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권
편지(시사에 대한 문답) 書(問答論事)
적계 호원중 선생에게 보냄 與籍溪胡原仲先生
【해제】1159년(송 高宗 紹興29, 己卯) 주희 30세 때의 편지이다. 이 편지 가운데 “범장이 지난달 18일에 마침내 일어나시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범여규는 이 해 6월에 죽었으므로, 이 편지는 이 해 7월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범여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 유족의 거처문제까지를 걱정하고 있다. 또 당시의 곡가(穀價)를 말하며 서민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희(熹)는 정자(正字) 어르신의 존전에 삼가 아룁니다. 저는 교석을 제수한지 한달여가 이미 지났는데, 진실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에 먹고 자는 것이 편안치가 않습니다. 요즘 가을 더위가 다하지 않았으니 비부(秘府)는 화창하고 한가하며, 존후만복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저는 모친을 모시고 병 수발을 하고 있은데 다행히 조금이나마 나아지셨으니 번거롭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헤어진 후부터 달리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고모님[二十姑]을 만나 뵈었는데, 또 말씀하시기를 행재소의 소식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니 항상 생각하는 마음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여정을 따져보니 월 초에 도착할 수 있을 듯한데, 지금은 매우 먼 일처럼 생각됩니다. 관청에 거하며 녹을 먹는 실정을 감히 여쭐 수는 없지만 물정(物情)과 시속의 변화를 마음 속에 확실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나를 쓰고자 한다면 장차 무엇을 먼저 할까?”라는 하는 말이 제가 듣고 싶은 말입니다. 편지를 보내주시어 깨우쳐 주시고 조금이나마 농민들의 걱정을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우리 도(道)가 불행하여 범장께서 지난 달 18일에 마침내 질병에서 일어나시지를 못하셨습니다. 시국을 걱정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시고, 도를 믿는 마음이 도탑고 진실하셨으니 세상에 이런 분이 어찌 다시 있겠습니까? 이전에 가서 그 빈소(殯所)에 곡하였는데 그 집형편을 보니 생계가 쓸쓸하고 적막하여 살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위곡(渭曲)에 장사지내고자 의논하였는데, 범장이 살 곳으로 정한 뜻을 따른 것이니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집안에서는 태녕(泰寧)에 살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좋은 계책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백수(伯修)가 그것을 좋아하니 다른 사람들은 간여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처음에 원리(元履) 등의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건양(建陽)이 첫째는 분묘(墳墓)에 편하고, 둘째는 강학(講学)에 편하고, 셋째는 생계에 편하다고 여겨 그것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이야기하였으나 따르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다만 범장(范丈)이 평소에 깨우쳐주던 바른 뜻을 생각하면 감히 묵묵히 있을 수가 없으므로 어르신께 다시 말씀드립니다. 한번 통곡하고 나서 생각하다 보니 여기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동쪽으로 오도록 바꿀 수가 있다면 아주 좋겠습니다.
범공의 셋째 아들이 이 달에 죽었다고 하는데, 그 불행이 이와 같이 겹쳤으니 얼마나 불쌍한지요. 조카 백봉(伯逢)으로 하여금 숭안(崇安)에서 소무(邵武)로 급히 달려가게 하여 며칠 머물러 있게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이미 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번도 뵐 수가 없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공보(共父)와는 자주 서로 만나보십니까? 만나서 모시고 잠깐 가고 싶은데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순보(旬父)는 다음 달 초에 돌아올 수 있으니, 도착했을 때는 아마도 소무(邵武)에 머물 듯하나, 얼마 안 되어 또한 마땅히 돌아올 것입니다. 산중에는 일이 없고, 올 벼는 익어서 거두어 들였는데, 한 말에 15전에 팔려 서민들은 다른 걱정이 없으니 다행히 편안히 쉴 수 있습니다. 알고 싶어 하실 것 같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다행히 쇠약함과 병이 생기지 않고 몸도 조금 나아진 듯 합니다. 진짜 제주(斉州)산 반하(半夏)를 얻어 진단(真丹)을 굳히고자 하는데 도성에 그것이 있는지 모르십니까? 만약 찾을 수가 있으면 한두 냥 얻기를 바라니 인편에 보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대개 병은 비록 조금 나았지만 심하게 단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백성(伯誠) 존형은 늦지 않게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감히 다른 상황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날씨가 서늘해지니 시절에 맞게 보중(保重)하시고 장차 크게 떨쳐 일어나시어 사람들의 바라는 마음을 위로해 주십시오. 이만 줄이겠습니다.
與籍溪胡原仲先生
熹拝覆正字丈丈尊前 熹拝違教席 忽已月余 瞻慕之誠 食息不置 即日秋暑未闌 伏惟袐府清暇 尊候動止万福 熹侍親養疾 幸粗遣 不煩賜念 但自別後 殊不聞動静 今日拝省二十姑 亦云未得到在所消息 不勝懸想耳 計程月初可到 今想視事久矣 官居廩食之况不敢問 物情時変 必已了然於胸中矣 如有用我而将奚先 此則区区所欲聞也 因来賜書 願以開示 少紓畎畝之憂 幸甚幸甚
吾道不幸 范丈前月十八曰遂不起疾 憂時深切 信道篤誠 世豈复有斯人哉 前此往哭其殯 視其家生理蕭然 未知所税 衆議葬於渭曲 従其卜居之志 甚善 但聞其家欲居泰寧 似非良計 然伯修樂之 人不得而間也 憙初与元履諸人議 以為居建陽一則便於墳墓 二則便於講学 三則便於生事 言之甚詳 未有見従之意 窃惟苑丈平日教誨之誼 未敢黙然 故敢复言於左右 伏想一慟之余 亦当念之至此 因書一提其耳 或能改轍東来 則甚善也
人哥此月亦物故 其重不幸如此 可傷 伯逢令姪自崇安徑趨邵武 聞留止数日 想今已行矣 不得一見 甚以為恨 共父数相見否 迎侍乍到 不知為況又如何 旬父後月初可帰 到時恐尚留邵武 旦夕亦当帰也 山中絶無事 早秔収熟 斗穀售十五銭 小民無他恙 幸可寧息 謾恐欲知之 熹衰疾幸不作 気体似亦差勝 向欲得真斉州半夏合固真丹 不知都下有之否 如可尋訪 乞為置得一二兩 便中寄示 幸甚 蓋病雖小愈 不得不過為隄防也 伯誠仙尉尊兄想非晩可帰矣 不敢別状 夭気向涼 伏乞順時保重 行奮壮猷 以慰人望 謹啓 不備
적계 호선생에게 보냄與籍溪胡先生
【해제】1159년(송 高宗 紹興29, 己卯) 주자 30세 때의 편지이다. 앞에 편지를 이어서 이 해 8월에 쓴 편지로 범여규의 장례와 그 유족의 거처 문제를 말하고 있다. 또 뒷부분에서는 당시 금(金)나라와의 대치 상황을 염려하고 있다. 주희는 어지러운 상황을 구제하는 것은 근본을 구하는 것 뿐이고, 그를 위해서는 인심이 모이는 사람을 골라 등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저 희(熹)는 정자(正字) 어르신의 존전에 삼가 아룁니다. 지난달에 편지를 올렸는데 이미 받아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헤어지고 나서부터 줄곧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며칠 전 고모님이신 의인(宜人)부인을 뵈었는데 선생께서 부인께 보내신 편지를 꺼내 보여주시어 자세한 사실을 들을 수 있었으니 매우 기쁩니다. 그 편지 중에서 일찍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시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아직 받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요즘 가을 기운이 맑고 청명하니 존후만복(尊候万福)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저는 부모를 모시고 병을 돌보고 있는데 다행히 고향 마을에서 편안하니 감히 기념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가을이 온 후로 비가 오지 않는데, 요 며칠 사이에 늦벼가 패고 익을 것이니 가뭄이 우환이 될 것을 알겠습니다. 비로소 기도하는 일을 의논하였는데, 알고 싶어 하실 듯하여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
범장(范丈)은 점을 쳐서 중양일(重陽日)에 장사를 지내기로 하였는데, 근래에 범장의 둘째 아들 백숭(伯崇)의 편지를 받아보니 저에게 장례의 절차를 한 두 가지 변경하도록 하였는데, 1일에는 검열(検閲)을 하고 오늘 비로소 대략 정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어르신께 바른 절차를 물을 수가 없습니다. 광중(壙中) 지석문(誌石文)을 짓게 되었으니 다른 날에 가르침을 청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게으름이 심하여 올리는 편지가 상세하지 못합니다. 범장 집안의 일은 공보(共父)의 편지에서 한 말이 자못 자세하니 그에게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드린 범장 집안의 거처를 정하는 일은 전 날 보인 범장 가문의 의견과 합치되었습니다. 이 일의 추세는 다시 아뢰기 어려울 것이니, 대개 그 집에서는 이미 원리(元履)와 저를 지목하여 백숭(伯崇)의 편이라고 하니 매우 탄식할만 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바로 범장께서 평소에 깨우쳐주시던 덕을 감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일 뿐입니다. 어르신께서 편지를 보시고 그 것을 알려 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가을이 이미 깊어 가는데 강상(江上)의 소식은 어떠합니까? 잠시라도 평안하고 (金과의) 사이가 좋다면 매우 다행입니다. 그러나 제가 도리어 근심하는 것은 대개 지금 군사를 출동시켜 방비하는 것은 수송하고 거두는 일을 면할 수가 없는데, 양자강 연안과 바닷가 주현(州県)은 이미 시끄럽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이와 같으니 어떻게 우리를 지탱하겠습니까? 이것은 병사를 늘려 대비하지 않고 앉아서 피해를 당하는 형세입니다. 전날 유자원(劉子源)이 여기에 왔는데 영상(嶺上)에서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 작별하였다는 말을 하면서 세상의 일을 극론(極論)하고 심지어는 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는데, 어진 사람의 마음이 세상을 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근래에 또 공보(共父) 집안의 시종을 만났는데 어르신께서 어둡던 귀가 점점 밝아진다고 말하였으니, (귀가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은) 하늘이 장차 대유(大儒)의 공을 한번 시험해 본 것입니까? 그것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엎드려 생각해보니 사람마다 반드시 가슴속에 규모가 본래 정해져 있는 듯 합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천하형세가 앞서 말한 것과 같다는 것은 또한 권력을 잡은 자가 몰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세를 구할 방법은 다만 그 근본을 구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 변화를 따라 일일이 대응하다보면, 그 변화는 끝이 없으니 어찌 다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이른바 그 근본을 구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세상의 인망(人望)이 모이는 사람을 보고, 그를 등용하여 쓰는 것일 뿐이니, 그의 행동거지와 일을 하는 것이 반드시 인심에 맞으면 천하의 마음이 합하여 조정에 모일 것이니, 그 기력은 쉽게 분발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위고 병든 사람이 침과 약을 쓸 수가 없어 그 단전(丹田)과 기해(気海)에 뜸을 뜨면 기혈이 근본에 모여서 귀와 눈, 손과 발이 이롭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틈에 붓이 여기까지 이르렀군요. 등불 아래서 편지를 쓰니 눈이 피로하여 급히 서두르다 보니 예의에 맞지 않습니다. 삼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뵙지 못하는 동안 각별히 보중하시어 대명(大名)을 기다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중추절(仲秋節) 하루 전날 삼가 올립니다. 희(熹) 올림.
與籍溪胡先生
熹拝覆正字丈丈尊前 前月附便拝書 不知已達尊視否 自拝違後 一向不聞問 数日前拝省二十姑宜人 蒙出示家問 獲聞詳実 深以為喜 承嘗有賜書 然亦末拝領也 即日秋気澄明 伏惟尊候動止万福 熹奉親養疾 幸安田里 不敢上勤紀錄 但里中秋来闕雨 此数日来晩稲秀而将実 尤覚焦渇為患 方議祈祷 謾恐欲知
范丈卜以重陽日葬 近得伯崇書 今為処葬体一二変節 一日為検閲 今日方略定矣 遠地 不得求正於丈丈 及有為撰壙中誌石文 并俟他日請教 倦甚 拝書不能詳 范家事於共父書中言之頗子細 乞転詢之也 熹前書所議謀居一事 与前日所見家問中意偶合 此事勢難复与 蓋其家已目元履与熹為伯崇之党矣 可歎之甚 然不能息意者 政以范丈平日教誨之徳不敢忘耳 得丈丈因書告語之 甚善
秋已向深 江上消息如何 得且平善 甚幸 然愚意反以為憂 蓋今出師防戌 転輸科斂所不能免 聞浴江海州県已騒然矣 歳歳如此 何以支吾 此不待兩兵相加而坐受弊之勢也 前日劉子源来此 道嶺上拝別所聞誨言 以為必極論夫下事 至於慷慨灑涕 有以見仁人之心不能忘世如此 近又見共父家兵士説丈丈至彼耳聴漸聡 夭其或者将一試大儒之效乎 聞之喜而不寐 伏計必有規模素定於胸中 熹窃謂天下形勢如前所云者 亦当路所不可不知也 救之之衍 独在救其本根而已 若随其変而一一応之 則其変無窮 豈可勝救也哉 而所謂救其本根之術 不過視天下人望之所属者 挙而用之 使其挙措用舎必当於人心 則天下之心翁然聚於朝廷之上 其気力易以鼓動 如羸病之人 鍼薬所不能及 焫其丹田気海 則気血萃於本根而耳目手足利矣 不審丈丈以為如何 因筆不覚及此 灯下作書 目力方倦 極草草不如法 伏乞尊察 未拝侍間 伏乞保重 以俟休命 中秋前一日 謹拝啓 不備 熹拝覆
범직각에게 보냄 與范直閣
【해제】이 편지는 1158년(송 高宗 紹興28, 戊寅) 주자 29세 때 호문정공(胡文定公)의 조카인 범여규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에서는 충서(忠恕)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이연평을 찾아 충서에 대해 물은 일을 기록하고, 이연평의 학문적 연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호장(胡丈)이 편지 중에서 지난날의 일관(一貫)에 대한 설을 매우 힘써 다시 주장하였는데, 다만 “이해하는 것이 한 단계 향상할 수 있으면 내외(内外)도 없고, 상하(上下)도 없으며, 원근(遠近)의 한계도 없어 확연하게 사통팔달(四通八達)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이 저의 뜻과 아주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대개 이미 내외의 한계가 없다면 어디에 가든 일관(一貫)하지 않겠습니까? 충서(忠恕)는 대개 가까운 것을 가리켜 말하지만 그 의미는 언외(言外)에 있습니다. 자직(子直)이 ‘우리 어르신께서 저의 비천한 논리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셨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감히 그 설을 다시 이렇게 반복하니, 옳고 그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저는 지난번 연평(延平)에 가서 이원중(李願中) 어르신을 만나 뵙고 일관(一貫)과 충서(忠恕)의 설에 대하여 여쭈었습니다. 이원중 어르신께서 “충서는 바로 증자(曾子)가 깨달은 것이고, 문인들의 질문이 있어서 또 그 깨달은 것을 깨우쳐준 것일 뿐이니 어찌 (충서와 일관이) 두 말이겠는가?”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다시 근세 유자의 설은 어떤가를 여쭈었더니 “이와 같다면 도(道)에 두 가지 이치가 있는 것이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저의 생각과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꼭 들어맞아 느긋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이장(李丈)의 이름을 통(侗)인데 나중소(羅仲素)선생께 배웠습니다. 나중소 선생은 일찍이 이천(伊川)선생을 뵙고 후에 구산(亀山)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는데, 깊은 견해로 칭송을 받았으나 후학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장(李丈)은 홀로 학문의 심오한 이치를 깊이 터득하고, 그 경학(経学)은 순수하고 밝았으며, 함양(涵養)은 정미롭고 순수하였습니다. 연평의 선비들이 그를 깊이 존경하여 군의 학정(学正)이 되어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비록 다시 천거에 응하지는 않았으나 온화하고 겸손하며 성실하고 후덕하여, 사람이 그와 함께 오래 있어도 그 끝을 보지 못하였으니, 우뚝한 군자입니다. 돌아가신 선친(先子)께서 그와 사귄지 수십 년인데 도의(道義)의 계합(契合)함이 아주 깊었습니다.
與范直閣
胡丈書中复主前日一貫之説甚力 但云若理会得向上一著 則無有内外上下遠近邊際 廓然四通八達矣 熹窃謂此語深符鄙意 蓋既無有内外邊際 則何往而非一貫哉 忠恕蓋指其近而言之 而其意則在言外矣 聞子直説吾丈猶未以卑論為然 敢复其説如此 幸垂教其是非焉
憙頃至延平 見李願中丈 問以一貫忠恕之説 見謂忠恕正曾子見処 及門人有問 則亦以其所見諭之而已 豈有二言哉 熹复問以近世儒者之説如何 曰 如此則道有二致矣 非也 其言適輿卑意不約而合 謾以布聞 李丈名侗 師事羅仲素先生 羅嘗見伊川 後卒業龜山之門 深見称許 其棄後学久矣 李丈独深得其閫奥 経学純明 涵養精粋 延平士人甚尊事之 請以為郡学正 雖不复応挙 而温謙愨厚 人与之処久而不見其涯 欝然君子人也 先子与之遊敷十年 道誼之契甚深
범직각에게 보냄與范直閣
【해제】위 편지와 같은 해에 쓴 것으로,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늦여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앞의 편지에 대한 범여규의 답장을 받고, 그에 대해 동의 할 수 없는 점을 다시 기술하고 있다. 그 요지는 곧 충서(忠恕)는 하나이지만 성인과 배우는 사람의 충서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려주시는 가르침을 받고 근래의 상세한 상황을 들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실로 늦더위는 비가 올 조짐이니, 엎드려 생각하건데 성덕(盛徳)이 임하시고 여러 신들이 힘써 도우니 만복이 올 조짐입니다. 제가 친히 곁에서 도움을 드리고 싶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충서(忠恕)의 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저를 사랑하는 깊은 마음이 아니면 그 어리석음을 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어찌 즐겨 이렇게 열심히 반복하여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엎드려 생각해보니 끝내 계합할만한 점이 없는데 감히 숨기고 묵묵히 있을 수가 없어 그 계합할 수 없는 곳에 대하여 다 말씀드려 선생께 바른 것을 구하고자 합니다.
제가 앞의 편지에서 논한 충서(忠恕)는 곧 하나이지만 성인(聖人)에 있어서와 배우는 사람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맹자께서 말씀하신 “인의(仁義)를 말미암아 행하는 것”과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의 구별입니다. 맹자의 말씀은 인의를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니, 저의 말 역시 충서가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은 각각 까닭이 있어 말씀하신 것이므로 마땅히 일을 따라서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비록 명도(明道)선생이 도(道)를 보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또한 둘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합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개 합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억지로 합하는 것은 높은 것을 내려서 낮은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가까운 것을 밀어 멀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비로소 한 편으로 기울어지면 끝내는 반드시 어긋나게 됩니다. 대개 이치가 본래 그렇게 않으니 이것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대개 증자(曾子)가 오직 성인(聖人)의 일관(一貫)의 취지를 발명하였으니 이른바 “충서(忠恕)를 말미암아 행한다”는 것입니다. 자사(子思)는 오직 배우는 사람이 덕(徳)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리켜 보여주었으니 이른바 “충서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가리키는 것이 이미 다르니 어찌 둘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핵심은 충서를 하는 까닭이니 그 본체는 대개 같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논하면 지금 가르침을 받고 묻는 곡절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선생께서도 그렇게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증자가 일관(一貫)의 뜻을 발명하여 말한 것은 제가 앞의 편지에서 한 두 번 논하였는데, 모두 그 옳고 그름을 결정받지 못했습니다. 저도 그것을 밝힌 것이 있습니다. 대개 ‘충서’ 두 글자는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성인(聖人)에게 있어서는 매우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인의 입장에서는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대개 이미 일관(一貫)이라 말하면 대소(大小)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도(天道)가 지극히 가르치고, 사시(四時)가 운행하고, 만물이 생하는 것과 같은 것은 조화의 신비로움이 아님이 없으니, 오직 형상이 없는 태허(太虚)로 도체(道体)를 삼을 수는 없으나, 형이하(形而下)의 것이 거친 행적이 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자께서 말씀하신 “나는 너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이니 일용(日用)의 사이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공자의 몇 사람의 제자가 다 알지 못하고서는 공자께서 숨기는 것이 있는가를 의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도(道)를 무형이라고 여기고, 날마다 쓰는 충서를 거친 행적이라고 여기므로 증자가 여기에서 그것을 가리켜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이 말은 비록 비천하지만 이정(二程)선생의 구설(旧説)과 사상채(謝上蔡)선생이 또 그것을 발명하셨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돌아보니 실로 여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다만 듣고 보아 아는 것으로 추론하고 연역하여 제 설로 삼았으니, 이것이 마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스스로 알 수가 없어 매번 가르침을 청합니다. 다시 앞의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시고 거듭 이끌어 깨우침을 주시기를 바라니, 그렇게 해주신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전날의 여러 의심스러운 점은 또한 이른 시일에 가르침을 내려주시어 의심을 없애주시기를 바랍니다. 계절이 점점 더워지니 도(道)를 위하여 보중하시면 다시 불러주실 것입니다. 저의 큰 바람은 다 적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與范直閣
伏奉賜教 獲聞迩日起居之詳 慰感亡以愉 信後暑雨応候 伏惟盛徳所臨 百神労相 台候万福 熹観旁粗遣 未有可言者 伏蒙教諭忠恕之説 自非愛予之深 不鄙其愚 豈肯勤勤反复如此 感幸深矣 但伏思之 終未有契処 不敢随黙 請畢其詞 以求正於左右
熹前書所論忠恕則一 而在聖人在学者 則不能無異 此正猶孟子言由仁義行与行仁義之別耳 孟子之言不可読以仁義為有二 則熹之言亦非謂忠恕為有二也 但聖賢所論 各有所為而発 故当随事而釈之 雖明道先生見道之明 亦不能合二者而為一也 非不能合 蓋不可合也 彊而合之 不降高以就卑 即推近以為遠 始倚一偏 終必乖戻 蓋非理之本然 是乃所以為不一也 蓋曾子専為発明聖人一貫之旨 所謂由忠恕行者也 子思専為指示学者人徳之方 所謂行忠恕者也 所指既殊 安得不以為二 然核其所以為忠恕者 則其本体蓋未嘗不同也 以此而論 今所被教間曲折 可以無疑矣 不織尊意以為然否
若夫曾子斫言発明一貫之旨 熹前書一再論之 皆末蒙決其可否 熹又有以明之 蓋忠恕二字 自衆人観之 於聖人分上極為小事 然聖人分上無非極致 蓋既曰一貫 則無小大之殊故也 猶夫道至教四時行百物生 莫非造化之神 不可専以太虚無形為道体 而判形而下者為粗迹也 此孔子所謂吾無隠乎爾者 不離日用之間 一二子知之未至而疑其有隠 則是正以道為無形 以日用忠恕為粗遂 故曾子於此指以示之耳 此説雖陋 乃二程先生之旧説 上蔡煙匿又発
明之 顧熹之愚 実未及此 但以閭見之知推衍為説 是以不自知其当杏而毎有請焉 更望詳覧前書 重賜提誨 不勝幸甚 前日諸疑 亦望早賜鐫譬 俾毋疑為望 時序向熱 伏乞為道保重 以須環召 区区不勝大願 不備
범직각에게 보냄 與范直閣
【해제】역시 위 두 편지와 같은 해에 쓴 것이다. 그런데 진래는 이 편지의 ‘초여름’, 앞 편지의 “ 앞의 편지에서 논한 충서(忠恕)는 곧 하나이지만~” 운운 한 것을 들어 이 편지가 두 번째 편지보다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편지의 내용으로 볼 때 그 설이 타당한 것 같다.
4월 1일에 가르침을 주신 글을 받고 두세 번 읽었습니다. 저에게 베풀어주신 두터운 은혜를 우러러 받잡고 감사하는 마음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전날 평보(平甫)가 사람을 보내어 또한 일찍이 문서를 받았는데, 이미 선생님께서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초여름 날씨가 맑고 화순하니 조령을 반포하고 여유가 많으실 것이니 존후만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숨어 지내니 대강이나마 걱정을 떨쳐 버렸습니다. 산간이 깊고 외지니 또한 책을 볼만합니다. 또 호장(胡丈)이 돌아오시어 조석으로 가르침을 청할 수 있으니, 곤궁한 가운데서도 이 또한 충분한 즐거움입니다. 친히 뵈올 날이 가까웠으니 여름 끝 무렵에 무림(武林)에 가야합니다. 생각해보니 서너 달도 남지 않았는데 거처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충서(忠恕)의 의미를 깨우쳐주신 별지를 받았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버리지 않으시고 반복하여 가르침을 주시는 것을 우러러 받드니 은혜가 매우 두텁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그에 대한 깊은 생각을 보여 주셨는데, 감히 더 말씀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저는 이른바 ‘충서’ 두 글자는, 증자(曾子)가 일관(一貫)이란 말에 묵묵히 계합하는 것이 있었는데 문인의 질문으로 인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도체(道体)에 대한 소견 가운데 이 두 가지 일용에서 가장 절실한 것을 가리킴으로서 도(道)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이른바 “~뿐이다[已矣]”라는 것은 거처에 따라 각자가 만족하여 온전한 체가 아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충서(忠恕) 두 글자는 성인(聖人)에 있어서는 성인의 쓰임이 있고, 배우는 사람에 있어서는 배우는 사람의 쓰임이 있습니다. 증자(曾子)가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성인의 충서이니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정(二程)이 말한 “하늘의 명(命)은 그윽하여 그치지 않으니 천지(天地)가 변화하고 초목이 번성한다”라는 것은 바로 이 의미를 드러내 밝힌 것입니다. 부자(夫子)께서 배우는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과 자사(子思)의 중용의 설과 같은 것은 배우는 사람을 위해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도(明道)선생이 증자의 말과 “도(道)에서 떠남이 멀지 않다”는 것이 다르다고 말한 것은 동(動)하기를 천도(天道)로서 한 것일 뿐입니다. 대개 동(動)하기를 천도(天道)로 하는 자는 일이 모두 지극한 데 처하니, 증자가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충서에 있어서 남과 자기를 대조하여 잘못을 고치고, 자신을 미루어서 다른 사람에 이르는 것을 면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천(天)에 한결같이 진실할 수가 없으니, 어찌 성인(聖人)의 충서와 함께 취급하여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증자가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성인의 충서로 말한 것이니, 그것이 성(性)․천도(天道)와 일찍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일관(一貫)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르다고 하는 것은 또한 도달한 바가 다른 것을 말한 것이니, 중용의 ‘안행(安行)’ ‘이행(利行)’ ‘면행(勉行)’의 구별과 같을 뿐입니다. 실로 하학(下学)하여 상달(上達)하면 어찌 간격이 있겠습니까? 저의 생각은 이와 같으니 제가 이르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기시기를 바랍니다. 거듭 타이르고 깨우쳐 주시어 바름을 얻게 하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의심스러운 의미가 아직 많은데 가르침을 청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니, 이것이 오랫동안의 바램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백숭(伯崇)이 초 3, 4일에 가려고 한다는 말을 비로소 들었는데, 갑자기 닥치니, 기록한 것을 베껴 쓸 틈이 없습니다. 한가한 날을 기다려 정리하여 인편이 있으면 가지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공보(共父)의 거처에서 직각(直閣) 어르신께서 조정에 돌아가 임금의 물음에 답하신 내용을 적은 문서의 사본을 보았는데, 그것을 읽고는 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군주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뜻이 전편에 걸쳐 절실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로 우리 임금의 곁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비록 인망(人望)을 다 채울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또한 한 두 사람의 품행이 단정한 선비가 있을 것입니다. 전에 범공이 임금께 여쭌 말씀을 임금께서 혹시 생각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생각하시면 반드시 그 사람을 등용할 것이니 등용하신다는 어명이 늦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도(道)와 이 백성을 위하여 스스로 보중하시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보냅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與范直閣
四月一日 預所賜教帖 伏読再三 仰佩畚予之厚 感慰不可以言 前日因平甫遣人 亦嘗拝状矣 不蕃已達台慈否 即日初夏清和 伏惟班布多暇 合候起居万福 憙奉親屏処 幸粗遣免 山間深僻 亦可観書 又得明丈来帰 朝夕有就正之所 窮約之中 此亦足樂矣 迫於親養 夏末須為武林之行 計不三四月 未得定居也
伏蒙別紙垂諭忠恕義 仰荷不棄其愚 与之反复 為賜甚厚 謹以来教所示熟思之矣 敢复為説以請益焉 熹所謂忠恕者 乃曾子於一貫之語黙有所契 因門人之問 故於所見道体之中 指此二事日用最切者 以明道之無所不在 所謂已矣者 又以見随寓各足 無非全体也 忠恕兩字 在聖人有聖人之用 在学者有学者之用 如曾子所言 則聖人之忠恕也 無非極致 二程所謂 維天之命 於穆不已 天地変化 草木蕃者 正所以発明此義也 如夫子所以告学者与子思中庸之説 則為学者言之也 故明道先生謂曾子所言与 違道不遠異者 動以天爾 蓋動以天者 事皆処極 曾子之所言者是也 学者之於忠恕 未免參校彼己 推己及人 則宜其未能誠一於天 安得輿聖人之忠恕者同日而語也若曾子之所言 則以聖人之忠恕言之 而見其与性与天道者未嘗有二 所以為一貫也 然此所謂異者 亦以所至之不同言之 猶中庸安行利行勉行之別耳 苟下学而上達焉 則亦豈有所隔閡哉愚見如此 更乞教其不至者 重賜鐫鍛暁 使得所正焉 不勝幸甚
他疑義尚多 蒙諭使得請教 此宿昔之願 但今曰方間伯崇欲以初三四日行 迫遮 末暇抄錄所記 俟暇日料理 有便即附行也 前日在共父処見宜閣丈還朝陛対副本 読之不能舎去 愛君敬主之義 蓋終篇三致意焉 然久矣莫以此言警琢吾君之側者矣 近日所用雖不能尽満人望 其間若亦有一二端士焉 前言儻見思乎? 思其言必用其人 延登之命 計亦非晩矣 願為斯道斯民厚自保重 副此錄依 謹上状 不備
범직각에게 보냄 與范直閣
【해제】역시 29세 때인 1158년에 쓴 편지이다. 앞의 세 편지에서 충서에 대해 논하였는데, 이 편지에서는 충서의 관한 설을 정리하여 보낸다는 말이 있지만 직접 충서를 논하지는 않고 있으니, 아마도 따로 별지로 보낸 듯하다. 67권에 있는 「忠恕說」이 이것인 것 같다.
제가 지난번에 충서(忠恕)와 일관(一貫)의 설을 선생님께 질의하였는데, 절실하고 지극한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소견에 아직 석연치 않은 것이 있습니다. 요즘 깊이 연구해 보고, 드디어 구설(旧説)에다 발명한 것을 더하였으니, 전에 가르침을 청할 때는 비록 대의를 대략 엿보기는 하였지만 깊이 이해한 것은 오래되지 않아 말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 열심히 번거롭게 변론하고 분석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제 다시 근래에 해석한 의미를 한 구절 적어 보내드리니, 끝까지 비판하시고 가부(可否)를 내려주시면, 다시 생각해보고, 계속해서 저의 생각을 갖추어 여쭙겠습니다. 지난 해 동안(同安)에 있을 때 홀로 거의 한해를 기거하면서 논어 10여 편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곳이 매우 많아, 서찰로는 다 적어서 가르침을 구할 수가 없으니, 종이 위에 엎드렸으나 간절한 마음만 달려갑니다.
與范直閣
熹向嘗以忠恕一貫之説質疑於函丈 伏蒙鑽暁切至 但於愚見尚有未安 比因玩索 遂於旧説益有発明 乃知前者請教之時雖略窺大義 然涵泳未久 説詞未瑩 致煩辨析之勤如此 今再錄近所訓義一段拝呈 乞賜批鼕可否示下 容更思黍 続具咨請也 去蔵在同安独居幾閲歳 看論語近十篇 其間疑処極多 筆札不能載以求教 伏紙但切馳仰
경국 탁부인에게 보냄 與慶國卓夫人
【해제】이 편지는 1158년(송 高宗 紹興28, 戊寅), 주희 29세 때에 쓴 편지이다. 탁부인은 유자우(1097~1146)의 계실이다. 유자우는 주희 부친의 사후 주희 모자의 거처를 자신이 사는 숭안(崇安) 오부리(五夫里)에 마련해준 사람이다. 주희는 이 편지에서 탁부인의 아들인 유평이 간관(幹官)으로 편하게 벼슬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즉 간관이 지위는 높지 않지만 세력이 있으면서 실무에 대한 책임은 없는 직책이므로 오만하고 무능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제가 갑자기 어리석은 소견이 있어 처음에는 뵙고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지금은 이미 갈 수가 없게 되어 감히 이 편지로 말씀드립니다. 악묘(嶽廟)인 다섯째 형은 근래에 봄 이후로 갑자기 유연(遊燕)을 줄이고 다시 서책을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만약 항상 이렇게 할 수 있다면 허물이 적어지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지를 보내시어 칭찬하고 격려하여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또 부인께서 간관(幹官)으로 파견되기를 주선하시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인가의 자제들이 많은 경우 간관이 됨으로 인하여 심성(心性)을 망치고 일생동안 벼슬살이 하는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부귀하게 자라면 본래 어려움을 알지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벼슬을 한 것이 곧 이 벼슬인데, 관아에서는 다만 사장(使長) 한 사람만이 관할을 할 수가 있으며, 또 그 중에 너그러운 윗사람이 있으면 귀한 집의 자제들로 대우하여 법도로 규제하려 하지 않아, 위로는 맡아서 주관해야 할 책임이 없고, 아래로는 아전과 백성들이 관리의 실수와 흠을 살필 걱정이 없는데, 주현(州県)의 태수와 부태수의 힘은 도리에 자기의 아래에 있으므로 태수와 부태수를 업신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후생 자제들 중에 이 벼슬을 하는 자는 오만하고 방자하지 않은 자가 없고, 세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 중에 삼가고 경계하는 자는 비록 이 같은 지경에는 이르지는 않더라도, 또한 그 때문에 친히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고, 일을 대하면 귀찮아합니다. 그런데 주현의 소리(小吏)의 등급은 서로 질서가 있고, 맡은 일이 서로 나누어져 있어, 하루만 게을리 하면 벌을 받으니, 주현에서 벼슬을 하는 자들은 항상 일을 분명히 하여 과실이 적은 것과는 다릅니다. 제 생각에는 평보가 참부를 받아 주부(主簿)나 승위(丞尉) 등을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집안의 형님께서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거나, 맡아 볼 일이 있거나, 다른 사람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리에 파견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의 그를 성취시켜주는 방법입니다. 만약 반드시 간관을 구하고자 하신다면 허물이 있는 자리에 두어, 평생을 그르치게 될 것이니 이는 아마도 부인께서 자제를 가르치는 본의가 아닐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두터워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황공하고 또 황공합니다.
제가 아뢸 것은 대개 이와 같습니다. 또 상세한 생각이 있지만 종이가 다하여 쓸 수가 없습니다. 유공(劉珙)께서는 반드시 매우 상세하게 아실 것이니 다만 가까이 모시고 그것을 여쭈어보기를 바랍니다. 그 분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주희 올림.
與慶國卓夫人
熹輒有愚見 初欲面禀 今旣不成行 敢此布之 五哥嶽廟近自春中以來 頓威遊燕 復近書冊 若常能如此 寡過可期 更望因書褒勸 以獎成之 且間尊意欲爲經營幹官差遣 不知然否 熹則竊以爲不可 近世人家子弟多因爲此壞却心性 一生仕官費力 蓋其生長富貴 本不知艱難 一旦仕官 便爲此官逐司只有使長一人可相拘轄 又間有寬厚長者 卽以貴遊子弟相待 不欲以法度見繩 上無職事了辨之責 下無吏民窺伺之憂 而州賺守倅勢反出己下 可以凌轢 故後生子弟爲此官者無不傲慢縱怒 席勢凌人 其謹筋者 雖不至此 亦緣不親民事 觸事懵然 非如州照小吏等級相承 職事相轄 一日廢慢則罪戾及之 故仕於州鯀者常曉事而少過 愚意以爲平父可且今參部 受簿尉之屬 乃爲正當 若不欲如此 卽舍人兄爲營一稍在人下 有職事 喫人打罵差遣 乃所以成就之 若必欲輿求幹官 乃是疊之有過之地 叢其終身 恐非太碩人高明敎子之本意也 受恩深厚 冒味及此 皇恐皇恐
熹所票大概如此 更有曲折意度 紙尽写不得 舎人兄長必燦委悉 只乞因其侍次 試以間之 必以為然也 熹又覆
황단명께 올림 上黃端明
【해제】1176년(송 孝宗 淳熙3, 丙申), 주자 47세 때의 편지이다. 황단명은 당시 병부상서를 사직하고 단명전 학사로 있었기 때문이 황단명이라고 한 것이다. 황중의 덕을 칭송하고, 그를 깊이 흠모한다는 뜻을 밝히고, 만나 뵙기를 간절히 청하는 내용이다.
8월 11일에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희(熹)가 목욕재계하고 편지를 쓰니, 상서(尚書)를 사직하신 단명(端明) 어르신께 재배(再拝)의 예를 드리기를 청합니다. 제가 듣건데, 맹자에 “천하에 통하는 존귀한 것 세 가지가 있으니, 벼슬이 그 하나요, 나이가 그 하나이며, 덕(徳)이 또 하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 가지의 존귀한 것이 천하에 통하니, 사람은 마땅히 공경하여 업신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벼슬과 나이는 대개 우연히 얻는 사람도 있으므로 그 존귀함이 조정에서는 행해지지만 향당에서는 미치지 못하고, 향당에서는 행해지지만 조정에서는 미치지 않으니, 사람이 그를 존경하는 것 또한 혹 그 겉으로만 하고 마음으로 하지 않기도 합니다. 오직 덕(徳)만이 마음에 얻어서 몸에 가득 차 집안을 다스리고 향당에까지 확산되며, 조정에까지 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벼슬과 나이라는 두 가지의 존귀함까지 겸비하면 천하를 통하여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숨기고 물러나 피하여 스스로 자처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따르며 진정으로 복종하는 것은, 대개 불가해합니다.
생각컨데 선생님께서는 양조(兩朝)의 시종(侍従) 원로(元老)로서 관직을 그만두고 물러나 집에 거하시는데, 천자께서도 감히 정사(政事)로 번거롭게 하지 않으시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시어 좋은 말씀을 구하시니, 그 지위와 나이는 우연히 얻은 것이 아닙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이런 것으로 스스로를 남과 다르다고 여기지 않으시니, 묵묵히 그 일을 이루시고 말씀하지 않아도 믿는 까닭은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게 하여 그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천하의 덕을 아는 선비들이 선생님의 풍모를 흠모하여 모두가 선생님의 수레라도 몰고 싶어하는 까닭이니, 어리석은 저도 그런 생각을 깊이 가지고 있습니다. 대개 그 평생에 부여받은 기(気)가 치우치고 어긋나서,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미세한 것에는 삼갈 수가 없고, 뜻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오래도록 지닐 수가 없으며,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에 이르러서는 온후하고 화평한 기운이 거칠고 사나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이기지 못하므로, 항상 몰래 스스로 슬퍼합니다. 어찌 잠깐이라도 선생님의 성덕(盛徳)과 용모를 우러러 뵙고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본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장래에 자신을 삼가고 허물을 보충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것이 소인의 귀의처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야 당하(堂下)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여 숙원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바라건대 선생님께서는 앉아서 저의 재배를 받으시어 문인 제자의 반열에 스스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시어, 제가 온 까닭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저의 행운입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 분수에 넘치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감히 명을 주시기에 앞서 글을 먼저 드리고 지붕아래 서서 가부간의 명을 듣고자 합니다. 저 희(熹)는 지극한 황공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上黃端明
八月十一日 具位熹敢斎沐裁書 請納再拝之礼于致政尚書端朋丈丈台座 熹聞之 孟子有言 天下有達尊三爵一歯一徳一 此言三者之尊達于天下 人所当敬而不可以慢焉者也 雖然 爵也 歯也 蓋有偶然而得之者 是以其尊施于朝廷者則不及於郷党 施于郷党者則不及於朝廷 而人之敬之也亦或以貌而不以心 惟徳也者 得於心 充於身 刑於家而推於郷党 而達於朝廷者也 有是而兼夫二者之尊焉 則通行夫下 人莫不貴 雖斂然退避 不以自居 而人之所以心悦而誠服者 蓋不可解矣
恭惟明公以両朝侍従元老上還印綬而退処于家 自夫子不敢煩以政 賜之几杖而乞言焉 其位輿年固非偶然而得之者矣 而明公則未嘗以是而自異於人 其所以黙而成之 不言而信者 則日新又新而未嘗有止也 此夫下知徳之士所以莫不窃慕下風之義 懊有執鞭之願 而熹之愚則有甚焉者 蓋其平生気禀傭駁 洽己則不能謹於細微 立志則不能持於常久 以至待人援物之際 温厚和平之気不能勝其粗属猛起之心 是以常籍自倬 以為安得朝夕望見明公之盛徳容貌而師法其万一 庶幾可以筋身補過於将来 而不遂為小人之帰也 今曰之来 蓋将頓首再拝于堂下 以償其夙昔之願 伏惟明公坐而受之 使得自進於門人弟子之列 而不孤其所以来之意 則憙之幸也 郷往之深 不自知其潜越 敢以書先于将命者而立于廡下 以聴可否之命 憙不勝皇恐之至
왕구령에게 보냄 與王龜齡
【해제】1167년(송 효종 건도3, 정해) 주자 38세 때의 편지이다. 왕구령의 이름은 십붕(十朋)이고 호는 매계(梅溪)로 온주(溫州)의 낙청(樂淸) 출신이다. 이 편지에는 왕십붕을 사모하는 마음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제가 은거하면서 만학을 하는데 성현을 닮아가는 것도 없고, 지나간 것은 배워도 방향을 알지 못하고, 허물이 있어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국가가 믿어 중하게 여기고, 천하가 의지하여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이 이미 젖어들어 다시 순후해질 수가 없고, 기강이 이미 무너져 다시 바르게 할 수가 없는 이러한 것들은 하나도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망령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 중에 명성이 있고, 절조 있는 행동을 하여, 사람들이 귀의할 바를 논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는 것을 절실하게 탄식합니다. 그것이 오래되면 혹 그를 만나기도 하고 혹 만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저의 간절한 마음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습니다. 그가 나아가서 등용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혼자서 기뻐하고, 그가 곤궁한 처지를 당하여 파면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혼자서 걱정하였습니다. 대저 그들이 나아가는 바를 보면 시종 굳은 절조를 지켜 진실로 존경하고 따를 만한 사람이 거의 없으니, 언론 풍지(風旨)가 끝내 일컬을만하지 않거나, 공명사업이 끝내 기록할만한 것이 없는 자도 또한 종종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숨쉬며 스스로 탄식하고, 천하에 이른바 절조있는 행동을 한다는 명성이 있는 자 역시 천하의 사람을 안정시켜 주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천하의 일은 과연 앞으로 어디에 맡겨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비록 어진 사람을 어질게 여기는 마음을 감히 바꾸고,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을 느슨하게 할 수는 없지만, 지난날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갖추는 것은 오히려 가볍게 여긴 것을 혼자서 스스로 비웃으니, 마치 맹자의 나무람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스승과 벗에게 들은 것을 다시 취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강명하고, 동정(動静)하는 사이에 자세히 관찰하고, 인(仁)을 구하고 격물(格物)을 하여 하루라도 감히 노력을 늦추지 않아서, 들은 것에 가까우면, 전날 절실하게 남에게서 구했던 것은 이미 그러한 틈이 없을 것입니다.
이 때에 마땅히 사대부의 말을 듣고,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나 심부름꾼의 말을 들으며, 아래로는 저자거리와 부녀자와 아이들에게까지 이르면 또한 천하의 바람이 이제 왕공(王公)께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윽고 진사가 되었을 때 올린 대책(對策)을 읽었고, 관각에 있을 때 상주한 것을 읽었으며, 주사(柱史)가 되었을 때와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시랑(侍郞)으로 옮겼을 때 간하는 일을 논한 것을 읽었고, 또 고대승상(故大丞相) 위국공(魏國公)의 뇌문(誄文) 및 초동수창(楚東酬唱) 등의 시를 읽었는데, 그 말씀과 뜻을 보니, 위로는 임금의 물음에 응하여 일을 주청하고 논간(論諫)한 것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로 주고받은 시화(詩話)에 이르기까지, 한마디 한 글자도 넓은 천리(天理)와 인륜(人倫)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세속에서 말하는 이해득실과 영욕사생의 변화가 그 가운데 하나도 들어간 것이 없으니, 그것을 읽으면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호연하게 할 수 있고, 비천하고 인색한 것이 사라져, 실로 스스로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완악한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우게 되는 효과가 자신의 몸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비가 인(仁)을 구하는 것은 실로 마땅히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는 것을 의무로 삼아야한다. 그러나 ‘어진 대부를 찾아가 섬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제 전 날에 몇 사람에게 실망한 것으로 스스로 경계한다면 이것은 한번 목이 메었다고 하여 먹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흔쾌히 다시 선생님을 만나뵙기를 청할 뜻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선생님께서 기주(夔州)에서 돌아오시어 도성 가까운 곳을 다스릴 것이란 말을 들었는데, 저의 마을에 교유하는 사람중에 마침 선생의 막하에 있는 사람이 있어 편지로 축하를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대개 어진 대부를 얻어 그를 섬기게 된 것을 기뻐하고, 또 내세울 만한 공적이 없는 저만이 홀로 한번도 다른 빈객들의 뒤에서 선생님을 따르며, 대군자의 도덕의 잔광을 우러르지도 못한 것을 탄식한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지난번 저의 망령되고 취할 만한 것이 없는 말을 선생님께서 모두 보고 들으셨는데, 선생님께서는 또 천한 것을 버릴 것이라고 여기지 않으시고, 방종하고 참람된 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으시고, 황공하게도 손수 글을 쓰시어 송쉬(宋伜)에게 보내어 매우 칭찬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뜻을 가만히 생각해보았는데, 세상이 쇠퇴하고 도(道)가 미미해져,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젖혀두는 논의가 번갈아 일어나고 멋대로 행해지며, 거리낌도 없이 온 세상에 가득하니, 그 횡류(横流)를 막을 것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가 얻은 한 생각에서라도 취하려 하셔서, 저의 지난날의 소행은 살피지 않으시고 제 말을 빌리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의 뜻은 바르고 크지만 저의 어리석음은 선생님의 뜻을 따를 만한 것이 있지 않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저에게 한 가지는 있으니, 그것은 오직 더욱 생각하고 연마하여, 강명하고 체찰하는 것과 인(仁)을 구하고 격물하는 공을 감히 그만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치가 날로 더욱 밝아지고, 의리가 날로 더욱 정밀해지며, 평소의 마음을 간직하는 공부가 날로 더 굳건해지고, 확충하는 것이 날로 더 원대하게 되면,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은덕을 거의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니, 선생님의 항상된 가르침을 바랍니다.
비록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한 몸으로 천하의 사대부와 군민의 한 부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고 계시니, 그 한마디 말과 침묵, 한 번 움직이고 고요함에 달려 있는 것이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 생각하건데 성덕대업(盛徳大業)이 다함이 없으며, 강건(剛健) 중정(中正)함과 독실광휘한 것은 억지로 힘써서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고 기억하는 옛 말에 “백리를 가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삼는다”는 것이 있으니 선생님께서도 그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지금은 인물이 약하고 보잘것없어 선생님과 같은 사람은 겨우 한 두 사람뿐이라, 세상 사람의 선생님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더욱 절실하니, 선생님께서도 더욱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또 들은 바로는, 옛날의 군자는 ‘존덕성(尊徳性)’에는 반드시 ‘도문학(道問学)’을 말했고, ‘광대함을 다한다[致広大]’라 하면 반드시 ‘정미함을 다한다[尽精微]’는 것을 말했으며, ‘고명(高明)을 다한다’고 하면 반드시 ‘중용(中庸)을 행한다’는 것을 말했고, 또 ‘온고지신(温故知新)’을 말하면, 반드시 ‘돈후숭례(敦厚崇礼)’를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고 지킨 것이 반드시 치우치고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위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아래에 있으면서도 배반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사람은 일으켜 주고, 도(道)가 없는 사람은 용납하여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가 선생님께 깊이 바라는 것이 있으니, 대개 덕성(徳性)과 광대(広大)함, 고명(高明)함,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은 반드시 시행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만, 문학(問学)과 정미(精微)함, 중용(中庸), 숭례(崇礼)와 같은 것도 별도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칠고 경솔하여 취할 것이 없지만 선생님께서는 반드시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지난번에 선생님께서 기주(夔州)에 계실 때 성도(成都)의 왕공(汪公-汪尚書)께서 가까이 계셨으니 매우 즐거우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성 가까이로 부임하시고 나서도 소식을 들으시는지요. 왕공(汪公)은 함양하심이 깊고 두터우며, 누긋하고 조용하며 관대하시니 큰일을 맡기면, 목소리나 안색을 바꾸지 않아도 내외에 복종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서로 깊이 아시니, 언젠가 세상에 나가시어 동류를 이끌어 천거하게 되면 반드시 그가 우선이 될 것입니다. 저는 문을 닫아걸고 모친을 봉양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번 호상(湖湘)에 갔었는데 교유하며 강론하는 유익함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갑자기 명을 받았으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조정에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제가 무엇을 바라고 감히 앞서 나가겠습니까? 선생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뵙고 절을 올릴 기약이 없으니, 오직 의(義)만을 추구하는 선생님을 생각하며 날로 부지런히 하겠습니다. 번번이 송쉬(宋伜)가 중간에서 전해주어서 선생님께 편지를 전하게 되니 그의 부지런한 정성을 알겠습니다. 상세히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與王龜齡
憙窮居晩学 無所肖似 往者学不知方 而過不自料 妄以為国家所恃以為重 天下所頼以為安 風俗所以既漓而不可以复淳 紀綱所以既壊而不可以复理 無一不係乎人焉 是以聞天下之士有声名節行 為時論所帰者 則切切然以不得見乎其人為欺 及其久也 或得見之 或不得見之 而熹之拳拳不少衰也 聞其進為時用 則私以為喜 聞其阨窮廃置 則私以為憂 及夫要其所就而観之 則始終大節真可敬仰者蓋無幾人 而言論風旨卒無可称 功名事業卒無可紀者 亦往往而有 以此喟然自歎 知天下所謂声名節行者 亦未足以定天下之人 而天下之事未知其果将何寄也 自是以来 雖不敢易其賢賢之心 緩其愛世之志 然亦籍自笑其前日所求於人之重而所以自待者反軽 如孟子之所譏也 於是始复取其所聞於師友者 夙夜講明 動静体察 求仁格物 不敢弛其一日之労 以庶幾乎有聞者 而於前日之所為切切然者 則既有所不暇矣
当是時 聴於士大夫之論 聴於輿人走卒之言 下至於閭閻市里 女婦児童之聚 亦莫不曰天下之望 今有王公也 已而得其為進士時所奉大対読之 已而得其在館閣時上奏事読之 已而得其為柱史 在台諌 遷侍郎時所論諫事読之 已而又得其為故大丞相巍国公之誄文及楚東酬唱等詩読之 観其立言措意 上自奏対陳説 下逮燕笑従容 蓋無一言一字不出於天理人倫之大 而世俗所謂利害得喪 栄辱死生之変一無所入於其中 読之真能使人胸中浩然 鄙吝消落 誠不自意克頑廉懦立之效乃於吾身見之 於是作而歎曰 士之求仁 固当以反求諸己為務 然豈不曰事其大夫之賢者云哉 今以前日失数公者自懲 是以一噎而廃食也 於是慨然复有求見於左右之意而未獲也
昨聞明公還自 夔州 撫臨近甸 而憙之里閈交游適有得佐下風者 因以書賀之 蓋喜其得賢大夫事之 而自傷無状 独不得一従賓客之後 以望大君子道徳之余光也 不意夤縁与其向来鄙妄無取之言皆得徹聞於視聴 明公又不以凡陋為可棄 狂僭為可罪 而唇枉手筆 以抵宋伜 盛有以称道 窃惟明公之志 豈非以世衰道微 遺君後親之論交作肆行 無所忌憚 挙俗滔滔 思有以障其横流者 是以有取於愚者一得之慮 因以不求其素而借之辞色也耶 明公之志則正矣 大矣 而熹之愚未有称明公之意也 雖然 有一於此 其惟益思砥砺 不敢廃其所謂講明体察求仁格物之功者 使理日益明 義日益精 操而存之日益固 拡而充之日益遠 則明公之賜庶乎其有以承之 而幸明公之終教之也
雖然 明公以一身當四海士大夫軍民一面之責 其一語一黙 一動一靜之間 所係亦不輕矣 伏惟盛德大業前定不窮 其剛健中正 篤實輝光者固無所勉彊 以熹之所睹記 則古語所謂行百里者半九十里 明公其亦念之 况今人物眇然 如明公者僅可一二敷 是以夫下之人責望尤切 而明公尤不可以不戒 不審明公以爲如何哉 熹又聞之 古之君子尊德性矣 而必曰道問學 致廣大矣 必曰盡精微 極高明矣 必曰道中庸 溫故知新矣 必曰敦厚崇禮 蓋不如是 則所學所守必有偏而不備之處 惟其如是 是故居上而不驕 爲下而不倍 有道則足以興 無道則足以容 而無一偏之蔽也 熹之區區以此深有望於門下 蓋所謂德性廣大高明知新者必有所措 而所謂問學精微中庸崇禮者又非別爲一事也 狂易無取 明公其必有以裁之
往者明公在夔 成都汪公聲闇密邇 竊意有足樂者 此來時通問否 此公涵養深厚 寬靜有容 使當大事 必有不動聲色而內外賓服考 明公相知之深 一日進爲於世 引類之擧 其必有所先矣 熹杜門養親 足以自遣 昨嘗一至湖湘 出資交遊講論之益 歸來忽被除命 旣不敢辭而拜命矣 然明公未歸朝廷 憙亦何所望而敢前也 引領牙纛 未有瞻拜之期 向風馳義 日以勤止 輒敢復因宋倅相爲介紹 致書下執事 以道其拳拳之誠 伏惟照察
진승상에게 보냄 與陳丞相
【해제】이 편지는, 송절본에는 ‘습실지에게 보냄(與襲實之)라고 되어 있어 진승상에게 보낸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여기에서 주희는 현자를 극진히 대우하여 나오게 하고, 인재를 선발할 때는 문사가 아닌 덕행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제가 천하에 뜻을 두었던 옛적의 군자를 가만히 살펴보니, 천하의 현자(賢者)를 부르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현자를 구하는 것을 급하게 여긴 까닭은, 그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거나 공덕을 기리게 하여, 한 때의 보고 듣는 것을 좋게 하고자 할 뿐이 아니라, 장차 견문이 미치지 못하는 것과, 생각이 이르지 못하는 것을 넓히고, 또 자신을 지키거나 사물을 접할 때 혹 미진한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현자를 구하는 것이 넓지 않을 수가 없고, 예우하는 것이 두텁지 않을 수가 없으며, 대접하는 것이 정성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천하의 현자들로 하여금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스스로 내 앞에 와서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을 즐기지 않음이 없게 된 다음에야 나의 덕업이 은미한데 부끄러움이 없어져서 점차 광대(光大)한 데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저 현자는, 그 현명함은 이미 미세한 사리(事理)를 충분히 자세히 알며, 지키는 것은 이미 성현의 행적을 충분히 쫒을 수 있으니, 그 자처함은 반드시 높아서, 동류들과 같이 더럽게 명예를 구하는 짓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스스로를 대우함은 반드시 두터워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꾸며서 스스로를 천거하려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믿는 것은 반드시 도타워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공손히 순종하여 구차하게 용납되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공(王公) 대인(大人)이 비록 현자를 좋아하고 선을 즐기는 진실됨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이름을 들을 수 없고, 그 얼굴을 알 수가 없으니, 그 마음과 뜻에 간직한 재지와 식견을 다하여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처음부터 이러한 뜻도 없으면서 현자를 취하는 것이 단지 문자와 언어 사이에만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데 공께서는 두터운 덕과 큰 기대로 나라에서 신봉하고 우러러보는 사람이 된지 여러 해가 됩니다만, 천하의 여러 어진 사대부들이 다 공의 문하로 나오지는 않은 듯합니다. 이것이 어찌 공께서 그들을 좋아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아서이겠으며, 그들을 구하는 것에 힘을 다하지 않아서이겠으며, 그들을 대우하는 것이 미진해서이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 선비를 좋아하면서 문자와 언어에서 그들을 취하면 도학과 덕행이 있는 선비들은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선비를 구하면서 벼슬에 나가기를 구하고 추천을 바라는 사람들에게서 취하면 자중하고 부끄러움이 있는 선비들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선비를 대우하면서 어리석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섞어놓는다면 절조가 있고 의기가 있는 선비들은 차라리 장읍(長揖)의 예를 하고 가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른바 사륙병려문[対偶駢儷]은 남의 비위나 맞추고 실속이 없으면서 세속의 문장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며, 또 문자의 말류이니, 쓸데없이 고원한데 뜻을 둔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비루하게 여겨 하지 않을 것이고, 식견이 있는 문사(文士)라면 또한 거기에 깊이 뜻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근래 아랫사람에게서 가만히 들었는데, 공께서는 오직 이것으로 천하의 선비들을 평가하려하신다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우(江右)에는 예부터 문사들이 많았는데 근세(近歳) 이래에 옳은 것을 행하고 지조가 있다는 말을 듣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바라건데 공께서는 유의하시어 굳세고 밝으며 정직한 자를 취하여 스스로를 돕게 하시고, 또 돈후하며 겸손한 자를 내세우시어 풍속을 권면하시며, 문예를 앞세우고 기량과 식견을 뒤로 하지 않으시면, 진태부(陳太傅)께서 이전보다 오로지 좋게만은 할 수는 없지만, 천하의 선비들 역시 공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쇠약하고 병들어 숨어서 엎드려 있으니,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고 싶은 것이 하나가 아니나 나아갈 수가 없으니, 잠시 그 큰 것만 이와 같이 말씀드립니다. 만약 채택해 주신다면 제가 말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가서 공께 고할 것입니다.
與陳丞相
憙竊觀古之君子有志於天下者 莫不以致天下之賢爲急 而其所以急於求賢者 非欲使之綴緝言語 譽道功德 以爲一時觀聽之美而已 蓋將以廣其見聞之所不及 思慮之所不至 且慮夫處己接物之間或有未盡善者 而將使之有以正之也 是以其求之不得不博 其禮之不得不厚 其待之不得不誠 必使天下之賢識與不識莫不樂自致於吾前以輔吾過 然後吾之德業得以無愧乎隱微而寢極乎光大耳 然彼賢者其明旣足以燭事理之微 其守旣足以遵聖賢之轍 則其自處必高 而不能同流合汙以求譽自待必厚 而不能陳詞飾說以自媒自信必篤 而不能趨走唯諾以苟容也 是以王公大人雖有好賢樂善之誠 而未必得聞其姓名 識其面目 盡其心志之底蘊又况初無此意 而其所取特在乎文字言語之間乎
恭惟明公以厚德重望爲海內所宗仰者有年矣 而天下之賢士大似未得盡出於門下也 豈明公所以好之者未至歟 所以求之者未力歟 所以待之者未盡歟 此則必有可得而言之者矣 蓋好土而取之文字言語之間 則道學德行之士吾不得而聞之矣 求士而取之投書獻啓之流 則自重有耻之士吾不得而見之矣待土而雜之妄庸便佞之伍 則志節慷慨之士寧有長揖而去耳 而况乎所謂對偶騈儷 諛佞無實 以求悅乎世俗之文 又文字之末流 非徒有志於高遠者鄙之而不爲 若乃文士之有議者 亦未有肯深留意於其間者也
而間者竊聽於下風 似聞明公專欲以此評天下之士 若其果然 則熹籍以爲諜矣 江右舊多文士 而近歲以來行誼志節之士有關者亦彬彬焉 惟明公留意 取其彊明正宜者以自輔 而又表其惇厚廉退者以屬俗 毋先文藝以後器識 則陳太傅不得專美於前 而夫下之士亦庶乎不失望於明公矣 衰病屛伏 所欲面論者非一 而不獲前 姑進其大者如此 若蒙釆擇 則熹所不及言者必有輕千里而告於明公者矣
유공보에게 보냄 與劉共父
【해제】1166년(송 孝宗 乾道2, 丙戌) 주자 37세 때의 편지이다. 이정문집(二程文集)을 편집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호오봉이 편집한 이선생의 문집이 호(胡)씨 집안에서 나왔는데, 그 판본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고 하여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답장흠부서」 5~8에도 언급되어 있다.
근자에 잠시 성(城)에 들렀다가 돌아온 지 며칠 되었습니다. 평보(平父)를 만나 최근에 보내신 편지를 보고서 저의 안부를 물어주신 것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두 선생의 문집에 대해서 논하신 것은 제 생각에는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호백봉(胡伯逢)이 가학(家学)을 주장한 것은 참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제가 감히 논의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총명하고 박식한 노형과 조예가 깊고 정밀한 흠부(欽夫)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니, 이것은 괴이한 일입니다.
만일 이 글들이 문정공(文定公)께서 지으신 것이라면 반드시 문정공의 판본에 의거해서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것은 이정(二程)선생의 문집으로 다만 그 중의 한 판본이 우연히 문정공의 집안에서 나왔을 뿐이요, 문정공 당시에도 또한 기록되어 전해지는 판본에 의거했을 뿐이니, 비록 문정공이라 할지라도 글자 하나의 오류도 없다고는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따로 좋은 판본을 구해서 다시 보충하고 편집했으니, 이것은 문정공께서도 원하시던 일일 것이니, 비록 문정공이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유감이 없으실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무슨 고충이 있어서 오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번에 사용한 두 판본이 진실로 완벽하게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이 판본에도 분명하게 드러난 오류들을 당시에는 교정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정신을 안정시키고 마음을 비워 의리가 통하는 것을 보면 마땅히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호문정공(胡文定公)의 판본을 먼저 마음속에 선입견으로 놓아둔 후에 다시 다른 도리는 믿지 않으십니까?
예를 들어 「정성서(定性書)」나 「명도서술(明道敍述)」, 「부공(富公)에게 올린 글」이나 「사수(謝帥)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삭제한 수십 글자, 관직을 사직하는 표문의 순서가 거꾸로라는 것, 역전의 서문에서 ‘연(沿)’자를 ‘기(沂)’자로 고친 것, 제문(祭文)에서 ‘질(姪)’을 ‘유자(猶子)’로 고친 것들은 모두 본래 문장이 아니라 분명히 문정공이 없애거나 교정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몇 곳은 커다란 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을 고친 것에 대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본문은 본래 의리를 해치지 않기 때문인데, 「명도서술」과 「부공에게 올린 글」 「사수에게 보낸 편지」가 이러한 것들입니다. 또 곡진하게 말을 돌려서 하고자 했으나 도리어 사실을 잃어버리고 의리를 해친 것이 있으니, 사직하는 표문이 이것입니다. 곡진하게 돌려서 말을 하여 곧 사사로운 뜻으로 의리를 해쳤습니다. 생각컨데 「정성서」의 처음과 끝 부분은 비록 긴요한 말은 아닙니다만, 명도는 횡거를 아버지의 표제(表弟)라고 불렀는데, 도에 대한 깨달음(問道)에 비록 선후가 있더라도 도에 대한 깨달음을 이유로 그 부형을 이와 같이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이정(二程)의 어록(語録)을 보면 두 선생과 학자들의 말이 합치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명도(明道)는 “다시 생각해 볼 점이 있다”고 말했고, 이천(伊川)은 바로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명도의 기상이 이와 같은데 오늘날 삭제한 글의 기상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또 문정공이 학자들에게 답하는 글에 비록 합치하지 않는 점이 있어도 매우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와 같이 아무런 함축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는데, 하물며 명도선생이야 어떻겠습니까? 만일 이와 같이 삭제해버리는 것은 몇 십자의 중요하지 않은 글자를 줄이는데 불과하지만 명도선생의 조용하고 온화한 대체(大体)와 기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아마 문정공께서도 우연히 한 때의 생각으로 간단하고 명백하게 의리[向上事]를 밝히려고 하다보니 이러한 것을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혹은 문정공 당시에 온전한 판본을 보지 못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오늘날 어찌 뜻을 굽혀 따를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본 이연평 선생이 소장한 판본은 양구산의 집안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유찰원(游察院)의 문장과 섞여 있는 듯했습니다. 근래에 유찰원의 문집을 찾아보고서야 그 오류를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선생에게 말씀드렸더니 선생이 탄식하시면서 “이 글들의 유래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데도 오히려 이런 오류가 있으니, 하물며 다른 것들이야 다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를 비우고 선을 좇는 공평하고 정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의 사의(私意)를 마음속에 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일 뿐입니다.
또 ‘유자(猶子)’라는 두 글자는 앞의 논의가 불충분합니다. 예기(禮記)에서 말하기를 “상복은 형제의 아들도 자식처럼(猶子) 한다”고 했으니, 이것은 형제의 자식들을 위해 상복을 입되 자기 자식처럼 입는다는 것이니 평시에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하물며 ‘유(猶)’ 자는 원래 칭호가 아니라 다만 예(禮)를 기록하는 말로서, 아래 문장의 형제의 부인이나 숙(嫂叔)에 대한 ‘무복(無服)’, 고모와 자매들에 대한 ‘박(薄)’과 같은 종류의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어찌 이것을 좇아서 마침내 형수를 ‘무복’이라 부르고, 고모와 자매들을 ‘박’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들은 진실로 형제의 아들을 ‘조카[姪]’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유자(猶子)’라고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형의 아들’ ‘동생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손자에 대해서도 역시 ‘형의 손자’라고만 했을 뿐입니다. 이정(二程) 선생이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세속을 따라 조카[姪]라고 칭한 것은 의리에 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곳은 문정공이 이미 한 때 자기의 견해로 이정 선생의 본문을 고친 것인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대대로 전해지는 별도의 판본에 의거하여 문정공이 고친 곳 가운데 온당치 못한 곳을 개정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어떻게 된 이치란 말입니까?
또 명도(明道)의 「논왕패차자(論王覇箚子)」 등 몇 편은 문정공의 판본에 아예 없으니, 이런 것들의 기록이 없는 것은 탈락이나 오류가 있는 것이지 문정공의 실수가 아닐 것입니다. 이천(伊川)의 「상인묘서(上仁廟書)」도 역시 문정공의 판본에는 없다가 나중에 흠부(欽夫)가 처음 보내온 호(胡)씨 집안의 판본과 교열해 보니 또한 두 구절이 빠졌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판본으로 문정공의 판본을 개정한 것이 아니라, 간행한 판본이 본래 문정공의 판본에 의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마도 모두 대조하여 살펴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들이 판각한 문자가 오류가 많고 교열이 정밀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는 곧 일체를 물리치니, 이것은 자만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목소리와 안색으로 사람을 천리의 밖에서 물리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남에게서 허물을 듣기를 좋아하고, 선으로 옮기기를 용감히 하는 것은 이 보다 더 큰 것입니다. 장차 두 형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데, 단지 이러한 작은 일에 뜻을 두어 줄곧 이와 같이 하여 끝내 소망하는 것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심각하게 논하고 버려두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사의(私意)의 뿌리와 줄기를 갈아서 없애버리지 않으면 형편에 따라 자라나서 그 해가 작지 않을 것이고, 또 그 해가 이정(二程) 선생의 글에만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기필코 호(胡)씨의 글을 한 글자도 바꾸거나 고칠 수 없다면, 한 가지 사례로 그것을 밝혀보겠습니다. 문집중에 「여여숙(与呂叔)에게 보내는 중(中)을 논하는 편지」의 주에서 말하기를 “자거(子居)는 화숙(和叔)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는데, 호씨가 어록(語録)을 편집할 때 형서(邢恕)의 아들로 할 뜻을 가지고 마침내 이 주를 삭제하고 바로 본문의 ‘자거(子居)’ 위에다 ‘형(邢)’자를 덧붙였습니다. 근래 여(呂)씨 중에도 화숙(和叔)이 있는 것이 의심스러워 편지로 흠부에게 물었습니다. 흠부가 답변하기를 “일찍이 형(邢)씨에게 그것을 물었더니 과연 자거(子居)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호씨의 책 또한 어찌 하나의 오류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비를 불문하고 일체를 그것을 따르려 하십니까? 하물며 이것은 문자의 오류여서 본원과 큰 절목에는 처음부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기필코 하나하나 그것을 따르고 감히 고치려하지 않습니까? 근래에 문정공의 사우(祠宇)를 향군에 세우기 위해서 응구(応求)와 방언(邦彦)에게 말을 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작은 절조를 잃은 일을 지적하며 의심스러워하여 위원리(魏元履)가 분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두 분께서 호문정을 스승으로 존경하면서 또 그 더욱 작은 일을 고수하여 고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문정공이 이른바 큰일을 한 사람인데도 끝내 당세에 알려지지 못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만 이정(二程)선생의 글의 불행일 뿐 아니라 문정공의 불행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미 관청의 비용을 사용하여 책 일부를 간행하였는데, 도리어 옳은 것은 전혀 살피지 않고, 다만 호씨 집안의 잘못된 판본의 문자들을 지당한 것이라고 하신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문정공의 마음은 모름지기 두루두루 유통되기를 바라신 것이지 결코 이처럼 편협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문정공께서 결연한 태도로 이 책을 주장해서 천하 후세 사람들이 반드시 이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왕개보(王介甫)의 삼경(三経)․자설(字説)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오히려 문정공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설사 조금이나마 이런 뜻을 가졌다 하더라도 또한 자신의 사사로움을 다하지는 않았으니 이른바 ‘현자(賢者)의 허물’입니다. 횡거(横渠)가 말하는 “선(善)하지 못한 것은 함께 그것을 고친다”는 말이 정녕 후학들에게 바라는 것이니, 자기의 찌꺼기를 지키면서 도(道)의 진리를 시샘해서 유풍(遺風)과 남은 폐해가 말류(末流)에 영향을 주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자(程子)도 일찍이 사람이 학문을 할 때 잘못은 자기의 주장이 너무 지나친 데에 있다고 했습니다. 횡거도 자처함이 너무 지나친 것을 다시 천하의 선이 모여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경계했습니다. 이제 두 분께서 이 일을 주장하는 것을 보니 이러한 점에 가깝지는 않습니까? 성현(聖賢)이 대중에 머무르고 자신을 버리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아울러 관찰하는 뜻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호자(胡子)의 지언(知言)에서도 말하기를 “배우는 것은 간략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지 비루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비루한데 가깝지는 않습니까? 만약 다른 곳에서 별도로 간행하는 것을 마땅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더욱 진실되지도 않는 아득하고 한가한 말이니, ‘매일 훔치던 닭을 한달에 한 마리씩 훔치다가 그만 두겠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소생이 감히 들을 바가 아닙니다.
이 도(道)는 쇠퇴하고 사설(邪説)이 번성하여 온 세상에 말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항상 한탄합니다. 두 분에게 천리의 바깥에서 바라는 것이 비단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바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데, 주장하시는 뜻이 이렇게 치우쳐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만일 조용히 빈객의 뒤에서 종일토록 바른 말을 한다면 또 합치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흠부 존형께는 따로 편지를 하지 않았으니, 흠부 존형께 말하고 싶은 것도 다만 이와 같을 따름이니 베껴서 보내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흠부 존형께서 “혹 이치에 맞지 않으면 깨우쳐주기를 바란다”고 하셨는데 저도 감히 고치기를 꺼리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써서 보낸 몇 장의 편지 가운데 마땅히 고쳐야 할 곳은 당시에 심력을 다 기울였고, 또 번거롭게 여러 사람에게 수고를 끼쳤는데, 저는 반드시 여기에 의거해서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이에 다시 다른 판본은 없습니다. 이제 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찢어 버리지는 마시고 모두 수습하셔서 인편으로 부쳐주시면 마땅히 모두를 보관했다가 후세를 기다릴 따름입니다. 지난번에 수십 개의 판본을 구하여 두루 붕우들에게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제 또한 부치지 않는 것은, 제가 감히 이러한 잘못된 판본의 문자로 붕우들을 그릇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추워 손이 얼어서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아 제가 가진 생각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으니, 더욱 자세히 살펴보시고 제멋대로 방자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與劉共父
近略到城中 帰方数日 見平父示近問 承寄声存問 感感 但所論二先生集 則愚意不能無疑 伯逢主張家学 固応如此 熹不敢議 所不可解者 以老兄之聡明博識 欽夫之造詣精深而不暁此 此可怪耳
若此書是文定所著 即須依文定本為正 今此乃是二先生集 但彼中本偶出文定家 文定当時亦只是拠所伝錄之本 雖文定蓋不能保其無一字之訛也 今別得善本 复加補綴 乃是文定所欲聞 文定复生 亦無嫌間 不知二兄何苦尚爾依違也 此間所用二本固不能尽善 亦有妁然却是此間本誤者 当時更不曾写去 但只是平気虚心看得義理通処 便当従之 豈可肚裏先横却一箇胡文定後 不复信道理耶
如定性書及明道敍述上富公与謝帥書中刪去数十字 及辞官表倒却次序 易伝序改沿為沂 祭文改姪為猶子之類 皆非本文 必是文定刪改 熹看得此数処有無甚害者 但亦可惜改却本文 蓋本文自不害義理故也 敍述及富謝書是也 有曲為回互而反失事実害義理者 辞表是也 曲為回互 便是私意害義理矣
惟定性書首尾雖非要切之辞 然明道謂横渠実父表弟 聞道雖有先後 然不応以聞道之故傲其父兄如此 語錄説二先生与学者語有不合処 明道則曰更有商量 伊川則直云不是 明道気象如此 与今所刪之書気象類乎 不類乎
且文定答学者書雖有不合 亦甚宛転 不至如此無含蓄 况明道乎 今如此脚去 不過是減得数十箇閑字 而壊却一箇従容和樂底大体気象 恐文定亦是偶然一時意思 欲直截発明向上事 更不暇照管此等処 或是当時未見全本 亦不可知 今豈可曲意狥従耶 向見李先生本出龜山家 猶雑以游察院之文 比訪得游集 乃知其護 以白先生 先生敷息曰 此書所自来可謂端的 猶有此叢 况其它 又可尽情耶 只此便是虚己従善 公平正大之心 本亦不是難事 但今人先着一箇私意横在肚裏 便見此等事為難及耳
又猶子二字 前論末尽 礼記云 喪服 兄弟之子猶子也 言人為兄弟之子喪服猶己之子 非所施於平時也 况猶字本亦不是称呼 只是記礼者之辞 如下文嫂叔之無服 姑妨妹之薄也 今豈可沿此 遂謂嫂為無服 而名姑妨妹以薄乎 古人固不謂兄弟之子為姪 然亦無云猶子者 但云兄之子弟之子 孫亦曰兄孫耳 二先生非不知此 然猶従俗称姪者 蓋亦無害於義理也 此等処文定既得以一時己見改易二程本文 今人乃不得拠相伝別本改正文定所改之未安処 此何理耶
又明道論王覇箚子等数篇胡本亦無 乃此間錄去 有所脱諜 非文定之失 伊川上仁廟書此間本無 後来乃是用欽夫元寄胡家本校 亦脱兩句 此非以他人本改文定本 乃是印本自不曾依得文定本耳 似此之類 恐是全不曾參照 只見人来説自家刻得文字多錯 校得不精 便一切逆拒之 幾何而不為訑訑之馨音顔色 拒人於千里之外乎
夫樂聞過勇遷善 有大於此者 猶将有望於兩兄 不意只此一小事 便直如此 殊矢所望 然則区区所以劇論不置者 正恐此私意根株消磨不去 随事滋長 為害不細 亦不専為二先生之文也
近以文定当立祠於郷郡説応求邦彦 二公皆指其小節疑之 魏元履至為扼脘
今二兄欲尊師之 而又守其尤小節処以為不可改 是文定有所謂大者 終不見知於当世也 此等処非特二先生之文之不幸 亦文定之不幸耳 今既用官銭刊一部書 却全不賭是 只守却明家錯本文字以為至当 可謂直截不成議論 恐文定之心却須該遍流通 決不如是之陋也 若説文定決然王張此書 以為天下後也必当依此 即与王介甫主張三経字説何異 作是説者 却是謗文定矣 設使微似有此 亦是克未尽底己私 所謂賢者之過 横渠所謂其不善者共改之 正所望於後学 不当守己残而妬道真 使其遺風余弊彼蕩於末流也 程子嘗言 人之為学 其矢在於自主張太過 横渠猶戒以自処太重 無复以来天下之善 今観二兄主張此事 得無近此 聖賢稽衆舎己 兼聴并観之意 似不然也 胡子之言亦云 学欲約不欲陋 此得無近於陋耶 如云当於他処別刊 此尤是不情悠悠之説 与月攘一雞何異 非小生所敢聞也
毎恨此道衰微 邪説昌熾 挙世無可告語者 望二兄於千里之外 蓋不翅磯渇之於飲食 乃不知主意如此偏枯 若得従容賓客之後 終日正言 又不知所以不合者复幾何耳 欽夫尊兄不及別状 所欲言者不過如此 幸為呈似 所云或不中理 却望指教 熹却不敢憚改也 向所錄去数紙合改処 当時極費心力 又且労煩衆人 意以為必依此改正 故此間更無別本 今既不用 切勿毀棄 千万尽為収拾 便中寄来 当十襲臧之 以俟後世耳 向求数十本 欲遍遺朋友 今亦不須寄来 熹不敢以此等錯本文字誤朋友也 天寒手凍 作字不成 不能傾竭懐抱 惟加察而恕其狂妄可也
유공보에게 보냄 與劉共父
【해제】翼增에서는 이 편지를 건도 7년(1171), 주자42세 대의 편지로 보고 있다. 유공이 계모 탁씨의 상을 당하여 물러났는데, 상중에 다시 동지추밀원으로 임명하자, 여섯 번 상소하여 사직을 간절히 청하고 대계(大計)를 회복하고 스스로를 수양하며, 현인을 구하라는 등의 다섯 가지 일을 개진하였다는 송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덕을 닦는 것에 관한 설에서 대해서는 다만 주상(主上)께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근심하고 수고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면 덕을 닦는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천심이 기뻐하지 않고, 아래로는 인심이 화합하지 않으며, 무릇 하고자 하는 것이 서로 화답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면 아마도 덕을 닦는 실효가 미치지 않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덕을 닦는 실질은 인욕(人欲)을 없애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데 있습니다. 인욕은 반드시 소리나 모양, 재물이나 이익의 즐거움이나 궁실과 보고 노는 사치만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한 것이 조금이라도 그 바름을 잃으면 곧 인욕입니다. 반드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너그럽고 큰 도량을 확충하여 아래에 다하며, 감히 자신이 옳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반드시 자기와 같게 하려 하지 않고, 편견을 주장하여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취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지 않으며, 아첨하는 사람을 즐겨 받아들여 바른 선비를 배척하고 경계하지 않고, 가까운 이익을 탐내어 먼 계책에는 어둡지 않으며, 출입 기거함과 명령을 내리고 시행함, 일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잊지 않으며 감히 잊거나 게을리 하지 않는 것, 또 단정한 사람과 바른 선비와 굳세고 사리에 밝으며 충직한 사람, 간언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하여 조석으로 좌우에 두고 함께 거하며, 익숙하고 편리하며 민첩한 사람으로 하여금 틈을 엿보게 하지 않으며, 높은 사람의 뜻을 따르거나, 기질과 습성을 더럽히거나, 총명함을 미혹되게 하거나 어지럽게 하도록 하지 않으며, 이 마음이 텅 비고 밝아 광대하고, 공평하고 바르며 중화(中和)하고, 겉과 속이 꿰뚫어 통하여 조금의 사사로운 생각의 얽매임도 없게 한 다음에야 덕을 닦아서 위로는 천(天)에 다가갈 수 있고, 아래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스스로 이 여러 가지를 돌아보시면 그 마음이 부합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방법에서는 이것을 따르지만 다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것이 무익하다 하여 바로 등지지는 않습니까? 하나라도 여기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신(臣)은 아마도 이른바 덕을 닦는 실질이라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복하는 형상’ 운운한 한 구절은 오늘날의 병통을 정확하게 맞춘 것입니다. 전날 보낸 첨첩(籤帖)에서 몇 마디를 고친 것은 구차하게 온전한 정론을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이지만 곧 인욕과 천리는 함께 가면서도 실정은 다른 것이니, 세밀하게 살펴서 분명하게 판별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저 안으로 수양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은 본래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 다른 사람과 적이 된 다음에 그것을 하려해서는 안됩니다. 또 그것을 하는 방법은 반드시 그 실질을 급하게 하고, 그 명목은 천천히 하며, 반드시 깊고 두터우며 성실하게 생각하도록 힘써서, 부박하고 얕은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된 다음에야 오래 갈 수 있는 덕을 쌓아서 크게 될 수 있는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기미를 누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참으로 이것을 하는 것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임시방편으로는 순정(純正)한 것을 논하면서 실상은 반드시 그 교활한 마음을 쓰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도운 후에도 순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음과 행적이 괴리되고 내외가 나누어져서, 공자의 말씀을 읽으면서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의 말을 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 관중(管仲)과 상군(商君), 오기(吳起), 신불해(申不害)는 아무런 공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죄를 얻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컨대 선생께서는 자세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與劉共父
修徳之説 但云主上憂勤恭倹 非不修徳 然而上而夫心末予 下而人心未和 凡所欲為 多不響応 疑於修徳之実有未至焉 蓋修徳之実在乎去人欲存天理 人欲不必費色貸利之媒 官室観遊之侈也 但存諸心者小失其正 便是人欲 必也存紙懼之心以畏夫 振寛宏之度以尽下 不敢自是而欲人必己同 不徇偏見而鑓聚無足取 不甘受佞人而外敬正士 不狃於近利而味於遼猷 出人起居 発号施今 念号在滋 不敢忘怠 而又択端人正土剛明忠直能尽言極諌者 朝夕与居左右 不使近習便利捷給之人得以窺伺間隙 承迎指意 抒染気習 惑軋聡明 務使此心虚明広大 平正中和 表裏洞然 無一豪私意之累 然後為徳之修 而上可以格夫 下可以感人 几所欲為 無不如志 陛下自省於是敷者 其心有得於中乎 其方従事於此而有未至乎 其無乃謂此無益而正背馳乎 一有不合乎此 則臣恐所謂修徳之実者有斫未至也
恢复之形一段 切中今日之病 前日籤帖更定敷語 非是欲蔔全正論 蓋只此豪釐之間 便是人欲天理同行異情処 不可不精察而明辨也 夫内修自洽 本是吾事所当為 非欲与人為敵然後為之 而為之之道 必急其実而緩其名 必以深厚淵塞為務 而不為浮薄義露之態 然後可以蓄可久之徳而成可大之功 亦非為畏泄其機而固為是不可測也 若謂姑為純正之論 而其実必用機心扶陰謀然後可 則是心迹乖離 内外判析 孔子謂而儀秦行矣 彼管仲商君臭起申不害非無一切之功 而所以卒得罪於聖人之門者 正在於此 願明者之熟察之也
유공보에게 보냄 與劉共父
【해제】1176(송 효종 순희3, 丙申) 주희 47세 때의 편지이다. 순희 2년 유공보가 건강(建康)의 지주가 되어 상원현(상원현)에 명도(明道)의 사당을 세웠는데, 명도의 상을 야복(野服)으로 세울 것이냐 법복(法服)으로 세울 것이냐를 두고 논의하고 있다.
평보(平父)가 별지를 보내와 명도(明道)의 관복(冠服)에 관한 일을 언급했습니다. 저의 처음 생각은 이미 학교에 사당을 세웠으면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 가까이 간 것이니 바로 야복(野服)으로 상을 세워서는 안된다고 보았으므로 마땅히 법복을 써야 한다는 의견[有此議]을 낸 것입니다. 아울러 연평(延平)의 학관에서 조어사(曹御史)와 진료옹(陳了翁)의 상을 보니 역시 해치관(獬豸冠)을 쓰고 법복(法服)을 입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스스로 간관(諫官)의 직책에서 물러나 외방을 떠돌았으니 모두 그 관직에 있을 때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보고 들은 것이 익숙해져서 그것을 끌어다가 법식을 삼고자 하여, 일찍이 그 당시의 두 사람의 상에 법복을 쓴 것의 득실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만약 혹자의 말이 실로 이치가 있다고 하여도 명도가 어사(御史)가 된 것은 처음에는 섭관(摂官)이 아니었고, 또 종정(宗正)으로 제수되었으나 일찍이 그 직책에 나가지 않았으니, 그것을 살펴보면 아마도 정밀하지 못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날 어사(御史) 법관(法冠)은 그 평생 관복 가운데 가장 번성할 때의 것이므로 역시 이치에 해가 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승의랑(承議郎) 본품(本品) 법복을 써도 좋습니다. 회요(会要)에 의하면 구품관(九品官)은 모두 법복을 입었으나, 원풍(元豊) 시기에 관제를 바꾼 후에도 관리에게 녹을 줄 때 법복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렇지 않으면, 복두공복(幞頭公服)을 써도 괜찮은데, 일찍이 그 집안의 화본(画本)을 보니 붉은 명주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만 옛날의 법식과 너무 가깝지 않을 뿐입니다. 저의 견해는 이러하니 선생께서 다시 생각하시어 판단하십시오. 혹자가 소위 이천(伊川) 사당의 제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다시 물어보시고, 어떤 사람이 세운 것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함께 물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與劉共父
平父示別紙 諭及明道冠服事 熹初意既在学校立伺 密迩先聖先師之側 則不応頁用野服為象 故有此議 兼在延平学中見曹御史陳了翁象 亦是豸冠法服 二公自去諌職 流落於外 皆非卒於其官者 見聞膂熟 因欲援以為例 而未嘗計其当時之得失也 今如或者之言固亦有理 但明道之為御史 初非摂官 而宗正之除未嘗就職 此其考之亦恐有未精也 窃謂今日御史法冠乃是追用其平生冠服之最盛者 似亦無害於理 不然 則直用承議郎本品法服亦佳 担会要 則九品官賛有法服 但不知元鬘官制後寄祿官有法服与否耳 又不然 則頁用蹊頭公服亦可 嘗見其家畫本緋衣也 但太不近古耳 鄙見如此 更惟高明裁之 或者所謂伊川枸堂之制 不知何謂 更告訶之 并問何人所立 今在何処可也
유공보에게 보냄 與劉共父
【해제】진래(陳來)는 이 편지의 연대가 분명하지 않지만 1176(송 효종 순희3, 丙申) 주희 47세 때의 편지이다. 다만 별집4권에 있는 유공보에게 보낸 3세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일을 언급하였는데, 본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거기 이어서 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인재를 선발하고 대우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제가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드린 인재를 찾는 일은,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듯 했는데 이윽고 그것을 생각해보니 이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어 다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논하겠습니다. 옛날의 대신(大臣)은 그 한 몸으로 천하의 중대한 일을 맡았지만, 그 한사람의 이목의 총명함과 그 한사람의 수족의 근력으로 천하의 일을 두루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힘입어서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국론을 한가지로 결단할 때는 반드시 많은 현자(賢者)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로서 장차 그 몸으로 이러한 책임을 맡으려는 자는 반드시 찾아가 묻고 자문을 구하되, 아무 일이 없을 때 인재를 취하여 이리저리 여러 번 비교하고 헤아려서 일이 생겼을 때 써야 합니다. 대개 바야흐로 자신이 천하의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지만 아직 거기에까지 이르지 않았으니, 조만간에 갑자기 쓸 것이 아니므로, 인재를 관찰하는 것을 오래 할 수 있을 것이고, 어지러운 이해관계의 유혹이 없으면 그 인재를 살펴보는 것이 자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이 드러나면 인재를 많이 얻을 것이고, 인재를 찾은 세월이 길면 인재가 풍부하게 쌓일 것입니다. 자중(自重)하는 사람이 거리낌이 없이 감히 나아가면, 은거하며 자신의 재능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요, 재주도 없으면서 나아가고자 하는 자[欲進者]는 할 일이 없어 나오지 않을 것이니, 교묘한 거짓으로 진실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래되고 자세하게 인재를 살폈으므로 그 인재의 장점과 단점의 실상을 알아 어긋나지 않을 것이고, 얻은 인재가 많고 넉넉하므로 번갈아가면 바꾸어 써도 고갈되지 않을 것입니다. 은거한 사람이 다 나오면 직언이 날마다 들릴 것이니 나의 덕이 닦일 것이요, 취사(取捨)가 모호하지 않으면 명실(名実)이 날로 융성하여 선비의 마음이 나를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예전의 군자가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는 공을 일시에 이룬 까닭이고, 그 유풍(遺風)과 여운(余韻)이 여전히 후세에도 칭송되고 생각되는 까닭입니다.
지금 선생께서는 그렇지 않아서 천하의 선비에 대해서는 실로 막연하여 생각하지도 않고, 인재를 구하는 것은 또 혹 가까운 데서만 얻어 먼데 사람을 빠트린 것을 알지 못하고, 적은 것에 만족하여 많은 것은 잃는 것을 알지 못하며, 다 갖춘 사람을 구하다가 너무 상세하게 따져서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평상시의 한가한 때에 자임하는 것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천하의 선비를 대우하는 것이 이러할 뿐이라면, 열심히 힘쓰고, 마음 아파하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노인과 같은 어려운 사람에게 정성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이고 장구적인 계책은 되지 못합니다. 은덕과 위엄, 공로와 명예가 비록 어린이와 심부름꾼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진 사대부의 마음을 깨우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공을 이루지도 않았는데, 천하의 선비들이 먼저 교만한 음성과 안색으로 대할 것입니다. 갑자기 일을 당하여, 모아둔 인재가 대비하여 쓰기에 부족하게 되면, 이에 비로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인재를 널리 구하여 쓰고자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직 벼슬을 맡지도 않았는데 먼저 천하의 현자를 얻고자하면 어찌해야 마땅합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권력이 미친다면 그를 살펴서 천거하며, 예제(禮際)가 미치면 그를 친히 여기고 후하게 대접하며, 권력과 예제가 다 미치지 않으면 그를 칭찬하고 기리며, 또 칭찬하고 기리는 것도 할 수 없다면 그를 우러러 향하고 사모하면 됩니다. 이와같이 하였는데도 오히려 충분하지 않다면 또 그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에게서 구하여, 작은 나쁜 점이 있다고 하여 큰 좋은 점을 보지 못하면 안되고, 단점이 많다고 하여 하나의 장점을 버리면 안되니, 이와 같이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내가 들은 이문공의 말이 있습니다. 이문공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어떤 곳에 여자가 있는데 국색(國色)입니다’라고 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반드시 장차 자신의 힘을 다하여 그를 구하려 아끼는 것이 없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어떤 곳에 사람이 있는데 국사(國士)입니다’라고 하면, 천하의 사람 중에 한번이라도 가서 먼저 만나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덕을 좋아하는 것이 색을 좋아하는 것만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 천하의 중책을 맡으려는 사람은 진실로 이문공의 말을 돌이켜서 인재를 구한다면 또한 선비가 오지 않을 것을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與劉共父
熹前幅所党訪間人材事 初若率然 既而思之 此最急務 然其意有未尽者 輒詳論之如左云 古之大臣以其一身任天下之重 非以其一耳目之聡明广手足之勤力為能周天下之事也 其所嬾以共正君心 同断国論 必有待於衆賢之助焉 是以君子将以其身任此責者 必答訶訪間 取之於無事之時 而參伍校量 用之於有事之日 蓋方其責之必加於己而未及也 無旦暮倉卒之須 則其観之得以久 無利害紛拏之惑 則其察之得以精 誠心素著 則其得之多 歳引月長 則其蓄之富 自重者無所嫌而敢進 則無幽隠之不尽 欲進者無所為而不来 則無巧偽之乱真
久且精 故有以知其短長之実而不差 多且富 故有以使其更迭為用而不掲 幽薩畢達 則譏言日聞而吾徳修 取舎不眩 則望実日隆而士心附 此古之君子所以成尊王庇民之功於一時 而其遺風余韻猶有稲思於後世者也 今之人則不然 其於天下之士固有漠然不以為意者矣 其求之者又或得之近而不知其遺於遠 足於少而不知其漏於多 求之備而不知其失於詳也 其平居暇日所以自任者雖重 而斫以待天下之士者不過如此 是以勤労惻但雖尽於鰥寡孤独之清 而未及乎本根長久之計 恩威功誉騅播於見童走卒之囗 而末諭乎賢士大夫之心 此蓋末及乎有為 而天下之士先以弛弛之費音顔色待之矣 至於臨事倉卒而所蓄之材不足以待用 乃始欲泛然求己所末知之賢而用之 不亦難哉
或曰 然則未当其任而欲先得天下之賢者 宜奈何? 日 権力所及則察之挙之 禮際所及則親之厚之 皆不及則称之誉之 又不及則郷之慕之 如是而猶以為未足也 又於其類而求之 不以小悪携大善 不以衆短棄一長 其如此而已 抑吾闥之李文公之言曰 有人告曰 某所有女 国色也 天下之人必将極其力而求之 無所愛也 有人告曰 某所有人 国士也 天下之人則不能一往而先焉 此豈非好徳不如好色者乎 鳴呼 欲任天下之重者誠反此而求之 則亦無患乎士之不至矣
한무구에게 답함(答韓無咎)
【해제】진래는 이 편지를 1174년(송 孝宗 淳熙 元年, 甲午), 주희 45세 이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주희는, 불교는 형이상(形而上)의 것에서도 얻은 것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또 화정(和靖)이, 이천어록(伊川語錄)이나 이천잡록(伊川雜錄)의 말은 신빙성이 없으므로 보지 않는 것이 좋으며, ‘以傳考經’과 같은 말은 이천선생이 한 말이 아니라고 한 것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유학(儒學)과 불학(佛學)의 차이가 나누고 합하는 데에 있다고 하신 것은 이미 받아보았습니다. 지난번에 본 소자유(蘇子由)와 장자소(張子韶)의 글에서는 모두 불학(佛學)이 형이상(形而上)의 것에서는 얻은 것이 있지만 세상을 다스리지는 못한다고 해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들이 어찌 천명(天命)의 성(性)을 알 것이며, 그 가운데 서(敍)․질(秩)․명(命)․토(討)가 이미 찬연하게 구비되어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저들이 나누는 이유는 또한 진실로 여기에서 얻은 것이 없어서일 뿐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화정(和靖)의 두 글은 예전에 보았는데, 그 전(伝)을 엄격하게 살피고 의심하는 뜻은 옳지만, 마침내 배우는 사람을 금지하고 막아서 다시 보지 못하게까지 하고자 하는 것은 지나친 듯 합니다. (이천伊川이) 춘추는 하시(夏時)를 바꾸어 썼다고 한 것을 이런 말이 없다고 하고, ‘전(伝)으로 살피고 경(経)으로 단정한다’란 말을 이치에 어긋난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아마도 자세하게 고찰하지 않은 듯 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들은 것을 다 듣지 못하였거나 한결같이 자신이 들은 것으로 개괄하고자 하는데서 온 실수일 것입니다. 춘추전은 이천이 스스로 저술한 것인데, “주(周)의 정월(正月)은 봄이 아니니 천시(天時)를 빌려 의(義)를 세웠을 뿐이다”와 같은 말이 있으니, 만약 정말로 하시(夏時)를 바꾸어 쓸 뜻이 없었다면 이 말은 또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더구나 서문에서 인용한 논어의 말은 더욱 명백하니 애초에 일찍이 이러한 뜻이 있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문인의 기록 중에 황오우(黄聱隅)에게 대답한 말이 있는데, 전(伝)으로 경(経)의 사적(事迹)을 고찰하고, 경(経)으로 전(伝)의 진위(真偽)를 가려야 한다고 한 것은 대개 두 사람의 글에 보입니다. 이것은 역시 소위 ‘전으로 살피고 경으로 단정한다’는 뜻과 같으니 어찌 두 사람의 기록이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모두 잘못되었겠습니까? 이것으로 두 구절을 미루어 보면 화정이 이른바 이천선생의 말이 아니라고 한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만 듣고 화정은 듣지 못한 것일 뿐인 듯 합니다. 지금 의심스러운 것과 믿을 만한 것을 나눌 수도 없고, 다시 생각하고 따질 수도 없는데, 갑자기 한 편의 말로 여러 사람이 전한 글을 다 없애는 것은, 아마도 그 말을 다 남겨두고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강명하여 그 진위와 득실을 살펴 옳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명도행장에서 “그 변석(辨析)이 자세하고 세밀하여 점점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학자가 전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이천의 뜻 또한 온전히 학자로 하여금 어록을 보도록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스스로 착안하여 보도록 한 것에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논어의 글 역시 70명 문인들이 기록을 모아 만든 책인데, 지금 공자의 자작이 아니라 하여 버리고 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어록을 없앨 수 없는 증거이니, 다시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答韓無咎
誨諭儒釈之異在乎分合之間 既聞命矣 頃見蘇子由張子韶書皆以仏学有得於形而上者而不可以治世 嘗窃笑之 是豈知天命之性而敍秩命討已粲然無所不具於其中乎 彼其所以分者 是亦未嘗真有得於斯耳 不審高明以為如何
和靖兩書昔嘗見之 其謹於伝疑之意則是 而遂欲禁絶学者 使不复観 則恐過矣 如以春秋改用夏時為無此説 以伝為按経為断為背於理 則疑其考之未精 或未尽聞他人所聞 而欲一以己所聞者概之之失也 春秋伝乃伊川所自著 其詞有曰 周正月非春也 仮天時以立義耳 若果無改用夏時之意 則此説复何謂乎 况序文所引論語之言尤為明白 不可謂初未嘗有此意也 又門人所記有答黄聱隅之語 謂以伝考経之事迹 以経別伝之真偽者 蓋見於両家之書 是亦猶所謂伝為案経為断之意 而豈二人所記不期而皆誤乎 推此兩条 則凡和静所謂非先生語者 恐特他人聞之而和靖亦未聞耳 今疑信未分而不复思繹 遽以一偏之説尽廃衆人所伝之書 似不若尽存其説而深思熟講 以考其真偽得失之為善也 况明道行状云 其辨析精微 稍見於世者 学者之所伝耳 観此則伊川之意亦非全不令学者看語錄 但在人自着眼看耳 如論語之書 亦是七十子之門人纂錄成書 今未有以為非孔子自作而棄不読者 此皆語錄不可廃之験 幸更深察之 如何如何
예국기(엽)에게 보냄 與芮國器(燁)
【해제】1169년(宋 孝宗 乾道5년 己丑), 주희 40세 때의 편지이다. 당시의 학교 제도는 경은 가벼이 여기고 문자의 재주에만 힘쓰므로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순화시키며, 인재를 육성하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고, 당시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있던 예국기가 학교제도를 개혁한 것을 칭송하고 있다.
학교의 제도를 새롭게 하셔서 많은 선비들이 감화되었다고 하니, 저의 바람에도 매우 들어맞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의 제도는 근자에 숭녕․대관 년간에 생겼는데, 오로지 매달 보는 시험[月書]과 계절 마다 보는 시험[季攷]만으로 승진과 탈락을 결정하여,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아주 작은 일에서 득실을 계산하게 만듭니다. 근세의 습속은 또 오로지 문자의 신기함만을 서로 높이는 데만 힘쓸 뿐, 다시는 경(經)의 본래 의미에 근거를 두지도 않습니다. 이 때문에 배우는 사람들은 화려한 것만 더욱 애쓰고, 근원을 탐색하고 명예와 예법에 힘쓸 뜻이 없습니다. 대개 그 심술(心術)을 파괴하는 이유가 한 둘이 아니기 때문에, 선왕(先王)들이 인륜(人倫)을 밝히고 풍속을 순화시키며, 인재를 육성하려는 뜻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직 원우(元祐) 년간에 이천(伊川) 정부자(程夫子)께서 조정에 계실 때 학교의 제도를 고쳤는데, 다만 그 폐단을 깊이 개혁하는 데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모두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서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그 글들이 구비되어 있으니, 혹시 뒷날의 군자가 반드시 능히 그것을 들어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여기에 조금이라도 뜻을 더하기를 바라니, 그렇다면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다행한 일입니다. 또 소(蘇)씨의 학술은 바르지 않아서, 그 음흉하고 간사하며 업신여기는 습속이 사람의 마음에 깊이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 그 해를 크게 깨달았으니, 또한 그것을 물리쳐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與芮國器(燁)
窃聞学政一新 多士風動 深副区区之望 但今日学制近出崇観 専以月書季攷為陞朏 使学者層層然較計得失於毫釐間 而近歳之俗又専務以文字新奇相高 不复根拠経之本義 以故学者益 騖於華靡 無复探索根原 敦励名検之志 大抵所以破壊其心術者不一而足 蓋先王所以明倫善俗 成就人材之意掃地尽矣 惟元祐間伊川程夫子在朝 与修学制 独有意乎深革其弊 而当時咸謂之迂闊 無所施行 今其書具在 意者後之君子必有能挙而行之 区区願執事少加意焉 則学者之幸也 又蘇氏学衒不正 其験譎慢易之習人人心深 今乃大覚其害 亦望有以抑之 使厳於正 允所幸願
예국기에게 보냄 與芮國器
【해제】역시 1169년(宋 孝宗 乾道5년 己丑)의 편지이다. 일을 행하는 것은 옳고 그름으로 결정해야 하고, 쉽고 어려움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또 뒷부분에서는 소식의 문장이 학자들에게 깊은 해를 끼칠 것이므로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지난 번에 망녕되게도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렸는데,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서 그 말들을 반복해서 살펴보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건데 일찍이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날에도 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거꾸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란 또한 이치의 소재가 어디인지를 살피는 것일 뿐이니, 이치가 마땅히 시행해야 하면, 그것을 시행하기가 쉽거나 어렵다고 해서 시행하거나 말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전력을 기울여 그것을 했는데도 불행히 참으로 시행할 수 없는 경우에 부닥친 연후에 그만둔다면 내 마음에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소(蘇)씨의 학문은 웅장하고 깊고 민첩하고 미묘한 문장으로 교활하고 거짓되며 종잡을 수 없이 변하는 습속을 부채질 합니다. 때문에 그 해독을 입은 것이 피부에 스미고, 골수에까지 사무쳐도 스스로 알지를 못합니다. 오늘날 마땅히 발본색원해서 배우는 사람들이 듣는 것을 전일하게 하면 광란함을 막아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바야흐로 막으려 하면서 또 그의 장점을 취하려는 뜻이 있다면, 아마도 배우는 사람들은 취사선택의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알지 못할 것이고, 또 장차 소씨와 같이 동화되어 스스로 바른 학문으로 돌아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마땅히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與芮國器
昨者妄以鄙見薦聞 伏蒙垂諭 反复其説 幸甚幸甚 然熹窃以為末嘗行之 不可逆料今日之不可行 且事亦顧理之所在如何耳 理在当行 不以行之難易為作輟也 尽心掲力而為之 不幸而至於真不可行 然後已焉 則亦無所憾於吾心矣
蘇氏之学以雄深敏妙之文煽其傾危変幻之習 以故被其毒者淪肌浹髄而不自知 今日正当抜本塞源 以一学者之聴 庶乎其可以障狂欄而東之 若方且懲之而又遮有取其所長之意 窃恐学者未知所択 一取一捨之間 又将与之倶化而無以自還 是則執事者之所宜憂也
정경망에게 답함 答鄭景望
【해제】1169년(宋 孝宗 乾道5년 己丑), 주희 40세 때의 편지로 정경망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이다. 정경망의 이름은 백웅(伯態)인데, 영가(永嘉) 사람으로 위령태수(違寧太守)를 지냈다. 공수는 원우년간의 신구법당간의 싸움에서 범충선공의 행위를 옳다고 평가했는데, 주희는 거기에 반박하고 있다. 즉 자신이 화를 면할 방도를 미리 마련한 범충선의 행위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것이라는 말이다. <우별본(又別本)>에서는 하숙경(何叔京)이 전세(田稅)를 고르게 하고자 한 일을 언급하고 있다. 진래는 주자서신편년고증에서 이 별본을 제1서의 별본이라고 하면서도 「답정경망」二로 따로 구분해놓고 있다. <우별본>의 중간 부분이 본편의 뒷부분과 일치한다.
공수(龔帥)가 건양을 지나면서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는데 만나지는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오늘 이교수가 찾아와 말하기를, ‘일찍이 공수와 잠시 만나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의 말이 모두 충후한 어른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아직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범충선(范忠宣)이 채신주(蔡新州)와 원우(元祐)년간에 귀양간 사람들을 구제한 것을 논하여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한 것이 그렇습니다. 저도 일찍이 이것을 논하였는데, 원우의 여러 현자들이 채확(蔡確)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근심하여 말로 배척하려 한 것은 진실로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범공이 미리 스스로를 보전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또 자신을 위하여 사사로운 행위를 했다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모두 죄인을 토벌하는 뜻이 아닙니다. 또 범충선공이, 제공들이 갑자기 ‘너에게 되돌아간다’는 말을 소홀히 하고, 반드시 되돌아온다[好還]는 경계를 어기고 스스로 화와 패배를 자초했다고 한데까지 이르면, 그것은 더욱 올바른 이치가 아닙니다. 만일 후세에 군주와 어버이가 무례한 꼴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도 팔짱을 끼고 좌시하며 끝내 쫓아내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 말 때문일 것입니다. 또 순(舜)이 사흉족을 내치셨는데, 고요(皐陶)가 또한 ‘너에게 되돌아간다’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마음으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모든 것이 사사롭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소자문(邵子文)이 명도의 소견이 충선의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아마 한갓 시행된 것이 서로 비슷한 것만을 보고, 동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티끌만한 사이라도 천리와 인욕의 차이는 아울러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명성을 좋아하는 것을 깊이 경계하신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편파적으로 이러한 의논을 고집한다면 아마도 방정하고 굳은 절조가 무너질 것이니, 그 폐단은 명성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선성(先聖)들은 말하기를 “군자는 죽을 때까지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표리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이것이 비로 성인의 말이 되는 까닭입니다. 학자들이 여기에서 마땅히 완심한다면, 잊어버리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 사이에 천리가 뛰어나게 밝을 것이요, 사사물물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또 지난번에 만나 가르침을 받았을 때, 요순시절에는 한결같이 가벼운 형을 썼다고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의심나는 것을 여쭈었는데, 바빠서 그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근래에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니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가 말한 “황제의 덕이 허물이 없으시니~ [帝德罔愆]” 이하의 한 구절은 곧 성인(聖人)의 마음의 함양과 교화가 발생하는 것이니, 참으로 천지와 덕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物)이 혹시 스스로 이치를 거슬러 하늘의 벌을 범하면, 대저 경중(輕重)과 취사(取捨)의 사이에 본래 결코 바꿀 수 없는 이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고, 그때 고의로 저지른 일에 형벌을 내리는 것은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며, 죄가 의심될 때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은 원칙이 없는 일시적인 관용이 아니고, 공의 의심될 때 무겁게 상을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天地)와 사시(四時)의 운행에는 춥고 쌀쌀함이 항상 그 반을 차지하지만, 함양하고 발생하는 마음은 처음부터 그 사이에 유행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을 적셔서 스스로 유사(有司)를 범하지 않는 까닭이니, 이미 범하였는데도 함부로 놓아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별본(別本)
21일을 순행하는 길일로 잡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승의 가르침은 아직 일을 시행하는데까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대개 도적질을 당한 나머지이고, 땅은 넓은데 사람은 드무니, 주현이 옛날의 1년간 회계에서 거두어들인 것으로 오늘날 현존하는 호구에 세액을 나누면, 백성의 힘으로는 본래 감당할 수 없습니다. 훗날에 다시 황전(荒田)의 산출을 현재의 호구에 고르게 나누어 주었으니, 이로 인하여 유리하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공사(公私)가 모두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지난번에 만나서 요순시절에는 한결같이 가벼운 형을 썼다는 가르침을 받았는데, 당시는 일찍이 의심나는 것을 여쭈었는데 바빠서 그 일을 궁구하지 못했습니다. 근래에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니 또한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가 말한 “황제의 덕이 허물이 없으시니~ [帝德罔愆]” 이하의 한 구절은 곧 성인(聖人)의 마음의 함양과 교화가 발생하는 것이니 참으로 천지와 덕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혹시 스스로 이치를 거슬러 하늘의 벌을 범하면 대저 경중과 취사의 사이에 본래 결코 바꿀 수 없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때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고, 그때 고의로 저지른 일에 형벌을 내리는 것은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며, 죄가 의심될 때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은 원칙이 없는 일시적인 관용이 아니고, 공의 의심될 때 무겁게 상을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와 사의의 운행에는 춥고 쌀쌀함이 항상 그 반을 차지하지만 함양이 발생하는 마음은 처음부터 그 사이에 유행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을 적셔서 스스로 유사(有司)를 범하지 않는 까닭이니, 이미 법을 위반했는데도 다시 함부로 놓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이미 백성의 악을 그치게 할 수 없는데도, 또 가벼운 형벌을 내려 악행을 유도하여 남에게 마음대로 흉포함을 부리면서 거리낌이 없게 하면, 난폭함을 당하는 사람이 스스로 원한을 씻을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간사한 백성들이 유사를 범하는 일이 장차 날로 많아질 것이니, (무조건 형을 가볍게 하는 것은) 또한 성인이 바로잡고 도와서 백성으로 하여금 선으로 옯겨 죄를 멀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答鄭景望
龔帥過建陽 遣人相聞 不及一見為恨 今日季教授見訪 云嘗小款 道其語皆出於忠厚長者 然在愚意 尚未有深解処 如論范忠宣救察新州及元祐流人 以為至当之挙 熹嘗窃論此矣 以為元祐諸賢憂確之不可制 欲以口語擠之 固為末当 而范公乃欲預為自全之計 是亦未免於自私 皆非天討有罪之意也 至其論諸公忽反爾之言 違好還之戒 自取禍敗 尤非正理 使後世見無礼於君親者拱手坐視而不敢逐 則必此言之為也 且舜流四凶族 為阜陶者亦殊不念反爾之戒 何耶 推此心以往 恐無適而非私者 邵子文以為明道所見与忠宣合 正恐徒見所施之相似 而未見所発之不同 蓋毫釐之間 天理人欲之差有不可同年而語者矣
又聞深以好名為戒 此固然矣 然偏持此論 将恐廉隅毀頓 其弊有甚於好名 故先聖云君子疾没世而名不称焉 而又曰君子求諸已 詳味此言 不偏不倚 表裏該備 此其所以為聖人之言歟 学者要当於此玩心 則勿忘勿助之間 天理卓然 事事物物無非至当矣
熹又記向蒙面誨尭舜之世一用軽刑 当時嘗以所疑為請 匆匆不及究其説 近熟思之 有不可不論者 但観臯陶所言帝徳岡愆以下一節 便是聖人之心涵育発生 真与天地同徳 而物或自逆于理以干夫誅 則夫軽重取舎之間 自有決然不易之理 其宥過非私恩 其刑故非私怒 罪疑而経非姑息 功疑而重非過予 如天地四時之運 寒涼粛殺常居其半 而涵養発生之心未始不流行乎其間 此所以好生之徳洽于民心而自不犯于有司 非既犯而縦舎之謂也 不審高明以為如何
(又別本)
聞二十一曰旌旆定行 何丞之諭 已不及事矣 然渠所言大概謂盗賊之余 土曠人稀 州懸以昔日歳計之額取辨今日見存之戸 民力素已不堪 後来复以荒田之産均之見戸 由此流移愈多 公私愈困耳 向蒙面誨尭舜之世一用軽刑 当時嘗以所疑為請 匆匆不及究其説 近熟思之 亦有不可不論者 但観臯陶所言帝徳罔愆以下一節 便見聖人之心涵育発生 真与天地同徳 而物或自逆于理以干夫誅 則夫軽重取舎之間 亦自有決然不易之理 其宥過非私恩 其刑故非私怒 罪疑而軽非姑息 功疑而重非過予 如天地四時之運 寒涼粛殺常居其半 而涵育発生之心未始不流行乎其間 此所以好生之徳洽于民心而自不犯于有司 非既抵冒而复縦舎之也 夫既不能止民之悪 而又為軽刑以誘之 使得以肆其凶暴於人而無所忌 則不惟彼見暴者無以自伸之為冤 而姦民之犯于有司者且将曰以益衆 亦非聖人匡直輔翼 使民遷善遠罪之意也
정경망에게 답함 答鄭景望
【해제】1169년(宋 孝宗 乾道5년 己丑), 주희 40세 때의 편지로 정경망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이다. 제1서에서 요순시대의 형벌에 관한 일을 언급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이어서 고대의 형벌에 관해서 논의하고 있다.
서경의 「우서(虞書)」에서 형벌을 논한 것이 가장 상세하지만, 「순전(舜典)」의 기록은 더욱 세밀합니다. 거기서 ‘형벌로 보여준다[象以典刑]’고 했는데, 상(象)은 하늘이 상(象)을 드리워서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전(典)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사람에게 변하지 않는 형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묵(墨)․의(劓)․비(剕)․궁(宮)․대벽(大辟)은 다섯 가지 바른 형벌이니, 매우 악한 사람,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고, 담을 뚫거나 넘어 도둑질하고, 음란하고 방탕하여, 무릇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유형으로 다섯 가지 형벌을 용서한다[流宥五刑]’는 것은, 유(流)․방(放)․찬(竄)․극(殛)과 같은 종류로, 죄가 조금 가벼운 자를 대하는 것이니, 비록 오형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정상이 불쌍히 여길만한 자와, 법이 의심스럽고, 귀한 사람과 친한 자, 공로가 있어 형벌을 가할 수 없는 자입니다. 사흉(四凶)이 바로 이 법에 들어맞습니다. ‘채찍은 관부의 형벌로 한다[鞭作官刑]’는 것과 ‘회초리는 학교의 형벌로 한다[樸作教刑]’고 하였으니, 관부와 학교의 형벌은 죄가 가벼운 자를 대하는 것입니다. ‘금으로 속죄하는 형벌을 만들었다[金作贖刑]’고 한 것은 죄가 매우 가벼워서 비록 채찍과 회초리의 형벌에 들어가지만, 정상과 법에 오히려 의논할 만한 것이 있는 자입니다. 아마도 후세에 비로소 오형을 면제받는 법이 생긴 것은 성인(聖人)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 다섯 구절은 무거운 것으로부터 가벼운 것이 이르기까지 각기 조리가 있으니, 법의 바른 것입니다. ‘모르고 지은 죄와 불행하여 지은 죄는 풀어준다[眚災肆赦]’고 하였는데, 생(眚)은 과오를 말하고, 재(災)는 불행을 말합니다. 만약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마땅히 면제받아야할 형벌에 들어가면, 또한 금(金)으로도 벌하지 않고 바로 사면합니다. 이 한 구절은 오직 가벼운 형벌을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춘추에서는 모르고 지은 큰 죄도 사면한다고 했는데, 과오가 커서 전형(典刑)에 들어가는 것 역시 사면한다는 것이니, 형(刑)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서에 또 ‘과오를 용서하되 큰 것이 없다[宥過無大]’고 한 것은 전형에 들어가는 큰 과오라도 다만 유형의 법을 써서 용서할 뿐이라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믿는 것이 있어 재범(再犯)하는 자는 죽이는 형벌을 쓴다[怙終賊刑]’고 했는데, 호(怙)는 믿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하고, 종(終)은 재범을 말합니다. 만약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용서할 법에 들어가더라도 또한 유형을 보내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이 두 구절은 혹은 무거운 것으로부터 가벼운 것에 나아가고, 혹은 가벼운 것으로부터 무거운 것에 나아가니, 지금 법령에 있는 명례(名例)와 같은 것이고, 또 법을 쓰는 권형(権衡)이니, 이른바 법 외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성인이 법을 세우고 형벌을 제정한 본말은 이 일곱 마디에서 대략 다 하였습니다. 비록 그 경중과 취사, 양으로 펴고 음으로 참혹하게 함[陽舒陰惨]이 같지 않지만 “공경하고 공경하여 형벌을 신중히 한다”는 뜻은 비로소 그 사이에서 행해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대개 그 경중은 털끝만한 차이에 각각 마땅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형벌의 바꿀 수 없는 정해진 이치이며, 또 공경하고 신중한 뜻이 그 사이에 행해지니, 성인(聖人)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본심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한결같이 가볍게만 할 뿐이겠습니까?
또 순이 고요(皐陶)에게 명한 말로 살펴보면 사관(士官)이 관장하는 것은 다만 상형(象刑)․유형(流刑) 두 가지 법일 뿐입니다. 채찍과 회초리 이하는 관부와 학교에서 일에 따라 시행하고 관리에게 다스리도록 하지 않는 것이 일의 마땅함입니다. “밝게 살펴야 백성들이 믿는다[惟明克允]”고 하였으니 혹은 형벌을 내리고 혹은 용서하는 것 역시 그 마땅함을 생각하여 형벌을 더하지 않는 것이지, 또 어찌 한결같이 용서하고 형벌을 내리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요순의 시대에는 용서만 있고 형벌은 없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람을 죽인 자도 죽지 않고, 사람을 상하게 한 자도 형벌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인의 마음이 매우 악한 자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통한 죄를 입고 마음에 슬픔을 품은 양민에게 잔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믿는 것이 있어 재범하는 자는 죽이고, 일부러 죄를 범한 자를 형벌하는 것은 정해진 형벌보다 작게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모두 공언이 되어 후세를 그릇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 또한 명백합니다.
대저 형벌이 비록 선왕이 믿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형별로 교화를 돕고, 백성이 잘못하는 것을 막으니, 이른바 살과 피부를 상하게 하여 악을 징벌하는 것 또한 ‘이미 마음과 생각을 다하고 차마 할 수 없는 정사로 계속’하는 것의 일단입니다. 이제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법은 이미 담을 뚫고 넘어 훔치며, 음란하고 방탕한 간악함을 멈추게 하기에 부족하지만, 지나치게 무겁게 하는 것은 또 죽으면 안되는 사람이 죽을 수가 있으니, 음란[彊暴]하고 뇌물로 배를 채우는[贓満] 종류와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진군(陳群)의 견해를 채택하여 한결같이 궁형(宮刑)이나 비(剕)형으로 죄를 다스리면, 비록 그 지체를 손상시키더라도 실로 그 생명은 온전히 하는 것이고, 또 그 어지러움의 근본을 끊어 후세에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우러러서는 선왕의 뜻에 맞고, 아래로는 세상의 마땅함에 적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군자가 뜻을 얻어 일을 하게 되면, 기르는 방법과 교화하는 기술에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힘닫는 대로 열심히 해야 하고, 옛 관습을 그대로 따라 구차하게 하면 안됩니다. 바로 기르지 않고 교화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면 눈앞에서 쟁탈하고 서로 죽이는 것을 익히 보게 될 것입니다.
答鄭景望
虞書論刑最詳 而舜典所記尢密 其曰象以典刑者 象如夫之垂象以示人 而典者常也 示人以常刑 所謂墨創弸宮大辟 五刑之正也 所以待夫元悪大惑殺人傷人穿箭淫放 凡罪之不可宥者也 日流宥五刑者 流放続種之類 所以待夫罪之稍軽 雖人於五刑而情可矜法可疑与夫覩貴動労而不可加以刑者也 四凶正合此法 曰鞭作官刑樸作教刑者 官府学校之刑 以待夫罪之軽者也 曰金作贖刑 罪之極軽 雖人於鞭撲之刑 而情法猶有可議者也 疑後世始有臍五刑法 非聖人意也 此五句者 従重及軽 各有条理 法之正也 日眚災肆赦者 管謂過俣 災謂不幸 若人有如此而人於当賎之刑 則亦不罰其金而直赦之也 此一倏専為軽刑設 春秋肆大管 則過俣之大人于典刑者亦肆之矣 所以為失刑也 書又曰: 宥過無大 明過之大人於典刑者 特用流法以宥之耳 日怙終賊刑者 怙謂有恃 終謂再犯 若人有如此而人于当宥之法 則亦不宥以流而必刑之也 此二句者 或由重而即軽 或由軽而人重 猶今律之有名例 又用法之権衡 所謂法外意也 聖人立法制刑之本末 此七言者大略尽之矣 雖其輊重取舎陽舒陰惨之不同 然欽哉欽哉 惟刑之恤之意 則末始不行乎其間也 蓋其軽重毫釐之間各有攸当者 乃夫討不易之定理 而欽恤之意行乎其間 則可以見聖人好生之本心矣 夫豈一於軽而已哉
又以舜命阜陶之諸考之 士官所掌 惟象流二法而已 鞭撲以下 官府学校随事施行 不領於士官 事之宜也 其日惟明克允 則或刑或宥 亦惟其当而無以加矣 又豈一於宥而無刑哉 今必日尭舜之世有宥而無刑 則是殺人者不死而傷人者不刑也 是聖人之心不忍於元悪大惑 而反忍於銜寃胞痛之良民也 是所謂沽終賊刑 刑故無小者 皆為空言以俣後世也 其必不然也亦明矣 夫刑雖非先王所恃以為洽 然以刑弼教 禁民為非 則所謂傷肌膚以懲悪者 亦既竭心思而継之以不忍人之政之一端也 今徒流之法既不足以止穿簽浮放之姦 而其過於重者則又有不当死而死 如彊暴賎満之類者 苟釆陳群之議 一以宮剕之辟当之 則雖残其支体 而貸全其躯命 且絶其為乱之本 而使後無以肆焉 豈不仰合先王之意而下通当世之宜哉 况君子得志而有為 則養之之具教之之衍亦必随力之所至而汲汲焉 固不応因循苟且 直以不養不教為当然 而熟視其争奪相殺於前也
정경망에게 답함 答鄭景望
【해제】1169년(宋 孝宗 乾道5년 己丑), 주희 40세 때의 편지로 정경망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이다. 앞부분에서는 백성들을 생각해 순행의 날짜를 미루지 말 것을 당부하고, 뒷부분에서는 정명도가 과거에서 쓴 글인 정문(程文)의 탁월함을 논하고 있다.
처음에는 순행을 할 길일을 택하여 반드시 기간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보내주신 글은 오히려 이것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멀리 있는 백성은 머리를 기울여 행차하시는 거마(車馬)의 소리를 듣고 있는지가 오래인데, 행차할 날짜가 자주 미루어지니 어찌 실망하지 않겠으며, 또 약속을 받들고 기회를 기다리는 하급 관리들이 또한 장차 이로 인하여 해이해지고 공경하지 않게 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데 선생께서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참람되게 이런 말까지 하였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명도(明道)의 정문(程文)이 분명 정집(正集)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전례를 살펴보면 참으로 이러한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명도선생께서는 과거에 응할 때 이미 스스로 도(道)를 들으셨으니, 지금 그 글을 읽어보면 명도선생이 논한 것이 바른 이치가 아닌 것이 없어, 지금 시류에 아부하고 시속을 따르는 거자(挙子)들의 글은 부끄러워 전할 수가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증남풍이 왕심보의 글에 서문을 썼는데, 한 마디의 말, 반줄의 글도 대의와 관련되어 있지 않지만 모두 남겨두고 없애지 않은 것은, 심보의 세세한 행위가 모두 전할 만한 것임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명도선생께서는 글로 영달하고자 하지 않으셨지만, 이 정문(程文)을 보면 곧 그 경륜(経綸)의 업(業)이 이미 이 때에 갖추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비록 문채가 곱지 않더라도 뚜렷하게 모두 행할만한 실속이 있고, 바른 학문으로 말하였으니, 일찍이 한마디의 구차함도 없습니다. 그것이 후학을 경계하고 깨우쳐주는 까닭이니, 또한 심오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제 생각은 단지 예전의 차례를 따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答鄭景望
初謂按行涓吉 必不渝期 今所賜字 殊未及此 何耶 遠民傾首以聴車馬之音久矣 行期屢却 無乃使之失望 而下吏之奉釣束聴期会者 将亦因是解弛而不虔乎 伏惟執事者試深盧之 僭易及此 皇懼之至 示諭明道程文不必見於正集 考求前此固多如此 然先生応挙時已自閠道 今臍其文 所論無非正理 非如今世挙子阿時徇俗之文 乃有愧而不可伝也 曾南豊序王深父之文 以為片言半簡 非大義所緊 皆存而不去 所以明深父之於細行皆可伝也 况先生非欲以文顕者 而即此程文便可見其経綸之業已具於此時 雖文釆不騒 而卓然皆有可行之貢 正学以言 末嘗有一解之荀 其所以警倍後学 亦不為不燦矣 愚意只欲仍旧次第 不蕃台意以為如何
정경망에게 답함 答鄭景望
【해제】1174년(宋 孝宗 淳熙 元年, 甲午), 주자 45세 때의 편지이다. 주희는 통전회요(通典會要)에 실려 있는 것과 당(唐)․송(宋) 여러 학자들의 설을 모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20권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정경망에게 보내며 편차를 논하고 조언을 구하는 내용이다.
가제례 세 권을 아울러 올리는데, 현재의 판본과 권 중에 더하여 집어넣을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더하여 넣을 수가 있다면 맹선(孟詵)과 서윤(徐潤) 두 사람은 마땅히 가욱(賈頊)의 가천의(家薦儀) 뒤에 놓아야 하니 맹선은 7편이 되고 서윤은 8편이 되어, 이후의 편수는 차례롤 밀려서 정화오례는 11편이 되고, 이어서 손일용은 12편이 되며, 두공의 사시제향의는 13편이 되고 또 이후는 차례로 밀려서 범씨의 제의는 19편이 됩니다. 또 후서(後序) 중에서 16은 19로 바꾸고 따라서 ‘맹선, 서윤, 손일용’ 일곱 글자는 없애야 합니다. 이 판본은 마땅히 따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의 서문은 남겨두고 별도로 몇 마디를 지어서 그 뒤에 덧붙여 더욱 상세하고 실속있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깨우쳐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필사하고 교정하는 것은 정밀하게 하여 오류가 없게 한 다음에 각판을 하면, 장래에 다시 비용과 힘을 들여 좋게 고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판각하도록 맡길 정본을 써서 정하여 아울러 보내 드릴 것이니, 혹 아직 판각하지 않았을 때, 여러 사람이 자세히 살피고 올리면 더 편할 것입니다.
答鄭景望
家祭体三策并上 不知可補人見版本巻中否 若可添人 即孟銑徐潤両家当在費項家薦儀之後 孟為第七 徐為第人 而逓価以後篇敷 至政和五体為第十一 而継以孫日用為第十二 乃以杜公四時祭享儀為第十三 而逓価以後 至范氏祭儀為第十九 又於後序中改十有六為十有九 仍珊去孟銑徐潤孫日用七字 此版須別換 不然 即存旧序而別作数語附見其後 尢為詳実 不蕃尊意以為如何 更俟誨諭也 但写校須今精審無謨 然後刻版 免致将来更改費力為佳 或未刻間 且辯写定上版真本寄示 容与諸生詳勘納上尢便也
우연지에게 답함 答尤延之
【해제】1186년(송 효종 순희13, 丙午), 주희 57세 때의 편지로 우연지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이다. 진래는 이 편지의 “진동보에게 편지를 받았다”는 말과, 주희가 진동보에게 보낸 11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편지가 진동보에게 편지를 보낸 조금 후인 병오년 가을 겨울 사이에 보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주희는 당시 통감강목을 편찬하다가 손을 놓고 있었는데, 다시 손대지 못할까를 걱정하며, 역사에서의 인물에 대한 평가 문제를 엄격히 할 것을 양웅(揚雄)과 순욱(荀彧)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다. 주희는 철저히 의리에 근본한 평가를 주장하고 있다.
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식량이나 축내면서 감히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간여하거나 들으려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호식(虎食)을 당할까 하는 걱정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늙고 병들어 피로하고 고달프니, 비록 산림 가운데 있어도 또한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을 찾거나 명승지를 찾아 유람하는 즐거움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다만 때때로 한 두 명의 학자들과 적막한 물가에서 서로 종유하면서 옛사람들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론하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에 이르면 불현듯 다시 기뻐하면서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도학의 법을 범하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일년여 전부터 눈이 어두워서 오래도록 책을 읽지 못합니다. 경설(經說)을 뛰엄뛰엄 보노라면 소루함이 자못 많으니, 형편에 따라 개정함을 면치 못할 것이지만 예전의 것과 비교해서는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통감강목에 다시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내 천고의 한이 될까 두렵습니다. 양웅(揚雄)과 순욱(荀彧) 두 사람의 일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서 사마광의 과거의 사례를 살펴보니 왕망(王莽)의 신하에 대해서는 태사(太師) 왕순(王舜)의 사례와 같이 모두 ‘죽었다[死]’고 썼는데, 오직 양웅에 대해서는 그가 왕망의 왕조에서 관직을 받은 것을 숨기고 ‘졸했다[卒]’고 썼습니다. 아마도 곡필의 혐의가 있는 듯하니 본래의 사례를 따라서 “왕망의 대부 양웅이 죽었다[死]”라고 써서 죽음이 두려워 절개를 잃는 부류들을 경계하는 것으로 삼고, 처음부터 사마광이 직필했던 바른 사례를 고치지 않아야 합니다. 순욱은 한(漢)왕조의 시중광록대부(侍中光祿大夫)로 승상군사(丞相軍事)를 겸하였는데 그의 죽음은 자살이었으니, 다만 사실에 의거해서 “어떤 관직에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자살했다”라고 기록하여, 조조(曹操)가 손권(孫權)을 공격하여 유수(濡須) 아래에 이른 일에 연계시키고, 억지로 순욱을 한나라의 신하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직을 모두 기록하면 또한 그가 실은 한나라 천자의 가까운 신하로서 적에게 붙은 불충을 저지른 죄를 알게 될 것이니, 그가 한나라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점들은 당시에 매우 분별하여 처리한 부분인데, 결국 후세의 공론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호(胡)씨는 순욱에 대해 논하기를 “순욱이 조조의 모신이 되었는데, 천자를 위협하여 수도를 옮기고, 구석을 하사하도록 한 두가지 일은 모두 동소(董昭)가 먼저 발한 것이니, 순욱은 구석을 하사하는 의론은 조금 늦추려고 하여 다른 날을 기다려 스스로 발의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살하였으니, 유목지(劉穆之)의 경우와 같으며, 송재구(宋齊丘)가 남당(南唐)에서 한 것과도 매우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논의가 순욱의 정황을 잘 파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종(李淙)과 사곽(謝廓)에 대해서는 모두 대략 알고 있습니다. 이종은 이곳에서 현(縣)을 담당했는데 깊이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사곽은 매우 빼어난데 임백(任伯) 참정(參政)의 손자이니 그의 집안에는 고서를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다만 오중권(吳仲權) 역시 명성이 있고, 그의 문자를 보니 심히 맑고 경계하는 것이지만 재기(才氣)가 이와 같은 줄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낮은 직책에 있는 후생들 가운데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니, 비록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있지만, 그러나 또한 권면하고 나아가기를 장려할 것이지 가볍게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동보에게서 근래에 편지를 받았는데 대체적인 말은 지난번과 같으니 힘써 권면하여 조금씩이라도 거두어 물러나도록 했습니다. 만일 신뢰를 보이지 않는다면 뒷날의 후환은 오히려 오늘날보다 더 심한 지경에 이를 것이니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숙조(叔祖)인 봉사(奉使) 주변(朱弁)의 장례 치르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가엾은 마음이 듭니다. 이 일은 애초에 감히 청하지 못했던 것으로 특별히 이와 같이 은혜를 내려 주실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결정된 의론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숙조는 당시에 앞장서서 사신으로 가기를 청하여, 오랑캐의 수중에서 16년을 머물다가 마침내 절개를 온전히 보존한 채 돌아왔습니다. 그가 상소한 화전의 의론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또 오랑캐들이 일을 도모하려는 조짐이 있으면 진승상(秦丞相)을 거역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했습니다.오랑캐의 수중에 있을 때도 일찍이 「휘묘(徽廟)를 제사하는 글」을 지었는데, 혹 돌아와 전하는 사람이 있어 황제가 읽어보고 감동하시어 상을 내리시면서 깊이 아끼셨습니다. 그 글이 여기에 있으나 이번 인편이 적절치 않아서 감히 보내드리지 못합니다. 저는 문득 그분의 행적을 나열하여 선생께 부탁하고자하니, 다행히 묘지명을 하사받을 수 있다면 종족과 자손들이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숙조는 조경우(晁景迂)의 지우(知遇)를 받았는데 학문이 매우 박식하고 시재가 뛰어났습니다.
答尤延之
熹杜門窃食 不敢与聞外間一事 尚不能無虎食其外之憂 衰病疲薾 雖在山林 亦不能有尋幽選勝之樂 但時有一二学子相従於寂寞之浜 講論古人為己之学 至会心処 輒复欣然忘食 不自知道学之犯科也 年来目昏 不甚敢読書 経説閑看 疏漏頗多 不■随事改正 比旧又差勝矣
綱目不敢動着 恐遂為千古之恨 蒙教揚雄荀彧二事 按温公旧例 凡莽臣皆書死 如太師王舜之類 独於揚雄匿其所受奔朝官称而以卒書 似渉曲筆 不■却按本例書之曰莽大夫揚雄死 以為足以警夫畏死矢節之流 而初亦未改温公宜筆之正例也 荀彧却是漢侍中光祿大夫而参丞相軍事 其死乃是自殺 故但拠実書之曰某官某人自殺 而系於曹操撃孫権至濡須之下 非故以彧為漢臣也 然悉書其官 亦見其実漢天子近臣而附賊不忠之罪 非与其為漢臣也 此等処当時極費区処 不審竟得免於後世之公論否
胡氏論彧爲操謀臣 而劫遷九錫二事皆爲董昭先發 故欲少緩九錫之議 以俟他日徐自發之 其不遂而自殺 乃劉穆之之類 而宋齊丘於南唐事亦相似 此論網謂得彧之情 不審尊意以爲何如
李淙謝廓皆略識之 李在此作縣甚得民情 謝甚俊 卽任伯參政之孫 其家有古書者也 但吳仲權亦聞其名 見其文字甚淸警 未知材氣如此也 今日下位後生中尙不爲無人 雖眞僞相半 然亦且得勸勉獎就之 未敢輕有遺棄也 陳同父近得書 大言如昨 亦力勸之 今其稍就歛退 若未見信 卽後日之患猶或有甚於此者 甚可念也
叔祖奉使葬事 甚荷憐念 此事初未敢有請 不謂已蒙特達如此 不知今有定諭否 叔祖當日挺身請使 留虜中十六年 竟保全節而歸 以奏對論和不可專恃 且虜有可圖之釁忤秦丞相 遂廢以死 虜在虜中時 嘗有祭徽廟文 或傳以歸 乙覽感動 錫賚甚寵 其書皆在此 此便不的 不敢附呈 鄙意輒欲次其行事以請於左右 幸而幷賜之銘 則宗族子孫皆受不貲之惠矣 叔祖受知於晁景迂 學甚博 詩甚工也
우연지에게 답함 答尤延之
【해제】우연지에게 보내는 제 1서의 내용과 바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1186년(丙午) 말이나 1187(丁未)년 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양웅이 왕망을 섬긴 것은 임금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 길을 찾은 행적만으로도 죄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 춘추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웅의 일에 대해 가르침을 내려주셨으니 군자가 서(恕)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바로 그것은 왕순(王舜)의 무리가 왕망(王奔)을 섬긴 까닭과는 비록 다르지만 왕망을 섬긴 것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조순(超盾)과 허지(滸址)의 예를 보면 대개 왕망의 신하로 쓴 것은 만세토록 신하된 사람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는 것이고, 비록 신하로서 임금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길을 찾은 행적만 있어도, 또한 죽여 없앨 죄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춘추의 근엄한 법입니다. 만약 사마광이 이러한 사례를 바꾼다면 어디에 의거할지를 모르게 됩니다. 늦게 배워 우매한 제가 참으로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말이 이치에 맞지 않거든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答尤延之
垂諭揚雄事 足見君子以恕待物之心 区区鄙意正以其与王舜之徒所以事奔者雖異 而其為事奔則同 故窃取超盾滸址之例而概以莽臣書之 所以著万世臣子之戒 明雖無臣賊之心 但畏死貪生而有其迹 則亦不免於誅絶之罪 此正春秋謹厳之法 若温公之変例 則不知何所号依 晩学愚味 実有所不敢従也 不蕃尊意以為如何 如未中理 却望垂教也
임황중(률)에게 답함 答林黃中慄
【해제】1186년(송 효종 순희13, 丙午),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앞부분에서는 의례(儀禮)의 방실지제(房室之制)에 관해 논의하고, 뒷부분에서는 소옹의 선천도를 배척한 임황중에게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실호(室戸)의 설에 대해서는 여러 번 가르침을 받았는데 결국 깨닫지 못했습니다. 대개 말씀하신 것과 같다면, 실호는 방(房)의 서쪽에 있어서 실(室)에 들어가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방으로부터 해서 다음에 실로 가야 합니다. 예(禮)에 관한 책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사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극자(郤子)가 올라가는 것은 반드시 서쪽 계단으로부터 하였으니 방호가 비록 실호의 동쪽에 있다고 하더라도, 대개 경서(経書)에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 반드시 실호는 반드시 동쪽으로 나가야 한다는 증거가 될 수 없을 듯합니다. 저는 여기에 깊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으니, 다시 한 마디 말로 그 막힌 것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역도(易図)에서는 소(邵)씨의 선천설(先天説)을 심하게 꾸짖으셨는데, 옛날에도 일찍이 그 책을 보았지만 그 말하는 내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이미 그 단점을 배척하셨으니, 분명히 이미 그 속 내용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잘못을 공격할 몇 마디를 아울러 구하면 또 큰 다행이겠습니다.
答林黃中慄
室尸之説屢蒙指教 竟所末暁 蓋如所論 即室尸乃在房之西偏 而人室者先必由庚而後進至于室矣 歴考澄書 不見此曲折処 却子之登 必自西階 房尸離在室尸之東 蓋亦無所経見 恐末足以証室尸之必東出也 愚意於此燦所未解 更丐一言以発其蔽 辜甚幸甚 又見易図深誑邯肢先夫之説 旧亦嘗見其書 然未暁其所以為説者 高明既斥其短 必已洞見其底蘊矣 因来并乞敷語拮撃其鯵 又大幸也
임황중에게 답함 答林黃中
【해제】임황중에게 보내는 제2서로 1서와 같은 해에 보낸 것이다. 제1서를 이어 호실지제와 소옹의 선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앞 편지에서는 소옹의 「선천도」를 배격하는 임황중의 의견에 동의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선천설에 대해 무조건 비난만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보내주신 세세한 편지는 매우 상세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악장(楽章)은 분명 이미 알았는데, 가르침으로 인하여 다행히 일찍 보게 되었습니다. 구추(丘推)는 선발에 참여하여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직 실호(室戸)에 대한 가르침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개 알고 싶은 것은 이 호(戸)가 남향인지 서향인지 과연 어떻게 결정이 났는가하는 것입니다. 또 경전에서 참으로 의거할 것을 과연 어디에서 취했습니까? (선생이 어떤 사람을 따랐는지) 전수(伝授)의 유무(有無)를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소씨(邵氏)의 선천설(先天説)은 제가 그것을 살펴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가 드넓은 바다를 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바로 “알지도 못하고 지은 것”이라고 그것을 배척하였으니, 저와 선생의 도량은 크기가 다르니 같은 나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앞의 편지에서 그 우매함을 다 밝히지 못하고 잠시 그 의심나는 것을 조금 드러낸 까닭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소(邵)씨는 본래 역도(易道)를 발명했으나 역에 대해서는 발명한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역과 역(易)의 도(道)는 다름이 없고, 도가 이미 밝아지면 역이 책이 되는데, 괘(卦)와 효(爻)와 상수(象数)가 모두 그 가운데 있다는 것은, 논할 것 없이 자연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도는 분명한데 글은 명백하지 않으면, 이른바 도라는 것은 참된 도가 될 수 없을 듯합니다.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 문자는 허여하지만 실체는 허여하지 않는 것이라면, 저는 소씨의 천근하고 소략한 것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대개 한 그림 안에 태극(太極)․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가 차례로 나오는 것과 위치와 행렬은 안배를 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질서가 있습니다. 네 번 나누어 16이 되고, 다섯 번 나누어 32가 되며, 여섯 번 나누어 64가 되는 것에 이르면, 그것이 따라서 거듭하여지니, 또한 용의가 옮겨가지 않아도 앞의 세 번의 나뉨과 일찍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습니다. 따라서 세 양(陽)을 함께 쌓아 건(乾)으로 삼고, 세 음(陰)을 이어 겹쳐서 곤(坤)으로 삼으며, 그 다음에 뜻에 따라 서로 섞어서 여섯 개를 만듭니다. 또 먼저 8괘를 안에 그리고, 다시 8괘를 밖에 그려 돌아가며 서로 더한 다음에 64괘를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천리의 자연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이 조작한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 높고 깊으며 굉활하며, 정밀하고 미묘함은 또 제가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피지 않고 갑자기 “알지도 못하고 지은 것”이라고 비난하면, 제 생각에는 후일에 지금 선생의 일을 논하는 것이 지금 선생이 소씨를 논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하의 사람들이 그것을 안타까워하는데 스스로는 그 말의 참람함을 알지 못하시는 듯 합니다.
答林黃中
誨愉螻钁 備悉 樂章必已得之 因風幸早示及 丘推參選未還 尚未得閠室尸之誨 大抵所欲知者 此尸南郷西郷 果安所決 而経伝貢号果安所取 不論伝授之有無也 邵氏先夫之説 以鄙見窺之 如井蛙之議滄海 而高明直以不知而作斥之 則小大之不同量 有不可同年而語者 此熹之前書所以未敢軽效其愚 而姑少見其折疑也 示諭邵氏本以発明易道 而於易無所発明 熹則以為易之与道非有異也 易道既明 則易之為書 卦爻象敷皆在其中 不待論説而自然可睹 若曰道明而書不白 則所謂道者恐未得為道之真也 不審高明之意果如何 其或文予 而責不予 則蔦請以邵氏之残近疏略者言之
蓋一図之内 太極兩儀四象八卦生出次第位畳行列不待安排而粲然有序 以至於第四分而為十六 第五分而為三十二 第六分而為六十四 則其因而重之 亦不待用意推移而与前之三分焉者未嘗不賂合也 比之并累三陽以為乾 連畳三陰以為坤 然後以意交鑽而成六子 又先昼八卦於内 复昼八卦於外 以旋相加而後得為六十四卦者 其出於天理之自然与人為之造作蓋不同矣 况其高深閑闊精密微妙又有非熹之所能言者 今不之察 而遊以不知而作識之 熹恐後之議今猶今之叢昔 是以窃為門下惜之 而不自知其言之僭易也
임황중에게 답함 答林黃中
【해제】임황중에게 보내는 제3서로 역시 1186(丙午)년에 보낸 것이다. 향음주례에서 연주하는 음악에 대해 묻는 내용이다.
「향음주(郷飲酒)」의 의심나는 의미에 대해 가르침을 구합니다. 근래에 음악을 연주하는데 이남(二南)과 소아(小雅), 육생시(六笙詩)를 쓰지 않고, 남궁(南呂)․무사(無射) 양궁 10장을 쓴다고 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옛날의 향악(郷楽)이 이 음률을 쓰는 것을 본 것이 있어서 남은 소리를 베낀 것입니까? 아니면 고악(古楽)은 이미 없어져 계고(稽古)할 수가 없으니, 따로 이 음악[此楽]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특별히 이 음률[此律]을 써야할 그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또 연주하는 음악에는 반드시 가사가 있어야하고, 소리는 반드시 악보가 있어야하며, 음률의 장단은 반드시 정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몇 단락은 모두 알 수 없는 것이니, 상세한 가르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答林黃中
所扣郷飲洒疑義 近細考所奏樂有不用二南小雅六笙詩 而用南呂無射兩宮十章 不知何拠 豈有以見古之郷樂用此律而写其遺声邪 将古樂已亡 不可積考 而別制此樂也 然則特用此律 其旨安在 又所奏薬必有辞 馨必有譜 而律之短長必有定論 凡此敷端 皆所未諭 幸因風詳悉指教
곽충회에게 답함 與郭沖晦
【해제】1180년(宋 孝宗 淳熙7, 庚子), 주희가 남강(南康)의 지사로 있을 때인 51세에 쓴 편지이다. 자신이 편집하고 있는 책들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내용이다.
저는 궁벽한 고장에서 뒤늦게 태어나 망녕되게도 도에 뜻을 두어, 비록 요행히 스승과 벗들에게 얻어들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데는 힘을 쓰지 못하고 헛되이 세월만 보내며 조금씩 쇠퇴하여, 이제 보잘 것 없는 인생이 51세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보살피는 일에서는 볼만한 결과도 없고, 의지가 굳지도 못해서 가난 속에서의 절조를 굳게 지키지도 못합니다. 억지로 관직에 나가보기도 했지만, 예전의 학문은 더욱 황폐해져서, 사람들에게 시행하는 것은 더욱 어긋나서 합치되지도 못합니다. 대개 의지가 기(氣)를 통솔하지 못하고, 이치가 사사로움을 극복할 수 없는데, 한밤중에 생각해보니 마음 속이 슬프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선생께서는 인색하지 않으시니 장차 무엇으로 저를 깨우쳐주시겠습니까? 저는 공수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여러 책들을 편집했는데, 비록 각각 의거하는 바가 있지만, 감히 제 뜻대로 빼거나 더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것과 믿을만한 것이 달리 전하여지면 서로 어긋나는 곳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찍이 왕단명 어르신께서 선생이 분별한 여러 가지 일을 보여주는 것을 보았고, 바야흐로 또 다시 편지를 써서 왕단명 어르신께 질정하였고, 다시 한 두 가지의 증험을 구하고 별도로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하였는데, 왕공께서는 이미 빈객을 물리치셨습니다. 이후로 매번 선생의 문하에 한 번 나아가서 그 설을 끝마치라고 생각했지만,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찾아가 질문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행히 통성명을 하였고, 또 단신으로 남강까지 오셨는데, 문서도 찾을 수 없고, 지난번에 질문하려 했던 것을 다시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때에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려 별도로 소식을 전하기를 도모하겠지만, 너무 멀어 도달하기 어려울까 걱정입니다. 근래에 판각한 정(程)선생과 윤화정(尹和靖)의 두 첩문과 백록동(白鹿洞) 오현(五賢)의 두 기(記)를 각각 1부씩 보내드리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사이에 가르침을 주실 만한 것이 있으면 내버려두지 말고 가르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與郭沖晦
憙窮郷晩出 妄窃有志於道 雖幸有聞於師友 而行之不力 荏苒頽侵 今犬馬之年五十有一矣 修身斉家 未有可見之效 而志気不彊 不能固守貧賎之節 彊起従宦 旧学愈荒 施之於人 允齟齬而不合 大抵志不能帥気 理未能勝私 中夜以思 恒然内疚 高明不鄙 不知将何以教誨之 熹所拱而竢也 向来次輯諸書 雖亦各有拠依 不敢妄意損益 然疑信異伝 不無牴牾
嘗得汪丈端明示以執事所辨数事 方且复書質之汪丈 更求一二左験 別加是正 則汪公已捐賓客矣 自此毎念一扣門下 以畢其説 而相去絶遠 無従致問 今幸得通姓名 又以単車此来 無复文書可以検索 不复記向之所欲質問者
尚俟異時還家 別図寓信 但恐益遠難致耳 近刻程先生尹和靖二帖及白鹿五賢二記 各納一本 伏幸視至 其間恐有可因以垂教者 切望不棄
곽충회에게 보냄與郭沖晦
【해제】역의 천지대연(天地大衍)의 수와 시초(蓍草)를 세어서 괘(卦)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곽충회의 논리를 반박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뒷부분에서는 괘․효의 원리와 하도(河圖) 낙서(洛書)와 「서명」과 선(善)에 대해서 역시 곽충회의 말을 반박하고 있으며, 특히 「서명(西銘)」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역설에서 말씀하시기를 “수(数)라는 것은 책(策)의 으뜸이고, 책은 이미 정해진 수가 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수는 자연의 수이고, 책은 시초의 경수(茎数)라고 생각합니다. 예에서는 거북점은 복(卜)이고, 점대 점은 서(筮)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노양(老陽) 일효(一爻)는 서른여섯 개의 점대를 세어서 떼어 내었으므로 6효를 쌓으면 216 개의 점대를 얻을 뿐입니다.
또 “대연(大衍)의 수가 50인 것은 자연의 수이니, 모두 그 의미를 궁구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미 그것을 수라고 말했으면 반드시 궁구할 수 있는 이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기(奇)는 걸어놓은 하나이고, 늑(扐)은 좌우에서 둘씩 센 나머지이다. 좌우에서 둘씩 센 나머지를 얻어서 앞에다 두고 기(奇)를 거기에 끼운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 기(奇)라고 하는 것은 좌우에서 넷씩 센 나머지이고, 늑은 손가락 사이입니다. 왼손의 책(策)을 넷씩 세어 그 나머지를 무명지 사이에 끼우고, 오른손의 책을 넷씩 세어 그 나머지를 중지의 사이에 끼웁니다. 한번 건 사이에 무릇 두 번 손가락사이에 끼니, 5년 동안에 무릇 두 번의 윤달이 있는 상(象)입니다.
또 “다(多)가 셋이고 소(少)가 셋이니, 사람들이 그 수를 말하는 것이 비록 어긋나지 않더라도 그 이름은 그릇된 것이다”고 하셨는데, 저는 다소(多少)의 설이 비록 경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실은 하나로 넷을 묶는 것이고, 기(奇)를 소(少)라 하고, 우(偶)를 다(多)라 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9와 8은 4가 두 번이고, 음(陰)의 우(偶)이므로 다(多)라고 합니다. 5와 4는 4가 한번이고, 양(陽)의 기(奇)이므로 소(少)라고 합니다. 기양(奇陽)은 원(員)을 체로 하고, 하나의 직경과 세 개의 둘레를 본받아 그 온전함을 쓰므로 소(少)의 수는 3입니다. 우음(偶陰)은 방(方)을 체로 하고, 하나의 직경과 네 개의 둘레를 본받아 그 반을 쓰므로 다(多)의 수는 2입니다. 기(奇)를 낀 것이 셋씩 세 번을 하면 9가 되니, 그 세어서 떼어낸 것이 네 번이면 36이 됩니다. 기를 낀 것이 셋씩 두 번이면 6이 되니 그 세어서 떼어낸 것이 네 번이면 24가 됩니다. 세어서 떼어낸 것이 둘씩 세 번과 하나씩 두 번이면 8이 되니 세어서 떼어낸 것이 네 번이면 32가 됩니다. 기를 끼고 둘씩 두 번을 하고, 하나가 세 번이면 7이 되니 세어서 떼어낸 것이 네 번이면 28이 됩니다. 세어서 떼어낸 수가 비록 먼저 그것을 얻지만 그 수는 많고 번거로우며, 기를 낀 수가 비록 후에 그것을 얻지만 그 수는 적고 간략합니다. 수를 다스리는 방법은 간략한 것으로 번거로운 것을 제어하는 것이지, 많은 것으로 적은 것을 제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유들의 구설은 오로지 다소로써 음양의 노소를 결정하였고, 세어서 때어낸 수도 은연중에 합치된 것이니 처음부터 이설(異説)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7,8,9,6이 음양의 노소가 되는 까닭은, 그 설은 또 도서(図書)에 근본을 둔 것이고, 사상(四象)에 정해진 것이니, 뒤 단락에 자세히 나옵니다. 기(奇)를 낀 수 역시 세어서 얻을 뿐입니다. 대저 하도(河図) 낙서(洛書)는 7,8,9,6의 할아버지이고, 사상의 형체는 그 다음이니 그 아버지이며, 기(奇)를 낀 기우(奇遇)와 방원(方圓)은 그 아들이고, 세어서 떼어내어 4로 곱한 것은 그 손자입니다. 이제 그 기를 끼는 것 이상은 모두 버려 기록하지 않고, 오직 세어서 떼어내기를 네 번한 수로만 말하는 것은, 아마도 상수의 본원을 궁구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네 번 경영한 이후에 효(爻)가 있다”고 하셨고, 또 “한번 걸고 두 번 끼니, 모두 세 번 변하여 일효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네 번을 경영해야 비로소 한번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역을 이룬다[成易]”고 하니, 역은 곧 변화입니다. 열두 번 경영을 거듭하여 세 번 걸고 여섯 번 끼면 세 번 변화를 이루고, 세 번 변한 다음에 효가 됩니다.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는다”고 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 한 구절은 공자께서 복희가 괘를 그린 자연의 형체와 차제를 발명한 것이니 가장 절실하고 긴요합니다. 고금에 말한 자들 중에 오직 소강절(邵康節)과 정명도(程明道) 두 선생만이 그것을 능히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소강절은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둘이 나뉘어 넷이 되고, 넷이 나뉘어 여덟이 되고, 여덟이 나뉘어 열여섯이 되고, 열여섯이 나뉘어 서른둘이 되며, 서른둘이 나뉘어 예순 여섯이 되니, 뿌리에 줄기가 있고, 줄기에 가지가 있는 것과 같아, 클수록 적어지고, 가늘수록 많아진다”고 하셨습니다. 또 명도 선생은 ‘한 배를 더하는 법[加一倍法]’이라 했으니, 공자의 말씀을 발명함이 또 가장 절실하고 긴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개 하도(河図)와 낙서(洛書)로 말하면 태극(太極)이라는 것은 그 가운데가 텅 빈 상(象)입니다. 양의(兩儀)라는 것은 음양(陰陽)의 기우(奇耦)의 상(象)입니다. 사상(四象)이라는 것은 하도의 1이 6을 합하고, 2가 7을 합하며, 3이 8을 합하고, 4가 9를 합하며, 낙서의 1이 9를 포함하고, 2가 8을 포함하며, 3이 7을 포함하고, 4가 6을 포함한 것입니다. 팔괘(八卦)라는 것은 하도의 사정(四正) 사우(四隅)의 위치이고, 낙서의 사실(四実) 사허(四虚)의 수입니다. 괘획(卦劃)으로 말하면 태극(太極)은 상수(象数)가 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전체입니다. 양의(兩儀)는 −은 양(陽)이 되고 는 음(陰)이 되며, 양수(陽数)는 1이고, 음수(陰数)는 2입니다. 사상(四象)은 양의 위에 하나의 양이 생기면 가 되니 그것을 태양(太陽)이라 하고, 양의 위에 하나의 음이 생기면 가 되니 그것은 소음(少陰)이라 합니다. 음의 위에 하나의 양이 생기면 이 되니 그것을 소양(少陽)이라 하고, 음위에 하나의 음이 생기면 가 되니 그것을 태음(太陰)이라 합니다. 사상이 이미 세워지면 태양은 1일 거하여 9를 포함하고, 소음은 2에 거하여 8을 포함하며, 소양은 3에 거하여 7을 포함하고, 태음은 4에 거하여 6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6,7,8,9의 수가 말미암아 정해진 것입니다. 팔괘는 태양의 위에 하나의 양이 생기면 ☰이 되는데 건이라 부르고, 하나의 음이 생기면 ☱이 되니, 태(兌)라 부릅니다. 소음의 위에 하나의 양이 생기면 ☲이 되는데 이(離)라 부르고, 한 음이 생기면 ☳이 되는데 진(震)이라 부릅니다. 소양의 위에 하나의 양이 생기면 ☴이 되는데 손(巽)이라 하고, 하나의 음이 생기면 ☵이 되니 감(坎)이라고 합니다. 태음의 위에 하나의 양이 생기면 ☶이 되어 간(艮)이라 부르고, 하나의 음이 생기면 ☷이 되는데 곤(坤)이라 부릅니다. 소강절의 선천설에서 이른바 건일(乾一)․태이(兌二)․이삼(離三)․진사(震四)․손오(巽五)․감육(坎六)․간칠(艮七)․곤팔(坤八)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팔괘의 위에 또 각각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생기게 되면 4획 괘가 열여섯이 됩니다. 경(経)에는 비록 글귀가 없어도 소강절이 이른바 여덟이 나뉘어 열여섯이 된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4획의 위에 또 각각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생기면 5획 괘가 서른둘이 됩니다. 경(経)에는 비록 이 글귀가 없지만 소강절이 열여섯이 나뉘어 서른둘이 된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5획의 위에 또 각각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생기면 6획의 괘가 예순 넷이 되는데 8괘가 서로 거듭하여 또 각각 건일(乾一)․태이(兌二)․이삼(離三)․진사(震四)․손오(巽五)․감육(坎六)․간칠(艮七)․곤팔(坤八)의 차서를 얻는데 그것은 도(図)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이미 7,8,9,6으로 사상을 삼고, 또 넷씩 세어서 사상(四象)을 삼는 것은 아마도 타당하지 않은 것이 있는 듯합니다.
하도 낙서는 제 생각에 대전의 글로 상세히 알 수 있는 듯하고, 하도 낙서는 대개 모두 성인이 취하여 8괘를 만든 것인데, 구주(九疇)도 같이 나왔습니다. 지금 그 상(象)으로 보면 그 가운데를 비우는 것은 역이 될 수 있는 까닭이고, 그 가운데를 채우는 것은 홍범이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이 역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이미 앞 단락에 있고, 홍범이 될 수 있는 까닭은 하도 구주의 상(象)과 낙서 오행의 수(数)가 속일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그것이 위서(緯書)에서 나왔다고 하여 경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총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이(理)는 삼재(三才)에서 나오고, 분(分)은 인도(人道)에서 나왔다. 「서명」은 이(理)로만 말하고 분(分)은 설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서명」은 횡거선생이 사람들에게 지극히 깊고 간절한 것을 보여준 것이며, 이천선생은 또 ‘이일분수(理一分殊)’로 그것을 칭송하셨으니, 말은 비록 매우 간략하지만 이치는 남김이 없습니다. 대개 건(乾)이 부(父)가 되는 것과 곤(坤)이 모(母)가 되는 것이 이른바 이일(理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곤이라는 것은 천하의 부모입니다. 부모라는 것은 일신(一身)의 부모이니 그것은 나눌 수도 없고 다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동포(同胞)로 삼고 물(物)을 나의 동류(同類)로 삼는 것은 천하의 부모로부터 말한 것이니, 이른바 이일(理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이라고 하면 참으로 나의 동포가 될 수 없고, 물(物)이라고 하면 참으로 나의 동류(同類)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신(一身)의 부모로부터 말한 것이니 이른바 분수(分殊)라는 것입니다. 또 하물며 동포라고 하고, 나의 동류라고 하며, 종자(宗子)라 하고, 집안을 관리한다고 하고, 노인이라 하고, 어린아이라 하며, 성인(聖人)이라 하고, 현인(賢人)이라 하며,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가운데 이러한 다른 차등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른바 이일(理一)이라고 하는 것이 분수(分殊)의 가운데를 관통하면 비로소 서로 분리되지 않을 뿐입니다. 이것이 천지자연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이치로, 두 부자(夫子)께서 비로소 그것을 드러내 밝히셨으니, 일시의 폐단을 구원하는 말이 아니고, 잠시 이것을 강하게 하여 저것을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서명」은 길을 빌리는 것으로 그치고 종신토록 배울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서명」의 말은 내 성(性)이 말미암은 바를 가리켜 부건모건(父乾母坤)의 실체를 밝히고, 기꺼이 천명(天命)을 따르고 타고난 품성을 실천함과 궁신지화(窮神之化)의 묘(妙)를 지극히 하여 평생토록 하나의 행(行)도 흡족하지 않음이 없는데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천선생은 “때를 다하도록 채울 수 있으면 곧 성인(聖人)이다”라고 하셨으니, 아마도 다만 처음 배우는 사람의 한 때의 소견을 위하여 「서명」을 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성선(性善)의 선(善)은 선악(善悪)의 선(善)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근원을 다하는 선[極本窮原]과 선악(善悪) 말류의 선(善)은 둘이 있지 않고, 다만 발하고 발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발하기 이전은 이 선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발하여 선악의 선이 되는 것도 역시 이 선입니다. 이미 발한 후에는 불선(不善)이 섞여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선이라는 것은 근원을 다하는 것이 발한 것일 뿐입니다. 총서에서 이른바 “무위(無為)의 때는 성(性)이 움직인 후이다”라고 하신 것은 이미 그것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또 “성선의 선은 선악의 선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제 생각에 그것은 스스로 서로 모순이 되어 학자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습니다.
또 “맹자는 기(気)를 기르는 것[養気]으로 공부를 삼고, 부동심(不動心)으로 시작을 삼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맹자의 학(学)은 대개 궁리(窮理)집의(集義)로 시작을 삼고, 부동심으로 효과를 삼았다고 행각합니다. 대개 다만 궁리만 하여도 지언(知言)을 할 수 있고, 집의만 하여도 그 호연지기(浩然之気)를 기를 수 있습니다. 이치가 밝아져 의심스러운 것이 없고, 기가 가득 차서 두려울 것이 없으므로 큰 소임을 맡아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장을 고찰해보니 조리가 있어 볼만합니다.
與郭沖晦
易説云 数者 策之所宗 而策為已定之敷 熹窃謂敷是自然之敷 策即警之茎敷也 禮曰龜為卜 筴為筮是已 老陽一爻過揲三十六策 故積六爻而得二百一十有六策耳
又云 大衍之敷五十 是為自然之敷 皆不可窮其義 熹籍謂既謂之敷 恐必有可窮之理
又云 奇者 所褂之一也 幼者 左右両楪之余也 得左右兩揲之余寘於前 以奇帰之也 熹簸謂奇者 左右四蝶之余也 劫 指間也 謂四探左手之策 而帰其余於無名指間 四撲右手之策 而曝其余於中指之間也 一褂之間凡再幼 則五歳之間凡再閠之象也
又云 三多三少 人言其敷雖不差 而其名非矣 熹窃謂多少之説雖不経見 然其実以一約四 以奇為少 以偶為多而已 九人者 兩其四也 陰之偶也 故謂之多 五四者 一其四也 陽之奇也 故謂之少 奇陽体員 其法徑一囲三而用其全 故少之敷三 偶陰体方 其法徑一囲四而用其半 故多之敷二 帰奇積三三而為九 則其過楪者四之而為三十六矣 帰奇積三二而為六 則其過探者四之而為二十四矣 帰奇積二三一二而為人 則其過撲者四之而為三十二矣 帰奇積二二一三而為七 則其過楪者四之而為二十八矣 過撲之敷雖先得之 然其数衆而繁 帰奇之敷雖後得之 然其敷寡而約 紀数之法 以約御繁 不以衆制寡 故先儒旧説専以多少決陰陽之老少 而過楪之数亦冥会焉 初非有異説也 然七八九六所以為陰陽之老少者 其説又本於図書 定於四象 詳見後段 其厳奇之数亦因擽而得之耳 大抵河図洛書者 七人九六之租也 四象之形体次第者 其父也 帰奇之奇偶方圓者 其子也 過楪而以四乗之者 其孫也 今自帰奇以上皆棄不錄 而独以過楪四乗之敷為説 恐或未究象数之本原也
又云 四営而後有爻 又曰 一褂再劫 共為三変而成一爻 熹窃謂四営方成一変 故云成易 易即変也 積十二管三掛六劫乃成三変 三変然後成爻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人卦 熹籍譖此一節乃孔子発明伏羲畫卦自然之形体次第 最為切要 古今説者惟康節明道二先生為能知之 故康節之言曰 一分為二 二分為四 四分為八 人分為十六 十六分為三十二 三十二分為六十四 猶根之有幹 幹之有枝 愈大則愈少 愈細則愈繁 而明道先生以為加一倍法 其発明孔子之言又可謂最切要矣 蓋以河図洛書論之 太極者 虚其中之象也 両儀者 陰陽奇黐之象也 四象者 河図之一合六二合七三合八四合九 洛書之一含九二含人三合七四合六也 八卦者 河図四正四隅之位 洛書四実四虚之敷也 以卦昼言之 太極者 象数未形之全体也 両儀者 一為陽而一為陰 陽敷一而陰敷二也 四象者 陽之上生一陽則為二而謂之太陽 生一陰則為二 而謂之少陰 陰之上生一陽則為二 而謂之少陽 生一陰則為 而謂之太陰也 四象既立 則太陽居一而含九 少陰居二而含八 少暢居三而含七 太陰居四而合六 此六七八九之敷所由定也 人卦者 太陽之上生一陽則為… 而名乾 生一陰則為三 而名児 少陰之上生一陽則為三 而名離 生一陰則為三 而名震 少陽之上生一陽則為… 而名巽 生一陰則為… 而名坎 太陰之上生一陽則為… 而名艮 生一一陰則為串 而名坤 康節先夫之説 所謂乾一児二離三震四巽五坎六艮七坤八者 蓋謂此也 至於八卦之上 又各生一陰一陽 則為四畫者十有六 経雖無文 而康飾所謂八分為十六者 此也 四昼之上又各有一陰一陽 則為五畫者三十有二 経雖無文 而康節所謂十六分為三十二者 此也 五昼之上又各生一陰一陽 則為六畫之卦六十有四 而八卦相重 又各得乾一児二離三震四巽五坎六艮七坤八之次 其在図可見矣 今既以七八九六為四象 又以擽之以四為四象 疑或有未安也
河図洛書 熹窃以大伝之文詳之 河図洛書蓋皆聖人所取以為八卦者 而九疇亦并出焉 今以其象観之 則虚其中者 所以為易也 実其中者 所以為洪範也 其所以為易者 已見於前段矣 所以為洪範 則河図九疇之象洛書五行之敷有不可誣者 恐不得以其出於緯書而略之也
叢書云 理出乎三才 分出於人道 西銘専為理言 不為分設 熹窃謂西銘之書 横渠先生折以示人至為深切 而伊川先生又以理一而分殊者賛之 言雖至約 而理則無余矣 蓋乾之為父 坤之為母 斫謂理一者也 然乾坤者 天下之父母也 父母者 一身之父母也 則其分不得而不殊矣 故以民為同胞物為吾与者 自其天下之父母者言之 所謂理一者也 然謂之民 則非真以為吾之同胞 謂之物 則非真以為我之同類矣 此自其一身之父母者言之 所謂分殊者也 又况其日同胞 曰吾与 曰宗子 曰家相 日老 曰幼 日聖 日賢 日頼連而無告 則於其中間又有如是差等之殊哉 但其所謂理一者貫乎分殊之中而未始相離耳 此天地自然古今不易之理 而二夫子始発明之 非一時救弊之言 姑以彊此而弱彼也
又云 西銘止以仮塗 非終身之学也 熹窃謂西鎔之言指吾体性之所自来 以明父乾母坤之盲 極樂夫践形窮神知化之妙 以至於無一行之不慊而没身島 故伊川先生以為充得尽時 便是聖人 恐非専為始学者一時所見而発也
又云 性善之善 非善悪之善 熹籍謂極本窮原之善与善悪末流之善非有二也 但以其発与未発言之有不同耳 蓋未発之前只有此善 而其発為善悪之善者亦此善也 既発之後 乃有不善以離焉 而其所謂善者 即極本窮原之発耳 叢書所謂無為之時 性動之後者 既得之矣 而又日性善之善非善悪之善 則熹籍恐其自相矛盾而有以起学者之疑也
又云 孟子以養気為学 以不動心為始 熹窃謂孟子之学蓋以窮理集義為始 不動心為效 蓋唯窮理為能知言 唯集義為能養其浩然之気 理明而無所疑 気充而無所催 故能当大任而不動心 考於本章 次第可見矣
곽충회에게 보냄 與郭冲晦
【해제】곽충회의 덕(德)을 칭송하고 곽충회에게 경연(經筵)과 간관(諫官)의 자리에 나가기를 간절히 권하는 내용이다.
저는, 한여름 심한 더위에 충회처사 어르신께서 고요한 곳에서 한가하게 지내시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시고 모든 일에 만복이 깃들기를 삼가 바랍니다. 저는 멀리서 선생님의 음덕을 입고 말석에서 선생님의 밝음을 우러러보며, 감히 때때로 도(道)로서 자중하며, 전에 보내주신 세 번의 편지로 세론의 위안을 삼습니다.
큰 이름을 우러러 받들어 논저하신 것을 얻어서 읽은 것이 지금 한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민산(閩山)에 엎드려 반생을 흘려보내며, 선생님의 덕용(徳容)을 우러러 뵙고, 가르침을 받지 못하니, 선생님을 뵘기를 간절히 바라며 한갓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근래에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와서 정성스러운 편지를 보내주시어 은혜를 받았고, 앞서도 가르침을 주시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세 번이나 답장을 보내 주시니 감사함이 이미 깊으나 또 거듭 스스로 그 불민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편지를 보내어 감사함을 전하니 제 말이 제 뜻을 다 전하지 못하더라도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의 집안에 전해지는 정학(正学)은 덕과 배울만한 말씀이 있으나, 세상을 피하고 무리를 떠나계시어 성주(聖主)께서 알지 못하시지만, 맑은 기풍과 깨끗한 절개는 멀수록 더욱 높아집니다. 지금 경연(経筵)과 간열(諫列)에 아직 결원이 많은데,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뛰어난 선비를 얻어서 군심(君心)을 바로잡으면 장래에 변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과 같은 분이 아니면 누가 그 책무를 맡겠습니까? 더욱 훌륭한 분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밤낮으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선생님께서 부름에 응하셨다는 소문을 들으면 지극한 기쁨이 더 깊을 것입니다. 참람되게도 다시 재배드립니다. 상께서 덕문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 드문 것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각자 아름다운 덕만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나라에는 의뢰할 바가 있으니 그 안목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與郭冲晦
某窃以中夏劇暑 共惟冲晦処士老丈燕居静勝 神相尊候 動止畜福 某遠籍余蔭 末由瞻晤 敢幾以時為道自重 前膺三聘 用慰与論 区区不勝至望 仰服大名 得所論著而謂之 有年於此矣 某踏伏闌嶺 忽忽半生 無従望見徳容 聴受議樂 引領函丈 徒切挙挙 比者寅綾附致悃款 乃蒙謙畚 先枉教函 三复以還 感慰既燦 又重自愧其不敏也 附便致謝 青不逮意 幸察 網惟執事家伝正学 有徳有言 遁世離羣 聖主不得而致 清風黍節 愈久愈高 今経帷諌列尚多欠員 衆謂当得高世之士以格君心 庶有変通於将来 非執事者 孰任其責邪 加擘之徴 計在辰夕 某譬在臭味 尢深欣矚之至
儧易再拝 上問徳門尊少 各惟佳福 是邦有委 幸示其目
정가구(逈)에게 답함 答程可久(逈)
【해제】1180년(송 효종 순희7, 경자), 주희 51세 때 남강(南康)에 있을 때 사수(沙隨)선생이라고 불리며, 지행으로 칭송을 받던 이정의 부친 정가구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도량(度量)에 대해 논하고 가르침을 구하는 내용이다.
제가 지난번에 간략한 편지를 올렸는데 거듭 답을 주시어 친절하고 정성스런 가르침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울러 유연(劉掾)이 선생께서 지으신 고대의 도량(度量)에 대한 책과 도의(図義) 한 책을 보여주어서 받들어 살펴보았는데 훌륭하고 많은 것은 개발해주었습니다. 감사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의 고루한 학문으로는 고인의 제도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근래에 범촉공집에서 인용한 방서(房庶)의 한지(漢志) 별본을 보았는데, 지금의 것에 비해 몇 여러 글자가 늘어나 있었습니다. 또 원분방분(員分方分)의 차이를 논한 것 역시 매우 상세했는데, 제 생각에는 사마공․호선생의 것과 다르게 된 단서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니, 마땅히 분명하게 변별해야 할 것입니다. 도의 중에서는 이미 그 설을 취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일찍이 그것이 그렇지 않은 까닭을 질정하지 않은 뜻을 저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시 상세하게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연(劉掾)은 또 허락을 받아 옛날의 저울 추[古権]를 같이 부친다고 했으니 또한 빨리 얻기를 바랍니다. 온공(温公)의 주척(周尺)은 옛 것을 기본으로 하여 새겼는데, 또 일찍이 법도에 의해 한 매를 얻었는데 지금의 철척(鉄尺)보다 조금 짧으니 무슨 이유로 이러한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본(旧本)을 검토하기를 기다리며, 이어서 가르침을 구합니다.
구부(口賦)․천맥(阡陌) 두 설에 대해서도 아울러 가르침을 받았는데, 고증이 정밀하고 넓으니 더욱 탄복스럽습니다. 다만 ‘천맥(阡陌)’ 두 글자는 제 생각에 의심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로 천맥의 뜻을 추론해보면, 저의 이전의 설에서 이른바 ‘경도(徑涂)가 천(阡)이 된다’고 한 것이 맥(陌)이 되어야 마땅하고, ‘진도(畛道)가 맥(陌)이 된다’고 한 것은 천(阡)이 되어야 합니다. 대개 사기색은은 풍속통의 “남북을 천이라 하고 동서를 맥이라 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고, 또 “하남(河南)은 동서를 천이라 하고, 남북을 맥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수인(遂人)」의 법으로 그것을 상고해보면, 마땅히 후설을 옳다고 해야 합니다. 주례(周礼) 「수인(遂人)」의 정현(鄭玄)의 주(注)는 “경(徑)은 종(従)이고, 진(畛)은 횡(横)이며, 도(涂)는 종(従)이고 도(道)는 횡(横)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1경(徑)의 안은 전(田) 100무(畝)가 되며, 1 도(涂)의 안은 전 100부(夫)가 되어, 경(徑)과 도(涂)는 모두 종(従)이니 이른바 남북의 맥(陌)이라는 것입니다. 1 진의 안은 전 1000무가 되고, 1도(道)의 안은 전 1000부가 되어 진(畛)과 도(道)는 모두 횡(横)이니, 이른바 동서(東西)의 천(阡)이라는 것입니다. 이름을 붙이고 뜻을 취하는 것이 바로 부무(夫畝)의 수(数)로 한 것입니다. 또 그 글자가 도로의 이름이 되려면 마땅히 ‘阜’을 좇아야 하고, ‘人’을 쫓으면 안됩니다. 대개 사기는 그 본래의 글자를 사용했는데, 한지가 가차(仮借) 자를 씀으로 인하여 그것을 어지럽혔으니, 그것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말이 천맥의 사이에 무리를 이루었다”고 한 것은 바로 밭 사이의 도로 위를 오간다는 말이고, “부자(富者)는 천맥(阡陌)을 연이어 있다”고 한 것 역시 제한을 초과하여 겸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천(阡)을 타넘고 맥(陌)을 잇대어 선왕이 나누어 다스리던 옛 경계를 지키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천맥(阡陌)’이라는 글자를 말한다면 아마도 분명하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니, 그렇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答程可久(逈)
熹昨者拝書草率 重蒙枉答 誨示難懇 并劉掾転示所製古度量及図義一冊 伏謂捧玩 閑発良多 其為感慰 不可具言 蔦孤陋之学 於古人制度多所未講 近看苑蜀公集引屏庶漢志別本比今増多数字 又論員分方分之差 亦甚詳悉 籍意其所以与司馬公胡先生不同之端正在於此 所当明辨 今図義中似已不取其説 然末嘗質其所以不然之意 熹於此有末暁然者 因便更乞詳以見教 幸甚 劉掾又云蒙許并寄古権 亦願早得之也 温公周尺刻本旧亦嘗依放制得一枚 乃短於今餓尺寸許 不知何故如此差繞 俟検旧本 績求教也
囗賦阡陌二説 并荷指教 考証精博 敷服允深 但阡陌二字 鄙意末能無疑 因以来教千百之義推之 則熹前説所謂徑除為阡者当為陌 畛道為陌者当為阡 蓋史記黍随引風俗通南北曰阡 東西日陌 又云河南以東西為阡 南北為陌 r今以遂人之法考之 当以後説為正也 遂人鄭注 徑従畛横 除従道横 今考一徑之内為田百畝 一除之内為田百夫 而徑除皆従 即所謂甫北之陌 一畛之内為田千畝 一道之内為田千夫 而畛道皆横 即所謂東西之阡也 其立名取義 正以夫畝之数得之 而其字為道路之類 則当従阜 而不当従人 蓋史記其本字 而漢志則因仮借而乱之 恐不当引以為担也 馬阡陌之間成群 正謂往来田間道路之上 富者連阡陌 亦謂兼并輸制 跨阡連陌 不守先王彊理之旧界耳 若作仟伯字説 恐難分明也 不蕃尊意以為如何 却望終賜誨示 幸甚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제 1서와 같은 해에 보낸 편지이다. 지난 번 편지를 이어 도량에 대한 가르침을 더 청하고 있다.
제가 지난번에 공문서를 황송하게 받아보고 서척(黍尺) 제도를 언급하였는데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다만 본래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동관(同官)들 역시 조금이나마 그 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선생께서는 분명 일정한 이론이 있을 것이니 가르침을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우리 군에서 지금까지 제기(祭器)를 제작할 때 이 책을 반포하여 기준으로 삼지 않고, 다만 임천(臨川)에서 인쇄한 사마(司馬)씨의 서의(書儀) 안에 있는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삼았으니 특히 미천함을 알겠습니다. 지금 비록 이 제도를 얻었으나 이미 수정하고 고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모든 것이 다 위태롭습니다. 전부(田賦)․부전(夫田) 두 책은 다시 몇 권을 얻었으니 그 뜻을 넓히고 늘여서 세상의 마음을 구하려고 합니다. 하루빨리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答程可久
熹昨承薩示公箚 諭及黍尺制度 極荷不鄙 但素所未講 同宮亦少有能知其説者 網適高明必有一定之論 却乞垂教 幸甚幸甚 弊都向来製造祭器時未準頒降此冊 只用臨川印本司馬書儀内周尺為之 殊覚低小 今雖得此制 亦已無力可修改矣 并幾合悉 少懇 田賦夫田二書 更欲求得敷本 以広長者救世之心 得早拝賜 甚幸甚幸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역시 앞의 두 편지와 같은 해인 1180년(경자)에 쓴 편지이다. 태극과 양의, 그리고 팔괘의 차서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주희는 점서의 법은 상수(象數)가 함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태극의 의미는 바로 이(理)의 극치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이(理)가 있으면 곧 이 물(物)이 있어 선후의 차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역(易)에 태극이 있다”고 말하면 이 태극은 음양의 가운데 있는 것이지 음양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대중(大中)’으로 그것을 해석하고, 또 건곤(乾坤)이 나누어지지 않고 대연(大衍)이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로 말하면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형이상(形而上)의 것을 도(道)라고 하고, 형이하(形而下)의 것을 기(器)라고 하는데, 지금 태극을 말하여 “그 물(物)을 신(神)이라고 한다”고 하고, 또 천지가 나누어지지 않은 것과 원기(元気)가 합하여 하나가 된 것으로 말하는 것 역시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이(理)가 있으면 곧 이 기(気)가 있는데, 기(気)는 둘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에서 말하기를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노자(老子)는 도(道)가 먼저 하나를 낳고 난 다음에 하나가 둘을 낳는다고 했으니, 그 이(理)를 살피는 것이 또한 정밀하지 못합니다. 노장(老荘)의 말의 실수는 대개 이러한 것들이니 인용하여 증거로 삼기에는 부적할 듯합니다.
양의(兩儀)와 사상(四象)의 설은 민(閩) 지방의 선배들이 일찍이 이것을 말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 생각 역시 그렇다고 여기고 애초에 감히 자신(自信)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보내오신 편지를 보니 이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양의가 건곤의 초효가 된다고 하고, 사상이 건곤의 초효와 이(二)효가 서로 섞여서 이루어진다고 하면 아마도 이론에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을 듯 합니다. 대개 비로소 그것이 양의가 되면 사상은 있지 않고, 비로소 그것이 사상이 되면 팔괘는 있지 않으니, 어찌 먼저 건곤의 이름이 있고 초효와 이효의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에 양의는 다만 음양이라고 할 수 있고, 사상은 이에 각각 태소의 구별을 더할 수 있으며, 그 순서는 또한 마땅히 태양 소음 소양 태음의 차례가 되어야 합니다. 대개 이른바 번갈아 올라가고 배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과 를 뚸어 넘어서 먼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순서가 이미 정해지면 번갈아 올라가고 배가 되어 건일(乾一)․태이(兌二)․이삼(離三)․진사(震四)․손오(巽五)․감육(坎六)․간칠(艮七)․곤팔(坤八)의 순서가 되니 소씨(邵氏)의 선천도(先天図)와 합치됩니다. 이것은 복희(伏羲)가 처음에 팔괘를 그린 자연의 차서이지 사람이 사사로운 지혜로 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역을 배우는 사람은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晉) 공자(公子)가 정둔회예(貞屯悔予)의 점을 얻었는데 위씨(韋氏)의 구주(旧注)는 실로 통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은 제 생각에도 의심나는 것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개 목강(穆姜) 동궁(東宮)의 점으로 말하면 이른바 ‘간(艮)의 팔(八)’이라는 것은 바로 해당되는 점의 효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지금 “정둔회예(貞屯悔予)는 모두 팔이다”라고 하고, 그것을 해석하여 삼효의 변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면 그 해당하는 점의 효가 아니고, 또 괘의 길흉(吉凶)을 연계시킬 것이 없습니다. 본문의 어조에 의거하면 이어서 두 괘를 얻었는데 모두 노양(老陽) 노음(老陰)의 효를 만나지 않았으므로 결론지어서 “모두 팔이다”라고 했고, 그것을 점쳐 말하기를 “닫혀서 통하지 않고 효는 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대개 괘의 체는 움직이지 않고 효는 소용이 없는 점일 뿐입니다. 그러나 두 괘 중에도 양효가 있는데 또 팔괘를 치우쳐 말하면 이 설도 역시 온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동궁의 점은 그 설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혹 단지 간괘의 육효가 변하지 않은 것을 만난 것 같습니다. 다만 “그 등에 그치면 몸을 보지 못하며, 뜰에 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는 점은 점치는 사람이 억지로 수괘가 되는 것으로 말하여 실로 목강을 기쁘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하는 사람이 점치는 사람의 말을 기록하여 “이것은 간괘가 수괘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여 정법이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구삼(九三)과 상구(上九) 역시 양효(陽爻)이니 또 의심스러운 듯 합니다. 대저 고서의 없어지고 빠진 부분은 쉽게 억측한 설로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점서의 법은 상수(象数)가 함께 갖추어져 있어야하니 아마도 뜻을 가진 자가 미루어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른바 활법(活法)이라는 것입니다.
答程可久
太極之義 正謂理之極致耳 有是理即有是物 無先後次序之可言 故日易有太極 則是太極乃在陰陽之中 而非在陰陽之外也 今以大中訓之 又以乾坤末判大衍未分之時論之 恐未安也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今論太極而日其物謂之神 又以天地未分 元気合而為一者言之 亦恐未安也 有是理即有是気 気則無不兩者 故易曰太極生兩儀 而老子乃謂道先生一 而後一乃生二 則其察理亦不精矣 老荘之言之失大抵類此 恐不足引以為証也 兩儀四象之説 閠中前輩嘗有為此説者 鄙意亦網謂然 初未敢自信也 今得来示 斯判然矣 但謂兩儀為乾坤之初爻 謂四象為乾坤初二相錯而成 則恐立言有未瑩者 蓋方其為兩儀 則未有四象也 方其為四象 則未有八卦也 安得先有乾坤之名 初二之辨哉 妄意兩儀只可謂之陰陽 四象乃可各加以太少之別 而其序亦当以太陽二少陰二少陽二太陰 為次 蓋所謂逓升而倍之者 不得越二与二而先為二也 此序既定 又逓升而倍之 適得乾一児二離三震四巽五坎六艮七坤八之序也 与邵氏先天図合 此乃伏義始昼八卦自然次序 非人私智所能安排 学易者不可不知也
晉公子貞屯悔予之占 韋氏旧注固有不通 而来示之云 鄙意亦不能無所疑也 蓋以穆姜東宮之占言之 則所謂艮之八者 正指其所当占之爻而言之也 今云貞屯悔予皆八也 而釈之以為指三爻之不変者而言 則非其当占之爻 而於卦之吉凶無所繋矣 拠本文語勢 似是連得兩卦而皆不値老陽老陰之爻 故結之曰皆八也 而占之曰閉而不通 爻無為也 蓋曰卦体不動 爻無所用占爾 然兩卦之中亦有陽爻 又不為偏言皆八 則此説似亦未安 且東宮之占 説亦未定 恐或只是遇艮卦之六爻不変者 但乃艮其背不獲其身 行其庭不見其人之占 史彊為之随之説 以苟悦于姜耳 故伝者記史之言而曰是謂艮之随 明非正法之本然也 然其九三上九亦是陽爻 又似可疑 大抵古書残闕 未易以臆説断 惟占筮之法 則其象数具存 恐有可以義起者推而得之 乃所謂活法耳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1180년(경자)에 쓴 정가구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이다. 앞의 편지를 이어서 역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는 내용이다.
제가 지난번 편지에서 이른바 “태극은 음양의 바깥에 있지 않다”고 한 것은 바로 보내주신 편지에서 “음양에 의지하지 않고 음양을 낳는다”고 하신 것과 합치됩니다. 그러나 저는 형이상하의 것을 그 실(実)은 처음부터 서로 섞이지 않으므로 음양의 가운데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형이상하의 것을 그 명은 서로 섞일 수 없으므로 음양의 바깥에 있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비록 비롯하여 말한 것은 다르지만 처음부터 일찍이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용한 구설과 같다면 태극은 이에 천지가 나누어지기 전에 있어서 오늘날 음양이 되는 것과는 함께할 것이 없으니, 이것은 앞에서 말한 음양에 의지하지 않고 음양을 낳는다고 한 것과 스스로 서로 모순되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다시 상세히 고찰하시어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양의(兩儀)와 사상(四象)은 모름지기 선천의 순서와 같아야 자연의 수가 될 듯합니다. 그러나 건으로 시작하여 곤으로 끝나는 것은 이치의 형세도 불가함이 없습니다. 만약 반드시 처음이 이고 다음이 가 되고자 한다면 이는 의도로 안배하는 것이니 자연의 순서가 아닙니다. 또 상(象)의 위에 각각 양의가 생기면 모름지기 건․태․간․곤이 차례가 되는 것은 다시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상세히 살펴보시고 가르침을 주시기를 다시 바랍니다.
건 곤 육효의 그림과 위치는 제 생각에도 분명하지 않은 곳이 있으니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시초(蓍草)를 세는 새로운 그림 안의 책(策) 수는 점서(占筮)에 유용한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答程可久
熹前書所謂太極不在陰陽之外者 正与来教所謂不倚於陰陽而生陰陽者合 但熹以形而上下者其実初不相雑 故曰在陰陽之中 吾丈以形而上下者其名不可相雑 故曰不在陰陽之外 雖所自而言不同 而初未嘗有異也 但如今日所引旧説 則太極乃在天地未分之前 而無所与於今日之為陰陽 此恐於前所謂不倚於陰陽而生陰陽者有自相矛盾処 更望祥考見教
兩儀四象 恐須如先天之序 乃為自然之数 而始乾終坤 理勢亦無不可 若必欲初次 乃是以意安排 而非自然之序 又象之上各生兩爻 即須以乾兌艮坤為次 复無所拠 更乞詳考見教
乾坤六爻図位鄙意亦有未暁処 更乞誨示
揲耆新図内策数 不知於占筮有用処否 亦乞開諭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1189(송 효종 순희16, 己酉)년, 주희 60세에 쓴 정가구에게 보내는 다섯 번째 편지이다. 당시 백성들의 곤궁을 염려하고, 과거(科擧)의 폐해를 개탄하는 내용이다.
임정(臨汀)의 염책(塩筴)은 이미 말한 만한 것이 없고, 경계(経界)는 또 갈 수가 없으니, 백성의 곤궁은 날로 더욱 심해 가서, 다만 흩어져서 유용(流庸)이 되든지, 모여서 도적이 되는 두 가지만이 있을 뿐입니다. 광서(広西)에는 첫머리에서 논의한 사람을 파견하였는데 매우 엄격하여 근세에는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을 조금 밖에 보지 못했으니,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여는 것을 싫어하게 합니다. 어찌하겠습니까? 황제현(黄斉賢)의 운어는 매우 고심한 것인데, 여러 그림들은 더욱 공부가 있은 것이니 쉽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존명(尊命)을 따라서 몇 마디를 권말에 붙였습니다. 저의 낮은 학문으로 어찌 충분히 중하게 하겠습니까? 선생의 말씀을 두세 번 반복해보니 개탄스럽습니다. 과거의 폐해가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答程可久
臨汀塩筴既無可言 経界又不得行 民之窮困日以益甚 但有散為流庸聚為盗賊両事耳 広右首議之人行遣甚峻 近世少見其比 益今人懶開口 奈何奈何 黄斉賢韻語用心甚苦 諸図尢有功夫 甚不易得 已遵尊命 以敷諸附巻末 晩生靉学 何足為重 三复長者之言 為之慨数 科挙之弊至於如此 奈何奈何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진래는 이 편지를 주희65세 때인 1194(송 光宗 紹熙5년, 甲寅)년에 쓴 편지라고 분류하였다. 그런데 이 편지는 63권에도 「손경보(孫敬甫)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로 실려 있다. 어조가 후학에게 보내는 것임을 볼 때 손경보에게 보내는 편지가 맞는 듯하다.
학문을 하는 본말을 깨우쳐 주심이 매우 상세하고 치밀하셨습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세상의 도(道)가 쇠퇴하고, 이단의 말들이 벌떼처럼 나오니, 사리에 심하게 어긋난다” 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사람을 형벌을 범하고 욕을 당하는 지경에 빠트렸습니다. 또 그 근사(近似)하지만 작은 차이가 있는 것 또한 족히 사람으로 하여금 지리하게 얽매이게 해서 성현(聖賢)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갈림길이 많아 길이 헛갈리니 매우 두렵습니다. 원컨데 마음을 비워 천천히 옛 가르침들을 관찰하고, 구절을 해석하고 장을 분석하여 구절마다 투철하게 알고, 단락마다 익숙하게 만든다면 자연히 학문하는 순서를 알 수 있을 것이니, 별도로 학문하는 방법을 만들고, 융통성 없는 방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答程可久
所諭爲學本末 甚詳且悉 前書所謂世道衰微 異言■出 其甚乖剌者 固已陷人於犯刑受辱之地 其近似而小差者 亦足使人支離繳繞而不得以聖賢爲歸 岐多路惑 甚可懼也 願且虛心徐觀古訓 句解章析 使節節透徹 段段爛熟 自然見得爲學次第 不須別立門庭 固守死法也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정가구가 자신의 거취에 대해 말한 것에 대한 답변인 듯하다. 주희는 여기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려 원하는 것을 쫓되 역(易)의 정신에 따라 좋은 일은 행하고 근심스런 일은 피하라고 말하고 있다.
보내주신 편지의 사연은 제 마음을 개탄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위 아래가 서로 핍박을 하니 형세에 또한 부득이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태에 따르거나 거스르는 것, 옳고 그름은 항상 사람이 결정할 것이지 반드시 어떤 기준을 가질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오직 시기와 역량을 헤아려서 스스로에게 있는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좇는다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역(易)을 깊이 공부하셔서 책을 저술하는 데까지 이르셨으니 좋은 일은 행하시고, 근심스런 일은 피하십시오. 삼가 생각해보니 가슴 속에 이미 계산이 서있을 것이니, 진실로 제가 아는 것으로 가볍게 의론할 것이 아닙니다.
答程可久
示諭曲折, 令人慨歎. 然今日上下相迫, 勢亦有不得已者. 故事之從違可否, 常在人而不可必. 唯審時量力, 從吾所好爲在己而可以無不如志爾. 先生硏精於易, 至有成書, 樂行憂違, 伏想胸中已有成算, 固非晩學所得而輕議也.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1186년(송 효종 순희13, 丙午) 주희 58세에 보낸 편지이다. 역학계몽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정가구의 필적을 구하는 내용이다.
정서(程書)의 역원(易原)은 근자에 비로소 얻었는데, 삼가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가지고 가도록 주었습니다. 역학계몽은 이미 살펴보셨을 것이니 온당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가르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상요(上饒)의 재부원류(財賦源流)는 기록을 볼 수 있었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백모(伯謨)가 말하기를, 근자에 석각(石刻)한 기문(記文)이 있다고 하는데, 또한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작은 간청이 있는데 선생의 필적으로 쓴 대대례(大戴礼)의 「무왕(武王)」 천조(践祚) 일편을 구하여 선생께서 살피시는 경계로 삼고자 하는데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드리고 선생의 글을 받으면 헤아릴 수 없이 기쁠 것입니다.
答程可久
程書易原近方得之 謹以授来使 易学敗蒙当已経省覧矣 有未安処 幸辱鐫誨 上饒財賦源流得蒙錄示 幸甚 伯諱鋭近有刻石記文 亦願得之也 又有小懇 欲求妙墨為写大戴体武王践柞一篇 以為左右観省之戒 不審可否 巻子納上 得蒙揮樂 不勝幸甚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주자가 정가구(程可久)에게 보낸 아홉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갑인년(甲寅, 1194년, 주자 65세) 겨울 경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해 주희는 세상사의 험난함을 감지하면서 정가구로 하여금 매사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갑자기 [그대가] 봉사(奉祠) 직을 명(命)받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망연자실했습니다. 도리어 이거개정(貳車改正)한 천거 때문에 격론(激論)이 일어나 이와 같은 사태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행로는 험난하고 인정은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장자(長者)의 풍모로 관평박후(寬平博厚)하게 처신하더라도 오히려 탄연(坦然)히 아무런 장애에 걸리지 않기가 힘들 텐데, 하물며 비루하고 편협한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또 어떻게 [그대의] 그 웅지(雄志)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실천해내기를 바라겠습니까? [나는] 장차 옛 사관(祠官)직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힘써 청하여 조용히 남들과 어울려 지내기를 바랄 뿐입니다.
忽聞有奉祠之命, 爲之惘然. 得非反以貳車改正之擧而激之至此也邪? 世路險巇, 人情不可測. 以長者之寬平博厚處之, 尙未能坦然無所繫閡, 况如鄙狹之姿, 又安可望於少行其志耶? 行亦力請祈還故官, 仰繼後塵爾.
정가구에게 답함 答程可久
【해제】주자가 정가구(程可久)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는, 이 편지에 대해서는 년대 고증을 해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홉 째 편지 다음에 실린 것으로 보아 갑인년(甲寅, 1194년, 주자 65세) 겨울 이후에 씌여진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이 편지는 정가구의『춘추전현미례목(春秋伝顕微例目』중 한 구절에 대한 주자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그대의]『춘추전현미례목(春秋伝顕微例目)』을 보여 주신 데 대해 그대의 두터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 책에서 의론한 것 중에 ‘소국(小國)이 스스로 그 작위(爵位)를 폄하(貶下)함으로써 예(禮)를 덜어내게 되었다(殺體)’는 주장은 [춘추시기의] 실제 사정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근년(近年=頃年)에 매양 ‘등자(滕子)가 환왕(桓王)에게 조회(朝會)했다’는 [춘추의 경문에] 관한 호씨(胡氏)의 학설이 ‘나쁜 단점(惡短)을 미워하는 『춘추(春秋)』의 의리(義理)’가 아니라고 의심을 해왔습니다만, 이제 [그대의 설명을 보니] 나의 의심이 이미 석연(釋然)히 풀어지는군요. 대개 뒤에 와서 정(鄭)나라 대부(大夫) 또한 “정(鄭)나라는 백남(伯男)의 나라이거늘 공후(公侯)의 공부(貢賦)를 따르게 하니...운운(云云)”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 제후 중에는 스스로 [그들의 작위를] 폄하(貶下)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다만 패주(覇主)가 기필코 이 예법으로 책망을 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 그들의 작위를 폄하(貶下)하고자 한] 그들의 소원을 이룰 수가 없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밖에 여전히 [그대의]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대목들이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겨를이 없군요. 대체로 [『춘추』라는] 이 경전은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말을 세우기(立說)는 쉬우나 [입론한 것을 끝까지] 관통(貫通)시켜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평소(平日) 감히 [나의] 의견을 그 사이에 함부로 개진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를 빌려 [『춘추』에 대해 공부한다 하더라도 내가 이 경전을 얼마나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알 수 없군요.
春秋例目拜貺甚厚. 其間議論小國自貶其爵以從殺體, 最爲得其情者. 頃年每疑胡氏滕子朝桓之說非春秋惡惡短之義, 今已釋然. 蓋後來鄭大夫亦有鄭伯男也. 而使從諸侯之賦之說, 則當時諸侯之願自貶者固多, 但覇主必以此禮責之, 故有不(3-1666)得而自遂爾. 然其他尙有欲請敎者, 便遽未暇. 大抵此經簡奧, 立說雖易而貫通爲難, 以故平日不敢措意其間. 假以數年, 未知其可學否爾.
정태지(대창)에게 답함 答程泰之[주 ; 大昌]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정태지(程泰之)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주자가 남강군 지사의 소임을 끝낸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씌여진 것이다. 주자대전 권 37에는 정태지(程泰之)에게 보내는 편지 세 통이 나란히 실려 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서로 가까운 시기에 이 세 통의 편지가 씌어진 것 같다. 특히 제일 처음 나오는 이 편지에서는 노자의 『도덕경』과 『주역』의 수(數), 천문학 내지 점(占)법과 연관된『주역』의 책수(策數), 송대 역학에서 중시되었던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수(數) 등이 비교적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
[제목] “도(道)가 하나(一)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는다”는 것에 대하여.
[선생의 의견] 내(熹)가 보기에 아마도 ‘도(道)’자(字)는 곧 주역(易)의 태극(太極)을, ‘일一)’은 양수(陽數)인 기수(奇數)를, ‘이(二)’는 음수(陰數)인 우수(偶數)를, 그리고 ‘삼(三)’은 이에 기수와 우수의 쌓임(積)을 말한 듯합니다. [따라서 노자가] 말한 ‘둘이 셋을 낳는다(二生三)’는 것은 이른바 [『장자(荘子)』「제물론(斉物論)」에서 말한]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는 것인데, 만약 ‘일(一)’을 곧바로 태극(太極)이라 한다면, ‘도(道)가 하나(一)를 낳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 문세(文勢)를 자세히 살펴보면,『열자(列子)』에 나오는 ‘역(易)이 변하여 하나가 된다(易變而爲一)’는 말과 완전히 동일(正同)합니다. 이른바 ‘하나(一)’란 모두 형체적 변화(形變)의 시작일 뿐이지만, 수(數)로서의 일(一)이 아니라 할 수는 없습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熹恐此‘道’字卽易之太極, ‘一’乃陽數之奇, ‘二’乃陰數之偶, ‘三’乃奇偶之積. 其曰‘二生三’者, 猶所謂二與一爲三也. 若直以‘一’爲太極, 則不容復言‘道生一 ’矣. 詳其文勢, 與列子‘易變而爲一’之語正同. 所謂‘一’者, 皆形變之始耳, 不得爲非數之一也.
[제목] 책수(策數)에 관하여.
[선생의 의견] ‘책(策 ; 점대)’이란 시초(著)의 가짓수(莖數)를 가리키니, 곡례(曲禮)에서 이른바 ‘책(策)이 점(筮)이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역대전(大傳)에서 이른바 건(乾)과 곤(坤) “두 편(二篇)의 책수(策)’라는 것은 바로 걸고(掛) 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난(扐) 이외에 남아 있는 시초의 수(蓍數)를 가지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대개 [점을 치기 위해] 시초를 세어 괘를 구성하는 방법(揲蓍之法)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릇 세 차례에 걸처 하나를 걸고(掛) 또 넷씩 세어서(揲) 남은 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扐) 것 모두를 모은 시초의 수가 모두 13책이 되면 [용수(用數) 49책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36책이 되니 이것이 곧 노양(老陽) 효(爻)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 차례에 걸처 하나를 걸고(掛) 또 넷씩 세어서(揲) 남은 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扐) 것 모두를 모은 시초의 수가 모두 17책이 되면 [용수(用數) 49책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32책이 되니 이것이 곧 소음(少陰) 효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 차례에 걸처 하나를 걸고(掛) 또 넷씩 세어서(揲) 남은 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扐) 것 모두를 모은 시초의 수가 모두 21책이 되면 [용수(用數) 49책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28책이 되니 이것이 곧 소양(少陽)의 효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또] 세 차례에 걸처 하나를 걸고(掛) 또 넷씩 세어서(揲) 남은 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扐) 것을 모은 시초의 수가 모두 25책이 되면 [용수(用數) 49책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24책이 되니 이것이 곧 노음(老陰)의 효가 됩니다. 대전(大傳)에서는 오로지 육효(六爻)에 노양(老陽)과 노음(老陰)을 곱한 수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건(乾)의 책수(策数)가 216이요 곤(坤)의 책수(策数)가 144이다. 그러므로 모두 360이다(乾之策二百一十有六, 坤之策百四十有四, 凡三百有六十)”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육효(六爻) 가운데 음양(陰陽)은 노소(老小)가 착잡(錯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쌓아서 건(乾)이 된 것이라 해도 [이 6효가] 반드시 모두 노양(老陽)인 것은 아니며, 쌓아서 곤(坤)이 된 것이라 해도 [이 6효가] 반드시 모두 노음(老陰)인 것은 아닙니다. [건괘(乾卦)와 곤괘(坤卦) 이외에] 여섯 자녀로 이루어진 여러 괘들의 경우는 양효(陽爻)와 음효(陰爻)가 섞여 있는 경우들인데, 이러한 경우 역시 ‘노소(老小)’의 구별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개 ‘노소’의 구별은 [점을 치기 위해] 육효(六爻)를 만들어냄(生爻)에 따른 것이지 괘(卦)를 명명(命名)한 데 따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만약 ‘건(乾)에는 노양(老陽)의 상(象)이 있고, 곤(坤)에는 노음(老陰)의 상(象)이 있으며 육자(六字)에는 소음(少陰) 소양(少陽)의 상(象)이 있는데, 또 그 책수(策數)를 고르게 하여 [노음과 노음, 그리고 소음과 소음 하는 씩으로] 짝에 맞게 총합한 다음 이것을 빌려 저것을 밝힌다’라고 한다면 괜찮습니다만, 만약에 ‘건(乾)의 육효(六爻)는 모두 노양(老陽)이고 곤(坤)의 육효(六爻)는 모두 노음(老陰)이며, 육자(六字)로 이루어진 괘(卦)는 모두 소양(少陽)과 소음(少陰)이다’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는 옳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360이란 음양(陰陽)을 총합(總合)한 것이니, 그것을 [총합한] 수는 반드시 같게 되어 있습니다. [즉] 만약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의 육효가 모두 소음과 소양이라면, 건괘의 책수는 [소양 책수인] 28책이 여섯인 셈이니 모두 168책이 될 것이고, 곤괘의 책수는 [소음 책수인] 32책이 여섯인 셈이니 모두 192책이 되어, 이 둘을 합하면 마찬가지로 360이 되니, [건곤괘의 책수를 더한 것이 360이 되는] 이러한 원리는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策數.
策者, 著之莖數, 曲禮所謂‘策爲筮’者是也. 大傳所謂‘乾坤二篇之策’者, 正以其掛扐之外見存蓍數爲言耳. 蓋揲蓍之法, 凡三揲掛扐, 通十三策而見存三十六策, 則爲老陽之爻 ; 三揲掛扐, 通十七策而見存三十二策, 則爲少陰之爻 ; 三揲掛扐, 通二十一策而見存二十八策, 則爲少陽之爻 ; 三揲掛扐, 通二十五策而(3-1667)見存二十四策, 則爲老陰之爻. 大傳專以六爻乘老陽老陰而言, 故曰乾之策二百一十有六, 坤之策百四十有四, 凡三百有六十. 其實六爻之爲陰陽者, 老少錯雜, 其積而爲乾者未必皆老陽, 其積而爲坤者未必皆老陰. 其爲六子諸卦者, 或陽或陰, 亦互有老少焉. 蓋老少之別本所以生爻, 而非所以名卦. 今但以乾有老陽之象, 坤有老陰之象, 六子有少陰陽之象, 且均其策數, 又偶合焉, 而因假此以明彼則可 ; 若便以乾六爻皆爲老陽, 坤六爻皆爲老陰, 六子皆爲少陽少陰, 則恐其未安也. 但三百六十者, 陰陽之合, 其數必齊於此. 若乾坤之爻而皆得於少陰陽也, 則乾之策六其二十八而爲百六十八, 坤之策六其三十二而爲百九十二, 其合亦爲三百六十, 此則不可易也.
[제목] 하락도서(河洛圖書)에 관하여
[선생의 의견] 그대는 비록 45수로 이루어진 것을 하도(河圖)라 하고, 55수로 이루어진 것을 낙서(洛書)라고 논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에 관한 여러 유학자들의] 서론(序論) 중에는 ‘낙서가 앞이고 하도가 뒤이다(先書而後圖)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대개 반드시 55수를 체(體)로 한 이후에 비로소 45수의 변화를 미루어 나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하물며 역전(易傳)에도 명백히 ‘55(五十有五)’라는 문구가 있으며, 홍범(洪範)에도 또 아홉 방위의 수(洛書九宮數를 말함)가 있지 않습니까?
河洛圖書
論雖以四十五者爲河圖, 五十五者爲洛書, 然序論之文多先書而後圖. 蓋必以五十五數爲體, 而後四十五者之變可得而推. 又况易傳明有‘五十有五’之文, 而洪範又有九位之數耶?
[제목] “기년(期年)의 일수(日数)에 해당하고(當朞)”라 한 데 대하여.
[선생의 의견] 역에서 괘의 위치는 진(震)괘는 동, 리(離)괘는 남, 태(兌)괘는 서, 감(坎)괘는 북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론이요, 12벽괘(辟卦)를 12진(辰)에 분속(分屬)시키는 것이 또 하나의 이론입니다. 초연수(焦延壽)가 괘기(卦氣)를 일진에 배당하는 방법을 만들어 위의 두 이론을 합해서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미 팔괘 가운데 진(震), 리(離), 태(兌), 감(坎)괘의 24효를 사계절에 배당하고 나서 또 12벽괘를 열 두달에 배당했고, 또 48괘를 나누어 공(公), 후(侯), 경(卿), 대부(大夫)를 삼았으며, 6일 7분의 이론이 생겨났습니다. 만일 8괘를 위주로 한다면 12벽괘의 건(乾)은 ‘사월(巳月)’의 벽(辟)이 되는 것은 부당하고, 곤(坤)은 해월(亥月)의 ‘벽(辟)’이 되는 것은 부당하며, 간(艮)이 신유(申酉)에서 ‘후(候)’가 되는 것도 부당하고, 손(巽)도 술해(戌亥)에서 ‘후(候)’가 되는 것도 부당합니다. 만일 12벽괘를 주로 삼는다면 8괘의 건은 서북에 있는 것이 부당하고, 곤은 서남에 있는 것이 부당하며 간은 동북에, 손은 동남에 있는 것이 역시 부당합니다. 피차의 두 이론이 서로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48괘를 나누어 각각 공, 후, 경, 대부를 삼아서 12벽괘에 부속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어떤 필연적인 법칙이나 형상(法象)이 없이 곧장 하나의 의견(意)을 제시하는 차원에서 말한 것이어서 본래 근거가 없는 것이니, 4괘의 24효를 빼기를 기다린 이후에야 그 잘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웅의 태현경의 순서도 모두 초씨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니, 태현경의 81수(首)라 하는 것도 대개 [주역 가운데] 진, 리, 태, 감을 제거하고는 다만 [주역의] 60괘를 모방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 학자들 중에도 [태현경의] 81수(首)를 두고 진, 리, 감, 태를 모방해서 [따로 태현경과 유사한 것을] 만든 것이 많이 있는데 근래에 허한(許翰)이 비로소 그 잘못을 바로잡았습니다. 기찬(踦贊)과 영찬(贏贊)이란 두 찬을 만들어야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바로 729찬으로도 또 60괘 6일 7분의 수에 부족하여 더 보태니, 아마도 거꾸로 태현경의 이론에 근거해서 초씨의 잘못을 바로잡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當朞
易卦之位, 震東離南, 兌西坎北者爲一說, 十二辟卦分屬十二辰者爲一說. 及(3-1668)焦延壽爲卦氣直日之法, 乃合二說而一之, 旣以八卦之震、離、兌、坎二十四爻直四時, 又以十二辟卦直十二月, 且爲分四十八卦爲之公、侯、卿、大夫, 而六日七分之說生焉. 若以八卦爲主, 則十二卦之乾不當爲巳之辟, 坤不當爲亥之辟, 艮不當候於申酉, 巽不當候於戌亥. 若以十二卦爲主, 則八卦之乾不當在西北, 坤不當在西南, 艮不當在東北, 巽不當在東南. 彼此二說, 互爲矛盾. 且其分四十八卦爲公、侯、卿、大夫以附於十二辟卦, 初無法象, 而直以意言, 本已無所據矣, 不待論其減去四卦二十四爻而後可以見其失也. 揚雄太元次第乃是全用焦法, 其八十一首蓋亦去其震離兌坎者, 而但擬其六十卦耳. 諸家於八十一首多有作擬震、離、坎、兌者, 近世許翰始正其誤. 至立踦贏二贊, 則正以七百二十九贊又不足乎六十卦六日七分之數而益之, 恐不可反據其說以正焦氏之失也.
[제목] 공영달(孔潁達)에 관하여.
[선생의 의견] 공씨(孔氏)의 ‘이것이 한 번 헤아리는 것이다.(是一揲也)’라고 한 네 글자에 대해서 선유(先儒)들 중에 그 잘못을 인식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대가] 이를 바로잡는 논의를 펼치니 참으로 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영달의] 소문(疏文) 후반부를 상세히 검토해보면 공씨(孔氏) 실제로 설시(揲蓍)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이해가 미숙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쉽사리 차질이 생기게 되어 이 네 글자를 잘못 보태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는 ‘괘륵(掛扐)한 곳에서 합한다(合於掛扐之處)’고 말하고, 또 ‘괘륵(掛扐)한 한 곳에서 합하여 모두 건다.(合於掛扐之一處而總掛之)’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큰 수에 있어서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孔潁達
孔氏‘是一揲也’四字, 先儒莫有覺其誤者. 今論正之, 信有功矣. 但細詳疏文後段, 孔氏實非不曉揲法者, 但爲之不熟, 故其言之易差而誤多此四字耳. 其云‘合於掛扐之處’, 又云‘合於掛扐之一處而總掛之’, 則實有誤, 然於其大數亦不差也.
[제목] 필중화(畢中和)에 관하여.
[선생의 의견] 필씨(畢氏)의 설시(揲蓍)법은 [공영달의] 소의(疏義)에 비해 상세합니다. 유자후(柳子厚)가 유몽득(劉夢得)을 나무라면서 [필중화의 학설은 그] ‘배움이 천박하다(膚末於學)’고 평가한 것은 잘못입니다. 필씨는 ‘[하나의 효를 생성해 내기 위해] 세 차례에 걸처 설시(揲蓍)하는데 그 때마다 각각 하나를 건다(三揲皆掛一)’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계상 상, 9장에 나오는] ‘네 번 경영한다(四營)’는 의미에 정확하게 부합합니다. 오직 세 차례에 걸처 설시(揲蓍)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괘(掛)’와 ‘륵(扐)’을 세 손가락 사이에 나누어 둔다(分措)고 한 것은 약간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큰 수에 있어서는 또한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여일익삼(餘一益三)’이라 했습니다만 이는 유몽득(劉夢得)의 표현(立文)이 너무 간단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저절로 그러함(自然)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도(人意)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을 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공영달의 잘못과 함께 바로잡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실제 정황에 대해 더욱 연구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畢中和
畢氏揲法視疏義爲詳, 柳子厚詆劉夢得, 以爲膚末於學者, 誤矣. 畢論三揲皆掛一, 正合四營之義. 唯以三揲之掛扐分措於三指間爲小誤, 然於其大數亦不差也. 其言餘一益三之屬, 乃夢得立文太簡之誤, 使讀者疑其不出於自然而出於人意耳. 此與孔氏之失固不可不正, 然恐亦不可不原其情也.
정태지에게 답함 答程泰之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정태지(程泰之)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주자가 남강군 지사의 소임을 끝낸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는 우공(禹貢)에 등장하는 다양한 지명이 언급되며, 이것들과 주자 당시의 지형 지세 등이 매우 실증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주자 뿐만 아니라 정태지(程泰之)가 지리학에 매우 밝았음을 알 수 있으며, 고전에 대한 주자의 경험적 실증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저번에 [그대가] 우공(禹貢)에 대한 글을 완성해서 이미 주상(主上)께 주달(奏達)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차(轉借)하신지 여러 해 만에 드디어 온전한 것을 얻게 되었군요. 그러나 그림이 부실하고 맞지 않은데도 간혹 고구(攷究)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근래에 온릉(溫陵)에서 간행한 판본을 보니 그림에 대한 해설이 붙어 있는데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 쉽게 설명하고 있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이 책이 지금까지 전해온 것은 배우는 자들에게 보탬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지난번 제가 남강(南康)에 2년 동안 있을 때입니다만, [우공(禹貢)에 따르면] 그 남강 지역이 팽려(彭蠡)․구강(九江)․동릉(東陵)․부천원(敷淺原)의 사이에 있어야만 하는데도, 그 산과 강의 지형을 실제로 살펴보니 [실제 지형이 우공과는] 자못 상응하지 않는 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이론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만, 아마도 조씨(晁氏)의 학설 중에 [우공의] 구강(九江)․동릉(東陵)을 [현재의] 동정(洞庭)․파릉(巴陵)이라고 한 것은 믿을 만한 듯 합니다. 대체로 장강(長江)은 풍(灃)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가 동정(洞庭)에 이르고, 파릉(巴陵)은 또 동정(洞庭)의 동쪽에 있습니다. 만일 [우공(禹貢)의] 구강(九江)이 오늘날의 강주(江州) 지역이라고 한다면 그 아래 조금 동쪽으로 가면 곧 마땅히 팽려(彭蠡)의 입구가 될 것이니, 서경 ‘우공(禹貢)편’에서 “동릉에 이른 연후에 동쪽으로 가고 북으로는 회수에 모인다(至東陵然後東迆, 北會于匯)”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熹昨聞禹貢之書已有奏篇, 轉借累年, 乃得其全. 猶恨繪事易差, 間有難攷究處. 近乃得溫陵印本, 被圖按說, 如指諸掌, 幸甚幸甚! 此書之傳, 爲有益於學者. 但頃在南康兩年, 其地宜在彭蠡、九江、東陵、敷淺原之間, 而考其山川形勢之實, 殊不相應. 因考諸說, 疑晁氏九江東陵之說以爲洞庭巴陵者爲可信. 蓋江流自灃而東, 卽至洞庭, 而巴陵又在洞庭之東也. 若謂九江卽今江州之地, 卽其下少東便合彭蠡之口, 不應言‘至東陵然後東迆, 北會于匯’也.
백씨(白氏)가 논한 부천원(敷淺原)은 또한 그 나름대로 일리(一理)는 있지만 미진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공’편의 경문(經文)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천원은 마땅히 형산(衡山) 동북쪽의 한 갈래가 끝나는 곳입니다. 아마도 지금의 여부(廬阜)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증거할만한 글이 없습니다. 덕안현(德安縣)에 있는 부양산(敷陽山)은 여산(廬山)의 서남쪽에 있기 때문에 ‘부양(敷陽)’라고 하는 것이지 그 지역을 가리켜서 부천원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과거의 설명(舊說)처럼 부양산을 부천원이라고 한다면 이 산은 매우 작고 또 산맥이 끝나는 곳이 아닙니다. 만일 조씨의 설명처럼 [부천원이] ‘장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오늘날의 경구(京口)이니, 경구를 지나치는 강은 또 구강(九江)에만 그치지는 않습니다. 만일 ‘형산(衡山)이 동북쪽으로 끝나는 곳’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이] 여부(廬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대체로 민산(岷山)에서부터 동남쪽으로 가다보면 형산에 이르고, 또 형산에서 동북쪽으로 가다보면 이곳에 이르니 구강(九江)의 원천은 이 세 산의 북쪽에서 나와서 모두 동정(洞庭)에서 모여서 민강(岷江)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형산으로부터 여기에 이르는 것은 반드시 구강을 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세(地勢)를 고찰해서 망령되게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니, [그대가] 다른 책을 참고해보면 나의 말과 합치될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서(著書)의 내용 가운데에는 억탁(臆度)한 곳이 많고, 모든 내용이 반드시 몸소 가서 조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모든 설명에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저서에 기록된 내용이] 반드시 오늘날의 안목으로 친절(親切)하고 저명(著明)하게 살피는 것 만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합하(閤下)께서는 지난 번 여러 지역을 이곳저곳 많이 경행(經行)하셨고 또 이 일에 뜻을 둔 지도 오래되었으며 이 방면에 관해 기람(記覽)하신 것도 풍부하시니, [이상과 같은 나의 생각에 대해] 아마도 반드시 바로잡아주실 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문득 감히 의심나는 것을 [그대에게] 올리니, 그대의 가르침이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白氏所論敷淺原者, 亦有理而未盡. 蓋詳經文, 敷淺原合是衡山東北一支盡處, 疑卽今廬阜, 但無明文可考耳. 德安縣敷陽山正在廬山之西南, 故謂之敷陽, 非以其地卽爲敷殘原也. 若如舊說, 正以敷陽爲敷淺原, 則此山甚小, 又非山脈盡處. 若遂如晁氏之說, 以爲江入海處, 則合是今京口, 所過之水又不但九江而巳也. 若以衡山東北盡處而言, 卽爲廬阜無疑. 蓋自岷山東南至衡山, 又自衡山東北而至此, 則九江之原出於此三山之北者, 皆合於洞庭而注於岷江, 故自衡山而至此者必過九江也. 此以地勢考之, 妄謂如此, 不審參以他書, 其合否又如何. 但著書者多是臆度, 未必身到足歷, 故其說亦難盡據, 未必如今目見之親切著明耳. 閤下向者固嘗經行, 而留意之久, 記覽之富, 其必有以質之. 故敢輒獻所疑, 伏惟有以敎之, 幸也.
정태지에게 답함 答程泰之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정태지(程泰之)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주자가 남강군 지사의 소임을 끝낸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는 정태지(程泰之)가 지은『역로통언(易老通言)』의 내용과 관련하여,『노자(老子)』15장의 내용 중 ‘엄약객(儼若客)’이라 할 때의 ‘객(客)’이 간혹 ‘용(容)’자로 된 판본이 있지만 ‘객(客)’으로 된 것이 옳음을 논증하고 있다.
병(病)으로 시달리는 가운데 [그대가]『주역』과 『노자』를 주제로 해서 새로이 쓴 책(易老新書)의 깊은 뜻을 엿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이 저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뜻이 깊고도 멀며 오묘하면서도 넓어서, 선배 유학자들조차 이러한 생각에 미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 도중(道中)에 흔들리는 남여(籃輿)로 인해, 정신과 생각(神思)이 혼미하고 심란(昏憒)한지라 아직도 여전히 [그대 글의] 깊고도 오묘한 뜻(底蘊)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노자(老子)』15장에 나오는] ‘엄약객(儼若客)’이라 할 때의 ‘객(客)’을 옛적에는 다만 ‘용(容)’자로 된 판본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황문(蘇黃門)도 [이 ‘용(容)’자를] ‘용모를 다스림이 게으르지 않음(修容不惰)’이라는 의미로 풀이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나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노자의 본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뒤에 [노자의] 이 구절을 인용한 상서(相書) 한 권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이 ‘용(容)’자가 ‘객(客)’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나의 의문이] 풀리게 되었는데, 『노자(老子)』의 이 일곱 구절에는 세 협운(三協韻)이 있는데, ‘객(客)’으로 ‘석(釋)’에 운을 맞추어보면 부계(符契)와 같이 들어맞습니다. 또 여기(『노자(老子)』15장)에서 ‘약모(若某...)’라 한 경우는 모두 실제 사물(事物之實)이 있습니다. 이른바 ‘객(客)’이라 한 것은 또한 ‘감히 주인행세를 할 수 없어 오래된 일(故事)에 간여하지 않으며, 그 용모가 엄숙한 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근래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노자주석본을 보니 그곳에서도 ‘객(客)’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고본(古本)에는 반드시 재고해볼만한 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비록 큰 의미(大義)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만일의 토론에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나의 생각에 대해]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그려.
病中得窺易老新書之祕, 有以見立言之指深遠奧博, 非先儒思慮所及矣. 尙以道中籃輿搖兀, 神思昏憒, 未容盡究底蘊. 獨記舊讀‘儼若客止’作‘容’字, 而蘇黃門亦解爲修容不惰之意, 嘗疑此或非老子意. 後見一相書引此, 乃以‘容’字爲‘客’字, 於是釋然, 知老子此七句而三協韻, 以‘客’韻‘釋’, 脗若符契. 又此凡言‘若某’者, 皆有事物之實. 所謂客者, 亦曰不敢爲主而無與於故事, 其容儼然耳. 近見溫公注本亦作‘客’字, 竊意古本必更有可考者. 雖非大義所繫, 然恐亦可備討論之萬一. 不審臺意以爲如何?
이수옹에게 답함 答李壽翁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이수옹(李壽翁)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가을에 씌여진 것이다. 당시 주역을 깊이 연구한 사람으로 알려진 이수옹(李壽翁)은 평소 마의역설(麻衣易說)을 좋아했는데, 주자는 이 편지를 통해 마의역설(麻衣易說)이 대사유(戴師愈)의 위작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저(熹)는 일찍부터 시랑(侍郞)께서 역학(易學)의 오묘함을 아시어 이굴(理窟)에 깊이 나아가셨다는 소문을 듣고서, 경전(經傳)을 들고 [시랑께] 배우러 가지 못한 것을 매번 한(恨)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처럼 가르침을 주시니 경계하여 살피게 되는 점(警省)이 많습니다. 마의역설(麻衣易說)에 관해서는 저도 오래전에 이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항상 그 문자와 언어가 오대(五代)에서 국초(國初) 시기의 체제(體製)와는 다르다는 점을 의심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의리(義理)는 더욱 천속(淺俗)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이 책은 그저 최근 30년에서 50년 이래 어떤 사람이 불로(佛老)와 술수가(術數家)의 서여(緖餘)를 끌어 모아 지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일찍이 [내가 읽은] 그 책 뒤에다 몇 마디를 적어(嘗題數語) [주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이 곳에 부임해 와서 대(戴)씨 성을 가진 어떤 주부(主簿)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유(師愈)인데, 지금의 인본(印本) 권말(卷後)에 발문을 쓴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제가 이 분을 만나던] 처음에는 [그 전에 마의상서라 하는] 이 책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대사유(戴師愈)의 주역해설이 오로지 마의(麻衣)를 근본(宗)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자주 확인할 수 있었기에 [나는] 그분이 주역이론을 전수한 내력에 관해 물어보니, 그는 숨기고 말하지 않더군요. 그 후에 [저는] 그가 저술한 다른 책을 얻어 살펴보니 그 문체와 의상(意象)이 이른바 마의역설(麻衣易說)이라는 것과 흡사한 점이 많았고, 중간 중간에 [이 마의역설(麻衣易說)을] 부회(附會)하고 가탁한 말이 많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나는 그 책이 바로 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 사실 여부를] 여러 사람들(邦人)에게 두루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 비록 그 책이 명백하게 위작(贋作)이라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가 누구로부터 그의 역학을 전수(傳授)했는지에 관해서도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나는 마의역설(麻衣易說)은 바로 이 사람이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사람은 이미 연로하고 병들어 그 정신이 혼미하고 막혀(昏塞) 있었기에 이를 심각하게 문제 삼기 어려웠습니다. 이윽고 그분이 돌아가시게(物故) 됨에 따라 결국 다시는 [그에게 이 문제를] 상세하게 따져 묻는 것(致詰)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책을 상세히 살펴보니, 곧 마의(麻衣)의 본문(本文) 및 [이 본문에 대해] 진(陳)、이(李)、대(戴)씨가 달았다는 주석(注)까지 해서 [이 책의 저자로 되어 있는] 네 분(四家)의 글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니, 이 또한 그 책이 대씨(戴氏)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책의 의미(義理)에 관해서는 제가 보기에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어르신께서 깨우쳐주신 것을 바탕으로 해서 마땅히 제 나름대로 다시 고정(考訂)을 해서, 다른 날 따로 가르침을 구하겠습니다. 정군(程君)의『시설(蓍說)』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현재 진현(進賢)의 현령(県令)으로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아 왔습니다만, 그는 참으로 개제(愷悌)하고 박아(博雅)한 군자(君子)입니다. [그는『시설(蓍說)』이 외에도]『역설(易説)』이 있고, 또 전제(田制)에 관한 글도 있습니다. 근자에 그 인본(印本) 및 판각(板刻)된 범백달(范伯達) 어르신의『부전설(夫田說)』을 부쳐왔기에 이제 이를 각각 한 편씩 정납(呈納)합니다. 어르신께서 보아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 외에도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흉년으로 인해 조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군중(郡中)에 일도 많고 이 편지를 전해드릴 심부름꾼(便人)을 머물러 둔 지도 오래인지라 우선 거칠게 몇 말씀 갖추어 답장 올립니다. 조만간에 따로 편리한 시기를 살펴서 어르신의 가르침에 대해 인사드리겠습니다.
熹竊嘗聞之, 侍郞知易學之妙, 深造理窟, 每恨不得執經請業. 玆辱誨諭, 警省多矣. 麻衣易說熹舊見之, 常疑其文字言語不類五代國初時體製, 而其義理尤多淺俗, 意恐只是近三五十年以來人收拾佛老術數緖餘所造. 嘗題數語於其後, 以俟知者. 及去年至此, 見一戴主簿者, 名師愈, 卽今印本卷後題跋之人. 初亦忘記其(3-1672)有此書, 但每見其說易專以麻衣爲宗, 而問其傳授來歷, 則又祕而不言. 後乃得其所著他書觀之, 則其文體意象多與所謂麻衣易說者相似, 而間亦多有附會假託之談, 以是心始疑其出於此人. 因復徧問邦人, 則雖無能言其贋作之實者, 然亦無能知其傳授之所從也. 用此決知其爲此人所造不疑. 然是時其人已老病昏塞, 難可深扣, 又尋卽物故, 遂不復可致詰. 但今考其書, 則自麻衣本文及陳、李、戴注題四家之文如出一手, 此亦其同出戴氏之一驗. 而其義理, 則於鄙意尤所不能無疑. 今以台諭之及, 當復試加考訂, 他日別求敎也. 程君蓍說亦嘗見之, 其人見爲進賢令, 至此數得通書, 愷悌博雅, 君子人也. 自別有易說, 又有田制書, 近寄印本及所刻范伯達丈夫田說來. 今各以一編呈納, 伏幸視至. 他所欲請敎者非一, 屬以歲凶, 郡中多事, 留此便人日久, 且草具此拜禀, 早晩別尋便拜啓次.
진체인에게 답함 答陳體仁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진체인(陳體仁)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는 이 편지가 씌여진 시기에 대한 고증을 해 놓지 않고 있다. 시집전(詩集傳)의 초고를 완성한 정유년(丁酉, 1177년, 순희4년, 주자 48세) 전후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지만, 정확한 년대를 알 수 없다. 이 편지의 주제는 시와 음악 중 어느 것이 근본인가 하는 문제이다. 주자는 “시(詩)는 본래 음악(樂)을 위해 지은 것이다”라는 진체인(陳體仁)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시(詩)는 본래 뜻(意)을 표현하기 위해 창작한 것”이기 때문에 “시(詩)는 뜻(志)에서 나온 것이고, 음악(樂)은 시(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뜻(志)이야말로 시의 근본이고 음악(樂)은 시의 말단(末)이다”라고 주장한다.
별지(別紙)를 통해 [그대는] ‘시(詩)를 말한 뜻(說詩之意)’을 [더욱 상세하게 나에게] 열어 보여주는군요. 이로 인해 저는 한두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감히 스스로 외면할 수 없어서, 그대에게 몇 가지 질정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대의 가르침에 따르면, “시(詩)는 본래 음악(樂)을 위해 지은 것이다. 이 때문에 요사이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소리(聲)를 가지고 [시를] 연구해 나가야만 하니, 그리하다보면, 시(詩)가 [소리 즉 음악과 무관하게] 구차스럽게 지어진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론(議論)이 훌륭하긴 하지만 저로서는 의심이 없을 수가 없군요. 대체로『서경(書經)』「우서(虞書)」를 연구해보면, 시(詩)는 본래 [시인이 품고 있던] 뜻(意)을 표현하기 위해 창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시(詩)가 창작되었을 때 아직 노래(歌)는 없었으며, 노래(歌)가 생겨났을 때도 아직 악(樂)은 있지 않았습니다. [시를] 소리(聲)내어 길게 따라 읽고(依永), 12율(律)을 가지고 소리에 맞추어(和聲) 나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악(樂)이 시(詩)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시가 악을 위해 지어진 것은 아닙니다. 삼대(三代)의 시기에는 예악(禮樂)이 조정에서만 쓰이고 여항(閭巷)에는 알려지지 못했지만 배우는 자들은 그 말을 외움(諷誦)으로써 그 뜻(志)을 알아내었으며, 그 소리(聲)를 읊조리고 그 악기를 잡아 절도에 맞게 춤추고 뛰면서(舞蹈) 그 마음을 길러나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성(聲)과 악(樂)이 시(詩)를 보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에서 흥기하고, 악에서 완성한다(興於詩, 成於樂)’고 했으니, 그 추구해 나감에 있어서는 본래 순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무릇 성현(聖賢)들이 시(詩)를 언급할 때 소리(聲)를 위주로 한 경우는 적고 그 뜻(義)을 계발(啓發)한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중니(仲尼)께서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고 하신 것이나, 맹자(孟子)께서 ‘<보는 자의> 뜻으로써 <작자의> 뜻에 맞추라(以意逆志)’하신 것은 참으로 ‘시(詩)는 그 뜻(志)을 보존하는 데 근본을 둔다’고 여겼기 때문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뜻(志)을 얻고도 그 소리(聲)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 뜻(志)도 얻지 못했는데도 그 소리(聲)에 통(通)할 수 있는 경우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설사 [그 뜻(志)도 얻지 못한 채] 소리(聲)에 통(通)한 경우가 있다 해도, 그것은 그저 종이나 북의 소리일 뿐이니, 이 어찌 聖人께서 ‘악(樂)이다, 악(樂)이다 하지만, [종이나 북(鍾鼓)을 말하는 것이겠는가?](樂云樂云)’라고 하신 그 뜻이 아니겠습니까?
蒙別紙開示說詩之意尢詳, 因得以窺一二大者. 不敢自外, 敢以求於左右. 來敎謂詩本爲樂而作, 故今學者必以聲求之, 則知其不苟作矣. 此論善矣, 然愚意有不能無疑者. 蓋以虞書攷之, 則詩之作本爲言志而已. 方其詩也, 未有歌也, 及其歌也, 未有樂也. 以聲依永, 以律和聲, 則樂乃爲詩而作, 非詩爲樂而作也. 三代之時, 禮樂用於朝廷而下達於閭巷, 學者諷誦其言以求其志, 詠其聲, 執其器, 舞蹈其節以涵養其心, 則聲樂之所助於詩者爲多. 然猶曰‘興於詩, 成於樂’, 其求之固有序矣. 是以凡聖賢之言詩, 主於聲者少而發其義者多. 仲尼所謂‘思無邪’, 孟子所謂‘以意逆志’者, 誠以詩之所以作本乎其志之所存, 然後詩可得而言也. 得其志而不得其聲者有矣, 未有不得其志而能通其聲者也. 就使得之, 止其鍾皷之鏗鏘而已, 豈聖人‘樂云樂云’之意哉?
하물며 지금은 공맹(孔孟)의 시대로부터 천 여년이 떨어진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악(古樂)은 흩어지고 없어져서 다시 상고할 수조차 없게 되었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소리(聲)로서 시(詩)를 구(求)하고 싶어 한다 하더라도, 잘 모르긴 합니다만 과연 고악(古樂) 가운데 남아있는 소리(遺聲)를 지금 모두 미루어 얻어낼 수 있을까요? 305편 모두를 음률(音律)로 맞추고 가락에 맞추어 노래(絃歌)할 수 있도록 복원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참으로 [이상과 같은 목표를] 이미 얻었다고 한다면 시(詩)의 이해에 도움 되는 바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정도로는] 아직 시의 근본을 터득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상과 같이 설정된 목표를 이미 성취했다고 해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와 같은 목표를] 반드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그대가] 강론(講論)하신 것은 [그저 실제로 먹을 수 없는] 떡을 그리는 것(畫餅)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받지 않을까요?
况今去孔孟之時千有餘年, 古樂散亡, 無復可考, 而欲以聲求詩, 則未知古樂之遺聲今皆以推而得之乎? 三百五篇皆可協之音律而被之絃歌已乎? 誠旣得之, 則(3-1674)所助於詩多矣, 然恐未得爲詩之本也. 况未必可得, 則今之所講, 得無有畫餅之譏乎?
이 때문에 저는 가만히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즉 ‘시(詩)는 뜻(志)에서 나온 것이고, 음악(樂)은 시(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뜻(志)이야말로 시의 근본이고 음악(樂)은 시의 말단(末)이다. 따라서 비록 말단이 없어진다 해도 근본은 얼마든지 보존가능하다. 걱정되는 것은 배우는 자가 마음과 기운을 평화롭게 하여 자연스럽게 [시를] 읊조리면서 정(情)과 성(性)이 중화(中和)한 상황에서 시를 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적에도 시에 관한 한] 이 정도는 터득한 연후에 비로소 시를 말할 수 있으며, [그리된 이후에 남아있는 문제는] 다만 터득한 것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일 뿐이다. 순(舜)임금과 같은 문덕(文德)을 지니고 있다면, 그 소리(聲)가 그대로 율(律)이요, 그 몸이 그대로 법도(度)이니, 굳이 소소(蕭韶)나 이남(二南)같은 소리(聲)가 창작되지 않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비록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그 이치는 대체로 속일 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남(二南)시를 왕자(王者)와 제후(諸侯)의 민요(風)로 나누고 있는 이른바 대서(大序)의 설명이 그리 잘못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서(大序)에서 ‘성(聖)은 깊고 현(賢)은 얕다(聖賢淺深)고 논변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해설자의 지나친 천착입니다. 정부자(程夫子)께서는 “이남(二南)은 역(易)의 건곤(乾坤)과 같다”고 하셨으며, 구산 양씨(龜山楊氏)는 “[이남(二南)은] 한 몸으로서 서로 이루어주는 관계이다(一體而相成)”라고 했습니다. 그 설명이 온당하니 시험 삼아 한 번 살펴보시면 어떨까요? 소남(召南)에 나오는 ‘부인(夫人)’은 아마도 당시 제후의 부인(夫人) 중에 문왕(文王)과 태사(太似)의 교화를 입은 자인 듯합니다. 이남(二南)의 시들 가운데 나타나는 ‘응(應)’을 오로지 악성(樂聲)이 응(應)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될 듯하며, 틀림없이 그 사이에는 합당한 이치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일 없는 이치(無事之理)나 이치 없는 일(無理之事)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직 그 이치에 나아가 [일을] 추구(求)해야 할 것이니, 이치가 터득되면 일은 그 가운데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故愚意竊以爲詩出乎志者也, 樂出乎詩者也. 然則志者詩之本, 而樂者其末也. 末雖亡, 不害本之存, 患學者不能平心和氣, 從容諷詠以求之情性之中耳. 有得乎此, 然後可得而言, 顧所得之淺深如何耳. 有舜之文德, 則聲爲律而身爲度, 蕭韶․二南之聲不患其不作. 此雖未易言, 然其理蓋不誣也. 不審以爲如何? 二南分王者諸侯之風, 大序之說恐未爲過. 其曰聖賢淺深之辨, 則說者之鑿也. 程夫子謂二南猶易之乾坤, 而龜山楊氏以爲一體而相成, 其說當矣. 試考之, 如何? 召南‘夫人’恐是當時諸侯夫人被文王太似之化者, 二南之‘應’, 似亦不可專以爲樂聲之應爲言. 蓋必有理存乎其間, 豈有無事之理․無理之事哉? 惟卽其理而求之, 理得則事在其中矣.
안로자에게 답함 答顔魯子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안로자(顔魯子)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안로자(顔魯子)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와 함께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가을 경에 씌여진 것이다. 심의(深衣)를 중심으로 복제(服制) 문제를 논하고 있다.
저(熹)는 그저께 [그대로부터] 심의(深衣)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삼가 심의(深衣)와 아울러 폭건대대(幅巾大帶)에 관한 저의 생각을 그대에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이는 모두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유제(遺製)에 따른 것입니다. 다만 띠(帶)는 마땅히 맺는 곳에서 약뉴(黑紐)의 ‘조(組)’와 합해야 하는 것이지만, 아직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설명이『서의(書儀)』본장에 나타나 있으니 고찰해본 후 더 보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흑리(黑履)’도 있는데 이 역시『서의(書儀)』에 보입니다만, 이 점에 관해서는 감히 [그대에게 자세한 내용을] 알려드리지(納呈) 못했습니다. 고례(古禮)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됨에 따라 [지금까지] 고례(古禮)의 관복(冠服)에 관한 제도가 겨우 보존은 되고 있으나 [상세히] 고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먼 곳의 선비들(士子) 또한 자주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왕왕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보곤 하지만, 궤이(詭異)하기만 하지 도무지 법도에는 맞지 않습니다. 거의 ‘요망한 옷을 입는 것(服妖)’에 가까우니, 매우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만약 학식이 넓으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가 고례(古禮)를 표장(表裝)해서 넓힐 수 있다면 민멸(泯滅)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텐데요.
熹昨蒙諭及深衣, 謹幷幅巾大帶納上, 皆溫公遺製也. 但帶當結處合有黑紐之(3-1675)組, 所未能備. 其說見於書儀本章, 可考而增益也. 又有黑履, 亦見書儀, 此不敢納呈. 去古益遠, 其冠服制度僅存而可攷者獨有此耳. 然遠方士子亦所罕見, 往往人自爲制, 詭異不經, 近於服妖, 甚可歎也. 若得當世博聞好禮者表而出之, 以廣其傳, 庶幾其不泯乎.
안로자에게 답함 答顔魯子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안로자(顔魯子)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7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안로자(顔魯子)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가을 경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의 앞 부분에서는 앞의 제1서에 이어 심의(深衣)의 복제(服制) 문제를 논하고 있으나, 뒷 부분에서는 신축(辛丑)년 가을 [주자가] 직비각(直秘閣)에 제수된 일을 말하면서, 그가 한 일은 모두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며, 구휼미를 사들여 백성들을 구휼하게 된 것은 남강의 몇 몇 부호들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마땅히 상을 받아야 한다는 점 등을 말하고 있다.
심의(深衣)의 띠 매는 것(約紐)에 관하여 그대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이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빌려 온 책 속에도 이 제도에 관해서는 빠져 있더군요. 그러나 그대가 “‘조(絛)는 신(紳)과 비슷하지만 폭을 더 넓게 한다(絛似紳而加闊)’고 하셨는데, 이는 곧 지금의 ‘편조(扁絛)와 비슷합니다만 그 제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지금 [그대는] “법복(法服) 배후(背後)에 ‘수(綬)’를 늘어뜨리는 것도 또한 옛날에 있었던 ‘조(組)’나 ‘수(綬)’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모습이다”고 하셨습니다만, 그것을 어떤 것으로 만드는지에 관해서는 기록하지 않으셨더군요. 참고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바로잡아서 다시 가르쳐주실 때를 기다려야 될 것 같습니다. 또 그대는 경망(景望)의 겸괘(謙卦) 기영(忌盈)에 관한 학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만 아직도 그와 관련된 자세한 곡절(曲折)을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설씨(薛氏)의 귀신(鬼神)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저 또한 평소부터 의심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를 직접 만나 그 취지에 대해 따져 물어 그가 미혹된 바를 떨어 없애지 못하고 있으니, 그 점이 한이 될 뿐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간혹 언어를 통해 밝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으니, 그럴 경우 편지를 통해 [그에게] 의사전다를 한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제(熹)가 돌연히 전례에 따라 오은(誤恩)을 입게 된 것은, 한재(旱災)를 불러들인 나의 죄를 너그러이 봐 주시고 나의 미미한 노고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신 데 따른 것으로써 이 모두가 그대(推借)의 힘이 미친 데서 나온 결과입니다. 처음에는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마침 남강군 사람들 중 진제(賑濟)에 응모(應募)해주신 여러 집에 대해서는 마땅히 관자금(官資)을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관(官)에서는] 이를 아직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의리상 [관자금을] 먼저 받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면, [저로서는 이 점을 시정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욱 과격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결국은] 신당(申堂)이 사면(辭免)된 것과 같은 처지를 면키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점에 대해 아울러 빠른 시기 안에 추은(推恩)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그 곡절(曲折)에 관해 알고 싶어 하실 것 같아 이상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만, 본래부터 감히 일부러 상도(常道)를 벗어난 행동을 하려던 것(矯激)은 아닙니다.
蒙諭深衣約紐, 正所未曉. 向借得者, 亦闕此制. 但旣云‘絛似紳而加闊’, 卽與今之扁絛相似, 不知其制果如何. 又今法服背後垂綬亦是古組綬之遺象, 不記其以何物爲之. 恐亦可參考, 却俟訂正垂敎也. 又承垂諭景望謙卦忌盈之說, 未審曲折. 幷薛氏鬼神事, 於此素亦未能無疑. 顧恨未得面扣其旨, 以祛所惑. 或恐有可以言語發明者, 幸因筆及之也. 熹忽例蒙誤恩, 寬其致旱之罪而過錄微勞, 皆出推借之及. 初不敢辭, 適郡人應募賑濟者數家合得官資皆未放行, 義難先受, 不免申堂辭免, 幷乞早與推恩矣. 恐欲知其曲折, 故敢及之, 非敢固爲矯激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