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105

황성 2025. 8. 19.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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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朱子大全 卷七十八

기문

 

 

 

백장산기(百丈山記)

 

 

 

해제이 글은 순희 원년(갑오, 1174, 45) 6월에 쓴 기문이다. 유충보(劉充父), 평보(平父), 여경숙(呂叔敬), 사촌동생 서주빈(徐周賓)과 함께 그 곳을 유람했고 모두가 부와 시를 지어 그 빼어난 경치를 읊었다. 주희가 백장산에 올라 쓴 부와 시는 󰡔대전󰡕 6에 실려 있다.

 

 

백장산(百丈山)을 삼십 리쯤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절벽 같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왼쪽으로는 절벽이 드리워져 있어, 돌을 첩첩이 쌓아 돌계단을 만들었고 열 계단 정도 오르면 되는데, 산의 아름다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돌계단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작은 시내가 있고, 그 위로 돌다리가 놓여있다. 모두 푸른 등나무와 고목들이어서 아무리 무더운 여름 한낮이라도 더운 기운이 없다. 물은 모두 맑고 깨끗하며 높은 데서 아래로 흐르는데, 그 소리가 콸콸거리는 듯하다. 돌다리를 건너 두 벼랑을 따라 구불구불 위로 올라가면 산문(山門)에 이른다. 자그마한 세 칸짜리 집으로 열 사람 정도밖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골짜기의 물이 보이고 뒤로는 돌 연못[石池]이 있으며, 두 협곡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종일 그치지 않는다.

문 안으로 들어서 연못을 건너면 다시 돌다리가 있는데,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난 돌계단을 몇 계단 밟아가면 암자로 들어간다. 암자는 겨우 몇 칸짜리 오래된 집으로 낮고 좁아 별로 볼 것이 없는데, 서쪽 누각[西閣]만이 빼어나다. 물은 서쪽 계곡의 돌 틈에서 솟아나와 누각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남쪽과 동쪽 계곡의 물이 함께 만나 연못 속으로 흘러든다. 연못에서 흘러나온 물이 앞에서 말한 작은 시내[小澗]가 된다. 누각은 그 상류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물과 돌이 만나 높게 부딪쳐 서로 감싸는 곳이 가장 볼만하다. 그리고 벽 뒤쪽으로는 볼 것이 없지만, 밤에 그 위에 누워있으면, 베개 아래로 밤새도록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오래도록 듣고 있으면 더욱 슬픈 느낌이 들어 애처롭다.

산문을 나서 동쪽으로 열 걸음쯤 가면 돌 누대[石臺]가 나오는데, 아래로는 가파른 언덕을 끼고 있는데 깊고 어두운 험한 절벽이다. 숲의 나무들이 조금 드믄드믄한 사이로 동남쪽을 바라보면, 앞쪽의 바위동굴에서 솟구쳐 나오는 폭포가 보인다. 폭포는 허공을 가로질러 수 십 척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 물방울이 마치 구슬이 흩어져 만들어진 안개와 같고, 거기에 햇빛이 비추면 아름답고 찬란하여 눈을 뜰 수 없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조차 없다.

누대는 산의 서남쪽 비어 있는 공간을 마주하고 있고, 앞쪽으로는 노산(蘆山)을 모시고 있는데, 한 봉우리만이 우뚝 솟아 수 백리 사이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모두 낱낱이 눈에 들어온다. 해가 서쪽 산에 걸릴 때쯤 남은 빛이 옆으로 비추면 자줏빛이 겹겹이 쌓인 모습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새벽에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하얀 구름이 온 골짜기에 가득하여, 마치 바다의 파도가 이는 듯하다. 그 가운데 솟아 있는 멀리 혹은 가까이의 여러 산들은 모두가 마치 뜬 구름이 오고 가는 것 같으니, 혹은 솟구치고 혹은 숨어서 시시각각으로 온갖 변화를 일으킨다. 누대의 동쪽으로는 길이 끊겼는데, 고을 사람들이 돌을 뚫어 돌층계를 만들어 건넜고, 그 동쪽에 신사(神祠)를 지어 가뭄이나 홍수 때에 신명에 고하고 빌었다. 겁이 많은 이는 혹 감히 건너지 못하지만, 산의 볼만한 경치는 여기에서 끝난다.

百丈山記

登百丈山三里許, 右俯絶壑, 左控垂崖, 疊石爲磴, 十餘級乃得度. 山之勝, 蓋自此始. 循磴而東, 卽得小澗, 石梁跨於其上. 皆蒼藤古木, 雖盛夏亭午無暑氣. 水皆淸澈, 自高淙下, 其聲濺濺然. 度石梁, 循兩崖曲折而上, 得山門. 小屋三間, 不能容十許人. 然前瞰澗水, 後臨石池, 風來兩峽間, 終日不絶. 門內跨池又爲石梁, 度而北, 躡石梯數級入菴. 菴纔老屋數間, 卑痺迫隘, 無足觀. 獨其西閣爲勝, 水自西谷中循石鏬奔射出閣下, 南與東谷水竝注池中. 自池而出, 乃爲前所謂小澗者. 閣據其上流, 當水石峻激相搏處, 最爲可玩. 乃壁其後無所睹, 獨夜臥其上, 則枕席之下終夕潺潺, 久而益悲, 爲可愛耳. 出山門而東十許步, 得石臺, 下臨峭岸, 深昧險絶. 於林薄間東南望, 見瀑布自前巖穴瀵湧而出, 投空下數十尺, 其沫乃如散珠噴霧, 日光燭之, 璀璨奪目, 不可正視. 臺當山西南缺, 前揖蘆山, 一峰獨秀出, 而數百里間, 峰巒高下, 亦皆歷歷在眼. 日薄西山, 餘光橫照, 紫翠重疊, 不可殫數. 旦起下視, 白雲滿川, 如海波起伏. 而遠近諸山出其中者, 皆若飛浮來往, 或涌或沒, 頃刻萬變. 臺東徑斷, 鄕人鑿石容磴以度, 而作神祠於其東, 水旱禱焉. 畏險者或不敢度, 然山之可觀者, 至是則亦窮矣.

 

나는 유충보(劉充父), 평보(平父), 여경숙(呂叔敬), 사촌동생 서주빈(徐周賓)과 함께 그 곳을 유람했고 모두가 부와 시를 지어 그 빼어난 경치를 읊었는데, 나는 다시 이와 같이 상세하게 차례대로 서술했다. 그 가운데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돌층계(石磴)작은 골짜기(小澗)산문(山門)돌 누대(石臺)서쪽 누각(西閣)폭포(瀑布)이다. 그래서 각기 따로 시를 지어 그 곳을 알리고, 함께 유람한 여러 사람들에게 증정하였고, 또 가고 싶어 하면서도 아직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린다. 년 월 일에 기록하다.

余與劉充父, 平父, 呂叔敬, 表弟徐周賓游之, 旣皆賦詩以紀其勝, 余又敍次其詳如此, 而最其可觀者石磴小澗山門石臺西閣瀑布也, 因各別爲小詩, 以識其處, 呈同游諸君, 又以告夫欲往而未能者. 年月日記.

 

 

 

운곡기(雲谷記)

 

 

 

해제이 글은 순희 2(을미, 1175, 46) 7월에 쓴 기문이다. 주희는 이 해 424, 한천정사에서 여조겸과 함께 󰡔근사록󰡕을 편찬하고, 516, 여조겸과 함께 연산 아호사로 출발하여 26일 아호사에 도착해 육구연 형제를 만난다. 그리고 7월 운곡에 거처하고 마침내 노봉(蘆峰)에 올라 운곡(雲谷)에 등정하여 시로 읊고 운곡기를 지었다. (운곡 26, 운곡잡시 12)󰡔대전󰡕6에 실려 있다.

 

 

운곡(雲谷)은 건양현의 서북쪽 70리에 있는 노산(蘆山)의 진()으로, 지대가 가장 높아 여러 봉우리들 위에 웅크리고 있으며 중간의 언덕배기들은 아래로 웅크리고 있고 안은 넓고 밖은 빽빽하여 절로 한 구역이 된다. 비록 맑은 날 한낮이라도 흰 구름이 모여 들면 지척간도 분별할 수 없다. 문득 아찔하게 변화하면 또 확 트여 간 곳을 알지 못한다. 1170(건도 경인)에 처음으로 그 곳에 갔다가 거기에 초당(草堂)을 짓고 회암(晦菴)’이라 이름하였다. 운곡의 물이 서남쪽으로 7리쯤 흘러가면 안장원(安將院) 동쪽에 이르는데, 나무가 무성하고 그늘이 교차한다. 시내에는 커다란 돌들이 서로 기울어 있고, 시냇물은 그 사이로 세차게 부딪치며 흘러가는데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한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 여기에 이르면 이미 정신이 맑고 상쾌해져서 보통 사람의 경지와 다름을 느끼기 때문에 남간(南澗)’이라는 방()을 써 붙여 유람이 시작되는 곳임을 기록했다.

雲谷記

雲谷在建陽縣西北七十里蘆山之顚, 處地最高, 而羣峰上蟠, 中阜下踞, 內寬外密, 自爲一區. 雖當晴晝, 白雲坌入, 則咫尺不可辨, 眩忽變化, 則又廓然莫知其所如往. 乾道庚寅, 予始得之, 因作草堂其間, 牓曰晦菴’. 谷中水西南流七里所, 至安將院東, 茂樹交陰, 澗中巨石相倚, 水行其間, 奔迫澎湃, 聲震山谷. 自外來者至此, 則已神觀蕭爽, 覺與人境隔異, 故牓之曰南澗’, 以識遊者之所始.

 

계곡의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산은 점점 깊어지고 나무는 점점 우거진다. 계곡의 바닥은 대부분 돌로 되어 있고, 높은 곳과 낮은 곳이 끊겨 꾸불꾸불 돌아서 간다. 물은 모두가 높은 데서 아래로 쏟아지는데, 긴 것은 한두 장()은 되고, 짧은 것이라도 몇 척()은 된다. 혹은 숨어 있다가 옆에서 나와 층층이 서로 이어서 몇 단계를 거쳐 내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양 쪽의 산에서 갈라져 나온 시냇물이 그 가운데로 가로질러 쏟아지기도 하는데, 역시 모두 분수처럼 엷게 흩뿌리는 모습이 볼만하다. 1리쯤 가다가 무성한 우산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백 걸음쯤 가면 물에 기대선 커다란 돌이 있어 기대어 쉴 수 있다. 시내 서쪽으로는 우뚝한 바위가 비스듬히 서 있는데 이끼가 둘려있고 덩굴이 얽혀있으며 아름다운 나무와 기이한 풀들이 그 위를 뒤덮고, 물은 그 아래에서 흘러나와 활처럼 흩어지니 계곡의 시내에서 특히 그윽하고 아름답다. 시내의 하류는 구불구불 수십 번을 돌다가 힘차게 솟아올라 사람의 잇몸처럼 생긴 서쪽의 바닥을 가로지른 바위는 길게 늘어지다가 천천히 흘러간다. 여기에 임하여 조그만 정자를 짓고 진나라 육사형(陸士衡)초은(招隱)이라는 시에 나오는 명옥(鳴玉)’이라 이름 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循澗北上, 山益深, 樹益老. 澗多石底, 高下斗絶, 曲折回互. 水皆自高瀉下, 長者一二丈, 短亦不下數尺. 或詭匿側出, 層累相承, 數級而下. 時有支澗自兩旁山谷橫注其中, 亦皆噴薄濺灑可觀. 行里餘, 俛入薈翳百餘步, 巨石臨水, 可跛而息. 澗西危石側立, 蘚封蔓絡, 佳木異草, 上偃旁綴, 水出其下, 淙散激射, 於澗中特爲幽麗. 下流曲折十數, 騰蹙沸涌, 西抵橫石如齦齶者, 乃曳而長, 演迤徐去. 欲爲小亭臨之, 取陸士衡招隱詩語, 命以鳴玉而未暇也.

 

여기에서 북쪽으로 가면, 서너 곳의 폭포수를 만나는데, 높은 곳은 5-6()에 이른다. 그 모이고 흩어지며 넓고 좁음이 각기 자태를 지니고 있어 모두 정자를 지어 그 흥취를 감상할 만하다. 또 북쪽으로 계곡을 벗어나 산을 따라 가다 동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다리 아래 풀과 나무들이 뒤엉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 아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우레와 같으니, 아마도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을 것이지만, 역시 찾아갈 겨를이 없다. 백 걸음쯤 가면 돌벽[石壁]이 있는데, 높이와 넓이가 모두 백 여 척이다. 폭포는 균형 있게 쏟아지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흰명주를 드리운 듯하다. 계곡의 시내에서 본 여러 폭포 중 가장 길다. 그 끝으로 가서 옷을 걷어올리고 맨발로 건넌 후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여러 산들이 모두 그 정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오직 서북쪽으로 바라보면, 산의 절반이 돌과 빽빽한 나무 인데, 표자암(豹子巖)이라 부르는 것으로 이빨처럼 돌출해 보이는데 마치 하늘 밖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돌벽의 폭포가 끝나는 쯤에서 북쪽 운곡으로 들어가자면 다시 몸을 숙여 표자암을 보게 된다. 지세의 높낮이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自此北去, 歷懸水三四處, 高者至五六丈, 聚散廣狹, 各有姿態, 皆可爲亭, 以賞其趣. 又北, 捨澗循山, 折而東行, 脚底草樹膠葛, 不可知其淺深. 其下水聲如雷, 計應猶有佳處, 而亦未暇尋也. 行數百步, 得石壁, 高廣皆百餘尺. 瀑布當中而下, 遠望如垂練, 視澗中諸懸水爲最長. 徑當其委, 跣揭而度, 回視所歷, 羣山皆撫其頂. 獨西北望, 半山立石叢木, 名豺子巖者, 槎牙突兀, 如在天(7-4058). 然石瀑窮源, 北入雲谷, 則又已俯而視之矣. 地勢高下, 大略於此可見.

 

운곡 입구의 좁은 협곡이 관문이 되어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가 된다. 관문의 양쪽 방벽은 창문이 되고, 앉거나 누워 쉴 수가 있다. 밖으로는 대나무를 빽빽하게 심었고 안으로는 연꽃 연못과 소통하는데 나무다리를 타고 건너는데 길 주위로는 삼나무를 심었다. 서쪽으로 작은 산을 따라 올라가면 중턱의 언덕[中阜]에 도달한다. 연못 위에 전답 몇 무()가 있는데, 그 동편에 몇 칸짜리 전사(田舍)를 짓고 운장(雲莊)’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중턱의 언덕 아랫자락에서 곧장 북쪽의 천협(泉峽)으로 들어가 석지(石池)산기둥(山楹)약밭(藥圃)정천(井泉)동료(東寮)의 서쪽을 거쳐 남쪽으로 돌아 대숲으로 들어가면 세 칸짜리 초당이 나오는데, 바로 회암(晦菴)이다. 산기둥(山楹) 앞에는 두 봉우리가 곧게 솟았는데 가파르게 솟은 것이 특히 우뚝하다. 아래로 석지(石池)를 내려다보면, 동쪽으로는 층층이 높고 가파른 산들이 있고, 그 옆으로는 경작할만한 수 십 무()의 전답이 있다. ()에는 도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산 중턱으로부터 동쪽으로 곡식을 심을만한 땅은 개간하지 않은 곳이 없다. 초당 앞의 빈 땅 몇 장()이 있는데,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조그만 산모양을 이뤘다. 거기에 참죽나무계수나무혜초를 심었는데 제법 울창한 봉우리가 되었다. 그 등쪽에서 나온 남쪽의 봉우리는 홀로 원만하고 곧고 빼어나서 함께 견줄만한 것이 없다. 그 왼쪽 역시 대나무 숲이 무성하여 빽빽하게 모여 서로 둘러싸고 있어서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 틈새에서 몸을 숙이고 고개를 들어보아도 내 키의 높이라든지 지형의 거리를 도통 알 수 없고 단지 해와 달이 곁에 있고 비바람을 함께 할 수 있을 뿐이다. 집 뒤에는 풀을 엮은 오두막을 지었는데, 위로 조금 올라가 산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무이산의 여러 봉우리가 굽어보인다. 정자를 지어 조망하고 싶지만, 바람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석대(石臺)를 만들고 이름을 회선(懷仙)’이라 했다. 작은 산의 동쪽으로 산허리를 감싸고 있는 작은 길이 있는데, 대나무 숲을 뚫고 남쪽으로 나와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면 산 앞에 퇴락한 마을과 우물이 보이는데 한적하여 오히려 그 수를 셀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집을 짓기에는 좁아 다시 대()를 지어 이름을 휘수(揮手)’라 했다.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옆으로 가는 지름길을 만난다. 지름길 남쪽이 바로 계곡 입구의 작은 산이고, 그 위의 조금 평평한 곳은 밭을 일구는 농부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어서 이름을 운사(雲社)’라 했다. 지름길의 동쪽은 삼나무 길에 속하고, 서쪽은 서암(西崦)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서암(西崦)에는 수 십 묘()의 땅이 있는데, 역시 도가류의 은자들이 띠를 엮어 살면서 경작을 하고 있는데, ‘서료(西寮)’라 했다. 그 서쪽 산등성이에서 동쪽으로 에둘러 내려오면, 남쪽 봉우리의 서쪽 끝이 서로 깎아내는 것처럼 맞물린다. 운곡 입구의 작은 산은 그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치 거인 손을 마주하고 옥구슬을 가지고 노는 듯하다. 서암과 남봉의 두 산에서 발원하는 물은 그 앞에서 합해지고 나아가 남간(南澗)이 된다. 동료(東寮)의 북쪽으로는 복숭아 지름길(桃蹊), 대나무 마을(竹塢), 칠원(漆園)이 있고,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산비탈에 차밭(茶坡)이 있다. 차밭에서 동북쪽으로 가다가 높고 커다란 바위를 올라 옆에 있는 지름길로 들어서 그 아래로 울창한 것이 수십 걸음인데, 동쪽 봉우리 고개로 가서 아래로 내려가다 다시 올라가면 마침내 절정(絶頂)에 이른다. 평평한 곳은 겨우 한 장() 정도로 사면이 모두 무너져 아래로는 수 백 장()이니, 눈이 아찔하고 자신을 보존하지 못할까 두렵게 된다. 그러나 구부려 사방을 내려다보면 사방이 각각 수 백리요 봉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고 가까운 것들이 모여 하나가 되며, 선명한 비취색의 구름이 파도를 이루어 아침 저녘으로 온갖 형상을 빚어내니, 이 세상 사람의 눈과 귀로 일찍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谷口距狹爲關, 以限內外. 兩翼爲軒窗, 可坐可臥, 以息遊者. 外植叢篁, 內疏蓮沼, 梁木跨之, 植杉繞徑. 西循小山而上, 以達于中阜. 沼上田數畝, 其東欲作田舍數間, 名以雲莊’. 徑緣中阜之足北入泉峽, 歷石池, 山楹, 藥圃, 井泉, 東寮之西, 折旋南入竹中, 得草堂三間, 所謂晦菴也. 山楹前直兩峰, 峭聳傑立, 下瞰石池, 東起層嶂, 其脅可耕者數十畝. 寮有道流居之, 自中阜以東, 可食之地無不闢也. 草堂前隙地數丈, 右臂繞前, 起爲小山, 植以椿桂蘭蕙, 悄蒨岑蔚. 南峰出其背, 孤圓貞秀, 莫與爲擬. 其左亦皆茂樹修竹, 翠密環擁, 不見間隙. 俯仰其間, 不自知其身之高, 地之逈, 直可以旁日月而臨風雨也. 堂後結草爲廬, 稍上山頂北望, 俯見武夷諸峰. 欲作亭以望, 度風高不可久, 乃作石臺, 名以懷仙’. 小山之東, 徑繞山腹, 穿竹樹, 南出而西下, 視山前村墟井落, 隱隱猶可指數. 然亦不容置屋, 復作臺, 名以揮手’. 南循岡脊下, 得橫徑. 徑南卽谷口小山, 其上小平, 田甿卽以祈年, 因命之曰雲社’. 徑東屬杉, 徑西入西崦. 西崦有地數十畝, 亦有道流結茅以耕其間, 西寮’. 其西山之脊, 蟠繞東下, 與南峰西垂相齧, 而谷口小山介居其間, 如巨人垂手, 拱玩珠璧. (7-4059)兩原之水合於其前, 出爲南澗. 東寮北有桃蹊, 竹塢, 漆園, 度北嶺, 有茶坡. 自茶陂東北行, 攀危石, 履側徑, 其下蓬蓬然者數十步, 行東峰之顚, 下而復上, 乃至絶頂. 平處劣丈餘, 四隤皆巉削, 下數百丈, 使人眩視, 悸不自保. 然俯而四瞰, 面各數百里, 連峰有無, 遠近環合, 彩翠雲濤, 昏旦萬狀, 亦非世人耳目所嘗見也.

 

나는 예전에 상서(湘西) 지방의 악록산(嶽麓) 정상을 혁희대(赫曦臺)’라고 불렀고, 장백화보(張伯和父)가 그것을 큰 글씨로 써주었는데 매우 씩씩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알게 되어, 옮겨와 새기고 그 빼어남을 크게 하였다. 절정(絶頂) 북쪽 아래로 위림(魏林)은 가로로 바위의 절반쯤을 덮고 있는데, 나무의 기운이 맵고 강해 뱃속이 결리는 질환에 쓸 수 있다고 하니, 아마도 방술가들이 썼던 아위(阿魏)라는 게 아닌가 싶다. 숲 아래 바위에는 낙숫물이 떨어져 구덩이를 만들었는데, 크기가 사발그릇만하다. 마르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아,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현제(顯濟)라 부르고, 가뭄이 들면 기도를 올린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북쪽 시냇물(北澗)이 되는데, 시내 옆에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마주보고 서 있다. 그 형세가 높고 험하고 장대하며, 고목이 뒤덮고 등나무와 풀이 잇달아 덮고 있으니 산의 북쪽에서는 가장 빼어난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왼쪽 것을 ()’, 오른쪽 것을 ()’라 부르고, 계절에 따라 예법을 갖추어 제사를 올린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가면 유당봉(油幢峰) 아래의 돌낭떠러지에서 흘러내리는 폭포가 있는데 허공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수 십 장()이나 되어 형세가 더욱 기이하고 장관이며, 동남쪽의 또 다른 계곡에는 석실(石室)이 셋 있는데, 모두 거처할 수 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아주 좋은데 두 방을 연결해서 가운데 방은 옆 방과 통하며, 바로 옆에는 샘이 있어서 길어다 빨래도 하고 씻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모두 가서 볼 겨를이 없다. 동쪽의 높고 가파른 산에서 남쪽으로 나가 작은 고개 아래로 수 십 걸음쯤에 장대한 돌이 있는데, 여기에서 아래의 산골짜기를 내려다보면, 고목이 우거지고 이리저리 굽은 나뭇가지들이 보이는데, 이것이 중계(中溪)이다. 다른 지름길로 내려가 마을로 들어가는데, 그 가운데 길이 바로 남간(南澗) 서애(西崖)의 작은 폭포가 시작되는 원천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거기에는 각기 돌밭 몇 묘()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멀뿐만 아니라 땅도 척박하기 때문에 버려두고 경작하지 않는다. 함께 이 땅을 사들여 거기서 나오는 세곡으로 회암을 지키는 사람에게 급여를 주고 남은 것으로는 그것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쓰면, 밖에서 조달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다.

予嘗名湘西嶽麓之頂曰赫曦臺’, 張伯和父爲大書, 甚壯偉. 至是而知彼爲不足以當之, 將移刻以侈其勝. 絶頂北下有魏林, 橫帶半巖, 木氣辛烈, 可已痁疾, 疑卽方家所用阿魏者. 林下巖中滴水成坎, 大如桮椀, 不竭不溢, 里人謂之顯濟, 水旱禱焉. 又下爲北澗, 有巨石二對立澗旁, 嶙峋崷崒, 古木彌覆, 藤卉蒙絡, 最爲山北奇處. 里人名其左曰’, 右曰’, 歲時奉祠如法. 聞自是東北去, 有瀑布出油幢峰下石崖隒下, 水瀉空中數十丈, 勢尤奇壯. 東南別谷有石室三, 皆可居. 其一尤勝, 比兩房, 中通側戶, 旁近水泉, 可引以潄濯, 然皆未暇往觀. 自東嶂南出小嶺下數十步, 有巨石贔屭, 下瞰絶壑, 古木叢生, 樛枝橫出, 是爲中溪. 別徑下入村落, 其中路及始入南澗西崖小瀑之源, 各有石田數畝, 村民以遠且瘠, 棄不耕. 皆以貲獲之, 歲給守者, 以其餘奉增葺費, 勢若可以無求於外而足者.

 

이 노산의 서북쪽에서 횡으로 뻗어 그 등성이가 숭안현의 남쪽과 건양현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데, 이 근방 수 백리의 산에서 이만큼 높은 산은 없다. 이 운곡은 아래에서 위로 8부 능선쯤 올라가면 멀리 바라봐야 할 만큼 넓고 거처할 수 있을 만큼 오목한 곳이다. 옛날에 왕군(王君) 자사(子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관직을 버리고 여기에 숨어 살면서 곡식을 먹지 않고 몸을 단련하여 신선이 되는 방법을 익혀 몇 년만에 떠났다. 지금의 동료(東寮)가 바로 그 거처의 유지(遺址)이다. 그러나 지세가 높고 기가 차갑고 또 바람이 많고 맹렬하며 지나가는 구름이 적시니, 사용하는 기물과 의복이 모두 마치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축축하다. 의지가 완정한 신왕(神王)이나 기골이 성대하고 강건한 사람이 아니면 그곳에 오래 거처하지 못한다. 사방에서 올라오는 길이 모두 벼랑의 가장자리를 따라 칡넝쿨을 붙잡고 험난하게 수백 미터를 와야 하니, 산림과 천석(泉石)에 고아한 뜻을 두고 기꺼이 고통스런 노고를 감수하려는 사람이 아니면 역시 올 수 없다. 나의 집 담계 서남쪽에서 와도 오히려 80여 리나 되기 때문에 다른 고장의 사람들은 결코 올 수 없다. 나 역시 일 년에 한 두 번 올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친구인 채계통(蔡季通)만이 집의 서북쪽에서 20 여리밖에 되지 않아 그동안 자주 왕래했고, 집을 짓기 시작해서 지금 완성한 것은 모두가 그의 노력이다.

蓋此山自西北橫出, 以其脊爲崇安, 建陽南北之境, 環數百里之山, 未有高焉者也. 此谷自下而上, 得五之四, 其曠然者可望, 其奧然者可居. 昔有王君子思者, 棄官棲遁, 學鰊形辟穀之法, 數年而去. 今東寮卽其居之遺址也. 然地高氣寒, 又多烈風, 飛雲所霑, 器用衣巾皆濕如沐. 非志完神王, 氣盛而骨强者, 不敢久居. 其四面而登, 皆緣崖壁, 援蘿葛, 崎嶇數里, 非雅意林泉, 不憚勞苦者, 則亦不能至也. 自予家西南來, 猶八十餘里, 以故它人絶不能來, 而予亦歲不過一再至. 獨友人蔡季通家山北二十除里, 得數往來其間. 自始營葺迄今有成, 皆其力也.

 

그렇지만 나는 늘 생각하기를, 앞으로 10년 후면 아이들 결혼문제도 대충 마무리될 것이니, 즉 가정 일을 끊고 이 산에 은거하고자 했다. 이 때쯤이면 산의 수풀은 더욱 깊고 무성할 것이고, 수석(水石)은 더욱 유려하고 빼어날 것이며, 관사는 더욱 완전하고 아름다울 것이니, 산을 갈고 낚시하며 심성을 함양하고 독서하며, 거문고를 타고 장군을 치면서 선왕들의 풍류를 노래하면, 역시 즐거워 죽음조차도 잊어버릴 것이다. 생각하건대, 지금은 참으로 여가가 없기 때문에 단지 그 산수의 아름다움을 이와 같이 기록하고 아울러 시로 읊고, 장차 화가를 시켜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게 해서 때때로 살펴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한다.

然予常自念自今以往十年之外, 嫁娶亦當粗畢, 卽斷家事, 滅景此山. 是時山之林薄當益深茂, 水石當益幽勝, 館宇當益完美, 耕山釣水, 養性讀書, 彈琴鼓缶, 以詠先王之風, 亦足以樂而忘死矣. 顧今誠有所未暇, 姑記其山水之勝如此, 幷爲之詩, 將使畫者圖之, 時覽觀焉以自慰也.

 

산영(山楹)이 마주 보고 있는 쌍봉(雙峰) 아래에는 옛날에 방사(方士) 여옹(呂翁)이 살았었는데 죽어서도 썩지 않았다. 그 지역 역시 고절(孤絶)하고 매우 아름다우며, 본래는 산 북쪽의 민가에 속하는데, 이제 그 곳을 얻어 이름을 휴암(休菴)’이라 붙였으니, 무릇 우리 산에서 경작해서 밥 먹는 이들은 모두가 여옹의 무리 제자이다. 성품이 늘 순박하고 맑고 깨끗하여 힘써 노동해서 스스로 먹고 살았고, 다른 사람들이 혹 침범해도 이해타산을 따져 대하지 않았다. 어느 소년이 처자식을 버리고 그를 따랐는데, 그에게 수수(授受)한 바를 물어도 웃기만 할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堅苦)해지고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빛이 없었다. ! 이는 인륜을 저버린 사람들로서 선왕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죄를 짓기는 하였지만, 세상의 이익과 여색을 탐닉하는 이들보다는 착하다. 때문에 그것을 기록하여 붙이고 자신을 경계하고자 한다. 순희 2(乙未, 1175) 가을 716, 회옹(晦翁) 쓰다.

山楹所面雙峰之下, 昔有方士呂翁居之, 死而不腐, 其地亦孤絶殊勝. 本屬山北民家, 今亦得之, 名曰休菴’. 蓋凡耕且食於吾山者, 皆翁之徒也. 往往淳質淸淨, 能勞筋骨以自給, 人或犯之不校也. 有少年棄妻子從之, 問其所授受, 笑不肯言. 然久益堅苦, 無怨悔之色. 嗚呼是其絶滅倫類, 雖不免得罪於先王之敎, 然其視世之貪利冒色, 湛溺而不厭者, 則旣賢矣. 因附記之, 且以自警云. 淳熙乙未秋七月旣望, 晦翁書.

 

 

 

당실의 명칭에 관한 기문(名堂室記)

 

 

 

해제이 글은 순희 3(병신, 1176, 47)에 쓴 글이다. 주희는 이 해에 아버지의 고향인 무원을 방문하는데, 412일 무원에 도착해 6월 상순 떠날 때까지 약 두 달 정도를 머문다.

 

 

자양산(紫陽山)은 휘주성(徽州城) 남쪽 5리에 있는데, 일찍이 은거한 군자가 거처하였던 까닭에 지금 그곳에는 노자를 모신 사당[老子祠]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고향이 무원(婺源)이어서 어릴 적에 군()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 그곳에 가서 유람하고 즐겁게 놀았었다. 그 뒤 민() 지방, 즉 건양현(建陽縣)으로 왔지만 고향 생각만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에 인장(印章)자양서당(紫陽書堂)’을 새겼으니, 그 뜻은 하루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 뒤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자, 아들인 내게 담계(潭溪)에 살라고 하셨는데, 이제 30년이 되었다. 가난하고 병들어 생활은 구차하니, 이미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했고 또 어버이를 빛낸 자식이 되어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남긴 뜻을 감히 잊을 수 없어 삼가 아버지께서 인장에 새긴 자양서당을 거처하는 대청에 걸었으니, 이른바 음악은 사물이 생산되는 근원을 노래한 것이고, 예는 사람들이 각자의 선조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후세에 오히려 상고할 수 있을 것이다.

名堂室記

紫陽山在徽州城南五里, 嘗有隱君子居焉, 今其上有老子祠. 先君子故家婺源, 少而學於郡學, 因往遊而樂之. 旣來閩中, 思之獨不置, 故嘗以紫陽書堂者刻其印章, 蓋其意未嘗一日而忘歸也. 旣而卒不能歸, 將沒, 始命其孤熹來居潭溪之上, 今三十年矣. 貧病苟活, 旣不能反其故鄕, 又不能大其闔閭, 以奉先祀, 然不敢忘先君子之志, 敬以印章所刻牓其所居之聽事, 庶幾所謂, 樂其所自生, , 不忘其本, 後世猶有考焉.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성격이 급박하여 잘못되지 않을까 늘 걱정하셨는데, 우계현위로 재직할 때에 가죽을 몸에 차고 다닌 옛사람의 뜻을 본받아 대청 동쪽 방에 위재(韋齋)’라는 액자를 걸고 부르며 한가할 적에 거처하면서 독서하였다. 연평(延平) 나중소(羅仲素)선생이 그것을 사실로 기록했고, 사양(沙陽) 조영덕(曹令德)군도 그것을 비명에 기록했다. 도적들이 관청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더 이상 유적(遺跡)이 없게 되었다. 근래에 내 친구 석군(石君) 자중(子重)이 지현(知縣)의 일을 맡으면서 다시 액자()를 복원하고 기록을 돌에 새겨 후세 사람에게 보이도록 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가문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고 나의 성격이 매우 조급하고 급박하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경계를 더욱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취해서 침소에 걸어두고 내 자신을 채찍하고 또한 자손에게 보이는 것이다.

先君子又每自病其卞急害道, 尉尤溪時, 嘗取古人佩韋之義, 牓其聽事東偏之室曰韋齋’, 以燕處而讀書焉. 延平羅公先生仲素實記之, 而沙陽曹君令德又爲之銘. 官署中更盜火, 無復遺跡. 近歲熹之友石君子重知縣事, 始復牓焉, 且刻記銘于石, 以示後來. 熹惟先君子之志不可以不傳于家, 而熹之躁迫滋甚, 尤不可以忘先人之戒, 則又取而揭之於寢, 以自鞭策, 且示子孫.

 

대개 대청과 침당(寢堂)은 집의 정처(正處)이니, 이제 모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으로 명명하니, 오호라! 내가 어찌 감히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늦게까지 공부하지 않으며, 여기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혼령이 임하시는데 혹시라도 경건하지 못해 아버지의 교훈을 욕되게 하겠는가. ‘회당(晦堂)’은 한가할 적에 거처하는 곳이다. 내가 열 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적계(籍溪) 호선생(胡公先生), 초당(草堂), 병산(屛山) 두 유선생(劉先生)의 문하에 가서 배우라고 유언하셨다. 선생들께서는 모두 지극한 정성으로 생활하게 해 주시고 가르쳐 주셨는데, 특히 병산(屛山)께서 일찍이 자()를 지어 축하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무는 뿌리를 감추지만 봄이 되면 찬란히 펼쳐지는 것을 허용하고, 사람도 몸을 숨기지만 정신은 속에 살쪄있는 것을 밝게 드러낸다.” 나중에 연평 이선생을 모셨는데, 선생께서 내게 가르쳐주신 것도 세 선생의 설과 다르지 않았고, 이른바 ()’도 병산(屛山)의 뜻과 같았다. 내가 늘 가슴에 간직하고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곤궁에 처했다. 이제 이를 집()의 이름으로 명명하여 감히 여러 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또 나의 회()를 지향하며, 이제부터 시작하여 다시 이에 종사하고자 한다.

蓋聽事, 寢堂, 家之正處, 今皆以先君子之命命之. 嗚呼熹其敢不夙興夜寢, 陟降在玆, 無或不虔, 以忝先訓? 晦堂者, 燕字朱熹祝詞冠而欽名粵惟古制朱氏子熹㓜而騰異交朋尚焉請祝以字字以元晦表名之義木晦於根春容敷人晦於身神明内腴昔者曾子稱其友曰有若無實若虛不斥厥名而傳於書雖百世之遠也居之所也. 熹生十有四年, 而先君子棄諸孤, 遺命來學於籍溪胡公先生, 草堂, 屛山二劉先生之門. 先生飮食敎誨之, 皆無不至, 而屛山獨嘗字而祝之曰: ‘木晦於根, 春容曄敷. 人晦於身, 神明內腴.’ 後事延平李公先生, 先生所以敎熹者, 蓋不異乎三先生之說, 而其所謂晦者, 則猶屛山之志也. 熹惟不能踐修服行, 是以顚沛. 今乃以是名堂, 以示不敢忘諸先生之敎, 且志吾晦, 而自今以始, 請得復從事於斯焉.

 

대청 곁에 두 개의 협실(夾室)이 있어서 한가한 날에는 그 곳에서 정좌(靜坐)하거나 독서한다. 왼쪽의 협실을 경재(敬齋)’, 오른쪽 협실은 의재(義齋)’라 이름 붙였다. 내가 예전에 󰡔주역󰡕을 읽으면서 ()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로 외면을 바르게 한다.”는 두 구절을 보고, 이것이 학문하는 요체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힘써야 하는가의 방법은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중용󰡕을 읽다가 수도지교(修道之敎)’를 논하면서 반드시 경계하여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戒愼恐懼)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경을 간직하는 근본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을 읽으면서 명덕(明德)의 차례를 논하면서 반드시 격물치지를 우선함으로써 의()를 밝히는 단서를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두 가지의 공부가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하여 교차하여 상호 작용하고, 또 주렴계의 태극의 이론에 합치함을 본 연후에 또 밝게 드러난 것이든 숨어 있는 것이든, 크든 작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심오하든 천박하든간에, 천하의 모든 이치가 하나로 관통하지 않음이 없음을 알았다. 즐겁게 완색하면, 평생토록 하여도 싫증나지 않을 것인데 어느 겨를에 밖에 것들을 따라 다니겠는가? 때문에 ()’()’로 나의 두 서재 이름을 붙였고, 또 당실(堂室)을 명명한 의미를 차례로 서술하여 내가 아버지와 스승에게 받은 명과 이제까지 스스로 공부한 것이 이와 같음을 드러내고, 그것을 집의 벽에 써 붙여놓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핌으로써 내 자신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堂旁兩夾室, 暇日獸坐, 讀書其間. 名其左曰敬齋’, 右曰義齋’. 蓋熹嘗讀易而得其兩言曰敬以直內, 義以方外’, 以爲爲學之要, 無以易此, 而未知其所以用力之方也. 及讀中庸, 見其所論修道之敎而必以戒愼恐懼爲始, 然後得夫所以持敬之本. 又讀大學, 見其所論明德之序而必以格物致知爲先, 然後得夫所以明義之端. 旣而觀夫二者之功, 一動一靜, 交相爲用, 又有合乎周子太極之論, 然後又知天下之理幽明鉅細, 遠近淺深無不貫乎一者. 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 又何暇夫外慕哉? 因以敬義云者名吾二齋, 且歷敍所以名夫堂室之意, 以見熹之所以受命於父師, 與其區區講學之所逮聞者如此, 書之屋壁, 出入觀省, 以自詔云.

 

 

 

건강부학의 명도선생 사당기(建康府學明道先生祠記)

 

 

 

해제이 글은 순희 3(병신, 1176, 47) 421일에 쓴 글이다. 주희는 이 해 412일에 아버지의 고향인 무원을 방문하여 6월 상순 떠날 때까지 약 두 달 정도를 머문다. 이 때에 유공의 편지를 받고 이 글을 썼다.

 

 

자정전(資政殿) 대학사(大學士) 건안(建安) 유공(劉珙)이 건강지방에 기거한 이듬해 봄 2월에 처음으로 학교에 명도 선생의 사당을 세우고 신안의 무원에 있는 내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어릴 적에 정씨(程氏)의 책을 읽고 선생의 도학과 덕행이 이제까지 전승되지 못했던 공자 맹자의 전통을 실제 계승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비록 학문은 미치지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선생을 지향했습니다. 이 지방에 와보니, 읍에 상원(上元)이라는 곳이 있는데, 선생이 젊은 시절 벼슬하던 곳이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니, 균전(均田)과 제방공사(塞堤) 및 용을 포 뜨고 장대를 꺾어 버린 일과 같은 백성과 관련한 정치가 많았고, 백성들을 교육하는 뜻 역시 완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을의 나이 드신 분들에게 여쭈어 그 사실을 상고해 보았더니, 전쟁의 여파로 풍모와 풍기 습속이 더 이상 전해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크게 탄식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셔 내 뜻을 다함으로써 이 지방의 선비는 학문에 더욱 정진하고, 관리들은 법에 따라 다스리고, 백성들은 그 덕을 잊지 않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해에 큰 습격을 만나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일찍이 그 시를 암송하고 그 책을 읽으셨으니, 그래서 글을 요청하여 그것을 기록하려는 것입니다.”

建康府學明道先生祠記

資政殿大學士建安劉公珙居守建康之明年春二月, 始立明道先生之祠于學, 而以書走新安之婺源, 抵熹曰:‘吾少讀程氏書, 則已知先生之道學德行實繼孔孟不傳之統. 顧學之雖不能至, 而心鄕往之. 及來此邦, 屬邑有上元者, 先生少日宦遊處也. 考之書記, 均田塞堤, 及民之政爲多脯龍折竿, 敎民之意亦備. 然問諸故老以稽其實, 則兵革變故之餘, 風聲氣俗蓋已無復有傳者矣. 始至慨然, 卽欲奉祠, 以致吾意, 使此邦之爲士者有以興於其學, 爲吏者有以法於其治, 爲民者有以不忘於其德. 不幸歲適大侵, 救饑之事方急, 於今乃克成其志. 以吾子之嘗誦其詩而讀其書也, 故願請文以記之.’

 

그 뒤에 부학교수(府學敎授) 손모군과 심모군 역시 편지를 보내왔는데, 유공의 뜻을 치하하고 또 처음으로 애써 노력하고도 이루지 못하다가 이제 약간의 여유가 생겨 일을 추진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었습니다. 나는 편지를 보냈는데, 감탄하고 우러러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현자를 존경하고 덕을 숭상하는 공의 뜻이 아름답습니다. 이미 부유하게 하고 교육하였으니, 공의 정치는 훌륭합니다. 내게 글을 부탁하셨으니, 공의 뜻이 근면합니다. 그렇지만, 그 큰 것으로 말하자면, 선생의 학문은 이른바 옛날의 여러 성인과 견주어도 어긋나지 않고 수 백년 후의 성인이라도 미혹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말하자면, 선생께서 상원지방에서 정치의 원대함에 대해서는 칭송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에 엎드려 생각해봅니다. 선생의 학문은 높고도 원대합니다. 그러나 선생께서 사람을 교육하는 방법은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학자들이 비근한 것은 버리고 고원한 것만 추구하며 아래에 처해있으면서도 높은 데만 쳐다보아 끝내 얻는 게 없으니, 큰 것만을 쫓는 무리들이 살피지 못하는 점입니다. 상원지방에서의 정치가 협소하고 비근한 것 같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찮은 선비라도 진실로 사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반드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 그 속에 담긴 뜻을 또 어찌 대소로 나누어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못난 제가 이것으로 공의 명을 받들고자 합니다. 공의 뜻과 선생의 학문 모두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旣而府學敎授孫君某, 沈君某亦以書來, 申致公意, 且具道公始之所以焦勞而未及, 與今之所以暇予而得爲者, 其語詳焉. 熹發書, 喟然仰而嘆曰: ‘尊賢尙德, 公之志則美矣. 旣富而敎, 公之政則得矣. 屬筆於我, 公之意則勤矣. 雖然, 先生之學自其大者而言之, 則其所謂考諸前聖而不謬, 百世以俟後聖而不惑者, 蓋不待言而喩. 自其小者而言之, 則上元之政, 於先生之遠者大者又懼其未足以稱揚也, 吾何言哉? ’於是伏而思之, 先生之學固高且遠矣, 然其敎人之法, 必自致知, 正心, 誠意至於治國平天下, 灑埽應對至於窮理盡性, 循循有序, 而嘗病世之學者捨近求遠, 處下窺高, 所以輕自大而卒無得焉, 則世之徒悅其大者, 有所不察也. 上元之政誠若狹而近矣, 然其言有曰:‘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必有所濟’, 則其中之所存者, 又烏得以大小而議之哉? 區區不敏, 竊願以是承公之命, 庶幾於公之志, 先生之學兩有補焉.

 

또 공의 충직한 말과 원대한 사고로 미루어 볼 때, 지금은 비록 외직에 있지만 이와 같이 급급하게 재난을 구제하려 하니, 명도선생이 간직하고 있는 것에서 깊이 감동받아 암암리에 합치하는 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사당을 건립하는 것이 어찌 단지 현자를 존숭하고 덕을 숭상하는 뜻을 다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겠습니까! 만약 공의 뜻을 미루어서 선생이 교육하던 바로써 사람을 교육하고 자신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실질에 종사하여 헛소리나 하고 분수를 알지 못한 채 잘난 체하는 폐단을 없게 하는 것, 이는 곧 손군과 심군 두 사람의 책임입니다. 손군과 심군의 노력, 나는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순희 3(1176) 4월 병신일, 신안 주희 기록하다.

又惟公之忠言大慮旣已效於朝廷, 今雖在外, 而其所以救菑弭患者又如此其汲汲也, 則於先生之所存, 必有深感而黙契于中者矣. 其祠之也, 豈獨以致其尊賢尙德之意, 使民不忘而已哉若夫推公之志而以先生之所以敎者敎其人, 使之從事於爲己愛人之實而無虛言蠟等之弊, 是則孫, 沈二君之任也歟. 二君勉旃, 熹於是其有望焉耳矣. 淳熙三年夏四月丙申, 新安朱熹記.

 

 

 

휘주 무원현학 장서각기(徽州婺源縣學藏書閣記)

 

 

 

해제이 글은 순희 3(병신, 1176, 47)에 쓴 글이다.

 

 

천하의 도는 그 실질적 근원이 천명의 성에 있고, 군신과 부자, 형제, 부부, 친구의 사이에서 행해진다. 그 문장은 성인의 손에서 나와, 󰡔()󰡕, 󰡔()󰡕, 󰡔()󰡕, 󰡔()󰡕, 󰡔()󰡕, 󰡔춘추(春秋)󰡕, 공자와 맹자의 책에 보존되어 있다. 근본과 말단이 서로 따르고 사람과 사람의 말씀이 서로 발명하니, 모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천리와 인륜, 자연사물의 위대한 질서와 법칙은 진실로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옛 성인이 이 도를 영원토록 천하에 밝히고자 할 때, 그 정밀하고 세세한 내용은 문자가 아니면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복희씨 이래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인들이 경전을 쓴 이후에 세상에 전달하고 교육체계의 수립이 찬란하고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아버리는 성인이 아닌 세상의 보통사람들은 반드시 이를 통해 그 이치를 탐구한 뒤에 지향해야 할 바를 알고 힘써 실천함으로써 끝내야지, 배불리 먹고 편안히 앉아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문득 깨닫거나 혼자서 얻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열(傅說)이 고종에게 옛날의 교훈에서 배워야 얻음이 있다.”고 고했고, 공자 역시 사람을 가르칠 때 옛 것을 좋아하여 급급히 그것을 구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군자가 학문하고 도를 이루는 방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한나라 이래로 선비들이 책에서 추구한 것은 암기하고 표절하는 것을 공부로 여기고, 이치를 탐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요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 중 심한 자는 마침내 학문을 끊고 책을 버리고 뜬구름 잡는 허황한 지경으로 치달린다. 이 두 가지의 폐단이 같지는 않지만, 옛사람의 뜻과 비교하면 둘 다 잘못되었다. 오호! 도가 밝혀지지 않고 행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徽州婺源縣學藏書閣記

道之在天下, 其實原於天命之性, 而行於君臣, 父子, 兄弟, 夫婦, 朋友之間 ; 其文則出於聖人之手, 而存於易, , , , , 春秋, , 孟氏之籍, 本末相須, 人言相發, 皆不可以一日而廢焉者也. 蓋天理民彝, 自然之物, 則其大倫大法之所在, 固有不依文字而立者. 然古之聖人欲明是道於天下而垂之萬世, 則其精微曲折之際, 非託於文字, 亦不能以自傳也. 故自伏羲以降, 列聖繼作, 至于孔子, 然後所以垂世立敎之具粲然大備. 天下後世之人自非生知之聖, 則必由是以窮其理, 然後知有所至而力行以終之, 固未有飽食安坐, 無所猷爲而忽然知之, 兀然得之者也. 故傳說之告高宗曰:‘學于古訓乃有獲’, 而孔子之敎人亦曰好古敏以求之’, 是則君子所以爲學致道之方, 其亦可知也已. 然自秦漢以來, 士之所求乎書者類以記誦剽掠爲功, 而不及乎窮理修身之要, 其過之者則遂絶學捐書而相與馳騖乎荒虛浮誕之域, 蓋二者之蔽不同, 而於古人之意則胥失之矣. 嗚呼, 道之所以不明不行, 其不以此與

 

무원(婺源)의 학관(學官) 강당 위에 있는 처마에 장서(藏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지만 보관하고 있는 책이 없었다. 보전(莆田) 임복(林虙)이 지현(知縣)으로 부임해 일하면서 처음으로 그가 보물처럼 여기던 󰡔대제신필석경(大帝神筆石經)󰡕 몇 권을 거기에 보관하고, 또 시중의 책을 더욱 모아 대략 4,000여 권을 그 위 시렁에 진열하여,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강론하고 교육하며 암송하여 익히도록 하였다. 나는 민() 지방 출신이 아닌 타지 사람이다. 이제 일 때문에 돌아가서 그 학교를 찾았는데, 임복은 이미 이 지방을 떠나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었는데, 학자들은 오히려 그 책들을 가리키며 오랫동안 서로 감탄하는 말을 나누었다. 하루는 마침내 곧장 집을 방문하였더니, 나에게 왜 그 일을 기록하지 않느냐면서 말하기를, “요 몇 년 이래로, 고을에 배우고자 하는 아이들은 많은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라 고심했다. 그대가 진실로 선인(先人)의 나라를 잊지 않았을 것인데, 유독 이 문제만 한 마디로 깨우쳐주지 못하는가?” 내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반드시 어진 대부의 업적을 기록하여 후학에게 알리고 싶어 찾아왔지만, 도읍에는 선생과 군자들이 있고 저는 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부형(父兄)과 자제(子弟)들의 말을 생각해보고, 또 제가 차마 어길 수 없는 것인데, 감히 공경하여 승낙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들은 바를 이와 같이 기록함으로써, 고을의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알리고, 마음을 다해 그치지 말고 독서하고 도를 탐구하여 자신을 선하게 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고을에 미치고 천하에 도달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해야 함을 알게 하며, 또 임복의 덕이 무궁함을 신뢰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한다. 순희 3(병신, 1176) 여름 6월 갑술 초하루날 아침, 읍인(邑人) 주희가 기록하다.

婺源學官講堂之上有重屋焉, 牓曰藏書’, 而未有以藏. 莆田林侯虙來知縣事, 始出其所寶大帝神筆石經若干卷以塡之, 而又益廣市書, 凡千四百餘卷, 列度其上, 俾隷業者得以講敎而誦習焉. 熹故邑人也, 而客於閩. 玆以事歸而拜於其學, 則林侯已去而仕於朝矣. 學者猶指其書以相語感嘆久之. 一旦, 遂相率而踵門, 謂熹盍記其事, 且曰:‘比年以來, 鄕人子弟願學者衆, 而病未知所以學也. 子誠未忘先人之國, 獨不能因是而一言以曉之哉? ’熹起對曰:‘必欲記賢大夫之績以詔後學, 垂方夾, 則有邑之先生君子在, 熹無所辱命. 顧父兄子弟之言, 又熹之所不忍違者, 其敢不敬而諾諸? ’於是竊記所聞如此, 以告鄕人之願學者, 使知讀書求道之不可已而盡心焉, 以善其身, 齊其家而及於鄕, 達之天下, 傳之後世, 且以信林侯之德於無窮也. 是爲記云. 淳熙三年丙申夏六月甲戌朔旦, 邑人朱熹記.

 

 

 

구주(衢州) 강산현학기(江山縣學記)

 

 

 

해제이 글은 순희 3(병신, 1176, 47)에 쓴 글이다. 주희는 421일 고향인 무원에 도착하여 선영을 정리 복구하고 6월 상순 귀가길에 올라 7월 상순에 집에 돌아온다. 오는 길에 강산현에서 현학 대성전을 신축하자 기문을 쓴 것인데, 이 글은 집에 돌아와서 썼다.

 

 

건안의 웅가량(熊可量)군이 구주의 강산위(江山尉)가 되어 처음 부임했을 때, 예로부터의 전해오는 규칙과 예법에 따라 성현의 사당을 알현하였다. 그 집을 보니 모두 무너져 비가 새어 지탱할 수 없었는데, 예전(禮殿)이 더욱 심했다. 그 학교의 관리에게 물으니, 수리하지 못한 지 이미 수십 년이라 했다. 이에 우러러 탄식하고, 돌아와서 현령인 양열(湯悅)에게 보고하고, 그 일을 책임지고 새롭게 고칠 것을 요청했다. 양군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기고, 5만원을 주면서 이 돈으로 그 사업을 시작하라.”고 했다. 웅군은 고을의 관리와 학자들에게 두루 말하였고, 이윽고 50만원을 모아 마침내 올해 정월 계축에 사업을 시작하였다. 먼저 대성전부터 지었는데 한 달 조금 지나 완공했다. 용마루와 처마는 높고 우아하고 집의 모양은 위엄을 갖추었으며 차례로 단청을 하니 도식과 응합하고 예법과 일치했다. 이윽고 웅군은 그 교장에 복귀하여 여러 관리를 모으고 여러 학생들을 이끌고 성현께 제사를 올렸다. 또 남은 돈을 거둬들여 그 일을 끝까지 하여, 문극(門棘)을 줄 지워 세우고 규문(奎文)’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학생과 교사의 기숙사도 옛 모습대로 수리했다. 이에 웅군은 여러 학생들에게 다시 예를 갖춰 인사하고 나아가 과정에 맞춰 수업하도록 했고 관사에 거처하면서 때때로 노래 부르며 시를 읽고 암송했다. 고을의 유식한 이들은 모두 그것에 감탄하면서, 현위(縣尉)는 본래 도둑을 잡는 관리이지만 먹기만 하고 그 일을 소홀히 해도 괜찮다고 여겼다. 사당과 학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겠는가? 그런데 웅군은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그의 뜻과 자질이 어떠했겠는가?

建安熊君可量爲衢之江山尉, 始至, 以故事見于先聖先師之廟. 視其屋皆壞漏弗支, 而禮殿爲尤甚, 因問其學校之政, 則廢墜不修又已數十年矣. 於是俯仰歎息, 退而以告於其長湯君悅, 請得任其事而一新焉. 湯君以爲然, 予錢五萬曰:‘以是經其始.’ 熊君則徧以語于邑人之宦學者, 久之, 乃得錢五十萬, 遂以今年正月癸丑始事, 首作大成之殿, 踰月訖功. 棟宇崇麗, 貌象顯嚴, 位序丹, 應圖合禮. 熊君旣以復于其長, 合羣吏, 率諸生而釋菜焉, 則又振其餘財, 以究厥事. 列置門棘, 扁以奎文’, 生師之舍, 亦葺其舊. 於是熊君乃復揖諸生而進之, 使程其業, 以相次第, 官居廩食, 弦誦以時. 邑人有識者皆嗟嘆之, 以爲尉本以逐捕盜賊爲官, 苟食焉而不曠其事, 則亦足矣. 廟學興廢, 豈其課之所急哉? 而熊君乃能及是, 是其志與材爲如何耶?

 

내가 마침 일 때문에 고을을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웅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이 일을 한 것은 훌륭하다. 그런데 그대가 교육하는 것은 내가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옛 성인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자신을 위한 학문과 남을 위한 학문이라는 두 가지의 구분은 사실 인재와 풍속이 흥할 것인가 망할 것인가, 두터워질 것인가 야박해질 것인가가 걸린 문제이니, 가르치는 자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그대의 고을에 옛날 정씨의 제자인 양시에게서 수업을 받은 서성수(徐誠叟)라는 분이 있었는데, 학문이 심오하고 행실이 높았다. 집에 돌아와서 도를 강론하였는데, 먼 곳으로부터 달려온 제자들이 백 명이 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의 일이다. 내 생각으로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 속에, 누추하고 하찮은 마을 아래에, 홀로 그 학문의 정수를 얻어 깊이 감추어두고서 고을에 나타나지는 않는 이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를 찾아 묻는다면, 반드시 이를 살펴서 교육하는 방법을 알 것이다.” 웅군이 감사하며 말하기를 저는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뜻 역시 이 고을의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니, 바라건대 글을 써주시면 여기에 표지를 하고 걸겠습니다.”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그 사실을 모두 기록하고 또 이와 같이 그 설명을 써서 새기도록 했다. 나중에 웅군을 격려하고 또 그 학도를 보았고, 또 뒤에 교사 제자가 되어 여기에 거처할 이들에게 알려 스스로 선택할 바를 알도록 하고자 한다. 순희 3년 가을 7월 병진(丙辰), 신안 주희 기록하다.

熹時適以事過邑, 聞其言, 則以語熊君曰:‘吾子之爲是役, 則善矣. 而子之所以爲敎, 則吾所不得而聞也. 抑先聖之言有之,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二者之分, 實人材風俗盛衰厚薄之所繫, 而爲敎者不可以不審焉者也. 顧予不足以議此, 子之邑故有儒先曰徐公誠叟者, 受業程氏之門人, 學奧行高, 講道于家, 弟子自遠而至者, 常以百數, 其去今未遠也. 吾意大山長谷之中, 隘巷窮閻之下, 必有濁得其傳而深藏不市者. 爲我訪而問焉, 則必有以審乎此而知所以爲敎之方矣.’ 熊君謝曰:‘走則敬聞命矣, 然此意也不可使是邑之人無傳焉, 願卒請文, 以識玆役而幷列之.’ 熹不得而辭也, 因悉記其事, 且書其說如此, 俾刻焉. 旣以勵熊君, 且以視其徒, 又以告凡後之爲師弟子而食于此者, 使知所以自擇云爾. 淳熙三年秋七月丙辰, 新安朱熹記.

졸재기(拙齋記)

 

 

 

해제이 글은 순희 3(병신, 1176, 47) 101일에 쓴 글이다.

 

 

임천 태수(臨川太守) 조경명(趙景明)이 정사를 본 이듬 해, 정치가 통하고 백성이 화목해서, 군이 무사태평하였다. 한가한 어느 날 함께 북쪽에 편하게 앉아 있다가 집을 서쪽으로 돌아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옛날 사람이 만든 추성재(秋聲齋)가 있었는데, 서까래도 몇 개 되지 않은 오래된 집으로 사람이 온 흔적도 거의 없었고, 거의 기울고 아주 비좁았다. 기꺼이 그것을 즐기기로 하고, 심하게 썩어 부서지고 무너진 부분들을 조금 고쳐 며칠 동안 지냈다. 얼마 후 홀로 우러러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누추한 집에 졸렬한[] 내가 아니라면 누가 거처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리고 곧 그 편액의 제목을 졸재(拙齋)’라 바꾸고 무이(武夷)에 있는 내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나의 졸렬함은 리를 깨닫지 못할까 매우 걱정됩니다. 당신께서 내게 한 말씀해 주시면 스스로를 경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臨川太守趙侯景明視事之明年, 政通人和, 郡以無事. 暇日, 相便坐之北, 循廡而西, 入叢竹間, 得前人所爲秋聲齋者, 老屋數椽, 人跡罕至, 而其傾欹痺狹又特甚. 意欣然樂之, 因稍易其腐敗撓折之尤者而日居焉. 間獨仰而嘆曰:‘是室之陋, 非予之拙, 則孰宜居之哉? ’乃更題其牓曰拙齋’, 而以書走武夷, 謁予記曰:‘吾之拙, 甚懼不足以爲理. 吾子因是而予之一言, 庶乎其有以自警也.’

 

이 당시, 나는 아직 조태후와 교류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의 곧고 신실하며 다식함은 들었었다. 그리고 이 고을에 와서 정사를 보면서, 다른 술수를 쓰지 않고 법과 직분을 존중하고 따르니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하여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그것을 듣고서 더욱 흠모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말에서 이와 같은 그의 뜻을 알 수 있으니, 예전에 들었던 것들은 그에게는 오히려 사소한 것임을 알았다. 그 말을 즐겁게 듣고 또 다시 나의 비루하고 완고하며 우둔함이 조태후보다 훨씬 심하다는 것을 알고서, 우러러 탄식하고 말하기를 조태후가 졸재라고 이름 지은 것에서 그의 뜻을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졸렬한 내가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기록하겠는가?”

方是之時, 予蓋夫始得遊於趙侯也, 然其直諒之操, 多聞之美, 則聞有日矣. 及其爲政於此邦也, 奉法遵職, 不作聰明而吏畏民安, 境內稱治, 則又聞之而加鄕往焉. 今也乃於其言而得其志如此, 則鄕之所聞者, 於侯抑餘事也. 誠竊樂聞其說, 且復自念, 若予之鄙樸頑鈍, 蓋有甚於侯者, 則亦仰而歎曰:‘趙侯所以名其齋者, 爲足以見其志矣. 然而非予之拙, 則亦孰宜記之哉?

 

나는 예전에 천하의 일은 모두 탐구할 수는 없지만 그 이치는 하나일 뿐이라고 들었다. 군자의 학문은 이 이치를 탐구하여 지키는 것이다. 그것을 탐구하는 것은 하나로 통달하려는 것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안정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견고한 것이니, 이런 까닭에 졸()에 가까운 것이다. 대개 사사로운 교활한 모략을 쓰지 않고 오직 리를 따르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옳음을 바르게 하고 그 이로움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니, 이 역시 졸()일 뿐이다. 조후(趙侯)의 학문은 장차 여기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에 기탁한 것은 이미 천박하다. 또 오히려 자기에 대한 믿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 마음을 경계할 바를 구하려 하였으니, 그 의지가 어떠한가? 만약 나의 졸렬함으로 치자면, 그 재주가 부족함이니, 어찌 이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조후(趙侯)의 방(拙齋)에 기문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허락한 것을 문득 생각하고, 태후가 스스로를 이라고 한 행동을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비록 그 말과 언사를 좋게 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또 어떻게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태후에게 부탁받은 것을 헛되게 할 수 없어 이 글을 써서 나의 뜻을 다하고자 한다. 순희 병신년 겨울 10월 임신 초하루에 신안 주희 기록하다.

抑嘗聞之, 天下之事不可勝窮, 其理則一而已矣. 君子之學, 所以窮是理而守之也, 其窮之也欲其通於一, 其守之也欲其安以固. 以其一而固也, 是以近於拙. 蓋無所用其巧智之私而唯理之從, 極其言則正其誼不謀其利, 明其道不計其功, 是亦拙而已矣. 趙侯之學, 蓋將進此. 然其所以託名者, 則已卑矣. 且猶不輕自信而必求所以警其心焉, 則其志爲如何哉? 若予之拙, 乃其材之不足, 而何足以語此? 顧輒自予爲足以記侯之齋者, 視侯之爲愧亦甚矣. 雖欲善其辭說, 其又何以爲觀省之助乎? 然侯之所以見屬, 有不可虛者, 姑亦書此, 以致予之意焉.’ 淳熙丙申冬十月壬申朔, 新安朱熹記.

 

 

 

복재기(復齋記)

 

 

 

해제이 글은 순희 3(병신, 1176, 47) 10월에 쓴 글이다. 1023일 경, 황중본(黃仲本)과 오영(吳英)이 찾아와 배웠다.

 

 

옛날 성인이 역을 지을 때, 음양의 변화를 본떴는데, 양이 위에서 사라지면 아래에서 자라나는 괘를 복()이라 했다. ()은 되돌아오는 것()이니, 양이 이미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큰 덕은 변화를 도탑게 하고 작은 덕은 냇물의 무궁한 흐름이니, 어찌 어느 겨를에 이미 사라진 기가 바야흐로 자라나는 데 도움이 되겠는가? 저기에서 끊어진 것이 여기에서 생겨남을 보고서, 그것이 왕래하는 형상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사람 또한 그러하여 태화(太和)를 보합(保合)하니, 선단(善端)이 무궁하다. 이른바 복()이란 이미 놓아버린 마음을 추적하여 되돌리는 것이나 이미 내버린 선()을 거둬들여 거기에 예속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멋대로 하여 밖으로 치달리게 하지 않으면 본심의 전체가 바로 여기에 보존되어 본연의 선이 저절로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오호라! 성인이 복괘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음을 찬탄하고 또 덕의 근본이 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昔者聖人作易, 以擬陰陽之變, 於陽之消於上而息於下也, 爲卦曰復. , 反也, 言陽之旣往而來反也. 夫大德敦化而川流不窮, 豈假夫旣消之氣以爲方息之資也哉? 亦見其絶於彼而生於此, 而因以著其往來之象爾. 唯人亦然, 太和保合, 善端無窮, 所謂復者, 非曰追夫已放之心而還之, 錄夫已棄之善而屬之也, 亦曰不肆焉以騁於外, 則本心全體卽此而存, 固然之善自有所不能已耳. 嗚呼聖人於復之卦, 所以贊其可見天地之心而又以爲德之本者, 其不以此歟?

 

내 친구 황군(黃君) 중본(仲本)()’자를 써 방이름을 짓고, 내게 알리기를 바라건대 당신의 말을 벽에 써 붙여놓고 날마다 보면서 잊지 않으려 하네.”라고 했다. 나는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그 이름지은 뜻을 물었더니, 중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려서 배울 적에, 아버지께서 정씨의 책을 내게 주었는데, 읽고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께서는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다시 물으니, ‘네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면 될 것이다.’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나서 거처함에 반드시 공손히 하고, 일을 집행할 때는 반드시 공경히 하고, 사람을 대할 적에는 반드시 충성되게 하였다. 이렇게 삼 년을 한 뒤에야 터득했다. 그러나 그것을 보존함이 완숙하지 못해 그것을 폭넓게 확충하지 못했다. 지난 날에는 그 근본을 따르지 못했다. 그래서 사물들에서 그것을 추구하고자 했지만, 간혹 도리어 밖으로 끌려 다녀 그 내면을 더욱 현혹시켰다. 이제 집 한쪽에 있는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하고 이 (복재라는) 방이름을 걸고 날마다 거처하고, 정성을 다해 부모를 모시고 여력이 있으면 옛 학문에 종사한다면, 아마도 오래도록 진정으로 힘써 노력하면 일상생활이 하나로 관통하여 안과 밖이 분리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게을러서 스스로 노력하지 못할까 두렵다. 이 때문에 자네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이네.”

吾友黃君仲本以名齋, 而謁於予曰:‘願得吾子之言以書于壁, 庶乎其有以目在之而不忘也.’ 予不敢辭, 而請其所名之意. 仲本則語予曰:‘吾之幼而學也, 家公授以程氏之書, 讀之而有不得於其說者, 則以告而願請益焉. 公曰󰡔思之󰡕. 又問, 則曰󰡔反諸爾之身以求焉可也󰡕. 自吾之得是言也, 居處必恭, 執事必敬, 其與人也必忠, 如是以求之, 三年而後有得也. 然其存之也未熟, 是以充之不周. 往者不循其本, 顧欲雜乎事物之間以求之, 或乃反牽於外而益眩於其內. 今也旣掃一室於家庭之側, 揭以是名而日居之, 蓋將悉其溫淸定省之餘力以從事於舊學, 庶乎眞積力久, 而於動靜語黙之間, 有以貫乎一而不爲內外之分焉. 然猶懼其怠而不能以自力, 是以願吾子之相之也.’

 

중본이 방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생각해보니, 내가 배운 것과 일치했다. 그러나 그것을 견고하게 지키고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은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부끄러움이다. 감사하면서 말하기를, “내 말이 자네보다 나을 게 없고, 자네가 내게 베푼 성의 역시 이미 후하네. 마음에 새기고, 뜻을 하나로 모아 밖으로 치닫고 빈말을 하는 폐단을 경계하면, 자네가 추구하는 바에 어려움이 있겠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네. 옛사람들의 학문은 박문(博文)하여 예로써 요약(約禮)하고, 선을 밝혀 몸을 성실하게 하고, 반드시 사물을 탐구하여 앎이 지극해진 뒤에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공자, 안연, 증자, 자사, 맹자가 서로 주고받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학자들의 공부과정이다. 중본은 이를 성실하게 성찰하여 함께 정진하고 함양하니, 도학의 본체와 작용, 성현의 덕업이 중본에게 있지 않다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바라건대 이 말을 벽에 기록하고, 또 집안을 오갈 때마다 바로잡는다면, 나 역시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순희 병신 겨울 10월 무인(戊寅), 신안 주희 기록하다.

予惟仲本所以名齋之意蓋與予之所聞者合, 然其守之固而行之力, 則吾黨之士皆有愧焉, 則起謝曰: ‘僕之言未有以進於吾子, 而子之賜於僕則已厚矣. 且將銘諸心, 移諸同志, 以警夫空言外徇之敝, 而豈敢有所愛於子之求哉. 抑予聞之, 古人之學博文以約禮, 明善以誠身, 必物格而知至, 而後有以誠意而正心焉. 此夫子, , , 子思, 孟子所相授受而萬世學者之準程也? 仲本誠察於此, 有以兩進而交養焉, 則夫道學之體用, 聖賢之德業不在仲本而安歸乎? 願書此言以記於壁, 且將因其過庭之際而就正焉, 予亦庶乎其又有以自新也. 淳熙丙申冬十月戊寅, 新安朱熹記.

 

 

 

강주(江州) 염계선생서당(濂溪先生書堂) 중건기

(重建記)(江州重建濂溪先生書堂記)

 

 

 

해제이 글은 순희 4(정유, 1177, 48) 2월에 쓴 글이다. 27, 강주(江州) 태수 반자명(潘慈明)과 통판(通判) 여승기(呂勝己)가 염계서당을 중건하자, 이 기문을 썼다.

 

 

세상의 도가 일찍이 없는 적이 없지만, 사람에게 기탁한 것이 혹은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이어지기도 한 까닭에 세상에 행해지는 도 역시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다. 이것은 천명이 하는 것이지 사람이 지략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릇 하늘은 높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음양오행이 실타래처럼 함께 섞이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오고가며, 그것들이 조화롭게 발육하여 만물이 각기 다르니, 각기 본연의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인, , , 지의 본성과 군신,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사이의 인륜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조금도 빈틈이 없으니, 어찌 나라의 흥망에 따라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기()의 운행은 진함과 엷음, 나뉨과 합함이 있고, 사람이 기를 품수함에는 맑음과 탁함, 어두움과 밝음이 혹 다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도가 사람에 기탁하여 세상에 행해지는 것에서, 오직 성인만이 도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지, 사적인 교묘한 지략과 과감함으로 억측하고 억지로 탐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도(河圖)가 나오자 팔괘를 그렸고, 낙서(洛書)가 드러나자 홍범구주(九疇)를 서술하였다. 공자는 유학의 흥망을 역시 하늘에 추론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성인이 우리를 속이지 않았음을 살필 수 있다. 염계(濂溪) 선생의 경우, 성인으로서 유학의 도를 깨달아 전수한 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끊어진 것을 쉽게 계승하고 매우 어두웠던 유학의 도를 이렇게 빨리 밝혔겠는가? 주나라가 쇠퇴하고 맹자가 죽으면서부터 이 유학의 도는 더 이상 전수되지 않았고, 다시 진나라와 한나라, 그리고 진()나라, ()나라, 당나라를 거쳐 다시 우리 송나라에 이르렀다. 우리 송나라의 태조께서 천명을 받자, 오성(五星)이 규숙(奎宿)에 모여들어 진실한 문명의 운행을 개창하였다. 그런 뒤에 엷은 기는 진해지고, 흩어진 기는 모여, 청명(淸明)한 기가 온전하게 사람에게 부여되었다. 선생이 출현하여, 스승의 전수에 따르지 않고서 묵묵히 도의 본체를 깨달아 󰡔태극도󰡕󰡔통서󰡕를 지었으니, 도의 핵심에 근본한 것이다. 당시 정씨가 있음을 보고 알았고, 마침내 확대하고 추론하여 밝혀 은미한 천리, 드러난 인륜, 수많은 사물들, 그윽한 귀신들을 분명하게 하나로 관통시켰다. 그리하여 주공, 공자, 맹자의 전수가 당시의 세상에 다시 환하게 명쾌해졌다. 마치 하은주 시대의 앞에 나온 것과 같이, 뜻 있는 선비라면 탐구하고 토론하며 몸에 간직하고 실천함으로써 그 올바름을 잃지 않아야 한다. ! 성대하도다. 하늘이 내린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道之在天下者未嘗亡, 惟其託於人者或絶或續, 故其行於世者有明有晦. 是皆天命之所爲, 非人智力之所能及也. 夫天高地下, 而二氣五行紛綸錯糅, 升降往來於其間, 其造化發育, 品物散殊, 莫不各有固然之理. 而最其大者, 則仁, , , 智之性, 君臣, 父子, 昆弟, 夫婦, 朋友之倫是已. 是其周流充塞, 無所虧間, 夫豈以古今治亂爲存亡者哉? 然氣之運也, 則有醇漓判合之不齊; 人之禀也, 則有淸濁昏明之或異. 是以道之所以託於人而行於世者, 惟天所畀, 乃得與焉, 決非巧智果敢之私所能億度而强探也. 河圖出而八卦畫, 洛書呈而九疇敍, 而孔子於斯文之興喪, 亦未嘗不推之於天. 聖人於此, 其不我欺也審矣. 若濂溪先生者, 其天之所畀而得乎斯道之傳者與. 不然, 何其絶之久而續之易, 晦之甚而明之亟也? 蓋自周衰, 孟軻氏沒, 而此道之傳不屬. 更秦及漢, 歷晉, , 唐以至于我有宋, 聖祖受命, 五星集奎, 實開文明之運. 然後氣之漓者酵, 判者合, 淸明之禀得以全付乎人而先生出焉, 不繇師傳, 黙契道體, 建圖屬書, 根極領要. 當時見而知之, 有程氏者, 遂擴大而推明之, 使夫天理之微, 人倫之著, 事物之衆, 鬼神之幽莫不洞然畢貫于一, 而周公, 孔子, 孟氏之傳煥然復明於當世. 有志之士得以探討服行而不失其正, 如出於三代之前者. 嗚呼盛哉非天所畀, 其孰能與於此?

 

선생의 성은 주()씨이고, 이름은 돈이(惇頤)이며, 자는 무숙(茂叔)이다. 세가(世家)는 춘릉(舂陵)인데, 노년에 여산(廬山) 아래에 살았는데,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냇가의 이름을 염계(濂溪)’라 하고, 그 상류에 서당을 지었다. 지금 그 옛터가 구강군(九江郡) 지역 남쪽 십리에 있는데, 거칠고 풀이 우거져 관리하지 않은 지 수 년이 되었다. 순희 병신(丙申, 1176), 현재 태수(太守) 반자명(潘慈明)과 그 통수(通守) 여승기(呂勝己)가 처음으로 그 곳에 다시 서당을 짓고, 옛 이름을 걸고 선생의 제사를 모셨다. 여후(呂侯)는 다시 편지를 보내 내게 그 기문을 부탁했다. 내가 어리석고 모자라서 그것을 맡기엔 부족하다. 다만 다행히 옛날에 정씨의 학문에 대해 들은 것이 있고, 그로 인해 선생의 글을 삼가 읽어 그 사람됨을 미루어 알았다. 근년에 일없이 집에 박혀 지내면서 늘 구강에 한 번 가서 염계의 물 위에서 갓끈을 씻으면서 고상한 덕행과 기상을 다 헤아려보고 싶었지만, 병 때문에 가지 못했다. 진실로 내 뜻은 아니지만 이제 다행스럽게도 문자로 그 곳에 이름을 기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선생의 도가 하늘에 부합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근원을 헤아려, 그 일을 이와 같이 전한다. 훗날의 군자가 살펴 고찰하여 흥기할 수 있다면, 이는 바로 (반후와 여후) 두 사람의 뜻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4년 정유 봄 2월 병자에 기록하다.

先生姓周氏, 諱惇頤, 字茂叔, 世家舂陵, 而老於廬山之下, 因取故里之號以名其川曰濂溪’, 而築書堂於其上. 今其遺墟在九江郡治之南十里, 而其荒茀不治, 則有年矣. 淳熙丙申, 今太守潘侯慈明與其通守呂侯勝己始復作堂其處, 揭以舊名, 以奉先生之祀. 而呂侯又以書來, 屬熹記之. 熹愚不肖, 不足以及此. 獨幸嘗竊有聞於程氏之學者, 困得伏讀先生之書而想見其爲人. 比年以來, 屛居無事, 常欲一泛九江, 入廬阜, 濯纓此水之上, 以致其高山景行之思, 而病不得往. 誠不自意, 乃今幸甚, 獲因文字以託姓名於其間也. 於是竊原先生之道所以得於天而傳諸人者, 以傳其事如此, 使後之君子有以觀考而作興焉, 是則庶幾乎兩侯之志也云爾. 四年丁酉春二月丙子記.

 

 

 

정강부학기(靜江府學記)

 

 

 

해제이 글은 순희 4(정유, 1177, 48) 1124일에 쓴 글이다.

 

 

옛날 성왕(聖王)이 학교를 설립하여 그 백성을 교육할 때 가정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질서를 세워, 그 백성들 모두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백성들을 교육하는 구체적 내용은 모두 하늘이 부여해 준 인륜에 근거하여 등급과 층차에 따라 조절함으로써 그들을 개도하고 권면하여, 마음을 밝히고 몸을 닦으며, 부자형제부부친구 사이에서 실천하고, 그것을 군신상하인민사물의 사이에까지 넓혀 반드시 그 분수를 다하도록 하였다. 그 학문이 완성되면, 또 현명하고 유능한 이를 작위에 배치했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의리가 빛나고 풍속이 순후하였고, 공경(公卿), 대부(大夫), 열사(列士)의 선발이 각기 마땅한 인재를 얻었다. 이것이 선왕께서 학교의 벼슬은 정치의 근본이자 도덕의 귀결처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한 까닭이다.

古者聖王設爲學校, 以敎其民, 由家及國, 大小有序, 使其民無不入乎其中而受學焉. 而其所以敎之之具, 則皆因其天賦之秉彝而爲之品節, 以開導而勸勉之, 使其明諸心, 修諸身, 行於父子, 兄弟, 夫婦, 朋友之間, 而推之以達乎君臣上下, 人民事物之際, 必無不盡其分焉者. 及其學之旣成, 則又興其賢且能者寘之列位. 是以當是之時, 理義休明, 風俗醇厚, 而公卿, 大夫, 列士之選無不得其人焉. 此先王學校之官所以爲政事之本, 道德之歸而不可以一日廢焉者也.

 

후세의 학교의 설립은 비록 선왕의 때와 다르지는 않지만, 스승이 교육하는 것과 제자가 배우는 것은 모두 근본을 망각하고 말단을 쫓으며 이익만 생각하고 의리는 없으니 더 이상 선왕의 뜻이 없다. 이 때문에 학교라는 이름은 있지만 그 실질은 드러나지 않으며, 그 결과 풍속은 날로 무너지고 인재를 날로 쇠퇴하니, 비록 한당(漢唐)이 가장 흥성했던 때라도 하은주 삼대의 숙계(叔季)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까닭을 살피지는 않고, 마침내 학교는 허망한 글이나 가르치고 도덕과 정치의 실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에 선비들은 노자와 불씨의 문하에서 도를 추구하고, 관리들은 회계장부나 관리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니, 학교가 겨우 있기는 하지만 마침내 없어지지 않기를 기대하기 것 역시 어렵다.

至於後世學校之設, 雖或不異乎先王之時, 然其師之所以敎, 弟子之所以學, 則皆忘本逐末, 懷利去義而無復先王之意. 以故學校之名雖在, 而其實不擧, 其效至於風俗日敝, 人材日衰, 雖以漢唐之盛隆, 而無以彷彿乎三代之叔季. 然猶莫有察其所以然者, 顧遂以學校爲虛文而無所與於道德政理之實, 於是爲士者求道於老子, 釋氏之門, 爲吏者責治乎簿書期會之最, 蓋學校之僅存而不至於遂廢者, 亦無幾耳.

 

근래에 임금께서 이와 같은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몸소 수레를 타고 학관에 오시어 여러 학생들에게 조칙을 발표하시고 벼슬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진정한 학자가 되라고 격려하시니, 은덕을 베푸시는 뜻이 이미 매우 아름답습니다. 정강(靜江)의 수신(守臣)인 광한(廣漢) 장식(張栻)이 이 때에 마침 그 부학(府學)을 새롭게 하였고, 일을 끝내자 관속들에게 명령하여 도서를 구비하도록 하고, 사람을 보내 무이산 자락에 있는 내게 기문을 부탁했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 싶지만, 그의 뜻을 욕되게 할 수 없었다. 도서를 살피고 고찰하여 그 일을 바로잡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정강(靜江)의 학교는 당나라 때 관찰사 농서(隴西) 이후(李侯) 창로(昌巙)가 처음으로 태수가 기거하던 곳의 서북쪽에 설립하였다가 나중에 동남쪽으로 옮겼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 선비들은 지대가 낮아 막히는 것을 걱정했다. 송나라 건도 3, 지부사(知府事) 연평(延平) 장후(張侯) ()가 옛 학교를 절거하고 시안의 옛날 군의 자리로 옮겼다. 그 곳은 군이 없어지면서 절간 세 칸이 들어섰는데, 처음에는 그 곳으로 옮길 것을 의논했지만, 부사(部使)가 이교(異敎)에 미혹되어 지탱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 중 하나를 겨우 얻어 이사했지만, 규모가 좁고 누추하여 다시 쉽게 무너져 내렸다. 지금 장식 태후가 온 뒤에 비로소 좌우의 절을 없애고 좋은 건축자재와 장인을 모아 그 땅을 합쳐 하나로 신축하였다. 전각(殿閣)은 유심(幽深)하고 당서(堂序; 정청正廳)는 광심(廣深)하며, 기숙사는 행랑채를 빙 둘러싸고 있는데, 위엄 있게 잘 정돈되어 있고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다. 그 제후의 학교에서 천자의 명령과 가르침을 전달하고 선양하는 것이 매우 합당했다. 이에 나는 한숨 쉬며 일어나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무릇 불교를 멀리하고 유학을 숭상하여 앞 사람들의 공적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그 사람이 하였으니, 이는 이미 기록했을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 그 사람이 여기에서 가르친 것은 의리를 밝히고 근본으로 돌아가 교화를 이끈 선왕께서 남긴 뜻을 따라 학자들이 모두 그 까닭을 알도록 하여, 명철한 임금의 조칙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명예나 벼슬을 쫓지 말고 진정한 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 아님이 없으니, 그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어찌 한때 흥기하는 것을 공적으로 삼으려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특별히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상세하게 논하고 그 구체적 내용을 이와 같이 기록하여 후대에 알리는 것이다.

乃者聖上慨然憫其如此, 親屈鑾路, 臨幸學官, 發詔諸生, 勵之以爲君子之儒而無慕乎人爵者, 德意旣甚美矣. 而靜江守臣廣漢張侯栻適以斯時一新其府之學, 亦旣畢事, 則命其屬具圖與書, 使人於武夷山間謁熹文以記之. 顧非其人, 欲謝不敢, 而惟侯之意不可以虛辱, 乃按圖考書, 以訂其事. 則皆曰, 靜江之學自唐觀察使隴西李侯昌巙始立於牙城之西北, 其後又徙于東南, 歷時旣久, 士以卑痺堙鬱爲病. 有宋乾道三年, 知府事延平張侯維乃撒而遷于始安故郡之墟. 蓋其地自郡廢而爲浮屠之室者三, 始議易置, 而部使者有惑異敎, 持不可者. 旣乃僅得其一, 遂因故材而亟從焉, 以故規模褊陋, 復易摧圮. 至于今侯, 然後乃得幷斥左右佛舍置它所, 度材鳩匠, 合其地而一新焉. 殿閣崇邃, 堂序廣深, 生師之舍, 環列廡外, 耽耽翼翼, 不侈不陋. 於其爲諸侯之學, 所以布宣天子之命敎者, 甚實宜稱. 熹於是喟然起而歎曰:‘夫遠非鬼, 崇本敎以侈前人之功, 侯之爲是, 則旣可書已. 抑熹聞之, 侯之所以敎於是者, 莫非明義反本, 以遵先王斅學之遺意, 而欲使其學者皆知所以不慕人爵, 爲君子儒, 如明詔之所謂者, 則其可書, 又豈徒以一時興作之盛爲功哉? ’故特具論其指意所出者爲詳, 而幷書其本末如此, 以告來者.

 

그의 자는 경부(敬夫)로 승상 위충헌공(魏忠獻公)의 큰아들이다. 그의 학문은 정씨(程氏)를 따라 공자와 맹자에 도달하여 자신을 도야하고 사람들을 교육하되, 한결같이 거경(居敬)을 위주로 하고 리를 밝히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일찍이 좌사부랑시강(左司副郞侍講)으로 구금되었고, 나중에 풀려나 이 지방에 와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였다. 그의 논설과 정교(政敎)는 모두 분명한 법도가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배운 선비들 역시 스승을 얻었다고 했고, 그 역시 그가 교육해야 하는 바에 의심이 없었으니, 서로 함께 그 마음을 다 했을 것이다. 순희 4년 겨울 11월 기미일 동지(冬至), 신안 주희 기록하다.

侯字敬夫, 丞相魏忠獻公之嗣子. 其學近推程氏, 以達於孔孟, 治己敎人, 一以居敬爲主, 明理爲先. 嘗以左司副郞侍講禁中, 旣而出臨此邦, 以幸遠民. 其論說政敎, 皆有明法. 然則士之學於是者, 亦可謂得師矣. 其亦無疑於侯之所以敎者而相與盡其心哉淳熙四年冬十有一月己未日南至, 新安朱熹記.

 

 

 

원주(袁州) 주학(州學) 세 선생 사당기(袁州州學三先生祠記)

 

 

 

해제이 글은 순희 5(무술, 1178, 49) 101일에 쓴 글이다.

 

 

의춘(宜春) 태수(太守) 광한(廣漢) 장후(張侯)는 그 군의 학교를 신축하고, 염계와 하남(河南) 세 선생의 사당을 강당의 동쪽에 세우고 내게 편지를 보내와 기문을 부탁했다. 대개 추나라의 맹자가 죽고 나자 성인의 도가 전해지지 않았다. 세속에서 말하는 이른바 선비의 학문(儒者之學)이란 안으로는 장구(章句)나 문장을 익히는 것에 불과하고, 밖으로는 노자와 석씨의 말과 뒤섞였다. 그들이 자신을 수양하고 인민을 다스리려는 이유는 한결 같이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데서 나오니 천박하고 성인의 도와는 어긋나 정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군주의 덕은 삼대의 융성하던 때와 견줄 수가 없고, 백성들의 풍속도 그 때에 뒤진다. 이렇게 된 지 지금으로부터 이미 천 여 년이 넘었다. 염계 주선생(周先生)께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성현의 심오한 도를 처음을 깊이 탐구하여 조화의 본원을 꿰뚫어 살피시고 홀로 마음으로 깨달았다. 그리하여 만물의 형상을 법 받아 저술하시어 심오한 도를 드러내 밝히시니, 말의 의미는 비록 간략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성명(性命)의 은미함과 자신을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하남(河南)의 두 정선생(程先生)께서 직접 찾아뵙고 전수받았다. 이에 그 학문이 마침내 세상에 행해지게 되었다. 그 학설을 강론하는 선비는 비로소 고루한 세속의 학문과 이단의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자신을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 역시 늘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현혹되지 않고 요임금과 순임금이 백성들을 다스렸던 것처럼 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대개 세 선생께서 오늘날에 남긴 공적이 적지 않다. 그러나 논하는 이들은 아직 그 학문을 고찰하지 못하고, 또 옛날과 오늘날의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의 차이에 얽매어 그 근본과 말단 원류가 이와 같은 알지 못한 채 경솔하게 논의한다. 그 가운데 조금 안다는 이들은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데서 구하며, 아래에 처해 있으면서 고원한 데만 쳐다보니, 일에 나아가서 이치를 탐구함으로써 자기를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실질을 절실하게 할 줄 알 지 못한다. 아아! 장후(張侯)가 이 사당을 짓고 내게 기문을 부탁한 것은 그 뜻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宜春太守廣漢張侯旣新其都之學, 因立濂溪, 河南三先生之祠于講堂之東序, 而以書來, 屬熹記之. 蓋自鄒孟氏沒而聖人之道不傳, 世俗所謂儒者之學, 內則局於章句文詞之習, 外則雜於老子釋氏之言, 而其所以修己治人者, 遂一出於私智人爲之鑿, 淺陋乖離, 莫適主統, 使其君之德不得比於三代之隆, 民之俗不得躋於三代之盛. 若是者, 蓋已千有餘年於今矣. 濂溪周公先生奮乎百世之下, 乃始深孫聖賢之奧, 疏觀造化之原而獨心得之, 立象著書, 闡發幽祕, 詞義雖約, 而天人性命之微, 修己治人之要莫不畢擧. 河南兩程先生旣親見之而得其傳, 於是其學遂行於世. 士之講於其說者, 始得以脫於俗學之陋, 異端之惑, 而其所以修己治人之意, 亦往往有能卓然不惑於世俗利害之私, 而慨然有志於堯舜其君民者. 蓋三先生者, 其有功於當世於是爲不小矣. 然諭者旣未嘗考於其學, 又拘於今昔顯晦之不同, 是以莫知其本末源流之若此而或輕議之. 其有略聞之者, 則又舍近求遠, 處下窺高, 而不知卽事窮理, 以求其切於修己治人之實也. 嗚呼張侯所以作爲此祠而屬其筆於熹者, 其意豈不有在於斯與?

 

듣건대, 소흥(紹興) 초에 지금은 돌아가신 시독(侍讀) 남양(南陽) 호문정공(胡文定公)이 정씨(程氏)에게 작위와 녹봉을 주고 선성(先聖) 선사(先師)의 사당에 배향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하고 싶었다. 그 후에 나의 죽은 친구인 건안(建安) 위군(魏君) 섬지(掞之)가 태학관(太學官)이 되었을 때, 그 일을 다시 재상에게 아뢰었고, 또 형공 왕안석의 제사를 폐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에는 모두 실행되지 않았지만, 알만한 이들은 모두 그것을 한탄했다. 최근에 천자께서 특별히 조칙을 내려 임천(臨川) 백우(伯雩)라는 자를 파면하고, 위염의 말과 같이 하라 하셨다. 그리하여 조정의 공경과 신하들은 앞의 일 두 가지를 상주하여, 그것을 모두 시행했다. 또 그것을 다시 위로 미루어 염계(濂溪)까지 이르렀으니, 그 역시 배향하지 못하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

抑嘗聞之, 紹興之初, 故侍讀南陽胡文定公嘗欲有請於朝, 加程氏以爵列, 使得從食於先聖先師之廟. 其後熹之亡友建安魏君掞之爲太學官, 又以其事白宰相, 且請廢王荊公安石父子勿祠. 當時皆不果行, 識者恨之. 至於近歲, 天子乃特下詔, 罷臨川伯雩者, 略如掞之之言. 然則公卿議臣有能條奏前二議者, 悉施行之. 且復推而上之, 以及於濂溪, 其亦無患於不從矣.

 

장후(張侯)의 이름은 진()으로, 승상 위충헌공(魏忠獻公)의 아들로서 문학(文學)과 관리로서의 능력 모두 집안의 전통이 있었다. 이 사당을 보니, 또 그 사람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훗날 헌납을 종요하고 그 단서를 국가에 건의하여 세 선생의 사당에 세상에 널리 퍼지고, 이 시대에 유학과 유학의 도를 존중하는 뜻이 무궁토록 하였으니, 기록해야 할 그 아름다운 업적이 이 사당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그 일을 분명하게 논하고 또 이 설명을 붙인다. 순희 5년 겨울 10월 신묘일에 기록하다.

張侯名枃, 丞相魏忠獻公之子, 文學吏治皆有家法. 觀於此祠, 又可見其志之所存者. 異時從容獻納, 白發其端, 使三先生之祠徧天下而聖朝尊儒重道之意垂於無窮, 則其美績之可書, 又不止於此祠而已也. 故熹旣爲之論著其事, 而又附此說焉以俟. 淳熙五年冬十月辛卯記.

 

 

 

건녕부(建寧府) 건양현(建陽縣) 현학장서기(縣學藏書記)(建寧府建陽縣學藏書記)

 

 

 

해제이 글은 순희 6(기해, 1179, 50) 21일에 쓴 글이다.

 

 

옛날 성인께서 육경으로 지으셔서 후세 사람들을 교화했다. 󰡔󰡕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이치를 꿰뚫었고, 󰡔󰡕를 통해 정치의 실질을 기록했고, 󰡔󰡕를 통해 성정(情性)의 올바름으로 이끌었으며, 󰡔춘추󰡕를 통해 법과 경계의 엄격함을 드러냈고, 󰡔󰡕를 통해 행동을 바르게 하고, 󰡔󰡕을 통해 마음을 조화롭게 했다. 육경은 의리의 정미함과 고금의 득실을 관통하여 밝히고 궁극을 추구하였으니, 참으로 지극하다 하겠다. 그 책은 모두 합해 수십 권에 불과하니, 대개 그 간이(簡易)하면서도 정약(精約)함이 또 이와 같다. () 이래로, 유학자들은 서로 높이어 준수하고 암송하고 익혔고, 서로 주고받으며 전수하여 각기 전통이 있은 후에 해설서가 비로소 출현했다. 국가가 등장하고 역사적 행사와 사실을 각기 사관이 기록했고, 이에 문자를 통한 전수가 더욱 확대되었다. 만약 세상의 현인과 군자가 경전을 학습하여 성인의 마음을 탐구하고, 역사를 고찰하여 시사의 변화를 증험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대해 밖에서 접촉하여 내면이 움직이게 되면, 다시 그 학설을 토론하고 저술함으로써 하나의 전문가(학파)가 되는 것이다. 서적에 실리고 나무상자에 저장된 것이 셀 수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이 도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진실로 도를 추구한다면, 어찌 이를 버리고 보지 않겠는가? 근세 이래로, 이른바 과거(科擧)가 그러한 뜻을 빼앗아 버렸다. 선비들은 학교와 숙사에서 하루도 책을 읽지 않는 날이 없지만, 무엇을 읽는가 물으면 옛날의 일컬었던 책이 아니다. 아아! 성현의 말씀을 읽더라도 마음에 밝히고 몸에 익히지 않으면 오히려 책창고가 됨을 벗어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읽는 것들이 성현의 서책이 아니라면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로써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곧 교화를 실행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는 것인데, 그 또한 어렵도다.

古之聖人作爲六經, 以敎後世, 易以通幽明之故, 書以紀政事之實, 詩以導情性之正, 春秋以示法戒之嚴, 禮以正行, 樂以和心. 其於義理之精微, 古今之得失, 所以該貫發揮, 究竟窮極, 可謂盛矣. 而總其書不過數十卷, 蓋其簡易精約又如此. 以來, 儒者相與尊守而誦習之, 傳相受授, 各有家法, 然後訓傳之書始出. 至於有國家者歷年行事之迹, 又皆各有史官之記, 於是文字之傳益廣. 若乃世之賢人君子學經以探聖人之心, 考史以驗時事之變, 以至見聞感觸, 有接於外而動乎中, 則又或頗論著其說, 以成一家之言. 而簡冊所載, 篋檳所藏, 始不勝其多矣. 然學者不欲求道則已, 誠欲求之, 是豈可以舍此而不觀也哉? 而近世以來, 乃有所謂科擧之業者以奪其志. 士子相從於學校庠塾之間, 無一日不讀書, 然問其所讀, 則擧非向之所謂者. 嗚呼讀聖賢之言而不通於心, 不有於身, 猶不免爲書肆, 况其所讀又非聖賢之書哉以此道人, 乃欲望其敎化行而風俗美, 其亦難矣.

 

건양에서 출판한 서적들이 사방 먼 곳까지 유통되고 있지만, 건양현의 학자들은 읽을 책이 없음을 한탄한다. 현재 지현사(知縣事)인 회계(會稽) 요기인(姚耆寅)이 비로소 사업을 집행하고 남은 돈으로 시중에서 책을 사들였다. 위로는 육경에서부터 아래로는 훈전(訓傳), 사기(史記), 자집(子集)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책을 사들였다. 세속적인 과거를 목표로 공부하는 유학들이 암송하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이 이미 성현의 경서를 읽었고, 또 함께 여후(姚侯)의 뜻을 강론하면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내게 기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여후(姚侯)가 사람들을 교육한 것이 무엇인지 쓸 수 있고, 여러 학생들이 여후의 뜻을 계승하려는 것 역시 마땅히 써야 한다. 오히려 내가 알리기를 원한다. 여러분들이 여후가 구입한 경서를 읽고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몸에 익혀 한갓 책창고가 되게 하지 않는다면, 여후의 가르침을 배반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 지방의 풍속 역시 지난날과는 다를 것이다. 이에 삼가 그 내용을 써서 돌에 새겨 곁채에 세운다. 순희 기해 2월 기유, 신안 주희 기록하다.

建陽版本書籍行四方者無遠不至, 而學於縣之學者, 乃以無書可讀爲恨. 今知縣事會稽姚侯耆寅始斥掌事者之餘金鬻書於市, 上自六經, 下及訓傳, 史記, 子集, 凡若干卷, 以充人之. 而世儒所誦科擧之業者, 一無得與於其間. 諸生旣得聖賢之書而讀之, 又相與講於侯之意而知所興起也, 來謁予文以記之. 予惟姚侯之所以敎其人固可書矣, 而諸生之所以承侯之意者, 亦當得書也. 抑予猶願有告焉, 諸君讀侯之書, 其必有以通諸心, 有諸身而無徒爲是書肆者, 則庶幾無負於侯之敎. 而是邦風俗之美, 亦將有以異於往時矣. 於是敬書其說, 使刻石而立諸其廡以俟. 淳熙己亥二月己酉, 新安朱熹記.

 

 

 

건녕부 건양현 학사현당기(學四賢堂記)建寧府建陽縣學四賢堂記

 

 

 

해제이 글은 순희 6(기해, 1179, 50) 221일에 쓴 글이다.

 

 

돌아가신 국자좨주(國子祭酒) 구강(九江) 소지민(蕭之敏)공은 자가 민중(敏中)으로, 융흥 년간에 건양현 지사로 부임했는데, 성품이 겸손하고 조용하며 평이하고 정직했고 이름을 드러내려 힘쓰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대함에 편안하였다. 고을의 선현이 누구인지 알아봤는데, 세 분의 어사가 있었다. 진수(陳洙) 사도(師道), 진사석(陳師錫) 백수(伯修), 유작(游酢) 정부(定夫)인데, 모두 당시 학행과 풍모와 절의로 이름이 났다. 마음으로만 그리워하다가, 이내 학교의 사당에 세 분의 초상화를 그려 모시고 삼현(三賢)’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고을의 사대부와 학생 제자들을 이끌고 함께 절하고 받들었다. 고을 사람인 웅극실(熊克實)군이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지금 돌에 새져겨 있는 것으로 고증할 수 있다. 얼마 후 공은 고을을 떠나 조정에서 벼슬하게 되었고, 몇 년 되지 않아 역시 어사가 되어 세 분 군자가 남긴대로 따라 실천하였다. 그의 충직한 말과 지극한 계책은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시대적 폐단을 바로 잡았으니,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밝힘으로써 선한 이는 믿고 의지하였고, 악한 이들은 두려워했으니, 그 공적이 세 분 군자보다 못하다 할 수 없다. 강동(江東)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국자좨주(國子祭酒)로 불려들였다. 사안에 따라 의견을 개진하였고, 솔직하면서도 강직하여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또 호남에 파견되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났을 때, 너무 가난하여 집조차도 없었다. 이에 사대부들이 서로 그의 절개를 더욱 높이었고, 건양 사람들 역시 모두 슬퍼 탄식하며, 우리 소() 영윤(令尹)이야말로 어질고 덕행이 뛰어나니 세 분 군자와 함께 배향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故國子祭酒九江蕭公之敏, 字敏中, 隆興間以選來知建陽縣事, 廉靜易直, 不務爲赫赫名, 人便安之. 嘗問邑之先賢, 而得三御史焉, 曰陳公洙師道, 曰陳公師錫伯修, 曰游公酢定夫, 皆以學行風節有聞於時. 心獨慨然慕之, 乃爲之肖象立祠於學, 牓曰三賢’, 而率邑之學士大夫以及諸生子弟相與拜而奉莫焉. 邑人熊君克實記其事, 今刻在石可考也. 旣公去而仕於朝, 不數年, 亦爲御史, 實踐三君子之跡. 而其忠言至計, 所以開上心, 救時弊, 則白是非邪正, 使爲善者有所怙, 爲惡者有所懼, 其功又不在三君子之下也. 出使江東, 未幾, 上思其言, 復召以爲國子祭酒. 因事獻言, 鯁切不少變. 又使湖南以卒. 卒時貧甚, 乃至無以爲家. 於是士大夫相與益高其節, 而建陽之人亦皆咨嗟惻愴, 以爲吾蕭令尹之賢, 眞可以追配三君子者無慚也.

 

현재 지현(知縣) 회계(會稽) 요후(姚侯)가 그 사실을 듣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내가 비록 소공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그 분의 이름을 듣고 사모한 지 오래 되었다. 이제 이 곳의 읍장이 되어 그 분의 자취를 이어가면서, 또다시 읍사람들이 이와 같이 칭송하는 것을 들으니, 내 어찌 나의 뜻을 다해 읍사람들의 생각을 위로하지 않겠는가.” 이에 다시 소공의 초상을 그려 세 군자와 합사하고 그 편액을 다시 사현(四賢)’이라 했다. 공사가 끝나자, 삼현을 제사지내는 것과 같이 공을 제사지냈다. 여러 학생들과 집사가 물러나 크게 탄식하며 서로 절의에 힘쓰자 다짐하면서 말했다. “훗날 벼슬하여 임금을 모시게 되더라도, 네 분의 현자를 부끄럽게 하거나 지금의 소후의 가르침을 배신하지 말자.” 소공과 연고가 조금 있다 하여, 내게 기문을 부탁했다. 나는 사양할 수 없어 사실을 이와 같디 구체적으로 쓰고, 아울러 여러분에게 경계해서 오늘의 뜻을 잊지 않게 하려 한다. 또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 무궁하게 서로 함께 탄복하고 진흥시키고자 한다.

今知縣事會稽姚侯聞之, 歎曰:‘吾於蕭公雖不及識其面, 然聞其名而鄕往之久矣. 今辱爲邑長於斯而繼其躅, 又聞邑人之所以稱誦之者如此, 其何以致吾之意而慰邑人之思哉? ’於是復肖公象, 以合食於三君子, 而更其牓曰四賢’. 旣成, 奠之如公祠三賢故事. 諸生與執事者退, 皆喟然太息, 相勉以節義曰:‘異時出身事主, 無或爲媕阿容悅以愧乎四賢者, 而負今侯之敎也.’ 謂予於蕭公有一日之故, 來請文記之. 予不得辭, 乃具書其本末如此, 因以警諸君, 使毋忘今日之志. 又以告來者, 使相與歎慕興起於無窮也.

 

요후(姚侯)의 이름은 기인(耆寅)인데, 그가 서적을 모아 학문을 진흥시켜 학자를 교육한 뜻은 나의 윗 글에 이미 나타나 있다. 이제 이 사당을 지으니, 그 뜻이 더욱 구차한 것이 아니다. 훗날의 군자들도 여기에서 그의 정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순희 기해 2월 기유, 신안 주희 기록하다.

姚侯名耆寅, 其興學聚書以敎學者之意, 已見於予文矣. 今爲此祠, 其意尤非苟然者. 後之君子亦可以觀政於斯焉. 淳熙己亥二月己酉, 新安朱熹記.

 

 

 

융흥부학 주돈이선생 사당기(隆興府學濂溪先生祠記)

 

 

 

해제이 글은 순희 6(기해, 1179, 50) 1027일에 쓴 글이다.

 

 

융흥부(隆興府) 부학(府學)의 교수인 남강(南康) 황호(黃灝)군이 학교에 염계선생의 사당을 세우고, 내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선생의 학문은 정씨가 전수받아 세상에 유행했는데, 오늘날에는 더욱 많은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고 신뢰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의 고향과 그가 벼슬했던 곳은 모두 학교에 사당을 세워 우러르는 뜻을 다했습니다. 이 지방의 경우, 선생께서 벼슬했던 곳인데도 그의 학문을 받들어 제사지내지 않는 유일한 곳입니다. 제가 이미 부()에 사당을 세우고 또 두 정씨 선생과 함께 배향을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책을 모아 날마다 학자들과 함께 익히고 암송하면서도 그의 학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함을 근심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당신께서는 일찍이 일을 시행하여 우리 지방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뜻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번 일에 관한 당신의 한 말씀을 기록한다면, 우리를 계발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재주가 모자라 사양했지만, 황군은 요청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선생의 심오한 학문에 대해서는 학문이 천박하여 진실로 감히 알지는 못하지만 선생과 같은 그런 뜻을 품고는 있는 사람이다. 하물며 황군의 요청이 이와 같은데, 어찌 그를 위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隆興府學敎授南康黃君灝旣立濂溪先生之祠於其學, 而書來語熹曰:‘先生之學自程氏得其傳以行於世, 至于今而學者益尊信之. 以故自其鄕國及其平生遊宦之所歷, 皆有祠於學, 以致其瞻仰之意. 若此邦者, 蓋亦先生之仕國也, 而視於其學獨未有所祠奉. 灝也旣言於府而敬立之, 且奉程氏二先生以配焉, 又將竊取其書, 日與學者誦習之, 而患未知其所以說也. 吾子蓋嘗爲是, 以幸敎吾邦之人, 是殆有以議其意者. 願得一言以記玆事, 庶乎其有以發也.’ 熹謝不敏, 而黃君要之不置. 熹惟先生之學之奧固非末學所敢知, 抑不敢謂無其志者, 矧黃君之請之勤若是, 亦安得而不爲之言乎?

 

일찍이 선생의 말씀을 생각해 보건대, 그 고원함은 무극과 태극의 오묘함을 다했고, 그 실질은 일상생활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 심오함은 음양 오행의 심오함을 탐구했으며, 그 실질은 인의예지와 강유(剛柔) 선악(善惡)의 신묘함을 벗어나지 않았다. 진한 이래로 이 체용일원(體用一源)과 현미무간(顯微無間)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 없었는데, 그 실제내용은 육경과 󰡔논어󰡕, 󰡔중용󰡕, 󰡔대학󰡕, 칠편이 담고 있는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대기 태극이라 하는 것은 천지만물의 이치를 합해서 하나로 이름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형체와 모양이 없지만, 천지만물의 이치가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무극이면서 태극이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이치를 담고 있으면서도 형체와 모양이 없기 때문에 태극은 무극에 근본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일반 백성들의 일상적 삶을 벗어나 독립적인 하나의 사물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음양오행의 심오한 조화가 되는 것도, 진실로 이 이치이다. 그것이 인의예지가 되고, 강유선악(剛柔善惡)이 되는 것도 역시 이 이치이다. 이 이치를 본성으로 하여 편안한 사람이 성인이다. 이 이치를 회복하여 지키는 사람이 현인이다. 요순 이래로 공맹에 이르기까지, 서로 전수했던 말씀에 어찌 한 마디라도 이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맹자가 죽고 나자, 많은 유학자들의 지혜가 여기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학자들은 막연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고원하게는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밖에서 방탕하고, 천박하게는 잡박화미(雜博華靡)한 곳으로 빠져들면서도, 스스로는 도는 진실로 이와 같다고 여겨 그것이 잘못됐음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선생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그것을 밝혀 정씨에게 전하자, 그것은 마침내 천하에 널리 퍼졌다. 이에 비로소 세상의 학자들은 성현이 서로 전수한 실질을 알게 되었고, 노력해야 할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선생의 가르침이 가버린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계몽하여 이 세상에 커다란 공을 세운 까닭(내용)이다.

蓋嘗竊謂先生之言其高極乎無極太極之妙, 而其實不離乎日用之間其幽探乎陰陽五行造化之賾, 而其實不離乎仁義禮智, 剛柔善惡之際其體用之一源, 顯微之無間, 秦漢以下, 誠未有臻斯理者, 而其實則不外乎六經, 論語, 中庸, 大學, 七篇之所傳也. 蓋其所謂太極云者, 合天地萬物之理而一名之耳. 以其無器與形, 而天地萬物之理無不在是, 故曰無極而太極. 以其具天地萬物之理而無器與形, 故曰太極本無極也. 是豈離乎生民日用之常而自爲一物哉? 其爲陰陽五行造化之賾者, 固此理也. 其爲仁義禮智, 剛柔善惡者, 亦此理也. 性此理而安焉者, 聖也. 復此理而執焉者, 賢也. 自堯舜以來至於孔孟, 其所以相傳之說, 豈有一言以易此哉? 顧孟氏旣沒, 而諸儒之智不足以及此, 是以世之學者茫然莫知所適, 高則放於虛無寂滅之外, 卑則溺於雜博華靡之中, 自以爲道固如是而莫或知其非也. 及先生出, 始發明之, 以傳於程氏, 而其流遂及於天下. 天下之學者, 於是始知聖賢之所以相傳之實乃出於此而有以用其力焉, 此先生之敎所以繼往聖, 開來學而大有功於斯世也.

 

지금 황군은 이미 그 사당을 세워 정씨에 미치었고, 또 그 학설을 미루어 학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니, 이는 반드시 마음으로 성현과 암암리에 일치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나의 말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경우, 어찌 나의 글로 그 설을 보완해서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기 때문이겠는가. 이미 사양하지 못한 채 그 일을 기술하고 아울러 이 말을 써서 돌려보낸다. 황군이 다행히 선생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글을 돌에 새겨 사당의 문에 두어 오는 사람들이 보도록 하면 아마 조금 보탬이 될 것이다. 순희 6년 겨울 10월 신해(辛亥), 신안 주희 기록하다.

今黃君旣立其祠以及於程氏, 而又欲推其說以傳學者, 是必有以黙契於心而亡疑矣. 而猶若有待乎熹之言者, 豈將以是輔其說而久其傳邪? 旣不得辭, 乃敍其事而幷書是語以復焉. 黃君幸以爲不悖於先生之言, 則願刻之石, 厝之祠門, 以告來者, 庶幾其或小補云爾. 淳熙六年冬十月辛亥, 新安朱熹記.

 

 

 

강릉부 곡강루기(曲江樓記)(江陵府曲江樓記)

 

 

 

해제이 글은 순희 6(기해, 1179, 50) 1115일에 쓴 글이다.

 

 

광한(廣漢) 장경부(張敬夫)가 형주(荊州) 태수를 맡은 이듬해, 농사는 풍년이 들고 사람들은 조화롭고 관내는 무사했다. 그러나 학교의 문 밖으로는 높은 담이 가로막고 있어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없음을 늘 안타까워했다. 맑고 탁 트인 곳으로 통하려고 곧장 그 남쪽으로 문을 내어 백하(白河)와 닿게 하고, 옆의 가까운 폐문의 편액을 가져다 걸고, 또 망루를 만들어 봄으로써 그 위를 나타냈다. 하루는 경부가 손님과 함께 올라보니, 대강(大江)의 큰 호수가 아득하게 둘러있고 강물은 빠르게 흐르고, 서쪽 능선의 여러 산들은 자욱한 안개구름 속에서 흐릿흐릿하고, 또 모두 자욱한 안개구름과 수면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에 경부는 탄식하여 말했다. “이것이 바로 곡강공(曲江公)이 말한 강릉군(江陵郡) ()의 남루(南樓)’인가. 옛날 곡강공이 재상에서 쫓겨나 이곳을 지켰는데, 평소 한가한 날에 여기 올라 부()를 읊었으니, 모두 빨리 세속을 벗어나고픈 생각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아파하고 잠들지 못한 채 깊이 염려했으니, 그 마음은 하루도 조정에 있지 않은 날이 없었고, 오직 도가 끝내 행해지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 슬프다!” 이에 그 편액을 곡강의 망루(曲江之樓)’라 쓰고, 내게 편지를 보내 그 기문을 부탁하였다.

廣漢張侯敬夫守荊州之明年, 歲豐人和, 幕府無事. 顧常病其學門之外卽阻高墉, 無以宣暢鬱湮, 導迎淸曠, 乃直其南鑿門通道, 以臨白河, 而取旁近廢門舊額以榜之, 且爲樓觀以表其上. 敬夫一日與客往而登焉, 則大江重湖縈紆渺瀰, 一日千里, 而西陵諸山空濛晻靄, 又皆隱見出沒於雲空煙水之外. 敬夫於是顧而嘆曰:‘此亦曲江公所謂江陵郡城南樓者邪. 昔公去相而守於此, 其平居暇日登臨賦詠, 蓋皆翛然有出塵之想. 至其傷時感事, 寤嘆隱憂, 則其心未嘗一日不在於朝廷, 而汲汲然惟恐其道之終不行也. 於戱悲夫乃書其扁曰曲江之樓’, 而以書來屬予記之.

 

나는 당시 남강군 태수로 있었는데, 갖은 질병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부의 편지를 읽고서, 이 망루의 아름다움을 알았고, 경부와 함께 한 번 그 위에 올라 노닐면서 강산을 조망하고 주변의 형세를 살피고, 이래의 성공과 실패를 본받아 그 까닭을 고찰한 후에, 서로 술잔을 부딪치면서 장공의 시를 읊으면서 천년이 넘는 옛시절의 사람을 생각하면 평소 품었던 마음 속 소원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하건대 서로 떨어진 거리가 천 리이니 까마득하여 만날 수 없으니, 또 고개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며 슬프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일찍이 그것을 생각해보니, 장공이 시기적으로 멀지만, (귀양 갔던) 그 당시의 일은 당나라의 치란이 분기되는 것이지만, 또한 어찌 후세 사람에게 예고하는 것인가? 그 책을 읽는 사람은 일찍이 읽다가 책을 덮고 깊게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시비(是非) 사정(邪正)의 진실은 곧 천리가 본래 그러한 것으로 인심이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록 백 세대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서로 감응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하고 슬퍼하게 하며, 마음 속에서 울컥하여 마치 눈앞에서 직접 그 사람을 보고 그 말을 듣는 듯 황홀하니, 이것이 어찌 고금과 피차의 사이가 있는데, 또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겠는가! 󰡔시경󰡕하늘이 여러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음에 법칙이 있도다. 백성이 떳떳한 성품을 갖고 있는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고 했다. 이 망루에 오르는 사람은, 여기에서도 역시 자신에게 돌이켜 그것을 스스로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이 망루를 가서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마치 범문정공악양루기를 쓴 것과 같이, 그 산천의 풍경, 그리고 사계절과 아침저녁에 따른 변화를 묘사할 수가 없다. 단지 경부의 말에 따라 나의 느낀 점을 이와 같이 덧붙이니, 훗날의 군자가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순희 기해년 11월 기사일 동지.

時予方守南康, 疾病侵陵, 求去不獲. 讀敬夫之書, 而知玆樓之勝, 思得一與敬夫相從遊於其上, 瞻眺江山, 覽觀形制, 按楚漢以來成敗興亡之效, 而考其所以然者, 然後擧酒相屬, 以詠張公之詩而想見其人於千載之上, 庶有以慰夙心者. 顧乃千里相望, 邈不可得, 則又未嘗不矯首西悲而喟然發嘆也. 抑嘗思之, 張公遠矣, 時之事雖唐之治亂所以分者, 顧亦何預於後之人? 而讀其書者未嘗不爲之掩卷太息也, 是則是非邪正之實, 乃天理之固然而人心之不可已者, 是以雖曠百世而相感, 使人憂悲愉怢勃然於胸中, 恍若覩見其人而眞聞其語者. 是豈有古今彼此之間, 而亦孰使之然哉詩曰:‘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 登此樓者, 於此亦可以反諸身而自得之矣. 予於此樓旣未得往寓目焉, 無以寫其山川風景, 朝暮四時之變, 如范公之書岳陽也, 獨次第敬夫本語而附以予之所感者如此. 後有君子得以覽觀焉. 淳熙己亥十有一月己巳日南至.

남강군 풍사단기(風師壇記)(南康軍風師壇記)

 

 

 

해제이 글은 순희 6(기해, 1179, 50) 1125일에 쓴 글이다.

 

 

남강군에는 본래 풍사단(風師壇)이 없어 사()에서 그 제사를 지냈다. 순희 6년은 도유대연헌(著維大淵獻)의 해, 즉 기해(己亥)년이다. 권발견군사(權發遣軍事)인 주희가 처음으로 당 개원례(開元體)에 따라 성의 동북쪽에 땅을 구하여, 남강군 출신인 성()씨 집안의 버러진 포도원 땅을 얻었었는데, 넓이(약간), 길이(약간), 그 세금 감면(약간), 사호참군(司戶參軍) (아무개)와 성자현위(星子縣尉) (아무개)에게 격문을 보내 정화신서(政和新書)를 받들어, 제단(築壇)을 삼단으로 쌓고 계단을 사방으로 내고, 동쪽으로는 요단(燎壇), 남쪽으로는 대문(大門)을 만들고 빙둘러 담을 쌓도록 했다. 문의 동쪽 벽에 제사의 과정을 적고, 서쪽 벽에 그 진열(陳列)과 등강(登降)의 자리를 그렸다. 11월 모일(某日)에 공사를 시작해서 모일에 완성했다.

南康軍故無風師壇, 而寓其祠於社. 淳熙六年, 歲在著維大淵獻, 權發遣軍事朱熹始按唐開元體, 求其地於城之東北, 得郡人盛宗廢圃, 廣若干, 袤若干, 蠲其租若干, 檄司戶參軍姓名, 星子縣尉姓名奉政和新書, 築壇三成, 陛四出, 東爲燎壇, 南爲大門而周垣之. 書祀儀於門之東壁, 而圖其陳列登降之位於西壁. 經始十一月某日, 而成於某日云.

 

 

 

신주(信州) 연산현(鉛山縣) 현학기(縣學記)信州鉛山縣學記

 

 

 

해제이 글은 순희 7(경자, 1180, 51)에 쓴 글이다. 917, 연산현령 장억(蔣億)이 현의 학교를 신축하자, 현학기를 써 주었다.

 

 

연산(鉛山)현의 학교는 옛날 현의 동남쪽 백여 걸음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지형에 따라 집을 지었기 때문에 동향이었다. 그런데 여러 학생들이 부자께서 남면하지 않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현의 동산 아래로 옮겼다. 그러나 그 비용 모두를 민간에서 부담하고, 유사(有司)는 공여하지 않아 대지가 비좁아 공묘(孔廟)와 학교의 규모를 갖출 수가 없었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모여 학교교육을 하지 않은지 벌써 이십 여 년이 넘었다. 순희 기해년 봄에, 의흥(義興)의 장후(蔣侯)가 부임하여 현의 정사를 관장했다. 처음 도착하여 학교의 당하(堂下)에 가서 알현하고,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서 뜻을 품었다. 그 뒤 몇 달 동안, 현의 정치가 안정되어 일이 줄어들고, 백성들은 여유롭고 재정은 풍족했다. 이에 땅을 사들여 산을 깎고, 재료를 잘 고르고 그 일을 뇌정(雷霆)군에게 부탁했다. 그 해 12월 병신에 공사를 시작해서 다음 해 4월 무신에 석채(舍菜)를 지냈다. 출입문은 매우 장엄하고, 주택은 크고 높으며, 신위(神位)는 청정(淸淨)하며, 제사용품은 모두 수리했다. 도서와 사적(史籍)의 저장, 궤석(几席)의 설치 및 기숙(寄宿)취사(炊事)종묘의 청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었다. 이윽고 그것을 간전(墾田)이라 이름 붙이고, 추사(僦舍)를 세우고, 날마다 학생 20 여명에게 급여를 주니, 관에서는 재정이 축나지 않았고 백성들은 고통스런 노역으로 여기지 않았다. 고을의 학부모들이 서로 모여 관람하면서 탄식하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수령이 우리 아이들을 이와 같이 후덕하게 가르쳐주시는데, 어떻게 이를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뇌군이 그것을 듣고, 그 뜻을 내게 전하면서 요청하기를, “비록 학교는 갖추어졌지만, 여러 학생들이 무엇을 배워야 할 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 계발해주시기 바랍니다.”

鉛山學故在縣東南百許步, 因地形爲屋, 東鄕. 旣諸生以夫子不南面於禮爲不稱, 乃徙寘縣東山下. 然其費皆出民間, 有司者無所與, 以故度地褊狹, 不能具廟學制度. 至若師生具員而弦誦輟響, 則亦旣二十有餘年矣. 淳熙己亥之春, 義興蔣侯來領縣事. 始至, 進謁堂下, 俯仰太息而有志焉. 後數月, 政成事簡, 民裕而財足, 乃買地鑿山, 度材致用而屬役於其屬雷君霆, 以歲十有二月丙申始事, 越明年四月戊申而舍菜焉. 門觀顯嚴, 宮廬宏敞, 神位淸密, 祭用畢修. 圖史之藏, 几席之設, 與凡所以棲宿炊鬻拚除之須, 無一不備. 旣又爲之名墾田, 立僦舍, 日給弟子員二十餘人, 而官無乏用, 民不病役. 邑之父兄相與聚觀顧嘆, 言曰:‘令之所以幸敎吾子弟者, 其厚如此, 是登可使後之人無傳焉? ’於是雷君聞之, 則以其意來請, 且曰:‘學雖具而諸生未知所志, 願吾子之因是而有以發之也.’

 

나는 일찍이 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학문에는 고금(古今)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개 주나라 사람들이 고을의 세 가지 일로 백성을 교육하고 (교육이 끝나면) 그를 (향음주의 예로) 대우함으로써 높인다. 그 덕은 여섯인데, (), (), (), (), (), ()라 한다. 그 행위도 여섯이니, (), 우애(), (), (), (), ()이라 한다. 그 예()는 여섯이니, (), (), (), (), (), ()라 한다.” 이는 학자가 주거하고 먹고 마시는 일상 생활하는 것에서, 어떤 사업도 학문 아닌 것이 없으며, 함께 생활하면서 힘써 공부하고 쉬고 노는(藏修游息) 곳에서는 어떤 학문도 사업 아닌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 총명함을 개발하고, 그 덕업(德業)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또 모두 (학문과 사업이) 서로 도구가 되니 어느 하나에 치우치거나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선왕이 길러낸 인재가 많고 풍속이 아름다운 까닭이며, 후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국가가 온 나라에 두루 학교를 세워 천하의 선비들에게 바라는 것 역시 어찌 선왕의 뜻과 같지 않겠는가? 배우는 이들이 그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니, 일상생활에서 이미 게으름피우고 방자하고 비방하면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를 모르고, 함께 생활하면서 강습할 때에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나누고 장식하는 것만을 능사로 여겨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쓰여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날이 갈수록 천박하고 견문이 좁아져 오직 이록(利祿)만 쫓는다. 다행히 자립에 뜻을 가진 한 두 걸출한 인물이 있더라도, 어떤 사람은 고원(高遠)한 것만 쫓고 역행(力行)에 힘쓰지 않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평상한 것만 따르고 옛것만 지킨 채 그 의리의 까닭을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 이론이 늘 한 쪽에 치우쳐 성현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단의 잡학한 선비들과 세상의 시류에 아부하려는 부류들이 또 이때를 틈타서 그 어그러지고 거짓된 이론들을 앞세워 편승하였다. 아아! 유학의 도는 없어지지 않았고, 특히 떳떳함을 지키려는 백성들은 없앨 수가 없었다. 내 힘으로는 그것을 구제할 수 없어서, 염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후(蔣侯)의 일을 이미 기록하였고, 또 뇌군(雷君)의 요청을 받아 내 설명을 덧붙여서 여기에서 공부하는 이들에게 알림으로써, 이로 인해 그것을 돌이켜 구할 수 있다면 지향해야 할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予嘗謂道無古今之殊而學有今古之異, 蓋周人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 其德六, 曰智, , , , , . 其行六, 曰孝, , , , , . 其藝六, 曰禮, , , , , . 是於學者日用起居食飮之間, 旣無事而非學 ; 於其羣居藏修游息之地, 亦無學而非事. 至於所以開發其聰明, 成就其德業者, 又皆交相爲用而無所偏廢. 此先王之世所以人材衆多, 風俗美盛而非後世之所能及也. 國家建立學官, 周遍海內, 其所以望於天下之士者, 豈不亦若先王之志? 而學者無以識其指意之所在, 於其日用之間, 旣誕謾恣睢而不知所以學其羣居講習之際, 又不過於割裂裝綴以爲能, 而莫或知其終之無所用也. 是以其趨日以卑陋而惟利祿之知. 幸而一二傑然有意於自立者, 則又或窮高極遠而不務力行之實, 或循常守舊而不知其義理之所以然也. 是以其說常倚於一偏, 而不得以入於聖賢之域. 於是時也, 異端雜學之士, 阿世徇俗之流, 又或鼓其乖妄之說而乘之. 嗚呼吾道之不亡, 特民之秉彝有不可得而絶滅者耳. 予之力固不足以救之, 而竊有憂焉. 是以旣書蔣侯之事, 又因雷君之請而附見其說以告夫學於此者, 以爲有能因是而反求之, 則庶乎其知所志矣.

 

장후(蔣侯)의 이름은 억()이고, 자는 중영(仲永)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원대하여,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세상의 일을 논할 때에는 도도하여 다함이 없다. 대개 일찍이 군대를 경영하여 국가를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하려는 뜻을 품은 사람이다. 그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참으로 능력이 넘친다. 모든 올바른 통치를 공적으로 삼아 이처럼 백성을 교화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 않으면, 후세의 군자들이 장차 여기에서 배울 것이다. 가을 9월 병인, 관직작위를 갖추어(具位) 주희 기록하다.

蔣侯名億, 字仲永, 材高志遠, 平居抵掌論當世事, 滾滾不窮, 蓋嘗有意笞兵萬里, 爲國家立非常之功者. 其辦一邑, 固當有餘力. 惟其不以壹切治理爲功, 而汲汲乎化民成俗之先務如此, 是則後之君子亦將有考於斯焉. 秋九月丙寅, 具位朱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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