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권 朱子大全 卷七十九
기 記
와룡암기(臥龍菴記)
【해제】 이 글은 순희 7년(경자, 1180년, 51세) 11월 28일에 쓴 글이다.
와룡암(臥龍菴)은 여산(廬山)의 남쪽, 오유봉(五乳峰) 아래에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 구산(龜山) 양선생의 시를 읽었는데, ‘와룡(臥龍) 유군(劉君)이 숨어살면서 곡식은 먹지 않고 나무와 계곡의 물만 먹고 마시며 살았는데, 이미 백 살이 넘었는데도 정신은 맑고 눈은 푸른 빛을 띠어 손님이 오면 먼저 알아차렸다’는 기록을 보고, 이미 이 암자가 있음을 알았다. 지난 해 성은을 입어 여기(남강군)로 부임했는데, 또 진순유(陳舜兪) 영거(令擧)의 여산기(廬山記)를 읽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산이 천하에 저명한 이유는 서응(徐凝)과 이백(李白)이 개선(開先)의 폭포를 시로 읊고, 강왕(康王) 계곡의 수렴(水簾)이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보이기 때문이다. 깊고 험하며 절벽 등에는 모두 아름다운 수석이 있다. 이 암자의 서쪽으로는 오래된 벼랑이 넷 서있는데, 성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커다란 도랑과 깊은 연못은 늠름하여 경외로울 정도이다. 여기에 어른 키의 몇 배나 되는 황석(黃石)이 있는데, 그 그림자가 쭉 이어지는데, 격랑 속에 있으면, 보는 사람이 아찔하고, 마치 구불구불 꿈틀거리면서 춤추며 날아갈 듯하기 때문에 와룡(臥龍)이라 했다. 여기가 산수의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여기에서 또 그 천석(泉石)이 이와 같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번에 농민들의 전답을 순시하기 위해 여기에 처음으로 왔는데, 암자는 이미 없고 유군도 다시 볼 수 없었다. 오직 아름다운 그 천석(泉石)만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장엄하고 훌륭하며 기이한 기세는 진순유의 기문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臥龍菴在廬山之陽五乳峰下, 予自少讀龜山先生楊公詩, 見其記臥龍劉君隱居辟穀, 木食澗飮, 蓋已度百歲而神淸眼碧, 客至輒先知之, 則固已知有是菴矣. 去歲蒙恩夾此, 又得陳舜前令擧廬山記者讀之, 其言曰: ‘凡廬山之所以著於天下, 蓋有開先之瀑布見於徐凝, 李白之詩, 康王之水簾見於陸羽之茶經. 至於幽深險絶, 皆有水石之美也. 此菴之西, 蒼崖四立, 怒瀑中瀉, 大壑淵深, 凜然可畏. 有黃石數丈, 隨映連屬, 在激浪中, 視者眩轉, 若欲蜿蜒飛舞, 故名臥龍. 此山水之特勝處也.’ 於是又知其泉石之勝乃如此. 間以行田, 始得至焉, 則菴旣無有, 而劉君亦不可復見. 獨其泉石之勝, 不可得改. 然其壯偉奇特之勢, 則有非陳記所能彷彿者.
나는 암자가 무너져 황폐화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지만, 또 다행히 그곳이 멀고 험하여 수레나 말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홀로 보존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남강 군수직에서 물러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곧 봉급 10전을 내놓고서, 서원(西原) 지방에 은거하고 있는 최가언(崔嘉彦)군의 부탁으로 그 옛터에 서까래 몇 개를 엮어 집을 만들어놓고 (남강군에서 해제되는) 명이 내려오면 옮겨가서 거처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또 (와룡이라는) 연못의 이름에 따라 한나라의 승상 제갈공명의 초상을 그려 초집 가운데 걸고, 옛친구인 장경부가 부시(賦詩)를 지어 그 일을 기록했다. 그러나 암자와 연못의 거리가 수 백 걸음인지라, 돌 사이를 걷기가 어렵고, 시냇물을 세 번이나 건너야 겨우 도달한다. 도착해도 또 어디에 발하나 걸칠 곳이 없고 기대어 조망할 수 곳도 없다. 어떤 이는 넘어지고 엎어져 되돌아가고, 그 동쪽 벼랑에 돌을 깎아 계단을 만들어 붙잡고 건넜다. 조금 아래에는, 시내에서 돌출한 커다란 암석이 있는데, 우러러보면 큰 나무가 우산 같고, 굽어보면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앞에는 나는 폭포를 마주하고 있으니, 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마침내 다시 그 위에 정자를 지어 관리와 백성들이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곳으로 삼고, 여기에 유람 오는 사람들 역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쉬면서 마음껏 조망하면서 마음을 유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해에 커다란 외침을 당해, 편액을 ‘기정(起亭)’이라 했는데, 연못에 누워 있는 용이 일어나 하늘로 날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내가 예전의 요청을 지금까지 여러 차례 올렸지만, 아직도 재가를 받지 못했다. 세월은 바람 같지만, 감개무량한 생각에 그 자세한 내용을 서술하고 집의 벽에 써 붙였다. 여기에 온 사람이 읽고서 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순희 경자년 겨울 11월 병진, 신안 주희 기록하다.
余旣惜其出於荒堙廢壞之餘, 而又幸其深阻夐絶, 非車塵馬跡之所能到, 儻可得擅而有也. 時已上章乞解郡紱, 乃捐俸錢十萬, 屬西原隱者崔君嘉彦, 因其舊址, 縛屋數椽, 以俟命下而徙居焉. 旣又緣名潭之義, 畫漢丞相諸葛公之象寘之堂中, 而故友張敬夫嘗爲賦詩以紀其事. 然菴距潭猶數百步, 步亂石間, 三涉澗水乃至. 至又無所託足, 以寓瞻眺, 或乃顚沛而反. 因相其東崖, 鑿石爲磴而攀綠以度. 稍下, 乃得巨石橫出澗中, 仰翳喬木, 俯瞰淸流, 前對飛瀑, 最爲谷中勝處. 遂復作亭於其上, 旣以爲吏民禱賽之地, 而凡來遊者, 亦得以彷徨徒倚而縱目快心焉. 於是歲適大侵, 因牓之曰‘起亭’, 以爲龍之淵臥者可以起而天行矣. 然予前日之請, 迄今蓋已屢上, 而竟未有得也. 歲月飄忽, 念之慨然, 乃敍其作興本末而書之屋壁. 來者讀之, 尙有以識予之意也. 淳熙庚子冬十有一月丙辰, 新安朱熹記.
서원암기(西原菴記)
【해제】 이 글은 순희 6년(기해, 1179년, 50세) 4월에 쓴 글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기이한 곳을 좋아했는데, 중년이 되면서부터 늙고 병들어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여부(廬阜)의 기이하고 빼어난 산수는 천하의 으뜸가며 기인(畸人) 일사(逸士)들이 종종 그 곳에서 노닌다는 소식을 듣고, 늘 한번 그곳에 유람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작년에 은혜를 입고 남강 군수직을 맡아 마침 이 산의 남쪽에 있다가, 간간이 공적인 일로 그곳에 갔었다. 깊고 깊은 골짜기와 바위들의 기괴함은 내 평생토록 상상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위골짜기의 물과 바위 사이에서 또 성기(成紀) 최군(崔君)을 만나고, 예전에 들었던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
予少好佳山水異甚, 而自中年以來, 卽以病衰, 不克逞其志于四方. 獨聞廬阜之奇秀甲天下, 而畸人逸士往往徜佯於其間, 意常欲一往遊焉而未暇也. 前年蒙恩試郡, 適在此山之陽, 乃間以公家職事得至其中. 其巖壑幽深, 水石奇怪, 固平生所創見. 而於巖壑水石之間, 又得成紀崔君焉, 乃信前所聞者之不誣也.
그의 이름은 가언(嘉彦), 자(字)는 자허(子虛)이며, 어려서부터 의기롭고 기이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장성해서는 파동(巴東) 삼협(三峽) 지방에 은거하면서 신농(神農)․노자(老子)의 비술(秘術)을 익혔다. 동쪽으로 오(吳) 월(越)지방으로 내려가, 경전(耕戰)의 술책으로 작고한 승상 조충간공(趙忠簡公)에게 벼슬을 구했는데, 당시 승상이던 조공(趙公)이 옳다고 했다. 승상에게 갈 수 있었는데, 결국 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최군은 이산에서 자취를 감추고 숨어버렸는데, 진영거(陳令擧)가 쓴 도기(圖記)를 살펴보면, 와룡폭포의 동쪽에 있는 서원암(西原菴)의 옛터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밭을 갈고 약초를 뿌려 겨우 자급(自給)할 만했는데, 오고가는 사방의 선비들이 모두 여기에서 밥을 먹었다. 늙고 병들어 돌아갈 곳조차 없는 외로운 사람이 오면, 모두 거두어 봉양했다. 나이 70이 넘었으나 정신은 맑고 근력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 사람은 나를 피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나를 위해 자신의 한평생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듣고서 서로 함께 크게 탄식했다. 내가 ‘와룡’이라는 집을 짓고 제갈공명 승상을 제사지내려 할 때, 세상 사람들은 대개 그 아는 이가 적었다. 그 사람은 탄식하면서 “이 기묘한 일이다!”고 하면서, 서로 그 사업을 경영하여 마침내 완성하게 되었다. 2년 동안, 수없이 서로 만났지만, 그 사람은 한 번도 다른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이를 통해 나는 그의 사람됨을 더욱 아름답게 여겼고, 그가 이미 늙어 더 이상 세상에 쓰일 수 없음을 거듭 탄식했다.
君名嘉彦, 字子虛, 少慷慨有奇志. 壯歲避地巴東三峽之間, 修神農․老子術. 東下吳越, 以耕戰之策干故相趙忠簡公, 趙公是之. 曾去相, 不果行. 君自是絶迹此山, 按陳令擧所述圖記, 得西原菴故址于臥龍瀑水之東, 築室居焉. 耕田種藥, 僅足以自給, 而四方往來之士皆取食焉. 其疾病老孤無所與歸之人, 至者亦收養之. 蓋年逾七十矣, 而神明筋力不少衰. 予往造之, 而君不予避也. 一旦爲予道說平生, 相與太息. 會予結屋臥龍以祠諸葛丞相, 世蓋少識其意者. 君獨嘆曰: ‘此奇事也!’相爲經紀其事, 以迄有成. 兩年之間, 相見者不知其幾, 而君未嘗一言及外事, 予以是益嘉君之爲人, 而重歎其旣老, 無所復用於世也.
순희 신축 윤달 그믐, 나는 남강 군수직을 그만두고 와룡에 와서 묵는데, 그 사람이 말했다. “와룡의 일은 당신께서 이미 쓰셨지만, 서원(西原)만 아직 기문이 없으니, 다시 나를 위해 써주시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그 자세한 내용을 적고 비석에 새기도록 했다. 신안 주희 기록하다.
淳熙辛丑閠月之晦, 予旣罷都, 來宿臥龍. 君曰: ‘臥龍之役, 夫子旣書之矣, 顧西原獨未有記, 復能爲我書之乎? ’予曰諾哉, 於是悉次其說, 俾刻焉. 新安朱熹記.
휘주 무원현 학교의 세 선생 사당기(徽州婺源縣學三先生祠記)
【해제】 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년, 52세) 8월 9일에 쓴 글이다.
순희 8년 봄 3월, 무원(婺源) 지방 대부(大夫) 주후(周侯)가 그 현의 학교에 주돈이 선생과 이정 선생의 사당을 시작하면서, 사람을 시켜 내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옛날 우리 고을의 사람으로서 일찍이 선생의 학문을 배웠고 이미 남강에서 그를 제사지냈다. 또 염계(濂溪)의 고택(故宅)․예장(豫章)․의춘(宜春)의 사당은 또 당신이 기록한 것이니, 그 또한 나를 위해 말해주시오.” 내가 생각하건대, 세 분 선생의 도는 높고도 아름답지만, 이 무원 지방은 그 고향도 아니고, 살았던 곳도 아니며, 또 일찍이 벼슬했던 지방도 아니다. 또 나라의 제사의레를 기록한 전적(典籍)에는 예법에 따른 등급에 근거하지 않고 지내는 제사는 없으니, 어떤 예법에 의거할 것이며, 어떤 의리에 합당하겠는가? 모두 알리고, 또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몇 달 뒤, 주후(周侯)와 읍(邑)의 처사(處士) 이증(李繒)군 및 학교의 제자 수 십 명이 모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오직 염계(濂溪) 부자(夫子)의 학문만이 하늘에의 본성대로 하고, 자기에게 성실하여 옛 성인이 주고받은 정통과 일치하고, 또 하남의 이정(二程) 선생을 얻어 그것을 전수하여 마침내 천하에 유행하였다. 작위나 상으로 권하거나 형벌로 윽박지른 것도 아닌데 천하의 학사들이 바람처럼 그를 따랐다. 수 십년 동안, 비록 그 고향이 아니고, 살았던 곳도 아니며, 벼슬한 나라가 아니며, 예법의 등급에 따라 제사를 거행한다는 경전의 명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의 학관(學官)에서는 다투어 사실(祠室)을 만들어 그 존봉(尊奉)의 뜻을 다하니, 이로써 제사의 명령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니, 또한 그 도덕의 위용을 그려 학자들로 하여금 날마다 바라보면서 흥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우리 고을 사람들이 세 분 선생의 말씀을 들었던 것은 당신의 선친도 함께 노력했던 것이다. 이제 사당도 이미 완성되었는데, 당신이 왜 그 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가? 바라건대 당신께서 선생의 학문의 그 시작과 끝, 근본과 말단의 취지를 자세히 진술해주시면, 우리를 계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淳熙八年春三月, 婺源大夫周侯始作周程三先生祠堂於其縣之學, 而使人以書來謂熹曰: ‘子故吾邑之人也, 蓋嘗有聞於先生之學而旣祠之南康矣. 且濂溪故宅, 豫章, 宜春之祠, 又吾子之所記也, 其亦爲我言之.’ 熹惟三先生之道則高矣, 美矣, 然此婺源者, 非其鄕也, 非其寓也, 非其所嘗遊宦之邦也. 且國之祀典, 未有秩焉而祀之, 於禮何依而於義何所當乎? 則具以告, 且謝不敢. 後數月, 周侯又與邑之處士李君繒及其學官弟子數十人皆以書來曰: ‘惟濂溪夫子之學性諸天, 誠諸己而合乎前聖授受之統, 又得河南二程先生以傳之, 而其流遂及於天下. 非有爵賞之勸, 刑辟之威, 而天下學士靡然鄕之. 十數年來, 雖非其鄕, 非其寓, 非其遊宦之國, 又非有秩祀之文, 而所在學官爭爲祠室, 以致其尊奉之意, 蓋非敢以是間乎命祀也, 亦曰肖其道德之容, 使學者日夕瞻望而興起焉耳. 且吾邑之人所以得聞三先生之言者, 子之先君子與有力焉. 今祠亦旣成矣, 子安得而不爲之言乎? 抑先生之學, 其始終本末之趣, 願吾子之悉陳之, 庶乎其有發也.’
나는 얼굴색을 바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명부(明府)의 가르침과 여러분의 말씀은 제게 기문을 쓰라는 명령하는 것인데, 제가 감히 다시 사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선생의 학문은 어리석은 제가 말하기에는 부족할까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염계의 여러 도설과 책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비록 간단소박하면서도 고아(古雅)하고 심오하여 쉽게 헤아릴 수 없지만, 그 근본 취지는 학자들이 강학하고 사색하여 천지만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그 사사로움을 이겨내고 그 처음을 회복하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실시하면 가정에서 잘 시작하여 천하에 이르고, 그것을 구비하면 고례(古禮)를 회복하고 지금의 음악을 변화시키며, 정치로서 백성을 성장시키고 형벌로서 백성을 엄숙하게 한다. 이것이 곧 이른바 이윤(伊尹)의 뜻이고 안자(顔子)의 학문이니, 정씨(程氏)가 그것을 전하여 우리들을 각성시키니, 역시 어찌 여러분의 일상생활을 벗어난 것이 있겠는가? 다만 그것을 아직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다행히 어진 대부의 노력으로 날마다 선생의 모습을 보고 우러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마침내 그 책을 읽고 그 취지를 구하여 내 몸에 돌이켜 힘써 실천하지 않겠는가?” 이윽고 그 일과 그 말들을 이와 같이 써서 기문으로 만들었으니, 학자들이 이로 말미암아 힘쓴다면 아마도 세 분 선생의 마음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 어른의 뜻과 어진 대부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여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사당은 강당 북쪽 벽 아래에 있고, 염계 선생은 남쪽을 향해 앉았고, 명도 선생과 이천 선생은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熹發書愀然曰: ‘明府之敎, 諸君之言, 其命熹以記者, 熹不敢復辭矣. 乃先生之學, 則熹之愚懼不足以言之也. 雖然, 諸君獨不觀諸濂溪之圖與其書乎? 雖其簡古淵深, 未易究測, 然其大指, 則不過語諸學者講學致思, 以窮天地萬物之理, 而勝其私以復焉. 其施則善始於家而達之天下, 其具則復古禮, 變今樂, 政以養民而刑以肅之也. 是乃所謂伊尹之志, 顔子之學, 而程氏傳之以覺斯人者, 而亦豈有以外乎諸君日用之間哉? 顧獨未之察耳. 今幸以賢大夫之力, 旣得以日見先生之貌象而瞻仰之, 則曷若遂讀其書, 求其指以反諸身而力行之乎? ’已而遂書其事與其辭如此以爲記, 以爲學者由是而用力焉, 則庶幾乎三先生之心不墜於地, 而於吾先子之志, 賢大夫之意亦可以無負矣. 諸君其亦勉之哉!祠在議堂北壁下, 濂溪先生南鄕坐, 明道先生, 伊川先生東西鄕以侑焉.
주후(周侯)의 이름은 사청(師淸)이며, 옥산(玉山) 사람으로 학문을 좋아해서 글을 남겼고, 일찍이 조정에서 벼슬했다. 그는 이 지방을 위해 너그러움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선비는 예로 대했다. 교화하고 가르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오늘날의 관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을 8월 계축에 현인(縣人) 주희 기록하다.
周侯名師淸, 玉山人, 好學有文, 而嘗仕於朝矣. 其爲此邦, 寬以撫民, 禮以俟土, 而所以敎誨之者又如此, 非今之爲吏者所能及也. 秋八月癸丑, 縣人朱熹記.
경주학기(瓊州學記)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10월 23일에 쓴 글이다.
옛날 성왕께서 백성들의 군사(君師)를 만들어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어 우두머리로 삼아 다스렸다. 백성을 가르치는 조목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하고,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다섯 가지일 뿐이다. 백성들에게 이 몸이 있으면 반드시 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하루라도 떠날 수 없다.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다섯 가지의 이치가 있으니, 하루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성왕의 가르침은 백성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固有)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이끌고, 그 처음(본래성, 고유성)을 잊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미암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오래되면 파괴될까 염려하여, 백성들을 위해 그들 가운데 우수한 이를 선발하여, 백성들을 학교에 모으고, 사유(師儒)로서 연합하고, 시서로써 개발하고, 예악으로 완성시켰다. 백성들이 이 이치를 밝고 알고 그것을 앓지 않고 지키며, 이 가르침을 전수하고 끝없이 실천하게 하는 것 역시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固有)에 근거하여 그것을 밝히는 것 아님이 없으니, 애당초 밖의 것에 힘쓰는 것은 없는 것이다. 무릇 이와 같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밝히기가 쉽고, 그 학문은 완성하기가 쉬우며, 그것을 실시하는 곳은 넓어, 아무리 먼 지역이라도 이르며 조금이라도 변화되지 않는 곳이 없다. 이것이 선왕의 교화의 은택이 흥성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다.
昔者聖王作民君師, 設官分職, 以長以治. 而其敎民之目, 則曰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五者而已. 蓋民有是身, 則必有是五者, 而不能以一日離. 有是心, 則必有是五者之理, 而不可以一日離也. 是以聖王之敎, 因其固有, 還以道之, 使不忘乎其初. 然又慮其由而不知 無以久而不壞也, 則爲之擇其民之秀者, 羣之以學校而聯之以師儒, 開之以詩書而成之以禮樂, 凡所以使之明是理而守之不失, 傳是敎而施之無窮者, 蓋亦莫非因其固有而發明之, 而未始有所務於外也. 夫如是, 是以其敎易明, 其學易成, 而其施之之博, 至於無遠之不曁而無微之不化. 此先王敎化之澤所以爲盛而非後世所能及也.
순희 9년, 경주 지방의 수장(帥守)인 장락(長樂) 한후(韓侯) 벽(璧)이 경주의 학교를 신축하고 나서 그림을 보내 기문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경주는 중국의 서남쪽으로 만리나 되는 뜨거운 남해(南海)에 위치하고 있어서, 백성들 가운데 선비가 되는 이는 매우 적고, 다행히 있더라도 문장을 읽고 외우고 기억하는 풍습이 북쪽 지방의 학자들보다 앞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공명(功名)과 사업은 끝내 오늘날의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니, 저는 그것을 적이 슬프게 여겼습니다. 이제 그 공당(公堂)의 학교(序室)는 이미 수리했지만, 그들을 어떻게 흥기시켜야 할 지 알지 못해 이렇게 여쭈니, 당신께서 그들의 덕을 진흥시켜 주십시오.”라고 했다.
淳熙九年, 瓊管帥守長樂韓侯璧旣新其州之學, 而使以圖來請記曰: ‘吾州在中國西南萬里炎天漲海之外, 其民之能爲士者旣少, 幸而有之, 其記誦文詞之習, 又不能有以先於北方之學者. 故其功名事業遂無以自白於當世, 僕竊悲之. 今其公堂序室則旣修矣, 然尙懼其未能知所興起也, 是以願有謁焉, 吾子其有以振德之.’
내가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뜻은 넓고 사람들이 이 교화를 받은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오히려 후(候)가 걱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있으니, 어찌 예전의 교육했던 것이 백성들을 그들의 몸과 마음에 고유한 것으로서 인도하지 않고 억지로 밖의 것에 힘쓰게 해서 저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이겠는가? 글을 쓰면서 예전에 들었던 것을 그들에게 알려, 경주의 선비들이 학문한다는 것이란 몸과 마음에 고유한 것을 벗어나지 않으니, 하루라도 거기에 힘쓰면 덕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닦아져 천하의 이치에 의심이 없어지고 장차 어려움이란 게 없어질 것이니, 이른바 공명과 사업 운운하는 것도 그 근본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하려 한다. 만약 저들이 지엽적인 문장이 암송하고 기억한다면, 그것은 우리 학문이 급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니, 또 어찌 경중을 논할 것인가. 아아! 경주의 선비들이여 노력하라. “하늘이 여러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음에 법이 있도다. 백성이 떳떳한 성품을 갖고 있는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 여기에 어찌 고금의 간격이 있고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겠는가? 후(侯)가 이 지방에서 행한 정사는 기록할만한 것이 많지만, 이미 갖추어 지정(池亭)의 돌에 새겼으니, 더 이상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업의 공정을 논쟁하는 것은 후가 글을 청탁한 의도가 아닐 것이니, 역시 대략 논의하지 않는다. 현익 섭제격(玄黓攝提格) 겨울 10월 경신, 선교랑(宣敎郞)․직비각(直祕閣) 주희 기록하다.
熹竊惟國家斅學之意不爲不廣, 斯人蒙化之日不爲不深, 然猶有如侯之所慮者, 豈前日之所以敎者, 夫嘗導之以其身心之所固有, 而徒强之以其外, 是以若彼其難與? 因爲之書其所聞於古者以告之, 使瓊之士知夫所以爲學者不外於身心之所固有, 而用其一日之力焉, 則其德成行修而無所疑於天下之理將無難者, 而几所謂功名事業云者, 其本已在是矣. 若彼記誦文詞之末, 則本非吾事之所急, 而又何足爲重輊乎? 嗚呼, 瓊士勉旃! ‘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 是豈有古今之間, 遠近之殊哉? 侯於是邦政多可紀, 已具刻於池亭之石, 因不復書. 而是役之面勢功程, 又非侯所以屬筆之意也, 亦略不論著云. 是年歲在玄黙攝提格冬十月庚申, 宣敎郞, 直祕閣朱熹記.
경주 지락정기(瓊州知樂亭記)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10월 23일에 쓴 글이다.
경관(瓊管; 경주)은 중국 서남쪽으로 만리나 되고, 격랑이 치고 끝없이 넓은 바다 밖에 위치하고 있다. 그 장리(長吏)는 항상 섬의 사군(四郡)을 보호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그 위임받은 책무가 매우 무겁다. 그러나 그곳은 멀고 험해서, 조정에서는 늘 관리로 보낼 사람을 선발하는데 애를 먹었고, 책임을 맡고 간 사람은 간혹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데 뜻을 두니, 진실로 선량한 전통을 계승하고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여 선포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그곳이 지금 왕의 영토가 된지 수 백 년이 되었지만, 구습을 완전히 개혁하지 못했고, 논자들은 이를 비속하게 여겨, 이곳은 중국의 명성과 교화에 걸맞지 못하다고 여기니, 그곳 사람들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아직까지 설욕하지 못하고 있었다.
瓊管在中州西南萬里鯨波浩漾之外, 其長吏常以領護島中四郡, 塡撫民夷爲職, 委寄甚車. 然以其險且遠也, 朝廷往往不暇擇人, 冒而往者, 意或私有所利, 固不復知所謂承流宣化爲何等事. 是以其地今爲王土數百年而舊俗未盡革, 論者因鄙夷之, 以爲是果不足以與中國之聲敎, 其人蓋深耻之而未有以雪也.
순희 8년, 지금의 수수(帥守) 한후(韓侯)가 처음으로 (한후의 청렴을) 경략사(經略使)로 경주의 일을 살펴 행하도록 요청하는 글을 올리니, 천자가 이를 허락했다. 부임하자, 농지와 관련된 장부를 바로잡고, 소금과 쌀과 같은 세금을 경감해 주었고, 논밭을 갈고 김을 매며 물을 대는 농사법을 가르치고, 성적이 나쁜 관리는 퇴출시켰다.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된 뒤에 예의 염치와 같은 예법의 의미를 설명하여 그들을 계몽하였다. 또 교화를 잘 따르는 사람들을 표창하여 교화에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힘들지만 게으름 피우지 않고 직접 현장을 답사하기를 1년, 백성과 관리들이 두루 화합하고 풍속도 새롭게 변하였다. 중화의 정령(政令)과 교화(敎化)가 미치지 않는 먼 지방에 거주하는 여족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흠모하여 성(省)의 민호처럼 세금을 내기를 원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에, 후(侯) 역시 그 정치가 이루어지고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어기지 않는 것을 스스로 기뻐하여 장자 호상(濠上)의 말을 취해 방생지(放生池) 위에 ‘지락(知樂)’이라는 정자를 짓고,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구름 사이로 대궐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서, 절기에 따른 담저축연(瞻佇祝延)의 곳으로 여겼다. 또 지방 사람 사녀(士女)들이 친구들이 함께 만나는 날이나 길일에는 춤추고 노래하게 하고, 성왕의 교화를 입고 성왕의 백성으로 부끄럽지 않음을 스스로 즐거워했다. 얼마 후, 내게 기문을 요청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비장에서 한후(韓侯)의 후(侯)는 참으로 근면하였으니, 정자 하나를 짓는 것으로 기록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하는 본말의 순서는 여기에서도 볼 수 있으니, 그것을 글로 써서 후세 사람에게 알린다. 후(侯)의 지위를 가지고 여기에서 유람하는 사람은 반드시 후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또 후의 정치를 본받는다면,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풍요해지고 백성들의 덕은 날로 새로워지며, 순수한 성왕의 교화는 지리적 제한이 없을 것이니, 세상에 어찌 끝내 교화하지 못할 백성이 있겠는가.
淳熙八年, 今帥守韓侯始以經略使察廉表行州事, 而天子許之. 至則爲之正田畝之籍, 薄鹽米之征, 敎之以耕耨灌漑之法, 而絀其官吏之無狀者. 民業旣有經矣, 然後日爲陳說禮義廉耻之意以開曉之. 旣又表其從化之民, 以厲其不率敎者. 出入阡陌, 勞來不怠, 行之期年, 民吏浹和, 俗以一變. 化外黎人聞風感慕, 至有願得供田稅, 比省民者. 於是侯亦自喜其政之成而幸其民之不我違也, 乃取莊生濠上之語, 作‘知樂之亭’於放生池上, 北望觀闕於雲天縹緲之間, 以爲歲時瞻佇祝延之地. 且曰其使邦人士女嘉辰勝日有所詠哥鼓舞, 以自樂其得被聖化而不愧於王民也. 間而以書屬予記之. 予惟韓侯之侯於此邦, 其勤至矣, 不但一亭之作爲可書也. 然其爲政本末之序, 則於此亦有可觀者, 因爲書之, 以告後人, 使凡居侯之位而遊於是者, 必以侯之心爲心, 又觀於其政而取法馬, 則庶乎民生日厚, 民德日新, 而王化之純無遠邇矣, 世豈有終不可敎之民哉?
후(侯)의 이름은 벽(璧)이고, 자는 정옥(廷玉)이며, 장락(長樂) 사람으로 청덕(淸德)이 자자했다. 9년 겨울 10월 경신(庚申), 신안 주희 기록하다.
侯名璧, 字廷玉, 長樂人, 世以淸德顯云. 九年冬十月庚申, 新安朱熹記.
장주 용암현 현학기(漳州龍巖縣學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0년(계묘, 1183년, 54세) 2월에 쓴 글이다.
장주 용암현의 현학(縣學)은 황우(皇祐) 초년(初年)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여기저기 옮겨다니다 마침내 허물어져 폐허가 된지 30 여년이 되었다. 승(丞) 모군(某君)이 학교를 중건하여 경영하려 하다가 갑자기 교체되어 가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 온릉(溫陵) 증비(曾祕)군이 와서 그 직책을 이어받고, 하던 사업을 완성했다. 약간의 기둥으로 집을 만들고, 전당의 문과 처마, 교사와 학생의 기숙사 등 갖추어지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순희 9년 몇 월 며칠, 학생들을 인솔하고서 선성선사(先聖先師)에게 제사를 지내고, 내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요청하고, 또 가르침을 달라고 했다. 용암현은 단절되고 외진 곳으로 민월(閔越)과 남월(南越) 사이에 끼어 있어서 풍속이 궁벽하고 고루하다고 들었다. 그곳의 선비들도 비록 총명하고 좋은 자질이 있더라도 성현의 학문으로 개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곳이 현이 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백년이지만 도의와 공렬(功烈)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있다고 듣지 못했다. 이것이 어찌 타고난 재질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아마도 관리들이 그들을 흥기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이 여기에서 함께 현승(縣丞)을 계승하고, 학문을 진흥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니, 그 뜻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고 또 증(曾)군은 일찍이 내 친구인 석자중(石子重)․허순지(許順之) 등 여러 사람을 쫓아 배웠으니, 그 때 들은 것들을 암송하여 그들을 이끌 것이니, 이 고을의 선비들을 거의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세한 내용을 적어 여러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고자 한다.
漳州龍巖縣學, 皇祐初年置, 其後遷徙不常, 遂以廢壞, 蓋三十有餘年. 而丞某君某始復營建, 迫代去, 不克就. 溫陵曾君祕來嗣其職, 乃因其緖而成之. 凡爲屋若干楹, 殿堂門廡, 師生之舍, 無一不具. 淳熙九年某月某日, 旣率其諸生以奠菜于先聖先師, 而以書來求記, 且曰願有敎也. 予聞龍巖爲縣斗辟, 介於兩越之間, 俗故窮陋. 其爲士者雖或負聰明樸茂之姿, 而莫有開之以聖賢之學, 是以自其爲縣以來, 今數百年, 未聞有以道義功烈顯於時者. 豈其材之不足哉? 殆爲吏者未有以興起之也. 今二君相繼貳令於此, 乃能深以興學化民爲己任, 其志旣美矣. 而曾君又嘗從吾友石, 許諸君遊, 是必能誦其所聞以先後之者, 此邑之士其庶幾乎. 乃爲之書其本末, 而因以告其諸生曰:
“이른바 성현의 학문이란 알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효제(孝弟), 충신(忠信), 예의(禮義), 염치(廉耻)로 자신을 수양하고, 스승과 벗을 구하고 찾아서 시를 칭송하고 책을 읽어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일 뿐이다. 이 두 가지 단서가 여러분들이 알 수 없고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인가? 다만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쫒겨 겨를이 없고, 과거시험을 위한 사장(辭章)의 습속에 빠져 하지 않을 뿐이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빠져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망각하니, 참으로 잘못됐도다. 하물며 그네들이 쫒는 것이 반드시 가히 추구할만한 것도 아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따라 살펴보고, 이 마음을 돌이켜 구하고 내가 말한 것에 한 번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나날이 효제, 충신, 예의, 염치를 힘써 돈독하게 하면 수양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스승을 구하고 벗을 찾아 시를 암송하고 독서하기를 나날이 깊게 하면 이치를 구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국가로, 천하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합당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일부러 도의와 공렬을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근본은 깊어지고 말단은 무성해져서 저절로 덮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아! 이 이야기는 증군 역시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여러분은 우리의 말에 서로 더불어 더욱 힘써야 한다. 서경에서 말한 ‘가르침은 배움의 절반’이라는 것은 증군이 깊이 유념했던 바이니, 여러분 역시 이것으로 말미암아 힘써야 할 것이다.” 10년 2월 갑인(甲寅), 신안 주희 기록하다.
‘夫所謂聖賢之學者, 非有難知難能之事也. 孝弟, 忠信, 禮義, 廉耻以修其身, 而求師取友, 頌詩讀書, 以窮事物之理而已. 是二端者, 豈二三子之所不知不能哉? 特怵迫於俯仰衣食之資而不暇顧, 誘奪於場屋雕篆之習而不及爲爾. 夫狥區區目前近小之利而忘其所貴於己者, 固已悖矣. 况其所狥, 又未必果可求也. 二三子循已事而觀之, 則曷若慨然反是心以求之, 而一用其力於吾之所謂者乎? 使吾孝弟, 忠倍, 禮義, 廉耻之行日篤而身無不修也, 求師取友, 頌詩讀書之趣日深而理無不得也, 則自身而家, 自家而國, 以達於天下, 將無所處而不當, 固不必求道義功烈之顯於時, 而根深末茂, 實大聲閎, 將有自然不可揜者矣. 鳴呼!是說也, 曾君蓋亦嘗爲二三子言之乎? 二三子其益以吾言相與勉焉!而書所謂敎學半者, 又曾君所宜深念也. 其亦由是而勉旃哉!’十年二月甲寅, 新安朱熹記.
강서 운사 양제원기(江西運司養濟院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0년(계묘, 1183년, 54세) 3월에 쓴 글이다.
강남서로(江南西路) 전운사(轉運司) 양제원(養濟院)은 융흥부(隆興府) 성(城)의 동쪽 숭화문(崇和門) 안에 있는데, 전운부사(轉運副使) 오군(吳郡) 전(錢)아무개공(公)이 세운 것으로, 판관(判官) 가화(嘉禾) 구□(丘□)공·비릉(毗陵) 우무(尤袤)공이 옮겼다. 예장(豫章)은 강서(江西)지방의 한 도회지로 땅은 넓고 물산은 풍부하여 사방의 손님들은 그 곳에서 사업을 하고, 또 교통도 좋았다. 평소에도 공사가 쉽게 소통되어 서로의 생활을 양생함에 충분하였지만, 다만 불행하게도 한 번 질병에 걸리면, 갈 데가 없었다. 약과 음식을 구하다가 구하지 못하면 길에서 헤매다 죽는 이가 해마다 몇 사람이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인데, 해당 관리들만 그것을 알지 못했다. 건도 9년, 전운부사(轉運副使) 오흥(吳興) 예엽(芮燁)공이 그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듣고 불쌍히 여겨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날에 개인 돈 100만전(錢)을 후임자에게 맡겨, 그 돈으로 무역을 해 남은 이익금으로 약품을 사서 병자에게 주도록 했다. 순희 5년, 판관 개봉(開封) 조(趙)아무개공이 다시 개인 돈 140만전으로 동관(東關) 나사(羅舍)의 밭을 사서 병자들이 먹을 수 있게끔 했다. 7년, 전공(錢公)이 왔을 때, 예공(芮公)은 이미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었다. 이해 봄, 조공(趙公) 역시 이부시랑으로 부름을 받았다. 조공은 전공의 아름다운 뜻을 알았고 또한 이를 즐겁게 여겼고, 그래서 자주 편지를 보내 알려왔고, 공(公)은 전공에게 편지를 보내, 남긴 돈에 자기 돈 130만을 더해 장정의 밭을 사들여, 다시 연경문(延慶)·숭경문(崇和) 밖에 이 양제원을 만들어 병자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하였다. 시작해서 완성하기까지 약간의 시일이 걸렸다. 문은 다섯 칸, 당(堂)은 세 칸, 편방(便房)을 끼고 가운데는 장실(丈室)을 두었고, 동쪽으로는 부엌, 서쪽에는 변소를 두었고, 좌우의 무(廡)는 각기 다섯 칸이며, 무(廡)의 깊이는 삼심(三尋), 수(修)는 칠심반(七尋半)이었다. 가운데에 18개의 거탑(巨榻)을 설치하여, 겨울에는 내려 찬바람을 막고 여름에는 걷어내어 답답함을 씻어냈다. 진료와 치료에 전문가를 두고 약을 조제하였고, 치료할 수 없는 사람은 관을 주어 장사지냈다. 직장을 가진 사람은 모두 녹봉을 나누어 주어 그 일을 대신하게 했다. 또 전속 관료와 관리가 때때로 가서 시찰하여 감독하도록 했다. 대개 삼공(三公)이 기부한 것은 모두 사방에서 들어온 예물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은 것들로, 그것을 합하면 370만전이다. 사들인 농막이 셋이고, 밭은 1111묘(畝)이며, 세입은 곡식으로 983곡(斛) 정도였다. 그 자세한 것은 문서에 적어 담당 관리에게 보관하도록 하고, 양제원의 규율 역시 적어 당상(堂上)에 게시했다. 전공(錢公)은 열거한 일로 알려져 글과 같이 시행하라는 조칙을 받았다. 전공이 떠나고 이공(二公)이 와서 사업을 계승하면서 전공이 한 행적을 두루 살펴보면서 여러 차례 감탄했다. 그러나 오히려 양제원이 관문의 밖에 있어서 병자들이 의약을 받는데 불편함이 있을까 걱정하여, 관문 안의 옛날 귀덕불사(歸德佛舍)가 있던 자리를 얻어 그곳으로 옮겼다. 증축하여 옥(屋)을 18칸으로 만들었고 아울러 옛날 승전(僧田) 6경(頃)을 얻었고, 또 종릉(鍾陵)·관성(灌城) 두 농막의 밭 70묘(畝)를 사들이니, 세수(歲收)가 곡식으로 300 여곡(斛)이고, 돈으로는 5만 여전이니, 그것으로 충당했다. 대개 이때부터 병들어 갈 곳이 없는 이들도 대부분 온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고, 불행하게 죽는 이들 역시 편안하게 눈을 감아 서운함이 없었다. 이에 전운사의 군속(羣屬)과 군의 관리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서로 모의하고 황모군이 그 일을 기술하고 내게 와서 기문을 요청했다.
江南西路轉運司養濟院在隆興府城東崇和門內, 轉運副使吳郡錢公某之所爲, 而判官嘉禾丘公□, 毗陵尤公袤之所從也. 豫章爲江西一都會, 地大物衆, 而四方賓旅之有事於其土者又不絶於道路, 平時通功易事, 足以相生養. 獨不幸一旦有疾灰, 則惸然無所歸, 求藥與食, 或無得焉, 則轉死於溝壑者, 歲不知幾何人, 而有司者莫之知也. 乾道九年, 轉運副使吳興芮公燁始有聞而閔焉, 去之日, 留私錢百萬以諉後人, 稱貸貿易, 收其贏以市藥物, 給病者. 淳熙五年, 判官開封趙公某復以私錢百四十萬買田東關羅舍, 病者又得以食. (初作於是, 又賦粟焉.) 七年, 錢公寔來, 而芮公已爲吏部侍郞. 是年春, 趙公亦以吏部侍郞召. 趙公知公雅意亦有樂乎此也, 因亟以書來諗, 公則移書芮公, 請所留錢, 益以己資百三十萬, 買田長定, 而又創爲此院延慶, 崇和兩門之外, 使病者有以居焉. 自經始至落成, 若干日而就. 凡爲門五間, 堂三間, 挾以便房, 中爲丈室, 東庖西圊, 左右廡各五間, 廡深三尋, 修七尋有半. 中設巨榻十有八, 冬加障蔽以禦風寒, 暑則撒之以渫煩鬱. 胗治有工, 藥石有劑, 其不可療者, 亦予槥櫝以葬. 職掌之人皆賦以祿, 俾供厥事. 又專屬僚吏以時行視而課督之. 蓋三公所捐, 皆四方之聘幣不以入于家者, 合之爲錢三百七十萬. 所買三墅, 爲田千有一百十一畝, 歲入租爲穀九百八十三斛有奇. 其詳則書之牘, 藏之有司, 而院之戒今糾禁, 亦書而揭之堂上. 旣錢公又列其事以聞, 詔下施行如章, 而錢公去矣. 二公踵至, 周視錢公之所爲者而屢歎之. 然猶以院在門關之外, 懼夫病者之有所不便於醫藥也, 乃相門內, 得故歸德佛舍之廢址而遷焉. 凡增屋十有八間, 幷得故僧田六頃, 又市鍾陵, 灌城兩墅之田七十畝, 歲收穀三百餘斛, 錢五萬有奇, 以充入之. 蓋自是以來, 病而無歸者多賴以全活, 不幸死者, 亦瞑目而無所憾焉. 於是臺之羣屬與郡吏之奔走焉者私相與謀, 因文學掾黃君某述其事, 來請文以記.
나는 당시 절동 지방의 상평사(常平事)를 막 그만두었는데, 그 글을 세 번 반복해 읽으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대개 숭녕(崇寧) 년간의 제도는 제방(濟坊)과 설택원(漏澤園)을 안정시키는 일의 경우는 모두 상평사(常平使)에 소속한 사람에게 맡기고, 그 잘못에 대해서는 전운사에서 걱정할 바가 아니다. 이제 그 일을 맡은 사람이 혹여 미치지 못한데, 다섯 군자는 자신들의 직책상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급급하게 여기고 의전(義錢)까지 내놓아 그것을 집성(輯成)하였다. 비록 그 선후(先後)로 오고 감이 한결같지는 않지만,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고 멀리까지 염려하는 정신은 마치 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고 한 사람의 손으로 하는 듯하니, 그 제도가 정비될수록 더욱 정밀해지고, 그 혜택이 증대될수록 더욱 두터워졌다.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비와 이슬이 샘에 스며드는 것과 같이 성스러운 조정의 은택을 수 천리 밖에까지 미루어 넓혔으니, 그 뜻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고 도를 배워 백성을 사랑하는 효과가 또 그 직책을 맡고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진흥시키니, 그 이로움이 어찌 매우 넓지 않겠는가. 때문에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그 자세한 내용을 썼으니, 다섯 군자의 치적을 드러내어 이 세상에 밝게 알리고, 또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 다섯 군자가 10 여년 동안 서로 함께 이를 완성한 것이 쉽지 않으며 감히 훼손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또 전공(錢公)은 일찍이 공주와 길주의 마세(麻租) 2459곡(斛)을 면제해 달라는 주장을 올려, 공주와 길주의 사람들이 더욱 감동하였다. 이제 비서각수찬(祕閣修撰) 지무주사(知婺州事)의 신분으로 기근을 구제한 그 정치 역시 여러 군 가운데 최고라 할만하다. 순희 10년 3월 갑술일, 선교랑(宣敎郞)·직휘유각(直徽猷閣)·주관태주숭도관(主管台州崇道觀) 주희 기록하다.
予時方罷浙東常平事, 三復其書而竊有愧焉. 蓋崇寧之制, 凡安濟坊, 漏澤園之政, 皆領屬常平使者, 其有曠關, 非將漕主計者之憂也. 今職其事者或不能及, 而五君子者乃能汲汲乎其職之所不必爲, 至出義錢以輯成之. 雖其先後來去之不齊, 而其閑惻之深, 計慮之遠, 泯然若出於一人之心而手自爲之, 其制愈修而愈密, 其惠益增而益厚. 於以推廣聖朝昭天漏泉之澤於湖山數千百里之外, 其意旣甚美矣, 而其學道愛人之效, 又足以警夫職其事而不能然者以興起之, 其利豈不又甚博哉? 因不復辭, 而爲書其本末如此, 旣以著夫五君子之成績而自說以曉當世, 又以告後之人, 使知五君子者相爲始終十年之間所以成此者之不易而不敢壞也. 錢公又嘗奏免贛, 吉麻租二千四百五十九斛, 爲錢千有一百九十七萬九十有奇, 兩州之人尤歌舞之. 今以祕閣修撰知婺州事, 其救饑之政, 亦爲諸郡最云. 淳熙十年三月甲成, 宣敎郞, 直徽猷閣, 主管台州崇道觀朱熹記.
자교암기(慈敎菴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0년(계묘, 1183년, 54세) 4월에 쓴 글이다.
금화(金華) 청강(淸江) 시호(時鎬) 및 그 동생 아무개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어르신의 장례에 다행히 동래(東萊)선생이 슬피 명정(銘旌)을 해주어 지하에 고하였는데, 사당이 이미 완성되었지만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해 선덕(先德)을 밖에 드러낼 수 없다. 감히 당신에게 요청하는데, 어떻습니까?” 나는 신군을 알지 못하지만, 오직 백공보(伯恭父)가 그가 가정을 엄정하게 다스렸고 자손을 매우 돈독하게 교육했다는 명문(銘文)을 보았고, 또 일찍이 내게 편지로 그것을 말해주었었다. 또 백공은 경솔하게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않으므로, 나는 이를 통해 시군의 사람됨을 알았다. 이에 안평중(晏平仲)의 말을 취해 그곳을 ‘자교지암(慈敎之菴)’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향대부(鄕大夫) 반덕부(潘德鄜)공이 그 소식을 듣고 그렇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큰 글씨로 써서 걸었다. 호(鎬) 등은 그것을 돌에 새기고, 또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암자의 이름을 지어서 선인(先人)의 뜻을 발휘하여, 당신은 나에게 베풀었다. 그러나 그 실질을 드러내는 말글이 없으니, 오래 지나면 없어져 선인의 덕이 드러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 그것을 기술하면, 반공(潘公)의 글과 함께 돌에 새켜 우리 스승(여동래)의 명계(銘戒)와 함께 배향하여 우리 부친을 후세에 믿게 할 것인, 당신의 베풂이 더욱 크지 않겠는가.” 나는 사양하지 못하고 또 이와 같이 내용을 써 주었다.
金華淸江時鎬及其弟某嘗以書來曰: ‘吾先人之葬, 東萊先生旣幸哀而銘之以告于幽矣, 惟是祠堂之奉旣作而未名, 將無以著先德于外者. 敢諸於子, 何如? ’予不及議時君, 獨觀伯恭父之銘稱其治家嚴整, 而所以敎子孫者甚篤, 且嘗以書爲予言之, 伯恭又非輕與人者, 予是以知時君之爲人. 乃取晏平仲之言, 名其所作曰‘慈敎之菴’. 而君之鄕大夫潘公德鄜聞之以爲然, 則爲之大書以揭焉. 鎬等旣刻之石, 而又以請曰: ‘名菴而有以發乎先人之志, 子則有賜於我矣. 然無詞以著其實, 其於久遠, 懼泯沒而不章也. 願吾子之遂志之, 將與潘公之書幷刻焉, 以配吾師之言而信吾父於後世, 子之賜不愈大乎? ’予不得辭, 則又書本末如此以遺之.
아! 당신의 자손은 이미 많고도 재주가 있어, 절기마다 함께 묘에 찾아와 절하여 부모와 스승의 교훈을 잊지 않고 더욱 힘쓰니, 이 이름이 그 실질과 부합함은 또 어찌 나의 말을 기다린 이후에 후세에 멀리까지 전해질 것인가. 순희 계묘 4월.
鳴呼!君之子孫旣多且材, 歲時相與來拜墓下, 其有以惕然不忘乎父師之訓而益勉乎其遠者大者, 則斯名之稱其實, 又豈待予言之而後傳於遠哉!淳熙癸卯四月.
소주 주학 염계선생사당 기문(韶州州學濂溪先生祠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0년(계묘, 1183년, 54세) 5월에 쓴 글이다.
진(秦)·한(漢) 이래, 천하에 도가 밝혀지지 않아 선비들은 어떻게 학문을 해야 할이지 알지 못했다. 하늘(天)을 말하는 이는 사람을 빠뜨리니 쓸모가 없고, 사람(人)을 말하는 이는 하늘에 미치지 않아 근본이 없고, 하학(下學)에 전문하는 이는 상달(上達)을 알지 못해 형기(形器)에 막히고, 기필코 상달(上達)하려는 이는 하학(下學)에 힘쓰지 않아 공허(空虛)에 빠지고, 치기(治己)가 충분한 이는 급인(及人)이 부족하고, 세상을 따라 공명을 성취한 이는 또 반드시 근본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추진하지는 못한다. 대체로 이와 같기 때문에 천리(天理)는 밝혀지지 않고 인욕(人欲)은 들끓으며, 도학(道學)은 전해지지 않고 이단이 일어난다. 사리사욕을 위한 모략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자는 늙어 죽도록 그치지 않으며, 끝내 그 잘못을 깨닫지도 못한다.
秦漢以來, 道不明於天下而士不知所以爲學, 言天者遺人而無用, 語人者不及天而無本, 專下學者不知上達而滯於形器, 必上達者不務下學而溺於空虛; 饅於治己者或不足以及人, 而隨世以就功名者又未必自其本而推之也. 夫如是, 是以天理不明而人欲熾, 道學不傳而異端起, 人浹其私智以馳騖於一世者, 不至於老死則不止, 而終亦莫悟其非也.
송(宋)나라가 흥기하고 구의(九疑)의 아래·용릉(舂陵)의 옛터에 염계(濂溪) 선생이란 분이 일어난 이후에 천리가 밝아지고 도학이 다시 전수되었다. 태극·음양·오행의 오묘한 뜻을 널리 밝힘으로써 천하의 중정(中正)과 인의(仁義)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성학(聖學)에는 요점이 있으니, 하학(下學)하는 자는 사욕을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면 점차 상달(上達)할 수 있음을 말했고, 천하에는 근본이 있으니 다스림을 말하는 이는 마음을 참되게 하고 자신을 단정하게 하면 천하에 등용되어 쓰일 수 있음을 밝혔다. 위로는 천여 년의 수사(洙泗)의 정통을 계승했고, 아래로는 하락(河洛)의 백세(百世)의 전수자를 계몽하였으니, 맥락이 분명하고 규모가 크고도 원대하다. 이렇게 하여 인욕(人欲)을 제어하여 멋대로 날뛰지 않게 하고, 이단을 회피하여 멋대로 하지 않게 되었다. 맹자가 죽은 이후로 차례로 여러 유학자들이 그 정통을 주고받았으나, 그 부흥하고 개창(開創)하며 천하를 깨끗이 통일한 공로는 진실로 염계선생보다 높은 이가 없다.
宋興, 九疑之下, 舂陵之墟, 有濂溪先生者作, 然後天理明而道學之傳復續. 蓋有以闡夫太極, 陰陽, 五行之奧, 而天下之爲中正仁義者, 得以知其所自來. 言聖學之有要, 而下學者知勝私復禮之可以馴致於上達; 明天下之有本, 而言治者知誠心端身之可以擧而措之於天下. 其所以上接洙泗千歲之統, 下啓河洛百世之傳者, 脈絡分明而規模宏遠矣. 是以人欲自是有所制而不得肆, 異端自是有所避而不得騁. 蓋自孟氏旣沒, 而歷選諸儒受授之次, 以論其興復開創, 汛掃平一之功, 信未有高焉者也.
선생은 일찍이 희녕(熙寧) 년간에 광남동로(廣南東路) 제점형옥공사(提點刑獄公事)가 되어 소주를 다스렸는데, 원한을 풀어주고 만물에 은혜를 베푸는 등 그 조짐이 충분히 실행할 수 있었는데 병 때문에 떠났다. 건도(乾道) 경인(庚寅)년(1170년)에 지주사(知州事) 주후(周侯) 순원(舜元)이 선생이 남긴 뜻을 우러러 받들어 영원토록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주학(州學) 강학의 동서(東序)에 처음으로 사당을 짓고 하남(河南) 이정(二程)선생을 배향했다. 13년 후, 교수(敎授) 요덕명(廖德明)군 때에 사당이 많이 훼손되고 된 것을 보고 제례 역시 게을러 봉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당을 넓혀 새로 지을 것을 도모했다. 이듬해, 그 옛터에 옥(屋) 3영(楹)으로 지었고, 의젓한 초상을 설치하고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여러 학생들을 이끌고 배알했고, 해마다 봄가을 석전(釋奠)을 지낸 다음날에 삼헌(三獻)의 예법에 따라 예를 올렸다. 그렇게 하고도 부족하다고 여겨, 또 날마다 세 선생의 글을 여러 학생들에게 교수하면서 “자세하게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힘써 실행하면 학문이 진보하여 이 당(堂)에 오를 것이니, 세 선생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또 그 다음해에는 편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내게 알려왔다. “소주는 옛날부터 유명한 군으로 성실하고 질박한 선비가 많고 부화(浮華)한 이는 적어, 함께 선으로 나아갈만하니, 장문헌(張文獻)·여양공(余襄公)이 남긴 풍모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옛 현인은 떠난 지 이미 멀고 선생 군자의 가르침으로 그 후세를 계몽하지 못하고 있으니 비록 세상에 이름을 떨친 훌륭한 현인이 이 지방에 관리로 부임하더라도, 선인을 공경하는 태도로 학문하고 그 학문을 후대에 전한 이가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주후(周侯)가 정성을 다하는 것이며, 요덕명이 뒤에서 받들어 계승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일에까지 이르렀으나, 덕명 역시 끝내 다시 떠날 것이니, 다행히 선생님께서 한 말씀해주시면, 마침내 주후(周侯)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이 역시 덕명이 바라던 것이며 여러 학생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先生熙寧中嘗爲廣南東路提點刑獄公事而治於韶, 洗寃澤物, 其兆足以行矣, 而以病去. 乾道庚寅, 知州事周侯舜元仰止遺烈, 慨然永懷, 始作祠堂於州學講堂之東序, 而以河南二程先生配焉. 後十有三年, 敎授廖君德明至, 視故祠頗已推剝, 而香火之奉亦惰弗供, 乃謀增廣而作新之. 明年, 卽其故處爲屋三楹, 像設儼然, 列坐有序. 月旦望率諸生拜謁, 歲春秋釋奠之明日, 則以三獻之禮禮焉. 而猶以爲未也, 則又曰取三先生之書以授諸生曰: ‘熟讀精思而力行之, 則其進而登此堂也, 不異乎親炙之矣.’ 又明年, 以書來告曰: ‘韶故名郡, 士多愿慤, 少浮華, 可與進于善者, 蓋有張文獻, 余襄公之遺風焉. 然前賢旣遠, 而未有先生君子之敎以啓迪於其後, 雖有名世大賢來官其地, 亦未聞有能摳衣請業而得其學之傳者. 此周侯之所爲倦惓焉者, 而德明所以奉承於後而不敢怠也. 今旣訖事, 而德明亦將終更以去矣, 夫子幸而予之一言, 庶幾乎有以卒成周侯之志, 是亦德明之願而諸生之幸也.’
요군(廖君)은 일찍이 나한테서 학문을 강습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서 도학을 널리 드러내 밝힌 선생의 공적을 논설하여 소주 사람들에게 보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공부하는 방법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또 사당을 일으킨 구체적 내용을 이와 같이 기록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한다. 순희 10년 계모 5월 정묘, 신안 주희 기록하다.
廖君嘗以其學講于熹者, 因不復辭, 而輒爲論著先生唱明道學之功以視韶人, 使因是而知所以用力之方. 又記其作興本末如此, 使來者有考焉. 淳熙十年癸卯歲五月丁卯, 新安朱熹記.
악주 사직단기(鄂州社稷壇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1년(갑진, 1184년, 55세) 정월에 쓴 글이다.
순희 10년 봄, 조봉랑(朝奉郞) 악주지사 신안(新安) 나후(羅候) 원(願)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악주에서 제사를 지내는 많은 단(壇)이 애초에는 중군채(在中軍寨)에 있었다. 작년 가을, 청강(淸江) 유군(劉君) 청지(淸之)가 통수(通守)로 부임해 와서 가서 배알하고 살펴보니, 그 곳은 치우치고 좁을 뿐만아니라 웅덩이 아래 있어서 요단(燎단)과 예감(瘞감)조차 둘 곳이 없으니, 제후의 나라[藩國]에서 천자의 명령에 따라 제사를 지내기에 걸맞지 않았다. 또 예년에 군(郡)에 가뭄과 질병 같은 변고가 많은 것을 떠올리고, 그 재앙의 근원이 여기에 있을까 생각하여 주(州)에 말하기를, 적당한 땅을 찾아 다시 율령에 따라 설치해 달라 하였다. 얼마 후, 유군이 주의 일을 맡아 하면서, 마침내 녹사참군(錄事參軍) 주명중(周明仲)을 위촉하여 성의 동쪽 황학산 아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곳을 얻었는데, 땅의 크기가 동서쪽으로는 10장(丈), 남북으로는 25장 정도였다. 정화오례(政和五禮)를 참조하여 사단(四壇)을 그리고, 그 공사는 병마감압(兵馬監押) 조백훤(趙伯烜)에게 맡겼다. 공사가 아직 절반도 끝나지 않았는데, 때마침 원(願)이 궐석에 임관하자 또 도감(都監) 왕춘(王椿)을 위촉하여 공사작업을 감독하고 빨리 완성하도록 했다. 2월 초하루에 단(壇)이 완성되었는데, 동쪽의 사단(東社)은 서쪽의 직단(西稜) 앞에 위치시켰고, 동쪽에는 풍백(風伯), 서쪽에는 우사(雨師) 뇌사(雷師)가 조금 뒤쪽에 자리했다. 단(壇)은 모두 세 계단이고, 담(壝)이 있으며, 담에는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이 있다. 앞의 두 사단과 직단의 가장 아래 계단은 모두 네모(方)로 2장(丈) 5척(尺)이다. 숭(崇)은 1척(尺) 2촌(寸)이다. 뒤쪽의 두 풍백단과 우사 뇌사단의 가장 아래 계단은 모두 네모로 1장(丈) 6척(尺) 5촌(寸)이며, 숭(崇)은 8촌(寸)이다. 그 뒤의 두 번째 계단은 1척(尺)을 줄였고, 숭(崇)은 4분의 1을 뺐다. 세 번째 계단은 앞에서와 같이 줄였지만 숭(崇)은 더 이상 줄이지 않았다. 앞의 두 담(울타리, 壝)은 모두 네모로 4장(丈) 2척(尺)이고, 문은 6척이고, 그 간격은 1장 5척이다. 뒤의 두 담 모두 사방 2장 8척이고, 문은 5척이며, 간격은 4장 9척이다. 그 숭(崇)은 모두 4척이다. 사단에는 주벽을 두고, 숭(崇)은 2척 5촌이고, 주벽(主壁)은 사방 1척이다. 그 위를 염(剡)하고, 그 아래의 절반을 흙으로 돋우는데, 돌로 한다. 담 밖의 남쪽은 5장으로 문은 세 칸이며, 북쪽은 2장 정도이고, 다섯 칸짜리 재려(齋廬)를 만들었다. 담은 두 겹으로 두르고, 튼튼한 벽돌로 쌓으며, 하은주 삼대의 나무(소나무, 밤나무, 잣나무)를 심었다. 또 이미 연제(練祭)의 시기이므로, 벼슬아치들을 데리고 축호(祝號)를 닦아 신명께 고하여 완성했다. 또 유군과 의논하니, 당신께서 일찍이 예(禮)를 공부하였다 하니, 이런 까닭에 바라건대 당신께 위의 사실을 기록한 글을 요청하니, 그렇게 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훼손하지 않게 하려 합니다.”
淳熙十年春, 朝奉郞, 知德明事新安羅候願以書來曰: ‘吾州羣祀之壇始在中軍寨, 去年秋, 通守淸江劉君淸之至而往謁焉, 視其地褊迫洿下, 燎瘞無所, 不稱藩國欽崇命祀之意. 且念比年郡多水旱札瘥之變, 意其咎或在是, 則言於州, 謂得度地, 更置如律令. 已而劉君行州事, 遂以屬錄事參軍周明仲, 行視得城東黃鶴山下廢營地一區, 東西十丈, 南北倍差. 按政和五禮, 畫爲四壇, 而屬其役事於兵馬監押趙伯烜. 作治未半, 而願適承乏, 又屬都監王椿董之, 以速其成焉. 二月朔壇成, 東社西稜居前, 東風伯, 西雨雷師居後少却. 壇皆三成, 有壝, 壝四門. 前二壇趾皆方二丈五尺. 崇尺二寸. 後二壇趾皆方一丈六尺五寸, 崇八寸. 其再成方面皆殺尺, 崇四分而去一. 三成方殺如之, 而崇不復殺. 前二壝皆方四丈二尺, 門六尺, 間丈五尺. 後二壝皆方二丈八尺, 門五尺, 間四丈九尺. 其崇皆四尺. 社有主, 崇二尺五寸, 方尺. 剡其上, 培其下半, 石也. 南五丈, 爲門三間, 北二丈有奇, 爲齋廬五間. 繚以重垣, 甃以堅甓, 而植以三代之所宜木. 亦旣練時日, 屬寮吏․修祝號以告于神而妥之矣, 則又與劉君謀, 以吾子之嘗學於禮也, 是以願請文以記之, 俾後人之勿壞也.
내가 살펴보건대, 사(社)는 사실 산림(山林)과 천택(川澤), 구릉(丘陵)과 분연(墳衍), 원습(原隰)의 다섯 토지의 신으로, 후토(后土)의 구룡씨(勾龍氏)를 사에 배향했다. 직(稷)은 오로지 전습(原隰)의 신으로 오곡(五穀)을 생산하니, 후직(后稷)과 주(周)의 기씨(棄氏)를 거기에 배향했다. 풍사(風師)는 기(箕)이고, 우사(雨師)는 필(畢)로, 모두 주례에 보이는데, 대종백(大宗伯)의 관리가 통솔한다. 오직 사직만 천자의 도읍으로부터 온 나라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제자지낼 수 있으며, 풍우(風雨)의 신은 당나라 이래로 여러 군에서 제사지내기 시작했다. 뇌신(雷神)은 당나라 제도에서 우사(雨師)와 함께 같은 단(壇)에서 희생을 공유하여 제사지내는 것을 허용했다. 우리 송나라의 예문(禮文)은 대부분 당나라의 제도를 답습하기 때문에 지금 군국(郡國)의 사전(祀典)은 선성과 선사를 제외하고는 오직 이 다섯 가지이다. 대체로 음양 이기의 양능(良能)과 천지의 공용(功用)이 실어주고 덮어주는 사이에 유행하여 만물을 양육하고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는 것 가운데, 그 덕이 이 다섯 가지가 더욱 융성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까닭에 사직단과 담장․시일의 제정, 희생과 예물․기물과 제복의 품평, 강등(降登)과 궤전(饋奠)의 절차에 대해서는 참고하고 정정하는 토론을 하여 예상(禮象)을 드러내고, 군국(郡國)에 배포하여 예관(禮官)에 저장하도록 했다. 담당관리가 해마다 그것을 거행하고, 또 부서의 자사(刺史)는 시기에 따라 행하고 법에 따르는지를 살폈다. 나라에서 밝은 신을 섬기고 이 세상에 복을 내려달라고 이왁 같이 신실하게 기도하였다. 지금의 관리들이 아는 거라곤 회계의 출납 정도다. 그렇지 않으면, 술이나 마시고 춤추며 서로 방탕하고도 돌아올 줄 모르니, 그들이 경외하고 존숭하여 신으로 섬기는 것은 노자와 석씨의 사당이거나 아니면 요망하고 음란한 귀신일 뿐이다. 선왕의 제도와 국가의 전적이 사람을 다스리고 귀신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 어찌 일찍이 그 마음에 일률적이었겠는가.
熹按, 社實山林川澤, 丘陵墳衍, 原隰五土之祇, 而后土勾龍氏其配也. 稜則專爲原隰之祇, 能生五穀者, 而后稷周棄氏其配也. 風師箕也, 雨師畢也, 是皆著於周禮, 領於大宗伯之官. 唯社稷自天子之都至於國里通得祭, 而風雨之神, 則自唐以來諸郡始得祀焉. 至於雷神, 則又唐制所與雨師同壇共牲而祀者也. 國朝禮文大抵多襲唐故, 故今郡國祀典自先聖先師之外, 唯是五者. 蓋以爲二氣之良能, 天地之功用, 流行於覆載之間, 以育萬物而民生賴焉者, 其德惟此爲尤盛. 是以於其壇壝時日之制, 牲幣器服之品, 降登饋奠之節, 莫不參訂討論, 著之禮象, 頒下郡國, 藏於禮官. 有司歲擧行之, 而部刺史又當以時循行, 察其不如法者. 蓋有國家者所以昭事明神, 祈以降祥錫福于下, 其勤如此. 顧今之爲吏者, 所知不過簿書期會之間, 否則觴豆舞歌, 相興放焉而不知反, 其所敬畏崇飾而神事之者, 非老子, 釋氏之祠, 則妖妄淫昏之鬼而已. 其於先王之制, 國家之典所以治人事神者, 曷嘗有槪於其心哉?
아! 사람들의 마음이 바르지 않고, 풍속이 후덕하지 않으며, 해마다 곡식이 여물지 않으며, 백성들의 생활이 성취되지 않는 것 역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제 나후(羅侯)와 유군이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니, 옛 것을 배우고 백성을 사랑하여 세상에서 탁월하게 드러내는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이것을 하겠는가. 비록 문장을 짓지 않더라도 그 사실을 기록하여 오래도록 남기기에 부족하지 않지만, 두 군자가 제사지내는 일에 지나치게 종사하여, 먼 길을 멀다 않고 찾아와서 청탁하니, 어찌 사양하겠는가. 이에 글로 기록하고 희생을 바치는 반석에 새기게 하여 후세의 군자들이 볼 수 있게 하려 한다. 나후(羅侯)는 유군과 함께 학문을 권장하고 농사에 힘쓰고, 또 유군은 일찍이 예전 태수 이후(李侯) 역(棫)에게 경내에서는 대홍산의 음사(淫祠)에 제사지내지 않도록 요청하였으니,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에 힘써 그 마음을 다 하였다. 11년 봄 정월 갑진, 구위(具位) 신안 주희 기록하다.
鳴呼!人心之不正, 風俗之不厚, 年穀之不登, 民生之不遂, 其不亦以此歟? 今羅侯之與劉君乃能相與汲汲乎此, 非其學古愛民之志卓然有見乎流俗見聞之表, 其孰能之? 顧雖不文, 不足以記事實, 垂久遠, 然二君子過以爲嘗從俎豆之事, 不遠千里而屬筆焉, 其得辭之乎? 因爲書之, 使以刻于麗牲之石, 後有君子得以覽焉. 羅侯方與劉君相率勸學劭農甚力, 劉君又嘗請於前守李侯棫, 禁境內無得奉大洪山淫祠者, 其於敎民善俗之事, 力所可爲 宣敎郞, 直徽猷閣, 主管台州崇道觀新安朱熹記.
건녕부 숭안현 현학전기(建寧府崇安縣學田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1년(갑진, 1184년, 55세) 정월에 쓴 글이다.
예로부터 숭안현에는 학교는 있지만 학교에 부속된 전답이 없어, 교육 사업에 뜻을 가진 어진 대부를 만나면, 다른 남은 돈으로 선비를 양성하는 비용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유고로 인해 계승되지 못하면, 여러 학생들은 밥조차 해결할 수 없어 늘 흩어져 돌아갔다. 이런 이유로 전당(殿堂)은 기울고 무너지며, 재관(齋館)은 황폐화되어, 보통 십 몇 년이 되어야 겨우 학생들이 글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두 해가 지나면 학생들은 다시 학업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순희 7년, 지금의 지현인 조후(趙侯)가 처음 부임해와 교육 사업에 뜻을 품고, 얼마 후 황폐해지고 무너진 옛 학교건물을 새롭게 수리했다. 또 학생들의 식사를 해결할 장기적인 계획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어느 날, 지역 내의 불교사찰의 장부를 보았는데, 절이 없어지고 계승되지 않는 곳이 모두 다섯 곳이었는데, 중산(中山), 백운(白雲), 봉림(鳳林), 성력(聖曆), 기력(曁曆)이란 곳으로, 그 경작하지 않는 전답을 농경지로 약간을 계산해보고 곧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알았다.”고 했다. 이에 그것들을 모두 취해 학교로 귀속시키니, 세입 조미(租米)가 220곡(斛)으로, 선비들이 학업을 익히는데 년말까지 넉넉하여 떨어지거나 끊어질 걱정이 없었다. 얼마 후 학교의 여러 학사 10여명이 함께 내가 거처하고 있는 산간으로 찾아와, 그 사실을 기록한 글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대의 군자들이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고, 혹여 학교가 무너지고 폐교될까 염려스럽다.”고 했다.
崇安縣故有學而無田, 遭大夫之賢而有意於敎事者, 乃能縮取他費之贏以供養土之費. 其或有故而不能繼, 則諸生無所仰食而往往散去. 以是殿堂傾圮, 齋館蕪廢, 率常更十數年乃一聞弦誦之聲, 然又不一二歲輒復罷去. 淳熙七年, 今知縣事趙侯始至而有志焉, 旣葺其宮廬之廢壞而一新之, 則又圖所以爲飮食久遠之計者, 而未知所出也. 一日, 視境內浮屠之籍, 其絶不繼者凡五, 曰中山, 曰白雲, 曰鳳林, 曰聖曆, 曰曁曆, 而其田不耕者以畝計凡若干. 乃喟然而嘆曰: ‘吾知所以處之矣.’ 於是悉取而歸之於學, 蓋歲入租米二百二十斛, 而士之肄業焉者得以優游卒歲而無乏絶之慮. 旣而學之羣士十餘人相與走予所居之山間, 請文以記其事曰: ‘不則懼夫後之君子莫知其所始而或至於廢壞也.’
내가 생각하건대, 하은주 삼대가 흥성할 때, 가정으로부터 천자와 제후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설치하지 않음이 없었고, 천자의 큰아들로부터 선비와 서민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입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즉 그 학관의 학사들의 곳집은 오늘날의 열 배가 넘었다. 예전(禮典)을 고찰해보면, 학교의 비용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언급한 것이 없다. 어찌 당시 학업을 하는 선비의 집이 이미 전답을 받고, 입학 역시 시기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 음식을 먹고 현의 관아에 급식을 바라지 않았겠는가? 한나라 원제와 성제 때에, 공자가 평민의 신분으로 학도 3000을 길렀다고 하여 학관의 제자의 숫자를 증원하여 더 이상 원수(員數)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 후 마침내 용도가 부족하여 급식을 할 수 없게 되자 폐지하였다. 3000명이란 공자의 집에 모여 식사를 하는 사람을 이른다고 하는 것은 이미 헛소리다. 그러나 선비를 양성해야 할 필요는 천하가 힘써 받들어도 부족하니, 어찌 어렵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나라가 쇠퇴하면서부터 정전법에 따른 전답이 주어지지 않자 사람들은 일정한 생산기반을 잃었고, 선비들은 더욱 빈곤에 시달렸지만, 그렇다고 농민이나 상공인들과 함께 할 나이도 아니었다. 나이든 이들은 모아서 가르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이 또 어찌 해가 다하도록 안에서 밥 먹으면서 내게서 배우겠는가. 이 때문에 그 비용이 비록 많이 들지만, 때론 경상비 외의 것에서 취하기도 하니, 추세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물며 오늘날 불교의 교설이 임금과 신하의 예법을 어지럽히고, 부모와 자식의 친밀함을 단절시키며, 음란하고 무고하며 비천하고 속임수로 한 세대의 사람들을 꾀어 짐승과 같은 곳으로 몰아가니, 진실로 선왕의 법도에서 반드시 베어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생각하건대, 방자하게 중국에 가득하여 높고 큰 집들이 줄지어 있고 좋은 논밭이 잇닿아 편안하고 또 배부르니, 그것을 금지할 줄 모른다. 비록 그 사람들을 모두 축출하고 그들이 점거했던 것들을 빼앗아 모두 학교에 귀속시켜 충효를 배우는 우리 학도들이 더 이상 밖에서 영업하지 않고 더욱 학습에 정진하더라도 오히려 그 사설(邪說)을 이기지 못할까 걱정인데, 하물며 그것이 황폐해져 잡초만 무성하여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또 어떻게 인재를 배양하여 영구하게 하려고 하겠는가? 조후(趙侯)가 그것을 취하니, 하나에 힘쓰다가 둘을 얻었다 하겠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 구체적 내용과 그가 지향한 뜻이 이와 같은 데서 나왔음을 기록함으로써 후세의 군자에게 보이고, 또 배우는 여러 학생들에게 경계하도록 함으로써 이른바 충과 효에 더욱 힘쓰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 일을 직책으로 하는 이는 또 마땅히 그 출납하는 장부 외의 것에도 삼가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도록 하면, 아마도 조후(趙侯)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予惟三代盛時, 自家以達於天子諸侯之國, 莫不有學, 而自天子之元子以至於士, 庶人之子莫不入焉, 則其士之廩於學官者, 宜數十倍於今日. 而考之禮典, 未有言其費出之所自者. 豈當時爲士者, 其家各已受田, 而其入學也有時, 故得以自食其食而不仰給於縣官也歟? 至漢元·成間, 乃謂孔子布衣養徒三千, 而增學官弟子, 至不復限以員數. 其後遂以用度不足, 無以給之而至於罷. 夫謂三千人者聚而食於孔子之家, 則已妄矣. 然養士之需, 至以天下之力奉之而不足, 則亦豈可不謂難哉? 蓋自周衰, 田不井授, 人無常産, 而爲士者尤厄於貧, 反不得與爲農․工·商者齒. 上之人乃欲聚而敎之, 則彼又安能終歲裏飯而學於我? 是以其費雖多, 而或取之經常之外, 勢固有所不得已也. 况今浮屠氏之說亂君臣之禮, 絶父子之親, 淫誣鄙詐, 以毆誘一世之人而納之於禽獸之域, 固先王之法之所必誅而不以聽者也. 顧乃肆然蔓衍於中國, 豐屋連甍, 良疇接畛, 以安且飽, 而莫之或禁. 是雖盡逐其人, 奪其所據而悉歸之學, 使吾徒之學爲忠孝者得以無營於外而益進其業, 猶恐未足以勝其邪說, 况其荒墜蕪絶, 偶自至此, 又欲封植而永久之乎? 趙侯取之, 可謂務一而兩得矣. 故特爲之記其本末與其指意所出者如此, 以示後之君子, 且以警夫學之諸生, 使益用力乎予之所謂忠且孝者; 職其事者又當謹其出內於簿書之外而無龠合之私焉, 則庶其無負乎趙侯之敎矣.
조후(趙侯)의 이름은 아무개인데, 재주가 매우 뛰어나 소송을 심의하고 재물을 관리하는데 모두 그 과업을 잘 수행했고, 또 남은 힘으로 여기에까지 미쳤으니, 경락사(經略使)와 전운사(轉運使)의 여러 관리들이 그 치적을 조정에 알렸다. 11년 봄 정월 경술, 직위를 갖추어 주희 기록하다.
趙侯名某(彦繩), 材甚高, 聽訟理財, 皆辦其課, 又有餘力以及此, 諸使者方上其治行於朝云. 十一年春正月庚戌, 具位朱熹記.
구주 강산현학 경행당기 (衢州江山縣學景行堂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8월에 쓴 글이다.
강상현의 현학에는 예부터 삼현당(三賢堂)이 있어서 정개선생(正介先生) 주군(周君) 영(潁)·증선교량(贈宣敎郞) 서군(徐君) 규(揆)·일평선생(逸平先生) 서군(徐君) 존(存)을 제사지냈다. 그런데 지금 현의 지사인 금화(金華) 소후(邵侯) 호(浩)가 다시 고간의대부(故諫議大夫) 모공(毛公) 주(注)·증조청랑(贈朝請郞) 모공(毛公) 율(㮚)을 추가하고, 또 다시 그 편액을 ‘경행지당(景行之堂)’으로 고치고 그 사실을 기술하고, 또 편지를 써 내게 보내 기문을 써달라고 하였다.
江山縣學故有三賢堂, 以祀正介先生周君潁, 贈宣敎郞徐君揆, 逸平先生徐君存. 而今知縣事金華邵侯浩又益以故諫議大夭毛公注, 贈朝請郞毛公㮚, 且更其扁曰‘景行之堂’而狀其事, 且爲書來告曰願有記也.
내가 그 문서를 살펴보고 다섯 군자의 학행과 절개가 참으로 이 시대를 엄숙하게 하고 후대를 흥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책을 읽고서 또 소후(邵侯)가 사람을 교육하는 준비성과 사람을 대하는 원대함에 감탄하였다. 대개 정개선생의 행실은 고을에서는 신실하다 하였고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선생께서 하신 말씀과 남긴 교훈, 선을 포창하고 악을 물리친 것 등은 모두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 사업이 그 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가 세운 것이 단지 한 고을의 선량한 선비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간의대부로 당시의 군주를 만나 몸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여 권세를 가진 간사한 신하를 물리치고 정치권력을 되찾았다. 이 당시 세상 사람들은 거의가 지치(至治)를 열망했으나, 불행히도 다 펼치지 못하고 폐절(廢絶)하여 죽으니, 뜻 있는 선비들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한스럽게 여기지만, 단지 공(公)의 한이 되는 것만 아니다. 숙진(叔縝) 때에 이르러서는 도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아 명관으로서 의리를 지켰고, 택경(宅卿)은 몸을 바쳐 포로가 되어 군주와 부모의 위급함을 제거하였으니, 그 일이 더욱 어렵고, 그 절개는 더욱 위대하다. 그리고 일평(逸平)은 정씨(程氏)의 문인(門人)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마음으로 깨닫고 행실로 완성하고, 또 그 학설을 추론하여 사람들을 교육하니, 모범적인 언행이 전해지는데, 오늘날로부터 멀지 않다. 내가 사는 작은 곳에서도 그분들의 학행과 절개는 이 세상을 엄숙하게 하고 후대 사람들을 이와 같이 분발하게 하니, 참으로 성대하다 하겠다. 그분들을 제사지낸 옛사람들의 뜻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나 세 분만 제사지내고 두 분은 빠뜨린채, 또 세 분으로만 제한하여 후세 사람들이 흠모하고 힘써 따르고자 하는 뜻을 갖게 못하게 하니, 이는 곧 뜻있는 사람들이 간혹 안타까워했다. 이에 소후(邵侯)는 두 분을 포함시키고 사당을 새롭게 수리하고, 또 그 이름을 경행지당으로 바꿔 부지런히 힘쓰는 뜻을 다하여 그 제한을 풀어 후대의 사람들을 대비하는 듯하니, 이는 사람을 교화하는 준비성과 멀리 후대 사람까지 대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 역시 글로 남길만하도다.
熹考其狀, 旣知五君子之學行氣節眞足以風厲當世而興起後來, 讀其書, 又歎邵侯所以敎其人者之備而待其人者之遠也. 蓋正介之行信於鄕而聞於朝, 其立言垂訓, 褒善貶惡, 又皆足以爲後世法. 雖其事業不得見於當年, 然其所立已不但爲一鄕之善士而已也. 諫議遭時遇主, 奮不顧身, 排擊巨姦, 奪其政柄. 當是時, 天下庶幾望至治焉. 不幸不究其用而廢絶以死, 有志之士至今恨之. 然不特爲公恨也. 至於叔縝罵賊不屈, 以明官守之義; 宅卿捐軀虜營, 以紓君父之急, 其事尤難, 其節尤偉. 而逸平受業程氏之門人, 得諸心, 成諸行, 又能推其說以敎人, 儀刑音旨之傳, 於今尤未還也. 夫以區區百里之間, 而其先賢之學行氣節可以風厲當世而興起後來者如此, 可謂盛矣. 昔人之祠之也, 其意豈不美哉? 然得其三而遺其二, 又限其目, 而不使後人復有勉慕企及之思也, 是則識者猶或病之. 邵侯於此乃能增益而葺新之, 且易其名以致其俛焉孶孶之意, 而撒其限以視, 若有待於來者, 是不亦敎其人之備而待其人之遠乎? 鳴呼, 是亦可書也已!
나는 또 예전에 이렇게 들었다. 대개 선비는 학식이 있고 덕망이 있은 후에야 그 말과 행동에 볼만한 것이 있고, 언행이 있는 뒤에야 그 절의에 귀함이 있을 것이다. 이는 선비와 군자가 자신을 수양하고 도를 실천하는 순서이며 시작과 끝이니,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타고난 품성이 다르고, 각자가 처한 상황 역시 다르기 때문에 몸소 수양한 것을 실제 현실에서 체현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러므로 끝을 완성하고서도 그 시초를 살피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세상에서 벗을 숭상함을 논하는 이들이 항상 전덕(全德)의 어려움을 한탄하는 이유이며, 추구해야 할 바를 선택하려 하면서도 도 여러 갈래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이 사당에 올라 다섯 군자의 사적에 뜻을 둔 이가 또 무엇을 먼저 힘쓰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의 순서에 따라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후(邵侯)는 대학을 읽고, 대학에 나오는 혈구(絜矩)라는 한 마디에 감동하여, 평소에 천하의 일을 논하다가 혈구(絜矩)할 수 없는 곳이 있으면, 크게 탄식하면서 분발하고 분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다섯 분의 군자에 대해서도, 구차스럽게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추구하는 순서에 입각하여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이러한 사업을 하는 것이 어찌 우연일 뿐이겠는가? 이런 이유로 그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아울러 이러한 뜻을 기록하여 학자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순희 12년 가을 8월 을축, 신안 주희 기록하다.
抑熹又嘗竊有說焉. 蓋士有學有德, 而後其言行有可觀, 有行有言, 而後其節義有可貫. 此士君子立身行道次第始卒之常而不可易者也. 然人之所禀不同, 而其所遭亦異, 故得於身者或無以驗其事, 成於終者或無以考其初. 此論世尙友者所以每恨全德之難, 而欲擇其所從者, 又不免有多岐之惑也. 然則登是堂而有志夫五君子之事者, 又可不知其所務之先後而循序以求之哉? 邵侯讀大學之書而有感於絜矩之一言, 其平居論天下事而有所不平, 未嘗不慨然發憤而抵掌太息也. 然則其於五君子者, 固已非苟知之, 而亦庶幾得其所以求之之序矣. 其爲此擧, 夫豈偶然而已哉? 因爲之識其本末而幷記此意, 以視其學者云. 淳熙十有二年秋八月乙丑, 新安朱熹記.
무주 금화현 사창기(婺州金華縣社倉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10월에 쓴 글이다.
순희 2년, 동래(東萊) 여백공보(呂伯恭父)가 무주(婺州)에서 병산 아래 머물고 있는 나를 찾아와, 사창(社倉)에서 재물을 내고 들이는 정사를 보고 감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주관(周官)의 위적(委積)의 방법이며, 수나라․당나라 시대의 의름(義廩)의 제도이다. 그러나 그대는 곡식을 모으는 전담 관리를 두니, 여러 현명한 사람들을 쓰지 못한다. 나는 돌아가면 고을의 여러 사람들과 사우(士友)들을 위촉하여, 함께 모여서 경영하여, 마을 안에 구휼을 위한 곡식을 저장하도록 하면 국가기관에서 아주 적은 비용만 부담하면 되니, 더욱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백공보는 돌아가자 곧 조정의 부름을 받고 등용되어 수레에서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고, 또 3년이 못되어 죽으니, 마침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가 죽던 해에 절동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고, 나는 준비한 곡식을 풀어 기근을 구휼하는 조치를 취했다. 행정상의 일로 무주에 갔었는데, 무주 사람들은 낭패를 당하여 이미 죽음에 이른 이가 많았다. 나는 조용히 탄식하면서 생각하기를, 지난번 여백공보의 생각대로 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환란이 없을 것이다. 얼마 지나, 상서성에 내가 사창과 관련하여 올린 주장을 여러 도(道)로 내려 보내, 그것을 처리할 사람들을 모았는데 많은 백성들이 모집에 응하였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나 역시 임기가 끝나 돌아와 버리는 바람에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했다. 이 때, 백공보의 문인인 반군(潘君) 숙도(叔度)가 그 사업에 감응하여 깊은 뜻을 두었고, 또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때부텅 이미 구휼사업에 힘써 기꺼이 베풀고 해마다 기부하는 돈과 비단이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여기까지 소문이 나지 않았을 뿐임을 생각하고서, 이에 그 아버님의 이름으로 집의 곡식 500곡(斛)을 내놓고, 그것을 금화현 무녀향 안기리의 41도(都)를 위해 계절에 따라 내놓는 자세한 프로그램을 갖추니, 일도(一都)의 사람들이 그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 곡식의 양이 많고 시행한 지역이 넓어, 아직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다. 하루는 내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이는 우리 사부(父師)의 뜻이며, 모형(母兄)의 은혜로서 당신께서 세운 것입니다. 내가 비록 다행히 그것을 이루기는 했지만, 세상에서는 아직도 의심하고 있으니, 당신이 나를 위해 한마디 하여 그것을 해명하여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淳熙二年, 東萊呂伯恭父自婺州來訪餘於屛山之下, 觀於社倉發歛之政, 喟然嘆曰: ‘此周官委積之法, 隋唐義廩之制也. 然子之穀取之有司, 而諸公之賢不易遭也. 吾將歸而屬諸鄕人士友, 相與糾合而經營之, 使閭里有賑恤之儲而公家無龠合之費, 不又愈乎? ’然伯恭父旣歸, 卽登朝廷, 輿病還家, 又不三年而卒, 遂不果爲. 其卒之年, 浙東果大饑, 予因得備數推擇, 奉行荒政. 按行至婺, 則婺之人狼狽轉死者已籍籍矣. 予因竊嘆, 以爲向使伯恭父之志得行, 必無父今日之患. 旣而尙書下予所奏社倉事於諸道, 募民有欲爲者聽之. 民蓋多慕從者, 而未幾予亦罷歸, 又不果有所爲也. 是時伯恭父之門人潘君叔度感其事而深有意焉, 且念其家自先夫夫時已務賑恤, 樂施予, 歲捐金帛不勝計矣, 而獨不及聞於此也, 於是慨然白其大人, 出家穀五百斛者, 爲之於金華縣婺女鄕安期里之四十有一都, 歛散以時, 規畫詳備, 一都之人賴之. 而其積之厚而施之廣, 蓋未已也. 一日, 以書來曰: ‘此吾父師之志, 母兄之惠, 而吾子之所建. 雖予幸克成之, 然世俗不能不以爲疑也. 子其可不爲我一言以解之乎? ’
내가 생각하건대,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한 몸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군자는 나의 사사로움으로 그것들을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끝이 없는 것이다. 다만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우(禹)․직(稷)과 같은 사업은 그 분수상 얻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 집안이 넉넉하여 그것을 자신의 이웃과 마을 향당(鄕黨)으로 넓혀가는 것은 우리 성인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자신의 직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를 해치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숙도(叔度)가 이 일을 한 것은 단지 분려(墳廬)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10보(保) 정도에서,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또 이에 앞서 이미 사방에 내린 천자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떻게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세상에서 이것을 병통으로 여기는 이들은 청묘법을 주창하는 왕씨뿐이다. 옛 선현의 말씀을 살펴보고, 오늘날의 일로 체험해 보니, 청묘(靑苗)라는 그 입법의 본래 의미는 선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공급하면서 곡식으로 하지 않고 금으로 하고, 그것을 처리하면서 향(鄕)으로 하지 않고 현(縣)으로 하고, 그 직책 담당자를 고을(鄕)의 선비와 군자로 하지 않고 관리로 하며, 그것을 실행하면서 놀라고 슬퍼하면서 충심으로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빨리 모으고 저장하려는 의지로만 하니, 이 때문에 왕씨(王氏)는 한 고을(邑)에서는 실행할 수 있었지만 천하에 실행할 수는 없었다. 정자(程子)께서 일찍이 그것을 논하면서, 그것이 이미 심해지면 격해짐을 후회함을 끝내 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나는 속도의 요청을 사양하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그 구체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적고, 또 이러한 뜻을 덧붙인다. 무(婺)지방의 사람들은 대부분 숙도와 동문의 선비들이니, 반드시 숙도가 하는 일의 선함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청묘설(靑苗說)에 의심이 없을 것이니, 군주와 스승의 은택을 광대하게 하고 사방 천리에 영원토록 굶어 죽은 이가 없도록 할 것이니, 또 어찌 매우 아름답지 않은가?
予惟有生之類, 莫非同體, 惟君子爲無有我之私以害之, 故其愛人利物之心爲無窮. 特窮而在下, 則禹稷之事有非其分之所得爲者. 然苟其家之有餘而推之以予鄰里鄕黨, 則固吾聖人之折許而未有害於不出其位之戒也. 况叔度之爲此, 特因其墳廬之所在, 而近及乎十保之間, 以承先志, 以悅親心, 以順師指. 且前乎此者又已嘗有天子之命于四方矣, 而何不可之有哉? 抑凡世俗之所以病乎此者, 不過以王氏之靑苗爲說耳. 以予觀於前賢之論而以今日之事驗之, 則靑苗者, 其立法之本意固未爲不善也. 但其給之也以金而不以穀, 其處之也以縣而不以鄕, 其職之也以官吏而不以鄕人士君子, 其行之也以聚歛亟疾之意而不以慘怛忠利之心, 是以王氏能以行於一邑而不能以行於天下. 子程子嘗極論之, 而卒不免於悔其已甚而有激也. 予旣不得辭於叔度之請, 是以詳著其本末, 而又附以此意. 婺人蓋多叔度同門之士, 必有能觀於叔度所爲之善, 而無疑於靑苗之說者焉, 則庶幾乎其有以廣夫君師之澤, 而使環地千里永無捐瘠之民矣, 豈不又甚美哉?
숙도의 이름은 경헌(景憲)으로, 여백공과 같은 해에 진사가 되었다. 나이가 조금 많으면서도 머리를 굽히고 배움을 받으면서도 어려운 기색이 없었다. 스승이 죽자, 스승의 학설을 굳게 지키면서 게으름피우지 않고 더욱 경건했으며,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당시의 세상에 깊은 뜻을 품었다. 그러나 자질이 너무 올곧아 세상의 흐름에 따라 적당히 살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래서 중년 이후로 더 이상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홀로 이곳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다. 12년 을사 겨울 10월 경술 초하루.
叔度名景憲, 與伯恭父同年進士, 年又長, 而屈首受學無難色. 師歿, 守其說不懈益虔. 於書無不讀, 蓋深有志於當世. 然以資峭直, 自度不能隨世俯仰, 故自中年不復求仕, 而獨於此爲拳拳也. 十二年歲乙巳冬十月庚戌朔.
건녕부 건양현 장탄 사창기(建寧府建陽縣長灘社倉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3년(병오, 1186년, 57세) 7월에 쓴 글이다.
건양의 남쪽에는 초현(招賢)이란 이름을 가진 마음이 셌 있는데, 지리적으로 순창(順昌)․구령(甌寧)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협소하고 대부분 험하며. 풍속은 더욱 용맹하고 사납다. 지난해 병란(兵亂)의 여파로 도적들이 남아 있어, 작은 기근(饑饉)을 만나도 서로 빼앗고 많은 간사한 무리들의 폭동이 일어났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뿌리 뽑지 못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미 소멸하여 먹을만한 것들이 없으니, 선량한 백성이라도 잠간 사이 소요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소흥 몇 년, 마침 큰 침략을 당해, 간사한 백성들이 곳곳에서 무리지어 일어나 음식을 빼앗고 소리를 지르니, 마치 장차 전날의 일을 따르려는 자이다. 온 마을이 큰 공포에 쌓여있을 때, 마을의 명사(名士)인 위군(魏君) 원리(元履)가 상평사(常平使) 원후(袁侯) 복일(復一)에게 말하여 약간 곡(斛)의 쌀을 얻어 백성들에게 임대하자 물정(物情)이 크게 안정되고 간사한 계략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가을이 되어 거두어들일 때가 되자, 원리는 다시 요청하여 장탄 사창을 역 부근에 세워 운송에 편리하게 하고, 또 뒷날의 흉년에 대비함으로써 담당자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곡식이 잘 익지 않은 해에는 곧바로 알려 사창을 열어 곡식을 방출했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자, 세 마을의 사람들은 비로소 배부르고 편안하게 거처할 수 있게 되어 식량이 떨어지는 재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인근에 있는 공공기관이나 개인이나 모두 알게 모르게 그 은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었다. 대개 원리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큰 뜻을 품고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이 이와 같았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은 알면서도 그가 그러한 일을 한 까닭까지는 꼭 알지는 못했다.
建陽之南, 里曰招賢者三, 地接順昌, 甌寧之境, 其狹多阻而俗尤勁悍. 往歲兵亂之餘, 莨莠不盡去, 小遇饑饉, 輒復相挺, 群起肆暴, 率不數歲一發. 雖尋卽夷滅無噍類, 然愿民良族, 晷刻之間已不勝其驚擾矣. 紹興某年, 歲適大侵, 姦民處處群聚, 飮搏嘯呼, 若將以踵前事者, 里中大怖. 里之名士魏君元履爲言於常平使者袁侯復一, 得米若干斛以貸. 於是物情大安, 姦計自折. 及秋將歛, 元履又爲請, 得築倉長灘廐置之旁, 以便輸者, 且爲後日凶荒之備, 毋數以煩有司. 自是歲小不登, 卽以告而發之. 如是數年, 三里之人始得飽食安居, 以免於震擾夷滅之禍, 而公私遠近, 無不陰受其賜. 蓋元履少好學, 有大志, 自爲布衣, 而其所以及人者已如此. 蒙其惠者雖知其然, 而未必知其所以然也.
그 후, 원리가 죽고 그 직책을 맡은 관리들은 원리가 한 것처럼 근면하고 공손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곡식은 창고에서 썩어가고 백성들은 집에서 굶주렸다. 어쩌다가 구휼미를 방출하면, 위 아래의 사람들이 뇌물을 요구하니 그 비용을 이미 적지 않았고, 관리가 시도 때도 없이 오고가면서 출납할 때에 알게 모르게 속이고 빼앗으니 폐단이 많았다. 대체로 사람들이 받은 중 절반은 쭉정인데 갚을 때는 도정한 곡식으로 하니, 중간에서 없어진 여러 비용을 계산해보면, 종종 두 배가 넘었다. 이 때문에 곡식 빌리는 것을 꺼리고, 선량한 백성들도 옛날처럼 흉년을 두려워했다.
其後元履旣沒, 官吏之職其事者不能勤勞恭恪如元履之爲, 於是粟腐於倉而民饑於室. 或將發之, 則上下請賕, 爲費已不貲矣, 官吏來往, 又不以時, 而出內之際, 陰欺顯奪, 無弊不有. 大抵人之所得, 粃糠居半, 而償以精鑿, 計其候伺亡失諸費, 往往有過倍者. 是以貸者病焉, 而良民凜凜於凶歲, 猶前日也.
순희 11년, 상평사 송후(宋侯) 약수(若水)가 그 일을 듣고서, 또 읍 사람인 선교량 주군(周君) 명중(明仲)이 현인임을 알고서 곧장 원리의 일을 글로 써서 그에게 위촉했다. 그리고 또 상평사 본대(本臺)에 내려 보내 모년 모월 모일의 황제의 명령에 의해 받들어 종사하게 했다. 대개 해마다 여름에 꾸어주고 겨울에 거둬들이고, 또 그 이자를 2할로 했다. 이렇게 3년을 실행하자 세 마을의 인정이 원리 때와 같이 근심이 없어지고 다시 편안해졌다. 2할의 수금으로 해마다 더욱 넓어졌다. 이윽고 주군(周君)은 그 식량창고를 넓혀 수리하고, 또 나머지 중 조금을 가지고 인근으로 점차 넓혀가니, 또 나날이 증가하여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淳熙十一年, 使者宋侯若水聞其事, 且知邑人宣敎郞周君明仲之賢, 卽以元履之事移書屬之, 且下本臺所被某年某月某日制書, 使得奉以從事. 蓋歲以夏貸而冬歛之, 且收其息什之二焉. 行之三年, 而三里之間人情復安, 如元履亡恙時. 什二之收, 歲以益廣. 周君旣以增葺其棟宇, 又將稍振其餘, 以漸及於傍近, 蓋其惠之所及, 且將日增月衍而未知其所極也.
주군(周君)은 일찍이 여기에서 나를 도왔던 까닭에 글을 보내 기문을 요청했다. 나와 원리는 같은 스승에게 배웠고 교유관계가 좋았고 매우 돈독했다. 옛날의 흔적을 되새기고, 또 그 사업을 계승해서 끝내 완성한 주군(周君)이 아름다워 사양하지 못하고 그를 위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또 옛날 원리(元履)도 이러한 일을 하였고, 나 역시 숭안 지방에서 그것을 했는데, 그 규모는 대략 원리를 모방했다. 다만 해마다 꾸어주고 거둬들이는 이자만 조금 달랐다. 원리는 늘 내가 부당하게 왕안석의 청묘법과 같이 2할의 세금을 거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나 역시 원리가 곡식을 창고에 오랫동안 저장해두고 꾸어주지 않아 썩고, 2할의 이자를 받지 않아 그 혜택이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차 오래 갈 수 없을 것임을 늘 걱정했다. 공부를 하고 여유가 있는 날에는 한가롭게 술잔을 나누면서, 때때로 서로를 비판하면서도 상대를 굴복시키는 못했다. 옆에서 듣는 이들은 손뼉을 치고 웃으며 바라보면서도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송후(宋侯)와 주군(周君)에 이르러, 마침내 내가 요청했던 사안대로 함으로써 원리의 뜻을 이루었고 그 효과 역시 이와 같으니, 이에 논자들은 마침내 내 말이 옳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원리의 말이 비록 소략하기는 하지만, 그의 충직하고 간절하며 정성스러운 뜻은 하은주 삼대의 왕도정치의 유풍을 담고 있으니, 어찌 한때 사업을 편리하게 하려는 나의 구차한 이론이 그에 미칠 수 있겠는가. 당시의 논쟁은 대개 내가 농담 삼아 한 것이고, 훗날의 요청은 반드시 몇 년의 이자를 받고서 면제해야 한다는 말은 오히려 내 친구가 남긴 가르침을 잊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기록하여 훗날의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그 때의 원리의 마음을 얻게 한다면 오늘날 송후와 주군의 법을 무너뜨리지 않고 지킬 수 있을 것이다.
周君以予嘗有力於此者, 來請文以爲記. 予與元履早同師門, 遊好甚篤. 旣追感其陳迹, 又嘉周君之能繼其事而絡有成也, 乃不辭而爲之說如此. 則又念昔元履旣爲是役, 而予亦爲之於崇安, 其規模大略放元履, 獨歲貸收息爲小異. 元履常病予不當祖荊舒聚歛之餘謀, 而予亦每憂元履之粟久儲速腐, 惠旣狹而將不久也. 講論餘日, 盃酒從容, 時以相訾謷而訖不能以相詘. 聽者從旁抵掌觀笑, 而亦不能決其孰爲是非也. 及是宋侯周君乃卒用予所請事以成元履之志, 而其效果如此, 於是論者遂以予言爲得. 然不知元履之言雖疏, 而其忠厚懇惻之意藹然有三代王政之餘風, 豈予一時苟以便事之說所能及哉? 當時之爭, 蓋予之所以爲戱, 而後日之請, 所以必曰息有年數以免者, 則猶以不忘吾友之遺敎也. 因幷書之, 以視後人, 使於元履當日之心有以得之, 則於宋侯․周君今日之法有以守而不壞矣.
원리(元履)의 이름은 섬지(掞之)이고, 일찍이 평민의 신분으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알현했다. 천자가 그의 대답을 듣고 기뻐, 그 날로 태학(太學)을 제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자주 사안에 대해 논의 했지만, 대궐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천자는 그를 다시 부르려고 생각했지만, 원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천자는 오랫동안 슬퍼하였고, 유사에게 조칙을 내려 특별히 직비각(直祕閣)을 추증하였다. 13년 7월 신묘, 신안 주희 기록하다.
元履名掞之, 嘗以布衣召見. 天子悅其對, 卽日除太學錄. 尋以數論事, 不得久居中. 旣而天子思復召用之, 則元履旣卒矣. 上爲悵然久之, 詔有司特贈直祕閣云. 十三年七月辛卯, 新安朱熹記.
건녕부 건양현 대천 사창기(建寧府建陽縣大闡社倉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3년(병오, 1186년, 57세) 7월에 쓴 글이다.
초현리 대천 나한원의 사창은 새로 부임한 후관(候官) 대부(大夫) 주군(周君) 아무개가 세운 것으로 장탄 지방의 또다른 저장소이다. 처음에 비각(祕閣) 위군(魏君)이 장탄 지방에 창고를 지었는데, 적당한 장소를 가려 짓지 않았기 때문에 곡식을 운반하면 여기에 맡겨 저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고가 있는 곳이 마을의 동북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어 서남쪽 경계와의 거리가 멀거나 또는 약간 떨어져 있어 사창에서 곡식을 빌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보통 몇 년에 한 번 왕래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심하게 고통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순희 갑진년에 주군(周君)이 처음으로 상평사 송공(宋公)의 격문으로 사창의 구휼미를 내고 거둬들이는 행정을 감사하고, 해마다 곡식을 임대하고 이자를 수납하는 법규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이미 그렇게 처리하고, 다시 제한규정을 정해 잘못된 폐단을 없애고 때에 알맞게 나누어주었다. 백성들은 은덕을 받은 것에 기뻐했고, 주군(周君)은 더욱 잘못된 인습을 개혁하고 고르지 못한 도로가 있으면 알리도록 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가서, 한 해에 왕래하는 것이 두 번이면, 그 노고와 편안함이 서로 끊어지고, 또 예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에 주군은 송공(宋公)에게 보고하고, 다시 이 사창을 지어 너무 멀거나 가깝지 않은 중간 정도로 적당하게 했고, 또 서남쪽의 경계에서 곡식을 받아 곧바로 운송하도록 했다. 다음 해에는 마침내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으로 나누어, 각기 그곳에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백성들은 배부르고 또 멀리까지 가야 하는 고충도 없게 되니, 이에 모두 주군의 덕을 칭송하고 서로 함께 와서 기문을 요청하니, 그 기문을 완성했다.
招賢里大闡羅漢院之社倉, 新候官大夫周君某之所爲, 而長灘之別貯也. 始, 祕閣魏君之築倉於長灘, 非擇其地而處之也, 因其船粟之委於是而藏焉耳. 故倉之所在, 極里之東北, 而距西南之境遠或若干里, 貸者多不便之. 而是時率常數歲乃一往來, 則猶未甚以爲苦也. 淳熙甲辰, 周君始以常平便者宋公之檄司其發歛之政, 而以歲貸收息之令從事. 旣爲之更定要束, 搜剔蠹弊而以時頒焉, 民已悅於受賜矣, 周君因益問以因革之宜, 而有以道里不均之說告者. 且曰: ‘自今以往, 一歲而往來者再, 則其勞佚之相絶, 又非前日比矣.’ 周君於是白之宋公而更爲此倉, 以適遠近之中, 且令西南境之受粟者卽而輸焉. 來歲遂以遠近分土, 使各集于其所以待命. 民旣歲得飽食, 而又無獨遠甚勞之患, 於是咸德周君, 而相率來請文, 以記其成.
내가 예전에 주례(周禮) 여사(旅師)․유인지관(遺人之官)을 읽었는데,, 곡식을 나누어주고 거둬들이는 소삭(疏數)과 위자(委積)의 멀고 가까움, 그것을 하는 숫자가 매우 상세하고도 정밀하게 제도화한 것을 보고, 옛 성인이 온 마음을 다하고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는 정치로 그것을 계승하니, 이와 같이 성인의 경지에 미칠 수 없음을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 이 사창의 사업으로 가지고 살펴보니, 그 제도의 상세하고도 정밀함이 어찌 역사적으로 시간이 오래되어 그런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이러한 경지에 이른 것이겠는가. 때문에 그 구체적 내용을 기록하여 후대의 군자들이 혹시라도 이것을 고찰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昔予讀周禮旅師․遺人之官, 觀其頒歛之疏數, 委積之遠邇, 所以爲之制數者甚詳且密, 未嘗不嘆古之聖人旣竭心思而繼之以不忍人之政, 其不可及乃如此. 及今而以是倉之役觀之, 則彼其詳且密者, 亦安知其不有待於歷時之久, 得人之多而後乃至於此耶? 因爲之記其本末, 以爲後之君子或將有考於斯焉.
주군(周君)의 자는 거회(居晦)이며, 독서를 좋아하고 당시의 시대적 과제에 뜻을 두었으며, 관리로서의 업무 처리 역시 빠르고 정밀하여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었으니, 단지 이것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고는 모두 두 칸으로, 높이는 몇 척(尺)이고, 넓이는 몇 척이고, 깊이는 몇 척이다. 모년 모월 모일에 시작해서, 모월 모일을 지나 완성했다. 약간의 공인와 약간의 돈을 썼다. 공사를 도운 이는 마을 사람 아무개이다. 13년 병오년 7월 갑오, 신안 주희 기록하다.
周君字居晦, 好讀書, 有志當世之務, 吏事亦精敏絶人, 不但此爲可書也. 倉凡二間, 高若干尺, 廣若干尺, 深若干尺. 始作以某年某月某日, 越某月某日成, 用工若干, 錢若干. 佐之者, 里之人某也. 十三年丙午歲七月甲午, 新安朱熹記.
소무군학 승상 농서 이공 사당기(邵武軍學丞相隴西李公祠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3년(병오, 1186년, 57세) 12월에 쓴 글이다.
건염(建炎) 승상 농서(隴西) 이공(李公)은 소무(邵武) 지방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면서부터 절절하게 천하의 일을 자신의 근심거리로 삼았다. 선화(宣和) 초기, 어느 날 갑자기 홍수가 나서 거의 도성까지 덥칠 정도였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이 어디서부터 연유했는지 알지 못한 채, 서로 함께 두려워하면서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때 공은 마침 좌사(左史)로 있었는데, 이는 오랑캐가 병란을 일으킬 형상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마침내 유배지로 쫓겨났다. 몇 년이 지나 다시 천자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는데, 오랑캐들이 말을 몰고 이미 변방을 넘어 대궐을 향하고 있었다. 공은 다시 내선(內襌)의 방책을 올렸는데 천자의 뜻과 통하여 말이 아직 천자에게 가기도 전에 이미 대계가 확정되었다. 오랑캐의 포위가 이미 임박하자, 많은 이들이 천자가 요행히 저 사악한 오랑캐들을 모면하는 계책을 제시하자, 공은 다시 천자를 뵙고 대의를 역설하면서 다시 성을 지키고 오랑캐의 군사를 물리치라 하였다. 그러나 이 때부터 마침내 땅을 바치고 화의를 맺자는 의논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공은 또 다시 유배를 감으로써 대사는 물거품이 되었다, 광요태상황제(光堯太上皇帝)가 중흥의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올라 인망이 있는 찾아 구하면서 가장 먼저 공을 불러 재상으로 삼았다. 공 역시 국가 비상의 변란을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으므로 밤낮으로 국토의 회복을 도모하면서 정치를 바로잡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을 생각하니, 본말이 잘 갖추어졌다. 대개 숨어있는 역적들을 베어 인심을 바로잡고, 장소(張所)를 하북 지방 안무사로 파견하고, 부량(傅亮)은 하동 지방을 수복하고, 종택(宗澤)은 경성을 지켜 미침내 더욱 형편을 튼튼히 하고 기율을 크게 밝혀 반드시 중원을 지키고 반드시 양궁(兩宮)을 탈환할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소인들 중에 공을 해치려는 자가 있어, 마침내 세 번째 유배를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建炎丞相隴西李公, 邵武人也. 少有大志, 自爲小官卽切切然以天下事爲己憂. 宣和初, 一日大水猝至, 幾冒都城. 人莫能究其所自來, 相與震懼而無有敢以爲言者. 公時適爲左史, 以爲此夷狄兵戎之象也, 不可以不戒, 亟上疏言之, 遂以謫去. 數歲, 乃得召還, 則虜騎已入塞而長驅向闕矣. 公復慨然圖上內襌之策, 誠意感通, 言未及發而大計已決. 虜圍旣迫, 群小方謀挾至尊, 犯不測爲幸免計, 公又獨扣殿陛, 力陳大義, 得復城守以退虜兵. 然自是以來, 割地講和之議遂起, 公又再謫, 而大事去矣. 光堯太上皇帝受命中興, 疇咨人望, 首召公爲宰相. 公亦痛念國家非常之變, 日夜圖回, 所以修政事, 攘夷狄者, 本末甚備. 蓋方誅僭逆以正人心, 而建遣張所撫河北, 傳亮收河東, 宗澤守京城. 遂將益據形便, 大明紀律, 以示必守中原, 必還兩宮之勢. 而小人有害公者, 遂三謫以去而不復還矣.
올해 순희 병오년은 공과의 시간적 거리로 보면 60년인데, 영가의 서군(徐君) 원덕(元德)이 이 지방을 다스리면서, 공의 충의(忠義)와 지략을 이야기하니, 세상의 모든 뜻있는 선비들이 그것을 암송하여 전했다. 그 고을의 자제들 중에 그 만분의 일에도 미치는 이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 이에 강당 동쪽의 벽에 공의 초상을 그리고 사당을 세웠다. 4월 길일(吉日)에 군의 관리들이 여러 학생들을 이끌고 사당으로 가 엎드러 절하고 제사지냈고, 예법에 따라 술을 올렸다. 일을 마치고 내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淳熙丙午, 距公去相適六十年, 而永嘉徐君元德命敎此邦, 謂公之忠義籌略, 海內有志之士莫不誦而傳之. 顧其鄕人子弟乃無有能道其萬一而興起焉者, 於是闢講堂之東, 肖公之象而立祠焉. 四月吉日, 合郡吏率諸生進拜跪奠, 妥侑如法. 已事而以書來屬熹記之.
내가 생각하기에, 천하의 의 가운데 군신보다 큰 것은 없다. 군신간의 의리가 깊고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어 나눌 수 없는 것은 이것 모두가 인심의 본연에서 생기는 것이고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이 각박해지고 학문을 폐지하고 더 이상 강론하지 않으니, 마음속에 고유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또 사욕에 물들고 빠져 몸이나 보전하고 처자식이나 먹여 살리는 계책이나 꾸미고 군주는 나중으로 여기는 자들이 종종 세상에 줄을 이었다(많았다). 그 가운데서 이공과 같은 사람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군주와 부모가 있음만 알고 자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천하의 안위만 알뿐 자신의 화복은 알지 못하니, 잠시 참소를 받아 배척받고 아홉 차례나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군주를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은 끝내 빼앗지 못했으니, 이 역시 한 시대의 위인이라 할 만하다.
熹惟天下之義莫大於君臣, 其所以纏綿固結而不可解者, 是皆生於人心之本然, 而非有所待於外也. 然而世衰俗薄, 學廢不講, 則雖其中心之所固有, 亦且淪胥陷溺, 而爲全軀保妻子之計以後其君者, 往往接迹於當世. 有能奮然拔起於其間, 如李公之爲人, 知有君父而不知有其身, 知天下之有安危而不知其身之有禍福, 雖以讒間竄斥, 屢瀕九死, 而其愛君憂國之志終有不可得而奪者, 是亦可謂一世之偉人矣.
서군(徐君)이 그를 제사지낸 것은 그의 뜻이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학문적으로 강론한 것이 여기에 있으니, 누가 거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서 그 설을 즐거이 추론해서 군의 학자들에게 알리고, 또 늙고 병들어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감개하고 분발하는 것은 오히려 평상시의 장대한 마음을 다시 오해하는 것이다. 12월 계사, 선교랑(宣敎郞)․직휘유각(直徽猷閣)․화주(華州) 운대관(雲臺觀) 주관 주희 기록하다.
徐君之祠之也, 非其志之所好, 學之所講有在於是, 則亦孰能及之哉? 故熹喜聞其事而樂推其說, 以告郡之學者, 雖病且衰而不自知, 其感慨發憤, 猶復誤有平日之壯心也. 十二月癸巳, 宣敎郞, 直徽猷閣․主管華州雲臺觀朱熹記.
형주 석고서원기(衡州石鼓書院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4년(정미, 1187년, 58세) 4월 초하루에 쓴 글이다.
형주(衡洲)의 석고산(石鼓山)은 증(烝)강과 상(湘)강이 만나는 지점이며, 강물이 끼고 돌아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예로부터 서원이 있었는데,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에 형주 사람 이관(李寬)이 세었다. 송나라 초기에 사액을 받았다. 그 후, 조금 동쪽으로 옮겨 주학(州學)이 되었는데, 이 때부터 서원의 흔적이 마침내 없어지고 더 이상 고치지도 않았다. 순희 12년, 부사(部使) 동양(東陽) 반후(潘侯) 치(畤) 덕부(德鄜)가 처음으로 서원의 옛터에 몇 칸짜리 집을 세우고 옛 편액을 걸고, 학문에 뜻이 있지만 과거시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방의 선비들을 모아 그곳에 거처하게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다. 지금 부사 성도(成都) 송후(宋侯) 약수(若水) 자연(子淵)이 또 그 옛터에 더욱 넓고 크게 짓고, 별도로 집을 지어 선성과 선사의 초상을 모셨고, 또 국자감 및 본도의 여러 고을에서 출간한 몇 종류의 책 몇 권을 베끼고, 군현의 수사들을 골라 파견하여 그것을 보충하도록 했다. 대체로 연수(連帥) 임후(林侯) 율(栗)․여러 부사 소후(蘇侯) 후(詡)․관후(官侯) 감(鑑)․형주 태수 설후(薛侯) 백선(伯宣) 등 모두가 헌금을 내고 공전을 나누어 주면서 그 사업을 도왔고,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에 송후(宋侯)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훗날 사람들이 알도록 하고, 또 다행히 학문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라는 바입니다.”
衡洲石鼓山據烝湘之會, 江流環帶, 最爲一郡佳處. 故有書院, 起唐元和間, 州人李寬之所爲. 至國初時, 嘗賜敕額. 其後乃復稍徒而東, 以爲州學, 則書院之迹於此遂廢而不復修矣. 淳熙十二年, 部使者東陽潘侯畤德鄜始因舊址列屋數間, 牓以故額, 將以俟四方之士有志於學而不屑於課試之業者居之, 未竟而去. 今使者成都宋侯若水子淵又因其故而益廣之, 別建重屋, 以奉先聖先師之象, 且摹國子盛及本道諸州印書若干種若干卷, 而俾郡縣擇遣修士以充入之. 蓋連帥林侯栗․諸使者蘇侯詡․官侯鑑․衡守薛侯伯宣, 皆奉金齎割公田以佐其役, 踰年而後落其成焉. 於是宋侯以書來曰: ‘願記其實, 以詔後人, 且有以幸敎其學者, 則所望也.’
내가 생각하건대, 옛날 학교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선비들은 공부할 데가 없는 것이 안타까워 종종 경치가 좋은 곳에 함께 모여 정사(精舍)를 세우고 여럿이 함께 강습하는 장소로 삼았고, 위정자는 간혹 그곳에 와서 포창하였으니, 이 산의 경우나, 악록이나, 백록동과 같은 경우가 그러한 종류이다. 송나라 경력․희영 연간의 태평성대한 시대에 이르러, 학교 기관이 천하에 두루 갖추어지자, 옛날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하던 선비들이 쓰던 임시거처들은 소용이 없어졌으니, 그 옛 흔적들이 잡초가 무성해지고 부서지는 것 역시 그 추세가 그러했던 것이다. 고대를 좋아하고 옛것을 도모하는 현자가 없다면, 누가 삼가 그것을 보존하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현의 학관에 둔 박사와 생원들은 모두 그 덕행과 도예의 소양을 고찰할 수 없고, 그들이 주고받는 수업 역시 모두 세속적인 책들로서 세속적인 벼슬이나 좇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보게 하고 의리는 보지 못하게 한다. 벼슬이 아닌 자신의 도덕적 수양에 뜻을 가진 선비는 이는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항상 따로 편안하고 맑고 밝은 곳을 구해 선현들에게 들은 바를 함께 강론하고자 하였으나 할 수가 없었다. 이 두 분은 이 역사(役事)에 떨쳐 일어나 감히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으니, 단지 그 옛 자취가 황폐화되고 사라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 것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특별히 그 구체적 내용을 기록하여 후대의 사람에게 알림으로써 두 부의 뜻이 그러한 바를 알게 하고 요즘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거를 위한 시험준비와 같은 혼란한 뜻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또 풍효(風曉)가 자리에 있어서, 오늘날 학교에서의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의 폐해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하여,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그 폐단을 없앨 수 없다. 만약 여러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전에 나의 벗인 장자(張子) 경부(敬夫)가 쓴 「악록기」에서 그것을 상세히 말했다. 생각하건대, 하학(下學) 공부가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을 암송하면서도 종사해야 할 방향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또 어떻게 남헌의 말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겠는가. 또 말하기를, “아직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온전함을 함양하고, 장차 마음이 움직이려 할 때의 그 기미를 살피고, 그 기미가 선하면 확충하고 악하면 극복해서 제거해야 하니, 이와 같은 뿐이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니, 또 왜 나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14년 정미해 여름 4월 초하루, 신안 주희 기록하다.
予惟前代庠序之敎不修, 士病無所於學, 往往相與擇勝地, 立精舍, 以爲群居講習之所, 而爲政者乃或就而褒表之. 若此山, 若嶽麓, 若白鹿洞之類是也. 逮至本朝慶曆․熙寧之盛, 學校之官遂徧天下, 而前日處士之廬無所用, 則其舊迹之蕪廢, 亦其勢然也. 不有好古圖舊之賢, 孰能謹而存之哉? 抑今郡縣之學官置博士弟子員, 皆未嘗考其德行道藝之素, 其所受授, 又皆世俗之書, 進取之業, 使人見利而不見義. 士之有志於爲己者, 蓋羞言之, 是以常欲別求燕閑淸曠之地以共講其所聞而不可得. 此二公所以慨然發憤於斯役而不敢憚其煩, 蓋非獨不忍其舊迹之蕪廢而已也. 故特爲之記其本末, 以告來者, 使知二公之志所以然者, 而毋以今日學校科擧之意亂焉. 又以風曉在位, 使知今日學校科擧之敎, 其害將有不可勝言者, 不可以是爲適然而莫之救也. 若諸生之所以學而非若今人之所謂, 則昔者吾友張子敬夫所以記夫嶽麓者謂之詳矣. 顧於下學之功有所未究, 是以誦其言者不知所以從事之方而無以蹈其實. 然今亦何以他求爲哉? 亦曰養其全於未發之前, 察其幾於將發之際, 善則擴而充之, 惡則克而去之, 其如此而已矣. 又何俟於予言哉? 十四年丁未歲夏四月朔, 新安朱熹記.
장주 주학 동계선생 고공 사당기(漳州州學東溪先生高公祠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4년(정미, 1187년, 58세) 9월에 쓴 글이다.
맹자는 말했다. “성인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니, 백이(伯夷)․유하혜(柳下惠)가 그렇다. 그러므로 백이의 풍도(風度)를 들은 자는 완악한 지아비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지아비가 뜻을 가지게 된다. 유하혜의 풍도를 들은 이는 경박한 지아비가 돈후(敦厚)해지고, 비루한 지아비가 너그러워진다. 백세의 위에서 분발하면 백세의 아래에서 그 풍도를 들은 자가 흥기하지 않음이 없다.” 맹자가 두 선생에 대해 논한 것이 상세하다. 두 선생에 대해, 비록 혹은 성인의 청정함이라 하고 혹은 성인의 온화함이라 여기면서도, 일찍이 그 협애함과 공손하지 못함, 또 그 도가 공자와 달라 학문을 원하지 않았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연하게 이 논의를 내놓고 백세의 스승으로 귀결시키면서, 공자는 도리어 포함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자의 도는 크고 덕은 중용이면서도 자취가 없기 때문에 그를 배우려는 자는 몸이 다 닿도록 연찬하고 우러러도 부족하다. 두 분은 뜻이 고결하고 행동은 고고했고 남긴 자취는 현저해서, 그를 사모하는 자는 하루만 감개(感慨)하여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두 분의 공적이 진실로 작은 것이 아니지만, 맹자의 뜻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孟子曰: ‘聖人百世之師也, 伯夷, 柳下惠是也. 故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 聞柳下惠之風者, 鄙夫寬, 薄夫敦. 奮乎百世之上, 百世之下, 聞者莫不興起也.’ 夫孟子之於二子, 其論之詳矣. 雖或以爲聖之淸, 或以爲聖之和, 然又嘗病其隘與不恭, 且以其道不同於孔子而不願學也. 及其一旦慨然發爲此論, 乃以百世之師婦之, 而孔子反不與焉, 何哉? 孔子道大德中而無迹, 故學之者沒身鑽仰而不足. 二子志潔行高而迹著, 故慕之者一日感慨而有餘也. 然則二子之功誠不爲小, 而孟子之意其亦可知也已.
임장(臨漳) 지방에 동계(東溪) 선생 고공(高公)이 있는데, 이름은 등(登)이고, 자는 언선(彦先)이다. 정강 연간에 태학에서 공부하였고, 진공(陳公) 소양(少陽)과 함께 대궐에 엎드려 상소하여 육적(六賊)을 베고 종(种)과 이(李)는 잔류하도록 요청했다. 무력을 사용하려 하였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소흥 초에, 천자의 부름을 받아 정사당(政事堂)의 자리에 올랐지만 재상인 진회(秦檜)와 의견이 맞지 않아, 정강부(靜江府) 고현(古縣)의 현령이 되어 남다른 정치를 했다. 수수(帥守)가 진회의 뜻을 좇아 그대로 관리를 임명했다. 회수(會帥) 역시 참소를 받아 감옥에 있다가 곧 석방되었다. 격시(檄試)에 의해 조주(潮州) 진사가 되어, 여러 학생들에게 두려워 들을 수도 없는 직언(直言)을 논하게 하고 민강과 절강의 수해 대책을 책문으로 하게 하다가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진회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고 관직을 빼앗고 용주(容州)로 귀양보냈다. 공(公)은 학식이 넓고 품행은 고고하며, 의논은 강개(慷慨)하여 손짓을 하면서 담론을 하고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으니, 충신 효자의 말이었고, 삶보다는 의리를 중시하는 뜻 아닌 것이 없었다. 듣는 이는 늠름하여 혼백이 살아 움직이고 귀신이 두려워했다. 그가 고현(古縣)에 있을 때, 배우려는 이들이 다투어 그에게 몰려왔고, 이 때에는 그 제자들이 더욱더 성하였다. 병에 걸리자 스스로 묘지명을 짓고, 함께 어울리던 여러 학생들을 불러 결별하고서 바르게 앉아 손을 공손하게 하고 수염을 휘날리고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아! 이 역시 한 시대의 호걸이라 할만하다. 그가 배운 것과 행한 것이 비록 공자와 완전히 일치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탁월한 뜻과 행동은 역시 현자의 청렴이라 하기에 충분하니, 백세가 지나더라도 그의 풍도를 듣는 이로 하여금 완악한 자는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는 뜻을 가지게 한니, 그가 세상의 교육에 끼친 공적이 어찌 몰래 개인의 사적인 욕심을 채우며 스스로 중용을 행하는 공자에 둘러대는 자들과 똑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
臨漳有東溪先生高公者, 名登, 字彦先, 靖康間遊太學, 與陳公少陽伏闕拜疏, 以誅六賊, 留种․李爲請. 用事者欲兵之, 不爲動也. 紹興初, 召至政事堂, 又與宰相秦檜論不合, 去爲靜江府古縣令, 有異政. 帥守希檜意, 捃其過以屬吏. 會帥亦以讒死獄中, 乃得釋. 被檄試進士潮州, 使諸生論直言不聞之可畏, 策閩浙水沴之所繇, 而遂投檄以歸. 檜聞大怒, 奪官徙容州. 公學博行高, 議論慷慨, 口講指畫, 終日滾滾, 無非忠臣孝子之言, 捨生取義之意. 聞者凜然魄動神竦. 其在古縣, 學者已爭歸之. 至是, 其徒又益盛. 屬疾, 自作埋銘, 召所與遊及諸生訣別, 正坐拱手, 奮髥張目而逝. 嗚呼, 是亦可謂一世之人豪矣!雖其所學所行未盡合於孔子, 然其志行之卓然, 亦足以爲賢者之淸, 而使百世之下聞其風者有廉頑立懦之操, 則其有功於世敎, 豈可與夫隱忍回互以濟其私, 而自託於孔子之中行者同日而語哉?
공이 죽고 20여년이 지난 후, 연평(延平) 전군(田君) 담(澹)이 군의 박사가 되자, 처음으로 그가 남긴 글을 찾아 방판(方版)에 새겼다. 또 공의 초상을 그려 사당에 모시고 제사지내 그 학문을 엄숙하게 했다. 중간에 군의 사람인 왕군(王君) 우(遇)가 와서 기문을 써달라고 했는데 내가 병 때문에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전군(田君)이 떠났다. 지금 태수인 영가(永嘉) 임후(林侯) 원중(元仲)이 와서, 다시 또 왕군(王君)과 함께 편지를 보내와서 독촉했다. 고공(高公)의 고고한 절개가 이와 같고, 여러 현자들이 존숭하는 뜻이 또 이와 같으니, 내 문장이 부족하지만 병을 핑계로 오래도록 계속 미루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억지로 일어나 글을 썼지만 말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후(林侯)가 시험적으로 그것을 새겨 사당의 벽에 걸어 놓았으니, 장(漳) 지방의 학자들과 사방의 선비들이 오고가면서 여기에서 그것을 읽으면, 과연 감개무량하여 흥기하는 이가 있을 것인가? 순희 정미 가을 9월 갑인, 신안 주희 기록하다.
公沒之後二十餘年, 延平田君澹爲郡博士, 乃始求其遺文, 刻之方版. 又肖公像而奉祠之, 以風厲其學者. 間因郡人王君遇來求文以爲記, 屬予病, 未及爲而田君去. 今太守永嘉林侯元仲至, 則又與王君更以書來督趣不置. 予惟高公孤高之節旣如彼, 而諸賢崇立之志又如此, 則予文之陋, 誠不宜久以疾病爲解. 强起書之, 辭不逮意. 林侯試爲刻之, 陷置祠壁, 漳之學子與凡四方之士往來而有事於此者讀之, 果能有所感慨而興起乎哉? 淳熙丁未秋九月甲寅, 新安朱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