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68

황성 2025. 8. 1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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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문답) (問答)

 

 

원기중 추에게 답함 1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유가의 학문은 고원하고 광박(廣博)한 곳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곳에 힘을 쏟는 데 있음을 일깨우고, 󰡔주역󰡕의 원()()()()에 대해 문왕과 공자의 설명이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저는 여러 날 병을 앓던 중에 당신이 보내준 하도(河圖)」․「낙서(洛書)에 대한 설과 괘획(卦畫)에 대한 설을 풀어내 보려고 했습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까마득히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다시 제가 지은 󰡔역학계몽(易學啓蒙)󰡕으로 참고해보니 그 논의의 요점이 상세히 드러났는데, 당신이 어쩌다 깊이 고찰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처럼 의견이 분분하게 되었고, 설명이 많아질수록 더욱 의심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하도낙서를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은 구양공(歐陽公: 구양수) 이래로 이미 제기되었으나, 고명(顧命)」․「계사전(繫辭傳)」․󰡔논어󰡕에 모두 이것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결국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유학자들이 전한 하도」․「낙서의 수()는 비록 서로 잘 어울려서 어그러짐이 없으나, 순수(順數)와 역추(逆推), 종횡(縱橫)과 곡직(曲直)이 모두 명확한 법칙을 지니고 있어 깨트릴 수 없습니다.

 

熹數日病中方得紬繹所示圖書卦畫二說, 初若茫然不知所謂, 因復以妄作啓蒙考之, 則見其論之之詳, 而明者偶未深考, 是以致此紛紛, 多說而愈致疑耳. 夫以河圖洛書爲不足信, 自歐陽公以來已有此說, 然終無奈顧命繫辭論語皆有是言, 而諸儒所傳二圖之數, 雖有交互而無乖戾, 順數逆推, 縱橫曲直皆有明法, 不可得而破除也.

 

예컨대 하도󰡔󰡕의 하늘 1부터 땅 10까지를 합하여 하늘과 땅 55의 수를 싣고 있으니, 본래 󰡔󰡕이 발생한 근원입니다. 낙서홍범(洪範)의 처음 1부터 다음 9까지를 합하여 구주(九疇)의 수를 갖추고 있으니, 본래 홍범이 발생한 근원입니다. 계사전에서 비록 복희(伏羲)하도를 받아서 󰡔󰡕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이른바 우러러 하늘에서 형상을 보고, 굽혀 땅에서 본받을 것을 살폈다거나 가까이 몸에서 취하고 멀리 사물에서 취했다고 말하니, 어찌 하도가 그 중의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고 증명하겠습니까? 대저 성인이 󰡔󰡕을 만든 근거는 본래 하나의 실마리만 있지는 않습니다. 본보기로 삼고 형상을 취하는 규모에는 반드시 가장 친근하고 절실한 곳이 있습니다. 예컨대 태고 시절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음양의 기운이 비록 각각 모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수()를 지니지는 못했습니다. 하도가 나온 뒤에 비로소 55의 수가 기수(奇數: 양의 수)와 우수(偶數: 음의 수)로 생성되어 찬란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는 성인의 독창적인 지혜를 깊이 발현시킨 때문이니, 또한 범범한 기상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러러 하늘에서 형상을 보고 굽혀 땅에서 본받을 것을 살피거나, 멀리 사물에서 구하고 가까이 몸에서 취한 뒤에 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의 음양과 기우(奇偶)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계사전에서 성인이 󰡔󰡕을 만든 근거를 논한 것이 하나가 아니지만, 하도를 얻은 뒤에 결정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至如河圖與易之天一至地十者合而載天地五十有五之數, 則固易之所自出也. 洛書與洪範之初一至次九者合而具九疇之數, 則固洪範之所自出也. 繫辭雖不言伏羲受河圖以作易, 然所謂仰觀俯察近取遠取”, 安知河圖非其中之一事耶? 大抵聖人制作所由, 初非一端, 然其法象之規模, 必有最親切處. 如鴻荒之世, 天地之間陰陽之氣雖各有象, 然初未嘗有數也. 至於河圖之出, 然後五十有五之數奇偶生成, 粲然可見. 此其所以深發聖人之獨智, 又非汎然氣象之所可得而擬也. 是以仰觀俯察遠求近取, 至此而後, 兩儀四象人卦之陰陽奇偶可得而言. 雖繫辭所論聖人作易之由者非一, 而不害其得此而後決也.

 

보내주신 편지 속에서 또 저더러 대연(大衍)의 수()하도」․「낙서의 수와 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이 또한 설명할 게 있습니다. 수가 수로 되는 것은 비록 각각 하나의 뜻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나,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얽힌 것을 풀어내어 통하지 않은 바가 없게 한다면,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합치되지 않는 것은 본래 억지로 합할 필요가 없지만, 반드시 합치되는 것은 종횡으로 반복해서 부절이 합치된 듯하니, 또한 사람이 억지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기에서 자연스레 합치되어 인위적인 힘이 들어가지 않은 도리를 볼 수 있다면, 바야흐로 조화의 공부가 신묘하고 정교해짐을 알게 되니, 다만 신기한 경험을 할 뿐 말로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의 문구를 논하자면, “대연(大衍)의 수 50”부터 다시 세어서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걸어놓는다까지를 곧 ()의 책(: 서죽)216”부터 더불어 신(: 변화)을 도울 수 있다까지 연접하여 하나의 절을 이루니, 이는 대연의 수를 논하는 것이요, “하늘은 1”부터 땅은 10”까지를 곧 하늘의 수는 다섯부터 귀신을 행하는 것이다까지 연접하여 하나의 절을 이루니, 이는 하도55의 수를 논한 것입니다. 지금 그 문구는 끊어지고 어긋나서 서로 연접하지 않으니, 착오가 있음은 매우 분명합니다. 이천(伊川: 정이) 선생이 이 점을 이미 바로잡은 적이 있고, 󰡔역학계몽󰡕은 이에 따라 쓰여졌으나 그 근거를 추론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보는 이가 이를 살피지 않은 것입니다.

 

來喩又謂熹不當以大衍之數參乎河圖洛書之數, 此亦有說矣. 數之爲數, 雖各主於一義, 然其參伍錯綜, 無所不通, 則有非人之所能爲者. 其所不合, 固不容以强合; 其所必合, 則縱橫反覆, 如合符契, 亦非人所能强離也. 若於此見得自然契合不假安徘底道理, 方知造化功夫神妙巧密, 直是好笑, 說不得也. 若論易文, 則自大衍之數五十再扐而後掛’, 便接乾之策二百一十有六可與祐神矣爲一節, 是論大衍之數; 天一 地十却連天數五而行鬼神也爲一節, 是論河圖五十五之數. 今其文間斷差錯, 不相連接, 舛誤甚明. 伊川先生已嘗釐正, 救蒙雖依此寫, 而不曾推論其所以然者, 故覽者不之察耳.

 

괘획(卦畫)에 대한 논의를 거듭 말해주셨는데, 저의 설명에도 그 깊은 이치를 미처 논구하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또 당신이 양의(兩儀)를 논해주신 곳에서 건괘는 기수(奇數)로 긋고, 곤괘는 우수(偶數)로 긋는다고 말하니, 건곤두 글자는 온당하지 못합니다. 대개 ()’[]’이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오늘날 속어에서 한 쌍[一雙]’이니 한 짝[一對]’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거듭 변화하여 세 번째 획을 파생시키게 되면 팔괘(八卦)가 이루어져 비로소 건()과 곤()의 명칭이 붙습니다. 마땅히 한 획을 만들었을 때에는 일기(一奇)와 일우(一偶)가 되고 음과 양이라 부를 수 있을 뿐, 건과 곤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至於卦晝之論, 反復來喩, 於熹之說亦多未究其底蘊. 且如所論兩儀有日乾之晝奇, 坤之晝偶’, 只此乾坤二字便未穩當. 蓋儀, 匹也. 兩儀, 如今俗語所謂一雙一對云爾. 自此再變, 至生第三畫, 人卦已成, 方有乾坤之名. 當爲一晝之時, 方有一奇一偶, 只可謂之陰陽, 未得謂之乾坤也.

 

보내주신 편지에서 또 두 획이 늘어나서 4획이 되는 것을 이기(二奇)와 이우(二偶)라 말하고, ”4획 위에 각각 일기(一奇)와 일우(一偶)를 더해서 8획으로 만든다고 말했는데, 이 또한 제가 도표 속에서 설명한 발생의 차례에 명확하지 못한 곳이 있어서 이런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대개 사상(四象)의 첫 번 째 획은 본래 앞에 양의(兩儀) 도표의 일기(一奇)와 일우(一偶)일 뿐입니다. 이 일기와 일우의 위에 각각 일기와 일우가 파생되기 때문에 나뉘어져 4가 되고, 처음 획의 일기와 일우도 이를 따라 나뉘어져 네 조각이 될 뿐입니다. 이는 두 획이 늘어나서 4획이 되거나 4획이 늘어나서 8획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한 구절은 앞에서 말한 대로 자연스레 합치되어 인위적인 힘이 들어가지 않은 오묘한 곳입니다. 공자 이후로 천 년 동안 전해지 않았다가 강절(康節: 소옹) 선생에 이르러 비로소 그 설명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크게 설파하지 못했습니다. 대개 󰡔󰡕의 핵심은 전적으로 여기에 달려있어서 감히 경솔하게 설명하지 않았으니, 그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來喩又日以二晝增至四晝爲二奇二偶, 又於四晝之上各增一奇一偶而爲人畫, 此亦是於熹圖中所說發生次第有所未明而有此語. 蓋四象第一晝本只是前兩儀圖之一奇一偶, 綠此一奇一偶之上各生一奇一偶, 是以分而爲四, 而初畫之一奇一偶亦隨之而分爲四段耳, 非是以二晝增成四畫, 又以四晝增成八晝也. 此一節正是前所謂自然契合, 不假安徘之妙. 孔子而後, 千載不傳, 至康節先生始得其說. 然猶不肯大段說破, 蓋易之心髓全在此處, 不敢容易輕說, 其意非偶然也.

 

보내주신 편지에서 또 양 두 사물을 과연 노()와 소()로 나누어 사상(四象)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라고 말했는데, 이 또한 고찰이 미숙한 과오인 듯합니다. 대저 노()()는 경전에 본래 분명한 글이 없으나, 설시법(揲蓍法)에서 삼변(三變)하는 과정에 4를 손가락에 끼워서 기()()로 나눈 뒤에 음효인지 양효인지를 변별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중에 각각 노()()로 나눈 뒤에 변효인지 불변효인지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경문에서 말한 용구(用九)’용육(用六)’은 바로 이를 말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종일 시초를 셈하더라도 무슨 괘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괘를 얻었다 하더라도 어떤 효를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후세의 억지 설명을 받아들여 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來喩又曰: ‘不知陰陽二物果可分老少而爲四象乎? ’此恐亦考之未熟之過. 夫老少於經固無明文, 然揲著之法, 三變之中掛扐四以奇偶分之, 然後爻之陰陽可得而辨. 又於其中各以老少分之, 然後爻之變與不變可得而分. 經所謂用九用六, 正謂此也. 若其無此, 則終日撲著, 不知合得何卦? 正使得卦, 不知當用何爻? 安得以爲後世之臆說而棄之乎?

 

또 논의해주신 내용 중에서 다만 천지(天地)를 양의(兩儀)로 삼고, ‘하늘이 신령스런 사물을 내놓았다[天生神物]’는 구절 이하 네 가지를 사상(四象)으로 여긴다는 말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대저 의()()()란 모두 획()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에는 태극이 있어서 양의사상팔괘를 낳는다고 말하고, 역에는 사상이 있어서 사람에게 괘와 효의 길흉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논의 대로라면 이는 먼저 태극양의사상이 있은 뒤에 성인이 팔괘를 그렸고, 양의사상팔괘 세 가지는 각각 하나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전혀 서로 연접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의 강령이니 마치 법률에 총괄적인 규정이 있는 것과 같아서 조금도 어긋나서는 안됩니다. 저의 소견은 두부를 자르듯이 매우 분명하여 다시 의심할 곳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만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시 편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又詳所論直以天地爲兩儀, 天生神物以下四者爲四象, 此允非是. 大振日儀, 日象, 日卦, 皆是指畫而言. 故日易有太極而生兩儀四象人卦, 又日易有四象而示人以卦爻吉凶. 若如所論, 則是先有太極兩儀四象, 然後聖人以畫八卦, 而兩儀四象八卦三物各是一種面貌, 全然相接不著矣. 此乃易之綱領, 如法律之有名例, 不可以豪釐差. 熹之所見判然甚明, 更無疑惑, 不蕃高明以爲如何? 如其未然, 幸復有以見敎也.

 

 

원기중에게 답함 2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원기중이 역()의 괘() 형성과정을 설명하면서 계사전설괘전의 삼재(三才)와 육위(六位)의 설을 인용한 데 대해, 주자는 원기중의 설명은 후천설에 편중되어있음을 지적하고, 오히려 소옹(邵雍)의 선천설과 후천설을 모두 받아들여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균형 잡힌 설명이 된다고 반박했다.

 

소자(邵子: 소옹)태극이 나누어지면 양의가 세워진다.[이 아래 네 구절은 복희의 64괘 원도(圓圖)를 통론한 것이다. 이 하나의 구절은 첫 번 째 효로 말한 것인데 왼쪽의 일기는 양이 되고 오른쪽의 일우는 음이 되니 이것이 이른바 양의(兩儀)라는 것이다. 이제 이 일기가 왼쪽에 32괘의 첫 효가 되고, 일우는 오른쪽에 32괘의 첫 효가 되니, 이는 곧 여러 차례 변화하여 나뉘어진 것이지 본래 이처럼 64 조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뒤에도 이를 따른다.] 양은 위로 음과 교역하고 음은 아래로 양과 교역하여 사상이 생겨난다.[이 하나의 구절은 첫 번째 효가 두 번째 효를 낳는 것으로 말했다. 양 하단의 반이 위로 음 상단의 반과 교역하면, 음 가운데 두 번째 효의 일기와 일우를 낳아 소양(少陽)과 태음(太陰)이 된다. 음 상단의 반이 아래로 양 하단의 반과 교역하면, 양 가운데 두 번째 효의 일기와 일우를 낳아 태양(太陽)과 소음(少陰)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양의가 사상을 낳는 것이다. 태양의 일기가 이제 나뉘어져 왼쪽 상단 16괘의 두 번째 효가 되고, 소음의 일우가 이제 나뉘어져 왼쪽 하단 16괘의 두 번째 효가 되며, 소양과 태음이 나뉘는 것도 이에 따른다. 그런데 첫 번째 효의 2가 또 나뉘어져 4가 된다.] 양은 음과 교역하고 음은 양과 교역하여 하늘의 사상을 생하고, ()은 유()와 교역하고 유는 강과 교역하여 땅의 사상을 생한다. [이 하나의 구절은 두 번째 효가 세 번째 효를 낳는 것으로 말했다. 양은 태양을, 음은 태음을, 강은 소양을, 유는 소음을 말한다. 태양 하단의 반이 태음 상단의 반과 교역하면 태음 가운데 세 번째 효의 일기와 일우를 낳아 간()괘와 곤()괘가 된다. 태음 상단의 반이 태양 하단의 반과 교역하면 태양 가운데 세 번째 효의 일기와 일우를 낳아 건()괘와 태()괘가 된다. 소양 상단의 반이 소음 하단의 반과 교역하면 소음 가운데 세 번째 효의 일기와 일우를 낳아 이()괘와 진()괘가 된다. 소음 하단의 반이 소양 상단의 반과 교역하면 소양 가운데 세 번째 효의 일기와 일우를 낳아 손()괘와 감()괘가 된다. 이것이 이른바 사상이 팔괘를 낳는 것이다. 건괘의 일기가 이제 나뉘어져 팔괘의 세 번째 효가 되고, 곤괘의 일우가 이제 나뉘어져 팔괘의 세 번째 효가 되며, 나머지는 모두 이를 따른다. 그런데 첫 번째 효와 두 번째 효의 4가 이제 또 나뉘어져 8이 된다. 건괘태괘간괘곤괘는 태양과 태음에서 생겨나므로 하늘의 사상이 되고, 이괘진괘손괘감괘는 소양과 소음에서 생겨나므로 땅의 사상이 된다.] 팔괘가 서로 섞인 후에 만물이 생한다[한 괘의 위에 각각 팔괘를 더하여 서로 섞으면 64괘가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보내주신 편지에서 인용한 소선생(邵先生)이 학설입니다. 이제 자세하게 변증하고 분석해서 부쳐드리니, 상세히 고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지,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邵子曰: ‘太極旣分, 兩儀立矣. 此下四節通輪伏義六十四卦圓圖. 此一節以第一爻而言, 左一奇爲陽, 右一偶爲陰, 所謂兩儀者也. 今此一奇爲左三十二卦之初爻, 一偶爲右三十二卦之初爻, 乃以累變而分, 非本卽有此六十四段也. 後放此. 陽上交於陰, 陰下交於陽而四象生矣. 此一節以第一爻生第二爻而言也. 陽下之半上交於陰上之半, 則生陰中第二爻之一奇一偶, 而爲少陽太陰矣. 陰上之半下交於陽下之半, 則生陽中第二爻之一奇一偶, 而爲太陽少陰矣. 所謂兩儀生四象者也. 太陽一奇, 今分爲左上十六卦之第二爻; 陰一偶, 今分爲左下十六卦之第二爻, 少陽太陰, 其分放此. 而初爻之二, 亦分爲四矣. 陽交於陰, 陰交於陽而生夭之四象; 剛交於柔, 柔交於剛而生地之四象. 節以第二爻生第三爻言也. 陽謂太陽, 陰謂太陰, 剛謂少陽, 柔謂少陰. 太陽之下半交於太陰之上, 則生太陰中第三爻之一奇一偶, 而爲艮爲坤矣. 太陰之上半交於太陽之下半, 則生太陽中第三爻之一奇一偶, 而爲乾爲兌矣. 少陽之上半交於少陰之下半, 則生少陰中第三爻之一奇一偶, 而爲離爲震矣. 少陰之下半交於少陽之上半, 則生少陽中第三爻之一奇一偶, 而爲巽爲坎矣. 此所謂四象生八卦也. 乾一奇, 今分爲八卦之察三爻; 坤一偶, 今分爲八卦之第三爻, 餘皆放此. 而初爻二爻之四, 今又分而爲人矣. 乾兒艮坤生於二太, 故爲夫之四象; 離震巽坎生於二少, 故爲地之四象. 八卦相錯, 而後萬物生焉. ’一卦之上, 各加八卦以相間錯, 則六十四卦成矣. 然第三爻之相交, 則生第四爻之一奇一偶, 於是一奇一偶各爲四卦之第四爻, 而下三爻亦分爲十六矣. 第四爻又相交, 則生第五爻之一奇一偶, 於是一奇一偶各爲二卦之第五爻, 而下四爻亦分而爲三十二矣. 第五爻又相交, 則生第六爻之一奇一偶, 則一奇一偶各爲一卦之第六爻, 而下五爻亦分而爲六十四矣. 蓋八卦相乘爲六十四, 而自三畫以上, 三加一倍以至六畫, 則三畫者亦加二倍而卦體橫分, 亦爲六十四矣. 數殊塗, 不約而會, 如合符節, 不差毫釐, 正是易之妙處. 此來敎所引邵先生說也. 今子細辨析奉呈, 幸詳考之, 方可見其曲折, 未遽可輕議也.

 

그러나 이는 64괘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 말했기 때문에 그 앞과 뒤, 많고 적음을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매우 자세하게 분석하였으나, 졸연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성인이 󰡔󰡕을 만든 근원을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도리어 책머리의 횡도(橫圖)를 살펴보는 것이 낫습니다. 이는 처음에 두 획을 그었을 때부터 점차적으로 시작하여 여섯 획으로 가득 채워진 뒤까지 관찰해 가는 것입니다. 그 앞과 뒤, 많고 적음은 이미 차례가 있어 위치가 분명하여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알게 되면 비로소 64괘가 모두 자연의 이치가 저절로 펼쳐져 나왔음을 보게 됩니다. 성인은 이를 분명하게 보고 획으로 그려냈을 뿐, 본래 조금도 지력(智力)을 보탠 적이 없습니다. 본래 지력의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고, 또 지력이 그 사이에 도움을 줄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괘가 형성된 이후에는 거꾸로, 순리적으로, 종으로, 횡으로 보더라도 모두 의리(義理)를 이루어 모든 것이 신묘하기 그지없으니, 도리어 사람의 관점으로 무엇을 보겠습니까? 각각 소견에 따라 설을 만드니 비록 각각 서로 도움을 주지 않는 듯하지만, 실로 서로 어그러진 적이 없습니다.

 

然此已是就六十四卦已成之後言之, 故其先後多募有難著語處. 乍看極費分疎, 猝然曉會不得. 若要見得聖人作易根原直截分明, 却不如且看卷首橫圖, 自始初只有兩畫時漸次看起, 以至生滿六畫之後. 其先後多寡旣有次第而位置分明, 不費詞說. 於此看得, 方見六十四卦全是天理自然挨排出來, 聖人只是見得分明, 便只依本畫出, 元不曾用一毫智力添助. 蓋本不煩智力之助, 亦不容智力得以助於其間也. 及至卦成之後, 逆順縱橫, 都成義理, 千般萬種, 其妙無窮, 却在人看得如何. 而各因所見爲說, 雖若各不相資, 而賓未嘗相悖也.

 

대개 아직 획을 그리지 않았을 때부터 여섯 획이 가득 그려진 곳을 말하는 것은 소자(邵子: 소옹)가 말한 선천(先天)의 학설입니다. 괘가 이루어진 뒤에 각각 하나의 의미를 통해 추론해 나가는 것은 소자가 말한 후천(後天)의 학설입니다. 이제 보내주신 편지에서 계사전설괘전의 삼재(三才)와 육위(六位)의 설을 인용한 것은 곧 이른바 후천의 학설입니다. 선천과 후천은 이미 각자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데, 후천의 학설 가운데에서 취한 의미는 또한 대부분 같지 않아 피차가 본래 서로 방해하지 않으니, 하나에 집착하여 백 가지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 학설에 집착하여 굳이 성인이 처음으로 괘를 그을 때에 삼재(三才)만 보았다고 말한다면, 다시 사유를 묻지 않고 계속해서 세 획을 제거하고 그 형상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획이 이루어진 뒤에 자세하게 보려해도 볼 수 없고, 또 획을 돌려 그려서 뒷면의 반을 더하게 됩니다. 이는 모두 사사로운 뜻으로 꾸며내어 보충한 것이니, 어찌 다시 󰡔󰡕이 되겠습니까? 말씀해 주신 조목은 아직도 많지만 그 큰 절목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이제 다만 이 점을 간파한다면 그 나머지 소소하게 합치되지 못한 곳은 절로 대나무가 쪼개지듯이 풀릴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다시 변론하여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헤아려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蓋自初未有畫時說到六畫滿處者, 邵子所謂先天之學也. 卦成之後, 各因一義推說, 邵子所謂後天之學也. 今來喩所引繫辭說卦三才六位之說, 卽所謂後天者也. 先天後天旣各自爲一義, 而後天說中取義又多不同, 彼此自不相妨, 不可執一而廢百也. 若執此說, 必謂聖人初畫卦時只見一箇三才, 便更不問事由, 一連便掃出三畫, 以擬其象. 畫成之後, 子細看來, 見使不得, 又旋劃擘, 添出後一半截. 此則全是私意小杜撰補接, 豈復更有易耶? 來喩條目尙多, 然其大節目不過如此. 今但於此看破, 則其餘小小未合處自當迎刃而解矣. 故今不復悉辨以浼高明, 伏幸財察.

 

 

원기중에게 답함 3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원기중이 하도(河圖)낙서(洛書), 선천설과 후천설, 사상(四象), ()의 명칭 등에 의혹을 제기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주자는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답변하고, 자신의 견해는 궁극적으로 공자의 견해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혔다. 아울러 자신의 저술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쓰게 된 배경도 설명하고 있다.

 

(1) 원기중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는 후대 사람의 위작이라고 의심한 내용에 대하여.

저는 다음처럼 생각합니다. 오늘날에 태어나서 옛사람의 글을 읽을 때 그 진위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의리의 옳고 그른 바로서 아는 것이고, 둘은 체험을 통하여 사실과 다른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버리고서 다만 억측하여 판단하여서는 안 됩니다. 제가 대대로 전해오는 하도와 낙서의 옛 것을 감히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의리에 부합되고 증험에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굳이 그르다고 말한다면, 그 의리의 오류와 증험의 차이를 지적하지도 못하고서 단지 억측으로 판단하고자 함이니, 이 때문에 제가 당신의 주장을 따르지 못해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의 논의가 또 상수(象數)의 위치와 왕래를 통해 천지음양의 조화와 길흉소장의 본원을 보고자 함이니, 참으로 이것에 밝지 못하면 별도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전혀 그 의리를 찾지도 않고 또 명확한 증거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한갓 이처럼 무익한 변론만 일삼으니, 이는 핵심을 논의하지 않고 외면만 떠들거나 고기는 맛보지 않고 뼈만 씹어대는 꼴입니다. 설령 하도낙서의 진위를 변증해서 명확히 착오가 없더라도 쓸모가 없는데, 또 하물며 반드시 이렇게 하지도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우선 이 문제는 버려 두고 제가 추론한 하도낙서의 설명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비록 반드시 올바른 도()라 하지는 못하겠지만 상수(象數)의 본원에 대해 의미를 얼추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흔쾌히 와 닿는 곳이 있으면 도()의 진위는 변증하지 않아도 저절로 분명해질 것입니다.

 

來敎疑河圖洛書是後人僞作.

熹竊謂生於今世而讀古人之書, 所以能別其眞僞者, 一則以其義理之所當否而知之, 二則以其左驗之異同而質之, 未有舍此雨塗而能直以臆度懸斷之者也. 熹於世傳河圖挌書之舊所以不敢不信者, 正以其義理不悖而證驗不差爾. 來敎必以爲僞, 則未見有以指其義理之繆證驗之差也. 而直欲以臆度懸斷之, 此熹之所以未敢曲從而不得不辨也. 况今日之論, 且欲因象數之位置往來以見天地陰陽之造化吉凶消長之本原, 苟於此未明, 則固未暇別尋證據. 今乃全不尋其義理, 亦未至明有證據, 而徒然爲此無益之辨, 是不議於室而課於門, 不味其腴而齩其骨也. 政使辨得二圖眞僞端的不差, 亦無所用, 又况未必是乎? 願且置此, 而於熹所推二圖之說少加意焉, 則雖未必便是眞圖, 然於象數本原亦當略見意味, 有歡喜處, 而圖之眞僞將不辨而自明矣.

 

(2) 원기중이 선천설(先天說)과 후천설(後天說)을 의심한 내용에 대하여.

소씨(邵氏: 소옹)의 설을 따르면, “선천이란 복희가 그린 󰡔󰡕이고 후천이란 문왕이 부연한 󰡔󰡕이다라고 했습니다. 복희의 󰡔󰡕은 본래 문자가 없고 다만 하나의 도()로 그 상수(象數)를 표현했으나, 천지만물의 이치와 음양시종의 변화가 갖추어졌습니다. 문왕의 󰡔󰡕은 곧 지금의 󰡔주역󰡕이니 공자가 전()을 지은 것이 이것입니다. 공자가 이미 문왕의 󰡔󰡕을 통해 전을 지었다면, 그 논한 바는 전적으로 문왕의 󰡔󰡕으로 주안점을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복희가 󰡔󰡕을 만들면서 괘를 그은 이유를 추론하지 않으면, 학자들은 반드시 문왕이 부연한 󰡔󰡕이 곧 복희가 처음으로 괘를 그은 󰡔󰡕이라고 오인하여, 단지 괘가 이루어진 이후부터 설명할 뿐 그 위의 근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익(十翼) 가운데에서 팔괘가 만들어져 중첩되었다고 하는 말은 태극양의사상팔괘이고, 하늘과 땅, 산과 연못, 우레와 바람, 물과 불 따위는 모두 복희가 괘를 그은 뜻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책원괘획(原卦畵)한 편도 또한 양의를 나누어 복희를 앞에 두고 문왕을 뒤에 두었습니다. 반드시 성인이 󰡔󰡕을 지은 본뜻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복희가 그은 괘를 고찰해야 하고, 만일 지금 󰡔󰡕의 글과 뜻을 알고자 하면, 다만 문왕의 경문과 공자의 전문에서 구해보면 족할 것입니다. 양자는 본래 서로 방해되지 않지만 또한 서로 섞일 수도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오로지 소씨(邵氏)의 해석만 따르고 󰡔역경󰡕에서 절충할 바가 없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고찰에 상세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來敎疑先天後天之說.

據邵氏說, 先天者, 伏義所畫之易也; 後天者, 文王所演之易也. 伏義之易初無文字, 只有一圖以寓其象數, 而天地萬物之理陰陽始終之變具焉. 文王之易卽今之周易, 而孔子所爲作傳者是也. 孔子旣因文王之易以作傳, 則其所論固當專以文王之易爲主. 然不推本伏義作易晝卦之所由, 則學者必將誤認文王所演之易便爲伏義始畫之易, 只從中半說起, 不識向上根原矣. 故十翼之中, 如八卦成列, 因而重之, 太極兩儀四象人卦而天地山澤雷風水火之類, 皆本伏義畫卦之意; 而今新書原卦畫一篇, 亦分兩儀, 伏義在前, 文王在後. 必欲知聖人作易之本, 則當考伏羲之畫; 若只欲知今易書文義, 則但求之文王之經孔子之傳足矣. 兩者初不相妨, 而亦不可以相雜. 來敎乃謂專爲邵氏解釋, 而於易經無所折衷, 則恐考之有未群也.

 

(3) 원기중이 7896은 사상(四象)이 될 수 없다고 말한 내용에 대하여.

사상(四象)의 명칭은 포괄한 바가 매우 넓습니다. 대체로 두 획이 중첩되어 4()가 이루어져 배열되는 것을 정도로 삼습니다. 그리고 1234는 그 위()의 차례이고, 7896은 그 수의 내용입니다. 이를 음양과 강유(剛柔)로 나누는 것은 천지를 합하여 말한 것이고, 음양과 태소(太少)로 나누는 것은 오로지 천도로 말한 것입니다. 만일 오로지 지도(地道)로 말한다면 강유에도 또한 자체에 태소(太少)가 있습니다. 이를 미루어 넓혀 가면 종횡으로 뒤섞여서 하나의 사물이 각각 네 가지 형상을 갖추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수()라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곧 천지간에 자연스런 도리이니, 괘를 긋기 전에 먼저 이런 형상과 수가 갖추어진 뒤에 성인이 괘를 그을 때 이를 본떠서 그려내고, 시초를 셈하는 자가 또 걸고 끼우고 셈한 수를 얻어서 합한 것이지, 원래 실체도 없다가 괘를 긋고 시초를 셈할 즈음에 차례로 배출한 것이 아닙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이 점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변설하는 데 수고를 헛되이 하니, 저는 먼저 괘를 긋기 전에 원래 태극양의사상팔괘의 골자가 있음을 알아야만 비로소 헤아려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서둘러 논의를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용구(用九)와 용육(用六)의 글은 본래 괘가 이루진 뒤에 있지만 용구와 용육의 이치는 곧 괘가 이루어지기 전에 있으니, 또한 이것이 이치입니다. 다만 실체를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자연히 접촉하는 곳마다 명확하게 통하여 수고롭게 변설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심지어 “7896은 곧 시초를 셈하는 자가 하는 일이지 성인의 법은 아니다고 말했는데, 이 오류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제 또 시초를 셈하는 방법은 성인에게서 나왔다고 말해야 합니까, 아니면 후세에 나왔다고 말해야 합니까? 만일 대전(大傳)을 근거해보면, 이는 의심할 것 없이 성인에게서 나왔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7896이 없다면, 또한 그 효의 음양과 동정을 나타낼 판단의 자료가 없으니, 어찌 시초를 셈한다고 하겠습니까? 이 일은 앞 편지에서 이미 자세하게 변증했는데, 저의 독창적인 견해나 새로운 학설이 아닙니다. 좀더 깊이 탐구해보면 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이제 다시는 번거롭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또 계사전은 본래 사상(四象)이 팔괘(八卦)를 낳는다고 말했는데, 이제 또 이를 곱하여 사상을 둘로 하면 팔괘 중의 하나를 낳는다고 말하니, 이 몇 글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깊이 변증할 것도 없고, 앞에서 말한 실체(實體)에서 증험해 보면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來敎謂七` ` ` 六不可爲四象.

四象之名, 所包甚廣. 大抵須以兩畫相重` 四位成列者爲正. 而一```四者, 其位之次也; ```六者, 其數之實也. 其以陰陽剛柔分之者, 合天地而言也; 其以陰陽太少分之者, 專以天道而言也. 若專以地道言之, 則剛柔又自有太少矣. 推而廣之, 縱橫錯綜, 凡是一物, 無不各有四者之象, 不但此數者而已矣. 此乃天地之間自然道理, 未畫之前, 先有此象此數, 然後聖人畫卦時依樣畫出, 揲蓍者又隨其所得掛劫過揲之數以合焉, 非是元無實體而畫卦揲蓍之際旋次安悱出來也. 來喩於此見得未明, 徒勞辨說, 竊恐且當先向未畫前職得元有箇太極`兩儀`四象`八卦底骨子, 方有商量, 今未須遽立論也. 用九用六之文, 固在卦成之後; 而用九用六之理, 乃在卦成之前, 亦是此理. 但見得實體分明, 則自然觸處通透, 不勞辨說矣.

至謂七```六乃揲蓍者所爲而非聖人之法, 此誤允不難曉. 今且說揲蓍之法出於聖人耶? 出於後世耶? 若據大傳, 則是出於聖人無疑. 而當是之時, 若無七```, 則亦無所取決, 以見其爻之陰陽動靜矣, 亦何以揲蓍爲哉? 此事前書辨之已詳, 非熹之創見新說, 更請熟玩, 當自見之, 今不復縷縷也. 來喩又云繫辭本只是四象生八卦, 今又倍之, 兩其四象而生八卦之一, 此數字不可曉. 然想不足深辨, 請且於前所謂實體者驗之, 庶乎其有得也.

 

(4) 원기중이 4효와 5효는 주된 명칭이 없다고 의심한 내용에 대하여.

한 번 그어서 의()를 만들고, 두 번 그어서 상()을 만들고, 세 번 그어서 괘()를 만들면 팔괘가 갖추어집니다. 이 위에다 각각 음과 양 1획을 돌아가면서 그으면, 세 겹으로 쌓이게 되고 거듭 팔괘를 만든 것이 8이 되어 바야흐로 64괘의 명칭이 있게 됩니다. 만일 팔괘를 한 괘의 위에 두루 더하면, 또한 그 위()에 맞게 명칭을 얻게 됩니다. 네 번, 다섯 번 그었을 때에는 외괘(外卦)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명칭을 붙일 수 없습니다. 내괘(內卦)는 정()이 되고 외괘(外卦)는 회()가 되며 또한 괘를 그을 때에 이미 이 명칭이 있게 됩니다. 시초를 셈하여 이를 구하면, 아홉 번의 변화를 거쳐 정()을 얻고 또 아홉 번의 변화를 거쳐 회()를 얻게 됩니다. 또한 나중에 한 단락의 일은 앞에서 논한 7896을 말할 뿐이요, 시초를 셈한 뒤에 비로소 정과 회의 명칭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저 새로운 책에서 논한 괘위(卦位)계사전의 괘 설명과 간혹 같고 다름이 있지만, 설시(揲蓍)를 논하는 것은 단지 계사전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어찌 어찌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곳은 매우 얕고 가까운 이치를 담고 있는데, 당신은 이처럼 말하니 아마도 고증이 너무 상세하지 못한 듯합니다.

 

來敎疑四爻五爻者無所主名.

一畫爲儀, 二畫爲象, 三畫爲卦, 則八卦備矣. 此上若旋次各加陰陽一畫, 則積至三重, 再成八卦者八, 方有六十四卦之名. 若徑以八卦偏就加乎一卦之上, 則亦如其位而得名焉. 方其四畫五晝之時, 未成外卦, 故不得而名之耳. 內卦爲貞, 外卦爲悔, 亦是畫卦之時已有此名. 至揲蓍求之, 則九變而得貞, 又九變而得悔, 又是後一段事, 亦如前所論七```六云爾, 非謂必揲蓍然後始有貞悔之名也. 大批新書所論卦位與繫辭說卦容有異同, 至論揲蓍, 則只本繫辭, 何由別有他說? 如此等處至爲淺近, 而今爲說乃如此, 竊恐考之殊未詳也.

 

(5) 원기중이 중괘(重卦)의 연유를 설명한 이천(伊川) 선생의 말을 인용한 데 대하여.

중괘(重卦)의 연유는 이천 선생의 말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대전(大傳)에서도 팔괘가 이루어져 배열이 되면 이를 겹쳐서 중첩시킨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팔괘가 이루어져 배열되는 것은 태극양의사상에서 점차 발행하여 여기에 이르는 것이니, 획이 이루어진 뒤에 바야흐로 삼재(三才)의 형상이 갖추어지는 것이지, 성인이 삼재를 보고 나서 마침내 자기의 의견으로 사유하여 세 효를 잇달아 그어서 형상화한 것은 아닙니다. 겹쳐서 중첩시킨다는 것은 팔괘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 각각 윗 부분에서 차례로 생겨납니다. 만일 효마다 돌아가며 생겨나면 다시 세 번의 변화를 더하여 바야흐로 64괘를 만듭니다. 만일 전체 괘를 한꺼번에 발생시킨다면 단지 한번의 변화를 일으켜 64괘를 만듭니다. 비록 늦고 빠른 차이는 있지만 모두 자연스레 차례대로 생겨 나와 각각 줄줄이 배열이 됩니다. 획이 이루진 뒤에 천하의 변화를 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아래 세 효가 천하의 변화를 모두 표현할 수 없음을 본 뒤에 별도로 계획을 세워 또 위의 세 효를 그어 다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을 만든 신묘한 곳이니, 그 획을 그을 때에는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또한 내면에 수많은 기기묘묘한 곳이 있음을 알지 못했으니, 단지 사람들에게 세밀히 체득해나가도록 할 뿐, 대충대충 설명해서는 안됩니다.

 

來敎引伊川先生說重卦之由.

重卦之由, 不但伊川先生之說如此, 蓋大傳亦云八卦成列, 因而重之. 但八卦所以成列, 乃是從太極, 兩儀, 四象漸次生出, 以至於此, 畫成之後, 方見其有三才之象, 非聖人因見三才, 遂以己意思推而連畫三爻以象之也. 因而重之, 亦是因八卦之已成, 各就上面節次生出. 若旋生逐爻, 則更加三變方成六十四卦. 若倂生全卦, 則只用一變便成六十四卦. 雖有遲速之不同, 然皆自然漸次生出, 各有行列次第. 畫成之後, 然後見其可盡天下之變. 不是聖人見下三爻不足以盡天下之變, 然後別生計較, 又幷畫上三爻以盡之也. 此等皆是作易妙處, 方其畫時, 雖是聖人, 亦不自知裏面有許多巧妙奇特, 直是要人細心體認, 不可草草立說也.

 

이상의 다섯 조항은 저의 마음을 다 기울여 조금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소강절(邵康節)의 말이고, 소강절의 말이 아니라 진희이(陳希夷)의 말이고, 진희이의 말이 아니라 공자의 말입니다. 다만 당시 여러 유학자들이 제대로 전하지 못하자, 방외(方外)의 무리가 은밀히 서로 주고받으며 단조술(丹竈術)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진희이와 소강절에 이르러 마침내 󰡔󰡕으로 되돌려 놓고 나서야 그 말이 비로소 다시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주역과는 순서와 배열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듣는 이들이 처음 보고서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여 그것을 믿지 않고, 다만 현재 통행되는 󰡔주역󰡕에 근거하여 글에 따라 의견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천착하여 기존의 학설을 망가뜨리니 그 두찬(杜撰)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것이 제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짓게 된 동기입니다. 만약 익숙히 듣고 쉽게 이해하여 사람마다 모두 다 알 수 있다면, 굳이 이 책을 새로 지어 쓸모 없는 것을 만들 리가 있겠습니까?

 

以上五條, 鄙意傾倒無復餘蘊矣. 然此非熹之說, 乃康節之說; 非康節之說, 乃希夷之說; 非希夷之說, 乃孔子之說. 但當日諸儒旣失其傳, 而方外之流陰相付受, 以爲丹竈之術. 至於,希夷` 康節, 乃反之於易, 而後其說始得復明於世. 然與見今周易次第行列多不同者, 故聞者創見, 多不能曉而不之信, 只據目今見行周易緣文生義, 穿鑿破碎, 有不勝其杜撰者. 此啓蒙之書所爲作也. 若其習聞易曉, 人人皆能領略, 則又何必更著此書, 以爲屋下之屋, 牀上之牀哉?

 

다시 바라건대, 당신은 저의 말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우선 마음을 비우고 겸손한 자세로 완전히 이해하기를 구하셔야지,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특이한 이론을 내세워 함부로 문제점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래도록 음미하여 마음에 푹 젖게 되면 천지의 변화하는 신비로움과 음양이 사라지고 자라는 오묘한 이치가 저절로 마음속에 환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랍고 기쁘고 웃음이 나고 즐거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말로는 다할 수가 없어 우연히 짧은 시를 지어 저의 생각을 담아 보냅니다. “한 밤중의 홀연한 한 줄기 우레 소리에/ 세상의 모든 집들 차례로 열리네/ () 가운데 유()가 포함된 상을 안다면/ 직접 복희를 만나고 왔음을 인정하겠네.” 말이 너무 조리가 없다 보니 선가(禪家)에서 하는 것처럼 주장자(拄杖子)를 한 번 세우면 그것이 한 차례 포괄적인 설법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치에 맞지 않고 분수에 넘치니 비루하다고 꾸짖지는 마십시오.

 

更願高明毋以爲熹之說而忽之, 姑且虛心遜志以求其通曉, 未可好高立異而輕索其瑕疵也. 玩之久熟, 浹洽於心, 則天地變化之神, 陰陽消長之妙自將瞭於心目之間, 而其可驚可喜, 可笑可樂必有不自知其所以然而然者矣. 言之不盡, 偶得小詩以寄鄙懷日; ‘忽然半夜一馨雷, 萬戶千門次第開. 若識無心涵有象, 許君覩見伏義來.’ 說得太郞當了, 只少箇住杖卓一下, 便是一回普說矣. 狂妄僭率, 幸勿鄙誚也.

 

 

원기중에게 답함 4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주자는 원기중에게 음양이 생성되는 방향과 위치를 예가(禮家)역가(曆家)․「설괘전의 주장을 들어 비교 설명해주고, ()()()()를 사계절에 분속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원기중의 발언에 대해, 지를 오행(五行)오상(五常)오방(五方)사시(四時)에 배속시키는 논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자신의 독창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변론하였다.

 

별지를 통해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새로운 논의를 제시해주시니,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뜻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다만 저의 설명은 앞 편지에서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앞뒤로 여러 차례 배척을 당하고 보니 여력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제 다시 보내주신 편지에서 설명을 다해주셨지만 또한 이전의 설명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논의를 시작하여 말하도록 하니 또한 묵묵부답할 수는 없습니다. 큰 문제는 경솔하게 논의하지 못하겠고, 우선 보내주신 편지 중에서 한두 가지 가벼운 문제를 질정하겠습니다.

 

伏承別紙誨諭諄悉, 及示新論, 尤荷不鄙. 但區區之說, 前此已悉陳之. 而前後累蒙排擯揮斥, 亦已不遺餘力矣. 今復下輸, 使罄其說, 顧亦何以異於前日耶? 然旣辱開之使言, 則又不敢嘿嘿. 然其大者未易遽論, 姑卽來敎一二淺者質之.

 

대저 온후한 기운은 동남쪽에서 흥성하고 차갑게 엉기는 기운은 서북쪽에서 흥성한다는 말은 예가(禮家)의 설명입니다. 양은 자()의 방향에서 생겨 괘에서 복()이 되고 음은 오()의 방향에서 생겨 괘에서 구()가 된다는 말은 역가(曆家)의 설명입니다. ()은 동남쪽에 위치하고 건()은 서북쪽에 위치한다는 말은 설괘전의 설명입니다. 이 세 학파는 각각 자신의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가와 역가의 말은 오히려 서로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설괘전에 이르면 그 괘의 위치를 독자적으로 설명하여 저 두 학파와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이제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데, 그 사이에 또 하나의 설명 중에 서로 어긋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저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동남쪽에서 하나의 음이 이미 생겨난 것으로 유순한 음의 위치를 만들고, 서북쪽에서 하나의 양이 이미 생겨난 것으로 강건한 양의 위치를 만든다고 말한다면, 양이 봄여름에 성한 것이 양이 될 수 없고 음이 가을겨울에 성한 것이 음이 될 수 없으며, 도리어 처음 생겨날 때의 미약한 것이 주가 됩니다. 하나의 음이 동남쪽에서 생겨나고 하나의 양이 서북쪽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면, 음은 정남쪽 오()의 방향인 구()에 생겨나지 않아 동쪽을 어지럽히고, 양은 정북쪽 자()의 방향인 복()에서 생겨나지 않아 서쪽에 붙어있게 됩니다. ()은 하나의 음이 생겨난 것으로 동남쪽에 위치한다고 말한다면, ()은 어찌 하나의 양이 생겨나 서북쪽에 위치한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설괘전의 본문에서는 손()에 대해서 다만 조촐하고 정제된 모습을 취하여 동남쪽에 위치시키고, ()에 대해서 다만 두려운 모습을 취하여 서북쪽에 위치시켰습니다. ()은 세 획으로 말하니 비록 하나의 음이 생겨났다 하더라도 동남쪽에 위치시키는 이유는 본래 그 뜻에서 취한 것이 아닙니다. ()에 대해서도 또한 세 양()의 전체로 보는 것이니, 본래 하나의 양이 이미 생겨난 것으로 취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 험난한 길을 거듭 가다가 끝내 통할 수 없는 것보다는 단지 양의 강건함으로 인()을 삼고 음의 유순함으로 의()를 삼는 것이 더 명백하고 간명할 것입니다. 대개 이와 같다면 틔워주고 낳아주는 것이 인()이고 엄숙하게 죽이는 것이 의()가 되니, 세 학파의 설명은 모두 어긋나는 바가 없게 됩니다. 엄숙하게 죽이는 것이 강건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천지의 수렴하여 퇴장하는 기운은 본래 음의 유순함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夫謂溫厚之氣盛於東南, 嚴凝之氣盛於西北者, 禮家之說也. 謂陽生於子, 於卦爲復; 陰生於午, 於卦爲姤者, 曆家之說也. 謂巽位東南, 乾位西北者, 說卦之說也. 此三家者各爲一說, 而禮家, 曆家之言猶可相通. 至於說卦, 則其卦位自爲一說, 而與彼二者不相謀矣. 今來敎乃欲合而一之, 而其間又有一說之中自相乖戾者, 此熹所以不能無疑也. 夫謂東南以一陰已生而爲陰柔之位, 西北以一陽已生而爲陽剛之位, 則是陽之盛於春夏者不得爲陽, 陰之盛於秋冬者不得爲陰, 而反以其始生之微者爲主也. 謂一陰生於東南, 一陽生於西北, 則是陰不生於正南午位之姤而淫於東, 陽不生於正北子位之復而旅於西也. 謂巽以一陰之生而位乎東南, 則乾者豈一陽之生而位於西北乎? 况說卦之本文, 於巽則但取其潔齊而位之東南, 於乾則但取其戰而位之西北. 巽以三晝言之, 雖爲一陰之生, 而其所以位之東南者, 初非有取乎其義. 至於乾, 則又三陽之全體, 而初無一陽巳生之義可得而取也. 凡此崎嶇反復, 終不可通, 不若直以陽剛爲仁, 陰柔爲義之明白而簡易也. 蓋如此則發生爲仁, 肅殺爲義, 三家之說皆無所牾. 肅殺雖似乎剛, 然實天地收斂退藏之氣, 自不妨其爲陰柔也.

 

보내주신 편지에서 또 흑과 백의 위치를 논했는데,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또한 고법(古法)이 아니라 오늘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를 만들어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은 세 자리가 모두 백이니 세 양의 형상입니다. ()는 아래 두 자리는 백이고 위 한 자리는 흑이니 아래는 두 양이고 위에는 하나의 음입니다. ()는 위아래 두 자리가 백이고 중앙이 하나의 흑이니 상하는 두 양이고 중앙이 하나의 음입니다. ()은 아래 한 자리는 백이고 위 두 자리는 흑이니 아래는 하나의 양이고 위는 두 음입니다. ()은 아래 한 자리가 흑이고 위 두 자리는 백입니다. ()은 상하 두 자리가 흑이고 중앙 한 자리가 백입니다. ()은 아래 두 자리가 흑이고 위 한 자리가 백입니다. ()은 세 자리가 흑이니 모두 그 세 효가 음양의 형상입니다. 감의 중앙의 효는 모두 백이고, 곤의 중앙의 효는 모두 흑입니다. 두 괘가 서로 사이가 생기니 사상(四象)의 모습입니다. 간의 위 효는 모두 백이고, 곤의 위 효는 모두 흑입니다. 하나의 괘가 서로 사이가 생기니 팔괘의 모습입니다. 어찌 진감이 모두 흑이어서 곤()과 같고, 리가 모두 백이어서 건()과 같은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아마도 그림을 그릴 때 오류를 범한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자세하게 살펴보지 못한 것입니다.

 

來敎又論黑白之位, 尤不可曉. 然其圖亦非古法, 但今欲易曉, 且爲此以寓之耳. 乾則三位皆白, 三陽之象也. 兌則下二白而上一黑, 下二陽而上一陰也. 離則上下二白而中一黑, 上下二陽而中一陰也. 震則下一白而上二黑, 下一陽而上二陰也. 巽之下一黑而上二白, 坎之上下二黑而中一白, 艮之下二黑而上一白, 坤之三黑, 皆其三爻陰陽之象也. 蓋乾兌離震之初爻皆白, 巽坎艮坤之初爻皆黑, 四卦相間, 兩儀之象也. 乾兌巽坎之中爻皆白, 離震艮坤之中爻皆黑, 兩卦相間, 四象之象也. 乾離巽艮之上爻皆白, 兌震坎坤之上爻皆黑, 一卦相間, 八卦之象也. 豈有震坎皆黑而如坤, 巽離皆白而如乾之理乎? 此恐畫圖之誤, 不然則明者察之有未審也.

 

이 모든 것은 곧 󰡔󰡕 가운데 매우 얕고 가까운 이치여서 보기 쉬운 것인데 당신은 오히려 철저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본체의 거대함과 의미의 심장함을 또한 어찌 쉽게 무시하고 갑자기 비난을 가할 수 있습니까? 이는 제가 감히 말을 억지로 찾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고 허물만 더할까 두렵습니다. 상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제가 말한 것이 조금이라도 믿을만하다면, 이를 이어 한층 밀고 나가서 아낌없이 의견을 개진해주길 바랍니다.

 

凡此乃易中至淺至近而易見者, 契丈猶未之盡, 而况其體大而義深者 又安可容易輕忽而遽加詆誚乎? 此熹所以不敢索言, 蓋恐其不足以解左右者之惑而益其過也. 幸試詳之, 若熹所言略有可信, 則願繼此以進, 不敢吝也.

 

또 보내주신 편지를 읽어보니, ()()()()를 사계절에 분속시킬 수 없다고 말하니, 이 또한 너무 경솔한 듯합니다. 대저 오행(五行)오상(五常)오방(五方)사시(四時)를 서로 배속시키는 것은 그 이치가 매우 분명하고 설명이 매우 오래되었으니, 저 홀로 오늘날 새롭게 이런 논의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부류는 당신이 고증을 상세히 하지 못하거나 사색을 깊이 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논의를 세워 멋대로 비난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앞에서 제 생각을 당신 앞에서 다 털어놓지 않으려 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 점이 으쓱거리는 목소리와 표정을 뚜렷하게 만든 것입니다. 만일 의리의 귀추를 실제로 탐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점을 버리고 남의 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아마도 해득함이 있을 것입니다. 주제넘어 황공합니다. 다시 아룁니다.

 

又讀來書, 以爲不可以仁` ` ` 智分四時, 此亦似太草草矣. 夫五行` 五常` 五方` 四時之相配, 其爲理甚明而爲說甚久, 非熹獨於今日創爲此論也. 凡此之類, 竊恐高明考之未詳, 思之未審, 而率然立論, 輕肆詆訶, 是以前此區區所懷不欲盡吐於老丈之前者尙多. 此其爲訑訑之聲音顔色大矣. 若欲實求義理之歸, 恐當去此而虛以受人, 庶幾乎其有得也. 僭易皇恐, 熹又禀.

 

 

원기중에게 답한 별지 5 答袁機仲別幅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바로 앞 편지에서 논의되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좀더 세밀하고 심도 있는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은 문왕의 팔괘 위치에서 서북쪽에 있고, 12괘의 위치에서는 동남쪽에 있습니다. ()은 문왕의 팔괘 위치에서 서남쪽에 있고, 12괘의 위치에서는 서북쪽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그림에서는 문왕의 팔괘를 안쪽에 배열하고 12괘를 바깥에 배포하여 피차의 위치가 멀어서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변증에 뛰어난 자가 있다해도 이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2괘의 설명은 이해할 수 있지만 팔괘의 설명은 밝히기 어렵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마땅히 추론해나가고, 밝히기 어려운 것은 마땅히 생략해야 하니 그림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乾於文王八卦之位在西北, 於十二卦之位在東南. 坤於文王八卦之位在西南, 於十二卦之位在西北. 故今圖子列文王人卦於內, 而布十二卦於內, 以見彼此位置逈然不同. 雖有善辯者, 不能合而一之也. 然十二卦之說可曉, 而八卦之說難明. 可曉者當推, 難明者當闕, 按圖以觀, 則可見矣.

 

12괘를 논하면, 양은 자() 방향에서 시작하여 사()에서 끝나고, 음은 오() 방향에서 시작하여 해()에서 끝납니다. 사계절의 기운을 논하면, 양은 인() 방향에서 시작하여 미()에서 끝나고, 음은 신() 방향에서 시작하여 축()에서 끝납니다. 이 두 가지 설명은 비록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나 쟁점은 두 개의 위치에 불과합니다. 대개 자()의 위치는 하나의 양이 생겨났지만 아직 땅에서 나오지는 못했고, ()의 위치인 태()괘에 이르면 세 양이 생겨나 바야흐로 땅위로 나와 온후한 기운이 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의 위치인 건()괘는 여섯 양이 극성을 부리지만 온후한 기운은 끝나지 아직 않기 때문에 오()의 위치에서 하나의 음이 생겨나지만 아직 양을 해치지 못하며, 반드시 미()의 위치인 돈()괘에 이른 뒤에 온후한 기운이 비로소 소진됩니다. ()의 위치에서 음이 이미 생겨나지만 엄숙하게 엉기는 기운은 신()의 위치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됩니다. ()의 위치에서 여섯 음이 극성을 부리지만 엄숙하게 엉기는 기운은 축()의 위치에 이르러 비로소 소진되니, 의미가 또한 이와 같습니다. 대개 땅 가운데의 기운은 보기 어렵고 땅 위의 기운은 알기 쉽기 때문에 주나라 사람들은 자()의 위치에서 세우는 것을 올바르게 여겨 비록 천통(天統)을 얻었으나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논할 때에 곧 하나라 시간을 올바르게 여겼습니다. 이는 음양의 처음과 끝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을 취한 까닭입니다. 그림을 통해 추론해보면 그 설명을 알 수 있습니다.

 

論十二卦, 則陽始於子而終於巳, 陰始於午而終於亥; 論四時之氣, 則暢始於寅而終於未, 陰始於申而終於丑. 此二說者雖若小羞, 而所爭不過二位. 蓋子位一陽雖生而未出乎地, 至寅位泰卦則三陽之生方出地上, 而溫厚之氣從此始焉. 巳位乾卦六陽雖極而溫厚之氣未終, 故午位一陰雖生而末害於陽, 必至未位遯卦而後溫厚之氣始盡也. 其午位陰已生而嚴凝之氣及申方始, 亥位六陰雖極而嚴凝之氣至丑方盡, 義亦放此. 蓋地中之氣難見而地上之氣易職, 故周人以建子爲正, 雖得天統, 而孔子之論爲邦, 乃以夏時爲正., 蓋取其陰陽始終之著明也. 按圖以推, 其說可見.

 

보내주신 편지에서 ()괘의 상육에는 양의 기운이 이미 생겨나고[그 위치는 해()에 있다], ()괘의 상구에는 음의 기운이 이미 생겨났다[그 위치는 사()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괘 상구효의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10월을 양월(陽月)이라고 하는 것으로 추론해보면, 박괘 상구의 양이 바야흐로 소진되어 순곤(純坤)으로 변화할 때이고 곤괘의 아래 효는 이미 양의 기운이 그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만 하루 안에, 한 획 가운데에서 바야흐로 30분의 1이 길어지고 반드시 이 것이 쌓여 한 달이 된 뒤에 비로소 한 획을 가득 채워 복()이 되어 하나의 양이 생기게 될 뿐입니다. ()괘의 하나의 음은 건()이 되기도 하고 구()가 되기도 하니 의미가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 비록 이러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상세하거나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추론해본 것입니다.] 대개 처음에 생겨날 때의 미약함을 논하면 본래 이미 음양으로 명칭을 붙일 수 있으나, 곧 이것으로 음양의 한계를 삼으면, 한창 성한 것이 교체되지도 못하여 점유의 비율이 괘 안에서 6분의 5일 뿐이 아니고, 한창 생겨난 것이 매우 미약하여 점유의 비율이 괘 안에서 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때문에 이곳에서 끊어 음양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이는 곧 12괘 중의 하나의 의미이니 복()()괘의 설명과 이치가 본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몇 차례 변화한 뒤에 바야흐로 이를 설명할 수 있으니, 먼저 자기의 설명을 끼워 넣어 올바른 뜻을 어지럽혀서는 안됩니다.

 

來喩謂坤之上六陽氣已生, 其位在亥. 乾之上九陰氣已生, 其位在巳. 以剝上九碩果不食”, 十月爲陽月之義推之, 則剝卦上九之陽方盡而變爲純坤之時, 坤卦下爻已有陽氣生於其中矣. 但一日之內, 一畫之中, 方長得三十分之一, 必積之一月, 然後始滿一晝而爲復, 方是一陽之生耳. 夬之一陰爲乾爲姤, 義亦同此. 來喩雖有是說而未詳密, 故爲推之如此. 蓋論其始生之微, 固已可名於陰陽; 然便以此爲陰陽之限, 則其方盛者未替, 而所占不啻卦內六分之五; 方生者甚微, 而所占未及卦內六分之一, 所以未可截自此處而分陰陽也. 此乃十二卦中之一義, 與復, 姤之說理本不殊. 但數變之後, 方說得到此, 不可攙先輥說, 亂了正意耳.

 

보내주신 편지에서 또 겨울과 봄은 양이 되고 여름과 가을은 음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문왕의 팔괘로 논하면, 서북쪽의 건()으로부터 동쪽의 진()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버지와 3남의 위치입니다. 동남쪽의 손()으로부터 서쪽의 태()에 이르기까지 모두 어머니와 3녀의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곤()()()괘의 단사(彖辭)는 모두 동북쪽을 양의 방향으로 삼고 서남쪽을 음의 방향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겨울과 봄은 양이 되고 여름과 가을이 음이 된다는 것은 또한 하나의 설입니다. 다만 설괘전에서 또 건을 서북쪽으로 여겼으니 음은 서쪽에서 소진되지 않게 되고, 손을 동남쪽으로 여겼으니 양은 동쪽에서 소진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세 괘의 단사와 조금 같지 않습니다. [이 또한 보내주신 편지로 추론해보면 설괘전의 글은 단사와 서로 표리가 되니 이 그림이 문왕에게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는 본래 하나의 설이니 12괘와 같은 다른 설과는 각각 서로 통하지 않을 뿐입니다.

 

來諭又謂冬春爲陽, 夏秋爲陰. 以文王八卦諭之, 則自西北之乾以至東方之震, 皆父與三男之位也. 自東南之巽以至西方之兌 , 皆母與三女之位也. 故坤蹇解卦之彖辭皆以東北爲陽方, 西南爲陰方. 然則謂冬春爲陽, 夏秋爲陰亦是一說. 但說卦又以乾爲西北, 則陰有不盡乎西; 以巽爲東南, 則陽有不盡乎東, 又與三卦彖辭小不同. 此亦以來書之說推之, 而說卦之文適與彖辭相爲表裏, 亦可以見此圖之出於文王也. 但此自是一說, 與他說如十二卦之類各不相通爾.

 

보내주신 편지에서 󰡒동남쪽의 온후한 기운은 인()이고 서북쪽의 엄숙하게 엉기는 기운은 의()이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예기(禮記)향음주의(鄕飮酒義)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근본해 보면 비록 인과 의는 나누고 음양(陰陽)과 강유(剛柔)는 구분 짓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 다시, 󰡒양기(陽氣)가 동방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진실로 인을 양()에 소속시키고, 따라서 의를 음()에 소속시켰다는 것을 유추(類推)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편지에서는 이 점을 살피지 않고 굳이 인()을 유()로 삼고 의()를 강()으로 삼고자 하셨으니 이미 이 부분에서 잘못을 범하고 계십니다. 또 유()가 양()에 속할 수 없고 강()이 음()에 속할 수 없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억지로 온후한 기를 유로 삼고 엄응한 기를 강으로 삼았으며, 북쪽의 음을 남쪽으로 보내 인의 유를 주관하게 하고, 남쪽의 양을 북쪽으로 보내 의의 강을 주관하게 하여 그 방위와 기후에 대해서 다 뒤집어 놓았는데 그 말한 내용도 모두 어긋나 맞지 않습니다. 또 동북쪽을 양으로 만들고 서남쪽을 음으로 만든 것도 모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으니, 이는 제가 그림에서 이미 그 잘못된 점을 다 지적하였습니다.

 

來喩以東南之溫厚爲仁, 西北之嚴凝爲義, 此鄕飮酒義之言也. 然本其言, 雖分仁義而無陰陽柔剛之別, 但於其後復有陽氣發於東方之說, 則固以仁爲屬乎陽, 而義之當屬乎陰從可推矣. 來諭乃不察此, 而必欲以仁爲柔, 以義爲剛. 此旣失之, 而又病夫柔之不可屬乎陽, 剛之不可屬乎陰也, 於是彊以溫厚爲柔, 嚴凝爲剛, 又移北之陰以就南, 而使主乎仁之柔; 移南之陽以就北, 而使主乎義之剛. 其於方位氣候悉反易之, 而其所以爲說者率皆參羞乖迕而不可合. 又使東北之爲陽, 西南之爲陰亦皆得其半而失其半, 愚於圖子已具見其失矣.

 

예를 들어 논해보면, ()은 나아감을 주장하고 음()은 물러남을 주장하며, 양은 자라남을 주장하고 음은 사라짐을 주장합니다. 나아가고 자라는 것은 그 기()가 강하고, 물러나고 사라지는 것은 그 기가 약하니, 이것이 음()이 유()가 되고 양()이 강()이 되는 이유입니다. 양강(陽剛)의 온후(溫厚)한 기는 동남쪽에 머물러 봄과 여름을 주관하여 나고 자라나는 것을 일삼고, 음유(陰柔)의 엄응(嚴凝)한 기는 서북쪽에 머물러 가을과 겨울을 주관하여 거두고 저장하는 것은 죽음이니, 이것이 강()이 인()이 되고 유()가 의()가 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음양과 강유, 인의의 위치가 환하게 구분되지 않습니까? 저 양자운(揚子雲)인에는 유하고 의에는 강하다고 한 말은 응용(應用) 부분의 지엽적인 측면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이것은 또한 양 가운데 음이고, 음 가운데 양이라는 말입니다. 별도로 하나의 의의를 만드는 것은 무방하지만 거기에 섞여 논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蓋嘗論之, 陽主進而陰主退, 陽主息而陰主消. 進而息者其氣彊, 退而消者其氣弱, 此陰陽之所以爲柔剛也. 陽剛溫厚, 居東南, 主春夏, 而以作長爲事; 陰柔嚴擬, 居西北, 王秋冬, 而以斂藏爲事. 作長爲生, 斂藏爲殺, 此剛柔之所以爲仁義也. 以此觀之, 則陰陽, 剛柔, 仁義之位豈不曉然? 而彼揚子雲之所謂於仁也柔, 於義也剛者, 乃自其用處之末流言之. 蓋亦所謂陽中之陰, 陰中之陽, 固不妨 自爲一義, 但不可以雜乎此而論之爾.

 

전에 묘담(妙湛)에서 직접 뵙고 말씀을 올린 일이 있습니다. 󰡔()󰡕 가운데 괘위(卦位)의 의미에 대해서는 층수가 매우 많은데 그 속에는 자연 순서가 있어 한 층 한 층이 각각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으니 이를 견강부회하여 합쳐서 하나의 설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학자들은 모름지기 순차적으로 이해하여 상층을 이해할 때에는 아직 하층을 흔들려고 해서는 안되고, 다만 상층을 이해하여 모두 투철하게 된 다음에 가볍게 하층을 들어 올려 이해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때에는 비록 더디기 때문에 마음이 시원스럽지 않겠지만 오래도록 누적시켜 각각의 층을 모두 이해하게 되면 저절로 천차만별의 허다한 조리가 각각 귀착점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찌 시원스럽지 않겠습니까? 정도의 차이를 불문하고 앞뒤를 나누지 않고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 하나의 설로 합치려고 한다면 피차가 서로 방해하여 사람들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하여 한갓 어지럽고 거칠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평생 독서하여 이미 시험한 결과이니, 비단 󰡔󰡕을 읽는 데에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向日妙湛蓋嘗面禀易中卦位義理層數甚多, 自有次第, 逐層各是一箇體面, 不可牽彊合爲一說. 學者須是旋次理會, 理會上層之時, 未要攪動下層, 直待理會得上層都透徹了, 又却輕輕揭起下層, 理會將去. 當時騅似遲鈍, 不快人意, 然積累之久, 層層都了, 却自見得許多條理, 千差萬別, 各有歸著, 豈不快哉. 若不問淺深, 不分前後, 輥成一塊, 合成一說, 則彼此相妨, 令人分疎不下, 徒自紛紛, 成鹵奔矣. 此是平生讀書已試之效, 不但讀易爲然也.

 

앞 편지에서 지를 오행(五行)과 사계절에 분속시키는 문제를 논했는데, 이는 선배 유학자들이 예전에 설명했던 것이니 경솔하게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 편지에서 미진한 곳이 있는 듯하여 그 설명을 심도 있게 진행시키겠습니다. 대개 천지 사이에는 한 덩어리의 기운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음과 양으로 나뉘어 두 사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양은 인()이 되고 음은 의()가 됩니다. 그러나 음양은 또 각각 나뉘어 둘이 되기 때문에 양의 처음에는 나무()이 되고, 양이 성하여 불여름()가 되며, 음의 처음에는 쇠가을()가 되고 음이 극점에 오면 물겨울()가 됩니다. 대개 인()의 측은한 마음이 바야흐로 마음속에서 나오면 예()의 공경하는 마음이 이미 밖으로 다 드러나고, ()의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바야흐로 밖에서 들어오면 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은 이미 마음속에 온전히 잠복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형상과 부류가 이와 같아 거짓으로 견강부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마음속에서 묵묵히 이해할 수 있다면 곧 절로 알 수 있습니다. ()()()()도 그 이치가 그러합니다. 문언전(文言傳)에서 부류를 취함이 더욱 명백하니 이는 제 구구한 억측이 아닙니다. 오행 가운데 네 가지는 이미 각각 배속이 되는데 토()는 중앙에 거하면서 사행(四行)의 터전이 되고 사시(四時)의 주인이 됩니다. 사람에게 비하면 신()이 되어 진실이라는 뜻이 되고 사덕의 터전이 되며 모든 선의 주인이 됩니다. [오성(五聲)오색(五色)오취(五臭)오장(五臟)오충(五蟲)은 그 나뉨이 이를 따른다.] 대개 하늘과 사람은 하나의 사물이요 안과 밖은 하나의 이치이니 서로 소통되고 꿰어져있어 본래 간격이 없습니다. 만일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록 천지 사이에 태어났지만 천지가 되는 이치를 모르게 되고, 비록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또한 사람이 되는 이치를 모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한 뜻은 내 몸에 절실하여 앞에 여러 단락과 견주어 더욱 긴요한 곳이니, 세세한 절목일 뿐만이 아닙니다.

 

前書所論仁` ` ` 智分屬五行四時, 此是先儒舊說, 未可輕詆. 今者來書雖不及之, 然此大義也, 或恐前書有所未盡, 不可不究其說. 蓋天地之間, 一氣而已, 分陰分陽, 便是雨物, 故陽爲仁而陰爲義. 然陰陽又各分而爲二, 故陽之初爲木, 爲春, 爲仁, 陽之盛爲火, 爲夏, 爲禮; 陰之初爲金, 爲秋, 爲義, 陰之極爲水, 爲冬, 爲智. 蓋仁之惻隱方自中出, 而禮之恭敬則已盡發於外; 義之蓋惡方自外人, 而智之是非則已全伏於中. 故其象類如此, 非是假合附會. 若能黙會於心, 便自可見. ` ` ` 貞其理亦然, 文言取類允爲明白, 非區區今日之臆說也. 五行之中, 四者旣各有所屬, 而土居中宮, 爲四行之地, 四時之主. 在人則爲信, 爲眞實之義, 而爲四德之地, 衆善之主也. 五聲` 五色` 五臭` 五味` 五藏` 五蟲, 其分放此. 蓋天人一物, 內外一理, 流通貫徹, 初無間隔. 若不見得, 則雖生於天地間, 而不知所以爲天地之理; 雖有人之形貌, 而亦不知所以爲人之理矣. 故此一義切於吾身, 比前數段尤爲要緊, 非但小小節目而已也.

 

 

원기중에게 답함 6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유가의 학문은 고원하고 광박(廣博)한 곳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곳에 힘을 쏟는 데 있음을 일깨우고, 󰡔주역󰡕의 원()()()()에 대해 문왕과 공자의 설명이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에 대한 설명을 보내주시고, 또 강학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무능한 사람에게 몸을 낮춰 질문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시니, 더욱 공경하고 추앙하는 마음을 표합니다. 이미 제 모든 생각을 별지에다 써서 드렸습니다. 이는 다만 󰡔󰡕 가운데 괘획(卦畫)과 음양의 나뉘어진 위치를 말한 것일 뿐, 우리들의 몸에 절실한 일은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제 견해가 당신의 뜻에 맞지 않다면, 이를 버려 두고 다시 마음속에서 구해보십시오. 분명 긴요하고 절실하게 공부해야할 곳이 있을 것입니다.

 

垂諭易說, 又見講學不倦, 下間不能之盛美, 尤竊欽仰. 已悉鄙意, 別紙具呈矣. 此但易中卦晝陰陽之分位耳, 未是吾人切身之事. 萬一愚見未合盛意, 可且置之而更別向裏尋求, 恐合自有緊切用功處也.

 

 

원기중에게 답함 7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원기중이 무릉구도(武陵舊圖)에서 인()()를 음양과 강유(剛柔)에 잘못 대비한 관점을 지적하고, 선천과 후천, 사상과 팔괘의 내용에 대해서도 다양한 근거를 들어 다시 설명해주고 있다.

 

거듭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당신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본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애초에 쟁점이 없었으나, 무릉(武陵)의 옛 그림에서 인의(仁義)’ 두 글자를 어쩌다 잘못 봄으로써 서로 어긋나게 되니, 그 실수는 매우 미세한 것입니다. 그 뒤에 ()’자는 서북쪽이 될 수 없고 ()’자는 동남쪽이 될 수 없음을 이미 깨닫고 곧장 이곳을 분명하게 개정하니 아무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단점을 옹호하면서 여러 가지로 술수를 만들고자 하여, ‘음양강유(陰陽剛柔)’ 넉자를 바꾸어서 그 실수를 덮었기 때문에 다투어 분분하게 변론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도 정해질 수 없었습니다. 대개 처음에는 문왕의 8괘로 설명하여 하나의 음이 손()에서 생기고 하나의 양이 건()에서 생긴다고 말하니, 이미 설괘의 본뜻이 아닙니다. 세 양으로 된 건()의 방향을 하나의 양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곳으로 말하니, 또한 매우 어긋납니다. 이미 이를 알았으면서도 다시 12괘로 설명하면서 하나의 양이 건()의 상구(上九)에서 생기고 하나의 음이 곤()의 상육(上六)에서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북쪽의 유순한 음을 옮겨서 남쪽으로 보내 자를 띠고 서남쪽으로 돌아 그 유순한 음을 잃지 않게 하고, 남쪽의 강건한 양을 옮겨서 북쪽으로 돌려 자를 띠고 동북쪽으로 돌아 그 강건한 양을 잃지 않게 하니 또한 교묘합니다. 그러나 그 이동한 것은 모두 두 방향[남쪽과 북쪽]인데 육진(六辰)과 육괘(六卦)가 모두 예전의 위치를 잃고, 또 다시 예전의 음양의 경계를 바꾸니, 번거롭고 소란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옮기고자 한 뜻은 겨우 그 절반을 얻고 그 절반을 잃은 것에 불과합니다. 대개 북쪽은 엄숙하게 엉긴다고 말하지만 동쪽은 이미 온후하고 남쪽은 온후하다고 말하지만 서쪽은 이미 엄숙하게 엉기게 됩니다. 이는 옛 그림이 한 때 실수한 것을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과오를 부끄러워하며 잘못을 만들어 고의로 천착한 허물은 도리어 예전보다 더 심합니다. 당신은 여기에서 이기려고 하는 데 급급하다가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 설명을 탐구하여 당신의 뜻을 개발시키고자 합니다. 또 생각해보니, 빈말로 휘감아 이해하기 어렵고 쉽게 어긋나 하나의 그림을 긋는 것을 면치 못하니, 먼저 정해진 위치를 배열하고 뒤에 따로 옛 그림의 실수와 지금 두 번에 걸쳐 논의한 뜻으로 사항에 따라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다 밝히지 못한 곳은 더 상세히 말하여 따로 몇 개의 조목을 만들어 뒤에다 붙이겠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 세밀히 고찰하고 느긋이 사색해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일 여기에서 퍼뜩 깨달을 수 있다면 먼저 옛 그림에서 인의두 글자를 분명하게 개정하고, 지금 옮겨놓은 음양강유따위의 글자를 모두 원래 상태로 되돌리십시오. 그래서 제가 만든 새로운 그림의 본래 위치대로 만든다면, 간결하여 알기 쉽고 원만하게 이루어 설명을 필요치 않게 되어 삼재(三才)와 오행(五行),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이미 각각 본래 자리를 얻게 됩니다.

 

再辱垂喩, 具悉尊旨. 然細觀本末, 初無所爭, 只因武陵舊圖仁義兩字偶失照管, 致有交互, 其失甚微. 後來旣覺仁字去西北方不得, 義字去東南方不得, 卽當就此分明改正, 便無一事. 顧乃護其所短而欲多方作計, 移換陰陽剛柔四字以蓋其失, 所以競辨紛紜, 以至于今而不能定也. 蓋始者先以文王八卦爲說, 而謂一陰生於巽, 一陽生於乾, 則旣非說卦本意矣. 其以三陽純乾之方爲一陽始生之地, 則又爲乖剌之甚者. 及旣知之, 而又以十二卦爲說, 則謂 一陽生於乾之上九, 一陰生於坤之上六, 遂移北方之陰柔以就南, 使之帶回仁字於西南而不失其爲陰柔; 移南方之陽剛以歸北, 使之帶回義字於東北而不矢其陽剛, 則亦巧矣. 然其所移動者凡二方, 而六辰六卦例皆失其舊主, 又更改却古來陰陽界限, 蓋不勝其煩擾. 而其斫欲遷就之意, 乃不過僅得其半而矢其半. 蓋北方雖日嚴凝, 而東方已爲溫厚; 南方雖日溫厚, 而西方已爲嚴凝也. 是則非惟不足以救舊圖一時之失, 而其耻過作非, 故爲穿鑿之咎反有甚於前日者. 竊恐高明於此急於求勝, 未及深致思也. 欲究其說以開盛意, 又念空言繳繞, 難曉易羞, 不免畫成一圖, 先列定位, 而後別以舊圖之失及今者兩次所論之意隨事貼說, 有不盡者, 則又詳言, 別爲數條以附於後. 切望虛心平氣, 細考而徐思之. 若能於此翻然悔悟, 先取舊圖分明改正仁義二字, 却將今所移易陰陽剛柔等字一切發回元來去處, 如熹新圖之本位, 則易簡圓成, 不費詞說, 而三才五行, 天理人事已各得其所矣.

 

문왕의 팔괘에 대해서는 제가 일찍이 괘획(卦畫)으로 탐구하여 종횡으로 반복해보았으나, 끝내 그렇게 안배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여 감히 헛되이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지, 문왕의 후천학(後天學)을 소홀히 여겨서가 아닙니다. 대저 문왕의 본성은 하늘과 합일되니 곧 태어나면서 아는 위대한 성인이지만, 후천학은 그 설명을 탐구했으나 이해할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제가 지극히 어리석지만 또한 어찌 소홀히 하는 마음을 두겠습니까? 다만 보내주신 편지에서 논한 것처럼 이는 이미 정해진 위치와 이미 완성된 설명으로 인해 호응하고 찬탄했을 뿐입니다. 만일 문왕의 뜻을 여기에서 그치게 한다면 저는 이미 이를 알아 깊이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음을 병통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저는 일찍이 당신이 이 그림에 대해 존경함이 지극하고 믿음이 돈독했지만, 이를 안다고 하는 것이 제가 깊이 아는 것보다 못한 듯하니, 이 또한 쉽게 말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至於文王八卦, 則熹嘗以卦畫求之, 縱橫反覆, 竟不能得其所以安排之意, 是以畏懼, 不敢妄爲之說, 非以爲文王後天之學而忽之也. 夫文王性與天合, 乃生知之大聖, 而後天之學方恨求其說而不得, 熹雖至愚, 亦安敢有忽之之心耶? 但如來書所論, 則不過是因其已定之位, 已成之說而應和贊歎之爾. 若使文王之意止於如此, 則熹固已識之, 不待深思而猶病其未得矣. 故嘗竊謂高明之於此圖尊之雖至, 信之離篤, 而所以知之則恐有不如熹之深者, 此又未易以言語道也.

 

소씨(邵氏: 소옹)가 이 그림을 문왕의 학으로 여긴 데 대해서는 비록 고증할 바가 없지만, 설괘전에서는 이를 하늘과 땅이 위치가 정해지고’, ‘우레를 쳐서 움직인다는 두 구절의 뒤에다 배열하여 그 배치하는 방법이 매우 다릅니다. 소씨는 이를 나누어 복희문왕에 배속시키니 무리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다만 그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선 생략하여 아는 자를 기다려도 그다지 해가 되지 않습니다. 경솔하게 멋대로 입론하여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至如邵氏以此圖爲文王之學, 雖無所考, 然說卦以此列於天地定位,雷以動之兩節之後, 而其布置之法逈然不同, 則邵氏分之以屬於伏義, 文王, 恐亦不爲無理. 但未曉其根源, 則姑闕之以俟知者, 亦無甚害, 不必率然肆意立論而輕排之也.

 

하나의 홀수와 하나의 짝수는 사상(四象)을 낳을 수 없고 두 홀수와 두 짝수도 팔괘를 낳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하나의 그림은 매우 이해하기 쉬운데 당신은 평소에 어떻게 보았기래 오늘 이러한 의심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대개 처음 생성된 하나의 홀수와 짝수는 양의(兩儀)입니다. 하나의 홀수 위에 또 하나의 홀수와 짝수가 생기면 두 획으로 된 것이 두 개가 되어 태양(太陽)소음(少陰)이라 말합니다. 하나의 짝수 위에 또 하나의 홀수와 짝수가 생기면 두 획으로 된 것이 두 개가 되어 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 말합니다. 이를 이른바 사상이라 합니다. [사상이 이루어지면 양의도 나뉘어 4가 됩니다.] 태양의 홀수 획 위에 또 하나의 홀수와 짝수가 생기면 상효는 두 개가 되어 건()과 태()라 말합니다. [나머지 여섯 조목은 이에 따릅니다.] 이를 이른바 팔괘라 합니다. [팔괘가 이루어지면 양의사상도 모두 나뉘어 8이 됩니다.] 이 모두 자연스레 생겨 분출한 것이니 지력을 빌리지 않고 수세도 범하지 않았지만 천지의 문채와 만사의 이치가 다 갖춰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를 괘를 긋기 전의 󰡔󰡕이라 말하지 않으면 뭐라 하겠습니까? 제가 앞 편지에서 이미 옛날에는 이런 그림이 있지 않았다고 말했으니, 단지 오늘 이런 뜻으로 해서 홀수와 짝수가 서로 생성되는 차례를 그려내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을 뿐입니다. 그곳에서 그리기 전의 󰡔󰡕이다라 한 것은 곧 그리기 이전에 이미 이런 이치가 있었음을 말한 것인데, 특별히 총명하고 신묘한 사람의 수완을 빌려서 그 비밀을 밝힌 것이지, 그리기 전에 이미 이 그림이 있고 그린 뒤에 비로소 팔괘가 있었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 가운데 첫째 의미이니 이를 알지 못하고 󰡔󰡕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물 없는 그물을 들고 옷깃 없는 갓 옷을 껴입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다만 힘쓸 곳이 없을 뿐입니다. 이는 아는 자에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병이 매우 심하여 몸소 쓰지 못했습니다. 깊이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又謂一奇一偶不能生四象, 而二奇二偶不能生八卦, 則此一圖極爲易曉, 又不知老丈平時作如何看, 而今日猶有此疑也. 蓋其初生之一奇一偶, 則兩儀也. 一奇之上又生一奇一偶, 則爲二書者二, 而謂之太陽, 少陰矣. 一耦之上亦生一奇一耦, 則亦爲二畫者二, 而謂之少陽, 太陰矣. 此所謂四象者也. 四象成, 則兩儀亦分爲四. 太陽奇書之上又生一奇一偶, 則爲上爻者二而謂之乾兒矣. 餘六絛準此. 此則所謂八卦者也. 八卦成, 則兩儀四象皆分爲八. 是皆自然而生, 瀵湧而出, 不假智力, 不犯手勢, 而天地之文, 萬事之理莫不畢具. 乃不謂之畫前之易, 謂之何哉? 僕之前書固已自謂非是古有此圖, 只是今日以意爲之, 寫出奇偶相生次第, 令人易曉矣. 其曰畫前之易, 乃謂未畫之前已有此理, 而特假手於聰明神武之人以發其秘, 非謂畫前已有此圖, 畫後方有八卦也. 此是易中第一義, 若不識此而欲言易, 何異擧無網之網, 挈無領之裘, 直是無著力處. 此可爲知者道也. 目疾殊甚, 不能親書, 切幸深照.

 

네 번 째 획은 팔괘를 태극(太極)으로 삼아 다시 생성된 양의입니다. 다섯 번째 획은 팔괘의 사상입니다. 여섯 번째 획은 팔괘의 팔괘입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다시 보니 이러한 한 항목이 있는데, 이 편지에서 미처 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언급합니다. 다시 아룁니다.

 

第四晝者, 以八卦爲太極而復生之兩儀也. 第五畫者, 八卦之四象也. 第六晝者, 八卦之八卦也. 再看來書, 有此一項, 此書未答, 故復及之. 熹又禀.

 

(3-1698) 그림

 

 

원기중에게 답함 8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바로 앞 편지에서 인()()를 음양과 강유(剛柔)에 대비하여 설명한 자신의 논점에 약간의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수정보강하여 다시 해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의 설명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군요. 앞 편지에서 말한 바 두 방향과 66()은 모두 부여한 것을 잃어 절반은 얻고 절반은 잃었다는 설명은 나중에 생각해보니 또한 미진한 부분이 있습니다. 대개 양을 북쪽으로 옮겨 양으로 하여금 그 위치를 잃고 음의 위치를 빼앗게 한 것이나, 음을 남쪽으로 옮겨 음으로 하여금 그 위치를 잃고 양의 위치를 빼앗게 한 것은 두 방향이 참으로 병폐를 안고 있습니다. 동쪽은 비록 여전히 양이 되겠지만 그 온후한 인()은 남쪽에서 동류와 서로 합치될 수 없어 억지로 북쪽의 엄숙하게 엉기는 의()에 붙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도리어 인을 의로 바꾸어 음을 버리고 양으로 나아가야 바야흐로 편안하게 위치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또 이러한 이치는 없을 듯하니, 이는 동쪽의 3괘와 3()도 역시 그 위치를 잃게 됩니다. 서쪽은 비록 여전히 음이 되겠지만 북쪽을 떠나 남쪽에 붙어 의를 인으로 바꾸게 되니 그 형세도 역시 불편합니다. 이는 서쪽의 33()도 역시 그 위치를 잃게 됩니다. 대개 이 두 방향을 옮겨서 481212괘가 한꺼번에 혼란하면, 하나의 사물도 그 성명(性命)의 뜻을 편안히 할 수 없습니다. 앞 편지에서 아뢴 것은 특히 이처럼 명백하고 상세함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易說不知尊意看得如何? 前書所云二方六卦六辰皆失其所與得半失半之說, 後來思之, 亦有未盡. 蓋從陽於北, 使陽矢其位而奪陰之位; 從陰於南, 使陰失其位而奪陽之位, 二方固已病矣. 東方雖得仍舊爲陽, 然其溫厚之仁不得南與同類相合, 而使彊附於北方嚴凝之義, 不則却須改仁爲義, 以去陰而就陽, 方得寧貼. 然又恐無此理, 是東方三卦三辰亦矢其所也. 西方雖得仍舊爲陰, 然其離北附南, 與夫改義爲仁, 其勢亦有所不便. 是西方三卦三辰亦失其所也. 蓋移此二方而四方, 八面, 十二辰, 十二卦. 時鬼亂, 無一物得安其性命之情也. 前書所禀, 殊未及此之明白詳盡也.

 

 

원기중에게 답함 9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주역󰡕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과 문제에 대해서 여러 차례 편지를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으나, 원기중이 자신의 관점만 고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에 진전이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주역(周易)󰡕에 대한 말씀은 이미 다 알아들었습니다. 단지 이와 같을 뿐이라면 저는 본래부터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니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의심을 하는 이유는 바로 당신의 소견이 미진한 점이 있는데도 힘을 낭비하면서 거기에 천착하여 음양을 왕성한 곳에 자리할 수 없게 하고, 인의(仁義)를 온전한 하나의 덕으로 보존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서 한갓 어지럽게 말만 하여 손해만 있고 이익은 없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이미 제 말을 살피지 않고 더욱 고집스럽게 주장하시니, 제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이 각각 스스로 일가의 견해를 이루고 있으니, 제가 당신을 저와 같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저를 당신과 같게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입을 다문 채 담론하지 말고 각각 자기의 설을 지켜 복희(伏羲)와 문왕(文王)이 나오기를 기다려 질정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의견만을 철저하게 믿고 계시니, 복희와 문왕이 다시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 같군요. 위정공(魏鄭公)이 말하기를 헌릉(獻陵)을 보시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소릉(昭陵)이라면 신이 이미 보았습니다라고 하였고, 불가(佛家)의 말에 사람들이 아는 것은 양수(良遂)가 다 알지만 양수가 아는 것은 사람들이 모른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조용한 곳에서 지내고 있으니 세상사는 말해본들 무익합니다. 여기는 조용히 강론하면서 저의 곤궁한 근심을 위로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서로의 의견이 이처럼 맞지 않으니 매우 한탄스럽군요. 참으로 우리 도()가 궁해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易說已悉. 若只如此, 則熹固已深曉, 不待諄諄之告矣. 所以致疑, 正恐高明之見有所未盡而費力穿鑿, 使陰陽不得據其方盛之地, 仁義不得保其一德之全, 徒爾紛紜, 有損無益爾. 今旣未蒙省察, 執之愈堅, 則區區之愚尙復何說? 竊意兩家之論, 各自爲家, 公之不能使我爲公, 猶我之不能使公爲我也. 不若自此閉口不談, 各守其說, 以俟羲, 文之出而質正焉. 然以高明之見, 自信之篤, 竊恐義, 文復出, 亦未肯信其說也. 魏鄭公之言以爲望獻陵也, 若昭陵則臣固已見之矣; 佛者之言日諸人知處良遂總知, 良遂知處諸人不知, 正此之謂矣. 世間事吾人身在閑處, 言之無益, 此正好從容講論, 以慰窮愁. 而枘鑿之不合又如此, 是亦深可歎者, 而倩乎其道之窮矣.

 

 

원기중에게 답함 10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원기중이 자신의 󰡔역설(易說)󰡕 서문을 보내면서, 다시 인()과 의()의 위치와 성격을 설명한 데 대해, 주자는 문왕공자의 논의와 계사전」․「설괘전의 내용을 근거로 원기중의 오류를 변증하고 있다.

 

󰡔󰡕에 대한 설명을 보내주셨더군요.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의 견해는 앞서 이미 여러 차례 개진하여 당신을 귀찮게 하다가 배척을 당한 지 오래입니다. 이제 다시 어찌 변명을 하겠습니까? 다만 󰡔역설󰡕 여러 편의 서문을 살펴보건대, 오직 경전에 의거하여 이치를 설명하여 여러 유학자들의 억견에 미혹되지 않으니, 이는 한 책의 요긴하고 절실한 뜻이 됩니다. 이제 글 속의 설명을 고찰해보면, 계사전설괘전의 해설은 둘 다 󰡔예기󰡕를 인용하여 봄에 경작하고 여름에 성장하는 것을 인()으로 여기고,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저장하는 것을 의()로 여겼습니다. 설괘전의 해설에서도 온후한 기운은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에서 성해지고, 엄숙하게 엉기는 기운은 서남쪽에서 시작하여 동북쪽에서 성해진다는 말을 인용하여 인과 의의 구분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경전에 이미 근거가 있고 또 이치의 자연스러움에도 합치하니, 참으로 여러 유학자들의 억견에 미혹되지 않았다고 말할만합니다. 다만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또한 반드시 성인은 건()은 강건한 양에서 그쳐 인()이 없고 곤()은 유순한 음에서 그쳐 의()가 없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반드시 삼재를 겸하여 6획으로 삼은 뒤에 건()으로 하여금 동북쪽에 거하여 겨울과 봄의 양을 만들게 하고, ()으로 하여금 서남쪽에 거하여 여름과 가을의 음을 만들게 했습니다. 또 반드시 횡으로 음과 양을 끊어서 각각 두 단락으로 만들어 인과 의의 경계를 나누도록 한 뒤에 봄으로 하여금 동쪽에 거하여 건의 인으로 삼고, 여름은 남쪽에 거하여 곤의 인으로 삼고 가을은 서쪽에 거하여 곤의 의로 삼고 겨울은 북쪽에 거하여 건의 의로 삼았으니, [이는 본서의 글이 아니라 제 뜻으로 이처럼 주해했을 뿐이니 아마도 살펴본 자는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찢어서 깁고 쪼개어 어긋내니 경전에서 무엇을 근거했는지, 여러 유학자들의 억견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또 문왕과 공자는 모두 건()을 서북쪽의 괘로 여겼고 간()은 동북쪽의 괘로 여겼으니, 비록 그 까닭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으나 경전에 명확한 문구가 있어 바꿀 수 없음은 이미 분명합니다. 지금 ()은 동북쪽에 위치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건()의 높은 위치를 폄하하여 간()괘의 위치에 거하도록 하는 것이니, ()괘를 도리어 어느 곳에 거하도록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이 또한 경전에서 무엇을 근거했는지, 여러 유학자들의 억견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또 공자는 ()에 태극이 있고 이것이 양의를 낳는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는 본래 태극을 하나로 여기고 양의를 둘로 여긴 것으로, 마음과 눈을 가진 자라면 모두 알 수 있고 역법을 추론하고 산수를 펼친 뒤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태극론(太極論)에서 건곤(乾坤)은 역의 태극이다라고 말하니, 이 양의를 태극으로 여기고 또 태극으로 하여금 스스로 양의를 낳도록 한 것입니다. 이 또한 경전에서 무엇을 근거했는지, 여러 유학자들의 억견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계사전의 해설에 이르면, 태극이란 일()이 생겨나는 근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또한 태극의 묘일(妙一)은 명칭을 붙일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고, 그 차례는 마땅히 일어나게 하는 하나를 낳은 뒤에 거듭 변화해서 이내 양의를 낳게 됩니다. 이는 또한 경전에 근거가 있는 지 없는지, 여러 유학자들의 억견과 같은지 다른지를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다만 앞의 논의를 참고해보면 이미 크게 서로 모순이 됩니다. 당신의 의견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군요. 이 네 가지 조목은 제가 감히 그르다고 하여 당신의 분노를 촉발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하겠기에 가르침을 구하지 않을 수 없을 뿐입니다.

 

易說垂示, 極荷不鄙. 然淺陋之見, 前已屢陳, 至煩訶斥久矣, 今復何敢有言? 但詳序說者篇, 唯是依經說理, 而不惑於諸儒臆說之鑿, 此爲一書要切之旨. 今以篇中之說考之, 則如繫辭,說卦解兩引禮記以春作夏長爲仁, 秋斂冬藏爲義, 說卦解又獨引溫厚之氣始於東北, 盛於東南; 嚴凝之氣始於西南, 盛於東北, 以爲仁義之分, 此於經旣有據, 又合於理之自然, 眞可謂不惑於諸儒臆說之鑿矣. 但其所以爲說, 則又必以爲聖人恐乾止有陽剛而無仁, 坤止有陰柔而無義, 故必兼三才以爲六晝, 然後能使乾居東北而爲冬春之陽, 坤居西南而爲夏秋之陰. 又必橫截陰陽各爲兩段, 以分仁義之界, 然後能使春居東而爲乾之仁, 夏居南而爲坤之仁, 秋居西而爲坤之義, 冬居北而爲乾之義, 此非本書之詞, 但以鄙意主解如此, 庶覽者之易曉耳. 則其割裂補綴, 破碎參差, 未知於經何所據依, 而何以異於諸儒臆說之鑿也. 又按文王, 孔子皆以乾爲西北之卦, 艮爲東北之卦, 顧雖未能洞曉其所以然, 然經有明文, 不可移易, 則已審矣. 今乃云乾位東北, 則是貶乾之尊使居艮位, 未知使艮却居何處, 此又未知於經何所據依, 而何以異於諸儒臆說之鑿也. 又按孔子明言易有太極, 是生兩儀, 是則固以太極爲一, 兩儀爲二, 而凡有心有目者, 皆能識之, 不待推曆布算而後可知也. 今太極論乃日乾坤者, 易之太極,則以是兩儀爲太極, 而又便之自生兩儀矣. 未知此於經何所據依, 而又何以異於諸儒臆說之鑿也. 至繫辭解, 又謂太極者一之所由起, 則是又以爲太極之妙一不足以名之, 而其序則當且 生所起之一而後再變, 乃生兩儀矣. 此則又未暇論其於經有無據依, 是與不是諸儒臆說之鑿, 而但以前論參之, 已有大相矛盾者. 不審高明之意果何如也. 凡此四條, 熹皆不敢輒以爲非以觸尊怒, 但所未曉, 不敢不求敎耳.

 

 

원기중에게 답함 11 答袁機仲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원기중(袁機仲)에게 답한 편지이다. 원기중이 󰡔참동계(參同契)󰡕를 지은 위백양(魏伯陽)과 소옹(邵雍)은 역()의 이치를 잘 몰랐다고 비판한 데 대해, 주자는 󰡔참동계󰡕의 납갑법(納甲法)도 역() 속에 갖춰져 있고, 소옹의 선천설도 복희씨의 획괘법(劃卦法)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 경솔하게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말씀해주신 󰡔참동계(參同契)󰡕와 소씨(邵氏)󰡔󰡕을 모른다는 설명은 변증이 뛰어나고 깊어서, 저처럼 얕은 식견으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참동계󰡕라는 책은 본래 󰡔󰡕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이내 납갑법(納甲法)을 빌려다가 운행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를 덧붙였습니다. 한때 늘 이를 배우려고 했으나, 전하는 뜻을 얻지 못해 착수할 곳이 없었으니 가볍게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납갑법이란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경방(京房)의 점법이 화주림(火珠林)에 보이는데 이것은 그가 남긴 설명입니다. 심존중(沈存中)󰡔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매우 상세하게 해석하고 있는데 또한 그 자체에 이치가 있습니다. 󰡔참동계󰡕에서 말한 갑신은 곧 달의 저물고 새고 나타나고 없어지는 것으로 말했지, 6괘를 나누는 방법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비록 󰡔󰡕을 밝히기 위해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 속에 갖춰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일 그 말이 저절로 하나의 설명이 되어 미루어 통할 수 있다면, 또한 󰡔󰡕에 해로움이 없을 것이니, 경솔하게 비난하여 배척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소씨의 선천설에 대해서는 복희가 괘를 그은 차례대로 끊임없는 생성의 묘리에 뿌리를 두고 있어, 󰡔󰡕의 으뜸이 되니, 더욱 경솔하게 망발을 해서는 안됩니다. 혹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우선은 밀쳐두고 논하지 않음으로서 의심난 곳을 제쳐두어야 합니다. 만일 반드시 󰡔󰡕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오히려 󰡔󰡕을 토론하기에 부족한 데 어찌하여 항상 애써 가르침을 주시는지요? 이미 저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셨으니 감히 제 견해를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육오곤승(六五坤承)”과 같은 구절은 과거에도 오자가 있다고 의심했는데, 제가 지은 󰡔참동계고이(參同契考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보내주신 12괘도에서 구()괘를 자()방향으로 여기고 복()괘를 오()방향으로 여겼는데, 이 또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괘와 이()괘에는 효의 위치가 없다는 구절을 인용해주셨는데, 여기에도 탈자가 있습니다. 이는 단지 필사할 때의 오류인 듯하니 모두 논의할 겨를이 없습니다.

 

誨諭參同邵氏不知易之說, 辨博高深, 非淺陋所能窺測. 但參同之書本不爲明易, 乃姑借此納甲之法以寓其行持進退之候. 異時每欲學之, 而不得其傳, 無下手處, 不敢輕議. 然其所言納甲之法, 則今所傳京房占法見於火珠林者是其遺說. 沈存中筆談解釋甚詳, 亦自有理. 參同所云甲,,,,,辛者; 乃以月之昏旦出沒言之, 非以分六卦之方也. 此雖北爲明易而設, 然易中無所不有, 苟其言自成一說, 可推而通, 則亦無害於易, 恐不必輕肆詣排也. 至於邵氏先夫之說, 則有推本伏羲畫卦次第生生之妙, 乃是易之宗祖, 允不當率爾妄議. 或未深曉, 且當置而不論, 以謹闕疑. 若必以爲不知易, 則如熹輩尙何足與言易, 而每煩提耳之勤也? 旣荷不鄙, 不敢不盡其愚. 其他如六五坤承, 向亦疑有誤字, 見於考異. 而所示十二卦圖以姤爲子, 以復爲午, 亦所未喩. 所引坎離無爻位, 亦有脫字. 此或只是筆誤, 皆末暇論也.

 

 

조제거 선예에게 답함 1 答趙提擧(善譽)

 

 

해제이 글은 1186(순희 13, 병오, 57)에 조선예(趙善譽)에게 답한 편지이다. 괘효(卦爻)와 사상(四象)을 해석하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주역󰡕이라는 책은 본래 점을 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말은 반드시 상수(象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혔다.

 

마음으로 사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작년에 들르셨지만 일이 많고 바쁜 관계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가니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근래 당신이 저술한 󰡔주역(周易)󰡕󰡔논어(論語)󰡕에 관한 글을 읽어보았으나, 뒤늦게 얻게 되어 직접 명리(名理: 이론)에 대해 여쭈어 볼 수 없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그 사이에 우군(虞君)이 당신의 글에 대해 의심난 부분을 질문해준 것을 계기로, 애초에 감히 제 성명을 당신에게 알리지 못했는데도, 고명(高明)께서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먼 곳에까지 편지를 보내 주시니, 저에게 보여준 애틋한 마음은 매우 두터웠습니다. 수 차례나 편지를 읽은 뒤에 감개무량하여 감히 답장을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慕用之久, 往歲雖辱寵臨, 而倥傯卒迫, 不能少款, 每以爲限. 近乃竊窺所著易論語書, 又歎其得之之晩而不獲親扣名理也. 間因虞君轉請所疑, 初未敢以姓名自通, 而高明不鄙, 遠辱貽書, 所以傾倒之意甚厚. 三復以還, 感慰亡量, 不敢無以報也.

 

도체(道體)의 광대함은 끝없이 크지만 그 안에는 문리(文理)가 상세하게 판별되어 조금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이는 성현이 도를 말할 때에 이미 만물을 발육시킨다거나 높이 하늘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여 도체가 지극히 광대함을 형용하고, 예의(禮儀)3백 가지이고, 위의(威儀)3천 가지이다라고 하여 도체가 지극히 은미함을 포괄하여 설명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배우는 자들에게 덕을 닦고 도에 전념하는 공부를 지시할 때에는 그 광대함을 이룬다고 하고, 정미(精微)함을 극진히 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근세에 도를 말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아서 그 주장이 대체로 뭉뚱그리는 것은 좋아하고 나누어 쪼개는 것은 꺼리며, 고상하고 신비로운 것은 좋아하고 미세한 것은 소홀히 여기니, 이른바 광대함에는 그럴 듯하더라도 정미함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으면, 이른바 광대함에 대해서도 쉽게 전체적인 조감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蓋道體之大無窮, 而於其間文理密察, 有不可以毫釐差者. 此聖賢之語道, 所以旣言󰡒發育萬物󰡓,󰡒峻極于天󰡓, 以形容其至大, 而又必日󰡒禮儀三百, 威儀三千󰡓, 以該悉其至微 : 而其指示學者脩德擬道之功, 所以旣曰󰡒致其廣大󰡓, 而又必曰󰡒盡其精微󰡓. 近世之言道者則不然, 其論大抵樂渾全而忌剖析, 喜高妙而略細微. 其於所謂廣大者則似之, 而於精微有不察, 則其所謂廣大者亦未易以議其全體之眞也.

 

이제 경서(經書)의 내용을 가지고 논해 보겠습니다. 그 글에서 밝힌 것은 하나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리키는 것은 동이(同異)의 구별이 없을 수 없고, 동일한 가운데에서도 주빈(主賓)친소(親疎)원근(遠近)의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괘()8이 되는 이유는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를 세 개씩 조합시켜 만들었기 때문이지만, 효를 3으로 한 이유는 삼재(三才)의 상에서 취한 것으로 양효와 음효가 간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것이 이치가 하나이면서 가리키는 것이 다른 이유입니다.

 

今且以經言論之, 其所發明固不外乎一理, 然其所指則不能無異同之別. 而就其所同之中, 蓋亦不無賓主, 親疎, 遠近之差焉. 如卦之所以八者, 以奇偶之三加而成也. 而爻之所以三, 則取諸三才之象, 而非奇偶所能與, 此理之一而所指之不同者也.

 

4(四象)에 대한 설명은 본래 괘를 그리기 위한 것이니, 마땅히 소강절(邵康節)의 말로 주체를 삼고, 7896과 동북과 수목 따위를 객체로 삼아야 합니다. 주체를 얻으면 객체의 친소와 원근은 모두 여기에 기반을 두고 정할 수 있지만, 주체를 얻지 못한 채 이것은 모두 하나의 설이다라고 한다면, 나는 같고자 하는데 상대는 나와 달라서 끝내 같아질 수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같지만 주빈(主賓)의 구분이 없을 수 없는 이유이니, 이는 모두 뭉뚱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나누어 쪼개는 것을 꺼리는 데서 생기는 잘못입니다.

 

四象之說, 本爲劃卦, 則當以康節之說爲主, 而七, , , , ,西, , , , , , 木之類爲客. 得其主則客之親疎遠近皆卽此而可定, 不得其主而日是皆一說, 則我欲同而彼自異, 終有不可得而同者矣. 此所指之同而不能無賓主之分者也. 是皆樂渾全而忌剖析之過也.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는 순일하여 잡됨이 없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천지의 덕을 형용하여 64괘의 강령으로 삼았습니다. 건괘의 순수하게 강건하여 잡됨이 없는 것은 또 성인이 천리(天理) 자연의 전체를 형용한 것으로서 곤괘의 강령이 됩니다. 강건하고 유순한 건괘와 곤괘의 온전한 덕을 찬미하여 성인이 도를 체득한 신묘한 이치와 학자들이 덕에 들어가는 방법을 밝힌 것 또한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한 번도 한 쪽으로 치우쳤다고 여겨 깎아 내린 적은 없습니다. 여러 효()의 경우에는 더러 경계를 한 것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건괘 구삼(九三)에서 위태롭다고 한 것은 중()을 잃었기 때문이고, ‘허물이 없다고 한 것은 강건하면서 끈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곤괘 육오(六五)에서 크게 길하다고 한 것은 높은 자리에 처해 능히 겸손하기 때문이고, 상육(上六)에서 용이 들에서 싸운다고 한 것은 너무 왕성하여 양과 겨루기 때문이지, 어찌 건()의 강()함을 미워하여 유()하게 하고자 하고, ()의 유함을 싫어하여 강하게 하고자 해서이겠습니까? 지금 정미함의 깊은 경지를 살피지 않고 성급하게 한 쪽으로 치우쳤다고 지적하면서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고 하니, 그 말은 마치 건곤(乾坤)에 만족하지 못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또한 고상하고 신비로운 것은 좋아하고 미세한 것은 소홀히 여긴 데서 초래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용구(用九)와 용육(用六)의 경계는 바로 강()과 유()의 치우침을 경계한 것이지만, 그것 역시 음이 변하여 양이 되고 양이 변하여 음이 되는 상()으로 인하여 이러한 경계를 둔 것이니, 구양자(歐陽子: 구양수)의 말과 같은 것은 성인이 창의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한 것입니다.

 

至於乾坤之純而不雜者, 聖人所以形容天地之德, 而爲六十四卦之綱也. 乾之純於剛健而不雜, 又聖人所以形容天理自然之全體而爲坤之綱也. 所以贊其剛健柔順之全德, 以明聖人體道之妙, 學者人德之方者, 亦云備矣, 未嘗以其偏而少貶之也. 至於諸爻, 雖或不免於有戒, 然乾九三之危, 以其矢中也 : 其得無咎, 以其健而健也. 坤六五之元吉, 以其居尊而能下也 : 上六之龍戰, 以其太盛而亢陽也. 是豈惡乾之剛而欲其柔, 惡坤之柔而欲其剛哉? 今未察乎其精微之蘊, 而遽指其偏以爲當戒, 意若有所未足於乾坤而狹小之者, 是不亦喜高妙而略細微之過乎? 至於用九用六, 乃爲戒其剛柔之偏者. 然亦因其陰變爲陽, 陽變爲陰之象而有此戒, 如歐陽子之云者, 非聖人創意立說而强爲之也.

 

󰡔주역󰡕이라는 책은 본래 점을 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말은 반드시 상수(象數)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성인(聖人) 개인의 생각으로 만든 것이 아니며, 또한 그 권면하고 경계하는 것도 점을 쳐서 어떤 괘의 어떤 효를 얻은 사람에게 시행한 것이지 반대로 어떤 괘와 어떤 효를 경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근세에 󰡔주역󰡕을 말하는 자들은 대부분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설이 비록 의리는 있지만 내용이 없어, 이천(伊川)선생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근래에 󰡔주역󰡕을 음미하던 중에 우연히 여기에 생각이 미쳐 개인적으로 기뻐하면서 하늘이 충심(忠心)을 열어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점을 사람들에게 얘기해줘도 사람들 중에서 깊이 이해하고 있는 자를 보지 못하였으니, 고명(高明)께서는 어떻게 여기시는지요? 예전에도 대략 제 의견을 썼는데 지금 붓 가는 대로 두 개의 괘()를 써서 올려 보냅니다. 그 외에 글 뜻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일을 마치지 못했으니 이는 우선 먼 훗날 저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근래 또 작은 책자를 만들어 대략 상수(象數)의 줄거리를 논하였는데 이 책도 아울러 바칩니다. 제 생각에는 󰡔주역󰡕을 배워 상수의 설에 뜻을 둔 자라면 이 책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이고, 이 외에는 굳이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음의 정미(精微)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바람 부는 곳을 향해 길게 목을 빼고 있으니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더욱 커집니다.

 

大抵易之書本爲卜筮而作, 故其詞必根於象數, 而非聖人己意之所爲. 其所勸戒, 亦以施諸筮得此卦此爻之人, 而非反以戒夫卦爻者. 近世言易者殊不知此, 所以其說雖有義理而無情意, 雖大儒先生有所不免. 比因玩索, 偶幸及此, 私竊慶, 以爲天啓其衷. 而以語人, 人亦末見有深曉者, 不知高明以爲如何? 舊亦草筆其說, ?錄二卦上呈. 其他文義未瑩者多, 未能卒業, 姑以俟後世之子雲耳. 近又嘗編一小書, 略論象數梗槪, 幷以爲獻. 妄竊自謂學易而有意於象數之說者, 於此不可不知, 外此則不必知也. 心之精微, 言不能盡. 臨風引領, 馳想增劇.

 

 

조제거에게 답함 2 答趙提擧

 

 

해제이 글은 1186(순희 13, 병오, 57)에 조선예(趙善譽)에게 답한 편지이다. 조선예가 주자의 역학(易學) 설명을 보고 간이(簡易)하다고 호평해준 데 대해, 주자는 송구스러운 마음을 표하면서 󰡔주역󰡕간이하게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하였다.

 

역학(易學)에 대해 당신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는데, 이내 저에게 간이(簡易)하다고 칭찬을 해주시니 삼가는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거칠고 소략한 글로써 어찌 이러한 칭찬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간이(簡易)’라는 두 글자에는 󰡔주역󰡕의 이치 가운데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는 오묘함이 들어있습니다. 근세에 󰡔주역󰡕을 설명하는 자들은 더욱 많아졌지만 이 이치는 더욱 어둡습니다. 당신처럼 견해가 분명하지 않으면, 누가 한 마디로 다 밝힐 수 있겠습니까? 탄복해 마지않습니다. 요사이 몇 곳을 대략 수정하여 부쳐드립니다. 다만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는 종횡으로 얽혀있으면서도 정확히 합치되지 않음이 없으나 끝내 다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천지의 문장은 인간의 사사로운 지혜로는 미칠 수 없나 봅니다.

 

易學未蒙指敎, 乃有簡易之褒, 領人踧踖. 其書草略, 何足以當此? 然此二字在易數中眞不可易之妙. 近世說易者愈多而此理愈晦, 非見之明, 執能以一言盡之哉? 歎伏亡已. 近嘗略修數處, 尋別寄呈. 但圖書錯綜縱橫, 無不脗合, 終有不可得而盡者. 信乎, 天地之文非人之私智所能及也

 

 

주익공에게 보내는 편지 1 與周益公

 

 

해제이 글은 1189(순희 16, 기유, 60)에 주익공(周益公)에게 보낸 편지이다. 아버지 주송(朱松)이 모아놓은 왕안석의 묵적(墨蹟) 업후가전(鄴後家傳)을 승상 주익공에게 소개하고, 또한 왕안석의 󰡔일록(日錄)󰡕속에 있는 이필전(李泌傳)에 대해서 승상의 고견을 담은 글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초여름 날씨가 청명하고 화창한데, 판부안무 소보대관문(判府按撫少保大觀文) 승상의 일상생활도 다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근래에 편지를 올린 적이 있었고, 아울러 호()선생의 묘문을 청했었습니다. 지금 도성에 이르러서야 이내 아직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사군(史君)에게 아뢰어 재촉을 했으니, 진실로 또한 마땅히 오래지 않아 듣게 될 것입니다.

저는 작은 간청이 있어서 경솔하게 승상에게 아룁니다. 저의 선친이 젊어서부터 형공(荊公: 왕안석)의 글을 배우기를 좋아해서 그의 묵적(墨蹟)의 모아 놓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글 중의 하나가 신종에게 올린 업후가전(鄴後家傳)의 초안인데, 글의 종지(宗旨)를 음미하고 필세(筆勢)를 감상해보면 곧 고금을 뛰어넘어 우주를 열고 닫는 기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판본의 문집과는 같지 않으니, 의심컨대 문집을 만든 자가 이내 정본을 삭제하고 윤색한 것 같은데, 이 글이 곧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본래 취지입니다. 일찍이 󰡔일록(日錄)󰡕 속에 이전(李傳)의 본문을 베껴서 그 뒤에 붙여서 함께 새겨 후대 학자로 하여금 고찰케 하려고 했습니다만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강서(江西)의 사자(使者) 왕계로(汪季路) 형이 취하여 임천(臨川: 왕안석의 고향)에다 새기고자 하는데, 승상의 한 마디 말을 구하여 그 일을 소중히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열람하는 자들로 하여금 이 글의 여러 행간의 뜻을 알도록 하고, 이 글이 관계하는 바가 이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있게 할 것이니, 다만 글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승상도 또한 마땅히 여기에 개탄하는 마음이 일어 끝내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속히 그러한 뜻을 써서 왕계로에게 부쳐주시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그 외에도 왕관문(王觀文)과 변경에 관한 일을 논한 몇 개의 편지가 있으니, 훗날 함께 부쳐서 상세한 고견을 구하겠습니다. 오로지 이것만을 아뢰고 감히 다른 언급을 하지 못했습니다. 승상께서 이런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熹竊以孟夏淸和, 伏惟判府安撫少保大觀文丞相國公均候動止萬福. 熹近嘗拜書, 幷胡先生墓文請敎. 今者至城中, 乃知未遣. 已白史君趣其行, 諒亦非久當徹鈞聽也. 熹有少懇, 率易拜禀. 熹先君子少喜學荊公書, 收其墨蹟爲多. 其一紙乃進鄴侯家傳奏草, 味其詞旨, 玩其筆勢, 直有跨越古今, 開闔宇宙之氣. 然與今版本文集不同, 疑集中者乃刪潤定本, 而此紙乃其胸懷本趣也. 嘗欲抄日錄李傳本語其後而幷刻之, 使後之君子得以考焉而未暇也. 今江西使者汪兄季路乃欲取而刻之臨川, 妄意欲求相公一言以重其事, 庶幾覽者有以知此幅紙數行之間而其所關涉乃有不可勝言之感, 非獨爲筆札玩好說也. 伏惟相公亦當慨然於此而終惠之, 早賜揮染附季路, 爲幸甚厚. 其他尙有與王觀文論邊事數紙, 異時幷當附呈, 以求審定也. 專此具禀, 不敢它及. 伏乞鈞照.

 

 

주익공에게 답함 2 答周益公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진, 67)에 주익공(周益公)에게 답한 편지이다. 범중엄(范仲淹)과 여이간(呂夷簡) 사이에 얽힌 정치적인간적 난맥상을 구양수(歐陽脩)가 범중엄의 묘비를 쓰면서 두 사람이 생존시에 서로 원한을 풀었다고 기록한 데 대해, 범중엄의 아들 범순인(范純仁)이 자의대로 이 구절을 삭제한 사건이 있었는데, 주자는 이 편지에서 그 사건의 경위와 진위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지난 번 범중엄(范仲淹)과 구양수(歐陽脩)에 대해 논의한 내용의 편지를 받았는데, 제 의견으로는 의심스런 곳이 있습니다. 다시 편지를 보내 묻고자 했으나 또한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 인편을 만나 기회를 잃어서는 안될 듯하여 글을 올립니다만, 병든 몸이 이틀 사이에 더욱 깊어져 전일보다 더욱 심해짐을 느끼니, 형편상 상세하게 아뢰지는 못합니다. 다만 저는 범중엄과 구양수 두 분의 마음은 명백하고 통달하여 조금도 의심할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공(呂公)은 전에는 허물이 있었고 나중에는 공이 있었으니, 단점과 장점을 스스로 서로 가리울 수 없습니다. 만약 승상의 견해와 같다면 도리어 그의 실정을 얻지 못하게 될 듯하니, 승상께서는 좀더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접 때에 범공(范公)이 여공(呂公)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양(汾陽)과 임회(臨淮)의 일을 인용한 것을 보았는데, 말의 뜻이 매우 명백하였지만 문집 가운데서는 도리어 볼 수 없었으니, 아마도 충선(忠宣)에 의해 삭제된 것 같습니다. 충선은 본디 어질지만 그 규모나 기상이 문정(文正: 범중엄의 시호)과는 다 같지 않은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일을 매우 꺼려했으니 비록 바름을 지키는데 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더불어 권도를 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고명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젊은 날에 저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았습니다. 오장(五丈) 서단립(徐端立)이 일찍이 석림(石林)이 범진(范鎭)과 사마광의 음률의 분변을 의심하여 이내 고의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만들어내어 붕당의 의혹을 해명하려고 했던 것을 보고, 그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이 일이 믿을만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을 논하는 자도 또한 이득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할만하다고 하니, 석림이 한번 웃고 끝냈습니다. 오늘의 논의는 이런 부류인 듯하여 아울러 언급했습니다. 참람되고 경솔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昨蒙寵喩范, 歐議論, 鄙意有所不能無疑. 欲以請敎, 而亦未暇. 今遇此便, 似不可矢, 而病軀兩日覺得沉重, 愈甚於前, 勢不容詳細稟白. 但竊以爲范, 歐二公之心明白洞達, 無纖芥可疑. 呂公前過後功, 瑕瑜自不相掩. 若如尊喩, 却恐未爲得其情者, 故願相公更熟思之也. 向見范公與呂公書引汾陽, 臨淮事者, 語意允明白, 而集中却不見之, 恐亦爲忠宣所刪也. 忠宣固賢, 然其規模氣象似與文正有未盡同者. 深諱此事, 雖不害爲守正, 然未得爲可與權也. 不審高明以爲如何? 少日見徐五丈端立自言嘗見石林疑范, 馬鍾律之辨乃故爲同異, 以釋朋比之疑者, 因告之曰: 此事信否未可知, 然爲此論者亦可謂不占便宜矣.石林爲之一笑而罷. 今日之論恐或類此, 故幷及之. 僭率皇恐, 切望矜恕.

 

 

주익공에게 답함 3 答周益公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진, 67)에 주익공(周益公)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 편지도 앞 편지를 이어 구양수가 지은 범중엄(范仲淹) 비문의 내용과 범순인이 그 구절을 삭제한 사건을 두고, 주자가 여러 가지 문헌과 정황을 참작하여 내용과 사건의 실체를 다각도로 규명하고 있다.

 

전에 여러 차례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받았는데 범공(范公)의 비문에 관한 내용은 고증이 정밀하고 방대하며, 논의가 바르고 치우침이 없으며, 지향하신 뜻이 깊고 원대하여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더군요. 또 여자약(呂子約)의 기록을 승상에게 받아서 이리저리 참고하여 무지를 깨우치니 그 분변이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저처럼 고루한 사람이 참여해서 들어볼 수 있었으니 너무 다행입니다. 다시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한 마디 말이라도 두겠습니까? 그러나 말씀하신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고는 의심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前者累蒙誨諭碑曲折, 考據精博, 論議正平而措意深遠, 允非常情所及. 又得呂子約錄記所被敎墨, 參互開發, 其辨益明. 之孤陋, 得與聞罵焉 幸已甚矣, 復何敢措一詞於其間哉? 然隱之於心, 竊有所不能無疑者.

 

한편으로 생각하면, 여공(呂公)의 마음씀이야 후학(後學)이 엿볼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정권을 잡았을 때 그의 행동이 민심에 부합되지 않은 것이 많았고, 또 충현(忠賢)들의 행동이 자기와 다른 것을 싫어하여 기어이 배척하여 조정에 용납될 수 없게 한 뒤에야 그쳤으니, 그 점이 당대의 바른 선비들이 다 미워했던 이유입니다. 하물며 범공과 구공(歐公)은 비평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고 간쟁(諫諍)하는 직분을 맡기도 했는데 어찌 그를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논한 것이 천하의 공론에 부합되었으면 그들을 너무 지나치다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그의 말년에 이르러 천하의 공론을 끝내 어지럽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또한 늙고 병들어 장차 귀향할 때에도 다시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또 천하의 일이 혹 끝내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면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염려했습니다. 어찌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러 배척되었던 여러 현인들이 혹 기용되어 다시 쓰인다면, 그 죄가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아울러 자손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차라리 옛 원한을 덜어 만년에 잘 수습하는 계책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환란(患亂)을 염려하는 뜻이 전부 다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온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허물을 고친 그의 선()한 생각으로 인해 천하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았으니, 잘못을 덮어두고 악을 조장(助長)하면서 힘써 천하의 공론과 싸워 국가에 우환을 남기는 세상의 무리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蓋嘗竊謂呂公之心固非晩生所能窺度, 然當其用事之時, 擧措之不合衆心者蓋亦多矣. 而又惡忠賢之異己, 必力排之, 使不得容於朝廷而後已. 是則一世之正人端士莫不惡之. ,二公或以諷議爲官, 或以諫靜爲職, 又安可置之而不論? 且論之而合於天下之公議, 則又豈可謂之太過也哉? 逮其晩節, 知天下之公議不可以終拂, 亦以老病將歸而不復有所畏忌, 又慮夫天下之事或終至於危亂, 不可如何, 而彼衆賢之排去者或將起而復用, 則其罪必歸於我而幷及於吾之子孫, 是以寧損故怨, 以爲收之桑愉之計. 蓋其慮患之意雖未必盡出於至公, 而其補過之善, 天下實被其賜, 則與世之遂非長惡, 力戰天下之公議以貽患於國家者相去遠矣.

 

범공(范公)의 마음은 광명 정대하여 본래 묵은 원한이 없었고, 그의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나라 걱정에 있었기 때문에 여공(呂公)의 선한 의도를 받아 들여 떨치고 일어나서 기꺼이 등용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해명한 글을 보면, “상공(相公)은 분양(汾陽)의 마음과 덕이 있는 데 나는 임회(臨淮)의 재주와 힘이 없다고 한 말도 여공에게 마음을 다 기울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이 글은 지금 문집 속에 보이지 않는데 또한 충선(忠宣)이 삭제하여 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범공의 가장 훌륭한 덕으로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점이니, 구양공(歐陽公)도 그의 마음을 알고 특별히 비문에 썼던 것입니다.

 

至若范公之心, 則其正大光明固無宿怨, 而倦惓之義實在國家. 故承其善意, 旣起而樂爲之用. 其自訟之書, 所謂‘“相公有汾陽之心之德, 仲淹臨淮之才之力, 亦不可不謂之傾倒而無餘矣. 此書今不見於集中, 恐亦以忠宣刊去而不傳也. 此爲范公之盛德而他人之難者, 歐陽公亦識其意而特書之.

 

구양공은 여공이 지난 날 범공을 폄하한 일은 죄 줄만 하지만, 이 시기에 범공을 기용한 것은 기록할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이 두 경우는 각각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 애당초 선악(善惡)을 서로 은폐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런 점에서 볼 때 구공의 마음도 역시 천박스러운 장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읽고 그 요체를 구해 보면, 그 말은 대략 여공의 도량이 넓고 깊고 마음 씀이 정밀하고 깊고 일을 이룸에 기약을 두어 재덕을 겸비한 사람을 등용해서 여러 현인들에게서 오직 덕망의 치우침만을 취하기 않았기 때문에 범중엄과 구양공이 그를 알기에 족하지 못했고, 또 여러 현인들의 어짊을 알지 못하고 그들을 공격하는 지나침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범중엄을 비록 등용하기는 했지만 그 문집 가운데 중하게 돌아왔다는 말 또한 매우 평이하니, 대개 특별하게는 주군의 상례이지만 사실인, 즉 끝내 그 자신이 일찍이 원한을 풀어놓지 않은 것입니다. 그 후에 구양수가 이내 전에 말한 잘못을 후회했고, 또 여러 현인들의 어짊을 알았기 때문에 범중엄의 비문을 부탁하는 걸로 인해서 원한을 푸는 말을 함으로써 뜻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충선이 그의 아버지의 마음만 알았으니, 이 때문에 다만 비문 가운데 그 말을 삭제해서 비록 구양공에게 노여움을 받더라도 꺼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체로 이러한 사연은 가리키는 뜻이 은미하고 비밀스러워 반드시 구차스럽지 않아야 합니다. 도리어 저의 견해에 편안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 이야기를 소상히 아뢰어 바름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참람되고 경솔함을 용서하시고 귀 기울여 들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呂公前日之貶范公自爲可罪, 而今曰之起范公自爲可書. 二者各記其實而美惡初不相掩, 則又可見歐公之心亦非淺之爲丈夫矣. 今讀所賜之書而求其指要, 則其言若曰: “呂公度量潭涵, 心術精深, 所以期於成務, 而其用人才德兼取, 不爲諸賢專取德望之偏, , 諸公不足以知之, 又未知其諸子之賢而攻之有太過者. 後來范公雖爲之用, 然其集中歸重之語亦甚平平, 蓋特州郡之常禮, 而實則終身未嘗解仇也. 其後歐公乃梅前言之過, 又知其諸子之賢, 故因碑託爲解仇之語以見意. 忠宣獨知其父之心, 是以直於碑中刊去其語, 雖以取怒於歐松而不憚也.”凡此曲折, 指意微密, 必有不苟然者. 顧於愚見有所未安, 不敢不詳布其說, 以求是正, 伏惟恕其僭易而垂聽焉.

 

여공(呂公)의 도량과 마음가짐은 큰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신 말씀은 진실로 맞습니다. 그러나 도량이 있었다면 마땅히 자신의 견해와 다른 주장을 용납했어야 할 것이고, 올바른 마음가짐이 있었다면 마땅히 인재의 바르고 바르지 못함을 분별했어야 할 것이고, 천하의 일을 성공시키고자 했다면 반드시 선한 점을 따르고 악한 점을 제거하면, 현인을 등용하고 간인(奸人)을 물리친 뒤에야 가능성이 있을 것인데 지금 모두 반대로 하여 천하의 형세를 날로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를테면 하서(河西) 지방의 소소한 일은 한 쪽 지방의 문제인데도 다시 범공을 기용하지 않고서는 거의 안정시킬 수 없었으니, 과거 그의 행위를 놓고 볼 때 훌륭한 도량과 마음가짐으로 능히 큰 일을 이룬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사람을 임용(任用)할 적에 재주있는 사람과 덕()을 가진 사람을 다 얻고자 했다는 말씀도 진실로 맞습니다. 그러나 범공(范公)과 구공(歐公)등 여러 현인들은 비단 덕()만 있고 재주는 부족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도 재주있는 이와 덕 있는 이를 모두 거두어 썼던 것입니다. 그 결과 비록 손원규(孫元規), 등자경(滕子京)과 같은 무리가 재주를 믿고 방자하게 굴면서 법도에 맞지 않는 행위를 했어도 또한 보호하고 받아 들여 능력을 다하게 하고 일찍이 버린 적이 없었으니, 전적으로 덕있는 자만 쓰고 재주 있는 자는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공(呂公)의 경우 그가 등용한 장사손(張士遜), 이적(李迪), 송상(宋庠), 송기(宋祁)와 같은 자들은 우선 재주만 놓고 보더라도 결코 범공과 구공보다 나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을 버리고 저들만을 썼으며, 당시 재주가 뛰어나고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로서 궁하여 아래에 있던 자들 중에 인재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들을 초치하여 기량대로 부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또 처음에 재상직을 내놓고 왕수(王隨)와 진요좌(陳堯佐)를 천거하여 자신의 후임으로 세웠으니, 여공이 취한 기준은 대체 무엇입니까? 재주입니까? 덕입니까? 이 점도 스스로 해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呂公之度量心術, 期以濟務則誠然矣. 然有度量則宜有以容義論之異同, 心術則宜有以辨人才之邪正, 欲成天下之務則必從善去惡, 進賢退姦, 然後可以有濟. 今皆反之, 而使天下之勢日人於昏亂, 下而至於區區西事一方之病, 非再起范公, 幾有不能定者. 則其前曰之所爲, 又惡在其有度量心術而能成務也哉? 其用人也, 欲才德之兼取, 則亦信然矣. 范歐諸賢非徒有德而短於才者, 其於用人, 蓋亦兼收而並取. 雖以孫元規, 膝子京之流恃才自肆, 不人規矩, 亦皆將護容養, 以盡其能, 而未嘗有所廢棄, 則固非專用德而遺才矣. 呂公所用, , , 二宋, 姑論其才, 亦決非能優於二公者. 乃獨去此而取彼, 至於一時豪俊跅弛之士, 窮而在下者不爲無人, 亦未聞其有以羅致而器使之也. 且其初解相印而薦王隨 陳堯佐以自代, 則未知其所取者爲才也耶? 爲德也耶? 是亦不足以自解矣.

 

, “범공(范公)과 구공(歐公)이 여공(呂公)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또 그 자식들의 어진 점을 헤아리지 못한 채 너무 지나치게 공격했다고 하시니, 그 공격한 것이 일마다 모두 드러난 흔적이 있어서 숨길 수가 없는데 어찌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시종(侍從)하고 간쟁(諫諍)하는 신하가 되어 나라를 위해 일을 논하는 과정에서 재상의 자제가 어진지 어질지 못한지를 보고서 진퇴를 결정한다면 그것을 신하된 자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범공(范公)과 여공(呂公)의 원한이 애당초 풀리지 않았다고 하시니, 범공이 이미 여공 때문에 다시 쫓겨났지만 그를 기용하여 하서(河西)의 일을 맡겨 직급을 올려 준 시기는 바로 여공이 세 번째 재상으로 들어간 때에 있었습니다. 만약 범공이 여공에게 품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묵묵히 여공의 천거를 받아들이면서 지난날의 생각을 밝히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안으로 독()을 품고서 도리로써 자신을 누르지 못한 채 좋은 관직만을 탐하여 머리를 숙이고 여공의 농락을 받아 그의 부림을 받았다는 말이 되니, 모르긴 합니다만 범공의 마음이 그러했을까요?

만약, ‘구공(歐公)이 뒤늦게 전에 여공을 탄핵했던 일을 후회하고 여러 아들의 어진 점을 알고서 범공의 비문을 통해 스스로 해명했다고 하신다면, 이는 여러 아들의 어진 점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자신이 빌붙을 계획을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은 친구를 팔아서라도 새로운 교제를 맺어 없었던 일을 있다고까지 하는 등 죽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부끄러운 행위가 된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구공이 차마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더구나 그가 쓴 비문에는 원한을 푼 한 가지 일만을 기록하였을 뿐 다른 좋은 점에 대해서는 칭찬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보면 여공이 과거에 충현(忠賢)을 배척한 죄는 이른바 덮고자 해도 드러난다는 것이니, 어찌 구공이 전에 여공을 탄핵한 일을 속죄하는 것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잘 보일 수 있겠습니까?

 

若謂范歐不足以知呂公之心, 又不料其子之賢而攻之太過, 則其所攻事皆有迹, 顯不可揜, 安得爲過?且爲侍從諫諍之官, 爲國論事, 乃視宰相子弟之賢否以爲前却, 亦豈人臣之誼哉? 若曰, 之仇初未嘗解, 范公旣以呂公而再逐, 及其起任西事而超進職秩, 乃適在呂公三人之時. 范公果有怨於呂公而不釋, 乃閔黙受此而無一語以自明其前日之志, 是乃內懷憤毒, 不能以理自勝, 而但以貪得美官之故, 俛而受其籠絡, 爲之驅使. 未知范公之心其肯爲此否也. 若曰歐公晩悔前言之失, 又知其諸子之賢, 故因碑以自解, 則是畏其諸子之賢, 而欲陰爲自託之計, 於是寧賣死友, 以結新交, 雖至以無爲有, 愧負幽冥而不遑恤. 又不知歐公之心其忍爲此否也. 况其所書但記解仇之一事, 而未嘗幷譽其他美, 則前日斥逐忠賢之罪, 亦未免於所謂欲蓋而彰者, 又何足以贖前言之過而媚其後人也哉?

 

범충선(范忠宣)이 어질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 규모를 보면 문정공(文定公)의 뜻이 크고 막힘이 없는 것과는 전혀 닮지 않은 점이 있으니, 이른바 함께 뜻을 세웠어도 함께 권도를 할 수 없다는 자입니다. 그의 부친이 원한을 푼 일에 대해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매우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을 입 밖에 내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몰래 묘비에서 이 일을 깎아내어 피휘(避諱)한 것처럼 하였던 것인데, 구공이 이 일 때문에 매우 불평하여 누차 편지에 쓰기까지 했으니, 비단 󰡔묵장만록(墨莊漫錄)󰡕에 기록된 것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용천지(龍川志)󰡕에서도 이 일에 대해 직접 장안도(張安道)에게 들은 말로 증거를 삼았으니, 장안도는 바로 여공의 당으로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범공(范公)이 이러한 일이 없는데 곧바로 구공에게 무고를 당했다고 한다면 충선(忠宣)은 마땅히 피눈물을 흘리며 구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이유를 상세히 말하여 부친의 심정을 밝힌 뒤 구공의 답을 기다려 진퇴를 결정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도 끝내 맞지 않으면 의리를 끌어다가 결별을 고하고 다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우선 돌에 새기지 않고 후세의 군자를 기다려 그 논의를 정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곧바로 완성된 글에서 몇 마디 말을 깎아 버렸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행동입니까? 지금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한 범공(范公)의 출처와 구공(歐公)의 간곡하게 되풀이한 말은 믿지 않고, 다만 사리에 맞지 않게 행동한 충선(忠宣)에게서 취하여 사실 유무의 결정을 내렸으니 저로서는 이 점이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若論忠宣之賢, 則雖亦未易輕議, 然觀其事業規模, 文正之供毅開豁終有未十分肖似處, 蓋所謂可與立而未可與權者. 乃翁解仇之事, 度其心未必不深耻之, 但不敢出之於囗耳. 故潛於墓碑刊去此事, 有若避諱然者. 歐公以此深不平之, 至屢見於書疏, 非但墨莊所記而已. 龍川志之於此, 又以親聞張安道之言爲左驗. , 尢足取情無疑也. 若曰范公果無此事而直爲歐公所誣, 則爲忠宣者正當沫血飮泣, 貽書歐公, 具道其所以然者以白其父之心迹, 而俟歐公之命以爲進退. 若終不合, 則引義告絶而更以屬人, 或姑無刻石, 而待後世之君子以定其論, 其亦可也. 乃不出此, 而直於成文之中刊去數語, 不知此爲何等擧措? 若非實諱此事, 故隨忍寢黙而不敢誦言, 則曷爲其不爲彼之明白而亘爲此黯闇耶?

 

지금 범중엄의 진퇴에 관한 글의 실제와 구양수의 간곡한 반복의 논의를 믿지 않으면서 다만 충선(忠宣)의 진퇴의 근거 없는 행위를 취하여 유무의 결정으로 삼는다면, 저는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사실을 가지고 말한다면 다만, “여공(呂公)은 지난 날 현자의 진출을 막은 죄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지만 뒤에 허물을 고친 공이 있고, 범공(范公)과 구공(歐公)의 마음은 시종과 본말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아서 조금도 논의할 것이 없다. 특히 범공과 같은 분은, ‘평생 한 사람에게도 원망과 미움이 없다고 한 말에서 그 마음가짐과 도량이 넓고 크면서 고명(高明)하여 백세의 사표(師表)로 삼을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충선(忠宣)의 경우는 소견은 좁지만 정도를 지키는 데에는 해될 것이 없다라고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 말하지 않고도 명분이 바르고 말이 조리에 맞아 다시 의심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승상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미치고 눈먼 저의 말이 혹 이치에 합당하지 못하더라도 깨우침을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今不信范公出處文辭之貧, 歐公丁寧反復之論, 而但取於忠宣進退無據之折爲以爲有無之決, 則區區於此誠有不能識者. 若摭實而言之, 但日呂公前日未免賢之罪, 而其後日誠有補過之功 : 范歐二公之心則其終始本末如靑天白日, 無纖毫之可議 : 范公所謂平生無怨惡於一人者, 允足以見其心量之廣大高明, 可爲百世之師表 : 至於忠宣, 則所見雖狹, 然亦不害其爲守正, 則不費詞說而名正言順, 無復可疑矣. 不審尊意以爲如何? 狂瞽之言, 或未中理, 得賜鐫曉, 千萬幸甚

 

다음 편지에서 깨우쳐 주신 것 또한 󰡔소록(昭錄)󰡕에 원한을 푸는 말을 기록하지 않고 그 유무를 단정하셨는데, 제 생각으로는 여공(呂公)의 파직과 범공(范公)의 진퇴가 이미 글로 다 기록되었다면, 두 공이 전에 가진 서운한 감정이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깨우쳐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록󰡕이 완성된 시기에 구양수가 본디 이미 사관이 되지 않았고, 정헌(正獻)과 충선(忠宣)이 또한 모두 이 시기에 등용되었고, 범중엄은 진실로 묘비의 전문을 사씨(史氏)에게 올리지 않았으며, 여씨의 뜻이 또한 아마도 구양수의 말에 불쾌한 바가 있어서, 이 때문에 우선 제쳐두고 말하지 않다가, 그 자취가 없어져서 후세의 공론이 속일 수 없음을 알지 못하게 되니, 이 때문에 금일의 분분한 논의를 열어 놓았습니다. 만약 또 그렇지 않다면 범중엄이 이 때 등용되었을 때 그 현자를 오히려 알아보지 못했다하더라도 저 사관이 된 자들이 구양수의 깊음과 같지 못하다고 알고, 혹자는 지나치게 숨기고 피하고도, 또한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아마도 또한 이 때문에 그 유무를 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後書誨諭又以昭錄不書解仇之語而斷其無有, 以爲呂公拜罷, 范公進退旣直書其歲月, 則二公前憾之釋然不待言而喩矣. 不然, 昭錄書成, 歐公固已不爲史官, 正獻, 忠宣又皆已爲時用, 固不以墓碑全文上史氏, 呂氏之意亦恐其有所未快於歐公之言也, 是以姑欲置而不言, 以泯其迹, 而不知後世之公論有不可誣者, 是以啓今日之紛紛耳. 如又不然, 范公此擧雖其賢子尙不能識, 彼爲史知之必不能如歐公之深, 或者過爲隱避, 亦不足怪, 恐亦未可以此而定其有無也.

 

󰡔묵장(墨莊)󰡕의 기록은 장방기(張邦基)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기록한 구공의 네 가지 일은 구공의 손자인 당세(當世)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약(子約)은 소흥(紹興)의 사인(舍人)이 기록했다고 여기니, 이것은 진실로 누구의 말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말의 뜻이 묘미가 있어 실로 후인이 말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혹 예로부터 있었던 것인지 의심해 볼뿐입니다. 󰡔담총(談叢)󰡕과 같은 글은 그 기록한 일이 진실로 한 때 잘못 전해진 것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병통은 옛날에 달려 있는 것이니, 비록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박식하다하더라도 근세에도 온공(溫公)의 정성이 모두 면하지 못하는 바였는데, 하물며 후세대에게 비록 선배들이 자못 언급해 놓았다하더라도 그 평생의 자취가 다 흩어진 것이 많고, 그 견문 사이에는 사실을 다 얻을 수 없는 것이 마땅히 있으며, 아마도 또한 이 편지로는 다 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단주(丹朱)의 말은 진실로 지나치지만, 구양수가 이 말을 일찍이 영호(令狐) 부자의 문장의 번거롭고 단조로움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 처음에 또한 크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없이, 다만 한 때 말의 형세가 우연히 들어맞은 것 같아서 윤리를 헤아리는 경중을 가릴 겨를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반드시 공의 말이라고 할 수가 없고, 또한 공의 말이 아니라고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몇 개 조항들은 깊이 논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연히 충분한 가르침을 주시고 함께 강론함을 통해 모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니, 또한 도움이 적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墨莊之錄出於張邦基, 不知其何人. 其所記歐公四事, 以爲得之公孫當世. 子約以爲紹興舍人所記, 此固未知其孰是. 但味其語意, 實有後人道不到處, 疑或有自來耳. 談叢之書, 則其記事固有得於一時傳聞之誤者. 然而此病在古雖, 之愽, 近世則溫公之誠, 皆所不免, 况於後世, 雖頗及見前輩, 然其平生蹤跡多在田野, 則其見聞之間不能盡得事實, 宜必有之, 恐亦未可以此便謂非其所著也. 丹朱之云誠爲太過, 歐公此言嘗爲令狐父子文字繁簡而發, 初亦無大美惡, 但似一時語勢之適然, 不暇擇其擬倫之輕重耳. 故此言者雖未敢必其爲公之言, 而亦未可定其非公之言也. 此等數絛, 不足深論. 然偶因餘誨之及而幷講之, 使得皆蒙裁正, 則亦不爲無小補者.

 

여자약(呂子約)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구공(歐公)이 말한 ()를 배운 지 삼십 년이라는 말을 후학의 말이라고 의심하셨는데 이 말씀에 대해 깊은 의문이 생겨 분별하지 않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명공(明公)께서는 이 말의 어떤 점을 싫어하여 의심하시는지요? ()를 고원하고 현묘하여 배울 수 없다고 여기십니까? ‘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로 사람이 날마다 활용하는 당연한 이치가 사해(四海)구주(九州)의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걸어가야 할 길과 같기 때문이니, 노자와 불가에서 말하는 가 공허하고 적멸(寂滅)하여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것과는 다릅니다. ‘를 우원(迂遠)하고 소활(疎闊)하여 굳이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는 이 세상의 군신부자 관계와 모든 행동에 대해 정해진 밝은 법을 갖고 있으니 잠시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현이 이 세상에 나와 이론을 세우고 교훈을 남겨 그것을 밝혀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게 했으니, 그 글을 읽는 자들은 반드시 강론하고 연구하여 마음에 담고 몸으로 실천하고 사업에 효과를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사람의 직분을 다하여 천지의 사이에 설 수 있을 것이니, 비단 그 글을 음미하여 문장을 짓는 공부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子游)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다스리기 쉽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을 외자, 공자가 옳게 여기셨으니, 도를 배운다는 말이 어찌 근세 후학(後學)들의 말이겠습니까?

 

唯是所與子約書中疑學道三十年爲後學之言者, 深惑焉, 而尢以爲不可以不辨. 不審明公何所惡於斯言而疑之也? 以道爲高遠玄妙而不可學邪, 則道之得名, 正以人生日用當然之理, 猶四海九州百千萬人當行之路爾, 非若彿之所謂道者, 空虛寂滅而無與於人也. 以道爲迂遠疎闊而不必學耶, 則道之在天下, 君臣父子之間, 起居動息之際, 皆有一定之明法, 不可頃刻而暫發. 故聖賢有作, 立言垂訓以著明之, 巨細精租, 無所不備. 而讀其書者必當講明究索, 以存諸心,行諸身而見諸事業, 然後可以盡人之職而立乎天地之間 : 不但玩其文詞, 以爲綴緝纂組之工而已也. 子游誦夫子之言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 而夫子是之. 則學道云者, 豈近世後學之言哉?

 

만약 구공(歐公)은 도()를 배운 적이 없으니 이것으로 스스로를 이름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구공의 학문이 비록 도체(道體)에는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문자에 힘을 기울여 지류(支流)를 거슬러 올라가 성현의 뜻을 구했으므로 󰡔주역󰡕․󰡔시경󰡕․󰡔주례(周禮)󰡕․󰡔춘추󰡕에 대해 모두 반복하고 궁구하여 선유(先儒)들의 잘못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의 저서인 󰡔본론(本論)󰡕에서는 성선설을 미루어 밝혀 이단의 말을 종식시키고 부정한 말을 막은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는 당시에 대학자라고 불리면서도 허황한 소리를 숭상하고 요사스런 말을 신봉하던 자들보다는 훨씬 더 훌륭합니다. 그 외의 글들이 비록 문장을 가지고 재주부린 데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일에 따라 밝혀낸 것이 많았고 문장의 기풍은 폭넓고 깊이가 있으며 정밀하고 적절하니, 참으로 한문공(韓文公: 한유)이 말한 인의(仁義)로운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가 전혀 배우지 않았다고 하여 곧바로 연()()()()의 무리들처럼 여겨서는 안될 듯합니다. 만일 비록 일찍이 도()를 배우기는 했지만 스스로를 명명하여 뛰어난 인물로 자신을 표방했다는 혐의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선비가 되어 스스로 를 배웠다고 말하는 것은 농부가 스스로 밭 간다고 말하고 장사꾼이 스스로 물건 판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 말은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문공(韓文公)과 같은 분은 심지어 자기의 도는 공자맹가(孟軻)양웅(揚雄)이 전한 도라고 하였으니, 그 말의 겸손하지 못함이 더욱 심합니다. 후생(後生)의 말이라고 지적하여 의심해서야 되겠습니까?

 

若謂歐公未嘗學此而不當以此自名耶, 歐公之學雖於道體猶有欠闕, 然其用力於文字之間, 而泝其波流以求聖賢之意, 則於, , 周禮, 春秋皆嘗反復窮究, 以訂先儒之繆 : 本論之篇, 推明性善之說, 以爲息邪距詖之本, 其賢於當世之號爲宗工巨儒而不免於祖尙浮虛, 信惑妖妄者又遠甚. 其於史記善善惡惡, 六臣傳之屬, 又能深究國家所以廢興存亡之幾, 而爲天下後世深切著明之永鑒者, 固非一端. 其他文說, 雖或出於遊戱翰墨之餘, 然亦隨事多所發明, 而詞氣藹然, 寬平深厚, 精切的當, 韓公所謂仁義之人者. 恐亦未可謂其全不學道, 而直以, , , 之等期之也. 若謂雖嘗學之, 而不當自命以取高標揭己之嫌耶, 則爲士而自言其學道, 猶爲農而自言其服田, 爲賈而自言其通貸, 亦非所以爲夸. 韓公, 至乃自謂己之道乃夫子孟軻揚雄所傳之道, 則其言之不讓益甚矣, 又可指爲後生之語而疑之耶? 凡此又皆之所未諭者, 蓋嘗反復思之而竟不得其說.

 

승상은 사업과 문장으로 옛 고인이 행한 자취를 벗하여 세상을 논하는데, 범중엄과 구양수 사이에 본디 세상을 논하는 것은 달라도 사상이나 행동은 같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와 과거를 널리 보고 시비를 고찰하는데 이르러서는 또한 망령되이 글씨를 고쳐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구양수의 글을 모아서 편찬하고 수정하여 유통시키는데 힘을 쓴 것이 많았는데, 반드시 이런 일에서 대충대충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또 정도가 몰락하여 쇠잔하게 되고, 이치에 어긋난 말들이 바른 말을 막는 즈음에 나머지 논의에서 승상에게 언급할 것이 조금 있다면 그 경중 후박이 곧 나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생각이 이미 익숙해져서 대처하는 것 또한 이미 정교해졌으리라 여깁니다. 도리어 어리석은 저는 의심이 없을 수가 없으니, 이 때문에 묵묵히 도가 있는 곳에서 바름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학(僞學)의 기풍이 이미 심한데 그 말의 광망(狂妄)함을 자각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승상께서 용서하고 가르침을 주신다면, 저는 무척 다행스럽겠습니다.

 

恭惟明公以事業文章而論世尙友, 其於范歐之間固已異世而同轍矣. 至於博觀今音, 考訂是非, 又非肯妄下雌黃者. 且於六一之文, 收拾編彙, 讎正流通, 用力爲多, 其於此事必不草草. 况又當此正道湮微, 異言充塞之際, 餘論所及小有左右, 則其輕重厚薄便有所分, 竊計念之已熟而處之亦巳精矣. 之愚, 獨有未能無疑者, 是以不敢黙黙而不以求正於有道. 所恨僞學習氣已深, 不自覺其言之狂妄. 伏惟高明恕而敎之, 不勝千萬幸甚

 

 

유승상에게 보내는 별지 1 與留丞相別紙

 

 

해제이 글은 유승상(留丞相)에게 보낸 별지(別紙)인데 언제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서투른 사건 처리로 죄인들을 도망가게 한 죄를 용서해준 점을 다행으로 여기는 한편, 문인 양지(楊至)의 사건을 선처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양지(楊至)의 사연을 써서 보내주신 별지를 받고 보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전에 다른 논의를 내보여 승상에게 죄를 얻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껴주고 살펴주심을 입었습니다. 지금 또 주변국의 방어에 관한 문제를 서투르게 처리하여 이 죄인들을 도망가게 했으니, 죄를 얻음이 무거워서 결국 절교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뜻밖에 승상께서 버리지 않고 청을 받아들이고, 속내까지 꿰뚫어 보고 자세하게 깨우쳐 주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비록 저로 하여금 수를 써서 변론하게 한다하더라도 이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듣건대 주현(州縣)에서 받들어 행하는 사이에 관망함이 없지 않아서 죄수를 매질에 연계시키고, 횡행함이 무고한 자에게 미치는데도 감독의 엄격함을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니, 원근에서 전해들은 자들이 지나치게 의심하는 의논이 있습니다. 이것은 애초에 승상과 양지의 외가가 스스로 두터운 정분이 있어서 승상이 본래 그들로 하여금 차마 낭패가 여기에 이르지는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가르침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두려운 마음이 깊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이런 말을 듣지 못했을까 두려워 문득 다시 아룁니다. 삼가 살펴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伏蒙別紙垂諭楊至曲折, 不勝皇恐. 前此本以異議得罪於丞相, 幸蒙矜察. 今又失於周防, 有此疏脫, 意必已重得罪而遂見絶矣. 不謂丞相釆聽不遺, 洞見底蘊, 至於誨諭之詳, 雖使自爲辯數, 不過如此, 幸甚然聞州縣奉行之間不無觀望, 囚繫篳撻, 橫及無辜, 程督之嚴, 至今未解, 遠近傳聞, 過有疑論. 此殆未知丞相與其外家自有契分, 而仁心曠度本不忍使其狼狽至此也. 旣蒙鐫誨, 感懼之深. 尙恐未有以此聞于鈞聽者, 輒復禀白. 伏惟照察, 千萬幸甚

 

 

유승상에게 보내는 편지 2 與留丞相

 

 

해제이 글은 유승상에게 보낸 편지인데 언제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양지(楊至)의 사건을 관대하게 처결해 달라는 내용이다.

 

전에 양지(楊至)의 빼어난 재능에 대한 일을 편지에서 말씀하셨는데 경솔하게 답변을 했습니다. 이미 관대하고 자애롭게 용서를 해주셨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와 같이 지극히 공정하여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대인의 도량을 볼 수 있으니, 공경하고 감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듣건대 유사(有司)가 오히려 이전에 발송한 문서가 준엄하여 추격해서 잡는 일을 아직 그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지금 숨어서 머물러 있을 곳이 없다 하니, 긍휼히 여겨줘야 합니다. 만약 생각을 미루어 다시 소속 관원에게 한 마디 하여 그를 체포하는 것을 작파하라고 한다면, 그로 인해 상호 통보하게 해서 필부의 뜻을 원수 삼지 않는 성덕과 아량을 알게 한다면 이 사람은 끝내 내려주신 것을 받겠습니다. 저는 욕되게도 평소에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음을 알면서도 감히 다시 혐의를 피하지 못하고 사리에 어긋나게 해동함이 여기에 미쳤으니 아울러 널리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황공함을 사죄합니다.

 

前此蒙喩揚至秀才事, 率易綴禀. 似聞已荷寬慈許以容恕, 足見大人之度至公無我有如此者, 不勝敬服. 然聞有司尙以前日符移之峻追捕未已, 其人至今蔑伏, 無斫容寄, 有足矜者. 如蒙推念, 更得一言明喩所屬罷其捕逮, 仍俾互相關白, 使知盛德雅量不讎匹夫之意, 則此人終受賜矣. 辱知素厚, 不敢復避嫌疑而冒昧及此, 幷冀容察. 皇恐死罪

 

 

유승상에게 답함 3 答留丞相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유승상(留丞相)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준 󰡔시전(詩傳)󰡕을 유승상이 꼼꼼히 읽고 지적해 준 일을 감사해 하고 있다.

 

이통판(李通判)이 돌아와서 보내주신 편지를 꺼내주었는데 삼가 받아서 읽어보니 위로되고 다행스러움이 너무 깊습니다. 편지로 장황하게 되풀이하여 말씀하시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타일러 주셨는데, 또한 덕이 성대하고 예절이 공순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기를 즐기고 자기를 버리는 뜻을 어렵지 않게 여기시니, 대개 일개 평범한 선비에게는 쉽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감탄하여 공경하고 감격하여 얻은 것이 많습니다.

지난 번 우연히 하문(下問)을 받고 별생각 없이 글을 올려 그것으로 우선 한가롭게 지내시는 여가에 읽으시며 졸음이나 그치게 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날마다 일정한 과정을 정해놓고 마지막 편까지 직접 점검을 해주시니 참작하여 취사선택한 것이 상세하고 정밀하여 전문 명가(名家)도 미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주공(周公)이 폐백을 가지고 가서 만나고 폐백을 돌려주면서 만난 마음이고, 필공(畢公)이 능히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아니한 뜻이니, 그것이 바로 성현의 훌륭한 점으로서 근세의 여러 사람들로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제가 비록 평범하지만 여기에 힘을 쓴 지 오래 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하나 평생 다듬고 논설한 것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서 점검을 받은 일은 드물었는데 뜻하지 않게 늘그막에 명공(明公)을 만나게 되는군요. 다시 다른 글을 가지고 선생께 나아가 모두 보여 드리고 싶지만 저의 집에 사람이 없어 정서(精書)하기가 어렵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러한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만약 하나하나 모두 인증(印證)을 받을 수 있다면 저도 자신감이 생겨 장래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선생의 문하에 진작 들어가지 못하여 의심나는 점을 물어 도움을 청하는 것이 10년이나 늦은 것입니다. 명공(明公)께서도 아쉬운 점이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통판이 돌아가는 편에 삼가 편지를 올려 감사의 마음을 폅니다. 눈이 어두워 정성 들여 쓸 수 없으니 더욱 황공합니다. 아울러 불쌍히 살펴주십시오.

 

李通判, 出示所賜手敎, 拜領伏讀, 慰幸已深. 至於垂喩諄複勤懇, 則又竊仰德盛體恭, 樂取諸人, 不難舍己之意, 蓋有一介布衣之士所不易者. 歎慕感激所得多矣. 前此偶因垂問, 率易呈獻, 亦以姑備燕申餘暇遮眼止睡之須. 不謂乃蒙親賜點閱, 日有程課, 以及終篇 : 而斟酌取予詳審精切, 又有專門名家所不逮者. 周公執鷙還贄之心, 畢公克勤小物之意. 此所以爲聖賢之盛節, 而非近世諸公所及也. 雖凡陋, 然其用力於此不爲不久, 而歷選平生, 講磨論說, 其得此於人蓋鮮. 不意臨老乃有遇於明公也. 更有它書, 欲遂傾困倒廩以跪進於几下, 而私居乏人, 艱於繕寫, 少假歲月, 當遂此心. 儻得一一悉蒙印證, 則亦足以自信而無憾於方來矣. 願所不能無恨者, 猶以登門之晩, 而其質疑請益乃有十年之遲. 伏想明公於此亦不能不慨然其間也. 謹因李倅還便奏記敍謝. 目昏不得謹好, 尢以皇懼, 幷乞矜察.

 

 

증구보에게 보내는 편지 1 與曾裘父

 

 

해제이 글은 증구보(曾裘父)에게 보낸 편지인데 언제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을 구하는 방법에 관한 짤막한 내용을 담았다.

 

()을 구하는 방법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몸소 당신에게 확인해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는데, 어제 흠부(欽夫: 장식)가 당신을 떠나보내며 준 서문(序文)을 부쳐주니 그 설이 모두 적확하고 합당한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求仁之方, 竊意潛心久矣. 方恨未獲躬扣, 欽夫寄示送行序文, 其說似皆的當. 不審高明以爲如何?

 

증구보에게 보내는 편지 2 與曾裘父

 

 

해제이 글은 증구보(曾裘父)에게 보낸 편지인데 언제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논어󰡕의 내용과 장경부(張敬夫)위원리(魏元履)의 근황에 대해 말했다.

 

지난 번 󰡔노론(魯論)󰡕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성문(聖門)의 친절한 요지가 바로 이 편지 속에 있더군요. 학문에 대한 조예가 날로 깊이를 더해 가리라 생각은 드는데 한두 말씀 듣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경부(敬夫)에게 편지를 받으셨습니까? 근래 강론이 더욱 정밀하던데 그와도 서로 의심스런 부분을 강론한 적이 있으신지요? 위원리(魏元履)는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난 것이 특별하니,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사우(士友)들은 대부분 영광스럽게 여기지만 저는 두려운 마음이 드는군요. 당신의 생각도 바로 저와 같을 것이니 마땅히 경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向聞垂意魯論, 塾門親切指要正在此書, 想所造日以深矣, 恨未得聞一二也. 敬夫得書杏? 比來講論兀精密, 亦嘗相與講所疑否? 元履遇合非常, 未知所以稱塞. 士友蓋多榮之, 竊有懼焉. 想高懷正如此, 當有以警策之也.

 

 

증구보에게 보내는 편지 3 與曾裘父

 

 

해제이 글은 1168(건도 4, 무자, 39)에 증구보(曾裘父)에게 보낸 편지이다. 장경부가 지은 서재 명()을 보내고, 자신이 지은 󰡔숭안이공사기󰡕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겠다는 내용이다.

 

경부(敬夫)가 위원리(魏元履)를 위해서 서재의 명()을 지었는데 보신 적이 있는지요? 노파심에서 한 부를 보내드립니다. 그 말이 비록 간략하지만 󰡔대학󰡕의 전체 의미가 그 안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당신도 곁에 두고 볼만할 것입니다. 󰡔숭안이공사기(崇安二公祠記)󰡕는 제가 망령되이 지었는데 곧 가서 가르침을 구하겠습니다. (이 글은 이미 새겨버렸기 때문에) 교정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후세를 경계할 만합니다.

 

敬夫元履作齋銘, 嘗見之否? 謾納一本. 其言雖約, 大學始終之義具焉, 恐可寘左右也. 祟安二公祠記, 所妄作, 輒往求敎. 雖不及改, 尙警其後也.

 

 

황숙장 유지에게 답함 答黃叔張(維之)

 

 

해제이 글은 1188(순희 15, 무신, 59)에 황숙장(黃叔張)에게 답한 편지이다. 불교는 마음을 절대적인 준칙으로 삼지만, 유가는 천지자연의 객관적인 법칙으로 삼는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세 차례나 편지를 보내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성립명통(誠立明通)”에 대한 논의는 참으로 당신이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감히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책이 나온 뒤로 사색이 여기에 이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서명󰡕․󰡔태극도설󰡕의 여러 설도 또한 모두 수십 년의 공부가 쌓여서 한 글자도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 없습니다. 석씨(釋氏)는 마음에서 나오는 작용을 지극한 법칙으로 삼았으나, 지금 보면 천지 사이에는 저절로 바꿀 수 없는 일정한 이치가 있으니, 조그만 생각에도 조작이 끼어 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조그만 생각에도 잡스런 것이 끼어 들지 않도록 해서 자연히 앞에 성인과 뒤에 성인이 부절(符節)이 딱 들어맞는 것과 같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바야흐로 이것이 궁극의 경지입니다.

 

示及三書, 感感. 誠立誠通之論, 議如尊愉, 不敢多遜. 竊意自有此書, 無人與之思素至此. 西銘太極諸說亦皆積數十年之功, 無一字出私意. 釋氏以胸襟流出爲極則, 以今觀之, 天地之間自有一定不易之理, 要當見得不假毫髮意思安排, 不著毫髮意見夾雜, 自然先聖後聖如合符節, 方是究竟處也.

 

 

경직지 병에게 답함 答耿直之()

 

 

해제이 글은 1183(순희 10, 계묘, 54)에 경직지(耿直之)에게 답한 편지이다. 절동(浙東)학자들의 학풍을 비판하고, 공자와 안자가 의()()()()를 끊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되었을 강조하였다.

 

제가 궁벽한 고을에서 생장(生長)하다보니 젊은 시절 사우(師友)들에게서 들은 것이라고는 몸을 수양하고 이치를 궁구하며 정도를 지켜 천명(天命)을 기다린다는 내용에 불과합니다. 비록 힘써 행하지 않아서 처음에 먹은 마음에 부끄러운 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그것을 버리고 남을 따른 적은 없었습니다. 근래 절동(浙東)에 가서 사대부들과 어울리는 몇 달 사이에 들은 것들은 모두 작은 것을 버려 큰 일을 성취하고 구차하게 의기투합하는 논리들이라 속으로 매우 놀랐습니다. 그런데 오직 집사에게서만은 명실(名實)을 다스려 도()를 곧게 지켜 행하는 것이, 우뚝하여 비단 당세의 선비와 비교할만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한 번 보지도 못했으나 직무를 보는 사이에 마침 서로 수미(首尾)가 되어 약속하지 않아도 합치되는 점이 있었으니, 이에 비로소 전일에 마음으로 기대했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더욱 믿겠습니다. 지금 또 보내 주신 학관의 제자들과 강론한 내용을 보니, 어진 수령께서 반수(泮水)에 계시면서 행하신 교화의 성대함과 대업(大業)에 마음을 두어 체용(體用)이 원만하게 흐르는 신묘한 이치를 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더군요. 우매한 자를 일깨워 경계하시는 것이 깊고 간절하니, 되풀이해서 읽고는 기쁘고 다행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生長窮僻, 少日所聞於師友者, 不過脩身窮理, 守正俟命之說, 雖行之不力, 有愧夙心, 亦未嘗敢舍之而從人也. 頃歲人, 從士大夫游, 數月之間, 凡所聞者無非枉尺直尋, 苟容偸合之論, 心竊駭之. 而獨於執事者見其綜理名實, 直道而行, 卓然非當世之土也. 顧雖末及一見, 而職事之間適相首尾, 乃有不約而合者, 於是始復益信前日心期之不偶然也. 絃者又承示及所與學官弟子謂論之說, 不唯有以見賢侯在洋弦歌之盛, 而潛心大業, 體用圓融之妙, 所以警發眛陋者又爲深切. 三復欣幸, 不知所言.

 

그러나 지난번에 이 글에 대해 대략 토론하고 강구했는데 또한 선배들의 말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 문장의 뜻으로 구해 보니, 성인의 말은 간단하고 솔직하여 이러한 곡절이 있지 않은 듯했습니다. 공자와 안자가 성인이 되었던 것은 초연하여 조금도 의()()()()의 사사로운 것이 없는 것으로써 근본으로 삼은 연후에 사물의 변화에 응하여 다함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구설(舊說)에 근거하여 다시 의심을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비록 앞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으나 그 규모의 방대함과 체용의 온전함은 저들이 도달할 바가 아니며 저 또한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침착하게 반복해서 탐구하기를 기다렸다가 별도로 가르침을 구하겠습니다. 기타 논저도 또한 찾아 뵙고 질정하고자 합니다. 제 거처에 베껴 쓸 사람이 부족하니 나중 인편에 부치겠습니다. 지난해에 빈민을 구제한 뒤 낭패가 매우 심했는데, 그 사람이 이내 이와 같이 용서를 받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언급하신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스스로 편안한 마음을 지니지 못하게 만드는군요.

 

然頃於此書粗嘗討究, 亦見前輩之說有如此者. 因以文義求之, 竊疑聖言簡直, 未遽有此曲折, 孔顔之所以爲聖賢, 必有超然無一亳意, , , 我之私者以爲之本, 然後有以應事物之變而無窮. 以是止遽舊說, 不復致疑. 今睹來示, 雖若不異於前人, 而其規模之大, 體用之全, 則非彼所到, 之愚亦未及也. 更俟從容反復玩味, 別以求敎. 它所論著, 亦有欲就正者. 私居乏人抄寫, 後便寄呈也. 去歲救荒後時, 狼狽殊甚, 不謂其人乃復見恕如此. 來喩所及, 令人恐懼不自安耳.

 

 

설사룡 계선에게 답함 1 答薛士龍(季宣)

 

 

해제이 글은 1173(건도 9, 계사, 44)에 설사룡(薛士龍)에게 답한 편지이다. 설사룡이 주자에게 도()를 강론하여 교육하는 일을 담당케 한데 대해, 주자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몇 가지를 이유를 설명하고, 아울러 호학(湖學)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장점을 부활시켰으면 하는 기대감을 내보이고 있다.

 

제가 깊은 산골에 있으면서 훌륭하신 명성에 감복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작년에 선성(宣城)에서 돌아오는 임택지(林擇之)를 우연히 만나 선생의 말씀을 나누게 되었는데 모두 자신의 수양을 이루고 남까지도 이루게 해주는 큰 일이더군요. 이 일로 더욱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도 싶었지만 우환을 겪고 난 뒤라 고향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집사의 명성은 한층 밝아지고 덕행과 사업은 성대해져서 우리 둘이 가는 길이 서로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저의 마음을 이룰 수가 없다는 생각에 슬픔으로 크게 탄식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임확지(林擴之) 편에 멀리서 편지를 보내 주시니 말씀하신 뜻을 매우 잘 알겠습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나머지 마음에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 제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 두 가지 있어 말씀드리고자 하니 어르신께서는 살펴주십시오.

 

竊伏窮山, 講服盛名之日久矣. 去年邂逅林釋之歸自宣城, 又能道餘論一二, 皆成己成物之大致. 區區益願承敎於前, 顧以憂患之餘, 屛跡田里, 而執事名間方昭, 德業方起, 隱顯異趣, 私竊揣料, 未容遽遂鄙懷, 則亦悵然太息而已. 玆者林擴之之來, 乃知榮膺睿畚, 出試輔藩, 宣布之初, 譽處休洽, 深以爲慰. 又蒙不鄙, 遠貽書翰, 所以敎告甚悉. 擴之又以所聞相與推說, 皆平生所深欲聞者, 感幸之至, 不容於心. 然而三復來敎, 則有愚不敢當者二焉, 請陳其說而右者察之.

 

저는 어려서부터 우둔해서 하는 일마다 남만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선생 군자의 가르침을 옆에서 듣고 대략 학문에 뜻을 둘 줄은 알았지만 애써 구해도 그 방법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근 20여 년 동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며 아래에 있으면서 높은 곳을 엿보아 공허하고 신비로운 세계에 마음을 썼는데, 근래 곤()함을 당함으로 인해 뉘우치고서야 비로소 물러나 구두(句讀)와 글 뜻에서 해결책을 찾고,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서 신중했습니다. 그런데도 제대로 나아진 것이 없기에 앞으로는 뜻을 같이하는 한두 명의 벗들과 마음과 힘을 합쳐 그 속에 종사하면서 조금씩 쌓아가고 차근차근 올라가서 대략 의리의 실체를 알아 소인이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세월이 점차 흘러 갑자기 이렇게 늙어 버렸습니다. 시간과 힘이 부족한 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당대의 도()가 있는 군자에게 도움을 청해 빠르게 성과를 거둘 생각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사(執事)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모른 채 도리어 도를 강론하여 남을 가르치는 일로 제게 기대하시니, 이것이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自少愚鈍, 事事不能及人. 顧嘗側聞先生君子之餘敎, 粗知有志於學, 而求之不得其術, 蓋舍近求遠, 處下窺高, 馳心空妙之域者二十餘年. 比乃困而自悔, 始復退而求之於句讀文義之間, 謹之於視聽言動之際, 而亦未有聞也. 方將與同志一二友朋幷心合力以從事於其間, 庶幾銖積絲累, 分寸躋攀, 以幸其粗知理義之實, 不爲小人之歸, 而歲月侵尋, 齒髮遽如許矣. 懍然大懼日力之不足, 思得求助於當世有道之君子以速其進而未得也. 執事乃不知此, 而反以講道敎人之事期之, 之所以不敢當者一也.

 

성현(聖賢)이 진출하고 물러나는 의리에 대해서는 저도 대략 들었습니다. 그러나 재주와 지혜가 짧다는 것을 저 스스로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고, 또 배워 이룬 것이 없어 남과의 응대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십 수년 동안 날이 갈수록 더욱 기가 꺾이고 위축되어 다시는 현 시대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습니다. 비록 전에 모친을 모실 때에도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는 것이 시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의 부족한 것을 억지로 버티면서까지 세상에 나아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지금 외롭게 살아가는 인생으로서 전보다 더욱 몸과 정신이 시들해지고 게으름으로 인해 학업을 폐지하여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이제는 차마 다시 벼슬길에 나아갈 계획을 세워 불효의 죄를 거듭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 없는 빈 산에서 두문불출한 채 궁벽하고 적막한 것을 달게 견디면서 저의 뜻을 이루어 허물을 적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사(執事)께서는 또 이 점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도()를 행하여 시대를 구제하는 일로 제게 요구하시니, 이것이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지극하신 뜻에 감복하였으나 사례할 길이 없어 감히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니, 더욱 불쌍히 여겨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뒤로 만약 저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신다면 부디 경계하고 가르쳐 주어 덕()으로 들어가는 길에 미혹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집사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클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至於聖賢出處之義, 則亦略聞之矣. 顧以材智淺劣, 自知甚明, 而又學無所成, 不堪酬酢, 故自十數年來, 日益催縮, 不敢復有當世之念. 雖昨來奉親之日急於甘旨之奉, 猶不敢自彊其所不足以犯世患: 矧今孤露餘生, 形神凋喪, 瀨廢無用, 益甚於前, 誠不忍復爲彯纓結綬之計, 以重不孝之罪. 是以杜門空山, 甘忍窮寂, 以遂區區之志, 而庶幾或寡過焉. 執事又不知此, 而反以行道濟時之事責之, 所以不敢當者二也. 感服至意, 無以爲謝, 敢布腹心, 伏惟加憐察焉. 繼此儻未斥絶, 尙冀有以警誨之, 使不迷於人德之塗, 則執事之賜厚矣, 它非所敢望也.

 

호학(湖學)의 융성함이 동남 지방에서 으뜸이었으나 맥이 끊겨 폐해진 지 오래입니다. 희령(熙寧: 송나라 신종의 연호) 연간에 교관(敎官)을 설치한 뒤로 학자들이 다시 직접 스승을 선택할 수 없어 학교의 정사가 유명무실하게 되니 인재의 배출도 그 당시처럼 융성하지 못합니다. 지금 어진 태수(太守)께서 몸소 스승이 되셨으니 앞으로 변화가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일찍이 호안정(胡安定)의 글을 읽고 그의 학문을 살펴보니 장구(章句)를 암송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했더군요. 근세 학자들의 고명하게 자득한다는 논리로 따져 보면 그 수준이 매우 낮지만, 옛날의 기준으로 오늘날을 재 본다면 정도의 차이로 생기는 결과가 서로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의심했었는데 감히 하문한 말씀으로 인해 질문을 드리니 인편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보여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듣건대 경력(經曆) 사이에 일찍이 호학(湖學)의 규모와 제도를 취하여 태학에서 행했다고 하는데, 당시에 취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요? 옛날 수장고에서 구한다면 오히려 고찰할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서리(書吏)들의 기록을 얻어서 보내주신다면 또한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기에 찾아가 가르침을 청할 길이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이 어찌 만 가지 뿐이겠습니까? 멀리서 당신의 서재를 상상해보니 편지를 쓰면서 몹시 기다려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學之盛, 甲於東南, 而其湮廢亦已久矣. 蓋自熙寧設置敎官之後, 學者不復得自擇師, 是以學校之政名存實亡, 而人才之出不復如當日之盛. 今得賢太守身爲之師, 其必將有變矣. 然竊嘗讀安定之書, 考其所學, 蓋不出乎章句誦說之間. 以近歲學者高明自得之論校之, 其卑甚矣. 然以古準今, 則其虛實淳漓, 輕重厚薄之效, 其不相逮至還. 是以嘗竊疑之, 敢因垂間之及而請質焉. 因風見敎及此, 幸甚. 又聞慶曆間嘗取學規制行之太學, 不知當時所取果何事也? 求諸故府, 必尙有可考者. 得令書吏錄以見賜, 則又幸甚. 相望之遠, 無由造前請益, 所欲言者何啼萬端. 遙想郡齋之間, 伏紙不勝引領

 

 

설사룡에게 답함 2 答薛士龍

 

 

해제이 글은 1173(건도 9, 계사, 44)에 설사룡(薛士龍)에게 답한 편지이다. 호학(湖學)의 본말을 설명해준 데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호안정(胡安定)의 학문세계에 대해 토론해봤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저는 외지고 누추한 곳에서 은거하면서 다행히 다른 고통은 없는데 친구들이 죽어 분주하게 조문하느라 조금도 편안할 날이 없으니, 근황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이 밖에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편지로 곡진히 가르침을 주시니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뜻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는 가르침은 초학자가 감히 스스로 기약할 바 아닌데, 예우를 기다려 대응하는 것은 더욱 쇠약하고 비루한 제가 감히 생각해낼 가 아닙니다. 제가 품은 생각은 전에 이미 다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 제공(諸公)들이 끝내 살펴주지 않으신다면 공손하게 엄한 견책을 기다릴 뿐이니 다른 할 말은 없습니다. 깊이 사랑해준 마음을 받았으나 그 사이에 서로 이해하지 못한 점이 상당히 있기 때문에 감히 언급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것은 못됩니다.

 

屛居窮陋, 幸無他苦, 而涉春以來, 親友喪亡, 吊間奔走不得少安, 殊無好況. 此外無足言者. 誨諭諪複, 仰荷不鄙之意. 然無可不可之敎, 則非初學所敢自期, 而待禮而應者, 允非衰陋所敢萌意也. 區區之懷, 前言蓋已盡之矣. 萬一諸公終不察, 則不過恭俟嚴譴而已, 無它說也. 蒙愛念之深, 而其間頗有末相悉者, 故敢及之. 然不足爲外人道也.

 

말씀해 주신 호학(湖學)의 본말(本末)에 대해서는 감탄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호공(胡公)의 학문은 옛날의 이른바, ‘물 뿌리고 먼지 쓸며 맞이하고 대답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에서 얻은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더욱 타당하여 일깨워 주심이 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고명(高明)께서 자신의 수양을 이루고 남까지 이루게 해주는 요체는 여기에서 벗어난 적이 없지만 초연하게 홀로 터득한 광대(廣大)하고 정미(精微)한 경지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들어앉아 있는 저로서는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어 한갓 탄식만 할뿐입니다. 만약 저를 도외시하지 않고 때때로 소식을 전해 경계해 주신다면 실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편지는 도리어 심하게 상황을 바꾸어 말씀하시니 읽고는 부끄러움으로 땀이 흐르고 황송하여 어떻게 할지를 몰랐습니다. 부디 바라건대, 저를 불쌍히 여겨 이 편지 이후로는 안부와 생사의 일 외에 필요 없는 말은 빼버리고 곧바로 도의(道義)로 일깨우고 지도해 주십시오. 이것이 제가 고명(高明)께 바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어리석은 마음에 부끄럽거나 거리끼는 것 없이 모두 말씀드려 약석(藥石)의 가르침을 구할 것입니다. 당신은 포용하여 들어주실 수 있겠는지요?

 

垂諭學本末, 不勝感歎. 而所論胡公之學蓋得於古之所謂灑掃應對進退者, 允爲的當, 警發深矣. 竊意高明所以成己成物之要未嘗不在於此, 而廣大精微之蘊, 其所超然而獨得者, 又非言之所能諭也. 跧伏之蹤, 未由承敎於前, 徒切歎仰. 儻不棄外, 時得惠音以鞭策之, 實爲萬幸. 而來敎之云, 倒置已甚, 讀之愧汗踧踖, 不知所以自容. 萬望矜察. 自此書來, 存訪死生之外, 削去虛文, 直以道義啓告誘掖, 此眞區區所望於門下者. 鄙懷悾悾, 亦得無所慚憚而悉布之, 以求藥石之誨. 不蕃尊意能容而聽之否?

 

 

임겸지 광조에게 답함 1 答林謙之(光朝)

 

 

해제이 글은 1169(건도 5, 기축, 40)에 임겸지(林謙之)에게 답한 편지이다. 주자는 옛날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효제(孝悌)충신(忠信)장경(莊敬)지양(持養) 곧 하학(下學)을 근본으로 하여 성()과 천도(天道)의 이치를 인식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실학(實學)이며, 선종의 돈오(頓悟)에 기반을 둔 학문은 안으로는 자신을 속이고 밖으로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행위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번에 삼가 임금의 부름을 받들고 조정에 들어가시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안부를 여쭙지 못하여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정(黃亭)에 내리신 교첩(敎帖)을 받들고 삼가 집사가 가시는 길이 신()의 보살핌으로 편안하심을 알게 되니 더 할 나위 없이 감격스럽고 위안이 됩니다. 근래 이미 임금을 뵙고 소신을 말씀드려 반드시 도학(道學)의 요체를 밝히시고 현재의 문제를 절실하게 지적했으리라 생각되지만 들을 수 없어 유감이군요. 순서를 뛰어넘은 발탁과 특별한 은총은 집사에게 굳이 말할 것도 못되는 것 같습니다.

 

玆承祗召還朝, 不獲爲間以候行李. 伏奉黃亭所賜敎帖, 恭審執御在行神相, 起居萬福, 感慰之至. 比曰伏想已遂對揚, 從容啓沃, 必有以發明道學之要, 切中當世之病者, 恨未得聞. 至於不次之除, 非常之數, 則不足爲執事道也.

 

어리석은 저는 시대에 적합하지 않으니 저 자신에 대해 매우 잘 압니다. 때문에 제가 바라는 것은 힘써 농사를 지어 모친을 봉양하여 허물을 적게 하기를 구하는 것일 뿐, 이른바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본래 당대 현인군자들의 몫이니, 어찌 제가 감히 그것에 대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곡진한 가르침을 과분하게 받고 깊이 사랑해 줌을 입었으며 편지 끝의 간곡한 말씀은 더욱 절절했습니다. 수 일전에 이미 사록관을 청하는 글을 부쳤는데, 하명을 속히 듣지 못하게 되어 비록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했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문하에 가서 말씀을 올리고자 했으나, 감히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갑작스럽게 집사(執事)의 하문(下問)을 받았으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愚不適時, 自量甚審, 所願不過力田養親, 以求寡過而已. 所謂趨赴事功, 自當世賢人君子事, 所敢議哉? 過蒙諪譬, 荷愛之深, 書尾丁寧允爲切至. 屬數日前已申祠官之謂, 聞命不早, 雖欲奉敎而不可得矣. 久欲有請於門下, 而夫敢以進. 今輒因執事之間而一言之.

 

제가 들으니, 옛날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효제(孝悌)충신(忠信)장경(莊敬)지양(持養)으로 하학(下學)의 근본을 삼게 한 뒤에 널리 여러 이치를 보고서 가깝게 생각하고 세밀히 살펴 몸소 실천한 실제를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다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마리를 열고 요체를 알려 주는 것도 모두 간단 명료하여 애당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 극치에 이르러서는 학자가 종신토록 생각하고 힘써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몸소 행하여 묵묵히 아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夫子)의 문장은 들을 수 있지만 부자께서 성()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신 것은 들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성문(聖門)의 학문은 조용히 쌓아 가면서 함양하고 성취하는 것인데 그 깊이에 따라 실학(實學)이 아닌 것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렇지 않아서 이치에 밝지 못하면서 이미 상지(上智)와 생지(生知)의 수준으로 오만하게 자처하여 성현이 평소 학자들에게 지극히 친절하게 가리켜 보이선 덕()에 들어가는 문에 대해서는 으레 재주가 둔한 소자(小子)의 학문이라서 마음에 둘 것이 없다고 하면서 평소에 내세우는 말들은 모두 자공(子貢)이 말한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종 괴상하고 매우 특이한 말을 하여 서로를 높이는 데 힘쓰고, 심한 경우에는 큰길을 다니다가 뒤로 물러서서 눈을 깜박이고 눈썹을 올리는 등 선학(禪學)을 하는 자가 돈오(頓悟)를 한 것처럼 행동하는데 이는 안으로는 자신을 속이고 밖으로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풍조가 날로 더욱 방자하게 행해져 성현이 지성(至誠)으로 잘 인도하신 가르침을 도리어 허망하고 경박한 것으로 만들어 인의(仁義)의 길을 막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問之, 自昔聖賢敎人之法, 莫不使之以孝弟忠信, 莊敬持養爲下學之本, 而後博觀衆理, 近思密察, 因踐履之買以致其知. 其發端啓要, 又皆簡易明白, 初若無難解者. 而及其至也, 則有學者終身思勉而不能至焉. 蓋非思慮揣度之難, 而躬行黙契之不易. 故日夫子之文章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不可得而聞也.”夫聖門之學所以從容積累, 涵養成就, 隨其淺深, 無非賓學者, 其以此與. 今之學者則不然, 蓋未明一理而巳傲然自處以上智生知之流, 視聖賢平日指示學者人德之門至親切處例以爲鈍根小子之學, 無足留意. 其平居道說, 無非子貢所謂不可得而聞者, 往往務爲險怪愍絶之言以相高. 甚者至於周行却立, 瞬目揚眉, 內以自欺, 外以惑衆. 此風肆行, 日以益甚, 使聖賢至誠善誘之敎反爲荒幻險薄之資, 仁義充塞, 甚可懼也.

 

저는 보잘것없는 힘과 재주로 배워 이룬 것이 없어 한갓 근심으로 탄식만 하고 있으니 어찌해 볼 방도가 없습니다. 평소 후학에게 존경을 받는 어진 집사와 같은 분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바로 잡아 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말씀을 올렸으니, 집사께서 참으로 뜻이 있다면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앞으로는 노둔(魯鈍)한 저로서도 더 힘쓰고 노력하여 하풍(下風)에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겠습니다. 집사(執事)께서도 허락해 주시겠지요? 이에 삼가 들은 것을 말씀드려 앞서 보내 주신 편지에 답합니다. 나머지는 도를 위해 자중(自重)하시어 후학들의 바램에 위안이 되게 하십시오.

 

綿力薄材, 學無所至, 徒抱憂歎, 末如之何. 竊獨以爲非如執事之賢, 素爲後學折觀仰者, 不能有以正而救之, 故敢以爲請. 執事誠有意焉, 雖不敏, 且將勉策駑頓以佐下風之萬一, 不識執事亦許之否乎? 謹此布聞, 因謝先辱. 餘惟爲道自重, 以慰後學之望. 上狀不宣.

 

 

강원적 영에게 답함 1 答江元適()

 

 

해제이 글은 1164(융흥 2, 갑신, 35)에 강원적(江元適)에게 답한 편지이다. 젊어서 도를 찾아 들어가는 길을 몰라 헤매다가 스승 이동(李侗)을 뵙고 비로소 지향해야할 대도(大道)를 알게 되었음을 회고하고, 아울러 강원적이 무극재기(無極齋記)」․「사잠(士箴)」․「삼요서(三要書)따위의 글에서 의심난 구절을 질문한 데 대해, 조목조목 분석하여 답변한 내용이 들어있다.

 

고루한 후생이 깊고 궁벽한 곳에 살면서 당신을 직접 뵌 적이 없는데,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아드님을 통해 편지를 보내 도체(道體)를 밝히신 글 세 편을 주고 자상하게 안부를 물어주시니, 도리어 후진이 선진(先進)에게 예의를 받는 듯합니다. 저처럼 어리석고 불초한 사람이 당신에게 이들을 얻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절하고 받으니, 몸 둘 곳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물러나 서너 차례나 읽으면서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저는 어리석고 견문이 없어서 아직 학문의 깊은 곳을 엿보지는 못했지만, 당신이 이른바 인()을 구하는 단서를 알게 되어 높은 식견을 마음으로 즐겨서 자득에 깊게 나아갔음을 알 수가 있으니, 세상 유학자들의 습성은 아니었습니다.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孤陋晩生, 屛居深僻, 未嘗得親几杖之遊, 乃蒙不鄙, 使賢子遺之手書, 致發明道要之文三編, 加賜親札, 存問繾綣, 反若後進之禮於先進. 愚不肖, 不知所以得此於門下者. 拜受踧踖, 若無所容. 退而伏讀以思, 至于三四. 雖昏懵無聞, 未獲直闚所至之堂奧, 然竊有以識夫所謂求仁之端者, 而知其玩心高明, 深造自得, 非世懦之習也. 幸甚幸甚

 

저는 타고난 자질이 노둔(魯鈍)하여 어려서부터 암기하고 묻고 답하는 것이 남에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자못 자기 수양의 학문에 뜻을 둘 줄은 알았는데, 요체를 얻지 못하여 석씨(釋氏)와 노자(老子)10여 년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근래 도()가 있는 분을 직접 뵙고서야 비로소 제가 지향해야 할 대도(大道)를 알았지만, 재주와 자질이 불민한 관계로 지식이 장구(章句)에서 벗어나질 못하였습니다. 때때로 마음에 맞는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돌이켜 구해 보면 전연 자신이 서질 않더군요. 모친을 봉양하고 어른을 섬기며 집에 있으면서 교제하는 것들은 대개 허물을 줄이고자 한 것이었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전 초야에 있는 신하를 부르시는 임금의 명을 외람되게 받았는데 의리상 굳이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나아가서는 대답할 말이 없어 사우(師友)에게 들은 것으로 한두 가지 말씀드렸으니, 어찌 가슴속에 진실로 이러한 도가 있어 우리 임금에게 나아간 것이었겠습니까? 다만 큰 단서를 말하여 만 분에 일이나마 도움이 있기를 바라서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세상에 소문이 퍼져 다시 어르신의 귀를 그릇되게 하였으니, 편지를 읽고 부끄러운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러나 호의를 헛되이 받을 수가 없어 감히 보여 주신 글로 인하여 그 속에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대략 저의 생각을 펴서 어르신께 말씀 올렸으니, 바라건대 다시 가르침을 주십시오.

 

天資魯鈍, 自幼記問言語不能及人. 以先君子之餘誨, 頗知有意於爲己之學, 而未得其處, 蓋出人於釋老者十餘年. 近歲以來, 獲親有道, 始知所向之大方. 竟以才質不敏, 知識未離乎章句之間. 雖時若有會於心, 然反而求之, 殊未有以自信. 其所以奉親事長, 居室延交者, 蓋欲寡其過而未能也. 日者叢蒙收召, 草野之臣, 其義不敢固辭. 造朝之際, 無以待問, 輒以所聞於師友者一二陳之. 豈胸中誠有是道以進之吾君哉, 特欲發其大端, 冀萬一有助焉耳. 不謂流傳, 復誤長者之聽. 伏讀誨喩, 慚負不知所言. 然厚意不可虛辱, 敢因所示文編, 其間有不能無疑者, 略抒其愚, 以謂於左右, 伏惟幸復垂敎焉.

 

󰡔무극재기(無極齋記)󰡕에서 의리의 본원을 밝혀 정명(正名)을 잠시잠깐 사이에도 모두 담으시니, 견식이 밝고 탐색이 완숙하지 않으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 󰡔주역󰡕은 우선 그 기틀을 형상하고 󰡔시경󰡕․󰡔서경󰡕․󰡔예기󰡕․󰡔악경󰡕은 우선 그 쓰임을 나열한다고 말했으니, 저는 가만히 생각건대 우선[]”이라는 글자는 또한 그러하면서도 실제를 담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체로 󰡔주역󰡕이 그 기틀을 형상하고 󰡔시경󰡕․󰡔서경󰡕․󰡔예기󰡕․󰡔악경󰡕이 그 쓰임을 나열한다는 것은 모두 그 실제가 그러하면서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어찌 그러하면서도 실제가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방불(髣髴)”이란 말이 있고, “강명(强名)”이란 말이 있고, “가장(假狀)”이란 말이 있는데, 이 모두는 노자와 장자의 아직 분명히 나뉘지 않은 천지자연의 원기[溟涬鴻蒙]’의 설에 가깝습니다. 육경(六經)으로써 󰡔논어󰡕󰡔맹자󰡕를 고찰한다면 성인의 말은 모두 성실하고 실제적이면서 정밀하고 명석하며, 평이하면서 심오하여 이와 같지는 않은 듯합니다. 예악(禮樂)정사(政事)와 전모(典謨)훈고(訓誥)는 모두 이 무극재의 토저(土苴: 정신)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토저라는 말은 또한 장자(莊子)에서 나온 것으로 식자들이 이미 논의했습니다. 지금 그 말을 근본으로 해서 옳은 설로 삼는다면 이 말은 정밀하고 조잡하고 안과 밖의 격차가 있게 되어 이것은 온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노자와 석가여! 조물주가 바탕을 본보기로 보인 태초에 부친다라는 말이 있는데, 말의 뜻이 은미하고 심오하여 또한 이해하지 못할 내용입니다. 서백(西伯)은 아무 것도 모른다 하고, 공자는 속셈도 없고 아집도 없었으며, 건곤(乾坤)이 무너지면 변화를 볼 수 없고 변화를 볼 수 없으면 건곤이 거의 종식되기도 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저는 가만히 생각건대 시인이 문왕(文王)을 칭송하여 비록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반드시 어어 말하기를 상제의 법을 순순히 따른다고 말했고, 공자 문하가 공자를 칭하여 비록 속셈도 없고 아집도 없다라고 말했지만 훗날 그 전수한 뜻을 얻은 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네 가지를 단절한 것 외에 반드시 그곳에 종사함이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체용(體用)이 서로 순환해서 치우치고 막힌 바가 없으니, 이치가 진실로 그런 것입니다. 󰡔대전󰡕에서 이른바 변화를 볼 수 없으면 건곤이 종식된다라고 하는 것은 건곤이고 곧 변화요 변화가 곧 건곤임을 밝히는 것이니, 건곤이 때가 없이 무너지면 변화는 때가 없이 종식될 뿐입니다. 아마도 인용한 마지막 편의 뜻과 같지 않다면, 곧 노씨(老氏)가 사물이 없는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말과 유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중용󰡕의 끝에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라고 말한 것은 곧 하늘이 싣고 있다는 말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니, 소리와 냄새가 비록 없다하더라도 하늘이 싣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 지금 말한 것과 같이 건곤과 더불어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아마도 도의 본체에 해로움이 있을 것이니, 스스로 인()의 단서를 구하는 자가 미루어 간다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無極齋記發明義理之本原, 正名統實於毫釐幾忽之際, 非見之明, 玩之熟, 詎能及此? 然其間有曰姑象其機, , , , 姑陳其用”, 竊謂, 且然而非實之辭也. 之象其機, , , , 之陳其用, 皆其實然而不可易者, 豈且然而非實之云乎? 又有日髣髴”, 强名”, 假狀”, 凡此皆近乎老莊溟滓鴻蒙之說. 以六經語孟考之, 凡聖人之言皆慤實而精明, 平易而淵奧, 似或不如是也. 又有日禮樂政事, 典謨訓誥, 皆斯齋之土苴耳.”.土苴之言, 亦出於莊周, 識者固已議之. 今祖其言以爲是說, 則是道有精粗內外之隔, 此恐未安. 又曰, 付諸大鈞範質之初”, 語意隱奧, 亦所未喩. 又日西伯不織不知, 仲尼壤意毋我, 玆蓋乾坤毁無以見易 : 易不可見, 乾坤或幾乎息矣.”竊謂詩人之稱文王, 雖曰不識不知”, 然必繼之曰順帝之則”, 門之稱夫子, 雖曰毋意毋我”, 然後之得其傳者語之, 必日絶四之外, 必有事焉.”蓋體用相循, 無所偏滯, 理固然也. 大傳所謂易不可見則乾坤息者, 乃所以明乾坤卽易, 易卽乾坤, 乾坤無時而毁, 則易無時而息爾, 恐非如所引終篇之意, 乃類於老氏復歸於無物之云也. 若夫中庸之終所謂無聲無臭”, 乃本於上夫之載而言, 則聲臭雖無, 而上天之載自頰, 非若今之所云幷與乾坤而無之也. 此恐於道體有害, 自所謂求仁之端者推之, 則可見矣.

 

󰡔사잠(士箴)󰡕의 본말은 잘 갖추어 있는데 하늘과 인간을 설하여 그 나머지를 관통시키고 인()의 본체를 드러냄이 매우 절실했습니다. 󰡔삼요서(三要書)󰡕는 하늘의 이치를 미루어서 인간사에다 드러냈는데, 거기서 본체가 서지 않으면 한갓 용단만 믿고 행동하여 하루아침에 지력(智力)이 궁하고 힘이 꺾이게 되니 나중을 좋게 하는 계책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말하니, 금일의 병통을 절실하게 꼬집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체의 중심이 성실한 자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 사이에서 실행하여 사방으로 멀리까지 확장한다고 말했는데, 삼공(三公)의 궐석을 잘 보충할 만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모두 제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일찍이 듣건대 성인의 학문이 노자석가와 다른 것은 정밀하고 거칠고 숨고 드러나는 사이에 본체와 작용이 혼연하여 크게 알맞고 지극히 바른 법칙이 아닌 것이 없어서 치우치고 기울고 지나치고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자는 지혜가 비록 지극히 고명(高明)하더라도 언행에서 드러난 것은 중용(中庸)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고명과 중용은 실로 다른 본체가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 도가 밝지 않으니 현명한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차이는 아주 작은데 어그러져서 동떨어진다라고 했는데, 성인의 간절한 뜻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릇되고 망령된 말은 모두 중()을 몰라서이겠지요? 바로 당신에게 가르침을 구하여 저의 깨닫지 못한 것을 열기를 바랬기 때문에 경솔하게 말하여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지 않으면 깨우침을 주실 수 없으리라 여겼을 뿐입니다. 오는 인편을 통해 아낌없이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이는 참으로 바라고 원하는 바이지만 감히 바라지는 못하겠습니다.

 

士箴本末該備, 說天人貫通其餘, 指示仁體極其親切. 三要書推天理而見諸人事, 其日體不立而徒侍勇斷以有爲, 一旦智窮力屈, 善後之謀素矣”, 可謂切中今曰之病. 又曰體中心之誠實者, 達於禮樂刑政之間, 而加之四方萬里之遠”, 可謂善補袞職之闕, 皆非淺陋所及也. 竊嘗聞之, 聖人之學所以異乎老釋之徒者, 以其緖組隱顯體用揮然, 莫非大中至正之矩, 而無偏倚過不及之羞. 是以君子雖離極乎高明, 而見於言行者未嘗不道乎中庸. 非放使之然, 高明, 中庸實無異體故也. 故日道之不行也, 智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賢者過之, 不肖考不及也.”又日差之毫釐, 鏐以千里.”聖人丁寧之意, 亦可見矣. 凡此謬妄之言, 皆不知其中否? 正欲求敎於左右以啓其未悟, 故率意言之, 無復忌憚. 蓋以爲不如是不足以來警切之誨爾. 因來不吝垂敎, 實所幸願, 而非敢望也.

 

 

강원적에게 답함 2 答江元適

 

 

해제이 글은 1164(융흥 2, 갑신, 35)에 강원적(江元適)에게 답한 편지이다. 주자는 이 편지에서 공자문하의 학문은 하학(下學)의 순서가 격물(格物)에서 시작하여 치지(致知)에 이르고,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시비를 가리고 가부를 살피며, ()를 정밀히 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 쓰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규정하고, 이 중에서 정의(精義)’의 개념을 정밀히 분석하고 있다.

 

별지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넓고 커서 한계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평소 사우(師友)에게 들은 것으로 징험해 보니 비록 그 대의와 규모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지만 덕에 나아가고 대업을 닦는 절차와 완급과 선후를 말한 것은 더러 같지 않더군요. 제가 듣기로는 천하의 사물은 하나도 천리(天理)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문하의 학문은 하학(下學)의 순서가 격물(格物)에서 시작하여 치지(致知)에 이르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시비를 가리고 가부를 살피니,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의()를 정밀히 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 쓰임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안에 곡절이 세밀하게 갖추어진 것은 각각 순서가 있지만 하나의 이치로 관통하여 모든 시공간에 다 존재하니, 형이상을 말한다 하여 형이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지엽적인 부분을 말한다 하여 근원적인 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여유 있는 마음으로 잠심하여 충분히 양을 채워서 자득해야만 이르게 될 것이니, 진실로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정해 놓고 느슨히 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빨리 진보하고자 하여 서둘러서도 안됩니다. 초목에 비유하면 이는 마치 싹이 트고 생장하는 단계를 지나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때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뽑아 올려서 자라는 것을 도우려 한다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보내 주신 편지에서, “시대를 상심하고 풍속을 애통하게 여겨 자신에게 돌이키는 것을 서두르고, 또 사물이 모이고 유통하는 요지를 알아 그것으로 자신이 설자리를 만들고자 한다고 하신 것과는 전체적인 뜻이 같지 않은 듯하군요. 그러다 보니 앞뒤로 반복하신 말씀이 모순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지금은 우선 그 대강을 논하여 가르침을 구하는 항목으로 삼으니, 그 외에 자세한 내용은 직접 뵙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別紙所喩汪洋博大, 不可涯涘, 然竊以平生所聞於師友者驗之, 雖其大致規模不能有異, 至其所以語夫進修節序之緩急先後者, 則或不同矣. 之所聞, 以爲天下之物無一物不具夫理, 是以聖門之學下學之序始於格物以致其知. 不離乎日用事物之間, 別其是非, 審其可否, 由是精義人神, 以致其用. 其間曲折纖悉, 各有次序, 而一以貫通, 無分段, 無時節, 無方所. 以爲精也而不離乎粗, 以爲末也而不離乎本, 必也優游潛玩, 饜飫而自得之, 然後爲至. 固不可自畫而緩, 亦不可以欲速而急. 譬如草木, 自萌芽生長以至於枝葉華實, 不待其日至之時而揠焉以助之長, 豈不無益而反害之哉? 凡此與來敎所謂傷時痛俗, 急於自反, 且欲會通其旨要, 以爲駐足之地者, 其本末指意似若不同. 故前後反復之言, 率多違異. 今姑論其大槪, 以爲求敎之目, 其他曲折, 則非得面承不能究也.

 

정의(精義)’ 두 글자는 어른들에게 들은 것인데 이른바 ()’자는 마땅함[]을 말했을 뿐입니다. ()에는 마땅함과 마땅하지 않음이 있고, ()에는 가함과 불가함이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 처리하되 각각 정해진 분수가 있어서 바뀔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이른바 의()입니다. ‘정의는 이것을 정밀히 할뿐입니다. 이른바 ()’이란 살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살피기를 지극히 하여 신의 경지에 들어간다면, 사물의 마땅한 바를 세세한 것 사이에서 다 알지 않음이 없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게 됩니다. 이는 쓰임을 이루어 쓰임이 이익이 되지 않음이 없는 이유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은 명칭과 언어 사이에서 약간 의심할만한 것이 있는 듯합니다. 비록 큰 뜻이 매인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은 곧 학자들이 단서를 잡아 착수하는 곳이니 소홀히 할 수 없을 듯하여 다시 개진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精義二字, 聞諸長者, 所謂義者, 宜而已矣. 物之有宜有不宜, 事之有可有不可. 吾心處之, 知其各有定分而不可易, 所謂義也. 精義者, 精諸此而已矣. 所謂精云者, 猶日察之云爾. 精之之至而人於神, 則於事物所宜, 毫釐委曲之間無所不悉, 有不可容言之妙矣. 此所以致用而用無不利也. 來敎之云似於名言之間小有可疑, 雖非大指所繫, 然此乃學者發端下手處, 恐不可略, 故復陳之. 不蕃高明以爲如何?

 

 

강원적에게 답함 3 答江元適

 

 

해제이 글은 1164(융흥 2, 갑신, 35)에 강원적(江元適)에게 답한 편지이다. 주로 인()을 구하는 방법과 정의(精義)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유가의 각종 경전과 성리서(性理書)를 원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제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천명(天命)의 성()은 항상 행해지고 작용하여 일상생활에 드러나는데 한 순간도 그렇지 않을 때가 없고 하나의 사물도 본체로 삼지 않음이 없으니, 그 큰 단서의 전체가 이른바 인()이고, 그 사이에 사물마다 각각 자연적인 구분이 있어 사방과 사유(四維: 사방의 사이)와 상하의 자리가 정해져서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이 조금도 어긋날 수 없는 것이 이른바 의()입니다. 사람의 도를 세우는 데에는 이 두 가지에 불과하니 이것은 애당초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이 인을 구하고 의를 정밀히 함에 있어서도 서로 체용(體用)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을 구하는 것은 자기의 사욕을 제거하여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것이니, 애당초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를 정밀히 하는 것은 시비를 가리고 가부를 구별하는 것이니 한 순간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든 천리와 인심의 체용(體用) 아닌 것이 없으니 인과 의를 다르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맹자는 제나라 선왕(宣王)에게 저울로 달아봐야 무게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자로 재어봐야 길이를 정확히 아는 것이니, 사물이 모두 그렇지만 그 중에 마음이 가장 심합니다. 왕께서는 헤아리소서라고 고하였습니다. ! 이것은 인()을 구하는 방법이지만 의()를 정밀히 하는 근본이 여기에 있으니 맹자는 말의 요체를 알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嘗謂天命之性流行發用, 見於日用之間, 無一息之不然, 無一物之不體, 其大端全體, 卽所謂仁. 而於其間事事物物莫不各有自然之分, 如方維上下定位不易, 毫釐之間不可羞繆, 卽所謂義. 立人之道不過二者, 而二者則初未嘗相離也. 是以學者求仁精義, 亦未嘗不相爲用. 其求仁也, 克去己私以復天理, 初不外乎日用之間. 其精義也, 辨是非別可否, 亦不離乎一念之際. 蓋無適而非天理人心體用之間, 未可以差殊觀也. 孟子齊王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王請度之. 嗚呼, 此求仁之方也, 而精義之本在焉, 孟子其可謂知言之要矣.

 

그런데 지금 당신은 자신에게 돌이켜 스스로 이치를 깨닫고 천리의 진성(眞性)을 보존하여 본성의 체()에 부합한다는 것을 가지고 자신의 학문으로 명명하시니, 이는 진실로 인을 구하는 데 뜻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의를 정밀히 한다는 말을 도의 정밀한 체에 대해서는 말했지만, 학자들이 힘을 쓰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하고, 시비를 가리고 가부를 구별한다는 것을 빈말로 보아 실용성을 갖추지 않아 간이(簡易)한 이치에 해가 된다고 하셨으니, 제 생각에는 지당한 논리라고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근래에 의를 정밀히 한다는 말은 󰡔정몽(正蒙)󰡕보다 자세한 것이 없습니다. 오봉(五峯) 호선생(胡先生)()을 생활화하는 것이 의()를 정밀히 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했으니, 이 말이 더욱 정밀하고 간단하여 깊이 음미할만합니다.

 

今執事以反身自認存眞合體者自名其學, 信有意於求仁矣. 而必以精義之云爲語道之精體, 而無與乎學者之用力, 又以辨是非, 別可杏爲空言, 不充實用而有害乎簡易之理, 恐其未得爲至當之論也. 蓋日道之精體, 不足以名之 : “强名, 則義之爲名又無所當. 此蓋原於不知義之所以爲義, 是以旣失其名, 因昧其實, 於是乎有空言實用之說. 此正告子義外之蔽也. 旣不知義, 則夫所謂仁者亦豈能盡得其全體大用之實哉? 近世爲精義之說, 莫群於正蒙之書, 五峰胡先生, , 仁仲. 亦曰居敬所以精義也.”此言尢精切簡當, 深可玩味.

 

혹여 당신이 그렇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시험 삼아 곧장 문장의 의미로 고찰해 보십시오. “정의입신(精義入神)”은 바로 이용안신(利用安身)”과 대구가 되니, “의리를 정밀하게 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다라는 말은 쓰임을 이용해서 그 몸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양자(揚子)의 이른바 정밀하고 정밀하게 한다는 말은 글자를 사용함이 바로 이것과 같으니, 이는 곧 학자가 힘을 써야 할 곳입니다. 만약 정의두 글자가 단지 도체(道體)라고 말한다면 그 아래 다시 입신이라는 두 글자가 있으니, 어찌 도체의 위에 또 이른바 신이라는 것을 두어 도를 통해 신묘함으로 들어간 것이겠습니까? 이것으로 말한다면 명확히 결단할 만합니다.

 

恐執事未以爲然, 則試直以文義考之. “精義人神”, 正與利用安身爲對. 其日精此義而人於神”, 猶日利其用而安其身. 揚子所謂精而精之”, 用字正與此同, 乃學者用功之地也. 若謂精義二字只是道體, 則其下復有人神二字, 豈道體之上又有所謂神者, 而自道以人神乎? 以此言之, 斷可決矣.

 

그러나 이른바 자신에게 돌이켜 스스로 이치를 깨닫고 천리의 진성(眞性)을 보존하여 본성의 체에 부합한다고 하신 말씀을 공자(孔子)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간다"와 맹자의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말로 징험해 보면 너무 서둘다가 도리어 도()와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하늘과 사람은 애당초 간격이 없는데 사람이 사의(私意)로 스스로 장애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공자와 맹자가 사람을 가르친 목적은 사욕을 완전히 이기면 천리는 회복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저절로 회복되는 것이지만, 생활하는 데 힘을 쓰는 것은 정연하게 순서가 있으므로 차근차근 성실히 하면서 올라서거나 단계를 건너뛰지 않으면 때가 이르렀을 때 확연히 관통하여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굳이 깨달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절로 합치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옛사람의 하학(下學)의 순서에 대해서는 남의 조종을 받는 나무인형에 가깝다고 하여 싫어하고, 마침내 지름길로 빠르게 나가고자 하여 그것을 간이(簡易)하다고 여겨서 도리어 공자나 맹자가 분명한 종지를 남긴 적이 없다고까지 합니다. 이는 스스로 깨달은 뒤에 부합하려는 것이 마치 싹을 뽑아 올려 자라는 것을 조장하는 행위와 같은 것임을 전연 모르는 것이니 간이하지 않고 자기의 의지가 없음이 또한 너무도 큽니다. 저는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하나의 일과 하나의 사물이 천진(天眞)과 본체 아닌 것이 없고 공자나 맹자의 말이 한 글자 한 구절이 분명한 종지가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나는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또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말했으며,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부자의 문장에 대해서는 들을 수 있지만 부자가 성()과 천도(天道)에 대해 말한 것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하였으니, 그 어찌 평상시의 말과 행동 외에 또 다시 이른바 분명한 종지가 있겠습니까?

 

抑所謂反身自認, 存眞合體者, 孔子克己復禮”,孟子勿忘勿助之說驗之, 則亦未免失之急迫, 而反與道爲二. 大抵天人初無間隔, 而人以私意自爲障礙, 孔孟敎人, 使之克盡己私, 卽天理不期復而自復. 惟曰用之間所以用力循循有序, 不凌不蠟, 則至於曰至之時, 廓然貫通, 天人之際不待認而合矣. 今於古人所以下學之序則以爲近於愧儡而鄙厭之, 遂欲由徑而捷出, 以爲簡易, 反謂孔孟未嘗有分明指訣, 殊不知認而後合, 揠苗助長, 其不簡易而爲愧儡亦已大矣. 竊以爲日用之間無一事一物不是夫眞本體, 孔孟之言無一字一句不是分明指訣. 孔子吾無隱乎爾”, 又曰天何言哉”, 子貢: “夫子之文章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夫道不可得而聞也.” 夫豈平日雅言常行之外, 而復有所謂分明措訣者哉?

 

이 밖에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직 많지만 그 대강의 조목은 여기에 갖추었습니다. 집사께서는 가르치고 깨우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 만날 기약이 있지 못함을 생각하여 오래 비워두고 크게 주지 못하니 이 때문에 우매함을 무릅쓰고 어리석은 제 마음을 다 비워냈습니다. 저의 미치고 망령된 언행을 용서하시고 조금이나마 살펴보신 뒤에 한마디를 적어보내 옳고 그른지를 보여주시기를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겠습니다. 의심난 바가 있으면 다시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此外抵牾尙多, 然其大槪節目具於是矣. 以執事敎誨不倦, 念未有承晤之期, 不敢久虛大賜, 是以冒味罄竭其愚. 伏惟怒其狂妄, 少賜覽觀, 還以一言, 示及可否, 虛心以竢. 如有所疑, 不敢不以復也.

 

 

첨체인 의지에게 답함 答簷體仁(儀之)

 

 

해제이 글은 첨체인(詹體仁)에게 답한 편지인데 언제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론과 실천이 괴리를 보인 당시 일반적 학풍을 개탄하고, 글을 볼 때는 신중한 해석을, 몸을 수양할 때에는 법도()를 따르는 것을 강조했다.

 

상중(湘中) 학자들의 병통은 진실로 편지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도 대체로 이와 같으니,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다만 실천만을 말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는 힘쓰지 않으니, 이것 역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장흠부(張欽夫)가 예전에 그 한 부류의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나섰으나 그 논설이 지나치게 비약적이어서 이단의 학문으로 흐르는 폐단을 열었었는데, 지금 고명(高明)의 도움으로 이 폐단을 구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문을 하는 것은 바로 자기 분수에 맞게 하는 것인데 고상한 품격이 있는 사람을 보기만 하면 곧 실천에 힘쓰지 않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바로 자신에게 돌이켜 학문에 착수하여 글을 볼 때는 해석을 신중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몸을 수양할 때에는 법도()를 따르는 것을 요체로 삼아 많은 허망한 말들을 없애야 평온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中學者之病誠如來敎, 然今時學者大抵亦多如此. 其言而不行者固失之, 又有一鍾只銳踐履而不務窮理, 亦非小病. 欽夫往時蓋謂救此一種人, 故其說有太快處, 以啓流傳之弊. 今日正賴高明有以救之也. 爲學是分內事, 纔見高自標致, 便是不務實了, 更說甚底? 今日正當反躬下學, 讀書則以謹訓銳爲先, 脩身則以循規矩爲要, 除却許多懸空閑說, 庶幾平穩耳. 不審尊意以爲如何?

 

 

양정수 만리에게 답함 答楊庭秀(萬里)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양정수(楊庭秀)에게 답한 편지이다. 비장의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양만리에게 시론(時論)이 분분한 시절에 지나친 여유나 은둔하려는 생각을 품지 말고 여인동우(與人同憂)’하는 삶을 살기를 희망했다.

 

정제(程弟)가 당신의 편지를 가져와 보여 주었는데 마치 뵙고 담소하는 듯하였습니다. 속세를 벗어나 있으면서 혼탁한 세상사로 초연한 가슴을 구속시키지 않는 것을 보니, 되풀이해서 읽으며 감탄과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비장(脾臟)의 통증으로 뱃속이 뒤틀리고 생각이 고적(孤寂)하였는데, 이 편지를 받고는 감히 답장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력(自力)으로 글을 올리느라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안부만 겨우 물을 뿐 다른 것들은 모두 여쭈어 볼 겨를이 없군요. 시론(時論)이 분분하여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의 청렴한 덕과 고상한 명망을 조정과 재야에서는 진심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생활하시는 중에 때로 자중하시고, 다시는 하늘을 즐거워하고 천명(天命)을 아는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세상의 근심을 나 몰라라 하시며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지 말고 은둔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으신다면, 저로서도 오히려 이 세상에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程弟轉示所惠書敎, 如奉談笑, 仰見放懷事外, 不以塵垢粃糠累其胸次之超然者, 三復歎羨不能已巳. 數日偶苦脾疾, 心腹撓悶, 意緖無聊. 値此便風, 不敢不附報. 自力布此, 僅能間何如, 他皆未暇及也. 時論紛紛, 未有底止. 契丈淸德雅望朝野屬心, 切冀眠食之間以時自重, 更能不以樂天知命之樂而忘與人同憂之憂, 毋過於優游, 毋決於遁思, 則區區者猶有望於斯世也.

 

 

이계장 벽에게 답함 1 答李季章()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진, 67)에 이계장(李季章)에게 답한 편지이다. 아버지 주송(朱松)의 척화 차자(箚子)를 국사(國史)에 실어줄 것을 요청하고, 효종(孝宗)의 대통 문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였다.

 

자상하게 쓰인 두 통의 편지를 보니 모두 훌쩍 멀리 떠나시려는 뜻이 있던데 언제쯤 이 계획을 결정하셨습니까? 저는 사록관(祠祿官)을 간곡하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니 그저 성상(聖上)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릴뿐입니다. 이미 옛 벼슬에 돌아갔으니 다시 사양할 체면이 없고, 외롭고 위태로운 처지를 비록 보장할 수 없지만 우선 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편지에서 소흥(紹興) 연간에 상주한 선친의 문자에 대해 물어주셨는데, 유고 중에 차자(箚子) 3편이 아마도 그것인 것 같습니다. 지금 이것을 바치니 필삭(筆削)하시는 중에 만약 국사(國史)에 실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화의(和議)를 다투던 시기에 선친은 호덕휘(胡德輝)범백달(范伯達) 등 여러 사람들과 같이 그 글에 들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사원(史院)의 동료들입니다. 그 당시에 이러한 의논이 국사에 실려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위원리(魏元履)가 찬집한 󰡔무오당의(戊午讜議)󰡕는 매우 자세하던데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관중(館中)에 없다면 건령(建寧)에 연락하여 초록(抄錄)해서 올려 보내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兩書縷縷, 皆有飄然遠引之意, 不審果以何日決此計耶? 懇祠得請, 深荷上恩. 旣還舊官, 無復可辭之誼. 孤危之跡雖未可保, 然姑無愧於吾心可也. 承間及先人紹興中文字, 遺稿中箚子第三篇, 疑卽此奏. 豫章所刊集中有之, 今以納呈, 已加籤帖於其上矣. 筆削之際, 儻得附見, 千萬幸甚. 諸公爭和議時, 先人與胡德輝范伯達諸諸公同人文字, 皆史院同察也. 當時此一宗議論不知有無登載. 魏元履所集戊午讜議一書甚詳, 亦嘗見之否耶? 如館中未有, 得行下建寧抄錄上送, 亦一事也.

 

경원(慶遠)의 행렬이 이미 영릉(零陵)에 도착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또 그가 태연하게 스스로 처한다고 들으니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 곧 대면하지 않으셨는지요? 지난해에 진군거(陳君擧)와 더불어 헤아려 생각해서 효종(孝宗)이 대통을 잇는 하나의 일을 끄집어내었습니다. 당시 논의에 참여했던 신하 누인량(婁寅亮), ()() 두 재상, 악후(岳侯), 범백달(范伯達), 진노공(陳魯公) 등 모두는 포상 기록을 두지 않으니, 아마도 당시에 일찍이 논의했던 사람을 묻고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이리저리 맞추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慶遠計程已到零陵久矣, 又聞其自處泰然, 亦不易也. 但未知便得一向安坐否耳. 前年與陳君擧商量, 拈出孝宗人繼大統一事. 當時議臣如婁寅亮, , 二相, 岳侯范伯達 陳魯公皆未有褒錄, 恐可更詢訪當時曾有議論之人, 幷與拈出也.

 

 

이계장에게 답함 2 答李季章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진, 67)에 이계장(李季章)에게 답한 편지이다. 아버지 주송(朱松)의 주소(奏疏)를 국사에 넣어준 것을 감사하고, 황문숙(黃文叔)지리목도(地理木圖)한 부를 부쳐주기를 간청했다.

 

지난번 편지를 통해 선친의 주소(奏疏)에 대해 이미 첨삭(添削)을 해주셨는데 사씨(史氏) 글의 끝 부분을 덧붙여주시니 매우 다행입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생각해보니, 선친이 어려서 독서한 것은 곧 가의(賈誼)와 육지(陸贄)의 학문이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만나 스스로 드러내기를 깊이 원했지만, 불행하게도 시험해보지 못하였으니 당시 세상에서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것뿐입니다. 지금 이내 사필(史筆)에 의탁하여 기리 전할 수 있게 되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다만 당신이 나라를 떠난 후에 혹 저의 잘못으로 인하여 삭제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듣건대 황문숙(黃文叔)이 지난해에 지리목도(地理木圖)를 만들어 올렸다고 하는데, 그 집안에 틀림없이 원본이 있을 터이니, 번거롭지만 방문하여 1부를 새겨서 부쳐주시기 바랍니다. 혹 너무 커서 멀리 보내기 어려울 때는 곧 사장(謝莊)의 방장목도(方丈木圖)에 의거해서 2-3()1()로 만들되, 곁에다 여닫는 기능을 설치해서 서로 어긋난 곳을 들어가게 하고 표시를 분명하게 새겨서 서로 떨어지고 합하게 한다면, 하나의 큰 대그릇에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昨承喩及先君奏疏已蒙筆削, 得附史氏篇末, 幸甚痛念先君早歲讀書, 卽爲賈陸之學. 遭時艱難, 深願有以自見, 而不幸不試, 所得陳於當世者止此而已. 今乃得託史筆以垂不朽, 豈不幸甚? 但恐賢者去國之後, 或爲不肖之孤所累, 因見刊削, 未可知耳. 又聞黃文叔頃年嘗作地理木圖以獻, 其家必有元樣, 欲煩爲尋訪, 刻得一枚見寄. 或恐太大, 難於寄遠, 卽依謝莊方丈木圖, 以兩三路爲一圖, 而傍設牝牡, 使其犬牙相人, 明刻表識以相離合, 則不過一大掩可貯矣. 切幸留念.

 

하서(河西)가 하나이고, 섬서(陝西)가 하나이고, 하동(河東)하북(河北)()()이 하나이고, 경동(京東)(西)가 하나이고, 회남(淮南)이 하나이고, 양절(兩浙)강동(江東)(西)가 하나이고, 호남(湖南)()이 하나이고, 서천(西天)이 하나이고, 이광(二廣)복건(福建)이 하나입니다. 대략 이와 같으니 다시 넓고 좁을 것을 헤아려 재단해 주십시오. 서로 합한 곳은 부디 위아래가 딱 맞도록 해 주시고 틈을 남겨두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河西爲一, 陜西爲一, 河東河北燕雲爲一, 京東西爲一, 淮南爲一, 兩浙江東西爲一, 湖南爲一, 西川爲一, 二廣福建爲一, 大略如此, 更詳闊狹裁之. 相合處順吻合, 不留繨罅乃佳.

 

 

이계장에게 답함 3 答李季章

 

 

해제이 글은 1197(경원 3, 정사, 68)에 이계장(李季章)에게 답한 편지이다. 위학(僞學)으로 탄핵을 당한 일과 󰡔의례(儀禮)󰡕를 수정하여 10편을 만드는 일을 언급하고, 왕안석의 상주문과 󰡔우적도(禹迹圖)󰡕를 보낸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죄 많은 저의 처신은 끝내 대관(臺官)의 탄핵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사실상 늦은 것입니다. 또 다행히 관대한 은혜를 입어 즉시 유배되지 않았으므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저의 허물을 반성하며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친구에게 말할 것은 못 됩니다. 몇 년 동안 󰡔의례(儀禮)󰡕를 수정하여 장구(章句)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전기(傳記)를 덧붙이고자 했던 것을 근래 10여 편을 완성했는데 그런 대로 볼만합니다. 나머지도 세전(歲前)에는 완성되리라 생각됩니다. 만약 그 안에 특별히 장애가 없다면 앞으로는 홀로 우두커니 안자 여생을 마칠 것이고 다시 세상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본 󰡔전례(典禮)󰡕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옛사람들이 모두 이미 설명했지만, 그 책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단락을 짓지 않아 사람들이 보기에 어렵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일찍이 참고해 보지 않아 소인들이 표절해다가 문장과 법규를 멋대로 농락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조정을 그르치게 하였습니다. 만약 이 책의 전면을 다듬어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게 한다면 이 소인배들이 자기들의 간사함을 숨길 곳이 없을 것이고, 세상에도 작은 도움이 아닐 것입니다. [이 내용을 퍼뜨리지 마십시오.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를 부를까 염려됩니다.]

 

罪戾之蹤, 竟不免吏議. 然已晩矣, 又幸寬恩未卽流竄, 杜門念咎, 足以遣日, 不足爲故人道也. 累年欲修儀禮一書, 釐析章句而附以傳記, 近方了得十許篇, 似頗可觀. 其餘度亦歲前可了. 若得前此別無魔障, 卽自此之後便可塊然兀坐, 以畢餘生, 不復有世間念矣. 元來典禮淆訛處古人都已說了, 只是其書袞作一片, 不成段落, 使人難看. 故人不曾看, 便爲鹼人舞文弄法, 迷國謀朝. 若梳洗得此書頭面出來, 今人易看, 則此輩無所匿其姦矣, 於世亦非少助也. 勿廣此說, 恐召坑焚之禍.

 

형공(荊公)의 상주문 초안은 이미 부치셨는지요? 지금 한 통을 보내니 당시에 기획한 내용이 대충 이뤄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적도(禹迹圖)󰡕에서 말한 것은 장안(長安)에 있는 구본(舊本)을 사용하여 새겼지만, 동남쪽의 여러 물줄기는 관례대로 모두 소략합니다. 지난해에 또 촉() 땅의 한 선비가 촉 땅 가운데 있는 가주(嘉州) 서쪽의 여러 물줄기도 또한 부합하지 않은 것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두드러진 문제점은 예를 들면 촉강(蜀江)이 노주(瀘州)의 동남쪽에 이르러 이내 물줄기가 나뉘어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꺾여 이광(二廣)을 거쳐 번우(番禺)에서 바다로 들어갑니다. 이치나 형세로 헤아려 보면 어찌 이 같은 경우가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두 물줄기가 남북으로 나뉘어 흘러가는데 베껴서 새기는 자가 잘못 연결해서 마침내 북쪽에서 장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리어 거꾸로 흐르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유자후(柳子厚)의 시에서 또한 장가(牂牁)의 남쪽 아래 물은 탕()과 같다고 하니, 이광(二廣)의 수원은 틀림없이 촉강에서 멀지 않는 거리라고 생각되는데, 다만 어느 주()에서 남북으로 나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뿐입니다. 또 노주의 이남의 여러 주들은 지금 모두 들어보지 못했으니 필시 이미 폐하여 합병했을 것입니다. 물어보고 탐구하여 하나하나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우적도󰡕는 지금 한 부 보내니 지울 곳과 첨가할 말을 표시하여 즉시 편지로 보내주십시오.

 

荊公奏草不記曾附去否? 今往一通, 可見當日規摹亦不草草也. 禹迹圖云是用長安舊本翻刻, 然東南諸水例皆疏略. 頃年又見一士說嘉州以西諸水亦多不合, 今其顯然者, 蜀江瀘州東南乃分派南流, 束折, 二廣番禺以人海. 以理勢度之, 豈應有此? 必是兩水南北分流, 而摹刻者誤連合之, 遂使其北人者反爲逆流耳. 柳子厚詩亦言牂牁南下水如湯’, 二廣之水源計必距蜀江不遠, 但不知的自何州而分爲南北耳. 又自瀘以南諸州今皆不聞, 必已廢倂. 幸爲詢究, 一一見喩. 其圖今往一紙, 可爲勾抹貼說, 却垂示也.

 

 

이계장에게 답함 4 答李季章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이계장(李季章)에게 답한 편지이다. 자신의 저술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가 완성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고, 유덕수(劉德修)황문숙(黃文叔)양자직(楊子直)의 안부를 물었으며, 황문숙의 지리목도를 구해서 보냈는지 묻고 있다.

 

제가 올해 더욱 쇠약해져서 정신과 근력이 지난날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게다가 친구마저 몰락하여 채계통(蔡季通)과 여자약(呂子約)이 모두 유배지에서 죽어 저의 마음을 슬프게 만드는군요. 이제는 더욱 살아갈 뜻이 없으니 결코 세상에 오래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이 남은 날들을 아끼는 이유는 바로 편집한 예전(禮傳)은 이미 대략 실마리를 보았으나 아직 완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시 몇 년간이라도 목숨을 연장해서 이 일을 완성할 수 있다면 또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책의 대요는 󰡔의례(儀禮)󰡕로써 근본을 삼는데 장()을 나누고 소()를 붙여서 소대(小戴)의 여러 뜻으로써 각각 그 뒤를 엮는 것입니다. 다른 편에서 혹은 다른 글에서 서로 발명할 수 있게 드러난 것은 경()에 붙이기도 하고 의()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밖에 제자직(弟子職)보부전(保傅傳)같은 부류는 또 구별해서 편을 만들어 그 부류로 붙였습니다. 그 조목에는 󰡔가례󰡕․󰡔향례󰡕․󰡔학례(學禮)󰡕․󰡔방국례(邦國禮)󰡕․󰡔왕조례(王朝禮)󰡕․󰡔상례󰡕․󰡔제례󰡕․󰡔대전(大傳)󰡕․󰡔외전(外傳)󰡕이 있습니다. 지금 이미 그 대체가 갖추어진 것이 대개 28 조목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바로 한나라 유자의 학문이 세상을 가르치는데 적잖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군주가 조부를 받드는 중함이 경전에서는 비록 명문화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강성(康成: 정현)과 그 문인의 문답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의(賈誼)의 상소문에 갖추어져 그 뜻이 매우 자세하니, 후세 이러한 일이 있음을 미리 알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무리들 또한 아직 그것을 강학하지 못했는데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또 사악한 말을 꾸며서 가리고 해를 끼치니 매우 탄식할 만합니다.

 

今歲益衰, 足弱不能自隨, 兩脅氣痛, 攻注下體, 結聚成塊, 皆前所未有, 精神筋力大非前日之比. 加以親舊凋雰, 察季通呂子約皆死貶所, 令人痛心. 益無生意, 決不能復支久矣. 所以未免惜此餘曰, 正爲所編禮傳已略見端緖而未能卒就, 若更得年餘間未死, 且與了却, 亦可以瞑目矣. 其書大要以儀禮爲本, 分章附疏, 而以小載諸義各綴其後. 其見於它篇或它書可相發明者, 或附於經, 或附於義. 又其外如弟子職保傳傳之屬, 又自別爲篇, 以附其類. 其目有家禮, 鄕禮, 學禮, 邦國禮, 王朝禮, 喪禮, 祭禮, 大傳, 外傳. 今其大體已具者蓋十七八矣. 因讀此書, 乃知儒之學有補於世敎者不小. 如國君承祖父之重, 在經雖無明文, 康成與其門人答問蓋已及之, 具於, 其義甚備, 若已預知後世當有此事者. 今吾黨亦未之講, 而憸佞之徒又飾邪說以蔽害之, 甚可嘆也.

 

편지에서 당신 마을의 선비들 중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에 종사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또한 들은 듯한데 다만 그 사람의 성명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매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인편이 있을 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해두었던 모든 경설(經說)3-4년 내에 다행히 재가 되는 것을 면했는데, 지금도 역시 보전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틈틈이 강학할 때마다 다시 수정한 것이 있어서 하나의 판본을 부쳐서 서주(西州)의 동지와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유위공(留衛公)은 제가 쓴 󰡔시전(詩傳)󰡕을 가지고 날마다 몇 판씩 점검하여 손수 표시를 하고, 한편으로는 편지를 보내 대단히 칭찬한 뒤에 그 강목(綱目)을 다 제시하였으니, 이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늘그막의 정력이 이와 같고 장구(章句)를 훈고하는 번거로움을 싫어하지 않으니, 이것은 타고난 자질이 속이 깊고 차분하며 순수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들어 일찌감치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喩及仁里士人有志於學而能不事科擧者, 近亦似曾聞說, 但不知其姓名. 此殊不易得, 幸因風略報及也. 舊來諸經說三四年來幸免煨燼, 今亦恐未可保. 然間因講說時有更定, 欲寄一本去, 恐可與西州同志者共之而未暇也. 留衛公, 日閱數版, 手加點抹, 書來頗極稱賞, 仍盡能提其綱, 亦甚不易老年精力乃能及此, 又不厭章句訓詰之煩也. 要是天姿深靜純實, 故能若此. 亦恨其聞此之晩, 不得早效區區之愚耳.

 

유덕수(劉德修)와 황문숙(黃文叔)은 집에 있으면서 무엇에 힘쓰는지요? 그들에게 각각 한 통씩의 편지가 있으니 전해 주십시오. 양자직(楊子直)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민()땅에서 정()()()이 모두 죽으니 분위기가 말할 수도 없이 쓸쓸합니다. 양자직은 사록관(祠錄官)을 얻었다가 논박을 당했고, 항평보(項平父)도 듣자 하니 두문불출한 채 감히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다고 하고, 그 외 친구들은 종종 종적을 감추고 감히 기()를 토해내지 않으니 매우 우스운 일입니다. 저는 내년에 일흔이니 이미 늙어서 벼슬을 그만 두기를 청하는 글을 지어놓았습니다. 단지 본 군의 관례에 따라 사면을 빌었을 뿐, 또한 묘당(廟堂)에 올릴 차자(箚子)는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혹자들은 오히려 재앙의 기틀을 건드릴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예법과 규율을 살펴보면 본래 명문화되어 있는데 죄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품계를 욕되게 하니, 또한 벼슬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법이 없고, 또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다시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령 면하지 못한다 해도 또한 괴로움이나 책망을 달게 여길 것입니다. 한 때의 동료들에 견준다면 이미 홀로 다행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머리를 숙이고 배회하면서 작은 녹봉을 탐하고 연연해하여 평생 품은 마음을 저버리니,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德修文叔家居亦何所務? 各有一書, 煩爲致之, 子直亦然也. 今年皆物故, 氣象極覺蕭索. 楊子直得祠又遭駁, 項平父聞亦杜門不敢見人, 其它吾人往往藏頭縮頸, 不敢吐氣, 甚可笑也. 明年七十, 已草告老之章, 只從本貫依庶官例陳乞, 亦不欲作廟堂書箚. 而或者尙恐觸犯禍機. 顧念禮律自有明文, 而罪戾之餘尙忝階官, 亦無不許致仕之法, 竝已決意爲之, 不復顧慮. 政使不免, 亦所甘心. 蓋比之一時輩流, 已獨爲優幸矣. 尙欲低回, 貪變微祿, 以負平生之懷, 復何爲哉

 

앞서 편지를 부쳤는데 이보주(李普州) 편에 보낸 것 같습니다. 편지 속에서 번거롭지만 황문숙(黃文叔)의 집에서 지리목도(地理木圖)를 빌려서 한 부를 제작해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셨는지요? 이것은 최근에 이미 스스로 아교와 진흙을 써서 초안을 잡았는데, 또한 볼만한 것 같습니다. 만약 다시 황문숙의 목도를 얻어서 참조한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다만 이 편지가 도중에 전달되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미 제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또한 굳이 만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예전도(禮殿圖)는 옛 판본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 정교하게 모사하여 부치니 바로 옛 판본에서 그린 의도를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의 조목은 고찰할 수 없습니다. 옛 일에 이것과 유사한 것이 많으니, 오늘날 어찌 옳고 그름을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미 이 이름과 칭호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런 사람이 있었을 것이니,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도 그 제작의 융성함을 들어서 말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한나라 사람들이 고조(高祖)와 문제(文帝)만을 언급하지만, 어찌 그 사이에 혜제(惠帝)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연(洮硏)에다 먹물을 찍어 글을 쓰니 칼날 끝이 두렵기는 하지만, 이것은 얻기가 어려우니 아름답게 즐길 만합니다.

 

前此附書, 似是因李普州便. 書中欲煩借黃文叔家地理木圖爲製一枚, 不知達否? 此近已自用膠泥起草, 似亦可觀. 若更得圖參照尤佳. 但恐此書惑已浮沉, 不曾製得, 卽亦不必爲矣. 禮殿圖舊亦有之, 但今所奇摹畫精好, 想正得古本筆意也. 三五之目不可考, 古事類此者多矣, 今日豈能必其是非也邪? 但旣有是名號, 則必有是人, 易大傳但擧其制作之盛者而言耳. 人但言高祖孝文, 豈可便謂其間無惠帝? 硏發墨, 鋒鋩可畏, 此所難得, 足爲佳玩矣.

 

 

이계장에게 답함 5 答李季章

 

 

해제이 글은 1198(경원 4, 무오, 69)에 이계장(李季章)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계장이 보내준 아버지 이도(李燾)의 글과 세 부인의 묘지문을 읽고 감탄했다는 내용과 󰡔속통전(續通典)󰡕․󰡔장편(長編)󰡕을 구해 보내달라는 청이 들어있다.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보내 주신 선정(先正) 문간공(文簡公)의 시편(詩篇)과 행실 그리고 세 부인의 무덤에 새긴 두 개의 글을 받고 꿇어앉아 삼가 읽으니, 평소에 태산처럼 우러러 사모하던 저의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두세 번 반복하며 읽는 동안 덕을 세우고 말을 세운 것이 분명하고 커서 어리석은 마음을 개발시키는 것이 하나만이 아닌 것을 보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저의 우둔함을 살피지 않고 저에게 그 일을 엮어서 무덤에 새겨 후세에 보이게 하시려고 하니 사람들은 덕이 없고 문장의 재주도 없는 제가 이러한 부탁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문간공(文簡公) 어른을 찾아뵌 적은 없지만 그 글을 읽고 그 분을 우러러 사모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게다가 일찍이 하풍(下風)에서 듣고서 공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상대의 면목을 모르고도 그 마음을 얻은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붙이기를 원하여 감히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로 인해 위적(僞籍)에 이름이 들어 있는 몸이라 평소 두문불출하며 숨을 죽이고 입술을 깨문 채 감히 한 마디라도 말을 하여 현재의 금령을 범할 수 없는 처지여서 두려운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면하지 못할까 두려운 상황입니다. 이러한 때에 갑자기 경계를 깨뜨리고 나선다면 저 개인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지만 나라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방황하고 고민하면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그만 두어 마침내 수고롭게 부르시는 선생의 명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집사(執事)께서는 우선 조금이나마 이것을 살펴 깊이 생각하십시오. 제 생각에는 대문장가(大文章家)들을 오늘날의 세상에서 찾아보면 없지는 않을 것이니, 보잘것없는 죄많 은 한 사람에게 연연하여 백 세에 전해야 할 이 성대한 덕을 가지고 지금 이 시점에서 정하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伏承不鄙, 貺以先正文簡公詩編行實, 幷及三夫人二壙刻文, 跽領伏讀, 足慰平生高山仰止之心. 而反復再三, 又見其立德立言明白磊落, 所以開發蒙吝, 有不一而足者. 幸甚幸甚至於不察之愚陋, 而將使之纂次其事, 刻之幽宮以視來世, 之不德不文, 人知其不足以勝此寄矣. 顧念平生未嘗得拜文簡公之函丈, 而讀其書仰其人則爲日蓋已久. 又嘗聽於下風, 而知公之所以相知, 亦有不待識其面目而得其心者, 是以願自附焉而不敢辭也. 唯是今者方以罪戾書名僞籍, 平居杜門, 屛氣齰舌, 不敢輒出一語以干時禁, 而凜凜度日, 猶懼不免, 乃於此時忽爾破戒, 政使不自愛惜, 亦豈不爲公家之累? 是以彷徨顧慮, 欲作復止, 而卒未有以副來命之勤也. 伏惟執事姑少察此而深計之. 竊意高文大筆取之今世不爲無人, 固不必拳拳於一無狀罪廢之人, 而使盛德百世之傳不得以時定也.

 

저의 비루한 뜻은 앞 편지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또한 깊이 생각하여 초안을 정리하고 전일의 행위를 가탁하여 편지를 보내려고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해보니 또 성실하지 못하여 해서는 안될 것 같았습니다. 또 생각해보니, 유손(劉孫: 두 사람의 성씨)이 정리한 판본이 당신의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손에서 나왔는데, 후세에 전하기에 넉넉했습니다. 다만 관례에 따라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교정을 해야 한다면, 비록 오늘날 남몰래 은밀하게 하더라도 또한 스스로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지금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이 작품이 있음을 알게 할 수 없으며, 장래에 초안을 정리하는 것 또한 사람에게 이 책을 보게 할 수가 없으나, 이는 숨겨서 보호하기가 어렵습니다. 심부름꾼이 오면 조금 머무르면서 기다리게 하고자 했는데 그 사람도 또한 당신의 간곡한 훈계를 듣고 재촉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을 끝내 마치지 못한다면 또한 그 사람을 되돌려 보내는 것만 같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한 번 만남을 기다렸다가 장차 보내준 편지를 자세하게 되풀이해서 읽고 마땅히 더하고 빼야할 곳을 기록해서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당신 아우가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또 아마도 서울을 경유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조금 참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만약 죽지 않는다면 참으로 답장을 올리겠습니다. 혹 갑자기 죽는다 해도 또한 마땅히 아이들에게 부쳐 당신에게 전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생 문장을 짓는 일이 많아 글을 쓰는 것은 익숙하지만 말이 부끄러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것은 제목은 좋은데 글을 짓지 못하는 것이 애석합니다. 또 이러한 때를 당하니 우울한 마음이 듭니다.

 

區區鄙意, 前幅具之詳矣. 始者亦嘗深念, 欲便草定而託以前日所爲. 旣而思之, 又似不誠而不可爲也. 又念劉孫所定本出賢昆仲之手者, 自足傳信後世, 但循例必欲更經一手刪節, 則雖在今日陰竊爲之, 亦自不害. 只是目下未可使人知有此作, 將來草定, 亦不可使人見有此書, 此則難遮護耳. 來使本欲留以少俟, 渠亦以丁寧之切, 不來相逼. 但覺此終是未敢落筆, 不如且遣之還. 俟一面更將所示者子細繙閱, 隨記所當增損處, 密託人送令弟處. 又恐經由都下不便, 不若且少忍之. 若未卽死, 固當有以奉報. 或使溘先朝露, 亦當以付兒輩令轉奉聞也. 平生多做了閑文字, 不能無愧詞. 今此好題目, 可惜不做. 但又適當此時, 令人鬱鬱耳.

 

󰡔속통전(續通典)󰡕을 시() 가운데에서 언급한 것을 보았는데 아마도 인쇄본이 있을 것이니 한 부를 구해보십시오. 󰡔장편(長編)󰡕의 개정본은 단지 개정한 곳만 베껴 썼는데 몇 권이나 있는지요? 구해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자가 건염(建炎)소흥(紹興) 연간의 일 또한 이미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데 그러합니까? 더욱 구하고 싶지만 글자가 너무 많아 베껴 쓰기 어려울 듯합니다. 지난번에 보니, 정강(靖康) 무렵의 일에 대해 양구산(楊龜山)이 다수의 소장을 남겼으나 편입시킨 적이 없엇는데, 나중에 보충했는지요? 대개 왕장(汪丈)이 새긴 판본은 실은 적이 없고, 복주(福州)와 성도(成都) 두 판본도 또한 모두 그러합니다. 그 분의 주의(奏議)는 나중에 남검(南劍)에서 간행한 한 책에 도리어 실려있으니 또한 보충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續通典見請中及之, 恐有印本, 求一部. 長編改定本只寫改處, 不知有多少冊? 得爲致之爲幸. 或云建炎紹興事亦已成書, 不知然否? 尤所欲得, 但恐字多難寫耳. 頃見靖康間事楊龜山多有章疏不曾編入, 不知後來曾補否? 汪丈所刻本不曾載, 福州成都二本皆然. 其奏議後來南劍一本却有之, 恐亦不可不補也.

 

 

범문숙에게 답함 1 答范文叔

 

 

해제이 글은 1189(순희 16, 기유, 60)에 범문숙(范文叔)에게 답한 편지이다. 󰡔대학󰡕의 치지(致知)와 주일무적(主一無適)을 연관지어 설명하였다.

 

󰡔대학(大學)󰡕의 순서는 참으로 치지(致知)를 우선으로 하는데, 정자가 지()에 이르고도 경()에 있지 않은 자가 없다고 밝힌 것은 더욱 본령에 힘써야 하는 절실한 곳을 드러낸 것입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읽어보니, 주일(主一)의 이치를 알아서 대개 일찍이 힘을 쓴다면 치지의 학문은 마땅히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시 그 설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저는 옛날에 󰡔대학󰡕을 읽고 그 설을 지었는데, 매번 천박한 견해여서 편안치 못한 바 있었습니다. 근자에 수정을 가하여 조금 명백해진 것 같습니다. 친지가 이를 취하여 목판에 새긴 자가 있어 지금 한 부를 보내니, 시험 삼아 고찰해주기 바랍니다. 혹 마땅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즉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고하건대, 이를 남에게 보여주어 옳지 못한 죄를 더욱 무겁게 만들지는 마십시오.

 

大學之序固以致知爲先, 程子發明未有致知而不在敬者, 尤見用力本領親切處. 今讀來喩, 知於主一蓋嘗用功, 則致知之學宜無難矣. 而尙欲更求其說, 何耶? 舊讀大學之書, 嘗爲之說, 每以淺陋, 有所未安. 近加訂正, 似稍明白. 親知有取以鋟木者, 今內一通, 幸試考之. 或有未當, 却望誨喩. 然切告勿以示人, 益重不韙之罪也.

 

 

범문숙에게 답함 2 答范文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범문숙(范文叔)에게 답한 편지이다. 회의(懷疑)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전을 읽는 것은 좋은 습관이며, 󰡔대학󰡕의 주석을 몇 군데 수정하여 보낸다는 내용을 담았다.

 

글을 읽다보면 절로 의심이 생긴다고 하신 말씀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경전을 해석하는데 정설이 없었으므로 여러 선생들의 말씀이 더러 같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독서를 하는데 의심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나 근래에는 여러 학설이 다 나오고 강론하는 자들도 많아 그로부터 의심할 곳이 없게 된 것입니다. 다만 반복하고 음미하여 성현의 본 뜻을 알아 도의(道義)의 실체를 이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게 한다면 저절로 수용할 곳이 있을 것입니다. 윤화정(尹和靖)의 문인이 그 스승을 기리기를, “위대하다! 성인의 교훈이여. 그러한 육경(六經)의 내용을 귀로 들으면 곧 마음으로 이해하여 마치 자신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하니, 모름지기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글을 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약(子約)이 가게 되니 사사로이 좋은 인편이라 생각했습니다. 상선(象先)과 서로 만나 무슨 논의를 하셨는지요? 지난해에 서로 만나 정성이 부족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이 될 뿐입니다. 당신의 경연강의(經筵講義)는 반복해서 상세히 밝혔으니 외우기를 권하는 바탕을 깊이 얻었습니다. 특별히 이 장을 부치니 어찌 또한 시론(時論)에 느낌이 있겠습니까? 󰡔대학󰡕은 근자에 옛날 책을 열람해서 다시 몇 군데를 고쳤습니다. 지금 한 부를 보내니 시험 삼아 구본을 참고한다면 저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讀書不覺有疑, 此無足怪. 蓋往年經無定說, 諸先生所發或不同, 故讀書不能亡疑. 比年以來, 衆說盡出, 講者亦多, 自是無所致疑. 但要反復玩味, 認得聖賢本意道義實體不外此心, 便自有受用處耳. 尹和靖門人贊其師曰:‘丕哉聖謨, 六經之編. 耳順心得, 如誦己言.’要當至此地位, 始是讀書人耳. 子約之去, 私計良便. 象先相從, 所論云何? 去歲相見不款, 未得盡所欲言, 至今爲恨耳. 講義反復詳明, 深得勸誦之體. 特寄此章, 豈亦有感於時論耶? 大學近閱舊編, 復改數處. 今往一通, 試以舊本參之, 當見鄙意也.

 

 

범문숙에게 답함 3 答范文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범문숙(范文叔)에게 답한 편지이다. 구구하게 말과 문자로 포장하는 공부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일 뿐이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써야 인()에 근접해 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춘풍당기(春風堂記)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승낙했는데 어찌 감히 그것을 잊겠습니까? 다만 요즈음 외롭고 위태로운 몸으로 당대에 미움을 받아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마침내 입을 다물고 남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화를 두려워해서일 뿐만 아니라 의리상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현실성이 없는 말은 실상에는 유익함이 없고 겨우 희극과 같을 뿐이니, 구구하게 문자로 포장하는 것은 한갓 완물상지(玩物喪志)가 될 뿐입니다. 만약 위기(爲己)의 절실한 공부를 논한다면 어찌 이러한 것들이 도움이 될 수 있겠으며, ()을 하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니 또 어찌 타인의 도움을 기다리겠습니까? 더구나 명도(明道) 선생의 기상이 이와 같으셨으니 바로 인에서 떠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지금 그러한 모습 밖에서 그 유사한 형체만을 겉으로 보고 감상하는 것과 그 분이 도달하신 경지를 깊이 살펴 본인이 직접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이 실을 따져 볼 때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자하(子夏)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히 하고 묻기를 간절히 하고 생각을 가까이한다는 것과 공자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간다는 것과, ‘공경 충서(恭敬忠恕)를 해야 한다는 것에서 힘을 쓰는 시종을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깊이 음미하여 여기에 공부를 더한다면 저의 기대에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니, 공부란 본래 말과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春風堂記久已奉諾, 安敢忘之? 但近覺孤危之迹爲當世所憤疾, 日以益甚, 遂絶口不敢爲人出一語. 非獨畏禍, 亦義理之當然也. 兼亦覺得此等空言無益於實, 僅同戱劇, 區區裝點, 是亦徒爲玩物喪志而已. 若論爲己切實功夫, 豈此等所能助? 而爲仁由己, 亦何待他人之助耶? 明道先生氣象如此, 乃是不違仁之影子. 今於影外旁觀而玩其形似, 孰若深察其心之所到而身詣之之爲實耶? 竊謂爲仁之要固不出乎聖賢之言, 子夏所謂博學篤志’,‘切問近思’, 夫子所謂克己復禮’, 所謂恭敬忠恕’, 可以備見其用力之始終矣. 幸深味乎此而實加功焉, 則爲有以慰區區之望, 固不在於言語文字之間而已也.

 

 

진군거에게 답함 1 答陳君擧

 

 

해제이 글은 1191(소희 2, 신해, 62)에 진군거(陳君擧)에게 답한 편지이다. 진군거의 저술 󰡔시해고(詩解詁)󰡕에 대해 언급하고, 아울러 당시 사람들의 학문에 대해, “이미 지나치게 높고 너무 잘 다듬어져 있어서 그 학설이 늘 모호하게 억지로 맞추는 폐단이 생겨 분별이 없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제가 지난 번 편지를 부친 뒤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어 마음이 뒤숭숭하여 소식을 전하지 못했지만 덕의(德義)를 우러러 생각하는 마음은 잠시도 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잊지 않고 사람을 통해 편지를 보내 부지런히 가르침을 보여 주시니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은혜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편지에서 말씀하신 󰡔시경󰡕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번에 이군(二君)을 보고 대강을 말했는데 큰 취지는 대략 같습니다. 생각건대 틀림없이 완성된 편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보내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을 듣고서야 이내 󰡔이아(爾雅)󰡕의 벌레와 물고기는 결코 작은 일에 거리낌없는 사람이 주를 달아야할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당돌하게도 부끄러움을 저버렸으니 어찌 말을 하겠습니까?

 

自頃寓書之後, 南來擾擾, 未能嗣音. 至於懷仰德義, 則無日而不勤也. 乃蒙不忘, 專人枉敎, 此意厚矣, 何感如之垂諭詩說, 向見二君能道梗槪, 大指略同, 意其必有成編, 故以爲請. 今承語及, 乃知爾雅蟲魚決非磊落人之所宜注也. 唐突負愧, 如何可言

 

부지런하게 편지를 보내주시니 비루하게 여기지 않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생각하기를, “사람이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만약 평탄한 곳으로부터 올라가서 순서대로 공부를 한다면 당장 눈앞에서 계산할만한 이익은 보이지 않더라도 공부가 쌓여 점차 단서가 보여서 저절로 문자를 꾸미는 데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을 것이며, 힘들여 버티지 않더라도 성현의 마음과 의리의 실상이 반드시 모두 확고하여 바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고, 강론하는 때에 이르게 되면 마음이 곧 입이고 입이 곧 마음일 것인데 어찌 별도로 계교를 내어 모호하게 억지로 맞춰가면서 세속과 타협하여 자신의 편의를 도모할 계획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의 학문은 이미 지나치게 높고 너무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그 학설이 늘 모호하게 억지로 맞추는 폐단이 생겨 분별이 없게 되니, 이것은 마음속에 조그만 의심이 없을 수 없어 이러한 결과를 부른 것이지 비단 비방을 피하고자 하다가 글에서 어긋난 것은 아닙니다. 저의 경우는 자신(自信)하는 것이 이미 독실하기 때문에 지난번의 변설(辨說)로 비록 참소를 만나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이 마음은 잊혀지지 않아 오히려 말이 미진하여 피차의 마음을 풀고 서로의 의견을 합치시키지 못한 것만이 유감스러울 뿐 그 때의 일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고명(高明)께서는 어떻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숨김없이 말을 다하여 반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늙고 병든 몸으로 깊은 근심에 쌓여 있으니 언제 죽을 지 모르겠습니다. 이 큰 일은 한 개인의 말과 하루 아침의 얕은 계획으로 이야기할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마침내 직접 뵙고 말씀 올릴 기회가 없어 이에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다 말씀드렸습니다. 바람을 향해 서서 길게 목을 빼고 있으니 그리운 마음을 이길 수 없군요.

 

誨示之勤, 尤荷不鄙. 然嘗謂人之爲學, 若從平實地上循序加功, 則其目前雖未見日計之益, 而積累功夫, 漸見端緖, 自然不假用意裝點, 不待用力支撑, 而聖賢之心義理之實必皆有以見其確然而不可易者. 至於講論之際, 心卽是口, 口卽是心, 豈容別生計較, 依違遷就, 以爲諸俗自便之計耶?. 今人爲學旣已過高而傷巧, 是以其說常至於依違遷就而無所分別. 蓋其胸中未能無纖芥之疑有以致然, 非獨以避咎之故而後詭於詞也. 之愚, 自信已篤. 向來之辯雖至於遭讒取辱, 然至于今日, 此心耿耿, 猶恨其言之未盡, 不足以暢彼此之懷, 合異同之趣, 而不敢以爲侮也. 不識高明何以敎之? 惟盡言無隱, 使得反復其說, 千萬幸甚老病幽憂, 死亡無日. 念此一大事非一人私說一朝淺計, 而終無面寫之期, 是以冒致愚悃. 鄕風引領, 不勝馳情.

 

 

진군거에게 답함 2 答陳君擧

 

 

해제이 글은 1191(소희 2, 신해, 62)에 진군거(陳君擧)에게 답한 편지이다. 진군거에게 성인이 전수한 도통(道統)을 잃지 않고 천하의 도술(道術)을 펼 수 있도록 학문의 방향을 올바로 정립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앞 편지에서 여쭈었던 것은 아직 답을 받지 못했으나, 제 마음을 말로 다 나타내지 못한 것이 또한 많았고, 마음을 터놓고 가르침을 구할 수 없음이 늘 한스러웠습니다. 근자에 조기지(曹器之)가 찾아와서 이내 사연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다시 선생(진군거)에게 나아가서 숨김없이 이야기할 것입니다. 감히 바라건대 당신이 조금이나마 가려 뽑아서 그렇지 않은 것은 통렬하게 배격한다면, 진정 옳은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 위로는 여러 성인이 전수한 도통을 잃지 않게 되고, 아래로는 천하의 도술(道術)을 펼치는 자로 하여금 한곳에 정함을 얻도록 할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 점은 생각해 주십시오.

 

前書所扣未蒙開示, 然愚悃之未能盡發於言者亦多, 每恨無由得遂傾倒, 以求鐫切. 曹器之來訪, 乃得爲道曲折. 計其復趨函丈, 必以布露. 敢丐高明少垂采擇, 其未然者痛掊擊之, 庶有以得其眞是之歸, 上不失列聖傳授之統, 下使天下之爲道術者得定于一, 非細事也. 惟執事圖之.

 

 

진군거에게 보내는 편지 3 與陳君擧

 

 

해제이 글은 1194(소희 5, 갑인, 65)에 진군거(陳君擧)에게 보낸 편지이다. 아버지 주송(朱松)이 가의(賈誼)와 육지(陸贄)의 학문을 흠모했고, 나종언(羅從彦)의 문하에서 수업했으며, 󰡔철종실록󰡕의 편수에 종사했는데, 나중에 화친을 반대하다가 진회(秦檜)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났음을 알려주고 있다.

 

선친은 어려서부터 호탕하고 시원시원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약관의 나이를 넘어서 과거에 급제했으나 다시 의지를 꺾고 독서하여 가의(賈誼)와 육지(陸贄)의 학문을 사모하였습니다. 오랜 뒤에 또 구산(龜山) 양씨(楊氏)의 문인을 좇아 도를 묻고 수업하여 실천과 수양을 더욱 독실히 했습니다. 소흥(紹興) 초기에 낭조(郎曹)의 관직으로서 신종(神宗)의 정사(正史)와 철종(哲宗)휘종(徽宗) 두 조정의 󰡔실록󰡕을 편수했는데, 󰡔철종실록󰡕에 힘을 많이 썼습니다. 속이고 헐뜯음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어그러지고 잘못된 것을 교정한 공은 모두 포상하는 조서에 드러나 있습니다. 나중에 상소하여 화친을 맺는 잘못을 비난하다가 재상 진회(秦檜)를 거슬러 조정을 떠나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사당을 받들다가 세상을 마쳤습니다.

 

先人自少豪爽, 出語驚人. 踰冠中第, 更折節讀書, 慕爲賈誼陸贄之學. 久之, 又從龜山楊氏門人問道授業, 踐修愈篤. 紹興, 以館職郞曹與修神宗正史哲徽兩朝實錄, 而於哲錄用力爲多. 其辨明誣謗刊正乖謬之功, 具見褒詔. 後以上疏詆講和之失忤秦相, 去國補郡, 不起, 奉祠以終.

 

 

진군거에게 보내는 편지 4 與陳君擧

 

 

해제이 글은 1194(소희 5, 갑인, 65)에 진군거(陳君擧)에게 답한 편지이다. 어머니의 행실을 몇 가지 알려주고, 아내의 친정 아버지 유면지(劉勉之)의 행적에 대해 약술하여 명사(命詞)에 보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선친에 대한 증고(贈告)는 이미 글로 써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아내에 대한 증고도 또한 명사(命詞)와 부합하지만 전일에 갖추어 아뢰지 못하여 이제 다시 간청을 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덕성은 순수하고 후덕했으며 시어머니를 지극한 효성과 공경으로 섬겼습니다. 할머니의 성품은 엄하였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는 잘 따르면서 적응했습니다. 가정을 다스리는데 너그럽고 법칙이 있어서 세시에 제사를 받들 때에 반드시 몸소 행하였습니다. 잉첩(媵妾)과 하인들을 어루만져주면서 은혜를 베풀었고 조금도 꺼리는 뜻이 없었습니다. 죽은 아내의 선조는 나라가 처음 세워진 때로부터 유학으로써 높은 벼슬에 등용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휘가 면지(勉之)이고 자는 치중(致中)이며, 소흥(紹興) 연간에 일찍이 벼슬 없는 선비로 부름을 받아 도당(都堂)에 이르렀다가 승상 진회(秦檜)와 의론이 맞지 않아 떠났습니다. 그래서 동래(東萊) 여사인(呂舍人)늙어서도 재주가 많고 10년을 굳세게 앉아있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모든 이러한 사연들은 거의 명사(命詞)에 드러나 있어 죽어서도 영광으로 삼을 만한 것이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명사에 빠져있다면 또한 보충해 넣어 확정해 주시길 빕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先人贈告必已蒙落筆. 母妻二告如亦合命詞, 則前日失於具禀, 今再有懇. 先妣德性純厚, 事姑極孝敬. 祖母性嚴, 先妣能順適之. 治家寬而有法, 歲時奉祀必躬必親. 撫勝御有恩意, 無纖毫嫌忌之意. 亡婦先世自國初時以儒學登高科, 其父諱勉之, 致中, 紹興中嘗以布衣召至都堂, 秦丞相議不合而去. 東萊呂舍人所謂老大多才, 十年堅坐者也. 凡此曲折, 得頗見於詞命, 足爲泉壞之榮, 幸辰矜念. 脫或已行, 亦乞刊定. 幸甚幸甚

 

 

유덕수 광조에게 보내는 편지 1 與劉德修(光祖)

 

 

해제이 글은 1199(경원 5, 기미, 70)에 유덕수(劉德修)에게 보낸 편지이다. 방주(房州)로 떠나는 유덕수에게 여러 가지 안부를 묻고, 위학(僞學)을 금하는 정국 속에서 동지(同志) 이계장(李季章)이양중(李良仲)범문숙(范文叔) 등의 근황을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오래도록 소식을 듣지 못했음을 생각하던 차에 문득 조보(朝報)에서 방릉(房陵)으로 가신다는 내용을 보고 슬픔에 잠겨 침식을 모두 폐하고 며칠 동안 서운한 마음을 풀 수 없었습니다. 언제쯤 길을 떠나고, 간주(簡州)에서 방릉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어느 주()를 경유하고 며칠이 걸리며, 풍토와 기후가 매우 다르지는 않은지요? 거처와 음식은 편안한지, 관리와 백성들은 서로 존경할 줄 아는지요? 우리 도()의 궁함이 한결 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군요. 오래 전에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눈앞에 닥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연히 악()이라는 인편이 있어서 유공도(劉公度)에게 부탁하여 이 문안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만약 분명한 인편이 있으면 또한 한 통의 답장을 보내서 소식을 알려 먼 곳에 있는 이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과 이()도 다시 용납되지 못하고, 이계장(李季章)은 군()을 다스리던 중에 이름이 그 아우를 탄핵하는 상소문에 보였으니 아마도 오래도록 편안히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양중(李良仲)은 세속을 훌쩍 떠나 멀리 가니 매우 부럽군요. 다만 그윽한 속의 맛을 묻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범문숙(范文叔)은 다행스럽게도 사당(邪黨)의 물색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면 그도 깊이 자신을 감추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다리의 힘이 없고 뱃속이 결린 증상이 나타난 지 이미 반년입니다. 지팡이를 잡고 사람이 부축해야 겨우 한 발자국 뗄 수 있지만 뱃속이 더부룩하게 차서 책상에 몸을 숙일 수가 없어 책을 보고 글씨 쓰는 일을 일체 폐하였습니다. 다만 어르신에게는 감히 관례대로 입으로만 전달할 수 없어 편지를 씁니다. 여러 날 또 오른쪽 어깨에서 통증이 발작하여 글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겠습니다. 노쇠하고 고달픔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오래 살 이유가 없습니다. 가르침을 받들 기회가 없으니 부디 때에 따라 깊이 세도(世道)를 위해 자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관례에 따라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다행히 이미 허락을 얻었습니다. 중간에 또한 약간의 소란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럭저럭 잠잠해졌지만 오히려 종지(從之)에게 누가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또한 탄식할 만합니다.

 

方念久不聞動靜, 忽閱邸報, 房陵之行, 爲之悵然, 寢食俱廢, 累日不能自釋. 不審彼以何日就道? , 道里幾何? 取道何州? 閱幾日而後至? 風土氣候不至甚異否? 居處飮食能便安否? 官吏士民頗知相尊敬否? 吾道之窮, 一至於此! 然亦久知會有此事, 但不謂在目前耳. 偶有便, 劉公度轉致此問. 如有的便, 亦望得一書之報, 使知動息, 少慰遠懷, 千萬之幸! 亦復不容, 季章得郡而名見乃弟疏中, 恐亦非久安者. 李良仲鴻飛冥冥, 使人深羨, 第恨不得扣其玄中之趣. 茫文叔却幸未見物色, 想亦深自晦也. 足弱氣痞, 己半年矣. 策杖人扶, 僅能略移跬步. 而腹脇脹滿, 不能俯案, 觀書作字, 一切皆廢. 獨於長者未敢依例口占耳. 數日又加右臂作痛, 寫字不成. 衰憊至此, 無復久存之理. 承敎無期, 尙冀以時深爲世道自愛耳. 隨例納祿, 幸已得請. 中間蓋亦小有紛紛, 後雖粗定, 然猶不免爲從之之累, 亦可歎也.

 

 

황문숙 도에게 답함 答黃文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황문숙(黃文叔)에게 답한 편지이다. 황문숙이 '위학(僞學)의 금()'을 단행한 당시 실권자 한탁주(韓侂冑)를 탄핵했다가 좌천되어 무주(婺州)지사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 위로하면서 순()임금과 이윤(伊尹)의 마음으로 정사(政事)에 임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824일에 저는 예를 갖추어 지부(知府)현모(顯謨)정언(正言)께 답장을 드립니다. 저는 궁벽한 산에 숨어 지내면서 당신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으나 진즉 만나 뵙지 못한 것이 늘 한스러웠습니다. 작년에 왕명을 받고 북으로 가는 길에 새로 즉위한 천자께서 당신을 어질게 여겨 언로(言路)에 발탁하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선류(善類)들과 함께 매우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일깨워 처음 즉위하셨을 적에 신중하게 하고 표준이 되는 법을 세워 중외(中外)의 기대에 위로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이틀도 채 안되어 벌써 지방관으로 나가게 했다는 명을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망연히 머리 속이 어지러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도성에 이르러 자주 그 까닭을 물었는데, 식견을 갖춘 사람들마다 분개하여 주먹을 쥐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유덕수(劉德修)만 홀로 당신이 올린 사면장 등본을 취하여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또한 다시 분노하고 크게 탄식하였으니, 대개 당신에게도 이는 애석한 일일뿐만 아니라, 조정을 위해서도 이러한 조치는 애석합니다. 또한 한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잃은 것이 한스러웠고, 게다가 우리 도()가 장차 행해지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내 두 달이 못되어 결국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갑니다. 길거리에서 당신이 무주(婺州)로 오는데 또한 행차의 일정이 잡혀있어 숙박할 수는 없다는 소식을 듣고, 수레와 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또 질병으로 고통스러운데, 게다가 봄과 여름이 바뀔 즈음에 기후가 크게 변하여 사악한 독이 마음을 지피고 위태로운 증상들이 다 드러나니,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먼저 당신에게 연통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 문득 편지를 받고 반복해 읽다 보니 정신이 번쩍 들만큼 기대 이상으로 저를 추켜세우셨더군요.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기는 하지만 저에 대한 예()가 지나치게 겸손하여 실제보다도 더 칭찬하시고 뛰어난 인물에 견주시니, 식견이 얇고 보잘것없는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아마 농담이겠지생각하면 당신은 단아한 선비이니 말을 농담으로 하는 분이 아니고, ‘진심인가생각하면 이치를 알고 사람을 알아보는 당신의 명철함에 손상을 입히게 될까 두렵습니다.

 

八月二十四日, 具位朱熹頓首復書于知府顯謨正言執事: 跧伏窮山, 聞執事之名舊矣. 末獲旣見, 每竊恨焉. 去歲趨召北歸, 道聞新天子以執事爲賢, 擢居言路, 方與善類同深喜幸, 以爲上新卽位, 首擇一人以爲諫官, 卽得執事之賢以充其選, 是必將用其言以新庶政無疑矣. 以執事之賢如此, 又遭難得之時如此, 其必將有以開寤上心, 謹始建極, 以慰中外之望又無疑矣. 而未一二日, 已聞出守之命, 則又爲之惘然昏惑, 莫曉所謂. 比至中都, 亟問其故, 則凡有識無不扼腕, 劉德修獨取執事所上免章謄本相視. 於是時亦復慨然浩歎, 蓋不唯爲執事惜此事會, 亦爲朝廷惜此擧措. 且自恨其失一見之便, 而又決知吾道之將不行矣. 曾未兩月, 果已罷遣. 道問聞當來, 又以行役有程, 不能宿留, 以俟車騎之來. 還家又苦疾病, 重以春夏之交, 氣候大變, 邪毒薰心, 危證悉見, 自謂必死矣, 固不能先自通於左右. 乃於呻吟之中, 忽奉手敎之辱, 三復醒然過望, 幸甚然而執禮過謙, 稱道浮實, 比擬非倫, 則非淺陋之所敢當也. 豈其戱耶? 則執事莊士也, 非以言爲戱者也. 以爲誠耶? 則懼其有傷執事者閱理之明知人之哲也.

 

옛날 성현들이 처한 상황을 논한 말씀에서 당신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지난 날 제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훌륭한 임금을 만나 저의 도()를 행해 보겠다는 뜻을 가졌습니다만, 배우고도 도()를 듣지 못하여 말에 힘이 실리지 않고 정신이 전일하지 않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깨우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이른바, ‘그대의 말은 주장(州將)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니, 제가 어찌 이것을 논하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도 있지만 이제는 저도 늙었습니다. 쇠약하고 병든 몸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오늘내일하니, 이 마음을 잊지는 않았지만 또한 장래에 희망도 없습니다. 지금 국운이 한창 상승하여 임금의 덕이 날로 새로워져 나라를 영원히 존속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계시니 반드시 명철한 사람과 함께 나랏일을 상의할 것입니다. 말씀하신, “전일한 마음을 다하여 천심(天心)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일입니다. 당신은 순() 임금이 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서 가리기를 반드시 정밀히 하여 인심과 섞이지 않게 하고, 지키기를 견고히 하여 도심의 순수함을 잃지 않게 한다면 시종(始終)이 한결같게 되어 이윤(伊尹)이 하늘을 감동시킨 일이 바로 당신께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임금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켜 이 백성들을 영원토록 보호한다면 이 일 역시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반복하여 가르침을 주십시오. 매우 바라는 바입니다.

 

至論古昔聖賢所處之難易, 則執事之意可知矣. 之愚, 蓋嘗不自揆度, 而妄竊有志於此. 然學未聞道, 言語無力, 精神不專, 不足以動人悟物. 蓋昔人所謂說將尙不下者, 而又何足以議此耶? 雖然, 今亦老矣, 衰病益侵, 旦暮且死, 此心雖不敢忘, 亦無復有望於將來矣. 顧今運祚方隆, 聖德日新, 有永之圖必將與明者慮之, 則夫所謂致一以格天者, 乃執事事也. 執事其亦察乎舜之所謂人心道心者爲如何, 擇之必精而不使其有人心之離, 守之必固而無失乎道心之純, 則始終惟一, 伊尹之所以格天者在我矣. 於以正君定國而大庇斯人於無窮, 豈不偉哉鄙見如此, 不識執事以爲如何? 如有未當, 願反復之, 以卒承敎之願, 千萬幸也

 

앞서 편지를 받은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군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니, 심부름꾼은 결국 다시는 답장을 찾으러 오지 않겠군요. 지금 생각건대 이미 회계(會稽)로 돌아오셨을 터인데, 근황은 다시 어떠하신지요? 시론(時論)이 날로 새로우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조주부(趙主簿)가 천태(天台)로 돌아가는 편에 이 편지를 부쳐 사례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는데 또 눈에 통증이 괴롭혀서 글을 많이 적을 수도 없고 몸소 글씨도 쓰지도 못했으니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습니다. 서로 천리(千里) 먼 곳을 바라보니 아득하여 서로 만나 뵐 기약이 없군요. 오직 철 따라 자중하시어 이 세상이 오히려 당신을 의지하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前此承書未久, 卽聞去郡, 來使遂不復來取報章. 今想已還會稽, 不審爲況復何如? 時論日新, 尙復何說趙主簿天台, 寓此爲謝. 不能盡所欲言, 又苦目痛, 不能多作字, 不得親書, 深以愧恨. 相望千里, 邈無晤見之期, 惟冀以時自重, 使斯世猶有賴焉, 則幸甚. 不宣.

 

 

서원민에게 답함 答徐元敏

 

 

해제이 글은 1169(건도 5, 기축, 40)에 서원민(徐元敏)에게 답한 편지이다. 곡례(曲禮)'무불경(毋不敬)'을 격언으로 삼아 생활하는 서원민의 학문 태도를 격려하고, 주경(主敬)과 치지(致知)를 수레의 두 바퀴로 삼아 끊임없이 공부해 나간다면, 결국 옛 습관을 극복하고 발전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지난번 편지를 보내면서 대충 적어 보낸 것이 한창 부끄러웠는데, 인편이 돌아올 때에 보내주신 답장 내용이 성근지고 지극하니, 저는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별지(別紙)에서 말해준 내용은 깨우쳐주심이 더욱 깊습니다. 다만 말의 뜻 사이에 겸손하게 낮추심이 너무 심하니, 저처럼 만학도가 감당할 것이 아닙니다. 삼가 두세 번 읽으니 더욱 두려움이 더해집니다. 그러나 삼가 당신의 은근한 뜻을 살펴보니, 대체로 곡례(曲禮)의 첫 장 내용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대강으로 삼아 행하기 쉬운 점을 기뻐하면서도 오래하기 어려움을 병통으로 여기셨더군요. 이것은 선을 택하기를 정밀히 하고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기를 간절히 한 사람이 아니라면 무슨 수로 여기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사우(師友)에게서 들은 것을 생각해 보니 그 큰 틀은 진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만 행하는데 힘쓰지 않아 하루는 따뜻하게 하고 열흘은 춥게 하며, 안일함을 즐기고 담론을 좋아하는 병통이 고명(高明)께서 염려하신 것보다 심하니, 이런 제가 만 분에 일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들으니, ()을 주장하는 것은 마음을 보존하는 요체이고, 앎을 다하는 것은 학문을 발전시키는 공부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아는 것은 날로 더욱 밝아지고 지키는 것은 더욱 견고해져서 잘못된 옛 습관이 저절로 마음속에서 날로 바뀌고 달로 변화될 것입니다. 들은 것이 이와 같지만 몸소 행해보지 못하는 것이니, 스스로 그것이 마땅한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감히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 다시 가르침을 주시어 덕으로 들어가는 방향에 미혹되지 않게 하신다면, 저는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昨者拜書, 方愧草率, 人還, 賜敎勤至, 區區悚仄已不自勝. 別紙垂誨, 警發尤深. 但詞意之間, 謙卑已甚, 非晩學小子所敢當. 伏讀再三, 益增恐懼. 然竊伏觀尊誨之微指, 大率以曲禮首章爲修己治人之大要, 喜其易行而病於難久. 此非擇善之精, 反躬之切, 何以及此? 顧念平昔所聞於師友者, 其大端誠不外是. 然行之不力, 一暴十寒, 其樂舒肆喜談謔之病殆有甚於高明之所患者, 而何能有以少補於萬分? 抑又聞之, 主敬者存心之要, 而致知者進學之功. 二者交相發焉, 則知日益明, 守日益固, 而舊習之非自將日改月化於冥冥之中矣. 所聞如此, 然躬所未逮, 不自知其當否. 敢因垂問之及而以質焉. 儻蒙矜憐, 還賜誨飭, 使不迷於入德之方, 千萬聿甚.

 

 

임정부 식에게 답함 答林正夫()

 

 

해제이 글은 1199(경원 5, 기미, 70)에 임정부(林正夫)에게 답한 편지이다. 성현들의 말씀은 모두 책 속에 들어 있고, 근세의 선각자들이 학문하는 단계와 방법을 이미 다 설명해 놓았으니,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공부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지인(知人)인 손봉길의 갑작스런 죽음과 유덕수의 원지 유배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고 토로하였다.

 

당신의 높은 기풍을 우러러 사모한 지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비록 다행스럽게도 거듭 뵐 인연을 가졌으나, 몹시 바빠서 충심으로 가르침을 받지 못하니, 지금도 한이 됩니다. 돌아와서 병을 앓게 되어 인간사를 다 폐하니, 글을 올려 안부를 물을 길이 없어 매번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번에 양통로[楊通老: 이름은 ()] 편에 문득 편지를 받으니 저에 대한 예가 지나치게 공손하여 사람을 더욱 두렵고 송구스러워 피할 곳이 없게 만드는군요. 그렇기는 하지만 고명(高明)께서 부탁하신 뜻이 어찌 하늘을 가리키고 해에게 맹세하면서 명성을 다투고 이익을 추구하는 장소로 서로를 불러들이려는 세상의 무리들과 같겠습니까? 더구나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말한다면 더욱 성()이 지극하시고 좋아하심이 돈독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감히 저의 고루한 생각을 숨기지 않고 스스로 당신의 덕에 붙고자 한 것입니다.

 

慕仰高風, 固非一日. 中間雖幸寅緣再見, 然苦悤悤, 不得款奉誨語, 至今以爲恨也. 歸來抱病, 人事盡廢, 無繇奉記以候起居, 每深馳跂. 今玆楊通老, 忽奉手誨之辱, 假借期許, 旣非愚昧之所敢當 : 而執禮過恭, 尤使人恐懼踧踖而無所避也. 雖然, 高明之所以見屬之意, 豈若世之指天誓日而相要於聲利之場者哉? 况在今日而言之, 尤足以見誠之至而好之篤. 是以不敢隱其固陋, 而願自附於下風焉.

 

일찍이 선생군자가 하신 말씀을 들으니, 부도(浮圖)를 살펴보는 자는 머리를 들고 둘러보면서 고상하게 담론하는 것보다는 머리를 숙이고 계단을 거쳐 점차로 나아가며 살펴보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밖에서 보는 자들은 비록 숭고하고 화려한 것이 아름다운 줄은 알지만 그 속에 들어간 자가 진실로 자신의 소유가 되게 하고 그 속에 층계를 쌓아 칸을 만든 것을 깊이 살필 수 있는 것만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성현들의 말씀은 모두 책 속에 들어 있습니다. 천하 후세에 가르침을 펴는 데 있어서 진실로 있는 힘을 다하였고, 근세 한 두 명의 선각자들이 또 문호를 가리키고 오르는 등급을 밝혀 주었으니, 앞뒤의 학자들이 여기로부터 들어간다면 마땅히 매우 쉽고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뜻을 둔 자도 혹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문제는 바로 한 번 밖을 관찰하여 대략 그럴 듯한 것을 보고는 곧 내가 이미 보았다하여 마침내 그 속에 다시 들어가서 진정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힘써 궁구할 계책이 없는 데 있습니다. 학문이 깊고 지키는 것이 바르신 고명(高明)께서는 자신에게 축적한 것을 이미 조정에 베풀고 논설에 보였으니, 이런 상황이라면 저의 말은 필요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문을 받았으니 헛되이 받기만 할 수는 없는데 제가 가진 것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만약 문하에 말씀드려 집사의 채택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또 제가 감히 편안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감히 다 말씀드리고 나서 가부에 대해서는 다시 편지를 기다리고 있으니 편지가 오면 마음을 비우고 서서 우러러 받들 것입니다.

 

蓋嘗聞之先生君子, 觀浮圖者, 仰首注視而高談, 不若俯首歷階而漸進. 蓋觀於外者雖足以識其崇高鉅麗之爲美, 孰若入於其中者能使眞爲我有而又可以深察其層累結架之所由哉? 自今而言, 聖賢之言具在方冊, 其所以幸敎天下後世者, 固已不遺餘力 : 而近世一二先覺又爲之指其門戶, 表其梯級, 而先後之學者由是而之焉, 宜亦甚易而無難矣. 而有志焉者或不能以有所至, 病在一觀其外, 粗覘彷彿, 而便謂吾已見之, 遂無復入於其中, 以爲眞有而力究之計. 此所以驟而語之, 雖知可悅, 而無以深得其味, 遂至半途而廢而卒不能以有成耳. 竊計高明所學之深, 所守之正, 其所蘊蓄蓋已施之朝廷而見於議論之實, 於此宜不待於愚言矣. 然旣蒙下問, 不可以虛辱 : 之所有不過如此, 若不以告於門下, 以聽執事者之采擇, 則又有非區區之所敢安者. 是以敢悉布之, 可否之決, 更俟來敎, 所虛佇而仰承也.

 

양통로(楊通老)가 여기에 있는 동안 서로 모여 매우 즐겁게 보냈습니다. 그가 옛날에 비해 갑작스런 진보를 한 것으로 보아 두 분이 절차탁마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겠습니다. 거리가 먼 관계로 갑자기 일어나 돌아가시게 되어 만류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 손봉길)는 어금니 통증을 앓았는데 용렬한 의원이 잘못 진단하여 시원하게 하는 약제[凉劑]를 투여했다가 하루 밤사이에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니, 매우 아프고 애석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찌 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유덕수(劉德修)는 기구하게 멀리 귀양가서 사람을 심란하게 하는군요. 그러나 평소 손님을 마주하고 말을 할 때면 매 번 귀양갈 것이라고 기필했다가 지금에서야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그 관계된 사안은 작지 않습니다. 기문(記文)을 써 보내왔기에 양통로에게 부탁하여 올려 보냈습니다. 이것을 받고 나서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시리라 생각이 드는군요. 원선(元善)은 삽천(霅川)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매우 편안하지 못하여 조만 간에 반드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자선(子宣)은 오늘에야 글을 얻었습니다. 저는 기운이 결려서 책상에 오래 엎드릴 수 없어, 글씨가 거칠고 또한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도 없었습니다. 바람 부는 곳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니 서글픈 생각이 한량없습니다. 당신께서 살펴주십시오.

 

通老在此相聚甚樂, 比舊頓進, 知有切磋之益. 惜其相去之遠, 忽起歸興而不可留也. 從之聞以牙痛爲庸醫所誤, 投以凉劑, 一夕之間遂至長往, 深可痛惜. 然此亦豈醫之所能爲哉? 德修崎嶇遠謫, 令人動心. 然聞其平居對客誦言, 固每以此自必, 乃今爲得所願. 然所關繫則不淺矣. 有寫其記文以來者, 已屬通老呈白, 想亦深爲廢卷太息也. 元善霅川, 殊不自安, 旦晩必歸. 子宣今日方得書也. 氣痞, 不能久伏几案, 作字草草, 且亦末能究所欲言. 臨風引領, 悵想亡量, 惟高明察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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