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전체 글 734

주자116

빙사유선생묘표(聘士劉公先生墓表) 선생의 성은 유(劉)씨이고 건주(建州)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의 백수(白水) 사람이다. 그 증조부의 휘(諱)는 자(滋)인데, 농사를 짓다가 진사시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상서직방랑중(尙書職方郞中)에까지 이르렀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누차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조(照)로 조청랑(朝靑郞)이었다. 2대에 걸쳐 모두 청덕(淸德)이 있었는데, 중간에 벼슬을 쉬고 물러나 있다가 늙어서 죽었다. 아버지 의 휘는 원진(元振)으로 처음에는 벼슬하지 않았으나, 순행(馴行)으로 일컬어졌다. 선생의 휘는 면지(勉之)이고, 자는 치중(致中)이며,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하루에 수천마디의 말을 외웠다. 한 번만 보고 들으면 다시는 잊어먹지..

주자115

卷九十묘표[墓表] 유병산(劉屛山) 선생 묘표(墓表)(屛山先生劉公墓表) 병산선생(屛山先生) 유공(劉公)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21년이 되던 어느 날, 그 사자(嗣子)인 평(玶)이 체읍(涕泣)하며 선생의 오랜 제자인 주희(朱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평(玶)이 불행(不幸)하여 일찍이 고자(孤子)가 되었습니다. 선인(先人)의 장례(葬禮)를 마쳤는데도 아직 명(銘)을 마련하지 못했고 묘도(墓道) 또한 지금까지 표창(表彰)할 수 없었습니다. 몹시도 두려운 것은, 평(玶)의 불효(不孝)가 또 유명(幽明) 간에 획려(獲戾)하게 된 점입니다. 이에 급히 돌을 세우고 탁사(琢辭)하여 후세(後世)에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생각건대, 선인(先人)께서는 세상에 쓰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업(事業)으..

주자114

卷八十九비[碑] 우문전수찬(右文殿修撰) 장공(張公) 신도비(神道碑)(右文殿修撰張公神道碑) 순희(淳熙) 7년 봄 2월 갑신(甲申)에, 비각수찬(祕閣修撰) ․ 형호북로(荊湖北路) 안무사(按撫使) ․ 광한(廣漢) 장공(張公)이 강릉(江陵)의 부사(府舍)에서 졸(卒)하였다. 그의 동생 형주(衡州) 사군(史君)인 표(杓)가 공의 영구(靈柩)를 호위(護衛)하고 돌아와 담주(潭州) 형양현(衡陽縣) 풍림향(楓林鄕) 용당(龍塘)의 언덕에 장례(葬禮)하였다. 법식(法式)에 따라 신도비(碑墓道)를 세우고 희(熹)에게 글을 보내와서 말하기를 “나의 형(兄)을 아는 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깊이 아는 사람은 당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명문(銘文)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희(熹..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