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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약

황성 2015. 7. 2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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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   約


심약(沈約, 441~ 513)

중국 남조시대 양(梁)나라의 문학가. 자는 휴문(休文). 오흥군(吳興郡) 무강(武康 :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더칭[德淸]) 사람이다. 관직은 상서령(尙書令)까지 이르렀다. 박학다식하고 특히 사학에 뛰어났다. 여러 종류의 역사서를 저술했는데, 그중 <<송서(宋書)>>는 24사(史)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시풍은 화려하고 수식에 치중했으며, 음운의 조화를 꾀했고, 정교한 대구를 사용했다. 4성(平, 上, 去, 入) 설을 제창하여 詩에 성률이 있게 했다. 시가의 성률론(聲律論), 즉 '4성8병설'(四聲八病說)을 제창했으며, 사조(謝朓) 등과 함께 '영명체'(永明體)를 창시했다. 후대 율시(律詩)의 형성과 변려문(騈儷文)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저작으로 〈심은후집 沈隱侯集〉이 있다.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

 중국 남조 양나라 때 심약이 주청한 시의 음률상 법칙이다. 중국어에 평상거입(平上去入)의 4성조가 있는 것은 본래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제나라 양나라 때의 심약, 주옹 등에 의해 확실하게 논의됨에 따라 詩 한 句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의식하게 되었다. 심약은 팔병설을 내세워 시를 쓰는데 있어서 피해야 할 점을 지적하였다. 팔병이란, 5언구에 관해서 시율상으로 중요한 부분의 같은 성조의 중복을 피한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졌던 것은 아니지만, 시는 이때부터 점차 세련되어 당나라 때에 近體詩가 탄생하였다.


사성론(四聲論)

 원시 중국에에선 장단의 구분만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위진남북조 때 소위 음의 장단에 고하(高下)의 요소를 결합하여 음을 네 가지로 분류하는 사성론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사성은 평(平), 상(上), 거(去), 입(入)을 말하는데, 개개 음의 성격은 장단, 고저, 완급, 경중 등에 따라 구분된다. 평성은 높고 긴 소리, 상성은 굴절되는 소리, 거성은 떨어지는 소리, 입성은 끝이 급하게 끊어지는 소리이다. 이후 의미와 소리의 충돌로 인해 평, 상, 거, 입의 네 가지 소리는 시창작에 있어서 평성(平聲 : 平)과 측성(仄聲 : 上, 去, 入)이라는 두 범주의 소리로 통합되었다.

중국 고대 음의 四聲

 현대중국어의 四聲

陰平

陽平



팔병설(八病說)

5언시를 지을 때, 성률면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여덟 가지를 이른다.

1. 평두(平頭) : 제 1자가 제 6자와 같은 성조일 수 없고, 제 2자와 제 7자가 같은 성조일 수 없다.

2. 상미(上尾) : 제 5자는 제 10자와 같은 성조일 수 없다.

3. 봉요(蜂腰) : 제 2자와 제 5자가 같은 성조인 경우이다.

4. 학슬(鶴膝) : 제 5자와 제 15자가는 같은 송조일 수 없다.

5. 대운(大韻) : 한 연에서 압운자와 같은 운의 글자를 다시 쓸 수 없다.

6. 소운(小韻) : 제 10자인 각운을 제외한 아홉 글자 중에서 같은 운인 글자가 중복될 수 없다.

7. 방축(傍紐) : 한 구 안에 쌍운자(雙韻字)를 쓸 수 없다.

8. 정축(正紐) : 한 구나 한 연 안에 한 꿰미(紐)의 동일한 음을 쓸 수 없다.


팔영루(八詠樓)

팔영루(八詠樓)의 원래 이름은 현창루(玄暢樓)인데 뒤에 원창루(元暢樓)로 고쳤다. 금화시(金華市)에 있다. 이 누대는 남조 제(齊)나라 융창(隆昌) 원년(494) 동양군 태수(東陽郡太守)이자 저명한 사학가(史學家)이며 문학가(文學家)인 심약이 지은 것이다. 준공한 뒤에 심약이 일찍이 사람들이 누대에 올라 읊은 시에 대해 많이 차운하여 지었는데,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었다. 그 시 가운데 《등원창루(登元暢樓)》가 있다.

《登元暢樓》

危峰帶北阜 높은 봉우리 북쪽 언덕을 두르고

高頂出南岑 높은 산은 남쪽 봉우리에 솟았네

中有淩風榭 가운데는 바람을 능멸하는 누대가 있으니

廻望川之陰 돌아서 시냇물 북쪽을 바라보네

岸險每增減 언덕은 험한데 매양 높기도 하고 또 낮으며

湍平互淺深 여울물은 평평한데 깊기도 하고 얕네

水流本三派 물줄기는 본래 세 갈래이지만

台高乃四臨 누대는 높아 마침내 사면으로 굽어보네

上有離群客 누대 위에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나그네 있으니

客有慕歸心 나그네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네

落暉映長浦 지는 해는 긴 포구에 비추고

煥景燭中潯 환한 빛은 중간쯤의 물가에서 빛나네

雲生嶺作黑 구름이 생기자 봉우리는 검게 변하고

日下溪半陰 해가 떨어지자 시내에는 반쯤 그늘졌네

信美非吾土 참으로 아름답지만 나의 고향이 아닌데

何事不抽簪1) 무슨 일로 벼슬을 버리지 못하는가


그리고 이 초석에 또 여덟 수의 시를 더 적었는데, 이를 두고 《팔영시(八詠詩)》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에 걸작으로 호평 받은 장편시이다. 이 시의 제목으로 인하여 후대에 ‘원창루’라는 누대 이름을 바꾸어 ‘팔영루(八詠樓)’라고 하였다.


1) 추잠(抽簪) : 남제(南齊) 때의 은사(隱士) 도홍경(陶弘景)이 종형(從兄)에게 보낸 편지에 “전에 내가 나이 40세 전후에 상서랑이 되거든 즉시 관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려고 기약했었는데, 지금 나이 36세에 비로소 봉청이 되었고 보면, 40세의 머리를 알 만하니,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昔仕宦期四十左右作尙書郞 卽抽簪高邁 今三十六 方作奉請 頭顱可知 不如早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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