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권 朱子大全 卷八十
기 記
휘주 유령현청 신안도원기(徽州休寧縣廳新安道院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 8월에 쓴 글이다.
휴녕대부(休寧大夫) 신안(信安) 축후(祝侯) 여옥(汝玉)이 내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휴녕이라는 고을은 비록 다스리기 어렵다고 이름났지만, 내가 여기에 와서 다스린 지 벌써 두 해이다. 처음에는 고을 사람들의 말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중간에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은 마침내 그것이 과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대체로 이 고장의 경계는 실제는 장산(鄣山)의 왼쪽 기슭에서 절강(浙江)으로 나오는데, 산은 조금 엄준하고 물은 맑으면서도 격하기 때문에 그 기운을 받고 그 땅의 곡식을 먹고 사는 생명들의 성정과 습성이 오히려 지나치게 굳세고 싸움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군자는 그 굳셈을 고결한 행동과 절개로 만드는데 힘쓰고, 더욱이 불의를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므로 그 습속이 힘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렵고 이치로 이기기는 쉽다. 진실로 내가 하는 것들은 공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서 나오지만, 간혹 사사로움을 불식하더라도 끝내 감히 그르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내가 처음 왔을 때,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없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기뻐하며 다른 행동을 하는 이들이 없다. 예전에는 일이 워낙 번거로워 곤혹스러웠는데, 지금은 할 만한 일이 없이 한가롭다. 내가 장차 청사의 동쪽 부분을 다시 수리하면서, 보좌관들이 읊은 시 구절 중에서 추려 ‘신안도원(新安道院)’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대가 나를 위해 그것을 기록해주면, 나중에 군자들이 어떻게 다스렸는지를 더욱 잘 알게 되어 내가 처음 시작하면서 가졌던 걱정이 없을 것이다.”
休寧大夫信安祝侯汝玉以書來曰: “休寧之爲邑, 雖有難治之名, 而吾之爲之已再歲矣. 始也不能不以人言爲慮, 中乃意其不然, 而今則遂有以信其果不然也. 蓋其封域實鄣山之左麓, 而浙江出焉, 山峭厲而水淸激, 故禀其氣, 食其土以有生者, 其情性習尙不能不過剛而喜鬪. 然而君子則務以其剛爲高行奇節, 而尤以不義爲羞. 故其俗難以力服而易以理勝. 苟吾之所爲者出於公論之所是, 則雖或拂於其私, 而卒不敢以爲非也. 以是吾之始至, 蓋不能無不悅者, 而今則驩然無與爲異. 吾嘗困於事之不勝其繁, 而今則廓然無事之可爲也. 吾將更葺廳事之東, 參採賓佐屬詠之什, 而榜之以‘新安道院’. 子能爲我記之, 則後之君子益知所以爲治, 而無吾始者之慮矣.”
여옥이 이 일을 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 완성도, 백성들의 자발적 복종과 무사하고 태평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라는 이름은 바로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길이지 무사(無事)함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여옥이 처음 여기 왔을 때, 관청 사무실에 앉아 왼쪽에 서류 장부를 놓고 오른쪽에는 법률 서적을 놓고 밤낮으로 몸과 마음을 다해 힘쓰면서 쉬지 않았다. 그 사이 간혹 조금이라도 여가가 있으면, 찬 바람나 뜨거운 햇빛을 무릅쓰고 백성들이 농사짓는 논밭을 찾아다니며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 무릇 백성들의 선을 권장하고 그 악을 징계하고, 백성들의 이익을 증대하고 그 해악을 제거하는 것은 도를 가진 이가 아니면 어떻게 오늘과 같은 태평무사한 정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서원의 이름을 신안도원이라 지은 것을 생각하건대, 오늘날 고을이 별탈없이 무사함에서 취한 것이지, 도리어 옛날 작은 일들이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노자와 부처가 일컫는 말인데, 여옥이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일찍이 그것을 생각해 보니, 천하의 일에는 비록 동정(動靜)과 노일(勞逸)의 차이가 있지만, 이른바 도라는 것은 피차(彼此)․정추(精粗)의 간격이 없다. 여옥의 학문이 본래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정치적 안정으로 인해 무사한 것을 기뻐하면서 이단의 학문의 헛된 이름을 피하지 않는 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여기에 노니면서 전날에 이미 행했던 것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더욱 추구하다가 끝내 피차(彼此) 정추(精粗)의 틈이 없는 것을 궁구하여 공명을 날리는 사업에 뛰어들었겠는가? 나는 옛날 이 고을 사람이고 여옥은 나의 옛 벗이니, 그 뜻을 기꺼이 하여 그 구체적 내용을 써서 이 지방의 풍속에 대해 현명한 지사가 고찰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순희 무술년 무신 8월 갑신, 주희 기록하다.
予惟汝玉之爲此, 可以見其政之成, 民之服而官曹之無事矣. 然道之得名, 正以人所共由之路, 而非無事之謂也. 夫以汝玉之始至, 坐于堂皇之上, 則左簿書, 右法律, 日夜苦心勞力而不得休. 其或少暇, 則又不免衝寒風, 冒烈日以出入乎阡陌之中而不敢怠. 凡所以勸民之善而懲其惡, 興民之利而除其害者, 非有道以行之, 則何以致今日之無事哉? 顧其名此, 乃若專取乎今日之無事, 而反序前日之厪事爲非道, 其無乃出於老子․浮屠之謂而汝玉未之思耶? 抑嘗計之, 天下之事雖有動靜勞逸之殊, 而所謂道者, 則無彼此精粗之間. 汝玉之學固有以知此矣, 彼其所以喜於政成之無事, 而不避異學之淫名, 豈非朝夕之間, 猶欲從容於此, 以深思前日之已行, 而益求其所未至, 而卒以究夫無彼此精粗之間者, 而大發於功名事業之間乎? 予故邦人, 且汝玉予舊也, 樂其意, 爲書本末以示來者, 使於此邦之俗, 賢宰之志尙有考云. 淳熙戊申八月甲申, 朱熹記.
옥산 유씨의학기(玉山劉氏義學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 9월에 쓴 글이다.
내가 처음 남강군 군수로 있을 때, 남강군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덕안에 읍재(邑宰)가 있었는데, 한결같이 유학에 근본하고 그 백성들을 매우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다. 가뭄이 든 해에는 조세의 감면을 요청했으나 주(州)의 지사가 안 된다고 하자 백성들이 낭패라 하여 서로 쳐다보며 깜짝 놀라 도망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는 얼른 사람을 보내 그들을 뒤쫓아 멈추게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 않는 것이 만약 같은 힘으로 주에 요청하면 감면받을 확률이 반드시 70%는 되는데, 도장을 맡기고 떠나 끝내 타향에서 귀신이 되게 하는 것은 끝내 차마 못하겠다.” 백성들이 이 명령을 듣고 감격하여 울면서 다시 서로 함께 부축하면서 돌아왔다. 민중들이 갖추어 마치 부자사처럼 주에 상황을 알리고 마침내 약속을 얻어내고서야 그쳤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마음 속으로 선하다고 여겨 그 읍과 마을의 성명을 물었더니, 옥산(玉山) 유후(劉侯)라 했다. 남강군에 속한 읍 가운데 덕안(德安)을 지나서 나오는 현에 속하는 곳이 있는데, 매번 관리를 파견하여 순행하면 반드시 꼭 유후를 찾아보도록 했고, 흉년이 들었을 때 그가 조치하는가를 보고 모범으로 삼아 시행했다. 이 때부터 유후의 은혜는 자신의 관할 지역에 그치지 않고 또 남강군 경계에까지 파급되어, 마침내 새로운 곡식을 먹고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거나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내 임기가 다 끝났을 때, 유후의 관사를 찾아가 절하고 뵈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그의 말을 듣고서 그가 참으로 군자다운 사람임을 믿을 수 있었다.
始予守南康, 鄰境德安有宰焉, 爲政一本儒術, 甚以惠愛得其民. 歲饑, 爲請蠲租而州家不可, 顧民狼顧相驚, 有逃去者, 則亟使人追止之曰: “所不爲若等力請於州, 必蠲十七者, 令寧委印綬去, 終不忍使若等爲異鄕鬼也.” 民聞是令下, 爲之感泣, 復相與携持而歸. 衆乃具以情白州若部刺史, 竟得如約乃已. 予聞而竊心善之, 而問其邑里姓名, 則曰玉山劉侯也. 南康屬邑有越德安而縣屬者, 每遣掾史循行, 則必戒使謁劉侯, 觀其荒政所施以爲法. 於是劉侯之惠不止行其封內, 而又波及南康之境, 竟食新, 民得無流亡殍死者. 及予將終更, 乃得納謁劉侯之館而拜賜焉, 則望其貌, 聽其言而有以信其爲君子人也.
몇 년 후, 내가 일이 있어 옥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유후가 다음 발령을 기다리면서 집에 머물고 있어서 다시 찾아볼 수 있었는데, 마치 평생 만난 것처럼 기뻤다. 어느 하루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집은 본래 가난한데 벼슬살이 역시 매우 늦어, 생각하건대 삼족(三族)을 인하게 할 수 없다. 중간에 전답을 나누고 집을 짓고 유명한 선비를 초빙하여 자제들을 가르쳤고, 고을 사람도 배움을 원하는 사람은 와서 배우도록 했다. 형제들도 기꺼이 재물을 들고와 도와주었는데, 나는 오히려 그러한 우의가 혹여라도 계속 이어지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또 신안에서의 남은 녹봉을 출자하고 창고에 있는 것들도 내다팔아 그 비용으로 보탰다. 무릇 분묘(墳墓)도 완전히 수리하고 가족과 인척도 두루 넉넉하게 돕는 것 역시 모두 하였다. 오주(吾州)에 이미 말했는데, 방군(邦君) 오후(吳侯)가 그것을 기꺼이 들으니, 그를 위해 신표를 주어 우리 자손에게 알리고 내 뜻을 거스리지 않도록 했다. 당신은 나를 잘 아니, 나를 위해 그것을 기록하여 이들에게 그것을 교육하고 가르치도록 함으로써 더욱 학문에 힘쓰도록 하려는 것이다.”
後數歲, 予以事過玉山, 則劉侯以待次家居, 復得相見, 如平生懽. 一日, 慨然語予曰: “吾家本單貧, 而入仕又甚晩, 顧無以仁其三族者. 間嘗割田立屋, 聘知名之士以敎族子弟, 而鄕人之願學者亦許造焉. 兄弟之間有樂以其貲來助者, 而吾猶懼其或不繼也, 則又出新安餘俸, 爲之發擧居積, 以佐其費. 而凡所以完葺丘壟, 周恤族姻者, 亦取具焉. 旣已言於吾州, 而邦君吳侯樂聞之, 爲之出敎刻符以詔吾之子孫, 使毋違吾志. 吾子雅知我, 其爲我記之, 以告其敎且學於此者, 使知有以勉焉.”
나는 듣고 감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의 대부는 혹 평민이 삼공의 지위에 이르면, 그러나 하루라도 뜻을 이루면 높은 대(臺)와 깊은 연못을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고 무녀응 춤을 추니 스스로 자신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요, 오직 노는 날이 부족할까만 걱정한다. 비록 창고에 곡식이 남아 있고 관청에 돈이 여유가 있어도 재해를 입은 주리(州里)의 백성을 위하지 않아도 충분하니, 진실로 다른 사람에게 미칠(신경쓸) 겨를이 없다. 유후(劉侯)와 같은 경우, 몸은 비록 은총을 입었지만 관직은 아직 6품에 이르지 못했고, 집안은 온화했지만 재산은 천금이 되지 않았는데도 그의 마음 씀씀이는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현명하다고 할 것이오, 또한 전날에 덕안 지방에서의 훌륭한 정치가 근본이 없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어찌 한갓 목소리와 웃는 용모만으로 기문을 쓸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사실의 근본을 추적하여 이와 같이 기록한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옛사람들이 말하는 학문이란 것이 어찌 독서하고 문장을 지어 벼슬과 이익을 구하고 따뜻한 옷과 음식을 구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겠는가? 또 말하기를, 이치를 밝혀 자신을 수양하고, 그것을 나라와 천하에까지 미루어 미칠 수 있도록 하려는 것뿐이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거처하면서, 시험 삼아 육경과 공자 맹장의 말을 이러한 뜻으로 탐구한다면, 아마도 유후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予聞而歎曰:「今士大夫或徒步至三公, 然一日得志, 則高臺深池, 撞鐘舞女, 所以自樂其身者, 唯恐日之不足. 雖廩有餘粟, 府有餘錢, 能毋爲州里災害則足矣, 固未暇以及人也. 如劉侯者, 身雖寵而官未登六品, 家雖溫而産未能千金, 顧其所以用心者乃如此, 是則可謂賢遠於人, 而亦可以見其前日德安之政不爲無本, 而豈徒以聲音笑貌爲之矣.」乃追本其事而記之如此. 雖然, 古人之所謂學者, 豈讀書爲文以干祿利而求溫飽之云哉? 亦曰明理以修身, 使其推之可以及夫天下國家而已矣. 羣居于此者, 試以此意求諸六經孔孟之言而深思力行之, 庶其有以不負劉侯之敎也.
유후의 이름은 윤적(允迪)이고, 자는 덕화(德華)이니, 지금은 조봉랑(朝奉郞) 참의연해제치사군사(參議沿海制置使軍事)라 부른다. 순희 15년 가을 9월 기미, 신안 주희 기록하다.
劉侯名允迪, 字德華, 今以朝奉郞參議沿海制置使軍事云. 淳熙十有五年秋九月己未, 新安朱熹記.
장주수신제명기(漳州守臣題名記)
장주(漳州)가 아래 속읍들의 군사를 통솔하는 것은 당나라 수공(垂拱) 2년에 좌옥검위익부좌랑장(左玉鈐衛翊府左郞將) 진원광(陳元光)의 주치(奏置)를 받아들여, 장포(漳浦) 회은(懷恩) 두 현을 통솔하고 장포현을 치소로 하여 다스렸다. 개원(開元) 4년, 이오천(李澳川)으로 옮겨 다스렸는데, 옛날 통치소에서 남쪽으로 80리에 있었다. 29년, 회은현을 없애고 장포현으로 편입했고, 천주(泉州) 용계현(龍溪縣)을 분할하여 소속시켰다. 천보(天寶) 원년에 장포군(漳浦郡)으로 바꿨다. 건원(乾元) 2년, 다시 주(州)가 되었다. 대력(大曆) 12년, 다시 정주(汀州) 용암현을 분할해서 소속시켰다. 정원(貞元) 원년, 다시 소재지를 용계현으로 옮겨 다스렸다. 당나라 말 오계(五季)의 난 때에는 늘 천주(泉州)의 지군(支郡)이었고, 가짜 자사(刺史) 동사안(董思安)이란 자가 자기 맘대로 이름을 바꿔 남주(南州)라고 했다.
漳以下州領軍事, 唐垂拱二年, 用左玉鈐衛翊府左郞將陳元光奏置, 領漳浦․懷恩二縣, 而治漳浦. 開元四年, 徙治李澳川, 在舊治南八十里. 二十九年, 廢懷恩入漳浦, 而割泉州龍溪縣來屬. 天寶元年, 改漳浦郡. 乾元二年, 復爲州. 大曆十二年, 又割汀州龍巖來屬. 貞元元年, 乃更徙治龍溪. 唐末五季之亂, 常爲泉州支郡, 而僞刺史董思安者至以私諱輒改號爲南州.
우리 송나라 건덕(乾德) 4년, 천주(泉州) 진홍진(陳洪進)이 (천주와 남주) 두 주의 판도(版圖)를 왕부(王府)로 귀속시켜 비로소 조칙으로 (장주라는) 옛이름을 되찾았다. 태평흥극(太平興國) 3년 5월 1일, 홍진(洪進)이 조정에 들어가 관리를 요청하여 마침내 위위사승(衛尉寺丞) 유원(劉援)으로 지주사(知州事)를 삼았다. 그리고 5년, 다시 천주의 장태현(長泰縣)을 쪼개 소속시켰다. 대체로 장주라는 주의 역사적 변천과정으로서 고증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하다. 그 수장(守將)은 진공(陳公)인데, 죽어서 신(神)이 되었고, 지금은 왕작(王爵)의 봉호로 사당에서 제사를 받는다. 나중에는 혹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였는데, 유후(劉侯) 이후 비로소 기(紀)를 가지게 되었다. 대개 그 청벽(聽壁)의 기록은 가우(嘉祐) 연간 정후(鄭侯) 해(偕)가 세운 것으로. 순희 년간 불타버려 다시 새겼고, 또 조후(趙侯) 공주(公綢)가 하였다.
我宋乾德四年, 泉州陳洪進以二州版圖歸王府, 始詔復故號. 太平興國三年五月一日, 洪進入朝請吏, 遂以衛尉寺丞劉援來知州事. 而五年, 又割泉之長泰縣以屬焉. 蓋凡漳之所以爲州, 其本末之可考者如此. 其守將則陳公, 沒而爲神, 今以王封廟食. 後乃或見或否, 以至于劉侯而後始有紀焉. 蓋其聽壁之記, 本嘉祐中鄭侯偕之所立. 逮淳熙中火而復刻, 則又趙侯公綢之爲也.
소희 년간, 임시직으로 있던 내가 가서 보니, 그 나무의 결이 금가고 갈라졌고, 또 쓴 글 역시 너무 번잡하여 글을 쓸만한 여백이 없었다. 그래서 연평에서 돌을 사와 청사에 두고 벽과(擘窠) 생문(省文)의 방법으로 구기(舊記)를 썼다. 그리고 그 왼쪽은 여백으로 비워 후대의 사람을 기다린다.
紹熙元年, 假守朱熹至而觀焉, 則其木理往往龜裂, 且其所書又太煩悉, 而將無地之可書也, 乃爲買石延平, 礱置聽事, 更爲擘窠省文之法, 以寫舊記, 而虛其左方, 以俟來者云.
덕안부 응성현 상채 사선생 사당기(德安府應城縣上蔡謝先生祠記)
【해제】 이 글은 소희 2년(신해, 1191년, 62세) 10월에 쓴 글이다.
응성현학(應城縣學)의 상채(上蔡) 사공선생(謝公先生)의 사당은 지금 현령(縣令) 건안(建安) 유병(劉炳)이 세운 것이다. 선생의 이름은 양좌(良佐)이며, 자는 현도(顯道)이고, 하남(河南) 정부자(程夫子) 형제의 문하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스스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강의하는 중간에 잡다한 전기를 인용하고, 심지어는 끝까지 암송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자께서 웃으시며 “그대는 외물에 정신이 팔려 본심을 잃어버렸군요.”고 말씀하셨다. 선생이 그말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얼굴이 벌개지고 식은땀이 흘러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이에 이제까지 했던 공부를 모두 버리고 부자에게 배웠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영명하며 결단력이 있고 게으름피우지 않고 힘쓰고 노력하여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며 날마다 해야 할 학업의 내용과 진도를 정해 두었다. 부자께서도 일찍이 그의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서 생각하는 공부를 인정하였다. 그가 저술한 논어해 및 문인들이 기록한 유어(遺語)는 모두 세상에서 유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생의(生意)로 인을 해석한다든가, 실리(實理)로 성(誠)을 해석한다든가, 상성(常惺)으로 경(敬)을 해석한다든가, 구시(求是)로 궁리(窮理)를 해석하는 것 등은 그 명리(命理)가 모두 정밀하고 합당하며, 궁리거경(窮理居敬)을 덕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 것을 곧바로 가리키니, 부자께서 사람을 교육하는 법의 강령을 가장 잘 파악했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중에는 조칙과 의견이 맞지 않아 서국관으로 발령 대기했다. 나중에 다시 주현(州縣)으로 옮겼는데, 비천하고 용렬함에 빠져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처사는 호연하여 조금도 좌절한 적이 없었다. 중간에 이 고을의 읍재(宰邑)가 되었었는데, 남양(南陽) 호문정공(胡文定公)이 전학사(典學使)의 자격으로 관할지역을 순시하면서 그곳을 지나갔는데, 감히 직사(職事)로 질문하지 못하고, 나중에 소개를 받고 제자의 예를 갖추고 알현하기를 요청했다. 문을 들어서서 이졸(吏卒)들이 정원에 나무를 심는 것을 보고 토목우인(土木偶人) 같아 숙연하게 경을 표하고 마침내 가르침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문에 도착한 선비들 역시 모두 그의 언론의 굉사(閎肆)함을 칭찬하였고, 사람들을 잘 계발(啓發)하였다. 지금 그의 책을 읽어보면 오히려 알 수 있을 것이다.
應城縣學上蔡謝公先生之祠, 今縣令建安劉炳之所爲也. 先生名良佐, 字顯道, 學於河南程夫子兄弟之門. 初頗以該洽自多, 講貫之間, 旁引傳記, 至或終篇成誦. 夫子笑曰 ‘子可謂玩物喪志矣.’ 先生聞之, 爽然自失, 面熱汗下, 若無所容, 乃盡棄其所學而學焉. 然其爲人英果明決, 强力不倦, 克己復禮, 日有程課. 夫子蓋嘗許其有切問近思之功. 所著論語說及門人所記遺語, 皆行於世. 如以生意論仁, 以實理論誠, 以常惺論敬, 以求是論窮理, 其命理皆精當, 而直指窮理居敬爲入德之門, 則於夫子敎人之法又最爲得其綱領. 建中靖國中, 詔對不合, 得官書局. 後復轉徙州縣, 沈淪卑冗, 以沒其身. 而處之浩然, 未嘗少挫. 中間嘗宰是邑, 南陽胡文定公以典學使者行部過之, 不敢問以職事, 顧因紹介, 請以弟子禮見. 入門, 見吏卒植立庭中, 如土木偶人, 肅然起敬, 遂稟學焉. 其同時及門之士亦皆稱其言論閎肆, 善啓發人. 今讀其書, 尙可想見也.
그러나 선생이 죽고, 유공(游公) 정부(定夫) 선생이 그의 묘를 실제로 알고 있었는데, 상란(喪亂)의 여파로 양가(兩家)의 문자를 모두 볼 수 없게 되었다. 응성(應城) 지방은 도적들의 폭동이 더욱 극심하여 분묘에 잡초만 무성하고, 그가 베푼 가르침의 조목들은 진실로 더 이상 전하지 자가 없었다. 유군(劉君)이 와서 그의 유적을 방문하고, 겨우 영류(詠留) 제목으로 수 십자를 새겼을 뿐이니, 개연히 탄식하면서 선생이 남긴 공덕을 이 지방에 세우지 않으면 후대의 군자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새로이 학교를 세우고, 강당의 동쪽에 신위를 설하고 제사를 모시고, 천 리 먼 곳까지 편지를 보내 기문을 요청했다. 나는 어릴 적 망령된 생각으로 공부를 하였는데, 선생의 말씀을 듣고 학문의 취지를 계발했다. 선생이 행한 일들 모두가 고매하고 탁월하여 사람들을 흥기시켰다고 평생 동안 들었다. 이제 늙고 병들고 보니, 그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을까 늘 두려웠다. 유군의 요청을 받고서 마침 내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어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기문을 써서 학자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소희 신해 겨울 10월 병자 초하루 아침, 신안 주희 기록하다.
然先生之沒, 游公定夫先生實識其墓, 而喪亂之餘, 兩家文字皆不可見. 應城寇暴尤劇, 莽爲丘墟, 其條敎設施固無復有傳者. 劉君之來, 訪其遺跡, 僅得題詠留刻數十字而已, 爲之慨然永歎, 以爲先生之遺烈不建於此邦, 後之君子不得不任其責. 於是旣新其學, 乃卽講堂之東偏設位而祠焉, 千里致書, 求文以記. 熹自少時妄意爲學, 卽賴先生之言以發其趣. 而平生所聞先生行事, 又皆高邁卓絶, 使人興起. 衰病零落, 廩然常懼其一旦泯減而無傳也. 劉君之請, 乃適有會於予心者, 於是不辭而記之如此, 以示其學者云. 紹熙辛亥冬十月丙子朔旦, 新安朱熹記.
장절정기(壯節亭記)
【해제】 이 글은 소희 3년(임자, 1192년, 63세) 5월에 쓴 글이다.
순희 기해년(1179년), 나는 임시직 남강 태수로 있었다. 처음 왔을 때에 나는 선현들의 유적을 찾아 방문하여, 성의 서문 밖 풀더미 속에서 고(故) 상서둔전외랑(尙書屯田外郞) 유공(劉公) 응지(凝之)의 묘를 발견했다. 내 생각으로는, 유공(劉公)은 당시 청명(淸名)과 고결한 절개로 저명하였고 후세에도 소문이 났으니, 잠시라도 그 여풍에 잠겨본 이라면 오히려 나약함을 떨치고 이치를 탐구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지금 불행하게도 제사지내줄 사람조차 없고, 이 지방에 있는 묘소조차 또 이와 같으니, 이 역시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람의 책임이다. 이에 그 앞에 작은 정자를 짓고 문장(門牆)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풀 베는 아이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그 해에 중춘(中春)에 관리들과 여러 학생들을 이끌고 제사지냈다. 군(郡)의 시인 사숙(史驌)이 구양공(歐陽公)의 말을 사용하여 정자의 이름을 장절(壯節)로 할 것을 청했는데, 마침 나의 뜻에도 들어맞아, 친구 황수(黃銖)에 부탁해서 큰 글씨로 써서 걸었다. 이 때부터 동서(東西)로 오가면서 지나는 이들마다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경건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나 역시 여기의 분묘가 견고하고 안전해서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淳熙己亥歲, 予假守南康. 始至, 訪求先賢遺迹, 得故尙書屯田外郞劉公凝之之墓於城西門外草棘中. 予惟劉公淸名高節著於當時而聞於後世, 暫而挹其餘風者, 猶足以激懦而律貪, 顧今不幸饋奠無主, 而其丘墓之寄於此邦者又如此, 是亦長民者之責也. 乃爲作小亭於其前, 立門牆, 謹扃鑰, 以限樵牧. 歲以中春率群吏諸生而祠焉. 郡之詩人史驌請用歐陽公語名其亭以「壯節」, 適有會於予意, 因屬友人黃銖大書以揭焉. 自是以來, 東西行而過者莫不顧膽起敬, 而予亦自以爲玆丘之固且安可以久而不壞矣.
소희 2년 신해년(1191년), 내가 군을 떠난 지 겨우 10년인데, 지금의 태수장공(章貢) 증후(曾侯)가 와서 지도를 살펴 그 옛터를 찾아보니, 문장(門牆)과 정방(亭榜) 모두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크게 탄식했다. 그 날로 다시 문장(門牆)을 만들고 그 사이에 더 높고 튼튼하며 굉활하게 정자를 축조하여 오래오래 지탱하도록 했다. 또 큰 돌을 갈아 그 봉(封)을 배(培)하고, 이름 있는 나무를 심어 그 뇌(籟)를 넓혔고, 옛 방(榜)을 구해 정자 위에 다시 설치하고 세시(歲時)에 맞춰 제사를 받들기를 한결같이 옛 법도대로 하였다. 또 공전(公田) 10묘를 분할하여 근처에 있는 능인승사(能仁僧舍)에 주고 받들어 지키는 일을 전담하고 증축하거나 수리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 또 내가 여기에서 그 일을 처음 시작했다 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바라건대 한 말씀 기록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우리 둘이 했던 간절하고 정성된 뜻을 알고 현인을 존경하고 덕을 숭상하는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또한 세상의 교화에 만의 하나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紹熙二年, 歲在辛亥, 予去郡甫十年, 而今太守章貢曾侯寔來, 按圖以索其故, 則門牆亭榜皆已無復存者, 爲之喟然太息. 卽日更作門牆, 築亭其間, 益爲高厚宏闊, 以支永久. 又礱巨石以培其封, 植名木以廣其籟, 求得舊榜, 復置亭上, 歲時奉祀, 一如舊章. 且割公田十畝以畀旁近能仁僧舍, 使專奉守, 爲增葺費. 而又以予爲嘗經始於此也, 以書來曰 “願得一言以記之, 使後之人知吾二人者所爲拳拳之意, 而不懈其尊賢尙德之心也. 斯不亦有補於世敎之萬分乎?” 予曰諾哉.
증후(曾侯)의 이름은 집(集)이고, 자는 치허(致虛)이며, 학문에 가법(家法)이 있기 때문에 그가 정치를 하면서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은 아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3년 여름 5월 계미, 신안 주희 기록하다.
曾侯名集, 字致虛, 學有家法, 故其爲政知所先後如此云. 三年夏五月癸未, 新安朱熹記.
빙옥당기(冰玉堂記)
【해제】 이 글은 소희 3년(임자, 1192년, 63세) 9월에 쓴 글이다.
남강(南康) 사군(使君) 증후(曾侯) 치허(致虛)가 둔전(屯田) 유공(劉公)의 묘를 수리하고, 다음 해, 군 소재지 동쪽에 있는 그 옛집과 유지(遺址)를 방문했다. 한가한 날에 말이 더 이상 갈 수 없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가서 보니, 그 북쪽으로 은연 중 높이 있는 것은 유공이 부역했던 동대(東臺)이고, 그 남쪽을 보면 우묵하게 아래로 내려 앉아 있는 것은 (유공의) 시서(詩序)에서 가리키는 연지(蓮池)이다. 병란 이래로 초목이 무성한 지 오래여서 겨우 이것만 남아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알 수조차 없다. 증후(曾侯)는 머뭇거리면서 네 번이나 뒤돌아보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부모로서의 응지(凝之)와 자식으로서의 도원(道原)은 그 고상한 큰 뜻과 굳은 절개는 구양수․사마광․소철․황정견 등과 같은 여러 공(公)들이 말한 것과 같으니, 이 역시 한 시대의 인걸이라 할만하다. 평소 이 깊은 숲과 연못가 집에 거처하면서 시서의 도서와 사적(史籍)에 묻혀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여유롭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한 때는 유람하고 또 여기에서는 벼슬하는 것 역시 문을 두드리고 자리를 피해 덕업을 살피고 물으니 어찌 이렇게도 흥성한가. 돌아보건대, 백 년이 넘어 누대는 기울고 연못은 평지가 되어 잡초만 무성하여 풀 베는 아이들과 풀 먹이는 목동들 모두가 그 위에서 뛰어노니, 어찌 또 슬프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이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니, 힘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는 기부금을 조금 내고, 그 돈으로 민간에서 그 땅을 사서 담을 쌓고 도랑을 파 군포(郡圃)에 합하고, 돌을 쌓아 그 누대를 높이고 연못을 깊이 파고 물을 끌어와서 마침내 누대의 서북쪽을 빙옥지당(冰玉之堂)이라 이름 짓고, 그 위에 유공 부자의 초상을 그렸다. 도 진충숙공(陳忠肅公)이 일찍이 여기에 머물렀다는 소식을 듣고, 또 그의 초상을 그려 보답했다. 얼마 후 이른바 시시당(是是堂)․만랑각(漫浪閣)이란 것 역시 차례로 그것들을 복구한 것이다. 모두 완성하고서 그림과 글을 내게 보내 기문을 부탁했다.
南康使君曾侯致虛旣葺屯田劉公之墓, 明年, 乃訪得其故居遺址於郡治之東. 暇日, 屛騶馭․披荊棘而往觀焉, 間其北隱然以高者, 則劉公所賦之東臺也. 顧其南窊然以下者, 則詩序所指之蓮池也. 蓋自兵亂以來, 蕪廢日久, 唯是僅存, 而其他則皆漫滅不可復識矣. 曾侯爲之躊躕四顧, 喟然而嘆曰:「凝之之爲父, 道原之爲子, 其高懷勁節, 有如歐․馬․蘇․黃諸公之所道, 是亦可謂一世之人豪矣. 想其平日之居此林塘館宇之邃, 詩書圖史之盛, 旣有以自適其適, 而一時遊且官於此邦者, 亦得以扣門避席而考德問業焉, 何其盛也!顧今百年之外, 臺傾沼平, 鞠爲灌莽, 而使樵兒牧子皆得以嘯歌躑躅於其上, 又何其可悲也!雖然, 此吾事也, 不可以不勉.」 乃出少府羨錢贖之民間, 垣而溝之, 以合於郡圃, 累石以崇其臺, 引流以深其池, 遂作‘冰玉之堂’於臺之西北, 而繪劉公父子之象於其上. 且聞陳忠肅公之嘗館於是也, 則又繪其象以侑焉. 旣而所謂‘是是堂’, ‘漫浪閣’者, 亦以次擧而皆復其舊. 旣成, 使人以圖及書來屬予記.
생각하건대, 내가 이 지방에 임관했을 때 역시 여기에 뜻을 두었지만 하지는 못했는데, 이제 지도를 펴 살펴보니 생각했던 것과 오히려 비슷하니, 증후(曾侯)가 민첩하게 일을 처리하고 완성하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그러나 내게는 또 유감이 있다. 근세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이 바르지 않아, 몸을 놀리는 이들은 함께 추잡한 짓을 하는 것을 지행(至行)이라 여기고, 일을 맡고 있는 이들은 자기 개인을 편안히 하고 이롭게 하는 것을 제일로 여긴다. 유씨 부자의 풍모를 들으면, 침 뱉고 욕하지 않는 이가 거의 드물다. 증후처럼 한결 같이 어진 이를 표창하고 풍속을 선량하게 하는 마음으로 세속의 습속에 물들지 않는 이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사실을 썼는데, 마침 진령거(陳令擧)가 기우시화(騎牛詩畫)를 보내와, 이 편에다가 함께 증후에게 보내어 당상(堂上)에 새겨 누락된 한 시기의 고사(故事)를 보충하도록 요청했다. 소희 3년 가울 9월 경오 초하루 아침, 신안 주희 기록하다.
予惟異時承乏此邦, 亦嘗有意於斯而不克就. 今披圖考驗, 尙能憶其彷彿, 固喜曾侯之敏於事而能有成矣, 抑予又有感焉. 近歲以來, 人心不正, 行身者以同流合汚爲至行, 任事者以便私適己爲長策. 其聞劉氏父子之風, 不唾而罵之者幾希矣. 欲其能如曾侯, 一以表賢善俗爲心而不奪於世習, 豈可得哉!於是旣書其事, 而適有以陳令擧騎牛詩畫爲寄者, 因幷以遺曾侯, 請刻堂上, 以補一時故事之缺云. 紹熙三年秋九月庚午朔旦, 新安朱熹記.
황주 주학 이정선생 사당기(黃州州學二程先生祠記)
【해제】 이 글은 소희 3년(임자, 1192년, 63세) 9월에 쓴 글이다.
제안(齊安)은 강주(江州)와 회주(淮州) 사이에 있는데, 가장 궁벽(窮僻)한 곳이어서 우리 송왕조 이래로 이름난 공경 대부는 대부분 그곳에 거처하는 것을 욕되게 여겼으니, 예를 들면, 왕한림(王翰林)․한충헌공(韓忠獻公)․소문충공(蘇文忠公)의 경우인데, 지방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즐겨 부르는데, 소식의 경우에는 더욱 자세하다. 하남(河南) 두 정부자(程夫子)에 이르러서는, 이 지방에서 태어났는데도 아직까지 그를 말하는 이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왕공(王公)의 문장, 한공(韓公)의 훈업(勳業)은 모두 한 시대를 빛냈고 그 의논과 기개 및 절개는 탁월하고 위대하였고, 더욱이 세상의 눈과 귀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는 또 모두 소공(蘇公)만큼 날렸던 이가 없다. 정부자(程夫子)의 경우는, 그 사업이 인울(湮鬱)하여 그 당시에 이미 드러나지 않았고, 문사(文詞)는 평범하고 담담하여 후세에까지 뻗기에는 부족하였지만, 오직 그 오묘한 도학(道學)만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덕을 아는 이가 아니라면 그것을 알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그 유적에 현회(顯晦)의 차이가 없을 수 없는 이유이며, 또한 이세(理勢)가 마땅히 그러한 까닭이다.
齊安在江淮間, 最爲窮僻, 而國朝以來, 名鄕賢大夫多辱居之, 如王翰林, 韓忠獻公, 蘇文忠公, 邦人至今樂稱, 而於蘇氏尤致詳焉. 至於河南兩程夫子, 則亦生於此邦而未有能道之者. 何哉? 蓋王公之文章, 韓公之勳業, 皆以震耀於一時, 而其議論氣節卓犖奇偉, 尤足以驚動世俗之耳目, 則又皆莫若蘇公之爲盛也. 若程夫子, 則其事業湮鬱, 旣不得以表於當年; 文詞平淡, 又不足以夸於後世, 獨其道學之妙, 有不可誣者, 而又非知德者莫能知之. 此其遺跡所以不能無顯晦之殊, 亦其理勢之宜然也.
대개 천성(天聖) 중에 낙인(洛人) 태중대부(太中大夫) 정공(程公) 향(珦)이 처음 부임하여 황피(黃陂) 위(尉)가 되었다가 임기가 다 찼는데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가정을 꾸렸다. 실제로 명도 원년 임신(1032년)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호(顥)라 했고, 자는 백순(伯淳)이다. 또 다음 해 계유(1133년)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頤)라 했고, 자는 정숙(正叔)이다. 그 후 10여 년, 즉 경력 병술(1046년)에서 정해(1047년) 사이에, 두 번에 걸쳐 남안(南安)에 갔는데, 옥연(獄掾)인 용릉(舂陵) 주공(周公) 돈이(惇頤)을 만나 그와 더불어 교유하였다. 이로 인해 두 아들이 주돈이에게 수학하였고, 비로소 구도의 뜻을 품었다. 이윽고 유경(遺經)에서 공자․맹자 이래로 전해지지 않던 단서를 찾으니, 마침내 그 학문을 여러 선비들이 제창하니, 오늘날 이른바 명도선생․이천선생이 그 분이다.
蓋天聖中, 洛人太中大夫程公珦初任爲黃陂尉, 秩滿不能去, 而遂家焉. 實以明道元年壬申生子曰顥, 字伯淳. 又以明年癸酉生子曰頤, 字正叔. 其後十有餘年, 當慶曆丙戌丁亥之間, 攝貳南安, 乃得獄掾舂陵周公惇頤而與之游. 於是二子因受學焉, 而慨然始有求道之志. 旣乃得夫孔孟以來不傳之緖於遺經, 遂以其學爲諸儒倡, 則今所謂明道先生, 伊川先生是也.
선생의 학문은 대학․논어․중용․맹자를 지표로 삼아 육경에 이르렀고, 사람들에게 궁리 독서하여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며, 그 자신을 수양하여 가정에서 국가 및 천하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 도는 평범하지만 명백하고, 그 학설은 간단하지만 두루 꿰뚫고, 그 행동은 단정하면서 실제적이다. 그것은 수 천 년 동안 미궁에 빠진 도학을 진흥시켜 성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니, 한 시대의 사업(事業)사장(詞章)과 기개와 절개를 논의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우며, 어느 것이 좋고 나쁜 것인지 능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단지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도학의 사기(邪氣)로 지목하여 반드시 그를 얕보고 멸시했다. 이 시기에, 그를 베어서 흔적조차 없게 만들어버리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으니, 그 나머지야 어떠했겠는가! 이제 태수(太守) 이부군후(李府君侯)가 시원에 근원하여 생각하고 남긴 뜻을 추념하여 두 부자의 사당을 학궁에 세워 그 풍모를 갈고닦아 흥기하니, 스스로 믿음이 독실하고 세속을 좇아 그 마음을 움직이는 이가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하겠는가?
先生之學以大學, 論語, 中庸, 孟子爲標指而達于六經, 使人讀書窮理, 以誠其意, 正其心, 修其身, 而自家而國, 以及於天下. 其道坦而明, 其說簡而通, 其行端而實. 是蓋將有以振百代之沈迷而納之聖賢之域, 其視一時之事業詞章․論議氣節, 所繫孰爲輕重? 所施孰爲短長? 當有能辨之者. 而世非徒不之好也, 甚者乃或目以道學之邪氣而必譾蔑之. 於斯時也, 苟無遭其伐木而削跡焉, 斯已幸矣, 尙何望於其餘哉!今太守李府君侯乃能原念本始, 追誦遺烈, 立二夫子之祀於學宮, 於以風厲其人而作興之, 非其自信之篤而不以世俗之趨舍動其心, 其孰能與於此?
이후(李侯)의 이름은 우(訧)이고, 자는 성지(誠之)이다. 그는 이 지방을 위해 삼가 일하고 백성을 사랑했으니, 참으로 기릴만한 것이 많다 특히 이 일은 그가 품은 뜻과 지조가 평범하지 않으며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기에 충분하다. 이런 까닭에 기문을 부탁받은 것을 기회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논함으로써 후대의 사람에게 알려 고찰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소희 3년 가을 9월 무자, 후학 신안 주희 기록하다.
李侯名訧, 字誠之. 其爲此邦勤事愛民, 固多可紀. 特於此擧尤足以見其趣操之不凡, 而非衆人所能及, 是以因其請記而具論之, 以告來者, 使有考焉. 紹熙三年秋九月戊子, 後學新安朱熹記.
소무군 광택현 사창기(邵武軍光澤縣社倉記)
【해제】 이 글은 소희 4년(계축, 1193년, 64세) 봄 2월에 쓴 글이다.
광택현의 사창은 현의 대부인 비릉(毗陵) 장후(張侯) 흔(訢)이 세운 것이다. 소무군의 여러 읍 가운데 광택현이 가장 작고 외진 곳에 있어, 장후(張侯)가 처음 부임해 왔을 때부터, 이미 마을에는 저장한 곡식이 없어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춘궁기에는 늘 쌀을 사들이는 값이 비싸 먹기 살기 어려움을 걱정했다. 또 중하(中下)의 가정에서는 아이를 낳아도 기를 힘이 없어 심지어는 죽도록 버려야할까 염려했다. 또 우리 지방과 인접한 곳을 여행하다가 한번 병에 걸리면 돌아갈 곳이 없어 심지어 길에서 죽을까 걱정한다. 바야흐로 그 일로 읍의 숨은 군자 이군(李君) 려(呂)와 의논하는데, 마침 연수(連帥) 조공(趙公) 역시 숭안 건안의 사창법을 관할 현에 하달하고 있었다. 이에 장후(張侯)는 이군과 의논하여 그 뜻을 대략 본받아 이 사창을 만들었다. 절약하고 긴축 경영을 하고 다른 용도의 남은 비용을 얻어 쌀 1,200곡을 사서 사창에 보충했다. 여름에는 값을 낮추어 내어 팔아 시장의 가격을 조절하고, 겨울에는 값을 올려 사들여 다음 해를 대비했다. 또 민간의 전답 약간 묘를 사고, 마땅히 몰수해야 할 승전(僧田)과 민전(民田) 약간 묘에서 나오는 세수미(歲收米; 세금으로 받아들인 쌀)의 합이 300곡(斛)인데, 모두 사창으로 납입시켜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들을 보조하였는데, 예를 들어 수사법(帥司法)과 같은 경우이다. 얼마 후 또 사창 부속 사영(四楹)짜리 집을 지어 여행길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대비하여 모두가 이곳에 의탁하여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여 급박한 고난이 없도록 했다. 사창의 규모와 창입, 강령의 게시는 모두 장후(張侯)의 공적이고, 사창의 정밀하고 명확한 법령, 사무관리의 섬세하면서도 정밀함은 이군의 노력이다. 읍민들이 그 혜택을 입고 춤추듯 기뻐하니, 부사(部使) 역시 그 사실을 듣고 더욱 권장하였다. 이에 장후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면서도 다음에 오는 이가 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요청했다.
光澤縣社倉者, 縣大夫毗陵張侯訢之所爲也. 光澤於邵武諸邑最小而僻, 自張侯之始至, 則已病夫市里之間民無蓋藏, 每及春夏之交, 則常糴貴而食艱也. 又病夫中下之家當産子者力不能擧, 而至或棄殺之也. 又病夫行旅之涉吾境者, 一有疾病, 則無所於歸而或死於道路也. 方以其事就邑之隱君子李君呂而謀焉, 適會連帥趙公亦下崇安建陽社倉之法於屬縣, 於是張俟乃與李君議, 略放其意, 作爲此倉. 而節縮經營, 得他用之餘, 則市米千二百斛, 以充入之. 夏則損價而糶, 以平市估;冬則增價而糴, 以備來歲. 又買民田若干畝, 籍僧田民田當沒入者若于畝, 歲收米合三百斛, 幷入于倉, 以助民之擧子者, 如帥司法. 旣又附倉列屋四楹, 以待道塗之疾病者, 使皆有以棲託食飮而無暴露迫逐之苦. 蓋其創立規模, 提挈綱領, 皆張侯之功; 而其條畫精明, 綜理纖密者, 則李君之力也. 邑人旣蒙其利而歌舞之, 部使者亦聞其事而加勸獎焉, 於是張侯樂其志之有成, 而思有以告來者, 使勿壞, 則以書來請記.
내가 고인의 글을 읽고 고인의 정치를 살펴보니, 부모나 자식이 없거나 아내나 남편이 없이 힘들고 어려우면서도 하소연할 데 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정책이 매우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고인들과의 시대적 거리가 이미 멀어서 법령만 갖추어놓고 시행하는 이가 없고, 관리라는 자들은 부당한 세금으로 백성들을 쥐어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배나 불리며 즐길 뿐이니, 어느 겨를에 힘들고 어려우면서도 하소연할 데 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정치를 묻겠는가? 장후(張侯)와 같은 이는, 그 아버지 때부터 안정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니, 이미 고도(古道)가 이미 행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면서 선인이 남긴 경전을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이름난 자손의 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평소에 전수받은 것을 정치로 시행하여 자신의 뜻과 생각을 마땅히 하여 여기에 미치고, 마음을 다해서 백성들을 구조하여 선정을 이루었다. 이군은 옛날 내게 강학을 했었는데, 나는 늘 그가 세상을 다스릴 재주가 있는데도 나이가 들어 마땅히 쓰일만한 데가 없음을 탄식했는데, 이제 장후(張侯)의 거사로 인해 그 재주의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감격스럽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장후의 일을 쓰고, 또다시 내가 이군에게 느낀 바를 덧붙이니, 후대의 사람들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소희 4년 봄 2월 정사, 신안 주희 기록하다.
予讀古人之書, 觀古人之政, 其所以施於鰥寡孤獨, 困窮無告之人者, 至詳悉矣. 去古旣遠, 法令徒設而莫與行之, 則爲吏者賦斂誅求之外, 亦飽食而嬉耳, 何暇此之問哉? 若張侯者, 自其先君子而學於安定先生之門, 則已悼古道之不行, 而抱遺經以痛哭矣. 及其聞孫, 遂傳素業以施有政, 宜其志慮之及此, 而能委心求助以底于有成也. 李君於予蓋有講學之舊, 予每竊歎其負經事綜物之才以老而無所遇也, 今乃特因張侯之擧, 而得以粗見其毫末, 是不亦有感夫! 故予旣書張侯之事, 而又附以予之所感於李君者, 來者尙有考云. 紹熙四年春二月丁巳, 新安朱熹記.
악주 주학 계고각기(卾州州學稽古閣記)
【해제】 이 글은 소희 4년(계축, 1193년, 64세) 9월에 쓴 글이다.
사람에게 이 몸이 있으면 반드시 이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이치가 있다. 만약 인․의․예․지가 본체라면, 측은․수오․사양․시비는 작용이 된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인이 가르치면서 학자들에게 밖으로 보거나 듣지 말고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고, 한결같이 마음에 돌이키는 것으로 일삼으라 하지 않고서, 반드시 “시(詩)에서 (착한 것을 좋아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흥기(興起)시키며, 예(禮)에 서며, 악(樂)에서 완성한다.”고 하시고, 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고, 힘써 행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이치는 비록 내게 있지만, 간혹 기품이나 물욕의 사사로움에 가리면 스스로 보지 못하게 되며, 학문이 비록 밖에 있지만, 이 이치의 실질을 강구하여 그것에 무젖어 관통하여 자득(自得)하면, 애당초 안과 밖, 정밀함과 조잡함의 간격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하고 풍속이 쇠퇴하니, 선비들은 학문을 알지 못해 책을 끼고 독서하는 이들은 문장이나 많이 외우고 화려하게 지어 이익과 벼슬자리 얻는 계책으로 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둔 이는 곧바로 마음에서 만족함을 취하고 밖에서 구하는 것을 일삼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불교와 노장의 공허한 사견(邪見)에 떨어져, 의리의 올바름이나 법도의 상세함은 살피지 않는다. 그 가운데 간혹 다행히 이치가 내게 있고 학문을 강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이라 해도, 또 자세한 순서를 알지 못해, 마음을 비우는 한결같은 뜻으로 나에게 있는 본연을 깨달으려고 한다. 이런 까닭에 급박하고 천박하여 끝내 무젖어 관통하지 못한다. 아! 어찌 학문은 할 수가 없고, 책은 읽을 수 없으며, 옛 성현이 세상에 내린 가르침은 후세 사람에게 쓸모없는 것이겠는가. 도가 밝혀지지 않음이 한탄스럽다.
人之有是身也則必有是心, 有是心也則必有是理. 若仁․義․禮․智之爲體, 惻隱․羞惡․恭敬․是非之爲用, 是則人皆有之, 而非由外鑠我也. 然聖人之所以敎, 不使學者收視反聽, 一以反求諸心爲事, 而必曰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又曰博學, 審問, 謹思, 明辯而力行之, 何哉? 蓋理雖在我, 而或蔽於氣稟物欲之私, 則不能以自見;學雖在外, 然皆所以講乎此理之實, 及其浹洽貫通而自得之, 則又初無內外精粗之間也. 世變俗衰, 士不知學, 挾冊讀書者, 旣不過於誇多鬪靡以爲利祿之計, 其有意於己者, 又直以爲可以取足於心, 而無事於外求也, 是以墮於佛老空虛之邪見, 而於義理之正, 法度之詳有不察焉. 其幸而或知理之在我, 與夫學之不可以不講者, 則又不知循序致詳, 虛心一意, 從容以會乎在我之本然, 是以急遽淺迫, 終已不能浹洽而貫通也. 鳴呼!是豈學之果不可爲, 書之果不可讀, 而古先聖賢所以垂世立敎者, 果無益於後來也哉? 道之不明, 其可嘆已!
악주(鄂洲) 주학(州學)의 교수 허군(許君) 중응(中應)이 그 학교의 대문을 새로 만들고 그 위에 각(閣)을 세우고, 소흥석경(紹興石經)․양조신한(兩朝宸翰)을 함에 보관하고, 이를 진귀한 보물이라 여겼다. 구경(九經)의 판본․온갖 제사(諸史)의 서적을 그 옆에 진열하고, 부족하면 사람을 시켜 폐물을 주고 서울의 학관(學官)에 요청하고, 학자들에게 토론하고 강론함으로써 조용히 사색하여 깊이 체득하고 이해하도록 했다. 그 사업은 소희 신해년 겨울에 시작되어 다음 해 여름까지 갔다. 그 비용은 대략 300만인데, 선비들에게 녹봉을 주고 남은 것이 3분의 1이다. 그 나머지는 태수 환장각대제(煥章閣待制) 진공(陳公) 거인(居仁)과 전운판관(轉運判官) 설후(薛侯) 숙사(叔似)가 그 자금을 맡았고, 총경(總卿) 담후(詹侯) 체인(體仁)․융수(戎帥) 장후(張侯) 조(詔) 역시 금을 내어 도왔다. 완성하고 나서, 내 벗인 채군(蔡君) 원정(元定)을 보내 기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鄂洲州學敎授許君中應旣新其學之大門, 而因建閣於其上, 櫝藏紹興石經․兩朝宸翰以爲寶鎭, 又取板本九經, 諸史百氏之書列寘其旁, 不足, 則使人以幣請於京師之學官, 使其學者討論誦說, 得以饜飫而開發焉. 其役始於紹熙辛亥之冬, 而訖於明年之夏. 其費亡慮三百萬, 而取諸稟士贏者, 蓋三之一. 其餘則太守煥章閣待制陳公居仁․轉運判官薛侯叔似實資之, 而總卿詹侯體仁, 戒帥張侯詔亦揮金以相焉. 旣成, 因予之友蔡君元定以來請曰, 願有記也.
나는 허군(許君)의 학문은 자신의 인격수양에 뜻을 두었고, 학문하는 것 역시 마음에서 만족을 취하는 것뿐이었다고 들었다. 이제 이 일을 가지고 살펴보니, 그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매우 평범하면서 실제적인 연후에 스스로 하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지, 심사(心思)와 견문을 없애는 것을 최고 귀결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를 위해 그 구체적 내용을 기록하고 아울러 요즘 학문하고 독서하는 문제점을 추론하여 새기도록 요청하여, 이 각에 오르고 이 글을 읽는 이가 세속적 학문의 저속에 흐름에 빠지거나 지름길이라는 이단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게 하고, 내게 이치를 깊이 탐구하여 자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도가 밝혀지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4년 계축 9월 갑자 초하루 아침, 신안 주희 기록하다.
予雅聞許君之學, 蓋有志於爲己, 而意其所以學者, 亦曰取足於心而已矣. 今以是擧觀之, 則見其所以誨人者甚平且實, 然後知其所以自爲者, 不以泯心思, 滅聞見爲極摯之歸也. 因爲之記其本末, 而幷推近世所以爲學讀書之病, 請具刻焉, 以告登此閣而讀此書者, 使姑無溺於俗學之下流, 無迷於異端之捷徑, 則於理之在我者庶乎有以深求而自得之矣. 道之不明, 豈足患哉? 四年癸丑九月甲子朔旦, 新安朱熹記.
신주 귀계현 상청교기(信州貴溪縣上淸橋記)
【해제】 이 글은 소희 4년(계축, 1193년, 64세) 9월에 쓴 글이다.
귀계(貴溪)의 강물은 그 근원이 동쪽으로는 연산(鉛山)의 분수(分水)라는 봉우리에서 오고, 북쪽으로는 옥산(玉山)의 진두(鎭頭)라는 곳에서 오는데, 둘이 합해져 대계(大溪)가 되고, 익양(弋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현 소재지 남쪽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조금 가다 꺾어서 북으로 간다. 대계(大溪)의 남쪽에는 조그만 뱃길이 있는데, 현의 동남쪽 경계에서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현 소재지 서남쪽에 이르러 산골짜기로 들어간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나 왕래하는 이들은 예부터 노 젓는 배로 세 차례 건넜다. 현 소재지 서남쪽에서 떨어진 대계(大溪)를 일러 중계(中溪)라고 하고, 그 서쪽으로 흐르다 북쪽으로 꺾어지는 곳을 만나는데 착석(鑿石)이라 한다. 조그만 뱃길에 물이 떨어질 때는 넓이가 100척(尺)에 지나지 않아 바지를 걷어올리고 건널 수 있다. 장마나 폭우가 지면, 그 깊이와 넓이가 종종 배가 되지만 역시 한 번에 건넌다. 중계(中溪)의 배는 늘 이때에 뱃길을 건너는데 항상 횡류(橫流)가 일으키는 파도를 만나는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 착석(鑿石)은 물이 서쪽절벽과 만나 성내 싸우듯이 튀어 오르니 덮치니, 그 험하기가 더욱 심하다. 그래서 두 번 건너는 이는 해마다 대체로 한두 번 배가 뒤집어지고 물에 빠지니 읍 사람들이 그것을 문제로 여겨 부량(浮梁)을 놓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나 작업의 규모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들어 누구도 감히 나서는 이가 없었다.
貴溪之水, 其原東出鉛山之分水, 北出玉山之鎭頭者, 合爲大溪, 自弋陽西流, 徑縣治南, 少西乃折而北. 大溪之南, 有小港焉, 出縣東南境上, 西北流, 至縣治西南, 乃入于溪. 居民行客之往來者, 故以舟楫爲三渡. 自縣治西南絶大溪者, 曰中溪;當其西流北折之處者, 曰鑿石. 小港水落時, 廣不過百餘尺, 褰裳可涉. 霖潦暴至, 則其深廣往往自倍, 而亦爲一渡. 中溪之舟每以是時過港, 常爲橫波所蕩擊, 人力不得施. 鑿石則水觸西崖, 鬪怒騰蹙, 其險爲尤甚. 故二渡者歲率一再覆溺, 邑人病之, 欲爲浮梁以濟久矣. 而役大費廣, 無敢唱者.
지금 현의 대부인 건안(建安) 이군(李君) 정통(正通)이 와서, 그 일을 남몰래 계산하고 묵묵히 도모하였다. 오랜 후에, 현의 여유 재산 80만을 공사에 투여했다. 읍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어떤 집에서는 철로 연결하여 만든 커다란 끈 1,500척을 내놓고, 어떤 집에서는 죽림(林竹) 10여리(里)를 기부했다. 자사(刺史)는 또 쌀 100곡으로 공사를 도우니, 이에 이군은 대계의 소항과 착석 사이의 물 소용돌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직접 보고나서 이 상태가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소희 3년 6월 공사를 시작했다. 백성들이 기꺼이 그를 좇아 함께 하니 100일이 안 되어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양쪽 벼랑의 돌을 갈아 돌다리를 만들었는데, 높은 것은 500척이고 낮은 것도 그 5분의 4였다. 다리의 건축은 900척으로 배 70척에 비견할 수 있고, 또 물이 위아래로 움직임에 따라 더하거나 낮게 보인다. 또 열 척의 배를 묶어 소항의 징검다리로 삼고, 한 쌍의 군함으로 큰물을 건너니, 동서로 다니는 이들이 봄 여름에는 충돌하고 침몰하는 걱정에서 벗어났고, 가을 겨울에는 힘들게 건너는 탄식이 없게 되었다. 그 공족은 매우 크면서도 비용은 절약했으니, 대개 그 규모와 계획은 한결같이 이군이 하였고, 주리(主吏) 공사(工師)가 명령을 잘 따라 완성하였으니 간여하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돈 50만을 명각사 스님에게 남겨두고, 스스로 임대와 대출을 해서 해마다 그 이자의 5분의 1로 다리를 증축하거나 수리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 다음 해, 이군이 떠나자, 내게 편지를 보내와서 읍 사람들의 뜻을 전하면서 기문을 요청했다.
今縣大夫建安李君正通至, 則陰計而嘿圖之. 久之, 乃得縣之餘財八十萬, 將以屬工. 而邑之大姓聞之, 有以銕爲連環巨絙千五百尺以獻者, 有捐其林竹十餘里以獻者. 州家又以米百斛者佐之, 於是李君乃相大溪二渡之間水平不湍者, 以爲唯是爲可久, 遂以紹熙三年六月始事. 民讙趨之, 不百日而告成. 兩崖礱石爲磴道, 高者五百尺. 卑者亦居其五之四. 橋之修九百尺, 比舟七十艘, 且視水之上下而時損益焉. 又維十舟以梁小港, 作雙艦以航巨浸, 於是東西行者春夏免漂沒之虞, 秋冬無病涉之歎. 其功甚大而費則省, 蓋其規模籌畫, 一出李君, 主吏工師拱手受成, 不能有所預也. 旣又留錢五十萬於明覺浮屠氏, 使自爲質貸, 而歲輸其贏五一以奉增葺之費. 明年, 李君將去, 乃以書來道邑人之意, 請予文以記之.
생각하건대, 이군의 이 교량공사의 공적은 백리의 사람들과 사방에서 왕래하는 사람들이 이미 진실로 칭송하고 노래하니, 기문을 기다리지 않고도 현저하다. 또 그 재주가 과단성 있고 명철하여 하는 일이 합당하지 않음이 없으니, 단지 이를 기록할만한 뿐만 아니라 그 구체적 내용을 기록하여 후세의 군자에게 알려 그 일의 성공이 이와 같이 쉽지 않음을 알게 하고, 서로 더불어 삼가 보고 때때로 수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곧 이군과 그 읍 사람들의 뜻이기도 하다. 4년 9월 무인 16일(기망), 신안 주희 기록하다.
予惟李君此橋之功, 百里之人與四方之往來者固已頌而歌之, 宜不待記而顯. 且其才之果藝明達, 用無不宜, 又非獨此爲可書也, 姑爲記其本末, 以告後之君子, 使知其成之不易者如此, 相與謹視而時修之. 是則李君與其邑人之志也云爾. 四年九月戊寅旣望, 新安朱熹記.
소주 주학 염계선생 사당기(邵州州學濂溪先生祠記)
【해제】 이 글은 소희 4년(계축, 1193년, 64세) 10월에 쓴 글이다.
소양 태수 동양(東陽) 반후(潘侯) 도(燾)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군학(郡學)에는 예부터 염계선생 주공(周公)의 사당이 있었는데, 대개 치평(治平) 4년에 선생이 영능(零陵) 통수(通守)로 와서 군의 일을 섭정하면서 그 학교를 옮겼고, 또 그의 벗 공공(孔公) 연지(延之)에게 위촉하여 기록하고 판각했다. 그 후, 옮기고 바뀐 것이 한결같지 않은데, 건도(乾道) 8년에 옛터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비로소 선생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기 시작했다. 얼마 후, 또 고부(故府) 장공(張公) 구성(九成)의 학문이 선생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역시 제사지내어 보답했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가 되었다. 도(燾)는 부임해 오자마자, 맨처음 사전(祀典)을 상고하고, 혼자서 생각하기를, 선생의 학문은 전해지지 않은 공자와 맹자의 통서를 실제로 얻어 하남의 이정선생에게 전하여 도를 크게 밝혔다. 그러나 재전(再傳) 이후로는 혹은 겨우 비슷하거나, 혹은 그 본래의 진수를 마침내 잃어버려, 이와 같이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이에 학교의 동쪽 방 하나를 헐어 특별히 선생을 제사하여 도통을 존엄하는 뜻을 다했다. 올해 봄에는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석전(釋奠)하고, 마침내 주렴계에게 분헌(分獻)할 것을 명하고 축(祝)으로 고하였다. 당신은 일찍이 그의 학문을 강론했으니, 감히 바라건대 한 말씀 적어 후대 사람들이 살펴 의심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邵陽太守東陽潘侯燾以書來曰 “郡學故有濂溪先生周公之祠, 蓋治平四年, 先生以零陵通守來撮郡事, 而遷其學, 且屬其友孔公延之記而刻焉. 其後遷易不常, 乾道八年, 乃還故處, 而始奉先生之祀於其間. 旣又以故府張公九成之學爲出於先生也, 則亦祠以侑焉, 於今蓋有年矣. 燾之始至, 首稽祀典, 竊獨惟念先生之學實得孔孟不傳之緖, 以授河南二程先生, 而道以大明. 然自再傳之後, 則或僅得其彷彿, 或遂失其本眞, 而不可以若是其班矣. 乃更闢堂東一室, 特祀先生, 以致區區尊嚴道統之意. 今歲中春, 釋奠于先聖先師, 遂命分獻而祝以告焉. 以吾子之嘗講於其學也, 敢謁一詞以記之, 使來者有考而無疑也.”
나는 함을 열고 세 번 반복해서 보고 한숨을 쉬면서 탄식하면서 말했다. 심하도다, 도는 밝히기는 어렵지만 가리워져 어두워지기는 쉬움이여. 요․순으로부터 공자․맹자에 이르기까지 2,000여 년간에도 역시 여러 차례 밝아지기도 하고 여러 차례 어두워졌다, 맹자로부터 주염계와 이정에 이르기까지, 그 어둠은 1,500년이고, 그 밝음은 100년이 되지 못한다. 정씨가 죽자, 경전을 암송하고 강론했던 문하에 가득했던 이들이 스승의 학설을 전수하면서 잘못이 없을 수 없어서, 노자와 불교에 빠지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것도 깨닫는 이가 없었다. 이제 반후(潘侯)가 이 점을 홀로 깊이 살피고 삼감을 다하니 거의 도를 밝힌 듯하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선생의 정밀함은 그림으로 나타냈고, 선생의 온축(蘊蓄)은 그림으로 인해 발휘되니, 거기에서 이른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 한 것은 태극도의 강령으로 도가 만물이 아직 존재하기 이전의 것이며 실제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니, 어찌 태극의 위에 다시 이른바 무극이 있겠는가. 요즘의 독자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혹은 그것을 망령되게 논의하여 선생의 병통으로 삼기도 한다. 사씨(史氏)는 선생을 전하면서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된다.(自無極而爲太極)”라고 그 말을 늘렸고, 또 의거할 데가 없다 하여 또다시 선생의 병통이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옛 승상(故相) 소공(蘇公)이 국사(國史) 「초두목각(草頭木脚)」의 간행을 요청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은 것과 비교하면서, 그 힘이 미치지 못함을 한스러워 했다. 이제 반후(潘侯)의 일이 거듭 유감스러워서, 그 일을 서술하고서 아울러 이 설명을 덧붙여 후세의 군자(의 판단)를 기다린다. 아니면 학식이 뛰어난 반후가 이미 이 점을 알아차린다면, 또 어찌 마침내 나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임을 알겠는가. 소희 계축 겨울 10월 경신, 후학 주희 기록하다.
熹發函三復, 爲之喟然而歎曰: 甚矣, 道之難明而易晦也! 自堯舜以至于孔孟, 上下二千餘年之間, 蓋亦屢明而屢晦. 自孟氏以至于周程, 則其晦者千五百年, 而其明者不能以百歲也. 程氏旣沒, 誦說滿門而傳之不能無失, 其不流而爲老子釋氏者幾希矣. 然世亦莫之悟也. 今潘侯於此乃獨深察而致謹焉, 道之明也儻庶幾乎. 雖然, 先生之精, 立圖以示; 先生之蘊, 因圖以發, 而其所謂無極而太極云者, 又一圖之綱領, 所以明夫道之未始有物, 而實爲萬物之根柢也, 夫豈以爲太極之上復有所謂無極者哉? 近世讀者不足以識此, 而或妄議之, 旣以爲先生病; 史氏之傳先生者, 乃增其語曰「自無極而爲太極」, 則又無所依據而重以病夫先生. 故熹嘗欲援故相蘇公請刊國史草頭木脚之比以正其失, 而恨其力有所不逮也. 乃今於潘侯之擧而重有感焉, 是以旣叙其事而幷附此說, 以俟後之君子. 抑潘侯學識之長, 旣足以及此矣, 則又安知其不遂有以成吾之志也耶? 紹熙癸丑冬十月庚申, 後學朱熹記.
포성현 영리창기(浦城縣永利倉記)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년, 65세) 9월에 쓴 글이다.
포성현(浦城縣) 천양진(遷陽鎭)의 영리창(永利倉)은 고(故) 제거상평공사(提擧常平公事) 황후(黃侯) 아무개가 세웠다. 나이든 분들에게 물어보니, 모년(某年)에 황후(黃侯)가 고을 사람에게 명을 받들고 본도(本道)에 심부름 보내 그 마을에 사창을 세워달라고 아뢰고, 세시(歲時)로 식량을 사들이고 내보내어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였다. 또 진관(鎭官)에게 그 일처리를 겸하도록 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시행하자, 인근 마을의 백성들은 제법 그 혜택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병란(兵亂)으로 인해 무너지고 폐허가 돼 남은 게 없었다. 혹여 가뭄이라도 들면 백성들은 고통을 하소연했지만,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이부(吏部)의 조진관(調鎭官)은 오히려 영리창이라는 옛이름만 답습할 뿐이었다. 중간에 지현승(知縣丞) 왕군(王君) 연(鉛)이 읍의 인풍(仁風)이 여러 마을 사창에 상당히 성과를 거두는 것을 보고, 그 방법으로 이 사창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자 의논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현재의 지현사(知縣事) 괄창(括蒼) 포군(鮑君) 공숙(恭叔)이 부임해 와서 다시 요청하자, 사자(使者) 오흥(吳興) 이후(李侯) 목(沐)이 그렇다고 깊이 동의하였고, 이에 포군이 그 공사를 이룰 수 있었다. 고향을 기준으로 조성하고 약간의 영(楹)으로 사창을 건축했는데, 하루도 되지 않아 완성하였는데, 대략 옛 모습과 같았다. 마침내 현에 쌓아둔 곡식 약간 곡(斛)을 옮겨와서 저장해 놓고, 여름에는 빌려주고 겨울에 거두어 저장하였는데, 한결같이 순희 모년(某年) 사창제 칙령을 따랐다. 대체로 임대가 되는 곳의 어떤 마을 어떤 도읍의 사람은 모두 다음 차례를 기다리니, 더 이상 흉년의 걱정이 없었다. 곡식을 빌릴 수 없는 곳의 사람들은 기뻐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이 사창의 이자는 많고 저장한 곡식은 넉넉하니, 끝내는 내게도 차례가 오지 않겠는가?” 하였다. 포군이 이를 듣고, 편지로 다음과 같이 알려왔다. “읍 사람들의 정서가 이와 같으니, 차마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浦城縣遷陽鎭永利倉者, 故提擧常平公事黃侯某之所爲也. 聞之故老, 某年中, 黃侯以鄕人奉使本道, 奏立是倉其里中, 歲時斂散, 以賑貧乏. 且使鎭官兼董其事, 行之累年, 近村之民頗賴其利. 後以兵亂, 廢熄無餘. 歲或不收, 民輒告病. 於今若干餘年, 而吏部之調鎭官, 猶襲故號也. 中間知縣丞王君鉛視邑之仁風諸里社倉頗有成效, 欲取其法以復此倉之舊, 而議不克合. 今知縣事括蒼鮑君恭叔之來, 乃復有請, 而使者吳興李侯沐深然之, 於是鮑君得致其役. 營度故壤, 築倉若干楹, 不日告成, 略如舊制. 遂移縣庾之粟若干斛以貯焉, 夏發以貸, 冬歛以藏, 一以淳熙某年社倉制勑從事. 蓋凡貸之所及者, 某里某都之人, 固皆有以望於其後, 而無復凶年之慮矣. 其所未及, 則亦欣然相告曰:「是倉息滋而藏羨, 其肯卒遺我哉?」鮑君聞之, 以書來告曰:「邑人之情如此, 不忍以無記也.」
내가 보건대, 황후(黃侯)는 당시의 권력으로 일도(一道)를 다스린 후, 이렇게 하여 곧 그 고을과 이웃을 구휼하였으니, 일찍이 그 어진 마음을 탄식하면서도 그것이 광대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지금 그것을 미루어보면, 그 추세상 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오늘날 사창법의 그것을 재단하겠는가. 이군과 포군이 이 공사를 한 것은 이미 황후의 마음을 더욱 유구하게 하여 사라지지 않게 하며, 또 천자의 조칙을 계승하여 그 혜택이 무궁하도록 넓히려는 것이니, 이 모두는 가히 기록할만하다. 다만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이루지 못하고) 남은 것을 아직 미치지 못한 곳에까지 두루 미치도록 하는 것에는 반드시 기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 구체적 내용을 적고 아울러 알림으로써, 고찰할 수 있도록 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소희 5년 여름 4월 기유, 조산랑(朝散郞)․ 비서각수찬(秘閣修撰)․신권발견담주(新權發遣潭洲)․주관형호남로안무사공사(主管荊湖南路安撫司公事) 주희 기록하다.
予觀黃侯當日之權足以制一道, 而其後爲此乃僅足以恤其鄕鄰, 蓋未嘗不歎其心之仁而病其不廣. 以今推之, 則未必其勢之有不能也, 是安得以今日社倉之法告之哉? 若李侯, 鮑君之是役, 則旣足以使黃侯之心愈久而不泯, 而又能承天子之詔, 以廣其惠於無窮, 是皆可書也已. 獨後之人能推所餘以徧乎其所未及, 則有未可必者. 故特爲之書其本末而幷以告焉, 庶乎有所考而不亡也. 紹熙五年夏四月己酉, 朝散郞, 秘閣修撰, 新權發遣潭洲, 主管荊湖南路安撫司公事朱熹記.
신주 대학 대성전기(信州州學大成殿記)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년, 65세) 12월에 쓴 글이다.
소희 5년 가을 9월, 나는 장사에서 성은을 입고 소환되어 오는 길에 상요 지방을 지나는데, 그곳 주학(州學) 교수 가흥(嘉興) 임군(林君) 아무개가 와서 만났는데, 학문하는 바의 뜻을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그가 평소에 힘쓴 것이 모두 옛사람들이 했던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이며, 아직 그치지 않고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일어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지방의 학교정책은 그 폐단이 오래되었습니다. 선비들이 익히는 것은 인습에 따르는 천박한 것으로, 과거시험만 알고 진정한 학문이 있음은 알지 못합니다. 또 그 가옥은 때에 맞춰 수리하지 않아 대부분 기울고 무너졌고, 예전(禮殿)은 더욱 심합니다. 또 상설(象設)․의관(衣冠)․위차(位次)의 경우, 모두 법식과 다릅니다. 제가 주제넘게도, 들은 것으로 가지고 그것을 강구하여 다행히 인의의 도를 지향한다는 것을 조금 알았으니, 또 장차 그 고전(故殿)을 철거하고 일신(一新)하겠습니다. 만약 그것을 완성하게 되면, 바라건대 한 말씀 그것을 기록하시어, 또 그 학문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紹熙五年秋九月, 熹自長沙蒙恩召還. 道過上饒, 其州學敎授嘉興林君某來見, 請間所以爲學之意甚勤. 與之語, 知其平日所用力者, 皆古人爲己之學, 而進則未已也. 旣乃起而言曰:「此邦學政其弊久矣. 士子習熟見聞, 因仍淺陋, 知有科擧而不知有學問. 且其屋不時修, 亦多頹圯, 而禮殿之壞爲尤甚. 至於象設, 衣冠位次又皆不如法式. 某不自料, 旣爲之講以所聞, 幸頗有知鄕方者, 又將撒其故殿而一新之. 儻遂有成, 願得一言以記之, 且有以進其學者於將來, 則幸甚.」
나는 재주가 없다고 사양하고 나서 지방의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 대답하기를, 임군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고유한 직업인데 모두 이른바 옛사람의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의 각종 사무도 크건 작건 모두 몸소 하여 빠뜨리거나 잘못됨이 없었다. 그래서 이처럼 흉년을 당해서도 그 제자의 수가 10에 5, 6이 늘어 오히려 이처럼 여력이 있다는 것이다. 공사를 처음 위촉하고, 맨먼저 녹봉을 제 비용으로 내놓았고, 조대(漕臺) 주가(州家) 역시 도움을 주었다. 직업을 가진 여러 학생도 서로 녹봉을 내놓아 그 일을 도왔다. 기와와 나무, 공사일꾼 등 조금도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마음속으로 좋게 생각하고,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접 가서 보았는데, 그 헌영(軒楹)이 크고 높았으며, 당실(堂室)은 매우 정숙하였고, 선성(先聖)은 밝은 쪽을 향하고 선사(先師)는 서쪽을 바라보며, 좌우의 여러 현인들이 차례에 따라 줄지어 않았는데, 한결같이 금년 봉상(奉常)이 하달한 새로운 제도와 같았다. 그리고 그 관면(冠冕)과 복불(服韍)은 예에 맞추었는데, 국자감 태학에서 취한 것으로 틀림이 없었다. 비록 서울근교나 지방의 중신이라도 그에 미칠 수 있는 이가 드물 것이다. 이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크게 탄식하고, 임군의 학문은 그 뜻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고, 또 역량은 그 학문을 실행할 수 있을 것임을 더욱 신뢰하였다. 연말이 되어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휴식을 취하는데, 임군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예전(禮殿)은 이미 완성하였으니, 내년 정월 정해 초하루 아침에 고하고자 합니다. 지주(知州)․통판(通判) 등 군의 관리와 여러 학생을 인솔하고 석채례(釋菜禮)을 올려 낙성식을 하고자 합니다. 지난번의 요청에 은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熹謝不敏, 退而問諸邦人, 則皆曰林君所以敎其諸生者有常業, 而皆本於所謂古人爲己之意. 其於學之庶務, 則又巨細必親, 無所漏失, 故能當此儉歲, 旣廣其弟子之員且什五六, 而猶有餘力以及此. 蓋屬役之初, 首出餐錢以給諸費, 而漕臺州家亦有助焉. 諸生之有職秩者, 又相與捐俸入以相其事. 瓦木工徒之直, 一毫無所取於民也. 熹心善之. 比歸而往觀焉, 則其軒楹宏敞, 堂室靚深, 先聖鄕明, 先師西面, 左右衆賢, 以次列坐, 一如今歲奉常所下新制. 而其冠冕服韍, 應圖合禮, 取諸監學, 靡有僭差. 蓋雖近輔名藩, 鮮有能及之者. 熹於是焉喟然太息, 益信林君之學有以充其志, 而力又有以行其學也. 歲晩還家, 甫爾休息, 而林君復以書來曰:「殿旣訖功, 將以來歲正月丁亥朔旦謁. 守貳合群吏, 率諸生而釋菜以落之. 前日之請, 願卒有以賜之也.」
내가 옛 국가의 명사(命祀)를 고찰해보니, 선성과 선사를 학궁(學宮)에서 예우하는 것은 장차 도통(道統)을 밝혀, 세상의 학자들이 지향할 바를 알도록 하여 거기에 도달하도록 하려는 것이지, 한갓 그 집과 담장을 수리하고 그 모상(貌象)을 설치하며 그 그릇과 의복을 성대하게 갖추고 우러르고 엎드리는 용모를 행하여 보기 좋게 하려는 것뿐이 아니다. 오늘날의 관리들은 많은 이들이 오히려 여기에 미치지 못하니, 임군처럼 능력 있는 이를 구하는 것이 이미 어렵게 되었다. 하물며 나라의 뜻을 우러러 체득하고, 몸으로 솔선하여 배우는 이들 모두가 고인(古人)이 학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알도록 하여 마음이 거의 그러하도록 하니, 어찌 또 어렵지 않은가? 이에 그 일을 기록하여 돌에 새기도록 하여 그 무리들을 엄숙하게 하고, 또 후세의 군자가 고찰할 수 있도록 하니, 임군의 뜻을 잊지 않아야 한다. 12월 신사, 조청랑(朝請郞) 신안 주희 기록하다.
熹惟國家稽古命祀, 而禮先聖先師於學宮, 蓋將以明夫道之有統, 使天下之學者皆知有所鄕往而幾及之, 非徒修其牆屋, 設其貌象, 盛其器服升降俯仰之容以爲觀美而已也. 而今之爲吏者, 於是數者猶有不及, 求其能如林君之所爲者, 則旣難矣. 而况欲其仰體國家之意, 以身爲率, 使其學者皆知古人之所以爲學者而心庶幾焉, 豈不又難矣哉? 於是爲記其事, 使刻諸石, 以厲其徒, 且使後之君子有以考焉, 而毋忘林君之志也. 十二月辛巳, 朝請郞新安朱熹記.
상주 의흥현 학기(常州宜興縣學記)
【해제】 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년, 66세) 봄 3월에 쓴 글이다.
소희 5년 12월, 의흥현(宜興縣)에서 새로이 학교를 수리하여 완성했다. 다음 해, 지현사(知縣事)․승의랑(承議郞) 괄창(括蒼) 고군(高君) 상로(商老)가 편지로 기문을 요청했는데, 또 그 학교의 스승과 학생 적공랑(迪功郞) 손정순(孫庭詢)․공사(貢士) 소기(邵機) 등 수 십 명이 그 일을 조목조목 적어 다음과 같이 알려왔다. “우리 읍의 학교는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황폐했는데, 지금의 현령(明府)이 부임하면서부터 뜻을 가졌다. 그러나 현이 가난하여 갑자기 그 비용을 댈 수 없어 심하게 부숴진 곳만 조금씩 수리하고 심하게 파손된 곳은 빨리 보수하였고, 또 한전(閑田) 5,000묘(畝)를 등기하여 그 곳집을 풍부하게 했고, 장교(長橋)에서 거둔 교량세 70 여만을 납입하여 그것을 더욱 증익하였고, 생원을 스승으로 배치하고 법에 따라 시험을 치렀다. 날마다 가서 살피고 몸소 강론하여, 그들을 도덕과 성명(性命)을 취지로 개발하고, 시서예악의 문장으로 넓혀, 선비가 배워야 할 바를 알게 하니, 과거시험과 문자를 넘어서는 탁월한 이들을 배출했다. 이에 현의 백성들과 학자들은 지향해야 할 바를 알았고, 마을에 거주하는 현명한 사대부들 역시 아이들을 이끌고 청강하니, 더 이상 서로 고소하는 일 없이 다시 서로 권면(勸勉)하였고, 그의 강론을 뒤늦게 들은 것을 한탄하였다. 돌아와 서로 돈을 출연하고 기부하여 그 공사를 도왔다. 공사(公私)의 힘을 합치니 돈이 거의 700만이었고, 학교 안팎이 완전히 새로워졌다. 당도문무(堂涂門廡)가 엄격하게 갖추어졌고, 상설예기(象設禮器)는 모두 도법(圖法)과 상응하였다. 고군이 이 학교를 건축하여 중흥시키고 관리하는 단서를 기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교육한 내용은 오늘의 관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읍의 인재와 풍속은 실로 그에게 힙입었다. 선생님께서 그것을 모두 기록하여 훗날의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알도록 해주시는 것이 저희들의 바람입니다.”
紹熙五年十二月, 宜興縣新修學成. 明年, 知縣事․承議郞括蒼高君商老以書來請記, 而其學之師生迪功郞孫庭詢․貢士邵機等數十人, 又疏其事以來告曰: “吾邑之學久廢不治, 自今明府之來, 卽有意焉. 而縣貧, 不能遽給其費, 乃稍葺其所甚敝, 亟補其所甚缺, 且籍閑田五千畝以豐其廩, 斥長橋僦金歲入七十餘萬以附益之, 爲置師弟子員, 課試如法, 而又日往遊焉, 躬爲講論, 開之以道德性命之指, 博之以詩書禮樂之文, 使其知士之所以學, 蓋有卓然科擧文字之外者. 於是縣人學子知所鄕慕, 至於里居士大夫之賢者, 亦携子弟來聽席下, 無不更相告語, 更相勉勵, 而自恨其聞之之晩也. 退而相與出捐金賚, 以佐其役. 合公私之力, 得錢幾七百萬, 而學之內外煥然一新. 堂涂門廡, 靡不嚴備, 象設禮器, 皆應圖法. 蓋高君之於是學, 非獨其經理興築之緖爲可書, 而其所以敎者, 則非今世之爲吏者所能及, 而邑之人材風俗實有賴焉. 幸夫子之悉書之, 以告來者於無窮, 則諸生之望也.”
나는 저번에 회계에서 고군을 만나보고 그의 현명함을 알았는데, 이제 그가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효과적으로 정교(政敎)를 시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그를 위해 이미 글을 썼다. 하물며 읍의 부형과 자제들이 고군의 교육을 받고 흥기한 바가 있으니, 모두 고인의 위기지학에 종사하였지 남에게 보이고 과시하기 위한 습속에 급급하지 않고,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좇아 세상의 자산을 취했음을 알 수 있으니, 또 내가 깊이 탄식한 바이고 더욱 즐겁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에 그 말을 모두 기록하여, 후대의 군자들이 살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더구나 고군은 이 읍에서 일찍이 그 사직의 위치를 새롭게 하고, 아울러 그 곁에 풍사․우사․뇌사(雷師)을 만들어 엄숙하게 제사지냈다. 옛도랑을 파고, 막힌 물줄기를 뚫어 홍수를 막았으며, 사창을 만들고 남은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을 대비하였다. 그 귀신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그가 배운 바를 능히 실천하는 것들이니, 모두 지극한 정성과 간절하게 진심을 다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말을 하면 읍의 사람은 진실로 그것을 좇았으니, 암송하고 강설하기를 기다린 이후에 말로 가르친 것이 아니다. 아! 어질도다. 경원 원년 봄 3월 경신, 조청랑(朝請郞)․제거(提擧) 남경홍경궁(南京鴻慶宮) 신안 주희 기록하다.
予頃得高君於會稽而知其賢, 今乃聞其政敎之施於人者又有成效如此, 故已樂爲之書矣. 而况其邑之父兄子弟能率高君之敎而有所興起, 皆知從事於古人爲己之學, 而不汲汲乎誇多鬪靡之習, 以追時好而取世資, 則又予之所深歎而尤樂取以告人者也. 乃爲悉記其語, 使後之君子有考焉. 抑高君之於此邑, 嘗新其社稷之位, 而幷作風․雨․雷師於其側, 以嚴祀事;穿故瀆, 疏積水以防旱潦, 作社倉, 儲羨粟, 以備凶荒. 其所以事神治民者, 類能行其所學, 而皆出於至誠懇惻之意. 是以言出, 其人信從之, 蓋不待至於誦說之間, 然後以言敎也. 鳴呼賢哉! 慶元元年春三月庚申, 朝請郞, 提擧南京鴻慶宮新安朱熹記.
상주 의흥현 사창기(常州宜興縣社倉記)
【해제】 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년, 66세) 봄 3월에 쓴 글이다.
내가 처음으로 건안의 숭안에 살게 되었을 때, 백성들이 굶주려 군수 서공(徐公) 철(嚞)에게 요청하여 쌀 600곡을 얻어 임대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사창(社倉) 제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거의 30년이 되었다, 그것이 축적되어 5,000곡에 이르렀고, 해마다 그것을 마을에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니 마침내 흉년이 없게 되었다. 중간에 성은을 입고 궁궐에 들어가 천자를 마주 대하고 정사를 아뢰고 강론(講論)하였는데, 문득 천자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시행하라는 조칙을 내렸지만, 여러 도에서 응하는 곳이 없었다. 오직 민수(閩帥) 조공(趙公) 여우(汝愚)․사자(使者) 송공(宋公) 약수(若水)만이 그 법을 몇몇 현으로 확대하였으나, 역시 멀리 파급하지는 못했다. 소희 5년 봄, 상주(常州) 의흥(宜興) 대부(大夫) 고군(高君) 상로(商老)가 실제로는 처음으로 그 현의 선권(善拳)․개보(開寶) 등 여러 향(鄕)에서 사창을 실시했는데, 무릇 사창이 열 하나였고, 그 쌀을 합하면 2,500곡이 조금 넘었는데, 읍의 현자인 승의랑(承議郞) 조군(趙君) 선석(善石)․주군(周君) 림(林)․승직랑(承直郞) 주군(周君) 세덕(世德) 이하 20여 명을 골라 법에 따라 그것을 관리하도록 하고, 내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위촉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허락했지만,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 해 절서(浙西) 지방에 장마와 가뭄이 들었는데, 상주 지방 백성들의 굶주림은 더욱 극렬해 떠돌다 굶주려 죽은 이가 길을 가득 메웠다. 의흥(宜興) 지방만이 조금 풍년이 들어, 곡식을 빌릴 수 있는 사람들은 더욱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곡식을 빌려간 이들이 갚지 못할까 염려되었고, 고군이 베푸는 혜택 역시 앞으로 한계에 부딪칠 것이라 걱정했다. 이듬해 봄, 고군은 임기가 만료되어 떠났는데, 이에 다시 조(趙)․주(周)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요청했다. 또 말하기를, 지난해 겨울, 백성들이 갚아야 할 쌀을 운송해 오면서 서로 앞을 다퉈 임대 장부에 조금도 들어오지 않음이 없었음을 보았다고 했다. 이에 나는 고군의 혜택이 오래도록 그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을 더욱 기뻐했고, 또 그 백성들이 윗사람을 믿고 사랑하여 차마 속이지 않는 것이 기뻐, 그를 위해 그러한 까닭을 기록한다.
始予居建之崇安, 嘗以民饑, 請於郡守徐公嚞, 得米六百斛以貸, 而因以爲社倉. 今幾三十年矣, 其積至五千斛而歲歛散之里中, 遂無凶年. 中間蒙恩召對, 輒以上聞, 詔施行之, 而諸道莫有應者. 獨閩帥趙公汝愚, 使者宋公若水爲能廣其法於數縣, 然亦不能遠也. 紹熙五年春, 常州宜興大夫高君商老實始爲之於其縣善拳․開寶諸鄕, 凡爲倉者十一, 合之爲米二千五百有餘斛, 擇邑人之賢者承議郞趙君善石․周君林․承直郞周君世德以下二十有餘人, 以典司之, 而以書來屬予記. 予心許之, 而未及爲也. 會是歲浙西水旱, 常州民饑尤劇, 流殍滿道. 顧宜興獨得下熟, 而貸之所及者尤有賴焉. 然予猶慮夫貸者之不能償, 而高君之惠將有所窮也. 明年春, 高君將受代以去, 乃復與趙, 周諸君皆以書來趣予文. 且言去歲之冬, 民負米以輸者繈屬爭先, 視貸籍無龠合之不入, 予於是益喜高君之惠將得以久於其民, 又喜其民之信愛其上而不忍欺也, 則爲之記其所以然者.
또 그것이 오래되면 폐단이 없을 수 없음을 염려하여 다음과 같이 깨우쳤다. “다스리는 사람은 있어도, 다스리는 법은 없다. 이는 비록 노인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실제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지극한 논리이다. 무릇 선왕(先王)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3년을 경작하면 반드시 1년치는 저축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30년이 되면, 10년의 저축이 있게 되어 백성들이 흉년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는 만세의 휼륭한 법이라 하겠다. 그 다음으로는 한나라 때의 상평(常平)이란 제도가 있는데, 지금 그 법을 실행하더라도, 선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고대에서 고찰해보면, 삼등태평(三登泰平)의 시대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을 지금에 적용하면 상평이란 그 법령과 장부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대개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법이란 한갓 법일 뿐이어서 스스로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른바 사창이란 것은 같은 마을의 황한(荒閑)한 곳에서 먹을 것을 모아 책임 있는 직책의 관리가 관리하고 유배의 형벌과 같이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진실로 항상 고군과 같이 총명하고 인애(仁愛)하 지도자를 만나고 또 지금의 몇몇 사람들처럼 충직하고 믿음직스럽고 명찰(明察)한 선비를 만나 함께 서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 그 출납을 근신하고 그 간사함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 법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은 하루가 가기 전에 알 수 있다. 또 이는 내가 몸소 시험해 본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그것을 써서 후세 군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경원 원년 3월 경오 16일, 구위(具位) 주희 기록하다.
抑又慮其久而不能無敝於其間也, 則又因而告之曰: “有治人, 無治法.此雖老生之常談, 然其實不可易之至論也. 夫先王之世, 使民三年耕者必有一年之蓄, 故積之三十年, 則有十年之畜而民不病於凶饑. 此可謂萬世之良法矣. 其次則漢之所謂常平者, 今固行之其法, 亦未嘗不善也. 然考之於古, 則三登泰平之世, 蓋不常有, 而驗之於今, 則常平者, 獨其法令簿書莞鑰之僅存耳. 是何也? 蓋無人以守之, 則法徒爲法而不能以自行也. 而况於所謂社倉者, 聚可食之物於鄕井荒閑之處, 而主之不以任職之吏, 馭之不以流徒之刑, 苟非常得聰明仁愛之令如高君, 又得忠信明察之士如今日之數公者, 相與幷心一力, 以謹其出納而杜其姦欺, 則其法之難守, 不待已日而見之矣. 此又予之所身試者, 故幷書之, 以告後之君子云.” 慶元元年三月庚午旣望, 具位朱熹記.
영암기(寧菴記)
【해제】 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년, 66세) 6월에 쓴 글이다.
시강(侍講) 왕공(王公)이 병이 낫자, 그 아들 한(瀚) 등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어나면 죽음이 있으니, 마치 아침이 있으면 저녁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치의 필연이다. 내가 다행스럽게 만년에 고향집에 돌아와 휴식하고, 집의 창문 아래서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장재가 말한 ‘살아서는 순응하여 섬기고, 죽어서는 편안하리라.’는 것이니, 더 이상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너희들 역시 너무 슬퍼하지 말라. 단지 형제 사이에 공경하고 우애하며, 어머니를 공경하여 모시고, 학문에 힘써 자립하여 집안을 빛내고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라.” 말을 끝내고 죽었다. 아들들은 울면서 그 가르침을 받들어 감히 어기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부인(公夫人) 역시 병으로 떠났다. 아들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백사(白沙) 석순(石筍) 들녘에 합하여 장사지내고, 사당과 요사(寮舍)를 짓고 그곳에 살면서 지키는 봉증(奉烝)하도록 하고, 아버지가 남긴 말씀들을 모아 영암(寧菴)이라 명명했다. 밭 100 여묘(畝)를 사서 암비(菴費)로 쓰고 왕조(王租)를 운반하고 그 나머지는 거두어 계절에 맞춰 증축하거나 수리하는 비용으로 삼았다. 그 사이에 나에게 알리고 이름이 지닌 뜻을 기록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왕공의 말에서 그가 지킨 바의 올바름을 볼 수 있었고, 죽은 뒤에야 그쳤음에 감동하였다. 또 백해(伯海) 형제가 아버지가 남긴 뜻을 차마 잊지 않고 따는 것을 아름답게 여겨, 이에 그 구체적 내용을 이와 같이 기록한다. 경원 을묘 6월 기미, 신안 주희 기록하다.
侍講王公病革, 顧謂其子瀚等曰: “生之有死, 如旦之有暮, 蓋理之必然也. 吾幸晩得歸息故廬, 今又以正終牖下, 是張子所謂存吾順事, 沒吾寧者, 復何憾哉!汝曹亦無過哀, 但兄弟友恭, 敬奉而母, 力學自立, 扶植門庭, 毋爲吾羞足矣.” 語絶而逝. 諸子泣奉其敎不敢違. 未幾而公夫人亦不起疾. 諸子旣奉兩柩合葬白沙石筍之原, 乃築祠堂寮舍以奉烝嘗居守者, 而取公遺語命之曰寧菴, 買田百餘畝, 以給菴費, 輸王租而歛其遺餘, 以爲歲時增葺之備. 間以告予而請記其所以名之意, 予感王公之言足以見其所守之正, 死而後已, 又嘉伯海昆弟之能遵先志而不忍忘也, 因爲書其本末如此云. 慶元乙卯六月己未, 新安朱熹記.
건창군 진사 제명기(建昌軍進士題名記)
【해제】 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년, 66세) 가을 8월에 쓴 글이다.
건창군은 강서(江西)의 동남쪽을 따라 올라가는데 걸쳐 있는데, 그 지세가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그곳 사람들은 기질이 강건하고 무예에 재주가 있으며, 그곳의 선비들 역시 대부분 경술(經術) 논의(論議) 문장(文章)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에를 들면 직강(直講) 이공(李公)․중서한림(中書翰林) 증공(曾公) 형제는 더욱 빼어난 이들이다. 그밖에 사예(詞藝)로 입신하거나,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 저명한 이름을 후세에 전한 이가 없었는데, 근년 이래로 학식과 덕망을 갖춘 고을의 선배들이 그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 무리를 이끌고 송나라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사람을 뽑아 돌을 갈아 이름을 새기고 군 학교 강당 위에 설치해 놓고, 다음에 이름을 써넣을 사람을 기다렸다. 이군(利君) 원길(元吉)․등군(鄧君) 약례(約禮)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오늘날 사람을 가르치고 선비를 뽑는 방법은 진실로 옛날과 다른 점이 있지만, 선비들을 취하는 뜻은 역시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선비들 가운데이로 말미암아 다행히 자리를 얻는 이들은 간혹 자신을 갈고 닦아 이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기도 하니, 이는 그 교육방법의 시비를 반드시 논할 필요도 없거니와, 내가 세상에 쓰이는 것을 책임지는 뜻은 이미 수없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우리 학생들을 함께 이끌고 이것을 하는 것은 감히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울로 삼고 싶어서이다. 이 지방 사대부 모두가 바라건대, 당신의 한 말씀을 얻어 맨 위에 걸어놓으면, 아마도 계속하여 공부하는 이들이 함께 그것을 읽으면서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建昌之爲郡, 據江西一道東南上游, 其地山高而水淸, 其民氣剛而材武, 其士多以經術論議文章致大名. 如直 講李公, 中書, 翰林曾公兄弟, 尤所謂傑然者也. 其他能以詞藝致身, 取高科而登顯仕者, 亦不絶於當世. 前此乃未有以著其名氏而傳於後世者, 比年以來, 鄕之先達始病其闕, 乃率其徒, 考自國初以至今日, 得若干人, 且將礱石刻之, 置諸郡學講堂之上, 以竢來者之嗣書焉. 而利君元吉, 鄧君約禮以書來曰: “今日敎人取士之法, 誠有異於古者, 然其所以取之之意, 則亦固有在也. 顧士之由此而幸得之者, 乃或不能刮磨奮勵以自見於斯世, 則亦不必論其敎法之是非, 而吾之所以負其見取之意者, 已不勝言矣. 故今吾徒相率爲此, 非敢以爲夸, 乃欲以爲鑒. 邦人士子咸願得子之一言, 冠其顚以發之, 庶乎嗣而書者相與讀之而知所警也.”
나는 그 편지를 세 번 읽고 나서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군자의 말이 참으로 아름답지만, 교육방법의 시비를 논하지 않으면 선비를 취하는 본래의 뜻을 논할 수 없다. 몸에 돌이켜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고서 자기에게 귀한 것을 얻는 것으로 교육방법의 시비를 의논하기에 부족하다. 고인들은 덕행과 도예(道藝)로 백성들을 교육하여 어진 자와 유능한 이를 일으키니, 그 법도가 갖추어지고 뜻이 깊다. 오늘날의 방법은 그렇지 않으니, 그 교육하는 것을 자세히 하고, 선비를 취하는 것을 세밀히 하여 반복해서 도태시키고 두 번 세 번까지 하지만, 그것은 쓸모없는 빈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 뜻을 깊이 탐구하면, 비록 그 쓰임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단지 쓸모없는 빈말만 하면서 우리의 작록(爵祿)을 요구할 줄만 아니, 또 어느 겨를에 그들을 취하는 그 뜻이 어떠한가를 다시 생각하겠는가? 두 군자는 예전에 학문을 배운 바가 있어 자기에 귀한 것을 얻었을 것인데, 왜 그 학설을 추론하여 밝혀 고을의 후학들에게 알려 그들을 감발(感發)시켜 고인들이 교육한 것을 탐구하여 마음을 다하지 않는가? 진실로 그 마음을 다해 이것을 얻은 이후에 오늘날의 교육방법이 비록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여기에 마땅히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선비를 뽑는 뜻이 모두 여기로부터 나오지는 않지만, 나는 그 뜻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마땅히 스스로 하루라도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해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옛사람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하나의 관직에도 부끄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들이 자랑하는 문자와 성명(聲名)을 보고도 오히려 깨끗하게 여기지 않는 바가 있을 것이니, 하물며 의롭지 못한 부귀는 또 말해 무엇 하겠는가? 본래 글을 부탁한 뜻에는 부족하지만, 잠시 이 설을 기록하여 두 군자에게 보내니, 부모 형제들과 함께 토론하고 비평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경원 원년 가을 8월 병인, 신안 주희 기록하다.
予三復其書, 而爲之喟然曰:「二君子之言誠美矣, 然不論夫敎法之是非, 則無以議其取士之本意; 不反身以自求而得其有貴於己者, 則又未足以議其敎法之是非也. 夫古之人敎民以德行道藝, 而興其賢者能者, 其法備而意深矣. 今之爲法不然, 其敎之之詳, 取之之審, 反復澄汰, 至于再三, 而其具不越乎無用之空言而已. 深求其意, 雖或亦將有賴於其用, 然彼知但爲無用之空言, 而便足以要吾之爵祿, 則又何暇復思吾之所以取彼者, 其意爲如何哉? 二君子蓋嘗有所受學, 而得其所貴於己者矣, 盍亦推明其說, 以告夫鄕之後進, 使之因是感發, 以求古人之所以敎者而盡心乎? 誠盡其心而有得乎此, 然後知今日敎人之法雖不由此, 而吾之於此, 自當有不能已者; 今日取士之意雖或不皆出此, 而吾之所以副其意者, 自當無日而不在乎此也. 是則不惟無愧於今人, 而亦且無愧乎古; 不唯無愧於一官, 而視彼文字聲名之盛者, 猶將有所不屑, 况乎不義而富且貴者, 其又何足道哉? 顧予不足以當其屬筆之意, 姑記是說, 以復于二君子, 幸與父兄子弟評之, 以爲如何也.」 慶元元年秋八月丙寅, 新安朱熹記.
위국록증고 후기(魏國錄贈告後記)
【해제】 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년, 66세) 9월에 쓴 글이다.
신 주희는 고(故) 참지정사(參知政事) 공무량(龔茂良) 등이 효종황제께서 고(故) 태학록(太學錄) 위섬지(魏掞之)에게 포증(褒贈)한 일을 기록한 것을 엎드려 읽고, 세 번 반복하고 돌아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섬지(掞之)는 본래 벼슬이 없는 평민의 신분을 황제를 뵜는데, 천자가 그를 기뻐하여 학관으로 발탁했습니다. 재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차례 정사를 논하는 글을 올려, 부당하게 벼슬하고 있는 근행(近倖)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가, 마침내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 돌아갈 것을 고하여 죽었습니다. 임금도 처음에는 그의 말을 싫어하지 않으셨으니, 이에 5년이 지나도록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탄식하고 슬퍼하면서 이와 같이 추가로 영예까지 하사하셨습니다. 아! 위대하도 성대한 덕이도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신하의 절개를 엄중하게 하심이 어떠한가!
臣熹伏讀故參知政事龔茂良等所記孝宗皇帝褒贈故太學錄魏掞之事, 三復以還, 至於感涕. 竊惟掞之本以白衣召見, 天子悅之, 擢爲學官. 在職未幾, 數上書論政事, 以至力遏近倖之不當進者, 遂不自安而告歸以卒. 上則初未始厭其言也, 至是越五年矣, 而眷念不忘, 咨嗟閔悼, 錫命追榮, 至於如此. 嗚呼偉哉!甚盛德也. 其所以感人心而厲臣節爲如何耶!
20년 후에 섬지(掞之)의 종제(從弟)인 성지(誠之)가 처음으로 제서(制書)를 모각(摹刻)할 것을 의논하여 석총(石冢) 위에 세우고, 신은 지난번에 주제넘게도 사관직을 맡으면서 우연히 무량(茂良) 등이 기록한 것을 얻었고, 글로 써서 그에게 주고 아울러 새겨서 선제(先帝)의 빛나는 교훈을 크게 선양하고 땅에 떨어지지 않고 억만 년 두루 미치게 할 것을 청했습니다. 이는 성스러운 자손들이 영원토록 관찰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일을 맡은 신하와 뜻 있는 선비들 역시 칭송하면서, 다시 서로 권면하면서 더욱 충직한 말에 힘쓸 것입니다. 경원 원년 9월 9일 경인, 조봉대부(朝奉大夫)․제거남경홍경궁(提擧南京鴻慶宮)․무원현(婺源縣) 개국남(開國男)․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 주희 삼가 기록하다.
後二十年, 掞之從弟誠之始議摹刻制書, 立石冢上, 而臣頃嘗待罪史氏, 偶得茂良等所記, 因書畀之, 請幷刻焉, 以丕揚先帝之光訓, 俾彌億萬年, 不墜于地. 是則不惟聖子神孫永有觀法, 而任事之臣, 有志之士亦得以稱誦道說, 更相勉勵而益勸於忠讜云. 慶元元年九月九日庚寅, 朝奉大夫, 提擧南京鴻慶宮, 婺源縣開國男, 食邑三百戶, 賜紫金魚袋臣朱熹謹記.
복주 주학 경사각기(福州州學經史閣記)
【해제】 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년, 66세) 9월에 쓴 글이다.
복주의 학교는 동남지방에서 가장 흥성하였고, 학생 수도 늘 수 백 명이었다. 근년 이래로 교양에 법도가 없어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대하는 것이 마치 길가는 사람 보듯 막연(漠然)하였다. 이런 까닭에 풍속이 날로 쇠퇴하고 선비들의 기풍은 진작되지 않으니, 나이든 어른들은 그것을 걱정하면서도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소희 4년에 지금의 교수인 임공(臨邛) 상군(常君) 준손(濬孫)이 처음 부임해 오고나서, 며칠 지나 학생들에게 가 옛 성현들이 배우고 가르친 뜻으로 깨우치고, 또 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객사를 수리하여 거처하기에 편안하도록 한 후에 학생들의 출입에 규칙을 정하고 시험의 방법을 엄격하게 하고, 그 사이에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가르쳐 인도하였다. 이에 배우는 이들이 다투어 학문에 힘써, 비로소 상군(常君)이 우리의 스승임을 알고, 상군은 여러 학생들을 위해 근심하여 오직 그들이 스스로 학문에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할 뿐이었다. 그래서 읽을만한 책이 없어 학업이 넓지 못할까 걱정하고, 또 그들을 위해 더욱 많은 경서와 역사서를 비치하고, 옛날 것과 합해 약간의 책을 마련하고 옛 법도에 따라 책장을 마련하고 다시 이층집을 만들어 그것을 저장하고서 편지를 보내 그 일을 기록한 글을 요청하고, 또 “바라건대 가르쳐주십시오.”라는 여러 학생들의 뜻을 전해왔다.
福州之學, 在東南爲最盛, 弟子員常數百人. 比年以來, 敎養無法, 師生相視, 漠然如路人. 以故風俗日衰, 士氣不作, 長老憂之而不能有以救也. 紹熙四年, 今敎授臨邛常君濬孫始至, 旣日進諸生而告之以古昔聖賢斅學之意, 又爲之飭廚饌, 葺齋館以寧其居, 然後謹其出入之防, 嚴其課試之法, 朝夕其間, 訓誘不倦. 於是學者競勸, 始知常君之爲吾師, 而常君之視諸生亦閔閔焉, 唯恐其不能自勉以進於學也. 故嘗慮其無書可讀而業將病於不廣, 則又爲之益置書史, 合舊爲若干卷, 度故御書閣之後, 更爲重屋以藏之, 而以書來請記其事, 且致其諸生之意曰:「願有以敎之也.」
내가 생각하건대, 옛날의 배움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여 각기 지선(至善)에 그치기를 구할 뿐이다. 옛 성현이 밝히고자 한 덕과 그치고자 한 선이 어찌 밖에서 구하는 것이겠는가? 그것에 나에게 있음을 알고 경(敬)으로써 보존하면 되는 것이다. 성현이 반드시 독서하라고 말한 것은 천지의 음양과 사물의 이치․자기수양과 부모님을 섬기는 것․가정을 화목하게 하여 국가에 이르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도에 이르는 것과 무릇 성현의 언행․고금의 득실․예악의 명수(名數), 그리고 아래로 식대(食貸)의 원류(源流), 군대와 형법 제도인데, 이것 역시 내가 사려하여 정밀하고 개략할 수 있는 범위 안의 것이다. 만약 여러 경전의 글에서 고찰하고 뒤섞인 것들을 깊이 헤아려 그 원인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명덕의 체용(體用)을 완전히 밝혀 지선의 지극히 정미한 곳에서 그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학(聖學)이 전해지지 않게 되자, 세상의 선비란 자들은 학문에 근본이 있음을 알지 못한채 오직 책만 읽으니, 그들이 책에서 구하는 것이란 문사(文詞)나 암기하고 훈고(訓詁)함으로써 명예나 낚고 이록(利祿)을 얻으려는 것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천하에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치는 더욱 어두워지고, 학자들이 근면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욱 방만해지며, 사장(詞章)은 더욱 화려하고, 논의는 더욱 고원하지만, 그 덕업(德業)과 사공(事功)의 실질은 고인에 미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는 경서의 잘못이 아니라, 독자가 학문에 근본이 있음을 알지 못하여 그것을 실제에 적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予惟古之學者無他, 明德新民, 求各止於至善而已. 夫其所明之德, 所止之善, 豈有待於外求哉? 識其在我而敬以存之, 其亦可矣. 其所以必日讀書云者, 則以天地陰陽, 事物之理. 修身事親, 齊家及國, 以至於平治天下之道, 與凡聖賢之言行, 古今之得失, 禮樂之名數, 下而至於食貸之源流, 兵刑之法制, 是亦莫非吾之度內, 有不可得而精粗者. 若非考諸載籍之文, 沈潛參伍, 以求其故, 則亦無以明夫明德體用之全, 而止其至善精微之極也. 然自聖學不傳, 世之爲士者不知學之有本而唯書之讀, 則其所以求於書, 不越乎記誦訓詁文詞之間, 以釣聲名, 干祿利而已. 是以天下之書愈多而理愈昧, 學者之事愈勤而心愈放, 詞章愈麗, 論議愈高, 而其德業事功之實愈無以逮乎古人. 然非書之罪也, 讀者不知學之有本而無以爲之地也.
이제 상군의 하는 교육을 살펴보면, 고인이 가르치고 배운 뜻으로 그들을 개발한 이후에 그것을 책에 저장하여 묻고 변별하는 취지를 넓히고 서각을 세우고 받들어 지키기를 지극히 하니, 본말에 순서가 있다 하겠다. 내가 비록 몇다디 말을 하였지만, 어찌 여기에 더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만둘 수 없어 한 마디 하자면, 학생들이 학문에 근본이 있음을 알고 밖에서 구하지 않고 붙잡아 보존하고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하도록 하며, 내 마음의 청명하고 순일(純一)함을 독서의 바탕으로 삼은 이후에 그 규모를 크게 하고 그 법도를 정밀하게 하여 그 선후와 본말의 순서를 따르도록 함으로써 서각에 저장되어 있는 경서를 깊이 탐구하도록 하면,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다하여 하나로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사업에 적용하는 것 역시 근본이 있어 무궁할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아울러 기록하여 남기니, 학생 여러분은 여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今觀常君之爲敎, 旣開之以古人敎學之意, 而後爲之儲書, 以博其問辨之趣, 建閣以致其奉守之嚴, 則亦庶乎本末之有序矣. 予雖有言, 又何以加於此哉? 然無已, 而有一焉, 則亦曰姑使二三子者, 知夫爲學之本, 有無待於外求者, 而因以致其操存持守之力, 使吾方寸之間, 淸明純一, 眞有以爲讀書之地, 而後宏其規, 密其度, 循其先後本末之序, 以大玩乎閣中之藏, 則夫天下之理, 其必有以盡其纖悉而一以貫之. 異時所以措諸事業者, 亦將有本而無窮矣. 因序其事, 而幷書以遺之, 二三子其勉之哉!
경서각의 공사는 경원 원년 5월 신축에 시작하여 7월 무술에 완공하였다. 건축자재와 임금 및 식대로 들어간 비용은 전(錢) 400만이 조금 넘는데, 상군은 그 관속을 나르고 녹봉을 납입하는 것을 첫 번째 일로 하였고, 수수(帥守) 첨후(詹侯) 체인(體仁)․사자(使者) 조후(趙俟) 상지(像之)․허후(許侯) 지신(知新) 모두가 거기에 보탰다. 인접한 군의 태수 조후(趙侯) 백괴(伯璝)․12개 읍장 진군(陳君) 공(羾) 등 역시 그 힘을 보태 도왔다. 그 공사를 감독한 이는 학교의 선사(選士) 양성중(楊誠中)․장안인(張安仁)․소공소(蕭孔昭)이다. 이 해 9월 정해 조봉대부(朝奉大夫)․제거남경홍경궁(提擧南京鴻慶宮) 신안 주희 기록하다.
凡閣之役, 始於慶元初元五月辛丑, 而成於七月之戊戌. 材甓傭食之費, 爲錢四百萬有奇, 則常君旣率其屬輸俸入以首事, 而帥守詹侯體仁, 使者趙俟像之, 許侯知新咸有以資之. 至於旁郡之守趙侯伯璝, 十二邑之長陳君羾等, 亦以其力來助. 而董其役者, 學之選士楊誠中, 張安仁, 蕭孔昭也. 是歲九月丁亥, 朝奉大夫, 提擧南京鴻慶宮新安朱熹記.
건창군 남성현 오씨 사창기(建昌軍南城縣吳氏社倉記)
【해제】 이 글은 경원 2년(병진, 1196년, 67세) 정월에 쓴 글이다.
건도 4년, 건창 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나는 관에 요청하여, 숭안현의 개요향(開耀鄕)에서 처음으로 사창을 시작하여, 빈민들이 한여름에 사창에서 곡식을 받고 겨울에 2할의 이자를 붙여 갚도록 했다. 조금 수확이 줄면, 그 이자를 반으로 줄여주고, 크게 흉년이 들면 이자를 완전히 없앴다. 몇 년이 지나자, 이자를 본전의 열 배를 넘고, 그 혜택을 받는 지역이 넓어졌고, 이자를 마침내 기부하여 백성들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 시행하니, 사람들이 펀하게 여겼다. 순희 신축(1181년), 나는 사사(使事)로 조정에 들어가 황제에게 진언하면서 조목조목 그 설명을 올렸더니, 효종황제께서 마다하지 않으시고 곧 그 법을 사방에 반포하시고, 또 조칙으로 우러러 따르는 백성은 있었으나, 관부(官府)는 참여하지 않았다. 황제의 덕의는 매우 심후하지만, 관리들은 게으르고 불공하여 폐하의 조칙을 받들어 천하에 펼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지금 거의 20년이 되었지만, 강서 절강 인근의 농사짓는 백성들은 알지조차 못하는 이가 있다. 알고 우러러 따르는 자는 겨우 한둘에 지나지 않는다.
乾道四年, 建人大饑. 熹請於官, 始作社倉於崇安縣之開耀鄕, 使貧民歲以中夏受粟於倉, 冬則加息什二以償. 歲小不收, 則弛其息之半; 大侵則盡弛之. 期以數年, 子什其母, 則惠足以廣而息可遂捐以予民矣. 行之累年, 人以爲便. 淳熙辛丑, 熹以使事入奏, 因得條上其說, 而孝宗皇帝幸不以爲不可, 卽頒其法於四方, 且詔民有慕從者聽, 而官府毋或與焉. 德意甚厚, 而吏惰不恭, 不能奉承以布于下. 是以至今幾二十年, 而江浙近郡田野之民猶有不與知者. 其能慕而從者, 僅可以一二數也.
이 때 남성(南城) 공사(貢士) 포양(包揚)이 마침 내가 있는 마을을 방문했다가 마침 상서에서 내려 보낸 허가의 징표를 가지고 돌아갔는데, 같은 현의 학도인 오신(吳伸)과 그 동생이 보고 느낀 바가 오랫동안 경영 계획을 궁리하여 이루었다. 마침내 소희 갑인년(1194년), 자신들의 사곡(私穀) 4,000곡(斛)을 내놓아 황제의 조칙에 응하고, 크게 건물을 지어 그것을 저장했다. 일하는 사람을 위해 당(堂)을 두었고, 휴식을 위해 재(齋)를 두었으며, 앞으로는 두 행랑을 두고 마주보고 여섯 노적가리를 쌓았으며, 밖으로는 중문(重門)을 만들어 출납을 엄격하게 했다. 그 규약은 대체로 옛 숭안현의 것에 바탕을 두고 더욱 상세하고 엄밀하게 하였으니, 즉 그 해 사창을 내고 들이는 것은 법에 따랐다. 고을의 어려운 사람들은 우러러 음식을 청할 곳이 있으니, 더 이상 굶주려 죽거나 변란을 당할 걱정이 없게 되니, 모두 오씨에게 그 덕을 돌렸다. 그런데 오신과 오륜은 감당할 수 없다고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창을 세운 것은 군사(君師)의 가르침이자 조상의 은택이며 고을 이웃들의 도움 덕택이니, 내가 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또 지금은 다행히 조그마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우리 자손이 현명할 지 그렇지 못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훗날 우리의 자손이 일탈하여 오늘의 뜻과 같이 하지 못하여 고을 사람들의 신망을 잃는다면, 바라건대 나를 대신하여 부형(父兄)들이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쳐주시오. 한두 번 가르쳐서 듣지 않는다면, 더 이상 우리 자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께 상의하여 유사(有司)에게 말해 그 죄를 바로잡도록 요청할 것이고, 그것이 두려워 잘못을 고친다면 그 또한 괜찮을 것이다.” 이에 고을 대중들은 그의 어짊을 더욱 감탄하면서 그러한 경지는 아무나 이를 수 없다고 여겼다. 포군(包君)은 그 말을 편지로 전해왔고, 또 오륜과 오신의 아들 진을 보내와 기문을 요청했다. 내가 병이 들어 기문을 쓸 힘이 없으나, 그 뜻이 아름다워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를 위해 구체적 내용을 쓴다. 오씨의 자손을 경계하여 몇 세대 후의 자손이라도 그 조상의 뜻이 이와 같음을 알고 차마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능력이 있으면서도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이로 하여금 부끄러워할 줄 알고 힘써 사모하면서 흥기하게 하면 또한 선제(先帝)의 성대한 덕을 무궁하게 넓히는 것이며, 또 외로운 신하가 그리워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지 않게 할 것이다. 경원 병진 정월 기유, 주희 기록하다.
是時南城貢士包揚方客里中, 適得尙書所下報可之符以歸, 而其學徒同縣吳伸與其弟倫見之, 獨有感焉, 經度久之, 乃克有就. 遂以紹熙甲寅之歲, 發其私穀四千斛者以應詔旨, 而大爲屋以儲之. 涖事有堂, 燕息有齋, 前引兩廊, 對列六庾, 外爲重門, 以嚴出內. 其爲條約, 蓋因崇安之舊而加詳密焉, 卽以其年散斂如法. 鄕之隱民有所仰食, 無復死徙變亂之虞, 咸以德於吳氏, 而伸與倫不敢當也, 則謹謝曰:「是倉之立, 君師之敎, 祖考之澤而鄕鄰之助也, 吾何力之有哉? 且今雖幸及於有成, 而吾子孫之賢否不可知. 異時脫有不能如今日之志, 以失信於鄕人者, 則願一二父兄爲我敎之. 敎之一再而不能從, 則已非復吾子孫矣. 盍亦相與言之有司, 請正其罪, 庶其懼而有改, 其亦可也.」 於是衆益咨嗟嘆息其賢, 以爲不可及. 而包君以書來道其語, 且遣倫及伸之子振來請記. 熹病, 力不能文, 然嘉其意, 不忍拒也, 乃爲之書其本末. 旣以警夫吳氏之子孫, 使其數世之後, 猶有以知其前人之意如此而不忍壞, 抑使世之力能爲而不肯爲者有所羞愧勉慕而興起焉, 則亦所以廣先帝之盛德於無窮, 而又以少致孤臣泣血號穹之慕也. 慶元丙辰正月己酉, 朱熹記.
평강부 상숙현 현학 오공 사당기(平江府常熟縣學吳公祠記)
【해제】 이 글은 경원 5년(기미, 1199년, 70세) 6월에 쓴 글이다.
평강부 상숙현 현학에 있는 오공사(吳公祠)란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였던 언언(言偃) 자유(子游)의 사당이다. 태사공(太史公)의 사기를 보면, 공자 문하의 대부분의 제자들은 동주(東州) 출신이었는데, 오직 공(公)만 오나라 출신이다. 이 현에는 자유(子游)라는 거리 이름이 있고 문학(文學)이라는 다리 이름도 있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도경(圖經)에서는 또 공(公)의 옛집은 현의 서북쪽에 있고 옛 우물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비록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공이 이 현 출신이라는 점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죽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1,600여 년인데, 군현(郡縣)의 학교에서 선성(先聖)을 공동으로 제사하면서, 공은 비록 반열에서 철식(腏食)을 종사하지만, 그 향읍(鄕邑)에서는 아직 그 일을 표창하여 드러내는 이가 없었다. 경원 3년 7월, 지현사(知縣事)․통직랑(通直郞) 회계(會稽) 손응시(孫應時)가 처음으로 그 학관 강당의 동편에 이 사당을 짓고 제사하는 일을 받들어 행했다. 이 해 한겨울 긴 날이 이르렀을 때, 읍의 학생 사대부와 그 자제를 몸소 이끌고 선성 선사에게 제례를 올려 그 영혼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기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平江府常熟縣學吳公祠者, 孔門高第弟子言偃子游之祀也. 按太史公記, 孔門諸子多東州之士, 獨公爲吳人. 而此縣有巷名子游, 有橋名文學, 相傳至今. 圖經又言, 公之故宅在縣西北, 而舊井存焉. 則今雖不復可見, 而公爲此縣之人蓋不誣矣. 然自孔子之沒以至于今, 千有六百餘年, 郡縣之學通祀先聖, 公雖以列得從腏食, 而其鄕邑乃未有能表其事而出之者. 慶元三年七月, 知縣事, 通直郞會稽孫應時乃始卽其學官講堂之東偏作爲此堂, 以奉祠事. 是歲中冬長日之至, 躬率邑之學士大夫及其子弟奠爵釋菜, 以妥其靈. 而以書來, 曰願有記也.
내가 생각하기에 하은주 삼대(三代) 이전에 제왕(帝王)이 일어나 중토(中土)를 이끌어 덕행(德行)과 도예(道藝)의 가르침으로 하니, 가까이에서 실행하는 이는 드러나고, 보고 느끼고 감복하여 익혀 들어가는 이는 심오하였다. 만약 오나라(句吳)의 옛 자리로 보자면, 오하(虞夏) 오복(五服)에 있으니, 이는 요황(要荒)의 밖이다. 태백(太伯)이 형만(荊蠻)에서 약초를 캐면서부터 비로소 그 백성을 얻어 예복(禮服; 端委)을 입고 그들에게 임하였지만, 역시 그 몸을 바쳤을 뿐이다. 우중(虞仲)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스스로 상국(上國)과 소통할 수 있었지만, 그 풍속은 역시 소박하고 비속하여 문채가 없었다. 공(公)은 그러한 시기에 태어나 홀로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를 심복(心服)하여 북쪽으로 중국에서 배워, 공자에게 수업하여 몸소 육예에 통달하여 마침내 문학(文學)으로 성인과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호걸이라 하지 않을 것인가. 이제 논어의 말을 가지고 고찰해보면, 그 부류가 모두 쉽고 간단하게 소통(疏通)하고, 고창(高暢)하여 두루 통달한다. 그가 말한 ‘근본이 없다’는 것은 비록 자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점은 앎에 근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른바 문학(文學)이란 진실로 모두 오늘날의 문학과는 다르다. 또 그의 실천적 측면을 보면, 무성(武城)에서 정치하면서 그 읍을 작다고 여기지 않고, 반드시 먼저 시․서․예․악에 힘썼는데, 백성을 용기 있고 풍족하게 하는 효과를 보는 데는 충분하지 못한 면이 있다. 성사(聖師)조차 빙그레 웃게 하였으니, 그를 허여한 뜻이 얼마나 천천(淺淺)한가! 그가 사람을 취함에 있어서는, 또 작은 두 가지 일로 멸명(滅明)의 현명함을 파악하니, 그 의기(意氣)의 감각이 암암리에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이런 까닭에 근세의 논자들은 그의 사람됨이 반드시 도를 들음에 민첩하고 형기(形器)에 방해 받지 않는다 하니, 이른바 ‘남방의 학문이 그 정화(精華)를 얻었다.’는 말이 어찌 옛날부터 이미 그러했겠는가? 하물며 지금 오나라는 완전히 기보(畿輔)가 되어 문물이 흥성하니, 예전 시대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여기에서 손군(孫君)은 또 천 년 동안 빠뜨렸던 것을 들어올리고 옛날을 고찰하여 덕을 숭상하여 학자들을 권면하니 무성현가(武城弦歌)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일에 관한 소식을 듣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글을 썼다. 공자의 문하에서 설과(設科)의 방법은 공이 말한 이른바 근본(本)․이른바 도(道), 그리고 사람을 취하는 것이니, 학생들이 서로 권장하고 힘써 그 실질에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읍의 사람으로 하여금 백 세대 이후에 다시 공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 또 나약하고 일을 꺼리며 염치도 없이 음식이나 탐한다는 비웃음을 씻어버린다면, 이는 곧 손군의 뜻이며 또한 나의 바람이다.
熹惟三代之前, 帝王之興率在中土, 以故德行道藝之敎, 其行於近者著, 而人之觀感服習以入焉者深. 若夫句吳之墟, 則在虞夏五服, 是爲要荒之外. 爰自太伯采藥荊蠻, 始得其民而端委以臨之, 然亦僅沒其身. 而虞仲之後, 相傳累世, 乃能有以自通於上國. 其俗蓋亦樸鄙而不文矣. 公生其間, 乃獨能悅周公仲尼之道而北學於中國, 身通受業, 遂因文學以得聖人之一體, 豈不可謂豪傑之士哉? 今以論語考其話言, 類皆簡易疏通, 高暢宏達. 其曰本之則無者, 雖若見詘於子夏, 然要爲知有本也. 則其所謂文學, 固皆有以異乎今世之文學矣. 旣又考其行事, 則武城之政不小其邑, 而必以詩書禮樂爲先務, 其視有勇足民之效, 蓋有不足爲者. 至使聖師爲之莞爾而笑, 則其與之之意, 豈淺淺哉! 及其取人, 則又以二事之細, 而得滅明之賢, 亦其意氣之感, 黙有以相契者. 以故近世論者意其爲人, 必當敏於聞道, 而不滯於形器, 豈所謂南方之學得其精華者, 乃自古而已然也耶? 矧今全吳通爲畿輔, 文物之盛, 絶異曩時. 孫君於此, 又能擧千載之闕遺, 稽古崇德, 以勵其學者, 則武城弦歌之意, 於是乎在. 故熹喜聞其事而樂爲之書. 至於孔門設科之法, 與公之言所謂本, 所謂道, 及其所以取人者, 則願諸生相與勉焉, 以進其實. 使此邑之人, 百世之下, 復有如公者出, 而又有以一洒夫婾懦憚事, 無廉耻而耆飮食之譏焉, 是則孫君之志, 而亦熹之願也.
공의 추작(追爵)은, 당나라 때 처음으로 오후(吳侯)에 봉했고, 우리 송나라의 정화(政和) 예서(禮書)는 임 호를 단양공(丹陽公)이라 했으며, 소흥어찬(紹興御贊)에서는 오히려 당(唐)에 봉(封)하였다. 순희 연간에 이르러 하사한 위차(位次)에서는 또 오공(吳公)으로 개칭했다. 5년 6월 갑신, 구관봉사(具官封賜) 주희 기록하다.
公之追爵, 自唐開元始封吳侯, 我朝政和禮書已號丹陽公, 而紹興御贊猶有唐封. 至淳熙間, 所肦位次又改稱吳公云. 五年六月甲申, 具官封賜朱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