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권 朱子大全 卷八十二
발 跋
동파가 임자중에게 준 수첩 발문(跋東坡與林子中帖)
【해제】 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년, 52세) 11월 12일에 쓴 발문이다.
순희 신축 한겨울(11월) 12일(을유), 구주(衢州) 부석담(浮石潭)의 배에서 이것을 보았다. 당시 절동 지방에 흉년이 매우 심하여, 나는 사사(使事)로서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상주하였는데, 그 말을 반복하고서 더욱 깊이 감탄하였다. 마땅히 여러 돌에 새겨서 세상의 군자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신안 주희 쓰다.
淳熙辛丑中冬乙酉, 觀此於衢州浮石舟中. 時浙東饑甚, 予以使事被旨入奏, 三復其言, 尤深感歎. 當摹刻諸石, 以視當世之君子. 新安朱熹書.
다시 쓴 발문(再跋)
순희 신축, 절동지방에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려, 나는 사사(使事)로 소명을 받고 대궐에 들어가 상주하려고 삼구(三衢)를 지나가다 옥산 왕씨(玉山汪氏)에게 이 수첩을 얻었는데, 어진 사람의 말은 광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년에는 상평사(常平司)의 서재(西齋)의 돌에 새기려 한다. 신안 주희 쓰다.
淳熙辛丑, 浙東水旱民饑, 予以使事被召入奏, 道過三衢, 得觀此帖於玉山汪氏. 以爲仁人之言, 不可以不廣也, 明年乃刻石常平司之西齋. 新安朱熹書.
세 번쩨 편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헤어진 후 오랫동안 비가 그치지 않아 입은 재해가 상당히 심합니다. 경구(京口)의 미두(米斗)가 120문(文)이니, 이미 인심(人心)은 놀라고 불안합니다. 또 4월의 날씨가 꼭 정월 같으니, 반드시 올해 질병과 굶주림을 조치하는데 많이 번거러울 것입니다. 회남(淮南)지방의 누에와 보리는 이미 가망이 없으니 반드시 본로(本路)의 쌀값을 변통하여 광릉(廣陵)과 같이 하고자 하면, 다시 정중(正仲)과 의논하여 다시 한 번 값을 깎으십시오. 바라건대, 노형께서 미지(微之)․중옥(中玉)과 상의하고 빨리 조정에 알려 충분히 대비하여 넉넉하게 준비하십시오. 희녕 중에, 본로가 상공해야 할 물건 중에서 구황용으로 쓰기 위해 남긴 것과 다른 로에서 돈을 주고 사온 쌀과 돈은 모두 큰 가뭄으로 인한 세금감면과 조세를 줄여준 합계가 100만이 넘지만,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는 애당초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 구휼이 늦어진 것이니, 노형께서 이 점 빨리 유의하여 주십시오. 또 바라건대, 조사(漕司)와 상의하여, 올해 상공해야할 곡미 모두를 마땅히 발송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형께서 2월에 상주하여, 또 몇 개월 발송을 늦주어 천천히 곡식이 익는 것을 살펴 6월쯤에나 발송할 수 있도록 늦추어 다른 로에서 진제할 곡식을 사 운반해서 진제하는 번거로움을 면하게 해주십시오. 이와 같이 진술하면, 조정도 반드시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돌보아주시는 은혜를 입고도 이와 같이 함부로 말하였으니, 바라건대 더욱 살펴 용서해주십시오. 자세히 적지 않습니다. 황송합니다.”
第三書節略云: ‘別後淫雨不止, 所過災傷殊甚. 京口米斗百二十文, 人心已是皇皇. 又四月天氣全似正月, 今歲流殍疾病必煩措置. 淮南蠶麥已無望, 必拽動本路米價. 欲到廣陵, 更與正仲議之, 更一削. 願老兄與微之, 中玉商議, 早間朝廷, 厚說儲備. 熙寧中, 本路截撥及別路般來錢米, 幷因大荒放稅及虧却課利蓋累百距萬, 然於救餓初無絲毫之益者, 救之遲故也. 願兄早留意. 又乞與漕司商量, 今歲上供斛米皆未宜起發. 兄自二月間奏乞且遲留數月起發, 徐觀歲熟, 至六月起未遲, 免煩他路般運賑濟. 如此開述, 朝廷必不訝. 荷知眷之深, 輒爾僭言, 想加恕察, 不一. 某皇恐.’
이후주시 후 발문(跋李後主詩後)
【해제】 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년, 52세) 11월 18일에 쓴 발문이다.
‘평숙(平叔)은 세속에 구속받지 않고 멋대로 행하였고, 이보(夷甫)는 좌선한채 공(空)을 논하였다. 어찌 소양전(昭陽殿)을 깨달아, 마침내 궁(宮)에서 혼자이겠는가.’ 이는 도은거(陶隱居)가 위(魏)․진(晉)에 기탁하여 소양(蕭梁)을 풍자한 시이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끝내 다시 전철을 답습하니, 그것을 거울삼아야 함이 더욱 분명하다. 위명(違命) 이후(李侯)가 다시 불교와 도가로 나라를 망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도학이 밝혀지지 않고 인심이 바르지 못해, 피음사둔(詖淫邪遁)의 설이 횡행하는 금지하지 않은 때문이다. 아아! 슬프다.
‘平叔任散誕, 夷甫坐論空. 豈悟昭陽殿, 遂作單于宮!’ 此陶隱居託魏晉以諷蕭梁之詩也. 當時不悟, 竟蹈覆轍, 其爲商監, 益以明矣. 而違命李侯, 乃復以無生混茫者亡其國, 何哉? 道學不明, 人心不正, 詖淫邪遁之說肆行而莫之禁也. 嗚呼痛哉!
내가 왕백시(汪伯時)가 소장하고 있는 이후주(李後主) 필사본의 시를 보고 탄식하여 이 글을 쓴다. 반숙창(潘叔昌)이 나의 조대(釣臺)를 방문하였기에 써서 그에게 보낸다. 순희 신축 11월 18일.
熹觀汪伯時所藏李後主手寫詩, 歎息書此. 潘叔昌訪熹釣臺, 因書贈之. 淳熙辛丑十一月十八日.
여백공일기 발문(跋呂伯恭日記)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1월에 17일에 쓴 발문이다.
여백공의 병중일기(病中日記)를 살펴보니, 그가 서책을 검토하여 논저(論著)한 것이 참으로 단 하루도 게으름피우지 않았다. 날씨의 따뜻함과 차가움, 초목의 피어나고 시듦에 대해서도 역시 반드시 모두 기록하였으니, 그의 사물을 관찰하고 내면을 성찰함은 혈기(血氣)가 능히 옮기지 못함이 있다. 근래에 백공보를 다시 보지 못했는데, 참으로 한탄스럽다. 그러나 그의 학력의 경지를 보고 스스로를 경계하고 깨우치니, 나의 벗이 죽지 않고 나를 가르쳐 인도함이 참으로 정성스럽다. 반복하여 눈물 흘리면서 삼가 책의 끝에 이 글을 쓴다. 순희 임인, 신안 주희 쓰다.
觀呂伯恭病中日記, 其繙閱論著固不以一日懈. 至於氣候之暄凉, 草木之榮悴, 亦必謹焉, 則其察物內省, 蓋有非血氣所能移者矣. 比來不得復見伯恭父, 固爲深恨. 然於此得窺其學力之所至以自警省, 則吾伯恭之不亡者, 其誨我亦諄諄矣. 三復流涕, 敬書其後. 淳熙壬寅, 新安朱熹書.
백공이 말거(抹去)한 형공일록 제사(題伯恭所抹荊公日錄)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1월에 17일에 쓴 발문이다.
백공은 병중에도 독서하고 늦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미 시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여 고금의 대사(大事)를 기록하고, 또 남은 힘으로 여기까지 미쳤다. 그러나 모두 마지막까지 편집을 끝내지 못하고 죽었으니, 읽는 사람은 그것이 한탄스럽다. 이 책은 온힘을 다해 양귀산(楊龜山)과 진료옹(陳了翁)을 배격하였는데, 그 폐부의 사이에는 오히려 다하지 못함이 있다. 이제 백공이 책의 첫머리 4권에서 한 단어도 더하지 않음을 보니, 그 작은 기미의 사이도 모두 숨기지 않은 것이다. 학자는 여기에서 지나간 일을 궁구하고 살펴 치란(治亂)의 근원을 궁극해야 할 뿐만아니라 또한 돌이켜 자기의 마음에서 구하여 그 득실의 단서를 살펴야 한다. 순희 임인 정월 17일, 백공의 묘에 와서 통곡하는데, 숙도(叔度)가 이 편(編)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이에 감탄한 나머지 그 왼쪽에 글을 쓴다. 주희 중회보(仲晦父).
伯恭病中讀書, 漏刻不去手. 旣定詩說, 記古今大事, 而其餘力又及此. 然皆未及終篇而卒, 讀者恨之. 此書經楊, 陳二公掊擊, 不遺餘力, 而其肺腑之際, 猶有未盡白者. 今觀伯恭於書首四卷乃不加一詞, 而其幾微毛髮之間皆不得有所遁. 學者於此, 不唯可以究觀前事而極夫治亂之源, 抑亦可以反求諸心而審其得失之端矣. 淳熙壬寅正月十七日, 來哭伯恭之墓, 而叔度出此編視予, 感歎之餘, 爲書其左. 朱熹仲晦父.
화권(畫卷) 후 발문(跋畫卷後)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발문이다.
순희 임인 상사, 주희 중회보 보다. 이 책은 아마도 이름이 뛰어난 이의 그림 시인 듯하다.
淳熙壬寅上巳, 朱熹仲晦父觀. 疑此卷勝名畫詩也.
우연지의 자법을 논함 후 발문(跋尤延之論字法後)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발문이다.
우연지가 고인의 필법을 논한 부분은 마치 주태사(周太史)의 세손(世係)에게 제사지내는 것처럼, 참으로 사람들에게 이간질하는 말을 못하게 만든다. 주희 중회보 기록하다.
尤延之論古人筆法來處如周太史奠世係, 眞使人無間言. 朱熹仲晦父識.
구공 금석록서 진적 제사(題歐公金石錄序眞蹟)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금석(金石)을 집록(集錄)한 것은 옛날에는 애당초 없었으니, 대개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순백(順伯)이 옛것을 싫증내지 않고 좋아함은 구양공이 했던 것보다 더 심하니, 공이 다시 이 서진적(序眞蹟)을 얻어 소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순희 임인, 회계(會稽)의 서원(西園)에서 계음(禊飮)하고 저녁에 돌아와 이 글을 쓴다. 주희 중회보(仲晦父).
集錄金石, 於古初無, 蓋自歐陽文忠公始. 今順伯嗜古無厭, 又有甚於公之所爲. 而復得公此序眞蹟藏之, 其不偶然矣. 淳熙壬寅, 禊飮會稽西園, 暮歸書此. 朱熹仲晦父.
서대서 제사(題西臺書)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서대(西臺)의 글은 당시 쓰는 방법이 있었으니, 당나라 중엽 이전의 필적(筆跡)과 같이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수첩을 자세히 보면, 역시 우연지가 말했던 것을 볼 수가 없다. 신안 주희 중회보.
西臺書在當時爲有法要, 不可與唐中葉以前筆跡同日而語也. 細觀此帖, 亦未見如延之所云也. 新安朱熹仲晦父.
형공수첩 제사(題荊公帖)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어려서부터 형공(荊公)의 글을 배우는 것을 좋아해 집안에 유묵(遺墨)을 여러 장 소장하고 있어, 그 위작(僞作)은 구별할 수 있다. 선우(先友)인 정공(鄧公) 지굉(志宏)이 일찍이 그것을 논하기를, 도는 하(河)의 락(雒)에게 배우고, 문장은 원우(元祐)에게 배우고, 서법은 형서(荊舒)에게 배우니, 알 수가 없다. 이제 이 수첩을 보니, 필체가 날렵한 것은 대체로 집에 소장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선조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감격하여 목이 메여 뒤에 글을 쓴다. 주희 쓰다.
先君子自少好學荊公書, 家藏遺墨數紙, 其僞作者率能辨之. 先友鄧公志宏嘗論之, 以其學道於河雒, 學文於元祐而學書於荊舒爲不可曉考. 今觀此帖, 筆勢翩翩, 大抵與家藏者不異, 恨不使先君見之. 因感咽而書于後. 朱熹書.
형공수첩 제사(題荊公帖)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집에 할아버지께서 형공에게 직접 쓴 몇 편의 시가 있는데, 지금 이 책을 살펴보고서야 그것이 임사본(臨寫本)임을 알았다. 수십 년이 지나면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이가 없을까 걱정되어 여기에 간략하게 적는다. 신안 주희 말하다.
熹家有先君子手書荊公此數詩, 今觀此卷, 乃知其爲臨寫本也. 恐後數十年未必有能辨之者, 略識于此. 新安朱熹云.
역명수첩 제사(題力命帖)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역명표(力命表)는 예전에 근래에 판각한 판본을 보았을 뿐인데, 이제 정관(貞觀) 판본을 보게 되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나 글자는 작고 눈은 어두워 그 묘처(妙處)를 거의 볼 수가 없으니, 이렇게 늦게 보게 된 것이 또 부끄러울 뿐이다. 나중에 오른쪽에 발문이나 제사를 쓴 여러 공(公)을 만나면 물어볼 것이지만, 또 그들이 본 것과 내가 본 것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주희 중회보.
力命表舊惟見近世刻本, 今乃得見貞觀所刻, 深以自幸. 然字小目昏, 殆不能窺其妙處, 又愧其見之晩也. 他日見右方諸公, 當請問焉, 又未知其所見與予果如何耳. 朱熹仲晦父.
악의론 제사(題樂毅論)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신안 주희가 왕순백(王順伯)이 소장하고 있는 악의론(樂毅論)․황정경(黃庭經)․동방찬(東方贊)을 보니, 모두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어서 오랫동안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新安朱熹觀王順伯所藏樂毅論, 黃庭經, 東方贊, 皆昔所未見, 撫歎久之.
「난정서」 제사(題蘭亭叙)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순희 임인 상사에, 회계군 관할의 서원(西園)에서 음계(飮禊)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순백(順伯)이 소장하고 있는 「난정서(蘭亭叙)」 두 두루마리를 완미하고, 이른바 “세상이 다르고 일이 달라도, 역시 장차 이 글에 느낌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오히려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발문을 보고, 단지 예법만 송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알았다. 그 왼쪽에 글을 덧붙여 훗날의 사람들을 웃기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공명을 위한 장계를 올리면서 ‘우군(右軍)’이라 말하는데, 이는 거의 생기를 막아버리는 것임을 볼 수 있다. 회옹(晦翁).
淳熙壬寅上巳, 飮禊會稽郡治之西園. 歸, 玩順伯所藏蘭亭叙兩軸, 知所謂世殊事異, 亦將有感於斯文者猶信. 及覽諸人跋語, 又知不獨會禮爲聚訟也. 附書其左, 以發後來者之一笑. 或者猶以牋奏功名語右軍, 是殆見杜德機耳. 晦翁.
종요첩 제사(題鍾繇帖)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이 표의 세월은 내가 깊이 고찰하지는 못했지만, 정남장군(征南將軍)은 아마도 조인(曹仁)인 듯하다. 지금 순백(順伯)이 논의한 것을 보니 마침 내 뜻과 같다. 이 당시의 자획(字畫)은 오히려 한나라 시기의 예체(隸體)였으니, 이 「묘전첩(墓田帖)」과 관본(官本) ‘백기(白騎)’ 등의 글자는 종요(鍾繇)의 필적이 아님이 틀림없다. 주희 기록하다.
此表歲月予未嘗深考, 然固疑征南將軍爲曹仁也. 今觀順伯所論, 適與意合. 是時字畫猶有漢隸體, 知此墓田帖及官本 ‘白騎’ 等字爲非鍾筆亡疑也. 朱熹記.
법서 제사(題法書)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내가 옛날에 법서(法書)를 좋아하였지만, 필묵(筆墨)이 조금도 닮지가 않아 마침내 그만두어버렸다. 이제 이 수첩을 보니, 다시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한다. 지금 사람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 일 한 가지뿐이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지나간 것을 생각해보면,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주희 쓰다.
予舊嘗好法書, 然引筆行墨, 輒不能有毫髮象似, 因遂懶廢. 今觀此帖, 益令人不復有餘念. 今人不及古人, 豈獨此一事? 推是以往, 庶乎其能自彊矣. 朱熹書.
조조첩 제사(題曹操帖)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조조가 쓴) 이 표를 배웠다. 당시 유공보(劉共父)는 안진경의 「녹포첩(鹿脯帖)」를 막 배웠는데, 내가 고금의 자획을 가지고 그를 꾸짖자, 공보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배운 것은 당(唐)의 충신이요, 그대가 배운 것은 한(漢)의 찬적(簒賊)일 뿐이다.” 당시 대응할 말을 없어 묵묵히 있었다. 이제 살펴보니, 이것을 일러 “천도는 음탕한 자에 화를 내리니, 그 명(命)을 끝내지 않는다.” 하니, 공보의 말에 더욱 감탄한다. 회옹(晦翁).
余少時曾學此表, 時劉共父方學顔書鹿脯帖, 余以字畫古今誚之. 共父謂予: ‘我所學者唐之忠臣, 公所學者漢之簒賊耳.’ 時予黙然亡以應. 今觀此謂 ‘天道禍淫, 不終厥命’ 者, 益有感於共父之言云. 晦翁.
옥새 서(書璽)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글이다.
신 주희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황제(太祖皇帝)게서 밝은 천명을 받아 구주(九州)의 사도를 두었지만, 당시 아직 이 옥새를 얻지는 못했다. 소성(紹聖)․원부(元符) 이후 일어난 사변(事變)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신 주희 삼가 쓰다.
臣熹恭惟我太祖皇帝受天明命, 以有九有之師, 時蓋未得此璽也. 紹聖, 元符之後, 事變有不可勝言者矣. 臣熹敬書.
우군첩 제사(題右軍帖)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3월에 쓴 제사이다.
일에 따라 행하고 머무는 것은 진실로 사만(謝萬)의 가르침이지만, 우군(右軍)은 사만의 이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 어찌 자기 스스로를 살펴 알고 마침내 초연하게 멀리 떠나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편지를 반복하고서 그만두고자 하나 그만둘 수 없었다. 훗날의 군자 가운데 이러한 뜻을 아는 이가 있을 것이다. 주희 중회보(仲晦父).
隨事行藏, 固謝萬之藥石, 然右軍未必能踐斯言也. 豈其自知已審, 遂超然遠逝而不顧邪? 三復此紙, 欲罷不能. 後之君子當有識此意者. 朱熹仲晦父.
노군에게 보낸 여러 사람의 시 후 발문(跋諸人贈路君詩後)
노군(路君)은 부서진 다리에서 도적을 만나 손으로 흉포한 그를 베었으니, 그 공이 참으로 위대한데도 상을 받지 못했으니, 아는 사람들은 그를 한탄했다. 그러나 노군은 재기가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구차하지 않았으니, 끝내 불우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이 시집을 보면 기이한 단어가 많아, 나는 첨서(簽書) 심공(沈公)의 말이 유감스러웠다. 노군은 힘써 노력했을 뿐이다. 순희 임인 9월 병신, 주희 제사(題詞)하다. (심공沈公은 숙회叔晦의 존인尊人으로, 당시 월주(越州) 첨판簽判이었다. 노군路君의 이름은 엄경嚴卿으로, 일찍이 기수위蘄水尉를 지냈다.)
路君斷橋擊賊, 手斬凶渠, 其功甚偉而賞不醻, 識者恨之. 然君材氣過人, 臨事不苟, 決非終不遇者. 觀此詩卷固多奇語, 而余於簽書沈公之言爲有感也. 路君勉旃而已. 淳熙壬寅九月丙申, 朱熹題. 沈公蓋叔晦之尊人, 時爲越州簽判. 路君名嚴卿, 嘗爲蘄水尉.
유단석의 상학경 발문(跋喩湍石所書相鶴經)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12월에 쓴 발문이다.
옛날 소장하던 벽허자(碧虛子)의 상학경(相鶴經) 석본(石本)을 상당히 애지중지했었다. 이제 단석(湍石) 유공(喩公)이 쓴 글을 보니, 법도가 근엄하고 뜻이 맑으니, 그것(상학경)이 법에 매였음을 알겠다. 순희 임인 섣달 경신, 주희.
舊藏碧虛子相鶴經石本, 意頗愛之. 今觀湍石喩公所書, 法度謹嚴而意象蕭散, 知彼爲法縛矣. 淳熙壬寅臘月庚申, 朱熹.
주희진의 「악의보연왕」 발문(跋朱希眞所書樂毅報燕王書)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12월에 쓴 발문이다.
나는 예전이 우군(右軍)이 책을 복사하지 않고 하후(夏侯)의 논의를 복사한 것을 한탄했는데, 이제 옥산(玉山) 왕계로(汪季路)가 소장하고 있는 이수노인(伊水老人)이 직접 쓴 것을 보니, 노인이 얻은 게 없음이 내게도 한이 되는가? 계로(季路)는 그것을 돌에 새겨 영원토록 전하려 하니, 뜻 있는 선비가 책을 읽고 덮은 다음 눈물 흘리는 이가 마땅히 다시 있을 것임을 나는 안다. 순희 임인 12월 경신, 신안 주희 쓰다.
余嘗恨右軍不寫此書而寫夏侯之論, 今觀玉山汪季路所藏伊水老人手筆, 老人得無亦有余之恨乎? 季路將刻之石, 以貽永久, 余知有志之士當復有廢書而拉者矣. 淳熙壬寅十二月庚申, 新安朱熹書.
주․유 이공 법첩 발문(跋朱喩二公法帖)
【해제】 이 글은 순희 9년(임인, 1182년, 53세) 12월에 쓴 발문이다.
서학(書學)은 당나라 때 가장 성했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장점으로 자기를 표현했기 때문에 한(漢)․위(魏)의 해법(楷法)은 마침내 사라졌다. 송나라에 들어와, 뛰어난 선비들이 속속이 등장하였지만, 역시 당나라 사람을 법도로 삼을 뿐이었다. 황(黃)․미(米)에 이르러, 치우치고 편파적이며 광탄하고 천박한 풍조가 극에 이르렀다. 근래에 주홍려(朱鴻驢)․유공부(喩工部)가 등장하면서, 초연하게 멀리 볼 줄 알아서 천 년을 넘어 원상(元常)를 추적하니, 이것은 이미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묵각(墨刻)을 모아 이 한 권으로 만드니, 그 중에서도 「악의서(樂毅書)」․「상학경(相鶴經)」은 절륜(絶倫)이다. 다른 선비들은 어떻게 감상하는지 모르겠다.
書學莫盛於唐, 然人各以其所長自見, 而漢, 魏之楷法遂廢. 入本朝來, 名勝相傳, 亦不過以唐人爲法. 至於黃, 米, 而欹傾側媚, 狂怪怒張之勢極矣. 近歲朱鴻驢, 喩工部者出, 乃能超然遠覽, 追迹元常於千載之上, 斯已奇矣. 故嘗集其墨刻, 以爲此卷, 而尤以樂毅書, 相鶴經爲絶倫, 不知鑒賞之士以爲如何也.
응인중이 발간한 정사업 시 발문(跋應仁仲所刊鄭司業詩)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1월에 쓴 발문이다.
정(鄭) 사업(司業) 금화(金華)라 불리는 팔시(八詩)의 자상하고 온후한 기운은 필묵(筆墨)과 일상적 법도 밖에까지 꽉 차 있다. 그 문인 응군(應君) 인중(仁仲)이 돌에 새기고, 그 복사본을 내게 보내왔는데, 반복하여 읽고 감탄하니,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여, 그를 위해 눈물 흘렸다. 순희 을사 정월 경술, 주희 중회보 쓰다.
鄭司業金華被召八詩, 慈祥溫厚之氣藹然發於筆墨畦徑之外. 其門人應君仁仲刻石, 摹本見寄. 三復詠歎, 如見其人, 爲之隕涕. 淳熙乙巳正月庚戌, 朱熹仲晦父書.
장옹주 묘지명 발문(跋蔣邕州墓誌銘)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2월에 쓴 발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장경부의 유문(遺文)를 읽고 그가 기록한 장옹주(蔣邕洲)의 사건을 보았는데, 늘 장군(蔣君)의 사람됨을 자세히 알 수 없어 한탄하였다. 하루는 신임 유현(攸縣) 장령(蔣令)이라는 사람이 내가 있는 곳을 지나면서 인사차 찾아와 장안국(張安國)이 서술한 선조의 묘문을 보여주었는데, 바로 옹주공(邕州公)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기뻐서 재빨리 몇 차례 읽었는데,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또 유문잠(劉文潛)이 쓴 발어(跋語)을 보고, 군(君)의 사랑이 백성에 있었고 오래도록 시들지 않았음을 또 알았다. 아! 세상에 진실로 인재가 없었던 적은 없다. 단지 궁황한 마을에서 태어나 스스롤 진발하지 않았을 뿐이며, 또 스스로를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아 세상의 명예를 취하려 하지 않아 마침내 땅에 몸을 가라앉히듯[陸沉] 낮은 자리에 머물렀으니, 그가 한 바를 캐는 이가 거의 없었다. 군(君)과 같은 재주에, 만년에 비록 소시(小試)에 응시했지만, 그 지업(志業)이 어찌 이미 응시한 시험만으로 다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문잠(文潛)이 논한 시문의 성률(聲律)만 가지고 인재를 뽑기 때문에 어질고 현명한 인재가 버려지는 폐단은 사람들의 뜻과 부합한다. 장경(章卿)이 유현(攸縣)을 칭하면서 일찍이 영서의 염법을 논한 것으로 인해 묻고, 또 옹주의 가법이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이 기쁘다. 탄식을 그치지 못하고 문득 그 뒤에 이렇게 기록한다. 순희 을사 2월 경진, 신안 주희.
始予讀張敬夫遺文, 見所記蔣邕洲事, 常恨不得蔣君爲人之詳. 一日, 有新攸縣蔣令者過門枉顧, 出張安國所述其先墓文, 則邕州公也. 予驚喜, 疾讀數過, 不能去手. 又觀劉文潛跋語, 則又知君之遺愛在人, 久而不衰也. 鳴呼!世固未嘗無材也. 惟其生於窮荒下邑, 旣無以自振, 而又知自貴重, 不肯希世取寵, 遂以陸沉下僚, 不及究其所有者爲不少矣. 如君之材, 晩雖小試, 然其志業豈遽盡於其所已試者而已耶? 是可哀已. 文潛所論聲病綴絹遺賢之弊, 尤與人意合. 章卿稱攸縣嘗論嶺西鹽法, 因得扣焉, 又喜邕州家法之未泯也. 嗟嘆不已, 輒記其後云. 淳熙乙巳二月庚辰, 新安朱熹.
정위민 유사 발문(跋鄭威愍遺事)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3월에 쓴 발문이다.
정위민공(鄭威愍公)은 병약한 군졸들을 이끌고 외롭게 성을 지키며 폭도들에게 저항하다가 인근의 원조도 끊긴 채 마침내 순절하였다. 나는 포상하고 추증하는 조서(詔書)와 그 집안에서 조각한 묘명(墓銘)을 읽고 반복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충의(忠義)의 본성은 인심의 병이(秉彝)에서 나오니, 이름을 책(策)에 써 임금 앞에 신하 노릇할 것을 선서(宣誓)하여 인군을 섬기는 것은 익숙하게 강론한 것이다. 내가 보건대, 옛날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한 때 사대부들은 몸을 바쳐, 정공과 같이 죽음으로써 관리로서의 직책을 지킨 이가 오히려 적은 것은 어찌 평소에 의리의 분별이 불분명하고 취사가 부정하니 하루아침에 삶은 탐내고 죽음을 두려하면서 오직 이익만 좇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아! 정공과 같은 이는 그 본심을 얻어 신하의 의리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만하다. 이는 단지 사적으로 정씨의 자손 뿐만 아니라 진실로 국가가 마땅히 크게 권장하고 포상하고 기록하여 신하된 이들에게 권면하여 사모하고 감격하여 그 충의의 양심을 일으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삼가 그 뒤에 기록하여 보는 이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순희 을사 3월 갑신 초하루, 신안 주희 쓰다.
鄭威愍公擁羸卒, 守孤城, 以抗暴起方張之虜, 鄰援旣絶, 遂以身殉. 予讀褒贈詔書及其家刻墓銘, 未嘗不三復流涕也. 夫忠義之性出於人心之秉彝, 策名委質以事人者, 其講之宜熟矣. 而吾觀於前日中原之禍, 一時士大夫出身狥國, 死其官守如鄭公者何少也. 豈非義利之分不素明, 取舍之極不素定, 一旦倉卒, 則貪生畏死而惟利之從哉? 鳴呼!如鄭公者, 可謂得其本心而無愧於臣人之義矣. 是固有國家者所宜殷勤褒錄, 以爲臣子之勸, 使其有所鄕慕感激而興起其忠義之良心, 非獨以私於鄭氏之子孫而已也. 因竊敬識其後, 以告觀者云. 淳熙乙巳三月甲申朔, 新安朱熹書.
미원장 서첩 발문(跋米元章帖)
미로(米老)의 글은 마치 재갈 풀린 천마와 같아서 바람과 번개 같으니, 비록 치달리는 모범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모름지기 통쾌하다. 주군(朱君)이 소장한 이 책은 더욱 분방(奔放)하고, 베껴 쓴 유무언(劉無言)의 시 역시 기이한 말이 많으니, 참으로 보배라 할만하다. 순희 을사 3월 그믐, 건양 서산 경북승사를 바라보면서, 주희 중회보.
米老書如天馬脫銜, 追風逐電, 雖不可範以馳驅之節, 要自不妨痛快. 朱君所藏此卷尤爲奔軼, 而所寫劉無言詩亦多奇語, 信可寶也. 淳熙乙已三月晦日, 朱熹仲晦父觀于建陽西山景福僧舍.
구양문충공집고록 발미 후서(書歐陽文忠公集古錄跋尾後)
【해제】 이 글은 순희 11년(갑진, 1184년, 55세)에 쓴 서문이다.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의 집고(集古)에 수록된 것은 대략 천 권이다. 지난번 그의 증손 당세(當世)의 집에서 200본(本)을 보았는데, 다만 발미(跋尾) 및 한 두 공(公)의 제자(題字)에서 그 석각(石刻)은 이란(離亂)를 거친 후에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제 이 사지(四紙)를 보니, 조덕보(趙德父)가 오면서부터, 숭녕(崇寧) 년간에 이미 흩어져버렸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것이 초고이겠는가? 문집에 실린 것을 가지고 교열해보니, 대부분이 틀리고 탈락했으니, 이것이 마땅히 맞을 것이니, 양군집비(楊君集碑)는 문집(文集)에 없다. 다만 ‘중종(中宗)’을 ‘중종(仲宗)’이라 쓰고, ‘건무지원(建武之元)’을 ‘효무(孝武)’라 쓴 것은 아마도 잘못 쓴 것 같다. 그러나 덕보가 평생동안 스스로 편집한 금석록(金石錄) 역시 2,000권으로 또 문충공(文忠公)보다 배가 많은데, 지금 다시 어디에 있는가? 공(公)의 이른바 “군자의 가르침은 쇠퇴하지 않으며, 사물에 의탁하여 전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참으로 말을 아는 것이다. 반복하여 탄식하노라. 순희 9년 중(重) 5일, 영천(穎川) 한원길 쓰다.
歐陽文忠公集古所錄, 蓋千卷也. 頃嘗見其曾孫當世家尙二百本, 但跋尾及一二名公題字, 其石刻, 謂離亂之後逸之爾. 今觀此四紙, 自趙德父來, 則在崇寧間已散落也. 不然, 豈其稿耶? 以校文集所載, 多訛舛脫略, 是當爲正, 而楊君集碑文集則無. 惟 ‘中’ 字作 ‘仲’, ‘宗’, ‘建武之元’ 作 ‘孝武’, 恐却乃筆誤也. 然德父平生自編金石錄亦二千卷, 又倍於文忠公, 今復安在? 公所謂 ‘君子之垂不朽, 不託於事物而傳’ 者, 眞知言哉. 三復歎息. 淳熙九年重五日, 穎川韓元吉書.
집고(集古) 발미(跋尾)는 진적교인본(眞蹟校印本)에 다른 부분이 있는데, 한공(韓公)이 그것을 자세하게 논하였다. 그러나 「평천초목기(平泉草木記)」 발문 뒤에는 오히려 60-70자가 있으니, 문요(文饒)가 부귀에 처하고 권리를 따르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탐내어 재앙을 부르고 무너진 것을 깊이 꾸짖는 말이 더욱 긴요하고 절실하니,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경계가 될만하다. 또 그 문세(文勢)가 여기에 이르러 귀결처가 있다. 또 “귀곡의 술책은 능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 다음에 인본(印本)에는 역시 ‘야(也)’자가 없다. 무릇 이러한 의문들은 모두 마땅히 인본(印本)을 맞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년 4월 기망, 주희 기록하다.
集古跋尾以眞蹟校印本, 有不同者, 韓公論之詳矣. 然平泉草木記跋後印本尙有六七十字, 深誚文饒處富貴, 招權利而好奇貪得, 以取禍敗, 語尤緊切, 足爲世戒. 且其文勢至此乃有歸宿. 又 ‘鬼谷之術所不能爲者’ 之下, 印本亦無 ‘也’ 字. 凡此疑皆當以印本爲正云. 十二年四月旣望, 朱熹記.
「화산비(華山碑)」의 ‘중종(仲宗)’자에 대해서는, 홍승상(洪丞相)의 예석(隷釋)이 변론했는데, 석각본(石刻本)에서 가차용(假借用)한 글자로 구공(歐公)이 잘못 쓴 게 아니다.
華山碑 ‘仲’, ‘宗’ 字, 洪丞相隷釋辨之, 乃石刻本文假借用字, 非歐公筆誤也.
주원옹 수첩 발문(跋周元翁帖)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여름에 쓴 발문이다.
법양(法楊)이란 사람은 늙어서도 독서를 그치지 않았고, 논의도 매우 올곧았다. 늘 말하기를, 농가에 100전과 몇 말의 곡식이 남으면 반드시 그것을 저장했다가 중에게 줘버리니, 백성들이 어떻게 굶주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산에 살면서 토목을 경영하지 않았고, 그의 무리들도 출구(出勾)시키지 않고, “나는 차마 백성을 좀먹는 벌레 같은 이들을 도울 수 없다.”고 말했다. 권력가나 귀인들이 요구해도 조금도 주지 않았지만, 흉년이 들면 죽을 끓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살렸다. 이런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공(公)께서 병서(倂書)해 주실 수 있는지요? (이는 육창(陸倉)이 선생에게 보낸 글이다.)
法楊者讀書至老不輟, 持論甚正. 常云農家有百錢斗粟之贏, 必謹藏之, 與僧乃已, 民安得不貧? 故其住山不營土木, 不遺其徒出勾, 曰吾不忍助民蠹也. 權貴人有所求, 一毫不予, 而凶年作糜粥, 以活人饑者. 豈易得哉!豈易得哉!願公倂書之, 可乎? (此乃陸倉與先生書.)
명주(明州) 대매로(大梅老) 법양(法楊)이란 사람은 고(故) 용도각(龍圖閣) 학사(學士) 정공(鄭公) 향(向)의 증손(曾孫)으로 주원옹 수첩(周元翁帖)과 그 선조의 수서(手書) 한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어서, 일찍이 내게 발미(跋尾)를 구해달라고 산음(山陰) 육무관(陸務觀)에게 부탁하였는데, 미처 내게 보내기도 전에 법양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무관(務觀)은 편지를 써서 보내고, 또 법양이 이미 세상을 떠난 까닭에 이 두루마리는 둘 데가 없으므로 필사를 마치면 염계서당에 보내 보관하기 바란다고 했다. 원옹(元翁)의 시와 문장의 아름다움은 나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많은 선배들이 이미 칭찬하였다. 그 말을 음미해보면, 노선생의 학문의 전수가 전적으로 정씨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참으로 칭찬할만하다. 양공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무관이 칭한 바와 같다면, 그 옛 집안의 유풍을 알 수가 있는데, 어찌 여기에서 중이 되었다는 것을 후회하여 돌아가지 못했겠는가? 이 또한 거듭 탄식할만하다. 무관(務觀)의 별지(別紙)의 서찰(筆札)은 정밀하고 신묘하며, 뜻은 고원하니, 양공이 의지한 것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 부분을 떼어내 수첩에 덧붙이이고 그 뒤에 기록한다. 순희 을사 한여름 기망, 운대은리(雲臺隱吏) 주희 중회보 쓰다.
明州大梅老法楊者, 故龍圖閣學士鄭公向之曾孫也. 藏周元翁帖與其先世手書一軸, 嘗屬山陰陸務觀求予跋尾, 未及遣而下世. 務觀乃以書致之, 且言楊旣死, 此軸無所付, 寫畢願爲送濂溪書堂藏之. 元翁詞翰之美, 前輩已多稱之, 無所俟於予言者. 獨味其言, 知老先生之學之傳乃專在於程氏, 此可歎也. 楊公雖不及識, 然如務觀所稱, 則其故家遺俗猶可想見, 豈亦自悔其失身於此, 而不能有以自還也耶? 此又重可歎也. 務觀別紙筆札精妙, 意寄高遠, 楊公所賴以不朽, 蓋有在於是者. 因剟以附卷中而識其後云. 淳熙乙已孟夏旣望, 雲臺隱吏朱熹仲晦父書.
호담암이 쓴 이승지의 논어설서 발문(跋胡澹菴所作李承之論語說序)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6월에 쓴 발문이다.
“경전에 통달한 선비는 진실로 마땅히 죽을 때까지 말을 실천하여야 배운 바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 말의 요점은 학자들을 경계함이 참으로 깊고 간절하다 할만하다. 그러나 선비가 반드시 경전에서 통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성현의 가르침을 강구하고 밝혀 종신토록 실천하는 자료로 삼다는 것이지, 한갓 장구나 나누고 쪼개는 것이 경전에 통달하는 것이라고 여긴 뒤에 말을 실천하여 그것을 실증하는 것은 아니다. 여릉(廬陵)에서 온 이군(李君) 승지(承之)가 담암선생(澹菴先生) 호공(胡公)이 쓴 논어해서(論語解序)를 꺼내 보여주는데, 옷깃을 여미고 반복하여 읽고 마치 음지(音旨)를 받들듯이 했다. 감히 헤아려 그 남은 뜻을 추론하여 권말에 덧붙인다. 다행히 이군이 어리석은 나의 말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선생이 추숭송양(推崇頌揚)하고 기대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순희 을사 6월 을축, 신안 주희 삼가 쓰다.
通經之士固當終身踐言, 乃爲不負所學, 斯言之要, 所以警乎學者可謂至深切矣. 然士之必於通經, 正爲講明聖賢之訓, 以爲終身踐履之資耳, 非直以分章析句爲通經, 然後乃求踐言以實之也. 李君承之來自廬陵, 出示澹菴先生胡公所爲作論語解序, 歛袵三復, 如奉音旨. 敢竊推其餘意, 以附卷尾. 李君幸以愚言思之, 則庶乎知先生所以推揚期待之意矣. 淳熙乙巳六月乙丑, 新安朱熹敬書.
호담암과 이승지 시 발문(跋胡澹菴和李承之詩)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6월에 쓴 발문이다.
촉(蜀) 지방 출신인 이군(李君) 승지(承之)가 이곳을 지나면서 내게 들려 시 한 편(編)을 보여주었는데, 글이 자유분방하면서도 구율(句律)은 근엄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지런하도록 만든다. 중간에 담암선생(澹菴先生) 호공(胡公)이 다른 사람들과 시를 주고받은 화장(和章) 한 권을 내놓는데, 모두 직접 손으로 쓴 것이었고, 또 그의 시가 뛰어나 당시 이미 이와 같이 유명해서 유행했고 존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지난 해 임안에서 선생을 한 번 만났지만, 그 뒤에 마침내 천거를 받았지만 어떻게 나의 시를 평했는지 알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은 선생이 그 시를 보고 기뻐했다고 했다. 생각하건대, 이제는 쇠락하여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는데, 이군(李君)이 종횡으로 해박하게 변론하여 서남이병(西南利病)을 궁구하여 아니, 대개 시에 심오하지 않으면 역시 다시 어려움에 빠지고 피로한 길에 드니, 어찌 선생이 이와 같은 이들(나와 이군처럼 곤궁한 이들)과 더불어 시를 논할만하다고 하였겠는가? 선생을 다시 볼 수 없음을 개탄하면서 깊이 탄식하고 그 뒤에 이렇게 쓴다. 순희 을사 6월 을축, 신안 주희 쓰다.
蜀人李君承之見過山間, 示詩一編, 詞源奔放而句律謹嚴, 讀之令人亹亹不厭. 間出澹菴先生胡公和章一卷, 皆其手筆, 又知君詩之勝, 已爲名流知重如此也. 因復自念頃歲嘗得一見先生於臨安, 其後遂叨薦寵, 而不知所以得之, 或者以爲先生嘗見其詩而喜之也. 顧今衰落, 惠許不酬, 而李君辯博縱橫, 究知西南利病, 蓋不但深於詩者, 亦復流落艱難, 疲於道路, 豈先生所許以爲可與言詩者例如此耶? 慨念先生不可復見, 因太息爲書其後云. 淳熙乙巳六月乙丑, 新安朱熹書.
송군 충가집 발문(跋宋君忠嘉集)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7월에 쓴 발문이다.
장주(莊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운명이며, (자식의) 마음에서 그것을 풀어버릴 수는 없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일은 의리이며, 어디를 가나 군주는 군주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 말을 명언이라 한다. 그러나 내가 논하건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인과 군주와 신하 사이의 의가 하늘에서 부여한 본연 아님이 없어서 백성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떳떳함인데, 그는 단지 부자(父子)만 자연(自然)으로 삼고, 군신 사이의 관계는 특별한 사세(事勢)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니, 어찌 그렇겠는가? 이제 동해(東海) 송군(宋君)의 사건을 읽어보니, 그가 몸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칼날과 창끝을 밟고 위난을 겪으며 여러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후회하지 않으며, 그리고 하루 아침에 처자를 버리고 떠나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재난을 당하니, 곤궁함이 극에 이르렀고, 이름을 바꾸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부흥시킬 생각을 잊지 않았으니, 어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한 것이겠는가. 이 점에 볼 때, 군신 사이의 의리는, 내가 논한 바와 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군주를 없이 한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과 같은 장생(莊生)의 사악한 학설은 변론하지 않아도 저절로 명백한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송군(宋君) 사건의 본말을 보면, 오히려 그의 선구적이고 늠름한 기상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괘검(挂劍)의 장에 이르러서는 말이 더욱 비장하여 읽을 때마다 눈물 흘리고 깊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에 앞서, 천자께서 송군의 유충(遺忠)을 기록하여 그의 아들 남강(南强)에 벼슬을 내렸는데, 남강은 지금 남검의 사현(沙縣)인데, 지방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하니, 역시 아버지의 충의(忠義)의 가르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다. 순희 을사 7월 경술, 신안 주희 쓰다.
莊周有言, 子之愛親, 命也.不可解於心; 臣之事君, 義也, 無適而非君也, 無所逃於天地之間. 古今以爲名言. 然以予論之, 父子之仁, 君臣之義, 莫非天賦之本然, 民彝之固有, 彼乃獨以父子爲自然, 而謂君臣之相屬特出於事勢之不得已, 夫豈然哉? 今讀東海宋君之事, 觀其出身以報國家之讎, 履鋒鏑, 蹈危難, 濱九死而不悔, 及其一旦棄妻子去, 以逃左袵之禍, 則窮困極矣. 而變易姓名, 猶不能忘於國家興復之念, 夫豈有所不得已而强爲之哉? 於此觀之, 則君臣之義如吾所論, 無可疑者. 而莊生爲我無君, 禽獸食人之邪說, 亦可以不辨而自明矣. 抑觀諸人所記宋君本末, 猶可以想見其魁奇磊落之氣. 至於挂劍之章, 語尤悲壯, 則每讀之, 未嘗不流涕太息也. 先是, 天子錄君之遺忠, 官其子南强, 而南强今爲南劍之沙縣, 治甚有聲, 其亦思有以不墜其先人忠義之敎乎哉!淳熙乙已七月庚戌, 新安朱熹書.
범문정공의 송두군시 발문(跋范文正公送竇君詩)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8월에 쓴 발문이다.
돗 단배 한 척 날아가니 마치 가벼운 기러기처럼, 한 차례 봄 비 썰물처럼 제(淛)의 동쪽으로 지나가네. 왕(王)․사(謝)의 강산은 오래도록 해맑으니, 자진(子眞)이 이제 맑은 바람을 일으키네.
片帆飛去若輕鴻, 一霎春潮過淛東. 王謝江山久蕭索, 子眞今爲起淸風.
위는 범문정공의 시이다. 은위(鄞尉) 청사에 벽기(壁記)가 없어 두군(竇君)이 어디 사람인지 관직에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범공이 이와 같이 칭찬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보통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죽고나서 없어져버렸는데도 적지 않게 세상에 보이는 것은 왜 그런가? 신안(新安) 등린(滕璘) 덕수(德粹)가 그 관직을 이어받아 지키면서, 이 시는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돌을 갈아 관사에 세우고 글을 요청하여 거기에 새긴 것이다. 순희 을사 8월 임술, 같은 군(郡) 주희 쓰고, 그 뒤에 기록하다.
右范文正公詩也. 鄞尉廳無壁記, 竇君不知何許人及居官歲月. 然爲范公所與如此, 必非常流矣. 而卒泯滅, 不少槪見於世, 何哉? 新安滕璘德粹嗣守其官, 以是詩爲不可無傳也, 礱石治舍, 請書而刻之. 淳熙乙巳八月壬戌, 同郡朱熹書而記其後云.
계상옹집 발문(跋溪上翁集)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9월에 쓴 발문이다.
수강(須江) 엄백분(嚴伯奮)이 찾아와 그의 선군자(先君子)인 계상옹(溪上翁)의 유문(遺文) 세 편(編)을 내놓았는데, 뒤에는 당시 여러 현자들의 매우 상세한 제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그와 같은 해에 진사가 되었는데, 예전에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 이제 그의 글을 읽어보니 글이 활기차고 분방하여, 사정(事情)을 매우 자세하게 적었으니 어려움과 고난의 태도는 없다. 사육(四六)․오칠언(五七言)의 시는 우형(尤兄) 연지(延之)가 그 오묘함에 대해 이미 아주 자세하게 품평하였다. 그 가운데 ‘몽중(夢中)’이란 시는 장사업(張司業)․양소윤(楊少尹)의 문집에 두어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역시 근래에 보기 드문 걸작이다. 백분(伯奮)이 서문을 써달라고 하였는데, 때마침 내가 큰 병 때문에 어지럽고 어두워 깊이 생각할 수가 없어서 이와 같이 그 뒤에 제사를 써주고 그를 돌려보냈다. 순희 12년 9월 23일, 신안 주희 쓰다.
須江嚴伯奮來訪, 出其先君子溪上翁遺文三巨編, 後有當世諸賢題識甚詳. 熹於翁爲同年生, 前此未獲相識. 今讀其文汪洋放肆, 究極事情, 而無艱難辛苦之態. 至於四六, 五七言, 則尤兄延之題品發明又已曲盡其妙. 其夢中一詩, 置之張司業, 楊少尹集中, 殆無以辨, 信亦近世之佳作也. 伯奮求序, 適予大病眩瞀, 不能致思, 爲題其後如此而歸之. 淳熙十二年九月二十三日, 新安朱熹書.
반현보자서 발문(跋潘顯甫字序)
내가 15, 16살 적에 병산(屛山) 유선생(劉先生)께서 내게 원회(元晦)라는 자를 지어주시고 축하해 주었는데, 그 말이 다음과 같다. “나무의 뿌리는 어두운 데 있으나, 봄에는 빛을 받아 번성하게 자라네. 사람도 그 몸 속은 어두우나, 정신이 속살에서 밝히네.”나는 그 말을 받고도 힘써 실천하지 않아 세상을 살면서 잘못을 범하고 좌절하여 돌아온 이후에야 그 말에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았다. 영천공(穎川公)이 반씨의 아들에게 써 준 현보자설(顯甫字說)을 읽고, 홀로 다시 느낀 바가 있어 길게 탄식하면서 그 뒤에 기록한다. 현보가 그것을 보고 나를 경계로 삼는다면, 스승과 부모의 가르침에 가까울 것이다. 이 해 겨울 10월 임자, 신안 주희 쓰다.
余年十六七時, 屛山劉先生字余以元晦而祝之, 其詞曰: ‘木晦於根, 春容曄敷. 人晦於身, 神明內腴.’ 余受其言而行之不力, 涉世犯患, 顚沛而歸, 然後知其言之有味也. 讀穎川公所爲潘氏子顯甫字說, 竊獨重有感焉, 爲之太息而識其後. 顯甫視之而能以予爲戒, 則於父師之訓其庶幾矣. 是歲冬十月壬子, 新安朱熹書.
사간재소작정재명 발문(跋謝艮齋所作靜齋銘)
【해제】 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년, 56세) 10월에 쓴 발문이다.
간재(艮齋)는 장양(長陽) 충회선생(冲晦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 종지(宗旨)를 얻었고 열심히 후학을 가르쳤다. 그가 인을 추구하는 공부를 논한 것이 이와 같으니, 자산(子山)에게 기대한 바와는 거리가 멀다. 자산 역시 하루 동안의 공부로 이 명(銘)을 빈말이 되지 않게 할 수 있었겠는가? 책 속에는 동갑내기 조언덕(趙彦德)의 제자(題字)가 있는데, 그것을 보면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니 감회가 더욱 깊다. 순희 을사 10월 갑인.
艮齋受學長陽冲晦先生之門, 得其宗旨, 訓誘後學, 孜孜不倦. 其論求仁功夫如此, 所以期於子山者遠矣. 子山盍亦有以用其一日之力, 使斯銘者不爲虛語乎哉? 卷中又有同年趙彦德題字, 覽之如見其人, 益深存沒之感. 淳熙乙巳十月甲寅.
고후사기 후 제사(題顧侯射記後)
【해제】 이 글은 순희 13년(병오, 1186년, 57세) 7월에 쓴 제사이다.
고후(顧侯)는 특수한 과목에 스스로 분발하여 활쏘는 솜씨가 정밀하고 절묘하다고 나는 오래 전에 들었는데, 한 번 만나지도 못했는데 고후는 만기가 되어 떠나버렸다. 하루는 산간에 와서 이 기문을 꺼내 읽으면서, 한때 번개처럼 빠르고 정확하며 함께 웃고 담소하는 즐거움을 생각해보니, 그의 초대를 받아 손님으로 가보지 못한 것이 더욱 후회스럽다. 원수 오랑캐가 비록 쇠퇴하기 했지만, 옛 강토를 아직 회복하지 못했으니, 고후가 노력하면 성주께서 가르치고 이루려는 뜻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순희 병오 7월 7일, 운대외사(雲臺外史) 주희 쓰다.
顧侯以殊科自奮, 射藝精絶, 予久聞之. 未得一寓目, 而侯以秩滿去矣. 一日來山間, 出此記, 讀之, 想見一時星飛的破, 起坐諠譁之樂, 尤恨不得爲坐上客也. 讎虜雖衰, 故疆未復, 侯其勉旃, 有以副聖主敎訓作成之意云. 淳熙丙午七月七日, 雲臺外史朱熹書.
이수옹 유묵 발문(跋李壽翁遺墨)
【해제】 이 글은 순희 13년(병오, 1186년, 57세) 9월에 쓴 발문이다.
한퇴지(韓退之)의 말과 글은 있는 힘껏 불가와 도가를 배척한다. 그러나 그의 「사조주표(謝潮州表)」․「답맹간서(答孟簡書)」 및 장적(張籍)의 유전(侑奠)의 글을 읽어보면, 화복(禍福)과 사생(死生)의 문제에 대한 그의 처신은 이학(異學)의 무리들에게 부끄러운 부분이 많아서 마음으로부터 깊이 따를 수가 없다. 시랑(侍郞) 이공(李公)은 죽을 때까지 역을 연구하고 평소에 이단의 가르침을 깊이 배척하였고, 위로는 천지의 변화와 만물의 시원, 군신부자의 도리와 성명(性命)의 이치, 삶과 죽음의 이론과 이세상과 저세상의 연고는 역에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단의 학설인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말에서 구하려 하다가 세속화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 말이 비록 간략하지만 공로는 실로 한퇴지의 곱절은 된다. 그이 평생에 걸친 위대한 절개는 나아감과 물러남, 간난함과 이치를 따름에 하나도 유감이 없이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초연하니, 이는 유학의 도를 지키고 따르는 사람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니 그의 말이 망령되지 않음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역에서 말한 “묵묵히 이루면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고 한 것은 바로 공(公)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공을 따라 배우지는 못했지만, 공이 깊고 두텁게 보살펴주었다. 그의 아들 정부(正夫)가 그 절필을 보여주어 받들어 읽어보고, 가만히 그 뒤에 이렇게 적는다. 순희 병오 9월 갑진 초하루.
韓退之著書立言, 觗排佛老不遺餘力. 然讀其謝潮州表, 答孟簡書及張籍侑奠之詞, 則其所以處於禍福死生之際, 有愧於異學之流者多矣, 其不能有以深服其心也宜哉. 侍郞李公玩心於易以沒其身, 平居未嘗深斥異敎, 而間獨深爲上言, 天地變化, 萬物終始, 君臣父子夫婦之道, 性命之理, 幽明之故, 死生之說, 盡備於易, 不當求之無父無君之言, 以傷俗化. 其言雖約, 而功實倍於韓子. 至其平生大節, 則不惟進退險夷一無可憾, 而超然於生死之際又如此, 此足以明吾道之有人而信其言之不妄矣. 易所謂 ‘黙而成之, 不言而信’ 者, 其公之謂歟? 熹不及從公遊, 而蒙公見與甚厚. 其子正夫視以絶筆, 因得捧讀而竊識其說於後云. 淳熙丙午九月甲辰朔.
임백기 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소유적 발문
(跋任伯起家藏二蘇遺蹟)
【해제】 이 글은 순희 14년(정미, 1187년, 58세) 7월에 쓴 발문이다.
원풍 년간, 서남 오랑캐와 변방의 관리를 만나지 못해 또 새로운 일이 생겼다. 당시 미산(眉山) 임공(任公) 급(伋) 자(字) 사중(師中)이 노주(瀘州) 태수였는데, “나는 굽고 저 사람은 곧으니, 더불어 본받을 수 없다.”고 하고, 하나에만 힘쓰면서 은혜와 믿음으로 그들을 달래고 회유했다. 이미 명을 받았는데, 어사란 자가 그 약속을 어기고 공적을 가로챘다. 공은 그에 대해 하소연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 후 군사가 출동했지만 과연 여러 차례 패했다. 천자가 진노하여 군관을 모두 목베었는데, 부사는 자신에게 닥치는 것이 두려워 도리어 공을 무고하여 요행히 화를 면했다. 유사가 있어 여러 가지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공은 죽었다. 그 아들이 세 차례 조정에 하소연했으나 끝내 신원되지 않았다. 그러나 임씨 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용각공(龍閣公)은 마침내 굽히지 않는 강직함으로 세상에 나갔다. 이제 그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두 소공(蘇公)의 글과 기록, 시편(詩篇)이 매우 많고, 시는 오히려 진적(眞蹟)인데, 노주의 사건에 대해 도리어 더욱 자세하게 뜻을 다하였다. 용각의 증손 희이(希夷)가 돌에 새겨 자손에게 보이고 내게 그 서문을 부탁했다. 임공 당시의 뜻은 그 당연한 사리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던 것 뿐이지 지금 바랄만한 이름은 아니며, 나중에 요행히 복이 되어 그렇게 한 것이다. 이제 그것을 보자면, 그 효과가 이와 같으니, 어찌 역에서 말하는 “육이(六二)는 밭 갈지 않고서도 수확하며 1년 된 밭을 만들지 않고서도 3년 된 밭이 되니, 갈 바를 둠이 이롭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 일을 이와 같이 기록하여, 나중에 군자들이 고찰할 수 있도록 한다. 순희 정미 7월 기유, 신안 주희 쓰다.
元豐間, 西南夷與疆吏不相得, 怒且生事. 時眉山任公伋字師中守瀘州, 曰: ‘我曲彼直, 不可與校.’ 務一以恩信撫柔之. 已聽命矣, 而部使者或壞其約以邀功. 公爭之不得, 其後師出, 果屢敗. 天子震怒, 將吏皆伏誅. 使者懼幷及, 則反誣公以幸免. 事下有司, 雜治未竟而公沒. 其子三訴於朝, 卒不得伸. 然任氏自此世有聞人, 而龍閣公遂以剛直不撓進爲於世. 今其家藏兩蘇公文記詩篇甚衆, 蓋詩猶眞蹟, 而於瀘事尤反復致意焉. 龍閣之曾孫希夷將刻石以視子孫, 而屬予序之. 予惟任公當日之意, 知其事理之當然而不得不然耳, 非以今名之可慕, 後福之可邀而爲之也. 而以今觀之, 其效乃如此, 豈易所謂 ‘不耕穫, 不菑畬而利有攸往’ 者耶? 因記其事如此, 後之君子有以考焉. 淳熙丁未七月己酉, 新安朱熹書.
등남부계당집 발문(跋膝南夫溪堂集)
【해제】 이 글은 순희 14년(정미, 1187년, 58세) 9월에 쓴 발문이다.
무원현(婺源縣)은 외지고 산세가 유난히 굽고 산과 고개가 중복되는 사이에 있는데, 100여년 동안 뛰어난 인재가 가끔 나왔으니, 예를 들면 한림(翰林) 왕공(汪公) 및 우리 할아버지 태사공(太史公) 같은 이들로 모두 학문과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호전(戶掾) 등공(滕公)은 조금 뒤에 태어나긴 했지만, 그 재주와 뜻이 또래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빙하자면, 땅을 디디면 천 리를 달리는 명마가 바야흐로 현인(韅靷)을 걸고 화란(和鸞)을 울리며 두 분을 본받아 치달려 하였는데, 불행하게 일찍 죽고 말았다. 평생 동안 남긴 글이 열에 하나도 안 되어서 시랑 여공(呂公) 인보(仁父)가 그 서문을 써주었다. 그러나 대부분 일시적 작품들이어서 그의 뜻이 담긴 것을 보기엔 부족하다. 아아! 등공의 뛰어난 재주가 오랜 수명을 얻고 게다가 사방에서 훌륭한 스승과 벗을 만나 자신의 뜻을 충족시켰다면, 그가 성취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순희 정미년에 그 형의 자손인 인(璘)이 숭안으로 나를 찾아와 그 문집과 이 전기를 꺼내 보여주니, 길게 탄식하고 그 뒤에 이렇게 쓴다. 전기에서는 공(公)이 일찍이 책을 써서 화(和)․전(戰)․수이해(守利害)를 논하는 많은 말을 하였고, 그 말은 참으로 훌륭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문집에서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 전기를 쓴 이(李)의 문장은 필력이 분방하고 법도가 근엄하여, 독자가 당시 친구가 함께 강론하고 토론하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9월 병진, 이인(里人) 주희 쓰다.
婺源爲縣窮僻, 斗入重山複嶺間, 而百十年來, 異材間出, 如翰林汪公及我先君子太史公, 皆以學問文章顯重於世. 至戶掾滕公, 雖稍後出, 然其才志傑然, 遠過流輩. 譬如汗血之駒, 墮地千里, 方將服韅靷, 鳴和鸞, 範其馳驅以追二公之逸駕, 則不幸而短命死矣. 平生遺文在者, 不能什一, 故侍郞呂公仁父嘗爲之序云. 然多一時應用之作, 未足以見其志之所存也. 鳴呼!以滕公之才之傑, 使得永年, 益求師友於四方以充其志, 則其所就豈止此而已哉? 淳熙丁未, 其兄璘訪予崇安, 出其集與此傳示予, 因太息而書其後. 傳言公嘗爲書萬言, 論和戰守利害, 其言甚偉. 今亦不見集中, 甚可惜也. 李丈此傳筆力奔放而法度謹嚴, 讀者可以想見當時朋友切磋之盛云. 九月丙辰, 里人朱熹書.
빙군가장 당고 발문(跋馮君家藏唐誥)
【해제】 이 글은 순희 14년(정미, 1187년, 58세) 11월에 쓴 발문이다.
황소(黃巢)의 난, 당 희종은 성도(成都)로 옮겨 거처하면서 왕탁(王鐸)․정전(鄭畋)을 재상으로 삼아 협력하여 도적을 토벌하도록 했다. 왕탁은 도통(都統)으로 격문을 돌려 여러 도(道)의 병사를 서기(西畿)로 모아 주질(盩厔)에 주둔하자 도적들의 세력이 마침내 쇠퇴하였고, 끝내는 황소를 축출하여 장안을 수복하였다. 이제 빙군(馮君)의 고신(告身)에 중화(中和) 2년 11월 하(下)라는 것을 보니,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거기에 ‘우도(右都)’라 한 것은 곧 서기(西畿)이다. 거기에 ‘이부행재지인(吏部行在之印)’이라 한 것은 바로 성도행성(成都行省)이다. 거기에 ‘태위겸중서령이사(太尉兼中書令而使)’란 한 것은 구사(舊史로 고찰해 보면 바로 왕탁(王鐸)이고, 신사(新史) 「탁전(鐸傳)」에는 검교사도(檢校司徒)라 되어 있는데 이는 착오이다. 거기에 ‘사공겸문하시랑(司空兼門下侍郞)․동평장사(同平章事)’란 한 것은 정공(鄭公)임에 틀림없으니, 그 관칭(官稱)이 두 사(史)서․통감(通鑑)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통감에는 군사가 주둔했던 여러 도의 지명이 매우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복건만 없는 것은 도(道)의 거리가 멀고 나중에 왔기 때문에 서열이 미치지 못한 것 아니겠는가. 아니면 장수가 비천하고 군사가 적어서 생략해 버린 것일까? 대개 복건이 속해 있는 민(閩) 지방은 곤궁하고 멀고 험해서, 그 당시에 장차 병사를 파견하는 명령을 받으면 국난으로 달려가지만, 빙군(馮君)은 또 그를 위해 사람들을 통솔하여 이끌고 수 만리 험난한 길로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공이 비록 크게 빛나지는 않지만, 그 충성스러움은 남음이 있다. 그의 11세손 윤중(允中)이 그것을 내게 보여주고, 또 빙군의 후손이 검(劍)․소(邵) 지방에 흩어저 살면서 삼대족(三大族)을 이루어 자손이 매우 번창하고 사대부가 끊이질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어찌 충로(忠勞)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윤중(允中)이 장차 돌에 새겨 삼족(三族)의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 시초를 잊지 않게 하려 하니, 때문에 그 구체적 내용을 이렇게 기록한다. 순희 정미 11월 갑자, 신안 주희 쓰다.
黃巢之亂, 唐僖宗出居成都, 以王鐸, 鄭畋爲宰相, 協力討賊. 鐸以都統檄召諸道之兵入西畿, 屯盩厔, 而賊勢遂衰, 卒逐巢, 復長安. 今觀馮君告身以中和二年十一月下, 則正此時事也. 其曰 ‘右都’ 者, 卽西畿. 其曰 ‘吏部行在之印’ 者, 卽成都行省. 其曰 ‘太尉兼中書令而使’ 者, 以舊史考之, 卽王鐸, 而新史鐸傳乃作檢校司徒, 誤矣. 其曰 ‘司空兼門下侍郞, 同平章事’ 者, 則爲鄭公不疑, 而其官稱史, 通鑑亦不異也. 但通鑑載諸道師屯所處甚悉, 而不及福建, 豈以道遠後至而不得列序耶? 抑且以將卑師少而略之也? 夫以閩之窮僻阻遠, 而當此之時乃能命將遣兵, 奔赴國難, 馮君又能爲之領率人徒, 崎嶇萬里, 以投命於君親, 其功雖不大顯, 然其於忠則有餘矣. 其十一世孫允中出以示予, 且言君之後散居劍, 邵之間, 爲三大族, 子孫甚衆, 衣冠不絶. 予以爲此豈忠勞之報耶? 允中將刻石以示三族之人, 俾之無忘其初, 因爲記其本末云. 淳熙丁未十一月甲子, 新安朱熹書.
정동이생 학칙 발문(跋程董二生學則)
【해제】 이 글은 순희 14년(정미, 1187년, 58세) 11월에 쓴 발문이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이치는 일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날 교육이란 밥 먹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훈도하고 가지런히 하는 것에 법도가 있었으니, 하물며 가숙(家塾)․당상(黨庠)․수서(遂序)는 어떻겠는가? 그 배우는 이들이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며, 행실은 조심스럽고 말은 믿음이 있고, 여럿이 함께 하루 종일 있으면서 덕업을 힘써 닦고 나아가지 몸에 포악하고 함부로 하는 방자한 기운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번역(番易) 정단몽(程端蒙)과 우생(友生) 동수(董銖)가 함께 이 책을 만들어 장차 그 고을 사람들과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니, 이는 옛사람들이 남긴 소학(小學)의 뜻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상숙(庠塾)의 스승들이 이것을 가지고 학도를 이끌면, 이른바 어른들은 덕이 있고 아이들은 학업에 나아가는 것을 오늘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왕(后王) 강덕(降德)의 뜻을 도와 이루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순희 정미 11월 갑자, 신안 주희 쓰다.
道不遠人, 理不外事, 故古之敎者, 自其能食能言而所以訓導整齊之者, 莫不有法, 而况於家塾黨庠遂序之間乎? 彼其學者所以入孝出弟, 行謹言信, 群居終日, 德進業脩, 而暴慢放肆之氣不設於身體者, 繇此故也. 番易程端蒙與其友生董銖共爲此書, 將以敎其鄕人子弟而作新之, 蓋有古人小學之遺意. 余以爲凡爲庠塾之師者能以是而率其徒, 則所謂成人有德, 小子有造者, 將復見於今日矣. 於以助成后王降德之意, 豈不美哉!淳熙丁未十一月甲子, 新安朱熹書.
이천선생서첩 후서(書伊川先生帖後)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 2월에 쓴 글이다.
고(故) 단전(端殿) 상요(上饒) 왕공(汪公)이 촉 지방을 진압할 당시 이 서첩을 얻었는데, 다시 소부(邵薄)가 논의한 것을 보고 그것을 의심하여 초록하여 부쳐 그 진위를 가려 달라 했다. 나는 당시 공을 위해 말했는데, 양준도(楊遵道)가 일찍이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록했었다. “배우는 이가 역을 읽으면서, 평소에 아직 읽지 않아 문장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면, 반드시 먼저 삼가(三家)를 익숙하게 읽은 연후에 용심처(用心處)가 있을 것이다.” 그 학설이 바로 이것과 부합한다. 그러나 그 말을 음미해보면, 진실로 억양(抑揚)이 있으니, 역(易)의 이론이 삼가(三家)가 말한 것에서 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첩은 실제 선생에게서 나왔으니, 소부의 말이 문제될 것은 없다. 또 깊은 의미를 찾아 통관하는 것으로 말하면 참다운 독서법이기도 하다. 요즘 학자들은 이치를 연구하지만 정밀하지 못하고 바르게 독서하지만 너무 대충 읽는다. 하물며 춘추의 대의가 수 십 가지이지만 밝기가 해와 별과 같아 진실로 이천선생이 쓴 「춘추전서」에 나타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잊어버려선 안 된다는 것이니, 선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삼강오륜과 위대한 인륜 법도는 유식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그만 이해관계에서도 지키던 것을 문득 잃어버리는 것은 배움이 그 본심의 바름을 온전히 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는 뿌리내린 바가 없어서 그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잊음을 용납하지 않음을 자신하고, 또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일에 따라 필찰의 사이에서 형용하니, 선생과 같이 덕이 성대하고 인이 성숙하며 어디에서나 본원을 만나는 이가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이르겠는가. 사군(謝君)의 이름은 장사숙이 기록한 「사설(師說)」에 나오는데, 숭․관 년간에 태학에서 오랫동안 벼슬했는데, 과연 소문을 우러를 줄 알지 못했는가? 그 집에서는 오히려 아직도 이 수첩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제 제막(制幕) 조숭헌(趙崇憲)이 모각(摹刻)하여 촉인(蜀人)에게 보여주고, 멀리 내가 있는 이곳까지 묵본(墨本)을 보내온 까닭에 전설(前說)을 기록하고 문득 그 뒤에 기록을 덧붙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학문의 도통이 있으며 도가 어디로 귀결하는지를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겉만 화려하고 속이 빈 문자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여 명예나 취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순희 무신 봄 2월 을묘.
故端殿上饒汪公鎭蜀時, 嘗得此帖, 又見邵薄所論而疑之, 因錄見寄, 而使審其眞僞. 熹時爲公言, 楊遵道記先生嘗語學者讀易, 如素未讀, 不曉文義, 必先熟讀三家, 然後却有用心處. 其說正與此合. 然味其言, 固有抑揚, 非以易之說爲盡於三家所言也. 此帖實出先生, 溥言不足爲病. 且尋繹通貫之云, 又眞讀書之法. 近世學者閱理不精, 正坐讀書太草草耳. 况春秋大義數十, 炳若日星, 固已見於傳序, 而此所謂不容遺忘者, 又非先生決不能道也. 夫三綱五常, 大倫大法, 有識以上卽能言之. 而臨小利害, 輒已失其所守, 正以學不足以全其本心之正, 是以無所根著而忘之耳. 旣有以自信其不容遺忘, 又不覺因事而形於筆札之間, 非先生之德盛仁熟, 左右逢原, 能及是耶? 謝君名見張思叔所記師說, 而崇, 觀間久官太學, 未知果能尊所聞否? 其家尙藏此帖. 今制幕趙崇憲摹刻以示蜀人, 遠寄墨本, 因記前說, 輒爲附識其後, 使覽者有以知夫學之有統, 道之有歸, 而不但爲文字之空言以嘩世取寵而已也. 淳熙戊申春二月乙卯.
태극서명해의 후 제사(題太極西銘解後)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 2월에 쓴 제사이다.
처음에 나는 태극과 서명에 대한 해설서를 지었지만 감히 남들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요즘 유학자들 가운데 두 글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이는 그 글의 뜻을 통달치도 못하고서 멋대로 욕하는데 나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때문에 이 해설서들을 학도들에게 보여주고 널리 전파하도록 했다. 읽는 사람들이 그 글을 통해서 본의를 안다면 또한 가벼이 의논할 수 없음도 알게 될 것이다. 순희 무신 2월 기사 회옹 제하다.
始予作太極, 西銘二解, 未嘗敢出以示人也. 近見儒者多議兩書之失, 或乃未嘗通其文義而妄肆詆訶, 予竊悼焉, 因出此解以示學徒, 使廣其傳, 庶幾讀者由辭以得意, 而知其未可以輕議也. 淳熙戊申二月己巳, 晦翁題.
동파가 준 조덕린 자설 수첩 발문(跋東坡與趙德麟字說帖)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 5월에 쓴 발문이다.
신종황제께서 옛것을 헤아려 법도를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시니, 이는 만세를 위한 위대한 사려이다. 소공(蘇公)이 그 뜻을 발명하여 자(字)를 덕린(德麟)이라 하니, 희망하는 바가 어찌 이렇게도 천천(淺淺)한가! 이제 조군(趙君) 선희(善希)가 이 수첩을 얻어 진귀하게 소장하니, 역시 여기에 뜻을 둔 것이다. 그 근면함을 숭상하는 것이요, 헛되이 화려함만을 일삼지 않는 것이다. 순희 무신 여름 5월 기망, 신안 주희 삼가 쓰다.
神宗皇帝稽古立法, 以敎宗子, 此萬世之大慮也. 蘇公發明其意, 以字德麟, 所以望之豈淺淺哉!今趙君善希能得此帖而珍藏之, 則亦有意於此矣. 尙其勉旃, 無爲徒玩其華藻而已. 淳熙戊申夏五月旣望, 新安朱熹敬書.
양구산 수첩 후서(書楊龜山帖後)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 6월에 쓴 글이다.
양(楊)․진(陳) 이공(二公)이 역을 논한 것에 차이가 있는데, 양공(楊公)의 말씀이 이와 같이 평완(平緩)하다. 무릇 이공(二公)의 사이에 어찌 혐의(嫌疑)하고 외피(畏避)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겠는가? 역시 그 덕은 성대하고 인은 성숙하여 저절로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양공(楊公)은 선천지학(先天之學)을 강론한 적이 없는데, 빼고 강론하지 않은 것이니, 자기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또 이와 같으니, 더욱이 후학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이다. 순희 무신 6월 16일, 신안 주희 쓰다.
楊, 陳二公論易有不同者, 而楊公之詞平緩如此. 夫二公之間, 豈有所嫌疑畏避而然哉? 亦其德盛仁熟而自無鄙倍耳. 楊公於先天之學有所未講, 則闕而不論, 其不自欺又如此, 尤後學之所宜取法也. 淳熙戊申六月十六日, 新安朱熹書.
양준도 유문 발문(跋楊遵道遺文)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 8월에 쓴 발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일찍이 양공(楊公) 준도(遵道)의 묘를 알고 계셨고, 그 논설의 대강을 기록하셨는데, 모두 매우 정밀하고 조예가 깊었다. 또 그가 평생 동안 쓴 글이 수백 편인데, 남아 있는 것은 열에 하나둘뿐이라고 하셨다. 나는 늘 삼가 가집(家集)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 이르면 책을 덮고 길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그가 남긴 글이 대부분 흩어져 사라져버리고 다행히 남아 있는 것조차도 볼 수가 없음을 한탄했다. 근래 장락(將樂) 등도(鄧綯)에게서 이 편을 얻었는데, 도(綯)는 그것을 공(公)의 손자인 선(璿)에게 얻었다고 한다. 급히 읽었지만, 놀랍고 기쁘고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그 글이 5-6편에 지나지 않고, 「묘지(墓識)」에 기록된 장(莊)․주(周)를 논했다는 말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지(識)」를 쓸 당시 망실된 것이 이미 많았던 것 같다. 마침내 「이천선생에게 올리는 역을 논한 두 번째 글」을 읽으면서는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미묘한 의미를 밝혀 지극하게 하여 얼음이 녹는 것처럼 풀이하였다!” 진(陳)․이(李)의 동이(異同)에 대한 분변에 대해서는, 그 취사(取舍)의 결정을 볼 수 없는 점이 한스럽고, 그 전서(全書)를 가지고 고찰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다만 「참경소(懺經疏)」에서 “어머니를 합사하면서 비로소 그 원조(遠祖)를 옮기고, 선조를 흠향하면서 이교(異敎)를 잡다하게 사용한다.”고 한 것은 비록 대신 말한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공이 마땅히 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세월이 오래되어 편집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어찌 진짜를 어지럽히는 일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그 뒤에 이와 같이 삼가 써서 보는 사람에게 알려, 양공(楊公)의 학문을 고찰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서 쓰신 글도 흔히 세상에 아첨하는 묘지문이 아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지(識)」에서 몇 년 지나서 비로소 공을 모처에 장사지냈다고 말한다. 선(璿)이 등(鄧)에게 말한 바로는, 공(公)은 먼저 장락현(將樂縣) 수혜향(垂惠鄕) 주림산(珠林山)에 장사지냈는데, 「지」를 쓸 당시 아마 개장(改葬)을 하려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지만, 끝내 그렇지 하지 못했다. 또 내게 그 자(字)를 경정(更定)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으므로 아울러 그것을 기록하여 그 실상을 나타낸다. 순희 무신 8월 임진, 신안 주희 삼가 쓰다.
先君子嘗識楊公遵道之墓, 記其論說梗槪, 皆極精詣. 且言其平生爲文數百篇, 存者什一二耳. 熹每伏讀家集至此, 未嘗不掩卷太息, 恨其遺文之散逸, 而其幸存者亦不得而見之也. 近乃得此編於將樂鄧綯, 而綯得之公孫璿者. 急披疾讀, 驚喜幸甚. 然其文不過五六篇, 而墓識所書論莊周語不復見, 則視作識時所失亡又已多矣. 遂讀至上伊川先生論易第二書, 則喟然曰: ‘是所謂發微詣極, 冰解的破者耶!’ 至於陳, 李異同之辨, 則恨未有以見其取舍之決, 惜乎不得其全書而考之也. 獨懺經疏祔母而始遷遠祖, 享先而雜用異敎, 雖云代作, 恐亦非公所宜爲者. 豈其歲月久遠, 次輯之際, 容或有亂眞者歟? 敬書其後如此, 以告觀者, 使不唯於楊公之學有以考焉, 又於吾先君子之作有以信其非世俗諛墓之文也. 識言後若干年, 始克葬公某處. 璿爲鄧言, 公先已葬將樂縣垂惠鄕珠林山, 作議時蓋將改葬, 故其言如此, 然竟不果. 且欲屬熹更定其字, 熹謝不敢, 因幷記之, 以見其實云. 淳熙戊申八月壬辰, 新安朱熹謹書.
진요옹 책심장 발문(跋陳了翁責沈)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 11월에 쓴 발문이다.
진충숙공(陳忠肅公)은 강직하고 방정한 지조를 타고났는데, 이치를 밝힘이 더욱 정밀하고 의리를 진술함이 더욱 절실하니 학문의 공부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수첩을 보니, 그가 자신을 이겨내고 현자를 존중하며 마음을 비우고 선을 따르는 뜻을 알 수 있다. 묵적(墨蹟)은 지금 형의 자손인 종정(宗正)의 아들 윤(荺)의 집에서 소장하고 있고, 건업(建業)․계림(桂林)․연평(延平) 모두 석본(石本)을 가지고 있는데, 자획(字畫)에 조금씩 진본과 차이가 있지만, 유독 사현(沙縣)만 판각(版刻)을 하였으니 멀리 전하기엔 더욱 부족하다. 지금의 현승(縣丞)인 황동(黃東)이 비로소 다시 묵적을 모사하고 농석(礱石)에 새겨 현학(縣學)의 사당(祠堂)에 두고, 백 세대가 지나더라도 이 읍의 사람들은 마땅히 풍문을 다시 듣고 흥기하는 이가 있을 것이라 여기니, 그 뜻이 원대하다. 심화(心畫)의 신묘함은 간륵(刊勒)이 더욱 정밀하니, 그의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색은 오히려 탐심을 억제하고 나약한 이를 자립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계림본(桂林本)에는 장경부(張敬夫)의 제자(題字)가 있는데, 공(公)의 뜻을 발명함이 있으니 그것을 함께 새긴다. 순희 무신 11월 신축, 신안 주희 그 왼쪽에 삼가 쓰다.
陳忠肅公剛方正直之操得之天姿, 而其燭理之益精, 陳義之益切, 則學問之功有不可誣者. 觀於此帖, 其克己尊賢, 虛心服善之意尙可識也. 墨蹟今藏所贈兄孫宗正之子荺家, 而建業, 桂林, 延平皆有石本, 顧字畫不能無小失眞, 獨沙縣乃爲版刻, 尤不足以傳遠. 今縣丞黃東始復就摹墨蹟, 礱石刻之縣學祠堂, 以爲此邑之人百世之下, 猶當復有聞風而興起者, 其志遠矣. 至於心畫之妙, 刊勒尤精, 其凜然不可犯之色, 尙足以爲激貪立懦之助. 而桂林本有張敬夫題字, 以爲於公之意有發明者, 因幷刻之. 淳熙戊申十一月辛丑, 新安朱熹敬爲書其左方.
참정 공공이 조정을 떠나면서 황제에게 올린 상소 초고 후기(記參政龔公陛辭奏稿後)
【해제】 이 글은 순희 16년(기유, 1189년, 60세) 정월에 쓴 기문이다.
대참(大參) 공공(龔公)은 평생토록 용병(用兵)에 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만년에 조정을 떠나면서, 일을 논하는 이가 곧 말하기를, 그가 조정을 떠나는 날에 국토를 회복하는 군사를 크게 일으킬 것을 요청하여 황제의 뜻에 영합하려 했다고 하니, 듣는 이가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나는 옛날 공과 함께 매우 오랫동안 교유했고, 공과 함께 이 문제를 반복하여 토론하였지만 두 사람 모두 각기 견지한 바가 있었지만 끝내 상대방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이제 와서 혼자 생각해보건대, 공의 뜻은 분명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공이 죽고 나서 몇 년 뒤, 그의 옛 고향을 지나다가 공의 두 아들한테서 그의 부본(副本)을 얻어 읽어보니, 경솔하게 거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극론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평생 평소 지론이었다. 공이 심하게 무고당하는 것이 가슴 아파, 그를 위해 길게 탄식하고 오래도록 눈물 흘렸다. 그러나 바쁜 것을 핑계 삼아 그의 수고(手稿)를 빌려 볼 겨를을 내지 못했고, 또 감히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도 못했다. 근래에 성상께서 공의 무죄를 아시고 특별히 조칙을 내려 그의 직질(職秩)을 되돌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상의 도량이 하늘과 같아서 진실로 신과 같이 식견이 얕고 천박한 사람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말하는 사람과 같이 그에게 진실로 조금이라도 그러한 것이 있었다면, 역시 어떻게 다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공가(公家)의 글이 거짓이 아님을 증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조금 드러내 그 본말을 이와 같이 기록한다. 순희 기유 정월 기망, 신안 주희 기록하다.
大參龔公平生不喜言用兵, 晩年去國, 論事者乃言其陛辭之日, 請大擧恢復之師, 以迎合上意, 聞者莫不怪之. 予曩從公遊甚久, 蓋嘗與公反復論此, 雖兩有所持, 然竟不能以相屈也. 至是, 竊獨意公不宜有此. 公薨後數年, 過其故里, 從公二子得其副本讀之, 乃極論不可輕擧之意, 蓋猶其平生之素論也. 痛公見誣之甚, 爲之太息流涕久之. 然尙恨匆匆, 不暇借其手稿以觀, 而亦未敢以示人也. 近者乃聞聖上知公無罪, 特詔有司還其職秩. 聖度如天, 固非賤臣淺識所能窺測. 然向使其眞有纖芥如言者之所謂, 則亦豈復有是也哉? 此可以驗公家書之不誣. 因稍出之而記其本末如此. 淳熈己酉正月旣望, 新安朱熹記.
통감운어 발문(跋通鑑韻語)
【해제】 이 글은 순희 16년(기유, 1189년, 60세) 3월에 쓴 발문이다.
사수선생(沙隨先生) 정공(程公)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임천(臨川) 황군(黃君) 제현(齊賢)의 학문이 구차하지 않음을 매우 칭찬하였다. 오래지 않아 제현 역시 자신의 저서 60권을 묶어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병 때문에 눈이 어두워 두루 읽을 수가 없었는데, 제현은 또 친절하게도 직접 손으로 가리켜주어 그 대강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깊은 뜻을 탐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아! 이 역시 근면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운어(韻語)가 비록 공교(工巧)하면서도 여러 그림에 쏟은 노력은 더욱 따라갈 수 없다고 제현에게 말했다. 비록 통감이 없지만, 또한 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운어에 기탁하여 절본(節本)이 온공(溫公)의 손에서 나왔다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제현은 또 간재선생(艮齋先生) 여러 공의 발문을 꺼내 아들에게 그것을 쓰도록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공(諸公)은 모두 당대의 선유(先儒)이니, 그 말 자체로 충분히 믿을 수 있으니, 구차한 나의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생각해보건대, 제현은 옛사람들의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의 뜻을 깊이 말하면서도 제현은 말을 듣고 의문이 없지 않았다[聽瑩]. 이런 까닭에 다시 여러 노선생들에게서 더욱 널리 탐구하여 몸소 체득하였을 것이니, 이 글의 한 글자 한 의미도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 순희 기유 3월 계묘 청명, 숭고은리(嵩高隱吏) 주희 쓰다.
沙隨先生程公以書見抵, 盛稱臨川黃君齊賢爲學之不苟也. 旣而齊賢亦橐其所著書六十卷以示余. 余病衰目盲, 不能徧讀, 齊賢又親爲指畫, 乃得窺其大略, 然猶恨未能有以究其蘊也. 鳴呼, 是亦勤矣!因語齊賢韻語雖工, 而諸圖用力之深尤不可及. 雖無通鑑. 亦可孤行. 今乃託於韻語而謂節本眞出溫公之手, 何耶? 齊賢又出艮齋先生諸公跋語, 俾嗣書之. 余惟諸公皆當代儒先, 其言自足取信. 區區鄙語, 何足爲助? 顧嘗竊爲齊賢深言古人爲己之意, 而齊賢未能無聽瑩也. 其以是復于諸老先生而益廣求之, 則庶乎有得於身, 而是書之中, 一字一義亦無不光焰矣. 淳熙己酉三月癸卯淸明, 嵩高隱吏朱熹書.
정재 등용각기 발문(跋程宰登瀛閣記)
【해제】 이 글은 순희 16년(기유, 1189년, 60세) 10월에 쓴 발문이다.
건양의 대부 정후(程侯)가 내게 마공(馬公) 자재(子才)가 기록한 그 집안의 등영각(登瀛閣)의 글을 보여주었는데, 지금 그것을 살펴보니, 그 말이 역시 대략 증험하다. 정후(程侯)는 관대하고 평이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였고, 뜻하는 바는 옛사람들이 선을 실천하는 보답이었는데 여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듣건대, 옛날의 군자는 베풀면서도 그 보답을 바라지 않고, 제사를 지내면서도 그 복을 빌지 않았으니, 대개 선을 실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때문이니, 하늘과 사람 사이에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응하는 것은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는 것이다. 정후(程侯)가 내게 그 후서를 부탁했기 때문에 문득 이러한 뜻을 덧붙인다. 순희 기유 10월 4일, 신안 주희 쓰다.
建陽大夫程侯示予以馬公子才所記其家登瀛閣之文, 以今觀之, 其言亦略驗矣. 程侯爲政寬易愛人, 意者前人爲善之報, 未止於此也. 然予聞之, 古之君子施而不望其報, 祀而不祈其福, 蓋以爲善爲當然, 而天人之間, 應若影響者, 自不容已也. 程侯屬予書其後, 因輒附見此意云. 淳熙己酉十月四日, 新安朱熹書.
방씨가 소장 소흥제현수첩 후 제사(題方氏家藏紹興諸賢帖後)
보양(莆陽) 방덕순(方德順)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실로 이름을 날렸는데, 한 때는 제공(諸公) 장자(長者)들이 모두 비슷한 또래로 내려 함께 교유했다. 소흥 초에 부름을 받고 마주한 자리에서 강화(講和)가 온당하지 않음을 극론하였다. 비록 뜻이 합치하지 않아 조정을 떠났지만,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장충헌(張忠獻)․절대삼(折大參)․증시랑(曾侍郞)․장급사(張給事)․여사인(呂舍人) 모두가 그를 깊이 인정하였으나, 끝내 벼슬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사룡(士龍)이 보관하고 있는 제공(諸公)과 주고받은 서첩(書帖)이 매우 많은데, 일찍이 꺼내어 보여준 적이 있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는 덕순이 사람됨을 충분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물을 중흥하는 성대함과 일을 도모하는 위대함도 대략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책을 어루만지고 세 번 탄식하면서 삼가 그 뒤에 쓴다.
莆陽方德順早以文行知名, 一時諸公長者, 皆折輩行與交. 紹興初, 嘗召對, 極論講和不便. 雖不合以去, 而名問益高, 張忠獻, 折大參, 曾侍郞, 張給事, 呂舍人皆深知之, 仕竟不遭以卒. 其子士龍藏諸公所與往還書帖甚富, 嘗出以見示. 熹謂此不唯足以見德順之爲人, 而中興人物之盛, 謀猷之偉, 於此亦可槪見. 因爲撫卷三歎而敬書其後.
이부랑을 지낸 선친이 연복원에 남긴 시에 발문을 붙임
[跋先吏部留題延福院詩]
선친이 이부랑(吏部郞)을 맡았을 때 세 수의 시를 지어 선화(宣和) 신축년(1121)에 정화(政和)의 연복원(延福院) 벽에 적어놓았다. 지금이 소희(紹熙) 경술년(1190)이니 정확히 70년이 흘렀다. 나는 숭안에서 이곳으로 와 벽 아래에서 배회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쳐다보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혹 허물어질까 염려가 되었다. 마을 사람 사동경(謝東卿) 군과 진극(陳克) 군이 모각하여 기리 전하길 청하니, 나는 그들의 말에 따라 발문을 몇 자 적는다. 2월 20일에 삼가 씀.
先君吏部三詩, 以宣和辛丑留題政和延福院壁, 至今紹熙庚戌, 適七十年矣. 孤熹來自崇安, 裴回其下, 流涕仰觀, 慮其益久而或圮也. 里人謝君東卿, 陳君克請爲模刻, 以傳永久, 熹因竊記其後云. 二月二十日敬書.
시량한의 군정책에 발문을 붙임[跋施良翰軍政策]
시양한(施良翰) 군이 나에게 「군정책(軍政策)」 한 편을 보여주었다. 이 글은 시국을 이롭게 하거나 병들게 하는 실상을 언급했는데 본말이 두루 갖춰져 모두 시행할만한 것이었다. 때마침 나는 여행의 피로 때문에 다 읽을 겨를이 없었으나, 내 뜻과 부합하는 곳에 이르면 거듭 찬탄하곤 했었다. 이른바 “은택이 공을 세운 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아첨하는 무리에게 돌아가면, 재주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합당하게 등용한다해도 이미 공론(公論)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에 이르면 또한 감흥이 깊게 일어났다. 그래서 간재(艮齋) 지보(智甫)의 책에 발문을 기록한다. 소희(紹熙) 원년(1190) 3월 21일에 신안 주희 씀.
施君良翰示予以軍政策一編, 其言當世利病之實, 本末備見, 皆可施行. 屬予方有行役之勞, 未遑盡讀. 然當會意處, 未嘗不三復而屢嘆也. 至所謂恩不歸於有功而歸於倖門, 則才否雖當, 已自不厭公論者, 又獨深有感焉. 因竊識其語於艮齋智甫書卷之後. 紹熙改元三月二十一曰, 新安朱熹書.
참정 공공의 「폐사주고」에 다시 발문을 붙임[再跋參政龔公陛辭奏稿]
애초에 나는 공공(龔公)의 「폐사주초(陛辭奏草)」를 얻어 읽어보고 그 본말을 기록하여 독자의 의혹을 해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진본을 보지 못한 점을 한탄했는데 이는 내가 공의 말에 의혹을 두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내 말에 의혹을 둘까 염려해서였다. 올해 다시 보중(莆中) 땅을 지날 적에 공의 두 아들과 손자 감(堪)이 다시 이 주초를 보여주었다. 글자를 지우거나 바꾸면서 수정했는데 자필의 흔적이 역력했고, 지시하는 의도도 신중하고 상세하여 강서(江西)의 주차(奏箚)와 서로 표리가 되었다. 여기에서 공의 평생의 언론이 조금도 변한 적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를 헐뜯은 자들은 참으로 승냥이와 범에게 던져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이 먹지 않을까 두렵다. 구양자(歐陽子)는 “후세가 공정하지 않다면 지금 성현이 없어서이네”라고 읊었다. 대개 천하의 일은 반드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옳고 그름의 실상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군자가 언론을 전개하고 행동을 절제함에 시속의 훼예(毁譽)를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내 마음에 부끄러움과 후회를 남겨두지 않으려 한 이유이다. 이미 그 일에 감동을 받아 다시 이전의 발문 뒤에 적어서 내 말이 헛되지 않음을 밝혔으니, 남사씨(南史氏)와 동호(董狐)와 같은 사관들은 오히려 참고할 바가 있으리라. 소희(紹熙) 경술년(1190) 4월 13일에 선유(僊遊) 장령(長嶺)의 역참에서 씀.
始予得龔公陛辭奏草而記其本末, 以解聽者之惑, 然猶以未及見其眞筆爲恨者. 非予有所疑於公之言, 蓋慮世之不能無疑於予言也. 今年復過莆中, 公之二子及其孫堪復以此軸見示, 塗乙點定, 手筆粲然, 而其指意審重詳密, 又與江西奏箚實相表裏. 於此足以見公平生之靑未嘗少變, 而彼譖人者, 眞可以男豺虎而猶懼其不之食也. 歐陽子曰: 「後世苟不公, 至今無聖賢.」 蓋天下之事必至於久而後是非之實可見, 此君子之立言制行所以不屑流俗一時之毁譽, 而唯欲其無所愧悔於吾心也. 旣感其事, 因復書前說之後, 以著吾言之不妄, 庶幾秉南董之筆者猶有考云. 紹熙庚戌四月十三日, 書於僊遊長嶺廐置.
염구생의 음부경에 발문을 붙임[跋閭丘生陰符經說]
괄창(括蒼) 염구생(閻丘生) 군이 임하(臨賀) 땅의 관리로 갈 때에 천리 길을 돌고 돌아 장수(漳水)가로 나를 찾아와 자신이 해석한 음부경(陰符經)을 보여주었다. 그의 뜻은 고원했고 문장의 뜻도 정밀했는데, 이단의 학설을 참고하면서도 능히 올바른 의리로 절충했다. 도술에 빠진 당시 세상을 논한 곳에서도 시비와 취사(取捨)가 모두 합당함을 잃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학자 중에 이처럼 논할 수 있는 자는 적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지식이 지나치게 고원하고 기운이 너무 예리하여 중용을 따르는 실상이 없어서, 도리어 이를 마음으로 삼아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까 염려되었다. 그가 이별을 고할 때에 이를 적어서 준다. 소희(紹熙) 경술년(1190) 5월 29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括蒼閭丘君之官臨賀, 迂道千里, 過予於漳水之上, 示予以所釋陰符之篇. 觀其意寄高遠而文義精密, 出入乎異端之說而能折衷以義理之正. 至論當世之爲道術者, 則其所是非取舍又皆不失其當, 蓋今之學子能若是者少矣. 然予憂其知之過高, 氣之太銳, 而無以道乎中庸之實, 或將反以喪失其所以爲心者而不自知也, 於其告別, 書以遺之. 紹熙庚戌五月二十九日, 新安朱熹書.
황산곡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黃山谷詩]
두자미(杜子美)가 쓴 시의 소서(小序)에 “범이 기(夔) 땅 사람의 울타리를 뚫고 돌진했다”는 말이 있는데, ‘기(夔) 땅 사람’은 바로 기주(夔州) 사람을 말한다. 황산곡의 시에는 ‘호기번(虎夔藩)’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 이 송(頌)에서 또 ‘기촉(躨觸)’이라는 글자를 썼다. 살펴보니, ‘기니(躨跜)’는 「영광전부(靈光殿賦)」에 보인다. 이는 규룡(虯龍)이 움직이는 모양으로 원래 ‘촉(觸)’의 의미가 없는데 황산곡은 무엇에 근거해서 썼는지 모르겠다. 이 시권의 시어는 정치하고 아름답지만, 가리키는 의미는 마치 이태백이 왕형공(王荊公: 왕안석)에게 기롱을 당한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를 보는 자들은 또한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杜子美詩小序有言虎搪突夔人藩蘺者, 「夔人」 正謂夔州人耳. 而山谷詩乃有 「虎夔藩」 之語, 今此頌又用「躨觸」 字. 按 「躨跜」 見靈光殿賦, 自爲蚪龍動貌, 元無觸義, 不知山谷何所據也. 此卷詞筆精麗, 而指意所屬未免如李太白, 所以見譏於王荊公者. 覽者亦可以發深省矣.
이천 선생이 방도보에게 준 서첩의 뒤에 발문을 붙임
[書伊川先生與方道輔帖後]
이천 선생의 덕성은 엄격하고 중후하여 가볍게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이제 선생이 방공[方公: 이름은 원채(元寀)]의 부자와 형제에게 이처럼 다정했던 것을 살펴보면, 방공의 어짊을 알 수가 있다. 나는 일찍이 이전의 서첩 몇 가지를 얻어서 여산(廬山)의 백록동(白鹿洞)에다 새긴 적이 있다. 공의 증손 장태(長泰)와 주부 임(壬)이 또 소장하던 몇 가지 서첩을 집에서 모각하고 간간이 나에게 보여주면서 발문을 써주길 부탁했다. 비록 선생이 써 준 것은 내가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응거경전(應擧耕田)’이라는 말을 보면 내외와 취사의 경중을 결단할 수 있고, ‘매독환주(買櫝還珠)’라는 비유를 살펴보면 독서하여 도를 구하는 요체가 여기에 있지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을 가다듬고 또 권말에 써서 방군(方君)에게 주어 그 집안의 부형과 자제가 서로 권면하기를 기대한다. 소희(紹熙) 개원(1190) 초가을 7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
伊川先生德性嚴重, 不輕與人接. 今觀其於方公父子兄弟之間眷眷如此, 則方公之賢可知已. 熹舊嘗得前數帖, 刻之廬山白鹿洞. 公之曾孫長泰王簿壬又幷其所藏數帖模刻於家, 間以視熹, 求書其後. 雖先生之所以書者有非熹之所敢知, 然觀於應擧耕田之語, 可以決內外取舍之輕重;察於買櫝還珠之諭, 可以知讀書求道之要在此而不在彼也. 旣以自厲, 又書卷尾以屬方君, 使與其族之父兄子弟相與勉焉.〔一〕紹熙改元孟秋七日, 新安朱熹.
〔一〕子: 原作 「兄」, 據宋閩, 浙本改.
임안․장주에서 간행한 네 경전 뒤에 발문을 붙임[書臨漳所刊四經後]
서경[書]〔一〕
세상에 전하는 공안국(孔安國)의 「상서(尙書)」 서문에는 “복생(伏生)이 입으로 전한 서경의 28편 곧 요전(堯典), 고요모(臯陶謨), 우공(禹貢), 감서(甘誓), 탕서(湯誓), 반경(盤庚), 고종융일(高宗肜日), 서백감려(西伯戡黎), 미자(微子), 목서(牧誓), 홍범(洪範), 금등(金縢),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재재(梓材), 소고(召誥), 낙고(洛誥), 다사(多士), 무일(無逸), 군석(君奭), 다방(多方), 입정(立政), 고명(顧命), 여형(呂刑), 문후지명(文侯之命), 비서(費誓), 진서(秦誓)가 있고, 공씨(孔氏)의 벽에서 나온 서경에서 25편 곧 대우모(大禹謨), 오자지가(五子之歌), 윤정(胤征), 중훼지고(仲虺之誥), 탕고(湯誥), 이훈(伊訓), 태갑상(太甲上), 태갑중(太甲中), 태갑하(太甲下), 함유일덕(咸有一德), 열명상(說命上), 열명중(說命中), 열명하(說命下), 태서상(泰誓上), 태서중(泰誓中), 태서하(泰誓下), 무성(武成), 여오(旅獒), 미자지명(微子之命), 채중지명(蔡仲之命), 주관(周官), 군진(君陳), 필명(畢命), 군아(君牙), 경명(冏命)을 증보했다. 복생의 서경 중에 4편을 나누어 9편으로 만들고 또 5편 곧 순전(舜典), 익직(益稷), 반경중(盤庚中), 반경하(盤庚下), 강왕지고(康王之誥)를 증보한 뒤 서(序) 1편을 합쳐서 모두 59편을 만들었다”고 했다. 공안국이 전(傳)을 쓸 때에 결국 서(序)를 첫머리에 두어 58편으로 확정하니, 현행 공사(公私)간의 판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한대 유학자는 복생의 서경을 금문(今文)이라 하고, 공안국의 서경을 고문(古文)이라 불렀다.
이제 이를 살펴보면, 금문은 난삽한 곳이 많은 대 비해 고문은 평이하다. 혹자는 말하기를 “금문은 복생의 딸이 조착(晁錯)에게 입으로 전할 때에 잃어버렸으니 선진(先秦)의 옛 책에서 인용한 글은 모두 이와 같다”고 하고, 혹자는 “기록의 실제적인 말은 잘 짓기가 어렵고 윤색의 아름다운 단어는 좋게 만들기가 쉬우니 암송하는 자는 어려운 것을 독점할 수 없고 문장을 고증하는 자는 도리어 그 쉬운 것을 독점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모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소서(小序)의 글은 간혹 경전의 글과 너무 일치하지 않는데 예컨대 강고(康誥), 주고(酒誥), 재재(梓材)의 부류가 그러하다. 그런데 공안국의 서문은 또 결코 서경(西京)의 문자와 비슷하지 않으니 또한 모두 의심스럽다. 소서(小序)가 본래 경전에 앞서지 않음은 공안국의 서문을 통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 따로 이 판본을 전하여 하나는 여러 편의 본문을 경전으로 하고 다시 서편(序篇)을 뒤에 합쳐서 독자로 하여금 성경(聖經)의 옛 모습을 보도록 하고 여러 유학자의 학설에 섞이지 않도록 한다. 또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음을 논하여 독자로 하여금 우선 알기 쉬운 것을 반복해서 학습하도록 하고 굳이 어려운 것을 천착하여 견강부회하지 않도록 한다. 소희(紹熙) 경술년(1190) 10월 임진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 적음.
世傳孔安國尙書序言伏生口傳書二十八篇, 堯典, 臯陶謨, 禹貢, 甘誓, 湯誓, 盤庚, 高宗肜日, 西伯戡黎, 微子, 牧誓, 洪範, 金縢, 大誥, 康誥, 酒誥, 梓材, 召誥, 洛誥, 多士, 無逸, 君奭, 多方, 立政, 顧命, 呂刑, 文侯之命, 費誓, 秦誓, 孔氏壁中書增多二十五篇, 大禹謨, 五子之歌, 胤征, 仲虺之誥, 湯誥, 伊訓, 太甲上, 太甲中, 太甲下, 咸有一德, 說命上, 說命中, 說命下, 泰誓上, 泰誓中, 泰誓下, 武成, 旅獒, 微子之命, 蔡仲之命, 周官, 君陳, 畢命, 君牙, 冏命. 分伏生書中四篇爲九篇, 又增多五篇, 舜典, 益稷, 盤庚中, 盤庚下, 康王之誥, 幷序一篇, 合之凡五十九篇. 及安國作傳, 遂引序以冠其篇首, 而定爲五十八篇. 今世所行公私版本是也. 然漢儒以伏生之書爲今文, 而謂安國之書爲古文, 以今考之, 則今文多艱澀而古文反平易. 或者以爲今文自伏生女子口授晁錯時失之, 則先秦古書所引之文皆已如此. 或者以爲記錄之實語難工而潤色之雅詞易好, 則暗誦者不應偏得所難, 而考文者反專得其所易. 是皆有不可知者. 至諸序之文, 或頗與經不合, 如康誥, 酒誥, 梓材之類, 而安國之序又絶不類西京文字, 亦皆可疑. 獨諸序之本不先經, 則賴安國之序而可見. 故今別定此本, 一以諸篇本文爲經, 而復合序篇於後, 使覽者得見聖經之舊而不亂乎諸儒之說. 又論其所以不可知者如此, 使讀者姑務沉潛反復乎其所易而不必穿鑿傳會於其所難者云. 紹熙庚戌十月壬辰, 新安朱熹識. 〔一〕此篇文字與卷六十五跋尙書孔安國序大同小異.
시경[詩]
정강성(鄭康成: 정현)이 해설한 「남해(南陔)」 등의 편은 진(秦)나라 때에 없어졌으나 그 뜻은 여러 편의 뜻과 합쳐져 편찬되었기 때문에 남아있었다. 모공(毛公)이 「고훈전(詁訓傳)」을 만들면서 여러 편의 뜻을 나누어 그 편의 서두에 각각 배치하였다. 나는 정씨가 “세 편의 뜻은 본래 여러 편의 뜻과 합쳐 편찬했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시와 뜻은 모두 선진(先秦) 때에 나왔으나 시는 없어지고 뜻만 남아 있다가 모공이 여러 편의 뜻을 나누어 각각 편의 서두에 배치함에 이르러 잃게 되었다고 여겼다. 후한의 「위굉전(衛宏傳)」에서 “위굉(衛宏)이 모시(毛詩)의 서문을 지었다”고 명확히 말했다면, 서문은 어찌 시경과 함께 나왔다가 모공의 손에서 나누어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서문이 본래 편의 서두에 배치되지 않았음은 정씨의 이 해설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오늘날 시경을 읽는 자가 서문이 있음을 알고 시가 있음을 모르는 것을 병폐로 여겼다. 따라서 그 해설에 근거하여 다시 이 판본을 수정하여 처음의 모습을 회복했으나, 오히려 독자의 의혹을 살까 두려워 또 그 뒤에 발문을 붙여놓는다. 소희(紹熙) 경술년(1190) 겨울 10월 임진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 적음.
鄭康成說南咳等篇遭秦而亡, 其義則與衆篇之義合編, 故存. 至毛公爲詁訓傳, 乃分衆篇之義各置於其篇端. 愚按鄭氏謂三篇之義本與衆篇之義合編者, 是也. 然遂以爲詩與義皆出於先秦, 詩亡而義獨存〔一〕, 至毛公乃分衆義各置篇端, 則失之矣. 後漢衛宏傳明言 「宏作毛詩序」, 則序豈得爲與經並出而分於毛公之手哉? 然序之本不冠於篇端, 則因鄭氏此說而可見. 熹嘗病今之讀詩者知有序而不知有詩也, 故因其說而更定此本, 以復于其初. 猶懼覽者之惑也, 又備論於其後云. 紹熙庚戌冬十月壬辰, 新安朱熹識.
〔一〕獨: 宋浙本作 「猶」.
역경[易]
위에 고문 주역의 경과 전 12편은 죽은 친구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자는 백공(伯恭)]이 산정한 것이고, 「음훈(音訓)」 1편은 그의 문인 금화(金華) 왕신수(王莘叟)가 받아 적은 것이다. 나는 일찍이 역경은 본래 복서(卜筮)를 위해 지은 것으로 모두 길흉을 통해 훈계를 나타냈기 때문에 그 말은 비록 축약되어 있지만 포괄하는 바는 매우 넓다고 생각했다. 공자가 지은 전(傳)도 그 한 단서를 얼추 들어서 범례를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러 유학자가 경을 나누고 전을 합한 뒤로부터 학자들은 편의대로 경문을 통해 뜻을 취하고 흔히 전체 경문을 탐구하지도 못한 채 돌연 전(傳)의 한 단서를 고집하여 정설로 삼았다. 이에 하나의 괘와 하나의 효가 겨우 한 가지 일이 될 뿐, 주역의 쓰임은 도리어 국한되어 천하의 일에 통용될 수 없었다. 나는 이 같은 경우를 병폐로 여겼으므로 백공(伯恭)의 글을 여러 번 검토하여 발휘하였는데, 이는 그 장구(章句)가 고문에 가까웠기 때문만이 아니다. 「음훈」은 내가 보기에 간혹 빠뜨린 곳이 있었다. 왕신수가 말하기를 “이 글을 겨우 마쳤을 때 백공이 죽었다”고 했으니 이렇게 된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그러나 또한 갑자기 보충할 수 없어서 따로 「음훈」을 12편 뒤에 붙여둔다. 순희(淳熙) 9년(1182) 여름 6월 경자삭(庚子朔) 아침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삼가 씀.
右古文周易經傳十二篇, 亡友東萊呂祖謙伯恭父之所定, 而音訓一篇, 則其門人金華王莘叟之所筆受也. 熹嘗以謂易經本爲卜筮而作, 皆因吉凶以示訓戒, 故其言雖約而所包甚廣. 夫子作傳, 亦略擧其一端以見凡例而已. 然自諸儒分經合傳之後, 學者便文取義, 往往未及玩心全經, 而據執傳之一端以爲定說, 於是一卦一爻僅爲一事, 而易之爲用, 反有所局而無以通乎天下之故. 若是者, 熹蓋病之, 是以三復伯恭父之書而有發焉, 非特爲其章句之近古而已也. 音訓則妄意其猶或有所遺脫, 莘叟蓋言書甫畢而伯恭父沒, 是則固宜. 然亦不敢輒補也, 爲之別見于篇後云. 淳熙九年夏六月庚子朔旦〔一〕, 新安朱熹謹書.
〔一〕淳熙九年夏: 正訛改作 「紹熙庚戌」.
춘추(春秋)
나의 선친은 춘추좌전을 좋아하여 저녁마다 읽었는데 반드시 한 권을 다 읽은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 따라서 나는 어려서 수학하기 전부터 이미 귀에 익숙했다. 성장하여 여러 선생들을 좇아 춘추의 의례(義例)를 물을 적에 가끔 그 한 두 가지 큰 뜻을 엿보기도 했으나 끝내 마음으로 자신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경솔히 그 사이에 한 마디를 남긴 적은 없지만, 홀로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간의 큰 윤리와 법칙에 대해 느낀 바가 있었다. 근래에 군(郡)의 재정을 털어 역경․시경․서경을 판각했는데, 역경은 여씨(呂氏)의 판본인 고문 경전 12편을 활용하고 시경․서경의 서문을 빼내어 경문의 뒤에 배치했다. 이것을 세상에 알려 고서의 옛 모습을 다시 보게 하고 후세의 여러 유자들의 학설에 얽매이지 않도록 했다. 다만 삼례(三禮)는 부피가 커서 수정할 수가 없다. 춘추의 위대한 풀이는 공자가 필삭하여 간행한 것이어서 감히 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남(河南) 소씨(邵氏)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는 또 역경․시경․서경․춘추를 황(皇)․제(帝)․왕(王)․패(覇)의 서적으로 여겼으니, 더욱 정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다시 춘추좌전의 경문을 끄집어내어 별도로 한 책을 만들어 삼경(三經)의 뒤에 붙였다. 춘추의 공양전과 곡량전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대부분 인명과 지명과 같은 부류여서 대의와 연관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 갖출 수가 없다. 훗날 여씨(呂氏)의 방법을 따라 삼경의 음훈을 만든 자가 있다면, 그때 나의 뜻을 이루어줄 것이다. 소희(紹熙) 경술년(1190) 겨울 10월 임진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삼가 씀.
熹之先君子好左氏書, 每夕讀之, 必盡一卷乃就寢, 故熹自幼未受學時已耳熟焉. 及長, 稍從諸先生長者問春秋義例, 時亦窺其一二大者, 而終不能有以自信於其心. 以故未嘗敢輒措一詞於其間, 而獨於其君臣父子大倫大法之際爲有感也. 近刻易, 詩, 書於郡帑, 易用呂氏本古經傳十二篇, 而絀詩, 書之序, 置之經後, 以曉當世, 使得後見古書之舊, 而不錮於後世諸儒之說. 顧三禮體大, 未能緖正. 獨念春秋大訓, 聖筆所刊, 不敢廢塞. 而河南邵氏皇極經世學又以易, 詩, 書, 春秋爲皇帝王霸之書, 尤不可以不備, 乃復出左氏經文, 別爲一書, 以踵三經之後. 其公, 穀二經, 所以異者類多人名地名, 而非大義之所繫, 故不能悉具. 異時有能放呂氏之法而爲三經之音訓者, 尙有以成吾之志也哉. 紹熙庚戌冬十月壬辰, 新安朱熹謹書.
초사협운의 뒤에 씀[書楚辭協韻後]
처음에 나는 황숙후(黃叔垕)가 만든 초사협운(楚辭協韻)을 얻어 애독하다가 장주 수령 부경인(傅景仁)에게 부쳤는데 부경인이 이를 판각하여 공탕(公帑)에다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부경인과 교대하였다. 부경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대초(大招)」편의 소(昭)와 거(遽)는 같은 운(韻)인데 여기서는 거(遽)는 마땅히 조(遭)가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의심스럽다. 그러나 일찍이 왕기공(王岐公)의 문집을 읽어보니 명시(銘詩) 중에 거(遽)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바로 소(昭)의 운에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대초」편의 거(遽)는 고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또 왕기공이 도리어 이 편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한서(漢書)의 서전(叙傳) 고증해보니, 부(符)와 소(昭)는 같은 운으로 보기도 하고[고혜공신후표(高惠功臣侯表)에 나옴], 구(區)와 교(驕)를 같은 운으로 보기도 했다[서남이양월전(西南夷兩粵傳)에 나옴]. 이에 「대초」편의 본문이 참으로 그릇되지 않았고 왕기공이 사용한 운도 고증이 상세했음을 알았다”고 했다. 내가 여러 책을 살펴보니 참으로 부경인의 말과 같았다. 대개 거(豦)의 소리를 따르는 글자로 갹(噱)․갹(臄)․갹(醵)이 있는데, 평성으로 음을 읽을 때는 모두 강(彊)이 된다. 그렇다면 「대초」편의 거(遽)는 마땅히 강(彊)을 교(喬)로 해야 읽을 수 있게 된다. 이에 그 판본을 찾아 다시 수정해서 간행하여 독자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도록 했다. 부경인의 설명에 좀 더 토론하여 수정해야 할 곳이 있는데, 마침 그가 속히 떠나버려 그렇게 하지 못했다. 훗날 마땅히 그에게 물어보고 글의 뒤편에 붙여 새길 것이다. 소희(紹熙) 경술년(1190) 10월 임오일에 신안(新安) 주희(朱熹)가 씀.
始予得黃叔垕父所定楚辭協韻而愛之, 以寄漳守傳景仁, 景仁爲刻板置公帑. 未幾, 予來代景仁, 景仁爲予言, 大招 「昭」 「遽」 同韻, 此謂 「遽」 當爲 「遭」, 似矣. 然嘗讀王岐公集, 銘詩中用 「遽」 字正入 「昭」 韻, 則大招之 「遽」 自不當改. 然又疑其或反是承襲此篇之誤, 因考漢書叙傳, 則有 「符」 與 「昭」 韻者, 高惠功臣侯表 「區」 與 「驕」 韻者, 西南夷兩粤傳乃知大招本文誠不爲誤, 而岐公用韻其考之亦詳也. 予按諸書信如景仁之言, 蓋字之從 「豦」 聲者, 「噱」 「臄」 「醵」, 平讀音皆爲 「彊」, 然則大招之 「遽」 當自 「彊」 而爲 「喬」, 乃得其讀. 於是卽其板本復刊正之, 使覽者無疑焉. 景仁說尙有欲商訂者, 會其去亟不果. 他日當幷扣之, 附刻書後也. 紹熙庚成十月壬午, 新安朱熹書.
초사협운에 다시 발문을 붙임[再跋楚辭叶韻]
초사협운(楚辭叶韻)의 「구장(九章)」에서 “장(將)과 우(寓)자의 뜻을 모르겠다”고 한 것은 당시에 황군[黃君: 숙후(叔垕)를 말함]이 오래된 항주(杭州) 판본과 조씨(晁氏)의 판본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빠뜨린 것이다. 근래에 합조(閤皂: 산 이름)의 도사 감몽숙(甘夢叔)이 “우(寓)는 곧 당(當)자의 잘못이다”라는 설명을 보고, 속히 이를 고증해보니 황장예(黃長睿)와 홍경선(洪慶善)의 판본에서는 모두 당(當)자로 되어있었다. 황장예는 “송본(宋本)에는 우(寓)라 되어있다”고 주를 달았고, 홍경선은 “당(當)은 만난다는 뜻이다”라고 주를 달았다. 문장의 뜻이나 음운으로 말하면 두 학자의 판본이 옳다. 항주 판본은 교정을 보지 않아 그릇된 곳이 가장 많기 때문에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조씨는 자칭 “이소(離騷)을 깊이 연구했다”고 했으나 또한 그 오류를 답습하여 바로잡을 수 없었으니 이와 같은 류는 오히려 눈에 많이 띈다. 그렇다면 그가 힘을 기울였던 곳은 다시 「서인(序引)」을 바꾸고 책의 편과 질을 증보, 확대하여 그 외면만 꾸몄을 뿐,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본래 밝혀낸 바가 없었다. 근세에 산정하고 기술하는 자들도 대부분 이와 같으니 조씨뿐만이 아니다. 나도 이 책에 대해 실로 그 음영(吟詠)을 도운 적이 있었으니, 이제 명칭과 내용에 현혹되어 고증이 상세하지 못한 점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따라서 다시 그 뒤에 발문을 써서 독자에게 알린다.
楚辭叶韻九章所謂 「將寓未詳」 者, 當時黃君蓋用古杭本及晁氏本讀之, 故於此不得其說而闕焉. 近見閤皂道士甘夢叔說 「寓」 乃 「當」 字之誤, 因亟考之, 則黃長睿, 洪慶善本果皆作 「當」. 黃注云: 「宋本作寓」. 洪注云: 「當, 値也.」 以文義音韻言之, 二家之本爲是. 杭本未校, 舛誤最多, 宜不足怪. 獨晁氏自謂深於騷者, 顧亦因襲其謬而不能有所是正, 若此類者, 尙多有之. 然則其所用力, 不過更易序引, 增廣篇帙以飾其外, 而於是書之實初未嘗有所發明也. 近世之言刪述者例如此, 不但晁氏而已. 予於此編實嘗助其吟諷, 今乃自愧其眩於名實而考之不詳也, 因復書其後以曉觀者云.
굴원의 「천문(天問)」 뒤에 씀[題屈原天問後]
이 책은 이해할 수 없는 곳이 많아 억지로 통하게 할 수 없다. 또한 분명히 오류가 있는데도 독자들이 깨닫지 못하여 그대로 좇아 헛되이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계극빈상(啓棘賓商), 구변구가(九辨九歌)”라는 구절에 대해, 왕일(王逸)은 극(棘)을 진(陳)으로 풀이하고 빈(賓)을 열(列)로 풀이하고 상(商)을 오음의 상(商)이라 하니, 참으로 천착한 설명이다. 그런데 홍흥조(洪興祖)는 또 “급히 빈객의 예절로 설(契)을 대우하기 위해 이 음악을 만들었다”고 말하니 이는 더욱 이치에 맞지 않다. 이제 이를 상고해보니 글자가 전서(篆書)와 서로 비슷하여 오류가 생겼다. 극(棘)은 마땅히 몽(夢)이 되어야 하고, 상(商)은 마땅히 천(天)이 되어야 하니, 이는 계(啓)가 꿈에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이 두 가지 음악을 얻어서 돌아왔다고 말해야 한다. 예컨대 열자와 사기에 실린 주목왕, 진목공, 조간자의 일과 같다. 만일 산해경에서 “하후(夏后)가 죽어서 하늘에 세 번 올라가 구변(九辨)과 구가(九歌)를 얻었다”고 말했다면, 당시에 이 책의 별본에서 빈(賓)자를 또한 빈(嬪)으로 잘못 썼기 때문에 혹자가 이를 근거로 말한 것이다. 비록 참으로 괴이하고 망령되어 근거로 삼을 것이 없지만 상(商)자를 천(天)자로 써도 무방함을 증험할 수 있다. 유자후(柳子厚)가 ‘무빈(貿嬪)’이라고 한 것은 곧 산해경으로 인해 오류를 범한 것인데 혹자는 똑 이를 오해하여 삼(三)자를 덧붙여 썼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일찍이 산해경과 이 책의 서로 맞지 않은 곳은 모두 이 책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의심해보았다. 이제 말하는 자들이 도리어 이 책은 저 책에서 나와 저 책의 내용을 끌어다가 말했다고 하니 이는 잘못이다. 회남자 같은 경우는 분명히 이 책을 풀이한 것임에 의심이 없다. 그러나 또한 전해들은 바가 없으니 견강부회하여 말한 격일뿐이다.
此書多不可曉處, 不可强通. 亦有顯然謬誤而讀者不覺, 又從而妄爲之說者. 如「啓棘賓商, 九辨, 九歌」, 王逸則訓 「棘」 爲 「陳」, 訓 「賓」 爲 「列」, 謂 「商」 爲五音之商, 固已穿鑿, 而洪興祖又以爲急相符契以賓客之禮而作是樂, 尤爲迂遠. 今詳此乃字以篆文相似而誤, 「棘」 當作 「夢」, 「商」 當作 「天」, 言啓夢上賓于天, 而得此二樂以歸耳. 如列子, 史記所載周穆王, 秦穆公, 趙簡子等事爾. 若山海經云夏后上三嬪于天, 得九辨, 九歌以下, 則是當時此書別本, 「賓」 字亦誤作 「嬪」, 故或者因以爲說. 雖實怪妄, 不足爲據, 然 「商」 字猶作 「天」 字, 則可驗矣. 柳子厚 「貿嬪」 之云, 乃爲山海經所誤, 而或者又誤解之, 三寫之□, 可勝歎哉!
嘗疑山海經與此書相出入處, 皆是並綠此書而作. 今說者反謂此書爲出於彼而引彼爲說, 誤矣. 若淮南子, 則明是此書之訓傳亡疑. 然亦未必有所傳聞, 只是傳曾說合耳.
유자징이 주노숙에게 준 서신에 발문을 붙임[跋劉子澄與朱魯叔帖]
죽은 친구 유자징(劉子澄)의 수묵(手墨)을 살펴보니 절로 눈물이 떨어진다. 마땅히 자신에게 절실한 문자를 보고 의리(義利)의 사이를 분별해야한다는 내용이어서 노숙(魯叔)에게 기대하는 바가 얕지 않았다. 노숙은 힘써 공부해야 하리라! 단양(丹陽)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가 임장(臨漳)의 군재(郡齋)에서 씀. 소희(紹熙) 경술년(1190) 중동(仲冬) 11일.
觀亡友劉君子澄手墨, 爲之隕涕. 其言當看切己文字, 分別義利之間, 所以期吾魯叔者爲不淺矣. 魯叔尙勉旃哉! 丹陽朱熹仲晦父書于臨漳郡齋, 紹熙庚戌中冬十一日.
황산곡의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黃山谷帖]
이는 주희진(朱希眞)의 글씨이다. 한자창[韓子蒼: 이름은 구(駒)]이 잘못 본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하사거(何斯擧)는 몸소 황산곡을 보았으면서도 잘못을 범했으니, 어째서인가? 그러나 주희진의 글씨는 평범하지 않아 늘그막의 필력은 더욱 호방하다. 이는 그가 젊어서 쓴 것이지만 또한 소장할만하다. 회옹(晦翁)이 씀.
此朱希眞書也. 韓子蒼之誤可耳, 何斯擧親見前輩, 亦誤, 何耶? 然希眞書自不凡, 老筆尤放逸. 此雖其少作, 蓋亦可藏也. 晦翁書.
채단명의 서신에 발문을 붙임[跋蔡端明帖]
채공[蔡公: 이름은 양(襄)]의 절개와 논의, 정치와 문학은 모두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어서, 그 서신만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남쪽으로 내려와 그의 필적을 많이 보았는데 늘 깊이 존경하고 흠모했다. 주희(朱熹)가 적음.
蔡公節槪論議, 政事文學皆有以過人者, 不獨其書之可傳也. 南來多見眞蹟, 每深敬歎. 朱熹題.
증 문소공이 주급사에 준 서신에 발문을 붙임[跋曾文昭公與朱給事帖]
예전에 휘록(徽錄)을 읽다가 증공(曾公)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고 늘 깊이 개탄했었다. 지금 문소공(文昭公)의 이 편지를 살펴보고 곧 주공(朱公)이 종유(從臾: 따르고 아첨함)한 힘을 알고 나니 더욱 탄식하게 된다. 그러나 훗날의 사변을 살펴보면 이는 대개 하늘이 실로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공이 그 사이에서 구차스럽게 대처하여 하나의 갈대로 장강과 황하의 물을 막으려하다가 결국 유배당해 쫓겨나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소희(紹熙) 경술년(1190) 중동(仲冬) 11일에 단양(丹陽) 주희가 씀.
舊讚徽錄, 見曾公兄弟往還書〔一〕, 每深慨嘆. 今觀文昭此帖, 乃知朱公從臾之力, 益以喟然. 然觀後來事變, 蓋有所謂天實爲之者. 諸公區區其間, 乃欲以一葦障江河, 卒以至於流離竄斥而不悔, 可悲也哉! 紹熙庚戌中冬十一日, 丹陽朱熹書.
〔一〕書: 宋浙本作 「事」, 底本原注別本同.
정윤부가 증승상의 서신에 붙인 발문 뒤에 씀[書曾帖程弟跋後]
건중(建中)이라 연호를 부르고 두 당을 조정하려 한 것은 실로 증승상[曾丞相: 이름은 포(布)]의 계책이었다. 그 뒤에 원우(元祐) 당인들이 그 단점을 심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국론이 결국 중간에 변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선(子宣: 증승상의 자)이 본래 꾀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향기로운 풀과 악취를 풍기는 풀이 같은 그릇에 있으면 결코 오래도록 향기를 퍼뜨릴 수가 없다. 정윤부[程允夫: 주자의 내제(內弟)]의 논의를 살펴보니 미비한 곳이 있어서 다시 이렇게 쓴다.
建中紀號, 調亭兩黨, 實曾丞相之策. 其後元祐諸人頗攻其短, 故國論遂中變, 非子宣本謀也. 但薰蕕同器, 決無久遠芬馥之理. 觀程弟所論有未究者, 故復書此云.
소동파의 「우부」에 발문을 붙임[跋東坡牛賦]
소공(蘇公)이 남긴 이 종이는 아마도 임본(臨本: 실물을 변화시켜 모사한 가짜)인 듯하다. 소희(紹熙) 경술년(1190)에 회옹(晦翁)이 심사하여 확정함.
蘇公此紙似是臨本. 紹熙庚戌, 晦翁審定.
왕단명의 주장에 발문을 붙임[跋王端明奏稿]
왕공(王公)의 네 편 상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뜻으로 간곡하게 충(忠)과 사(邪)를 판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 중에 원우(元祐)의 정치를 도와 이루고 국가의 원기를 영구히 하려던 곳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힘입고 있으니 그 공이 성대하다. 선유(僊遊) 주노숙(朱魯叔)이 형양(衡陽)에서 벼슬할 때에 그 집에서 이 유묵을 얻어 소중히 간직해왔다. 이를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니 거듭 장탄식을 그칠 수 없다. 때는 소희(紹熙) 개원(1190) 11월 11일이다.
王公四疏, 首末一意, 丁寧懇側, 無不以忠邪之判爲言. 其所以輔成元祐之治而壽國家元氣之脈者, 人到于今賴之, 厥功茂矣. 僊遊朱魯叔游宦衡陽, 得此遺墨於其家而寶藏之. 出以示熹, 爲之三復太息而不能已. 時紹熙改元十一月十一日也.
임장에서 간행한 사서 뒤에 씀[書臨漳所刊四子後]
성인은 경전을 지어 후세를 가르쳐서 장차 독자로 하여금 그 글을 외우고 그 뜻을 생각하여 사리의 당연함을 알게 하고 도의의 전체를 깨닫게 하여 몸소 힘껏 행하여 성현의 경지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 말은 비록 간략하지만, 감춰지고 드러나며 크고 작은 천하의 일이 갖춰지지 않음이 없다. 도를 구하여 덕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이를 내팽개치고는 그 마음을 쓸 곳이 없게 된다. 그러나 성인의 세상과 이미 멀어져 강송(講誦)이 실전되어 상수(象數)와 명물(名物), 훈고와 범례에 대해 노숙한 스승과 선비도 오히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하물며 초학자들은 급하게 읽어가니 또한 어찌 그 큰 뜻과 요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하남(河南) 정부자(程夫子)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먼저 대학․논어․중용․맹자에 힘을 쏟도록 한 뒤에 육경으로 넘어가도록 했다. 대개 그 난이(難易)․원근․대소의 차례는 참으로 이와 같아야 혼란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제 네 가지 고경(古經)을 판각하고 다시 사서를 간행하여 앞뒤로 삼는다. 또 옛날에 들었던 것을 고증하고 이를 음훈(音訓)으로 만들어 독자의 편의를 돕는다. 또 이것에 대해 정자가 언급한 것을 모두 모아 그 뒤에 덧붙여 독법을 제시하여 학자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용은 비록 맹자 7편이 나오게 된 곳이지만 독자가 먼저 맹자를 읽지 않고 갑자기 중용을 읽게 되면 또한 도에 들어가는 차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에다 함께 기록해둔다. 소희(紹熙) 개원(1190) 섣달 경인일에 신안 주희가 임장(臨漳)의 군재(郡齋)에서 씀.
聖人作經, 以詔後世, 將使讀者誦其文, 思其義, 有以知事理之當然, 見道義之全體而身力行之, 以入聖賢之域也. 其言雖約, 而天下之故幽明巨細靡不該焉. 欲求道以入德者, 舍此爲無所用其心矣. 然去聖旣遠, 講誦失傳, 自其象數名物, 訓詁凡例之間, 老師宿儒尙有不能知者, 况於新學小生, 驟而讀之, 是亦安能遽有以得其大指要歸也哉? 故河南程夫子之敎人, 必先使之用力乎大學, 論語, 中庸, 孟子之書, 然後及乎六經. 蓋其難易遠近, 大小之序固如此而不可亂也. 故今刻四古經, 而遂及乎此四書者以先後之. 且考舊聞, 爲之音訓, 以便觀者. 又悉著凡程子之言及於此者, 附於其後, 以見讀之之法, 學者得以覽焉. 抑嘗妄謂中庸雖七篇之所自出, 然讀者不先於孟子而遽及之, 則亦非所以爲入道之漸也. 因竊幷記於此云. 紹熙改元臘月庚寅, 新安朱熹書于臨漳郡齋.
채단명의 헌수의에 발문을 붙임[跋蔡端明獻壽儀]
채 충혜공(蔡忠惠公)의 글은 천하에 널리 퍼졌지만 이 글만은 배포되지 못했다. 올해에 남쪽으로 와서 비로소 그의 내손(來孫: 5대손)인 의(誼)의 집에서 얻어보고 옛날의 군자가 그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이처럼 애경(愛敬)스러웠음을 알았다. 고아가 되어버린 나는 효도할 곳이 없어 책을 받들어 읽다가 목이 메어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 진본을 빌려 모사하여 판각함으로서 세상에 사람의 자식이 된 자에게 제시하여 채공의 “효도하는 집안에 영원히 효자를 내려준다”는 뜻을 확산하려 하니, 비단 그 글자의 획이 정밀해서일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또 우연히 훌륭한 장인을 얻었기에 제생 황간(黃榦)에게 와서 근엄하게 살펴보도록 했으니, 글씨를 아는 자도 그 붓을 놀리는 미묘한 뜻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리라. 소희(紹熙) 경술(1190) 섣달 16일에 단양 주희가 장포(漳浦)의 군재(郡齋)에서 씀.
蔡忠惠公書蹟徧天下, 而此帖獨未布. 今歲南來, 始得見於其來孫誼之家, 乃知昔之君子所以事其親者如此其愛且敬也. 孤露餘生, 無所爲孝, 捧玩摧咽, 不能仰視. 遂請其眞, 摹而刻之, 以視世之爲人子者, 庶以廣蔡公永錫爾類之志, 非獨以其字畫之精而已〔一〕. 然又偶得善工, 且屬諸生黃榦臨視唯謹, 知書者亦以爲不失其用筆之微意云. 紹熙庚戌臘月旣望, 丹陽朱熹書于漳浦郡齋.
〔一〕畫: 原作 「書」, 據正訛改.
이충주 집안의 여러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李忠州家諸帖]
군민 이기(李禨)의 형제가 그 집안에 소장된 제공들의 비지(碑志)에 관한 서첩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충주사군(忠州使君)의 절개와 재주가 이처럼 뛰어났음을 알았다. 그리고 나이가 아직 노년에 이르기 전에 능히 하루아침에 홀연히 사직하고 귀향했으니 그의 견식이 원대하고 사려가 깊었음을 알았다. 유 충정공[劉忠定公: 이름은 안세(安世)]이 그 묘비의 음기를 적어 구양수와 범중엄의 반열에 나란히 서게 되었으니, 어찌 다만 하나의 절개가 높았던 것을 취했을 뿐이겠는가? 그 아들 진강(晉江) 대부도 문자로 당시의 명현들과 종유하여 자못 칭송을 들었다. 비록 불행하게도 품은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죽었으나 세상의 천박하고 비루하여 명성도 없이 죽어간 자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다. 읽고 거듭 감탄하다가 돌에다 새겨서 나라 사람에게 알리려했으나, 임지로 떠나느라 일을 이루지 못하고 발문을 써서 돌려보냈다. 서재(恕齋)의 설은 오직 추충공(鄒忠公)이 상세히 했으나 그 마지막 장은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습속이 사람을 빠뜨림이 이와 같으니 아! 두려운 일이다. 황태사(黃太史)가 “독서는 정밀함을 귀하게 여긴다”고 논한 것은 학자들의 병폐를 적절하게 꼬집었는데, 그 수첩(手帖)이 남아있지 않음이 애석하다. 신안 주희(朱熹)가 씀.
郡人李君禨伯仲視予以其家藏羣公碑志書帖, 知忠州使君之節槪才略絶人如此. 而年未及老, 乃能一旦飄然謝事而歸, 其識遠而慮深矣. 劉忠定公題其碑陰, 至以儕於歐, 范二公之列, 豈徒取夫一節之高而已哉? 其子晉江大夫又以文字追逐一時名勝之間, 盛見稱許. 雖不幸未究其實以死, 然視世之苟賤貪鄙而泯沒於無聞者, 則有間矣. 讀之三歎, 欲刻之石, 以視邦人, 而迫去不果, 乃書其後而歸之. 恕齊之說, 唯鄒忠公爲詳實, 然其卒章亦不能無可疑者. 習俗之溺人如此, 吁可畏哉! 黃太史所論讀書貴精者, 切中學者之病, 惜其手帖之不存也. 新安朱熹書.
고언선 집안의 여러 서첩에 발문을 붙임[跋高彦先家諸帖]
나는 소흥(紹興) 연간에 간흉들이 조정을 휘젓고 충현들이 시국을 떠났음을 보고 나서 장포(漳浦) 고공[高公: 이름은 등(登)]의 충절을 알았다. 늘그막에 남쪽으로 와서 이내 학궁(學宮)에서 그의 신위에 절하고 가집(家集)에서 그의 일고(逸稿)를 보았으나, 그의 맏아들의 사람됨을 알고 또 그 본말의 상세함을 좀더 알고 나니, 매우 개탄할만했다. 계사(季士)는 또 이 축(軸)을 보여주었는데, 이미손(李彌遜)․증개(曾開)․호정(胡珵)․호전(胡銓)같은 분은 모두 선친이 종유한 사람이고 당시에 줄줄이 국정을 떠났다. 그 말을 거듭 살펴보니 더욱 개탄스러웠다. 이에 삼가 발문을 써서 돌려준다. 소희(紹熙) 신해년(1191) 4월 27일에 신안 주희가 씀.
熹猶及見紹興中年姦凶擅朝, 忠賢奔播時事, 而知漳浦高公之爲烈也. 老矣南來, 乃獲拜其祠象於學宮, 窺其逸稿於家集, 而識其嗣子之爲人, 又益得其本末之詳, 甚可歎也. 季士又以此軸見視, 如李, 曾, 二胡諸公, 皆先人所從游, 當日相隨去國者. 三復其言, 益以慨歎. 乃敬書其後而歸之. 紹熙辛亥四月二十七日, 新安朱熹書.
섭씨 모당의 시에 발문을 붙임[跋葉氏慕堂詩]
운암처사(雲巖處士) 섭중미(葉仲微) 군은 맑은 덕과 순수한 행실로 고을에 알려졌으나 나는 미쳐 보지를 못했다. 만년에 그의 아들 덕부(德符)와 함께 장주(漳州)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제군들이 모당(慕堂)에 붙인 시를 꺼내 보였다. 그런 뒤에 부모인 중미의 자애로움을 잘 알게 되었고, 또 자식인 덕부의 효성을 알게 되었다. 같은 벼슬아치 중에 많은 현인들이 그 일을 높이 추앙하여 기꺼이 시를 짓지 않음이 없었다. 나는 홀로 사적인 일 때문에 더욱 감동을 받아 비통한 심정을 말할 수 없었다. 이에 발문을 써서 내 뜻을 부쳤다. 이 때 덕부도 또한 늙고 객지생활로 지루해 했으나 공가(公家)의 일에는 구차한 바가 없었다. 그의 몰골은 수척했으나 시는 매우 풍요로워 나는 마음으로 존경하고 아꼈다. 그러나 천거할 수 없었는데 덕부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고 나서 나는 더욱 그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소희(紹熙) 2년(1191) 5월 5일에 단양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가 진강(晉江) 낙양(洛陽) 아래 생원(生院)에서 씀.
雲巖處士葉君仲微以淸德馴行聞於鄕, 余不及見矣. 晩與其子德符爲寮於漳, 一日, 出示諸君所賦慕堂詩, 然後益知仲微爲父之慈, 而又知德符爲子之孝也. 同官多賢者, 莫不高仰其事而樂爲之詩. 余獨以私故, 重有感焉, 而悲不能言也, 乃書其後, 以寄余意. 時德符亦老且倦游矣, 而於公家事無所苟, 其貌雖瘠而詩甚腴, 余心竊敬愛之. 而不能薦, 察德符無不足之色, 余以是益愧其人云. 紹熙二年重五日, 丹陽朱熹仲晦父書于晉江洛陽下生院.
등호조가 태주를 지킨 사실에 발문을 붙임[跋滕戶曹守台州事實]
처음에 나는 일 때문에 태주(台州)에 이르렀는데, 태주의 사군자들이 등공(滕公)이 성을 지킬 때의 일을 매우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마음으로 장하다고 여겼으나 그의 문자를 보지는 못했다. 수년 사이에 마음속에 왔다갔다하면서 잊혀지지 않았다. 이제 공의 손자 중의(仲宜)와 중선(仲宣)을 통해 이 글을 얻어 읽고 나서 공의 한평생 큰 절개가 모두 이처럼 탁월하고 위대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태주를 지킨 하나의 일만을 칭송해서가 아니다. 다만 태주를 지킨 일은 진사공(陳師恭)의 기록에 담겼고, 남도(南都)를 지킨 일은 정천추(程千秋)의 기록에 담겼기 때문에 그의 모획(謀劃)의 기발함과 절제(節制)의 정밀함은 모두 사람들의 이목에 환하게 남아있다. 심지어 채(蔡)․진(陳)․악(鄂) 세 읍을 지킨 공적 또한 적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 일을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다. 정천추는 또 기록하기를, “그가 대원수를 설득하여 서북쪽 병사를 이끌고 이성(二聖)을 맞았으며 동남쪽의 무리에게 격문을 발해 방창(邦昌)을 토벌했다”고 했는데 모두 사리에 절실하고 형편에 적절했다. 그러나 건염(建炎) 원년(1127)에 논한 다섯 가지 일과 하공(賀公)이 “정사를 논하다가 이부(吏部)로 보내졌고 도읍을 세우는 일을 논쟁하다가 참소를 당했다”고 적은 것을 보면, 분명 또한 탁월하고 절실한 논의가 있었을 것인데, 세상에는 그 일을 상세하게 말할 자가 없다. 그러나 행장에서는 또 “공은 주의(奏議) 10여권과 정부서(政府書) 30편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몇 가지 설은 반드시 그 사이에 갖춰져야 한다.
대저 당시에 이미 쓰이지 못했는데 만일 또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결국 장차 소문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태사씨(太史氏)가 천하에 유실된 사실들을 모두 수집하여 중흥을 이룬 군주와 신하들의 장거를 드러내려 하니, 이는 반드시 그 책무를 맡은 자가 있는 것이다. 두 손자가 집안 서적을 뒤져서 이 기록을 첨부해서 제출한다면, 저승에서 이를 알고 또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 소희(紹熙) 2년(1191) 가을 9월 임자일에 홍경외사(鴻慶外史) 주희(朱熹)가 씀.
始予以事至台州, 州人士君子爲予道滕公城守時事甚悉, 予心竊獨壯之, 而不及訪其文字. 數年之間, 時往日來于中不忘也. 今從公孫仲宜, 仲宣得此編而讀之, 乃知公平生大節類皆卓犖奇偉如此, 非獨守台一事爲可稱也. 但守台事有陳師恭之記, 守南都事有程千秋之記, 故其謀畫之奇, 節制之密皆焯焯在人耳目. 至其守蔡, 陳, 鄂, 功亦不細, 而莫有能言其事者. 千秋又記其說大元帥部西北之兵以迎二聖, 檄東南之衆以討邦昌, 皆切事機, 適形便. 而建炎初元所論五事, 與賀公所狀因論事而送吏部, 爭建都而遭讒毁, 則意必亦有卓絶切至之論, 而世莫得而語其詳焉. 然行狀又言公有奏議十餘卷, 與政府書三十篇, 則是數說者必已具於其間矣. 夫已不用於當時, 若又不傳於後世, 則是遂將泯沒於無聞, 豈不可惜也哉! 今太史氏方將網羅天下放失舊聞, 以著中興君臣一時之盛, 是必旣有任其責者. 二君其求諸家書, 以附此錄而往獻焉, 則九原有知, 其亦足以少慰也夫! 紹熙二年秋九月壬子, 鴻慶外史朱熹書.
여사인의 첩에 발문을 붙임[跋呂舍人帖]
여공(呂公)의 말에는 도를 강론하고 몸을 수양하는 방법을 밝힌 것이 상세하다. 학자가 그 선후와 완금의 차례를 살펴서 노력한다면,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소희(紹熙) 신해년(1191) 9월 계유일에 신안 주희(朱熹)가 삼가 씀.
呂公之言, 所以發明講道修身之法詳矣. 學者審其先後緩急之序而用力焉, 其入聖賢之域也孰禦? 紹熙辛亥九月癸酉, 新安朱熹敬書.
경려당시에 발문을 붙임[跋景呂堂詩]
등덕장(滕德章)이 이 책을 부치면서 경려당시(景呂堂詩)를 구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후학이 선현을 추앙하고 흠모하여 그 유적을 표창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묵묵히 이를 인식하여 저런 경지에 이르게 된 원인을 구하여 노력한다면 옳을 것이니, 어찌 시를 구하랴? 영구히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잊지 않도록 하는 일은 덕수(德粹)의 기(記)와 제공의 시(詩)가 이미 후세에 전하고 있으니, 또한 내 말을 기다릴 것이 없다. 이에 발문을 써서 돌려보낸다. 소희(紹熙) 신해년(1191) 10월 무인일에 주희[朱熹: 자는 중회(仲晦)]가 적음.
滕德章寄此冊來求景呂堂詩, 余謂後學宗慕前輩而表其遺跡, 固爲美事, 然黙而識之, 求其所以至於彼者而勉焉可也, 何以詩爲哉? 至於傳之遠久, 使人不忘, 則德粹之記, 諸公之詩已足以垂後矣, 亦無待於余言也. 乃書其後而歸之. 紹熙辛亥十月戊寅, 朱熹仲晦父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