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66

황성 2025. 8. 10.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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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육상산 형제 및 진량과의 변론) (陸陳辯答)

 

 

 

육자수에게 답함(答陸子壽)

 

해제1177(孝宗 淳熙4, 丁酉), 주자 48세 때의 편지이다. 󰡔상산년보󰡕에 의하면 육()씨 형제는 이 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주자에게 상례의 절차에 대하여 물었는데, 이 편지는 그에 대한 주자의 대답이다. 이 편지에서는 특히 부묘의 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편지에서 부묘(祔廟)의 예에 관해 언급하셨습니다. 편지에서 선생께서 고찰하신 것은 이미 정밀합니다. 그런데도 겸손하게 널리 물으시어 이렇게 소견이 좁고 견문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르렀는데, 제가 어찌 그것을 충분히 알겠습니까? 그러나 저도 과거에 상을 당한 적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여러 성현의 말을 살펴보아도, 공자의 말씀은 영원히 바꿀 수 없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일년이 되어서 신()으로 모신다는 뜻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보아도 역시 타당합니다. 그러나 그 예법의 규정과 순서를 지금은 살펴볼 수 없습니다. ()나라의 예제(禮制)에는 󰡔의례(儀礼)󰡕라는 책이 있어서, 처음 돌아가실 때부터 소대상(小大祥)과 담제(禫祭)에 이르기까지 그 규정과 제도가 자세합니다. 그러므로 사마광의 󰡔서의(書儀)󰡕도 비록 공자의 말씀을 기록하긴 했지만, 결국에는 󰡔의례󰡕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사마광의 뜻은, 의심스러운 것을 없애는데 엄격히 하여, 이미 조목이 자세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비록 공자의 말이라 할지라도 따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한 의도는 매우 좋지만, ()씨는 대개 부묘를 하고 이미 침전(寝殿)에 반혼하고 소상(小祥)을 지낸 다음에 사당으로 옮긴다고 하였고, 󰡔춘추좌전󰡕에도 단독으로 신주에 제사지낸다는 문장이 있으니, 이것은 옛 사람들의 부묘에도 본래 궤연을 철거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여기에서 아마도 상세하게 고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개원례󰡕의 설명은 고씨가 이미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대상(大祥)에서 영좌(靈座)를 철거한 후, 다음날 사당에 부묘한다는 말이니, 차마 하루도 돌아갈 곳이 없게 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이미 궤연을 철거하고 나서 아직 부묘하기 전에 오히려 하루 저녁이 있어, 오랫동안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마침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개 이것은 모두 온당하지 않은 곳이 있으니, 아마도 󰡔의례󰡕와 온공(温公)의 설을 따르는 것만 못할 것이니, 차서와 절문 또한 곡진하여 자세한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궁의 여러 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존형께서는 부묘의 예를 어떻게 행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아직 하지 않으셨다면 어쩔 수 없이 반드시 고씨의 설을 따라야 합니다. 다만 상제(祥祭)를 지내는 날에 궤연을 철거할 수 없으니, 혹은 조금 가깝고 넓은 곳으로 옮긴다. 바로 다음날 신주를 받들고 부묘의 예를 행한 다음에 철거하시면, 오히려 그나마 예가 없는 데서의 예가 될 것입니다. 저의 의견은 이러한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答陸子壽

蒙喩及祔礼 此在高明考之必已精密 然猶謙遜博謀 及於浅陋如此 顧熹何足以知之 然昔遭喪禍 亦嘗考之矣 窃以為衆言淆乱 則折諸聖 孔子之言万世不可易矣 尚复何説 况期而神之之意 揆之人情 亦為允愜 但其節文次第 今不可考 而周礼則有儀礼之書 自始死以至祥禫 其節文度数詳焉 故温公書儀雖記孔子之言 而卒従儀礼之制 蓋其意謹於闕疑 以為既不得其節文之詳 則雖孔子之言亦有所不敢従者耳 程子之説意亦甚善 然鄭氏説 凡祔 已反于寝 練而後遷廟 左氏春秋伝亦有特祀于主之文 則是古人之祔固非遂徹几筵 程子於此恐其考之有所未詳也 開元禮之説 則高氏既非之矣 然其自説大祥徹霊坐之後 明日乃祔于廟 以為不忍一日未有所帰 殊不知既徹之後 未祔之前 尚有一夕 其無所帰也久矣 凡此皆有所未安 恐不若且従儀礼温公之説 次序節文亦自曲有精意 如檀弓諸説可見 不審尊兄今已如何行之 願以示教 若猶未也 則必不得已而従高氏之説 但祥祭之日未可撒去几筵 或遷稍近広処 直俟明日奉主祔廟然後撤之 則猶為亡於禮者之礼耳 鄙見如此 不審高明以為如何

 

 

육자수에게 답함 答陸子壽

 

 

해제이 역시 1177(孝宗 淳熙4, 丁酉)의 편지로 앞의 편지에 이어 육씨 형제의 모친상과 관련한 장례 절차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상례를 포함한 모든 예의절차는 결국 인정(人情)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부묘와 졸곡, 부묘한 후의 사당에서의 신주의 위치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선왕(先王)이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人情)에 연유한 것입니다. 길례(吉禮)와 흉례(凶禮) 사이에 그 변화가 점진적인 까닭에 처음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온전히 살아있는 분을 모시던 예[事生之禮]로 대우하다가,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는 신()으로 모십니다. 그러나 차마 완전히 변했다고는 인정할 수 없어서 신주를 정침(寢殿)에 다시 모시고 산 사람을 섬기는 예로 모시다가, 3년이 되어서 사당[]에 옮긴 후로는 온전히 신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 관한 문장이 경전(經傳)에 나타난 것이 매우 많아서, 비록 그 뜻을 말한 것은 없지만, 인정(人情)으로 헤아려보면 위에서 말한 예가 이러한 이유에서 나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당을 옮긴다[遷廟]는 구절은, 정현이 󰡔곡량전(穀梁傳)󰡕의 용례를 써서 소상을 지내고() 사당을 허문다는 설을 세웠고, 두씨(杜氏)는 가규(賈逵)와 복건(服虔)의 설을 써서 삼년(三年)으로 단정(斷定)하였습니다. 이런 학설들 사이의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은 비록 상고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곡량(穀梁)은 옛 사당[舊廟]을 허무는 것만을 말하고, 신주(新主)를 옮길 것은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것이 소상을 지내고 옛 신주를 옮긴다는 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겠으며, 삼년(三年)이 지나 신주(新主)를 들이는 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의 소()에서 정현(鄭玄)의 설을 해석하면서 󰡔주례󰡕사당에서 유()를 사용한다[廟用卣]’는 한 구절만 근거로 했으니, 또한 명백한 증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의 생각으로는 두예()의 설이 인정(人情)에 맞는 것 같습니다. 보내신 편지가 고증(考證)은 비록 상세하지만, 그 대강은 이미 길례(吉禮)를 지냈으면 다시 흉례를 재낼 수 없고, 이미 신()으로 모셨다면 다시 산 사람을 섬기는 예()로 대접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것은 옛 사람들이 길례와 흉례가 점차 변하는 것을 깊이 고찰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조상을 깊이 사랑하고 지극히 애통해 하는 인정을 돌이켜보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옛날에는 궤연은 상을 마칠 때까지 철거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정현과 두예를 힘써 꾸짖은 데에 이르면, 이것은 더욱 더 감히 그 명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에 의하면 소렴에는 석()이 있고, 우제(虞祭) 이후에 궤연을 설치하지만 졸곡 이후에는 다시 하실(下室)에서 궤식(饋食)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고금이 다름이 마땅한데 예법과 문물제도의 변화를 또한 깊이 고찰하지 않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례󰡕는 우제(虞祭)에서 부제(祔祭)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열흘이 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설치하고 철거하는 것이 이렇게 빨라서는 안 됩니다.

또 상을 마치고 궤연을 철거하고 사당에 세운다는 설은 듣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제후가 삼년상을 마치고 제사지내는 것은 노나라에서는 길체(吉禘)라 했고, ()나라에서는 체사(禘祀)라고 했으며, 󰡔󰡕의 소에서는 특사(特禘)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가 없어져 사대부 이하는 다시 고찰할 수가 없을 뿐입니다. 대개 지금의 󰡔의 글은 없어지고 빠진 것이 많으니, 어찌 그 글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 예가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사당을 허물면 소목(昭穆)의 자리가 바뀐다고 하신 것 역시 잘못입니다. 예의 전문가들의 설에 따르면 소()는 항상 소가 되고, ()은 항상 목이 됩니다. 그러므로 󰡔()󰡕에서는 문왕(文王)을 목고(穆考)라고 했고, 󰡔󰡕에서는 무왕(武王)을 소고(昭考)라고 한 것입니다. 󰡔좌전󰡕에 이르면 필()()()()문왕의 소()’가 되고, ()()()()무왕의 목()’이 된다고 했으니, ()와 목()의 자리가 어찌 새로운 신주를 부묘(祔廟)한다고 해서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소()의 신주가 부묘하면 두개의 소()가 번갈아 옮겨가고, ()의 신주가 부묘하면 두개의 목()이 번갈아 옮겨갈 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말할 급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다만 되는 대로 말하여 보내오신 편지에서 고찰한 것이 자세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임을 보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매 마다 사당을 달리했으므로 조부와 조고에 부묘하는 예가 있었다. 지금은 한 방에 같이 두었으니 한 사람에게만 부제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정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선생께서는 일찍이 관중(関中)에서 󰡔󰡕를 배우는 자들을 나무라시어 정의(情義)는 헤아리지 않고 예의 구절만을 쓰는 폐해가 있다고 했고, 여여숙은 경전을 지키고 옛것을 믿는 것으로 학자는 거의 과실이 없을 뿐이니, ()로써 예문(禮文)을 짓는 일은 덕이 성한 사람이 행하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 등은 실로 의리에 크게 해가 되는 것이 없으면, 구설(旧説)을 따르는 것만 못하니, 또한 부자께서 ()이라도 남겨두어서 예()를 아끼는 뜻입니다. 저는 󰡔예경󰡕에 익숙하지 않고, 고증 또한 자세하지 못한데 또 저의 생각을 이렇게 논했으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지 만은 않으니, 저는 항상 책을 두루 읽으며 일에 대처하고, 번잡하고 복잡하며 의심스러운 때에는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널리 수집하여 지당한 것을 구합니다. 혹 얻는 것이 없으면 또한 의심을 없애고 위태로움을 버린다는 생각으로 거기에 임합니다. 만약 문득 제가 대강 깨달은 한 이론으로 제가 궁구하지 못한 중론을 다 없애버린다면 거기에 대처하는 득실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마음의 도량 또한 넓지 못한 것이 됩니다. 천천히 보시고 저의 방자함을 용서해주십시오.

 

答陸子壽

先王制禮 本縁人情 吉凶之際 其変有漸 故始死全用事生之禮 既卒哭祔廟 然後神之 然猶未忍尽変 故主復于寝而以事生之禮事之 至三年而遷于廟 然後全以神事之也 此其禮文見於経伝者不一 雖未有言其意者 然以情度之 知其必出於此無疑矣 其遷廟一節 鄭氏用穀梁練而壊廟之説 杜氏用賈逵 服虔説 則以三年為断 其間同異得失雖未有考 然穀梁但言壊旧廟 不言遷新主 則安知其非於練而遷旧主 於三年而納新主邪 至於礼疏所解鄭氏説 但拠周礼廟用卣一句 亦非明験 故区区之意窃疑杜氏之説為合於人情也 来諭考証雖詳 其大概以為既吉則不可復凶 既神事之則不可復以事生之礼接爾 窃恐如此非惟未嘗深考古人吉凶変革之漸 而亦未暇反求於孝子慈孫深愛至痛之情也

至謂古者几筵不終喪而力詆鄭 杜之非 此尤未敢聞命 拠礼 小斂有席 至虞而後有几筵 但卒哭而後不復饋食於下室耳 古今異宜 禮文之変 亦有未可深考者 然周禮自虞至祔会不旬考日 不応方設而遽徹之如此其速也

又謂終喪徹几筵 不聞有入廟之説 亦非也 諸侯三年喪畢之祭 魯謂之吉褅 晉謂之褅祀 禮疏謂之特褅者是也 但其禮亡 而士大夫以下則又不可考耳 夫今之禮文 其残闕者多矣 豈可以其偶失此文而遽謂無此礼耶

又謂壊廟則変昭穆之位 亦非也 拠礼家説 昭常為昭 穆常為穆 故書謂文王為穆考 詩謂武王為昭考 至左伝 猶謂畢原酆郇為文之昭 邘晉応韓為武之穆 則昭穆之位 豈以新主祔廟而可変哉 但昭主祔廟則二昭逓遷 穆王祔廟則二穆逓遷爾 此非今者所論之急 但謾言之 以見来説考之未精類此

又謂古者毎代異廟 故有祔于祖父祖姑之礼 今同一室 則不当専祔於一人 此則為合於人情矣 然伊川先生嘗譏関中学礼者有役文之弊 而呂与叔以守経信古 学者庶幾無過而已 義起之事 正在盛徳者行之 然則此等苟無大害於義理 不若且依旧説 亦夫子存羊愛礼之意也 熹於礼経不熟 而考証亦未及精 且以遇意論之如此 不審高明以為如何 然亦不特如此 熹常以為大凡読書処事 当煩乱疑惑之際 正当虚心博釆以求至当 或未有得 亦当且以闕疑闕殆之意処之 若遽以己所粗通之一説而尽藤己所未究之衆論 則非惟所処之得失或未可知 而此心之量亦不宏矣 閑併及之 幸恕狂妄

 

 

 

육자미에게 답함 答陸子美

 

 

해제1186(송 효종 순희13, 丙午), 주자 57세 때의 편지로, 태극도설서명에 대해 논한 육자미의 편지에 답한 첫 번째 편지이다. 육자미는 주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렴계의 󰡔태극도설󰡕의 설은 주렴계의 또 다른 저서인 󰡔통서󰡕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보고 있으며, 그 근원은 도가(道家)에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자는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에 관한 유명한 명제인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은 하나의 사물과 같아져서 모든 조화의 근거가 되기에 부족하고,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은 공적에 빠져서 모든 조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로 󰡔태극도설󰡕이 유가(儒家)에 근본을 두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태극서명의 잘못에 대한 편지를 받아보니 지적하신 선생님의 뜻을 모두 알겠습니다. 그러나 태극서명두 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종전에는 감히 가벼이 논의하지 않았고, 그 사람의 확고한 견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문호에 의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반복하여 보아도 도리가 참으로 이와 같아 달리 입을 열어 말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이것은 제가 한 말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망령되이 저의 의견을 갑자기 말하였지만, 그 깊은 뜻을 다 드러낼 수도 없고 도리어 그것에 누가 될까 두려우니, 어찌 감히 스스로 그것을 부액(扶腋)한 공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보내오신 편지와 이전에 논하신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처음부터 태극서명의 말을 소홀히 하여, 깊이 생각하시지 않고 다만 스스로의 소견과 도리가 옳다고 여기셨습니다. 또 원래 그 위치에 이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곧 자신의 견해로 경솔하게 멋대로 배척하셨습니다. 지금 또한 세세하게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태극편의 첫 번째 한 구절이 선생께서 가장 배척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극(無極)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太極)은 하나의 사물과 같아져서 모든 조화의 근거가 되기에 부족하고,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은 공적에 빠져서 모든 조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이 한 구절은, 곧 그 말씀하시는 것이 정밀하고 미묘하고 무궁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 구절 아래에서 말하는 허다한 도리가 정연하고 맥락이 가지런하여 어지럽지 않아서, 지금 다만 목전에 있는 것이지만 고금에 두루 미치며, 뒤집어지거나 깨어질 수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이렇게 분명하고 간단명료함을 일찍이 깨닫지 못한 듯하니 의심할만한 것은 자신에게 있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명에 관한 설에 이르면 더욱 더 분명합니다. 이제 역시 첫 구절로 논해보겠습니다. 사람의 한 몸은 실로 부모가 낳은 것이지만 그러나 부모가 부모가 되는 까닭은 건곤(乾坤)입니다. 부모로 말하자면 한 사물마다 한 부모가 있습니다. 건곤으로 말하면 만물은 모두 한 부모가 있을 뿐입니다. 만물이 이미 한 부모를 가지고 있으니, 내 몸이 내 몸이 되는 까닭이 어찌 천지의 충만함이 아니며, 나의 성()의 성()이 되는 까닭이 어찌 천지의 으뜸이 아니겠습니까? 옛날의 군자(君子)는 오직 그 도리를 깨달음이 이와 같이 진실하였으므로 어버이를 친히 하여 백성을 자애롭게 대하며, 백성을 자애롭게 대하여 만물을 사랑하며, 그 하는 바를 미루어서 천하를 한 집안으로 하고, 중국을 한 사람으로 하는데 이르러도 거기에 사사로운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사람과 사물이 단지 부모가 낳은 것이라고만 한다면, 건곤(乾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서명에서 취할 것이 있는 것은 다만 잠시 넓고 광대한 말로 인체(仁体)를 표현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사사로움을 깨뜨리는 것일 뿐이니, 그렇다면 소위 인체(仁体)라는 것은 온전히 허명(虚名)이어서 처음부터 실체가 없고, 작고 사사로운 개인이 오히려 실리(実理)가 되니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또 성현(聖賢)은 여기에서 오히려 처음부터 의리(義理)를 보지 못하고 다만 이해(利害)만을 보고, 망령되이 자신의 뜻으로 언어를 조작하여 없는 것을 증식하고 있는 것을 파괴한 것이 됩니다. 만약 실로 이와 같다면 그 이론의 과실은 고루하고 융통성이 없다(膠固)’라는 두 글자로 어찌 다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찌 자신의 사사로움에서 다른 사람의 질곡을 깨트릴 수가 있겠습니까?

대개 옛날의 성현의 많은 말들은 다만 사람들에게 이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이치가 이미 분명하다면 이론을 세우려 애쓰지 않아도 말하는 것이 의리가 아닌 것이 없고, 행동을 바르게 하려 애쓰지 않아도 행하는 것이 참된 의리가 아닌 것이 없으며, 처음부터 이 이치가 없던 적이 없었으니, 잠시 이 말로 시속(時俗)의 폐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정(子静)과 서로 만나 일찍이 이 말로 자세하게 따져보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왕통(王通)의 속경(続経)의 설을 보니 그 또한 이러한 병폐를 면하지 못한 듯 합니다. 요즘 강서(江西)로 가는 인편을 구하기 어려워 황급히 편지를 썼으니 다시 자정에게 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만 보내신 편지가 반년 만에 도착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통렬히 지적하시어 분명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치에 맞는 말은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答陸子美

伏承示諭太極西銘之失 備悉指意 然二書之説 従前不敢軽議 非是従人脚根 依他門戸 却是反覆看来 道理実是如此 別未有開口処 所以信之不疑 而妄以己見輒為之説 正恐未能尽発其奥而反以累之 豈敢自謂有扶被之功哉 今詳来教及省従前所論 却恐長者従初便忽其言 不曾致思 只以自家所見道理為是 不知却元来未到他地位 而便以己見軽肆抵排也 今亦不暇細論 只如太極篇首一句 最是長者所深排 然殊不知不言無極 則太極同於一物 而不足為万化之根 不言太極 則無極淪於空寂 而不能為万化之根 只此一句 便見其下語精密 微妙無窮 而向下所説許多道理倏貫脈絡井井不乱 只今便在目前 而亘古亘今 攧撲不破 只恐自家見得未曾如此分明直截 則其所可疑者乃在此而不在彼也

至於西銘之説 猶更分明 今亦且以首旬論之 人之一身 固是父母所生 然父母之所以為父母者 即是乾坤 若以父母而言 則一物各一父母 若以乾坤而言 則万物同一父母矣 万物既同一父母 則吾体之所以為体者 豈非天地之塞 吾性之所以為性者 豈非天地之帥哉 古之君子惟其見得道理真実如此 所以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 推其所為 以至於能以天下為一家 中国為一人 而非意之也 今若必謂人物只是父母所生 更与乾坤都無干渉 其所以有取於西銘者 但取其姑為宏闊広大之言以形容仁体而破有我之私而已 則是所謂仁体者全是虚名 初無実体 而小己之私却是実理 合有分別 聖賢於此却初不見義理 只見利害 而妄以己意造作言語 以増飾其所無 破壊其所有也 若果如此 則其立言之失 膠固二字豈足以尽之 而又何足以破人之梏於一己之私哉

太抵古之聖賢千言万語 只是要人明得此理 此理既明 則不務立論而所言無非義理之言 不務正行而所行無非義理之実 無有初無此理 而姑為此言以救時俗之弊者 不知子静相会 曾以此話子細商量否 近見其所論王通続経之説 似亦未免此病也 此間近日絶難得江西便 草草布此 却託子静転致 但以来書半年方達推之 未如何時可到耳 如有未当 切幸痛与指摘 剖析見教 理到之言 不得不服也

 

 

육자미에게 답함 答陸子美

 

 

해제앞의 편지에 이어서 같은 해에 육자미에게 답한 두 번째 편지이다. 혹은 다음해인 1187(丁未)의 편지로 보기도 한다. 상산년보에는 병오년 겨울에 사록관이 되어 11월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편지에서 주자는 자정이 돌아오셨으니~”운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병오년 말이나 정미년 초에 쓴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여전히 태극도설서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육자미에게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 편지에서 논하신 태극서명에 대한 설은 반복하여 상세하고 빠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질과 습관의 편벽됨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급하게 사람과 글을 보고 그 사람의 사정을 다 헤아리지도 않고 급하게 자신의 생각을 펴려고 하여, 경솔하게 이론을 세우고 헛되이 많은 말을 하였지만 결국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태극설의 경우 저는, ()선생의 뜻은 아마 배우는 사람이 태극(太極)이 하나의 사물(事物)인줄로 잘못 알까 걱정하셨으므로 무극(無極)’ 두 글자를 붙여서 그것을 밝힌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대의 현인(賢人)이 이론을 세운 본래의 뜻을 미루어 본 것인데, 중복을 꺼리지 않은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내오신 편지에서 제가 태극을 하나의 사물로 내려놓았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주()선생의 오묘한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저의 얕고 좁은 망령된 설에 대해서도 그 사정을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무극두 글자를 붙인 것은 허무하고 고원한 것만 좋아하는 폐해가 있다고 하셨는데, 존형께서 이른바 태극이라고 하는 것은 형기(形器)가 있는 사물인지, 아니면 형기가 없는 사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과연 형상이 없고 다만 이()만 있다면, 무극은 곧 형상이 없고 태극은 곧 이()가 있음이 분명하니, 또 어찌 허무를 위하고 고원한 것만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말한 서명의 의미는, 바로 선생께서 횡거의 말로는 건곤이 실로 부모가 될 수 없다고 하여, ‘고루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말로 배척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그것을 의심해 보건데, 만약 선생님의 뜻과 같다고 하면 이것은 사람과 사물은 실로 천지를 바탕으로 삼는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어서, 아마도 온당치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니, 저의 본래 설은 실로 이와 같이 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보내오신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오히려 서명을 횡거가 단지 빌려온 말로 여기시고, 부모와 건곤이 비록 그 분수에 다름이 있지만, 애초에 일찍이 이체(二体)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다름을 또 변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는 것을 살피지 않으셨습니다.

어리석고 고루한 저는 존형께서 다시 이 두 사람의 말에 대해서 조금만 반복해서 보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유의하시면 반드시 그 말이 제가 말한 것과 같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말씀을 하시고 이론을 세워 그 옳고 그름을 단정하시면, 번거롭게 분별하지 않아도 이치가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급한 생각으로 구하려고 하면 이치를 살피는 데서는 정밀할 수가 없고, 그의 사정도 다 살필 수 없을 것이니, 헛되어 어지럽기만 하여서 어긋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 급박함은 보내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기질의 폐해이니 대개 말의 어긋난 곳은 비록 여기에 있지 않지만 그러나 그 어긋난 까닭은 여기에 근원한다는 것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자정(子静)께서 돌아오셨으니 반드시 조석으로 진지하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의 편지에서 이론(異論)은 결국 합치될 수 없다고 한 것은 당연히 이미 정설(定説)이 있습니다. 그 곁에서 얻어들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좁은 소견으로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유익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연평선생께서 새로 간행한 󰡔구산별록(亀山別録)󰡕을 늦게나마 한권을 보내 드립니다.

근래에 또 일찍이 복서(卜筮)에 관한 작은 책을 만들었는데 이것도 보냅니다. 대개 근래에 󰡔󰡕을 말하는 자들은 상수(象数)에 대해서는 완전히 대충대충 넘어가고, 그렇지 않은 자는 또 너무 지루하게 매달려 있어 상세히 궁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경전에서 말한 상수(象数)를 미루어보면, 다만 이 몇 조목으로도, 뜻으로 미루어보면 위로는 성인이 󰡔󰡕을 지으신 본지를 충분히 궁구할 수 있고, 아래로는 사람을 구제하고 변화를 관찰하는 점()의 실용을 관상할 수가 있으니, 󰡔󰡕을 배우는 자들은 결코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대개 상수는 이것을 넘어선다고 말하는 자는 모두 높은 누각에 매달아놓고 반드시 묻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答陸子美

前書示諭太極西銘之説 反复詳尽 然此恐未必生於気習之偏 但是急迫看人文字 未及尽彼之情而欲遽申己意 是以輊於立論 徒為多説而未必果当於理爾 且如太極之説 熹謂周先生之意恐学者錯認太極別為一物 故著無極二字以明之 此是推原前賢立言之本意 所以不厭重複 蓋有深指 而来諭便謂熹以太極下同一物 是則非惟不尽周先生之妙旨 而於熹之浅陋妄説亦未察其情矣

又謂著無極字便有虚無好高之弊 則未知尊兄所謂太極是有形器之物耶 無形器之物耶 若果無形而但有理 則無極即是無形 太極即是有理明矣 又安得為虚無而好高乎 熹所論西銘之意 正謂長者以横渠之言不当謂乾坤実為父母 而以膠固斥之 故窃疑之 以為若如長者之意 則是謂人物実無折資於天地 恐有所未安爾 非熹本説固欲如此也 今詳来誨 猶以横渠只是仮借之言 而未察父母之与乾坤 雖其分之有殊 而初未嘗有二体 但其分之殊則又不得而不辨也

熹之愚陋 瀦願尊兄更於二家之言少賜反复 寛心游意 必使於其所説如出於吾之所為者而無繊芥之疑 然後可以発言立論而断其可否 則其為辨也不煩而理之所在無不得矣 若一以急迫之意求之 則於察理己不能精 而於彼之情又不詳尽 則徒為紛紛 而雖欲不差不可得矣 然只此急迫即是来諭所謂気質之弊 蓋所論之 羞処雖不在此 然其所以差者則原於此而不可誣矣 不審尊意以為如何

子静帰来 必朝夕得欸聚 前書所謂異論卒不能合者 当已有定説矣 恨不得側聴其旁 時效管窺以求切磋之益也 延平新本龜山別錄漫内一通

近又嘗作一小卜筮書 亦以附呈 蓋縁近世説易者於象数全然闊略 其不然者又太拘滞支離 不可究詰 故推本聖人経伝中説象数者 只此数条 以意推之 以為是足以上究聖人作易之本指 下済生人観変玩占之実用 学易者決不可以不知 而凡説象数之過乎此者 皆可以束之高閣而不必問矣 不審尊意以為如何

 

 

육자미에게 답함 答陸子美

 

 

해제1187(송 효종 순희14, 丁未), 주자 58세 때의 편지이다. 앞의 두 편지는 모두 󰡔태극도설서명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육자미가 두 번째 편지에 대한 답변에서 거기에 대해서는 다시 논변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내왔으므로 주자도 그에 동의하는 뜻으로 이 편지를 보냈다.

 

보내주신 상세한 편지는 바른 뜻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할 수 없으면 그친다는 것은 바로 삼가 보내주신 편지에 해당하는 것이니 감히 다시 허물하지 않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무이(武夷)에 이르러 갑자기 실마리를 펼치려고 하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태극도설이나 서명과 같은 큰 것은 이미 감히 말 할 수가 없으니, 또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答陸子美

示諭縷縷 備悉雅意 不可則止 正当謹如来教 不敢复有塵涜也 偶至武夷 匆匆布敍 不能尽所欲言 然大者已不敢言 則亦無可言者矣

 

 

육자정에게 부침 寄陸子靜

 

 

해제1185(孝宗 淳熹12, 乙巳), 주희 56세 때의 편지이다. 육자정은 전 해인 갑진(甲辰)년에 황제를 알현하고 주차를 올렸는데, 주희는 그것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주희는 육자정의 주차가 황제의 일에 대해서만 논하고, 근본적인 학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주차(奏箚)를 보내주시어 지극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니 위로가 됨이 실로 깊습니다. 그 규모는 광대하고 원류는 깊고 머니 어찌 천박한 유생이 엿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전하의 명령을 받들 때 전하께서는 어떤 말에서 허락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사사로운 근심은 바로 만우회수(万牛回首)의 탄식을 면하지 못할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이 근심이겠습니까? 말이 원만하고 생각은 생기가 있으며, 물이 세차게 흐르듯 하며, 견해가 깊고 소양이 두터운 것은 더욱 더 탄복스럽습니다. 그러나 향상일로(向上一路)에는 일찍이 발동하고 변화하는 곳이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면하지 못하게 하니 아마도 서역[葱嶺]의 선학(禅学)의 기()를 띠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스울 뿐입니다. 저는 쇠잔함과 병세가 더욱 깊어졌는데 다행히도 외람되이 사록(祠禄)이 되어, 드디어 진희이(陳希夷)의 여러 자손들을 위하게 되었으니 실로 스스로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향화(香火)의 땅은 성교(声教)가 미치지 않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개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寄陸子靜

奏篇垂寄 得聞至論 慰沃良深 其規模宏大而源流深遠 豈腐儒鄙生所能窺測 不知対揚之際 上於何語有領会 区区私憂 正恐不万牛回首之歎 然於我亦何病 語圓意活 渾浩流転 有以見所造之深 所養之厚 益加歎服 但向上一路未曾溌転処 未免使人疑著 恐是葱嶺帯来耳 如何如何 一笑 熹衰病益侵 幸叨祠祿 遂為希夷直下諸孫 良以自慶 但香火之地 声教未加 不能不使人慨歎耳

 

 

육자정에게 답함 答陸子靜

 

 

해제1186(孝宗 淳熙13, 丙午), 주자 57세 때의 편지이다. 육자정의 제자인 부몽천을 만난 일을 말하면서 그 학문이 지나치게 현묘함을 추구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지난번에 일찍이 원하던 것 이외의 청이 있으나 다시 이루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결정되었습니까? 아니면 마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까? 배우는 사람은 후에 다시 어떤 사람을 얻었습니까? 현도(顕道)가 편지에서 일찍이 뵙겠다고 하였는데, 이미 도착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연(子淵)과는 지난 겨울에 서로 만나보았는데 기질이 굳고 강하여 끝내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치우친 것은 또한 심하게 일을 해치는데 비록 일찍이 간곡하게 간하더라도 분명 그렇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이부참선(吏部参選)이 도착하면 반드시 서로 만나려고 하는데, 또한 일찍이 통렬하게 권면해야 합니까? 도리가 비록 매우 정밀하고 미세하지만, 처음부터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 밖에 있지 않으니, 시비(是非)와 흑백(黒白)은 바로 면전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살피지 않고, 따로 의려(意慮)의 밖에서 현묘(玄妙)함을 구하려 하는 것 또한 잘못입니다. 저는 쇠약함과 질병이 날로 깊어가고 작년의 재난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요사이 며칠간은 병든 몸을 대략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없어지는 것이 날로 더 심해지니 아마도 끝내는 세상에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다행한 것은 근래에 일용공부는 자못 힘이 있음을 알겠으니 앞으로는 다시 지루한 병통이 없을 것입니다. 심히 한스러운 것은 편안히 얼굴을 맞대고 논할 수 없는 것이니, 언제 만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라고 해서 의견의 차이가 없겠습니까?

 

答陸子靜

昨聞嘗有丐外之請而复未遂 今定何如 莫且宿留否 学者後来更得何人 顕道得書云嘗詣見 不知已到未 子淵去冬相見 気質剛毅 極不易得 但其偏処亦甚害事 雖嘗苦口 恐未必以為然 今想到部 必已相見 亦嘗痛与砭(+)否 道理雖極精微 然朷不在耳目見聞之外 是非黒白 即在面前 此而不察 乃欲別求玄妙於意慮之表 亦已誤矣 熹衰病日侵 去年災患亦不少 此数日来 病躯方似略可支吾 然精神耗減 日甚一日 恐終非能久於世者 所幸迩来日用功夫頗覚有力 無复向来支離之病 甚恨未得従容面論 末知異時相見 尚复有異同否耳

 

 

육자정에게 답함(정미년 52) 答陸子靜丁未五月二日

 

 

해제1187(송 효종 순희14, 丁未), 주자 58세 때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도 주자는 함부로 높은 경지만을 추구하고, 성현의 말씀을 다 믿지 않으며, 일용에서 일용(日用)을 가볍게 여기는 학문의 풍조를 개탄하고 있어, 육씨 형제의 학문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머물러 쉰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여러 상황이 더욱 좋아졌으리라 생각합니다. 학도가 사방에서 찾아오니,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까닭은 학도에게 도()를 가르치는데 있지 나아가 벼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이욕(利欲)은 심한 고질이라고 하신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일종의 가볍게 높은 경지만을 말하고, 망령되게 내외(内外)와 정조(精粗)의 구별을 만들며, 양심(良心)과 일용(日用)을 둘로 나누고, 성현(聖賢)의 말씀을 다 믿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용모와 말에서는 깊이 살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매우 사리에 어긋나 장차 우리 도()에 크게 해가 될 것이니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말류의 폐해는 이미 목전(目前)에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것을 살피지 않고 일찍이 그것을 걱정하셨습니까? 이러한 일은 언제나 소소한 글의 의미의 차이와 비교할 수 없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을 맞대고 논할 수 없으니, 한갓 초조함만 늘어갈 뿐입니다. 이자(李子)는 학문에 매우 쉽게 학문에 뜻을 둔 것이 아닙니다 역시 고원한 것을 좋아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착실히 목전의 도리와 사물을 분명하게 보려고 하고, 장차 집안에 전해 오는 옛것을 잃지 않으면, 아마도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현묘한 것만 말하면 아마도 양쪽 모두 이루는 것이 없을 것이니, 오히려 타고난 기질을 무너뜨려, 반드시 순박하고 성실한 늙은이만도 못할 것인데, 많은 노력을 하지도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答陸子靜丁未五月二日

税駕已久 諸况想益佳 学徒四来 所以及人者在此而不在彼矣 来書斫謂利欲深痼者 已無可言 区区所憂 却在一種軽為高論 妄生内外精粗之別 以良心日用分為兩截 謂聖賢之青不必尽信 而容貌詞気之間不必深察者 此其為説乖戻很悖 将有大為吾道之害者 不待他時末流之弊矣 不審明者亦嘗以是為憂乎 此事不比尋常小小文義異同 恨相去遠 無由面論 徒増耿耿耳 李子甚不易知向学 但亦漸覚好高 鄙意且欲其著実看得目前道理事物分明 将来不失将家之奮 庶幾有用 若便如此談玄説妙 却恐兩無所成 可惜壊却夫生気質 却未必如乃翁撲実頭 無許多労攘耳

 

 

육자정에게 답함 答陸子靜

 

 

해제1188(孝宗 淳熙 15, 戊申), 주자59세 때의 편지이다. 󰡔육구연집󰡕을 살펴보면 이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육자정이 정월14일의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있어, 이 편지를 쓴 날짜를 알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의 병통은 실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만, 또한 모름지기 스스로 공평무사하고 깊고 정밀한 것을 얻으면 바야흐로 사람들의 병통을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 한편에 치우침을 면하지 못한다면 분주하게 치료하려고 해도 도리어 그 병을 키울 것입니다. 제가 선생의 형에게 보낸 편지를 논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고 이치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당시에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혹 정말로 이러한 병통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조리정연하게 자세히 분석하신 가르침을 받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니 가르침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온당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더 자세히 논한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니, 거사 형처럼 갑자기 편지를 끊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答陸子靜

学者病痛誠如折諭 但亦須自家見得平正深密 方能薬人之病 若自不於一偏 恐医来医去 反能益其病也 所諭与今兄書辞費而理不明 今亦不記当時作何等語 或恐実有此病 承許絛析見教 何幸如之 虚心以俟 幸因便見示. 如有未安 却得細論 未可便似居士兄遽断来章也

 

 

육자정에게 답함 答陸子靜

 

 

해제1188(宋 孝宗 淳煕15) 주자 나이 59세 때의 편지이다. 주자와 육자정은 1187년 겨울부터 무극태극에 관한 논변을 벌이는데 이 편지는 이 논변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육자정의 태극변에 대한 주자의 답 글이다.

 

118일에 제가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자정(子静) 숭도감승(崇道監丞) 노형에게 편지를 드립니다. 올 여름 옥산(玉山)에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때 도성에 들어갔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질병과 많은 일이 있었고, 또 편지를 보낼 방법이 없어서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덕망과 상산의 빼어난 경치를 생각하면 서쪽을 바라보며 크게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즈음 겨울 날씨가 지나치게 따뜻합니다. 삼가 존후만복하시고, 여러 형님들과 조카들, 그리고 모든 권속이 강녕하시며, 배우러 오는 선비들 역시 모두 하시는 일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2년 동안 쓸데없이 번잡하여 공사(公私)에 보탬이 없으니 다만 매우 부끄럽고 겸연쩍을 뿐입니다. 오늘날 또 부르심을 받고 전에 이미 매우 외람된 은혜를 입었음을 돌아보면, 감히 함부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너무 빨리 혼자서만 독점한다고 꾸짖으실 것 같아서이니, 이미 사람을 묘당(廟堂)에 보내어 상황을 말하고 면하기를 간절하게 아뢰었습니다. 만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땅히 힘껏 청하여 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문을 닫아 걸고 앉아서 녹봉만 훔치고, 비천한 학문을 되짚어 생각하며 이 생을 채울 것입니다. 한스러운 것은 전하의 은혜가 심히 두터운데도 갚을 길이 없으니 죽어서도 여한이 있을 것입니다.

전의 편지에서 깨우쳐주신 모든 것은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옛날의 성현은 오직 이치만을 보고 말이 이치에 맞으면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라도 버리지 않는 것이 있었고, 혹 이치에 어긋나면 비록 고서에 나온다고 해도 감히 다 믿지 않았다고 하신 이 말씀은 지당하시니 세속의 선비들의 얕은 소견으로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말을 가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치는 쉽게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치에 참으로 깨달은 것이 있으면 사람들의 말의 옳고 그름은 흑과 백처럼 쉽게 판단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실로 그 사람이 현명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물어서 물리치고 취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말하는 이()라는 것은 혹은 다만 한 사람의 사사로운 견해에서 나오기도 하므로 아마 자신이 취사한 것을 모든 말의 절충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할 듯합니다. 하물며 이치가 이미 밝지 않다면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아마도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갑자기 고서(古書)가 믿을만하지 않다고 물리치고, 가슴속의 판단에 바로 맡기겠습니까?

보내신 편지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은 무극태극에 관한 상세한 논변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복희(伏羲)씨가 󰡔󰡕을 지어 한 획을 그은 이래, 문왕(文王)󰡔󰡕을 부연하여 건원(乾元)을 말한 이후로는 모두 일찍이 태극을 말하지 않았는데, 공자께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공자께서 󰡔󰡕을 찬술하시어 태극을 말한 이후 일찍이 무극(無極)은 말하지 않았는데, 주자(周子)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저 선성(先聖)과 후성(後聖)이 어찌 사리와 맥락이 통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기에서 태극의 진정한 본체를 확연히 실제로 보았다면 말하지 않은 자라고 해서 그것을 경시한 것이 아니고, 말한 자라고 해서 그것을 중시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니, 어찌 이렇게 어지러운 상황에 이르렀겠습니까? 지금 이미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모든 말의 절충으로 삼기에는 부족한 듯 합니다. 또 하물며 사람의 말에서 다 알 수 없는 것이 한 둘만이 아니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이미 저를 어리석게 여기지 않으시고 가르쳐주셨으니 저 또한 감히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전(大伝)󰡕의 태극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곧 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의 이()가 이 세 가지에 앞서서 갖추어지고, 이 세 가지의 안에 온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생각은, 바로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어서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으므로 다만 태극(太極)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천하의 지극한 것이라도 여기에 더할 수가 없다고 한 말과 같으니 애초에 중()이라는 의미로 태극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아닙니다.북극(北極)’의 극()이나 옥극(屋極)’의 극, ‘황극(皇極)’의 극, ‘민극(民極)’의 극 같은 것에 대해서는 여러 유학자들이 비록 중()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대개 이러한 것들의 극()은 항상 그것들의 가운데 있다는 것으로 하는 말이지, ()자를 가리켜 중()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라는 것은 지극함일 뿐입니다. 형상이 있는 것으로 말하면 사방팔면이 모여서 여기에 이르러 완전하게 되므로 다시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미루어 나가면 사방팔면이 모두 향배(向背)가 없어 모든 것이 고르게 되므로 극()이라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후일의 사람들은 그것이 가운데 있으면서도 사방에 잘 응하므로 그 처한 것을 가리켜 중()이라고 한 것이니, 그러한 의미로 중()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극에 이르면 또 애초에 말할 만한 형상이나 방소가 없으니, 다만 이 이()가 지극하므로 극()이라고 할 뿐입니다. 이제 중()으로 이름 붙이니, 이것은 이른바 이치에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첫 번째 것입니다.

󰡔통서(通書)󰡕()()()장은 그 첫머리 두 구절에서 이()를 말하고, 다음 세 구절에서 성()을 말하고, 다음 여덟 구절에서 명()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장 안에 이 세 글자가 없으나 유독 이 세 글자로 그 장의 이름을 붙이 것은 장 안의 말이 이미 각각 속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거기에서 신령스럽다는 것과, ‘하나라는 것은 태극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이라는 것은 부여받은 기()가 중()을 얻었다는 것으로, ‘강선(剛善)’ ‘강악(剛悪)’ ‘유선(柔善)’ ‘유악(柔悪)’이라는 것과 함께 오성(五性)이 되는 것으로 오행(五行)에 속하니 애초에 일찍이 이것을 태극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을 얻어야 그친다는 것은 또 아래에서 이기오행(二気五行)과 화생만물(化生万物)’이라고 한 것에 속하니, 이것이 또한 다시 어떤 글자나 의미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보내주신 편지에서 그 중()을 가리켜 태극이라 하고 아래 문장에 속한다고 하시니, 이것은 또 이()에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두 번째 것입니다.

무극(無極)’ 두 글자를 논하면, 주자(周子)께서는 도체(道体)를 분명하게 보고, 상정(常情)을 뛰어넘었으며, 옆 사람의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않았고, 자신의 득실(得失)을 따지지 않고 용감하게 곧바로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않은 도리를 말하여, 이후의 학자들로 하여금 태극의 오묘함은 유무(有無)에 속하지 않고, 방체(方体)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간파해낼 수 있으면 비로소 이 분이 진정으로 천 여 년 전의 성인 이래로 전해지지 않던 비의를 얻었으며, 지붕 밑에 집을 짓거나 마루 위에 마루를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제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여기시니, 이것은 또 이()에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것입니다.

대전에서는 이미 형이상(形而上)의 것을 도()라고 한다고 했고,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라고 한다고 했지만, 이것이 어찌 참으로 음양(陰陽)을 형이상의 것이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바로 일음일양이 드러나는 것은 비록 형기에 속하지만,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게 하는 것은 도체(道体)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체의 지극함을 말하면 태극이라고 하고, 태극의 유행을 말하면 도()라고 합니다. 비록 두 가지 이름이 있지만 처음부터 두개의 체()는 아닙니다. 주자(周子)께서 무극(無極)’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방소가 없고, 형상이 없어 사물이 있기 전에도 있고, 사물이 있고난 후에도 일찍이 있지 않은 적이 없다고 여긴 것이고, 음양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일찍이 음양의 가운데 있지 않은 적이 없다고 여긴 것이며, 전체를 관통하여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또 처음부터 말할 수 있는 소리나 냄새, 그림자나 메아리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제 무극이 그렇지 않음을 심하게 비난한다면 이것은 바로 태극이 형상이 있고, 방소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음양이 형이상의 것이라고 한다면 또 도기(道器)의 구분에 어두운 것입니다. 형이상자(形而上者)’ 위에 다시 하물며 태극이랴는 말을 하면 또 도() 위에 따로 한 사물이 있어 태극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이()에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의 의미를 다 알 수 없는 네 번째의 것입니다.

제가 앞의 편지에서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은 한 사물과 같아서 만화의 근본이 되기에 부족하고,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은 공적에 빠져서 만화의 근본이 될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주자(周子)의 생각에 근본을 두고 미루어 본 것입니다. 당시에 만약 이렇게 두 가지로 말하지 않았다면 읽는 사람은 말의 뜻을 잘못 알아 반드시 편견의 병이 생겨,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들으면 실제로 있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곧 정말 없다고 여기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는 이렇게 해야 주자의 생각이 분명해진다고 생각합니다만 단지 도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지나치게 누설한 것을 싫어할까 두려워하였고, 노형과 같은 사람이 온당하지 않고 알기 어렵다고 여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저의 편지의 상하의 글의 의미를 상세히 살펴보신다면 어찌 태극이 사람의 말로 더하고 덜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또 이()에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의 의미를 다 알 수 없는 다섯 번째입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또 대전에서는 분명히 역에 태극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 없다고 하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더욱 그대에게 바라던 것이 아닙니다. 올 여름 어떤 사람과 함께 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 사람의 논리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당시에 그것을 대하여 모르는 사이에 실소를 하여 질책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들 완고한 속유(俗儒)들이 언어만을 쫒아 풀이 하는 것은 심히 괴이하지는 않습니다. 노형은 평소에 스스로를 어떻게 보시기에 또 속유들과 같이 이런 말을 하십니까? 노형은 또 대전의 이른바 있다는 것이 과연 양의사상팔괘가 정해진 위치가 있고, 천지오행만물의 지속적인 형상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자(周子)의 이른바 없다는 것이 과연 텅 비고 끊어져 없어져서 사물이 생겨날 이치가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또 이()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는 여섯 번째입니다.

노자(老子)무극으로 되돌아간다고 했는데 이 무극은 무궁하다는 의미로 장자(荘子)무궁(無窮)의 문으로 들어가서 무극(無極)의 들에서 노닌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니, 주자(周子)가 말한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이제 그것을 끌어다가 주자(周子)의 말이 실제로 기에서 나왔다고 하니, 이것이 또 이()에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을 다 알지 못하는 일곱 번째입니다.

선생의 학문은 방외(方外)에서 벗어나 실로 쉽게 세간의 언어로 그 국량을 말할 수 없고, 세간의 의견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 한 방면을 고집하여 논하였으니, 그 합치되지 않는 것은 전에 진술한 바와 같습니다. 또한 답장을 하고자 하니 쓸데없이 어지러워져 거듭 세속에서 보고 웃을까 두렵습니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지만, 만약 말하지 않으면 아마도 학자들이 끝내 바른 것을 취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두 가지를 비교해보니 차라리 지금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는 있어도 후세에 죄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만두지 못하고 끝내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노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答陸子靜

十一月八曰 熹頓首再拝 上啓子静崇道監丞老兄 今夏在玉山 便中得書 時以入都 旋复還舎 疾病多故 又苦無便 不能即報. 然懐想徳義与夫象山泉石之勝 未嘗不西望太息也 比曰冬温過甚 恭惟尊候万福 諸賢兄今子姪畚集以次康寧 来学之士亦各佳勝

熹兩年冗擾 無補公私 第深愧歉 不謂今者又蒙収召 願前所被已極叨冒 不敢踰進 以速竜断之譏 已遣人申堂懇免矣 万一未遂 所当力諸 以得為期 杜門窃廩 温鐸陋学 足了此生 所恨上恩深厚 無路報塞 死有余憾也

前書誨諭之悉 敢不承教 所謂古之聖賢惟理是視 言当於理 雖婦人孺子有所不棄 或乖理致 雖出古書 不敢尽信 此論甚当 非世儒浅見所及也 但熹窃謂言不難択而理未易明 若於理実有所見 則於人言之是非 不翅白黒之易辨 固不待訊其人之賢否而為去取 不幸而吾之所謂理者或但出於一己之私見 則恐其所取舎未足以為群言之折衷也 况理既未明 則於人之言恐亦未免有未尽其意者 又安可以遽絀古書為不足信 而直任胸臆之所裁乎

来書反复 其於無極太極之辨詳矣 然以熹観之 伏羲作易 自一昼以下 文王演易 自乾元以下 皆未嘗言太極也 而孔子言之 孔子賛易 自太極以下 未嘗言無極也 而周子言之 夫先聖後聖 豈不同条而共貫哉 若於此有以灼然実見太極之真体 則知不言者不為少而言之者不為多矣 何至若此之紛紛哉 今既不然 則吾之所謂理者 恐其未足以為群言之折衷 又况於人之言有所不尽者 又非一二而已乎 既蒙不鄙而教之 熹亦不敢不尽其愚也

且夫大伝之太極者 何也 即兩儀四象八卦之理具於三者之先 而縕於三者之内者也 聖人之意 正以其究竟至極 無名可名 故特謂之太極 猶日挙天下之至極無以加此云爾 初不以其中而命之也 至如北極之極 屋極之極 皇極之極 民極之極 諸儒雖有解為中者 蓋以此物之極常在此物之中 非指極字而訓之以中也 極者 至極而已 以有形者言之 則其四方八面合輳将来 到此築底 更無去処 従此推出 四方八面都無向背 一切停勻 故謂之極耳 後人以其居中而能応四外 故指其処而以中言之 非以其義為可訓中也 至於太極 則又初無形象方所之可言 但以此理至極而謂之極耳 今乃以中名之 則是所謂理有未明而不能尽乎人言之意者也

通書理性命章 其首二句言理 次三句言性 次人句言命 故其章内無此三字 而特以三字名其章以表之 則章内之言固已各有所属矣 蓋其所謂霊 所謂一者 乃為太極 而所謂中者 乃気票之得中 与剛善剛悪柔善柔悪者為五性 而属乎五行 初未嘗以是為太極也 且日中焉止矣 而又下属於二気五行化生万物之云 是亦复成何等文字義理乎? 今来諭乃指其中者為太極而属之下文 則又理有未明而不能尽乎人言之意者二也

若論無極二字 乃是周子灼見道体 迥出常情 不顧旁人是非 不計自己得失 勇往直前 説出人不敢説底道理 今後之学者暁然見得太極之妙不属有無 不落方体 若於此看得破 方見得此老真得千聖以来不伝之秘 非但架屋下之屋畳牀上之牀而已也 今必以為未然 是又理有未明而不能尽人言之意者三也

至於大伝既曰形而上者謂之道矣 而又曰一陰一陽之謂道 此豈真以陰陽為形而上者哉 正所以見一陰一陽雖属形器 然其所以一陰而一陽者 是乃道体之所為也 故語道体之至極 則謂之太極 語太極之流行 則謂之道 雖有二名 初無両体 周子所以謂之無極 正以其無方所 無形状 以為在無物之前 而未嘗不立於有物之後 以為在陰陽之外 而未嘗不行乎陰陽之中 以為通貫全体 無乎不在 則又初無声臭影響之可言也 今乃深詆無極之不然 則是直以太極為有形状 有方所矣 直以陰陽為形而上者 則又昧於道器之分矣 又於形而上者之上复有况太極乎之語 則是又以道上別有一物為太極矣 此又理有未明而不能尽乎人言之意者四也

至熹前書所謂不言無極 則太極同於一物而不足為万化根本 不言太極 則無極淪於空寂而不能為万化根本 乃是推本周子之意 以為当時若不如此両下説破 則読者錯認語意 必有偏見之病 聞人説有即謂之実有 見人説無即以為真無耳 自謂如此説得周子之意已是大煞分明 只恐知道者厭其漏洩之過甚 不謂如老兄者 乃猶以為未穏而難暁也 請以熹書上下文意詳之 豈謂太極可以人言而為加損者哉 是又理有未明而不能尽乎人言之意者五也

来書又謂大伝明言易有太極 今乃言無 何耶 此尤非所望於高明者 今夏因与人言易 其人之論正如此 当時対之 不覚失笑 遂至被劾 彼俗儒膠固 随語生解 不足深怪 老兄平日自視為如何 而亦為此言耶 老兄且謂大伝之所謂有 果如兩儀四象八卦之有定位 天地五行万物之有常形耶 周子之所謂無是果虚空断滅 都無生物之理耶 此又理有未明而不熊尽乎人言之意者六也

老子复帰於無極 無極乃無窮之義 如荘生入無窮之門 以遊無極之野云爾 非若周子所言之意也 今乃引之而謂周子之言実出乎彼 此又理有未明而不能尽乎人言之意者也

高明之学超出方外 固未易以世間言語論量 意見測度 今且以愚見執方論之 則其未合有如前所陳者 亦欲奉報 又恐徒為紛紛 重使世俗観笑 既而思之 若遂不言 則恐学者終無所取正 較是二者 寧可見笑於今人 不可得罪於後世 是以終不獲已而竟陳之 不識老兄以為如何

 

 

육자정에게 답함 答陸子靜

 

 

해제1189(孝宗 淳熙16, 己酉), 주자 60세 때의 편지이다. 무극 태극을 논한 주자의 앞의 편지에 대해 육자정이 답변을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주자는 그 답변의 조목조목을 들어 육자정의 논리를 반박하고 있다. 이 편지는 태극도설에 대한 두 사람의 근본적인 이해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육자정은 태극도설자체에 회의를 보이고 있으며, 무극(無極)은 노자에 근원을 두고 있고, 극을 중으로 해석하는 등, 기존의 학문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보내신 편지에서 말씀하시기를 절강(浙江)에서 후생들이 편지를 보내서, 우리 두 사람이 익힌 것이 각자 이미 성숙하여 끝내 서로 함께 할 수 없으니 그냥 놓아두고 논하지 않고 천하후세가 스스로 택하기를 기다리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비루한 말입니까? 이 무리들은 모두가 비루하여 속학에 빠져 이렇게 어긋났으니 가련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천하의 이치는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으니, 바른 학문을 하는 사람은 분명하게 분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보낸 그 사람들의 설은 참으로 온당하지 못합니다만, 무릇 변론이라는 것은 또한 모름지기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기운을 조화롭게 하여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며, 반복해서 헤아려보아 실속 있고 옳은 것을 구하려 힘써야 귀착점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다만 급하게 서두르는 가운데 비루하고 시끄럽고 경솔한 말을 방자하게 늘어놓아 원망하고 평온하지 않은 기운을 멋대로 펼쳐놓으면 아마도 오히려 그들이 말한 것만도 못할 것입니다. 안정되고 화평하며 항상 넓은 마음을 갖는 것이 군자와 어르신들의 뜻일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습니다. . . . . 감히 다 펼칩니다운운하셨습니다.

제가 이 단락에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니 규모가 넓고 크며 가리키는 의미가 자세하고 절실합니다. 예를 들면 비록 스스로 그 이()가 이미 밝다고 하지만 어찌 사견(私見)에 가린 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하신 것과, ()은 선()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등의 말을 인용한 것에 이르기까지는 더욱 마땅합니다. 제가 비록 매우 어리석으나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틀린 것이 하나의 옳음으로 귀착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 과연 어떻게 결론지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분명하게 바라는 것은 또한 깊이 살피고 그 말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고인은 질박하고 실속 있었습니다. . . . . 그것을 완전히 조리를 잡아주기를 청합니다운운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을 상세히 살펴보니 대개 오직 사실에 힘쓰려 하고, 헛된 말을 높이지 않았으며, 그 의미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무극두 글자에 대해서는, 저는 실로 이미 말하지 않은 자라고 해서 그것을 경시한 것이 아니고, 말한 자라고 해서 그것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르다고 생각하신다면 또 놓아두어도 사실에는 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형제분들은 고인(古人)의 뜻을 보지 못하고 다만 아무 이유도 없이 이에 대하여 허황된 변설을 만들고 수많은 말을 하여 서너 차례나 편지를 주고받았어도 다 할 수가 없으니, 막히고 거칠어짐이 너무 심합니다. 또 그 중에 긴요한 절목을 자세히 살펴보니, 서로의 생각에 따라 주고받음이 없이 다만 한결같이 업신여기고 욕하며, 허세를 부리며 위협하여 반드시 이기고자 합니다.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의 기상을 논하지 않더라도 다만 자공(子貢)이라도 이와같은 것을 옳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갑자기 이것(안자와 증자)로 저것(자공)을 경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존형께서는 일찍이. . . 실로 본래 같지 않습니다운운 하셨습니다.

저 또한 노형께서는 바로 태극은 본래 무극이면서 그 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시므로 반드시 중()으로 극()을 해석하고 또 음양(陰陽)을 형이상(形而上)의 것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합니다. 허견(虚見)과 실견(実見)은 그 말이 실로 같지 않습니다.

보내오신 편지 중에서 ()씨는 무()로써. . . 숨기겠습니까?” 운운 하셨습니다.

제가 살펴보니 노씨가 말한 유무(有無)는 유무를 둘로 보았고, 주자(周子)가 말한 유무는 유무를 하나로 보았으니, 바로 남과 북, 물과 불처럼 상반됩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시면 쉽게 비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이 이(). . . 아들이 아닙니다 운운하셨습니다.

제가 전에 보낸 편지에 일찍이 무리(無理)’ 두 글자가 있는지 다시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 또한 이 . . . 극재(極哉)” 운운 하셨습니다.

()은 이 이()의 지극함을 이르는 것이고, ()은 이 이()가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모두 같은 이()이지만 그 명의(名義)는 각각 당연한 것이 있고, 비록 성현이 각각 다르게 말했지만 감히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극(皇極)’의 극()이나 민극(民極)’의 극() 같은 것은 표준의 의미입니다. ‘이것에 입각하여 저것을 보여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라는 바가 있는 것으로 바름을 취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지 그 중()으로 명명한 것은 아닙니다. ‘입아증민(立我烝民)’이라고 했는데, ()과 입()은 통하므로 󰡔󰡕에서 백성이 곡식을 먹게 된 것은 너의 극이 아닌 것이 없다(烝民乃粒 莫匪爾極)”고 한 것의 너()는 후직(后稷)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대개 우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곡식을 먹게 한 것은 너 후직이 극을 세운 것은 백성이 바라는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할 뿐입니다. 여기서 너() 자는 천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자 또한 받은 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가 더욱 명백한데 이기려고 하는데 급급하여 다시 위 아래의 글을 살피지 않은 듯 합니다. 이 한 구절을 미루어보면 그 나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라는 것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다라는 것은 희노애락이 발하지 않은 것으로 이 이()가 혼연하여 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태극은 실로 치우침이 없어 만화(万化)의 근본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태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지극(至極)하다는 의미의 극()과 또 표준의 의미를 겸하여 가진 것이지 처음부터 중()의 의미로 태극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극을 중이라고 하면. . .() 입니까?” 운운 하셨습니다.

노형께서는 스스로 중()으로 극()을 해석하셨으나, 저는 일찍이 형()으로 극()을 해석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글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도 역시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대학󰡕문언은 모두 지지(知至)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자세히 살펴보니 지지(知至)’ 두 글자는 비록 같지만 󰡔대학󰡕에서는 지()는 실자(実字)이고 지()는 허자(虚字)이니, 두 글자가 위는 무겁고 아래는 가벼워 대개 마음이 아는 바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문언에서는 지()는 허자(虚字)이고 지()는 실자(実字)이니 두 글자가 위는 가볍고 아래는 무거워 대개 당연히 이르러야 할 곳을 알 수 있다고 했을 뿐입니다. 두 의미가 이미 본래 같지 않고, 또 태극이 지극이 되는 것도 모두 같지 않습니다.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의미는 여러 설 중에 가장 분명하니 여기에서 미루어 보시면 보내신 편지에서 실수가 없을 수는 없고, 이러한 것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바로 음양으로 형기(形器)를 삼습니다. . . 도기(道器)의 구분입니까?” 운운 하셨습니다.

만약 음양으로 형이상의 것을 삼는다면 형이상의 것은 또 무슨 물건입니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어리석은 견문과 같다면 곧 모든 형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 기()이며, 이 기()가 되게 하는 소이인 이()는 곧 도()입니다. 그렇다면 보내신 편지에서 이른바 시종(始終)회명(晦明)기우(奇偶)에 속하는 것은 모두 음양이 작위하는 기()이고, 이 기()가 되게 하는 소이인 이(), 눈의 밝음이나 귀의 총명함, 아버지의 자애, 아들의 효 같은 것만이 도()일뿐입니다. 이렇게 분별하면 약간 명백할 듯합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 구절은 또한 매우 분명하니, 간절히 바라건데, 조금 더 생각해보시면 곧 저의 말이 이치가 없지 않음을 알 것이고 그 나머지 또한 유추(類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통서󰡕에서 말하기를 . . .이와 같다 운운하셨습니다.

주자(周子)께서는 ()’을 말하고 ()’로 그것을 풀었습니다. 중절(中節)’이라 하고, 또 달도(達道)라고 하셨습니다. 주자(周子)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니, 그 말이 명백히 󰡔중용󰡕과 어긋난다면 또한 반드시 설명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이 ()’이라는 글자는 곧 기품에서 발용하는데 나아가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지, 바로 본체가 미발함을 가리켜 치우친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을 중()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보내 주신 편지에서 경전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모든 장을 다 인용하였는데, 비록 번거롭기는 하지만 싫지는 않았는데, 󰡔통서󰡕를 인용할 때만 중언지의(中焉止矣)’에서부터 아래는 잘라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노형께서 본래 주자(周子)를 믿지 않거나 󰡔통서󰡕를 잘못 인용하는 것은 또한 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하필이면 이 작은 실수를 감추어 도리어 고치지 않는 허물을 만드십니까?

보내 주신 편지에서 󰡔대전(大伝)󰡕 . . . 숙고(孰古)”부분에 대하여.

󰡔대전󰡕󰡔홍범󰡕󰡔시경󰡕󰡔예기󰡕는 모두 극()을 말했을 뿐이지 극()을 중()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선유(先儒)들은 이 극()이 항상 사물의 중앙에 있으면서 사방의 안과 면하여 바름을 취한다고 보았으므로, ()으로 극()을 해석해도 심한 잘못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인들이 따라서 바로 극()을 중()이라고 하면 선유(先儒)의 본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아(爾雅)󰡕는 고금(古今) 여러 유학자들의 훈고를 모아서 이루어진 책인데, 그 중에는 대개 오류가 없을 수 없으니, 옛것의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하물며 그 중에 극()으로 지()를 해석하고, 은재(殷斉)로 중()을 해석한 것이 있으니, 일찍이 극()을 중()이라고 한 것이 없겠습니까?

보내 주신 편지에서 또 주자(周子). . . 뿐입니다.” 부분에 대하여. 전에 또 만약 . . . 태극의 위에~” 라고 한부분에 대하여.

무극이면서 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것은 함이 없으면서도 하고, 가지 않고도 이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함이 없는 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모두 어조가 마땅히 그러한 것이지 따로 한 물건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흠부(欽夫)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쓸데없는 말이라고 의심하였는데, 지금에야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비로소 흠부의 생각이 깊음을 알겠습니다. 그 의미는 곧 오직 황극(皇極)민극(民極)옥극(屋極)과 같이 방소와 형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이()의 지극함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만약 이 의미를 이해한다면 성문(聖門)에 어떤 어긋남이 있어서 말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상천지재(上天之載)’는 유() 가운데서 무()를 말하는 것이고,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은 무() 가운데서 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참으로 안다면 유()를 말하든 무()를 말하든, 앞서든 뒤서든 모두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공언(空言)을 높이지 않고 오직 사실에만 힘쓴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반드시 이렇게 얽매이고 억지로 분별을 하면서, 도리어 이와같이 합니까?

보내오신 편지에서 부건(夫乾) . . . 자반야(自反也)”까지에 대하여.

태극은 실로 사람에게 가려져 있던 적이 없었는데 사람 중에 태극을 아는 자는 적습니다. 종종 단지 선학(禅学) 중에서 어떤 밝고 신령한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여 이것을 태극이라고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른바 태극이라는 것이 천지만물 본연의 이()이고, 고금에 두루 통하여 넘어져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상정(常情)에서 벗어난다는 등의 말은 단지 세속의 말로 선가(禅家)에서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유자(儒者)는 도리어 회피하면 안됩니다. 하물며 지금은 비록 우연히 말했다고 해도 저의 소견과 말은 선가의 도리가 아니며, 다른 사람과 같이 실제로는 몰래 그 말을 사용하면서도 겉모습만 바꾸어서 겉으로는 그것이 말미암은 바를 숨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사로이 그 말로 스스로를 오묘하게 하고 신비하게 한다고 하고, “이것에 의지하여 그 간교함을 신비화한다고 말하며, 다소 좋은 기질에 얽매인 학자라고 하였는데, 아마 세상에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이러한 말도 마땅할 것입니다. 제가 비록 내세울 만한 것은 없지만 스스로 이러한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를 인용하여 말이 네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도에서 구하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성인의 말씀이니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보내신 편지에서는 도()에서 구하였으나 보지 못하고, 다만 그 말의 뜻이 어긋나고 기상이 거친 것만 보았으니, 이것은 성현과 서로 매우 가깝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한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스스로 그 천한 습관과 견문을 편안하게 여기고, 감히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고명한 혼자만의 견해를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근년에 일찍이 평심(平心)의 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앞의 편지에서는 깨우쳐 주시기를 갑과 을이 변론을 하는데 바야흐로 각자가 자기의 설을 옳다고 하며 갑이 말하기를 을이 평심을 갖기를 바란다고 하고, 을도 말하기를 갑이 평심을 갖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평심의 설은 아마도 분명하게 하기가 어려우니, 일에 근거하여 이()를 논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셨으니, 이 말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평심이라고 하는 것은 갑으로 하여금 을의 견해를 부리고, 을은 갑의 설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모두 일의 시비(是非)를 논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양쪽이 자기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하는 생각을 놓아두고 난 다음에, 일을 근거로 하여 이()를 논하면 결국은 그 시비(是非)의 실상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의혹이 많아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을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그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지, 굽은 것을 펴서 바르게 하거나, 바른 것을 고쳐 굽히거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 굽음과 곧음을 모두 묻지 않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저 자신의 의견의 향배(向背)를 위주로 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연후에 원고와 피고[兩造]의 말을 자세히 듣고 널리 복잡한 사정의 증거를 구하면 결국 그 굽고 곧음의 마땅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제 거칠고 얕은 마음과 성나고 원망하는 기운을 가지고,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사사로운 마음을 잠시도 놓아두려 하지 않고서 의리의 득실을 평하려고 하면, 비록 흑백과 같이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오류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털끝만한 차이가 있는 가운데서 또 누가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며 오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에서 서미(書尾) . . . 문야(文耶)” 부분에 대하여.

중간에 강덕공(江徳功)이 삼책(三策)을 봉하여 보냈는데 강덕공의 편지 중에 첨부한 별지에서 말하기를 육자정께서 책문 세 편을 모두 손수 점검하여 대조하여 보고 묵()으로 하여금 봉하여 드리게 하였습니다. 먼저 편지를 쓰고자 하였으나 제가 떠나려고 하니 쓰려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강덕공 본래의 말이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세세한 일은 말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세속에서 명예를 더럽히는 것을 또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현자의 언행이 이렇게 일관성이 없으니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덕공 또한 이것은 여러 생도가 답한 것이니 본래 여러 생도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형께서 주어서 부치도록 했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이미 이것을 써놓고 자세히 보니, 그 중에 또한 오히려 말을 다하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대개 노형의 형제분들은 모두 이것에 대한 논의를 하셨습니다만 그 말한 의미는 같지 않습니다. 자미 존형께서는 본래 천품이 꾸밈이 없이 진실하고 중후하십니다. 그러나 당시 이 이()에 대한 이해가 미진함이 있어 자세히 추구할 수 없었는데도 곧 자신의 이론을 만들고, 따라서 스스로를 지나치게 믿으니 끝내 돌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견해에 비록 병폐가 있지만 뜻은 실제로 다름이 없습니다. 노형께서는 오히려 먼저 하나의 설을 만들어 유약(有若)이나 자공(子貢) 이상으로 뛰어나고자 애쓰고, 근세의 주자(周子) 정자(程子)와 같은 여러 학자는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에 대해서는 시비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결점을 찾아서 떠들어대고 틀린 곳을 비난하려고 합니다. 만약 선생의 말이 충분히 병폐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의도는 우선 좋지가 않습니다. 하물며 거칠고 경솔한 말이 또 병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부자(夫子)의 성인되심은 실로 많이 배워서 지식을 얻은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옛것을 좋아하고 구하는데 민첩하신 점을 보면 참으로 많이 배우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가운데 본래부터 일이관지(一以貫之)한 곳이 있었을 뿐입니다. 만약 다만 이렇게 공허하고 산만하며 근거가 없었다면, 비록 한결같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관통하지는 못했을 것이니 어찌 공자라고 했겠습니까?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유독 성학(聖学)을 전수한 것은 바로 박문약례(博文約礼)하고, 발로 눈으로 모두 직접 가서 보고 해보았기 때문이니, 또한 이렇게 공허하고 산만하며 근거 없이 함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공(子貢)은 비록 도통(道統)을 잇지는 못했지만 그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지금 사람보다 못하지 않은 듯하니, 선학(禅学)이 바꿀 만한 것은 아닙니다. 주자(周子)와 정자(程子)께서 태어난 때가 비록 공맹의 뒤이지만 그러나 그 도()는 적지 않게 합하는 것이 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반복하여 보니, 아마도 노형께서는 그분들의 말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 많은 듯하니, 함부로 안자와 증자로 자처하여 그들을 경시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안자(顔子)는 능하면서도 능하지 않은 사람에게 질문하였고, 많이 알면서도 조금 아는 사람에게 물었으며,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하였고, 가득 차 있으면서도 비어있는 듯이 하였으며, 다른 사람이 욕보여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증자(曾子)는 하루에 세 번 자신을 돌아보아 남을 위해 일을 할 때 자신을 다하지 않았는지, 남과 사귐과 신의가 없었는지, 전수한 것을 익히지 않았는지 걱정했으니, 그들은 지혜가 그렇게 높으면서 예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자만하거나 자족하여 억지를 부려 이기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보내주신 편지의 뜻은 가르침을 주시려는 마음이 매우 지극하였고, 그 말미에 만약 의심스러운 것이 있거든 거리끼지 말고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실로 감히 이를 감당할 수가 없으나 저의 하찮은 견해를 노형께 남김없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면 나는 날마다 이 길을 가고 달마다 이 길을 간다는 것처럼 각각 들은 것을 높이고 각자 알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니, 다시 반드시 같게 되는 것을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매우 두려워 숨쉬기가 어려우니 천만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근래에 󰡔국사(国史)󰡕염계전(濂渓伝)을 보니 이 도설이 실려 있었는데, “무극(無極)으로부터 태극(太極)이 된다고 되어 있어, 염계의 본서에 실로 부터()’된다()’라는 두 글자가 있는 듯이 되어있어 참으로 노형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았으나 감히 변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 두 글자를 덧붙임으로써 본래 이 글자가 없을 때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으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答陸子靜

来書云 浙間後生賂書見規 以為吾二人者所習各已成熟 終不能以相為 莫若畳之勿論 以俟天下後世之自択 鄙哉言乎 此輩凡陋 沈溺俗学 悖戻如此 亦可憐也

熹謂天下之理有是有非 正学者所当明辨 或者之説誠為未当 然凡辨論者 亦須平心和気 子細消詳 反复商量 務求実是 乃有帰著 如不能然 而但於匆遮急迫之中肆支蔓躁率之詞 以逞其忿懟不平之気 則恐反不若或者之言安静和平 寛洪悠久 猶有君子長者之遺意也 来書云人能洪道止敢悉布之

熹按此段所説規模宏夫而指意精切 如曰雖自謂其理已明 安知非私見蔽説及引大舜善与人同等語 尢為的当 熹雖至愚 敢不承教 但所謂莫知其非帰於一是者 未知果安所決 区区於此亦願明者有以深察而実践其言也 来書云古人質実止請卒絛之

熹詳此説 蓋欲専務事実 不尚空言 其意甚美 但今所論無極二字 熹固已謂不言不為少 言之不為多矣 若以為非 則且置之 其於事実亦未有害 而賢昆仲不見古人指意 乃独無故於此創為浮辨 累数百言 三四往返而不能已 其為湮蕪亦已甚矣 而細考其間緊要節目 并無酬酢 只是一味慢駕虚喝 必欲取勝 未論顔曾気象 只子貢恐亦不肯如此 恐未可遽以此而軽彼也 来書云尊兄未嘗止固自不同也

熹亦謂老兄正為未識太極之本無極而有其体 故必以中訓極 而又以陰陽為形而上者之道 虚見之与実見 其言果不同也 来書云老氏以無止諱也

熹詳老氏之言有無 以有無為二 周子之言有無 以有無為一 正如南北水火之相反 更請子細著眼 未可容易譏評也 来書云此理乃止子矣 更請詳看熹前書曾有無理二字杏 来書云極亦此止極哉

極是名此理之至極 中是状此理之不偏 雖然同是此理 然其名義各有攸当 雖聖賢言之 亦未嘗敢有所差互也 若皇極之極 民極之極 乃為標準之意 猶日立於此而示於彼 使其有所向望而取正焉耳 非以其中而命之也 立我烝民 立与粒通 即書所謂烝民乃粒 莫匪爾極 則爾指后稷而言 蓋日使我衆人皆得粒食 莫非爾后稷之所立者是望耳 爾字不指天地 極字亦非指折受之中 此義允明白 似是急於求勝 更不暇考上下文 推此条 其余可見 中者天下之大本 乃以喜怒哀樂之未発 此理渾然 無所偏倚而言 太極固無儼倚而為万化之本 然其得名自為至極之極 而兼有標準之義 初不以中而得名也 来書云以極為中止理乎 老兄自以中訓極 熹未嘗以形訓極也 今若此青 則是己不暁文義 而謂他人亦不暁也 請更詳之 来書云大学文言皆言知至

熹詳知至二字雖同 而在大学則知為実字 至為虚字 雨字上重而下軽 蓋日心之斫知無不到耳 在文言則知為虚字 至為実字 両字上軽而下重 蓋曰有以知其所当至之地耳 兩義既自不同 而与太極之為至極者又皆不相似 請更詳之 此義在諸説中亦最分明 請試就此推之 富知来善禾能無失 往往類此 来書云直以陰陽為形器止道器之分哉

若以陰陽為形而上者 則形而下者复是何物 更請見教 若熹愚見与其所聞 則曰凡有形有象者 皆器也 其所以為是器之理者 則道也 如是則来書所謂始終晦明奇偶之属 皆陰陽所為之器 独其所以為是器之理 如目之明 耳之聡 父之慈 子之孝 乃為道耳 如此分別 似差明白 不知尊意以為如何 (条亦極分明 切望略加思索 便見愚言不為無理 而其余亦可以類推矣)

来書云通書曰止類此

周子言中 而以和字釈之 又日中節 又曰達道 彼非不識字者 而其言顕与中庸相戻 則亦必有説矣 蓋此中字是就気禀発用而言其無過不及処耳 非直指本体未発 無所偏倚者而言也 豈可以此而訓極為中也哉 来書引経必尽全章 雖煩不厭 而所引通書乃独截自中焉止矣而下 此安得為不誤 老兄本自不情周子 政使誤引通書 亦未為害 何必諱此小矢而反為不改之過乎 来書云大伝止孰古

大伝洪範詩禮皆言極而已 未嘗謂極為中也 先儒以此極処常在物之中央而為四方之所面内而取正 故因以中釈之 蓋亦未為甚失 而後人遂直以極為中 則又不識先儒之本意矣 爾雅乃是纂集古今諸儒訓詁以成書 其間蓋亦不能無誤 不足拠以為古 又况其間但有以極訓至 以殷斉訓中 初未嘗以極為中乎 来書云又謂周子止道耳 前又云若謂欲言止之上

無極而太極 猶曰莫之為而為 莫之致而至 又如曰無為之為 皆語 勢之当然 非謂別有一物也 向見欽夫有此説 嘗疑其贅 今乃正使得著 方知欽夫之慮遠也 其意則固若曰非如皇極民極屋極之有方所形象 而但有此理之至極耳 若暁此意 則於聖門有何違叛而不肯道乎 上夫之載 是就有中説無 無極而太極 是就無中説有 若実見得 即説有説無 或先或後都無妨碍 今必如此拘泥 強生分別 曾謂不尚空言 専務事実 而反如此乎

来書云夫乾止自反也

太極固末嘗億於人 然人之議太極者則少矣 往往只是於襌学中認得箇昭昭霊霊能作用底 便謂此是太極 而不知所謂太極乃天地万物本然之理 亘古亘今 攧撲不破者也 過出常情等語 只是俗談 即非殫家所能専有 不応儒者反当回避 况今雖偶然道著 而其所見所説即非禅家道理 非如他人陰実祖用其説 而改頭換面 陽諱其所自来也 如日私其説以自妙而又秘之 又日寄此以神其姦 又日繋辟多少好気質底学者 則恐世間自有此人可当此語 熹雖無状 自省得与此語不相似也

来書引書云 有言逆于汝心 必求諸道

此聖言也 敢不承教 但以来書求之於道而未之見 但見其詞義差舛 気象粗率 似与聖賢不甚相近 是以窃自安其浅陋之習聞 而未敢軽舎故歩以追高明之独見耳 又記頃年嘗有平心之説 而前書見喩曰 甲与乙辨 方各自是其説 甲則日願乙平心也 乙亦日願甲平心也 平心之説恐難明白 不若拠事論理可也此言美矣 然熹所謂平心者 非直使甲操乙之見 乙守甲之説也 亦非謂都不論事之是非也 但欲兩家姑暫置其是己非彼之意 然後可以拠事論理 而終得其是非之実 如謂洽疑獄者当公其心 非謂便可改曲者為直 改直者為曲也 亦非謂都不問其曲直也 但不可先以己意之向背為主 然後可以審聴兩造之辞 旁求參伍之験 而終得其曲宜之当耳 今以粗浅之心 浹忿懟之気 不肯暫置其是己非彼之私 而欲評義理之得失 則雖有判然如黒白之易見者 猶恐未免於誤 况其差有在於毫釐之間者 又将誰使折其衷而能不謬也哉? 来書云書尾止文耶

中間江徳功封示三策 書中有小帖云 陸子静策三篇 皆親手点対 今黙封納 先欲作書 臨行不肯作 此并是徳功本語 不知来喩何故乃爾 此細事 不足言 世俗毀誉 亦何足計 但賢者言行不同如此 為可疑耳 徳功亦必知是諸生所答 自有姓名 但云是老兄所付 今寄来耳

熹已具此 而細看其間亦尚有説未尽処 大抵老兄昆仲同立此論 而其所以立論之意不同 子美尊兄自是天資質実重厚 当時看得此理有未尽処 不能子細推究 便立議論 因而自信太過 遂不可回 見雖有病 意実無他 老兄却是先立一説 務要突過有若子貢以上 更不数近世周程諸公 故於其言不問是非 一例吹毛求疵 須要討不是処 正使説得十分無病 此意却先不好了 况其言之粗率 又不能無病乎 夫子之聖 固非以多学而得之 然観其好古敏求 実亦未嘗不多学 但其中自有一以貫之処耳 若只如此空疏杜撰 則雖有一而無可貫矣 又何足以為孔子乎 顔曾所以濁得聖学之伝 正為其愽文約禮 足目倶到 亦不是只如此空疏杜撰也 子貢雖未得承道統 然其所知似亦不在今人之後 但未有禅学可改換耳 周程之生 時世雖在孟子之下 然其道則有不約而合者 反覆来書 窃恐老兄於其所言多有末解者 恐皆未可拠以顔曾自処而軽之也 顔子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実若虚 犯而不校 曾子三省其身 惟恐謀之不忠 交之不信 伝之不習 其智之崇如彼而禮之卑如此 豈有一毫自満自足 強辯取勝之心乎 来書之意 所以見教者甚至 而其末乃有若猶有疑 不憚下教之言 熹固不敢当此 然区区鄙見亦不敢不為老兄傾倒也 不審尊意以為如何? 如日未然 則我日斯邁而月斯征 各尊所聞 各行所知亦可矣 無复可望於必同也 言及於此 悚息之深 千禽幸察

近見国史濂渓伝載此図説 乃云自無極而為太極 若使濂渓本書実有自為兩字 則信如老兄所言 不敢辨矣 然因渠添此二字 却見得本無此字之意愈益分明 請試思之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1182(宋 孝宗 淳熙9, 壬寅), 주자53세 때의 편지이다. 이 때는 주자가 절동(浙東)에서 제거(提擧)를 맡고 있었고, 진동보와 진부량(陳傅良)이 모두 같은 경내에 있었다.

 

수일(数日)동안 산간에서 노닐어 매우 즐거웠는데 헤어지고 나니 허전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군거(君挙)는 이미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내일 섬계(剡渓)에 갑니다. 그러나 오래 머물 수는 없고 단지 하루 이틀이면 돌아올 것입니다. 대개 성중(城中)의 여러 관리가 애써 와서 섬계에 갈 수 없다고 말하고, 전날 구()와 무()에 간 것을 깊이 책망하였습니다. 이와 같으면 산간(山間)에 다시는 갈 수 없는데 노형(老兄)과 군거(君挙)가 모두 이곳으로 와서 서로 모인 것이 다행입니다. 관사(官舎)에 사람이 없어 조용하여 자못 도로에서 거마에 비녀장을 끼우는 소리가 들리는 마차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조금 낫지만 종일토록 서로 말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군거형(君挙兄)은 감히 급히 알리지 않았으나, 다행히 관사에서 모이는 뜻을 알았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전국책(戦国策)󰡕, 󰡔논형(論衡)󰡕 두 책과 함께 제가 주석한 󰡔전설(田説)󰡕 작은 책 두 질()을 아울러 보내니, 어떤지 살펴보십시오. 산정(刪定)하신 󰡔문중자(文中子)󰡕를 다행히 가지고 왔습니다. 진숙달(陳叔達)이 한공(韓公)이 산정(刪定)󰡔예의(礼儀)󰡕가 있다는 말을 하였으나, 아직 가서 빌려오지 못했습니다. 이별 후에 울적하였는데 선생의 훌륭한 글을 받들 생각을 하니, 꿈에도 그것을 생각합니다. 바람이 부는데 목을 빼고 내다보니 기다리는 마음 더욱 이길 수 없습니다.

 

答陳同甫

数日山間従游甚樂 分袂不勝惘然 君挙已到未 熹来日上剡渓 然不能久留 只一兩曰便帰 蓋城中諸寄居力来言不可行 深咎前日衢婺之行也 如此則山間之行不容复践 老兄与君挙能一来此間相聚為幸 官舎無人 得以従容 殊勝在道間関置車中 不得終日相語也 君挙兄不敢遽奉問 幸為深致此意 千万千万 戦国策論衡二書并自注田説二小帙并往 観之如何也 所定文中子千万携来 陳叔達説有韓公所定礼儀 尚未及往借也 別後欝欝 思奉偉論 夢想以之 臨風引領 尢不自勝

 

 

진동보에게 보냄 與陳同甫

 

 

해제위 편지와 같은 해 여름에 쓴 것이다. 이 해에 절동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주자는 그것을 제대로 구휼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벼슬을 사직하는 글을 올렸다. 17권의 乞賜鐫削狀이 이 글인 듯하다.

 

군거(君挙) 끝내 기약이 없고, 노형(老兄)은 또한 더위를 두려워하시어 분명 급하게 왕림할 수는 없을 것이니, 날씨의 기세가 모름지기 서늘해져야 기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상황이 외롭고 위태로우며, 힘은 적은데 맡은 일은 무거워 바로 조만간에 죄를 얻어 해고될까 두렵습니다. 이미 가뭄이 들었는데, 삼일 전에는 찌는듯했지만 끝내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요 이틀 새벽과 저녁에 서늘하고, 낮에는 찜통이니, 다시 비가 올 것 같지는 같습니다. 비록 기도(祈祷)는 감히 정성을 다했으나, 주현(州県)의 정사(政事)를 보니, 하나라도 조화롭게 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없으니, 장차 다시 어떤 결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본래는 열흘을 기다렸다가 떠나기를 간청하려 했는데, 저의 대죄하는 글에 대한 답이 오지 않아, 감히 급하게 갈 수 없습니다. 이제 드디어 이 극심한 가뭄을 만나니, 어찌 또 감히 스스로 편하기를 구하겠습니까? 다만 자연히 저의 죄()로 파면되면 매우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장차 어떤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새로운 이론은 매우 특이하고 웅대한 것이며 진실로 독창적인 견해입니다. 놀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감히 갑자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나머지 편을 얻을 것을 기다리니, 감히 더 보내주시기를 청합니다. () 지역의 사람들이 전수(銭守)를 얻었으니, 다른 군의 사정과 비교하면 아주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실로 조금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이것은 치료받을 곳도 없습니다. 조쉬(趙伜)가 물러나는 것은 심히 애석합니다. 제 뜻도 또한 일찍이 구황을 담당한 관리들의 공적을 평가할 때 (조쉬의 업적을) 보고하고자 하였으나 바야흐로 죄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조쉬의) 공을 논하기가 꺼려져 감히 올릴 수 없었습니다. () 태수(銭守)가 일찍이 다시 아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조쉬가 물러나는 일이) 실행된다면 실로 애석합니다. 󰡔서의파제(書義破題)󰡕는 진실로 장산인(張山人)이 말하는 착상제시(著相題詩)’라는 것으로, 구절의 뜻이 다 갖추어졌으니 탄복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다른 글도 기록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으시면, 다섯 편을 함께 보내 이 어리석음을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말씀하시기를 방엄(方厳)의 아래 여백공(伯恭)이 즐겨 노닐던 곳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지명이 어디입니까? 그 땅은 누구에게 속합니까? 비답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근래에 간행한 여백공(呂伯恭)이 산정한 󰡔고역(古易)󰡕은 자못 볼만은 하지만 아직 다 보지 못했습니다. 조금 있어 다 보게 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선생과 같이 깊은 생각에 잠기는 분이 이 같은 속된 유자의 글은 읽지 않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사중(社中)의 여러 벗들이 하안거에 들어 안온(安穏)하니, 산간에는 한가하고 시원하여, 성시(城市)의 분주하고 번잡한 기운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근래 문인들을 가르치는 순서에서 한두 가지라도 얻어 들을 수 있습니까? (󰡔論語) “같이 설 수는 있으나 같이 권도할 수는 없다고 했으니, 선생께서는 이것을 살피십시오.

 

與陳同甫

君挙竟未有来期 老兄想亦畏暑 未必遽能枉顧 勢須秋涼乃可為期 但賎迹孤危 力小任重 政恐旦夕便以罪去耳 旱勢巳成 三日前猶蒸欝 然竟作雨不成 此兩日晨夜凄涼 亭午惨烈 無复更有雨意 雖祈檮不敢不尽誠 然視州懸間政事無一可以召和而弭災者 未知将复作何究竟也 本欲俟旬日間力懇求去 綾待罪文字未報 未敢遽発 今遂遭此旱廬 如何更敢求自便 但恐自以罪罷則幸甚 不然 則未知所以為計也 不蕃高明将何以見教也

新論奇偉不常 真所創見 驚魂未定 未敢遽下語 俟再得余篇 乃敢謂益耳 婺人得銭守 比之他郡事体殊不同 他人直是無一点愛人底心 無譬治処也 趙伜之去甚可惜 鄙意亦欲具曾救荒官吏殿最以聞 以方俟罪 嫌於論功 遂不敢上 不知銭守曾再奏否 若其遂行 実可惜也 書義破題真張山人所謂著相題詩者 句意倶到 不勝嘆服 他文有可錄示者 幸併五篇見教 洗此昏価也 向説方巌之下伯恭所樂游処 其名為何 其地属誰氏 幸批示 近刊伯恭所定古易 頗可観 尚未竟 少俟断手 即奉寄 但恐抱膝長嘯人 不読此等俗生鄙儒文字耳 社中諸友朋坐夏安穏 山間想見虚涼 無城市歊煩之気 比所授之次第 亦可使聞一二乎 可与立者 未可与権 願明者之審此也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1183(송 효종 순희10, 癸卯), 절동에서의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거처할 때에 쓴 편지이다. 주자는 이 해 사월에 무이정사를 지었다. 이 편지에도 그 내용이 있다. 동보가 바로 전에 보낸 편지에서 주희가 당중우(唐仲友)를 탄핵한 일을 논하였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편지 중간에 한번 나갔다가 곤란해져서 돌아왔다는 것이 이 일을 말한다.

 

병중에 특별한 이론을 정리하지 못하고, 한가하게 옛 책을 취하여 외고 읊조리니 또한 그 맛을 알겠습니다. 또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에도 자못 힘을 얻을 곳이 있으니, 다른 것은 또한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저에게 보내주신 편지의 뜻이 매우 두텁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어찌 그런 사람이겠습니까? 선생은 여기에서 실언의 잘못을 면키 어렵게 되셨습니다. 진괘(震卦)의 구사(九四)[우뢰가 돌아오지 못하고 걸리고 빠졌다]는 지난번 안노자(顔魯子)가 납갑(納甲)으로 저의 운명을 추론할 때 바로 이 효()로 하였는데 그 설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항상 한스럽습니다. 이제 선생이 사리(事理)로 미루어서 맞추었는데, 그와 은밀히 합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 일은 실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하라고 부탁하신 것을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의 곡절은 쉽게 지필(紙筆)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숙창(叔昌)처음에는 실로 있었다고 말한 것은, 대개 노형이 위로는 무정(無情)함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결코 정()을 언급하지 않는 것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이니, 그러므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제 편지를 받고 보니, 노형이 마침내 의()로서 사()를 이긴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았으니, 참으로 일세(一世)의 호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른바 장부되기를 천하게 여긴다는 것은 또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무이(武夷)의 구곡(九曲) 가운데에 요사이 작은 집 몇 칸을 지었으니 노닐고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봄에 한번 가서 십여 일 머물었습니다. 계곡과 산이 모이고 구름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모여 아침과 저녁의 풍광이 실로 사람의 경계가 아닙니다. 일찍이 몇 편의 시()가 있었고, 친구가 지은 것 또한 많습니다. 천하고 쓸모가 없어 베껴가는 사람은 없으나, 후에 편지로 부쳐드려 몇 마디 말씀을 구하겠습니다. 한장(韓丈)께서도 또한 (무이정사의) 기문(記文)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이 시대에 등용되기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중간에 확고하지 못하여 쉽게 한번 나갔다가 곤란해져 돌아왔습니다. 가까운 일로 말하자면, 물리침을 당하였고, 처음 먹은 마음으로 말하면, 자신의 자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편지를 받고 돌아보니, 조용히 이 산간에서 기이하고 웅장하며 사람을 놀라게 하는 선생의 이론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또한 평생의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몸을 굽혀 천직에 종사하고 향시를 치르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으니, 바로 아마도 이로부터 지위가 올라가면 이 적막한 물가를 찾을 겨를이 없을 듯합니다.

책문(策問)의 전편(前篇)은 내 생각에 명초(明招)산을 지키는 때의 설인 듯 하고, 후편(後篇)은 시폐(時弊)를 바로잡는 것입니다만, 모름지기 또한 크게 경장(更張)이 있어야 시행(施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모든 일이 단지 오늘날과 같아서 법()을 폐지하고자 한다면, 나는 법이 없어 일어나는 폐해가 법이 있을 때보다 심할까 두렵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해 열 가지 의론은 대체적인 뜻이 아마도 정도를 어겨서라도 시폐를 구하려는 의도가 너무 많아, 정도(正道)에 대한 방비가 없게 되었습니다. 뒤에 태어난 사람들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정도를 알지 못하고 갑자기 이 설을 들으면, 그 해로움은 장차 이루 구제할 수 없이 많을 것이오니, 원컨대 선생께서는 그것을 돌이키십시오. 저의 생각이 이러하니, 혹 도리에 맞지 않으면 다시 반복해서 알려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위공집(李衛公集)󰡕 한 권을 책상에 두니, 이위공의 재기(才気)와 사업(事業)은 춘추(春秋) 전국(戦国)시대의 어떤 사람과도 비교될 만하니, 한번 평가해보시고 빨리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答陳同甫

病中不能整理別頭項文字 閑取旧書諷詠之 亦覚有味 於反身之功亦頗有得力処 他亦不足言也 示喩見予之意甚厚 然僕豈其人乎 明者於是乎不免矢言之累矣 震之九四 向来顔魯子以納甲推賎命 以為正当此爻 常恨未暁其説 今同甫复以事理推配 与之暗合如此 然則此事固非人之所能為矣

附託之戒 敢不敬承 然其事之曲折 未易紙筆既也 叔昌所云初盲有之 蓋意老兄上末及於無情 而下決不至於不及情 是以疑其未免乎此 今得来喩 乃知老兄遂能以義勝私如此 真足為一世之豪矣 而区区妄意 所謂浅之為丈夫者 又以自愧也

武夷九曲之中 比縛得小屋三数間 可以游息 春間嘗一到 留止旬余 渓山回合 雲煙開斂 旦暮万状 信非人境也 嘗有数小詩 朋旧為賦者亦多 簿冗 無人写得 後便当寄呈求数語 韓丈亦許為作記文也 此生本不擬為時用 中間立脚不牢 容易一出 取困而帰 自近事而言 則為廃斥 自初心而言 則可謂爰得我所矣 承許見顧 若得遂従容此山之間 款聴奇偉驚人之論 亦平生快事也 但聞未免俯就郷挙 正恐自此騫騰 未暇尋此寂漠之浜耳

策問前篇 鄙意猶守明招時説 後篇極中時弊 但須亦大有更張 乃可施行 若事事只如今日而欲廃法 吾恐無法之害又有甚於有法之時也 如何如何 去年十論 大意亦恐援溺之意太多 無以存不親授之防耳 後生輩末知三綱五常之正道 遽聞此説 其害将有不可勝救者 願明者之反之也 妄意如此 或未中理 更告反覆 幸幸

李衛公集一本致几間 此公才気事業当与春秋戦国時何人為比 幸一評之 早以見寄 幸甚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1184(송 효종 순희11, 甲辰), 주자 55세 때의 편지이다. 이 때 진량은 살인 교사 혐의로 감옥에 갔다 나왔는데, 주자는 언행을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면서, “가 함께 시행되고, 왕도와 패도가 아울러 행해질 수 있다는 설을 물리치고” “순수한 유학의 로 스스로 규율하기를 당부하고 있다.

 

요새 갑자기 의외의 재앙이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도와서 힘을 쓸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미 사리를 분명히 밝히고 돌아왔다고 들으니, 매우 기쁩니다. 인생만사는 참으로 없는 일이 없습니다. 요새 오랜 장마로 후덥지근한데 존후만복하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도 모든 상황이 옛날 그대로라고 생각하시면 무릇 온갖 것을 또한 통렬히 스스로 언행을 신중히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이 일은 마땅히 여러 번 말해야 하는 것으로, 오늘에 이르러 늦었다고 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실로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형께서 평소에 법도 밖에 있다고 자처하였으며, 유생(儒生)의 예법에 관한 논의를 듣기를 즐기지 않으셨으니, 비록 백공(伯恭)과 같은 현명한 친구도 역시 서로 법도의 밖에 처했다고 하여 감히 귀에 거슬리는 논의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경계하고 일깨워줄 것이 있으면 반드시 완곡히 돌려서 듣기 좋게 한 다음에야 감히 말하였으니, 평소에 저는 그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老兄을 사랑하는 자는 마땅히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야흐로 나중에 조용히 만나서 면전에서 그러한 말을 할 때를 기다리고자 했으나, 뜻밖에 급하게 관직을 그만두고 물러나게 되었으니, 이 생각대로 다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사고는 비록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또는 반드시 그것을 초래한 것도 아니지만, 평소에 쌓인 것이 있으니, 아마 또한 여러 사람의 허물을 모아 헐뜯는 자를 믿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노형은 식견이 높고 밝으며 강직하고 결단을 잘 내리고 잘못을 고치는 자에게 인색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저의 말로 생각해 보시고, ()와 이()가 함께 시행되고, 왕도와 패도가 아울러 행해질 수 있다는 설을 물리쳐 버리시고 분노를 억제하고 사욕을 막으며 허물을 고쳐 선으로 옮기는[懲忿窒慾, 遷善改過]일에 종사하여 순수하게 깨끗한 유학의 도()로 스스로 규율하시면, 형벌을 받는 화()만을 면하겠습니까? 그 본래의 뿌리를 북돋아 키우며, 바른 근본을 맑게 하는 이유는 다른 때 사업에서 발휘하는 것이 더욱 크게 빛나고 고명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 함께한다는 후의를 입어 그 광솔(狂率)함을 잊고, 감히 제 생각을 다 말했습니다. 비록 지체한 죄를 면제받기는 부족하지만 혹 장래(将来)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答陳同甫

比忽聞有意外之禍 甚為驚歎 方念未有相為致力処 又聞已遂辨白而帰 深以為喜 人生万事 真無所不有也 比日久雨蒸欝 伏惟尊候万福

帰来想諸况仍旧 然凡百亦宜痛自収斂 此事合説多時 不当至今日遅頓不及事 固為可罪 然観老兄平時自処於法度之外 不樂聞儒生礼法之論 雖朋友之賢如伯恭者 亦以法度之外相処 不敢進其逆耳之論 毎有規諷 必宛転回互 巧為之説 然後敢発 平日狂妄深窃疑之 以為愛老兄者似不当如此 方欲俟後会従容面馨其説 不意罷逐之遽 不及尽此懐也 今茲之故 雖不知所由 或未必有以召之 然平日之所積 似亦不為無以集衆允而信讒口者矣 老兄高明剛決 非吝於改過者 願以愚言思之 紬去義利双行 王覇并用之説 而従事於懲忿窒慾遷善改過之事 粋然以醇儒之道自律 則豈独免於人道之禍 而其所以培壅本根澄源正本 為異時発揮事業之地者益光大而高明矣 荷相与之厚 忘其狂率 敢尽布其腹心 雖不足以贖稽緩之罪 然或有補於将来耳 不蕃高明以為如何 悚仄悚仄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위의 편지와 같은 해 가을에 쓴 편지이다. 주희가 문인의 형인 임숙화(林叔和)로부터 진량이 소림면벽 공부를 권고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이를 극력 만류하고 있다. 주희는 이 무렵부터 진량을 비판하였다.

 

어제 흉흉한 소식을 들었으니, 항상 숙도(叔度)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시기가 오히려 분명한 것을 알지 못하니,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편지에서 문득 526일에 보낸다는 글을 보고, 사정을 다 알았으니,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또 호랑이 입을 벗어날 수가 있었으니, 이 밖의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은 놓아두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임숙화(林叔和)가 여기를 지나가서 또 그 일의 전모를 더욱 상세하게 들었는데, 이 또한 탄식할 만 한 것입니다. 집에 돌아간 후에 여러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른바 소림면벽(少林面璧)이라는 것은, 노형(老兄)께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바로 이와 같이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명교(名教) 가운데에 본래 안락을 찾을 곳이 있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미 앞의 편지에 모두 말했습니다. 대개 세상의 논의는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지만, 중간에 하나의 평온(平穏)하고 정당(正当)한 대로(大路)가 있으나, 사람들이 높은 곳을 향하여 입각하려고 하지 않으니, 깨달을 수 없을 뿐입니다. 노형(老兄)의 총명함은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으니 제 말을 한번 생각해 보시고, 평이한 이론이라고 하여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뜻밖에 편지를 전할 인편을 만나 급하게 편지를 쓰니 적당한 말을 찾을 겨를이 없습니다.

 

答陳同甫

昨聞泅泅 常託叔度致書奉問 時猶未知端的 不能無憂 便中忽得五月二十六日所示字 具審曲折 喜不可言 且得脱此虎口 外此是非得失 置之不足言也 林叔和過此 又得聞其事首末尢詳 是亦可歎也已 還家之後 諸况如何 所謂少林面壁 老兄決做不得 然亦正不当如此 名教中自有安樂処 区区所願言者 已具之前書矣 大率世間議論不是太過即是不及 中間自一絛平穏正当大路 却無人肯向上頭立脚 殊不可暁 老兄聡明非他人所及 試一思愚言 不可以為平平之論而忽之也 偶有便 匆匆未暇索言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이 편지는 1184년 가을에 진량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이다. 진동보가 漢高祖唐太宗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성패(成敗)로서 시비(是非) 논하는 것이라고 하여 진동보의 사공론(事功論)을 비판하고 있다.

 

915, 저는 동보 노형께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문안드립니다. 여름에 동인(同人) ()씨가 돌아와서, 편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지난 일의 자세한 사연을 알았으니, 매우 부끄럽고 통탄스럽습니다. 또한 일찍이 따로 질문을 덧붙여 편지를 보냈으니,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에 멀리서 사람을 시켜 보낸 편지를 받았으니, 더욱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또 집으로 돌아온 이래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았으니 족히 위안이 됩니다. 또 편지를 가져온 사람에게 자세히 물어서, 또 귀로에 뜻밖의 일을 당한 사연을 상세히 듣고 거듭 놀랐습니다. 그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잊을 것이니, 지금은 안정되고 편안하게 지내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병이 들어 문 밖 출입을 못하고 문득 이번 생일을 맞으니, 부모 없이 외로운 생애에 바야흐로 목이 메고 마음이 아팠는데, 잊지 않으시고 멀리서 새로운 축하 글을 써서, 맛있는 과일과 좋은 물건을 보내주시고, 옷감까지 보내주셨는데, 또 그것이 직접 베틀에서 짠 것이니, 이 뜻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두 편의 글이 호탕하고 맑고 아름다워 각각 그 취지를 다했으나, 깊은 산의 초동과 목부가 있는 곳에 보내야 하는 것을, 쇠퇴하고 노후한 사람에게 주셨으니 글의 제목과 내용이 잘 어울리지[著題] 않는 것 같습니다.

보내주신 상세한 편지는 저의 나약한 마음을 격동시킵니다. 노형(老兄)의 높은 학식과 준걸함은 세간의 영고성쇠도 본래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내오신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니 평안하지 못한 심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홀로 생각해보니, 평소에 재주가 너무 높고, ()가 너무 날카로우며, 논의하는 것은 너무 높고, 자취가 너무 드러나는 것은 장점에는 부족하고 단점에는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시 변고를 겪고,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오히려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여 바로잡을 줄을 알지 못 할 것입니다. 일찍이 생각해보니 천리(天理)’인욕(人欲)’ 두 글자는 반드시 고금(古今) 왕패(王覇)의 자취에서 구할 필요가 없고, 다만 내 마음의 의리(義利)와 사정(邪正)의 사이에서 돌이켜보고 더욱 자세히 살피면 그 드러남이 더욱 분명해지고, 마음가짐을 더욱 엄하게 하면 그 발()함이 더욱 결단력이 있을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気)’는 대개 기준과 법도로 수렴하여 감히 함부로 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천하(天下)의 무거운 임무를 자임(自任)하는 것이니 그것은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같은 사람이라도 능히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재능(才能)이나 혈기(血気)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노형께서 한고조(漢高祖)와 당태종(唐太宗)이 한 일을 보고 그 마음이 과연 의()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고조의 경우는 사사로운 의도의 정도가 그렇게 성하지는 않았지만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태종의 마음은 나는 한 생각도 인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만 인의(仁義)를 빌려서 그들의 사사로움을 행했지만 그러나 당시에 그들과 다툰 자들은 재능과 지식과 술책이 그들의 밑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인의(仁義)를 빌릴 줄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이 이들보다 나았던 것이며, 결국 그 뜻을 이룰 수 있었을 뿐입니다. 만일 국가를 건립하여 대대로 멀리까지 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천리(天理)의 바름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면, 이것은 바로 성패(成敗)로서 시비(是非) 논하는 것이고, 다만 많은 짐승을 잡은 것만 취하고, 짐승을 잡는 부정한 방법이 바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1500년간 바로 이러한 것만을 논하고 앉아 있었으므로 단지 새는 것을 막고 떨어진 것을 끌어다 깁는 것으로 시일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소강(小康)이 없지는 않았으나, 삼왕주공공자가 전한 도는 하루도 천지간에 시행된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도()가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 처음부터 사람이 간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것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존재하여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비록 천오백 년 동안 사람들에 의해 훼손을 당했어도 끝내 다 없앨 수 없었습니다. 한당(漢唐)의 이른바 현군(賢君)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찌 조금이라도 그것을 도울 힘이 있었겠습니까? 유자(儒者) 성인(成人)에 관한 이론에 이르면 오로지 유자(儒者)의 학문이 자하(子夏)에게서 나왔다고 했으니, 이는 아마도 억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로(子路)가 성인(成人)에 관해서 물은 것에 대하여 공자께서는 또한 자로가 미칠 수 있는 곳에 나아가 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성인(成人)의 지극함이 아닙니다. 자로(子路)를 위해 말씀하시고, 자하(子夏)를 위해 말씀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학자(学者)에 있어서 각각 그 본성의 가까운 바를 취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무중(蔵武仲)과 변장자(卞荘子), 염구(冉求) 중간에 한 명의 맹공작(孟公綽)을 나란히 하여 집어넣고, 또 예악(禮樂)으로 문식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또한 관중(管仲)과 소하(粛何) 이하의 규모는 아닙니다.

지난 번 제백공문(祭伯恭文)을 보고 또한 동보와 동래 두 사람이 어째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와 같은 의론(議論)을 하였는지를 의아해 했습니다. 요사이 숙창(叔昌)과 자약(子約)의 편지 가운데서 한 말을 보고, 이전에 이 말을 이미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일찍이 숙창(叔昌)과 자약(子約)에게 답한 편지로 인하여 그 설을 힘써 변설했습니다만 그들의 설이 간단명료하지 않으므로 저의 논의도 또한 이 편지와 같이 다할 수 없을 뿐입니다. 노형(老兄)의 인물됨이 위대하고 훌륭하니 오늘날 볼 수 없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지난번의 노형의 득실과 장단은 바로 다시 언급하거나 사람들에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다시 현자께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歩)하시어, 장차 삼대(三代)이하의 인물에 목표를 두지 마시고, 힘써 한당(漢唐)을 위해 변명하는 기력을 줄이면, 곧 다시 거리낌 없고 확 트이게 될 것입니다. 이응(李膺)과 공융(孔融)같은 기개와 곽광(霍光)과 장소(張昭)같은 장중함을 내가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패자(覇者)를 보좌한 이오[夷吾:管仲]와 경략[景略:王猛]의 일을 또한 동보(同父) 당신께서 감히 원하시면 안됩니다.

무이(武夷)에서 지은 여러 시()를 위하여 한 말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한유[]의 기문[]과 육유[]의 시()를 보냅니다. 한장(韓丈)은 또 도가(櫂歌)를 지었으니, 지금 같이 기록하여 보냅니다. 대자(大字)를 써 달라는 말은 제게 황공한 말씀이지만 일찍이 사관(寺観)을 위해서 글씨를 쓴 적이 없으니 규칙을 깨고 싶지 않습니다. 이 또한 꽉 막힌 유자(儒者)의 변함없는 모습이니, 그것을 생각하고 한번 웃었습니다. (大字를 써달라고) 부치신 종이는 장공(張公)의 좌우명(座右銘)을 써서 보내니 혹 만에 하나라도 함양 공부를 쌓고, ()가 맑은 얼굴과 몸에까지 나타나는 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찍이 회계(会稽)에 갔다고 들었는데 구종경(丘宗卿)은 얼마나 정성스럽게 대했습니까? 또 누구와 만나보았습니까? 항평보(項平父)는 아직 후임자와 교대하지 않았습니까? 산을 유람하지는 않았습니까? () 지방의 산수(山水)와 기상(気象)이 얕고 협소하니, 생각이 원(深遠)할 수가 없습니다. 무이(武夷)도 또한 아주 좋지는 않으나 가까이에 산이 없어서 또 형편을 따라 자리를 잡아 스스로 경계를 지었습니다. 봄에 거기에 가니 산이 높고 물은 길며, 붉은 꽃과 푸른 신록이 서로 비추어 또한 저절로 싫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간 궁핍함이 특히 심하여 시()는 지었으나 집은 다 짓지 못했고, 또 인력이 없어 갈 수가 없으니 매양 생각만 할 뿐입니다.

편지를 전하러 온 사람이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아서, 급하게 편지를 쓰다보니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책과 짝할 만한 물건이 없어, 고용정(古龍涏) 두 냥(二兩)과 종유(鍾乳) 네 냥(四兩), 등나무 베게 하나를 보내니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근사록(近思録)󰡕 두 책이 있어, 외람되이 함께 보내니,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대의 부인과 아들, 딸도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서자재(徐子才)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혹 보시거든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추위에 몸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성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부질없이 몇 자를 써서 숙도(叔度)의 처소에 부쳤으니, 아마도 인편이 있으면 여기에 올 것입니다. 만나 뵙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바람만 맞고 있으니 서글퍼집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머리를 조아려 재배합니다.

 

答陳同甫

九月十五日 某頓首再拝同甫上舎老兄 夏中朱同人帰 辱書 始知前事曲折 深以愧歎 尋亦嘗別附問 不謂尚未達也 玆承不遠千里専人枉書 尢荷厚意 且審還舎以来 尊候万福 足以為慰 即細絢来使 又詳帰路戒心之由 重増歎駭也 事遠日忘 計今処之帖然矣

熹衰病杜門 直此生朝 孤露之余 方深哽愴 乃蒙不忘 遠寄新詞 副以香果佳品 至於裘材 又出機杼 此意何可忘也 但両詞豪宕清婉 各極其趣 而投之空山樵牧之社 被之衰退老朽之人 似太不著題耳

示喩縷 殊激濡衷 以老兄之高明後傑 世間栄悴得失本無足為動心者 而細読来書 似未免有不平之気 区区窃独妄意 張公座右銘

此殆平日才太高 気太鋭 論太険 跡太露之過 是以困於所長 忽於所短 雖复更歴変故 顛沛至此 而猶未知所以反求之端也 嘗謂 天理 人欲 二字 不必求之於古今王伯之迹 但反之於吾心義利邪正之間 察之愈密 則其見之愈明 持之愈厳 則其発之愈勇 孟子所謂 浩然之気 者 蓋斂然於規矩凖縄不敢走作之中 而其自任以天下之重者 雖賁育莫能奪也 是豈才能血気之所為哉

老兄視漢高帝唐太宗之所為 而察其心果出於義耶 出於利耶 出於邪耶 正耶 若高帝 則私意分数猶未甚熾 然已不可謂之無 太宗之心 則吾恐其無一念之不出於人欲也 直以其能仮仁借義以行其私 而当時与之争者才能智衒既出其下 又無有仁義之可借 是以彼善於此而得以成其志耳 若以其能建立国家伝世久遠 便謂其得天理之正 此正是以成敗論是非 但取其獲禽之多而不羞其詭遇之不出於正也 千五百年之間 正坐如此 所以只是架漏牽補 過了時日 其間雖或不無小康 而尭舜三王周公孔子所伝之道 未嘗一日得行於天地之間也

若論道之常存 却又初非人所能預 只是此箇自是亘古亘今常在不減之物 雖千五百年被人作壌 終殄滅他不得耳 漢唐所謂賢君 何嘗有一分気力扶補得他耶 至於儒者成人之論 専以儒者之学為出於子夏 此恐未可懸断 而子路之問成人 夫子亦就其所及而告之 故曰亦可以為成人 則非成人之至矣 為子路 為子夏 此固在学者各取其性之所近 然臧武仲卞荘子冉求中間挿一箇孟公綽 斉手并脚 又要文之以体樂 亦不是管仲蕭何以下規模也

向見祭伯恭文 亦疑二公何故相与聚頭 作如此議論 近見叔昌子約書中説話 乃知前此此請已説成了 亦嘗因答二公書力辨其説 然渠来説得不索性 故鄙論之発亦不能如此書之尽耳 老兄人物奇偉英俊 恐不但今日所未見 向来得失短長 正自不須更桂歯牙 向人分説 但鄙意更欲賢者百尺竿頭進取一歩 将来不作三代以下人物 省得気力為漢唐分疏 即更脱灑磊落耳 李孔霍張 則吾豈敢 然夷吾景略之事 亦不敢為同父願之也

武夷諸詣能為下一語否 韓記陸詩納呈 韓丈又有櫂歌 今并錄去 大字甚荷不鄙 但尋常不曾為寺観写文字 不欲破例 此亦狗儒常態 想又発一笑也 寄来紙却為写張公集句坐右銘去 或恐万一有助於積累涵養随面益背之功耳

聞曾到会稽 丘宗卿頗款否 更曾与誰相見 項平父未受代否 曾遊山否 越中山水気象終是浅促 意思不能深遠也 武夷亦不至甚好 但近処無山 且随分占取做自家境界 春間至彼 山高水長 紅綠相映 亦自不悪 但年来窘束殊甚 詩成屋未就 亦無人力可往来 毎以為念耳

来人不欲久留 草草布此 不能尽所欲言 無物可伴書 古竜涎二兩 鍾乳四兩 藤枕一枚幸視人 更有近思錄兩冊 并以唐突 勿怪勿怪 尊嫂郎娘均慶 徐子才今在何処 或見 幸為致意 向寒 珍重為檮 有人之城 謾作数字寄叔度処 恐有便来此也 引領晤対 臨風悵然 不宣 熹頓首再拝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1185(송 효종 순희12, 乙巳) 주희56세 때의 편지이다. 이때 진동보가 포슬재를 짓고 주희를 비롯한 몇 사람에게 포슬재를 위한 시를 한 수 부탁했다. 주희는 진부량과 섭정칙의 시를 칭찬하고, 자신은 시가 잘 써지지 않아 당장은 보낼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진동보가 이 무렵 외삼촌의 상을 당했는데 주희가 묘액(墓額)을 써서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는 사공론이나 왕패론 같은 진동보와 함께 논쟁을 벌이던 주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노형께 머리를 조아려 재배합니다. 지난번 사람이 돌아간 뒤로 다시 편지가 없어서, 날마다 기다렸습니다. 편지를 전하는 사람이 와서, 갑자기 편지를 받고서, 날로 봄날같이 화창하고, 두루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감사함과 위안이 몰려옵니다. 또 정원의 정자의 지붕을 잇고 수리하여 규모가 심히 성대해졌다는 것을 들었는데, 가서 즐거움을 함께하고 고견을 듣지 못하는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누대(楼台)의 곁에는 버드나무 짝하고, 주렴 중간에 제비가 나는구나라는 시는, 부귀(富貴)한 자들의 일일뿐이니, 증자와 공자가 말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는 뜻도 될 수 없고, 또한 몸소 밭 갈고 김을 매며, 무릎을 안고 앉아 생각에 잠겨 길게 읊조리는 기상(気象)도 아닙니다. 도리어 이는 스스로가 이 부귀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아서 장차 한가지로 간주할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병의 근원이고, 평소의 의논과 같은 관건(関鍵)인 듯합니다. 졸렬한 저의 편지에서 일일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포슬시(抱膝詩)는 수일(数日)동안 수정하고 해체하여, 기울어진 것을 일으키고 헐은 곳을 고치며, 남는 것을 모으고 부서진 것을 섬세하게 하여, 그 노고를 이길 수 없는데, 선생의 누대와 연못의 절승(絶勝)은 없으면서 소란스러움만 있으니,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과 머물러 수일(数日)을 기다렸으나 끝내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또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생각나기를 기다려 시를 지어서 인편에 보내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는 모두 매우 고상하고, 또 섭정칙(葉正則)의 모사(摹写)는 더욱 교묘한데, 마지막 장의 의미는 더욱 돈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게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 일침을 놓지 않아 오히려 제 이의(二義)로 떨어진 것입니다. 군거(君挙)가 군()을 얻어 지사가 된 것은 기쁜 일이나, 언제 그 자리가 비는지 모르겠습니다. 섭정칙이 학문에 매우 많은 진보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지 매우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전날 인편이 있어, 이미 써 놓은 것을 다시 보냈습니다. 이제 그것을 이 편지와 덧붙여 보내니 받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 논의(議論)한 것을 보니, 또한 많은 부분이 제 뜻과 다릅니다. 이 일은 참으로 깊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조금도 서로 뜻이 모일 수가 없습니다. 서로 모일 수가 있다면 아마도 곧 믿을 수는 없을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선생의 외삼촌인 하장(何丈)께서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이제는 장사를 지냈습니까? 묘액(墓額) 또한 이미 썼으니, 아마 불교의 여섯 자 염불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돌려 지난번 길에서 서로 만난 것을 생각하니, 마치 어제 일 같은데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져 있군요. 인간 세상은 가고 옴이 무상하니 어찌 하겠습니까? 좌우명(坐右銘)은 참으로 버려야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써서 보낸 뜻은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니, 부디 자주 취하여 보고 돌려보내면 다행으로 여기고 제가 스스로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버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가르쳐준 것은 그 말이 매우 좋습니다. 우연히 눈병을 얻어 여러 날 낫지 않았는데, 시자가 여기에 머무른 지가 오래여서 자꾸 빨리 돌아가겠다고 하여, 관청에서 일하는 시종에게 구술하여 별지로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는 이미 혼란하고 난삽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항상 자애(自愛)하시길 바랍니다. 종이를 대하니 치닫는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월 십사일에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올립니다.

삼가 문안드리니, 댁내에 좋은 일만 있고, 댁의 자제분은 학문이 수승하기를 바랍니다. 배우는 여러 사람 중에 반드시 함께 말할 만한 빼어난 사람이 있을 것인데 만나 볼 수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자재(子才)는 지금 어떤 곳에 파견되었습니까? 편지를 쓰고자 하나,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해 쓸 수가 없습니다. 배움이 매우 독실하여 마음에 더욱 위로가 되지만 어떤 학문을 배우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감과 밤[柑栗]을 보내주시니 더욱 후의(厚意)에 감사합니다. 촌락이 조용하여 보낼 만한 책이 없어, 금실[金糸]과 횟감과 떡 10개와 김 조금으로 하나의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보내게 되어 다행입니다. 천민(天民)이가 관직에 이른 것은 기뻐할 만하니 그를 보시거든 제 생각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조만간 인편이 있으니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答陳同甫

熹頓首再拝同父上舎老兄 自頃人還 不得再附問 日以馳情 専人至止 忽奉誨示 獲聞即日春和 尊候万福 感慰并集 且聞葺治園亭 規模甚盛 甚恨不得往同其樂而聴高論之余也 楼台側畔裼花過 簾幕中間燕子飛 只是富貴者事 做沂水舞雫意思不得 亦不是窮耕隴畝抱膝長嘯底気象 却是自家此念未断 便要王張将来做一般看了 窃恐此正是病根 与平日議論同一関鍵也 所需悪札一 一納去 但抱膝詩以数日修整破屋 扶傾補敗 叢冗細砕 不勝其労 無長者台池之勝而有其擾 以此不暇致思 留此人等候数日 竟不能成 且今空回 俟旦夕有意思却為作 附便以往也 二公詩皆甚高 而正則摹写兀工 卒章致意尢篤 今人歎息 所惜不曾向頂門上下一針 猶落第二義也 君挙得郡可喜 不知闕在何時 正則聞甚長進 此得其書甚久 不曾答得 前日有便 已写了 复遺之 今以附納 幸為致之 観其議論 亦多与鄙意不同 此事侭素商量 但卒乍未能得相聚 便得相聚 亦恐未便信得及耳 今外舅何丈何時物故 今乃葬邪 墓額亦已写去 似却勝六字 然回首向来道間相見 如昨日事 而便有幽明之隔 人世餐営費 欲何為邪 坐右銘固知在所鄙棄 然区区写去之意 却不可委之他人 千万亟為取以見還為幸 自欲投之水火也 他所誨諭 其説甚長 偶病眼 数日未愈 而来使留此頗久 告帰甚亟 不免口授小児 別紙奉報 不審高明以為如何 此已覚昏澀 不能尽所欲言 惟翼以時自愛 臨紙不勝馳情 二月十四日 熹頓首再拝上状

熹拝問 畚集伏惟佳慶 今郎為学勝茂 従学諸君必有秀彦可与言者 恨未得見也 子才今得甚処差遣 欲作書 以未知此 写不得 為学甚篤 允慰所懐 但未知所学何学耳 恵脱柑粟尢荷厚意 村落瀟然 無以伴書 金糸膾材十餠紫菜少許 共作一小菴 幸視至 夫民到官可喜 因見幸為致意 旦夕有便 自拝書也 熹再拝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1185(송 효종 순희12, 乙巳) 주희56세 때의 편지이다. 진동보에게 보내는 여덟 번째 편지이다. 이 편지는 앞의 편지와 연결된 편지로 보기도 한다. 즉 제 7서와 8서에서 주희가 언급한 것을 󰡔용천집󰡕여주원회비서에서는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農巖雜識󰡕󰡔標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편지에서도 삼대와 한당을 같이 보는 진동보에게 그것을 이룬 결과는 같은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근본이 다르므로 같이 취급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보내 주신 여러 장의 편지는 거칠 것 없고 특이하며, 기이함이 백출(百出)하여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맹자(孟子)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또한 그 말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우매하고 용렬한 자는 어떠하겠으며, 또 노형께서 말씀하신 천유(賎儒)가 또 어찌 그 사이에 한 마디라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뜻에 실로 온당치 않은 것이 있어 감히 부화뇌동할 수 없고, 아부할 수도 없어 다시 한두 마디 하겠으니, 그대는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이 비록 많지만 그 대부분은 한당(漢唐)을 추존하여 삼대와 다르지 않다고 하고, 삼대를 폄하하여 한당과 다름이 없다고 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까닭은 고금(古今)은 다름이 마땅하므로 성현(聖賢)의 일을 다 본보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다만 세상을 구할 뜻이 있고, 혼란을 없애는데 공이 있으면, 그가 한 행위가 비록 반드시 다 의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세의 영웅이 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이것이 의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으므로 또 천지인(天地人)이 나란히 서서 셋이 됨을 말해야 하고, 천지(天地)가 단독으로 운행하고 사람은 쉬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미 천지(天地)가 상존(常存)하니 곧 한당(漢唐)의 군주는 단지 이와 같이만 하여도 이미 사람의 일을 한 것이고, 천지(天地)도 힘입은 바가 있어 오늘에 이른 것이 됩니다. 그 전후(前後)에 반복(反覆)함이 비록 끊임없고 복잡하지만 모든 것은 이 설을 증명하여 성립시키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어리석은 저는 그 소견(所見)이 실로 이와 다르지 않음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 중에 또 같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이제 그 같은 것을 말미암아서 그 다른 것을 탐구하고자 하니, 아주 작은 차이나 매우 큰 차이도 장차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마음은 항상 민멸되지 않으며, 법은 항상 없지는 않다는 구절은 이 편지의 핵심입니다. 제가 동의하는 것이 이 구절보다 많은 것이 없습니다만 다른 것 역시 이 구절보다 보다 더 심한 것이 아직 없습니다. 대개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으면 이 법도 있으니, 본래 언제나 민멸되고 언제나 없는 이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민멸되지는 않는다고 하면 즉 어떤 때는 민멸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항상 없지는 않다고 하면 어떤 때는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대개 천리와 인욕은 병행하니, 그것이 끊어지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는 것은 실로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본연의 오묘함(本然之妙)만을 논한다면, 오직 천리만 있고 인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으로 반드시 그 인욕을 모조리 제거하여 천리를 온전히 회복시키려고 합니다. 마음의 경우, 그것이 언제나 민멸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항상 민멸되지 않는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법도의 경우, 언제나 그것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항상 없어지지 않는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로지 정밀하게 하고 오로지 한결같이 하여 그 중()을 잡으라고 한 것은 요()()()가 서로 전해준 비밀스런 뜻입니다. 대개 사람은 테어나면서부터 형체의 사사로움에 얽매이게 되니, 실로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천지의 바름을 얻는 것이 있으니 또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일용의 사이에서 이 두 가지가 병행하여 번갈아 이기고 지게 되니, 한 개인의 시비와 득실, 천하의 치란(治乱)과 안위(安危)가 모두 그것에 메어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밀한 것을 택하여 인심(人心)이 도심(道心)에 섞이지 못하게 하고, 그 한결같음을 지켜 천리(天理)가 인욕(人欲)으로 흐르지 않게 하면,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도 중()을 얻지 않는 것이 없고, 천하 국가는 대처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됩니다. 대저 어찌 인심이 스스로 위태롭도록 놓아두고 때로는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며, 도심이 스스로 은미하도록 놓아두고 그것이 잠시라도 항상 민멸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겠습니까? 대저 요우가 서로 전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무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듣고 알았으며, 또 그것을 돌이켜서 (우가 이룬)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부자께서 안연(顔淵)과 증삼(曾參)에게 전한 것이 이것이며, 증자가 자사와 맹가에게 전한 것 역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고 하셨고, 나의 도()는 하나로 꿰었느니라라고 하셨으며, “도는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여 바로 길러도 해가 없으니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찼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서로가 전한 오묘한 이치이니, 유자(儒者)는 서로 삼가 지키고, 함께 배워서, 천하가 비록 크다고 하더라도 다스리는 소이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맹자(孟子)께서 돌아가신 후로 세상이 다시 이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때에 영웅호걸의 선비가 있어 혹 아름다운 자질과 정밀하게 생각할 줄 알아 한 마디 말과 한 행동이 우연히 도()에 맞는 것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의 근본으로 삼은 것은 실로 이욕(利欲)의 사사로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또 세상의 학자들 중에 조금 재기(才気)가 있는 자는 스스로 마음과 뜻을 낮추어서 유가의 일과 성학(聖学) 공부에 뜻을 두려 하지 않았고, 또 이러한 하나의 도리(道理)가 충분히 옳고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거리낌 없이 여러 행위를 하며, 큰 공명을 세우고, 큰 부귀를 얻을 수도 있다고 보았으니, 이에 마음이 이롭다고 여기면 다투어 흠모하여 그것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또 전적으로 의리(義理)를 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이러한 행위하면서 잠깐 사이에 우연히 없어지지 않은 도리(道理)를 가리켜, 이것이 바로 요()()과 삼대(三代)와 융성함을 견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 마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대개 삼재가 삼재가 되는 까닭은 실로 일찍이 두 가지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지는 마음이 없고, 사람은 욕심이 있으므로, 천지의 운행이 다함이 없으나, 사람에게 있어서는 천지의 운행과 서로 같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대개 의리의 마음이 잠깐 동안이라도 없으면 인도(人道)는 멈추니, 인도가 멈추면 천지의 작용이 그치지 않았다고 해도, 나에게 있어서는 실로 여기에 나아가 행할 수 는 것입니다. 단지 큰 하늘이 위에서 항상 운행하는 것과, 유순한 땅이 항상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곧 인도가 세워지지 않을 때가 없고, 천지가 그것에 힘입어서 존재한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대저 ()의 존망(存亡)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므로 사람을 버리고 도를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도가 일찍이 없어진 적이 없으나, 사람이 그것을 체득하는 것은 거기에 이를 때도 있고, 이르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일 뿐이지, 실로 이 몸이 있으면, 곧 도가 저절로 존재하니, 이 몸이 없어지고 나면 도가 곧 없어진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에 실로 모든 사람이 요()임금이 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요()임금의 도가 행해진 다음에야 사람의 기강이 닦여지고 천지가 설 수 있습니다. 천하에 모든 사람이 다 걸()이 될 수도 없지만, 또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걸()이 되고 난 후에야 사람의 기강이 닦여질 수가 없고, 천지가 세워질 수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도를 주장하는 사람인 인군(人君)은 한 생각이라도 요() 같지 않고, () 같으면, 이 한 생각 사이에 곧 새는 것을 임시로 꿰어 맞추며 날을 허비하고, 잡아당겨 꿰매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마음은 항상 없어지지 않지만 혹 없어질 때가 있는 것을 면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또 어찌 소위 반생반사(半生半死)의 벌레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도는 일찍이 쉰 적이 없으나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와 려()가 그것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직 성인이라야 인륜을 다 할 수 있고, 오직 왕이라야 제도를 다 갖출 수가 있으니, 이것은 실로 보통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을 세우는 것은, 남김없이 다하는 것으로 법을 삼아야 하지 다하지 않는 것으로 기준을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것으로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그 임금에게 불경한 자이고,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것으로 하지 않으면 그 백성을 도둑으로 해치는 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을 다 속이지 않는 것으로 인륜을 삼고, 세상 사람을 다 잡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제도를 삼는다고 하면, 이것은 보내주신 편지의 논리로 보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 않고 세상 사람을 잡아들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자는 다른 사람도 그를 속이고, 다른 사람을 잡아들이는 자는 다른 사람도 그를 잡아들이니, 이것은 한()()의 정치가 비록 그 융성함을 다했지만 사람들이 심복하지 않았으니, 결국 삼대(三代)의 성시(盛時)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대개 사람은 다만 사람일 뿐이고, ()는 단지 도일 뿐이니, 어찌 삼대(三代)와 한()()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다만 유자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고, 무 이래 서로 수수(授受)한 마음이 천하에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한 당의 임금이 비록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도에 맞을 때가 없을 수 없었지만, 그 전체는 오히려 단지 이욕에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요삼대가 본래 요삼대인 이유이고, ()의 고조(高祖)와 당()의 태종(太宗)이 본래 한고조 당태종이어서, 끝내 하나로 합치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이제 만약 반드시 그 간격을 없애고, 고금도 없애고자 하면 요순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과 탕무가 돌이킨 공부를 깊이 고찰하여 그것을 준칙으로 삼아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 한고조와 당태종이 마음을 쓴 은미한 곳에 나아가 통렬하게 수정을 가하고, 우연히 합치되는 것은 그 원인을 찾으며, 그 어긋나는 것은 물리치고, 그것이 따라 일어난 곳을 궁구하면 천지의 변함없는 도리와 고금에 통하는 바른 뜻을 내가 터득할 수가 있습니다. 앉아서 이미 지나간 자취를 이야기하고, 이미 벌어진 잘못을 거슬러가서 덮어 가리며, 우연히 같아진 것을 가리켜 전체가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진실로 고대의 성현과 다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또 약법삼장(約法三章)과 같은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만 끝내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없앨 수는 없었으니, 한 때의 공신(功臣)으로서 베어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혼란을 없애는 뜻은 참으로 좋습니다만, 궁인을 몰래 취하여 아버지를 사사로이 모시게 하고 그 밖에 윤리를 어지럽히고 거스르는 일을 자주 저질렀습니다. 대개 그 처음과 끝을 들어 말하면 의리에 맞는 것은 항상 적었고, 맞지 않는 것은 많았으며, 의리에 맞는 것은 항상 작고, 맞지 않는 것은 항상 컸습니다. 그러나 후일에 그것을 보는 사람은 여기에 근본 공부가 본래 부족함이 있어서 그 잘못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치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혹 비록 이치에 해가 된다고 여기더라도 그 많은 짐승을 잡는 것(실질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는 것)에는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이 말씀하신 성인(成人)을 배우되 반드시 유학에서 배울 필요는 없으니, 철을 섞어 하나의 그릇을 만들어서 알맞게 쓰는 것을 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보면, 그 마음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 공리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니, 변설로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 사람이 되는 길은 유자(儒者)의 학으로 구하면 부자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성인(成人)’입니다. 유자의 학으로 구하지 않으면 먹줄을 벗어나고 법도를 벗어나게 되니, 나아가서 군자가 될 수 없고, 물러나서 소인조차 될 수가 없습니다. 바로 금철을 섞어 하나의 그릇을 만들면, 금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과 철도 역시 동과 철의 쓰임새를 다할 수 없게 됩니다. 순경(荀卿)은 실로 유자(游子)와 자하(子夏)의 비천함을 비웃었고, 대유(大儒)로 주공을 지목하지 않았습니까? 공자는 참으로 관중(管仲)의 공을 칭찬하고, “그릇이 작아 예를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자께서 이 사람은...” 운운한 설은 고주(古注)에서 그 의미를 잘 해석하였습니다. 만약 관중이 일개 이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자산(子産)의 무리는 일개 이 사람도 될 수가 없습니다. 성인(聖人)이 말씀하시는 기운은 이렇게 거칠고 강하며 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밖의 자잘한 것들은 다 궁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해지지 않아 끊어진 학문에 관한 것은 아마도 다시 토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윗대의 여러 성인들이 서로 전한 심법을 알 수 있고, 후세의 일에서는 결단하는데 그 바름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알 수 없다면 도리어 스스로 이목이 높지 않고 듣고 보는 것이 들어맞지 않는 것이니, 소위 넓다는 것은 혼잡한 것이지 참으로 넓은 것이 아니며, 소위 익숙하다는 것은 그저 따르는 것이지 진정으로 익숙한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후생이 전해 들으면 가벼이 서로 전하여 익혀 의()와 이()의 다름을 분명히 하지 않고, ()과 척()의 도를 구별하지 않으며, 유속(流俗)에서 보고 듣는 것에 현혹되어, 학자의 마음 씀씀이를 무너뜨리게 된다면 노형(老兄)은 식자의 논의꺼리가 될 뿐만 아니라, 노형의 붕우 또한 검거하고 조사하는 연좌의 법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매우 우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극언하여 정론(定論)을 구합니다. 만약 여전히 그렇다고 여길 수 없으면 이 일은 잠시 놓아두고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쓸데없이 시끄럽게 논쟁하여 도에 도움에 되지 않고, 또 변장자(卞荘子)의 무리들로 하여금 곁에서 몰래 비웃으며 몰래 그 계책을 행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答陳同甫

来教累紙 縰横奇偉 神怪百出 不可正視 雖使孟子复生 亦無所容其喙 况於愚味騫劣 又老兄所謂賎儒者 复安能措一詞於其間哉? 然於鄙意実有所未安者 不敢雷同 曲相阿徇 請复陳其一二 而明者聴之也

来教云云 其説雖多 然其大概不過推尊漢唐 以為与三代不異 貶抑三代 以為与漢唐不殊 而其所以為説者 則不過以為古今異宜 聖賢之事不可尽以為法 但有救時之志 除乱之功 則其所為雖不必尽合義理 亦自不妨為一世英雄 然又不肯説此不是義理 故又須説夫地人并立為三 不応天地独運而人為有息 今既天地常存 即是漢唐之君只消如此 已能做得人底事業 而天地有所頼以至今 其前後反覆 雖縷縷多端 要皆以証成此説而已 若熹之愚 則其所見固不能不与此異 然於其間又有不能不同者 今請因其所同而核其所異 則夫台釐之羞千里之鏐将有可得而言者矣

来書心無常泯 法無常廃一段 乃一書之関鍵 鄙意所同 未有多於此段者也 而其所異 亦未有甚於此段者也 蓋有是人則有是心 有是心則有是法 固無常泯常廃之理 但謂之無常泯 即是有時而泯矣 謂之無常廃 即是有時而廃矣 蓋天理人欲之并行 其或断或続 固宜如此 至若論其本然之妙 則惟有天理而無人欲 是以聖人之教必欲其尽去人欲而复全天理也 若心 則欲其常不泯而不恃其不常泯也 法則欲其常不廃而不恃其不常廃也 所謂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 尭舜禹相伝之密旨也 夫人自有生而梏於形体之私 則固不能無人心矣 然而必有得于天地之正 則又不能無道心矣 日用之間 二者并行 迭為勝負 而一身之是非得失天下之洽乱安危莫不係焉 是以欲其択之精而不使人心得以雑乎道心 欲其守之一而不使天理得以流於人欲 則凡其所行 無一事之不得其中 而於天下国家無折処而不当 夫登任人心之自危而以有時而泯者為当然 任道心之自微而幸其須臾之不常泯也哉 夫尭舜禹之所以相伝者既如此矣 至於湯武 則聞而知之 而又反之以至於此者也 夫子之所以伝之顔淵曾參者此也 曾子之所以伝之子思孟軻者亦此也 故其言曰 一日克己复体 天下帰仁焉 又曰 吾道一以貫之又曰 道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又曰 其為気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乎天地之間此其相伝之妙 儒者相与謹守而共学焉 以為天下雖大 而所以洽之者不外乎此

然自孟子既没 而世不复知有此学 一時英雄豪傑之士或以資質之美 計慮之精 一言一行偶合於道者 蓋亦有之 而其所以為之田地根本者 則固未免乎利欲之私也 而世之学者稍有才気 便自不肯低心下意做儒家事業聖学功夫 又見有此一種道理 不要十分是当 不碍諸般作為 便可立大功名 取大富貴 於是心以為利 争欲慕而為之 然又不可全然不顧義理 便於此等去処指其須臾之間偶未泯減底道理 以為只此便可与尭舜三代比隆 而不察其所以為之田地本根者之無有是処也

夫三才之所以為三才者 固未嘗有二道也 然天地無心而人有欲 是以天地之運行無窮 而在人者有時而不相似 蓋義理之心頃刻不存則人道息 人道息則天地之用雖未嘗已 而其在我者則固即此而不行矣 不可但見其穹然者常連乎上 頽然者常在乎下 便以為人道無時不立而天地頼之以存之験也 夫謂道之存亡在人而不可舎人以為道者 正以道未嘗亡而人之折以体之者有至有不至耳 非謂苟有是身則道自存 必無是身然後道乃亡也 天下固不能人人為尭 然必尭之道行然後人紀可修 天地可立也 天下固不能人人皆桀 然亦不必人人皆桀而後人紀不可修 天地不可立也 但王張此道之人 一念之間不似尭而似桀 即此一念之間便是架漏度日 牽補過時矣

且日心不常泯而未免有時之或泯 則又豈非所謂半生半死之虫哉 蓋道未嘗息而人自息之 所謂非道亡也 幽属不由也 正謂此耳 惟聖尽倫 惟王尽制 固非常人所及 然立心之本 当以尽者為法 而不当以不尽者為準 故曰 不以舜之所以事尭事君 不敬其君者也 不以尭之所以洽民洽民 賊其民者也而况謂其非尽欺人以為倫 非尽罔世以為制 是則雖以来書之辨 固不謂其絶無欺人罔世之心矣 欺人者人亦欺之 罔人者人亦罔之 此漢唐之治所以雖極其盛 而人不心服 終不能無愧於三代之盛時也

夫人只是這箇人 道只是這箇道 豈有三代漢唐之別 但以儒者之学不伝 而尭舜禹湯文武以来転相授受之心不明於天下 故漢唐之君雖或不能無暗合之時 而其全体却只在利欲上 此其所以尭舜三代自尭舜三代 漢租唐宗自漢祖唐宗 終不能合而為一也 今若必欲撤去限隔 無古無今 則莫若深考尭舜相伝之心法 湯武反之之功夫 以為準則而求諸身 却就漢祖唐宗心術微処痛加縄削 取其偶合而察其所自来 黜其浮戻而究其所従起 庶幾天地之常経古今之通義有以得之於我 不当坐談既往之迹 追飾已然之非 便指其偶同者以為全体 而謂其真不異於古之聖賢也

且如約法三章固善矣 而卒不能除三族之今 一時功臣 無不夷減 除乱之志固善矣 而不免窃取官人私侍其父 其他乱倫逆理之事往往皆身犯之 蓋挙其始終而言 其合於義理者常少 而其不合者常多 合於義理者常小 而其不合者常大 但後之観者於此根本功夫自有欠闕 故不知其非而以為無害於理 抑或以為雖害於理 而不害其獲禽之多也 観其所謂学成人而不必於儒 撹金銀飼鉄為一器而王於適用 則亦可見其立心之本在於功利 有非辨説所能文者矣

夫成人之道 以儒者之学求之 則夫子所謂成人也 不以儒者之学求之 則吾恐其畔棄縄墨 脱略規矩 進不得為君子 退不得為小人 正如撹金銀銅鉄為器 不唯壊却金銀 而鋼鉄亦不得尽其銅鉄之用也 苟卿固譏游夏之賎儒矣 不以大懦自周公乎 孔子固称管仲之功矣 不日小器而不知礼乎 人也之説 古注得之 若管仲為当得一箇人 則是以子産之徒為当不得一箇人矣 聖人詞気之際不応如此之粗厲而鄙也

其他瑣屑 不能尽究 但不伝之絶学一事 却恐更須討論 方見得従上諸聖相伝心法 而於後世之事有以裁之而不失其正 若不見得 却是自家耳目不高 聞見的 其所謂洪者 乃混雑而非真洪 所謂慣者 乃流徇而非真慣 窃恐後生伝不聞 軽相染習 使義利之別不明 舜蹠之塗不判 眩流俗之観聴 壊学者之心衍 不唯老兄為有識者所議 而朋友亦且陥於収司連坐之法 此熹之所深憂而甚懾者 故敢極言以求定論 若猶未以為然 即不若姑置是事而且求諸身 不必徒為譊譊 無益於道 且使卞荘子之徒得以窃笑於旁而陰行其計也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1185(송 효종 순희12, 乙巳) 주희 56세 때의 편지로, 󰡔용천집󰡕20에 실려 있는 乙巳春書之二에 대한 답변이다. 역시 진동보의 사공론을 비판하고 있다. 즉 같은 결과를 이루었어도 그 일을 의리(義理)에서 행했느냐 이욕(利慾)에서 행했느냐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내주신 긴 사연은 좋은 뜻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은,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지 일체(一体)일 뿐이며, 이를 따른 자는 성공하고, 이를 거스른 자는 패하니, 옛 성현(聖賢)만이 그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이른바 영웅호걸(英雄豪傑)도 또한 이 이()를 버리고 건립(建立)하고 성취(成就)한 바가 없다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옛날 성현(聖賢)은 근본에서부터 유정유일(惟精惟一)의 공부를 했으므로 그 중()을 잡을 수 있었고, 철두철미(徹頭徹尾)하여 선()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후일의 영웅(英雄)이라는 것은 일찍이 이 공부(功夫)가 없이, 다만 이욕(利欲)의 장() 가운데서 출몰하였는데, 그 자질이 훌륭한 자는 우연히 들어맞는 것이 있었으니 그 분수(分数)의 많고 적음을 따라 성취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혹은 맞든 맞지 않든 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욕의 장에 출몰하는 자와 한가지일 뿐입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말씀하신 삼대(三代)는 다 했고, ()과 당()은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 다하고 다하지 못함 만을 논하고, 다하고 다하지 못한 이유는 논의하지 않으며, 도리어 성인(聖人) 사업상의 거취(去就)를 이욕(利欲)의 장() 가운데에서 서로 견주어 비교하고 헤아려, 서로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을 보고, 성인(聖人)의 형상도 이와 같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른바 호리(毫釐)의 차이가 천리(千里)의 차이가 된다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 관중(管仲)의 공()과 같은 것은 이윤(伊尹)과 여상(呂商) 이하 누가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마음은 바로 이욕(利欲)의 마음이고, 행적은 바로 이욕(利欲)의 행적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비록 그 공()을 칭했지만 맹자(孟子)와 동중서는 모두 법의(法義)를 가지고 재단하여 조금도 꾸미지 않았습니다. 대개 성인(聖人)의 안목은 진실로 크고, 마음은 진실로 평화롭습니다만 근본(本根)적이고 가깝고 절실한 곳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나뉨에는 아주 작은 것도 반드시 헤아려야 하고 미세한 것도 어긋나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후현(後賢)이 은밀히 전하고 삼가 지켜서 뒷날(後来)을 기다리는 까닭이니, 오직 하루아침에 우리 도의(道義)의 바른 것을 버리고 저 이욕(利欲)의 사사로움()을 따를까 두렵습니다. 이제 이것을 말하지 않고,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그 마음을 평안히 하여 천고(千古)의 시비(是非)를 단정하려 하면, 쇠를 가리켜 금()이라고 하며, 도적을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잘못을 스스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무릇 쇠를 다루어 금()을 만든다는 비유는 가르침을 베풀되 유()를 따지지 않는 것과 선으로 옮겨 허물을 고치는 일이라면 가능하지만, 고인(古人)의 이미 지나간 자취에 이르면 금()이든 철()이든 진실로 정형(定形)이 있으니 뒷사람들의 말과 논의로 오래된 일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공리(功利)의 철()을 다루어서 도의(道義)의 금()을 만들려 하는 것은 한가하게 심력(心力)만을 낭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지견(知見)을 바로 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며, 다가올 일에도 해()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한당(漢唐) 이하를 진짜 금이라 말한다면, 진실로 돌을 다루어 금을 만들기[点化]를 기다릴 것이 없지만 그 실상은 또 아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대개 성인(聖人)이라는 것은 금() 중의 금()입니다. 성인(聖人)을 배워도 이르지 못하는 자는 금() 가운데 오히려 철()이 있는 것입니다. () 고조(高祖)와 당() 태종(太宗)이 마음을 쓰고 일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은 철() 가운데의 금()입니다. 조조(曹操)와 유유(劉裕)의 무리는 철()일 뿐입니다. 무릇 금() 중의 금()은 바로 천명(天命)이 본래 그러한 것이고, 밖으로부터 스며드는 것이 아니니, 가리고 골라 깨끗이 하지 않으면 오히려 마음에 걸릴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까닭 없이 반드시 자기의 본연함을 버리고 도로로 달려 나가, 쇠를 녹이는 화로 가에서 광석 중의 자잘한 금을 가려내려 한다면,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제왕(帝王)은 본래 다른 도()가 없는데, 왕통(王通)은 제왕(帝王)의 도()를 두 세 등급으로 나누었으니, 이미 도()를 아는 이의 말이 아닙니다. 또 그 도()는 행하면 되는 것이니, 이제 막아서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부득이하여 양한(兩漢)의 제도를 쓴다고 하니 이는 모두 비루(卑陋)한 말로, 끌어다가 전거를 삼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전해지지 않아 끊어진 학문을 터득했다면 본래 이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한가한 의론(議論)은 모두 이 학문이 밝혀지지 않은 것에서 근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나무 울타리 가에 놓아둔 하찮은 물건으로 여겨 살피지 않습니다. 그 은()을 철()이라고 하는 것 또한 너무 심한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에 또 말씀하시기를, “무릇 이 말을 하는 까닭은 바로 유자(儒者)가 갖추지 못한 바를 드러내어, 후세(後世) 영웅(英雄)의 입을 막고 기()를 빼앗아, 천만 가지 길이 있어도, 마침내 성인(聖人)의 모습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마도 바로 이와 같이 힘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도리(道理)를 분명하게 깨달아 정당함을 지키면, 후세(後世)에 이 경지에 이른 자는 자연스레 부절(符節)이 합치듯이 하여, 말로 전한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자가 또 어찌 함께 다툴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 같은 의론(議論)은 바로 파도를 일으켜 물결을 돕고, 함부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끄려는 것으로, 저들로 하여금 성현(聖賢)을 경시하여 더욱 거리낌이 없게 하는 것이니, 또 어찌 그 입을 막고 그 기()를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는 지난달 초순에 성()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몇 곳의 인사(人事)를 돌아보고, 드디어 무이(武夷)에 들어왔습니다. 어제 막 돌아와서 매우 피곤하고, 눈도 너무 어두워 글을 쓰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대강 적으니, 언어(語言)가 거칠고, 가려 쓰지 못해 매우 죄송합니다. 그 사이에 자세한 사연이 있으나 다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읽으면 말로 다하지 않아도 실로 반드시 저의 마음을 깊이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장(何丈)의 묘문(墓文)은 필세(筆勢)가 기이하여, 두 번 세 번 탄식해도 그칠 수 없습니다. 만시(挽詩)는 심기(心気)가 쇠약하여, 사방에서 써달라고 하는 것에 응할 수 없어, 사양한 것이 많습니다. 근래에 어쩔 수 없었고, 또 말은 많지만 이룬 것은 적음을 면하지 못하여 힘에 따라 부응(副応)하였는데, 종종 모두 그 하려는 것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만약 다시 이것을 짓는다면 곧 묘액(墓額)과 중첩되고, 선례를 깨는 것입니다. 또 면제해 주시기를 바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슬음(抱膝吟)도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아울러 이전의 의론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현자(賢者)의 마음 씀을 드러내 밝힐 수가 없을 듯하니, 또 헛말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앞에서 말한 것은 바로 압운(押韻)도 하지 않고, 음률도 없는 좋은 시()이니, 자연히 다시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答陳同甫

示喩縷縷 備悉雅意 然区区鄙見 常窃以為亘古亘今只是一体 順之者成 逆之者敗 固非古之聖賢所能独然 而後世之所謂英雄豪傑者 亦未有能舎此理而得有所建立成就者也 但古之聖賢従本根上便有惟精惟一功夫 所以能執其中 徹頭徹尾 無不尽善 後来所謂英雄 則未嘗有此功夫 但在利欲場中頭出頭没 其資美者乃能有所暗合而随其分数之多少以有所立 然其或中或否 不能尽善則一而已 来喩所謂三代做得尽 漢 唐做得不尽者 正謂此也 然但論其尽与不尽而不論其所以尽与不尽 却将聖人事業去就利欲場中比并較量 見有彷彿相似 便謂聖人様子不過如此 則所謂毫釐之差 千里之鏐者 其在此矣 且如管仲之功 伊呂以下誰能及之 但其心乃利欲之心 迹乃利欲之迹 是以聖人雖稲其功 而孟子 董子皆秉法義以裁之 不少仮借 蓋聖人之目固大 心固平 然於本根親切之地 天理人欲之分 則有毫氂必計 糸髪不差者 此在後之賢所以密伝謹守以待後来 淮恐其一旦舎吾道義之正以狥彼利欲之私也 今不講此 而遽欲大其自 平其心以断千古之是非 宜其指鉄為金 認賊為子而不自知其非也

若夫点鉄成金之譬 施之有教無類 遷善改過之事則可 至於古人已往之迹 則其為金為鉄固有定形 而非後人口舌議論所能改易久矣 今乃欲追点功利之鉄 以成道義之金 不惟費却閑心力 無補於既往 正恐凝却正知見 有害於方来也 若謂漢唐以下便是真金 則固無待於点化 而其実又有大不然者 蓋聖人者 金中之金也 学聖人而不至者 金中猶有鉄也 漢祖 唐宗用心行事之合理者 鉄中之金也 曹操 劉裕之徒 則鉄而已矣 夫金中之金乃夫命之固然 非由外鑠 淘択不浄 猶有可憾 今乃無故必欲棄舎自家光明宝蔵而奔走道路 向鉄鑪邊査砿中撥取雰金 不亦俣乎 帝王本無異道 王通分作兩三等 已非知道之言 且其為道 行之則是 今莫之禦而不為 乃謂不得已而用両漢之制 此皆卑陋之説 不足援以為拠 若果見得不伝底絶学 自無此蔽矣 今日許多閑議論 皆原於此学之不明 故乃以為笆籬邊物而不之省 其為喚銀作鉄 亦已甚矣

来諭又謂凡所以為此論者 正欲発儒者之所未備 以塞後世英雄之口而奪之気 使知干塗万轍 卒走聖人様子不得 以愚観之 正恐不須如此費力 但要自家見得道理分明 守得正当 後世到此地者 自然若合符節 不仮言伝 其不到者 又何足与之争耶 况此等議論正是推波助瀾 縦風止燎 使彼益軽聖賢而愈無忌憚 又何足以閉其口而奪其気乎

熹前月初間略人城 帰来還了幾処人事 遂人武夷 昨日方帰 冗甚倦甚 目亦大昏 作字極艱 草草布此 語言粗率 不容持繹 千万勿過 其間亦有瑣細曲折不暇尽辨 然明者読之 固必有以深得其心 不待其詞之悉矣

何丈墓文筆勢奇逸 三复歎息不能已 挽諸以心気衰弱 不能応四方之求 多所辞却 近不得巳 又不免辞多就少 随力応副 往往皆不能満其所欲 今若更作此 即与基額犯重 破却見行比例矣 且乞蠲免 如何如何 抱膝吟亦未遑致思 兼是前論未定 恐未必能発明賢者之用心 又成虚設 若於此不疑 則前所云者便是一篇不押韻 無音律底好詩 自不須更作也 如何如何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이 편지는 위 편지와 같은 1185(乙巳) 가을에 쓴, 진동보에게 보낸 10번째 편지이다. 이전에 보낸 세 번의 편지에서 역사는 그 결과가 아닌 동기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지만 진동보는 주희의 이 말을 수긍하지 않은 듯하다.

 

보내주신 긴 편지는 저에게는 매우 과분한 것입니다. 다만 저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 이미 다 말했습니다. 보내신 편지를 자세히 읽고 힘을 낭비했다는 것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바로 손자형(孫子荊)귀를 씻는다이를 간다는 것과 같으니, 웅변(雄辨)이 민첩(敏捷)하지 않음이 없지만 물로 베개를 삼고 돌로 양치하는 것과 같은 것은 끝내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왕의 시비(是非)는 깊이 따질 만한 것이 아니고, 오늘날의 계획은 다만 마땅히 궁리수신(窮理修身)하여 성현사업(聖賢事業)을 배워, 벼슬길이 다하게 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벼슬에 이르면 천하를 같이 선하게 하면 몸을 굽혀 일세인(一世人)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答陳同甫

誨諭縷縷 甚荷不鄙 但区区愚見 前書固已尽之矣 細読来諭 愈覚費力 正如孫子荊洗耳砺歯之云 非不雄辨敏捷 然枕流漱石 終是不可行也 已往是非不足深較 如今曰計 但当窮理修身 学取聖賢事業 使窮而有以独善其身 達則有以兼善天下 則庶幾不枉為一世人耳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1186(송 효종 순희13, 병오)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용천집󰡕20에 실린 병오秋書에 대한 답서이다. 바로 앞의 편지에서 왕패(王覇)론과 의리이욕론 등을 더 이상 진동보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는데, 이 편지에서는 그 말대로 그러한 학문적인 문제는 논하지 않고, 자신의 생일에 진동보가 여러 가지를 보내준데 대한 감사 등 학문외적인 일에 대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동정(動静)을 듣지 못했는데, 심부름하는 사람이 와서, 손수 쓰신 편지를 받고 근황(近况)을 들으니 매우 기쁩니다. 좋은 글을 보내주시니, 더욱 더 소중한데, 게다가 촉()의 비단과 좋은 과일과 오()의 종이를 보내 주시니, 두터운 은혜를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쇠잔하고 병들어 지루하고, 서리와 이슬이 내린 듯이 처연하고 측은한데 성의(盛意)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생각하니, 다만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끽긴사아(喫緊些児)’란 구절은 선생이 저에게 그 말을 빌려주는 것의 중()함에 감사합니다만 비속한 유생인 제가 어찌 이 말을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감탄하고 찬미하는 말을 보내시니 보답할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올해 여름에는 대강 조금 편안했는데 가을이 되자 두 번이나 마을 사람이 이끌어서 푸성귀를 먹으며 기우(祈雨)를 했는데, 오랫동안 비위(脾胃)를 상하여, 드디어 먹을 수가 없고, 먹어도 소화시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조리(調理)하여 겨우 다시 회복한 것 같습니다. 또 각기병이 발동하여 약을 써서 지나치게 차게 하였더니, 이제 큰 병이 되어 고달픔과 괴로움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단사(丹砂)와 부자(附子), 종유석(鐘乳石) , 평소에 감히 입을 댈 수 없는 것들을 모두 섞어 가까이 하지만 아직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의기(意気)가 꺾이고 쇠퇴하여 마치 해가 저물려고 하는 것 같으니 아마도 오래 세상에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많은 말을 하셨는데, 그것을 읽고 망연했습니다. 반복하여 여러 번 읽어도 그 본말을 알 수 없습니다. 대개 정신이 이렇게 쇄락하였으니, 하물며 서로 더불어 왕복하며 그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독서는 자못 정밀하고 완전히 익히려 애썼는데, 중간에 또한 다행히 몇 편의 책을 끝내게 되어, 고인(古人)의 마음 쓴 곳을 엿볼 수 있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니 천 년의 세월이 멀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깨우쳐주고 말할 자가 없으니, 때때로 생각해보고 스스로 웃을 뿐입니다. 그 사이에 한 두 가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제 병이 나버렸으니 다시 책을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후세에 양자운(揚子雲)과 소요부(邵尭夫)같은 이가 다시 나와 저의 뜻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미 그것을 놓아두고 있는데 다시 뜻을 둘 수가 없습니다. 단지 이제는 일용의 공부를 하여 병을 요양하는 틈에 또 심신을 수습하여, 옛 사람이 말한 소학(小学)에 종사하여, 전날의 거칠고 빠뜨린 허물을 보충할 것이니, 대개 또한 마음은 이러한 일을 거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힘은 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동보가 이 말을 들으면 마땅히 다시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유(韓愈)가 말한 거두어 물러나서 새로 게으름을 부리며, 스스로 경영하고자 바빴던 이전의 맹렬함을 슬퍼한다는 것은 구구한 저[故人]의 뜻이지만 오히려 이것을 당신에게 바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밖에 세속의 시비(是非)와 훼예(毀誉)를 어찌 입에 올리겠습니까? 보내온 편지를 자세히 읽으니 여기에 작은 마음 속의 응어리가 없지는 않은 듯 합니다. 큰 바람이 불어 정자(亭子)를 넘어진 것은 하늘이 알고 바람을 일으킨 듯하니, 저 낙양(洛陽)의 누대가 어찌 또 그렇게 부러워할만한 것입니까? 일찍이 맹자(孟子)대인(大人)에게 유세할 때는 그를 가볍게 여겨야한다라고 한 것을 논했는데, 맹자(孟子)는 실로 일찍이 대인(大人)을 경외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다만 그 우뚝한 모양을 가벼이 여긴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출 수 있으면 곧 다시 침실이 무너져도 또한 노지(露地)에서 잠들 수 있다면 아마도 이것이 바로 진정한 대영웅(大英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英雄)은 도리어 전전긍긍(戦戦兢兢)하고 깊은 물에 임하고 얇은 얼음은 밟은 것처럼 조심해야 될 수 있습니다. 거칠고 억센 혈기(血気)와 같은 것은 도리어 조금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여백공도 일찍이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백공과 같은 사람이 오늘날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붕우에게 정을 다하지 않았으니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남은 한이 없을 수 없게 합니다.

포슬음은 오래도록 완성되지 못하고 있는데, 먼저 부쳐온 진부량과 섭정칙의 두 시와 맞지 않고, 밭은 모두 점거를 당하여 손 둘 곳이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 질병과 괴로움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시 좋은 말로 노형의 의중에 있는 일을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무이(武夷)에서 노닐고 싶다는 말씀을 들으니 바라던 바에 매우 위안이 됩니다. 다만 이 산은 겨울은 춥고 여름은 뜨거워 머물 만하지가 않습니다. 오직 봄은 따뜻하고 가을은 서늘하며, 봄에는 붉고 푸른 꽃과 잎이 분분하고, 가을에는 맑은 서리에 나무가 옷을 벗으니 이 두 계절만이 노닐기에 아주 좋을 뿐입니다. 이제 봄에는 겨우 한번 왔으나 머물 틈이 없었고 가을이 오자 병이 들어 다시 갈 수가 없으니, 맡은 일에 소홀해졌음을 심각하게 깨달았습니다. 만약 오는 봄에 방문해 주신다면 마땅히 가서 수일 간 머물 것입니다. 다만 거기서 지내기가 편안하지 않은 한가지 일이 있으니 감히 들려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거처가 가난하고 구차하여 사람을 보내어 동정을 묻지 못하였는데, 또 해마다 번거롭게 사람을 시켜 생사를 물어주시니 그 일이 드디어 관례처럼 되었습니다. 이미 또 지체하다가 보답하지 못하고 앉아서 이런 지나친 예를 받으니, 비록 형께서는 허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우매한 저로서는 감히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예를 줄이시고 사람이 성에 들어갈 때 한 두 글자를 적어 숙도와 자약에게 부탁하여 오게 하여도 충분히 속마음을 전할 수 있으니 왕래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答陳同甫

方念久不聞動静 使至 忽辰手書 獲聞近况 深以為喜 且承雅詞下逮 鄭重有加 副以蜀鎌佳果呉牋 益見畚存之厚 顧衰病支離 霜露悽側 無可以稲盛意者 第増愧作耳 喫緊些児之句 尢荷高明仮借之重 然鄙儒俗生 何足語此 咏歎以還 不知所以報也

熹今年夏中組似小康 渉秋 兩為郷人牽挽 蔬食請雨 積傷脾胃 遂不能食 食亦不化 中間調理稍似复常 又為脚気発動 用薬過浴 今遂大病 疲乏不可言 丹附乳石 平日不敢向口者 今皆雑進 尚未見效 意気摧頬 如日将暮 恐不得久為世上人矣

来喩袞袞 読之惘然 反复数過 尚不能該其首末 蓋神思之衰落如此 况能相与往复 上下其論哉 向来読書頗務精熟 中間亦幸了得数書 自謂略能窺見古人用心処 未覚千歳之為遠 然亦無可告語者 時一思之以自笑耳 其間一二有業未就 今病已矣 不能复成書矣 不知後世之子雲尭夫复有能成吾志者否 然亦已置之 不能复措意間也 只今日用功夫 養病之余 却且収拾身心 従事於古人所謂小学者 以補前日粗疏脱略之咎 蓋亦心庶幾焉 而力或有所未能也 同父聞之 当复見笑 然韓子所謂斂退就新懦 趨営悼前猛者 区区故人之意 尚不能不以此有望於高明也 如何如何 此外世俗是非毀誉 何足桂歯牙間 細読来書 似於此未能無小芥蔕也 夫風吹倒亭子 却似夫公会事発 彼洛陽亭館又何足深羨也 嘗論孟子説大人則藐之 孟子固未嘗不畏大人 但藐其巍巍然者耳 辨得此心 即更掀却掛房 亦且露地睡 似此方是真正大英雄人 然此一種英雄 却是従戦戦兢兢臨深履薄処做将出来 若是血気粗豪 却一点使不著也 伯恭平時亦嘗説及此否 此公今日何処得来! 然其於朋友不肯尽情 亦使人不能無遺恨也

抱膝吟久做不成 蓋不合先寄陳葉二詩来 田地都被占却 教人無下手処也 况今病思如此 是安能复有好語 道得老兄意中事耶 承欲為武夷之游 甚慰所望 但此山冬寒夏熱 不可居 惟春暖秋涼 紅綠紛葩 霜清木脱 此兩時節為勝游耳 今春纔得一到 而不暇宿 秋来以病 未能再往 職事甚覚弛廃 若得来春命駕 当往為数日款也 但有一事処之不安 不敢不布聞 私居貧約 無由遣人往問動静 而蔵煩遣介存問生死 遂為故事 既又闕然不報 而坐受此過当之礼 雖兄不以為譴 而実非愚眛所敢安也 自此幸損此禮 因人人城時 以一二字付叔度子約俾転以来 亦足以道情素 不為莫往莫来者矣 如何如何

 

 

진동보에게 답함 答陳同甫

 

해제이 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1186(송 효종 순희13, 丙午) 주희 57세 때의 편지로 추정된다. 유학자가 때를 만나지 못할 때에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며, 천하에 대의를 밝혀 천하의 학자로 하여금 모두 우리 도의 바름을 알고 지키면 되는 것이지, 반드시 세상에 나아가 직접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저의 쇠약함과 병고는 이전과 마찬가지라 말할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소견(所見)은 얕고 막혀, 단지 구시대 사람일 뿐입니다. 받은 편지에 섭정칙(葉正則)이 스스로 진보했다고 하니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허언(虚言)이 아닙니다. 이미 서로 만났으니 반드시 그 요령(要領)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그의 말을 한 두 마디 듣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우매하여 노형(老兄)의 말을 많은 부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전에 보낸 편지에서 말씀드린 한 두 조목은 선생의 깊은 뜻에 계합하지 못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대가 이번 편지에서 말씀하신 과분하여 마지않다는 말씀 또한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사사로운 생각의 얽매임을 다 끊을 수 없고, 군상(君上)을 개도하는 데에 그 힘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이렇게 자처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쾌괘(夬卦)는 성대한 오양(五陽)이 하나의 음()과 나란히 있지만 오히려 하나의 음을 결단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점사에 말하기를, “왕정(王庭)에 드러내는 것이니, 정성으로 호소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이 있게 하여야 하며, 사읍(私邑)부터 고하고 전쟁에 나아감은 이롭지 아니하며, 갈 바를 둠이 이롭다고 하였으니, 대개 비록 위태로우나 스스로 닦으면 그 무력에 이르지 않고 왕정에 드러내어 정성으로 호소하여 갈 바를 둠이 이로울 것인데, 애초에 후환(後患)을 돌아보지 않고 조금 물러난 것입니다. 저의 시는 이미 보내드렸는데, () 자는 실로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다만 한스럽게도 전군(銭君)을 알지 못하여, 이른바 정()과 대()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니, 감히 쉽게 쓸 수 없습니다.

보내주신 시()크고 바르게 학문에 뜻을 둔다[大正志学]’는 말은 때를 만나 임금에게 보답하는 것이니 이는 선생의 평소의 뜻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에게는 분명 이미 정론(定論)이니, 다른 사람들은 간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른바 스스로 때를 만날 수는 없다고 한 것은 제가 감히 들을 것이 아닙니다. 다만 노형께서는 앞선 성인의 모범과 법도의 밖으로 나가지 말고, 사단(四端)의 미세한 부분에 힘쓰고, 연공(兗公)의 즐거움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뚝하게 앉아있는 성현에게 고할 때의 마음과 같이 하면 그 행함과 멈춤, 거스르고 부합함이 시대의 명에 맞음이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를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며, 천하에 대의를 밝혀 천하의 학자로 하여금 모두 우리 도의 바름을 알게 하고, 그것을 지켜서 상()의 사령(使令)을 기다리면 이것이 바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갚는 것이니, 또 어찌 반드시 나아가서 세상을 다스려야만 하겠습니까? 불교의 말에 장차 이 몸과 마음으로 세상을 받드는 것이 이름하여 부처님의 은덕을 갚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두자미(杜子美) 또한 사방의 이웃이 쟁기와 보습을 내는데 어찌 반드시 내 집에서 그것을 부리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대저 성현은 실로 스스로 시대를 위할 수는 없지만 벼슬을 할 때는 오래 생각하고 그만둘 때는 빨리 하는 것은 모두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니, 스스로 시대를 위하는 것 또한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때가 맞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지키던 것을 바꾸어 그것을 따르겠습니까?

 

答陳同甫

熹衰病如昨 不足言 但所見浅滞 只是旧時人 承喩正則自以為進 後生可畏 非虚言也 想已相見 必深得其要領 恨不得与聞一二 然自度愚暗 於老兄之言尚多未解 政使得聞 決是暁会不得 如前書所報一二条 計於盛意必是未契 又如今書所喩 過分不止之説 亦区区所未喩 如僕所見 却是自家所以自処者未能尽絶私意之累 而於所以開導聡明者未尽其力爾 故夬以五陽之盛而比一陰 猶欲決之 故其繇曰 揚于王庭 孚号有厲 告自邑 不利即戎 利有攸往 蓋雖危擢自修 不極其武 而揚庭孚号 利有攸往 初不願後患而小却也 拙詩前已拝稟 大字固当如戒 但恨未議銭君 不知其所謂 正与大者為如何 未敢容易下筆也 其所以告於巍巍当坐之時之心 則其行止忤合付之時命 有不足言矣 就其不遇 独善其身 以明大義於天下 使天下之学者皆知吾道之正而守之以待上之使令 是乃所以報不報之恩者 亦豈必進為而撫世哉 仏者之言曰 将此身心奉塵刹 是則名為報仏恩 而杜子美亦云 四鄰耒耜出 何必吾家操 此言皆有味也 夫聖賢固不能自為時 然其仕久止速 皆当其可 則其所以自為時者亦非他人之所能奪矣 豈以時之不合而変吾所守以狥之哉

来詩有 大正志学 之語 逢時報主 深悉雅志 此在高明必已有定論 非他人所得預 然所謂 不能自為時 者 則又非区区所敢聞也 但願老兄毋出於先聖規矩凖縄之外 而用力於四端之微 以求乎袞公之所樂 如其所以告於巍巍当坐之時之心 則其行止忤合付之時命 有不足言矣 就其不遇 独善其身 以明大義於天下 使天下之学者皆知吾道之正而守之以待上之使今 是乃所以報不報之恩者 亦豈必進為而撫世哉 仏者之言曰 将此身心奉塵剃 是則名為報仏恩 而杜子美亦云 四鄰 耒耜出 何必吾家操 此言皆有味也 夫聖賢固不能自為時 然其仕久止速 皆当其可 則其所以自為時者亦非他人之所能奪矣 豈以時之不合而変吾所守以狗之哉

 

 

진동보에게 답함(1193.9.24) 答陳同甫(癸丑九月二十四日)

 

 

해제1192(光宗 紹熙4, 癸丑) 주희 64세 때의 편지이다. 진동보가 지사에 급제했다는 말을 듣고, 사군(事君)과 수신(修身)이 다른 일이 아니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점을 점차 미루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진사에 일등으로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날마다 사람을 시켜 축하를 드리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일찍이 이웃에 사는 진군(陳君)에 부탁해서 편지 한통을 성중(城中)에 전달했는데, 이미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자가 와서 편지를 받았는데 또 새로운 글과 후한 폐백과 좋은 과실을 보내 주셨습니다. 잊을 수 없는 뜻에 감사드리며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늙고 병들어, 부모가 돌아가시고 평생 그것을 슬퍼하는데, 매번 저의 생일을 기억하시고 지나친 예를 베풀어 주시니 단지 슬픔만을 더하게 됩니다. 이로부터는 생략해버릴 것을 알려드립니다. 요사이 가을 날씨가 음습하니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이미 늙고 병들어 다시 건강(健康)하게 될 리는 없습니다. 요즘 쑥뜸을 뜨고 난 후에 비로소 조금씩 먹습니다만 예전과 같지는 못합니다. 또 달포사이에 조금 나아졌으니 바로 죽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사()는 변화가 많고 풍물 좋은 곳을 다 말했습니다. 다만 상정정로(常程正路)’기우(奇遇)’가 같은지 다른지, ‘진어(進御)’부진어(不進御)’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선생이 반드시 한 말씀 내려주셔야 하겠습니다. 노형(老兄)의 뜻은 대우주(大宇宙)와 같고 용기는 옛것을 뛰어넘는다는 백공(伯恭)의 말을 다시 고쳐 평하지 않겠습니다. 오늘날 비로소 후생(後生) 무리 가운데서 기운을 펼 수 있는 급제자가 나왔다는 것은 크게 축하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출세하여 군주를 섬기는데, 이 시초부터 대충대충하지 않는다면 다른 때의 일도 점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내주신 편지의 여러 말은 제 생각에 자못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움직임이 없으면 어찌 쉬움을 보여주겠는가?”라고 한 말은 그 움직임을 어떻게 하고, 쉬움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분별하여 처리하는데 반드시 정해진 규칙이 있을 것인데, 그 상세한 내용을 듣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비슷하지만 실은 같지 않다고 한 것 또한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과 같다면 반드시 나 자신이 좋아할 수 있어야 동류들도 좋아하고, 우리의 임금을 훌륭하게 할 수 있으면 천하 국가가 훌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훌륭하다는 것도 허실(虚実)과 대소(大小)와 오래되고 가까운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내 몸이 훌륭한 것으로부터 미루어 나가면 대개 훌륭하다는 것은 모두 실()이고 모두 대()이며, 또 오래가고 멀리 갈 것입니다. 만약 나 자신으로부터 미루어 나가지 않으면 이리저리 꿰어 맞추고 덮어 가려서, 비록 구차하게 한 때에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훌륭하다는 것은 모두 다른 날의 어찌할 수 없는 병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대개 몸을 닦고 임금을 섬기는 것은 처음부터 둘이 아니니 둘로 나누어 보면 안됩니다. 이것은 모든 성인들이 전한 정법안장(正法眼蔵)이고, 평소에 스승과 벗에게서 듣고 가만히 지켜온 것입니다. 이제 늙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고치고 바꿀 수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한 말씀을 혹시 여러 사람들은 마땅한 일이하고 여긴다 해도 제가 감히 들을 것이 아닙니다.

상선(象先)이 말한 것과 이것은 어떻습니까? 전에 이 사람(상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분발시켜주는 것을 보았는데 정성껏 대접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은 것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여기는 올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올벼가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가을 초입에 한번 비가 왔으니 늦벼는 기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또 여러 날 비가 오지 않았는데, 산속에 서리가 일찍 내리니 이제는 온전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 이제 쌀값이 내리고 안정되었는데 또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을 뿐입니다. 포슬음을 보내겠다는 약속은 식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전에 말한 것이 정해지지 않아 대충 말을 할 수가 없군요. 다른 날 서로 만나 손가락을 퉁길 뿐 말이 없어도 설할 수 있게 되면 바야흐로 소식을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아마도 이러한 한가한 말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 돌아가려고 하여 잠깐 동안에 편지를 썼습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없으니 항상 자애하시고 소식 주시기 기다리겠습니다.

 

答陳同甫(癸丑九月二十四日)

自聞栄帰 日欲遣人致間 未能 然亦嘗附鄰舎陳君 書於城中転達 不知己到未也 専使之来 伏奉手誨 且有新詞厚幣佳実之况 感認不忘之意 愧作亡愉 然衰晩病疾之余 霜露永感 毎尋記存始生 過為之禮 秖益悲愴 自此告略去之也 比日秋陰 伏惟尊候万福 熹既老而病 無复彊健之理 比妁艾後 始粗能食 然亦未能如旧 且少寛旬月 未即死耳

新詞宛転 説尽風物好処 但未知 常程正路 与 奇遇 是同是別 進御 与 不進御 相去又多少 此処更須得長者自下一転語耳 老兄志大宇宙 勇邁終古 伯恭之論無复改評 今日始於後生叢中出一囗気 蓋未足為深賀 然出身事主 由此権与 便不碌碌 則異時事業亦可卜矣 但来書諸論 鄙意頗未尽暁 如云 無動何以示易 不知今欲如何其動 如何其易 此其区処必有成規 恨未得聞其詳也 又如 二者相似而実不同 処 亦所未喩 若如鄙意 則須是先得吾身好 党類亦好 方能得吾君好 天下国家好 而所謂好者 又有虚実大小久近之不同 若自吾身之好而推之 則凡折謂好者皆実皆大而又久遠 若不自吾身推之 則弥縫掩覆 雖可以荀合於一時 而凡所謂好者 皆為他日不可之病根矣 蓋修身事君 初非二事 不可作兩般看 此是千聖相伝正法眼蔵 平曰所聞於師友而窃守之 今老且死 不容改易 如来喩者 或是諸人事宜 非老僕所敢聞也

不知象先所論与此如何 向見此公差彊人意 恨未得款曲 尽所懐耳 此中今夏不雨 早稲多損 秋初一雨 意晩稲可望 今又不雨多日 山間得霜又早 次第亦無全功 幸日下米価低平 且爾遣日 未知向後如何耳 抱膝之約 非敢食言 正為前此所論未定 不容草草下語 須俟他時相逢 弾指無言可説 方敢通箇消息 但恐彼時又不須更作這般閑言語耳 人還 姑此為報 未即会晤 千万以時自愛 倚俟詔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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