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104

황성 2025. 8. 1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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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朱子大全 卷七十七

 

 

 

고사헌기髙士軒記

 

 

해제이 글은 주희가 동안 주부가 되었을 때 고사헌(高士軒)를 건립하고 스스로 기를 기록한 것인데, 서한(西漢) 시대의 손보(孫寶)의 말을 원용하여 고사(高士)’의 의미를 밝히며 선비가 해야 할 임무를 쓴 것이다.

 

 

동안(同安) 주부(主簿)의 관아는 모두 오래된 집에 지주만 있어 거의 거처할 수가 없었다. 유독 서북쪽 모퉁이의 하나의 집이 매우 상쾌하고 기쁠 만한데 이는 이전 사람이 그것을 지어 부서(簿書)를 다스린 휴가의 날을 기다려서 한가로이 휴식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이름한 까닭을 보면 그곳에 거주할 만한 가치가 없는 뜻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군자가 마땅히 들어가 스스로 거처할 수 없으니, 이를 이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시 고사헌(高士軒)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객이 혹 나를 힐란하여 말하기를 한나라 때 고사(高士)로 주부가 되지 아니한 자는 진실로 어사(御史) 따위이다. 한나라의 벼슬로 어사부(御史府)는 제도와 문장을 관장하고 대부는 상경(上卿)과 아승상(亞丞相)에 위치하여 그 부서(簿書)를 주관하는 것인데, 차등을 이름하는 것 또한 하천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을 더럽힌다고 하여 되돌아보지 아니하기 때문에 고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번잡하게 세속 티끌 속에 있으면서 좌우에 붉은 먹으로 형장(刑杖)을 범한 것을 표시하고 여기에 현()의 명부를 주관하며 고사(高士)로 그 거처를 이름한 것이 또한 어긋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물론 이 말입니다만 어찌 또한 선비가 혼자 있음을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고상한 채 하여 그 때를 만나지 못하면 죽어도 그치지 아니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 말에 대해 대개 일찍이 그윽이 느낌이 있었지만, 그러나 또 그 말이 극진하지 못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옛날에 승전(乘田)위리(委吏)포관(抱關)격탁(擊柝)과 같은 것은 할 수 있거니와 선비가 홀로 스스로 고상하게 지낼 수 없다면 저와 같은 것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는 아직 저 높은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대저 선비가 진실로 스스로 고상한데 뜻을 두지 아니하는 것이나, 그러나 그 초연히 만물의 밖에서 홀로 선 것은 또한 어찌 밖을 기다린 후에 고상함이 있겠는가? 이것을 알면 곧 현의 명부를 주관한 것이 비록 매우 하천하더라도 과연 그 고상함을 해칠 수 없음을 알고, 이 집도 비록 누추할지라도 고상한 선비가 또한 혹 때로 내방함이 있을 것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고 후일의 군자를 기다림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객이 예라고 답변하며 물러가니, 이로 인하여 이것을 벽에 써서 기록하였다.

同安主簿廨皆老屋支拄, 殆不可居. 獨西北隅一軒爲亢爽可喜, 意前人爲之, 以待夫治簿書之暇日而燕休焉. 然視其所以名, 則若有不屑居之之意. 予以爲君子當無入而不自得, 名此非是, 因更以爲髙士軒’. 而客或難予曰: “世髙士不爲主簿者, 實御史屬. 漢官御史府典制度文章, 大夫位上卿亞丞相, 主其簿書者名秩亦不卑矣. 彼猶以爲凂已而不顧焉, 故足以爲髙也. 今子僕僕焉在塵埃之中, 左右朱墨, 蒙犯箠楚, 以主縣簿於此, 而以髙士名其居, 不亦戾乎?” 予曰: “固也是其言也, 豈不亦曰士安得獨自髙, 其不遭則可無不爲已乎? 予於其言蓋嘗竊有感焉, 然亦未嘗不病其言之未盡也. 蓋謂士之不遭可無不爲, 若古之乘田委吏, 抱關擊柝者焉可也; 謂士不能獨自髙, 則若彼者, 乃以未睹夫髙也. 夫士誠非有意於自髙, 然其所以超然獨立乎萬物之表者, 亦豈有待於外而後髙耶? 知此則知主縣簿者雖甚卑, 果不足以害其髙, 而此軒雖陋, 髙士者亦或有時而來也. 顧予不足以當之, 其有待於後之君子云爾.” 客唯唯而退, 因書之壁以爲記.

 

 

 

 

천주동안현학관서후기泉州同安縣學官書後記

 

 

 

해제이 글은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의 학관이 이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도록 위해 방공(方公)에게 책을 청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주요의 내용으로는 고을의 자제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학관의 역할을 중시한 것으로 1156년 정월에 기록한 것이다.

 

소흥(紹興) 25(1156) 봄 정월에 나()는 백사대도독부정주(白事大都督府廷中)에 격서(檄書)하였는데, 일을 그만두고 연수(連帥) 방공(方公)에게 말하기를 ()는 동안(同安)에서 관리를 하면서도 그 학교의 일을 겸하여 다스릴 수 있었다. 학교에는 스승과 학생이 송독하며 말하지만 경적(經籍)은 구비되지 않아, 배우는 사람이 네 차례 왕래하여도 그 기간에 수업하는 것이 없었다. 무부(撫府)가 글을 써서 되돌려 주어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익힐 수 있도록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공이 그 어리석음을 슬펴하여 불가하다고 하지 않았는데, 곧 날로 적은 부서에 드는 비용인 금전을 덜어 공관(工官)에게 재촉하여 나의 현에서 간행하니 무릇 985권이다. ()는 여러 생도와 함께 이미 주고받았다면, 서로 여러 사람과 더불어 염장수시(歛藏守視)출납량폭(出内涼暴)이 금지하고 경계하는 것을 의논하여 공에게 아뢰니, 모두 시행하는 것은 명백한 듯하다고 알렸다. ()는 그윽이 공이 하사하는 것을 거론하니 대개 장차 이 현의 사람을 가르침으로서 나의 요청에 사사롭지 않다. ()는 바로 다행히 변변치 않는 재주로 이어받았을 수 있었으나 칭송받을 수 없을 수 없음을 두려웠고, 또 교훈을 후세에 남기는 것을 오래할 수 없기 때문에 감히 공이 가르쳐주심을 모두 새기고 그의 뜻이 이와 같은 서술하고 게재하여 고을의 부형자제와 학관 제자로 전령에 직분이 있는 자들에게 보여 공의 뜻을 받들어 영원토록 게으르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직수입니다. 여름 4 정축일(丁丑日)에 구위(具位)는 삼가 기록한다.

紹興二十有五年春正月, 以檄書白事大都督府廷中, 已事而言於連帥方公: “爲吏同安, 得兼治其學事. 學有師生誦説而經籍弗具, 學者四來, 無所業於其間. 願得撫府所有書以歸, 使學者得肄習焉.” 公幸哀其愚, 不以爲不可, 即日減省少府用度金錢, 屬工官橅以予縣, 凡九百八十五卷. 與諸生既受賜, 則相與羣議所以歛藏守視出内涼暴之禁戒以復于公, 報皆施行如章. 竊惟公之舉是賜也, 蓋將以幸教此縣之人, 而非私於熹之請. 乃幸得以菲薄奉承, 懼不能稱, 且無以垂示久逺, 故敢具刻公所出教而并敘其指意如此揭之, 以視縣之父兄子弟與學官弟子之有秩於典領者, 使承公志, 永永不怠. 此熹之職守也. 夏四月丁丑, 具位謹記.

 

사포기 射圃記

 

 

 

해제주희가 조항(曹沆)과 서북쪽을 방비하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동안현(同安縣) 서북문(西北門)의 사포(射圃)는 감염세(監鹽税) 조후항(曹侯沆)이 하는 바인데, 소흥 25년 여름 현에서 경계가 있자 승상이 이하 부서 이사(吏士)로 하여금 성을 나누어 지키고 조후(曹侯)와 나(주희)는 서북쪽을 수비하였다. 이전에 도적이 이르러 항상 서북쪽을 함락하였다. 그렇다면 조후와 내가 지키는 것은 도적과 충돌한 것이다. 조후가 하루는 나로 더불어 성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고 강개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이것을 지킬 수 없다면 우리의 무리가 죽어도 처할 곳이 없을 것이니 면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곧 길을 달리 하여 행소부(行所部)로 가서 돌아다니며 독려하고 위안하며 정돈하여 이사(吏士)에게 그 뜻을 효유하였다. 이사가 모두 감격하고 분발할 것으로 마음을 썼다. 조후가 또 말하기를 병가(兵家)에 있으니, 굽은 길이 험하고 좁으면 칼과 방패가 유리하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아래에 임하면 곧 활과 화살이 편리하다. 이것은 곧 활소는 것이 본래 성을 지키는 도구이어서 그 기술을 하는 부리는 것은 반드시 일 없는 때에 익힌 연후에 완급(緩急)을 자료하여 사용할 수 있다. 지금 벌이나 개미처럼 주둔한 것이 비록 능히 우리 성을 지킬 수 없지만 진설(陳設)한 것은 우리의 선비가 본래 장차 나를 따라 사망하면, 내가 평소 가르쳐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서로 더불어 성을 바라보는 모퉁이에 틈있는 지역을 얻어 개척해서 사포(射圃)를 만들었는데, 그 남북의 길이가 60보이고 그 길이를 셋으로 나누면 넓이는 20보가 되니, 그 무리들이 날마다 그 틈에서 활쏘는 것을 재촉하였다. 그 후에는 도적이 비록 이미 흩어져 도망하였지만 사포는 폐지하지 아니하고 간혹 가서 활쏘는 것을 처음과 같이 하였다. 조후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사포를 만드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의 힘입니다. 뭇 사람이 그 장차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우리 두 사람이 일 없는 날에 백성에게 근면하도록 할 것이니, 어찌 그 뜻을 기록하여 뒷사람에게 보이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허락합니다라고 하였다. 조후의 자는 덕광(德廣)이고 무혜왕(武惠王)의 제손(諸孫)이다. 대대로 장수 집안으로 병법을 익히면서도 문사(文詞)를 좋하고 이사(吏事)에 능통하였는데 대개 개연히 공명에 뜻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안 주희이고 중회(仲晦)인데, 당시 여기서 주부가 되어 이것을 기록한다.

同安縣西北門射圃者, 監鹽税曹侯沆所爲也. 紹興二十五年夏, 縣有警, 令丞以下部吏士分城以守, 曹侯與予備西北. 異時㓂至, 常陷西北, 然則曹侯與子所守者, 盜衝也. 侯一日與予登城四望, 慷慨相語曰: “是不能守, 吾屬死無處所, 不可不勉!” 則分背去行所部, 循勉慰飭, 喻意吏士. 士皆感奮爲用. 侯又曰: “兵家有之, 曲道險阨則劒楯利, 仰髙臨下則弓矢便. 是則射者固嬰城之具, 而其爲技必習之於無事之時, 然後緩急可頼而用也. 今蜂蟻之屯雖未能傅吾城而陳, 而吾之士固將徇我以死亡, 我其可以不素教而用之哉?” 於是相與相城之隅, 得隙地, 斥以爲射圃, 袤六十步, 三分其袤而廣得一焉, 屬其徒日射其間. 其後盜雖已潰去, 圃因不廢, 間往射如初. 謂予: “是圃之作, 吾二人力也. 衆人不能見將然, 其以吾二人者爲無事而勤民矣. 盍記其意以視後?” 予曰諾哉. 曹侯德廣, 武惠王諸孫. 世將習兵, 喜文詞, 通吏事, 蓋慨然有志於功名者. 而予新安朱熹仲晦, 時爲主簿於此, 是爲記云.

 

 

 

 

소승상사기 蘇丞相祠記

 

 

 

해제이 글은 소송(蘇頌)의 절개를 기린 것으로, 소송은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왕안석의 선발에 사양하고 귀향하여 절개를 지켰다. 주희는 사당을 건립하고 그와 함께 이재원송흠도를 사당에 배향하고 삼사인(三舍人)’이라고 칭송하며 기문을 썼다.

 

()는 젊어서 선생의 장점을 좇아, 옛 정승 소공(蘇公)의 사람됨을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가 고금에 대해 널리 알고 전고에도 온통 밝아 훌륭한 군자의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희령(熙寧) 연간(10681077) 중에 외제(外制)를 담당하였는데 당시 왕승상(王丞相: 왕안석)이 정권을 좌지우지 하고 있어, 일찍이 뽑히는 것이 있고자 하였다. 공은 그 사람이 등용할 수 없고 게다가 고사(故事)가 아니라고 여겨 임금에게 그것을 봉하고 이것으로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스스로 후회하지 않고 마음을 지키는 것이 더욱 견고하였다. 당시 그 절개를 고상하게 여겨 이재원(李才元)송흠도(宋次道)와 함께 아울러 삼사인(三舍人)이라고 일컫었다. 뒷날 비릉(毗陵)의 추공(鄒公)이 찬한 공의 행장을 얻고, 또 공의 시종 대절(大節)이 대체로 분명함이 이와 같음을 알았다. 그래서 마음으로 매양 그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부탁하러 와서 동안(同安)의 관리되었다. 공안은 공이 살던 읍의 말이다. 그러한 것으로 공이 현의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비록 가족의 자식이라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천()의 사람들은 왕왕 도리어 증선정(曽宣靖)채신주(蔡新州)여대위(吕太尉)의 일을 기쁘게 말하여 성대하고 하나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찍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비는 배우지 않음을 근심할 따름이다. 그런데 세상의 배우는 사람은 간혹 외부에 두려운 것이 있으면 현혹되어 그 지키는 것을 일어버려 마치 공이 지극함을 배운 듯이 하고, 또 그것을 지켜 끝내는 그 몸이 한 번도 변하지 않으니 이것은 선비나 군자의 어려운 것인데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그로 인해 학교에 사당을 세워 세시(歲時)로 학관(學官)의 제자가 사당에 참배하여 그 뜻이 이와 같음을 기록하여 읍 사람들에게 보인다 한다.

少從先生長者遊, 聞其道故相蘇公之爲人, 以爲博洽古今, 通知典故, 偉然君子長者也. 熙寧中掌外制, 王丞相用事, 嘗欲有所引拔. 公以其人不可用, 且非故事, 封上之, 用此罷歸. 不自悔, 守益堅. 當世髙其節, 李才元宋次道並稱三舍人云. 後得毗陵鄒公所撰公行狀, 又知公始終大節葢章章如是, 以是心每慕其爲人. 屬來爲吏同安, 同安公邑里也. 以公所爲問縣人, 雖其族家子不能言. 人往往反喜道曽宣靖蔡新州吕太尉事以爲盛, 予不能識其何説也. 然嘗伏思之, 士患不學耳, 而世之學者或有所怵於外, 則眩而失其守, 如公學至矣, 又能守之, 終其身一不變, 此士君子之所難而學者所宜師也. 因爲之立祠於學, 歲時與學官弟子拜祠焉, 而記其意如此, 以視邑人云.

 

 

 

 

장주교수청벽기 漳州教授㕔壁記

 

 

 

해제이 글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후학을 가르친 진군(陳君)의 행의를 기록한 것이다. 진군이 장주(漳州) 교수청(教授㕔)에서 활동한 이전 사람의 이름과 성씨를 벽에 간행하려고 할 때 주희에게 기문을 부탁하자, 주희는 교수의 직책이 막중한데도 진군이 교수직을 잘 수행한 행의를 기록하였다.

 

교수의 직책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오직 스스로 임무가 막중한데도 구차하게 여기지 않아야 그것을 알 것이다. 그 쉬우면서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면 구차스러운 도이다. 무엇 때문인가? 교수란 천자의 명령으로 그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니라. 무릇 나라의 선비는 현관(縣官)에서 녹봉을 받고 제자의 인원을 채우는 것은 크게는 56백에 이르고, 적게는 1십에서 내려가지 않으니 오직 교수라는 것은 스승이다. 그 반드시 거느리고 가서 화복(化服)함이 있으니, 몸소 학문을 하고 법도를 실천하고 <향리를 순서대로> 출입하면서도 들은 것에 어긋나지 않도록 한 뒤 칭송을 한다. 이것은 몸을 돌이키지 않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어렵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뿐만이 아닐 따름인지라, 또 마땅히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전사(典祀)를 엄격하게 수행하여 사당과 학교를 거느리면서도 그 도서(圖書)와 기복(服器)의 소장을 지키고, 그 몸은 막중함에 이른다. 아래로는 금곡(金穀) 출납(出内)의 미세한 데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책임으로 여긴다. 오호라, 이 또한 어려운 것이로다! 그러나 무릇 지금 시대에 벼슬하는 사람은 크고 작은 것 없이 법도에 임하여 총섭(總攝)하는 것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그 책임은 심히 쉬운 것이 없어 반드시 모두 문서를 구비하여 거듭 시찰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비록 심히 느슨한 것이라도 또한 어렵게 여겨 감히 제멋대로 하지 않는다. 교수의 벼슬만은 비록 전통이 있으나 만일 그 임무가 몸에 근본한다면 부서기회(簿書期㑹)를 살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사(有司)에게 구비하여 고찰할 수 있는 것은 윗사람이 또 그 유관(儒官)으로 넉넉히 포용하고, 비록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질문하지 않으니, 이것을 편리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의 벼슬하는 사람은 이익을 돌이키면서 즐거이 하니, 누가 그 책임을 충족하는 것이 저와 같이 어려운 것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오직 스스로 임무가 막중한데도 구차하게 여기지 않아야 그것을 알 것이다. 그 쉬우면서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면 구차스러운 도이다고 할 것이다. 나는 일찍이 사무로 장주(漳州)에 이르니 그 교수 진군(陳君)이 나와 함께 연고가 있고, 나를 우직(寓直)의 집에서 머무르게 하여, 그래서 진군이 학교에 베푼 것을 소상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진군과 같다고 한다면 그 어려움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진군은 장차 이전 사람의 이름과 성씨를 벽에 간행하려고 할 적에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할 수 없는 것이 두세 번이므로 이미 명할 수 없었다. 바로 물러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써서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장차 뒷날의 군자를 장려하려고 할 뿐이다. 소흥(紹興) 26(1156) 7월 갑자일에 신안 주희는 기록한다.

教授之爲職, 其可謂難矣, 惟自任重而不苟者知之. 其以爲易而無難者, 則苟道也. 何也? : 教授者, 以天子之命教其邦人. 凡邦之士, 廩食縣官而充弟子員者, 多至五六百餘, 少不下百十數, 皆惟教授者是師. 其必有以率厲化服之, 使躬問學, 蹈繩榘, 出入不悖所聞, 然後爲稱. 此非反之身而何以哉? 是可不謂難矣乎? 不特此爾, 又當嚴先聖先師之典祀, 領護廟學而守其圖書服器之藏, 其體至重. 下至金穀出内之纎悉, 亦皆獨任之. 嗚呼, 是亦難矣! 然凡仕於今者, 無大小莫不有所臨制總攝, 其任無劇易, 必皆具文書, 使可覆視. 是以雖甚弛者, 亦有所難而不敢肆. 獨教授官雖有統, 若其任之本諸身者, 則非簿書期㑹之所能察. 至其具於有司而可考者, 上之人又以其儒官優容之, 雖有不合不問, 以是爲便. 故今之仕者反利焉而喜爲之, 而孰知所以充其任者如彼其難哉? 故曰惟自任重而不苟者知之, 其以爲易而無難者則苟道也. 予嘗以事至漳, 其教授陳君與予有故, 館予於其寓直之舍, 因得盡觀陳君所施於學者. 予謂若陳君, 則可謂知其難矣. 陳君方將刻前人名氏於壁, 屬予記. 予辭謝不能者再三, 既不得命, 乃退而書其所聞見如此以爲記, 且以厲後之君子云爾. 紹興二十六年七月甲子, 新安朱熹

 

 

 

 

일경당기 一經堂記

 

 

 

해제주희가 소흥(紹興) 연간에 동안(同安)의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가한(柯翰)과 교류가 매우 두터웠다. 이 글은 가한이 양자(楊子)삼년통일경(三年通一經)”이라는 말을 취하여 거실을 일경당(一經堂)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주희가 가한의 학문과 행의를 차례로 기록한 것이다.

 

소흥(紹興) 23(1153) 가을 7월에 나는 동안에 왔다. 명년에는 바로 가군(柯君)를 얻어 그와 더불어 노는 것이 서로 즐거웠다. 당시 가군은 세상을 피해 읍에 거처했는데, 교수가 항상 백여 사람이었다. 나에게 학교 다스리는 일을 부탁하자 가군을 이끌어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하였다. 가군의 행실은 준엄하여 구차하게 부합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은 처음에는 혹독하게 꺼리는 것이 있었다. 다른 일에 이르러서도 또한 많이 힙입어 구제하였다. 또 명년에 가군이 장차 그 선인의 여막을 돌이켜 옛 띠지붕이 무너졌기 때문에 거쳐했는데, 양자(揚子)의 이른바 옛날의 학자는 밭갈며 기르며 삼년동안 한 경전을 통달했다고 하는 것을 취하고 그 잠자는 거실을 호하기를 일경지당(一經之堂)”이라고 하고, 간간히 나를 아뢰면서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학문을 두루 살펴본 것이 오래되지 못하고 문장은 또 비천하며 게다가 그대의 뜻에 발명한 것이 있지 않으니 원컨대 거듭 가함을 부탁하는 것은 이와 같이하기를 다시 한두 차례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금년 겨울에 나는 장차 벼슬을 사양하고 가는데, 가군이 또 청하였다. 이미 사양할 수 없어 바로 그를 위해 말하기를 나는 옛날의 이른바 배움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밭갈고 기를 따름이라고 한 것을 들었는데, 그 경()에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기를 장차 사물을 궁구할 적에는 그 앎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배움은 앎에서 시작하니, 오직 사물을 궁구하여야 만이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앎이 지극하면 뜻이 진실하고 마음이 올바르게 되어, 󰡔대학󰡕의 순서가 유추되어 어렵지 않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세상에서 또한 그저 장구(章句)와 송설(誦説)의 사이에 종사할 줄 알고 그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자는 진실로 장차 발갈고 또 기른다는 것이 부차적인 것이 될 것이다. 대저 어찌 외부에 용력할 것인가? 가군은 이름이 한()이고 자가 국재(國材)인데,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삼가며 성실하여 개연(介然)히 자수(自守)함이 있고 경전에 배우지 않음이 없다. 이제 장차 은거하려고 할 적엔 그 뜻이 스스로 이와 같을 수 없고 이에 대개 몸을 마친다면 그 조예(造詣)의 지극함은 내가 감히 헤아릴 것이 아니다. 잠시 이러한 말을 순서해서 기록한다. 소흥(紹興) 26(1156) 윤월 신축일(辛丑日)에 신안 주희는 기록한다.

紹興二十三年秋七月, 予來同安. 明年, 乃得柯君而與之游相樂也. 時君以避地邑居, 教授常百餘人. 屬予治學事, 因得引君以自助. 君行峻, 不爲苟合, 由是衆始有所嚴憚. 至他事, 亦多賴以濟焉. 又明年, 君將反其先人之廬, 因舊葺壞以居, 而取揚子所謂古之學者耕且養, 三年通一經, 號其寢居曰一經之堂”, 間謁予記之. 予謝渉學未久, 文且下, 將不能有所發明於吾子之意, 願更屬可者, 如是非復一再至. 今年冬, 予將辭吏以去, 而君又以爲請. 既不得辭, 乃爲之言曰, 予聞古之所謂學者非他, 耕且養而已矣. 其所以不已乎經者, 何也? : 將以格物而致其知也. 學始乎知, 惟格物足以致之. 知之至則意誠心正, 而大學之序推而達之無難矣. 若此者, 世亦徒知其從事於章句誦説之間, 而不知其所以然者, 固將以爲耕且養者資也, 夫豈用力於外哉? 柯君國材, 爲人孝謹誠慤, 介然有以自守, 於經無不學. 今將隱矣, 而其志不自足如此, 是蓋終身焉, 則其造詣之極, 非予所敢量也. 姑次比是説, 爲之記云. 紹興二十六年閏月辛丑, 新安朱熹.

 

 

 

 

운재기 芸齋記

 

 

 

해제이 글은 주희가 자신의 벗 서원빙(徐元聘)이 헌창(軒窗)에서 자신을 위하는 공부를 하며 즐겁게 지내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벗 서원빙(徐元聘)은 전사(田舍) 일구(一區)가 있고, 곁에 헌창(軒窗)을 마련하여 밝고 깨끗하게 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더라. 시간 나는 대로 자제와 함께 그 칸에서 강학하는데, 명칭을 나()에게 물었다. ()는 옛날에 농사지으며 밭을 알았는데, 뜻은 일찍이 맹자가 사람들의 병통은 자기 밭을 버려두고 남의 밭을 김매는 데에 있으나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중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가볍다고 말한 것을 이르니 가장 좋은 비유이다. 이제 서군(徐君)은 그 자제에 일을 부과하면서도 전원에서 배우니 잠시 ()’로 재()를 이름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밭에서 김매는 일에 나아가 생각하도록 한다면 안으로 자기의 임무와 밖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의 구분이 정해져 힘이 다른 사람의 밭에까지는 다하지 않을 것이다. 서리와 이슬이 이미 성하였어도 열매 맺어 그것을 먹으니 다른 사람의 고량진미(膏粱珍味)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서군이 나의 말로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글을 써 남긴다. 소흥(紹興) 26(1156) 윤달 5일 계묘일(癸卯日)에 신안 주희는 쓴다.

友人徐元聘有田舍一區, 旁治軒窗, 明潔可喜. 暇日與子弟講學其間, 而問名於. 故爲農知田, 意嘗謂孟子言人病舍其田而芸人之田, 所求於人者重而所以自任者輕, 最爲善喻. 徐君課其子弟而學於田間, 姑以名齋, 使學者即事而思之, 則内外之分定而力之所肆不於人之田矣. 霜露既繁, 實而食之, 所以不願人之膏粱之味也. 徐君言爲然, 故書以遺之云. 紹興二十六年閏月五日癸卯, 新安朱熹.

 

 

 

 

외루암기 畏壘庵記

 

 

 

해제이 외루암(畏壘庵)은 동안현(同安縣) 서북쪽에 있는데 진양걸(陳良傑)이 거처한 곳이다. 주희가 임기 말년에 빌려 머물며 지내니 당시 사람들이 거의 경상자(庚桑子)가 외루(畏壘)에 거처한 것처럼 여겼다. 그래서 주희가 이름하고 스스로 기문을 지은 것이다.

 

소흥(紹興) 26(1156) 가을에 나는 동안(同安)에서 벼슬한 지가 바로 3년이 될 것이다. 이부(吏部)에서 나를 대신하도록 하는 자가 이르지 않고 관청은 날마다 무너져 거처할 수 없었다. 바야흐로 지붕의 쓸 만함으로 인하여 현에 청하니 마침 벼슬을 주어 이웃 군으로 가게 되자, 그 어머니와 처자를 함께 타게 하고 몸소 전송하여 동쪽 담계(潭溪)로 돌아갔다. 봄철을 지나고 돌아왔더니, 문이나 처마, 잇날아 있는 집들이 이미 무너져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고을 사람 진씨(陳氏)의 집을 빌려 거처한 것이다. 고을 서북쪽에서 꺾어 수백보를 걸어서 꼬불꼬불한 길 속으로 들어가 울타리와 지붕이 있는 낮은 집 아래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관경(觀境)은 없다. 그러나 그 속은 대략 완전하고 깨끗한데, ()은 손님이나 벗을 대접할 만하고, ()은 깃들어 쉬는 것을 구비할 만하여 책과 역사를 송독하면서 가화(佳花)이훼(異卉)만약(蔓藥)분하(盆荷)의 따위가 또 모두 뜰아래에 줄지어 모종되어, 또 이목을 즐겁게 하면서도 스스로 그 뜻에 맞을 수 있었다. 나만이 그 사이에 거처하며 점점 외부의 일을 버리고, 벗과 학생이 배우기를 좋아하도록 명령하는 자가 함께 그 관청 아래에 거처하고, 먼지를 제거하고 우물을 긷고 불을 때는 종들이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은 몇 사람 없었다. 만일 평상시 거마를 타고 온 손님과 서리가 관부에 일이 있으면 하는 일 없이 올 것이다. 손님이 혹 나에게 일러 이곳에 처하는 까닭은 거의 경상자(庚桑子)가 외루(畏壘)에 거처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거처를 연유하여 외루암(畏壘庵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문을 닫고 하루를 보내며, 재빠르게 깊은 계곡에 있는 듯하여, 저절로 몸이 연계되어 여기서 벼슬할 줄을 알지 못하다가 이미 해가 만기되었어도 갈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하면서도 여러 달이 지나자 나를 대신할 자 끝내 이르지 않아서, 법이 스스로 모면을 당하여 돌아갔다. 진씨가 나를 뵙고 그 일을 기록하면서 뒷사람이 부자(夫子: 주희)가 일찍이 여기에 거처한 것을 알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데, 경상자는 대체로 장주(莊周)와 열어구(列禦㓂)의 이른바 도가 있다는 사람인데, 나의 학문이 이미 부족하여 알지 못하겠고, 태사공(太史公)의 기록에서는 또 무릇 장주가 일컬은 외루허(畏累虛)와 항상자(亢桑子)의 따위는 모두 공허한 말이고 사실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망시공(亡是公)비유선생(非有先生)의 차례이다. 이 모두는 상고할 수 없고, 장주의 서사(書辭)만이 떳떳하고 기이함[經竒]을 가리키고 있어 볼 만한 것이 있다. 나는 이것으로써 그윽이 그 이름을 취하여 사절하지 않고, 마침내 글을 써서 진씨(陳氏)에게 주었다. 진씨는 당시 의원이 되었고, 나에게 기문을 청한 사람이니 이름이 양걸(良傑)인데, 사람됨이 근독주신(謹篤周慎)하여 그 가학을 이어받아 통하였다. 소흥(紹興) 27(1157) 여름 611일에 신안 주희는 기록한다.

紹興二十六年之秋, 予吏同安適三年矣. 吏部所使代予者不至, 而廨署日以隳敝, 不可居. 方以因葺之宜爲請於縣, 㑹予奉檄走旁郡, 因得并載其老幼, 身送之東歸. 涉春而反, 則門廡列舍已摧壓而不可入矣, 於是假縣人陳氏之館居焉. 自縣西北折行數百步, 入委巷中, 垣屋庳下, 無鉅麗之觀. 然其中粗完潔, 有堂可以接賓友, 有室可以備棲息, 誦書史, 而佳花異卉蔓藥盆荷之屬, 又皆列蒔於庭下, 亦足以娛玩耳目而自適其意焉. 予獨處其間, 稍捐外事, 命友生之嗜學者, 與居其下, 拚除井竈之役, 願留者亦無幾人. 若常時車馬之客與胥吏之有事於官府者, 則無所爲而來矣. 客或謂予所以處此, 庶乎庚桑子之居畏壘也, 因名予居曰畏壘之庵”. 自是閉門終日, 翛然如在深谷之中, 不自知身之繫官於此, 既歲滿而不能去也. 如是又累月, 代予者卒不至, 法當自免歸. 陳氏謁予記其事曰: “使後之人知夫子之嘗居于是也.” 予惟庚桑子莊周列禦㓂所謂有道者, 予之學既不足以知之, 而太史公記又謂凡所稱畏累虛亢桑子之屬, 皆空言無事實, 然則亡是公非有先生之倫也. 此皆不可考, 之書辭指經竒, 有可觀者. 予是以竊取其號而不辭, 遂書以畀陳氏. 陳氏世爲醫, 請予記者名良傑, 爲人謹篤周慎, 能通其家學云. 紹興二十七年夏六月十一日, 新安朱熹.

 

 

 

 

존재기 存齋記

 

 

 

해제이 글은 주희가 동안의 주부가 되었을 때 허승(許升)과 교류하였는데 그의 호()에 대한 의미를 기록한 것이다.

 

나는 동안에서 벼슬하며 그 학교에서 노닐었는데, 일찍이 사사로이 들은 것으로 그 선비와 내가 노니는 것을 말하였다. 이에 허생(許生) ()이란 사람을 얻어 경애(敬愛)하였다. 근래 내가 관리를 사양할 적엔 그와 함께 돌아기를 청하여 모두 그 강업을 마쳤다. 어느 날 허생이 나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이 올 적에는 내가 친히 한두 사람의 곤제(昆弟)와 함께 서로 환도(環堵)의 방을 부서진 오두막집 왼쪽에 축조하였고, 장차 돌아가려고 할 적엔 쑥이나 명아주로 지봉을 이어 거처하였다. 오직 부자(주희)만이 승의 뜻을 알기에 감히 이름붙이는 까닭을 청하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이 승의 소원입니다고 하였다. 나는 사절하지 못하고 허생과 서로 종유하며 생각한지가 이제 67년이 되었는데 그의 학문은 오로지 마음을 내부에 쓰고 세상의 교활한 것은 한 터럭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끼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일찍이 그윽이 허생의 학문이 대체로 맹자의 이른바 그 마음을 보존한다는 것에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존한다[]’는 글자로 그 서재를 이름하고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민첩하지 못하니 어찌 그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제 이것으로 그대의 서재를 이름한다면 그대의 뜻은 그윽이 저절로 거의한다고 할 것이다. 반드시 그대에게 그것을 이름하는 설로 고한다면 이 설이란 그대가 이미 스스로 알 것이고, 내가 또 어찌 그대를 말하겠는가? 아니면 일찍이 들으니 사람이 천지의 중앙에 자리하여 만물의 영장이 되는 까닭은 심일 다름이다. 그러나 심의 체단은 견문으로 얻을 수 없고 사려고 구할 수 없다. 유물(有物)이라고 하면 말에서 체득하지 못하고, 무물(無物)이라고 하면 일용의 사이에 가는 곳마다 옳지 않음이 없다. 군자는 여기서 또한 장차 어찌 그 능력을 사용할 것이겠는가? ‘반드시 종사하면서도 미리기대하지 말고 마음에서 잊지 말고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보존하려는 도이다. 이와 같이 보존하고, 보존하면서도 오래하고 오래하면서도 익숙하도록 하는 것이 심의 체단이 되지 반드시 장차 분명하게 참여하고 기대는 사이에 나타나 한 번 숨쉬는 사이라도 보존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서재를 이름하는 까닭의 설이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허생이 지어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승이 배우기를 원하는 것인데 가능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기니, 청컨대 써서 방 벽에 기록해주신다면 거의 스스로 노력함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써서 주어 돌아가서 새기도록 하였다. 소흥(紹興) 28(1158) 9월 갑신일(甲申日)에 신안 주희는 기록한다.

予吏同安而游於其學, 嘗私以所聞語其士之與予遊者, 於是得許生升之爲人而敬愛之. 比予之辭吏也, 請與俱歸, 以共卒其講業焉. 一日, 生請於予曰: “之來也, 吾親與一二昆弟相爲築環堵之室於敝廬之左, 將歸, 翳蓬藋而居焉. 惟夫子爲知之志, 敢請所以名之者而幸教之, 之願也.” 予辭謝不獲, 因念與生相從, 於今六七年, 視其學專用心於内, 而世之所屑, 一毫不以介於其間, 嘗竊以爲生之學蓋有意乎孟氏所謂存其心者. 於是以名其齋而告之曰: “予不敏, 何足以知吾子? 然今也以是名子之齋, 則於吾子之志竊自以爲庶幾焉耳矣. 而曰必告子以其名之之説, 則是説也吾子既自知之, 予又奚以語吾子? 抑嘗聞之, 人之所以位天地之中而爲萬物之靈者, 心而已矣. 然心之爲體, 不可以聞見得, 不可以思慮求. 謂之有物, 則不得於言; 謂之無物, 則日用之間無適而非是也. 君子於此, 亦將何所用其力哉?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 則存之之道也. 如是而存, 存而久, 久而熟, 心之爲體, 必將瞭然有見乎參倚之間, 而無一息之不存矣. 此予所以名齋之説, 吾子以爲如何?” 生作而對曰: “此固之所願學而病未能者, 請書而記諸屋壁, 庶乎其有以自礪也.” 予不獲讓, 因書以授之, 俾歸刻焉. 紹興二十八年九月甲申, 新安朱熹.

 

 

 

 

목재기 牧齋記

 

 

 

해제이 글은 주희가 존재(存齋)를 지어 거처하였는데,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며 자신을 위하는 공부를 하며 성인에 이르고자 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내가 이 재()를 지어 거처한지가 3년이 되었는데, 굶주림추움위험박절함의 염려가 일찍이 하루도 그 마음에서 없지 않았다. 여행길에 기구 준비의 수고로움과 질병의 우려가 있지 않다면 하루도 육경과 백씨(百氏: 百家)의 서책을 취하여 여기서 송독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돈독한 뜻과 일의 근면성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그 지혜가 더욱더 명철하고 학업이 더욱더 전진하여 지혜가 더욱 어둡고 학업이 더욱 그만두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허물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간간히 생각하기를, 저 굶주림추움위험박절함의 염려를 가지고서 성인의 문하에 종사하고, 여행길에 기구 준비의 수고로움과 질병의 우려가 혼잡되고, 사물의 누가 있고, 우유(優游)의 즐거움이 없다면 그 이치의 정미함에 대해 탐색하여도 극진히 할 수 없고, 그 일의 시비나 고금의 성패흥폐의 연유도 고찰하여도 그 자세함을 얻지 모할 것이다. 하물며 옛 사람들의 학문이 점진적으로 함양하고 지양(持養)하는 까닭은 진실로 일찍이 그 마음에 베풀고 그 몸에 두는 것이다. 이와 같으면 대저 주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사업의 성취를 바래고 도덕의 진전을 인도하는 것은 또한 허망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군자는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도 태연히 처신하였으니, 일직이 그 마음에 근심함이 있어도 그 말에 급급하지 않았다. 저들이 당세(當世)에 궁함이 나보다 심한 것이 있을 것이다. 자기에게 자득한 것이 이와 같고, 반드시 마음을 쓰는 까닭은 혹 나와는 다를 것이다. 공자가 가난하면서도 즐겁다고 하였고,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그러하니, 어찌 굶주리고 추운 것이 그 뜻을 움직이겠으며, 어찌 책만을 끼고 독서하는 것으로 배운다고 하겠는가? 나는 바야흐로 이것에 힘쓰며 스스로 성인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그 까닭을 기술하고 그 말을 벽에 써서 기()를 삼노라.

余爲是齋而居之三年矣, 飢寒危迫之慮, 未嘗一日弛於其心. 非有道路行李之勞, 疾病之憂, 則無一日不取六經百氏之書以誦之於兹也. 以其志之篤事之勤如此, 宜其智益加明, 業益加進, 而不知智益昏而業益墮也. 以是自咎, 故嘗間而思之, 夫挾其飢寒危迫之慮以從事於聖人之門, 而又雜之以道路行李之勞疾病之憂, 有事物之累, 無優游之樂, 其於理之精微, 索之有不得盡, 其事之是非, 古今之成敗興廢之故, 考之有不得其詳矣. 況古人之學所以漸涵而持養之者, 固未嘗得施諸其心而措諸其躬也. 如此則凡所爲早夜孜孜以冀事業之成而詔道德之進者, 亦可謂妄矣. 然古之君子一簞食瓢飲而處之泰然, 未嘗有戚戚乎其心而汲汲乎其言者. 彼其窮於當世, 有甚於余矣. 而有以自得於己者如此, 必其所以用心者或異於予矣. 孔子貧而樂”, 又曰古之學者爲已”. 其然也, 豈以饑寒者動其志, 豈以挾策讀書者而謂之學哉? 予方務此以自達於聖人也, 因述其所以而書其辭於壁以爲記.

 

 

 

 

귀락당기 歸樂堂記

 

 

 

해제주언실(朱彦實)은 귀락당(歸樂堂)을 짓고 천하를 다스릴 뜻 없이 여기에 거처하며 휴식을 취하였다. 이 글은 주언실이 이에 대한 뜻을 주희에게 전하며 기문을 부탁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천주(泉州) 동안(同安)의 관리가 되어 선유현(僊游縣) 주후(朱侯) 언실(彦實) 동료와 함께 서로 잘 지냈다. 그 후 나는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온 지가 또 56년이었으나 질병으로 시골집에 누워 지내니 차츰차츰 세상 사람들과 서로 알고 지내지 못하였는데 유독 주후만이 때때로 서한을 보내고 방문하여 곡진하고 정답게 이야기 하고 옛일을 말한 것이 평생의 기쁨과 같았다. 어느 날 서한 나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앞 오두막 옆에 집을 축조하고 그것을 명명하여 귀락당(歸樂堂)’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상방에 경륜을 펼칠 뜻이 게을러져 장차 여기에 의탁하여 스스로 쉴까 합니다. 그대가 나를 위해 이것을 기록하여 주시요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어려서는 배우고 강성하여서는 벼슬하고 늙어서는 돌아가며 돌아가서는 즐거워하나니, 이것은 항상 만물의 큰 심정이고 사군자(士君子)가 한 가지로 하는 것이다. 혹자는 가난에 쪼들려 이익에 유혹당하고 권세에 핍박당하여 헌면(軒冕: 관직)솨 인불(印韍: 관리의 인장)의 사이를 돌아보며 늙어서도 돌아가지 못하고 혹 돌아가도 술을 마시고 오락을 좋아한 나머지 담박함을 싫어하고 옛날을 회고하고 사모하면서 그 옛 심정을 잊지 못하였다. 바야흐로 또 차탄하고 근심하면서 스스로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니 어찌 돌아온 것이 즐거움이 된 것을 알겠는가? 혹 이를 안다 해도 도리어 그 이전 벼슬을 쫒아 행동한 것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지 못한 자는 그 즐거워한 것에 비록 잠시 편안하고자 할지라도 진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벼슬하면서도 돌아갈 수 있고 돌아가서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또한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주후의 이름은 경자(卿字)인데 젊어서 아름다운 재능이 있었으나 학문은 강개(慷慨)하였다. 벼슬길에 들어가서 30년 동안에 강직함으로써 스스로 완수하고 홀로 뜻한 것을 행하면서 권세에 굽히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부침(浮湛: 영고성쇠)하더라도 선발하기를 고르게 하였는데 나이 50세에야 왕조의 관직에 등극하였다. 그러나 내가 부서기회(簿書期㑹)의 남은 날을 보면 대개 하루도 빈우(賓友)와 종자질(從子姪)에게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고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여 악기타며 노래부르고 시 짓으면서 속세의 티끌 밖에서 방랑하여도 유락불우(留落不遇)의 뜻이 말이나 얼굴에 보이는 기미가 없으니 곧 권세와 이익에는 어떻겠습니까? 그 벼슬하면서도 돌아갈 수 있으며 돌아가서도 즐길 수 있으니 이 집이 지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의심할 것 없이 믿을 수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나는 한 번도 이 집에 올라가서 그 빼어난 경치를 보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그 임학(林壑)의 아름다움과 천석(泉石)의 풍요로움은 배회하면서 의지할 수 있으며 관우(館宇)의 깊숙함과 계처(啟處)의 적당함은 연휴(燕休)에 편안하며 도사(圖史)의 풍부함은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하여 유인일사(幽人逸士)가 동북의 밭두둑을 왕래한 것은 명리(名理: 名物義理)을 분석하고 고금을 헤아릴 수 있으니, 또 이목에 접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주후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음을 알 것이다. 이로써 명령을 받들고 이를 사양하지 못하여 그 뜻을 기록한 것이 이와 같다. 만일 하늘의 복으로 타일 당상(堂上)에 종유하는 것을 얻게 되면 여전히 주후를 위하여 시를 지을 것이다. 소흥(紹興) 30(1160) 12월 을묘이다.

予嘗爲吏於泉之同安, 而與僊游朱侯彦實同寮相好也. 其後予罷歸且五六年, 病臥田間, 浸與當世不相聞知, 朱侯時時書來, 訪問繾綣, 道語舊故, 如平生驩. 一日, 書抵予曰: “吾方築室先廬之側, 命之曰歸樂之堂’. 蓋四方之志倦矣, 將託於是而自休焉. 子爲我記之.” 予惟幼而學, 强而仕, 老而歸, 歸而樂, 此常物之大情而士君子之所同也. 而或者怵迫勢利, 睠睠軒冕印韍之間, 老而不能歸, 或歸矣, 而酣豢之餘, 厭苦淡泊, 顧慕疇昔, 不能忘情. 方且咨嗟戚促, 自以爲不得其所, 而豈知歸之爲樂哉? 或知之矣, 而顧其前日從官之所爲有不能無愧悔于心者, 則於其所樂雖欲暫而安之, 其心固不能也. 然則仕而能歸, 歸而能樂, 斯亦豈不難哉? 朱侯卿子, 少有美材, 學問慷慨. 入官三十年, 以彊直自遂, 獨行所志, 不爲勢屈. 以故浮湛選調, 行年五十, 乃登王官. 然予視其簿書期㑹之餘日, 蓋無一日不命賓友從子姪, 登山臨水, 弦歌賦詩, 放浪於塵埃之外, 而無幾微留落不偶之意見於言面, 則其於勢利如何哉! 其仕而能歸, 歸而能樂, 不待斯堂之作而可信無疑矣. 顧予未獲一登斯堂而覽其勝槩, 然其林壑之美泉石之饒足以供徙倚, 館宇之邃啓處之適足以寧燕休, 圖史之富足以娛心目, 而幽人逸士往來於東阡北陌者, 足以析名理而商古今, 又不待接於耳目而知侯之樂有在乎是也. 是以承命不辭而記其意如此. 如天之福, 異時獲從遊於堂上, 尚能爲侯賦之. 紹興三十年十二月乙卯.

 

 

 

 

건령부 학교 유어사 사기 建寧府學游御史祠記

 

 

 

해제정자문인(程子門人) 가운데 사군자(四君子)로 일컬는 유작(游酢)는 휘종 때 어사(御史)가 되어 얼마 되지 않은 기간 고을을 다스리다가 물러가 한가롭게 지내며 죽었다. 연평(延平) 진공(陳公)이란 사람이 그가 죽은지 41년이 되었어도 학교에 사당이 없음을 개탄하고 주희에게 기문을 부탁하자 주희는 양시(楊時)어사유공묘지명(御史游公墓誌銘)에 의거하여 그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고 감찰어사(故監察御史) 유공(游公) 선생의 휘는 조()이고 자는 정부(定夫)니 이 나라의 건양인(建陽人)이며 하남(河南) 정씨(程氏)의 고족제자이다. 휘묘(徽廟) 초기에 어사가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양자강()과 회수(淮水)의 사이에서 군수가 되었고, 또 물러가 한가하게 거처하다가 죽었다. 융흥(隆興) 원년에 세재(歲在) 계미년(癸未)에 선생이 죽은 지 어언 41년이 되었다. 이제 보문각(敷文閣) 지제(待制) 연평(延平) 진공(陳公)은 진실로 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덕과 학문의 성대함이 선생과 같은 것이 있지만 그 고을의 학교에는 사당이 없어, 고을 사람 자제의 허물일 뿐만 아니라 백성에게 어른 노릇하는 사람도 허물이 있어, 바로 부학(府學) 동편(東偏)에 당을 만들고 상()을 세워 제사를 올리는데, 글을 나(주희)에게 부탁하여 그 뜻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나는 감히 사양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주 돌아가 말하였지만 공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물러가 옛날 들은 것을 생하고, 구산(龜山) 양문정공(楊文靖公)이 지은 선생의 묘지(墓誌)의 말을 안찰하였다.

故監察御史游公先生諱, 定夫, 此邦之建陽, 河南程氏之髙第弟子也. 徽廟初爲御史, 未幾去, 爲郡江淮, 又退而閒居以卒. 隆興初元, 歲在癸未, 先生之殁於是四十有一年矣. 敷文閣待制延平陳公實爲此邦, 謂德學之盛有如先生者而無祠於其鄉之學, 非獨鄉人子弟之過, 長民者亦有罪焉, 乃爲堂於府學之東偏, 立像致祠, 而以書屬, 使記其意. 辭謝弗堪, 屢返而公不聽, 於是退考舊聞, 龜山楊文靖公所爲先生墓誌之辭曰:

 

나는 원풍(元豐) 연간 중에 명도(明道) 선생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벗 두 사람이 있으니, 상채(上蔡) 사현도(謝顯道)이고 공은 그 한 사람이다. 처음에 이천(伊川) 선생은 일이 있어 경사에 이르렀는데, 한 번 공을 보고 그 현명함은 함게 도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때 명도는 부구현(扶溝縣)의 지사가 되어 선생의 형제는 바야흐로 도학을 창명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로 삼고, 상서(庠序)를 설치하고 읍 사람의 자제를 보아 가르치고 공을 불러 와서 학사를 맡도록 하였다. 공은 기쁜 듯이 가서 추종하고 그 은미한 말을 얻어 여기서 그 학문을 완전히 버리고 배웠다. 그 후 읍의 하청(河清)을 얻고 내가 가서 뵈었다. 이천은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유군(游君)의 덕기(德器)는 순수하고 학문은 날로 나아가, 정치의 일 또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 스승의 문하에서 칭송받음이 이와 같으니 그 나아간 것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무리짓지 않고 독서할 때 한 번 눈에 지나가면 모두 외웠다. 장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마음으로 전하고 눈으로 이르러 세유(世儒)의 학습을 하지 않았다. 속 마음이 진실하여 밖에 드러나 의용(儀容)과 사령(辭令)이 찬연하게 문채가 있어 그를 바라보면 성덕군자(成德君子)이을 알 것이다. 그 어버이를 섬김이 어기는 것이 없고 붕우와 교류하는데 믿음이 있고 벼슬에 나아가 관리를 대우하는 것이 은혜로운 뜻이 있으니 비록 사람들은 스스로 다하는데 즐거워하더라도 감히 그 명령을 업신여기는 것이 없었다. 은혜로운 정사가 백성에 있고 백성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 하기 때문에 떠나가면 사모하게 되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은혜를 잊지 않는다. 만일 그 도학이 사람들을 깨닫게 할 수 있고 여윤(餘潤)이 천하를 윤택할 수 있다면 때를 만나 청명하고 등용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이것은 선비들이 함께 애석하는 것을 의논하는 것이니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다. 저서에는 󰡔중용의(中庸義)󰡕․󰡔역설(易説)󰡕․󰡔시이남의(詩二南義)󰡕․󰡔논맹잡해(論孟雜解)󰡕 1권이 있고, 문집 10권은 집에 보관되었다.” 대개 양공(楊公)의 기록이 이와 같다.

元豐中受學明道先生兄弟之門, 有友二人焉, 上蔡謝顯道, 公其一也. , 伊川先生以事至京師, 一見公, 謂其賢, 可與適道. 是時明道扶溝縣, 先生兄弟方以唱明道學爲已任, 設庠序, 聚邑人子弟教之, 召公來職學事. 公欣然往從之, 得其微言, 於是盡棄其學而學焉. 其後得邑河清, 予往見之. 伊川謂予曰: ‘游君德器粹然, 問學日進, 政事亦絶人逺甚.’ 於師門見稱如此, 其所造可知矣. 公自幼不羣, 讀書一過目輒成誦. 比壯益自力, 心傳目到, 不爲世儒之習. 誠于中, 形于外, 儀容辭令, 粲然有文, 望之知其爲成德君子也. 其事親無違, 交朋友有信, 蒞官遇僚吏有恩意, 雖人樂於自盡而無敢慢其令者. 惠政在民, 戴之如父母, 故去則見思, 愈久而不忘. 若其道學足以覺斯人, 餘潤足以澤天下, 遭時清明, 不及用而死, 此士論共惜之, 非予之私言也. 所著書有中庸義易説詩二南義論孟雜解各一卷, 文集十卷, 藏於家.” 楊公所記如此.

 

주희는 선생의 깊음을 알고 그 덕과 믿음을 후세에 명할 만함을 말하니, 마땅히 양공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선생의 도학과 덕행은 여기서 그 자세함을 볼 수 있다. 또 생각하건대 매년 진공을 시좌(侍坐)하게 되어 그가 선정(先正) 충숙공(忠肅公)이 선생과 함께 종유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소담(笑談)과 논의(論議), 서소(書疏)와 사장(辭章)에 대해 옛날 친히 보고 들은 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송독할 수 있었다. 그의 온화한 용모가 우러르고 굽어보는 사이에 또 그 깊고 은미한 뜻을 모두 얻어 듣는 사람이 황홀한 듯하여 장차 다시 그 사람을 볼 것처럼 하게 하니 이것은 그 선생의 도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공이 왕명에 의해 선생을 제사하는 것은 대체로 장차 그가 자기에 얻은 것을 미루어 이 나라의 사람을 가르쳐 주신 것이니, 한갓 흠모의 뜻을 이루어 옛 일을 닦을 따름이 아니다. 주희가 이미 말을 마칠 수 없었는데, 바로 모두 양공의 본래 말을 의논하여 저술하고 감히 문득 그 사이에 한 말도 돕지 않았다. 또 다시 공이 가리키는 뜻의 출처가 이와 같은 것을 헤아리고 함께 써서 공의 명령을 받들었으니 거의 죄가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오호라. 선생은 멀어졌구나! 배우는 사람은 이 당에 돌러 그 동상에 절하고, 여기에 기록하는 것은 그 사우의 연원을 고찰하고 물러가 그 책을 찾아 읽었다. 선생의 배우는 까닭을 구하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마는 다행히 스스로 얻음이 있다면 또한 친히 배운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경󰡕에서 사람들 가운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여, 나에게 큰 길을 보여주오라고 하고, 높은 산 우러르고 큰 길 행한다고 하였는데, 주희는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학문을 계승한 선비와 함께 면강하여 진공의 덕을 잊어버리는 것이 없기를 원합니다. 8월 갑자에 구위(具位) 주희는 기록한다.

惟知先生之深而言足以命其德且信於後, 宜莫踰於楊公. 然則先生之道學德行, 於此可以觀其詳矣. 又念每獲侍坐於陳公, 而聞其語先正忠肅公之與先生遊也, 笑談論議, 書疏辭章, 昔所親見而聞之者, 至今尚能誦之. 其雍容仰俯之間, 又能併得其深微之意, 使聞者恍然若將復見其人焉, 此其於先生之道如何哉? 然則公之所以命祀先生, 蓋將推其所得於己者以幸教此邦之人, 非徒致欽慕之意以修故事而已也. 既不獲終辭, 乃悉論著楊公本語而不敢輒贊一辭於其間, 且復揆公指意所出者如是而并書之, 以承公命, 庶乎其可幸無罪云耳. 嗚呼, 先生逺矣! 學者登是堂而拜其像, 於是記也考其師友之淵源, 退訪其書而讀之, 於以求先生之所以學者果惡乎在, 幸而有以自得之, 則亦無以異乎親而灸之矣. 詩曰: “人之好我, 示我周行.” 又曰: “髙山仰止, 景行行止.” 雖不敏願與承學之士勉焉, 以無忘陳公之德也. 八月甲子, 具位朱熹.

 

 

 

 

통감실기 通鑑室記

 

 

 

해제이 글은 󰡔자치통감(資治通鑑)󰡕 수십 질을 취하여 그 방에 나열하고서 분향하고 대면하면서 날로 여러 책을 다 읽기에 이 공부하는 방을 통감실(通鑑室)이라고 이름하고 그에 대한 선비가 해야 할 일을 기술한 것이다.

 

선비가 천하의 일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은 그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능이 아니면 곧 그 뜻을 구제할 수 없고, 술책(術策)이 아니면 곧 그 재능을 보좌할 수 없다. 그래서 옛날의 군자가 이 세 가지를 겸하지 아니하면 세상에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술책이란 것은 또 어찌 음험궤측(陰險詭仄)조삼모사(朝三暮四)를 말하겠는가마는 또한 일을 처리한 방법이 된 것을 말할 따름이다. 영구(營久)의 장후(張侯) 중융(仲隆)은 강개하여 기절이 있어 항상 옛사람의 공명과 사업으로 스스로 기약하고 허락하여 세속의 이런일 저런일을 녹록하게 따르는 것을 수긍하지 아니하였다. 그 재기(才器)가 크고 넓으면 이용한 것이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이는 대개 큰 사변에 임하여서도 더욱 그 정신을 더하고 지휘하며 처리하고 계획하는 것이 하나도 기회(幾會)에 적중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것은 그 뜻과 재능이 비록 그 시설을 죄다 보지 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이 그 여유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바야흐로 또 책들을 널리 보면서도 기록하고 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대개 장차 옛날을 참작하고 지금을 헤아려 더욱 일 처리하는 방법을 다하여 베푸는 것을 구하였다. 세상의 학사(學士)와 대부가 힘써 책을 진술하며 좋은 것을 채록하여 담론하고 청취하는 자료를 삼았고, 그 사실을 베푸는데 이르러서는 곧 범연히 의거함이 없을 따름이다. 일찍 숭안(崇安)의 광화정사(光化精舍)에 우거하면서 한가한 날에 대문 오른쪽에 하나의 방을 새롭게 하여 다른 물건을 두지 아니하고 유독 󰡔자치통감(資治通鑑)󰡕 수십 질을 취하여 그 방 가운데 나열하고서 분향하고 대면하면서 날로 여러 책을 다 읽었다. 대개 위아래 몇 해 사이 안위치란(安危治亂)의 기회와 정위길흉(情僞吉凶)의 변화에 큰 것은 강령을 이끌고 자세한 것은 적은 것을 분석하여 마음에서나 눈에서나 명료하여 적당하여 내가 일 처리하는 방법 아닌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대개 3년 동안하면서 그 기거하고 음식하며 연오(宴娛)하고 담소하는 것도 하루도 여기에 있지 아니함이 없었다. 방 앞마루에서는 여러 산을 굽어보고 아래로는 맑은 물의 흐른 곳에 임하고 읍옥(邑屋)대관(臺觀)원림(園林)피택(陂澤)의 승경(勝景)과 월성(月星)우로(雨露)풍연(風煙)운물(雲物)의 기특함이 또 신령스러운 흉금을 깨끗하게 씻고 신명의 관경을 도우며 열어준 것이 더욱 이 글을 읽는데 마땅함이 되었다. 여기에 곧바로 통감으로 표방하여 나에게 기록을 부탁하였다.

士之所以能立天下之事者, 以其有志而已. 然非才則無以濟其志, 非術則無以輔其才. 是以古之君子未有不兼是三者而能有爲於世者也. 然而所謂術者, 又豈隂險詭仄朝三暮四之謂哉, 亦語夫所以處事之方而已矣. 營丘張侯仲隆慷慨有氣節, 常以古人功名事業自期許, 不肯碌碌隨世俗上下. 至其才器閎博, 則又用無不宜. 蓋臨大事變而愈益精神, 指麾處畫, 無一不中幾㑹者. 是其志與其材雖未盡見施設, 而人知其有餘矣. 然未嘗以是自足也, 方且博觀載籍, 記覽不倦, 蓋將酌古揆今, 益求所以盡夫處事之方者而施之. 非特如世之學士大夫兀兀陳編, 掇拾華靡, 以爲談聽之資; 至其施諸事實, 則泛然無據而已也. 嘗客崇安光化精舍, 暇日新一室於門右, 不置餘物, 獨取資治通鑑數十帙列其中, 焚香對之, 日盡數卷. 蓋上下若干年之間, 安危治亂之機, 情僞吉凶之變, 大者綱提領挈, 細者縷析毫分, 心目瞭然, 無適而非吾處事之方者. 如是蓋三年矣, 而其起居飲食宴娛談笑亦無一日而不在是也. 室之前軒俯視衆山, 下臨清流, 邑屋臺觀園林陂澤之勝, 月星雨露風煙雲物之竒, 反若有以開滌靈襟, 助發神觀者, 尤於讀是書也爲宜. 於是直以通鑑榜之, 而屬予記.

 

내가 들으니 고금은 때이고 득실은 일이며, 이것을 전하는 것은 책이고 이를 읽는 자는 사람이다. 사람이 글을 읽어 고금을 관통하고 득실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인()이다. 대개 사람이 진실로 나의 한 생각의 깨달음에 나아가 묵묵히 알아 견고하게 보존할 수 있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없다. 하물며 이 책은 선정(先正) 온공(溫公)의 뜻인데, 그것은 그 전형(典刑)이 모으고 간독(簡牘)이 많이 모여 신조(神祖)의 성스러운 조서로 칭찬하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족히 그 마음을 다할 수 없겠는가? 지금 장후(張侯)가 당세의 뜻과 당세의 재능이 있고 또 이 책으로 인하여 그 술책을 죄다 구하니 이것이 어찌 진실로 그러할 따름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오히려 행동이 드러나고 학습이 자세한 길에 나아가고자 하여 가사 타일에 사용되는 것이 추호의 차이도 없게 한다면, 원하건대 인()의 설로 장후를 위하고 암송할 것이다. 이로써 명령을 받들고 사양하지 아니하고 그 본말을 기록하여, 이와 같이 들은 것을 첨부한다. 건도(乾道) 3(1167) 가을 7월에 신안(新安) 주희는 기록한다.

予聞之, 古今者, 時也; 得失者, 事也; 傳之者, 書也; 讀之者, 人也. 以人讀書而能有以貫古今定得失者, 仁也. 蓋人誠能即吾一念之覺者黙識而固存之, 則目見耳聞無非至理. 而况是書先正温公之志, 其爲典刑總㑹簡牘淵林, 有如神祖聖詔所褒者, 是亦豈不足以盡其心乎? 今侯有當世之志當世之才, 又能因是書以求盡其術, 此豈茍然而已哉? 然予猶欲進於行著習察之塗, 使異時見於用者無毫釐之差也, 則願以仁之説爲侯誦之. 是以承命不辭而記其本末, 因附以所聞如此. 乾道三年秋七月, 新安朱熹

 

 

 

 

남악유산후기 南嶽遊山後記

 

 

 

해제이 글은 경부(敬夫) 장식(張拭)이 남악에서 산에서 노닐며 시를 주고받은 까닭을 서문으로 보내자, 그것에 대한 주희가 동료와 함께 남악(南嶽)에 이르는 과정과 시를 쓴 내용적 의미를 기록한 것이다.

 

남악(南嶽)에서의 창수(唱酬)는 경진년(庚辰日)에 끝냈는데, 경부(張敬夫)가 이미 그러한 까닭을 서문으로 써서 보관하였다. 계미년(癸未日)에 승업사(勝業寺)를 출발하자, 백숭(伯崇)도 그 무리와 이별하고 형제를 따라 왔다. 처음 수렴(水簾)의 빼어난 경치를 듣고 장차 가서 한 번 보려했는데 비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순수(趙醇叟)호광중(胡廣仲)백봉(伯逢)계립(季立)감가대(甘可大)가 와서 운봉사(雲峰寺)에서 이별하고, 주오행(酒五行)에 대해 의심난 것을 자세히 논하고 이별하였다. 병술일에 저주(櫧州)에 이르렀는데 나(주희)와 백숭택지(擇之)는 길을 돌려 동쪽에서 돌아오고, 경부는 이곳으로부터 서쪽에서 장사(長沙)로 돌아왔다. 계미일로부터 병술일까지는 대체로 4일이었고, 남악의 궁에서 저주까지는 무릇 180리가 되는데, 그 사이의 삼천임야(山川林野)와 풍연경물(風煙景物)은 여태까지 본 것이기에 시() 아닌 것이 없으나 이전에 이미 <시를 짓지 않겠다는> 기약이 있었다. 그러나 또한 이별할 날이 임박하게 됨을 생각하여, 이전 날에 강론한 것이 대체로 이미 그 단서만 열어놓고 끝마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야흐로 또 서로 함께 깊이 생각하고 토론하여 그 설을 끝맺는다면, 그 시를 짓기에는 굳이 여유로운 시간이 없을 것이다. 병술일 저녁에 내(주희)가 대중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시를 짓는 것은 본래 좋지 아니함이 없다. 우리들이 깊이 징계(懲戒)하고 통절(痛絶)하는 것은 거기에 빠져들어 근심이 생길까 두려워할 뿐이니 그 시초에는 또한 어찌 시를 짓는데 허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지금 멀리 이별할 기약이 조석(朝夕)에 가까우니 시로 말하지 않는다면 알기 어려운 속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 날에 일시 굽은 것을 바로잡음이 너무 심하다는 약속은 이제 또한 그만둘 만하다고 하였다. 모두 응하여 그렇습니다고 하였다. 이윽고 경부가 시를 기증하자 우리 세 사람도 또한 각각 시로 답하여 그 뜻을 보였다. (주희)가 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전 날의 기약이 이미 지나갔지만, 그러나 그 계구경성(戒懼警省)의 뜻은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시가 본래 뜻을 말한다면, 그 답답한 마음을 펴며, 공평중정의 마음을 너그럽고 부드럽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거기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바로 거의 뜻을 잃어버리는 데 이르고, 여러 사람과 지내는 것에 인()을 보조하는 이익이 있다면 그 의리가 정밀하여 이치가 터득되고 행동이 차례와 생각에 들어맞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오히려 간혹 나쁜 데로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여러 사람을 떠나 거처한 뒤에 사물의 변화가 무궁함을 찾은들 미세한 사이와 호발(毫髮)의 즈음에 귀와 눈을 현혹시키고 마음과 뜻에 느끼고 옮겨버리는 것을 또 장차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전 날에 계구경성의 뜻이 비록 적은 허물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러나 또한 허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확충해 가면 거의 그 과실이 적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경부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좋으니 그것을 마침내 써서 가르침으로 삼아 잊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여기에 증처(贈處)의 여러 시를 책에 죄다 기록하였는데 그 내용도 기록함이 이와 같았다. 지금부터 틈나는 날 때때로 내어 보면 그것이 또한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의 경계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해년(丁亥年: 1167) 신안 주희는 기록한다.

唱酬訖于庚辰, 敬夫既序其所以然者而藏之矣. 癸未發勝業, 伯崇亦别其羣從昆弟而來. 始聞水簾之勝. 將往一觀, 以雨不果. 趙醇叟胡廣仲伯逢季立甘可大來餞雲峯寺, 酒五行, 劇論所疑而别. 丙戌至櫧州, 伯崇擇之取道東歸, 敬夫自此西還長沙. 自癸未至丙戌凡四日, 自嶽宫至櫧州凡百有八十里, 其間山川林野, 風煙景物, 視向來所見, 無非詩者, 而前日既有約矣. 然亦念夫别日之迫, 而前日所講葢有既開其端而未竟者, 方且相與思繹討論, 以畢其説, 則其於詩固有所不暇者焉. 丙戌之莫, 諗於衆曰: “詩之作, 本非有不善也. 而吾人之所以深懲而痛絶之者, 懼其流而生患耳, 初亦豈有咎於詩哉? 然而今逺别之期近在朝夕, 非言則無以寫難喻之懷. 然則前日一時矯枉過甚之約, 今亦可以罷矣.” 皆應曰諾. 既而敬夫以詩贈. 吾三人亦各荅賦以見意. 則又進而言曰: “前日之約已過矣, 然其戒懼警省之意, 則不可忘也. 何則? 詩本言志, 則宜其宣暢湮鬱優柔平中, 而其流乃幾至於喪志; 羣居有輔仁之益, 則宜其義精理得, 動中倫慮, 而猶或不免於流. 况乎離羣索居之後, 事物之變無窮, 幾微之間, 毫忽之際, 其可以營惑耳目感移心意者, 又將何以禦之哉? 故前日戒懼警省之意, 雖曰小過, 然亦所當過也. 由是而擴充之, 庶幾乎其寡過矣.” 敬夫: “子之言善, 其遂書之, 以詔毋忘.” 於是盡錄贈處諸詩於篇而記其説如此. 自今暇日時出而觀焉, 其亦足以當盤盂几杖之戒也夫, 丁亥, 新安朱熹

 

 

 

 

전운사견면염전기() 轉運司蠲免鹽錢記()

 

 

 

해제이 글은 전운사(轉運司)에서 소금과 돈에 대한 폐단이 없어지도록 조칙을 내려 줄 것을 건의한 것이다.

 

황제 폐하가 즉위한 5년 만에 조정이 청명하고 모든 관직이 닦여지니 남쪽을 돌아보시고 먼 백성까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모월에 조칙을 내려서 태상소경신모로써 복건성 전운부사를 삼아서 소금에 관한 계책(鹽筴)을 부여하여 그 이로움과 병폐를 물어서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신모가 조칙을 받들어 달려가 일을 함에 판관신 모와 그 소속 관료들과 함께 성실히 묻고 자세히 살펴 교정하여 모두 조목조목 아뢰었습니다. 이듬 해 봄에 드디어 황제의 교지가 내려져 본도에 속한 주현(州縣)의 미납한 소금세금 민전 97만냥을 면제해 주고 또 조칙을 내려서 해마다 바치는 초염(鈔鹽) 민전 22만 냥을 내지 않도록 하고 조사(漕司)로 하여금 해마다 민전 7만 냥으로 부족한 경비를 보충하도록 하였습니다. 신모는 명을 받들어 기뻐하고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복건성의 소금에 관한 법의 폐단은 오래 되었습니다. 신 등이 옛 관부에 물어보니 조정이 성했을 때는 본도에 소금으로 받는 이자 연 수입이 민전으로 10만 냥이었는데 그것을 셋으로 나누어 그 하나를 조사(漕司)에게 주어서 주현의 비용을 돕도록 하였습니다. 또 시공금 그 하나로 초법(鈔法)을 만드니 즉 상인이 해마다 수도에 갖다 바치는 것이 돈으로 육만 육천 냥 쯤 되었습니다. 그 후에 초법이 중간에 느슨해지고 헛된 논의가 선동되어 이 때문에 모두 조사(漕司)에게 위임되어 그 금액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전운의 조직이 함부로 병탄되고 소금의 탈루가 수시로 일어나서 백성들이 폐단을 입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일찍이 그 금액을 경감시켰으나 십 분의 삼도 제거하지를 못하였고 그리고 다른 용도를 소금에서 거둬들이는 것이 또한 옛날보다 수십 배가 증가하였습니다. 세출은 일정함이 있기 때문에 감히 의논도 하지 못하고 주에 이르면 현을 대신하여 제공할 수도 없고 또 때때로 면제할 수도 없어서 새로운 것과 옛것이 서로 이어지고 전운사에서 감독을 하고 재촉을 하여 거듭 백성들의 병폐가 되었고 해가 지날수록 더욱 불어났는데 이제 다행히도 폐하의 훌륭한 인성(仁聖)과 검자(儉慈)를 만나서 먼 지방을 저버리지 않고 다행히 어리석은 신의 말을 듣고서 그 말로 추측을 하여 말하지 않은 것까지 언급하시니 덕스러우신 말씀이 다시 내려옴에 초액(鈔額)이 선대의 옛 모습을 회복하고 미납한 세금은 여러 해 것을 면제함으로써 주현의 관리들로 하여금 간접적인 원인으로 백성들을 수탈하지 못하게 하니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고 은택이 더욱 두터워진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재주가 노둔하여 사명을 받들음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는데 다행히도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서 아래에 선포하니 진실로 기뻐하고 기뻐하니 감히 힘을 다하여 끝까지 선포하지 않으리오? 부하들을 삼가 살펴봄에 경건하지 아니하여 현명하신 명령을 망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뜻에 맞지 않아 밝게 영원히 길이 없음을 두려워하여 상서에서 내린 조칙을 취하여 석대문에 새겨서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고 삼가 그 아래 기록함이 이와 같고, 또 폐하의 궁덕(躬德)과 신성(神聖)으로 천운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기약이 이미 두터워 백성들의 마음이 하루 종일 부지런하여 나감이 끝이 없습니다. 그윽이 계산해볼 때, 다스리는 제도 크게 정해져서 위와 아래 사람이 모두 만족하니 그 성과를 기일 안에 기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신 등이 이전에 감히 논하지 못했던 것도 또한 장차 희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그 설법을 기록하여서 엎드려 명을 기다립니다.

皇帝陛下臨御之五年, 朝廷清明, 衆職修理, 乃眷南顧, 閔兹逺黎. 某月, 詔以太常少卿臣某爲福建轉運副使, 而付以鹽筴, 使訪其利病以聞. 臣某既承詔奔走即事, 則與判官臣某爰暨屬僚愽詢審訂, 具以條奏. 越明年春, 遂有旨免本道屬州縣逋負鹽課之緡錢九十七萬, 又詔歲入鈔鹽緡錢二十二萬者其罷之, 而使漕司嵗以緡錢七萬補經費之闕. 臣某承命懽喜, 北向頓首言: “福建鹽法之弊久矣. 臣等問諸故府, 竊見祖宗盛時, 本道鹽息歲入緡錢十萬, 而三分之以其一予漕司, 佐州縣用度. 且市貢金其一爲鈔法, 則商人嵗輸京師者爲錢六萬六千有竒而已. 其後鈔法中弛, 浮議交煽, 因盡以委漕司而増其額. 於是綱運猥并, 鹽洩不時, 而民始受弊. 中間蓋嘗減損, 然什不能去其三, 又他用之取具於鹽者亦且數倍舊制. 顧以嵗出有常, 因不敢議 至州代縣或不能供 又不得以時蠲除, 新故相仍, 轉相督趣m 重爲民病, 歴年滋多, 今乃幸遇陛下仁聖儉慈, 不遺遐逺, 既幸聽愚臣言, 而又推之以及其所未言者, 蓋德音再下而鈔額復祖宗之舊, 逋負捐累嵗之積, 使州縣之吏無所旁緣以漁獵其民, 民得休息, 恩澤隆厚, 不可勝量. 臣等駑鈍不材, 奉使無狀, 乃幸得奉承聖詔, 以布于下, 誠歡誠喜, 敢不悉力究宣, 謹察所部, 無或不䖍, 以廢明命. 猶懼不稱, 無以昭示永久, 則取尚書所下詔旨刻石臺門, 以諗來者, 而竊敬識其下方如此, 又惟陛下躬德神聖, 天運日新, 其約已厚民之心終日乾乾, 有進無已. 竊計經制大定, 上下與足, 蓋可以日月期矣. 然則臣等前日所不敢議者, 且將復有望焉. 敢昧萬死, 并記其説而俯伏以俟. 乾道四年三月.”

 

 

 

 

사상채 어록 후기 謝上蔡語錄後記

 

 

 

해제이 글은 사양좌(謝良佐)의 어록의 편찬과정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주희는 지난번 󰡔상채선생어록(上蔡先生語錄)󰡕 3편을 교정하였다. 탈고하지 못하다가 어떤 사람이 떠난다고 전하자 마침내 공(: 江西省)에서 출판했으나 나는 매양 한이 남는다고 생각했다. 근래에 한가함으로 인하여 다시 이 판본을 정하여 저술하였으나, 그러나 또한 감히 스스로 전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因念 지난번 판본 50여 장을 삭제한 것을 생각하여 특별히 이치로 그 결코 선생의 말이 아닌 것을 미루어 알았지만 애초에 일찍이 증거한 것이 있지 않았다. 또한 그것이 과연 어느 사람에게 나온지를 알지 못하였다. 뒷날 적계(籍溪) 호선생(胡先生)이 서울로 와서 그 배우는 자 여조겸(吕祖謙)이 강민표(江民表)󰡔변도록(辨道錄)󰡕 1편을 얻어 읽었다면 옛날의 삭제한 50여 장을 극진히 한 것은 수미(首尾)와 차서(次序)가 한 글자도 차이가 없는 뒤에 강공(江公)에 의해 저술되었음을 알 것이며 사씨(謝氏)의 말이 아닌 것이 더욱 명백하다. 저 강공은 행의(行誼)와 풍절(風節)이 진실로 당대에 추앙하여 높였고, 진충숙공(陳忠肅公)이 또 일찍이 명도(明道) 선생이 발과 눈이 서로 응한다는 말이 있는 것을 논한 것을 칭송하였으니, 대체로 대략 오도(吾道)를 존숭할 만한 것임을 알 것이다. 그 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저 천리의 어긋남이 반드시 이르러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서서 스스로 경계삼고 또 독자에게 보여 의심이 없도록 하였다. 옛날에 사선생(謝先生)과 호문정공(胡文定公)의 수간(手柬)이 전했는데 이제는 그 정요(精要)의 말을 모아 삼편(三篇)의 두에 덧붙였다. 건도(乾道) 무자년(戊子年) 4월 임인(壬寅)에 주희는 삼가 기록한다..

頃年校定上蔡先生語錄三篇, 未及脱稿而或者傳去, 遂鋟木於贛上, 愚意每遺恨焉. 比因閒暇, 復爲定著此本, 然亦未敢自以爲可傳也. 因念往時削去版本五十餘章, 特以理推知其決非先生語, 初未嘗有所左驗, 亦不知其果出於何人也. 籍溪胡先生入都, 於其學者吕祖謙江民表辨道錄一篇讀之, 則盡向所削去五十餘章者, 首尾次序無一字之差, 然後知其爲江公所著而非謝氏之語益以明白. 江公行誼風節固當世所推髙, 陳忠肅公又嘗稱其論明道先生有足目相應之語, 蓋亦略知吾道之可尊矣. 而其爲言若此, 豈差之毫釐, 則夫千里之繆有所必至而不能已者耶? 因書以自警, 且示讀者使毋疑. 舊傳謝先生胡文定公手柬, 今并掇其精要之語, 附三篇之後云. 乾道戊子四月壬寅, 謹記.

 

 

 

 

건녕부숭안현학이공사기 建寧府崇安縣學二公祠記

 

 

 

해제이 글은 건령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의 학교에 사당을 세워 조변(趙抃)과 호안국(胡安國)을 배향하고 그에 대한 내역을 쓴 것이다.

 

숭안(崇安) ()의 암읍(巖邑)은 옛 궁사(宫師) 조청헌공(趙清獻公)이 일찍이 재상이 되었기 때문에 시독(侍讀) 호문정공(胡文定公)은 또 그 읍 마을 사람이다. 두 공의 덕은 후학이 추앙한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수십 년 사이에 이 읍을 다스린 사람이 그 몇 사람인지를 알 수 없고 표현해 드러낼 수 없어 읍을 교화한 것이다. 건도(乾道) 3(1167), 지금 고을의 일을 맡은 온릉(温陵) 제갈후(諸葛侯)가 처음 이르면 장창 학교를 수리하여 새롭게 하여 그 사람들을 가르쳐 깊이 양공의 사당이 세워지지 않은 것을 이미 병통으로 여겼다. 그래서 유상(遺像)을 찾아 구하고, 신학(新學)에 연유하여 사당을 세웠다. 명년(明年: 1168) 5월 갑자에 공로가 마치자 여러 생도가 모두 학교에 들어 몸도 쫒아 돕고 그들과 함께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채소만을 놓고 양공의 집에 올린다. 삼헌(三獻)으로 예를 이루고 여러 생도에게 읍하고 나아가게 하여 말하기를 배움은 공자나 맹자가 숭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 거처하여 그 풍성(風聲0과 기속(氣俗)의 천근한 것을 말하면 향대부(鄉大夫: 호안국)나 향선생(鄉先生: 제갈정서)의 현명한 사람은 어찌 그 사람을 알지 못할 수 있겠는가? 오직 조공(趙公)은 효도하고 우애하며 자애롭고 상서로우며 법도를 실천하여 정사를 다스리는 것이 순양(循良)의 자취가 있고 조정에 서서서는 건악(蹇諤)의 풍모가 드러내고 청절(淸節)과 지행은 세상의 표준이 되어 진실로 제공이 미쳐 들은 것이다. 호공(胡公)에 이르러서는 이락(伊洛)에에 도를 듣고 뜻이 춘추에 있어 글을 짓고 말을 세우며 임금을 바르게 하고 후인을 드리워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여 삼강을 돕고 구법을 펼치는 까닭은 깊고 간절하며 저명하여 체용(體用)이 갖추어지고 관통된다. 그 정색위언(正色危言)이 경전에 의거하여 일을 논하며 강대정직(剛大正直)의 기상은 또한 고인에게 부끄러운 것이 없다. 곧 제군이 어찌 죄다 알겠는가? 나는 이에 승핍(承乏)하고 지나치게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항상 제군과 함께 서로 성현의 일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이제 다행히 백성의 여력으로 인해 집을 조사하고 수선하여야 바야흐로 장차 날로 제군과 함께 조용히 그 사이에 부앙할 것이다. 도리어 옛 성현을 생각함이 멀어지면 제군이 그 가까운 것으로부터 이르고자 한다. 그래서 양공을 이 당에 형상화하였다. 제군이 지금 이후로부터 대개 또한 그 용모를 바라보고 숙경(肅敬)의 마음을 일으키고, 그 언행을 상고하여 탐나(貪懦)의 뜻을 격렬하게 한 뒤에 정밀히 생각하고 익숙하게 강독하며 마음에 돌이켜 지극한 이치의 소재를 구하여 절충한다면 거의 학문이 분명하고 행동이 높으며 덕이 오래되고 일이 광대하여 과연 성현의 일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양공이 뒷날의 근본 뜻을 사숙하고 또한 내가 평일 제군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제군이 어찌 뜻이 있는 것인가?” 여러 생도가 모두 인사하며 말하기를 여러 생도가 민첩하지 못하여 감히 경건하게 아침저녁으로 생각하여 선생(제갈정서)의 가르침을 욕되게 함이 없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미 물러가 제갈후가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말로 산간으로 도주하여 나(주희)에게 기를 부탁하였다.

崇安建之巖邑, 故宫師趙清獻公嘗爲之宰, 故侍讀胡文定公又其邑里人也. 兩公之德, 後學仰之舊矣. 然數十年之間, 爲是邑者不知其幾何人, 無能表而出之, 以化於邑者. 乾道三年, 今知縣事温陵諸葛侯始至, 則將葺新學校, 以教其人, 而深以兩公之祠未立爲已病, 於是訪求遺像, 因新學而立祠焉. 明年五月甲子訖功, 命諸生皆入於學, 躬率丞掾, 與之釋菜于先聖先師, 而奠于兩公之室. 三獻成禮, 揖諸生而進之曰: 學則孔孟尚矣, 然居是邦, 語其風聲氣俗之近, 則鄉大夫鄉先生之賢者, 豈可以不知其人哉? 趙公孝弟慈祥, 履繩蹈矩, 爲政有循良之蹟, 立朝著蹇諤之風, 清節至行, 爲世標表, 固諸公之所逮聞也. 至於胡公, 聞道伊洛, 志在春秋, 著書立言, 格君垂後, 所以明天理正人心扶三綱叙九法者, 深切著明, 體用該貫. 而其正色危言, 據經論事, 剛大正直之氣, 亦無所愧於古人. 則諸君豈盡知之乎? 吾承乏於此, 過不自料, 常欲與諸君相勵以聖賢之事. 今幸因吾民之餘力, 校室以修, 方將日與諸君者從容俯仰乎其間. 顧念古昔聖賢遠矣, 則欲諸君自其近者而達之, 是以象兩公於此堂也. 諸君自今以來, 盍亦望其容貌, 而起肅敬之心, 考其言行以激貪懦之志, 然後精思熟講, 反之於心, 以求至理之所在而折衷焉, 庶幾學明行尊, 德久業大, 果能達於聖賢之事. 是則兩公私淑後來之本意, 而亦區區平日所望於諸君也. 諸君豈有意乎? 諸生皆拜曰: “諸生不敏, 敢不敬蚤夜以思, 無辱先生之誨.” 於是既退而諸葛侯使人以是説走山間, 爲之記.

 

(주희)는 생각하건대 지금의 정사를 다스리는 자는 진실로 이미 학교의 일에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그 혹 미쳤었어도 가르치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 한갓 녹리(禄利)로 사름을 유인하여 비오천루(卑洿淺陋)의 영역으로 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해치는 것이어서 가르침에 무엇이 있는 것인가? 이제 제갈후가 이 읍에 이미 그 학교를 새롭게 하여 성현의 일로 말하고 또 양공을 숭상하며 섬겨 배우는 이로 하여금 이로 연유하여 이르게 할 수 있다면 가르치는 까닭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뜻이 어찌 지금의 정사를 다스리는 것보다 현명할 따름이겠는가? 이미 사양할 수 없어 이에 그 본말을 구비해 써서 동지에게 보이니, 서로 더블어 힘써 제갈후의 가르침을 배반함이 없기를 바란다. 이 달 계미(癸未)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기록한다.

惟今之爲政者固已不遑於學校之事, 其或及之而不知所以教, 則徒以禄利誘人而納之卑洿淺陋之域. 是乃賊之, 而於教何有? 諸葛侯於兹邑既新其學而語之以聖賢之事, 又能尊事兩公, 俾學者由是而達焉, 則可謂知所以教矣. 此其志豈特賢於今之爲政者而已哉? 既不得辭, 乃具書其本末以視同志, 願相與勉焉, 以無負諸葛侯之教也. 是月癸未, 新安朱熹.

 

 

 

 

극재기 克齋記

 

 

 

해제이 글은 건도(乾道) 8(임진, 1172, 43)에 석돈(石惇)의 부탁을 받고 써준 것이다. 주희는 석돈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내용을 여러 차례 교정했는데, 그런 정황이 󰡔주자대전󰡕 42 석자중에게 답함(11-12)에 보인다. 한편 󰡔주희집󰡕에 수록된 󰡔극재기󰡕에는 부록의 형태를 한 󰡔극재기부(克齋記附)󰡕(순희본)가 하나가 더 실려 있는데, 글자와 문장에서 󰡔극재기󰡕와 출입이 많지만 내용은 일치한다. 여기 나오는 주희의 극재기와 같은 문체가 송나라 성리학자들에게 유행하였다. 󰡔송문감(宋文鑑)󰡕에 실린 여대림의 󰡔극기명(克己銘)󰡕이나 󰡔남헌집󰡕 36에 실린 장식(張植)이 진택지(陳擇之)에게 지어준 극재명등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주희의 󰡔극재기󰡕는 인()과 예()의 상보적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주희는 수양자가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구하는 요점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욕심을 뿌리 뽑고 막아서 하늘의 이치가 순수해지면 사물을 살리는 인()의 마음이 따뜻한 봄볕처럼 사물을 보살필 것이라고 말한다.

 

본성과 감정의 덕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고 한 마디로 그 신묘함을 다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인()이다. 인을 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한 마디로 그 요점을 들 수 있으니 그것은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이란 천지가 사물을 낳는 마음이며, 사람과 사물이 얻어서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오직 천지가 사물을 낳는 그 마음을 얻어서 자기의 마음으로 삼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직 감정으로 발생하기 전에 네 가지 덕이 갖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인지라고 하며 인이 나머지를 총괄한다. 이미 발생하면 네 가지 단서가 드러나니 그것은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 등이며 측은지심이 나머지를 관통한다. 이것이 인의 본체와 작용이 무젖어 길러져서 혼연히 온전해지고 두루 흘러서 관통하며, 한 마음의 신묘함을 오로지 하여 모든 선의 으뜸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몸이 있으면 귀사지 등의 욕구가 있어서 인을 해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이 이미 어질지 않으면 천리를 없애고 사람의 욕심을 추구하는 일이 더욱 잦아질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의 학문은 서둘러 인을 추구하고, 인을 추구하는 요점도 인을 해치는 원인을 없애는 것일 뿐이다. 예가 아닌데도 보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 인을 해치는 경우이고, 예가 아닌데도 듣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 인을 해치는 경우이고, 예가 아닌데도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 인을 해치는 경우이다. 사람의 욕심이 인을 해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서 그 근원을 뿌리 뽑고 막아 이기고 또 이겨 어느 날 아침에 환하게 사람의 욕심이 다 사라지고 이치가 순수해지면, 가슴 속에 보존된 것들이 어찌 순수하게 천지가 사물을 낳는 마음이 아니겠으며, 무성히 싹트게 하는 따뜻한 봄볕과 같지 않겠는가? 말없이 (인을) 이루면 진실로 갖추어지지 않은 이치가 없고 포괄하지 않은 사물이 없다. (인에) 느끼고 통하면 이치를 얻지 않은 일이 없고 그 보살핌을 입지 않은 사물이 없다. ! 이것이 인의 덕이며 한 마디로 본성과 감정의 신묘함을 다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인을 구하는 요점은 공자가 안연에게 일러 주었던 것으로, 역시 한마디로 들어 말할 수 있다.

性情之德無所不備, 而一言足以盡其妙, 而已. 所以求仁者蓋亦多術, 而一言足以擧其要, 克己復禮而已. 蓋仁也者, 天地所以生物之心, 而人物之所得以爲心者也. 惟其得夫天地生物之心以爲心, 是以未發之前, 四德具焉, 曰仁義禮智, 而仁無不統, 已發之際, 四端著焉, 曰惻隱羞惡辭讓是非, 而惻隱之心無所不通. 此仁之體用所以涵育渾全周流貫徹, 專一心之妙而爲衆善之長也. 然人有是身, 則有耳目鼻口四肢之欲, 而或不能無害夫仁. 人旣不仁, 則其所以滅天理而窮人欲者, 將益無所不至. 此君子之學所以汲汲於求仁, 而求仁之要亦曰去其所以害仁者而已. 蓋非禮而視, 人欲之害仁也; 非禮而聽, 人欲之害仁也; 非禮而言且動焉, 人欲之害仁也. 知人欲之所以害仁者在是, 於是乎有以拔其本塞其源克之克之而又克之, 以至於一旦豁然欲盡而理純, 則其胸中之所存者, 豈不粹然天地生物之心, 而藹然其若春陽之溫哉? 黙而成之, 固無一理之不具而無一物之不該也. 感而通焉, 則無事之不得於理而無物之不被其愛矣. 嗚呼! 此仁之爲德, 所以一言而可以盡性情之妙, 而其所以求之之要, 則夫子之所以告顔淵者, 亦可謂一言而擧也與.

 

그러나 성현의 시대가 멀어져 이러한 학문이 전해지지 않았다. 정씨 두 선생이 나오자 후학들이 비로소 다시 인에 대한 말을 들었으나 다만 거기에 뜻을 두는 사람은 드물었다. 내 친구인 회계(會稽)에 사는 석자중 군이 인에 대한 말을 듣고 거기에 뜻을 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이기는 것으로써 서재를 이름 붙이고 나에게 기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생각에는 자기를 이기는 것예로 돌아가는 것이 비록 각각 다른 일일지라도, 실제로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욕심이 대립적이므로 자기를 이기는 것이 예로 돌아가는 근거이며 자기를 이기는 것 이외에 달리 예로 돌아가는 공부가 없다. 이제 석자중이 이 말을 뽑아서 자신의 서실에 극재(克齋)’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그것이야말로 인을 구하는 요점이며, 나아가 그가 인을 구하는 요점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글을 써준다고 실천될 일인가? 지금부터 알고 있는 요점에 따라서 자기의 힘을 다하여, 넘어지는 순식간의 틈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인이 반드시 넓게 퍼져서 스스로 자기의 마음에서 그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글을 써준다고 실천될 일인가? 정성스럽게 부탁한 것을 보고 끝까지 침묵할 수 없어서 인에 대한 처음과 끝을 갖추어 글을 써서 남기노라. 바라건대 아침저녁으로 집의 벽을 보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는다면 인을 구하는데 조그만 도움은 되리라. 건도 임진 ○○○○일에 신안 주희가 삼가 기록하다.

然自聖賢旣遠, 此學不傳. 及程氏兩先生出, 而後學者始得復聞其說, 顧有志焉者或寡矣. 若吾友會稽石君子重, 則聞其說而有志焉者也. 故嘗以名齋而屬予記之. 予惟”“之云, 雖若各爲一事, 其實天理人欲相爲消長, 故克己者乃所以復禮, 而非克己之外別有復禮之功也. 子重擇於斯言而獨以名其室, 則其於所以求仁之要, 又可謂知其要矣. 是尙奚以予言爲哉? 自今以往, 必將因夫所知之要而盡其力, 至於造次顚沛之頃而無或怠焉, 則夫所謂仁者, 其必盎然有所不能自已於心者矣, 是又奚以予言爲哉? 顧其所以見屬之勤, 有不可以終無言者, 因備論其本末而書以遺之. 幸其朝夕見諸屋壁之間而不忘其所有事焉者, 則亦庶乎求仁之一助云爾. 乾道壬辰月日, 新安朱熹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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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齋記

 

 

 

해제부록으로 첨부한 극재기는 번역하지 않고 참고로 게재한다.

 

性情之德無所不備, 而一言足以盡其妙, 而已. 所以求仁者蓋亦多術, 而一言足以擧其要, 克己復禮而已. 蓋仁也者, 天地所以生物之心, 而人物之所得以爲心者也. 惟其得夫天地生物之心以爲心, 是以未發之前, 四德具焉, 曰仁義禮智, 而仁無不統, 已發之際, 四端著焉, 曰惻隱羞惡辭讓是非, 而惻隱之心無所不通. 此仁之體用所以涵育渾全周流貫徹, 專一心之妙而爲衆善之長也. 然則人之求之, 亦豈在夫外哉? 特去其害此者而已矣. 蓋所謂仁者, 天理之公也; 所以害仁者, 人慾之私也. 二者分而相爲消長, 彼旣盛則此不得不衰矣. 故求仁者克去己私, 以還天理, 至於一旦廓然, 欲盡而理純, 則其視天下蓋無一物不在吾生物氣象之中焉. 黙而成之, 固藹然其若春陽之溫也, 泛然其若醴酒之醇也; 有感而遂通, 則無事之不順於理而無物之不被其愛矣. 嗚呼! 此仁之爲德所以盡情性之妙也與.

昔者顔子問仁於孔子, 孔子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告之. 其於用力於仁之要, 可謂一言而擧矣. 至於近世, 程氏之學祖述孔顔, 尤以求仁爲先務, 而其所論求之之術, 亦未有以易此者. 吾友會稽石君子重, 蓋聞程氏之風而悅之者也. 間嘗以名齋, 而訊其說於予. 予惟”“之云, 雖若各爲一事, 其實克己者乃所以復禮, 而非克己之外別有所謂復禮之工也. 子重擇於斯言而有取於克之云者, 則其於所以用力於仁之要, 又可謂知其要矣. 尙奚以予言爲哉? 繼今以往, 如將因夫所知之要而盡其力, 至於造次顚沛之頃而無或怠焉, 則夫所謂仁者, 其必盎然有所不能自已於心者矣, 是又奚以予言爲哉!

雖然, 自程門之士有以知覺言仁而深疾夫愛之說, 於是學者乃始相與求之於危迫之中而行之於波動之域, 甚者揚眉瞬目, 自以爲仁, 而實蓋未嘗知夫仁之爲味也. 予懼子重之未能無疑於其說也, 則書予之所聞者如此以復焉. 使吾子重無駭於彼而有以安於此, 則斯言也於輔仁之義其庶幾乎. 年月日記..

 

 

 

 

미도당기 味道堂記

 

 

 

해제이 글은 하호(何鎬)의 아버지 하태(何兌)󰡔중용󰡕인막불음식야 선능지미야(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에서 ()’를 취하여 도를 맛본다라는 의미에서 지미당이라는 당호를 사용였는데 하호가 그것에 대한 기문을 주희에게 청한 것이다.

 

무양(武陽)의 하군(何君) () 숙경(叔京)이 어느 날 나(주희)에게 편지를 보내와 말하기를 나의 선군자(先君子) 진양부군(辰陽府君)이 젊은 시절 동평(東平) 마공(馬公) 선생을 약간 섬겨 󰡔중용(中庸)󰡕의 설을 받고서는 복습하고 실천하기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일찍이 한가하게 거처하는 집에다 편액을 붙여 이르기를 미도(味道)”라 했으니, 대개 또한 󰡔중용󰡕의 이른바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이가 없건마는 맛을 알 수 있는 이가 드물다고 말한 것에서 취한 것이다. 이제 불초한 자식이 이 도를 이어서 듣지 못하여 아침저녁으로 몸을 닦고 조심하고 삼가 거처하여 감히 아버지의 뜻을 잊지 않았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기문을 써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고하고 나() 또한 출입하면서 본다면 거의 스스로 힘쓸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나는 오직 하공(何公)께서 진실로 선군자 태사공이 같은 해에 벼슬에 나아갔고, 내가 상하(牀下)에 나아가 절하지 못했는데 유독 다행히 숙경을 따라 사귀다가 형으로 섬겼으니 그로 인하여 그 학행(學行)의 아름다움을 들을 수가 있었다. 돌아 보건데 비록 덕이 없고 글이 없어 의견을 진술하고 편지를 왕래하지는 못하였지만 사모하고 우러러봄이 깊어 바라건대 방 벽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 감히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武陽何君鎬叔京一日以書來謂: “吾先君子辰陽府君少事東平馬公先生受中庸之説, 服習踐行, 終身不懈. 間嘗牓其燕居之堂曰味道’, 蓋亦取夫中庸所謂莫不飲食鮮能知味之云也. 今不肖孤既無以嗣聞斯道, 惟是朝夕糞除, 䖍居恪處, 不敢忘先人之志. 子其爲我記之, 以告於後之人, 而鎬也亦得出入覽觀焉, 庶乎其有以自勵也.” 何公實先君子太史公同年進士, 不及拜其牀下, 獨幸得從叔京遊而兄事之, 因得聞其學行之懿. 顧雖不德不文, 不足以稱述傳信, 然慕仰之深, 願得託名於其屋壁之間以爲幸, 因不敢以不能對.

 

삼가 살펴보건데 공의 휘는 모()이고 자는 태화(太和)인데, 처음 남쪽지방에서 작은 벼슬을 하였다가 마침 마공이 어사선위제도(御史宣慰諸道)로 한 번 보고 그를 어질게 여기어<󰡔중용󰡕> 취하기를 아뢰는 것을 재촉하고 정부자(程夫子)의 문하에서 들은 것을 전수해주고 또 평생출처의 큰 법도를 모두다 자세히 말해주었다. 이미 마공이 언사(言事) 때문에 유배지에서 죽고 나서, 공이 돌아와 그 배운 것을 지키기를 죽을 때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몸을 단정히 하고 사물을 접하며 말을 하고 일을 하는데 대체로 먹고 쉬는 잠깐 동안에도 󰡔중용󰡕에 의지하지 않음이 없었다. 고향 사람들이 아끼고 공경하여 중용하공(中庸何公)’이라고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경전에 대해서도 배우지 않음이 없었지만 󰡔주역󰡕에 더욱 마음을 다하여 집전(集傳) 약간의 책을 지었다. 그 충순독후(忠純篤厚)의 자태와 염정직방(廉靜直方)의 지조는 하늘에서 얻어 학문으로 이루어지고 안에서 충만하며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니 세상의 군자들이 알 수가 없었다. 만년에 마공이 위초(僞楚)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사신을 배척하고 직위를 피하는 절개는 그 반열이 사관(史官)보다 위에 있었다. 재상이 자기의 공을 나누기를 싫어하여 잡아가두고 고문을 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귀향을 보냈는데도 끝까지 후회하지 않고 죽었다. 이는 그가 도에 있어 진실로 음식을 먹고 마심에 그 맛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그 맛을 앎이 깊기 때문에 지킴이 견고하고 행함이 즐거우며 행함이 즐겁기 때문에 더욱 그 아름다움을 맛보고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 이른바 도()라는 것이 또 어찌 세상의 속된 선비들이 노불(老佛)의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말을 습득하여 보고 마침내 지칭하여 도라고 여기는 것과 같겠는가? 공의 󰡔중용󰡕을 상고해 보면 또한 오품(五品)인 민이(民彝)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나는 어리석고 불초하여 진실로 대인과 군자가 보존한 것에 만에 하나라도 엿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윽이 그 당을 이름한 뜻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히 그러한 것을 구비하여 써서 숙경의 부탁을 받들고 후세의 군자들이 상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숙경이 청렴하고 평이하며 편안하고 넓어 세상의 어지러움에도 누가 되지 않았으며 이미 가정에서 도를 들었고 또 사방에서 벗을 취하여 더욱 이르지 않은 바를 구하였으며 가르침을 품고 일을 이어 이 당()에 처한 것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지금 또 이로 말미암아 더욱 스스로 장려하고자 하니 그 나아감이 재빠르고 이르는 것이 원대한 것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法當) 에다 글을 붙이고 그로 인하여 아울러 이것을 기록한다. 건도(乾道) 계사년(癸巳年: 1173) 2월 갑신(甲申)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쓰다.

謹按公諱某, 太和, 始爲小吏南方, 馬公以御史宣慰諸道, 一見賢之, 奏取爲屬, 因授以所聞於程夫子之門者, 且悉以平生出處大節告之詳焉. 馬公以言事謫死, 公歸守其學, 終身不少變. 其端已接物, 發言造事, 蓋無食息之頃而不惟中庸是依也. 鄉人愛敬, 至以中庸何公目之. 於他經亦無所不學, 而尤盡心于易, 作集傳若干卷. 其忠純篤厚之姿, 廉静直方之操, 得于天而成于學, 充于内而不暴於外, 世之君子莫能知也. 晚以馬公移書僞楚, 斥使避位之節, 列上史官. 宰相惡其分已功, 逮繫詔獄, 削籍投荒而終不自悔, 以殁其身. 此其於道, 真可謂飲食而知其味矣. 惟其知之深, 是以守之固而行之樂; 行之樂, 是以益味其腴而弗能去也. 然公之所謂道者, 又豈若世之俗儒習見佛虚無寂滅之説, 而遂指以爲道也哉? 考諸公之中庸, 亦曰五品之民彛而已, 愚不肖, 誠不足以窺大人君子所存之萬一. 然竊意其名堂之意有在於是也, 是以敢備書之, 以承叔京之命, 後之君子得以考焉. 叔京之清夷恬曠, 不累世紛, 既聞道于家庭, 又取友於四方, 以益求其所未至, 其銜訓嗣事而居此堂也可無愧矣. 今又欲由是益自勵焉, 是其進之鋭而至之逺, 其可量哉! 其可量哉! 此於法當得附書, 因并識於此云. 乾道癸巳二月甲申, 新安朱熹

 

 

 

 

유씨묵장기 劉氏墨莊記

 

 

 

해제이 글은 주희 벗 유청지(劉清之) 집안의 소장 책에 대한 내역을 밝히고 유학의 의리학을 추숭한 성향을 밝힌 것이다.

 

건도(乾道) 4(1168) 가을에 나(주희)의 벗 유청지(劉淸之) 자증(子澄)이 오()()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서로 담계(潭溪) 부근을 지나다가 몇 일을 머물며 말하는 것이 서로 즐거워하였다. 어느 날 아침 자증이 공수(拱手)하고 일어서서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청지)5세조 마감공부(磨勘工部) 부군(府君)께서 태종(太宗)의 조정에 벼슬하여 나라를 위해 계략을 내놓은 것이 십여 년이 되었다. 이미 돌아가시어 가정에는 남은 재물이 없고 오직 도서(圖書) 수천 권만 있었습니다. 부인 진씨(陳氏)가 그것을 여러 아들에게 그것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묵장(墨莊)이란 것이다고 하니, 해릉(海陵) 호공(胡公) 선생이 듣고 그것을 어질게 여겨 그 일을 기록하였다. 그 후로 여러 아들과 손자에 까지 삼대에 걸쳐 과연 모두 문장(文章)과 기업(器業)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었다. 중간에 변란이 지나면서 도서가 흩어져 지키지 못하였다. (청지)의 아버지께서 유독 깊이 생각하시어 음식과 의복을 절약하고 힘을 다해 헤아리고 수집하시어 소흥(紹興) 임신년(壬申年: 1152)에 이르러 이른바 수천 권이라는 것을 비로소 그 예전대로 회복하였다. 그러므로 상서랑(尙書郞) 서공극(徐公兢)오공설(吳公說)이 묵장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장실의 편액(扁額)에 제자(題字)하였다. 불행하게도 아버지께서 아들들을 버리고 떠나니 나(청지)의 형제들이 보호하고 간직하기를 더욱더 하여 겨우 잃어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내(청지)가 부군부인과 선군자(先君子)의 본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찌 도에 힘써 도를 얻고 인은 익숙히 하는 것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알지 못하는 사들은 이른바 혹 청자거마(靑紫車馬)의 사이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 나(청지)의 불초하여 그윽이 병이 생겼습니다. 바라건대 한 말씀을 얻어 선대의 근본 뜻을 발명하고 자손들에게 드리워서 도의(道義) 의 가르침을 드날린다면 매우 큰 은혜일 것 입니다라고 하였다.

乾道四年秋, 之友劉清之子澄罷官吳越, 相過于潭溪之上, 留語數日相樂也. 一旦, 子澄拱而起立, 且言曰: “清之之五世祖磨勘工部府君仕太宗, 佐邦計者十餘年. 既殁而家無餘貲, 獨有圖書數千卷. 夫人陳氏指以語諸子曰: ‘此乃父所謂墨莊.’ 海陵胡公先生聞而賢之, 爲記其事. 其後諸子及孫比三世, 果皆以文章器業爲時聞人. 中更變亂, 書散不守. 清之之先君子獨深念焉, 節食縮衣, 悉力營聚. 紹興壬申歲, 而所謂數千卷者始復其舊. 故尚書郎徐公兢吳公説, 皆爲大書墨莊二字, 以題其藏室之扁. 不幸先人棄諸孤, 清之兄弟保藏増益, 僅不失墜, 以至於今. 清之竊惟府君夫人與先君子之本意, 豈不曰耕道而得道, 仁在夫熟之而已乎? 而不知者意其所謂或出於青紫車馬之間, 清之不肖, 心竊病焉. 願得一言以發明先世之本意, 於以垂示子孫, 丕揚道義之訓, 甚大惠也.”

 

(주희)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징의 뜻은 참으로 아름다운데, 그런데 유씨가 국초(國初)부터 명가가 되어 함께 글에 통달하여 일을 기록한 것이 진유(盡儒)가 장자보다 먼저 한 것이다. 하물며 지금 자징이 칭송한 것 또한 업을 열고 가정에 전한 것이 시작되는 바이니 몸에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돌아보건데 나(주희)는 어떠한 사람인가? 이에 감히 무능한 말로 많은 어진 이들을 뛰어넘어 처음으로 이 일을 기록 할 수 있겠는가? 이에 감히 담당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자징이 청하기를 그만두지 않고 이미 떠난지가 56년인데 서한은 십수 통으로 왕래한 것은 또한 일찍이 이것으로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주희)가 친구의 뜻을 끝내 사양하지 못한 것은 바로 자징이 본래 말한 것과 내(주희)가 감당하지 못한 뜻을 실마리 뽑듯 뽑아내어 이와 같이 서술하여 차례하였다. ! 조상의 어짊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시서예악(詩書禮樂)의 많음으로 그 자손을 두텁게 하였으며, 자손의 어짊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실상으로 조상을 빛나게 하였겠는가? 지금 이후로부터 유씨의 문을 지나다가 󰡔묵장󰡕을 이름하는 까닭을 묻는 이가 있다면 여기에서 상고해보면 그 흙의 나오는 것, 오두막()의 들어가는 것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음을 알 것이다. 대개 마감공(磨勘公)의 다섯 아들은 모두 어질고 명성이 있었는데, 가운데 아들 주객랑중(主客郞中)은 진실로 집현(集賢)과 사인(舍人) 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문학으로써 당시 크게 드러나 후세까지 유명하였다. 넷째 아들은 비서감(秘書監)으로 타고난 자품이 간략하고 엄숙하며 대체(大體)를 알아 󰡔영종실록(英宗實錄)󰡕에 전하는 것이 있다. 자징의 아버지는 곧 그의 증손이다. 휘는 모(), 자는 모요, 관직은 모에 이르렀다. 벼슬은 이미 높지 못하여 시설(施設)에 나타는 것이 없다. 지금 유독 가업을 계승하고 후세를 보호하는 뜻이 여기서 오히려 알 수 있다. 두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장자는 정지(靖之) 자화(子和), 막내는 자증이니 모두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청렴하고 고요하며 널리 배워 문식이 있었다. 그런데 자증이 나(주희)와 함께 교류하면서 더욱 의리의 학문에서 뜻을 돈독히 하였다. 이른바 도에 힘쓰고 인을 익숙히 한다는 것은 장차 여기에 있을 것이다. 9(1173) 2월 병술일(丙戌日)에 신안(新安) 주희(朱熹)는 기록한다.

聞其説, 則竊自計曰, 子澄之意誠美矣, 劉氏自國初爲名家, 所與通書記事者盡儒先長者. 矧今子澄所稱, 又其開業傳家之所自, 於體爲尤重. 何人? 乃敢以其無能之辭度越衆賢, 上紀兹事? 於是辭謝不敢當. 子澄請之不置, 既去五六年, 書疏往來以十數, 亦未嘗不以此爲言也. 惟朋友之義有不可得而終辭者, 乃紬繹子澄本語與所以不敢當之意而敘次之如此. 嗚呼! 非祖考之賢, 孰能以詩書禮樂之積厚其子孫? 非子孫之賢, 孰能以仁義道德之實光其祖考? 自今以來, 有過劉氏之門而問墨莊之所以名者, 於此乎考之, 則知其土之所出廬之所入者, 在此而不在彼矣. 蓋磨勘公五子皆有賢名, 中子主客郎中實生集賢舍人兄弟, 皆以文學大顯于時而名後世. 第四子秘書監資簡嚴, 識大體, 有傳于英宗實錄. 子澄之先君子即其曽孫也, 諱某, 字某, 官至某. 仕既不遭, 無所見於施設. 今獨其承家燾後之意, 於此尚可識也. 生二子, 長曰靖之子和, 其季則子澄, 皆孝友廉静, 博學有文. 子澄, 尤篤志於義理之學. 所謂耕道而熟仁者, 將於是乎在. 九年二月丙戌, 新安朱熹

 

 

 

 

진심당기 盡心堂記

 

 

 

해제이 글은 범염덕(范念德)이 여릉(廬陵)의 녹사(録事)가 되어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의 군자진심(君子盡心)”에서 진심두 글자를 취하여 당호하고 그 집에서 당시 세상사람을 일깨웠는데 그 기문을 주희에게 청한 것이다.

 

나의 벗 범백숭(范伯崇)은 처음의 벼슬로 여릉(廬陵) 속읍(屬邑)의 주부가 되었으나, 그 벼슬을 적게 여기지 아니하고 일을 만나면 구차하게 여기는 것이 없어 마침내 일처리함이 민첩하다는 것으로 소문났다. 그 고을에서 재능을 빙자하여 녹사(錄事: 옥관)를 대신하는 병통이 일 할 수 없음을 아뢰었다. 여릉 백성은 본래 송사에 어리석어 옥사를 다스리는 자가 항상 그 실정을 얻지 못한 것을 근심하였다. 백숭이 이미 마음을 다하고 또 청렴하고 근면하여 아랫사람에 서고 간절하고 측은히 여겨 윗사람에게 폈다. 그래서 적은 원한을 가진 사람이라도 반드시 아뢰게 하고 간사한 백성은 요행히 모면함이 없게 하니 한 고을에서 이를 칭찬하였다. 관리로서 일이 없을 적엔 가일(暇日)로 그 일을 묻는 집을 수리하고 군자가 그 마음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취하여 이를 액자로 걸었다. 또 서합(噬嗑)의 괘를 병풍 위에 크게 쓰고 또 그 뒤를 열어 방장(方丈)의 방을 만들고 벗을 모아 강학하였다. 어느날 서신이 와 말하기를 원하건대 이 집을 기록하고 그 방을 이름짓고 나를 가르쳐 주시면 다행하옵고, 또 심부름으로 내왕하는 자도 함께 듣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예기󰡕 「왕제(王制)의 편은 비록 한나라 박사의 벼슬이 나온 것이라고 전하나 그러나 그 이른바 나라의 법이 한 번 성립하면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군자가 마음을 다한다고 한 것은 그 말이 간략하고 뜻이 주도면밀하며 교화가 밝고 경계가 치밀하여, 생각건대 어떤 사람은 옛날의 유언(遺言)일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백숭이 이미 몸소 행하고 또 그 집을 이름하여 그 출입하고 기거할 적에 우러러 보고자 하니 이는 항상 스스로 경계함이 있는 것이다. 만족하지 아니하고 또 대역(大易: 󰡔주역󰡕) 전뢰(電雷)의 상()명단(明斷)의 뜻과 강유상하(剛柔上下)천심난이(淺深難易)의 설을 취하여 금시(金矢)황금(黃金)과 간정(艱貞)정여(貞厲)의 경계를 앉은 오른편에 계시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남관(覽觀)하니 이는 그 뜻이 어찌 한 번 그 실정을 얻어 갑자기 기뻐하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학문이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부자의 친함과 군신의 의리에 조그마한 사이라도 살피지 못한 것이 있다면 비록 그 총명함을 다하고 그 충애(忠愛)함을 이루고자 하여도 권도(權度)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 물러나 먹고 편안히 거처하는 곳을 그 뒤에 만들어 강학하기에 편리하게 하니 이것은 더욱 지금의 관리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자로가 말하기를 백성이 있으며 사직(社稷)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글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하는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옳음에 가까우나 부자(夫子: 공자)가 이를 싫어하였으니, 그렇다면 벼슬은 학문에 근본하고 학문은 반드시 책을 읽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공자 문하의 남긴 법이다. 그래서 그 방을 명명하는 것을 청하여 독서의 방이라고 하자 그 본말이 이와 같음을 죄다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백숭의 집안은 정학을 전하여 도에 있어 소문이 있고, 그 조금 시험한 공효가 또 이미 상하 사람에게 믿음이 이와 같으니 이것은 그 독서한 까닭이 반드시 다른 사람이 읽는 것과 다름이 있습니다. 백숭이 평상시 거처할 적에는 겸손유순한 모양으로 말하지 못하는 듯하고 일을 만나서는 물결 따라 가는 모양으로 주장한 것이 없는 듯하니 내가 비록 아는 것이 깊으나 또한 그 온후함이 남음이 있음을 기뻐하고 그 강의함이 부족한 것을 근심하지 아니한 적이 없다. 지금 하나의 행의로 관리가 되어 그 스스로 수립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이 하여 세상의 총명하고 재지(才智)있는 선비가 벼슬에 대당한 효능을 도모할 적엔 마땅히 백숭보다 멀고 지나치게 할 수 있는 것은 간혹 도리어 미칠 수 없으니 내가 여기에 또 그윽이 홀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아울러 써서 당시 세상 사람을 깨우치고 또 내방하는 사람을 끝없이 격려한다. 백숭의 이름은 염덕(念德)이고 건안(建安) 사람이며 나와 더불어 대대로 인연이 있고 게다가 동서간(同壻間)이어서 또 서로 좋아하였다. 건도(乾道) 계사년(1173) 2월 정해일에 신안 주희는 기록한다.

予友范伯崇始仕, 廬陵屬邑主簿, 不小其官, 遇事亡所茍, 遂以幹敏聞. 州藉其才, 奏取以代錄事之病不能事者. 廬陵民素嚚訟, 治獄者常患不能得其情. 伯崇既盡心焉, 而又廉勤以揵于下, 懇惻以伸於上, 於是小寃必白而姦民無所幸免, 一郡稱之. 官以無事, 則以暇日葺其問事之堂, 而取君子盡心之云者牓之. 又大書噬嗑之卦於屏上, 且闢其後爲方丈之室, 以㑹友講學焉. 一日, 書來曰: “願有以記此堂而名其室, 以幸教我, 且使來者與有聞焉.” 予惟王制之篇雖傳以爲漢博士官所出, 然其所謂刑一成而不可變, 故君子盡心焉, 語約而意周, 教明而戒宻, 意其或者古之遺言也與. 伯崇既躬行之, 而又以名其堂, 欲其出入起居仰而見之, 常有以自警也. 以爲未足, 又取大易電雷之象, 明斷之義與夫剛柔上下, 淺深難易之説, 金矢黄金, 艱貞貞厲之戒揭於坐右, 而以蚤夜覽觀焉, 此其志豈以一得其情而遽喜者哉! 然猶懼夫學之未至, 而於父子之親君臣之義纎微之間有所未察, 則雖欲悉其聰明, 致其忠愛而不知所以權之, 故又爲退食燕居之所於其後, 以便講學, 此則尤非今之爲吏者所能及也. 子路: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然後爲學?” 此言近是, 而夫子惡之, 然則仕本於學而學必讀書, 門之遺法也. 因請命其室曰讀書之室”, 而悉記其本末如此以遺之. 伯崇家傳正學, 於道有聞, 而其小試之効又已孚於上下如此, 此其所以讀書者必有以異乎人之讀之矣. 伯崇平居退然, 若不能言, 遇事汎然, 若無所主, 予雖知之深, 亦未嘗不喜其温厚之有餘而憂其强毅之不足也. 今一行作吏, 其所以自樹立者乃如此, 而世之聰明才智之士, 計其當官之效宜可以遠過於伯崇, 或乃反不能及, 予於此又竊獨有感焉. 因并書之, 以風曉當世, 且以厲來者於無窮. 伯崇念德, 建安, 與予有世舊, 且有連又相好也. 乾道癸巳二月丁亥, 新安朱熹

 

 

 

 

기주교수청기 蘄州教授㕔記

 

 

 

해제이 글은 주희의 벗 이종사(李宗思)가 기주((蘄州)의 학관(學官)이 되었어도 학문에 매진한 일련의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건도(乾道) 8(1172) 가을, 나의 벗 건안(建安) 이군(李君) 종사(宗思)는 기주(蘄州)의 학관(學官)이 되었다. 처음 이르러 학교에 들어가 석채(釋菜)하고 제생을 불러 당상에 앉아 고하여 말하기를 조정에서 학교를 세우고 벼슬을 세우는 것은 인재를 가르치고 양성하여 그 등용을 기다리는 것은 덕의(德義)가 매우 아릅다웠다. 종사는 재능이 없었으나 선발에 포함될 수 있어 깊고 천루(淺陋)하여 칭찬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였다. 이제 장차 이삼자(二三子)에게 알려 서로 더불어 옛 사람의 자기를 위하는 학문을 조석으로 하면 거의 조정에서 교양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삼자는 그 또한 여기에 뜻이 있을 것인가?” 제생이 일어나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생은 민첩하지 못하여 오직 선생께서 가르침이 있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군이 물러가 그 거처에 나아가니 학교와의 거리가 또 십리의 곳이다. 이군이 돌아보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학관(學官)은 마땅히 학교에 조석으로 가서 제생과 함께 서로 절차탁마하는 것이다. 그 서로 거리가 멀어 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다음날 학교의 동편(東偏)에 무너진 땅이 있는 것을 보고 주()에 청하기를 집으로 만들어 거처하여 날로 학교에 왕래하면서 그 일을 제공할 수 있도록 원하였다. 그래서 통수(通守) 북해(北海) 왕후(王侯) 모가 진실로 주부(州符)를 거느려 이군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그 힘을 다하여 보았다. 일이 시간을 넘기지 않고 마침내 보고를 구비하였다. 그러한 뒤에 이군이 날로 학교에 이를 수 있었고, 제생을 진출시켜 가르치도록 하였다. 대개 그들로 하여금 󰡔논어󰡕와 맹씨의 책을 잠잠히 생각하여 리의(理義)의 요점을 구하고 또 여러 편년과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역사를 상고하여 사변의 득실을 의논하도록 하여, 날로 노력이 정도 있고 엽등하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아 방책을 찾아 묻고 때로 권장하고 감독하여 무릇 그들로 하여금 선을 밝히고 몸을 닦는 방법, 제가가 나라에 미치는 근본임을 알아 사예(詞藝)의 익힘에 있어 뒤로 하고 그것을 급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또 그 선비가 어질고 덕이 있는 자 이군(李君) 지한(之翰)에게 예를 올리고 그와 함께 거처했는데 무릇 학교의 가르침과 다스림을 죄다 듣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연유하여 기()의 선비가 되는 사람은 비로소 선비가 되는 까닭의 일을 알고 그 힘쓸 줄을 알았다. 이군도 또한 그 가르침이 유행하여 장차 성취가 있음을 기뻐하였다. 당에 돌을 갈아 앞을 생각하여 이 관을 만든자는 모인(某人)이하로부터 약간 인의 이름성씨세월을 얻어 새기고 글을 나에게 부탁하여 그 까닭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나는 오직 이군의 가르침은 가능하거니와 그 <󰡔논어󰡕󰡔맹자󰡕> 가르치는 까닭은 세유(世儒)들이 미칠 것이 아니다. 왕후(王侯)가 학교에 뜻을 드리는 것은 미칠 수 있거니와 그 이군의 설로 일에 우활(迂濶)하다고 하는 자가 아니면 속리(俗吏)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 모두 마땅히 써서 후세에 알린다. 대개 이군을 계승하여 여기에 거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법을 상고하는 것이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천리까지 이어 흘러 스승이 그 백성의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인솔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본말을 모두 쓴 것이 이와 같고 제명(題名)의 머리에 판각하여 둔다. 9(1173) 가을 7월 임자일(壬子日)에 신안(新安) 주희(朱熹) 기록한다.

乾道八年秋, 予友建安李君宗思蘄州學官. 始至, 入學釋菜, 召諸生坐堂上而告之曰: “朝廷立學建官, 所以教養人才而待其用, 德意甚美. 宗思不佞, 得備選焉, 深惟淺陋, 懼不能稱. 今將有以告二三子者, 而相與朝夕乎古人爲已之學, 庶以無負朝廷教養之意. 二三子其亦有意於斯乎?” 諸生起而對曰: “諸生不敏, 惟先生有以教之, 則幸甚.” 於是李君退即其居, 則距學且十里所. 李君顧而嘆曰: “學官宜朝夕于學, 與諸生相切磋者. 其相距之遠, 可若是耶?” 翌日, 相學之東偏有廢壤焉, 請於州, 願得爲屋以居, 而日往來於學, 以供厥事. 於是通守北海王侯某實領州符, 李君之意而悉其力以相之. 役不踰時, 遂以備告. 然後李君得以日至於學, 進諸生而教誨之. 蓋使之潛思乎論語孟氏之書以求理義之要, 又考諸編年資治之史以議夫事變之得失焉, 日力有程, 不躐不惰, 探策而問, 勸督以時, 凡以使之知所以明善修身之方齊家及國之本, 而於詞藝之習則後焉而不之急也. 既又禮其士之賢有德者李君之翰而與之居, 凡學之教治, 悉使聽焉. 由是之爲士者始知所以爲士之事而用其力. 李君亦喜其教之行而將有成也, 礱石於堂, 考前爲是官者, 得自某人以下若干人之名氏歲月刻之, 而以書屬予, 使因記其所以然者. 予惟李君之教可能也, 而其所以教者, 則非世儒之所及. 王侯之垂意於學可及也, 而其不以李君之説爲迂濶於事者, 則非俗吏之所能. 是皆宜書, 以詔于後. 蓋非獨使繼李君而居此者有所考法, 抑亦承流千里而師帥其民者之所宜知也. 於是悉書其本末如此, 俾刻寘題名之首云. 九年秋七月壬子, 新安朱熹.

 

 

 

 

건녕부 건양현 주부청 기 建寧府建陽縣主簿㕔記

 

 

 

해제이 글은 건령부(建寧府) 건양현(建陽縣) 주부(主簿㕔)이 도적에 의해 불탔으나 이후 왕악(王渥)과 섭지기(葉之基)에 의해 건립 과정을 쓴 것이다.

 

현의 부속으로 주부가 있는데 녹봉은 종 9품이며 현의 한 사람이 현의 부서를 관장한다. 무릇 호세(戶稅)의 명부, 출납의 회계, 부격(符檄)의 위임(委任), 옥송(獄訟)의 성립 등은 모두 총괄해서 다스리고 그 일의 계위(稽違: 밀려 늦어짐)와 재물 용도의 상실을 점검하고 명령으로 다스리는 것을 도우니, 대개 주부의 직책이 이와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일찍 그윽이 논하건대, 현의 다스림은 비록 좁으나 백성에 있어서는 실로 매우 친하고, 그 부서를 주관한 것은 녹봉이 비록 낮으나 사람을 등용하는 득실로 그 백성에게 아름답게 하는 것은 실로 심히 중대한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전조(銓曹)가 거느린 관리의 인원은 백수명이 되나 이미 이를 추천하고 선택한 것이 있을 수 없고 명령을 하는 자는 또 왕왕 그 정사를 사사로이 하여 그 부속에 미치지 않으니 이것으로 관리 대부분 그 사람을 얻지 못하고 사람 또한 그 직책을 얻지 못한다. 모든 천하의 현에는 우연히 그 벼슬에 맞은 자는 백에 한두 명이 되지 못함을 헤아리겠으나 그러나 또한 호조의 명부를 취하여 주묵(朱墨)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 그 다른 것이라면 곧 본래 그 함께 할 수 없고 또한 간혹 그 직책의 공허함을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건양현(建陽縣) 주부의 관사는 옛날에는 현이 다스리는 서쪽담 밑에 있었는데 건염(建炎) 기간 중에 도적에게 불타 승려의 사옥에 우거하니 그 현과의 거리가 삼리이다. 대개 주부가 그 국면을 맡을 수 없는 것은 40여년이나 되었다. 지금 우통직랑(右通直郞) 지양(池陽) 왕군(王君) ()이 지현사(知縣事)로 와서 곧 그 회복을 계획하였으나 거행할 수 없었다. 주부 괄창(括蒼) 섭군(葉君) 지기(之基)가 이르러 더욱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 직책을 얻지 못함을 근심하고 이에 현에 청하여 마침내 완성하였다. 이 공사 시작으로부터 공사 마침에 이르기까지 무릇 100여일이고 집은 백여 개 남짓의 기둥으로 만들었는데 그 비용은 현의 남은 돈 50만금과 곡식 100석을 들였다. 무릇 옛 땅이 민간 거주지에 들어온 것은 모두 옛 문서에 정당하고 탈취하지 아니한 것이다. 명년에 섭군이 그 본말을 글로 갖추어 나에게 기록을 부탁하였다. 내가 왕군이 그 정사를 사사로 하지 아니함과 섭군이 능히 그 직책에 근심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그 관청을 설치한 까닭의 뜻을 미루어 근본하고 아울러 그 일을 서술하여 써서 후일 오는 자에게 알려 그 직책에 공허함이 없도록 하였다. 이미 또 섭군의 요청으로 인하여 공자께서 위리(委吏)가 되었을 때의 말을 취하여 그 동편(東偏)의 방을 이름하여 당재(當齋)”라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이 주부의 직책과 함게 서로 표리가 된다고 말하겠다. 건도(乾道) 9(1173) 가을 8월 신유일 초하루에 신안 주희는 기록한다.

縣之屬有主簿, 秩從九品, 縣一人, 掌縣之簿書. 凡戸租之版, 出内之㑹, 符檄之委, 獄訟之成, 皆總而治之, 勾檢其事之稽違與其財用之亡失, 以贊令治, 蓋主簿之爲職如此. 而予嘗竊論之, 以爲縣之治雖狹, 而於民實甚親; 主其簿書者秩雖卑, 而用人之得失, 其休戚於民實甚重. 顧今銓曹所領員以百數, 既不容有所推擇, 而爲令者又往往私其政, 不以及其屬, 是以官多不得其人, 而人亦不得其職. 舉天下之縣, 偶能其官者, 計百不一二, 然亦不過能取夫戸租之版而朱墨之耳. 若其他, 則固不得而與焉, 而亦莫或知其職之曠也. 建陽縣主簿之廨故在縣治西墉下, 自建炎中火于盜, 而寓於浮屠之舍, 距縣且三里所. 蓋主簿之不得司其局者, 四十有餘年矣. 今右通直郎池陽王君渥來知縣事, 則計復焉而未克舉. 及主簿括蒼葉君之基至, 而尤以不得蚤夜其職爲憂, 乃請於縣而卒成之. 自經始以至迄事, 凡百餘日, 爲屋餘百楹, 其費得縣之羨錢五十萬粟斛百. 凡故地之入於民居者, 則皆正於舊籍而不之奪也. 明年, 葉君以書具本末屬予記. 予佳王君之不私其政與葉君之能憂其職也, 則爲推本其所以設官之意, 并叙其事而書之, 以告來者, 俾無曠於其職. 既又因葉君之請, 取孔子爲委吏時語, 名其東偏之室曰當齋”, 其意蓋與此相表裏云. 乾道九年秋八月辛酉朔, 新安朱熹.

 

 

 

 

남검주우계현학기 南劔州尤溪縣學記

 

 

 

해제이 글은 석돈()이 남검주(南劔州) 우계현(尤溪縣)에 학교를 수선조성한 다음 그 위치와 배경을 상세히 서술하여 주희에게 기문을 청하자, 주희가 유가(儒家)의 오륜(五倫)과 격물치지(格物致知)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리를 서술하여 그 이념이 천하에 밝아지를 염원하여 쓴 것이다.

 

건도(乾道) 9(1173) 9월 우계현(尤溪縣)에서는 묘학(廟學)을 수선하여 조성하자 현의 일을 담당하고 있던 회계(會稽) 석군(石君) ()이 친구인 나(新安 朱熹)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현의 학교는 옛날에는 현의 동남쪽 모퉁이에 있었는데, 그 지역은 높이 솟아 산을 정면으로 대하고 흐르는 강을 임하여 뒤에는 번화한 시가가 있으며 뜰은 깨끗하고 넓어 처사들이 학업을 익히기에 마땅하였다. 중도에는 현의 북쪽 산자락으로 옮겼고, 뒷날 또 훼손되어 처음 있던 곳으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회복할 적에 선비들이 음양가의 설을 이용하여 인(: 동북동)과 묘(: )의 사이에 비스듬하게 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하고, 문 안으로부터는 짧고 협소하여 마침내 한 물건도 그 올바름을 잃어버리지 않음이 없었다. ()가 처음 이르렀을 적에 병이 나서 도리어 효학(斅學)의 처음으로 밖의 일에 급히 마음 쓰지 못하다가 정월달에 비로소 철거하고 새롭게 하였다. 이미 문()()()()()()()()으로 하여금 하나라도 그 올바름을 얻지 않.음이 없도록 하고, 또 당의 동쪽에 이층집을 지어 선현을 받들고 옛날 가르침을 높였다. 다만 전(殿)은 옛날 그대로 따랐으나 그러나 또한 서까래를 겹으로 얽었고 섬돌과 난간을 위엄 있게 하였다. 그런데 대체로 모방해 건설하는 것이 옛것을 상고하지 않은 것은 태학을 보고 올바름을 취하도록 하였다. 사용한 금액은 대개 사십만이고 동원한 인력은 삼만 명의 기술자이었으며 선비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백성들을 취하지 않았어도 일은 때에 맞게 이루어졌다. 생각하건대 그대가 또한 즐겁게 듣고 만약 욕되게 기문을 써 다행히 끝없이 학자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이는 곧 나의 행복일 것입니다고 하였다.

乾道九年九月, 尤溪縣修廟學成, 知縣事㑹稽石君(+)以書來語其友新安朱熹: “縣之學故在縣東南隅, 其地隆然以髙, 面山臨流, 背囂塵而挹清曠, 於處士隸業爲宜. 中徙縣北源上, 後又毁而復初. 然其復也, 士子用隂陽家説, 爲門斜指寅卯之間以出, 而自門之内, 因短就狹, 遂無一物不失其正者.始至而病焉, 顧以斆學之初, 未遑外事, 歲之正月, 乃始撤而新之. 既使夫門堂齋序庫庾庖湢無一不得其正, 而又度作重屋于堂之東, 以奉先賢, 以尊古訓. 唯殿爲因其舊, 然亦繚以重櫩, 嚴其陛楯. 而凡像設之不稽于古者, 則使視諸太學而取正焉. 靡金錢蓋四十萬, 用人力三萬工, 不資諸士, 不取諸民而事以時就. 意者吾子亦樂聞之, 儻辱記焉, 以幸教其學者於無窮, 是則之幸也.”

 

(주희)는 석군이 이 부역을 한 것으로도 진실로 이미 기문을 쓸만하다. 또한 내가 일찍이 석군과 교류하면서 그가 학문하는 것은 대개 모두 옛사람의 자기를 위하는 학문이었음을 알았고, 또 일찍이 일 때문에 그 고을에 갔다가 그가 가르치는 것이 또 모두 깊이 자득(自得)에 나아간 여유이었음을 알았다. 이것이 곧 기문을 쓸만 것이니 대개 이러한 부역보다 위대한 것이 있는 것이다. 내 비록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진실로 그윽이 근본을 미루어 갖추어 논할 것을 좋아하였기에 부탁을 받들고 사양하지 않았다. 대개 내가 들으니 하늘이 이 사람을 낳음에 인의예지의 성품을 주시고 군신(君臣)부자(父子)형제(兄弟)부부(夫婦)붕우(朋友)의 윤리가 있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백성이 잡은 떳떳함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기질의 품부받음이 순수(純秀)한 시기에 한결같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이 움직이고 정이 이기면 혹 빠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옛날의 성왕이 이 때문에 학교를 세워 백성들을 가르친 것이다. 그 가르침이 되는 것은 반드시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의 사이와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사이에서 시작하여 아침저녁으로 공경하고 공손히 하여 효제충신(孝弟忠信)을 닦아 어긋남이 없도록 한 후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가르쳐서 그 도를 극진히 하여 수신(修身)으로부터 제가(齊家)에 미치고 제가로부터 치국(治國)에 이르고 천하에 이르는 까닭을 알도록 한 것이니 대체로 두 가지 이치가 없는 것이다. 그 바로잡고 곧게 하고 도와주고 품어주며, 너그럽고 순하게 젖어들어 반드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본성을 잃지 않고 그 윤리를 문란하지 않게 한 뒤에 그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성대할 적에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우며 백성들이 순박한 것이어서 후세의 사람들이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라 이후로부터 천여 년인데 학교의 다스림이 때와 함께 성하고 쇠하였어도 그 가르침을 삼은 까닭은 유형이 모두 여기서 나옴을 알지 못하였다. 권면하고 경계하는 것에 이르러 또 대부분 그 방법을 얻지 못하였고 심한 경우는 본성을 거듭 잃어버리고 그 윤리를 더욱 문란하도록 하는 데 이르렀어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또한 슬퍼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송나라에 이르러 문치가 응당 기약하고, 학교의 관원이 군현(郡縣)에 두루 미치었다. 그 제도가 자세하고 정밀하며 규모가 웅장하고 원대하여 대개 이미 한나라와 당나라를 능가하여 당우삼대(唐虞三代)의 융성함보다 장황하였다. 유사들 가운데 중산보(仲山甫)의 받들고 밝은 재주가 없어 덕의(德意)를 공경히 받들지 못하였으니 만약 다스려진 옛날을 상고하면 학교가 가르침을 삼는 것으로 하여금 근대보다 원대하고 지나침이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니, 선유군자(先儒君子)는 혹 남은 한이다. 지금 석군이 이에 홀로 옛날의 학문을 배우고 미루어 오늘날에 시행을 하니 배우는 이로 하여금 수신궁리(修身窮理)를 알아 그 본성을 이루고 그 윤리를 두텁게 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도록 하였는데, 세속의 학문이 때를 구하고 총애를 취하는 것만을 보는 자는 좋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 석군이 가르침을 펼쳐 인재를 키운 것은 기문을 쓸 만한 큰 것이니, 그가 묘학(廟學)을 새로이 조성한 일시의 공만을 보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나 이 부역을 할 적에 석군의 뜻이 또한 장차 존엄한 국가 교화의 궁()으로 학자들의 귀와 눈을 변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외면에서 길러 내면을 가지런히 하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요. 한갓 장관을 자랑하고 유성(游聲)을 꾸밀 따름이 아니다. 가르침을 펼치고 인재를 기르는 공이 여기에 갖추어졌는데, 애석하게도 시험한 것이 적고 미치는 것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그 본말을 차례로 하여 모두 기록한다. 대개 다만 석군의 뜻을 밝혀 학자들을 격려할 뿐만이 아니라 장차 천하의 모든 군현을 다스리는 자들을 풍동(風動)하여 그 모두 석군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도록 한다면 성인의 도와 성인의 교화가 장차 천하에 밝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 겨울 10월 경신(庚申) 초하루에 기록한다.

石君之爲是役也, 則固已可書矣. 嘗得遊於石君, 而知其所以學者, 蓋皆古人爲已之學; 又嘗以事至於其邑, 而知其所以教者, 又皆深造自得之餘. 是則其爲可書, 蓋有大於此役者. 雖不敏, 誠竊樂得推本而備論之, 是以承命而不辭焉. 聞之, 天生斯人, 而予之以仁義禮智之性, 而使之有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之倫, 所謂民彛者也. 惟其氣質之禀不能一於純秀之㑹, 是以欲動情勝, 則或以陷溺而不自知焉. 古先聖王爲是之故, 立學校以教其民. 而其爲教, 必始於洒掃應對進退之間, 禮樂射御書數之際, 使之敬恭朝夕, 修其孝弟忠信而無違也, 然後從而教之格物致知以盡其道, 使知所以自身及家, 自家及國而達之天下者, 蓋無二理. 其正直輔翼, 優柔漸漬, 必使天下之人皆有以不失其性, 不亂其倫而後已焉. 二帝三王之盛所以化行俗美黎民醇厚而非後世之所能及也. 自漢以來, 千有餘歲, 學校之政與時盛衰, 而其所以爲教者, 類皆不知出此. 至於所以勸勉懲督之者, 又多不得其方, 甚者至或使之重失其性, 益亂其倫而不悟. 是不亦可悲也哉! 至于我宋, 文治應期, 學校之官遍于郡縣, 其制度詳宻, 規模宏逺, 蓋已超軼漢唐而娓娓乎唐虞三代之隆矣. 而有司無仲山甫將明之材, 不能祗承德意, 若稽治古, 使學校之所以爲教者卓然有以逺過於近代, 儒先君子或遺恨焉. 石君乃獨能學乎古之學而推之以行於今, 使其學者惟知修身窮理以成其性厚其倫之爲事, 而視世俗之學所以干時取寵者有不屑焉, 是則石君所以敷教作人, 可書之大者, 其視葺新廟學一時之功爲如何哉? 然是役也, 石君之意, 亦將以尊嚴國家教化之宮, 而變其學者之耳目, 使之有以養於外而齊其内, 非徒以誇壯觀飾游聲而已也. 蓋其敷教作人之功於是爲備, 惜乎所試者小而所及之不遐也, 故特序其本末而悉書之. 蓋非特明石君之志以厲其學者, 且將以風天下之凡爲郡縣者, 使其皆以石君之心爲心焉, 則聖人之道聖人之化, 將不憂其不明於天下矣. 是歲冬十月庚申朔記.

:南劔州尤溪縣新修學記

 

 

 

해제부록으로 첨부한 남검주우계현신수학기는 번역하지 않고 참고로 게재한다.

 

乾道九年九月, 尤溪縣修廟學成, 知縣事㑹稽石君(+)以書來語其友新安朱熹: “縣之學故在縣東南隅, 其地隆然以髙, 面山臨流, 背囂塵而挹清曠, 於處士肄業爲宜. 中徙縣北源上, 後又毁而復初. 然其復也, 士子用隂陽家説, 爲門斜指寅卯之間以出, 而自門之内, 因短就狹, 遂無一物不失其正者.始至而病焉, 顧以斆學之初, 未遑外事, 歲之正月, 乃始撤而新之. 既使夫門堂齋序庫庾庖湢無一不得其正, 而又度作重屋于堂之東, 以奉先賢, 以尊古訓. 唯殿爲因其舊, 然亦繚以重櫩, 嚴其陛楯. 而凡像設之不稽于古者, 則使視諸太學而取正焉. 靡金錢蓋四十萬, 用人力三萬工, 不資諸士, 不取諸民而事以時就. 意者吾子亦樂聞之, 儻辱記焉, 以幸教其學者於無窮, 是則之幸也.” 某惟往歲嘗以事至尤溪, 石君之所以化於邑者莫非古人爲已之學, 固已深悅而屢嘆之. 矧其振弊圖新, 以克有立, 又有如今所聞者, 則其於屬筆之意, 雖欲以固陋辭, 其可得乎? 乃不復辭而序其本末如此, 且誦所聞以告夫二三子者曰:

天生斯人, 而予之以仁義禮智之性, 而使之有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之倫, 所謂民彛者也. 惟其氣質之禀不能一於純秀之㑹, 是以物感情動, 則日以陷溺而不自知焉. 古先聖王爲是之故, 立學校以教之. 而其爲教, 必始於洒掃應對進退之間, 禮樂射御書數之習, 使之敬恭朝夕, 修其孝弟忠信而無遣焉, 然後從格物以致其知, 修身齊家以達于治國平天下, 期以不失其性不亂其倫而後已. 然自秦漢以來, 千有餘歲, 上之所以教, 下之所以學, 莫有知出此者. 以故學校遍天下, 而人材風俗□□□□學所破壞, 或使之重失其性益亂其倫而不□□□□可悲也哉! 石君生於此俗, 乃能挺然自立, 以學□□□□又能推之以敎其人而不倦焉, 其可尙已! □□□□以惡夫宮牆宇室之不得其正而悉其力以□□□□所以根乎內而警乎外者, 又何如哉? 二三子□□□□警敎之意, 以求其學之所在而用力焉, 則去□□□□而厚倫者, 亦不可勝用矣. 顧今之爲吏者不得久於其官以須敎化之效, 誠懼邑人之於石君之敎或有時而忘之也, 因幷記是說, 請刻石寘廡下, 以詔其學者於無窮云.

 

 

 

 

건녕부숭안현오부사창기 建寧府崇安縣五夫社倉記

 

 

 

해제이 글은 건령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의 많은 빈민(貧民)들이 나옴에 따라 유여우(劉如愚)와 주희가 관리 서철(徐嚞)왕회(王淮)심도(沈度) 등에게 고법에 의거하여 사창(社倉) 제도 즉 빈민에게 곡물 대여하여 구제하도록 하는 기문이다.

 

건도(乾道) 무자년(戊子年: 1168) 봄과 여름의 교차기에 건영부(建寧府)의 사람은 크게 굶주렸다. 나는 숭안(崇安) 개요향(開耀鄕)에 거처하여, 지현사(知縣事) 제갈후(諸葛侯) 정서(廷瑞)께서 서한을 보내 나와 그 고향의 노인 좌조봉랑(左朝奉郞) 유후(劉侯) 여우(如愚)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백성이 굶주리고 있으니 어찌 호민(豪民)에게 권면하여 저장한 곡식을 발하여 그 값을 내려 빈민을 구제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후와 나는 서한을 받들어 일에 종사하니 마을 사람들은 바야흐로 다행히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도적이 포성(浦城)에서 일어났는데 국경과의 거리가 20리도 안되어 인심이 크게 동요하고 저장한 곡식도 장차 떨어지려고 하였다. 유후와 내가 이를 근심하면서 곡식을 원조할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곧 서한으로 현()과 부()에 요청하였다. 당시 부문각(敷文閣) 대제(待制) 신안(信安) 서공(徐公) () 지부사(知府事)께서 바로 그날 유사에게 명하여 양곡 600석을 배에 싣고 시내를 거슬러서 올라왔다. 유후와 나는 고향사람을 거느리고 40리를 가서 황정(黃亭) 부두 아래에서 받았다. 호적에 적을 가진 중인의 대소인이 양식을 구하는 약간의 사람들이 법에 따라 곡식을 받았다. 백성들이 곡식을 얻게 되어 마침내 굶주려 난을 일으켜 죽는 것이 없으니 기뻐 환호하고 소리가 이웃고을에 진동하였다. 이에 포성의 도적도 다시 수화(隨和)하여 팔짱 끼고 곧바로 사로잡는 것이 없었다. 가을이 되어 서공은 사당에 제사를 봉행하기 위하여 떠나자 직부문각 동양(東陽) 왕공(王公) ()가 계승하였다. 이해 겨울에 풍년이어서 백성들이 곡식을 관청에 갚기를 원하고, 마을 가운데의 민가 곡식 창고는 모두 가득하여 장차 수레에 실어 유사에게 돌려보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왕공이 말하기를 한 해에 풍년과 흉년이 있는 것을 미리 헤아릴 수 없다. 후일 혹 간난(艱難)의 식량이라면 다시 앞날의 노력이 없을 수 있는 것인가? 그 마을 가운데 유치하여 두었다가 그 문서를 관청에 상납하겠다고 하였다. 유후와 나는 이미 조서를 받들다가 명년 여름에는 또 관청에 요청하여 말하기를 산골 영세한 백성은 저장해 쌓은 곡식이 없어 새롭고 오래된 곡식을 접하지 못하여 비록 풍년이라 하더라도 배나 되는 이자로 내어 부호에게 곡식을 빌려 먹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관청의 곡식은 쓸모없는 땅에 쌓아놓고 있어 후일 장차 변한을 곡식을 다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이후로부터 그 해에 한 번 곡식을 거두고 발산하여 이미 백성의 급박함을 완화하여 주시고 또 새 곡식으로 바꾸어 저장하여 곡식 빌리기를 원하는 자로 하여금 그 이자를 십분의 이를 내놓게 하고 또 요행한 곡식을 억누르고 저축을 넓힐 수 있는 것은 곧 원하지 않는다면 강제하지 마십시오. 그 해 혹 불행하게 적은 흉년이 들면 이자를 반액으로 감해주시고, 큰 흉년이 들면 그 전액을 면제하여 은혜로 환과(鰥寡)를 살리고 화란(禍亂)의 근원을 막은 것이야말로 매우 큰 은혜입니다. 청하건대 전례를 나타내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공의 보답은 모두 소장(疏章)과 같이 시행하였다. 이윽고 왕공이 또 떠나버리자, 직용도각(直龍圖閣) 의진(儀真) 심공(沈公) ()가 계승하였다. 유후와 나는 또 요청하여 말하기를, “곡신은 나누어 민가에 저장하면 그 출납을 감시하는 데 편리하지 않으니 땅과 마을 가운데를 헤아리고 옛 법을 모방하여 사창(社倉)을 만들어서 보관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일 년의 이자를 출연(出捐)하는데 불과하니 마땅히 판단해야만 합니다고 하였다. 심공은 그것을 따르고 또 돈 육만(六萬)으로 그 노역을 돕도록 명령하였다. 그래서 적판(籍坂) 황씨(黃氏)의 폐지(廢地)를 얻어 기술자를 모으고 재목을 헤아렸다. 일이 7(1171) 6월에 시작하여 8월에 완성하니 창고 세 개, 정자 하나, 담장수사(守舍)가 하나라도 구비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회계를 맡고 공역(工役)을 감독할 자는 공사(貢士) 유복(劉復)과 유득여(劉得輿)와 마을 사람인 유서(劉瑞)였다. 이미 완성되고 문서를 받게 되어 유후와 나는 현관 한 사람이 출납을 참여하여 맡을 수 있기를 요청하니, 이에 위() 반자소(潘子韶)가 격문을 보내왔다. 명년 여름에 유후가 강서 막부(幕府)에 벼슬할 적에 내가 또 요청하여 말하기를 유복과 유득여는 모두 이 창고에 노력함이 있고 유후의 아들 장사랑(將仕郞) ()는 일찍이 여기서 아버지를 보좌하고 그 족자(族子)인 우수직랑(右修直郞)인 평()도 또한 청렴하고 공평하여 계략이 있어 함게 힘을 병합할 수 있기를 요청합니다고 하였다. 막부에서는 나의 말을 죄다 글로 갖추어 예로 요청하니 네 사람은 마침내 모다 일에 나아갔다. 게다가 서로 더불어 창고의 이익과 병폐를 강구하고 조약을 갖추었는데, 마침 승상 청원공(淸源公)이 이 땅에 진수(鎭守)로 나와 마을 영역에 들어와 풍속을 물으니, 나와 제군들이 조약을 갖추어 공을 맞이하면서 아뢰었다. 공이 이를 편리하다고 여기니 곧 교령을 내어 돌아가 문설주 사이에 게시하여 오는 사람에게 보도록 하였다. 이에 이 창고의 여러 일 가운데 대소가 규정이 있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乾道戊子春夏之交, 人大饑. 予居崇安開耀鄉, 知縣事諸葛侯廷瑞以書來, 屬予及其鄉之耆艾左朝奉郎劉侯如愚: “民饑矣, 盍爲勸豪民發藏粟, 下其直以振之? 劉侯與予奉書從事, 里人方幸以不饑. 俄而盜發浦城, 距境不二十里, 人情大震, 藏粟亦且竭. 劉侯與予憂之, 不知所出, 則以書請于縣于府. 敷文閣待制信安徐公嚞知府事, 即日命有司以船粟六百斛泝溪以來. 劉侯與予率鄉人行四十里, 受之黄亭步下. 歸籍民口大小仰食者若干人, 以率受粟. 民得遂無饑亂以死, 無不悦喜歡呼, 聲動旁邑. 於是浦城之盜無復隨和而束手就擒矣. 及秋, 徐公奉祠以去, 而直敷文閣東陽王公淮繼之. 是冬有年, 民願以粟償官貯, 里中民家倉廥皆滿, 議將輦載以歸有司, 而王公曰: “歲有凶穰, 不可前料. 後或艱食, 得無復有前日之勞? 其留里中而上其籍於府.劉侯與予既奉教, 及明年夏, 又請于府曰: “山谷細民無蓋藏之積, 新陳未接, 雖樂歲, 不免出倍稱之息貸食豪右, 而官粟積於無用之地, 後將紅腐, 不復可食. 願自今以來, 歲一歛散, 既以紓民之急, 又得易新以藏, 俾願貸者出息什二, 又可以抑僥倖廣儲蓄, 即不欲者勿强. 歲或不幸小饑, 則弛半息; 大侵則盡蠲之, 於以惠活鰥寡, 塞禍亂原, 甚大惠也. 請著爲例.” 王公報皆施行如章. 既而王公又去, 直龍圖閣儀真沈公度繼之. 劉侯與予又請曰: “粟分貯民家, 於守視出納不便, 請度地里中, 放古法, 爲社倉以儲之. 不過出捐一歲之息, 宜可辦.” 沈公從之, 且命以錢六萬助其役. 於是得籍坂黄氏廢地, 而鳩工度材焉. 經始於七年五月而成於八月, 爲倉三, 亭一, 門牆守舍, 無一不具. 司㑹計董工役者, 貢士劉復劉得輿里人劉瑞. 既成, 當受翰, 劉侯與予又請得縣官一人參掌出納, 於是尉潘子韶以檄來. 明年夏, 劉侯之官江西幕府, 予又請曰: “得輿皆有力於是倉, 劉侯之子將仕郎嘗佐其父於此, 其族子右修職郎亦廉平有謀, 請得與并力.” 府以予言悉具書禮請焉, 四人者遂皆就事. 方且相與講求倉之利病, 具爲條約, 㑹丞相清源公出鎮兹土, 入境問俗, 予與諸君因得具以所爲條約者迎白于公. 公以爲便, 則爲出教, 俾歸揭之楣間, 以視來者. 於是倉之庶事細大有程, 可久而不壞矣.

 

나는 생각하건대, 성주(成周)의 제도는 현과 도성에 모두 위자(委積: 저축)하여 흉년을 기대비한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이른바 사창은 또한 근고(近古)의 좋은 법이다. 지금은 모두 폐지되었으나 유독 상평(常平)과 의창(義倉)은 아직도 고법의 유의(遺意)가 남아 있다. 그러나 모두 주현에 보관되어 은혜 받는 사람은 시정의 게으르고 방탕한 무리에 불과하다. 심산장곡(深山長谷)에서 힘써 농사짓고 멀리 수송하는 백성에 이르러서는 비록 굶주리고 죽을 지경에 다다라도 그 은혜가 미치지 못한다. 또 그 법이 너무 치밀하여 관리 가운데 일을 꾀하고 법을 두려워하는 자로 하여금 백성이 굶어서 죽는 것을 보고도 기꺼이 곡식을 발하지 않고 아니하고 왕왕 그 창고의 자물쇠를 완전히 봉하고 서로 가름하여 열쇠를 주고받으면서 혹 수십 년이 되기에 이르러도 한 번도 헤아리고 살피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어느 것이라도 그만두지 않은 뒤에 곡식을 발한다면 이미 먼지나 흙덩이로 변해 먹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대저 국가가 백성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으로 한다면 그 걱정이 어찌 여기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고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사(里社)가 불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모두 맡을 만한 사람이 한 번이라도 그 하는 것을 듣고자 한다면 사사로움을 도모하여 공정함을 해칠까 두렵고, 그 출입을 삼가 관부와 동등하고자 한다면 살펴 조사하는 것이 치밀하지 않고 위아래 사람이 서로 회피하니, 그 해로움이 또 반드시 이전에 말한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어렵게 여기며 여가가 없을 뿐이다. 지금 다행히 여러 공이 서로 계승하여 그 백성을 사랑하고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이 모두 법령의 밖에서 나오고 또 모두 우리들을 천대하지 않고 부족한 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에 미칠 수 있었다. 수년의 사이에 좌우로 이끌고 윗사람이 설명하고 아랫사람이 교화하여 마침내 고향을 위해 이 무궁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것이 어찌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생각하건대, 후일의 군자는 그 만난 것이 쉽지 않음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 사사로움을 도모하고 공정함을 해롭게 하여 윗사람에게 의심받는 것이 없고, 윗사람도 또한 사소한 법령으로 구속함이 없는 것이 여러 공의 마음과 같이 한다면 이 창고의 이익은 어찌 한 때에 그치겠는가? 그 보고 본받은 사람도 또한 장차 한 고을에 그치지 아니할 따름이다. 그래서 그 본말을 이와 같이 쓰고 돌에 새겨 후일의 군자에게 고하는 것이다. 순희(淳熙) 갑오년(甲午年: 1174) 여름 5월 병술일(丙戌日)에 신안 주희는 기록한다.

予惟成周之制, 縣都皆有委積, 以待凶荒. 隋唐所謂社倉者, 亦近古之良法也. 今皆廢矣, 獨常平義倉尚有古法之遺意. 然皆藏於州縣, 所恩不過市井惰游輩. 至於深山長谷, 力穡遠輸之民, 則雖饑餓瀕死而不能及也. 又其爲法太密, 使吏之避事畏法者視民之殍而不肯發, 往往全其封鐍, 遞相付授, 至或累數十年, 不一訾省. 一旦甚不獲已然後發之, 則已化爲浮埃聚壌而不可食矣. 夫以國家愛民之深, 其慮豈不及此? 然而未之有改者, 豈不以里社不能皆有可任之人, 欲一聽其所爲, 則懼其計私以害公; 欲謹其出入, 同於官府, 則鈎校靡密, 上下相遁, 其害又必有甚於前所云者, 是以難之而有弗暇耳. 今幸數公相繼, 其愛民慮遠之心皆出乎法令之外, 又皆不鄙吾人, 以爲不足任, 故吾人得以及是. 數年之間, 左提右挈, 上説下教, 遂能爲鄉閭立此無窮之計. 是豈吾力之獨能哉? 惟後之君子視其所遭之不易者如此, 無計私害公, 以取疑於上, 而上之人亦毋以小文拘之, 如數公之心焉, 則是倉之利, 夫豈止於一時? 其視而傚之者, 亦將不止於一鄉而已也. 因書其本末如此刻之石, 以告後之君子云. 淳熙甲午夏五月丙戌, 新安朱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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