 않았다. 충의가 계책이 곤궁해지자 다시 예우하여 그들을 돌려보냈다. 상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급히 호방 등을 형틀에 매달고 위협한 일을 묻기 위해 장식을 부르시고, 그 편에 공에게 유시(諭示)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화의(和議)의 일이 성사되지 않은 것은 천명(天命)이다. 일은 마땅히 하나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시고, 비로소 4월에 건강으로 행차할 것을 의론하였다.
通書官胡昉等至宿州, 僕散忠義以不許四郡之故, 械繫迫脅. 昉等不屈, 忠義計窮, 更禮而歸之. 上聞之, 亟召栻語之故, 令諭公曰:‘和議之不成, 天也, 事當歸一也.’ 始議以四月進幸建康.
공이 다시 상주하여 마땅히 조서로서 지망(之望) 등을 소환하시라고 하니, 상께서 비답(批答)을 내리시어 말씀하시기를, “왕지망과 용대연은 아울러 함께 보낸 예물(禮物)과 같이 돌아오라.”라고 하셨다. 사퇴 등이 크게 놀라 다시 다음 날 대면하여 상주 할 것을 약속했다. 대루원(待漏院)에 이르자 사퇴 등이 다투어 앞서의 이야기를 고집했으나 공이 정론(正論)으로써 꺾어버리니 문득 굴복(屈服)했다. 이 날은 3월 초하루로 상께서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는 날이었다. 연(輦)에 오르시기 전에 재상(宰相)들을 소집하여 일을 의론했다. 사퇴 및 참지정사 주규(周葵), 동지추밀원 홍준(洪遵)이 머리를 조아리며 힘껏 간쟁(諫爭)을 하니 상께서 노하시어 안색과 목소리가 자못 사나우셨다. 덕수궁에서 돌아오시자 다시 비답을 내어 말씀하시기를, “지망 등을 뒤 쫒아 되돌리게 하라는 차자(箚子)를 빨리 들여보내라.”라고 하셨다. 때마침 덕수궁에 나아가니 태상황제께서 또한 크게 노하시어, “이 오랑캐가 무례(無禮)하니 경등이 오로지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고 아마도 천하(天下)의 의론(議論)을 취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퇴 등이 두려워서 드디어 차자를 들여보내고 금자패(金字牌)를 내어 빨리 가게 했다. 공이 호방 등은 오랑캐에게 굴복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하며, 지난 날 노중현이 제멋대로 국가의 변경 땅을 오랑캐에게 줄 것을 허락했으니 의당 중벌(重罰)이 있어야한다고 아뢰었다. 조서로 중현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침주(郴州)로 귀양을 보냈다. 또 상주하기를, “마땅히 제군에게 방을 보여 복산충의가 사신을 형틀에 매달고 무례함을 더하였으나 사신들 각자가 충의(忠義)를 떨쳐 힘껏 적을 대하여 공명(功名)을 취하였으니, 바라건대 제군도 오랑캐의 자세한 사정을 알게 하고, 또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알게 하여 격앙(激昻)되어 사기(士氣)가 고무(鼓舞)될 수 있도록 타이르십시오.”라고 했다. 상께서 도독에게 이 뜻으로써 방을 양회(兩淮), 형(荊), 양(襄), 천(川), 섬(陝)에 내리도록 명령하시니 며칠사이에 호령(號令)이 일신되고 안팎의 군민이 모두 상(上)의 영단(英斷)을 우러렀다.
公又奏當詔之望等還, 上批出曰:‘王之望․龍大淵幷一行禮物竝回.’ 思退等大駭, 更約翌日面奏. 及至漏舍, 思退等競執前說. 公折以正論, 輒屈. 是曰三月朔旦, 上當詣德壽官. 未登輦, 召宰執議事. 思退及參知政事周葵․同知樞密院洪遵叩頭力爭, 上怒, 聲色頗厲. 及自德壽宮回, 復批出曰 : ‘追回之望等劉子宜速進入.’ 適詣德壽宮, 太上皇帝亦深怒:‘此虜無禮, 卿等不可專主和議, 恐取議於天下.’ 思退等懼, 遂以箚子進入, 發金字遞行. 公奏胡昉等能不爲虜屈, 當加賞. 而向者盧仲賢擅以國家境土許寇與讎, 宜有重罰. 有旨仲賢除名勒停, 編管郴州. 又奏 : ‘宜牓示諸軍, 諭以僕散忠義械繫使人, 加以無禮, 使各奮忠義, 勉勵待敵, 趨赴功名, 庶幾諸軍知曲在虜, 且知和議不成, 激昂增氣.’ 上今都督以此旨降牓兩淮 ․ 荊 ․ 襄 ․ 川 ․ 陜, 數日之間, 號令一新, 中外軍民皆仰上英斷.
사퇴가 계책이 곤궁하자 다시 상주하여 화의를 힘껏 주장했고, 또 상께 종사(宗社)의 대계는 태상황제께 품주(稟奏)한 뒤에 시행하기를 요청했다. 상께서 친히 그 말미에 비답하시고 삼성(三省)에 내리시고 말씀하시기를, “오랑캐의 무례함이 이와 같은데 경은 오히려 화의를 말하고자 하니, 오늘 오랑캐의 세력은 진회의 때와 비교할 것이 아니니 경의 의론은 진회와도 같지 않다.”라고 하셨다. 예부터 재상이 날마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임금이 비답한 봉투를 열었는데, 이날은 때마침 공이 여는 것을 담당하여 열고나자 곧 옮겨서 사퇴에게 보였다. 사퇴가 크게 놀라 달아나 숨어버렸다. 이에 앞서 상께서 이미 건강으로 행차하는 의론을 결정하셨는데, 사퇴 등이 처음에 함께 듣지를 못하였다. 뒤에 상 앞에서 일을 상주하며 말이 여러 차례 비굴하였고, 청하여 말하기를,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랑캐가 이르면 무엇으로써 그들을 대하시렵니까?”라고 하니,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짐은 이미 건강으로 행차하는 것을 결정했다.”라고 하시니 사퇴 등이 얼굴빛이 바뀌었다. 다시 비답의 말씀을 보여주시기에 이르자 이에 곁으로는 두려워하며 사록(祠祿 : 곧 辭職을 청함)을 요청하는 것처럼 했지만 몰래 그 당파들과 더불어 무너뜨릴 계책을 꾸몄는데 자취가 교묘하고 비밀스러워서 사람들이 다 알 수가 없었다. 며칠 뒤에 갑자기 조서로 공에게 강, 회를 위무하고 둘러보라는 명이 있었다. 공이 하루아침에 밖으로 나가면 간사한 사람들이 반드시 제멋대로 할 것임을 알았으나 그러나 길을 떠나라는 조서가 여러 차례 내려오고 일의 성패(成敗)는 다시 인력(人力)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서 이에 떠났다. 이윽고 성문을 나서니 사퇴가 드디어 우정언(右正言) 윤색(尹穡)과 터놓고 모의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공을 이간(離間)할 사유(事由)를 더욱 구하였다. 공이 진강에 당도하지 못하여서 길에서 왕지망 등이 귀환(歸還)하는 것을 만났는데, 지망이 힘껏 화의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 은밀하게 그것을 상주했다. 사퇴 등이 또한 서로 더불어 음모를 꾸며 이르기를 수비(守備)를 훼손하지 않으면 공을 제거(除去)할 수 없고, 화의를 이룰 수가 없다고 하여 이에 지망 등에게 수비를 크게 훼손하여 하나라도 믿을 것이 없게 하라고 명령했다. 또 몰래 관작(官爵)으로써 제장들을 넌지시 깨우치고 글을 들여보낼 때 오랑캐가 너무 강하여 두려워하고 겁내는 말을 쓰도록 했다. 색(穡)이 오로지 그 의론을 주관하여 온갖 계책으로 공을 헐뜯었다.
思退計窮, 復奏力主和議, 且請上以宗社大計奏禀太上皇帝而後從事. 上觀批其後, 降付三省曰:‘虜無禮如此, 卿猶欲言和, 今日虜勢非秦檜時比, 卿之議. 論, 秦檜之不若.’ 故事, 宰相日一人啓御封. 是日適公當啓, 啓畢, 卽轉示思退. 思退大駭, 藏去. 先是, 上旣決幸建康之議, 思退等初不與聞. 後奏事上前, 語屢屈, 因請曰:‘和議不成, 虜至何以待之? ’上曰:‘朕已決幸建康.’ 思退等失色. 及又見批語, 乃陽爲皇恐乞祠狀, 而陰與其黨謀爲傾陷之計, 蹤跡詭祕, 人不得盡知也. 居數日, 俄有旨命公按視江淮. 公知一日出外, 姦人必得肆意, 然趣行之旨屢下, 而事之成敗則又有非人力所能爲者, 乃行. 旣出國門, 思退遂與右正言尹穡通謀, 日夜汲汲益求所以間公者. 公未抵鎭江, 道遇王之望等還, 見之望力主和議, 因密奏之. 而思退等亦相與陰謀, 謂不毁守備則公不可去, 和不可成, 乃令之望等盛毁守備一無以恃者. 又陰以官爵諷諸將, 令入文字, 稱虜盛彊, 爲畏怯語. 而穡專主其議, 百計毁公.
대개 공이 강, 회의 임무를 받은 것이 2년 반인데 국가가 근심이 많고, 추악한 오랑캐가 다스려지지 않았음을 생각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계획하고 헤아리느라 자도 편안하지를 않았고 먹어도 맛을 몰랐다. 혹독한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도 장사들을 위로하고 위무하였으며, 항복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군대의 일을 강론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젊은이의 정력으로도 미칠 수가 없음이 있었는데, 공이 충의로 분격하여 일찍이 수고롭다고 여기지를 않았다. 계산하면 산동과 회북의 충의지사(忠義之士)를 초모하여 건강, 진강의 양군을 충원한 것이 무릇 1만 2천여 명이었고, 만노영(萬弩營)에서 초모한 회남의 장정 및 군도(群盜)가 또한 만여 명인데 진민(陳敏)이 그들을 통솔하며 사주(泗州)를 지켰다. 회남의 군사들이 사주가 양회의 요새가 됨을 알아 모두 사수(死守)하기를 원하여 부모와 처자를 이끌고 가기에 이르렀다. 요충지인 해, 사, 고우, 소, 화(和), 육합(六合) 등은 모두 이미 축성(築城)이 끝났고 물로써 험요(險要)를 삼을 수가 있어서 모두 물을 가두어 궤(櫃)를 만들고, 강․회의 전함(戰艦)을 늘려서 배치했고, 제군의 활과 화살, 기계가 다 갖추어졌다. 두해의 겨울에 오랑캐가 중기갑병(中騎甲兵) 10만을 하남에 주둔시키고 큰 소리를 치며 화의로 위협하기를 여러 차례하기에 이르렀고 모두 날짜를 약속하고 결전을 하자는 말이 있었다. 사주의 장사들이 날마다 오랑캐가 당도하면 대공(大功)을 이루기를 바랐고, 오랑캐 역시 우리의 방비가 매우 잘 갖추어진 것을 알고 끝내 감히 움직이지를 않았고, 도리어 우리의 계획을 방비(防備)했다. 이에 이르러 공이 다시 재상으로서 와서 제군을 위무하니 장사들이 기뻐 날뛰며 기세를 떨칠 것을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군대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오랑캐가 공이 온 것과 또한 격문을 내어 숙주(宿州)의 군대를 남경으로 귀환시키고 연변(沿邊)에서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기다린다는 것을 들었다.
蓋公受任江淮, 兩年有半, 念國家多虞, 醜虜未靖, 憂恐計度, 浸不遑安, 食不遑味. 祁寒盛暑, 勞撫將士, 接納降人, 講論軍務, 未嘗少倦, 少年精力有不能及. 而公忠義奮激, 曾不以爲勞. 諸軍感悅, 有不待號令而從者. 計所招來山東․淮北忠義之士, 實建康․鎭江兩軍凡萬二千餘人, 萬弩營所招淮南彊壯及江西羣盜又萬餘人, 陳敏統之, 以守泗州. 淮南軍士知泗爲兩淮要塞, 皆願以死守, 至挈父母妻子往焉. 要地如海․泗․高郵․巢․和․六合等皆已成築, 其可因水爲險處, 皆積水爲櫃, 增置江淮戰艦, 諸軍弓矢器械悉備. 兩年冬, 虜屯重兵十萬于河南, 爲虛聲, 脅和至再至三, 皆有約日決戰之語. 泗州將士日望虜至成大功, 而虜亦知.吾備禦甚設, 卒不敢動, 反爲防我計. 及是, 公又以宰相來撫諸軍, 將士無不踴躍思奮, 軍聲大振. 虜聞公來, 亦檄宿州之兵歸南京, 沿邊淸野以俟.
회북에서 귀순하는 자들이 날로 끊이지를 않았고, 산동의 호걸(豪傑)들이 모두 사람을 보내와서 지시를 받았다. 공이 그들을 일깨워 말하기를, “회북과 산동의 사람들이 나라의 은혜를 사모하고 학정(虐政)의 고통을 싫어하여 산의 험(險)함에 의거하여 적병에게 항거한 것이 지금까지 여러 해이다. 수령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멀리서 오니 그대들의 충성스러운 근로(勤勞)와 그 때문에 내 가슴이 아픈 것을 갖추어 기술하여 이미 황제께 상주하며 그대들의 성명을 기록하였으니, 장차 대병(大兵)이 나아가 토적(討賊)을 하면 기각지세(掎角之勢)로써 응원을 하고, 낮에는 놀라게 하고 밤에는 겁채(劫寨)를 하여 곡식을 운반하는 길을 노략질하고 끊어야 한다. 이와 같이 적병이 깊이 들어오면 마땅히 연이어 성읍(城邑)을 타고 넘어야 하니, 적의 무리를 괴롭혀서 공훈(功勳)과 업적(業績)이 만약 이루어지면 장군(將軍)의 직책을 내리는 것을 모두에게 인색하게 하지 않겠다. 다만 마땅히 때를 보고 힘을 헤아려서 혹시나 가볍게 움직여서 도리어 적의 계책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지금 우리 조정은 병사를 훈련하고 말을 길러서 천시(天時)를 기다리고 있으니, 너희들 또한 마땅히 훈련을 하면서 왕사(王師)가 이르기를 기다려라.”라고 했다. 공이 다시 소기(蕭琦)가 거란의 사군대왕(四軍大王)의 손자로 침착하고 용맹하며 지모(智謀)가 있음으로써 기에게 거란의 항복한 무리를 모두 거느리고 하고 또 격문으로 거란을 일깨우도록 명령하되, 대략 이르기를 우리 조정은 거란과 더불어 형제(兄弟)의 우호(友好)가 있는데 불행히도 간신(奸臣)이 두 나라를 그르쳐서 모두 여진(女眞)의 재앙을 입게 되었다. 지금 거란은 제사(祭祀)가 끊어졌는데 황제께서 이것을 생각하시지 않는 날이 없다. 너희들이 서로 호응(呼應)하기로 약속할 수가 있다면 우리 조정은 마땅히 없어진 것을 보존하고 끊어진 것을 이어주는 의리를 돈독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오랑캐가 더욱 두려워하고 드디어 이간질하는 글을 쓰고, 판목(板木)에 새기고 인장(印章)을 모방하여 국경에 그것을 뿌리니 후주(後周)가 곡률명월(斛律明月)을 이간질했던 뜻을 유추(類推)한 것이다.
淮北歸正者日來不絶, 山東豪傑悉遣人來受節度. 公曉之曰:‘淮北․山東之人慕戀國恩, 厭苦虐政, 保據山險, 抗拒賊兵, 于今累年. 首領冒難遠來, 備述爾等忠勤, 爲之惻痛. 已具奏皇帝, 記錄汝等姓名, 將來大兵進討, 則掎角爲援, 晝驚夜劫, 抄絶糧道. 如是賊兵深人, 便當連跨城邑, 痛勦賊徒. 勳績儻成, 節鉞分茅, 皆所不吝. 但當觀時量力, 無或輕動, 反墯賊計. 今本朝屬兵秣馬, 以俟天時, 汝等亦宜訓習, 以待王師之至.’ 公又以蕭琦乃契丹四軍大王之孫, 沉勇有謀, 欲令琦盡統契丹降衆, 且以檄喩契丹, 大意謂本朝與契丹有兄弟之好, 不幸姦臣誤兩國, 皆被女眞之禍. 今契丹不杷, 皇帝無日不念此. 爾能結約相應, 本朝當敦存亡繼絶之義. 虜人益懼, 遂爲間書, 鏤板摹印, 散之境上, 類後周所以間斛律明月之意.
독부(督府)의 참의관(參議官)인 풍방이 조정에 서서 곧다는 명성(名聲)이 있었고, 일에 임해서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는데 두루 양회지방을 다니면서 성곽과 보루를 쌓는 일을 다스리느라 가장 수고가 많았다. 사퇴 등이 그의 애씀이 더욱 많음으로써 더욱 그를 미워하여 색(穡)을 시켜서 방이 성을 쌓으며 재물을 소비한 것이 부당함을 의론하게 하여, 무릇 두 번 글이 올라가자 방을 파직했다. 또 공이 소비하는 국비(國費)를 계산하지 않는다고 의론을 하니, 공이 상주하기를, 장부(帳簿)에 기록한바 독부(督府)에서 염탐군을 보내고, 관리들의 급여(給與)를 주는 등의 2년 반의 비용은 실지로는 30만 민(緡)에 미치지 않고, 그 나머지는 성을 수리하고 배를 만들며, 기계를 만들고 군사를 초모하는 등에 썼다고 했다. 상께서 공의 상주문(上奏文)을 내놓으시니 사퇴와 색이 의론을 굽혔으나, 이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다른 일을 만들어 공을 흔들 것을 모의했다. 전전후군통제(殿前後軍統制) 장심(張深)이 사주를 지켜 수고로움이 있었고 군사들이 그를 편하게 여겼다. 갑자기 조서로서 파직하고 조밀(趙密)의 아들인 곽(廓)으로써 그를 대신했다. 공이 회동에 이르러 자문을 하고 진상을 알아 심(深)을 그대로 두도록 상주를 하였는데, 색이 공의 이 일을 지목하여 명(命)에 항거(抗拒)하고 발호(跋扈)한다고 했다. 사퇴 등이 다시 서로 모의하기를, 상께서 공을 돌보심이 두터워 반드시 즐겨 갑자기 공을 파직하지는 않을 것이니 다만 먼저 도독부를 그만두게 하면 공이 스스로 마땅히 떠날 것이라고 했다. 색이 사퇴의 계획대로 상주하여 의론하였고, 공이 풍방이 파직된 것을 들은 뒤부터 이미 도독을 그만둘 것을 요청하는 상주를 했다. 조서로써 공의 요청을 따르니 공이 또한 글을 올려 정사(政事)를 되돌리기를 힘껏 구하였다. 색이 연이어 상소하여 공을 비난하는데 힘을 더했다. 좌사간(左司諫) 진양한(陳良翰)이 상주하여, 공과 같은 충성(忠誠)과 근로(勤勞)는 인망(人望)이 모이는 바니 조정을 떠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상께서 양한에게 이르시기를, “본래 이 일이 없거니와 또 당금의 인재로 누가 위공(魏公)을 뛰어넘을 자가 있겠느냐? 경은 마땅히 시종과 대간에게 두루 일깨워 그들로 하여금 짐의 이 뜻을 알게 하라.”라고 하셨다. 시어사(侍御史) 주조(周操)가 평소에 양한과 의론을 같이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매우 힘써서 쟁론을 했다. 그러나 이때 공이 평강의 호구(虎丘)에 머물러있으면서 벼슬에서 물러나겠다는 글을 이미 여덟 차례나 올렸다. 상께서 공의 간절한 정성을 살피시고 그의 떠남을 온전히 해주고자 하셨다. 4월 22일에 조서로써 공을 소사(少師), 보신군절도사(保信軍節度使), 판복주(判福州)에 제수하니, 사퇴 등이 드디어 땅을 포기하고 화의를 구할 의론을 결정하였다. 또 선유사(宣諭司) 및 통제사에게 명하여 독부의 문서(文書)와 전물(錢物) 등을 자세하게 살피도록 명령하여 샅샅이 흠결을 찾았으나 끝내 얻을 수가 없자 이에 그만 두었다. 공이 은명(恩命)을 힘써 사양하였지만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5〜6차례에 이르니 예천관사(醴泉觀使)에 제수하였다.
督府參議官馮方立朝有直聲, 臨事不避難, 遍行兩淮, 築洽城壘, 最爲勞勩. 思退等以其救力尤多, 尤惡之, 使穡論方不當築城費財, 凡再章而方罷. 又論公所費國用不貲, 公奏, 計督府遣間探․給官吏等, 二年半之費, 實不及三十萬緡. 其餘爲修城造舟․除器招軍等用. 上出公奏, 思退․穡議屈, 於是始謀更造它事撼公. 殿前後軍統制張深守泗有勞, 軍士安之. 俄有旨放罷, 而以趙密之子廓代之. 公至淮東, 詢問知狀, 奏留深, 而穡指公此事爲拒命跋扈. 思退等又相與謀, 上眷公厚, 必末肯遽罷公, 但先罷都督, 則公自當引去. 穡奏論如思退訐, 而公自聞馮方罷, 已上奏乞罷督府. 詔從公請, 而公亦封章力求還政矣. 穡連疏詆公愈力. 左司諫陳良翰奏, 如公忠勤, 人望所屬, 不當使去國. 上謂良翰:‘本無此事, 且當今人材孰有踰魏公者? 卿宜遍喩侍從臺諫, 使知朕此意.’ 侍御史周操素同良翰議, 至是爭論甚力. 然是時公留平江虎丘, 致仕之章已八上矣. 上察公懇誠, 欲全其去. 四月二十有二日, 制除公少師․保信軍節度使․判福州, 而思退等遂決棄地求和之議. 且命宣諭司及統領司磨洽督府文書錢物, 吹毛求疵, 卒不可得, 乃已. 公力解恩命, 上不許, 至五六, 除醴泉觀使.
공이 비록 조정을 떠났으나 감히 혐의(嫌疑)가 있는 까닭으로 감출 수가 없어 윤색(尹穡)이 간사(奸邪)하여 반드시 국사를 그르칠 것이라고 상주했다. 또 상께 학문에 힘쓰고 어진사람을 가까이 하도록 권하는 상소를 올렸다. 까닭에 옛 문인(門人)으로 어떤 이는 공에게 다시는 작금(昨今)의 일을 묻지 말고, 뒤에 비록 부르는 명(命)이 있어도 또한 벼슬에 나아가지 말도록 권했다. 공이 강개(慷慨)하여 그에게 일러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의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도망갈 곳이 없다. 하물며 내가 두 조정(朝廷)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오랫동안 중임(重任)을 주관했는데 지금 비록 조정을 떠났지만 오히려 날마다 상의 마음이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진실로 보는 바가 있다면 어찌 차마 말을 하지 않겠느냐? 상께서 다시 아무개를 쓰시고자 한다면 아무개는 당일로 길을 떠나리니 감히 늙고 병든 것으로써 사양하겠는가? 공 등이 말하는 것 같은 것은 다시 무슨 마음에서인가?”라고 하니 듣는 자들이 두려워했다. 공이 해마다 피로함으로써 근래에 물러나 쉬게 되었지만 이미 쇠약하고 지친 것을 느꼈다. 또 더위를 두려워해서 아직 장사(長沙)로 돌아가지를 못했다. 행차가 여간(餘干)에 이르자 종실(宗室)인 조공(趙公) 청의 거처를 빌려서 머물렀다. 거처하는 곳 남쪽에 서실(書室)이 있었는데 공이 거기에 이름을 붙여 ‘양정 養正’이라고 하고, 그를 위해 명(銘)을 지어 이르기를, “천하의 움직임은 일(一)에 정(貞)하는 것이다. 정이 본래 나에게 있는데 그것을 기름이 이에 길(吉)하다. 도가 천지에 통하면 만화(萬化)가 흘러나온다. 깊이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고 아침저녁으로 잊음이 없다.”라고 했다. 날마다 『역경』을 읽으며 앞의 학설을 다시 정정했다. 또 말하기를, “죽을 때가 가까워서야 학문에 진보가 있다.”라고 하고, 다시 『역경』의 「상전 象傳」을 취하여 좌우명(座右銘)을 제(題)하여 말하기를, “언어에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며, 목숨을 바쳐 뜻을 완수하고, 몸에 돌이켜서 덕을 닦는다.”라고 했다. 친구로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더불어서 옛 도(道)를 강론하되 종일토록 싫증을 내지 않았다. 대개 그 마음이 순수하고 한결같음이 나아가거나 집안에 있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할 것 없이 이와 같았다.
公雖去國, 不敢以嫌故有隱, 奏尹穡姦邪, 必誤國事, 又奏勸上務學親賢. 故舊門生或勸公當勿復問時事, 後雖有召命, 亦無庸起. 公慨然語之曰:‘君臣之義, 無所逃于天地之間. 況吾荷兩朝厚恩, 久戶重任, 今雖去國, 猶日望上心感悟. 苟有所見‘安忍不言? 上復欲用某, 某當卽日就道, 敢以老病爲辭? 如公等言, 復何心哉!’聞者聳然. 公以連年疲勞, 比得退休, 已覺衰薾. 且畏暑, 未能遂還長沙. 行次餘干, 假宗室趙公𩑠之居而寓止焉. 所居之南有書室, 公名之曰‘養正’, 而爲之銘曰:‘天下之動, 以正而一. 正本我有, 養之斯吉. 道通天地, 萬化流出. 精思力行, 無忘朝夕.’ 日讀易, 更定前說, 且曰:‘庶幾未死, 於學有進也.’ 又取易象題坐右曰 : ‘謹言語, 節飮食, 致命遂志, 反身修德.’ 觀舊來訪者, 輒與講論古道, 終日不倦. 蓋其心純一, 無出處動靜之間如此.
7월 16일에 공이 조고(祖考)를 제사(祭祀)하며 이미 올리고 나서 넘어졌다. 공이 일어나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의 대명(大命)이 머지않았다.”라고 하고 직접 집안일을 기록하여 두 아들에게 주었다. 또 제사와 혼례(婚禮)의 예법을 정하고 그것을 준수하게 하고 말하기를, “상례는 반드시 불교식(佛敎式)을 써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고, 또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국가의 재상이 되어 중원을 회복하여 조종의 원수를 모두 씻지를 못했으니 돌아가 선인(先人)의 묘 왼쪽에 묻히고 싶지는 않다. 곧 죽으면 나를 형산(衡山)에 장사하면 충분하다.”라고 했다. 8월 20일이 되자 오히려 요주(饒州)의 수령인 왕십붕을 위해 「불기실명 不欺室銘」을 짓고 거기에 말하기를, “만물(萬物)을 데면데면 보더라도 마음은 오직 하나여야 한다. 어찌 잠시라도 암실(暗室)의 속임이 있겠는가? 군자는 의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잊지 않는다.”라고 했다. 22일이 되자 비로소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28일에 병이 들었다. 낮 신시(申時)에 아들인 식 등에게 자리 앞에 앉으라고 명하고, 국가에서 네 군을 버렸는지의 여부를 물었고, 또 벼슬을 물러나기를 요청하는 주장(奏狀)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날이 저물자 부녀자들에게 모두 나가라고 명하고 밤에 돌아갔다. 이에 앞서 6월 말에 큰 별이 조씨의 거처 양정당의 북쪽에 떨어졌는데 빛나는 것이 낮과 같아서 조씨 일가가 모두 놀랐었다. 다음날 공이 와서 붙여 살겠다고 말하는 서신을 받았다. 부음을 듣고 상께서 몹시 슬퍼하시고 이틀간 조회(朝會) 보는 것을 거두셨다. 조서로 공에게 태보(太保)를 증직(贈職)했다. 식 등이 감히 공의 뜻을 어기지 못하고 영구를 붙들고 보호하여 담주(潭州)로 돌아갔다. 이 해 11월 신해에 형산현 남악의 남쪽, 풍림향 용당의 들에 장사를 지냈다.
孟秋旣望, 公薦享祖考, 旣奠而跌. 公起歎曰:‘吾大命不遠矣.’ 手書家事付兩子, 且定祭祀昏喪之禮, 俾遵守, 曰:‘喪禮不必用浮屠氏.’ 且曰:‘吾嘗相國家, 不能恢復中原, 盡雪柤宗之恥, 不欲歸葬先人墓左. 卽死, 葬我衡山足矣.’ 及仲秋二十日, 猶爲饒守王十朋作不欺室銘, 有曰:‘泛觀萬物, 心則惟一. 如何須臾, 有欺暗室? 君子敬義, 不忘粟粟.’ 至二十有二日, 始寢疾. 二十八日, 疾病. 日晡時, 命子栻等坐于前, 問國家得無棄四郡乎, 且命作奏乞致仕. 日暮, 命婦女悉去, 夜分而薨. 先是, 六月末有大星隕于趙氏居養正堂之北, 光芒若晝, 趙氏一家盡驚. 翌日, 得公書欲來寓居云. 訃聞, 上震悼, 輟視朝兩日. 有旨贈公太保. 栻等不敢違公志, 扶護還潭州. 以是歲十一月辛亥葬于衡山縣南嶽之陰豐林鄕龍塘之原.
공은 어려서부터 시국(時局)을 구제(救濟)하려는 뜻이 있어 일찍이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을 본 적이 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을 지은 적이 없으며, 부지런히 선비를 구하고 옛사람을 벗으로 삼아 당세(當世)의 연고(緣故)를 강론했다. 사방의 이로움과 병통, 기쁨과 슬픔을 들으면 문득 책에 기록하였고 한명의 천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또한 곡진하게 방문하여 자문을 받았다. 경사에 있을 때 직접 두 황제가 북쪽으로 잡혀가고, 황족들이 포로가 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보고 오랑캐와 더불어 공존(共存)하지 않겠다고 맹서를 했다. 어려운 때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일에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 다른 사람들은 바야흐로 두려워 피하고 물러나 위축(萎縮)되었지만, 우뚝하게 자신이 그것을 맡아서 죽고 사는 것으로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강남으로 옮겨온 이래로 사대부들이 왕왕 화의의 설을 주창하고, 그 현명한 자도 강남을 보존하여 지키는 데에 불과하여 오랑캐가 명령을 내리고 짐승을 거느려서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큰 변란이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공이 홀로 꿋꿋하게 오랑캐를 멸망시키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책무로 삼아, 반드시 인심을 바르게 하고, 원수와 치욕을 씻으며, 국토를 회복하고, 남은 백성을 진작(振作)시키고자 하여 잠시 동안이라도 온갖 근심을 하며 뜻하는 것이 더욱 금석(金石)과 같았다. 만년(晩年)에 다시 임금의 예우를 만나 주의(主義)가 더욱 견고하였는데, 비록 하늘이 그 공을 세우는 것에 인색하여 공으로 하여금 참소(讒訴)하는 간사한 입에서 곤란함을 당하게 하고 끝내 그 뜻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그러나 천심(天心)을 드러내고, 사람의 기강(紀綱)을 붙들어 세웠으며,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밝게 다시 중국(中國)이 이적(夷狄)과는 다른 까닭과, 인류(人類)가 금수(禽獸)와는 다른 까닭을 알게 하고, 떳떳한 인륜(人倫)의 바름을 얻게 한즉 그 공적의 성대함을 또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公自幼卽有濟時之志, 未嘗觀無益之書, 未嘗爲無益之文, 孜孜然求士尙友, 講論當世之故. 聞四方利病休戚, 輒書之冊, 至一介之賤, 亦曲加詢訪. 在京城中, 親見二帝北狩, 皇族係虜, 生民塗炭, 誓不與虜俱存. 委質艱難之際, 事有危疑, 它人方畏避退縮, 則挺然以身任之, 不以死生動其心. 南渡以來, 士大夫往往唱爲和說, 其賢者則不過爲保守江南之計, 夷狄制命, 率獸逼人, 莫知其爲大變. 公獨毅然以虜未減爲己責, 必欲正人心․雪讎恥․復守宇․振遺黎, 顚穎沛百罹, 志踰金石. 晩復際遇, 主義益堅, 雖夫嗇其功, 使公困於讒慝之口, 不得卒就其志, 然而表著天心, 扶持人紀, 使天下之人曉然復知中國之所以異於夷狄, 人類之所以異於禽獸者, 而得其秉彝之正, 則其功烈之盛, 亦豈可勝言哉!
공이 상 앞에서 일을 의론할 때, 도리를 다하는데 힘썼고, 들어주기를 기약했으며, 구차하게 분격하지는 않았다.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몸소 처리했으며, 국가의 일을 집안일처럼 보았고, 백성의 괴로움을 자기 몸에 있는 것처럼 보았으며, 지성과 간곡한 진심으로 위아래를 꿰뚫어 통하게 했다. 평생 동안 네 번 귀양의 명을 받았고 무더운 지방에 거처한 것이 거의 24년인데 부지런히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은 멀수록 더욱 돈독했다. 조정이 한번 좋은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면 기쁨이 말과 얼굴빛에 넘쳤고, 한 가지 일이라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근심으로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자는 반드시 이 마음을 순수하고 한결같이 한 뒤라야 감격시킬 수가 있는 것이라고 했으니 대개 그 충의는 장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혹은 등용이 되고, 혹은 버려졌지만 일찍이 잠시의 틈도 있지를 않았다.
公論事上前, 務盡道理, 期於聽從, 不爲苟激. 其在官守, 事無細大, 必以身親, 視國事如家事, 視民疾苦如在己身, 至誠懇惻, 貫徹上下. 平生四被謫命, 處炎方幾二紀, 擧擧念君之心遠而彌篤. 見朝廷一擧措之善, 則喜溢詞色 ; 一事不厭, 則愛思終夕不寐. 嘗日事君者必此心純一而後能有感格, 蓋其忠義自壯至老, 或用或舍, 未嘗有斯須之間也.
태부인을 섬김에 뜻을 받드는 것을 먼저 생각하여 부드럽고 기뻐하는 태도로 순종하며 편안히 해드리는 데에 그 마음을 다했고, 봉양함에 삼가고 공손하게 하기를 춥거나 덥거나 변하지를 않았다. 집안사람들이나 부녀자들이 공이 솔선수범하는 것을 보고 감히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여 때로 모시는 곁에서 멀리 가게 되어, 매번 마음 편하지 않은 것을 깨달을 때면 곧 말하기를, “태부인께서는 병환이 있지나 않으시느냐?”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여쭙고 그날은 태부인이 드실 약을 지었다. 태부인이 바야흐로 엄하시거나 혹여 안색이 화락하지 않으시면, 공이 곁에서 공수(拱手)를 하고 서서 삼가고 공손히 하여 용납되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태부인의 뜻이 풀어지기를 기다려서야 감히 편안해 했다. 대개 슬하에 있었을 때부터 흰머리가 될 때까지를 하루같이 했다. 태부인이 이미 돌아가시자 평소에 입거나 쓰시던 물건을 보면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어서 공경을 일으키고 효를 일으켜 효성의 독실함이 지극하니, 위로는 대궐에서부터 아래로는 여염(閭閻)에 이르기까지 감탄하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비들과 군민이 공의 소문을 듣고 사모하고 실천함을 일으켰으며, 대저 부끄러워 후회하고 행실을 고친 자가 이루다 셀 수가 없었다. 형인 휘유공에게 우애와 공경이 지극히 독실했고, 그의 아들과 자기의 아들을 가르치고 양육함에 조금도 달리하지를 않았다. 의장(義莊)을 설치하여 종족(宗族)의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었고, 외가(外家) 일족의 상장례와 혼가(婚嫁)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돕고 재물을 대주었다. 세사(歲祀)와 시사(時祀), 제사 때에는 반드시 미리 크고 작은 것을 재계(齋戒)하여 각자로 하여금 엄숙히 삼가게 하였고, 희생(犧牲)을 씻기고 도구를 준비하되 반드시 친히 임석(臨席)을 했다. 제사를 지내게 되면 조(祖), 고(考)께서 거기에 임하신 것처럼 엄숙히 했다. 계절마다 새로운 음식을 맛보게 되면 반드시 먼저 사당에 올린 뒤에야 감히 먹었다. 그릇은 정결한 것을 골라서 제향(祭享)에 대비를 했고 다른 용도로는 쓰지 않았다. 평소에 술을 마시면 한말이 넘기에 이르렀다. 연산(連山)으로 좌천이 되자 태부인 말하기를, “남쪽지방은 땅이 뜨거우니 마땅히 술을 줄여라.”라고 하신즉 곧 감히 마시지를 못했다. 다시 태부인을 뵙게 되자 마셔도 좋다고 명하시자 이에 마셨으나 드디어 종신토록 석 잔을 넘지를 않았다. 그릇을 사용하거나 도구를 취함에 좋고 나쁜 것을 따지지 않았고, 평생 동안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없어서 천하의 사물(事物)을 보는 것이 담박(淡泊)하여 그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 없었다. 사사로이 거처할 때의 음식은 모두 일정한 법도가 있었고, 비록 내실(內室)에 있을 때에도 희롱하는 말이나 게으른 모습이 없었다. 일찍이 기대어 않은 적이 없고, 일찍이 급하게 부르거나 빨리 걸은 적이 없었으며, 말에는 반드시 가르침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법도가 있었다. 무성한 덕은 날로 새로워서 늙음에 이르기까지 쉰 없었다. 여간에 있게 되어 아직 병으로 자리에 눕지 않았을 때에도,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하여 한 올의 게으른 뜻이 없었다. 절필(絶筆)한 두개의 명(銘)은 지금까지 그것을 읽으면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공경을 일으키게 한다. 그런즉 공의 마음은 비록 말로써 형용하는 것이 쉽지 않으나, 그러나 이에서 또한 조금이나마 그 기미를 볼 수가 있다. 대개 그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답고, 학문으로 기른 것이 매우 두터워, 덕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지기에 이르렀으니 억지로 힘써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事太夫人先意承志, 婉愉順適, 曲盡其心, 奉養恭恪, 寒暑不湔. 家人婦子見公身率, 莫敢不敬. 或時遠去侍側, 每覺意緖不佳, 則曰:‘太夫人得無有疾乎? ’遣人候問, 則其日果太夫人服藥也. 太夫人方嚴, 或顔色不和, 則公拱立左右, 踧踖若無所容. 俟太夫人意舒, 乃敢安. 蓋自膝下至白首如一日. 太夫人旣沒, 見素所服用之物, 未嘗不泣下, 起敬起孝, 孝誠篤至, 上自宮禁, 下至閭閻, 無不咨嗟歎息. 縉紳軍民聞風而興起慕用, 與夫愧悔改行者, 不可勝計也. 於兄徽猷公友弟篤至, 敎養其子與己子不少異. 置義莊以贍宗族之貧者, 以至母族喪葬婚嫁, 亦皆取給焉. 歲時祭祀, 必預戒小大, 使各嚴恪. 滌牲治具, 必親涖焉. 及祭, 肅乎如祖考臨之. 時節嘗新, 必先薦于廟而後敢食. 器皿擇精潔者備薦享, 不以它用. 素能飮酒, 至斗餘. 及貶連山, 太夫人曰:‘南方地熱, 宜省酒.’ 卽不敢飮. 及再見太夫人, 命之飮乃飮, 遂終身不踰三酌. 於器用取具, 不問美惡, 平生無玩好, 視天下之物泊然, 無足以動其心者. 燕處飮食, 皆有常度, 雖在閨門, 無戲語, 無墮容. 未嘗偏倚而坐, 未嘗疾呼遽行, 言必有敎, 動必有法. 盛德日新, 至老無息. 及在餘干, 未寢疾間, 溫恭朝夕, 無絲毫倦怠意. 絶筆二銘, 于今讀之猶能使人悚然起敬. 則公之心雖未易以言語形容, 然於此亦可以少見其幾矣. 蓋其天資粹美, 涵養深厚, 以至於德成而行尊, 非强勉所能及也.
공의 학문은 한결같이 천리(天理)에 근본 하였는데, 더욱 『역경』, 『춘추』, 『논어』,『맹자』에 깊었다. 일찍이 『역경』의 수(數)를 논하여 말하기를, “역에는 태극(太極)이 있는데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는다. 태극이 하나이고 양의는 그것을 셋으로 한 것이다. 나누면 둘이 되는데, 7, 8, 9는 6의 수로 55인데 이것이 천지의 중수(中數)이다. 무엇으로써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대개 1, 3, 5, 7, 9는 합쳐서 천수(天數)가 되고, 천수는 다섯에 불과하다. 2, 4, 6, 8, 10은 합쳐서 지수(地數)가 되는데 지수는 다섯에 불과하다. 천지의 기수(奇數)와 우수(耦數)는 그것을 합하면 열이 되는데 그것을 다 합치면 55가 된다. 자연의 수는 모두 중에서 떠나질 않고, 중(中)인 까닭에 변화하고, 변화하는 까닭에 그 도(道)가 끝이 없다. 성인(神妙)이 신묘하게 그것을 밝히고 수의 중(中)을 쓴 까닭에 줄고 불고 가득 차고 비는 묘리와, 닫고 열고 변화하는 기미가 모두 나에게 있어 움직이고 그침에 어김이 없으니 중은 지극하도다.”라고 했다. 또 일찍이 강유(剛柔)의 뜻을 논하여 아들과 조카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임금의 도(道)는 강(剛)을 주로하고 그 동함은 유(柔)를 쓴다. 까닭에 건(乾)이 동하면 곤(坤)이 된다. 신하(臣下)의 도는 유를 주로하고 그 동함은 강을 쓴다. 까닭에 곤이 동하면 건이 된다. 까닭에 대저 반드시 음악(音樂)과 여색(女色)을 멀리하고자 하고, 반드시 소인(小人)을 제거하고자 하며, 반드시 제왕(帝王)을 짝하고자 하고, 반드시 사직(社稷)을 안정시키고자 하며, 반드시 백성(百姓)을 편안히 하고자 하며, 반드시 사방의 오랑캐를 복속시키고자 하는 것이 건괘(乾卦)의 강이다. 임금은 안에 대하여 결단을 주관한다. 신하에게 예우(禮遇)를 하고, 어진 인재(人才)에게 몸을 낮추고, 사방을 어루만지고, 백성을 사랑하며,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를 긍휼히 여기며,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선(善)을 취하고, 자기의 주장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니 그 동은 유가 아님이 없다. 감히 처음으로 주창하지 않고, 감히 일을 먼저 하지 않으며, 예법에 삼가고, 분수를 따르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편안히 하고, 직업(職業)을 지키는 것이 곤괘의 유이다. 신하가 그것을 안에서 얻으면 받듦이 있는 자이다. 안색(顔色)을 범(犯)하면서 감히 간쟁하고, 몸을 헤치며 절개를 다하고, 육척(六尺)의 고아를 부탁할만하며, 천리(千里)의 고을을 다스리도록 맡길만하고,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고, 곤란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짓을 하게할 수는 없으며, 충의의 큰 가르침을 지키고, 당년(當年)의 환난(患亂)을 그치게 하며, 큰 계획을 결단하고, 큰 의심(疑心)을 결정하며, 얼굴빛을 바로하고 조정(朝廷)에 서고, 중화(中華)로서 오랑캐를 두렵게 하여 복속(服屬)시킴에 그 동이 강이 아닌 것이 없다. 까닭에 대저 『역경』을 잘 보는 자는 반드시 대저 강유의 가운데에서 그 용(用)의 되는 까닭을 궁구하되, 곧 64괘(卦), 384효(爻)의 혹은 얻고 혹은 잃으며, 혹은 후회하고, 혹은 아끼며, 혹은 길하고 혹은 흉한 것으로써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 강유의 쓰임을 알지 못하고 『역경』을 말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公之學一本天理, 尤深於易․春秋․論․孟. 嘗論易數曰:‘易有太極, 是生兩儀. 太極一也, 兩儀三之也. 分爲二, 而七․八․九․六之數五十有五, 此天地之中數也. 何以知其然? 蓋一․三․五․七․九合爲天數, 而天數不過五;二․四․六․八․十合爲地數, 而地數不過五. 天地奇糲, 合之爲十, 總之爲五十有五. 自然之數, 皆不離乎中, 中故變, 變故其道不窮. 聖人神而明之, 用數之中, 故消息盈虛之妙․闔闢變化之幾皆在於我而動靜莫違焉, 中其至矣.’ 又嘗論剛柔之義示子姪曰:‘君道主剛, 而其動也用柔, 故乾動則爲坤矣. 臣道王柔, 而其動也用剛, 故坤動則爲乾矣. 故夫必欲遠聲色, 必欲去小人, 必欲配帝王, 必欲定社稷, 必欲安民人, 必欲服四夷, 乾之剛也, 君則之於內而主斷也. 至於禮臣下․下賢才․撫四鄰․愛百姓․卹孤寡, 虛心取善, 舍己從人, 其動莫非柔矣. 不敢唱始, 不敢先事, 謹禮法, 循分守, 安進退, 守職業, 坤之柔也, 臣得之於內而有承者也. 至於犯顔敢爭, 捐軀盡節, 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千里之命, 可殺不可辰, 可困而不可使爲不義, 守忠義之大訓, 弭患難於當年, 斷大計․定大疑, 正色立朝, 華夷讋服, 其動莫非剛矣. 故夫善觀易者, 必觀夫剛柔之中而究其所以用, 則六十四卦․三百八十四爻之或得或失, 或悔或吝, 或吉或凶可以類推矣. 不知剛柔之用, 不可言易也.’
호전(胡銓)이 공에게 그가 저술한 『춘추전 春秋傳』의 서문(序文)을 요청하니, 공이 그에게 말하기를, “춘추에 기록한 것은 인사(人事)의 법이 되는 글이 아닌 것이 없다. 마음에서 그것을 일으키고, 일에서 그것을 보며, 하늘에서 그것을 응험하는 것이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다. 부자(夫子)께서 사시(四時)를 서술하시면서 천왕(天王)을 일컬음으로써 하늘에 순응하면 다스려지고, 생물(生物)의 공(功)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하늘을 거스르면 어지러워 생물의 공이 여기에서 그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니 천만세를 위한 교훈이 지극히 밝도다. 까닭에 한마디 말로써 춘추의 의리를 판단하여 말하면, ‘천리(天理)일 뿐이다.’ 아! 왕(王)으로 하여금 하늘이 있음을 알게 하면 제후(諸侯)들은 왕이 있음을 알게 되고, 대부(大夫)들은 제후가 있음을 알게 되고, 배신(陪臣)들은 대부가 있음을 알게 되면 길들이는 이치를 자연스럽게 얻게 되니 화란을 누군들 일으키겠는가? 대개 왕자(王者)가 하늘이 있음을 알아 그것을 두려워하면 말과 행동이 반드시 믿음이 있고, 정치와 교육이 반드시 서며, 기뻐함과 성냄이 반드시 공변되고, 등용되고 버려짐이 반드시 마땅하며, 물리침과 올림이 반드시 밝고, 벌과 상이 반드시 시행된다. 저 열국(列國)의 제후들이 비록 강대(强大)하다고 말하지만 감히 하늘을 거슬러서 공손(恭遜)치 않고, 거듭 천하의 마음을 거스름으로써 스스로 죽음과 멸망을 취하겠느냐? 주(周)나라의 도(道)가 이미 쇠(衰)하니 왕이 왕 노릇을 못해, 몸을 바르게 해서 예를 행하고, 천심을 받들어서 상벌을 천하에 크게 밝히지를 못하였다. 『춘추』는 이를 위해 지었으니, 내가 포폄(襃貶)을 함으로써 하늘을 대신하여 상벌(賞罰)을 행하여, 거의 착한 자는 권면하고, 악(惡)한 자는 두려워하며,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생각과 뜻을 바꾸어 다시는 훗날 뒤를 이어 일어나지 않음에 가깝게 했으니, 천지의 큰 덕이 비로소 고르게 만물에게 입히게 되었다. 성인이 우주본체(宇宙本體) 심법(心法)의 요체를 이 책에서보다 드러낸 것이 있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胡銓求公序其所著春秋傳者, 公告之曰:‘春秋所書, 莫非人事章章者. 作之於心, 見之於事, 應之於天, 毫釐不差. 天子敍四時, 稻天王, 以謂順天則治, 生物之功于是興;逆天則亂, 生物之功于是息, 爲千萬世訓至明也. 故一言以斷春秋之義曰天理而已矣. 鳴呼!使王知有天, 則諸侯知有王, 大夫知有諸侯, 陪臣知有大夫, 馴致之理, 得之自然, 禍難孰爲而作哉? 蓋王者知有天而畏之, 言行必信, 政敎必立, 喜怒必公, 用舍必當, 黜陟必明, 賞罰必行. 彼列國諸侯雖曰彊大, 敢違天不恭, 以重拂天下之心而自取誅減耶? 周道旣衰, 王之不王, 不能正身行禮, 奉承天心, 以大明賞罰於天下. 春秋爲是作, 以我褒貶, 代天賞罰, 庶幾善者勸․惡者懼, 亂臣賊子易慮變志, 不復接踵于後, 天地之大德, 始獲均被萬物. 聖人先天心法之要, 蔑有著於此書者矣.’
공이 본조(本朝)의 대신(大臣)에 대하여 이문정공(李文靖公)을 가장 중시하여 삼대(三代)의 기상(氣象)에 가깝다고 말했다. 또 구충민(寇忠愍), 부문충(富文忠), 범문정(范文正)의 일로서 법이 될만하다고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공(萊公)이 전연(澶淵)으로부터 돌아오자 성하(城下)의 맹약을 부끄러워하여 더욱 상께 덕을 닦고 정사를 세우라고 권했다. 이미 쓰이지 않게 되자 이에 동봉서사(東封西祀)의 이야기가 있었다. 정공(鄭公)이 오랑캐에 사신을 갔다가 돌아와서 화의로써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급선무 삼아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로 제수한다는 상(賞)을 받지 않았다. 문정(文正)은 서쪽 변경에서 들어와 대정(大政)에 참여하게 되자 인조(仁祖)께 천장각(天章閣)을 열어 대신들로 하여금 시무(時務)를 조목조목 적어내게 하여 크게 정사를 닦도록 권했다. 문정이 갖춘바 20조는 요체가 아닌 것이 없으나 그러나 또한 시행하지를 못했다. 삼공(三公)으로 하여금 그 계책을 모두 실행할 수 있게 했다면 왕업(王業)이 반드시 200년 만에 점점 쇠약해지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날 늙어서 산림(山林)으로 돌아가면 마땅히 초려(草廬)의 곁에 삼현당(三賢堂)을 짓고 거의 아침과 저녁에 모습을 상상하면 그 사람을 보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라고 했으니 어찌 삼공이 한 일이 때마침 공의 마음에 합치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公於本朝大臣最重李文靖公, 謂近三代氣象. 又以寇忠愍․富文忠․范文正之事爲可法, 嘗曰 : ‘萊公自澶淵環, 恥於城下之盟, 益勸上修德立政. 旣不獲用,乃有東封西祀之說. 鄭公使虜環, 以和議爲恥, 以自治爲急務, 而不受樞庭之賞.文正自西鄙入參大政, 勸仁祖開天章閣, 俾大臣條時務, 大修政事. 文正所具二十條, 無非要切, 然亦不克施. 使三公獲盡其猷爲, 則王業必不至二百年而中微也. 異時歸老山林, 當作三賢堂於弊廬之側, 庶幾朝夕想像, 如見其人.’ 豈三公所爲適有契于公心也與!
매번 여러 아들과 문인들을 가르칠 때 말하기를, “학문은 예(禮)로써 근본을 삼고, 예는 경(敬)으로써 우선해야 한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그 마음을 청명하게하고, 묵묵히 성현(聖賢)의 기상을 보존하여 오래되면 스스로 보는 곳이 있게 된다.”라고 했다. 남에게 한 가지 착한 것이 있음을 보게 되면 그를 위해 기쁨을 말과 얼굴빛에 드러냈다. 아들과 조카들의 언동에 조금이나마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를 대할 때 안색을 바꾸고 즐거워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감동을 했다.
每訓詆子及門人曰 : ‘學以禮爲本, 禮以敬爲先.’ 又曰 : ‘學者當淸明其心, 黙存聖賢氣象, 久久自有見處.’ 見入有一善, 爲之喜見辭色. 子姪輩言動小不中理, 則對之愀然不樂, 人自感動.
공이 처음에 양국부인(楊國夫人) 악씨(樂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열흘 만에 부르는 명을 받고 조정에 곧 나아갔다. 시종이 되기에 이르자 어떤 이가 공이 장년(壯年)이기 때문에 첩(妾)을 살 것을 권했다. 공이 말하기를, “국사가 이와 같고, 태부인이 멀리 계시는데 내 마음이 어찌 여기에 미치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종신토록 첩을 두지 않았다. 다시 촉국부인(蜀國夫人) 우문씨(宇文氏)에게 장가드니, 현명하고 정숙하여 공과 뜻이 같았다. 태부인을 섬김에 예를 다하여 닭이 처음 울면 이미 의복을 갖춰 입고 침대 앞에 시립하고 태부인이 깨시기를 기다렸다. 밤이면 태부인이 주무시기를 가다렸다가 숨소리가 고르게 편안히 잠이 드시면 이에 물러나왔다. 음식과 탕약(湯藥)을 일일이 직접 준비했다. 태부인이 늘 말씀하시기를, “내 아이가 효성스러우니 하늘이 어진 며느리를 내려서 그 마음을 이루어주는구나.”라고 했다. 내외의 종족들이 존경하고 우러러서 간섭할 말이 없었고, 거처와 음식이 또한 모두 공과 같이 일정한 법도를 넘지 않았으며, 서로 대하기를 손님처럼 했다. 공이 바야흐로 귀해졌으나 일찍이 사가(私家)인 우문씨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고 매번 여러 아들들을 훈계하며 말하기를, “나는 아침저녁으로 전전긍긍하며 땅을 밟기를 얼음을 밟듯이 하고, 오직 한마디의 실수와 한 가지일의 차질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다.”라고 했다. 대개 그 덕성이 공의 배위(配位)가 되기에 충분했다. 공보다 5년 앞서서 돌아갔는데 형산에 장사지냈으니 공과 더불어 무덤은 같으나 광혈(壙穴)은 다르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가 식으로 우승무랑(右承務郞) 직비각(直祕閣)이고, 차자가 진(枃)으로 우승봉랑(右承奉郞)이다.
公初聚楊國夫人樂氏, 旬日被命召, 卽造朝. 及爲侍從, 或以公盛年, 勸買妾. 公曰 : ‘國事如此, 太夫人在遠, 吾何心及此?’ 遂終身不置妾. 再娶蜀國夫人宇文氏, 賢明淑順, 與公同志. 事太夫人盡禮, 鷄初鳴, 已冠帔立寢前, 俟太夫人寢覺. 夜則俟太夫人寢, 至息勻寐安乃去. 食飮湯藥, ‘吾兒孝, 天賜賢婦, 以成其心.’ 內外宗族敬仰無間言, 起居飮食亦皆如公有常度不湔, 相對如賓. 公方貴, 未嘗言及宇文氏私門, 每訓諸子曰 : ‘吾朝夕兢兢履地如履氷, 惟恐一言之失, 一事之差.’ 蓋其德誠足以配公焉. 先公午年薨, 葬衡山, 與公同兆異穴. 生子男二人, 長栻, 右承務郞․直祕閣 ; 次枃, 右承奉郞.
공의 상주한 의론은 평탄하고 밝아서 헛된 말을 하지 않았다. 입으로 구술하고 아들과 조카에게 그것을 쓰게 하니 모두가 마음에 근본해서 한글자도 바꾸지 않았다. 『소흥주의 紹興奏議』, 『융흥주의 隆興奏議』각 10권이 있다. 『논어해 論語解』4권과, 『역해 易解』 및 『잡기 雜記』 가 공히 10권이고, 『춘추해 春秋解 』6권, 『중용해 中庸解』 1권 『시서예해 詩書禮解』 3권이고 문집(文集)이 10권이다.
公奏議務坦明, 不爲虛辭, 率口誦, 令子姪書之, 皆根於心, 不易一字. 有紹興奏議․隆興奏議各十卷, 論語解四卷, 易解幷雜記共十卷, 春秋解六卷, 中庸解一卷, 詩書禮解三卷, 文集十卷.
생각건대 공의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었고 효성은 신명(神明)에게 통했으며, 무성한 덕은 타고난 성품에서 도움을 받았고, 깊은 학문은 마음에 통함에서 오묘했다. 공훈은 왕실에 있고, 은택은 생민에게 있으며, 위엄은 사방의 오랑캐를 떨게 하고, 이름은 영원히 후세에 드리웠다. 평생의 말과 행동을 책에 다 기록할 수가 없어, 삼가 그 대략을 선택해서 군부(君父)께 바쳐서 사관(史官)에게 내려 무궁하게 그것을 전하는 데에 대비하고 또 장차 당금 세상의 말을 세우는 군자의 기술(記述)을 구하노라. 삼가 행장을 쓴다. 건도(乾道) 3년 10월 일. 좌적공랑(左迪功郞) 특차감담주남악묘(特差監潭州南嶽廟) 주희(朱熹)가 쓰다.
惟公忠貫日月, 孝通神明, 盛德隣於生稟, 奧學妙於心通. 黙存王室, 澤在生民, 威震四夷, 名華永世. 平生言行, 非編錄可記. 謹掇其大略, 以備獻于君父, 下之吏官, 傳之無窮, 且將以求當世立言之君子述焉. 謹狀. 乾道三年十月日, 左迪功郞․特差監潭州南嶽廟朱熹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