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백숭에게 답함(여자약․장자선과 함께) 答范伯崇 5 [주 ; 同呂子約․蔣子先]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5서)는 제6서 및 제7서와 함께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이후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주역』건괘, 특히 문언(文言)전의 내용에 대해 범백숭이 제시한 의견에 대한 주자의 답장이다. 역(易), 시(時), 도(道)의 개념에 관한 문제, 『주역』에서의 천(天)과 인(人)의 문제, 사덕(四徳)의 편언(偏言)과 전언(専言)에 관한 문제, ‘공(公)’개념과 ‘인(仁)’과의 관계 이외에도 『주역』건괘, 특히 문언(文言)전의 내용 하나하나가 문제가 된다. 이들의 학문적 이상이『주역』의 이해와 깊이 연관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편지이다. 또한 당시 이 두 사람은 정이천의『역전』을 거의 교과서처럼 여기면서, 이를 심화시켜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범백숭의 의견] [이천선생께서는] ‘역(易)은 변역(変易)함이니 때에 따라 변역하여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역(易)이니, 시(時)니, 도(道)니 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그것이 ‘흐르듯 운행하여 쉬지 않는다(流行不息)’는 측면에서 말하면 ‘역(易)’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 ‘미루어 변천되어 항상함이 없다(推遷無常)’는 측면에서 말하면 ‘時’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그처럼 드러나게 된 근거로서의 이치(其所以然之理)는 ‘도(道)’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時)’의 고금(古今)이 바로 ‘도(道)’의 고금(古今)이며, ‘시(時)’의 성쇠(盛衰)가 바로 ‘도(道)’의 성쇠(盛衰)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갓 그 변동(變動)이 무궁한 것만 보지 그 ‘시(時)’의 운행을 알지 못하며, 한갓 ‘시(時)’의 운행만 보지 그 ‘도(道)’의 행함은 알지 못합니다. ‘도(道)’가 ‘도(道)’인 참된 이유는 [그것이] 실로 조화(造化)의 추기(樞機)이며, 만물 생성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 도를] 따르고 쫓는다고는 하지만 따를 대상이나 쫓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기(一氣)가 운행되어 나감에 있어 저절로 그만둘 수 없는 어떤 점(所不得已)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른바 ‘역(易)에 태극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일설(一說)에 “당처(當處)가 곧 ‘시(時)’이며, 그 변동하여 머무르지 않고 왕래가 무궁한 것이 역(易)이며, 그 소이연자(所以然者)가 도(道)이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일설(一說)에 “역(易)은 도(道)의 생성작용이다. 이 때문에 [이천께서] ‘역(易)은 변역(変易)함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다. 이 때문에 [이천(伊川)께서] ‘때에 따라 변역하여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라고 했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결국 이상에서 말씀드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천께서는 ‘군자(君子)가 때를 따름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름에는 갈옷 입고 겨울에는 가죽옷 입으며,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실 뿐이니, 그 사이에 어찌 조금이나마 인위를 보탬이 있겠습니까, ‘시(時)’를 따를 뿐인 것이지요. ‘시(時)’가 이르면 스스로 좇아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때에 따라 변역하여 도(道)를 따른다(隨時變易以從道)’라고 했을 때의 [역(易), 시(時), 도(道)] 이 셋이 비록 명칭은 다른 듯하지만 [결국] ‘역(易)’과 ‘도(道)’는 애초부터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배우는 자의 본분이라는 관점에서 말해보겠습니다. 참으로 아직은 ‘역(易)’이라는 것을 제대로 모르는 상황이라면, [그런 사람이] 곧 ‘시(時)’에 맞추어 먹고 마시며 ‘시(時)’에 맞추어 갈옷을 입기도 하고 가죽옷을 입기도 하다가, [여기에] 조그마한 차질이라도 생기면 [상황에 따라 그가] 대응해나가는 것이 모두 어그러지게 되니 장차 무엇을 가지고 도(道)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일찍이 이런 점들을 가지고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천하의 온갖 변화를 충분히 [그 속에 다] 포함하지만 그 자체로 도(道)는 아닌 것, 그것이 바로 역(易)의 체(體)일까요? 일찍이 딱 자르듯 분리되거나 쪼개진 적이 없는 것 이것을 도(道)라 하는 것일까요? [이천께서 하신] ‘역(易)은 변역(変易)함이니 때에 따라 변역하여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라는 말은 ‘역(易)’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이는 인사(人事)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치(理)’에 나아가 말하자면, [모든 변화는] 하나의 원리에 따라 흘러 가 끝이 없습니다. [이 때 모든 변화는] ‘시(時)’의 이동과 변천이 있다하더라도 본래 저절로 일찍이 ‘그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에 그러한 것(所當然而然)’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로 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에 그러함(當然而然)’이야말로 곧 ‘도를 따르는 것(從道)’입니다. 사람(人)에 나아가서 말하자면, ‘역(易)’을 알지도 못하고 체득(體)할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은 곧 ‘시(時)’가 변천해도 이를 알지 못하기에 드디어 거꾸로 행동하고 반대로 베풀어(倒行逆施) 그 ‘시(時)’에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바(其時之所當然)를 어기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성현(聖賢)은 [나와 세계의] 무궁한 변화(流行無窮)의 와중에서도 [역리(易理)를] 인식하고 이를 체득하고 있으므로 그의 몸 자체가 곧 ‘역(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변역(變易)하여 도(道)를 따름’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른바 ‘때(時)를 따라 변역(變易)하여 도(道)를 따른다’는 것은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 대처해나감(時中)’이라는 말과 같을 뿐입니다. [주 ; ‘道’를 곧바로 ‘中’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時中’이라는 말을 빌려 [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에 대해 그대는] 옳다고 보십니까 그르다고 보십니까?
[선생의 답변] ‘역(易)’은 괘효(卦爻)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건괘(乾卦)에서 [괘효의 위치에 따라] 잠(潛)․현(見)․약(躍)․비(飛)와 같은 [서로 다른 상(象)을 제시하고 있는] 경우들을 볼 때, 곧 ‘때(時)를 따라 변역(變易)하여 도(道)를 따른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지를 알 수 있습니다.
‘易, 變易也, 隨時變易以從道也. ’易也, 時也, 道也, 皆一也. 自其流行不息而言之, 則謂之易 : 自其推遷無常而言之, 則謂之時 : 而其所以然之理, (4-1813)則謂之道. 時之古今, 乃道之古今 : 時之盛衰, 乃道之盛衰. 人徒見其變動之無窮也, 而不知其時之運也 : 徒見其時之運也, 而不知其道之爲也. 道之爲道, 實造化之樞機, 生物之根本, 其隨其從, 非有所隨․有所從也, 一氣運行, 自有所不得已焉耳. 所謂易有太極, 其此之謂歟? 一說當處便是時, 其變動不居․往來無窮者, 易也. 其所以然者, 道也. 一說易, 道之生也, 故曰‘易, 變易也.’ 然易有太極, 故又曰‘隨時變易以從道也.’ 故伊川曰: ‘君子順時, 如影之隨形, 可離非道也.’ 夏葛冬裘, 饑食渴飮, 豈有一毫人爲加乎其間哉, 隨時而已. 時至自從而自不可須臾離也. 以是知‘隨時變易以從道’, 三者雖若異名, 而易之於道, 初無兩物也.
然自學者分上言之, 苟未識夫所謂易, 則時食而飮, 時葛而裘, 毫釐之差, 其應皆忒, 則將以何爲道哉? 又嘗以是思之, 盡天下之變而己不自道者, 其易之體歟? 未嘗截然離析者, 其斯之謂道歟? ‘易, 變易也, 隨時變易以從道也’, 此指易而言, 謂人事也. 以理言之, 一流行而無窮, 則時之遷移固自未嘗不隨其所當然而然也. 當然而然卽從道也. 就人言之, 衆人不識易而不能體, 則時旣遷而不知, 遂以倒行逆施而違其時之所當然. 惟聖賢之流行無窮而識之體之, 其身(4-1814)卽易, 故能變易以從道. 所謂‘隨時變易以從道’, 猶曰時中云耳. [주 ; 道不可直謂之中, 姑借‘時中’而言耳.] 未知是否?
‘易’指卦爻而言, 以乾卦之潛․見․躍․飛之類觀之, 則‘隨時變易以從道’者可見矣.
[범백숭의 의견] ‘천하의 움직임(動)을 보아 그것을 회통(會通)해서 살피며, 그 전례(典禮)를 행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만, 먼저 ‘동(動)’이라는 한 글자를 관찰하면 곧 회통(會通)할 줄 알게 되는 것은 [그 동(動)이] 변동(變動)의 대요(大要=總)이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일은 무궁히 변동하지만, 이와 같이 무궁한 변동에 이르게 되는 근거(所以)에는 반드시 [무궁히 변동하는 천하의 일들이] 말미암는 단서(端由)가 되는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일이 바로 온갖 변화가 대요(大要=總)로 삼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천하의 움직임의 [실체를] 깨닫고 있기에 눈만 뜨면 곧 저 모든 변동(變動)이 대요(大要=總)로 삼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이 무궁하게 아무리 도도(滔滔)히 변해나간다 해도 [성인은] 그 강목(綱目)을 꿰뚫고 있어서, 사사물물마다 그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其所當然)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전례(典禮)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전례(典禮)는 사물 속에 있는 것으로서 마땅히 그러함(當然者)인 것입니다. 일설(一說)에 “‘살펴서 회통(會通)하며, 그 전례(典禮)를 행한다’라 할 때의 회통(會通)은 강요(綱要)이며 사물의 추(樞)이다. ‘살펴서 회통(會通)함’은 ‘앎이 이름(知至)’라 말하는 것과 같고, ‘전례(典禮)를 행함’은 ‘[앎을 바탕으로 실천에] 도달함(至之)’이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아비는 아비다워야 한다’거나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을 회통(會通)해보면 오직 자(慈)와 효(孝)일 뿐입니다. 아비는 자애로움(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성스러움(孝)에 머무르는 등, 각각 [따라야 할] 법칙에 따라 머무를 수 있게 되면 이것이 바로 그 전례(典禮)를 行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비를 아비답게 만들어주는 자애로움과 자식을 자식답게 만들어주는 효성스러움을 알지 못한다면 장차 무엇을 시작으로 하여 그 예(禮)를 실천해나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또 다른 일설(一說)에는 “회통(會通)은 모아서 또 소통시키는 것(會而且通)이다”라고 합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입장이 옳은 것입니까?
[선생의 답변] ‘회(會)’는 물건(物)이 모인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통(通)’은 일(事)이 마땅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有以見天下之動而觀其會通, 以行其典禮者, 聖人事也’. 先觀‘動’之 一字, 則知會通者, 變動之總也. 天下之事變動無窮, 而其所以至於如此變動無窮者, 必有一事爲之端由也. 此一事者, 萬變之所總也. 聖人則有以見天下之動而擧目卽觀夫變動之所總, 故無窮之事變滔滔然各入其綱目, 而事事物物各處之以其所當然, 所謂行其典禮也. 典禮, 事物中之所有而當然者也. 一說‘觀會通以行典禮’, 會通, 綱要也, 事物之樞也. 觀會通猶云‘知至’, 行典禮猶云‘至之’也. 如父父․子子之會通, 惟慈孝而已. 至於父止於慈․子止於孝, 各止其則, 是乃行其典禮也. 苟不知父父之慈․子子之孝, 則將何自而行其禮乎? 一說‘會通’, 會而且通也. 未知孰是?
‘會’以物之所聚而言, ‘通’以事之所宜而言.
[범백숭의 의견] 성인(聖人)은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입니다. 그러나 아직 [성인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천지에] 이런 저런 모든 이치(始終之理)는 비록 갖추어져 있다 해도 [이를] 크게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전(彖傳)에서] ‘구름이 가고 비가 내려 만물이 형체를 갖추니, [이에] 성인(聖人)이 나와서 천도(天道)의 처음과 시작을 크게 밝히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괘(卦)의 육위(六位)는 ‘시(時)’에 따라 [한꺼번에] 모두 갖추어진 것이어서 점차적인 순서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인이] ‘때로 여섯 용(竜)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님’으로써 변화가 무궁해지는 것입니다. 천지(天地)가 제 자리를 잡으면서, 이 이치는 본래 [한꺼번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聖人)이 능력을 발휘해야 이치가 크게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은 하늘이고, [이를] 밝히는 것은 사람입니다. [선생께서는 ‘[내가 글로써 병통을] 없앤 곳(抹處)은 말이 매우 교묘하긴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매우 심각합니다’라고 비판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의 답변] [주역, 건괘, 단전에서] ‘위대하다, 건원(乾元)이여!(大哉乾元)’에서부터 ‘만물이 형체를 갖춘다(品物流形)’는 곳까지는 원(元)과 형(亭)의 뜻을 말한 것이고, ‘시작과 끝을 크게 밝힌다(大明終始)’에서부터 ‘하늘을 날아다닌다(以御天)’까지는 성인(聖人)이 [천도의] 원(元)과 형(亨)의 용(用)을 체득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聖人, 生而知之者也. 然未生於天地之間, 則始終之理雖具, 而大明之者誰(4-1815)乎? ‘雲行雨施, 品物流形, 聖人出焉, 大明天道之終始’, 便是卦之六位應時俱成, 更無漸次, 由是時乘六龍以御天而變化無窮焉. 天地設位, 理固皆具 : 聖人成能, 理乃大明. 具者天也, 明者人也. [先生批云‘抹處說得甚巧, 然極有病.’]
自‘大哉乾元’ 至 ‘品物流形’, 是言元亭之義 : ‘大明終始’至‘以御天’, 是說聖人體元亨之用耳.
[범백숭의 의견] 사덕(四德)가운데 원(元)을, 오로지 말하면(즉 專言하면) 곧 온전한 본체 자체의 낳고 낳는 이치(生生之理)입니다. 이 때문에 사덕(四德) 전체를 포괄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덕(四德)가운데 원(元)을] 치우쳐 말하면(즉 偏言하면) 이는 곧 만물이 발생하는 시작(端)을 가리킬 뿐입니다. 따라서 이는 한 가지 일에 그칩니다.
[선생의 대답] 공자(孔子)께서 ‘인(仁)’을 말씀하셨는데, [이 경우의 인(仁)은] 전언(專言)한 경우입니다. 맹자(孟子)께서는 ‘인의(仁義)’를 말씀하셨는데, [이 경우의 인(仁)은] 편언(偏言)한 경우입니다.
四德之元, 專言之則全體生生之理也, 故足以包四者. 偏言之則指萬物發生之端而已, 故止於一事.
孔子之言仁, 專言之也. 孟子之言仁義, 偏言之也.
[범백숭의 의견] ‘대화를 보합한다(保合大和)’는 것은 곧 이 생리(生理)를 보합(保合)한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기운이 얽히고 설킴(天地氤氳)’이란 이에 천지가 이 ‘만물을 낳은 이치(生物之理)’를 보합(保合)하여 조화(造化)작용을 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만물이 변화 생성된 이후에는 곧 만물 각자가 그 생리(生理)를 보합(保合)해 나갑니다. 만약 [만물 각자가 각자의 생리(生理)를] 보합(保合)하지 못하면 그 사물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선생의 답변] ‘각기 성명(性命)을 바룬다(各正性命)’는 것은 그 품부(禀賦)된 처음을 말한 것이고, ‘대화를 보합한다(保合大和)’는 것은 이미 받은 이후에 말한 것입니다. 천지 만물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서로 관련이 없는] 두 구절로 여겨 말씀해서는 안 됩니다.
‘保合大和’, 卽是保合此生理也. ‘天地氤氳’, 乃天地保合此生物之理, 造化不息. 及其萬物化生之後, 則萬物各自保合其生理, 不保合則無物矣.
‘各正性命’, 言其禀賦之初 : ‘保合大和’, 言於旣得之後. 天地萬物蓋莫不然, 不可作兩節說也.
[범백숭의 의견] ‘나타난 용이 밭에 있다는 것은 덕을 널리 베풂이요(見龍在田, 德施普也)’라고 한 것은 흡사 ‘바야흐로 해가 솟아올라 비록 아직 중천(中天)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 햇볕을 누구나 쪼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의 답변] 구이(九二)는 임금의 덕(君德)이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구오(九五)의 자리에 도달한 연후에 그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見龍在田, 德施普也’. 如日方升, 雖未中天, 而其光已無所不被矣.
九二君德已著, 至九五然後得其位耳.
[범백숭의 의견]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다(元者, 善之長也)’라 했는데, 이 또한 인(仁)일 뿐입니다. 인(仁)을 체득하면 [백성들이 지닌] 각종 질병이나 고통을 모두 내 몸에 절실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 때문에 ‘남의 우두머리가 될 만한 것(足以長人)’입니다.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요(亨者, 嘉之會)’라 했을 때, ‘회(會)’는 ‘통(通)한다’는 것이니 ‘만나서 서로 통한다(會而通)’는 것입니다. ‘통(通)’에는 ‘사귄다(交)’는 뜻이 있습니다. ‘가회(嘉會)’는 경사스런 모임(慶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서로 만나서 사귀더라도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인(小人)들이 모여 함께 모의(同謀)할 경우, 그들의 정리가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모임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러한 모임에 어찌 형통함이 있겠습니까? ‘이(利)는 의(義)에 화함이요(利者, 義之和)’라 했는데, 이는 의(義)에 和合하게 되면 곧 이롭다(利)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물건을 이롭게 함이 족히 의(義)에 조화된다(利物足以和義)’고 한 것입니다. 대개 의(義)란 마땅함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 대처해 나감이 마땅함을 얻게 되어 물정을 거스르지 않게 되면, 이것이 곧 이른바 이로움(利)인 것이지요. 이로움이란 곧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이로움이] 어찌 의로움과 조화할 수 없겠습니까? ‘정(貞)은 일의 근간이다(貞者, 事之榦)’라 했습니다. 이는 철두철미 부족하거나 빠트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만났을 때, 흔히 쇠약하고 나태해져 그 평소의 뜻(素志)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정고(貞固)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정고(貞固)함이 족히 일의 근간이 될 수 있다(貞固足以幹事)’고 한 것입니다. 문언(文言)에서는 대체로 사덕(四德)을 인사(人事)에 나아가 말했습니다. ‘군자(君子)가 인(仁)을 체행한다(君子體仁)’는 말 이하는 건(乾)의 덕(德)을 체득하여, 행사(行事)에 드러내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말 끝에] ‘군자(君子)는 이 사덕(四徳)을 행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건(乾)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정(貞)하다 한 것이다.(君子行此四德者, 故曰乾, 元․亨․利․貞.)’라는 말을 덧붙힌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아름다운 것들의 모임(嘉之會)’이란 뭍 아름다운 것들이 모인다는 것이니, 예를 들어 만물이 자라남에 [각각이] 무성하고 번창하게 되면 약속하지 않아도 저절로 모여들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군자가 그 모임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예에 부합될 수 있다는 것이니, ‘모든 행동거지가 두루 예(禮)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로움(利)’은 의로움(義)이 조화를 이룬 곳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義’에는 分別하여 잘라낸다(斷割)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에 불화(不和)한 것으로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을] 실천하여 각각 그 마땅함을 얻게 되면 이것이 바로 화(和)이며, 이것이 바로 군자가 이른바 ‘이로움(利)’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만물로 하여금 각자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니 ‘자기 스스로만을 이롭게 하는 사사로움(自利之私)’이 아닙니다. ‘간(榦)’은 우리 몸에 뼈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담 쌓을 때 세우는 나무를 ‘정간(楨榦)’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를 미루어 나가보면 정(貞)의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元者, 善之長也’, 亦仁而已. 體仁則痒痾疾痛擧切吾身, 故足以長人. (4-1816)‘亨者, 嘉之會’, 會, 通也, 會而通也. 通有交之意, ‘嘉會’猶言慶會. 會通而不嘉者有矣, 如小人同謀, 其情非不通也, 然非嘉美之會, 又安有亨乎? ‘利者, 義之和’, 和合於義卽利也. 利物足以和義, 蓋義者得宜之謂也. 處得其宜, 不逆於物, 卽所謂利. 利則義之行, 豈不足以和義乎? ‘貞者, 事之榦’, 徹頭徹尾不可欠闕. 人之遇事, 所以頹惰不立而失其素志者, 不貞故也. 此所謂‘貞固足以幹事’. 文言四德大槪就人事言之, 自‘君子體仁’以下, 體乾之德, 見諸行事者也. 是以係之曰: ‘君子行此四德者, 故曰乾, 元․亨․利․貞.’
‘嘉之會’, 衆美之會也. 如萬物之長, 暢茂蕃鮮, 不約而會也. 君子能嘉其會, 則可以合於禮矣. 如‘動容周旋, 無不中禮’是也. 利是義之和處. 義有分別斷割, 疑於不和, 然行而各得其宜, 是乃和也, 君子之所謂利也. 利物, 謂使物各得其所, 非自利之私也. ‘榦’猶身之有骨, 故板築之栽謂之楨榦. 推此可以識貞之理矣.
[범백숭의 의견] ‘건(乾)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이 있는 것’은 흡사 ‘성(性)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의 답변] 이 말은 매우 온당(穩當)합니다.
‘乾, 元亨利貞’, 猶言 ‘性, 仁義禮智’.
此語甚穩當.
[범백숭의 의견] [건괘의] 초구(初九)는 용덕(竜徳)을 가지고 잠잠하게 은둔해 있는 경우이니, 이는 다만 그 스스로 믿고 스스로 즐긴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구이(九二)에 이르러 땅 위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 순수하여 그치지 않는 공’을 비로소 드러내는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잠(潛)’이란 숨어 있어 아직은 드러나지 않으며, 실천한 것이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덕(德)은 이미 완전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初九龍德而潛隱, 止言其自信自樂而巳. 至九二出見地上, 始見其純亦不已(4-1817)之功也.
潛者, 隱而未見, 行而未成, 德雖已完, 特未著耳.
[범백숭의 의견] 이미 허물없는 경지에 [확고히] 자리하게 되면 오직 ‘사특함을 막아 순수히 경(敬)한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허물이 없다(無過)고 말하더라도 [사특함을] 막지 않으면 [결국은] 허물이 있게 됩니다. ‘뜻이 확고하여 뽑을 수 없는 것(確乎其不可拔)’이란 ‘물러나 은둔해 있기에 그 지조를 바꿀 수 없음’만을 오로지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하고 즐거워하며, 실천하고 위배함(憂樂行違)이 [오직] ‘시(時)’에 따를 뿐이어서, [아무도] 그가 지켜나가는 것을 빼앗을 만한 정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부귀(富貴)조차도 [그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貧賎)조차도 [그의] 절개를 옮겨놓지 못할 정도(富貴不淫, 貧賤不移)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충(忠)과 신(信), 말을 닦음(忠信修辭)’이란 ‘덕(徳)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아나가는 방법’에 관해 큰 강령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를 것을 알고 마칠 것을 안다(知至知終)’고 한 것은 곧 그 시작과 마침에 따른 공부(工夫)의 순서가 이와 같음을 상세히 말한 것이니, 친절(親切)하고 진밀(縝密)하여 조금의 간극(間隙)도 없습니다. 충(忠)과 신(信)이 곧 실질적인 내용을 채워주는(著實) 터전(根基)인데, 터전이 부실(不實)하다면 어찌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닦고 정성을 세움(修辭立誠)’에 대해서는 단지 평소 말하거나 침묵하는 즈음에 그 기운이 어떠한지를 통해 [이를] 징험할 수 있으니 생각을 한 후에 말하는 것과 생각 없이 말하는 것 사이에는 의미(意味)가 저저로 달라집니다. 명도(明道)께서 이른바 ‘자기 스스로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의 실질적인 일(實事) 자체를 체험(體當)하라’고 한 것은 단지 ‘흘러나오는 말이 평이(平易)한가 조망(躁妄)한가’를 잘 관찰해보면, 곧 그 덕(德)의 두텁고 엷음(厚薄)과 그 수양의 얕음과 깊음(淺深)의 정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데를 안다(知至)’는 것은 그 도(道)가 머무르는 곳을 안다는 것이고, ‘그곳에 이른다(至之)’는 것은 실천에 옮겨 그가 알고 있던 것을 징험해본다는 것입니다. ‘마침을 안다(知終)’는 것은 그 도(道)의 극치를 본다는 것이고, ‘그것을 마무리한다(終之)’는 것은 힘써 실천해나감으로써 귀착지(歸宿之地)에 도달할 것을 기약한다는 것입니다. ‘앎을 바탕으로 실천해 나가고(知而行), 실천을 통해 알아나간다(行而知)’는 것은 [지(知)와 행(行)이] 상호 경발(警發)되어 그 도(道)가 날이 갈수록 더욱 빛난다는 것입니다. ‘종일토록 힘쓰고 힘쓴다(終日乾乾)’고 했으니 또한 어찌 한 순간이라도 쉴 수 있겠습니까? [건괘] 구삼(九三)에서는 비록 성인(聖人)의 학(學)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 실제 내용을 볼 때, 위 아래를 소통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보통의] 배우는 자들 역시 힘쓸만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건괘 구삼효를 통해] 성학(聖學)의 연원(淵源)이 거의 남김없이 발휘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답변] 충(忠)과 신(信)은 마음(心)의 문제이고, 말을 닦는 것(修辭)은 일(事)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온축되어 있던 것이 일에 드러나는 것인 만큼, 일을 닦아나감을 통해 그 마음을 수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聖人의 學에서는 안과 밖 양면이 함께 나아가게 하지, [내외(內外)를] 판연히 다른 두 가지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지지(知至)’와 ‘지지(至之)’의 경우는 ‘지(至)’에 주안점이 있고, ‘지종(知終)’과 ‘종지(終之)’의 경우는 ‘종(終)’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이에 관한 정자(程子)의 학설은 매우 분명합니다.
旣處無過之地, 則唯在閑邪純敬而已. 雖曰無過, 然而不閑則有過矣. ‘確乎其不可拔’, 非專謂退遯不改其操也. 憂樂行違, 時焉而已, 其守無自而可奪. 如富貴不淫, 貧賤不移之意. ‘忠信修辭’, 且大綱說所以進德修業之道. ‘知至知終’, 則又詳言其始終工夫之序如此, 親切縝密, 無纖悉之間隙. 忠信便是著實根基, 根基不實, 何以進步? 修辭立誠, 只於平日語黙之際, 以氣上驗之, 思與不思而發, 意味自別. 明道所謂‘體當自家敬以直內․義以方外之實事’者, 只觀發言之平易躁妄, 便見其德之厚薄, 所養之淺深矣. ‘知至’則知其道之所止, ‘至之’乃行矣而驗其所知也. ‘知終’則見其道之極致, ‘終之’乃力行而期至於所歸宿之地也. ‘知而行, 行而知’者, 交相警發而其道日益光明, 終日乾乾, 又安得一息之間哉? 九三雖曰聖人之學, 其實通上下而言, 學者亦可用力. 聖學淵源, 幾無餘蘊矣.
忠信, 心也 : 修辭, 事也. 然蘊於心者, 所以見於事也 : 修於事者, 所以養其心也. 此聖人之學所以內外兩進, 而非判然兩事也. ‘知至’․‘至之’主至, ‘知(4-1818)終’․‘終之’主終, 程子此說極分明矣.
[범백숭의 의견] ‘오르고 내림에 일정함이 없’고 ‘나아가고 물러감에 항상함이 없는 것’이 간사함이나 굽힘이 되지 않으며, 동류(同類)를 떠남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마음이 처(處)한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선생의 답변] ‘시(時)’에 따라 변동(變動)해 나가며, 고요할 때에도 그 마땅함을 상실하지 않으니, [이것은] 이에 ‘덕(徳)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아나간’ [결과 얻게 된] 결실입니다.
上下無常, 進退無恒, 非爲邪枉, 非離群類, 則其心之所處果安在哉?
隨時而變動, 靜不失其宜, 乃進德修業之實也.
[범백숭의 의견]『유서(遺書)』에서 ‘인도(仁道)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나, 오직 ‘공(公)’이라는 말이 [인도(仁道)에] 가깝다’고 했습니다만, 이는 ‘공(公)’으로 ‘인(仁)’을 풀이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공정성(公)을 잃지 않고 있을 때 저절로 인(仁)의 기상을 묵묵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공(公)’은 그 자체로 ‘인(仁)’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公)’해야만 이에 인(仁)할 수 있습니다. 인(仁)의 기상(氣象)도 여기서 참으로 묵묵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는 자는 인(仁)에 대해 그저 알고자 하기만 해서는 안 될 뿐입니다.
遺書云: ‘仁道難言, 唯公近之’, 非以‘公’訓仁, 當公之時, 仁之氣象自可黙識.
公固非仁, 然公乃所以仁也. 仁之氣象於此固可黙識, 然學者之於仁, 非徒欲識之而已.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6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6서)는 제5서 및 제7서와 함께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이후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논어(論語)』의 내용에 대해 범백숭이 제시한 의견에 대한 주자의 답장이다. 『논어(論語)』,「학이(学而)」편, 제1장에 대한 사상채의 학설에 대한 토론,「헌문(憲問)」편, 제23장에 나오는 ‘범(犯)’의 문제,「위정(為政)」제9장에 안회(顔回)와 연관된 “亦足以発”의 문제 이외에도「위정(為政)」제10장 제11장과 제22장 및「팔일(八佾)」제15장 등의 내용이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
[범백숭의 의견] “[논어에] ‘동지(同志)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했는데, 평소 들은 것으로 징험해보건대 부절(符節)을 합한 듯하여 조금의 차질도 없다.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상채(上蔡)로부터 나온 말입니다만 그가 한 본래의 말은 너무 광활해서 그 요점을 뽑은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선생의 답변] 이 경우는 다만 뜻이 서로 부합하고 도가 같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선생(謝先生)께서는 조금의 차질도 없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지나친 말이라 볼 수밖에 없겠군요.
‘有朋自遠方來, 以平生之所聞驗之, 若合符節而無絲髮之差, 豈不樂哉.’ 此出於上蔡, 而其本說太廣, 撮其要如此.
此但以志合道同, 故可樂. 謝先生謂無絲髮之差, 不免過言.
[범백숭의 의견] 임금을 섬기면 임금의 그른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데, [임금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訐)을 정직(直)이라고 여기는 그러한 정도에 이르지는 않으면서 임금의 그른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大人의 일입니다. 효제(孝悌)는 참으로 순종(順從)하는 덕(德)입니다. 그러나 나아간 바에 천심(淺深)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효제의 덕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반드시 모두가 다 대인(大人)이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범안(犯顔)하여 극간하는 것은 애군(愛君)을 위주로 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자로(子路)에게 고하신 말씀 가운데에도 “속이지 말고 얼굴을 대놓고 간쟁해야 한다(勿欺也而犯之)”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범상(犯上)’이란 아마도 이와는 같지 않은 듯하며, 다만 벼슬길에 나와 공(公)이나 경(卿) 등 무릇 자기보다 위에 있는 상관들을 섬기는 자가 [자신이 가정에서 익혀온] 효심(孝心)을 옮겨다 그들을 섬길 수 있다면 ‘범분(犯分)’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범상(犯上)’을 오로지 임금 섬기는 데만 적용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무릇 자기 위에 있는 사람이 모두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임금 섬기는 것이 이와 같다면 그 나머지 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맹자께서는 “오직 대인(大人)이라야 군주의 나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惟大人爲能格君心之非)’고 하셨는데, 목왕(穆王)이 백경(伯冏)에게 “허물을 바로잡고 잘못을 바로잡아 자신의 나쁜 마음을 바루어 줄 것(繩愆紏繆, 格其非心)”을 명령한 것을 보면 [백경(伯冏)이] 반드시 대인(大人)인 것은 아닙니다. 이전의 현인 들 중 동중서(董仲舒)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은 [소극적으로나마] 모두 그 임금으로 하여금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나쁜 짓을 할 수 없도록 한 사람들이니, 이들 역시 ‘그 옳지 못한 마음을 바로잡은(格其非心)’ 경우에 속합니다.
事君則能格其非心. 不至於以訐爲直, 格君心之非者, 大人之事. 孝悌固是順德, 然所造有淺深, 未必皆能大人之所爲也. 犯顔而諫, 主於愛君. 夫子之告(4-1819)子路, 亦曰‘勿欺也而犯之’. 然則所謂犯上者, 恐不如此, 直謂出事公卿, 凡在己上者, 能移孝心以事之, 不至犯分而已.
犯上不必專爲事君, 凡在己上者皆是. 擧事君如此, 則其他可知. 孟子曰: ‘惟大人爲能格君心之非’, 而穆王命伯冏以繩愆紏繆, 格其非心, 則不必大人也. 前賢如董仲舒之流非一人, 皆能使其君愧畏而不敢爲非, 是亦格其非心也.
[범백숭의 의견] [상채선생은] “『예기(禮記)』에 ‘말은 좋게 하고자 한다.(辭欲巧)’라고 했고,『시경(詩經)』에서 중산보(仲山甫)를 찬미하면서 ‘위의가 훌륭하고 안색이 훌륭하다(令儀令色)’이라 했으니,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한다(巧言令色)고 해서 모두 불인(不仁)한 것은 아니다”고 했고, “만약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데, 덕(德)이 이에 동반되지 않아서 그저 남이 보고 듣는 것을 기쁘게 하는 수준이라면, 이는 그 본심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안에 간직한 것이 밖에 드러나는 것이니만큼 [군자는] 그 얼굴빛은 반드시 경건히 하고 곱게 하는 데는 뜻을 두지 않으며, 그 말은 반드시 순(順)하게 하고 좋게 하는 데 뜻을 두지는 않는 것입니다. 君子가 道를 귀하여 여김이 이런 정도입니다. 시인(詩人)이 중산보(仲山甫)의 덕(德)을 찬미하면서 ‘교언령색(巧言令色)’이라 일컫지는 않았으며. [예기(禮記)』에 말한] ‘사욕교(辭欲巧)’란 말도 ‘정욕신(情欲信)’이라는 윗 문장을 이어서 한 말이니, 대개 ‘이미 성심(誠心)이 있으면 반드시 훌륭한 사령(辭令)이 동반 된다’는 것일 뿐이어서, [상채의 말과 같이 교언령색(巧言令色)한다고 해서 모두 불인(不仁)한 것은 아니다]라는 이런 것과는 뜻이 다릅니다. ‘드물다(鮮)’라는 것은 말을 할 때 곱고 미세(婉微)하다는 느낌을 부여하는 바탕이 되는 말이니, 이른바 말이 박절(迫切)하지 않은데도 뜻은 이미 이해되도록 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鮮)’이라는 말 대신에] ‘모두 불인(不仁)한 것은 아니다(非盡不仁)’라고 말하게 되면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경우’ 가운데서도 가끔은 ‘인(仁)하다’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 되니, 아무래도 의미상에서 편안하지 못합니다. 또 [상채께서는] ‘덕(德)이 동반되지 않기 때문에 인(仁)한 경우가 드물다’고 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언령색(巧言令色) 자체가 이미 바르지 않은 것인데 어찌 다시금 ‘덕(德)이 동반되지 않기 때문에...’ 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의 답변] ‘말은 좋게 하고자 한다.(辭欲巧)’는 것은 단장취의(斷章取義)한 것입니다. 덕(德)이 있는 사람은 비록 말을 좋게 하고, 안색을 곱게 하더라도 해(害)가 없습니다. 만약 [덕이 없는 상태에서] 한갓 말을 좋게 하고 안색을 곱게 하기만 한다면 소인(小人)일 뿐입니다.
‘記曰辭欲巧, 詩美仲山甫而以令儀令色稱之, 則巧言令色非盡不仁也. 若巧言令色而無德以將之, 以是說人之觀聽, 此之謂失其本心, 焉得仁? 有諸中而形諸外, 則其色必莊而韭有意於令, 其辭必順而非有意於巧. 君子所以貴乎道者如此, 詩人所以美仲山甫之德而非巧言令色之謂也’. ‘辭欲巧’自承上文‘情欲信’爲說, 蓋曰旣有誠心, 須善辭令以將之耳, 與此異旨. ‘鮮’者立言婉微之體, 所謂辭不迫切而意已獨至者. 若謂‘非盡不仁’, 則巧言令色有時而仁矣, 義恐未安. 又曰‘無德以將之, 故鮮仁. ’竊謂巧言令色其本已不正, 何能復有德以將之耶?
‘辭欲巧’乃斷章取義, 有德者言雖巧, 色雖令無害, 若徒巧言令色, 小人而已.
[범백숭의 의견] “약속을 의리(義理)에 가깝게 하면, [그 약속한 말을 실천할 수 있다...](信近於義...)”는 [공자의 말씀에 대한] 횡거(橫渠)의 설(說)과 사설(謝說)은 같지 않습니다. 만약에 횡거(橫渠)의 설(說)과 같다면 ‘치욕을 멀리 한다(遠耻辱)’는 한 구절은 아마도 통하지 않을 듯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장의 주제가 ‘시작단계에서 신중하라(謹始)’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은 반드시 ‘의(義)’에 가깝게 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후에 [그 말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손함(恭)을 반드시 예에 가깝게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치욕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친(親)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친(親)하게 대함으로써 감히 친함을 잃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마루(宗)로 삼을만한 사람이 아닐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은 『예기(禮記)』,「치의(緇衣)」편에 나오는 바] “말을 할 때는 반드시 그 마칠 바(즉 말을 실천하는 것)를 염려해야 하며, 행동할 때는 반드시 가려져 있는 것(즉 실천에 장애가 있을 수 있는 말단의 편벽된 것)을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이 논의는 자못 좋습니다.
‘信近於義’, 橫渠說與謝說自不同. 如橫渠說‘遠耻辱’一句, 恐不通. (4-1820)竊謂此章意在謹始, 如言須當近義, 慮其後之不可復也. 恭須當近禮, 恐其自貽耻辱也. 不敢失親於可賤之人, 懼其非所可宗也. 有言必慮其所終, 行必稽其所敝之意.
此論頗善.
[범백숭의 의견] [『논어(論語)』에서] ‘물러간 뒤에 그 사생활(私生活)을 살펴봄에 충분히 발명(発明)하니(退而省其私, 亦足以發)’라 했습니다만, ‘사(私)’를 ‘사실(私室)’로 본 것은 고주(古注)의 설(說)과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듯 합니다. 저의 생각에 ‘사(私)’는 ‘안자(顔子)가 스스로 받아 응용해 나간 곳(自受用處)’인 듯합니다. 부자(夫子)께서 물러나 가만히 살펴보시고서는 ‘또한 [안회가] 나를 계발시키기에 충분하구나’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주 ; 이 한 구절은 유대신(游大信)의 학설입니다.] 대개 안자(顔子)가 아니라면 부자(夫子)의 말씀을 깊이 깨우칠 수가 없고, 부자(夫子)가 아니라면 안자(顔子)가 잠심(潛心)한 이유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사(私)’를 ‘안자(顔子)가 스스로 받아 응용해 나간 곳(自受用處)’이라고 본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물러난다(退)’는 것은 부자(夫子)가 물러나신 것이 아니라, 안자(顔子)가 물러난다는 말입니다. ‘발(發)’은 ‘계발(啓發)’한다는 뜻이니, 처음에는 바보와 같이 계발(啓發)하는 곳이 없는 듯 하였는데, 이제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니 이에 [스스로] 계발(啓發)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계(啓)’는] ‘계여(啓予)’라 할 때의 ‘펴다. 열어주다(啓)’와는 같지 않습니다.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以‘私’爲私室, 如古注說, 恐未安. 竊謂‘私’是顔子自受用處, 夫子退而黙省之, 以爲亦足以啓予矣. [주 ; 此-句游大信說.] 蓋非顔子不能深喩夫子之言, 非夫子不足以知顔子之所以潛心也.
以‘私’爲顔子自受用處恐未安. 退非夫子退, 乃顔子退也. 發, 啓發也, 始也 如愚人似無所啓發 今省其私 乃有啓發 與 ‘啓予’ 之 ‘啓’ 不同.
[범백숭의 의견] ‘시기소이(視其所以)’[로 시작되는] 이 장(『논어(論語)』,「위정(爲政)」편, 제10장)은 대개 윗 문장(『논어(論語)』,「위정(爲政)」편, 9장)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니, [9장에서] “물러나와 그 편한 곳을 살펴본다(退而省其私)”고 했기 때문입니다. ‘私’는 편안한 곳을 말합니다.
[선생의 답변]『논어(論語)』에서 한 말 중에, 같은 부류(類)는 서로 연계하여 기재해 놓은 곳이 간혹 있긴 하지만, 그러나 매번 ‘자왈(子曰)’이라 일컫고 있는 장은 저절로 한 단락으로 되어 있으니 반드시 위 아래 문장과 연계시켜 의미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視其所以’, 此章蓋述上文爲說退而省其私, 私, 所安也.
論語立言雖間以類相從, 每稱‘子曰’卽自爲一段, 不必專以上下文求之.
[범백숭의 의견] ‘옛 것을 잊지 않고, [그 속에서] 새 것을 알아낸다면(溫故知新)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배움은 이런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 무궁해집니다. 부자(夫子)께서 오히려 ‘배움이 싫증나지 않는다(學不厭)’라고 하셨으니, 부자(夫子)야말로 그 배움이 무궁(無窮)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이 될 수 있다(可以爲師)’는 것은 무방(無方)한 물음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 것을 잊지는 않지만 [그 속에서] 새 것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비록 삼분(三墳)과 오전(五典), 그리고 팔색(八索)과 구구(九丘)를 읽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사(史)’일 수는 있지만 ‘사(師)’가 되기엔 부족합니다.
[선생의 답변] 이 논의는 매우 훌륭합니다.
‘溫故知新’, 學至此而無窮矣. 至於夫子而猶曰‘學不厭’, 非以其無窮哉? ‘可以爲師’者, 以其足以待無方之問也. 溫故而不知新, 雖能讀三墳․五典․八索․九丘, 足以爲史而不足以爲師也.
此論甚佳.
[범백숭의 의견] ‘사람으로서 신이 없으면(人而無信) [그 가(可)함을 알지 못하겠다.]’고 한 장에서, 수레와 우마(牛馬)는 본래 두 물건입니다. [따라서] 수레채마구리(輗)와 멍에막이(軏)가 그 사이를 묶어줌에 따라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상(物)과 나(我)가 아직 묶이지 않고 있을 때 역시 [서로 분리되어 있는] 두 물건입니다만 ‘신(信)’이 그 사이에 작동하게 되면 대상과 내가 일치(一致)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된 이후에 무슨 일이든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본문(本文)에서는 단지 ‘수레에 수레채마구리(輗)와 멍에막이(軏)가 없으면 [수레를] 운행할 수 없는 것이 흡사 사람에게 신(信)이 없으면 무슨 일이든 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점’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대가] 그 사이에 우마(牛馬)를 첨가해 넣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바로 소씨(蘇氏)가 저지른 착오입니다.
‘人而無信’, 車之與馬牛本兩物, 以輗軏交乎其間, 而引重致遠, 無所不至焉. 物與我未合, 亦二物, 以信行乎其間, 則物我一致矣. 夫然後行.
本文只言車無輗軏不可行, 譬如人無信亦不可行, 今乃添入馬牛於其間, 此蘇氏之鑿.
[범백숭의 의견] ‘공자(孔子)께서 태묘(大廟)에 들어가 [매사(毎事)를 물으시니...’로 시작되는 장(『논어(論語)』,「팔일(八佾)」, 제15장)에서, 구설(舊說)에서 “예(禮)는 경(敬)을 위주로 한다. [공자께서] ‘매사(每事)를 물으신 것’은 경(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이것이] 요즈음 학자들의 학설보다 나은 듯합니다.
[선생의 답변] [이 점에 관해서는] 양선생(楊先生)의 학설이 매우 훌륭합니다.
‘子入太廟’, 舊說謂禮主於敬, ‘每事問’所以爲敬, 恐勝今說.
楊先生之說甚長.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7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일곱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7서)는 제5서 및 제6서와 함께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이후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상례(喪礼) 및 제례(祭礼)에 관한 주자의 입장 몇 가지를 담고 있다.『예기(禮記)』,「왕제(王制)」편과 「증자문(曾子問)」등을 근거로 주로 상중(喪中)에 제사를 폐하는 일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주자는 결론적으로 “상례(喪礼)에는 애도(哀悼)함이 부족하고 예(禮)가 남음이 있기보다는 예가 부족할지언정 애도함이 지극한 것만은 못하다”는『예기(禮記)』,「단궁(檀弓)」의 말과 “상례(喪礼)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한다”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는 겉치레나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범백숭의 의견1]『예기(禮記)』,「왕제(王制)」편에 “상(喪) 중에는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고 오직 천지(天地)와 사직(社稷)에만 제사하되 상불(喪紼)을 넘어서 제사를 거행한다”라고 했는데, 정씨(鄭氏)는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살피건대 여박사(呂博士)는 “인간사의 중대함이 죽음을 슬퍼하는 일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상(喪)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이 자기 몸을 손상시키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는 것이다. 대공(大功)의 상(喪)에도 여전히 업(業)을 폐(廢)할 수 있다. 상(喪)에 ‘일을 거듭하지 않음(不貳事)’을 이와 같이 하므로, 제사가 비록 지극히 중요하지만 또한 거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대개 제사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게 되면 슬픔을 잊을 수 있지만, 제사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지 않을 바엔 차라리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낫다. 후세에 와서 죽음을 애통해 함이 고인(古人)만 못하다. 이 때문에 [상(喪) 중에는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이러한 예법을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했습니다. 정씨(鄭氏)는 오직 천지(天地)와 사직(社稷)에 제사지내는 것에 대해서만 ‘낮은 자로 인하여 높은 자[에 대한 제례]를 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不以卑廢尊也)’라고만 해석했습니다만 저는 이 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살피건대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상(喪)에, 제사지내지 않는 것은 오직 종묘(宗廟)일 뿐이고, 교사(郊社)와 오사(五祀)는 모두 폐할 수 없습니다. 천지(天地)는 종묘(宗廟)보다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오사(五祀)와 사직(社稷)이 종묘(宗廟)보다 높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사(內事)에는 실제상황을 충실하게 그대로 적용(用情)하기 때문에 종묘(宗廟)가 비록 높지만 [그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고, 외사(外事)의 경우는 [제사를 규정한] 예문(禮文)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사직(社稷)과 오사(五祀)의 경우에조차 제사를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증자문(曾子問)」소(疏)에 이른바 ‘외신(外神)의 경우에는 ‘자기 개인의 상(己私喪)’을 이유로 그 제사를 오래 폐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 설이 정씨(鄭氏)의 설보다 낫습니다.
王制: ‘喪三年不祭天地社稷, 惟越紼而行事’. 鄭氏不解不祭之義. 按呂博士云: ‘人事之重, 莫甚於哀死, 故有喪者之毁, 如不欲生 : 大功之喪, 業猶可廢. 喪不貳事如此, 則祭雖至重, 亦有所不行. 蓋祭而誠至則忘哀, 祭而誠不至則不如不祭之爲愈. 後世哀死不如古人之隆, 故多疑於此’. 鄭氏解惟祭天地社稷云‘不以卑廢尊也’. 愚謂此說非是. 按天子諸侯之喪, 所不祭者惟宗廟爾, 郊社五祀皆不廢也. 天地可言尊於宗廟, 五祀社稷不尊於宗廟也. 但內事用情, (4-1822)故宗廟雖尊而有所不行 : 外事由文, 故社稷五祀不可廢其祭. 曾子問疏所謂‘外神不可以己私喪久廢其祭’, 其說優於鄭氏矣.
[범백숭의 의견2] ‘내사에는 실제상황 그대로를 적용한다(內事用情)’는 것은, [상(喪)으로 인해] 자손이 애척(哀戚)해하는 상황(情)을 조상(祖考)의 마음에까지 미루어 나감으로써, 조상들도 반드시 이 일 때문에 편안해 하지 않을 것임을 미루어 안다는 것입니다. [주 ; 예기(禮記)「증자문(曾子問)」편에 ‘천자(天子)가 붕(崩)하고 국군(國君)이 훙(薨)하면, 축(祝)이 여러 사당의 신주(神主)를 모아가지고 조묘(祖廟)에 간직[하는 것이 예이다]’라고 했고, 정씨(鄭氏)는 ‘상(象)에 흉(凶)한 것이 있으면 모인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대개 [조상이] 자손과 함께 근심한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자손이 조상(祖考)에 대해 지극히 공경하되 꾸며서는 아니 되며(至敬不文), 또 사람을 시켜 일을 대신하게 해서도 안 되며(不可使人攝事), 반드시 친히 조상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상(服喪)에 거칠다고 해서 제사에 임해서도 아니되고(衰粗不可以臨祭) 또 상기(喪期)가 끝났다고 해서 길복(吉服)을 입어서도 안 된다는 것(不可以釋衰而吉服) 역시 명백합니다. ‘외사(外事)의 경우는 [제사를 규정한] 예문(禮文)을 그대로 따른다(外事由文)’는 것은 “나라(國)나 가(家)를 다스리는 자에 대해 ‘백신(百神)들이 그대를 주인(主人)으로 삼게 한다(百神爾主)’”했으니,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후(諸侯)가 사직(社稷)에, 대부(大夫)가 오사(五祀)에 대해 모두 예문에 따른 [제사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자손이 [자기의] 조상(祖考)에 대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천자나 제후 등 국가를 다스리는 자들은] 예문 자체를 숭상하므로 사상(私喪)을 이유로 오랜 동안 그 제사를 폐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제사를 지낼 때에도 반드시 길례(吉禮)에 따라 길복(吉服)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하여 그 경중에 따라 [당사자 아닌] 남으로 하여금 대신 섭제(攝祭)를 할지언정, 반드시 예문을 전폐(全廢)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애척(哀戚)이 바야흐로 심각하여 신령과 교감하는 뜻(交神之意)이 이르지 않을지라도, 부득이(不得已) 예문대로 [이 제사를] 시행해야만 하니, 그렇게 하는 것도 또한 예(禮)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內事用情者, 以子孫哀戚之情推祖考之心, 知其必有所不安於此, [주 ; 曾子問篇曰: ‘天子崩, 國君薨, 祝取羣廟之主而藏諸祖廟.’ 鄭氏注曰: ‘象有凶者聚也.’ 愚謂此蓋示與子孫同憂之意.] 而子孫之於祖考至敬不文, 又不可使人攝事, 必也親之, 則衰粗不可以臨祭, 又不可以釋衰而吉服, 狥情而廢禮亦明矣. 外事由文者, ‘有國家者百神爾主’, 天子之於天地, 諸侯之於社稷, 大夫之於五祀, 皆禮文之不可已者, 非若子孫之於祖考也. 以文爲尙, 故不得以私喪久廢其祭, 而其祭之也, 必以吉禮吉服. 故不得已隨其輕重而使人攝焉, 期於無廢其文而已. 雖哀戚方深, 交神之意有所不至, 不得已也. 以文而行, 其亦禮之稱乎.
[범백숭의 의견3] 또 예기(禮記),「증자문(曾子問)」편에 “천자(天子)가 붕(崩)하여, 아직 빈장(殯葬)하지 않았으면 [주; 천자는 7일만에 빈장(殯葬)한다.] 오사(五祀)의 제사를 거행하지 않는다. [주 ; 애척(哀戚)이 바야흐로 심각하기 때문에 제사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빈장(殯葬)한 뒤에는 제사를 지내되, [주 ; 소(疏)에 말하기를 ‘오사(五祀)는 외신(外神)에 대한 제사이기에, 자기의 사상(私喪)을 이유로 오래 그 제를 폐(廢)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이미 빈장(殯葬)을 한 이후, 슬픈 감정이 조금 줄어든 다음에는 [그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제사에는 시동씨(尸童氏)를 맞아들여서 축(祝)이 밥을 올리되, 삼반(三飯)에 그치고 더 권하지 않는다. 그리고 밥 먹은 뒤에 술로 입을 가시게 하는 절차는 있으나 그 잔을 수작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주 ; 禮를 다 갖추지는 않는 것이다.] 또 빈(殯)을 파헤쳐서 영구(靈柩)를 들어내는 일(啓)로부터 [주 ; 장차 장사지내려 할 때 啓殯한다.] 반곡(反哭)할 때까지는, [주 ; 이미 장사 지낸 다음에 반곡한다.] 오사(五祀)의 제사는 거행하지 않으며, [주 ; 계빈(啓殯)하여 영구(靈柩)를 버면 슬픈 감정이 더욱 극심해지기 때문에 제사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장사지낸 다음에는 제사를 지내되, [주 ; 이미 빈장을 했을 때와 뜻이 같다]. 이 때의 제사는 축인(祝人)에게 술잔을 주는 것으로 헌수(獻酬)를 그친다.” [주 ; 아직은 순길(純吉)하지 않다.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교(郊)의 경우도 그러하고, 사(社)의 경우도 그러하다. 오직 상과 체, 그리고 종묘(嘗禘宗廟)는 길(吉)할 때를 기다린다’라고 했다.] 고 했고, 또 “제후(諸侯)가 훙(薨)한 때로부터 설빈(設殯)할 때까지와 [주 ; 제후는 5일만에 빈장(殯葬)한다.] 빈(殯)을 열어서 장사하고 반곡(反哭)에 이르기까지는, 천자의 예에 따르는 것이다. [주; 천자의 예(禮)와 같이 한다.] ” 라고 했습니다.『좌전(左傳)』희공(僖公) 33년에 “무릇 임금이 죽으면, 졸곡(卒哭)이 끝나야 조상의 사당에 합제하고, 그것이 끝나야 위패를 만드는데, 특별히 능에서 소상(小祥), 대상(大祥), 담제(禫祭)를 행하고 위패를 만들며, 그리고 3년상이 끝나자 증제(蒸祭), 상제(嘗祭), 체제(禘祭)라는 사계절에 지내는 제사를 종묘에서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 ; 두씨(杜氏)의 주(注)에 이르기를 ‘이것은 천자와 제후의 예(禮)이니, 경(卿)이나 대부(大夫)에는 통하지 않는다. 대개 졸곡(卒哭) 후에는 상례(喪禮)를 특용(特用)하여, 새로이 죽은 자(新死者)를 침(寢)에서 제사하고, 종묘(宗廟)와 사시(四時)의 상제(嘗祭)는 이전과 같이 한다’고 했는데, 이는『예기(禮記)』와 같지 않습니다. 석례(釋例)에 또 ‘진(晉)나라에서 석 달만에 도공(悼公)을 장사지낸 후 개복(改服) 수관(脩官)하고 곡옥(曲沃)에서 증제(烝祭)를 지냇으며 추량(溴梁)에서 회동한 일’을 인용하여 전국(戰國)시대의 예(禮)가 변한 상황을 이와 같이 징험했습니다. 대개 삼년상을 제후들이 시행한지 않은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좌전(左傳)』에는 한 때의 일을 특기(特記)한 것일 뿐인데 두씨(杜氏)는 이에 [이것이] 올바른 예(正禮)라고 오인한 것입니다.]
又曾子問: ‘天子崩, 殯, [주; 天子七日而殯.] 五祀之祭不行. [주 ; 哀戚方甚, 故不祭.] 旣殯而祭. [주 ; 疏曰: ‘五祀外神, 不可以己私喪久廢其祭, 故旣殯, 哀情稍殺而後祭也.’] 其祭也, 尸入, 三飯不侑, 酳不酢而已矣. [주 ; 不備禮也] 自啓 [주 ; 將葬啓殯] 至于反哭, [주 ; 旣葬而反] 五祀之祭不行. [주 ; 啓殯見柩哀情益深, 故亦不祭.] 已葬而祭, [주 ; 義同旣葬]. 祀畢獻而已也.’ [주 ; 未純吉也. 鄭氏曰: ‘郊亦然, 社亦然, 唯嘗禘宗廟俟吉也.’] ‘諸侯自薨至殯, [주 ; 諸侯五日而殯.] 自啓至于反哭, 奉(4-1823)帥天子.’ [주; 如天子之禮也.] 左傳僖公三十三年: ‘凡君薨, 卒哭而祔, 祔而作主, 特祀於主, 蒸嘗禘於廟.’ [주 ; 杜氏注謂此天子諸侯之禮, 不通於卿大夫. 蓋卒哭後特用喪禮祀新死者於寢, 而宗廟四時嘗祭自如舊也. 此與禮記不同. 釋例又引晉三月而葬悼公, 改服脩官, 烝于曲沃, 會于溴梁之事爲驗戰國禮變如此. 蓋三年之喪, 諸侯莫之行久矣. 左傳特記一時之事, 而杜氏乃誤爲正禮也.]
[범백숭의 의견4] 위의 세 조목은 모두 사대부(士大夫)의 예제(禮制)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예(禮) 가운데서 미루어 짐작할만한 점은 있습니다. 즉 옛 대부(古大夫)의 종묘(宗廟)에는 오사(五祀)가 있었으니, ‘외사유문(外事由文)’의 뜻을 미루어 보면 오사(五祀)의 경우 ‘[사람이] 죽었을 때로부터 빈장(殯葬)’할 때까지와 ‘계(啓)로부터 반곡(反哭)’까지 잠시 폐(廢)하고, 이미 장빈(葬殯)하고 나서는 곧 가신(家臣)으로하여금 섭제(攝祭)케 한다는 것입니다. 또 ‘내사용정(內事用情)’의 원리를 미루어 보면 종묘(宗廟)의 제사조차도 의당 폐(廢)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은 가(家)에서 오사(五祀)를 지내지 않고, 오직 향선(享先)하는 이 한 가지 일조차 상(喪)을 만나면 폐(廢)하곤 하여, [이런 행위에] 더 이상 아무런 의심도 두지 않습니다.
[범백숭의 의견4] 右三條皆非士大夫之制, 然其禮有可得而推者. 古大夫宗廟有五祀, 推‘外事由文’之意, 則五祀惟自卒至殯, 自啓至于反哭暫廢. 旣葬殯, 則使家臣攝之. 推‘內事用情’之理, 則宗廟之祭宜亦廢也. 今人家無五祀, 惟享先一事遭喪而廢, 蓋無疑矣.
[선생의 답변] 상중(喪中)에 제사를 폐하는 일에 대해 고례(古礼) 가운데에서 상고할 만한 것은 그대가 인용한 것들과 같습니다. 다만 옛사람이 상중에 있으면서 상복을 몸에서 벗지 않으며 곡읍(哭泣)의 소리를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고 출입(出入), 거처(居処), 언어(言語), 음식(飲食)을 모두 평상시와는 아주 다르게 했기 때문에 종묘(宗廟)의 제사를 비록 폐(廃)하더라도 죽은 자나 산 자에게 양쪽 다 유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상중에 거하는 것이 옛사람과는 달라서 졸곡(卒哭)을 한 뒤에 마침내 상복은 검게 물들이고 무릇 평소 행하던 출입, 거처, 언어, 음식을 모두 폐(廃)하지 않으면서 오직 이 한 가지만을 폐하니 아마도 편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도리에 처(処)하고자 하는 자가 다만 상중(喪中)에 거(居)하는 예(禮)를 성찰하여, 그 결과 시종(始卒) 하나하나 옛 예(古礼)에 맞게 할 수만 있다면 즉시 [지금 문제가 되어있는] 제사를 폐해도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뒷날 상복을 검게 물들여 입고서 출입(出入)하지 않을 수 없거나 혹 그 밖에 [고례(古礼)와는] 부합되지 않는 점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면 곧 졸곡(卒哭) 전에는 부득이 예(禮)에 따라 우선 제사를 폐하더라도, 졸곡 뒤에는 대략『춘추좌전(春秋左伝)』두주(杜註)의 설(説)에 따라 사계절의 제삿날을 만나면 상복을 입고 특별히 죽은 이의 영전에 제사지내고, 검은 상복차림으로 정기적으로 가묘(家廟)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주;『춘추좌전(春秋左伝)』에 따르면, 졸곡(卒哭) 전에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졸곡의 시기는 장례를 마친 다음 신주를 모셔 놓고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10일 뒤에 날을 가려서 제사를 지내어 상사(喪事)를 마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주; 온공(溫公)과 고씨(高氏) 두 사람의 글(二書) 이점과 관련된 글(節文)이 매우 상세하게 실려 있으니 숙고(熟攷)할 만하다.] 만약 상여가 있는데 백일로 기간을 줄이고자 하여 검은 상복을 입고 출입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백숭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상제(喪祭)를 주관해서 받드는 것(主奉)는 이에 그대의 형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일은 그대(伯崇)가 전단(專斷)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셈이지요. 다만 이 의례(儀禮)에 관해서는 종용(從容)하게 자문하고 강론한 다음 더욱이 예를 아는 자와 함께 논평해보아 그들이 나의 이론을 들어줄만한 정도라면 괜찮겠습니다만, 만에 하나 [서로간의 의견에]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고려해 보아야겠습니다. 즉 내가 듣기에, “상례(喪禮)에는 애도(哀悼)함이 부족하고 예(禮)가 남음이 있기보다는 예가 부족할지언정 애도함이 지극한 것만은 못하며(喪與其哀不足而禮有餘, 不若禮不足而哀有餘)” 부자(夫子)께서도 또한 “상례(喪禮)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한다(喪與其易也寧戚)”라고 하셨으니, [주 ; 내가 이 구절의 뜻을 풀이하면서 늘 ‘문(文)과 예(禮)는 구비되어 있으나 정성을 다하지 않게 되기가 쉽다’라고 여겼습니다만, 지금 사람들(今人)에게는 이러한 문제가 많으니, 시험삼아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대는 이점에 마땅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대의 말씀을 듣고자(拜聞)합니다.
在喪廢祭, 古禮可攷者如此. 但古人居喪, 衰麻之衣不釋於身, 哭泣之聲不絶於口, 其出入居處․言語飮食皆與平日絶異, 故宗廟之祭雖廢而幽明之間兩無憾焉. 今人居喪與古人異, 卒哭之後, 遂墨其衰, 凡出入居處․言語飮食與平日之所爲皆不廢也, 而獨廢此一事, 恐亦有所未安. 竊謂欲處此義者, 但當自省所以居喪之禮果能始卒一一合於古禮, 卽廢祭無可疑. 若他時不免墨衰出入, 或其他有所未合者尙多, 卽卒哭之前不得已準禮且廢, 卒哭之後可以略放左傳杜注之說, 遇四時祭日, 以衰服特祀於几筵, 用墨衰常祀於家廟可也. [주; 佐傳之意, 卒哭前亦廢祭也.] 但卒哭(4-1824)之期, 須旣葬․立主․三虞之後十日而祭以成事方可耳. [주; 溫公高氏二書載此節文甚詳, 可以熟攷.] 若神柩在而欲以百日爲斷. 墨衰出入, 則決然不可. 愚見如此, 不知伯崇以爲如何? 然主奉喪祭乃令兄職, 此事非伯崇所得專. 但以此儀從容咨講, 更與知禮者評之, 庶其聽則可矣. 萬一有所不合, 則熹聞之, 喪與其哀不足而禮有餘, 不若禮不足而哀有餘. 夫子亦言‘喪與其易也寧戚’, [주 ; 熹常解此義, 以爲具文備禮而非致慤焉之爲易. 今人多此病, 試思之.] 此則伯崇所當勉也. 更思之. 熹拜聞.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8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여덟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8서)는 기축년(己丑, 1169년, 주자 40세) 경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에서는 범백숭이 주자에게 부탁한 ‘행차를 전송하는 말(送行語)’을 모친의 상중이라 글을 쓰지 못했다는 점을 미안해하면서 범백숭의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원칙을 당부하고 있다. 주자는 여기서 경(敬) 공부와 격물치지(格物致知)공부의 균형을 강조하면서도 경(敬)을 중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 또 관리가 되어 청렴하고 신중할 것을 당부하면서 모름지기 미세한 부분조차도 엄밀히 살펴야 할 것이고 소홀히 하여 구태의연하게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울러 여가 시간에는 반복해서 익히는 것을 폐하지 말고 음주(飲酒)를 적게 하고 벗을 가려서 사귀라는 자상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부탁하신] ‘행차를 전송하는 말(送行語)’을 보내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상중이라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백간(李伯諫 : 이종사(李宗思)의 자)이 쓴 글을 보니 이미 약석(薬石)의 경계로 삼을 만하더군요. 다만 다시 근본을 세울 바를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장엄함과 공경을 주로 삼아야 할 것이고, 모든 일에는 스스로 법도를 세워 [밖을 엄히] 단속해서 자기의 내면에 가깝게 하고 마음과 뜻을 방만하게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강하게 하는 큰 근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를 더하여 성현의 말씀은 반드시 믿을 만하다고 여기고 고인의 일은 반드시 행할 만하다고 여긴다면 세속의 소소한 이해가 자신의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관리가 되어 청렴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본분이니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미세한 부분조차도 엄밀히 살펴야 할 것이고 소홀히 하여 구태의연하게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여씨(呂氏 : 이름은 본중(本中))의『동몽훈(童蒙訓)』하권의 몇 조목은 [부정을] 단속하는 도리가 매우 지극하니 모두 가슴 속에 담아 교훈으로 삼을 만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이미 구차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금 예로써 윗사람을 섬기고 성심으로 상대를 대하며 관대함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법으로써 관리를 제어함으로써 관청의 일을 제 때에 처리하는 데에도 그 공경(恭敬)을 쓰지 않는 곳이 없다면 거의 잘못을 적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가 시간에는 반복해서 익히는 것을 폐하지 말고 음주(飲酒)를 적게 하고 벗을 가려서 사귀십시오. 유자징(劉子澄 : 유청지(劉清之)의 자)과는 거리가 멀지 않으니 참으로 곧고 성실하고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실로 [그대가] 그(유자징)의 진실된 공부를 받아들여 [그대의 잘못을]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 역시 [그대에게] 고해 주는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구하나마 서로 꼭 알릴만한 것은 이 정도입니다. 이제 그대와의 이별을 앞두고 바삐 몇 자 적다 보니 하고 싶은 말 다할 수가 없습니다. 미리 몇 말씀 알려 드리니, 오직 그대가 헤아리고 가려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須送行語, 哀苦中不復能爲文. 然觀伯諫之言, 已是藥石, 但更須求所以立其本耳. 日用之間以莊敬爲主, 凡事自立章程, 鞭約近裏, 勿令心志流漫, 其剛大之(4-1825)本乎. 由此益加窮理之功, 以聖賢之言爲必可信, 以古人之事爲必可行, 則世俗小小利害不能爲吾累矣. 當官廉謹, 是吾輩本分事, 不待多說. 然微細處亦須照管, 不可忽略, 因循怠墮. 呂氏童蒙訓下卷數條, 防閑之道甚至, 皆可佩服. 自治旣不苟, 更能事上以禮, 接物以誠, 臨民以寬, 御吏以法, 而簿書期會之間亦無所不用其敬焉, 則庶乎其少過矣. 暇日勿廢溫習, 少飮酒, 擇交遊. 子澄相去不遠, 眞直諒多聞之益. 果能受其實攻而不憚改焉, 則彼亦將不憚啓告之煩矣. 區區所以相告者不過如此, 恐臨別匆匆, 不能盡擧, 預以拜聞, 惟所材擇.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9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아홉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9서)는 제 10서, 11서, 12서와 함께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모친상을 당해 상중(喪中)에 있던 주자가 사랑하는 동료이자 제자인 범백숭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과 몇 가지 당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지 말미에는 장식(張軾)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근래 저는 두 아들을 데리고 한천(寒泉)을 지나면서 채계통(蔡季通)을 불러 만나보고 다시 한두 명의 친구들이 와서 서로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애당초 강의를 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혼미하고 게으르고 명민하지 못하여 저 자신을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배우는 자들의 기품에 강약(強弱)의 차이가 있어 [한결같이] 각각 나름의 병통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두드러지게 믿을만한 자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이 점이 또한 특히나 두려워할만한 일입니다.
熹比携二子過寒泉, 招季通來相聚, 更有一二朋友來相聚, 初不廢講議. 但昏惰不敏, 自救不給, 何能有以及人? 而學者氣禀强弱不齊, 各有病痛, 未見卓然可恃者, 此亦殊可懼也.
노형께서는 관직생활이 구차하지 않고 또 어진 수령을 만나 서로 어울리면서 조금이나마 자신의 뜻을 펼 수 있게 되셨으니 저의 바람에 깊이 부응해 주시는군요. 근래에 [나는] 오히려 [그대가] 임기응변의 재주가 주밀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였는데 지금 마침내 이와 같으시니, 진실로 기질(気質)의 쓰임은 작고 도학(道学)의 힘은 큽니다.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신, “일명(一命)의 선비가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둔다면, 남들에게 반드시 뭔가를 이루어주는 것이 있다.”는 것이 빈 말이 아니군요. [부디 그대가] 모든 일을 힘써 함으로써 장차 원대한 사업의 기틀을 크게 하고, 우리 당의 기상을 증진시키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래 군중(郡中)에 머무르다 보면, 문서와 관련된 책임(簿領之責)을 혹시라도 등한히 할까 걱정되니, 이 역시 편치는 않을 듯합니다. 수납(受納)을 이미 마쳤으니, [그대가] 말씀하신 ‘타사(他事)’를 만약 다른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선 곧바로 읍(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훨씬 나을 듯합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혹시라도 아직은 돌려보낼 수 없는 형편이라면, 무릇 모든 일에 대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혐의(嫌疑)를 받을만한 일을 멀리 피함으로써 [자칫 불필요한] 은혜나 원망이 집중되지 않도록 처신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知老兄官守不苟, 又得賢守相聽從, 得以少伸己志, 深副所望. 向來猶恐應變之才有所不周, 今乃如此, 信乎氣質之用小, 道學之力大, 而程子所謂 “一命之士(4-1826)苟存心愛物, 於人必有所濟”者, 非虛語也. 凡百勉旃, 以大遠業之基, 增吾黨之氣, 幸甚! 但久留郡中, 於簿領之責竊恐曠弛, 亦似非便. 受納旣畢, 所謂他事若他人所可辦者, 卽不若且歸邑中之爲愈也. 如何? 或未能歸, 凡百亦須戒懼, 遠避嫌疑, 無爲恩怨之府乃佳.
장흠부(張欽夫)는 배운 것을 행하고 계시니 우리 도(道)로서는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우니 [아직은] 기뻐할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근래에 와서 다시금 [흠부의 공부가] 어떠합니까? 정월에 보내온 [흠부의] 편지에서도 아직은 특별히 달리 들리는 것은 없고, 학문을 논하는데 여전히 고상한 것만을 좋아하고 지나치게 통쾌함을 추구하는 폐단이 있더군요. 저는 근래 학문이란 전적으로 도리의 근본에서부터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착실하게 함양(涵養)하고 완미(玩味)해야 공부의 참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흠부와 내가] 잡박(雑駁)하게 문답(問答)한 것을 한 두 단락 산만하게 써 보냅니다만, 당부(當否)에 관해서는 깨우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합니다. 달리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만 이루 편지로는 다할 수 없군요.
欽夫得行所學, 吾道之幸. 但此事大難, 不可喜而可懼. 近復如何? 得正月書, 亦未有異聞也. 論學依舊有好高傷快之弊. 熹近覺此事全放在底下, 著貢涵養玩味, 方見工夫. 有一二段雜問答, 漫寫呈, 當否俟喩及. 他所欲言, 非書所能盡也.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10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0서)는 제 9서, 11서, 12서와 함께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봄 내지 여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주자가 채계통(蔡季通)과 함께 당시 불교적 분위기에 젖어 있던 이백간(李伯諫)을 회유(懐柔)한 사실을 적고 있다.
백간(伯諫)이 전일(前日) 이 곳을 지나갈 때, 계통(季通)도 이 곳에 와서 함께 모여 서로 유교와 불교의 차이에 관해 극론(劇論)했습니다. 이에 [나는] 백간(伯諫)에게 ‘천명을 일러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는 이 구절이 실(實)한 것인가? 공(空)한 것인가?’라고 질문을 했더니 그는 ‘실(實)한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나는 ‘이와 같다면 [불교에서와 같이 일체를] 공(空)이라 보는 견해는 잘못이다. 또 [그대가] 이제 실리(實理)를 궁구하고 싶어 하면서 또한 어찌 전일(前日)에 [지녔던] 공견(空見)에 의지할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또 계통(季通)이 비근한 일을 예로 들어 비유한 것에 힘입어, 그는 드디어 [유교적 진리를] 석연히 이해하고 이전까지 공부해왔던 것을 기꺼이 내버린 듯이 보였습니다. 만약 [그가] 이로부터 이단의 의론에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 도의 입장에서는 [새로이] 이 사람을 얻게 된 셈이 됩니다. 더구나 그의 타고난 자질과 고상한 의지는 보통 사람에 비해 매우 탁월하므로, [우리들로서는 그에게] 참으로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伯諫前日過此, 季通亦來會, 相與劇論儒佛之異. 因問伯諫: ‘天命之謂性, 此句爲實邪, 爲空邪?’ 渠以爲實. 熹云: ‘如此則作空見者誤矣. 且今欲窮實理, 亦何賴於前日之空見哉?’ 又爲季通指近事譬喩, 渠遂釋然, 似肯放下舊學. 若自此不爲異議所移, 則吾道又得此人, 其資稟志尙過人數等, 眞有望矣.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11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열한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1서)는 제 9서와 10서에 이어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여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에서는 장식(張軾)의 의논이 지나치게 통쾌하기만 하고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없다는 점, 여백공(呂伯恭)과 유자징(劉子澄)이 이단을 분명히 가려내지 못하는 점에 대해 논란하고 있다.
장흠부(張欽夫)는 일전에 의논이 지나치게 통쾌하기만 하고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일에 응대(応待)해 나가는 것이 너무 급하여 여유가 없다고 느꼈습니다만, 근래에 와서는 저에게 있어서도 역시 이 문제가 작은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여백공(呂伯恭)은 강론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사를 모호하게 한 덩어리로 말하려 하고, 또 사람들이 이단(異端)과 속학(俗学)의 잘못을 말하는 것을 공연히 두려워하여 소씨(蘇氏 : 소식(蘇軾)을 가리킴)을 옹호하는데 더욱 힘쓰면서, 시비를 따지는 것이 차라리 심신(心身)을 수렴(収斂)하여 기르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근래 유자징(劉子澄)이 [여백공과 같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이미 편지를 써서 힘써 변론하였는데 그가 끝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유자징(劉子澄)과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시나요? 그가 저번에 의심했던 곳에 대해 그 당시 [저는 그의 의심에] 도리어 문제가 있다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만, 근자에 보니 [유자징이 쓴] 이 글(此書)이야말로 [저번의 글에 비해] 더욱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군요. 문정공(文定公)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두고] ‘경(經)을 풀이하기를 좋아하면서 독서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만, 대저 [유자징이 쓴 이 글은] 모두 하나의 도리(道理)에 편집(偏執)하여 횡설수설(横説竪説)하고 있기는 있지만, 일찌기 문리(文理)를 함영(涵泳)한 적이 없기에 그가 하는 말이 지극히 막히어 통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또 더욱이 [그는] 정자(程子)의 문자(文字)에 대해 익숙하게 보지 않은 곳이 왕왕 있더군요. 이에 [그대는] 자징(子澄)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의 이와 같은 뜻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欽夫日前議論傷快, 無涵養本原功夫, 終是覺得應事匆匆. 熹亦近方覺此病, 不是小事也. 伯恭講論甚好, 但每事要鶻圇說作一塊, 又生怕人說異端俗學之非, 護蘇氏尤力, 以爲爭校是非, 不如歛藏持養. 頃見子澄有此論, 已作書力辨之, 不知竟以爲如何也. 子澄通書否? 渠向疑處當時答得却有病, 近看此書病尤多. 文定云‘好解經而不喜讀書’, 大抵皆是捉住一箇道理, 便橫說竪說, 都不曾涵泳文理, 極有說不行處. 如程子文字, 往往尤看不熟也. 因作子澄書, 爲致意.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12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열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2서)는 쓴 시기를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문집에 편집되어 있는 순서를 보아 역시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심신(心身)을 수렴(収斂)하고 거동(挙動)에 일정함이 있게 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도록 하는 데 힘쓸 것을 강조하는 짧은 안부의 편지이다.
[그대] 백숭(伯崇)은 근래 무엇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십니까? 관청의 일이 정신없이 바빠 한결 같이 고요히 앉아 책을 보지는 못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가가 있을 적에 반드시 속히 심신(心身)을 수렴(収斂)하여 혹은 용모를 바르게 하여 단정하게 앉기도 하고 혹은 의리를 깊이 생각하여 사물이 오면 일에 따라 성찰하여 동정(動静)에 절도가 있게 하기도 하고 거동(挙動)에 일정함이 있게 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도록 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간다면 내외(内外)와 본말(本末)이 서로 영향을 미쳐 큰 근본(根本)이 설 것이고 여러 이치가 쉽게 밝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이밖에는 특별히 힘을 쓸 곳이 없습니다. 관청의 일 중 남에게 [그대의] 영향이 미칠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대의] 최선을 다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이에 그치지 말고] 자신을 단속하여 [아전과 같은]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데에도 더욱 마음을 쓰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伯崇近日何以用功? 官事擾擾, 想不得一向靜坐看書. 然暇時速須收歛身心, 或正容端坐, 或思泳義理, 事物之來, 隨事省察, 務令動靜有節, 作止有常, 毋使放逸, 則內外本末交相浸灌而大本可立, 衆理易明矣. 此外別無著力處. 官事有可(4-1828)以及人處, 想不憚出力. 然檢身馭下, 尤不可不加意也.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13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열세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3서)는 신묘년(辛卯, 1171년, 주자 42세)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의 주제는 장식(張軾)의 학문과 그의 학문의 뿌리인 호남학(湖南学)의 창시자 호굉(胡宏) 학설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주자는 37세(1166년)에 장식을 통해 호남학의 찰식단예(察識端倪)설을 접한 후 이에 매료되어 호남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40세 때 중화신설(中和新説)을 확립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학설을 확립한다. 이 편지는 이미 확립된 자신의 학설을 기반으로 호남학을 총체적으로 반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 편지에서 말씀하신 몇 가지 일은 대체로 옳습니다. 다만 어의(語意)에 있어 아직까지는 착실하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논어』「태백」제4장의] ‘증자유질(曾子有疾)’에 관하여 요사이 [이에 관한] 여러 학설을 두루 검토해보고, 사사로이 그 이유에 관해 논해 보았습니다. 이제 [이를 그대에게] 보내드리니 [그대가 보시고] 다시 한 번 고쳐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지언(知言)』의] ‘마음에는 삶과 죽음이 없다(心無死生)’는 구절에 관해, 그대가 의론한 바의 뜻이 또한 옳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나로부터 서고, 나를 보는 자로부터 말한다.(自我而立, 自觀我者而言)’라고 한 이 말은 도리어 적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실] 지언(知言)의 의론(議論)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저는] 근자에 [지언(知言) 가운데] 의심나는 곳에 대해 주석을 하고 경부(敬夫, 張軾), 백공(伯恭, 呂祖謙)과 함께 의론하여 약간의 왕복(往復)이 있었습니다만, 그 글 중에는 아직은 기록해서 [그대에게] 보내드릴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고, 또 [저의 이 글이] 자못 선배의 약점을 잡아 공격을 가했다는 혐의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대저 [호오봉의 학설 가운데는] ‘마음으로 본성을 완성하나니 [마음과 본성은] 서로 체용이 된다.(心以成性, 相爲體用)’, ‘본성에는 선악이 없고, 마음에는 생사가 없다(性無善惡, 心無死生)’, ‘천리와 인욕은 체에 있어서는 같으나 용에 있어서 다르다.(天理人欲同體異用)’, ‘먼저 인체(仁體)를 깨달은 연후에 경(敬)공부를 해 나간다.(先識仁體, 然後敬有所施)’, ‘먼저 큰 것에 뜻을 두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작은 일에 종사해야 한다.(先志於大, 然後從事於小)’ [주 ; ‘천도(天道)의 변화(變化)에 근본을 두고, 세속(世俗)에서 수작(酬酢)해 나간다’거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효(孝)’를 질문한 것을 논한 것 등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등과 같은 이와 같은 류(類)가 지극히 많습니다. 또 그 사의(辭意)에 급박한 곳이 많고 너그럽고 여유로운 곳이 적으니, [이는 그의 공부가] 참으로 지력(智力)에 힘을 쏟아 탐구해 얻은 것일 뿐 함양(涵養)의 노력이 전무(全無)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경계할 만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색은 지극히 정미한 곳에까지 도달해 있으니, 또한 누가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이루」상, 제6장에 나오는] ‘거실(巨室)’은 아마도 여여숙(呂與叔)의『대학해(大學解)』가운데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에 ‘나의 일가(吾之一家)’일 뿐입니다. ‘실(室)’은 사실(私室)이고, ‘가(家)’는 ‘실(室)’ 중에서 큰 것을 말합니다. 대체로 위 문장의 뜻을 이어 읽는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만 바야흐로 의사(意思)가 정당(正當)하고, 어세(語勢)도 편안(穩帖)하리라 여겨집니다. 만약 ‘거실(巨室)’을 ‘세력이 강성한 집(彊家)’이라 여긴다면, 곧 의도적으로 거실(巨室)을 농락(籠絡)하여 그들의 환심(驩心)을 얻는다는 뜻이 있게 되니, 비록 ‘도를 어겨가면서 명예를 구해서는 안 된다(不可違道干譽)’고 말하더라도, 결국은 오로지 이 뜻을 표준(標準)으로 삼게 되어 곧바로 틈(縫罅)이 생기게 되니, 이는 성현(聖賢)의 평일(平日) 규모(規模)와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 이전에 [논어, 안연, 1장의] ‘천하귀인(天下歸仁)’의 해석에 있어서는 여여숙(呂與叔)의 찬설(贊說)을 채택하고, [논어, 공야장, 12장의] ‘부자언성여천도(夫子言性與天道)’의 해석에 있어서는 상채(上蔡)의 설(說)을 채택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근자에 이 모두가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대도 이점에 대해] 다시금 미루어 헤아려본 후, 그대의 생각을 내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글을 보고 요사이 무엇을 터득하게 되었나요? 이곳으로 오는 걸음이 있으면, 내게 말씀해 주세요. 나로서는 [이점이야말로 그대로부터] 지극히 듣고 싶은 내용입니다.
前書所論數事, 大槪得之, 但語意多未著實. 曾子有疾之說, 近嘗通考諸說, 私論其故. 今以上呈, 幸更爲訂之. ‘心無死生’, 所論意亦是. 但所謂 ‘自我而立, 自觀我者而言’, 此語却大有病. 知言中議論多病, 近疏所疑, 與敬夫․伯恭議論, 有小往復. 文多未能錄寄, 亦懼頗有摭掎前輩之嫌. 大抵如心以成性, 相爲體用 : 性無善惡, 心無死生 : 天理人欲同體異用 : 先識仁體, 然後敬有所施 : 先志於大, 然後從事於小, [주 ; 如本天道變化, 爲世俗酬酢, 及論游․夏問孝之類.] 此類極多. 又其辭意多迫急, 少寬裕, 良由務以智力探取, 全無涵養之功, 所以至此, 可以爲戒. 然其思索精到處, 亦何可及也. ‘巨室’恐如呂與叔大學解中云, 乃‘吾之一家’耳. ‘室’者, 私室 : ‘家’則室之巨者也. 蓋承上文之意讀之, 只合如此說, 意思方正當, 語勢亦穩帖. 若以‘巨室’爲彊家, 便有著心牢籠之意, 雖說不可違道干譽, 終是專立此意爲標準, 便有縫罅, 不似聖賢平日規模也. 如何? 舊說‘天下歸(4-1829)仁’用呂與叔贊說, ‘夫子言性與天道’用上蔡說, 近覺皆未是. 試更推之, 復以見告. 觀書比何所得? 因來亦告及之, 極所欲聞也.
흠부(欽夫 ; 장식을 말함)는 근래에 배우는 자들을 위해 『논어』에 나오는 ‘인(仁)’자를 부류별로 모아 각각 해설을 붙인 후 이를 나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도리어 [장흠부와 같은] 이런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대는 나의 이와 같은 생각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흠부(欽夫)는 또 [논어, 위령공, 35장에 나오는] ‘인(仁)을 당하여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當仁不讓於師)’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 때를 당하여 사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所以不讓者何物)를 깨닫는다(識)면 곧 이 인(仁)을 아는 것(知)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이 옳은 것일까요?
欽夫近爲學者類集論語‘仁’字, 各爲之說, 許寄來看. 然熹却不欲做此工夫, 伯崇以爲然否? 欽夫又說‘當仁不讓於師’, 要當此時識所以不讓者何物, 則知此仁矣. 此說是否?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14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열네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4서)는 언제 씌어진 것이지 확실치 않으나 문집에 편집되어 있는 순서로 볼 때, 신묘년(辛卯, 1171년, 주자 42세) 이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에서는 이단(異端)에 대해서는 군자가 당연히 물리쳐야 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반드시 우리 학문부터 먼저 밝혀서 환히 대본(大本)과 달도(達道)의 전체를 본 다음, 천리(天理)에 의거하여 상대의 잘못을 비판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단(異端)이 정도(正道)를 해치는 것인만큼 군자가 이를 물리쳐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 학문부터 먼저 밝혀서 환히 대본(大本)과 달도(達道)의 전체를 본 다음, 천리(天理)에 의거하여 ‘유아(有我)’의 사심을 활짝 열어 없앰으로써 ‘상대의 잘못’을 통해 ‘우리 도의 올바름’을 통찰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되면 의론해나가는 사이에 피차 서로의 견해가 다 밝혀지게 됨에 따라, 내외(内外)의 도가 하나의 도로 관통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맹자(孟子)께서는 기를 기름(養気)에 관해 논하시면서 고자(告子)가 의(義)를 밖으로 여긴 잘못을 언급하셨고, 이자(夷子)로 인해 천리는 그 근본이 하나라는 위대한 사실을 밝히셨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상대의 잘못만을 공격한 것이겠습니까? [맹자께서는 이상에서 제가 지적한 바와 같은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학문의 지극한 본원을 미루어 밝히신 것이니, 또한 [그가 우리 학문의 지극한 본원을 밝힘에 있어 거의 아무런] 남김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맹자께서는] 이와 같이 한 연후에 비로소 양자(楊子)와 묵자(墨子)를 막아 성현(聖賢)의 대열에 낄 수 있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맹자께서] 그저 소리 높여 상대를 헐뜯으면서 객기(客気)로 승부를 다투는 정도에 그쳤다면, 이는 선배가 말한, “스스로 피폐하고 곤궁해지는 상황에 빠진다”는 조롱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異端害正, 固君子所當闢. 然須是吾學旣明, 洞見大本達道之全體, 然後據天理以開有我之私, 因彼非以察吾道之正, 議論之間, 彼此交盡, 而內外之道一以貫之. 如孟子論養氣而及告子義外之非, 因夷子而發天理一本之大, 此豈徒攻彼之失而已哉? 所以推明吾學之極致本原, 亦可謂無餘蘊矣. 如此然後能距楊․墨而列於聖賢之徒, 不然譊譊相訾, 以客氣爭勝負, 是未免於前輩自敝之譏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