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권 朱子大全 卷八十三
발문[跋]
주봉사의 주장에 발문을 붙임[跋朱奉使奏狀]
이것은 작은할아버지 봉사직각공[奉使直閣公: 이름은 주변(朱弁)]이 오랑캐의 포로로 있다가 돌아와서, 주소(朱昭) 등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일을 알린 글이다. 작은할아버지의 자는 소장(少章)이며, 젊어서 경우(景迂) 조공(晁公)선생에게서 배웠다. 건염(建炎) 초기에 제생으로 응모하여 오랑캐 조정에 사신으로 갔다가 절개를 지켜 굴하지 않고 운중(雲中)에 억류되어 16년을 머물렀다. 소흥(紹興) 계해년(1143)에 화친을 맺어 겨우 돌아왔다. 부름을 받고 편전에서 공은 “오랑캐의 심술이 간사하여 화친을 믿을 수 없으니 마땅히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오랑캐의 형세가 비록 강하다고 하더라도 도의로서 굳건히 하지 못하여 그 나라가 쇠하고 망할 싹이 있으니 기미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원컨대 더욱 덕을 닦고 군사를 진작하여 그들의 변란을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승상 진회(秦檜)가 이미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이 주장을 올리자 진회가 더욱 노하여 마침내 그 일을 중지시켜 알리지 않았고, 공 또한 곧바로 죽었다. 주소 등의 충의의 절개는 마침내 다시는 이야기하는 자가 없었다. 나는 그 글을 읽을 때마다 흐느끼고 한숨 쉬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역양(歷陽) 공군(龔君)이 지은 중흥충의록(中興忠義錄)을 보니 지극히 자세하다. 그러나 또한 주소 등의 이름이 없기에 곧 이 주장을 적어 화주(和州) 사군(史君), 부문(敷文) 장공(張公)에게 보내서 판각하여 그 뒤에 첨부하기를 청하였으니, 거의 이 몇 사람들은 의탁하여 길이 남을 것이다. 또 기억하건대, 지난번에 회계(會稽)에 위사(衛士) 당(唐) 아무개의 사당이 있음을 보고, 사당을 둔 까닭을 물으니, “오랑캐가 회계를 함락하자, 천자의 수레는 별안간 동쪽으로 가게 되었고, 아무개는 병 때문에 따르지 못하였다. 수수(帥守) 이업(李鄴)은 재빨리 성에서 투항하였다. 하루는 오랑캐 우두머리가 이업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성안을 순행하니 아무개가 매우 분노하여 벽돌을 품고 길가에서 저격했는데 맞지 않아 사로잡혔다. 장차 죽이려 하니 끊임없이 꾸짖다가 죽었다. 월주(越州) 사람이 의롭게 여겨 제사를 지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칙으로 사당의 편액을 □□라 하였다. 급사중(急事中) 오불(吳芾)이 일찍이 돌에 새겨서 그 일을 기록하였다”고 대답했다. 지금은 이 기록 또한 보이지 않으니, 그 기록을 함께 구하여 덧붙여 새겨야 할 것이다. 소희(紹熙) 신해년(1191) 10월 신사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右叔祖奉使直閣公還自虜中, 乞表朱昭等死節事狀也. 叔祖字少章, 少從景迂晁公先生學. 建炎初, 以諸生應募, 奉使虜廷, 守節不屈, 被留雲中, 積十六年. 紹興癸亥和約定, 乃得歸. 召對便殿, 公言虜情詭詐, 和不可恃, 宜有以待之. 又言虜勢雖强而無道義以固, 其國衰亂有萌, 幾不可失. 願益修德振兵, 以俟其變. 秦丞相已不樂, 及上此奏, 檜益怒, 遂寢其事不報, 而公亦旋卒, 昭等忠義之節遂不復有言者. 熹每讀其書, 未嘗不爲之歔欷流沸也. 今觀歷陽龔君所纂中興忠義錄至纖悉矣, 然亦無昭等名, 乃錄此狀以寄和州史君敷文張公, 請刻而附於其後, 庶幾此數人者得託以不朽. 又記頃見會稽有衛士唐某祠, 問其故, 曰虜陷會稽, 車駕倉猝東幸, 而某以病不及從. 帥守李鄴亟以城降. 一日, 虜酋與鄴並轡行城中, 某憤怒甚, 則懷磚石從道旁狙擊之, 不中, 因被執. 將殺之, 罵不絶口而終. 越人義而祠之, 事聞, 詔賜廟額曰囗囗, 故給事中吳公芾嘗刻石以記其事. 今此錄亦不見, 恐可幷求其記而附刻之也. 紹熙辛亥十月辛巳, 新安朱熹書.
조직각의 충절록에 발문을 붙임[跋趙直閣忠節錄]
직각(直閣) 조공(趙公)의 충의의 절개는 조칙으로 포상을 했고 믿을만한 사서에 드러나니 없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평생 수립한 것을 고찰하면, 처음이나 끝이나 크거나 작거나 간에 일념이 국가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또한 위험을 보고 목숨을 버리는 정성이 한 때 일의 정세의 우연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 손자 언숙(彦橚: 주자의 문인)이 학문에 뜻을 두고 힘써 공부하니 또 장차 그 가문을 크게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틈틈이 편지를 보내 나에게 이 충절록을 보여주었다. 병중에 읽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 거듭 감탄하기를 그칠 수 없었다. 그래서 발문을 써서 나의 사모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드러낸다. 소희(紹熙) 3년(1192) 봄 2월 임진일에 신안 주희가 씀.
直閣趙公忠義之節爲詔所褒, 著在信史, 不可泯沒. 而考其平生所立, 始終巨細, 未嘗一念不在國家, 又足以見見危致命之誠非出於一時事勢之偶然也. 其孫彦橚力學有志, 又將有以大其門者. 間以書來, 視予此錄. 病中讀之, 蹶然起坐, 爲之三嘆, 不能自已. 因書其後, 以見區區慕仰之私云. 紹熙三年春二月壬辰, 新安朱熹書.
조조봉의 행장에 발문을 붙임[跋趙朝奉行實]
시경에서 “마음가짐이 착실하고 깊으니, 암말이 3천 필이네”라고 했다. 이는 사람이 그 부강(富强)한 업적을 이루는 것은 반드시 권모술수나 이해타산에 힘써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성실함과 돈독함 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이 편을 보니 조후(趙侯)의 행실과 시인의 말이 어찌 서로 발현된 것이 아니겠는가! 조후의 자손은 이미 학문을 잘 닦아서 작위를 얻었고, 또 당대 명현들의 문자를 얻어서 그 어버이를 드러내어 영원히 남겼으니, 이 또한 어질다고 이를만하다. 나는 이 점을 발문에 적는다. 소희(紹熙) 임자년(1192) 봄 2월 임인일에 주희가 씀.
詩曰: 「秉心塞淵, 騋牝三千.」 此見人之所以成其富强之業者, 非必權譎計數之爲務, 而在於誠實深厚之中也. 今觀此編, 則趙侯之行, 詩人之言, 豈不兩相發哉! 侯之子孫旣能修文學以致爵位, 又能得當代名勝之文字以顯其親而垂無窮, 是亦可謂賢矣. 予是以識之. 紹熙壬子春二月壬寅, 朱熹書.
왕형공이 업후의 유사를 진달한 주장에 발문을 붙임
[跋王荊公進鄴侯遺事奏稿]
신은 전일에 삼가 업후[鄴侯: 이름은 이필(李泌)]의 유사(遺事)를 올리라는 성지(聖旨)를 받고, 지금 이미 고쳐서 베껴놓았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재능이 뛰어난 우문흑달(宇文黑獺)이 기울어 가는 소란한 때를 만나 보잘것없는 소작(蘇綽)으로 보필케 하여 능히 법을 통제함이 이와 같습니다. 폐하는 하늘이 내린 뛰어난 지혜와 훌륭한 재능을 갖췄으니, 오랫동안 일이 없는 중국(中國)을 만들어 요순과 삼대를 따르고자 하여도 그 형세가 어렵지 않은데, 어찌하여 매사를 오히려 망설이고 세속에 이끌려, 능히 하나라도 세워서 천하의 장구한 계책으로 삼지 않아, 계책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다시 소작(蘇綽)을 부끄럽게 만드십니까? 대개 나라를 열어 왕통을 전하는 것은 그 시행이 점차 이루어지니, 삼가 생각건대 완성된 계산이 이미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신이 비록 매우 어리석지만, 진실한 소원을 다 쏟아 해와 달의 후광에 의지하여 늙은 여생을 벼슬이나 훔치는 신하가 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가지고 있는 업후의 유사는 삼가 이것과 함께 올립니다.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집본(集本: 왕안석의 문집)에는 “재능이 뛰어난 우문흑달(宇文黑獺)” 아래에서 “기울어 가는 소란한 때를 만나 보잘것없는 소작(蘇綽)으로 보필케 하였으나 그가 법을 만든 것은 오히려 취할 만한 점이 있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는 하늘이 내린 뛰어난 지혜와 훌륭한 재능을 갖췄으니, 결단코 오랫동안 일이 없는 중국(中國)을 만들어 나라를 열어 왕통을 전하고 요순과 삼대를 따르고자 한다면 도를 밝히고 백성을 통제하여 운용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이필(李泌)이 일컬은 것은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견문을 넓혀서 고금의 득실을 고찰하려 한다면 이 글이 또한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안석의) 희령주대일록(熙寧奏對日錄)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희령 2년(1069) 윤11월 19일에 폐하가 말하기를, ‘후숙헌(侯叔獻)이 의용군(義勇軍)의 상번정식(上番定式) 문자는 반드시 제치사(制置司)의 토론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이 일은 할만 한 것 같습니다. 때를 기다려 논의해야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양숙[暘叔: 진승(陳升)의 자]이 말하기를 ‘지금 모병(募兵)이 소멸되지 못했는데 또 상번의용군(上番義勇軍)을 기른다면, 조정하여 처리하기가 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폐하에게 ‘모병의 폐해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모두 그렇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병사를 양성함이 비록 많다고는 하지만 쓰려고 하면 적은 것이 걱정되니, 이는 백성과 병사를 두 가지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 오대(五代)의 화란(禍亂)에 대한 걱정을 끝내 능히 제거하지 못했는데 이것 등은 모두 본래 무뢰배와 간교한 사람들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폐하는 그것과 연관해서 부병(府兵)의 제도를 묻기를 ‘부병제를 가장 잘 갖추어 말한 곳이 어디인가?’ 하니, 나는 ‘「이업후전(李鄴侯傳)」에 말이 자세하게 갖추어졌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폐하가 ‘부병과 조용조법(租庸調法)은 서로 관련되는가?’라고 묻자, 나는 ‘지금의 번에 들어 군역을 지는 자에게 옷과 식량을 지급한다면, 빈부에 상관없이 모두 군대에 들어가 보초를 설 수 있을 것이니, 비록 조용조법이 있지 않더라도 또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의용‘이란 글자를 손등을 새기지 않아야 하니, 손등에 새기는 것이 제어하는 실상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금 이미 양민이 의용군을 맡고 있으니 마땅히 예의(禮義)로 권장하고 길러야만 합니다. 손등에 새기는 것은 그들의 불평을 살 뿐 실로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 향리의 호걸을 뽑아서 장교로 삼고 평가하여 권장과 선발을 더한다면, 사람들은 스스로 기뻐하며 복종할 것입니다. 지금 병사를 모집하여 숙위(宿衛)로 삼으니 이내 관직 경력을 쌓은 자가 자사(刺史)나 방어사(防禦使), 단련사(團練使)에 이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옮겨 저기로 주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와 같이 관록(官祿)을 낭비하지 않게 되어 이미 사람들로 하여금 즐겁게 맡을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측근 신하를 살펴서 간택하여 모두 정사를 맡아볼 인재로 충당하신다면, 훗날 이들 군사를 나누어 분담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모병제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 나와 오히려 그들이 군상(軍廂)의 주인이 되니, 측근 신하 이상이 어찌 이 무리에 미칠 수 없겠습니까? 이것은 곧 선왕의 성법(成法)이요 사직의 대계입니다’라고 답하였다. 폐하는 참으로 ‘그렇겠다’고 말했다.”
선친은 젊어서 형공(荊公: 왕안석)의 글을 배우기를 좋아하여 늘 그의 유적을 찾았다. 뒤늦게 이 초고를 얻어 집본을 교정했는데, 조금 다른 점이 있으니 아마도 이것은 미정 원고로 생각된다. 나는 「이업후전」을 베껴 올리면서 우문태(宇文泰)․소작(蘇綽)의 일과 어떻게 관련시켰는지를 알지 못하여 늘 한스러워했지만, 그 주장에 말미 석 줄의 말투가 씩씩하고 글투가 저앙(低昻: 내리고 올림)함을 홀로 아껴, 오히려 고금을 뛰어넘어 우주를 주선하는 뜻을 보게 되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중에 희령주대일록을 읽고 이내 그 설이 이와 같았음을 알았다. 아! 신종(神宗)이 뜻을 두고 공이 군주를 얻음은 성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모병(募兵)의 비용을 끝내 덜 수 없었고 보갑법(保甲法)이 천하를 소란하게 하니, 이른바 앞에서 계수(計數)를 정하고 반드시 뒤에 사공(事功)한 것이니, 과연 어떠하다 하겠는가! 그래서 일록과 가전본(家傳本)의 말을 뽑아 뒤에 붙여두니 독자는 이것을 고찰해보라. 소희(紹熙) 임자년(1192) 봄 2월 19일에 신안 주희.
臣前日伏奉聖旨, 今進鄴侯遺事, 今繕寫已具. 竊以宇文黑獺之中材, 遇傾側擾攘之時, 而輔之以區區之蘇綽, 乃能制法如此, 陛下天縱上智, 卓然之材, 有百年無事之中國, 欲追堯舜三代, 其勢不難. 豈宜每事尙或依違, 牽制流俗, 不能一有所立, 以爲天下長計, 而令任策之臣更以蘇綽爲愧也? 蓋創業垂統, 其施有漸. 伏惟成算已在聖心. 臣雖甚愚, 誠願自竭, 庶憑末光, 不以投老餘年爲竊位之臣而已. 所有鄴侯遺事謹隨此上進, 取進止.
集本 「宇文黑獺之中材」 下云: 「遇傾側窮困之時, 而輔以區區之蘇綽, 然其爲法, 尙有可取. 伏惟陛下天縱上智, 卓然之材, 全有百年無事萬里之中國, 欲創業垂統, 追堯舜三代, 在明道制衆, 運之而已. 如李泌所稱, 豈足道哉!顧求多聞以考古今得失之數, 則此書亦或可備省覽.」
熙寧奏對日錄云: 熙寧二年閏十一月十九日, 上曰: 「侯叔獻有言義勇上番文字, 必是見制置司商量來.」 余曰: 「此事似可爲, 恐須待年歲間議之.」 晹叔曰: 「今募兵未消, 又養上番義勇, 則調度尤不易.」 余因爲上言募兵之害, 終不可經久, 僉以爲如此. 余曰: 「今養兵雖多, 及用則患少, 以民與兵爲兩故也. 又五代禍亂之虞終夫能去, 以此等皆本無賴姦猾之人故也.」 上因問府兵之制曰: 「何處言府兵最備?」 余曰: 「李鄴侯傳言之詳備.」 上曰: 「府兵與租庸調法相須否?」 余曰: 「今上番供役則以衣糧給之, 則無貧富皆可以入衛出戌, 雖未有租庸調法, 亦可爲也. 但義勇不須刺手背, 刺手背何補於制御之實? 今旣以良民爲之, 當以禮義獎養, 刺手背但使其不樂, 而實無補也. 又擇其鄕閭豪傑爲之將校, 量加獎拔, 則人自悅服. 今募兵爲宿衛, 乃有積官至刺史防團者. 移此與彼, 固無不可. 况不至如此費官祿, 已足使人樂爲之. 陛下審擇近臣, 使皆有政事之材, 則他時可令分將此等軍. 今募兵出於無賴之人, 尙可爲軍廂主, 則近臣以上豈不可及此輩? 此乃先王成法, 社稷之大計也.」 上良以爲然.
先君子少喜學荊公書, 每訪其蹟. 晩得此稿以校集本, 小有不同, 意此爲未定也. 熹常恨不曉寫進李鄴侯傳於宇文泰, 蘇綽事何所預, 而獨愛其紙尾三行語氣凌厲, 筆勢低昂, 尙有以見其跨越古今, 斡旋宇宙之意, 疑此非小故也. 後讀熙寧奏對日錄, 乃得其說如此. 甚矣, 神宗之有志而公之得君也! 然其後募兵之費竟不能損, 而保甲之擾遍天下, 則所謂定計數於前, 必事功於後者, 果何如哉! 因抄日錄, 家傳本語以附于後, 覽者有考焉. 紹熙壬子春二月十九日, 新安朱熹.
방계신이 교정한 한유의 글에 발문을 붙임[跋方季申所校韓文]
나는 어려서부터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항상 세상에 좋은 판본이 없음을 흠으로 여겨 매번 정밀한 교정본 한 통을 널리 유포하고자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다. 지금 살펴본 방계신[方季申: 이름은 숭경(崧卿)]의 이 판본은 교정이 정밀하고 변증이 상세하니 그 노력이 성근하였다. 다만 「거정(擧正)」편에서 정립한 네 가지 조례는 서로 모순된 것이 있고, 또 여러 판본의 같음과 차이를 다 드러내지 못하여 지극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대개 이 책들은 앞사람이 이미 완성해둔 조례가 있으니, 본문을 위쪽에다 크게 쓰고 안감(顔監)이 한서(漢書)를 작성한 방법을 따라 그 아래쪽에다 여러 판본의 같음과 차이를 모두 주석하여 그 시비를 상고하여 지금 판본을 확정해 따르는 뜻을 나타낸다면, 독자들이 분명하게 여러 판본의 득실을 알게 되고 더욱 우리 책에서 취사선택한 것이 잘못이 없음을 믿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고증이 혹 미진한 것이 있고 취사선택에 조그만 오류가 없지 않다 하더라도, 또한 아직 남아있는 다른 판본의 별도 글자가 없어지지 않게 되어 훗날의 군자를 기다릴 수 있으니, 더욱 장구한 계책이 될 것이다.
또 계신(季申)이 말한 사(謝)씨의 판본은 소흥(紹興) 갑술년과 을해년 사이에 내가 온릉(溫陵)에서 벼슬할 때에, 사공의 동생 여회(如晦)의 아들 경영(景英)이 박사(舶司)의 속관이 되었는데, 일찍이 그의 책상 사이에서 보았다. 대개 천태(天台)의 인쇄본을 베고 찢어서 풀로 붙여 엮고 진후산(陳後山) 판본을 따라 별도로 차례를 만들었는데, 책의 첫머리에 ‘건염봉사(建炎奉使)’라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송진수재서(送陳秀才序)」 한 편의 “무슨 불신이 있겠는가[則何不信之有]”라는 구절을 읽는데, 갑자기 붉은 붓으로 ‘불(不)’자를 에워 제거해 버렸다. 처음에는 매우 놀랬으나, 다시 실마리를 찾아 살펴보니 이내 이 글자를 반드시 제거한 이후에야 한 편의 수미가 다시 관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개 전습(傳襲)의 오류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독자가 비록 그 장애를 깨닫는다 하더라도 깊이 연구할 겨를이 없었다. 가만히 기록해 두었다가 다른 판본으로 징험해 보았으나 모두 그렇지가 않았다. 이 판본이 비록 정밀하지만 또한 다시 볼 수 없으니, 아마도 계신(季申)이 사씨 판본을 읽을 때에 문장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보아 오히려 유탈(遺脫)이 조금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이리라. 아니면 계신이 보았던 것이 사씨의 진본이 아니어서, 먼저 교정한 자가 이미 이 글자를 유실한 것일까? 소희(紹熙) 임자년(1192) 초여름에 병중에 우연히 그 뒤에 기록한다.
余自少喜讀韓文, 常病世無善本, 每欲精校一通, 以廣流布, 而未暇也. 今觀方季申此本, 讎正精密, 辨訂詳博, 其用力勤矣. 但擧正之篇所立四例, 頗有自相矛盾者, 又不盡著諸本同異, 爲未盡善. 蓋此等書前人爲之已有成例, 若太書本文於上, 而用顔監漢書法悉注衆本之同異於其下, 因考其是非, 以見定從今本之意, 則讀者有以曉然知衆本之得失, 而益信吾書之取舍不誣矣. 萬一考訂或有末盡, 取舍不無小差, 亦得尙存他本別字, 不遂泯沒, 以待後之君子, 尤久遠之慮也. 又季申所謂謝本, 則紹興甲戌, 乙亥之間予官溫陵, 謝公弟如晦之子景英爲舶司屬官, 嘗於其几間見之. 蓋用天台印本剪裂粘綴, 依陳後山本別爲次序, 而卷首欸以 「建炎奉使」 之印. 因讀其送陳秀才序一篇 「則何不信之有」 句內, 輒用丹筆圍去 「不」 字, 初甚駭之, 再加尋繹, 乃知必去此字然後一篇首尾始復貫通. 蓋傳襲之誤久矣, 讀者雖亦微覺其礙, 而未暇深究也. 常竊識之, 以驗他本, 皆不其然. 此本雖精, 亦復不見, 豈季申讀時便文縱口, 尙不免小有遺脫? 將所見者非其眞本, 先傳校者已失此字也耶? 紹熙壬子孟夏, 病中偶記其後.
조증승의 행장에 발문을 붙임[跋趙中丞行實]
원우(元祐) 시절에 중승(中丞)을 지낸 조공(趙公)의 원손 거(擧)가 나에게 이 글 한 편을 보여주었다. 조공의 효성, 근실, 순수, 독실한 행실은 비록 옛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어려워하였다. 그 글을 여러 번 반복해 읽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상로(霜露)와 풍목(風木)의 비애를 이기지 못하였다. 일찍이 나는 망령되이 조씨의 가법은 한나라의 만석군(萬石君)과 매우 비슷하지만, 그 학문을 강론하고 일을 절제하고 효를 충으로 옮기는 아름다움은 석씨(石氏)가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문득 사사로이 발문을 적었다. 그러나 주의(奏議) 29편을 다 보지 못한데다, 행실을 기록한 것에 시종의 이력과 세월의 차례가 없기 때문에 기타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음이 여전히 한스럽다. 소희(紹熙) 임자년(1192) 가을 9월 8일에 신안 주희가 씀.
元祐中丞趙公之元孫擧示予此書一篇〔一〕. 趙公之孝謹醇篤, 雖古人猶難之. 三復其書, 令人起敬, 不勝霜露風木之悲也. 嘗竊妄謂趙氏家法甚似漢萬石君, 而其講學制事, 移孝爲忠之美, 則石氏不及遠矣. 因輒私記其語於其後. 尙恨所謂奏議二十九篇未得盡見, 而行實之記無始終履歷, 歲月次第, 故於其他有不得而論也. 紹熙壬子秋九月八日, 新安朱熹題.
〔一〕擧: 宋浙本作 「●」.
서래숙의 귀사당의 시에 발문을 붙임[ 跋徐來叔歸師堂詩]
동안(同安) 서래숙(徐來叔) 군이 맹자가 조교(曹交)에게 한 말을 취하여 그 집을 ‘귀사(歸思)’라고 명명하였다. 모관(某官) 대윤성(戴允成) 군이 이미 기문을 적었는데, 래숙이 다시 나에게 보여주면서 “한 마디 말을 덧붙여 밝혀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다음처럼 생각했다. 맹자의 말은 바로 ‘돌이켜 내 몸에서 구할’ 줄 모르고 오로지 밖에서 스승을 구하는 데 힘쓰는 자에게 해주었을 뿐이다. 대저 도(道)는 큰길과 같을지라도 상지(上智)나 생지(生知)의 자질이 아니라면, 또한 어찌 스승과 벗에 의지하지 않고서 홀로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요컨대 마땅히 그 실마리를 발현한 뒤에야 남아도는 스승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래숙이 나의 말로서 생각해본다면, 이 이름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소희(紹熙) 임자년(1192) 10월 회경절(會慶節: 효종황제의 탄신일)에 신안 주희가 씀.
同安徐君來叔取孟子語曹交之言, 名其堂曰 「歸師」. 某官戴君尹成旣記之矣, 來叔復以示予曰: 「願得一言以發明之.」 予謂孟子之言正爲不知反求諸身而專務求師於外者設耳. 夫道雖若大路, 然非上智生知之質, 亦豈能不籍師友而獨得之哉? 要當有以發其端倪, 然後有餘師者可得而求耳. 來叔其以予言思之, 庶乎其不虛爲此名也. 紹熙壬子十月會慶節日, 新安朱熹書.
윤화정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尹和靜帖]
하남(河南) 윤군(尹君)이 임천(臨川)으로부터 와서 그의 할아버지 화정(和靜)선생의 유상(遺像)과 문충공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삼지(三志)를 직접 쓴 글씨를 내보였다. 삼가 우러러 읽으며 경탄(敬歎)을 금하지 못하였다. 이미 그 초상을 모사하여 집에 보관했는데, 윤군은 또 묘지문(墓誌文)의 뒤에다 기록하게 하였다. 윤씨 집안의 성대한 덕은 이미 구양공이 글로써 발휘하였는데, 화정이 이것을 근실하게 손수 썼으니, 이 또한 세상에 전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만학(晩學)이 어찌 감히 외람되이 한마디 말을 짓겠는가? 다만 그의 요청이 그치지 않아서 지면에 별도로 적어 글의 말미에 붙인다. 소희(紹熙) 임자년(1192) 10월 25일에 신안 주희가 기록함.
河南尹君來自臨川, 出示其大父和靜先生遺像及手書歐陽文忠公所作三志, 仰瞻伏讀, 不勝敬歎. 旣模其像以藏于家, 尹君又俾記於誌文之後. 熹惟尹氏世德之盛, 旣得歐陽公之文以發揮之, 而和靜手書唯謹, 是亦足以傳世矣. 孤愚晩學, 何敢僭易輒贊一辭? 顧其請不已, 乃別書幅紙, 以附卷尾云. 紹熙壬子十月二十五日, 新安朱熹記.
당나라 사람의 모우목우도에 발문을 붙임[跋唐人暮雨牧牛圖]
나는 농포(農圃)에서 늙어가면서 날마다 몸소 쟁기질하고 파종했기 때문에 비록 그림을 모르더라도 이 그림이 진짜 소 그림이라는 것을 안다. 저 앞에 것은 도리어 돌아보면서 서행하고, 뒤에 것은 머리를 들고 힘차게 뛰어가는데, 눈빛이 빛나 참으로 서로 비를 이야기하면서 서로 바삐 귀가하는 것 같다. 보는 자가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지만, 뛰어난 화가의 고독한 고뇌를 어찌 믿지 않겠는가? 연평(延平) 여무경(余無競)이 이 그림을 내보였는데, 그림 중에 유충정(劉忠定)․추충공(鄒忠公)의 제자(題字)가 있었다. 이를 보니 모두 공경한 마음을 일으키기에 족했다. 그러나 용산노인(龍山老人) 또한 선친이 뽑은 선비여서 내가 일찍이 추종한 사람이다.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니 개연한 마음이 들어 발문을 적어 돌려보낸다. 소희(紹熙) 임자년(1192) 11월 임진일에 신안 주희.
予老於農圃, 日親犁耙, 故雖不識畫, 而知此畫之爲眞牛也. 彼其前者却顧而徐行, 後者驤首而騰赴, 目光烱然, 眞若相語以雨而相速以歸者. 覽者未必知也, 良工獨苦, 渠不信然! 延平余無競出示此卷, 卷中有劉忠定, 鄒忠公題字, 覽之幷足使人起敬. 而龍山老人又先君所選士而余所嘗趨走焉者也, 俛仰存沒, 爲之慨然, 因議其後而歸之. 紹熙壬子中冬壬辰, 新安朱熹.
양심보 집안에 보관된 소동파의 첩에 발문을 붙임[跋楊深父家藏東坡帖〕
양심보(楊深父)가 지난번에 나에게 동파(東波)공이 그의 선조와 주고받은 서신 두 통을 보여주었는데, 내가 이미 발문을 적었다. 지금 또 그 나머지를 다 열람하고 나서 두 분이 서로 허여한 기쁨을 시종일관 바꾸지 않았음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또 인심과 공론은 형률과 재앙으로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다시 기록하여 이전의 말을 부연해서 세상의 ‘어진 이를 홀대하고 권세가에게 붙은’ 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도록 한다. 소희(紹熙) 임자년(1192) 11월 임진일에 신안 주희가 씀.
楊深父頃嘗示予以東坡公與其先世往來手書二紙, 予已識其後矣. 今又得盡覽其餘, 益知二公相與之驤始終不替, 而又足以見人心公論所在之不可以刑禍屈也. 因復識之, 以申前說, 使世之簡賢附勢者知所愧云. 紹熙壬子中冬壬辰, 新安朱熹書.
채신여가 붓을 꺾은 일에 발문을 붙임[跋蔡神與絶筆]
친구 채계통[蔡季通: 이름은 원정(元定)] 군이 하루는 책 한 권을 받들고 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울먹이며 절한 뒤 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선친이 절필(絶筆)한 글입니다. 선친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잘 깨우쳐서 7세에는 곧 능히 시를 지었습니다. 이미 성장해서는 두루 배운 것을 잘 기억하였고 고매하여 뜻이 넓었으나, 세속과 더불어 어울릴 수가 없어서 집을 떠나 사방을 유람하니 견문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마침내 역상(易象)․천문․지리․삼식(三式)의 설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서 모두 그 득실을 교정할 수 있었습니다. 중년에야 돌아와서 무이(武夷)의 남쪽에 전답을 사고 집을 지었습니다. 그 사이에 누차 도적과 수화(水火)의 변고를 만났지만, 호연하여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춘 채 오로지 독서와 자식 교육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제[元定]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곧 서명(西銘)을 읽게 했습니다. 조금 성장하자, 또 정씨(程氏)의 어록, 소씨(邵氏)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장씨(張氏)의 정몽(正蒙) 등의 책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공자와 맹자의 정맥이니 네가 힘써야 할 것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만년에 마침 병을 얻어 손수 이 종이에 글을 써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기타 간곡한 말씀 또한 충후함과 성실함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더욱이 이욕에 빠지는 것을 살신(殺身)의 경계로 삼도록 했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받은 지 어언 40년이 흘렀건만, 이미 간절히 새겨서 실추가 없도록 할 수 없었고, 또 뚜렷이 드러내어 현창할 수도 없었으니, 참으로 그것이 없어져 전해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슬프게 여겨 한마디해준다면, 불후의 은혜를 어찌 자손만이 힘입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또 울먹이며 절하였다.
나 또한 삼가 그 글을 받아 읽고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죽음이나 삶이나 사람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니, 진실함이 쌓이면 후세에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채공(蔡公)이 평생 그 아들에게 가르친 것은 이록(利祿)에 간여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을 계발시키는 것이었으니, 그 의지와 식견의 고원함은 진실로 이미 세상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그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 부탁한 것도 오히려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또 글씨의 획은 힘차고 의기는 여유가 있어 또 능히 시종(始終)의 변화에 애태우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애써 거짓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대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살아서는 불우했으나, 계통(季通)이 곧 오늘날에 그 뜻을 잘 이어서 학행을 닦는 외에 율력(律曆)에 더욱 심오하여 토론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었고, 마침내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어 천년 동안의 오류를 속 시원히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모두 명징한 법칙을 만들었으니 이 또한 그 어버이를 영원히 드러내기에 족하였다. 오히려 어찌 내 말로써 그렇다고 하겠는가? 다만 그의 성근한 요청을 헛되게 할 수 없어서 의론을 갖추어 그 뒤에 기록한다. 채씨의 선조는 당나라 말기에 벼슬하여 건양령(建陽令)이 되었고, 비로소 마사(麻沙)에서 가문을 열었다. 10대(代)를 내려와 공에 이르니 휘는 발(發)이요 자는 신여(神與)이다. 같은 고을의 첨씨(詹氏)게 장가들어 계통(季通)을 낳았고, 소흥(紹興) 임신년 6월에 죽었는데 향년이 64세라고 한다. 소희(紹熙) 임자년(1192) 겨울 12월 무신 대한(大寒)에 신안 주희가 삼가 씀.
友生蔡君季通一日奉書一卷以示熹, 而泣拜且言曰: 「此先人絶筆之書也. 先人自幼警悟, 七歲卽能爲詩. 旣長, 博學强記, 高簡廓落, 不能與世俗相俯仰, 因去遊四方, 聞見益廣. 遂於易象天文地理三式之說無所不通, 而皆能訂其得失. 中年乃歸, 買田築室於武夷之陽. 其間屢道盜賊水火之變, 而浩然不以屑意, 杜門掃軌, 專以讀書敎子爲事. 元定生十年, 卽敎使讀西銘. 稍長, 則又示以程氏語錄, 邵氏經世, 張氏正蒙等書, 而語之曰:『此孔孟之正脈也, 爾其勉旃!』晩歲屬疾, 手書此紙以付元定. 其他丁寧之語, 亦無不出於忠厚誠實, 而尤以沒溺於利欲爲殺身之戒. 元定涕泣拜受, 于今四十年, 旣不能拳拳服膺以無失墜, 而又不能有以表著而顯揚之, 誠竊懼其泯沒而無傳焉. 惟吾子幸哀而予之一言, 則不朽之惠豈惟子孫賴之!」 語訖, 又泣以拜. 熹亦拜受其書而伏讀之, 爲之喟然太息曰: 死生之際, 人之所不容僞, 而誠之積者未有不顯于後者也. 蔡公平生所以敎其子者, 不干利祿而開之以聖賢之學, 則其志識之高遠固已非世人所及矣. 及其委衾屬纊之餘, 而其所託猶不異於平日. 且其字畫壯偉, 意氣間暇, 又能無怛於始終之變如此, 是豈可以勉强而僞爲哉! 夫如是, 是以生雖不遇, 而季通乃能承厥志於今日, 學行之餘, 尤邃律曆, 討論定著, 遂成一家之言, 使千古之誤曠然一新. 而遡其源流, 皆有明法, 是亦足以顯其親於無窮, 尙奚以予言爲哉? 顧其請之勤, 有不可虛者, 是以備論而竊識於其後. 蔡氏之先仕唐末, 爲建陽令, 始家於麻沙. 世十傳而至公, 諱發, 字神與. 娶同縣詹氏而生季通, 以紹興壬申歲六月卒, 卒時年六十有四云. 紹熙壬子歲冬十有二月戊申大寒日, 新安朱熹謹書.
유숙통의 시권에 발문을 붙임[跋劉叔通時卷] 임자년(1192) 겨울.
숙통(叔通)의 시는 다듬거나 짜 맞춘 노력은 없었지만, 평이하고 침착하여 힘을 들이지 않았기에 여유로운 맛이 있다. 일전에 내가 본 것 중에도 아름다운 시구가 많았다. 그러나 혹 이 시권에서 보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대단히 좋다’고 말한 것이 도리어 숙통(叔通)이 ‘너무 마음에 맞지 않다’고 말한 것이 되리라. 추운 저녁에 화롯불을 쬐는데 눈바람이 거세게 부니, 시를 읊고 나서 장난 삼아 그 뒤에 쓴다. 운곡(雲谷) 회암노인(晦庵老人).
叔通之詩不爲雕刻纂組之工, 而其平易從容, 不費力處, 乃有餘味. 頃予所見佳句多矣, 而或不見於此卷, 豈予所謂大好者, 乃叔通所謂大不得意者耶? 寒夜擁鑢, 風雪大摯, 吟諷之餘, 戲書其後. 雲谷晦菴老人.
여백공의 서경 해설에 발문을 붙임[跋呂伯恭書說]
내가 왕년에 백공[伯恭: 이름은 여조겸(呂祖謙)]을 아호(鵝湖)로 보낼 때에 그가 이 책을 만들었음을 알았으나 아직까지 보지를 못했다. 이에 그간에 빠진 글이나 의심 나는 뜻이 있지 않았는지 물었는데, 백공이 ‘없다’고 답하여 나는 속으로 괴이하다고 여겼다. 몇 년 후, 다시 구주(衢州)에서 만났을 때에 백공은 비로소 나에게 말하길, “서경의 글은 참으로 해석할 수 없는 곳이 있는데, 전일에 의심스러운 곳을 뺄 수 없었음이 매우 후회가 된다”고 하였다. 나는 이내 백공의 학문이 이미 정밀하여 그 진보가 끝이 없음을 탄복하였으나, 그 후에 결국 수정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미묘한 말과 깊은 뜻을 다시 탐색할 곳이 없지만 이 책을 폐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백공의 내제(內弟)인 증후(曾侯) 치허(致虛)가 남강(南康)에서 목판에 새기고, 나에게 발문을 부탁했다. 나는 생각건대, 백공이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을 비록 그의 문도가 혹 반드시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본말이 이와 같음을 갖추어 논하여 독자로 하여금 백공이 만년에 빼려고 했던 것은 뺐음을 알도록 했으니, 거의 그가 이 글을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소희(紹熙) 임자년(1192) 섣달 그믐날에 신안 주희가 씀.
予往年送伯恭父於鵝湖, 知其有此書而未及見也. 因問其間得無亦有闕文疑義者乎, 而伯恭父曰無有, 予心固竊怪之. 後數年, 再會於衢州, 伯恭父始謂予曰: 「書之文誠有不可解者, 甚悔前日之不能闕所疑也.」 予乃歎伯恭父之學已精而其進猶未已, 然其後竟未及有所刊訂而遽不起疾, 則其微詞奧義無所更索, 而此書不可廢矣. 今伯恭父之內弟曾侯致虛鋟木南康, 而屬予記其後. 予惟伯恭父所以告予者, 雖其徒或未必知, 因具論其本末如此, 使讀者知求伯恭父晩所欲闕者而闕之, 則庶幾乎得其所以書矣. 紹熙壬子歲除日, 新安朱熹書.
위시랑의 문집에 발문을 붙임[跋魏侍郞集]
건염(建炎)과 소흥(紹興) 무렵에 강성한 오랑캐가 침략하여 휘종(徽宗)․흠종(欽宗) 두 황제가 포로로 잡혀가니, 천자께서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릴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충직하고 지혜롭고 민첩하고 변론에 뛰어난 선비가 전쟁터를 내왕하며 화친을 맺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의 대부들은 게으르고 두려워하여 기꺼이 가려는 자가 없었다. 유독 작고한 시랑(侍郞) 건안(建安) 위공[魏公: 이름은 양신(良臣)]과 나의 족조(族祖) 비각공[秘閣公: 이름은 주변(朱弁)]이 제생(諸生)의 신분으로 자신을 천거하여 비분강개하며 갈 것을 청하였다. 일산(日傘)을 들고 깃발을 펼치며 서로 앞뒤를 다투어 나아가 서슬 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오랑캐의 조정에서 목숨을 바쳤다. 시랑공은 곧 거짓 관직을 받지 않고 부절을 쥐고서 죽었으며, 족조도 역시 반드시 죽음으로써 맹세하였으나 우연히 전벽(全璧)을 얻어 돌아왔다. 비록 당한 바에 생사의 다름은 있었지만, 몸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죽으려는 본뜻은 마음속에 본래 정해졌음은 애초부터 다름이 없었다. 위공의 손자 영(瑛)이 이 글을 보여주면서 발문을 적도록 했다. 나는 생각건대, 두 분의 충의와 큰 절개는 이미 역사책에 실려 만세에 전해졌으나, 다만 두 가문은 멀리 떨어지고 풍상을 겪은 지 오래되었으니, 후인들에게 들려주지 않을 수가 없다. 삼가 재계하고 조용히 기록한다. 소희(紹熙) 계축년(1193) 7월 초하룻날에 구위(具位) 주희가 삼가 씀.
建炎, 紹興之間, 强虜憑陵, 兩宮隔絶, 天子不勝晨夕溫淸之念, 思得忠智敏辯之士往來兵間, 以通和好. 而見大夫婾惰畏縮, 無肯行者. 獨故侍郞建安魏公與熹之族祖祕閣公以諸生自薦, 慷慨請行. 擁蓋張旜, 略相先後, 卒冒白刃, 致命虜廷. 侍郞公尋以不受僞官, 握節以死, 而族祖亦以必死自誓, 偶得全璧而歸. 雖其所値有生死之不同, 然其捐軀狥國之本志素定於胸中者, 則未始不同也. 魏公之孫瑛見示此編, 俾書其後. 熹惟二公忠義大節固已載在史冊, 傳之萬世, 特兩家絶域風霜之舊, 不可使後之人無聞焉, 謹齋祓而竊識之. 紹熙癸丑七月初吉, 具位朱熹謹書.
장횡거․소강절의 첩 뒤에 씀[書橫渠康節帖後]
이것은 횡거(橫渠)선생의 서첩과 강절(康節)선생의 시, 양문정(楊文靖)․진충숙(陳忠肅) 두 분의 발문이다. 모두 양씨가 소장했는데, 병산(屛山) 유씨(劉氏)가 얻은 것이다. 나는 글을 빌려 본떠서 새겨 학자들에게 전하였다. 거기에서 여항(餘杭) 동재(東齋)라고 한 것은 양씨가 기록하였다. 소희(紹熙) 계축(1193) 8월 병오일에 주희.
右橫渠先生帖, 康節先生詩, 楊文靖, 陳忠肅二公跋語, 故皆藏楊氏, 而屛山劉氏得之. 熹因借本摹刻, 以傳學者. 其曰餘杭東齋者, 楊氏記也. 紹熙癸丑八月丙午, 朱熹.
선친 이부랑의 편지 뒤에 씀[書先吏部手澤後]〔一〕
내제(內弟) 축강국(祝康國)이 선친이 외조부에게 보낸 편지를 꺼내 보였는데, 불초한 내가 이때에 태어났기 때문에 편지 속에 언급되었다. 어언 64년이 흘렀는데 손때 묻은 편지를 받들어 읽으니, 피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삼가 발문을 적어서 돌려보낸다. 소희(紹熙) 계축년(1193) 12월 7일에 고자(孤子) 조산랑(朝散郞), 비각수찬(秘閣修撰), 주관남경홍경궁(主管南京鴻慶宮) 희(熹)가 삼가 씀.
內弟祝康國出示先君子與外大父書, 熹之不肖於是始生, 故書中及之. 今六十有四年矣, 捧玩手澤, 涕血交零, 敬書其後而歸之. 紹熙癸丑十二月七日, 孤朝散郞, 祕閣修撰, 王管南京鴻慶宮熹謹書.
〔一〕此篇又見續集卷八韋齋與祝公書跋.
여암기의 문집에 발문을 붙임[跋余巖起集]
나는 젊었을 적에 자주 선배들을 보고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 마음을 세우고 몸을 처신한 것을 보면, 성품이 강경하고 질박하고 정직한 것을 어질게 여겼고, 관직에 나아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굳세고 과단성이 있는 것을 옳게 여겼다. 그 글을 지을 때에도 명백하고 뚜렷하게 일의 정황을 지적하기에 힘썼으며 말이 모호하고 우물쭈물하거나 곁눈질하면서 아첨하는 태도가 없었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한 두 번만 읽어도 곧 무슨 일을 논하고 어떤 계책에서 나온 것인지를 환히 알게 하여 피차간에 의심이 없게 하였다. 근년 이래에 풍속이 크게 변하여 위로는 조정의 신하로부터 아래로는 시골의 벼슬 없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서로 더불어 일종의 의론을 전하고 익혀, 행동을 규제하고 말을 할 때에 오로지 관대히 포용하여 깊이 감춰두거나 두루뭉수리하게 미화하는 것을 숭상하여, 함께 거처한 자로 하여금 종신토록 마음에 품은 바를 추측하지 못하게 하고, 그 말은 듣는 자로 하여금 종일토록 뜻한 바가 어디를 지향하는지 모르게 한다. 4-50년 전의 풍속을 회고해보면 마치 추위와 더위, 낮과 밤이 서로 크게 뒤바뀐 듯하니,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용산(龍山) 여공(余公)의 글을 보니 또한 개연히 감동이 밀려온다. 여공의 휘는 양필(良弼), 자는 암기(巖起)이다. 유생 시절부터 과거시험장에서 문명을 드날리더니 향시에 합격하여 외대(外臺)에 임명되었다. 나의 선친과 고인이 된 직비각(直秘閣) 오공로(吳公路)가 그 글을 읽고 나서 기특하게 여기고, 참으로 쓸만한 내용이 있다고 하면서 그를 앞줄에다 두었다. 조금 뒤에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곧 적을 평정하는 계책으로 공을 세웠고, 중외(中外)에 드나들면서 병영의 직분을 다하여 모두 명성이 자자했다. 평생 지은 글이 매우 많았으나 대부분 잃어버려 보존된 것이 이것뿐이다. 그러나 모두 응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저작이어서 빈말이 없다. 사망한 지 28년이 흘렀는데 그 막내아들 대용(大用)이 건양위(建陽尉)로 나와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나와 그는 선대부터 세의(世誼)가 있었고, 또 일찍이 하급관리로 공을 온릉(溫陵)에서 모시게 되었는데 나를 칭찬하면서 가르침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늘그막에 다시 이 글을 얻어 읽어보니 금석지감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공자는 “나는 전에는 오히려 사관들이 글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음과, 말을 소유한 사람이 남에게 빌려주면서 타게 함을 보았는데, 지금에는 그것도 없어졌구나!”라고 말했는데, 나도 여공의 글에 대해 그처럼 말하고 장탄식하며 발문을 쓴다. 대용(大用)은 청렴하고 절개가 있어 구차스럽지 않아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앞에 나서니, 공의 열렬한 기풍을 전해 받았다고 말하리라. 소희(紹熙) 계축년(1193) 12월 경신일에 조산랑, 비각수찬, 주관남경홍경궁 주희가 씀.
熹少時猶頗及見前輩而聞其餘論, 覩其立心處己, 則以剛介質直爲賢; 當官立事, 則以强毅果斷爲得. 至其爲文, 則又務爲明白磊落, 指切事情, 而無含胡臠卷, 睢盱側媚之態, 使讀之者不過一再卽曉然知其爲論某事, 出某策而彼此無疑也. 近年以來, 風俗一變, 上自朝廷搢紳, 下及閭巷韋布, 相與傳習一種議論, 制行立言, 專以醞藉襲藏, 圓熟軟美爲尙, 使與之居者窮年而莫測其中之所懷, 聽其言者終日而不知其意之所鄕. 回視四五十年之前風聲氣俗, 蓋不啻寒暑晝夜之相反. 是孰使之然哉? 觀於龍山余公之文者, 亦可以慨然而有感矣. 余公諱良弼, 字巖起, 自爲諸生, 卽以文鳴於場屋, 以鄕擧類試外臺. 熹之先君子與故直祕閣吳公公路得其文而異之, 以爲眞有可用之實, 取而寘之前列. 旋入幕府, 卽以畫策平賊有功, 出入中外, 遂分帥閫, 皆有聲烈. 平生爲文甚多, 亡逸之餘, 所存止此. 然皆摭實應用之作〔一〕, 不爲空言. 沒後二十八年, 其季子大用尉建陽, 出以相視. 熹以先世之契, 又嘗獲以少吏事公於溫陵, 辱獎進而收敎焉, 衰莫零落, 乃復得斯文而讀之, 其所感於今音之變, 又當如何也哉! 孔子曰: 「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 借人乘之, 今亡已夫!」 熹於余公之文亦云, 因太息而書其後. 大用廉介不苟, 遇事敢前, 蓋有公之風烈云. 紹熙癸丑十二月庚申, 朝散郞, 祕閣修撰, 主管南京鴻慶宮朱熹書.
〔一〕摭: 原作 「無」, 據宋閩, 浙本改.
거짓 조서 뒤에 씀[書僞詔後]
내가 장로에게 들으니, 남쪽으로 천도한 건염(建炎) 초기에 천자의 수레가 이미 전당(錢塘)에 도착했는데, 장충헌공(張忠獻公)을 평강(平江)에 머무르게 하여 후진(後鎭)으로 삼았다. 이때에 작고한 병부시랑 탕공[湯公: 이름은 동야(東野)]이 실로 수장(守將)이 되었다. 하루는 사령(赦令)이 당도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 마음으로 혼자 의심하다가 속히 장공에게 알렸다. 공이 말하기를 “우선 아전 중에서 글을 알고 일을 아는 자를 보내 말을 달려서 사서(赦書)를 보게 하고, 거짓이 있으면 사서를 갖고 있는 행렬을 늦추어놓고 먼저 빼앗아 돌아오면 일을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탕공이 옳다 하고 곧 주학교수(州學敎授) 모관(某官)을 보내 살펴보고 돌아오게 하니, 과연 명수(明受)의 거짓 조서였다. 또 고하기를 “이것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는데,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장차 병졸들은 폐하의 하사를 바라겠지만 우리들은 먼저 화를 당할 것이니, 어찌 충성을 보일 수 있겠는가?”하였다. 탕공이 “그렇다면 마땅히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장공은 말하기를 “지금 곧 돈 창고를 열어 상을 준다는 뜻을 보여주고 나서, 위조된 사서를 물리치고 은밀히 옛 관부에 보관한 등극사서(登極赦書)를 가지고 와 수레 속에 둔다. 이를 맞이하여 성문으로 올라가 읽고 공표할 때에 그 사다리를 치우고 갑자기 오르는 자가 없도록 금하고 나서, 금과 비단을 나누어주기를 마치 평상시에 성 밖에서 주는 옛 일처럼 한다면 가할 것이다” 하였다. 탕공이 시행하니, 이에 인정이 대강 안정되어 큰 계획을 결행하게 되었다.
나는 세상이 한갓 장공이 황제를 복위시킨 공만 크게 여기고, 탕공이 더불어 여러모로 모의하여 깊숙이 도와준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자가 적음을 늘 한스러워했다. 지금 탕공의 가전(家傳)을 읽고, 또 그 거짓 조서를 불태운 일을 얻어서 이전에 장로에게 들었던 것으로 참고해보니, 역시 공의 처신이 평소에 정해져 있어 속일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일은 더욱 훌륭한데도, 행장과 묘지 그리고 기타 기록에는 모두 생략하여 쓰여지지 않았으니 어째서인가? 유종원(柳宗元)이 말하기를, “사마천은 형가(荊軻)가 하무저(夏無且)에게 징계되었음을 기록하고, 유후(留侯: 장량)는 화공(畵工)에게 징계되었음을 기록했다”고 했다. 지금 태사씨(太史氏)가 장차 고종(高宗)이 이룬 중흥의 성대함을 편찬하여 만세에 드리우려 하는데, 또한 여기에서 취할 것이 없겠는가? 소희(紹熙) 갑인년(1194) 정월 계해 초하루 아침에 조산랑(朝散郞), 비각수찬(秘閣修撰), 주관남경홍경궁(主管南京鴻慶宮) 주희(朱熹)가 삼가 씀.
熹聞之長老, 建炎南渡之初, 車駕已幸錢塘, 而留張忠獻公於平江, 以爲後鎭. 時故兵部侍郞湯公實爲守將, 一日, 聞有赦令當至, 心獨疑之, 亟走以白張公. 公曰: 「姑遣吏屬知書解事者馳往發視, 有故則緩驛騎之行而先取以歸, 則事可議矣.」 湯公然之, 則遣州學敎授某官往視而歸, 乃明受僞詔也. 則又以告曰: 「是則其可宣乎?」 張公曰: 「不然, 事已至此, 胡可匿? 且卒徒觖於望賜, 吾屬先受禍矣, 又何忠之能輸哉?」 湯公曰: 「然則宜柰何?」 張公曰: 「今便發庫錢以示行賞之意, 乃屛僞赦而陰取故府所藏登極赦書置輿中, 迎登譙門, 讀而張之, 卽捐其階, 禁無敢輒登者, 而散給金帛如常時郊賫故事, 則可矣.」 湯公行之, 於是人情略定, 乃決大計. 熹常恨世徒知張公復辟之功爲大, 而於湯公相與謀議曲折所助之深則少有能言之者. 今讀其家傳, 又得其焚僞詔事, 而以前所聞者參之, 亦足以見公之處此素定, 不可誣矣. 茲事尤偉, 而行狀墓誌及其他記錄皆略不書, 何哉? 柳宗元言司馬遷記荊軻徵夏無且, 記留侯徵畫工. 今太史氏方將纂輯高宗中興盛烈以垂萬世, 得無亦有取於斯乎? 紹熙甲寅正月癸亥朔旦, 朝散郞, 祕閣修撰, 主管南京鴻慶宮朱熹謹書.
조청헌의 사실 뒤에 적음[題趙淸獻事實後]
국가가 희령(熙寧)․원풍(元豐)․원우(元祐) 이래로 인재와 정사가 나뉘어 두 길이 되었는데, 이것을 옳게 여기면 저것을 그르다 하고 왼쪽으로 향하는 자는 오른쪽을 등지니, 이미 같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같은 것 중에 또 다름이 있었으니, 예컨대 원우의 삭당(朔黨)․낙당(洛黨)․천당(川黨)이 그러하고, 희령․원풍의 증문숙[曾文肅: 이름은 포(布)]․조청헌[趙淸獻: 이름은 정지(挺之)]․장승상[張丞相: 이름은 상영(商英)]은 또 장돈(章惇)․채경(蔡京)과 서로 같지 않다. 나는 어릴 적에 조공의 손자 혜주사군(惠州使君)과 종유하면서 채경과 본말을 달리 논한 조공의 수기를 보았는데, 대개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공의 불행을 탄식하였다. 지금 다시 혜주의 아들 아무개[某]로부터 이 글을 얻어 읽어보니, 또한 깊이 그 일을 생각하며 거듭 국가의 큰 불행을 탄식하였다.
대저 조공이 스스로 말하기를, “아래로 백성과 원한을 맺고자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번거롭고 까다롭게 쟁탈해 가는 횡포한 정치를 자행해서는 안 되고, 가운데로 사대부에게 죄를 얻고자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충현(忠賢)을 금고하는 사특한 말을 부르짖어서는 안 되고, 밖으로 이적에게서 믿음을 잃고자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연(燕)․계(薊)의 땅을 개척하는 미친 계책을 망령되이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가 평생 질박하고 두텁고 청렴하고 절약함이 남보다 뛰어났음을 살펴보면, 또한 반드시 채경을 위해 음란하고 사치하고 아첨하여 황제의 마음을 미혹시켜 허물이 있는 곳으로 몰아넣지는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렇다면 비록 희령․원풍에서 함께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특함과 바름, 얻음과 잃음 사이에서 어찌 같은 차원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춘추에서 왕도의 법을 밝히면서 오패(五覇)의 공을 폐하지 않았고, 원성(元城) 유충정공(劉忠定公)이 정화(政和)․선화(宣和: 모두 휘종의 연호)의 난에 상심하여 “또한 신종(神宗)을 추종할 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훗날의 군자가 이 글에서 오히려 어찌 취할 것이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아! 그 또한 슬퍼할 만하다. 그 또한 슬퍼할 만하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계해일 설날에 홍경외사(鴻慶外史) 주희가 씀.
國家自熙, 豐, 元祐以來, 人才政事分爲兩塗, 是此者非彼, 鄕左者背右, 旣不可得而同矣, 而於其同之中又有異焉, 則若元祐之朔黨, 洛黨, 川黨, 而熙, 豐之曾文肅, 趙淸獻, 張丞相, 又與章, 蔡自不同也. 熹少時從趙公之孫惠州使君游, 得觀趙公手記所與蔡京異論本末, 蓋嘗三復而歎公之不幸. 今復從惠州之子某得此書而讀之, 則又深惟其故而重歎國家之大不幸也. 夫以趙公之自言, 下不欲結怨於百姓, 則必不肯肆行煩苛爭奪之橫政;中不欲得罪於士大夫, 則必不肯唱爲禁錮忠賢之邪說;外不欲失信於夷狄, 則必不肯妄起開拓燕, 薊之狂謀. 而考其平生質厚淸約, 有過人者, 則又知其必不肯爲蔡京之淫侈導諛以蠱上心而納之於有過之地也. 是則雖曰同出於熙, 豐, 而其邪正得失之間, 豈可同年而語哉? 且春秋明王法而不廢五伯之功, 元城劉忠定公傷政, 宣之亂而曰莫若且宗神考, 然則後之君子之於此書豈不猶有取焉? 鳴呼, 其亦可悲也哉! 其亦可悲也哉! 紹熙甲寅元曰癸亥, 鴻慶外史朱熹書.
여사인이 설원량에게 준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呂舍人與薛元亮帖]
설공(薛公)은 가난을 편히 여기고 낮은 지위를 지켜내는 절개가 있고, 여공(呂公)은 현자를 좋아하고 덕을 숭상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 글을 보는 자는 스승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4월 16일에 신안 주희가 씀.
薛公安貧守賤之節, 呂公好賢尙德之心, 覽此卷者可以得師矣. 紹熙甲寅孟夏旣望, 新安朱熹書.
설외옹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薛畏翁詩]
제생(諸生)이 간혹 묻기를 “경(敬)은 마땅히 어떻게 풀이해야 합니까?”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은 풀이할 수가 없는데 다만 ‘외(畏)’자가 가까울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지금 설공이 자신의 호를 짓고 그 손자를 훈계한 것을 보면, 나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4월 16일에 신안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는 임천성(臨川城) 남쪽의 객사에서 살펴보고 발문을 쓴다.
諸生或問敬當何訓, 余告之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今觀薜公之自名與所以訓其孫者, 知鄙之言不繆也. 紹熙甲寅孟夏旣望, 新安朱熹仲晦父觀于臨川城南之客舍, 因書其後云.
증구보와 유자징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曾裘父劉子澄帖]
소희(紹熙) 갑인년(1194) 초여름에 내가 장사(長沙)로 부임하기 위해 임천(臨川)을 지나갈 때에 왕군(汪君)이 나를 찾아와 이 글을 꺼내어 보였는데, 곧 증구보(曾裘父)와 유자징(劉子澄)의 필적이었다. 이미 청계선생(靑溪先生)의 고매한 행실을 추앙했고, 또 두 사람이 모두 선배의 유풍을 늠름하게 지켰던 것에 감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 책을 덮고 크게 한숨을 쉰다. 왕군은 명가의 전통을 얻었고 좋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배운 바가 필시 남보다 뛰어날 것이다. 나랏일로 바삐 가야해서 자세하게 묻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주희(朱熹) 중회(仲晦)가 씀.
紹熙甲寅初夏, 予以赴官長沙, 道過臨川, 汪君見過, 出此卷見示, 乃曾裘父, 劉子澄筆迹也. 旣仰靑溪先生之高行, 又感二君所立皆凜凜乎其有前輩之遺風, 而今皆不可見矣, 爲之掩卷太息. 汪君得名家之傳, 有良友之助, 所學必有以過人者. 恨以王事馳驅, 不及細扣之也. 朱熹仲晦父書.
여사인의 청계유고에 발문을 붙임[跋呂舍人靑溪類稿]
소흥(紹興)의 자미여공[紫微呂公: 이름은 본중(本中)]은 명성과 덕망이 중후하여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모두 법도가 되었으니, 본디 후학이 찬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汪)․사(謝) 등 여러 현인들의 고매한 뜻과 청렴한 절개를 논한 것은 모두 후세에 믿음을 전하기에 충분한데, 누가 고쳐 평가하겠는가? 유독 요절(饒節)이란 자는 하루아침에 머리털을 깎고 천륜을 끊어버렸는데 제공들이 에워싸고 보면서도 한사람도 멈추게 하여 구하는 자가 없었고, 혹자는 이내 종용하고 탄식하기를 미칠 수 없는 것으로 여겼으니 또한 무엇 때문인가? 그래서 이 글을 보니, 가만히 느낌이 밀려와 갑자기 크게 한숨을 쉬며 발문을 쓴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여름 4월 16일에 주희 중회가 씀.
紹興紫微呂公名德之重, 一言一動皆有法戒, 固非後學可得而贊也. 其論汪, 謝諸賢高志淸節, 皆足以傳信後世, 孰敢改評? 獨饒節者, 一旦毁削膚髮, 殄絶天倫, 而諸公環視, 無一人能止而救之者, 或乃從臾嗟嘆〔一〕, 以是爲不可及, 亦獨何哉? 因觀此卷, 竊有感焉, 輒太息而志其後. 紹熙甲寅夏四月旣望, 朱熹仲晦父書.
〔一〕臾: 原作 「更」, 據宋閩, 浙本改.
증구보가 굴대거에게 준 시에 발문을 붙임[跋曾裘父贈屈待擧詩]
옛날에 기거(起居) 이성계[李成季: 이름은 소기(昭玘)]가 그의 조카인 대참(大參) 한노[漢老: 이름은 병(邴)]의 글을 보고, “너의 글에 대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일찍이 그 말을 좋아해서 매번 사우(士友)들에게 암송해 주었다. 지금 강서(江西)에 와서 그 사우들이 대부분 오묘하게 언어를 구사했으나 왕왕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구하는 뜻이 없지 않음을 보니, 어찌 이공(李公)의 가르침을 아직 강구해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는 이미 글을 짓는다고 말하면 형세상 반드시 외부에 기대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인가? 굴군(屈君)은 시로써 정재(艇齋)에게 인정을 받았는데도 오히려 여러 사람에게 차중(借重: 남의 이름이나 역량을 빌어 자기의 위세를 더함)하려고 나에게도 말하니 이렇게 쓴다. 신안 주희 중회가 씀.
昔李起居成季見其姪大參漢老之文曰: 「汝於文吾不能有所與, 但勿求人知耳.」 余嘗愛其言, 每爲士友誦之. 今來江西, 見其士友多妙於語言而往往不能無求人知之意, 豈於李公之誨未之講耶? 將旣曰爲文, 則勢必不能無待於外也? 屈君以詩見知於艇齋矣, 而猶不能不借重於衆口, 唇以謂予, 因爲書此云. 新安朱熹
仲晦父.
증중공의 글에 발문을 붙임[跋曾仲恭文]
선배들의 문자는 규모가 크고 넓으며 논의는 웅장하고 뛰어나 시속에 아첨하는 태도를 일삼지 않았으니, 그 풍기와 습속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선화(宣和)의 뒤에 건염(建炎)과 소흥(紹興)이 계속해서 일어나 위태롭고 혼란함이 극에 달했는데도 선비들의 기세는 쇠하지 않았는데, 증공의 글을 살펴보면 또한 그 방불함을 볼 수 있다. 근년 이래로 말 잘하는 선비는 으레 기쁜 얼굴과 교묘한 웃음을 짓기에 힘쓰느라 다시는 대장부의 기개가 없으니, 식자들이 대개 깊이 근심하면서도 바로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문득 사사로이 발문을 기록해둔다.
前輩文字規模宏闊, 論議雄偉, 不爲脂韋嫵媚之態, 其風氣習俗蓋如此. 故宣和之後, 建, 紹繼起, 危亂
雖極而士氣不衰, 觀曾公之文亦可以見其彷彿矣. 近歲以來, 能言之士例以容冶調笑爲工, 無復丈夫之氣, 識者蓋深憂之而不能有以正也. 因讀此編, 輒私記於其後云.
정선무의 첩에 발문을 붙임[跋鄭宣撫帖]
어진 사대부는 사특함을 용납하지 않다가 귀양가고 떠도는 재앙에 이르게 되는데, 비록 평소 지극히 친밀한 친구라 하더라도 역시 등지고 떠나기도 한다. 심한 경우는 그 낭패와 곤욕을 편안히 보면서 구휼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평상시에 한번 찾아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없어도, 홀로 분연히 한때의 권신(權臣)의 위세와 학대를 돌아보지 않고 기구한 몸을 이러 저리 뒤척이면서 그 옹호하고 부지하는 힘을 이루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그가 어찌 짐짓 괴상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고 명성을 취하겠는가? 다만 떳떳함을 잡고 덕을 좋아하는 선량한 마음과 세상에 울분을 느끼고 사특함을 미워하는 장대한 뜻으로, 홀로 타고난 재질을 많이 얻었으나, 또 능히 사사로운 정과 사특한 생각에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스스로 멈출 수 없었을 뿐이다. 일찍이 기억하건대, 지난해에 단전상서(端殿尙書) 왕공(汪公)을 모시고 앉아, 그가 당세의 선비에게 능히 이처럼 하는 것을 보고, 늘 매우 감탄하면서 아무나 잘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나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서 다시 일이 많아진 연후에야 그 말에 맛이 있음을 알았고 세교(世敎)에 보탬이 많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연히 남풍(南豐) 노형보(魯衡父)가 소장한 선무(宣撫) 정공(鄭公)과 그의 선친 교수공(敎授公)의 수첩(手帖)을 보고, 속으로 거듭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 뒤에 발문을 써서 돌려보내어, 세상의 군자들이 마땅히 읽고 이마에 땀이 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賢士大夫不容於邪枉以放於竄逐流離之禍, 雖其平生至親篤友, 亦或背而去之, 甚者安視其狼狽困辰而莫之卹也. 當此之時, 乃有常日未嘗一通聲問之人, 獨能奮然不顧一時權臣之虐, 崎嶇反側, 以致其擁護扶持之力而不少懈, 彼豈故爲詭激之行以驚世取名哉? 特以秉彝好德之良心, 憤世疾邪之壯志獨有得於天分之多, 而又能不爲私情邪念之所回奪, 是以於此自有不能已耳. 嘗記頃年侍坐於端殿尙書汪公, 見其於當世之士有能此者, 每極稱歎, 以爲難能, 初蓋未能不以爲疑. 逮此晩歲, 更事旣多, 然後知其言之有味而識其有補於世敎之深也. 偶觀南豐魯衡父所藏宣撫鄭公與其先君敎授公手帖, 竊獨重有感焉, 因書其後而歸之, 以爲世之君子宜有讀之而泚其顙者云.
증남풍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曾南豐帖]
나는 약관 전에 남풍(南豐)선생의 글을 읽고, 그 말이 엄격하고 이치가 바름을 좋아하여 평상시에 암송하고 익혀서, 사람의 말은 반드시 이와 같아야 곧 구차스런 저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인(舍人) 왕자발(王子發)이 이른바 “(남풍은) 스스로 유향(劉向)에 견주었는데, 한유(韓愈)와 비교해서 어떠한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절로 감동을 받았다. 지금 선생의 족손 유(濰)에게서 그 친필을 얻어보니 탄식을 이길 수가 없다. 문소공(文昭公)의 글자는 연전에 장락(長樂)의 승사(僧舍)에서 본 적이 있으나, 상담(湘潭) 문숙[文肅: 증포(曾布)의 시호]의 편지는 또한 지금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여름 4월 22일에 신안 주희가 의춘(宜春) 창산도(昌山渡)의 객사에서 씀.
熹未冠而讀南豐先生之文, 愛其詞嚴而理正, 居常誦習, 以爲人之爲言必當如此, 乃爲非苟作者. 而於王子發舍人所謂自比劉向, 不知視韓愈如何者, 竊有感焉. 今乃得於先生之族孫濰見其親筆, 不勝歎息. 文昭公字頃嘗於長樂僧舍見之, 至於湘潭文肅之書, 則亦今始得觀也. 紹熙甲寅夏四月二十二日, 新安朱熹書于宜春昌山渡之客舍.
여사인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題呂舍人帖]
사람이 지켜야할 큰 윤리가 다섯 가지인데, 붕우(朋友)가 그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 중에 그것을 아는 자가 매우 드문데, 여공(呂公)은 홀로 이것을 깊이 간직하였다. 이 서첩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그 사이에 시문으로 가르친 곳이 많았으나 공은 만년에 이를 깊이 뉘우쳤으니, 독자들은 또한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4월 24일에 신안 주희가 씀.
人之大倫有五, 而朋友居其一. 然世人鮮克知之, 獨呂公於此爲拳拳焉. 觀於此帖, 可以見矣. 至於其間多以詩文爲敎, 則公晩歲蓋深悔之, 覽者又不可以不知也. 紹熙甲寅四月二十四日, 新安朱熹書.
수황이 위승상의 봉사차자에 내린 비답에 발문을 붙임
[書壽皇批答魏丞相奉使箚子]
신 주희(朱熹)가 융흥(隆興) 원년에 부름을 받고 수공전(垂拱殿)에 들어가, 화친을 맺는 것은 책략이 아니라고 망령되이 논했는데 마침 폐하의 뜻과 일치했습니다. 그 후에 곧 제공들이 갑자기 맹약(盟約)으로 확정했음을 듣고, 당시 군신들의 계책에는 필시 매우 부득이 한 점이 있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수황성제(壽皇聖帝: 효종을 지칭)가 승상 수춘공(壽春公)에게 조서를 내려 금나라에 들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준 것을 보면, 나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겠습니다. 그리고 수춘공의 의지와 절개의 훌륭함과 지모와 사려의 정밀함을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공의 아들 웅몽(熊夢)이 신에게 이 글을 보여주었는데, 때마침 부음을 받든 뒤여서 받들어 읽으니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물이 주룩주룩 흐릅니다. 경건히 예를 갖추고 그 아래쪽에다 씁니다.
臣熹以隆興初元召對垂拱, 妄論講和非策, 適契上指. 其後乃聞諸公卒定盟約〔一〕, 竊意一時君臣之計必有甚不得已者. 今得仰窺壽皇聖帝詔報丞相壽春公出疆請事, 於是信其不誣. 而壽春公志節之偉, 謀慮之精, 於此亦可見矣. 公子熊夢視臣此軸, 適當奉諱之後, 奉玩摧裂, 涕血交頤. 敢拜手稽首而書其下方.
〔一〕卒: 原作「率」, 據宋閩, 浙本改.
변지록에 발문을 붙임[跋辨志錄]
백공(伯恭)이 이 글을 지었는데 나는 몇 가지 판본을 보았다. 이 글은 또 장공(章貢) 이화경(李和卿)이 편차한 것이었다. 그 전후의 차례가 간혹 다르다 할지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징계하고 조심하고 미세한 것도 삼가도록 하여 온전한 덕을 성취하도록 하는 뜻은 같지 않음이 없었다. 안성(安成) 팽군(彭君)이 또 이를 받아 전승․배포하였는데, 오직 널리 배포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이 뜻 역시 가상할 뿐이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7월 중복날에 신안 주희가 장사(長沙)의 군재(郡齋)에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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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恭父作此書, 余所見凡數本, 此又章貢李和卿所序次者〔一〕. 其前後次第雖或不同, 然其所以使人警懼懲毖而謹於細微, 以就全德之意, 則未嘗不同也. 安成彭君又受而傳布之, 唯恐不廣, 此意亦可嘉已. 紹熙甲寅七月中伏日, 新安朱熹書于長沙郡齋.
〔一〕序次: 原倒, 據宋閩, 浙本乙.
조청헌공의 편지와 문언박․부필의 서첩 발어 뒤에 발문을 붙임
[跋趙淸獻公家問及文富帖跋語後]
조청헌공[趙淸獻公: 이름은 변(抃)]은 만년에 염계(濂溪)선생을 매우 깊이 알았고, 선생이 공에게 알려준 것도 역시 매우 상세했으니, 장공(章貢)에서 전송하는 시를 보면 상고할 만하다. 그런데 공은 불학(佛學)에 몰두했는데, 왜 그랬을까? 이 글을 읽으면서 탄식한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7월 27일에 신안 주희가 삼가 적음.
“원사(元師)가 위(魏)에 있으니 한 쪽이 믿고 향한다”고 했다. 대개 이른바 “위부(魏府)의 늙은 화엄(華嚴)”이란 하나의 스님일 뿐이다. ‘사(師)’자를 ‘수(帥)’자로 읽어서 마침내 위공(魏公)이라 생각하니 잘못이다. [이는 이석(李石)의 발어 뒤에 적음]
부공[富公: 이름은 필(弼)]의 서첩 속의 말은 곧 먼 곳에서 생각하지만 아직 정해지지 못했다는 말인데, 비문의 기록에 반드시 고찰해야할 점이 있을 것이다. 동파(東波)가 어찌 개보(介父)를 도와 공을 모함했겠는가? [이는 하만(何萬)의 발어 뒤에 적음]
趙淸獻公晩知濂溪先生甚深, 而先生所以告公者亦甚悉, 見於章貢送行之篇者可考也. 而公於佛學蓋沒身焉, 何邪? 因覽此卷, 爲之歎息云. 紹熙甲寅七月二十七日, 新安朱熹謹記.
「元師在魏, 一方信嚮」, 蓋所謂 「魏府老華嚴」, 乃一僧耳. 讀 「師」 爲 「帥」 而遂以爲魏公, 誤矣. 此題李石跋語後富公帖中語乃遠方懸料未定之詞, 碑文所記, 其必有考矣. 東坡豈右介父而誣公者耶? 此題何萬跋語後
삼가예범에 발문을 붙임[跋三家禮範]
아! 예(禮)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다. 사대부가 어려서부터 몸에서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장성해도 집에서 행하지 못한다. 장성해서 집에서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벼슬에 나아가 조정에서 논의하거나 군현에서 시행할 수 없고, 물러나도 향리에서 가르칠 것이 없고, 자손에게 전해도 혹 그 직분이 닦이지 않았음을 모른다. 장사군(長沙郡)의 박사 소연(邵淵) 군이 나의 죽은 벗인 경부(敬夫)가 편차한 삼가예범(三家禮範)이란 책을 얻어서 학궁에서 판각하였는데, 대개 우리 당의 선비들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깊이 고찰하고 힘써 행하여 인륜을 두텁게 하고 비루한 풍속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이니, 그 뜻이 아름답다. 그러나 정자(程子)․장자(張子)의 말이 너무 갖추어지지 않았고, 유독 사마씨(司馬氏: 사마광을 지칭한 듯함)로 글을 이루었다. 그런데 독자들 중에 그 절문(節文)과 도수(度數)의 상세함을 쉽게 논구하지 못할 것으로 여긴 자들은 흔히 익혀서 실행해 보지도 않고 이미 소문만 들어도 겁을 집어먹는 뜻을 지녔다. 또 간혹 그 당실(堂室)의 넓음과 급사(給使)의 많음과 의물(儀物)의 성대함을 보고서 스스로 그 실천할 힘이 부족함을 흠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 글이 배포되더라도 전한 것은 한갓 상자에만 감춰두고 능히 거행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들은 예서(禮書)의 글은 비록 많지만 몸소 시험해보면 혹 잠깐에 불과하고, 예물(禮物)이 비록 넓지만 또한 예문은 부족하더라도 공경하는 마음은 남음이 있는 것이 더 낫는 말이 있음을 너무 모른 것이다. 이제 곧 교만하고 방일함을 편히 여겨 거꾸로 그 어려움을 꺼리고, 조금 갖추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도리어 크게 갖추어지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니, 어찌 그릇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사마씨(司馬氏)의 글에 근거를 두고 여러 학자의 학설을 참고하여 교정하고 증손(增損: 더하고 뺌)하고 강령을 들고 조목을 펼쳐서 그 뒤에 첨부하니,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 요체를 얻어 상세한 절목으로 나아가, 행하기 어렵다고 꺼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가난하고 미천하더라도, 또한 그 큰 절목을 갖추고 번다한 문장을 생략하여 그 본뜻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병들고 쇠약한 몸이어서 미칠 수 없을 분이다. 이제 소군(邵君)의 뜻에 감동하여 문득 다시 써서 기록한다. 아! 후대의 군자가 오히려 나의 뜻을 이루어 줄 수 있을까! 소희(紹熙) 갑인년(1194) 8월 기축 초하루에 신안 주희가 씀.
嗚呼, 禮廢久矣! 士大夫幼而未嘗習於身, 是以長而無以行於家. 長而無以行於家, 是以進而無以議於朝廷, 施於郡縣, 退而無以敎於閭里, 傳之子孫, 而莫或知其職之不脩也. 長沙郡博士邵君淵得吾亡友敬夫所次三家禮範之書而刻之學宮, 蓋欲吾黨之士相與深考而力行之, 以厚彝倫而新陋俗, 其意美矣. 然程, 張之言猶頗未具, 獨司馬氏爲成書. 而讀者見其節文度數之詳有若未易究者, 往往未及習行而已有望風退怯之意〔一〕. 又或見其堂室之廣, 給使之多, 儀物之盛而竊自病其力之不足, 是以其書雖布, 而傳者徒爲篋笥之藏, 未有能擧而行之者也. 殊不知禮書之文雖多, 而身親試之, 或不過於頃刻;其物雖愽, 而亦有所謂不若禮不足而敬有餘者. 今乃以安於驕佚而逆憚其難, 以小不備之故而反就於大不備, 豈不誤哉? 故熹嘗欲因司馬氏之書, 參考諸家之說, 裁訂增損, 擧綱張目, 以附其後, 使覽之者得提其要以及其詳, 而不憚其難行之者. 雖貪且賤, 亦得以具其大節, 略其繁文而不失其本意也. 顧以病衰, 不能及已. 今感邵君之意, 輒復書以識焉. 嗚呼, 後之君子其尙有以成吾之志也夫! 紹熙甲寅八月己丑朔, 新安朱熹書.
〔一〕及: 原作 「見」, 據宋閩, 浙本改.
소강절이 자손을 경계한 진본 필적 뒤에 씀[書邵康節誡子孫眞蹟後]
이는 향림(薌林) 상씨(向氏)가 강절(康節) 선생이 자손을 훈계한 글을 소장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작고한 벗인 유자징(劉子澄)에게서 그 모사본을 얻어서 돌에다 새겨 여산(廬山)의 백록정사(白鹿精舍)에 세웠다. 지금 이내 그 진본을 보게 되니, 격언(格言)과 심화(心畫)은 한 세상에 모범이 될만했다. 백호(伯虎)가 이를 얻어 보존하니 그 후손을 도와 계발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여러 달을 빌려 음미하느라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다시 가만히 발문을 기록하여 돌려보낸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8월 □일에 신안 주희가 풍성(豐城)의 전사(傳舍)에서 씀.
右薌林向氏所藏康節先生誡子孫之文也. 熹嘗從故友劉子澄得其摹本, 刻石廬山白鹿精舍. 今乃獲覩其眞, 格言心畫, 模範一世. 伯虎得而葆之, 所以佑啓厥後者爲亡窮矣. 借觀累月, 玩不釋手, 已復竊識其後而歸之. 紹熙甲寅八月囗日, 新安朱熹書于豐城傳舍.
사간재가 황생에게 준 시에 발문을 붙임[跋謝艮齋與黃生詩]
황생(黃生)은 사람을 섬김에 한결같은 뜻이 있어서 죽고 사는 문제 때문에 그 마음을 둘로 나누지 않았으니, 이는 사대부가 행하기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그의 절개는 참으로 가상했는데, 첨공(詹公)은 사람을 취하여 능히 이처럼 하도록 하고 사공(謝公)은 당대의 명현들과 더불어 또한 뒤이어 표창하니, 모두 훌륭한 덕을 갖춘 자가 하는 일이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추사(秋社) 무신일에 회옹(晦翁)이 살펴보고 탄식하며 그 뒤에 쓴다.
黃生事人有始終之義, 不以生死二其心, 蓋有士大夫所難者. 其節固可嘉, 而.詹公之取人至能使之如此, 謝公與一時諸名勝又從而表章之, 皆盛德事也. 紹熙甲寅秋社戊申, 晦翁覽而歎之, 爲題其後云.
설후의 행장에 발문을 붙임[跋卨侯行實]
호(濠)지역의 부관 설후(卨侯)의 사적은 상서(尙書) 사공(謝公)이 이미 상세하게 전하였는데, 그의 손자 균(鈞)이 또 나에게 발문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천하의 일은 그 실상을 갖추는 것으로 족한데 한갓 실상만 갖추고 문장으로 꾸미지 않으면 간혹 후대에 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문장으로 기술하게 된다. 문장으로 기술하되 또 당대의 순유(醇儒)나 석덕(碩德)의 손에서 나온다면, 그 전승은 또한 멀리 가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을 시켜 헛된 말을 꾸며 찬술한 것이 수천 마디가 된다고 할지라도 어찌 그 실상에 보탬이 되겠는가? 이미 쓰지 않겠노라고 사절했으나 균(鈞)의 청이 끊이지 않고 게다가 사공(謝公)의 명을 따랐다고 하니, 나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임강(臨江)의 길가 객사에서 발문을 쓴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8월 17일에 신안 주희가 씀.
濠倅卨侯之事, 尙書謝公傳之已詳, 而其孫鈞又欲予記其後. 予以爲天下之事有其實足矣, 以爲徒實而不文, 或不得以傳於後也, 故文以述之. 至文以述之, 而又出於一代醇儒碩德之手, 則其傳亦旣遠而足恃矣. 而又使他人飾虛詞以贊之, 雖累千百言, 亦何所加於其實哉? 旣謝不爲, 而鈞之請不置, 且以謝公之命命之. 予不獲避也, 乃記其語於臨江道旁之客舍云. 紹熙申寅八月十七日, 新安朱熹書.
정재 증구보의 사우척독에 발문을 붙임[跋曾裘父艇齋師友尺牘]
이 글들은 모두 여러 선배들이 정재(艇齋) 증공(曾公)과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그의 아들 유(濰)가 적어서 책으로 만들었는데 또한 내 편지도 그 사이에다 두니 외람된 일이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에 임천(臨川)을 경유할 때 입수해 살펴보니 매우 부끄러웠다. 아! 정재(艇齋)는 이미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고, 책 속의 사람들 또한 거의 서거했는데, 오직 육무관(陸務觀)과 내가 생존해 있을 뿐이니, 이 또한 거듭 슬프다! 8월 27일에 주희(朱熹)가 적음.
此編皆諸前輩所與艇齋曾公往來書疏也. 其子濰錄以成書, 乃亦置予言於其間, 非其倫矣. 紹熙甲寅, 經由臨川, 得而觀之, 深以愧歎. 嗚呼!艇齋旣不幸卽世, 而卷中人亦往往逝去, 濁陵務觀與予在耳, 此又重可悲也!八月二十七日, 熹記.
정자의 체설 뒤에 씀[書程子禘說後]
“왕자(王者)가 그 선조의 출생의 근원이 되는 분에게 체(禘) 제사를 올리되 그 선조를 배향하여 사묘(四廟)를 세우니, 서자(庶子)가 왕이 되었을 경우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선조의 출생의 근원이 되는 분에게 체(禘: 천자가 종묘에서 천제께 제사를 올리면서 시조를 배향함) 제사를 올린다’ 함은 비로소 성(姓)을 받게 된 자이다. ‘선조를 배향한다’ 함은 시조로써 배향하는 것이다. 문왕과 무왕은 반드시 후직(后稷)으로써 배향하는데 후세에는 반드시 문왕으로써 배향했다. 시조의 사당이 없으면 태조(太祖)의 사당에서 체(禘) 제사를 지냈을 따름이다. 만물은 하늘에서 근본하고 사람은 조상으로부터 근본하기 때문에 시조를 하늘에 배향한다. 주(周)나라의 후직은 강원(姜嫄)에게서 나왔고 강원(姜嫄) 이상은 다시 미루어 갈 수 없다. 문왕과 무왕의 공은 후직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하늘에 배향하는 것은 반드시 후직(后稷)으로 한다. 아버지는 하늘에 배향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므로 문왕을 명당(明堂)에서 제사하여 상제(上帝)에 배향하니 제(帝)는 곧 하늘이다. 하늘의 신을 모아서 말하면 상제라고 한다. 이는 무왕이 문왕을 제사하여 아버지를 받들어 상제에 배향한 것이니 반드시 아버지로써 하는 것이다. “옛날에 주공(周公)은 후직에게 교사(郊祀)를 지내 하늘에 배향하고, 문왕을 명당에서 제사하여 상제에 배향했다”고 말했는데, 무왕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주나라의 예악이 주공이 제작한 것에 나왔기 때문에 그 예악을 제작한 사람으로써 말한 것이다. 또 “노(魯)나라의 교사(郊祀)와 체사(禘祀)는 예가 아니니, 주공의 예악이 쇠퇴한 것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주공의 법도가 무너진 것이다. 만약 성왕(成王)이 상제에게 제사 지낸다면 반드시 무왕을 배향해야 한다. 하늘에 배향하는 조상은 바뀌지 않으니 비록 백세(百世)가 지나더라도 오직 후직으로 할 따름이다. 상제에 배향한다면 반드시 아버지로 해야 하니, 만약 선왕(宣王)이 상제에게 제사 지낸다면 또한 여왕(厲王)으로써 해야 한다. 비록 요(堯), 순(舜)과 같은 성인일지라도 그를 아버지로 삼을 수 없고, 유왕(幽王), 여(厲王)과 같은 악인일지라도 그 낳아준 바가 됨을 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법(祭法)」에서 ”유우씨(有虞氏)가 요(堯)를 종사(宗祀)함은 잘못된 것“이라 했으니, 이와 같다면 순(舜)이 요(堯)의 아들이 된다. 그의 아들이 아니라면 비록 순(舜)에게 천하의 보위를 물려주었으나, 아버지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 같다면 요(堯)가 순(舜)을 길러서 양남(養男)을 삼은 것이니, 선양(禪讓)한 일은 없어지게 된다. 시조를 하늘에 배향하는 것은 반드시 동지에 하니, 하나의 양(陽)이 처음 생겨나고 만물이 시작되는 때이다. 제사에는 원구(圓丘)를 쓰고 기물은 도포(陶匏)와 고갈(藁秸)을 사용하고, 의복은 대구(大裘)를 쓴다. 그런데 종사(宗祀)는 9월에 제사를 지내니, 만물이 이루어지는 때이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게 된 근원이고 제(帝)는 만물을 낳아준 시조이기 때문에 미루어 배향하고 명당에서 제사지낸다. 우리 조정은 태조(太祖)를 원구(圓丘)에 배향하고 이버지를 명당에 배향했는데 개보(介甫: 왕안석)로부터 이 의론이 방정해졌다. 이에 앞서 오제(五帝)에게 제사지내고 또한 호천상제(昊天上帝)에게 제사 지내니, 함께 배향한 것이 여섯 신위였다. 개보(介甫)의 의론으로부터 오직 호천상제를 제사지내고 아버지를 배향했다. 태조 위로 희조(僖祖), 순조(順祖), 익조(翼祖), 선조(宣祖)가 있는데 먼저 희조를 합사했으나 개보(介甫)는 마땅히 희조를 합사해서는 안되고 순조 이하로 합사하는 것이 옳다고 의론을 제시했다. 왜 그러한가? 우리 조정은 희조(僖祖)를 미루어 시조로 삼았으니 그 이상은 미루어 갈 수가 없다. 혹자는 희조(僖祖)가 공업(功業)이 없어서 곤란하다고 하나 또한 마땅히 합사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하면, 영웅이 천하를 얻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써 한 것이니 결코 조상의 덕과 함께 할 수는 없다. 혹자는 영지(靈芝)는 뿌리가 없고 예천(醴泉)은 근원이 없다고 하지만, 사물이 어찌 근본이 없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천하의 기틀은 대개 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어찌 공업(功業)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정에서 희조(僖祖)의 사당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禮)에 합당하다. 개보(介甫)의 소견은 결국 세속의 유자들보다 높다.
내가 이 논의를 보지 못했을 때에 여러 유생들이 또한 논란하여 희조(僖祖)는 공덕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내가 답하기를, “누가 그로 하여금 좋은 손자를 얻을 수 있게 하였는가?” 하니, 사람들은 모두 장난말로 여기고 비웃기도 했다. 지금 양자직[楊子直: 이름은 방(方)]이 기록한 이천선생(伊川先生)의 설을 얻어 보았는데, 이른바 “지금 천하의 기틀은 모두 이 사람에게 나온 것이니 어찌 공업(功業)이 없겠는가”라고 하니, 곧 나의 말과 은연중 서로 부합된다. 지극하구나, 그 말이여! 천하에 백년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한 시비(是非)가 여기에서 정해졌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윤(閏) 10월 7일에 임안(臨安)의 우사(寓舍)에서 삼가 씀.
王者禘其祖之所自出, 以其祖配之, 而立四廟, 庶子生亦如之.
禘其祖之所自出, 始受姓者也. 其祖配之, 以始祖配也. 文武必以稷配, 後世必以文王配. 所出之祖無廟, 於太祖之廟禘之而已. 萬物本乎天, 人本乎祖, 故以所出之祖配天也. 周之后稷生於姜嫄, 姜嫄已上更推不去也. 文武之功起於后稷, 故配天者須以后稷. 嚴父莫大於配天, 宗祀文王於明堂, 以配上帝, 帝卽天也. 聚天之神而言之, 則謂之上帝. 此武王祀文王, 推父以配上帝, 須以父也. 曰 「昔者周公郊祀后稷以配天, 宗祀文王於明堂以配上帝」, 不曰武王者, 以周之禮樂出於周公制作, 故以其作禮樂者言之. 猶言 「魯之郊禘非禮, 周公其衰」, 是周公之法壞也. 若是成王祭上帝, 則須配以武王. 配天之祖則不易, 雖百世惟以后稷. 配上帝則必以父, 若宣王祭上帝, 則亦以厲王. 雖聖如堯, 舜, 不可以爲父; 雖惡如幽, 厲, 不害其爲所生也. 故祭法言有虞氏宗堯非也, 如此則須舜是堯之子. 苟非其子, 雖授舜以天下之重, 不可謂之父也. 如此則是堯養舜以爲養男也, 禪讓之事蔑然矣. 以始祖配天, 須在冬至, 一陽始生, 萬物之始. 祭用圓丘, 器用陶匏藁秸, 服用大裘. 而祭宗祀九月, 萬物之成. 父者我之所自生, 帝者生物之祖, 故推以爲配而祭於明堂也. 本朝以太祖配於圓丘, 以禰配於明堂, 自介甫此議方正. 先此祭五帝, 又祭昊天上帝, 幷配者六位. 自介甫議, 惟祭昊天上帝, 以禰配之. 太祖而上, 有僖, 順, 翼, 宣, 先嘗以僖祧之矣, 介甫議以爲不當祧, 順以下祧可也. 何者? 本朝推僖祖爲始, 已上不可得而推也. 或難以僖祖無功業, 亦當祧. 以是言之, 則英雄以得天下自己力爲之, 並不得與祖德. 或謂靈芝無根, 醴泉無源, 物豈有無本而生者? 今日天下基本蓋出於此人, 安得爲無功業? 故朝廷復立僖祖廟爲得禮. 介甫所見, 終是高於世俗之儒.
熹未見此論時, 諸生亦有發難, 以爲僖祖無功德者. 熹答之曰: 「誰敎他會生得好孫子?」 人皆以爲戲談而或笑之. 今得楊子直所錄伊川先生說, 所謂「今天下基本皆出於此人, 安得爲無功業」, 乃與熹言黙契. 至哉言乎! 天下百年不決之是非, 於此乎定矣. 紹熙甲寅閏十月七日, 臨安寓舍謹書.
노직서의 「천조편」에 발문을 붙임[跋魯直書踐祚篇]
소희(紹熙) 갑인년(1194) 윤 10월 10일에 범문숙(范文叔)을 장공보(張功父)가 사는 남호(南湖) 가에서 전별하였다. 공보가 이것을 꺼내어 주면서, “옛날에 그 진적(眞蹟)을 얻어 간직해왔는데 근자에 주상(主上: 영종)께서 천조(踐祚)한 뒤에 이미 훈석(訓釋)하여 함께 어부(御府)로 올리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기억을 더듬어보니, 며칠 전에 강연(講筵)에 입시했을 때 폐하께서 이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주희(朱熹)가 삼가 적음.
紹熙甲寅閏十月十日, 錢范文叔於張功父南湖之上. 功父出此爲贈, 云舊得其眞蹟藏之, 近以主上踐祚, 已訓釋幷上御府矣. 因省數日前入侍講筵, 上語嘗及此也. 熹謹記.
조청헌공의 유첩에 발문을 붙임[跋趙淸獻公遺帖]
조청헌공(趙淸獻公)의 청렴하고도 충성스런 절의와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행실은 고금에 으뜸이어서 찬사와 감탄으로도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올해 장사(長沙)로부터 조정에 들어가 여러 번 그의 유묵(遺墨)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가 집안의 편지였다. 이 책은 그의 족손(族孫) 준(遵)의 집에 보관되었는데 더욱 자상하고 화목한 뜻을 드러냈다. 오직 한스러운 것은 세 개의 정자가 풀이 무성하고 훼손되어 만년에 노닌 유적을 살필 수가 없으니, 고산앙지(高山仰止)의 탄식을 이길 수 없다. 준(遵)은 온화하고 근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능히 그 가학을 잇고 있으니 반드시 복구할 수 있으리라. 소희(紹熙) 갑인년(1194) 11월 8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상부사(祥符寺)에 적음.
趙淸獻公淸忠之節, 孝友之行冠映古今, 非贊歎之所可及. 今年自長沙趨朝, 屢得見其遺墨, 皆家問也. 此卷藏其族孫遵家, 尤見慈祥雍睦之意. 獨恨三亭蕪沒, 不得追尋晩步遺跡, 不勝高山仰止之歎. 遵溫謹好學, 能業其家, 其必有以復之. 紹熙甲寅中冬八日, 新安朱熹題於祥符方丈云.
사마 충결공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司馬忠潔公帖]
나는 전에 장경부[張敬夫: 이름은 식(栻)]가 사마 충결공(司馬忠潔公)의 시장(諡狀)에 대해 의론한 것을 보았는데, 매번 그 일의 본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지금 옥산(玉山)을 지나는데, 공의 손자가 고을의 장관이 되어 비로소 이 서첩을 얻어서 살펴보았다. 경부(敬夫)의 의론은 신뢰하여 징험할 만하다고 본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11월 12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熹舊見張敬夫議司馬忠潔公謚狀, 每恨不得其事之本末. 今過玉山, 而公之孫爲縣尹, 始獲此帖而觀之. 敬夫之議, 可謂信而有徵矣. 紹熙甲寅中冬十有二日, 新安朱熹識.
사마 문정공의 통감강요 필적에 발문을 붙임[跋司馬文正公通鑑綱要眞蹟]
이는 사마 문정공(司馬文正公)이 초한(楚漢) 무렵의 사건을 몸소 쓴 한 권의 책인데, 아마도 통감목록(通鑑目錄)의 초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 총목(總目)으로 더해보면 현행본에는 없는 것이다. 또한 별도로 강요(綱要)라는 이름이 있으니 또한 어떤 책인지 모르겠다. 아! 공(公)의 군부(君父)에 대한 충성과 옛 일을 개진하고 좋은 말을 올리는 마음은 절실했다고 할 만하다. 삼가 유적을 살펴보고 거듭 경탄해 마지않으며 감히 그 뒤에 기록한다.
右司馬文正公手書楚漢間事一卷, 疑是通鑑目錄草稿. 然又加以總目, 則今本所無. 且別有 「綱要」 之名, 不知又是何書也. 鳴呼! 公之願忠君父,陳古納誨之心, 可謂切矣. 竊觀遺跡, 三復敬歎, 敢識其後云.
왕추밀이 사마 충결공에게 답한 첩에 발문을 붙임
[跋王樞密答司馬忠潔公帖]
사마 충결공(司馬忠潔公)은 오랑캐 조정에서 절개를 지켜 죽음을 맹세하고 굽히지 않았으니, 이는 왕추밀[王樞密: 이름은 윤(倫)]의 편지에 답하고 왕공(王公)이 조정에 올린 글이다. 내가 삼가 들으니, 족조(族祖) 비각공(祕閣公)은 건염(建炎) 초기에 실로 왕공(王公)을 도와 예측할 수 없는 오랑캐 땅으로 앞장 서 사신으로 갔는데, 그 후에 오랑캐가 먼저 왕공을 돌려보냈고, 나중에 강화(講和)에 관한 논의가 오갔으나, 족조(族祖)는 홀로 운중(雲中)에 10여 년을 머물렀다. 고종(高宗) 황제는 절개를 지킨 것을 아름답게 여겨 틈틈이 매우 많은 기물(器物)을 내렸다. 이 서첩에서 사례한 것은 아마도 또한 폐하가 하사했는데 군주의 명으로 봉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이라. 그렇지 않았다면 왕공(王公)은 분명 가지고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족조(族祖)는 나중에 홍호(洪皓)․장소(張邵) 두 공(公)과 더불어 세 명이 모두 살아 돌아 올 수 있었고, 왕(王)․마(馬) 두 공(公)은 서로 연이어 북방에서 죽음으로써 모두 그 절의를 온전히 했으니 아! 또한 성대하다! 그러나 이 첩(帖)을 보면 또한 충분히 한때 나라가 처한 간난(艱難)과 임금이 근심하고 신하가 욕을 당하는 뜻을 알 수 있고, 쓸쓸하고 참담한 상황이 마치 눈 속에 있는 듯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탄식하게 하고 흐르는 눈물을 그칠 수 없게 한다. 이에 그 본말을 상세하게 기록해둔다.
司馬忠潔公仗節虜廷, 誓死不屈, 此其報王樞密手書而王公繳進之章也. 熹竊聞之, 族祖祕閣公在建炎初實介王公首使不測之虜, 其後虜人先遣王公歸, 後往來議講和事, 而族祖獨留雲中十餘年. 高宗皇帝嘉其守節, 嘗因間使賜以器物甚厚. 此帖所謝, 豈亦上賜而使不以君命將之歟? 不然, 王公不應持以進也. 族祖後與洪, 張二公五人者皆得生還, 而王, 馬二公相繼死北方, 皆全其節, 吁亦盛矣! 然觀此帖, 又足以見一時國步艱難, 主憂臣辱之意, 荒凉慘澹, 如在目中, 使人太息流涕不能已已. 因詳記其本末云.
사마 문정공이 현인을 천거한 첩에 발문을 붙임[跋司馬文正公薦賢帖]
내가 삼가 이 책을 읽어보니, 문정공(文正公: 사마광)의 현인을 천거하는 공정함과 마음씀의 정대함은 모두 그 성대한 덕에서 흘러나온 것이어서, 참으로 찬양하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사람들이 스승으로 삼을만함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현인들이 공에게 지우(知遇)를 받아추천서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말하면, 보는 자가 미처 깊이 관찰하여 안으로 살피거나 발분하여 같아지기를 생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방원영(龐元英)은 예(禮)에 맞춰 상을 치렀는데, 대개 하나의 일을 가지고 누차에 추천서에 올리니, 공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보존함이 세교(世敎)에 어찌 보탬이 작다고 하겠는가! 원풍(元豐) 이후에는 추천서에 등재하지 못하고 당적(黨籍)에 든 자들이 또한 이 추천서의 빈곳을 채워서 집대성 하게 된 것이 애석하다. 나는 여기에 또한 느낀 바가 있어서 삼가 그 뒤에 기록하면서 후일의 군자 중에도 반드시 이 탄식에 동조할 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희(紹熙) 갑인년(1194) 11월 경자일에 주희(朱熹)가 삼가 씀.
熹伏讀此書, 竊惟文正公薦賢之公, 心畫之正, 皆其盛德之支流餘裔, 固不待贊說而人知其可師矣. 若乃一時諸賢所以受知於公而獲名薦書者, 則恐覽者未能深觀而內省, 發憤而思齊也. 如龐元英之居喪以禮, 蓋一事而屢書焉, 則公之意可見. 而此書之存, 其於世敎豈小補哉! 惜其元豐以後, 不及登載, 而彼爲黨籍者, 亦足以補此書之闕而集其大成矣. 熹於是又有感焉, 因竊記於其後, 以爲後之君子必有同此歎者. 紹熙甲寅中冬庚子, 朱熹謹記.
왕형공이 업후의 유사를 진달한 주장 초고에 다시 발문을 붙임
[再跋王荊公進鄴侯遺事奏稿]
내 집에 소장된 형공(荊公)이 「업후가전(鄴侯家傳)」을 진달한 주장의 초고는 임천(臨川)에서 돌에다 새긴 모본(摹本)인데, 승상(丞相) 익공[益公: 이름은 주필대(周必大)]이 상세하게 논했다. 그러나 논의한 상번의용군(上番義勇軍)은 당시에 끝내 시행된 바가 있음을 듣지 못했고, 보갑법(保甲法)과 보마법(保馬法)을 사람들이 대부분 편리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개 업후(鄴侯)가 이른바 “때를 얻어 세를 이용하거나 세를 버리고 힘을 이용하면 이익과 해악이 서로 멀게 된다”고 한 말은 본디 이와 같다. 공의 이 글은 말투가 격렬하고 글투가 저앙(低昂: 낮추거나 높임)하여 당시 세상을 깔보고 천고의 역사를 비루하게 여겼는데, 판본과 문집에 실린 것은 곧 다시 몸을 낮추어 순종하면서 아첨하는 뜻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분명 스스로 너무 심하게 고집스럽고 사나운 것이 아닌가 하여 억눌러 절제한 것이니, 그 사려가 깊다. 그러나 그 실상을 논하면, 이 글에서 말한 것은 우연한 감촉에서 발한 초기여서 그 마음의 본래 취지를 더욱 명쾌하게 볼 수가 있다. 대저 형공(荊公)이 신종황제를 얻은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처럼 눈치를 살피다가 오히려 답답하게 다 발휘하지 못한 회포만 남기게 되었으니, 군주와 신하가 만나고 공적과 명예가 모이기가 아! 어렵구나. 소희(紹熙) 갑인년(1194) 섣달 신사일에 밤에 글을 읽다가 느낌이 있어 발문을 쓴다.
熹家所藏荊公進鄴侯家傳奏草臨川石刻摹本, 丞相益公論之詳矣. 然所議上番義勇, 當時竟不聞有所施行, 而保甲保馬之法人多不以爲便. 蓋鄴侯所謂得時用勢, 舍勢用力, 利害相遠固如此也. 抑公此紙詞氣激烈, 筆勢低昂, 高視一時, 下陋千古, 而版本文集所載乃更爲卑順容悅之意, 是必自疑其亢厲已甚而抑損之, 其慮深矣. 然論其實, 似不若此紙之云, 發於邂逅感觸之初, 尤足以見其胸懷本趣之爲快也. 夫以荊公之得神祖, 可謂千載之一時矣, 顧乃低徊若此而猶未免有鬱鬱未盡之懷, 君臣之際, 功名之會, 鳴呼難哉! 紹熙甲寅臘月辛巳, 夜讀有感, 因書以識其後.
석전 신명 지휘의 뒤에 씀[書釋奠申明指揮後]
구양공(歐陽公)이 말하기를, “고례(古禮)는 이제 모두 폐하여 없어졌으나 주(州)와 현(縣)에 다행히 사직(社稷)․석전(釋奠)․풍(風)․우(雨)․뢰사(雷師)의 제례가 있어서 백성들이 오히려 선왕(先王)의 예를 알고 있다. 그러나 관리들이 대부분 익히지 않아서 그 정사에 임하여 행동이 대부분 맞지 않고 얼굴빛은 장중하지 않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우러러볼 바가 없게 하고 보는 자는 태만히 여긴다”고 하였다. 내가 처음에 읽어볼 때는 매번 그의 말이 지나치다고 의심했는데, 주현(州縣)에서 벼슬하게 되어 몸소 살펴본 뒤에야 공(公)이 망령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순희(淳熙) 기해년(1179) 초에 남강군(南康軍)지사로 있을 때에 조정에 건의하여 정화(政和: 휘종의 연호) 때 만든 석전신의(釋奠新儀)를 판각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나 그 책은 착오가 많아서 다시 아뢰었지만 살펴주지 않았다. 소희(紹熙) 경술년(1190)에 다시 임장(臨漳)에서 석전(釋奠)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열거하여 올리고, 또 예관(禮官)에게 편지를 보내 독촉하여 이내 제법 토론과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순희(淳熙) 때 새긴 판본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백방으로 찾은 뒤에야 늙은 관리의 집에서 얻었다. 또 의론이 일치되지 않아 2년을 넘겨서 비로소 의론이 정해져 상주하여 시행할 것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주관한 자가 마침 다른 관직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중지되어 내려오지 않았다. 또 2년이 지나 나는 장사(長沙)로 갔는데 전 박사(前博士) 첨체인(詹體仁)이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돌아와 비로소 지난해에 칙명을 받은 일을 다시 맡아 본군으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이문(吏文: 관용 공문서)이 중복되고 번잡하여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또 “이미 대전례(大典禮)가 있으니 널리 여러 주(州)로 내려보낼 겨를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윽고 나도 조정에 소환되어 상주하고 며칠을 지냈는데, 때마침 눈병이 들어 문서를 살펴볼 수가 없었다.
회고해보니, 이 일은 승낙을 얻기가 어려웠는데 이제 내려온 글이 이와 같고, 또 분명 여러 주(州)로 잇달아 내려보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속히 처리하여 명확히 배포하지 않으면 이는 이미 폐하에게 승낙을 얻었다가 다시 아래에서 막히는 꼴이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요청했다가 내가 중지시키는 것은 옳지 않았기에 병든 몸을 이끌고 교정하여 외람된 곳을 깎아내어 몇 조목을 확정해서 주안(州案)에다 붙였다. 이어 학관(學官)에게 전하고 속현(屬縣)에 통지하도록 했으며, 또 수사(帥司)에게 알려 관할 내의 여러 주(州)에 내려보내도록 했다. 겨우 끝내고 소명을 받아 갈 때에 소경 첨체인이 외직에 임명되어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여타 주(州)에 그 책을 다시 내려보내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궁궐에 이르러 또한 두 달을 채울 수가 없어 돌아갔다. 이듬해에 장사군(長沙郡)의 문학(文學) 소연(邵淵)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공이 이 일에 전력을 다했는데 이미 판각을 하여 널리 배포하였다”고 했다. 나는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전말을 서술하여 훗날의 군자에게 보여, 예(禮)는 폐하기는 쉽지만 일을 이루기란 이처럼 어려운데 석전(釋奠) 한 가지에만 그칠 뿐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끔 한다. 경원(慶元) 원년(1195) 을묘년 정월 5일에 조청랑(朝請郞) 주희(朱熹)가 삼가 씀.
歐陽公言: 「古禮今皆廢失, 州縣幸有社稷, 釋奠, 風, 雨, 雷師之祭, 民猶得以識先王之禮. 而吏多不習, 至其臨事, 擧多不中而色不莊, 使民無所瞻仰, 見者怠焉.」 熹始讀之, 每疑其言之過. 及仕州縣, 身親見之, 而後知公之不妄也. 淳熙己亥初守南康, 嘗一言之朝廷, 爲取政和新儀鏤版頒下. 而其本書自多牴牾, 復以告焉, 則莫之省矣. 紹熙庚戌, 復自臨漳列上釋莫數事, 且移書禮官督趣, 乃得頗爲討究, 則淳熙所鏤之版已不復存. 百計索之, 然後得諸老吏之家. 又以議論不一, 越再歲, 乃能定議條奏, 得請施行. 而主其事者適徙他官, 因格不下. 及又再歲, 而熹守長沙, 則前愽士詹體仁還爲少卿, 始復取往年所被敕命下之本郡. 然吏文重複繁冗, 幾不可讀. 且曰屬有大典禮, 未遑徧下諸州也. 旣而熹亦召還奏事, 行有日矣, 又適病目, 不能省文書. 顧念玆事得請之難, 而今所下書乃如此, 又度其必不能繼下諸州, 若不亟疏理而明布宣之, 是爲已得請於上而復重見格於下也. 且自我請之, 自我尼之, 不可. 於是力疾躬爲鉤校, 刪剔猥釀, 定爲數條, 以附州案, 俾移學官, 符屬縣, 且關帥司, 幷下巡內諸州. 僅畢而行, 則聞詹卿補外, 而奉常果不復下其書他州矣. 熹到闕, 亦不能兩月而歸. 明年, 長沙郡文學邵淵乃以書來曰: 「以公之拳拳於此也, 謹已鋟木而廣其傳矣.」 熹嘉其志, 因爲叙其本末, 以視後之君子, 使知夫禮之易廢, 事之難成類如此, 不止釋奠一端而已也. 慶元元年歲在乙卯正月五日, 朝請郞朱熹謹書.
이시랑의 무이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李侍郞武夷詩]
관묘당(觀妙堂) 동쪽 기둥에 시랑(侍郞) 이공(李公)이 남긴 유묵은 글의 뜻이 맑고 아름다웠으며, 자획(字畫)은 단정하고 힘찼는데, 매번 그 아래에 이르러 갑자기 외우고 음미하다가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글씨가 벗겨져 떨어져나갔고, 또 마침 음식을 제공하는 곳이 되었는데, 10여 년 뒤에는 다시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별도로 모각(摹刻)해서 도사(道士)에게 전해 벽 사이에다 감춰두게 하니, 먼 훗날에 선배들의 기풍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공(李公)의 이름은 미손(彌遜)이고, 당시에 화의(和議)를 강력히 비판하다가 임장(臨漳)의 지방관으로 나갔다고 한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 정월 갑인일에 주희(朱熹)가 씀.
觀妙東楹李公侍郞遺墨語意淸婉, 字畫端勁, 每至其下, 輒諷玩不能去. 然歲久剝裂, 又適當施供張處, 後十數年, 當不復可讀矣. 別爲摹刻授道士, 使陷置壁間, 庶幾來者得以想見前輩風度. 李公諱彌遜, 時以力詆和議出守臨漳云. 慶元乙卯正月申寅, 朱熹書.
소동파의 「강설」에 발문을 붙임[跋東坡剛說]
소문충공(蘇文忠公)이 손개부[孫介夫: 이름은 입절(立節)] 군을 위해 「강설(剛說)」을 지었는데, 손군의 사람됨을 밝힌 것이 지극했다. 그러나 강(剛)이 인(仁)에 가까운 이유는, 욕심에 굽히지 않고 능히 그 본심의 덕을 온전히 하는데 있으니,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본 뒤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도(寧都)의 주부(主簿) 정재덕(鄭載德)이 손군의 집에서 유적을 얻어 장차 모각(摹刻)하여 학궁(學宮)에 두려고 틈틈이 나에게 보여주니, 이에 그 왼쪽에다 발문을 적어 보는 이에게 고하여 강(剛)에 힘써 더욱 인(仁)을 행하는 방법을 구하도록 한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 2월 계미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蘇文忠公爲孫君介夫作剛說, 其所以發明孫君之爲人者至矣. 然剛之所以近仁, 爲其不詘於欲而能有以全其本心之德, 不待見於活人然後可知也. 寧都主簿鄭載德得遺跡於君家, 將摹刻而寘之學宮, 間以視予, 因爲識其左方以告觀者, 使勉夫剛而益求所以爲仁之方云. 慶元乙卯二月癸未, 新安朱熹書.
이면중의 시권에 발문을 붙임[跋李勉仲詩卷]
건양(建陽) 이종례(李從禮) 군은 자가 면중(勉仲)인데, 내가 아이 적에 학사(學舍)에서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이때에 종례(從禮)는 이미 성인이었고 준재의 명성이 있었다. 10여 년 후에 나와 함께 예부(禮部)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종례는 낙방하고 돌아와 마침내 시와 술에 파묻혀 지내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처음에 종례가 아직 죽지 않았을 때에, 나는 병산(屛山)에 머무르느라 한 해에 겨우 한두 차례 건양(建陽)에 가서 종례와 교유했으나 속마음을 두드려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의 마음은 드넓었고 뜻은 높았으며 논설을 종횡무진으로 펼치다가 농담을 섞어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모든 일에 뜻이 없는 듯하였다. 틈틈이 그의 시구(詩句)를 살펴보니, 매우 청신(淸新)하고 온밀(穩密)했으며, 때때로 기묘한 생각을 내어 위려(偉麗)한 맛을 즐길만했으나 또한 많이 보지는 못했다. 만년에 고정(考亭)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다판(茶坂)에 가서 강문경(江文卿)과 함께 교유했다. 문경은 종례의 사위였는데 종례의 아름다운 시구를 더욱 많이 암송하였으니 모두 전에 듣지 못한 것들이었다. 또한 일찍이 그 유고(遺稿)를 편차하여 약간의 책을 만들었으나 나중에 친구들이 서로 돌려가며 보다가 산실되었다. 오직 이 책만 남았는데 곧 그의 선친과 서로 시(詩)를 주고받은 것이었다. 나에게 그 일을 적어주도록 부탁하기에 대략 이와 같이 줄거리를 기록한다. 책 가운데 효백(孝伯)이란 글자는 곧 문경(文卿)의 선친이니,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시(詩) 짓기를 좋아했는데, 우언(寓言)과 풍자를 통해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안타까워하는 시어를 많이 남겼다. 종례의 재주를 아껴 더불어 나이를 초월한 벗이 되었다고 한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 3월 그믐날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建陽李君從禮, 一字勉仲, 予兒時嘗與同學舍. 然是時從禮旣冠, 已有後聲矣. 後十餘年, 乃與予俱試禮部, 從禮不偶而歸, 遂放意詩酒間, 得疾不起. 姶, 從禮未死時, 予居屛山, 歲不過一再至建陽, 與從禮遊不能欸. 但見其襟懷坦然, 意象軒豁, 論說縱橫, 雜以詼笑, 傲倪一世, 若都無意於事者. 及間見得其詩句, 乃極淸新穩密, 時出巧思, 偉麗可喜, 然亦不多見也. 晩歲來居考享, 往茶坂, 得江文卿而與之遊. 文卿, 從禮子婿也, 能誦從禮佳句尤多, 皆前所未聞者. 且言嘗次其遺稿, 得若干篇, 後爲親友傳玩而失之. 獨留此卷, 乃與其先君子唱酬往來者, 屬予書其事. 因爲略識梗槪如此. 卷中字孝伯者, 卽文卿先君子, 老而嗜學, 喜爲詩, 寓詞託諷, 多憂國閔時語. 愛從禮之才, 與爲忘年友云. 慶元乙卯三月晦日, 新安朱熹書.
곽장양의 의서에 발문을 붙임[跋郭長陽醫書]
소희(紹熙) 갑인년(1194) 여름에 나는 장사(長沙)로 부임했다. 가는 길에 신유(新喩)에 들러 옛날 환장학사(煥章學士)를 지낸 사창국(謝昌國) 공을 그 집에서 알현했다. 공은 머물게 하고 술을 마시면서 장양(長陽) 출신 충회(冲晦) 곽옹(郭雍)선생의 언행을 매우 상세하게 언급했다. 이어 의서(醫書)와 역서(曆書)여러 권을 꺼내면서 “이는 선생이 저술한 것이다”고 말했다. 나는 두 학파의 학문을 모두 학습하지 못한 터라 그 학설의 얕고 깊음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 빌려 가지고 돌아가 장차 겨를을 내어 숙독하여 정밀히 탐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무와 사무로 바빠서 강으로 육지로 달리느라 한해가 다하도록 쉴 수가 없어 다시 겨를을 내지 못했다. 이듬해 여름에 큰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마침 옛친구의 아들 왕한[王漢: 자는 백기(伯紀)]이 금화(金華)에서 찾아오고 친구 방사요[方士繇: 자는 백모(伯謨)]가 또 적계(籍溪)에서 찾아와 함께 내 병을 간호하니, 며칠이 지나 조금 살아나는 기미가 보였다. 그간에 사공(謝公)이 준 장양(長陽)의 의서(醫書)를 말하니 두 사람이 속히 보기를 청하였다. 이에 꺼내어 보여주니 모두 놀라고 기뻐하면서 “이는 기이한 서적이다. 대개 그 학설은 비록 고경(古經)에서 한결같이 나와 첨삭할 곳이 없는 듯하지만, 고경은 심원하고 호박(浩博)하여 찾아가기가 어려운데 이 책은 항목으로 나누어 놓아 보기가 쉽다. 어찌하면 널리 유포하여 세상에 약방을 배우려는 자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간직하고 사람마다 암송케 하여 옛날 성현의 의도(醫道)의 원위(源委)를 알아 그 어려움을 병으로 여기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나는 채충혜공[蔡忠惠公: 이름은 양(襄)]의 장락(長樂)의 지방관이 되어 무당이 병을 치료하면서 벌레의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간사함을 미워하여 이미 금하여 근절시키고, 또 백성 중에 총명한 자를 뽑아 의약을 가르쳐 질병을 치료케 하니 이것이 어진 사람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민(閩)의 수수(帥守)인 첨원선(詹元善)은 실로 채공(蔡公)의 임지를 맡아서 자혜로운 정치를 우선시하니, 시험삼아 말하건대 혹여 뜻이 있는 것인가? 급히 그의 뜻을 물으니 원선(元善)이 답하기를 “삼가 승낙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두 사람을 시켜서 수정하여 간행케 하고 그 전말을 이처럼 적어서 부쳤다. 또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옛사람은 맥을 짚어 살피는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니었으나 지금 세상에 통행하는 것은 오직 촌(寸)․관(關)․척(尺)의 방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또 그 설명은 난경(難經)의 수편(首篇)에 실려있으니 또한 상스럽고 천한 속설은 아니다. 따라서 곽공(郭公)의 이 책은 그 말을 자세히 기재하고 아울러 정덕용(丁德用)의 세 손가락을 촘촘히 배열하는 방법을 취하여 해석했다. 대저 난경은 지극한 원리를 담았고, 덕용(德用)의 방법에 대해서 나는 진찰자의 손가락이 살찌거나 마른 경우가 있고 병자의 팔뚝은 길거나 짧은 경우가 있으니 이것으로 서로 구해보면 정론이 될 수가 없을 듯하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난경에서 척(尺)․촌(寸)으로 나눈 까닭을 세밀히 살펴보았는데, 모두 관(關: 손목의 경상 돌기 부분)에서 앞뒤로 어제혈(魚際穴)․척택혈(尺澤穴)과 거리가 있다. 이는 이른바 관(關)은 반드시 일정한 부위가 있으니 또한 어제혈․척택혈은 밖으로 드러나 먼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러 서적에는 모두 명확한 논의가 없고, 오직 천금(千金)에서 “촌구(寸口)의 부위는 그 뼈가 솟아 있어 관(關)과 척(尺)은 모두 이를 따라 취한다”고 말하니, 그 말의 선후와 부위의 진퇴는 경문(經文)과 합치되지 않는다. 유독 세속에 전해진 오언과 칠언의 시어로 된 맥결(脈訣)은 말이 가장 비천하니 숙화(叔和)의 책이 아님은 매우 분명하다. 여기에서는 솟은 뼈를 곧바로 관(關)이라 하고 그 앞과 뒤를 나누어 촌척(寸尺) 음양(陰陽)의 위치로 삼으니, 난경의 본지를 얻은 듯하다. 그러나 세상의 고명한 의원은 맥결을 위작이라 하여 마침내 폐기하여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 나는 도(道)에 정밀하지 않은 사람이니 이를 바로잡을 수가 없다. 우선 그 설을 여기에 덧붙여 두어 총명한 자를 기다려 절충하려고 한다. 경원(慶元) 원년 을묘년(1195) 5월 병오일에 홍경외사(鴻慶外史)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紹熙甲寅夏, 予赴長沙, 道過新喩, 謁見故煥章學士謝公昌國於其家. 公爲留飮, 語及長陽冲晦郭公先生言行甚悉. 因出醫書, 曆書數帙曰: 「此先生所著也.」 予於二家之學皆所未習, 不能有以測其說之淺深, 則請以歸, 將以暇日熟讀而精求之. 而公私倥傯, 水陸奔馳, 終歲不得休, 復未暇也. 明年夏, 大病幾死, 適會故人子王漢伯紀自金華來訪, 而親友方士繇伯謨亦自籍溪來, 同視予疾, 數日間乃若粗有生意. 間及謝公所授長陽醫書, 二君亟請觀焉, 乃出以視之, 則皆警喜曰: 「此寄書也. 蓋其說雖若一出古經而無所益損, 然古經之深遠浩愽難尋, 而此書之分別部居易見也. 安得廣其流布, 使世之學爲方者家藏而人誦之, 以知古昔聖賢醫道之源委而不病其難耶?」 予念蔡忠惠公之守長樂, 疾巫覡主病, 蠱毒殺人之姦, 旣禁絶之, 而又擇民之聰明者敎以醫藥, 使治疾病, 此仁人之心也. 今閩帥詹卿元善實補蔡公之處, 而政以慈惠爲先, 試以語之, 儻有意耶? 亟以扣之, 而元善報曰敬諾, 乃屬二君讎正刊補而書其本末如此以寄之. 抑予嘗謂古人之於脈, 其察之固非一道, 然今世通行, 唯寸關尺之法爲最要. 且其說具於難經之首篇, 則亦非下俚俗說也. 故郭公此書備載其語, 而幷取丁德用密排三指之法以釋之. 夫難經則至矣, 至於德用之法, 則予竊意診者之指有肥瘠, 病者之臂有長短, 以是相求, 或未得爲定論也. 蓋嘗細考經之所以分寸尺者, 皆自關而前郤, 以距乎魚際尺澤, 是則所謂關者, 必有一定之處, 亦若魚際尺澤之可以外見而先識也. 然今諸書皆無的然之論, 唯千金以爲寸口之處其骨自高, 而關尺皆由是而却取焉, 則其言之先後, 位之進退若與經文不合. 獨俗間所傳脈訣五七言韻語者, 詞最鄙淺, 非叔和本書明甚, 乃能直指高骨爲關, 而分其前後以爲寸尺陰陽之位, 似得難經本指. 然世之高醫以其贋也, 遂委棄而羞言之. 予非精於道者, 不能有以正也, 姑附見其說於此, 以俟明者而折中焉. 慶元元年乙卯歲五月丙午, 鴻慶外史新安朱熹書.
맏아들의 시권에 적음[題嗣子詩卷]
큰아이는 어려서부터 활달하여 다른 아이들과 달랐는데, 나는 항상 그가 가볍고 화려한 습속에 빠질까 저어해서 굳이 시문(詩文)으로써 가르치지 않았다. 이미 죽은 후에 허진지(許進之)가 큰아이와 함께 주고받은 시권(詩卷)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처음엔 그가 이런 시어를 쓸 수 있는 줄 몰랐는데, 그것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나와 차마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 뒤에다 글을 써서 돌려보내면서 나의 슬픔을 적어둔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 6월 16일에 회옹(晦翁)이 씀.
大兒自幼開爽, 不類常兒, 予常恐其墮於浮靡之習, 不敢敎以詩文. 旣沒後, 許進之乃出其所與唱和詩卷示予. 予初不知其能道此語也, 爲之揮沸不能已, 不忍復觀也. 爲書其後而歸之, 以識予哀云. 慶元乙卯六月旣望, 晦翁書.
소강절의 ‘검속’ 큰 글자에 발문을 붙임[跋邵康節檢束二大字]
강절선생(康節先生)은 스스로 큰 글씨를 써야 마음이 쾌활하다고 말했으나 그 필적은 근엄하기가 이와 같았으니, 어찌 이른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해도 스스로 법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원(慶元) 을묘년(1195) 7월 16일에 후학 주희(朱熹)는 조이상(趙履常)이 소장한 ‘검속(檢束)’이라는 큰 글자를 보고 삼가 쓴다.
康節先生自言大筆快意, 而其書蹟謹嚴如此, 豈所謂從心所欲而自不踰矩者耶? 慶元乙卯七月旣望, 後學朱熹觀趙履常所藏 「檢束」 大字敬書.
창옥의 시권에 발문을 붙임[跋蒼玉詩卷]
나는 근래에 강서(江西)를 두어 차례 왕래했는데, 합조(閤皁)가 명승지라는 말을 많이 들으나 한번 가서 유람할 수 없음을 늘 한으로 여겼다. 이제 창옥(蒼玉)의 시권(詩卷)을 보니 또한 몸소 가서 낱낱이 유람하지 않아도 소원(小院)과 회랑(迴廊), 바람 부는 대나무 숲과 눈 덮인 대나무가 이미 안중에 뚜렷하게 펼쳐졌다. 죽헌(竹軒) 속의 주인은 글을 읽고 거문고를 타며 종일토록 노닐다가 그 사이에 누웠는데 세월의 가는 줄도 모르니, 그 즐거움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더구나 지금 계산선생(桂山先生)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유묵(遺墨)은 더욱 귀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진군(陳君)이 그것을 잘 간직하고 있구나! 경원(慶元) 을묘년(1195) 7월 28일에 홍경외사(鴻慶外史) 주희(朱熹)가 씀.
余頃歲數往來江西, 飽聞閤皁之勝, 每以不能一往遊焉爲恨. 今觀蒼玉詩卷, 則亦不待身到脚歷而小院迴廊, 風篁雪竹已了了在眼中矣. 軒中主人讀書彈琴, 終日遊居寢臥其間, 而不知歲月之逝, 其樂詎可量耶? 况今桂山先生已往, 遺墨益可貴重, 陳君其葆藏之! 慶元乙卯七月二十八日, 鴻慶外史朱熹書.
무후의 화상찬에 발문을 붙임[跋武侯像贊]
건도(乾道) 정해년(1167)에 나는 장사(長沙)에 놀러가서 장경부(張敬夫)의 서실에 매우 오래된 무후(武侯: 제갈량)의 초상화를 보았는데, 유자구[劉子駒: 이름은 예(芮)] 어른의 집에 소장된 당나라 염립본(閻立本: 화가)의 필치라고 했다. 이에 나는 “경부(敬夫)는 어찌하여 찬(贊)을 짓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경부(敬夫)는 기쁜 마음으로 곧장 입으로 글을 지었는데 말은 간결하고 뜻이 통하니 듣는 이가 탄복하여 “무후(武侯)의 심사(心事)를 깊이 알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고 칭송했다. 왕제현(王齊賢) 형이 모사본을 가지고 경부(敬夫)에게 그 위에 손수 글을 쓰도록 했다. 29년이 지나 제현(齊賢)의 여러 아들들이 나에게 꺼내 보이니, 옛날을 추억하니 어제의 일과 같았으나 세 군자는 모두 볼 수가 없었다. 이에 크게 탄식하며 그 아래쪽에다 기록해둔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 가을 8월 정축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
乾道丁亥歲, 予遊長沙, 見張敬夫書室有武侯畫像甚古, 云是劉丈子駒冢藏唐閻立本筆, 因謂敬夫盍爲之贊. 敬夫欣然口占立就, 語簡意到, 聞者歎服, 以爲非深知武侯心事者不能道也. 王兄齊賢因摹本而屬敬夫手題其上. 後二十九年, 齊賢諸子出以視予, 俯仰疇昔, 如昨日事, 而三君子皆不可見矣. 爲之太息, 記其下方. 慶元乙卯秋八月丁丑, 新安朱熹仲晦父.
위원리의 묘표에 발문을 붙임[跋魏元履墓表]
원리(元履)의 장례에 나는 실제로 묘지명(墓誌銘)을 써서 돌에 새겨 광(壙) 속에 넣었다. 그 중에 “일이 안위(安危)와 치란(治亂)의 기틀에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은 곧 증적(曾覿)이 소환한 명령이었다”고 말했는데, 당시엔 증적의 권세가 한창 성하여 나는 홀로 지나치게 걱정하여 훗날 묘소에 재앙이 미치지 않을까 저어했기 때문에 자세히 밝혀서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부(敬夫)가 다시 그 묘표를 썼으나 또한 이러한 뜻에 따랐다. 따라서 항상 홀로 생각하기를, 내 망우(亡友)가 극진하게 언론을 편 충정을 후세에 밝히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허물은 곧 나에게 있어 매번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그 후 순희(淳熙) 3년(1176)에 효종(孝宗) 황제가 정감(鄭鑑)의 말을 받아들여 원리(元履)가 이전에 진언한 것을 생각하고, 집정(執政) 공무량(龔茂良) 등을 돌아보며 “그 정직과 진실에 감탄하여 장차 다시 불러서 등용하겠다고 말했는데 곧 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참동안 슬퍼하고 탄식하다가 곧 조서를 내려서 “조정에 정직하고 진실한 사대부가 없어서는 안되니, 섬지(掞之: 위원리의 이름)가 비록 죽었으나 선교랑(宣敎郞)․직비각(直祕閣)으로 고명(告命)한다”고 말했다. 대개 이 때에 폐하가 비록 옛 은혜로 증적을 두텁게 대우했으나 사실은 정사(政事)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원리(元履)와 자명(自明: 정감의 자)은 모두 증적을 심하게 꾸짖은 자인데 폐하는 모두 성내지 않고 은총과 표창을 내리니, 산 자나 죽은 자에게 간격을 두지 않은 것이다. 원근에서 전해 듣고 감탄이 터져 나왔다. 다만 경부(敬夫)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버려 마침내 옛 글에 첨삭을 가하여 이 일을 전하지 못하고 또한 아직껏 새기지도 못했다.
원리(元履)의 사촌아우 성지(誠之)가 요사이 경부(敬夫)가 손수 작성한 정본(定本)을 얻어 그 형의 친구인 연평사군(延平使君) 황중본(黃仲本)에게 보여주었다. 중본(仲本)은 감격해서 곧 돌을 사서 새기고, 또한 나에게 관직을 추증한 일을 다시 기록해서 효종(孝宗)이 신하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어진 이를 생각한 것과 측근의 구습을 억제시킨 숨은 뜻을 밝혀 깊이 후대 군주의 법도가 될 수 있도록 부탁해왔다. 나도 다행히 이로 인해 묘지명의 결함을 보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거의 원리(元履)를 지하에서 위로할 수 있을 것이고, 눈치를 보다가 정직함을 숨긴 허물을 스스로 속죄할 수 있을 것이다. 경원(慶元) 원년(1195) 9월 경인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元履之葬, 熹實銘之而刻石納壙中矣. 其日事有繫安危治亂之機者, 則曾覿召還之命也. 時覿勢方盛, 熹竊過憂, 恐貽異時丘隴之禍, 故不欲察察言之. 而敬夫復表其墓, 亦放此意. 故常私念, 使吾亡友盡言之忠不白於後世, 其咎乃繇於我, 每竊愧焉. 其後淳熙改元之三年, 孝宗皇帝因納鄭鑑之言而思元履前所進說, 顧語執政龔公茂良等, 歎其直諒, 將復召而用之, 則聞其死矣. 嗟悼久之, 卽下詔曰: 「朝廷不可無直諒之士, 掞之雖死, 其以宣敎郞, 直祕閣告其第.」 蓋是時上雖以舊恩遇覿厚, 然實未嘗及以政事. 元履, 自明, 皆深詆覿者, 上皆不怒而亟寵褒之, 無所間於存沒. 遠近傳聞, 感歎興起. 顧以敬夫尋亦下世, 遂不及損益舊文以傳玆事, 而亦至今未及刻也. 元履從弟誠之比得敬夫手書定本, 以視其兄之友延平使君黃仲本. 仲本慨然, 卽爲買石而刻焉, 且屬熹復記贈官事, 以明孝宗納諫思賢, 抑制近習之微意, 深可爲後聖法. 熹亦幸因得追補志銘之闕, 庶有以慰元履於地下, 而自贖其顧望回隱之咎云. 慶元元年九月庚寅, 新安朱熹識.
도사 진경원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道士陳景元詩]
벽허자(碧虛子)는 도사(道士) 진경원(陳景元)이다. 제법 글을 읽었고 시문(詩文)에도 능해서 당시의 명현들이 대부분 그와 더불어 교유했다. 나는 일찍이 그가 주석한 장자(莊子)와 그가 쓴 상학경(相鶴經)을 보았는데 자못 순박하여 볼만했다. 생각건대 그의 동류 중에는 또한 약간 다른 자가 있을 것이다. 원우(元祐) 무렵에 왕중지[王仲至: 이름은 흠신(欽臣)]가 일찍이 천거하여 비부(秘府)의 도교 서적을 교정토록 했는데, 범순부(范醇夫)는 궁중에 있으면서 불가하다고 극론했고, 또 왕소(王韶)와 장돈(章惇)이 변경을 개척할 때에 스님을 데리고 갔다가 ‘경략찰방대사(經略察訪大師)’라는 비난을 받은 사실을 인용하여, 오늘 어찌 다시 관각(館閣)에 편집과 교정을 보는 대사(大師: 스님)를 둘 수가 있겠는가 라고 했다. 이제 이 책을 보니 그 시구와 자획이 모두 맑고 아름다워 즐길만하고 형공(荊公: 왕안석)의 필치는 더욱 뛰어났다. 뜻하지 않게 범공(范公)의 말이 떠올라 책 끄트머리에다 적어 독자로 하여금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 9월 계사일에 주희(朱熹) 중회(仲晦)가 씀.
碧虛子, 道士陳景元也. 頗讀書, 能詩文, 一時名勝多與之遊. 予嘗見其所注莊子及所書相鶴經書, 頗醇古可觀. 計於其輩流中, 亦當小異. 然元祐間, 王仲至嘗薦使校中祕道書, 范醇夫在瑣闈, 極論其不可, 且引王韶, 章惇開邊時以僧自隨, 因有經略察訪大師之誚, 今日豈可復使館閣有編校大師耶? 今觀此卷, 見其詩句字畫皆淸婉可喜, 而荊公筆語尤高勝, 偶憶范公語, 聊書卷尾, 以發觀者之一笑云. 慶元乙卯九月癸巳, 朱熹仲晦父書.
이삼중의 행장에 발문을 붙임[跋李參仲行狀]
종산(鍾山)선생 이삼중(李參仲)의 아들 계찰(季札)이 그의 선친의 행장(行狀) 한 통을 갖고서 수백 리를 멀다하지 않은 채 건계(建溪)로 나를 찾아와 절하고 일어나 눈물을 흘리면서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나의 선조는 무원(婺源)에 터를 잡아 공과 같은 고을 사람이 되었으나 객지인 건계로 온 지도 오래되었다. 소흥(紹興) 경오년(1150), 내 나이 20여세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와서 묘소와 종족, 인척들에게 인사했다. 여기에서 공을 사귀어 그의 논의를 듣고 마음으로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나이가 젊고 초학자였기에 그의 마음을 두드려볼 수 없었다. 중년에 다시 돌아와서 다시 공을 뵌 뒤에야 더욱 친밀하게 교유하게 되었는데, 공은 이미 종산을 거주할 것으로 정하고 장차 늙어 죽을 계책으로 삼았다. 두 숲 사이에 도랑물은 맑고 연못은 깊으며 대나무는 빽빽했는데, 때때로 나와 정윤부(程允夫)를 불러 그 사이에서 노닐면서 도의를 강론하고 고금을 담론하며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틈틈이 그가 평소에 지은 글을 내놓고 나로 하여금 암송하게 하니, 글마다 고아하고 기발하고 두텁고 엄밀하여 마치 그의 사람됨됨이와 같았다. 나는 이로써 마음으로 더욱 공을 공경했으나, 스스로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날마다 서로 이곳저곳에서 종유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 이별하고 돌아와서도 서신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후 여러 해가 지나 공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나는 근심과 질병으로 편안하지 못한 터라 찾아가 한차례 공에게 곡배(哭拜)를 드릴 수도 없었다. 그런데 공의 아들들은 나를 죄주지 않고 도리어 불후의 글을 부탁하였다. 그 행장을 받아 읽어보니 또한 정윤부의 글이었다. 여러 번 반복하여 읽은 후에 공의 목소리와 용모가 황홀하게 잡히는 듯했다. 나라에 인물들이 보잘것없음을 생각해볼 때, 공처럼 어진 사람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내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나 어찌 감히 말을 아끼겠는가? 이에 병으로 쇠약하고 심력이 소모되어 붓을 잡고 글을 쓰려고 해도 정신이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계찰의 뜻에 부응하지는 못했으나, 우선 행장의 끝에다 이와 같이 기록하여 정윤부의 글은 과연 부끄러운 말이 없고 내가 비록 짓는다해도 또한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밝힌다. 등공(滕珙)의 기록은 행장의 빠진 부분을 잘 보충했다. 대저 수십 년 이래로 고향사람의 자제들이 대부분 문사(文詞)를 좋아하고 능한 것도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뿌리가 된 것이다. 경원(慶元) 원년(1195) 11월 계사일 동지에 오군(吳郡)의 주희가 고정(考亭)의 청수각(淸邃閣)에서 씀.
鍾山先生李公參仲之子季札奉其先君子行狀一通, 不遠數百里, 謁予於建溪之上, 拜起垂泣, 而以銘墓爲請. 予之先世家婺源, 與公爲同縣人, 而客於建也久矣. 紹興庚午歲, 予年二十餘, 始得一歸故鄕, 拜其墳墓宗族姻黨, 於是乃獲識公而聽其餘論, 心固已知其賢. 然是時年少新學, 未能有以扣也. 中年復歸而再見公, 然後從游益親. 而公已營鍾山所住, 爲將老焉之計矣. 兩林之間, 渠淸沼深, 竹樹蒙密, 時命予與程弟允夫徜祥其間, 講論道義, 談說古今, 觴詠流行, 屢移晷刻. 間乃出其平生所爲文詞, 使予誦之, 則皆高古奇崛而深厚嚴密, 如其爲人. 予以是心益敬公, 而自恨其不能久留, 以日相與追逐於東阡北陌之間也. 旣別而歸, 書疏不絶. 其後數年, 聞公物故, 予以憂患疾病之不寧, 不能一往哭公. 而公之諸子不以爲罪, 更以不朽爲託. 至受其狀而讀之, 則又允夫之文也. 三復之餘, 公之聲容恍若相接. 永念故國人物眇然, 如公之賢, 寧可復得? 顧雖不敏, 其何敢有愛於言乎? 乃以病衰, 心力凋耗, 把筆欲下而神已不俱來矣, 遂無以塞季子之意, 而姑記其篇末如此, 以見允夫之狀果無愧辭, 予雖有作, 亦不能有以加也. 滕珙所記, 足補狀闕. 大抵數十年來, 鄕人子弟多自好而善於文詞, 亦其師友淵源之有自也. 慶元元年十一月癸巳冬至, 吳郡朱熹書于考亭所居淸邃閣.
여인보 제공의 첩에 발문을 붙임[跋呂仁甫諸公帖]
정강(靖康)의 난으로 중원이 도탄에 빠지고, 사대부들은 동남쪽으로 모여들었다. 여광문[呂廣問: 자는 인보(仁父)]은 무원(婺源)의 주부(主簿)로 올 때에 그 형 화문[和問: 자는 절보(節夫)]을 모시고 함게 살았다. 또 유양(維揚)의 나정[羅靖: 자는 중공(仲共)]과 나송[羅竦: 자는 숙공(叔共)]도 와서 손님이 되었는데, 이에 이씨(李氏) 부자가 그들과 종유하게 되었고 호조(戶曹) 등개[滕愷: 자는 남부(南夫)]도 여공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 책을 보니, 그 당시 학문을 배우려는 원류(源流)가 성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보(仁父)만은 만년에 관로가 트였는데 다른 제공들은 대부분 죽도록 출세하지 못했고 등(滕)은 더욱이 준재임에도 일찍 죽어서 마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탄식하고 애석해 했다. 그런데 이삼중(李參仲) 어른은 홀로 나이가 들어 수명을 다하여 후배들의 우러르는 바가 되니, 비록 또한 당세에 가진 것을 펼 수는 없었지만 제공(諸公)들이 도리어 의지해서 전했다. 그의 저작인 등군전부청기(滕君傳簿廳記)는 살펴볼 만 하다. 끝에 건(建) 출신 위원리(魏元履)가 삼중(參仲)의 아우 원질(元質)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위(魏)의 당시의 이름은 정지(挺之)였고 나중에 섬지(掞之)로 고쳤다. 뛰어난 재주로 관리가 되어 여러 번 직간(直諫)하다가 오랫동안 중앙에 머무를 수가 없었는데, 죽은 이후 천자가 그를 생각해서 조서를 내려 표창하여 구휼할 것을 명했다. 원질(元質) 또한 아름다운 재능이 있었고 학문을 좋아했으나 불행히도 또한 오래 살지 못했으니 또한 이씨(李氏) 중에는 현인이 많음을 볼 수 있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 11월 갑진일에 주희(朱熹)가 적음.
靖康之亂, 中原塗炭, 衣冠人物萃於東南. 呂公廣問仁父來主婺源簿, 而奉其兄和問節夫以俱. 又有維揚羅公靖仲共, 竦叔共亦來客焉, 於是李氏父子得從之游, 而滕戶曹愷南夫亦受其學. 觀於此卷, 可見一時問學源流之盛矣. 然惟仁父晩歲宦達, 其他諸公多沒不顯, 滕尤以雋才蚤逝, 鄕人至今嗟惜之. 而李丈參仲獨以老壽終, 爲後進所高仰, 雖亦不得施其所有於當世, 而諸公者乃反賴之以傳. 其所著滕君傳簿廳記可考也. 末有建人魏元履與參仲之弟元質書, 魏時名挺之, 後改掞之, 以特起爲官, 數直諫, 不得久居中, 旣沒而天子思之, 詔褒卹焉. 元質亦有美才, 好學, 不幸亦不壽, 又可見李氏之多賢也. 慶元乙卯仲冬甲辰, 朱熹題.
이삼중 집안에 보관된 이정 선생의 어록 뒤에 씀
[書李參仲家藏二程先生語錄後]
정씨(程氏)의 책이 처음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책을 구하기 힘들어서 매우 귀중하게 여겼지만, 반드시 모두가 연구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근년 이래로 전하는 것이 점차 많아져서 후인들은 그것을 입고 먹는 것처럼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참으로 좋아해서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또한 드물다. 여광문(呂廣問), 등개(滕愷), 이삼중(李參仲) 세 군자가 전수한 옛 글과 이삼중 어른이 쓴 발문을 살펴보니 가만히 감동이 밀려와 뒤에다 정중히 쓴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 11월 갑진일에 주희(朱熹)가 기록함.
程氏書初出時, 人以其難得而珍貴之, 然未必皆能講究而踐行之也. 近年以來, 傳者浸廣, 而後人知其如絲麻穀粟之不可一日無. 然眞能好之而不舍者, 則亦鮮矣. 因觀呂, 滕, 李三君子傳授舊編及李丈跋語, 竊有感焉, 謹識于後. 慶元乙卯中冬甲辰, 朱熹記.
엄거후와 마장보가 수창한 시축에 적음[題嚴居厚與馬莊甫唱和詩軸]
엄거후[嚴居厚: 이름은 사돈(士敦)]가 민청(閩淸)을 다스린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는데, 그 영윤(令尹) 마장보(馬莊甫)와 함께 시를 주고받아 마침내 시축(詩軸)이 가득하게 되었다. 신기함과 기교를 다투고 때로는 옛 이야기를 표출하니, 편마다 모두 생각이 미치고 읽음에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관리의 심경과 타향의 정회가 홀연히 눈앞에 펼쳐졌다. 낭송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그 뒤에 쓴다. 경원(慶元) 을묘년(1195)년 섣달 보름에 둔옹(遯翁)이 씀.
嚴居厚攝事閩淸, 不滿兩月, 而與其令尹馬莊甫更唱迭酬, 遂至盈軸. 爭新鬪巧, 時出古談, 篇篇皆有思致, 讀之不覺宦情覊思恍然在目. 諷詠不已, 爲書其後. 慶元乙卯臘月望日, 遯翁.
오증승의 가전에 발문을 붙임[跋吳中丞家傳]
작고한 어사중승(御史中丞) 오공[吳公: 이름은 집중(執中)]의 강직한 조행은 대관(大觀)․정화(政和: 모두 휘종의 연호) 무렵에 드러나 사적이 국사(國史)에 실려있어서 대략 이 가전(家傳)과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 합치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전하는 말들이 약간 다를 뿐이다. 유어사[游御史: 이름은 초(酢)]․모간의[毛諫議: 이름은 주(注)]․호문정공[胡文定公: 이름은 안국(安國)]을 천거한 일을 논하자면 모두 당대의 명사(名士)이니 공(公)의 사람 보는 안목을 알 수 있다. 호공(胡公)을 천거함에 휘종(徽宗)이 급히 편지로 그의 이름과 성을 살폈으니, 또한 임금이 현신을 급히 찾는 아름다운 뜻을 볼 수 있다. 이는 모두 역사서에는 나오지 않으나 오직 이 책에서만 살펴볼 수 있으니 이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광록공(光祿公)이 호공(胡公)과 교유함에 붕우의 정의가 있었음은 호공(胡公)이 여병서(呂兵書)에게 보낸 서신에 나와있다. 그리고 나의 선친 또한 평소에 서로 존중하여 일찍이 시(詩)를 주어 “소매 속 나라 구할 묘한 솜씨를 묻느라, 오래도록 함께 한가롭게 노닐 수 없었지’라는 구절을 남겼다. 지금 증상서[曾尙書: 이름은 무(楙)]가 지은 명지(銘識)를 읽어보니 또한 이와 같다. 아! 그 또한 어진 부자라 말할만하다! 그의 족손 불(芾)이 이 책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 주니, 이에 발문을 써서 공(公)의 종족에게 보여 그 열렬한 업적을 계승할 길을 생각하게 한다. 경원(慶元) 병진년(1196) 정월 24일.
가전(家傳)에는 또 어지를 받들어 진정휘(陳正彙)를 국문한 일을 기록했는데, 곧 진충숙공(陳忠肅公)이 말한 바 “옥사(獄詞)는 공평하고 진실하여 짧은 말 중에서 실상을 살폈다”는 것이다. 역사서에도 적혀있지 않으니 대개 글을 생략한 것이다. 장각(張閣)이 항주(杭州)의 지방관이 되어 화석(花石)을 겸할 것을 주청한 일을 기록했는데 이 또한 다른 책에는 나오지 않으니 마땅히 이를 표출하여 그 악행을 드러내야 한다.
故御史中丞吳公剛直之操著於大觀, 政和之間, 事具國史, 略與此傳相表裏. 其有不合, 則傳聞之異詞爾. 至其論薦游御史, 毛諫議, 胡文定公, 皆一世名士, 足以見公之知人. 其薦胡公, 而徽宗亟以手札審其名氏, 又足以見聖主急賢之美意, 則皆不見於史, 而獨此書爲可考焉, 是不可以無傳也. 光祿公與胡公游, 有朋友之誼, 見於胡公所與呂兵書手簡. 而熹先君子亦雅相敬重, 嘗贈以詩, 有 「問訊袖中醫國手, 不應長與一笻閑」 之句. 今讀曾尙書所爲銘識又如此, 鳴呼, 其亦可謂賢父子矣! 其族孫芾出此書以見示, 因書其後, 以示公之族黨, 尙思有以繼其遺烈云. 慶元丙辰正月二十四日.
家傳又記被旨鞠陳正彙事, 卽陳忠肅公所謂 「獄詞平允, 閱實於片言之中」 者. 史亦不書, 蓋闕文也. 張閣守杭, 乞兼領花石事, 亦不見他書, 當表而出之, 以著其惡云.
조충간공의 첩에 발문을 붙임[跋趙忠簡公帖]
조공(趙公)이 처음에 조주(潮州)로 유배를 갈 때에 그의 막내아들의 죽음에 곡하고 길을 떠났다. 이미 떠난 뒤에 또 맏아들을 잃었다. 내 집에 여자미(呂紫微)가 선친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오히려 “이 노신의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편지에서는 “올해 유배지에 있는데 위(渭: 맏아들의 이름)가 죽은 지 딱 반년이 되었다”고 말했으니, 이 때는 오히려 조주(潮州)에 있었고 아직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구주(衢州)의 수신(守臣) 장걸(章傑)은 실로 소성(紹聖) 시절의 옛 재상의 후손인데, 여러 손자들이 평소에 조공에게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를 계기로 그 사사로운 분노를 드러냈다. 진회(秦檜)는 그가 오로지 자기를 위하지 않고 남의 힘을 빌려 사감을 풀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바로잡지 않았다. 옹위(翁尉)의 일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장걸도 끝내 폐하여 등용하지 않았다. 대개 의심하지 않음이 너무 심하였다. 옹위는 또 호시랑(胡侍郞)의 처형이고, 호시랑 또한 조서를 초하여 장돈의 죄상을 논한 자이니, 그 집안에서 이 일을 가지고 원통함을 하소연하다가 이내 난계(蘭溪)에게 옮겨지게 된 것이다. 나는 옹위와도 친구여서 그 일을 더욱 상세하게 알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하여 발어(跋語)의 미진한 곳을 보충해둔다. 경원(慶元) 병진년(1196) 2월 13일에 회옹(晦翁)이 적음.
趙公初謫潮州時, 哭其季子而行. 旣行, 又喪長子. 熹家有呂紫微與先君手書, 言之猶云: 「不知此老力量能堪之否?」 此帖云 「今年在貶所而渭亡適半歲」, 則是猶在潮, 未過海也. 衢守章傑實紹聖故相, 諸孫雅怨趙公, 故藉此以發其私忿. 秦檜知其不專爲己而借力以逞憾也, 故不直之. 不惟翁尉事解, 傑亦遂廢不用, 蓋不爲疑其已甚也. 翁又胡侍郞妻兄, 胡亦草制罪狀章惇者, 其家持此事訴寃, 乃得移蘭溪. 予與翁亦親舊, 知之尤詳, 因記於此, 以補跋語之未盡云. 慶元丙辰二月十三日, 晦翁題.
조충간공의 서첩에 다시 발문을 붙임[再跋趙忠簡公帖]
조공(趙公)이 재상이 되었을 때, 고종(高宗)은 원부(元符: 휘종 황제의 연호)의 간관(諫官) 임백우(任伯雨)가 소장을 올려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이 일찍이 선인성렬황후(宣仁聖烈皇后)의 추폐(追廢)를 청한 일 논박한 것을 살펴보고, 몹시 진노하여 직학사원(直學士院) 호인(胡寅)을 불러 조칙을 초하도록 하고 손수 써서 삼성(三省)에 전하여 장돈과 채변의 관작을 삭탈하고 친척과 자손을 금고시켰다. 그 조칙 중에 “누군들 어머니가 없겠는가? 어찌 차마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는 말이 있어서 천하가 통쾌하게 여겼다. 조공은 오히려 너무 과중하게 추방했다는 뜻으로 상주하여 죄가 없음을 변명하고, 친척에 대한 금고를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고종은 손수 조서를 써서 그의 어질고 너그러움을 칭찬하고 매우 가벼운 형벌로 처리했다. 지금 황제의 편지가 조씨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데 간혹 돌에 새겨 세상에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씨(章氏)의 자손은 이를 모르고, 다만 조공이 원우(元祐)에 힘써 주장한 것만 보고서, 이 일은 모두 그의 뜻에서 나왔다고 말하며 매우 원망했는데, 세상에서도 그 자세한 내막을 아는 자가 적었다. 이에 다시 여기에다 아울러 기록해둔다.
趙公爲相時, 高宗因覽元符諫官任伯雨章疏論章惇蔡卞嘗乞追廢宣仁聖烈皇后事, 赫然震怒, 召直學士院胡寅草詔, 手書以付三省, 削奪惇, 卞官爵, 禁錮親戚子孫. 其詞有 「誰無母慈, 何忍至此」 之語, 天下快之. 趙公猶以行遣太重, 奏爲申理, 乞免錮其親戚. 高廟手詔褒其仁恕, 頗爲末減. 今宸翰猶藏趙氏, 或爲刻石以傳於世矣. 然章氏子孫不知也, 但見趙公力主元祐, 因謂此事皆出其意而深怨之, 世亦鮮知其曲折者. 因復幷記於此云.
장위공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張魏公詩]
“원흉들이 농단하니 인심은 떠나고, 대의가 다시 새로우니 하늘의 뜻이 돌아오네. 중원 땅에 오랑캐 없게 만든다면, 사문은 천고에 티끌이 없으리라.” 대의를 들어 중원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장공(張公)의 평생의 마음이었다. 이 시를 살펴보면 그가 잠잘 때나 먹을 때나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羣兇用事人心去, 大義重新天意回. 解使中原無左袵, 斯文千古未塵埃. 擧大義以淸中原, 此張公平生心事也. 觀於此詩, 可見其寢食之不忘. 然竟不得遂其志, 可勝嘆哉!
장위공이 사참정에게 준 편지에 씀[書張魏公與謝參政帖]
장준(張浚)이 재배하고 말씀 드립니다. 저번께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급하여 학문에 마음을 다 쏟지 못했습니다. 파직되어 물러나게 됨에 비로소 삼구(三衢)에 의탁하여 비호를 받고자 했는데, 거의 승낙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사이 또 삼가 폐하의 처분을 받고 복당(福唐)에서 살고있어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매우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사람을 종종 보내 소식을 주시니 저를 염려해주시는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더욱 감격하고 있습니다. 장준 올림.
내가 삼가 승상 장충헌공(張忠獻公)이 삼정(參政)인 상채(上蔡) 사공(謝公)에 보낸 편지를 읽어보니, 이 당시에 장공은 이미 큰공을 세워 우부(右府)에 올랐는데도 예법을 이처럼 공손하게 갖추었고, 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으니 매우 덕이 성대하다. 사공(謝公)의 외손 견술조(甄述祖)가 나에게 꺼내 보이니 여러 번 읽고 나서 매우 감탄했다. 삼가 한 통을 베껴서 상자에다 간직하고 발문을 써서 돌려보낸다. 경원(慶元) 병진년(1196) 2월 갑인일에 구위(具位) 주희(朱熹)가 삼가 적음.
浚再拜: 曩以急於祿養, 未及盡心于學. 玆綠罷退, 初欲托庇三衢, 庶有承敎之便. 比又恭領處分, 俾居福唐, 失此依賴, 殊用慊然. 差人種種, 悉荷留意, 尤所感激. 浚再拜.
熹伏讀丞相張忠獻公所與參政上蔡謝公手書, 是時張公已建大功, 登右府矣, 而其執禮之恭如此, 且又欲然自以爲未始學者, 而有受敎之願焉, 甚盛德也. 謝公外孫甄述祖出以見示, 三復之餘, 歎仰不足, 謹錄一通藏之巾篋, 而敬書其後以歸之. 慶元丙辰二月甲寅, 具位朱熹謹記.
위 글에 다시 발문을 붙임[又跋]
이는 장위공(張魏公)이 사참정(謝參政)에게 보낸 편지이다. 모두 3통인데 앞 편지에서는 ‘판부참정 어르신께[判府參政丈丈鈞座]’라 칭했고, 나중에는 또 한 편지 속에 1통에서 “저는 아직 고명(告命)을 받지 못해서 상세한 품계를 갖추어서 편지를 드릴 수가 없으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으니,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此張魏公所與謝參政書也, 凡三幅, 前幅稱 「判府參政丈丈鈞座」, 後又一書內一幅云: 「某以未被受告命, 不果具細階拜書, 伏幸照察」, 其恭如此.
상백원의 유계에 발문을 붙임[跋向伯元遺戒]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후, 위로는 조정에서 아래로는 향리에 이르기까지 상례(喪禮)를 치르는 자는 한결같이 그 법을 사용했다. 노자(老子)의 무리는 고통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높였는데, 또한 그 방법을 본받아 비루하여 두서가 없으니 괴이하고 웃을만했다. 그런데 습속이 거기에 휩쓸려 편안히 받아들여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당나라 때는 요문헌공[姚文獻公: 이름은 숭(崇)], 송나라에는 사마 문정공[司馬文正公: 이름은 광(光)], 정자(程子)․장자(張子) 등 여러 군자들, 그리고 근세에 장충헌공(張忠獻公)이 비로소 배척하여 쓰지 않았으나, 또한 그 도도한 흐름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근고(近故)에 조의대부(朝議大夫) 상공(向公) 백원[伯元: 이름은 오(浯)]은 젊어서 호문정공(胡文定公)에게 수학하고, 만년에는 물어나 집에 거처하면서 들은 것을 높이고 안 것을 행하는 데 늙도록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종할 무렵에 손수 글을 써서 그 자손들에게 “세속에서 말하는 불교의 예법을 쓰지 말라”고 훈계했는데, 글씨가 단아하고 말뜻이 근엄하여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여러 고자(孤子) 사백(士伯) 등은 유지를 받들어 감히 실추하지 않았다. 또 돌에 새겨서 영구히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틈틈이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홀로 이 글이 행해지면 세법(世法)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독자가 참으로 이 글을 미루어서 말속의 비루함을 다 제거하여 선왕의 예법을 구하여 살펴 행할 수 있다면, 이 말은 상씨(向氏) 한 가문의 훈계가 될 뿐만이 아니다. 이에 발문을 지어 이를 밝힌다. 경원(慶元) 2년(1196) 2월 신미일에 신안 주희가 삼가 씀.
自佛敎入中國, 上自朝廷, 下達閭巷, 治喪禮者一用其法. 老子之徒厭苦岑寂, 輒亦傚其所爲, 鄙陋不經, 可怪可笑. 而習俗靡然, 恬不覺悟. 在唐唯姚文獻公, 在本朝則司馬文正公, 關洛程張諸君子, 以及近世張忠獻公, 始斥不用, 然亦未能盡障其橫流也. 近故朝議大夫向公伯元少受學於胡文定公, 晩年退處于家, 尊聞行知, 不以老而少懈. 及啓手足, 親書幅紙, 戒其子孫勿爲世俗所謂道場者, 筆札端好, 詞意謹嚴, 與平日不少異. 諸孤士伯等奉承遺指, 不敢失墜. 旣又謀刻諸石, 以詒久遠, 間以視熹. 熹竊以爲此書之行, 可爲世法. 觀者誠能因而推之, 盡祛末俗之陋, 以求先王之禮而審行之, 則斯言也不但爲向氏一門之訓而已. 因識其後以發之. 慶元二年二月辛未, 新安朱熹謹書.
요덕명의 「인수려조약」의 뒤에 씀[書廖德明仁壽廬條約後]
보통사람이 혼자 길을 가다가 질병에 걸렸는데도 처자식의 보살핌이나 친구에게 의탁하거나 집과 침석(枕席)같은 도구나 의약과 음식 같은 물건이 없다면, 그는 수레에 실려 옮기다가 노지에서 굶주리고 목말라 구렁텅이나 골짜기에서 죽어 자빠질 것임은 틀림없다. 선왕(先王)의 정치에 도로․여사(廬舍)․위적(委積)을 설치하는 방법은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였으나, 이것까지 미치지는 못했으니, 어찌 담당 관리가 선왕의 전교를 놓친 것이 아니겠는가? 송나라가 천명을 받아 국토를 다스리고 백성을 기른 지 백여 년이 되어 숭녕(崇寧)․대관(大觀) 연간에 이르러 공적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혜택이 넘쳐 융성함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 폐하의 마음은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혜택을 입지 못할까 염려하여 비로소 주현(州縣)에 안제방(安濟坊)과 거양원(居養院)을 세워 병든 자나 쇠잔한 노인을 수용하여 구휼하도록 조칙을 내리니 그 덕이 매우 두터웠다. 중년에 나라에 근심이 많아 폐지되거나 이지러졌다. 근세 이래로 상당 부분 다시 복구되었으나 보(莆)땅의 군현은 오히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지금 그곳의 대부 요덕명(廖德明)군이 홀로 이에 감개하여 현(縣)의 남쪽에다 집을 짓고 ‘인수지려(仁壽之廬)’라는 간판을 내걸어, 길을 오고가다가 질병에 걸린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이곳에 의탁하여 기숙하고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또 군(郡)에 요청하여 폐사(廢寺)의 전답을 얻어 해마다 곡식 약간 섬을 들여와 약이 되는 음식을 마련하고 관리비용을 지급했다. 오히려 힘이 부족함을 한스러워하고 혜택이 넓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이내 그 전말을 서술하여 조약을 만들었다. 틈틈이 이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그 일을 기록하여 후인에게 알려서 끝내 그 뜻을 이루어 오래도록 폐지되지 않도록 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요군(廖君)은 실로 선대 조정에서 이미 실추한 법전을 시행하여 길에서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을 살렸는데, 본디 도를 배워 사람을 사랑하는 군자라면 즐겁게 듣고 쓰기를 원할 것이니, 또한 어찌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 우선 그 조약의 뒤에다 써서 함께 판각하도록 하니, 훗날 이를 고증해볼 수 있으리라. 경원(慶元) 병진년(1196) 3월 정미일에 신안 주희가 적음.
匹夫單行而遇疾病, 無有妻孥之養, 親舊之託與夫室廬枕席之具, 醫藥食飮之須, 則其輿曳驅馳, 暴露饑渴而轉于溝壑也必矣. 先王之政, 道路廬舍委積之法至詳至密, 而不聞其及此, 豈有司者因失其傳邪? 國朝受命, 覆冒區宇, 涵育黎元, 百有餘年, 至於崇寧, 大觀之間, 功成治定, 惠澤洋溢. 隆盛極矣. 而上聖之心猶軫一夫之不獲, 始詔州縣立安濟坊, 居養院, 以收卹疾病癃老之人, 德至渥矣. 中以多虞, 不無廢缺. 近歲以來, 頗復修擧. 而莆之爲郡縣者, 猶未暇也. 今其大夫廖君德明獨有感焉, 乃卽縣南爲舍一區, 牓曰 「仁壽之廬」, 使凡道路往來疾病之民咸得以託宿而就哺. 又請於郡, 得廢寺之産, 歲入粟若干斛者, 以供藥餌, 給奉守. 猶恨其力之不足而恐其惠之不廣也, 乃叙其本末而爲之條約. 間以示余, 請記其事以告後人, 冀有以卒成其志而不壞於久遠也. 余惟廖君於此實擧先朝已墜之典, 以活中路無告之人, 固學道愛人之君子所樂聞而願爲者, 又何待於余言哉? 姑爲書其條約之後, 俾幷刻焉, 庶幾來者尙有考也. 慶元丙辰三月丁未, 新安朱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