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書百選 卷之一
上延平李先生1)
熹拜違2)侍右3) 焂忽4)月餘라 頃嘗附兩書於建寧5)이러니 竊計已獲關6)聽矣라 熹十八日에 離膝下7)하야 道路留滯하야 二十四日에 到鈆山8)館於六十兄9)官舍하니 路中幸無大病호이다 熹向蒙指喩10)하야 二說에 其一已敍次成文하고 惟義利之說을 見得未分明이라 說得未快하야 今且以泛論時事11)者代之니 大略如前書中之意라 到闕萬一得對畢에 卽錄呈也리니 但義利之說이 乃儒者第一義니 平時豈不講論及此리오마는 今欲措辭斷事면 而茫然不知所以爲說하니 無乃此身自坐在裏許12)而不之察乎아 此深可懼者라 天氣未寒하니 更乞爲道保重하야 以慰瞻仰이로소이다 九月二十六日拜狀不備
주서백선(朱書百選) 제1권
여/연평이선생서(與延平李先生書)
제가 선생님 곁을 절하고 떠난 지 어느덧 달포가 지났습니다. 진작 건영(建寧)으로 글월을 올렸으니 이미 받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18일에 어머니 슬하(膝下)를 떠나서 도중에 머물다가 24일에 연산(鉛山)에 도착하여 육십형(六十兄) 관사에서 묶고 있습니다. 여행 중에는 다행히도 아무 탈이 없었습니다. 전에 저에게 깨우쳐 지시해 주신 두 말씀 가운데 하나는 앞 뒤 차례와 전체를 대략 알겠습니다 마는, 의리(義利)에 관한 말씀은 저의 이해가 분명하지 못해서 주장이 명쾌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사(時事)를 논(論)하는 것으로써 대신하오니 그 내용은 전서(前書)의 뜻과 대략 같습니다. 대궐에 도착하여 만일 무사히 폐하를 배알하고 나면 바로 적어 올리겠습니다. 다만 의리(義利)의 설(說)은 유자(儒者)의 으뜸가는 명제(命題)이니 어찌 평시(平時)에 이를 강론(講論)하지 않았겠습니까 마는 지금 구체적으로 말로써 표현하고 현실의 사안을 판단하려 하니 망연(茫然)하여 논설할 방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자신이 그 의리(義利)가 불분명한 가운데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의리(義利)를 판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이것이 심히 두려운 것입니다. 아직 날씨가 그렇게 차지는 않습니다. 성도(聖道)를 행하시고 존체(尊體)를 보전(保全)하시어 저의 첨앙(瞻仰)에 위안을 주시기를 비옵니다. 9월 26일에 미비한 글을 전하고 올리옵니다.
【역주】
1) 延平李先生(연평이선생) : 명은 동(侗)이요 자는 원중(愿中)이다. 남검주(南劒州) 검포인(劒浦人)이며 선생의 스승이다. 효종(孝宗) 융흥(隆興) 원년(元年) 계미(癸未)년에 선생이 감담주(監潭州) 남부묘(南缶廟)의 직(職)으로 있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았는데 이때 연평이 마침 건안(建安)으로부터 연산(鉛山)에 가는 길이었는데 무이산(武夷山) 담계(潭溪)에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이 임금에게 올릴 마땅한 말을 물으니 연평(延平)이 답하기를, “금일(今日) 삼강(三綱)이 바르지 못하고 의리(義利)가 불분명하다. 운운” 하였음.
2) 拜違(배위) : 위(違)는 별(別)이니 이별하다. 떠나다는 뜻.
3) 侍右(시우) : 존자(尊者)는 오른쪽에 있고 시자(侍者)는 왼쪽에 있으니 우(右)는 연평(延平)을 가리킨다.
4) 焂忽(숙홀) : 매우 빠르다는 뜻.
5) 建寧(건령) : 부명(府名). 연평(延平)이 검주(劒州)사람이나 건영부(建寧府)가 검주(劒州)에서 가깝고 이때에 연평의 차자(次子) 신보(信甫)가 건영(建寧) 관내(管內)의 주부직(主簿職)에 있었기 때문에 건영(建寧)으로 편지를 부쳐서 연평(延平)에게 전하려 하였다.
6) 關(관) : 경유(經由)와 같다.
7) 膝下(슬하) : 선생의 모(母) 석인(碩人) 축씨(祝氏)가 이때에 선생의 봉양을 받고 있었다.
8) 到鉛山(도연산) : 연평의 아들 우직(友直)이 이 때에 연산위(鉛山尉)를 맡고 있었다.
9) 六十兄(육십형) : 연평(延平)의 아들 우직(友直)을 가리킴. 옛 사람이 숫자로써 그 사촌 형제의 차례를 나타내었으니 우직(友直)이 그 형제의 차서로 육십 번째였다. 형(兄)은 붕우(朋友)간의 존칭이다.
10) 向蒙指喩(향몽지유) : 선생이 조정으로 불려 갈 때에 임금에게 고(告)할 마땅한 말을 물었는데 연평(延平)이 답하기를, “금일(今日) 삼강(三綱)이 부정(不正)하고 의리(義利)가 불분(不分)하다. 운운.” 하였음.
11) 泛論時事(범론시사) : 복수(復讐) 제적(制敵) 등의 일.
12) 裏許(이허) : 이(裏)는 의리불분명지리(義利不分明之裏)이고 허(許)는 어사(語辭)임.
與陳侍郞1)
伏蒙還賜手書慰藉2)甚厚하고 又蒙台慈3)引重4)再三이라 熹賦性朴愚가 誠不足以奉承敎令이나 然竊不自勝其慕用之私하야 而試效5)一言焉이러니 執事者其亦聽之ㄴ저 熹嘗謂天下之事가 有本6)有末하니 正其本者는 雖若迂緩而實易爲力하고 捄其末者는 雖若切至而實難爲功이라 是以昔之善論事者는 必深明夫本末之所在而先正其本하나니 本正則末之不治은 非所憂矣라 且以今日天下之事論之컨대 上則天心未豫하야 而饑饉荐臻하고 下則民力已殫하야 而賦斂方急하야 盜賊四起人心動搖하니 將一二以究其幣하야 而求所以爲圖回之術컨댄 則豈可以勝言哉아 然語其大患之本이면 則固有在矣니 盖講和7)之計決에 而三綱8)頹萬事墮하고 獨斷9)之言進에 而主意驕於上하고 國是10)之說行에 而公論鬱於下하니 此三者가 其大患之本也라 然爲是說者는 苟不乘乎人主心術之蔽면 則亦無自而入이니 此熹所以於前日之書不暇及他하고 而深以夫格君心之非者로 有望於明公이라 盖是三說者不破면 則天下之事無可爲之理오 而君心不正이면 則是三說者又豈有가破之理哉아 熹竊不自勝其憤懣之積이라 請復得而詳言之하리라
여진시랑(與陳侍郞)
엎드려 보내신 글을 받으니 위로와 도움이 심히 두텁고, 또 크나큰 자애를 베풀어 재삼 천거해 주시니, 나의 천성이 어리석어 가르침을 받들기에 참으로 부족하나 감사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한 말씀 드리오니 부디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하(天下)의 일은 근본과 말단이 있으니 그 근본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비록 둘러 가고 느린 것 같으나 실은 쉽게 힘을 얻을 수 있고 그 말단을 더듬는 사람은 비록 아주 적절한 것 같으나 실은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부터 일을 잘 논(論)하는 사람은 반드시 본말(本末)의 소재를 확실하게 밝혀서 먼저 그 근본을 바르게 하니 그 본근이 바르면 말단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근심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시국(時局)을 논할 것 같으면 위로는 하늘의 마음이 즐겁지 아니하여 기근(饑饉)이 자주 닥치고 아래로는 백성의 힘이 고갈 된데다 징세(徵稅)가 가혹하여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인심이 흉흉하니 그 폐단을 일일이 규명해서 회복의 방책을 강구하려면 어찌 한 두말로써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큰 근심의 근본 원인을 말한다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겁입니다. 강화지계(講和之計)가 결정되자 삼강(三綱)이 쇠퇴하여 만사(萬事)가 무너지고, 독단지언(獨斷之言)이 나옴에 위로 임금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국시지설(國是之說)이 행해짐에 아래로 공론(公論)이 꽉 막혀 답답하니 이 세 가지가 큰 근심의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설(說)을 주창한 사람이 만일 임금의 마음의 가리어 덮인 부분을 편승하지 않았다면 어디로부터 임금의 마음속으로 들어갔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으로 내가 이전의 글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임금의 마음이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기를 명공(明公)에게 바랐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설을 깨뜨리지 않고는 천하(天下)의 일이 되는 것이 없을 것이며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이 세 가지 설이 또 어찌 깨뜨려지겠습니까. 마음에 쌓인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이를 자세히 논하고자 합니다.
夫沮國家恢復之大計者는 講和之說也오 壞邊陲備禦之常規者는 講和之說也오 內咈吾民忠義之心하고 而外絶故國11)來蘇之望者는 講和之說也오 苟逭目前宵旰12)之憂하야 而養成異日宴安之毒者가 亦講和之說也니 此其爲禍가 固已不可勝言이오 而議者言之固已詳矣이어니와 若熹之所言이 則又有大於此者라 盖以祖宗之讐13)는 萬世臣子之所必報而不忘者니 苟曰力未足以報ㄴ댄 則姑爲自守之計하야 而蓄憾積怨以有待焉이 猶之可也어니와 今也進不能攻退不能守하야 顧爲卑辭厚禮以乞憐於仇讐之戎狄幸而得之면 則又君臣相慶하야 而肆然以令於天下曰하대 凡前日之薄物細故14)를 吾旣損之矣라하야 欣欣焉無夫毫分忍痛含寃迫不得已之言하야 以存天下之防15)者하니 嗚呼孰有大於祖宗陵廟之讐者언마는 而忍以薄物細故損之哉아
국가 회복의 대계(大計)를 저해(沮害)하는 것도 강화지설(講和之說)이요, 변방 방어의 상규(常規)를 무너뜨리는 것도 강화지설(講和之說)이요, 안으로 백성의 충의지심(忠義之心)을 어기고 밖으로 고국(故國)의 영토 회복의 희망을 끊는 것도 강화지설(講和之說)이요, 구차히 목전(目前)의 소간지우(宵旰之憂)에서 도망쳐 타일(他日)의 연안지독(宴安之毒)을 양성하는 것도 또한 강화지설(講和之說)입니다. 이 같은 강화지설(講和之說)의 재화(災禍)는 이미 말로써 다할 수 없고 이를 논의(論議)한 것이 이미 상세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중대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 조종(祖宗)의 원수는 만세(萬世) 신자(臣子)가 기필코 갚아야 하는 것이니, 만일 힘이 원수를 갚기에 부족하다면 우선 수비(守備)의 계책(計策)을 세우고 원한(怨恨)을 쌓아서 때를 기다림은 오히려 있을 수 있는 일이거니와, 지금의 실정은 나아가 공격도 하지 아니하고 물러나 수비도 하지 않고 도리어 비겁한 말과 두터운 예로써 원수인 오랑캐에게 동정을 빌고, 요행히 동정을 얻으면 또 군신이 서로 좋아하며 뽐내어 천하(天下)에 호령하여 말하기를,
“전일(前日)의 작은 일은 모두 잊고 앞으로의 큰 일을 도모하자”
고 하며 희희낙락하여 털끝만치도 아픔을 참고 원한을 품어 절박한 말로써 천하의 방비가 되는 군신지의(君臣之義)와 부자지은(父子之恩)을 보존하려 하지 않으니, 아! 무엇이 조종(祖宗) 능묘(陵廟)의 원수보다 크기에 이를 사소한 일이라 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까.
夫君臣之義父子之恩은 天理民彛之大니 有國有家之所以繫民心紀綱政事本根之要也라 今所以造端建極16)者가 如此하며 所以發號施令者如此오 而欲人心으로 固結於我而不離하고 庶事로 始終有條而不紊이 此亦不待知者而凜然以寒心矣라 而爲此說者之徒가 懼不公論之沸騰而上心之或悟也하야 則又相與作爲獨斷之說 傳會經訓文致17)姦言 以深中人主之所欲 而陰以自託其私焉이라 本其爲說이 雖原於講和之一言이나 然其爲禍는 則又不止於講和之一事而已리니 是盖將重誤吾君하야 使之傲然自聖 上不畏皇天之譴告하며 下不畏公論之是非하고 挾其雷霆之威萬勻之重하야 以肆於民上而莫之敢攖18)者가 必此之由也니 嗚呼其亦不仁也哉ㄴ저 甚於作俑19)老矣로다 仁人君子其可以坐視其然하야 而恬然不爲之一言以正之乎아 此則旣然矣어니아 而旬日之間에 又有造爲國是之說以應之者하니 其欺天罔人包藏險慝이 抑又甚焉이어늘 主上旣可其奏하시니 而群公亦不聞有以爲不然者하니 熹請有以詰之하리라
대체 군신지의(君臣之義)와 부자지은(父子之恩)은 천리(天理)와 민이(民彛)의 대강(大綱)으로써 국가와 가정을 가진 자가 민심을 수습하고 정사(政事)를 바로잡는 근본인 것입니다. 지금 법을 세우는 바가 이와 같고 정령(政令)을 발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도 민심이 나에게 굳게 맺어져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정사(政事)가 차례가 있어 문란하지 않기를 바라니, 이는 누가 보아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강화지설(講和之說)을 주창한 무리들이 공론(公論)이 비등하고 혹 임금의 마음이 이를 깨달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또 독단지설(獨斷之說)을 만들어 내어 경전(經傳)의 뜻을 멋대로 해석하고 간사한 말을 함부로 꾸며내어 임금의 뜻에 맞추어 속으로는 자기들의 사리(私利)를 꾀하려 하니, 본래 독단지설(獨斷之說)을 만들어 낸 것이 비록 강화지설(講和之說) 때문이지만 그 폐단은 강화지설(講和之說)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앞으로 임금의 마음을 더욱 그르쳐 스스로 성인(聖人)인 것처럼 자만하여 위로 하늘의 꾸지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래로 공론(公論)의 시비(是非)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뢰같은 위엄과 만균(萬勻)의 무게를 끼고 백성의 위에 군림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으니 이 또한 독단지설(獨斷之說) 때문입니다.
아! 그 어질지 못함이 무덤 속에 넣는 인형을 만든 자보다 더 심합니다. 어진 군자(君子)가 어찌 앉아만 있고 이를 바로 잡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일이 이 지경인데도 근래에 또 국시지설(國是之說)을 지어내어 독단지설(獨斷之說)과 부응하는 자가 있으니 그 하늘과 사람을 속이고 사특(邪慝)함을 마음속에 감춤이 독단지설(獨斷之說)보다 더 심합니다. 임금이 이미 국시지설(國是之說)을 옳다 하고 여러 신하가 또한 이에 붙좇아 이구동성으로 이를 옳다 하니 내 이를 힐책(詰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夫所謂國是者가 豈不謂夫順天理合人心而天下之所同是者耶아 誠天下之所同是也ㄴ댄 則雖無尺土一民之柄이라도 而天下莫得以爲非어던 況有天下之利勢者哉아 惟其不合乎天下之所同是而彊欲天下之是之也라 故必懸賞以誘之嚴刑以督之然後僅足以劫制士夫不齊之口나 而天下之眞是非는 則有終不可誣者矣니 不識今日之所爲若和議之比果順乎天理否耶合乎人心否耶아 誠天理合乎人心이면 則固天下之所同是也니 而論何自而生乎리오 若猶未也하야 而欲主其偏見濟其私心하야 彊爲之名 號曰國是라야 假人主之威以戰天下萬口一辭之公論이면 吾恐古人所謂德惟一20)者가 似不如是오 而子思所稱具曰予聖誰知烏之雌雄者가 不幸而近之矣로다
대저 이른바 국시(國是)라는 것이 어찌 천리(天理)에 순(順)하고 인심(人心)에 합(合)하여 천하(天下)가 함께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천하(天下)가 옳다고 한다면 비록 자투리의 땅과 한 사람의 백성을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천하가 옳지 않다고 못할 것인데 하물며 천하의 권세를 잡은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그 천하가 옳다고 하는 데에 합당(合當)하지 않음에도 이를 억지로 천하가 옳다고 여기기를 바라는 까닭으로, 꼭 현상(懸賞)을 걸고 백성을 회유하고 엄한 형벌로써 백성을 독찰(督察)하며 그런 연후에야 겨우 사대부(士大夫)의 여러 주장을 틀어 막는 데만 급급한 실정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참된 시비(是非)는 끝까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횡행하고 있는 화의(和議)같은 주장들이 과연 천리(天理)에 순(順)하고 인심(人心)에 합당(合當)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천리에 순하고 인심에 합당하다면 천하가 다 옳다고 할 것이니 이론(異論)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만약 천리에 순하고 인심에 합당하지 않으면서도 그 편견을 주장하여 사욕(私慾)을 충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국시지설(國是之說)을 만들어 임금의 위엄을 빌려서 천하가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공론(公論)과 싸우려 한다면 고인(古人)이 이른 바 “덕(德)은 오직 하나”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 아닌 것 같고 자사가 말한
“모두 내가 성인(聖人)이라고 하니 어느 것이 암까마귀인지 어느 것이 수까마귀인지 누가 알겠나”
고 한 말이 불행하게도 오늘의 일에 흡사한 것 같습니다.
昔在熙寧21)之初王安石22)之徒가 嘗爲此論矣리니 其後章淳蔡京之徒가 又從而紹述之하야 前後五十餘年之間士大夫出而議於朝退而語乎家에 一言之不合乎此면 則指而爲邦朋邦誣23)하야 而以四兇/之罪24)隨之하니 盖近世主張國是之嚴凜乎其不可犯이 未有過於斯時25)者로대 而卒以公論不行으로 馴致大禍26)하야 其遺毒餘烈이 至今未已하니 夫豈國是之不定然而然哉아 惟其所是者가 非天下之眞是而守之太過라 是以上下相徇하야 直言不聞 卒以至於危亡而不悟也하니 傳曰호대 差之毫釐繆以千里하니 況所差가 非特毫釐哉아
지난 날 희녕(熙寧) 초년에 왕안석(王安石)의 무리가 국시지설(國是之說)을 주장하였고, 그 후에 장돈(章惇)과 채경(蔡景)의 무리가 또 이를 쫓아 이으니, 이것이 전후(前後) 50여년간입니다.
사대부(士大夫)가 나아가 조정에서 의논(議論)하고 물러나 가정에서 대화(對話)할 때에 한 말이라도 국시지설(國是之說)에 맞지 않으면 붕당을 짓고 군신(君臣)을 속인다고 하여 사흉(四凶)의 죄로 다스리니, 근세에 주장한 국시(國是)의 엄하고 살벌함이 왕안석 장채의 때가 가장 혹독하였거늘 이 때에 끝내 공론이 시행되지 않고 이윽고 오랑캐가 남침하여 그 유독(遺毒) 여세(餘勢)가 지금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어찌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이러하겠습니까. 그 국시(國是)라는 것이 천하가 진실로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지키려고 함이 너무 혹독하여 이 때문에 상하(上下)가 서로 쫓아 직언(直言)하는 사람이 없고 마침내 위망(危亡)의 지경에 이르러도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마담(司馬談)의 ������역전(易傳)������에 말하기를,
“처음의 털끝 만한 차이가 나중엔 천리(千里)나 서로 어긋난다.”
고 했으니, 하물며 차이가 털끝 이상일 때에야 어떻겠는가.
鳴呼其可畏也已어늘 奈何其又欲以是重誤吾君하야 使之尋亂亡之轍跡 而躬駕以隨之也오 鳴呼此三說者는 其爲今日大患之本이 明矣로다 然求所以破其說者ㄴ댄 則又不在乎他하야 特在乎格君心之非而已니 明公이 不在朝廷則이어니와 一日立乎其位에 則天下之責이 四面而至니 與其顚沛於末流하야 而未知所濟론 孰若汲汲27)焉以勉於大人之事28)하야 而成已成物29)之功을 一擧而兩得之也오 熹杜門求志하야 不敢復論天下之事久矣리니 於閤下之言30)에 竊有感焉이라 不能自已하야 而復發其狂言如此하니 不審高明以爲如何也오 尙書汪公31)이 計就職已久라 方群邪競逐32)正論消亡之際하야 而二公在朝로 天下望之屹然若中流之底柱33)하야 有所恃而不恐하나니 雖然時難得而易失이오 事易毁而難成이니 更願合謀同力하야 早悟上心 以圖天下之事하라 此非獨熹之願이라 實海內生靈34)之願也니라
아! 두려운지고. 어찌하여 이 국시지설(國是之說)로써 거듭 우리 임금을 오도(誤導)하여 난망(亂亡)의 전철을 밟게 하고 자신들도 함께 따르려고 하는지. 아! 세 가지 설(說)이 오늘날 대환(大患)의 근본임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삼설(三說)을 깨뜨릴 방법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는데 있을 따름입니다. 명공(明公)은 조정의 직위에 있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하루라도 그 직위에 있을진댄 명공(明公)에 대한 천하의 추궁이 사방에서 도래할 것이니 망하는 대열의 끄트머리에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어쩔 줄 몰라 하기보다는 임금을 바로잡는 일에 부지런히 힘써 세상을 위하고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겠습니까. 내 문을 닫고 자기 수양에 힘써 천하의 일을 논(論)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합하(閤下)의 말에 느낀 바 있어 마지못해 다시 광언(狂言)을 발하오니 명공(明公)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서(尙書)인 왕공(汪公)은 조정의 직위(職位)에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군사(群邪)가 다투어 치닫고 정론(正論)이 소망(消亡)하는 이 때에 이공(二公)이 조정에 있으니 천하가 바라보기를 우뚝이 중류(中流) 지주(砥柱) 같아 믿어 두려워하지 않는 바입니다. 비록 그러나 기회는 얻기가 어렵고 잃기는 쉬우며 일은 해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려우니 다시 바라나니 이공(二公)이 합모동력(合謀同力)하여 일찌감치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 천하의 정사(政事)를 바로잡기 바랍니다. 이는 나 개인만의 바람이 아니라 실로 해내생령(海內生靈)의 바람입니다.
與陳丞相35)
熹昨奉咫尺之書36)햐야 脩致慶問37)하고 因以愚慮로 上瀆高明하니 自揣妄庸이 宜得譴之罪리니 乃蒙勻慈還賜手敎하야 撫存38)開納39) 禮意勤厚라 伏讀三歎하야 有以見明公位愈高而心愈下德彌盛而禮彌恭하야 果非小人之腹所能料也로다 盖熹雖愚不肖無所短長40)이나 然區區用力於古人之學하야 閱天下之義理亦庶幾不爲懵然者로니 豈不知外有君臣之義內有母子之情而平生知己如明公者大之又不爲不厚하니 豈不願及明時效尺寸하야 以報君親酬知遇하고 而直逡巡退縮以求守此東罔之陂41)乎아
여진승상(與陳丞相)
전일(前日)에 글월을 올려 하례(賀禮)를 드리고 인하여 어리석은 생각으로 위로 고명(高明)에게 누를 끼쳤으니 생각해 보니 못난 사람이 꾸중을 들어야 마땅하거늘 이에 큰 자애를 베풀고 도리어 글월을 주시어 마음을 열어 위로하고 두터이 예대(禮對)하시니 엎드려 세 번 감탄함에 명공(明公)이 위(位)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낮추고 덕(德)이 융성(隆盛)할수록 예(禮)는 더욱 공손히 함을 볼 수 있으니 과연 저 같은 사람이 헤아려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비록 불초(不肖)하여 보잘 것 없으나 고인(古人)의 학문에 힘쓰고 세상의 의리(義理)를 살피려고 애썼으니 아마 아주 어리석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찌 밖으로 군신지의(君臣之義)가 있고 안으로 모자지정(母子之情)이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명공(明公)과 같은 평소 지기(知己)가 두터이 대우(待遇)해 주시니 어찌 이 밝은 때에 작으나마 정성을 다해 군친(君親)과 지우(知遇)에 보답하지 아니하고 다만 머뭇머뭇 물러나 이 동강(東岡)의 언덕만 지키고 있겠습니까.
此其中必有甚不得已42)者니 惟明公이 幸察言하야 而聽其所欲 使得竊祠官43)之祿以養其親하야 而自放於荒閒寂寞之境 以益求其所志ㄴ댄 庶乎動心忍性涵泳中和하야 賴天之靈 得遂變化其狂獧44)朴愚之質이면 則異時에 明公未忍終棄하야 猶熏沐45)而器使46)之면 其或可以奉令承敎而不敢辭也리니 明公亦宜自謀所以淸化原47)革流弊者하야 使乾剛不亢48)而君道下濟하고 忠讜競勸而臣道上行이면 則天下交泰上下志同하야 而天下之士雖有囂囂然處畎畝而樂堯舜49)者라도 猶將爲明公出이어던 況如熹者아 又豈足道也哉아 伏惟明公勉焉이면 則天下幸甚하리라
제가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으니 명공(明公)은 이 점을 살펴 저의 뜻을 들어주시어 사관(祠官)의 녹(祿)을 얻게 하여 노모(老母)를 봉양케 하고 한적한 강호(江湖)에서 자기 수양에 힘쓰게 하면, 아마 힘써 극기(克己)하고 내면에 중화(中和)의 덕(德)을 함양하여 천령(天靈)에 힘입어 광환(狂獧)하고 박우(朴愚)한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곧 타일(他日)에 명공(明公)도 저를 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저의 재능을 진작시켜 기용(器用)하려 할 것이고 저 또한 명공의 가르침을 받들어 이에 응할 것입니다. 명공은 또한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맑게 하고 시폐를 개혁할 방도를 강구하여 임금은 교만하지 아니하여 군도(君道)가 아래에 시행되고 충당(忠黨)은 다투어 힘써 신도(臣道)가 위로 임금에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천지(天地)가 모두 편안하고 상하(上下)가 뜻이 같아질 것입니다. 천하의 선비가 비록 아무 욕심 없이 견묘(畎畝)에 처하여 요순(堯舜)의 도를 즐기는 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명공(明公)을 위해 세상에서 나올 것이니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명공(明公)이 이미 힘쓰면 천하(天下)가 다 다행히 여길 것입니다.
與陳丞相
熹竊觀古之君子有志於天下者는 莫不以致天下之賢爲急하나니 而其所以急於求賢者는 非欲使之綴緝50)言語譽道功德하야 以爲一時觀聽之美而已라 盖將以廣其見聞之所不及思慮之所不至하고 且慮夫處已接物之間에 或有未盡善者하야 而將使之有以正之也니 是以其求之不得不博其禮之不得不厚其待之不得不誠 必使天下之賢識與不識이 莫不樂自致於吾前하야 以輔吾過하야 然後吾之德業이 得以無媿乎隱微而寢極乎光大耳라 然彼賢者가 其明旣足以燭事理之微其守旣足以遵聖賢之轍이라 則其自處必r高하야 而不能同流合汚以求譽하며 自待必厚하야 而不能陳詞飾說以自媒하며 自信必篤하야 而不能趨走唯諾以苟容也니 是以王公大人이 雖有好賢樂善之誠이나 而未必得聞其姓名識其面目盡其心志底蘊51)어어든 又況初無此意하고 而其所取特在乎文字言語之間乎아
여진승상(與陳丞相)
내 생각해 보니 옛부터 천하(天下)에 뜻을 둔 군자(君子)가 천하의 현자(賢者)를 초치(招致)하기를 급하게 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지만, 그 구현(求賢)을 급히 한 까닭이 그들로 하여금 언설(言說)을 엮어 자기의 공덕(功德)을 칭송케하여 한때의 보고 들음의 즐거움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견문(見聞)과 사려(思慮)가 미치지 못하는 곳을 넓히고 또 처세(處世)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를 바로잡게 하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 현인을 구함을 널리 하지 않음이 없고 현인(賢人)을 예우(禮遇)함을 두터이 하지 않음이 없고 현인을 대우(待遇)함을 성실히 하지 않음이 없어 모든 천하의 현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즐겨 내 앞에 나와 나의 부족함을 보충케 하니 그런 연후에 자신의 덕업(德業)이 은미(隱微)한 곳에도 한점 부끄러움이 없고 점차 광명정대(光明正大)의 극(極)에 도달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 현인들은 그 명철함이 족히 사리(事理)의 은미(隱微)함을 밝힐 수 있고 그 자수(自守)가 족히 성현의 법도를 따를 수 있으니 그 자처(自處)함이 반드시 높아서 시류(時流)에 부합하여 명예를 구하지 아니하고 그 자신(自信)이 반드시 돈독하여 붙좇아 구차함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왕공대인(王公大人)이 비록 호현(好賢) 낙선(樂善)하는 정성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현인의 성명(姓名)과 면목(面目)을 알거나 그 마음속 포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처음부터 호현(好賢) 낙선(樂善)의 뜻도 없고 그 취하는 바가 다만 언어(言語) 문자(文字)에만 있는 자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恭明公以厚德重望으로 爲海內所宗仰者有年矣라 而天下之賢士大夫가 似未得盡出於門下也니 豈明公所以好之者未至歟며 所以求之者未力歟 所以待之者未盡歟아 此則必有可得而言之者矣로다 盖好士而取之文字言語之間이면 則道學德行之士를 吾不得而聞之矣오 求士而取之投書獻啓52)之流면 則自重有恥之士를 吾不得而見之矣오 待士而雜之妄庸便佞之伍면 則志節慷慨之士가 寧有長揖而去耳라 而況乎所謂騈儷53)諛佞無實하야 以求悅乎世俗之文이 又文字之末流니 非徒有志於高遠者가 鄙之而不爲라 若乃文士之有識者가 亦未有肯識者가 亦未有肯深留意於其間者야라 而間者竊聽於下風이니 似聞明公專欲以此評天下之士라하니 若其果然ㄴ댄 則熹竊以爲誤矣라
삼가 생각하니 명공(明公)이 두터운 덕과 무거운 명망(名望)으로 세상의 숭앙(崇仰)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건만 천하의 어진 사대부(士大夫)가 명공의 문하(門下)에 다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어찌 명공의 호현(好賢)함이 지극하지 못하며 구현(求賢)함이 힘들이지 아니하며 대현(待賢)함이 최선을 다하지 아니하여 그렇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그런 까닭이 있다 할 수 있으니 대개 호현(好賢)하되 그 취(取)함이 언어(言語) 문자(文字) 사이에만 있다면 도학(道學) 덕행(德行)의 선비는 얻기가 어려울 것이고 구현(求賢)하되 그 취(取)함이 투서(投書) 계문(啓文)에만 있다면 자중(自重) 유치(有恥)의 선비는 구할 수 없고 대현(待賢)하되 그들을 무능하고 아첨하는 무리에 섞어 둔다면 지절(志節) 강개(慷慨)의 선비는 이를 사양하고 떠날 것입니다.
더구나 이른바 대우변려(對偶騈儷)의 글은 아첨스럽고 실속이 없어 세속의 즐거움만 구하는 글이고 또 문자(文字)의 말류(末流)이니 비단 뜻이 고상한 지사(志士)가 이를 비루(鄙陋)하게 여길 뿐아니라 유식(有識)한 문사(文士)같은 사람도 또한 즐겨 변려문(騈儷文)에는 뜻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으니 명공(明公)이 오로지 대우변려문(對偶騈儷文)으로 천하의 현사(賢士)를 평가한다 하니 만약 과연 그러하다면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江右54)舊多文士리니 而近歲以來行誼志節之有聞者가 亦彬彬焉하니 惟明公留意하야 取其彊明正直者以自輔하고 而又表其惇厚廉退者以厲俗하야 母先文藝以後器識이면 則太傅55)이 不得專美於前하야 而天下之士가 亦庶乎不失望於明公이라 衰病屛伏하야 所欲面論者非一이나 而不獲前일새 姑進其大者如此하노니 若蒙采擇이면 則熹所不及言者를 必有輕千里而告於明公者矣리라
강우(江右)에 옛부터 문사(文士)가 많았고 근세 이래로 행의지절(行誼志節)로 소문난 사람도 또한 많으니 생각건대 명공은 이에 유의(留意)하여 그 강명정직(彊明正直)한 사람을 취하여 명공을 돕도록 하고 그 돈후청렴(惇厚淸廉)한 사람을 표창(表彰)하여 풍속을 진작시켜 문예(文藝)를 앞세우고 기식(器識)을 뒤로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명공은 후한의 진번(陳藩)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천하의 선비도 또한 아마 명공에게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내 병으로 물러나 엎드려 있으니 명공의 면전(面前)에 나아가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우선 대략 이같이 글월을 올리니 만약 나의 말을 채택한다면 내가 말하지 아니한 것은 반드시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온 선비가 이를 말할 것입니다.
與汪尙書56)
自頃拆號57)로 日望登庸하대 尙此滯留하니 不省所謂로대 海內有識之士는 盖莫不爲明公遲之나 而熹之愚는 獨有爲明公喜者라 盖以省闈58)之取舍59)觀之면 則疑明公이 於天下之義理에 尙有當講求者而喜其猶及此閒暇之時也라 自道學不明之久로 爲士者 狃於偸薄浮華之習하야 而詐欺巧僞之姦이 作焉하니 上之人知厭之矣로대 然欲遂變而復於古하야 一以經行60)迪之면 則古道가 未勝而舊習之姦이 已紛然出於其間하야 而不可制하니 世之人이 本樂縱恣而憚繩檢이라 於是乘其隙而力攻之하야 以爲古道不可復行이라야 因以遂其日自恣苟簡之計하니 俗固已薄이어늘 爲法者61)가 又從而薄之하야 日甚一日歲深一歲 而古道가 眞若不可行矣라
여왕상서(與汪尙書)
고시 합격자(考試合格者)를 발표한 이후 날마다 등용(登庸)을 바랐는데 이같이 늦어지고 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유식한 선비들이 모두 명공(明公)이 등용을 늦춘다고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저는 오히려 명공을 위해서 기뻐하는 바가 있습니다. 성위(省闈)에서 관리를 뽑는 기준을 볼 때 명공이 천하의 의리에 아직 더 강구(講求)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등용되지 않고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도학(道學)이 불명(不明)해진 이후로 학자들이 투박(偸薄) 부화(浮華)한 습성에 젖어 과장(科場)에서 간교(姦巧)하고 거짓된 글이 판을 치니 조정의 시관(試官)들이 이를 싫어할 줄은 알면서도 이를 개혁하여 옛날과 같이 오로지 경술덕행(經術德行)을 기준으로 관리를 뽑으려 하지 않고, 또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고도(古道)는 시행되지 못하고 간교한 구습은 여전히 분분하여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앞질러 단정하여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이 본래 방종은 좋아하고 예법에 검속(檢束)되기를 싫어하는 까닭에, 이 틈을 타 고도(古道)로의 복귀를 세차게 공격하여 고도(古道)는 다시 행해 질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방자하고 구차한 계책으로 투박 부화한 글만으로 사람을 뽑는 제도를 존속시키려 하니, 세속 학자들이야 본래 부박(浮薄)한 것이지만 시관(試官)들도 따라서 부박해져 해마다 더욱 심해지니 고도(古道)가 참으로 시행되지 못할 것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譬之病人컨데 下寒而客熟이 熾於上하야 治其寒則熟復大作이어던 熟公이 不求所以治寒之術하고 遂以爲眞熟이라하야 而妄以寒藥下之하면 其不殺人也가 幾希矣니 蘇氏貢擧之議62)正如此라 至其詆東州二先生63)爲矯誕無實하야 不可施諸政事之間이라하니 則其悖理傷化가 抑又甚焉하니 而省闈盜用此文者兩人을 明公皆擢而寘之衆人之上하니 是明公之意盖不以其說爲非也라 生於其心하야 害於其政하고 發於其政하야 害於其事하나니 明公未爲政於天下에 而天下之事가 已知明公之心이라 爭誦其書하야 以求速化 耳擩目染 以陷溺其良心而不自知 遂以偸薄浮華로 爲眞足尙하야 而敢肆詆欺於昔之躬行君子64)者를 不爲非也하니 況於一朝에 坐廟堂之上하야 而以宰相行之면 其害又當如何哉아
비유컨대 병든 사람이 하한(下寒)이 있어 객열(客熱)이 위로 치솟아, 그 하한(下寒)을 치료하려 하면 열이 다시 크게 일어나는 법인데, 속된 의원이 치한(治寒)의 법을 알지 못하고 이를 진짜 열이라고 오진하고 쓸데없는 한약(寒藥)을 투약하니 이렇게 하고서도 사람을 죽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식(蘇軾)이 주장한 시험 방법이 꼭 이와 같고 그가 동주(東州)의 두 선생이 교탄무실(矯誕無實)하여 그들의 주장을 정사(政事)에 시행할 수 없다고 논박한 일은 그 이치에 어긋나고 교화(敎化)를 해침이 몹시 심하거늘 성위(省闈)안의 소씨(蘇氏)의 글을 도용(盜用)한 두 사람을 명공이 발탁하여 윗자리에 앉히니 이는 명공의 뜻이 이미 소식이 주장한 시험 방법을 받아들인 것과 같습니다. ‘그 마음을 일으켜 그 정사를 해치고 그 정사를 발하여 그 일을 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공이 정무(政務)에 종사하지 않을 때에도 세상의 학자들이 이미 명공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투어 소씨(蘇氏)의 글을 외우고 이에 동화되어 이목(耳目)이 이미 물들고 양심(良心)마저 이에 빠져, 드디어 투박부화(偸薄浮華)한 글을 숭상하고 옛 궁행군자(躬行君子)를 비난하며, 또 이것이 나쁜 줄을 모르니, 하물며 어느 날 명공이 윗자리에 앉아 재상이 된다면 그 해(害)가 어떻겠습니까.
明公前者駁正張綱之謚하고 深詆王氏之失하니 識者韙之러니 而今日之取舍가 乃如此하니 死者有知면 得無爲綱所笑65)아 不審明共亦嘗悔之不乎 熹愚無知나 辱知獎甚厚하야 往者亦嘗關說及此66)러니 而今略驗67)矣라 故獨不敢以延拜68)之遲爲恨하고 而以猶得及此暇時하야 講所未至로 爲深喜하노니 明公若察其願忠之意하야 而寬其忘分之誅면 則願深考聖賢所傳之正하야 非孔子子思孟程之書어던 不列於傳하야 晨夜覽觀窮其指趣하고 而反諸身以求天理之所在하야 旣以自正其心 而推之以正君心하며 又推而見於言語政事之間하야 以正天下之心이면 則明公之功名德業이 且將與三代王佐로 比隆而近世所謂名相者 其規模가 盖不足道어던 況蘇氏浮靡機變之術이 又其每下69)者哉아
명공이 전에 장강(張綱)의 시장(諡狀)을 논박(論駁)하고 왕안석(王安石)의 실책을 공격했을 때, 식자(識者)들이 모두 이를 옳다고 하였는데, 지금 관리의 발탁이 이와 같으니,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이를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명공은 이를 후회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제가 명공의 두터운 지우(知遇)를 입고, 전에 이를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으니, 저의 등용이 늦은 것을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이 한가한 때를 이용하여 저의 부족한 점을 수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명공이 저의 충정을 살피고 분수에 넘치는 저의 추궁을 관대히 생각해 주신다면, 바라건대 성현이 전한 정도(正道)를 탐구하여, 공자․자사․맹자․정자의 글을 밤낮으로 읽어 그 뜻을 궁구하고,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천리를 구하여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 또 나아가 언어 정사에 나타내어 천하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면, 명공의 공명덕업(功名德業)이 장차 하은주 삼대의 왕좌(王佐)와 견줄 수 있을 것이요, 근세의 이른 바 명상(名相)이란 사람들은 그 규모가 족히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니, 하물며 소씨(蘇氏)와 같이 얕고 부화한 임기 응변의 술책이 그 최하자(最下者)인 경우에야 다시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答汪尙書
前書에 戒以勿視元履爲去就70)하니 熹固已略言之矣라 夫朝有闕政에 宰執侍從臺諫이 熟視却立하야 不能一言 使小臣71)으로 出位犯分하야 顚沛至此하니 已非聖朝之美事어늘 又不能優容獎勵하야 顧使之逡巡而去 以重失士心하고 又不俊其自請하야 而直譴出之하니 則駭聽甚矣라 陳公72)之待天下之士가 乃如此어늘 明公 又不少加調護하고 而聽其所爲하니 則熹亦何恃而敢來哉아 盖熹非敢視元履爲去就라 乃視諸公所以待天下之士者하야 而爲進退耳니 願明公思之하야 爲熹謝陳公하라
답왕상서(答汪尙書)
전서(前書)에서 원리(元履)를 본받아 거취(去就)를 결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그렇지 않음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조정(朝廷)이 실정(失政)을 하였음에도 재집(宰執) 시종(侍從) 대간(臺諫)들이 이를 익히 알면서도, 한 걸음 물러나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원리(元履) 같은 소신(小臣)으로 하여금 지위를 벗어나 직분을 어기게 하여, 이 같은 낭패에 이르게 하니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이같은 소신 있는 신하를 우대하고 장려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그로 하여금 위축되어 관직을 떠나게 하니 거듭 선비들을 실망시키는 일입니다. 또 원리(元履)의 스스로 사직해야겠다는 소청을 들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그를 꾸짖고 내쫓으니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진공(陳公)이 천하의 선비를 이같이 대우함에도, 명공께서 조금도 천하의 선비를 변호해 주지 않고 진공(陳公)이 하는 대로 보고 있으니, 제가 누구를 믿고 조정에 나아가겠습니까. 제가 원리(元履)를 본받아 거취(去就)를 결정한 것이 아니고 제공(諸公)이 천하의 선비를 대우하는 것을 보고 진퇴(進退)를 결정한 것입니다. 명공(明公)께서는 이점을 생각하여 나를 위해 진공(陳公)에게 사과의 말을 해주기 바랍니다.
熹之坐違朝命이 已三月矣라 欲加之罪면 不患無辭니 旣不早從所請인댄 則不若正其違傲之惱하야 而謫斥之亦足以少振風聲73) 使天下之士로 知守道循理之不可爲하고 而一於阿諛委靡之習하야 以遂前日之非74)니 亦一事也라 不識明公其亦以爲然乎아 頃年陳公在建安하고 明公在蜀郡에 熹嘗獲侍하야 言於陳公 竊以爲天下之士가 非兩公不能濟하니 陳公盖不辭也라 至於今日하야 乃復自憂言之不效75)하니 往者는 則不可諫矣어니와 來者를 其亦尙可追乎ㄴ저 伏惟明公深達陳公하야 相與亟圖之하라 熹之心이 盖猶不能無拳拳也이로다
제가 조정(朝廷)의 명령을 어기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은지가 이미 석달이 되었으니, 벌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을 것이요. 저의 청(請)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면 차라리 저의 명령위반죄를 밝혀 엄벌에 처하여,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재상이 도를 지키고 이치를 따르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그로 인하여 아첨하는 무리에 영합하여 전일의 잘못을 더욱 꾸며 감추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도 또한 한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명공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년전(年前)에 진공(陳公)은 건안(建安)에 계시고 명공(明公)은 촉군(蜀郡)에 계실 적에 제가 진공(陳公)에게 말하기를,
“진공(陳公)과 명공(明公)이 아니면 천하의 일을 구제(救濟)할 사람이 없다.”
고 하나 진공(陳公)께서도 저의 말에 동의(同議)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저의 말이 맞지 않음을 근심하고 있으니, 지난 일은 이미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명공(明公)께서는 진공(陳公)과 힘을 합쳐 속히 앞일을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습니다.
答汪尙書
別紙示及釋氏之說이 前日에 正以疑晦未祛76)라 故請其說하고 方虞僭越得罪於左右하리니 不意貶損高明하야 與之酬酢77)如此하니 感戢78)亡已라 熹於釋氏之說에 盖嘗師其人79)尊其道하야 求之亦切至矣로대 然未能有得이러니 其後以先生君子之敎로 校夫先後緩急之序하야 於是暫置其說하고 而從事於吾學80)하니 其始盖未嘗一日不往來於心也하야 以爲俊卒究吾說하고 而後求之未爲甚晩耳오 非敢遽絀絶之也리니 而一二年來에 心獨有所自安하야 雖未能卽有諸已나 然欲復求之外學하야 以遂其初心이라도 不可得矣라 然則前輩於釋氏에 未能忘懷者가 其心之所安이 盖亦必有如此者가 而或甚焉하니 則豈易以口舌爭哉아
답왕상서(答汪尙書)
별지(別紙)에서 말씀하신 석씨(釋氏)에 관한 말씀은 전일에 정히 의문을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다시 듣기를 청하였고 마침 명공에게 참월(僭越)한 죄를 지은 것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또 뜻하지 않게도 고명(高明)을 폄손(貶損)하여 이같이 더불어 수작(酬酌)을 하니 죄송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제가 석씨(釋氏)의 설에 대하여는, 일찍이 불자(佛者)를 스승으로 삼고 불도(佛道)를 존숭하여 불도(佛道) 구하기를 또한 지극히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아 터득한 바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학문의 차서(次序)를 교정받아 잠시 석씨의 설을 접어 두고 유학(儒學)에 전념하니 처음에는 하루도 석씨의 설이 마음에 왕래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학(儒學)을 철저히 궁구(窮究)한 연후에 석씨설(釋氏說)을 추구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니 갑자기 석씨의 설을 물리쳐 끊을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학을 공부한 지 1, 2년 뒤에 마음이 편안해져, 비록 확고한 신념이 생긴 것은 아니나, 다시 불설(佛說)을 공부하여 처음의 뜻을 이루려 해도 이젠 불설(佛說)이 싫어졌습니다. 그런즉 석씨의 설을 잊지 못해 전배(前輩)들이 그 마음이 편안한 것이 꼭 제가 유학에 마음이 편안한 것과 같을 것이니 이 보다 심히 불설에 빠진 사람들이야 어찌 말로써 다툴 수 있겠습니까.
竊謂但當益進吾學하야 以求所安之是非면 則彼之所以不安於吾儒之學하고 而必求諸釋氏하야 然後安者를 必有可得而言者矣니 所安之是非旣判이면 則所謂反易天常殄滅人類81)者는 論之亦可오 不論亦可이니 固不卽此以定取舍也라 上蔡所云止觀82)之說이 恐亦是借彼83)脩行之目하야 以明吾進學之事니 若曰彼之參請84)이 猶吾所謂致知오 彼之止觀이 猶吾所謂克己也라 以其語錄85)考之컨데 其不以止觀與克己로 同塗共轍이 明矣어늘 後之好不者가 遂撤去首尾하고 孤行此句하야 以爲已援하니 正如孔子言夷狄之有君不如諸夏之亡也가 豈眞慕夷狄이시며 明道適僧舍하시고 見其方食而曰三代威儀盡在是矣가 豈眞欲入叢林86)也아 胡文定87)所以取楞嚴圓覺88)이 亦恐是謂於其術中에 猶有可取者오 非以爲吾儒當取之以資已學也라 孔子曰 攻乎異端斯害也已라하시고 呂博士89)가 謂君子反經而已矣라 經正斯無邪慝이라 今惡邪說之害正而攻之 則適所以自蔽而已라하니 此言이 誠有味者라
오직 유학에 더욱 정진(精進)하여 그 편안한 바의 옳고 그름을 밝히면 전배(前輩)가 유학(儒學)에 안주(安住)하지 못하고 불설에 안주(安住)한 까닭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편안해 한 바의 시비(是非)를 밝히면 이른 바 반역천상(反易天常)과 진멸인류(殄滅人類) 같은 것은 논(論)해도 좋고 논하지 않아도 그만이라 하겠으니 꼭 반역천상과 진멸인류의 시비를 논한 연후에 불설의 취사(取舍)를 정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채(上蔡)가 말한 지관지설(止觀之說)은 아마 불자의 수행의 한 방도를 빌어 우리의 진학(進學) 공부를 밝히려 한 것일 것입니다. 이를 두고 만약
“불자의 참청(參請)은 오학(吾學)의 치지(致知)와 같고 불자의 지관(止觀)은 오학의 극기와 같다.”
고 말한다면, 상채의 ������어록(語錄)������을 보건대 지관과 극기가 동도(同塗) 공철(共轍)이 아님이 명백하거늘, 근래에 불교를 좋아하는 자들이 거두절미하고 상채의 지관지설(止觀之說)을 말 그대로 믿고 자신의 힘으로 여기니, 공자(孔子)께서 ‘이적(夷狄)이 임금이 있음이 중국에 임금이 없음보다 낫다.’고 말한 것이 어찌 참으로 이적(夷狄)을 사모(思慕)한 것이며, 명도(明道) 선생이 승사(僧舍)에 가서 그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삼대(三代)의 위의(威儀)가 모두 여기에 있다.’고 말한 것이 어찌 참으로 총림(叢林)에 들어가고자 한 것이겠습니까. 호 문정공(胡文定公)이 ������능엄경(楞嚴經)������과 ������원각경(圓覺經)������을 취한 것이 그 구도(求道)의 방법 가운데에 조금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우리 유학이 이를 그대로 취해 유학의 학습 방법으로 삼으려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이단(異端)을 다스리는 것은 해로울 뿐이라’고 하셨는데 여박사(呂博士)가 말하기를,
“군자는 경상(經常)을 돌이킬 뿐이니 경상(經常)이 바르면 곧 사특(邪慝)이 없게 되니, 지금 사설(邪說)이 정(正)을 해침을 미워하여 이를 공격하면, 곧 바로 정(正)이 스스로를 해칠 뿐이다.”
고 하니, 이 말이 참으로 뜻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姑熹於釋學雖所未安이나 然未嘗敢公言詆之는 特以講學所由가 有在於是라 故前日에 略扣其端이리니 旣蒙垂敎하니 不不敢不盡所懷호라 恐未中理어던 乞賜開示하라 不憚改也리라 更願勿以鄙說示人이로니 要於有定論而已니라 和戰之說이 頃嘗蒙面晦리니 及今所示非不明白利害較然矣나 然愚意終未敢安이라 盖衛君이 待夫子而爲政이어늘 夫子以正名爲先하시고 以子路之賢으로 尙疑其迂어던 然後夫子極言之하사 以爲名之不正이 其禍가 至於使民無所措其手足이라하시니 聖人之言은 萬世之法이니 豈苟然哉아 惟明人倫達天理하야 知其上際下蟠無所不極이 無所逃於天地之間하야 然後信斯言之果不妄也리라
제가 석학(釋學)에 비록 편안하지 못한 바가 있으나 들어 내놓고 이를 비난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만 제 공부의 발단이 이에 있은 까닭입니다. 전에 석학(釋學)의 문을 두드리다가 이제 고명(高明)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다시 제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의 말이 이치에 다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원컨대 이에 대한 논리를 열어 주시면 꺼리지 않고 잘못을 고치겠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저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정론(定論)만 하기 바랍니다. 화전(和戰)에 대한 말씀은 전에 뵈올 적에 말씀을 들었고 지금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도 논리가 명백하고 이해(利害)가 뚜렷합니다만 제 생각이 끝내 편안치 못한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공자(孔子)를 모시고 정치를 하려 할 때에 공자께서 정명(正名)을 최우선으로 하려 했는데, 자로(子路)같은 현자(賢者)도 오히려 이를 우원(迂遠)하다고 하니, 공자께서 극론하여 말하기를,
“명분(名分)이 바르지 못하면 그 화(禍)가 백성으로 하여금 수족(手足)을 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고 하였습니다. 성인의 말씀은 만세 불면의 법이니 어찌 그 뜻이 구차하겠습니까. 오직 인륜(人倫)을 밝히고 천리(天理)를 깨달아 인륜과 천리가 하늘과 땅끝까지 꽉 차서 도저히 이를 피할 수 없음을 안 연후에야 공자의 이 말이 과연 거짓이 아니라고 믿을 것입니다.
今欲以講和爲名而脩自治之實하니 恐非夫子正明爲先之意라 內外心迹이 判爲兩途하니 雖使幸而成功이라도 亦儒者之所諱也어던 況先自處於背盟違命之地하야 而使彼得擅其直이 以責於我가 內疑上下之心하고 外成讐敵之勢皆非計之德也라 必以搖動爲慮면 則所謂自治者가 其惟閉關固圉하야 寇至而戰하고 去不窮追가 庶可以省息勞費하고 蓄銳待時乎ㄴ저 以此自治與夫因機亟決電掃風馳者로 固不同이나 然猶同歸于是니 其與講和之計로 不可同年而語矣라 不審台意以爲如何오
지금 강화(講和)를 명분으로 하고 자치(自治)의 실리(實利)를 취하고자 하니 이는 공자(孔子)의 정명(正名)을 우선하는 뜻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안팎으로 마음의 길이 자른 듯이 다른 길을 가니, 비록 다행히 이렇게 하여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유자(儒者)가 꺼리는 바이니 하물며 우리가 먼저 스스로 배맹(背盟)과 위명(違命)의 자리에 서서 저들로 하여금 정직(正直)을 내세워 우리를 추궁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라 안으로는 상하가 서로 의심하게 하고 나라 밖으로는 수적(讐敵)의 형세를 이루게 하니 어느 모로 보나 좋은 계책이 못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강화(講和)를 하지 않으면 국세가 흔들릴 것이라 염려한다면, 이른 바 자치란 것은 오직 빗장을 걸고 굳게 방어하여, 적이 오면 싸우고 달아나면 추격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병력의 소모를 줄일 뿐아니라 또 칼을 갈면서 승기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자치가, 때맞춰 속결하여 전소풍치(電掃風馳)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결국 같은 길로 갈 수 있고, 강화(講和)와는 아주 다르다 할 것입니다. 명공(明公)의 높은 뜻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熹玆者累日侍行90)하야 得以親炙91)하니 竊惟道德純備固非淺陋所能窺測이나 而於謙虛好問受盡言之際에 尤竊有感焉하니 盖推是心以往이라 將天下之善皆歸之리니 其於任天下之重也에 何有리오 愚公他日之事常人所不能任者를 閤下終不得而辭也라 是以不勝拳拳하야 每以儒釋邪正之辨爲說이 冀或有助萬分하고 而猶恐其未足於言也하야 請復陳之하노니 幸垂聽焉이라하다 大抵近世言道學者가 失於太高하야 讀書講義에 率常以徑易超絶不歷階梯爲快하고 而於其問曲折精微正好玩索處에 例皆忽略厭棄하야 以爲卑近������屑不足留情이라 以故雖或多聞博識之士나 其於天下之義理에 亦不能無所未盡하니 理旣未盡이라 而胸中不能無疑어늘 乃不復反求諸近하고 顧惑於異端之說하야 益推92)而置諸冥漠不可測知之域 兀然終日에 味無義之語93)하야 以俊其廓然而一悟하니 殊不知物必格而後明이며 倫必察而後盡이라
제가 요즈음 여러 날 합하(閤下)를 모시고 지내며 가까이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생각해 보니, 합하(閤下)의 도덕(道德)이 순비(純備)하여 진실로 천루(淺陋)한 제가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합하의 겸허(謙虛)하고 호문(好問)하는 면에 더욱 감격스러우니,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나가면 장차 천하의 선사(善士)들이 모두 합하(閤下)에게로 돌아 올 것이니, 합하가 천하의 중책을 맡음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후일에 보통 사람이 맡을 수 없는 중대사가 생기면 합하는 끝내 이를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제가 충정을 이기지 못하여 자주 유(儒)와 석(釋)의 사정(邪正)을 말씀드려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기대하는 바입니다. 또 저의 논설(論說)에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여 다시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대저 근세에 도학(道學)을 말하는 사람이 너무 고원(高遠)한 데에 빠져서, 독서하고 강론함에, 항상 지름길을 가거나 뛰어넘어 순서를 밟지 않는 것을 신통하게 여기고, 그 사이의 자세하고 정미(精微)하여 정히 그 뜻을 음미하기에 좋은 곳은, 소홀히 하고 싫어하여 비근하고 잣단 것이라 마음 쓸 것이 없다고 여기니, 이 때문에 혹 비록 다문박식(多聞博識)한 선비라 하더라도 천하의 의리(義理)에는 미진한 곳이 없지 않으니, 천하의 의리에 미진하여 흉중에 의문이 없지 않음에도, 다시 가까운 곳에 돌이켜 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단(異端)의 설(說)에 현혹되어, 더욱 막연하여 알 수 없는 영역에 빠져 종일 오뚝이 앉아 뜻 없는 말을 곱씹으며 홀연한 깨달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사물의 이치는 반드시 물(物)을 격(格)한 뒤에 밝혀지며, 인륜(人倫)은 반드시 자세히 살핀 뒤에 다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彼旣自謂廓然而一悟者는 其於此94)에 猶懵然也면 則亦何以悟爲哉아 又況俊之而未必可得이오 徒使人抱不決之疑하야 志分氣餒가 虛度世月而倀倀耳이니 曷若致一吾宗95)하야 循下學上達之序 口講心思躬行力究 寧煩毋略寧下毋高寧淺毋深寧拙毋巧 從容潛玩하면 存久96)漸明하야 衆理人事之全이 無不在是97)라 初無逈然超絶不可及者나 而幾微之間에 毫釐畢察하고 酬酢之際에 體用渾然하야 雖或使之任至重而處所難이나 亦沛然行其所無事而已疑니 又何疑之不決而氣之不完哉오 此其與外學所謂廓然而一悟者로 雖未知其孰爲優劣이나 然此一而彼二虛면 則較然矣라 就使其說有實非吾儒之所及者나 是乃所以過乎大中至正之矩하야 而與不及者亡以異也니라
저들이 말하는 확연히 깨닫는다는 것이 격물(格物)보다 오히려 흐리멍텅한 일이니 어찌 깨달음이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그 황홀한 깨달음이란 것이 기다린다고 꼭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공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판별 못할 의혹을 가슴에 품고, 뜻이 흩어지고 기운이 쇠진한 상태로 허송세월만 하여 갈팡질팡 허둥대게 할 따름입니다. 어찌 오도(吾道)에 치일(致一)하여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순서를 따라,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몸소 실천하고 힘써 궁구하여, 번러로울지언정 홀략하지 아니하고 아래일지언정 높지 아니하고 얕을지언정 깊지 아니하고 졸렬할지언정 교묘하지 아니하여 조용히 음미하고 오래도록 조금씩 나아가 중리(衆理)������가 밝아지고 차례가 뚜렷해진 연후에,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도(道)와 천리(天理) 인사(人事)의 전체가 이에 있음을 아는 것만 같겠습니까. 이에는 처음부터 멀고 높아서 미칠 수 없는 세계는 없으며, 일의 아주 작은 낌새에도 털끝같이 작은 것을 살피고,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할 때에도 도와 덕의 체(體)와 용(用)을 홀연히 갖춰, 비록 지극히 중대한 일을 맡아 큰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결연히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니, 또 어찌 의혹이 풀리지 않고 기운이 불안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같은 우리의 도(道)가 불설(佛說)이 말하는 “확연히 한 번 깨닫는다.”는 것과 비교하여 비록 그 우열(優劣)을 알 수 없으나, 우리의 도는 근본이 하나이고 불설은 둘이며, 유학은 실천적이고 불설은 허망한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설사 불설이 실질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유학이 미칠 바는 아니니 이것이 곧 불설이 대중지정한 법도를 지나가서 그 미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까닭입니다.
道胥在六經何必它求가 誠如台諭하니 亦可謂要言不煩矣라 然世之君子가 亦有雖知其爲如此나 而不免於淪胥98)者는 何哉오 以彼之爲說99)者曰 子之所求於六經者는 不過知性知天而已니 由吾之術이면 無屈首受書之勞而有其效하야 其見解眞實이 有過之者오 無不及焉이라하니 世之君子가 旣以是中其好徑欲速之心하고 而不察乎它求之賊道100)하야 貴仕者는 又往往有王務101)家私之累聲色勢利之娛하야 日力亦不足疑니 是以雖知至道가 不外六經이나 而不暇求라 不若一注心於彼하야 而徼幸其萬一也하나니 然則何必云者가 正矣로대 而熹竊恨其未嚴야하니 若易必以可면 儻庶幾乎ㄴ저 盖不必云者는 無益之辭也오 不可云者는 有害之辭也니 夫二者之間이 相去遠矣라 如烏喙102)食之而殺人이면 則世之相戒者가 必曰不可食이오 而未有謂不必食而已者也라 妄意如此하니 不審高明以爲如何오
‘도(道)가 육경에 있으니 하필 다른 데서 구하리요.’ 라고 하신 말씀은 진실로 합하(閤下)의 말씀과 같으며, 가히 번잡하지 않고 요지로운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군자가 이를 알면서도 모두 이단에 빠지는 것은 왜 그렇겠습니까. 저들 논설 자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육경에서 구하는 것이 불과 지성(知性)과 지천(知天)일 따름인데, 우리의 법술(法術)을 따라 행하면 머리를 숙여 힘들여 책을 읽는 수고로움이 없이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고, 그 견해가 진실하고 비상한 데가 있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
고 하니, 세상의 군자가 이 말이 그 지름길을 좋아하고 속히 이루려는 마음에 꼭 맞아 이것이 도를 해침을 살피지 못하고, 고관들은 왕왕 이로 인해 공무(公務)와 가사(家事)에 누를 끼치고, 또 성색(聲色)과 세리(勢利)의 즐거움으로 삼아 이에 푹 빠져 나날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이 때문에 도에 도달하는 길이 육경의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육경에서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일념으로 선(禪)에 마음을 쏟아 그 만일의 요행을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니 하필 운운한 말은 옳은 말이지만 저는 그 엄밀하지 못함이 아타까운 것입니다. 만약 필(必)자를 가(可)자로 바꾸면 아마 더욱 좋은 말이 될 것입니다. 대개 불필(不必)이란 말은 무익(無益)하다는 말이요 불가(不可)라는 말은 유해(有害)하다는 말이니 서로 거리가 아주 먼 말입니다. 부자를 먹으면 사람이 죽게 되는데, 세상에서 이를 경계하는 자가 반드시 불가식(不可食)이라고 말하지 불필식(不必食)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러한데 명공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又蒙敎喩以兩蘇103)之學不可與王氏104)同科라하니 此乃淺陋105)辭不別白指不分明之過니 請復陳之於後而來敎가 又以歐陽司馬로 同於蘇氏는 則熹亦未能不以爲疑也라 盖歐陽司馬之學이 其於聖賢之高致에 固非末學所敢議者어니와 然其所存所守106)가 皆不失儒者之舊오 特恐有所未盡耳라 至於王氏蘇氏는 則皆以佛老爲聖人하니 旣不純乎儒者之學矣오 而王氏는 支離穿鑿하야 尤無義味하고 至於甚者는 幾類俳優하니 本不足以惑衆이로대 徒以一時取舍人主로 假利勢以行之於已甚이라 故特爲諸老先生之所排詆하니 在今日에 則勢窮禍極이라 故其失을 人人得見之하고 至若蘇氏之言이 高者는 出入有無而曲成義理하고 下者는 指陳利害而切近人情하고 其知識才辨謀爲氣槪又足以震耀而張皇之하야 使聽者로 欣然而不知倦이 非王氏之比也라 然語道學則迷大本하고 論事實則尙權謀햐야 衒浮華忘本實貴通達賤名檢107)하니 此其害天理亂人心妨道術敗風敎가 亦豈盡出王氏之下也哉아 但其身與其徒는 皆不甚得志於時하야 無利勢以輔之라 故其說雖行이나 而不能甚久하야 凡此患害를 人未盡見이라 故諸老先生이 得以置而不論하니 使其行於當世를 亦如王氏之盛이면 則其爲禍가 不但王氏而已니 主名敎108)者가 亦不得恝然而無言也이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두 소씨(蘇氏)의 학문이 왕안석의 학문과는 다르다고 하시니 이는 저의 말이 명백하지 못하고 저의 뜻이 분명하지 못한 탓인 것 같습니다. 다음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구양수와 사마광이 소식과 같은 부류라고 하시니 제가 의문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양수와 사마광의 학문이, 성현의 고치(高致)에는 저 같은 말학(末學)이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그 마음에 두고 지키는 것이 모두 유학의 전통을 잃지 않았으며 다만 미진한 점이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소식과 왕안석은 석가와 노자를 성인이라 하고 처음부터 유학에 순정(純正)하지 못했습니다. 왕안석의 학문은 지리(支離)하고 천착(穿鑿)하여 의미가 없고, 심지어는 거의 배우(俳優)들과 같아서 대중을 유혹하기엔 부족하지만, 다만 일시로 인주(人主)의 뜻에 취합되어 그 세력에 힘입어 그의 주장이 세상에 시행되고 그 해가 너무 심해 여러 선생의 배척하는 바가 되었고, 지금은 그의 세력이 다하고 그로 인한 폐단이 극심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 눈으로 똑똑히 그 실책을 볼 수 있고, 반면 소식의 말은 높은 것은 유무(有無)에 출입하며 의리(義理)가 있는 것 같고, 낮은 것은 이해를 열거하며 인정에 근접하여, 그 지식 재변과 모책 기개가 빛을 발하고 장황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 지루한 줄을 모르게 하니 왕안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학(道學)을 말함엔 근본을 알지 못하고, 사실을 논함에는 권모술수를 좋아하여, 부화(浮華)를 뽐내고 본실(本實)을 망각하며, 통달(通達)을 귀하게 여기고 명검(名檢)을 천하게 여기니, 그 천리를 해치고 인심을 혼란시키며, 도술(道術)을 훼방하고 풍교(風敎)를 퇴패시킴이 어찌 왕안석보다 심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소식과 그 무리들이 당시에 때를 만나지 못하여, 이세(利勢)로써 그들의 설에 힘을 보태지 못했기 때문에, 그 설이 비록 시행되어도 오래가지 못했으며, 또 그 때문에 여러 노 선생(老先生)이 이를 논박하지 않았으니, 만약 그들의 설이 당세에 행하여져 왕안석처럼 강성(强盛)하였다면 그 화(禍)가 왕안석 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명교(名敎)를 신조로 삼는 사람이 어찌 태연하게 말없이 이를 좌시하고 있겠습니까.
盖王氏之學이 雖談空虛而無精彩109)하고 雖急功利而少機變110)하니 其極也는 陋如薛昻111)之徒而已라 蔡京112)이 雖名推尊王氏나 然其淫侈縱恣하야 所以敗亂天下者가 不盡出於金陵113)也이어니어 若蘇氏는 則其律身이 已不若荊公之嚴이오 其爲術이 要未忘功利호대 而詭秘過之하고 其徒如秦觀114)李廌115)之流가 皆浮誕佻輕하야 士類不齒라 相如扇縱橫捭闔116)之辨하야 以持其說 而漠然不知禮義廉恥之爲何物하니 雖其勢利未能有以動人이나 而世之樂放縱惡拘檢者가 已紛然向之라 使其得志면 則凡蔡京之所爲를 未必不身爲之也로대 世徒據其已然者論之라 是以蘇氏猶得在近世名卿之禮하고 而君子樂成人之美者가 亦不欲逆探未形之禍하야 以加譏貶이어니와 至於論道學邪正之際면 則其辨이 有在毫釐之間者라 雖欲假借117)而不能私也어늘 今乃欲專貶王氏而曲貸二蘇하니 道術所以不明과 異端所以益熾實由於此니 愚公王氏復生이면 未有以黙其口而厭其心118)也로다 以閤下之明으로 秉天理以格人欲하고 據正道以黜異端이면 彼亦將何所순遁其情哉리오 熹之愚昧么麽119)가 豈不知其力之不足이리오마는 所以慨然發憤而不能已亦決於此而已矣니 天下에 豈有二道哉아
왕안석의 학문은 비록 공허를 말하기는 하나 정채(精彩)가 없고, 비록 공리(功利)에 급하기는 하나 기변(機變)이 적으며 그 극단적인 추종자는 비루 하기가 설앙(薛昂)의 무리 같을 따름이고, 채경(蔡京)이 비록 왕씨를 추존한다고는 하나 그 음탕하고 방종하여 세상을 어지럽힌 것은 왕씨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씨는 그 율신(律身)이 왕씨만큼 엄하지는 않지만 그 술법이 공리(功利)를 잊지 못하면서도 아주 이상야릇하며, 그 무리인 진관(秦觀) 이응(李鷹) 같은 부류는 모두 부탄(浮誕) 조경(佻輕)하여 사류(士類)들이 상종을 아니했고, 그들은 서로 종횡패/합(縱橫捭闔)의 변술을 선동하여 소씨의 설을 저지하고, 막연하여 예의 염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세리(勢利)가 사람을 움직일 만하지는 않지만 세상의 방종을 좋아하고 법도에 구속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분연히 이를 따르고 있으니, 가령 그들이 득지(得志)를 했다면 채경(蔡京)이 저지른 소행을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이 그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의거하여 그를 논하는 까닭으로 소씨는 오히려 근세의 명경(名卿)의 자리에 있을 수 있고, 또 군자는 남의 아름다운 점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까닭으로, 사실로 나타나지 않은 재화(災禍)를 미리 추정하여 그를 폄하(貶下)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도학의 사정(邪正)을 논하는 마당에는 그 판별이 아주 미묘하고 사소한 데에 있으니, 비록 소씨를 관대히 용서하고자 하나 사정(私情)을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합하께서 왕씨만 폄하하고 소씨는 용서하고자 하니 도학이 밝혀지지 아니하고 이단이 더욱 맹렬한 것이 실로 이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왕씨가 다시 살아난다면 아마 그 입을 다물고 마음을 억누르고 잠자코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합하의 명철함으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물리치며 정도에 의거하여 이단을 물리친다면 저 이단이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고 세소(細小)한 제가 어찌 저의 힘이 부족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마는 개연히 발분하여 마지 못하는 까닭은 정사(正邪)를 판별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천하에 어찌 두 가지 도가 있겠습니까.
蘇氏邪正之辨이 終未能無疑於心하니 盖熹前日所陳이 乃論其學儒不至하야 而流於詖淫邪遁之域이어늘 竊味來敎러니 乃病其學佛未精하야 而滯於智慮言語之間하니 此所以多言而愈不合也라 夫其始之闢禪學也에 豈能明天人之蘊하며 推性命之原하야 以破其荒誕浮虛之說而反之正哉리오 如大悲閣120)中和院記121)之屬이 直掠彼之粗하야 而角其精122)하며 據彼之外하야 以攻其內니 是乃率子弟以攻父母오 信枝葉而疑本根이라 亦安得不爲之詘123)哉아
합하께서 말씀하신 소학(蘇學) 사정(邪正)의 변(辨)은 끝내 제 마음에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전일에 제가 말씀드린 것은 곧 그가 유학 공부가 철저하지 못하여 피음사둔(詖淫邪遁)한 데로 흘렀다고 했는데, 합하의 말씀을 음미해 보니, 곧 그가 불교 공부가 정밀하지 못하여 지려(知慮)와 언어(言語)가 통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곧 말이 많으면서도 더욱 적합하지 못한 까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저 그가 처음 선학(禪學)의 문을 두드릴 때에, 어찌 능히 천인(天人)의 오묘한 이치를 밝히고 성명(性命)의 근원을 캐내어 그 황탄(荒誕)하고 부허(浮虛)한 설을 깨뜨리고 정도로 돌이킬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저술한 「대비각기(大悲閣記)」와 「중화원기(中和院記)」 같은 것은 다만 불설(佛說)의 거치른 것을 빼앗아서 그 알짜와 겨루고 불설의 껍데기에 의거하여 그 알맹이를 공격한 것이니 이는 곧 그 자손을 거느려서 그 부모를 치고 그 지엽을 믿고 근본을 의심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그 말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近世攻釋氏者如韓歐124)孫石125)之正을 龜山이 猶以爲一杯水救一車薪之火126)라하니 況如蘇氏는 以邪攻邪하니 是束縕灌膏而往赴之也니 直以身爲燼而後已耳라 來敎에 又以爲蘇氏는 乃習氣之弊라 雖不知道나 而無邪心하니 非若王氏之穿鑿附會하야 以濟其私邪之學也라하니 熹竊謂學以知道爲本하니 知道則學純心正하야 見於行事하며 發於言語에 亦無往而不得其正焉이라 如王氏者는 其始學也에 盖欲凌跨揚韓하고 掩迹顔孟하니 初亦豈遽有邪心哉리오 特以不能知道라 故其學不純而設心造事가 遂流入於邪하고 又自以爲是하야 而大爲穿鑿附會 以文之하니 此其所以重得罪於聖人之門也라
근세에 석씨(釋氏)를 공격한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손명복(孫明復) 석수도(石守道) 같은 이의 정도(正道)를 양구산이 오히려 ‘한 잔의 물로써 한 수레 섶의 불을 꺼려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하물며 소씨의 사(邪)로써 사(邪)를 공격하는 것 같은 것은 솜뭉치에 기름을 적셔 불 속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으니 곧 몸이 재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또 서찰에서 말씀드리기를,
“소씨(蘇氏)가 객기(客氣)에 젖은 폐단이 있고 비록 그가 정도(正道)를 잘 모르지만 사심(邪心)이 있는 것은 아니니 왕씨(王氏)가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그 사학(邪學)을 현실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과는 다르다.”
고 하시니, 제 생각에는 학문은 도를 아는 것이 근본이니 도를 알면, 학문이 순정하고 마음이 바르며 행사(行事)에 나타나고 언어에 드러나, 모든 곳에서 정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씨가 처음 학문을 시작할 때에 양웅(揚雄)과 한유(韓愈)를 능과(凌跨)하고 안자(顔子)와 맹자(孟子)를 앞지르려 하였는데 처음부터 어찌 사심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정도(正道)를 알지 못한 까닭으로 그 학문이 불순하고 마음과 하는 일이 드디어 사도(邪道)로 흐르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만 여기고 견강부회하여 이를 꾸미 대려 하니 이것이 그가 성인의 문에 거듭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蘇氏之學이 雖與王氏若有不同者나 然其不知道而者以爲是則均焉하니 學不知道라 其心이 固無所取則127)以爲正이오 又自以爲是而肆言之하니 其不爲王氏者는 特天下가 未被其禍而已라 其穿鑿附會之巧가 如來敎所稱論成佛說老子之屬이 盖非王氏所及이나 而其心之不正이 至乃謂湯武纂弑而盛稱荀彧以爲聖人之徒128)라하지 凡若此類皆逞其私邪하야 無復忌憚이 不在王氏之下하니 借曰不然이나 而原情129)以差其罪130)라도 則亦不過稍從末减131)之過而已라 豈可以是爲當然而莫之禁乎아 書曰天討有罪어던 五刑으로 五用哉라하니 此刑法之本意也면 若天理不明하야 無所準則이오 而屑屑132)焉惟原情之爲務면 則無乃徇情廢法而縱惡以啓姦乎아 楊朱學爲義者也로대 而偏於爲我하고 墨翟學爲仁者也로대 而流於兼愛하니 本其設心가 豈有邪哉언마는 皆以善而爲之耳로대 特於本原之際에 微有毫釐之差라
소씨의 학문이 비록 왕씨와 다른 것 같으나 그 도(道)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점은 왕씨(王氏)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학문을 해도 도를 알지 못하면 그 마음을 바르게 할 준칙이 없고 또 그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이를 빙자하여 주장하지만, 왕씨와 다른 점은 다만 세상이 그로 인한 화(禍)를 입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소씨의 견강부회가 교묘하여, 서찰에서 말씀하신 ‘그가 부처를 논하고 노자를 설한 것’ 같은 것은 왕씨가 미칠 바가 아니고, 그 마음의 부정함이, 탕무(湯武)를 찬시(簒弑)의 군이라 하고 순욱(荀彧)을 성인의 무리라 하는 데까지 이르니, 무릇 이와 같이 거리낌없이 자기의 사사(私邪)한 생각을 제멋대로 말하는 것은 왕씨보다 더 심하다 하겠습니다. 가령 정상을 짐작한다 하더라도 그 형벌을 조금 가볍게 할 수 있을 뿐이니 어찌 이를 당연하다 여기며 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서 말하기를,
“하늘이 죄를 벌함에 다섯 가지 죄를 다섯 가지 형벌로 다스린다.”
고 했으니, 이것이 형법의 본뜻이거늘 만약 천리(天理)가 불명하여 따를 원칙이 없이 우왕좌왕하고 오직 정상 참작에만 힘쓴다면, 이는 곧 사정(私情)을 따라 법을 폐하는 일이며, 악을 방치하여 간적(姦賊)을 계도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양주(楊朱)의 학문이 의를 행함을 근본으로 하였지만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졌고, 묵적(墨翟)의 학문이 인(仁)을 행함을 근본으로 하였지만 겸애설(兼愛說)로 흘러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찌 그들이 처음부터 사심(邪心)이 있었겠습니까. 모두 선을 행하고자 하였지만 다만 천리와 인륜의 본원에 털끝 같은 작은 잘못이 있었을 뿐입니다.
是以孟子推言其禍하사 以爲無父無君而陷於禽獸라하야 辭而闢之하야 不少假借하시니 孟子亦豈不原其情而過爲是刻該之論哉아 誠以其賊天理害人心於幾微之間하야 使人陷溺이 而不自知하니 非若刑名133)狙詐134)之術의 其禍가 淺切而易見也라 是以拔本塞源135)을 不得不如是之力하시고 書曰호대 予畏上帝라 不敢不正이라하고 又曰予弗順天이면 闕罪惟均이라하니 孟子之心이 亦若是以而已라 以此論之컨데 今日之事가 王氏僅足爲申韓儀衍이오 而蘇氏는 學不正而言成理又非楊墨之比니 愚恐孟子復生이시면 則其取舍先後가 必將有在하야 而非如來敎之云也ㄹ까하노라 區區僭越이 辨論不置하니 非敢自謂工訶古人136)하야 而取必於然諾이라 實以爲古人致知格物之學이 有在於是로니 旣以求益137)하고 而亦意其未必無補於高明也니라
이런 까닭으로 맹자(孟子)께서 그 화(禍)를 극단적으로 말하여
“이들은 인류를 아비도 없고 군주도 없는 상태로 이끌어 마침내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뜨린다.”
고 하여 혹독히 물리쳐 조금도 용서치 않았습니다. 맹자께서 어찌 이들의 정상을 참작하지 않아서 이같이 심하게 말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양주와 묵적이 미묘한 사이에 천리와 신심을 해쳐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단에 빠져서 이를 알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소씨의 해독은 양주와 묵적의 해독처럼 형명(刑名)의 속임수가 얕으면서 절실하여 쉽게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께서 그 해를 발본색원하기 위하여 부득불 이같이 강조하여 말한 것입니다. ������서경(書經)������에서 말하기를,
“내 하늘을 두려워하여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내 하늘의 뜻에 따라 주(紂)를 벌하지 않으면 그 죄가 주(紂)와 같다.”
고 했으니, 맹자의 마음이 역시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이로써 말할 것 같으면 지금 왕씨와 소씨를 논하는 일이, 왕씨는 겨우 신불해․한비․장의․공손연 정도이고 소씨는 그 학문이 바르지 못하면서 말은 논리가 정연한 것 같은 것이 양주와 묵적의 정도가 아닙니다. 맹자께서 다시 살아난다면, 왕씨와 소씨를 포함한 이단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있을 것이니 서찰의 말씀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참람하게도 이같이 계속 변론하는 것은, 지난 시대의 사람을 심하게 비난하여 명공(明公)의 동의를 꼭 받아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실은 고인(古人)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가르침이 이에 있다고 생각하며 또 이것이 저의 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명공께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與汪尙書
去春賜敎에 語及蘇學하야 以爲世人讀之에 止取文章之妙하고 初不於此求道면 則其失自可置之라하니 夫學者之求道가 固不於蘇氏之文矣어니와 然旣取其文이면 則文之所述이 有邪有正하면 有是有非하며 是亦皆有道焉하니 固求道者之所不可不講也라 講去其非하고 以存其是則道固於此乎在矣니 而何不可之有리오 若曰惟其文之取하고 而不復議其理之是非면 則是道自道文自文也니 道外有物이면 固不足以爲道오 且文而無理면 又安足以爲文乎리오
여왕상서(與汪尙書)
지난 봄에 보내 온 서찰에서 소씨(蘇氏)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세인(世人)이 소씨의 글을 읽고 다만 그 문장의 교묘함만을 취하려는 것이요, 처음부터 소씨의 글에서 도(道)를 구하려는 것은 아니니 그 실(失)을 내버려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고 하셨습니다. 학자가 소씨의 글에서 도를 구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 글을 취하여 읽는다면 그 글이 서술하는 것이 사정(邪正)과 시비(是非)가 있으니 이 또한 도가 없을 수 없는 것이며 학자가 또 이를 강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학자가 그 옳은 것은 마음에 담아 두면 도가 진실로 이에 있는 것이니 어찌 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오직 그 글만 취하고 그 글 속의 도리의 시비(是非)는 논하지 않는다면 이는 도는 도일 따름이고 글은 글일 따름이어서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 되니, 도를 벗어난 사물이 존재한다면 이 도는 진실로 참다운 도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또 글 속에 도리가 없다면 어찌 참다운 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盖道가 無適而不存者也라 故卽文以講道면 則文與道를 兩得而一以貫之요 否則亦將兩失之矣니 中無主外無擇이면 其不爲浮誇險詖所入하야 而亂其知思也者가 幾希라 況彼之所以自任者가 不但曰文章而已니 旣亡以考其得失이면 則其肆然而談道德於天下를 夫亦孰能禦之리오 愚見如此라 累蒙敎告에 終不能移也로다 又蒙喩及二程之於濂溪에 亦若橫渠之於范文正138)耳라하니 先覺相傳之秘非後學所能窺測이나 誦其詩讀其書則周范之造詣固殊오 而程張之契悟가 亦異하니 如曰仲尼顔子所樂과 吟風弄月以歸皆是當時口傳心受的當親切處라 後來二先生擧似139)後學에 亦不將作第二義看하시니 然則行狀140)所謂反求之六經然後得之者는 特語夫功用之大全耳니 至其入處則自濂溪不可誣也라 若橫渠之於文正은 則異於是하니 盖當時에 粗發其端而已라 受學이 乃先生自言141)이니 此豈自誣者耶아
대개 도란 것은 있지 아니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글을 읽으며 도를 강구한다면 이는 글과 도를 모두 얻어 글과 도를 하나로 통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고 도가 없는 글을 읽는다면 이는 글과 도를 모두 잃어버릴 것입니다. 마음속에 주관이 없고 밖으로 선택의 기준이 없으면, 과장되고 음흉하여 그 지각을 혼란시키지 않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소씨가 자임(自任)하는 바가 비단 문장뿐만이 아닌 경우에, 그 득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소씨가 방자하게 세상에 도룰 말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의 생각이 이와 같으니 여러 번 가르침을 받았으나 끝내 저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겠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두 정자(程子)의 염계(濂溪)와의 관계가 횡거(橫渠)의 범문정(范文正)과의 관계와 같다고 하시니 선각(先覺)이 서로 전한 오묘한 도는 후학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음에 주렴계와 범문정의 조예(造詣)가 사뭇 다르고 이정(二程)과 장횡거의 깨달은 바가 또 다릅니다. 염계가 이정(二程)에게 말한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거워 한 것’과 ‘음풍(吟風) 농월(弄月)하며 돌아옴’ 같은 것은 모두 당시에 서로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전수받은 적당 친절한 곳이요, 뒤에 이정(二程)이 후학을 가르칠 때에 이를 으뜸으로 가르쳤으니, 이천(伊川)이 지은 명도 선생의 행장에서 말한,
“육경에 돌이켜 도를 구한 연후에 도를 터득했다.”
는 것은 다만 공부의 전체를 두고 말한 것이요, 명도나 이천이 학문에 들어간 입구는 염계로부터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횡거의 범문정에 관한 관계는 이와는 다르니, 당시에 횡거의 구도(求道)의 단서를 범문정이 대략 유발(誘發)시켰을 뿐이라 하겠습니다. 명도가 염계에게서 배웠다는 것은 선생 자신의 말이니 어찌 자신을 속여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答汪尙書
東西銘142)이 雖同出於一時之作이나 然其詞義之所指와 氣象之所及에 淺深廣狹이 逈然不同하니 是以程門이 專以西銘으로 開示學者하고 而於東銘則未之嘗言하니 蓋學者가 誠於西銘之言에 反覆玩味하야 而有以自得之면 則心廣理明하야 意味自別이오 若東銘이 則雖分別長傲遂非之失於毫釐之間하야 所以開驚後學이 亦不爲不切이나 然意味有窮하야 而於下學功夫에 盖猶未盡者하니 又安得與西銘撤上撤下一以貫之之旨로 同日而語哉아 竊意先賢取舍之意或出於此하니 不審高明以爲如何오 至於體用一原顯微無間之語는 則近嘗思之하니 前此看得大段鹵莽143)이라 子細玩味면 方知此序144)無一字無下落145)無一語無次序하니 其曰 至微者理也오 至著者象也라 體用一原顯微無間146)이 盖自理而言則卽體而用在其中하니 所謂一原也오 自象而言則卽顯而微不能外하니 所謂無間也라 其文理密察하야 有條不紊이 乃如此하니 若於此看得分明이면 則卽西銘之書而所謂一原無觀之實이 已瞭然心目之間矣니 亦何俟於東銘而後足耶아
답왕상서(答汪尙書)
「동명(東銘)」과 「서명(西銘)」이 비록 같은 시기에 같이 나온 글이라고는 하나, 그 말뜻이 가리키는 바와 그 기상이 미치는 바가 얕고 깊으며 넓고 좁음이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정자께서 오로지 「서명」으로써 후학을 가르쳤고 「동명」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습니다. 대개 학자가 서명의 말을 반복 음미하여 자득하는 바가 있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도리가 밝혀져서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요, 「동명」은 비록 미세한 가운데에 장오(長傲)와 수비(遂非)를 분별하게 하나 그 의미가 유한하여 하학(下學) 공부에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으니, 어찌 「서명」의 하학상달(下學上達)하고 체용일관(體用一貫)하는 뜻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나는 정자(程子)의 취하고 버리는 뜻이 혹 서명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는데 명공(明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자께서 ������역전서(易傳序)������에서 말한
“체(體)와 용(用)이 한 근원이요 드러난 것과 미미한 것이 틈새가 없다.”
고 한 말을 요사이 생각해 보니, 전에 이 말을 이해한 것이 대단히 거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세히 음미해 보니 정자의 이 말이 한 글자도 꼭 맞지 않는 글자가 없고 한 말도 조리에 맞지 않는 말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자께서 ������역전서(易傳序)������에서 말한
“지극히 미묘(微妙)한 것은 이(理)요 지극히 드러난 것은 상(象)이니 체(體)와 용(用)이 한 근원이요, 현저(顯著)함과 은미(隱微)함이 간격이 없다.”
는 것은 이를 풀이해 보면,
“대개 이(理)로부터 말한다면, 체(體)에 나아가면 용(用)이 그 가운데에 있으니 일원(一原)이요, 상(象)으로부터 말한다면, 현저한데 나아가면 은미함이 이를 벗어나지 못하니 이른바 간격이 없다.”
라고 할 수 있으니, 그 문리(文理)가 자세하고 분명하며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아니함이 이 같으니, 만약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서명」의 글을 읽는다면 이른 바 ‘일원(一原) 무간(無間)’이란 말의 실질적인 내용이 이미 마음과 눈에 훤할 것이니, 어찌 동명을 읽기를 기다린 뒤에 라야 충분하다고 하겠습니까.
又蒙語及前此妄論平易蹉過147)之言에 稱許甚過하니 尤切皇恐이라 然竊觀來意니 似以爲先有見處라하야 乃能造夫平易하라하니 此則又似禪家之說하니 熹有所不能無疑也로다 聖門之敎가 下學上達이라 自平易處講究討論하야 積慮潛心이 優柔饜飫/148)가 久而漸有得焉이면 則日見其高深遠大而不可窮矣니 程夫子所謂善學者는 求遠必自近이니 易於近者는 非知言者也가 亦謂此耳라 今曰此事는 非言語臆度所及이니 必先有見然後有以造夫平易則是가 欲先上達而後下學이니 譬之컨대 是猶先察秋毫而後睹山岳이며 先擧萬石而後勝必雛也라 夫道固有非言語臆度所及者나 然非顔曾以上幾於化者면 不能與也니 今日爲學用力之初에 正當學問思辨而力行之라야 乃可以變化氣質하야 而入於道어을 顧乃先自禁切하야 不學不思가 以坐待其無故忽然而有見149)하니 無乃溺心於無用之地하야 玩歲愒日 而卒不見其成功乎아 就使僥倖於恍惚之間이라도 亦與天理人心叙秩命討150)之實로 了無交涉하야 其所自謂有得者가 適足爲自私自利之資而已니 此則釋氏之禍가 橫流稽天151)하야 而不可遏者오 有志之士所以隱憂浩嘆하야 而欲火其書也라
또 앞서 제가 말한
“일용(日用) 상행(常行)의 평이(平易)한 곳에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는 말에 대해서 칭찬이 지나치시니 매우 황공합니다. 그러나 명공(明公)의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먼저 어떤 신념이 서 있어야 곧 일용의 평이한 곳에 실수 없이 나아갈 수 있다.”
는 뜻 같은데 이 말은 선가(禪家)의 말과 비슷한 것 같으니, 저는 이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학(儒學)의 가르침은 아래로부터 인륜을 배워서 위로 천리에 도달하는 것이니, 일용의 평이한 곳에서부터 강구(講求) 토론하고 적려(積慮) 잠심하며, 충분히 넉넉하게 하여 이를 오래 지속하여 점점 터득함이 있으면 날로 나아가 그 고심원대(高深遠大)하여 끝이 없는 경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자께서 말씀하신,
“잘 배우는 자는 말을 이해하기를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구하니, 가까운 곳에 소홀히 하는 자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명공께서는
“이 일은 말과 추측으로써 해 낼 일이 아니니 반드시 먼저 어떤 신념이 있어야 일용의 평이한 곳에 차질 없이 나아갈 수 있다.”
고 하시니, 이는 먼저 상달(上達)한 뒤에 하학(下學)하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컨대 먼저 추호(秋毫)를 관찰할 수 있은 뒤에 산악(山岳)을 볼 수 있고, 먼저 만석(萬石)을 들 수 있은 뒤에 한 마리 병아리를 들 수 있다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대저 도(道)는 진실로 언어와 추측이 미칠 바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안자(顔子) 증자(曾子) 이상의 성인이 아니면 말을 이해하지 않고 도를 바로 깨닫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배우고 힘써야 할 초기에 마땅히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힘써 실천하여야만 곧 기질을 변화시켜 도에 들어갈 수 있거늘, 도리어 먼저 스스로 이를 금하여 배우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앉아서 그 원인 없이 홀연히 나타남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곧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빠뜨려 세월을 허송하여 마침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사 황홀한 가운데서 요행을 얻는다 하더라도 천리(天理) 인심(人心) 서질명토(叙秩命討)의 실(實)엔 끝내 들어갈 수 없으니, 그 스스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자기의 사리(私利)의 도움이 될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석씨(釋氏)의 화(禍)가 천지에 넘쳐 막을 수 없음으로 해서 뜻있는 선비가 근심 걱정 탄식하며 불서(佛書)를 태워 버리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舊讀明道行狀하니 記其學行事業累數千言이로대 而卒道其言152)에 不過力排釋氏하야 以爲必闢之而後可以入道라하야늘 後得呂滎公153)家傳154)하니 則以爲嘗受學於二程하야 而所以推尊稱美之辭가 甚盛하고 考其實에 亦誠有以大過人者로대 然至其卒章而誦其言155)하니 則以爲佛之道가 與聖人合이라하니 此其師生之間에 分背矛盾이 一南一北이라 不審台意平日於此是非之際에 何以處之오 天之生物이 使之一本이라 此是則彼非오 此非則彼是니 盖不容幷立而兩存也니라
전에 이천이 지은 명도선생의 행장을 보니, 그 학행과 사업을 기록한 것이 수천(數千)의 말이나, 그 결론은 불과
“석씨를 극력 배격하여 물리친 뒤에 라야 도에 들어 갈 수 있다.”
는 말이거늘, 뒤에 여형공(呂滎公) ������가전(家傳)������을 읽어보니
“일찍이 이정(二程) 선생에게 수학을 했다.”
하고, 또 이정을 추존 칭미하는 말이 매우 성(盛)하였으며, 또 그 학문의 실상을 살펴보니 참으로 대단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장(章)을 읽어보니,
“불(佛)의 도가 성인의 도와 같다.”
고 하니, 이는 스승과 제자의 사이가 등지고 모순됨이 하나는 남으로 가고 하나는 북으로 가는 것과 같으니, 평소 명공의 뜻은 이 시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낳음에 그 근본은 하나이니 이것이 옳으면 저것이 옳지 않고 이것이 옳지 않으면 저것이 옳으니, 대개 옳고 그름이 병립(並立)하여 양존(兩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 옥고 가운데 우선 1권을 이 정도로 편집해서 보냅니다. 글자의 크기와 편집 체제 등을 보시고 지적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특히 현토한 한글은 원문의 크기를 고려하여 대소를 조정하면 됩니다.
2. 현토는 제가 가지고 있는 한적에 근거하여 달았는데, 해석할 때 참조하신 것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면밀하게 대비하여 취사하시기 바랍니다.
3. / 표시를 한 부분은 현재 의심이 나는 곳들입니다.
4. 곧바로 2~6권이 나갈 것입니다.
朱書百選 卷之二
答張敬夫
來敎가 綱領1)極正當하고 條目2)亦詳備하대 顧其間有所未盡하니 計非有所不及라 恐以爲無事於言而不言耳 請試陳之리라 夫春秋之法이 君弑賊不討면 則不書葬者가 正以復讐之大義爲重이오 而掩葬之常禮爲輕이라 以示萬世臣子가 遭此非常之變이면 則必能討賊復讐라야 然後爲有以葬其君親者오 不則雖棺槨衣裳이 極於隆厚라야 實與委之於壑으로 無異하니 其義可謂深切著明矣어늘 而前日議者가 乃引此3)以開祈請之端하니 何其與春秋之義로 背馳之甚耶오 又況祖宗陵寢欽廟梓宮4)이 往者屢經變故하야 傳聞之說이 有臣子所不忍言者하니 此其存亡5)固不可料矣라 萬一狡虜가 出於漢斬張耳6)之謀하야 以誤我하면 不知何以驗之하며 何以處之오
답장경부(答張敬夫)
보내온 편지의 말씀은 강령이 극히 정당하고 조목이 또한 자세히 갖추어져 있으되 그 가운데에 미진한 바가 있는 것 같으니, 생각건대 이는 그대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가 아니고 아마 말할 일이 없다고 여겨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 일을 다시 진술해 보고자 하니 대저 ������춘추(春秋)������의 필법에 임금을 시살(弑殺)한 적(賊)을 토벌하지 아니하면 장(葬)이라고 쓰지 않는 것은, 정히 복수의 대의를 중히 여기고 엄장(掩葬)의 상례(常禮)를 가벼 여겨서, 만세의 신자(臣子)가 이러한 비상의 변을 만났을 때 반드시 토적(討賊)하여 복수를 한 연우에라야 그 군친(君親)을 장사지낼 수 있고, 토적하여 복수를 하지 못하면 비록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이 극히 융후(隆厚)하더라도 실은 군친의 시신을 골짜기에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니, 그 뜻이 가히 매우 절실하고 뚜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일에 기청사의 파견을 주장하는 자가 이에 ������춘추������를 인용하여 기청(祈請)의 단서를 열고자 하니, ������춘추������의 뜻과 배치됨이 어찌 이토록 심한가. 또 더구나 조종능침(祖宗陵寢)과 흠묘(欽廟) 재궁(梓宮)이 전에 여러 번 변고를 겪어서, 전해 듣는 말에 신자(臣子)로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것이 있으니, 이는 지금 능침의 존망조차도 알 길이 없는 형편인 것이다. 만일 교활한 오랑캐가, 한(漢)이 장이(張耳)의 목을 벤 꾀를 내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는 사실을 확인할 길도 없을 것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방법도 모를 것이다.
熹昨日道間에 見友人李宗思하야 相於及此니 李云하대 此決無可問이니 爲臣子者가 但當思其所以不可問之痛 沫血飮泣이 益盡死於復讐가 是乃所以爲忠孝耳라하니 此語는 極當이라 若朝廷이 果以此義存心하야 發爲號令이면 則雖瘖聾跛躄之人이라도 亦且增百倍之氣矣리니 何患怨之不報 恥之不雪 中原之不得 陵廟梓宮之不復이로대 而爲是紕繆倒置有損無益之擧哉아 不知曾爲上壟此意하야 請罷祈請之行否아
내 어제 노상에서 친구 이종사(李宗思)를 만났는데, 대화가 기청사(祈請使)의 일에 미치자, 이종사가 말하기를,
“조종능침의 존망은 결코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니, 신자가 된 자는 다만 그 물어 볼 수도 없는 아픔을 잊지 말고, 피묻은 얼굴로 눈물을 삼키며 복수에 죽을힘을 다해야만 이것이 곧 충효의 길이다.”
고 하니 이 말이 지극히 마땅하다 하겠다. 만약 조정이 과연 이 충효의 뜻을 마음에 두고 전국에 명령을 내린다면, 비록 벙어리 귀머거리 절룩말이 앉은뱅이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백배로 힘을 내어 복수의 대열에 참여할 것이다. 어찌 원수를 갚지 못하고, 치욕을 씻지 못하며, 중원을 얻지 못하고, 능묘재궁을 회복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이같이 뒤틀리고 거꾸러져 해롭고 무익한 기청(祈請)의 일을 듣고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대는 위로 이같은 뜻을 논하여 기청사(祈請使)의 사행(使行)을 파하도록 주청(奏請)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此今日正名擧義之端이니 不可不審이오 其他는 則所論盡之로대 但所謂德者를 當如何而脩며 所謂人才者를 當如何而辨하며 所謂政事者를 當如何而立고 此須一一有實下功夫處오 又須審度彼己하며 較時量力하야 定爲幾年之規를 若孟子大國五年 小國七年之說이오 其間施設次第를 亦當一一子細畵爲科條하야 要上心曉然開悟 知如此가 必可以成功이며 而不如此가 必至於取禍하야 決然不爲小人邪說所亂하며 不爲小利近功所移하야 然後可以向前擔當하야 鞠躬盡力 上成主有爲之志하고 下究先正7)忠義之傳이니 如其不然이면 則計慮不定하야 中道變移하리니 不惟不能成功이라 正恐民心內搖하고 仇敵外侮하야 其成敗禍福이 又非坐而待亡之比니 家族不足惜이어니와 奈宗社何오 此尤當審處오 不可容易承當8)이라 後將有悔而不及者니 願更加十思하라 不可以入而後量也이니라
이 기청의 일은 오늘날 명분을 바르게 하고 의리를 세우는 단서가 되니, 자세히 논하지 않을 수 없고, 나머지 조목은 그대의 주장에 미진한 점이 없이 다 논한 것 같다. 다만 그대가 이른 바 덕을 어떻게 닦아야 하며 인재를 어떻게 분변해야하며 정사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같은 그대의 주장은 반드시 하나하나 실제로 노력할 수 있는 곳을 제시해야 하고, 또 반드시 적국과 아국(我國)의 형세를 자세히 판단하고, 시기와 전력을 헤아려 몇 년이 걸릴 것인가를, ������맹자������의 ‘대국은 5년 소국은 7년’과 같은 식으로 정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기 위한 시설과 차례를 하나하나 자세히 조목조목 구분하여, 주상의 마음으로 하여금 훤히 깨달아 이렇게 이렇게 하면 반드시 성공하고,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여, 결연히 소인들의 사설(邪說)에 현혹되지 않고, 작은 이익과 눈앞의 공적에 유혹되지 않게 한 연후에야 가히 앞을 향하여 책무를 지고 몸을 굽혀 힘을 다해, 위로 성주(聖主)의 하고자 하는 뜻을 이룩하고 아래로 선정(善正)의 충의(忠義)를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국가 대계(大計)가 굳건히 결정되지 못하고 중도에 변경될 것이며, 성공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으로 민심이 요동하고 밖으로 구적(仇敵)이 모멸하여, 그 성패와 화복(禍福)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가족은 그만두고라도 종사(宗社)를 어찌할 것인가. 이는 참으로 주도면밀해야 하니 복수의 계획을 쉽게 세워서는 안될 것이다. 차후에 후회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바라건대 다시 열번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일이란 원래 실행하기 이전에 백번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것이다.
抑又有所獻이니 熹幸從遊之久하야 竊覵所存하니 大抵莊重沈密氣象이 有所未足이라 以故所發多暴靈而少含蓄하니 此殆涵養本原之功이 未至而然이라 以此慮事하면 吾恐視聽之不能審하야 而思慮之不能詳也ㄹ가 願深察此言하야 朝夕點撿이 絶其萌芽 勿使能立이면 則志定慮精하야 上下信服이 冀於有爲에 事半而功倍矣리라 熹嘗以爲內脩外攘이 譬如直內方外라하노니 不直內而求外之方이 固不可어니와 然亦未有今日直內而明日方外之理니 須知自治之心이니 不可一日忘이오 而復讐之義도 不可一日緩이라야 乃可與語今世之務矣니라 奏草已得竊觀하니 所論該貫詳明하야 本末巨細無一不擧하니 不欲有爲則已어니와 如欲有爲 未有舍此而能濟者라 但使介遂行하니 此害義理失幾會之大者라 若虜人有謀하야 不拒吾請하고 假以容車之地하야 使得往來朝謁이면 不知又將何以處之오 今幸彼亦無謀하야 未納吾使하니 不若指此爲釁하야 追還而顯絶之乃爲上策이니 若必待彼見絶하야 而後應之면 則進退之權이 初不在我하야 而非所以爲正名之擧矣라 尊兄所論이 雖不見郤이나 然只此一大節目이 便已乖戾하고 而他事가 又未有一施行者하니 竊意虞公이 亦且繆爲恭敬이오 未必眞有信用之實이니 不若早以前議로 與之判決하야 如其不合이어든 則奉身而退亦不爲無名矣니라
또 그대에게 드릴 말이 있으니, 내 다행히 그대를 따라 교유(交遊)한지 오래되어, 가만히 그대의 기품을 보니, 장중하고 침밀(沈密)한 기상이 부족한 것같다. 그래서 나타내는 바가 폭로함이 많고 함축함이 적으니, 이것은 자못 본원을 함양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기상으로 사물을 생각하면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할 수 없고, 사려(思慮)가 상밀(詳密)할 수 없을 것이다. 바라건대 이 말을 깊이 생각하여 조석으로 점검하여 그 폭로(暴露)의 싹을 잘라 설자리도 없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뜻이 확고하고 생각이 정밀하여 상하가 믿고 따를 것이니, 무슨 일을 함에 수고로움은 반으로 줄고 성과는 배로 늘어날 것이다. 내가 전에 내정(內政)을 닦아 외적을 물리치는 일이, 비유하자면 마음을 곧게 하여 행동을 반듯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마음을 곧게 하지 아니하고 행동이 반듯하기를 바라는 것은 진실로 불가한 일이나, 그러나 오늘은 마음을 곧게 하고 내일은 행동을 반듯하게 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반드시 내정(內政)을 다스릴 마음을 하루도 잊지 말고, 복수의 의리를 하루도 늦추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 비로소 함께 금세(今世)의 시무(始務)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奏草已得竊觀하니 所論該貫詳明하야 本末巨細無一不擧하니 不欲有爲則已어니와 如欲有爲 未有舍此而能濟者라 但使介9)遂行하니 此害義理失幾會之大者라 若虜人有謀하야 不拒吾請하고 假以容車之地10)하야 使得往來朝謁이면 不知又將何以處之오 今幸彼亦無謀하야 未納吾使하니 不若指此爲釁하야 追還而顯絶之乃爲上策이니 若必待彼見絶하야 而後應之면 則進退之權이 初不在我하야 而非所以爲正名之擧矣라 尊兄所論이 雖不見郤이나 然只此一大節目11)이 便已乖戾12)하고 而他事가 又未有一施行者하니 竊意虞公이 亦且繆爲恭敬이오 未必眞有信用之實이니 不若早以前議로 與之判決하야 如其不合이어든 則奉身而退亦不爲無名矣니라
존형의 주소(奏疏) 초본을 읽어보니 그대의 주장이 상세하고 분명하여, 본말과 거세(巨勢)를 언급하지 않음이 없으니, 하고자 함이 없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하고자 함이 있을진댄 그대의 주장과 같이 하지 않고는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능침의 조알(朝謁)을 기청(祈請)하기 위한 사신이 이미 가버렸으니 이는 크게 의리를 해치는 일일뿐만 아니라 복수의 기회마저 상실할 것이다. 만약 금로(金虜)가 꾀가 있어 우리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능침을 조알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우리는 장차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한 일이다. 지금 다행히 저들이 무모하여 우리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우리는 이를 꼬투리 잡아 사신을 소환하여 외교를 단절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만약 저들이 거절당하는 것을 기다린 뒤에 우리가 이에 응한다면 이는 우리의 진퇴의 권한을 빼앗기는 일이며 명분을 세울 수 있는 방법도 아닌 것이다. 존형의 주소(奏疏)가 비록 군상(君相)으로부터 기각 당하지는 않았지만 기청(祈請)이 불가하다는 큰 문제에 이미 서로의 뜻이 어긋났으니 다른 일 또한 하나도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우공(虞公)이 겉으로 존형을 공경하는 체 하고 속으로는 존형을 신용하는 실상이 없는 것같다. 일찌감치 전에 논한 기청이 불가하다는 일을 가지고 그와 담판하여 그 뜻이 합치되지 않거든 결연히 사직하고 물러나는 것도 또한 명분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此非細事라 其安危成敗間不容息하니 豈可以坐縻虛禮하야 逡巡閔黙이 以誤國計하고 而措其身於顚沛之地哉리오 必以會慶13)爲期로대 竊恐未然之間에 卒有事變而면 而名義不正하고 彌綸14)又踈하야 無復有著手處也ㄹ까하노이다 彼若15)幸而見聽16)이어든 則更須力爲君相極言學問之道하야 使其於此開明이면 則天下之事가 不患難立詳觀四牘17)却似於此有未盡也노라 熹常謂天下萬事가 有大近本而每事之中에 又各有要切處하니 所謂大近本者는 固無出於人主之心術이요 而所謂要切處者는 則必大本旣立하야 然後可推而見也니 如論任賢相杜私門은 則立政之要也요 擇良吏輕賦役은 則養民之要也오 公選將帥不由近習은 則治軍之要也요 樂聞警戒不喜導諛는 則聽言用人之要也니 推此數端하야 餘皆可見이라 然未有大本不立이오 而可以與此者니 此古之欲平天下者所以汲汲於正心誠意하야 以立其本也라
대저 이번 기청사(祈請使)의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니, 그 안위(安危)와 성패가 초미의 긴박한 상황이다. 어찌 앉아서 허례에 구애되어 머뭇머뭇 침묵으로 일관하여 국책을 그르치고 자신을 낭패의 지경에 빠뜨릴 것인가. 꼭 주상(主上)의 탄신 일을 기다린다면 예기치 못하는 사이에 사변(事變)이 일어나 명분을 세울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대처할 방책이 엉성해져 착수할 곳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공(虞公)이 만약 다행히도 존형의 청을 들어 기청사를 소환한다면, 다시 힘껏 군상(君相)을 위해 학문의 도를 지성으로 말하여 군상으로 하여금 학문의 도를 깨닫도록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정사(政事)가 제대로 성립될 것이다. 그런데 존형의 주초(奏草)를 자세히 읽어보니 학문의 도에 관하여 미진한 바가 있는 것같다. 천하 만사는 곧 근본이 있고 모든 일은 그 가운데에 각각 요절(要切)한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 큰 근본이란 인주(人主)의 심술을 말하고 또 요절한 곳이란 반드시 큰 근본이 세워진 뒤에 라야 가히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존형이 논한 바 어진 재상을 임명하고 사문(私門)을 막는다는 것은 정사(政事)를 세우는 요체요, 우수한 관리를 뽑고 부역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백성을 보살피는 요체요, 장수를 공정하게 선발하여 친한 사람을 뽑지 않는다는 것은 군을 다스리는 요체요, 경계하는 말을 듣기를 즐겨 하고 아첨하는 말에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청언과 용인(用人)의 요체이다. 이상과 같이 요절(要切)한 일을 잘 수행해 나가면 나머지 일은 저절로 잘 될 것이다. 그러나 큰 근본인 인주(人主)의 마음이 바로 서지 않으면 이와 같은 요절한 일이 수행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옛날에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성실히 하여 그 큰 근본을 세우기에 급급해 하는 까닭인 것이다.
若徒言正心而不足以識事物之要하며 或精覈事情而特昧夫根本之歸면 則是腐儒迂闊之論 俗士功利之談이니 皆不足與論當世之務矣라 吾人18)向來非不知此로대 却是成已功夫가 於立本處에 未甚端的이라 故其論此에 使人主亦無下功夫處하니 今乃知欲圖大者댄 當謹於微오 欲正人主之心術인댄 未有不以嚴恭寅畏爲先務하고 聲色貨利가 爲至戒니 然後乃可爲者라 此區區近日愚見之拙法이니 若未有孟子手段19)인댄 不若且循此塗轍20)之無悔吝也니라
만약 헛되이 정심(正心)만 말하고 사물의 요절처(要切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며, 혹은 사물의 실정을 속속들이 말면서도 근본의 귀착점에 어둡다면, 이는 곧 썩은 선비의 어설픈 논설에 불과하고, 속된 선비의 공리(功利)를 좇는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모두 당면한 시무(時務)를 논하기엔 부족한 것이다. 존형이 지금껏 이 같은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테지만, 근본을 세우는 데에 자기 공부가 적확하지 못한 까닭으로 인주(人主)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공부할 곳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큰 일을 도모하고자 할진댄 작은 일에 조심해야 하고, 인주(人主)의 심술을 바르게 하고자 할진댄, 먼저 인주를 근엄한데 힘쓰게 하며, 성색(聲色)과 화리(貨利)를 경계토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안 뒤에 라야 인주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공부할 곳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현재 내 우견(愚見)의 졸법(拙法)이니 만약 존형이 맹자 같은 웅대한 경륜이 없다면 내가 말한 상도(常道)를 따르는 것이 후회가 없을 것이다.
向者請對之云21)이 乃爲不得已尼計리니 不知天意22)慇懃하사 旣以侍立23)을 開盡言之路하고 而聖心24)鑒納25)하사 又以講席을 延造膝之規26)하시니 此豈人謀所及哉아 竊觀此擧하니 意者天人之際君臣之間에 已有響合27)之勢하니 甚盛28)甚盛이라 勉旃29)勉旃어다 凡平日之所講聞을 今日親見之30)矣라 盖細讀來書然後知聖主之心이 乃如此하시고 而尊兄學問涵養之力이 其充盛和平又如此하니 宜乎立談之頃31)發悟感通曾不旋踵32)遂定腹心之契33)眞所謂千載之遇也로다 然熹之私計는 愚竊不勝十寒34)衆楚35)之憂하노니 不審36)高明37)이 何以處之요 計此亦無他術이라
전에 내가 존형에게 청대(請對)를 하여 시사(時事)를 극론하도록 권한 것은 나의 마지못한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예상밖에도 천의(天意)가 은근(慇懃)하여 존형을 시립(侍立)으로 임명하여, 언로(言路)를 활짝 열고 성심(誠心)이 이를 감납(鑒納)하며, 또 존형을 강석(講席)으로 임명하여 은밀한 간언(諫言)을 모두 받아들이니, 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를 생각해보니 아마 하늘과 사람 사이에, 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 울려 합하는 기운이 있는 것같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요, 힘쓰고 힘 쓸 일이다. 평소에 공부하며 듣던 일은 지금 존형은 친히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존형의 편지를 읽어보고, 성주(聖主)의 마음이 이와 같고, 존형의 학문 함양의 공이 그 충성(充盛) 화평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금방 서로 깨닫고 통하여, 곧 서로 마음이 맞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십한(十寒) 중초(衆楚)의 격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존형은 이에 어떻게 대처할 지 모르겠다. 생각건대 이 또한 다른 방도가 없으리라.
但積吾誠意於平日하야 使無食息之間斷이 則庶乎其可耳니라 夜直38)亦嘗宣召39)否아 夫帝王之學이 雖與韋布40)不同하고 經綸之業이 固與章句41)有異나 然其本末之序는 愚竊以爲無二道也라하노니 聖賢之言이 平鋪放著42)하야 自有無窮之味하니 於此從容潛玩43)하야 黙識而心通44)焉이면 則學之根本이 於是乎立하니 而其用可得而推45)矣라 患在立說貴於新奇하니 推類46)欲其廣博이라 是以反失聖言平談之眞味하야 而徒爲學者口耳之末習하니 至於人主能之47)에 則又適所以爲作聰明48)自聖賢49)之具라 不惟無益而害有甚焉하니 進說之際에 恐不可以不戒로다
다만 평소에 존형의 성의(誠意)를 쌓아서 쉬지 않고 힘써 나가면 아마 십한(十寒) 중초(衆楚)의 근심은 없을 것이다. 야직(夜直)할 때에 또한 선소(宣召)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비록 제왕의 학문은 서민의 학문과는 다르고, 제왕의 경륜은 장구(章句)의 학습과는 다르다고 하나 그 본말의 차례는 양자가 다 같을 것이다. 성현의 말은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함축성이 커 그 의미가 무궁하니 이를 종용히 음미하여 묵식 심통하면 이에 학문의 근본이 성립하고 그 쓰임을 백방으로 미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근심하는 것은 신기한 입설(立說)을 귀히 여기고 광박(廣博)한 유추(類推)를 좋아하여 이 때문에 존형의 강설이 성언(聖言)의 평담(平淡)한 진미를 잃고 한갓 학자의 구이(口耳)의 말습(末習)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주가 신기한 입설과 광박한 유추를 능사로 어기면 자신이 아주 총명한 줄 알고 자신이 성현인 줄 아는 자료가 되어 매우 무익할 뿐만 아니라 그 폐해가 아주 심할 것이니 존형이 주상에게 진설(進說)할 때에 이를 각별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筵中50)見講何書오 愚意孟子二書가 最切於今日之用이나 然輪日51)講解未必有益이니 不若勸上萬幾之暇52)에 日誦一二章反復玩味하야 究觀聖賢作用本末하야 然後夜直之際에 請問業之所至하야 而推明之하면 以上之聰明英睿53)으로 若於此見得을 洞然無疑면 則功利之說이 無所投54)하야 而倖倖之門無自啓矣리라 今財利之柄이 制於聚斂掊克之臣하야 末流之弊不可勝捄니 愚意莫若因制國用之名55)하야 而遂脩其實하야 明降詔旨令逐州逐縣을 各具民田歲入幾何와 非凡56)科率57)幾何所收金穀總計幾何諸色58)支費59)總計幾何와 有餘者歸之何許60)와 不足者何所取之를 類會61)考究하야 而大均節之하야 使州縣貧富不至甚相懸이면 則民力之慘敍/62)가 亦不至大相絶矣니 如此然後先王不忍人之政63)을 庶乎其可施也니라
경연(經筵) 중에는 어떤 책을 강독하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맹자 한 권이 금일의 쓰임에 가장 적절할 것같다. 그러나 날마다 연속적으로 강독하는 것이 꼭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주상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고 난 여가에 하루에 한 두 장(章)을 공부하게 하고 이를 반복 음미하여 성현이 뜻하는 근본 의미를 추구해 알게 한 연후에, 야직할 때에 주상이 공부한 것을 질문해 보고 그 의미를 미루어 밝혀서, 주상의 총명과 빼어난 슬기로 하여금 이를 훤히 깨달아 의문이 없게 해야 공리(功利)의 말이 이에 끼여들지 못하고, 요행의 길이 이에 열려 정도를 침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지금 재리(財利)의 권한이 가렴주구 하는 신하의 손에 잡혀 있으니 그 말류(末流)의 폐단을 구제할 길이 막연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 제국용사(制國用司)의 이름으로 재리를 조사케 하고, 명확히 조서를 내려 각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민전(民田) 세입이 얼마이며, 비상 과율이 얼마이며, 각종 지출의 총계가 얼마이며, 남는 것이 있으면 어느 곳으로 귀속되며, 부족한 것은 어디서 보충하는가를 보고하게 하여, 이를 비교 고찰하고 균등하게 하여, 각 주현으로 하여금 서로 빈부의 차이가 없게 하면, 백성의 고통과 편안함이 서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같이 한 연후에야 선왕의 어진 정사를 가히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又屯田64)實邊65)이 最爲寬民力之大者니 須就今日邊郡官田하야 略以古法으로 畵爲丘井66)溝洫67)之制하야 使通行之하야 使彼此無疆場68)之爭하니 軍民無雜耕69)之擾하면 此則非惟利於一時라 又可漸爲復古70)之緖니 今日養民之政이 恐無出於兩者71)라 其他忠邪得失은 不敢槪擧어니와 但政本72)未淸하고 倖門73)未窒하야 殊未有以見陽復74)之効하니 願更留意하야 暇日爲上一二精言之하라
또 둔전(屯田)과 실변(實邊)의 일이 백성의 힘을 덜어 주는 가장 중요한 정책이니, 변방 군현의 관전을 고법(高法)에 따라 구정(丘井)과 구혁(溝洫)제로 구획하여 시행케 하여, 서로 토지 경계로 인한 분쟁을 없게 하고, 군(軍)과 민(民)이 섞여 농사를 짓는 혼잡이 없게 하면, 이는 일시의 이로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점점 개선하여 옛 정전법을 회복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으니, 금일 양민(養民) 정책이 이 두 가지 정책을 신속히 시행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 나머지 충사(忠邪)와 득실(得失)에 관한 일은 다 말할 수 없으나, 다만 정치의 근본이 밝지 아니하고 행문(倖門)의 발로를 깍지 아니하면 양(陽)이 회복되는 결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를 유념하여 때때로 주상을 위해 하나 둘 자세히 말씀드리기 바라는 바이다.
答張欽夫
答廣仲75)書가 切中學者之病이나 然愚意竊謂此病이 正坐平時獨理未明涵養未熟이라 以故事物之來에 無以應之하니 若曰於事物紛至之時에 精察此心之所起ㄴ대 則是似更於應事之外에 別起一念하야 以察此心이니 以心察心이면 煩擾益甚하고 且又不見事物未至時用力之要니 此熹所以不能亡矣也라 儒者之學이 大要以窮理爲先하니 盖凡一物이 有一理라 須先明此라하야 然後心之所發에 輕重長短이 各有準則이니 書所謂天叙76)天秩77)天命78)天討79)孟子所謂物皆80)然心爲甚者가 皆謂此也라 若不於此81)先致其知하고 但見其所以爲心者如此하며 識其所以爲心者如此하야 泛然而無所準則이면 則其所存所發이 亦何自而中於理乎아
답장흠부(答張欽夫)
존형이 호광중(胡廣中)에게 답한 글은 학자들의 병통을 적절히 지적한 것같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병통이 평시에 이치를 밝힘이 명확하지 못하고 자신을 함양하는 공무가 익숙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사물이 도래할 때에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사물이 목전에 어지럽게 도래하였을 때에 이 사물에 응하여 일어나는 마음을 자세히 관찰한다고 한다면 이는 사물에 응하는 마을 외에 별도로 또 다른 하나의 마음을 일으켜 사물에 응하고 있는 마음을 관장하는 것이 되니, 이는 마음으로써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어서 어지럽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사물이 도래하기 이전에 힘써야 할 함양 공부의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내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인 것이다. 유학은 궁리를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로 여긴다. 무릇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이치가 있으니, 먼저 이 이치를 밝힌 연후에 라야 마음이 발할 바 경중(輕重)과 장단(長短)이 각각 따를 곳이 있게 된다. ������서경������에서 천서(天叙)와 천질(天秩)과 천명(天命)과 천토(天討)를 말하고, ������맹자������에서 “사물이 다 그러하지만 마음이 더욱 심하다.”라고 말한 것이 모두 이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준칙인 천리(天理)를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마음이 발하는 까닭이 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이 발하는 까닭이 이러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범연(泛然)히 준칙(準則)할 곳이 없으면, 그 마음을 보존하는 바와 발하는 바가 어디로부터 나와서 이치에 맞을 것인가를 알 수 없게 된다.
且如釋氏擎拳竪拂82)運水般異柴83)之說리 豈不見此心豈不識此心하야 而卒不可與入堯舜之道者가 正爲不見天理하고 而專認此心하야 以爲主宰라 故不免流於自私耳니 前輩84)有言하대 聖人本天하고 釋氏本心이 盖謂此也라 來示又謂心無時不虛하니 熹以爲心之本體固無時不虛나 然而人欲已私가 泊沒久矣니 安得一朝遽見此境界85)乎아 故聖人必曰 正其心이라하시니 而正心必先誠意오 誠意必先致知라 其用力次第如此라야 然後可以得心之正하야 而復其本體之虛니 亦非一日之力矣어늘 今直曰無時不虛라하고 又曰旣識此心則用無不利라하니 此亦失之太快하야 而流於異學86)之歸矣니 若儒者之言이니 則必也精義入神而後用無不利를 可得而語矣니라
또 석씨(釋氏)의 경권수불(擎拳竪拂)과 운수반시(運水般柴)의 설이 어찌 이 마음을 보지 못하고 이 마음을 인식하지 못하리오마는 끝내 함께 요순(堯舜)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천리(天理)를 보지 못하고 오로지 마음만 인식하여 내 몸의 주재로 삼기 때문이며, 그런 까닭으로 끝내 천리를 망각하고 자사(自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전배(前輩)가 성인은 천리에 근본을 두고 석씨는 마음에 근본을 둔다고 말하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보내온 편지에서 또 ‘마음은 비어 있지 않을 때가 없다’고 하니, 나도 마음의 본체는 비어 있지 않을 때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인욕과 이기심에 빠진지가 오래되었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마음을 비울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성인이
“정심(正心)하되 정심은 먼저 성의(誠意)를 해야 하고, 성의는 먼저 치지(致知)를 해야 한다.”
라고 말하니, 그 힘 쓸 차례가 이 같은 연후에 라야 마음이 바름을 얻을 수 있고 그 본체가 비어 있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쉬운 일이 아니거늘, 지금 바로
“비어 있지 않을 때가 없다.”
라고 말하고, 또
“이 비어 있는 마음의 실태를 알고 나면 쓰임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
라고 말하니, 이는 너무 통쾌한 데에 빠져서 이단의 길로 흘러 버린 것이리라.
유학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반드시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영묘한 경지에 들어가야만 쓰임에 이롭지 않음이 없음을 말할 수 잇다.”
라고 말한다.
孟子存亡出入之說을 亦欲學者操而存之耳오 似不爲識此心發也니 若能常操而存이면 卽所謂敬者純矣라 純則動靜如一하야 而此心이 無時不存이니 今也必曰動處求之면 則是有意求免乎靜之一偏이나 而不知其反倚乎動之人偏也라 然能常操而存者가 亦是顔子地位以上人아라야 方可言此니 今又曰識得便能守得아라하면 則僕亦恐其言之易也하노라 明道先生曰 旣能體87)之而樂이면 則亦不患不能守라하시니 守如此而言이라야 方是攧撲不破하야 絶滲漏無病敗耳니라 高明之意大抵在於施爲運用處求之하니 正禪家所謂石火電光底消息88)也라 而於擾游涵泳之功에 似未甚留意是以求之太迫而得之若驚하고 資之不深而發之太露하니 易所謂寬以居之者는 正爲不欲其如此耳라 愚慮가 及此하니 不識高明이 以爲如何오
������맹자������의 ‘마음이 존망하고 출입한다’는 설은 학자로 하여금 마음을 잡아 두게 하려는 것이요, 이 마음의 발함을 인식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같다. 만약 마음을 항상 잡아 둘 수 있으면 이른바 경(敬)이 순일(純一)할 수 있고 경(敬)이 순일하면 동정(動靜)이 하나 같아 본심이 보존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존형은 기어코 동처(動處)에서 마음의 발함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니, 이는 정(靜)에 치우치지 않으려다가 도리어 동(動)에 기울어짐을 알지 못한 것이다.
또 ‘항상 마음을 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은 안자(顔子) 수준 이상인 사람이라야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존형은 지금 마음을 알면 곧 마음을 지킬 수 있다’라고 말하니 내 생각에는 그 말이 너무 쉬운 것같다. 명도 선생이 말하기를,
“몸으로 행하여 이를 즐길 수 있을 정도면 이를 지킬 수 없음을 근심할 필요는 없다.”
고 하니, 모름지기 이같이 말해야만 비로소 깨뜨리려 해도 깰 수 없는 물샐틈없이 완벽한 말이 되는 것이다.
존형의 듯은 대저 운용(運用)과 시행하는 곳에서 마음의 작용을 알고자 하니 이는 바로 선가(禪家)가 이른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과 같아서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사물의 이치를 음미하는 공부엔 깊이 유의(留意)하지 않는 것같다. 이 때문에 구함이 너무 급하고 얻음이 깜짝 놀란 듯하며, 바탕이 깊지 아니하고 발함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주역������에서 이른바
“너그러이 거처한다.”
는 것이 전광석화 같은 생멸을 경계한 것이다. 내 생각은 이러하니 존형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答張欽夫
二先生89)皆有隨俗墓祭90)不害義理之說이라 故不敢輕廢오 至於節祠는 則又有說하니 盖今之俗節이 古所無有라 故古人이 雖不祭나 而情亦自安이어니와 今人이 旣以此爲重이라 至於是日에 必具殽羞相宴樂하고 而其節物91)이 亦各有宜하니 故世俗之情이 至於是日에 不能不思其祖考而復以其物亨之하니 雖非禮之正이나 然亦人情之不能已者니 但不當專用此하고 而廢四時之正禮92)耳라
답장흠부(答張欽夫)
정자(程子)와 장자(張子) 두 선생이 모두 시속에 따라 지내는 묘제(墓祭)는 의리(義理)를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묘제는 감히 가벼이 폐할 수 없고, 절사(節祠)에 대하여는 또 할 말이 있으니, 대개 지금의 시속 명절은 옛날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닌 까닭으로, 옛날 사람이 비록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인정이 또한 스스로 편안할 수 있거니와, 지금 사람은 시속 명절을 중요하게 여겨, 이날이 오면 꼭 안주와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어울려 잔치를 하며 즐기며, 또 그 계절에 따라 나는 음식과 과일이 있어, 세속의 인정이 이날이 되면 그 조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다시 그 계절의 음식과 과일로써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니, 비록 이것이 제례의 정도는 아니나 또한 인정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있는 것이다. 다만 오로지 이 절사만 지내고 사시(四時)에 지내는 정례(正禮)를 폐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故前日之意93)以爲旣有正祭하니 則存此似亦無害리니 今承誨諭以爲黷而不敬이라하니 此誠中其病然欲遂廢之ㄴ댄 則恐感時觸物思慕之心을 又無以自止니 殊覺不易處94)로다 且古人不祭면 則不敢以燕하나니 況今於此俗節에 旣已據經而廢祭하고 而生者는 則飮食宴樂하야 隨俗自如하면 殆非事死如事生事亡如事存之意也라 必盡廢之 然後可로대 又恐初無害於義理95)어늘 而特然廢之不惟徒駭俗聽이라 亦恐不能行遠96)하노니 則是已廢之祭는 拘於定制하야 不復能擧하고 而燕飮節物이 漸於流俗하야 有時而自如也니 此於天理에 亦豈得爲安乎아
그래서 전일에 내가, 이미 사시의 정제를 지낸다면 명절에 지내는 제사가 의리를 해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존형은 전사를 지내는 것이 신을 모독하는 불경(不敬)이라고 하니 이는 참으로 그 온당치 않음을 잘 지적하였으나, 그러나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폐하고자 하니 시절에 느끼는 추모의 마음을 금할 길 없어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고, 또 옛 사람이 제사를 않으면 잔치하고 즐기는 법이 없었거늘 하물며 지금 명절에 조상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산 사람은 전과 같이 음식을 차려 잔치하고 즐긴다면, 이는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과는 너무나 다르니, 명절의 잔치와 명절의 제사를 함께 다 폐하는 것이 옳겠고, 명절에 즐기고 제사지내는 것이 처음부터 의리에 해가 없는 것을 별스레 이를 폐한다면 이는 세속 인정을 놀라게 할뿐만 아니라, 또 아마 오래 지속되지도 못할 것이다. 곧 이는 이미 폐한 제사는 예법에 구속되어 다시 거행하지 못하고 절기에 나는 음식과 과일로 잔치하고 즐기는 일은 풍속에 젖어 여전히 계속될 것이니, 이는 천리(天理)에 비추어 어찌 편안한 일이라 하겠는가.
夫三王制禮因革不同이나 皆合乎風氣之宜하고 而不違乎義理之正하니 正使聖人復起라도 其於今日之議에 亦必有所處矣시라라 愚意時祭之外에 各因鄕俗之舊하야 以其所尙之時所用之物로 奉以大槃하야 陳於廟中而以告朔97)之禮莫焉이면 則庶幾合乎隆殺之節하고 而盡乎委曲之情하야 可行於久遠而無疑矣라 至於元日履端98)之祭禮亦無文하니 今亦只用此例니라
삼왕이 예법을 제정함에, 인순(因循)과 개혁이 각기 달라, 모두 풍속에 맞게 하되, 의리에 위배되지 아니했으니,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금일의 논의에 대처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사시에 행하는 정제(正祭) 외에 각기 옛 향속(鄕俗)을 따라 좋은 때에 나는 음식과 과일을 큰판에 바쳐 사당에 차려 놓고 곡삭(告朔)의 예(禮)로써 제사 드리면 이는 거의 융쇠(隆殺)의 절도에도 합당하고 애틋한 정리도 다 표할 수 있어, 오래도록 지속되어도 의혹이 없을 것이며, 또 정월 초하루에 지내는 제사도 예에는 글이 없으니, 지금 또한 이 예(例)를 따라 시행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熹昨聞彪丈99)이 謂天命을 惟人이 得之오 而物이 無所與어니아 鄙意固已不能無疑리니 今觀所論100)에 則似又指稟生賦形以前하야 爲天命之全體오 而人物所受가 皆不得而與焉이라하니 此則憙之所尤不曉也로다 夫天命不已固人物之所同得以生者也나 然豈離乎人物之所受하고 而別有全體哉리오 觀人物之生生無窮이면 則天命之流行不已를 可見矣니라 但其所乘之氣101)有偏正純駁之異라 是以稟而生者는 有人物賢否之不一하니 物固隔於氣而不能知하고 衆人亦蔽於欲而不能存하나 是皆有以自絶于天이오 而天命之不已者는 初亦未嘗已也니 人能反身自求於日用之間하야 存養體察 以去其物欲之蔽면 則求仁得仁에 本心昭著하야 天命流行之全體固不外乎此身矣라 故自昔聖賢이 不過使安盡其所以正心脩身之道면 則仁在其中而性命之理得이니 伊川先生所謂盡性至命을 必本於孝悌正謂此耳라
내 일찍이 들으니 표장(彪丈)이 말하기를,
“천명(天命)은 사람만이 부여받을 수 있고 물(物)은 천명을 부여받을 수 없다.”
고 하니, 내 생각에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지금 표장이 논한 것을 보니 하늘이 품생(禀生) 부형(賦形)하기 이전을 가리켜 천명의 전체라 하고 사람과 물(物)이 부여받은 것은 천명 전체가 아니라 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내가 더욱 알지 못할 일이다. 대저 천명의 유행이 그치지 아니하여 인물(人物)이 같이 천명을 부여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인물(人物)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과는 단절된 별도의 천명 전체가 있겠는가.
인물이 끝없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 천명의 유행이 그침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타고난 기(氣)가 편정(偏正) 순박(純駁)의 다름이 있어 이 때문에 하늘로부터 품부받아 태어난 것이 인물(人物)과 현부(賢否)의 구별이 있으며, 물질은 이성(異性)은 없고 기(氣)에 막혀 지각(知覺)을 할 수 없고 대중은 욕심에 막혀 이성을 보존하지 못하니, 이것은 다 스스로 천명을 단절한 것이요, 천명의 유행은 일찍이 한 번도 그친 적이 없다. 사람이 일용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반신(反身) 자구(自求)하고 존양체찰(存養體察)하여 그 물욕(物慾)을 버리면 인(仁)을 구하고, 인(仁)을 얻어서 본심이 밝게 드러나 천명 유행의 전체가 이 몸 안에 있을 것이니, 이 때문에 옛부터 성현이
“정심(正心)이 그 가운데에 있고 천명을 얻을 수 있다.”
고 했다. 이천 선생이
“진성(盡性)과 지명(知命)은 반드시 효제(孝悌)에 있다.”
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夫豈以天命全體로 置諸被命受生之前四端五典之外而別爲一術하야 以求至乎彼哉아 釋侍雖自謂惟明一心102)이나 然實不識心體103)하고 雖云心生萬法104)이나 而實心外有法이라 故無以立天下之大本而內外之道는 不備105)하대 然爲其設者 猶知左右迷藏106)이 曲爲隱諱하야 終不肯言一心之外에 別有大本也라 若聖門所謂心은 則天序天秩天命天討惻隱羞惡是非辭讓이 莫不該備하대 而無心外之法이라 故孟子曰 盡其心者는 知其性也니 知其性則知天矣니라 存其心하야 養其性이 所以事天也라하시니 是則天人性命이 豈有二理哉아 而今之爲此道者는 反謂此心之外에 別有大本하고 爲仁之外에 別有盡性至命之方이라하니 竊恐非惟孤負聖賢立言垂後之意와 平生承師問道之心이라 竊恐此說流行하면 反爲異學所政하야 重爲吾道之累라 故因來示하야 得效其愚하노니 幸爲審其是否하고 而復以求敎於彪丈이 幸甚幸甚이라
대저 어찌 천명 전체를 저 인물이 품부받아 태어난 것 이전 영역에다 두고 사단(四端)과 오전(五典) 외에 별단의 일술(一術)로 천명 전체에 도달하기를 바랄 것인가. 석씨(釋氏)가 비록 스스로
“오직 일심(一心)을 밝혀야 한다.”
고 말하나 실은 마음의 실체를 모르고, 비록
“마음이 만법(萬法)을 낳는다.”
고 말하나 실은 마음 외에 다른 법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불씨가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우지 못하며, 내외의 도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을 주장하는 자가 오히려 그 사실을 감추고 꺼리어 끝내 일심(一心) 외에 별도로 대본(大本)이 있음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성문(聖門)이 이른바 마음이란 것은, 곧 천서(天叙), 천질(天秩), 천명(天命), 천토(天討)와 측은(惻隱), 수오(羞惡), 시비(是非), 사양(辭讓)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어, 마음 밖의 법은 있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맹자께서 말하기를,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알고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 수 잇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
라고 했다.
이러하니 천(天)과 인(人)과 성(性)과 명(命) 이 어찌 두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지금 천인성명(天人性命)의 도를 논하는 자가 도리어
“마음밖에 별도의 대본(大本)이 있고, 인(仁)을 행하는 것 외에 별도로 성(性)을 다하고 명(命)을 아는 길이 있다.”
고 하니, 가만히 생각하니 이는 성현이 후세에 교훈으로 전한 말씀의 뜻과 평일에 스승을 받들고 도를 묻는 마음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이 말이 유행하여 도리어 이단이 공격하는 바가 되어 오도(吾道)에 누(累)가 될까 염려하는 바이다. 그래서 존형이 보낸 준 편지를 인하여 내 어리석은 생각을 피력하는 바이니, 그 옳고 그름을 살펴서 다시 표장(彪丈)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다행이겠다.
答張敬夫
類聚孔孟言仁處하야 以求夫仁之說이 程子爲人107)之意可謂深切이나 然專一如此用功이면 却恐不免長欲速好徑之心하고 滋入耳出口之弊니 亦不可不察也니라 大抵二先生之前에 學者全不知有仁字하야 凡聖賢說仁處를 不過只作愛字看108)了리니 自二先生以來로 學者始知理會仁字하야 不敢只作愛說109)이나 然其流는 復不免有弊110)者는 盖專務說仁하고 而於操存涵泳之功에 不免有所忽略이라 故無復優柔厭飫之味克己復禮之實하니 不但其蔽也愚111)而已라 而又一向離了愛字하고 懸空揣摸하야 旣無眞實見處하고 故其爲說이 恍惚警怪弊病百端이 殆反不若全不知有仁字하고 而只作愛字看却之爲愈也니라
답장경부(答張敬夫)
공자 맹자께서 인(仁)을 말한 곳을 모아서 인(仁)의 설을 구한다고 하니 정자의 사람을 위한 뜻이 가히 절실하다 할 수 있으나 오로지 이에만 힘쓴다면 도리어 속히 이루려는 마음과 지름길을 좋아하는 마음을 조장하고 강설이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는 그런 폐단이 심해질까 염려되니 이점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저 이정 선생(二程先生) 이전에는 학자들이 관념적인 인(仁)이란 말을 모르고 무릇 성현이 인을 논설한 곳에 애(愛)란 뜻으로 보는데 지나지 않았다. 두 선생 이래로 학자들이 비로소 관념적인 인이란 말을 이해하고 애(愛)란 말로 보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공부하는 것이
다시 다른 폐단을 야기시켰으니, 대개 오로지 인(仁)을 이론적으로 논설하는 데만 마음을 수양하고 덕을 기르는 공부에는 소홀함을 면치 못했다. 이 때문에 넉넉하고 충만한 의미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내용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그 폐단이 학자들을 어리석게 할뿐만 아니라 일향(一向) 애(愛)란 말을 떠나 허공을 더듬어 진실을 보는 곳이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 논설이 황홀하여 놀랍고 괴이하여 병폐가 하나 둘이 아니니, 도리어 인(仁)이란 말을 모르고 애(愛)란 말로 보는 것만 같지 못하게 되었다.
熹竊嘗謂若實欲求仁ㄴ대 固莫若力行之近112)이어니와 但不學以明之면 則有擿埴冥行113)之患하야 故其蔽愚니 若主敬致知하야 交相爲助면 則自無此蔽矣오 若且欲曉得仁之名義ㄴ댄 則又不若且將愛字推求하니 若見得仁之所以愛114)而愛之所以不能盡仁이면 則仁之名義意思는 瞭然在目矣리니 初不必求之於恍惚有無之間也니라 此雖115)比之今日高妙之說하얀 稍爲平易나 然論語中에 已不肯如此迫切注解語破하고 至孟子方間有說破處나 然亦多是以愛爲言하니 殊不類近世學者警怪恍惚窮高極遠之言也니라
만약 진실로 인(仁)을 구하고자 한다면 배운 것을 힘써 실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仁)을 강설하여 그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맹인이 작지로 길을 더듬는 것과 같으니 그 폐단이 사람을 어리석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만약 경(敬)을 바탕으로 치지(致知)로 나아가 상호 보완하면 이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또 만약 인(仁)의 개념과 실제를 깨닫고자 한다면, 애(愛)란 말로써 이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만약 인(仁)이 애(愛)가 되는 까닭을 알고, 애(愛)가 인(仁)을 설명하는 충분한 말이 되지 못하는 까닭을 안다면, 인(仁)의 개념과 실제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 인(仁)의 명의(名義)를 처음부터 황홀(恍惚) 유무(有無)의 사이에서 관념적으로 구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금일의 고묘(高妙)한 설과 견주어 약간 평이한 것 같으나, 그러나 ������논어������ 가운에 인(仁)을 이같이 박절하게 설파하려 하지 않았고, 맹자께서도 간혹 인(仁)을 설파한 곳이 있으나 역시 애(愛)란 말로써 풀이하였으니, 근세 학자들의 경괴황홀(驚怪恍惚)하고 궁고극원(窮高極遠)한 설과는 사뭇 다르다 하겠다.
中字之說116)甚善이나 而所論狀性形道117)之不同이 尤爲精密하야 開發多矣나 然愚意竊恐程子所云只一箇中字但用不同이라하야늘 此語을 更可玩味라 夫所謂只一箇中字者는 中字之義未嘗不同118)하니 亦曰不偏不倚無過不及而已라 然用不同者는 則有所謂在中之義119)者有所謂中之道者가 是也니 盖所謂在中之義者는 言喜怒愛樂之未發이 渾然在中하야 亭亭堂當이 未有箇偏倚過不及處니 其謂之中者는 盖所以狀性之體段也오 有所謂中之道者는 乃卽事卽物自有箇恰好底道理하야 不偏不倚無過不及이니 其謂之中者는 則所以形道之實也니 只此는 亦便可見來敎所謂狀性形道之不同者로다 但又見得中字는 只是一般道理니 以此狀性之體段이면 則爲未發之中이오 以此形道면 則爲無過不及之中이라 且所謂在中之義는 猶曰在裏面底道理云爾니 非以在中之中字로 解未發之中字也니라
중(中)이란 글자를 풀이한 설은 아주 좋고, 중(中)이란 글자가 성(性)을 나타낼 때와 도(道)를 나타낼 때가 있어 서로 같지 않다고 논한 것은 더욱 정밀하다 하겠으니, 그 개발(開發)함이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정자가 말한 바
“하나의 중(中)이란 글자가 다만 그 쓰임이 다르다.”
라고 한 이 말이 다시 음미 할 만하니, 대저 다만 하나의 중(中)이란 글자의 뜻이 같지 않음이 아니니 역시
“치우침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다.”
는 말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 쓰임이 같지 않는 것은 곧 이른바 재중지의(在中之義)가 있고 이른바 중지도(中之道)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 이른바 재중지의란 것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아니하고 한 덩어리로 마음 가운데 자리잡아 정정당당(亭亭當當)하여 치우침과 기댐과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지 아니하니, 이 때에 중이라고 말한 것은 성의 체단(體段)을 나타난 것이고, 이른 바 중지도(中之道)란 것은 곧 사물에 대처함에 스스로 적합한 도리가 있어 치우침과 기댐과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음이니 이 때에 중(中)이라고 말한 것은 도의 실체를 나타낸 것이다.
이에서 존형이 말한 상성(狀性)과 형도(形道)가 다름을 볼 수 있되, 또 중이란 글자의 뜻은 같은 도리(道理)임을 알 수 있으니, 이로써 성의 체단을 나타내면 미발지중(未發之中)이요 이로써 도의 실체를 나타내면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중(中)일 따름이다. 또 이른 바 재중지의(在中之義)라는 것은 이면에 있는 도리를 말한 것이지 재중(在中)의 중(中)으로써 미발지중(未發之中)을 풀이한 것은 아니다.
忠恕之說이 竊意明道是就人分上分別淺深而言이오 伊川是就理上該貫上下而言이니 若就人分上說이면 則違道不遠者는 賢人推之之事也오 一以貫之者는 聖人之不待推也니 若就理上平說이면 則忠이 只是盡己오 恕는 只是推己니 但其所以盡所以推則聖賢之分不同이 如明道之說耳라 大抵明道之言이 發明極致에 通透灑落120)하야 善開發人하고 伊川之言은 卽事明理에 質慤精深하야 尤耐咀嚼이라 然明道之言은 一見便好하야 久看愈好니 所以賢愚는 皆獲其益이고 伊川之言은 乍見未好하고 久看方好라 故非久於玩索者면 不能識其味하나니 此其自任이 所以有成人材尊師道121)之不同이니라
충서(忠恕)의 설은, 명도는 사람의 등분을 성형으로 측면에서 갚고 얕음을 구분하여 말한 것이요, 이천은 이치의 측면에서 성현을 모두 통하여 말한 것이니, 만약 사람의 등분의 측면에서 말할 것 같으면 위도불원(違道不遠)이란 것은 현인(賢人)이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하는 그러한 일이며, 일이관지(一以貫之)란 것은 성인(聖人)이 이룸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충(忠)에 도달하는 그러한 일이요, 만약 이치(理致)의 측면에서 말할 것 같으면 충(忠)은 곧 자기를 다하는 것이요 서(恕)는 곧 자기를 미루는 것이니 다만 그 자기를 다하고 자기를 미루는 방법은 성인과 현인이 같지 아니하니 곧 명도의 설과 같다.
대저 명도의 말은 발명극치(發明極致)하고 통투쇄락(通透灑落)하여 사람을 잘 개발하고, 이천의 말은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밝힘에 질박하고 성실하며 정밀하고 의미 심장하여, 오래도록 음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도의 말은 한 번 봄에 금방 좋고 오래 보면 더욱 좋아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그 유익함을 얻을 수 있고, 이천의 말은 얼른 보아 좋은 줄을 모르고 오래 보아야 좋은 줄을 아니, 이 때문에 그 의미를 오래도록 음미해 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 자임하는 것이 명도는 인재를 양성함에 있고, 이천은 사도(師道)를 높임에 있어 서로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以敬爲主하면 則內外肅然122)하야 不忘不助123)而心自存오 不知以敬爲主하고 而欲存心이면 則不免將一箇心하야 把捉一箇心이니 外面未有一事時에 裏面已是三頭兩緖124)는 不勝其優優矣라 就使實能把捉得住하도 只此125)已是大病이어던 況未必眞能把捉得住乎아 儒釋之異亦只於此便分了라 如云常見此心光爍爍126)地가 便是有兩箇主宰了니 不知光者 是眞心乎아 見者 是眞心乎아 來諭剖析이 雖極精微나 却似未及此意라 愚慮는 及此하니 不審是否는 如何오
수양을 함에 경(敬)을 위주(爲主)로 하면 마음과 행위가 모두 정숙하여, 해야 할 일을 마음속에 두고 잊지 않으며 또 이를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일도 없어 마음이 저절로 보존될 것이요, 경(敬)을 위주로 할 줄 모르면서 마음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하나의 마음으로써 또 다른 마음을 잡는 그러한 상태를 면치 못하여, 외면에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이미 미음은 두 갈래, 세 갈래로 얽혀 그 어지러움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가령 실제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방법은 이미 큰 병통이 있을 터인데, 하물며 진실로 마음을 다잡을 수 없는 경우에야 어떻겠는가. 유학과 불교가 다른 점이 이에서 금방 나누어지는 것이다.
“항상 이 마음이 반짝반짝 빛남을 본다.”
고 말한다면 이는 곧 두 개의 주재자(主宰者)가 있으니 빛나는 것이 진짜 마음인지 이를 보는 것이 진짜 마음인지 알 지 못하겠다.
존형의 분석이 비록 극도로 정밀하나 도리어 이러한 뜻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같다. 내 생각은 이러하니 존형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答張敬夫論仁說
開諭仁說이 再領書誨에 亦已具曉나 然大抵不出熹所論也라 謹按程仔言仁이 本末甚備나 今撮其大要不過數言이니 盖曰仁者는 生之性127)也오 而愛其情128)也오 孝悌는 其用129)也오 公者는 所以體仁이니 猶言克己復禮爲仁也라 學者於前三言130)자에 可以識仁之名義오 於後一言131)者에 可以知其用力之方矣어늘 今不深考132)其本末指意之所在하고 但見其分別性情之異하야 便謂愛之與仁이 了無干涉이라하고 見其以公爲近仁133)하야 便謂直指仁體最爲深切이라하니 殊不知仁이 乃性之德而愛之本이오 因其性之有仁하야 是以其情能愛하대 但或蔽於有我之私면 則不能盡其體用之妙하나니 惟克己復禮하야 廓然大公이라야 然後此體渾全하고 此用昭著하야 動靜本末이 血脈貫通이라
답장경부논인설(答張敬夫論仁說)
존형이 깨우쳐 준 인(仁)을 논한 말씀은 두 차례의 서신을 통해 모두 이해한 것같다. 그러나 대체로 내가 논설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자께서 인(仁)을 말한 것이 본말(本末)이 모두 잘 갖추어져 있지만 그 대요(大要)를 간추려 보면, 첫째 인(仁)이란 타고난 성(性)이요, 둘째 애(愛)는 그 정(情)이요, 셋째 효(孝)와 제(悌)는 인(仁)의 용(用)이요, 넷째 공(公)은 인(仁)을 체득하는 방도이며,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인(仁)의 명의(名義)를 알 수 있고, 뒤의 하나에서 그 힘 쓸 방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자가 말하고자 하는 근본 뜻을 깊이 고찰해 보지 않고, 다만 그 성(性)과 정(情)이 다름을 분별한 것만 보고 애(愛)가 인(仁)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하며, 그 공(公)이 인(仁)과 가깝다고 하는 것을 보고 인(仁)의 체(體)를 지적함이 매우 적절하다고 말하니, 인(仁)은 성(性)의 덕(德)이요 애(愛)의 근본이니, 성(性)이 인(仁)이 있음으로 인하여 그 정(情)이 능히 애(愛)를 발하되, 다만 아사(我私)에 가리워져 인(仁)의 체(體)와 용(用)을 다할 수 없으니 오직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확언대공(廓然大公)한 연후에 인(仁)의 체(體)가 혼전(渾全)하고 인(仁)의 용(用)이 밝게 드러나, 동정(動靜)과 본말(本末)이 혈맥(血脉)이 관통한다는 것을 자못 알지 못하는 것같다.
程子之言이 意盖如此하니 非謂愛之與仁이 了無干涉也며 非謂公之一字는 便是直指仁體也라 由漢以來로 以愛言仁之弊正爲不察性情之辨하고 而遂以情爲性爾니 今欲矯其弊하야 反使仁字로 汎然無所歸宿而性情이 遂至於不相管하니 可謂矯枉過直이 是亦枉而已矣라 其弊將使學者終日言仁이나 而實未嘗識其名義하고 且又幷與天地之心134)性情之德而昧焉이리니 竊謂程子之意必不如此라 是以敢詳陳之하노라
정자의 말뜻이 이와 같으니, 애(愛)가 인(仁)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오, 공(公)이란 한 글자가 곧 바로 인(仁)의 체(體)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漢) 이래로 애(愛)로써 인(仁)을 말한 폐단은 전혀 성과 정의 분별을 자세히 하지 못하고 마침내 정(情)을 성(性)이라고 한 때문이다. 지금 그 폐단을 고치려다가 도리어 인(仁)으로 하여금 범연히 귀착(歸着)할 곳이 없게 하고, 성과 정으로 하여금 서로 상관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하니,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지나친 것이라 말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굽은 것일 따름이다. 그 폐단이 장차 학자로 하여금 종일 인(仁)을 말하되 실은 그 명의(名義)를 알지 못하게 하고, 또 천지지심(天地之心)과 성정지덕(性情之德)을 뒤섞어 혼동하게 할 것이니, 정자의 뜻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감히 상세히 진술하는 것이다.
答張欽夫
諸說을 例蒙印印可135)而未發之旨136)又其樞要137)라 旣無異論하니 何慰如之오 然比觀舊說이 却覺無甚綱領하니 因復體察得見此理須以心爲主而論之면 則性情之德中和之妙가 皆有條而不紊矣라 然人之一身知覺運用莫非心之所爲니 則心者는 固所以主於身하야 而無動靜語黙之間者也라 然方其靜也에 事物未至하고 思慮未萌하야 而一性渾然에 道義全具하니 其所謂中이 是乃心之所以爲體而寂然不動者也오 及其動也에 事物交至하야 思慮萌焉이면 則七情迭用하야 各有攸主하니 其所謂和는 是乃心之所以爲用感而遂通者也라
답장흠부(答張欽夫)
내가 말한 제설(諸說)은 존형이 모두 옳다 하였고 미발(未發)의 의미는 또 그 추요(樞要)라 생각하는데 존형이 이에 이론(異論)이 없으니 이같은 위안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근래에 나의 구설(舊說)을 살펴보건대 이에 심히 강령(綱領)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이치를 체찰한 후에 이 이치(理致)가 반드시 마음을 위주로 하여 논할 것 같으면, 곧 성(性)과 정(情)의 덕과 중(中)과 화(和)의 묘(妙)가 모두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지각운용(知覺運用)이 마음의 작용이 아님이 없으니, 그래서 마음이란 진실로 신체의 주재자가 되는 바이며 동정어묵(動靜語黙)의 사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사물이 도래하지 아니하고 사려(思慮)가 싹트지 않아 하나의 성(性)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도의(道義)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니, 그 이른 바 중(中)은 이 곧 마음의 체(體)가 되는 바이며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 마음이 움직이는데 미쳐서는 사물이 밀려 와 사려가 싹트고 칠정이 번갈아 일어나 각기 주재하는 바가 있으니, 그 이른 바 화(和)란 것은 이 곧 마음의 용(用)이 되며 느끼어 만물에 통하는 것이다.
然性之靜也에 而不能不動하고 情之動也에 而必有節焉하니 是則心之所以寂然感通하야 周流貫徹而體用는 未始相離者也라 然人有是心이로대 而或不仁이면 則無以著此心之妙오 人雖欲仁이나 而或不敬이면 則無以致求仁之功이니 盖心主乎一身하야 而無動靜語黙之間이라 是以君子之於敬에 亦無動靜語黙而不用其力焉하야未發之前에 是敬也는 固已主乎存養之實이오 已發之際에 是敬也는 又常行於省察之間이라 方其存也에 思慮未萌而知覺不昧하니 是則靜中之動이니 復138)之所以見天地之心139)也로 及其察也에 事物紛糾而品節不差하니 是則動中之靜이니 艮140)之所以不獲其身不見其人141)也라 有以主乎靜中之動이라 是以寂而未嘗不感하고 有以察乎動中之靜이라 是以感而未嘗不嘗不寂하야 寂而常感하며 感而常寂하니 此心之所以周流貫徹하야 而無一息之不仁也니 然則君子之所以致中和而天地位萬物育者는 在此而已라
그러나 성(性)이 고요하되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고, 정(情)이 움직이되 반드시 절도가 있으니, 이것이 곧 마음이 고요하면서도 만물에 느끼고 통하여 두로 흘러 관철하되 체와 용이 떨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마음이 있으되 혹 어질지 아니하면 곧 이 마음의 오묘한 이치가 드러나지 아니하고, 사람이 비록 어질고자 하나 혹 공경(恭敬)하지 아니하면 인(仁)을 구하는 공부를 이룰 수 없으니, 대개 마음이 동정어묵(動靜語黙)의 틈이 없이 항상 신체의 주재자가 되니, 이 때문에 군자가 경(敬)에 있어서도 역시 동정어묵(動靜語黙)할 것 없이 항상 용력(用力)을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발하기 전의 경(敬)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실(實)에 힘써야 하고, 마음이 이미 발한 후에 경(敬)은 사물을 성찰하는데 힘써야 한다. 아직 존심(存心)의 상태에서 사려(思慮)가 싹트지 않은데도 지각이 깨어 있는 것은 정중지동(靜中之動)이니, 복(復)괘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까닭이요, 마음이 발하여 성찰하는 때에는 사물이 분규함에도 품절이 어긋나지 않는 것은 동중지정(動中之靜)에 힘씀이 있는 까닭으로 느끼되 고요하지 않음이 없으니, 고요하되 항상 느끼고 느끼되 항상 고요한 것이 이것이 마음이 주류관철(周流貫徹)하여 한 순간도 어질지 아니한 때가 없는 까닭이다. 이러하니 군자가 중화(中和)를 이루어 천지가 제자리하고 만물이 길러지도록 하는 방법이 이에 있을 따름이다.
盖主於身而無動靜語黙之間者는 心也오 仁則心之道而敬則心之貞142)也라 此徹上徹下之道聖學之本統이니 明乎此則性情之德中和之妙를 可一言而盡矣니라 熹向來之說이 固未及此而來喩曲折이 雖多所發明이나 然於提綱振領處에 似亦有未盡이로다 又如所謂學者는 先須察識端倪之發하고 然後可加存養之功하야 則熹於此에 不能無疑하노니 盖發處固當察識이어니와 但人自有未發時하니 此處便合存養이라 豈可必待發而後察이며 察而後存耶아 且從初不曾存養하고 便欲隨事察識이면 竊恐浩浩茫茫無下手處而毫釐之差千里之繆는 將有不可勝言者니 此는 程子所以每言孟子才高143)라 學之無可依據하니 人須是學顔子之學144)이라야 則入聖人爲近하야 有用力處라하시니 其微意를 亦可見矣로다
대개 신체의 주재자이며 동정어묵의 사이가 없는 것이 마음이니, 인(仁)은 마음의 도(道)요 경(敬)은 마음의 정(貞)이다. 이것이 철상철하(徹上徹下)의 도(道)요 성학(聖學)의 본통(本統)이니, 이를 밝히면 성정(性情)의 덕과 중화(中和)의 묘(妙)를 한 말로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전일의 논설이 이에 미치지 못했고, 그대의 생각도 발명한 바가 많으나 강령(綱領)에 미진한 것이 있는 것 같고, 또
“학자가 먼저 사단(事端)을 발하는 곳을 살펴서 안 연후에야 존양(存養)의 공부를 할 수 있다.”
는 주장에는 내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사단이 발하는 곳을 마땅히 살펴 알아야 하지만, 다만 사람은 마음과 정이 발하지 아니한 때가 있으니, 이곳에 마땅히 먼저 존양(存養)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어찌 반드시 사단의 발함을 기다린 후에 찰식(察識)하며, 찰식(察識)한 후에 존양(存養)의 노력을 해야 하겠는가. 또 처음에 존양의 노력을 하지 않다가 문득 일이 발생한 뒤에 찰식(察識)하고자 하면, 아마 막연하여 착수할 곳을 찾지 못할 것이며, 털끝같이 작은 차이가 천리나 서로 떨어질 것이니 이를 장차 어찌 말로 다할 수 잇겠는가. 이것이 정자가
“맹자는 재능이 너무 높아 배우는 사람이 이에 의거할 곳이 없으니 모름지기 안자(顔子)가 공부한 것을 배워야만 성인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 가까워지고 또 구체적으로 힘 쓸 곳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 까닭이니, 이에서 우리는 정자의 모요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來敎又謂言靜則溺於虛無라하니 此固所當深慮나 然此二字가 如佛老之論에 則誠有此患이어니와 若以天理觀之하면 則動之不能無靜이 猶靜之不能無動也며 靜之不能無養이 猶動之不可不察也니 但見得一動一靜이 互爲其根하야 敬義夾持 不容間斷之意에 則雖下靜字나 元非死物이라 至靜之中에 盖有動之端焉하니 是乃所以見天地之心者오 而先王之所以至日閉關145)이니 盖當此之時하고 則安靜以養乎此爾오 固非遠事絶物閉目兀坐하야 而偏於靜之謂니 但未接物時便有敬以主乎其中이면 則事至物來에 善端이 昭著하야 而所以察之者는 益精明爾라 伊川先生所謂却於已發之際觀之者는 正謂未發則只有存養而已니 發則方有可觀也오 周子之言主靜은 乃就中正仁義146)而言하니 以正對中이면 則中爲重이오 以義配仁이면 則仁爲本爾니 非四者之外는 別有主靜一段事也니라
보내온 서신에서 또 말하기를,
“정(靜)을 너무 중시하면 허무(虛無)에 빠질 위험이 있다.”
라고 하니 이 말의 뜻을 진실로 깊이 살펴야 할 것이나 그러나 이 정(靜)이란 것이 불노(佛老)에서 말하는 것이면 진실로 이러한 폐단이 있겠지만, 천리(天理)를 바탕으로 볼 것 같으면 동(動)이 정(靜)이 없을 수 없음이 정(靜)이 동(動)이 없을 수 없음과 같고, 정(靜)이 양(養)이 없을 수 없음이 동(動)이 찰(察)이 없을 수 없음과 같으니, 다만 일동 일정(一動一靜)이 서로 근본이 되고 경(敬)과 의(義)를 아울러 지켜 간단이 없어야 하는 뜻을 안다면, 비록 정(靜)이라고 하더라도 원래 이것이 사물(死物)이 아니고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동(動)의 싹이 맹동하니, 이것이 곧 복(復)괘에서 말하는 천지지심(天地之心)을 볼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선왕(先王)이 동짓날 문을 잠그고 고요히 지내는 까닭이 이 때를 당하여 안정을 취하여 정중동(靜中動)을 기르기 위함이니, 진실로 일을 멀리하고 사람을 사절하여 눈을 감고 오뚝이 앉아 정(靜)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물과 접하기 전에 마음속에 경(敬)이 자리잡고 있으면 사물이 도래할 때에 사물의 단서가 밝게 드러나고 사물을 관찰하는 마음이 더욱 정명(精明)해질 것이니 이천 선생이 말한 바 ‘도리어 이미 마음이 발한 때에 관찰하라’는 것은 바로 ‘마음이 발하지 않은 때엔 다만 존양(存養)에 힘써야 마음이 발한 때에 비로소 관찰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주자(周子)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정(靜)을 위주로 한다’는 말은 곧 중정인의(中正仁義)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정(正)을 중(中)에 비교하면 중(中)이 중요하고, 의(義)를 인(仁)에 비교하면 인(仁)이 근본이라는 뜻이요, 중정인의(中正仁義) 외에 별도로 주정(主靜)이란 일단(一端)의 일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來敎又謂熹言以靜爲本147)은 不若遂言以敬爲本이라하니 此固然也나 然敬字工夫는 通貫動靜하야 而必以靜爲本이라 故熹向來輒有是語하니 今若遂易爲敬이면 雖若完全이나 然却不見敬之所施有先有後148)면 則亦未得爲諦當149)也로다 至如來敎所謂要須察夫動以見靜之所存하며 靜以涵動之所本하야 動靜相須體用不離而後爲無滲漏也此數句卓然하야 意語俱到하니 謹以書之座右하야 出入觀省하리라 然上兩句次序는 似未甚安하니 意謂易而置之150)라야 乃有可行之實이니 不審尊意以爲如何오
보내온 서신에서 또 말하기를,
“내가 정(靜)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말한 것이 경(敬)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 보다 못하다.”
고 하니, 이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경(敬)이란 공부는 동정(動靜)간에 모두 힘써야 하나 반드시 정(靜)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기 때문에 내가 정(靜)이란 말을 써 왔으니, 지금 만약 정(靜)을 경(敬)으로 바꾸면 비록 완전한 것 같지만 경(敬) 공부의 선후를 알지 못하면 경(敬) 공부를 정확히 알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서찰에서 또
“요컨대 반드시 동(動)으로써 정(靜)이 함양한 바를 봄과 정(靜)으로써 동(動)의 근본을 함양함을 관찰하여 동정(動靜)이 서로를 필요로 하여 체용(體用)이 떨어지지 않는 연후에야 빈틈이 없을 것이다”
고 하니, 이 몇 구절은 우뚝하여 말뜻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니, 삼가 자리의 오른 쪽에 써 붙여 놓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반성하리라. 그러나 위의 두 구절은 차례가 맞지 않은 것 같으니 차례를 바꾸어 놓으면 가히 실행할 수 있는 내용이 있을 것같다. 존형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答韓尙書
熹狷介151)之性은 矯揉萬方하대 而終不能回
하고 迂踈152)之學이 用力旣深하대 而自信愈篤하니 以此自知決不能與時俯仰153)하야 以就功名이라 以故二十年來自甘退藏하야 以求己志하고 所願欲者不過脩身守道하야 以終餘年因其暇日하야 諷誦遺經하고 參考舊聞하야 以求聖賢立言本意之所在하야 旣以自樂間亦筆之於書하야 以與學者共之하고 且以待後世之君子而已니 此外實無毫髮餘念也하라 中間懇辭召命154)이라가 反誤寵褒155)하니 初亦不敢奉承이러니 旣而思之하니 是乃君相灼知無用之實하대 而欲假以閔勞惠養之恩이라 故少進其官156)益其祿157)하야 而卒許以投閒하니 似若有可受者라 以故懇避踰年타가 而終於拜受하니 私竊以爲是足以上承朝廷之美意로 而下得以自絶於名宦之途라야 自是以往으로 其將得以優游卒歲하야 就其所業158)而無蹙迫之慮矣리니 而事乃有大繆不然者159)라 熹亦安得黙然而亡言哉리오
답한상서(答韓尙書)
저의 견개(狷介)한 성품은 고칠 곳이 만방(萬方)이나 끝내 고치지 못하고, 우소(迂疎)한 학문은 용력(用力)이 이미 깊어 자신(自信)이 더욱 두려워졌습니다. 이 때문에 시류(時流)에 따라 공명(功名)을 취할 수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이 때문에 20년 동안 즐겨 퇴장(退藏)하여 나의 뜻한 바를 구하여, 하고자 하는 것이 불과 수신(修身)․수도(守道)하여 여생을 마치고, 한가할 땐 유경(遺經)을 풍송(諷誦)하며 구문(舊聞)을 참고하여, 성현이 전한 말씀의 뜻을 구하여 스스로 즐기고, 때로는 문자로 기록하여 학자들과 강론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는 일 뿐이요, 이밖에 추호도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에 소명(召命)을 간절히 사양하다가 도리어 잘못 총포(寵褒)를 입고, 처음엔 역시 소명을 받들지 못하였더니, 이윽고 생각하니 이는 군상(君相)께서 저의 무용(無用)함을 잘 알고 불쌍히 여겨, 혜양(惠養)의 은혜를 베풀고자 저의 관위(官位)를 조금 높여 주고 봉록을 더해서 한직(閑職)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를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양한지 한 해를 넘기고 마침내 배수(拜受)하였으니, 이것은 위로는 조정의 아름다운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제가 벼슬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앞으로 조용히 여생을 지내면서 저의 저서하는 일을 이룰 수 있어 아무 근심이 없을 것 같더니, 일이 크게 잘못되었으니 제가 어찌 묵연(黙然)히 말이 없겠습니까.
夫以熹之狷介迂踈不能俯仰으로 世俗固已聞風而疾之矣로대 獨賴一時賢公名卿이 或有誤而知之나 然聽於下風하야 考其行事議論之本末하면 則於鄙意所不能無疑者는 尙多라 今若不辭而冒受하면 則賓主之間異同之論이 必有所不能免者니 無益於治오 而適所以爲群小嘲笑之資라 且熹之私願所欲就者160)는 亦將泊沒而不得成하야 其或收之桑楡161) 而幸有所就라도 人亦必以爲已試不驗之書하야 而不之讀矣리라 又況今日一出이면 而前日所以斟酌辭受하야 而不敢苟然之意亦且黯闇而不能以自明이면 諸公誠知之深愛之厚론 則曷爲不求所以伸其志全其守하고 而必脅歐縱臾162)를 使至此極也耶아 且士大夫之辭受出處가 又非獨其身之事而已라 其所處之得失이 乃關風俗之盛衰하니 故尤不可以不審也니라 若熹者向旣以辭召命이 得改官矣라 今又因其所改之官하야 而有此授하니 熹若受而不辭면 則是美官要職을 可以從容辭讓하야 安坐而必致之也라 近世以來風頹俗靡하야 士大夫가 倚託欺謾以取爵位者가 不可勝數로대 獨未有此一流耳어늘 而熹適不幸하야 諸公必欲彊之使充其數하니 熹雖不肖나 實不忍以身蒙此欲하야 使天下後世持淸議者163)로 得以唾罵而嗤鄙之也하노라
제가 성품이 견개(狷介)하고 학문이 우소(迂疎)하여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세속이 이를 알고 또 저를 미워하고 있지만 다만 한 때의 현공(賢公)과 명경(名卿)이 잘못 저를 알아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듣고 그 생사와 의논의 본말을 상고해 보니 제 모자란 생각에도 오히려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관직을 사양하지 않고 무모하게 이를 받아들인다면 빈주(賓主)의 사이에 이견으로 인한 논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니, 치정(治政)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군소배의 조소 거리가 되기에 딱 알맞을 것입니다. 또 제가 사적으로 바라는 저술하는 일의 성취도 이룰 수 없을 것이고, 혹시 말년에 성취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미 시행해 보아 효험이 없는 책이라 생각하고 읽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더구나 지금 세상에 한 번 나가면 전일에 사양하고 나가지 않은 뜻도 아무런 의미 없이 희미해질 것입니다. 제공(諸公)께서 진실로 저를 알아줌이 깊고 아껴 줌이 두텁다면 어찌 저의 뜻을 펴고 저의 신념을 지키게 하지 못하고 권하고 내몰아 이 지경에 이르게 합니까. 또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가 비단 그 일신(一身)만의 일이 아니고, 그가 처신한 결과의 득실(得失)이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를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전에 소명(召命)을 사양함으로써 새로운 직위를 얻고, 이번에 또 이를 받아들이고 사양하지 않는다면 이는 미관요직(美官要職)을 종용히 사양하면서 편안히 앉아서 얻는 것이 되니, 근세 이래로 풍속이 퇴미(頹靡)하여, 사대부가 의탁(倚託)과 기만으로 작위를 취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이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 불행하게도 제공(諸公)이 저를 억지로 그들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니, 제 비록 불초하나 차마 이러한 치욕을 뒤집어쓰고 천하 후세의 청의자(淸議者)들의 욕설과 조소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且熹之言此於門下가 有年이라 若言悲懇을 無所不至어늘 而執事者가 聽之藐然하야 方且從容遊談 大爲引重하대 而其要歸成効 則不過使之內違素心하고 外貽深誚而後已니 此熹所不能識이라 且復竊自計其平生言行이 必有大不相副者햐야 而使執事者로 不信其言以至此也니 深自悔責하야 無所歸咎나 然亦不敢終黙黙於門下ㄹ새 足以敢復言之하노니 伏惟憐而察焉하라
또 제가 문하(門下)에 이런 말을 드린 지 한 해가 지나면서 고언(苦言)과 비간(悲懇)이 지극하였으나, 집사(執事)께서 이를 막연히 듣고 종용유담(從容遊談)하여 저를 크게 추천하니, 결과적으로 안으로 저의 평소의 마음에 어긋나고 밖으로 심한 책망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알 수 없는 일이며,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평소 저의 언행이 집사(執事)께 부합하지 않아 집사께서 제 말을 믿지 아니하여 이에 이른 것 같습니다. 자책이 심하여 허물을 돌릴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끝내 묵묵히 있을 수 없어 감히 다시 말씀드리오니 가련히 여기고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答鄭自明164)
副封165)囊恨未見이러니 今玆幸得竊讀하니 感歎之餘에 斂衽敬服하라 嘗竊論之하야 以爲非獨忠諒懇切이 有以過人이라 於才辨智略에 亦非人所能及이니 不知劉元城166)陳了翁167)背如何爾168)로다 上聖聰明하사 開納如此하시니 一朝感寤하시면 去鼠輩169)如反覆手耳라 太平萬歲를 雖老且病이나 尙庶幾及見之니 幸甚幸甚이라 補郡170)懷章171)이 雖鬱公이나 然得以此閒暇로 進德脩業하야 益懋久大172)之規하면 天意亦有非偶然者矣니 更願深自培養하야 以厚其基하고 篤志講學하야 以濬173)其源하야 使誠意充積而鋒穎潛藏하고 義理著明而議論條暢이면 則一日復進而立於朝에 其所以動寤啓發174)者는 決不但如今日之所就而止也니라 盖前日文字가 固爲剴切175)이어니와 但論事多而論理少하고 數群小之姦欺雖詳이나 而於人主之所以端本淸源脩德立政之意에 有未備也하니 此其所以然者는 失於逆料176)聽者177) 謂之迂闊而不敢言하고 亦自於此理에 講之未精하야 不免於自以爲迂闊而不足言也ㄹ새라
답정자명(答鄭自明)
그대의 상소문 부봉(副封)을 보지 못해 한스럽더니 다행히도 지금 읽어보니 감탄한 나머지 옷깃을 여미고 경복(敬服)하는 바이다. 그대의 충량간절(忠諒懇切)이 출중할 뿐 만 아니라 재변(才辨)과 지략(智略)이 또한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것 같으니 유원성(劉元城)과 진요옹(陳了翁)은 그대와 비교해서 어떠한지 모르겠다. 상성(上聖)이 총명하여 개납(開納)이 이와 같으니 어느 날 한 번 깨닫기만 하면 소인배를 물리치기란 손을 뒤집기처럼 쉬울 것이다. 비록 늙고 병든 몸이나 태평 만세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대가 상소문을 올린 뒤에 인장(印章)을 풀고 외군(外郡)으로 보직되어 가니 비록 공론(公論)이 비등하나, 그러나 이 한가한 동안에 진덕수업(進德修業)하여 원대한 계획에 더욱 힘쓰면 하늘도 무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바라건대. 자신을 배양하여 기초를 두터이 하고, 독지강학(篤志講學)하여 근본을 깊게 하며 성의(誠意)를 충적케 하고 봉영(鋒穎)을 잠장(潛藏)케 하여 의리(義理)가 밝게 드러나고 의논(議論)이 조리가 있으면, 타일에 다시 조정에 설 때 군심(君心)을 깨우쳐 계발함이 결코 금일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의 전일 상소는 진실로 통절한 바가 있으나 다만 논사(論事)는 많은데 논리(論理)는 적고, 군소배의 간사함을 힐책함을 자세하지만 인주(人主)가 단본청원(端本淸源)하고 수덕입정(修德立政)해야 하는 뜻엔 미비한 점이 있으니, 그 까닭을 말할 것 같으면, 그대가 미리 군상(君上)이 우활(迂闊)하다고 여길 것이라 예단하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그대 자신이 단본청원(端本淸源)과 수덕입정(修德立政)의 이치에 강학이 미정(未精)하여 스스로 우활하여 말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같다.
此外則伯恭所告讀書取人之意를 亦所宜深留意者니 盖吾人所立已如此하니 使天無意於佑宋則이어니아 若有此意한데 異日之事를 豈得而辭其責哉리오 然則今日吾人之進德脩業이 乃是異時國家撥亂反正之所繫非但一身之得失榮辱也니 惟高明深念之하라 然講壑之方을 未得面論하니 猶頗以爲恨也하노라 向來一番前輩少日粗有時望이라가 晩年出來往往不滿人意니 正坐講學不精하야 不見聖門廣大規模 少有所立에 卽自以爲事業止此라하야 更不求長進了하니 荊公所謂未俗易高險塗難盡者를 亦可念也니라
이 외에는 백공(伯恭)이 말한 독서취인(讀書取人)의 뜻을 깊이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대의 입지(立志)가 이렇듯 훌륭하니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울 뜻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이 나라 장래의 일을 그대가 어찌 외면하겠는가. 그러니 금일 그대의 진덕수업은 훗일 국가의 발란(撥亂)과 반정(反正)이 관계되는 일이요, 그대 일신의 득실과 영욕의 문제가 아니니, 그대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그러나 강학의 방도를 만나서 논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지난날 일련의 전배들이 소년일 때엔 당대의 촉망을 받다가 만년에 이르러 왕왕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바로 강학이 정밀하지 못하여 성문(聖門)의 큰 규모를 보지 못하고 작은 성취에 만족하며 다시 원대하게 진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공(荊公)이 말한
“말속(末俗)엔 높아지기가 쉽고 험란한 길은 다 가기가 어렵다.”
는 말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與袁寺丞178)
熹失計此來179)하니 無可言者로다 初若稍可支吾180)하야 亦不敢必爲去計러니 今內則精神이 昏憒하야 兩日生花 白書對人에 往往坐睡하고 而省閱文案簽書181)決遣182)之際에 爲尤甚하니 此一當去也오 外則財用耗竭하야 支遣不行183)하고 性本踈拙 不能稽考收拾하니 恐更一二月이면 轉見狼狽184)하리니 此二當去也오 至於刑獄이 最是重事어늘 而一經監司何問185)하면 官吏便欲望風希旨變異情節하니 則是此事가 亦復不得自專이니 此三當去也오 鄙性伉直하야 不能俯仰이라 所以忍飢杜門하야 不敢萌仕進意리니 今行年五十에 乃復變其所守하고 爲此睢盱186)하야 以求苟免於譴辱하니 中夜思之에 旣以自愧오 而當其俯仰之時하야 大悶不聊라 深恐不能自抑하야 而忽發其狂疾하노니 此四當去也오
여원시승(與袁寺丞)
내 잘못하여 이 남강(南康)에 왔으니 무어라 할 말이 없구료. 처음엔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꼭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내 일신상으로는 정신이 혼궤(昏憒)하고 두 눈이 침침하여 낮에 사람을 접견할 때 왕왕 조는 일이 있고, 서류를 살피고 판결서를 결재할 땐 더욱 혼란이 심하니, 이것이 떠나야 할 첫째 이유요, 밖으로는 재용(財用)이 모갈(耗竭)하여 지출을 할 수 없는 데다 성품이 본래 소졸(疎拙)하여 수습을 하지 못하니, 아마 한 두 달이 지나면 더욱 낭패(狼狽)를 당할 것이니 이것이 떠나야 할 둘째 이유요, 형사 사건을 판결하는 일은 중요한 일인데 감사(監司)의 질문에 관리들이 감사의 비위를 맞추느라 사실을 왜곡하여 보고를 함으로 내가 형옥(刑獄)의 일을 원칙대로 관장할 수 없으니 이것이 내가 떠나야 할 셋째 이유요, 내 성품이 본래 항직(伉直)하여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림을 참고 문을 잠그고 있으면 있었지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는데, 지금 나이 오십에 다시 변절하여 소인처럼 이를 좋아하여 구차히 견책을 면하고자 한다면, 이는 자다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요, 시류(時流)에 굴종하느라 번민하고 괴로워함은 아마 도저히 참지 못하고 홀연히 광질(狂疾)이 발할 것 같으니 이것이 내가 떠나야 할 넷째 이유요,
到官兩月에 思歸之情을 不能自悶하야 往往無日不發於言語書問之間이라 官吏知之하고 亦不復以尊重難危를 見期하니 所以號令不行財不賦不辨이러니 而熹以一身으로 孤客於此하야 携小兒甥在此無婦女看當187)이라 無日不病하니 熹時又須自視問其醫藥하고 家中188)碎小를 想見無人牧拾하야 亦不成模樣하대 業已不爲久計하고 又不容復往般取189)하야 以耗公家하니 此五當去也오 蒙喩作書從班190)言路諸公191)此非所憚이로대 但初意只一二月間便去라 故不能虛爲此하야 以違素心이리니 今旣不能得去하고 又有所奏請하니 事勢須關白192)하새 已不免作書與之나 但言語拙直하야 不能婉順하니 其間未必不有觸其忌諱者라 或反以速其抨彈193)을 亦不可知니 此六當去也오
도임(到任)한지 두 달만에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그치지 않아 자꾸 이를 입에 올리니, 관리들이 이를 알고 나를 존중하지 않으며 어려워하지도 않아 호령이 잘 시행되지 않고 세금도 잘 걷히지 않으며, 또 내가 단신으로 이 땅의 외로운 나그네가 되어 어린 생질을 이곳에 데리고 왔으니, 돌볼 여인도 없고 어린것이 잔병이 끊일 날이 없어 내가 이를 손수 돌봐야 하고, 집안 자질구레한 일도 수습할 사람이 없어 모양이 아니고, 이미 오래 있을 계획이 없으면서 다시 가서 가솔을 데리고 와 국록을 축낼 수 없으니 이것이 내가 떠나야 할 다섯째 이유요, 존형이 편지에서 말한 대로 남강(南康)의 일을 언로(言路)에 있는 제공(諸公)에게 적어 올리는 것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로되, 다만 처음부터 한 두 달만에 떠나려 했으니, 언로에 글 올리는 일을 하지 않아 본래의 마음을 어길 생각이 없었고, 지금 이에 떠나지 못하고 또 주청(奏請)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담당관에게 보고를 해야 하니 어차피 글을 올려야 하는데, 다만 나의 언어가 졸직(拙直)하여 완순(婉順)하지 못하니, 꺼리고 피하는 곳을 저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혹 도리어 이로 인해 탄핵을 자초할지도 모르니, 이것이 떠나야 할 여섯째 이유요,
向來閒中에 私竊有所論著하야 自謂庶可以傳前聖之心하고 開後學之耳目이 實非細事리니 今旣來此하야 無復功夫可以向此하고 而衰困斯盡하야 與死爲隣하니 萬一溘然於此면 則此事遂成千古之恨하야 非獨熹不瞑目而已也니 此七當去也라 當去之事를 略數之면 有此七條하니 其他曲折이 不暇徧擧라 熹亦已有書懇諸公丏祠나 然又不敢盡言此意라야 只告尊兄하노니 力爲一言하야 使必從所請이 乃千萬之幸이라 大抵自度林亦事細하니 祠廟之外에 不選194)甚195)差遣196)하고 都做不得이라 小卽小狼狽오 大卽大狼狽 遠卽遠狼狽 近卽近狼狽니 諸公儻相哀憐하야 必欲扶持而 全安之ㄴ댄 豈應使至此極耶아
전일 한가할 때에 저술하던 것이 있어 전성(前聖)의 마음을 전하고 후학의 이목(耳目)을 열어 주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곳에 온 이래로 다시 이를 공부할 수 없고, 쇠곤하고 시진(澌盡)하여 죽음에 이를 것 같으니, 만일 갑자기 이 지경을 당한다면 천고의 한이 되어, 비단 내가 눈을 감지 못할 뿐만이 아니리니 이것이 내가 떠나야 할 일곱 번째 이유이다. 마땅히 떠나야 할 이유가 대략 일곱 가지이고 나머지 세세한 사정은 다 열거할 겨를이 없다.
내 이미 언로에 있는 제공(諸公)에게 글을 올려 사관(祠官)을 부탁하였으나, 내 뜻을 다 말하지 못하고 오직 존형에게만 알리니 나를 위해 힘써 한 말씀하여 나의 청이 이루어지면 천만 다행이겠다. 대저 스스로 나의 재능과 형편을 헤아려 보건대 사묘(祠廟)외에는 어떠한 관직도 내게 맞지 않을 것같다. 다른 관직은 작으면 작은 대로 작은 낭패요, 크면 큰 낭패요 멀면 먼 낭패요,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낭패이니 제공(諸公)이 만일 나를 애련(哀憐)히 여겨 나를 부지(扶持)하고 전안(全安)케 하고자 한다면 어찌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는지 모르겠구료.
與臺端197)
熹未見顔色198)하고 比輒妄以名姓自通이니 方以僭瀆自咎하리니 乃蒙敎答하고 又枉手帖之誨하야 降屈威重 謀及踈遠하니 此古人之事를 而執事者之하니 甚盛甚盛이라 顧熹之愚가 不足以當之나 然敢無詞以對아 盖嘗竊謂欲起膏肓之疾者가 必攻其受病之處하야 而其用功之緩速과 制藥之寒溫을 又有不可以頃刻毫釐差者니 今天下之病在膏肓者久矣라 夫人199)而能之하고 夫人而欲言之하대 顧以不當其任이면 則雖欲一效其伎而無所施耳라 乃者天子以執事가 有廉靖貞孤之操라하사 擢寘諫垣하시고 納用其言하야 屛去姦惡하시니 皆所謂膏肓之餘症200)이라
여대단(與臺端)
제가 일면식(一面識)도 없이 근자에 망령되이 성명을 스스로 통하여 참독(僣瀆)한 허물이 있었는데 오히려 이에 교답(敎答)을 주시고, 또 굽혀 서찰을 써서 가르침을 주시어, 위중(威重)한 몸을 낮추어 소원(疎遠)한 저에게까지 사려(思慮)가 미치니, 이는 옛 사람의 아름다운 일이거늘 집사께서 이를 행하시니 함으로 훌륭한 일이라 감탄하는 바입니다. 보건대, 이는 어리석은 제가 이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나 그러나 어찌 묵묵히 답서를 올리지 않겠습니까. 대개 난치병에 걸린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그 병든 곳을 치료해야 하고, 그 시술의 완속(緩速)과 제약(制藥)의 한온(寒溫)은 털끝 만한 착오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병이 고황(膏肓)에 이른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이를 알고 사람마다 이를 말하고자 하나, 그 당직에 있지 아니하여 비록 그 재능을 한 번 시험해 보고자 하나 시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근래에 천자께서 집사자가 염정정고(廉靖貞孤)하다고 하여 간원(諫垣)에 발탁하여, 그 말을 채용하여 간악한 무리를 물리치려 하니, 이들은 모두 이른 바 고황의 지당(支黨)입니다.
海內有志之士가 知上之心이 盖已深悟隱疾之在躬하사 而欲假執事之藥以去之也하고 又知執事之心所以姑從事於此201)者가 盖亦以爲之兆耳라 其必將有以繼之리니 則夫所謂病本者를 可去無疑也로다 然而側聽累月에 未有所聞하니 則又懼夫二竪子202)者가 知良醫之傷已하고 而先爲術以去之라 以是憂疑하야 不知所定이리니 尙幸聖心堅定하야 不入其言하시고 而又進執事於臺端之重하시니 是必君臣之間에 而又一定之計라 足以少慰士大夫心이나 然熹之愚가 竊獨私愚過計하야 意夫姦賊이 窺見端倪203)하고 則其所以自爲謀者가 必將愈深喩切하야 而有先執事以發其機者니 不審執事何以處之오 盖伐木而翦其枝葉이 不若斧其根이오 壅水而捍其波流가 不若塞其源이오 鳴金鼓耀戈甲하야 而噪呼以逐虎가 不若乘其方睡而斃之之速也니 今執事則旣/감撼而覺之204)矣어늘 又猶欲緩視徐趨하야 以當其虓怒205)決裂206)之勢니 熹竊爲執事者威之也하노라 然此等小人이 有生以來自朝至暮어든 無非罪惡이라 不可殫數오 且又人主素以倡優奴僕을 畜之하야 初不責其名檢이어늘 而間者議臣이 乃復抉擿荷細207)하야 而一一以陳之하니 其不納208)則矣로다
세상의 뜻있는 선비들은 천자의 마음이 이미 은질(隱疾)이 몸에 있음을 깨닫고, 집사자의 처방을 이용하여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려 함을 알며, 또 집사의 마음이 이에 종사하여 보필함이 좋은 징조임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같은 마음을 지속해 나가면 그 이른 바 병의 근본을 틀림없이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곁에서 몇 달 동안 들어봐도 간악한 무리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으니, 병귀(病鬼)가 양의(良醫)의 시술을 알아차리고 먼저 술책을 써서 양의를 제거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다행히 성심(聖心)이 견정(堅定)하여 간신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집사를 대단(臺端)의 중임에 임명하니 이는 필시 군신(君臣)의 사이에 이미 일정한 계획이 서 있음이니 족히 사대부의 마음을 고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간적(姦賊)들이 먼저 이를 알아차리면 그 자위책이 주상이나 집사자의 계획보다 더욱 심절(深切)하여 집사자보다 먼저 공격을 해 올 것이니, 집사자는 장차 이에 어떻게 대처할 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나무를 베어 그 가지를 자르는 것이 도끼로 뿌리를 찍어 없애는 것 보다 못하고, 물줄기를 막아 그 흐름을 말리는 것이 그 수원을 없애는 것 보다 못하며, 금고(金鼓)를 울리고 과갑(戈甲)을 번쩍이며 소리지르며 호랑이를 쫓는 것이 그 잠자는 틈을 타서 신속히 죽이는 것 보다 못합니다. 지금 집사자는 잠자는 호랑이를 흔들어 깨워 놓고 서서히 보고 천천히 달려가서 그 성내어 우는 결렬(決裂)한 세를 당하고자 하니, 제 생각에는 집사자가 아주 위험한 처지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소인들은 태어난 이래로 밤낮 죄악을 저지름이 헤아릴 수 없고, 또 인주(人主)가 본래 이들을 배우나 노복으로 길러 처음부터 그 명분과 검속을 책망하지도 않았으니, 근래 의신(議臣)이 그들의 세세한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여 보고하는데도 군상이 그 말을 다 듣지 않음도 당연한 일입니다.
唯其日侍燕閒하야 逢迎縱臾 使人主之心恬於逸欲而法家拂士209)之言이 不得以進하고 狃於卑近而正大久遠之計不得以聞하야 賄賂公行하고 姦邪堵立하야 盖凡所以爲天下國家之網紀者는 日傾月壞而上下가 相蒙하야 莫敢以告하니 是則此一二人之罪所以上通於天而深爲今口膏肓之病者라 執事誠能聲此爲罪하야 揚于王庭210) 深贊聖主去邪勿疑之志하고 又引同列之賢合謀幷力하야 以決去之則天下膏肓之病者가 庶幾其可去矣니 太平萬歲熹雖不武211)나 尙能爲執事誦之리니 不識執事亦有意乎아 熹比因三月九日指揮212)하야 已略爲明主言之矣로대 顧踈賤之言未足取信이오 而或以取戾라 謹已束裝하야 恭俟嚴譴하노니 惟執事者가 毋以爲計하고 而亟深圖之면 則天下幸甚일가하노라
그들이 평소 시중을 들 때에 인주의 비위나 맞추어 인주의 마음을 일욕(逸欲)에 젖게하여, 법가(法家) 필사(弼/士)의 말은 들리지 않게 하고, 비근한 습속에 젖어 정대구원(正大久遠)한 계획은 들리지 않게 하며,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간사한 무리가 에워 싸, 천하 국가의 기강이 날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대도 상하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옳게 진언(眞言)하는 자가 없으니, 이는 이들 한 두 사람 간신의 죄가 하늘에 닿아 오늘날 고황(膏肓)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집사자께서 진실로 이들을 성토하여 치죄하고, 조정에 이들의 죄를 낱낱이 밝혀, 성주께서 이들을 물리치려는 뜻을 돕고, 또 같은 대열의 현신들을 이끌어 합모병력하여 결연히 이들을 제거하면, 천하의 고황지병(膏肓之病)을 치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형만세에 제 비록 용맹이 없으나 집사자를 위해 말씀드리오니 집사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근자에, 3월 9일에 발한 조칙에 의하여 명주를 위해 대략 상소를 올렸으나, 소천(疎賤)한 말이라 주상의 믿음을 받기에 부족할 것 같고, 혹 주상의 마음에 어긋남이 있을까 하여 삼가 짐을 싸서 엄한 문책을 기다립니다. 집사께서는 경계하지 말고 서둘러 이를 추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하가 이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上宰相213)
熹嘗謂天下之事가 有緩急之勢하고 朝廷之政이 有緩急之宜하니 當緩而急이면 則繁細苛察하야 無以存大體而朝廷之氣가 爲之不敍하고 當急而緩이면 則怠慢廢弛하야 無以赴事幾而天下之事가 日入於壞하나니 竊觀今日之勢可謂當急而不可緩者矣라 然今日之政이 則反是하니 愚不知其何以然也케라 去歲諸路之飢에 淅東이 爲甚하고 淅東之飢에 紹興이 爲甚하니 聖天子閔念元元之無辜하라사 傾囷到廩以救之하시고 而甚者는 至出內帑之藏하야 以補其不足하시니 德意之厚가 與天同功이라
상재상(上宰相)
천하의 일은 완급의 세가 있고 조정의 정사는 완급의 마땅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만히 해야 할 일을 급박하게 하면 번세(繁細)하고 가찰(苛察)하여 대체를 보존할 수 없어 조정의 기상이 위축되고, 급하게 해야 할 일을 완만히 하면 태만하고 해이해져 기회를 놓쳐 천하의 일이 날로 무너질 것입니다. 금일의 사세(事勢)를 살펴보건대 마땅히 서둘러야 하고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금일의 정사를 보건대 오히려 이에 반(反)하고 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지난해에 각 지방에 흉년이 들어 절동(浙東)이 심하고, 절동에서도 소흥(紹興)이 더욱 심합니다. 성천자(聖天子)께서 죄없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국고를 털어 구휼하고, 심지어 내탕(內帑)을 비워 그 부족함을 채우니, 그 덕의(德意)의 두터움이 하늘과 같습니다.
熹於是時憊臥田野리니 而明公이 實推挽214)之하야 使得與被使令趨走之末215)하니 仰惟知遇에 撫已慙怍라 然自受任以來夙夜憂歎하야 恐無以仰承聖天子之明命而辱明公之知216)於此時也라 是以不憚奔走之勞하며 不厭奏請之煩하야 以盡其識之當爲者 求以報塞萬一하대 而乃奏請諸事가 多見抑却217)하고 幸而從者라도 又率稽緩218)後時하야 無益於事하고 而其甚者는 則又漠然無所可否하야 若墮深井之中하고 至其又甚자 則遂至於按劾不行하야 反遭傷中하니 而明公意所左右219)가 又自曉然이라 使人憤懣하야 自悔其來而求去不得이로다
제가 이때에 병들어 야윈 몸으로 전야(田野)에 누워 있었는데, 명공께서 저를 추천하여 말직에서 함께 일 할 수 있게 해 주시니 우러러 지우(知遇)를 생각하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수임(受任)이래로 우러러 성천자의 밝은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 명공의 지우(知遇)를 욕되게 할까 밤낮으로 근심하며 두려워합니다. 이 때문에 분주(奔走)의 수고를 꺼리지 않고 주청(奏請)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지 않으며, 직분을 다하여 만일이라도 보색(報塞)하고자 하였더니, 주청한 일 들이 모두 기각 당하고 다행히 채택된 것도 대부분 상고(詳考)가 늦고 때에 늦어 사태의 수습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막연히 가부의 결정도 없어 마치 깊은 우물 속에 빠져 버린 것 같으며, 더욱 심한 경우는 사실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도리어 저를 숭상하는 데까지 이르니, 명공의 뜻이 어느 쪽을 편들고 있는지 명백하니, 분하여 가슴이 답답하여 여기 온 것을 후회하여 떠나고자 해도 떠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比日以來旱勢復作하니 雖已一面多方祈禱하야 必冀感通이오 然天道高遠事有不可期者오 而上自大農220)下及閭巷 公私蓄積을 頻年發散하야 亦自無餘하니 後日之憂가 必有萬倍於前日者라熹是以彷徨怵迫하야 而復冒昧一罄其愚하노니 有明公試幸聽之하라 且以荒政論之라도 則於天下之事에 最爲當急而不可緩者오 而荒政之中에 有兩事焉하니 又其甚急而不可少緩者也라 一曰給絳221)緡錢廣糴米斛이니 今二廣222)之米艫舳223)相接於四明224)之境하니 乘時收糴不至甚貴오 而又顆粒이 勻淨하야 不雜糠粃하고 乾燥堅碩하야 可以久藏이니 欲望明公이 察此事理하야 特與敷奏 降給緡錢三二百萬 付熹收糴이면 則百萬之粟을 旬月可辨이니 儲蓄이 旣多에 緩急足用이면 政使朝廷으로 別有支撥225)이라도 一紙朝馳而米夕發矣라
근일 이래로 다시 가뭄이 심해 비록 여러 곳에 기도를 올려 하늘을 감통(感通)코자 하나 천도는 고원하여 비 올 것을 꼭 기대할 수도 없고, 위로 대농으로부터 아래로 마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공사(公私)의 축적을 해마다 징발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앞으로의 근심이 전일의 만 배나 될 것입니다. 제가 이런 까닭으로 슬픔에 방황하여 다시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오니 명공께서는 들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흉년을 구휼하는 정책을 말할 것 같으면 천하의 일 가운데서 가장 급하여 조금도 늦출 수 없고, 흉년을 구휼하는 정책 가운데서도 더욱 급하여 늦출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민전(緡錢)을 내려 보내 줘 쌀을 널리 사 들이는 일입니다. 지금 광동과 광서의 쌀 실은 배가 꼬리를 물고 명주(明州) 지역에 이어져 있습니다. 때 맞춰 사 들이면 값이 비싸지도 않고, 낱알이 굵어 쭉정이도 섞이지 않았으며 건조도 잘 되어 오래 저장할 수 있겠으니 명공께서는 이점을 명찰하시어, 특별히 주상께 아뢰어 민전 이삼백 량을 내려보내어, 저에게 사 들이는 일을 지시하시면 백만 석의 쌀을 한 달 안에 사 들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축이 많아지고 조정이 때 맞춰 쓸 수 있으면, 조정이 지불할 일이 있을 때 아침에 공문서 한 장을 발하여 저녁에 쌀을 방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且往時에 不免轉大農之粟하고 發內帑之弊하야 以應四方之求矣니 積之於此가 與彼226)何異하며 而又乘賤廣糴하면 利重費輕하야 殆與臨期支撥糴貴傷財者로 不可同日而語라 且今未船이 已集하야 求售無所하니 停住日久에 坐失本利하면 後者懲創하야 因不復來하리니 無窮之害實自今始니 此一事也오 二曰速行賞典227)激勵富室이니 盖此一策이 本以誘民이라 事急則籍之以爲一時之用하고 事定則酬之以爲後日之勸이어늘 旋觀今日에 失信已多하니 別有緩急이면 何以使衆하고 欲望明公察此事理하야 特與敷奏 照會228)元降229)에 卽與推恩하야 使已輪者無怨恨不滿之意하고 未輪者有歆豔慕用之心하야 信令旣行 願應者衆이면 則緩急之間에 雖百萬之粟이라도 可指揮而辦이라
또 지난날에는 대농의 쌀을 운반하고 내탕금을 내어 사방의 구휼에 응하였으니, 여기에 쌓아 두는 것이 부가(富家)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또 쌀값이 쌀 때에 널리 사 들이는 것이 이익은 무겁고 비용은 가벼우니, 일이 코앞에 닿아 급히 방출하려고 비싼 값에 사 들이는 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겠습니까. 또 지금 쌀을 실은 배가 모여들어 팔 곳을 찾지 못하고 정박한 지 오래되어 가만히 앉아서 손실을 보고 있으니, 다음 사람들이 이것이 무서워 다시 쌀을 싣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손실이 실로 지금부터 시작되니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로 상전(賞典)을 신속히 시행하여 부가(富家)를 격려하는 일입니다. 대개 이 정책은 본래 백성을 유도하는 것이니 사태가 급하면 이들의 힘을 빌려 일시로 쓰고, 사태가 수습되면 이를 갚아 다음에 또 도와주기를 장려하는 제도이거늘, 지금 부가에 대한 실신(失信)이 자심하니 앞으로 급한 일을 만나면 어떻게 이들의 도움을 받겠습니까. 명공께서는 이점을 통찰하시어 특별히 상주(上奏)하여 앞서 내린 조칙(詔勅)을 조사하여, 상전(賞/典)을 소급 시행토록 하여, 미곡을 출연한 사람은 원한과 불만이 없게 하고 아직 출연하지 않은 사람은 이를 부러워하게 하면, 공신력 있는 정령이 발해지고, 이에 부응하는 자가 많아서 사세에 따라 비록 백만 석의 쌀이라도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況是此策이 不關經費하니 揆時度事에 最爲利宜어늘 而乃遷延歲月하야 沮抑百端이 使去歲者至今未及霑賞하고 而今歲者方且反覆郤難230)하야 未見涯際하니 是失信天下는 固足以爲今日之所甚憂오 而自壞其權宜濟事之策者가 亦今日之所可惜也라 謀國之計乖戾若此하니 臨事而悔 其可及哉아 此二事也라 然或者之論이 則以爲朝廷이 擲節財用하고 重惜名器231)하야 以爲國之大政이 將在於此하니 二者之請232)이 恐難必濟라하니 愚竊以爲不然也라하노라
더구나 이 시책은 경비가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시사(時事)를 헤아림에 가장 편의(便宜)한 일이거늘, 세월을 천연하여 상전을 베풀 수 있는 온갖 단서를 억제하여, 지난해 미곡을 출현한 자는 지금까지 상전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금년에 출현한 자는 반복 상전을 기각하여 기약이 없으니, 이는 천하에 실신(失信)을 자초하는 일이니, 참으로 금일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으며, 스스로 편리한 시책을 무너뜨리니 또한 금일의 애석한 일입니다. 국가 경영의 계획이 이처럼 망쳐지니 일을 당한 후 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일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조정이 재용을 절약하고 관직 임명을 신중히 하여 국정의 중점을 이에 두어야 하며 그래서 위의 두 가지 시책은 그 실행이 아마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夫擲節財用이 在於塞侵欺滲漏之弊오 愛惜名器는 在於擲無功幸得之賞이니 今將預儲積蓄하야 以大爲一方之備는 則非所謂侵欺滲漏之弊也오 推行恩賞하야 以昭示國家之信이 則非所謂無功幸得之賞也라 且國家經費用度가 至廣하야 而耗於養兵者는 十而八九라 至於將帥之臣이 則以軍籍之虛數로 而濟其侵欺之姦하고 饋餫之臣233)이 則以簿籍之虛文으로 而行其盜竊之計하야 苞苴輩載234)하고 爭多鬪巧하야 以歸於權倖之門者가 歲不知其幾巨萬이어늘 明公不此之正하고 顧乃規規235)焉轎計毫末於飢民口吻之中하야 以是爲擲節財用之計하니 愚不知其何說也라
대개 재용을 절약하는 것은 공금 유용과 재물 손실을 막는데 있고, 관직 임명을 신중히 하는 것은 공 없이 요행으로 관직을 취득하는 것을 억제하는데 있으니, 지금 미곡을 사 들여 비축하는 것은 흉년에 대비하는 것이니 공금 유용과 재물 손실의 폐해가 아니며, 상전을 소급 시행하여 국가의 공신력을 창달하는 것은 공도 없이 요행으로 관직을 취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국가 경비의 용도가 지극히 광범위한데도 군인을 양성하는데 소모되는 것이 팔 구 할이나 되고, 더구나 장수라는 자들이 군적을 위조하여 군수품을 횡령하고, 군량미를 운송하는 관리가 장부를 위조하여 도적질을 일삼으며, 다투어 뇌물을 요직에 갖다 바치는 자가 매년 수만 명이나 되거늘, 명공은 이를 바로잡니 않고 도리어 좀스럽게 굶주린 백성의 입술에서 밥알을 세면서 이를 재용 절약의 시책이라 하니, 저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國家官爵이 布滿天下야 而所以予之者는 非可以限數也라 今上自執政下及庶僚와 內而侍從之華外而牧守之重이 皆可以交結託附而得이오 而北來歸正之人236)近習戚里237)之輩大者荷旄238)仗節239)하고 小者正任240)橫行241)하야 又不知其幾何人이어늘 明公不此之愛이고 而顧愛此迪功文學承信校尉十數人之賞하야 以爲重惜名器之計하니 愚亦不知其何說也라 然熹亦嘗竊思其故하야 而得其說矣로니 大抵朝廷愛民之心이 不如惜費之甚이라 是以不肯爲極力救民之事하고 明公憂國之念이 不如愛身之切이라 是以但務爲阿諛順指之計하니 此其自謀可謂盡矣나 然自旁觀者論之켄댄 則亦可謂不思之甚者也로다 盖民之與財는 孰輕孰重이며 身之與國이 孰大孰小오 財散猶可復聚어니와 民心一失이면 則不可以復收오 身危猶可復安이어니와 國勢一傾이면 則不可以復正이니 至於民散國危하야 而措身無所ㄴ댄 則其所聚有不爲大盜積者耶아
국가 관직이 천하에 넘쳐 있어 이를 임명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는데도, 지금 위로는 집정으로부터 아래로는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안으로는 영화로운 시종과 밖으로는 무거운 목수(牧守)를 모두 부탁과 결탁으로 취득하고, 북에서 온 귀화인과 근십 외척의 무리들이 크게는 장수 수령과 작게는 정임(正任) 횡행(橫行)을 취득하는 자가 무지 기수이거늘, 명공께서는 이를 아깝게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적공(迪功) 문학(文學) 승신(承信) 교위(校尉) 몇 사람의 상전을 아끼는 것을 관직 임명을 신중히 하는 계획이라 하니,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셍각해보니 그 이유를 알만도 합니다. 조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재물을 아끼는 마음보다 못하기 때문에 힘써 굶주린 백성을 구휼할 뜻이 없고, 명공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자신을 사랑하는 절실함보다 못하기 때문에 아첨과 순종에만 힘쓰니, 이는 명공 자신은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지 모르나 옆에서 볼 땐 생각이 깊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백성과 재산을 비교하면 어느 것이 무거우며, 내 몸과 나라를 비교하면 어느 것이 크겠습니까. 재물은 흩어지면 다시 모을 수 있지만 민심은 한 번 잃으면 다시 거둘 수 없고, 일신은 위태하더라도 다시 편안해질 수 있지만 국세는 한 번 기울면 다시 바로 잡을 수 없으니, 백성이 흩어지고 나라가 위태로워 몸 둘 데가 없다면, 모아 둔 재물은 도적을 위해 쌓아 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明公試觀自古國家傾覆之由가 何嘗不起於盜賊이며 盜賊竊發之端이 何嘗不生於飢餓오 赤眉黃巾葛榮黃巢之徒가 其已事可見也니라 數公242)이 當此無事之時하야 處置一二小事243)에 尙且瞻前顧後踰時越月하대 而不能有所定하니 萬一荐饑之餘에 事果有不可知者면 不審明公何以處之오 明公自度果有以處之ㄴ댄 則熹不敢言어니와 若果無以處之면 則與其拱手熟視하야 而俟其禍敗之必至론 孰若圖難於易하며 圖大於細하야 有以消弭其端 而使之不至於此也오 古之人이 固有雍容深密不可窺測하야 平居黙然에 若無所營타가 而臨大事決大策에 不動聲氣하고 而措天下於泰山之安244)者로대 然從今觀之245)켄댄 自其平日無事之時로 而規撫246)措畵/247)가 固已先定於胸中이라 是以應變之際敏妙神速하니 決不若是其泄泄而沓沓248)也니라 況今祖宗之讐恥未報하고 文武之境土未復하니 主上憂勞愓厲하사 未嘗一日忘北向之志어시는 而民貧兵怨하야 中外空虛하고 綱紀陵夷하야 風俗敗壞하니 政使風調雨節하고 時和歲豊이라도 尙不可謂之無事어든 況其饑饉狼狽至於如此로대 爲大臣者에 乃不愛惜分陰하야 勤勞庶務를 如周公之坐以待朝하며 如武侯之經事綜物249)하야 以成上意之所欲爲者하고 顧欲從容偃仰하야 玩歲愒日250) 僥倖目前之無事하니 殊不知如此不已면 禍本日深이라 熹恐所憂者는 當不在於流殍而在於盜賊이오 愛其害者는 當不止於官吏而及於邦家일까하노니
명공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고로 국가가 패망한 원인이 도적 때문이 아니며, 도적이 일어나는 까닭이 굶주림 때문이 아닌가를. 적미(赤眉), 황건(黃巾), 갈영(葛榮), 황소(黃巢)의 무리를 보지 않았습니까. 제공이 이 무사(無事)한 때에 한 두 가지 작은 일을 처리하는데도 앞뒤의 눈치를 보고 때를 넘기고 달을 넘겨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니, 만일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할 땐 명공께서는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겠습니다. 명공께서 과연 대처할 방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말할 것이 없지만, 아무런 방도가 없다면 팔짱을 끼고 쳐다보며 화를 당하기 전에 쉬운 것에서 어려움을 대비하고 작은 것에서 큰 것을 계획하여 그 화의 실마리를 제거하여 화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마음이 온화하고 생각이 깊어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으며 평소에 묵묵히 아무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이 지내다가, 큰 일을 당하여 큰 대책을 결정할 때에는 얼굴빛이나 목소리를 변하지 않고 천하를 태산처럼 안전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평소 무사할 때에 이미 구상과 계획이 가슴속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큰 일을 당한 때에 대책이 신속하고 정확하였으며, 결코 지금처럼 아무 대책 없이 해이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조종(祖宗)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옛 국토를 회복하지 못하여, 주상께서 괴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루도 북벌의 뜻을 잊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백성은 궁핍하고 병사는 원망하며, 안팎이 공허하여 기강이 무너지고 풍속이 퇴패하니, 설사 바람이 순조롭고 비가 때맞으며 기후가 알맞아 풍년이 들더라도 오히려 무사하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인데, 하물며 흉년이 들어 낭패가 이 지경인데도, 대신이란 사람이 분음을 아껴 직무에 근면하기를 주공(周公)이 앉아서 날을 새고 공명(孔明)이 모든 일을 총괄하여 선제(先帝)의 뜻을 성취하려고 한 것 같이 하지 않고, 도리어 편안히 게으름을 피우며 목전의 무사 안일을 바라고 있으니, 이러다간 회본(禍本)이 날로 깊어져, 제가 걱정하는 것이 주려 죽는데 있지 않고 도적이 일어나는데 있으며, 그 피해자가 관리에 그치지 않고 국가에 미치지 않을까 하는데 있습니다.
竊不自勝漆室251)嫠婦252)之憂하야 一念至此에 心ㄷ膽墮地라 念不可不一爲明主言之하대 而猶未敢率然253)以進할세 敢先以告于下執事하노니 惟明公深察其言하야 以前日遲頓254)寬緩之咎로 自列於明主之前하고 君臣相誓에 務以盡變前規하야 共趨時務之急하고 而於熹所陳荒政一二事者에 少加意焉이면 則熹雖衰病하야 不堪吏役이나 尙可勉悉疲駑以備鞭策이오 至其必不可支吾而去라도 後來之人이 亦得以因其已成之緖하야 葺理整頓 仰分顧憂255)어니와 如其不然이면 則熹之愚昧衰遲固不能爲此無麵之不托256)이오 而其狂妄이 將有不能忍於明主之前者라 明公不如早罷其官守解其印綬하야 使毋得以其狂瞽之言으로 上瀆聖聰이면 則熹也가 謹當緘口結舌하고 歸臥田間하야 養鷄種黍 以준俟明公功業之成而羞愧以死니 是亦明公始終之厚賜也니라
제 분수에 맞지 않는 나라 걱정을 이기지 못하여 한 번 생각이 이에 미치니 심담(心膽)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밝으신 주상을 위해 한 말씀 드리고자 했으나 감히 가벼이 말씀 드릴 수 없어 먼저 집사께 감히 말씀드리오니, 명공께서는 전의 말을 통찰하시어 전일의 더디고 게을렀던 허물을 명주(明主)앞에 낱낱이 열거하여, 군신이 서로 맹세하고 전규(前規)를 모두 변혁하여, 함께 급선무에 달려가, 제가 말씀드린 두 가지 황정에 관한 정책을 시행하면, 제가 비록 늙고 병든 몸이라 관직을 감당하지 못하나, 힘써 지치고 둔한 말이 되어 채찍을 맞을 것입니다. 기어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면 제 뒤를 이어오는 자가 제가 만들어 놓은 단서를 인하여 이를 마무리하여 우러러 주상의 근심을 함께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매하고 쇠진한 저는 진실로 밀가루 없는 국수를 만들 수 없을 것이며, 장차 저의 광질이 명주 앞에서 견디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지 모를 일이며, 명공께서는 일찌감치 저의 관직을 파면하여 그 인수(印綬)를 풀어 저의 광고(狂瞽)한 말이 위로 성총(聖聰)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마땅히 입을 닫고 혀를 묶어 전야(田野)에 돌아가 닭이나 치고 기장이나 심으며 훗일 명공의 공업이 성취하길 기다리며 부끄럽게 죽을 것입니다. 이 또한 명공이 저를 추천한 것과 꼭 같은 후사(厚賜)가 될 것입니다.
答詹帥257)
熹向蒙下喩에 欲見諸經鄙說258)하니 初意淺陋不足薦聞이로대 但謂庶幾因此하야 可以求敎라 故卽寫呈하야 不敢自匿이나 然亦自知其間에 必有乖繆하야 以失聖賢本指하고 誤學者眼目處라 故嘗布懇하야 乞勿示人하니 區區此意非但爲一時謙遜之美而已也러니 不謂誠意不積하야 不能動人 今辱垂喩에 乃聞已遂刊刻하니 聞之惘然하야 繼以驚懼로다 向若預知遣人抄錄之意已出於此면 則其不敢承命이 固已久矣니 見事之晩이 雖悔莫追라
답첨수(答詹帥)
지난번에 저에게 보낸 서찰에서 제경(諸經)을 논한 저의 비설을 보고자 하셨을 때 처음엔 저의 경설(經說)이 천루(淺陋)하여 보여 드리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로 인하여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숨기지 않고 베껴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가운데에 잘못이 있어 성현의 본 뜻을 상실하고 학자의 안목을 그르칠 곳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기를 간청하였으니 저의 이 뜻은 다만 일시 겸손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의 성의가 부족하여 존형을 설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인지 지금 하교(下敎)를 받음에 저의 경설(經說)을 이미 출판하였다 하니 어리둥절하여 놀라울 뿐입니다.
전에 만약 사람을 보내어 초록하게 한 뜻이 책을 출간하는데 있는 줄 알았더라면 초록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오래된 일이고 사실을 늦게 알았으니 후회하여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竊惟此事利害如前所陳259)하니 所繫已不細矣라 又況賤迹이 方以虛聲으로 橫遭口語하야 玷黜之禍가 上及前賢260)하니 爲熹之計政使深自晦匿이라도 尙恐未能免禍어늘 今侍郞丈이 乃以見愛之深과 衛道之切로 不暇以消息盈虛261)之理推之하야 至爲刻畵其書에 流布遠近하야 若將以是로 與之較彊弱爭勝負者하니 熹恐其未能有補於世敎오 而適以重不敏之罪라 且於門下에 亦或未免分朋樹黨262)之譏니 盖未論東京禁錮263)白馬淸流264)之禍하고 而近世程伯禹洪慶善之事265)를 亦可鑒矣니 豈可遽謂今之君子가 不能爲前日之一德大臣266)耶아 況所說經이 固有嫌於時事而不能避忌者하니 指爲訕上하야 而加以刑誅는 亦何不可乎아
저의 경설(經說)을 출판한 일로 인한 이해(利害)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으니 관계되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또 더구나 저의 지난날 행적이 과장되게 소문이 나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로 인한 점출(玷黜)의 화가 위로 전현(前賢)에 미치니 제 생각에는 깊이 은인 자중하더라도 오히려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렵거늘 지금 시랑장(侍郞丈)께서 저를 아끼는 정이 깊고 위도(衛道)의 뜻이 절실한 나머지 예측하지 못할 세태의 변화를 미루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책으로 출간하여 원근에 유포하여 마치 이것으로써 왕회(王淮)의 무리와 강약을 겨루고 승부를 다투려는 것 같이 되었으니 제가 세상의 풍교에 도움도 되지 못하고 칠칠치 못한 죄만 더하지 않았나 두렵습니다.
또 시랑장의 문하에 혹 분붕수당(分朋樹黨)이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으니 동경금고(東京禁錮)와 백마청류(白馬淸流)의 화는 말할 것도 없고 근세의 정백우(程伯禹), 홍경선(洪慶善)의 일을 또한 거울 삼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지금의 대신이 전일의 진회(陳檜)간은 대신이 한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의 경설(經說)이 시사에 관계되는 혐의가 없지 않아 세상의 기휘(忌諱)를 피하기 어려우니 산상(訕上)이라고 지목하여 형벌을 내리려 한다 하면 어찌 못하겠습니까.
去歲에 建昌學官이 偶爲刻舊作感興詩라가 遂爲諸生注釋하야 以爲謗讟이라하야 而納之臺諫 此敎官者는 幾與林子方으로 俱被論列267)하니 此尤近事之明鏡이라 雖若無足畏避나 然亦何苦而直觸此姦慝之鋒耶아 欲布愚懇하야 便乞寢罷其事하대 又恐已興工役用過官錢하야 不可自已라 熹今有公狀申使府268)하니 欲望書押入案하야 收索焚毁하고 其已用過工費를 仍乞示下實數라 熹雖貧이나 破産還納이 所不辭也니라 如其不然이면 此輩269)決不但已니 一身目前利害가 初不足道어니와 正恐以是反爲此道無窮之害耳로니 切乞更入思慮하야 不憚逮改千萬幸甚이라
지난해에 건창(建昌)의 교관이 우연히 전에 지은 감흥시를 인쇄하였는데 사인(士人)이 이를 당시의 시사(時事)를 방독(謗讟)하였다고 주석하여 대간에 고발하니 이 교관이 임자방(林子方)과 연좌되어 탄핵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더욱 근래에 일어난 뚜렷한 사례입니다. 비록 두려워 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으나 그러나 하필 간특한 예봉을 바로 부딪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제발 경설(經說)의 출판을 중단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만 출판이 이미 공역에 들어갔고 관전을 이미 비용으로 지출하였으니 그냥 중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첨수부에 공문서를 제출할 것이니 이에 결제를 하여 첨수부의 명으로 출판 중인 것과 이미 츨판된 것을 모두 수색하여 불태워 버리기 바랍니다. 이미 쓰버린 공비는 실비를 알려 주시면 제 비록 가난하나 파산을 해서라도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간특한 무리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제 일신상의 목전의 이해는 그만두더라도 정녕 이 때문에 도리어 우리의 도(道)가 무궁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비나니 다시 한 번 생각하여 거리낌없이 속히 중단하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但今日紛紛270)이 本非爲程氏發이라 但承望風旨271)하야 視其人272)之所在而攻之耳니 若此人이 尙談淸虛면 則幷攻老子오 幸修273)齌戒면 則兼詆釋迦오 曾讀三經字說274)이면 則攻王氏오 曾讀權書衡論275)이면 則斥三蘇니 怒室色市276)라 彼亦何嘗有定論하야 而可與之較是非曲直277)哉아 但不察此而欲力與之爭이면 則必反以激成其勢而益堅其說하야 或遂直爲道學之害亦不爲難이니 此尤不可不慮耳라 當時與王信伯辨278)者가 恐亦尙是近道理人이라 故得以此言279)으로 屈之어니와 若在今日이면 彼豈有憚於此280)耶아
지금 저들이 정씨(程氏)의 비난하는 것은 본래 정씨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왕회(汪淮)의 비위를 맞추려고 제가 정씨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정씨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청허(淸虛)를 말하면 노자를 공격할 것이고 행수재계(幸修齋戒)를 하면 석가를 비난할 것이며, ������삼경자설(三經字說)������을 읽으면 왕씨(王氏)를 공격할 것이고 권서형론(權書衡論)을 읽으면 삼소(三蘇)를 배척하여 집에서 화난 것을 시장에서 화풀이 할 것이니, 저들이 어찌 정론이 있어 더불어 시비곡직을 다투겠습니까. 다만 이점을 살피지 아니하고 애써 저들과 다툴 한다면 이는 도리어 저들을 쳐서 그 세를 이룸으로써 저들의 설을 더욱 단단하게 하여 참으로 도학의 해가 될 것이니 이 점을 더욱 신중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에 왕신백(王信伯)과 논변한 자는 오히려 도리에 가까운 사람이라 이 때문에 왕신백의 말로써 굴복시켰지만, 지금 저들은 어찌 우리의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朱書百選 卷之三
答陳同父
熹迂滯之見을 書中281)에 已說盡하니 自看一過282)에 亦覺難行283)이라 次第284)八九分是且罷休285)矣어니와 萬一不如所料286)면 又須別相度니 今亦不可預定耳라 來敎所云287) 心亦慮之나 但鄙意到此에 轉覺懶怯하고 況本來只是間界學問288)이라 更過五七日이면 便是六十歲人이니 近方措置種得幾畦杞菊하니 若一脚出門이면 便不能此且物喫이니 不是小事라 奉告老兄하노니 且莫相擸掇289)하고 留取290)閒漢291)在山裏咬菜根하야 與人無相干涉하고 了却292)幾卷殘書하야 與村秀才子尋行數墨293)이 亦是一事라 古往今來多少聖賢豪傑이 韞經綸事業不得做하고 只恁麽294)死了底295)何限고 顧此腐儒야 又何足爲輕重이며 況今世孔孟管葛이 自不乏人296)也耶 來喩恐爲毫士所笑297)는 不知何處298)更有毫士가 所得고 老兄勿過慮也하라
주서백선(朱書百選) 제3권
답진동보(答陳同父)
나의 어리석고 둔한 견해는 봉사(封事)의 글 중에 이미 다 말하였으나 다시 한번 읽어봄에 역시 그 시행이 어려움을 알겠으니, 사세(事勢)의 차례가 대부분 이미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만일 봉사(封事) 중에 말한 일이 같이 되지 않으면 별도로 다시 생각해 봐야겠지만 지금 어떻다고 예정할 수가 없구로. 보내 온 서신에서 말한 것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았지만 내 생각이 이에 미치자 더욱 게을러지고 더구나 본래 나의 학문이 쓸모 없는 학문이기도 하다오. 오 칠일만 지나면 곧 육십 노인이니 근방에 텃밭을 마련하여 몇 이랑 구기자와 국화나 심을까 하니 한 발 자국만 문을 나서면 기국을 맛 볼 수 없을 것이니 이 또한 작은 일이 아니다.
노형은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을 붙들어 권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산중에서 풀뿌리나 씹으며 세상을 벗어나 남은 책이나 마저 읽으며 시골의 준수한 아이들과 글이나 읽으리니 이 또한 하나의 일거리일 것이다. 고왕금래로 허다한 성현 호걸이 큰 뜻을 품고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갔으니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한이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나 같은 부유(腐儒)가 또 무슨 경중(輕重)이 있으며 더구나 금세(今世)의 공맹관갈(孔孟管葛) 같은 노형도 스스로 궁핍하게 지내지 않는가. 보내 온 서찰에서 내가 호사(豪士)가 있는지 모르겠다. 노형의 생각이 지나친 것 같다.
來書驚誨殊荷愛念이나 然使熹不自料度하야 冒昧直前이라도 亦只是誦說章句299)하야 以應文300)備數而已니 如何便擔當許大事온 況只此僥冒301)를 亦未敢承當하니 老兄之言이 無乃太早計302)乎아 然世間事를 思之非不爛熟이나 只恐做時不似說時하고 人心不似我心이라 孔子豈不是至公血誠이시며 孟子豈不是麤拳大踢303)이리오마는 到底無著手處하니 況今無此伎倆304)하야 自家句當305)一箇身心도 尙且奈何不下306)라 所以從前不敢容易出來蓋其自知甚審이라 而間一種不相識公論底人307)이 亦莫不知之언커는 只是吾黨中有相知日久相愛過深者가 好而不知其惡하야 誤相假借 以爲粗識廉恥하고 而又年紀老大하야 節次推排308)하야 遂有無實之名 以至上誤君父之聽 有此叨竊하니 每中夜以思에 悚懼漸怍하야 無以少答上下之望하야 未嘗不發汗沾衣也리니 不意以老兄之材氣識略이 過絶流背로도 而亦下同流俗하야 信此虛 聲하야 將欲彊僬僥309)以千句之重하고 而不憂其覆跌狼狽하야 以誤知人之明也니 自今以往으로 牢關固拒라도 尙恐不免於禍어던 況敢望入帝王之門乎아 彼去都城310)不遠하니 想已見得近日爻象矣라 萬一再辭不得이면 卽不免束裝裏糧하야 爲生行死歸311)之計로다 承許見訪於蘭溪312)하니 甚幸이로대 但恐無說話處라 向來子約313)到彼314)相守三日에 竟亦不能一吐所懷하니 或先得手筆數行하야 略論大意 使未相見間에 預得紬繹이라가 而面請其曲折이 庶幾猶勝忽忽說話不盡하야 只成閑追逐315)也리라
보내 온 편지에서 경계하여 깨우쳐 줌은 자별한 애정이나 그러나 내가 요량 없이 무턱대고 관직에 나간다 하더라도 다만 장구(章句)나 송설(誦說)하며 숫자만 채울 뿐이니 어찌 큰 일을 담당하리요. 하물며 아무 능력 없이 요행으로 주어진 관직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노형의 말은 생각은 멀고 기대는 너무 빠른 말 같다. 세상의 일이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니, 일을 착수할 때는 말할 때와 같지 않고 세간 인심이 내 마음과 같지 않는 법이다. 공자가 어찌 지공혈성(至公血誠)이 아니며 맹자가 어찌 추권대척(麤拳大踢)이 아니리오마는 세상을 구제하는데는 도무지 착술할 곳을 잡지 못하였으니 지금 그러한 재능도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세상일에 어찌 나서겠는가. 종전에 쉽사리 세상에 나가지 않은 까닭이 이러한 내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인데, 내가 이러한 줄을 세간의 나를 알지 못하는 일반 공론을 말하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다만 우리 마을에 서로 사귄 지 오래이고 서로 아낌이 깊은 사람이 나를 좋아하여 나의 나쁜 점을 모르고 잘못 나를 평가하여 염치를 조금 안다 하고, 또 나이가 조금 위라하여 절차대로 나를 추대하니, 마침내 실없이 과장된 명성이 있어 위로 군부(君父)가 잘못 듣게 하여, 이같이 외람되게 관직을 받게 되었으니 밤중에 생각해도 송구하고 부끄러우며, 상하의 기대에 조금도 보답할 수 없으니 땀이 옷을 적실 지경이다. 재기(材氣)와 식략(識略)이 세속 사람들보다 뛰어난 노형이 어찌 이들과 같이 헛된 명성을 믿고, 난쟁이에게 천균의 짐을 지워 놓고 엎어져 허둥대도록 하여 지인(知人)의 총명을 흐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한사코 세상 사람을 거절하여도 오히려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렵거늘, 하물며 감히 제왕의 문에 들어가기를 바라겠는가. 노형이 거주하는 영강(永康)이 도성에서 멀지 않으니 근일 조정의 형세를 잘 알리라 생각한다. 만일 두 번 사양하여도 불가하면 두득불 짐을 꾸리고 양식을 싸서 살아서 가서 죽어서 돌아올 각오를 할 수밖에 없구료. 난계(蘭溪)를 방문하겠다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다만 서로 대화하고 토론할 적당한 소재가 없지나 않을까 염려되는구료. 지난번에 자약(子約)이 난계에 왔을 때 사흘을 같이 지내면서도 끝내 서로의 깊은 생각을 토로하지 못했으니 먼저 상대의 수필 같은 것을 읽어 본 뒤에 대의를 대략 파악하여 서로 만나기 전에 미리 이모저모 뜻을 풀어 보고 그런 뒤에 서로 만나서 그 자세한 것을 토론하면 아마 허둥지둥 할 말을 다 못하고 실속없이 상대방의 말을 따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리라.
答陳同父
熹衰病杜門타가 忽此生朝316)라 孤露317)之餘에 方深哽愴이러니 乃蒙不忘하야 遠寄新詞318) 副以香果佳品하고 至於裘材319)를 又出機杼320)하니 此意何可忘也리오 但兩詞毫宕淸婉하야 各極其趣나 而投之空山樵牧之社하야 彼之衰退老朽之人이 似太不著題耳라 示喩縷縷가 殊激懦衷이로다 以老兄之高明俊傑로 世間榮悴得失이 本無足爲動心者이리오마는 而細讀來書에 似未免有不平之氣하니 區區竊獨妄意此殆平日才太高氣太銳論太險跡太露之過是以困於所長하고 忽於所短하야 雖復更歷變故顚沛321)至此라도 此而猶未知所以反求之端也ㄹ새라 嘗謂天理人欲二字가 不必求之於古今王伯之迹이라 但反之於吾心義利邪正之間하야 察之愈密이면 則其見之愈明하고 持之愈嚴이면 其發之愈勇이니 孟子所謂浩然之氣者는 盖斂然於規矩準繩不敢走作之中하야 而其自任以天下之重者가 雖賁莫能奪也니 是豈才能血氣之所爲哉아
답진동보(答陳同父)
내 병으로 쇠약해진 몸으로 문을 닫고 지냄에 홀연히 생일을 맞으니 부모 없는 몸이라 슬퍼 목이 메이더니, 잊지 않고 멀리 축시를 보내주고 향과와 좋은 선물을 딸려 보냈으며, 옷감은 또 베틀에서 직접 짠것이라 하니 이 뜻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보내 온 두 편의 시는 호탕(豪宕) 청완(淸婉)하여 각각 그 뜻을 다 표현하였고, 빈 산의 나무하고 풀 베는 집에 던져, 쇠퇴하여 늙고 사그라진 늙은이에게 부치니 너무나도 격이 맞지 않은 것 같다. 서찰 속의 긴 말씀은 나약한 나의 마음을 자못 격려하나, 노형의 고명 준걸한 인품을 볼 때 세간의 영췌(榮悴)와 득실(得失)이 그대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한 것인데도, 보내 온 서신을 자세히 읽어보니 노형이 아직 불평(不平)한 기상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이것은 평일 노형의 재능(才能)이 너무 높고 기상(氣象)이 너무 날카로우며 언사(言辭)가 너무 위험하고 행적(行蹟)이 너무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형이 자신의 장점에는 너무 소홀하여, 비록 다시 뜻하지 않는 변고를 겪어 좌절을 당하더라도 자신에 돌이켜 책망할 단서를 찾지 못할 것이다.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변별은 고금 왕패(王覇)의 자취에서 구할 필요가 없고, 다만 내 마음의 의리(義利)와 사정(邪正)의 사이를 돌이켜보아 살피기를 자세히 하면 보는 것이 더욱 명백하고, 지키기를 엄하게 하면 발하는 것이 더욱 용감해 질 것이니,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것은, 의리의 법도에 자중하여 무슨 일을 하고 내닫지 않으면서도, 천하의 중책을 스스로 맡겠다는 의지는 분육이라도 할지라도 뺏지 못하는 그런 기상일 것이니, 이 어찌 재능과 혈기로써 가능한 일이겠는가.
老兄視漢高帝唐太宗之所爲하야 而察其心케어던 果出於義耶出於利耶아 出於邪샤正耶아 若高帝가 則私意分數가 猶未甚熾나 然已不可謂之無오 太宗之心이 則吾恐其無一念之不出於人欲也언마는 直以其能假仁借義以行其私하고 而當時與之爭者도 才能知術이 旣出其下하야 又不知有仁義之可借ㄹ사 是以彼善於此로 而得以成其功耳니 若以其能建立國家傳世久遠으로 便謂其得天理之正이면 此正是以成敗論是非오 但取其獲禽之多하야 而不羞其詭遇之不出於正也니 千五百年322)之間에 正坐如此323)니 所以只是架漏牽補324)過了時日하고 其間雖或不無小康이나 而堯舜三王周公孔子所傳之道가 未嘗一日得行於天地之間也니라 若論道之常存이면 却又初非人所能預니 只是此箇自是원亙古亙今常在不滅之物이라 雖千五百年이 被人作壞325)나 終殄滅它326) 不得이라 漢唐所謂賢君이 何嘗有一分氣力扶助得它327)耶아 老兄人物이 奇偉英特이 恐不但今日所未見이니 向來得失短長328)이 正自不須更挂齒牙하야 向人分說이어니와 但鄙意更欲賢者百尺竿頭에 進取一步329)하야 將來不作三代以下人物로 省得氣力爲漢唐分踈330)하면 卽更脫灑磊落이리라
노형이 한 고제(高帝)와 당 태종(太宗)의 업적을 보고 그 마음을 살펴본다면, 관연 그 행위가 의(義)에서 나왔겠는가. 이(利)에서 나왔겠는가. 고제(高帝)는 그 사의(私意)의 정도가 심하지는 않으나 없다고는 할 수 없고, 태종의 마음은 아마 한 가닥의 생각도 인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인(仁)과 의(義)를 빌어서 그 사욕을 행하였으되 당시 그와 경쟁하는 자들은 그 재능과 지술(知術)이 그보다 못하고 또 인(仁)과 의(義)를 가차(假借)할 줄을 몰랐을 뿐이며 이 때문에 태종(太宗)이 그들보다 능력이 나아 성공을 했을 뿐이다.
만약 태종이 국가를 세워 후세에 오래도록 전한 것으로써 그가 천리(天理)의 정(正)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바로 성패로써 시비를 논하여, 다만 그 짐승을 많이 잡은 것만 취하고 그 속임수가 정(正)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다. 맹자가 가신 후 지금까지 1500년 동안 이렇게 지내왔으니, 이는 구차하게 세월만 보냈기 때문이며, 그 사이에 비록 조금 나은 때도 있었으나 요순 삼왕, 주공 공자가 전한 도는 하루도 세상에 행해지지 못한 것이다.
만약 도의 상존(常存)을 말할 것 같으면 이는 처음부터 사람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도(道)는 스스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상존하여 멸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천 5백 년 사이에 사람에 의해서 도(道)가 무너졌으나 끝내 도를 소멸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한당(漢唐)의 이른 바 현군(賢君)이 일찍이 무슨 한 가닥 힘이 있어 도(道)를 일으켜 세웠겠는가. 노형의 인물이 기위(奇偉)하고 영특하여 금일에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니 노형은 자신의 지난날의 득실(得失) 장단(長短)을 입에 담아 남에게 토로하여 스스로 기상을 저상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 뜻은 노형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한 걸음만 더 진취하면, 장래에 삼대(三代) 이하의 공리(功利)를 좇는 인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니 한당(漢唐)을 해명하는데 기력을 소모하지 않으면 곧 범속을 벗어나 쇄락(灑落)해질 것이다.
李孔霍張이 則吾豈敢가 然夷吾景略331)之事도 亦不敢爲同父願之也하노라 大字甚荷不鄙어니와 但尋常不欲爲寺觀寫文字니라 不欲破例하니 此亦拘儒常態니라 想又發一笑也로다 寄來紙에 却爲寫張公集句左右銘去하니 或恐萬一有助於積累涵養睟面盎背之功而라 聞曾到會稽하니 曾遊山否아 越中山水氣象終是淺促하니 意思不能深遠하로다 武夷亦不至甚好로대 但近處無山이라 隨分占取하야 做自家境界하니 春間至彼에 山高水深하고 紅綠相映하야 亦自不惡이로다 但年來窘束332)殊甚하야 詩成屋未就하고 亦無人力333)可往來하니 每以爲念耳라
이응(李膺) 공융(孔融) 곽광(霍光) 장소(張昭)를 내 어찌 감당하리오마는 관중(管仲) 왕맹(王猛)의 일을 동보를 위해 원하지는 않으리라. 액자(額字)를 써 달라고 하니 비루한 일은 아니나 평소에 사관(寺觀)에 글자를 써 걸기를 좋아하지 않고, 이 전례를 깨고 싶지 않으니, 이는 융통성 없는 유자(儒者)들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는구료. 부쳐 보낸 종이는 장공이 집구한 좌우명을 써서 보내니, 혹 적루함양(積累涵養)과 수면앙배(晬面盎背)의 공부에 작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듣건대, 회계(會稽)에 다녀왔다 하니 산행은 잘하였는지 모르겠다. 월중(越中)의 산수는 기상이 얕고 좁아 마음이 심원하지 않을 것이다. 무이 또한 썩 좋은 곳은 아니지만 근처에 산이 없으니 형편따라 적당한 곳을 찾아 내 거처로 정할까 하네. 봄에 무이(武夷)에 갔더니 산은 높고 물은 깊어 홍록(紅綠)이 어리비쳐 또한 싫지는 않았다오. 하지만 요즈음 군속(窘束)이 더욱 심하여 시는 짓고 집은 짓지 못했으니 왕래할 인력이 없어 늘 마음만 간절할 뿐이라네.
來敎累紙縱橫奇偉하야 神怪百出하니 不可正視라 雖使孟子復生이라도 亦無所容其喙어든 況於愚昧蹇劣又老兄所謂賤儒者가 復安能措一詞於其間哉아然於鄙意에 實有所未安者라 不敢雷同334)曲相阿徇이니 請復陳其一二러니 而明者聽之也러다 來敎云云이 其說雖多나 然其大槪는 不過推尊漢唐以爲與三代不異하고 貶抑三代以爲與漢唐不殊라하니 而其所以爲說者가 則不過以爲古今異宜하니 聖賢之事를 不可盡以爲法이라 但有救時之志除亂之功이면 則其所爲雖不盡合義理라도 亦自不妨爲一世英雄이라하대 然又不肯說此가 不是義理335)라 故又須說天地人336)並立爲三하니 不應天地獨運이오 而人爲有息337)이라 今旣天地常存하니 卽是漢唐之君이 只消如此338)라도 已能做得人底事業339)이오 而天地有所賴以至今이라하야 其前後反復이 雖縷縷多端이나 要皆以證成此說而已니 若熹之愚는 則其所見이 固不能不與此異나 然於其間又有不能不同者니 今請因其所同하야 而核其所異면 則夫毫釐之差千里之繆를 將有可得而言者矣리로다
보내 온 여러 장의 편지는 종횡기위(縱橫奇偉)하고 신괴백출(神怪百出)하여 바로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비록 맹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또한 이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없을 것이어늘 하물며 우매하고 졸렬한 내가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또 노형이 이른바 천한 유생이 다시 어찌 그 사이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실은 내 마음에 이해 못할 점이 있으니, 뇌동하여 내 생각을 굽히고 아부해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청컨대 다시 그 한, 두 가지를 발하고자 하니 노형은 경청해 주기 바란다.
보내 온 서찰에서 말한 것은 그 논설이 비록 많으나 그 요지는 한당(漢唐)을 추존하여 삼대(三代)와 다르지 않다 하고 삼대를 폄억하여 한당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있으며,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불과 옛날과 지금이 시의(時宜)가 달라서 성현의 언행이 모두 법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시대를 구제하려는 뜻과 난을 제거할 공로가 있으면 그 행위가 비록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일세의 영웅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또 이것이 의리가 아니라고 말하기 싫어하여 이런 까닭으로 또 말하기를,
“천(天)․지(地)․인(人)이 함께 서서 셋이 되니 천지(天地)만 단독으로 운행하고 인간의 행위는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 천지(天地)가 상존하는 것은 곧 한당의 명군이 반드시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사람의 사업을 성취하여 천지가 이에 힘입어 지금에 이르렀다.”
하여 그 앞 뒤 반복이 비록 길고 다단하나 그 요지는 모두 이 설이 성립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나의 생각은 이와 다르나 그 가운데는 같은 것도 있으니, 그 같은 것으로 인하여 그 다른 것을 지적하고자 하니, 털끝같은 차이가 천리나 어긋난다는 말을 이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來書心無常泯法無常廢340)一段이 乃一書之關鍵이니 鄙意所同이 未有多於此段者也로대 而其所異亦未有甚於此段者也로다盖有是人이면 則有是心하고 有是心이면 則有是法하야 固無常泯常廢之理어니와 但謂之無常泯이면 卽是有時而泯矣오 謂之無常廢면 卽是有時而廢矣라 盖天理人欲之幷行이면 其或斷或續이 固宜如此어니와 至若論其本然之妙ㄴ댄 則唯有天理而無人欲이라 是以聖人之敎가 必欲其盡去人欲而復全天理也라 若心이 則欲其常不泯하야 而不恃其不常泯也며 法則欲其常不廢하야 而不恃其不常廢也ㄹ새니 所謂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者가 堯舜禹相傳之密者也라 夫人自有生으로 而梏於形體之私하니 則固不能無道心矣니 日用之間에 二者幷行迭爲勝負하야 而一身之是非得失天下之治亂安危莫不係焉이라 是以欲其擇之精하야 而不使人心得以雜乎道心하고 欲其守之一하야 而不使天理得以流於人欲하야 則凡其所行이 無一事之不得其中하야 而於天下國家에 無所處而不當하니 夫豈任人心之自危하야 而以有時而泯者爲當然이며 任道心之自微햐야 而幸其須臾之不常泯也哉아
그대의 서찰에서 말한
“마음은 항상 민멸함이 없고 법은 항상 폐함이 없다.”
고 한 일단이 곧 이 글의 관건이니, 내 생각과 같은 것이 이 일단보다 확실한 곳이 없고, 또 그 다른 것이 이 일단보다 심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개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법이 있으니 그야말로 상민(常泯) 상폐(常廢)의 이치는 없다 하겠다. 다만 무상민(無常泯)이라고 말한다면 곧 이는 때로 민멸할 수 있다는 말이요, 무상폐(無常廢)라고 말하면 때로 폐한다는 말이니 대개 현상적(現象的)으로 보면 천리와 인욕이 병행하여 혹 끊어지고 혹 이어지고 하지만 그 본연의 묘를 말할 것 같으면 오직 천리(天理)만 있고 인욕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이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마음은 항상 민멸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 불상민(不常泯)은 믿고 내버려두어서는 안되며 법은 항상 폐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 불상폐(不常廢)를 믿고 내버려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른바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미미(微微)하니 오직 순정(純正)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만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
고 한 것은 요순우(堯舜禹)가 서로 전한 밀지(密旨)이다.
대저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형체의 사(私)에 얽매이면 인심이 없을 수 없지만 천지(天地)의 정(正)을 체득하면 또 도심이 없을 수 없다. 일상 생활을 영위해 가는 중에 인심과 도심이 아울러 행해져 서로 이기고 지고 하니 일신의 시비득실(是非得失)과 천하의 치란안위(治亂安危)가 이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그 선택을 정밀하게 하여 인심으로 하여금 도심에 섞이지 않게 하고 그 지키기를 전일하게 하여 천리(天理)로 하여금 인욕(人欲)에 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무릇 그 행하는 바가 한가지 일도 중도(中道)를 얻지 않음이 없고 천하 국가에 처해서 마땅치 않음이 없을 것이니 어찌 인심이 위태한 것을 방임하여 때로 민멸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도심이 미약한 것을 방임하여 잠깐 동안 민멸하지 않는 것을 다행히 여기는가.
夫堯舜禹之所以相傳者가 旣如此矣오 至於湯武는 則聞而知之而又反之以至於此也오 夫子之所以傳之顔淵曾參者가 此也오 曾子之所以傳之子思孟軻者는 亦此也라 故其言曰 一日克己復禮면 天下가 歸仁焉이라하시고 又曰 吾道는 一以貫之하시고 又曰道不可須臾離也니 可離면 非道也라 是故君子가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라하시고 又曰 其爲氣也가 至大至剛하니 以直養而無害則塞乎天地之間이라하시니 此其相傳之妙를 儒者相與謹守而共學焉하야 以爲天下雖大나 而所以治之者가 不外乎此라 然自孟子旣沒에 而世不復知有此學하야 一時英雄毫傑之士가 或以資質之美計慮之精으로 一言一行偶合於道者가 盖亦有之로대 而其所以爲之田地341)根本者가 則固未免乎利欲之私也오 而世之學者가 稍有才氣면 便自不肯低心下意하야 做儒家事業聖學功夫하고 又見有此一種道理不要十分是當하며 不礙諸般作爲하야 便可立大功名取大富貴하고 於是心以爲利하야 爭欲慕而爲之나 然又不可全然不顧義理라 便於此等去處에 指其須臾之間偶未泯滅底道理하야 以爲只此便可與堯舜三代比隆하고 而不察其所以爲之田地本根者之無有是處也나니
대저 요순우(堯舜禹)가 서로 전한 것이 이와 같고 탕무(湯武)는 이를 듣고 알았으며 또 이에 돌이키려고 힘써서 이에 이른 자이고, 부자(夫子)께서 안연(顔淵)과 증삼(曾參)에게 전한 것이 이것이고 증자가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에게 전한 것이 또한 이것이다. 때문에 그 말에
“하루라도 자기를 이기고 예에 돌아오면 천하 사람이 인(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도(道)는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것에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것에 두려워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기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해서 바로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다.”
고 하니 이것이 전하고 전하여진 묘법이니 유자(儒者)는 서로 삼가 지키고 함께 공부하여 천하가 비록 크나 그 다스리는 방도는 이것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가 몰한 이후로 세상이 다시 이 도학이 있는 줄을 모르고, 한 때의 영웅 호걸이 혹 자질이 좋고 생각이 정밀하여 일언 일행이 우연히 도(道)와 합치되는 자가 있긴 잇지만 그 행위의 바탕이 되는 근본 마음은 이욕(利欲)의 사(私)를 면치 못하고, 세상의 학자가 재기(才氣)가 조금 있으면 곧 마음을 낮추고 뜻을 낮추어 유가(儒家) 사업과 성학(聖學) 공부를 하려 하지 않고, 떠 어떤 도리가 충분히 의리에 합당하지 않으면서 제반 작위에는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곧 큰 공명을 세울 수 있고 큰 부귀를 취할 수 있다고 하며 이를 바라는 마음에 아주 이롭다고 여겨 다투어 숭상하고 이를 행하곤 한다. 그러나 또 전혀 의리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곧 이와 같은 곳에 잠깐동안 우연히 민멸하지 않는 도리를 가리켜 이것이 곧 요순 삼대의 도와 같다 하고 그 바탕이 되는 근본 마음은 이와 같지 않음을 살피지 못하는 것이다.
夫三才342)之所以爲三才者는 固未嘗有二道也나 然天地無心而人有欲이라 是以天地之運行無窮하대 而在人者는 有時而不相似라 盖義理之心이 頃刻不存이면 則人道息하고 人道息이면 天地之用이 雖未嘗已나 而其在我者가 則固卽此而不行矣니 不可但見其穹然者常運乎上하고 頹然者常在乎下하야 便以爲人道無時不立而天地賴之以存之驗也니라 夫謂道之存亡在人而不可舍人以爲道者는 正以道未嘗亡하대 而人之所以體之者는 有至有不至耳니 非謂苟有是身이면 則道自存이오 必無是身이라야 然後道乃亡也니라 天下固不能人人爲堯나 然必堯之道行하야 然後人紀可脩天地可立也며 天下固不能人人皆桀이나 然亦不必人人皆桀이면 而後人紀不可脩天地不可立也라 但主張此道之道之人343)이 一念之間에 不似堯而似桀이면 卽此一念之間이 便是架漏度日牽補過時矣라 且曰心不常泯而未免有時之或泯이면 則又豈非所謂半生半死之蟲哉344)아 盖道未嘗息이라 而人自息之하니 所謂非道亡也幽厲不由는 正謂此耳라 惟聖盡倫하고 惟王盡制345)하니 固非常人所及이나 然立心之本이 當以盡者爲法이오 而不當以不盡者爲準이라 故曰不以舜之所以事堯로 事君이면 不敬其君者也오 不以堯之所以治民으로 治民이면 賊其民者也니 而況謂其非盡欺人以爲倫이며 非盡罔世以爲制346)라하니 是則雖以來書之辨으로도 固不謂其紀無欺人罔世之心矣라 欺人者人亦欺之하고 罔人者人亦罔之하나니 此漢唐之治所以雖極其盛이나 而人不心服하야 終不能愧於三代之盛時也니라
대저 천(天)․지(地)․인(人)의 삼재(三才)가 천(天)․지(地)․인(人)의 삼재(三才)가 되는 까닭은 두 갈래 도(道)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천지(天地)는 마음이 없고 사람은 인욕이 있기 때문에 천지의 운행은 무궁하고 사람의 도(道)는 때로 무궁하지 못하니 대개 의리의 마음이 잠깐 사라지면 인도(人道)가 멈추고 인도가 멈추면, 천지의 운행은 비록 그치지는 않으나 인도는 곧 행해지지 않으니, 다만 하늘이 위에서 항상 운행하고 땅이 아래에서 항상 숨쉬고 있는 것을 보고 곧 인도가 항상 서고 천지가 이에 힘입어 존재하는 징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개
“도(道)의 존망이 사람에게 있고 사람을 떠나 도(道)가 있을 수 없다.”
고 말하는 것은 도(道)는 일찍이 망한 적이 없고, 사람이 도(道)를 체득하는 것이 도(道)에 도달할 때가 있으며 도(道)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만일 이 몸이 있으면 도(道)가 자존하고 꼭 이 몸이 없어진 연후에 도(道)가 망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천하 사람이 사람사람이 모두 요(堯)임금 같이 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요(堯)의 도(道)가 행해진 연후에야 인륜을 닦을 수 있고 세상이 다스려 질 수 있으며, 천하 사람이 사람사람이 모두 걸(桀)이 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사람사람이 모두 걸(桀)이 된 연후에야 인륜이 닦아지지 않고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군(人君)이 이 도(패도)를 주장하여 눈 깜박할 사이에 요와 같지 않고 걸과 같아지면 곧 눈 깜박할 사이에 구차스럽게 하는 일없이 세월을 보내게 되어 온 세상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
“마음이 항상 민멸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 혹 민멸할 때도 있다.”
고 한다면 이 어찌 이른 바 반생반사(半生半死)하는 벌레가 아니겠는가.
대개 도(道)는 그친 적이 없고 사람이 스스로 그치게 하니 이른 바
“도가 망하는 것이 아니고 유려(幽厲)가 행하지 않을 뿐이다.”
라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순자(荀子)가 말한
“성인이라야 윤강(倫綱)을 지극히 하고 왕이라야 제도(制度)를 지극히 한다.”
는 것은 보통 사람이 이에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세우는 근본은 마땅히 지극히 함을 법칙으로 해야 하고 지극하지 못함을 준칙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때문에
“순(舜)이 요(堯)를 섬긴 방도로 그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그 임금을 공경하지 않는 자이고 요가 백성을 다스린 방도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으면 그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
라고 말하니 하물며 사람을 다 속이지 않는 것을 인륜(人倫)이라고 말하며 세상을 다 속이지 않는 것을 법제라고 말하겠는가. 이는 그대의 말대로라도 기인망세(欺人罔世)의 마음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남을 속인 자는 남이 또한 자기를 속이는 법이다. 이것이 한당(漢唐)의 치세가 극도로 융성하였으나 백성들이 심복하지 아니하고 삼대의 치세에 부끄러워하는 까닭이다.
夫人只是這箇人이오 道只是這箇道니 豈有三代漢唐之別이리오 但以儒者之學不傳으로 而堯舜禹湯文武以來轉相授受之心이 不明於天下하야 故漢唐之君이 雖或不能無暗合347)之時나 而其全體却只在利欲上하니 此其所以堯舜三代自堯舜三代오 漢祖唐宗自漢祖唐宗하야 終不能合而爲一也ㄹ일세라 今若必欲撤去限隔348)하야 無古無今이온댄 則莫若深考堯舜相傳之心法과 湯武反之之功夫하야 以爲準則하야 而求諸身하고 却就漢祖唐宗心術微處하야 痛加繩削349) 取其偶合이 察其所自來350)하고 黜其悖戾而究其所從起하면 庶幾天地之常經古今之通義를 有以得之於我니 不當坐談旣往之迹하고 追飾已然之非하야 便指其偶同者以爲全體而謂其眞不異於古之聖賢也351)니라 且如約法三章固固善矣나 而卒不能除三族之令352)하야 一時功臣無不夷滅하며 除亂之志固善矣나 而不免竊取宮人私侍其父하고 其它亂倫逆理353)之事를 往往皆身犯之하니 盖擧其始終而言켄댄 其合於義理者가 常少오 而其不合者가 常多하고 合於義理者는 常少오 而其不合者常大로대 但後之觀者 於此根本功夫354)에 自有欠闕이라 故不知其非하야 而以爲無害於理라하고 抑或以爲雖害於理나 而不害其獲禽之多也라하니 觀其所謂355)學成人而不必於儒오 攪金銀銅鐵爲一器而主於適用켄댄 則亦可見其立心之本이 在於功利하야 有非辯說의 所能文者矣라
대개 사람은 다만 사람이고 도(道)는 다만 도(道)이니 어찌 삼대와 한당의 구별이 있으리오마는 다만 유자(儒者)의 학(學)이 전해지지 않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무(文武) 이래로 전하고 전하여진 심법(心法)이 천하에 밝혀지지 않는 까닭으로 한당(漢唐)의 군(君)이 비록 도(道)에 암합(暗合)하는 때가 없지 않으나 그 전체는 이욕(利欲)의 마당에 있으니 이것이 요순 삼대는 요순 삼대이고 한조(漢祖) 당종(唐宗)은 한조 당종이어서 끝내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지금 만약 꼭 삼대와 한당의 한격(限隔)을 철거하여 고금(古今)의 차이를 없애고자 한다면 요순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과 탕무가 회복하려고 한 노력을 탐구하여 준칙으로 삼아 자신에게 구하고 한조(漢祖) 당종(唐宗)의 심술의 깊은 곳을 살펴서 통렬히 먹줄을 대어 그 우연히 도에 합치되는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 근본 마음을 살피고, 그 패려함을 내치면서 그 원인을 규명하면, 천지의 상경(常經)과 고금의 통의(通義)를 내 마음 가운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앉아서 지나간 자취를 말하고 미루어 지나간 잘못을 문식(文飾)하여 그 우연히 도(道)와 합치하는 것을 가리켜 전체로 여기고 옛 성현과 다르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漢) 고제(高帝)의 약법삼장(約法三章) 같은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었으나 끝내 진(秦)의 삼족지령(三族之令)을 없애지 못하였고 한 때의 공신이 모두 죽었으며, 당(唐) 태종(太宗)의 제란(除亂)의 뜻이 진실로 좋은 것이었으나 궁인을 훔쳐 그 아버지를 사사로이 모시게 하고, 수많은 패륜 역리의 일을 스스로 저질렀으니, 대개 시종(始終) 전체를 들어 말할 것 같으면 그 의리에 합하는 것은 적고 합하지 않는 것은 많으며, 그 의리에 합하는 것은 작고 의리에 합하지 않는 것은 크다고 하겠다. 다만 후세의 학자가 이 근본 공부에 결함이 있어 그 잘못을 알지 못하고 도리에 해롭지 않게 하고, 혹 도리어 해롭다 하더라도 공적을 이루는데 해롭지 않다고 하니, 그 이른 바
“인격을 완성하는 데 꼭 유학에 의존할 필요가 없고, 금․은․동․철을 섞어 하나의 그릇을 만드는 데에는 실용을 위주로 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마음 세우는 근본이 공리(功利)에 있음이 변설로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夫成人之道는 以儒者之學求之면 則夫子所謂成人也오 不以儒者之學求之면 則吾恐其畔棄繩墨하고 脫略規矩하야 進不得爲君子오 退不得爲小人이나 正如攪金銀銅鐵爲一器에 不唯壞却金銀이라 而銅却恐更須討論이라하야 方見得從上諸聖相傳心法이오 而於後世之事에 有以裁之而不失其正이니 若不見得이면 却是自家耳目不高開見不的하고 其所謂洪者乃混雜而非眞洪이오 所謂慣者乃流徇而非眞慣이니 竊恐後生傳聞이 輕相染習하야 使義利之別不明하고 舜蹠之塗不判하야 眩流俗之觀聽하고 壞學者之心術하야 不惟老兄爲有識者所議라 而朋友 亦且陷於收司連坐之法이니 此熹之所深憂而甚懼者라 故敢極言以求定論하노니 若猶未以爲然인댄 卽不若姑置是事하야 而且求諸身이니 不必徒爲譊譊356)無益於道하고 且使卞莊子357)之徒로 得以竊笑於旁而陰行其計也니라
인격을 완성하는 공부를 유자의 학으로써 공부하면 공자가 말하는 인격이 되고, 유자의 학으로써 공부하지 않으며 예법을 버리고 규칙을 벗어나 세상에 나아가 군자가 되지 못하고 가정에 물러나 송인도 되지 못하니, 꼭 금․은․동․철을 섞어 그릇을 만들면 근 은을 못쓰게 할뿐만 아니라 동, 철도 그 동, 철의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유학을 전해지지 않는 끊어진 학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뒤에 다시 꼭 토론해야 할 일이요, 지금 그대는 여러 성인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을 체득하여 이를 후세의 역사적인 사실을 평가하는 준칙으로 삼아 그 정도(正道)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니 만약 이를 체득하지 못하면 그대의 이목은 높아지지 않고 견문은 정확하지 못하여, 그대가 이른바 이목이 넓다는 것은 혼잡이요 참으로 넓은 것이 아니오, 견문이 익숙하다는 것은 주견없이 온갖 정보에 따른 것이요 참으로 익숙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대가 이러한 설을 주장한다면 그대의 의도와는 달리 아마 후생들이 전해 들음에 경솔히 서로 물들어 의(義)와 리(利)의 구별이 불명확하고 순(舜)과 도척(盜蹠)의 길이 판별되지 않아, 세속의 관청(觀聽)을 현혹시키고, 학자의 올바른 심술을 파괴하여, 그대가 유식자의 비난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붕우도 또한 연좌의 법에 걸릴 것이니 이것이 내가 깊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감히 말을 다하여 정론(定論)을 구하는 바이니 만약 나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잠깐 이 논쟁을 접어 두고 자신의 마음에 돌이켜 정답을 구해 볼 것이요, 헛되이 도에 무익한 말을 장황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변장자(卞莊子)의 무리가 곁에서 비웃으며 그 간계를 꾸미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
古之聖賢이 從本根上하야 便有精惟一功夫하니 所以能執其中하야 撤頭撤尾無不盡善이오 後來所謂英雄이 則未嘗有此功夫하고 但在利欲場中頭出頭沒하야 其資美者 乃能有所暗合하야 而隨其分數之多少以有所立이나 然其或中或否不能盡善이 則一而已니 來喩所謂三代做得盡하고 漢唐做得不盡者가 正謂此也라 然但論其盡與不盡이오 而不論其所以盡與不盡하고 却將聖人事業去就利欲場中比並較量하야 見有彷彿相似하고 便謂聖人樣子不過如此라하면 則所謂毫釐之差千里之繆者가 其在此矣라 且如管仲之功를 伊呂以下誰能及之리오마는 但其心乃利欲之心이로 迹乃利欲之迹이라 是以聖人雖稱其功하시나 而孟子董子는 皆秉法義以裁之不少假借하니 盖聖人之目固大하니 心固平이나 然於本根親切之地天理人欲之分에 則有毫釐必計絲髮不差者하니 此在後之賢所以密傳槿守하야 以待後來 惟恐其一朝舍吾道義之正 以徇彼利欲之私也어늘 今不講此하고 而遽欲大其目平其心하야 以斷千古之是非하니 宜其指鐵爲金認賊爲子하야 而不自知其非也로다
옛 성현은 근본을 따라 유정유일(惟精惟一) 공부에 힘써 능히 그 중도(中道)를 잡아 철두철미 선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후세의 이른 바 영웅은 이러한 공부에 힘쓰지 않고 다만 이욕(利欲)의 마당에 출몰하여 그 자질이 우수한 자는 도(道)에 암합(暗合)하는 바도 있고 또 그 암합하는 정도에 따라 성공하는 일도 있었으나, 그 혹은 도(道)에 합치하고 혹은 합치하지 않음으로써 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매 일반이라 하겠다.
보내 온 서찰에서 말한
“삼대는 선을 다하고 한당(漢唐)은 선을 다하지 못했다.”
는 것은 정히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을 다함과 다하지 못함만 논하고 그 선을 다하고 다하지 못하는 까닭은 논하지 않으며, 성인의 업적을 이욕(利欲)의 마당에 출몰하는 영웅의 공적과 비교하여 그 비슷한 점을 보고 성인의 모습도 영웅과 다르지 않다고 하니, 이른바
“털끝같은 차이가 천리나 어긋난다.”
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관중의 공로 같은 것은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에 미치리오마는 다만 그 마음이 이욕(利欲)의 마음이고 그 행적이 이욕의 행적이니 성인이 비록 그 공적을 말하지만 맹자와 동자가 모두 법의(法義)로써 판제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았으니 성인의 안목은 광대하고 마음은 평탄하나, 근본의 절실한 곳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별엔 털끝도 재어 실오라기 만한 차이도 용납하지 않으니, 이것이 뒤따르는 현인이 은밀히 전하고 삼가 지켜서 뒤에 오는 군자를 기다려 어느 날 우리의 도의(道義)의 바름을 버리고 저 이욕의 사를 따를까 두려워하기 때문이거늘, 지금 도의(道義)의 정(正)을 강학하지 않고 갑자기 안목을 크게 하고 마음을 평탄하게 하여 천고의 시비를 단정하고자 하니 이는 철(鐵)을 가리켜 금(金)이라 하고 도적을 가리켜 아들이라 하면서 그 잘못을 모르는 것과 같다 하겠다.
若夫點鐵成金之譬가 施之有敎無類遷善改過之事則可어니아 至於古人已往之迹이 則其爲金爲鐵이 固有定形이오 而非後人口舌議論所能改易이 久矣어늘 今乃欲追點功利之鐵하야 以成道義之金하니 不惟費却閑心力하야 無補於旣往이라 正恐礙却正知見하야 有害於方來야로다 若謂漢唐以下便是眞金ㄴ댄 則固無待於點化로대 而其實又有大不然하니 盖聖人者는 今中之金也오 學聖人而不至者는 金中猶有鐵也오 漢祖唐宗用心行事之合理者는 鐵中之金也오 曹操劉裕之徒는 則鐵而已矣라 夫金中之金이 乃天命之固然이라 非由外鑠이니 淘擇不淨이라도 猶有可憾이어던 今乃無故必欲棄舍自家光明寶藏하고 而奔走道路하야 向鐵鑪邊査礦中撥取零金하니 不亦誤乎아 帝王本無異道어늘 王通分作兩三等하니 已非知道之言이오 且其爲道는 行之則是어늘 今莫之禦而不爲하고 乃謂不得已而兩漢之制하니 此皆卑陋之說이라 不足援以爲據니 若果見得不傳底絶學358)이면 自無此蔽矣어늘 今日許多閑議論이 皆原於此學之不明이라 故乃以爲笆籬邊物하야 而不之省하니 其爲喚銀作鐵이 亦已甚矣로다
철을 다루어 금을 만드는 비유는 사람을 가르치는데 있어서의 유교무류(有敎無類)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일에 비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옛 사람의 지나간 행적에 비유하는 것은 그것이 철이 되고 금이 되는 것이 정형(定形)이 있어 뒤 사람의 입으로 논의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지금 공리(功利)의 철을 다루어 도의(道義)의 금(金)을 만들려고 하니, 쓸데없이 심력(心力)을 소비함이 지난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장래의 일을 해칠까 두려운 것이다. 만약 한당 이하를 진금(眞金)이라고 한다면 점화(點化)를 기다릴 필요도 없겠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대개 성인은 금(金) 중의 금(金)이요 성인을 배워 성인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금(金) 중에 철(鐵)이요, 한조(漢祖) 당종(唐宗)의 용심 행사 중에 도리에 합당한 것은 철(鐵) 중의 금(金)이요, 조조(曺操)와 유유(劉裕) 같은 무리는 철(鐵)일 따름이다.
대개 금(金) 중의 금(金)은 하늘이 준 그대로이고 밖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니, 일고 가려서 깨끗하지 못함도 오히려 유감이 있거늘 지금 아무 까닭없이 자신의 빛나는 보배를 버리고 거리로 뛰쳐나가 용광로 주변의 찌꺼기 광석을 가지고 부스러기 금(金)을 취하려 하니 이런 잘못이 어디 있겠는가. 제왕의 도(道)가 본래 다른 도(道)가 없거늘 왕통(王通)이 삼등분으로 나누니 이는 도(道)를 아는 말이라 할 수 없고, 또 그 도(道)를 행하면 옳은 것이 되지만 지금 아무도 막지 않는데도 행하지 않고, 이에 부득이해서 양한(兩漢)의 제도를 쓴다고 하니 모두 비루(鄙陋)한 설인 것이다. 이를 인용하여 의거하기엔 부족한 것이니 만약 노형이 끊어져 전해지지 않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유학을 공부하면 이러한 폐단은 절로 없어질 것이다.
지금 허다한 쓸데없는 의논이 모두 유학이 불명한데 원인이 있는데도 도리어 유학을 울타리 가의 하찮은 물건이라 하여 쳐다보지도 않으니, 이는 은(銀)을 철(鐵)과 바꾸는 것과 같다 하겠다.
來喩又謂凡所以爲此論者는 正欲發儒者之所未備하야 以塞後世英雄之口而奪之氣 使知千塗萬轍이 卒走聖人樣子不得이라하니 以愚觀之컨대 正恐不須如此費力이라 但要自家見得道理分明하야 守得正當이면 後世到此地者가 自然若合符節하야 不假言傳이니 其不到者는 又何足與之爭耶아 況此等議論이 正是推波助瀾과 縱風止燎라 使彼益輕聖賢하야 而愈無忌憚이니 又何足以閉其口而奪其氣乎아
보내온 서찰에서 또 말하기를,
“무릇 이렇게 논하는 까닭은 유학자가 갖추지 못한 것을 발명하여 후세의 영웅의 입을 막고 기를 꺾어 천도만철(千塗萬轍)이 성인의 문을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고 하나, 내 생각에는 이처럼 힘을 소모할 필요없이 다만 자신의 도리(道理) 체득을 분명히 하고 이를 지킴을 올바르게 하면, 후세에 이 같은 지위에 도달하는 자는 부절을 합한 것 같아 말로써 전할 필요가 없고, 그 도달하지 못하는 자는 더불어 다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이러한 의논이 꼭 파도를 일으켜 물결을 더욱 일게 하고 바람을 일으켜 불꽃을 끄는 것과 같아 저를 영웅으로 하여금 더욱 성현을 경시하여 거리낌없이 굳게 할 것이니 어찌 족히 그들의 입을 막고 기를 꺾겠는가.
來喩袞袞359)하야 讀之焹然 反復數過에 尙不能該其首末이라 盖神思之衰落如此하니 況能相與往復하야 上下其論哉아 向來讀書에 頗務精熟하야 中間亦幸了得數書360)하니 自謂略能窺見古人用心處하야 未覺千歲之爲遠이나 然亦無可告語者하니 時一思之以自笑이라 其問一二有業361)未就는 今病已矣라 不能復成書矣니 不知後世之子雲堯夫362)는 復有能成吾志者否아 然亦已置之하야 不能復措意間也하노라 只今日用功夫는 養病之餘에 却且收拾身心하야 從事於古人所謂小學者 以補前日粗踈脫略之咎를 盖亦心庶幾焉이로대 而力或有所未能也라
보내 온 서찰은 그 언설이 너무 무성하여 읽기에 망연하고, 몇 번 반복해서 읽어도 그 본말을 알 수 없으니 정신이 이같이 쇠락하여 어찌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상하를 논할 수 있으리오. 이전에 독서를 함에 자못 정숙(精熟)에 힘쓰고, 또한 몇 권의 책을 독파하여 스스로 고인이 마음을 쓴 곳을 대략 엿볼 수 있겠다고 여겨 천년이 먼 줄을 몰랐더니, 이제 와서 말로써 표현해 다른 사람에게 전할 만한 것이 없으니 가끔 이를 생각하고 스스로 웃을 뿐이라오.
그 사이에 한, 두 가지 저서를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병이 들어 저서를 중단하고 말았으니 후세의 자운(子雲)이나 요부(堯夫) 같은 사람이 다시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버려두고 다시 마음에 두지 않고 있으며 다만 금일 힘쓰는 공부는 병든 몸을 조섭하는 틈틈이 몸과 마음을 추스려 고인이 말하는 ������소학������에 마음을 기울여 전일의 소략(疎略)한 곳을 보충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은 그런 대로 따라가지만 힘이 혹 부족할 때가 있음을 느낀다.
同父聞之에 當復見笑로다 然韓子所謂斂退就新懦趨營悼前猛363)者는 區區故人364)之意尙不能不以此有望於高明也로니 如何如何오 此外世俗是非毁譽는 何足挂齒牙間이리오 細讀來書에 似於此365)未
能無小芥蔕366)也로다 大風吹到/亭子는 却似天公會事發이라 彼洛陽亭館을 又何足深羨367)也리오 當論孟子說大人則藐之라하니 孟子固未嘗不畏大人이로대 但藐其巍巍然者耳니 辦得此心하면 卽更掀却臥房이라 亦且露地睡니 似此方是直正大英雄人이라 然此一種英雄이 却是從戰戰兢兢臨深履薄處做將出來니 若是血氣麤豪는 却一點使不著也니라 伯恭平時亦嘗說及此否아 此公今日何處得來리오 然其於朋友에 不肯盡情하니 亦使人不能無遺恨也라 抱膝吟이 久做不成하니 盖不合先寄陳葉二詩來라 田地都被占却하니 敎人無下手處也리로다 況今病思如此하니 是安能復有好語道得老兄意中事耶아
동보는 이 말을 듣고 나를 비웃을는지 모르나, 한자(韓子)가
“물러나서는 새로운 게으름이 생기고 나아가 영위하자니 험난한 앞일이 두렵다.”
고 했으니, 내 뜻은 존형에게 이러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바이니 존형은 어떠한지 모르겠구료. 이 밖에 세속의 시비훼예(是非毁譽)는 입에 담아 무엇하겠는가.
보내 온 서신을 자세히 읽어보니 존형이 아직도 세속의 시비훼예에 마음을 쓰는 것 같다. 큰바람이 존형의 정자(亭子)를 날려버렸다 하니 이는 하늘이 존형을 경계하기 위하여 바람을 일으킨 것이라 생각하고 자성(自省)하기 바란다. 저 낙양의 정관(亭觀)을 어찌 부러워하겠는가. ������맹자������의
“대인을 유세할 땐 그를 작게 보라.”
는 말을 논한다면, 맹자가 진실로 대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외외(巍巍)한 외모를 작게 보라는 말일 것이다. 맹자가 뜻하는 이 마음을 확실히 깨달으면 누워 자는 방을 날려 버렸다 하더라도 역시 노지(露地)에서 또 잘 수 있으니,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대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이 도리어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임심이박(臨深履薄)하는 곳에서 나오니 혈기와 추호(麤豪) 같은 것은 일점도 흉중에 머물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백공(伯恭)이 평시에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백공 같은 사람을 지금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붕우에겐 인정상 사실대로 다 말하지 않으니 유한(遺恨)이 없지 않다. 포설음(抱膝吟)은 시일이 오래되었지만 아직 짓지 못하였다. 마땅치 않게도 먼저 진공(陳公), 섭공(葉公)의 두 시를 부쳐 보내어 이를 읽어보니 시의 소재를 두 시가 먼저 취해버렸으니, 나는 착수할 곳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지금 병든 생각이 이 같으니 어찌 좋은 말이 있어 존형이 의중에 둔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承欲爲武夷之游하니 甚慰所望이라 但此山이 冬寒夏熟不可居오 惟春暖秋凉紅綠紛葩霜淸木脫此兩時節이 爲勝游耳라 今春纔得一到하대 而不暇宿하고 秋來以病未能再往하니 職事甚覺弛廢라 若得來春命駕하면 當往爲數日款也리라 但有一事處之不安하야 不敢不布聞하니 私居貧約하야 無由遣人往問動靜이라 而歲煩遣介存問生死로 遂爲故事하대 旣又闕然不報하고 而坐受此過當之禮하니 雖兄不以爲譴이나 而實非愚昧所敢安也니라
존형이 무이(武夷)를 유람하고자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다만 이 산이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워 유람하기가 좋지 않고 따뜻한 봄과 서늘한 가을에는 홍록이 부나(紛葩)하고 상청(霜淸)이 목탈(木脫)하니 봄가을이 유람하기엔 좋을 것 같다.
나는 금년 봄에 겨우 한 번 다녀왔지만 유숙하지는 못했고, 가을이 와도 이렇게 병든 몸으로 다시 산에 오르지를 못하니 이제 산에 오르는 일 조차도 게을러 졌다 보오. 만약 오는 봄에 존형이 여기에 올 수 있으면 함께 가서 며칠 머물고 싶다. 한가지 마음이 편치 못한 일이 있어 감히 말을 아니할 수 없으니, 나는 사는 것이 빈약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을 수도 없는데, 존형은 해마다 번거롭게 사람을 보내어 생사(生死)를 물어 고사에 있는 것처럼 하니, 내 이를 보답하지 못하고 앉아서 이 과분한 예를 받기만 한다. 비록 존형이 나를 꾸짖지는 않지만 실로 우매한 나는 감히 마음이 편치는 않다.
所謂不能自爲時者는 則又非區區所敢聞也라 但願老兄毋出於先聖規矩準繩之外하고 而用力於四端之微하야 以求乎袞公之所樂을 如其所以告於巍巍當坐之時之心이면 則其行止忤合이 付之時命하야 有不足言矣라 就其不遇라도 獨善其身하야 以明大義於天下 使天下之學者로 皆知吾道之正而守之하야 以待上之使令이면 是乃所以報不報之恩者니 亦豈必進爲而撫世哉아 佛者之言曰 將此身心奉塵刹是則名爲報佛恩이라하고 而杜子美亦云 四隣耒耟出何必吾家操리오하니 此言皆有味也니라 夫聖賢固不能自爲時나 然其仕止久速이 皆當其可하야 則其所以自爲時者는 亦非他人之所能奪矣니 豈以時之不合으로 而變吾所守以徇之哉아
존형이 자신은 ‘시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한 말에 대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노형은 선성(先聖)이 전한 법도를 벗어나지 말고 사단(四端)의 미묘한 이치에 힘을 써 안자가 즐긴 바를 구하기를 노형이 공자와 안자의 사당에 고했던 때의 마음과 같이 하면 그 행하고 그치고 어긋나고 합치됨이 모두 시명(時命)에 부합하여 스스로 시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때를 만나지 못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더라도 홀로 선을 행하여 천하에 대의를 밝혀 천하의 학자들로 하여금 우리 도의 바름을 알게 하고 이를 지키게 하여 하늘의 명을 기다리면 이것이 곧 하늘의 은혜를 갚는 것이니 어찌 꼭 관직에 나아가 세상을 다스려야만 하겠습니까.
불자의 말에,
“이 몸과 마음으로 천지를 받들면 이것이 곧 부처님 은혜를 갚는 것이다.”
고 하였고 ,두자미(杜子美) 역시
“사방 이웃이 모두 쟁기를 가지고 나오니 하필 내가 쟁기를 잡으랴.”
하니, 이 말이 생각해 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대개 성인이 본래 스스로 시대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지구속(仕止久速)을 모두 마땅하게 하니 그 시대를 위한 것이 누구도 뺏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어찌 시대가 나와 맞지 않다고 해서 내가 지키는 것을 바꾸어 세상에 굴종하겠습니까.
自聞榮歸로 日欲遣人致問未能이리니 專使之來에 伏奉手誨하고 且有新詞厚幣佳實之貺하니 感認不忘之意愧怍亡喩라 老兄志大宇宙하고 勇邁終古는 伯恭之論이 無復改評이라 今日始於後生叢中에 出一口氣盖未足爲深賀나 然出身事主는 由此權輿하야 便不碌碌하니 則異時事業을 亦可卜矣로다 但來書諸論을 鄙意頗未盡曉하고 又如二者相似而寔不同處는 亦所未喩라 若如鄙意는 則須是先得吾身好라야 黨類亦好라야 方能得吾君好天下國家好라 而所謂好者는 又有虛實大少久近之不同하니 若自吾身之好而推之면 則凡所謂好者는 皆實大오 而又久遠하고 若不自吾身推之면 則彌縫掩覆하야 雖可以苟合於一時나 而凡所謂好者는 皆爲它日不好之病根矣라 盖脩身事君이 初非二事니 不可作兩般看이라 此是千聖相傳正法眼藏이니 平日所聞於師友而竊守之라 今老且死에 不容改易하노니 如來喩者는 或是諸人事오 宜非老僕所敢聞也라 不知象先所論이 與此如何오
존형이 과거에 급제하여 영광스럽게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이래로 나날이 사람을 보내어 하례를 하려 하였으나 이윽고 실행치 못하였더니, 사령이 옴에 엎드려 편지를 받고 또 신사(新詞)를 지어 보내고 또 후폐와 가실을 딸려 보내 주시니 나를 잊지 않는 정을 느낌에 부끄러움이 비할 데가 없습니다.
노형이 뜻이 크고 용기가 뛰어나다는 백공의 말은 다시 고쳐 말할 것이 없으니 금일 후생들 중에 처음으로 급제하여 기(氣)를 편 것은 그렇게 심히 축하할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나아가 군주를 섬김이 이로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만만치 않게 해내면 훗일 노형의 사업에 크게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내서(來書)의 제설은 내 자못 다 깨닫지 못하겠고 존형과 나의 생각이 비슷하면서 같지 않는 곳에 또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반드시 먼저 내 자신이 진실로 좋아하는 것을 체득해야만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이어 우리 임금이 좋아하고 온 천하 국가가 좋아할 것이고 이른바 좋아한다는 것이 허․실․대․소․구․근의 같지 않음이 있으니 만약 내 자신이 진실로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나가면 모든 이른 바 좋아하는 것이 모두 실․대․구․원하고 만약 내 자신으로부터 미루어 나가지 않으면 임시 방편으로 깁고 가려서 비록 일시에 구차하게 합당하나 무릇 이른 바 좋다고 하는 것이 훗일 불호(不好)의 병근(病根)이 될 것입니다.
대저 수신과 사군이 두 가지 일이 아니니 두 가지 형태로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천성(千聖)이 전한 심법의 정도이니, 평일 사우로부터 듣고 내밀히 지켜 와 지금 늙고 병들 때까지 고치지 않는 것입니다.
보내 온 편지에서 나에게 도를 행하여 시대를 구제하기를 권하였는데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말입니다. 상선(象先)이 말한 것이 이 말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與李誠父
久不拜狀이리니 玆聞榮被親擢하야 進居六察之聯하니 深以爲慰라 比日淸和에 伏惟台候動止百福가 先生抱道不試나 然其心未嘗忘當世也리니 門人弟子가 旣不足以少承厥志오 而家有賢子가 足繼其業하니 學者之望이 蓋非常人之比라 況新天子繼照之初에 慨然有志於治로대 而外則夷虜憑陵에 國威不振하고 內則陰邪朋結에 國論未定하니 此亦賢人君子效忠宣力垂名竹帛之秋也라 尊兄平日立志持身이 固有定論이나 然區區更願一意爲國하야 無徇常日往還厚善之私하고 深察天下公議之所在精慮이 結行之하야 使陰消於上而陽長於下하고 政事脩理而國勢尊安이면 不亦老先生平日之所望於後人者乎아 熹託契深厚라 不敢效常人進諛하야 詞以贊除用之喜하고 狂妄及此하니 不審尊兄二爲如何오 胡公論事는 皆合公論하니 甚彊人意라 但二小諫之去殊可惜이어늘 乃不能遂其言이 何耶諸公排逐正人하고 乃以尊兄塞責하니 此相輕之甚하니 謂兄必不能爲薛許耳니 不可懷此小惠而忘大辱幸深念之어다
여이성보(與李誠父)
오랫동안 글월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영예롭게도 친탁(親擢)으로 육찰(六察)의 반열에 나아간다 하니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근일 청환한 날씨에 존체 두루 평안하신지 궁금합니다. 선생께서 뜻을 품고 펴지 못하고 계시나 마음은 항상 당세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문인 제자가 그 뜻을 받들지 못했었는데 가정에 어진 자제가 있어 선생의 뜻을 잘 계승하니 존형에 대한 학자의 촉망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 천자께서 보위를 이어 받은 처음에 개연(蓋然)히 치평에 뜻을 두었더니 밖으로는 오랑캐가 빙릉(憑陵)하여 국위를 떨치지 못하고 안으로는 음사(陰邪)한 자들이 붕당을 지어 국론을 정하지 못하니 이때야말로 현인 군자가 충성을 바쳐 능력을 발휘하여 청사에 이름을 남길 좋은 때입니다.
존형의 평일 입지(立志)와 지신(持身)이 진실로 정론이 있으나 나는 다시 바라노니 일념으로 국가를 위하며 평상시 오고 가는 사사로운 정리는 따르지 말고 천하 공의(公議)의 소재를 깊이 살펴서 정려(精慮) 결행하여 위로 소인배가 물러나고 아래로 군자가 전출토록 하며 정사가 수리(修理)되고 국세가 존안하면 또한 노 선생이 평일 후인들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겠습니까. 내 친분이 두터운 관계로 다른 사람처럼 아름다운 말로 제수의 기쁨을 칭송하지 않고 이같이 광망(狂妄)한 말을 하니 존형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호공(胡公)의 논사(論事)는 공론에 합당하여 사람의 뜻을 자못 진작시킵니다 마는 두 소간(小諫)의 떠남은 매우 애석한 일이니 호공이 할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제공이 올바른 사람〔正人〕을 밀어내고 존형을 제수함으로써 그들의 책임을 면하고자 하니 이는 존형을 가벼이 여김이 자못 심한 것입니다. 그들은 필시 존형이 설(薛)과 허(許) 두 사람처럼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니 작은 은혜를 생각하고 큰 치욕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與留丞相
熹嘗竊謂朋黨之過가 止於縉紳하대 而古之惡朋黨而欲去之者는 往往至於亡人之國하니 盖不察其賢否忠邪하고 而惟黨之務去면 則彼小人之巧於自謀者는 必將有以自蓋其迹하고 而君子는 恃其公心直道하야 無所回互라 往往反爲所擠而目以爲黨하니 漢唐紹聖之已事는 今未遠也라 熹雖至愚나 伏讀丞相所賜之書하야 知丞相愛君憂國之心이 無一言一字不出於至誠測怛하니 此天下之賢人君子所以相率而願咐於下風也로대 而未能不以朋黨爲慮하니 熹恐丞相或未深以天下之賢否忠邪爲已任이라 是以上之所以告于君者는 未能使之判然不疑於君子小人之分하며 下之所以行於進退予奪者는 未能有以服天下之心慰天下之望오 而陰邪讒賊이 常若反有侵陵干犯之勢하고 丞相이 又慮此身自陷於君子之黨而使彼之蓄憾久而爲禍深也하야 又稍故爲迷亂昏錯之態以調柔之하야 反使之氣豪意健에 傍若無人하야 敢於干祿之章에 肆爲誣善之語하대 而朝廷亦不之問也하니 不杜門自守하야 孤立無朋者는 此一介之行也오 延納賢能하고 黜退姦險하야 合天下之人以濟天下之事가 宰相之職也니 奚必以無黨者로 爲是오 而有黨者로 爲非哉아
여유승상(與留丞相)
나는 평소에 붕당의 화는 시하에 그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옛날의 붕당을 미워하여 제거하고자 하는 자가 왕왕 나라를 망치는 데까지 이르니, 대개 그 현부(賢否)와 충사(忠邪)를 살피지 않고 당을 없애는 데만 힘쓰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을 보호하는데 교묘한 소인들은 그 자취를 덮어 감추는데 반해 자신의 공변된 마음과 곧은 도만 믿는 군자들은 스스로를 변호하는 바가 없어 왕왕 밀려나는 바가 되어 당인으로 지목되니 한당과 소성(紹聖)년간의 일은 그렇게 멀지 않은 사례입니다.
내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승상이 주신 글을 읽음에 승상의 충군 우국하는 마음이 한 마디도 지성 측달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겠으니, 이것이 천하의 현인 군자가 다투어 승상의 문하에 오이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이들이 붕당으로 지목될까 염려를 하는 것은 승상께서 천하의 현부(賢否)와 충사를 깊이 살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위로 주상께서 고하는 것이 주상으로 하여금 군자 소인의 구분을 확연히 의심치 않도록 하지 못하고 아래로 관리를 진퇴시키는 것이 천하의 마음을 심복시키고 천하의 바램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음사한 참적들이 도리어 침능 간법(干犯)의 세가 있는 것 같고 또 승상 자신이 군자의 당에 빠져 음사한 참적의 미움을 사 화를 당할까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일부러 애매한 태도를 취하여 저들을 순하게 길들이려 하니 도리어 저들은 기세 등등하고 방약무인하여 감히 구천(求薦)의 글에 방자하게도 선류(善類)를 무고하는 말을 하고 조정이 또 이를 못 들은 체합니다.
대개 두문 자수(自守)하여 홀로 붕당이 없는 자는 일개 포의(布衣)에 불과하지만 어진이와 능한 자를 맞아들이고 간사한 자를 물리쳐 천하의 사람들과 협력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재상의 직무입니다. 하필 당이 없는 자를 옳다 하고 당이 있는 자를 그르다 하겠습니까.
夫以丞相今日之所處는 無黨則無黨矣어니와 而使小人之道日長하고 君子之道日消하야 天下之慮는 將有不可勝言者가 則丞相安得辭其責哉아 熹不勝愚者之慮하노니 願丞相先以分別賢否忠耶로 爲己任하야 其果賢且忠耶ㄴ댄 則顯然進之하야 惟恐其黨之不衆而無與共圖天下之事也하고 其果姦且邪耶ㄴ댄 則顯然黜之하야 惟恐其去之不盡而有以害吾用賢之功也 不惟不疾君子之爲黨이라 而不憚以身爲之黨하고 不惟不憚以身爲之黨이라 是又將引其君以爲黨而不憚也니 如此則天下之事는 其庶幾乎ㄴ댄 前年逐二諫官하고 去年逐日御史 近聞又逐一諫官矣라 上下不交하야 而天下 將至於無邦이어늘 丞相不此之慮하고 而慮士大夫之爲黨하니 其亦誤矣로다 熹雖荷知獎而未遂掃門之願이리니 顧蒙出語之勤에 似不爲無可取者라 是以輒空胸臆하야 少答恩顧하니 不自知其狂且妄也하노라
승상의 지금 처한 바가 무당이긴 하지만 소인의 도로 하여금 날로 자라게 하고 군자의 도로 하여금 날로 사라지게 하여 장차 말할 수 없는 폐해가 있을 것이니 승상은 그 책임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내 어리석은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승상께 바라노니 먼저 현부(賢否)와 충사(忠邪)를 확실히 구별하여 현인과 충신은 확실하게 진출시켜 그 당이 모자라 함께 천하의 일을 도모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간특하고 사악한 자는 확실하게 내 쫓지 못하여 나의 용현(用賢)의 공을 해칠까 염려하여 군자가 당이 되는 것을 미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말며 자신이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상을 이끌어 당이 되게 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천하의 일이 거의 다스려질 것입니다.
전년에 두 간관을 쫓아내고 또 한 간관을 쫓아냈다 하니 상하가 교류가 없어 천하가 앞으로 국가가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거늘 승상은 이를 염려하지 아니하고 사대부가 당이 되는 것을 염려하니 이 또한 큰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승상이 나를 알아주고 장려해 줌에도 불구하고 아직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지 못했거늘 도리어 부지런히 나를 깨우쳐 주시니 나에게 취할 것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문득 마음속의 생각을 다 말해 작으나마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나 그 광망(狂妄)을 스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熹竊見詔興初年에 趙忠公爲相하야 一時收用 人材之盛을 後來莫及이나 然細考其間亦豈無不滿 人意者리오 但其多寡之勢는 此彊彼弱이라 故雖 少雜이나 而不能害治하야 當時有小元祐之號리니 今者竊觀丞相之心이 卽趙公之心이나 然論一時人 材賢佞之勢면 則此少而彼多하고 此弱而彼彊하니 此則區區所以不能不深憂하야 而輒以分別賢否忠 耶之說로 爲獻於門下也니 伏乞勻照하라
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흥(紹興) 초년에 조 중간공이 재상이 되어 일시의 인재 수용이 융성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자세히 보니 또한 만족스럽지 못한 것도 없지 않았습니다. 다만 많고 적음의 세가 군자는 많고 소인은 적어 치평을 해치지는 않아 당시에 원우(元祐)년간의 선정이 조금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승상의 마음은 조공의 마음과 같으나 일시 인재 현부의 세를 보면 군자는 적고 소인은 많으며 군자는 약하고 소인은 강하니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여 분별 현부 충사의 말을 문하에 드리는 까닭이니 양찰하시기 바랍니다.
如聞比日朝士는 有以不願爲忠臣368)之說를 當上心被親擢者라하니 遠方傳聞이 不知信否어니아 如審有之면 則小人過計之憂는 恐其不得爲興邦之言也라 又聞其人亦嘗出入門墻하야 深辱知顧라하니 當是其時에 未有此論어니와 如又不然369)이면 則知言知人之訓을 妄意丞相更當留意하야 博求直諒之賢하야 置之東閤370) 與圖天下之事ㄴ댄 則大人格心之效를 不日可見而勳業丕茂는 不但踰於前後數公矣리라 諸葛武侯之敎에 有曰 諸有忠慮於國者는 但勤攻吾之闕이면 則事可成賊可死功可翹足371)而待矣라하고 太祖372)皇帝嘗於侍臣하라하대 唐太宗이 虛心求諫하야 容受盡言이 固人主之難事나 然曷若自不爲非하야 使人無得而諫之爲愈乎아하시니 至哉라 言乎며 大哉라 言乎여
근일에 들은 바에 의하면 조정의 관리들 중에 ‘직언하는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설을 가지고 군상(君上)의 마음에 맞추어 친탁(親擢)을 받은 자가 있다 하니, 멀리서 들은 말이라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으나, 만일 사실이라면 내 지나친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는 나라를 흥하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듣건대 그 사람이 전에 승상의 문하에 출입하며 매우 아낌을 받은 자라 하니, 그 당시에도 그러한 말이 없었겠지만 만약 그러한 말이 있었다면 승상은 지언(知言)과 지인(知人)에 대한 성인(聖人)의 훈계를 유념하여, 널리 직언하는 현인 군자를 구하여 동합(東閤)에 두고 더불어 천하의 일을 도모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승상께서 군심(君心)을 바르게 한 공효를 빠른 시일 안에 볼 수 있을 것이며, 승상의 업적이 전후 제공(諸公)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제갈 무후의 말에
“국가에 충성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의 결점을 잘 지적해 주기 바란다. 그러면 일은 이루어질 수 있고, 적은 죽일 수 있고, 공은 금방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태조 황제께서 일찍이 근신에게 말하기를,
“앙 태종이 마음을 비우고 간언(諫言)을 구하여 직언을 다 수용했으니 참으로 인주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아니하여 신하로 하여금 간할 것이 없게 하는 것보다 나으랴.”
했으니, 지극하도다, 그 말이여! 위대하도다, 그 말이여!
愚竊願以武侯之言으로 爲丞相獻하노니 又願丞相이 以太祖聖訓으로 日啓迪373)於上前也하노니 至如朋黨之論이 則前記所陳이 有未究者라 致煩鐫喩374)하야 至於勤縟375)하니 三復愧悚에 不知所言이라 章376)蔡377)之禍는 誠如尊命378)이어니와 但忠賢奔播379)至於如此는 推本其原켄댄 盖自有在380)로대 而九年之間381)에 黜幽陟明하야 培固根本이 其效見於靖康382)建炎383)之際者를 民到于今賴之하야 又自有不可誣者하니 若其無此오 而元豊384)紹聖385)이 便相傳襲이면 則後日之禍는 豈但若此而已哉아 前輩有論嘉祐386)元豊에 兼收並用異趣之人하야 故當時朋黨之禍는 不至於朝廷者를 世多以爲名言아하대 熹嘗謂此乃不得已之論이나 以爲與其偏用小人而盡棄君子론 不若如是徵猶爲愈오 非以爲君子를 不可專任이오 小人을 不可盡去하야 而此擧眞可爲萬世法也라
내 무후의 말을 승상께 드리고자 하니 승상은 태조의 성훈을 주상께 말씀드리기 바랍니다. 붕당(朋黨)에 관한 말씀은 전서(前書)에 진술한 것이 미진한 바가 있어 다시 절실한 말씀을 중언부언 드리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장채(章蔡)의 화의 원인은 진실로 승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마는 다만 충현(忠賢)의 분파(奔播)가 이에 이른 것은 그 원인을 미루어 보건대 달리 까닭이 있고 9년 동안에 소인을 축출하고 현인을 진출시켜 그 근본을 배양한 효과가 정강(靖康)과 건염(建炎) 년간에 나타나 백성이 지금 이에 힘입은 결과는 또 따로 있다 하겠습니다. 만약 9년 동안의 소인을 내침이 없이 원풍(元豊)에서 바로 소성(紹聖)으로 이어졌다면 훗일의 화가 어찌 이에 그쳤겠습니까. 전배의
“가우(嘉祐) 원풍(元豊) 년간에 뜻이 다른 사람을 겸수․병용한 까닭으로 당시의 화가 조정에까지 미치지 않았다.”
라는 말을 세상에서 명언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소인만 등용해 쓰고 군자는 다 버리는 것보다 이와 같이 병용해 쓰는 것이 좋다는 뜻이고 군자만 오로지 써서는 안되고 소인을 다 버려서는 안된다는 뜻은 아니며, 또 이 같은 병용이 진정 만세의 법이 된다는 듯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若使當時盡用韓富之徒하고 而幷絀王蔡387)之屬이면 則其所以卒就慶曆/388)之宏規하고 盡革熙寧389)之秕政者는 豈不盡美而盡善乎아 後之覽者는 得其言而不得其心하야 知退守其所爲不得已之論하고 而不知進求其盡美盡善之策하니 是以國論日卑하야 而天下之勢卒至於委靡而不振하니 此可悲也라 至如元祐는 則其失在於徒知異已者之非君子오 而不知同已者之未必非小人이라 是以患生於服心390)之間하야 卒以助成仇敵之勢하니 亦非獨章蔡之能爲已禍也라 然則元祐之失이 乃在於分別之未精이어늘 而丞相以爲太甚하니 熹竊有所未喩也라 是以知言知人이 聖有明誡을 區區已效於前矣니 深願丞相之加之意也하노라 抑又聞之하니 天下事勢有消長賓主之不同하니 以易而言켄댄 方其復而長也391)에 一陽爲主於下하야 而五陰莫之能遏하고 及其遇而消392)也에 五龍夭矯於上하대 而不足以當一陰하니 羸豕蹢躅之孚393)가 甚可畏也라 丞相觀於今日之勢孰爲主而方長乎며 孰爲客而方消乎 孰能制人而孰爲制人者乎아 於是焉而汲汲乎以求天下之賢以自助하야 使之更進迭入에 日陳安危治亂之明戒하야 以開上心하고 排抑陰邪하야 無使主勢小傾而陷入其黨이라도 尙恐後時而無及於事하고 不精而未免有失이어던 亦何遽至預憂其分別太甚하야 而爲異日之患乎아
만약 당시에 한부(韓富)의 무리만 쓰고 왕채(王蔡)의 무리를 다 내쫓았다면 경력(慶曆) 년간의 거대한 이상을 실현하고 희령(熙寧) 년간의 비정(秕政)을 완전히 개혁하였을 것이니, 어찌 진선진미(眞善眞美)가 아니겠습니까.
후인이 그 말만 듣고 그 마음을 알지 못하며, 물러나 그 부득이한 말의 뜻만 고수할 줄 알고 나아가 그 진미선선(眞美眞善)한 방책은 강구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국론이 날로 비루해지고 세상의 기세가 시들어져 떨치지 못하니 이것이 슬픈 일입니다. 원우(元祐) 년간의 사태는 그 실책이 다만 자기들과 뜻이 다른 사람이 군자가 아닌 것만 알고 자기들과 뜻이 같은 사람들 중에 소인이 섞여 잇다는 것을 알지 못한데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화근(禍根)이 자기들의 당인 가운데서 생겨나 마침내 구적(仇敵)의 세를 격성(激成)하니 꼭 장채(章蔡)의 무리만이 화를 일으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원우 년간의 실책이 곧 군자 소인의 구별이 엄밀하지 못한데 있거늘, 승상은 그 구별이 너무 심했다고 하니 제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지언(知言) 지인(知人)에 대한 성인의 명백한 훈계를 승상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승상께서는 다시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천하의 사세(事勢)는 소장(消長)․빈주(賓主)가 있으니 ������주역������의 괘로써 말할 것 같으면, 복(復)괘의 바야흐로 양(陽)이 회복되어 자랄 즈음에 하나의 양이 아래에서 주(主)가 되어 다섯 음(陰)이 이를 막지 못하고, 구괘(姤卦)에서 양(陽)이 사라질 즈음에 다서 양(陽)이 위에서 창성(暢盛)하여도 아래의 한 음(陰)을 감당하지 못하니, 힘빠진 돼지이지만 그 본성을 믿고 날뛰면 심히 두려운 것과 같습니다. 승상께서는 금일의 사태를 보건대 누가 주가 되어 자라고 있고 누가 객이 되어 멸되고 있으며, 누가 사람을 제어하고 누가 사람에게 제어 당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승상께서는 이러한 때에 부지런히 천하의 현인을 구하여 자신을 돕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번갈아 들어와 날마다 안위(安危) 치란(治亂)의 명계(明戒)를 진술케 하여, 위로 군상의 마음을 열고 아래로 소인의 진출을 막아, 군주의 세가 기울어져 소인의 당에 빠지지 않도록 하되, 오히려 때를 놓쳐 일에 미치지 못하고 분별이 정밀하지 못해 실책을 면치 못할까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어찌 미리 그 분별이 태심(太甚)하여 뒷날 화가 미칠까 걱정부터 하십니까.
竊以孟冬이 漸寒하니 伏惟丞相國公勻候起居百福가 熹昨者人還에 伏奉省箚394)하니 喩以聖恩褒借395)하야 不許終辭之旨하고 又蒙勻慈396)는 加賜手敎하야 所以開曉는 尤極懇至하니 伏讀再三에 仰體吾君吾相委曲眷憐之意如此其後하야 謹已齋祓397) 祗拜告命398)하고 奉表稱謝矣라 區區願丞相深觀大易陰陽消長否399)泰400)往來之變하야 謹察君子小人之分而公進退之하고 毋爲調停401)之說所誤하야 使忠言日聞하고 聖德日新하야 而天下之人이 眞享富壽康寧之福하고 朝廷之上에 眞見平平湯湯之風이면 則衰病之軀는 老死丘壑이라도 無所憾矣어니와 如於忠邪之分에 察之有未明하며 消長之戒에 信之有未篤하고 而又以一身利害之私로 參錯乎其間이면 則今所謂持平402)者가 是乃所以深助小人之勢하야 以爲君子之病이라 將見彼黨日盛하고 此勢日孤하야 天下之事는 將有不可爲者니 丞相雖欲奉身而退하야 窮勝事而樂淸時나 亦不得辭後世良史之責矣라 熹不勝感德之至하야 輒復冒昧言之하노니 伏惟恕其狂妄而采其千慮之一得焉이면 則又幸之大者니라
점점 추워지는 초겨울 날씨에 승상국공의 균후 기거가 두루 평안하신지 문후드립니다. 지난 번 심부름하는 사람이 돌아올 때에 엎드려 성차(省箚)를 받으니 성상(聖上)의 발탁을 사양치 말라 하시고, 또 손수 따뜻한 편지를 써서 보내 주시니, 타일러 깨우쳐 주는 바가 매우 간절합니다.
엎드려 재삼 승상의 수고를 읽음에 군상의 자상하고 뜻이 이같이 두터움을 깊이 깨달겠습니다. 삼가 재계하여 고명(告命)을 절하여 받자옵고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대역(大易)의 음양(陰陽)이 소장하고 비태(否泰)가 왕래하는 변화를 깊이 살피고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분명히 하여 공평무사하게 진퇴시켜 조정(調停)의 설에 오도되지 말고 충언이 날마다 들리고 성덕이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여 천하의 사람이 부수강녕(富壽康寧)의 복을 누리고 조정의 윗사람이 평평탕탕한 풍기(風氣)를 볼 수 있으면 늙고 병든 몸이 산골짜기에서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충사(忠邪)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소장(消長)의 경계(警戒)를 돈독히 믿지 못하며, 또 일신의 이해 관계를 그 사이에 개입시키면, 지금 말하는 조정이란 곧 소인의 세력을 키워 군자를 병들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인의 세력은 날마다 왕성해지고, 군자의 세력은 날마다 미약해져, 천하의 일이 장차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승상께서 비록 몸을 가다듬고 물러나 좋은 일을 다하고 맑은 때를 즐기고자 하더라도 후세 사가(史家)들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승상의 후덕에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여 외람되게도 다시 우매함을 무릅쓰고 한 말씀 올리오니, 그 광망(狂妄)을 용서하시고 천려일득을 취하시면 크나큰 다행이겠습니다.
卽得朝士私書에 語及近事하니 恭聞丞相忠誠感格에 天意爲回하야 重陰之底에 復有陽復之漸403)하니 乃竊自幸其言404)之不效리니 旣又反覆以思하대 則恐今日之事는 未足爲喜오 而前日之論이 猶有可思者也라 盖自古君子小人雜居並用에 非此勝彼면 卽彼勝此라 無有兩相疑而終不決者하니 此必然之理也라 故雖擧朝는 皆君子오 而但有一二小人이 雜於百執事之間이라도 投隙抵巇405)已足爲患이어든 況居侍從之列乎며 況居丞弼406)之任而潛植私黨하야 布滿要津乎아 盖二三本臣者는 人主之所與分別賢否하며 進退人材하야 以圖天下之事니 自非同心一德에 協恭和衷407)하야 彼此坦然에 一以國家爲念하고 而無一毫有已之私는 間於其間이면 無以克濟라 若以小人參之면 則我之所賢而欲進之者를 彼以爲害已而欲退之하며 我之所否而欲退之者를 彼以爲助已而欲親之하고 且其可否異同이 不待勉爭力辨而後決이라
조정에 있는 어떤 관리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시사(時事)에 관해 말하던 중에 승상의 충성이 주상을 감격시켜 음사(陰邪)한 소인들 속에서 충현이 점점 살아난다고 하니, 전서에서 제가 한 말이 사실대로 되지 않았음을 다행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뒤집어 생각하면 금일의 일을 기뻐할 것이 아니고, 전일의 말을 오히려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개 옛부터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으면 군자가 소인을 이기지 않으면 소인이 군자를 이겨 양쪽이 서로 의심하면서 결판이 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필연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비록 온 조정이 모두 군자이고 한 두 사람의 소인이 그 사이에 끼여서 그 틈을 노린다면 이미 화근이 되기에 족하거늘, 하물며 그 소인이 시종(侍從)의 반역에 있고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당(私黨)을 만들어 요직에 제 사람을 많이 배치하는 경우에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대신이란 인주가 함께 현부(賢否)를 구별하고 인재를 진퇴시켜 천하의 일을 도모하는 자이니, 한 마음 한 뜻으로 마음을 합쳐 모두 평탄한 마음으로 오직 국가를 생각하고 털끝 만한 사심이라도 그 사이에 끼이지 않게 하지 않으면, 대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소인이 그 사이에 끼이게 되면, 내가 어질다고 하여 진출시키고자 하는 자는 그는 그를 해친다고 생각하여 쫓아내고자 할 것이고, 내가 어질지 못하다고 하여 물리치고자 하는 자는 그는 그를 도운다고 생각하여 가까이 하고자 할 것이니, 그 가부(可否) 동이(同異)가 애써 다툴 필요도 없이 뻔할 것입니다.
但於相與進對之間에 小爲俯仰前郤之態라도 而已足以敗吾事矣니 是豈可不先以爲慮하고 而輕爲他計하야 以發其害我之機哉아 此猶姑以勻敵之常勢言之耳라 況今親踈新舊之情이 本自不侔하고 忠邪遜逆之趣는 又各有在하야 彼已先据408)必勝之地而挾群黨以塞要衝 凡一擧手一搖足이 皆足以爲吾之害오 下至近習纖人409)이 亦或爲之挾持簡牘에 關通內外하야 以助其勢어늘 而吾乃兀然孤居하고 孑然特立하야 絶無蚍蜉蟻子之援은 可與用力於根本之地하야 以覺上心而淸言路하고 其可望以爲公道之助者를 不能留之蹞步之間이오 而欲求之千里之外410)하야 彼方爲主어늘 而我方爲客하고 彼方爲刀어늘 而我方爲肉하니 此固天下之危機敗證이오 而又時取彼所甚惡之人하야 置之不能爲助之處하야 徒益其疑而無補於事하니 愚恐雖能遍起天下之賢人君子하야 置之內外라도 彼亦不必動其聲氣하고 但陰拱而微伺하야 其勢似能害已어니와 則便一眴目而群吠四起하야 使來者로 或未及門하고 至者를 或未煖席而已狼狽倉皇411)하야 奔迸四出矣니 尙何國事之可圖哉아
소인들과 함께 인주 앞에서 정사를 논할 경우에 조금이라도 화해 절충하려는 태도를 보이면 이미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니, 어찌 먼저 소인들을 경계하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겸수 병용(兼受並用)할 생각을 하여 군자를 해칠 기틀을 마련해 주려 합니까. 이는 잠시 대등한 상세(常勢)로 말한 것일 뿐이니, 더구나 지금의 상황은 친소(親疎) 신구(新舊)의 사정이 서로 비교가 되지 않고, 충사(忠邪) 손역(遜逆)의 길이 서로 다름이 판연하니, 저들은 이미 먼저 필승의 위치를 점거하여 군당을 끼고 요충을 차지하여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우리의 해가 되며, 아래로 심부름꾼까지도 혹 서신을 전달하며 내외를 통하는 사이에 그 세력을 돕고 있거늘, 우리는 혈혈단신 외롭게 서서 근본에 더불어 힘써 군상의 마음을 깨우치고 언로를 맑게 할 개미 새끼 한 마리 원군이 없고, 공도(公道)를 도울 충현은 가까이 두지를 못하면서 천리 밖에서 구하고자 하니, 저들은 주인이요 우리는 객이며, 저들은 칼이요 우리는 고기인 형세입니다.
천하가 위기에 처한 상황이 이러한데, 또 가끔 저들이 죽도록 미워하는 나 같은 사람을 뽑아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임명하려 하니, 공연히 저들의 의심만 더 사고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천하의 현인을 다 모아서 조정 내외에 두더라도, 저들은 그 성세를 움직일 필요도 없이 가만히 팔짱을 끼고 우리의 형세를 살펴서, 자기를 해칠 기미가 있으면 금방 눈짓 하나로 뭇 개가 짖으며 사방에서 일어나, 오는 자로 하여금 문에 이르지도 못하게 하고, 오 자로 하여금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도 없이 낭패 창황하여 사방으로 달아나게 할 것이니, 어찌 국사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今日之事를 丞相以爲但去一人이면 斑列便無小人이오 臺閣便無異論乎아 胡不觀於鄭尙書王著作遜司業之遂去而不留며 袁溫州之已除而中寢고 此皆誰實爲之也哉오 以愚觀之컨데 但見其操心益危하고 慮患益深이나 而爲崇益甚耳라 語曰治水不自其原이면 末流彌增其廣이라도 又曰 射人先射馬오 禽賊當禽王이라하니 蓋慮此也라 去年劉副端初除抗論에 震動朝野하야 善類가 相慶하대 而熹獨深憂之리니 今日之勢何以異此리오 伏願丞相이 試熟計之하야 而亟陰求學士大夫之有識慮氣節者相與謀之하야 先使上心廓然洞見忠邪之所在 而自腹心以至耳目喉舌之地 皆不容有毫髮邪氣留於其間아라야 然後天下之賢을 可以次而用이오 天下之事를 可以序而爲也니 如其不然이면 則自今以往으로 丞相之憂는 乃有甚於前日이라 是以熹竊危之오 而未敢以爲ㅡ喜也하노라 辱知之厚하야 不敢不盡愚하노니 惟高明察之하라 抑天下之事는 固多以欲速而致敗나 然見幾不蚤하야 猶預留時亦智者의 所甚懼也라 今日在我之勢固爲甚危나 然乘隙疾攻이 正在此時하니 投機之會間不容息이라 惟丞相深計而亟圖之면 則不唯善類之幸이라 實宗社生靈之幸이라
승상께서는 오늘 날 강특립(姜特立) 한 사람만 제거하면 반열에 소인이 없고 대각에 이론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찌 정상서 왕 저작, 손 사업이 떠나고 없으며, 원 온주가 제수를 받고도 중간에 취소된 일을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이 모두가 실로 누가 이렇게 한 것입니까.
제 생각에는 소인과 이론을 아무리 조심하고 염려한다 해도 재앙은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격언에
“물을 다스림에 그 근원을 다스리지 않으면 말류는 더욱 넓게 퍼진다.”
는 말이 있고,
“사람을 쏘고자 할 땐 그 말을 먼저 쏘아야 하고, 도적을 잡으려 할 땐 먼저 그 우두머리를 잡아야 한다.”
는 말이 있으니, 모두 이를 염려한 말일 것입니다.
지난해에 유부단(劉부/端)이 처음 제수 받을 때에 항론이 조야를 진동하였으니 선류(善類)가 모두 이를 좋아하였지만 저는 혼자 매우 걱정하였습니다. 지금 형편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사대부 중에 식견이 있고 기절이 있는 자를 은밀히 구하여 함께 모의하여, 먼저 주상으로 하여금 충사의 소재를 확연히 통찰케 하여, 복심으로부터 이(耳)․목(目)․후(喉)․설(舌)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사람의 소인도 발을 못 붙이게 한 연후에, 천하의 충현을 차례로 쓰며 천하의 일을 차례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승상의 근심이 전일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기뻐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승상께서 저를 알아줌이 두터워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고명은 양찰하시기 바랍니다. 천하의 일이 너무 속히 이루고자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러나 기회를 놓치고 머뭇머뭇 우유부단한 것은 지자(知者)가 또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금일 우리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하기는 하나, 저들의 틈을 타 속히 공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이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승상께서 면밀한 계획을 세워 재빨리 실행에 옮기면 이는 현인 군자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종사와 만백성의 다행인 것입니다.
與趙尙書
今日之事에 第一이 且是勤得人主收拾身心保惜精神412)하야 常以天下事爲念하고 然後可以講磨治道에漸次更張하니 如其不然이오 更欲破去因循苟且之弊而奮然有爲에 決無此理라 旣無此理ㄴ댄 則莫若且靜以俟之하야 時進陳善閉邪之說 以冀其一悟니 此外庶事를 則唯其甚害於君心政體而立致患害者를 不得不因事捄正이어니와 若其它閑慢非安危存亡所繫者는 皆可置而不論이니 如學校之政413)이 是也라
여조상서(與趙尙書)
오늘날 승상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주(人主)로 하여금 심신을 수습하고 정신을 보석(保惜)하여 항상 천하의 일을 유념토록 권장하고, 그렇게 한 연후에 치도(治道)를 강마(講磨)하여 점차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관습에 젖은 폐단을 하루아침에 혁파하려 하면 이는 무리한 일이니, 차라리 조용히 때를 기다리면서 때때로 진선 폐사(陳善閉邪)의 설을 진언하여, 인주의 마음이 크게 깨닫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 밖의 다른 일은 오직 군심의 정체를 해쳐서 환해를 가져올 것은 부득불 사안에 따라 시정해야 할 것이고, 기타 한만(閑慢)하여 안위와 존망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일은 모두 잠깐 접어 두고 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학교에 관한 시책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此等事를 欲大更張이면 非惟任事者未必肯行이라 亦恐主議之人414)이 未必究知先王學校敎育之本意良法이니 政使行之라도 未能有益이오 而反有害어든 又況敎官이 未必得人이라 將來姦弊百出하리니 旣已慮之415)而未知所以爲計416)ㄴ댄 又何必抗言極論에 以爭此嘗試踈闊之策417)하야 而使旁觀者로 重有紛更不靜之譏乎아 然欲爲前所謂時進陳善閉邪之說하야 以冀上心之悟者는 又在反之於身하니 以其所欲陳於上者를 先責於我하야 使我之身心安靜하며 精神專一하고 然後博延天下之賢人智士하야 日夕相與切磋琢磨 使於天下之事에 皆有以洞見其是非得失之正하야 而深得其所以區處更革之宜하고 又有以職其先後緩急之序하야 皆無毫髮之弊하고 然後幷心一力에 潛伺黙聽하야 俟其間隙有可爲者하야 然後徐起而圖之라야 乃庶幾乎其有益耳라
이 같은 일을 크게 개혁하려고 하면 우선 담당자가 이를 기꺼이 행하려 하지 않을 뿐아니라, 이를 주장하는 상서께서도 선왕의 학교 교육에 관한 본의와 양법(良法)을 다 알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령 어설프게 개혁을 한다 하더라도 유익함은 없고 유해함만 있을 것입니다. 또 더구나 교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장래에 온갖 폐단이 발생할 것이니 이미 그러한 폐단이 발생하면 이를 염려하여도 이러한 폐단을 방지할 방책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또 기어코 이를 항언 극론(抗言極論)하여 이 이미 시도해 보아 실현성이 없는 시책을 들고 나와 주위로부터 시끄러운 비난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앞에서 말한 진선 폐사를 진언하여 상심(上心)의 대오(大悟)를 기대하고자 한다면 우선 상서께서 자신부터 반성하여 군상(君上)께 요구하고자 하는 것을 먼저 자신에게 추궁하여,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고 정신이 투철하게 한 연후에, 널리 천하의 현인과 지사(智士)를 초치하여 주야로 함께 절차 탁마하고, 천하의 일에 그 시비득실을 통견할 수 있도록 하여 그 개혁의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 선후와 완급의 차례를 정하여 털끝 만한 폐단도 없게 한 연후에, 마음과 힘을 합쳐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관망하고 있다가, 그 시행할 수 있는 틈을 기다려 서서히 시행하면 아마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尙書天姿高明하야 而於當世之務에 講之熟矣오 至於前世名臣議奏를 又嘗博觀而精擇之하야 以爲一書418)하니 宜其投機合變419)하야 慮無遺策이로대 而今者之議以大言之則不時오 以小言之則不巧하니 不惟熹之至愚가 以爲未安이라 而天下有職이 亦無不竊怪其不當出於明者之口也라 抑其言420)又有夭於此者하니 盖又以爲尙書頗以簡貴自高421)하고 憚於降屈하야 而無好士受言之美也라하니 不識尙書何以得此於梁楚之間422)哉오 其必有以取之矣니 願反諸身而熟察之하라 有諸已而後可以求諸人이오 無諸已 而後可以非諸人이니 雖敵已以下猶然이어든 而況於南嚮萬乘之主乎아 尙書誠以天下之事爲己任이면 則當自格君心之非始오 欲格君心이면 則當自身始니 盖非獨熹之所望於下執事者如此라 計善類之所望莫不然也니라
상서께서는 천품이 고명하고 시무에도 강학이 익숙하며, 전세 명신의 의주(議奏)에 대해서는 제가 일찍이 박관 정택하여 한 글을 드렸으니 그 현실 적용에 빠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학교에 관한 시책 같은 것은 크게 말하면 시기에 맞지 않고 작게 말하면 방법이 정교하지 못하니 어리석은 나 뿐만 아니라 천하의 유식한 선비들이 모두 이것이 상서의 입에서 나온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모두들 상서께서 스스로 존귀하게 생각하여 자신을 낮추기를 꺼리고 선비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없다고 하니, 상서께서 어찌 이러한 말을 듣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어떤 까닭이 있을 것이니 깊이 반성해 봐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갖춘 연후에 그것을 남에게 요구할 수 있고, 자신에게 먼저 허물이 없어야 남을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그러하니 하물며 남(南)으로 향해 천하의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느낄 것 같으면 마땅히 군심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요, 군심을 바로 잡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나만이 상서께 바라는 것이 아니요, 모든 현인 군자의 소망인 것입니다.
答張定叟423)
熹昧於攝理하야 百病交攻하니 初亦只是常年脚氣러니 而根本已衰에 不能與病爲賊하야 遂至沈困에 日甚一日하야 今已無復生全之望할세 亟上掛冠之請424)矣라 自惟平生無所肖似하야 雖不及趨拜先忠獻公425)幕府나 而荷知遇之意不薄하고 及遊兄伯仲間에 又以道義德業으로 相期於千載러니 敬夫棄我而先이 已十餘年이오 而熹今衰病又如此하야 則亦不得久留矣라 昨蒙朝廷不棄하야 累加收用하대 訖無補報하고 狼狽而歸426)하야 方此省愆에 尙期後效러니 而時論一變에 中外震駭하야 忠賢427)斥逐에 下及韋布428)하니 蓋近世所無有라 病中憤悶無聊하야 悲歎累日하대 顧念踈遠이 言之無益이라 竟不能發一語以效其愚하고 適會疾亟하야 姑出此下計429)하니 庶幾朝夕瞑目에 有以見兄家父兄平生師友於地下耳니 此外尙何言哉아
답장정수(答張定叟)
내 양생(養生)의 섭리에 어두워 백가지 병이 번갈아 일어나 처음엔 전과 같은 각기병이더니, 근본 원기가 이미 쇠약해져 병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앓아 누워 날로 심해지니, 이젠 온전히 회생할 가망이 없겠기에 자주 사직을 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 평소에 아무 보잘 것이 없어 비록 선 충헌공 막부에 달려가 뵙지 못했으나 충헌공께서 나를 알아주심이 두터웠고, 그대의 형제들과 종유함에 도의와 덕업으로써 서로 격려하며 영원하기를 바랐더니, 경부(敬夫)가 나를 버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십여 년이 되었으며, 내 지금 이같이 병으로 쇠약하니 또한 오래 머물지 못할 것 같다. 지난 날 조정이 나를 버리지 않아 여러 번 임용되었으되, 끝내 조그만 보답도 하지 못하고 낭패하여 돌아와 지난 허물을 반성하고 뒷날을 기다렸더니, 시론(時論)이 일변함에 안팎이 놀라고 충현이 쫓겨나 아래로 위포(韋布)에까지 화가 미치니, 근세에 없었던 일이다.
병중에 분한 마음 편치 못하여 여러 날 슬피 탄식하였으나, 돌이켜 생각하니 소원한 나의 말이 무익하겠기에 마침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마침 병이 더욱 심해져 결국 사직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내 눈을 감으면 그대의 부형과 평소의 사우(師友)를 지하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밖에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時事如此에 有識寒心이라 黙計中外群公컨댄 威望慇然忠義明白이 誰如吾定叟者오 異時扶傾補敗하야 洪濟艱難을 熹誰瞑目이나 實不能不以此望於門下也하노니 更願勉思令猷하고 益求彊輔하야 燕居深念430)에 恬養本原하야 遠耳目之細娛하고 圖國家之大計此又區區所深望也라 游誠之才力可仗에 不但捄荒一事이니 得收置門下하면 異時儘有用處리라 但亦更願兼收並蓄하야 更得方正嚴重有餘識遠慮可敬畏者하야 參錯其間 使勤攻吾闕을 如崔州平法孝直之於孔明하면 則天下之事를 庶乎其可濟也리라
시사가 이와 같음에 세상의 유식한 선비가 모두 한심해 하니, 중외의 군공(群公) 가운데 위망(威望)이 무겁고 충의가 드러남이 우리 나라를 바로 세우고 도의를 일으켜 크게 세상을 구제할 일은 내 비록 눈을 감으나 실로 그대에게 바랄 뿐이다. 다시 바라건대 힘써 생각하여 좋은 계책을 내어 그대보다 나은 친구를 구하고 평소에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조용히 본심을 함양하여 이목의 즐거움을 멀리하고 국가의 대계를 도모하기 바라니, 이 또한 내가 깊이 원하는 바이다. 유성지(游誠之)는 재주와 능력이 가히 의지할 만하니 구황(救荒)의 일 뿐만 아니라 문하에 거두어 두면 훗일에 진실로 크게 쓰일 것이다.
또 다시 바라지만 겸수 병축(兼受並蓄)하되 방정 엄중하고 식견과 원려가 있어 경외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여, 그 사이에 섞어 두고 자신의 결점을 지적하기를 최주평과 범효직이 공명에게 한 것처럼 하게 하면, 천하의 일을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朱書百選 卷之四
答呂伯恭
竊承進學之意甚篤하니 深所望於左右431)어니와 至於見屬過勤이 則非區區432)淺陋所堪이나 然不敢不竭所聞以塞厚意하노라 熹舊讀程子之書는 有年矣로다 而不得其要러니 比因講究中庸首章之書하야 乃知所謂涵養須用敬進學則在致知433)者는 兩言雖約이나 其實入德之門이 無踰於此라 方竊洗心434)以事斯語로 而未有得也리니 不敢自外435)하야 輒以爲獻하노니 以左右之朋으로 尊而行之436)하야 不爲異端荒虛浮誕之談所遷惑하며 不爲世俗卑近苟簡之論所拘牽437)하고 加以歲月하야 久而不舍하면 竊意其將高明光大不可量矣로다
4권
답여백공(答呂伯恭)
그대 진학의 뜻이 매우 돈독하니 참으로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이다. 나에 대한 지나친 촉망은 천루한 내가 감당할 바가 아니나, 그러나 그대의 후의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가 듣고 아는 바를 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전에 정자의 글을 읽은 지 몇 해가 되었지만 그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근래에 ������중용������ 첫 장의 뜻을 검토 연구하다가 이로 인하여 정자의
“함양 공부엔 반드시 경(敬)을 써야 하고 진학 공부는 치지(致知)에 있다.”
는 두 말이 비록 요약되어 있으나 실은 덕에 들어가는 문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로써 마음을 맑게 하여 이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아직 절실히 깨달은 것은 없지만, 그러나 감히 그대를 잊을 수 없어 이 말을 드리니 그대의 명철함으로 이 말을 받들어 행하여 황허부탄(荒虛浮誕)한 이단의 말에 유혹되지 말며 비루하고 구차한 세속의 논리에 이끌리지 않도록 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이를 버리지 않으면 장래에 고명 광대함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承喩所疑론 爲賜甚厚라 所未安者438)는 別紙求敎나 然其大槪는 則有可以一言擧者하니 其病이 在乎略知道體之渾然無所不具오 而不知渾然無所不具之中에 精粗本末賓主內外盖有不可以豪髮差者라 是以其言이 常喜合而惡離하야 却不知雖文理密察이 縷析豪分이나 而初不害乎其本體之渾然也라 往年見汪丈이 擧張子韶語明道至誠無內外之句하야 以爲至誠二子有病 不若只下箇中字439)라하니 大抵近世一種似是而非之說이 皆是此箇意見이라 惟恐說得不鶻突440)하니 直是謾人自謾이오 誤人自誤하라 士大夫無意於學이면 則恬不知覺하고 有志於學이면 則必入於此하니 此熹之所以深憂永嘆하야 不量輕弱하고 而極力以排之하야 雖以得罪於當世라야 而不敢辭也로다
보내준 글 가운데 내가 의혹하는 것은 나를 너무 후하게 평가하는 점이며, 그 중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른 글로써 가르침을 구할 것이나, 그 대개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으니, 그 병통이 도(道)의 체(體)가 혼연히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것만 알고 혼연한 가운데에 정조(精粗) 본말(本末) 빈주(賓主) 내외(內外)가 털끝 만한 어긋남이 없이 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데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 그대의 말이 항상 종합을 좋아하고 분석을 싫어하며, 또 문리가 밀착하여 실오라기나 털끝을 분석하듯 하여도 그 본체가 혼연한 것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지난해에 왕장(汪丈)이 장자소(張子韶)가 말한 명도의 ‘지성무내외(至誠無內外)’의 구를 들어 ‘지성이란 두 글자가 적합하지 않으니 지성 대신에 중(中)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근세의 같은 류의 사이비 설이 모두 이러한 것 같다. 이러한 사이비 설을 말하는 자들은 항상 그들의 설이 애매하지 아니할까 두려워하니 이는 참으로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며 남을 그르치고 자신을 그르치는 것이다. 사대부가 학문에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러한 데 빠지니 이것이 내가 심우영탄(深憂永歎)하여 나의 경약(輕弱)을 헤아리지 않고 이들을 극력 배격하여 비록 당세에 죄를 짓더라도 사양치 않는 까닭이다.
來敎又謂吾道無對하니 不當與世俗較勝負라하니 此說美則美矣로다 而亦非鄙意之所安也라 夫道固無對者也나 然其中却著不得許多異端邪說이오 直須一一剔撥441)出이라하야 後方曉然見得箇精明純粹底無對之道니 若和泥合水하야 便只著箇無對包了442)하면 竊恐此無對中에 却多藏得病痛443)也로다 孟子言楊墨之道不熄하면 孔子之道不著라하시고 而大易於君子小人之際에 其較量勝負는 尤爲詳密하니 豈其未知無對之道邪아 盖無對之中에 有陰則有陽하고 有善則有惡하니 陽消則陰長하고 君子進則少人退하야 循環無窮이나 而初不害其爲無對也라 況熹前說已自云非欲較兩家已往之勝負라 乃欲審學者今日趣向之邪正이라하니 此意尤分明也니라 科擧之敎無益은 誠如所喩나 然謂欲以此致學者而告語之라하니 是乃釋氏所謂先以欲句牽하고 後令入佛智者니 無乃枉尋直尺之甚가 尤非淺陋之所敢聞也로다
보내온 편지에서 또 말하기를,
“우리의 도는 절대적이어서 세속의 이론(異論)과 승부를 겨루어서는 인된다.”
고 하니 이 말이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또한 내 생각에는 이해 못할 바가 없지 않다. 도(道)는 본래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道) 안에는 부득이 이단(異端) 사설(邪說)이 없을 수 없으니 그 이단 사설을 하나하나 밝혀 낸 연후라야 비로소 훤히 그 정명순수(精明純粹)한 절대적인 도(道)를 볼 수 있으니 만약 진흙을 물에 타서 바로 무대(無對)라고 포장해버리면 이 무대 중에는 반드시 온갖 병통이 잠재해 있을 것이다. 맹자는
“양묵의 도가 사라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하고 ������대역������에서 군자 소인을 말하는 즈음에 그 비교 승부가 더욱 상밀하니 어찌 그 절대적인 도를 몰라서 그랬겠는가.
대개 무대(無對)한 가운데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으며 양이 사라지면 음이 자라고 군자가 진출하면 소인이 물러나 순환이 무궁하되 처음부터 그 무대함을 해치지는 않는다. 더구나 내가 전설에서 이미 스스로
“양가(兩家)의 이왕의 승부를 교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학자들의 금일 취향의 사정(邪正)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했으니 내 뜻은 더욱 분명한 것이다. 과거 공부를 위한 가르침이 무익하다는 것은 진실로 그대 생각과 같으나, 그러나 과거 공부를 가르친다하고 사람을 불러모아 곧 석씨(釋氏)가 이른 바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으로써 이끈 후에 그들로 하여금 불지(佛智)로 들어오게 한다.”
는 것과 같으니 이는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바로 잡는 것과 같이 무리한 것이 아닌가. 더욱 내가 수용해 들을 수 없는 것이다.
示喩曲折이 深所望於左右라 顧其間有未契處할새 不得不極論以求至當之歸하노니 至於立彼我較勝負444)之嬚이 則熹雖甚陋나 豈復以此疑於左右者哉아 持養斂藏之誨는 敢不服應가 然有所不得已者하니 世衰道微하야 邪詖交作하니 其他紛紛者는 固所不論어니와 而賢如吾伯恭者도 亦尙安於習熟見聞之地하야 見人之詭經誣聖 肆爲異說하고 而不甚以爲非하니 則如熹者는 誠亦何心으로 安於獨善하야 而不爲極言覈論 以曉一世之昏昏也리오 使世有任其責者면 熹亦何苦而譊譊445)若是耶아 設使顔子446)之時에 上無孔子시면 則彼其所以明道而捄世者가 亦必有道니 決不退然安坐陋巷之中하야 以獨善其身而已라 故孟子言禹稷顔子易地則皆然이라하시고 惟孟子見此道理하고 如揚子雲之徒는 盖未免將顔子只做箇塊然自守底好人看447)하고 若近世는 則又甚焉하야 其所論顔子者는 幾於釋老之空寂矣라
보내온 서찰의 자세한 내용은 내가 그대에게 몹시 바라는 바이나, 다만 그 가운데에 내 생각과 합치하지 않는 곳이 있어 부득불 이를 극론하여 합당한 결론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대의 서신에서 내가 ‘그대를 서로 대적하여 승부를 겨루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고 하였는데 내 비록 심히 비루하나 어찌 이 같은 일로 그대를 의심하겠는가. 덕을 함양하여 마음속에 감추어 두라는 가르침은 내 어찌 이에 응하지 않으리오마는,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으니, 세상이 쇠퇴하고 도덕이 퇴패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주장들이 마구 일어나니, 기타 분분한 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백공 같은 현자도 오히려 평소의 습관적인 견해에 안존하여, 사람들이 경전을 속이고 성인을 무함(誣陷)하며 멋대로 이단을 말하는 것을 보고도 이를 심하게 나쁘다 하지 않으니, 내 참으로 무슨 마음으로 독선에 안주할 것이며, 극언 핵론으로 일세의 혼미를 깨우치지 않겠는가.
만약 세상에 그 책임을 질 사람이 있다면 내 어찌 수고롭게도 이 같이 분분한 말을 하겠는가. 가령 안자의 시대에 위로 공자가 없었다면 안자는 반드시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제하는 길을 취했을 것이고, 결코 누항에 안주하여 자기 수양에만 힘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우(禹)․직(稷)․안자(顔子)가 서로 입장이 바뀌었더라도 모두 꼭 같이 했을 것이다.”
고 했으니 맹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도리를 볼 수 있었고, 양자운(揚子雲) 같은 무리는 안자를 다만 묵묵히 흙덩이처럼 자수(自守)할 줄만 아는 좋은 사람 정도로 보았고, 근세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서, 그 안자를 논하는 것이 거의 석씨와 조자의 공적(空寂)과 비슷하게 볼 정도이다.
熹竊謂學者固當學顔子者니 如克己復禮不遷怒貳過不伐善施勞之類를 造次顚沛에 所不可忘이어니와 但亦須審時措之宜448)하야 使體用兼擧 無所便廢하야 乃爲盡善이니 若用有所不周면 則所謂體者는 乃是塊然死物而已라 豈眞所謂體哉아 觀伊川先生十八歲時上書所論顔子武侯所以不同과 與上蔡論韶武異處하니 便見聖賢之心이 無些私意오 只是畏天命循理而已라 此義與近世論內脩外攘之說者로 亦相貫하니 夫吾之所以自治449)者는 雖或有所未足이나 然豈可以是而遂廢其討賊之心哉아 示喩蘇氏於吾道不能爲楊墨이오 乃唐景450)之流耳라하니 今蘇氏之學이 上談性命하고 下述政理하야 其所言者 非特屈宋唐景而已라 學者始則以其文而悅之하야 以苟一朝之利451)라가 及其旣久則漸涵入骨髓하야 不復能自解免하니 其壞人材敗風俗이 盖不少矣어늘 伯恭尙欲左右之하니 豈其未之思耶아 其貶而置之唐景之列은 殆欲陽擠而陰予之耳라 向見正獻公452)家傳453)하니 語及蘇氏에 直以浮薄背目之하고 而舍人丈所著童蒙訓이 則極論詩文을 必以蘇黃爲法하니 嘗竊歎息하야 以爲若正獻榮陽454)이 可謂能惡人者로대 而獨恨於舍人丈455)之微旨456)에 未喩也니 然則老兄今日之論이 未論其它하고 至於家學에 亦可謂蔽於近而違於遠457)矣니 更願思之하야 以求至當之歸오 不可自悟而復悟人也니라
내 생각에는 학자가 안자를 배우고자 한다면 극기복례(克己復禮)․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二過)․불벌선(不伐善)․불시로(不施勞) 같은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이 명도구세(明道救世)랄 때인가, 안좌독선(安坐獨善)할 때인가를 잘 살펴서 체(體)와 용(用)을 아울러 생각하여 어느 한쪽이라도 폐함이 없도록 해야만 진선(盡善)이 될 것이니, 만약 용(用)이 두루 미치지 못한다면 이른 바 체(體)라는 것이 흙덩이 같은 죽은 물건일 뿐일 것이니 어찌 참된 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천 선생이 18세 때에 상서(上書)에서 논한 ‘안자(顔子)와 무후(武侯)가 같지 아니한 까닭’과 상채(上蔡)가 논한 ‘소악(韶樂)과 무악(武樂)의 다른 점’을 볼 때에 성현의 마음이 아주 작은 사의(私意)도 없고 다만 천명을 두려워하고 천리를 따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 뜻이 근세에 논한 ‘안으로 내치를 올바르게 하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설과 서로 관통한다 하겠다.
우리의 내정(內政)의 방법이 비록 충분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어찌 적을 토벌해야 할 마음마저 없앨 수 있겠는가. 보내온 편지에서 또 소씨(蘇氏)가 우리 도와 관련지어 양자와 묵자의 정도(程度)는 아니고 다만 당륵(唐勒)과 경차(景差) 정도일 뿐이라고 하니, 지금 소씨의 학업이 위로는 성명(性命)을 말하고 아래로는 정리(政理)를 서술하여 그 말하는 바가 비단 굴원․송옥․당륵․경차 정도가 아니라 할 것이다.
학자가 처음엔 소씨의 글을 좋아하여 과거 실험용으로 공부하다가 오랫동안 이를 읽음으로 해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소씨의 주장이 골수에 박혀 다시 이를 헤어나지 못하게 되니 그 인재를 못쓰게 만들고 풍속을 퇴패시킴이 적지 않거늘 백공이 오히려 그를 옹호하고자 하니 어찌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소씨를 폄하(貶下)하여 당경의 반열에 두는 것은 일견 그를 밀쳐 내는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옹호하는 격이 될 뿐이다. 전일에 정헌공이 지은 ������가전(家傳)������을 보니 소씨에 대해서 말한 것이 다만 부박배(浮薄輩)로 지목했고 사인장(舍人丈)이 지은 ������동몽훈������에는 시문을 반드시 소황(蘇黃)으로 법을 삼아야 한다고 극찬하니 ‘정헌공과 영/양(榮/滎陽)은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자이지만 사인장의 속뜻은 알 수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다.’고 하며 혼자 탄식하였다. 그러니 노형의 금일의 논설이 다른 것은 그만두더라도 가학(家學)이 있어서는 사인장에 가려서 정헌공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바라지만 이 점을 생각하여 지당한 귀착점을 찾아 자신을 그르치고 남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前書奉問謝公之說458)이 正疑其不能無病이어니와 詳考從上459)聖賢以及程氏之說이니 論下學處에 莫不以正衣冠肅容貌爲先460)하니 盖必如此하야 然後必得所存하야 而不流於邪僻이니 亦所謂閉邪存其誠程氏所謂制之於外所以養其中者는 此也라 但不可一向溺於儀章器數之末耳니라 若言所以正所以謹者는 乃禮之本이라하면 便只是釋氏所見徒然橫却箇所以然者在胸中461)이오 其實却無端的下功夫處니 儒者之學이 正不如此라 更惟詳之하라 功夫易間斷하고 義理難推尋이어늘 而歲月如流하 니 甚可憂懼라 乃何乃何오 數日來에 蟬聲益淸하니 每聽之에 未嘗不懷高風 也하노라
전서에서 나에게 질문한 사공(謝公)의 설은 정히 병통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성현으로부터 정씨(程氏)에 이르기까지 하학(下學)을 논한 곳을 상고해 보건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용모를 엄숙히 하는 것을 먼저 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이같이 한 연후에 라야 마음이 보존되어 바르지 못한 곳으로 흐르지 않게 될 것이다. ������역������에서 말한 ‘바르지 못한 것을 막아서 그 진실한 것을 보존한다.’는 것과 정자가 말한 「밖을 막는 것은 그 마음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란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다만 외길로 의장(儀章)과 기수(器數)의 말단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외모를 바르게 하고 행동을 삼가야 하는 그 소이연(所以然)이 예(禮)의 근본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석씨의 소견과 같은 것이 되리라. 공연히 가슴속에 라로 놓인 그 소이연(所以然)이란 것은 실은 적확하게 공부할 곳을 지시해 주지 못하는 것이니, 유자의 공부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서 공부할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공부는 쉽게 중단되고 의리를 추구하기 어려운데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가니 심히 두렵도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며칠동안 매미소리 더욱 맑으니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대 생각 간절하구나.
適此旱災에 祈禱未能感格하야 今早禾는 已不可捄오 若更數日不雨하면 卽晩禾를 亦不可保니 觀此事勢에 必致大段狼狽나 遂不敢言去하고 只得竭盡駑力이니 切幸因風有以見敎於其思慮之所不及者는 幸甚幸甚이라 囊封付出462)이 乃邸吏云463)이라 方竊怪之하노라 當時誠亦輕發이나 然今已不可悔矣라 積其誠意待時而發464)이 固所當然이나 但恐如諺所謂今年自家雪裏凍殺하고 不知明年甚人喫大椀不托465)耳니 言之痛心이라 若事若事로다 謹密之戒는 乃今聞之하니 初但不敢以草本466)示人及與人說其中所論이오 不謂乃幷此題目不得漏洩也라
이 같은 심한 가뭄을 만나 나의 기도(祈禱)가 하늘을 감격시키지 못하니 조생벼는 이미 구할 수 없겠고 며칠만 더 비가 오지 않으면 만생벼도 또한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니 이 같은 형편을 보건대 반드시 큰 낭패를 당할 것 같다. 사직하고 떠나야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다만 있는 힘을 다할 뿐이다. 다행하게도 그대로부터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으니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나의 봉사(封事)를 개봉하여 심의한 일에 대해서는 사환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에 내가 경솔히 봉사를 올린 것은 사실이나 지금 뉘우친들 어찌하겠는가. 성의를 쌓아서 때를 기다렸다가 실현성이 있을 때에 봉사를 올리는 것이 지당한 일이나 다만 속담과 같이 때를 기다리다가 금년에 내가 눈 속에서 얼어 죽으면 명년에 누가 큰 사발의 국수를 먹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대의 말이 마음을 아프게 하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다. 신중하고 치밀하라는 경계는, 지금 듣고 보니 처음에 봉사의 초본을 남에게 보여준 것이 아니고 봉사에게 논한 일을 우연히 다른 사람과 논하는 가운데 진언의 뜻을 누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數年前風俗尙不如此러나 自今當深戒之耳라 旣云有調護者면 卽是嘗有譴怒之意니 亦幸密見告也라 近緣旱虐하야 百事放寬하니 又覺得雨露太勝雪霜467)이나 然亦且得如此468)하니 前日誠有過當處也라 塾不知果能漸469)解事否아 人家後生이 只得自有意做好人이라야 便有可望이어늘 此郞470)正坐無此根本하니 使人憂心耳라 新參471)近通問否아 大勝氣證472)에 却下四君子湯473)하니 如何得相當이리오 然尙幸其不發病耳라 老兄與之分厚하니 須痛箴之어다 吾背與百萬生靈性命이 盡在此漏船上하니 若喚得副手梢工474)하야 不至沈醉하면 緩急猶可恃也니라
수년 전에는 풍속이 이와 같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신중히 경계해야 할 것 같다. 봉사를 심의할 때에 나를 옹호한 자가 있었다 하니, 곧 이는 주상이 봉사에 대해 꾸지람이 있었다는 말이니 이를 자세히 알려주어 다행하고 고마운 일이다. 근일에 가뭄이 지독하여 이로 인해 사무를 좀 너그럽게 하고 또 그렇게 하니 내 너그러운 기운이 엄한 기운을 이김을 느낄 수 있겠다. 또 마음이 너그러워지니 전일에 내가 지나친 점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겠다. 점(/)은 점차 사리(事理)를 좀 깨닫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자식이 뜻만 있으면 가망이 있는 것인데 이 아이가 이러한 근본이 없으니 걱정스럽다. 신참(新參)은 근래에 소식을 듣는가. 대승기증(大承氣證)에 도리어 사군자탕(四君子湯)을 처방하니 어찌 적합한 처방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큰 발병은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노형은 그와 친분이 두터우니 통렬히 충고해 주기를 바란다. 온 백성의 운명이 모두 이 새는 배 위에 실려 있으니 이 등가는 뱃사공이라도 구하여 그가 술에 취하지 않는다면 위급한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으리라.
范公475)不爲程門弟子는 下卷476)范公語中이라 論之已詳이어니와 至於國忌齋筵葷素477)所宜는 則以范公之賢으로 於已之所行이라 自當顧義理之是非以爲從違오 不當視同列478)之喜怒以爲前郤也니라 使其果欲依違兩間하야 曲全交好면 則具素饌旣忤東坡오 具酒肉亦忤伊川이니 若慮於彼而忽於此479)면 則亦非所以兩全矣라 況它書480)所記라 亦云范醇夫背食素하고 秦黃481)背食肉이라하니 則所記雖不同482)이나 而范公之不畏東坡而每事徇從을 亦當時所共知矣라 故嘗竊意范公이 雖不純師程氏나 而實尊仰取法焉하고 其於東坡는 則但以鄕黨游從483)之好로 素相親厚하고 而立朝議論이라 趨向略同이나 至其制行之殊는 則逈然水火之不相入이니 且觀其辨理伊川之奏484)면 則其心豈盡以東坡爲是哉아 但不能辨之於當時하고 而發之於數年之後하니 此則剛强不足하야 不免乎兩徇之私者로대 而其所重在此라 故卒不能勝其義理之公也니라 大抵程蘇學行이 邪正不同하야 勢不兩立이라 故東坡之於伊川이라 素懷憎疾하니 雖無素饌之隙485)이나 亦不相容이오 若於范公은 則交情旣深하고 而其氣象聲勢無足畏者라 故雖有右袒之嫌이나 而不以害其平生之驩486)也니라
범공(范公)이 정문(程門)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은 ������연원록������ 하권의 범공에 대한 말 가운데 자세히 논하였다. 나라 제삿날 재계하는 자리에서 훈식(葷食)을 함이 옳은가, 소식(素食)을 함이 옳은가는, 범공의 현명함으로 볼 때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마땅히 의리의 옳고 그름을 살펴보고 따르고 따르지 않음을 결정하였을 것이요, 동료의 뜻에 구애되어 태도를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양쪽 사이에서 이쪽 저쪽 모두 교호(交好)를 온전히 하고자 한다면 소찬을 차리면 이천을 거스르며 만약 동파를 생각해서 이천에 소홀하면 또한 양쪽 모두 교호를 온전히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연원록������에서 역시 범순부의 무리는 소식을 하고 진황의 무리는 육식을 했다하니, 기록한 것들이 비록 같지 않으나 범공이 동파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매사를 그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에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까닭으로 범공이 비록 정씨를 바로 스승으로 모시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정씨를 존앙하고 모범으로 삼았으며, 동파는 고향의 잘 지내는 친구로써 본래 친함이 두터워 조정의 의론에 있어서는 가는 방향이 대략 같았지만, 그 행위 규범이 서로 다른데 있어서는 물과 불이 서로 용납 못하는 것과 같았다. 또 범공이 이천을 변리한 상주를 볼 것 같으면, 그 마음이 어찌 동파를 옳다고 했다 하겠는가. 다만 당시에 바로 변리하지 못하고 수년 뒤에 변리한 것은, 범공이 강강(剛强)하지 못하여 양쪽의 사정을 이기지 못한 때문이며, 그가 존중하는 것이 이천 쪽이기 때문에 마침내 그 의리의 마음을 아기지 못하여 변리를 발한 것이다.
정씨와 소씨의 학행이 사정(邪正)이 부동하여 양립할 수 없는 형세이다. 동파가 이천을 본래 미워했기 때문에 비록 소식 육식의 이견이 없었다 하더라도 서로 용납될 수가 없었고, 범공은 사귀는 정이 이미 깊었고 범공의 기상성세가 두려워 할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비록 범공이 이천의 편을 든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 평소의 우정을 해치지는 않은 것이다.
答劉子澄
來書深以異學侵畔487)爲憂하니 自是488)而憂之면 則有不勝其憂者라 惟能於講學體驗處加功하야 使吾胸中洞然無疑면 則彼自不能爲吾疾矣니 약부구중리지明하고 而徒恃片言489)之守면 則雖早夜憂虞라도 僅能不爲所奪이오 而吾之胸中이 初未免於憒憒490)니 則是亦何足道리오 願老兄專以聖賢之言으로 反求諸身하야 一一體察하야 須使一一曉然無疑하야 積日旣 久하면 自當有見이니 伹恐用意不精하야 或貪多務廣하고 或得少爲足이면 則無由明爾니라 熹比來溫習하야 略見日前所未到一二大節目하야 頗覺省力하대 但昏弱之姿는 執之不固하야 尤悔日積하니 計有甚於吾友之所患者나 然以所聞質之면 則似不可不兩進491)也로다 程夫子曰 涵養須用敬이오 進學則在致知라하시니 此二言者에 體用本末492)은 無該備하니 試用一日之功493)이면 當得其趣니라 夫涵養之功은 則非佗人所得與라 在賢者加之意而已오 若致知之事는 則正須友朋講學之助라야 庶有發明하니 不知今者見讀何書며 作如何究索하며 與何人辨論고 惟毋欲速하며 毋蓄疑하야 先後疾徐를 適當其可라야 則功日進而不窮矣리라 向見前背有志於學而性涉猶預者는 其內省甚深하고 下問甚切이나 然不肯沛然用力日用間하야 以是로 終身抱不決之疑하니 此可以爲戒오 而不可以爲法也니라
답유자징(答劉子澄)
보내온 편지에서 이단이 오학(吾學)을 침범하고 배반하는 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는데, 이를 근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오직 강학하고 체험하는 곳에 공부를 집중하여 내 마음속부터 의문이 없이 훤하게 밝게 하면, 저 이단이 나에게 병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제반 도리를 밝히지 않고 한갓 이단을 물리치는 짧은 말 한마디만 믿고 있으면, 비록 밤낮으로 걱정을 하더라도 겨우 이단의 침탈을 면할 수 있을 뿐이고, 내 마음속은 처음부터 혼란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도(道)라 할 수 있겠는가. 노형은 오로지 성현의 말로써 자신을 반성하여 하나하나 몸으로 깨달아 살피고 하나하나 의문이 없이 명백하게 하여 이를 오래 지속하면 스스로 보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다만 공부가 정밀하지 못하여 혹 많은 것을 탐내어 여러 곳에 힘쓰고, 또는 작은 것을 얻고 만족하면 도리를 밝힐 길이 없을 것이다.
내 근일에 지난날의 공부를 복습함에 전일에 알지 못하던 것을 대략 알 수 있었으니 한, 두 가지 큰 절목에 성찰할 힘이 생김을 느꼈다. 다만 자질이 혼약하여 이를 지킴이 견고하지 못하여 허물과 후회가 날마다 쌓여 노형의 근심보다 더 심한 것 같다. 그러나 내가들은 것으로써 이를 바르게 고친다면 함양 공부와 진학 공부를 병행해야 할 것 같다. 정부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함양 공부는 경(敬)으로써 하고 진학 공부는 치지(致知)에 있다.”
하니 이 두 마디 말에 체용(體用)과 본말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것이 없으니 하루만 힘써 공부를 해 봐도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함양 공부는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없는 것이니 그대가 노력하는데 달려 있고, 진학 공부는 반드시 붕우의 강학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는 어떤 책을 읽으며 작문은 어떻게 하며 어떤 사람과 변론하는지 모르겠다. 오직 속히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거나 의문을 쌓아주는 일이 없이 차례대로 노력해 나가면 성과가 날마다 진척하여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전배가 학문에 뜻이 있으나 성품이 우유부단하여 자신에 대한 성찰이 깊고 타인에게 묻는 것이 절실함에도 결연히 일상생활 가운데서 힘써 공부할 줄 모르고 종신토록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니 이것은 경계할 바이고 본 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與劉子澄
近看溫公論東漢名節處하야 却得有未盡處하니 但知黨錮諸賢494)趨死不避爲光武明章之烈이오 而不知建安495)以後中州士大夫는 只知有曹氏하고 不知有漢室이 却是黨錮殺戮之禍가 有以歐之也로다 且以荀氏一門論之라도 則荀淑이 正言於梁氏496)用事之日하대 而其子爽은 已濡跡於董卓專命之朝하고 及其孫彧이 則遂爲唐衛497)之壻曹操之臣하야 而不知以爲非矣니 盖剛大直方之氣折於凶虐之餘而漸圖所以全身就事之計라 故不覺其淪胥而至此이니 想其當時父兄師友之間에 亦自有一種議論이 文飾盖覆하야 使驟而聽之者로 不覺其爲非하고 而眞以爲是必有深謀奇計可以活國救民於萬分有一之中也하니 邪說橫流는 所以甚於洪水猛獸之害라 孟子豈欺予哉시리오 年來讀書에 只覺得此意思498)分明하야 參前倚衡499)에 自不能舍하야 雖知以是爲人所惡하야 而終窮以死나 其心誠甘樂之하니 不自以爲悔也하노라
여유자징(與劉子澄)
근래에 온공(溫公)이 동한(東漢)의 명성과 절조를 논한 것을 보고 그 중에 미진한 곳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온공이 당고제현(黨錮諸賢)이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것이 광무제․명제․장제와 같은 빛남이 있게 한 것만 알고, 건안(建安) 이래로 중주(中州)의 사대부가 조조만 알고 한실(漢室)을 알지 못한 것이 실은 당고 살륙의 화가 그렇게 한 것인 줄은 몰랐다. 순씨 일가(一家)의 일을 예로 들어 말할 것 같으면 순숙은 양태후가 국권을 좌우할 때 정언 벼슬을 하였고, 그 아들 상은 동탁이 전권을 쥐고 있는 조정에 발을 적셨고, 그 손자 욱은 당형의 사위가 되고 조조의 신하가 되고도 그것이 나쁜 줄을 몰랐다.
대개 강대직방(剛大直方)한 기가 흉악한 무리에 의해 꺾여 점점 보신과 출세의 길만 궁리한 까닭으로 모두 죄에 빠져 이 지경에 이르고도 이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 당시에 부형 사우의 사이에 어떤 의논이 있어 순씨 일가의 일을 꾸미고 가려 갑작스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잘못을 모르고 참으로 그것이 깊고 기특한 계책이 있어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제할 길이 있는 줄 알게 하였으리라. 사특한 설이 세상에 유포되는 것이 맹수보다 더 무섭다고 했으니, 맹자가 어찌 우리를 속이고 이런 말을 하였겠는가. 연래에 독서를 함에 이 생각이 더욱 분명해져 마음에 떠나지 않아 잊을 수가 없다. 비록 이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죽을 때까지 그러리라는 것을 알지만 사특한 설을 물리치는 것이 즐거우니 이를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與劉子澄
知欲一來建安하니 甚善甚善이라 前書亦嘗奉問하야 欲就中路深僻處 相聚數時500)러니 不知曾踏逐501)得此去處502)否아 麻姑503)當是佳處로대 但聞去城504)差近하니 不免人事之擾하야 却不濟事耳라 武夷結茅雖就나 然亦苦此505)라 覺得却是朋友直來相訪하니 只就書院中寢食506)이면 則都無外面閑人相擾也라 仲叔來此하니 前此면 在社倉507)宿實508)에 相去差遠이라 近方移來閣下러니 渠又告歸하니 其人資性平和하고 看文字亦易曉나 然似亦習成閒懶하야 離群之後에 全不曾做得功夫라가 到此方討冊子看하야 便未有可商量處하니 如倉庫無紅腐貫朽之積하고 軍士無超距投石之勇이오 只是旋收旋支하고 或鼓或罷509)하야 終是不成頭緖라 已向渠說510)別後惜取光陰하야 須看敎滿肚疑難 不能得相見이라가 相見後三五日說不透511)라가 方是長進也니라 伯恭無恙時에 愛說史學이러니 身後爲後生背糊塗512)說出一般惡口小家513)議論하야 賤王尊覇하고 謀利計功하니 更不可聽이어늘 子約立脚不住하야 亦曰吾兄盖嘗言之云爾라하니 中間不免極力排之514)하야 今幸少定이나 然其彊不可令者515)는 猶未肯竪降幡516)也라 子靜寄得對語517)來에 語意圓轉渾浩하야 無凝滯處하니 亦是渠所得效驗이나 但不免些禪底意思라
여유자징(與劉子澄)
존형이 건안(建安)에 한 번 오고 싶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전번 서찰에서 중간지점의 아주 궁벽한 곳을 찾아 함께 만나 며칠을 보내자고 하더니 좋은 곳을 한 번 물색해보았는지 모르겠다. 마고(麻姑)는 아름다운 곳이기는 하나 도성에서 너무 가까워 세상의 시끄러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지 좋지 않을 것 같고, 무이(武夷)의 움막은 그런대로 괜찮으나 이곳 역시 좀 시끄러울 것 같다. 차라리 그대가 내 서실로 바로 와서 먹고 자면 외부 한인(閑人)의 시끄러움은 없을 것 같다. 중숙(仲叔)이 여기에 왔었는데 여기에 오기 전에 숭안(崇安)의 사창(社倉)에서 먹고 잘 때는 서로 거리가 멀어 자주 학문을 토론하지도 못했지만, 내 집에 오자 금방 또 돌아가 버렸다. 그 사람의 자성(資性)이 화평하고 문자(文字)를 잘 이해하나 습성이 게을러 학우들을 떠난 후에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다가, 여기에 와서 대뜸 서책을 토론하려하니 가늠하여 생각해 볼만한 것이 없어 , 비유하자면 창고엔 넉넉한 식량이 없어 금방 거두어 금방 지출하고, 군사는 돌 던지고 뜀박질할 용기가 없어 금방 진군했다가 금방 후퇴하는 것과 같아 도무지 두서를 잡을 수 없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를 떠난 후에 광음을 아껴 반드시 마음속에 의문과 어려움이 가득차게 하여, 나를 만나고자 하나 만날 수 없고 만난 후에도 삼, 오 일 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된 후에 질문을 해야 비로소 장족의 진취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백공(伯恭)이 평시에 즐겨 사학(史學)을 강설하여, 그가 돌아간 뒤에 후생들이 모호하게 천박하고 식견이 낮은 의론을 발설하여, 왕도를 천하게 여기고 패도를 높게 여기며 공리를 도모하니 듣기에 민망하고, 자약(子約)도 입지(立地)가 확고하지 못해
“우리 형이 늘 이렇게 말하였다.”
고 하니, 그 사이에 내가 그를 호되게 배격하여 다행히 조금 바른 자리를 잡았으나, 성품이 강강(剛强)하여 말을 잘 안 듣는 자는 쉽게 항복을 하려들지 않는다. 자정(子靜)이 경연에서 주상께 진언(進言)한 것을 써서 부쳐 보내왔는데, 그 말뜻이 자유 자재하고 광대 무변하여 막힌 곳이 없으니, 이것은 그의 학문 정진의 결과이겠지만, 다만 선(禪)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昨答書戱之云하대 這些子518)는 恐是葱嶺帶來라하니 渠定不伏이나 然實是如此라 諱不得也519)니라 近日建昌520)이 說得動地하야 撑眉努眼521) 百怪俱出하니 甚可憂懼로다 渠亦本是好意어니와 但不合只以私意爲主하야 更不講學涵養하고 直做得如此狂妄이니라 世俗滔滔하야 無說可說이오 有志於學者는 又爲此說引去하니 眞吾道之不幸也라 公度書來에 似有此病痛522)하니 不知季章이 如何學問고 固是須著勇猛이나 然此勇猛이 却要有箇用處하니 若只兩手握拳523)하니 努筋著力 枉費十分氣力하고 下梢無可成就하면 便須只是怪妄而已라 吳伯起資質이 本是大段昏弱이라 故得此氣力524)에 便能振厲而短長相輔하야 不至於怪나 然亦失之偏枯525)라 恐不能大有所就로다 若資性中本有些子精神이 被此發作하면 如陽藏人이 喫却伏火丹砂하야 其不發狂者幾希耳라 近日因看大學하야 見得此意526)甚分明하니 聖賢已是八字打開527)了언마는 但人自不領會하야 却向外狂走耳니라
지난 번 그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그의 설이 조금은 불교의 색을 때고 있다고 놀렸더니, 그는 승복하려 하지 않았으나 사실이 이러하니 피할려고 해도 필할 수 없는 것이다. 근일 건창(建昌)에서 자정(子靜)의 문도들이 격렬한 주장으로 땅을 흔들 듯하여 온갖 괴상한 말을 다하고 있으니 몹시 걱정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자정(子靜)이 본래 좋은 뜻으로 학문을 시작하였으나, 오도(吾道)에 합치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다만 사의(私意)를 위주로 하여, 오도(吾道)를 차근차근 강학 함양하지 않고 곧 바로 생소하고 허망한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세속이 도도히 불설(佛說)을 따르고, 학문에 뜻이 있는 자 또한 이 설을 인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오도(吾道)의 불행이라 하겠다.
공도(公度)의 서찰에서도 불설의 병통을 볼 수 있었는데 계장(季章)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학문이 본래 용맹이 있어야겠지만 용맹이란 그 용처(用處)가 있으니, 만약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근육에 힘을 넣어 잘못 힘을 쓰면 결국 성취되는 일도 없고 다만 괴상해질 뿐이다. 오백기(吳伯起)는 본래 자질이 대단히 혼약하여, 선가(禪家)의 작세 기력을 얻어 기세를 떨쳤으나 그 후에는 단점을 보완하여 괴이한데 이르지는 않았다. 역시 한쪽으로 치우쳐 크게 성취하지는 못할 것 같다.
만약 자성(資性)이 본래 선가적(禪家的)인데다 정신이 선가의 영향을 받으면 이는 마치 양성(陽性)이 강한 사람이 화단사(火丹砂)를 복용하는 것과 같으니 발광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근일에 ������대학������을 읽고 오학(吾學)의 뜻을 더욱 분명히 알았으니, 성현이 이미 오학의 뜻을 분명히 밝혀 놓았거늘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학의 밖으로 미친 듯 달아날 뿐인 것이다.
答陸子靜528)
熹頓首再拜上啓子靜崇道監丞老兄하노라 今夏在玉山하야 便中得書하대 時以入都529)라가 旋復還舍530)하야 疾病多故하고 又苦無便하야 不能卽報나 然懷想德義與夫象山531)泉石之勝에 未嘗不西望太息也하라 前書誨諭之悉을 敢不承敎리니 所謂古之聖賢이 惟理是視하니 言當於理하면 雖婦人孺子라도 有所不棄오 或乖理致하면 雖出古書라도 不敢盡信이 此論甚當하니 非世儒淺見所及也로다 但熹竊謂 言不難擇而理未易明이니 若於理에 實有所見이면 則於人言之是非에 不翅白黑之易辨이라 固不待訊其人之賢否而爲去取어니와 不幸而吾之所謂理者는 或但出於一已之私見이면 則恐其所取舍는 未足以爲群言之折衷532)也오 況理旣未明이면 則於人之言에 恐亦未免有未盡其意者니 又安可以遽絀古書爲不足信이라야 而直任胸臆之所裁乎아
답육자정(答陸子靜)
내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자정 숭도 감승 노형에게 말씀 올리는 바이다. 이 번 여름에 옥산에 있을 때 인편으로 노형의 서신을 받고, 마침 도성에 들어갔다가 막 집으로 돌아와서 병중에 일이 많고 또 인편이 없어 즉시 회답을 못했으나, 노형의 덕의(德義)와 상산(象山)의 아름다운 경치를 잊지 못하여 서쪽을 바라보며 탄식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전서에서 일러준 여러 가르침을 어찌 따르지 않으리오마는, 노형이 말한
“옛 성현이 오직 이치를 가르쳤으니 말이 이치에 맞으면 비록 아녀자의 말이라도 버리지 못할 것이 있고, 말이 이치에 어긋나면 비록 고서(古書)에서 한 말이라도 다 믿을 수 없다.”
는 말은 이 말이 매우 지당하여 속된 선비의 짧은 소견으로는 미칠 바가 아닌 것 같다. 다만 말은 가려 하기가 어렵지 않고 이치는 쉽게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이치에 밝으면 다른 사람이 한 말의 시비를 판별하는 것은 흑백을 구분하기보다 쉬울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현부(賢否)를 묻지 않고도 그 취사를 결정할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자신이 말하는 이치라는 것이 내 한 몸의 사견(私見)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취하고 버리는 것이 모든 말을 절충하기에 부족한 것이 될 것이다. 하물며 이치가 아직 밝혀지지 않아 다른 사람의 말을 다 이해하지도 못한 경우에야, 어찌 고서를 물리쳐 믿을 수 없다 하고 오직 추측의 판단에 맡길 수 있겠는가.
來書反復하야 其於無極太極之辨에 詳矣어니와 然以熹觀之켄댄 伏羲作易에 自一畵以下와 文王演易에 自乾元以下고 皆未嘗言太極也로대 而孔子言之하시고 孔子贊易에 自太極以下고 未嘗言無極也로대 而周子言之하시니 夫先聖後聖이 豈不同條而共貫哉아 若於此有以灼然實見太極之眞體면 則知不言者不爲少오 而言之者不爲多矣니 何至若此之紛紛哉아 今旣不然533)이면 則吾之所謂理者는 恐其未足以爲群言之折衷이니 又況於人之言에 有所不盡者는 又非一二而已乎아 且夫大傳534)之太極者何也오 卽兩儀四象八卦之理具於三者之先而縕於三者之內535)者也이니 聖人之意正以其究竟至極하야 無名可名이라 故特謂之太極이라하니 猶曰擧天下之至極이라도 無以加此云爾니 初不以其中536)而命之也니라 至如北極之極屋極之極皇極537)之極民極538)之極이 諸儒雖有解爲中者나 盖以此物之極이 常在此物之中이오 非指極字而訓之以中也라 極者는 至極而已니 以有形者言之면 則其四方八面이 合輳539)將來하야 到此築底540)에 更無去處오 從此推出에 四方八面이 都無向背하야 一切停勻이라 故謂之極耳니 後人以其居中而能應四外541)라 故指其處而以中言之오 非以其義爲可訓中也라 至於太極이 則又初無形象方所542)之可言이라 但以此理至極而謂之極耳니 今乃以中名之면 則是所謂理有未明而不能盡乎人言之意者也로다
노형의 서찰에서 반복해 논한 것이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해석이 상세하나, 내가 생각하기엔 복희가 역(易)을 지음에 있어 한 획을 그은 뒤로, 또 문왕이 역(易)을 풀이함에 건원을 말한 뒤로, 모두 태극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공자가 태극이라 말했고, 공자가 역(易)을 찬송함에 태극이라 말한 뒤에 무극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주자(周子)가 무극을 말했으니, 선성 후성이 어찌 같은 길이 아니면서 한 곳으로 통하였겠는가.
만약 이에서 태극의 실체를 확실히 볼 수 있다면 태극을 말하지 아니한 복희와 문왕이 태극을 말한 공자보다 못하지 않고, 태극을 말한 공자가 태극을 말하지 아니한 복희와 문왕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이같이 분분(紛紛)히 논설하기에 이르렀는가.
지금 태극의 전체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이치란 것이 여러 말의 절충이 되기에 부족할 것이니, 하물며 사람들의 말에 이해가 부족한 것이 한 둘이 아닌 경우에야 어찌 그 절충이 될 수 있겠는가.
또 공자가 찬술한 역(易) 대전의 태극이란 무엇이겠는가. 곧 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의 이치가 양의 상상 팔괘보다 먼저 태극에 갖추어져 있고, 또 양의 사상 팔괘 안에 태극의 이치가 쌓여 있으니, 공자가 생각하기를, 그 이치가 구경(究竟) 지극(至極)하여 이름지을 수 있는 이름이 없어 다만 태극이라고 말하였으니,
“천하에서 가장 지극한 것이라도 이 태극보다 더 지극한 것이 없다.”
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처음부터 태극이 중(中)의 뜻이 있어 태극이라고 명명한 것이 아니다. 북극의 극, 옥/극의 극, 황극의 극, 민극의 극 같은 것은 여러 유학자들이 비록 중(中)으로써 풀이를 하였으나 대개 이러한 극이 이들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고, 극자(極字)를 가리켜 중(中)이라고 풀이한 것은 아니다. 극이란 지극(至極)일 뿐이니 형체있는 것을 가지고 말할 것 같으면 사방 팔면에서 안으로 모여와 극에 이르면 다시 갈 곳이 없고, 이로부터 밖으로 사방 팔면으로 나가도 향하고 등짐이 없어 일체가 정균하니, 이 때문에 그 곳을 가리켜 중이라 말하였고, 극의 뜻을 중(中)이라고 풀이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태극을 말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형상과 방소(方所)로써 말할 수 없고, 다만 그 이치가 지극하기 때문에 극(極)이라고 말했을 따름이니, 지금 중으로써 명명한다면 이는 이른 바
“이치를 밝히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는 것이 된다.
若論無極二字컨댄 乃是周子灼見道體를 逈出常情하야 不顧旁人是非하며 不計自已得失하고 勇往直前하야 說出人不敢說底道理하야 令後之學者로 曉然見得太極之妙는 不屬有無하며 不落方體하니 若於此看得破면 方見得此老眞得千聖以來不傳之秘하야 非但架屋下之屋疊牀上之牀而已也니라 至於大傳에 旣曰形而上者를 謂之道矣라하고 而又曰一陰一陽之謂道라하니 此豈眞以陰陽爲形而上者哉아 正所以見一陰一陽이 雖屬形器나 然其所以一陰而一陽者는 是乃道體之所爲也라 故語道體之之極이면 則謂之太極이오 語太極之流行이면 則謂之道이니 雖有二名이나 初無兩體라 周子所以謂之無極이 正以其無方所無形狀하야 以爲在無物之前하대 而未嘗不立於有物之後하고 以爲在陰陽之外하대 而未嘗不行乎陰陽之中하고 以爲通貫全體無乎不在하대 則又初無聲臭影響之可言也어늘 今乃深詆無極之不然이면 則是直以太極爲有形狀有方所矣며 直以陰陽爲形而上者면 則又昧於道器之分矣오 又於形而上者之上에 復有況太極乎之語하니 則是又以道上別有一物爲太極矣로다 至熹前書所謂不言無極이면 則太極同於一物하야 而不足爲萬化根本이오 不言太極이면 則無極淪於空寂하야 而不能爲萬化根本이 乃是推本周子之意하야 以爲當時若不如此兩下說破543)면 則讀者錯認語意하야 必有偏見之病 聞人說有에 卽謂之實有하고 見人說無에 卽以爲眞無耳544)니 自謂如此說得周子之意545)已是大煞546)分明이라 只恐知道者는 厭其漏洩之過甚이리니 不謂如老兄者는 乃猶以爲未穩而難曉也라 又謂大傳에 明言易有太極이어늘 今乃言無는 何耶오하니 此尤非所望於高明者로다
또 무극 두 글자를 논할 것 같으면, 이는 주자(周子)가 도(道)의 실체를 본 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어, 주위의 시비를 생각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용감하게 직진하여,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도리를 말하여, 후세의 학자로 하여금 태극의 오묘한 이치가 유무(有無)의 세계에 속하지 않고 공간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만약 이를 간파할 수 있으면 주자(周子)가 진실로 천성(千聖) 이래로 전하지 못한 비밀한 이치를 발명한 것이니 비단 옥하(屋下)의 옥(屋)을 가설하고 상상(床上)의 상(床)을 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대전(易大傳)������에서 공자가
“형이상자(形而上者)를 도(道)라 한다.”
고 했고 또 말하기를
“일음 일양을 도(道)라 한다.”
고 하였으나 어찌 이 말이 진실로 음양이 형이상자임을 뜻하겠는가. 일음 일양을 볼 수 있는 바탕은 비록 형기(形氣)에 속한다 하겠으나 일음 일양이 되는 까닭은 곧 도체(導體)의 작용인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도체의 지극함을 말하면 태극이요, 태극이 만물 속에 흐름을 말하면 도(道)이니, 비록 두 이름이나 처음부터 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주자(周子)가 태극이라고 말한 까닭은 태극이 방소(方所)와 형상이 없어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여, 만물이 존재한 이후에도 만물의 법칙이 되지 않음이 없다고 여기고, 음양의 밖에 있으면서 음양의 안에 유행하지 않음이 없다고 여기고, 우주 전체를 관통하여 존재하지 않음이 없어, 처음부터 소리 냄새 그림자 울림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거늘, 지금 무극의 부당성을 심히 꾸짖으면 이는 곧 태극이 형이상자라 말하면 이는 도(道)와 기(器)의 구분을 모르는 것이며, 또 형이상자의 위에 또 태극이 있다고 말하면 이는 도 위의 다른 일물(一物)을 태극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전서에서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이 만물 중의 일물이 되어 만화의 근본이 될 수 없고,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이 공적(空寂)에 빠져서 만화의 근본이 될 수 없다.”
고 말한 것은 주자(周子)의 뜻을 미루어 주자가 당시에 이 같이 태극과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독자가 말뜻을 잘못 알아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유(有)를 말하는 것을 들으면 실제로 유(有)인줄 알고, 다른 사람이 무(無)인줄 알 것이라고 여긴 것이니, 이같이 말함으로써 주자(周子)의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도(道)를 아는 사람이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음을 싫어할까 염려하였지만, 노형 같은 사람이 도리어 내 말이 온당치 못하여 알기 어렵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또 노형이
“������대전(大傳)������에 분명히 역에는 태극이 있다고 말했거늘 지금 무극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라고 하니 이는 더욱 노형에게 실망하는 바이다.
今夏因與人言易547)하야 其人之論正如此어늘 當時對之不覺失笑하야 遂至被劾하니 彼俗儒膠固하야 隨語生解548)온 不足深怪어니와 老兄平日自視爲如何ㄴ대 而亦爲此言耶오 老兄且謂大傳之所謂有는 果如兩儀四象八卦之有定位하며 天地五行萬物之有常形耶아 周子之所謂無는 是果虛空斷滅都無生物之理耶아 老子復歸於無極549)이라하니 無極이 乃無窮之義라 如莊生入無窮之門하야 以遊無極之野550)云이니 非若周子所言之意也어늘 今乃引之하야 而謂周子之言實出乎彼라하니 此又理有未明하야 而不能盡乎人言之意者也로다 高明之學이 超出方外하니 固未易以世間言語論量하며 意見測度어니와 今欲奉報한댄 又恐徒爲紛紛하야 重使世俗觀笑오 若遂不言이면 則恐學者終無所取正이니 較是二者컨댄 寧可見笑於今人이언정 不可得罪於後世라 是以終不獲已而竟陳之하노라
이번 여름에 어떤 사람과 역(易)을 말하다가 그 사람의 말이 꼭 이와 같아 나도 모르게 실소를 하여 이를 추궁당한 일이 있었는데, 저들 속유(俗儒)야 융통성이 없어 말대로 풀이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지만, 노형의 평일의 생각이 어떠하였기에 이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노형은 또������대전������에서 말한 유(有)가 과연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가 정위가 있는 것과 같으며, 천지 오행 만물이 형상이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또 주자(周子)가 말한 무(無)가 과연 허공단멸(虛空斷滅)하여 도무지 만물을 생성하는 이치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노자(老子)가 무극으로 다시 돌아갔다.”
고 할 때의 무극은 무궁의 뜻이고,
“장자(莊子)가 무궁의 문에 들어가서 무극의 들에서 놀았다.”
고 할 때의 무극은 주자(周子)가 말한 무극의 듯이 아니거늘, 지금 이를 인용하여
“주자(周子)의 말이 실은 저 노장(老莊)에서 나왔다.”
고 하니, 이 또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여 남의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고명(高明)의 학문이 정통적인 학문의 범위를 벗어나 세속적인 언어나 의견으로서는 쉽게 헤아리기가 어렵거니와, 지금 고명의 학설에 응대하고자 하니 공연히 시끄럽게 하여 세속의 웃음을 살 것 같고, 만약 응대를 하지 않으면 학자들이 끝내 정론(正論)을 취하지 못할 것 같다. 양자를 비교하건대 차라리 세속의 웃음거리가 될지언정 후세에 죄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끝내 그만두지 못하고 이같이 말하는 것이다.
子美尊兄이 自足天資質實重厚하야 當時看得此리 有未盡處라 不能仔細推究하고 便立議論하야 因而自信太過하야 遂不可回하니 見雖有病이나 意實無它어니와 老兄이 却是先立一說하야 務要突過有若子貢以上하고 更不數近世周程諸公이라 故於其言에 不問是非하고 一例吹毛求疵하야 須要討不是處하니 正使說得十分無病이라도 此意却先不好了어든 況其言之粗率이 又不能無病乎아 顔子以能問於不能以多問於寡有若無實若虛犯而不校하고 曾子三省其身하야 惟恐謀之不忠交之不信傳之不習하니 其智之崇如彼하대 而禮之卑如라 此豈有一毫自滿自足强辯取勝之心乎아 來書之意所以見敎者甚至라 區區鄙見을 亦不敢不爲老兄傾倒也로니 不審尊意以爲如何오 如曰未然인댄 則我日斯邁하며 而月斯征551)하야 各尊所聞하고 各行所知亦可矣니 無復可望於必同也로다
자미(子美) 존형은 타고난 성품이 진실하고 중후하나 당시에 이 이치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여 자세히 추구하지 아니하고 곧 자기 주장을 세워 자신(自信)이 지나쳐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니, 그 견해는 비록 병통이 있으나 뜻은 그렇지 아니하거니와, 노형은 먼저 하나의 설(說)을 세워 이를 관철시키려함이 유약(有若)․자공(子貢) 이상이고, 또 근세의 주자(周子)․정자(程子)자 같은 제공(諸公)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하나같이 결점을 찾아내어 기필코 옳지 않는 곳을 밝히려고 하니, 가령 노형의 주장이 한 점 오류가 없다하더라도 이러한 태도는 좋지 않은 것인데 하물며 그 말이 거칠고 병통이 없지 않는 경우에야 더욱 좋지 않은 것이리라. 안자는 재능이 있으면서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묻고, 식견이 많으면서 식견이 적은 사람에게 묻고, 덕이 있으면서 없는 것같이 하고, 속이 차 있으면서 빈 것같이 하고, 남이 나를 침범하여도 시비를 따지지 않았으며, 증자는 날마다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하여 남에게 충성치 못하였는가. 남에게 신실치 못하였는가. 배운 것을 복습하지 못하였는가. 하고 걱정하였으니 지혜가 그처럼 높으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예(禮)가 이처럼 돈독하니 어찌 일호(一毫)의 자만․자족이나 강변․취승(取勝)하는 마음이 있었겠는가.
보내온 서신의 뜻이 나에게 교훈을 주는 바가 매우 지극하니, 어찌 노형을 위해 나의 생각을 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존형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서로의 생각이 같지 아니하면 나는 내 생각대로 정진하고, 존형은 존형 생각대로 매진하여, 제각기 들은 바를 존숭하고 아는 바를 행함이 옳을 것이다. 반드시 두 사람의 생각이 같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與慶國卓夫人552)
熹輒有愚見하야 初欲面稟이러니 今旣不成行이라 敢此布之하노라 五哥嶽廟553)는 近自春中以來로 頓減遊燕하고 復近書冊하니 若常能如此하면 寡過可期라 更望因書褒勤하야 以獎成之하라 且聞尊意欲爲經營554)幹官555)差遣이라하니 不知然否아 熹則竊以爲不可라하노라 近世人家子弟는 多因爲此壞却心性하야 一生仕宦費力556)하니 盖其生長富貴하야 本不知艱難이라가 一朝仕宦에 便爲此官하면 逐司557)只有使長558)一人이 可相拘轄559)이오 又間有寬厚長者는 卽以貴遊子弟相待하야 不欲以法度見繩하니 上無職事了辦之責하고 下無吏民窺伺之憂오 而州縣守倅560)이 勢反出已下하야 可以陵轢561)이라 故後生子弟爲此官者는 無不傲慢縱恣하야 席勢陵人하고 其謹飭者는 雖不至此나 亦緣不親民事하야 觸事懜然非如州縣小吏等級相承하고 職事相轄하야 一日廢慢이면 則罪戾及之라 故仕於州縣者는 常曉事而少過하니 愚意는 以爲平父562)를 可且令參部563)하야 受簿尉564)之屬이 乃爲正當이오 若不欲如此ㄴ댄 卽舍人兄565)이 爲營一稍在人下有職事喫人打罵566)差遣이 乃所以成就之하니 若必欲與求幹官이면 乃是置之有過之地하야 誤其終身이니 恐非太碩人高明567)敎子之本意也로다 受恩深厚하야 冒昧及此하니 皇恐皇恐이로다 熹所稟大槪如此하니 更有曲折意度하대 紙盡寫不得이라 舍人兄長必深委悉이니 只乞因其侍次하니 試以問之하면 必以爲然也니라 熹又覆하노라
여경국탁부인(與慶國卓夫人)
내 문득 어리석은 생각이 있어 처음엔 찾아 뵙고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실행치 못하고 이렇게 글월을 드립니다.
평보(平父)는 근래 중춘 이래로 놀기를 줄이고 다시 서책을 가까이한다 하니 늘 이같이 하면 허물이 적을 것입니다. 글을 보내 칭찬하고 격려해주기 바랍니다. 듣기로는 부인께서 평(玶)에게 간관직(幹官職)을 얻도록 해서 보내려 한다 하니 이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은 옳지 않은 일 같습니다. 근세에 많은 자제(子弟)들이 이로 인하여 심성을 해치고 일생 벼슬살이에도 많은 고생을 하게되니, 대개 부귀한 가정에서 자라나 어려움을 모르거나, 갑자기 벼슬길에 나아가 곧 바로 간관(幹官)을 맡으면, 사(司)마다 사장(使長) 한 사람만 이를 감독하고, 또 혹 너그러운 윗사람은 귀한 자제로 대우하여 법도로써 검속하지 않으니, 위로는 분명한 책임이 없고 아래로는 이민(吏民)들이 규찰할 염려가 없으며, 주현의 군수들은 세력이 자기보다 약해 능멸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후생 자제들이 간관(幹官)을 한 자가 모두 오만 방자하여 세력을 믿고 남을 능멸합니다. 조금 엄격한 자는 이에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민생을 잘 모르고 잔일에 어두워, 주현 소리(小吏)들이 위계 질서가 있고 직책이 분담되어 하루라도 직분을 게을리 하면 벌을 받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러므로 주현의 관리들은 사리(事理)에 밝아 과실이 적으니 내 생각에는 평보(平父)를 이부(吏部)로부터 정식으로 부위(簿尉)같은 직함을 받게 함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기가 싫으면 사인형(舍人兄)이 다른 말직(末職)을 주선하여 남의 밑에서 곤욕을 치르도록 함이 그를 성취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에게 꼭 간관(幹官)을 구해주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곳에 그를 밀어 넣어 그의 일생을 그르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석인(碩人)의 자식을 교육하는 본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은혜가 두터워 이 같이 외람된 말을 하니 황공합니다.
내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대략 이와 같고 또 할말이 더 있으나 종이가 모자라 더 쓰지 못하겠습니다. 사인형이 더욱 자세히 알고 계실 터이니 때를 봐서 그에게 물으면 꼭 내 말이 옳다 할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上黃端明568)
具位熹敢齋沐裁書하야 請納再拜569)之禮于致政570)尙書端明文丈台座571)하노라 熹聞之하니 孟子有言하대 天下有達尊三이나 爵一齒一德一이라하시니 此言三者之尊이 達于天下人所當敬이오 而不可以慢焉者也라 雖然爵也齒也는 盖有偶然而得之者라 是以其尊이 施于朝廷者는 則不及於鄕黨하고 施于鄕黨者는 則不及於朝廷하야 而人之敬之也는 亦或以貌而不以心이어니와 惟德也者는 得於心充於身刑於家하야 而抽於鄕黨而達於朝廷者也니 有是而兼夫而者之尊焉이면 則通行天下에 人莫不貴하야 雖斂退避하야 不以自居나 而人之所以心悅而誠服者를 盖不可解矣라
상황단명(上黃端明)
자리만 지키는 무능한 제가 감히 목욕 재계하고 종이를 잘라 치정상서단명문장태좌(致政尙書端明文丈台座)에 재배의 예를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들으니 맹자가 말하기를,
“천하에 달존(達尊)이 셋 있으니 벼슬이 하나요 나이가 하나요 덕이 하나라”
고 하니 이 세 가지 높음은 천하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존경하여 소홀히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벼슬과 나이는 우연히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존경을 받더라도 향당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할 수가 있고, 향당에서 존경을 받더라도 조정에서는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있어 사람들의 존경이 겉으로 모양만 취하고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는 수가 있지만, 덕(德)은 마음에 체득하여 몸에 확충되고 가정에서 본보기가 되어 향당과 조정에까지 미치는 것이니, 덕이 있고 벼슬과 나이를 겸하면 천하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비록 거둔 듯이 물러나 있어 스스로 뽐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마음으로 즐겨하고 진실로 복종할 것입니다.
恭惟明公이 以兩朝侍從元老로 上還印綬而退處于家하니 自天子不敢煩以政하사 賜之 凡杖而乞言焉하시니 其位與年도 固非偶然而得之者矣로대 而明公則未嘗以是而自異於人하고 其所以黙而成之不言而信572)者則日新又新하야 而未嘗有止也하니 此天下知德之士所以莫不竊慕下風之義하야 俱有執鞭之願이오 而熹之愚는 則有甚焉者니라 盖其平生氣稟偏駁하야 治已則不能謹於細微하며 立志則不能持於常久하고 以至待人接物之際커늘 溫厚和平之氣不能勝其粗厲猛起之心이라 是以常竊自悼以爲安得朝夕望見明公之盛德容貌하야 而師法其萬一하야 庶幾可以飭身補過於將來하고 而不遂爲小人之歸也오하더니 今日之來는 盖將頓首再拜于堂下하야 以償其夙昔之願이니 伏惟明公坐而受之하야 使得自進於門人弟子之列하야 而不孤其所以來之意면 則熹之幸也라 鄕往之深573)에 不自知其僭越하야 敢以書先于將命者하고 而立于廡下하야 以聽可否之命하노니 熹不勝皇恐之至로다
삼가 생각건대 명공은 양조(兩朝)의 시종(侍從) 원로(元老)로서 사직하고 물러나 있으니, 천자도 감히 정사로써 명공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지팡이와 책상을 하사하여 자문을 구하니, 그 벼슬과 나이도 우연히 얻은 것이 아니로되 명공은 이를 내세워 다른 사람과 특별히 달리하지 않고, 그 말 없이도 일을 이루고 말 없이도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이 날로 새로워져 그침이 없습니다. 이것이 천하의 덕을 아는 선비가 명공의 덕을 사모하여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까닭이고, 어리석은 저는 그 중에서도 더욱 간절한 사람입니다. 저는 평소의 기품이 편박(偏駁)하여 처신이 근밀(謹密)하지 못하여, 입지(立志)가 강하지 못하여 오래 지속을 못하고, 윗사람을 모시고 사람을 대함에는 온후하고 화평한 기운이 거칠고 사나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항상 안타까워하며 어찌하면 조석으로 명공의 성덕(盛德) 용모를 바라보고 사법(師法)을 삼아 앞으로의 잘못을 고쳐 소인(小人)을 면할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머리를 조아려 당하에 절하고 평소의 소원을 이루고자 함이니, 명공은 이를 거두어 문인 제자가 되게 하여 여기에 온 저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해 주시면 큰 다행이겠습니다. 명공을 향한 마음이 깊어 제 분수에 넘침을 알지 못하고 감히 먼저 장명자(將命者)에게 글을 올려 곁채 아래에서 하명을 기다리니 황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與王龜齡574)
熹窮居晩學하야 無所肖似라 往者學不知方하대 而過不自料하야 妄以爲國家所恃以爲重天下所賴以爲安風俗所以旣漓而不可以復淳紀綱所以旣壞而不可以復理無一不係乎人焉이라 是以聞天下之士有聲名節行爲時論所歸者면 則切切然以不得見乎其人爲歎하고 及其久也에 或得見之하고 或不得見之라도 而熹之拳拳이 不少衰也하야 聞其進爲時用이면 則私以爲喜하고 聞其阨窮廢置면 則私以爲憂리니 及夫要其所就而觀之컨댄 則始終大節眞可敬仰者盖無幾人이오 而言論風旨卒無可稱하고 功名事業卒無可紀者는 亦往往而有하니 以此喟然自歎하야 知天下所謂聲名節行者는 亦未足以定天下之人이니 而天下之事는 未知其果將何寄也라
여왕구령(與王龜齡)
제가 곤궁하게 지내면서 늦게 공부하여 제대로 본받아 배운 바가 없습니다. 지난날엔 나의 배움이 법도를 모르고 허물이 있어도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헛되이도 국가가 믿고 의지하여 무거워짐과, 천하가 힘입어 편안해짐과, 풍속이 경박해져 다시 순박해질 수 없음과, 세상의 기강이 무너져 다시 다스려지지 않음이 어느 하나 현인 군자의 교화에 달려있지 않음이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천하의 선비 중에 성명(聲名)과 절행(節行)이 뛰어나 세상이 이를 따르는 자가 있다고 들으면, 절절히 그 사람을 보지 못해 탄식을 하고, 오래됨에 그 사람을 보기도 하고 혹 보지 못하기도 하였지만, 내가 이들 현자를 잊지 못하는 마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인 군자가 세상에 나와 등용되는 것을 들으면 혼자 좋아하고, 그가 액운을 만나 세상에서 버려졌다는 것을 들으면 혼자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향해 가는 바를 자세히 살펴보건대, 시종일관 대절(大節)을 지켜 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그의 언론과 풍지(風旨)는 말할만한 것이 거의 없으며, 그의 공명과 사업은 기록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자가 왕왕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를 한심하게 생각하여 천하가 성명 절행이 있다고 말하는 자도 천하의 인심을 귀속시키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천하의 일이 장차 어디에 의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自是以來로 雖不敢易其賢賢之心하고 緩其憂世之志나 然亦竊自笑其前日所求於人之重이오 而所以自待者反輕이 如孟子之所譏575)也라 於是始復取其所聞於師友者하야 夙夜講明하야 動精體察에 求仁格物하야 不敢弛其一日之勞하야 以庶幾乎有聞者오 而於前日之所爲切切然者는 則旣有所不假矣이니 當是時하야 聽於士大夫之論하며 聽於輿人走卒之言하며 下至於閭閻市里女婦兒童之聚에 亦莫不曰하대 天下之望이 今有王公也라하더니 已而得其爲進士時所奉大對576)讀之하고 已而得其在館閣時上奏事577)讀之하고 已而又得其爲柱史578)在臺諫遷侍郞時所論諫事讀之하고 已而又得其爲故大丞相魏國公之誄文及楚東579)酬唱等詩讀之하야 觀其立言措意 上自奏對陳說580) 下逮燕笑從容581)히 盖無一言一字 不出於天理人倫之大하고 而世俗所謂利害得喪榮辱死生之變이 一無所入於其中하니 讀之眞能使人胸中浩然하고 鄙吝消落하니 誠不自意古人頑廉懦立之效를 乃於吾身見之라 於是作而歎曰 士之求仁이 固當以反求諸己爲務나 然豈不曰事其大夫之賢者582)云哉아
이때부터 비록 저의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는 마음과 세상을 걱정하는 뜻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지만, 전일에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도리어 가볍게 여겼던 것이, 마치 맹자가 꾸짖은 바 대로 내 밭을 버리고 남의 밭을 김매는 것과 같아서, 비로소 다시 평소에 사우(師友)로부터 들은 바를 모아서 밤낮으로 강명하여,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나 몸으로 살핌에, 안으로는 인(仁)을 구하고 밖으로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아 세상에 들릴만한 것이 있기를 기대하고, 전일에 다른 사람에게 절절히 바랐던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이 때에 사대부의 논의를 듣거나 가마 네는 심부름꾼의 말을 듣거나 마을의 부녀와 아동들의 말을 들어도, 천하의 촉망이 왕공에게 모아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드디어 왕공이 진사일 때에 상주(上奏)한 대책(對策)을 구해 읽어보고, 또 관각(館閣)에 계실 때에 상주(上奏)한 것을 읽어보고 또 사관(史官)일 때와 대간에 계실 때와 시랑(侍郞)으로 계실 때에 간언한 것들을 읽어보고 또 돌아가신 대승상 위국공(魏國公)의 제문과 초동수창(楚東酬唱) 등의 시문(詩文)을 읽어보니, 그 언어와 뜻이 위로 주대(奏對) 진설(陳說)로부터 아래로 평소의 종용한 풍모에 이르기까지 일언 일자가 모두 천리와 인륜에 벗어난 것이 없고, 세속이 말하는 이해득실과 영욕사생의 변화는 그 가운데에 하나도 들어 있지 않으니, 이을 읽음에 진정 저로 하여금 가슴이 확 트이게 하고 비속하고 인색한 마음이 말끔히 사라지게 하니, 진실로 옛 사람이 말한 ‘욕심많은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굳건히 설 수 있다’는 말의 징험을 저 자신에게서 보는 것 같습니다. 이에 분연히 일어나 저 자신에게 말하기를,
“선비가 인(仁)을 구함이 마땅히 자신에게 돌이켜 구함에 힘써야 할 것이나 어찌 ‘대부 중에 어진 자를 섬겨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今以前日失數公者가 自懲이면 是以一噎而廢食也라 於是慨然復有求見於左右之意而未獲也리니 昨聞明公還自夔州583)하야 撫臨近甸584)하고 而熹之里閈交游585)는 適有得佐下風者586)라 因以書賀之하니 盖喜其得賢大夫事之하고 而自傷無狀獨不得一從賓客之後하야 以望大君子道德之餘光也러니 不意夤緣하야 與其587)向來鄙妄無取之言으로 皆得徹聞於視聽하고 明公又不以凡陋爲可棄狂僭爲可罪라하야 而辱枉手筆하야 以抵宋倅하야 盛有以稱道하니 竊惟明公之志豈非以世衰道微하야 遺君後親588)之論이 交作肆行하야 無所忌憚하야 擧俗滔滔라 思有以障其橫流者할세 是以有取於愚者一得之慮하야 因以不求其素589)하고 而借之辭色也耶아 明公之志는 則正矣大矣나 而熹之愚는 未有稱明公之意也로다 雖然有一於此590)하니 其惟益思砥礪하야 不敢廢其所謂講明體察求仁格物之功者하야 使理日益明하며 義日益精하며 操而存之日益固하며 壙而充之日益遠하며 則明公之賜를 庶乎其有以承之니 而幸明公之終敎之也하라 雖然明公以一身當四海士大夫軍民一面之責하니 其一語一黙一動一靜之間에 所係亦不輕矣라
지금 전일에 몇몇 공경(公卿)에게 실망한 일 때문에 왕공 같은 분에게도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는 한 번 목메임 때문에 밥을 먹지 않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에 개연히 다시 명공의 깊은 뜻을 헤아려보고자 하였으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일전에 명공께서 기주로부터 돌아와 도성 부근에서 지내신다고 듣고, 또 저의 마을의 친구가 마침 명공을 모시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이어 그에게 글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으니, 그 사람이 현대부(賢大夫)를 모심을 기뻐하였고, 저는 명공의 빈객이 되어 대 군자의 도덕 여광(餘光)을 바라보지 못함을 상심하고 있었더니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이렇게 축하의 말씀과 함께 저의 보잘 것 없는 말을 모두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공께서 또 저의 말이 비루하다고 버리지 않고, 외람되다고 죄를 주지 않으며, 욕되이도 굽혀 송쉬(宋倅) 편으로 수필(手筆)을 보내어 크게 칭도(稱道)해 주시니,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쇠도미(世衰道微)하여 유군후친(遺君後親)의 말이 거리낌없이 일어나 세상이 온통 이에 휩쓸리는 때에, 명공의 뜻이 어찌 그 횡류(橫流)를 막는데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라도 천 마디 말 중에 한 마디는 쓸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저의 바탕을 고려하지 않고 저의 말을 거두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명공의 뜻은 광명정대(光明正大)한데 반하여 저의 어리석음은 이 십분의 일도 부응하지 못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려를 더욱 갈고 닦아 강명체찰(講明體察)하고 구인격물(求仁格物)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의리(義理) 공부는 날로 정명(精明)학 하며, 조존(操存) 공부는 더욱 굳게 하며, 확충(擴充) 공부는 더욱 원대하게 한다면, 명공께서 저에게 거는 기대를 조금은 받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명공께서는 끝까지 저를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명공의 일신(一身)이 천하 사대부와 군민(軍民)의 희망을 한 몸으로 짊어졌으니, 명공의 일어(一語) 일묵(一黙), 일동(一動) 일정(一靜)이 그 끼치는 영향이 또한 가볍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伏惟盛德大業이 前定不窮하니 其剛健中正篤實輝光者는 固無所勉彊이어니와 以熹之所覩記론 則古語所謂行百里者半九十里591)를 明公其亦念之하라 況今人物眇然592)하야 如明公者僅可一二數라 是以天下之人이 責望尤切하니 而明公尤不可以不戒라 不審明公以爲如何哉오 熹又聞之하니 古之君子尊德性矣오 而必曰道問學이라하고 致廣大矣오 必曰盡精微라하고 極高明矣오 必曰道中庸이라하고 溫故知新矣오 必曰敦厚崇禮593)라하니 盖不如是면 則所學所守는 必有偏而不備之處니 惟其如是라 是故居上而不驕하며 爲下而不倍하야 有道則足以興이오 無道則足以容하야 而無一偏之蔽也니 熹之區區는 以此深有望於門下하노라 盖所謂德性廣大高明知新者는 必有所措594)오 而所謂問學精微中庸崇禮者는 又非別爲一事也라 狂易595)無取하니 明公其必有以裁之니라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덕대업(盛德大業)은 그 성취가 끝이 없으니, 명공의 강건중정(剛健中正)과 독실휘광(篤實輝光)이 참으로 더 힘 쓸 바가 없다 하겠으니, 제가 본 옛 기록에
“백 리를 감에 구십 리가 반 밖에 되지 않는다.”
는 말이 있으니 명공께서는 이 말의 뜻을 깊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지금 세상에 인물이 묘연하여 명공 같은 분이 겨우 한 두 사람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의 명공에 대한 촉망이 매우 간절하니, 명공께서는 이를 더욱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명공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제가 들은 바로는
“옛날의 군자가 덕성을 높게 하되 반드시 문학(問學)을 통해서 하고 광대함을 이루되 반드시 정미로움을 다하며, 고명(高明)을 다하되 반드시 중용을 말미암고, 온고지신을 하되 반드시 돈후숭례(敦厚崇禮)를 통해서 한다.”
고 하니 이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배우고 지키는 바가 반드시 치우쳐 두루 갖추지 못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오직 이렇게 하여야만 소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윗자리에 있되 교만하지 아니하며, 아래 자리에 있되 윗사람에 위배되지 아니하여 상대가 도(道)가 있으면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을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제가 이와 같은 것을 명공께 간절히 바라노니 대개 존덕성(尊德性)․광대(廣大)․고명(高明)․지신(知新)이라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있을 것이며, 문학(問學)․정미(精微)․중용(中庸)․숭례(崇禮)라고 말하는 것이 별도로 다른 일이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의 말이 상정(常情)을 잃은 말이라 취할 바가 없을 것이니 명공께서 반드시 취사선택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往者明公在夔에 成都汪公596)聲聞密邇하니 竊意有足樂者라 此來597)에 時通問否아 此公涵養深厚하고 寬靜有容하니 使當大事에 必有不動聲色이오 而內外賓服者라 明公相之深하니 一日進爲於世하면 引類之擧는 其必有所先矣리라 熹杜門養親하야 足以自遣이러니 昨嘗一至湖湘598)하야 出資交游講論之益하고 歸來忽被除命599)하야 旣不敢辭而拜命矣나 然明公未歸朝廷하니 熹亦何所望而敢前也리오 引領牙纛600)에 未有瞻拜之期하니 向風馳義를 日以勤止라 輒敢復因宋倅하야 相爲介紹하야 致書下執事하야 以道其拳拳之誠하노니 伏惟照察하라
지난번에 명공께서 기주에 계실 때에 성도의 왕공(汪公)께서 가까이 계셨으니 또한 함께 즐거운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 오신 이래로 때때로 왕공과의 통문(通問)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왕공(汪公)께서는 함양(涵養)이 매우 두텁고, 너그럽고 고요하여 종용함이 있으니, 큰 일을 맡기시면 반드시 목소리와 얼굴빛을 요동하지 아니하여도 안팎에서 빈복(賓服)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왕공은 명공과 서로 친숙한 사이이니 명공이 세상에 나가면 반드시 먼저 그를 천거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문을 닫고 어버이를 모시며 쓸쓸함을 달래고 지내다가, 지난번에 호상(湖湘)에 갔을 때는 교우하고 강론하는 사이에 유익함이 많았고, 돌아와서 갑자기 제명(除命)을 받으니 감히 사양치 못하고 명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명공께서 조정에 돌아오지 않으시니 누구를 바라보고 조정에 나아가겠습니까. 명공이 돌아오시기를 목을 느리고 기다리고 있지만 우러러 절하고 뵈올 날이 기약이 없으니 명공을 향해 의리(義理)를 다하기를 날마다 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감히 다시 송쉬(宋倅)를 통하여 저를 소개하고 하집사(下執事)에게 글을 보내어 저의 잊지 못하는 정성을 말씀드립니다. 굽어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與劉共父601)
熹前幅所稟謗問人材事는 初若率然이러니 旣而思之니 此最急務나 然其意有味盡者할세 輒詳論之如左云하노라 古之大臣이 以其一身任天下之重하니 非以其一耳目之聰明과 一手足之勤力이 爲能周天下之事也라 其所賴以共正君心하고 同斷國論이 必有待於衆賢之助焉이니 是以君子將以其身任此責者는 必咨詢訪問하야 取之於無事之時하고 而參伍校量602)하야 用之於有事之日하나니 盖方其責之必加於己而未及603)也에 無朝暮倉卒之須604)면 則其觀之605)得以久하며 無利害紛拏之惑이면 則其察之得以精하며 誠心素著에 則其得之多하며 歲引月長이면 則其蓄之富하며 自重者는 無所嫌而敢進606)이면 則無幽隱之不盡하며 欲進者607)는 無所爲而不來면 則無巧僞之亂眞하니 久且精이라 故有以知其短長之實而不差하며 多且富라 故有以使其更迭爲用而不竭하며 幽隱畢達이면 則讜言이 日聞而吾德이 須하며 取舍不眩이면 則望實608)이 日隆而士心이 附하니 此古之君子所以成尊主庇民之功於一時而其遺風餘韻이 猶有稱思於後世者也니라
여유공보(與劉共父)
내가 지난 번 서신에서 말한 인재를 찾아 방문하는 일이 처음엔 긴요한 일이 아닌 것같이 여겼으나 깊이 생각해보니 이 일이 가장 급히 힘써야 할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뜻이 미진한 것이 있어 아래와 같이 다시 자세히 논하고자 한다.
옛날에 대신이 그 일신(一身)으로써 천하의 중책을 맡은 것은 한 사람의 이목의 총명과 한 사람의 손발의 부지런함으로써 천하의 일을 모두 주선한 것이 아니다. 그가 힘입어 같이 군심(君心)을 바르게 한 것과 함께 국론을 결정한 것이 반드시 여러 현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가 장차 이러한 중책을 질 사람은 반드시 인재를 찾아 방문하고 자순(咨詢)하여 중대한 일이 없을 때에 인재를 취하여 다방면으로 헤아렸다가 중대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들을 적재적소에 썼던 것이다. 곧 그 중책이 자기에게 주어질 것이로되 아직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때에 미리 인재를 구하면 장졸간의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그 재능을 알아 볼 수 있고, 이해관계에 얽히는 유혹이 없기 때문에 정밀하게 그 재능을 알아 볼 수 있고, 인재를 구하려는 성실함이 밝게 드러나기 때문에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고, 여러 해를 두고 인재를 구했기 때문에 풍부한 인재를 준비할 수 있고, 자신을 무겁게 처신하는 자가 혐의 없이 용감하게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숨어있어서 빠뜨리는 인재가 없고, 재능이 없으면서 세상에 진출하고자 하는 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진출할 수가 없으니 거짓이 진실을 속이는 일이 없고, 오랫동안 알아보고 자세히 살폈기 때문에 그 장단의 실상을 알 수 있고, 착오 없이 많이 비축해두었기 때문에 바꾸어가며 써도 부족함이 없고, 숨은 인재가 다 모였기 때문에 날마다 바른 말을 들을 수 있어 나의 덕이 날로 쌓이며, 취하고 버림에 현혹됨이 없기 때문에 나의 명망이 날마다 융성해져 선비들의 마음이 나를 따를 것이니, 이것이 옛날의 군자가 한 시대에 존주(尊主)․비민(庇民)의 공을 이루어 그 유풍(遺風)․여운(餘韻)이 후세에 칭송되는 까닭인 것이다.
今之人609)則不然하야 其於天下之士에 固有漠然不以爲意者矣오 其求之者도 又或得之近而不知其遺於遠하며 足於少而不知其漏於多하며 求之備而不知其失於詳也하야 其平居暇日所以自任者雖重이나 而所以待天下之士者는 不過如此라 是以勤勞惻怛이 雖盡於鰥寡孤獨之情而未及乎本根長久之計하고 恩威功譽雖播於兒童走卒之口而未論乎賢士大夫之心하니 此盖未及乎有爲하야 而天下之士는 先以訑訑之聲音顔色待之矣니 至於臨事倉卒而所蓄之材不足以待用이오 乃始欲泛然求已所未知而賢而用之하며 不亦難哉아 或曰然則未當其任而欲先得天下之賢者면 宜奈何오 曰權力所及則察之擧之하고 禮際所及則親之厚之하며 皆不及則稱之譽之하며 又不及則鄕之慕之하대 如是以猶以爲未足也어든 又於其類而求之하야 不以小惡揜大善하며 不以衆短棄一長이니 其如此而已라 抑吾聞之니 李文公610)之言曰하대 有人告曰하대 某所有女는 國色也라하면 天下之人이 必將極其力而求之無所愛也오 有人이 告曰某所有人이 國士也라하면 天下之人이 則不能一往而先611)焉하나니 此豈非好德不如好色者乎아하니 嗚呼欲任天下之重者는 誠反此而求之면 則亦無患乎士之不至矣리라
그런데 지금 명공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니 천하의 어진 선비에 대해서 막연하여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명공이 어진 선비를 구하는 것이 가까운데서 구하여 먼데 있는 선비를 빠뜨림을 모르고, 인재가 적은데 만족하여 많은 인재가 빠뜨려짐을 알지 못하고, 재능이 완벽한 사람을 구하면서 그 재능을 자세히 살피지 않음을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평소에 자신의 책임이 이같이 무거운 줄을 알면서도 천하의 어진 선비를 대우함이 이처럼 소홀한 것 같다. 이 때문에 부지런히 힘써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비록 환과 고독에까지 다 미치나 근본적이고 장구한 계획에는 미치지 못하고, 은혜와 공로가 비록 아동과 주졸(走卒)의 입에 파다하게 칭송되어도 현사(賢士)와 대부의 마음을 설복시키지 못하니, 이는 평소에 천하의 선비를 거만한 말과 얼굴로 대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대한 일을 당한 창졸지간에 미리 준비해 둔 인재가 부족하여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인재를 막연히 구하려 하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중대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먼저 천하의 현자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면, 자신의 권력이 미치면 그 현자를 살펴서 천거하고, 자신의 예우가 미치면 그를 가까이하여 두터이 예우하고, 권력과 예우가 다 미치지 못하면 그를 칭송하고, 또 이것도 미치지 못하면 그를 사모할 것이니, 이렇게 하고도 현자를 구하기에 부족하면 그에 버금가는 비슷한 사람 중에 인재를 구하여 작은 결점 때문에 큰 장점을 못 보는 일이 없도록 하고, 여러 가지 단점 때문에 하나의 장점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할 따름인 것이다.
문공(文公) 이고(李翶)가 말하기를,
“어떤 곳에 절세의 미인이 있다고 하면 천하의 사람이 모두 있는 힘을 다하여 이를 구하려 하지만 국사(國士)가 될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호덕(好德)을 호색같이 한다고 하겠는가.”
하니 천하의 중책을 맡고자 하는 자가 호색을 구하듯 현자를 구하면 어찌 현자가 이르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與劉共父
竊承延登廟堂하야 參貳樞筦612)하니 君子之仕至此에 亦可謂得時得位니 可以不負其所學矣라 逖聞明命하고 贊喜亡涯라 某去月六日613)에 始得離長沙614)하야 與敬夫同行 謁魏公墓615)下하고 遂登祝融616)絶頂이러니 已乃東歸至櫧洲하야 始分手하니 盖講論之樂이 尙未曾有617)라 別去에 殊憫618)然也로다 至醴陵하야 始微聞兄有此拜하니 至淸江에 始得其眞이라 然伏讀十一月五日詔書619)하니 奴詬大臣하고 豕視庶位하니 甚矣其間而不然也로다 不知出兄筆否620)아 當時何不略開諫耶오 自見此詔로 連三日寢食不安이니 其曲折未易以一言盡이어니와 大抵自此人主心益肆勢益孤621)하며 賢人君子는 日益消縮하야 不願立於其朝하고 而讒謟面諛持祿保位之士는 益聚而肆然其無所不爲矣리니 反復念此에 惻然寒心하야 中夜以興에 不覺歎咤622)이라 此殆聖主는 思之未熟而奉令承敎之臣623)도 與有責也로다 某嘗譬之人子事親之道624)컨댄 不幸至於父母之顔色이 不和하면 爲子者는 當左右承順하야 以祈悅適耶아 當詬詈妻孥하며 敺擊僮隸하야 以快己之忿耶아 此閭巷之人이니 知之니 不待曾參孝己625)而後委626)也라 至於人主事天之道하얀 何獨不然이리오 今日之爲其亦異乎오所聞矣로다
여유공보(與劉共父)
천자께서 친히 공(公)을 묘당(廟堂)에 맞이하여 추밀원 부사의 직첩을 내리셨다 하니 군자가 벼슬을 하여 이에까지 이르니 때를 얻고 위(位)를 얻어 그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멀리서 이 같은 군명(君命)을 들으니 기쁘고 기리는 마음 가이없다.
나는 지난 달 6일에 비로소 장사(長沙)를 떠나 경부(敬夫)와 동행하여 위공(魏公)의 묘소를 배알하고 축융의 절정에 올랐다가 이윽고 동쪽으로 돌아와 저주(櫧洲)에서 헤어지니 함께 학문을 토론하는 즐거움이 일찍이 이보다 더함이 없었고 헤어지기가 자못 섭섭하였다. 예능(醴陵)에 이르러 존형이 추밀원 부사에 제수 되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고 청강(淸江)에 도착하여 비로소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11월 5일의 조서(詔書)를 읽어보니 대신을 종처럼 꾸짖고 아래 관원을 돼지처럼 나무라니 심하도다! 그럴 수가 있는가. 혹시 존형이 그 조서를 쓰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찌하여 당시에 이러한 일을 막지 못했는가. 이 저서를 본 뒤로 연 사흘 동안 침식이 불안하였으니 그 아픈 마음을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이 일이 있은 뒤로 인주(人主)의 마음은 더욱 방자해지고 그 형세는 더욱 외로워져, 현인 군자는 날로 위축되어 조정에 나오기를 꺼릴 것이고, 아첨하여 봉록과 자리만 지키려는 소인배는 더욱 더 모여들어 방자하게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반복 이를 생각하니 슬프고 한심하여 밤중에 일어나 생각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것은 성주(聖主)의 생각이 미숙한 탓도 있겠지만 대간(臺諫)과 시신(侍臣)들도 같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인 것 같다. 비유컨대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가 불행히 부모의 안색이 화평하지 못한 상황에 이르렀다면, 자식된 자가 곁에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가 기뻐하기를 빌 것인가, 아니면 아내와 자식을 욕하며 꾸짖고 종아이를 매질하여 자기의 분을 풀 것인가. 이것은 거리의 사람들도 다 아는 일일 것이다. 증삼(曾參)이나 효기(孝己)같은 효자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니 인주(人主)가 하늘을 섬기는 도리가 어찌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오늘과 같은 일은 내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觀今日氣象하니 雖非有危機交急之慮나 然大根大本627)處는 被群小壞得八九分以上了하야 日往月來하니 不是小事라 苦痛苦痛이로다 兄與陳公628)으로 素有物望이 非它人比니 今日雖未爲宰相이나 然實斷國論629)이니 若只似常人의 遷延歲月하야 保持祿位 以俟人主厭棄而擊逐之면 則非惟大失人望하고 隤損家聲이라 亦豈吾平日讀書問學之意耶며 亦豈吾平日致身事國之意耶아 在長沙時에 未親近詔630)하대 但已不勝憂慮하야 日與欽夫語此에 幾陳至隕涕러니 不知當其任者631)는 視以爲何如耳라 願亟與陳公謀至하라
지금 조정의 형세를 보건대 비록 위기가 급박한 상태는 아니지만 치세의 큰 근본인 군주의 덕망이 뭇 소인배에 의하여 거의 다 손상된 지경이니 이 상태로 세월이 가면 큰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존형과 진공(陳公)은 평소에 온 세상 사람이 기대를 걸고 바라보고 있으니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하겠다.
지금 비록 재상의 자리에 있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는 국론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으니, 만일 세월만 보내며 봉록과 지위를 유지하려는 평범한 사람처럼, 인주가 싫어하여 쫓겨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고자 한다면 크게 세상 사람을 실망시킬 뿐만 아니라 일가(一家)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가 평소에 독서하고 학문을 한 뜻이며 수신하고 치국하는 뜻이겠는가. 장사(長沙)에 있을 때는 그 조서(詔書)를 보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위한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날마다 흠부(欽夫)와 조서의 일을 말하며 눈물을 흘렸으니 제조(制詔)를 맡은 존형은 이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속히 진공(眞空)과 더불어 대책을 논의하기 바라는 바이다.
某至預章에 宿上藍寺라가 偶復感此하야 通夕不眠하고 夜漏未盡에 呼燭作此632)하니 不能旣所懷之萬一이라 欲作陳公書不暇나 然作亦不過如此니 只老兄語次에 達此懷足矣라 何以書爲哉리오 然今日之事는 政須爲其大者633)컨대 論薦人材亦有次第하니 今日遠則益州634)오 近則吳興635)이 皆第一義諦636)오 而敬夫637)도 尤不可後라 如某背草野之臣이 則雖有憂歎之心이나 然以義分觀之컨댄 似未當出이니 兄果相念이어든 當此徐之오 不須抑迫이라 恐一朝大發狂疾638)하야 彼此爲不利일까하노니 俟兩公有成하야 則彈冠639)群彦之後는 殊未爲晩이라 某許多年過了하니 豈計此年歲間事耶640)아 此是實情相告니 某豈不欲及今一見明主하야 極陳胸中之憤懣이리오마는 但思之하니 言語必有太甚處니 恐却悞兩公641)協贊彌縫之意라 所以斷然自誓하야 決未敢出이니 不獨爲身이라 亦以爲親642)爲二公爲國計也니라
예장(豫章)에 도착하여 상람사(上藍寺)에서 묵고 다시 조서의 일이 걱정되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에 촛불을 마주해 이 글을 쓰니 가슴에 품은 생각의 만 분의 일도 다 쓰지 못할 것 같다. 진공(陳公)에게도 편지를 쓰고 싶으나 쓸 겨를이 없다. 그러나 편지를 쓴다해도 같은 말일 테니 노형이 지공과 말할 때에 나의 생각을 전하면 족할 것이다. 꼭 편지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노늘날 조정에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일은 군심(君心)을 바로잡는 일이다. 인재를 천거하는 일 또한 차례가 있으니 멀리는 익주(益州)의 왕응신(汪應辰)과 가까이는 오흥(吳興)의 진량한(陳良翰)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며 경부(敬夫)는 더욱 뒤로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같이 초야에 있는 사람은 비록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있으나 의분(義分)으로 보건대 세상에 진출하기가 마땅치 않은 것 같으니 형이 과연 나를 생각할 것 같으면 마땅히 천천히 생각해야 할 것이고 급하게 독촉해서는 안될 것 같다.
만일 나를 독촉하여 세상에 진출하게 하여 어느 날 광질(狂疾)이 발동하면 피차 모두 이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이 뜻을 이루는 것을 기다렸다가 여러 현인의 뒤를 이어 진출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니 내 여러 해를 이렇게 보냈으니 어찌 일 이년 늦은 것이 문제되겠는가. 이는 사양의 뜻이 아니고 진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내 어찌 지금 같은 때에 명주(明主)를 한 번 뵙고 가슴속의 답답한 심정을 다 말하고 싶지 않겠는가 마는 생각해보니 내 말에 반드시 지나친 곳이 있을 것 같으니 도리어 두 사람이 힘 모아 수습하는 뜻을 그르칠까 염려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결단코 벼슬길에 진출하지 않는 이유이니 이는 내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를 위하고 두 사람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것이다.
答鄭景望643)
龔帥644)過建陽에 遣人相聞645)하대 不及一見爲恨이로다 今日李敎授見訪에 云嘗小款646)라 道其語647)는 皆出於忠厚長者나 然在愚意에 尙未有648)深解處라 如論范忠宣649)救蔡新州650)及元祐流人651)이니 以爲至當之擧라하니 熹嘗竊論此矣라 以爲元祐諸賢憂確之不可制하야 欲以口語擠之652)는 固爲未當而范公이 乃欲預爲自全之計653)하야 是亦未免於自私라 皆非天討有罪之意也오 至其論654)諸公655)의 忽反爾656)之言하고 違好還657)之戒하야 自取禍敗는 尤非正理니 使後世見無禮於君親者하고 拱手坐視而不敢逐이 則必此言之爲也로다 且舜이 流四凶族에 爲皐陶者는 亦殊不念反爾之戒는 何也오 推此心以往에 恐無適而非私者라 邵子文658)以爲明道所見659)이 與忠宣合이라하니 正恐徒見所施之相似오 而未見所發660)之不同하니 盖毫釐之間에 天理人欲之差는 有不可同年而語者矣라 又聞深以好名爲戒661)라하니 此固然矣나 然偏持此論이면 將恐廉隅毁頓하야 其弊有甚於好名이라 故先聖云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이라하시고 而又曰 君子求諸己라하시니 詳味此言에 不偏不倚하야 表裏該備하니 此其所以爲聖人之言歟ㄴ저 學者要當於此玩心이면 則勿忘勿助之間에 天理卓然하야 事事物物이 無非至當矣리라
답정경망(答鄭景望)
공수(龔帥)가 건양(建陽)을 지날 때에 사람을 보내 나의 안부를 물었는데 그를 한 번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더니 금일 이교수(李敎授)가 나를 찾아와 전에 공수와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정담을 나눈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공수의 말을 나에게 전하는데 공수의 말이 모두 충후(忠厚)한 장자(長者)의 말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해하지 못할 말이 있으니
“범 충선공(范忠宣公)이 소인 채확(蔡確)과 원우 유인(元祐流人)을 구원해 준 것이 지당한 일이다.”
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나도 전에 이 일을 논한 적이 있는데, 원우(元祐) 년간에 제현(諸賢)이 채확을 제제할 수 없음을 고심하여 채확이 지은 시구(詩句)를 문제삼아 그를 처벌하려 한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며, 범공이 미리 자신을 보전하려는 계책을 세운 것 또한 사심(私心)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죄있는 자를 처벌하는 하늘의 뜻이 아니다. 범공이 원우 제현이 ‘너에게서 나간 것은 너에게로 돌아온다’는 맹자의 경계를 소홀히 하고 ‘좋은 병기는 상스럽지 못한 물건이니 이것은 자기에게 되돌아오기를 좋아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는 노자의 훈계를 위배하여 화패(禍敗)를 자초했다고 논한 것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안은 말이니, 후세에 군부(君父)에게 무례한 자를 보고도 팔장을 끼고 앉아서 이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이러한 말 때문일 것이다. 순(舜)이 사흉(四凶)을 유배시킬 때 고요(臯陶)가 또한 ‘네게로 돌아온다’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왜이겠는가. ‘네게로 돌아온다’는 말을 경계하는 이 마음을 미루어 나가기만 하면 사심(私心)이 아님이 없을 것이다. 소자문(邵子文)이 명도(明道)의 견해가 충선(忠宣)의 견해와 같다고 하니, 이는 서로의 표현이 같은 것만 보고 속마음이 같지 않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털끝 만한 사이에 천리와 인욕의 차이가 있으니 이를 같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공수가 명예를 좋아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니 참으로 그렇기는 하나, 이 말을 치우쳐 지키기만 하면 지나치게 소절(小節)을 시켜 그 폐단이 명예를 좋아하는데서 오는 폐단보다 더 큰 것이다. 그래서 선성(先聖)이
“군자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못함을 싫어한다.”
했고 또
“군자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구한다.”
했으니 이 말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 뜻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이 내외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성인의 말이 되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학자가 이에 마음을 두면, 잊고 방치하지도 않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않아 천리(天理)가 확연하여 모든 일이 지당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答尤延之662)
熹杜門竊食663)하야 不敢與聞外間一事나 尙不能無虎食其外664)之憂하고 衰病疲薾하야 雖在山林亦不能有尋幽選勝之樂이로대 但時有一二學子는 相從於寂寞之濱하야 講論古人爲己之學 至會心處輒復欣然忘食 不自知道學之犯科665)也라 年來目昏하야 不敢甚讀書하니 經說666)閑看에 踈漏頗多라 不免隨事改正하니 比舊又差勝矣라 綱目不敢動着667)하니 恐遂爲千古之恨이로다 蒙敎揚雄荀彧二事는 按溫公舊例에 凡莽臣皆書死하니 如太師王舜668)之類오 獨於揚雄에 匿其所受莽朝官稱하고 而以卒書하니 似涉曲筆이라 不免却按本例669)하야 書之曰 莽大夫揚雄死라하니 以爲足以警夫畏死失節670)之流오 而初亦未改溫公直筆之正例也니라 荀彧却是漢侍中光祿大夫而參丞相軍事하고 其死乃是自殺이라 故但據實書之曰 某官某人自殺이라하니 非故二彧爲漢臣也나 然悉書其官이 亦見其實漢天子近臣而附賊不忠之罪오 非與其671)爲漢臣也라 此等處를 當時極費區處하니 不審竟得免於後世之公論否아 胡氏672)論彧이 爲操謀臣하야 而劫遷九錫673)二事는 皆爲董昭先發이라 故欲少緩九錫之議하야 以俟他日徐自發之는 其不遂而自殺은 乃劉穆之674)之類오 而宋齊丘675)는 於南唐事에 亦相似라하니 此論竊謂得彧之情이라하노니 不審尊意以爲何如오
답우연지(答尤延之)
내 문을 닫고 하는 일없이 국록만 축내고 세상일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고 지내니 그래도 혹 세화(世禍)를 면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병들어 쇠약한 몸이 비록 산중에 있으나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노니는 즐거움은 없고, 가끔 한 두 제자들과 적막한 물가에서 옛 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론하여 마음에 깨닫는 곳이 있으면 기뻐하며 밥먹는 것도 잊어버리니, 도학의 정도를 범하는 것도 잊어버린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눈이 어두워 독서를 하지 못하고 한가로이 나의 경설(經說)을 읽어보니, 엉성하고 빠뜨린 곳이 많아 일일이 수정을 하니 옛 것에 비해 조금 나은 것 같다. 나의 저서 ������통감강목������은 초고가 너무 방대하여 다시 손을 댈 수 없으니 천추의 한이 된다.
존형이 서찰에서 말한 양웅(揚雄)과 순욱(荀彧)에 관한 일은 온공(溫公)의 필법을 살펴보건대 무릇 왕망(王莽)의 신하는 모두 ‘사(死)했다’라고 썼으니,
“망(莽)의 태사 왕순(王舜)이 사(死)했다.”
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유독 양웅의 경우에 왕망으로부터 받은 관칭을 숨기고 ‘졸(卒)했다’라고 쓴 것은 잘못 쓴 것 같기에 온공의 필법대로
“망(莽)의 대부 양웅이 사(死)했다.”
라고 썼으니, 이는 양웅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절개를 잃었음을 경계하기에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처음부터 온공의 직필의 정례(正例)를 고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순욱(荀彧)은 한(漢)의 시중광록대부(侍中光祿大夫) 참군사(參軍事)이었고 그 죽음이 자살이었다. 그래서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모관(某官) 모인(某人)은 자살했다.”
고 쓴 것이고 일부러 욱(彧)을 한(漢)의 신하라고 여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관칭을 다 쓴 것이 실은 한(漢) 천자의 근신이 적(賊)에게 붙은 불충의 죄를 나타낸 것이요 그가 한(漢)의 신하임을 허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곳은 저서 당시에 엄격히 구분하려고 애를 많이 썼으니 후세 공론의 지적을 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호씨(胡氏)는 ‘순욱(荀彧)이 조조(曺操)의 모신(謀臣)이 되어, 천자를 위협해 쫓아내는 일과 조조에게 구석(九錫)의 작위를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일을 동소(董昭)가 자기보다 먼저 말한 것인데, 순욱이 구석에 관한 논의를 고의로 뒤로 미루었다가 다음에 서서히 발하여 자기가 창안한 것처럼 하려 하다가 이를 완수하지 못하고 자살하였으니 이는 곧 유목지(劉穆之)의 일과 같고, 송제구(宋齊丘)의 남당(南唐)의 일과 같다.’고 논하였으니 이 논설이 순욱의 진실을 잘 간파한 것이라 하겠다. 존형의 뜻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答周益公
前者累蒙誨諭范碑曲折676)을 考据精博하고 論議正平而指意深遠하야 尤非常情所及이나 然隱之於心677)이라 竊有所不能無疑者로다 盖嘗竊謂呂公678)之心이 固非晩生所能窺度나 然當其用事之時하야 擧措之不合衆心者는 盖亦多矣오 而又惡忠賢之異已하야 必力排之 使不能容於朝廷而後已하니 是則一世之正人端士는 莫不惡之어든 況范歐二公이 或以諷議679)爲官하니 或以諫諍680)爲職하니 又安可置之而不論이며 且論之而合於天下之公議681)에 則又豈可謂之太過682)也哉아 逮其晩節하대 知天下之公議를 不可以終拂이오 亦以老病將歸라 而不復有所畏忌하고 又慮夫天下之事는 或終至於危亂不可如何하야 而彼衆賢之排去者는 或將起而復用이면 則其罪必歸於我而幷及於吾之子孫이라 是以寧損故怨하야 以爲收之桑楡之計하니 盖其慮患之意雖未必盡出於至公이나 而其補過之善을 天下之實被其賜하니 則與世之遂非長惡力戰天下之公議하야 以貽患於國家者로니 相去遠矣라
답주익공(答周益公)
지난 번에 보내준 서신에서 깨우쳐 준 범 문정공(范文正公) 묘비에 관안 곡절(曲折)은 고거(考据)가 정박(精博)하고 논의가 정평(正平)하며 지의(旨意)가 심원하니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의아한 점이 없지 않다.
대개 여공(呂公)의 마음이 후생이 헤아릴 바가 아니나, 그가 주요 정사를 결정할 때에 그 결정이 여론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 많았고, 자기와 견해가 다른 충현(忠賢)을 미워하여 조정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한 시대의 정인(正人) 단사(端士)가 이를 미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더구나 범구(范歐) 양공(兩公)이 혹은 관각교감(館閣校勘)으로 혹은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어찌 이를 내버려두고 논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 이를 논함이 천하의 공의(公議)������에 합당하니 어찌 이를 너무 심하다 하겠는가.
여공(呂公)이 만년에 이르러 천하의 공의(公議)를 끝내 어길 수 없음을 알고, 또 장차 노병(老病)으로 물러날 때에는 다시 두려워 꺼릴 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또 천하의 정세가 어찌할 수 없는 위란의 지경에 이를 때, 자기가 배격한 충현이 다시 일어나 등용되면 자신은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며 자기의 자손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이라는 것을 염려하여, 차라리 구원(舊怨)을 풀어서 말년의 안전 대책으로 삼으려 했으니, 그 환란을 염려한 뜻이 비록 모두 지공(至公)한데서 나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죄과를 보상하는 선(善)은 천하가 실제로 그 혜택을 입었으니, 세상의 악을 조장하고 천하의 공의(公議)와 극력 싸워서 국가에 환란을 끼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至若范公之心이 則其正大光明이 固無宿怨이 惓惓之義는 實在國家라 故承其善意683)하야 旣起而樂爲之用하니 其自訟之書所謂相公有汾陽684)之心之德하고 仲淹無臨淮685)之才之力者는 亦不可不謂之傾倒而無餘矣니 此最爲范公之盛德而他人之難者라 歐陽公亦識其意而特書之686)하니 盖呂公前日之貶范公이 自爲可罪而今日之起范公이 自爲可書라 二者를 各記其實而美惡이 初不相掩하니 則又可見歐公之心이 亦非淺之爲丈夫矣로다 夫呂公之度量心術이 期以濟務687)는 則誠然矣나 然有度量則宜有以容議論之異同이오 有心術則宜有以辨人才之邪正이오 欲成天下之務則必從善去惡하고 進賢退姦이라하야 然後可以有濟어늘 今皆反之하야 而使天下之勢로 日入於昏亂하야 下而至於區區西事688)一方之病도 非再起范公이면 幾有不能定者하니 則其前日之所爲689)又惡在其有度量心術而能成務也哉아 其用人690)也는 欲才德之兼取는 則亦信然矣나 然范歐諸賢이 非徒有德而短於才者오 其於用人이라 盖亦兼收而幷取하야 雖以孫元規691)滕子京692)之流는 恃才自肆하야 不入規矩라도 亦皆將護容養하야 以盡其能하고 而未嘗有如廢棄하니 則固非專用德이 遺才矣오 而呂公所用이 如張李693)二宋694)이 姑論其才라도 亦決非能優於二公695)者어늘 乃獨去此而取彼하고 至於一時豪俊跅弛696)之士窮而在下者는 不爲無人이로대 亦未聞其有以羅致而器使之也하고 且其初解相印而薦王隨陳堯佐697)以自代하니 則未知其所取者는 爲才也耶아 爲德也耶 是亦不足以自解矣로다 若謂范歐不足以知呂公之心이오 又不料其子之賢而攻之太過698)라하면 則其巢攻이 事皆有迹하야 顯不可揜하니 安得爲過하며 且爲侍從諫諍之官하야 爲國論事라 乃視宰相子弟之賢否하야 以爲前却하면 亦豈人臣之誼哉아 若曰 范呂之仇는 初未嘗解699)라하면 則范公이 旣以呂公而再逐이라가 及其起任西事而超進職秩700)이 乃適在呂公三入701)之時하니 若范公이 果有怨於呂公而不釋하고 乃閔黙受此而無一語以自明其前日之志하면 是乃內懷憤毒하야 不能以理自勝而但以貪得美官之故로 俛而受其籠絡하야 爲之驅使니 未知范公之心이 其肯爲此否也로다 若曰歐公晩悔前言之失702)하고 又知其諸子之賢이라 故因范碑以自解703)라하면 則是畏其諸子之賢而欲陰爲自託之計하야 於是寧賣死友以結新交하야 雖至以無爲有704) 愧負幽冥이라도 而不遑恤이니 又不知歐公之心이 其忍爲此否也로다 況其所書라 但記解仇之一事오 而未嘗並譽其他美하니 則前日斥逐忠賢之罪亦未免於所謂欲盖而彰者니 又何足以贖前言之過而媚其後人也哉아
그런데 범공의 마음은 광명정대(光明正大)하여 본래 어떤 사람과도 숙원(宿怨)을 맺은 적이 없고, 항상 국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여공(呂公)의 선의(善意)를 받아들여 다시 일어나 국가를 위해 즐겨 일을 했으니, 그 자책(自責)하는 글에서
“여공은 곽분양(郭汾陽)의 심덕이 있으나 중엄(仲淹)은 이광필(李光弼)의 재능이 없다.”
라고 말한 것이 그 마음을 남김없이 말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이 바로 범공의 융성한 덕이요,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구양공(歐陽公)이 또한 범공(范公)의 뜻을 잘 알고 이를 묘비에 썼으니, 대개 여공(呂公)이 전일에 범공을 폄하(貶下)한 것은 그것대로 죄가 되고, 금일에 범공을 다시 일으켜 등용한 것은 그것대로 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가지를 각각 사실대로 썼고 미악(美惡)이 처음부터 서로 덮어 가릴 수 없는 것이니, 구공의 마음 또한 범부(凡夫)의 마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명공(明公)이
“여공의 도량과 심술은 국가를 위한 사업 성취에 뜻이 있었다.”
고 한 것은 진실로 그러하나 도량이 있다는 것은 의론의 동이(同異)가 있을 수 있고, 심술이 있다는 것은 인물의 사정(邪正)을 변별하는 기준이 되니, 천하를 위한 사업에 힘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을 따르고 악을 제거하며 현인을 진취시키고 간인(姦人)을 물리친 후에 라야 가능하거늘, 지금 여공은 이와 반대로 하여 천하의 형세가 날로 혼란해지고 아래로 작은 서사(西事)에 이르러서도 범공이 재기(再起)하지 않았다면 거의 평정되지 못했을 것이니, 그가 전일에 한 일이 어디에 도량과 심술이 있으며 어찌 성사(成事)가 있다 하겠는가.
“여공이 사람을 씀에 재(才)와 덕(德)을 아울러 취했다.”
는 명공의 말은 진실로 그러하다마는 범구(范歐) 제현이 모두 덕만 있고 재능이 없는 사람이 아니며, 범공의 용인(用人)은 재덕(才德)을 겸취하여 비록 손원규(孫元規)와 등자경(滕子京) 같은 사람이 재능을 믿고 방자하여 법도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데도 모두 장려하고 길러서 그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도록 하여 버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덕을 쓰고 재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그런데 여공이 쓴 장(張)․이(李)․이송(二宋) 같은 사람은 그 재능을 논한다면 결코 범구(范歐) 이공(二公)보다 우수하다 할 수 없는데도 이공을 버리고 저들을 썼으며, 일시의 호준(豪俊)이 곤궁하게 아래 있는 사람이 많은데도 이들을 불러서 썼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또 여공이 재상을 사임하고 왕수(王隋)와 진요좌(陳堯佐)를 자기의 후임자로 추천한 것은 그 취한 바가 재능인가 덕망인가. 이 또한 스스로 해명하지 못할 점이 있을 것이다.
“범구 양공(兩公)이 여공의 마음을 잘 몰랐으며 또 그 아들의 현명함을 고려치 않고 너무 지나치게 여공을 공격했다.”
는 명공의 말은 그 공격한 일이 모두 증빙할 수 있고 뚜렷이 드러나 가려 덮을 수 없는 사실이니 어찌 지나치다 하겠으며, 또 시종(侍從) 간쟁(諫諍)의 신하가 국가를 위해 논사(論事)를 함에 재상의 자제의 현부(賢否)를 보고 태도를 결정한다면 어찌 신하된 자의 마땅한 도리라 하겠는가.
“범려(范呂)의 구원(仇怨)이 처음부터 풀린 적이 없었다.”
는 말은 범공이 여공으로 인하여 두 번 쫓겨났다가 다시 일어나 서사(西事)를 맡고, 차례를 넘어 직급이 올라간 때가 마침 여공이 주상의 신임을 받던 때이니, 만약 범공이 과연 여공에게 원한이 있으면서 이를 풀지 않고 말없이 이를 받아 들여, 전일의 자기 뜻을 해명하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면, 이는 곧 마음속의 분독(憤毒)을 풀지 않고 다만 좋은 벼슬을 탐내어 구부려 그의 중(手中)에 들어가 부림을 당한 것이 되니, 범공의 마음이 과연 이를 수 있겠는가.
“구공이 만년에 앞서 여공에게 한 실언을 후회하고 또 그 아들의 현명함을 고려하여 범비(范碑)를 통해 이를 해명했다.”
는 말은 그 아들의 현명함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계책으로 범비(范碑)를 통해 자신을 변호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죽은 친구를 팔아서 새 교우(交友)를 맺기 위해 없는 사실을 있다고 하여 저승의 친구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도 저지르고도 남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되니, 구공의 마음이 차마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하물며 구공이 두 사람이 원한을 풀었다는 사실만 쓰고 다른 좋은 점은 칭송하지 않았으니, 전일에 충현을 쫓아낸 죄는 덮으려면 오히려 드러나는 것이 되니 이것이 어찌 전언(前言)의 과오를 씻어 후인에게 아첨하는 것이 되겠는가.
若論忠宣之賢한댄 則雖亦未易輕議나 然觀其事業規模는 與文正之洪毅開豁로 終有未十分肖似處하니 盖所謂可與立으로도 而未可與權者라乃翁解仇之事를 度其心705) 未必不深恥之로대 但不敢出之於口耳라 故潛於墓碑 刊去此事하야 有若避諱然者하니 歐公以此로 深不平之하야 至屢見於書疏하니 非但墨莊所記706)而已오 況龍川志707)之於此라 又以親聞張安道708)之言爲左驗하니 張實呂黨709)이라 尤足取信無疑也니라 若曰范公果無此事오 而直爲歐公所誣라하면 則爲忠宣者正當沫血飮泣하야 貽書歐公하야 具道其所以然者 以白其父之心迹而俟歐公之命 以爲進退하대 若終不合이어던 則引義告絶而更以屬人하고 或姑無刻石而待後世之君子하야 以定其論이 其亦可也어늘 乃不出此하고 而直於成文之中 刊去數語하니 不知此爲何等擧措오 今不信范公出處文辭之實과 歐公丁寧反復之論하고 而但取於忠宣進退無據之所爲하야 以爲有無之決하니 則區區於此 誠有不能識者로다 若摭實而言之하면 但曰 呂公前日未免蔽賢之罪而其後日誠有補過之功하고 范歐二公之心은 則其終始本末이 無纖毫之可議오 若范公所謂平生無怨惡於一人者는 尤足以見其心量之廣大高明하야 可爲百世之師表오 至於忠宣은 則所見雖狹이나 然亦不害其爲守正이라하면 則不費詞說而名正言順하야 無復可疑矣니 不審尊意以爲如何
충선의 어짐을 논한다면 가벼이 논할 수는 없지만 그 사업규모를 보건대 문정공(文定公)의 크고 넓은 기상을 십분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 이른바
“같이 설 수는 있어도 함께 일을 처결할 수는 없다.”
는 경우라 하겠다.
자기 아버지가 여공과 원한을 풀었다는 사실을 충선의 마음에 심히 치욕이라 여겼으되, 이를 입에 올려 말하지는 못하고 몰래 묘비의 이 사실을 깎아내어 무슨 꺼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구공(歐公)이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여러 번 글을 써 나타내었다. 「묵장기(墨莊記)」 뿐만 아니라 「용천지(龍川志)에서는 장안도(張安道)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하여 말하였으니, 장안도는 기실 여공의 무리이니 더욱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만약 범문정공이 과연 여공과 원한을 푼 사실이 없고 다만 구공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충선(忠宣)은 마땅히 피묻은 얼굴로 눈물을 삼키며 구공에게 글을 보내 그 까닭을 다 말하여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밝히고, 구공의 말을 기다려서 자기의 태도를 결정할 것이고, 만약 끝내 생각이 같지 않으면 의리(義理)를 들어 구공과 절교하고, 우선 비석에 글을 새기지 말고 후세의 군자의 정론(定論)을 기다리는 것이 적당하거늘, 이렇게 하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비문(碑文) 속의 몇 글자를 깎아내니 이것이 무슨 처사인지 모르겠다.
지금 명공은 문정공(文正公)의 출처와 문사(文辭)의 실상과 구공의 두 세 번 반복하는 말을 믿지 않고, 다만 충선의 근거 없는 행위만 취하여 사실 유무의 결정을 내리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대로 정리해 말한다면, 여공은 전일에 충현(忠賢)을 내쫓은 죄가 있고 훗일에는 잘못을 보상한 공이 있으며, 범구(范歐) 이공(二公)의 마음은 그 종시(終始) 본말(本末)에 추호도 잘못이 없으며, 범공(范公)의
“평소에 어떤 사람과도 원악(怨惡)이 없었다.”
는 말에서 충분히 그 심성과 도량의 광대고명(廣大高明)함을 볼 수 있으며 백세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다 하겠고, 충선은 소견이 비록 좁으나 그 올바름을 지키는데는 해로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렇게 말하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 다시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명공(明公)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
所與子約書710)中 疑學道三十年711)爲後學之言712)者는 則熹深惑焉而尤以爲不可以不辨이라하노니 不審明公이 何所惡於斯言而疑之也오 以道爲高遠玄妙而不可學耶ㄴ댄 則道之得名이 正以人生日用當然之理라 猶四海九州百千萬人當行之路爾오 非若老佛之所謂道者는 空虛寂滅하야 而無與於人也하며 以道爲迂遠疏闊而不必學耶ㄴ댄 則道之在天下 君臣父子之間과 起居動息之際 皆有一定之明法하야 不可頃刻而暫廢라 故聖賢有作할세 立言垂訓하야 以著明之하야 巨細精粗는 無所不備而讀其書者는 必當講明究索하야 以存諸心行諸身而見諸事業然後可以盡人之職而立乎天地之間이니 不但玩其文詞하야 以爲綴緝纂組之工而已也라 故子游誦夫子之言曰 君子學道則愛人하고 小人學道則易使라하야 而夫子是之하시니 則學道云者 豈近世後學之言哉라
명공(明公)이 여자약(呂子約)에게 준 서찰에서 구공이 말한 ‘학도삼십년(學道三十年)’이란 말을 후학의 말일 것이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이 내 마음에 심한 의혹이 있어 이를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명공(明公)은 이 말의 어디가 싫어서 의문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 도를 ‘고원현묘(高遠玄妙)하여 배울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道)라고 이름한 까닭이 ‘도(道)란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당연히 가야할 도리’이기 때문이니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당연히 가야할 길이요, 노자(老者) 불자(佛者)가 말하는 공허적멸(空虛寂滅)하여 사람의 생활과 관계가 없는 그러한 도(道)가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며, 도(道)를 ‘일상생활과 너무 거리가 멀고 엉성하여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도(道)는 천하의 군신(君臣) 부자(父子)가 기거 동작하는 즈음에 일정한 명법(明法)이 있어 이를 잠시도 폐할 수 없으며, 이런 까닭으로 성현이 일어나서 격언(格言)을 세우고 교훈을 드리워서 도를 밝혔으니 성인의 말씀에 그 거세정조(巨細精粗)가 다 갖추어져 있다. 성인의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이를 강명구색(講明究索)하여 마음에 간직하고 몸으로 실행하여 사업에 드러낸 연후에야 사람의 구실을 다하여 이 세상에 설 수 있을 것이요, 그 문사(文詞)를 감상하고 문장을 짜 맞추어 지어내는 기교에만 힘써서는 안될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자유(子游)가 부자(夫子)의 말을 외우면서
“군자(君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小人)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
고 함에 부자(夫子)께서 옳다 하였으니, 학도(學道)라는 말이 어찌 근세 후학들이 처음 한 말이겠는가.
若謂歐公이 未嘗學此而不當以此自名耶ㄴ댄 則歐公之學이 雖於道體 猶有欠闕이나 然其用力於文字之間而泝其波流以求聖賢之意하야 則於易於詩於周禮於春秋 皆嘗反復窮究하야 以訂先儒之繆하고 而本論713)之篇 推明性善之說하야 以爲息邪距詖之本하니 其賢於當世之號爲宗工巨儒714)而不免於祖尙浮虛信惑妖妄者又遠甚하고 其他文說이 雖或出於遊戱翰墨之餘나 然亦隨事多所發明하고 而詞氣藹然하야 寬平深厚하고 精切的當하니 眞韓公所謂仁義之人者라 恐亦未可謂其全不學道오 而直以燕許楊劉715)之等期之也오 若謂雖嘗學之나 而不當自命하야 以取高標揭己之嫌耶ㄴ댄 則爲士而自言其學道는 猶爲農而自言其服田하며 爲賈而自言其通貨니 亦非所以爲夸라 若韓公者는 至乃自謂己之道는 乃夫子孟軻揚雄所傳之道라하니 則其言之不讓은 益甚矣라 又可指爲後生之語而疑之耶아
만약
“구공(歐公)이 도(道)를 공부하지 아니했고 스스로 도를 배웠다고 할 수 없다.”
고 말한다면, 구공의 학문이 비록 도의 근본엔 충분히 섭렵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나, 문학(文學)에 힘써서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성현의 뜻을 추구한 것은 ������주역(周易)������과 ������시경(詩經)������과 ������주례(周禮)������와 ������춘추(春秋)������를 반복 연구하여 선유(先儒)의 오류를 정정하였고, 그의 저서 본론(本論)에서는 성선설(性善說)을 밝혀 식사거피(息邪距詖)의 근본으로 삼았으니, 당세의 종공거유(宗工巨儒)라고 호칭되면서 부허(浮虛)한 문장을 숭상하여 요망(妖妄)한 의혹에 빠진 자보다는 훨씬 훌륭하다 할 것이다. 기타 문설(文說)이 혹 유희한묵(遊戱翰墨)의 여기(餘技)에서 나온 것도 있지만 또한 사리(事理)를 따라 발명한 것이 많고, 그 사기(詞氣)가 온화하여 관평심후(寬平深厚)하고 정절적당(精切적당(的當)하니 참으로 한공(韓公)이 이른 바 인의(仁義)의 사람이니, 전혀 도를 배우지 아니하여 다만 장열(張說) 소막(蘇막/) 양억(楊億) 유자의(劉子儀) 등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명공(明公)이
“비록 도를 배웠다 할지라도 스스로 내가 도를 공부했노라고 말하여 자신을 높은 표적에 내 걸었다는 혐의를 받도록 해서는 안 된다.”
고 말한다면, 선비가 스스로 도를 공부했다고 말하는 것은 농부가 스스로 밭을 갈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장사가 스스로 물건을 팔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자신을 뽐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공(韓公) 같은 사람은 자기의 도는 공자 맹자 양웅이 전한 도라고 말하니 그 말의 사양치 않음이 더욱 심하거늘 어찌 학도삼십년(學道三十年)이란 말을 구공이 한 말이 아니고 후생의 말이라고 의심하겠는가.
答林正夫716)
慕仰高風이 固非一日이러니 今玆楊通老來 忽奉手誨之辱하야 執禮過恭하니 尤使人恐懼踧踖而無所避也로다 雖然高明之所以見屬之意豈若世之指天誓日而相要於聲利之場者哉아 況在今日717)而言之하니 尤足以見誠之至而好之篤이라 是以不敢隱其固陋而願自附於下風焉하노라 盖嘗聞之先生君子니 觀浮圖718)者는 仰首注視而高談이 不若俯首歷階而漸進이라하니 盖觀於外者는 雖足以識其崇高鉅麗之爲美나 孰若入於其中者는 能使眞爲我有하고 而又可以深察其層累結架之所由哉아 自今而言이면 聖賢之言이 具在方冊하야 其所以幸敎天下後世者는 固已不遺餘力이오 而近世一二先覺이 又爲之指其門戶하고 表其梯 級而先後之하니 學者由是而之焉이면 宜亦甚易而無難矣로대 而有志焉者는 或不能以有所至하야 病在一觀其外하야 粗覘彷彿하고 而便謂吾已見之라하야 遂無復入於其中하야 以爲眞有而力究之計719)하니 此所以驟而語지면 雖知可悅이나 而無以深得其味하야 遂至半途而廢而卒不能以有成耳라
답임정부(答林正夫)
고명(高明)을 우러러 사모한지 오래되었더니 지금 양통노(楊通老)가 오는 편에 욕되게도 친서를 보내 지나친 예를 차리니 더욱 나로 하여금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게 한다. 그러나 고명이 나에게 촉망하는 뜻이 어찌 세 속의 하늘과 해를 두고 서약하여 이욕과 명성을 취하려는 자들과 같겠는가. 더구나 내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니 고명의 지극한 정성과 돈독한 호의가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이 때문에 감히 나의 고루함을 숨기지 아니하고 고명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일찍이 선생 군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탑을 보는 자가 머리를 들고 탑 꼭대기를 쳐다보며 고차적인 말을 하는 것이 머리를 숙여 계단을 하나하나 관찰하여 점차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니, 대개 밖에서 탑의 외관을 보는 것이 비록 높고 크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는데는 좋겠지만, 탑 속으로 들어가서 몸소 몸으로 느끼며 층마다 그 구조의 묘함을 자세히 살피는 것보다는 못할 것이다. 지금 학문의 방법을 두고 말한다면 성현의 말씀이 모두 서책에 기록되어 있고, 그 천하 후세를 가르치는 방법이 또한 전력을 다했으며, 근세의 한, 두 선각자가 또 그 목표를 지시하고 차례를 인도해주니, 학자가 이 길을 따라가면 매우 쉬워서 어려움이 없을 터인데, 배움에 뜻이 있는 사람이 혹 학문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잘못이 외양의 비슷함을 보고는 금방 도를 보았다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몸으로 체득하지 않고 그 겉모양에 진실이 있는 양 믿고, 힘들여 이를 추구하는데 있다 하겠다. 이것이 갑자기하는 말을 비록 즐겨하나 그 의미를 깊이 체득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여 끝내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까닭인 것이다.
竊計高明所學之深과 所守之正이 其所蘊蓄을 盖已施之朝廷而見於議論之實하니 於此 宜不待於愚言矣로대 然旣蒙下問하니 不可以虛辱而熹之所有는 不過如此라 若不以告於門下하야 以聽執事者之采擇이면 則又有非區區之所敢安者라 是以敢悉布之하야 可否之決을 更俟來敎하나니 熹所虛佇而仰承也로다 通老在此 相聚甚樂하야 比舊頓進하니 知有切磋之益720)이러니 惜其相去之遠 忽起歸興하야아 而不可留也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고명의 학문이 깊고 실천이 정당하며, 그 쌓아온 경륜이 이미 조정에서 시행되어 실질적인 논의에 나타났으니 어리석은 나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고명의 학문을 받고 이를 헛되이 할 수 없으며, 나의 소견이 보잘 것 없지만 만약 문하에 고하지 않고 집사자의 채택을 듣지 못하면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할 것 같다. 이 때문에 감히 모두 말하니 가부의 결정을 알려주기 바라며, 다음 글을 우러러 기다리겠다. 통로(通老)가 여기에 와서 서로 매우 즐거워하였고 통로의 학문이 전에 비해 현저하게 진취하였으니 고명과 통로의 학문 토론이 더욱 유익했으리라 생각한다. 통로가 갈 길이 멀어 홀연히 일어나 돌아가려 하니 그를 더 만류할 수 없어 서운하기 이를 데 없다.
答柯國材
熹奉親粗遣이나 武學闕이 尙有三年721)하니 勢不能待라 目今貧病之迫已甚하니 朝夕當宛轉請祠也리라 親年日老하고 生事益聊落722)하니 雖吾道固如此나 然人子之心에 不能不慨然耳라 時事竟爲和戎所悞하니 今歲虜人大入하야 據有淮南하고 留屯不去하야 監前事之失하야 不汲汲於渡江하야 欲圖萬全之擧하니 此可爲寒心이어늘 而我之所以待敵者는 內外本末이 一切刓弊하야 又甚於往年妄論723)之時矣니 奈何奈何오 遠書不能詳言也하노라 熹自延平逝去로 學問無分寸之進하고 汨汨724)度日하야 無朋友之助하니 未知終何所歸宿이로다 邇來雖病軀粗健이나 然心力凋弱하야 目前之事를 十忘八九하고 至於觀書 全不復記하고 以此兀兀하야 於致知格物之地 全無所發明이라 思見吾國材精篤之論하야 而不可得臨書怳然也하노라
답가국재(答柯國材)
나는 어머니 병환을 보살펴 드리며 그냥 그냥 지내고 있다. 무학박사(武學博士)는 차례가 아직 삼년이나 남았으니 형세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가난과 질병으로 괴로움이 더욱 심하니 조만 간에 곱게 사관(祠官)의 직을 청해볼까 한다. 어머니께서 날로 연로해 지시니 생활이 더욱 적막하다. 사람이 연로하면 쇠잔해짐은 자연의 섭리이다. 자식된 마음에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지금 나라의 형편은 화친론의 잘못으로 인하여 금년에 오랑캐가 쳐들어 와 회남을 점거하여 주둔하고 있고, 이들이 앞의 실책을 거울삼아 경망히 강을 건너지 않고 만전을 기하고 있으니 한심한 지경이고, 우리의 방비 태세는 모두 피폐하여 지난해 내가 복수의 일을 상소한 때보다 더욱 심하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멀리서 보내는 글이라 자세히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연평(延平) 선생이 가신 뒤로 학문은 분촌(分寸)의 진취도 없고 곤궁에 빠져 지내니 붕우의 도움도 없다. 종내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다. 요즈음은 병든 몸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마음이 시들고 약하여 눈앞의 일을 십중팔구 잊어버리고, 책을 보는 일에는 더욱 기억력이 없어 이렇게 심신을 가눌 수 없으니, 치지(致知)와 격물(格物) 공부에 전혀 깨닫는 바가 없다. 국재(國財)의 자세하고도 밝은 이론을 알아보고자 하나 알 수 없으니 편지를 대함에 멍할 뿐이다.
不合725)無愧之說은 在我固然이어니와 第所不能無根者는 精神言語가 不足以感悟萬一爲恨耳라 若人人持不合無愧之說하면 則君臣之大倫廢矣니 如何如何오 春秋工夫를 未及下手하야 而先生棄去하시니 盖亦以心志凋殘不堪記憶하노다 此書雖云本根天理나 然實與人事貫通하니 若不稽考事迹하야 參以諸儒之說이면 亦未易明也라 故未及請其說이나 然嘗略聞其一二니 以爲春秋는 一事가 各是發明一例하니 如看風水移步換形이라 但以今人之心으로 求聖人之意하며 未到聖人洒然處하야 不能無失耳라하시니 此亦可見先生發明之大旨也로다
자신의 진언이 주상의 뜻에 맞지 않다고 하여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대의 말은 나에게 사실 그러하기는 하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자의정신과 언어가 주상의 마음을 만 분의 일도 감동시키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만약 사람 사람이 모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군신(君臣) 간의 대의(大義)가 무너질 것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춘추(春秋)������의 주석은 착수를 못하고 있으며 연평 선생께서 나를 버리고 가신 뒤로 또 심지(心志)가 약해져 전에 공부한 것도 모두 기억할 수 없다. ������춘추������가 본래 천리(天理)를 궁구하는 데 잇으나 실은 모든 인사(人事)에 관통하니, 만약 역사의 사실을 고증하여 제유(諸儒)의 설을 참고하지 않으면 ������춘추������의 뜻을 밝히기 어려울 것이다. ������춘추������에 대한 연평 선생의 가르침을 다 받지는 못했으나 대략 한, 두 가지 들은 바에 의하면
“������춘추������는 하나의 역사 사건에서 하나의 법을 밝힌 것이니 마치 풍수지리를 볼 때에 한 걸음을 옮기면 눈에 들어오는 산수의 형상이 모습을 달리하는 것과 같다. 다만 요즘 사람의 마음을 기준으로 하여 성인의 뜻을 알고자 하면 성인의 엄숙한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고 하시니, 이에서 또한 선생이 밝힌 큰 뜻을 알 수 있겠다.
朱書百選 卷之五
答許順之
書中所諭皆的當之論이로대 所恨無餘味耳라 更向平易著實處子細玩索하야 須於無味中得味라야 乃知有餘味之味耳니라 敬齋記1)所論이 極切當하니 近方表裏看得無疑2)라 此理要人識得하니 識得이면 卽雖百千萬億3)이라도 不爲多4)오 無聲無臭5)라도 不爲少6)어니와 若如所疑댄 卽三綱五常都無頓處7)오 九經三史 皆爲剩語矣라 此正是順之從來一箇窠臼8)이니 何故至今出脫不得고 豈自以爲是之過耶아 聞有敬字不活9)之論하니 莫是順之敬得來不活否아 却不干敬10)字事니라 惟敬故活이니 不敬이면 便不活矣라 此事所差毫釐에 便有千里之繆하야 非書札所能盡이라 切在細思하니 會當有契耳리라
주서백선(朱書百選 ) 5권
답허순지(答許順之)
서찰에서 깨우쳐준 말이 모두 적당한 말이나 여운의 맛이 없어 한스러울 뿐이다. 다시 평이하고 착실한 곳을 향하여 자세히 음미하여 그 무미(無味)한듯한 곳에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곧 여운이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재기(敬齋記)」에서 논한 바는 지극히 절실하고 당연한 말이어서 일용의 평이한 도리를 속속들이 의문없이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 도리를 꼭 알아야 하니 이 도리를 알면 우주의 모든 사물이 이 도리안에 있음을 알 수 잇고, 소리도 냄새도 없는 아주 미묘한 이 도리가 온 우주를 관통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의심한대로라면 곧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안식할 곳이 없고 구경(九經)과 삼사(三史)가 모두 쓸데없는 말일 뿐일 것이다. 이는 종래에 그대가 빠진 선학(禪學)의 독단때문이니 무슨 까닭으로 지금까지 여기에서 탈출하지 못하는가. 아마 선학을 과신(過信)한 탓인지 모르겠다.
또 그대가
“경(敬)이란 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정적인 것이다.”
라고 주장하니, 아마 그대가 생각하는 경(敬)이 정적(靜的)인 것일 것이다. 이는 도리어 참다운 경(敬)과 반대되는해석이니 오직 경(敬)하기 때문에 살아 숨쉬는 것이 되고 경(敬)하지 않으면 살아 숨쉬는 것이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처음에 털끝만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끝에 가선 천리나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서찰로써 다 말할 수 없으니 자세히 생각해보면 반드시 수긍할 곳이 있을 것이다.
【註解】
1)敬齋記(경재기) : 남헌(南軒)과 상산(象山)이 모두 이 기(記)가 있으니 누구의 것인지 미상.
2) 看得無疑(간득무의) : 선생이 자득무의(自得無疑)함을 말함.
3) 百千萬億(백천만억) : 만수(萬殊)를 가리킴.
4) 不爲多(불위다) : 만수(萬殊)가 하나로 통하기 때문.
5) 無聲無臭(무성무취) : 일본(一本)을 가리킴.
6) 不爲少(불위소) : 일본(一本)이 육합(六合)에 두루 미치기 때문.
7) 頓處(돈처) : 안돈처(安頓處).
8) 窠臼(과구) : 과는 새집, 구는 굴. 모두 감추어 숨기는 곳. 순지(順之)가 선(禪)을 공부함을 가리킴.
9) 敬字不活(경자불활) : 경이 활동적이지 못함을 말함.
10) 却不干敬(각불간경) : 순지의 해석이 경(敬)에 간여되지 못함.
熹一出幾半年1)이라 學問思辨之益이 警發爲多로다 大抵聖門求仁格物之學이 無一事與釋氏同하니 所以尋常議論間에 偶因記憶2)하야 自然及之오 非是特然立意하야 與之爭勝負較曲直也니 想見孟子之闢楊墨이 亦是如此라 故其言曰 予豈好辯哉리오 予不得已也라하시니 今觀所與祝弟3)書乃有謗釋氏之語하니 殊使人驚歎이라 不知吾友別後所見如何而爲是語也리니 及細讀二書4)하니 則所可怪者不特此耳라 且論其大者컨대 如所謂棲心淡泊與世少玩聖賢之言 可以資吾神養吾直者 一一勘過5)只此二十餘字에 無一字不有病痛이라 夫人心是活物이니 當動而動當靜而靜하야 動靜不失其時면 則其道光明6)矣라 是乃本心全體大用이니 如何須要棲之淡泊然後爲得이며 且此心是箇什麽7)라 又如何其可棲也耶아 聖賢之言이 無精粗巨細 無非本心天理之妙니 若眞看得破하면 便成已成物이 更無二致하야 內外本末을 一以貫之니 豈獨爲資吾神養吾眞者而設哉아 吾友若信得及8)이러니 且做年歲功夫하야 屛除舊習하고 案上只看六經語孟 及程氏文字著9)하야 開擴心胸 向一切事物上理會하면 方知體用一源顯微無間이 是眞實語니 不但做兩句好言語10)說而已也라
내가 남헌(南軒)을 방문한지 반년이 지남에 학문 사변의유익함이 많았고 이로 인한 깨달음 또한 적지 않았다. 대개 성문(聖門)의 구인격물(求仁格物) 공부가 석씨(釋氏)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학문을 논하는 가운데 우연히 유석(儒釋)이 같지 않는 곳을 기억하여 저절로 이를 언급하는 것이요, 특별히 뜻을 세워서 석씨와 승부를 다투고 시비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맹자가 양주 묵적을 물리친 것이이와 같았으리라. 그래서
“내 어찌 변론을 좋아하리오. 부득이할 따름이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 그대가 축제(祝弟)에게 준 글을 보니 석씨를 비방한 말이 있으니 자못 놀랍게 한다. 그대가별후(別後)에 소견이 어떠하였길래 이런 말을 하는가. 두 서찰을 자세히 읽어보니 괴이한 점이 이 뿐이아니다. 그 큰 것을 말하자면, 이른바
“서심담박(捿心淡泊)하여 세속에서 물러나 성현의말씀을 음미하여 내 정신을 맑게하고 내참모습을 기른다.”
는 말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이 스무 여글자가 하나도 병통이 없는 것이없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란 살아움직이는 것이니 움직일때는 움직이고 고요할 때는 고요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을 때맞춰 하여야만 지선(至善)의 도가 광명이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본심 전체의 큰 활용이니 어찌 꼭 서심담박(捿心淡泊)한 뒤에라야 내 참 모습을 기른다 하겠는가.
또 이 마음이란 것이 어떠한 것이길래 어떻게 잡아 묶어맬 수 있다고 하는가. 또 성현의 말씀은 정조거세(精粗巨細)를 막론하고 본심과 천리의 오묘한 진리가 아님이 없으니 진실로 이를 깨달으면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이 두 이치가아니고 내외 본말이 하나로 통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유독 내정신을 밝게하고 내 참모습을 기르기위하는데만 성현의 말씀이 필요하겠는가.
그대가 성현의 말이 믿어진다면 몇 해 동안 노력하여 구습을 물리치고 책상 위엔 육경(六經)과 어맹(語孟)과 정씨(程氏)의글만 놓고 보고 마음을 활짝 열고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부딫혀 이치를 궁구하면
“체(體)와 용(用)이 한 근원이요 드러남과 미묘함이 틈이 없다.”
는 말이 진실한 말이요, 두 구절의 말이 좋아서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又承見警하니 此則甚荷相愛之深이나 然儒者之學이 於此11)亦只是順理而已라 當顯則顯當黙則黙이니 若涵養深淳면 則發必中節하야 更無差互하고 旣未到此地位앤 自是隨其氣習하야 所發不同이라 然若一向矯枉過直이면 則柔弱者必致狂暴하고 剛彊者必爲退縮하야 都不見天理之當然이니 惟聖門之學이 以求仁格物爲先이라 所以發處自然見得하야 是非可否不差毫髮하니 其功夫到與不到는 却在人이어늘 今吾友見敎에 要使天下之人으로 不知有自家12)는 方做得事라하니 且道13)此一念14)從何處來오 喚做天理得否 直是私意上又起私意라 縱使磨는 挫掩藏15)得하야 全不發露라도 似箇沒氣底死人이니 亦只是計校利害之私라 與聖門求仁格物順理涵養氣象으로 大故16)懸隔하니 信知儒釋只此毫釐間은 便是繆以千里處라 却望吾友更深思之하야 仍將此書遍呈諸同志 相與反復商確이오 不可又似向來說先覺之義17)하야 更不與徐柯二丈見也18)니라 朋友商論이 正要得失分明하야 彼此有益하니 何必於此19)揜覆이리오 只此是私意根株니 若不拔去하야 使之廓然大公이면 何緣見得義理眞實處耶아 所論好善優於天下는 只是一箇公字니 此等處20)에 何不公之甚也오
또 나의 말로 인하여 깨우침을 받았다 하니, 이는 나를 아끼는 마음이 깊은 탓에 하는 말이리라. 그러나 유자(儒者)의 공부가 드러내고 침묵함에 역시 순리를 따라 해야 할 것이니 드러날 때는 드러나고 침묵할 때는 침묵해야 할 것이다. 만약 함양 공부가 깊고 순박하면 언행을 발함에 반드시 절도에 맞아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고, 만약 함양 공부가 충분하지 못하면 평소의 기질에 따라 흘러 그 발함이 절도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리하게 억지로 함양 공부에 집착하게 되면 기질이 유약한 사람은 광포하게 변할 것이고 기질이 강한 사람은 움추려들어 천리(天理)의 당연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문(聖門)의 공부는 구인격물(求仁格物)에 힘써 이를 바탕으로 나아가면 저절로 시비 가부가 밝혀져 한치의 어긋남도 없고, 그 공부가 되고 안되고는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거늘, 지금 그대는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감추어 세상에서 이름도 모르게 한 연후에라야 무엇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니, 자기를 매몰시키는 방법을 어떻게 해야 본심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고 천리(天理)를 깨닫는 경지에 이르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 억지로 자기를 매몰시킨다는 것은 곧 사의(私意) 위에 또 하나의 사의(私意)를 일으키는 것이다. 가령 기(氣)를 꺾어 버리고 몸둥이를 묻어버리듯이 완전히 자기를 매몰시켜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는 생기(生氣)가 없는 죽은 사람과 같으니, 이는 천리(天理)를 깨닫지 못하고 이해를 계산하는 사의(私意)일 뿐이다. 이는 성문(聖門)의 구인격물(求仁格物)하고 순리함양(順理涵養)하는 기상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 진실로 유학과 불교가 이 털끝같은 인식의 차이에서 천리나 어긋남을 알 수 있겠다.
그대는 다시 깊이 생각하여 이 글을 여러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같이 반복해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다시 서가(徐柯) 두 사람의 견해와 같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붕우간에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 득실을 분명히하여 서로 유익함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이처럼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곳을 덮어 감추려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사의(私意)의 뿌리가 될 뿐이니 이를 제거하며 확연대공(廓然大公)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의리(義理)의 진실을 볼 수 있겠는가.
서찰에서 논한 바
“호선(好善)이 천하에서 가장 좋다.”
는 말은 참으로 확연대공(廓然大公)한 말이니, 서심(捿心)과 자기매몰(自己埋沒)과 선각지의(先覺之義) 같은 곳에는 어찌하여 공명하지 못함이 그토록 심한가.
【註解】
1) 一出幾半年(일출기반년) : 건도(乾道) 정해 8월에 선생이 장사(長沙)에 가서 남헌을 방문하고 12월에 환가함.
2) 偶因記憶(우인기억) : 유석(儒釋)이 같지 않는 곳을 때로 기억함.
3) 祝弟(축제) : 축강국(祝康國). 선생 내제(內弟).
4) 二書(이서) : 축제(祝弟)와 선생에게 준 순지의 글.
5) 勘過(감과) : 감(勘)은 조사함. 사설함. 과(過)는 어사.
6) 動靜…光明(동정…광명) : ������역������ 간괘 단전의 말.
7) 什麽(십마) : 하물(何物)의 뜻. 심마(甚麽)와 같음.
8) 信得及(신득급) : 성현의 말에 독신무의(篤信無疑)함을 말함.
9) 只看…字着(지간…자착) : 착(着)자가 간(看)자와 바뀐 것같다.
10) 兩句好言語(양구호언어) :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을 가리킴.
11) 於此(어차) : 차는 아래의 현묵(顯黙)을 가리켜 말함.
12) 不知有自家(부지유자가) : 사람이 장명익적(藏名匿跡)하여 세상 사람이알지 못하게 한 연후에야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 장주(莊周)가 말한 “선(善)을 행하되 이름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음.
13) 且道(차도) : 순지로 하여금 말하게 함.
14) 此一念(차일념) : 윗 글의 부지유자가(不知有自家)의 생각.
15) 磨挫掩藏(마좌엄장) : 불서의 말. 그 기를 꺾고 몸을 감춤.
16) 大故(대고) : 대단(大段).
17)/ 徐柯二丈(서가이장) : 서원빙(徐元聘)과 가국재(柯國材).
18)/ 又似…見也(우사…견야) : ������대전(大全)������ 답허순지 제 12서에 ‘선각지론(先覺之論)은 다만 성(誠)이 적당하고 감(感)은 곧 군더더기 말이다. 글자대로 해석해야지 가장(柯丈)처럼 미리 추측으로 헤아려서는 안된다’고 했으니 대개 순지와 선각의 뜻을 미리 추측하는 일로 논의하는데 순지가 서가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숨기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문책하는 말.
19) 何必於此(하필어차) : 어(於)는 여(如)의 잘못.
20) 此等處(차등처) : 엄부처(掩覆處).
與魏應仲1)
三哥年長하니 宜自知力學하야 以副親庭責望之意오 不可自比兒曹하야 虛度時日이니 逐日早起하야 依本 點2)禮記左傳各二百字하대 參以釋文3)하야 正其音讀하고 儼然端坐하야 各誦百遍訖誦孟子三二十遍하라 熟復玩味訖看史數板하야 反復數遍하라 大抵所讀經史를 切要反復精詳이라하야 方能漸見旨趣라 誦之宜舒緩不迫하야 令字字分明하고 更須端藏正坐如對聖賢이면 則心定而義理易究이니라 不可貪多務廣涉獵鹵莽하야 纔看過了便謂已通이오 小有疑處어든 卽更思索하고 思索不通이어든 卽置小冊子하야 逐日抄記하야 以時省閱이라가 俟歸日4)逐一理會오 切不可含糊護短恥於資問하야 而終身受此黯暗以自欺也니라 又置簿하야 記逐日所誦說起止하야 以俟歸日稽考하라 起居坐立을 務要端莊이오 不可傾倚니 恐至昏怠니라 出入步趨를 務要凝重이오 不可票輕5)하야 以害德性이니라以謙遜自牧6)하며 以和敬待人 凡事切須謹飭하며 無故不須出入이니라 少說閑話하라 恐廢光陰이오 勿觀雜書하라 恐分精力이니라 早晩頻自點檢所習之業하고 每旬休日에 將一旬內書하야 溫習數過 勿令心少有放佚이면 則自然漸近道理하야 講習易明矣이라
여위응중(與魏應仲)
효백(孝伯)은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니 힘써 공부하여 어버이께서 바라는 뜻에 부응할 줄 알아야 할 것이요 스스로 아이들처럼 헛되이 세월을 보내서는 안될 것이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서 ������예기(禮記)������와 ������좌전(左傳)������의 본문을 각각 이백 자씩 읽고, 석문(釋文)을 참고하여 그 음독을 바르게하며, 단정히 앉아 각각 백 번을 외우고, 또 ������맹자������를 이삼십 번을 ㅚ우고 반복 일히 완미하고, ������사서(史書)������ 수판(數板)을 읽고 몇 번 반복해야 할 것이니, 대개 읽은 바 경서와 서서를 반복해서 자세히 일어야만 곧 그 뜻을 차쯤 알 수 있을 것이니, 읽기를 마땅히 서서히하여 급박하게 하지 말며 한자 한자 뜻을 분명히 하고, 다시 또 꿋꿋하게 바로 앉아 마치 성현과 마주 앉은 것 같이 하면 곧 마음이 안정되고 의리가 쉽게 밝혀질 것이니, 많이 읽기를 탐내어 대충 대충 지나가 읽기를 마치자마자 곧 이를 통했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으면 곧 다시 생각하고, 생각을 해도 통하지 않는 곳이 있으면 작을 책자를 비치하여 이를 날마다 기록하여 수시로 살펴보고, 문하에 돌아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하나하나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절대로 얼버무려 단점을 숨기고 묻기를 부끄러워하여 죽을 때까지 이 캄캄한 의문을 가슴에 품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또 작은 책자를 비치하여 매일 읽기를 시작한 곳과 마친 곳을 기록하여 문하에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 다시 살펴보도록 할 것이며, 집안에서의 모든 몸가짐을 단정하고 꿋꿋이하여 기울거나 기대는 일이 없도록 하라. 흐리멍텅하게 게을러질까 걱정이다. 외부에 츨입할 때는 걸음걸이를 단정하면서도 무게있게하여 경거망동으로 덕성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겸손으로 자기 수양을 하고 화경(和敬)으로써 남을 대우할 것이며, 모든 일을 삼가여 원칙대로 할 것이며 아무 일 없이 드나들며 잡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 잡서를 보지 마라. 정력을 허비할까 두렵다. 아침 저녁 배운 바를 점검하고, 열흘마다 오는 휴일에는 열흘동안 공부한 책을 다시 몇 번 복습하여 잠시라도 마음이 방일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저절로 점점 도리에 가까워져 공부한 곳이 쉽게 밝혀질 것이다.
【註解】
1) 魏應仲(위응중) : 위효백(魏孝伯),건양 사람, 위원리의 아들. 선생 문인.
2) 本點(본점) : 경사(經史)의 본문(本文).
3) 釋文(석문) : 육덕명(陸德明) ������경사 석문������.
4) 歸日(귀일) : 그 집으로부터 선생 문하에 돌아노는 날.
5) 票輕(표경) : 경지망동.
6) 謙遜自牧(겸손자목) : ������역������에 ‘겸겸군자(謙謙君子) 비이자목(卑以自牧)이라 함.
答何叔京
熹孤陋如昨이라 近得伯崇過此1)하야 講論踰月하니 甚覺有益이로대 所恨者는 不得就正於高明耳라 它日伯崇相見2)或通書3)에 當能備言之4)니 或有差誤어든 不吝指誨幸甚이라 李先生敎人이 大抵令於靜中에 體認大本未發時氣象分明하시니 卽處事應物에 自然中節하니 此乃龜山門下相傳指訣이라 然當時親炙之時貪聽講論하고 又方竊好章句訓詁之習하야 不得盡心於此라 至今若存若亡無一的實見處하야 辜負5)敎育之意하니 每一念此에 未嘗不愧汗沾衣也로다 脫然之語6)는 乃先生稱道之過니 今日猶如掛鉤之魚7)어든 當時寧有是耶아 然學者一時偶有所見하면 其初皆自悅預하야 以爲眞有所自得矣라及其久也에 漸次昏暗淡泊하고 又久則遂泯滅而頑然如初無所睹하니 此無它라 其所見者는 非卓然眞見道體之全이오 特因聞見揣度而知故耳라 竊意當時에 日聞至言觀懿行하니 其心固必有不知所以然者리니 洎失其所依歸하고 而又加以歲月之久하야 汩沒浸漬하야 今則兀然爲庸人矣니 此亦無足怪者라 因下問之及하야 不覺悵然하니 未知其終何所止泊也로다 東平先生遺事는 猥蒙垂示하야 得以究觀前賢出處之大致와 先庭8)問學之淵源과 與夫高明纂輯成書9)以傳世垂後之意하니 幸甚幸甚更容熟復하야 續得具稟也리라
답하숙경(答何叔京)
내 여전히 고루하게 지내던 차에 근일에 백숭(伯崇)이 방문하여 달을 넘겨 학문을 강론하니 실로 유익함이 많았다. 다만 고명(高明)에게 나아가 바로잡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훗일 백숭이 방문하거나 혹은 서찰을 보낼때에 강론한 바를 갖추어 말할 것이니 혹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가르침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연평(延平) 이선생께서는 후학을 가르치기를, 대개 고요한 가운데에 발하지 않은 큰 근본을 분명히 체인(體認)하면 처사응물(處事應物)할 때에 자연 알맞은 정도에 꼭 맞을 것이라 하니, 이는 곧 구산(龜山) 문하에 내려오는 지결(指訣)이다.
내가 연평 선생께 직접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선생님의 강론을 많이 듣기에만 탐을 내고, 또 장구(章句)나 훈고(訓詁)를 좋아하여 선생의 이같은 가르침에 마음을 다하지 못해지금 있는 듯 없는 듯하여 하나도 정확한 곳이 없다. 이렇듯 내 허물로써 선생의 가르침의 뜻을 저버렸으니 이를 생각하니 부끄러움에 땀이 옷을 적신다. 탈연(脫然)하다는 말은 선생이 나를 과찬한 말이다. 지금도 아직 낚시에 걸린 물고기 같거늘 당시에 어찌탈연한 데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배우는 자가 한 때의 우연히 본 바가 있어 그 처음에는 모두 스스로 즐거워 참으로 본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다가 오래지남에 점차 ㅇ두워지고 희미해져서 또 더 시일이 지나면 드디어 이것마저 없어져버려 처음 아무것도 보지 못한 때와 꼭 같이 되고 마니, 이것은 다름아니라 그 본 것이우뚝하여 참으로 도체(道體)의 진수를 본 것이 아니고 다만 듣고 본 바를 인하여 추측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선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당시에 날마다 지극한 말씀을 듣고 아름다운 행위를 볼 때에, 내마음이 선생의 지극한 말씀과 아름다운 행위의 바탕이 되는 근원을 알지 못한 것이 반드시 있었을 터이니, 선생이 돌아가시어 내가 의지할 곳을 잃고, 또 더하여 세월이 흘러감에 세속에 빠지고 물들었으니 지금 오뚝이 앉은 못난이가 된 것이 또한 괴이한 일이 아니다.
나에게 여러 가지 물으니 갑자기 창연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동평(東平) 선생 유사(遺事)는 외람되게도 고명의 지시를 받아 전현(前賢)의 출처의 자취와, 선정(先庭)의 문학(問學)의 연원과, 고명(高明)의찬술의 서책을 모두 볼 수 있고, 후세에 전할 교훈이 있어 더욱 다행하게 생각한다. 다시 자세히 읽어보고 계속 갖추어 알리겠다.
【註解】
1) 伯崇過此(백숭과차) : 백숭이 선생을 방문함.
2) 伯崇相見(백숭상견) : 백숭이 숙경을 만남.
3) 通書(통서) : 백숭이 숙경에게 글을 보냄.
4) 備言之(비언지) : 달을 넘겨 함께 강론한 일을 갗추어 말하다.
5) 辜負(고부) : 허물로써 가르침의 뜻을 저버리다.
6) 脫然之語(탈연지어) : 연평이 선생을 칭도(稱道)한 말.
7) 如掛鉤之魚(여괘구지어) : 탈연과 상반되는 의미.
8) 先庭(선정) : 숙경의 부 태(兌). 친정(親庭)과 같음.
9) 纂輯成書(찬집성서) : 동평유사(東平遺事), 숙경 부 태(台)가 찬하고 숙경이 또 속기(續記)를 찬함. 선생이 편찬한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도 함께 실려있다.
答程允夫1)
來書謂熹之言이 乃論蘇氏之粗者라하니 不知如何而論이라야 乃得蘇氏之精者오 此在吾弟心更有說이나 然熹則以爲道一而已라 正則表裏皆正이오 譎則表裏皆譎이니 豈可以析精粗爲二致리오 此正不知道之過也로다 又謂洗垢索瘢 則孟子以下皆有可論이라하니 此非獨不見蘇氏之失이라 又幷孟子而不知也라 夫蘇氏之失이 著矣라 知道愈明이면 見之愈切하야 雖欲爲之覆藏而不可得이니 何待洗垢而索之耶아 若孟子는 則無垢可洗無瘢可索이어늘 今欲掩蘇氏之疵하야 而援以爲比하니 豈不適所以彰之耶아 黃門2)比之 乃兄似稍簡靜然謂簡靜爲有道ㄴ댄 則與子張之指淸忠爲仁何以異리오 吾弟乃謂其躬行不後二程이라하니 何其考之不詳하고 而言之之易也오 二程之學은 始焉未得其要라 是以出入於佛老라가 及其反求而得諸六經也에 則豈固以佛老爲是哉아 如蘇氏之學이 則方其年少氣豪에 固嘗妄觝禪學하니 如大悲閣中和院等記可見矣로대 及其中歲流落不耦3)하야 鬱鬱失志하야 然後匍匐而歸4)焉하야 始終迷惑하야 進退無據하니 以比程氏컨댄 正揚子先病後瘳先瘳後病5)之說이라 吾弟比而同之하니 是又欲洗垢而索孟子之瘢也로다
답정윤부(答程允夫)
보내온 서찰에 말하기를 나의 말이 소씨(蘇氏)의 껍데기를 논한 것이라 하니 어떻게 말하여야 소씨의 알맹이를 논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이는 아우에게도 필경 할 말이 있을 것이나 내 생각에는 도(道)는 하나일 따름이니 그 도가 바르면 겉과 속이 다 바르고 그 도가 거짓이면 겉과 속이다 거짓이니 어찌 속과 겉을 나누어 두 이치로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그야말로 도(道)를 알지 못함이 심하다 하겠다.
또 말하기를
“때를 씻어서 흠을 찾는다면 맹자이하는 모두 흠을 논할 수 있다.”
고 하니 이는 소씨의과실을 알지 못할 뿐만아니라 또 맹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소씨의 과실은 두드러지게 드러나 도를 앎이 명백할수록 그 과실을 앎이 더욱 명백하여 비록 소씨를 위하여 그 흠을 덮어 숨기려해도 숨길수 없을 것이니 어찌때를 씻어서 흠을 찾도록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맹자 같은 사람은 씻을 때도 없거니와 찾을 흠도 없거늘 지금 아우는 소씨의 흠을 덮어려고 맹자를 이끌어 비교하니 어찌 도리어 소씨의흠을 들추어내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소철(蘇轍)은 그의 형에 비해 조금 간정(簡靜)한 것같으나 간정하다고해서 도(道)가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자장(子張)이 청충(淸忠)을 가리켜 인(仁)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아구가 또
“소씨가 도를 행함이 이정(二程)에 뒤지지 않는다.”
고 하니, 어찌 그 생각함이 자세치 못하고 말함이 이같이경솔한가. 이정(二程)의 학문 공부는 처음에 도의 요체를 터득하지 못하여이 때문에 불노(佛老)의설에서 이를 구하려 드다들었으나 유학(儒學)에 돌아와 육경(六經)에서 도를 터득함에 미쳐서는 어찌 불노를 옳다 했겠는가. 그러나 소씨의 경우에는 혈기 왕성한 젊었을 때에 벌써 선학에 빠졌으니 「대비각(大悲閣)」과 「중화원(中和院)의 기문에서 이를 볼 수 있고, 그 중년의 불우한 때를 당하여서는 허겁지겁 기어가듯 선학으로 돌아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갈길을 잃고 근거없이 헤매었다 할 것이다.
이를 정씨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꼭 양자(揚子)가 말한 것같이 정씨는 먼저 병이있어 뒤에 이를 고쳤고 소씨는 먼저 치료를 하고 뒤에 병이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우는 둘을 비교하여 같다고 하니 이는 때를 씻어 맹자의 흠을 찾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又謂程氏於佛老之言에 皆陽抑而陰用之라하니 夫竊人之財를 猶謂之盜이어든 況程氏之學이 以誠爲宗하니 今乃陰竊異端之說하야 而公排之以盖其跡이 不亦盜憎主人之意乎아 必若是言이면 則所謂誠者가 安在하며 而吾弟之所以敬仰之意果何謂也오 挾天子以今諸侯는 乃權臣跋扈6)하야 借資7)以取重於天下면 豈眞尊主者哉아 若儒者論道에 而以是爲心이 則亦非眞尊六經者니 此其心術之間에 反覆畔援8)하야 去道已不啻百千萬里之遠이라 方且自爲邪說詖行之不暇니 又何暇攻百氏而望其服於已也리오 凡此皆蘇氏心術之蔽9)라 故其吐辭立論에 出於此者는 十而八九니 吾弟讀之에 愛其文辭之工하야 而不察其義理之悖 日往月來에 遂與之化하야 如入鮑魚之肆久 則不聞其臭矣라 而此道之傳은 無聲色臭味之可娛하야 非若侈麗閎衍之辭와 縱橫捭闔之辨이 有以眩世俗之耳目而蠱其心하니 自非眞能洗心滌慮以入其中하야 眞積力久10)卓然自見道體之不二하야 不容復有毫髮邪妄이 雜於其間인댄 則豈肯遽然舍其平生之所尊敬11)向慕者하니 而信此一夫12)之口哉아 故伊川之爲明道墓表曰 學者於道에 知所向然後見斯人之爲功이오 知所止然後見斯名之稱情이라하시니 盖爲此也라 然世衰道微하야 邪僞交熾 使溺於見聞之陋 各自是其所是하니 若非痛加剖析하야 使邪正眞僞로 判然有歸하면 則學者將何所適從以知所向이온 況欲望其至之乎아 此熹之所不得不爲吾弟極言하야 而忘其僭越之罪也라
또 말하기를,
“정씨가 불노의 말을 겉으로는 억누르는 것같이 하면서 속으로는 이를 끌어다 쓴다.”
고 하니 대개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도 도적이라 하거늘 하물며 정씨의학이 성(誠)을 제일로 삼거늘 지금 곧
“몰래 이단의말을 훔쳐 쓰면서 공적(公的)으로는 이를 배격하여 자기의 사실을 감추려 한다.”
고 한다면 이는 도적이 주인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꼭 이렇게 말한다면 이른 바 성(誠)이란 것이 정씨의 어디에 있으며 아우가 이정(二程)을 경앙(敬仰)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천자의이름과 권위를 배경으로 제후에게 명령하는 것은 권신(權臣)이 발로하여 천자의 권위를 빌어 천하에 자기의 권력을 행세하려는 것이니 이 권신이 어찌 참으로 천자가 존경하는 자이겠는가.
만약 유자(儒者)가 도를 논하면서 이 권신의심술을 쓴다면 또한 진실로 육경(六經)을 존중하는 자가 아니니, 이는 그러한 심술을 쓰는 동안에 이랬다 저랬다하여 오도(吾道)를 배반하고 이단을 도와 도를 떠남이 천리 만리나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스스로 사설(邪說) 피행(詖行)을 하기에 바쁘니어느 곁에 백가(百家)를 쳐서 나에게 굴복하기를 바라겠는가.
이 모든 것이 소씨의 심술의 폐단이니이러한 까닭으로 그 말과 논설이 십중 팔구는 사(私)에서 나온 것이다. 아우가 소씨의 글을 읽음에 그 문사(文辭)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그 의리에 어긋남을 살피지 못하여 날이 갈수록 그를 닮아가니, 이는 어물전에 들어가 오래되어도 그 냄새가몸에 베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 도는 즐길 수 있는 성색취미(聲色臭味)가 없어, 화려하고 방대한 말과 종횡패합(縱橫捭闔)하는 변론이 세속의 이목(耳目)을 현혹시켜 그 마음을 유혹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우는 스스로 마음을 맑게하여 지속적으로 힘써 도의 본체를 확연히 깨닫아 털끝같은 사망(邪妄)도 섞이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어찌 갑자기 평소에 존경하는 사람인 소씨를 버리고 보잘 것 없는 나의말을 믿겠는가. 그래서 이천(伊川)이 명도(明道)의 묘표(墓表)에 말하기를,
“도에 있어서 그 사람이 향하는 바를 안 연후에 그 사람의 공(功)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그치는 바를 안 연후에 그 사람의 명성이 사실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고 했으니 아마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도가 쇠미(衰微)하여 사특하고 거짓된 것이 마구 일어나 학자들이 고루한 견문(見聞)에 빠져 제각기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하니, 만약 통열히 이를 분별하여 사정(邪正)과 진위(眞僞)를 쪼갠 듯 갈라놓지 않으면 학자들이 장차 어디를 좇아서 향할 바를 알겠으며 또 더구나 학자들이 도에 도달하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아우를 위해 부득불 극언하여 그 참월을 잊어버리는 까닭이다.
程氏書를 謾寄大全集13)一本龜山語錄14)一本去하노니 程氏高弟尹公 嘗謂易傳乃夫子自著니 欲知其道者ㄴ댄 求之於此足矣오 不必傍觀他書라하니 盖語錄이 或有他人15)所記하니 未必盡得先生意也니라 又言先生踐履盡一部易하니 其作傳이 只是因而寫成이라하니 此言尤有味라 試更思之하야 若信得及이어니와 試用年歲之功하야 屛去雜學하고 致精於此면 自當有得이니 始知前日所謂蘇程之室16)者는 無以異於雜薰蕕17)冰炭於一器之中하야 欲其芳潔而不汚라도 盖亦難矣리라 蘇氏文辭偉麗는 近世無匹하니 若欲作文이면 自不妨模範이어니와 但其詞意矜豪譎詭하야 亦有非知道君子所欲聞이라 是以平時에 每讀之雖未嘗不善이나 然旣喜未嘗不厭하야 往往不能終帙而罷하니 非故欲絶之也라 理勢自然하니 盖不可曉18)로다 然則彼醉於其說者欲入吾道之門이 豈不猶吾之讀彼書也哉아 亦無怪其一胡一越而終不合矣로다 蘇程은 固嘗同朝라 程子之去에 蘇公嗾19)孔文仲하야 齕而去之也니 使其道果同이 如吾弟之所論이면 則雖異世라도 亦且神交20)니 豈止若是之戾耶아 文仲爲蘇所嗾하야 初不自知라가 晩乃不覺하야 憤悶嘔血 以至於死하니 見於呂正獻公之遺書하야 尙可考也니 吾弟未之見耳로다 因筆及此하니 似傷直矣나 然不直則道不見이니 吾弟察之幸甚이라
������정자대전집(程子大全集)������ 한 권과 ������구/귀산 어록(龜山語錄)������ 한권을 부쳐 보내니 잘 읽어보기 바란다. 정씨의 고제(高弟) 윤공(尹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역전(易傳)������은 정자가 직접 저술한 것이니 정자의 도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역전(易傳)������에서 구할 것이요 다른 서책을 볼 필요가 없다.”
고 하니 아마 정씨 어록은 혹시 타인이 기록할 때에 정자의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 곳이 있는 것같고 또 윤공이말하기를,
“정자의실천 궁행이 한권 ������역전(易傳)������에 다 나타나 있으니 그 ������역전(易傳)������을 저술한 것이 다만 그 실천 궁행의 뜻을 옮겨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 하니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고 이 말을 믿을 수 있겠거든 몇 년간 힘써 공부하여 잡서는 물리치고 이 ������역전(易傳)������을 정독하면 스스로 깨닫는 바가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비로소 전일에 말한
“소정(蘇程)이터득한 학문의깊은 곳이 마치 향기로운 풀과 누린내나는 풀을, 어름과 술을 한 그릇에 섞어 담은 것과 같아서 향기롭고 깨끗하게하여 오염되지 않게 하고자 하나 그것이 불가능하다.”
는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소씨는 문사(文辭)가 뛰어나고 아름다움이 근세에 따를 사람이없으니 만약 작문을 하고자 한다면 모방을 해도 무방하겠지만, 다만 그 사의(詞意)가 호탕하고 기이하여 도를 아는 군자가 배울 바는 아닌 것같다. 이 때문에 내가 평소에 소씨의글을 읽을 때마다 비록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좋아한 뒤에는 싫어하지 않은 때가 없어 종종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내가 일부러 소씨의 글을 읽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저들 소씨의 설에 취한 사람이 오도(吾道)의 문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어찌 우리가 소씨의 글을 읽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한 쪽은 북쪽으로 가고 한쪽은 남쪽으로 가는 길이라 끝내 만나지 못함이 괴이할 것이 없다.
소씨와 정씨가 함께 조정에 있을 때에 정자가 조정을 떠난 것이 소씨가 공문중(孔文仲)을 사주하여 정씨를 쫓아낸 것이니 가령 두 사람의 도가 과연 같다면 비록 저승에서나마 그들의 정신(精神)이 서로 사귈것이니 지금 어찌 이같이 서로 어긋나겠는가. 공문중이 처음엔 소씨의 사주를 몰랐다가 나중에 이를 알고는 울분이 쌓여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으니 이 사실은 여 정헌공의 유서에 잘 나타나 있지만 아우가 아직 이를 보지 못한 것같다.
나의 글이 이러한 말까지 하게 되어 너무 지나치게 직필한 것같다. 그러나 직필하지 않으면 도가 밝혀지지 않을 것이니 아우는 자세히 살피기 바란다.
【註解】
1)程允夫(정윤부) : 휘주(徽州) 사람. 길주(吉州) 참군(參軍)이었음. 윤부의 아버지 한계(寒溪) 옹이 위재(韋齋) 주송(朱松)의 내제(內弟), 선생이 윤부와 중표(中表)의 형제이다.
2) 黃門(황문) : 소철(蘇轍).
3) 中歲…不耦(중세…불우) : 원풍(元豐) 2년에 동파(東坡)가 황주(黃州)로 귀양감. 소성(紹聖) 이후로 또 영주(英州)로 귀양가 혜주(惠州) 경주(瓊州)에 이름. 우(耦)는 우(偶)와 같음.
4) 匍匐而歸(포복이귀) : 선학으로 돌아감.
5) 楊子…後病(양자…후병) : ������양자법언(楊子法言)������ 「효지(孝之)」편에 누가 묻기를, “덕이 시작이 있고 마침이 없는 것이 마침이 있고 시작이 없는 것이 어느 것이 낫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먼저 병이 있고 뒤에 고치는 것이 낫지 어찌 먼저 고친 뒤에 병이 있는 것이 낫겠는가.” 하였다.
6) 跋扈(발호) : 호는 죽리(竹籬)니 고기를 가두는 것이다. 큰 고기는 이 죽리를 뛰쳐 나온다.
7) 借資(차자) : 한비자의 「세난(說難)」에 말로 이 쪽의 힘을 빌어 저쪽의 바탕으로 삼는다는 말.
8) 畔援(반원) : 이쪽을 배반하고 저쪽을 도움.
9) 凡此…之蔽(범차…지폐) : 양억음용(陽抑陰用) 차자취중(借資取重)을 가리키는데 윤부가 정자를 논하는 말을 인용하여 소씨를 공격함.
10) 眞積力久(진적역구) : 끊임없이 끝까지 노력함.
11) 所尊敬(소존경) : 윤부가 소씨를 존경함을 말함.
12) 一夫(일부) : 선생 스스로를 말함.
13) 大全集(대전집) : 이 때에 ������이정전서(二程全書)������는 나오지 않았고 ������어록(語錄)������ ������문집(文集)������ ������경설(經說)������ 등을 합하여 대전집이라 함.
14) 龜山語錄(구산어록) : 구산이 기록한 이정(二程)의 말.
15) 他人(타인) : ������경설(經說)������ 중의 「여씨 중용해(呂氏中庸解)」인 것같다.
16) 蘇程之室(소정지실) : 실(室)은 터득한 것이 깊은 곳. 윤부가 전에 “소정지실에 들어가고 싶다.” 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이 말을 말함.
17) 薰蕕(훈유) : ������좌전������ 희공(僖公) 4년에 진 복인(卜人)이 말하기를, “훈과 유를 섞어놓으면 10년이 가도 악취가 난다” 함. 훈은 향초 유는 악초.
18) 盖不可曉(개불가효) : 소씨의 글이 좋았다가 다시 싫어지는 까닭을 모르겠다는 말.
19) 嗾(주) : 개로 하여금 짓게 함.
20) 神交(신교) : 서로 의기가 상통하여 예의에 구애되지 않고 깊이 사귀는 일. 정신상의 교섭.
答胡廣仲
上蔡雖說明道는 先使學者로 有所知識에 却從敬入1)이라하나 然其記二先生語2)는 却謂未有致知而不在敬者하고 又自云3)하대 諸君不須別求見處니라 但敬與窮理則可以入德矣하며 二先生이 亦言4)根本을 須先培壅然後可立趨向이라하고 又言莊整齊肅하야 久之則自然天理明이라하시니 五峯이 雖言知不先至則敬不得施나 然又云格物之道는 必先居敬하야 以持其志라하니 此言은 皆何謂耶아 熹竊謂明道所謂先有知識者는 只爲知邪正識趨向耳오 未便遽及知至之事也어늘 上蔡五峯이 旣推之太過5)하니 而來喩又謂知之一字는 便是聖門授受之機라하니 則是因二公之過而又過之라
답호광중(答胡廣仲)
상채(上蔡)가 비록
“명도(明道)는 먼저 학자로 하여금 아는 바에 있게 한 연후에 경(敬)을 쫓아 도(道)에 들어가게 한다.”
고 말했으나, 그러나 그가 이정(二程)의 말을 기록함에
“앎에 이르는 것이 경(敬)에 있지 않음이 없다.”
했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제군(諸君)이 별도로 도를 구할 곳을 찾지 말고 다만 경(敬)과 궁리(窮理)에서 구하면 덕(德)에 들어갈 수 있다.”
하고, 이정(二程)이 또한 말하기를,
“근본을 먼저 배양한 연후에라야 나아갈 방향을 세울 수 있다.”
했고, 또 말하기를,
“엄숙하고 가지런한 몸가짐을 오랫동안 견지하면 자연히 천리가 밝아진다.”
하고, 오봉(吾峯)이 비록
“앎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을 시행할 수 없다.”
고 했으나, 또 말하기를,
“격물(格物)의 방법이 먼저 경(敬)으로써 그 뜻을 굳건히 가져야 한다.”
고 했으니, 이러한 말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내 생각에는 명도가 이른 바
“먼저 아는 바가 있어야 한다.”
는 것은 다만 바르지 못함과 바른 것을 알아야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다는 뜻의 말이고 곧바로 지지(知至)의 일에 도달해야한다는 뜻이 아니거늘 상채와 오봉이 정자의 말을 너무 지나치게 미루어 해석한 것같고, 그대의 서찰에서 또
“지(知)가 곧 성문(聖門) 수수(授受)의 기틀이다.”
고 하니, 이는 또 이공(二公)의 지나침에서 더 지나친 것같다.
試以聖賢之言考之면 似皆未有此等語意니 却是近世禪家說話多如此라 若必如此론 則是未知已前에 可以怠慢放肆無所不爲어던 而必若曾子一唯之後6)라야 然後可以用力於敬也라 此說之行이 於學者日用功夫에 大有所害하니 恐將有談玄說妙하야 以終其身而不及用力於敬者니 非但言語之小疪也니라 上蔡又論橫渠以禮敎人之失하야 故其學至於無傳이라하니 據二先生所論컨댄 却不如此라 蓋曰7) 子厚以禮敎學者8)最善하야 使人先有所据守오 但譏其9)說淸虛一大使人向別處走하니 不如且道敬耳라하시니 此等處10)上蔡說이 皆有病하니 如云正容謹節이 外面威儀니 非禮之本이 尤未穩當이니라
다시 성현의 말로써 고찰해보면 모두 이러한 뜻의 말은 없는 것같고 도리어 근세 선가(禪家)의 설이 이같은 것이 많으니 만약 꼭 이와 같다면 이는 앎이 있기 이전엔 태만 방자하여 무슨 일이든지 저지를 수 있고 증자(曾子)와 같은 높은 깨달음이 있은 연후에야 경(敬)에 힘 쓸 수 있다는 말이되니 먼저 앎이 있어야 경(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 말이 학자의일용 공부에 매우 해로워 담현설묘(談玄說妙)로 일생을 보내 경(敬)에 힘 쓸 수 없게 하니 그 해가 언어상의 작은 흠에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상채가 또 말하기를,
“횡거(橫渠)가 예(禮)를 너무 지나치게 우선으로하여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 학문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한다.”
고 하니, 이정(二程)이 논한 것을 보면 이같지 않으니 대개
“자후(子厚)가 예로써 학자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의거해지킬 바를 알게 한다.”
하고 다만 그가 청허일대(淸虛一大)로써 도의 체(體)를 논하여 학자들을 다른 곳으로 달려가게 하니, 경(敬)을 말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횡거의 말을 나무랐다.
앞에서 말한 상채의 설이 모두 잘못이 있고
“용모를 바르게하고 삼가 절제하는 것은 외면의 위의(威儀)이고 예(禮)의 근본이 아니다.”
라고 한 상채의 말 같은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한 말이다.
【註解】
1) 上蔡…敬入(상채…경입) : ������상채 어록������에서 횡거가 예로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좋지 않다 하고 “명도는 먼저 학자로 하여금 아는 바가 있게 하고 곧 경에 들어가게 한다”고 말함.
2) 記二先生語(기이선생어) : 유서(遺書)의 사현도기(謝顯道記).
3) 又自云(우자운) : 상채 자운.
4) 李先生亦言(이선생역언) : 명도가 말하기를 “근본을 먼저 배양한 후에 나아갈 곳을 세울 수 있다. 나아갈 곳이 정해지면 나아가는 바가 깊고 얕은 것은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하고 이천이 말하기를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면 마음이 전일하고 마음이 전일하면 사곡(邪曲)함이 끼어들지 못한다. 함양을 오래하면 천리가 자연 밝아진다.” 함.
5) 推之太過(추지태과) : 윗글 상채의 “먼저 학자로 하여금 아는 바가 있게 한다.” 는 말과 오봉의 “앎이 먼저 이르지 아니하면 경을 행할 수 없디”는 말을 가리킴.
6) 曾子…之後(증자…지후) : 진적역구(眞積力久)한 뒤를 말함.
7) 盖曰(개왈) : 두 글자는 선생의 말이고 자후 이하 거수까지는 정자의 말이다. 선생이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 때문에 ‘개왈’로 시작한 것이다.
8) 子厚…學者(자후…학자) : 횡거가 말하기를 “내가 학자로 하여금 먼저 예를 배우게 하는 까닭은 다만 세속의 좋지 못한 습관을 제거하여 탈쇄(脫灑)하게 하기 위해서다. 예를 배우면 지켜 의지할 바가 있다.” 하였다. 명도가 이를 최선이라 했다.
9) 但譏其(단기기) : 세 글자 또한 선생의 말이고 설 청허 이하 도경(道敬)까지는 또 정자 말을 인용한 것이다. 말미의 이(耳)자도 선생이 쓴 것이다. 일(一)은 만수일본(萬殊一本)의 일이요 대(大)는 대이무외(大而無外)의 대이니 횡거가 청허일대(淸虛一大) 네 글자로 도의 실체를 형상하였는데 정자가 이를 나무람.
10) 此等處(차등처) : ‘론횡거이례(論橫渠以禮)’ 운운을 가리킴.
人欲非性1)之語는 此亦正合理會니 熹竊謂天理固無對나 然旣有人欲이면 卽天理便不得不與人欲으로 爲消長하고 善亦本無對나 然旣有惡이면 卽善便不得不與惡으로 爲盛衰라 譬如晋天之下가 莫非王土하며 率土之濱이 莫非王臣이니 此本豈有對哉아至於晋有五胡2)唐有三鎭3)이 則華夷逆順不得不相與爲對矣니 但其初則有善而無惡有天命而無人欲耳라 龜山之意4)正欲於此毫釐之間剖判分析하야 使人於克己復禮之功에 便有下手處하니 如孟子道性善이 只如此說5)하시니 亦甚明白慤實하야 不費心力하고 而易傳大有卦6)는 遺書7)第二十二篇에 論此又極分明하니 是皆天下之公理오 非一家所得而私者8)라 願虛心平氣하야 勿以好高爲意며 毋以先入爲主하야 而熟察其事理之實於日用之間이면 則其得失從違不難見矣의라 蓋謂天命爲不囿於物이 可也오 以爲不囿於善9)이면 則不知天之所以爲天矣오 謂惡不可以言性이 可也오 以爲善不足以言性10)이면 則不知善之所自來矣니라 知言11)中此等議論이 與其它好處로 自相矛盾者極多하야 却與告子揚子釋氏蘇氏12)之言을 幾無以異라 昨來所以不免致疑者는 正爲如此니 惜乎不及供灑掃於五峯之門하야 而面質之호라 故不得不與同志者講之耳로다 亦聞以此或頗得罪於人13)이나 然區區之意只欲道理分明하야 上不負聖賢하고 中不誤自已 下不迷後學而已니 它固有所不得而避也니라
인욕(人欲)이 성(性)이 아니라는 구산(龜山)의 말은 정히이치에 부합하는 말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즉 천리가 본래 상대(相對)가 없으나 이미 인욕이 있게되면 천리는 부득불 인욕과 서로 소장하는 관계가 되고, 선이 본래 상대가 없으나 이미 악이 있게 되면 선이 부득불 아과 서로 성쇠(盛衰)의 관계에 있게 된다. 비유컨대 하늘 아래 모든 땅이 왕의 영토 아님이 없고 모든 땅의 백성이 왕의 신하 아님이 없으니이것이 어찌 본래 상대가 있으리오마는 진(晋)에 오호(五胡)가 있고 당(唐)에 삼진(三鎭)이 있게 된 연후에는 화(華)와 이(夷), 역(逆)과 순(順)이 부득불 서로 상대가 되는 것과 같다 하겠다. 다만 그 처음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며 천명이 있고 인욕이 없는 것이다. 구산이 인욕이 성이 아니라고 한 듯은 정히 이(理)와 욕(欲)과 선과 악의 털끝같은 사이를 베고 쪼개어 사람으로 하여금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공부에 힘쓰게 하고자 한 것이니 맹자가 성선설(性善說)을 말한 뜻과 같다 하겠다. 그러니 마음을 명백하고 성실히하여 심력을 쓸데없이 허비하여 심무생사(心無生死) 성무선악(性無善惡) 같은 설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정자의 ������역������ 대유(大有)괘 전(傳)과 유서(遺書) 제 22편에 이를 지극히 분명하게 논하였으니이는 모두 천하의 공리요 어느 일가(一家)의 말이 아니다.
바라건대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평정히하여 호고(好高)와 선입(先入)을 좋아하지 말고 일용 생활 가운데에서 그 사리(事理)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득실과 종위(從違)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천명(天命)이 사물(事物)에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만 선(善)에 가두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천(天)이 천(天)인 까닭을 모르는 것이며 악(惡)을 성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옳지만 선을 성이라 말하기에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선을 선이라 이름한 가닭을 모르는 것이라 하겠다. 지언(知言) 중에 이욕동체(理欲同體) 선악동체(善惡同體) 같은 의론(議論)은 다른 좋은 것과 서로 모순되는 곳이 허다하니 고자(告子) 양자(揚子) 석씨(釋氏) 소씨(蘇氏)의 말과 거의 다름이 없는 것같다. 근래에 내가 의문이 없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오봉(五峯)의 문하에 가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여 부득불 동지들과 이를 가론해볼 따름이다. 이로써 혹 오봉의 문인 자제들에게 죄를 지을지 모르겠으나 나의 뜻은 다만 도리를 분명하게하여 위로 성현을 저버리지 않고 가운데로 자신을 그릇되게 하지 않고 아래로 후학들을 미혹되지않게 할 따름이니 이는 진실로 피치 못할 바이다.
【註解】
1) 人欲非性(인욕비성) : 구산의 말인데 답하숙경서에 보인다. 오봉이 ������지언(知言)������에서 이 말을 그르다 하고 광중이 이를 이어 이욕상대(理欲相對)를 그렇지 않다고 물리쳐 도리어 이욕동체(理欲同體)라는 그릇된 생각에 빠졌다.
2) 五胡(오호) : 한(漢) 진(晋) 무렵 서북방에서 중국 본토에 이주한 다섯 민족, 곧 몽고의 흉노(匈奴)․갈(羯) 몽고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인 선비(鮮卑), 티베트 계인 저(氏/) 강(羌).
3) 三鎭(삼진) : 하삭삼진. 즉 범양(范陽) 평노(平盧) 하동(河東).
4) 龜山之意(구산지의) : 구산이 말하기를 “성(性)은 착하지 않음이 없고 인욕은 성(性)이 아니다.” 하니 정히 이욕(理欲)과 선악(善惡)의 사이를 쪼갠 듯 분석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욕을 제거하고 이(理)를 보존하여 악을 제거하고 선을 보존케 하려는 것이니 맹자가 성선(性善)을 말한 뜻과 같다.
5) 只如此說(지여차설) : 차는 구산설을 가리킨 듯.
6) 易傳大有卦(역전대유계) : 정전(程傳)에 말하기를 “원(元)은 사물의 먼저인 것이다. 사물의 선(先)이 어찌 불선(不善)이 있겠는가. 일은 성(成)이 먼저 있고 패(敗)가 있어 패(敗)는 성(成)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흥(興) 이후에 쇠(衰)가 있으니 쇠(衰)는 진실로 흥(興) 뒤에 있으며 득(得) 이후에 실(失)이 있으니 선악 치란 시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7) 遺書(유서) : 체(棣)가 “성(性)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정자가 답하기를 “성(性)은 곧 이(理)이다. 천하의 이(理)가 그 스스로 온 바를 생각해보면 선하지 않음이 없다. 희노애락이 발하지 아니한 때에 어찌 선하지 않으며 발하여 절도에 맞으면 도달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다. 무릇 선악을 말함에 모두 선을 먼저 말하고 길흉을 말함에 먼저 길을 말하며 비시를 말함에 먼저 시(是)를 말한다.” 함.
8) 非一…私者(비일…사자) : 광중이 가학(家學)을 주장했기 때문에 하는 말.
9) 天命…於善(천명…어선) : ������지언(知言)������에 말하기를, “천명은 선에 가두어지지 않는다. 인욕으로써 서로 대칭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니 유(囿)는 장(藏) 취(聚)와 같다. 천명이 형체와 방소가 없기 때문에 물(物)에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가하지만 하늘이 하늘이되는 까닭은 순수지선(純粹至善)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선에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10) 善不足而言性(선부족이언성) : 호안국(胡安國)이 이 설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들 호굉(胡宏)이 ������지언(知言)������에서 “성(性)이란 것은 천지 귀신의 오묘함이다. 선(善)은 성을 말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함.
11) 知言(지언) : 오봉이 찬. 심무생사 성무선악을 주장. 선생이 「지언의의」를 지어 극력 비난함.
12) 告子…蘇氏(고자…소씨) : 고자는 “성은 선 불선이 없다.” 하고 양씨는 “성은 선과 악이 섞여있다.” 하고 석씨는 “작용(作用)이 엇이다. 선악을 나누지 않고 운용자를 성이라 한다.” 하고 중(中), 일(一)이라하여 선악을 나누지 않고 말했다. 맹자가 성선을 말함으로부터 일(一)과 중(中)이 갈라져 선악이 되었다.
13) 得罪於人(득죄어인) : 선생이 오봉의 ������지언(知言)의 득실을 변론하였기 때문에 오봉의 문인 자제에 득죄라 함.
太極之旨를 若如所論하야 必以舊圖로 爲據而曲爲之說이면 意則巧矣나 然旣以第一圈爲陰靜이오 第二圈爲陽動이면 則夫所謂太極者는 果安在耶아 又謂先有無陽之陰後有兼陰之陽이 則周子本說이 初無此意하고 而天地之化가 似亦不然이오 且程子所謂無截然爲陰爲陽之理는 卽周子所謂互爲其根也오 程子所謂升降生殺之大分不可無者는 卽周子所謂分陰分陽也어늘 今偏擧其一1)하야 而所施又不當其所2)하고 且所論先有專一之陰3)後有兼體之陽4)이 是乃截然之甚者니 此熹之所疑者也라 人生而靜天之性者는 言人生之初未有感時에 便是渾然天理也오 感物而動性之欲者 言及其有感에 便是此理之發也니 程子於顔子好學論中에 論此極詳하시니 但平心易氣熟玩而徐思之면 自當見得義理明白穩當處오 不必如此强說하야 枉費心力也니라 知言疑義所謂情亦天下之達道5)此句는 誠少曲折6)이나 然其本意는 却自分明하니 今但改云情亦所以爲天下之達道也라하면 則語意曲折備矣라
태극의 뜻을 만약 그대가 논한대로 꼭 구도(舊圖)를 근거로하여 잘못 해설하면 그 뜻은 교묘하다 하겠으나 그러나 제 일권(第一圈)으로써 음정(陰靜)을 삼고 제 이권(第二圈)으로써 양동(陽動)을 삼으면 이른 바 태극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먼저 양(陽)이 없는 음(陰)이 있고 뒤에 음(陰)을 겸한 양(陽)이 있다.”
고 하니, 주자(周子) 본설(本說)에 이 뜻이 없고 천지조화도 역시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며 또 정자가 말한 바
“자른 듯이 음(陰)이 되고 양(陽)이 되는 이치가 없다.”
는 것은 곧 주자(周子)가 이른 바
“음(陰)과 양(陽)이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된다.”
는 것이고, 정자가 말한
“오르고 내리고 낳고 죽는 큰 나누임이 없을 수 없다.”
는 것은 주자(周子)가 이른 바
“음으로 나누이고 양으로 나누이는 것”
이거늘 지금 그대는 주자(周子)가 말한 ‘분음분양(分陰分陽)’과 ‘호위기근(互爲其根)’ 두 가지 중에서 분음분양만 취하고 호위기근을 빠뜨렸고 그림을 좌우로 음양을 ㅏ누지 않고 상하로 나누었으며, 또
“먼저 전일(專一)한 음(陰)이 있고 뒤에 음(陰)을 겸한 양(陽)이 있다.”
는 것은 음양(陰陽)을 잘라 나눔이 더욱 심한 것이니, 이것이 내가 의문을 가지는 바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한 것이 하늘의 성(性)’이란 것은 사람이 태어난 처음에 외물을 느끼지 않은 때는 곧 우주와 한 덩어리로 순수한 천리(天理)라는 말이요 ‘외물을 느껴 움직일 때를 성(性)의 욕망’이란 것은 사람이 외물을 느낌에 미쳐서는 천리가 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자가 ‘안자호학론(顔子好學論) 가운데서 이를 아주 자세히 논하였으니다만 심기(心氣)를 평이(平易)하게 가져서 자세히 살펴보고 서서히 생각해보면 의리(義理)의 명백하고 온당(穩當)한 곳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같은 무리한 설을 세워서 심력(心力)을 허비할 필요가없을 것이다. 「지언의의(知言疑義)」에서 말한
“정(情)은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라는 말은 사실 조금 잘못된 말이다. 그러나 그 본 뜻은 분명하니
“정은 천하의 달도가 되는 바탕이다.”
라고 고쳐 말하면 본래의 말 뜻의 곡절이 모두 갖추어질 것이다.
盖非喜怒哀樂之發이면 則無以見其中節與否오 非其發而中節이면 則又何以謂之和哉아 心主性情7)은 理亦曉然하니 今不暇別引證據라 但以吾心觀之컨대 未發而知覺不昧者는 豈非心之主乎性者乎며 已發而品節不差者는 豈非心之主乎情者乎아 心字貫幽明通上下하야 無所不在하니 不可以方體論也라 今口以情爲達道則不必言心8)矣라하니 如此면 則是專以心爲已發이 如向來之設也니라 性情之善이 不與惡對此本龜山所聞於浮屠常摠者니 宛轉說來에 似亦無病이나 然謂性之爲善이 未有惡之可對則可어니어와 謂終無對則不可하니 盖性一而已라 旣曰無有不善이면 則此性之中에 無復有惡與爲對亦不待言而可知矣어니와 若乃善之所以得名이 是乃對惡而言이니 其曰性善이 是乃所以別天理於人欲也라 天理人欲이 雖非同時幷有之物이나 然自其先後公私邪正之反而言之이면 亦不得不爲對也니 今必謂別有無對之善이면 此又熹之所疑者也라
대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발함이 없으면 그 중절(中節) 내부를 볼 수가 없고 그 발하여 중절(中節)함이 아니면 무엇으로써 화(和)라 하겠는가.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주관한다는 것은 이치가 명백하니 지금 별도로 증거를 끌어댈 겨를이 없고 다만 내 마음으로써 볼 것 같으면 마음이발하지 아니해도 지각이 깨어 있으니 어찌 마음이 성을 주관하지 안하다고 하겠으며 마음이 이미 발하여 알맞은 정도에 어긋나지않으니 어찌 마음이 정을 주과하지않는다고 하겠는가. 마음은 유명(幽明)을 꿰뜷고 상하를 통하여 있지 아니한 곳이 없으니 방향이 정해진 일정한 몸체로 논할 수 없거늘 지금 그대는
“정을 달도(達道)라고 한다면 마음을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고 말하니이렇다면 이는 오로지 마음을 이미발한 것으로만 보는 것이니 이는 그대의 종전의 설과 같은 것이다.
“성이 선(善)하다고 할 때의 선이 악과 상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는 말은 본래 구산(龜山)이 승려 상총(常摠)에게 들은 것인데 교묘히 말함에 잘못이 없는 말 같지만 그러나
“성이 선한 것이 악과 상대가되는 것이 없다.”
고는 말할 수 있지만
“끝내 상대가 없다.”
고는 말할 수 없으니 대개 성은 하나 뿐이니 이미
“성(性)이 선(善)하지 아니함이 없다.”
고 했으면, 이는 성(性) 가운데에 악이 선과 상대가 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거니와 선이라고 명명된 유래는 곧 악과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요,
“성(性)이 선(善)하다.”
고 말한 것은 이는 곧 천리(天理)를 인욕과 구별하기 위함이니 천리와 인욕이 비록 동시에 병존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그 선후(先後) 공사(公私) 사정(邪正)으로 말할 것같으면 부득불 상대가 되지 않을 수 없거늘 지금 기필코
“별도로 절대적인 선이 있다.”
고 말하니, 이것이 또한 내가 의문이 있는 바이다.
天命之性을 不可刑容이오 不須贊歎9)이라 只得將他骨子10)實頭處說出來라야 乃於言性에 爲有功이라 故熹只以仁義禮智四字言之最爲端的이라 率性之道는 便是率此之性하야 無非是道라 亦離此四字不得이나 如程子所謂仁이 性也오 孝悌는 是用也라 性中에 只有仁義禮智而已니 曷嘗有孝悌來리오시니 此語亦可見矣라 盖天地萬物之理無不出於此四者하니 今以此爲倒說하야 而反謂仁義因父子君臣而得名이면 此又熹之所疑者也라 中和體用之語는 亦只是句中少曲折11)耳라 盖中者는 所以狀性之德而形道之體오 和者所以語情之正而顯道之用이니 熹前說之失은 便以中和爲體用하니 則是猶便以方圓爲天地12)也라 近已用此意하야 改定舊語하니 與來諭所疑는 却恐未然이로다 所引孟子知覺二子는 却恐與上蔡意旨不同13)하니 盖孟子之言知覺14)은 謂知此事覺此理니 乃學之至而知之盡也오 上蔡之言知覺은 謂識痛痒15)能酬酢者니 乃心之用而知之端也라 二者亦不同16)矣나 然其大體는 皆智之事也어늘 今以言仁하니 所以多矛盾而少契合也니라 憤驕險薄이 豈敢輒指上蔡而言이리오 但謂學者는 不識仁之名義하고 又不知所以存養而張眉努眼하야 說知說覺者는 必至此耳라 夫以愛名仁17)이 固不可나 然愛之理는 則所謂仁之體也니 天地萬物이 與吾一體라 固所以無不愛나 然愛之理則不爲是而有也18)니 須知仁義禮智四字一般皆性之德이라 乃天然本有之理 無所爲然者로대 但仁乃愛之理生之道라 故卽此而又可以包夫四者하야 所以爲學之要耳라 夫來敎之爲此數說者는 皆超然異於簡冊見聞之舊니 此其致知之功이 亦足以爲精矣나 然以熹之所疑로 考之ㄴ댄 則恐求精之過而反失之於鑿也라
‘하늘이 품부한 성(性)’은 말로써 형용할 수 없으며 또 찬탄할 필요도 없고 다만 그 실직적인 알맹이를 가지고 말을하면 성을 말함에 보다 효과적이다. 이 때문에 내가 다만 성(性)의 알맹이인 인의예지(仁義禮智) 넉자로써 성(性)을 말하니 이것이 가장 단적(端的)하고,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라는 것은 곧 이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가 아님이 없는 것이니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떠날 수 없다.
정자가
“인(仁)은 성(性)이요 효제(孝弟)는 용(用)이다. 성(性) 가운데는 다만 인의예지(仁義禮智)만 있을 따름이니 어찌 효제(孝弟)가 있겠는가.”
라고 말한 이 말에서 도를 말함에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떠나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천지 만물의 이치가 인의예지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거늘 지금 이를 거꾸로 말하여 반대로
“인의(仁義)는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라는 실재의 인간 관계의 사실이 있은 후에 그 인의(仁義)라는 말이생겼다.”
고 하니 이 또한 내가 의심하는 바이다. ‘중화체용(中和體用)’이란 말은 역시 그 말 중에 조금 결함이 있다.
대개 중(中)이란 것은 성(性)의 덕(德)과 도(道)의 체(體)를 말한 것이요, 화(和)란 것은 정(情)의 정(正)과 도(道)의 용(用)을 말한 것이니 내 앞 말의 결함은 바로 중화(中和)를 체용(體用)이라 했으니 이는 모나고 둥근 것이 하늘과 땅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근자에 이미 이 뜻으로 전에 말한 것을 고쳐 정의(定義)하였고 그대가 서찰에서 의문을 제기한 그런 뜻은 아니다. 그대가 인용한 ������맹자������의 지각(知覺) 두 글자는 상채(上蔡)가 말하는 지각과 뜻이 다른 것이다.
대개 맹자가 말하는 지각은 이일을 알고 이 이치를 깨달음을 이름이니 곧 배움이 이르러 앎이 지극한 것이요 상채가 말한 지각은 아프고 가려움을 느끼고 묻고 대답할 줄 앎을 이름이니 곧 마음의 용(用)이요 앎의 단서이다. 맹자가 말한 지각과 상채가 말한 지각이 다르기는 하나 그 대체는 모두 지(智)의 일이거늘 그대는 인(仁)으로써 말하니 모순이 많고 부합이 적은 까닭이다.
분교험박(憤驕險薄)하다는 말은 어찌 감히 상채(上蔡)를 가리켜 한 말이겠는가. 다만 학자가 인(仁)의 명의(名義)를 알지 못하고 또 존양(存養)의 바탕을 알지 못하면서 눈썹을 치켜 뜨고 눈동자에 힘을 주어 지(知)를 논하고 각(覺)을 설하는 자가반드시 이에 이를 것임을 말한 것이다.
대개 애(愛)를 인(仁)이라 하면 안되지만 그러나 애(愛)의 이(理)는 이른 바 인(仁)의 체(體)인 것이다. 천지 말물이 나와 한 몸통이니 진실로 천지 만물을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그러나 사랑의 이치는 천지만물을 사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네가지가 모두 꼭 같이 성(性)의 덕(德)이니 자연적으로 본래부터 있는 개념이요 천지 만물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當爲) 때문에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다만 인(仁)은 사람의 이(理)요 만물을 생성하는 도(道)이니 또 인(仁)은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를 모두 포함할 수 있으니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이다.
대개 보내온 서찰에서 이를 논한 것이 모두 초연(超然)하여 종래에 보고 듣은 것과는 사뭇 다르니 이것은 그대의 치지(致知)가족히 자세하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세함을 추구함이 너무 지나쳐서 도리어 천착(穿鑿)에 빠진 것같다.
大抵天下事物之理亭當均平하야 無無對者하니 唯道爲無對나 然以形而上下論之면 則亦未嘗不有對也라 盖所謂對者는 或以左右 或以上下 或以前後 或以多寡 或以類而對 或以反而對하야 反復推之天地之間이면 眞無一物兀然無對而孤立者니 此程子所以中夜以思에 不覺手舞而足蹈也라 究觀來敎에 條目固多而其意常主於別有一物之無對라 故凡以左右而對者는 則扶起其一邊19)하고 以前後而對者는 則截去其一段20)하야 旣彊加其所主者以無對之貴名하고 而於其所賤而列於有對者에 又不免別立一位以配之21)하니 於是左右偏枯首尾斷絶23)하고 位置重疊條理交倂23)하야 凡天下之理勢一切畸零贅剩24)側峻尖斜하야 更無齊整平正之處하니 凡此所論25)陰陽26)動靜27)善惡仁義28)等說이 皆此一模29)中脫出也라 常安排此箇意思規模하야 橫在胸中이면 竊恐終不能到得中正和樂廣大公平底地位하노니 此熹所以有所知不精害於涵養之說也라 若必欲守此ㄴ댄 而但少加涵養之功하야 別爲一事以輔之於外 以是爲足以合內外之道는 則非熹之所敢知矣 要須脫然頓舍舊習하고 而虛心平氣以徐觀義理之所安이면 則庶乎其可也니라 仰恃知照하야 不鄙其愚引與商論以求至當之歸하니 敢不罄竭所懷以求博約가 盖天下公理非一家之私니 儻不有益於執事之高明이면 則必有警乎熹之淺陋矣리라
대저 천하 사물의 이치가 정당(亭當) 균평(均平)하여 상대가 없는 것이 없고 오직 도(道) 만이 상대가 없다 할 수 있으나 그러나 형이상하(形而上下)로 나누어 논할 것 같으면 형이상(形而上)의도가 있고 형이하(形而下)의 도(道)가 있어 미상불 상대가 있는 것이다. 이른 바 상대라는 것은 혹은 좌우(左右)로써 혹은 상하로써 혹은 전후(前後)로써 혹은 다과(多寡)로써 혹은 같은 것으로써 혹은 다른 것으로써 짝이 되어 이를 반복해서 미루어 나가면 천지간에 참으로 한 물건도 오뚝이 짝없이 고립(孤立)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정자가 밤중에 생각함에 절로 춤이 나오는 까닭이다.
그애의 서찰을 자세히 살펴보니 조목(條目)이 참으로 많으나 그 의미는 항상 별도로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주관되니 이 까닭으로 좌우로 상대가 되는 음양같은 것은 그 한쪽만 일으켜 세우고 전후로 상대가 되는 선악같은 것은 그 한쪽을 잘라 없애버려 무리하게 그 주관하는 것을 보태어 절대라는 귀한 이름을 부쳐주고, 또 천하게 여길 필요가 있어 상대적인 것에 배열하고자 할 때는 별도로 한 자리를 만들어서 짝을 지어주니 이에 좌우 중 한쪽이 말라버리고, 머리나 꼬리 중 한쪽이 잘려버리고, 위치가 중첩되고 조리가 엇갈려, 천하의 이세(理勢)가 모두 한쪽이 떨어져 나가 없거나 사마귀처럼 필요없이 툭 불거져 나온 모양이 되고, 한쪽이 가팔라 뾰족하고 비탈진 모양이되어, 다시 가지런하고 반듯한 곳이 없으니 그대가 논한 음양(陰陽) 동정(動靜) 선악(善惡) 인의(仁義) 등의 설이 모두 이러한 틀에서 찍혀 나온 것같다. 항상 이러한 모양의 의사(意思)와 법규(法規)를 마음 속에 억지로 지니고 있으니 아마 끝내 중정(中正) 화락(和樂) 광대(廣大) 공평(公平)한 지위에 도달하지 못할 것같으니 이것이 내가
“아는 바가 자세치 못하여 함양 공부에 해를 끼친다.”
는 말을 한 까닭이다. 그대가 만약 기필코 성선무재지설(性善無對之說)을 고수(固守)하여 다만 조금의 함양공부를 하고 별도로 한가지일을 외부에 보충하여 이로써 내외(內外)의 도에 합치하기에 족하다고 생각하고자 한다면 이는 도저히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요컨대 기필코 구습을 깨끗이 버리고 마음을 비워 기운을 평정히하여 서서히 의리(義理)의 편안한 곳을 보면 거의 정도(正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우러러 그대의 서찰을 봄에 나의 어리석음을 업신여기지 않고 이끌어 함께 상론(商論)하여 지당(至當)한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니 어찌 감히 나의 생각을 다 말하여 그대의 박약(博約)을 구하지 않겠는가. 대개 천하의 공리(公理)는 일가의 사물(私物)이 아니니 집사(執事)의 고명(高明)에 도움이 있거나 나의 천루(淺陋)함에 깨우침이 있을 것이다.
【註解】
1)偏擧其一(편거기일) : 상문 양구 즉 호위기근(互爲其根)과 분음분양(分陰分陽) 중 분음분양만 들다.
2) 不當其所(부당기소) : 제 1권을 음정(陰靜)으로 제 2권을 양동(陽動)으로 함을 가리킴. 좌우로 음양을 나누지 않고 상하로 나눈 것을 가리킴. 음을 먼저하고 양을 뒤로하여 생양 생음의 차례를 잃음을 말함. 이상 세가지 견해가 있음.
3) 專一之陰(전일지음) : 양이 없는 전일한 음.
4) 兼體之陽(겸체지양) : 양체로서 음체를 겸함.
5) 情亦達道(정역달도) : 선생이 「지언의의(知言疑義)」에서 “성은 천하의 대본이요 정은 천하의 달도”라 하니 광중이 이를 들어 이론을 제기하기 때문에 선생이 이같이 답함.
6) 少曲折(소곡절) : 정(情)이 발하여 중절(中節)해야만 달도(達道)라 할 수 있는데 지금 바로 정이 달도라 했기 때문에 조금 결함이 있다함.
7) 心主性情(심주성정) : 「지언의의(知言疑義)」중의 말.
8) 不必言心(불필언심) : 광중(廣仲)이 심(心)을 이발(已發)로 보았기 때문에 선생이 정(情)을 달도(達道)라고 하니 심(心)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함.
9) 不須贊歎(불수찬탄) : 호씨(胡氏)가 “맹자가 성선(性善)을 말하는 것은 다만 칭탄의 말이다.” 라고 했기 때문에 선생이 이렇게 말함.
10) 他骨子(타골자) :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함.
11) 句中少曲折(구중소곡절) : 「지언의의(知言疑義)」 중에 설한 중화체용(中和體用)이 다소 결함이 있음을 말함.
12) 方圓爲天地(방원위천지) : 중화(中和)로써 성도(性道)의 체용(體用)을 말하는 것은 방원(方圓)으로써 천지의 형상을 말하는 것과 같다. 성도(性道)와 천지는 실상이고 중화(中和)와 방원은 허상이다. 지금 성도(性道)를 말하지 않고 바로 중화(中和)로써 체용(體用)이라 하니 곧 천지를 말하지 않고 바로 방원으로써 천지라 하는 것과 같다.
13) 知覺…不同(지각…부동) : 광중(廣仲)이 맹자의 선지건각(先知先覺)을 인용하여 말한 것같다.
14) 孟子之言知覺(맹자지언지각) : 선지(先知)로 하여금 후각(後覺)을 깨닫게 한다는 말.
15) 識痛痒(식통양) : 신체에 아프고 가려움이 있으면 느끼지 못함이 없으니 이는 우리 지각작용의 신비한 것이다. 이는 하등의 사람과 심지어 금수(禽獸)도 가능한 일이다.
16) 二者不同(이자부동) : 맹자의 말로 효지(曉知)를 말하고 상채의 말은 각지(覺知)의 뜻이다.
17) 以愛名仁(이애명인) : 애를 인이라 한다면 이는 용(用)을 득고 체를 버리는 것이다.
18) 愛之理則…有也(애지리즉…유야) : 애지리(愛之理)는 천연 본유(天然本有)의 이(理)이니 어떤 목적이나 당위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곧 천지 만물이 일체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애지리(愛之理)가 있는 것이 아니다.
19) 扶起其一邊(부기기일변) : 음양(陰陽)이 좌우로 상대적인 것이거늘 지금 제일도(第一圖)로써 음정(陰靜)이라하여 먼저 양이 없는 음이 있다 하니 이는 그 일변을 부추켜 세운 것이다.
20) 截去其一段(절거기일단) : 선악(善惡)이 선후로 상대적인 것이거늘 지금 악과 상대가 아닌 절대적인 선이 있다고 하니 이는 그 일단을 잘라 없앤 것이다.
21) 旣彊…配之(기강…배지) : 선악이 본래 상대적인 것인데 선을 무대(無對)라 했으니 천하게 여기는 악이 상대가 없이 홀로 설 수 없기 때문에 부득불 무대(無對)한 선의 아래에 유대(有對)한 선의 자리를 만들어서 악과 짝을 맞추는 것이란 말.
22) 左右…斷絶(좌우…단절) : 좌우 상대에 그 일변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좌우편고(左右偏枯)요 전후 상대에 그 일단을 잘라 없애는 것은 수미단절(首尾斷絶)이다.
23) 位置…交倂(위치…교병) : 이미 무대자(無對者)가 있었는데 다시 유대자(有對者)가 나타나니 무대 유대가 번갈아 나타나 나란히 서니 이것이 위치 조리가 중첩하고 서로 다투는 까닭이다.
24) 畸零贅剩(기령췌잉) : 기령은 홀수, 췌잉은 남아도는 것이니 무대(無對)가 곧 기령이요 별도로 한 자리를 세우는 것이 곧 췌잉이다.
25) 所論(소론) : 광중소론.
26) 陰陽(음양) : 먼저 전일한 음이 있고 뒤에 음을 겸체한 양이 있다.
27) 動靜(동정) : 동과 상대가 아닌 정이 있고 정과 상대가 아닌 정이 있다 함.
28) 仁義(인의) : 인은 의와 상대로 말할 수 없다 함.
29) 一模(일모) : 모(模)는 기물을 주조하는 틀. 광중이 논하는 음양 동정 등이 모두 한 뜻인 것이 모두 한 틀에서 나온 기물같다는 말.
答吳誨叔1)
熹伏承示及先知後行之說이 及復詳明引據精密하니 警發多矣로대 所未能無疑者를 請得而細論之리라夫泛論知行之理而就一事之中하야 以觀之면 則知之爲先行之爲後는 無可疑者나 然合夫知之淺深行之大小而言則非有以先成乎其小2)면 亦將何以馴致乎其大者3)哉아 盖古人之敎는 自其孩幼로 而敎之以孝悌誠敬之實하고 及其少長에 而博之以詩書禮樂之文하니 皆所以使之卽夫一事一物之間에 各有以知其義理之所在하야 而致涵養踐履之功也오 及其十五成童學於大學에 則其灑掃應對之間과 禮堊射御之際所以涵養踐履之者는 略已小成矣라 於是不離乎此4)하야 而敎之以格物하야 以致其知焉하니 致知云者는 因其所已知5)者推而致之하야 以及其所未知者而極其至6)也니 是必至於擧天地萬物之理하야 而一以貫之하야 然後爲知之至니 而所謂誠意正心脩身齊家治國平天下者는 至是而無所不盡其道焉이라 今就其一事之中而論之면 則先知後行이 因各有其序矣어니와 誠欲因夫小學之成하야 以進乎大學之始則非涵養履踐之有素면 亦豈能居然以夫雜亂紛糾之心으로 而格物以致其知哉아
답오회숙(答吳晦叔)
서찰에서 보여준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설은 아주 자세하고 근거가 정밀하니 나를 깨우치는 바가 크다. 의문이 없지 않은 것을 자세히 논해보고자 한다. 대저 일반적으로 지행(知行)의이론을 논하여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볼 것 같으면 지(知)가 먼저이고 행(行)이 뒤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지(知)의 천심(淺深)과 행(行)의 대소(大小)를 합하여 말할 것같으면 먼저 작은 것을 이루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큰 것을 이루겠는가.
대개 옛 사람의 교육이 어린 아이 때에는 효제성경(孝悌誠敬)의 실(實)로써 가르치고, 조금 자라서는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글로써 식견을 넓혀주니 이는 일상 생활에서 의리(義理)의 소재를 알아 덕성 함양과 실천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이다. 15살이 되어 ������대학(大學)������을 배움에 이르러서는 쇄소응대(灑掃應對)와 예악사어(禮樂射御) 등에는 함양천리(涵養踐履)의 방법이 조금 이루어져 있으니, 이를 바탕으로 격물(格物)로써 가르쳐 치지(致知)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치지(致知)라 하는 것은 이미 안 것을 바탕으로하여 이를 미루어나가 그 알지 못하는 것에 다달아 그 지극한 데까지 도달하는 것이니, 이렇게하면 반드시 ‘천지 만물의 모든 이치를 하나로 꿰뚫어 지(知)의 지극한 상태’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 바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란 것도 각각 이러한 상태에까지이르러야 그 도(道)를 다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 가지 일로써 논할 것 같으면 선지후행(先知後行)이 참으로 각각 그 차례가 있을 것이로되 진실로 ������소학(小學)������ 공부의 성과를 바탕으로하여 ������대학(大學)������ 공부의시작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곧 함양실천(涵養實踐)의 바탕이 아니면 어찌 갑자기 잡란분규(雜亂紛糾)한 마음으로써 격물(格物)하여 치지(致知)에 이를 수 있겠는가.
且易之所謂忠信脩辭7)者는 聖學之實事는 貫始終8)而言者也니 以其淺而小者言之면 則自其常視毋誑9)男唯女兪10)之時로 固已知而能之11)矣라 知至至之는 則由行此而又知其所至也라 此知之深者也오 知終終之12)는 則由知至而又進以終之也니 此行之大者也라 故大學之書는 雖以格物致知로 爲用力之始나 然非謂初不涵養履踐而直從事於此也오 又非謂物未格知未至則意可以不誠心可以不正身可以不脩家可以不齊13)也라 但以爲必知之至然後所以治己治人者는 始有以盡其道耳라 若曰必俟如至而後可行이면 則夫事親從兄承上接下는 乃人生之所不能一日廢者니 豈可謂吾知未至라야 而暫輟以俟其至而後에 行哉아 抑聖賢所謂知者는 雖有淺深이나 然不過如前所論二端14)而已니 但至於廓然貫通則內外精粗는 自無二致오 非如來敎及前後所諭觀過知仁者는 乃於方寸之間에 設爲機械15)하야 欲因觀彼而反識乎此也니라
또 ������주역(周易)������에서 이른 바 충신수사(忠信修辭)는 성학(聖學)의 실질이요 시종(始終)을 다 말한 것이다. 그 얕고 작은 것을 말할 것같으면 상시무광(常視無狂)과 남유여유(男唯女兪)를 배울 때부터 이미 알아 행할 수 있는 것이요, 지선(至善)을 알아 지선(至善)에 그칠 줄 아는 것은 이를 행함을 말미암아 또 그 지선(至善)에 그칠 바를 아는 것이니 이는 지(知)의깊은 지지(知至)를 말미암아 또 나아가 마치는 것이니 이것은 행(行)의 큰 것이다. 그래서 ������대학(大學)������의 글이비록 격물(格物)․치지(致知)로써 용력(用力)의 처음을 삼으나, 그러나 처음에 함양천리(涵養踐履)를 하지 아니하고 곧 바로 격물(格物)․치지(致知)를 하라는 것이 아니요, 또 물(物)이 격(格)해지지 아니하고 지(知)가 치(致)해지지 아니하고 지(知)가 치(致)해지지 아니하면 뜻이 성실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바르지 아니하며 몸이 닦이지 아니하며 집이 다스려지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앎이 지극한 연후에야 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 비로소 그 도(道)를 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뿐이다.
만약 기필코 앎이 지극함을 기다린 후에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대개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며 윗 사람을 섬기고 아랫 사람을 대접하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하루도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니, 어찌
“내 앎이 아직 지극하지않았으니 잠시 이 일들을 그만두고 앎이 지극하기를 기다린 뒤에 이를 행하겠다.”
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성현(聖賢)이 이른 바 앎이란 것이 비록 얕고 깊음이 있으나 앞에서 논한 바대로 ������소학������과 ������대학������ 공부에 지나지 않으니, 다만 확연관통(廓然貫通)한 이치에 도달하면 내외정조(內外精粗)가 두 이치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서찰과 전후에서 논한 ‘그 사람의 과오를 보면 그 사람의 인(仁)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미리 마음 속에 계책을 세워 그 과오를 보고서 그 인(仁)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註解】
1) 吳晦叔(오회숙) : 이름은 욱(昱), 건양인. 선생보다 한 살 위임. 호오봉(胡오봉(五峯)의 제자. 처사(處士)로 생을 마침. 선생이 행장과 제문을 짓다.
2) 先成乎其小(선성호기소) : ������소학������ 공부.
3) 致其乎大者(치기호대자) : ������대학������ 공부.
4) 不離乎此(불리호차) : 차는 소학지사.
5) 所已知(소이지) : 앎의 얕은 것.
6) 極其知(극기지) : 앎의 깊은 것.
7) 忠信修辭(충신수사) : ������역������ 건괘 문언 구삼(九三) 참조.
8) 貫始終(관시종) : 지행(知行)의 대소천심(大小淺深).
9) 常視無狂(상시무광) : 「곡례」에 유자(幼子)는 상시무광이라 하니 이는 충신(忠信)������의 처음이다.
10) 男唯女兪(남유여유) : 「내칙(內則)」에 남유여유라 하니 이는 수사(修辭)의 처음이다.
11) 固已知而能之(고이지이능지) : 앎의 얕은 것이요 함함의 작은 것이다.
12) 知至…終之(지지…종지) : ������역(易)������ 건문언구삼(乾文言九三程傳)에 지지지지(知至至之)는 치지(致知)니 시조리자(始條理者)요 지종종지(知終終之)는 역행(力行)이니 종조리자(終條理者)라 함.
13) 又非…불齊(우비…불제) : 지(知)가 비록 지극하지 않다 하더라도 행(行)에 소홀해서는 안된다는 말.
14) 二端(이단) : ������소학������과 ������대학������의 지(知)의 천심(淺深).
15) 機械(기계) : 임기응변의 책략.
答李伯諫
來書에 謂伊川先生所云內外不備1)者爲不然2)하니 蓋無有能直內而不能方外者3)라하니 此論이 甚當이나 據此가 正是熹所疑處니 若使釋氏로 果能敬以直內면 則便能義以方外니 便須有父子有君臣하야 三綱五常을 闕一不可라 今曰能直內矣한댄 而其所以方外者는 果安在乎 又豈數者之外에 別有所謂義乎아 以此而觀伊川之語면 可謂失之恕4)矣나 然其意不然5)이라 特老兄未之察耳로다 所謂有直內者는 亦謂其有心地一段功夫耳라 但其用功이 却有不同處라 故其發有差어늘 他却全不管著하니 此6)所以無方外之一節也라 固是有根株7)면 則必有枝葉8)이나 然五穀之根株는 則生五穀之枝葉하야 華實而可食하고 稊稗之根株는 則生稊稗之枝葉華實而不可食하니 此則不同耳라 參朮9)이 以根株而愈疾하고 鉤吻10)以根株而殺人하니 其所以殺人者는 豈在根株之外而致其毒哉아 故明道先生又云하대 釋氏唯務上達而無下學하니 然則其上達處는 豈有是也11)리오 元不相連屬12)하니 但有間斷이면 非道也라하니 此可以見內外不備之意矣라 然來書之云이 却是從儒向佛이라 故猶藉先生之言以爲重이어니와 若眞胡種族은 則亦不肯招認此語矣라 如何如何오
답이백간(答李伯諫)
보내 온 서찰에서 말하기를,
“이천(伊川) 선생이 석씨(釋氏)는 내외(內外)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그렇지 않으니 대개 직내(直內)하면서 방외(方外)하지 않음이 없다.”
고 하니 이 말이 아주 마땅한 말이나 또한 내가 의심하는 바가 없지 않다. 만약 석씨가 과연 경(敬)으로써 직내(直內)할 수 잇다면 곧 의(義)로써 방외(方外)할 수있어 곧 부자(父子)․군신(君臣)의삼강오상(三綱五常)을 다 갖추어 가질 것이니, 지금 석씨가 직내(直內)하다 하니 그 방외(方外)가 되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또 어찌 삼강오상(三綱五常) 외에 별도로 의(義)라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석씨에 직내(直內)가 있다고 한 이천(伊川)의 말이 오히려 지나치게 관대한 것같다. 그러나 이천(伊川)의 뜻은 그렇지 않으니 다만 노형이 이를 살피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천(伊川)이 석씨에 직내(直內)가 있다고 한 것은 석씨에 일단의 마음 공부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 유석(儒釋)이 같지 않은 곳이 있기 때문에 그 시발(始發)에 차이가 있음에도 석씨는 전혀 이를 살피지 못하니 이것이 석씨에 방외(方外) 일절(一節)이 없는 까닭이다. 노형의 말대로 진실로 뿌리와 줄기가 있으면 반드시 가지와 잎이 있으나 그러나 오곡(五穀)의 뿌리는 오곡의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생산하여 우리가 먹을 수 있고 피의 뿌리와 줄기는 피의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생산하여 이를 우리가 먹을 수 없으니 이것이 같지 않은 것이다. 참출(參朮)은 그 뿌리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으나 구문(鉤吻)은 그 뿌리로써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니 그 사람을 죽이는 독이 어찌 뿌리밖에 있겠는가. 고로 명도(明道) 선생이 또 말하기를,
“석씨는 오직 상달(上達)에 힘쓰고 하학(下學)이 없으니 그 상달하는 곳이 어찌 옳겠으며 처음부터 석씨는 상하가 이어지지 않으니 상하의 사이가 끊어지면 이는 참다운 도(道)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고 하니, 이 말에서 내외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서찰에서 말한 것은 유(儒)를 따르면서 불(佛)을 바라본 것이니 이 때문에 오히려 이천(伊川)의 말에 의거해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니 만약 진실로 불도佛徒)라면 아마 이천(伊川)의 이 말을 기꺼이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註解】
1)內外不備(내외불비) : 이천(伊川)이 “석씨(釋氏)가 경이직내(敬以直內)는 있어도 의이방외(義以方外)는 없다.” 고 함.
2) 爲不然(위불연) : 백련(伯/)이 이천의 설을 그렇지 않다고 함.
3) 方外者(방외자) : 내서(來書)의 뜻이 여기까지 이름.
4) 失之恕(실질서) : 석씨가 내외 모두 갖추지 못했거늘 이천이 경이직내(敬以直內)는 있다고 했기 때문.
5) 其意不然(기의불연) : 직내(直內)면 곧 방외(方外)이다. 석씨는 윤상(倫常)이 적멸하니 이는 방외가 아니다. 방외가 아니니 곧 직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자가 직내라 한 것은 너무 관대하다. 그러나 다만 일단의 마음 공부가 있기 때문에 맢하는 것이지 참으로 직내라고 여긴 것은 아니라는 말.
6) 全不管著此(전불관저차) : 차(此)는 용공부동(用功不同)과 기발유차(其發有/此)를 가리킨다. 대개 성인은 천리(天理)에 근본을 두어 고요할 때 만리(萬理)가 찬연하기 때문에 움직일 때 모든 절도가 어긋남이 없고, 석씨는 마음에 근본을 두어 고요할 때 텅 비어 일법(一法)이 없기 때문에 움직일 때 전도망행(顚倒妄行)하다. 이것이 유석(儒釋) 부동한 까닭이다.
7) 根株(근【註解】 : 경이직내(敬以直內).
8) 枝葉華實(지엽화실) : 의이방외(義以方外).
9) 參朮(참출) : 약초. 삽주.
10) 鉤吻(구문) : 독초.
11) 豈有是也(기유시야) : 옳지 않다는 말.
12) 元不相連屬(원불상연속) : 오유(吾儒)는 하학인사(下學人事)하여 곧 상달천리(上達天理)하니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연속되지만 석씨는 천리와 인사가 연속되지 아니하니 하학(下學)이 없기 때문이다.
答林擇之
太山은 爲高矣나 然太山頂上은 已不屬太山1)이라하니 此喩道體之無窮이라 而事業雖大나 終有限量爾니 故下文云云2)이 意可見也오 又旣得後須放開3)라하니 此亦非謂須要放開라 但謂旣有所得 自然意思廣大規模開廓이니 若未能如此면 便是未有所得이오 只是守爾라 盖以放開與否로 爲得與未得之驗하니 若謂有意須放敎開면 則大害事4)矣라 上蔡論周恭叔이 放開忒早라하니 此語는 亦有病也라 鳶飛魚躍에 察見天理5)正與中庸本文察字로 異指6)하니 便入堯舜氣像7)이 亦只是見得天理自然不煩思勉處爾라 若實欲到此地位更有多少功夫하니 而可易其言也라 疑上蔡此語亦傷快也로다 近來玩索 漸見聖門進趣實地하대 但若惰廢하야 不能如人意8)爾라
답임택지(答林擇之)
“태산이 높기는 하나 태산 꼭대기에 다시 태산을 붙일 수 없다.”
는 정자의 말은 도체(道體)가 무궁하여 사업(事業)이 비록 위대하나 한계가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그래서 하문(下文)에 이른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터득한 뒤에 반드시 방개(放開)한다.”
고 한 정자의 말은 방개하기를 꼭 예기(預期)함을 말한 것이 아니고, 다만 터득한 바가 있으면 저절로 의사(意思)가 광대(廣大)해지고 규모(規模)가 넓게 열려지니 만약 의사가 광대하고 규모가 개확(開廓)하지 않으면 이는 얻은 바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작은 것을 지킬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방개(放開) 여부로써 터득함과 터득하지 못함의 징험을 삼으니, 만약 꼭 방개(放開)하기를 의도적으로 바라면 이는 조장(助長)의 병통이 있으니 크게 일을 해칠 것이다.
상채(上蔡)가 말한
“주공숙(周恭叔)이 방개(放開)가 너무 이르다.”
는 말은 또한 잘못된 말 같다.
“소리개가 하늘을 나느로 물고기가 엿못에서 뜀을 봄에 천리(天理)를 뚜렷이 볼 수 있다.”
는 말 가운데의 찰(察)의 뜻은 ������중용(中庸)������ 본문의 찰(察)의 뜻과 그 의미가 다르다. 또 상채가 말한
“금방 요순(堯舜)의 기상에 들어간다.”
는 말은 천리자연(天理自然)을 앎에 생각하고 힘씀을 번거로이 하지 않음이 있다는 의미이고, 만약 실제로 이 지위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니 어떻게 이같이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상채의 이 말은 너무 쉽게 말한 것 같다.
근래에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조금씩 그 나아가는 실지(實地)를 볼 수 있는 것같기도 하나 공부가 게을러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이 괴로울 뿐이다.
【註解】
1) 太山爲…屬太山(태산위…속태산) : 정자의 말.
2) 下文云云(하문운운) : 요순의 사업은 태허(太虛) 중의 한 범 구름과 같다.
3) 旣得後須放開(기득후수방개) : 명도(明道)가 말하기를, “천리(天理)를 터득하고나면 반드시 의사가 광대하고 규모가 개확(開廓)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다만 작은 것을 지키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
4) 有意…害事(유의…해사) : 조장(助長)의 병통이 있기 때문.
5) 鳶飛…天理(연비…천리) : 상채의 말.
6) 察字異指(찰자이지) : 이 글의 찰(察)은 사람이 천리를 살펴 본다는 뜻이고 ������중용������ 본문의 찰(察)은 천리가 밝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7) 便入堯舜氣像(변입요순기상) : 상채의 말. 상채가 말하기를 “연비어약(鳶飛魚躍)은 자사가 시사하는 바가 매우 긴요하다. 만약 이처럼 천리를 깨닫는다면 금방 요순의 기상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함.
8) 人意(인의) : 인(人)은 선생 자신을 말함.
答蔡季通1)
琴中旋宮2)一事는 正爲初絃이 有緊慢3)하야 而衆絃隨之耳라 若一定而不可이면 則旋宮之法을 何所施耶아 但恐午未以後4)聲太高急而小絃이 斷絶이라 故疑所謂五降5)者乃謂蕤賓以下는 不可爲宮耳니 此說이 固未必然이나 然與今所謂一定而不可易과 古所謂隨十二月爲宮者로 似得中制6)라 試更推之如何오 復以見敎也하라 參同之說을 子細推尋하니 見得一息之間에 便有晦朔弦望7)이니 上弦者는 氣之方息自上而下也오 下弦者는 氣之方消自下而上也오 望者는 氣之盈也니 日沈于下而月圓于上也로 晦朔之間者는 日月之合乎上이니 所謂擧水以滅火金來歸性初8)之類是也라 眼中見得了了如此하대 但無下手處耳로다 自從別後로 此等事更無商量處하니 劇令人憒憒라 今此病中에 又百事不敢思量하니 未知異時賢者之歸에 得復相見論此否耳로다
답채계통(答蔡季通)
거문고의 선구업(旋宮法)은 초현(初絃)의 긴만(緊慢)에 따라 중현(衆絃)을 이에 맞춰 긴만하게 하는 것을 말하니, 만약 그 긴만을 일정하게하여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선궁의 법을 응용하겠는가. 다만 오미(午未) 뒤로는 소리가 너무 높아 작은 현은 끊어지려 할 것이다. 이른 바 오강지설(五降之說)은 곧 생빈(생/賓) 이하는 궁(宮)이 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오강지설이 꼭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 이른 바
“일정하여 바꿀 수 없다.”
는 설과 옛날의이른 바
“열 두달을 따라 궁(宮)이 된다.”
는 설의 중제(中制)가 되는 것같으니 다시 추구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시 가르쳐 주기 바란다.
삼동지설(參同之說)을 자세히 추구해보니 일식지간(一息之間)에 회삭현망(晦朔弦望)이 있으니 상현자는 기(氣)가 막 자람에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요, 하현자는 기(氣)가 막 소멸함에 아래로부터 위로 올가가는 것이고, 망(望)이란 것은 기(氣)가 가득 찬 거이니, 해가 아래로 가라앉음에 달이 위에서 둥근 것이며, 회삭지간(晦朔之間)이란 것은 해와 달이 위에서 합하는 것이니 이른 바 물을 들어 불을 끔에 금(金)이 성초(性初)에 올라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눈으로 글을 볼 때에는 이와 같은 이치를 밝게 알 수 있으나 다만 구체적으로 파고들 착수처를 알지 못하겠다. 그대와 헤어진 뒤로는 이같은 문제를 상량해 의논할 곳이 없어 더욱 심란하다. 지금 또 병중이라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할 수 없으니 훗일 그대가 돌아오면 서로 만나서 이를 다시 논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註解】
1) 蔡季痛(채계통) : 건양인(建陽人) 여덟 살 때 능히 시를 지었고 하루에 수천 말을 외웠다. 자라서 건양 서산에 살 때는 주림을 참고 독서하였고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천문지리에 밝고 율력 병법 고문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선생이 이 사람은 나의 노우(老友)이지 제자의 열에 둘 수 없다 하였다. 학자들이 서산선생이라 추존했다. 저서에 ������대연상설(大衍詳說)������ ������율려신서(律呂新書)������ ������연악원년(燕樂原辨)������ ������황극경세(皇極經世)������ 등 다수 있음.
2) 旋宮(선궁) : 오성(五聲) 육율(六律) 십이관(十二管)이 돌아가며 서로 궁(宮)이 됨을 말함.
3) 緊慢(긴만) : 초현이 궁이 되면 모든 현이 차례로 상(商)․각(角)․」징(徵)․우(羽)가 되고 또는 초현이 우(羽)가 되면 다음 현은 궁(宮)이 되니 이것이 선궁지법이다.
4) 오미이후(午未以後) : 옛 사람이 탄금(彈琴)할 때에 달에 따라 현을 맞추었으니 11월은 황종(黃鍾)에 맞추고 12월은 대려(大呂)에 맞추고 정월은 대/주(大簇)에 맞추고 2월은 협종(夾鍾)에 맞추었다. 다만 이 이후는 소리가 더욱 긴장되어 10월을 응종(應鍾)에 맞추면 현이 너무 팽팽하여 끊어질 염려가 있다. 곧 이것이 ‘소리가 너무 고급(高急)하여 소현(小絃)이 끊어짐’의 뜻이다.
5) 五降(오강) : 황종은 구촌 대려는 팔촌남짓 대주는 팔촌 협종은 칠촌남짓 고선은 칠촌이니 이 오율 외에 생빈(생/賓) 이하는 육촌 오촌 사촌이니 궁(宮)이 될 수 없다는 말.
6) 中制(중제) : 오강지설(五降之說)이 지금 일정하여 바꿀 수 없다는 설과 옛날의 열두달을 따라 궁(宮)이 된다는 설을 중제한 설이라는 말임.
7) 參同…弦望(삼동…현망) : 삼동계(參同契)에 달의 회삭현망(晦朔弦望)으로써 괘체(卦體)를 형상하는데 달의 출몰의 방위로써 배열함. 예를 들면 조 3일은 달이서방 경위(庚位)에서 뜨고 상이 진(震)이니 경어진(庚於震)이라 하고 초 8일은 달이 남방 정위(丁位)에서 뜨고 상이 태(兌)이니 정어태(丁於兌)이다. 이른바 납갑법(納甲法)이니 수양가(修養家)가 이로써 연단절도(鍊丹節度)로 삼았다. 삼동계(參同契)라 이름한 것은 ������주역(周易)������과 황노(黃老)와 노화(爐火)의 삼가(三家)가 같은 이치로 대도(大道)에 묘계(妙契)한다는 뜻이다.
8) 擧水…性初(거수…성초) : 금수화(金水火)는 모두 가정(假定)의 말이다. 일화(日火)는 외경(外景)이고 금수(金水)는 내경(內景)이다. 도가(道家)에서 말하기를 일화(日火)는 밖에서 양광(揚光)하기 때문에 일식(日食) 화멸(火滅)이 있고 금수(金水)는 안에 잠광(潛光)하기 때문에 무궁하다. 이로써 양생(養生)의 법을 삼으니 수시반관(收視反觀) 잠형불요(潛形不曜)가 이것이다.
答游誠之
示喩讀書玩理次第 甚慰所懷라 但嚴立功程하고 寬著意思하면 久之自當有味니 不可求欲速之功也라 所論一用功夫는 尤見其爲己之意어니어와 但心一而已니 所謂覺者는 亦心也라 今以覺求心하고 以覺用心야 紛拏迫切恐其爲病이 不但揠苗而已라 不若日用之間에 以敬爲主하야 而勿忘焉하면 則]自然本心不昧하야 隨物感通 不待致覺而無不覺矣라 故孔子只言克己復禮 而不言致覺用敬하시고 孟子只言操存舍亡 而不言覺存昧亡1)하시고 謝先生이 雖善以覺言仁이나 然亦曰 心有知覺而不言知覺此心也하니 請推此以驗之면 所論得失이 自可見矣니라 若以名義言之면 則仁自是愛之體오 覺自是知之用이니 界分脈絡이 自不相關이라 但仁統四德이라 故人仁則無不覺이라 然謝子之言을 侯子非之하야 曰謂不仁者는 無所知覺은 則可어니와 便以心有知覺爲仁은 則不可라하니 此言亦有味하니 請試思之하라
답유성지(答游誠之)
깨우쳐 일러준 독서완리(讀書玩理)의 차례는 내 마음에 아주 흡족하였다. 다만 공부할 과정을 엄격히 세우고 생각을 너그럽게하여 꾸준히 힘써 나가면 자연히 의미를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니 속히 성과를 거두려 애써서는 안될 것이다. 일용공부(日用功夫)에 대한 그대의 논의(論議)에서 자기수양(自己修養)에 대한 그대의 열정을 십분 읽을 수 있으나 다만 마음은 하나일 뿐이니 이른바 각(覺)이란 것도 역시 마음이거늘 지금 그대는 각(覺)으로써 마음의 본질을 찾으려하고 각(覺)으로써 마음의 운용을 삼으려하니 이렇게되면 각(覺)과 심(心)이 서로 얽혀 치고 때려 아마 그 병통이 벼이삭을 뽑아 올리는 것보다 더 심할 것이니, 일상 생활 속에서 경(敬)으로써 마음을 보존하여 본심이 밝아져 사물을 따라 느끼고 통하여, 각(覺)을 이룸을 기다리지 않고도 깨닫지 않음이 없게 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공자(孔子)께서는 다만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고 치각용경(致覺用敬)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맹자(孟子)는 조존사망(操存舍亡)을 말하고 각존매망(覺存昧亡)을 말하지 않았으며, 사선생(謝先生)이 비록 각(覺)으로써 인(仁)을 말하기를 좋아하나
“마음에 지각이 있다.”
라고 말하고
“마음을 지각한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니, 바라건대 이러한 말들을 미루어서 하나하나 징험해보면 그대 의론의 장단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정의(定義)로써 말할 것같으면 인(仁)은 애(愛)의 체(體)요 각(覺)은 지(知)의 용(用)이니 이렇게 말하면 그 한계와 맥락이 분명하여 서로 얽힘이 없을 것이다. 다만 인(仁)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네 덕목(德目)을 통괄하기 때문에 사람이 어질면 깨달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사선생(謝先生)이 그대를 꾸짖어 하는 말이
“어질지 아니한 자는 지각이 없다라고 한다면 옳다 할 수 있지만, 마음이 지각이 있기 때문에 어질다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
고 하니 이 말이 뜻이 깊으니 생각해보기 바란다.
【註解】
1) 孟子… 昧亡(맹자…매망) : 이 말은 마음이 각(覺)의 상태에서 보존되지 아니하고 매(昧)의 상태에서 없어지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마음을 잡으면 깨닫아서 보존되고 마음을 놓으면 어두워서 없어지니 마음을 얻고 잃는 순간이 잡고 놓음에 있고 깨닫고 어두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答楊子直
熹向以太極爲體하고 動靜爲用하니 其言固有病이라 後已改之曰 太極者本然之妙也오 動靜者所乘之機也라하니 此則庶幾近之니라 來喩疑於體用之云이 甚當하대 但所以疑之之說은 則與熹之所以改之之意로 又若不相似然하니 盖謂太極含動靜이라 則可오 謂太極有動靜이라도 則不可어니와 若謂太極便是動靜은 則是形而上下者不可分 而易有太極之言이 亦贅矣라 其它는 則季通論之已極精詳하니 且當就此虛心求之하면 久當自明이니 不可別生疑慮하야 徒自繳繞也니라 持敬之說은 不必多言이라 但熟味整齊嚴肅 嚴威儼恪 動容貌 整思慮 正衣冠 尊瞻視 此等數語하야 而實加功焉이면 則所謂直內所謂主一이 自然不費安排하야 而身心肅然表裏如一矣리니 豈陸棠之謂哉아 彼其挾詐欺人이 是乃敬之賊耳어늘 今反以敬之名歸之하야 而謂敬之實이 眞有不足行者라하니 豈不誤甚矣哉아
답양자직(答楊子直)
내가 전에 태극(太極)을 체(體)라하고 동정(動靜)을 용(用)이라 하였는데 그 말이 진실로 잘못이 있었다. 뒤에 고쳐서
“태극(太極)은 본연의 오묘한 이치요 동정(動靜)은 태극이 타는 바 계기이다.”
고 하였으니 이 말이 정확한 표현에 가깝다 하겠다. 그대가 서찰에서 태극은 체요 동정은 용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매우 마땅하다 하겠으나 다만 그 의심하는 이론(理論)이 내가 개정한 이론과 서로 같지 않는 것같다.
대개 태극이 동정을 포함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잇어도 태극에 동정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니 만약 태극이 곧 동정이라고 한다면 이는 형이상하(形而上下)를 구분할 수 없게하며 역(易)에 태극이 있다는 말은 필요없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 나머지는 계통(季通)이 아주 상세하게 논하였으니 이를 취하여 마음을 비우고 그 의미를 알려고 노력하면 자연히 의미가 밝혀질 것이요, 별도로 의문을 제기하여 쓸데없이 자신을 얽어매어 괴롭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경(持敬)의 설은 많은 말이 필요없고 다만 정제엄숙(整齊嚴肅) 엄위엄각(嚴危儼恪) 동용모정사려(動容貌整思慮) 정의관존첨시(正衣冠尊瞻視) 등의 말을 자세히 음미하여 실행의 노력을 기울이면, 곧 직내(直內)가 되고 주일(主一)이 되어 억지로 애를 쓰지 않아도 신심이 숙연하여 내외(內外)가 여일(如一)할 것이다. 어찌 육당(陸棠)을 말하겠는가. 그가 거짓으로 사람을 속인 것은 곧 경(敬)의 적(賊)이거늘, 지금 그대는 도리어 육당이 경(敬)을 칭했다 하고, 경(敬)의 실상이 행하기에 부족한 것이라 하니 어찌 잘못이 이같이 심한가.
大抵身心內外初無間隔하니 所謂心者는 固主乎內로대 而凡視聽言動出處語黙之見於外者는 亦卽此心之用而未嘗離也라 今於其空虛不用1)之處라도 則操而存之하고 於其流行運用2)之實이어든 則棄而不省하니 此於心之全體에 雖得其半3)이나 而失其半4)矣오 然其所得之半이 又必待有所安排布置하고 然後能存이라 故存則有揠苗助長之患하고 否則有舍而不芸之失하니 是則其所得之半이 又將不足以自存而失之니 孰若一主於敬하야 而此心卓然 內外動靜之間에 無一毫之隙一息之停哉아 叔京來書尙孰前說5)하고 而來喩之云은 亦似未見內外無間之實이라 故爲此說하야 幷以寄叔京하고 而所以答叔京者로 亦幷寫呈하니 幸詳思之하니 却以見告也하라
대개 심신(心身) 내외(內外)가 처음부터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니 이른 바 마음이란 것이 진실로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어 모든 시청언동(視聽言動)과 출처어묵(出處語黙) 등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곧 마음의 작용이며 또한 잠시도 마음을 떠날 수 없거늘, 저들은 그 공허하고 쓸데없는 곳에는 마음을 붙잡아 두고 일상의 중요한 운용처(運用處)에는 마음을 버리고 살피지 아니하니, 이러한 방법은 마음 전체를 두고 볼 때에 비록 반(半)을 얻었다 해도 그 반(半)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얻엇다는 반쪽도 반드시 안배포치(安排布置)를 한 뒤에라야 보존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마음을 보존한다는 것은 벼이삭을 뽑아 올리는 조장의 폐해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내 밭을 버리고 김매지 않는 과오를 저지러는 것이다. 이는 그 얻었다는 반쪽도 보존하여 유지하지 못하는게 되는 것이니, 전일하게 경(敬)에 정성을 기울여 마음이 우뚝하여 내외동정(內外動靜)의 즈음에 털끝만한 틈과 한순간의 멈춤도 없는 것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낫다고 하겠는가.
숙경(叔京)이 나에게 보낸 서찰을 보니 아직도 잘못된 지경지설(持敬之說)에 집착해있고, 그대 또한 내외(內外)가 하나되는 실상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그대에게 이같이 말하고 숙경에게도 이같은 내용의 서찰을 부쳐 보냈으며, 숙경에게 답한 글도 그대에게 배껴 보내니 자세히 생각해보고 답해주기 바란다.
【註解】
1)空虛不用(공허불용) : 적연(寂然)하여 사물과 접하지 않은 때.
2) 流行運用(유행운용) : 시청언동(視聽言動)과 출처어묵(出處語黙)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
3) 得其半(득기반) : 공허한 곳에 조존(操存)함.
4) 失其半(실기반) : 운용하는 곳에 살피지 아니함.
5) 叔京…前說(숙경…전설) : 숙경이 오로지 내면에 존심(存心)해야 하고 용모와 사기(辭氣)에 지경(持敬)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함.
答廖子晦1)
二先生所論敬字를 須該貫動靜看方得하니 夫方其無事而存主不懈者는 固敬也오 及其應物而酬酢不亂者는 亦敬也라 故曰 毋不敬儼若思라하고 又曰 敬執事敬이라하니 豈必以攝心坐禪으로 而謂之敬哉아 禮樂固必相須나 然所謂樂者는 亦不過謂胸中無事하야 而自和樂耳오 非是著意放開一路하야 而欲其和樂也라 然欲胸中無事ㄴ댄 非敬不能이라 故程子曰 敬則自然和樂이라하시고 而周子亦以爲禮先3)而樂後라하시니 此可見也로다 旣得後須放開2)하니 不然却只是守者4)는 此言旣自得之後에 則自然心與理會하야 不爲禮法所拘而自中節也라 若未能如此하면 則是未有所自得하니 纔方是守禮法之人爾라 亦非謂旣自得之오 又却須放敎開5)也라 克己復禮固非易事나 然顔子用力이 乃在於視聽言動禮與非禮之間하니 未敢便道是6)得其本心而了無一事也라 此其所以先難而後獲歟ㄴ저 今言之甚易하대 而苦其行之之難하니 亦不考諸此7)而已矣라
답요자회(答廖子晦)
이정(二程)이 논한 바 경(敬)은, 반드시 동정(動靜)을 다 통해서 보아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으니, 그 무사(無事)할 때에 경(敬)의 상태를 놓치지 말아야 하지만, 사물에 응하여 행동할 때에도 마음이 가지런하여 흐트러지지 않음이 또한 경(敬)인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무불경(無不敬) 엄약사(嚴若思)라 하고, 또
“생각할 때도 경(敬)을 유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때도 경을 잃지 말아야 한다.”
고 했으니, 어찌 반드시 마음을 틀어잡아 참선에 들어가는 것만이 경이라 하겠는가. 예악(禮樂)이 본래 상수(相須)적인 관계이나 그러나 이른 바 악(樂)이란 것이 마음 속에 아무 일이 없어 저절로 화락한 것을 말함이요, 의식적으로 한 길을 놓아 열어 화락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아무 일이 없게 하고자 하면 경(敬)이 아니면 안된다. 그래서 정자(程子)가
“경(敬)을 실천하면 저절로 화락해진다.”
고 했고, 주자(周子)가 또한
“예(禮)가 먼저이고 악(樂)이 뒤이다.”
고 했으니 이를 알 수 있다. 정자가
“얻은 뒤에는 반드시 활짝 열리니 그렇지 않으면 단지 지키는 사람일 뿐이다.”
고 했으니 이 말은 스스로 이치를 터득하고나면 자연히 마음과 아치가 하나가 되어 예법에 구속되지 않고도 저절로 절도에 맞으며, 만약 이러하지 못하면 이는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는 것이 아니고 겨우 가까스로 예법을 지키는 사람일 뿐이라는 말이요, 이미 이치를 터득하고 나서 또 의식적으로 마음을 놓아 열리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나 안자(顔子)가 힘을 쓴 곳이 곧 시청언동(視聽言動)의 예(禮)․비례(非禮)에 있고,
“본심을 얻어 마음에 아무 힘든 일이 없다.”
고 쉽게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이
“먼저 어려움을 극복하고난 후에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고 가르친 까닭이다. 지금 극기복례를 쉽게 말하면서 행하기가 어렵다고 고심하는 것은 안자(顔子)가 힘쓰는 곳이 시청언동의 예․비례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註解】
1) 廖子晦(요자회) : 남검주(南劒州) 사람. 어려서 석씨(釋氏)를 배웠고 나중에 선생에게 배웠음. 시에 능함.
2) 旣得…放開(기득…방개) : 득은 득도(得道)임. 수(須)는 필(必)의 뜻.
3) 禮先(예선) : 예는 경(敬)의 뜻. ������통서(通書)������에 “예는 이(理)이고 악(樂)은 화(和)이다. 만물이 각각 그 이치를 얻은 뒤에 화(和)가 있다. 그래서 예가 먼저 있고 악이 뒤에 있다.” 고 함.
4) 守者(수자) : 기득(旣得)에서 수자(守者)까지는 역시 정자의 말이다. 수(守)는 하문의 수예법(守禮法)의 수(守)이다.
5) 須放敎開(수방교개) : 기필코 마음을 놓아 개활(開豁)하게 한다는 것이니 조장(助長)의 병통을 말하는 것이다.
6) 便道是(변도시) : 시(是)는 극기복례를 말한다.
7) 考諸此(고저차) : 차(此)는 “안자의 용력처가 시청언동의 예․비례에 있음”을 가리킴.
賢者之見는 所以不能無失者는 正坐以我爲主1)하고 以覺爲性爾라 夫性者는 理而已矣니 乾坤變化에 萬物이 受命하야 雖所稟之在我나 然其理則非有我之所得私也라 所謂反身而誠은 盖謂盡其所得乎己之理하야 則知天下萬物之理初不外此오 非謂盡得我此知覺2)하야 則衆人之知覺은 皆是此物3)也라 性只是理니 不可以聚散言이니 其聚而生散而死者는 氣而已矣라 所謂精神魂魄有知有覺者는 皆氣之所爲也라 故聚則有散則無하니 若理는 則初不爲聚散而有無也라 但有是理則有是氣니 苟氣聚乎此면 則其理亦命乎此耳라 不得以水漚로 比4)也니라 鬼神은 便是精神魂魄이니 程子所謂天地之功用造化之迹이오 張子所謂二氣之良能이니 皆非性之謂也라 故祭祀之禮以類而感以類而應하니 若性은 則又豈有類之可言耶아 然氣之已散者는 旣化而無有矣라 其根於理而日生者는 則固浩然而無窮也니 故上蔡謂我之精神 卽祖考之精神이 盖謂此也라
그대의 견해가 잘못된 까닭은 천리를 떠나 나를 위주로 성(性)을 정의(定義)하고, 각(覺)을 성(性)의 본질이라고 하는데 있는 것같다. 대저 성(性)이란 것은 이(理)일 따름이니, 천지(天地)의 변화에서 만물이 각자의 본체를 품부받는다. 그 품부받은 것이 비록 내 안에 있으나 그 본체의 이(理)는 내가 사사로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 바
“내 몸에 돌이켜 반성하여 진실해진다.”
는 것은,
“하늘로부터 나에게 품부된 이치를 다 알면 천하 만물의 이치가 이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는 것을 말함이요,
“나의 지각을 다 알면 모든 사람의 지각이 모두 나의 지각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성(性)은 곧 이(理)이니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써 말할 수 없고, 그 모이면 생물(生物)이요 흩어지면 사물(死物)인 것은 기(氣)를 두고 하는 말이니,이른 바 정신(精神)․혼백(魂魄)․유지(有知)․유각(有覺)이란 것은 모두 기(氣)의 산물이다. 그래서 모이면 있고 흩어지면 없어지거니와, 이(理)는 본래 모이고 흩어지거나 있고 없는 것이 아니요 다만 이 이(理)가 있으면 이 기(氣)가 있고 만약 기(氣)가 이에 모이면 그에 따른 이(理)가 또한 이에 부여되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성(性)은 물과 거품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귀신(鬼神)이 곧 정신(精神)․혼백(魂魄)이니 정자(程子)가 말한 천지의 공용(工用)․조화(造化)의 자취이고, 장자(張子)가 말한 음양(陰陽)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니, 모두 성(性)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제사(祭祀)의 예를 행할 때에 각각 유(類)를 따라 느끼고 유를 따라 흠향(歆饗)하니, 성(性)은 어찌 유(類)로써 말할 수 있겠는가. 기(氣)가 이미 흩어진 것은 화(化)하여 무(無)가 되나 이(理)에 근원하여 날마다 나는 것은 진실로 호연(浩然) 무궁(無窮)한 것이다. 그래서 상채(上蔡)가
“나의 정신은 곧 조고(祖考)의 정신이다.”
라 하니 대개 이를 말함이다.
然聖人之祭祀也에 設主立尸하며 焫蕭灌鬯하야 或求之陰或求之陽 無所不用其極而猶止曰 庶或享之而已라하니 其至誠惻怛精微恍惚之意 盖有聖人所不欲言5)者오 非可以世俗麤淺知見으로 執一而求也라 豈曰一受其成形에 則此性遂爲吾有6)하야 雖死而猶不滅 截然自爲一物 藏乎寂然一體之中이라가 以俟夫子孫之求하야 而時出以饗之耶아 必如此說이면 則其界限之廣狹安頓之處所는 必有可指言者라 且自開闢以來積至于今하야 其重倂積疊7)이 計已無地之可容矣니 是又安有此理耶아 且乾坤造化는 如大洪爐하야 人物生生에 無少休息하니 是乃所謂實然之理니 不憂其斷滅也라 今乃以一片大虛寂目之8)하야 而反認人物已死之知覺 謂之實然之理라하니 豈不誤哉아 又聖賢所謂歸全安死者는 亦曰 無失其所受乎天之理면 則可以無怪而死耳오 非以爲實有一物可奉持而歸之라하야 然後吾之不斷不滅者는 得以晏然安處乎冥漠之中也라 若未能遽通이어든 卽且置之오 姑卽夫理之切近而平易者하야 實下窮格功夫 使其積累而貫通焉 則於此에 自當曉解오 不必別作一道理求也니 但恐固守舊說하야 不肯如此下工則拙者는 雖復多言이나 終亦無所補耳라
성인(聖人)이 제사의 제도를 마련함에 신주(神主)를 설치하고 시동(尸童)를 세워 쑥을 사르고 울창주를 땅에 부어 혹 음(陰)에 구하고 혹 양(陽)에 구하여 그 정성을 다 하되, 오히려 다만
“거의 혹 흠향(歆饗)하시기를…”
이라고만 말하고 사람의 지성측달(至誠惻怛)하고 귀신의 정미황홀(精微恍惚)한 뜻은 성인이 말하고자 아니하는 것이니, 이것은 귀신의 세계는 세속의 거칠고 얕은 지견(知見)으로 하나에 집착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한 번 그 성형(成形)을 품부받았으니 이 성(性)이 드디어 나의 소유물이 되어 비록 죽었으나 오히려 불멸하고 자른 듯 일물(一物)이 되어 적연(寂然)한 한 몸체에 저장되어 있다가 자손(子孫)의 구함을 기다려 때때로 나타나서 흠향한다.”
고 말할 수 있겠는가. 꼭 이같이 말한다면 그 한계(限界)의 광협(廣狹)과 안돈(安頓)의 처소가 반드시 가리켜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또 천지개벽 이래로 지금까지 귀신이 쌓이고 쌓여 그 중첩이 계산컨대 다시 더 수용할 여지가 없을 것이니 또한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하늘과 땅의 조화가 큰 용광로와 같아서 인물(人物)의 나고 남이 잠깐의 멈춤도 없으니, 이는 곧 이른 바 실연(實然)의 이치이다. 건곤(乾坤)의 조화(造化)는 단멸(斷滅)을 근심할 필요가 없거늘 지금 그대는 천지를 한 조각 큰 허적(虛寂)이라 하고, 도리어 이미 흩어버린 인물(人物)의 지각(知覺)을 인정하여 이를 실연지리(實然之理)라 하니 어찌 잘못된 생각이 아니겠는가. 또 성현이 말한 귀전안사(歸全安死)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성(性)을 잃지 않으면 부끄러움 없이 죽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지 실제로 받들어 가질 수 있는 일물(一物)을 가지고 죽을 수 있은 연후에야 나의 부단불멸(不斷不滅)한 것이 편안히 명막(冥漠)한 가운데에 안처(安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갑자기 이 이치에 통할 수 없다면 그대의 생각을 잠깐 접어두고 이치(理致)의 절근평이(切近平易)한 것에 나아가서 궁리격물(窮理格物) 공부를 착실히하여 이 공부가 쌓이어 절근평이한 이치에 관통하게 되면 곧 저절로 성(性)이 이(理)임을 밝게 알 수 있을 것이니, 별도로 한 이론(理論)을 세워 이해를 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대가 구설을 고수하여 기꺼이 절근평이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비록 다시 많은 말을 하여도 끝내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는 바이다.
【註解】
1) 以我爲主(이아위【註解】 : 성(性)을 공공도리(公共道理)로 보지 않고 나를 위주로 봄.
2) 盡得…知覺(진득…지각) : 나의 이 지각(知覺)을 다하다. 득(得)은 허사.
3) 此物(차물) : 나의 지각을 가리킴.
4) 以水漚比(이수구비) : 이(理)는 상재(常在)하고 수구(水漚)는 변멸무상(變滅無常)하니 이(理)는 수구(水漚)에 비유할 수 없고 기(氣)는 수구(水漚)에 비유할 수 있다.
5) 聖人…欲言(성인…욕언) : ������논어������ ‘불어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의 주에 ‘귀신조화지적(鬼神造化之迹)은 궁리가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쉽게 밝힐 수 없는 것이 있다. 때문에 가벼이 말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선생의 말이 이 뜻이다. 지성측달은 무불용극에 정미활홀은 서혹향지(庶或享之)에 대응함. 성인이 제사에 그 성의(誠意)를 다하면서 오히려 그 흠향(歆享)을 기필하지 않는 것은 대개 귀신이 있다고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어 명확히 말하고자 아니하는 것이다.
6) 此性…吾有(차성…오유) : 차성은 자회(子晦)가 ‘지각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니 기(氣)이다.
7) 重倂積疊(중병적첩) : 귀신이 많은 것을 말함.
8) 一片…目之(일편…목지) : 대개 자회(子晦)가 지각의 본원을 실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지각의 본원이 없으면 천지가 곧 한 조각 큰 허적(虛寂)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인물이 나고 또 나 잠깐의 휴식도 없으니 이것이 곧 조화실연의 이(理)이다. 천지에 이미 이 실리(實理)가 충색(充塞)해 있으니 어찌 허적이라 하겠는가. 자회가 이 실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천지를 일편대허적(一片大虛寂)이라 했다.
所喩已悉이라 但事已如此1)하니 不若且靜以聽之니 吾人所學이 正要此處呈驗2)이라 若著些利害하야 便不免開口告人이면 却與不學之人何異리오 向見李先生說若大段排遣不去3)어든 只思古人所遭患難이 有大不可堪者하야 持以自比면 則亦可以少安矣라하시니 始者甚卑其說하야 以爲何至如此리니 後來臨事에 却覺有得力處하니 不可忽也라 若閣中4)不快5)면 亦無可奈何라 事已至此하니 已展不縮已進不退라 只得硬著脊粱6)하야 與它厮崖7)하야 看他如何8)오 自家決定不肯開口告它9)니 若到任滿에 便作對移10)批書11)離任이면 則它許多威風이 都撫使處12)矣라 豈不快哉아 東坡在湖州被逮13)時에 面無人色하야 兩足俱軟하야 幾不能行이라 求入與家人訣而使者不聽하고 雖伊川先生謫涪陵時라도 亦欲入告叔母而不可得이어늘 惟陳了翁被逮14)聞命卽行하얀대 使人駭之하야 請其入治行裝하대 而翁反不聽하니 奇哉奇哉라 願子晦勉旃하야 毋爲後人羞也하라
서찰에서 말한 그대의 뜻은 다 알겠으나 다만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조용히 관장(官長)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대가 지금까지 공부할 것이이곳에서 그 시금석을 만난 것이다. 만약 사소한 이해(利害)에 집착하여 금방 입을 열어 남에게 통사정을 하면 배우지 못한 사람과 무엇이 다르랴. 전일에 이선생(李先生) 말씀을 들으니,
“만약 큰 일을 만나 견디기가 어렵거든 고인이 큰 환난을 만나 견딜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하여 이를 자신의 처지와 견주면 조금은 안정이 될 것이다.”
하니 처음엔 그 말을 대수롭잔게 여기고 그럴리가 있겠는가 하였더니 훗일에 실제로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이 말에 힘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았다. 그대도 이 말을 소홀히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만약 자친께서 그대의 수정(守正)을 불편하게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사태가 이미 이에 이름에 이미 펼쳤으니 움추릴 수 없고 이미 나아갔으니 물러날 수 없다. 다만 힘을 내어 관장(官長)과 버티어 관장이 어떻게 나오는지 관망할 것이요, 나에게 결정된 일을 용서해달라고 관장에게 사정하여 빌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임기만묘시에 좌천 명령을 받고 그 공문서에 따라 떠나면 관장의 위풍은 위세를 부릴 곳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동파(東坡)가 호주(湖州)에서 체포당할 때 얼굴 빛이 말이 아니었고 두 다리가 후들거려 거의 걸을 수가 없었으며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도록 간청하였으나 사령들이 들어주지 아니했고, 비록 이천(伊川) 선생 같은 분도 부능(涪陵)으로 유배될 때에 숙모에게 고하고자 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고, 오직 진요옹(陳了翁) 만이 체포될 때에 명령을 듣는 즉시 떠나려 하니 사령이 놀랍게 여기고 들어가 행장을 챙기기를 전하였으나 요옹(了翁)이 도리어 듣지 아니했다. 기이하도다. 기이하도다. 자회(子晦)는 이를 본 받아 힘쓰고 힘써 후인에게 수치가 되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
此間有吳伯起者는 不曾講學이러니 後聞陸子靜門人說話하고 自謂有所解悟하야 便能不顧利害러니 及其作令纔被對移它邑主簿하니 却不肯行하고 而百方求免이어늘 熹嘗笑之하야 以爲何至如此오 若對移作指使15)하면 卽逐日執杖子하야 去知府廳前唱喏16)이오 若對移做押錄17)이면 卽逐日抱文案하야 去知縣案前呈覆18)하고 更做耆長壯丁이라도 亦不妨與它去做어든 況主簿乎아 吳不能用하야 竟至憤鬱成疾而死하니 當時若放得下면 却未必死어늘 今不免死하야 而枉陪19)了許多下情20)하니 所失愈多라 雖其臨機失於斷決이나 亦是平日欠了持論也라 志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은 此夫子所以有取於虞人이어늘 而孟子亦發明之하시고 李先生說不忘二字는 是活句니 須向這裏參取21)라하니 愚謂若果識得此意辦得此心이면 則無入而不自得이리오 而彼之權勢威力이 亦皆無所施矣니라
근래에 오백기(吳伯起)란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강학을 하지 않다가 육자정(陸子靜) 문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다 하고 곧 이해(利害)를 돌아보지 않더니, 그 인사이동 명렬에 미쳐서 다른 읍 주부로 좌천 명령을 받자 곧 기꺼이 떠나지 않고 백방으로 사면을 구걸하였다. 내 이를 비웃으며,
“어찌 이렇게 못났는가. 만약 좌천이 사령이면 곧 그 날로 작지를 짚고 부청(府廳) 앞으로 가서 힘차게 복창할 것이요, 만약 좌천이 서리(書吏)면 즉일 문안을 안고 현안(縣案) 앞에 나아가 복명하고, 좌천이 기장(耆長) 장정(壯丁)이라도 그렇게 떠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겠거늘 하물며 주부야 어떻겠는가.”
하였더니 오백기가 이렇게 하지 못하고 마침내 울분이 병이되어 죽기에 이르니, 당시에 만약 마음을 풀어 하기(下氣)하였더라면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죽음을 면치 못하고 허다한 비루한 꼴을 보여 실책이 더욱 많으니, 비록 일을 당한 당시에 결단력이 부족했다 하나 역시 평일에 지론(持論)이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지사(志士)는 골짜기에 떨어져 죽을 것을 잊지 말고 용사는 그 머리를 잃음을 잊지 말라.”
는 말은 부자(夫子)께서 우인(虞人)에게서 취함이 있었기 때문이요, 맹자 또한 이 뜻을 이어 밝혔으니 이선생이
“불망(不忘)이란 두 글자가 살아있는 말이니 그 속에서 참 뜻을 취하라.”
하니 만약 과연 이 뜻을 알고 실천하면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도 자득(自得)하는 바가 있어 저 권세와 위력이 행세할 곳이 없을 것이다.
【註解】
1) 事已如此(사이여차) : 자회가 관장에게 과오를 범한 것이 있어 임기 만료 시에 좌천당한 일.
2) 呈驗(정험) : 징험이 드러남.
3) 大段…不去(대단…불거) : 대단히 견디기 힘들다.
4) 閣中(각중) : 부인. 자회의 모친. 합중(閤中)이 맞음.
5) 不快(불쾌) : 자회가 수정(守正)하기를 바라지않음.
6) 脊梁(척량) : 관장과 버티어 굴복하지 않음.
7) 與它厮崖(여타시애) : 타는 관장을 가리킴. 시(厮)는 서로의 뜻. 애(崖)는 애(捱)니 서로 버티어 굴복하지 않음을 말함.
8) 看他如何(간타여하) : 관장이 어떻게 하는지 보다.
9) 告它(고타) : 관장에게 사정하여 사면을 빌다.
10) 對移(대이) : 좌천.
11) 批書(비서) : 관장의 좌천 명령서.
12) 使處(사처) : 사는 사주(使酒)의 사와 같음.
13) 東坡…被逮(동파…피체) : 원풍(元豊) 2년에 하대정(何大定) 서단(舒亶) 이정(李定)이 지은 시를 방산(謗訕)이라 논하여 호주로부터 어사대로 압솓됨.
14) 了翁被逮(요옹피체) : ������주자대전������ 34권 ‘해문지우(海門之憂)’ 아래에 있음.
15) 指使(지사) : 관부 급사(給事)의 소직(小職).
16) 唱喏(창야) :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위해 존경과 축원의 뜻으로 경의를 표하는 소리.
17) 押錄(압록) : 서리(書吏).
18) 呈覆(정복) : 사룀.
19) 枉陪(왕배) : 배(陪)는 거듭, 두 번의 뜻.
20) 下情(하정) : 비하한 정.
21) 不忘…參取(불망…참취) : ‘지사불망재구학 용사불망상기원’ 열 넉자 중에 불망 두 글자가 지사와 용사의 마음을 나타내 말하는 것이다. 이는 뜻으로 이해해야지 말로써 해설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선생이 활구(活句)라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속에서 뜻을 참구(參究) 식취(識取)하기를 바란 것이다.
盖詳來諭하니 正謂日用之間에 別有一物光輝閃爍하고 動蕩流轉하니 是卽所謂無極之眞이오 所謂谷神不死1)니 二語는 皆來書所引이라 所謂無位眞人2)은 此釋氏語니 正谷神之酋長3)也4)라 學者合下便要識得此物하야 而後將心想象照管要得常在目前이라야 乃爲根本功夫라 至於學問踐履零碎湊合은 則自是下一截事5)니 與此粗細逈然不同이라 雖以顔子之初仰高鑽堅에 瞻前忽後6)로다 亦是未見此物이라 故不得爲實見耳7)라하니 此其意則善8)矣라 然若果是如此ㄴ댄 則聖人設敎에 首先便合痛下言語하야 直指此物9) 敎人著緊體察 要令實見하고 著緊10)把捉하야 要常在目前이 以爲直截根原之計오 而却都無此說하야 但只敎人格物致知克己復禮하야 一向就枝葉上零碎處做功夫하니 豈不誤人枉費日力耶아 論孟之言平易明白하야 固無此等玄妙之談이라 雖以子思周子喫緊爲人으로 特著中庸太極之書하야 以明道體之極致하대 而其所說用功夫處는 只說擇善固執學問思辨而篤行之오 只說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君子脩之吉而已오 未嘗使人日用之間에 必求見此天命之性無極之眞而固守之也니 盖原此理之所自來雖極微妙나 然其實이 只是人心之中에 許多合當做底道理而已니 但推其本이면 則見其出於天心而非人力之所能爲이면 故曰天命이라하고 雖萬事萬化가 皆自此中流出이나 而實無形象之可指라 故曰無極耳라 若論功夫면 則只擇善固執中正仁義便是理會此事處오 非是別有一段根原功夫는 우재강학應事之外也오 如說求其放心이 亦只是說日用之間에 收歛整齊하야 不使心念으로 向外走作이면 庶幾其中에 許多合做底道理漸次分明하야 可以體察하니 亦非捉取此物하야 藏在胸中하고 然後別分一心出外以應事接物也라
그대는 보내온 서찰에서
“일상 생활을 하는 중에 별도의 일물(一物)이 광휘섬삭(光輝閃爍)하여 동탕유전(動蕩流轉)하는 것이 있으니, 이는 곧 이른 바 무극지진(無極之眞)이요, 이른 바 곡신불사(谷神不死)며, (두 말을 모두 그대의 서찰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른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는 석씨(釋氏)의 말이니 곡신의 추장이다) 이라하여 학자가 반드시 이것을 인식한 뒤에 마음에 두고 상상조관(想象照管)하여 항상 목전(目前)에 있도록 해야만 근본 공부가 되고, 학문(學問) 천리(踐履) 영쇄(零碎) 주합(湊合)은 하등(下等)의 일이니, 광휘섬삭한 인물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하고, 안자(顔子)의 본심으로도 앙고찬견(仰高鑽堅)하고 첨전홀후(瞻前忽後)하여 광휘섬삭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도(道)의 실체를 보지 못한 것이라.”
고 하니 그대의 이 말은 그 뜻은 좋기는 하나 과연 그대의 말과 같다고 하면 성인이 설교(設敎)를 함에 무엇보다 먼저 이 말을하여 바로 그 광휘섬삭한 것을 지적하여 학자로 하여금 절실하게 이를 체찰하여 실제로 보고 눈 앞에 항상 있도록 하게하여 학문의 근원으로 삼게 하였을 것이거늘, 도리어 전혀 이러한 말이 없고 다만 학자로 하여금 격물치지(格物致知)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한결같이 지엽상(枝葉上) 영쇄처(零碎處)에 공부하게 하니, 어찌 학자들을 그릇되게하여 시간과 정력을 헛되이 소모케함이 아니겠는가.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의 말이 평이(平易)하고 명백(明白)하여 이같은 현묘(玄妙)한 말이 없거니와, 자사(子思)와 주자(周子)가 학자를 위한 절실한 마음으로 ������중용������과 ������태극도설������을 지어 도체(道體)의 극치를 밝혔으되, 힘써 공부할 곳을 말한 것이 다만 택선고집(擇善固執)하고 학문(學問) 사변(思辨)하여 돈독히 행하라 하고, 또 다만 중정인의(中正仁義)로써 정하되 정(靜)을 위주로하며 군자는 이를 수행(修行)하면 길(吉)하리라고만 말했을 뿐이고, 학자로 하여금 일상 생활 가운데서 천명지성(天命之性)과 무극지진(無極之眞)을 구하여 고수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대개 도리(道理)의 근원을 추구하면 비록 극히 미묘하나 실은 인심(人心)에 허다히 합당한 도리일 따름이요, 다만 그 근본을 추구해 나가면 그것이 모두 천심(天心)에서 나와 인력(人力)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천명(天命)이라 말하고, 비록 만사만화(萬事萬化)가 모두 천심에서 나오나 실은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형상이 없는 까닭으로 무극이라고 말하니, 만약 학자가 힘써 공부해야할 곳을 말한다면 다만 택선고집 중정인의가 바로 그것이요, 특별히 일단의 근원 공부가 강학(講學) 응사(應事)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방심(放心)을 거두어들이는 바업을 말할 것같으면 다만 일용 사이에 수렴(收斂) 정제(整齊)하여 신념(信念)으로 하여금 밖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면 아마 그 가운데에 허다히 합당한 도리가 점차 분명해져 가히 몸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요, 광휘섬삭한 것을 붙잡아 마음 가운데 간직한 뒤에 별도로 다른 한 마음을 내어 응사접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來喩又疑考異11)中에 說韓公이 見道之用而未得其體12)하야 以爲亦若自謂根原學問이 各有一種功夫者라하니 此亦不然이라 前日鄙意正爲韓公이 只於治國平天下處에 用功而未嘗就其身心上하야 講究持守耳오 非病其不曾捉得此物하야 藏在懷袖間也라 此是學問功夫는 徹上徹下細密緊切處니 向使不因來喩之詳이면 終亦未覺其病之在是리니 今幸見得하니 今幸見得하니 不是小事라 千萬詳看此說13)하야 子細尋繹 更推其類 盡將平生所認有相關處14)하야 一一勘驗이면 當自見得이니 如有未契에 更宜反覆이오 不可容易放過也니라 安卿15)之病이 正亦坐此16)하니 向來至此에 說得旣不相合이라 渠便藏了17)하야 更不說著18)라 遂無由與之極論하야 至今以爲恨하니 或因與書하야 幸亦以此曉之 勿令久自拘縶也하라 太顚問答19)을 初疑只是其도의 僞作이러니 後細思之하니 想亦有些彷彿20)하니 計其爲人이 山野質朴하야 雖不會說21)이나 而於脩行地位에 做得功夫著實이라 故其言語는 有力하야 感動得人하고 又是韓公所未嘗聞이라 而亦切中其病22)하니 故公旣聞其語하고 而不覺遂悅之也라 然亦只此便見得韓公本體功夫 有欠闕處니 如其不然이면 豈其自無主宰하야 只被朝廷이 一貶23)異敎一言하고 而便如此失其常度哉아 此等處極 不可草草看過니 更宜深體之也니라 坡公海外24)意況이 深可歎息이라 近見其晩年所作小詞에 有新恩雖可冀舊學終難改之句每諷詠之에 亦足令人慨然也라 盖性命之理雖微나 然就博文約禮實事上看이면 亦甚明白이니 正不須向無形象處하야 東撈西摸25) 如捕風繫影 用意愈深而去道愈遠也니라
보내온 서찰에서 또 내가 ������고이(考異)������에서 ‘한공이 도의 용(用)을 보고 그 체(體)를 보지 못했다.’고 한 말을 잘못 이해하여 학문의 근원이 별도로 일종의 공부가 있는 것처럼 말하니 이 또한 그렇지 않는 것이다. 전일 나의 생각은 한공이 다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만 힘쓰고 신심(身心) 상에는 강구지수(講究持守)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가 일찍이 광휘섬삭한 것을 붙잡아 마음 속에 간직하지 못했다고 나무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실로 학문 공부의 철두철미하고 세밀긴절한 곳이니 그대의 자세한 서찰이 아니었더라면 끝내 그대의 병통이 이에 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대의 병통의 소재를 알 수 있었으니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나의 말을 천만번 살펴서 자세히 생각해보고 또 유추하여 평소에 알고 있는 상관있는 곳을 하나하나 점검해보면 마땅히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깨닫지 못하겠거든 다시 반복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니 쉽게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안경(安卿)의 병통이 또한 그대와 같은데서 기인하니 전일에 여기에 왔을 때 설득이 상합하지 못하여 그가 곧 자기의 생각을 감춰버리고 다시 말하지 않아 끝내 더불어 자세히 논할 계기가 없었으니 지금까지도 한스럽기 짝이 없다. 혹시 안경(安卿)에게 글을 보낼 일이 있거든 이 같은 나의 말로써 깨닫게하여 오래도록 자신의 잘못된 생각에 묶여 있지 않도록 하면 다행이겠다.
태전문답(太顚問答)은 처음엔 한갖 위작(僞作)이라 여겼더니 뒤에 자세히 생각해보니 태전의 위인이 산야의 질박한 사람이라 비록 이설(理說)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나 수행(修行)은 돈독한 까닭으로 그 언어가 힘이 있어 사람을 감동시키고, 그의 말이 한공이 일찍 들어보지 못한 말이고 또한 한공의 병통을 잘 지적하는 까닭으로, 한공이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이에서 한공이 본체 공부에 결함이 있음을 알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다면 어찌 스스로 주견없이 조정의 일폄(一貶)과 이교(異敎)의 일언에 이같이 쉽게 자신을 잃었겠는가. 이러한 일은 소홀히 지나칠 수 없으니 다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동파(東坡)가 해남(海南)에 유배되었을 때 그 심경은 매우 탄식할 만하고 근래에 그의 만년의 작품 소사(小詞)를 보니
“신은(新恩)은 비록 기대할 수 있으나 구학(舊學)은 끝내 고치기 어렵다.”
는 구절이 잇으니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사람을 슬프게 한다. 대개 성명(性命)의 이치는 비록 미묘하나 박문약례(博文約禮)하여 실사(實事) 상에서 보면 아주 명백하니 형상이 없는 곳을 좇아 동노서모(東撈西模)하기를 마치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묶듯이 용의(用意)가 깊을수록 도에서 더욱 멀어지는 것같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註解】
1) 谷神不死(곡신불사) : 노자(老子)의 말. ������노자������에 “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현빈(玄牝)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근본이다. 끊임없이 이어져 아무리 써도 수고로움이 없다.” 고 함. 곡(谷)은 빈 것, 낮은 것, 기르는 것, 암컷 등으로 풀며 만물을 생성하는 모체, 도의 근원이라 함.
2) 無位眞人(무위진인) : 불가(佛家)의 말. ������전등록(傳燈錄)������에 임제(臨濟) 선사가 “너의 몸둥이 위에 한 무위진인이 있다.” 하고 ������어록(語錄)������에 “선가가 이르기를 한 무위진인이 사람의 문위에 있어 사람이 출입할 때 모든 행위를 살펴본다,” 하였으니, 대개 이(理)가 있지 아니하는 곳이 없어 매사에 소홀해서는 안된다는 뜻.
3) 酋長(추장) : 괴수(魁帥). ������맹자������에 지기(志氣)의 수자(帥者)라 함.
4) 二語…長也(이어…장야) : 이어(二語)에서 소인(所引)까지 일곱자와 차(此)에서 장야(長也)까지 열한자를 선생의 자주인 것을 판본이 잘못되어 큰 글자로하여 원문과 섞였음.
5) 自是…截事(자시…절사) : 섬삭광휘한 것을 인식하는 것을 상면 일절사로 보기 때문에 학문 천리를 하면(下面) 일절사로 봄.
6) 仰高鑽堅瞻前忽後(앙견찬견첨전홀후) : 자사가 공자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말. “우러러 보니 너무 높고 뚫으려 하니 너무 단단하며 앞에 보이더니 홀연히 뒤에 있다.” 하여 성인의 도를 알 수 없음을 말함.
7) 實見耳(실견이) : 정위(正謂)에서 여기까지는 선생이 자신의 뜻으로 자회의 뜻이 이와 같다고 말한 것임.
8) 其意則善(기의즉선) : 잠깐 좋다하고 곧 그렇지 않음을 배척하는 말.
9) 直指此物(직지차물) : 차물은 광휘섬삭을 가리킴.
10) 著긴(착긴) : 착은 허자(虛字)임.
11) 考異(고이) : 선생이 지은 ������한문고이(韓文考異)������. 각 본의 문자의 동이를 고정(考訂)하고 그 아래 주(注)를 함. 경원(慶元) 정사(丁巳)에 완성됨.
12) 未得其體(미득기체) : 선생이 “한공이 도에 있어 그 용(用)이 만사에 두루 미침은 알고 그 체(體)가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음은 모르며, 천하에 행하여짐은 알고 먼저 내 몸에 뿌리내려야 함은 모른다.” 하였음.
13) 詳看此說(상간차설) : 차설은 선생의 설임.
14) 平生…關處(평생…관처) : 금일 의견과 상관이 있는 곳.
15) 安卿(안경) : 성은 진(陳), 명은 순(淳), 호는 북계(北溪), 용계인(龍溪人), 선생 문인.
16) 正亦坐此(정역좌차) : 자회와 같은 병통이 있다.
17) 藏了(장료) : 그의 설을 감추어 버림.
18) 說著(설착) : 착은 어사.
19) 太顚 問答(태전문답) : 승려임. 성은 양씨, 처음엔 나부산(羅浮山)에 있었고 뒤에 호주(湖州)의 영산선원(靈山禪院)에 있었다. 한공이 제신(祭神)의 일로 해상(海上)에 갔을 때 보고 불러서 십 수일을 같이 지냄. 태산선사에게 보낸 글 세 편이 ������창려외집(昌黎外集)������에 보임. 후인이 별찬 답문 등의 말로 퇴지를 매우 비난함. 혹은 서안도의 작이라 함. 구양공은 위작이라 하고 동파가 이를 변론함.
20) 有些彷佛(유사방불) : 당시 실사(實事)와 방불함. 위작이 아니라는 말.
21) 不會說(불회설) : 이해를 다 못한다는 말.
22) 切中其病(절중기병) : 한공의 병통을 잘 맞힘.
23) 一貶(일폄) :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금중(禁中)에 들이려 하자 한공이 극간, 이로 인해 호주 자사로 좌천됨.
24) 坡公海外(파공해외) : 파공은 동파(東坡)임. 해외는 담주(儋州) 창화군(昌化軍) 남해 가운데 있음.
25) 東撈西摸(동노서모) : 그 본의(本意)를 알지 못하고 동서로 찾아 다님.
答李濱老1)
熹少好讀程氏書러니 年二十許時에 始得西山2)先生所著論孟諸說讀之하야 又知龜山之學이 橫出此枝나 而恨不及見也러니 旣而得從何兄叔京遊하야 乃知足下盖得其家傳者라 是時家居3)는 西距高隱4)不能甚遠호대 而以事牽不得一往하야 質其所疑하니 徒日往來於心不忘也라 示喩向來爲學之意는 有以知家庭授受之要니 感歎無已로다 盖竊嘗病今世學者는 幸得諸老先生爲之先唱하야 指示要途 以趣聖賢之域이나 而不能自淺及深自近及遠하야 循序以進하고 或乃探測幽微하야 馳騖於言意之表 以是徒爲談說之資 而卒無所得於造理行事之實이라 其幸不至於中道而廢者는 則必流於老佛之歸而不悟하나니 今足下之學之傳이 遠有端緖하니 其必有以異於此者로대 顧恨未得面扣其詳이라 廬阜는 固爲東南雄麗奇特之觀이오 而又有陶靖節祖孫6)劉西澗7)父子之遺風하고 濂溪暮年에 嘗守其地하시고 而西山舅氏陳忠肅公이 亦嘗謫居焉하니 今老儒生이 猶有及見之者라 然前此未嘗有留意者러니 區區此來5)에 適會學官楊君8)이 訪得西澗遺象하야 與元祐李公擇尙書로 並祠於學하고 因與復議並取靖節忠肅及西澗之子秘丞公하야 合而祠之하고 更立濂溪之祠於其右하야 配以程氏二夫子焉하고 陶公有醉石9)하야 在郡西北數十里하니 所謂栗里者也오 劉公之墓在西門外荒草中하니 幾無復知其處者어늘 今皆作亭以表之하니 以來敎之語及之로 知足下之有意乎此也라 故並以告하노니 想聞之亦爲一太息也리라
답이빈노(答李濱老)
내 어려서 정씨(程氏)의 글을 읽기를 좋아하였더니, 나이 스무살 쯤 되어서 비로소 서산(西山) 선생이 지은 ������논맹제설(論孟諸說)������을 읽고, 또 구산(龜山)의 학문이 서산에게 전해졌음을 알았으나, 서산을 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뒤에 하형숙경(何兄叔京)과 교유(交遊)함에 족하(足下)가 서산의 가전(家傳)을 이은 자임을 알았다. 이때에 나의 거처가 족하가 거처하는 곳에서 서쪽으로 그렇게 멀지 않는 거리에 있었으나, 일에 얽메이어 한 번 가서 의문이 있는 것을 질정(質正)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간직한채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서찰에서 알려 준 족하의 학문의 뜻은 그 가정수수(家庭授受)의 요체임을 알 수 있었으니 감탄해 마지 않는 바이다. 금세의 학자가 다행히 여러 노선생(老先生)이 선창(先唱)하여 거시하는 요도(要途)를 체득하여 성현(聖賢)의 도를 향해 나아가나, 얕은 데서 깊은데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순서를 따라 나아가지 못하고, 심원하고 미묘한 곳을 드듬어 헤아리며, 언어의 거죽만 치달려 이를 이야기 거리로만 삼으니, 마침내 이치에 나아가고 실사를 행하는 실질에는 체득하는 바가 없다.
다행히 중도에 그만두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 자는 노불(老佛)에 흘러 이를 깨닫지 못하니 내 일찍이 혼자서 이를 한탄하였더니, 지금 족하의 학문의 전수(傳受)가 멀리 구산(龜山)이 전한 단서(端緖)가 있어 이들과는 다름이 있을 것인, 반갑기 그지없다. 한 번 만나서 자세히 물어보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여산(廬山)은 본래 동남의 웅려(雄麗)하고 기특(奇特)한 경관이고 또 도정절(陶靖節) 조손(祖孫)과 유서간(劉西澗) 부자의 유풍(遺風)이 있고 염계(濂溪) 선생이 만년에 이 땅을 지켰고 서산(西山)의 외숙 진충숙공(陳忠肅公)이 여기서 유배생활을하여 당시에 이를 본 노유생(老儒生)이 아직도 살고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아무도 이 유풍(遺風)에 뜻을 둔 사람이 없었더니 내가 여기에 왔을 때 학관 양군(楊君)이 서간(西澗)의 유상(遺像)을 찾아 원우(元祐) 년간의 이공택(李公擇) 상서(尙書)와 함께 학교 안에 병사(並祠)하고, 인하여 함께 의논하여 정절(靖節) 충숙(忠肅) 서간(西澗)의 아들 미승공(秘丞公)을 합사(合祠)하고, 다시 그 오른 쪽에 염계(濂溪)의 사당을 세워 정씨 이부자(程氏二夫子)를 배향하였다. 도공(陶公)의 취석(醉石)이 군(郡) 서북쪽 수십리에 있으니 율리(栗里)라는 곳이요, 유공(劉公)의 묘가 서문 밖 거친 풀숲에 있어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이라, 모두 정자(亭子)를 지어 표(表)하였다. 보내 온 서찰에서 족하의 뜻이 이에 있음을 알고 아울러 알리니 내 말을 듣고 족하도 크게 감탄하리라 생각한다.
【註解】
1) 李濱老(이빈노) : 소무인(邵武人), 특주공(特奏公)의 아들. 세 다들 굉조(閎祖)․상조(相祖)․장조(壯祖) 모두 선생 문인이다.
2) 西山(서산) : 빈노의 종부(從父). 명은 욱(郁), 자는 광조(光祖), 소무군(邵武軍) 광택현(光澤縣) 사람. 원우 당인 심(深)의 아들, 진요옹의 생질, 양구산의 사위. 소흥(紹興) 초에 추천으로 제관(除官). 진회(秦檜)의 용사(用事)시에 벼슬을 버리고 서산에 물러나 안빈낙도함.
3) 家居(가거) : 선생이 오부리(五夫里)에 살 때.
4) 高隱(고은) : 상대방의 거처를 높혀 말함. 빈노는 소무 광택현 사람. 호는 담헌(澹軒).
5) 此來(차래) : 남강(南康)에 옴.
6) 陶靖節祖孫(도정절조손) : 정절이 환공(桓公) 간(侃)의 증손임.
7) 劉西澗(유서간) : 명은 환(渙), 자는 응지(凝之) 벼슬을 버리고 여산에 은거. 그 아들 서(恕) 자(字) 도원(道原) 또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함.
8) 楊君(양군) : 양원범(楊元範)임.
9) 醉石(취석) : 강중(江中)에 한 반석(磐石)이 있는데 돌 위에 연명취와(淵明醉臥)라 새겨져 있음.
朱書百選 卷之六
答呂道一
三復來示에 詞義通暢하니 爲之爽然1)이라 但其所論은 有於鄙意未安者하니 大凡論學은 當先辨其所趍之邪正이니 然後可察其所用之能否하야 苟正矣면 雖其人或不能用2)이나 然不害其道之爲可用也오 如其不正이면 則雖有管仲晏子之功이나 亦何足以稱於聖賢之門哉아 且古之君子所以汲汲於學者는 不爲其終有異於物3)而勤이라 故亦不爲其終無異於物而肆也며 不爲其有名而勸이라 故亦不爲其無名而沮也며 不爲其有利而爲라 故亦不爲其無利而止也하나니 是其設心이 蓋儻然4)一無有所爲者5)오 獨以天理當然 而吾不得不然耳니라
주서백선(朱書百選 ) 6권
답여도일(答呂道一)
그대의 서찰을 세 번 읽음에 말뜻이 통창(通暢)하여 마음이 맑아진다. 다만 그 논한 바가 나의 견해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다. 무릇 학문을 논함에 마땅히 먼저 그 나아가는 방향이 바른가 바르지 않는가를 분별한 연후에 그 운용의 능력 여부를 살피는 것이 옳으니, 만약 그 학문의 나아가는 방향이 바르면 비록 그 사람이 혹 학문의 운용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학문의 쓰임에는 해(害)가 되지 않고, 만약 그 학문의 나아가는 방향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그 사람이 관중(管仲), 안자(顔子)와 같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성현의 문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또 옛날의 군자가 학문에 급급(汲汲)한 까닭이 만물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학문을 부지런히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끝내 만물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세상에 유명해지려고 학문에 힘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이름 없이 생을 마친다고 해서 학문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가 이익이 있어서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익이 없다고 해서 학문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학문에 임하는 태세는 마음에 한 점 목적의식을 두지 않고, 그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천리가 당연히 성실하고 내 또한 천리를 따라 성실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註解】
1) 桑然(상연) : 자실(自失).
2) 不能用(불능용) : 학문을 현실에 운용하는 능력이 없다.
3) 異於物(이어물) : 물는 만물의 물임. 도일(道一)의 뜻은 “사람이 학문을 하는 까닭이 후에 이름이 전해져 만물이 허무하게 소멸되는 것과 다르게 하고자 하고자 함” 이라고 생각한다.
4) 儻然(당연) : ������장자������ 주에 자실지모(自失之貌)라 함.
5) 一無…爲者(일무…위자) : 어떤 목적 의식이 하나도 없다는 말.
答潘叔昌
示喩天上에 無不識字底神仙1)이라하니 此論이 甚中一偏之弊나 然亦恐只却得識字오 却不曾學得上天하노니 卽不如且學上天耳라 上得天了에 却施學上天人이 亦不妨2)也니라 中年以後氣血精神이 能有幾何오 不是記故事時節3)이라 熹以目昏不敢著力讀書하고 閒中靜坐하야 收斂身心이라 頗覺得力이오 間起看書에 聊復遮眼하야 遇有會心處면 時一喟然耳라 六國表4)議論이 乃是衰世一種卑陋之說이라 吾輩平日에 講誦聖賢하니 何爲却取此等議論以爲標的이리오 殊不可曉로다 建州有徐柟者하야 常言秦始皇賢於湯武管仲賢於夫子라하니 朋友間每每傳以爲笑리니 不謂來說이 亦頗似之5)也로다 此恐是日前於根本上에 不曾大段用功이라 而便於討論世變處에 著力太深하야 所以不免此弊라 向答子約一書에 亦極言之하니 正恐赤幟已立6)하야 未必以爲然耳라 熹老矣라 不復有意於此世로대 區區鄙懷猶欲勉率同志之士하야 熟講勤行 以趣聖賢之域이러니 不謂近年異論蜂起하야 高者7)溺於虛無하고 下者8)淪於卑陋9)하야 各執已見 不合不公하니 使人憂歎不知所以爲計라 而今而後亦不復敢以此로 望於今世之人하노니 姑抱遺經하야 以待後之學者而已니 不審明者以爲如何오
답반숙창(答潘叔昌)
보내온 서찰에서
“천상(天上)에 글자를 모르는 신선이 없다.”
고 한 말은 독서를 하지 않는 선학(禪學)의 폐단을 잘 지적하였다. 그러나 글자만 공부하고 성현(聖賢)의 뜻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이는 성현(聖賢)의 뜻을 공부하는 것보다 못할 것이니 성현의 지위에 이르고 나면 모든 책을 널리 읽어 박식에 힘써도 좋을 것이다.
내 중년 이후에 혈기와 정신이 쇠하여 고사(故事)를 잘 기억하지 못하겠고 뿐만 아니라 눈이 침침하여 힘붙여 독서도 하지 못하겠다. 다만 한가한 가운데 조용히 정좌하여 심신을 수렴하며 조금 힘을 얻으면 간간히 일어나 독서를 하고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회심처(會心處)를 만나면 탄식을 발하곤 한다. 「육국표의론(六國表議論)」은 곧 쇠미(衰微)한 시대의 일종의 비루한 공리지설(功利之說)이다. 우리들이 평소에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하였거늘 어찌하여 이러한 의논을 취하여 표적(標的)으로 삼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건주(建州)에 사는 서남(徐柟)이란 자가 항상 진시황(秦始皇)이 탕왕(湯王) 무왕(武王)보다 뛰어나고 관중(管仲)이 공자(孔子)보다 훌륭하다고 하니 붕우간에 자주 이를 비웃었더니 그대가 또 이같이 비슷한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마 이는 전앨에 근본 공부에 힘을 쓰지 않고 세변토론(世變討論)에만 힘을 썼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을 면치 못한 것 같다.
지난번에 내가 자약(子約)에게 답한 글에서도 이러한 폐단을 극론(極論)하였으나 자약(子約)은 자기의 주장을 강력히 세워 나의 말을 수긍하려 하지 않았다. 내 이제 늙었으니 다시 금세에 뜻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이며, 뜻이 같은 학자들을 이끌고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행하여 성현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근년에 이단(異端)이 봉기하여 학문이 높은 자는 허무(虛無)에 빠지고 학문이 낮은 자는 공리(功利)에 빠져서 각각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여 합당(合當)하지도 않고 공명(公明)하지도 못하니 근심과 탄식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부터는 다시 금세의 사람에게 내 생각에 동조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며 경서를 읽고 후학을 가르치며 훗일의 학자를 기다릴 것이다. 그대는 이를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註解】
1) 天上…神仙(천상…신선) : ‘천상에 글자를 모르는 신선이 없다.“는 말은 본래 열선전(列仙傳)의 말이다. 숙창의 학문이 오로지 박식(博識)에 힘쓰고 의리(義理)의 학에는 힘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선생이 누차 그 잘못을 말하였다. 숙창이 말하기를 ”천상에 글자를 모르는 신선이 없으니 우리가 박식에 힘쓰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고 했다. 선생이 당시에 선학에 빠져 독서를 하지 않는 자가 있기 때문에 ”한쪽의 폐단을 잘 지적하였다.“고 말하고 돌아서 금방 숙창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 잡으니 결국 숙창의 말을 잘못이라 말하는 것이다.
2) 只學…不妨(지학…불방) : 이 단락은 대개 성현의 지위를 천상인에 비유하여 경서를 공부함으로써 성현의 지위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하며 성현의 지위에 오르고 나면 모든 책을 읽어 박학이 힘써도 괜찮다는 말이다.
3) 中年…時節(중년…시절) : 모든 사람이 중년 이후에는 혈기와 정신이 쇠하여 사학(史學)을 공부하기가 힘든다는 말.
4) 六國表(육국표) : 사마천의 저작임.
5) 來說…似之(내설…사지) : 숙창이 육국표 의논을 취하여 표적으로 삼는 것이 건주의 서남의 설과 비슷하다는 말.
6) 赤幟已立(적치이립) : 한신(韓信)이 복병으로 하여금 조(趙)나라 성벽에 올라가 한(漢)나라 적치(赤幟)를 세우게 하니 조나라 군사가 놀라 항복함. 기세를 세워 상대방과 항쟁하려 함을 말함.
7) 高者(고자) : 육학(陸學)을 말함.
8) 하자(下者) : 절학(浙學)을 말함.
9) 卑陋(비루) : 공리지설(功利之說)을 말함.
答呂子約
所示日用功夫는 大慰所望이라 舊讀胡仔知言하다가 答或人以放心求放心之問1)에 怪其覶縷2)散漫不切하야 嘗代之下語云하대 知其放而欲求之면 則不放矣3)라하니 嘗恨學者는 不領此意러니 今觀來論하니 庶幾得之矣로다 所論必有事焉4)鳶飛魚躍5)이 意亦甚當하니 孔子只說箇先難後獲6)一句하시니 便是這話7)라 後來子思孟子程子爲人之意8)轉切이라 故其語는 轉險9)하야 直說到活潑潑地10)處耳라 知得11)如此는 已是不易하니 更且虛心寬意하야 不要回頭轉腦計校論量이오 却向外面博觀衆理하야 益自培殖이면 則根本이 愈固하고 而枝葉은 愈茂矣라 若只於此靜坐處尋討12)하며 却恐不免正心助長13)之病이오 或又失之면 則一蹴而墮於釋子之見矣니 亦可戒也라
답여자약(答呂子約)
서찰에서 보여 준 그대의 일용공부에 관한 말은 나의 기대에 큰 위안이 된다. 전에 호자(胡子)가 ������지언(知言)������에서 어떤 사람의
“방심(放心)으로써 방심(放心)을 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답한 것을 읽고, 그 말이 너무 자세하고 산만하여 절실하지 못함을 괴이하게 생각하고, 일찍이 이를 대신하여
“그 마음이 흩어졌음을 알고 마음을 거두려함은 이미 마음이 흩어진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학자들이 말을 이해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더니, 이제 그대의 논설을 보니 나의 말을 거의 이해하는 것같다.
그대가 논한 필유사언(必有事焉)과 연비어약(鳶飛魚躍)은 그 뜻이 아주 적합하니 공자가 말한 선난후획(先難後獲) 일구(一句)가 그 말이요, 뒤를 이어 자사(子思) 맹자(孟子) 정자(程子)가 위인(爲人)의 뜻이 절실하여 그 말이 더욱 기고(奇高)하고 평이하지 못하여 활발발지(活潑潑地)라고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대가 이 같은 경지를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다시 또 마음을 비우고 뜻을 너그럽게 하여 머리를 굴려 이것저것 헤아려보지 말고 외면(外面)을 향하여 모든 이치를 널리 보아 더욱 자신을 배식(培殖)하면 근본이 더욱 굳어지고 지엽(枝葉)이 더욱 무성해질 것이다.
만약 고요히 앉아서 사색하는 데만 깊이 빠지면 도리어 정심(正心) 조장(助長)의 폐단을 면치 못할 것이요, 혹 잘못하면 아차하는 순간에 석씨(釋氏)의 견해에 떨어질 것이니 이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讀書如論孟이 是直說日用眼前事라 文理無可疑니 先儒說得雖淺이나 却別無穿鑿壞了處오 如詩易之類는 則爲先儒穿鑿所壞라 使人不見當來14)立言本意니 此又是一種功夫라 直是要人虛心平氣하야 本文之下에 打疊交空15)蕩蕩地16)하야 不要留一字先儒舊說 莫問他是何人所說하고 所尊所親所憎所惡 一切莫問하고 而唯本文本意是求면 則聖賢之指得矣리라 若於此處先有私主면 便爲所蔽하야 而不得其正이니 此夏蟲井蛙所以卒見笑於大方17)之家也라 且如向來主張史記時變之學이 以近日都人觀美出涕沱若之章觀之亦可見其流弊之所極矣니 此乃前人18)有醇德而無虛心之弊라 反爲所誘하야 以墮一偏之見하니 今日子弟欲發其所長하야 而覆其所短19)이면 正在專於自己分上公聽並觀하야 打破前來窠臼라야 乃可以發明前人本來心事之正이오 而使學者로 計其所偏이니 此在子約이 比之他人에 又有此一重擔負라 尤不可勿勉也니라
독서를 함에 있어서 ������논어������와 맹자������ 같은 것은 일상 생활 중의 눈 앞의 일을 말한 것이니 문리(文理)가 의심할 것이 없어 선유(先儒)의 설이 비록 천근(淺近)하나 천착(穿鑿)하고 괴료(壞了)한 곳이 없고, ������시(詩)������ ������역(易)������ 같은 것은 천착과 괴료로 인하여 당초에 말한 본 뜻을 볼 수 없게 하니 선유의 제설(諸說) 또한 일종의 공부이지만 학자들은 허심평기(虛心平氣)하여 본문 아래를 말끔히 하여 선유의 구설(舊說)을 한 글자도 남기지 말고, 누구의 설인지도 묻지 말며 존경하는 바, 친한 바, 비워하는 바, 싫어하는 바를 묻지 말고, 오직 본문의 본 뜻만 추구하면 성현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선유의 구설(舊說)로 인한 사사로운 선입견을 가지면 곧 그 선입견에 가리어 바른 뜻을 볼 수 없을 것이니 이는 곧 우물안 개구리가 대방지가(大方之家)의 비웃음을 사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또 종전에 그대가 주장하던 ������사기(史記)������ 시변(時變)의 학은, 근래 시중 사람들이 그 문장을 아름답게 여기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때 그 유폐의 극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폐단 때문에 동래(東萊)가 순덕(淳德)은 있으되 허심(虛心)이 없는 결점으로 인하여 도리어 사학(史學)에 유혹되어 그 편견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 동래의 자제들이 그의 장점을 밝히고 단점을 보완하고자 할진댄, 오로지 자신의 본분에 입각하여 공청(公廳) 병관(並觀)하여 지금까지의 편견을 타파해야만 동래의 본래의 올바른 뜻을 밝힐 수 있고, 또 학자들로 하여금 그 편견을 경계토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자약(子約)이 다른 사람보다 더 무거운 책무를 지고 있으니 더욱 힘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註解】
1)舊讀…之問(구독…지문) : 선생이 호자(胡子)가 ������지언������에서 표거정(彪居正)의 질문에 답한 것을 읽고 “사람이 방심을 구하려고 마음 먹으면 곧 양심(良心)이 이에 있으니 하필 천리가 물욕 사이에서 발현되기를 기다린 연후에 방심을 구하겠는가. 이와 같이 하면 그 사이에 공백이 너무 많아 마치 집 앞에서 실물을 하고 성밖에서 찾는 것과 같다.”고 함.
2) /縷(나루) : 위곡(委曲)한 모양. 나(/)는 나(覶)가 옳음.
3) 欲求…放矣(욕구…방의) : 선생이 “방심을 구하려면 내 마음이 어떻게 방심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방심을 구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방심을 어떻게 구해애 겠다고 말하기 전에 방심을 구하려는 마음은 이미 마음 속에 있다.”라 했다.
4) 必有事焉(핑유사언) : ������맹자������ 호연지기(浩然之氣) 장에 기(氣)를 기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집의(集義)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함.
5) 鳶飛魚躍(연비어약) : 도체(道體)를 나타낸 말. 연비어약을 보고 도(道)의 비이은(費而隱)을 알 수 있음. 도의 화육(化育) 유행(流行)이 상하로 밝게 드러남을 말함.
6) 先難後獲(선난후획) : ������논어������ 옹야(雍也) 편에 번지(樊遲)가 인(仁)을 물으니 공자께서 “선난후획이면 인(仁)이라 할 수 있다.”고 함. 정자(程子)가 이에 주하기를 선난은 극기(克己)이다.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그 얻음을 꾀하지 않는 것이 인(仁)이다고 함. 이 글 중의 필유사언(必有事焉)도 선난이다.
7) 便是這話(변시저화) : 필유사(必有事)․연비어약(鳶飛魚躍)을 말함. 선난(先難)은 필유사(必有事)이고 후획(後獲)은 물정사(物正事)임. 정자가 필유사․물정․연비어약을 같이 활발발지(活潑潑地)라 함.
8) 爲人之意(위인지의) : 사람에게 이(理)를 보여주고자 하는 뜻을 말함.
9) 轉險(전험) : 기고(奇高)하여 평이하지 못함.
10) 潑潑地(발발지) : 천리유행(天理流行)이 응체(凝滯)되는 바가 없는 묘(妙)를 형용한 말. 지(地)는 어사(語辭).
11) 知得(지득) : 자약(子約)이 필유사․연비어약을 논한 뜻이 매우 마땅하기 때문에 하는 말.
12) 尋討(심토) : 필유사․연비어약의 도리를 심토함을 말함.
13) 正心助長(정심조장) : 정심은 미리 결과를 기대함이요, 조장은 속성하기를 바라 서두르다가 오히려 일을 망침을 말함.
14) 當來(당래) : 당초(當初).
15) 打疊交空(타첩교공) : 타첩은 타파(打破)임. 첩은 타(打)임. 교(交)는 사(使) 혹은 도(到)임. 사견(私見)을 제거함을 말함.
16) 空蕩蕩地(공탕탕지) : 제거하여 깨끗이 없앰을 말함.
17) 大方(대방) : 대도(大道), 혹은 현인 군자임.
18) 前人(전인) : 동래(東來)를 가리킨 듯.
19) 所長所短(소장소단) : 소장은 순덕, 소단은 무허심. 혹은 소장은 존주경서(尊主經書), 소단은 사학(史學)이라 함.
夫未發已發이 子思之言已自明白이라 程子數條引寂然感通1)者는 皆與子思本指符合하야 更相發明하니 但答呂與叔之問에 偶有凡言心者는 皆指已發一言之失 而隨卽自謂未當이라하시니 亦無可疑라 至遺書中纔思卽是已發一句는 則又能發明子思 言外之意니 盖言不待喜怒哀樂之發하야 但有所思면 卽爲已發이니 此意已極精微하야 說到未發界至十分盡頭니 不復可以有加矣어늘 問者는 不能言下領略하야 切已思惟하고 只管要說向前去하야 遂有無聞無見之問2)하니 據此所問之不切 與程子平日接人之嚴컨댄 當時正合不答이라 不知何故却引惹他3)致他하야 如此記錄 前後差舛4)을 都無理會하니 後來讀者는 若未敢便以爲非어든 亦且合存而不論이어늘 今却据守其說하야 字字推詳 以爲定論하고 不信程子手書는 此固未當之言이니 而寧信他人所記 自相矛盾之說하야 彊以已發之名으로 侵過未發之實5)하야 使人有生已後未死已前에 更無一息未發時節이오 惟有爛熟睡著는 可爲未發而오 而又不可以立天下之大本이니 此其謬誤는 又不難曉라
대저 미발(未發) 이발(已發)에 관한 설은 자사(子思)의 말이 이미 명백하고, 정자(程子)가 적연감통(寂然感通)을 인용하여 말한 몇가지 조목이 모두 자사의 본 뜻과 맞추어 그 의미를 더욱 발명하였을 뿐이다. 다만 여여숙(呂與叔)에게 답한 글에서 우연히
“무릇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킨다.”
고 잘못 말하였다가, 곧 이어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수정하였으니 더 의심할 것이 없고, 유서(遺書) 중에
“생각이 싹트면 곧 이는 이발(已發)이다.”
고 한 말은 자사의 언외(言外)의 뜻을 밝힌 것이니, 대개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함을 기다리지 않고 다만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곧 이는 이발(已發)이 된다는 뜻이니, 이 뜻이 극도로 정미(精微)하여 미발(未發)의 영역 끝까지 다달아 말하였으니 다시 더할 것이 없거늘, 질문하는 자가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에만 집착하여 자기의 주장을 전개해 나가 마침내
“미발(未發)인 때는 듣는 기능과 보는 기능이 없다.”
는 질문을 하니, 이 질문의 절실하지 못함과 정자가 평일에 사람을 접함이 엄격함을 보건대 당시에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지 않음이 당연하거늘, 무슨 까닭으로 그의 질문에 답하여 앞뒤가 어긋나는 기록을 하게 하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도록 하였는지 모르겠다. 후세의 독자가 만약 정자의 말을 자신있게 늘렸다고 말할 수 없으면 당연히 이를 논하지 말아야 할 것이거늘, 지금 도리어 정자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한 설을 가지고 한자 한자 자세히 추구하여 정론으로 삼아, 정자가 손수 쓴 부당하다는 말은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모순된 말을 믿고, 무뢰하게 이발(已發)의 이름으로 미발(未發)의 실(實)을 침과(侵過)하여, 사람이 태어난 이후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미발의 상태가 없게하고, 오직 깊이 잠든 상태만이 미발의 상태가 되도록 하며, 또 천하의 대본을 세울 수 없게하니 그 잘못을 쉽게 알 수 있다.
故或問中에 粗發其端이러니 今旣不信하고 而復有此紛紛之論할새 則請更以心思耳聞目見三事로 校之하야 以見其地位時節之不同이리니 蓋心之有知與耳之有聞目之有見으로 爲一等時節이니 雖未發而未嘗無오 心之有思는 乃與耳之有聽目之有視로 爲一等時節이니 一有此면 則不得爲未發이라 故程子以有思로 爲已發則可라하야시늘 而記者는 以無見無聞으로 爲未發則不可라하니 若苦未信이어든 則請更以程子之言으로 證之하리라 如稱許渤持敬6)에 而注其下하대 云曷嘗有如此聖人이리오하고 又每力詆坐禪入定之非하시니 此言이 皆何謂耶아 若必以未發之時에 無所見聞이면 則又安可譏許渤而非入定哉아 此未發已發之辨也니라 若氣配道義則孟子之意不過曰此氣能配道義니 若無此氣면 則其體有不充而餒然耳라 此其賓主向背7)條理分合이 略無可疑니 但粗通文理之人이 無先入偏滯之說하야 以亂其胸次하고 則虛心平氣而讀之에 無不曉會라 若反諸身而驗之면 則氣主乎身者也오 道義主乎心者也니 氣는 形而下者也오 道義는 形而上者也라 雖其分之不同이나 然非謂氣在身中而道義在皮外也니 又何嫌於以此配彼하야 而爲崎嶇詰曲以爲之說하야 曰 道義本存乎血氣하니 但無道義면 則此氣便餒하야 而止爲血氣之私라 故必配義與道然後能浩然而無餒乎아 若果如此면 則孟子於此에 當別有穩字하야 以盡此意之曲折이오 不當下一配字하야 以離二者合一之本形이오 而又以氣爲主하야 以倒二者賓主之常勢也8)라
그래서 ������혹문(或問)������에서 대략 그 단서를 발(發)하였는데 지금 이를 믿지 아니하고 다시 이렇게 분분(紛紛)한 말을 하니 청컨대 다시 심사(心思) 이문(耳聞) 목견(目見), 세 가지 일로써 검토하여 그대의 미발(未發) 이발(已發)의 분류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대개 마음이 지각(知覺) 능력이 있음은 귀가 듣는 능력이 있고 눈이 보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미발(未發)인 때에도 지각 능력이 없을 수 없고 마음이 생각하는 것은 귀가 듣고 눈이 보는 것과 같아서 생각함이 있으면 곧 미발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정자가
“생각함이 있음을 이발(已發)이라”
한 것은 옳지만, 기록한 자가 미발(未發) 때에는 보고 듣는 능력이 없다고 한 말은 옳지 않다. 꼭히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정자의 말로써 증명하고자 하니, 허발(許渤)의 지경(持敬)을 칭찬하면서 그 아래에 주석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 같은 성인이 있겠는가.”
하고, 자주 좌선입정(坐禪入定)의 잘못을 꾸짖으니 이 말은 모두 무엇을 말하겠는가.
만약 미발(未發)인 때에 보고 듣는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허발을 꾸짖고 입정(入定)을 비난하겠는가. 이것이 미발과 이발의 분변이다.
맹자가
“기(氣)가 도의(道義)를 도운다.”
고 한 것은 그 뜻이
“이 기(氣)가 없으면 그 몸이 불충(不充)하고 주린 듯하다.”
고 말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 빈주향배(賓主向背)와 조리분합(條理分合)이 의혹의 여지가 없으니, 문리(文理)에 대략만 통하는 사람이 치우쳐 막힌 선입견으로 그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허심평기(虛心平氣)하여 읽는다면 이를 깨닫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에 돌이켜 징험해 보면 기(氣)는 몸의 주된 것이요 도의(道義)는 마음의 주된 것이며, 기(氣)는 형이하자(形而下者)이고 도의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다. 비록 그 나누임이 같지 아니하나 그러나 기(氣)는 몸 안에 있고 도의는 몸밖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기(氣)가 도의를 오/둔다.”
는 말에 무슨 의혹이 있어 어렵게 굴곡하여 말하기를,
“도의가 혈기(血氣) 위에 있으니 도의가 없으면 이 기(氣)가 주린 듯 허물허물하여 단지 혈기가 사욕(私欲)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기가 도의를 짝한 뒤에 라야 능히 호연(浩然)하여 주린 듯 하지 않을 것이다.”
고 말하는가. 과연 이러하다면 맹자가 이에 대하여 마땅히 별도로 합당한 말을 하여 이 뜻의 자세한 곡절을 다 말했을 것이요, ‘짝한다’라는 한마디 말만하여 기(氣)와 도의(道義)의 합일한 본형을 분리시키고 또 기(氣)를 주어로 하여 기(氣)와 도의의 빈주상세(賓主常勢)를 도치(倒置)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且其上에 旣言其爲氣也以發語하고 而其下에 復言無是餒也以承之하니 則所謂是者는 固指此氣而言이니 若無此氣면 則體有不充而餒然矣라 若如來喩하야 以是爲指道義而言이니 若無此道義면 卽氣爲之餒라하면 則孟子於此에 亦當別下數語하야 二盡此意之曲折이오 又不當如此倒其文而反其義하야 以疑後之讀者를 如今之云也니라 且若如此면 則其上에 本未須說以直養而無害오 其下에 亦不須更說是集義所生矣니 今乃連排三句9)只是一意오 都無向背彼此之勢 則已甚重複而太繁冗矣라 而其中間一句10)는 又如此其暗昧而不分明하고 如此其散緩而無筋骨하니 依以誦說에 使人迷悶하야 如口含膠漆 不可呑吐라 竊意孟子胸中이 明快灑落하야 其發於言語者는 必不至於如此之猥釀而紕繆也니라
또 그 위에서 이미 ‘그 기(氣)됨이’라고 말하여 말을 시작하고 그 아래에 다시 ‘이것이 없으면 주린 듯하다’고 말하여 이를 이어 받았으니, 곧 이른 바 ‘이것’이 참으로 기(氣)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만약 이 기(氣)가 없으면 주린 듯하다는 뜻이다.
만약 그대의 말대로 ‘이것’이 도의를 가리켜 ‘만약 이 도의가 없으면 기가 주린 듯하다’는 뜻일 것 같으면 맹자가 이에 또한 마땅히 별도로 몇 구절의 말을 더하여 이 뜻의 곡절을 상세히 말할 것이요, 이 같이 글을 거꾸로 하고 뜻을 뒤집어 이같이 후세의 독자를 의혹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만약 그대의 말대로 라면 그 위에 본래 ‘곧음으로써 기(氣)를 길러 해치지 않으면’이란 말이 다시 필요없을 것이며, 또 아래에 ‘이는 오래도록 의리를 쌓아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다시 필요 없을 것이다.
지금 그대와 같이 곧 세 구절을 이어 한 문장으로 보아 다만 하나의 뜻으로 파악하여 향배피차(向背彼此)의 세(勢)가 없다면 이는 문세(文勢)가 너무 번거로이 중복되고 용렬하며 또 그 중간의 한 구절이 이같이 의미가 어두어 불분명하며 산만하여 뼈대가 없어 이를 읽음에 사람을 흐릿하게하여 아교나 옻을 머금은 듯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것같으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맹자의 가슴 속이 명쾌쇄락(明快灑落)하여 그 말한 것이 반드시 이같이 잡되고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註解】
1) 程子…感通(정자…감통) : 여여숙(呂與叔)이 이천(伊川)에게 묻기를 “선생이 무릇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고 하니 그러면 미발(未發) 전에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까” 하니 이천이 말하기를 “무릇 마음은 이발(已發)이라고 한 말은 잘못되었다. 마음은 하나이니 체(體)를 말할 것같으면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것이고 용(用)을 말할 것같으면 감이수통천하지고(感而遂通天下之故)가 이것이다. 오직 그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뿐이다.”고 함.
2) 問者…之問(문자…지문) : 소계명(蘇季明)이 묻기를, “미발지전에 중(中)을 구할 수 있습니까” 하니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불가하다. 이미 구하려고 하면 이는 생각하는 것이니 이미 생각을 하면 곧 이는 이발(已發)이니 화(和)라고 하지 중(中)이라 하지 않는다.” 또 묻기를 “여학사가 미발지전에 중(中)을 구해야 한다 하니 어떻습니까.” 하니 “존양(存養)은 가하지만 구중(求中)은 불가하다.”고 답함. 또 묻기를, “미발지전에는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평일에 함양공부를 해야 한다.”고 답함. 또 묻기를 “당중지시(當中之時)에 귀는 들음이 없고 눈은 봄이 없는 것입니까.” 하니 “비록 귀는 들음이 없고 눈은 봄이 없지만 보고 듣는 능력은 처음부터 이에 있는 것이다.”고 답함.
3) 引惹他(인야타) : 타는 계명(季明)이다.
4) 前後差舛(전후차천) : 전에는 귀는 들음이 없고 눈은 봄이 없다하고 뒤에는 귀는 반드시 듣고 눈은 반드시 본다 하였음.
5) 彊以…之實(강이…지실) : 귀는 반드시 들을 수 있고 눈은 반드시 볼 수 없음은 실로 미발 경계의 일이거늘 자약(子約)이 억지로 이발(已發)이라하여 미발 경계를 침과함.
6) 許渤持敬(허발지경) : 허발이 그 아들과 창을 격하고 잠을 자는데 그 아들의 독서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니 선생이 “ 이 사람의 지경(持敬)이 대단하구나” 하고 그 아래에 주석을 함.
7) 賓主向背(빈주향배) : 기(氣)가 주이고 도의는 빈이며 기(氣)가 향이고 도의는 배임.
8) 孟子…勢也(맹자…세야) : 지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논하니 기(氣)가 당연히 주이다. 이 때문에 기(氣)를 위주로 말하는데 자약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의를 위주로 말하니 선생이 이 말로써 깨우치는 것이다.
9) 連排三句(연배삼구) : “기위기야 배의여도 무시뇌야(其爲氣也配義與道無是餒也)” 이 세 구절을 이어 해석함. 곧 시(是)를 도의로 봄을 말함.
10) 中間一句(중간일구) : 배의여도(配義與道).
答劉季章
細看來書하니 方論董子功利之語하고 而下句所說曾無疑事1)는 卽依舊是功利之見이니 蓋天下只有一理하니 此是卽彼非오 此非卽彼是하야 不容幷立이라 故古之聖賢心存目見이 只有義理오 都不見有利害可計較하야 日用之問應事接物이 直是判斷得直截分明하고 而推以及人하니 吐心吐膽이 亦只如此하야 更無回互하니 若信得及2)이면 卽相與俱入聖賢之域이오 若信不及이라도 卽在我3)에 亦無爲人謀而不盡底心이니 而此理是非昭著明白하면 今日此人이 雖信不及이나 向候他人이 須有信得及底오 非但一時之計也라 若如此所論4)이면 則在我者에 未色視人顔色之可否하야 以爲語黙이니 只此意思何由能使彼信得及乎아 然此亦無它라 只是自家看得道義自不曾端的이라 故不能眞知是非之辨하고 而爲此回枉이니 不是說時病痛이라 乃是見處病痛也니라
답유계장(答劉季章)
보내온 서찰을 자세히 읽어보니 동자(董子)의 공리설(功利說)을 논하고 그 아랫 구절에 말한 증무의(曾無疑)의 일도 종전과 같은 공리의 견해인 것 같다. 대개 천하에 다만 한 도리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옳으면 저것이 옳지 않으며, 이것이 옳지 않으면 저것이 옳은 것이니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옛 성인이 마음에 두고 눈으로 보는 것이 다만 의리(義理)일 뿐이고 이해(利害)를 계교(計較)하지 않았으며, 일상 생활 중의 응사접물(應事接物)에도 판단이 자른 듯이 분명하고,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침에도 진실만을 말하여 의리에 합당하게 하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만약 성인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함께 성현의 구역에 들어갈 것이고, 비록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인 자신에게는 남을 위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 또 이치의 옳고 그름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니, 오늘 이 사람이 비록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훗일 다른 사람이 믿을 것이니, 성인의 마음은 비단 한 시대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핀 연후에 자신의 가부를 결정할 것이니 이러한 생각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믿도록 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 도의를 깨달음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진실로 볼줄 몰라서 이 같은 잘못이 있는 것이다. 이는 말할 때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견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註解】
1) 曾無疑事(증무의사) : 무의(無疑)가 진취에 급한 사람인데 계장(季章)이 이를 바로 나쁘다고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
2) 若信不及(약신불급) : 약은 수(雖)임.
3) 즉재아(卽在我) : 아(我)는 성현을 말함.
4) 所論(소론) : 계장의 공리지견(功利之見)을 말함.
答諸葛誠之
示喩競辯之端1)이 三復惘然이라 愚意比來深欲勸同志者는 兼取兩家之長하야 不可輕相詆訾오 就有未合2)이라도 亦且置勿論하고 而姑勉力於吾之所急이러니 不謂乃以曹表3)之故로 反有所激如來喩之云也라 不敏之故를 深以自咎나 然吾人所學喫緊著力妻는 正在天理人欲二者相去之間耳라 如今所論이 則彼之4)因激而起者니 於二者之間에 果何處5)也오 子靜平日所以自任이 正欲身率學者하야 一於天理오 而不以一毫人欲雜於其間이니 恐決不至如賢者之所疑也라 義理는 天下之公이라 而人之所見이 有未能盡同者니 正當虛心平氣하야 相與熟講而徐究之하야 以歸於是乃是吾黨侍責이어늘 而向來講論之際에 見諸賢往往皆有立我自是之意하야 厲色忿詞는 如對仇敵하야 無復長少之節禮遜之容하니 盖嘗竊笑以爲正使眞是仇敵이라도 亦何至此리오 但觀諸賢之氣方盛이라 未可遽以片辭取信일새 因黙不言하야 至今常不滿6)也리니 今因來喩하야 輒復陳之하노라
답제갈성지(答諸葛誠之)
그대가 육자정(陸子靜)의 문인과 다투어 변론한 단서를 세 번 반복해 읽어보니 마음이 망연자실(惘然自失)하다. 근래에 내 뜻은 동지들이 양가(兩家)의 장점을 겸취(兼取)하여 가벼히 서로 헐뜯지 말기를 바랐다. 가령 서로 견해가 합치하지 않을 경우에라도 잠시 접어두고 논쟁하지 말고 우선 자신의 급한 곳부터 힘쓰기를 바랐는데, 뜻밖에도 내가 지은 조표(曺表)로 인하여 그대의 말과 같이 서로 격돌함이 있었으니 내 불민(不敏)의 소치를 심히 자책하는 바이다.
우리가 긴요하게 힘붙여 공부해야 할 곳은 그야말로 천리와 인욕을 판별하는데 있으니, 지금 말하는 저들이 격분해 일어나는 것이 과연 천리 때문인가 인욕 때문인가. 자정(子靜)이 평일에 자임(自任)하는 것이 학자를 인도하여 천리에 전념하고 털끝 만한 인욕도 그 사이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이니 아마 결코 그대가 의심하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기(公器)로되 사람마다 보는 바가 꼭 같지 않으니, 마땅히 허심평기(虛心平氣)하여 서로 익히 공부하여 서서히 연구하여 의리에 도달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거늘, 이전에 강론할 때에 보니 제현(諸賢)들이 왕왕 입아자시(立我自是)의 마음이 있어 여색분사(厲色忿詞)하여 마치 원수를 대하듯 하여, 장소(長少)의 차례와 예손(禮遜)의 용태가 없으니 혼자 웃으며 참으로 원수라도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제현이 기(氣)가 왕성할 때이고 한쪽 말 만 듣고 바로 믿을 수도 없고 하여 침묵을 지키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음이 편치 않아 그대의 서찰을 받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註解】
1) 競辯之端(경변지단) : 육문인과 주문인 간의 경변의 단서.
2) 就有未合(취유미합) : 취는 가령임.
3) 曺表(조표) : 조립(曺立)의 묘표. 조립이 육자정에게 수학하고 만족하지 못하여 뒤에 남강에서 장경부(張敬夫) 유문(遺文)을 보고 정론(定論)을 알았다는 내용.
4) 彼之(피지) : 육문(陸門)임.
5) 果何處(과하처) : 인욕에 처했다는 말.
6) 常不滿(상불만) : 제현들의 말을 다 믿을 수 없어 말하지 않았지만 육자정 문인들의 소위(所爲)에 불만이 있었다는 말.
答王季和1)
學者之志 固不可不以遠大自期나 然觀孔門之敎니 則其所從言之者는 至爲卑近이라 不過孝弟忠臣持守誦習之間이오 而於所謂學問之全體엔 初不察察言之也라 若其高第弟子은 多亦僅得其一體니 부以夫子之聖諸子之賢으로 其於道之全體에 豈不能一言盡之하야 以相授納2)하고 而顧爲是拘拘者하야 以狹道之傳畵人之志는 何哉오 盖所謂道之全體 雖高且大나 而其實이 未嘗不貫乎日用細微切近之間이니 苟悅其高而忽於近하며 慕於大而略於細면 則無漸次經由之實이오 而徒有懸想跂望之勞니 亦終不能以自達矣라 故聖人之敎는 循循有序하야 不過使人反而求之至近至小之中博之以文하야 以開其講學之端하고 約之以禮하야 以嚴其踐履之實 使之得寸則守其守得尺守其尺 如是久之日滋月益 然後道之全體乃有所鄕望 而漸可識이오 有所循習하야 而漸可能이라 自是而往俛焉孶孶하야 斃而後已오 而其所造之淺深所就之廣狹이 亦非可以必詣3)而預期也라 故夫子嘗謂先難後獲爲仁이라하시고 又以先事後得4)爲崇德히시니 盖於小差면 則心失其正이라 雖有鑽堅仰高5)之志하고 而反爲謀利計功之私矣니 仁何自而得이면 德何自而崇哉아 聊誦所聞하야 以答下問之意하노니 至於菴記大字之需는 則非學之急이오 亦老懶之所不暇也니라
답왕계화(答王季和)
학자(學者)는 뜻을 원대(遠大)하게 가져야 하나, 공문(孔門)의 가르침을 보건대 그 좇아서 말하는 바가 지극히 비근하여 효제충신(孝弟忠信)과 지수송습(持守誦習) 따위에 지나지 않고, 이른바 학문 전체에는 처음부터 세세히 말한 것이 없었으니, 그 우수한 제자들도 모두 도(道)의 한 체단(體段)을 겨우 터득한 정도이다. 부자(夫子)의 성(性)과 제자의 현(賢)으로써 도(道)의 전체에 어찌 한 말로 다하여 서로 주고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처럼 구구(拘拘)한 말을 하여, 도의 전수(傳授)를 좁게 하고 사람의 뜻을 한정하였으니 무슨 까닭일까.
대개 도(道)의 전체란 것이 비록 높고 크나 실은 일용의 작고 절근한 일에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만약 그 높은 것을 좋아하여 비근한 것을 소홀히 하며, 큰 것을 사모하여 작은 것을 소홀히 한다면, 차례와 경유(經由)의 실상은 없고 한갓 현상(縣想)과 기망(跂望)의 수고로움만 있을 것이니 끝내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이 순순한 차례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돌이켜서 도를 구하게 하고,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학(文學)으로써 견문을 넓혀 그 강학의 단서를 열고, 예로써 그 행실을 구속하여 그 실천의 내실을 엄정하게 하며, 일촌(一寸)을 얻으면 일촌은 지키고 일척(一尺)을 얻으면 일척을 지키게 하여, 이를 오래 지속하여 일취월장하게 하여 그러한 뒤에 도의 전체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하니, 차례대로 익혀 점점 유능하게 하여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 부지런히 힘써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게 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그 진보(進步)의 천심(淺深)과 성취(成就)의 광협(廣狹)도 꼭 지적하여 예기(預期)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자(夫子)께서 일찍이 선난후획(先難後獲)을 인(仁)이라 하고 선사후득(先事後得)을 숭덕(崇德)이라 했으니, 대개 이에 조금만 어긋남이 있어도 마음이 그 바름을 잃어 비록 찬견앙고(鑽堅仰高)의 뜻이 있다 하더라도, 도리어 모리계공(謀利計功)의 사욕(私欲)에 빠지고 말 것이니, 인(仁)을 어떻게 얻으며 덕을 어떻게 높이겠는가. 작으나마 들은 바를 말하여 하문(下問)의 뜻에 답하는 바이다. 현판의 큰 글자를 써 달라고 요구하나 이는 학자의 급한 일이 아니요, 늙고 게으른 몸이라 이를 쓸 겨를도 없으니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註解】
1) 王季和(왕계화) : 선생의 우수한 제자임.
2) 授納(수납) : 수수(授受)와 같음.
3) 必詣(필예) : ‘예’는 ‘지(指)’로 고쳐야 함.
4) 先事後得(선사후득) : ������논어������ 「안연(顔淵)」편에 번지가 숭덕(崇德)을 물으니, 공자가 선사후득이라 답함. 선생이 선난후획과 같으니,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그 결과는 헤아리지 않으면 덕이 날마다. 쌓일 것이라고 주함.
5) 鑽堅仰高(찬견앙고) :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뜻. ������논어������ 찬지미고 앙지미견 ?
答路德章1)
示喩縷縷는 備悉이나 然其大槪皆自恕之詞니 以此存心이 亦無惑乎德之不進而業之不脩也라 吾人爲貧이 只有祿仕一途可以苟活이라 無害於義니 彼中2)이 距臨安3)不遠하니 豈不能一爲參選4)計하고 而長此羈旅乎아 此則未論義理오 而只以利害計之라도 亦未得爲是也니라 大抵是日前爲學이 只是讀史傳說世變이오 其治經이 亦不過是記誦編節이라 向外意多하야 而未嘗反躬內省하야 以究義理之歸라 故其身心放縱하며 念慮粗淺하야 於自己分上에 無毫髮得力處하니 此亦從前師友5)與有責焉이로대 而自家受病이 比之它人에 尤更重害니 此又姿稟이 不美而無以洗滌變化之罪也라 今日正當痛自循省하야 向裏消磨라야 庶幾晩節에 救得一半이어늘 而一向如此苟簡自恕하야 若不怨天이면 卽是尤人이니 殊非平日所望於德章者也로다 來喩每謂熹有相棄之意6)라하니 此亦尤人之論이라 區區所以苦口相告는 正爲不忍相棄이니 若已相棄면 便可相忘於江湖7)니 何至如此忉怛8)하야 愈增賢者忿懟不平之氣耶아
답노덕장(答路德章)
모내온 서찰은 길고 길어 모든 것을 다 말하였으나 그 대개는 모두 자신에게 관대한 말 뿐이다. 이 같은 마음으로는 덕이 진취하지 못하고 사업이 성취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대가 지금 생활이 빈궁하니 오직 출사(出仕)의 길만이 살길이요, 또 이것이 의리(義理)를 해치는 이리도 아니다. 그대가 살고 있는 곳이 임안(臨安)과 거리가 멀지 않으니 어찌 한 번 과거에 응시해보지 않고 오래도록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것은 의리상으론 말랄 것도 없고 이해 상으로도 결코 옳은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대개 지금까지의 그대의 공부가 다만 역사전기를 읽고 세태의 변화를 논하는 정도였고 경서(經書)의 공부도 몇몇 구절을 외우는 정도였다. 또 밖으로 향하는 뜻은 많고 자신에 돌이켜 내면을 반성하여 의리를 탐구하는 공부는 소홀히 하여 그 몸과 마음이 방종하고 사려가 깊지 못하여 자신의 본분에는 힘을 쓰지 못하니 이는 종전의 그대의 사우에게도 책임이 있겠지만, 그대의 결점이 다른 사람보다 더욱 큰 것은 그대의 자품(資品)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닌데다 이를 깨끗이 씻어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통열히 자신을 반성하여 내면을 깨끗이 하면 늦으나마 조금 나아질 수 있겠지만, 시종여일 이같이 구차하게 자신에게 관대하여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허물을 돌리니, 내가 평소에 덕장(德章)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보내온 서찰에서 내가 그대를 버리는 뜻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남을 원망하는 말이라 하겠다. 내가 입이 아프도록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그야말로 그대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를 버린다면 이는 곧 강호(江湖)에서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이같이 마음 아프게 그대의 분하고 평정치 못한 심기를 더욱 부채질 하겠는가.
只今可且捺下身心9)하야 除了許多閑說話多方擘畫10)去參了11)却하야 授一本等12)合入差遣13)이어든 歸來討一歇泊處14)하야 將論語孟子正文端坐熟讀하야 口誦心惟에 雖已曉得文義나 亦須逐字討過하야 洗滌了心肝五臟裏 許多忿憾怨毒之氣하야 管取15)後日에 須有進步處면 不但爲今日之路德章而已也라 向見伯恭說少時性氣粗暴하야 嫌飮食不如意하야 便敢打破家事16)러니 後因久病하야 只將一冊論語 早晩閑看이라가 忽然覺得意思는 一時平了하야 遂終身無暴怒라하니 此可爲變化氣質之法이라 不知平時曾與朋友說及此事否아 德章從學之久에 不應不聞이니 如何全不學得些子오 是可謂不善學矣로다
지금 그대는 울분을 억누르고 쓸데없는 주장과 모책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버려, 합당한 벼슬 자리를 얻어 한곳에 정착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논어������ ������맹자������를 숙독(熟讀)하고 열심히 사색하여, 비록 이미 글 뜻을 아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자 한자 검토해 나가 마음 속의 허다한 분함과 원망을 씻어내어 훗일을 기다릴 것이니 이렇게하여 진보하는 곳이 있으면 지금의 덕장(德章)이 아닐 것이다.
전에 백공이 말하기를,
“소시(少時)에 성품이 거칠어 음식이 마음에 맞지 않을 경우에 곧 잘 가구를 부수고 하였는데 어느 날 지병(持病)으로 ������논어������ 한 권을 들고 아침 저녁 조용히 읽었더니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껴 드디어 죽을 때까지 불쑥 화내는 일이 없었다.”
고 하니, 이것이 그야말로 기질을 변화시키는 좋은 예인 것이다.
평시에 붕우들과 이일을 서로 이야기 해본 적이 없는지 모르겠다. 덕장(德章)이 백공(伯恭)을 따라 배운지 오래되었으니 이 말을 듣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니 어찌 이를 배우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이는 그야말로 잘 배우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註解】
1) 路德章(노덕장) : 여동래(呂東萊)의 문인.
2) 彼中(피중) : 덕장이 사는 곳.
3) 臨安(임안) : 경사(京師).
4) 參選(참선) : 인재 선발에 참여하다.
5) 從前師友(종전사우) : 덕장이 동래를 따라 배움.
6) 相棄之意(상기지의) : 덕장이 선생이 자기의 결점을 매우 배척한다고 생각함.
7) 相忘於江湖(상망어강호) : ������장자(莊子)������에 “샘이 마르면 물고기가 함께 마른 땅에서 서로 습기로써 숨을 쉬고 거품을 내어 서로 젖게 하니, 이는 강호에서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함.
8) 忉怛(도달) : 조심하고 슬퍼함.
9) 捺下身心(날하신심) : 분울(憤鬱)한 마음을 누르다.
10) 擘畫(벽획) : 경영규획(經營規畫).
11) 去參了(거참료) : 참선(參禪)을 버리다. 제료(除了)의 뜻이 여기까지 이름.
12) 本等(본릉) : 본품(본品).
13) 合入差遣(합입차견) : 상당차견(相當差遣).
14) 討一歇泊處(토일헐박처) : 안돈처를 구함.
15) 管取(관취) : 영득(領得). 얻음.
16) 打破家事(타파가사) : 가사는 가구(家具)임.
答趙幾道
昔時讀史者는 不過記其事實摭其詞采하야 以供文字之用而已러니 近世學者1)는 頗知其陋하고 則變其法하야 務以考其形勢之利害事情之得失하고 而尤喜稱史遷之書하야 講說推尊에 幾以爲賢於夫子라하야 寧舍論孟之屬而讀其書나 然嘗聞其說2)之一二하니 不過只是戰國以下見識이라 其正當處는 不過知尊孔氏나 而亦徒見其表하야 悅其外之文而已니 其曰折衷於夫子3)者는 實未知所折衷也라 後之爲史者는 又不及此4)라 以故讀史之士는 多是意思粗淺하야 於義理之精微에 多不能識하고 而墮於世俗尋常之見以爲雖古聖賢亦不過審於利害之筐而已라하니 唯蘇黃門이 作古史序篇首에 便言古之聖人이 其必爲善이 如火之必熟水之必寒이오 不爲不善이 如騶虞5)之不殺竊脂6)之不穀이라하야 於義理大綱寧處에 見得極分明 提得極親切하니 雖其下文7)이 未能盡善이나 然只此數句는 已非近世諸儒所能及矣라 惜其從初爲學功夫는 本無次序라 不曾經歷하야 不能見得本末 一一諦當이오 只其資質恬靜하야 無他外慕라 故於此大頭段處에 窺測得箇影響하니 到此地位에 正好著力이어늘 却便墮落釋老門戶中去하고 不能就聖賢指示處 立得脩己治人正當規模하야 以見諸事業傳之學者하고 徒然說得此箇意思오 而其意之所重이 終止在文字言語之間이라 其徒8)는 雖極力推尊之나 然竟不曾有人이 能爲拈出此箇話頭9)하야 以建立宗旨者니 亦可恨也로다
답조기도(答趙幾道)
옛날에 ������사서(史書)������를 읽는 사람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그 시문을 발췌하여 작문의 자료로 쓰는데 불과하였으나, 근세의 학자들은 그 비루한 사실을 조금 알면 곧 자기가 지켜온 법도를 변개하고 그 형세의 이해(利害)와 사정의 득실(得失)을 고구(考究)하는데 힘쓰며, 또 사마천(史馬遷)의 ������사기(史記)������를 더욱 칭찬하여 이를 강설하고 사마천을 추존하기를 거의 부자(夫子)보다 훌륭하다 하여, 차라리 ������논어������, ������맹자������를 버릴지언정 사마천의 ������사기������는 버릴 수 없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마천이 논설한 것을 한, 두 가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식견이 전국(戰國) 시대 이후의 공리주의나 패권주의에 불과하였다. 그 정당하다는 곳도 공자를 추존(推尊)할 줄 아는데 불과하여 그 거죽만 보고 그 외면의 문채만 좋아할 뿐이었고, 그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에 따랐다고 말하는 것도 실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으며 후세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또한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사서(史書)������를 읽는 학자가 모두 생각이 깊지 못하여, 의리의 깊은 곳에는 자세히 알지 못하고 심상(尋常)한 세속의 견해에 빠져서 비록 옛 성현이라 하더라도 이해(利害)를 살필 뿐이라고 말한다. 오직 소황문(蘇黃門)이 ������고사서(古史序)������를 지어 말하기를,
“옛 성인이 선(善)을 행함이 불이 뜨겁고 물이 찬 것과 같고 불선(不善)을 행하지 않음이 추우(騶虞)가 생물을 먹지 아니하고 절지(竊脂)가 곡식을 먹지 않는 것과 같다.”
고 하였으니, 그가 의리(義理)의 강령처(綱領處)에 깨달은 것이 매우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 지극히 친절하다 하겠다. 비록 그 아래 구절이 진선(盡善)하지는 못한 것이나 이 말은 근세의 제유(諸儒)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시초의 공부가 본래 차례가 없고 전 과정을 두루 거치지 못해, 본말의 중요한 핵심을 깨닫지 못했으며, 다만 그 자질이 평온하고 조용하여 외면을 연연해 하지 않은 까닭으로 의리의 대강령처에 그 비슷한 모습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그가 이러한 대강령처에 도달하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도리어 곧 석노(釋老)의 문호(門戶)에 떨어져버렸다. 그리하여 성현이 지시한 입덕(立德), 수기(修己), 치인(治人)의 정당한 법규에 나아가지 못했을 뿐아니라 이를 사업에 실현하고 학자에 전하지 못했다. 또 공연히 ������고사서(古史序)������와 같은 말만하고 그 뜻 둔 바는 오히려 문자 언어에만 그쳤으니, 그를 따르는 학도들이 비록 그를 극력 추존하였으나 끝내 누구도 그의 ������고사서문������에 있는 말을 꺼집어 내어 이를 종지(宗旨)로 삼는 사람이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註解】
1)近世學者(근세학자) : 이하 모두 동래 문하(東萊門下)의 사학(史學)의 폐단을 가리킨다.
2) 其說(기설) : 기서 기설은 모두 사마천을 가리켜 말함.
3) 折衷於夫子(절충어부자) : 사마천의 말이다.
4) 又不及此(우불급차) : 차는 절충어부자임.
5) 騶虞(추우) : 짐승 이름. 호랑이와 비슷한데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고 꼬리가 몸둥이보다 길며 생초를 밟지 않고 생물을 먹지 않는다 함.
6) 竊脂(절지) : 새 이름. 곡식을 먹지 않는다 함.
7) 雖其下文(수기하문) : 불곡(不穀) 아래의 글.
8) 其徒(기도) : 황문의 무리.
9) 此箇話頭(차개화두) : 위 ������사서(史序)������에 말한 몇 구절.
答葉正則1)
向來相見之日甚淺하대 而荷相與之意甚深이러니 中間寓舍2)에 並坐移晷하야 觀左右之意若欲有所言者하대 而竟囁嚅3)不能出口하고 前後書䟽往來에 雖復少見鋒穎나 而亦未能彼此傾倒하야 以求實是之歸하고 但見士子傳誦所著書 及答問書尺에 類多籠罩包藏之魚4)하야 不唯它人所不解하야 意者左右는 亦自未能曉然於心而無所疑也로다 世衰道微5)에 以學爲諱하야 上下相徇에 識見議論이 日益卑下하니 彼旣不足言矣어니와 而吾黨之爲學者는 又皆草率苟簡하야 未曾略識道理規模功夫次第하고 便以己見으로 摶量湊合하야 撰出一般說話하야 高自標置하야 下視古人하대 及考其實하얀 則全是含胡6)影響7)之言이오 不敢分明道著實處하니 竊料其心豈無所疑이언마는 只是已作如此聲勢라 不可復謂有所不知라하야 遂不免一向自瞞8)하야 彊作撑拄 且要如此鶻突9)將去하니 究竟成就得何事業이라면 未論後世하니 只今日旁觀에 便須有人識破하대 未論它人하고 只自家方寸이 如何得安穩耶아
답섭정칙(答葉正則)
지난날 그대와의 교우가 일천(日淺)한데도 나를 생각하는 그대의 뜻이 매우 깊어 객사에 마주 앉아 하루 해를 다 보내며 담론에 열중하였다. 그대의 뜻을 보건대 무슨 할 말이있을 것 같으면서도 끝내 머뭇머뭇하고 입밖에 말을 내지 않더니, 사자(士子)가 전한 그대의 저서와 전후로 왕래한 서신에서 비록 조금 그 단서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또한 서로의 마음 속을 다 털어놓아 온당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대의 저서와 문답한 서신에서 다소 포괄적이고 모호한 말을 볼 수 있었으니, 이는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각건대 그대 자신도 의혹없이 마음에 밝게 깨닫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세쇠도미(世衰道微)하여 학자들이 학문하기를 꺼리고 상하가 모두 이에 따라 식견과 의론이 날로 비하해지니, 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편의 학문을 하는 자도 또한 거칠고 등한하여, 도리 법규와 공부 절차를 알지 못하고, 곧 자기의 견해로 사물을 헤아려 단정하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워 높이 걸고 고인을 하시(下視)하되, 그 실상을 고찰해본즉 모두 모호하고 사이비 말이요, 착실한 곳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 속을 헤아려 보건대 어찌 스스로 의문이 없으리오 마는, 이미 자기를 높이고 고인을 하시(下視)하는 형세를 취하였으니, 다시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드디어 한 길로 스스로를 속여 무리하게 버티어 나가니, 이같이 모호한 태도로 무슨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후세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당장 이 실상을 알아 낼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마음 속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如來書所謂在荊州10)無事하야 看得佛書하니 乃知世外瓌奇之設이 本不能與治道相亂이니 所以參雜辨爭은 亦是讀者 不深考爾라하니 此殊可駭라 不謂正則이 乃作如此語話也하라 中間得君擧書하니 亦深以講究辨切11)爲不然하니 此盖無他라 只是自家는 不曾見得親切端的하야 不容有毫釐之差處라 故作此見耳라 欲得會面하야 相與劇談하노니 庶幾彼此盡情吐露하야 尋一箇是處하야 大家講究到底12) 大開眼看覰大開口說話 分明去取直截剖判이오 不須得如此遮前掩後에 似說不說하야 做三日新婦子模樣이 不亦快哉아 孟子自許雖行覇王之事나 而不動其心하시니 究其根源13)에 乃只在識破詖淫邪遁四種病處어늘 今之學者는 不唯不能識此라 而其所做家計窠窟이 乃反在此四種病中하니 便欲將此見識判하야 斷古今議論聖賢이 豈不誤哉아 相望千里에 死亡無日이라 因書聊復一言하니 不審明者以爲如何오 然勿示人하라 恐又起鬧하야 無益而有損也사일까하노라
보내온 서찰에서 그대가 말한
“내가 행주에 있을 때에 불서(佛書)를 보고 세상 밖 괴기지설(/奇之說)이 본래 오학(吾學)의 치도(治道)와 다름이 없고, 유불(儒佛)의 변쟁(辨爭)은 독자가 깊이 고찰하지 못했기 때움임을 알았다.”
는 말 같은 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정칙(正則)이 이러한 말을 할 줄은 정말 뜻밖이다. 그 사이에 군거(君擧)의 글을 보니 또한 유불의 변별(辨別)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다. 이는 다름 아니라 자신이 털끝 만한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절실하고 정확한 곳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된 것 같다. 한 번 만나 함께 격론하여 서로의 진정을 털어놓고 옳은 곳을 찾아 크게 강구하고 크게 개안하며 크게 설화하여 거취(去取)를 분명히 하고 판단을 똑바로 하여 이같이 앞뒤가 가려 덮이고 그런 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아 삼일신부(三日新婦) 같은 애매한 모습을 타파하는 것이 또한 통쾌한 일이라 할 것이다. 맹자가 스스로 경상(卿相)의 지위를 얻어 패왕(覇王)의 업을 이룰 수 있다 하더라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다고 한 것을 그 부동심의 근원에 피음사둔(詖淫邪遁)의 네 가지 병통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거늘, 지금의 학자는 이 네가지 병통을 알아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치우친 편견이 곧 이 네 가지 병통 안에 있고, 또 이 식견으로 고금을 판단하고 성현을 논의하려 하니 어찌 잘못이 심하다 아니겠는가. 서로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고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아 그대의 서신을 받고 한마디 제언하니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을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기 바란다. 아마 또 시끄럽기만 하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다.
【註解】
1) 葉正則(섭정칙) : 영가인(永嘉人). 순희(淳熙) 년간에 진사에 급제, 화려한 관직을 역임함. 경제(經濟)로 자부. 선생을 위해 변무(辨誣), 관직이 보모각(寶謨閣) 학사에 이름. 수심집(水心集)이 있음.
2) 寓舍(우사) : 여관.
3) 즙즙(즙즙/) : 말을 하고 싶어나 하지 못하는 모습.
4) 籠罩包藏之語(농조포장지어) : 농조는 가리임. 어설프게 포괄적이어서 의미가 불분명한 말.
5) 世衰道微(세쇠도미) :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미함.
6) 含胡(함호) : 함호(含糊)와 같음. 모호함.
7) 影響(영향) : 그림자와 울린 소리. 곧 실체가 아님.
8) 自瞞(자만) : 자기(自欺).
9) 鶻突(골돌) : 불분명한 모양.
10) 在荊州(재형【註解】 : 정칙이 무창군 절도판관(節度判官)이었음. 무창이 곧 형주이다.
11) 辨切(변절) : 유불의 변절.
12) 到底(도저) : 다하다.
13) 究其根源(구기근원) : 그 부동심의 근원을 보건대.
答楊志仁1)
兩書所喩存養功夫는 甚喜甚慰로다 固地他人이 不能如此著實用工이어니와 但此亦且是依本分事2)니 正不須把來作奇特想3)이라 只合趂此心地明淨處大著胸懷하야 將世間道理 精粗表裏 從豆至尾 理會一番하야 交他4)眞箇通透無疑礙處라하야 方是向進이니 若只守此些箇5)하야 不敢放開하니 每看義理에 亦只揀取玄妙高遠無形無象處 方肯理會如此면 則遂成偏枯倒向一邊하야 將爲有體無用之學하야 而與老佛로 無以異矣리라 所論理氣先後等說이 正坐如此6)라 怕說有氣에 方具此理라하면 恐成氣先於理하니 何故却都不看有此理後方有此氣오 旣有此氣然後此理有安頓處니 大而天地 細而螻蟻 其生皆是如此하니 又何慮天地之生 無所付受耶아 要之理之一字를 不可以有無論이니 未有天地之時에 便已如此了也니라 張子說得7)費力이오 惟是太極通書數章8)이 說得極分明하고 熹解得又極分明하니 可更子細看이니 便自見得也리라
답양지인(答楊志仁)
두 서찰에서 말한 그대의 존양 공부(存養功夫)에 대한 열정은 매우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다른 사람은 이같이 착실히 힘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존양 공부 또한 본분(本分)상의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힘써야 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종래의 비상하고 기특한 상념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마땅히 이 마음의 명정처(明淨處)를 좇아서 가슴을 크게 열고 세간의 일용 도리의 정조표리(精粗表裏)를 철저히 이해하여 막히고 의혹되는 곳이 없게 꿰뚫어 통하면 비로소 앞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존양 공부에만 매달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매양 의리(義理)를 이해함에 현묘고원(玄妙高遠)하고 무형무상(無形無象)한 곳만 취하여 즐겨 이해하려 한다면 드디어는 한편으로 치우쳐 장차 체(體)는 있고 용(用)이 없는 학문이 되고 말 것이니 노불(老佛)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이기선후(理氣先後) 등의 설은 그야말로 현묘 고원한 것을 좋아함으로 인하여 기(氣)가 있고 난 다음에 이(理)가 이에 갗추어 진다고 말하는 것 같으니, 아마 기(氣)가 이(理)보다 먼저라는 설을 세우는 것 같다. 어찌하여 이 이(理)가 있고난 뒤에 이 기(氣)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 기(氣)가 있고 난 뒤에 이 이(理)가 머무를 곳이 있다고 한다면 크게는 하늘과 땅 작게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그 태어남이 모두 기(氣)가 먼저일 것이니, 또 하늘과 땅이 생겨남이 어찌 그 품부받은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요컨대 이(理)라는 것은 있다 없다를 가지고 말할 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이 같은 이(理)가 있었던 것이다. 장자(張子)가 이를 힘써 태극(太極)이라 했고 주자(周子)가 ������통서(通書)������에서 여러 장에 걸쳐 이를 분명히 말하였으며, 나의 풀이가 또 지극히 분명하니 다시 자세히 읽어보면 이(理)가 기(氣)보다 먼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浩然之氣는 若據孟子所言이면 卽合儘就粗處看이오 不須如明道先生之說9)이라 若欲理會明道先生說底면 //칙역지합취일용간已身上回頭識取오 不須如此說作費力也니라 日月至焉은 若說顔子卽誠不可如此說이라하면 今旣明言回也는 其心이 三月不違오 其餘則但能如此면 則其功夫疏密久近을 較然可見이니 何爲而復有此疑耶아 且曰非本文之義ㄴ댄 則未知以本文之義爲當如何耶아 至德之論10)은 又更難言이니 論語中只有兩處하니 一爲文王而發이시니 則是對武王誓師而言이오 一爲泰伯而發이시니 則是對太王剪商而言이니 若論其志면 則文王固高於武王이오 而泰伯所處는 又高於文王이오 若論其事면 則泰伯王季文王武王이 皆處聖人之不得已에 而泰伯이 爲獨全其心하야 表裏無憾也라 不然이면 則又何以有武未盡善之嘆이며 且以夷齊爲得仁耶아 前此諸儒說到此處에 皆爲愛惜人情11)하야 宛轉回護하야 不敢窮究到底하니 所以更不敢大開口說하야 令人胸次憒憒하야 自欺自誑 此病이 不小하니 想賢者는 尤12)當疑駭하야 未敢以爲然13)也로다 然當更思之하야 若信未及이어든 卽且放下오 向後時提起하야 略一審玩이면 便自見得也리라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맹자의 말을 의거해 볼 것 같으면 마땅히 집의(集義)의 일로 볼 것이요, 명도 선생의 설과 같이 지경(持敬)의 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명도 선생의 설을 이해하려고 하면 마땅히 일용간 자기 신상에서 이해해야 하니 그대처럼 힘겹게 이론을 전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월지언(日月至焉)은 만약 안자(顔子)를 두고 말할 것 같으면, 진실로 그대와 같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지금 안자가 분명히
“저의 마음이 석 달은 인(仁)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으니, 그 나머지 안자의 공부의 소밀구근(疏密久近)은 밝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다시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가.
또 본문의 뜻이 그렇지 않다고 하니 본문의 뜻이 어떠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덕(至德)에 관한 논의는 말하기가 쉽지 않다. ������논어(論語)������ 중에 이를 논한 것이 두 군데 있으니, 하나는 문왕의 덕을 말한 것인데 무왕의 서사(誓師)와 비교하여 말한 것이고, 하나는 태백의 덕을 말한 것인데 태왕의 전상(剪商)과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 그 뜻을 말할 것 같으면 문왕이 무왕보다 높다 하겠고, 그 사업을 말할 것 같으면 태백 왕계, 문왕, 무왕이 모두 성인으로서 부득이한 사정이었고, 태백만이 그 마음 씀이 완전하여 표리가 유감이 없다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무는 진선(盡善)하지 못했다는 한탄이 있을 것이며 이제(夷齊)는 인(仁)을 얻었다는 말이 있겠는가. 선유(先儒)가 모두 이를 말할 때에 인정(人情)을 아껴 순하게 돌려 비호하여 말하고 철저히 궁구하여 다 말하지 않으니 이것이 크게 확실히 말하지 않음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고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까닭이니 이 병통이 작지 아니하다 할 것이다. 생각건대 그대는 이상과 같이 내 말을 의심하고 기꺼이 수긍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마땅히 다시 생각해볼 것이요 만약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그대의 종래의 생각을 잠시 접어 두고 향후 때때로 말을 제기하여 생각해보면 곧 스스로 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註解】
1) 楊志仁(양지인) : 호는 신재(信齋), 영주(寧州) 장계인(長溪人). ������가례잡설부주(家禮雜說附註)������ 두권, ������제례������ 14권의 저서가 있다. 선생 문인임.
2) 衣本分事(의본분사) : 본분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임.
3) 不須…特想(불수…특상) : 존양 공부를 비상하고 기특한 곳을 찾아서 해서는 안 된다는 말.
4) 交他(교타) : 교는 교(敎)와 같음. 타는 세간 도리를 말함.
5)守此些箇(수차사개) : 존양 공부를 가리킴.
6)正坐如此(정좌여차) : 차는 간취현묘고원처를 가리킴.
7) 張子說得(장자설득) : 태허(太虛)를 말미암아 천지의 이름이 있고 기허(氣虛)를 말미암아 도(道)의 이름이 있고 허(虛)와 기(氣)를 합하여 성(性)의 이름이 있고 성과 지각을 합하여 심(心)의 이름이 있다고 했으니 태허가 곧 이(理)이다.
8) 太極…數章(태극…수장) : ������통서������ 제 1장에 일음 일양을 도라하며 잇는 것이 선이며 이루는 것이 성이라 하고, 제 11장에 하늘이 양으로써 만물을 낳고 음으로써 만물을 이루니 생(生)은 인(仁)이요 성(成)은 의(義)라 하고 제 12장에 이기(二氣) 오행(五行)이 화생만물(化生萬物) 운운.
9) 明道先生說(명도선생설) : 맹자의 필유사언(必有事焉) 일단은 집의(集義)의 일로 말하였는데 명도는 지경(持敬)의 일로 옮겨 취하였음.
10) 至德之論(지덕지론) : 지인(志仁)이 공자가 태백과 문왕을 모두 지덕(至德)이라 하기 때문에 그 고하이동(高下異同)을 물었다.
11) 愛惜人情(애석인정) : 태왕․왕계․문왕․무왕을 태백과 같지 않다고 말하고자 아니한다는 말.
12) 尤(우) : 유(冘)로 고쳐야 함. 유(猶)와 통함.
13) 未敢以爲然(미감이위연) : 선생의 뜻을 수긍하지 않다.
答徐子融1)
有性無性2)之說은 殊不可曉라 伊川先生言性은 卽理也라하니 此一句는 自古無人敢如此道하니 心則知覺之在人而具此理者也라 橫渠先生 又言由太虛3) 有天之名 由氣化 有道之名 合虛與氣 有性之名 合性與知覺 有心之名이라하니 其名義는 亦甚密하야 蓋不易之至論也라 盖天之生物이 其理固無差別이나 但人物所稟이 形氣不同하니 故其心有明暗之殊 而性有全不全之異耳라 若所謂仁은 則是性中四德之首오 非在性外別爲一物하야 而與性並行也라 然唯人心至靈이라 故能全此四德하야 而發爲四端이오 物은 則旣偏駁而心昏蔽하야 固有所不能全矣라 然其父子之相親4)君臣之相統5)이 間亦有僅存而不昧6)者나 然欲其克己復禮以爲仁 善善惡惡以爲義는 則有所不能矣어니와 然不可謂無是性也니라 若生物之無知覺7)者는 則又其形氣偏中之偏者라 故理之在是物者는 亦隨其形氣하야 而自爲一物之理니 雖若不復可論仁義禮智之彷彿이나 然亦不可謂無是性也라
답서자융(答徐子融)
물(物)에는 성(性)이 있는 것이 있고 성(性)이 없는 것이 있다는 그대의 말은 자못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이천(伊川) 선생이 성(性)은 곧 이(理)라 하였으니, 이 한 구절은 예로부터 감히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다. 마음은 곧 지각(知覺)이 사람에 내재하여 이 이(理) 곧 성(性)을 갖춘 것이니, 횡거(橫渠) 선생이 또 말하기를
“태허(太虛)를 말미암아 하늘이라는 이름이 있고 기화(氣化/)를 말미암아 도(道)라는 이름이 있고 허ㅘ 기(氣)가 합쳐서 성(性)이라는 이름이 있고 성(性)과 지각(知覺)이 합쳐서 심(心)이라는 이름이 있다.”
고 하니, 그 정의(定義)가 또한 매우 자세하여 모두 고칠 수 없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대개 하늘이 만물을 낳음이 그 이(理)가 진실로 차별이 없지마는, 다만 사람과 동물이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형기(形氣)가 같지 아니한 까닭으로 그 마음이 밝고 어두움의 다름이 있고 성(性)이 완전하고 완전하지 못한 다름이 있으며, 이른바 인(仁)은 성(性) 중의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덕의 처음이니 성(性) 밖의 별도 일물(一物)이 되어 성과 병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직 사람만이 지극히 영묘하여 능히 네 덕을 온전히 보존하여 발하여 사단(四端)이 되고 동물은 기(氣)가 치우쳐 섞이고 마음이 어둡고 가리워져 진실로 온전하지 못한 바가 있다. 그러나 동물이 부자(父子)가 서로 친함과 군신(君臣)이 서로 통솔됨은 어쩌다 조금 가능하지만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인(仁)을 실행하고자 하고 선선오악(善善惡惡)하여 의(義)를 실행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동물이 성(性)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생물 가운데 지각이 없는 초목같은 것은 또 그 형기(形氣)가 치우쳐진 가운데 더욱 치우친 것이기 때문에 이 생물에 있는 이(理)는 또한 그 형기를 따라 스스로 일물(一物)의 이(理)가 되니, 비록 다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을 말할 수는 없으나 성(性)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又謂枯槁之物이 只有氣質之性하고 而無本然之性이라하니 此語尤可笑라 若果如此하면 則是物只有一性이오 而人却有兩性矣라 此語는 非常醜差8)니 盖由不知氣質之性이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이라 故隨氣質而自爲一性이니 正周子所謂各一其性者라 向使元無本然之性이면 則此氣質之性이 又從何處得來耶아 況亦非獨周程張子之言이 爲然이라 如孔子言成之者性9) 又言各正性命10)이 何嘗分別某物是有性底 某物是無性底하며 孟子言山之性水之性이 山水何嘗有知覺耶아 若於此看得通透면 卽知天下無無性之物이라 除是11)無物이라야 方無此性이니 若有此物이면 卽如來喩木燒爲灰人陰爲土12)는 亦有此灰土之氣니 旣有灰土之氣면 卽有灰土之性이라 安得謂枯槁無性也리오 但請虛心靜慮하야 詳味此說이면 當自見得이니 如看未透어든 卽且放下하고 就平易明白切實處하야 玩索涵養하야 使心地虛明 久之須自見得이니 不須如此信口信意13)하야 馳騁空言 無益於己하고 而徒取易言之罪也라 如不謂然인댄 則請子融方叔이 自立此論하야 以爲宗旨하라 熹亦安能必二公之見從耶아 至於易之說은 又別是一事니 今於自己分上見成易曉底物14)에 尙且理會不得이어든 何暇及此리오 當俟異日心虛氣平萬理融徹하야 看得世間文字言語無不通達이라야 始可細細商量이라 此等15)은 若理會不得이라도 亦未妨事니 且闕所疑하고 而徐思之니 不當便如此咆哮無禮也니라
또 말하기를,
“무생물은 다만 기질의 성만 있고 본연의 성은 없다.”
고 하니, 이 말은 더욱 우스운 말이다.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무생물은 한 성(性)만 있고 사람은 두 성(性)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대단히 큰 착오가 있으니 이 착오는 대개 기질(氣質)의 성(性)은 성이 기질 가운데 떨어져 기질을 따라 스스로 한 성(性)이 됨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그야말로 주자(周子)가 말한 바와 같이 만물은 각각 자기의 고유한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본래 본연의 성이 없었다면 기질의 성이 어디서부터 나왔겠는가. 더구나 또한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의 말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공자도 이루는 것이 성이라 했고 또 각정성명(各正性命)이라 했으니, 어찌 일찍이 분별하여 어떤 물(物)은 성이 있고 어떤 물(物)은 성이 없다고 했겠는가. 또 맹자도 산의 성 물의 성이라고 했으니 산과 물이 어찌 일찍이 지각이 있었겠는가. 만약 이 말을 투철히 이해하면 곧 천하에 성이 없는 물(物)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반드시 물(物)이 없어야 그 성(性)이 없으며 만약 물(物)이 있으면 그대의 말과 같이 나무가 타서 재가 되고 사람이 줄어 흙이 되더라도 또한 재와 흙의 기(氣)가 있으니, 이미 재와 흙의 기가 있으면 곧 재와 흙의 성이 있다. 어찌 무생물은 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마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해가 미흡하거던 잠시 내버려두고 평이하고 명백하며 절실한 곳에 나아가 생각하고 함양하여 마음이 텅비어 맑아지면 오래되어 반드시 스스로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니, 이 같이 입과 뜻가는 대로 공연한 말을 남발하여 자신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결과를 낳고 공연히 말을 쉽게 한다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내 말에 수긍할 수 없다면 자융(子融)과 방숙(方叔)은 무성지설(無性之說)을 세워 종지(宗旨)로 삼아라. 내 어찌 기필코 두 사람이 나를 따르기를 바라겠는가. ������주역(周易)������에 관한 설은 이는 별도의 일이니, 지금 자기 본분상의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일에도 이해가 부족하면서 어느 겨를에 ������주역������의 일을 이해하겠는가. 마땅히 훗일 허심평기(虛心平氣)하여 모든 이치에 형통하고 세간 언어 문자에 통달하거던 그 때에 자세히 생각해 볼 일이요, 또 이러한 이론은 이해가 부족하더라도 자기 본분상의 일에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으니 의문스러운 것은 남겨두고 서서히 생각할 일이요 이같이 포효하고 무례해서는 안될 것이다.
【註解】
1) 徐子融(서자융) : 연산인(鉛山人)
2) 有性無性(유성무성) : 자융이 성이 있는 물(物)이 있고 성이 없는 물이 있다고 함.
3) 太虛(태허) : ������정몽(正蒙)������에 태허는 이(理)라 하였다.
4) 父子相親(부자상친) : 호랑(虎狼)의 류.
5) 君臣之相統(군신지상통) : 벌과 개미의 류.
6) 僅存而不昧(근존이불매) : 호랑의 부자와 방의(방/義)의 군신(君臣).
7) 生物無知覺(생물무지각) : 초목을 말함.
8) 非常醜差(비상추차) :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말.
9) 成之者性(성지자성) : ������주역������ 「계사」의 말. 성(成)은 구(具)의 뜻.
10) 各正性命(각정성명) : ������주역������ 건(乾) 단사(彖辭)에 건도변화(乾道變化) 각정성명(各正性命)이라 함.
11) 除是(제시) : 수시(須是). 요지(要之)와 같은 뜻.
12) 人陰爲土(인음위토) : ������예기������의 말. 음(陰)은 묻힌다는 뜻.
13) 信口信意(신구신의) : 신은 임(任)의 뜻.
14)見成…底物(견성…저물) : 성(性)을 말함.
15) 此等(차등) : 성(性)과 역(易)을 말함.
答陳器之1)
性是太極渾然之體니 本不可以名字言이라 但其中含具萬理하야 而綱理之大者는 有四라 故命之曰하대 仁義禮智라하니 孔門未嘗備言이러니 至孟子而始備言之者는 盖孔子時性善之理素明이라 雖不詳著其條나 而說自具오 至孟子時하얀 異端蜂起하야 往往以性爲不善이라하니 孟子懼是理之不明 而思有以明之하대 苟但曰渾然全體라하면 則恐其如無星之秤2)無寸之尺하야 終不足以曉天下할새 於是別而言之하야 界爲四破而四端之說이 於是而立하니 盖四端之未發也에 雖寂然不動이나 而其中自有條理自有間架하야 不是儱侗都無一物이라 所以外邊纔感中間便應이니 如赤子入井之事는 感이면 則仁之理便應하야 而惻隱之心이 於是乎形하고 如過廟過朝之事는 感이면 則禮之理便應하야 而恭敬之心이 於是乎形하고 盖由其中間에 衆理渾具하야 各各分明이라 故外邊所遇는 隨感而應하니 所以四端之發이 各有面貌之不同이라 是以孟子析而爲四라하사 以示學者하야 使知渾然全體之中에 而粲然有條는 若此하니 則性之善을 可知矣라
답진기지(答陳器之)
성(性)은 태극(太極)의 혼연(渾然)한 실체이다. 본래 이름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로되 다만 그 안에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강리(綱理)의 큰 것이 넷이 있어 이를 이름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라 했다. 공자가 일찍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하나하나 말하지 않았는데 맹자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하나 말한 것은, 공자 때에는 성선의 이(理)가 명백하여 비록 자세히 밝혀 드러내지 않더라도 성선의 설이 저절로 이루어졌지만 맹자 때에 이르러 이단(異端)이 벌떼처럼 일어나 자주 성을 착하지 않다고 말하여 맹자가 성선지설(性善之說)이 밝혀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를 밝히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혼연전체(渾然全體)만 말하면 별점 없는 저울이나 눈금 없는 자와 같아서 세상을 깨우치기에 부족한 것 같아 조목을 구분하여 넷으로 나누어 말하니 사단지설(四端之說)이 비로소 성립한 것이다. 대개 사단(四端)이 발하지 않을 때에 비록 조용하여 움직임이 없으나 그 안에 조리(條理)와 구조가 있어 희미하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외부의 자극이 있으면 곧 마음 속에서 이에 응하니,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인(仁)의 이(理)가 곧 응하여 측은(惻隱)의 마음이 이에 형성되고, 사당을 지나고 저정을 지날 때에는 예(禮)의 이(理)가 곧 응하여 공경(恭敬)의 마음이 이에 형성된다.
대개 마음 안에 모든 이치가 혼연히 갖추어져 각각 분명하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에 따라 이에 느껴 응하니 사단(四端)의 발함이 각각 면모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가 넷으로 나누어 학자에게 보여 혼연한 전체 안에 가닥이 있음을 알게 하니 곧 성의 착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然四端之未發也에 所謂渾然全體無聲臭之可言無形象之可見이라 何以知其粲然有條如此오 盖是理之可驗이 乃依然就他發處驗得이니 凡物必有本根이라 性之理雖無形이나 而端緖之發에 㝡可驗이라 故由其惻隱이라 所以必知其有仁이오 由其羞惡이라 所以必知其有義오 由其恭敬이라 所以必知其有禮오 由其是非라 所以必知其有智니 使其本無是理於內면 則何以有是端於外리오 由其有是端於外라 所以必知有是理於內而不可誣也라 故孟子言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乃所謂善也라하시니 是則孟子之言性善이 盖亦遡其情而逆知之耳라 仁義禮智를 旣知得界限分曉하고 又須知四者之中仁義是箇對立底關鍵3)이니 盖仁은 仁也니 而禮는 則仁之著오 義는 義也니 而智는 則義之藏이니 猶春夏秋冬이 雖爲四時나 然春夏는 皆陽之屬也오 秋冬은 皆陰之屬也라 故曰 立天之道曰陰與陽이오 立地之道曰柔與剛이오 立人之道曰仁與義라하니 是知天地之道는 不兩이면 則不能以立이라 故端雖有四나 而立之者는 則兩이오 仁義雖對立而成兩이나 然仁實貫通乎四者之中이니 盖偏言則一事오 專言則包四者라
그러나 사단(四端)이 발하지 않은 때의 혼연한 전체가 말할 수 있는 소리나 냄새가 없고 볼 수 있는 형상이 없으니 어떻게 찬연히 조목이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대개 우리 사람에게 착한 성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성이 발하여 나타나는 것을 보고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반드시 근본이 있듯이 이 근본이 되는 성의 이(理)가 비록 형상이 없으나 그 단서가 발함을 보고 그 근본을 똑똑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측은(惻隱)의 단서(端緖)를 말미암아 그 인(仁)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수오(羞惡)의 단서를 말미암아 의(義)가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공경(恭敬)의 단서를 말미암아 그 예(禮)가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시비(是非)의 단서를 말미암아 그 지(智)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가령 본래 우리 마음 속에 착한 성의 이(理)가 없다면 어찌 밖으로 이 단서가 나타나겠는가.
이 단서가 밖으로 나타남을 말미암아 반드시 그 안에 이 착한 성의 이(理)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맹자가 말하기를,
“우리의 정(情)은 착한 것이니 이를 선(善)이라 한다.”
고 말했으니 맹자가 성(性)이 착하다고 말 한 것은 그 정(情)을 추리하여 성이 착하다는 것을 안 것이다.
대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구분지어 분명히 알았으면 또 네 가지 중에 인의(仁義)가 대립적인 관건이 됨을 알아야 하니, 인(仁)은 인(仁)이면서 예(禮)가 곧 인(仁)의 발현이요, 의(義)는 의(義)이면서 지(智)가 곧 의(義)의 완성이다. 이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비록 사시(四時)이나 춘하(春夏)는 양(陽)에 속하고 추동(秋冬)은 음(陰)에 속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하늘의 도(道)를 세움을 일러 음양(陰陽)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움을 일러 유강(柔剛)이라 하고, 사람의 도(道)를 세움을 일러 인의(仁義)’라 하니, 이에서 하늘과 땅의 도가 음양강유(陰陽剛柔)로 각각 둘이 아니면 설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단서(端緖)가 비록 넷이나 사람의 도(道)를 세우는 것은 둘일 뿐이다. 인(仁)과 의(義)가 비록 대립하여 둘을 이루나 인(仁)이 실은 넷을 관통하는 것이니, 인(仁)을 부분적으로 말하면 한가지 일이지만 통틀어 말하면 넷을 포함하는 것이다.
故仁者는 仁之本體오 體者는 仁之節文이오 義者는 仁之斷制오 智者는 仁之分別이라 猶春夏秋冬은 雖不同而同出乎春이니 春은 則春之生也오 夏는 則春之藏也오 秋는 則春之成也오 冬은 則春之藏也니 自四而兩하고 自兩而一이면 則統之有宗會之有元矣라 故曰 五行이 一陰陽이오 陰陽이 一太極이라하니 是天地之理固然也라 仁包四端而智居四端之末者는 盖冬者는 藏也니 所以始萬物而終萬物者也라 智有藏之義焉하고 有終始之義焉하니 則惻隱羞惡恭敬 是三者는 皆有可爲之事而智는 則無事可爲라 但分別其爲是爲非이니 是以謂之藏也오 又惻隱羞惡恭敬이 皆是一面底道理而是非 則有兩面하니 旣別其所易하고 又別其所非하니 是終始萬物之象이라 故仁爲四端之首하고 而智는 則能成始能成始하야 猶元氣雖四德之長이나 然元不生於元이오 而生於貞이니 盖由天地之化가 不翕聚면 則不能發散이 理固然也라 仁智交際之間이 乃萬化之機軸이라 此理循環不窮脗合無間하니 程子所謂動靜無端 陰陽無始者는 此也니라
때문에 인(仁)은 인(仁)의 본체요, 예(禮)는 인(仁)의 절문(節文)이며, 의(義)는 인(仁)의 단제(斷制)요, 지(智)는 인(仁)의 분별(分別)이다. 이는 춘하추동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모두 춘(春)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니, 춘(春)은 춘(春)의 발생이요, 하(夏)는 춘(春)의 자라남이며, 추(秋)는 춘(春)의 이루어짐이요, 동(冬)은 춘(春)의 갈무림이다. 넷으로부터 둘이 되고 둘로부터 하나가 되니 인(仁)은 거느려서 종(宗)이 되고 모아서 으뜸이 된다. 때문에 말하기를,
“오행(五行)이 저마다 하나의 음양(陰陽)이 되고 음양(陰陽)이 각각 하나의 태극(太極)이 된다.”
고 한다. 이는 천지(天地)의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인(仁)이 사단(四端)을 포함하되 지(智)가 사단(四端)의 끝에 있는 것은 대개 동(冬)이란 것은 갈무림이니 만물의 시작이면서 만물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智)가 갈무림의 뜻이 있고 종시(終始)의 뜻이 있으니 측은(惻隱)․수오(羞惡)․공경(恭敬) 셋은 각각 고유의 맡은 일이 잇되 지(智)는 맡은 일이 없고 다만 셋이 하는 일의 시비분별(是非分別)만 한다. 이 때문에 갈무린다고 말하고 또 측은(惻隱)․수오(羞惡)․공경(恭敬)은 일면의 도리(道理)인데 반해 시비(是非)는 양면이 있어 그 옳고 옳지 않는 것을 구별하니 이는 만물을 종시(終始)하는 상(象)이다. 때문에 인(仁)은 사단(四端)의 수장(首長)이 되고 지(智)는 능히 성시(成始) 성종(成終)이 되니, 이는 원기(元氣)가 비록 사덕(四德)의 수장(首長)이나 원기(元氣)가 원(元)에서 생기지 아니하고 정(貞)에서 생기는 것과 같다. 대개 천지(天地)의 변화로 말미암아 기(氣)가 모이지 아니하면 흩어질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인(仁)과 지(智)가 교차하는 사이는 곧 만화(萬化)의 기축(機軸)이니 이 이(理)가 돌고 돌아 다함이 없고 입술을 다문것처럼 떨어짐이 없으니 이것이 곧 정자(程子)가 말한 동정무단(動靜無端) 음양무시(陰陽無始)인 것이다.
【註解】
1) 陳器之(진기지) : 이름은 식(埴), 호는 잠실(潛室), 영가(永嘉) 사람. 선생문인.
2) 無星之秤(무성지칭) : 성(星)은 목(目)임. 눈금 없는 저울.
3) 關鍵(관건) : 대문의 빗장과 열쇠. 전하여 사물의 중요한 곳을 말함.
答汪叔耕1)
來書所論 向來爲學次第 足以見立志之高矣라 然雜然進之하고 而不由其序는 譬如以枵然之腹으로 入酒食之肆하야 見其肥羹大胾 餠餌膾脯 雜然於前하고 遂欲左拏右攫 盡納於口하야 快嚼而亟呑之면 豈不撑腸拄腹하야 而果然2)一飽哉아 然未嘗一知其味면 則不知向之所食者果何物也라 所論周程傳授次第 恐亦有未易言者니 而以太極圖로 爲有單傳3)密付4)之三昧5)는 則又近世學者 背形逐影指妄爲眞之弊也라 夫道在目前하야 初無隱蔽어늘 而衆人이 沈溺膠擾하야 夫自知覺할새 是以聖人이 因其所見道體之實하야 發之言語文字之間하야 以開悟天下與來世하시니 其言丁寧反復明白切至하야 惟恐人之不懈了也라 豈有故爲不盡之言하야 以愚學者之耳目하야 必俟其單傳密付而後 可以得之哉아 但患學者는 未嘗虛心靜慮 優柔反復하야 以味其立言之意하고 而妄以己意로 輕爲之說이라 是以不知其味하고 而妄意乎言外之別傳耳니라 不欺論6)中所談儒佛同異得失이 似亦未得其要니 至有忘心忘形 非寐非寤 虛白淸鏡 火珠靜月 每現輒變之說이 則有大不可曉者어늘 而反自謂將從主靜持敬 應事接物以求之7)라하니 不惟求之不得而已라 愚恐其必將有狂易8)亹亹9)喪心之患이니 竊爲吾子憂之하노니 幸且置此하고 而卽聖賢之言 平易明白之處하야 虛心平氣 熟玩而躬行之니 玩之深則理自明이오 行之篤則力自進이라 持之以久하야 亹亹而上達焉이면 則道體精微之妙 聖賢親切之傳이 不待單傳密付하야 而已了然心目之間矣니라
답왕숙경(答汪叔耕)
보내온 서신에서 논한 그대의 지금까지의 학문 차서(次序)는 족히 그대의 높은 입지(立志)를 볼 수 있게 하나, 그러나 잡되게 나아가 그 순서를 밟지 아니하면, 비유건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음식점에 들어가서 기름진 고깃국과 떡과 회와 포가 잡되게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좌우로 움켜쥐고 모두 입에 털어 넣어 통쾌하게 씹어 빨리 삼켜서 배가 탱탱하게 부르기는 하나 그 맛도 제대로 모르고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도 모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대가 말한 주자(周子)․정자(程子)의 전수차제(傳授次第)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극도(太極圖)를 말로써 표현못할 오묘한 진리를 은밀히 서로 전한 비결로 생각하는 것은, 근세 학자가 형체를 등지고 그림자를 밟고 허망한 것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폐단이 있는 것이다. 대개 도(道)라는 것은 눈앞에 뚜렷이 있어서 처음부터 숨기고 가림이 있는 것이 아닌데 뭇 사람이 어지럽고 요란한데 빠져서 이를 알지 못할 뿐이다. 이 때문에 성인이 자기가 본 도체(道體)의 진실을 언어와 문자로 나타내어 천하와 내세(來世)를 열어 깨우치니, 그 말이 재삼 반복되고 명백절실하여 오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까 염려할 뿐이다. 어찌 고의로 말을 다하지 않아 학자의 이목(耳目)을 어리석게 하고, 반드시 그 단전밀부(單傳密付)를 기다린 뒤에 도체(道體)의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하였겠는가. 다만 학자가 허심정려(虛心精慮)하고 우유반복(優柔反復)하여 성인이 말한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헛되이 자기의 뜻으로 경솔하게 주장을 세워, 이로 인해 그 뜻을 알지 못하면서 허망하게 그 말 밖의 별전(別傳)에 뜻을 둘까 염려할 뿐이다. 그대의 ‘불기론(不欺論)’에서 말한 유불(儒佛)의 동이득실(同異得失)은 그 요령(要領)을 터득하지 못한 것 같고 망심망형(亡心亡形)․비매비오(非寐非寤)․허백청경(虛白淸鏡)․화주정월(火珠靜月)․매현첩변(每現輒變) 등의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인데 그대는 도리어 이렇게 하고서 주정지경(主靜持敬)으로 응사접물(應事接物)하여 유학을 공부하려하니 이렇게 해서는 유학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장차 평상(平常)의 성(性)을 변개하고 본심을 잃어버릴 것이니 그대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이 같은 생각을 버리고 성현의 평이하고 명백한 말을 좇아서, 허심평기(虛心平氣)하여 열심히 생각하고 힘써 행하면, 생각을 깊이 함으로써 이치가 자명해지고, 실천을 돈독히 행함으로써 힘이 저절로 생길 것이니, 지속적으로 힘써 위로 도달하면, 도체(導體)의 정미(精微)한 이치와 성현의 친절한 가르침을 단전밀부(單傳密付)를 기다리지 않고도 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註解】
1) 汪叔耕(왕숙경) : 이름은 신(莘), 호는 방곤(方壼), 휘주(徽州) 사람. 선생 문인.
2)果然(과연) : 충실(充實).
3)單傳(단전) : 문자 언어에 의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함.
4) 密付(밀부) : 비밀히 서로 전함.
5) 三昧(삼매) : 정수(正受) :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 범어 samadhi의 음역.
6) 不欺論(불기론) : 숙경이 지은 구정(求正)을 위한 것.
7) 求之(구지) : 유자의 학을 구함.
8) 狂易(광역) : 그 평상의 성(性)을 바꿈.
9) 亹亹(미미) : 힘쓰는 모양.
答鞏仲至8)
古之聖賢所以敎人이 不過使之講明天下之義理하야 以開發其心之知識하얀 然後力行固守하야 以終其身이오 而凡其見之言論措之事業者는 莫不由是以出이니 初非此外에 別有歧路는 可施功力하야 以致文字之華靡와 事業之恢宏也라 故易之文言於乾九三에 實明學之始終2)하야 而其所謂忠信所以進德者는 欲吾之心이 實明是理而眞好惡之를 若其好好色而惡惡臭也오 所謂脩辭立誠以居業者는 欲吾之謹夫所發하야 以致其實而尤先於言語3)之易放而難收也니 其曰脩辭는 豈作文之謂4)哉아 今或者는 以脩辭名左右之齋5)하니 吾固未知其所謂나 然設若盡如文言之本指6)라도 則猶恐此事는 當在忠信進德之後하야 而未可以遽及이어든 若如或者賦詩之所詠歎7)이면 則恐其於乾乾夕惕之意에 又益遠而不相似也라 鄙意於此深有所不能無疑者8/)로다 今雖不敢承命以爲記나 然念此事於人에 所關不細하야 有不可以不之講者라 故敢私以爲請하노니 幸試思之하야 而還以一言으로 判其是非焉호라
답공중지(答鞏仲至)
옛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까닭이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의 의리를 밝혀서 그 마음의지식을 개발한 연후에 힘써 이를 행하고 지켜서 그 일생을 마치도록 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무릇 성인이 언론에 나타낸 것과 사업에 처리한 것이 천하의 의리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처음부터 천하의 의리밖에 별도로 다른 길이 있어 이에 공력을 베풀어 문자의 화려함과 사업의 웅대함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역������ 문언(文言) 건(乾) 구삼(九三)에 학문의 시작과 마침을 밝혔으니 이른바 ‘충신(忠信)이 진덕(進德)하는 방법’이란 것은 우리의 마음이 의리를 밝혀서 참으로 좋아하고 싫어함을 여색(女色)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같이 하게 하고자 함이요, 이른바 ‘말을 조심하고 성의를 다하여 사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우리가 말을 조심하여 신실하게 하되, 먼저 말이 쉽게 나오고 거두기 어렵다는 점에 조심하게 하고자 함이니, 그 수사(修辭)란 것이 어찌 작문(作文)을 말하겠는가.
지금 어떤 사람이 수사(修辭)로써 그대의 집을 이름지으려 하니 내 참으로 그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하겠다. 만약 그 뜻이 문언(文言)의 본 뜻과 같다 하더라도 수사(修辭)의 일이 충신(忠信) 진덕(進德) 이후의 일이니 바로 수사에 나아갈 일이 아니요, 또 혹자(或者)가 시를 지어 영탄한 뜻과 같다 하더라도 그 뜻이 문언(文言)의 ‘쉬지 않고 힘써 저녁때까지 조심한다’는 뜻에서 더욱 멀어 그 뜻이 서로 거리가 멀다 하겠다. 내 뜻이 이에 의문이 적지 않다. 지금 그대의 요청대로 기문(記文)을 써주지 못하나, 수사(修辭)의 일이 사람에 끼치는 영향이 작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를 철저히 강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라노니 심사숙고하여 그 시비를 밝혀 회신해주기 바란다.
至於佳篇之貺은 則意益厚矣라 顧惟鈍拙이 於此豈敢有所與리오 三復以還에 但知贊歎而已라 然因此偶記 頃年學道未能專一之時에 亦嘗間考詩之原委9)하야 因知古今之詩凡有三變하니 盖自書傳所記虞夏以來下及魏晋 自爲一等이오 自晋宋間顔謝10)以後下及唐初 自爲一等이오 自沈宋11)以後 定著律詩 下及今日 又爲一等이나 然自唐初以前은 其爲詩者는 固有高下而法猶未變이러니 至律詩出하야 而後詩之與法이 始皆大變하야 以至今日益巧益密 而無復古人之風矣이라 故嘗妄欲抄取12)經史諸書所載韻語13)와 下及文選漢魏古詞하야 以盡乎郭景純14) 陶淵明之所作 自爲一編하야 以附于三百篇楚辭之後 以爲詩之根本準則하고 又於其下二等15)之中에 擇其近於古者各爲一編하야 以爲之羽翼輿衛16)하고 其不合者는 則悉去之하야 不使其接於吾之耳目하고 而入於吾之胸次하야 要使方寸之中無一字世俗言語意思라야 則其爲詩不期於高遠 而自高遠矣라 然顧爲學之務는 有急於此者오 亦復自知材力短弱하야 決不能追古人而與之並일새 遂悉棄去하야 不能復爲어든 況今老病하야 百念休歇하니 寧尙復語此乎아 然感左右見顧之重하야 若以爲可語此者라 故聊復言之하노니 恐或可以少助百尺竿頭에 更進一步之勢也라
아름다운 시를 지어 보내주니 그대의 뜻이 매우 두터움을 알겠다. 둔졸(鈍拙)한 내가 어찌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있겠는가마는 이를 세 번 반복해 읽음에 찬탄을 아끼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생각이 나는데, 지난해에 도학(道學) 공부가 전일하지 못할 때에 때때로 시(詩)의 본말을 고찰해보니 고금(古今)의 시가 무릇 세 번 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개 ������서전(書傳)������에 기록된 우하(虞夏) 이래로부터 위진(魏晋) 시대까지가 일등(一等)이요, 진송(晋宋)의 안사(顔謝) 이후로 당초(唐初)까지가 일등(一等)이요, 심송(沈宋) 이후 율시(律詩)가 정착된 때로부터 지금까지가 일등(一等)이다. 그러나 당초(唐初) 이전은 시의 작품성과 고하(高下)는 있되 그 법은 오히려 변하지 않았고, 율시(律詩)가 출현한 이루로는 시(詩)의 법이 크게 변하여 금일에 이르러 더욱 정교하여져 다시 고인(古人)의 풍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경서나 사서(史書)에 실린 시들과, 아래로 ������문선(文選)������과 한위(漢魏) 고사(古詞)에 미쳐서 곽경순(郭景純)과 도연명(陶淵明) 같은 이의 작룸들 중에서 추려 뽑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되, 300편 초사 뒤에 부쳐서 시의 근본 준칙으로 삼고, 다시 그 아래 이릉(李陵)/ 중에서 고시(古詩)에 가까운 것을 가려서 각각 한 권 책으로하여 보충 자료로 참고토록 하고, 그 합당하지 않는 것은 모두 버려서 다시 우리의 이목(耳目)에 접하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의 가슴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한 글자라도 세속 언어의 뜻이 없게 하면 그 시풍이 자연 고원해질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배움에 힘 쓸 것이 시보다 급한 것이 있고 재력(材力)이 단약(短弱)하여 결코 고인을 따라 나란히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모두 버리고 다시 시(詩) 공부를 하지 않으려 한다. 더구나 지금 늙고 병들어 만사가 귀찮으니 어찌 다시 시를 말하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후의에 감동하여 시를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여 잠깐 말하노니, 혹시라도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작으나마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來喩所云 漱六藝之芳潤하야 以求眞澹17)이 此誠極至之論이나 然恐亦須先識得古今體製雅俗鄕背 仍更洗滌得盡腸胃間夙生18)葷血脂膏라야 然後此語方有所措니 如其未然이면 竊恐穢濁爲主하야 芳潤入不得也ㄹ까하노라 近世詩人이 正緣不曾透得此關19)하야 而規規於近局20)이라 故其所就皆不滿人意하니 無足深論이나 然旣就其中而論之라도 則又互有短長하니 不可一槪抑此伸彼21)어든 況權度未審이면 其所去取又或未能盡合天下之公也니라 此說甚長하니 非書可究라 它詩에 惑得面論하면 庶幾可盡이어니와 但恐彼時22)且要結絶脩辭公案23)하야 無暇可及此耳라 此有一黃子厚24)者하야 其詩自楚漢諸作中來하야 絶不類世人語하니 人亦少能知之라 近以社倉出內25)에 譏察不謹으로 狼狽憂鬱하야 以至於死하니 甚可傷也라 放翁26)詩書는 錄寄幸甚이라 此亦得其近書니 筆力愈精健이라 頃嘗憂其迹太近27)能太高하야 或爲有力者28)所牽挽 不得全此晩節이러니 計今決可免矣니 此亦非細事也로다
보내온 서찰에서
“육예(六藝)의 방윤(芳潤)으로 씻어 진담(眞澹)을 구한다.”
는 말은 참으로 지극한 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 고금의 체제(體制)․아속(雅俗)․향배(鄕背)를 알고 다시 장위(腸胃) 사이에 끼인 마늘냄새 나는 피와 기름기를 씻어낸 후에라야 이 말이 쓰일 곳이 있을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예탁(穢濁)이 주가 되어 방윤(芳潤)이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근세의 시인이 정히 이에 철저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근체(近體)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아가는 바가 모두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니, 이를 깊이 논할 것은 못되나, 그러나 이미 그 가운데 들어가서 논한다면 또 서로 장단이 있어 일률적으로 이를 누르고 저를 편들 수도 없고, 더구나 이들을 저울질하고 헤아림이 자세치 못하여 그 취하고 버림이 혹 천하의 공리(公理)에 다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말이 너무 길어 글로써 다 말하지 못하겠으니 다음에 서로 만나면 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때에 또 앞에 말한 수사(修辭)에 관한 논쟁(論爭)을 결론짓지 못하면 시를 논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황자후(黃子厚)란 자가 그 시가 초한(楚漢)의 여러 작품의 시풍(詩風)을 본받아 세속의 언어와 같지 않고, 사람들 역시 이를 조금 알아주었는데, 근래에 사창(社倉)의 출납 기찰 업무를 잘 보지 못함으로 인하여 아주 심한 곤경에 처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니, 심히 가슴 아픈 일이다. 방옹(放翁)의 시서(詩書)를 적어 부쳐주면 매우 다행이겠다. 방옹의 시 또한 그 근작(近作)을 보니 필력이 더욱 정건(精健)한 것 같다. 근간에 그가 유력자(有力者)와 너무 가까운 위치에 있고, 재능이 너무 높아, 혹시 유력자에 유인되어 그 만절(晩節)을 지키지 못할까 걱정하였더니, 생각해보니 그렇지는 않는 것 같다. 이 또한 예사 일이 아니다.
【註解】
1) 鞏仲至(공중지) : 우의인(武義人). 여동래(呂東萊)를 따라 교유함. 선생 문인. 호는 율재(栗齋). 동래 문인.
2) 學之始終(학지시종) : 지지지지(知至至之)와 지종종지(知終終之)를 말함.
3) 尤先於言語(우선어언어) : 그 실질을 이루고자하면 마땅히 언어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히 수사(修辭)를 일컬어 말하는 것이다.
4) 修辭…之謂(수사…지위) : 중지가 수사를 작문을 위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생이 극력 부인하는 말.
5) 左右之齋(좌우지재) : 좌우는 중지를 말함.
6) 文言之本指(문언지본지) : 선생은 비례물언(非禮勿言)이라 여김.
7) 或者…詠歎(혹자…영탄) : 혹자가 시를 지어 수사의 뜻을 영탄함.
8) 於此…소여/(어차…소여) : 중지가 선생이 시에 능하다고 추앙하기 때문에 선생이 겸사하여 하는 말임.
9) 原委(원위) : 본말(本末)과 같음.
10) 顔謝(안사) : 안연년(顔延年)과 사령운(謝靈運).
11) 沈宋(심송) : 심전기(沈佺期)와 송지문(宋之問).
12) 妄欲抄取(망욕초취) : 초취의 뜻이 소작(所作)까지 이름.
13) 經史…韻語(경사…운어) : 갱가(賡歌) 채미가(采薇歌) 염이가(扊扅歌) 등
14) 郭景純(곽경순) : 이름은 박(璞), 진(晋) 하동인(河東人). 사부(詞賦)를 잘함.
15) 下二等(하이등) : 진송(晋宋)으로부터 당초(唐初)까지 일등이요, 심송(沈宋)으로부터 지금까지 일등임.
16) 輿衛(여위) : 지제부위(持載扶衛)의 뜻. ������역������ 대축(大畜) 구삼(九三) 효사(爻辭)에 나오는 말. 전(傳)에 ‘거여방위(車輿防衛)’라 하니 우익(右翼)의 뜻이다.
17) 漱六…眞澹(수육…진담) : 중지가 논한 작시(作詩) 법.
18) 夙生(숙생) : 처음부터 생긴 것.
19) 此關(차관) : 윗 글 식체제(識體製)와 세장위(洗腸胃)를 가리킴.
20) 近局(근국) : 근체(近體).
21) 抑此伸彼(억차신피) : 차는 강서시파(江西詩派)요 피는 완능(宛陵)임. 강서시파는 소자첨(蘇自瞻)을 연원으로하는 황정견(黃庭堅)․진사도(陳師道)․반대림(潘大臨)․사무일(謝無逸) 등 시가 기굴(奇崛)하고 기미풍격(氣味風格)이 있음. 원능은 사경초(謝景初)․매요신(梅堯臣)을 가리킨 듯.
22) 彼時(피시) : 면론시(面論時).
23) 且要…公案(차요…공안) : 공안은 선종(禪宗)에서 제자(弟子)에게 추구(追求)케 하는 문제임. 곧 면론할 때에 우선 중지와 함께 수사(修辭)란 것이 근언(謹言)의 뜻인지 작문의 뜻인지 또 충신진덕(忠信進德) 전의 일인지 후의 일인지를 논하여 결말지어야 하니 그래서 시를 논할 겨를이 없다는 말임.
24) 黃子厚(황자후) : 이름은 수(銖), 건안인(建安人), 호는 곡성(穀城), 은거 불사(不仕), 선생 동문. 시에 능함.
25) 社倉出內(사창출납) : 사창법에 민간으로 하여금 빈부차등으로 곡물을 출연케하여 사(社)에 비축하였다가 흉년에 대비함. 자후(子厚)가 이때에 그 일을 맡음.
26) 放翁(방옹) : 육무관(陸務觀).
27) 迹太近(적태근) : 방옹(放翁)이 세로(世路)에 초연하지 못하여 권세인에 유혹될까 염려함. 혹은 방옹이 사는 곳이 임안에서 가깝기 때문에 하는 말임. 또는 방옹이 한탁주(韓侂冑)와 인친(因親)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 함.
28) 有力者(유력자) : 한탁주(韓侂冑)를 가리킴.
來書所論平談二子는 誤盡天下詩人이 恐非至當之言이어늘 而明者亦復不以爲非하니 是則熹所深不識也로다 夫古人之詩本豈有意於平淡哉리오 但對今之狂怪雕鎪神頭鬼面에 則見其平하고 對今之肥膩腥臊酸鹹苦澁에 則見其淡耳라 自有詩之初以及魏晋 作者非一이로대 而其高處는 無不出此1)하니 左右固自以爲亦嘗從頭看得一過하야 而諳其升降沿革2)矣니 則豈不察於此者리오마는 但恐如李漢所謂3) 易以下爲古文4)이라하야 因以爲無所用於今世하니 不若近體5)之可以悅人之觀聽이라하야 以是不免有是今非古之意하야 遂不復有意於古人之高風遠韻耳라 又謂有意於平淡者邊는 卽非純古라하니 然則有意於今之不平淡者는 得爲純古乎아 又謂水落石出自歸此路6)ㄴ댄 則吾未見終身習於鄭衛之哇淫이라가 而能卒自歸於英莖7)韶頀8)之雅正者也니라 鄙見如此하니 幸試思之以爲如何也오 放翁近報亦已掛冠하니 盖自不得不爾라 近有人自日邊9)來云하대 今春에 議者欲起洪景盧10)하야 與此老11)付以史筆 置局湖山 以就閒曠이러니 已而當路 有忌之者하야 其事遂寢이라하니 今日此等好事를 亦做不得이나 然在此翁엔 却且免得一番拖出來하니 亦非細事라 前書盖已慮此하니 乃知人之所見有略同者12)로다
보내온 서찰에서 논한 ‘평담(平淡)이란 말이 천하의 모든 시인을 잘못되게 한다’는 말은 지당한 말이 아니거늘 그대는 다시 그렇지 않다고 하니 이는 내가 심히 알지 못할 일이다. 옛 사람의 시가 본래 어찌 평담(平淡)에 뜻을 두었겠는가. 다만 지금의 괴이하고 아로세긴듯하며 귀신같은 시와 비교하면 그 평상(平常)함을 알 수 있고, 지금의 기름지고 비리며 시고 짜고 맵고 떫은 시와 비교하면 그 담박(淡泊)함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니, 시(詩)가 처음 생길 때부터 위진(魏晋)에 이르기까지 작자가 한 둘이 아니로되 그 풍격(風格)이 높은 작자는 평담(平淡)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진실로 스스로 시(詩)의 생성 첫머리부터 살펴서 그 연혁을 살펴보았다고 한다면 어찌 평담(平淡)을 보지 못했으리오마는 아마 이한(李漢)의 말처럼 ������역(易)������ 이하를 고문(古文)이라하여 금세에 쓸모가 없으며, 근체시(近體詩)가 사람의 보고 들음을 즐겁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근체시가 옳고 고시(古詩)가 옳지 않다고 하여 드디어 고인(古人)의 고풍원운(高風遠韻)에 뜻을 두지 못한 것같다. 또
‘평담(平淡)에 뜻을 둔 자는 순수한 고풍(古風)이 아니다’
고 하니, 그러면 지금의 평담하지 못한데 뜻을 둔 자는 순수한 고풍(古風)이 있는 자가 되겠는가. 또
“물이 줄면 돌이 드러나듯 시작(詩作) 능력이 우수해지면 저절로 평담해진다.”
고 하니 평생토록 정위(鄭衛)의 음란한 시를 공부해도 영경소호(英莖韶頀)의 아정(雅正)에 돌아오는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나의 견해는 이러하니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방옹(放翁)은 근자에 들으니 이미 관직을 내놓았다 하니 이는 방옹(放翁)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근자에 어떤 사람이 대궐 가까이에서 와서 말하기를,
“금년 봄에 홍경로(洪景盧)와 방옹(放翁)을 기용해서 사필(史筆)을 맡겨 호산(湖山)에 사국(史局)을 설치하여 조용히 지내게 하자는 논의(論議)가 있었으나 당로(當路)에 이를 꺼리는 자가 있어 실현되지 못했다.”
고 하니, 오늘날 이같이 좋은 일이 성사되기가 어렵구나. 그러나 방옹(放翁)은 유력자(有力者)에 의해 요란한 관직에 끌려 나올뻔 하였으나 이를 면하였으니 또한 작은 일이 아니다. 전서(前書)에서 내 이를 염려하였더니 사람의 생각이 대략 같은가 보다.
【註解】
1) 出此(출차) : 출어평담(出於平淡).
2) 亦嘗…沿革(역상…연혁) : 중지의 말. 연(沿)은 인(因)이요 혁(革)은 개(改)이다.
3) 李漢所爲(이한소위) : 이한의 ������창려집서(昌黎集序������ 중의 말.
4) 古文(고문) : 이한(李漢)의 말이 이에 그침.
5) 近體(근체) : 율시(律詩)가 성당(盛唐)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근체라 함.
6) 水落…此路(수락…차로) : 중지의 말임. 중지가 작시의 기교가 우수해지면 저절로 평담해지는 것이 물이줄면 돌이 드러나는 것같다고 하니 선생이 그렇지 않음을 말함.
7) 英莖(영경) : 태고의 악, 영(英)은 영(韺)과 통함.
8) 韶頀(소호) : 소는 순악(舜樂) 호는 탕악(湯樂).
9) 日邊(일변) : 대궐부근.
10) 洪景盧(홍경로) : 이름은 매(邁), 호는 용재(容齋), 충선공 호(皓)의 셋째 아들, 시(諡)는 문민(文敏).
11) 此老(차노) : 방옹(放翁)을 말함.
12) 略同者(약동자) : 선생이 전서(前書)에서 타출(拖出)을 염려하였는데 중지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임.
新詩1)見寄는 尤荷不鄙라 讀之便覺烏石2)靈源3)이 去人不遠하니 當此炎燠하야 洒然如羾4)寒門5)而濯淸風也라 記文6)更定은 莊重詳實하니 足以傳遠이라 悟老7)眞不朽矣로다 放翁筆力愈健하대 但恨無故被天津橋上胡孫擾亂하야 却爲大耳三藏의 覰見8)9)하야 氣候는 不佳10)라 故舊中에 時復塌了一兩人11)하니 令人鬱鬱이라 仲止不謂乃能自立如此로니 深可愛敬이라 尤喜南澗12)之有後13)는 足强人意也로다
새로 지은 시(詩)를 부쳐 보내 주니 매우 청아(淸雅)한 일이로다. 시(詩)를 읽음에 문득 선경같은 오석(烏石)이 눈에 선하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 이같이 더운 날씨에 한문(寒門)에 날아 청풍(淸風)을 쐬듯 오석(烏石)의 바람을 쐬고 싶도다. 오노(悟老)를 위해 지어준 기문(記文)은 장중(莊重)하고 상실(詳實)하여 족히 후세에 오래 전해지리니 오노(悟老)는 참으로 불멸하리로다. 방옹(放翁)의 필력이 더욱 건장(健莊)해졌으나 한스럽게도 부귀를 탐하는 마음이 있어 한탁주(韓侂冑)의 유혹을 받았구나. 시상(時象)이 아름답지 못하여 고우(故友) 두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갔으니 마음이 편치 않구나. 중지(仲至)는 이외로 이같이 잘 자립(自立)하니 매우 애경(愛敬)할 일이요, 남간(南澗)의 유후(有後)를 기쁘하는 바이다. 족히 나의 뜻을 굳건하게 하도다.
【註解】
1) 新詩(신시) : 중지가 지은 시.
2) 烏石(오석) : 복주성(福州城) 서남에 있는 산이름. 인소대(鄰霄臺)․욕아지(浴鴉池) 등의 명승지가 있음. 이때 중지가 복건 안무사로 있으면서 이 산에 유람하면서 시를 지어 선생에게 보냄.
3) 靈源(영원) : 선경(仙境), 오석을 칭도하는 말임.
4) 羾(공) : 날아 이름.
5) 寒門(한문) : 북극(北極)의 문.
6) 記文(기문) : 중지가 오노(悟老)를 위해 지은 글.
7) 오노(悟老) : 정오사(淨悟師) 비상승(非常僧).
8) 天津…覰/見(천진…처/견) : 천진교는 하남성 낙양현 서남 낙수(洛水)에 있는 다리. 호손(胡孫)은 원숭이의 이칭. 당(唐) 대종(代宗) 때에 인도에서 대이삼장 법사가 경사(京師)에 왔을 때 혜충국사(慧忠國師)와 시험을 보게 했는데 국사가 묻기를 “너는 지금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겠는가.” 하니 삼장법사가 말하기를, “화상은 일국의 국사로서 어찌 천지교에서 원숭이 노는 것을 보고 있습니까.” 라고 답함. 방옹(放翁)이 부귀(富貴)를 탐함을 호손요란으로 비유하고 한탁주가 방옹의 마음을 훔쳐봄을 다이삼장으로 비유하였음.
9) 覰見(처견) : 엿봄. 한(恨)의 뜻이 이에 그침.
10) 氣侯不佳(기후불가) : 시상불호(時象不好).
11) 塔了一兩人(탑료일양인) : 탑은 퇴하(頹下)임. 일양인은 고구(故舊)를 가리킴.
12) 南澗(남간) : 중지의 부(父), 무구(無咎)의 호(號)임.
13) 有後(유후) : 선대의 덕망과 사업을 잘 이음.
與湖南諸公1)論中和
中庸未發已發之義를 前此認得此心流行之體하고 又因程子凡言心者는 皆指已發而言하야 遂目心爲已發性爲未發이나 然觀程子之書에 多所不合이라 因復思之니 乃知前日之說2)이 非惟心性之名에 命之不當이라 而日用功夫는
全無本領3)하니 盖所失者不但文義之間而已라 按文集遺書諸說 以思慮未萌 事物未至之時로 爲喜怒愛樂之未發하니 當此之時하야 卽是此心寂然不動之體 而天命之性本體具焉이라 以其無過不及不偏不倚라 故謂之中이라하고 及其感而遂通天下之故 則喜怒愛樂之情이 發焉而心之用을 可見이라 以其無不中節 無所乖戾라 故謂之和라하니 此則人心之正而情性之德이 然也라 然未發之前에 不可尋覓이오 已覺之後에 不容安排니 但平日에 莊敬涵養4)之功이 至에 而無人欲之私以亂之則其未發也에 鏡明水止오 而其發也에 無不中節矣니 此是日用本領功夫라 至於隨事省察하야 卽物推明이라도 亦必以是爲本이라 而於已發之際에 觀之則其具於未發之前者를 固可嚜識이라
여호남제공론중화(與湖南諸公論中和)
������중용(中庸)������의 미발(未發) 이발(已發)의 뜻을, 앞서 마음의 유행(流行)하는 실체를 인식하고, 또 정자가 ‘무릇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킨다.’는 말을 근거로하여 드디어 마음을 가리켜 이발(已發)이라하고 성(性)을 미발(未發)이라고 하였더니, 정자의 글을 자세히 보니 그 정의가 합당하지 않음을 알았다. 인하여 다시 생각해보니 전일의 설이 심(心)과 성(性)의 정의가 잘못되었을 뿐만아니라 이로 인하여 일용공부에도 전혀 본령(本領)이 없게되니 잃어버리는 것이 문의(文義)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집(文集)과 유서(遺書)의 제설을 보니,
“생각이 싹트지 아니하고 사물이 도래하지 않을 때를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미발(未發)이라 하니 이때에는 마음이 적연부동(寂然不動)한 체(體)이고 하늘이 품부한 성(性)의 본체가 갖추어져 있어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고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어 중(中)이라 하고, 그 느끼어 천하의 일에 통함에 미쳐서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하여 마음의 용(用)을 볼 수 있으니 그 중절(中節)이 아님이 없고 어긋남이 없는 까닭으로 화(和)라고 한다.”
고 하니, 이는 곧 인심(人心)의 정(正)과 성정(性情)의 덕(德)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미발(未發)의 전엔 찾아 구할 수 없고 이발(已發)의 후엔 어찌할 수 없으니 다만 평일에 장경함양(莊敬涵養) 공부가 지극하여 인욕(人欲)의 사(私)가 어지럽힘이 없으면 그 미발인 때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고 그 이발(已發)인 때엔 중절(中節)이 아님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일용 사이의 본령(本領) 공부요 일 따라 성찰하고 일 따라 미루어 밝힘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경(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이발(已發)의 즈음에서 보면 그 미발(未發) 이전에 갖추어 진 것을 말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다.
故程子之答蘇季明5)에 反復論辨을 極於詳密하대 而卒之不過以敬爲言하고 又曰 敬而無失이 卽所以中이라하고 于曰 入道莫如敬이오 未有致知而不在敬者라하고 于曰 涵養須是敬이오 進學則在致知라하니 盖爲此也라 向來講論思索이 直以心爲已發이라하야 而日用功夫가 亦止以察識端倪로 爲最初下手處라 以故闕却平日涵養一段功夫하야 使人胸中擾擾 無深潛純一之味하고 而其發之言語事爲之間에 亦常急迫浮露하야 無復雍容深厚之風하니 盖所見一差에 其害는 乃至於此하니 不可以不審也라 程子所謂凡言心者皆指已發而言은 此乃指赤子之心而言 而謂凡言心者則其爲說之誤라 故又自以爲未當6)而復正之하니 固不可以執其己改之言7)하야 而盡疑諸說之誤8)오 又不可遂以爲未當9)하야 而不究其所指之殊10)也라 不審諸君子以爲如何오
때문에 정자가 소계명(蘇季明)에게 답할 때에 반복 논변(論辨)하여 극도로 상세히 말하고 마침내 경(敬)으로써 결론지어 말하고 또 말하기를,
“경(敬)을 유지하여 잃지 않는 것이 중(中)에 도달하는 길이라.”
하고, 또 말하기를,
“도에 들어감에는 경(敬)이 제일이니 치지(致知)하되 경(敬)에 있지 않음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함양(涵養) 공부는 반드시 경(敬)으로써 해야 하고 진학(進學) 공부는 치지(致知)에 있다.”
고 하니, 대개 이를 말하는 것이다. 종래에 강론하고 사색할 때에 심(心)을 바로 이발(已發)로 여기고 일용(日用) 공부도 또한 찰식단예(察識端倪)로써 최초의 착수처로 삼았으니 이 때문에 평일의 함양 공부 일단을 겸하여 사람의 흉중을 요란하게 하고 침잠 순일한 맛을 없게 하며, 그 언어와 행위에 발할 때에도 또한 급박 부로(浮露)하게 하여 옹용(雍容) 심후(深厚)한 풍도(風度)가 없게 하니, 인식이 한 번 잘못됨으로서 그 해가 이에까지 이르니 이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자가 ‘무릇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그 말이 잘못된 것이다. 이 때문에 스스로 적합하지 않는 말이라고 뒤에 바로 잡았으니 진실로 그 이미 고친 말을 가지고 제설을 모두 의심해서는 안되고 또 이를 합당하지 않다고만 말하고 그 지시하는 바의 뜻이 각별함을 살피지 않아서도 안될 것이다. 제 군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註解】
1) 湖南諸公(호남제공) : 남헌(南軒) 문인과 호씨(胡氏) 문인을 가리킴.
2) 前日之說(전일지설) : 심(心)을 이발(已發)이라 하고 성(性)을 미발(未發)이라 한 설.
3) 全無本領(전무본령) : 정자가 ‘무릇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킨다’고 했기 때문에 일용 공부에 본령(本領)을 정양(靜養)하는 공부가 없다는 말.
4) 莊敬涵養(장경함양) : 동정설(動靜說)에 통함.
5) 程子答蘇季明(정자답소계명) : 답여자약서에 자세히 나타남.
6) 自以爲未當(자이위미당) : 이천(伊川)이 여대림(呂大臨)과 중(中)을 논한 글에 보임.
7) 已改之言(이개지언) : ‘무릇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킨다’는 말.
8) 諸說之誤(제설지오) : 상문의 유서와 문집의 설.
9) 遂以爲未當(수이위미당) : 정자의 설은 ‘어린 아이의 마음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킨다’는 뜻인데 ‘무릇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킨다’고 했으니 그 설이 잘못되었고, 제설(諸說)은 정자가 말한 바 ‘마음은 체(體)를 가리켜 말할 때가 있고 용(用)을 가리켜 말할 때도 있다는 등의 설을 말함.
10) 所指之殊(소지지수) : 정자의 이발지설(已發之說)은 ‘적자의 마음’을 가리켜 한 말임.
答黃直卿1)
大學向所寫者는 自謂已是定本이라니 近因與諸人講論하야 覺得絜矩一章에 尙有未細密處하니 文字는 元來直是難看이라 彼才得一說에 終身不移者는 若非上智면 卽是下愚也라 此番出來에 更歷鍛煉하야 儘覺有長進處하니 向來未免有疑處가 今皆不疑矣로다 輅孫2)은 不知記得外翁否3)아 渠4)愛壁間獅子5)러니 今畵一本與之하노니 可背起與看6)하야 勿令揉壞却也하라 此是陸探微畵니 東坡集中有贊하노라 願他 似此獅子의 奮迅哮吼7)이면 令百獸腦裂8)也하노라
답황직경(答黃直卿)
전에 ������대학(大學)������을 베껴 쓴 사람이 그것이 정본(定本)이라고 하였는데 근자에 여러 사람과 강론할 때에 보니 혈구(絜矩)의 일장(一章)에 세밀하지 못한 곳이 있음을 알았으니 문자(文字)가 원래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이 겨우 일설(一說)을 터득하자 곧 종신토록 이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상지(上智)가 아니면 하우(下愚)일 것이다. 이번 출사(出仕)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또 시련을 당하고 나니 자기 수양에 좀 나아진 곳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종전에 의문이 있던 곳이 지금 모두 그 의문이 풀렸다. 낙손(낙/孫)은 이 외할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아이가 벽에 걸린 사자 그림을 좋아하여 지금 한 폭을 보내니 잘 배접하여 그에게 줘 보게 하고 잘 간수하도록 하라. 이것은 육탐미(陸探微)의 그림이니 ������동파집(東坡集)������ 가운데 이를 찬탄한 글이 있다. 낙손(/孫)이 이 사자가 분신효휴(奮迅哮吼)하여 백수뇌열(百獸腦裂)하는 것처럼 기상이 있기 바란다.
【註解】
1) 黃直卿(황직경) : 선생의 전도(傳道) 문인. 선생의 사위임.
2) 낙/孫(낙손) : 직경의 아들. 자는 자목(子木), 선생의 외손(外孫)임.
3) 記得外翁否(기득외옹부) : 외옹은 선생 자신을 말함. 낙손이 일찍이 선생 집에서 기르다가 직경의 집에 간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
4) 渠(거) : 낙(/)을 가리킴.
5) 壁間獅子(벽간사자) : 벽에 그린 사자.
6) 背起與看(배기여간) : 이 그림을 배접하여 낙에게 주어 보게 하라는 말.
7) 奮迅哮吼(분신효후) : 사자가 기세를 떨치고 일어나 으르렁거림.
8) 百獸腦裂(백수뇌열) : 백수의 머리가 찢어짐.
1) 진시랑(陳侍郞) : 진준경(陳俊卿). 이때에 이부시랑(吏部侍郞)임.
2) 위자(慰藉) : 위로와 도움.
3) 태자(台慈) : 큰 자애.
4) 인중(引重) : 천거.
5) 효(效) : 바치다.
6) 유본(有本) : 본(本)은 군심(君心)을 말함.
7) 강화(講和) : 금로(金虜)와의 화친(和親).
8) 삼강(三綱) :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
9) 독단(獨斷) : 현주(賢主)는 위에서 독단으로 신하를 독책(督責)해야 한다는 설.
10) 국시(國是) : 강화(講和)를 국시(國是)로 삼고 백성들의 비난을 금지함.
11) 고국(故國) : 중원(中原).
12) 소간(宵旰) :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 후에 늦게 저녁을 먹는다는 뜻으로 천자(天子)가 정사(政事)에 부지런함을 이름.
13) 조종지수(祖宗之讐) : 금로(金虜)가 조종(祖宗)의 능묘(陵廟)를 헐고 이제(二帝)를 북(北)으로 인질로 데리고 감.
14) 박물세고(薄物細故) : 강화(講和) 이전의 쟁폐(爭幣) 할지(割地) 능묘(陵廟) 등의 모든 일.
15) 천하지방(天下之防) : 군신지의(君臣之義)와 부자지은(父子之恩).
16) 건극(建極) : 입법(立法).
17) 문치(文致) : 꾸며 이룸.
18) 영(攖) : 촉(觸).
19) 작용(作俑) : 흙으로 인형을 만들어 무덤 속에 사자(死者)와 함께 묻음. 견맹자(見孟子).
20) 덕유일(德惟一) : ������서(書)������ 함유일덕(咸有一德).
21) 희령(熙寧) : 송(宋) 신종(神宗) 연호(年號).
22) 왕안석(王安石) : 자(字) 개보(介甫). 신종시(神宗時)에 변법(變法)으로 국가를 그르친 사람.
23) 방붕방무(邦朋邦誣) : ������주례(周禮)������ 추관(秋官)에 주(註)하기를, “붕당상아사정불평 방무망군신사사실실(朋黨相阿使政不平 邦誣罔君臣使事失實)”이라 하였음.
24) 사흉지죄(四凶之罪) : 유방찬극(流放竄殛).
25) 사시(斯時) : 왕안석(王安石) 장채(章蔡)의 때.
26) 대화(大禍) : 정강지변(靖康之變)을 가리킴. 북송(北宋) 정강(靖康) 2년에 금군(金軍)이 남하(南下)하여 송도(宋都)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 흠종(欽宗)을 인질로 잡아감.
27) 급급(汲汲) : 쉬지 않는 모양.
28) 대인지사(大人之事) : ������맹자(孟子)������에 ‘유대인(惟大人)이아 위군격군심지비(爲能格君心之非)’라고 함.
29) 성기성물(成己成物) : 성기(成己)는 진기(盡己)를 뜻함. 책성물위천하(責成物爲天下).
30) 합하지언(閤下之言) : 진시랑(陳侍郞)이 선생에게 구언(求言)함.
31) 상서왕공(尙書汪公) : 명(名)은 응신(應辰), 자(字)는 성석(聖錫), 옥산인(玉山人)
32) 경축(競逐) : 서로 달리고 쫓음.
33) 중류저주(中流底柱) : 중류지주(中流砥柱)라고도 함. 황하 중류에 있는 돌 기둥.
34) 생령(生靈) : 생민(生民). 生命.
35) : 진승상(陳丞相) : 앞의 진시랑(陳侍郞).
36) 지척지서(咫尺之書) : 지(咫)는 팔촌(八寸). 편지의 길이가 혹은 팔촌 혹은 한 자.
37) 경문(慶問) : 하문(賀問)과 같음. 진공(陳公)이 새로이 승상이 됨을 하례(賀禮)함.
38) 무존(撫存) : 위로하고 휼문(恤問)함.
39) 개납(開納) : 마음을 역고 받아들임.
40) 무소단장(無所短長) : 재능이 없음을 무장처(無長處)라 하니 또한 단처(短處)도 없음.
41) 수차동강지피(守此東岡之陂) : 후한(後漢)의 주섭(周燮)이 천자의 부름에 응하지 않으니 종족(宗族)이 말하기를, “하위수차동강지피호(何爲守此東岡之陂乎)”라 함.
42) 심불득이(甚不得已) : 선생이 두 번 절화의억요행지계(絶和義抑僥倖之戒)를 올렸으나 진언(進言)이 실행되지 않자 드디어 극력 소명(召命)을 사절(辭絶)함.
43) 사관(祠官) : 현인(賢人)을 우대하기 위해 설(設)한 한직(閑職).
44) 광견(狂獧) : 뜻이 너무 커서 상규에 벗어남과, 고집이 너무 세어 용납성이 없고 지조가 굳음. 모두 중용에 벗어난 행위.
45) 훈목(熏沐) : 향(香)을 몸에 칠함을 훈(熏)이라 함.
46) 기사(器使) : 사람을 적재적소에 씀.
47) 청화원(淸化原) : 화원(化原)은 군심(君心).
48) 건강불항(乾剛不亢) : ������역������ 건괘(乾卦) 상구(上九) 효사(爻辭)의 뜻. 덕(德)이 굳세어 굴(屈)하지 않으나 항(亢)하지도 않음. 항(亢)은 과어상이불능하지의(過於上而不能下之意).
49) 효효~요순(囂囂~堯舜) : ������맹자������에 있는 이윤(伊尹)의 말을 씀.
50) 철즙(綴緝) : 엮음. 얽음. 편집.
51) 저온(底蘊) : 깊은 속. 마음속에 깊숙이 감추어 둔 일. 온오(薀奧).
52) 투서헌계(投書獻啓) : 자기를 추천해 달라고 요구하는 글. 한퇴지(韓退之)의 상재상서(上宰相書), 유자후(柳子厚)의 상권보궐계(上權補闕啓) 같은 것.
53) 대우/변려(對偶/騈儷) : 이른 바 사륙문(四六文)은 당(唐)대부터 있었음. 송(宋) 때 사과(詞科)를 오로지 이로써 사람을 채용함.
54) 강우(江右) : 강서(江西).
진태부(陳太傅) : 후한의 진번(陳藩)을 말한 것 같음.
대우변려(對偶騈儷) : 이른 바 사륙문(四六文)은 당(唐)대부터 있었음. 송(宋) 때 사과(詞科)를 오로지 이로써 사람을 채용함.
55) 진/태부(陳/太傅) : 후한의 진번(陳藩)을 말한 것 같음.
56) 왕상서(汪尙書) : 이름은 응신(應辰), 자는 성석(聖錫), 옥산인(玉山人) 진사 제일 급제. 관직이 이부상서에 이름. 시호는 문정(文定). 단명전 학사임. 선생이 당시 선류(善類)의 종주로 추존.
57) 탁호(拆號) : 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을 적은 봉함을 터뜨려 그 이름을 방에 내 거는 일.
58) 성위(省闈) : 상서성.
59) 취사(取舍) : 왕공이 고관(考官)으로 있으면서 소식(蘇軾)의 문장을 모방하여 쓴 사람을 합격시킨 일.
60) 경행(經行) : 경술(經術)과 덕행.
61) 위법자(爲法者) : 시관(試官).
62) 소씨공거지의(蘇氏貢擧之議) : 동파(東坡)가 “과거 시험에서 시부(詩賦)를 위주로하여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덕행으로써 사람을 뽑는 것을 심히 비난하였음.
63) 동주이선생(東州二先生) : 손복(孫復)과 석개(石介)를 말함.
64) 궁행군자(躬行君子) : 동주 이 선생.
65) 위강소소(爲綱所笑) : 왕안석을 공격하고 소동파를 두둔하였기 때문에 장강의 비웃는 바가 되다.
66) 관설급차(關說及此) : 관설은 통설(通說)과 같음. 차(此)는 소동파를 두둔함을 말함.
67) 험(驗) : 왕상서가 시관으로서 정도를 잃고, 소동파의 문장을 숭상하는 자를 등용함.
68) : 연배(延拜) : 등용(登庸).
69) : 매하(每下) : 매(每)는 최(最)와 유(愈)의 뜻.
70) 물시원리위거취(勿視元履爲去就) : 건도(乾道) 4년에 위원리(魏元履)가 태학 교수로써 재상의 미움을 받아 태주(台州)교수로 좌천되었는데 선생이 이 일로 인하여 극력 사직을 청하였기 때문에 왕공이 이 말을 하였음.
71) 소신(小臣) : 위원리(魏元履)를 말함.
72) 진공(陳公) : 진준경(陳俊卿).
73) 풍성(風聲) : 서경 필명에 수지풍성(樹之風聲)이란 말
이 있는데 그 「소주(小註)」에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는 바가 있게 하는 것을 성(聲)이라 한다.” 하였음.
74) 수전일지비(遂前日之非) : 수(遂)라는 잘못을 꾸밈을 말함. 전일지비는 위원리를 좌천시킨 일을 말함.
75) 효(效) :험(驗)과 과(果).
76) 의회미거(疑晦未祛) : 거(祛)는 거(去), 개(開)임.
77) 수(수/) : 수(酬)임
78) 감즙(感戢) : 즙(戢)은 장(藏)이니 감심장우중(感心藏于中)임.
79) 기인(其人) : 승(僧) 개선(開善) 도겸(道謙).
80) 선생~오학(先生~吾學) : ������어류(語類)������에 “내 15,6세 때에 선학(禪學)을 공부하였는데 뒤에 이선생(李先生)께 고(告)하니 ‘옳지 않다.’ 했다. 재삼 질문하니 ‘성현의 말씀을 공부하라.’고 하여 드디어 선(禪)을 잠시 버리고 성현의 글을 읽어보니 점점 그 의미를 알 수 있었고 석씨(釋氏)를 되돌아보니 온갖 모순을 볼 수 있었다.” 함
81) 반역~인류(反易~人類) :������왕서(汪書) 중에서 석씨를 논한 말임.
82) 지관(止觀) : ������원각경(圓覺經)������과 ������화엄경(華嚴經)������의 말. 망상을 억제하고 만유(萬有)의 진리를 관조(觀照)하여 깨달은 일. 명(明)과 정(靜)이 지관(止觀)의 묘체이다.
83) 借彼 : 차는 석씨(釋氏)를 가리킴.
84) 참청(參請) : 불어(佛語)임. 저들이 스승에게 도를 묻는 것을 참알청학(參謁請學)이라 함.
85) 어록(語錄) : 상채어록임.
86) 총림(叢林) : 승려가 회합하는 곳.
87) 호문정(胡文定) : 이름은 안국(安國). 사숙정문(私淑程門)함.
88) 능엄원각(능嚴圓覺) : 두 불경의 이름.
89) 여박사(呂博士) : 이름은 대림(大臨), 자는 여숙(與叔), 정자 문인. 원우(元祐)에 태학박사가 됨.
90) 누일시행(累日侍行) : 이 때에 선생이 무학박사(武學博士)로써 배명(拜命)하고 귀가(歸家)하였고 왕(汪)은 민수(閩帥)였기 때문에 함께 상종(相從)하였음.
91) 친자(親炙) : ������맹자(孟子)������ 주(註)에 ‘친근하여 훈자(薰炙)함’이라 함.
92) 익추(益推) : 익추차리(益推此理)
93) 무의지어(無義之語) : 불가가 말하는 화두(話頭).
94) 어차(於此) : 차(此)는 물(物)과 윤(倫)임.
95) 오종(吾宗) : 오도(吾道).
96) 존구점명(存久漸明) : 명도가 말하기를, “학자는 반드시 먼저 이치를 알고 성경(誠敬)으로써 이를 보존할 따름이니, 오래 보존하면 이치가 절로 밝아진다.”고 함.
97) 무불재시(無不在是) : 시(是)는 오종(吾宗).
98) 윤/서(淪/胥) : 서로 이끌어 함께 쇠에 빠짐.
99) 피지위설(彼之爲說) : 피(彼)는 석씨를 가리킴.
100) 타구지적도(它求之賊道) :타(它)는 이단을 말함. 이단에서 구함이 오도(吾道)를 해침.
101) 왕무(王務) : 나라의 공무(公務).
102) 오훼(烏喙) : 부자(附子).
103) 양소(兩蘇) : 소식과 소철.
104) 왕씨(王氏) : 왕안석.
105) 천루(淺陋) : 선생 자신을 말함.
106) 소존소수(所存所守) :심지(心志)와 규모(規模).
107) 명검(名檢) : 법도.
108) 명교(名敎) : 명분의 교. 인륜의 교. 유교의 별칭.
109) 정채(精彩) :정화문채(精華文彩). 정신광채(精神光采/)
110) 기변(機變) : 교사(巧詐). 수기응변(隨機應變).
111) 설앙(薛昂) : 왕당(王黨)의 극자(極者). 송 휘종 때 상서좌승(尙書左丞). 채경(蔡京)에 붙어 온 집안이 경(京)자를 말하는 자는 매질을 하고 자신이 잘못하여 말을 하면 스스로 자기 입을 때렸다 함.
112) 채경(蔡京) : 송 철종 때 신법을 행함. 육적(六賊)의 우두머리.
113) 금능(金陵) : 왕안석이 금능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금능이라 칭함.
114) 진관(秦觀) : 자는 소유(少游). 동파가 그의 황루부(黃樓賦)를 보고 굴송(屈宋)의 재능이 있다 함.
115) 이응(李鷹/) : 자는 방숙(方叔). 동파가 그 필묵을 보고 비사주석(飛沙走石)의 세가 있다 함. 동파가 공거(貢擧)를 맡았을 때 그를 빠뜨려 시를 지어 자책함. 동파가 죽었을 때 이응이 따라 죽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음.
116) 패합(捭闔) : 열고 닫음. 귀곡자(鬼谷子)의 변론술을 말함.
117) 가차(假借) : 용서함.
118) 염기심(厭其心) : 마음을 누름.
119) 요마(么麽) : 작은 모양.
120) 대비각기(大悲閣記) : 동파 대비각기에, “재계지율(齋戒持律)하고 강송기서(講誦其書)하여 숭식탑묘(崇飾塔廟)하는 것이 불(佛)의 가르침이거늘 혹자는 재계지율이 무심(無心)만 못하고 강송기서가 무언(無言)만 못하고 숭식탑묘기 무위(無爲)만 못하다 하니 무심 무언 무위는 배불리 먹고 즐기는 것과 같으니 이는 크게 부처님을 속이는 것이다.” 함
121) 중화원기(中和院記) : 중화승상원기(中和勝相院記)에, “불도(佛道)는 이루기 어렵다. 사람으로 하여금 비산수고(悲酸愁苦)하게 한다. 내 전에는 이를 만모(慢侮)하여 믿지 않았다. 지금 보월대사(寶月大師) 유간(惟簡)이 그가 사는 집의 본말로써 기문을 지어 주기를 요구하니 내 그의 정민강위(精敏强爲)한 설을 아껴서 운운” 함.
122) 약피~기정(掠彼~其精) : 피(彼)는 불씨를 말함. 약(掠)은 빼앗음이요 각(角)은 항거(抗拒)와 같음.
123) 위지굴(爲之詘) :소씨가 석씨에 굴하다.
124) 한구(韓歐) : 한창려와 구양공.
125) 손석(孫石) : 손명복(孫明復)과 석수도(石守道).
126) 구산~지화(龜山~之火) : 구산이 육사중(陸思仲)에게 준 글에서 이 몇 사람이 그 지혜가 선왕의 도를 밝히기에 부족하다. 마치 한 잔의 물로써 한 수레의 섶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다고 함.
127) 취칙(取則) : 칙(則)은 법임.
128) 탕무~지도(湯武~之徒) : 동파가 탕무를 논하여 말하기를, “가령 당시에 동호(董狐) 같은 사관(史官)이 있었더라면 남소지사(南巢之事)를 반드시 반(叛)이라 썼을 것이요 목야지사(牧野之事)를 반드시 시(弑)라 썼을 것이다.” 고 하고 순욱(荀彧)을 논하여 말하기를, “순문약(荀文若)은 성인의 무리이다. 조조(曺操)가 아니면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조조를 도왔다. 어찌 조조로 하여금 반란하게 하였겠는가. 인의(仁義)로써 천하를 구함에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신기(神器)가 저절로 이르렀으니 부득이 받은 것이다. 이것은 문왕의 도요 문약의 마음인 것이다.” 고 함.
129) 원정(原情) : 원(原)은 서(恕)임.
130) 차기죄(差其罪) : 차(差)는 차(次)임.
131) 말감(末減) :말(末)은 박(薄)임. 감(減)은 경(輕)임.
132) 설설(屑屑) : 구차한 모양.
133) 형명(刑名) : 형(刑)은 신한(申韓)의학이니 형법이요 명(名)은 명분만 쫒아 실질을 책함을 말함.
134) 저사(狙詐) : 기회를 타서 속임. 일설에는 원숭이처럼 속임.
135) 발본색원(拔本塞源) : ������춘추 좌전������의 말. 나무의 뿌리를 뽑고 물의 근원을 막음.
136) 공가고인(工訶古人) : 공은 선(善)임. 대언노책(大言怒責)임.
137) 구익(求益) : 나에게 보탬이 되다.
138) 횡거~문정(橫渠~文正) : 횡거가 소시에 병사(兵事)를 좋아하여 18세 때에 범문정(范文正)에게 글을 올렸는데 문정(文正)이 말하기를, “유자(儒者)는 명교(名敎)가 있거늘 어찌하여 병사를 일삼는가.” 하고 ������중용(中庸)������을 읽기를 권하였다.
139) 거사(擧似) : 들어 보임. 제시함.
140) 행장(行狀) : 이천(伊川)이 지은 명도(明道) 행장에 말하기를, “선생이 15,6세 때에 여남(汝南) 周茂叔)이 도(道)를 논함을 듣고 개연히 구도(求道)의 뜻을 가졌으나 그 요령을 알 수 없었다. 제가(諸家)를 범람(汎濫)하고 석노(釋老)에 출입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후에 육경(六經)에 돌이켜 구한 뒤에 도의 요체를 터득했다.” 고 함.
141) 선생자언(先生自言) : 명도(明道)가 말하기를, “옛적엔 주무숙(周茂叔)에게 수학하였고 지금은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기는 곳을 찾는다.” 고 함.
142) 동서명(東西銘) : 횡거(橫渠)가 그 서실의 양쪽 창문에 명(銘)을 써 걸었는데 동쪽은 「폄우(砭愚)」라 하고 서쪽은 「정완(訂頑)」이라 했다. 이천(伊川)이 “이런 이름은 사람들의 논쟁의 실마리가 될 수 있으니 차라리 그냥 동명 서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여 횡거가 이에 따랐다.
143) 노망(鹵莽) : 소홀함. 거침. 마음을 쓰지 않음. 구차함.
144) 차서(此序) : 정자의 ������역전(易傳)������ 서(序).
145) 하락(下落) : 귀숙(歸宿)과 같음.
146) 체용~무간(體用~無間) : 일원무간(一源無間)이란 말은 정자가 본래 역(易)을 논할 때에 한 말인데 선생이 또 「서명」을 논함에 왜 이 말을 썼을까. 「서명」이 이 이(理)가 하나이면서 만가지 다름에 통함을 밝혔으니, 인(仁)이 체(體)가 되고 의(義)가 용(用)이 되는 까닭을 말하였다. 이(理)가 하나인 가운데에 분수(分殊)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이른 바 일원(一源)이다. 「서명」이 사친(事親)의 정성을 인하여 사천(事天)의 도를 밝혔으니, 사천(事天)과 사친(事親)은 그 일이 지극히 드러난 일인데 그 이치는 미묘하니 드러난 사실을 취하여 그 이치가 그 안에 있음을 말함이니 이른 바 무간(無間)이다.
147) 평이차과(平易蹉過) : 평이(平易)는 하문의 고심원대(高深遠大)와 상대적인 말이니 일용 상행하는 평이한 곳을 가리켜 한 말이다. 배움이 반드시 먼저 평이한 곳을 따라 공부하여야 점점 쌓이어 터득하는 것이 있음에도, 학자들이 평이한 곳에 소홀히 하고 원대한 곳을 생각하여 차과(蹉過)에 이른다. 차과(蹉過)는 홀략(忽略)의 뜻.
148) 우유염어(優游厭飫)/ : 두예(杜預)의 ������춘추������ 서(序)에, “우이유지사자구지염이어지사자추지(優而游之使自求之厭而飫之使自趍之)”라 함.
149) 홀연이유견(忽然而有見) : 일초돈오(一超頓悟)를 말함.
150) 서질명토(叙秩命討) : ������서(書)������ 「대우모(大禹謨)」 참견.
151) 계천(稽天) : 계(稽)는 지(至)의 뜻.
152) 졸도기언(卒道其言) : 기언(其言)은 명도의 말.
153) 여형공(呂滎公) : 이름은 희철(希哲) 자는 원명(原明) 정헌공(正獻公)의 장자. 형양군공(滎陽郡公)에 봉함.
154) 가전(家傳) : 여본중(呂本中)이 지음.
155) 송기언(誦其言) : ������가전(家傳)������을 지은 자가 형공(滎公)의 말을 인용함. ������가전������ 마지막 장에 말하기를, “공(公)이 늦게 고승(高僧)을 좇아 수옹(修顒)을 근본으로 그 도를 모두 추구한 뒤에 불(佛)의 도가 성인의 도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고 함.
1) 강령(綱領) : 복수. 절화(絶和).
2) 조목(條目) : 수덕(修德). 입정(立政). 용현(用賢). 양민(養民). 선장(選將). 연병(練兵)
3) 인차(引此) : ������춘추������의 말을 인용함.
4) 재궁(梓宮) : 천자의 관을 가래나무로 만든다. 그래서 천자의 능묘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5) 존망(存亡) : 능침 흠묘의 존망. 건도(乾道) 6년에 우상(右相) 우윤문(虞允文)이 능침(陵寢)의 조알(朝謁)을 청하기 위해 금(金)에 사신을 보내자는 주장을 했다. 진준경(陳俊卿)이 이를 다투다 여의치 못해 떠나고 마침내 범성대(范成大)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금인(金人)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거랑(起居郞) 장식(張栻)이 입대(入對)하여 안으로 내치를 충실히 하여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칠 방책을 극언하였으니 이 글에서 논하는 것이 이것이다. 선생은 이때에 모친 상복 중이었다.
6) 한참장이(漢斬張耳) : 한이 초나라를 침에 조나라의 진여(陳餘)에게 원병을 청하니, 진여가 말하기를, “한나라가 장이(張耳)의 목을 베면 함께 따르겠다.” 하니, 한나라가 장이를 닮은 사람의 목을 베어 진여에게 보내니 진여가 이에 속아 한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쳤다.
7) 선정(先正) : 위준(魏浚)을 가리킴.
8) 승당(承當) : 복수의 계획을 말함.
9) 사개(使介) : 능침의 배알을 청하기 위한 사신.
10) 용거지지(容車之地) : 오가며 능침을 조알할 수 있는 길을 허용하다. 전의(前議) : 대절목이 서로 어긋난 논의.
11) 일대절목(一大節目) : 기청사(祈請使)를 파견하는 일.
12) 괴려(乖戾) : 남헌(南軒)이 기청사의 파견을 대의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였으나 우공의 주장대로 끝내 사신을 보냈기 때문.
13) 회경(會慶) : 왕의 탄신일.
14) 미륜(彌綸) : 두루 다스림.
15) 피약(彼若) : 피(彼)는 우윤문을 가리킴.
16) 견청(見淸) : 사신을 소환하라는 청을 들어줌.
17) 사독(四牘) : 남헌의 주소(奏疏) 초본이 종이 넉장의 분량임.
18) 오인(吾人) : 남헌을 가리킴. 오당(吾黨)으로도 씀.
19) 맹자수단(孟子手段) : 제 선왕이 호화(好貨) 호색(好色)을 말했을 때 맹자는 호화 호색을 나쁘다 하지 않고 화색(貨色)으로부터 위정(爲政)의 단서를 끄집어내어 선왕이 인욕을 절제하고 천리를 보전하도록 인도한 수단을 말함.
20) 순자도철(徇此塗轍) : 도철(塗轍)은 성인의 유법을 말하며, 아울러 엄공인외(嚴恭寅畏)를 가리켜 말함.
21) 청대지운(請對之云) : 선생이 전에 남헌(南軒)에게 천자께 청대하여 시사(時事)를 극론하고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라는 권한이 있는데 이는 선생의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란 말임.
22) 천의(天意) : 천자의 뜻.
23) 시립(侍立) : 벼슬이름.
24) 성심(聖心) : 천자의 마음.
25) 감납(鑒納) : 경계로 받아들임.
26) 조슬지규(造膝之規) : 천자의 무릎 아래에 바짝 다가가 은밀히 간언하는 경계.
27) 향합(響合) : 두 소리가 울려 합치듯 아주 잘 화합함.
28) 심성(甚盛) : 매우 성대하다.
29) 면전(勉旃) : 힘쓸지어다.
30) 친견지(親見之) : 남헌(南軒)이 이를 직접 보다.
31) 입담지경(立談之頃) : 서서 말하는 사이. 곧 아주 짧은 시간.
32) 선종(旋踵) : 발꿈치를 돌리는 사이. 아주 짧은 시간.
33) 복심지계(服心之契) : 마음이 서로 맞음.
34) 십한(十寒) : 하루 따뜻하게 하고 열흘 춥게 하면 따뜻해질 수 없다는 말.
35) 중초(衆楚) : 제나라 말을 가르치는데 여러 초나라 사람이 곁에서 지껄여 대면 제나라/ 말을 배울 수 없다는 말.
36) 불심(不審) : 알지 못하겠다.
37) 고명(高明) : 상대방에 대한 존칭.
38) 야직(夜直) : 숙직.
39) 선소(宣召) : 천자의 부름.
40) 위포(韋布) : 서민. 백성.
41) 장구(章句) : 글 가운데에 글 뜻이 끊어지는 곳을 장(章)이라 하고 말이 끊어지는 곳을 구(句)라 하는데 여기서는 경륜과는 거리가 먼 한낱 글공부를 말함.
42) 평포방착(平鋪放著) : 평(平)은 평이하다는 말. 포(鋪)는 포(布) 즉 펴다는 말. 방(放)은 방치(放置)의 뜻. 착(著)는 의미 없는 어조사. 곧 너무 평범하다는 말.
43) 잠완(潛玩) :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함.
44) 묵식심통(黙識心通) : 말 없이 알고 마음으로 깨달음.
45) 기용가득이추(其用可得而推) : 근본이 서면 그 쓰임을 백방으로 미루어 나가 응용할 수 있음을 말함.
46) 추류(推類) : 서로 비슷한 점으로부터 그 밖의 일을 미루어 짐작하는 일.
47) 능지(能之) : 천자가 신기한 입설과 광박한 유추를 자기의 장점으로 생각함.
48) 작총명(作聰明) : 천자가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함.
49) 자성현(自聖賢) : 천자가 스스로 성현이라고 생각함.
50) 연중(筵中) : 경연(經筵) 중에.
51) 윤일(輪日) : 매일 이어서.
52) 만기지가(萬幾之暇) : 천자가 정사를 보고 난 여가.
53) 영예(英睿) : 빼어난 슬기.
54) 투(投) : 사이에 낌.
55) 인제국용지명(因制國用之名) : 제국용의 이름으로 건도(乾道) 3년에 제국용이란 관청을 설립하여 재상이 이를 겸직하도록 함. 건도 5년에 폐함.
56) 비범(非凡) : 비상(非常).
57) 과율(科率) : 율(率)은 율(律)의 착오인 듯. 일설에는 관가(官家)의 공용의 물자를 전례에 따라 정해 놓고 이를 백성으로부터 거두어 쓰는 것을 과율이라 함.
58) 제색(諸色) : 각 방면. 각 부류. 각 가지 물품. 색(色)은 모양. 꼴. 종류의 뜻.
59) 지비(支費) : 지출.
60) 하허(何許) : 어느 곳.
61) 유회(類會) : 종류별로 모음.
62)참서(慘舒/) : 고통과 편안함.
63) 불인인지정(不忍人之政) : 인민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 곧 어진 정치.
64) 둔전(屯田) : 군대가 머물러 수비하면서 농사를 지음.
65) 실변(實邊) : 국토의 변방이 백성을 이주케 하여 농사를 짓고 살게 함으로서 생산도 증대시키고 아울러 변방 수비의 일환이 되도록 하는 정책.
66) 구정(丘井) : 사정(四井)을 일읍(一邑)으로 하고 사읍(四邑)을 일구(一丘)로 함. ������전한(前漢) 형법지(刑法志)������에 나옴.
67) 구혁(溝洫) : ������설문(說文)������에 말하기를, 정(井)과 정 사이의 너비 넉자 깊이 넉자의 도랑을 구(溝)라 하고 십리가 성(成)이 되는데 성(成)과 성 사이의 넓이 여덟 자 깊이 여덟 자의 도량을 혁(洫)이라 함.
68) 강장(疆場) : ������운회(韻會)������에 강(疆)은 계(界)를 말하고 장(場)은 반(畔)을 말함.
69) 군민잡경(軍民雜耕) : 변방 군현에 이미 민전이 있는데 그 사이에 관전(官田)을 둠으로써 혼잡을 이룸을 말함.
70) 복고(復古) : 옛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함을 말함.
71) 양자(兩者) : 각 주현 사이의 빈부의 차를 없애는 것과 둔전을 두는 것.
72) 정본(政本) : 정령(政令)의 근본을 말함이니 조정(朝廷)을 가리킴.
73) 행문(倖門) : 간신의 무리.
74) 양복(陽復) : 음이 사라지고 양이 회복됨. 간신이 물러가고 충신이 등용됨. 흉한 형세가 지나가고 길한 형세가 도래함.
75) 주) 광중(廣仲) : 명은 식(寔) 호문정(胡文正)의 종자(從子). 오봉(五峰)의 종제(從弟).
76) 천서(天叙) : 하늘이 내린 법칙이니 오륜(五倫)같은 것이다.
77) 천질(天秩) : 하늘이 정한 질서이니 존비 귀천의 상하 등급이다.
78) 천명(天命) : 하늘이 덕 있는 자를 상줌이다.
79) 천토(天討) : 하늘이 죄 있는 자를 벌줌이니 모두 천리와 인간의 당위를 말함.
80) 물개(物皆) : ������맹자������ 양 혜왕 장구 (章句) 상(上)에 나오는 말로서, 물건의 경중과 장단은 저울에 달거나 자로 재어야 정확히 알 수 있듯이, 사람 마음의 사물에 대한 반응도 천리(天理)와 당위(當爲)의 법칙에 의거하여 그 경중 장단을 가름해야 한다는 뜻임.
81) 어차(於此) : 차(此)는 천리, 준칙을 말함.
82) 경권수불(擎拳竪拂) : 경권은 두 주먹을 높이 드는 것이요 수불은 먼지떨이를 세우는 것이니 모두 선가(禪家)에서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임.
83) 운수반시(運水般柴) : 불씨(佛氏)가 신통(神通)하고 묘용(妙用)한 작용을 한다는 의미.
84) 전배(前輩) : 정자(程子)를 가리킴.
85) 경계(境界) : 마음이 빈 경계.
86) 유어이학(流於異學) : 선가(禪家)의 창광(倡狂) 자자(自恣)로 흘러 들어 감을 말함.
87) 체(體) : 몸으로 행한다는 말임.
88) 소식(消息) : 나타나고 소멸함을 말함.
89) 주) 이선생(二先生) : 정이천과 장횡거를 말함.
90) 묘제(墓祭) : 고대에는 없었고 진한(秦漢)시대부터 비롯되었음.
91) 절물(節物) : 삼월 삼짓날의 화전과 동짓날의 팥죽 같은 것.
92) 사시정례(四時正禮) : ������의례(儀禮)������에 사시제(四時祭)가 있음.
전일지의(前日之議) : 선생이 제설(祭說)을 정하여 남헌에게 의논한 것임.
93) 전일지의(前日之意) : 선생이 제설(祭說)을 정하여 남헌에게 의논한 것임.
94) 불이처(不易處) : 난처하다는 뜻임.
95) 무해어의리(無害於義理) : 제사와 연락(宴樂)을 겸하여 가리킴.
96) 불능행원(不能行遠) : 명절의 연락과 제사를 모두 폐하는 일을 가리킴.
97) 곡삭(告朔) : 매월 초하루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
98) 원일이단(元日履端) : 정월 초하루.
99) 표장(彪丈) : 표덕원(彪德遠) 임. 호오봉(胡五峰) 문인이며 장경부와 동학 문인임.
100) 소론(所論) :표장소론(彪丈所論)임.
101) 소승지기(所乘之氣) : 천명소승지기(天命所乘之氣)를 말함.
유명일심(惟明一心) : 이 마음을 밝히면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
102) 유명일심(惟明一心) : 이 마음을 밝히면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
103) 불식심체(不識心體) : 석씨는 심체가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근본임을 모른다는 말임.
104) 만법(萬法) : 만사(萬事)를 말함.
105) 내외지도불비(內外之道不備) : 직내(直內)는 있되 외방(外方)은 없다는 말임.
106) 좌우미장(左右迷藏) : 아이들이 장난할 때에 찾는 자가 왼 편에 있으면 오른 편에 숨기고 찾는 자가 오른 쪽에 있으면 왼 쪽에 숨기는 일을 말함. 서로 숨기는 일을 비유함.
107) 정자위인(程子爲人) : 정자가 “공자와 맹자께서 인을 말한 곳을 모아서 인의 뜻을 구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정자 위인 운운하였고 남헌이 정자의 말을 따라서 이미 그 인을 말한 곳을 모아서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을 만들었기 때문에 선생이 그 불가함을 말한 것이다.
108) 지작애자간(只作愛字看) : 한유가 지은 「원도(原道)」 중게 ‘박애지위인(博愛之謂仁)’ 같은 것을 말함.
109) 불감지작애설(不敢只作愛說) : 정문(程門)에서 인(仁)을 애(愛)의 이(理)라 하고 애를 인의 용(用)이라 했기 때문에 이르는 말임.
110) 불면유폐(不免有弊) : 정자가 인(仁)을 씨앗의 싹트는 이치로 말했고 수족마비 현상을 불인(不仁)이라 말했으며, 양귀산이 만물이 나와 동체(同體)인 상태가 인이라 했고, 사상채가 지각이 있어 아프고 가려움을 아는 것이 곧 인이라 했으니, 이런 것들이 일종의 폐단이란 말임.
111) 기폐야우(其敝也愚) : ������논어������에 “好仁不好學이면 其敝也愚”란 구절이 있음.
112) 역행지근(力行之近) : ������중용������에 “力行이 近乎仁”이란 구절이 있음.
113) 척식명행(擿埴冥行) : 맹인이 작지로 땅을 더듬으며 길을 찾는 것을 말함.
114) 인지소이애(仁之所以愛) : ������맹자������에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 인이라 했음.
115) 차수(此雖) : 차(此)는 仁之所以愛而愛之所以不能盡仁을 말함.
116) 주) 중자지설(中字之說) : 경부(敬夫)가 중(中)의 뜻을 풀이한 설.
117) 상성형도(狀性形道) : 남헌의 글에 중용의 중은 중으로써 도를 나타낸 것이요, 희노애락이 발하지 아니한 것을 중이라 한다고 할 때의 중은 중으로써 성의 체단을 나타낸 것이라 함.
118) 지일게……부동(只一箇……不同) : 정자의 말임.
119) 재중지의(在中之義) : 이 중(中)은 곧 심중(心中)을 말함.
120) 쇄락(灑落) : 청명고원(淸明高遠)의 뜻임.
121) 성인……사도(成人……師道) : 成人材)는 명도에 해당하는 말이요 존사도(尊師道)는 이천에 해당하는 말임. 명도가 일찍이 말하기를, “후일 사도(師道)를 높일 사람은 내 아우이다. 후학을 접인(接引)하여 그 사람의 재능에 따라 성취시키는 일은 내 이를 사양치 않겠다.”고 함.
122) 내외숙연(內外肅然) : 안은 정전(靜專)하고 밖은 정칙(整勅)함을 말함.
123) 주) 불망부조(不忘不助) : 「養氣者 必以集義爲事 而勿預期其效 其或未充 則但當勿忘其所有事 而不可作爲 以助其長 乃集義養氣之節度也」에서 나온 말. ‘기(氣)를 기르려는 사람은 반드시 평소에 정의(正義)를 행하여 이를 쌓아가야 하며 그 효과를 미리 기대해서는 안 된다. 혹 불충분하더라도 다만 해야 할 일을 잊지 말 것이며 인위적으로 그 일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정의를 행하여 기를 기르는 정도이다.’
124) 삼두양서(三頭兩緖) : 마음이 일어남과 이를 잡음이 둘이요 또 이를 아울러 잡음이 셋이다.
125) 차(此) : 마음으로써 마음을 잡는 모양을 말함.
126) 삭삭(爍爍) : 매우 빛나는 모양을 말함.
127) 주) 생지성(生之性) : 이천이 말하기를, “마음을 씨앗에 비유한다면 그 싹이 트는 이치는 곧 인(仁)이요, 양기가 발하는 곳은 곧 정이다.” 라고 함.
128) 애기정(愛其情) : 이천이 말하기를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이 인(仁)이다.’라고 하니 후인(後人)이 마침내 애(愛)를 인(仁)이라 하는데 애(愛)는 정(情)이요 인(仁)은 성(性)이다.” 라고 함.
129) 효제기용(孝悌其用) : 이천이 말하기를, “인(仁)은 곧 성(性)이요 효제(孝悌)는 곧 용(用)이다.”라고 함. ������논어(論語)������의 「학이(學而)」 제 삼장(三章) 집주(集註)에 있음.
130) 삼언(三言) : 성(性)․정(情)․용(用)이니 인(仁)․애(愛)․효제(孝悌)를 말함.
131) 일언(一言) : 공(公)을 말함.
132) 금불심고(今不深考) : 남헌을 가리켜 한 말임.
133) 이공위근인(以公爲近仁) : 이천이 말하기를, 인도(人道)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공(公)이 인에 가까우나 공(公)은 곧 인(仁)이라고는 할 수 없다.
134) 천지지심(天地之心) : 생물지심(生物之心)을 말함.
135) 주) 인가(印可) : 불교의 말로써 옳게 여기다. 허가하다는 뜻임.
136) 미발지지(未發之旨) : 미발지중(未發之中)을 말함.
137) 추요(樞要) : 가장 요긴하고 중요로움.
138) 복(復) : ������주역������의 괘 이름. 진하곤상(震下坤上). 기운이 순환하는 상. 일양(一陽)이 오음(五陰)의 아래에서 생기니 음이 다하고 양이 회복되는 상이다.
139) 견천지지심(見天地之心) : 천지는 만물을 생성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는다. 일양(一陽)이 아래에서 회복하는 것이 곧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니 이것이 곧 사려가 싹트지 않는데도 지각이 어둡지 않는 것이요, 또 정중지동(靜中之動)인 것이다.
140) 간(艮) : ������주역������의 괘 이름. 간하간상(艮下艮上). 정지하여 나아가지 않는 상. 간(艮)은 산의 상이니 안중견실(安重堅實)한 뜻이 있고 또 안지(安止)의 뜻이 있으니 지어지선(止於至善)의 뜻이다.
141) 불획기신 불견기인(不獲其身不見其人) : 어떤 사람을 내 등 뒤에 그치게 하여 내가 그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나의 뜰에 지나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니 동중지정(動中之靜)을 설명하려는 말임.
142) 경즉심지정(敬則心之貞) : 정(貞)은 정(正)이요 상(常)이다.
143) 맹자재고(孟子才高) : 맹자는 천자(天姿)가 초매(超邁)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어렵고 안자(顔子)는 천자(天姿)가 순수하고 공부가 진밀(縝密)하여 진덕(進德)이 차례가 있기 때문에 학자가 힘 쓸 곳이 있다. 선생이 남헌의 찰식단예(察識端倪)를 병되이 여겨 존양(存養)이 학문의 본령(本領)임을 역설함.
144) 안자지학(顔子之學) : 비례물시청언동(非禮勿視聽言動) 같은 것.
145) 선왕지소이지일폐관(先王之所以至日閉關) : 양(陽)이 비로소 지하에서 생겨 아주 미약하니 안정을 취한 뒤에 라야 능히 자랄 수 있다. 선왕이 천도(天道)에 순응하여 동짓날 양이 처음 생기는 날을 맞아 안정을 취하여 양(陽)을 기르는 것이다. 그래서 문을 잠그고 상인(常人)들을 다니지 못하게 하고 인군(人君)으로 하여금 사방을 성시(省視)하지 못하게 한다. ������주역 복괘������ 참조.
146) 중정인의(中正仁義) : ������퇴계집(退溪集)������에 “중(中)과 인(仁)을 정(靜)이라 하여 체(體)라 할 것 같으면 정(正)과 의(義)를 동(動)이라 하여 용(用)이라 할 수 있고, 정(正)과 의(義)를 정(靜)이라 하여 체(體)라 할 것 같으면 중(中)과 인(仁)을 동(動)이라 하여 용(用)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중정인의(中正仁義) 넷이 모두 체용(體用)이 있기 때문에 상호(相互) 체용이 된다. 양설(兩說)이 비록 다르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고 함.
147) 이정위본(以靜爲本) : 이발미발(已發未發)설에 말하기를, “일로써 말할 것 같으면 동(動)이있고 정(靜)이있으며 마음으로써 말할 것 같으면 주루관철(周流貫徹)하니 그 공부가 처음부터 간단(間斷)이 없는 것이다. 다만 정(靜)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고 함.
148) 유선유후(有先有後) : 정(靜)이 먼저이고 동(動)이 뒤인 차례를 말함. 경(敬)은 공과 정을 통하기 때문에 한 말임.
체당(諦當) : 정확한 곳을 자세히 안다는 말.
149) 체당(諦當) : 정확한 곳을 자세히 안다는 말.
150) 역이치지(易而置之) : 定以涵動之所本을 動以見靜之所存 위에 둠을 말함.
151) 견개(狷介) : 고집이 세고 절개가 굳어 굴종하지 아니함.
152) 우소(迂踈) : 세상 일에 어둡고 소홀함.
153) 부앙(俯仰) :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여 조금도 거역하지 아니함.
154) 소명(召命) : 신하를 부르는 임금의 명령. 관직의 임명에 임명한 것을 말함.
155) 총포(寵褒) : 총애를 받음. 계사년에 한상서의 유지(有旨)가 있었음.
156) 진기관(進其官) : 좌선교랑(左宣敎郞)으로 승진시킴.
157) 익기록(益其祿) : 숭도사록(崇道祠祿)을 더해줌.
158) 소업(所業) : 저서(著書)하는 일.
159) 대무불연자(大繆不然者) : 크게 잘못되어 그러하지 못한 것. 선생을 비서랑(秘書郞)에 임명한 것.
160) 소욕취자(所欲就者) : 저서(著書)하는 일.
161) 수지상유(收之桑楡 : 상유(桑楡)는 뽕나무와 느름나무로써 지는 해의 그림자가 뽕나무와 느름나무 끝에 남아 있다는 뜻에서 해지는 곳. 말년(末年). 노인의 사기(死期). 서쪽을 가리킴.
162) 종유(縱臾) : 권장(勸獎)함.
163) 의자(議者) : 능침 조알을 기청하자는 사람.
164) 주) 정자명(鄭自明) : 보전인(莆田人). 이름은 감(鑑), 진준경(陳俊卿)의 사위.
165) 부봉(副封) : 정자명이 올린 상소의 부본. 상소할 때 하나는 어전(御前)에 직접 올리고 하나는 상서성(尙書省)에 올리는데 상서성에 올리는 것을 부봉이라 함.
166) 유원성(劉元城) : 이름은 안세(安世), 자는 기지(器之), 시호는 충정(忠定). 벼슬이 간의 대부에 이름.
167) 진요옹(陳了翁) : 이름은 관(瓘), 자(字)는 영중(瑩中), 남검주(南劒州) 사람. 벼슬이 감찰어사에 이름. 시호는 충숙(忠肅).
168) 여하이(如何爾) : 유원성과 진요옹이 정자명의 재변(才辨)과 지략(智略)에 비해 어떠한가를 묻는 말임.
169) 서배(鼠輩) : 용대연(龍大淵)의 무리를 말함.
170) 보군(補郡) : 정자명이 배척당하여 외군인 태주(台州)에 보직됨.
171) 회장(懷章) : 군수의 인장(印章)을 품음.
172) 구대(久大) : 가구가대(可久可大), ������주역������에 나오는 말.
173) 준(濬) : 깊게하다.
174) 동오계발(動寤啓發) : 근심(君心)을 가리켜 한 말.
175) 개절(剴切) : 칼로 베듯이 통절함.
176) 역료(逆料) : 예탁(預度).
177) 청자(聽者) : 군상(君上)을 가리킴.
178) 주) 원시승(袁寺丞) : 이름은 추(樞)요, 자는 기중(機仲)이다. 종정시승(宗正寺丞)을 지냈다. 호는 매암(梅岩)이요, 청렴직절(淸廉直節)하다는 명망이 있었다. 벼슬은 시랑(寺郞)에 이름.
179) 차래(此來) : 남강(南康)에 옴.
180) 지오(支吾) : 지탱(支撑).
181) 첨서(簽書) : 공문서에 결재함.
182) 결견(決遣) : 죄인을 판결하여 보냄.
183) 지견불행(支遣不行) : 지출을 할 수 없음.
184) 낭패(狼狽) : 허겁지겁하여 어찌할 줄 모름. 넘어짐. 실패.
185) 하문(何問) : 하(何)는 「가의전(賈誼傳)」에 힐문(詰問)으로 주(註)하고, 「과진론(過秦論)」에 문(問)으로 주함.
186) 휴우(睢盱) : 소인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양.
187) 간당(看當) : 간(看)은 호(護), 當은 어조사.
188) 가중(家中) : 본가(本家)를 말함.
189) 반취(般取) : 반(般)은 운(運)이니 본가에 가서 가족을 옮겨 남강으로 옴.
190) 종반(從班) : 시종반열(侍從班列).
191) 작서제공(作書諸公) : 원시승이 선생에게 남강의 일을 언로에 있는 제공에게 글을 써 올리라고 권함.
192) 관백(關白) : 주청 후에 담당관에게 보고함.
193) 평탄(抨彈) : 탄핵.
194) 불선(不選) : 불택(不擇) 무론(無論).
195) 심(甚) : 무엇.
196) 차견(差遣) : 사람을 임명하여 보냄.
197) 주) 대단(臺端) : 시어사의 직에 사대(四臺)가 있는데 내사(內事)를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직을 대단이라 하고, 타인이 부를 때는 단공(端公)이라 함. 그 중에 집사를 맡은 자를 잡단(雜端)이라 함.
198) 미견안색(未見顔色) : ������논어������에 나오는 말이나 여기서는 다만 “아직 서로 면식이 없다.” 는 말임.
199) 부인(夫人) : 부(夫)는 어사, 인(人)은 인인(人人)이니 사람마다.
200) 고황지여증(膏肓之餘症) : 쫓아내야 할 간악이니 곧 증적(曾覿)과 왕변(王抃)의 무리를 말함. 고황의 본근이 아니고 지당(支黨)을 가리킴.
201) 종사어차(從事於此) : 차(此)는 간악한 무리를 쫓아내는 일을 말함.
202) 이수자(二竪子) : 명치 끝에 숨었다는 병귀(病鬼)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증적과 왕변을 가리킴.
203) 규견단예(窺見端倪) : 간신들이 자기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리다.
204) 감이교지(感而覺之)/ : 잠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다. 간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들어내다.
205) 효노(虓怒) : 범이 성내어 울다.
206) 결렬(決裂) : 사나움을 떨치는 모양.
207) 결적가세(抉擿苛細) : 소인들의 세세한 비리를 적발함.
208) 불납(不納) : 군상이 받아들이지 아니함.
209) 필사(拂士) : 필(拂)은 필(弼)과 같은 뜻. 천자를 보필하는 큰 신하.
210) 양우왕정(揚于王庭) : 천자 앞에서 간신들의 죄를 낱낱히 밝힘.
211) 불무(不武) : 무(武)는 용(勇)임.
212) 지휘(指揮) : 천자가 간언을 요구하며 내리는 조칙.
213) 주) 재상(宰相) : 왕회(王淮).
214) 추만(推挽) : 왕회가 선생을 절동(浙東) 제거(提擧)에 추천함.
215) 사령추주지말(使令趨走之末) : 제거절동상평다염공사(提擧浙東常平茶塩公事)의 관직.
216) 명공지지(明公之知) : 왕재상이 선생을 알아주는 지우(知遇).
217) 억각(抑却) : 기각. 왕승상이 기각함.
218) 계완(稽緩) : 참고함이 늦다. 선생이 본래 4월 23에 쌀 사들일 것을 주청하였는데, 이 때에는 명주의 쌀 실은 배가 사방에서 몰려 들었는데도 조정이 시행치 않다가 6월 11일에야 쌀을 사들이라는 지시를 받으니, 이 때는 부호들이 이미 쌀을 다 사간 뒤였다.
219) 의소좌우(意所左右) : 좌(左)는 억(抑)이요 우(右)는 조(助)임.
220) 대농(大農) : 국가의 재곡(財穀)을 맡은 관청.
221) 급강(給降) : 국가로부터 내려보내 줌.
222) 이광(二廣) : 광동과 광서. 그 해에 이광은 흉년이 들이 않음.
223) 노축(艫舳) : 노(艫)는 뱃 머리로 노를 젓는 곳이요, 축(舳)은 뱃 꼬리로 키로 방향을 잡는 곳임.
224) 사명(四明) : 절동로 명주부를 말함. 이곳에 사명산이 있어, 이로 인하여 주명이 됨. 지금 영파부(寧波府)임.
225) 지발(支撥) : 발(撥)은 발(發)과 같으니 지급(支給)임.
226) 여피(與彼) : 피(彼)는 대농과 내탕을 가리킴.
227) 상전(賞典) : 쌀을 낸 사람에게 관직을 임명함.
228) 조회(照會) : 조감(照勘)과 같음. 비추어 살핌.
229) 원강(元降) : 앞서 내린 조칙. 쌀을 낸 사람에게 관직을 임명하겠다는 뜻의 조칙을 내린 적이 있음.
230) 각난(卻難) : 퇴각중난(退却重難). 억각지난(抑却持難).
231) 명기(名器) : 명(名)은 벼슬이름 기(器)는 거복(車服)으로 관직을 말함.
232) 이자지청(二者之請) : 이자(二者)는 급강민전과 속행상전임.
233) 궤운지신(饋餫之臣) : 전운사(轉運使)와 같음.
234) 포저연재(苞苴輦載) : 뇌물을 수레에 실음. 장수와 궤운지신을 아울러 말함.
235) 규규(規規) : 작은 모양. 얼빠진 모양.
236) 귀정지인(歸定之人) : 원래 중원인으로 오랑캐에 빠졌다가 다시 중원으로 복귀한 사람.
237) 척리(戚里) : 옛날에 외척이 사는 마을을 척리라 함. 이로 인하여 외척을 척리라 함.
238) 하모(荷旄) : : 장수.
239) 장절(仗節) : 수령.
240) 정임(正任) : 송나라 제도에 제주(諸州)의 관찰 방어 자사 등의 관하에 정임과 요령의 두 명색이있는데 모두 그 이름으로 우대해 주는 명예직이요 실무는 맡지 않음.
241) 횡행(橫行) : 당시 장령을 말함.
242) 수공(數公) : 재집제공(宰執諸公).
243) 일이소사(一二小事) : 금강민전과 속행상전을 말함.
244) 임대……지안(臨大……之安) : 구양수가 주금당기에서 한기를 칭송한 말.
245) 종금관지(從今觀之) : 옛 사람이 옹문 운운을 지금에 비추어 보면.
246) 규무(規撫) : 규모(規模).
247) 조획(措劃/) : 판리(辦理).
248) 예예답답(泄泄沓沓) : 무사 태평스럽게 게으름을 피우며 기뻐 남을 좇는 모양. 태완열종지모(怠緩悅從之貌).
249) 경사종물(經事綜物) : 사물을 총괄하여 다스림. 경(經)은 실을 간추리는 일이요 종(綜)은 베를 짜는 일임.
250) 완세게일(玩歲愒日) : 완(玩)은 염(厭)이요 게(愒)는 식(息)이니 태타(怠惰)의 뜻임.
251) 칠실(漆室) : 노나라 칠실 읍의 시집못간 노처녀가 기둥에 기대어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노나라 임금은 늙었고 태자는 아직 어리다.” 고 하니 이웃 집 여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경대부가 걱정할 일이다.” 라고 하니, 처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전에 외지에서 온 말이 우리 규땅을 마구 짓밟고 지나가 우리 규땅 사람들은 그해에 배불리 먹지 못했다. 하윤까지는 9리(理)지만 점점 가까이 가면 삼백 보밖에 안된다는 말이 있으니 노나라에 환란이 있으면 군신 부자가 그 욕을 당할 것인데 어찌 부녀자만 그 욕을 피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부정적으로 보면 신분과 분수에 맞지 않는 헛된 걱정을 비유했다고 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보면 아무리 미천한 백성이라도 나라를 걱정해야 함을 비유했다 할 수 있음.
252) 이부(嫠婦) : 과부가 베 짤 걱정은 아니하고 종주(宗周) 망함을 걱정한다는 말.
253) 솔연(率然) : 갑작스레. 경솔하게.
254) 지돈(遲頓) : 영민하지 못하고 매우 굼뜸. 우둔.
255) 고우(顧憂) : 천자의 근심.
256) 무면지불탁(無麵之不托) : 불탁은 국수, 즉 밀가루 없는 국수를 말하니, 불가능한 일을 말함. 곧 쌀이 없으니 흉년을 구휼할 수 없음을 말함.
257) 주) 첨수(詹帥) : 첨의지(詹儀之) 인 듯?
258) 제경비설(諸經鄙說) : 선생이 지은 「집전(集傳)」 「집주(集註)」 「장구(章句)」 등.
259) 여전소진(如前所陳) : 잘못이 있어 성현의 본 뜻을 상실하고 학자의 안목을 그르치는 것.
260) 점출급전현(玷黜及前賢) : 이부상서 정병(鄭丙)과 감찰어사 진가(陳賈)가 당시 재상 왕회(王淮)의 뜻을 받들어 정씨(程氏)를 헐뜯는 상소를 올려 속으로는 선생을 비방함.
261) 소식영허(消息盈虛) : 세태의 변화.
262) 분붕수당(分朋樹黨) : 첨수가 선생과 붕당을 짓는다는 혐의.
263) 동경금고(東京禁錮) : 동한의 당고.
264) 백마청류(白馬淸流) : 당 소선 2년에 주전충이 백마역에 조정의 선비를 죽였는데 이건이 말하기를, “이들은 청류이니 황하에 던져야 한다.” 고 함.
265) 근세……지사(近世……之事) : 정백우가 ������논어설(論語說)������을 짓고 홍경선이 이에 서문을 썼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간행했다. 진회(陳檜)가 이를 보고 노하여 두 사람을 치죄하고 그 판본을 태워버렸다.
266) 일덕대신(一德大臣) : 진회를 말함.
267) 건창……논열(建昌……論列) : 건창은 강서 속군이요, 임자방이 강서수(帥)였다. 건창 사인(士人)이 교관에게 무례한 사람이 있어 자방이 치죄하였다. 사인이 교관이 지은 「감흥시」에 주석을 하여 지 중의 어떤 일은 당시의 어떤 일을 비난하였다 하고 이를 대간에 고발하니 대간에서 자방과 교관을 아울러 탄핵하고자 했다.
268) 사부(使府) : 첨수가 근무하는 부서.
269) 차배(此輩) : 소인배.
270) 금일분분(今日紛紛) : 정자의 학문을 비난하는 것.
271) 풍지(風旨) : 왕회의 뜻.
272) 기인(其人) : 소인배들이 배척하는 사람. 선생 자신을 말함.
273) 행수(幸修) : 행(幸)은 만약. 혹시의 뜻.
274) 삼경자설(三經字說) : 왕안석이 삼경신의(三經新義)를 지음.
275) 권서형론(權書衡論) : 소노천(蘇老泉)이 ������권서������ 10편을 짓고 ������형론������ 10편을 지음.
276) 노실색시(怒室色市) : 집에서 화난 것을 시장에서 화풀이 함.
277) 교시비곡직(較是非曲直) : 첨수의 ������서인(序引)������ 중에 정씨를 위해 변명한 말이 있기 때문에 한 말임.
278) 왕신……변자(王信……辨者) : 왕신백 운운은 첨수가 지은 서 가운데의 말 같음. 왕신백은 정문(程門)의 고제(高弟)임.
279) 차언(此言) : 왕신백의 말. 또는 유학의 정도로 한 말.
280) 탄어차(憚於此) : 차(此)는 유학의 정도.
281) 서중(書中) : 서(書)는 곧 무신년에 선생이 올린 봉사서(封事書)임.
282) 자간일과(自看一過) : 선생이 올린 봉사(封事)를 자신이 한 번 봄.
283) 난행(難行) : 봉사 중에 말한 일이 시행하기가 어려움.
284) 차제(次第) : 사세(事勢)의 차제.
285) 파휴(罷休) : 봉사 중에 말한 일이 팔구분 쓸모없이 되었다는 말.
286) 불여소료(不如所料) : 봉사 중에 말한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음.
287) 래교소운(來敎所云) : 조정에서 별도의 관직 임명이 있음을 말함.
288) 한계학문(閒界學問) : 실용적인 학문이 아닌 무용(無用)의 학문. 겸손의 말임.
289) 찬철(攛掇) : 유인위비(誘人爲非).
290) 유취(留取) : 취(取)는 어조사.
291) 한한(閑漢) : 한가한 사람. 선생 자신을 말함.
292) 요각(了却) : 일을 이해함을 마침. 각(却)은 어조사.
293) 심행수묵(尋行數墨) : 독서를 말함.
294) 임마(恁麽) : 여차(如此).
295) 요지(了底) : 어조사.
296) 자불핍인(自不乏人) : 동보(同父)를 가리킴.
297) 공위……소소(恐爲……所笑) : 동보의 글에서 선생이 벼슬길에 나오지 않는 것이 호사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했기 때문에 한 말.
298) 하처/소소(何處所笑/) : 동보 외에 다시 호사(豪士)가 없다는 말.
299) 송설장구(誦說章句) : 선생이 봉사를 올린 다음날 주관 태을궁 숭정전 설서강관(說書講官)을 제수받았기 때문에 한 말임.
300) 응문(應文) : 다만 법에 응할 뿐임.
301) 요모(僥冒) : 요행으로 설서강관(說書講官)을 제명(除命) 받음을 말함.
302) 무내태조계(無乃太早計) : ������장자(莊子)������ 「제물편」에 “달걀을 보고 밤 시각을 알고자 하고 활을 보고 올빼미 구이를 먹고자 하니, 무내태조계(無乃太早計)가 아닌가.”라 함. 너무 멀리 생각하여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아니함을 심하게 한 말임. 동보가 선생에게 큰 임무를 담당하라고 권하였기 때문에 하는 말임.
303) 추권대척(麤拳大踢) : 크게 주먹질하고 크게 말로 차다. 대단한 재능을 말함.
304) 무차기량(無此伎倆) : 기량은 재능과 같음. 차는 윗 글의 지공혈성과 추권대척을 가리킴.
305) 구당(句當) : 주관(主管).
306) 내하불하(奈何不下) : 어떻게 하고자 해도 할 수 없음. 불하는 부득(不得)과 같음. 내하는 여하(如何)와 같음.
307) 불상……지인(不相底人) : 선생과 친하지 않아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을 논하는 자. 선생과 취향이 다른 사람을 가리킴.
308) 추배(推排) : 미루어 앞서게 함.
309) 초요(僬僥) : 키가 삼척인 난장이. 남방에 산다 함.
310) 피거도성(彼去都城) : 피는 동보가 거주하는 영강(永康).
311) 생행사귀(生行死歸) : 동한의 환제가 위환(魏桓)을 불렀는데 향인이 가기를 권하니 위환이 말하기를, “벼슬을 구하는 것은 그 뜻을 행하기 위해서인데 지금 후궁이 수천인데 줄일 수 있겠는가. 운운.” 하니 모두 불가하다고 하니 위환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살아서 가서 죽어서 돌아와도 그대들은 좋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은거하고 벼슬을 하지 아니함.
312) 견방어난계(見訪於蘭溪) : 선생이 두 번 사양해도 불가하여 소명에 응하였는데 동보가 난계로 선생을 내방함.
313) 자약(子約) : 여동래의 아우. 여조검(呂祖儉).
314) 도피(到彼) : 피(彼)는 난계. 건영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난계를 경유함.
315) 한추축(閑追逐) : 은 할 일없음의 뜻이니 무의미하게 상대방을 서로 따름을 말함.
316) 생조(生朝) : 생일. 선생은 건염 경술 9월 15일 생이다.
317) 고로(孤露) : 부모가 없음을 말함.
318) 신사(新詞) : 남의 생일에 지어 보내는 축시.
319) 구재(裘材) : 옷감.
320) 출기저(出機杼) : 시장에서 산 것이 아니고 집의 베틀에서 짠 것이란 말.
321) 경력……전패(更歷……顚沛) : 의외의 화를 가리킴.
322) 천오백년(千五百年) : 맹자 졸년으로부터 선생시까지.
323) 정좌여차(正坐如此) : 차(此)는 상문 약(若) 이하.
324) 가루견보(架漏牽補) : 집이 새는데 고치지 않고 시렁을 만들고 옷이 터졌는데 당겨서 깁고 옳게 고치지 않음. 구차함을 말함.
325) 작괴(作壞) : 무너뜨리다.
326) 진멸타(殄滅它) : 타(它)는 도를 가리킴.
327) 부조득타(扶助得它) : 타(它)는 도를 가리킴.
328) 득실장단(得失長短) : 동보의 득실장단. 보보가 의외의 화를 만나 항상 원한과 불평의기가 있어 종종 언사에 말하기 때문에 글머리에 경계하여 말하기를, “세간 영췌 득실이 본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다.”하고 여기서 또 이로써 충고하는 것이다.
329)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 백척이나 되는 긴 장대 위에 있어서 다시 한 걸음 더 나간다는 뜻으로 이미 충분히 향상하였는데 다시 더욱 분발하여 향상한다는 말.
330) 생득……분소(省得……分疎) : 분소(分疎)는 발명, 해명의 뜻. 한당을 해명하는 기력을 없애다는 말.
331) 이오경략(夷吾景略) : 관중과 왕맹이니 모두 패자를 도운 사람. 동보가 편지에서 이오 경략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은지가 오래되었다고하여 스스로 이오 경략에 비유하기 때문에 선생이 한 말.
332) 군속(窘束) : 집이 빈궁함.
333) 인력(人力) : 노복을 가리킴.
334) 뇌동(雷同) : 남의 말을 듣고 이에 부화하는 것이 마치 우뢰가 침에 물건이 이에 응하는 것과 같음을 말함.
335) 우불……의리(又不……義理) : 차는 상문 고금 이하를 가리킴.
336) 우수……지인(又須……地人) : 동보가 편지에서 말하기를 , “한고조 당태종의 업적은 천지가 이에 힘입어 운행하여 쉬지 않고 사람의 기강이 이에 힘입어 이어지고 떨어지지 않으니 도의 존망이 사람이 관여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잘못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로지 한당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지가 항상 운행하고 인간의 행위가 항상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고 함.
337) 유식(有息) : 불응의 뜻이 여기까지 이름.
338) 지소여차(只消如此) : 소는 수(須)이다. 여차는 구시제란이 의미를 다하지 못하더라도.
339) 주득……사업(做得……事業) : 천지와 병립하여 사람의 할 일을 수행했다는 말.
340) 법무상폐(法無常廢) : 법은 예악 제도를 말함.
341) 전지(田地) : 기초. 마음을 가리킴.
342) 삼재(三才) : ������주역������ 「계사」에 나옴. 재는 능(能)이며 질(質)이고 용(用)이며 재(材)라 함.
343) 주장……지인(主張……之人) : 인군(人君)을 말함.
344) 소위……충재(所謂……蟲哉) : 동보가 “천지가 무의미하게 시일만 보낸다면 하나의 죽은 물건이요, 인심이 무의미하게 시일만 보낸다면 반사반활(半死半活)한 벌레”라고 했기 때문에 이같이 말함.
345) 유성……진제(惟聖……盡制) :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성인은 인륜을 지극히 하는 자이고 왕은 법제를 지극히 하는 자이다.”라 함.
346) 위기……위제(謂其……爲制) : 동보가 한 말.
347) 암합(暗合) : 도에 우연히 일치함.
348) 한격(限隔) : 삼대와 한당의 한격.
349) 승삭(繩削) : 승은 곡직을 바르게 하는 것이요, 삭은 도삭(刀削)이다.
350) 소자래(所自來) : 천리(天理)를 말함.
351) 성현야(聖賢也) : 부당(不當)의 뜻이 이에 그침.
352) 삼족지령(三族之令) : 주(周) 평왕 39년 진(秦) 문공 초에 삼족지령이 있었다.
353) 절취……역리(竊取……逆理) : 당 태종이 처음에 진양(晋陽)과 배적(裴寂)을 기용하여 궁인(宮人)을 훔쳐 고조(高祖)를 사사로이 모시게하고 병을 일으켜 그 형 건성(建成)과 아우 원길(元吉)을 죽이고 원길의 아내를 맞아 들여 아들 명(明)을 낳아 원길의 뒤를 잇게 함.
354) 근본공부(根本工夫) : 요(堯)․순(舜)․탕(湯)․무(武)․공(孔)․안(顔)․사(思)․맹이 이어 전한 심법(心法).
355) 관기소위(觀其所謂) : 동보가 이른 바.
356) 요요(譊譊) : 싸우는 소리.
357) 변장자(卞莊子) : 변읍(卞邑) 대부 장자가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소를 잡아 먹으려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곧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죽을 것이니 딜거에 두 마리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과연 그렇게하여 앉아서 두 마리 호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 곧 도학(道學)을 비난하는 소인들을 비유한 말.
358) 불전지절학(不傳底絶學) : 동보가 일찍이 유학을 부전지절학이라 함.
359) 곤곤(袞袞) : 성의껏 설명하는 모양. 연이은 모양. 성(盛)하게 떠오르는 모양.
360) 요득수서(了得數書) : 장구(章句), 집주(集註)의 류(類)
361) 유업(有業) : 저서. ������본의(本義)������ ������계몽(啓蒙)������ 등을 가리킴.
362) 후세……요부(後世……堯夫) : 양자운은 ������태현경(太玄經)������을 짓고 소요부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지음. 두 사람 모두 자기의 저서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함.
363) 염퇴……전맹(斂退……前猛) : 창려(昌黎) 추회시(秋懷詩)의 구절.
364) 고인(故人) : 선생 자신을 이름.
365) 사어차(似於此) : 차는 시비훼예를 가리킴.
366) 개대(芥蔕) : 사소한 지장, 작은 가시.
367) 취도……심선(吹到/……深羨) : 하늘이 마침 바람을 일츠켜 동보의 호종불검(豪縱不檢)한 마음을 경계한 것이니 이로써 자성(自省)하라는 말.
368) 불원위충신(不願爲忠臣) : 본래 위징(魏徵)의 말인데 당시 조정의 선비가 이 말을 인용해 말하며 직언을 하지 않는 자 있었음.
369) 여우불연(如又不然) : 출입시에 이러한 말이 있었다면.
370) 동합(東閤) : 합은 작은 문, 동향은 정문(庭門)을 피해 빈객을 인접하여 요속과 구별하기 위한 것임.
371) 교족(翹足) : 기족(跂足)과 같음. 발돋움을 말함.
372) 태조(太祖) : 송 태조.
373) 계적(啓迪) : 인도함.
374) 전유(鐫喩) : 매우 절실하게 깨우쳐 줌.
375) 근욕(勤縟) : 욕은 번성(蕃盛)의 뜻. 문채(文采/)의 뜻.
376) 장돈(章惇) : 송나라 포성 사람. 박학하고 글을 잘 지음. 왕안석이 그 재능을 좋아함. 철종 때 지추밀원사, 뒤에 쫓겨나 지여주. 고태후가 죽음에 다시 일어나 상서복야 겸문하시랑이 됨. 그 당 채경 채변을 이끌어 왕안석의 신법을 모두 복구하고 원우당인을 배격함. 휘종 초년에 육주로 폄하되어 졸함.
377) 채경(蔡京) : 송 선유 사람 철종때 장돈이 용사(用事)할 때에 권호부상서에 들어와 장돈을 도와 고역법을 정함. 왕안석의 신법을 다시 행하고 원우구신을 내쫓음. 당인을 심어 사리(私利)를 취해 세상에 많은 해독을 끼침. 만년에 눈이 어두워 아들에게 정사를 위임하니 간악하기가 아비보다 못지 않음. 천하 육적의 우두머리. 흠종 즉위 때 폄하되어 죽음.
378) 장채……존명(章蔡……尊命) : 유 승상이 원우 년간의 제현이 뜻이 다른 사람을 겸수 병용하지 않아 장돈(章惇) 채경(蔡京)의 화를 이루었음을 잘못이라고 함.
379) 충현분파(忠賢奔播) : 원우제현(元祐諸賢)이 흩어짐을 말함.
380) 개자유재(盖自有在) : 하문의 원우의 실책을 가리킴.
381) 구년지간(九年之間) : 철종 즉위 년부터 원우까지 9년임.
382) 정강(靖康) : 송 9대 흠종 년호.
383) 건염(建炎) : 송 10대 고종 년호.
384) 원풍(元豊) : 송 6대 신종 년호
385) 소성(紹聖) : 송 7대 철종 년호.
386) 가우(嘉祐) : 송 4대 인종 년호 이 때에는 겸용소인.
387) 왕채(王蔡) : 왕안석과 채확.
388) 경력(慶曆/) : 송 인종 년호. 북송의 국운이 극성할때에 명신 한기․범중엄․부필․구양수․소옹․장재․정호․정이와 문호 구양수․소순․증공․소식․소철․왕안석 등이 배출됨. 이 때에는 오로지 군자만 등용됨.
389) 희령(熙寧) : 신종 년호. 이때에는 소인만 등용. 원풍엔 군자를 가끔 등용.
390) 환생복심(患生腹心/) : 원우 말에 여대방(呂大防)이 양외가 직언을 잘한다고하여 예부시랑으로 발탁하였는데 뒤에 양외가 앞장서 여대방을 배반한 사건을 말함.
391) 복이장야(復而長也) : 복괘(復卦)를 말함. (부호표시/) 진하곤상(震下坤上). 기운이 순환하는 상. 양이 회복되어 자라나는 상.
392) 우이소(遇而消) : 구괘(姤卦)를 말함(부호/) 손하진상. 음기가 비로소 나타나 성한 모양. 양이 음을 만나 소멸하는 상.
393) 이시척촉지부(羸豕蹢躅之孚) : 구괘(姤卦) 초육을 말함. 돼지는 음조(陰躁)한 동물이기에 힘빠진 돼지가 비록 강맹(强猛)하지 않으나 그 마음은 양(陽)을 해치는데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말.
394) 성차(省箚) : 성은 궁중의 부서, 차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의 한 체. 또 상관이 하관에게 보내는 공문서.
395) 포차(褒借) : 등용함. 발탁함.
396) 균자(균慈) : 존자의 사랑. 태자(台慈)와 같은 뜻.
397) 재불(齋祓) : 재계불제(齋戒祓除).
398) 고명(告命) : 이부(吏部)에서 발하는 관직 임명장. 고신(告身)과 같음.
399) 비(否) : ������역������ 괘명. 음양이 고르지 못하여 일이 잘 되지 않는 상.
400) 태(泰) : ������역������ 괘명. 음양이 조화되어 사물이 통하는 상.
401) 조정(調停) : 조화균정. 원우 말에 여대방 유지가 희령 원풍 년간의 구신들이 사설(邪說)을 쟁기(爭起)하여 재위자(在位者)를 흔들기 때문에 이들을 조금 등용하여 구원을 없애고자 하였음. 또 소성 원우 년간에 장돈 채경 등 소인들이 득지하여 흉독을 크게 끼쳤다. 휘종 초에 정치가 맑아져 정인(正人)이 점점 진출했다. 이에 의자(議者)가 원우 년간에는 정인(正人)이 집권했고 소성 년간에는 소인이 집권했으니 둘다 잘못이 있었으니 공평하게 등용하여 붕당을 없애고자 하였음. 이 때문에 사정(邪正)이 잡진함. 곧 이어 군자는 사라지고 소인이 조정에 가득함.
402) 지평(持平) : 조정의 뜻.
403) 양복지점(陽復之漸) : 양이 점점 회복되다. 곧 군자가 차츰 진출함을 가리킴.
404) 기언(其言) : 선생의 말. 전서의 대역(大易)의 음양․소장․비태․왕래 이하의 말.
405) 저희(抵巇) : 틈을 노려 공격함. 적군이가파른 지세에 처해 있을 때 공격함.
406) : 승필(丞弼) : 재상을 말함.
407) 협공화충(協恭和衷) : ������서경������ 「고요모」에 ‘동인협공화중(同寅協恭和衷)’이라 함. 협공은 함께 공경함을 말하고 화충은 백성과 만물이 각각 그 올바름을 얻는 것을 말함.
408) 피이선거(彼已先据) : 시종 승필의 직에 있음.
409) 섬인(纖人) : 세인(細人).
410) 불능유……천리지외(不能留……千里之外) : 가까운 것을 버리고 멀리서 구함.
411) 창황(倉皇) : 창황(蒼黃)과 같음.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댐.
412) 수습……정신(收拾……精神) : 우암(尤庵)이 “수습신심은 극기를 말하고 보석정신은 계색지주(戒色止酒)를 말한다.” 함.
413) 학교지정(學校之政) : 조상서가 이 때에 학교지정을 건의함.
414) 주의지인(主議之人) : 조공을 가리킴.
415) 여지(慮之) : 장래에 간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함.
416) 위계(爲計) : 간폐를 방지할 계책.
417) 상시……지책(嘗試……之策) : 학교지정을 가리킴.
418) 전세……일서(前世……一書) : 조수(趙帥)에게 준 선생의 네 번째 글을 말함.
419) 합변(合變) : ������사기������의 조광의 어미의 말. 합여변(合與變)임. 응변(應變)임.
420) 기언(其言) : 유식의 말.
421) 간귀자고(簡貴自高) : 간은 약(略)이니 대사지례(待士之禮)에 소홀하고 자기를 존귀하게 생각함.
422) 양초지간(梁楚之間) : ������사기������에 초인 조구생이 계포에게 “황금 백근을 얻는 것이 계포의 한 약속을 얻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니 족하는 어찌하여 양초의 사이에서 이러한 명망을 얻었는가.”라 한 말에서 나옴.
423) 장정수(張定叟) : 장경부의 아우.
424) 괘관지청(掛冠之請) : 사직을 청함.
425) : 선충헌공(先忠獻公) : 장정수의 아버지.
426) 낭패이귀(狼狽而歸) : 선생이 천자의 결정으로 파직당하여 돌아옴.
427) 충현(忠賢) : 조여우.
428) 위포(韋布) : 여자약.
429) 출차하계(出此下計) : 선생이 질병으로 사직을 청함.
430) 연거심념(燕居深念) : 평소에 깊이 생각함. 진평이제례를 염려하여 연거심념함.
431) 좌우(左右) : 싱대방을 지칭.
432) 구구(區區) : 자신을 낮추어 지칭.
433) 중용~치지(中庸~致知) : 계신(戒愼) 공구(恐懼)는 함양 공부에 속하며 신독(愼獨)은 성찰(省察)이니 치지(致知) 공부에 속한다. 계신 공구는 치중(致中)이니 하문의 존덕성(尊德性)과 상응하고 신독(愼獨)은 치지(致知)니 하문의 도문학(道問學)과 상응한다. 함양에서 치지까지의 열 글자는 논학(論學)의 종지(宗旨)이니 선생의 전후의 허다한 설이 이 말과 일관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마땅히 이를 익숙하게 음미해야 할 것이다.
434) 세심(洗心) : ������역������ 「계사」에 “성인이 이로써 마음을 씻는다.”고 함.
435) 자외(自外) : 스스로 상대방을 소홀히 하다.
436) 존이행지(尊而行之) : 증자가 말하기를, “그 들은 바를 높이면 고명해지고 그 아는 바를 행하면 광대해진다.”고 함.
437) 이단~구견(異端~拘牽) : 동래가 전에 이단을 심하게 공격할 필요가 없다 하고 또 사학(史學)으로써 후진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
438) 소미안자(所未安者) : 의문나는 것 중에 더욱 이해하지 못하여 마음이 편치 않는 것.
439) 견왕장~중자(見汪丈~中字) : 명도에서 중자까지는 장자소가 명도의 설을 설명한 말인데 왕장이 이 말을 들어 선생에게 말한 것이다. 누가 선생에게 말하기를, “성(誠)는 행하기가 쉽지 않으니 중(中)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하니 선생이 성(誠)으로 중에 도달하는 것은 군자의 중용이요 불성(不誠)으로 중에 도달하는 것은 소인의 기탄 없음이다고 함. 왕장은 왕상서.
440) 유공~고롤(惟恐~鶻突) : 사람들이 자기의 실책을 지적할까 두려워 항상 애매한 말을 함. 골돌은 불분명한 모양을 말함.
441) 척발(剔撥) : 살을 가르고 뼈를 발라냄이니 이단 사설의 분별을 이같이 해야함을 말함.
442) 지착~포료(只著~包了) : 무대(無對) 두 글자로써 도의 체단을 포장해 말해 버림.
443) 장득병통(藏得病痛) : 병통은 이단 사설을 가리켜 말함.
444) 입피~승부(立彼~勝負) : 동래의 글에서 “내가 번독하게 말이 많은 것은 명변(明辨) 심문(審問)하여 털끝같은 차이라도 있을까 두려워함이요 피아를 세워 승부를 겨루고자 함이 아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그렇게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임.
445) 요요(譊譊) : 시끄럽게 다투는 소리.
446) 설사안자(設使顔子) : 동래의 글에서 “그대의 영위 준명한 자품으로 마땅히 안자와 같이 금종 저아를 버리고 지양염장의 공부를 하면 사문이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선생이 이같이 답함.
447) 양자~인간(揚子~人看) : 양자가 안연은 학술외에는 무심한 사람이라고 함.
448) 심시조지의(審時措之宜) : 지금이 도를 밝혀 세상을 구제할 때인가 앉아서 독선을 행할 것인가를 살리하는 뜻.
449) 자치(自治) : 내수(內修).
450) 당경(唐景) : 당륵과 경차. 모두 초나라 사람으로 사부(詞賦)를 잘하였다.
451) 기문~지리(其文~之利) : 일조의 이익이란 소동파의글을 공부하여 과거시험에 나감을 말함.
452) 정헌공(正獻公) : 동래 5세조.
453) 가전(家傳) : 여원명이 지음.
454) 영/양(滎陽) : 여희철. 동래의 고조.
455) 사인장(舍人丈) : 여본중.
456) 미지(微旨) : 반드시 소황으로 법을 삼아야 한다는 미지.
457) 폐어~어원(蔽於~於遠) : 근은 사인을 가리키고 원은 정헌과 영양을 가리킴.
458) 사공지설(謝公之說) : 상채 ������어록������에 말하기를, “횡거가 사람을 가르침에 예를 우선하여 정용근절(正容謹節)에 힘쓰도록하여 그 문일들이 형명도수(刑名度數)에만 몰두하는 병통이 있기 때문에 횡거의 학을 전하는 자가 없다. 정용근절이 예의 근본이 아니고 정용근절(正容謹節)해야 하는 소이연(所以然)이 예의 근본이다.”고 함.
459) : 종상(從上) : 종고(從古).
460) 정의~위선(正衣~爲先) : 선생의 이 말은 비록 사공의설을 비판한 것이지만 또한 백공을 경계한 말이다.
461) 약언~흉중(若言~胸中) : 동래가 사씨의 뜻을 이같이 이해하기 때문에 선생이 “이는 석씨가 공연히 ‘소이연(所以然)’이란 것을 가슴 속에 두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고 함.
462) 낭봉부출(囊封付出) : 낭봉은 봉사, 부출은 부출 후에 일을 살핌.
463) 저리운(邸吏云) : 저리가 선생에게 보고함.
464) 적기~이발(積其~而發) : 동래의 글에, “성의를 쌓아서 그 시행이 가능할 때에 발하는 것이 유력하다.”고 하였음.
465) 대완불탁(大椀不托) : 큰 사발의 국수. 성의를 쌓아서 때를 기다려 봉사를 발한다면 끝내 그 시기를 맞추지 못하고 정란에 죽을 것이니 눈 속에 얼어 죽어 내가 죽은 뒤에 비록 다행히 좋은 시절을 만난다 해도 나는 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큰 사발의 국수를 먹는 것과 같다는 말로 비유함.
466) 초본(草本) : 봉사 초본.
467) 우로~상설(雨露~雪霜) : 동래 서에 “간흉을 길러서 선량을 어지럽히는 것은 진실로 군자의 수치이지만 분질(忿疾)의 뜻은 없어야 한다. 만약 설상(雪霜)의 기운이 우로(雨露)의 기운을 이긴다면 이는 옳은 일이 아니다.”고 했기 때문에 선생이 이같이 답함.
468) 차득여차(且得如此) : 방관을 말함.
469) 점(/) : 선생의 아들.
470) 차랑(此郞) : 점.
471) 신참(新參) : 참지정사 주익공을 말함.
472) 대승기증(大勝氣證) : 열이 많이 나는 증상. 시사가 위급한데 신참이 때를 놓침을 말함.
473) 사군자탕(四君子湯) : 열을 내리는 탕약.
474) 부수초공(副手梢工) : 부수는 이등의 솜씨. 초공은 뱃사공. 새는 배가 심히 위험하니 상등의 뱃사공이 필요한데 이를 구하지 못할진댄 이등의 뱃사공이라도 구해서 그가 술에 취하지 않는다면 다행하다는 말. 선생이 신참에게 남의 경계하는 말이라도 듣기를 바라는 뜻.
475) 범공(范公) : 범조우.
476) 하권(下卷) : ������연원록������ 하권.
477) 훈소(葷素) : 훈은 양념이니 곧 고기를 먹는 것이고 소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
478) 동열(同列) : 범공이 동파와 동열이다.
479) 여피홀차(慮彼忽此) : 피는 동파요 차는 이천이다.
480) 타서(它書) : ������연원록������에 실린 어록.
481) 진황(秦黃) : 진소유와 황산곡.
482) 소기소부동(所記雖不同) : ������연원록������에서 “이천이 소찬을 함에 동파가 이를 힐난하니 범순부 무리는 소식을하고 진황의 무리는 육식을 했다.”하고, ������선우록������에는 “이천이 전에 육식을 나쁘다고 했기 때문에 범순부가 소식을 했고 인하여 동파가 비속한 말로 이천을 놀렸다.” 함.
483) 향당유종(鄕黨游從) : 범순부와 동파는 모두 촉인임.
484) 변리지주(辨理之奏) : 원우 2년에 이천이 공문중의 무함을 받아 차견 서감함. 그 7년 뒤에 범공이 이를 변리하는 상주를 올림.
485) 소찬지극(素饌之隙) : 원우 초에 국기에 이천은 소찬을 하고 동파는 육식을 하니 범순부의 무리는 소식을 하고 진황의 무리는 육식을 함.
486) 우단~지환(右袒~之驩) : 범공이 이천을 따라 편든 혐의가 있으나 동파가 범공의 평소 교우를 해치지 않음.
487) 이학침반(異學侵畔) : 정학을 침범하고 오학을 배반함.
488) 자시(自是) : 이학침반을 가리킴.
489) 편언(片言) : 이단을 물리치는 설.
490) 괴괴(憒憒) : 마음이 어지러운 모양.
491) 양진(兩進) : 함양 공부와 진학 공부.
492) 체용본말(體用本末) : 함양은 체요 본이며 치지는 용이요 말임.
493) 일일지공(一日之功) : ������논어������에 “하루라도 인(仁)에 힘 쓸 진저.” 라 함.
494) 당고제현(黨錮諸賢) : 후한의 환제 때 진번(陳藩)․이응(李膺) 등 우국지사가 환관의 발호를 미워하여 태학생을 거느리고 환관을 공격하니, 환관들이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黨人)이라고 몰아 도리어 이들 우국지사를 옥에 가두고 사진(仕進)의 길을 막았으며, 영제 때 두무(竇武)․진번(陳藩) 등이 환관 등을 죽이려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그와 뜻을 같이하는 백 여명의 우국지사와 함께 피살당한 사건.
495) 건안(建安) : 후한 헌제(獻帝)의 년호.
496) 양씨(梁氏) : 양태후.
497) 당형(唐衛) : 환관.
498) 차의사(此意思) : 사설(邪說)을 물리치려는 생각.
499) 참전의형(參前倚衡) : 항상 마음에 있어 떠나지 않음.
500) 수시(數時) : 수일(數日)과 같음.
501) 답축(踏逐) : 찾아보다. 답사(踏査)하다.
502) 차거처(此去處) : 차처(此處)와 같음.
503) 마고(麻姑) : 건창군 남성현에 있는 산 이름. 폭포와 석지(石池)가 있음.
504) 거성(去城) : 도성과의 거리.
505) 역고차(亦苦此) : 사람들의 시끄러움이 괴롭다.
506) 서원중침식(書院中寢食) : 무이서원이 아니고 선생이 평시에 거처하는 서실.
507) 사창(社倉) : 숭안에 있는 사창인 것 같다.
508) 숙실(宿實) : 실(實)은 당본에 식(食)으로 되어 있음.
509) 창고~혹파(倉庫~或罷) : 중숙이 습성이 게을러 이전에 전혀 공부를 하지 않다가 여기에 도착한 뒤에 비로소 서책을 토론하려 하니 헤아려 생각해 볼만한 것이 없어 이는 마치 창고에 넉넉한 식량이없어 금방 거두어 금방 지출하는 것과 같고 군사가 용기가 없어 금방 진군했다가 금방 후퇴하는 것과 같다.
510) 이향거설(已向渠說) : 중숙을 향하여 말하다.
511) 수간~불투(須看~不透) : 분비(憤悱)의 뜻으로써 중숙을 격려한 말. 교(敎)는 하여금의 뜻.
512) 호도(糊塗) : 불분명한 모양.
513) 악구소가(惡口小家) : 사학을 말하는 소인.
514) 극력배지(極力排之) : 선생이 극력 자약을 배격함.
515) 강불가령자(彊不可令者) : 동래 문인 중에 이론이 심한자.
516) 수항번(竪降幡) : 항복의기를 세우다.
517) 대어(對語) : 자정이 경연에서 주상에게 진언한 말.
518) 사자(些子) : 조금.
519) 총령~득야(葱嶺~得也) : 총령은 천축(天竺) 동쪽에 있는 산. 높고 크며 파가 나기 때문에 총령이라 함. 파미르 고원. 이는 육씨가 선학을 하기 때문에 그 주대(奏對)의 말이 비록 좋으나 선학의 물이 들었음을 꾸짖는 말임.
520) 건창(建昌) : 상산(象山) 문인 중에 건창에 있는 사람이 선가에 물든 사람이 많았다.
521) 탱미노안(撑眉努眼) : 선학을 하는 자가 구도의 뜻이 본래 나쁜 생각이 아님.
522) 차병통(此病痛) : 선학을 하는 병통.
523) 양수악원(兩手握拳) : 상문의 탱미노안과 같이 선학하는 사람의 용력. 작세하는 모양.
524) 득차기력(得此氣力) : 선가의 작세 용력하는 기력.
525) 편고(偏枯) : 속언에 수족 편고를 말함.
526) 차의(此意) : 차는 오도를 말함.
527) 팔자타개(八字打開) : 팔(八)자의 모양이 분별 타개하는 모양임으로 분별타개의 뜻으로 씀.
528) * : 무신 여름에 상산(象山)이 태극변을 선생에게 써 보냄.
529) 시이입도(時以入都) : 선생이 강서 제형(提刑)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감.
530) 선부환사(旋復還舍) : 무신 6월에 임율(林栗)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고 봉사(奉祠)로 집에 돌아옴.
531) 상산(象山) : 신주(信州) 귀현(貴縣) 남쪽에 있는 산. 형상이 코끼리를 닮음. 자정(子靜)이 무주(撫州) 금계(金谿)에 살다가 이곳에 옮겨 집을 지어 상산이라 하고 독서를 함.
532) 절충(折衷) : 사마천이 “육예를 부자(夫子)에 절충한다.”고 하고 ������어류(語類)������에 말하기를, “절충은 꺾어서 중(中)을 취함이니 충(衷)은 곧 중(中)이다.” 하고 또 “정충의 충(衷)은 작은 지나침더 없고 작은 못미침도 없이 정히 중간의 꼭 알맞은 곳을 말한다.”고 함.
533) 금기불연(今旣不然) : 태극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다.
534) 대전(大傳) : 공자가 찬술한 ������역������ 「계사」.
535) 구어~지내(具於~之內) 양의 사상 팔괘 이전에 갖춰진 것은 통체(統體)의 태극이요 양의 사상 팔괘의 안에 쌓인 것은 각각 갖춘 태극이다.
536) 기중(其中) : 전후 제유가 모두 중(中)으로써 태극을 풀이했기 때문에 하는 말. 자정이 편지에서 “극(極)이란 중(中)이니 무극(無極)이라 하면 이는 무중(無中)이니 어찌 무극을 태극의 위에 또 더하겠는가. 무극이란 말은 ������노자(老子)������에서 나왔고 성인의 글에는 없다.”고 함.
537) 황극(皇極) : 제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 또는 만민의 법칙으로 하기 위하여 제왕이 정한 대도(大道).
538) 민극(民極) : 백성이 지켜야 할 도덕.
539) 합주(合輳) : 합하여 모임.
540) 도차축저(到此築底) : 저(底)는 근본을 말하고 축(築)은 궁극을 말하는 것이니 근본의 끝까지 가서 더 갈데가 없음을 말함.
541) 사외(四外) : 사면. 안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에 밖이라 함.
542) 무형상방소(無形象方所) : 윗 글의 제극(諸極)은 형태가 있기 때문에 그 처한 위치에서 중으로써 말할 수 있지만 태극은 형상과 방위가 없기 때문에 중으로써 말할 수 없음.
543) 양하설파(兩下說破) : 파(破)는 어조사. 내시(乃是)에서 이위(以爲)까지는 선생이 그렇게 여긴 것이고 당시(當時)에서 설파(說破)까지는 염계(濂溪)를 가리킨 것임.
544) 무이(無耳) : 이위(以爲)의 뜻이 여기까지 이름.
545) 여자~지의(如此~之意) : 여차설득(如此說得)이 구임.
546) 태살(大煞) : 살(煞)은 심(甚), 최(最)의 뜻. 대단하다는 뜻.
547) 여인언역(與人言易) : 임율(林栗)을 가리킴.
548) 수어생해(隨語生解) : 의리(義理)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언어에 집착하여 해석함.
549) 노자~무극(老子~無極) : ������도덕경������ 38장에 나옴.
550) 장생~지야(莊生~之野) : ������장자������ 「제유편」에 나옴.
551) 이월사정(而月斯征) : 이는 너임.
552) 탁부인(卓夫人) : 유자우(劉子羽)의 계실.
553) 오가악묘(五哥嶽廟) : 오는 항열 차례, 가는 형, 악묘는 관위.
554) 경영(經營) : 주선.
555) 간관(幹官) : 균수관(均輸官).
556) 비력(費力) : 노고(勞苦).
557) 축사(逐司) : 매사(每司) 조사(漕司) 제형사(提刑司) 등.
558) 사장(使長) : 안무사(安撫使) 전운사(轉運使) 등.
559) 구할(拘轄) : 관할(管轄).
560) 수쉬(守倅) : 수는 태수, 쉬는 부, 통판(通判)을 쉬라 함.
561) 능력(陵轢) : 차에 깔림.
562) 평보(平父) : 평(玶)의 자.
563) 참부(參部) : 참알(參謁) 이부(吏部)에 보고하여 조용(調用)을 기다림.
564) 부위(簿尉) : 현의 부관.
565) 사인형(舍人兄) : 유공(劉珙). 평보의 형.
566) 끽인타매(喫人打罵) : 하관이 장관(長官)의 타매를 받음.
567) 태석인고명(太碩人高明) : 탁부인을 가리킴.
568) 황단명(黃端明) : 이름은 중(中), 자는 통노(通老). 건도(乾道) 원년에 병부 상서로 치사(致仕)하고 단명전 학사가 됨. 건도 정해년 8월에 선생이 남헌(南軒)을 방문할 때에 길이 소무(邵武)를 경유하여 글을 올려 단명을 배알함.
569) 납재배(納再拜) : 후진이 존장에게 재배의 예를 드림.
570) 치정(致政) : 정사를 군즈에게 귀환(歸還)시킴.
571) 태좌(台座) : 삼공(三公)의 위(位). 태위(台位)․ 태석(台席)과 같은 말.
572) 묵이~이신(黙而~而信) : ������역(易)������ 「계사(繫辭)」의 말.
573) 향왕지심(鄕往之深) : 향(鄕)은 향(向)과 통함. 왕(往)도 향(向)의 뜻. 마음은 항상 그 쪽을 향하고 있으나 몸이 가지 못함을 말함.
574) 왕구령(王龜齡) : 이름은 십붕(十朋), 온주 낙청 사람. 어려서 영오(穎悟)하여 매일 수천 말을 외웠으며 소흥 년간에는 정대(廷對)의 제 일인이었음. 용비각 학사가 됨. ������매계집(梅溪集)������이 있으며 선생이 서함. 이 글은 정해년에 씀.
575) 맹자지소기(孟子之所譏) : 맹자가 사람이 자기 밭을 버리고 남의 밭을 김메는 것을 꾸짖음. 곧 남에게서 구함이 많고 자신에게 구하는 것이 적음을 한탄한 말.
576) 대대(大對) : 대책(對策). 왕구령이 나이 47세에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이 대책으로 천자가 손수 장원으로 뽑음.
577) 재관~주사(在館~奏事) : 구령(龜齡)이 국자사업으로 있을 때 “인주(人主)는 세가지 큰 직무가 있으니 임현(任賢)․남간(納諫)․상벌(賞罰)이 이것”이라고 말함.
578) 주사(柱史) : 사관(史官).
579) 초동(楚東) : 형초(荊楚)의 동쪽.
580) 주대진설(奏對陳說) : 위의 주사논진(奏事論陳).
581) 연소종용(燕笑從容) : 창수시화(唱酬詩話).
582) 사기~현자(事其~賢者) : ������논어������ 가운데의 글.
583) 기주(夔州) : 구령이 이부시랑으로 있다가 기주수(夔州帥)로 나감.
584) 근전(近甸) : 이때에 구령이 기주로부터 옮겨 지호주(知湖州)가 됨.
585) 이한교유(里閈交游) : 마을의친구. 아래의 송쉬인 듯.
586) 득자하풍자(得佐下風者) : 구령의 막속자(幙屬者)가 됨.
587) 여기(與其) : 축하한 글과 전에 탄식한 말을 아울러 말한 것을 말한 것같음.
588) 유군후친(遺君後親) : 맹자의 말. 유친후근이라고도 함.
589) 불구기소(不求其素) : 그 옛날의 보잘 것 없음을 생각하지 않음.
590) 유일어차(有一於此) : ������좌전������에 나오는 말.
591) 행백~십리(行百~十里) : ������전국책������에 나오는 말. 시작은 쉽지만 마치기가 어렵다는 말.
592) 인물묘연(人物眇然) : 당세에 인재가 없음을 탄식한 말. 묘는 작고 작은 모양.
593) 군자~숭례(君子~崇禮) : ������중용������ 장구에는 온고와 돈후를 존심에 배속시키고 지신과 숭례를 치지에 배속시켰으니 이 글에서는 나누어 배속시킴. 장구와 다름. 선생이 우연히 실조(失照)한 것같음.
594) 필유소조(必有所措) : 조는 지(指)임.
595) 광역(狂易) : 광질(狂疾)이 있어 본성을 잃음.
596) 성도왕공(成都汪公) : 왕상서가 이때에 사천제치사지성도부(四川制置使知成都府)임.
597) 차래(此來) : 무림근전 후에 왕상서와 통문이 있었는가 라는 말.
598) 일지호상(一至湖湘) : 정해년에 장사(長沙)에 가서 남헌을 방문한 일.
599) 홀피제명(忽被除命) : 추밀원 편수관을 제수받음.
600) 아독(牙纛) : 장군의 행차때나 장막에 세우는 기. 여기서는 왕구령의 행차를 말함.
601) * : 이 글은 유공(劉公)이 건강(健康)에 있을 때의 편지이다.
602) 삼오교량(參伍校量) : 세가지 다섯가지로 생각하여 그 실상을 알아 본다는 뜻.
603) 방기~미급(方其~未及) : 그 책임은 곧 천하를 짊어질 책임. 곧 그 중책을 맡을 것이지만 아직 맡지 않은 때.
604) 수(須) : 필요.
605) 관지(觀之) : 인재를 알아봄. 하문의 찰지(察之)와 득지(得之)도 마찬가지임.
606) 무소~감진(無所~敢進) : 관위(官位)가 주어지지 않
으니 추부(趍附)한다는 혐의가 없음.
607) 욕진자(欲進者) : 재능이 없으면서 진출하고자 하는 자.
608) 망실(望實) : 덕망과 실상. 곧 명실(名實).
609) 금지인(今之人) : 유공모를 가리킴.
610) 이문공(李文公) : 당(唐) 이고(李翶).
611) 일왕이선(一往而先) : 한 번 가서 먼저 봄.
612) 참이추완(參貳樞筦) : 건도(乾道) 3년 정해 11월에 공보(共父)가 한림학사로서 독단의 잘못을 극론하여 이로 인해 주상이 추밀부사로 발탁함.
613) 거월육일(去月六日) : 11월 6일.
614) 이장사(離長沙) : 선생이 건도 정해 8월에 장사에 가서 남헌(南軒)을 방문하고 돌아옴.
615) 위공묘(魏公墓) : 장위공(張魏公)이 임종에 두 아들에게 글을 써 주며 말하기를, “내 금에 빼앗긴 중원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내 죽은 뒤 아버지 곁에 묻힐 수 없다. 형산(衡山)에 장사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묘가 형산 아래 남악에 있다.
616) 축융(祝融) : 남악(南嶽)의 별봉(別峯) 이름.
617) 상미증유(尙未曾有) : 유력(遊歷)이 총총하여 조용히 강론할 수 없었다. 일설에는 “상(尙)은 향(向)이니 강론의 즐거움이 전ㅇ이 좋았다.”고 함.
618) 민(憫) : 타본에는 망(惘)임.
619) 조서(詔書) : 재상을 파직한 조칙.
620) 출형필부(出兄筆否) : 한림이 제조(制詔)를 맡기 때문에 혹시 그 조서가 공보의 글이 아닌가 의심한 것임.
621) 심익사세익고(心益肆勢益孤) : 주상의 마음이 더욱 방자해지면 신하는 위엄이 두려워 감히 효충진언(效忠盡言)하지 못하고 인주는 도와주는 신하가 없어 홀로이게 되어 그 형세는 더욱 외로워짐.
622) 탄타(歎咤) : 슬퍼하여 탄식함.
623) 봉령~지신(奉令~之臣) : 대간(臺諫)과 시신(侍臣)을 통틀어 말함.
624) 비지~지도(譬之~之道) : 이 때 천변(天變)으로 재상을 파직하는 조칙을 내렸기 때문에 하는 말임.
625) 효기(孝己) : 상(商) 고종의 아들. 효행이 있음.
626) 위(委) : 신(信)․지(知)․임(任)의 뜻. 선생이 미지(未知)를 미위(未委)로 많이 씀.
627) 대근대본(大根大本) : 군덕(君德).
628) 진공(陳公) : 진준경(陳俊卿).
629) 실단국론(實斷國論) : 참정(參政)과 추밀부(樞密副)가 모두 참결(參決) 조정(朝政)함.
630) 근조(近詔) : 위에 말한 조서.
631) 당기임자(當其任者) : 공보(共父)를 이름.
632) 작차(作此) : 이 글을 쓰다.
633) 대자(大者) : 윗 글의 대근대본(大根大本).
634) 익주(益州) : 왕은신(汪應辰). 왕공이 당시 지성도(知成都)
635) 오흥(吳興) : 석서로(淅西路) 호주(湖州). 손오(孫吳)가 이때 오흥군(吳興郡)임. 이때 진량한(陳良翰)이 강동제형(江東提刑)으로 석서(淅西)로 옮김. 진량한을 가리킨 듯.
636) 의체(義諦) : 불가문(佛家文). 요결(要訣)의 뜻.
637) 경부(敬夫) : 이때 공보가 남헌 왕응신 진부량을 천거함.
638) 광질(狂疾) : 선생이 어떤 개혁 방안이 있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서 한 말.
639) 탄관(彈冠) :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함.
640) 허다~사야(許多~事耶) : 선생이 스스로 “내 여러해를 버려져 조정에 쓰이지 않았는데 어찌 일이년 늦은 걸로 이렇게 독촉하는가.” 함.
641) 양공(兩公) : 진공(陳公)과 공보(共父).
642) 위친(爲親) : 이때에 선생 모부인이 계셨기 때문.
643) 정경망(鄭景望) : 명은 백웅(伯熊), 영가(永嘉) 사람. 건영(建寧) 태수. 이 글은 경망이 복건(福建) 제거(提擧) 때에 보낸 편지.
644) 공수(龔帥) : 무량(茂良).
645) 상문(相聞) : 문(聞)은 문(問)과 통함. 공수가 선생에게 안부를 물음.
646) 소관(小款) : 이교수와 공수가 소관함. 관(款)은 대어(對語).
647) 도기어(道其語) : 공수의 말을 말함.
648) 미유(未有) : 유미(有未)의 잘못임.
649) 범충선(范忠宣) : 자는 요부(堯夫), 범문정(范文正)의 아들. 원우 3년에 여대방(呂大防)과 좌우복야(左右僕射)임. 이름은 순인(純仁).
650) 채신주(蔡新州) : 확(確).
651) 원우유인(元祐流人) : 원우 년간에 유배된 현인.
652) 구어제지(口語擠之) : 유안세(劉安世) 등 제현이 채확의 시를 문제삼아 그를 유배시킴.
653) 예위자전지계(預爲自全之計) : 유안세 범조우가 채확의 죄를 논하여 연(/)에 유배시킬 것을 논의하니 범순인 왕존이 불가하다 하였고 문언박이 채확을 영교(嶺嶠)로 폄하고자 하니 범순인이 여대방에게 말하기를, “여기는 형극이다. 근 70년간 우리들이 이길을 열었다. 우리도 이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채확을 신주에 안치하였다.
654) 지기론(至其論) : 소성(紹聖) 2년에 여대방(呂大防) 등이 원주(遠州)에 유배되었는데 범순인(范純仁)이 상언(上言)하기를, “대방 등이 지심실서(持心失恕)하고 호오임정(好惡任情)하여 노씨(老氏)의 호환지계(好還之戒)를 위배하고 맹가(孟軻)의 반이지언(反爾之言)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이지화(牛李之禍)는 모두 다 빠져서 풀리지 아니하니 대방 등을 풀어 주기 바랍니다. 운운.” 하였음.
655) 제공(諸公) : 원우 제공.
656) 반이(反爾) : 맹자의 말. ‘출호이자반호이(出乎爾者反乎爾).’
657) 호환(好還) : 노자의 말. ‘가명불상지기기사호환(佳兵不祥之器其事好還).’
658) 소자문(邵子文) : 이름은 백온, 강절(康節)의 아들. 들어오면 부언(父言)을 듣고 나가면 온공(溫公)과 사귀었다.
659) 명도소견(明道所見) : 소자문의 ������문견록������ 주에 “명도가 말한 원풍 대신 공정(共政)의 설은 범충선의 말과 같다.” 함.
660) 소발(所發) : 명도는 지성보화(至誠保和)에서 나왔고 범공은 자전지계(自全之計)에서 나왔음.
661) 심이~위계(深以~爲戒) : 공수가 호명(好名)을 경계하였음.
662) * : 이 글은 진동보(陳同甫)의 일로써 미루어 보건대 갑신년간의 글이다.
663) 절식(竊食) : 선생이 봉사(奉祠)로 집에 있을 때이다.
664) 호식기외(虎食其外) : 양생자보(養生自保)하여 호랑이에게 먹힌다는 말이니 세화(世禍)를 면치 못함을 걱정함을 비유한 것이다.
665) 범과(犯科) : 법에 어긋나는 행위. 과(科)는 법임.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는 말.
666) 경설(經說) : 선생이 지은 경설.
667) 강목~동착(綱目~動着) : ������통감강목������은 기초(起草)가 너무 방대하여 중간에 그만두고 다시 손을 대지 못함.
668) 왕순(王舜) : 왕망이 한을 찬탈하고 안양후(安陽侯) 왕순을 보내어 국새(國璽)를 청함. 왕순이 왕망이 한을 찬탈한 후 공포증에 걸려 죽었는데 ������강목������에 망(莽) 태사 왕순이 사(死)했다고 쓴 것은 온공(溫公)의 구례이다.
669) 본례(本例) : 온공의 본례.
670) 외사실절(畏死失節) : 양웅이 한(漢) 조정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다가 왕망이 한을 찬탈한 후 대부가 되어 왕망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공(周公)이래 가장 훌륭한 사람이며 공로는 아형(阿衡)보다 낫다고 함.
671) 여기(與其) : 여는 허(許)임.
672) 호씨(胡氏) : 호 문정공(文定公).
673) 구석(九錫) : 천자가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하사하는 아홉가지 물품. 거마(車馬)․의복(衣服)․악칙(樂則)․주호(朱戶)․납폐(納陛)․호분(虎賁)․궁시(弓矢)․부월(鈇鉞)․거창(秬鬯).
674) 유목지(劉穆之) : 유유(劉裕)의 심복. 유(裕)가 구석(九錫)을 구했는데 자기가 이를 제안하지 못함을 괴구(愧惧)하여 발명하여 죽음.
675) 송제구(宋齊丘) : 서지고(徐知誥)가 오(吳)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을 때 제구가 이를 먼저 발의하지 못하고 주종(周宗)이 먼저 발의한 것 때문에 병을 얻고 다른 의론을 견지하고 있다가 지고(知誥)가 즈위하자 제구가 어찌할 줄 모르다가 죄를 얻고 자살함. 지고는 처음에 서온(徐溫)의 양자가 되어 서성(徐姓)을 썼다가 찬위(簒位)에 미쳐 이(李)로 복성(復姓)함. 국호를 남당(南唐)이라 함.
676) 범비곡절(范碑曲折) : 구양공(歐陽公)이 범문정공(范文正公) 비문에 “곽후가 폐함에 공이 간관을 이끌고 합하에 엎드려 불가함을 쟁간하여 육주(陸州)로 좌천되고 소주(蘇州)로 옮겨졌다. 몇 해 뒤에 전장각 대제가 되어 더욱 실정(失政)을 논하니 권력 대신이 모두 공을 꺼리고 미워하여 개봉부로 좌천되었다. 이에 또 더욱 고금의 치란 안위를 취하여 개설을 올리고 또 백관의 비루함을 말하고 진공(陳公)의 사사(私邪)함을 지적하니 여승상(呂丞相)이 화가나서 주상 앞에서 공을 논박하니 공이 낙직(落職)하고 요주(饒州)로 좌천되고, 다음해에 여공이 공을 파직하여 윤주(潤州)로 옮기고 또 월주(越州)로 옮겼다. 조원호(趙元昊)의 반란에 주상이 여공을 재상에 복직시키니 여공이 공을 협서성 경략안무사에 임명하였다. 공이 여공에 의해 좌천된 이래로 사대부가 이공(二公)의 곡직을 논하였다. 여공이 이를 걱정하여 공이 옳다고 하는 자를 모두 낭인으로 지목하여 혹 유배되기도 하였다. 여공이 다시 재상이 됨에 미쳐서 공도 또한 다시 일어나 이에 이공(二公)이 기꺼이 상약(相約)하고 힘을 합쳐 적을 평정하니 천하의 사대부가 모두 이공(二公)을 잘한다 하였다.”고 하니 범충선(范忠宣)이 그의 아버지 문정공이 처음부터 여공과의 원한을 풀지 않았다고하여 몰래 묘비의 이 말을 깎아내니 이것이 그 전후 곡절이다.
677) 은지어심(隱之於心) : 익공(益公)의 말로써 마음에 헤아려보다.
678) 여공(呂公) : 이간(夷簡), 자는 탄/부(坦/夫), 인종 때 재상. 허국공(許國公)에 봉함. 시호는 문정(文靖).
679) 풍의(諷議) : 구공이 이때에 관각교감(館閣校勘)이었다.
680) 간쟁(諫諍) : 범공이 이때에 지개봉부(知開封府)로 있으면서 진언(進言)하였음.
681) 논지~공의(論之~公議) : 범공(范公)이 여공(呂公)을 논한 일 때문에 낙직(落職)당하고, 여정(余靖)․윤수(尹洙)가 범공이 옳다고 논함으로써 관직에서 축출당하였다. 구공(歐公)이 사간(司諫) 고약눌(高若訥)에게 글을 써 문책하기를, “범희문(范希文)이 허물 없이 쫓겨났는데도 그대는 이를 변호하지 않고 뻔뻔스레 사대부를 대하니 이는 인간의 수치를 모르는 일이다.”고 하였다. 약눌(若訥)이 이 글을 주상에게 올려 구공이 또 이능(夷陵)으로 좌천되었다.
682) 위지태과(謂之太過) : 익공(益公)이 범구(范歐)를 너무 심하다고 함.
683) 승기선의(承其善意) : 여공의 선의를 받아 들이다.
684) 분양(汾陽) : 곽자의(郭子儀).
685) 임회(臨淮) : 이광필(李光弼).
686) 특서지(特書之) : 구공이 범비(范碑)를 지을 때에 이를 특별히 쓰다.
687) 여공~제무(呂公~濟務) : 주익공이 선생에게 한 말.
688) 서사(西事) : 서하(西夏) 조원호(趙元昊)의 반란.
689) 전일지소위(前日之所爲) : 금개반지(今皆反之) 이하.
690) 기용인(其用人) : 여공의 용인(用人).
691) 손원규(孫元規) : 이름은 면(沔), 회계(會稽) 사람. 질탕자방(跌蕩自放)하여 불수사절(不守士節)함. 그러나 재맹과인(才猛過人)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써 여이간을 노낙하였다가 파직당함. 구공이 변론하여 자정전 학사가 됨.
692) 등자경(滕子京) : 이름은 종량(宗諒), 하남(河南) 사람. 범중엄과 동년에 진사가 됨. 중엄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자기의 후임으로 천거하였으나 공전(公錢)을 유용한 죄로 탄핵을 받았는데 중엄이 극력 구제하여 강(降) 일등에 그치게 하니 유사(有事)시에 그 재능을 쓰기 위함이다.
693) 장이(張李) : 미상(未詳).
694) 이송(二宋) : 송교(宋郊)와 송기(宋祈).
695) 이공(二公) : 범구(范歐).
696) 척이(跅弛) : 척(跅)은 검국(檢局)되지 아니함이요, 이(弛)는 방종함이니 예법을 따르지 아니함을 말함.
697) 왕수진요좌(王隨陳堯佐) : 왕은 자가 자정(子正)이며 하남(河南) 사람이고 진은 자가 희원(希元)이며 낭주(閬州) 사람이다. 여공이 사직을 청함에 인종(仁宗)이 어떤 사람으로 대신함이 좋겠는가 라고 물으니 여공이 두 사람을 추천하였다. 뒤에 재상이 되었으나 건명(建明)한 바가 없어 좌사간(左司諫) 한기(韓琦)가 보필(輔弼)의 재능이 아니라고 척파(斥罷)하였다.
698) 범구~태과(范歐~太過) : 주익공 글 속의 말.
699) 범려~상해(范呂~嘗解) : 주익공 글 속의 말.
700) 초진직질(超進職秩) : 범공이 우간의(右諫議)로써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됨. 이때 여공이 사도(司徒)로써 함께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논의함.
701) 여공삼입(呂公三入) : 인간(夷簡)이 자주 사직을 청하니 인종이 이를 싫어하지 아니하고 허락하였다. 그래서 세 번 조정에 들어 올 수 있었다.
702) 만회~지실(晩悔~之失) : 전일여공을 논핵한 일을 후회하다.
703) 구공~자해(歐公~自解) : 주익공 글 속의 말.
704) 이무위유(以無爲有) : 범공이 해구(解仇)한 일이 없는데 구공이 있다고 함을 말함.
705) 탁기심(度其心) : 선생이 충선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706) 묵장소기(墨莊所記) : 장방기(張邦基)의 저작.
707) 용천지(龍川志) : 소자유(蘇子由)의 저작.
708) 장안도(張安道) : 이름은 방평(方平).
709) 장실여당(張實呂黨) : 충선이 묘비를 깎아낸 일은 실로 여공이 부끄러워할 일이다. 장안도는 여당(呂黨)이니 당연히 숨겨야 할 일을 숨기지 아니하기 때문에 더욱 신빙성이 있다는 말.
710) 소여자약서(所與子約書) : 익공이 자약에게 준 글.
711) 학도삼십년(學道三十年) : 구양공의 말.
712) 위후학지언(爲後學之言) : 익공이 이 말을 후학의말이요 구양공이 한 말은 아니라고 함.
713) 본론(本論) : 구양공의 저작.
714) 종공거유(宗工巨儒) : 왕안석을 가리킨 듯.
715) 연허양유(燕許楊劉) : 장열(張說) 소막(蘇邈) 양억(楊億) 유자의(劉子儀).
716) 임정부(林正夫) : 복주(福州) 장계(長溪) 사람. 호는 무은(無隱), 소흥 말에 어사(御史)에 제수됨. 관직이 용도각(龍圖閣)에 이름.
717) 황재금일(況在今日) : 선생이 위액(危厄)을 만난 때임.
718) 부도(浮圖) : 탑을 말함.
719) 역구지계(力究之計) : 병(病)의 뜻이 여기까지 미침.
720) 절차지익(切磋之益) : 선생이 정부와 통노가 절차의 유익함이 있었음을 알다.
721) 무학~삼년(武學~三年) : 선생이 무학 박사에 제수되어 보직을 받으려면 3년 기다려야 했다. 양친(養親)이 급하여 더 기다릴 수 없어 청사(請祠) 운운함. 당시 관제가 미리 관직을 임명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예가 있었다.
722) 요락(聊落) : 적막함.
723) 왕년망론(往年妄論) : 효종이 즉위하여 직언을 구하니 선생이 복수의 대의를 상소함.
724) 골골(汨汨) : 골몰(汨沒).
725) 불합(不合) : 선생이 절화의(絶和議) 억요행(抑僥倖)의 설을 상소하였으나 군심(君心)에 불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