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사유선생묘표(聘士劉公先生墓表)
선생의 성은 유(劉)씨이고 건주(建州)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의 백수(白水) 사람이다. 그 증조부의 휘(諱)는 자(滋)인데, 농사를 짓다가 진사시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상서직방랑중(尙書職方郞中)에까지 이르렀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누차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조(照)로 조청랑(朝靑郞)이었다. 2대에 걸쳐 모두 청덕(淸德)이 있었는데, 중간에 벼슬을 쉬고 물러나 있다가 늙어서 죽었다. 아버지 의 휘는 원진(元振)으로 처음에는 벼슬하지 않았으나, 순행(馴行)으로 일컬어졌다.
선생의 휘는 면지(勉之)이고, 자는 치중(致中)이며,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하루에 수천마디의 말을 외웠다. 한 번만 보고 들으면 다시는 잊어먹지 않았다. 글을 지을 때는 아무렇게나 붓을 휘둘러도 글이 이루어졌으며, 기운이 왕성하고 넓게 트였으며, 기세가 맹렬하고 문장과 서법의 변화가 풍부하였는데, 동년배들이 어려서부터 그를 따랐다. 약관이 지나 향리에서 선발되어 태학에 이르렀다. 그 때에 채경(蔡京)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바야흐로 선비들이 원우서(元祐書)를 익히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스승과 생도가 서로 연좌되는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범하는 자는 유배형에까지 이르도록 하였다. 명목은 한결같이 도덕이었으나 실상은 천하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선생은 마음으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홀로 알고 이락(伊洛) 정(程)씨의 전(傳)을 은밀하게 구하여 그 책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터득하였다. 깊은 밤에 동사생(同舍生)들이 모두 깊이 잠들면, 비로소 상자에서 책을 찾아 책 덮개를 열어서는 휘장을 치듯이 하고, 열심히 베끼고 묵묵히 외웠다. 부릉(涪陵)의 초천수(譙天授)가 일찍이 정부자를 종유했으며, 역학(易學)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있어서 경사에 가서는 그를 찾아가서 그 학문의 본말을 다 얻었다. 이윽고 과거를 위한 학문을 싫어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녹첩(錄牒)을 버리고는 여러 생도들에게 읍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남도(南都)를 지나면서 원성(元城) 유충정공(劉忠定公)을 뵙고, 비릉(毗陵)을 지나면서 구산(龜山) 양문정공(楊文靖公)을 뵙고는, 모두 학문을 청하였다. 그런데 유공은 그 재질을 특히 뛰어나게 여겨 몇 십일을 머물게 하며 평생에 걸쳐 몸소 실천한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대절(大節)과 방외(方外)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은 듣지도 못한 것들을 알려 주었는데,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선생은 그 말을 감사하게 받고,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행하여 조석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하니 얻은 것이 있었는데, 예전에 들은 한 마디의 좋은 말을 융회관통(融會貫通)하여 모두 자기의 것으로 행하였으니, 날로 성하고 독실해졌다.
적계(籍溪) 호원중(胡原仲)․병산(屛山) 유언충(劉彦冲)과 우애가 좋아 날마다 강론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당세의 일에 대해서는 중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였으나 말이 일을 분별하고 처리하는데 이르면 큰 일이나 작은 일, 드러나는 일이나 은미한 일 모두에 다 조리가 있었다. 난(亂) 후에 고향집이 황폐해져서 건양(建陽) 근교 소둔(蕭屯)에 따로 풀을 엮어 집을 짓고 거기에서 독서하며 힘써 농사를 지어 자급하며 담박하게 지내면서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일세에 현사대부들이 그를 사모하여 추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여거인(呂居仁)이 그를 깊이 알아 일찍이 짤막한 시로 문안을 드렸는데, 그 중에 “老大多材 十年堅坐”라는 구절이 있어 세상에 실록으로 전해졌다.
이때에 국가가 남쪽으로 건너간 지 몇 십 년인데 중원(中原)을 회복하여 오래된 원통함을 풀기를 꾀하면서도 일정한 계책이 없었다. 비로소 준걸들이 이러한 일을 항상 잊지 않고 일을 도모하여, 여공(呂公)이 동열인 증천유(曾天游), 이사지(李似之), 장자유(張子猷) 세 사람과 함께 바른 행동과 뜻으로 조정에까지 그 명성이 있어서 특별히 궁궐로 부름을 받아 나아갔다. 막 가려고 할 때에 병산 선생이 「초검(招劍)」이라는 글을 지어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그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기를 “보검을 지니고 가서, 군왕을 받들고 사이(四夷)를 누르고 온 천하를 평정한다. 때가 때이니 깊이 감추지 말아라”라고 하였으니, 선생에게 기대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조정에 나가보니 마침 승상(丞相) 진회(秦檜)가 나라 일을 심하게 전단하여 일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면 할 수 없게 하였다. 이때에는 또 바야흐로 자신을 굽혀 융적과 화친을 맺을 정책을 세우고, 천하의 정론을 듣기 싫어하였으며, 산림(山林)의 선비들이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금기를 깨고 감히 진언하는 것을 의심하고, 특히 천자를 알현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일을 도맡아 이야기하였으며, 가령 문하성에 책시(策試)가 있으면 문서를 보내서 그와 합치되는 사람을 올려 주도록 하였다. 선생은 도가 쉽게 행해지지 않을 것을 알고 바로 병을 핑계로 물러나 돌아왔다.
문을 닫아걸고 은거한지 10여년에 조양(造養)은 더욱 무르익고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므로 조충간공(趙忠簡公)이 남주(南州)를 진압하러 나가며 마을을 나서면서 조아리고 들어가 뵈었는데, 날을 세우며 앉아서 이야기 하고는 더욱더 탄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참소를 당하여 해외로 달아나 숨었고, 동시에 선생과 같은 사람들 또한 다시는 등용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결국 한 번도 등용되어 보지 못하고 집에서 생을 마쳤으니 향년 59세였다. 뜻 있는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소흥(紹興) 19년 2월 10일이었다.
선생의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근본으로 하였으나 재주는 널리 세상에 쓰일만하여 정사와 재물을 맡아 처리하면서도 기색을 흩트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엄숙하게 스스로를 지켜 범할 수 없었고, 사물을 때할 때는 온화하고 화락하여 웃음 띤 안색이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재물을 처리할 때는 청렴하여 하나라도 함부로 취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처가가 부유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재물을 주어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다. 그것을 물리쳐 용납하지 않았고 집안사람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택하여 천거하여 주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때 정성과 진심을 다하였는데, 같은 동네의 시랑(侍郞) 호명중(胡明仲)이 일찍부터 뛰어나 작은 아버지의 후사를 이었는데, 스스로는 자신의 본래 부모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수군거리면서도 그에게 알리지는 않고 있었다. 선생은 홀로 편지를 보내어 일이 그렇게 된 본말을 갖추어 진술하였는데, 호공이 그 말에 감격하여 자주 고향에 가서 부모를 뵙고 은혜에 대하여 간략한 예를 갖추니, 분분한 논의가 조금 잠잠해졌다. 나의 아버님께서 일찍이 선생과 사귀며 서로 좋아하였는데, 돌아가시려 할 때 뒷일을 살뜰히 맡기시고, 또 나에게 가서 배우도록 타일러주셨다. 고아로 버려졌을 때 선생은 흔쾌히 그 가사를 경영하시면서 나를 아들이나 조카처럼 가르쳐 주셨다. 또 여식을 주셨다. 친구가 외롭고 가난하면 거두어서 도와주었는데, 그 역시 곡진한 은의를 다하였다. 학생이 문하에 오면 그 재질에 따라 성현이 가르치고 배운 문호 및 옛날의 훌륭한 말과 행위의 아름다움을 말하여 종일을 힘써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장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았다. 연(連)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아들이 없어 종형(從兄)의 아들 사온(思溫)을 후사로 삼았다. 두 딸이 있는데, 그중에 큰 딸은 나에게 주었고, 작은 딸은 조봉랑(朝奉郞) 범염덕(范念德)에게 시집보냈다. 사온 역시 아들이 없어 또 종제(從弟)의 아들 예(澧)로 후사를 이었다. 건주(建州)는 지금 건녕부(建寧府)가 되었는데, 선생의 묘가 있는 초당은 개울을 건너 북쪽으로 70 리에 있는 군옥향(羣玉鄕) 삼계리(三桂里)의 학사원(學士原)에 있다. 장례를 지낼 때 미처 명(銘)을 쓰지 못하였는데 지금 또 50년에 흘렀다. 후생 가운데 선생을 뵌 사람은 점점 적어지니, 나는 더 오래되면 밝힐 수가 없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그 집안에 전해지는 뛰어난 학행을 추가하여 적고 돌에 새겨 드러내는 것이다.
경원(慶元) 무오(戊午) 정월 기해 초하루 아침에 문인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치사한 주희 쓰다.
先生姓劉氏, 建州崇安縣五夫里之白水人. 其曾大父諱滋, 起身農畝, 以進士高第仕至尙書職方郞中, 累贈開府儀同三司, 吏部尙書. 大父諱照, 朝請郞. 再世皆有淸德, 中歲卽休官退處, 以大耄終. 父諱元振, 始不仕, 然亦以馴行稱.
先生諱勉之, 字致中, 自幼强學, 日誦數千言. 耳目所接, 一過不復忘. 其爲文肆筆而成, 滂沛閎闊, 凌厲頓挫, 儕輩少能及之. 踰冠, 以鄕擧詣太學. 時蔡京用事, 方禁士毋得挾元祐書, 制師生收司連坐法, 犯者罪至流從. 名爲一道德者, 而寔以鉗天下之口. 先生心獨知其非是, 陰訪伊洛程氏之傳, 得其書藏去. 深夜, 同舍生皆熟寐, 乃始探篋解袠, 下帷然膏, 潛抄而黙誦之. 聞涪陵譙公天授嘗從程夫子遊, 兼邃易學,
適以事至京師, 卽往扣焉, 盡得其學之本末. 旣而遂厭科擧之業, 一日, 棄錄牒, 揖諸生而歸. 道南都, 見元城劉忠定公; 過毗陵, 見龜山楊文靖公, 皆請業焉. 而劉公尤奇其材, 留語數十日, 告以平生行己立朝大節, 以至方外之學, 它人所不及聞者, 無不傾盡. 先生拜受其言, 精思力行, 朝夕不怠. 久而若有得焉, 則疇昔所聞一言之善融會貫通, 皆爲己用, 而其踐履日以莊篤.
與籍溪胡公原仲․屛山劉公彦冲兩先生友善, 日以講論切磋爲事. 其於當世之務若不屑焉, 而論說區處, 鉅細顯微皆有條理. 亂後故山室廬荒頓, 乃卽建陽近郊蕭屯別墅結草爲堂, 讀書其中, 力耕稼以自給, 澹若無求於世. 而一時賢士大夫莫不注心高仰之. 中書舍人呂公居仁知之尤深, 嘗以小詩問訊, 有 ‘老大多材, 十年堅坐’ 之句, 世傳以爲實錄.
是時國家南渡幾十年, 謀復中原以攄宿憤, 而未有一定之計. 方且寤寐俊傑, 與圖事功, 呂公乃與同列曾公天游․李公似之․張公子猷三數人者共列其行誼志業以聞於朝, 特詔詣闕. 將行, 屛山先生爲作招劍之文以祝之. 其卒之糺曰: ‘寶劍徠, 奉君王. 撫四夷, 定八荒. 時乎時, 毋深藏.’ 其所望於先生者蓋如此. 旣至, 會秦丞相檜已顓國枋, 爲其事非己出, 不能平. 時又方決屈己和戎之策, 惡聞天下正論, 意山林之
士不顧利害, 敢盡言觸忌諱, 尤不欲使見天子, 談當世事, 第令策試後省, 給札俾上其對. 先生知道不易行, 郞日謝病歸.
杜門高臥十餘年, 造養益熟, 名聞益尊. 故相趙忠簡公出鎭南州, 道出里門, 紆轡入謁〔一〕, 坐語移日, 彌加歎重. 然其去未幾, 卽遭讒竄海外以沒, 同時知先生者亦皆廢錮不復用, 於是先生竟不及一試於用而卒于家. 享年五十有九, 有志之志莫不哀之, 紹興十九年二月十日也.
先生學本爲己而才周世用, 臨事財處, 不動聲氣. 平居嚴敬自持, 若不可犯, 而接物之際恂恂和悅, 色笑可親. 其臨財廉, 一介不妄取. 少時婦家富而無子, 謀盡以貲産歸女氏. 旣謝不納, 又擇其宗屬之賢者擧而畀之, 使奉其先祀. 其與人交誠信懇惻, 同里胡公明仲侍郞蚤出爲季父後, 不自知其本親, 鄕人多竊議之而莫以告. 先生獨爲移書, 具陳本末所以然者, 胡公感其言, 爲數歸省, 恩禮略備, 議以少息. 熹之先君子蚤與先生遊相好, 將沒, 深以後事爲寄, 且戒熹往學焉. 及棄諸孤, 先生慨然爲經理其家事, 而敎誨熹如子姪. 旣又以其息女歸之. 親舊羈貧, 收恤扶助亦皆曲盡恩意. 學子造門, 隨其材品爲說聖賢敎學門戶以及前言往行之懿, 終日娓娓無倦色. 自壯至老, 如一日也. 娶連氏, 無子, 以從兄之子思溫爲後. 二女子, 其長歸于我, 次適
朝奉郞范念德. 思溫亦無子, 又以從弟之子澧後之. 建州於今爲建寧府, 先生墓在草堂涉溪西北七里所羣玉鄕三桂里之學士原. 其葬時不及銘, 逮今且五十年. 後生之及見先生者曰加少, 熹懼其益久而遂將無所考也, 乃追記其世家學行之最而伐石以表焉. 慶元戊午正月己亥朔旦, 門人朝奉大夫致仕朱熹述.
〔一〕紆: 宋浙本作 ‘紓’.
주자대전 91권 朱子大全 卷九十一
묘지명[墓誌銘]
유십구부군묘지명(劉十九府君墓誌銘)
내 나이 열 대여섯에 선군(先君)의 유명(遺命)으로 고인이 된 빙사(聘士) 유군(劉君) 선생에게서 배웠다. 그 때 내가 어리고 어리석어 그 원대한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고, 특히 용모와 말씀하시는 기운을 보고 그 위대함이 오늘날의 선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또 선생의 형님인 십구장부군(十九丈府君)을 뵈었는데, 말씀과 안색, 기거동작이 선생과 다르지 않았으며, 온후함과 근량함은 선생보다 나았다. 그리하여 그 사람됨을 매우 경애하였다. 내가 조금 자라자 선생은 딸을 아내로 주시어 또 자주 가서 부군의 곁에 계시는 걸 뵐 수 있었다. 그 때 부군은 노쇠하셨으나 자신을 지키고 사람을 접하는 동작에 법도가 있어 종일을 단정히 앉아서 게으르게나 기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말을 하면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의거하였다. 생활을 경영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과 농사짓고 누애치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정연하게 조리가 있었다. 요사이 선조의 유사(遺事)와 선생의 고향 옛집에서 행하던 오래된 풍속의 옛 기록을 보면 반드시 돌아보고서 “내가 다시 이것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구나!”라고 탄식하였다. 나는 물러나와서 매번 친구들에게 그 말을 하여 선배들의 기질이 순후하며, 성실하고 소박하여 부화하지 않으며, 또 예법을 삼가 행하여 찬연히 문치가 있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 타고난 자질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또 승평교화(昇平敎化)가 끼친 혜택이며 의관문물(衣冠文物)의 남은 기풍이다. 지금 사람들이 글을 외고 문장을 짓는 것을 보면 경박하게 스스로 좋아하면서도 가볍고 빠르며 경박하고 게을러 도리어 시정(市井)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으니 선배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30여년이 지나 부군께서 졸하셨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 그 아들이 나에게 그 행장을 주어서 글을 지어 묘도(墓道)에 적도록 하였다.
부군의 자는 치단(致端)이고 건녕부(建寧府) 숭안(崇安) 사람이다. 증조부는 직방랑중(職方郞中)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증직하였는데, 처음에 문학(文學)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여러 주(州)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모두 은혜를 베풀고 자애로운 정치를 펼쳤다. 조부 조청랑(朝請郞)은 현(縣)을 맡아 다스렸는데 자신의 뜻을 실천할 수 없게 되자 나이 70이 안되어 그 일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부친은 경전에 밝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데 힘썼으며, 벼슬하지 않고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같은 군의 여(余)씨를 아내로 맞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어 지식이 있었으며 부군(府君) 형제를 두었고 국자좨주 옹(翁)공이 그 묘지명을 지었다.
부군이 형제 중에서 가장 맏이여서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맡아보았으므로 학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효애와 공경, 성신(誠信)과 돈독함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였는데, 부군 때에 이르러서는 식구가 더욱 많아졌다. 부군은 치밀하게 경영하여 대체(大體)를 잃지 않았다. 춘추 조석의 봉사(奉祀)와 혼상(婚喪)에서는 반드시 연회를 베풀어 친인척과 친구들이 좋은 일에는 축하하고 나쁜 일에는 조문하게 하였으니, 그 후박왕래(厚薄往來)의 분별이 뜻에 부합하고 예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부군은 마음대로 바깥일을 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었으며, 동생들도 모두 사방으로 유학을 하여 스승과 벗을 사귀어 그 재능과 학식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나 빙군(聘君)인 선생께서 두드러지게 우뚝하시어 일세의 명망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불후의 이름을 이루었다는 말은 실로 부군이 거기에 들어맞는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명예나 재물과 같은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아 나이가 들도록 수십 년 간 동네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 정신과 기력은 늙어도 쇠잔해지지 않아 산에 오르고 물에 갈 때는 항상 초연히 홀로 갔는데, 스스로 즐기시는 바가 다른 사람들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이 85세, 건도(乾道) 계사(癸巳)년 정월에 병으로 댁에서 졸하시어 자택에서 서남쪽으로 수백 보 떨어진 팽원(彭原)이라고 하는 곳에 장사지냈다.
부군께서는 신안(信安) 축(祝)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어진 행실을 지니고 있었지만 선생보다 먼저 졸하시었다. 아들 모(某)가 있다. 딸은 진사(進士) 강지서(江之瑞)에게 시집갔다. 손자 윤(潤)과 손녀가 셋 있다. 그 행장에 실린 것은 대체로 이와 같은 것들이고, 내가 앞에서 논한 것은 실상을 드러내 밝힌 것이다. 삼가 차례대로 함께 쓰고 또 묘지명(墓誌銘)을 쓴다.
선비들은 입과 귀로만 학문을 하고 실로 몸으로 하지는 않는다. 방정맞고 약삭빨라서 벼슬자리를 더럽힌다. 누가 선생과 같이 믿음 있고, 경계함이 있겠는가? 말만 무성하지 않고, 행동에 법도가 있다. 팽원의 나무는 가리개가 되고 그늘이 되는구나! 나는 이것을 묘지명으로 새겨 앞으로의 가르침으로 삼으려 한다.
熹年十四五時, 以先君遺命學於故聘士劉君先生. 時幼且愚, 未足以識其大者遠者, 特觀於容貌詞氣之間, 知其偉然非今世之士也. 旣又獲見于先生之兄十九丈府君者, 詞色俯仰, 蓋與先生不異, 而溫厚謹良則又過之. 因亦甚敬愛其爲人. 及少長, 而先生以女妻之, 又得數往拜於府君之側. 時府君老矣, 然其持己接人動有法度, 危坐終日無怠惰偃側之容. 與人言, 必依於孝弟忠信. 至於治生處事之方, 耕稼蠶績之務, 亦皆纚纚有絛理. 間而及於先世遺事與夫鄕里故家舊俗之傳, 則必(8-4618)顧而歎曰:‘吾之不復見此也久矣夫!’熹於是退而每爲朋友道之, 以爲前輩氣質淳厚, 悃愊無華, 而其謹於禮法, 桑然有文又如此. 蓋不惟其天資之美, 抑亦昇平敎化之餘澤, 衣冠文物之遺風. 其視今人誦書業文, 沾沾自喜, 而輕儇浮惰反無以異於市井之人者, 相去遠矣. 如是三十餘年, 而府君卒. 旣葬, 其子某狀其行以授熹, 使爲之書以表于墓道.
熹按府君諱某, 字致端, 建寧府崇安人. 其曾大父職方郞中․贈開府儀同三司諱某, 始以文學起家, 歷典數州, 皆有惠愛. 大父朝請郞諱某, 爲縣有所不得行其志, 年未七十卽致其事以歸. 父某, 明經勵行, 不仕以卒, 而鄕人敬之. 娶同郡余氏, 讀書史, 有智識, 實生府君兄弟, 國子祭酒翁公所爲志其墓者也.
府君於兄弟爲最長, 自少則任家事, 以故不及於學. 而其孝愛恭敬․誠信敦篤自有以過人者. 家世淸貧, 至先府君時食口益衆. 府君經營纖密而不失大體. 蓋凡春秋晨夕之奉, 婚喪燕勞之須, 以至族姻黨友賀吉而弔凶, 其厚薄往來之數無不稱情而合禮者. 先府君於是得以放情事外而遂其高, 諸弟亦皆得以遊學四方, 親師取友, 各成就其器業. 而聘君先生卓然傑立, 遂爲一世之聞人, 名立於不朽, 實府君有以相之也.
府君自少無外慕, 晩歲足跡不出里門者數十年. 其精神氣力老而不哀, 登山臨水常翛然獨往. 其所以自樂者, 人不得而言也. 年八十有五, 以乾道癸巳正月□□□病卒于家, 而葬於宅之西南數百步曰彭原者.
府君娶信安祝氏, 有賢行, 前卒. 子男某也. 女適進士江之瑞. 孫男潤, 女三人. 凡狀之所載如此, 與熹前所竊論者實相發明. 謹敍而幷書之, 且爲之銘. 銘曰:
士學口耳, 弗誠以身. 旣佻以儇, 汙我冠紳. 孰如丈人, 庸信庸謹? 詞無支葉, 動有繩凖. 彭原之木, 有翳其陰. 我銘斯刻, 以詔來今.
국록위공묘지명(國錄魏公墓誌銘)
원리(元履)의 성은 위(魏)씨이고, 옛 이름은 정지(挺之)인데 후에 섬지(掞之)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자는 자실(子實)이다. 그러나 그는 원리로 불린 지가 오래되어 부르는 사람들이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집은 건녕부(建寧府) 건양현(建陽縣)의 초현리(招賢里)인데 유학으로 드러난 집안이다. 그 세계(世系)가 옮긴 내력은 고 시랑(侍郞) 호인(胡寅) 공이 이미 원리의 선군자의 묘에 적어하여 놓았다.
원리는 어려서 큰 뜻이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군(郡)의 향학에 유학하여 적례(籍溪) 호헌(胡憲)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선생은 그를 특출하게 여겼다. 얼마 후 향리의 선배 유학자들을 두루 종유하였으며, 사이사이에 사방을 다녔고, 또 선배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그리하여 견문이 날로 넓어지고 명성이 날로 커졌다. 일찍이 구주(衢州)의 태수 장걸(章傑)의 집에 의탁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전의 재상 조충간공(趙忠簡公)이 해상에서 죽어 상산(常山)으로 돌아가 장사지냈다. 장걸은 조공을 매우 미워하고 있었고, 또 진회(秦檜)의 뜻과도 거리가 있어 그 집안사람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는데, 그를 조사하고 죄를 다스리는 것이 매우 엄혹하였다. 사람들은 그 흉학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원리는 홀로 아무렇지도 않게 글을 써서 장걸을 꾸짖고는 장읍(長揖)하고 바로 돌아왔는데, 장걸 역시 그를 해칠 수 없었다.
두 번 향시에 급제하여 예부(禮部)에 시험을 보았는데 모두 급제하지 못하였다. 민(閩)의 지방장관인 왕응진(王應辰)과 건(建)의 태수 진정동(陳正同)이 그의 뛰어남을 알고 서로 의논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재상이 저지하여 또 부름을 받지 못하였다. 몇 년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부름을 받았다. 부(部)의 자사(刺史) 예엽(芮燁) 공이 그 관료와 태수 여섯 사람을 이끌고 함께 위원리의 품행과 도의를 말하여 특별히 그를 불러들였다. 원리는 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포의(布衣)로 궁궐에 들어가 알현하고 당세의 일에 대하여 극력 진언하였다. 그 큰 요체는 황제가 덕업(德業)을 수양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며, 사기(士氣)를 길러서 근본을 회복하도록 권하는 것이었고, 황제께서는 칭찬하며 받아들이고 잠시 위로하여 주셨다. 다음날 드디어 불러들여서 진사출신과 같이 대우하여 좌적공랑(左迪功郞)과 수태학록(守太學錄)을 내려주었다. 건도(乾道) 4년 12월의 일이다.
이전에 학관(學官)이 생도들과 교류하지 않고 오만하게 학사를 돌보지도 않으면서 한갓 명망을 얻으려고 노력하며 거만하게 굴고만 있었다. 원리가 직책에 나가고 나서는 날마다 생도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가르쳤다. 또 그 거처가 허물어지거나 거의 무너진 것을 보고는 곧 조정에 청하여 민전(緡錢) 40만을 받아서 그것을 수리하였다. 공자 사당에 석전(釋奠)을 지내는데 원리가 종사된 선현에게 분헌(分獻)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일에 앞서 재상에게 아뢰기를 “왕안석(王安石) 부자는 삿된 말로 황제의 귀를 미혹시키고, 인심을 그르쳐 차츰 화란에 이르게 하였으니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또 하남(河南) 정(程)씨 형제는 끊어진 학문을 창명하여 다행스럽게도 지금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공이 큽니다. 청컨대 황제에게 말씀하시어 왕안석 부자의 위는 폐하시어 제사지내지 말고, 정씨 형제를 추작(追爵)하여 종사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날에 또 말하기를 “태학의 교육은 마땅히 덕행과 경술(經術)을 앞세워야 합니다. 그 다음은 또 생도들이 세상의 일에 통달하도록 하여 관리로서의 능력을 갖추게 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같이 공허하고 부화한 말로 사람들을 뽑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정사(政事)에서도 안위(安危)와 치란(治亂)이 달린 중요한 일에 있어서도 재상은 바르게 처리하지 못하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은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도 그는 역시 항소하고 진언하지 않음이 없었다. 간언하고 상소하는 것이 서너 차례에 이르러도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병을 핑계로 문밖을 나오지 않고, 글을 써서 재상을 질책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재상은 원리를 훌륭하다는 것을 깨닫고 불러들였으나 이에 이르러도 근본은 바로잡히지 않았다. 원리는 전부터 여러 번 벼슬을 그만둘 것을 청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휴가를 받아 돌아갈 수 있었다. 여러 날이 지나서 태주(台州) 주학(州學)의 교수를 그만두었다.
원리는 어려서부터 당세(當世)에 뜻을 두고 있었고 늦은 나이에 군주를 만났으니 그 배운 것을 행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가 벼슬한 것은 반년이 채 못 되어서 맞지 않아 돌아갔다. 그 사이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가 깊고 두터움이 이와 같으나 나의 학문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여 보답하지 못함을 깨달았느니 나의 죄가 크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일찍이 그 서실(書室)에 ‘간재(艮齋)’라고 편액을 붙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거기에 거처하면서 비로소 이전의 학문을 조리있게 하여 그때까지 이르지 못한 것을 더욱더 구하여 종유하는 선비들 중에 먼 곳에서부터 오는 자들이 점점 생겨났으나 불행히도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병이 위급할 때에도 임금과 부모를 생각하고 가사를 처리하며 한 마디의 실수도 없었다. 그 어머니가 그를 보면 눈물이 없이는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승려나 무속의 예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경계하고, 또 편지로 그 친구인 신안(新案) 주희를 불러서 도착하자 자신의 상례에 관한 일을 부탁하고 이별하였다. 죽은 날은 9년 윤월 임술(壬戌)일이었고, 그 나이 59세였다.
같은 군의 유(劉)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징사(徵士) 면지(勉之)의 손위 누이로 선생보다 19년 먼저 죽었다. 계실(繼室)은 우(虞)씨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효백(孝伯)은 국학(國學)진사(進士)이고, 효명(孝明)은 아직 어리다. 논의(論議)․훈설(訓說)과 같은 문장을 지은 것이 모두 수십 권으로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원리는 학문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전대의 치란(治亂)과 흥폐(興廢), 존망(存亡)에 대한 설에 특히 뛰어났고, 본조(本朝) 고사(故事)의 실상에 대해서는 모두 깨닫고 관통하였고, 그 대체를 잘 알았다. 평소에 논설을 하면 듣는 사람이 송연하였다. 집안에 거처하면서는 상례와 제례를 삼가 행하고, 예법을 중시하였으며 친구를 구휼하여 비록 가난하였지만 게으르지 않았다. 부친의 형제 중에 남쪽으로 옮겨 산 사람이 있었는데, 천리를 나가 맞이하여 봉양하였고, 죽어서 장사를 지낼 때는 예법대로 하였으며, 그 고아를 기르는 것은 더욱 은혜로웠다. 흉년이 든 해에는 죽을 끓여 굶주린 자를 먹였으며, 관청에 곡식을 내어줄 것을 극력 청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였다. 또 일찍이 고을 사람 중에 자신의 부모를 장사지내지 않는 자를 감독하기를 청하여 넉넉한 사람에게는 기한을 주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비용을 주었으며, 또 후사가 없는 자를 감싸준 것이 천여 명이었다. 글을 지어서 선비이면서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들을 경계하여 온전하게 살게 해 준 자 역시 많았다. 사람과 사귈 때는 특히 정(情)을 다하였고, 좋은 일은 기뻐하고 잘못은 고쳐주었는데,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는 듯이 하였다. 후배들 중에 예를 갖추어 찾아오는 자는 실로 한가지 장점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부지런히 밀고 끌어주어 성취시켜 주었다. 그가 마음을 쓰고 행동을 하는 것들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일찍이 그 사람됨이 흠이 있어 크게 지나친 자가 있었는데, 원리(元履)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자신의 이익으로 자신을 경영하는 사람들보다는 낫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혹 명예를 쫒는 것을 비난하는 것에 이르면 근심스럽게 말하기를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의심을 피하려고 한다면 선을 행하는 길은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가 도를 배우고 사람을 사랑하는 본의(本意)였다. 아! 만약 그가 장수하여 통달하고 그를 등용하여 그것을 행하도록 하였다면 사람들에게 미쳤을 영향이 어떠했겠는가?
효백(孝伯)이 7월 기미(己未)일에 널을 받들어서 살고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10리도 안되는 장판(長坂)이라고 하는 곳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곳은 원리가 평소에 좋아하던 곳이었다. 내가 그 터에 가니 효백이 읍하며 절하고 엄사돈(嚴士敦)의 행장을 받들고 와서 명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원리가 남긴 뛰어난 말들이 여기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니, 스스로를 생각해 보아도 비록 할 수가 없을 것 같지만 차마 저버릴 수가 없어서 승낙하였다. 돌아와서 그 행장이 거짓이 없는 것을 보고 그 대체를 엮어서 서(序)를 짓고 명(銘)을 쓴다.
하늘이 그를 아꼈다고 하면 그 자질과 뜻을 다한 것이고, 그를 사랑했다고 하면 또 나이가 되지도 않았는데 제자리를 찾게 한 것이니 결국 그 나머지를 가지고 땅에 묻힌 것이다. 나는 명(銘)을 써서 그를 슬퍼하고 또 그 무덤을 덮는다.
元履姓魏氏, 舊名挺之, 後更名掞之, 則字子實. 然其以元履間也久, 故稱者莫能易也. 家建寧府建陽縣之招賢里, 以儒學顯. 其胄出遷徙之所繇, 則故侍郞胡公寅已識於元履先君子之基矣.
元履幼有大志, 少長遊郡庠, 事籍溪先生胡公憲, 先生奇之. 已而偏從鄕之儒(8-4620)先長者遊, 間適四方, 又盡交其先達名士, 於是聞見日廣而聲稱日益大. 嘗客衢守章傑家, 曾故相趙忠簡公薨海上, 歸葬常山. 傑雅怨趙公, 又希秦檜意, 逮繫其家人, 劾治甚急. 人畏其凶虐, 無敢議者. 元履獨慨然以書噍讓傑, 長揖徑歸, 傑亦不能害也.
兩以鄕擧試禮部, 皆不第. 閩帥汪公應辰․建守陳公正同知其賢, 相與論薦于朝. 時相尼之, 又不得召. 後數歲, 詔擧遺逸. 部刺史芮公燁遂帥其寮與帥守六人者共以元履行誼爲言, 於是詔特徵之. 元履辭謝不獲, 則以布衣入見, 極陳當世之務. 大要勸上以修德業․正人心․養士氣爲恢復之本, 上獎歎開納, 勞問移時. 明日, 遂有詔賜同進士出身, 授左迪功郞, 守太學錄. 乾道四年十有二月也.
異時學官不與諸生接, 亦漫不省學事, 徒養望自高而已. 元履旣就職, 則日進諸生而敎誨之. 且視其居有壞者, 或幾壓焉, 則請于朝, 得緡錢四十萬以葺之. 釋奠孔子祠, 職當分獻先賢之從祀者, 則先事白宰相: ‘王安石父子以邪說惑主聽, 溺人心, 馴致禍亂, 不應祀典. 而河南程氏兄弟唱明絶學, 以幸來今, 其功爲大, 請言於上, 廢安石父子勿祀, 而追爵程氏兄弟, 使從食.’ 不聽. 它日又言: ‘太學之敎宜以德行經衒爲先. 其次尤當使之通習世務, 以備官使. 今壹以空言浮說取人, 非是.’ 又不聽. 至它政事, 有係安危治亂之機, 而宰相不能正․臺諫待從不敢言者, 亦無不抗疏盡言. 以諫疏至三四上不納, 則移病杜門, 以書質責宰相, 語尤切. 宰相雅知元履, 招徠之, 至是始不能平. 而元履前已數求去矣, 遂以迎親予告使歸. 行數日, 罷爲台州州學敎授.
元履自少則有志于當也, 晩而遇主, 謂可以行其學. 然其仕不能半歲而不合以歸, 間獨喟然嘆曰:‘上恩深厚如此, 而吾學不至, 無以感悟報塞, 吾罪大矣.’ 先是, 嘗榜其書之室曰‘艮齋’, 至是日處其間, 方將絛理舊學以益求其所未至, 從遊之士稍有自還來者, 而不幸病不起矣.
病革時, 顧念君親, 處理家事, 無一言之繆. 其母視之, 不巾不見也. 戒其子毋以僧巫俗禮浼我, 且以書召其友新安朱熹, 至則盡以終事爲寄而訣. 卒之日, 實九年閏月壬成, 其年五十有八矣.
娶同郡劉氏, 徵士勉之之兄女, 先十九年卒. 繼室虞氏. 子男二人, 孝伯, 國學進士;孝朋, 尙幼. 所爲文章若論議訓說合數十卷, 藏于家.
元履於學無不講, 而尤長於前代治亂廢興存亡之說, 以至本朝故事之實, 皆領略通貫, 識其大者. 平居論說, 聽者悚然. 居家謹喪祭, 重禮法, 恤親舊, 地貧不懈. 從父有落南者, 千里迎養, 死葬如禮, 而字其孤尤有恩. 歲饑, 爲粥以食餓者, 而力請移粟於官, 邑里賴焉. 又嘗請督鄕人之不葬其親者, 富予期, 貧予費, 而掩其無主後者以千數. 爲文以戒生子而不擧者, 所全活者亦甚衆. 與人交尤盡情, 嘉其善而救其失, 如恐不及. 後進以禮來者, 苟有一長, 必汲汲推挽成就之. 其處心制行類如此. 故嘗有病其爲人太過者, 元履笑曰:‘不猶愈於橫目自營者耶? ’至或訾其近名, 則蹙然曰:‘使夫人而皆避此嫌, 則爲善之路絶矣.’ 此其學道愛人之本意也. 嗚呼!使其老壽通達, 擧而施之, 則其所以及人者爲如何哉!
孝伯將以七月己未奉其柩葬所居之南不十里所謂長坂者, 元履平生時所樂處也. 予往禮其卜, 孝伯泣拜, 奉嚴君士敦之狀以銘文爲請. 予惟元履垂絶之言若有及此者, 顧雖不能, 不忍負也, 則應曰諾. 退視其狀不誣, 因掇其大者序而銘之. 銘曰:
謂天嗇之, 則曷其材且志也. 曰其德之, 則又不年以位也, 竟使抱其餘以沒於地也. 我銘以哀之, 又以掩其隧也.
진사덕묘지명(陳師德墓誌銘)
주(周)나라가 쇠퇴하고부터 관(官)은 방탕해지고 백성은 안정된 수입이 없으며 선비는 배움을 알지 못한다. 혹자는 쳐서 없애고 모아서 편찬하는 일을 일삼아서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찾는데, 그것은 본래 가족을 부양하고 춥고 굶주리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으로 빼앗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혹 더 능하게 되면 풍속이 그릇되어 서로 번갈아가며 자랑한다. 이에 공경(公卿)의 자제 중에 재능 있는 자들이 왕왕 그것을 하고 싶어 하니 이것은 절박한 것도 없으면서 한갓 자기 자랑이나 하고 기만하는 수치만 당하는 것이다. 아니면 문음(門蔭)을 쫒는 것을 싫어하고 세록(世祿)을 가볍게 여기며, 본래 학문은 과장(科場)에서 무용한 글을 짓은 것을 일삼는 것이라고 내버려두고 온 세상이 경쟁하는데도 편안하여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성현이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방법과 국가의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한 가르침은 점점 없어졌다. 아! 이러한 폐단이 오래되었구나. 탁월하게 높은 뜻과 고원한 식견을 가진 선비가 아니면 누가 이러한 폐단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사덕(師德)과 같은 분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질병으로 죽었으니 그 또한 애통할 뿐이다.
사덕은 보전(莆田) 사람으로 성은 진(陳)씨이고 이름은 정(定)이다. 승상 신안공(信安公)의 셋째 아들이다. 모친은 복국부인(福國夫人)이라 불리는 섭(攝)씨이다. 사덕은 나면서부터 빼어났고 어린아이 때부터 이미 성인(成人)의 도량이 있었다. 나이 열 두세 살에 이미 고인(古人)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알았고 과거를 위한 문장을 짓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날 공의 명으로 내 친구인 괄창(括蒼) 오경로(吳耕老)가 편지를 보내어 그 뜻을 말하고 학문을 청하였다. 그 말을 세 번 반복하여 읽어 보고 그것을 훌륭하다고 여겼으나 그 뜻은 선학(禪學)의 영역에서 깊이 생각하고 힘껏 찾고 있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답하여 말하기를 “성현의 학문은 비록 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그것을 배우는 자는 반드시 가까이 여기고 쉽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사덕은 비로소 나의 말로 인하여 돌이켜 구하게 되었는데, 이미 오래 생각한 괴로움에 지쳐 있었고, 질병이 들어 위태로웠다. 그 후에 여러 번 나를 만나보기를 바라고, 또 세상의 도 있는 군자를 두루 구하여 스승과 벗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병이 들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죽으려고 할 때에 그 친구인 방뢰(方耒)와 경도(耕道)에게 말하여 나에게 말하도록 하였는데, 서로 만나보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고 하였다. 다음 해에 그 중형(仲兄) 수(守) 사중(師中)이 건양(建陽)으로 나를 찾아와서 드디어 경도가 쓴 행장 한 통을 나에게 주고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것을 차마 사양할 수가 없었다.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덕의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신안공과 모부인을 모시는데 곡진히 사랑하고 공경하여, 음식을 잘 삶고 요리하여 몸소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주위를 두루 살펴 의리를 멀리하지 않고 좋은 안색을 잃은 적이 없으니, 형제가 더욱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상소를 올려 우승봉랑(右承奉郞)을 제수하였다. 같은 군의 임(林)씨를 아내로 맞았으니, 조청랑(朝請郞) 임일명(林一鳴)의 딸이다. 나이 25세 순희(淳熙) 갑오(甲午)년 7월 기해(己亥)일에 졸하였다. 그 병이 위급할 때 공의 부인이 가서 보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음은 당신도 아는 것입니다”고 하니 사덕이 손을 맞잡고 말하기를 “전전긍긍함이 깊은 연못에 임한 듯하고, 얇은 얼음을 밟은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그 형을 돌아보고는 문학(問學) 수신(修身)의 의미를 부탁하고는 저녁을 지나서 세상을 떴다. 공의 부인이 곡을 하며 슬퍼하고 그 형의 아들이 복손(福孫)으로 그 후사를 이었으며, 석천(石泉) 조상의 무덤 곁에 장사지냈다.
아! 사덕의 뜻이 이와 같은데도 그 행사를 알 수 있는 글은 이것뿐이니 이 또한 슬프지 않은가? 그러나 그가 이룬 것은, 세속의 학문이 이익에 눈이 멀어 자신을 욕되게 하고, 이미 얻었으면서도 그치지 않는 자는 이미 없어졌으니, 어찌 공과 부인의 생각과 형제와 친구들의 그리움을 위로하기에 부족하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명을 짓기를, 어느 선비가 배우지 않겠는가만 그 방법은 다르니, 조금의 차이로도 도척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네. 탁월한 사람은 옳은 학문을 생각하여 뜻에 새기고 몸을 힘들게 하며 선각자들을 따라가네. 하늘이 그를 늙게 두지 않는 것은 빠르게 진보하는 빼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네. 연못의 얼음이 풀려도 지기(志氣)는 남아 있네. 석천의 물가에 있는 조상의 무덤에 합사하니, 누가 그 돌아감을 온전히 알 수 있겠는가? 여기 깊이 새긴 뜻을 보아라.
自周衰, 官失而民無常産, 士不知學. 或者務爲剽掠纂組之工以希名射利, 蓋本出於俯仰寒餓之迫, 有不獲已者. 而其後或更以爲能焉, 俗弊風訛, 迭相夸尙, 於是公卿子弟之才者往往亦慕而爲之, 無所於迫而徒取衒鬻之羞. 顧反薄君恩․輕世祿, 捐本學以從事於場屋無用之文, 擧世競馳, 恬不覺悟. 而聖賢修己治人之方, 國家禮義廉恥之敎益泯泯矣. 嗚呼, 斯其爲弊也久矣!不有卓然高志遠識之士, 其孰能有以反之哉? 如吾師德者, 蓋庶幾焉. 而又不及就其志而疾病以死, 其亦可哀也已.
師德莆田人, 姓陳氏, 名定. 丞相信安公之第三子也. 母曰福國夫人聶氏. 師德生秀異, 自孩幼已有成人之度. 年十二三, 則已知古人爲己之學而不屑爲擧子之文矣. 一日, 以公命, 因予友括蒼吳君耕老以書來道其志而請業焉. 予三復其解而嘉之, 然亦意其必已淫思力索於空幻恍惚之場也, 則報之曰:‘聖賢之學雖不可以淺意量, 然學之者必自其近而易者始.’ 師德於是始欲因予言而反求之, 旣疲於宿昔思慮之苦而感疾殆矣. 其後屢欲求見, 且將徧求世之有道君子而師友之, 竟以病不果行. 且死, 猶語其友方耒耕道, 使言於予, 以不及相見爲深恨. 明年, 其仲兄守師中見予於建陽, 遂以耕道所狀行實一通屬予銘其竁. 予不忍辭也.
狀言, 師德性至孝, 事信安公及母夫人曲盡愛敬, 劑和烹飪必躬必親, 左右周旋不違義理而未嘗失顔色, 於兄弟尤友愛. 以公奏授右承奉郞. 娶同郡林氏, 朝請郞一鳴之女, 年二十有五, 以淳熙甲午七月己亥卒. 於其疾之革也, 公夫人往視之, 謂曰:‘死生有命, 汝所知也.’ 師德拱手對曰:‘戰戰競兢, 如臨深淵, 如履薄冰.’ 又顧其兄, 屬以問學修身之意, 越夕而逝. 公夫人哭之哀, 以其伯兄之子福孫後之, 而葬之石泉祖塋之側.
嗚呼!有如師德之志, 而其行事可得而書者止於如此, 是不亦可哀也哉!然其所立, 視世俗之學昧利辱身, 得已而不已者, 則旣絶矣, 夫豈不足以頗慰公․夫人之念與其兄弟朋友之思哉? 予是以銘曰: 士執不學? 其方則殊. 毫忽之差, 有蹠其徒. 卓哉若人, 惟義之學. 刻意劬躬, 蹈履前覺. 天不耆之, 以駿其奔. 淵冰免矣, 志氣則存. 石泉之瀕, 于祔于 宅. 執全其歸? 視此幽刻.
하숙경 묘갈명(何叔京墓碣銘)
소무(邵武)의 동쪽 백리 인근 칠대(七臺)의 산기슭, 소계(小溪)의 물가에 군자가 있으니, 하(河)군으로 이름은 호(鎬)이고 자는 숙경인데, 나는 그와 종유하며 서로 좋아할 수 있었다. 금년 겨울에 한천정사(寒泉精舍)로 나를 찾아와서 열흘을 머물다가 돌아가서 바로 병에 걸렸다. 병이 들고 나서 곧 손수 편지를 써서 작별을 알렸는데, 말이 사사로운 것은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부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하지 못하고 학문을 마칠 수 없는 것을 깊이 염려하였으며, 당세에 대한 근심 또한 애타게 잊지 못했다. 그 때 나는 군과 헤어진 지가 이제 막 달을 넘겼으므로 편지를 열어보고 놀라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급히 달려가서 살펴보려 하였는데, 내가 도착하니 군은 이미 세상을 떴다. 이윽고 들어가서 애통하게 곡하고 다음 날 군의 친우와 문인이 나에게 와서 모두 다시 모여서 곡하고 서로 조문하고서 장례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군을 이을 아들 염(琰) 또한 상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나와 절하며 엎드려 곡하고, 굳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참으로 군의 죽음이 나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제 그 아들이 또 슬퍼하면서 이렇게 부탁을 하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였다. 곧 거기에 온 여러 사람들과 함께 군의 일을 논의하니 모든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의 집안은 대계(臺溪)에서 여러 대를 살았고, 세상에 은덕(隱德)이 있다. 군의 부친 태(兌)에 이르러서 처음 벼슬하여 좌조봉랑(左朝奉郞)․통판진주(通判辰州) 되었다. 진(陳)씨․유(劉)씨․임(林)씨․등(鄧)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모두 안인(安人)에 봉해졌고, 군은 유씨의 소생이다. 나면서 효성스럽고 공손하여 기국과 식견이 있었고, 스승에게 나아가고 나서는, 날이 저물어 집에 돌아오고 나면 다시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에 글을 수천마디를 외고 문장을 짓는데 민첩하고 생각이 있었으며, 고원한 것을 추구하여 식자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진주(辰州)는 일찍이 정(程)씨의 중용의 학을 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동평(東平) 마공신(馬公伸)에게서 배워 실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그 충절에 관한 글을 태사(太史)에게 보냈는데 진회(秦檜)를 거슬러 하급 관리로 남방으로 내보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원망하지 않고 그 사이에 다시 들은 것을 다 갖추어서 군에게 말해주었다. 군은 그 설을 듣고 나서는 더욱 더 경사(經史)에 통달하도록 힘쓰고, 여러 곳에서 친구를 사귀고 널리 상고하고 헤아려서 서로 참고하여, 오래도록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야 스스로 그것을 믿었다. 이에 한결같이 자신을 지키고 종일 문밖을 나가지 않으며,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마치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는 듯하였다. 그가 고금을 논설할 때는 득실을 명확하게 지적하여 진술하고 또 명백하게 강개하니, 실행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덕의(德義)를 숭상하고 염절(廉節)을 닦아서 공리(功利)를 결코 언급한 적이 없었다. 집안사람을 거두고 고아들을 구휼하며, 정사를 보고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있어서는 또 간절하게 정성을 다하고 근심하여 자신이 즐기는 것 같이 하였다. 언행이 서로 따르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남주(南州)에서 정학(程學)을 하는 사람들은 비로소 마(馬)씨의 전함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진주에 등용되었는데 관직에 임용된 것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천주(泉州) 안계(安溪) 주부(主簿)를 제수하였다. 채 부임하지 않았을 때 등구조(鄧舅祚)가 강서(江西) 지방 장관으로 있었는데 기밀문자를 맡아서 작성하는 것을 막았다. 다시 정주(汀州) 상항(上杭)의 부관으로 전보되었다. 여러 번 현(縣)의 일을 맡아 행하였는데 오직 너그럽고 소탈함으로 다스렸다. 세금 외의 이름 없는 부(賦)는 모두 없애니 사람들이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부(部)의 사(使)인 정백웅(鄭伯熊)이 선비를 좋아한다고 이름이 났는데 부(部)를 순시하다가 군을 얻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군(郡)의 일이 공무를 처리하지 않아 죄수가 오랜 세월동안 풀려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군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 수령을 돕도록 하였다. 군은 막사에 들어가 문서를 모두 취하여 살펴보고는 그 까닭을 갖추어서 판별한 것을 문서를 수령에게 보내 아뢰고 열흘 만에 모두 처리하였다. 또 전세(田稅)가 고르지 않아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밤새도록 근심하여 전세를 고르게 할 방안에 대한 설을 잘 갖추었다. 그는 부족한 것을 메우고 보조하는 사람이었으나 역시 자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좋아하지 않자 군은 곧 물러나 떠났다.
군은 등안인(鄧安人)을 정성스럽게 모시고 있었는데, 그는 상항(上杭)에 부임하였는데 안인은 장독(瘴毒)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군은 감히 청하지 못하고 혼자서 갔다. 관에 이르러서는 한해에 공사(公事)로 한두 번 귀성하였는데, 갈 때마다 녹봉을 받지 않았다. 관직의 임기가 만료되어 녹봉을 받지 않은 달을 세어보니 14달이었는데, 모두 유사(有司)에게 그 녹봉에 대한 문서를 돌려주었다. 당시의 학사(學士)와 동료들이 군의 학행을 높이 여겼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사람들 중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 적었고, 군은 굳이 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스스로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단지 년 수와 근무 경력에 의하여 담주(潭州) 선화(善化)의 수령으로 전보되었다. 막 가려고 하다가 졸하였으니 나이 48세였고, 순희(淳熙) 을미(乙未)년 11월 정축(丁丑)일 밤이었다.
군은 사람됨이 탐욕이 없고 온화하며 담박하고 활달하며 청렴하고 혼화하였고, 경(經)을 말하고 일에 대하여 논할 때는 간결하고 막힘이 없었다. 저술한 책은 역과 논어에 대한 설과 사론(史論)과 시문 수십 권이 있는데, 그 말들은 대부분 전할 만한 것들이다. 만년에 서당을 짓고 남판(南坂) 위에 살며 ‘고원(高遠)’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자신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질병이 들자 자제를 불려 교훈을 남겼는데 한결같이 의리(義理)에 대한 것이었고, 끝내 집안사람의 생업에 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치상(治喪)은 예(禮)로 하고 불교의 것으로 우리의 법을 어지럽히지 말라고 하였다. 같은 고을의 이(李)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그 숙부 욱(郁)은 구산(龜山) 양(楊)공에게서 배워 서산(西山)선생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군의 명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다. 다음해 모월 모일에 대계(臺溪) 동양(東楊)의 들에 장사지낼 것이다. 아들은 셋이 있는데, 염(琰)이 장남이고, 차남은 섭이며 다음은 우(瑀)다. 딸은 셋이 있는데, 장녀는 오대동(吳大同)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마동(溤棟)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시집가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말한 군의 행실은 이와 같은데 이 모두가 내가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이다. 염(琰) 등이 군을 동탕(東碭)의 들에 장사지냈는데, 나는 이미 가장 좋은 것을 써서 그 광에 넣었다. 그러나 그간에 일찍이 내가 보아온 군의 학행은 교육을 맡을 만하고, 논의는 헌납(獻納)에 짝할만하였으며, 그 심성과 자질은 또 덕택을 베풀고 홀아비와 과부에게 은혜를 베풀 만하였으나, 이제 겨우 일개 현령이 되었을 뿐이고, 또 시험에 급제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것은 매우 애통한 일이다. 이에 다시 그 상세한 내역을 차례대로 써서 돌에 새겨 묘에 비석으로 세우고 또 이어서 명(銘)을 쓴다. 명(銘)에 이르기를,
청렴하고 바르면서 온화하고, 온화하면서 방정하며, 다만 배우기에 게으르지 않았으니 그는 광채와 같았네. 누가 가문을 열었으며, 누가 나라를 안정시켰는가? 누가 그 아름다운 자질을 풍성하게 해놓고 그 긴 수명을 막았는가? 상제는 내려주지 않은 것이 없으나 기(氣)가 혹은 서로 해치기도 하네. 상제가 내려준 것을 받드니 군이 어찌 부끄럽겠는가? 덕이 아닌 것을 높이지 않았고, 말이 아닌 것을 오래 하지 않았네. 명(銘)으로 그것을 자세히 살펴서 묘문의 돌에 새기네.
邵武之東百里而近, 七臺之麓, 小溪之濱, 有君子者, 曰何君, 名鎬, 字叔京, 予獲從之遊相好也. 今年冬, 過予於寒泉精舍. 留止浹旬, 歸而屬疾. 旣病, 則手書來告訣, 語不及私, 獨以不獲終養卒學爲深念〔二〕, 而於當世之慮亦眷眷不忘也. 時予別君甫踰月, 發書驚歎失聲, 亟走省焉. 至則君已逝矣. 旣入哭盡哀, 明日, 君之親友門人以予至, 皆復來會哭相弔, 議語葬故. 君嗣子琰亦衰絰杖出拜伏哭, 固以銘墓爲請. 予惟君實以其死累我, 今其子又哀以請如是, 其何說之辭? 則與諸來曾者共訂君事, 皆曰:
君家臺溪且數世〔三〕, 世有隱德. 至君皇考諱見始仕, 爲左朝奉郞․通判辰州事. 娶陳氏․劉氏․林氏․鄧氏, 皆封安人, 而君劉出也〔四〕. 生孝謹有器識, 旣出就傅, 暮歸則不復去親側. 誦書日數千言, 爲文敏而有思, 趣尙高遠, 識者奇之. 辰州嘗受程氏中庸之學於故殿中侍御史東平馬公伸, 服行不怠. 又以其忠節事狀移書太史, 忤秦檜, 下吏南方. 危死不恨, 間復悉以其所聞者語君. 君旣受其說, 則益務貫穿經史, 取友四方, 博考旁資以相參伍, 蓋久而後有以自信之. 於是一意操存, 杜門終日, 澹然若無所營者. 至其論說古今, 指陳得失, 則又明白慷慨, 可擧而行. 平居崇德義․廣廉節, 絶口未嘗及功利. 至於收族恤孤〔五〕, 興事濟衆, 則又懇惻憂勞, 如己嗜欲〔六〕. 言行相循, 沒身不懈. 由此南州之爲程學者, 始又知有馬氏之傳焉.
始用辰州致仕恩補官, 授泉州安溪主簿. 未赴, 鄧舅柞帥江西, 辟掌書寫機宜文字. 再調汀州上杭丞. 數行縣事〔七〕, 專用寬簡爲治. 白罷稅外無名之賦〔八〕, 人便安之. 部使者鄭君伯熊名好士, 行部得君, 喜甚. 顧郡事爲不理, 囚繫或累歲月不得釋, 檄君佐其守. 君入幕, 悉取文書閱視, 具得其所以然者, 持白守決遣之, 旬日皆盡〔九〕. 又以田稅不均, 貧弱受病, 夙夜疚思〔十〕, 爲所以均之之銳甚備. 他所以彌縫補助者, 亦盡其力. 而守顧不悅, 君卽謝去.
君事鄧安人素謹, 其赴上杭也, 安人以瘴毒爲憚. 君不敢請, 遂單行. 至官, 歲以公事一再歸省, 每行輒不受俸. 秩滿, 計其月十有四, 悉歸其券於有司. 一時學土僚友高君學行, 多師尊之. 而當路鮮識之者, 君固不求, 亦不自悔, 獨以年格循資謫潭州善化令. 將行而卒, 年四十有八, 淳熙乙末十有一月丁丑晦也.
君爲人淸夷恬曠, 廉直惠和, 談經論事簡易倏暢. 所著書有易․論語說․史論․詩文數十卷, 其言多可傳者〔十一〕. 晩築書堂所居南坂上, 名以, ‘高遠’, 用見己志. 疾病, 召子弟敎戒, 一以義理, 終不及家人生産事. 獨曰治喪以禮, 勿用浮屠鬼敎亂吾法而已. 娶同郡李氏, 其叔父郁學於龜山楊公, 所讀西山先生者也, 奉君命無所違. 將以明年某月日葬于臺溪東楊之原. 子男三人, 琰爲長, 次(玉+燮)․瑀. 女三人, 長適吳大同, 次適馮棟, 次未行也〔十二〕.
諸君所論君行事如此, 皆予所聞知. 琰等葬君東碭之原, 予旣書其最納竁中, 然間嘗竊目君學行可以司敎育, 論議可以陪獻納, 而其心誠才實又可以宣德澤而惠鰥寡, 今乃僅得一縣令, 而又不及試以死, 此爲重可哀者. 乃復敍次其詳, 刻石表墓, 且系以銘. 銘曰:
淸宜而溫, 夷易而方〔十三〕. 惟學不懈, 厥猷以光. 孰敗于家, 而尼于邦? 孰豐其粹, 而嗇其長!帝罔弗衷, 氣或交珍. 旣欽厥承, 君則奚愧!莫尊匪德, 莫久匪言. 銘以相之, 刻石墓門〔十四〕.
〔一〕碣: 淳熙本作‘誌’.
〔二〕獨․獲:右引作‘惟’․‘及’.
〔三〕此句右引作‘君家邵武七臺之麓小溪之濱也’.
〔四〕劉:右引作‘林’.
〔五〕至: 右引作‘唯’.
〔六〕‘則又’二句: 右引作‘爲無所愛其力而’.
〔七〕數: 右引作‘攝’.
〔八〕白: 右引作‘且’.
〔九〕日:右引作‘月’.
〔十〕疚: 右引作‘究’.
〔十一〕言多: 右引作‘間皆’.
〔十二〕‘奉君命無所違’以下底本差略, 今從右引增補.
〔十三〕易而: 右引作‘直以’.
〔十四〕‘氣或交沴’以下, 右引作‘氣則靡定. 惟欽厥承, 斯得其正. 君乎知此, 旣順且寧. 何以昭之?. 幽竁其銘.’
부인여씨 묘지명(夫人呂氏墓誌銘)
부인의 성은 여(呂)씨이고, 건녕부(建寧府) 건양현(建陽縣) 장평리(長平里) 사람이다. 그 선대는 당(唐)에서 하동(河東)의 유명한 성씨였는데 건부(乾符) 중에 시어사(侍御史) 행립(行立)이 재앙을 피해 옮겨 처음 건양에 집안을 이루게 되었다. 송조(宋朝)에 들어 백여 년이 지나고 비로소 영달한 사람이 나왔고, 부인의 부친 희열(希說)도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강경하고 곧아서 구차하게 영합하지 못하여 만년에 검포(劍浦)의 수령이 되어 졸하였다.
부인은 천생이 질박하고 성실하며 쓸데없이 희롱하고 웃지 않았다. 열다섯이 되지 않아 그 모친을 잃고 검포에서 가사를 돌보고 동생들을 돌보도록 하였더니 어른과 같이 하였다. 얼마 후 소무(邵武) 요위(饒偉)에게 시집갔는데 시부모를 섬겨 그 환심을 두텁게 받았다. 한해 쯤 지나 아들 간(幹)을 낳았는데, 아들이 한 살 쯤 되어서 과부가 되었다. 부인은 굳은 의지로 절조를 지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포와 시아버지인 장주부군(漳州府君)도 모두 졸하였고, 시어머니는 이전에 죽었다. 요씨는 본래 청빈하였고, 손아래 누이들은 모두 어려서, 부인이 과부로서 어린 아들을 안고 문호를 지키고 손을 맞고 제사를 받들었는데, 위아래 사람이 서로 화목하고 안팎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비용을 출납할 때는 한 푼도 사사로이 하지 않고 장부에 정리하였으며, 비록 얼마 안되는 양식이라도 새나가지 않았다. 젊어서 미망인이 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하여 주저하면서 며칠 동안이나 즐거워하지 않았다. 마부나 종에게 지시하거나 이웃의 부녀자와 마을의 노인을 대할 때도 모두 인정이 있었다.
아들 간(幹)이 어렸을 때 그를 몹시 사랑하여 목욕하고 양치질하는 것 등을 하나라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조금 자라나서 공부를 하러 보냈는데, 그 학업을 헤아려보고 출입하고 교제하는 때를 삼갔으며, 멋대로 안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간 또한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독실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을 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았다. 순희 2년에 진사과에 급제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인이 한창때 홀로 되어 절개를 지켰는데 이 아들이 있어 그 보답을 받는다고 하였다. 처음, 부인의 여동생이 유(劉)씨의 부인이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 이 때 그 아들 숭지(崇之)와 간이 모두 뽑혔다. 부인은 그 어미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을 매번 언급할 때마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또 이것으로 부인이 영리(營利)에는 박하지만 효자(孝慈)에는 후함을 알았다.
간은 길주(吉州) 길수현(吉水縣)의 위(尉)로 가게 되었는데, 가려고 할 때 부인이 작은 병을 줄곧 앓다가 하루 저녁에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듣고 애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유(丁酉)년 가을 7월 14일 이었고, 이때의 나이 56세였다. 다음해 간이 부인을 그 고향의 사순리(思順里)에 장사지내고, 그 친구인 강주(江州) 녹사참군(錄事參軍) 유구사(游九思)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절을 하고 일어나서는 눈물 콧물을 흘리고 목메어 울며 말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뜻을 불쌍히 여기고, 또 부인의 행실이 유연(游掾)의 말과 같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 큰일을 취하여 차례를 짓고 명을 지었다.
황황한 천제께서 삼강(三綱)을 내려주시고, 아내를 지아비에 메어 음(陰)이 양(陽)을 합하게 하시었네. 성쇠(盛衰)와 수요를 애초에 헤아리지 않았으나, 자신이 메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지켜야 할 법도를 바꾸지 않았네. 아! 부인은 인자롭고 엄숙하시어 천제(天帝)가 내려주신 가르침을 독실하게 잊지 않으셨네. 오랜 병과 근심 고난이 있어도, 위태롭게 쓰러지려고 하여도 끝내 그 아들을 구하여 후에 경사가 있었네. 옥령(玉靈)과 보귀(寶龜)가 이 윤택한 곳에 있으니 말씀을 아뢰고 행실을 읽어 유황(幽荒)께 고합니다. 산이 순하고 못이 가득 차니 허물어져 상함이 없게 하소서!
夫人姓呂氏, 建寧府建陽縣長平里人. 其先世於唐爲河東著姓, 乾符中, 有侍御史行立者避地, 始家建陽. 入宋餘百年, 乃有顯人, 而夫人之父希說亦進士中第, 剛介不苟合, 晩乃爲劍浦令以卒.
夫人生愿慤. 不妄戱笑. 未笄, 失其母, 劍浦俾治家事․撫弟妹如成人. 尋以歸邵武饒君偉, 事舅姑甚得其懽心. 餘年生子幹, 甫睟而寡.. 夫人誓志秉節, 毅然不可奪. 無何, 劍浦及皇舅漳州府君亦皆卒, 而姑氏固前沒. 饒氏固淸貧, 諸赦妹皆幼稚, 夫人以孀婦抱弱子, 持守門戶, 奉承賓祭, 和輯上下, 內外斬斬無間言. 其出內用度不以一錢自私, 文簿整整, 雖龠合分寸無所漏. 少或遺亡․則爲之躊躇不懌者累日. 指馭僕妾․接鄰婦里嫗咸有恩意.
幹幼時, 愛之異甚, 捧視漱沐, 一不以委他人. 及少長, 遣就學, 則程其術業, 議其出入交遊之際, 未嘗輒借以顔色. 幹亦孝謹敦實, 能自力學問, 見稱朋友間. 中淳熙二年進士第, 人謂夫人盛年苦節, 以有斯子, 今且享其報矣. 始, 夫人女弟爲劉氏婦, 早卒. 至是, 其子崇之與幹偕選. 夫人爲其母之不見, 每及之, 未嘗不悲嘆出涕. 人又以是知夫人之薄於榮利而厚於孝慈也.
幹調吉州吉水縣尉, 將行, 夫人屬微疾, 一夕遂不起, 聞者莫不哀之. 歲丁酉秋七月十四日也, 時年五十有六. 明年, 幹卜葬夫人於其鄕之思順里, 而奉其友江州錄事參軍游九思之狀來請銘. 拜起, 涕泗鳴咽不能言. 予哀其志, 亦雅聞夫人行實如游掾言, 因刪取其大者敍而銘之曰:
皇皇后帝垂三綱, 制婦繫夫陰統陽. 盛衰修夭初莫量, 有繫弗改玆厥常. 吁嗟夫人仁且莊, 祝若帝訓篤不忘. 疚煢艱棘廩欲僵, 卒濟厥子後以昌. 玉靈食墨此澗岡, 納詞誄行告幽荒〔一〕, 山夷淵實無壤傷!
〔一〕誄: 原作‘誅’, 據宋浙本․明天順本․萬曆本改.
특주명 이공묘지명(特奏名李公墓誌銘)
소무군(邵武軍) 광택현(光澤縣) 동리에 오주(烏洲)라는 땅이 있는데 이(李)씨가 거기에 세거하였고, 이씨는 군의 유명한 성이다. 그 선조 중에 대리평사(大理評事)에 증직된 탁(鐸)이라는 휘(諱)를 가진 사람이 처음에 문행(文行)으로 향당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태상박사(太常博士) 고(誥)를 낳고 처음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죽어서는 조청대부(朝請大夫)를 증직하였다. 진충숙공(陳忠肅公)이 그를 어질게 여겨 그가 진솔하고 화락하며 고인의 풍모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 가운데 아들 심(深)이 소성(紹聖) 연간에 당시의 재상의 옳지 않음을 논척하여 임백우(任伯雨) 등과 함께 원우(元祐)의 적(籍)에 들었다. 막내는 처사(處士)인 준(濬)인데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우문전(右文殿) 수찬(修撰) 이기(李虁)가 명(銘)을 지었다. 대개 그 선조대로부터 함께 교류하고 혼인을 맺어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은 당시의 명사들이었으므로 그 자제들의 견문은 확 트이고 취향이 고원하여 세속과는 같지 않았다. 특주(特奏) 부군(府君) 득지(得之)와 같은 사람은 처사 중의 으뜸이 되는 사람이었다.
젊어서는 주례(周禮)의 학문을 하였고, 아울러 좌씨춘추(左氏春秋)에 통하였으며, 글을 쓰는 것이 질박하고도 고상하여 당시에 좋게 여기는 풍조를 쫒아가지 않았다. 약관에 태학(太學)에 유학하여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삼사법이 행해지자 거기에 충원되었는데, 사법이 결국은 시행되지 못하고, 마침내 예부(禮部)에 여러 차례 시험 보아 주명 천부의 은혜를 입었다. 조정에 들어가서 임금의 자문을 받들게 되었는데, 그 하루 전에 임안(臨安)의 객사에서 졸하였으니, 소흥(紹興) 5년 8월 18일 이었고, 나이는 겨우 52세였다. 빈소를 모시고 돌아와서 동강(東岡)에 유택을 만들었다. 32년에 그 아들 여(呂)가 다시 오군산(烏君山) 아래 사자령(獅子嶺)의 들에 묏자리를 잡아 널을 받들어 옮겼다. 순희(淳熙) 6년 여(呂)가 처음 여부(廬阜)의 남쪽으로 나를 보러 왔는데 마치 예전부터 서로 알았던 것 같았다. 하루는 울면서 말하기를 “저는 불효하여 부친께서 돌아가신지 27년이 지난 후에 겨우 예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사지내고 또 19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지를 새기지도 못하고, 장차 심원하고 무궁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다만 선생님께서 명을 지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고, 또 그 친구들과 숭양대부(崇陽大夫) 유은(游訔)의 행장을 보내 청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고 그 일을 위와 같이 편찬하였다.
행장과 말을 살펴보면 부군(府君)의 사람됨은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공손하였으며, 그 아우를 사랑함이 매우 독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쇠하여지지 않았다. 족당을 만나면 은의(恩意)가 있었고, 조금의 분쟁이라도 있으면 그 사이에 들어 힘써 바로잡아서 관부에까지 들어가지 않게 하였다. 불행히 상을 당하면 그 집안일을 잘 경영하였고 그 혼인과 관련된 책임을 맡았다. 일찍이 태학생으로 죽은 자가 있었는데, 가운데 동생을 보내어 그 널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다. 마을 사람 중에 나쁜 평판이 심한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그와 비교한 적이 없었다. 급박함이 자신의 주위에까지 미치면 의식(衣食)을 그치고 돌아보지 않았다. 여러 아우들이 선인(善人)의 도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는데, 부군은 말하기를 “일에 임하여 편리한 마음에 몰래 의탁하지 않으면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고, 또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비록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그것을 해야 한다. 만약 여력이 있고 난 다음에 그것을 하고자 한다면 끝내 할 수 있을 때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자신을 실천하고 사물에까지 그 마음을 미치는 본 뜻이었다. 평소에는 방정하고 엄숙하여 함부로 놀거나 웃지 않았으나 일을 만나 갑자가 대응해야 하면 머뭇거리는 일이 없었다. 종제(從弟)인 서산(西山)선생이 일찍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형은 묻고 답하는데 마음에 두지 않았더라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반복해서 여러 번 생각해보면 결국은 쉽게 넘길 수 없다. 이것은 여러 동생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성품은 매우 돈후하고 질실하여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은밀한 것이나 드러난 것이나 또는 다른 것들이나 나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듣기를 좋아하고 그 나쁜 점을 감싸기에 힘썼으며 함께 교류하는 자들은 모두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었으니 그를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현(縣)에서 일찍이 민병(民兵)을 맡긴 적이 있었는데 부군은 작전의 진법과 공격하는 법을 만들어서 때때로 그것을 연습하는 것을 검열하였는데, 매우 볼만하였다. 수령이 알려서 부군이 훈상(勳賞)을 받기를 바랐으나 부군은 웃으며 사례하고 물러가서는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때 나라에 걱정거리가 많아 거인(擧人) 중에 예부(禮部)에 시험을 볼 수 없는 자가 있었는데, 종종 인정으로 바로 관원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부군이 어찌하여 관원을 임명해준 은혜를 스스로 말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부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늙어가자 구림(丘林)에 편안히 않아서 서사(書史)를 외며 편안히 자족하였으며, 때를 못 만난 탄식을 한 적이 없었다. 아!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도 부군을 알지 못하였으나 유(游)군은 나를 속이지 아니하였으니, 부군과 같은 사람은 덕을 좋아하여 변함이 없는 선비라고 할 수가 있다. 재주를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고 숨졌으니 그 또한 슬픈 일이로다.
부인 상관(上官)씨는 조의대부(朝議大夫) 합(合)의 딸이다. 계실(繼室) 황(黃)씨는 곡강(曲江) 수령 전(銓)의 딸이다. 아들이 셋 있는데, 여(呂)가 장남이다. 딸이 넷인데, 유(游)군과 장사랑(將仕郞) 고지민(高志旻), 종정랑(從政郞) 하호(何鎬), 보의랑(保義郞) 상관분(上官賁)이 그 사위들이다. 손자는 지금 26명이 있다. 장남 여(呂)가 학문에 힘쓴다는 것은 이미 소문이 났고, 또 가르친 제자들이 모두 모범이 될 만하니 하늘이 부군에게 보답하는 것이 장차 여기에 있는가 보다. 이에 그를 위하여 명(銘)을 썼으니 무덤위에 새겨 놓기를 바란다.
자기를 위하여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고 의(義)를 취하기만 생각했다. 의(義)는 굳세게 행하고, 인(仁)으로 귀의함을 생각했다. 어느 것이 그 근원이 길면서 그 물이 풍부하지 않겠는가? 이 무덤이여 일어섬은 있어도 추락함은 없을진저!
邵武軍光澤縣東里所有地曰烏洲, 李氏世居之, 爲郡著姓. 其先有贈大理評事者諱鐸, 始以文行知名鄕黨. 生太常博士誥. 始登進士第, 卒贈朝請大夫. 陳忠肅公賢之, 稱其眞率樂易, 有古人之風. 其仲子深, 紹聖間以論斥時相之姦, 與任公伯雨等俱入元祐籍. 季曰處士濬, 隱居不仕. 而其葬也, 右文殿修撰李公夔實銘之. 蓋自其先世, 所與交游姻好盡一時知名士, 故其子弟見聞開廓, 趣尙高遠, 不與世俗同. 若特奏府君諱某, 字得之者, 則處士之長子也.
少治周禮學, 兼通左氏春秋, 爲文簡古, 不逐時好. 弱冠遊太學, 薦而不第. 舍法行, 當充貢, 又不果行. 竟以累試禮部恩奏名天府〔一〕. 將入奉廷對, 前一日卒於臨安之客舍, 實紹興五年八月十八日, 年才五十有二. 歸殖, 宅之東岡. 三十二年, 其子呂乃更卜兆于烏君山下獅子嶺之原, 奉其柩而遷焉. 淳熙六年, 呂始見予廬阜之陽, 如舊相織. 一日, 泣而言曰:‘呂不孝, 先人之沒二十七年, 而後克以禮葬. 葬又十有九年矣, 而未克識, 將無以爲幽遠無窮之計. 惟吾子幸而予之銘.’ 因出其親友․崇陽大夫游君訔之狀以請. 予群謝不獲, 乃次其事如右.
按狀又言, 府君爲人事親孝謹, 友愛其弟甚篤, 之死不少衰. 遇族黨有恩意, 少有忿爭, 則爲居間極力平處, 不令入官府. 不幸死喪, 則爲經理其家事而任其婚嫁之責. 嘗有死上痒者, 遣仲弟護其柩以歸. 里人有以惡聲至者, 未嘗與之較. 至周其急, 則輟衣食不顧也. 諸弟嘗問善人之道, 府君語之曰:‘臨事而無陰據便利之心, 斯可矣.’ 又嘗語人: ‘事有當爲, 力雖未及, 亦勉爲之. 若必有餘而後爲, 則終無時矣.’ 此其行身及物之本意也. 平居方嚴, 不妄戱笑, 而遇事輒應, 無所凝滯. 從弟西山先生嘗面歎曰:‘兄於答問若不經意, 而受其言者反覆十思, 終無以易. 此非諸弟所能及也.’ 性尤敦厚質實, 發言處事不以幽顯物我爲間. 樂聞人善而務掩其惡, 所與交皆巨人長者, 無不愛而敬之. 縣嘗以民兵爲屬, 府君爲制戰陳擊刺之法而以時閱習之, 甚可觀也. 令欲以聞, 冀爲府君得動賞, 府君笑謝去, 不復有所預. 時海內多虞, 擧人有不能試褞部者, 往往以恩直補官. 人有謂府君盍自言者, 府君不答. 老之將至, 婆娑丘林, 吟諷書史, 逌然自適, 未嘗有不遇之歎也. 嗚呼!予生晩, 不及識府君, 而游君不予欺也, 則府君者可謂好德有常之士矣. 乃不得少見於用以沒其身, 其亦可悲也夫!
夫人上官氏, 朝議大夫合之女. 繼室黃氏, 曲江令銓之女. 子男三人, 呂爲長, 次某, 次某. 女四人, 游君與將仕郞高志旻․從政郞何鎬․保義郞上官賁其婿也. 孫男女於今二十有六人. 而呂之彊學旣有聞, 又敎諸子皆有法, 夫之所以報府君者, 其將在於此乎. 乃爲之銘, 使刻宰上以竢. 其詞曰:
利不自予, 惟義之取. 義則彊爲, 惟仁之歸. 孰長其源, 不豐其委? 斯斤斯藏, 有起無墜!
〔一〕恩: 原作‘思’, 據宋浙本․明天順本․萬曆本改.
금자광록대부 황공 묘지명[金紫光祿大夫黃公墓誌銘]
순희(淳熙) 6년 봄 정월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황(黃)공이 소무(邵武) 고향의 사제(私第)에서 앓아누웠다. 나는 그 안부를 물으러 가서 뵙기를 청하니 공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둘째 아들 한(瀚)을 시켜 나를 들어오도록 하셨다. 들어가니 또 부축을 받고 일어서서 황송하게도 읍양하여 예를 갖추고 같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공손히 하심이 평상시와 같이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 먹고는 또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 나를 위하여 울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무덤에 오랫동안 지를 새기지 못했는데, 그것은 또 감히 가볍게 부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대에게 누를 끼치니 그대는 나를 위해 그 일을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머리를 조아리고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공은 명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공을 오래 힘들게 할까 두려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명을 받고 나왔다. 돌아와서 사양하는 글을 썼으나 보내지 않았는데, 공께서 돌아가셨다. 어려 아들들이 사람들 보내 부고를 하고 또 남기신 명을 전하면서 같은 군의 이여(李呂)가 쓴 행장을 보내왔다. 나는 이윽고 곡을 하여 공을 애도하기를 마치고, 또 이제 사양할 데가 없음을 생각하고는 이에 그 행장을 살펴보고 들은 것을 덧붙여서 그 사실을 열거한다.
우선의랑(右宣義郞)으로 벼슬을 마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추증한 황공(黃公) 숭(崇)은 자는 언고(彦高)인데, 그 선조는 광주(光州) 고시인(固始人)이다. 11세 할아버지 응(膺)은 민(閩)에 피난하여 지금 소무군 소무현 사람이 되었다. 증조 의(扆)는 은덕(隱德)이 있어 마을에서 존경을 받았다. 늙어서 아들이 벼슬을 하여 조정에 올라 태상승(太常丞)을 제수받고 죽었다. 고 지제고(知制誥) 여하경(呂夏卿)이 그 묘지명을 썼다. 후에 손자 이(履)가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어 여러 번 사도(司徒)에 증직되었다. 조부 여신(汝臣)은 벼슬하지 않았고, 부친 예(豫)는 우승주(右丞奏)에 등용되고 우승무랑(右承務郞)이 되었는데 모두 마을에서 효성스럽고 공손함으로 소문이 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여 하루에 천여마디를 외웠으니, 사람들이 이는 그 가문을 크게 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자라고 나서는 승무공이 집안일을 맡겼는데 이에 다시 벼슬에 나아갈 뜻을 갖지 않았다. 고아가 되고 가난해지고 나서는 힘을 다하여 상례를 치렀는데, 그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예를 행하는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모친 손(孫)부인의 연세가 많아지고서는 성격이 엄하고 병이 많았다. 공은 봉양하는데 힘을 다하여 환심을 얻었다. 이웃에 이영(李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기개와 절의를 높여 공을 매우 경모하고 있었다. 공이 부모를 모시는데 뜻은 많으면서도 힘이 부족한 것을 보고는 공을 도와 집안일을 돌보기를 청하였다. 공 역시 그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재물을 다 그에게 맡기고는 그 출입에 대해서 하나도 간섭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 것이 15년이었다. 이영은 공의 덕을 받들었는데, 죽으려고 할 때 감개하여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아버지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형이 타향을 유랑하다가 역질로 죽었는데 감히 그를 가서 보는 자가 없었다. 공이 홀로 의연하게 가서는 천리 길을 관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전대를 보니 남은 돈이 백여만 냥이 넘었다. 그것을 모두 가지고 그 형수에게 주고 한 푼도 스스로 챙기지 않았다. 평소에는 공손하고 검소하고 스스로를 단속하였으며 주고받을 것을 잊지 않았다. 아들을 가르치는 스승을 고를 때는 비록 먹고 입는 것을 그치더라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아들이 모두 진사에 오르고 공이 고과에 올랐을 때는 덕업과 풍모와 기개가 당세에 알려졌다. 또 나란히 조열(朝列)에 오르고 나서는 교경(郊慶)을 만났는데 공이 우선의랑(右宣義郞)이 되기를 아뢰어 그 일을 맡겼다. 공은 편안한 수레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봉양을 받았는데 두 아들은 모두 효성과 공손함이 독실하였다. 많은 자손이 앞에 가득하여 아침 저녁으로 매우 잘 봉양하고 즐겁게 해주었으니 마을에서 그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소흥(紹興) 계유(癸酉)년 정월 19일에 병으로 남검주(南劍州) 사현(沙縣)의 관사에서 졸하니 향년 81세였다. 그해 10월에 구돈(九墩) 선영에 이어서 장사를 지냈다. 건안(建安) 유(游)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먼저 죽었다. 역시 두 아들로 인하여 유인(孺人)으로 추봉(追封)되었다. 딸이 하나가 있는데, 공사(貢士) 유기(劉紀)에게 시집갔다.
공이 졸할 때 단명공은 비로소 모관(某官) 통판건주사(通判建州事)였고, 막내아들 장(章) 역시 지사현사(知沙縣事)였다. 그 후 단명공이 태상황제(太上皇帝)에게 은혜를 입어 관직(館職)․낭조(郎曹)․사관(史官)․섭찬서명(攝贊書命), 겸(兼)사업(司業)․좨주(祭酒)․시강(侍講), 역공(歷工)․이(吏)․병(兵)․예부시랑(禮部侍郞)에 발탁되었고, 또 부교수(府敎授)․급사중(給事中)․병부상서(兵部尙書)로 금상황제(今上皇帝)를 모셨는데, 궁궐에서 시독(侍讀)하며 단정하고 엄숙히 입조하니 소리와 위엄이 매우 왕성하였다. 현모(顯謨)․용도각(龍圖閣) 학사로 집안에 물러나 여생을 보내고 있었는데, 천자께서는 또 구언(求言)을 하시면서 곧 단명전 학사로 배수하였다. 대우해주시는 예가 특별히 두터웠으며, 나라의 학식있는 선비들 역시 마음으로 귀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현에서는 힘든 일을 여러 번 주관하여 능력이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권호(拳豪)에 아첨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후에 어사중승(御史中丞) 탕붕거(湯鵬擧)가 천거하여 조정에 들어가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또 자신의 생각을 지키며 아첨하지 않아서 물러났다. 제거복건로상평차사(提擧福建路常平茶事), 지태주(知台州) 등 하는 일이 명성이 이어져서 모두 모범이 될 만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번 증직되어 공은 금자광록대부에 이르렀고, 부인 역시 본군(本郡)에 봉해졌다. 또 자손들이 손자와 증손자 중에 벼슬한 사람이 십여 인이었는데, 그 후에 고을 사람들은 공이 그 자손들에게 남긴 것이 무궁함을 알게 되었다.
이(李)군은 또 말했다. “여(呂)는 공의 손녀 사위였는데 일찍이 당상에서 공을 배알하였다. 그 때 공의 사람됨을 엿보았는데, 바라보면 엄연하고 마주 대하면 온화하며 엄숙히 앉아서 종일이 지나도 게으른 모습이 없었다. 비록 노비를 만나더라도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결 같았다.” 나는 이것으로 또 단명공의 덕이 높음을 알았고, 예에 몸을 다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았다. 아, 공은 역시 현인이로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묘지명을 쓴다.
사도(司徒)의 덕은 주향(州鄕)에 두로 미치네. 하물며 그 손자와 증손자도 훌륭함이 뛰어나지 않은가? 광록의 어짊은 그 경사를 매우 두터이 하였네. 광채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들에 이르러 성하여졌구나. 그 성함은 어떠한 것인가? 공부하는 선비가 글을 숭상함이라. 작은 아들은 준수하고 재능이 있어 또한 사신이 되었네. 나라의 경사가 퍼져나가 사당을 밝히는 데까지 미쳤네. 관복을 입고 나아가니 천자께서 말씀을 내리셨네. 그 작위의 귀함은 오직 덕을 기린 것이니. 지켜서 떨어뜨리지 않았고, 쌓고 두루 높혔네. 내가 고인을 생각하니 마주하여 사귐이 황홀할 뿐이네. 명을 받아 명(銘)을 지으니 참으로 후대에 쓰이기를 바란다.
淳熙六年春正月, 端明殿學士黃公寢疾于邵武故縣之私第. 熹往問其起居, 謁入, 公正衣冠, 擧扶起坐, 願中子瀚召熹入. 至則又扶以立, 辱與揖讓爲禮, 共坐食飮, 恭謹不懈如常時. 卒食, 又扶而起, 沸泣爲熹言曰:‘中也先考妣之藏久未克識, 蓋不敢輕以屬人. 今以累子, 子其爲我成之.’ 熹頓首辭謝, 不敢當, 而公命之不置. 熹懼以久勞公, 則不敢辭而受命以出. 歸, 又以書辭, 未報而公薨. 諸子遣使來訃, 且致遺命, 以同郡李君呂之狀來. 熹旣哭公盡哀, 且念今則無所於辭, 乃考其狀而附以所聞, 爲列其事曰:
謹按右宣義郞致仕․贈金紫光祿大夫黃公諱崇, 字彦高, 其先光州固始人. 十一世祖膺避地閩中, 今爲邵武軍邵武縣人. 曾祖扆有隱德, 爲鄕里所尊. 晩以子仕登戟, 授太常丞以卒. 故知制誥呂公夏卿贊銘其墓. 後以孫履爲尙書右丞, 累贈司徒. 祖汝臣, 不仕. 父豫, 用右丞奏爲右承務郞, 皆以孝謹聞於鄕黨.
公自幼力學, 日誦千言, 人謂是且大其門矣. 旣長, 承務公任以家事, 於是無復進取意. 旣孤而貧, 悉力治喪, 不以累其昆弟, 而所以爲禮者無不備, 觀者歎息. 母孫夫人春秋高, 性嚴而多病. 公致養勤劇, 得其驩心. 鄰家有李永者, 尙氣節, 雅敬慕公. 察公養親之意有餘而力不足, 請助公以經紀. 公亦信之不疑, 竭貲付之, 一不間其出入, 如是者十有五年. 李銜公德, 將死, 感慨執公手曰:‘子吾父也.’ 公之兄客遊以疫死, 人無敢往視之者. 公獨毅然告行, 千里還柩, 視其橐, 得餘貲尙百餘萬, 悉奉以歸其丘嫂, 不以一毫自私. 平居恭儉自守, 不忘取予. 至其敎子擇師, 雖靉衣食無所愛. 由是二子皆擧進士, 及公時取高科, 以德業風槪各有聞於當世. 旣又竝登朝列, 遇郊慶, 奏公爲右宣義郞而致其事. 公乘安車東西就養, 二子皆孝謹篤至. 諸孫滿前, 晨夕所以奉養娛樂公者甚備, 鄕黨榮之. 紹興癸酉正月十九日, 以疾卒于南劍州沙縣之寺舍, 享年八十有一. 其年十月, 葬于九墩先塋之次. 娶建安游氏, 先卒, 亦以二子故追封孺人. 一女, 適貢士劉紀.
公卒時, 端明公方以某官通判建州事, 而季子章亦以某官知沙縣事. 其後端明公被遇太上皇帝, 擢館職․郞曹․史官, 攝贊書命, 兼司業․祭酒․侍講, 歷工․吏․兵․禮部侍郞, 又以府敎授․給事中․兵部尙書事今上皇帝, 侍讀禁中, 正色立朝, 聲烈甚茂. 以顯謨․龍圖閣學士退老于家, 天子又乞言焉, 卽拜端明殿學士. 恩禮殊渥, 而海內有識之士亦莫不婦心焉. 沙縣屢宰劇邑, 有能稱. 然不肯媚事權豪, 後以御史中丞湯鵬擧薦入臺爲主簿, 以又持諭不阿而去. 提擧福建路常平荼事, 知台州, 所至聲績皆可紀. 以是累贈公至金紫光祿大夫, 夫人亦敗封本郡. 而孫曾仕者又十餘人, 然後鄕人知公所以遺其子孫者爲無窮也.
李君又言, ‘呂以壻公孫女, 嘗得拜公堂上. 間竊窺觀公之爲人, 望之儼然, 卽之溫然, 危坐竟日無惰容. 雖遇臧獲, 不妄言笑. 自少至老如一日.’ 熹以是又知端明公之德之盛, 所以沒身於禮而不倦者爲有自來也. 嗚呼, 公其亦賢矣哉!敬爲作銘, 銘曰:
司徒之德, 浹于州鄕. 矧其孫曾, 弗俊以良? 光祿之賢, 克篤其慶. 隨耀弗章, 及子而盛. 其盛伊何? 學士尙書. 介也英英, 亦假節符. 國慶所覃, 逮其考廟. 結紫垂黃, 天子有詔. 匪爵之貴, 惟德之褒. 保而弗墜, 有積彌高. 我思古人, 恍其對接. 承命作銘, 用亶來葉.
건안군부인 유씨 묘지명[建安郡夫人游氏墓誌銘]
유송(有宋) 건안군부인(建安郡夫人) 유(游)씨는 우선의랑(右宣義郞)으로 치사하고 금자광록대부에 증직된 소무(邵武) 황숭(黃崇)의 아내인데, 아들 단명전학사 중(中)과 태주사군(台州史君) 장(章)으로서 추작되었다. 대대로 건주(建州) 건양현(建陽縣) 장평리(長平里) 사람으로 증조부 정경(正卿)과 조부 희고(希古), 부친 의(儀)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으나 은덕(隱德)이 있어 마을에서 장자(長子)로 받들었다.
부인은 바탕이 정숙(靜淑)하고 친척 부인 완(阮)씨가 부덕(婦德)으로 가르쳐 부인은 어려서부터 배웠는데, 반소(班昭)의 여훈(女訓)을 배워서 그 대의에 통했다. 베를 짜고 글을 쓰는 솜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심전력하지 않아도 쉽게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그 어머니가 그를 매우 사랑하여 대부공(大夫公)에게 시집보냈다. 시부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데 부지런하고 엄숙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손님을 좋아하여 경사스러운 날이나 좋은 계절에는 친구들이 집에 가득했다. 부인은 다만 공손히 음식을 대접하여 잠시라도 스스로 소홀히 하거나 동서에게 미루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성질이 엄하여 며느리들이 곁에서 모셨는데 20년을 앉을 것을 명하지 않았다. 부인은 유독 그 뜻을 잘 맞추어, 씻고 빗질하는데 따뜻하고 차게 하는 것에서 예로 하여 어김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부인이 약을 드리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항상 일이 있을 때마다 가리켜 말하여 여러 며느리들의 모범으로 삼았다.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대부공이 가난하여 형제들이 서로 돌아보며 밭을 팔아 장례를 지내려고 계획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선조가 생업으로 삼던 것을 없애지 마십시오”라고 하고, 물러나와 전대에 가지고 있던 것을 꺼내서 그 일을 받들어 대부공이 여러 사람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고 대사를 치를 수가 있었다. 대부공의 사람됨이 성실하고 장중하였는데, 부인은 유순함과 곧음으로 그를 도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였으며 일을 도모하는데 화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친척들을 대우하는데 겸손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친척들의 훌륭한 점을 말하기를 좋아하고 그 허물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빈곤함에 처하면 그들을 구휼하는데 힘을 다했다. 날마다 여훈과 다른 경전의 말까지 외워 스스로 경계로 삼았다. 또 불교를 매우 숭상하여 자식을 잉태하면 반드시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향을 사르고 유학과 불교의 서적을 읽었다.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았고, 화를 내며 바라보지 않았으니 이것을 고인의 태교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아들이 태어나면 모두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 또 부인이 가르치는 것은 매우 지극하여 조금 말할 줄 알게 되면 무릎위에 앉히고 시서(詩書)를 가르쳐주었다. 조금 자라면 스승을 맞고 친구를 가려서 모두 가르치고 타일러주었다. 종형 어사(御史)선생이 하남 정씨에게서 배워 행실과 학문이 도탑고 훌륭하여 학자의 종장이 되었다. 부인은 아들들에게 말할 때마다 “외삼촌을 보고 그를 모범으로 삼으면 충분히 훌륭한 선비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소흥(紹興) 임자(壬子)년 4월 23일에 병으로 졸하였다. 병이 위급하자 대부공이 부인을 보고 울었다. 부인이 말하기를 “나고 죽는 것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밤과 아침이 그러한 것과 같은데 어찌 슬퍼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 때 나이 56세였다.
두 아들은 모두 진사에 오르고 그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단명공은 실로 제 2인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에는 두 임금을 시종(侍從)하며 출입한지 20여년인데 충언(忠言)과 곧은 절조가 늙을수록 더욱 굳세었다. 고향으로 물러나와 거하였는데 천자는 일 때문에 힘들까 걱정하여 믿을만한 사자(使者)에게 친서를 보내어 안부를 묻도록 했다. 그 충효 대절이 참으로 훌륭하였고 그 세세한 언행은 모두 벼리가 될 만하였으니, 사람들은 부인이 남겨준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태주(台州)는 일찍이 어사대주부(御史臺主簿)가 되었는데 역시 다스림의 행적이 섬세하고 민첩하였고, 의논은 강개(慷慨)하여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 두 분은 앞뒤로 모두 벼슬을 하는 은혜를 만나 그 어머니가 지금의 봉호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딸 하나가 있는데 공사(貢士) 유기(劉紀)가 그 사위이다.
졸한 다음해에 소무현(昭武縣) 석기(石岐)의 들에 장사지냈다. 대부공은 일찍이 태주에 명하여 그 행장을 썼으나 묘지명을 맡기지는 않았다. 46년 후에 단명공이 나에게 명하였다. 그 말은 대부공의 묘지(墓誌)에 갖추어져 있어 여기서는 쓰지 않는다. 행장의 글만을 살펴보고 그 큰 것만을 잘라내서 묘지명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장평(長平)의 유(游)씨는 대대로 덕이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마을을 어짊을 했네. 여사(女士)가 마땅함을 닦아 부녀자의 본보기가 되었네. 덕있는 사람을 배필로 맞고 현자를 잉태하여 덕을 쌓은 집안에 많은 경사가 있었네. 두 아들이 상서(尙書)와 자사(刺史)가 된 것은 덕과 재주가 있어서이니, 탕목(湯沐)을 봉함은 본방(本邦)에 처음이네. 황황히 글을 고하여 유택을 꾸미니, 돌을 자르고 말을 새겨서 영원히 모범으로 남긴다.
有宋建安郡夫人游氏, 右宣義郞致仕․贈金紫光祿大夫邵武黃公諱崇之妻, 而子端明殿學士諱中, 台州史君諱章之所追爵也. 世爲建州建陽縣長平里人, 曾祖正卿․祖希古․父儀皆不仕而有隱德, 鄕里推長者.
夫人資靜淑, 族母阮氏以婦德爲女師, 夫人幼嘗學焉, 受班昭女訓, 通其大義. 至它組紉筆札之藝, 皆不待刻意而能輒過人. 早孤, 其母鍾愛之, 以歸大夫公. 事舅姑․承祭祀勤肅不懈. 舅喜賓客, 佳辰令節, 親舊滿門. 夫人供饋唯謹, 未嘗頃刻自逸而委勞於娣姒也. 姑性嚴, 諸婦待旁, 有二十年不命坐者. 夫人獨能順適其意, 盥櫛溫淸, 禮無違者. 姑有疾, 非夫人進藥不嘗. 每因事指言以爲諸婦模楷. 遭舅喪, 大夫公素貧, 昆弟相顧, 謀鬻田以葬. 夫人曰:‘毋隳爾先業爲也.’ 退斥橐中裝以奉其役, 以故大夫公得以不煩於衆而襄大事. 大夫公爲人誠慤莊重, 夫人以柔順堅正佐之, 相敬如賓, 謀無不協. 其待遇族姻謙謹有禮, 樂道其美而不喜聞其過. 至其貧困, 則賙之必盡其力. 日誦女訓及它經言, 以自箴警. 亦頗信尙浮屠法, 娠子則必端居靜室, 焚香讀儒彿書. 不疾呼, 不怒視, 曰此古人胎敎之法也. 故其子生皆賢材. 而夫人所以敎之者又甚至, 稍能言, 則寘膝上授以詩書. 少長, 卽爲迎師擇友, 敎諮諄悉. 從兄御史先生學於河南程氏, 行業淳慤, 爲學者所宗. 夫人每語諸子曰:‘視乃舅而師法之, 足以爲良士矣.’ 紹興壬子四月二十三日, 以疾卒. 病革, 大夫公泣視之. 夫人曰:‘生死聚散, 如夜旦然, 何以戚戚爲哉? ’於是年五十有六矣.
二子皆擧進士, 中其科, 而端明公實以第二人賜第. 其後侍從兩朝, 出入二十餘年, 忠言直節老而益壯. 退居于鄕, 天子閔勞以事, 嘗遣信使奉璽書就而問之. 其忠孝大節固已偉然, 而其言行之細又皆可紀, 人以爲夫人之遺敎也. 台州嘗爲御史臺主簿, 亦以治行精敏․議論慷慨有聞於時. 二公前後凡□逢慶恩〔一〕 , 得追榮其母至今封, 里人榮之. 一女, 則貢士劉紀其壻也.
卒之明年․葬于邵武縣石岐之原. 大夫公嘗命台州狀其行, 而未有所託銘. 後四十有六年, 端明公乃以命熹. 其語具於大夫公之誌, 此不著. 獨按狀文, 剟其大者書而銘之. 銘曰:
長平之游, 世有德人. 弗耀于世, 乃里其仁. 女士攸宜, 壺彝是式. 配德娠賢, 慶餘善積. 尙書刺史, 之德之才. 湯沐之封, 本邦是開. 煌煌命書, 賁此玄宅. 伐石篆辭, 永世貽則.
〔一〕此句缺字明萬曆本作‘遭’, 四庫全書本作‘累’, 恐屬臆補. 所缺當爲逢恩之數.
단명전학사 황공 묘지명[端明殿學士黃公墓誌銘]
공(公)의 성은 황(黃)씨이고 휘는 중(中)이며 자는 통노(通老)이다. 그 선조 중에 휘가 응(膺)인 사람이 있는데 광주(光州) 고시현(固始縣)에서 민(閩)으로 들어와 소무(昭武)에 가문을 열었다. 공에 이르기까지 12세이다. 공의 증조부 여신(汝臣)은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예(豫)는 승무랑(承務郞)에 올랐다. 부친 숭(崇)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증직되었다. 모친 유(游)씨는 건안군부인(建安郡夫人)으로 추봉되었다.
공은 나면서부터 빼어나게 총명하고 곧고 성실하였으며, 조금 자라서 글을 배우면서는 한두 번만 읽고는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고 종일 조용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에게 물어보면 이미 모두 외우고 있었다. 스무 살이 되지 않아서 외종숙(外從叔) 어사(御史)선생 정부(定夫)가 그를 매우 아껴 손수 글을 써서 부인을 하례하였다. 스무 살이 넘어 태학에 입학하였는데, 도읍을 지키지 못하고 위초(僞楚)가 참위(僭位)하여 이름을 지으니 공이 그날로 나가서 밖에 거처하였다. 이윽고 장방창이 학관에 위조(僞詔)와 약물(藥物)을 보내어 제생을 방문하였는데, 공은 먼저 나갔으므로 홀로 욕을 당하지 않았다. 건염(建炎)에 다시 창건하니, 승상 잠선(潛善)공이 친척 조부였는데, 공을 매우 훌륭한 인재로 중히 여겨서 조정에 천거하였다. 수직랑(修職郞)․어영사사간판공사(御營使司幹辦公事)에 임명하였다. 소흥 5년에 진사에 올라 조정에서 대책(對策)을 하였는데, 효제(孝弟)의 의미를 극론하여 성심(聖心)을 감동시키고자 하였다. 천자께서 과연 그 말을 특별하게 여기고 상등급으로 뽑아 2등이 되어 좌문림랑(左文林郞)․보령군절도추관(保寧軍節度推官)을 제수하였다. 다시 선의랑(宣義郞)․주관남외돈종원(主管南外敦宗院)에 제수되었다. 교대하여 돌아왔는데 승상(丞相) 진회(秦檜)가 일을 맡고 있었다. 공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통판건주사(通判建州事)로 파견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복을 벗고는 다시 통판소흥사(通判紹興事)로 보내졌다. 이때가 공이 등제(登第)한지 20여년인데 외직을 전전하였으니 친구들이 그렇게 머물러 있는 것을 탄식하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처신하였다.
진회가 죽고 나자 공의 길이 조금씩 열렸다. 상이 공의 성명을 기억하고 있어 불러서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겸 실록원검토관(實錄院檢討官)으로 삼았다. 저작좌랑(著作佐郞) 겸 보안(報安) 은평군왕(恩平郡王)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 겸 권국자사업(權國子司業)으로 옮겼다. 세월이 차고서는 참으로 권력을 대하여 말하게 되었다. 소흥 28년 하금국생신사(賀金國生辰使)가 되어 하정사(賀正使)․비서소감(秘書少監) 심개(沈介)와 서로 선후가 되었다. 다음해 공이 돌아와서 홀로 오랑캐가 변궁(汴宮)을 수리하는데 역부(役夫)가 많으니 이것은 분명 옮겨서 핍박하려는 것이니, 서둘러 스스로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는 화의를 맺은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 안팎이 해이해져서 다시 싸우고 수비할 준비가 없었다. 상이 공의 말을 듣고 놀라며 말하기를 “이궁(離宮)뿐인가?”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신이 그 궁궐을 지을 위치를 표시한 것을 보았는데, 궁궐이 이미 다 갖추어지면 이것이 어찌 이궁에 그치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그것을 생각해보니 오랑캐의 세력이 반드시 남하할 것입니다. 오랑캐가 남쪽 변(汴)에 살면 장사(壯士)와 튼튼한 말이면 수일이 지나지 않아 회(淮) 상에 이를 것입니다. 사세가 이미 절박하니 폐하께서는 빠르고 심각하게 도모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은 공의 말이 옳다고 여겼으나 재상은 모두 좋아하지 않아 공을 돌아보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심감(沈監)이 돌아왔을 때 주의 깊게 들어도 이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공은 어찌하여 홀로 이렇게 하는가?”라고 하며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달이 지나서 공이 다시 말을 꺼내자 또 말하기를 “천박한 말을 믿을 수가 없으니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며 모두 무연히 응하지 않았고, 우상(右相) 탕사퇴는 매우 화를 내어 공을 말로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동요하지 앉자 심개를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제수하고 공은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 옮겨서 그를 물리쳤다. 공이 그에 오히려 변방을 방비해야 한다고 말해도 듣지 않으므로 외곽을 보수할 것을 청했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황(黃)모는 마음이 담박하여 지조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고는 기거랑(起居郞)을 제수하고 안장과 말을 하사하였으니 전에 있던 일이 아니다.
달을 넘겨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겸하였다. 현인태후(顯仁太后)가 붕(崩)하여 백관이 조정에서 곡을 하였는데 진일(辰日)은 피하려고 하였다. 공이 경(經)에 어긋난다고 하고 또 당태종이 장공근(張公謹)을 곡한 일을 인용하여 논쟁하였다. 이윽고 빈일(殯日)을 정했는데 마침 상복을 벗는 이후에 있었다. 유사가 백관은 길복(吉服)으로 배석해야한다고 말하자 공이 다시 논하기를 “당제(唐制)에 빈(殯)이 그 달 안에 있으면 모든 관료들은 각각 그 복을 입는다고 하고, 계빈(啓殯)이 그 달밖에 있으면 각각 그 초복(初服)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빈(殯)이 비록 기간이 지났지만 어찌 계빈(啓殯)의 예로 하여 그 초복을 입지 않겠습니까? 또 상례는 잘 다스려지기 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하니, 다만 옛날에 정해진 제도를 상고하여 신하된 자의 지극한 정을 펴면 되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지삼십년공거(同知三十年貢擧)와 권공부시랑(權工部侍郞)을 겸직하였는데, 아뢰기를 “어전군기소(御前軍器所)는 중인환관이 법식과 규범을 관리하는데 공부군기감(工部軍器監)은 들을 수가 없으니, 이것은 조종(祖宗)께서 이름에 맞게 관직을 세우신 뜻이 아닙니다. 공부군기감에서 계고(稽考)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금(金)인이 천신절(天申節)을 하례하러 와서 접반사(接伴使)를 맡았다. 옛날부터 사신에게 연회를 베푸는 것은 뜰 안에서 사례하는 것이었다. 이때 장소가 덥다고 하며 처마 밑에서 절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불가하다는 뜻을 지켜 지금까지와 같이 하였다. 드디어 접반사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또 오랑캐는 날마다 병기를 수선하여 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고 또 그 중요한 병사는 모두 중주(中州)에 주둔하고 있으니 그에 대비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해에 시강(侍講)을 겸하고 또 이부시랑(吏部侍郞)과 병부시랑(兵部侍郞)을 겸하였다. 장차 명당(明堂)에서 일이 있었는데, 공은 새로운 장막을 설치하지 말고, 사로(四輅)를 설치하지 말아 지나친 비용을 절약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다시 오랑캐의 사신이 천신절에 와서 하례하여, 바야흐로 맞아들여 보았는데, 갑자기 흠종황제의 부고를 가지고 불손한 말을 많이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상은 흉복(凶服)으로 사신을 만나는 것은 옳지 않으니 그가 가기를 기다려 발상(發喪)하자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이 그것을 듣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 대사이고 신하된 자로 지극히 마음 아픈 때이니 하나라도 예를 잃으면 천하 후세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또 사신이 그 이유를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에 비로소 발상의 예를 행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공은 또 여러 동열을 거느리고 대면하기를 청하여 병사를 독려하여 쓰는 일을 논의하여 결말을 지었다. 여러 사람 중에 동의하는 자가 없자 공은 이에 홀로 오랑캐를 대비하고 막는 책략을 진술하였다. 또 말하기를 “조정이 오랑캐들과 통호(通好)한지 20년 사이에 우리는 하루도 전쟁을 말한 적이 없고, 오랑캐는 하루도 전쟁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폐(歲幣)로 저 사졸(士卒)들을 먹이니 우리는 날로 더욱 약해지고, 오랑캐는 날로 더욱 강성해집니다. 이제 다행히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 먼저 사신이 약속을 어겨 폐하를 경계하니, 오직 폐하께서는 더욱 성심을 다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은 사신으로부터 돌아온 지 3년 동안에 매번 나아가 황제를 대할 때마다 이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황제는 비로소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오랑캐 량(亮)이 많은 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회수를 건넜다.
권예부시랑(權禮部侍郞)으로 옮겼는데, 들어가서 사례하고 그에 따라 회서(淮西)의 군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음을 논하고, 대신을 뽑아서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할 것을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궁궐의 장수 양존중(楊存中)이 어영사(御營使)를 하게 되었는데, 공은 또 동열을 거느리고 양존중이 문서를 보내지 못함을 극력 논하였다. 오랑캐의 기병이 양자강의 연안에 이르렀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다투어 집안을 달아나 숨게 하였다. 공은 홀로 평일과 같이 태연하였다. 집안사람들 또한 아침 저녁으로 떠나기를 청했으나 공이 말하기를 “천자(天子)와 육관(六官)이 여기 있는데 내가 종신(從臣)이 되어서 홀로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오랑캐가 다 퇴각하니 오직 공과 좌상(左相) 진노공(陳魯公)의 집안만이 성 안에 있었으니 모두가 부끄러워 엎드렸다. 이에 황제가 건강(建康)의 병사들을 위로하려고 하였으나 흠종이 아직 부묘(祔廟)하지 않았으니, 유수(留守) 탕사퇴가 우제(虞祭)를 줄여서 빨리 부묘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황제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흉복(凶服)으로 오랑캐에게 나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실로 횐 상복으로 중외(中外)에 고한다”고 하고는 끝내 공의 말을 따라 행하였다. 월삭(月朔)에 모든 관리들이 들어와서 임하였는데, 탕사퇴가 다시 그 예를 중지할 것을 의논하자 공은 또 힘껏 따져 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신주를 만들어 늘어놓았다가 당연히 무덤에 묻어야 하는데 공은 또 초복으로 할 것을 청했다. 우상(右相) 주탁(朱倬)이 불가하다고 하여 말하기를 “휘고대행(徽考大行)의 고사(故事)가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전에 잘못한 것이니 지금은 마땅히 그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주탁이 거짓으로 황제의 뜻이 참으로 그러하므로 신하된 자들은 힘써 삼가 따르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랑캐가 임금을 바꾸고 나서 다음해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친교를 맺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토지는 실질적인 것이고 군신(君臣)은 명목입니다. 실질을 먼저하고 명목을 뒤로 하는 것이 우리의 이익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다시 아뢰기를 “군신의 명목이 이미 정해졌으니 실질이 그것을 따르는 것은 백세에 바뀔 수 없습니다. 토지로 말하자면 그 득실과 취하고 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닌데 어찌 도리어 그것을 실질이라고 하여 우선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황제가 그렇다고 하여 공을 권호(權號)를 없애고 예부시랑으로 임명하였다. 족식(足食) 족병(足兵)의 계책을 물은 적이 있는데 공은 수입을 고려하여 지출을 해야 한다고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재부는 반이 내탕(內帑)으로 들어가는데, 유사는 그것이 차고 비는 것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모두 좌장(左藏)으로 귀속시키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당나라의 양염(楊炎)이 덕종(德宗)에게 고한 말을 인용하고 “폐하께서는 인자하신 성인이시니 어찌 덕종이 하신 것처럼 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께서도 그를 좋게 여겼으나 행동으로 옮기는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천자께서 선위를 받아 등극하셨다. 공은 처음에는 참여하여 그 의논을 들었는데 이에 이르러 스스로 구학노신(舊學老臣)으로 자처하였고, 또 좌우에 술수로 임금을 미혹시키는 자가 있는지를 살폈다. 먼저 요․순․우․탕․문․무․주공이 전해준 정심성의(正心誠意)․격치성정(致知格物)의 설을 임금을 위하여 모두 다 말하였다. 마침 시신(侍臣)들에게 붓과 종이를 주어 천하의 일을 논하게 하였다. 공은 이미 조목별로 말씀을 올렸고, 또 이전의 상소에서도 내탕의 폐단을 극론하였다. 이에 명령을 내려 내장격상(內藏激賞)을 좌장남고(左藏南庫)로 삼았다.
다음해에 국자좨주를 겸직하였다. 조황(早蝗)과 성변(星變)에 대하여 조서를 내리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잘못된 정사를 말하도록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붓과 종이를 주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이미 조목별로 다 대답했는데, 지금 시행되는 것은 열 가지 중에 한두 가지가 안 됩니다. 대저 말하기는 어렵지 않고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힘써 행하실 뿐이지 많은 말씀을 하시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조서를 내려, 지금부터 태상황후의 명령은 모두 황제의 명령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공은 예전의 전거로 그것을 따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재상이 사신을 보내 오랑캐와 화약을 맺을 것을 건의하였는데 공이 또 그것을 논하였지만 역시 공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갑자기 급사중(給事中)을 겸하였다. 다음해 천신절에 축수를 하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흠종의 복을 벗고 다시 음악을 쓰자고 하였다. 일이 예조(禮曹)로 내려가자 공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은 임금을 모시기를 자식이 아버지를 모시는 것처럼 하였는데, 예에 어버이의 상에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복을 벗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춘추에서는 임금이 시해를 당했는데 시해한 자를 토벌하지 않았으면 비록 장례를 지냈다고 하더라도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신하된 자의 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흠종황제는 실제로 장례를 지내지 않았는데, 갑자기 음악을 연주하면 또한 예를 잃고 경전에 어긋남이 심한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물러나서 다시 재상에게 아뢰었는데, 또 휘종(徽宗)이 재궁(榟宮)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일을 인용하여 비유하였다. 좌상 탕사퇴가 말하기를 “그 때는 사신을 보내 맞아들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라고 하자, 우상 장위공(張魏公) 역시 말하기를 “지금은 부모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므로 전날의 일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태상황제는 흠종에게 친 형제이고 또 항상 북면하여 섬겼으니 군신의 의리에 있어서도 아마 편안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고 물러나서 초를 잡아서 그것을 다시 논하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장려하였다. 거듭 성지(聖旨)가 있어 뜻을 모았으나 묘당에서는 예관을 보내 공의 뜻을 정탐하였다. 공이 주초(奏草)를 꺼내어 보여주니 공의 의논이 옳아 꺾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그만두었다.
공이 동대(東臺)에 있은 지가 반년이 안되는데, 조칙이 내려온 것은 이치가 어떠한가를 묻고, 자기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작은 것도 굽힌 적이 없었다. 내시 이작(李綽)․서신(徐紳)․가횡(賈竑)․양가(梁珂)가 관작을 올리는데 법에 따르지 않았고, 간관(諫官) 유도(劉度)가 근신(近臣) 용대연(龍大淵)을 논하여 임금의 뜻을 거스른 것과 연관되어 군(郡)에 임명이 되었으나 다시 그를 파직시키려 하였는데, 공은 줄곧 독(讀)자를 쓰지 않고, 조서를 돌려보내니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싫어하였다. 다시 안목황후(安穆皇后)의 집안에 분사전(墳寺田)을 내리는 임금의 명이 있었는데, 승려들이 드디어 절 앞에 있는 선봉군(先鋒軍)이 사들인 정사(丁禩)의 밭을 탈취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자, 군사들이 그것을 하소연 하였다. 일이 호부(戶部)로 내려가자 상서(尙書) 한중통(韓仲通)은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시랑(侍郞) 전단례(錢端禮)는 관망하고 있었고, 공이 홀로 승려에게 밭을 주는 것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공이 다시 글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만약 분사전을 주라는 이전의 명령을 행하신다면 마땅히 관전(官田)으로 주어야 하는 것이지 군가(軍家)에서 산 것을 취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만약 정사가 그것을 옳지 않게 얻었다면 군가에서는 사지 않았을 것이니, 역시 도로 밭의 값을 주고 밭을 취해야 하는 것이지, 군색하게 요행히 이익을 얻는 것은 부당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주하고 나서는 많은 소상(小相)들이 함께 더욱 방자하게 공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여 드디어 특지(特旨)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파직하였다. 마기(馬麒)가 공을 그 자리에 두도록 상소를 올렸으나 되지 않았고, 언사관(言事官) 윤색(尹穡)이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여 기회를 엿보아 공을 장공(張公)의 당이라고 헐뜯었다. 마기 역시 뒤에는 그 뜻을 굳게 지키지 못하여 공은 결국 수도를 떠나게 되었다.
다음해 건도(乾道)로 연호를 바꾸었는데 공의 나이 70이 되어 거주하는 소무군(昭武軍)에 공문을 보내어 나이를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집영전(集英殿) 수찬修撰)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문각(敷文閣) 대제(待制)로 나아갔다. 오래되자 상 역시 점점 깨달아 공의 말을 생각하고는 장차 그를 다시 등용하려 하였다. 5년에 경연에서 시신(侍臣)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노유(老儒) 황모(黃某)는 지금 어디에 살고, 나이가 얼마나 되었으며 건강은 괜찮은가?”하고 물었다. 그리하여 공을 불러 대궐로 나아갔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벼슬에 나아갔다.
공은 나이가 많고 덕이 있고 오랜 동안 쌓아온 명망이 있으며, 바른 길과 바른 말로 조정을 떠난 지 7년 만에 다시 오게 되었으니, 기대하며 바라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내전에 입대하여 노고를 묻고 깊은 은혜를 받았다. 이 때 권세를 가지고 있던 자가 바야흐로 교활한 음모와 공리(功利)로 날로 제멋대로 기망하였는데, 공이 다시 전에 올렸던 정심성의와 치지격물로 임금을 위하여 자세하게 말씀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년이래에 화친을 말하는 자는 끝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며, 또한 오래 평안할 수 있는 계책이 아닙니다. 또 전쟁을 말하는 자는 부질없이 큰일에 대하여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없으며, 또 반드시 이길 계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잠시 동안은 그들과 화친을 맺으면서 재빨리 그들에 대한 대비를 하며, 안으로는 정사의 도리를 닦고 밖으로는 때의 변화를 살피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모두 듣고 받아들이고, 병부상서겸시독(兵部尙書兼侍讀)으로 삼았다. 매번 입직할 때마다 임금은 먼저 사람을 보내 살펴보고 안부를 물었으며, 그 사람이 돌아오면 빨리 불러들여서 앉히고 말하기를 매우 종용하였다. 이렇게 몇 달이 되었는데,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만나보았다.
공은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중요한 것은 곧 흠종의 재궁을 맞이하여 알현하는 것과 천신절의 연회를 베푸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처음에 공이 예부에 있을 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그만두기를 논했었는데, 공이 해를 넘기고 그만두자 결국을 음악을 썼지만 연회는 베풀지 않았다. 이 때 연회를 베풀려고 했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전에 한 말을 되풀이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삼강오상은 성인이 천하의 중요한 도를 유지하려는 것이니 잠깐이라도 없앨 수 없습니다. 흠종의 재궁은 멀리 사막에 있는데 신하된 자로서 일찍이 한 마디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다만 연회를 베풀지 않는 한가지 일만을 간신히 말하는 것은 노(魯)나라의 고삭(告朔)의 양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또 그것을 폐지하면 삼강오상은 깨끗이 없어져 비릴 것이니 폐하께서는 장차 천하의 신하가 임금과 부모에게 충효를 다하지 않은 것을 어찌 꾸짖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중서사인(中書舍人) 범성대(范成大)를 오랑캐의 사신으로 보내어 선제(先帝)의 무덤이 있는 곳을 묻게 하였다. 공이 또 주청하기를 “폐하의 성효(聖孝)가 이에 이르렀으니 천하가 매우 기뻐합니다. 그러나 흠묘(欽廟) 재궁(梓宮)을 방치해두고 묻지 않는 것은 곧 인심에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또 비록 임금을 모르는 이적(夷狄)이라 하더라도 혹 이것으로 우리를 엿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매우 좋게 여겼으나 시행하는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오랑캐는 이에 경멸하는 말을 방자하게 하니, 사람들이 공이 논한 것이 올바름과 그것을 일찍 안 것에 감복하였다. 공은 또 일찍이 관리가 쓴 건도회계록(乾道會計錄)을 국용으로 제정할 것과, 발운사(發運使)와 그 민간의 이해와 변방(邊防)의 득실에 관한 여러 일들을 없애버릴 것을 명하도록 주청했다.
공은 전에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참소를 당하여 물러났는데, 그 기회가 다시 와서 끝내 그 뜻을 행할 수 있었으니, 임금의 뜻이 공을 향하는 것이 더욱 두터웠다. 이 때 한해를 마치지 못하고, 또 말을 다 행하지 못하고 호연히 돌아갈 뜻을 가졌다. 그러나 차마 흔쾌히 물러날 것을 청하지 못하고 10 가지의 중요한 도에 관한 설을 진술하여 올렸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생각만을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이 천하의 중요한 도입니다. 공의(公議)로 인재를 진퇴시키는 것이 사람을 등용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정직하고 충성을 바치는 것과 아부하여 임금의 뜻만을 쫒는 것을 잘 살피는 것이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것이 주요한 방법입니다. 언로(言路)를 넓게 여는 것은 가려짐을 막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중요한 사실을 살피는 것은 말을 잘 듣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문무(文武)의 신하가 면전에서 방략을 진술하도록 하는 것이 장수(將帥)를 뽑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병적(兵籍)을 계고하는 것이 재화를 절약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말들이 모두 당시의 병폐에 절실히 들어맞는 것이니 매번 한 편을 올릴 때마다 임금이 칭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공은 드디어 편안히 돌아기기를 구하였는데 말과 뜻이 굳고 확실하였다. 임금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어 이에 현모각(顯謨閣) 학사(學士)와 강주(江州) 태평흥국궁(太平興國宮) 제거(提擧)를 제수하였다. 들어가서 사례하고 사양하였으나 임금의 뜻이 특별히 간절하여, 안에서 물소 뿔 장식 허리띠와 차를 꺼내어 하사하였다. 돌아오고 나서 다시 소를 올려 늙음으로 치사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용도각(龍圖閣) 학사(學士)로 치사(致仕)하였다.
순희(淳熙) 원년에 임금이 공을 등용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공이 매우 연로하여 감히 부르지는 않고,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공에게 사자를 보내어 천하의 이해와 조정의 과실에 대해 물었다. 단명전 학사직에 나아가니 또 은과 명주를 보냈다. 공이 명을 받고 감격하여 소를 올려 사례하였다. 거기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정의 과실이 많은데, 그 중에 더 잘못한 것은 군자가 재야에 있고, 소인이 벼슬자리에 있으며,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언로가 막히고, 염치와 도가 상하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입니다. 천하의 이해(利害)가 많은데, 그 중에 더욱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은 관리가 탐욕스럽고 더러우며, 훔치고 바라는 것이 번거롭고 무거우며, 재용이 고갈되고, 도적은 많고, 송사는 처리되지 않고, 정사는 뇌물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신은 군자를 등요하고 소인을 퇴출시키며, 모든 도(道)와 부(部)의 사자를 잘 뽑아서 주현(州縣)을 살피면 조정에는 조리가 있고, 백성들은 병폐를 호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이 다시 돌아온 지 또 10년이 지나 몸은 비록 전리(田里)에 있지만 장수하고 강령하여 다시 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그 마음은 하루도 조정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사이에 말이 시사(時事)에 이르면 혹 강개하고 슬퍼하기를 그치지 못하여 듣는 자들이 대개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공이 다시 나아가서 끝내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주기를 바랐다. 7년 8월 경인(庚寅)에 끝내 집안의 정침(正寢)에서 병으로 훙(薨)하였다. 이에 앞서 병이 계속되어 해를 넘겼는데, 손수 유표(遺表)를 초하여 능침이 있는 지역과 흠종 재궁에 대하여 말하고, 임금이 인주(人主)의 직분을 주위 사람들에게 빌려주면 안된다고 경계하였는데, 그 말이 적절하고 간절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에게 올렸다. 임금이 듣고 슬퍼하였고, 조야(朝野)가 모두 조상하였다. 명을 내려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그 등급을 고하였으니, 향년 85세였고, 강하군(江夏郡) 개국후(開國侯)․식읍(食邑) 1천 5백호․실봉(實封) 1백호에 여러 차례 봉하여졌다.
웅(熊)씨와 첨(詹)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웅씨는 숙인(淑人)에 봉해졌다. 세 아들이 있는데, 원(源)은 통직랑(通直郞)이었고, 한(瀚)은 승무랑(承務郞)이 되었으며, 호(浩)는 종정랑(從政郞)에 올랐다. 딸은 여섯인데, 승의랑(承議郞) 예치(倪治), 통직랑(通直郞) 오응시(吳應時), 선교랑(宣敎郞) 사원명(謝源明), 승사랑(承事郞) 장주(張鑄), 승사랑(承事郞) 진경산(陳景山)이 그 사위들이다. 셋째 아들과 둘째 딸은 다 일찍 죽었다. 손자가 일곱이고, 손녀가 다섯이다.
공은 천성이 장중하여 종일 엄연(儼然)하였으며, 앉고 서는데 일정한 장소가 있어, 기울어지거나 기댄 적이 없다. 말하고 침묵하는데 항상 절도가 있어 희롱하는 말을 하거나 구차하게 웃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마치 매어 있어 잠시도 편안할 수 없는 듯하였으나 공은 홀로 태연히 종신토록 그렇게 하였다. 비록 제사를 지낸 후 친척끼리 연회를 벌이며 정을 나눌 때라도 잠시나마 변한 적이 없었다. 집안에 있을 때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하였으며, 부부 사이에 서로 존경함이 손님을 대하듯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할 때는 공손하고 믿음이 있었으며, 담박하고 변하지 않았으니, 실로 의(義)가 아니면 한 개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에 가난하여 기장밥도 혹 끼니를 잇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거기에 처해서도 매우 편안했다. 자신의 힘이 미치는 데에서는 부모로 하여금 걱정을 하지 않게 하였다. 늦은 나이에 관리로 입신하고서도 스스로 간소하고 담박한 것을 받들어 예전의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오직 제사에 있어서는 풍성하고 깨끗하게 하였으며, 작은 일이나 큰일 모두를 반드시 몸소 하였다.
주현(州縣)의 벼슬을 할 때는 법을 받들고 이치를 따랐으며, 풍교를 독실하게 숭상하였고, 조정에 있을 때는 조리를 지키고 올바름에 의거하였으며, 사려가 깊었으니, 격렬하게 비방하는 말이나 스스로 드러내는 행동을 하여 자기를 자랑하고 명성을 취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의로 다가갔으니, 오래되면 될수록 상하가 더욱 그를 믿고 감복하였다. 임금이 공을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겨 여러 번 크게 쓸 뜻이 있었다. 그러나 공은 끝내 공손히 물러나서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임금이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반드시 삼가 대답하기를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이재(理財)에 대해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수입을 헤아려 지출해야 합니다”라고 하고 시종 한 마디에서라도 공리(功利)를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충효대절과 상례나 제례를 지낼 때는 깊이 잊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처음 조책(詔策)을 대했을 때부터 그 단서가 발하고 나서도 흠묘(欽廟) 재궁(梓宮)이 돌아오지 못함을 가슴 아파하여 죽을 때까지 그것을 논하였고, 죽을 때 한 말에 이르기까지도 풀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공의 이 마음을 받들면 죽어서나 살아서나 마음에 차지 않음이 없으나 남긴 본보기와 교훈은 하늘 땅과 함께 없어졌다고 해도 좋을만하다.
특히 세리(勢利)나 흥폐(興廢)에 담담하여 사람들은 그가 기뻐하거나 성내는 기색을 볼 수 없었다. 군(郡)의 일에 종사할 때 차권(茶券)을 위조한 것을 증험한 적이 있었다. 아전은 공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공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일족의 일을 그만두고 조정의 일을 하였는데, 임안(臨安) 학관(學官)은 시공사(試貢士)의 일을 맡고 있었는데 공은 조정의 명령으로 그 일을 대신하였다. 이 때 당시의 학관 외에 결관이 있어 일을 맡은 사람이 일부러 공을 시험한 것이다. 시험에 관한 일을 다 마치고 나서 공은 직무를 벗고 떠났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대신한 일은 결원을 돕는 일인데 어찌 스스로 말하여 그것을 자세히 살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결국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일을 맡은 자는 이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다. 왕부(王府)에 있을 때 용대연이 내지(內知)가 되었는데, 임금이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그 교수들은 그와 친하게 지내며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기도 했는데, 공은 홀로 그와 앉은 적이 없었고, 조석으로 그를 만나면 읍하고 물러났다. 그 후 그 교수들은 대부분 그 힘을 입었는데, 공만이 관직을 옮기지 못했다.
사업(司業)이 되었을 때 무성묘(武成廟)에 지초(芝草)가 났는데, 무학(武學) 관리들이 알리기를 청했다. 공이 대답하지 않으니 몰래 그림을 그려서 바쳤다. 재상이 우두머리 둘을 불러 꾸짖기를 “치세(治世)의 길조인데 저지하고 아뢰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하니 좨주 주관(周綰)은 대답하지 않았고, 공은 그 그림을 가리키며 대답하기를 “치세에 이것을 어디에 씁니까?”라고 하였다. 주관이 물러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황공의 말은 정확하고 적절하며 간단하여 그를 간쟁관(諫諍官)을 시키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육화탑(六和塔)이 완성되고 재상이 여러 높은 관리들에게 명하여 불교의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하나를 써서 벽에 새기라고 하였다. 공은 할 수 없다고 사절하고, 두 번을 청했는데도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이단에 미혹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감히 사사로운 일을 간섭하지 않지만 공은 처음부터 굳이 그것을 막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촉(蜀)의 선비가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동급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부끄러워하고 업신여겼는데, 공만이 자신을 후하게 대해주는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또한 그 사람만을 후하게 대하려는 뜻을 가진 적이 없었다. 특히 선비를 추천하는 것을 좋아하여 첨사(詹事) 왕십붕(王十朋), 사인(舍人) 장진(張震)이 모두 공이 불러온 사람들이다. 장충헌공(張忠獻公), 태위(太尉) 유기(劉錡)가 다시 등용된 것도 공의 힘이 컸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알린 적이 없어 여러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마을에 거한지 전후로 15년 간 죽은 이를 거두고 고아를 구휼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어 도움을 받은 자가 많았으나 공은 스스로 덕을 베푼 기색을 낸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문에 번거로운 손님이 없었으나, 고을과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만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몸소 함께 예를 갖추어 큰 손님을 대하듯 하였다. 정성스러운 교훈의 말은 반드시 효제충신에 의거하였으니, 나이가 많다고 하여 해이한 마음이나 게으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대개 공의 사람됨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 천하의 사물은 이미 그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었으며, 천하의 의리(義理)에 대한 학문은 또 모두 문변(問辨)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그 대체(大體)를 알았다. 또 그의 성의(誠意) 궁행(躬行)은 또 혼연하여 억지로 힘쓰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또 겸손하고 성실하여 특히 빈말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므로 당세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친히 가르침을 받아서 얻음이 있으면, 흔연히 심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 이른바 말은 어눌하면서도 행동은 민첩하다는 것이 실질이명성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공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다음해 장례를 치르려고 하는데, 후계자인 아들 원(源)이 그 아우 한(瀚)을 시켜 공의 행사를 글로 써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황송하게도 공이 매우 후하게 돌보아주시었고, 또 일찍이 명을 받아 그 선대부와 선부인의 묘에 지를 써서 감히 사양할 수 없었으니, 이에 삼가 그 일을 차례대로 정리하여 명을 쓴다. 공의 묘는 소무현(邵武縣) 인택향(仁澤鄕) 경친리(慶親里)의 살던 집 북쪽에 있는 석기원(石歧原)에 있으니, 12월 초닷새에 장사지냈다. 그 묘지명에 말하기를,
천하 국가의 일 어느 것이 당면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이 그 근본이 되는가? 몸이 그곳이네. 사물의 이치 중에 그 궁극을 손꼽아 헤아리면, 그 대체는 무엇인가? 효와 충일 뿐이라네. 내가 황공을 보니 하늘이 순하고 두터운 법을 내려주셨네. 근본을 세워 스스로 행하니, 그 앎에 대체가 있네. 생각을 엄숙하게 하고 공평함과 순함을 실천하였네. 성덕(盛德)이 겉으로 드러나 음성과 용모에 드러났도다. 집안에는 효행과 덕행을 실천하고, 나라에는 성심을 다했네. 상례를 정중히 하고 제례를 후하게 했으니, 잘못을 남기지 않았네. 근본은 깊고 말단은 무성하니, 큰 줄기가 들리면 세세한 것들은 그를 따라 들리는 것이지. 행실은 당세를 넉넉하게 하였고, 말씀은 보귀(寶龜)가 되었네. 양조에 출입하였으나 시종 한뜻이었네. 더불어 응대할 수 있었고 신(神)을 도울 만 했으며, 표리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궁구하지 못하였으니 군자가 그를 애석해하네. 무덤에 명문을 새기니 오직 진실함만으로 하였네.
公姓黃氏, 諱中, 字通老. 其先有諱膺者, 自光州固始縣入閩, 始家邵武. 至公間十有二世矣. 公之曾大父汝臣, 不仕. 大父豫, 假承務郞. 父崇, 贈金紫光祿大夫. 母游氏, 追封建安郡夫人.
公生而穎悟端慤, 少長受書, 不過一再讀, 退輒黙然危坐竟日, 問之則皆已成誦矣. 未冠, 從舅御史先生定夫愛其厚重, 手書爲夫人賀. 踰冠入太學, 會京城失守, 僞楚儧位號, 公卽日出居于外. 旣而邦昌果遣學官致僞詔藥物勞問諸生, 公以前出, 故獨無所汙. 建炎再造, 丞相潛善公族租父也, 雅器重公, 薦諸朝. 詔補修職郞․御營使司幹辦公事. 紹興五年與進士, 對策廷中, 極論孝弟之意, 冀以感動聖心. 天子果異其言, 擢置上第, 名次擧首, 授左文林郞․保寧軍節度推官. 改宣義郞․主管南外敦宗院. 代還, 秦丞相檜方用事, 察公意不附己, 差通判建州事. 罹外艱, 服除, 復差通判紹興府事. 時公登第二十有餘年矣, 轉徙外服, 士友嘆其滯淹, 而公處之泊如也.
檜已死, 公道稍開. 上記公姓名, 乃召以爲秘書省校書郞, 兼實錄院檢討官. 遷著作佐郞, 兼普安恩平郡王府敎授, 遷司封員外郞, 兼權國子司業. 滿歲. 爲眞. 紹興二十八年, 充賀金國生辰使, 與賀正使․秘書少監沈介相先後. 明年公還, 獨言虜作治汴宮, 役夫萬計, 此必欲徙居以見迫, 不可不早自爲計. 時約和旣久, 中外解弛, 無復戰守之備. 上聞公言, 矍然曰:‘非但爲離宮耶? ’公曰:‘臣見其營表之目, 自寢悉備, 此豈止爲離宮者? 以臣度之, 虜勢必南. 虜南居汴, 則壯士健馬不數日可至淮上. 事勢已迫, 惟陛下亟深圖之.’ 上是公言, 而宰相皆不悅, 顧誥公曰:‘沈監之歸, 屬耳不聞此言, 公安得獨爲此? ’殊不以爲意. 輸月, 公復往扣之, 且曰:‘卽不以鄙言爲可信, 請治其罪.’ 又皆憮然莫應, 而右相湯思退怒甚, 至以語侵公. 公不爲動, 已乃除沈吏部侍郞, 而從公秘書少監以抑之. 公猶以邊備爲言, 不聽, 則請補外. 上不許, 曰:‘黃某可謂恬退有守矣.’ 除起居郞, 賜以鞍馬, 非故事也.
踰月, 兼權中書舍人. 顯仁太后崩, 百官朝臨, 將避辰日. 公以非經, 且引唐太宗哭張公謹事爭之. 已而卜殯日, 適在權制釋服之外. 有司議百官以吉服陪位, 公又論之曰:‘唐制, 殪在易月之內, 則曰百僚各服其服. 放殯在易月之外, 則曰各服其初服. 今殯雖過期, 獨不得以啓殯例之而服其初服乎? 且喪與其易寧戚, 惟稽古定制, 有以伸臣子之至情者, 則幸甚.’
尋差同知三十年貢擧, 權工部侍郞, 奏: ‘御前軍器所領屬中人, 其調度程品, 工部軍器監有不得而聞者, 非祖宗正名建官之意. 請得隸屬稽考.’ 不報. 金人來賀天申節, 充接伴使. 故事, 錫宴使者謝於庭中. 至是辭以方暑, 請拜宇下. 公持不可, 乃如故事. 遂爲送伴使. 還, 又言聞虜日繕兵不休, 且其重兵皆屯中州, 宜有以待之.
明年, 兼待講, 又兼吏․兵部侍郞. 會將有事于明堂, 公請毋新幄帟, 毋設四輅, 以餓浮費. 詔從之. 旣而虜使復以天申來賀, 方引見, 遽以欽宗皇帝訃聞, 且多出不遜語. 諸公框駭〔二〕, 不知所爲, 至謂上不可以凶服見使者, 欲俟其去乃發喪. 公聞之, 馳白宰相 : ‘此國家大事, 臣子至痛之節, 一有失禮, 謂天下後世何? 且使人或問故, 將何以對? ’於是始議行禮. 公又率諸同列請對, 論決策用兵事. 衆莫有同者, 公乃獨陳備禦方略, 且曰:‘朝廷與仇虜通好二十餘年之間, 我未嘗一日言戰, 虜未嘗一日忘戰. 以我歲幣, 啗彼士卒, 我日益削, 虜日益彊. 今幸夫褫其魄, 使先墜言以警陛下, 惟陛下亟加聖心焉.’ 蓋公自使還三年, 每進對未嘗不以玆事爲言. 至是上始入其說, 然不數月而虜亮已擁衆渡淮矣.
遷權禮部侍郞, 入謝, 因論淮西將士不用命, 請擇大臣督諸軍. 旣而殿帥楊存中以御營使行, 公又率同列論存中不可遣狀甚力. 虜騎至江壖, 朝臣震怖, 爭遣家逃匿. 公獨晏然如平日. 家人亦朝暮請行, 公曰:‘天子六宮在是, 吾爲從臣, 獨安適耶? ’比虜退, 唯公與左相陳魯公家在城中, 衆皆慚服. 於是車駕將撫師建康, 而欽宗未祔廟, 留守湯思退諸省虞以速祔. 公持不可, 上納用焉. 而議者猶謂凶服不可以卽戒, 上曰:‘吾固以縞奏詔中外矣.’ 卒從公言而行. 月朔, 留司百官當入臨, 思退復議寢其禮, 公又力爭, 得不罷. 比作主, 當瘞重, 公又以初服請. 右相朱倬不可, 曰:‘徽考大行有故事矣.’ 公曰:‘此前日之誤, 今正當改之耳.’ 倬因妄謂上意實然, 臣子務爲恭順可也. 公曰:‘責難於君, 乃爲恭耳.’
虜旣易主, 明年, 復遣使來通好, 議者皆曰土地, 實也;君臣, 名也. 先實後名, 我之利也. 公又奏曰:‘君臣之名旣定, 則實將從之, 百世不易. 若土地〔三〕, 則其得失取予非有定也, 安得反謂之實而先之乎? ’上然之, 詔公去權號. 會有詔問足食足兵之計, 公以量入爲出爲對, 且曰:‘今天下財賦半入內帑, 有司莫能計其盈虛, 請悉以歸左藏.’ 且引唐楊炎告德宗語曰:‘陛下仁聖, 豈不能爲德宗之爲哉? ’上亦善之, 然未及行也.
未幾, 今天子受禪登極. 公始蓋嘗與聞其議, 至是自以舊學老臣, 且察左右有以衍數惑上聽者, 首以堯․舜․禹․湯․文․武․周․孔所傳正心誠意․致知格物之說爲上敷陳甚悉. 會詔給筆札侍臣, 論天下事. 公旣條上, 且申前奏, 極論內帑之弊. 於是有詔, 更以內藏激賞爲左藏南庫.
明年, 兼國子祭洒. 謠以旱蝗星變, 命近臣言闕政. 公曰:‘前給筆札, 群臣悉已條對, 今什未一二施行. 夫言非難, 行之爲難. 願陛下力行而已, 無以多言爲也.’ 已而有旨, 自今太上皇后令皆以聖旨爲號. 公以故典爭之, 不得. 宰相建遣王之望使虜約和, 公又論之, 亦不從.
俄兼給事中. 明年, 天申上壽, 議者以欽宗服除, 將復用樂. 事下磴曹, 公奏曰:‘臣事君猶子事父, 禮親喪未葬不除服. 春秋君弑賊不討, 則雖葬不書, 以明臣子之罪. 况今欽宗實未葬也, 而遽作樂, 不亦失禮違經之甚乎!’退復以白宰相, 且引永祐龍輴未返時事爲比. 左相湯思退曰:‘時已遣使奉迎, 今則夫也.’ 公曰:‘此又誰之責耶? ’右相張魏公亦曰:‘今乃爲親之故, 不得以前日比.’ 公曰:‘太上皇帝於欽宗親弟昆, 且常北面事之, 有君臣之義, 尤恐非所安也.’ 退具草, 將復論之, 詞益壯厲. 尋有旨集議, 而廟堂間遣禮官來偵公意. 公出奏草示之, 知公議正不可屈, 乃寢.
公在東臺不半歲, 詔勑下者, 問理如何, 未嘗顧己狥人, 小有所屈. 內侍李綽․徐紳․賈竑․梁珂遷官不應法, 諫官劉度坐論近習龍大淵忤旨補郡, 已復罷之, 公登不書讀, 繳奏以聞, 左右已深忌之. 會復有旨賜安穆皇后家墳寺田, 而僧遂奪取殿前選鋒軍所買丁禩田以自入, 軍士以爲言. 事下戶部, 尙書韓仲通以爲不可, 而侍郞錢端禮觀望, 獨奏予之. 公復封上曰:‘今若奉行前詔, 則當以官田給賜, 不當取諸軍家所買. 若謂丁禩得之非道, 軍家不應得買, 則亦當還直取田, 不當遽乾沒也.’ 疏奏, 群小相與益肆媒孶公, 遂以特旨罷中書舍人. 馬騏上疏留公, 未報, 而言事官尹穡希意投隙, 詆公爲張公黨. 騏後亦不能自堅, 而公竟去國矣.
明年, 乾道改元, 公年適七十, 卽移文所居邵武軍, 引年告老. 除集英殿修撰致仕, 進敷文閣待制. 久之, 上亦寢悟, 思公言, 將復用之. 五年, 因御講筵, 顧侍臣曰〔四〕․‘黃某老儒, 今居何許? 年幾何矣? 筋力彊否? ’於是召公赴闕. 公辭謝不獲, 明年乃起.
公以老成宿望․直道正言去國七年, 至是復來, 觀者如堵. 入對內殿, 問勞甚寵. 時用事者方以權譎功利日肆欺罔, 公因復以前奏正心誠意․致知格物者爲上精言之. 又言: ‘比年以來, 言和者忘不共戴天之讎, 固非久安之計;而言戰者徒爲無顧忌大言, 又無必勝之策. 必也暫與之和而亟爲之備, 內修政理而外觀時變, 則庶乎其可耳.’ 上皆聽納. 以爲兵部尙書, 兼侍讀. 每當入直, 上常先遣人候視, 至則亟召入, 坐語極從容. 如是數月, 月必一再見.
公知無不言, 其大者則迎請欽廟梓官, 罷天申錫宴也. 初, 公在禮部論止作樂事, 公去踰年, 卒用之, 然猶未設宴也. 至是, 將錫宴, 公奏申前說, 且曰:‘三綱五常, 聖人所以維持天下之要道, 須臾不可無也. 欽宗梓宮遠在沙漠, 爲臣子者未嘗以一言及之, 獨不錫宴一事僅存, 如魯告朔之餼羊爾. 今又廢之, 則三綱五常掃地盡矣, 陛下將何以責天下臣子之不盡忠孝於君親哉? ’己而詔遣中書舍人范成大使虜. 以山陖爲請. 公又奏曰:‘陛下聖孝及此. 天下幸甚. 然置欽廟梓官而不問, 則有所未盡於人心. 且雖夷狄之無君, 其或以是而窺我矣.’ 上善其言而不及用, 虜於是果肆嫚言, 人乃服公論之正而識之早也. 公又嘗奏請命有司作乾道會計錄以制國用, 罷去發運使及它民間利病․邊防得失數事.
公前以不得其言而被讒以去, 其復來也, 將有以卒行其志, 而上意鄕公亦益厚. 至是不能卒歲, 又以言不盡用, 浩然有歸志. 然猶未忍決求去也, 乃陳十要道之說以獻曰:‘用人而不自用者, 治天下之要道也. 以公議進退人材者, 用人之要道也. 察其正直納忠, 阿諛順旨者, 辨君子小人之要道也. 廣開言路者, 防壅蔽之要道也. 考核事實者, 聽言之要道也. 量入爲出者, 理財之要道也. 精選監司者, 理郡邑之要道也. 痛懲贓吏者, 恤民之要道也. 求文武之臣面陳方略者, 選將帥之要道也. 稽考兵籍, 省財之要道也.’ 言皆切中時病, 每奏一篇, 上未嘗不稱善. 公遂從容乞身以歸, 詞旨堅確. 上不能奪, 乃除顯謨閣學士․提擧江州太平興國宮. 入謝且辭, 上意殊眷眷, 內出犀帶香茗爲賜. 旣歸, 再疏告老, 遂以龍圖閣學士致仕.
淳熙元年, 上意猶欲用公, 以公篤老不敢召, 則上手爲書, 遣使詣公, 訪以天下利害․朝政闕矢. 進職端明殿學士, 且以銀絹將之. 公受詔感激, 拜疏以謝. 略曰:‘朝政之闕矢多矣, 其尤失者, 君子在野, 小人在位, 政出多門, 言路壅塞, 廉恥道喪, 貨賂公行也. 天下之利害多矣, 其尤害民者, 官吏貪墨, 賦歛煩重, 財用匱竭, 盜賊多有, 獄訟不理, 政以賄成也. 臣願進君子, 退小人, 精選諸道部使者以察州縣, 則朝政有經, 民不告病矣.’
公之復歸又十年, 雖身安田里, 老壽康寧, 無復它念, 然其心未嘗一日忘朝廷. 間語及時事, 或慷慨悲辛不能已, 聞者蓋動心焉. 然尙冀公之復起, 而卒有以寤上心也. 七年八月庚寅〔五〕, 竟以疾薨于家之正寢. 先是, 屬疾輸年, 手草遺表, 猶以山陵境土․欽廟梓宮爲言, 而戒上以人主之職不可假之左右, 言尤剴切, 至是上之. 上聞悲悼, 朝野相弔. 詔以正議大夫告其第, 享年八十有五, 累封江夏郡開國侯․食邑千五百戶․實封百戶.
娶熊氏․詹氏, 又娶詹氏, 封淑人. 三男: 源, 通直郞;瀚, 承務郞;浩, 從政郞. 六女, 承議郞倪治․通直郞吳應時․宣敎郞謝源明․承事郞張鑄․承事郞陳景山其婿也. 第三子及第二女皆夭〔六〕. 孫男七人, 女五人.
公天性莊重, 終日儼然, 坐立有常處, 未嘗傾側跛倚; 語黙有常節, 未嘗戱言苟笑. 它人視之若有所拘縶而不能頃刻安者, 公獨泰然以終其身. 雖在燕山私, 亦未嘗須臾變也. 居家孝友篤至, 夫婦相敬如賓. 與人交恭而信, 淡而久, 苟非其義, 一介不取諸人, 亦不以予人. 少時貧窶, 炊黍或不繼, 而處之甚安. 至其力所可致, 則亦不使親與其憂也. 晩歲宦達, 而自奉簡薄不改於舊. 惟祭祀則致豐潔, 細大必身親之.
仕州縣奉法循理, 敦尙風敎, 在朝廷守經據正, 思深慮遠, 不爲激訐之言․表襮之行以矜己取名. 然誠意所格, 愈久而上下愈信服之. 上雅敬重公. 屢有大用意. 而公卒不少貶以求合. 上問進取, 必謹對曰:‘先自治.’ 問理財, 必謹對曰:‘量入爲出.’ 始終一說, 未嘗少及功利. 至於忠孝大節, 敬終追遠之際, 則深有所不能忘者. 蓋自始對詔策, 已發其端, 而痛夫欽廟梓宮之未返, 則論之終身, 至於垂絶之言不釋也. 嗚呼悲夫!推公此心, 可謂無歉於幽明, 而其法戒之所存, 雖與天壤相弊可也.
尤恬於勢利, 興廢之間, 人莫見其喜慍之色. 爲郡從事時, 驗茶券有僞者. 吏白公當受賞, 公謝却之. 罷惇宗而造朝也, 臨安學官與試貢士, 公以朝命攝其事. 時見官外猶有缺員, 用事者故以嘗公. 已而試事畢, 公卽解印去. 其人曰:‘所攝(8-4648)黨缺員, 盍亦自言以審之乎? ’公竟不顧, 用事者以是惡之. 在王府時, 龍大淵爲內知, 已親幸. 它敎授或與過從觴詠, 公獨未嘗與之坐, 朝夕見則揖而退. 其後它敎授多蒙其力, 公獨不從官.
爲司業時, 芝草生武成廟, 武學官吏請以聞. 公不答, 則陰圖以獻. 宰相召長貳而詰之曰:‘治世之瑞, 抑而不奏, 何耶? ’祭洒周公綰未對, 公指所畵對曰:‘治世何用此爲? ’周退語人曰:‘黃公之言精切簡當, 惜不使爲諫靜官也.’ 六和塔成, 宰相命諸達官人寫釋氏四十二章之一刻之壁間. 公謝不能, 請至再, 終不與. 其不惑異端又如此.
所居官人莫敢干以私, 然公初未嘗有意固拒之也. 蜀士有仕于朝考, 同列多靳侮之, 獨感公遇己厚, 然公亦未嘗有意獨厚之也. 尤喜薦士, 王詹事十朋․張舍人震皆公所引. 張忠獻公․劉太尉錡之復用, 公力爲多. 然未嘗以告人, 諸公或不之知也. 致事里居前後十五年, 收死恤孤, 振貧繼絶, 蒙賴者衆, 而公未嘗有自德之色. 平居門無雜賓, 邑里後生有來見者, 躬與爲禮, 如對大賓. 諄諄敎語, 必依於孝弟忠信, 未嘗以爵齒自高而有懈意惰容也.
蓋公之爲人生質粹美, 天下之物旣無足以動於其心, 其學於天下之義理又皆不待問辨而已識其大者. 若其誠意躬行, 則又渾然不見其勉强之意. 而謙厚慤實, 尤以空言爲恥. 以故當世群克知之. 然親炙而有得焉, 則未有不厭然心服者. 嗚呼!所謂訥言敏行, 實浮於名者, 公其是與.
明年將葬, 嗣子源使其弟瀚狀公行事〔七〕, 屬熹以銘. 熹辱公知顧甚厚, 且嘗受命以識先大夫․先夫人之墓矣, 不復敢辭, 乃敬敍其事而銘之. 公墓在邵武縣仁澤鄕慶親里居第之北日石岐原〔八〕, 葬以十二月初五日. 其銘曰:
天下國家, 執匪當務? 曷爲斯本? 身則其處. 事物之理, 指數其窮, 曷其大者? 維孝與忠. 我觀黃公, 天畀淳則. 植本自躬, 有大其識. 儼其若思, 履衡蹈從. 監德之表, 見于聲容. 烝烝于家, 懇懇于國. 敬終厚遠, 摩有遺貸. 根深末茂, 綱擧目隨. 行滿當世, 言爲寶龜. 出入雨朝, 初終一意. 酬酢佑神, 表襄一致. 因而不究, 君子惜之. 勒銘幽宮, 維以質之!
〔一〕此篇淳熙本文字差異頗大, 今附錄於後, 以便參考. 其中誤字仍舊, 未加是正.
〔二〕恇: 原作‘惟’, 據宋浙本․明天順本改.
〔三〕若: 瞭作‘者’, 據宋閩本․明天順本改.
〔四〕曰:原作‘力’, 據宋浙本․明順順本․萬曆本改.
〔五〕庚寅: 原缺, 據淳熙本補.
〔六〕三: 原作‘二’, 據淳熙本․宋浙本改.
〔七〕瀚: 原作‘翰’, 據淳熙本․宋浙本改.
〔八〕慶親․石岐:原缺, 據淳熙本補.
附: 有宋端明殿學士中大夫致仕江夏郡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食實封一百戶贈正議大夫黃公墓志銘
공(公)의 성은 황(黃)씨이고 휘는 중(中)이며 자는 통노(通老)이다. 그 선조 중에 휘가 응(膺)인 사람이 있는데 광주(光州) 고시현(固始縣)에서 민(閩)으로 들어와 소무(昭武)에 가문을 열었다. 공에 이르기까지 12세이다. 공의 증조부 여신(汝臣)은 벼슬하지 않았다. 조부 예(豫)는 승무랑(承務郞)에 올랐다. 부친 숭(崇)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증직되었다. 모친 유(游)씨는 건안군부인(建安郡夫人)으로 추봉되었다.
공은 나면서부터 빼어나게 총명하고 곧고 성실하였으며, 조금 자라서 글을 배우면서는 한두 번만 읽고는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고 종일 조용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으니 글을 이미 모두 외우고 있었다. 건안(建安) 종부형(從父兄) 정부(定夫)선생이 그를 매우 아껴 칭찬하였다. 스무 살이 넘어 태학에 입학하였는데, 위초(僞楚)의 난을 만나니 공이 그날로 나가서 밖에 거처하였다. 이윽고 장방창이 학관에 위조(僞詔)와 약물(藥物)을 보내어 제생을 방문하였는데, 공은 먼저 나갔으므로 홀로 욕을 당하지 않았다. 건염(建炎)에 다시 창건하니, 적저부가 정사를 보좌하고 있었는데, 천거하여 수직랑(修職郞)․어영사사간판공사(御營使司幹辦公事)에 임명하였다. 소흥 5년에 진사에 올라 조정에서 대책(對策)을 하였는데, 효제(孝弟)의 의미를 극론하여 성심(聖心)을 감동시켰다. 드디어 특명으로 2등으로 급제시켜 좌문림랑(左文林郞)․보령군절도추관(保寧軍節度推官)을 제수하고, 선의랑(宣義郞)․주관남외돈종원(主管南外敦宗院)으로 바뀌었다. 임기가 되어 교대하여 돌아왔는데 승상(丞相) 진회(秦檜)가 일을 맡고 있었는데, 공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통판건주사(通判建州事)로 파견하였다. 상을 당하여 복을 벗고는 다시 통판소흥부(通判紹興府)로 보내졌다. 이때가 공이 등제(登第)한지 20여년인데 외직을 전전하였으니 친구들이 그렇게 머물러 있는 것을 탄식하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처신하였다. 진회가 죽고 나자 공의 길이 조금씩 열리니, 상이 공의 성명을 기억하고 있어 불러서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겸 실록원검토관(實錄院檢討官)으로 삼았다가 저작좌랑(著作佐郞) 겸 보안(報安) 은평군왕부교수(恩平郡王府敎授)로 옮겼다. 다시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 겸 권국자사업(權國子司業)으로 옮겼는데 해가 차고서는 참으로 권력을 대하여 말하게 되었다. 28년 하금국생신사(賀金國生辰使)가 되었다가 돌아와서 비서소감(秘書少監)이 되었다. 거듭 기거랑(起居郞) 겸권중서사인(兼權中書舍人)에 제수되었고, 권공부시랑(權工部侍郞) 겸시강(兼侍講), 겸권이․병부시랑(兼權吏․兵部侍郞), 권예부시랑(權禮部侍郞)에 제수되었다. 해가 지나서 권(權)자를 떼고 본래 관직에 나아갔다.
공이 오랑캐에 사신으로 갔을 때, 오랑캐가 변(汴)궁을 짓고 있었는데 비서소감(秘書少監) 심개(沈介)는 하정사(賀正使)로서 먼저 돌아왔는데 감히 말하지 않았다. 공이 돌아와서 홀로 변(汴) 중에 역부(役夫)가 많으니 궁이 다 지어지면, 이것은 분명 옮겨서 핍박하려는 것이니, 서둘러 스스로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는 화의를 맺은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 안팎이 해이해져서 다시 싸우고 수비할 준비가 없었다. 상이 공의 말을 듣고 놀라니, 재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심감이 돌아왔을 때 주의 깊게 들었는데 이것을 듣지 못한 것은 왜인가?”라고 하고는 다시 공의 말을 뜻에 두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공이 다시 가서 아뢰자 망언(妄言)으로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우상 탕사퇴는 노하여 말로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동요하지 앉자 심개를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제수하고 공은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 옮겨서 그를 물리쳤다. 공이 그에 오히려 변방을 방비해야 한다고 말해도 듣지 않으므로 외곽을 보수할 것을 청했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황(黃)모는 마음이 담박하여 지조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고는, 좌사를 배수하고 안장과 말을 하사하였으니 전에 있던 일이 아니다.
현인태후(顯仁太后)가 상선(上僊)하였는데, 유사가 진일(辰日)은 조석의 곡을 파하려고 하였다. 공이 따져 말하기를 이것은 경(經)에 어긋납니다. 또 당태종은 이 날에 그 신하를 곡하였는데, 하물며 신하가 군(君)을 곡하는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윽고 빈일(殯日)을 정했는데 마침 임시 법령으로 이미 끝내고는, 백관은 길복(吉服)으로 행사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당제(唐制)에 빈(殯)이 그 달 안에 있으면, 예에 이르기를 모든 관료들은 각각 그 복을 입는다고 하고, 계빈(啓殯)에 이르러 그 달밖에 있으면 각각 그 초복(初服)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달이 지났다는 이유로 길복으로 빈을 하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공부(工部)에 있을 때 어전군기소(御前軍器所)는 중인환관이 법식과 규범을 관리하는데 공부군기감(工部軍器監)은 들을 수가 없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법의 아니니그것을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답을 받지 못했다. 오랑캐의 사자를 마중한 적이 있는데, 사신에게 연회를 베푸는 것은 뜰 안에서 사례해야 하는데, 날씨가 덥다고 하며 처마 밑에서 절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불가하다는 뜻을 지켜 뜰에서 절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또 말하기를 “오랑캐는 날마다 병기를 수선하여 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고 또 그 중요한 병사는 모두 이미 남하하였으니 그에 대비함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친히 명당(明堂)에서 잔치를 하였는데, 공은 새로운 장막을 설치하지 말고, 사로(四輅)를 설치하지 말아 지나친 비용을 절약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을 내렸다.
31년에 금(金)의 사신이 천신절(天申節)에 하례하러 왔는데, 갑자기 흠종황제의 부고를 가지고 불손한 말을 많이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가 가기를 기다려 발상(發喪)하고자 하였다. 공이 그것을 듣고 재상에게 달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 대사이고 신하된 자로 지극히 아픈 절개이니 하나라도 예를 잃으면 천하 후세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또 사신이 그 이유를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에 결국 예에 맞게 할 수 있었다. 처음에 공이 사신에서 돌아오고 나서 이때까지 3, 4년간인데, 매번 나아가 뵐 때마다 변방의 일을 말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이에 이르러 공은 또 여러 동열을 거느리고 대면하기를 청하여 병사를 독려하여 쓰는 일을 논의하여 결정하려고 하는데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공은 이에 홀로 오랑캐를 대비하고 막는 책략을 진술하였다. 황제가 비로소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금(金)의 량(亮)이 많은 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회수를 건넜다.
또 말하기를 “조정이 오랑캐들과 통호(通好)한지 20년 사이에 우리는 하루도 전쟁을 말한 적이 없고, 오랑캐는 하루도 전쟁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폐(歲幣)로 저 사졸(士卒)들을 먹이니 우리는 날로 더욱 약해지고, 오랑캐는 날로 더욱 강성해집니다. 이제 다행히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 먼저 사신이 약속을 어겨 폐하를 경계하니, 오직 폐하께서는 더욱 성심을 다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은 사신으로부터 돌아온 지 3년 동안에 매번 나아가 황제를 대할 때마다 이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황제는 비로소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오랑캐 량(亮)이 많은 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회수를 건넜다. 공이 마침 예조로 옮겼는데, 들어가서 사례하고, 그에 따라 회서(淮西)의 군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음을 논하고, 대신을 뽑아서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할 것을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궁궐의 장수 양존중(楊存中)이 어영사(御營使)를 하게 되었는데, 공은 또 동열을 거느리고 양존중이 문서를 보내지 못함을 극력 논하였다. 오랑캐의 기병이 양자강의 연안에 이르렀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다투어 집안을 달아나 숨게 하였다. 공은 홀로 평일과 같이 태연하였다. 집안사람들 또한 아침 저녁으로 떠나기를 청했으나 공이 말하기를 “천자(天子)와 육관(六官)이 여기 있는데 내가 종신(從臣)이 되어서 홀로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오랑캐가 다 퇴각하니 오직 공과 좌상(左相) 진노공(陳魯公)의 집안만이 성 안에 있었으니 모두가 부끄러워 엎드렸다.
이에 황제가 건강(建康)의 병사들을 위로하려고 하였으나 흠종이 아직 부묘(祔廟)하지 않았으니, 유수(留守) 탕사퇴가 우제(虞祭)를 줄여서 빨리 부묘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황제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흉복(凶服)으로 오랑캐에게 나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실로 횐 상복으로 중외(中外)에 고한다”고 하고는 끝내 공의 말을 따랐다. 행하고 나서 모든 관리들이 길월(吉月)에 들어와서 임하였는데, 탕사퇴가 다시 그 예를 중지할 것을 논하였다. 공은 또 힘껏 따져 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신주를 만들어 늘어놓았다가 당연히 무덤에 묻어야 하는데, 공은 또 초복으로 할 것을 청했다. 우상(右相) 주탁(朱倬)이 불가하다고 하여 말하기를 “휘고대행(徽考大行)의 고사(故事)가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전에 잘못한 것이니 지금은 마땅히 그것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어찌 다시 그것을 따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탁이 거짓으로 황제의 뜻이 참으로 그러하므로 신하된 자들은 힘써 삼가 따르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랑캐가 임금을 바꾸고 나서 다시 와서 수교하고, 또 신하의 예와 새로 사군(四郡)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니, 마중한 자가 들었다. 그리하여 토지는 실리이니 줄 수가 없고, 예제(禮際)는 허명이니 아낄 것이 없다고 하였다. 공이 그것을 듣고 아뢰기를 “명목이 정해지면 실질이 그것을 따르는 것은 백세에 바뀔 수 없으며 허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토지로 말하자면 그 득실과 취하고 주는 것은 실질이라고 할 수 없는데 논하는 자들은 옳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그렇다고 하고, 시신(侍臣)에게 고하여 족식(足食) 족병(足兵)의 계책을 물은 적이 있는데 공은 마하기를 “지금 천하의 재부는 반이 내탕(內帑)으로 들어가는데, 유사는 그것이 차고 비는 것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모두 좌장(左藏)으로 귀속시키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도 그를 좋게 여겼으나 행동으로 옮기는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천자께서 선위를 받아 등극하셨다. 공은 스스로 구학노신(舊學老臣)으로 자처하였고, 바르게 경계하기를 다하였고, 또 좌우에 술수로 임금을 미혹시키는 자가 있는지를 살폈으니, 곧 요․순․우․탕․문․무․주공이 전해준 정심성의(正心誠意)․격치성정(致知格物)의 설을 임금을 위하여 모두 다 말하였다. 마침 시신(侍臣)들에게 붓과 종이를 주어 천하의 일을 논하게 하였다. 공은 이미 조목별로 말씀을 올렸고, 또 이전의 상소에서도 내탕의 폐단을 극론하였다. 이에 명령을 내려 내장격상(內藏激賞)을 좌장남고(左藏南庫)로 삼았다. 다음해에 다시 재이(災異)가 있어, 가까운 신하들에게 잘못된 정사를 말하도록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붓과 종이를 주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이미 다 대답했으니 뜻이 있는 것은 폐하께서 마땅히 힘써 행해야 합니다. 지금 열 가지 중에 한두 가지 만이 시행되니, 또 어찌 많은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조서를 내려, 태상황후의 명령은 모두 황제의 명령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공은 예전의 전거로 그것을 따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재상이 왕지망(王之望)을 보내 오랑캐와 화약을 맺을 것을 건의하였는데 공이 또 그것을 논하였지만 역시 공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천신절에 축수를 하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흠종의 복을 벗고 다시 음악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은 임금을 모시기를 자식이 아버지를 모시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예에 어버이의 상에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복을 벗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춘추에서는 임금이 시해를 당했는데 시해한 자를 토벌하지 않았으면 비록 장례를 지냈다고 하더라도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신하된 자의 죄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흠종황제는 실제로 장례를 지내지 않았는데, 갑자기 음악을 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미 그것을 아뢰고, 또 휘종(徽宗)이 재궁(榟宮)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일을 인용하여 재상에게 아뢰었다. 좌상 탕사퇴가 말하기를 “그 때는 사신을 보내 맞아들였으므로 음악을 거두고 대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라고 하자, 우상 장공(張公) 역시 말하기를 “지금은 부모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므로 전날의 일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태상황제는 흠종에게 친 형제이고 또 항상 북면하여 섬겼으니 군신의 의리에 있어서도 아마 편안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고 물러나서 초를 잡아서 그것을 다시 논하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장려하였다. 모았으나 묘당에서는 공의 의논이 옳아 꺾을 수 없는 것임을 꺼리니 일이 잠잠해졌다.
일찍이 국자좨주를 겸하고 또 급사중을 겸하였는데, 조칙이 내려온 것은 이치가 어떠한가를 묻고, 자기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작은 것도 굽힌 적이 없었다. 내시 이작(李綽)․서신(徐紳)․가횡(賈竑)․양가(梁珂)가 관작을 올리는데 법에 따르지 않았고, 간관(諫官) 유도(劉度)가 근신(近臣) 용대연(龍大淵)을 논하여 임금의 뜻을 거스른 것과 연관되어 군(郡)에 임명이 되었으나 다시 그를 파직시켰다. 공은 줄곧 독(讀)자를 쓰지 않으니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싫어하였다. 몇 달이 지나 마침 안목황후(安穆皇后)의 집안에 분사전(墳寺田)을 내리는 임금의 명이 있었는데, 승려들이 드디어 절 앞에 있는 군(軍)이 사들인 밭을 탈취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자, 군사들이 그것을 하소연 하였다. 일이 호부(戶部)로 내려가자 상서(尙書) 한중통(韓仲通)은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시랑(侍郞) 전단례(錢端禮)는 홀로 그것을 받들어 주었다. 공이 다시 상주하고 나서는 많은 소상(小相)들이 함께 더욱 방자하게 공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니 드디어 특지(特旨)로 공을 파직하였다. 중서사인 마기(馬麒)가 공을 그 자리에 두도록 상소를 올렸는데, 언사관(言事官) 윤색(尹穡)이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여 기회를 엿보아 공을 장공(張公)의 당이라고 헐뜯으니 마기 역시 뒤에는 그 뜻을 굳게 지키지 못하였다.
다음해 건도(乾道)로 연호를 바꾸었는데 공의 나이 70이 되어 거주하는 소무군(昭武軍)에 공문을 보내어 나이를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집영전(集英殿) 수찬修撰)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문각(敷文閣) 대제(待制)로 나아갔다. 6년을 거하였는데, 하루는 상께서 공을 생각하고는 장차 그를 다시 등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경연에서 시신(侍臣)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노유(老儒) 황모(黃某)는 지금 어디에 살고,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가?”하고 물었다. 그 뜻은 근력이 아직 쇠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니, 이에 공을 불러 대궐로 나아갔다. 공은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벼슬에 나아갔다.
따라서 도문(都門)에 들어가니 기대하며 바라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내전에 입대하여 노고를 묻고 깊은 은혜를 받았다. 이 때 권세를 가지고 있던 자가 바야흐로 교활한 음모와 공리(功利)로 날로 제멋대로 간악하였는데, 공이 다시 전에 올렸던 정심성의와 치지격물로 임금을 위하여 자세하게 말씀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년이래에 화친을 말하는 자는 끝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며, 또한 오래 평안할 수 있는 계책이 아닙니다. 또 전쟁을 말하는 자는 부질없이 큰일에 대하여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없으며, 또 반드시 이길 계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잠시 동안은 그들과 화친을 맺으면서 재빨리 그들에 대한 대비를 하며, 안으로는 정사의 도리를 닦고 밖으로는 때의 변화를 살피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모두 듣고 받아들이고, 병부상서겸시독(兵部尙書兼侍讀)으로 삼고, 매번 입직할 때마다 임금은 먼저 사람을 보내 살펴보고 안부를 물었으며, 그 사람이 돌아오면 빨리 불러들여서 앉히고 말하기를 매우 종용하였다. 이렇게 몇 달이 되었는데,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만나보았다. 공은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중요한 것은 곧 흠종의 재궁을 맞이하여 알현하는 것과 천신절의 연회를 베푸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공이 전에 예부에 있을 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그만두기를 논했었는데, 공이 떠나자 결국 음악을 썼다. 이 때 연회를 베풀려고 했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전에 한 말을 되풀이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삼강오상은 성인이 천하의 중요한 도를 유지하려는 것이니 하루라도 없앨 수 없습니다. 흠종의 재궁은 멀리 사막에 있는데 신하된 자로서 일찍이 한 마디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다만 연회를 베풀지 않는 한가지 일만을 간신히 말하는 것은 노(魯)나라의 고삭(告朔)의 양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또 그것을 폐지하면 삼강오상은 깨끗이 없어져 비릴 것이니 폐하께서는 장차 천하의 신하가 임금과 부모에게 충효를 다하지 않은 것을 어찌 꾸짖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중서사인(中書舍人) 범성대(范成大)를 오랑캐의 사신으로 보내어 선제(先帝)의 무덤이 있는 곳을 묻게 하였다. 공이 또 주청하기를 “폐하의 성효(聖孝)가 이에 이르렀으니 천하가 매우 기뻐합니다. 그러나 흠묘(欽廟) 재궁(梓宮)을 방치해두고 묻지 않는 것은 곧 인심에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또 비록 임금을 모르는 이적(夷狄)이라 하더라도 혹 이것으로 우리를 엿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매우 좋게 여겼으나 시행하는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오랑캐는 이에 경멸하는 말을 방자하게 하니, 사람들이 공이 논한 것이 올바름과 그것을 일찍 안 것에 감복하였다. 그가 논하여 아뢴 것은 회계록(乾道會計錄)을 지은 것과, 발운사(發運使)와 그 민간의 이해와 변방(邊防)의 득실에 관한 여러 일들을 없애버릴 것을 명하도록 주청했다.
공이 다시 와서 끝내 그 뜻을 행할 수 있었으니, 임금의 뜻이 공을 향하는 것이 더욱 두터웠다. 이 때 한해를 마치지 못하고, 또 말을 다 행하지 못하고 호연히 돌아갈 뜻을 가졌다. 그러나 차마 흔쾌히 물러날 것을 청하지 못하고 10 가지의 중요한 도에 관한 설을 진술하여 올렸다.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생각만을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이 천하의 중요한 도입니다. 공의(公議)로 인재를 진퇴시키는 것이 사람을 등용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정직하고 충성을 바치는 것과 아부하여 임금의 뜻만을 쫒는 것을 잘 살피는 것이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것이 주요한 방법입니다. 언로(言路)를 넓게 여는 것은 가려짐을 막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중요한 사실을 살피는 것은 말을 잘 듣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문무(文武)의 신하가 면전에서 방략을 진술하도록 하는 것이 장수(將帥)를 뽑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병적(兵籍)을 계고하는 것이 재화를 절약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극력 그 선함을 칭찬하니, 공은 사직을 청하였는데 그하는 것이 매우 간절하였다. 임금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어 이에 현모각(顯謨閣) 학사(學士)와 제거강주태평흥국궁(提擧江州太平興國宮)을 제수하고, 안에서 물소 뿔 장식 허리띠와 차를 꺼내어 하사하였다. 돌아오고 나서 다시 소를 올려 늙음으로 치사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용도각(龍圖閣) 학사(學士)로 치사(致仕)하였다. 그 후에 임금이 공을 등용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공이 매우 연로하여 감히 부르지는 않고,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공에게 사자를 보내어 천하의 이해와 조정의 과실에 대해 물었고, 단명전 학사직에 나아가니 또 은과 명주를 보냈다. 공이 명을 받고 감격하여 소를 올려 사례하였다. 거기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정의 과실이 많은데, 그 중에 더 잘못한 것은 군자가 재야에 있고, 소인이 벼슬자리에 있으며,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언로가 막히고, 염치와 도가 상하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입니다. 천하의 이해(利害)가 많은데, 그 중에 더욱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은 관리가 탐욕스럽고 더러우며, 훔치고 바라는 것이 번거롭고 무거우며, 재용이 고갈되고, 도적은 많고, 송사는 처리되지 않고, 정사는 뇌물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신은 원컨대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퇴출시키며, 모든 도(道)와 부(部)의 사자를 잘 뽑아서 주현(州縣)을 살피면 조정에는 조리가 있고, 백성들은 병폐를 호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이 다시 돌아온 지 또 10년이 되었는데 늙어서 이문(里門)에 있으면서 다시 바깥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하루도 조정을 잊은 적이 없었고, 그 사이에 말이 시사(時事)에 이르면 혹 강개하고 슬퍼하기를 그치지 못하여 듣는 자들이 대개 마음을 움직이니, 공이 다시 나아가서 끝내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주기를 바랐다. 얼마 안되어 병이 계속되자, 손수 유표(遺表)를 초하여 능침이 있는 지역과 흠종 재궁에 대하여 말하고, 임금이 인주(人主)의 직분을 주위 사람들에게 빌려주면 안된다고 경계하였다. 7년 8월 경인(庚寅)에 훙하자 아들들이 그 글을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슬퍼하였고, 명을 내려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그 등급을 고하였으니, 공의 나이 85세였다.
공은 먼저 웅(熊)씨와 첨(詹)씨를 아내로 맞았고 또 첨(詹)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첨씨는 숙인(淑人)에 봉해졌고 공 보다 1년 후에 역시 훙하였다. 네 아들이 있는데, 원(源)은 통직랑(通直郞)이었고, 한(瀚)은 승무랑(承務郞)이며, 호(浩)는 종정랑(從政郞)이다. 딸은 여섯인데, 승의랑(承議郞) 예치(倪治), 통직랑(通直郞) 오응시(吳應時), 선교랑(宣敎郞) 사원명(謝源明), 승사랑(承事郞) 장주(張鑄), 승사랑(承事郞) 진경산(陳景山)이 그 사위들이다. 셋째 아들과 둘째 딸은 다 일찍 죽었다. 손자가 일곱이고, 손녀가 다섯이다.
공은 천성이 장중하여 종일 엄연(儼然)하였으며, 앉고 서는데 일정한 장소가 있어, 기울어지거나 기댄 적이 없다. 말하고 침묵하는데 항상 절도가 있어 희롱하는 말을 하거나 구차하게 웃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마치 매어 있어 잠시도 편안할 수 없는 듯하였으나 공은 홀로 태연히 종신토록 그렇게 하였다. 비록 제사를 지낸 후 친척끼리 연회를 벌이며 정을 나눌 때라도 잠시나마 변한 적이 없었다. 집안에 있을 때는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지극하였으며, 부부 사이에 서로 존경함이 손님을 대하듯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할 때는 공손하고 믿음이 있었으며, 담박하고 변하지 않았으니, 실로 의(義)가 아니면 한 개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에 가난하여 기장밥도 혹 끼니를 잇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거기에 처해서도 매우 편안했다. 자신의 힘이 미치는 데에서는 부모로 하여금 걱정을 하지 않게 하였다. 늦은 나이에 관리로 입신하고서도 스스로 간소하고 담박한 것을 받들어 예전의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오직 제사에 있어서는 풍성하고 깨끗하게 하였으며, 작은 일이나 큰일 모두를 반드시 몸소 하였다.
주현(州縣)의 벼슬을 할 때는 법을 받들고 이치를 따랐으며, 풍교를 독실하게 숭상하였고, 조정에 있을 때는 조리를 지키고 올바름에 의거하였으며, 사려가 깊었으니, 격렬하게 비방하는 말이나 스스로 드러내는 행동을 하여 자기를 자랑하고 명성을 취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의로 다가갔으니, 오래되면 될수록 상하가 더욱 그를 믿고 감복하였다. 임금이 공을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겨 여러 번 크게 쓸 뜻이 있었다. 그러나 공은 끝내 공손히 물러나서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임금이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반드시 삼가 대답하기를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이재(理財)에 대해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수입을 헤아려 지출해야 합니다’라고 하고, 시종 한 마디에서라도 공리(功利)를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충효대절과 상례나 제례를 지낼 때는, 처음 조책(詔策)을 대했을 때부터 그 단서가 발하고 나서도 종신토록그것을 외웠고, 죽을 때 한 말에 이르기까지도 그것을 놓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공의 이 마음을 받들면 죽어서나 살아서나 마음에 차지 않음이 없으나 남긴 본보기와 교훈은 하늘 땅과 함께 없어졌다고 해도 좋을만하다.
특히 세리(勢利)나 흥폐(興廢)에 담담하여 사람들은 그가 기뻐하거나 성내는 기색을 볼 수 없었다. 군(郡)의 일에 종사할 때 차권(茶券)을 위조한 것을 증험한 적이 있었는데, 아전은 공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공은 사양하여 물리쳤다. 일족의 일을 그만두고 조정의 일을 하였는데, 임안(臨安) 학관(學官)에 결원이 있어 현제의 관리가 시공사(試貢士)로 들어갔는데, 재상이 공에게 그 일을 대신하게 하였다. 시험보는 사람이 나가고 나서 공은 직무를 벗고 떠났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공이 대신한 일은 결원을 돕는 일인데 어찌 스스로 말하여 그것을 자세히 살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결국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일을 맡은 자는 이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다. 왕부(王府)에 있을 때 용대연이 총애를 받았는데, 그 교수들은 그와 친하게 지내며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기도 하였다. 공은 홀로 그와 앉은 적이 없었고, 조석으로 그를 만나면 읍하고 물러났다. 그 후 그 교수들은 대부분 그 힘을 입었는데, 공만이 관직을 옮기지 못했다. 사업(司業)이 되었을 때 무성묘(武成廟)에 지초(芝草)가 났는데, 관리들이 알리기를 청했다. 공이 대답하지 않으니 몰래 그림을 그려서 바쳤다. 재상이 우두머리 둘을 불러 꾸짖기를 “치세(治世)의 길조인데 저지하고 아뢰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하니 좨주 주관(周綰)은 대답하지 않았고, 공은 그 그림을 가리키며 대답하기를 “치세에 이것을 어디에 씁니까?”라고 하였다. 주관이 물러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황공의 말은 정확하고 적절하며 간단하여 그를 간쟁관(諫諍官)을 시키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재상이 여러 달관들을 거느리고 불서(佛書)를 나누어 베끼도록 하여 육화탑(六和塔) 아래 돌에 새기도록 하였다. 공은 할 수 없다고 사절하고, 두 번을 청했는데도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이단에 미혹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감히 사사로운 일을 간섭하지 않지만 공은 처음부터 굳이 그것을 막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촉(蜀)의 선비가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동급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부끄러워하고 업신여겼다. 공만이 자신을 후하게 대해주는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으나 공은 또한 그 사람만을 후하게 대하려는 뜻을 가진 적이 없었다. 특히 선비를 추천하는 것을 좋아하여 첨사(詹事) 왕십붕(王十朋), 사인(舍人) 장진(張震)이 모두 공이 불러온 사람들이다. 장충헌공(張忠獻公), 태위(太尉) 유기(劉錡)가 다시 등용된 것도 공의 힘이 컸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알린 적이 없어 여러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마을에 거한지 전후로 15년 간 죽은 이를 거두고 고아를 구휼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어 도움을 받은 자가 많았으나 공은 스스로 덕을 베푼 기색을 낸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문에 번거로운 손님이 없었으나, 고을과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만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몸소 함께 예를 갖추어 큰 손님을 대하듯 하였다. 정성스러운 교훈의 말은 반드시 효제충신에 의거하였으니, 나이가 많다고 하여 해이한 마음이나 게으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대개 공의 타고난 바탕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 천하의 사물은 이미 그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었으며, 천하의 의리(義理)에 대한 학문은 또 모두 문변(問辨)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그 대체(大體)를 알았다. 또 그의 성의(誠意) 궁행(躬行)은 또 혼연하여 억지로 힘쓰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또 겸손하고 성실하여 특히 빈말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므로 당세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친히 가르침을 받아서 얻음이 있으면, 흔연히 심복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아! 이른바 말은 어눌하면서도 행동은 민첩하다는 것이나 실질이 명성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공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후계자인 아들 원(源)이 8년 10월 신유(辛酉)에 공을 소무현(邵武縣) 인택향(仁澤鄕) 경친리(慶親里)의 거주하는 집의 북쪽 석기원(石歧原)에 장사지내려고 하면서, 그 아우 한(瀚)을 시켜 공의 행사를 글로 써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본래 공의 덕을 우러러보고 있었고, 공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매우 후하였으며, 또 일찍이 명을 받아 그 선대부와 선부인의 묘에 지를 썼으니 또 어찌 사양하겠는가? 이에 삼가 그 일을 차례대로 정리하여 명을 쓴다. 공의 묘는 의 살던 집 북쪽에 있는 석기원(石歧原)에 있으니, 12월 초닷새에 장사지냈다. 그 묘지명에 말하기를,
천하 국가의 일 어느 것이 당면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이 그 근본이 되는가? 몸이 그곳이네. 사물의 이치 중에 그 궁극을 손꼽아 헤아리면, 그 대체는 무엇인가? 효와 충일 뿐이라네. 내가 황공을 보니 하늘이 순하고 두터운 법을 내려주셨네. 근본을 세워 스스로 행하니, 그 앎에 대체가 있네. 생각을 엄숙하게 하고 공평함과 순함을 실천하였네. 성덕(盛德)이 겉으로 드러나 음성과 용모에 드러났도다. 집안에는 효행과 덕행을 실천하고, 나라에는 성심을 다했네. 상례를 정중히 하고 제례를 후하게 했으니, 잘못을 남기지 않았네. 근본은 깊고 말단은 무성하니, 큰 줄기가 들리면 세세한 것들은 그를 따라 들리는 것이지. 행실은 당세를 넉넉하게 하였고, 말씀은 보귀(寶龜)가 되었네. 양조에 출입하였으나 시종 한뜻이었네. 더불어 응대할 수 있었고 신(神)을 도울 만 했으며, 표리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궁구하지 못하였으니 군자가 그를 애석해하네. 무덤에 명문을 새기니 오직 진실함만으로 하였네.
公姓黃氏, 諱中, 字通老. 其先有諱膺者, 自光州固始縣入閩, 始家邵武. 至公間十有二世矣. 公之曾大父汝臣, 不仕. 大父豫, 假承務郞. 父崇, 贈金紫光祿大夫. 母游氏, 追封建安郡夫人.
公生穎悟端慤, 少長受書, 不過一再讀, 已輒黙然危坐竟日, 而書悉已成誦. 建安從父兄定夫先生愛其厚重, 亟稱之. 踰冠入太學, 道僞楚之亂, 卽日自屛居外. 旣而邦昌果遣學官致僞詔藥物勞諸生, 公以前出, 故無所汚. 建炎再造, 族祖父輔政, 薦補修職郞․御管使司幹辦公事. 紹興五年擧進士, 對策廷中, 極論孝弟之意, 有以動聖心者. 遂以第二人賜第, 授左文林郞․保寧軍節度推官, 改宣義郞, 主管南外敦宗院. 代還, 秦丞相檜方用事, 察公意不附己, 差通判建州事. 遭喪, 服除, 復差通判紹興府. 時公擢第餘二十年, 士友莫不以遷徙滯留爲公嘆息, 而公處之泊如也. 檜死, 公道開, 天子記公姓名, 乃召以爲秘書省校書郞․兼實錄院檢討官, 遷著作佐郞, 兼普安恩平郡王府敎授. 遷司封員外郞, 兼權國子司業, 滿歲爲眞. 充二十八年賀金國生辰使, 還爲秘書少監. 尋除起居郞, 兼權中書舍人. 權工部侍郞, 兼侍講. 兼權吏․兵部侍郞, 權禮部侍郞. 踰年, 去權卽眞.
公使虜時, 虜已作治汴宮, 秘書少監沈介以賀正使先歸, 不敢言. 公還, 獨言汴中役夫萬計, 宮寢畢備, 此必欲從居以見迫, 不可不早自爲計. 時約和久, 中外解弛, 無戰守備. 上聞矍然, 而宰相顧曰:‘沈監之歸, 屬耳殊不聞此, 何耶? ’因不復以公言爲意. 居數日, 公複往白, 請以妄言卽罪. 右相湯思退, 至以語侵公. 公不爲動, 已乃除沈吏部侍郞, 而從公以補其處. 公猶以邊備爲言, 又不聽, 則論補外. 上不許, 曰:‘黃中可謂恬退有守矣.’ 於是有左史之拜, 錫以鞍馬, 非故事也.
顯仁太后上僊, 有司以辰日罷朝夕哭. 公爭之曰:‘此非經. 且唐太宗猶以是日哭其臣, 况臣子於君母乎? ’及殯, 有司又以權制已訖, 請百官以吉服行事. 公又曰:‘唐制, 殯在易月之內, 則其禮曰百寮各服其服. 至敗殯, 則雖在易月之外, 而猶曰各服其初服. 今以易月故而遂吉服以殯, 非禮也.’
在工部, 以御前軍器所領屬中人, 其調度程品工部軍器監不得與, 非祖宗法, 奏請改之, 不報. 嘗迓虜使, 使者當謝錫宴, 故以天暑爲辭, 請拜宇下. 公持不可, 乃拜廷中, 遂送之還. 又言:‘聞虜日繕兵不休, 且其重兵皆已南下, 宜有以待之.’ 親饗明堂, 請毋新幄帟, 毋設四輅, 以節浮費, 詔從之.
三十一年, 金使來賀天申節, 遽以欽宗皇帝訃聞, 且多出不遜語. 諸公不知所爲, 欲俟其去乃發喪. 公聞之, 馳白宰相:‘此國家大事, 臣子至痛之節, 一有失禮, 謂天下後世何? 且使人或間其故, 將何以對? ’於是竟得如禮. 始, 公自使還, 至是三四年間, 每進見, 未嘗不以邊事爲言. 至是, 又率諸同列請對, 諭決策用兵事, 莫有同者. 公乃獨陳備禦方略. 上始善其言, 然不數月, 而金亮已擁衆渡淮矣. 公適以遷禮曹入謝, 因論淮西將士不用命, 請擇大臣督諸軍. 旣而以殿帥楊存中爲御營使, 公又率同列論存中不可遣狀甚力. 虜騎臨江, 朝臣震怖, 爭道家逃匿, 公獨晏然如乎日. 家人亦朝暮請行, 公初不答. 已而曰:‘天子六宮在是, 吾爲從臣, 若等欲安適耶? ’比虜退, 唯公與左相陳魯公家在城中, 衆皆慚服.
於是車駕將撫師建康, 而欽宗未祔廟, 留守湯思退請省虞速祔而釋服以行. 公持不可, 上納用焉, 而議者猶讀凶服不可以卽戎. 上曰:‘吾因以縞素詔中外矣.’ 卒從公言. 旣行, 留司百官吉月當入臨, 思退復議罷之. 公又力爭, 得不罷. 比作主, 當瘞重. 公又以初服請. 右相朱倬不可, 曰:‘徽孝大行有故事矣.’ 公曰:‘此前日之誤, 今所富改, 奈何復因之乎? ’倬因妄謂上意實然, 臣子務爲恭順可也. 公曰:‘責難於君, 乃爲恭耳.’
虜以易王, 後來修好, 且責臣禮及新復四郡, 迓者以聞. 因曰土彊實利, 不可予, 禮際虛名, 不足惜也. 公聞之, 亟奏曰:‘名定實隨, 百世不易, 不可謂虛;土彊得矢, 一彼一此, 不可謂實. 議者言非是.’ 上然之, 已而有詔問侍臣足食足兵之計, 公言: ‘今天下財賦半入內帑, 有司莫能計其盈虛. 請用唐德宗楊炎之策, 歸之左藏.’ 上亦善之, 然未及行也.
未幾, 今天子受裡. 公自以舊學老臣, 當盡規戒, 且察左右有以術數惑上聽者, 則具以堯․舜․禹․湯․文․武․周․孔所傳正心誠意․致知格物之說爲上陳之. 會給筆札侍臣, 論天下事. 公旣條上, 且申前奏, 極論內帑之弊. 於是有詔, 更以內藏激賞爲左藏南庫. 明年, 復以災異, 命近臣言闕政. 公曰:‘前給筆札, 羣臣對甚悉, 意者陛下當力行之. 今什未一二施行, 又何以多言爲哉? ’已而有詔, 太上皇后之命得以聖旨爲稱. 公引故典爭之, 不得. 宰相建遣王之望使虜約和, 公又論之, 亦不從.
天申上壽, 議者以欽宗服除, 當擧樂. 公曰:‘臣事君猶子事父. 禮, 親喪未葬不除服. 春秋君弑賊不討, 則雖葬不書, 以明臣子之罪. 况今欽宗實未葬也, 而可遽作樂乎? ’旣奏言之, 又引永祐龍輴未返時事白宰相. 左相湯思退曰:‘時已遣使迎奉, 故輟樂以待. 今則未也.’ 公曰:‘此又誰之責耶? ’右相張公亦曰:‘今爲親故, 不得以前日比.’ 公曰:‘太上皇帝於欽宗親弟昆, 且嘗北面事之, 有君臣之義, 尤恐非所安也.’ 退具草, 將復論之, 詞益壯. 廟堂憚公議正守堅不可屈, 事乃得寢.
嘗兼國子祭酒, 又兼給事中, 詔敕下者, 問理如何, 未嘗顧己徇人, 小有回屈. 內侍李綽․徐紳․賈竤․梁珂遷官不應法, 諫官劉度坐論近習龍大淵忤旨補郡, 巳復罷之. 公皆不書讀, 左右已深忌之. 居數月, 曾安穆皇后家墳寺當得賜田, 而僧遂奪取殿前軍所買田以自入, 軍士以爲言. 事下戶部, 尙書韓仲通不可, 而侍郞錢端禮獨奉予之. 公復封上, 羣小因是相與媒聾, 遂以特旨罷公. 中書舍人馬騏方上疏請留, 而言事官尹穡希意投隙, 詆公爲張公黨, 騏後亦不能自堅也.
明年乾道改元, 公年適已七十矣, 卽移文所居邵武軍告老. 除集英殿修撰致仕, 進敷文閣待制. 居六年, 一日, 上思公, 將復用之. 因御講筵, 顧侍臣曰:‘黃中老儒, 今居何許? 年幾許? ’意其筋力或未衰也, 於是召公赴闕. 公不得辭, 强起. 比入都門, 觀者如堵. 引對內殿, 問勞甚寵. 時用事者方以權譎功利日肆姦惡, 公因復以前奏正心誠意․致知格物者爲上精言之. 又言:‘比年以來, 言和者忘不共戴天之讎, 固非久安之計; 而言戰者徒爲無顧忌大言, 又無必勝之策. 必也暫與之和而亟爲之備, 內修政理而外觀時變, 則庶乎其可耳.’ 上皆聽納. 以爲兵部尙書兼侍讀, 每當入直, 上常先造人候視, 至則亟召入, 坐語從容. 如是數月, 月必一再見. 公知無不言, 其大者則迎請欽宗梓宮, 罷天申錫宴也.
公前在禮部, 論止作樂事, 公去卒用之. 至是又將錫宴, 公奏申前說, 且曰:‘三綱五常, 聖人所以維持天下之要道, 不可一日無. 欽宗梓宮遠在沙漠, 臣子未嘗一言及之, 獨不錫宴一事僅存, 如魯告朔之餼羊爾. 今又廢之, 則三綱五常掃地而盡, 陛下將何以責天下臣子之不盡忠孝於君親哉? ’已而謂遣中書舍人范成大使虜, 以山陵爲請. 公又奏曰:‘陛下聖孝及此, 天下幸甚. 然置欽廟梓官而不問, 則有所未盡於人心. 且雖夷狄之無君, 其或以是而鏡我矣.’ 上善其言而不及用, 虜於是果肆漫言, 人乃服公之論正而識早也. 它所論建, 如作曾計錄, 罷發運使, 及民間利病․邊防得失甚衆.
蓋公之復來, 庶幾得以卒行其志, 而上意鄕公亦益厚. 至是不能卒歲, ‘又以言不盡用, 浩然有歸志. 然猶未忍決求去也, 乃陳十要道之說以獻. 日用人而不自用者, 治天下之要道也; 以公議進退人材者, 用人之要道也;察其正直納忠․阿諛順旨者, 辨君子小人之要道也; 廣開言路者, 防壅蔽之要道也;考析事實者, 聽言之要道也; 量入爲出者, 理財之要道也;精選監司者, 理郡邑之要道也; 痛懲贓吏者, 恤民之要道也; 求文武之臣, 面陳方略者, 選將帥之要道也; 稽考兵籍者, 省財之要道也. 上亟稱善, 公遂以乞身爲請, 祈懇甚力. 上不能奪, 以爲顯謨閣學士․提擧江州太平興國宮, 內出犀帶․香茗以賜. 旣歸, 再疏告老, 遂以龍圖閣學士致仕. 其後上意猶欲用公, 以公篤老不敢召, 則手爲書, 遣使訪公以天下利筈․朝政闕失, 進職端明殿學士, 且以銀絹將之. 公受詔感激, 拜疏以謝, 略曰:‘朝政之闕失多矣, 其尤矢者, 君子在堙, 小人在位, 政出多門, 言路壅塞, 廉耻道喪, 貨賂公行也. 天下之利害多矣, 其尤害民者, 官吏貪墨, 賦歛煩重, 財用匱竭, 盜賊多有, 獄訟不理, 政以賄求也. 臣願進君子, 退小人, 精選諸道使者, 以察州縣, 則朝政有經, 民不告病矣.’
公之復歸又十年, 婆娑里門, 無復外事. 然其心未嘗一日忘朝廷, 間語及時事, 或慷慨悲辛不能已, 聞者蓋動心焉, 尙冀公之復起而卒有以寤上心也. 旣而屬疾, 手草遺表, 猶以山陵境土․欽廟梓宮爲言, 而深以人主之職不可假之左右爲戒. 淳熙七年八月庚寅薨, 諸子上其書, 上爲悲悼, 詔以正議大夫告其弟, 蓋公之年八十有五矣.
公先娶熊氏․詹氏, 又娶詹氏, 封淑人, 後公一年亦薨. 四子, 源, 通直郞; 瀚, 承務郞; 浩, 從政郞. 六女, 承議郞倪冶․通直郞吳應時․宣敎郞謝源明․承事郞張鑄․宣義郞陳景山其婿也. 第三子及第二女皆夭. 孫男七人, 女五人.
公天性莊重, 終日儼然, 坐立有常處, 夫嘗傾側跛倚;語黙有常節, 夫嘗戱言苟笑. 它人視之若有所拘縶而不能頃刻安者, 公獨泰然以終其身, 雖在燕私, 亦未常須臾變也. 居家孝友篤至, 夫婦相敬如賓. 與人交恭而信, 淡而久, 苟非其義, 一介不取諸人, 亦不以予人. 少時貧窶, 炊黍或不繼, 而處之甚安. 至其力所可致, 則亦不使親與其憂也. 晩歲宦達, 而自奉簡薄, 不改於舊. 惟祭祀, 則致豐潔, 細大必身親之.
仕州縣奉法循理, 敦尙風敎. 在朝廷守經居正, 思深慮遠, 不爲激訐之言․表襮之行以矜己取名. 然誠意所格, 愈久而上下愈信服之. 上雅敬重公, 婁有大用意, 而公卒不少貶以求合. 上問進取, 必謹對曰先自治; 問理財, 必謹對日量入爲出, 始終一說, 未嘗少及功利. 至於忠孝大節, 敬終追遠之際, 則自始對詔策已發其端, 而終身誦之, 至於垂絶猶不置也. 嗚呼悲夫!推公此心, 可謂無歉於幽明, 而其法式之所存, 雖與天壞相弊可也.
尤恬於勢利, 興廢之間, 人莫見其喜慍之色. 爲郡從事時, 驗茶券有僞者, 吏白公當受賞, 公謝却之. 罷惇宗而造朝也, 臨安學官有缺員而見官入試貢士, 宰相俾公攝罵. 試者出, 公卽解印去. 其人曰:‘公所攝黨缺員, 盍亦自言以審之乎? ’公不顧, 用事者以是惡之. 在王府時, 龍大淵已親幸, 它敎授或與過從觴詠. 公獨未嘗與之坐, 朝夕見, 則揖而退. 其後它敎授多蒙其力, 而公獨不從官. 爲司業時, 芝草生武成廟, 官吏請以聞. 公不答, 則陰畫以獻. 宰相召長貳語之, 曰:‘治世之瑞, 抑而不奏, 何耶? ’祭酒周公綰末對, 公指其畫曰:‘治世何用此爲? ’周退, 謂人曰:‘黃公之言精切簡當, 惜不使爲諫靜官也.’ 宰相率諸達官分寫彿書, 刻石六和塔下. 公謝不能, 請至再, 終不與, 其不惑異端又如此.
其涖官人莫敢干以私, 然公初未嘗有意固拒之也. 蜀士有仕於朝者, 同列多靳侮之. 獨感公遇己厚, 然公亦未嘗有意獨厚之也. 尤喜薦士, 如王詹事十朋․張舍人震, 皆公所引. 張忠獻公․劉太尉錡之復用, 公力爲多. 然未嘗以告人, 諸公或不之知也.
致事里居前後十五年, 收死恤孤, 振貧繼絶, 蒙賴者衆, 而公未嘗有自得之色. 平居門無雜賓, 邑里後生有來見者, 躬與爲禮, 如對大賓. 諄諄敎語, 必依於孝弟忠信, 未嘗以爵齒自高而有懈意惰容. 蓋公生質粹美, 天下之物旣無足以動其心, 其於天下之義理又皆不待問辯而已識其大者. 若其誠意躬行, 則又渾然不見其有勉彊之意. 而謙厚感實, 尤以空言爲耻, 以故當世鮮克知之. 然親炙而有得島, 則未有不厭然心服者. 嗚呼!所謂訥言敏行․實浮於名者, 公其是與!
嗣子源將以八年十月辛酉葬公於邵武縣仁澤鄕慶親里居第之北石歧原, 而使其弟瀚狀公行事, 屬某識焉. 某素仰公德, 而公所以敎誨之者亦甚厚, 且嘗受命以識于先大夫先夫人之墓矣, 其又何辭? 乃敬序其事而銘之. 銘曰:
天下國家, 執匪當務? 曷爲斯本? 身則其處. 事物之理, 指數莫窮. 曷其大者? 維孝與忠. 我觀黃公, 夫男淳則. 植本自窮, 有大其識. 儼其若思, 履衡膰從. 監德之表, 見于聲容. 烝烝于家, 懇懇于國. 敬終厚遠, 靡有遺貸. 根深末茂, 綱擧目隨. 行滿當世, 言爲寶逸. 出入兩朝, 初終一意. 酬酢佑神, 隱顯一致. 用而不究, 君子惜之. 刻辭幽宮, 維以質之!
무경대부 조공 묘지명[武經大夫趙公墓誌銘]
공의 휘는 모(某)이고 자는 몽주(夢周)이며, 송 태종(太宗) 황제의 6세손이다. 그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태사(太師)에 증직되었고, 한(韓)․성(成) 이국(二國)의 왕으로 추증되었으니, 이러한 일은 모두 국사에 보인다. 부친은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죽었는데, 중봉대부(中奉大夫)를 증직하였다.
공은 교사은보성충랑(郊祀恩補成忠郞)으로 목친택(睦親宅)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자립할 수 있게 되어서는 학문을 하기를 뜻에 새기고 문자로 세상에 이름을 이루고자 했다. 난을 만나 옮겨 살게 되어 그 뜻을 성취할 수 없었다. 나이가 약관이 되어서는 상주(常州) 의흥현(宜興縣)의 세금을 감독하는 일을 하였다. 이때 난리가 평정되지 않아 도로가 험했는데, 공은 통행세를 관리하는데 가혹하게 하지 않아 왕래하기에 편하게 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홀로 한 방에 거했는데 날마다 책을 읽고 거문고를 치는 것을 일삼았고 다른 기호는 하나도 없었다. 동료가 그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없어 사람을 시켜 몰래 엿보게 하고나서는 곧 믿고 따랐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장수(張守) 역시 그가 어짊을 알고 다시 요주(饒州) 영평감(永平監)으로 삼았다. 구법(舊法)에는 과졸(課卒)은 땅에 버려진 구리를 씻어서 가져다가 주전(鑄錢)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였는데, 만근(萬斤)이 되면 그 때마다 그 노력을 써서 상을 받았다. 앞뒤 사람이 서로 이어받았는데, 헤아리고 감독하는 것이 엄격하여 노역을 하는 사람이 그것을 싫어하였다. 공이 와서는 홀로 탄식하기를 “다른 사람을 마르게 하고 나는 살찌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고 하고는 재빨리 그것을 없애버리고는 다른 비용을 아껴서 그 용도를 충당하였다. 태수 동운(董耘)이 그를 어질게 여겼고, 또 그 사장(詞章)을 아껴서 조정에 천거하여 문관의 자격과 경력을 바꾸도록 청하니 끝내 물리치지 않았다. 신(信)의 과양(戈陽)에 거주하였는데, 일시에 명성이 나서 보수를 많이 주면서 다투어 맞아들였고, 또 자제를 보내어 종유하게 하였다. 그렇게 오래되자 사관(祠官)을 자청하여 화주(華州) 운대관(雲臺官)을 주관할 수 있게 되어 비로소 소무(邵武)에 와서 살게 되었다. 당시 중서사인(中書舍人) 왕양(王洋)이 지군사(知郡事)였는데, 특히 깊이 예경(禮敬)하고 함께 시사(詩詞)를 서로 주고받으며 왕래하여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임기가 다 차서 건창군(建昌軍) 병마도감(兵馬都監)이 되었다. 군수(郡守)가 그 청렴함을 알고는 금고의 출납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다시 군수(郡守)가 감천주군(監泉州軍) 사적사(司糴事)를 시켰다. 공이 전에 쌓아둔 것이 좀이 먹고 헤진 것을 알고는 탄식하기를 “이러한 것을 따라하는 것은 나는 참으로 할 수 없다. 그것을 바로잡으려면 그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이 분명 많을 것이니, 내가 어찌 화의 발단을 만들겠는가?”라고 하고는 힘껏 그것을 사양했다. 그리고 나서 그를 대신해 부임한 자가 과연 화를 면하지 못하니, 그것을 들은 자들이 탄복하였다.
늦게 다시 복건로(福建路) 병마검할(兵馬鈐轄)이 되었고, 관직을 더하여 무경대부(武經大夫)에까지 이르렀는데, 나이 73세에 순희 6년 7월 모일에 병으로 졸하였다. 공은 공인(恭人) 만(滿)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모관 중행(中行)의 증손녀다. 아들 다섯이 있는데, 선준(善俊)은 조의대부(朝議大夫)․직용도각(直龍圖閣)․지노주(知盧州)․주관회서안무사공사(主管淮西安撫司公事)를 역임하였고, 선우(善佑)는 조산랑(朝散郞)․지상덕부사(知常德府事)를, 선의(善儀)는 병의랑(秉義郞)을, 선임(善任)은 승절랑(承節郞)을, 선걸(善傑)은 충익랑(忠翊郞)을 역임하였는데, 선임은 일찍 죽었다. 딸은 일곱인데, 그 중에 둘은 역시 요절하였다. 다섯은 종정랑(從政郞) 등조유(鄧祖攸)․적공랑(迪功郞) 양정(楊珵)․이인(李絪)․황조(黃造)․사마섭(司馬(섭)이 그 사위들이다. 손자와 손녀가 둘씩인데 모두 어리다.
다음해 여러 아들들이 공의 널을 받들어 소무현(邵武縣) 신둔(新屯) 서택(西宅)의 들에 장사지내고, 사장(事狀)을 이와 같이 써서 사람을 보내어 묘지명을 부탁했다. 나는 공의 사람됨이 욕심이 없고 마음이 담백하고 넓으며, 젊어서부터 청렴함을 스스로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평소에는 노여운 안색을 띤 적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기를 매우 싫어하였다. 급박한 어려움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구휼해 주어 유무(有無)를 따진 적이 없었다. 태평(太平)공의 족간에서 생장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습관을 하지 않았다. 관직을 따라 이르는 데마다 한결같이 인(仁)과 서(恕)와 측은한 마음을 가졌다. 비록 처지가 낮아서 그 뜻을 다 행하지 못하더라도 일에 따라 사물에 미쳐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었다. 만(滿) 공인(恭人)은 어진 행실이 있어, 여러 아들이 모두 문학(文學)으로 칭송받았다. 또 회서(淮西)와 상덕(常德)은 이어서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모두 공이 병이 없을 때에 지위가 높아지고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공은 늦게 다시 첩을 들였으므로 다시는 집안일을 묻지 않았고, 마음껏 바둑과 술로 스스로 즐기면서 장수하다가 죽었다. 아! 이로서 또한 서운함을 없앨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이에 그 행장을 살펴보고 묘지명을 쓴다.
오직 다른 사람의 노고를 풀어주고 차라리 자신이 나아갔다. 어찌 자신이 청렴하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어려움에 빠지게 하겠는가? 인부(人夫) 조(趙)공이 그 무덤을 택하였으니, 나는 이 돌에 새겨서 그 죽음을 고한다.
公諱某, 字夢周, 有宋太宗皇帝之六世孫也. 其曾大父某, 大父某, 皆爲開府儀同三司․贈太師, 追王韓․成二國, 事皆見國史. 父某, 擧進士中第, 未及仕而卒, 贈中奉大夫.
公生睦親宅, 以郊祀恩補成忠郞. 少孤, 能自植立, 刻意爲學, 欲以文字成名於世. 遭亂轉徙, 不克遂其志. 年甫冠, 調監常州宜興縣稅. 是時寇難未夷, 道路艱棘, 公治征算不以苛皦爲事, 往來便之. 在官獨居一室, 日以讀書鼓琴爲事, 一無他嗜. 同寮莫測其所爲, 至使人陰伺之, 已乃信服. 參知政事張公守亦知其賢, 更以爲饒州永平監. 舊法, 課卒淘土取棄銅以益鑄用, 數登萬斤, 輒書勞受賞. 前後相承, 程董峻切, 役者病之. 公至, 獨歎曰:‘瘠人肥己, 吾弗忍也.’ 亟罷去, 而節他費以足用. 守董耘賢之, 且愛其詞章, 薦於朝, 請爲易文資, 不果去. 居信之弋陽, 一時名勝爭迎致館穀, 且遣子弟從之遊. 久之, 自請爲祠官, 得主管華州雲臺觀, 始來居邵武. 時中書舍人王洋知軍事, 尤深禮敬, 與酬唱往來, 稱嘆不置. 秩滿, 爲建昌軍兵馬都監. 郡守知其廉, 帑藏出納悉以諉之. 復監泉州軍郡使司糴事〔一〕. 公知前積蠹弊, 歎曰:‘踵是則吾固不能, 正之則蒙其辜者必衆, 吾豈爲禍始乎? ’因力辭之. 旣而有求代其任者, 果不免, 聞者歎服.
晩再爲福建路兵馬鈐轄, 累官至武經大夫, 行年七十有三, 淳熙六年七月某日以疾卒. 公配恭人滿氏, 某官中行之曾孫女. 子男五人: 善俊, 朝議大夫․直龍圖閣․知廬州․主管淮西安撫司公事;善佐, 朝散郞․知常德府事;善儀, 秉義郞;善任, 承節郞;善傑, 忠翊郞, 而善任蚤卒. 女七人, 其二亦夭〔二〕. 其五人, 則從政郞鄧祖攸․迪功郞楊珵․李絪․黃造․司馬(辶+艹+●)其壻也. 孫男女各二人, 皆幼.
明年, 諸孤特奉公柩葬于邵武縣新屯西宅之原, 而書其事狀如此, 使人來請銘. 熹雅聞公爲人恬淡寬博, 自少以廉謹自將. 平居未嘗有慍色, 尤不喜言人過. 以急難告者必周之, 未嘗計有無也. 生長太平公族間, 不爲華靡之習. 從宦所至, 壹以仁恕測怛爲心. 雖勢卑不得盡行其志, 然其隨事及物, 亦足以見其胸中所存者. 滿恭人有賢行, 諸子皆以文學稱. 而淮西, 常德連中進士第, 皆及公爲恙時, 被遇通顯, 知名當世. 公晩更得閒適, 因不復問家事, 顓用棋酒自娛而老壽以沒. 嗚呼, 是亦可以無憾也夫!乃考其狀敍而銘之. 銘曰:
唯紓人之勞, 寧郤己之進. 豈日己之廉, 而速人以病? 仁夫趙公, 有睪其宮. 我銘斯石, 以詔其終.
〔一〕軍: 原缺, 據宋浙本․明天順本․萬曆本補.
〔二〕其二: 原缺, 據宋浙本․明天順本補.
부인 서씨 묘지명[夫人徐氏墓誌銘]
부인 서(徐)씨는 온주(溫州) 서안현(瑞安縣) 사람으로 대대로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부인은 유순하고 맑고 바르게 타고나 부모가 그를 아껴 마땅히 시집갈 곳을 골라서 군(郡)의 사람 장군(張君)을 배필로 맞았다. 혼인하고 나서는 시부모를 예를 다하여 섬겼다. 아침저녁으로 의복과 음식, 추위와 더위가 적절한지를 정중히 여쭈어 맞춰주었고, 시부모가 먹지 않으면 감히 먹지 않았고, 자지 않으면 감히 자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성격이 엄중하여 일이 그 뜻에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종일 기뻐하지 않아 주위에서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부인만이 편안히 즐겁게 모셔 그 뜻을 만방으로 풀어드렸다. 그 말과 웃음이 평상시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감히 물러났다. 이렇게 하기를 18년이었는데, 인근의 친족들이 보기에 하루도 해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몹시 슬퍼하여 상복을 이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장군의 집안은 본래 재산이 풍족하고 빈객을 좋아하였다. 중간에 조금 가난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친구들이 집을 지나가면 번번이 요리를 하고 찬을 갖추어 서로 즐겨 마시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다. 객이 집에 머물면 열흘이나 한 달이 되어도 싫어하지 않았다. 부인은 의식을 절약하여 그 쓰임을 싫은 기색 없이 받들어 장군이 집안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장군을 도와 아들들을 가르쳐 모두 문행(文行)이 있었다. 장남 양경(揚卿)이 진사에 급제하고 나서 주현(州縣)에서 관직을 관직을 맡았는데, 돈후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모든 일을 자세히 익혀서 제공(諸公)과 장자(長子)들이 알아주었다. 장군은 이로 인하여 태상경수운보승무랑(太上慶壽恩補承務郞)으로 치사하였고, 장수하면서 자손들이 앞에 가득하니, 고을 사람들이 영예로 삼았다. 그러나 부인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오래 전이다.
대개 부인은 소흥 26년 12월 OO에 졸하니 향년 55세였다. 모두 3남 3녀를 낳았는데, 양경(揚卿)의 동생은 진경(振卿)과 O경(卿)이라고 하며, 딸 가운데 큰 딸과 작은 딸은 일찍 죽고, 가운데 딸은 성충랑(成忠郞)․감좌장서고(監左藏西庫) 임용(林鏞)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여덟이고, 손녀는 여섯이다. 부인이 졸한지 4년 후에 선고(先姑) 주(周)씨의 무덤에 같이 부묘(祔廟)하였다.
또 25년이 지나서 양경이 종정랑(從政郞)으로 남강군학(南康軍學)의 교수(敎授)가 되었는데, 나와 함께 협조하여 일을 하며 서로 잘 지냈다. 하루는 부인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양경의 녹은 이미 어머니께 드릴 수가 없으니 밤낮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만일 그 행실의 아름다움을 장래에 알릴 수가 없으면 불효의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감히 삼가 읍하며 청하니 부자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명을 써주시면 이는 저로 하여금 부모를 잃지 않게 하여 죄를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음해에 군에 갔는데, 양경이 또 편지를 보내어 내버려두지 말 것을 청하니, 이에 그 일을 차례로 서술하고 묘지명을 쓴다.
효를 다하고 공경을 다하였고, 또 검소하고 부지런하였으니, 하늘이 무엇으로 그것을 갚았는가? 아들이 문(文)으로 빼어난 것이네. 생애는 짧으나 경사(慶事)는 길고, 쌓은 것은 많은데 잔치는 인색하네. 묘지명을 써서 바로잡으니 백세에 빛나리라.
夫人徐氏, 溫州瑞安縣人, 世隱德不仕. 夫人生柔順靜正, 父母愛之, 擇所宜歸, 以配郡人張君某. 旣歸, 事舅姑盡禮. 晨夕敬問衣服食飮寒煥之宜而節適之, 舅姑未食不敢食, 未寢不敢寢. 姑性嚴重, 事有不可其意, 終日不懌, 左右莫能近. 夫人獨從容娛待, 所以開釋其意者萬方. 俟其語笑復常, 乃敢退. 如是者十有八年, 鄰里親族覵之, 不見其一日懈也. 舅姑沒, 哀毁不勝衰.
張君家故饒財, 喜賓客. 中歲少窶約, 然不以屑意. 朋舊過門, 輒飭庖具饌, 相與樂飮如故時. 館客於家, 至或旬月不厭. 夫人節衣食以奉其費無難色, 不使張君知其有異於前也. 佐張君敎諸子, 皆有文行. 旣而其長揚卿遂登進士第, 仕州縣以敦樸詳鰊爲諸公長者所知. 張君由此, 亦以太上慶壽恩補承務郞而致其事, 老壽家居, 子孫滿前, 鄕鄰以爲榮. 而夫人已不及見久矣.
蓋夫人以紹興二十六年十二月□□□卒, 享年五十有五. 凡生三男三女, 揚卿之弟曰振卿, 曰□卿;女伯季蚤卒, 仲適成忠郞․監左藏西庫林鏞. 孫男八人, 女六人. 卒後四年, 乃克祔於先姑周氏之塋.
又二十有五年, 而揚卿以從政郞爲南康軍學敎授, 與予聯事相好也. 一日, 狀夫人之行以告曰:‘揚卿之祿已不得逮其母, 日夜痛于厥心. 如又不能有以表其行實之懿於方來, 則不孝之罪死有餘責. 敢敬泣拜以請, 天子幸哀而予之銘, 是使揚卿得以不死其親而免於戾也.’ 予辭謝不獲, 而未及爲. 明年去郡, 揚卿又以書來請不置, 乃序其事而銘之. 其詞曰:
旣孝旣敬, 又儉以勤. 天曷報之? 子秀而文. 生短慶長, 儲豐饗嗇. 銘以訂之, 百世其澤!
유씨 누이 묘지명[劉氏妹墓誌銘]
신유양승건안(新瀏陽丞建安) 유자상(劉子翔) 언집(彦集)의 처 오군(吳郡) 주(朱)씨는 선태사(先太史) 이부부군(吏部府君)의 딸이고 나의 여동생이다. 사람됨이 꾸밈이 없고 진실하여 어려서부터 함부로 말하거나 성난 안색을 보지 못했다. 태어난 지 5년 만에 부친을 잃었고, 어머님이 그를 사랑해주셨다. 나이 21세에 유(劉)씨에게 시집갔는데, 시아버지 대부공(大夫公)을 예의와 공경, 신칙함으로 섬겨 아래로 곁에서 모시고 자신을 굽혀서 따르며 뜻을 맞추니, 다른 사람들은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대부공이 돌아가시자 언집을 도와 가사를 다스려 부지런하고 검약하며 게으르지 않았다. 여러 아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치며 사랑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아랫사람에게는 인정이 있었고, 집안의 관리는 온화하였다. 나이 43세로 순희8년 2월 을미(乙未)에 병으로 졸하였다. 아들 둘이 있는데, 근(瑾)과 전(瑱)은 모두 장사랑(將仕郞)이다. 딸 둘은 혼인하지 않았다. 언집은 이해 10월 신유(辛酉)에 그 널을 숭안현(崇安縣) 서쪽 3리 대부공의 묘소 왼쪽 약간 떨어진 곳에 묻고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묘지명을 쓰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형제가 적고 선군이 남기신 딸은 이 여동생 하나뿐이다. 나는 이미 산간에 두문불출하고 있고, 여동생 역시 다행히 멀지 않은 곳으로 시집가 한 해에 대강 두 세 번은 보았다. 멀리 헤어질 때는 그 집안의 벼슬살이 하는 것을 따라갈 때가 그러하였지만 1, 2년이 되지 않아 번번이 돌아와 다시 서로 만났다. 지금 병으로 죽었으니, 나는 마침 관리의 임무를 따라 돌아왔는데 다시는 서로 보지 못하였다. 다만 언집과 서로 통곡하였고, 언집은 또 나에게 장차 그가 죽어 가족과 결별하는 것을 말하며 자녀들의 형편을 부탁하니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차마 듣지 못하였다. 아! 어찌 나의 누이를 말하면서 갑자기 여기에까지 이르는가? 늙고 병들어 또 애통하게도 글을 쓸 수가 없으니 억지로 이것을 써서 그 무덤을 표한다. 명에 이르기를,
슬프고 슬프다, 내 동생아. 그 언덕에 돌아가 묻혔구나. 그가 남긴 이 아름다운 덕은 뒷사람들이 기리리라.
新瀏陽丞建安劉君子翔彦集之妻吳郡朱氏者, 先太史吏部府君之女, 而熹之女弟也. 爲人質實易良, 自幼不見其有妄言慍色. 生五年而失先君〔二〕, 先孺人愛之. 年二十有一以歸劉氏, 事皇舅大夫公禮敬飮備.下及旁側侍御, 委曲逢將, 尤有人所難者. 大夫公沒, 佐彦集理家事, 勤約不懈. 撫敎諸子, 愛而有節. 其逮下有恩意, 門內之治雍如也. 淳熙八年, 年四十有三, 二月乙未, 以疾卒. 子男二人, 瑾․瑱, 皆將仕郞. 女二人, 未嫁. 彦集將以是歲十月辛酉藏其柩於崇安縣西三里大夫公塋左若干步, 謂予曰:‘子盍銘諸!’予寡兄弟, 先君之遺女唯此妹.予旣杜門山間, 而妹亦幸不遠嫁, 一歲中率再三見. 其遠別惟從其家之官時爲然, 然不一二歲輒歸, 復相見. 今其病死, 而予適從吏役歸, 則不復相見矣. 獨與彦集相持大慟, 而彦集又爲予道其將死時與家人訣別, 付託兒女狀, 尤使人不忍聞. 嗚呼!孰謂吾妹而遽至此耶!老病且哀不能文, 彊書此以識其壙, 且爲銘曰:哀哀吾弟, 歸藏其丘. 懿此遺德, 後人之休!
〔一〕而: 原作‘面’, 據宋浙本․明萬曆本改.
소무현승 사군 묘지명[邵武縣丞謝君墓碣銘]
임천(臨川)에 숨은 군자가 있는데, 계당(溪堂) 선생이라고 하는 사(謝)군이다. 사군의 이름은 일(逸)이고 자는 무일(無逸)인데, 이름은 매(邁)이고 자는 유(幼)인 동생인 죽우(竹友)선생과 함께 황태사(荒怠史)에게서 시(詩)를 배웠다. 성품이 맑고 곧으며 청렴하고 지조가 있는 것으로 당시에 이름이 났다. 그러나 모두 불우하게 죽었으므로 단지 그 시(詩)만이 사방에 행해지고, 그 아름다운 행업은 그 읍의 사람이 아니면 상세히 알지 못하니 이는 한탄할만한 일이다. 죽우의 아들은 민행(敏行)이라 하고, 자는 장눌(長訥)인데, 중은거사(中殷居士)라 자호하였고, 계(季)씨를 아내로 맞아 이름은 원(源)이고 자는 자심(資深)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비로소 진사로 관직에 올라 문림랑(文林郞)과 소무군(邵武郡) 소무현승(邵武縣丞)이 되었다. 또 경은(慶恩)을 입어 어머니가 태안인(太安人)으로 봉해졌으니, 장차 그 가문을 크게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행히 졸하니 식자는 그를 가슴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자심(資深)은 어려서부터 날마다 수천 마디를 외웠고, 조금 자라서는 경(經)과 문(文)을 배웠는데, 학교에서 명성이 있었다. 어진 사대부들이 임천에 오면 그 이름을 듣고는 초청하여 빈례(賓禮)로 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예부에 부번 시험을 보아 합격하였는데, 계당(溪堂)과 죽우(竹友) 두 선생으로 인하여 이부(吏部)의 전선(銓選)을 따르지 않게 하고 임금에게 말하여 건창군학(建昌軍學)의 교수가 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정중(靜重)하여 지킴이 있었으나 일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면 개혁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일찍이 그 고을의 현자 다섯 사람을 군학(軍學)에서 제사지내어 제생을 권장하였고, 고 시랑(侍郞) 유계고(劉季高)가 그것을 기록하였다. 임기가 다 차자 제생들이 서로 이끌어서 그 치행(治行)을 문서로 만들어서 조대(漕臺)에 그를 머물게 해주도록 청했다. 사자(使者)가 그의 어짊을 알고, 법으로는 불가함을 고려하여 서로 그를 천거하여 조금 옮겨서 강주(江州) 주학(州學)의 교수가 되었다. 아직 강주로 가지 않았을 때 부친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융흥부(隆興府) 남창현(南昌縣)승(丞)으로 전보되었다. 마침 시랑(侍郞) 이인보(李仁甫)가 강서(江西) 조운을 맡아 예전에 들은 것을 모아서 일로도경(一路圖經)을 찬수하려 하였는데, 관속 중에서 자심만이 함께 이것을 할 수 있었고, 또 여러 사자들이 모두 그를 추천하였다. 일찍이 한해 남짓 읍의 일을 행하였는데, 거기에 속한 수수(帥守)가 세금을 거두기를 심하게 하였다. 여러 읍은 다만 공손히 받들었는데 자심만은 굴하지 않고, 항상 탄식하기를 “가난한 백성을 다그쳐 상관을 받드는 짓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수수는 이 일로 자심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읍의 사람들은 그를 매우 어질게 여겼다. 임기를 마치고 갈 때 부형(父兄) 자제(子弟)들이 함께 그를 전송하여 몇 리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 수수가 부끄럽고 한스러워하며 서둘러 편지로 그를 추천하여 그를 도왔다. 전조(銓曹)의 조사에 나아가니 경관(京官)으로 바꾸어주려 하였다. 마침 추천한 사람이 일이 있어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소무(邵武)로 왔다. 일을 담당한 자는 대부분 그의 어짊을 알고 있었는데, 상평사자(常平使者) 송약수(宋若水)는 특히 그를 중히 여겼고, 또 모든 동열들이 서로 천거하였다. 글이 내려왔으나 자심은 이미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니, 이 때 나이 58세였고, 순희(淳熙) 신축(辛丑)년 9월 기축(己丑)이다.
자심은 타고난 자질이 질박하고 중후하여 사람들은 그가 기뻐하거나 화내는 것을 조금밖에 보지 못하였다. 급제하지 않았을 때 가르치고 배우면서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동생과 누이를 가르치고 정성껏 길러 혼인시키니 마을에서 그의 효성과 우애를 칭찬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밭만 몇 무(畝)가 있었고, 중은군은 그 호로 편액을 달았다. 자심에 이르러 비록 관직에 종사했으나 생산은 역시 늘어나는 것이 없었고, 다만 이 정원을 수리하여 그 사이에 집을 짓고 화목(花木)과 나물과 열매와 뽕나무와 대나무를 섞어서 심고 한가한 날에 책을 끼고 그 사이에서 시가를 읊조렸다. 비록 거친 음식을 먹었지만 스스로는 부족함을 알지 못하였다. 그 시는 아름답고 윤택하며 조화롭고 아름다워 두 조부의 풍치가 있었다. 남아있는 것이 백여 편인데, 공재시고(空齋詩稿)라고 불린다. 자심은 같은 군의 황(黃)씨를 아내로 맞아 3남 5녀를 낳았다. 아들은 추(樞), 기(機), 춘(椿)이라 하고, 딸은 엄향보(嚴享甫), 요기(饒祁)가 시집 갔고,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자심이 소무에 있을 때 격서(檄書)를 가지고 가는 길에 내가 있는 곳을 지났다. 나는 자심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는데, 한 번 보고서는 곧 그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떠나고 나서 무이(武夷)의 산수 간에 노닐며 내가 지은 집에서 다시 시에 유의하여 이어서 보았다. 나는 이것으로 그 구(句)와 율(律)의 묘가 선배들을 따르기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하니 서로 말을 주고받지도 못하고 부고를 들었는데, 또 병 때문에 가서 조문할 수도 없다. 지금 추(樞) 등이 이미 자심을 중은군 묘의 곁에 장사를 지냈는데, 편지로 자심의 친구인 오병약(吳炳若)의 행장을 보내어 묘지명을 청했다. 때마침 내가 병이 들어 할 수 없다고 사양하려 하였으나 또 자심이 전날에 부시(賦詩)를 서로 부탁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끝내 갚지 못하였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이에 묘지명을 쓴다.
군의 집안은 대대로 은거하였네. 그 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뒷사람에게까지 이르렀지. 군이 그것을 이어받아 기세를 떨치려 하였네. 길은 반도 되지 않았는데, 그 몸을 잃었네. 여기에 감추어두고 은군(隱君)을 따르니, 언덕이 골짜기가 되면 이 글을 바로잡을 것이다.
臨川有隱君子, 曰溪堂先生謝君, 名逸, 字無逸, 與其弟竹友先生名薖, 字幼槃, 俱學詩於黃太史氏, 而以淸介廉節有聞於時. 然皆不遇以死, 是以獨以其詩行於四方, 而其行業之懿, 則非其邑子有不得而詳焉, 是可歎已. 竹友之子曰敏行, 字長訥, 自號中隱居士, 娶季氏, 生子曰源, 字資深, 始以進士得官, 爲文林郞․邵武軍邵武縣丞. 且以慶恩, 得封其母爲太安人, 蓋將有以大其門者. 而不幸以卒, 識者莫不傷之.
資深自幼日誦數千言, 少長受經屬文, 有聲庠塾間. 士大夫之賢者來臨川, 聞其名莫不延致而賓禮之. 再試軆部中第, 宰相以兩先生故, 不使從吏部選, 言於上, 以爲建昌軍學敎授. 居官靜重有守, 然事有當爲, 亦不憚改革也. 嘗祠其鄕之賢者五人於學, 以勸諸生, 而故劉侍郞季高爲之記. 秩滿, 諸生相率狀其行治, 扣漕臺請留之. 使者知其賢, 顧法不可, 因相與薦之, 得稍遷秩, 復敎授江州州學. 未行, 遭父喪. 終制, 調隆興府南昌縣丞. 會李侍郞仁甫將漕江西, 披輯舊聞, 以修一路圖經, 於官屬中獨以資深爲可與於此者, 又與諸使者共薦之. 嘗行邑事歲餘, 屬帥守以聚歛爲急, 諸邑奉承唯謹, 而資深獨無所屈, 常歎曰:‘迫貧民以奉上官, 吾弗忍爲也.’ 帥守以是於資深獨不悅, 而邑人深德之. 旣去, 父兄子弟相與送之, 數里不絶. 帥守愧歎, 亟以薦書追而與之. 詣曹校考, 當改京秩. 會擧將有故不果, 遂來邵武. 當路者多知其賢, 而常平使者宋君若水尤敬重之, 又率同列交薦. 章下而資深已病不起矣, 時年五十有八, 淳熙辛丑九月己丑也.
資深天資渾厚, 人少見其喜怒. 未第時, 斅學以奉甘旨. 敎撫弟妹而婚嫁之, 鄕黨稱其孝友. 家世淸貧, 獨有園廛數畝, 中隱君旣以其號榜之. 至資深, 雖從官, 然於生産亦不能有所增益, 獨葺此園, 築室其間, 雜蒔花木蔬果桑竹, 暇日挾冊吟哦其間. 雖飯疏飮水, 不自知其有不足也. 其詩秀潤和雅, 有二祖風致. 存者百餘篇, 號空齋詩稿云. 資深娶同郡黃氏, 生三男五女. 男曰樞, 曰機, 曰椿. 女所適曰嚴享甫, 曰饒祁, 餘夫有行也. 資深在邵武時, 嘗以檄書便道過我. 予雅聞資深名, 一見卽知其長者. 旣去, 遊武夷山水間, 得予所結廬處, 復留詩見屬. 予以是又知其句律之妙可追前輩無慚也. 顧未及酬而聞其訃, 又以病不能往弔. 今樞等旣葬資深中隱君墓之側, 而以書奉資深親友吳君炳若之狀來請銘. 時予方病, 欲謝不能, 又念資深前日賦請相屬之意不可以終莫之償也, 乃爲之銘. 銘曰:
惟君家, 世隱淪. 載其德, 之後人. 君承之, 勢欲振. 塗未半, 隕厥身. 藏於斯, 從隱君. 陵爲谷, 訂此文.
사농사승 옹군 묘지명[司農寺丞翁君墓碣銘]
소흥(紹興) 년간에 재상 진회(秦檜)가 권력을 전단하고 있었는데, 옛 원한이 있거나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는 모두 죄를 무고하여 영해로 내쫒았다. 이전의 재상 조충간공(趙忠簡公)이 이것 때문에 주애(朱崖)에서 죽으니, 천자가 그것을 슬퍼하였다. 그 관이 돌아와서 구주(衢州) 상산현(常山縣)에 장사지내려 했는데, 군장(郡將) 장걸(章傑)과 소성(紹聖) 승상 돈(惇)의 자손들이 조공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명을 받들어 돈(惇)의 죄를 다스린 것에 대해 큰 원한이 있었고, 또 진회의 뜻을 바라, 겉으로는 선의(善意)로 상산(常山) 위(尉) 옹몽지(翁蒙之)에게 격문을 보내어 호상(護喪)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옹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조씨는 사사로이 술을 역부(役夫)들에게 마시게 하였으니 빨리 법으로 잡아다스려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가만히 사인에게 뜻을 알려주고, 조공이 평소에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와 소(疎)를 함께 찾아서 가지고 오게 하였으니, 조씨를 해쳐서 사감(私憾)을 풀고, 또 진회에게 아첨하여 좋은 관직을 얻으려 하였다. 옹군이 할 수 없다고 하니 이익으로 꾀었으나 또 할 수 없다고 하자 위협하여 두세 번 오갔다. 옹군은 장걸의 뜻이 거세어 그냥 그만두지 않고 혹 다시 다른 관리에게 맡기면 일이 어쩔 수 없이 되어갈 것을 헤아리고, 조씨에게 몰래 알려서 밤에 모든 문서를 취하여 모두 불태우게 하여 종이 쪽 하나도 남지 않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 수색하여 체포하는 자가 갔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장걸이 노하여 또 옹군의 여동생이 시집간 이전의 예부시랑 호인(胡寅)을 사찰하였는데, 실상은 당시 돈(惇)의 죄상을 알리는 조서를 기초한 사람이었으므로 더욱 노하여, 옹군을 무고하여 그 죄를 캐물었다. 마침 호(胡)공의 동생 영(寧)이 상서랑(尙書郞)이 되었는데, 그 일을 모두 진회에게 아뢰었다. 진회 역시 걸이 속인 것을 알고 안무사로 하여금 그 상황을 알리도록 명령을 내리고, 옹군의 관직은 옆의 군으로 옮기고, 조씨 역시 결국은 다른 일이 없게 되었다. 걸은 벼슬을 폐하여 다시 기용하지 않았다. 이때 천하에서 옹군의 옮음을 높이고, 옹군의 이름을 사모하여 그 사람됨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의 천자께서 즉위하시어 근신에게서 그 일을 들었다. 임금께서는 빨리 불러 보시고 그 지조를 아름답다 칭찬하고는, 벼슬을 바꾸어서 다시 중도관(中都官)에 제수하고, 모두 인원을 줄여 외직으로 발령하였다. 노년에 사농시승(司農寺丞)이 되어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졸하니, 그것을 들은 자들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군은 자가 자공(子功)이고 집안은 대대로 건녕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의 백수촌(白水村)에 살았다. 조부인 언심(彦深)은 선화(宣和)년간에 비서소감(秘書少監)이 되었다. 양사성(梁師成)이 그를 한번 보고자 하였으나 볼 수 없어 오래되어도 관직을 옮기지 못했다. 그 후에 국자좨주(國子祭酒)와 태상소경(太常少卿)을 역임하고, 집영전(集英殿) 수찬(修撰)으로 사직하고 노년을 집에서 한가로이 보냈다. 부친 규(揆)는 문림랑(文林郞)․밀주(密州) 사사조사(司士曹事)였으며 역시 문행(文行)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일찍 졸하였다.
군은 집영임보등사랑(集英任補登仕郞)에서 우적공랑(右迪功郞)․상산위(常山尉)로 전보되었다가 무(婺)의 난계(蘭溪)로 옮겼다. 다시 명주(明州)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전보되었는데 모친상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부가각문자(吏部架閣文字)를 주관하였는데, 또 서모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OO랑으로 바뀌었다가 감등문고원(監登聞鼓院)이 되었다. 강남동로(江南東路) 안무사가 되어 나가서 기의문자(機宜文字)를 주관하였다. 당도(當塗)현에 큰물이 들고 돌림병이 있었는데, 군이 격문을 내걸고 순행을 하며 힘을 다하여 물의 피해를 건져내고 돌림병을 치료하여 온전히 소생시킨 사람이 매우 많았다. 군기감승(軍器監丞)에 임명되어 또 강서안무기의문자(江西安撫機宜文字)를 주관하였다. 다시 흉한 세월을 만나 군은 그 관청을 도와 자문하고 처리하여 매우 많이 힘을 썼다. 사(使) 공무량(龔茂良)이 여러 사자(使者)들과 조정에서 의견을 모아 승대농(丞大農)으로 불렀다. 졸할 때 나이 52세였고 순희 원년 2월 13일이었다.
군은 어려서부터 뛰어나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았고 경탄(敬憚)을 받았다. 또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우애가 있어 집영전의 일에서나 모친과 형제들 사이에 간언(間言)이 없었다. 형이 죽자 그 고아들을 매우 후하게 돌보아 그 딸을 자신의 딸보다 먼저 시집보냈다. 집영전에서 나이가 많고 현명한 사람에게 내리는 은사가 마땅히 군의 아들에게 미쳐야 하지만 군은 종조제(從祖弟)인 이지(履之)에게 미루었다. 집안에 있을 때는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고, 관직에서는 승진과 강등을 따지지 않았다. 주변 사람이 급한 일이 있으면 또 어렵고 쉬움, 많고 적음을 가릴 줄 몰랐으며,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비록 분주히 얻고 빌리는 노력과 욕됨을 입어도 꺼리지 않았다.
역양(歷陽) 장진언(張晉彦)은 아들 효상(孝祥)이 임금에 의해 많은 선비 중에 첫째로 발탁되었으므로 진회의 뜻을 거슬러 정위(廷尉)에까지 얽혀들었다. 친구들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그와 왕래하지 않았고, 의식(衣食)에 쓸 비용을 구하였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군이 그것을 듣고 홀로 흔연히 그 형을 만나 집안의 재물을 다하여 백금(白金) 백 냥을 전할 수 있었다. 마침 진회가 죽자 일이 모두 해결되었다. 후에 장(張)씨 부자가 모두 관직이 높은 곳에 이르렀는데, 이 일로 군을 어질게 여겨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군 역시 그와 종유하며 매번 그 실수를 바로잡아 회피하는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둘 모두를 어질게 여겼다.
강서에 있을 때 동료 유자기(劉子琦)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갔는데, 돌림병이 들어 매우 위태하여 사람들이 감히 보지 못하였다. 군이 홀로 수레를 타고 그 집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과 약을 몸소 수발하여 기(琦)는 죽지 않게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이 매우 많았으니 다 기록할 수 없다. 평소에 식객이 집안에 가득하여 군에게 구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군은 싫어하지 않았다.
소흥(紹興) 사관(史官) 미정(彌正)의 딸 이(李)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먼저 졸하였다. 아들이 없어 종조(從祖) 형 성지(誠之)의 아들 저년(樗年)을 후사로 삼았다. 딸 하나는 수직랑(修職郞) 왕신(王伸)에게 시집갔다.
군의 집안은 집영 시절부터 금릉(金陵)에 별업이 있어 군은 거기에 살았다. 졸하고 나서 드디어 강녕현(江寧縣) 서북촌(西北村)에 장사지내고 이씨와 함께 부묘하였다. 몇 년 후에 군의 생질 예장(豫章)이 태수 호대원(胡大原)과 왕래하며 군의 행사를 글로 적어 와서 말하기를 “삼촌의 뜻은 펴지 못하고 불행히 이에 이르렀는데, 그 높은 지조와 순행(馴行)은 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는 어찌 알지 못하십니까? 나는 또 그 묘 위에 새기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의 처가와 군은 혼인으로 연결되는데 일찍이 군을 종유하며 서로 기약함이 매우 두터웠다. 그 글을 읽어보니 눈물이 나와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 일을 써서 묘지명으로 삼는다. 명에 이르기를,
어짊은 고향집을 온전히 하였고, 지혜는 간사한 모략을 꺾었네. 용기는 아주 어려운 일을 실천하였으니, 분(賁)․육(育)이 짝이 될 만하구나. 훌륭하도다! 이 사람은, 몸소 이 달덕을 행하였네. 종신토록 힘써, 어긋나고 편벽된 것이 없었네. 이 무덤은 사척의 높이라고 하지만, 자신을 잊고 나약함을 일으켰으니 천년의 고풍이로다.
紹興中, 宰相秦檜專柄用事, 諸有故怨及不附己者, 皆誣以罪, 竄嶺海. 故相超忠簡公用此死朱崖, 天子哀之. 還其樞, 將葬衢州常山縣, 郡將章傑, 紹聖丞相惇諸孫, 雅怨趙公當國時奉詔治惇罪, 又希檜旨, 陽以善意檄常山尉翁君蒙之護其喪. 一日, 下書翁君曰:‘趙氏私爲酒以飮役夫, 亟捕寘之法.’ 而陰使人喩意, 使幷搜取趙公平日知舊往來書疏, 欲以敗趙氏, 快私憾, 且媚檜取美官. 翁君不可, 則啗以利, 又不可, 則脅以威, 往反再三. 翁君度傑意壯不但已, 或更屬它吏.則事有不可爲者, 卽密告趙氏, 夜取諸文書悉燒之, 無片紙在. 翌旦, 乃往爲搜捕者, 而以無所得告. 傑怒, 又廉知翁君女弟適故禮部侍郞胡公寅, 實當時草詔罪狀惇者, 益怒, 乃誣翁君它罪劾之. 會胡公弟寧爲尙書郞, 具以其事白檜. 檜亦悟爲傑所賣, 下其事安撫使問狀, 徙翁君官旁郡, 趙氏亦竟得無它, 而傑遂廢, 不復用. 當是時, 天下莫不高翁君之誼, 慕翁君之名, 而想見其爲人者. 今天子卽位, 近臣乃以其事聞. 上亟召見, 嘉歎其節, 改秩, 再除中都官, 皆以省員補外. 晩乃歸爲司農寺丞, 未幾而卒, 聞者莫不哀之.
君字子功, 世家建寧府崇安縣之白水村. 大父彦深, 宣和中爲秘書少監. 梁師成欲一見之不可得, 遂久不徙官. 其後歷國子祭酒․太常少卿, 以集英殿脩撰婦老于家. 父揆, 文林郞․密州司士曹事, 亦以文行知名, 蚤卒.
君以集英任補登仕郞, 調右迪功郞, 尉常山, 移婺之蘭溪. 更調明州司理參軍, 以母喪不赴. 主管吏部架閣文字, 又以少母喪去官. 改□□郞, 監登聞鼓院. 出爲江南東路安撫司主管機宜文字. 當塗澇疫, 君以檄按行, 拯療極力, 全活甚衆. 除軍器驢丞, 又主江西安撫機宜文字. 復値歲凶, 君佐其府咨訪處畵, 用力尤多. 使龔公茂良與諸使者合言於朝, 乃召丞大農. 卒時年五十有二, 淳熙元年二月十三日也.
君自幼卓犖不群. 曹偶敬憚. 而孝謹順悌, 事集英及母兄無間言. 兄沒, 撫其孤甚厚, 嫁其女先己女. 集英引年恩當及君子, 君推以予從祖弟履之. 家居不問有無, 仕官不計升黜. 至於周人之急, 則亦不復知有難易多寡之擇, 卽有不逮, 雖奔走乞貸勞辱不憚也.
歷陽張晉彦以子孝祥被親擢冠多士故忤相檜意, 逮繫廷尉. 親舊畏禍及己, 莫與通, 求所以爲槖饘費者無所得. 君聞之, 獨慨然謁其兄, 罄家貲, 得白金百兩遺之. 會檜死, 事壹解. 後張氏父子俱官達, 以此德君, 終其身不能忘. 君與之遊, 亦每規正其失無所避, 人兩賢之.
在江西時, 同寮劉氏子琦奔父喪, 病疫甚殆, 人莫敢視. 君獨輿致其家, 蚤暮躬治粥藥, 琦得不死. 它所爲類此人所難者甚衆, 不勝紀. 平居食客滿堂, 莫非有求於君者, 而君不之厭也.
娶李氏, 紹興史官彌正之女, 先卒. 無子, 以從祖兄誠之之子樗年爲後. 一女, 適修職郞王伸.
君家自集英時有別業金陖, 君卽居之. 號卒, 遂葬江寧縣西北村, 祔以李氏. 後數年, 君之甥豫章通守胡君大原狀君行事以來曰:‘舅氏志未克申而不幸至此, 其高節馴行有不可以弗識者. 子盍識諸? 吾且刻其墓上.’ 予婦家與君有連姻, 得蚤從君游, 相期甚厚. 讀其書爲出涕, 不忍辭也. 乃書其事而銘之. 銘曰:
仁全故家, 知折姦謀. 勇蹈大難, 賁育其儔. 偉哉若人, 躬此達德. 俛焉終身〔一〕, 靡有回遹. 無曰斯丘, 四尺之崇, 忘私起懦, 千載高風!
〔一〕焉: 原作‘哉’, 據宋閩․浙本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