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69-1

황성 2025. 8. 1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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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권


편지(친구와 제자들과의 문답) 書(知舊門人問答)

대매에게 답함 答戴邁


【해제】주자가 대매(戴邁)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答戴邁)는 이 편지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임만(林巒)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여신(呂侁)에게 보내는 편지, 및 양송경(楊宋卿)에게 보내는 편지 등 세 통의 편지들과 함께 모두 을해년(乙亥, 1155년, 주자 26세) 경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答戴邁)의 맨 처음에 “제가 이곳에 와서(熹來此)”라고 했는데, 이는 주자가 외임(外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여신에게 답하는 글(答呂侁)’에 “저는 이곳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관직생활로 인해] 받는 녹봉으로는 제 가족들을 보살피기에도 부족하니(熹之官於此 祿不足以仁其家)”라고 하고 있으며, 또 ‘양송경에게 답하는 편지(答楊宋卿)’에서는 “공무(吏事)가 너무나 급하여(吏事匆匆)”이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편지는 모두 주자가 동안(同安) 주부(主簿)로 있을 당시에 쓴 편지이다. 대매(戴邁), 임만(林巒), 여신(呂侁), 양수경(楊守卿) 등 이 네 사람은 모두 주자가 동안(同安)에서 교유한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이 몇 통의 편지는 모두 주자가 동안(同安)에 주부(主簿)로 있을 당시에 쓴 편지들이다. 우선 을해년(乙亥, 1155년, 주자 26세)에 씌여진 것으로 분류해 둔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9-10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희는 대매(戴邁)가 자신의 새로운 논어해석을 이해해 준데 대해 감사하면서 학문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매우 날카로운 반성을 하고 있다. 주자는 20대 중반에 이미 뚜렷한 자신의 학문관을 지니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제가 이곳에 와서 래차(來此)
󰡔익증󰡕 복주(福州)에 대씨(戴氏)가 있었으니 이 편지는 아마도 [선생께서] 동안(同安)에 계실 때 씌여진 것 같다. (󰡔翼增󰡕 福州有戴氏 此疑在同安時)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대(足下)를 [처음으로] 만나 [그대] 용모를 바라보고 또 [그대와 이런 저런] 의논을 해본 뒤에 [비로소] 그대가 마음에 담고 계신 것이 마치 [물건을 차곡차곡] 쌓아둔 듯한 점이 있으나 아직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것 미득...발지(未得...發之)
󰡔차의󰡕 ‘발(發)’은 󰡔논어(論語)󰡕에서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不悱不發)’라 할 때의 ‘발(發)’과 같은 의미이니, 대매(戴邁)가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있지만 아직 그것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箚疑󰡕 發 如論語不悱不發之發 謂戴邁有蓄積於心 而未得其所以達其辭者) * 󰡔논어(論語)󰡕, 술이(述而)편, 제8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되,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反證)하지 못하면 다시 더 일러주지 않아야 한다.’ (子曰 不憤이어든 不啓하며 不悱어든 不發호되 擧一隅에 不以三隅反이어든 則不復也니라)”  * ‘발(發)’에 대해 주자는 “발(發)은 그 말문을 열어줌을 말한다.(發 謂達其辭)”라고 풀이하고 있다.
을 알고서 나 혼자 생각에 그대야말로 [나와] 함께 이 도에 나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또『논어(論語)』에 대한 나의 해설 논어지설(論語之說)
󰡔간보󰡕 아마도 [주선생의]의 󰡔논어집주(論語集注)󰡕인 듯하다. (󰡔刊補󰡕 疑論語集注 )
을 제생(諸生)에게 말하자 제생들이 [그 생경함에] 다들 놀라 악이(愕眙)
󰡔記疑󰡕 ‘이(眙)’는 ‘니’(丑吏切)로 읽는다. 놀라는 모양이다. (󰡔記疑󰡕 眙丑吏切驚貌) * 악이(愕眙) : ‘악(愕)’은 ‘놀라다’는 뜻이며, ‘이(眙)’는 ‘부릅떠보다.’ 혹은 ‘휘둥그레져서 보는 모양’을 말한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755쪽 및 1423쪽 참고.]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데 오직 그대만은 [나의『논어』에 대해 해설이] 믿을만한 점이 있다 여기시어 이를 손으로 베끼고 입으로 외울 뿐 아니라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까지 하시니 제가 보기에 그대는 [󰡔논어󰡕을 통해] 장차 그대가 [마음속에 축적해 둔 것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듯합니다. 장득...자의(將得...者矣)
󰡔차의󰡕 󰡔논어󰡕에서 장차 그가 [마음속에 축적해 둔 것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箚疑󰡕 謂於論語 將得其所以發之之道也)
 [이점을 생각하니] 저로서는 대단히 위로가 됩니다. 지금 편지와 함께 그대가 초록한 네 편의 글을 보여 주시면서 소견이 얕고 고루한 저의 말을 [그대의] 네 편의 글 앞 뒤 끝에 저의 이름으로 붙이라 요구하시니 책기...경단(責其...經端)
󰡔차의󰡕 [대매가] 선생께 서문과 발문을 지어 주십사 청한 것을 말한다. (󰡔箚疑󰡕 謂請先生爲序跋也 )
 이것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대의 지나친 요구이기도 합니다. 경서를 들고 남쪽을 향해 앉아 남면(南面)
󰡔익증󰡕『예기(禮記)』,「학기(學記)」편에 ‘교학(敎學)의 예(禮)에 따르면 [스승된 자는] 비록 천자라 해도 [그에게] 북면(北面)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스승을 높이기 때문이다’라는 요지의 말이 있다. (󰡔翼增󰡕 學記 敎學之禮 雖於天子無北面 尊師也) *『예기(禮記)』「학기(學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체로 학문을 하려면 먼저 스승을 존엄하게 생각해야 하며 이것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학문을 하는 것이 중대하다는 것이 인정되고 그래야만 비로소 사람들이 학문을 존중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임금이 신하에 대해 신하로서 취급하지 않는 상대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즉 그것은 선조의 제사에 시동(尸童)씨 노릇을 할 경우와 임금의 스승이 될 경우에는 신하로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스승은 천자에게 어떤 일을 말씀드릴 때에도 북면(北面)하지 않는 것은 스승을 존엄하게 여기는 취지에서 유래된 것이다.(凡學之道 嚴師爲難 師嚴然後道尊 道尊然後民知敬學 是故君之所不臣於其臣者二 當其爲尸 則弗臣也 當其爲師 則弗臣也 大學之禮 雖詔於天子 無北面 所以尊師也) [이상옥(李相玉) 역주, 󰡔예기(禮記)󰡕(中), (서울, 明文堂, 2003), 959-60쪽 참고.]
 관련 학설을 문인 제자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대가 [저에게 이상과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이] 왜 지나친 것인지를 감히 말씀드리고자 하니 저의 참람함을 너그럽게 여기시어 저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熹來此, 得足下於衆人之中, 望其容色, 接其議論, 而知足下之所存若有所蓄積, 而未得其所以發之者, 心獨期足下可共進於此道. 及以論語之說授諸生, 諸生方愕眙不知所向, 而足下獨以爲可信也, 手抄口誦而心惟之. 熹謂足下將得其所以發之者矣, 甚慰所望. 今辱書及以所抄四大編示之, 而責其淺陋之辭託名經端, 則非熹之任而足下之過也. 夫執經南面, 而以其說與門人弟子相授受, 此其非熹之任明矣. 熹無所復道, 獨敢竊議足下之所以過, 願寬其僭易而幸聽之.

무릇 배움은 자득(自得)을 목표로 삼을 뿐이니 남이 알아주는가 알아주지 않는가 하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스스로 이미 자득했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대는] 당연히 [남이 그대를 알아주는가 알아주지 않는가 하는] 이점에 급급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저의 말도 그대에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연(不然)
󰡔차의󰡕 아직 자득(自得)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箚疑󰡕 謂未自得也)
 비록 제가 허튼 소리를 하더라도 망언지(妄言之) 
󰡔익증󰡕『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 “[장오자(長梧子)가 구작자(瞿鵲子)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 허튼 소리를 해볼까요. 그대는 그렇게 알고 들으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翼增󰡕 莊子 爲女妄言之 女以妄聽之) [역주] * 안동림(安東林) 역주, 󰡔장자(莊子)󰡕 내편(內篇), (서울, 玄岩社, 1980), 119-120쪽 참고.
 그대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보여주신] 그대의 처신 족하지위(足下之爲)
󰡔차의󰡕 그대가 있는 곳을 말한다. (󰡔箚疑󰡕 謂足下之所居 )
은 매우 잘못되었으니 그대가 힘써 스스로 구하여 자득함이 있은 뒤에 그만 두기를 기약하신다면 제가 비록 거칠고 뒤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대와 그 문제에 관해 이런저런 토론과 강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편의 글은 우선 서실(書室)로 돌려보낸 바 귀서실(歸書室)
󰡔차의󰡕 선생의 서실(書室)에 돌려보낸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대매(戴邁)의 서실(書室)에 돌려보낸다는 말이라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아직은 분명히 알 수 없다. (󰡔箚疑󰡕 謂歸之先生書室 或云還歸於戴邁書室 未知孰是)
󰡔문목󰡕 뒤의 말이 사실에 가까운 듯하다. (󰡔問目󰡕 後說似近)
󰡔절보󰡕 현학(縣學)의 서실(書窒)인 듯하다. (󰡔節補󰡕 似是縣學書窒)
 그렇게 하게 된 이유를 그대에게 말씀드렸으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夫學期以自得之而已, 人知之不知之, 無所與於我也. 今足下自謂其已自得之耶, 則宜無汲汲於此, 而熹之言亦何爲足下重? 不然, 雖熹妄言之, 於足下何有? 足下之爲甚過. 足下勉自求之, 期有以自得之而後已, 熹雖荒落矣, 尙能與足下上下其說而講評之. 四編且以歸書室, 而具其所以然者報足下, 幸察. 





임만에게 답함 答林巒 임만(林巒)
󰡔표보󰡕 [임만(林巒)의] 자(字)는 순지(順之)이다. 진강(晋江) 사람이며 선생의 문인이다. (󰡔標補󰡕 字順之 晋江人 先生門人 )



【해제】주자가 임만(林巒)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앞에 나오는 대매에게 보내는 편지(答戴邁) 및 이 편지 다음에 나오는 여신에게 보내는 편지(答呂侁), 및 양송경에게 보내는 편지(答楊宋卿) 등 세 통의 편지들과 함께 모두 을해년(乙亥, 1155년, 주자 26세) 경에 씌여진 것이다. 대매에게 보내는 편지(答戴邁)의 해제 부분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9-10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자는 자신이 지은 세 편의 문장을 검토해주기를 원하는 임만(林巒)에게 “[올바른] 배움의 길은 문장 짓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며,” “반드시 그 마음에 자득(自得)함이 있으면 그것이 문장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마련”임을 강조하면서 문장학이 아닌 도학(道学)에의 자득(自得)을 학문의 목표로 삼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편지와 함께 직접 쓰신 글 세 편을 보내 주시어 마치 이것으로 저에게 질정을 구하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려서는 문장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라서는 또 게으름으로 인해 문장 짓는 것을 전폐하다시피 했으므로 그대의 뜻에 부응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들은 바에 따르면 [올바른] 배움의 길은 문장 짓는데 급급할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마음에 자득(自得)함이 있으면 그것이 문장에 어쩔 수없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이 때문에 예부터 훌륭한 말씀을 세상에 전한 분들은 그 문장을 순수하게 지었을 뿐 세속과 다르기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그분들의 문장을 읽은 이들은 한결같이 그분들이 탁월한 분들로서 평범한 세속의 선비가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 그대의 언사(詞)는 풍요로운 편이며 주장과 논설이 고상하기는 합니다만 몇몇 선유(先儒)들의 말을 많이 발췌하여 이룬 것일 뿐입니다. 그대께서 자득한 것은 [그 중에서] 과연 어느 정도인지요? 공자께서 ‘덕을 버린다 덕지기(德之棄)
󰡔차의󰡕『논어(論語)』[「양화(陽貨)」제14장에 “공자 말씀하시기를]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덕을 버리는 것이다”라 했다. 대개 임만(林巒)이 선유(先儒)의 학설을 취하기만 했지 실질적으로 자득함이 없었기 때문에 선생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箚疑󰡕 論語 道聽途說 德之棄也 蓋林采摭先儒之說而無自得之實故云)  [역주] * 주자는『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이 구절을 “비록 좋은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자기의 소유로 삼지 않으면 이는 스스로 그 덕을 버리는 것이다(雖聞善言 不爲己有 是自棄其德也)”라고 해석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351쪽 참고.
’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상심해서 하신 말씀이니, 족하께서는 [지금까지의 공부방식을] 고치시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들은 것을 미루어 마을 사람들에게 강학(講学)한다’ 강학문리간(講學問里間)
󰡔기의󰡕 임만(林巒)이 마을에 스승노릇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선생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記疑󰡕 林巒欲爲師於閭里間 故先生言之)
고 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예기(禮記)』「학기(学記)」편에, “가르친 뒤에야 곤혹스러움을 안다” 교연후지곤(敎然後知困)
󰡔차의󰡕 󰡔예기(禮記)』「학기(學記)」편의 말이다. 주(注)에 ‘남의 요구에 응할 길이 없으면 스스로 곤혹스러움을 알게 된다’ 하였다. (󰡔箚疑󰡕 學記語 注無以應人之求則自知困辱也)
󰡔익증󰡕「학기(學記)」편에서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게 되고 가르친 연후에 곤혹스러움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알게 된 연후에 스스로 반성할 수 있게 되고 곤혹스러움을 알게 된 연후에 스스로 노력할 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를 길러준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翼增󰡕 學記曰 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然後能自反 知困然後能自强也 故曰敎學相長)  [역주] * 이상옥(李相玉) 역주, 󰡔예기(禮記)󰡕(中), (서울, 明文堂, 2003), 946쪽 참고. 
고 했는데 곤혹스러움을 알게 되면 왜 스스로 노력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부디 그대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辱示書及所爲文三篇, 若以是質於熹者. 熹少不喜辭, 長復嬾廢, 亡以副足下意. 然嘗聞之, 學之道非汲汲乎辭也, 必其心有以自得之, 則其見乎辭者非得已也. 是以古之立言者其辭粹然, 不期以異於世俗, 而後之讀之者知其卓然非世俗之士也. 今足下之詞富矣, 其主意立說高矣, 然類多採摭先儒數家之說以就之耳. 足下之所以自得者何如哉? 夫子所謂德之棄者, 蓋傷此也. 足下改之, 甚善. 示喩推所聞以講學閭里間, 亦甚善. 記曰: ‘敎然後知困’, 知困則知所以自彊矣. 熹所望於足下者在此, 足下勉旃!





임만에게 답함 答林巒


【해제】주자가 임만(林巒)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혹은 그 보다 조금 뒤에 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편지 가운데 “우계의『집해(集解)』에 이미 잘 나타나 있는 듯합니다.(尤溪集解想已見之)”라 하고 있는데, 이는 석자중(石子重)이 지은『중용집해(中庸集解)』를 가리킨다. 이 책은 건도(乾道) 9년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에 완성되었다. [이 점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문집 75권「중용집해서(中庸集解序)」에 보인다.] 대개 그 당시 석자중(石子重)이 우계(尤溪)의 재(宰)로 있었기 때문에 “우계에서 쓴 집해(尤溪集解)”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주자의 이 편지는 마땅히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이나 혹은 그보다 조금 뒤에 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07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희는 석자중(石子重)이 지은『중용집해(中庸集解)』와 관련하여『중용(中庸)』과『논어(論語)』의 몇 몇 구절에 대한 주자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데 자주 이천(伊川)의 학설을 거론하고 있다. 주자는 이 편지를 쓰기 한 해 전인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에 이미『논맹정의(論孟精義)』를 내 놓았으며, 한 해 후인 갑오년(甲午, 1174년, 주자 45세)에는『대학장구(大学章句)』및『중용장구(中庸章句)』그리고『대학혹문(大学或問)』과『중용혹문(中庸或問)』을 완성하였다.『논어(論語)』와『맹자(孟子)』의 경우는 상기『논맹정의(論孟精義)』를 통해 주자는 선배 학자들의 다양한 학설을 정리하는 한편 임만(林巒) 등과의 토론을 통해 자신의 학설을 성숙시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실이 정유년(丁酉, 1177, 주자 48세)에 완성된『논어집주(論語集註)』와『맹자집주(孟子集註)』및『논어혹문(論語或問)』과『맹자혹문(孟子或問)』인 것이다. 미우라 쿠니오 지음, 김영식․이승연 옮김, 󰡔인간 주자󰡕, 268-9쪽 참고.


[논의주제] “성(性)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教)라 이른다 󰡔중용󰡕 제1장에 “하늘이 명(命)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性)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天命之謂性이요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라고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59쪽 참고. 
”는 구절에 관하여
[선생의 의견] 이천(伊川)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용󰡕1장의] 성을 따름을 도라 이른다’는 말은 사람과 동물을 통털어 말한 것이다. 통인물이언(通人物而言)
󰡔차의󰡕 󰡔중용혹문(中庸或問)󰡕에서 [주선생은] “날짐승과 길짐승 풀과 나무와 같은 경우 태어나면서부터 그저 치우친 형기(形氣)를 타고났기에 비록 온전한 바탕(全體)을 두루 꿰뚫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알아 깨우치고 움직이며 꽃이 피고 지는 등 이들의 생명활동은 또한 모두 그 본성을 따라 각각 저절로 그러한 이치를 지니고 있다. 범과 이리가 보여주는 父子관계, 벌과 개미가 보여주는 군신(君臣)관계, 승냥이나 수달이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것, 물수리(睢鳩)가 보여주는 부부유별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비록 이들은 태어날 때 치우친 형기(形氣)를 타고났지만 도리어 하늘로부터 얻은 도덕성(義理)을 약간씩은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箚疑󰡕 中庸或問 雖鳥獸草木之生 僅得形氣之偏 而不能有以通貫乎全體 然其知覺運動榮悴開落 亦皆循其性而各有自然之理焉 至於虎狼之父子 蜂蟻之君臣 豺㺚之報本 睢鳩之有別 則其形氣之所偏 又反有以存其義理之所得)  [역주] * 󰡔중용혹문(中庸或問)󰡕5쪽, 주희(朱熹), 󰡔사서혹문(四書或問)󰡕, (서울, 保景文化社 영인본, 1986), 303쪽 참고.  * ‘달(㺚)은 수달 달(獺)과 같은 글자임. 
󰡔절보󰡕 정자(程子)께서 “그 본성을 따라가서 [그 본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함은 사람과 동물 모두 [각각 타고난] 이치를 따름을 말한 것이다. 말은 말의 본성을 따르지 소의 본성을 따르지는 않으며, 소는 소의 본성을 따르지 말의 본성을 따르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이는 본래 명도(明道)선생의 말씀인데『집략(輯略)』에서는 이천(伊川)의 말로 되어있으니 의심스럽다. (󰡔節補󰡕 程子曰循其性而不失 此亦通人物而言循理者 馬則爲馬底性 又不做牛底性 牛則爲牛底性 又不爲馬底性 此本明道語 輯略作伊川說 可疑)
”라고 하셨으니 다시금 이천선생의 학설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중용󰡕1장의]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教)라 이른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선생(二先生)과 후씨(侯氏)의 학설이 도리어 이와 같습니다. 이선(二先...如此)
󰡔차의󰡕 정자(程子)께서 “[󰡔중용󰡕1장의]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사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니 [인간사의 경우 흔히] 그 본성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수양을 통해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배움에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애초부터 본성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찌 수양이라는 존재하겠는가. 후씨(侯氏)의 학설은 아마도 이와 같았던 듯하다. 아마도 임만(林巒)의 학설이 정자와 후씨에 근본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箚疑󰡕 程子曰 修道之謂敎 此則專在人事 以失其性故修而求復之則入於學 若元不失則何修之有 侯氏說想亦如此 蓋林巒說祖於程侯 故云却如此)
 그러나 여(呂)씨 ․유(游)씨 ․양(楊)씨의 학설 여유양설(呂游楊說)
󰡔차의󰡕『중용혹문(中庸或問)』에 “여씨(呂氏)의 이른바 ‘선왕(先王)이 예(禮)를 제정하여 천하에 보편화시킴으로써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 학설이 옳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 살피건대 정자(程子)와 후씨(侯氏)는 ‘보통 사람이 각자 그 도를 닦는다’는 뜻으로 해석한 반면, 여(呂)씨와 유(游)씨 및 양(楊)씨는 ‘성인(聖人)이 도(道)를 닦아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유(游)씨와 양(楊)씨의 설은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여(呂)씨의 설과 같았음에 틀림없다. (󰡔箚疑󰡕 中庸或問 呂氏所謂先王制禮 達之天下 傳之後世者得之 ○ 按程子侯氏 以人自修其道而言 呂游楊 以聖人修道敎人而言 游楊說不可考 然當與呂說同)  [역주] * 󰡔중용혹문(中庸或問)󰡕8쪽, 주희(朱熹), 󰡔사서혹문(四書或問)󰡕, (서울, 保景文化社 영인본, 1986), 304쪽 참고.
󰡔잡지󰡕 도(道)를 [아무나 사적인 차원에서] 멋대로 소유해서는 아니 된다. [도는] 참으로 장차 천하(天下)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다. 장차 천하와 더불어 함께하기 때문에 예(禮)를 닦아 ‘중(中)’을 보이고 악(樂)을 닦아 ‘화(和)’를 찾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도에 입각한 가르침이다. [주; 이는 유씨(游氏)의 학설이다.] 도(道)란 백성이 늘 이를 활용하면서도 그 이치를 모른다. 선왕(先王)께서 이 때문에 잘못을 예방할 수 있는 법도(防範)를 제정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적절함(中)을 지닐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가르침(敎)에 대해 닦는다(修 즉 修道)라고 한 것이니 [수(修)란] 대개 품목별로 적절함을 조절해 둔 것(品節)일 뿐이다. [주; 이는 양씨(楊氏)의 학설이다.] 󰡔차의󰡕에는 단지 여(呂)씨의 학설만 기록했다. (󰡔雜識󰡕 道不可擅而有也 固將與天下共 將與天下共之 故修禮以示之中 修樂而尋之和 此道之敎也 [주;游氏說] 道者 百姓日用而不知也 先王爲之防範 使過不及者取中焉 所以敎也  謂之修者 蓋亦品節之而已[주; 楊氏說] 箚疑只記呂說)  [역주] *『중용장구』1장의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修道之謂敎)”에 대해 주자는 “도(道)는 노(路)와 같다. 사람과 물건이 각기 그 성(性)의 자연(自然)을 따르면 일상생활(日常生活)하는 사이에 각기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이른바 도(道)라는 것이다. 수(修)는 품절(品節)함이다. 성(性)과 도(道)가 비록 같으나 기품(氣稟)이 혹 다르기 때문에 과(過)하고 불급(不及)한 차이가 없지 못하다. 이러므로 성인(聖人)이 사람과 물건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인하여 품절(品節)[등급과 제한]하여 천하(天下)에 법(法)이 되게 하시니, 이것을 일러 교(敎)라 하니 예악(禮樂)·형정(刑政)과 같은 등속이 이것이다. (道는 猶路也라 人物이 各循其性之自然이면 則其日用事物之間에 莫不各有當行之路하니 是則所謂道也라 修는 品節之也라 性道雖同이나 而氣稟或異라 故로 不能無過不及之差하니 聖人이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하사 以爲法於天下하시니 則謂之敎니 若禮樂刑政之屬이 是也라)”라고 하였다. 주자가 최종적으로 양씨의 설을 많이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59-60쪽 참고.
󰡔표보󰡕 유씨(游氏)가 말하기를 도(道)를 [아무나 사적인 차원에서] 멋대로 소유해서는 아니 된다. [도는] 참으로 장차 天下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禮)를 닦아 ‘중(中)’을 보이고 악(樂)을 닦아 ‘화(和)’에로 인도하는 것이니, 이것이 도를 닦음에 입각한 가르침(修道之敎)이다. (󰡔標補󰡕 游氏曰道不可擅而有也 固將與天下共之 故修禮以示之中 修樂以導之和 此修道之敎也)
만은 못한 듯합니다. 우계(尤溪) 석자중(石子重)의『중용집해(中庸集解)』에 이미 잘 나타나 있는 듯합니다.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伊川先生說‘率性之謂道, 通人物而言’, 更以其說思之. ‘脩道之謂敎’, 二先生及侯氏說却如此, 然恐不如呂․游․楊說. 尤溪集解想已見之. 

[논의주제]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発)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한다 󰡔중용󰡕 제1장 가운데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道)이다.(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라고 나온다.
”는 구절에 관하여
[선생의 의견] 이천(伊川)선생께서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함양(涵養)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아직 드러나기도 전에 中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으니 이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고 난 다음 이 단락을 자세히 검토해보시기 바랍니다.
喜怒哀樂未發謂之中.
伊川先生云: ‘涵養於未發之時則可, 求中於未發之前則不可.’ 宜更思之, 檢此段熟看.

[논의주제] “사람들이 능한 이가 적은 지가 오래이다” 󰡔중용󰡕 제3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中庸)은 그 지극할 것이다. 사람들이 능한 이가 적은 지가 오래이다.’(子曰 中庸은 其至矣乎인저 民鮮能이 久矣니라)  또 󰡔논어(論語)󰡕,「옹야(雍也)」편 제27장에도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中庸)의 덕(德)이 지극하구나! 사람들이 <이 덕(德)을>소유한 이가 적은 지 오래이다. (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인저 民鮮이 久矣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64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23쪽 참고.
와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다” 󰡔논어󰡕 ,「술이(述而)」편 제5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다. 내 다시는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뵙지 못하였다.’(子曰 甚矣라 吾衰也여 久矣라 吾不復夢見周公이로다)”라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28쪽 참고.
의 ‘오래됨(久)’이 같은 의미라는 것에 관하여. 
[선생의 의견] ‘오래되었다’는 [경서의] 의미를 올바르게 터득하셨습니다. 득지(得之)
󰡔차의󰡕 제유(諸儒)들이 대부분 ‘능구(能久)’를 붙여 읽는데 반해 여기서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께서 “잘 이해했다(得之)”고 하신 것이다. (󰡔箚疑󰡕 諸儒多以能久連讀 而此獨不然 故曰得之 )
󰡔차보󰡕 이 질문 내용은 여씨(呂氏)설과는 다르며 주선생의 장구(章句)의 설과 부합한다. 혹문(或問)에도 이점에 관해 논한 곳이 있다. (󰡔箚補󰡕 此問與呂氏異 而合於章句 或問中亦有所論)
󰡔익증󰡕 여씨(呂氏)는 ‘구(久)’자를 “‘중용(中庸)의 덕(德)’을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는데, 사람들 중에는 이 학설을 추종한 사람도 있었던 듯하다. (󰡔翼增󰡕 呂氏以久字爲不能久於中庸之德 諸家或從之) * 즉 󰡔중용󰡕3장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中庸)은 그 지극할 것이다. 사람들이 능한 이가 적은 지가 오래이다.’(子曰 中庸은 其至矣乎인저 民鮮能이 久矣니라)”라는 구절에 대해 여씨(呂氏)는 “民이 鮮能久矣라”로 읽었고 주자(朱子)는 “民鮮能이 久矣라”고 읽고 있는 것이다.

‘民鮮能久矣’與‘甚矣, 吾衰也久矣’之‘久’同. 
‘久矣’之意得之. 

[논의주제] “부부의 어리석음” 󰡔중용󰡕 제12장에 “부부(夫婦)의 어리석음으로도 참여하여 알 수 있으되 그 지극함에 이르러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부부(夫婦)의 불초(不肖)함으로도 능히 행할 수 있으되 그 지극함에 이르러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능하지 못한 바가 있으며, 천지(天地)의 큼으로도 사람이 오히려 한(恨)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큰 것을 말할진댄 천하(天下)가 능히 싣지 못하며, 작은 것을 말할진댄 천하(天下)가 능히 깨뜨리지 못한다. (夫婦之愚로도 可以與知焉이로되 及其至也하여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知焉하며 夫婦之不肖로도 可以能行焉이로되 及其之也하여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能焉하며 天地之大也에도 人猶有所憾이라 故로 君子語大인댄 天下莫能載焉하며 語小인댄 天下莫能破焉이니라)”이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71쪽 참고.
에 관하여
[선생의 의견] [이에 관해서는] 이천(伊川)선생께서 이미 상세히 논하였습니다. 대저 [중용12장의] ‘어리석은 부부로서도 능히 알고 능히 행할 수 있다’는 데서부터 ‘성인(聖人)이나 천지(天地)도 다할 수 없는 점이 있다’는 데까지는 모두 ‘넓게 드러난 곳’을 말한 것입니다만, 이른바 ‘은미한 것’이 이를 벗어나 있지는 않습니다. 󰡔중용󰡕 제12장에 “군자(君子)의 도(道)는 비(費)하고 은미(隱微)하니라.(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에 대해 주자는 “비(費)는 용(用)이 넓음이요, 은(隱)은 체(體)가 은미(隱微)함이다.(費는 用之廣也요 隱은 體之微也라)”라고 주석하고 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71쪽 참고.
 
夫婦之愚
伊川先生論之已詳. 大抵自夫婦之所能知能行直至聖人天地所不能盡, 皆是說‘費’處, 而所謂‘隱’者不離於此也. 

[논의주제] “도(道)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 󰡔중용󰡕 제13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도(道)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으니, 사람이 도(道)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 한다면 도(道)라 할 수 없다.’(子曰 道不遠人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이면 不可以爲道니라)”라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72쪽 참고.
는 데 대하여
[선생의 의견] 이 단락의 의미가 아직 통하지 않습니다. 또 불교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더욱이 너무 밖으로 내달린다 주작(走作)
󰡔차의󰡕 ‘밖으로 치달린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箚疑󰡕 猶言外馳)
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선 다시금 그 문맥의 의미를 자세히 완미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道不遠人
(4-1756)此段文義未通, 又多用佛語, 尤覺走作. 且更熟玩其文義爲佳. 

[논의주제] “자신을 바로잡기만 하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원망이 없다”는 데 대하여
[선생의 의견] 무릇 글을 읽을 때에는, 우선 마음을 비우고 [지금 읽고 있는] 이곳의 문맥상의 의미를 그 자체로 간파하여 간차...문의(看此...文義)
󰡔차의󰡕 어떤 한 단락의 문의를 살펴본다는 점을 범언(泛言)한 것이다. [여기서의 ‘이 한 단락의 문의’란] 아래 나오는 ‘다른 곳의 언어’라는 구절과 서로 대(對)가 된다. (󰡔箚疑󰡕 泛言看此一段文義也 與下引他處言語相對)
 말뜻이 분명해지도록 하여 온몸에 푹 배어들 듯이 글의 맛을 흠뻑 느낄 수 있어야만 훌륭하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지금 읽고 있는 곳 이외의 언어를 멋대로 지금 읽고 있는 곳에로 끌어와 서로 뒤섞는 것은 절대로 아니 됩니다. 그리되면 [말은 유사하다 해도 의미는] 서로 유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보고 있는] 이 가운데에서의 정확한 의미 맥락을 혼란시키게 될 것입니다.
正己而不求人則無怨. 
凡讀書, 且虛心看此一處文義, 令語意分明, 趣味浹洽乃佳. 切不可妄引他處言語來相雜, 非惟不相似, 且是亂了此中正意血脈也. 





여신에게 답함 答呂侁


【해제】주자가 여신(呂侁)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이 편지 앞에 실려 있는 대매에게 보내는 편지(答戴邁)와 임만(林巒)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및 이 편지 다음에 실려 있는 양송경에게 보내는 편지(答楊宋卿) 등 세 통의 편지들과 함께 모두 을해년(乙亥, 1155년, 주자 26세) 경에 씌여진 것이다. 대매에게 보내는 편지(答戴邁)의 해제 부분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9-10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희는 가난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신(呂侁)을 격려하면서 “가난은 선비의 일상적인 것이니, 이 때문에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보내 주신 편지에 매우 위로되었습니다. 지키시는 것이 만약 이와 같다면 그대가 마음에 품고 계신 것은 실로 원대한 것이어서 제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대는] 가난 때문에 [그대 자신의 자율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결박하여 남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대가 큰 것은 참으시면서 작은 것은 참지 못하는 것 인기...기세(忍其...其細)
󰡔차의󰡕 ‘큰 것은 차마한다’는 것은 ‘[지조(志操)를] 지킴이 이와 같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 작은 것’이란 가난을 말한다. (󰡔箚疑󰡕 忍其大 謂所守如是 其細謂貧也)
이니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저는 이곳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관어차(官於此)
󰡔익증󰡕 아마도 이 역시 동안(同安)에서인 듯하다. (󰡔翼增󰡕 疑亦同安)
 [관직생활로 인해] 받는 녹봉으로는 제 가족들을 보살피기 인기가(仁其家)
󰡔익증󰡕 한유의 글에 “그 봉록이 삼족을 사랑하기에도 부족하다”는 말이 나온다. (󰡔翼增󰡕 韓文 其祿不足以仁其三族)  [역주] * 삼족(三族) ; (1) 부모, 형제, 처자 (2) 부친, 아들, 손자 (3) 부친의 형제, 자기의 형제, 아들의 형제 (4) 부족, 모족, 처족.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84쪽.]
에도 부족하니 그대의 뜻에 부응할 길이 없군요. 무이...지의(無以...之意)
󰡔기의󰡕 여공(呂公)이 선생께 요구하는 것이 있었는데 선생께서는 이에 부응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記疑󰡕 呂公有求於先生 而先生不得副也)
 [그러나 그대는 못난 저를 믿고 그대의 속사정을 저에게 말씀해주심으로써 제가] 감히 들을 수 있게 된 데 대해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대는 지금까지 지켜 오신 것을 굳건히 하시기 바랍니다. 가난은 선비의 일상적인 것이니 빈자사지상(貧者士之常)
󰡔표보󰡕 이 다섯 글자는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온다. (󰡔標補󰡕 此五字出家語)
,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으면 매우 좋겠습니다.
惠書, 甚慰. 所守審如是, 足下之所存誠遠且大, 非熹所能及也. 顧不能不以貧自累而求有以得於人, 則足下之忍其大而不忍其細, 又非熹之所能知也. 抑熹之官於此, 祿不足以仁其家而無以副足下之意, 敢以所聞爲謝, 糞足下之堅其守也. 貧者士之常, 惟無易其操則甚善. 





양송경에게 답함 答楊宋卿


【해제】주자가 양송경(楊宋卿)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앞에 나오는 대매에게 보내는 편지(答戴邁), 임만(林巒)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여신에게 보내는 편지(答呂侁)와 함께 모두 을해년(乙亥, 1155년, 주자 26세) 경에 씌여진 것이다. 대매에게 보내는 편지(答戴邁)의 해제 부분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9-10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희는 양송경이 보내온 시를 칭찬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주자는 “마음에 있으면 뜻(志)이고 말로 표현되면 시(詩)이다”는 관점을 견지하면서 ‘시’에 있어서는 표현의 화려함 여부(工拙)가 아닌 시인의 의지가 지향하는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가 중요한 것이라 본다.

일전에 편지 한 통과 직접 지으신 시 한 편을 보내오셨더군요. 여러 날 동안 [그대가 보내주신 시를] 읇조리면서 차마 손에서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가 내려주신 후의가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공무(吏事)가 너무나 급하여 때맞추어 감사의 편지도 쓰질 못했군요. 이 점에 대해 그대는 저를 나무라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前辱柬手啓一通及所爲詩一編, 吟諷累日, 不忍去手. 足下之賜甚厚, 吏事匆(4-1757)匆, 報謝不時, 足下勿過. 

제가 들으니, “시(詩)는 뜻이 가는 바[에 따라 이를 글에 표현한 것]이니, 마음에 있으면 뜻이고 말로 표현되면 시이다 시자...위시(詩者...爲詩)
󰡔익의󰡕 [이 말은] 시(詩) 대서(大序)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翼疑󰡕 詩大序中語)  [역주] * 시(詩) 대서(大序)는 󰡔주자전서(朱子全書)』(上海: 上海古籍出版社, 安徽敎育出版社, 2002) 제1책, 354쪽 참고.
”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시’에 어찌 다시 잘 짓는다거나 못 짓는다거나 하는 것(工拙)이 있겠습니까? 시를 통해 [시인의] 의지가 지향하는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를 볼 뿐입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군자는 [그] 덕이 [자신의] 뜻을 추구하기에 충분할 정도여서 그의 뜻이 고명하고 순일한 경지에서 나왔음 출어...지지(出於...之地)
󰡔차의󰡕 그의 뜻이 고명하고 순일한 경지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箚疑󰡕 謂其志出於高明純一之地也)
이 틀림없는 그런 수준이었기에, 시에 대해서는 참으로 배우지 않고서도 잘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격률(格律)의 정미로움과 거칢, 운(韻)을 써서 대구를 맞추는 것, 그리고 일을 비유하여 말을 엮어나가는 것 등을 잘 하는가 잘못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위(魏)․진(晉) 이전 여러 현자들의 작품을 가지고 고찰하더라도 [그들 중에] 이런 점들 기간(其間)
󰡔차의󰡕 윗 문장의 [시의] 격율(格律)이 지극히 선한가 아닌가 하는 점을 말한다. (󰡔箚疑󰡕 謂上文格律至善否) 
에다 마음을 쓴 자들은 없었습니다. 하물며 옛 시인들이 쓴 작품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근세 작자들이 비로소 여기 어차(於此)
󰡔차의󰡕 [이] 또한 격율(格律) 등을 가리키다. (󰡔箚疑󰡕 又指格律等)
에 마음을 둔 결과 시[를 논함]에 ‘잘 짓는다거나 못 짓는다거나 하는 논의’가 생겨나 화려한 문장 파(葩)는 ‘꽃’ 혹은 ‘화려함’을 의미하고, 조(藻)는 ‘무늬’, ‘꾸미다’ 등의 의미이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769 및 1801쪽 참고.]
이 우세해지면서 ‘[시작의] 뜻을 거론하는 데서 생겨나는 공적’은 묻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시를 잘 짓지는 못합니다만 [대개 시와 관련하여] 들어온 말이 이와 같습니다. 그대의 후의(厚意)에 보답할 길이 없어 우선 한두 조목의 말씀을 드립니다. 보내오신 그대의 시편(詩編)을 다시 보내드리면서 아울러 이것으로 답을 대신합니다.
熹聞詩者志之所之, 在心爲志, 發言爲詩. 然則詩者豈復有工拙哉, 亦視其志之所向者高下如何耳. 是以古之君子德足以求其志, 必出於高明純一之地, 其於詩固不學而能之. 至於格律之精粗, 用韻屬對, 比事遣辭之善否, 今以魏晉以前諸賢之作考之, 蓋未有用意於其間者, 而况於古詩之流乎? 近世作者乃始留情於此, 故詩有工拙之論, 而葩藻之詞勝, 言志之功隱矣. 熹不能詩, 而聞其說如此, 無以報足下意, 姑道一二. 盛編再拜封納, 幷以爲謝. 





가국재(한)에게 답함 答柯國材 가국재(柯國材)
󰡔절보󰡕 동안(同安) 사람이다. 선생께서 동안(同安)에 계실 때 그를 천거하여 학직(學職)에 파견하였다. (󰡔節補󰡕 同安人 先生在同安 擧公差學職)



【해제】주자가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을해년(乙亥, 1155년, 주자 26세) 경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 내용 중에 “[그대가] 요즈음 일상사에 바쁜 일이 없으시면 여가를 내어 잠시 이곳에 오셔서...(齋居無事, 宜有暇日, 以時過我...)”라고 하고 있는데, 살피건대 주자가 가국재(柯國材)를 위해 쓴「일경당기(一經堂記)」에 “소흥23년(癸酉, 1153년, 주자 24세) 가을 7월에 나는 동안(同安)에 왔는데, 그 이듬 해에 가국재(柯國材)와 교유할 수 있었다.(紹興二十三年秋七月予來同安 明年乃得柯君游)”라고 했다. 가국재(柯國材)가 동안(同安)에 있을 때, 주자도 동안(同安)에서 관직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그대가] 요즈음 일상사에 바쁜 일이 없으시면 ... 잠시 이곳에 오셔서...(齋居過我...)”라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마땅히 주자가 동안(同安)에 있을 때 쓴 편지이다. 우선 을해년(乙亥, 1155년, 주자 26세) 경에 쓴 것으로 해 둔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0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자는 인(仁)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데 특히 ‘인의 실천은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爲仁由己)’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대가 내게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그대의 생각으로는] 안자(顔子)와 자공(子貢)이 모두 인(仁)에 관해 질문했지만, 공자께서는 대답해주신 내용이 동일하지는 않은 듯하다 부자...부동(夫子...不同)
󰡔차의󰡕 [인에 대해] 공자께서는 顔淵에게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감’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인(仁)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몸에 달려 있다’는 말씀으로 결론내리셨다. 그러나 子貢에게는 ‘[이 고을에 삶에] 그 대부(大夫) 중에 어진 자를 섬기며, 그 선비 중에 인(仁)한 자를 벗삼아야 한다’라고 말씀해주셨다는 것이다. (󰡔箚疑󰡕 告顔淵以克已復禮 而結之以爲仁由已 告子貢以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 * 󰡔논어(論語)󰡕「안연(顔淵)」편, 제1장 ; “안연(顔淵)이 인(仁)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감이 인(仁)을 하는 것이니, 하루 동안이라도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가면 천하(天下)가 인(仁)을 허여 하는 것이다. 인(仁)을 하는 것은 자기 몸에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있는 것이겠는가? (顔淵問仁한대 子曰 克己復禮爲仁이니 一日克己復禮면 天下歸仁焉하리니 爲仁由己니 而由人乎哉아)” * 󰡔논어(論語)󰡕「위령공(衛靈公)」제9장 ; “자공(子貢)이 인(仁)을 행함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공인(工人)이 그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기구[연장]를 예리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 이 고을에 삶에 그 대부(大夫)의 어진 자를 섬기며, 그 선비의 인(仁)한 자를 벗삼아야 한다. (子貢問爲仁한대 子曰 工欲善其事인댄 必先利其器니 居是邦也하여 事其大夫之賢者하며 友其士之仁者니라)” 
는 취지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나도 일찍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대의 말씀과는 다릅니다. ‘인의 실천은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爲仁由己)’는 이 말씀은 인(仁)을 실천함에 있어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서 대개 [인의 실천은] 시종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시종...호차(始終...乎此)
󰡔익증󰡕 ‘시종(紿終)’은 남과 자기, 안과 밖을 말한다. ‘이것(此)’는 ‘자기에게서 말미암음(由已)’을 가리키는 것이니 ‘자기반성(求已)’와 ‘남에게서 구함(求人)’이 모두 ‘자기에게서 말미암는 것(由已)’이라는 말이다. (󰡔翼增󰡕 紿終 謂人已內外也 此 指由已 謂求已求人皆由已也)
 대저 [인을 올바르게 실천하기 위해] 스승과 벗을 구하여 그들을 섬기게 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찌 외부적인 데서 촉발한 것이겠습니까? 이미 스승과 벗을 얻어 섬기게 되더라도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기반성적 차원에서 인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스승과 벗은 그저 스승과 벗으로 남을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스승과 벗이 인의 실천이라는] 나의 공부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뜻 차의(此意)
󰡔차의󰡕 윗 문장에서 이른바 ‘[인을 올바르게 실천하기 위해] 스승과 벗을 구하여 그들을 섬기게 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외부적인 데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이미 스승과 벗을 얻어 섬기게 되더라도]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기반성적 차원에서 인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스승과 벗은 그저 스승과 벗으로 남을 뿐’이라는 뜻을 말한다. (󰡔箚疑󰡕 卽上所謂求師友而事之之心 非自外至 及不求諸已則師友自師友之意也)
으로 미루어보건대 [안연과 자공에게 해주신 공자의] 두 가지 말씀이 애초부터 다르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대의 말씀과 같다면, 아마도 그것은 선을 길러주고 실수를 구제해주려는 뜻은 아닌 듯합니다. 저로서는 그대가 부디 이 점을 잘 생각해보시고 [공자께서 두 제자에게 해주신] 그 말씀을 반복해서 살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그대로부터 부탁받은 것에 대해서는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대매(戴邁)와 진제중(陳斉仲) 이 두 분 대진이생(戴陳二生)
󰡔익증󰡕 곧 대매(戴邁)와 진제중(陳齊仲)을 말한다. (󰡔翼增󰡕 卽戴邁陳齊仲)
의 문사(文辭)에 대한 취향은 볼만한 점이 있으니, 본디 그것이 유래한 바 소자(所自)
󰡔차의󰡕 국재(國材)로부터라는 말이다. (󰡔箚疑󰡕 謂自國材也)
가 있음을 알겠습니다. [그대는] 이와 같은 훌륭한 벗을 두었으니 충분히 인의 실천을 도울만합니다. 이 점에 대해 감히 그대에게 축하를 드리며 나 또한 장차 [보인(輔仁)을 위해 그대들의] 도움을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대가] 요즈음 일상사에 바쁜 일이 없으시면 여가를 내어 잠시 이곳에 오셔서 그 동안 공부한 것을 토론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제가 감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辱書, 示以顔子子貢俱以仁爲問, 而夫子告之有若不同者. 此固嘗思之, 而非如足下之說也. ‘爲仁由己’, 此論爲仁之至要, 蓋始終不離乎此. 夫其所以求師友而事之之心豈自外至哉? 旣得師友而事之矣, 然不求諸己, 則師友者自師友耳, 我何有焉? 以此意推之, 則二說者初不異也. 如足下之言, 恐非長善救失之意. 足下思之而反復其說, 則熹之願. 他所以見屬者, 豈熹所敢當哉? 戴․陳二生趣向文辭皆可觀, 固知其所自矣. 有友如此, 足以輔仁, 敢以爲足下賀, 而僕亦將有賴焉.(4-1758)齋居無事, 宜有暇日, 以時過我, 幸得講以所聞, 而非所敢望也. 





가국재에게 답함 答柯國材 


【해제】주자가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경에 씌여진 것이다. 담가국재이(答柯國材二)
󰡔익증󰡕 이 편지는 을유년(乙酉, 1165년, 주자 36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 가운데 나오는 ‘화융(和戎)’이라는 말이 연보(年譜)와 서로 부합되기 때문이다. (󰡔翼增󰡕 此乙酉書 据書中和戎之語 與年譜相合 ) * 왕무횡(王懋竑) 찬(撰), 하충례(何忠禮) 점교(點校), 󰡔주희연보(朱熹年譜)󰡕, (北京 ; 中華書局, 1998), 26쪽 참고. 
그러나 진래(陳來)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 이 편지를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경에 씌여진 것으로 본다. 진래의 주장을 다음과 같다. 이 편지 내용 중에 “이연평(李延平)선생께서 돌아가신 뒤로부터...(自延平逝去...)”라는 말이 나오는데, 살피건대 이통(李侗)은 융흥(隆興)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 10월에 죽었다. 이 때문에 이 편지는 마땅히 그 후에 씌여진 것이다. 또 이 편지 내용 중에 “오랑캐들은 올해 들어 대거 나라 안에 진입해 들어와 회남을 점거하여 주둔한 채 떠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今歲虜人大入 據有淮南 留屯不去)”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마땅히 융흥(隆興) 2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겨울의 일이다. 이 때문에 이 편지는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겨울에 씌여진 것이다. 또 이 편지 가운데 “근자에  구주(衢州)에서 강원적(江元適, 즉 江泳)이 벼슬에 오르고 나서 내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와 ... (近衢州一江元適登仕[泳]以書來...)”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주자가 강원적(江元適)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는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임이 또한 증명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9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자는 일상사 안부를 묻고 최근 금나라와의 관계 등을 언급하는 이외에, 복희선천도에 따른 역괘(易卦)의 순서에 대하여 언급하기도 하고 󰡔춘추(春秋)󰡕가 “비록 천리(天理)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로 인간사(人事)를 관통하고 있으니, 만약 사적(事迹)을 상고하지는 않고 그저 여러 유학자들의 학설만 참고해서는 󰡔춘추(春秋)󰡕의 대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하면서 역사적 사실 확인을 강조하기도 한다. 또 󰡔논어(論語)󰡕, 󰡔시경(詩経)󰡕 및 󰡔맹자(孟子)󰡕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 집필이 계속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가국재(柯國材)의「논어서(論語序)」「역서(易序)」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비교적 긴 편지에 속한다.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가국재(柯國材) 어른 집사(執事) 집사(執事) ; (1) 시무를 봄. 또 그 사람. (2) 귀인(貴人)을 모시고 그 집안 살림을 맡은 사람. (3) 귀인(貴人)을 직접 지칭하기가 황송하여 그의 옆에 모시고 있는 집사(執事)에게라는 뜻으로, 편지에서 귀인(貴人)의 성명 밑에 쓰는 말. 전(轉)하여 (4) 직접 귀인(貴人)의 대명사로도 씀.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463쪽 참고.]
께 두 번 절합니다. 주희집 주 : 처음부터 여기까지(以上)의 내용은 원문에는 빠져 있어, 순희(淳熙)본에 근거하여 보충한다. (以上原缺, 據淳熙本補)
 채강(蔡彊)이 [이곳에] 옴에 따라 [저는 채강을 통해 그대가 보낸] 3월과 6월 그리고 9월에 쓴 세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급히 [편지를] 개봉하여 빠른 속도로 읽어보았습니다. [편지를 통해 저는] 마치 [직접 그대의] 가르침을 받자온 듯하여 그대와 헤어진 후 오랜 동안 소식 듣지 못한 저의 마음에는 매우 위로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려! 소식 들은 후 벌써 한 해가 저물었군요. 그대의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주희집 주 : 앞서 인용한 [淳熙本에는] ‘况’자 아래 ‘復’자가 있다. (右引‘况’下有‘復’字.) 
? 엎드려 바라옵건대 [그대의 일상이] 도를 음미하는 데 도움이 되시고 아울러 만복이 깃드시기를 바랍니다. 
熹頓首再拜國材丈執事: 蔡彊來, 領三月六月九月三書, 急拆疾讀, 如奉誨語, 良慰久別不聞問之懷, 幸甚幸甚!信後歲已晩矣, 不審爲况何如? 伏惟味道有相, 尊候萬福.

저는 모친을 모시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학박사(武学博士)로 임명되어 순서를 기다린 것이 이미 삼 년이나 되었으니 무학...삼년(武學...三年)
󰡔기의󰡕 선생께서 무학박사(武學博士)에 제수되셨지만 [임지에 나아가지 않아 그 소임을] 궐(闕)한 것이 삼년이나 되었는데 [그리된 것은 선생께서] 어버이 봉양이 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는] 부득이(不得已) 사록관직을 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운운(云云) 했는데 이는 요즈음 관리들로 하여금 [실지로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미리 분부하여 대궐(待闕)케 하는 것(預付待闕)과 흡사한데 주선생 당시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記疑󰡕 先生除武學博士 其闕尙隔三年 以養親爲急 不得已欲請祠云云 如今敎官預付待闕之類 當時有此例耳)
󰡔절보󰡕 당(唐)나라 개원(開元, 713-742) 시기에 처음으로 태공묘(太公廟)를 설치하여 줄곧 무왕(武王)과 성왕(成王)을 존중해왔는데 송(宋)대에 이르러 [이 태공묘에] 박사(博士)와 학유(學諭)를 두었다. 선생께서는 계미년(癸未년, 1163, 주자34세) 11月에 박사(博士)에 제수되셨다. (󰡔節補󰡕 唐開元中 始置太公廟 尋尊爲武成王 至宋置博士學諭 先生於癸未十一月除博士) * 왕무횡(王懋竑) 찬(撰), 하충례(何忠禮) 점교(點校), 󰡔주희연보(朱熹年譜)󰡕, (北京 ; 中華書局, 1998), 23쪽 참고. 
󰡔익증󰡕 그 당시 관제(官制)에, 미리 [임용의] 차례를 조정하여 기다리게 하는(預調待次)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선생께서는 [이러한 관례에 따라] 동안(同安)에서 [태공묘 박사에] 제수되신 후 3년 후에 비로소 임지로 가시게 된 것이다. (󰡔翼增󰡕 時官制有預調待次之例 先生授同安 亦三年始之任)
 형편상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현재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절박함이 이미 극심하니, 빠른 시간 안에 완곡하게 사록관(祠録官)을 청해야 할 형편입니다. 모친이 점점 나이를 드시니, 살아계실 때 부모 섬기는 일 * 생사(生事) ;『논어(論語)』,「위정(爲政)」, 제5장에 “맹의자(孟懿子)가 효(孝)를 묻자, 공자(孔子)께서 ‘어김이 없어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번지(樊遲)가 수레를 몰고 있었는데,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맹손씨(孟孫氏)가 나에게 효(孝)를 묻기에 나는 어김이 없으라고 대답하였다.’ 번지(樊遲)가 ‘무엇을 이르신 것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살아 계실 때에는 예(禮)로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禮)로 장사지내고, 예(禮)로 제사지내는 것이다.’ (孟懿子問孝한대 子曰 無違니라 樊遲御러니 子告之曰 孟孫이 問孝於我어늘 我對曰 無韋라호라 樊遲曰 何謂也니잇고 子曰 生事之以禮하며 死葬之以禮하며 祭之以禮니라)”라는 내용이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36-7쪽 참고.
이 더욱 쓸쓸해집니다. 요락(聊落)
󰡔익증󰡕 요락(寥落)의 의미이다. (󰡔翼增󰡕 寥落之意)  [역주] * 요락(寥落) ; (1) 드물다. 희소하다. (2) 쓸쓸하다. 적막하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594쪽]
 비록 우리 [유교의] 도가 본래 [생사(生死)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이러한 것이긴 합니다만 [늙어가는 어버이를 바라보는] 자식의 마음에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군요.
熹奉親粗遣, 武學闕尙有三年, 勢不能待. 目今貧病之迫已甚, 旦夕當宛轉請祠也. 親年日老, 生事益聊落, 雖吾道固如此, 然人子之心不能不慨然耳. 

현재의 나라 사정은 오랑캐와의 화의(和議) 화융(和戎)
󰡔익증󰡕『춘추좌전(春秋左傳)』에 ‘위강(魏絳)이 융적과 화의했다’고 했다. 소흥(紹興) 을해년(乙亥, 1155, 주자26세)에 진회(秦檜)가 죽자 만사설(萬俟卨)과 탕사퇴(湯思退)가 연이어 재상이 되어 [진회가 해온 금과의] 화의를 계속 주도했다. (󰡔翼增󰡕 左傳魏絳和戎 紹興乙亥 秦檜死 萬俟卨湯思退相繼爲相 連主和議)
로 인해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 오랑캐들은 [화의를 핑계로] 올해 들어 대거 나라 안에 진입해 들어와 회남(淮南)을 점거하여 주둔한 채 떠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금세...불거(今歲...不去)
󰡔익증󰡕 융흥(隆興) 계미년(癸未, 1163, 주자34세)에 금(金)나라 사람 10만이 남성(南聲)과 언규(言規)에 진을 치고 양회(兩淮)에 축적해둔 양식을 취하여 성곽을 수리했다. 이에 조야(朝野)가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에 갑신년(甲申, 1164, 주자35세)년 겨울 복산(僕散)과 충의(忠義)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넜다. (󰡔翼增󰡕 隆興癸未 金人十萬屯南聲言規 取兩淮積糧修城 朝野震恐 甲申冬 僕散忠義等 帥師渡淮)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지난 일의 실책을 거울삼아 감전사지실(監前事之失)
󰡔기의󰡕 전에 가볍게 강을 건넜기 때문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던 사례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 때문에 그러했다고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없다. (󰡔記疑󰡕 前者必以輕爲渡江 計卒不得志 故云然 未有考)
󰡔차의󰡕 살피건대 완안량(完顔亮)이 침입하여 도적들이 채석(采石)에까지 이르렀을 때, [완안량(完顔亮)은] 여러 장군들을 불러 3일을 기약하면서 [이 기간 안에] 반드시 강을 건너 갈 것이며, 만약 이 가간을 넘기게 되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드디어 완안량(完顔亮)을 죽인 일(소흥30년, 辛巳, 1161년, 주자32세)이 있었는데, 바로 이 일을 가리킨다. (󰡔箚疑󰡕 按完顔亮入 寇至采石 召諸將 約三日必濟 過期盡殺 諸將遂弑亮 正指此事)  [역주] * 완안량(完顔亮)은 원래 금(金)의 승상(丞相)으로 기왕(岐王)으로 있었는데, 음모로 금(金)의 희종(熙宗)을 죽인 뒤 금의 왕이 되었다가 이 때 제장(諸將)들에 의해 죽은 것이다. [증선지(曾先之) 저, 윤재영(尹在瑛) 역, 󰡔십팔사략(十八史略)󰡕하(下), 217쪽 이하 참고.]
 강을 건너는데 서두르지 않고 만전을 도모하려고만 하니 한심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적에 대처해온 방법이 내외(内外) 본말(本末) 할 것 없이 일체 망가져 왕년에 제가 함부로 논하던 그 당시 왕년망론(往年妄論)
󰡔기의󰡕 효종(孝宗)이 즉위(卽位)하여 직언(直言)을 구했는데 선생께서는 ‘복수(復讐)의 의리’를 논한 상소(上疏)를 올린 적이 있다. (󰡔記疑󰡕 孝宗卽位求直言先生上疏論復讎之義)
󰡔익증󰡕 임오년(壬午, 1162, 주자33세) 봉사(封事)를 말한다. (󰡔翼增󰡕 壬午封事) * 소흥(紹興 : 송나라 고종(高宗)의 연호) 임오(1162, 주자33세)에 효종(孝宗)이 선양(禪讓)한 뒤 직언을 구했는데 그 때 선생께서는 ‘격치성정(格致誠正)의 학문’과 ‘복수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골자로 봉사(封事)를 올렸다. 
󰡔절보󰡕 계미년(癸未, 1163, 주자34세)의 수공주차(垂拱奏扎)를 말한다. (󰡔節補󰡕 癸未垂拱奏扎)
보다 더 심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먼 곳에서 보내는 편지인지라 상세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時事竟爲和戒所悞, 今歲虜人大入, 據有淮南, 留屯不去. 盛前事之失, 不汲汲於渡江, 欲圖萬全之擧, 此可爲寒心. 而我之所以待敵者, 內外本末一切刓弊, 又甚於往年妄論之時矣. 奈何奈何!遠書不能詳言也. 

저는 이연평(李延平)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연평서거(延平逝去)
󰡔절보󰡕 연평(延平)은 계미년(癸未, 1163, 주자34세) 10월에 죽었지만 선생께서는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35년) 정월(正月)에 가서 곡했다. (󰡔節補󰡕 延平之卒在癸未十月而先生以甲申正月往哭焉) * 왕무횡(王懋竑) 찬(撰), 하충례(何忠禮) 점교(點校), 󰡔주희연보(朱熹年譜)󰡕, (北京 ; 中華書局, 1998), 25쪽 참고.
로부터는 학문이 조금도 진보되지 않았고, 일에 파묻혀 골골(汨汨)
󰡔간보󰡕 골몰(汨沒)이란 말의 뜻과 같다. (󰡔刊補󰡕 猶汨沒也)  [역주] * 골몰(汨沒) ; (1) 물 속에 잠김, 가라앉음 (2) 세상에 나타나지 못함, 顯達하지 못함 (3) 한 일에만 몰두함. 여기서는 (3)의 뜻인 듯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116쪽 참고]
 세월을 보내다 보니 벗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게 되고 보니 [나의 공부가] 끝내 어디에로 귀착될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들었던 몸이 요즈음 와서 조금 건강을 되찾았지만 * 주희집 주 : ‘이(邇)’는 순희(淳熙)본에는 ‘년(年)’으로 되어 있다. (邇: 右引作‘年’. )
 심력(心力)이 쇠약하여 눈앞의 일인데도 열에 여덟아홉은 무시하고 지냅니다. 십칠(十七. 주차집보에는 ‘十亡’이 ‘十七’로 되어 있다.)
󰡔차의󰡕 ‘칠(七)’이 당본(唐本)에는 ‘망(亡)’으로 되어 있다. (󰡔箚疑󰡕 七唐本作亡)
 심지어 책을 보아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니, 이 때문에 사사물물에 이르러(格物) 앎을 확장(致知)하고자 부지런히 공부하느라고 합니다만 올올(兀兀)
󰡔익증󰡕 한창려(韓昌黎 즉 韓愈를 말함)의「진학해(進學解)」에 “항상 부지런히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해를 마치니”라는 말이 나온다. (󰡔翼增󰡕 昌黎進學恒兀兀而窮年) *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국자선생(國子先生)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열에서 웃으며 말하는 자가 있었다...선생이 우리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저희 제자들이 선생을 섬겨온 지가 지금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선생이 입으로는 육예(六藝, 즉 六經)의 글을 끊임없이 읊고 손으로는 백가(百家)의 책을 멈추지 않고 뒤적이고 있으며 일을 기록함에는 반드시 그 요점을 잡고 말을 엮음에는 반드시 깊은 뜻을 찾아 많음을 탐하고 얻기를 힘쓰며 작은 것이나 큰 것을 버리지 아니하여 기름을 태워 낮을 이으면서 항상 부지런히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해를 마치니 선생의 학업은 부지런하다고 이를 만합니다.(國子先生...言未旣, 有笑于列者曰..., 先生欺余哉. 弟子事先生, 于玆有時矣. 先生口不絶吟於六藝之文. 手不停披於百家之編. 記事者必提其要, 纂言者必鉤其玄. 貪多務得, 細大不捐. 焚膏油以繼晷, 恒兀兀以窮年. 先生之業, 可謂勤矣.)  [역주] * 성백효, 󰡔현토완역 고문진보 후집󰡕, 전통문화연구회, 2003[초판은 1994] 184-5쪽 참고. 
 밝혀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가국재의 정밀하고 독실한 논의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만 [그 자세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조차 없으니 편지를 앞에 두고 그저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뿐입니다.
熹自延平逝去, 學問無分寸之進, 汨汨度日, 無朋友之助, 未知終何所歸宿. 邇來雖病軀粗健, 然心力凋弱, 目前之事十亡八九. 至於觀書, 全不復記, 以此兀兀, 於致知格物之地, 全無所發明. 思見吾國材精篤之論而不可得, 臨書怳然(4-1759)也

그대가 보여주신 역괘(易卦)의 순서에 관해서는 제가 아직 깊이 연구하지 못했기에 감히 가볍게 말씀드리기 힘듭니다만. 그러나 본(本) 역괘도(易卦圖)에 따르면 초효(初爻)에서부터 음양이 나누어지고, <주 ; [역괘도의 왼쪽에 위치한 32개의 괘는 모두 일양(一陽)을 공유하고 있고, 오른쪽에 위치한 32개의 괘는 일음(一陰)을 공유하고 있다.> 두 번째 효(爻)에서 일변(一變)하여 음양이 교감(交感)하고, <주 ; 역괘도의 왼쪽 아래에 위치한 16개 괘의 양(陽)과, 역괘도의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16개의 괘의 음(陰)이, 각각 위로 역괘도의 오른쪽 위에 위치한 음(陰)과 교감하며 또 아래로 역괘도의 왼쪽 위의 양(陽)과 교감하는 것이다.> 또 그 다음 효에 와서 또 일변(一變)하여 [음양이] 또 한 번 교감함 * 주희집 주 : ‘차효즉일진(次爻卽一震)’에서 ‘상지양우(上之陽又)’까지는 원문에 빠져 있다. 순희(淳熙)본에 근거하여 보충한다. (‘次爻卽一震’至‘上之陽又’原缺, 據右引補.) 
으로써, <주 ; 태괘(兌卦)와 간괘(艮卦)가 교감하고, 진괘(震卦)와 손괘(巽卦)가 교감한다. [주(注)] 태여...손교(兌與...巽交)
󰡔차의󰡕 이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태음(太陰)의 위 일획(一畫)이 태양(太陽)과 사귀어 태괘(兌卦)가 되고 태양(太陽)의 윗 일획(一畫)이 태음(太陰)과 사귀어 간괘(艮卦)가 되며, 소양(少陽)의 아래 일획(一畫)이 소음(少陰)과 사귀어 진괘(震卦)가 되고 소음(少陰)의 아래 일획(一畫)이 소양(少陽)과 사귀어 손괘(巽卦)가 된다. [兌與艮交, 震與巽交라 한] 이 말은 대개 ‘태괘(兌卦)와 간괘(艮卦)는 태양(太陽)과 태음(太陰)이 사귀어 생성되며, 진괘(震卦)와 손괘(巽卦)는 소음(少陰)과  소양(少陽)이 사귀어 생성된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이지, ‘태괘(兌卦)와 간괘(艮卦)가 서로 사귀며 진괘(震卦)와 손괘(巽卦)가 서로 사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밖에] 건(乾), 곤(坤), 감(坎), 리(離)의 경우는 사상(四象)이 사귀어 생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건(乾), 곤(坤), 감(坎), 리(離)가 생성되어 있을] 이 때 아직은 兌, 艮, 震, 巽이라는 명칭은 존재하지 않지만 특히 그들 즉 [태양과 태음, 그리고 소양과 소음]이 서로 사귀어 [태(兌), 간(艮), 진(震), 손(巽)와 같은 이러한 괘를] 생성시킨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주석에서 ‘兌與艮交, 震與巽交라 한 이 말은 건(乾), 곤(坤), 감(坎), 리(離)의 경우와] 순서가 거꾸로 된 듯이 여겨질 수 있으니, 활간(活看)해야만 할 것이다. (󰡔箚疑󰡕 此言 太陰上一畫 交於太陽而爲兌 太陽上一畫 交於太陰而爲艮 少陽下一畫 交於少陰而爲震 少陰下一畫 交於少陽而爲巽 蓋謂兌及艮爲太陽太陰所交而成 震及巽爲少陰少陽所交而成云爾 非謂兌與艮相交 震與巽相交也 乾坤坎離 則四象不交而成 故不言 但此時未有兌艮震巽之名 而特言其所交而成 故次序似倒 活看可也)
󰡔절보󰡕『계몽(啓蒙)』에서 ‘사상(四象)이 팔괘(八卦)를 생성한다’는 구절의 원문 아래 붙어 있는 소주(小註)에서 옥제호씨(玉齋胡氏)가 인용한 주자(朱子)의 말이 이 곳에서의 말과 거의 같다. 다만 이 곳에서는 ‘태괘와 간과가 사귀고, 진괘와 손괘가 사귄다.(兌與艮交 震與巽交)’라고 말하고 있고, 그 곳에서는 ‘팔괘(八卦)가 [사상(四象)으로부터 차례로 생겨나] 작게 이룬 것(小成)’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은 아마도 선생의 만년에 확정된 이론(晩年定論)이라 할 수 있는 바 ‘바야흐로 그것(팔괘) 자체가 양의(兩儀)요 사상(四象)이니 어찌 먼저 건(乾)이니 곤(坤)이니 하는 명칭이 있었으리요’라고 하는 입장과는 서로 부합되지 않으니, 비록 [이 점에 관해서는] 마땅히 활간(活看)해야 하지만 끝내 석연히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으니 독자가 반드시 알아 두어야만 할 것이다. (󰡔節補󰡕 啓蒙 四象生八卦小註 玉齋胡氏所引朱子下說 與此大槪相同 但此所云 兌與艮交 震與巽交 而下卽以八卦小成承之者與 先生晩年定論 方其爲兩儀四象也 安得先有乾坤之名云云者不合 雖當活看而終恐未安 讀者不可不知也)
> 여덟 개의 괘(즉 八卦, 小成卦)가 작게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팔괘(八卦)를 근거로 하여 이를 중첩(因而重之)’해냄으로써 64괘(大成卦)를 만들어 냅니다. <주 ; 여기서 [8괘와 64괘 생성에 관하여] 서술한 순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주역을] ‘역(易)’이라 하게 된 이유는, 대개 [주역의 괘 생성과정을 보아] 음양이 왕래하여 서로 바뀌어나간다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역(易)’이라는 이러한] 명칭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 주희집 주 : ‘개(蓋)’는 순희(淳熙)본과 송(宋)나라 절(浙)본에는 ‘사(似)’로 되어 있다.(蓋 : 右引及宋浙本作‘似’.) 
 그러니 오로지 진괘(震卦)와 손괘(巽卦)의 4․5효가 서로 바뀌기 때문에 [‘역(易)’이라는 명칭을 부여받게 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 이치는 천지 사이에 그렇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우러러 보거나 굽어봄에 더위가 지나면 추위가 오는 등 [음양이 서로 바뀌면서 더위와 추위를] 운용해내지 않음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위에서와 같은 주역생성에 관한] 도상(圖象)을 자세히 고찰해 보지 않고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인(古人)이 [주역의 괘효를] 지어낸 것에는 참으로 오묘한 점이 있으니, 그것은 곧 건곤(乾坤)이라는 조화(造化)의 기틀(機) * 주희집 주 : ‘화(化)’는 순희(淳熙)본에는 ‘물(物)’로 되어 있다.( 化 : 淳熙本作‘物’.) 
이 이와 같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기꺼이 완미할 가치가 있다 할 것입니다.>
所示易卦次敍, 此未深究, 不敢輕爲之說. 但本圖自初爻而陰陽判, [주 ; 左三十二卦共一陽, 右三十二卦共一陰.] 次爻卽一變而陰陽交, [주 ; 左下十六卦之陽, 右下十六卦之陰, 上交於右上之陰, 下交於左上之陽.] 又次爻又一變而又交, [주 ; 兌與艮交, 震與巽交.] 而八卦小成矣. 其上因而重之, 而成六十四卦. [주 ; 此次敍甚明. 其所以爲易者, 蓋因陰陽往來相易而得名, 非專謂震巽四五相易而然也. 此理在天地間無時不然, 仰觀俯察, 暑往寒來, 莫非運用, 恐不待考諸圖象而後明也. 然古人制作之妙, 顯發乾坤造化之機, 有如此者, 是亦可樂而玩之耳.]

“[나의 학설이 당대 임금의] 도(道)에 부합되지 않는다 해도 불합(不合)
󰡔기의󰡕 당대의 세속 권력(時君)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국재(國材)의 말이다. (󰡔記疑󰡕 謂不合於時君 此國材之說)
󰡔익증󰡕 부합되지 않는다 해도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함이 없다는 것인데, [나의] 도(道)가 비록 [당시 임금의 도와] 부합되지 않더라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두 차례에 걸처 화의(和議)를 끊어야 하며, 요행(僥倖)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글을 [임금께] 올렸으나 [그 때마다 선생의 도가 임금의 도와] 부합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국재(國材)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翼增󰡕 不合無愧憎 謂道雖不合無愧於心也 先生嘗兩進絶和議抑僥倖之戒 而皆不合 故國材之言如此)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그대의 말씀은 참으로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만 [그대와 달리] 저로서는 다만 제 정신과 언어가 만에 하나조차 [시속과 당대 임금을] 감동시켜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만약 사람마다, [그대의 말씀과 같이] ‘[나의 학설이 당대 임금의] 도와 부합되지 않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원칙만을 견지한다면 군신(君臣)간의 큰 기강(倫紀)이 무너질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군(李君)은 배우기를 좋아하여 현자를 예우하니 그 뜻이 아름답다 하겠습니다. 국재(國材)께서도 잘 생각해보시고 또 정성을 기울여 이군과 함께 강론해 나간다면 분명 [공부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대와 이군이] 함께 [제가 있는] 이곳을 한 번 다녀가실 수만 있다면 덕이 부족하고 지위가 비천한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不合無愧之說, 在我固然 : 第所不能無恨者, 精神言語不足以感悟萬一爲恨耳. 若人人持不合無愧之說, 則君臣之大倫廢矣. 如何如何? 李君好學禮賢, 其志可嘉. 國材想亦推誠與之講論, 有可采處. 若得同爲此來, 眞寡陋之幸也.

  󰡔춘추(春秋)󰡕에 대해서는 제가 [그에 관한 다양한 주석을 검토하는 등]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급하수(未及下手)
󰡔기의󰡕 주석(註釋)을 [공부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말이다. (󰡔記疑󰡕 謂未及註釋)
 선생께서 돌아가셨고 선생기거(先生棄去)
󰡔기의󰡕 선생은 연평(延平)선생을 말한다. (󰡔記疑󰡕 先生 延平)
 저 역시 그 일로 인해 심지(心志)가 약해져서 [󰡔춘추(春秋)󰡕의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현재]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비록 천리(天理)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로 인간사(人事)를 관통하고 있으니, 만약 [󰡔춘추(春秋)󰡕의 내용과 관련된 자세한 역사적인] 사적(事迹)을 상고하지는 않고 그저 여러 유학자들의 학설만 참고해서는 [󰡔춘추(春秋)󰡕의 대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로서는 미처 선생께 『춘추』에 대해 묻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청기설(請其說)
󰡔차의󰡕 연평(延平)선생께 청한다는 말이다. (󰡔箚疑󰡕 謂請於延平也)
 그렇기는 하지만 이전에 대략 한두 가지 문제에 관해서는 들은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선생께서는] “『춘추』는 한 가지 일마다 각각 한 가지 사례를 밝힌 것이니, 이는 풍수가(風水家)들의 이른바 [마치 바람과 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형세가 달라지는 것 풍수...환형(風水...換形)
󰡔차의󰡕 풍수지리가(風水地理家)의 술수(術數)이다. ‘한걸음만 이동해도 형세가 달라진다’는 말은 집터(堂局)의 형세(形勢)와 산천(山川)의 모습(面目)이 한 걸음만 이동되어도 저절로 [뚜렷이] 구별된다는 말이다. (󰡔箚疑󰡕 風水地家之術也 移步換形 如堂局形勢山川面目 移一步則自別也) 
을 보는 것과 같다. 단지 요즘 사람들 수준으로 성인의 뜻을 구하려고 한다면 성인의 시원스런 경지 성도(聖到)
󰡔차의󰡕 당본(唐本)에는 이 두 글자가 바뀌어 ‘도성(到聖)’으로 되어 있다. (󰡔箚疑󰡕 唐本乙)
에 이르지 못하고, 따라서 잃는 것도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무실이(無失耳)
󰡔기의󰡕 ‘이위(以爲)’에서부터 여기까지는 연평(延平)의 말이다. (󰡔記疑󰡕 自以爲以下止此 延平說)
”라고 하셨으니, 여기에서도 선생께서 밝히신 큰 뜻을 볼 수 있습니다.『논어(論語)』에 관해서는 최근 몇 년 동안 공부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글 뜻을 풀이하는 정도의 배움(文義訓詰之學)에 그치고 있어 아직까지는 툭 터지듯 깊은 이해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시경(詩經)󰡕과 󰡔맹자(孟子)󰡕 각각에 관해서도 [제가 나름대로 연구하여] 써 둔 것이 조금 있습니다만, [내가 있는 이 곳과 그대 계신 곳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제가] 원고의 원본을 가지고 [그곳으로] 갈 엄두를 낼 수도 없고, 또 베껴 보낼 인편도 없기에 [나의 이 원고에 대해 그대와] 서로 더불어 의논(商榷) 상각(商榷)
󰡔차의󰡕 ‘각(榷)’은 당본(唐本)에 ‘확(確)’으로 되어 있다. (󰡔箚疑󰡕 榷 唐本作確)
할 수 없는 것이 한이 될 뿐입니다. 만약 [그대가] 약속대로 이 곳에 한번 오신다면 [이 문제에 관해 그대와 함께 강론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뿐입니다.  
春秋工夫未及下手, 而先生棄去. 蓋亦以心志凋殘, 不堪記憶. 此書雖云本根天理, 然實與人事貫通, 若不稽考事迹, 參以諸儒之說, 亦未易明也. 故未及請其說. 然嘗略聞其一二, 以爲春秋一事各是發明一例, 如看風水移步換形, 但以今人之心求聖人之意, 未到聖人灑然處, 不能無失耳. 此亦可見先生發明之大旨也. 論語比年略加工夫, 亦只是文義訓詰之學, 終未有脫然處. 更有詩及孟子, 各有少文(4-1760)字. 地遠, 不欲將本子去, 又無人別寫得, 不得相與商榷爲恨爾. 若遂此來之約, 則庶幾得講之耳. 

[그대가 써서 보내온] 세 편의 서문을 보고 그대의 마음 씀이 참으로 알뜰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 구절마다 너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추단해 나갔기(推與) 때문에 [그 글의 내용이] 아직은 ‘바꿀 수 없는 논의(不易之論)’라 하기는 힘들 듯합니다. 또「논어서(論語序)」 논어서(論語序)
󰡔절보󰡕 [「논어서(論語序)」는 국재(國材)가 지은 것이니 [그가 지은] 세 서문(三序) 중 하나이다. (󰡔節補󰡕 國材作卽三序中一也)
에서 [그대는] ‘배워서 인을 실천한다(學爲仁)’는 내용을 담은 한 구절을 말씀하셨는데,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는] ‘仁’이라는 글자에 대해 얼마나 분명하게 이해하고 계시는지요? 후면의 절차(節次)를 통해 이 의리를 어떻게 성취 성치(成褫)
󰡔차의󰡕 ‘빼앗을 치(褫)’는 당본(唐本)에는 ‘나아갈 취(就)’로 되어 있다. ‘부지(不知)’의 의미가 여기까지 걸린다. (󰡔箚疑󰡕 褫唐本作就 不知之意止此)
해낼 수 있을까요? 모름지기 한 구절 한 구절 착실하게 써 나가야 하며, 이처럼 애매(含糊) * 함호(含糊 = 含胡) ; 모호한 모양, 분명하지 않은 모양.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386쪽.]
해서는 안 됩니다. 근자에 구주(衢州)에서 강원적(江元適, 즉 江泳)이 벼슬에 오르고(登仕) 등사(登仕)
󰡔차의󰡕 곧 계(階)이다. (󰡔箚疑󰡕 卽階)
 나서 내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와 말하기를 “[저는] 근래 * 경세(頃歲) ; 이마적, 근래.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249쪽.]
 혼자 공부해 오면서 항상 ‘인을 구하는 단서(求仁之端)’를 찾았습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반드시 이른바 [원형이정(元亨利貞) 중의] 원(元)에 관해 분명히 인식하여 이를 마음속에서 체득하여 아무런 의심이 없는 정도가 되어야 하니, 도(道)에로 나아가고 도에로 변화해 나감이 바로 여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논의는 [강원적(江元適)이 그저] 구차하게 홀로 묵묵한 가운데 알게 된 것(苟然黙識)만은 아닌 듯하니 시험 삼아 그의 말을 한 번 쯤 깊이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직은 강군(江君)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만 [제가 보기에 그는 이미 써둔] 글을 많으며 또 의론(議論)하기를 좋아하니 또한 노성(老成)한 선배로 인정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또 그대의] 「역서(易序)」 역서(易序)
󰡔차의󰡕 강군(江君)의「역서(易序)」를 말한다. (󰡔箚疑󰡕 謂江君易序)
󰡔절보󰡕 이 또한 [가국재(柯國材)가 선생께 보내온] 세 서문(三序)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윗 글에서 ‘강군(江君) 운운(云云)’한 것은 [가국재(柯國材)가 선생께 보내온] 「논어서(論語序)」의 내용 중 ‘위인(爲仁) 운운(云云)’한 것에 근거하여 [선생께서 당신의 의견을 피력하시던 중에 바로 이 ‘강군(江君) 운운(云云)’한 내용에까지 선생의] 말이 미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節補󰡕 亦三序中一也 上文江君云云 因論語序爲仁云云 而及之耳)
 가운데서 “이는 ‘생각함이 없음(無思)’이 서로 비슷하다고 여겨 ‘생각함이 있음(有思)’에까지 미친 것이다(此以無思相似, 以至有思) * 주희집 주 ; ‘상(相)’과 ‘유사(․有思)’는 원문에는 없다. 정와(正訛)본에서 인용한 서수명(徐樹銘)의 신본(新本)에 근거하여 보충한다. (相․有思: 原缺, 據正訛引徐樹銘新本補.)
”라고 하셨는데, 이 말에는 병통이 있는 듯합니다.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기기 바랍니다. [저도] 근자에 이 경전 차경(此經)
󰡔차의󰡕『주역(周易)』을 말한다. (󰡔箚疑󰡕 謂易也)
(즉『주역(周易)』)을 다시 읽었습니다만 건양(建陽)에 사는 한 학자가 또 [주역에 관해 저와 함께] 강(講)하고 싶어 하는군요. 내년에는 [그 분을] 초빙하여 이 곳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면서 내년교아배(來年敎兒輩)
󰡔차의󰡕 여기서 끊어 익어야 한다. (󰡔箚疑󰡕 句)
 아이들과 함께 그분에게 배우되 득여공학(得與共學)
󰡔차의󰡕 건양(建陽)의 학자(學者)와 아이들이 함께 배우게 한다는 말이다. (󰡔箚疑󰡕 謂使建陽學者與兒輩共學)
󰡔익증󰡕 [건양(建陽)의 학자(學者)로 하여금] 이곳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고 선생께서는 [이 아이들과 함께 그분에게] 배우고자 한다는 말씀이니, 이는 대개 겸사(謙辭)이다. 『논어(論語)』에 ‘더불어 함께 배울 수는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翼增󰡕 俾敎兒輩 而先生仍與共學 蓋 謙辭也 論語 可與共學)  [역주] * 『논어(論語)』「자한(子罕)」제29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더불어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道)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道)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權道)를 행할 수는 없다. (子曰 可與共學이라도 未可與適道며 可與適道라도 未可與立이며 可與立이라도 未可與權이니라)”라고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81-2쪽 참고.
 넉넉히 한 해 정도 잡고 * 년세(年歲) ; (1) 해, 세월 (2) 나이의 존칭.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675쪽.] 그러나 여기서는 ‘1년 정도’를 의미하는 듯하다.
 열심히 공부해보려 합니다. [이 점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간여하(看如何)
󰡔차의󰡕 ‘여하(如何)’는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이 어떠한가’라는 말이다. (󰡔箚疑󰡕 如何 謂學者所見如何也) 
󰡔차보󰡕 이것은 오로지 학자(學者)를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닌 듯하다. (󰡔箚補󰡕 此恐非專指學者而言)
 
三序示及, 想見用心之精. 但每每推與過當, 恐未得爲不易之論. 又論語序云學爲仁一節, 不知見得‘仁’字如何分明? 後面節次如何成褫此義? 須句句有下落始得, 不可只如此含糊也. 近衢州一江元適登仕[泳]以書來云: ‘頃歲獨學, 常窺求仁之端, 又謂須明識所謂元者, 體諸中而無疑, 則道之進也化也基諸此矣.’ 此論似非苟然黙識, 試一思之如何? 江君未相識, 書多好議論, 亦是一老成前輩也. 易序中云: ‘此以無思相似以至有思’, 此恐亦不能無病. 試更思之. 近方再讀此經, 建陽一學者亦欲講之, 因招之來年敎兒輩. 得與共學, 用年歲工夫, 看如何. 

요전에 제중(齊仲) 제중(齊仲)
󰡔표보󰡕 성(姓)은 진(陳)씨이며, 동안(同安) 사람이다. (󰡔標補󰡕 姓 陳 同安人)
이 편지를 보내 의심나는 뜻을 물어왔으나 [저로서는 그것이] 石丞이 지은 것인 줄 몰라 기의...승자(寄疑...丞者)
󰡔차의󰡕 ‘부(否)’는 당본(唐本)에 ‘석(石)’으로 되어 있다. 편지를 보내 의심나는 뜻을 물어왔으나 [선생으로서는 그것이] 석승(石丞)이 지은 것인 줄 몰랐다는 말이다. (󰡔箚疑󰡕 否 唐本作石 謂寄來疑義 乃所不知石丞者作)
󰡔문목󰡕 [선생께서는] 그것이 석승(石丞)이 지은 것인 줄 몰라 멋대로 천착했다는 말이다. (󰡔問目󰡕 謂不知其爲石丞所作 而忘意批鑿也)
󰡔차보󰡕 선생께서 처음에는 [그것을] 석승(石丞)이 지은 것인 줄 몰랐던 것이다. ‘자(者)’는 마땅히 ‘저(著)’로 써야 한다. (󰡔箚補󰡕 先生初不知石丞作也 者 當作著)
 멋대로 천착했습니다만, 평소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참람하고 경솔한 짓을 함부로] 저질러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분(石丞) 거기(渠旣)
󰡔절보󰡕 ‘거(渠)’는 석승(石丞)이다. 석승(石丞)은 아마도 석자중(石子重)인 듯한데 선생께서 이 당시에는 아직 그와 서로 몰랐던 것 같다. (󰡔節補󰡕 渠 石丞也 石丞 似是石子重 先生此時蓋未及相識也)
으로서는 이미 우리 유교의 도(道)에 나아가기로 기약하고 있는 만큼 반드시 [저의 이와 같은 실수를] 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저로서는 참람함과 경솔함(僭率)이라는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昨齊仲寄疑義來, 乃不知是石丞者, 妄意批鑿, 非所施於素昧平生之人. 然渠旣以此道相期, 必不相怪, 但在熹有僭率之咎耳.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끝이 없습니다만, 오랜 동안 그대의 편지를 받지 못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제 막상 그대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만, 심부름꾼 * 래인(來人) ; 시자(使者) 즉 심부름꾼을 말한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1권 947쪽 참고.]
이 서서 기다리는 형편인데다 날씨는 춥고 손가락은 얼어붙어 글자 한 자 쓰기가 쉽지 않아서 마음속으로부터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씀 다 드리는 것은 힘들 듯합니다. 천리 밖에서 서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니 어찌나 개탄(慨嘆)스러운지요!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대가] 편한 때에 이곳을 한 번 다녀가실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될 수만 있다면] 마음 속 회포를 거의 풀 수 있을 듯합니다 * 경도(傾倒) ; (1) 기울어져 넘어짐, 또 기울이어 넘어뜨림 (2) 안의 물건을 모두 꺼냄 (3) 마음을 기울이어 그리워함 (4) 술을 많이 마심.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19쪽] 여기서는 (2)의 뜻인 듯.
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저 편지를 통해서는 마음 속에 든 것을 다 털어내 놓을 수 없겠습니다. 그대의 부인과 아드님 합정...영랑(閤正...令郎)
󰡔차의󰡕 ‘정(正)’은 무슨 뜻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유인(孺人)’은 국재(國材)의 처(妻)를 그리고 ‘영랑(令郎)’은 그의 아들을 말한다. (󰡔箚疑󰡕 正未詳 孺人國材妻 令郎其子) 
󰡔익증󰡕 ‘합정(閤正)’은 ‘현합정실(賢閤正室)’의 뜻이다. ○ 살피건대 42권「호광중에게 보내는 글(與胡廣仲書)」에는 ‘정(正)’이 ‘정(政)’으로 되어 있다. (󰡔翼增󰡕 閤正 賢閤正室之意 ○ 按四十二卷與胡廣仲書 正作政) * 현합(賢閤) ; 현합(賢閤)은 현각(賢閣)과 뜻이 같다. 현각(賢閣)은 남의 처를 가리킨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8권 1389쪽 참고.] * 정실(正室) ; (1)본처. (2) 측실(側室)의 대(對). (3)맏아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073쪽. 여기서는 (3)의 뜻인 듯.]
께서도 모두 안녕하시겠지요. 이곳에서도 노인(老人) 노인(老人)
󰡔차의󰡕 선생의 모부인(母夫人)을 말한다. (󰡔箚疑󰡕 先生母夫人)
 이하(以下) 모두 다행스럽게도 평안합니다. 매번 부지런히 안부해주시고 또 생각해주시니 너무나 감격스럽군요. 아직은 [저와 그대와 모두 도를] 밝게 이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기에 더구나 천만(千萬) 자중자애 하시어 늘 도에 나아가소서. 이만 줄입니다. 윤달 그믐에 저는 국재(國材) 어른의 집사(執事)께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所欲言者無窮, 以久不得書, 無所發端. 今得來示, 又以來人立俟, 天寒手冷, 作字不成, 不能究悉胸中所欲言. 千里相望, 豈勝慨嘆! 但願果能乘便一來, 庶得傾倒, 不然, 終非紙札所能具也. 閤正孺人․令郞各安佳, 老人以下幸安. 每勤問念, 至感. 未由會晤之前, 千萬以時進道自愛. 不宣. 閏月晦日, 熹頓首再拜(4-1761)國材丈執事.

‘인仁)’자의 대강 * 대개(大槪) ; (1) 대체의 梗槪. (2) 세밀하지 아니한 정도로.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495쪽]
을 알고자 한다면, 우선 불인(不仁)한 사람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개 그런 사람의 마음은 완고하기가 쇠붙이나 돌과도 같아 도덕적 진리(義理)가 어떤지는 묻지 않으며 * 주희집 주 ; ‘문(問)’은 순희(淳熙)본에는 ‘인(認)’으로 되어 있다. (問: 淳熙本作‘認’.) 
 일은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만 [독단적으로] 처리합니다. 사임기지(事任已知) 
주희집 주 ; ‘사(事)’와 ‘지(․知)’가 순희(淳熙)본에는 ‘전(專)’과 ‘사(私)’로 되어 있다. (事, ․知: 淳熙本作‘專’․‘私’.)
󰡔차의󰡕 당본(唐本)에 ‘사(事)’는 ‘전(專)’으로 ‘지(知)’는 ‘사(私)’로 되어 있다. (󰡔箚疑󰡕 唐本 事作專 知作私 )
 이 때문에 [그런 사람을] 어질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인함이] 이러한 기상(氣象)임을 알게 되면, 인도(仁道)가 어떤 것인지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가추이지(可推而知)
󰡔차의󰡕 불인(不仁)의 기상(氣象)을 미루어 가서 이를 반대로 관찰해보면 인도(仁道)가 어떤 것인지 미루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箚疑󰡕 謂推不仁之氣象 而相反以觀之 則仁之爲道可推而知矣)
 편지를 통해 시험 삼아 제가 지금까지 터득한 것을 말씀드렸으니 [그대 역시 자신이 터득한 것을 저에게] 답해오면 저와 그대의 생각에 서로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답...하이(以答...何耳)
󰡔차의󰡕 ‘답(答)’자(字)는 무슨 뜻인지 상세히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국재(國材)로 하여금 그 자신이 터득한 것을 [선생께] 답장해오게 하여 선생의 생각과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본다’는 뜻이라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耳)’자(字)가 불필요한 글자라 주장한다. (󰡔箚疑󰡕 答字未詳 或云 使國材答其所見 與先生合否也 或疑耳字是衍)
 
欲識‘仁’字大槪, 且看不仁之人可見. 蓋其心頑如鐵石, 不問義理, 事任己知, 是以謂之不仁. 識此氣象, 則仁之爲道可推而知矣. 因書試言所得, 以答合否如何耳. 





가국재에게 답함 答柯國材


【해제】주자가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는 이 편지가 씌어진 정확한 년대를 확정하기는 힘들지만 대개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 이어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9쪽 참고. 
 주자는 가국재(柯国材)로부터 그의『논어소전(論語小伝)』에 관한 서문을 부탁받았지만 이를 완곡하게 거절한다. 아무래도 가국재(柯国材)의『논어(論語)』이해 방식에 주자는 동의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울러 자로(子路)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가국재(柯国材)를 은근히 나무라고 있다. 주자와 다른 방식으로『논어(論語)』이해했던 가국재의 견해가 궁금하다.

[그대는 그대의]『논어소전(論語小伝)』에 관한 서문 전서(傳序)
󰡔익증󰡕『논어소전(論語小傳)』의 서문을 말한다. 대개 국재(國材)가 이『논어소전(論語小傳)』을 지어 선생께 이 책의 서문을 써 줄 것은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서문을 짓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翼增󰡕 謂論語小傳序 蓋國材作此傳求序 先生不作 故云)
을 저에게 부탁했습니다만 저로서는 내키지 않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요전에 [그대의]『논어소전(論語小伝)』이 지어졌을 때, 이미 저의 생각을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대가 이러한 저의 뜻을] 이해해 주시지 않으시니 * 영략(領略) = 영회(領會) = 영해(領解) = 영오(領悟) ; 깨달음, 이해가 감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10권 7쪽 참고.] 
, 저로서는 감히 또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이제 [그대는] 편지를 통해 [저의 조처가] 도리어 말을 아끼는 처사라 나무라시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또 그대는 논어의 “자로(子路)는 강하고 굳센 듯하다”는 구절의 뜻을 취해] 항항(行行)이라 자호(自号) 항항지호(行行之號) 
󰡔차의󰡕 아마도 국재(國材)가 논어의 “자로(子路)는 강하고 굳센듯하다”는 구절의 뜻을 취해 스스로 호를 삼은 듯하다. (󰡔箚疑󰡕 疑國材取子路行行如也之義以自號) * 항항여야(行行如也) ;『논어(論語)』,「선진(先進)」편 제12장에 “민자건(閔子騫)은 옆에서 모시는데 온화(誾誾)하였고, 자로(子路)는 강하고 굳세었고(行行), 염유(冉有)·자공(子貢)은 강직하였는데(侃侃), 공자(孔子)께서 즐거워하셨다. 유(由, 子路)로 말하면 온당한 죽음을 얻지 못할 듯 하구나. (閔子는 侍側에 誾誾如也하고 子路는 行行如也하고 冉有子貢은 侃侃如也어늘 子樂하시다. 若由也는 不得其死然이로다)”라고 했고, 이에 대해 주자는 “항항(行行)은 굳세고 강한 모양이다.(行行은 剛强之貌라)”라고 주석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10-11쪽 참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자로의 항항(行行)함을 숭상하는 것은] 치우친 기질을 교정하여 중화(中和)의 경지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 구구(區區)한 저의 생각에는 어르신(老丈)께서는 이러한 칭호를 사용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점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傳序鄙意不欲如此, 昨因論語小傳之作, 已罄鄙懷. 不蒙領略, 遂更不敢復言. 今所惠書反謂有所愛於言, 何耶? 行行之號, 尢非所以矯氣習之偏而反之於中和之域, 區區之意亦不願老丈之爲此稱也. 如何?





가국재에게 답함 答柯國材


【해제】주자가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는 이 편지 역시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와 세 번째 편지에 이어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주자가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요전에 제중(齊仲)이 편지를 보내 의심나는 뜻을 물어왔으나 [저로서는 그것이] 석승(石丞)이 지은 것인 줄 몰라 멋대로 천착했습니다만, 평소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참람하고 경솔한 짓을 함부로] 저질러서는 안 될 일입니다.(昨齊仲寄疑義來 乃不知是石丞者 妄意批鑿 非所施於素昧平生之人)”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한 석승(石丞)은 석돈(石/敦+山)인데 자(字)는 자중(子重)이다. 그 당시 주자와 석자중(石子重)은 아직 왕래가 없었다. 석자중(石子重)은 일찍이 동안(同安)의 현승(縣丞)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문집92권에 나오는「지남강군석군묘지명(知南康軍石君墓誌銘)」에 보인다.) 또 가국재(柯國材)와 진제중(陳齊仲)은 모두 동안(同安)이 살았다. 이 때문에 이 편지(즉 주자가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에서 “석장(石丈)과 만나 어떤 일에 관해 담론하셨습니까?(石丈相聚所談何事?)”라고 말한 것이다.『우계현지(尤溪縣志』에 따르면, 석자중(石子重)은 을유년(乙酉, 1165년, 주자 36세)에서 정해년(丁亥, 1167년, 주자 38세)까지 관리로 발탁되어 우계현(尤溪縣)에서 대차(待次)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마땅히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경에 씌어진 것이라 보아야 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9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충서(忠恕)에 관한 자신의 구설(舊說)을 반성하면서 ‘충서(忠恕)가 곧 도(道)의 전체(全體)이고, 충(忠)이 체(體)이며 서(恕)는 용(用)임’라는 체용론적 사유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또 『주역(周易)』의 ‘일음일양(一陰一陽)’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한 번 음으로 되고 한 번 양으로 되어 [음양이] 쉬지 않고 왕래하는 것이 곧 도(道)의 전체(全體)이며, [이러한] 도(道) 밖에 별도의 도(道)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음양과 도를 뚜렷히 구분한는 그의 만년정론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이편지에서는 가국재(柯國材)의「역서(易序)」를 언급하기도 하며, 석자중(石子重),  진제중(陳斉仲), 許順之(허순지)의 학문태도를 언급하기도 한다. 주자는 이들이 ‘고상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여 즐겨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다가 종종 의리의 중정(中正)함을 넘어서곤 한다’고 걱정하고 있다.

충서(忠恕)에 관한 그대의 설명은 매우 상세하니 [저의] 구설(舊說) 구설(舊說)
󰡔익증󰡕 곧 동안(同安)에 있을 때 강설(講說)한 것을 말한다. (󰡔翼增󰡕 卽同安時講說)
이 아마도 [지금 그대의] 이것과 비슷했던 듯합니다. *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은『논어(論語)』,「이인(里仁)」편 제15장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우리 도(道)는 한 가지 이(理)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하시니, 증자(曾子)께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증자(曾子)께서 대답하셨다.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子曰 參乎아 吾道는 一以貫之니라 曾子曰 唯라 子出이어시늘 門人問曰 何謂也잇고 曾子曰 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시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77-9쪽 참고,
 요사이 들어 저는 명도(明道)․상채(上蔡) 등 선배 학자들의 학설 명도...공지설(明道...公之說)
󰡔차의󰡕 명도(明道)의 말은『논어집주(論語集註)』에 보인다. 상채(上蔡)가 말하기를 “忠은 ‘흘러가 쉬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서(恕)’는 만물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점을 알면 ‘하나로 꿰둟고 있는 이치(一貫之理)’를 이해할 수 있다.” 또 말하기를 “충(忠)과 서(恕)의 관계는 흡사 형체와 그림자의 관계와 같다. 충(忠)이 없으면 서(恕)가 나올 수 없다. ‘서(恕)’는 내 본래 마음 그대로(如心) 남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논어정의(論語精義)』에 자세히 보인다. (󰡔箚疑󰡕 明道語 見論語集注 上蔡曰 忠譬則流而不息 恕譬則萬物散殊 知此則可以知一貫之理矣 又曰 忠恕猶形影也 無忠做恕不出來 恕如心而已詳見精義) [역주] *『논어정의(論語精義)』2권(卷) 하(下), 󰡔주자전서(朱子全書)』(上海: 上海古籍出版社, 安徽敎育出版社, 2002) 제7책, 151-6쪽 참고. 
󰡔익증󰡕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자신 그대로 남에게 미침은 인(仁)이요,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침은 서(恕)이니, [『중용(中庸)』에] ‘충(忠)과 서(恕)는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다. 충서(忠恕)는 하나의 원리로 일관(一以貫之)되어 있으니, 충(忠)이란 천도(天道)요 서(恕)란 인도(人道)이며, 충(忠)이란 망령됨이 없는 것이요 서(恕)란 충(忠)을 이행(履行)하는 것이다. 충(忠)은 체(體)요 서(恕)는 용(用)이니, 대본(大本)과 대도(大道)이다. 이것이 [『중용(中庸)』의] 충서위도불원(忠恕違道不遠)과 다른 것은 동(動)하기를 천(天)[자연(自然)]로 하기 때문이다.” 37권「범직각에게 보내는 편지與範直閣書」에서도 이를 논했다. (󰡔翼增󰡕 程子曰 以已及物仁也 推已及物恕也 違道不遠是也 忠恕一以貫之 忠者天道 恕者人道 忠者無妄 恕者所以行乎忠也 忠者體恕者用 大本達道也 此與違道不遠異者 動以天爾三十七卷與範直閣書 又論此)  [역주] *『논어집주(論語集註)』,「이인(里仁)」편 제15장 주석 참고. 여기에는 앞의 󰡔익증󰡕에서 인용한 내용에 이어 다음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 [정자(程子)께서는] 또 말씀하였다. “하늘의 명(命)이, 아! 심원(深遠)하여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충(忠)이요, ‘건도(乾道)가 변화(變化)하여 각기 성명(性命)을 바루고 있다.’는 것은 서(恕)이다.” 또 말씀하였다. “성인(聖人)이 사람을 가르침에 각기 그 재질(才質)을 따르셨다. 우리 도(道)가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것은 오직 증자(曾子)만이 이것을 통달할 수 있었으니, 공자(孔子)께서 이 때문에 증자(曾子)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증자(曾子)는 문인(門人)에게 말씀하기를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뿐이다.’하셨으니, 이 또한 부자(夫子)께서 증자(曾子)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중용(中庸)』에 이른바 ‘충서위도불원(忠恕違道不遠)’이란 것은 바로 아래로 인간(人間)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通達)한다는 뜻이다.”(又曰 維天之命이 於穆不已은 忠也요 乾道變化하여 各正性命은 恕也니라 又曰 聖人敎人에 各因其才하시니 吾道一以貫之는 惟曾子爲能達此니 孔子所以告之也시니라 曾子告門人曰 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라하시니 亦猶夫子之告曾子也라 中庸所謂忠恕違道不遠은 斯乃下學上達之義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78쪽 참고.
을 상세히 살피고 나서 [저의] 구설에 병통이 있음 구유병(舊有病)
󰡔익증󰡕 ‘구(舊)’자 아래 아마도 ‘설(說)’자가 빠진 듯하다. (󰡔翼增󰡕 舊下恐脫說字)
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개 ‘충서(忠恕)가 곧 도(道)의 전체(全體)이고, 충(忠)이 체(體)이며 서(恕)는 용(用)임’을 반드시 인식한 후에라야 ‘하나로 관통한다(一貫)’는 말이 비로소 분명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만약 [그대의 말씀과 같이] ‘서(恕)는 이에 하나로 꿰뚫는 데서 발출(發出)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또한 도리어 이러한 의미와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약언...차의(若言...此意)
󰡔차의󰡕 ‘충서(忠恕)’와 ‘일관(一貫)’이 두 가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제 [가국재(柯國材)가] ‘서(恕)는 일관(一貫)으로부터 발출(發出)한 것’이라 한다면 이는 ‘충서(忠恕)’와 ‘일관(一貫)’을 둘로 여기는 것이니 이는 이에 [‘충서(忠恕)’와 ‘일관(一貫)’이 두 가지가 아니라는] 이러한 의미와는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箚疑󰡕 謂忠恕與一貫非二物 而今言恕自一貫發出 則是以忠恕與一貫爲二 是乃差了此意也)
󰡔절보󰡕 충서(忠恕) 자체가 곧 도(道)의 전체(全體)이므로 ‘충(忠)’이 ‘일(一)’이라면 ‘서(恕)’는 ‘관(貫)’이며, ‘충(忠)’이 ‘체(體)’라면 ‘서(恕)’는 ‘용(用)’이다. [따라서] ‘서(恕)’는 ‘충(忠)’이 발(發)한 것이라 말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서(恕)’는 일관(一貫)이 발(發)한 것이라 말하면 안 된다. 이처럼 ‘서(恕)는 일관(一貫)이 발(發) 것’이라 여기는 것은 흡사 ‘서(恕)는 충서(忠恕)가 발(發)한 것’이라 보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말이 되겠는가? 또 살피건대 위에서 언급한 ‘도(道)의 전체(全體)는 체(體)와 용(用)을 합해서 말한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점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節補󰡕 忠恕卽是道之全體 忠是一 恕是貫 忠是體 恕是用 謂恕是忠之發則可 謂恕是一貫之發則不可 以恕爲一貫之發 猶以恕爲忠恕之發 豈成說話乎 又按上文所云 道之全體 是合體用而言之者也)
 만약 [이 점이] 철저히 이해되지 않으면 우선 명도(明道)와 상채(上蔡)의 말을 가지고 사색하되 반복해서 그 의미를 깊이 완미하다 보면 저절로 이해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조급한 마음으로 구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대가] 인용한 ‘충서독흠(忠恕篤欽) 충서독흠(忠恕篤欽)
󰡔차의󰡕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다. (󰡔箚疑󰡕 未知何人語)
’이하의 말은 더욱 이 일과는 무관합니다. [그대가 인용하신] 저 구절의 내용은 대개 ‘도에 들어가는 관문(入道之門)’과 ‘인을 구하는 방책(求仁之方)’을 각각 언급하고 있을 뿐, ‘성인(聖人)의 충서(忠恕)’ 및 ‘도체(道體)의 본래 그러함’과는 애초부터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들입니다. ‘일음일양(一陰一陽)’에 관해 [지금으로서는 저의] 구설(舊說) 구설(舊說)
󰡔차의󰡕 선생의 구설(舊說)을 말한다. (󰡔箚疑󰡕 先生舊說)
을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만약 [저의 구설이 지금 그대가] 보여준 바와 같다면 이는 [제가] 잘못된 설을 펼친 것이니 당시에 어쩌자고 감히 그와 같이 멋대로 지껄인 것인지 알 수 없군요. 이 점에 대해서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따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것은] ‘한 번 음으로 되고 한 번 양으로 되어 [음양이] 쉬지 않고 왕래하는 것이 곧 도(道)의 전체(全體)이며, [이러한] 도 밖에 도지외(道之外)
󰡔절보󰡕 ‘도(道)’자(字)는 의심스러우니 혹시 ‘음양(陰陽)’이라는 두 글자 대신에 이 ‘도(道)’자가 잘못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한다. (󰡔節補󰡕 道字可疑 豈或是陰陽二字之誤耶) 
 별도의 도(道)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주역(周易)』「설괘(說卦)」전의] ‘역순(逆順)’ 역순(逆順)
󰡔차의󰡕 선천도(先天圖)에서 볼 때, 진(震)에서 건(乾)까지는 순수(順數)이고 손(巽)에서 곤(坤)까지는 역수(逆數)이다. (󰡔箚疑󰡕 先天之圖 自震至乾是順數也 自巽至坤是逆數也) 
󰡔절보󰡕 ‘지나간 것을 셈은 순(順)이요 미래를 앎은 역(逆)이다. (數往者順 知來者逆)’은 『주역(周易)』「설괘(說卦)」전에 나오는 글이다. 이에 관한 풀이는『주역본의(周易本義)』에 보인다. (󰡔節補󰡕 數往者順知來者逆 易說卦文 解見本義)  [역주] *『주역(周易)』「설괘(說卦)」전 제3장 본문과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주자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주역(周易)』「설괘(說卦)」전 제3장 본문] ; “천(天)과 지(地)가 자리를 정(定)하고 산(山)과 택(澤)이 기(氣)를 통하며, 뇌(雷)와 풍(風)이 서로 부딪히고, 수(水)와 화(火)가 서로 해치지 않아 팔괘(八卦)가 서로 교착(交錯)하니,  지나간 것을 셈은 순(順)이요 미래를 앎은 역(逆)이다. 그러므로 역(易)은 거슬러서 세는 것이다. (天地定位하며 山澤通氣하며 雷風相薄하며 水火不相射(석)하여 八卦相錯하니 數往者는 順이요 知來者는 逆이라 是故로 易은 逆數也라)”  [『주역(周易)』「설괘(說卦)」전 제3장『주역본의(周易本義)』] ; “소자(邵子)가 말하였다. ‘이는 복희(伏羲) 팔괘(八卦)의 자리이니, 건(乾)은 남쪽에 있고 곤(坤)은 북쪽에 있으며, 이(離)는 동쪽에 있고 감(坎)은 서쪽에 있으며, 태(兌)는 동남(東南)쪽에 거하고 진(震)은 동북(東北)쪽에 거하며, 손(巽)은 서남(西南)쪽에 거하고 간(艮)은 서북(西北)쪽에 거하였다. 이에 팔괘(八卦)가 서로 사귀어 육십사괘(六十四卦)를 이루었으니, 이른바 선천(先天)의 학(學)이라는 것이다. 진(震)에서 시작하여 이(離)·태(兌)를 지나 건(乾)에 이름은 이미 생겨난 괘(卦)를 세는 것이요, 손(巽)으로부터 감(坎)·간(艮)을 지나 곤(坤)에 이름은 아직 생기지 않은 괘(卦)를 미루는 것이다. 역(易)이 괘(卦)를 낳음은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으로 차례를 하였기 때문에 모두 거슬러서 세는 것이다.’ (邵子曰 此는 伏羲八卦之位니 乾南坤北하고 離東坎西하며 兌居東南하고 震居東北하며 巽居西南하고 艮居西北이라 於是에 八卦相交而成六十四卦하니 所謂先天之學也라. 起震而歷離兌하여 以至於乾은 數已生之卦也요 自巽而歷坎艮하여 以至於坤은 推未生之卦也라 易之生卦는 則以乾兌離震巽坎艮坤爲次라 故皆逆數也라.)” 이상은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602-4쪽 참고. * 또『주역본의(周易本義)』총론 부분에 나와 있는 역본의도(易本義圖) 중 복희팔괘방위지도(伏羲八卦方位之圖)를 설명하는 데서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복희팔괘방위지도(伏羲八卦方位之圖) 해설 부분] ; “이상은〈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 ‘천(天)·지(地)가 자리를 정하고 산(山)·택(澤)이 기운을 통하고 뇌(雷)·풍(風)이 서로 부딪치고 수(水)·화(火)가 서로 해치지 아니하여 팔괘(八卦)가 서로 교착(交錯)하니, 지나간 것을 셈은 순(順)이고 올 것을 앎은 역(逆)이다.’ 하였는데, 소자(邵子)는 말씀하기를 ‘건(乾)은 남이고 곤(坤)은 북이며 이(離)는 동이고 감(坎)은 서이며 진(震)은 동북이고 태(兌)는 동남이며 손(巽)은 서남이고 간(艮)은 서북이니, 진(震)으로부터 건(乾)에 이르기까지는 순(順)이 되고, 손(巽)으로부터 곤(坤)에 이르기까지는 역(逆)이 된다. 뒤의 64괘(卦)의 방위도 이와 같다’하였다. (右는 說卦傳曰 天地定位하며 山澤通氣하며 雷風相薄하며 水火不相射하여 八卦相錯하니 數往者는 順하고 知來者는 逆이라하니 邵子曰 乾南, 坤北, 離東, 坎西, 震東北, 兌東南, 巽西南, 艮西北하니 自震至乾은 爲順이요 自巽至坤은 爲逆이라 後六十四卦方位倣此라하니라)” 이상은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45-6쪽 참고.
이란 말을 두고 소강절(邵康節)은 이를 선천(先天)의 수(數)라 여겼습니다. 이제 [그대가 역과 관련된 이] 도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효도자불득(曉圖子不得)
󰡔차의󰡕 여기서 끊어 읽어야 한다. 국재(國材)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箚疑󰡕 句謂國材如此也) 
󰡔절보󰡕 ‘도자(圖子)’는 ‘선천도(先天圖)’를 말한다. (󰡔節補󰡕 圖子先天圖)
 이에 관해 [제가] 억지로 설명한다 해도 [그대로서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그냥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대가 지은] 「역서(易序)」 역서(易序)
󰡔절보󰡕 이는 곧 위 6판(板)에 나오는「역서(易序)」를 말한다. (󰡔節補󰡕 卽上六板易序)
의 두 구절이 지닌 큰 병통은 바로 ‘피차(彼此)’라는 이 두 글자에 있습니다. 따라서 [‘피차(彼此)’라는] 이 두 글자는 고치지 않은 채 이 두 글자 아래 나오는 다른 말을 고치는 정도로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못 됩니다. 개득하면(改得下面)
󰡔차의󰡕 [‘피차(彼此)’라는] 이 두 글자는 고치지 않은 채 이 두 글자 아래 나오는 말을 고치는 정도로서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箚疑󰡕 謂不改二字而改得二字下面語 爲不濟事也)
󰡔익증󰡕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은 ‘사리(事理)에 맞지 않다’는 말과 같다. (󰡔翼增󰡕 不濟事 猶言不成事理)
 우선 이정도 말씀드림으로써 미진하나마 그대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의 대답이 그대의 질문에 적합했는지 어떤지 모르겠군요? 인편이 있어 [제가]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示諭忠恕之說甚詳, 舊說似是如此. 近因詳看明道․上蔡諸公之說, 却覺舊有病. 蓋須認得忠恕便是道之全體, 忠體而恕用, 然後‘一貫’之語方有落處. 若言恕乃一貫發出, 又却差了此意也. 如未深曉, 且以明道․上蔡之語思之, 反復玩味, 當自見之, 不可以迫急之心求之. 如所引‘忠恕篤欽’以下, 尤不干事. 彼蓋各言入道之門․求仁之方耳, 與聖人之忠恕道體本然處初不相干也. 一陰一陽不記舊說, 若如所示, 卽亦是謬妄之說. 不知當時如何敢胡說? 今更不須理曾, 但看一(4-1763)陰一陽往來不息, 卽是道之全體, 非道之外別有道也. 逆順之說, 康節以爲先天之數. 今旣曉圖子不得, 彊說亦不通, 不若且置之. 易序兩句大病在‘彼此’二字上, 今改得下面不濟事也. 凡此數說, 姑塞來問, 未知中否? 有便却望垂敎, 幸甚幸甚!

석장(石丈) 석장(石丈)
󰡔기의󰡕 석자중(石子重)이다. (󰡔記疑󰡕 子重)
과 만나 어떤 일에 관해 담론하셨습니까? [요즈음으로서는 석장 정도의] 돈독한 정성으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미 얻기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더구나 [석장의] 논의가 명쾌하기까지 하니, [그와 더불어] 강론하는 중에 막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석장의 편지를 받으니 [그대가 석장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반복해서 숙고 유소반복(有少反復) 
󰡔기의󰡕 전후(前後)의 의론(議論)에 상반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반복(反復)’이라 했다. 가국재가 이전에 한 의론 중에는 지금의 의론과 약간 상반되는 곳이 있다는 말이다. (󰡔記疑󰡕 前後議論有相反 故謂之反復 言柯公前日議論 與今議論 有少反復處也) 
󰡔차의󰡕 살피건대 ‘서래(書來)’는 석장(石丈)의 편지가 왔다는 말이지 국재(國材)의 편지가 왔다는 말이 아니다. ‘소유반복(有少反復)’은 ‘편지를 반복해서 주고받으며 깊이 생각해 본다’는 뜻이니 [가국재(柯國材)의] 전후(前後)의 의론(議論)에 상반되는 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箚疑󰡕 按書來謂 石丈書來 非國材也 有少反復 謂有所往復商量之義 非相反也)
한 내용이 약간 보이더군요. 바쁘게 * 초초(草草) ; (1) 근심하는 모양 (2) 바쁜 모양 (3) 허둥지둥 하는 모양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748쪽] 여기서는 (2)나 (3)의 뜻으로 본다.
 답장을 쓰느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을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오직 의리를 이해하고자 함인데 강학...리회(講學...理會)
󰡔차의󰡕 여기서 끊어 읽어야 한다. (󰡔箚疑󰡕 句)
󰡔차보󰡕 ‘의리(義理)’ 아래서 마땅히 끊어 읽어야 한다. (󰡔箚補󰡕 義理下 當句)
, [이 의리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 바, 바로 천리(天理)인 것입니다. 천리는 저절로 그러하게 각각 정해진 바탕(体)이 있으니 [이것이] 심원하다고 하여 [억지로] 억눌러 비근하게 만드는 것도 잘못이고, 천근하다고 하여 [억지로] 천착하여 깊게 하려는 것도 잘못입니다. 학자들의 문제점은 이 이치에 밝지 못한 채 오직 이 마음에서 결단을 내리려 취결어심(取決於心)
󰡔기의󰡕 위에서 말한 ‘근자에 마음에서 내린 결단을 깊이 인정하게 되었다(近與深決於心)’는 것이 이것이다. (󰡔記疑󰡕 上所云 近與深決於心也)
󰡔차의󰡕 살피건대 사의(私意)로 억탁함으로써 비근한 것을 천착하여 깊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箚疑󰡕 按謂以私意抑之 使近鑿之使深也)
󰡔간보󰡕 ‘비근한 것을 억지로 천착하여 깊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한결같이 그 마음이 그와 같은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刊補󰡕 謂抑之使近鑿之使深 一惟其心之所欲爲也)
 하는 데 있습니다. 마음에 어찌 늘 일정함(常)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란] 높은 것을 좋아하는 자는 이미 지나치게 높은데도 오히려 낮을까 근심하고, [마음이] 비근한 데 막힌 자는 이미 너무 비근한데도 오히려 멀까 근심하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이치에는 밝지 못한 채 오직 이 마음에서 결단을 내리려 하니] 이것이 바로 도가 밝아지지 못하고 행해지지 않는 이유이며, 학자들이 각자 천착하여 일정한 틀을 만듦으로써 각자위방(各自爲方)
󰡔기의󰡕 ‘비근하다 여기는 것’과 ‘깊다 여기는 것’이 [학자들 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記疑󰡕 近與深各異 故云)
󰡔익증󰡕 ‘방(方)’은 ‘한 쪽(隅)’이다.『시경(詩經)』에 “서로 다른 한 쪽(一方)을 원망한다”라 한 것이 이것이다. (󰡔翼增󰡕 方隅也 詩相怨一方是也)  [역주] *『시경(詩經)』,「소아(小雅)」, 상호지집(桑扈之什) 각궁(角弓)편 제4연에 “선량하지 못한 사람은 서로 일방(一方)을 원망하느니라. 작위(爵位)를 받고 사양하지 아니하나니 이 망함에 이르리로다. (民之無良은 相怨一方이니라 受爵不讓하나니 至于已斯亡이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대해 주자는 “일방(一方)은 저 한 쪽이다. 서로 원망하는 자는 각기 그 일방(一方)만을 근거하나니, 만일 남을 책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책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여 피아(彼我)의 사이로 하여금 서로 드러나 가리움이 없게 한다면, 어찌 서로 원망하는 자가 있겠는가. 더구나 형제간(兄弟間)에 서로 원망하고 서로 참소하여 작위(爵位)를 취하여 사양할 줄을 알지 못하니, 끝내 또한 반드시 멸망할 뿐이다. (一方은 彼一方也라 相怨者는 各據其一方耳니 若以責人之心責己하고 愛己之心愛人하여 使彼己之間으로 交見而無蔽면 則豈有相怨者哉리오 況兄弟相怨相讒하여 以取爵位하여 而不知遜讓하니 終亦必亡而已矣라)”라고 풀이하고 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시경집전(詩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164-5쪽 참고.
󰡔간보󰡕 이 또한 ‘비근한 것을 천착하여 깊게 만든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刊補󰡕 亦指使近使深而言)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된 이유입니다.
石丈相聚所談何事? 其篤誠好學已不易得, 而議論明快, 想講論之際少所凝滯也. 書來有少反復, 草草作答, 不能盡所言. 大抵講學只要理會義理非人所能爲, 乃天理也. 天理自然各有定體, 以爲深遠而抑之使近者, 非也  : 以爲淺近而鑿之使深者, 亦非也. 學者患在不明此理而取決於心. 夫心何常之有? 好高者已過高矣, 而猶患其卑 : 滯於近者已太近矣, 而猶病其遠. 此道之所以不明不行而學者所以各自爲方而不能相通也. 

이 전에 진제중(陳斉仲)과 허순지(許順之) 진허(陳許)
󰡔기의󰡕 진제중(陳齊仲)과 허순지(許順之)은 모두 동안(同安) 사람이다. 선생께서 일찍이 동안(同安)의 주부(主簿)로 근무하신 적이 있다. (󰡔記疑󰡕 齊仲 順之 皆同安人 先生嘗爲同安主簿)
 이 두 친구가 고상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여 즐겨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다가 종종 의리의 중정(中正)함을 넘어서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늘 편지를 통하여 [이 점을] 경계하곤 해왔습니다만 이는 그들이 지닌 문제점에 근거하여 이를 고치기 위한 것이었지 학문을 강론하는 자들이 모두가 마땅히 천근(浅近)한 곳에만 관심을 한정하여 여기에 그치고 더 이상의 고상한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현(聖賢)의 학문과 근세 여러 선생과 장자(長者)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른바 ‘고원(高遠)한 것’도 독창적인 뜻으로 [새로운] 학설을 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정이천(程伊川)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나이 스물에 경전(経典)의 뜻을 해석한 것이 지금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맛보고 있는 경전의 의미는 젊은 시절의 것과는 확연히 구별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권18에 보인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참으로 알아야(眞知) 한다. 이처럼 참으로 옳게 알아야만 곧 태연(泰然)히 안 것을 바탕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다. 나는 나이 20세 때 경전의 의미를 해석(解釋)하는 것은 지금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금은 어리 적보다 맛(意味)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學者須是眞知 纔知得是 便泰然行將去也 某年二十時 解釋經義 與今無異 然思今日 覺得意味與少時自別)”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188쪽.
고 하셨고, 윤화정(尹和靖)의 문인이 말하기를, “윤공께서는 경서에 대해 강론이나 해석은 하지 않으셨지만 귀로 들으면 곧 마음으로 이해하여 마치 자기의 말을 하는 것처럼 하셨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반드시 독창적으로 [새로운] 학설을 세우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긴 것이겠습니까? 이천...고재(伊川...高哉)
󰡔차의󰡕 이 두 가지 사례는 위 문장의 ‘고원(高遠)’이란 말에 상응한다. (󰡔箚疑󰡕 此二者 應上文高遠)
 지금 우리들의 입장에서 이 분들이 도달한 경지 지위(地位)
󰡔기의󰡕 정이천과 윤화정 양 선생의 지위를 말한다. (󰡔記疑󰡕 程尹地位)  [역주] * 지위(地位) ; (1) 있는 곳, 거처 (2) 신분 (3) 입장.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452쪽.] 여기서는 ‘경지(境地)’ 정도의 의미인 듯하다.
를 볼 때 [그 거리는] 매우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로 글을 읽음에 있어서는 우선 선유(先儒)들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 글 뜻을 통한 뒤에 이를 완미하여 마음에 푹 젖게 해서 본인 스스로가 그 의미의 참 맛(의미)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선유들의] 옛 학설 구설(舊說)
󰡔차의󰡕 선유(先儒)의 주설(註說)을 말한다. (󰡔箚疑󰡕 謂先儒註說)
에 대해 통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연히 [내가] 자득해낸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면 그런 의미를 취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선유들의] 전주(伝注) 외에 별도로 이른바 [나 스스로의] ‘자득(自得)’을 기필코 추구하여 새로운 학설을 세우는 데만 힘쓰고자 한다면 선유(先儒)들의 말을 아직 충분히 연구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그들의 학설을] 내버리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와 같다면 마음 씀이 수고로울수록 도(道)와는 더욱 멀어져서 급속히 어어(馭馭)
󰡔익증󰡕 말이 빨리 달리는 모양이다. (󰡔翼增󰡕 馬行疾貌)
 천리(天理)의 바름을 잃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에 빠지게 될 것이니 이것은 배우고 묻는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또 ‘자득’이라 할 때 그것은 바로 ‘저절로 그렇게 얻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득을] 어찌 억지로 구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대부분 [‘자득(自得)’의 ‘자(自-저절로)’를] ‘독자(独自)’의 ‘자(自-자기)’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미덥지 않게 여겨 기필코 자기의 주장을 펴려 하는 것입니다. 필기출(必已出)
󰡔익증󰡕 한유(韓愈)의 글 중「번종사묘명(樊宗師墓銘)」에 나오는 말이다. (󰡔翼增󰡕 韓文樊宗師墓銘語)

前此以陳․許二友好爲高奇, 喜立新說, 往往過於義理之中正, 故常因書箴之. 蓋因其病而藥之, 非以爲凡講學者皆當畫於淺近而遂止也. 然觀聖賢之學與近世諸先生長者之論, 則所謂高遠者, 亦不在乎創意立說之間. 伊川云 : ‘吾年二十時, 解釋經義與今無異. 然思今日意味, 覺得與少時自別. ’又尹和靖門人稱尹公於經書不爲講解, 而耳順心得, 如誦己言, 此豈必以創意立說爲高哉? 今吾輩望此地位甚遠. 大槪讀書且因先儒之說, 通其文義而玩味之, 使之浹洽(4-1764)於心, 自見意味可也. 如舊說不通, 而偶自見得別有意思, 則亦不妨. 但必欲於傳注之外別求所謂自得者而務立新說, 則於先儒之說或未能究而遽舍之矣. 如此則用心愈勞而去道愈遠, 恐駸駸然失天理之正而陷於人欲之私, 非學問之本意也. 且謂之自得, 則是自然而得, 豈可彊求也哉? 今人多是認作‘獨自’之‘自’, 故不安於他人之說, 而必己出耳.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제가] 석장(石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것 석장...진포(石丈...盡布)
󰡔차의󰡕 이 부분이 바로 이 편지의 앞부분에서 말한 “[그대가 석장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반복해서 숙고한 내용이 약간 보이더군요”라고 한 그 내용이다. (󰡔箚疑󰡕 此卽上文所謂有少反復者 )
󰡔절보󰡕 이 부분이 바로 이 편지의 앞부분에서 말한 “바쁘게 답장을 쓰느라 말씀을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그 내용이다. (󰡔節補󰡕 卽草草作答不能盡所言者)
이니, 혹 [그대가 석장과] 강론하는 자리에서 [그를 위해] 차분하게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점을 그에게] 언급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아울러 이 말을 진제중(陳斉仲)과 허순지(許順之)에게도 전해주십시오. 물론 이러한 저의 비루한 말이 도리어 [그 두 분의] 고상한 뜻에 맞을지 환가(還可)
󰡔차의󰡕 ‘가(可)’는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箚疑󰡕 可 宜也)
󰡔절보󰡕 ‘도리어 그 두 분의 고상한 뜻에 합당할지 아닐지’라는 말이다. (󰡔節補󰡕 謂還可於二公高意否也)
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 두 사람 이공(二公)
󰡔익증󰡕 진제중(陳齊仲)과 허순지(許順之)이다. (󰡔翼增󰡕 陳許)
에게는 별도로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서장(徐丈) 서장(徐丈)
󰡔익증󰡕 선생께서 동안(同安)에 계실 때 학빈(學賓)을 충당키 위해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 있는데, 그 차자 속에 서응중(徐應仲)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아마도 서원빙(徐元聘)인 듯하다. (󰡔翼增󰡕 先生在同安 請充學賓箚子 有徐應仲疑元聘)
이 보내온 편지에 ‘의심나고 어려운 곳이 여러 페이지 있다’고 했습니다만 아직은 그 내용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서장(徐丈)이 나에게] 편지를 부칠 때 [의심나고 어려운 곳이 어떤 내용인지를 써 둔 질문서를] 빠트린 것일까요? 때마침 촌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종이가 떨어진 것이겠지요. 아무튼 [이와 관련하여] 따로 글을 올리지는 않겠습니다. 번거롭더라도 이와 같은 저의 뜻을 [서장(徐丈)에게] 전해주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許順之 허순지(許順之)
󰡔절보󰡕 이름이 승(升)이다. (󰡔節補󰡕 名升)
는 편지 속에서 ‘그 마음을 평이하게 한다(平易其心)’는 횡거(橫渠)의 학설이 잘못이라 여기는 듯 합니다. [‘평이(平易)’라는 횡거의 이 말이] 어찌 용이(容易)함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담하용이(談何容易)
󰡔익증󰡕 ‘동방삭(東方朔)’에 나온다. 선생의 의론 가운데 나오는 말이 아니다. (󰡔翼增󰡕 出東方朔 非有先生論) 
 우선은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개 이른바 ‘평이(平易)하다’는 것은 ‘구차스레 간략하거나 가볍고 쉬운 것(苟簡輕易)’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럿이 종일 모여 있다’고 하셨는데 특별이 어떤 공부(工夫)를 하시는지요? 편지를 통해 한 두 가지라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미안(未安)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의문점을 내 놓아 더욱 나아지기를 구할 뿐입니다. 
凡此皆石丈書中未及盡布者, 或因講論之次, 閑爲及之, 幸甚幸甚! 幷以呈齊仲․順之, 不知如此卑說還可高意否? 二公更不及別書也. 徐丈惠書云有疑難數板, 却末見之, 豈封書時遺之耶? 偶數時村中乏紙, 亦不別拜狀, 只煩爲致此意, 幸甚幸甚! 順之書中似以橫渠 ‘平易其心’ 之說爲不然, 談何容易? 更且思之爲佳. 蓋所謂平易者, 非苟簡輕易之謂也. 群居終日, 別作何工夫? 便中千萬示及一二. 苟有未安, 不憚獻所疑以求益也. 





허순지 허순지(許順之)
󰡔익증󰡕 허승(許升)은 동안(同安) 사람이다. 선생께서 동안(同安)에 계실 때 허순지(許順之)가 선생을 따라 배웠다. 선생께서 임지에서 돌아오실 때, [허순지는 선생을] 따라 건양(建陽)까지 와서 배우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선(禪)에 물들어 일찍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마음을 구슬프게 한다(悽心)’든지 ‘담박(淡泊)’이라든지 하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선생께서는 이를 경계하셨다. (󰡔翼增󰡕 升 同安人 先生在同安 順之從學 先生解歸 隨至建陽請學 然染禪 嘗不食肉 又有悽心淡泊之語 先生戒之)
에게 답함 答許順之 1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9월 경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의 맨 앞에 “그대는 [내가 그대를 위해 써 준]「존재기(存齋記)」의 말 가운데 병통이 있음을 지적해 주셨는데 [그대의 지적은] 참으로 적당(的當)합니다. 이제 [그대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를 고쳐서 ‘힘을 쓸 줄은 알면서 힘씀에 있어 충분한 근거에 입각한 정당한 방법을 모르면 [힘쓰는 것이] 도리어 루(累)가 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라고 하면... (示諭記中語病的當 改云知用其力而不知所以用力之方 則未有不反爲之累...)”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당연히 「존재기(存齋記)」가운데 나오는 “군자(君子)가 여기서 또 어찌 그 힘을 쓰리요?(君子于此亦將何所用其力哉)”라는 구절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개「존재기(存齋記)」는 소흥(紹興) 28년[1158년, 주자 29세]에 주자가 허순지(許順之)를 위해 지은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또 “나는 요사이 당차(堂箚)로 인해 걸음을 재촉 받고 있기에, 임금의 부르심에 대해 거듭 사면을 청하는 글을 올려 바야흐로 지금 맡아 있는 관직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는 기다려 주십사했습니다만... (熹比因堂箚促行 再入文字 乞候終秩...)”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소흥(紹興) 29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주자가 소명(召命)에 대해 사면을 청한 일을 말한다. 주자는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에 올린「사면소명장(辭免召命狀)」에서 “관례에 따라 지금 맡아 있는 관직의 임기를 마치기 전까지는 악묘(岳廟)에서 기다렸다가 그 후에 임금님 계신 곳으로 가도록 조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乞依例令候岳廟滿日前赴行在)”[문집22권]라 말하고 있는데, 이「사면소명장(辭免召命狀)」을 기묘년 9월에 지었으니, 이 편지와 같은 시기로 보는 것이 옳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6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그가 허순지에게 써 준「존재기(存齋記)」의 내용에 관해 토론한 후, 현재 집필 중인 논어설(論語說)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주자에 따르면, 그는 나름대로 소소(小小)한 깨우침은 늘 있어왔지만 아직까지는 도체(道體)를 여실히 간파하지는 못하다면서 특히 ‘인자(仁者)는 아득히 [자신을] 만물과 한 몸으로 여긴다’는 것과 같은 부류의 학설에 대해서는 아직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인설(仁說)」의 핵심주제인 ‘지각설(知覺說)’과 ‘만물일체설(萬物一體說)’의 극복이라는 문제가 이 시기에 벌써 고민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대는 [내가 그대를 위해 써 준]「존재기(存齋記)」의 말 가운데는 병통이 있음 기중병어(記中語病)
󰡔차의󰡕 선생께서는 일찍이 허순지를 위해 ‘재기(齋記)’를 지은 적이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재기(齋記)’ 가운데는 다만 ‘우리 자네가 여기서 장차 어찌 그러한 힘을 쓰리오. 반드시 이 일에 종사하고 운운(吾子此將何所用其力哉 必有事焉云云)’이라는 구절만 있고 ‘그 힘을 쓸 줄 안다(知用其力)’ 이하 21자는 없으니 아마도 당초에는 이와 같이 고쳤다가 그 후에 다시 고친 듯하다. (󰡔箚疑󰡕 先生嘗爲順之作齋記 然記中但有 吾子此將何所用其力哉 必有事焉云云 而無知用其力以下二十一字 疑當初如是改之 而其後復改之也)
󰡔절보󰡕 ‘재기(齋記)’는 ‘존재기(存齋記)’로 되어 있다. (󰡔節補󰡕 齋記作存齋記)
을 지적해 주셨는데 [그대의 지적은] 참으로 적당(的当)합니다. 이제 [그대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를 고쳐서 ‘힘을 쓸 줄은 알면서 힘씀에 있어 충분한 근거에 입각한 정당한 방법을 모르면 [힘쓰는 것이] 도리어 루(累)가 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라고 하면 어떨까요? 대저 도(道)를 봄이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 췌마(揣摩) ; 자기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림.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853쪽.]
 [도(道)에] 부합되기를 요구하다 보면 저절로 구멍이 뚫리고 찢어지는 곳 * 루탄(漏綻) ; 구멍이 뚫리고 찢어짐. 파탄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203쪽.]
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그대가 만약 이와 같은 자세로 절차탁마해 나갈 수만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되어, 언젠가 후에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니 매우 다행한 일 일 것입니다. 두 통의 편지에는 모두 그대의 뜻이 담겨 있으니 [그대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위안이 됩니다. [이 두 통의 편지는] 언제 쓴 것인가요? 요사이는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공부의 순서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나의 논어설(論語說)은 바야흐로 [『논어(論語)』] 제 13편을 마친 상태입니다. [나는 논어설을 집필하면서] 소소(小小)하게 의심하기도 하고 깨우치기도 하는 일 의오(疑悟)
󰡔차의󰡕 의심나는 곳과 깨친 곳을 말한다. (󰡔箚疑󰡕 謂所疑所悟處)
은 늘 있지만 아직까지는 가깝고도 절실한 도체(道體) [그 자체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를 들어 ‘인자(仁者)는 아득히 [자신을] 만물과 한 몸으로 여긴다’는 것과 같은 부류의 학설에 대해서는 아직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관해] 돌이켜 생각해보지만 아득하기만 하니 장차 어찌 하리요! 나는 요사이 당차(堂箚) * 당차(堂箚)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2권 1229쪽 참고.]
로 인해 걸음을 재촉 받고 있기에, 임금님의 부르심에 대해 거듭 사면을 청하는 글을 올려 재입문자(再入文字)
󰡔절보󰡕 소흥(紹興) 기묘년(己卯, 高宗29년, 1159년, 주자 30세) 11월 임금의 부르심에 대해 거듭 사면을 청했을 때를 말한다. (󰡔節補󰡕 紹興已卯十一月 再辭召命時) [역주] * 소명(召命) ; 신하를 부르는 임금의 명령.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371쪽]
바야흐로 지금 맡아 있는 관직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는 기다려 주십사 걸후종질(乞候終秩)
󰡔차의󰡕 바야흐로 지금 맡아 있는 관직의 임기가 끝날 때가지 기다리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箚疑󰡕 謂乞俟方帶之官之終秩也)
󰡔절보󰡕 [선생께서] 처음 사면을 요구하는 글에서 말씀하시기를 “바라옵건대 남악묘(南岳廟)의 재임기간이 만료되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임금님이 계신 곳에 도착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운운(云云)”이라 하셨고 재차 사면을 요구할 때에도 또 반드시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대개 선생께서는 당시에 감남악묘(監南嶽廟)에 재직하고 계셨다. (󰡔節補󰡕 初辭之狀 曰乞候岳廟滿日前赴行在云云 再辭亦必同此 蓋先生時監南嶽廟) [역주] * 행재(行在) ; 행재소(行在所). 즉 거동 때에 임금이 머무는 곳.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851쪽]
했습니다만 만(萬)에 하나 제공(諸公)께서 [내가] 이처럼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불욕여차(不欲如此)
󰡔차의󰡕 하여금 끝내 바꾸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이다. (󰡔箚疑󰡕 謂不欲使之終秩也)
 [우선] 교관(敎官) 한 분을 [그대가 있는] 남쪽으로 보내겠습니다. 남거(南去)
󰡔익증󰡕 허순지(許順之)는 천주(泉州) 사람이다. 이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翼增󰡕 順之 泉州人 故云 )
 그리되면 가까운 시기 안에 서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재의 현부(賢否)를] 분별 분별(分別)
󰡔차의󰡕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전관(銓官)이 인물을 분별하는 일인 듯하다. 󰡔箚疑󰡕 未詳 疑銓官分別人物之事() [역주] * 전관(銓官) ; 인재를 가려 등용하는 역할을 맡은 관리.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128쪽 참고.]
하는 일을 어찌 미리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산간(山間)에 다른 일은 없습니다. 다만 올해는 풍년이 들어 곡식이 너무 흔해져서 농가에서는 온힘을 따 써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농가극비력(農家極費力)
󰡔차의󰡕 [풍년이 들어] 곡식이 너무 흔해졌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극진히 힘쓰지만 오히려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箚疑󰡕 以米賤故農家極費力 猶言不便)
 그러나 [풍년이 들었기에] 세민(細民) * 세민(細民) ; 비천한 백성, 빈민, 천민.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80쪽.]
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그로 인해 다른 뜻 타지(他志)
󰡔차의󰡕 도적질할 뜻을  말한다. (󰡔箚疑󰡕 謂偸竊之志)
을 품지 않으니, 이나마 또한 다행한 일입니다.
示諭記中語病的當, 改云‘知用其力而不知所以用力之方, 則未有不反爲之(4-1765)累’, 如何? 大抵見道未明, 揣摩求合, 自然有漏綻處. 得公如此琢磨, 爲益大矣. 後便見報, 幸甚! 兩書皆有來意, 甚慰所望, 當在何時耶? 近讀何書? 工夫次第如何? 熹論語說方了第十三篇, 小小疑悟時有之, 但終未見道體親切處. 如說仁者渾然與物同體之類, 皆未有實見處, 反思茫然, 爲將奈何! 熹比因堂箚促行, 再入文字乞候終秩. 萬一諸公不欲如此, 得一敎官之屬南去, 卽相見之期近矣. 但分別之事, 豈可預料耶. 山間無他事, 歲豐米賤, 農家極費力. 然細民飽食, 遂無他志, 亦一幸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 역시 제1서와 마찬가지로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에 “‘기문(記文)’의 경우 그대가 고친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記文如所改甚善)”라고 했는데 이는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답한 제1서에 이어「존재기(存齋記)」의 문구를 수정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따라서 마땅히 이 편지 역시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에 씌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7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존심(存心)․양성(養性) 공부 뿐만 아니라 사명(詞命) 공부 역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1서에 이어「존재기(存斎記)」의 문구를 어떻게 수정하는 것이 옳은지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늙고 쇠약한 이 몸 쇠로(衰老)
󰡔절보󰡕 이 당시 선생의 나이가 서른이었다. 따라서 ‘쇠로(衰老)’라는 두 글자는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節補󰡕 時先生年三十 衰老二字 恐誤)
이 다행히 편안히 지내기는 하지만 몸 바탕(気体)이 허약해져서 예전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마음의 힘도 회복되지 않아 도무지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하니, 옛 학업이 황폐해져서 새로 밝힌 것이라곤 없는 실정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존심(存心)․양성(養性) 공부에 바탕(地位)이 없는 것 같아 매우 두렵군요. 우리 친구의 경우는 이 공부 어차(於此)
󰡔기의󰡕 존심(存心)․양성(養性) 공부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記疑󰡕 存養用力處)
에는 이미 충분합니다. 다만 아직까지 사명(詞命)에는 통달하지 못하고 있으니 미능...지간(未能...之間)
󰡔기의󰡕 문사(文詞)를 짓는 것은 반드시 뜻을 세우고 나서야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명(詞命)은 곧 ‘뜻을 세움’을 말한다. (󰡔記疑󰡕 凡作文詞 必立意而爲之 詞命卽立意之謂)
󰡔차의󰡕 살피건대 [여기서의 사명(詞命)은] 곧 공손추(公孫丑)가 말한 사명(詞命)과 같은 것이니 대개 언어문사(言語文辭)가 모두 이것이다. 󰡔기의󰡕에서의 설명은 아마도 횡거(橫渠)의 ‘명(命)과 사(辭)는 차이가 없다(命辭無差)’는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사명(詞命)’과는 상관이 없으니 더욱 상세히 살펴볼 일이다. (󰡔箚疑󰡕 按卽公孫丑所稱詞命 蓋言語文辭皆是也 記疑說似出於橫渠命辭無差之意 然與此詞命不相干 更詳之) [역주] * 공손추(公孫丑)가 말한 사명(詞命) ; 현행『맹자(孟子)』에는 ‘사명(詞命)’이 아닌 ‘사명(辭命)’으로 되어 있다.『맹자』,「공손추」상(上) 제2장 원문 중 ; “재아(宰我)와 자공(子貢)은 설사(說辭)를 잘 하였고, 염우(冉牛), 민자(閔子), 안연(顔淵)은 덕행(德行)을 잘 말씀하였는데, 공자(孔子)께서는 이것을 겸하셨으되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명(辭命)에 있어서는 능하지 못하다.’ 하셨으니, 그렇다면 부자(夫子)께서는 이미 성인(聖人)이시겠습니다.”(宰我 子貢 善爲說辭 冉牛 閔子 顔淵 善言德行 孔子兼之 曰我於辭命則不能也 然則夫子 旣職矣乎)라는 말이 나온다. 설사(說辭)에 대해 주자는 “설사(說辭)는 언어(言語)이다.”(說辭 言語也)라고 주석하였다.
󰡔간보󰡕 허순지(許順之)는 공부에 있어 단지 존심(存心)․양성(養性)에만 힘쓰고 강학(講學)을 즐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명(詞命)’ 사이에 창달(暢達)하지 못해 막힘이 있었던 것이다. (󰡔刊補󰡕 謂順之爲學 只務存養 不肯講學 故於詞命之間不能暢達有滯碍處也)
, 아무래도 그 [존심(存心)․양성(養性) 공부와 사명(詞命) 공부의] 사이에서 아직은 철저 철저(徹底)
󰡔익증󰡕 ‘도저(到底)’라는 말과 같다. (󰡔翼增󰡕 猶到底)  [역주] * 도저(到底) ; (1) 마침내, 필경, 결국 (2) 끝까지, 아주, 철저(徹底).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91쪽.]
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인 듯합니다. 그러니 지금으로써는 마땅히 사물의 명수(名数)에 대해 약간의 공부를 더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대개 이 도(道)는 이미 정조(精粗)와 본말(本末)의 차이가 없으므로 개기무(蓋旣無)
󰡔차의󰡕 ‘개(蓋)’자(字) 아래에 마땅히 ‘도(道)’자(字)의 의미를 넣어 이 문맥을 이해하야 한다. (󰡔箚疑󰡕 蓋字下當着道字意看)
 사명(詞命)에 대해서도 즉차(卽此) 
󰡔차의󰡕 사물의 명수(名數)를 말한다. (󰡔箚疑󰡕 謂事物名數) 
󰡔절보󰡕 도(道)에는 이미 정추(精粗)와 본말(本末)의 차이가 없으니 ‘추(粗)’와 ‘말(末)’인 곳에서도 도(道)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니 사물의 명수(名數)라 하더라도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節補󰡕 道旣無精粗本末之異 則粗與末處 道亦無不在 然則事物名數 亦何可忽云爾)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熹衰老幸向安, 然氣體虛弱, 非復昔時, 心力亦未復, 都不敢思慮, 舊業荒廢, 無所發明. 反而求之, 似於存養用力處未有地位, 甚以自懼耳. 如吾友於此却已有餘, 第未能達於詞命之間, 恐其間亦有未徹底處, 却宜於事物名數上着少工夫. 蓋旣無精粗本末之異, 卽此亦不可忽也. 

상례(喪禮)에 유의(留意)하신다니 참으로 좋습니다. 다만 상례의 도수(度數) 또한 쉽게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상례에 있어서는] 슬픔과 공경함이 그 알맹이(實)라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 친구도 평소부터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상례를 살펴봄에] 마땅히 더욱 맛이 있을 것입니다. 익유여미(益有餘味)
󰡔차의󰡕 상례(喪禮)에 더욱 여운의 맛이 있다는 말이다. 대개 슬퍼하는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상례를 살피기 때문에 상례에 더욱 맛이 있다는 것이다. (󰡔箚疑󰡕 謂於喪禮 益有餘味也 蓋以哀敬之心看喪禮 故於喪禮益有味也) 
 요사이 횡거(橫渠)의 어록(語錄)을 얻었는데, 그곳에 ‘곡례(曲禮)는 이에 천지(天地)의 오장(五臟)이니, 혼백(魂魄)과 심부(心府) 천지...심부(天地...心府)
󰡔차의󰡕 천지가 실제로 오장(五臟) 등을 지닐 수는 없다. 대개 천지 사이의 의리(義理)가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심(心)’은 ‘육(六)’자(字)의 잘못인 듯하다. (󰡔箚疑󰡕 天地非實有五臟等也 蓋言天地間義理耳 心疑六字之誤)
가 그 일 기사(其事)
󰡔차의󰡕『예기(禮記)』「곡례(曲禮)」가운데 나오는 일을 말한다. (󰡔箚疑󰡕 謂曲禮中事)
에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시험 삼아 횡거의 이 말을 생각해보니, [이 말이 상례를 포함한 곡례의 정신을] 드러내기에 충분할 듯합니다. ‘기문(記文)’에 대해 그대가 고친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다만 변설(辨說)한 것이 아직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대가 고친 부분 중 일부를] ‘마음의 체(體)는 은미하니, 저가 여기에 힘쓸 줄 알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물욕(物欲)을 쫓아가면서도 인순(因狥)
󰡔차의󰡕 ‘因’이 唐本에는 ‘固’로 되어 있다. (󰡔箚疑󰡕 因唐本作固) [역주] * 순(狥)은 순(徇)의 고자(古字)이다.
 스스로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자지(心之...自知)
󰡔익증󰡕 ‘기문(記文)’의 정본(定本)에는 이 말이 없다. (󰡔翼增󰡕 記文定本無此語)
(心之爲體亦微矣, 彼不知用力於此者, 固狥於物欲而不自知)’라고 고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그대가 고쳐서 보여주신 것을 그대로 두어도 좋을 듯합니다. 대개 ‘그 힘을 쓸 수 없다(不能用其力)’는 말 역시 병통이 있는 듯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 중맹모상(衆盲摸象,『주차집보』에는 ‘模’로 되어 있다.)
󰡔차의󰡕 장님들이 코끼리의 몸 전체는 보지 못한 채 손으로 만져본다는 것이니, 코끼리의 코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가 절구공이와 같다’고 말하고, 코끼리의 귀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가 키(箕)와 같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箚疑󰡕 謂盲人不見象之全體 以手模之 模其鼻者則謂象如杵 模其耳者謂象如箕)
󰡔익증󰡕『홍명집(弘明集)』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즉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 두 사람이 있었는데, 코끼리의 귀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가 키(簸箕)와 같다’고 말하고, 코끼리의 툭 튀어나온 코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가 절구공이와 같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코끼리의 한 부분을 묘사할 수는 있었지만 끝내 코끼리 전체의 실상을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 살피건대 ‘모(模)’자는 마땅히 ‘모(摸)’로 써야 한다. (󰡔翼增󰡕 弘明集 有二盲模象 得象耳者云 象如簸箕 得角鼻者云 象如舂杵 雖獲象之一方 終不得全象之實 ○ 按模當作摸)
과 같아서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 보면 일소에 부칠만할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喪禮留意甚佳, 但其度數亦不易曉. 若哀敬之實, 則吾友素知之矣, 當益有餘味也. 近得橫渠語錄有云: ‘曲禮乃天地(4-1766)五藏, 魂魄心府寓於其事.’ 試思此語, 亦足以發耳. 記文如所改甚善, 但所辨說未能盡曉. 熹意欲云‘心之爲體亦微矣, 彼不知用力於此者, 固狥於物欲而不自知’, 餘卽悉如來示. 蓋‘不能用其力’之語, 亦似有病了. 眞如衆盲摸象, 達者見之, 可付一笑.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3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 역시 제1서 제2서에 이어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에 씌어진 것이다. 허순지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제2서)에 “대개 이 도(道)는 이미 정조(精粗)와 본말(本末)의 차이가 없으므로 사명(詞命)에 대해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蓋旣無精粗本末之異 卽此亦不可忽也)”라고 했는데 이 편지(제3서)에서도 “[그대는] 이번에 보내온 편지에서 마침내, “본말과 정조가 본래 둘이 아닌데 어찌 이렇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하시니, 이 질문은 또한 잘못되었습니다. (來書乃謂 本末精粗本無二致 何用如此分別 此又誤矣)”라고 말하고 있다. 또 제2서에 “상례에 유의하신다니 참으로 좋습니다. 다만 상례의 도수(度數) 또한 쉽게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喪禮留意甚佳, 但其度數亦不易曉)”라고 했는데, 이 편지(제3서)에서도 앞 부분에서 상례(喪禮)를 논하면서 “상례가 모두 주례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喪禮皆周禮也)” “지난 번 편지를 통해 [나는 그대가]『예기(禮記)』를 읽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미세한 부분을 자세하게 볼 것’을 권면했고... (前書因見讀禮 故勸以致詳微細...)”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편지(제3서)는 제2서에 이어 역시 소흥(紹興)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에 씌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7쪽 참고.
 이 편지의 전반부는『예기(禮記)』「단궁(檀弓)」편에 근거하여 은나라와 주나라의 상례(喪礼)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편지의 후반부는 하학과 상달의 문제와 관련하여 “본말(本末)과 정조(精粗)가 본래 둘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도 은근히 상달(上達)처에 관심을 두고 있는 허순지(許順之)를 비판하면서 “성인들이 자처하는 곳은 늘 하학(下学)에 있었으며, 상달의 세계는 공부를 착수할 곳도 의지처도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는 한에서 ‘상달은 하학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본말과 정조가 두 가지가 아니다’는 말만 우선하면 이는 “대추를 통째로 삼켜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단궁(檀弓)」편에 “은나라에서는 연사(練祀)를 지낸 뒤에 부사(祔祀)를 지내고, 주나라에서는 졸곡(卒哭)을 지내면 부사(祔祀)를 지낸다. 공자는 은나라의 제도를 좋다고 하였다” *『예기(禮記)』,「단궁(檀弓)」하(下)에 “은나라에서는 연사(練祀)를 지낸 뒤에 부사(祔祀)를 지내고, 주나라에서는 졸곡(卒哭)을 지내면 부사(祔祀)를 지낸다. 공자는 은나라의 제도를 좋다고 하였다. (殷練而祔, 周卒哭而祔, 孔子善殷.)” 라고 하여 현행 판본에는 ‘旣’자가 없다.  [역주] * 사당에서는 조상을 귀신으로 대우하여 향사한다. 공자가 은나라에서 연사(練祀) 뒤에 부사(祔祀)하는 제도를 좋다고 말씀한 것은 아들이 어버이를 귀신으로 대우하는 일을 급히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만성(南晩星) 역주, 󰡔예기(禮記)󰡕(上), (서울, 平凡社, 1979), 356쪽 참고.] 
라고 했습니다. 공자께서 은나라의 제도를 좋다고 하셨으니 마땅히 은나라의 예(禮)에 따라 ‘연사(練祀)를 지낸 뒤에 부사(祔祀)를 지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사이 이 예를 따르는 자가 드문 이유는 대개 지금의 상례(喪禮)가 모두 주나라 예법(周禮)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례(葬禮) 후에 우제(虞祭)를 지내고, 우제(虞祭)를 지낸 후에 졸곡(卒哭)하고, 졸곡(卒哭)한 후에 부사(祔祀)를 지내는 것’은 일련의 사건(一項事)으로써 처음과 끝이 서로 관통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만약 [주례를 따르고 있는 지금의 상례를] 고쳐 은례(殷禮)를 따라 ‘연사(練祀) 지내기를 기다린 후에 부사(祔祀)를 지낸다’면 곧 주(周)나라 사람들이 지내던 우제(虞祭)를 지낼 수 없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례(殷禮)를 구해 징험해보고자 하나 이 또한 불가능합니다. 우불가득(又不可得)
󰡔차의󰡕 부제(祔祭)의 경우 비록 은(殷)나라의 예(禮)를 따라 련(練) 이후에 행한다 해도 우(虞)와 졸곡(卒哭)의 경우 은(殷)나라의 예법에서 고거(考據)할 곳이 없다는 말이다. (󰡔箚疑󰡕 謂祔祭雖從殷禮行於練後 而虞卒哭則無所考據於殷禮也) [역주] * 고거(考據) ; 참고하여 증거로 삼음.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661쪽]
 이 때문에 비록 공자(孔子)의 말씀이 있지만 아직은 감히 바꾸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주 ; 온공(溫公)은 그저 주례(周禮)에 의거하고 있고, 당(唐)의 개원례(開元禮)와 근세(近世)에 또 이를 개정한 자 개자([註]改者)
󰡔차의󰡕 주나라의 예(周禮)를 고쳐 은나라의 예(殷禮)를 따른다는 말이다. (󰡔箚疑󰡕 謂改周禮從殷禮也) 
󰡔익증󰡕 개원례(開元禮)에는 담제(禫祭) 후에 부제(祔祭)를 지낸다. 정자(程子)와 고씨(高氏)의 예법(禮法)에는 대상(大祥) 후에 부제(祔祭)를 지낸다. 육자수(陸子壽)의 편지를 보면 [그의 경우는] 주나라의 예(周禮)를 바꾸면서도 또 은나라의 예(殷禮)를 쫓지도 않았다. (󰡔翼增󰡕 開元禮 禫後乃祔 程子高氏之禮 大祥而祔 見陸子壽書 蓋改周禮而亦不從殷禮也)
가 있지만, 그러나 끝내 확정되지 않고 있다.> 예문(禮文)은 지극히 엄밀히 살펴야 할 일 밀찰(密察)
󰡔차의󰡕 ‘밀(密)’은 상세함이오 ‘찰(察)’은 분명히 구분(明辨)하는 것이다. (󰡔箚疑󰡕 密詳細也 察明辨也)
이지 흐리멍덩 농통(儱侗)
󰡔기의󰡕 분명(分明)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記疑󰡕 不分明之意)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예문(禮文)에 대해 지극히 상세히 함으로써 조금의 차질도 생겨나지 않도록 했던 것입니다. 만약 [예문을] 상세히 하지도 않고 극진히 해 놓지도 않으면 우선 [예문을 제정한 성인] 자신의 마음에서조차 편안할 수 없는데 [그러한 예법을] 백성이 추종하지 않을 것 민지부종(民之不從)
󰡔차의󰡕『중용(中庸)』에 보인다. (󰡔箚疑󰡕 見中庸) [역주] *『중용(中庸)』제29장 원문 ; “천하(天下)를 통치함에 세 가지 중(重)함이 있으니, <이것을 잘 행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위[상고시대(上古時代)]의 것은 비록 좋으나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증거할 것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 <성인(聖人)으로서> 아래에 있는 자는 비록 잘 하나 높지 못하니, 높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 (王天下 有三重焉하니 其寡過矣乎인저 上焉者는 雖善이나 無徵이니 無徵이라 不信이요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下焉者는 雖善이나 不尊이니 不尊이라 不信이요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임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아마도 부자(夫子)께서 이대(二代)의 예(禮)에 대해 이와 유사한 점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때문에 상세하지도 못하고 극진하지도 못한] 한 두 조목은 빼 놓게 되었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징험할 길이 없게 된 것입니다. 필유...증의(必有...證矣)
󰡔차의󰡕 부자(夫子)께서는 [은(殷)과 주(周)] 이대(二代)의 예(禮)에 대래서는 아직 상세하지 않아(未詳) 미진(未盡)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편안할 수가 없어서 그 중 한 둘을 빼버렸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후인(後人)이 징험해낼 길이 없다. 예를 들어 은(殷)의 부제(祔祭)는 비록 훌륭하지만 요즈음 징험하여 시행할 길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箚疑󰡕 謂夫子於二代之禮 有所未詳未盡 心不能安而闕其一二 則後人無所證也 如殷之祔祭雖善而今無所證而行之矣) 
󰡔문목󰡕 가만히 생각건대 ‘그 한 둘을 빼버렸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징험해낼 길이 없다’는 이 말은 ‘한 두 절목을 빼버리자 다시는 곧 징험할 곳이 없게 되어 버렸다’는 말이니 대개 부자(夫子)께서 이대(二代)의 예(禮)의 대강(大綱)과 대의(大義)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다만 그 상세한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다 상고(詳考)해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부득이] 한 두 조목을 빠트리게 되었는데 그리되자 곧 [이 부분에 관해서는 더 이상] 징험할 곳이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기(杞)나라와 송(宋)나라에서조차 징험해내기에 부족하다’거나 ‘징험해내지 못하면 믿지 못한다’와 같은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부제(祔祭)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은(殷)에서는 이미 연(練)하고 난 후에 부제(祔祭)를 지냈는데, 그 대체(大軆)는 본래 훌륭하지만 그러나 그 사이의 절목(節目) 즉 우(虞)와 졸곡(卒哭)을 행할 수 있는가 혹은 행해서는 안 되는가 등에 관해서는 모두 자세하지 못하다. 이것이 바로 징험할 길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좇을 수 없는 것이다. (󰡔問目󰡕 竊意闕其一二則無所證 纔闕一二節目則便無所徵也 蓋夫子於二代之禮 其大綱大義非不知之也 而特其節目之詳 有不可盡考者 於此纔有一二闕遺 則便爲無所證 故有杞宋不足證 無證不信之語 今以祔祭言之 殷之旣練而祔 其大軆則固善矣 然其間節目 如虞卒哭之可行不可行 皆有所未詳 則此爲無證而不可從也) [역주] * 기송부족징(杞宋不足證)은『논어(論語)』「팔일(八佾)」제9장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하(夏)나라의 예(禮)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기(杞)나라에서 충분히 증거를 대주지 못하며, 은(殷)나라의 예(禮)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송(宋)나라에서 충분히 증거를 대주지 못함은 문헌(文獻)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文獻)이> 충분하다면 내가 <내 말을> 증거댈 수 있을 것이다.”(子曰 夏禮를 吾能言之나 杞不足徵也며 殷禮를 吾能言之나 宋不足徵也는 文獻不足故也니 足則吾能徵之矣로리라) 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기(起)는 하(夏)나라의 후손이고, 송(宋)은 은(殷)나라의 후손이다. 징(徵)은 증거를 대는 것이다. 문(文)은 전적(典籍)이고, 헌(獻)은 어진 사람이다. 두 시대의 예(禮)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두 나라에서 취하여 증거로 삼을 수 없으니, 이는 문헌(文獻)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文獻)이 만일 충분하다면 내가 그것을 취하여 내 말을 증거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杞는 夏之後요 殷之後라 徵은 證也라 文은 典籍也요 獻은 賢也라 言二代之體를 我能言之나 而二國不足取以爲證하니 以其文獻不足故也라 文獻若足이면 則我能取之하여 以證吾言矣리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56-7쪽 참고.  * 무징불신(無徵不信)은『중용(中庸)』제29장에 나온다. “천하(天下)를 통치함에 세 가지 중(重)함이 있으니, <이것을 잘 행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위[상고시대(上古時代)]의 것은 비록 좋으나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증거할 것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 <성인(聖人)으로서> 아래에 있는 자는 비록 잘 하나 높지 못하니, 높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 (王天下 有三重焉하니 其寡過矣乎인저 上焉者는 雖善이나 無徵이니 無徵이라 不信이요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下焉者는 雖善이나 不尊이니 不尊이라 不信이요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107쪽 참고.

檀弓篇云: ‘殷旣練而祔, 周卒哭而祔. 孔子善殷. ’據孔子以殷禮爲善, 則當從殷禮練而祔無疑矣. 然今難遽從者, 蓋今喪禮皆周禮也. 葬而虞, 虞而卒哭, 卒哭而祔, 是一項事首尾相貫 : 若改從殷禮, 俟練而祔, 卽周人之虞亦不可行, 欲求殷禮而證之, 又不可得, 是以雖有孔子之言, 而未敢改也. [주 ; 溫公只依周禮, 唐開元禮及近世亦有改者, 然終不安.] 禮文極是密察, 不可儱侗, 故聖人致詳於此, 豪髮不差. 蓋未詳未盡, 則於己之心且不能安, 民之不從尙未論也. 疑夫子於二代之禮必有類此者, 闕其一二, 則無所證矣. 

지난 번 편지를 통해 [나는 그대가]『예기(禮記)』를 읽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미세한 부분을 자세하게 볼 것’을 권면했고 인견...미세(因見...微細) 
󰡔기의󰡕 그의 말로 인해 [선생께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선생께서는 허순지(許順之)가 예(禮)를 읽었다는 것을 아시고, [그로] 인해 ‘미세한 부분을 자세하게 볼 것’을 권면했다는 말이다. (󰡔記疑󰡕 非因其言而見之 乃先生見順之讀禮 因勸以致詳微細耳)
 이에 ‘남는 부분에 대해서는 줄여나가고 손소유여(損所有餘)
󰡔기의󰡕 ‘[하학하기도 전에] 먼저 상달의 경지를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記疑󰡕 指先向上達處)
󰡔간보󰡕 존심(存心)․양성(養性)에 힘쓴다는 말이다. (󰡔刊補󰡕 存養用力)
 부족한 부분 부족(不足)
󰡔기의󰡕 ‘하학(下學)’을 가리킨다. (󰡔記疑󰡕 指下學) 
󰡔차의󰡕 살피건대 ‘남음이 있는 곳’이란 이전 편지에서 말한 ‘슬픔과 공경함이라는 [예의] 알맹이’를 말하고 ‘부족한 곳’이란 이전 편지에서 말한 ‘상례(喪禮)의 도수(度數)에 관한 글’을 말한다. 󰡔기의󰡕에서의 설명은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箚疑󰡕 按所有餘 謂前書哀敬之實 所不足 謂喪禮度數之文 記疑說恐未然)
󰡔간보󰡕 ‘사물의 명수(名數)’를 말한다. (󰡔刊補󰡕 謂事物名數)
에 대해서는 더 힘쓰라’고 말씀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이번에 보내온 편지에서 마침내, “본말(本末)과 정조(精粗)가 본래 둘이 아닌데 본말...이치(本末...二致)
󰡔차의󰡕 아마도 허순지(許順之)는 선(禪)을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미세한 것을 엄밀하게 고찰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정조와 본말은 본래 둘이 아니다’는 식의 말을 자주 한곤 했는데 그의 이 말은 상달(上達)에 주로 뜻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선생의 생각에 따르면, 이른바 상달이란 반드시 문리(文理)를 엄밀히 살피는 그 곳에서 곧바로 ‘[상달과 문리가 기실은] 본래 둘이 아님’을 본다는 것이고, 그런 연후에 상달의 일이 바로 그 [하학] 속에 있게 되니 엄밀하게 살피는 [하학] 공부를 버려두고 별도로 상달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箚疑󰡕 蓋順之爲禪學者 故不肯密察細微 而槪言精粗本末無二致 蓋主上達之意而爲言也 先生之意則以爲 所謂上達必於文理密察處 直見其本無二致 然後上達之事在其中矣 不可捨密察而別求上達也)
 어찌 이렇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하시니, 이 질문은 또한 잘못되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본말과 정조를 둘이 아니라 보는]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 힘쓸 곳도 없고 더 이상 말할 곳조차 없게 되겠지요. 자하(子夏)가 자유(子游)의 말에 대답하기를, “초목에 비유하자면 유별(類別)로 구별된 것과 같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자하...별의(子夏...別矣)
󰡔익증󰡕 자하(子夏)의 말은, 대개 배우는 자의 공부가 미치는 바에는 저절로 얕고 깊은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이는 흡사 초목(草木)에 크고 작은 구별이 있는 것과 같으니, 만약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 각각의 자질이] 얕고 깊음이 있음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높고 먼 것으로 가르쳐 주게 되면, 이는 [결국 배우는 자를] 속이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翼增󰡕 子夏之言 蓋謂學者所至自有淺深 如草木之大小有別 若不量其淺深 槪以高且遠者告之 則是誣之而已)
만 [이 말이] 어찌  [그대의 말과 같이] 불분명한 데가 있습니까? [그러니 그대로서는] 특히 구별의 내용을 세밀히 살피는 가운데 유밀찰(惟密察)
󰡔차의󰡕 살피는 것이 엄밀하다는 말이다. (󰡔箚疑󰡕 謂察之密也)
 [하학과 상달이] 본래 둘이 아닌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상달(上達)하는 일이 바로 그 [하학함] 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만약 그대의 말씀대로라면 이는 [하학하기도 전에] 먼저 상달의 경지를 향해 자리 잡고 앉은 것 선향...좌각(先向...坐却)
󰡔기의󰡕 앉아 있다는 말과 같다. ‘각(却)’은 어조사이다. 허순지(許順之)는 선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선생께서는] 앞뒤의 편지를 통해 [이점을] 아프게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記疑󰡕 猶言坐在也 却語辭 順之爲禪學者 故前後書痛言之)
󰡔간보󰡕 마땅히 이곳에서 끊어 읽어야 한다. (󰡔刊補󰡕 當爲一句)
이 되는데 성인의 뜻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요순(尭舜)이나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의 경우도 그분들이 자처하는 곳은 늘 하학(下学)에 있었습니다. 상달의 세계는 공부를 착수할 곳도 없고 더구나 [착수했다 해도 계속 공부해나갈 수 있는 안정적인] 의지처가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하학의 경우]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의 모든 행동과 말이 하학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성인께서 어찌 [상달을] 이 하학과 분리하신 적이 있었던가요? 리차래(離此來)
󰡔차의󰡕 ‘래(來)’는 어조사이다. (󰡔箚疑󰡕 來語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지금 걸핏하면 동부동(動不動)
󰡔차의󰡕 ‘움직였다 하면 문득’이라는 의미이다. (󰡔箚疑󰡕 動輒之意) 
 곧 ‘본말과 정조가 두 가지가 아니다’는 말을 먼저 하니, 이것은 바로 대추를 통째로 삼켜 맛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번 이장(李丈) * 이장(李丈) : 이연평(李延平)선생을 가리킨 말이다.
께서 말씀하신 바 “쇠로 만든 새장으로 덮어씌운 것처럼 어두워 분명치 않다” 골륜...조각(鶻侖...罩却)
󰡔기의󰡕 가리(罩)는 [대그릇으로 만들려진] 그물의 일종인데, 위로부터 아래를 감싸서 물고기를 포획한다. [그런데 이 가리를] 쇠붙이로 만들어 대그릇 대신 사용하게 되면 그 가운데 잡혀든 고기들을 빼낼 수 없게 되니 [이는] ‘하학(下學)’을 버려둔 채 먼저 ‘상달(上達)’을 지향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고어(古語)’는 연평(延平)의 말인 듯하나 분명히 알 수 없다. ○ ‘골륜(鶻崙)’은 ‘混淪’으로 쓰기도 한다.『주자어류(朱子語類)』를 보면 일찍이 선생께서 ‘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만약 과자 하나를 집어 통째로 삼켜버린 경우, [그 과자] 속이 신지 쓴지 알 수 없고 반드시 그 과자를 씹어보아야만 비로소 맛을 알 수 있다. ‘골륜(鶻崙)’은 ‘둥글고 온전하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이] 대추의 원만하면서도 온전한 것을 형상하며, 대추를 씹지 않고 온전히 통째로 삼키게 되면 그 맛을 알지 못함에 비유한 것이다. ‘가리(罩)’은 고기 잡는 그물의 일종인데, 위로부터 아래를 감싸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쇠로 만들어 위로부터 아래를 감싸게 되면 감싸는 것이 너무 견고여 빼낼 길이 없다. 대개 허순지(許順之)는 늘 ‘정추(精粗)와 본말(本末)이 둘이 아님’을 말하지만 그는 이치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에] 문리(文理)를 엄밀히 살피는 일에 종사할 수도 없었고, [또 문리를 엄밀히 살피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이치들이] 무르녹아 서로 관통(貫通)되고 있는 오묘한 경지에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이는 그 맛도 모를 뿐만 아니라 툭 터져 쇄락한 곳(상달처)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도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그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이장(李丈)은 아마도 연평(延平)을 가리키는 듯하다. 선생께서는 ‘범직각(笵直閣)에게 보내는 편지(與笵直閣書)’에서도 연평을 어르신(丈)이라 부르고 있다. (󰡔記疑󰡕 罩者 罟之自上籠下以捕魚者 謂以鐵作籠 自上籠下 則其中籠入之物 無緣脫出 舍下學先向上達者似之 古語 或延平語 未可知也 ○ 鶻崙或作混淪 語類 先生嘗謂[●고를 순[火火冖田] - 글자를 만들어 넣어야 함] 曰若只是握得一箇鶻崙底果子 不知裏面是酸 是苦須是與它嚼破便是滋味 鶻崙 圓也全也 所以狀棗之圓而全也 謂不嚼棗全而呑之不知味之喩也 罩 魚罟之自上籠下者 以鐵籠自上籠下則籠得牢固 無由脫出 盖順之每說精粗本末無二致 其見理龍侗 不能從事於文理密察 而以造夫融會貫通之妙 是不知其味而無由到得脫洒處 故云云 李丈 恐指延平 蓋先生與笵直閣書 亦稱延平爲丈 )  [역주] * 조(罩) ; (1) 가리 (조)[닭의어리나 통발모양으로 가는 대쪽으로 엮어, 옆면에 구멍을 내고 속에 먹이를 넣어서, 물에 엎어놓아 고기가 들어간 후에 들어내는 고기 잡는 기구 (2) 잡을 조, 가리를 놓아 고기를 잡음 (3) 속에 넣다. 싸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638쪽.]  * 롱(籠) ; (1) 대그릇 (롱), 竹器의 총칭 (2) 새장, 탈 것, 전동, 싸다, 싸이다. 적시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55쪽.]  * 순(●) ; 고르다. 발 편편하다. 따비 이루다(개간하는 모양). ;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371쪽.]
󰡔차의󰡕『가례(家禮)』소주(小註)를 보면 ‘조(罩)’는 ‘덮는다’는 의미이다. 대개 허순지(許順之)는 하학(下學)과 상학(上學)을 구분하지 않은 채 ‘정조(精粗)는 하나’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식이었다. 이는 흡사 철로 된 새장(鐵籠)으로 싸여있어서 어둑어둑하여 분명치 않은 것과 같다는 말이니, 󰡔기의󰡕에서 [이를 두고] ‘빼낼 길이 없다(無由脫出)’는 의미로 풀이했으나 아마도 이는 선생의 본의(本意)가 아닌 듯하다. (󰡔箚疑󰡕 按家禮小註 罩 覆之之意也 蓋順之不分下學上學 而槩以精粗一致爲言 是如以鐵籠覆之晻晦不明也 記疑所謂無由脫出之語 恐非先生本意)
󰡔절보󰡕 ‘쇠로 만든 그물로 덮어버린다(鐵籠罩却)’는 말은 역시 ‘대추를 통째로 삼키다(鶻侖呑棗)’는 말과 비슷한 말인 듯하다. 대개 쇠 그물로 싸서 덮어버리면 그 속의 사물이 정미한 것인지 거친 것인지 혹은 큰지 작은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節補󰡕 鐵籠罩却 按此亦如鶻侖呑棗相似 蓋謂籠罩而掩之 則裏面事物 不知是精是粗 或大或小)
는 병통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주희집 주 ; 순희본(淳熙本)에는 이 구절 끝에 ‘운운(云云)’이라는 두 글자가 더 있다. (淳熙本句未有‘云云’二字.) 

前書因見讀禮, 故勸以致詳微細, 因有‘損所有餘, 勉所不足’之言. 來書乃(4-1767)謂‘本末精粗本無二致, 何用如此分別?’ 此又誤矣. 若每每如此, 則更無用功處, 更無開口處矣. 子夏對子游之語, 以爲‘譬之草木, 區以別矣’, 何嘗如此儱侗來? 惟密察於區別之中, 見其本無二致者, 然後上達之事可在其中矣. 如吾子之說, 是先向上達處坐却, 聖人之意正不如是. 雖至於堯․舜․孔子之聖, 其自處常只在下學處也. 上達處不可著工夫, 更無依泊處. 日用動靜語黙, 無非下學, 聖人豈曾離此來? 今動不動便先說箇本末精粗無二致, 正是鶻崙呑棗. 向來李丈說鐵籠罩却之病, 恐末免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4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제4서) 내용 중에 “범백숭(范伯崇)이 작년 봄에 편지를 보내『논어(論語)』몇 줄을 물어 왔는데 그 내용이 매우 고상하고 신묘하였습니다. 이것을 이선생께 보였더니...(伯崇去年春間得書 問論語數段 其說甚高妙 因以呈李先生...)”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통(李侗)은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 겨울에 죽었다. 따라서 이 편지는 적어도 계미년 이후에 씌어진 것일 수는 없다.『연보(年譜)』에는 이 편지를 임오년(壬午, 1162년, 주자 33세)에 쓴 것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이 편지 가운데 “편지에 이런 뜻과 두 개의 서문(序文)을 기록하여 보내었고...(因書可錄此意及二序送之...)”라고 하고 있다. 주자가 이통(李侗)이 죽기 전에 쓴 서문(序文)을 살펴보면 임오년(壬午)에 세 편, 계미년에 두 편이 있는데, 이 편지에서 ‘두 개의 서문(二序)’아라 한 것은 아마도 계미년에 쓴 「논어요의목록서(論語要義目錄序)」와「논어훈몽구의서(論語訓蒙口義序)」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마땅히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5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자는 허순지의 학설이 지나치게 현학적인 점을 걱정하면서 “평이하고 진실한 곳에서 지당한 이치를 찾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아울러 장구성(張九成)의 말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또한 이 편지에는 가국재(柯國材)와 서원빙(徐元聘)이 언급되고, 범백숭(范伯崇)의 학문이 크게 진보한 점과 유덕명(劉德明) 역시 “대략 이치를 알게 된 점”에 대해 칭찬한다. 

편지를 통해 [그대가] 동안현(同安県)의 학교 현상(縣庠) 
󰡔기의󰡕 동안현(同安縣)의 학교이다. (󰡔記疑󰡕 同安縣痒)
󰡔간보󰡕 허순지(許順之)는 동안(同安)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곳에 있는 학교에서 강설(講說)을 주관했다. (󰡔刊補󰡕 順之同安人 故入其庠 主講說)  [역주] * 상(庠) ; 은․주대의 학교[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682쪽.]
에서 여러 생도들에게 강설(講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이는 매우 좋은 일입니다. 다만 보내신 [그대의] 여러 학설은 모두 너무 지나치게 강구한 듯 합니다. 만약 한결 같이 이렇게 한다면 점차 올바른 길을 잃고 이단(異端)의 설에 빠지게 될까 염려되는데 그렇게 되면 해(害)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의 털끝만한 차이도 나중엔 결국 천리의 거리로 어긋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털끝만큼의 차이 정도가 아닌 이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보내온 그대의 편지를 재삼 검토하였습니다만 이 때문에 저는 슬픈 마음에 빠져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 그냥 넘길 수 없기에] 저의 어리석은 의견을 아래에 밝히긴 했습니다만 그 자세한 내용을 붓끝으로 다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두 분 선생과 범공(范公)과 윤공(尹公) 범윤(笵尹)
󰡔기의󰡕 범순부(笵淳夫)와 윤화정(尹和靖)인 듯하다. (󰡔記疑󰡕 疑淳夫和靖)
의 말을 표준으로 하여 반복 음미함으로써 다만 평이하고 진실한 곳에서 지당한 이치를 찾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무릇 지난 날 일삼아왔던 ‘하나의 일부당(一副當)
󰡔기의󰡕 ‘일건(一件)’이라는 말과 같다. (󰡔記疑󰡕 猶言一件)
 높으면서도 기이하고 새로우면서도 오묘한 설’은 모두 폐기시켜 버려야 의각(倚閣)
󰡔기의󰡕 없애버리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記疑󰡕 廢置不用之意)
 합니다. 그렇게 오래 해나가다 보면 참된 이치(実理)를 보아 저절로 [예전의 설들은] 모두 쓸 곳이 없게 될 것 도사불착(都使不著)
󰡔기의󰡕 ‘사(使)’는 사용(使用)한다는 것이다. ‘도사불착(都使不著)’은 ‘높으면서도 기이하고 새로우면서도 오묘한 설’은 모두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記疑󰡕 使使用也 都使不著 謂高奇神妙之說皆無所用矣)
입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기 오래 전부터 저에게도 이러한 병통이 있었는데 그것이 서로를 점점 물들여 이러한 풍조를 만들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 마침내 서로를 잘못되게 하고 있으니 [특히] 나의 탓이 크다고 여길 뿐입니다. 장자소(張子韶)의 말 자소지설(子詔之說)
󰡔차의󰡕 ‘소(詔)’는 본래 글자대로 발음한다. (󰡔箚疑󰡕 詔從音) 
󰡔기의󰡕 장구성(張九成)은 고종(高宗) 때의 사람이며 자(字)는 자소(子韶)이다. 선(禪)에 빠진 정도가 매우 심각했으며 멋대로 유교경전을 해석하곤 했다. (󰡔記疑󰡕 張九成 高宗時人 字子韶 溺禪最甚 妄作經解)
은 절대로 올바른 이치가 아닙니다. 직절...정리(直截...正理) 
󰡔차의󰡕 여기서 끊어 읽어야 한다. (󰡔箚疑󰡕 句)
 가장 고상하고 가장 오묘하게 말한 부분이 문제가 특히 심각하니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지 배워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대를] 직접 만나 이와 같은 정미(精微)한 문제에 대해서 깊이 연구할 수 있을까요? 바람을 향해 서니 그대 향한 그리움이 끝없이 내 가슴에 사무쳐 옵니다.
承在縣庠爲諸生講說, 甚善甚善. 但所寄諸說, 求之皆似太過. 若一向如此, 恐駸駸然遂失正途, 入於異端之說, 爲害亦不細. 差之豪釐, 謬以千里, 况此非特豪釐之差乎! 三復來示, 爲之悵然, 已輒用愚見附注於下. 然其曲折非筆端可盡, (4-1768)恐當且以二先生及范․尹二公之說爲標準, 反復玩味, 只於平易慤實之處認取至當之理. 凡前日所從事一副當高奇新妙之說竝且倚閣, 久之見實理, 自然都使不著矣. 蓋爲從前相聚時, 熹亦自有此病, 所以相漸染, 成此習尙. 今日乃成相誤, 惟以自咎耳. 如子韶之說, 直截不是正理, 說得儘高儘妙處, 病痛愈深. 此可以爲戒而不可學也. 何由面話, 究此精微? 臨風鬱結, 無有窮已.

가국재(柯國材)와 서원빙(徐元聘) 원빙(元聘)
󰡔익증󰡕 성(姓)이 서(徐)씨이다.「운재기(芸齋記)」에 보인다. (󰡔翼增󰡕 姓徐見芸齋記)
은 근황이 어떠합니까? 어제 의심나는 부분을 편지로 보내왔는데 별도로 하나의 학설 일반설화(一般說話
󰡔기의󰡕 잘못 [유교의 진리와는] 다른 길로 들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또 다른] 한 종류의 학설’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記疑󰡕 誤入別一端 故謂之一般說話)
󰡔차의󰡕 살피건대 이는 가국재(柯國材)와 서원빙(徐元聘)의 학설이 허순지(許順之)와 동일한 부류라는 말이다. 󰡔기의󰡕에서 이른바 ‘잘못 [유교의 진리와는] 다른 길로 들었다. 云云’한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箚疑󰡕 按此謂國材元聘之說 與順之一般 記疑所謂誤入別一端云云 未知何謂)
󰡔절보󰡕 ‘일반(一般)’은 ‘일종(一種)’이라는 말과 같다. 대개 진제중(陳齊仲)의 학설이 허순지(許順之)와는 달라 [또 다른] 한 종류의 학설이라는 말이다. (󰡔節補󰡕 一般猶言一種 盖與齊仲順之不同是一種說話)
󰡔차보󰡕 이제 살펴보니 마땅히 󰡔기의󰡕를 따르는 것이 옳은 듯하다. (󰡔箚補󰡕 今按恐當從記疑爲是)
이더군요. 대체로 진제중(陳齊仲)과 허순지(許順之)는 너무 유심(幽深)하고 [주 ; 허순지가 더욱 심하다.] 두 사람 二公 [주희집에는 三公으로 되어 있다.]
󰡔기의󰡕 가국재(柯國材)와 서원빙(徐元聘)이다. (󰡔記疑󰡕 國材元聘)
은 너무 집착(執着)합니다. [주 ; 집착하는 자는 가끔 통하지만 유심한 자는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중간의 한 가닥 평탄하여 관원(官員)이 다닐만한 큰 길을 다니는 사람이 없고, 그저 위로 올라가 산으로 다니거나 내려와 물로 다니니 이것이 무슨 생각 * 의사(意思) : 마음먹은 생각.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772쪽.]
으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대가 가국재(柯國材)와 서원빙(徐元聘) 등에게 보내는] 편지 인서(因書)
󰡔기의󰡕 허순지(許順之)가 가국재(柯國材)와 서원빙(徐元聘)에게 보낸 편지를 말한다. (󰡔記疑󰡕 謂順之寄國材元聘之書) 
󰡔차의󰡕 살피건대 진제중(陳齊仲) 역시 그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箚疑󰡕 按齊仲亦當在其中)
에 나의 이런 뜻과 내가 쓴 두 개의 서문 이서(二序)
󰡔기의󰡕 자세히 알 수 없다. (󰡔記疑󰡕 未詳)  [역주] * 그러나 진래(陳來)에 따르면 ‘두 개의 서문(二序)’아라 한 것은 아마도 계미년에 쓴「논어요의목록서(論語要義目錄序)」와「논어훈몽구의서(論語訓蒙口義序)」를 가리킨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7쪽 참고.
 및 내가 미처 쓰지 못한 뜻까지 다 기록해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범백숭(范伯崇)은 학문이 크게 진보하였고, 유덕명(劉德明) 유덕명(劉德明)
󰡔간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刊補󰡕 未聞)
도 대략 이치를 아니 모두 기쁜 일입니다. 범백숭의「잡설(雜說)」하나를 부치니 그 글을 보면, 그가 지키는 것이 어긋나지 않고 이치를 본 것이 점차 밝아지는 등 그에 관한 대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설이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으니 범백숭에게 그 부분을 물은 뒤에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갱구...견유(更求...見喩)
󰡔차의󰡕 허순지(許順之)가 미진한 곳에 대해 범백숭(范伯崇)에게 다시 질문하여 선생께 알려드린다는 말이다. 혹자는 선생이 허순지(許順之)로 하여금 다시 범백숭(范伯崇)의 학설을 추구(推求)하도록 했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箚疑󰡕 謂順之更問未盡處於伯崇 以喩於先生也 或云先生使順之更爲推求伯崇說也)

國材․元聘爲况如何? 昨寄得疑難來, 又是一般說話. 大抵齊仲․順之失之太幽深, [주 ; 順之尤甚]. 而三公失之太執著, 執著者有時而通, 幽深者蕩而不反矣. 中間一條平坦官路却沒人行著, 只管上山下水, 是甚意思!因書可錄此意及二序送之, 爲致不及書之意. 范伯崇學大進, 劉德明者亦稍識理趣, 皆可喜耳. 伯崇雜說一紙附去, 可見其持守不差, 見理漸明之大槪矣. 然其說有少未盡, 更求之, 却以見喩. 

범백숭(范伯崇)이 작년 봄에 편지를 보내『논어(論語)』몇 줄을 물어 왔는데 그 내용이 매우 고상하고 신묘하였습니다. 이것을 이선생께 보였더니, 이선생께서는 옳지 않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착실하게 공부를 하라 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곧 전과 확연히 달라졌으니 이것은 하나의 좋은 본보기 역시일격(亦是一格
󰡔기의󰡕 ‘격(格)’은 ‘예(例)’와 같은 의미이다. [이 구절은] 즉 범백숭(范伯崇)이 이선생(李先生)의 말씀을 따라 고묘(高妙)함을 버리고 성실하게 공부해 나갔기 때문에 뒤에 와서 곧 그 이전과는 매우 달라지게 되었는데, 이에 이공(二公)도 이러한 사례를 본보기로 삼아 공부해 나간다면 또한 범백숭(范伯崇)이 이전과 달라진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記疑󰡕 格例也 言伯崇依李先生說 捨高妙而殼實做工夫 故後來便別 二公能依此格例而做工夫 則亦如伯崇之便別矣)
󰡔차의󰡕 살피건대 이 구절은 다만 범백숭(范伯崇)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니 대개 [그가] 고묘(高妙)함을 버리고 성실하게 공부해 나간 점이 장족의 진보를 이룬 하나의 사례이라는 말이다. 󰡔기의󰡕에서 ‘이공 운운(二公 云云)’한 것은 아마도 너무 늘어지게 설명한 듯하다. (󰡔箚疑󰡕 按此但指伯崇而言 蓋謂捨高妙就殼實 此爲長進之一格也 記疑二公云云 恐太蔓)
󰡔차보󰡕 이는 보편적으로 위학(爲學)의 한 사례를 지목하여 한 말이다. (󰡔箚補󰡕 此通指爲學格例而言)
가 되겠지요. 그러나 [범백숭의 경우] 당초의 그의 고상하고 신묘한 설이라 하는 것도 역시 여러 선생들의 말에 의거하긴 했지만 이를 지나치게 추론(追論)한 데서 발생한 문제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의 경우는] 그대(許順之)처럼 억지로 글 뜻을 주장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게 말한 것 경장...요횡(硬將...拗橫)
󰡔기의󰡕 ‘경(硬)’은 견고(堅固)하여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요(拗)’는 어긋난다는 뜻이다. (󰡔記疑󰡕 硬 堅固不通之意 拗 戾違也)
󰡔간보󰡕 ‘요(拗)’는 음이 ‘료’이며, ‘어긋나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억지로 글 뜻을 어긋나게 하여 이치에 따라 설파해나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刊補󰡕 拗 音了 戾違之意 言强將文義乖戾 不順理而說破也) [역주] * 요(拗) ; 꺾다. 부러뜨리다. 비꼬이다 등의 의미이다. 발음은 (요)로 표기되어 있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827쪽.]
과는 다릅니다. 빨리 고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체로 글 뜻에 대해서는 선유(先儒)들이 다 풀어 놓았습니다. 고금(古今)의 인정(人情)은 서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말과 글이 또한 이와 같을 뿐입니다. 오직 자득(自得)한 사람은 그 의미를 본 것이 다를 뿐이지 그 학설이 일반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닙니다. 유소...어중(有所...於衆) 
󰡔차의󰡕 자득(自得)한 사람은 글의 뜻에 대해 [그가] 깨달은 의미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만 그 설명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가 깨달은] 의미가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말은 ‘깊고 유장하다(深長)’는 말이다. (󰡔箚疑󰡕 謂有所自得之人 雖於文義 其意味不同於衆 而其說則不異於衆也 意味不同 謂深長也)
 그러니 그저 기이한 학설을 세우는 데 힘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공부해나가다 보면 결국] 바른 이치를 잃게 되고 세속의 괴이한 학문과 다를 바가 없게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각각의 문맥의 이치(文理)에 의거하여 반복 음미하기를 오래하다 보면 저절로 밝아지고 가슴속도 시원하게 뚫려 허다한 노고가 없어질 것이니,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이미 시원(快活)하게 될 것입니다. 시험 삼아 나의 말대로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伯崇去年春間得書, 問論語數段, 其說甚高妙, 因以呈李先生. 李先生以爲不然, 令其慤實做工夫, 後來便別. 此亦是一格也. 然其當時高妙之說, 亦只是依諸先生說而推言之過當處耳, 非如順之所示, 硬將文義拗橫說却也. 切宜速改, 至祝至祝. 大抵文義先儒盡之, 蓋古今人情不相遠, 文字言語只是如此. 但有所自得之人, 看得這意味不同耳, 其說非能頓異於衆也. 不可只管立說求奇, 恐失正理, 却(4-1769)與流俗詭異之學無以異也. 只據他文理反復玩味, 久之自明. 且是胸中開泰, 無許多勞攘, 此一事已快活了. 試依此加功, 如何?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5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 역시 제5서에 이어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이나 이보다 조금 뒤에 씌어진 것이다. 주자가 허순지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제4서) 내용 중에 “다만 보내신 [그대의] 여러 학설은 모두 너무 지나치게 강구한 듯 합니다... 다만 평이하고 진실한 곳에서 지당한 이치를 찾아 ... (所寄諸說 求之皆似太過...只於平易慤實之處認取至當之理)”라고 했는데, 이 편지(제5서)에도 “단지 평이하고 착실한 곳에서 이해해야 합니다.(只就平易慤實處理會也)”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 통의 편지는 모두 허순지(許順之) 위학(爲學)의 병폐를 시정하기 위해 한 말이다. 따라서 제5서 또한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이나 이보다 조금 뒤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6쪽 참고.
 이 편지 역시 앞의 제4서에 이어 주자는 허순지의 학설이 지나치게 현학적인 점을 걱정하면서 “독서는 대개 일에서 이해하여 그 말뜻이 어떠한지를 보는 것이지, 굳이 지나치게 깊고 그윽한 말을 함으로써 도리어 성현(聖賢)들의 본 뜻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주자는 사상채, 윤화정, 정이천 등 선배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독서는 대개 일에서 이해하여 그 말뜻이 어떠한지를 보는 것이지, 굳이 지나치게 깊고 그윽한 말을 함으로써 도리어 성현(聖賢)들의 본 뜻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스스로의 마음 씀씀이도 정도(正道)를 얻지 못하여 지리하고 괴벽한 곳에로 빠져들게 될 것이니 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경계하여 평이하고 착실한 곳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필유사언(必有事焉)’에 대한 [그대의] 글은 본 적이 없어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부증...여하(不曾...如何)
󰡔기의󰡕 ‘접득(接得)’은 ‘견득(見得)’이라는 말과 같다. 허순지(許順之)가 일찍이 ‘필유사언(必有事焉)’에 관해 논한 편지를 선생께 올렸는데 선생께서는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나는 일찌기 그것을 접한 적이 없는데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신 것이다. (󰡔記疑󰡕 接得猶言見得 謂順之曾論必有事焉之書上於先生 先生未見 故言不曾接得 不知何故而然也)
󰡔차의󰡕 살피건대 ‘부지여하(不知如何)’는 [허순지의] 편지 속에서 펼친 학설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기의󰡕에서의 설명은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箚疑󰡕 按不知如何 謂不知書中之說如何也 記疑說恐未然)
 사상채(謝上蔡 : 사량좌(謝良佐)의 호)는 “출입(出入)과 기거(起居)가 일 아님이 없으니, 미리 기대하면 일에 앞서 맞이하게 되고, 잊으면 거의 생각에서 떠나게 되며, 조장(助長)하면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성인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일반인들과는 다르다.” 상채...중인(上蔡...衆人)
󰡔기의󰡕『연평답문(延平答問)』에서는 이것을 상채(上蔡)에게 답한 명도(明道)의 말이라 하였고 지금은 이 말을 곧바로 상채(上蔡)의 말이라 하고 있다. 마땅히『연평답문(延平答問)』을 옳게 여겨야 할 것 같다. (󰡔記疑󰡕 延平答問 以此爲明道答上蔡語 今直以爲上蔡語 恐當以答問爲是)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살피건대 여기에서 말한 ‘일’은 바로 ‘일에 종사한다’라 할 때의 ‘일’입니다. 사사지사(事事之事)
󰡔차의󰡕『서경(書經)』,「열명(說命)」편에 ‘일에 종사(從事)함이 바로 대비(對備)가 있는 것이니(事事乃其有備)’라는 말이 나온다. (󰡔箚疑󰡕 書說命 事事乃其有備)  [역주] *『서경(書經)』,「상서(商書)」,「열명(說命)」중(中)편, 제8장에 “일에 종사(從事)함이 바로 대비(對備)가 있는 것이니, 대비(對備)가 있어야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惟事事 乃其有備니 有備라사 無患하리이다)”라고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375쪽 참고. 
 이 한 가지 ‘일’을 만나면 이 한 가지 ‘일’에 종사하여야 본체가 밝아질 것이니, 여기에서 곧 [『맹자(孟子)』에서 말씀하신 바,] ‘잡으면 보존되고 조즉존(操則存) 
󰡔차의󰡕 ‘조(操)’는 ‘이 한 가지 일을 일삼는 것’을 말한 것이고, ‘존(存)’은 ‘본체(本體)를 환히 밝은 상태로 보존함’을 말하는 것이다. (󰡔箚疑󰡕 操以事此一事而言 存以本體昭然而言)
 놓으면 없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피건대 이 이치는 지극히 평이하여 다만 눈앞에 있는 데도 사람들은 고원(高遠)한 것을 사모합니다. 이 때문에 구하는 것이 지나쳐 스스로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들어 두 번째로 논어에 관한 윤선생의 학설(論語尹先生說)을 보고 있습니다. 구절구절마다 깊은 맛(意味)이 있어 다시금 완미할만하며 늘 하는 말이라 여겨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천(伊川) 선생께서는 “말을 함(立言)에 있어 마땅히 [그 말 속에 깊은] 의미가 含畜되도록 함으로써 ‘덕을 아는 사람(知徳)’으로 하여금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덕이 없는 자’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덕...자혹(知德...者惑 
󰡔익증󰡕 ‘덕을 앎(知德)’이란 의리(義理)를 아는 사람을 두고 한 말한다. 말을 함(立言)에있어 만약 [그 말 속에 깊은 의미를] 함축(含蓄)시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리(支離)하고 번쇄(繁碎)하게 말하게 될 것이다. ‘덕을 아는 사람(知德)’은 이렇게 [지리하고 번쇄한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의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지나치게 번잡해진 것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덕이 없는 자도 [지리하고 번쇄하게 된 그] 많은 말 때문에 도리어 미혹되고 어지럽게 되어 그 요지를 터득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翼增󰡕 知德 知義理之人 立言若不含畜則必說得支離繁碎 知德則不待如此 而已知其義故厭其太繁 而無德者 則反爲多言所惑亂 不得其要旨也)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니, 거듭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讀書大抵只就事上理會, 看他語意如何, 不必過爲深昧之說, 却失聖賢本意, 自家用心亦不得其正, 陷於支離怪僻之域, 所害不細矣. 切宜戒之, 只就平易慤實處理會也. ‘必有事焉’之書不曾接得, 不知如何. 上蔡云 ‘出入起居, 無非事者. 正以待之, 則先事而迎. 忘則涉乎去念, 助長則近於留情. 聖人之心如鏡, 所以異於衆人也.’ 觀此所謂 ‘事’ 者, 只是 ‘事事’ 之 ‘事’, 遇此一事, 則事此一事, 本體昭然, 此便見所謂 ‘操則存․舍則亡’ 也. 見此理極平易, 只在目前, 人自貪慕高還, 所以求之過當而自失之也. 近再看論語尹先生說, 句句有意味. 可更玩之, 不可以爲常談而忽之也. 伊川先生云 : ‘立言當含畜意思, 不可使知德者厭, 無德者惑.’ 此言深有味, 更思之如何?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6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쯤에 씌어진 것이다.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제4서, 계미년)와 다섯 번째 편지(제5서, 계미년)에서 모두 허순지 위학(爲學)의 병폐를 지적한다. 이 편지(제6서)에서는 논어에 관한 질문을 조목별로 답하는 내용이지만 그 내용 중에 “지리(支離), 현묘(玄妙)”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허순지(許順之)의 병통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는 제4서 및 제5서와 대의(大意)가 동일하다. 따라서 제6서 또한 제4서와 5서에 이어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에 쓴 편지 중 주자가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에서 “진제중(陳齊仲)과 허순지(許順之) 이 두 친구가 고상하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여 즐겨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다가 종종 의리의 중정(中正)함을 넘어서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늘 편지를 통하여 [이 점을] 경계하곤 해왔습니다만...(陳․許二友好爲高奇 喜立新說 往往過於義理之中正 故常因書箴之...)”라고 하고 있다.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이 편지(제6서) 역시 이른바 “[허순지(許順之)를] 경계한 내용(箴)”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쯤에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9쪽 참고.
 이 편지의 내용은『논어(論語)』에 관한 허순지의 질문을 조목별로 답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논어(論語)』「자한(子罕)」편의 ‘공공여야(空空如也)’, 「학이(学而)」편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한다(貧而樂)’는 구절,「헌문(憲問)」편의 “남이 나를 속일까 역탐(逆探)[미리 짐작]하지 않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臆測)하지 않는다.(不逆詐 不億不信)는 구절, 그리고「팔일(八佾)」편에 나오는 ‘사(社)’ 등이 토론의 주제로 등장한다.

[허순지 질문 1] ‘공공여야(空空如也)’『논어(論語)』,「자한(子罕)」, 제7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비루(鄙陋)한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묻되, 그가 아무리 무식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묻는 내용의> 양단(兩端)[양쪽]을 다 말해준다. (子曰 吾有知乎哉아 無知也로라 有鄙夫問於我하되 空空如也라도 我叩其兩端而竭焉하노라)”라고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68-9쪽 참고.
에 대해 [불교의] 진공(眞空) 진공(眞空) 
󰡔차의󰡕 불교 용어이다.『화엄경(華嚴經)』에 나온다. (󰡔箚疑󰡕 佛語出華嚴經)
의 의미를 끌어와 질문하는 사람이 많은데 * 주희집 주 : ‘위문(爲問)’은 원본에는 없다. 순희(淳熙)본에 의거하여 보충한다.(爲問 : 原缺, 據淳熙本補.) 
,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생의 답변 1] 이정(二程)선생께서 이 단락을 설명하신 것 이정선생설(二程先生說)
󰡔차의󰡕 [주선생의] 『논어본주(論語本注)』(『논어집주(論語集註)』를 말함)에 보인다. (󰡔箚疑󰡕 見論語本注)  [역주] *『논어집주(論語集註)』「자한(子罕)」제7장에 보인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68-9쪽 참고.
󰡔익증󰡕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성인(聖人)이 사람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나아가게 함이 이와 같되, 오히려 사람들이 고원(高遠)하다고 여겨 가까이 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성인(聖人)의 도(道)는 반드시 내려서 스스로 낮추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깝게 여기지 않는다. 현인(賢人)의 말씀은 끌어올려 스스로 높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道)가 높아지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에게서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翼增󰡕 程子曰 聖人之敎人 俯就之若此 猶恐衆人以爲高遠而親也 聖人之道 必降而自卑 不如此則人不親 賢之人言 則引而自高 不如此則道不尊 觀於孔子孟子則可見矣)
󰡔차보󰡕 본주(本注)에는 다만 이천(伊川)의 설명만 있다. (󰡔箚補󰡕 本注只有伊川說)
이 매우 분명합니다. 횡거(橫渠)의 설명 횡거설(橫渠說)
󰡔차의󰡕『정몽』에 “모르는 것이 있어야만 [진정한] 앎이 있고, 모르는 것이 없다면 [진정한] 앎도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비루한 사람이 물어오더라도 공자께서는 ‘양단(兩端)을 다하여 남김없이 알려 준다’고 했다. [또 주역에서도] “역(易)은 생각이 없고 함이 없으며”, “그 명령을 받음이 메아리와 같다”라고 했다. 성인(聖人)은 한 마디 말로 천하의 도(道)를 다하니 비록비루한 사람이 물어 오더라도 반드시 양단(兩端)을 다하여 그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묻는 자는 타고난 재주에 따라 각자 만족할 뿐, 반드시 [공자께서 알려준] 양단(兩端)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箚疑󰡕 正蒙有 不知則有知 無不知則無知 是以鄙夫有問 仲尼竭兩端而空空 易無思無爲 受命乃如響 聖人一言盡天下之道 雖鄙夫有問 必竭兩端而告之 然問者隨才分各足 未必能兩端之盡也) [역주] * 이상 󰡔차의󰡕에 인용된 장횡거(張橫渠)의 말은『정몽(正蒙)』,「중정(中正)」편에 보인다. 장재(張載), 󰡔장재집(張載集)󰡕(四部刊要), 장석탐(章錫琛)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78), 31쪽 참고. * 또 󰡔차의󰡕에 인용된『주역(周易)』의 말은「계사(繫辭)」상(上), 10장에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556쪽 참고.
은 지금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나의 생각에는 우선 이정(二程)선생의 설명을 위주 * 주희집 주 : ‘차(且)’는 순희(淳熙)본에서는 ‘직(直)’으로 되어 있다.(且 : 右引作‘直’.)
로 하여 올바르게 글 뜻을 이해해 나간다면, 도리(道理)는 그 속 어디 쯤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현묘한 것만 입에 담다 보면 도리어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 *『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상, 제2장(호연지기장) 원문 가운데 “무엇을 지언(知言)이라 합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으니, 마음에서 생겨나 정사에 해를 끼치며, 정사에 발로되어 일에 해를 끼치나니, 성인(聖人)이 다시 나오셔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르실 것이다.’(何謂知言이니잇고 曰 詖辭에 知其所蔽하며 淫辭에 知其所陷하며 邪辭에 知其所離하며 遁辭에 知其所窮이니 生於其心하여 害於其政하며 發於其政하여 害於其事하나니 聖人復起사도 必從吾言矣시리라)”라는 내용이 나오고, 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이는 공손추(公孫丑)가 다시 물음에 따라 맹자(孟子)께서 대답하신 것이다. 피(詖)는 편벽됨이요, 음(淫)은 방탕함이요, 사(邪)는 사벽함이요, 둔(遁)은 도피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인(因)하니, 말의 병통이다. 폐(蔽)는 가리우고 막힘이요, 함(陷)은 침닉(沈溺)이요, 이(離)는 배반이요, 궁(窮)은 곤굴(困屈)이다. 이 네 가지는 또한 서로 인(因)하니, 이것은 마음의 잘못이다. 사람의 말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니, 마음이 정리(正理)에 밝아서 가리움이 없는 뒤에야 말이 공평하고 올바르며 통달하여 병통이 없으니,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반드시 이 네 가지의 병통이 있게 된다. 말의 병통을 가지고 마음의 잘못을 알며, 또 정사에 해됨이 결정적이어서 바꿀 수 없음을 앎이 이와 같았으니, 마음이 도(道)를 통달하여 천하(天下)의 이치에 의심함이 없는 자가 아니면 그 누가 이에 능하겠는가. 저 고자(告子)는 말에 이해되지 못하거든 이것을 마음에 찾기를 즐겨하지 않아서, 심지어는 의(義)는 외면에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그렇다면 스스로 이 네 가지의 병통을 면치 못한 것이니, 어떻게 천하(天下)의 말씀을 알아 의심하는 바가 없겠는가.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이 도(道)를 통달한 뒤에야 능히 시비(是非)를 분별할 수 있으니, 마치 저울대를 잡고 경중(輕重)을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맹자(孟子)의 이른바 지언(知言)이란 바로 이것이다.’ 또 말씀하였다. ‘맹자(孟子)의 지언(知言)은 바로 사람이 당상(堂上)에 있어야 바야흐로 당하(堂下) 사람의 곡직(曲直)을 구별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만일 자신이 아직도 당하(堂下)의 여러 사람 속에 섞여 있음을 면치 못한다면 이것을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此는 公孫丑復問而孟子答之也라 ?는 偏陂也요 淫은 放蕩也요 邪는 邪僻也요 遁은 逃避也라 四者相因하니 言之病也라 蔽는 遮隔也요 陷은 沈溺也요 離는 叛去也요 窮은 困屈也라 四者亦相因하니 則心之失也라 人之有言이 皆出於心하니 其心이 明乎正理而無蔽然後에 其言이 平正通達而無病이니 苟爲不然이면 則必有是四者之病矣니라 卽其言之病而知其心之失하고 又知其害於政事之決然而不可易者如此하니 非心通於道而無疑於天下之理면 其孰能之리오 彼告子者는 不得於言이어든 而不肯求之於心하여 至爲義外之說하니 則自不免於四者之病이니 其何以知天下之言而無所疑哉리오 程子曰 心通乎道然後에 能辯是非니 如持權衡하여 以較輕重이니 孟子所謂知言이 是也니라 又曰 孟子知言은 正如人在堂上이라야 方能辨堂下人曲直이니 若猶未免雜於堂下衆人之中이면 則不能辨決矣리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91-2쪽 참고.
 가운데로 흘러들어가게 될까 유입(流入) 
󰡔차의󰡕 ‘인(人)’이 당본(唐本)에는 ‘입(入)’으로 되어 있다. (󰡔箚疑󰡕 人唐本作入)
 두렵습니다.  
‘空空如也’, 或者多引眞空義爲問, 如何? 
二程先生說此段甚分明, 橫渠說似過當了. 愚謂且以二程先生之說爲主, 理會正當文義, 道理自在裏許. 只管談玄說妙, 却恐流入詖淫邪遁裏去. 

[허순지 질문 2]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한다(貧而樂) *『논어(論語)』,「학이(學而)」편, 제15장에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가난하되 아첨함이 없으며, 부(富)하되 교만함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괜찮으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는 자만은 못하다.’ 하셨다. (子貢曰 貧而無諂하며 富而無驕하면 何如하니잇고 子曰 可也나 未若貧而樂(락)하며 富而好禮者也니라)”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주자는 “첨(諂)은 자신을 낮추고 굽히는 것이요, 교(驕)는 자랑하고 방사(放肆)한 것이다. 상인(常人)은 빈부(貧富)의 가운데에 빠져서 스스로 지킬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두 가지의 병통이 있는 것이다.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다면 스스로 지킬 줄을 안 것이나, 빈부(貧富)의 밖에 초월(超越)하지는 못한 것이다. 무릇 가(可)라고 말하는 것은 겨우 가(可)해서 미진한 바가 있다는 말이다. 즐거워한다면 마음이 넓고 몸이 펴져서 그 가난함을 잊을 것이요, 예(禮)를 좋아한다면 선(善)에 처함을 편안히 여기고 이치(理致)를 따르기를 즐거워해서 또한 스스로 그 부유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공(子貢)은 재화를 증식하였으니, 먼저는 가난하고 뒤에는 부유해서 일찍이 스스로 지조(志操)를 지키는 데에 힘을 쓴 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자, 부자(夫子)께서 대답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셨으니, 이는 그 이미 능한 것을 허여(許與)[인정]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힘쓰게 하신 것이다.(諂은 卑屈也요 驕는 矜肆也라 常人은 溺於貧富之中하여 而不知所以自守라 故로 必有二者之病이라 無諂無驕면 則知自守矣나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라 凡曰可者는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라 樂則心廣體쮐하여 而忘其貧이요 好禮則安處善, 樂循理하여 亦不自知其富矣라 子貢貨殖하니 蓋先貧後富하여 而嘗用力於自守者라 故로 以此爲問에 而夫子答之如此하시니 蓋許其所已能하고 而勉其所未至也시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9-30쪽 참고.
’운운, 선(善)에 있어서는 유위(有爲) 병어유위(病於有爲)
󰡔차의󰡕 [여기서의] ‘유위(有爲)’는 장남헌(張南軒)이 이른바 ‘할 바가 있어 한다(有所爲而爲)’라 한 말과 같은 의미이다. (󰡔箚疑󰡕 有爲與南軒所謂有所爲而爲者同)
함보다 더한 병이 없고, 학(學)에 있어서는 스스로 만족하는 것보다 더한 병이 없으니 [선을 행함에] 유위(有爲)하는 사람은 무위(無爲)한다 해도 간혹 [그 무위행을] 그치는 경우가 있으며, [학에 있어서] 자족(自足)하게 되면 만족해서는 아니 되는 상황에 부딪쳐도 간혹 [노력을] 중단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런 점들이야말로 배우는 자의 큰 문제이며 현달(賢達)한 자들이 기필코 덕에 나아가기를 기약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대개 ‘선(善)’이란 자기(自己)가 보아 당연한 것이며 ‘학(學)’이란 모름지기 실증내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선에 있어서] 당연한 바를 알면, 가난해도 이를 즐기며 부유해도 예(禮)를 좋아하게 되어 교만과 아첨을 일삼지 않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학에 있어서도] 실증내지 아니할 곳을 알면 갈고 닦아 글공부(道學)를 해나갈 것이며 아울러 자기수양(自修)에 힘써, 배우고 묻고 명석하게 분변하는 공부를 그만두지 않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마땅히 시를 인용하여 스스로를 비유할만하며 또한 도학(道學)의 무궁(無窮)함을 밝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2] 이 단락의 경우 비록 문제는 없지만, 언어의 맥락 가운데 막힌 곳이 또한 많습니다. 대체로 보아 [그대의 말과 같이] 반드시 이처럼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선유(先儒)들의 말씀 속에 이미 그 대략이 갖추어져 있습니다만 이광조(李光祖) 李光祖(李光祖) 
󰡔익증󰡕 이욱(李郁)이니 양구산(楊龜山)의 문인(門人)이다. (󰡔翼增󰡕 郁龜山門人)
의 학설이 특히 좋습니다. 
‘貧而樂’云云, 善莫病於有爲, 學莫病於自足. 有爲則無爲而或輟, 自足則不足而或止. 此學者之大病, 而賢達之必期於進德也. 蓋善自己之當然而學須至於不厭. 知所當然則貧而樂, 富而好禮, 驕與諂無所事也. 知所不厭則切瑳以道學, 琢磨以自修, 學問明辨之不可已也. 是宜引詩以自况, 亦明道學之無窮也. 
此段雖無病, 然語脈中窒礙處亦多. 大凡不必如此立說, 此先儒之說已略具矣. 李光祖說甚善.

[허순지 질문 3] [공자께서는] “남이 나를 속일까 역탐(逆探)[미리 짐작]하지 않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臆測)하지 않는다.” *『논어(論語)』,「헌문(憲問)」편, 제33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속일까 역탐(逆探)[미리 짐작]하지 않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臆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먼저 깨닫는 자가 어진 것이다.” (子曰 不逆詐하며 不億不信이나 抑亦先覺者是賢乎인저)”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주자는 “역(逆)은 <일이>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을 미리 짐작하는 것이요, 억(億)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억측하는 것이다. 사(詐)는 남이 자신을 속이는 것을 말하고, 불신(不信)은 남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억(抑)은 반어사(反語辭)이다. 비록 역탐(逆探)하지 않고 억측(臆測)하지 않으나, 남의 정위(情僞)[실정과 허위]에 대하여 자연히 먼저 깨달아야 어짊이 된다고 말씀한 것이다. ○ 양씨(楊氏)가 말하였다. ‘군자(君子)는 성실(誠實)에만 한결같이 할뿐이다. 그러나 성실(誠實)하고도 밝지 않은 자는 있지 않다. 그러므로 비록 남이 나를 속일까 역탐(逆探)하지 않고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억측(臆測)하지 않더라도 항상 먼저 깨닫는 것이다. 만일 역탐(逆探)하지 않고 억측(臆測)하지 않다가 끝내 소인(小人)에게 속임을 당하면 이 또한 볼 것이 없는 것이다.’ (逆은 未至而迎之也요 億은 未見而意之也라 詐는 謂人欺己요 不信은 謂人疑己라 抑은 反語辭라 言雖不逆不億이나 而於人之情僞에 自然先覺이라야 乃爲賢也라 ○ 楊氏曰 君子一於誠而已라 然이나 未有誠而不明者라 故로 雖不逆詐, 不億不信이라도 而常先覺也라 若夫不逆不億이라가 而卒爲小人所罔焉이면 斯亦不足觀也已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94쪽 참고.
고 하셨습니다만, 공자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인(成人)께서 천하 후세(後世)사람들이 모두 관후(寛厚)한 장자(長者)의 경지에 돌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군자(君子)가 될 수는 없으며, 또 모두가 다 소인(小人)이 될 수도 없습니다. 각자 스스로를 선하게 다스려 나갈 뿐이지요. 이제 설사 속이거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가 반드시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쪽에서 다만 성실(成実)한 도(道)로 그에 대응해 나가기만 한다면 [그도 또한] 반드시 보고 느끼어 감화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으니 또한 선(善)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역탐(逆探)’이나 ‘억측(億測)’을 굳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군자(君子)는 정당한 도(道)로써 속일 수는 있거니와, 도(道)가 아닌 것으로 터무니없이 속이기는 어려운 것 *『논어(論語)』,「옹야(雍也)」편, 제24장에 “재아(宰我)가 물었다. ‘인자(仁者)는 비록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고 말해 주더라도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救濟)하고자 하여> 따라 우물에 들어가겠습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君子)는 <우물까지> 가게 할 수는 있으나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이치에 있는 말로> 속일 수는 있으나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宰我問曰 仁者는 雖告之曰 井有仁[人]焉이라도 其從之也로소이다 子曰 何爲其然也리오 君子는 可逝也언정 不可陷也며 可欺也언정 不可罔也니라)”라고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21쪽 참고. * 또『맹자(孟子)』,「만장(萬章)」상편 제2장에 “‘그렇다면 순(舜)은 거짓으로 기뻐하신 자입니까?’ ‘아니다. 옛날에 살아있는 물고기를 정(鄭)나라 자산(子産)에게 선물한 자가 있거늘, 자산(子産)이 교인(校人)으로 하여금 그것을 못에 기르게 하였는데, 교인(校人)이 삶아 먹고 복명(復命)하기를 ‘처음에 고기를 놓아주자 어릿어릿하더니, 조금 있다가는 양양(洋洋)해서 유유(攸攸)[유유(悠悠)]히 가더이다.’ 하니, 자산(子産)은 ‘살 곳을 얻었구나, 살 곳을 얻었구나.’ 하였다. 교인(校人)이 나와서 말하기를 ‘누가 자산(子産)을 지혜롭다 말하는가. 내 이미 물고기를 삶아먹었는데, 자산(子産)은 「살 곳을 얻었구나! 살 곳을 얻었구나!」라고 했다.’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방(方)[도(道)]로써 속일 수는 있거니와, 도(道)가 아닌 것으로 터무니없이 속이기는 어려운 것이다. 저 상(象)은 형(兄)을 사랑하는 도리로써 왔다. 그러므로 진실로 믿고서 기뻐하셨으니, 어찌 거짓이셨겠는가. (曰 然則舜은 僞喜者與잇가 曰 否라 昔者에 有饋生魚於鄭子産이어늘 子産이 使校人畜之池한대 校人烹之하고 反命曰 始舍之하니 圉圉焉이러니 少則洋洋焉하여 攸(悠)然而逝하더이다 子産曰 得其所哉인저 得其所哉인저하여늘 校人出曰 孰謂子産智오 予旣烹而食之어늘 曰 得其所哉인저 得其所哉인저하니 故로 君子는 可欺以其方이어니와 難罔以非其道니 彼以愛兄之道來라 故로 誠信而喜之시니 奚僞焉이시리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265-6쪽 참고.
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저쪽에서 소인(小人)의 도(道)로 내게 다가오는데 * 주희집주 ; ‘피(彼)’는 원본에는 ‘피(被)’로 되어 있다. 송나라 민본(閩本)과 절본(浙本)에 근거하여 고친다. (彼: 原作‘被’, 據宋閩․浙本改.) 
, 가령 이쪽에서 이를 먼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어찌 엉터리없이 속는 상황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또한 먼저 깨닫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것이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선생의 답변 2] 나를 속일까 역탐(逆探)하며,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臆測)하게 되면 [이로 인해 혹시라도] 스스로의 ‘기계와 같은 마음(機械之心)’ 기계지심(機械之心)
󰡔익증󰡕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한 의도적인 마음(機關之心)이라는 의미이다. (󰡔翼增󰡕機關之心)  [역주] * 기관(機關) ; (1) 장치 (2) 어떤 에너지를 기계적으로 변화시키는 장치 (3)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시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049쪽.] 여기서는 (3)의 뜻에 가깝다.
을 불러일으킬까 두려운 것이지 저들이 보고 감동하여 교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호명중(胡明仲)이 ‘역탐과 억측은 곧 나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속이고 스스로를 불신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이러한 뜻 此意(此意)
󰡔차의󰡕 곧 위 글의 ‘스스로의 기계와 같은 마음(機械之心)을 불러일으킬까 두렵다’고 한 뜻을 말한다. (󰡔箚疑󰡕 卽上文恐惹起自家機械之心之意)
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만 말하면 곧 지리(支離)하게 되어버리고 친절(親切)한 맛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또한 선각자가 현명한가?(抑亦先覺者是賢乎)’라는 구절에 대해 이광조(李光祖)는 ‘리지(理地) 리지(理地)
󰡔차의󰡕 자세히 알 수 없다. 혹 ‘의리(義理)가 있는 곳’이니 대개 ‘마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箚疑󰡕 未詳 或是義理之地 盖謂心也)
가 명백(明白)하면, 사사로운 지혜를 쓸 곳이 없어진다’라고 했는데, 이 설명이 매우 좋습니다. 진제중(陳齊仲)이 이르기를, ‘억역(抑亦)’이라는 이 두 글자를 마땅히 완미해보아야 한다. [여기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라고 했으니 그 말이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또한 “‘선각자가 현명한가?(先覺方是賢乎)’라는 이 여섯 글자를 붙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막수...현호(莫須...賢乎) 
󰡔차의󰡕 진제중(陳齊仲)은 다만 ‘역역(抑亦)’ 두 글자만 말하고 다시 그 아래 ‘선각방시현호(先覺方是賢乎)’라는 이 여섯 자를 붙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 여섯 글자를 붙여야만 ‘억역(抑亦)’이라는 이 두 글자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막수(莫須)’는 ‘득무(得無)’와 같은 뜻이다. (󰡔箚疑󰡕 謂齊仲但云抑亦二字 而其下更不着先覺方是賢乎六字 蓋必須更着此六字 然後抑亦二字 方有下落也 莫須猶得無之意)
󰡔절보󰡕 ‘고시(固是)’에서 ‘현호(賢乎)’까지를 살피건대 [이 중에서] ‘참으로 이와 같다(固是如此)’는 말은 ‘역탐하지도 않고 억측하지도 않음(不逆不意)’을 지칭하여 말한 것이다. [따라서] ‘고(固)’자(字) 위에 마땅히 ‘언(言)’자(字)나 ‘위(謂)’자(字)의 뜻을 더 보태어 보아야 한다. 대개 공자(孔子)의 뜻을 해석해 말한 것인데 [공자의 뜻에 따르면] 참으로 마땅히 역탐도 하지 않고 억측도 하지 말아서 이에 모름지기 먼저 깨닫아 미리 알아차리는(先覺) 일이 없어진 연후에 비로소 현명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막수(莫須)’ 이하가 곧 [앞에서 말한] ‘억역(抑亦)이라는 이 두 글자는 깊은 의미가 있으니 마땅히 완미해야 한다’는 그 내용이다. 진제중(陳齊仲)의 설은 [‘제중운(齊仲云)’에서부터] ‘의문야(疑問也)’까지이다. (󰡔節補󰡕 固是止賢乎 按固是如此 指不逆不意而言 固字上當着言字謂字意看 蓋釋孔子之意 以爲言 固當不逆不意 而無乃更須先覺 然後乃爲賢乎云爾 莫須以下 卽抑亦二字有深意當玩味者也 齊仲說止疑問也)
만 여기서의 ‘호(乎)’는 의문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호자...지사(乎者...之辭) 
󰡔차의󰡕 여기의 ‘호(乎)’자는 또한『논어(論語)』본문의 ‘호(乎)’자이다. ‘호(乎)’는 결정사(決定辭)가 아니다. 이 때문에 ‘의문사(疑問詞)’라고 말한 것이다. (󰡔箚疑󰡕 此乎字 亦論語本文乎字也 乎非決辭 故謂之疑問)
 위 글의 뜻이 미진하기 때문에 의문을 표시한 것입니다.
‘不逆詐, 不億不信’, 此有以見聖人皆欲天下後世歸於寬厚長者之域處. 蓋天下不能皆君子, 不能皆小人, 私淑艾之可也. 今設有詐與不信之人, 彼未必(4-1771)不心知其非, 第此以誠實之道處之, 亦未必不觀感而化, 不亦善乎? 何用逆億爲? 然君子可欺以其方, 難岡以非其道. 彼以小人之道來, 使此而不先覺, 豈不爲所罔乎? 故亦在所先覺方爲賢耳.
逆詐億不信, 恐惹起自家機械之心, 非欲彼觀感而化也. 胡明仲云: ‘逆億在心, 是自詐自不信也’, 只是此意. 若如此說, 便支離了, 不親切. ‘抑亦先覺者是賢乎’, 李光祖曰: ‘理地明白, 則私智無所用之矣.’ 此說極善. 齊仲云, ‘抑亦’ 二字當玩味, 有深意, 固是如此. ‘莫須也著先覺方是賢乎’, 乎者, 疑問之辭, 以上意末盡故疑問也.
 
[허순지 질문 4]  사(社)에 관하여, 부자(夫子) 부자(夫子) 
󰡔익증󰡕 설부(說郛)가 말하기를 성현(聖賢)은 으레 ‘자(子)’라 호칭하는 법인데 공자(孔子)께서는 일찍이 대부(大夫)로 있으신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弟子)들이 관직 이름을 이어 [공자를 夫子라 부름으로써] 존칭(尊稱)한 것이다. (󰡔翼增󰡕 說郛曰 聖賢例稱子 而孔子嘗爲大夫 故弟子連官尊稱也)
께서는 일찍이 재아(宰我)에게 “[옛 사람들은] 귀와 신이라는 존귀한 이름을 붙이고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뒤의 존재에 관한] 원칙을 지니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삼가 그것을 받아들여 모두 그것을 따랐던 것이다.(明命鬼神, 以爲黔首則, 百姓以畏, 萬民以服’) 명명...이복(明命...以服 
󰡔차의󰡕 이는 곧 『예기(禮記)』「예운(禮運)」편에 나오는 ‘재아문귀신장(宰我問鬼神章)’의 말이다. (󰡔箚疑󰡕 卽禮運宰我問鬼神章語)
󰡔표보󰡕「예운(禮運)」은 마땅히「제의(祭儀)」로 고쳐야 한다. 주(註)에 ‘명명(明命)’은 ‘존명(尊名)’이라는 의미로, 그리고 ‘칙(則)’은 ‘법(法)’과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백성을 위해 법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조상을 섬기게 한 것이다. (󰡔標補󰡕 禮運當作祭儀註 明命猶尊名也 則法也 爲民作法 使亦事其祖禰) [역주] *『예기(禮記)』「제의(祭儀)」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죽으나 죽으면 또한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 그와 같이 죽은 인간 그것을 鬼라 한다. 사람이 죽으면 뼈와 살은 땅 속에서 썩어 묻힌 채 野土가 되고 기는 하늘로 떠올라서 영험한 신령의 무리 속에 들어간다. 모든 사람이나 물건이 죽으면 그 精氣가 뭉쳐서 강한 향기를 뿜어,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신령의 신기한 작용인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성왕은 사람이나 물건이 정기를 가리켜 그것이 [사람이나 물건에 갖추어지는] 가장 존귀한 성질임을 가르치고 또한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귀와 신이라는 존귀한 명칭을 붙이고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사람들의 [죽은 뒤의 존재에 관한] 법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삼가 그것을 받아들여 모두 그것을 따랐던 것이다.(衆生必死, 死必歸土, 此之謂鬼. 骨肉斃于下, 陰爲野土. 其氣發揚于上, 爲昭明, 焄蒿悽愴, 此百物之精也, 神之著也. 因物之精, 制爲之極, 明命鬼神以爲黔首則, 百衆以畏, 萬民以服)” [이상옥(李相玉) 역주, 󰡔예기(禮記)󰡕(中), (서울, 明文堂, 2003), 1181-2쪽 및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22권 32-3판, 보경문화사 축쇄 영인본(1986) 󰡔예기(禮記)󰡕, 561-2쪽 참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곧 옛 사람들이 사(社)를 그저 헛되이 설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토지에 합당한 나무를 선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하였으니 [사(社)를 세움으로 인한] 교화는 실로 막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공(哀公)이 재아(宰我)에게 사(社)에 관해 질문했을 때 *『논어(論語)』,「팔일(八佾)」편 제21장에 “애공(哀公)이 재아(宰我)에게 사(社)에 대하여 물으니, 재아(宰我)가 대답하기를 ‘하후씨(夏后氏)는 소나무를 <심어 사주(社主)로> 사용하였고, 은(殷)나라 사람들은 잣나무를 사용하였고, 주(周)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사용하였으니, <밤나무를 사용한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戰栗)을 느끼게 하려고 해서였습니다.’ 하였다. 공자(孔子)께서 이를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내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이라 간하지 않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 탓하지 않는다.’(哀公이 問社於宰我한대 宰我對曰 夏后氏는 以松이요 殷人은 以柏이요 周人은 以栗이니 曰 使民戰栗이니이다 子聞之하시고 曰 成事라 不說하며 遂事라 不諫하며 旣往이라 不咎로라)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 주자는 “재아(宰我)는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이니, 이름은 여(予)이다. 삼대(三代)의 사(社)가 똑같지 않은 것은 옛날 사(社)를 세움에 각각 그 토질에 적당한 나무를 심어 사주(社主)로 삼았기 때문이다. 전율(戰栗)은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재아(宰我)는 또 ‘주(周)나라가 밤나무를 사용한 이유의 뜻이 이와 같다.’고 말하였으니, 아마도 옛날 사(社)에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말을 부회(附會)한 것일 것이다. 수사(遂事)는 일이 비록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형세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재아(宰我)가 대답한 것이 사(社)를 세운 본뜻이 아니었고, 또 당시 임금의 살벌(殺伐)한 마음을 열어 주었으나, 그 말이 이미 입에서 나와 다시 구제할 수 없으므로, 이것을 일일이 말씀하여 깊이 꾸짖으셨으니, 이는 그로 하여금 그 뒤를 삼가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 윤씨(尹氏)가 말하였다. “옛날에는 각각 토질에 적당한 나무로써 그 사(社)에 이름을 붙였을 뿐이요, 나무에서 뜻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재아(宰我)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대답하였기 때문에 부자(夫子)께서 꾸짖으신 것이다.(宰我는 孔子弟子니 名予라 三代之社不同者는 古者立社에 各樹其土之所宜木하여 以爲主也라 戰栗은 恐懼貌라 宰我又言周所以用栗之意如此하니 豈以古者戮人於社라 故로 附會其說與아 遂事는 謂事雖未成이나 而勢不能已者라 孔子以宰我所對非立社之本意요 又啓時君殺伐之心이나 而其言已出하여 不可復救라 故로 歷言此以深責之하시니 欲使謹其後也시니라 ○ 尹氏曰 古者에 各以所宜木名其社하니 非取義於木也어늘 宰我不知而妄對라 故로 夫子責之시니라)”라고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64-5쪽 참고.
, 재아(宰我)는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했으면서도 어찌하여 올바른 말로 애공(哀公)의 심술(心術)을 바로잡아주지 못했을까요? [재아가 한 것이라곤] 이를 계기로 다만 [애공의 옳지 못한 심술을] 길러주고 미리 조장해주기만 했으니 이는 당연히 성인께 죄를 지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인께서는] 반복해서 꾸중의 말씀을 하심으로써 [재아의 잘못을] 깊이 나무라신 것입니다. ‘아전즉극(我戰則克)’이라는 구절에 관하여, 부자(夫子)께서 군대(陣)에 관해 모르실 리 없었지만 영공(靈公)에게 반드시 조두(俎豆)[제기(祭器)]에 대한 일로 말씀하셨고 *『논어(論語)』,「위령공(衛靈公))」제1장 ; [원문]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공자(孔子)에게 진법(陳法)을 묻자, 공자(孔子)께서는 “조두(俎豆)[제기(祭器)]에 대한 일은 일찍이 들었거니와,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못하였다.” 하시고, 다음날 마침내 떠나셨다. (衛靈公이 問陳於孔子한대 孔子對曰 俎豆之事는 則嘗聞之矣어니와 軍旅之事는 未之學也라하시고 明日에 遂行하시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305쪽 참고.
, 진(晉)나라의 역사인 ‘승(乘)이나 초(楚)나라의 역사인 ’‘도올(檮杌)’이나 노(魯)나라의 역사인 ‘춘추(春秋)’에 관해, 맹자(孟子)께서 분명히 들어 알고 계셨을 것이지만 *『맹자(孟子)』,「이루(離婁)」하 제21장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왕자(王者)의 자취가 종식됨에 시(詩)가 없어졌으니, 시(詩)가 없어진 뒤에《춘추(春秋)》가 나왔다. 진(晉)나라의《승(乘)》과 초(楚)나라의《도올(檮杌)》과 노(魯)나라의 《춘추(春秋)》가 똑같은 것이다. 그 일은 제환공(齊桓公)·진문공(晉文公)의 일이요, 그 문체(文體)는 사관(史官)의 문체(文體)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의(義)는 내가 저으기 취했다.’ 하셨다. (孟子曰 王者之跡이 熄而詩亡하니 詩亡然後에 春秋作하니라 晉之乘과 楚之檮杌과 魯之春秋가 一也니라 其事則齊桓晉文이요 其文則史니 孔子曰 其義則丘竊取之矣로라하시니라)”라고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243-4쪽 참고.
 제나라 환공(桓公)이나 진(晉)나라 문공(文公)에 대해서는 대위문(對威文)
󰡔차보󰡕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제나라 환공(桓公)과 진(晋)나라 문공(文公)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흠종(欽宗)의 이름이 ‘환(桓)’이었기 때문에 송(宋)나라 사람들은 ‘환(桓)’자를 피하여 ‘위(威)’자로 대신했다. (󰡔箚補󰡕 謂齊宣王桓文之問也 欽宗名桓 故宋人諱桓爲威)
 전해들은 바 없다고 했습니다.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상 제7장에 “제선왕(齊宣王)이 물었다.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이 일을 얻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대답하셨다. ‘중니(仲尼)의 문도(門徒)들은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의 일을 말한 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후세에 전해진 것이 없어, 신(臣)이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만두지 말고 기어이 말하라 하신다면 왕도(王道)를 말하겠습니다... (齊宣王問曰 齊桓晉文之事를 可得聞乎잇가 孟子對曰 仲尼之徒는 無道桓文之事者라 是以로 後世無傳焉하여 臣未之聞也로니 無以則王乎인저...)”라는 내용이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1쪽 이하 참고.
 무릇 공자와 맹자께서는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당시 임금들을 도(道)에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아(宰我)는 오랫동안 성인(聖人)에게 배웠으면서도 이를 알지 못했으니 증위...지지(曾謂...之知) 
󰡔차의󰡕 여기서 끊어 읽어야 한다. ‘그것을 몰랐다’는 말은 ‘임금을 도에로 이끌어 들이는 의리를 몰랐다’는 말이다. (󰡔箚疑󰡕 句不知之謂不知引君當道之義也)
, 어찌 명교(名敎)에 보탬이 있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유...자야(豈有...者耶) 
󰡔차의󰡕 위 글을 이어 말한 것이다. [재아(宰我)가] 진실로 이를 몰랐다면 어찌 [그를] 명교(名敎)에 보탬이 있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箚疑󰡕 承上文而言 苟不知此 則豈有補於名敎者耶)
 
[선생의 답변 4] 이 단락은 [그대가] 고주(古註) 지의고주(只依古注)
󰡔차의󰡕 고주(古註)에 공안국(孔安國)이 “무릇 나라를 건립하고 사(社)를 세움에 있어서는 각각 그 토지에 합당한 나무로 한다”고 했으며, 정의(正義)에 “하(夏)나라는 안읍(安邑)에 도읍을 정하고 소나무(松)가 그 토질에 합당하다고 여겼으며, 은(殷)나라는 박(亳)에 도읍을 정한 후 잣나무(栢)가 그 토질에 합당하다고 여겼고, 주(周)나라는 풍호(豐鎬)에 도읍을 정한 후 밤나무(栗)가 그 토질에 합당하다고 여겼다”고 하였다. (󰡔箚疑󰡕 古註 孔曰 凡建邦立社 各以其土所宜之木 正義 夏都安邑宜松 殷都亳宜栢 周都豐鎬宜栗)
에 의지하여 [고주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대는] 또 옛 사람이 사(社)에 나무를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귀신이] 그 곳에 깃들어 있는 줄로 알게 하였으니 지소존착(知所存着) 
󰡔차의󰡕 귀신(鬼神)이 이 나무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알았다는 말이다. (󰡔箚疑󰡕 謂知鬼神存着於此木也)
, 사(社)의 신(神)을 맡은 관리가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셨더군요. 그러니 국군(國君)이 이 때문에 사직(社稷)을 그토록 엄(嚴)하게 수호했던 것이지요. 삼환(三桓)이 [이 사(社)]를 멋대로 바꾸면서 삼환천개(三桓擅改)
󰡔차의󰡕 이 아래 내용은 지금의『논어집주(論語集註)』와 같지 않다. (󰡔箚疑󰡕 此下與今論語集注不同)
 노(魯)나라 정부는 이를 맡아 관리할 권리를 잃게 되었고 * 주희집 주 ; ‘개(改)’는  정와(正訛)본에는 ‘정(政)’으로 되어 있다. (改: 正訛改作‘政’.)  
, 이에 애공(哀公)이 사(社)에 관해 [재아에게] 질문했으며, 재아(宰我)는 [애공의] 질문에 ‘백성들로 하여금 두렵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使民戰栗)’라고 대답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설명이 상세히 남아있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는 ‘내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는다(成事不說)’고 탄식하셨으니, [이는 재아가 社에 관해 애공에게]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하신 탄식입니다. 또 [공자께서는] ‘끝난 일이라 간하지 않는다(遂事不諫)’고 탄식하셨는데 이는 [애공이 재아에게 사에 관한 질문을 한 것을] 기회로 삼아 [재아가 애공을] 간하지 못했음을 탄식한 것입니다. 가령 재아(宰我)의 앎이 [그와 같은 내용을] 아는 데는 부족한 수준이었다면 곧 그를 꾸짖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아가] 이를 알고도 [애공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면 이것이야말로 聖人께서 애석하게 여긴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는 또] ‘이미 지나간 일이라 탓하지 않는다(旣往不咎)’라고 탄식하셨는데, 대개 애공의 그 질문에 대해 [재아가 충분히] 말해줄 수 있었는데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실수는] 이미 지나버린 실수인지라 지금 돌이킬 수도 없고 허물할 수도 없다는 것이니 [공자께서 하신 ‘기왕불구(旣往不咎)’라는 이 말은] ‘이제 와서 해줄만한 말이 없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社, 夫子曾語宰我 ‘明命鬼神, 以爲黔首, 則百姓以畏, 萬民以服’, 則知古人立社, 豈虛設哉, 亦以土地所宜之木而使民知戒懼, 其爲敎莫大焉. 然哀公問社宰我, 宰我受學聖人之門, 豈無格言以正其心術? 直以是而長之逢之, 宜得罪於聖人, 故反覆重言而深罪之. 如‘我戰則克’, 夫子非不知陣, 而對靈公必以俎豆 : 晉乘․楚檮杌․魯春秋, 孟子非不知聞, 而對桓文以無傳. 凡此皆引君於當道. 曾謂宰我久學於聖人而不之知, 豈有補於名敎者耶? 
此段只依古註爲是. 又謂古人立木於社, 使民知所存著, 知社之神必有所司, (4-1772)則國君所以守社稷其嚴乎. 三桓擅改而魯之權失所司, 則哀公之問社, 宰我因其問而言 ‘使民戰栗’. 惜乎其說之不詳, 故夫子歎之曰: ‘成事不說’, 謂不爲之詳說也, ‘遂事不諫’, 謂不因事而諫也. 使宰我之知不足以知之, 則無責可矣. 知而言之不盡, 此聖人之所以惜之也. ‘旣往不咎’, 蓋因其問而可以言而不言, 旣往之失, 今則無及矣, 無可咎也, 猶曰‘今無可言矣.’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7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일곱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가 씌어진 정확한 시기를 추정하기는 곤란하지만 대체로 제6서와 마찬가지로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쯤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제7서)가 씌어진 정학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제 6서 뒤에 둔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 쯤에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9쪽 참고.
 군자와 소인,『주역』과 『맹자』를 배경으로 한 성(性)과 명(命)이 등이 언급된다.

[허순지 질문 1] “사시(四時)와 함께하는 군자는 가까운 공(近功)은 없지만 여사...근공(與四...近功) 
󰡔차의󰡕 ‘사시(四時)와 함께하는 것’은 ‘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를 가리키며, ‘가까운 기일 안에 생기는 공로(近功)’는 ‘작은 지혜를 가진 자’를 가리키니, 이는 사람의 노력으로 이룬 결과를 말한다. (󰡔箚疑󰡕 與四時俱 指可大受者也 近功 指小知者人功也)
, 이 때문에 크게 받아들일 수 있어서 ‘작은 지혜’라 할 수는 없다”라는 것은 그가 다만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선생의 답변 1] 한 가지 일을 잘 해내는지의 여부만으로는 군자의 깊은 내막(蘊)을 다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에 [군자의 지혜는] ‘작은 지혜라 할 수는 없다’고 했으며 [군자는] 막중한 천하를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소인은 한 가지 능한 재주만 있으면 [그 재주를] 그릇삼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맡겨서는 아니 될 뿐입니다.
與四時俱者無近功, 所以可大受而不可小知也. 謂他只如此. 
一事之能否不足以盡君子之蘊, 故不可小知. 任天下重而不懼, 故可大受. 小(4-1773)人一才之長亦可器而使, 但不可以任大事耳.

[허순지 질문 2] [주역 설괘전에서는] “도덕(道徳)에 화순(和順)하고 의(義)에 맞게 하며,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성(性)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和順道德而理於義, 窮理盡性以至於命)” 화순...어명(和順...於命) 
󰡔차의󰡕『주역(周易)』「계사(繫辭)」전에 나오는 말이다. (󰡔箚疑󰡕 繫辭語)
󰡔익증󰡕『주역(周易)』「설괘(說卦)」전에 나오는 말이다. (󰡔翼增󰡕 說卦語) [역주] *『주역(周易)』,「설괘(說卦)」전 제1장에 “옛날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을 적에 그윽히 신명(神明)을 도와 시초(蓍草)를 내었고, 하늘에서 셋을 취하고 땅에서 둘을 취하여 수(數)를 의지하고, 음양(陰陽)에 변(變)을 보아 괘(卦)를 세우고, 강유(剛柔)에 발휘하여 효(爻)를 낳으니, 도덕(道德)에 화순(和順)하고 의(義)에 맞게 하며,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성(性)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昔者聖人之作易也에 幽贊於神明而生蓍하고 參天兩地而倚數하고 觀變於陰陽而立卦하고 發揮於剛柔而生爻하니 和順於道德而理於義하며 窮理盡性하여 以至於命하니라)”라고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600-601쪽 참고. 
고 하고, [맹자에서는] “명(命) 아님이 없으나, 그 정명(正命)을 순(順)히 받아야 한다.(莫非命也 順受其正)” *『맹자(孟子)』,「진심(盡心)」상 제2장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명(命) 아님이 없으나, 그 정명(正命)을 순(順)히 받아야 한다. 이러므로 정명(正命)을 아는 자는 위험한 담장 아래에 서지 않는다. 그 도(道)를 다하고 죽는 자는 정명(正命)이요, 질곡(桎梏)으로 죽는 자는 정명(正命)이 아니다.’ (孟子曰 莫非命也나 順受其正이니라 是故로 知命者는 不立乎巖墻之下하나니라 盡其道而死者는 正命也요 盡其道면 則所値之吉凶이 皆莫之致而至者矣라 桎梏死者는 非正命也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74-5쪽 참고. 
고 했으니 이에 군자는 장차 어찌해야 할 것인가? 또한 “본래부터 내게 있어온 것을 닦아 하늘에 있는 것의 명령을 받들 뿐이다(脩其在我者 *『맹자(孟子)』,「진심(盡心)」상 제3장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으니, 이 구함은 얻음에 유익(有益)함이 있으니, 자신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구함에 도(道)가 있고, 얻음에 명(命)이 있으니, 이 구함은 얻음에 유익(有益)함이 없으니, 밖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孟子曰 求則得之하고 舍則失之하나니 是求는 有益於得也니 求在我者也일새니라 求之有道하고 得之有命하니 是求는 無益於得也니 求在外者也일새니라)”라 했는데, 이에 주자는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인(仁)·의(義)·예(禮)·지(智) 등 모든 성(性)에 있는 것을 이른다.(在我者는 謂仁義禮智凡性之所有者라)”라고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75쪽 참고.
以聽其在天者而已矣)”라고 할 뿐입니다. 
[선생의 답변 2] ‘도덕(道徳)에 화순(和順)한다(和順於道德)’는 것은 본원(本源)에 묵묵히 계합함이요, ‘의(義)에 맞게 한다(理於義)’는 것은 변화에 대응함이 마땅함을 얻은 곳입니다. 물건마다 모두 [각자 나름의] 이치를 지니고 있으니 반드시 하나하나 미루어 연구해나가야 합니다. 본성(性)은 이치가 지극한 곳입니다. 이 때문에 [성(性)에 대해서는 진성(盡性)이라 할 때와 같이] ‘다한다(盡)’ 性則...云盡(性則...云盡) 
󰡔차의󰡕 여기서 끊어 읽어야 한다. (󰡔箚疑󰡕 句)
라고 말합니다. 명(命)은 본성이 그로부터 유래한 바의 처소(性之所自來處)입니다. 이런 식으로 미루어 나아가면 저절로 중복되지 않을 것이니 자불중복(自不重復) 
󰡔차의󰡕 ‘도(道)’는 덕(德)이요 의(義)요 리(理)이며 성(性)이고 명(命)이기도 하다. 중복된 듯하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분석하여 위와 같이 논하신 것이다. (󰡔箚疑󰡕 道 德也 義也 理也 性也 命也 似重復 故先生析而論之如上)
 반드시 이전에 [문목에서] 말한 것처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필...소설(不必...所說)  
󰡔차의󰡕 문목(問目)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箚疑󰡕 指問目而言)
 
‘和順道德而理於義, 窮理盡性以至於命’, 莫非命也. 順受其正, 則君子於此將如何哉? 亦曰脩其在我者以聽其在天者而已矣. 
和順於道德, 是黙契本原處 : 理於義, 是應變合宜處. 物物皆有理, 須一一推窮 : 性則是理之極處, 故云盡 : 命則性之所自來處. 以此推之, 自不重複, 不必如前所說.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8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여덟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제8서) 가운데 “그런데 요즈음 들어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자질이] 기뻐할만 한 듯 합니다.(近得一人 似可喜)”라 했는데, 아마도 임택지(林擇之)인 듯하다. 주자가 정해년(丁亥, 1167년, 주자 38세)에 하숙경(何叔京)에게 답한 여덟 번째 편지에 “금년에 여기서 동인(同人)인 임씨(林氏)[이름은 용중(用中), 자는 택지(擇之)]를 얻어 서로 더불어 토론하게 되었습니다.(今年却得一林同人在此 名用中 字擇之 相與討論)”라고 말하고 있다. 문집(文集) 75권「임용중자서(林用中字序)」에 따르면 임택지(林擇之)가 처음 주자를 추종한 것은 건도(乾道) 2년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이다. 따라서 이 편지도 이 해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7쪽 참고.
 주자는 이 편지를 통해 허순지의 맹자(孟子) 관련 학설들이 매우 치밀한 것임을 칭찬하면서도 “너무 지나치게 탐색하고 너무 박잡하게” 되어 “도리어 성현께서 하신 말씀의 본래 의미가 흐려질”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아울러 이정(二程)의 어록(語錄)을 통해 허순지의 병통을 고쳐나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저는] 산간(山間)에서 배우는 자 한 둘과 상종(相從)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훌륭한 자질을 지닌 자를 얻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자질이] 기뻐할만 한 듯 합니다. 또 매우 순후(醇厚)하기까지하여 장차 기대가 됩니다. 재사(齋舍)는 너무 비좁아, 이미 규보(圭甫) 규보(圭甫) 
󰡔차의󰡕 [규보(圭甫)의] 성(姓)은 유(劉)씨이고 이름은 상(瑺)이다. 평보(平甫)의 형이다. (󰡔箚疑󰡕 姓劉 名瑺 平甫之兄)
의 집으로 옮긴 후에 불정암(佛頂菴)에서 [이들 배우는 자들과] 서로 모임을 갖곤 합니다. 저번에 들으니 [그대는] 진제중(陳齊仲)과 함께 정은(凈隱) 정은(凈隱)
󰡔차의󰡕 아마도 절(寺) 이름인 듯하다. (󰡔箚疑󰡕 疑寺名) 
에 계신다고 했습니다만 얼마나 오랜 동안 그와 함께 머무셨는지요? 또 무슨 글을 읽었는지요? 어떻게 공부하는지요? 올해 들어 그와 다시 만났습니까? [그 동안 그대가 진제중(陳齊仲)과 함께] 발명(發明)한 것 소유발명(所有發明) 
󰡔차의󰡕 진제중(陳齊仲)과 함께 경전의 의미를 발명(發明)한 것을 말한다. (󰡔箚疑󰡕 謂與齊仲發明經意者也)
 여러 조목을 [나에게] 보여주심으로서 [나로서는 이 점에 대해] 반복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득반복(得反復) 
󰡔차의󰡕 선생으로 하여금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발명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말이다. (󰡔箚疑󰡕 謂使先生得以往復商量也) [역주] * 왕복(往復) ; (1) 감과 돌아옴, 갔다가 돌아옴. (2) 주고받기, 수수(授受). (3) 순환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719쪽.] * 상량(商量) ; 헤아려 생각함, 상탁(商度).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407쪽.]
 실로 보람 있는 서신왕래였습니다. [그대가] 보여주신 맹자(孟子)와 관련 학설들을 통해 [나는] 그대의 정치한 마음 씀씀이를 자세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만약] 이와 같이 하면 너무 지나치게 탐색하고 너무 박잡하게 이끌어 들이는 것이 되어, 도리어 성현께서 하신 말씀의 본래 의미가 흐려져(汨沒) * 골몰(汨沒) ; (1) 물 속에 잠김, 가라앉음 (2) 세상에 나타나지 못함, 현달하지 못함 (3)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116쪽.]
 분명치 않게 되어버릴 듯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그대의] 글의 단락을 따라가면서 망령되게도 나의 생각으로 그 한두 가지 대강(梗槪) * 경개(梗槪) ; 개요, 대략, 대강.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012쪽]
은 논했습니다. [내가 논한 것을 바탕으로 그대는] 유추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다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정의 어록(語錄) 어록(語錄) 
󰡔익증󰡕『정씨유서(程氏遺書)』를 말한다. (󰡔翼增󰡕 程氏遺書)
 가운데 한 구절은 바로 이 이점에 관해 논하고 있기에, 이제 [그 내용을 그대에게] 베껴 보내니 상세히 음미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정어록을 상세히 음미해보면] 곧 [내가 말한 그대의] 병통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따분한 입장(吝)을 고집하여 [스스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김으로써 [지금까지 내가 그대에게 말해준 그대의 문제점을]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지개야(不之改也) 
󰡔차의󰡕 ‘불가(不可)’의 의미가 여기까지 걸린다. (󰡔箚疑󰡕 不可之意 止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진제중(陳齊仲) 및 서원빙(徐元聘)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서중(書中)  
󰡔차의󰡕 ‘서(書)’는 선생께서 진제중(陳齊仲)과 서원빙(徐元聘)에게 보낸 편지를 말한다. (󰡔箚疑󰡕 書先生所與齊仲元聘書)
서도 각각 조금씩 변론(辨論)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는] 요사이 배우는 자들이 지나치게 높은 것을 추구하는 데서 생겨나는 실수가 무엇인지 하는 것만 주로 분석(理會)했습니다.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山間有一二學者相從, 但其間絶難得好資質者. 近得一人, 似可喜, 亦甚醇厚, 將來亦可望也. 齋舍迫狹, 已遷在圭甫屋後佛頂菴中相聚矣. 向聞與齊仲在凈隱, 不知得多少時? 看何文字? 如何作工夫? 今歲復相聚否? 所有發明, 條示數端, 得反復焉, 亦勝空書往來耳. 所示孟子說備見用意之精, 然愚意竊謂如此反似求索太過, 援引太雜, 使聖賢立言之本意汨沒不明. 已逐段妄以己意略論其一二梗槪矣, 可以類推, 其餘不能一一備論也. 語錄中有一節正論此, 今亦錄去, 可詳味(4-1774)之, 便見病痛處亦非小疾, 不可執吝, 以爲無傷而不之改也. 齊仲․元聘書中各有少辨論, 大抵亦止是理會近時學者過高之失, 可幷取觀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9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아홉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제8서에 이어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제8서) 가운데 “그런데 요즈음 들어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자질이] 기뻐할만 한 듯 합니다.(近得一人 似可喜)”라 했는데, 아마도 임택지(林擇之)인 듯하다. 주자가 정해년(丁亥, 1167년, 주자 38세)에 하숙경(何叔京)에게 답한 여덟 번째 편지에 “금년에 여기서 동인(同人)인 임씨(林氏)[이름은 용중(用中), 자는 택지(擇之)]를 얻어 서로 더불어 토론하게 되었습니다.(今年却得一林同人在此 名用中 字擇之 相與討論)”라고 말하고 있다. 문집(文集) 75권「임용중자서(林用中字序)」에 따르면 임택지(林擇之)가 처음 주자를 추종한 것은 건도(乾道) 2년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이다. 따라서 이 편지도 이 해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7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맹자, 중용에 대한 허순지의 견해에 대해 주자 자신의 의견을 조목별로 제시하고 있다.『맹자』,「양혜왕」상, 제1장을 중심으로 의(義)와 리(利)에 관한 문제,「양혜왕」상, 제6장에 나오는 ‘한 곳에 정해질 것이다(定于一)’라고 할 때의 ‘일(一)’은 ‘통일(統一)’의 의미이지 ‘유일(唯一)’의 의미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양혜왕」상, 제7장을 중심으로 왕도와 패도에 관한 견해 등이 제시되고 있다. 이 밖에도「공손추」하 제7장,「이루」하 제20장,『중용』13장 등의 내용이 논의되고 있다.

[허순지 질문 1] “또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상  제1장에 “맹자(孟子)께서 양혜왕(梁惠王)을 뵈시니, 왕(王)이 말씀하였다. ‘노인(老人)께서 천리(千里)를 멀리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대답하셨다. ‘왕(王)은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孟子見梁惠王하신대 王曰 叟不遠千里而來하시니 亦將有以利吾國乎잇가 孟子對曰 王은 何必曰利잇고 亦有仁義而已矣니이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15쪽 참고.
라고 한 데 대하여
[선생의 답변 1]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利心)을 지닌 채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은 곧 [그 자체가 이미] 인의를 행하는 올바른 정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를 확인하여] 이롭지 않음이 있음을 확인한 연후에 비로소 [결과적인 이익을 산출해낸 어떤 행위가] 인의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리심...조야(以利心...阻也)
󰡔차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利心)을 지닌 채 인의(仁義)를 행하게 되면 비록 이익을 얻더라도 인의(仁義)에 방해가 된다는 말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인의(仁義)는 [결과적으로] 이롭지 않은 적이 없다’는 이 말은 동중서가 말한 ‘그 의(義)를 바르게 지키고 그 이(利)는 도모하지 않는다’는 말보다는 못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箚疑󰡕 謂利心爲仁義 則雖獲利而於仁義則阻也 先生嘗言 仁義未嘗不利之言 不如董子正其義不謀其利之言) [역주] * 󰡔차의󰡕 에서 주자가 ‘인의(仁義)는 [결과적으로] 이롭지 않은 적이 없다(仁義未嘗不利)’고 말했다고 했으나, 이는『맹자집주(孟子集註)』에 인용된 정자(程子)의 말을 요약한 것인 듯하다.『맹자집주(孟子集註)』「양혜왕」상, 제1장의 주자집주에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군자(君子)가 일찍이 이롭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다만 오로지 이(利)로써 마음을 삼으면 해(害)가 있고, 인의(仁義)는 이(利)를 구하지 않아도 일찍이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 때를 당하여 천하(天下) 사람들이 오직 이(利)만을 추구하고 다시 인의(仁義)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께서 인의(仁義)를 말씀하시고 이(利)를 말씀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서 그 폐단을 바로잡으신 것이니, 성현(聖賢)의 마음이시다.’(程子曰 君子未嘗不欲利언마는 但專以利爲心이면 則有害요 惟仁義則不求利而未嘗不利也라 當是之時하여 天下之人이 惟利是求하고 而不復知有仁義라 故로 孟子言仁義而不言利하시니 所以拔本塞源而救其弊시니 此는 聖賢之心也시니라)”라고 나온다. 성백효,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17쪽 참고.

亦將以利吾國乎
以利心爲仁義, 卽非仁義之正, 不待有不利然後仁義阻也

[허순지 질문 2] ‘맹자께서 양(梁)나라 양왕(襄王)을 뵙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상  제6장에 “맹자(孟子)께서 양양왕(梁襄王)을 만나보시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였다. “바라보아도 임금 같지 않고, 그 앞으로 나아가도 두려워할 만한 바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묻기를 ‘천하(天下)가 어디에 정해지겠습니까?’ 하거늘, 내 대답하기를 ‘한 곳에 정해질 것입니다.’ 하였노라. ... ” (孟子見梁襄王하시고 出語人曰 望之不似人君이요 就之而不見所畏焉이러니 卒然問曰 天下惡乎定고하여늘 吾對曰 定于一이라호라. ... )라 하였다. 성백효,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29-30쪽 참고.
’ 운운한 것에 대하여. 
[선생의 답변 2] ‘‘하나(一)에로 정해질 것이다(定于一)’라고 할 때의 ‘하나(一)’는 단지 ‘혼일(混一)’이라 할 때의 ‘一(통일)’[과 동일한 의미]이니 ‘덕은 오직 하나(德惟一)’이라 할 때의 ‘一(유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지나치게 [그대와 같은] 이런 씩의 설명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맹자께서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出而語人)’ 역시 우연히 말한 것이므로 [그대가 말하듯이] ‘천하의 선(善)을 공공연히 드러내어’ 이하에서 운운하신 것과 같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필...지설(不必...之說)
󰡔차의󰡕 허순지(許順之)의 생각에 따르면, 맹자(孟子)는 모든 사람이 [맹자가 본 이 사실을] 알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본 바를] 말해주었는데 이는 [맹자가] 천하의 선을 공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본문에서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箚疑󰡕 順之之意 以爲孟子欲人人聞之 出而語人 是所以公天下之善 故云)

‘孟子見梁襄王, 出語人曰’云云.
‘定于一’只是混一之‘一’, 與‘德惟一’之‘一’不同, 不必過爲此說. 出而語人亦是偶然說及, 不必言‘公天下之善’以下云云之說.

[허순지 질문 3] ‘제선왕(斉宣王)이 물었다. 제환공(斉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의 일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운운.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상 제7장에 “제선왕(齊宣王)이 물었다.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이 일을 얻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대답하셨다. ‘중니(仲尼)의 문도(門徒)들은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의 일을 말한 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후세에 전해진 것이 없어, 신(臣)이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만두지 말고 기어이 말하라 하신다면 왕도(王道)를 말하겠습니다.’ ‘덕(德)이 어떠하면 왕노릇 할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맹자(孟子)께서 ‘백성을 보호하고 왕노릇하면 이것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셨다. ‘과인(寡人)과 같은 자도 백성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 (齊宣王問曰 齊桓晉文之事를 可得聞乎잇가 孟子對曰 仲尼之徒는 無道桓文之事者라 是以로 後世無傳焉하여 臣未之聞也로니 無以則王乎인저 曰 德何如면 則可以王矣리잇고 曰 保民而王이면 莫之能禦也리이다 曰 若寡人者도 可以保民乎哉잇가 曰 可하니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성백효,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1쪽 이하 참고.
 군자의 도(道)는 ‘먼 길을 감에 있어서는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며 높은 곳에 올라감에 있어서는 반드시 낮은 곳부터 시작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의 도는] 미루어 나감에 근본이 있으며 응용해 나감에 순서가 있어서, 처음부터 매우 높거나 행하기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군자의 도를] 추구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일 뿐입니다. [따라서 맹자의 말씀처럼] ‘돌아가 찾는다면 남은 스승 *『맹자(孟子)』,「고자(告子)」하 제2장에 나오는 ‘남은 스승(餘師)’에 대해 주자는 “도(道)는 알기 어렵지 않으니, 만일 돌아가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사이에서 찾는다면 성분(性分)의 안에 온갖 이치가 다 구비되어 있어, 곳에 따라 발현(發見)되어 스승 삼을 만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굳이 이곳에서 머물며 수업(受業)할 것이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言 道不難知하니 若歸而求之事親敬長之間이면 則性分之內에 萬理皆備하여 隨處發見하여 無不可師하니 不必留此而受業也니라)”라고 주석하고 있다. 성백효,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48쪽 참고.
이 있을 것’ *『맹자(孟子)』,「고자(告子)」하 제2장 원문은 다음과 같다. “조교(曹交)가 물었다. ‘사람은 다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그러하다.’ ‘제[교(交)]가 들으니, 문왕(文王)은 <신장(身長)이> 10척(尺)이요, 탕(湯)임금은 9척(尺)이라 하는데 지금 저는 9척(尺) 4촌(寸)이 되지만, 곡식만 먹을 뿐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어찌 이에 상관이 있겠는가. 또한 그것을 할 뿐이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힘이 한 마리 오리새끼를 이길 수 없다고 한다면 힘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요, 이제 백균(百鈞)을 든다고 한다면 힘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확(烏獲)이 들던 짐을 든다면 이 또한 오확(烏獲)이 될 뿐이니, 사람이 어찌 이기지 못함을 걱정하는가. 자기가 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천천히 걸어서 장자(長者)보다 뒤에 감을 ‘공경한다’ 이르고, 빨리 걸어서 장자(長者)보다 앞서 감을 ‘공경하지 않는다’ 이르나니,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어찌 사람들이 능히 할 수 없는 바이겠는가. 자기가 하지 않는 것이니,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弟)일 뿐이다. 그대가 요(堯)임금이 입던 옷을 입으며, 요(堯)임금의 말씀을 외우며, 요(堯)임금의 행실을 행한다면 이 요(堯)임금일 뿐이요, 그대가 걸왕(桀王)이 입던 옷을 입으며, 걸왕(桀王)의 말을 외우며, 걸왕(桀王)의 행실을 행한다면 이 걸왕(桀王)일 뿐이다.” 조교(曹交)가 말하였다. ‘제[교(交)]가 추(鄒)나라 군주를 뵈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기를 원합니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도(道)는 대로(大路)와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구하지 않는 것이 병(病)일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 찾는다면 남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 (曹交問曰 人皆可以爲堯舜이라하니 有諸잇가 孟子曰 然하다 交는 聞 文王은 十尺이요 湯은 九尺이라하니 今交는 九尺四寸以長이로되 食粟而已로니 如何則可니잇고 曰 奚有於是리오 亦爲之而已矣니라 有人於此하니 力不能勝一匹雛면 則爲無力人矣요 今曰擧百鈞이면 則爲有力人矣니 然則擧烏獲之任이면 是亦爲烏獲而已矣니라 夫人은 豈以不勝爲患哉리오 弗爲耳니라 徐行後長者를 謂之弟요 疾行先長者를 謂之不弟니 夫徐行者는 豈人所不能哉리오 所不爲也니 堯舜之道는 孝弟而已矣니라 子服堯之服하며 誦堯之言하며 行堯之行이면 是堯而已矣요 子服桀之服하며 誦桀之言하며 行桀之行이면 是桀而已矣니라 曰 交得見於鄒君이면 可以假館이니 願留而受業於門하노이다 曰 夫道若大路然하니 豈難知哉리오 人病不求耳니 子歸而求之면 有餘師리라) 성백효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46쪽 이하 참고.
이니 어찌 위험한 것을 행하고 요행을 바라 *『중용(中庸)』제14장에 “군자(君子)는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부귀(富貴)에 처해서는 부귀(富貴)대로 행하며, 빈천(貧賤)에 처해서는 빈천(貧賤)대로 행하며, 이적(夷狄)에 처해서는 이적(夷狄)대로 행하며, 환난(患難)에 처해서는 환난(患難)대로 행하니, 군자(君子)는 들어가는 곳마다 스스로 만족하지 않음이 없다.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을 잡아당기지 않고, 자기 몸을 바루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평이함에 처하여 천명(天命)을 기다리고, 소인(小人)은 위험한 것을 행하고 요행을 바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활쏘기는 군자(君子)의 자세와 같음이 있으니, <활을 쏘아> 정곡(正鵠)을 잃으면 자기 몸에 돌이켜 찾는다.’ (君子는 素其位而行이요 不願乎其外니라 素富貴하얀 行乎富貴하며 素貧賤하얀 行乎貧賤하며 素夷狄하얀 行乎夷狄하며 素患難하얀 行乎患難이니 君子는 無入而不自得焉이니라 在上位하여 不陵下하며 在下位하여 不援上이요 正己而不求於人이면 則無怨이니 上不怨天하며 下不尤人이니라 故로 君子는 居易以俟命하고 小人은 行險以僥幸이니라. 子曰 射는 有似乎君子하니 失諸正鵠이어든 反求諸其身이니라.)”라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75-6쪽 참고.
 구구(区区)히 패자(覇者)의 행위를 함으로써 왕도(王道)를 높이는 데 어둡게 되겠습니까? 이 때문에 맹자께서는 특별히 ‘애처롭게 여겨 소를 아끼는(惻怛愛牛)’ [제선왕이 지닌 인의의] 한 단서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상 제7장 참고. 성백효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1쪽 이하 참고.
를 지목하시어 [제선왕의 미처] 드러나지 않은 행실과 자세히 살피지 않은 잘못된 습관이 지닌 문제점을 드러내셨습니다. [맹자께서 이렇게 한 이유는 제(斉) 선왕 스스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내게 이 마음(즉 인의의 마음)이 있음을 일찍이 [내가] 소를 아끼는 데에서 확인하였으니 내 어찌 [이 마음을] 스스로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 마음이] 내 몸에 있음을 반성하여 백성에게까지 [이런 마음이] 미치도록 * 주희집 주 ; ‘급(急)’은 마땅히 ‘급(及)’이 되어야 할 것 같다.(急: 疑當作‘及’.)
 해야 하겠으니 어찌 금수(禽獣)에 미치는 정도에 머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방식은] 바로 ‘납약자유(納約自牖) * 납약자유(納約自牖) ; 상대방이 알기 쉬운 것부터 설명하여 깨닫도록 인도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73쪽]
’식의 논설로써, 명백한 것을 근거로 하여 [의도하는 내용을 상대에게 슬쩍] 던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맹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 선왕은 종신토록 [그 도를] 말미암으면서도 그 도를 알지 못했으니 *『맹자(孟子)』,「진심(盡心)」상, 제5장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행하면서도 밝게 알지 못하며, 익히면서도 살피지 못한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행하면서도 그 도(道)를 모르는 자가 많은 것이다.’(孟子曰 行之而不著焉하며 習矣而不察焉이라 終身由之而不知其道者衆也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77쪽 참고.
 애석하기만 합니다. [맹자와의 대화 중에 제선왕은] 또 ‘내가 마침내 행하고 [스스로에게] 돌이켜 찾았으나 내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상, 제7장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 왕(王)이 기뻐하며 말씀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타인(他人)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내가 헤아린다.’ 하였으니, 부자(夫子)를 두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마침내 행하고 돌이켜 찾았으나 내 마음을 알지 못하였는데, 부자(夫子)께서 말씀해 주시니, 내 마음에 척척(戚戚)함이 있습니다. 이 마음이 왕도(王道)에 부합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 ( ... 王說曰 詩云 他人有心을 予忖度(탁)之라하니 夫子之謂也로소이다 夫我乃行之하고 反而求之하되 不得吾心이러니 夫子言之하시니 於我心에 有戚戚焉하여이다 此心之所以合於王者는 何也잇고... )”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4쪽 참고.
고 했지만 어찌 그가 ‘돌이켜 찾는 것’에 대해 참으로 알았겠습니까? [그는] 그저 맹자의 논설에 대면함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그의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을 없앨 수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했을 뿐인 것입니다. [그가 만약] ‘돌이켜 찾는 것’을 참으로 알았다면 [그의] 밝은 것이 더욱 밝아지고, 성스러움이 더욱 성스러워졌을 텐데 [공부를] 스스로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제 선왕이] ‘내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진...시야(使眞...是也)
󰡔차의󰡕 [그가 만약] ‘돌이켜 찾는 것’을 참으로 알았다면 ‘내 마음을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箚疑󰡕 謂眞知求之 則無不得吾心之理也)
 
[선생의 답변 3]이 단락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곳 과당처(過當處) 
󰡔차의󰡕 “‘돌이켜 찾는 것’을 참으로 알았다면 밝은 것이 더욱 밝아지고, 성스러움이 더욱 성스러워졌을 것”이라는 등의 말을 가리킨다. (󰡔箚疑󰡕 謂眞知求之 則明益明聖益聖等語)
도 있습니다. 
‘齊宣王問曰: 󰡔齊桓晉文之事可得聞乎? 󰡕’云云. 君子之道, 譬如行遠必自邇, 譬如升高必自卑, 推之有本, 用之有序, 初非有甚高難行之事, 但病不求之耳. 歸而求之有餘師, 安在乎行險以僥倖區區於覇者之爲而昧於遵王之道哉? 故孟子特指惻怛愛牛之一端, 以啓其行不著而習不察之病, 欲齊王之知吾有是心, 亦曾於愛牛處見之, 吾安得而自失之耶? 反之吾身, 急於百姓, 何止乎(4-1775)及禽獸而已. 正納約自牖之論, 因其明以投之也. 惜乎齊王終身由之而不知其道, 且曰: ‘夫我乃行之, 反而求之, 不得吾心’, 是亦豈眞知反而求之哉? 第不過見孟子之論而一時消盡鄙吝之心, 故有是云爾. 使眞知求之, 則明益明而聖益聖, 能自已乎? 不得吾心, 無有是也. 
此段甚好, 然語亦有過當處. 

[허순지 질문 4]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묻기를 ‘이웃나라와 사귐에 도(道)가 있습니까?’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하, 제3장에 “제선왕(齊宣王)이 물었다. ‘이웃나라와 사귐에 도(道)가 있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오직 인자(仁者)만이 대국(大國)을 가지고 소국(小國)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탕왕(湯王)이 갈(葛)나라를 섬기시고, 문왕(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기신 것입니다. 오직 지자(智者)만이 소국(小國)을 가지고 대국(大國)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왕(大[太]王)이 훈육(獯鬻)을 섬기시고,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 (齊宣王이 問曰 交隣國이 有道乎잇가 孟子對曰 有하니 惟仁者라야 爲能以大事小하나니 是故로 湯事葛하시고 文王事昆夷하시니이다 惟智者라야 爲能以小事大하나니 故로 大王事獯鬻하시고 句踐事吳하니이다 ... )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48-9쪽 참고.

[선생의 답변 4] 탕(湯)이 갈(葛)을 섬긴 일이『맹자』에 나타나 있으니 * 탕왕(湯王)과 갈족(葛族)과의 관계에 대해서는『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하, 제3장 및 11장 및「등문공(滕文公)」하, 제5장 등 참고.
 그 곡절(曲折)을 상세히 음미해보면 곧 성인(聖人)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齊宣王問曰: ‘交鄰國有道乎? ’
湯事葛之事見於孟子, 詳味其曲折, 則知聖人之心矣. 

[허순지 질문 5] [맹자 말씀하시기를] ‘군자(君子)는 천하를 위하여 그 어버이에게 검박(倹朴)하게 하지 않는다’ *『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하, 제7장에 “ ... 내가 들으니 ‘군자(君子)는 천하를 위하여 그 어버이에게 검박(儉朴)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吾聞之也하니 君子는 不以天下儉其親이라하니라)”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죽은 이를 장송(葬送)하는 예(禮)에 마땅히 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다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천하를 위해서 이 물건을 아껴 내 어버이에게 박(薄)하게 하는 것이다. (送終之禮에 所當得爲而不自盡이면 是는 爲天下愛惜此物하여 而薄於吾親也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123-4쪽 참고.
운운 했는데. 맹자의 이 말씀은 어진 이와 효자(孝子)의 마음을 매우 가깝고도 절실(親切)하게 말한 곳입니다. 그 친친(親親)의 윤리는 참으로 무거운 것으로써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비록 큽니다만, 온 천하 사람들은 [이 친친의 윤리를] 그저 구차스럽게 터득하여 [각자의] 마음에서 사용하는 실정 구득용(苟得用) 
󰡔차의󰡕 ‘구(苟)’는 ‘그저 구차하게 쓸 수 있음(苟可以得用)’을 말한다.(󰡔箚疑󰡕 苟謂苟可以得用也)
󰡔익증󰡕 말하자면 [친친(親親)의 비중이] 비록 크긴 하지만 온 ‘천하(天下)’ 사람들이 [이 친친의 원리를] 구차스럽게 터득하여 쓰는 그런 수준이라면 [인인(仁人) 효자(孝子)의 마음과는 달리 그들의] 마음에는 [이 친친의 원리를] 크다 여기지 않게 되어 반드시 사용하지는 않게 된다는 말이다. (󰡔翼增󰡕 言雖大 至於天下 苟可以得用 則其心不以爲大而必用之也)
이어서 또한 [인인 효자의 마음과는 달리 이 원리를] 그리 크다 여기지 않으며, 따라서 그 어버이에게 검박하게 함으로써 [이 원리를] 사용하지 않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는 어떠하겠습니까. 반드시 온 천하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은 어닙니다. 비필천하(非必天下)
󰡔익증󰡕 [‘군자는 천하의 일을 핑계로 그 어버이에게 검박하게 하지는 않는다(君子不以天下儉其親)’라 할 때의 ‘천하(天下)’는] 반드시 [실질적인] ‘천하(天下)’를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니고, 여기서는 특히 [인인(仁人)과 효자(孝子)의] 그 마음의 지극한 바에까지 미루어나가다 보니 [이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천하(天下)’라는 말로 표현한 것일 뿐임을 말한 것이다. (󰡔翼增󰡕 謂非必指的以天下爲言 此特推至其心之所極 而以天下言之耳)
 그 마음을 끝까지 미루어 나가보면 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선생의 답변 5] 이 설명은 매우 좋습니다. 예전에 나는 이 구절을 “‘이(以)’는 ‘위하다(爲)’와 같은 의미이다. 이유위야(以猶爲也) 
󰡔차의󰡕 ‘이(以)’는 ‘천하의 일이 있다고 해서 - 그것을 핑계로 - 그 어버이에게 검박하게 하지는 않는다(不以天下儉其親)’이라 할 때의 ‘이(以)’를 말한다. ‘위(爲)’는 거성(去聲)이다. (󰡔箚疑󰡕 以 不以天下儉其親之以 爲 去聲)
 [이 구절의 의미는 군자가] 천하를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관곽(棺椁)을 소비하는 것조차 아낌으로써 그 어버이에게 검박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한 적이 있습니다. 차설...구설(此說...舊說) 
󰡔차의󰡕 [선생은] 비록 [허순지의] 이 설명이 매우 좋다고 하셨지만『맹자집주(孟子集註)』에는 여전히 [선생의] 구설(舊說) 그대로이다. (󰡔箚疑󰡕 雖以此說爲甚好 而孟子集註 則終是舊說)
󰡔절보󰡕 [허순지의] 문목(問目)에서 말하고 있는 ‘크게는 천하 운운(大而天下 云云)’한 대목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그런데도] 선생께서는 매우 좋다고 하셨으니 [선생께서 이와 같은 칭찬을 하신 진정한 의미를] 의심해볼만하다. (󰡔節補󰡕 問目所云 大而天下云云 有不可曉 先生以爲甚好 可疑) 
 [그대는] 다시 한번 [나의 생각도 아울러] 참작(參酌)하여 [이 구절을] 어떻게 풀이하는 것이 가장 온당한 것인지 검토해보시고 [그 결과를 나에게도]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君子不以天下儉其親’云云. 此極言仁人孝子之心親切處. 當其親親之重, 雖大而天下, 苟得用心, 亦不以爲大而儉於其親而不用也, 况其餘乎? 非必天下也. 推其心是如此. 
此說甚好. 熹舊說此句 : ‘以猶爲也. 不爲天下惜一棺椁之費而儉於其親也’, 更參酌看如何爲穩, 却示報也.

[허순지 질문 6]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아니하며’ *『중용(中庸)』13장에 “ ... 군자(君子)의 도(道)가 네 가지인데 나는 그 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니,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부모(父母)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신하(臣下)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군주(君主)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형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붕우(朋友)에게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베풂을 능히 하지 못한다. 떳떳한 덕(德)을 행하며, 떳떳한 말을 삼가여, <행(行)에> 부족한 바가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치 못하며, <언(言)이> 유여(有餘)하면 감히 다하지 못하여, 말은 행실을 돌아보며 행실은 말을 돌아 보아야 하니, 군자(君子)가 어찌 조조(慥慥)[독실함]하지 않겠는가. ( ... 君子之道四에 丘未能一焉이로니 所求乎子로 以事父를 未能也하며 所求乎臣으로 以事君을 未能也하며 所求乎弟로 以事兄을 未能也하며 所求乎朋友로 先施之를 未能也로니 庸德之行하며 庸言之謹하여 有所不足이어든 不敢不勉하며 有餘어든 不敢盡하여 言顧行하며 行顧言이니 君子胡不慥慥爾리오)”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74쪽 참고. 
운운한 [『중용(中庸)』의 이 구절은] ‘나에게 비록 남음이 있지만, 그러나 오히려 감히 다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개 도체(道體)는 무궁(無窮)하여, 비록 문왕(文王)조차도 단지 ‘도(道)를 바라보시고도 보지 못한 듯이 여기셨을 뿐’ *『맹자(孟子)』,「이루(離婁)」하, 제20장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우왕(禹王)은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선언(善言)을 좋아하셨다. 탕왕(湯王)은 중도(中道)를 잡으시며, 어진이를 세우되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이 하셨다. 문왕(文王)은 백성을 보기를 다칠 듯이 여기셨으며, 도(道)를 바라보시고도 보지 못한 듯이 여기셨다. 무왕(武王)은 가까운 자를 친압하지 않으셨으며, 먼 자를 잊지 않으셨다. 주공(周公)은 세 왕(王)을 겸하시어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시되,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우러러 생각하여 밤으로써 날을 이어서, 다행히 터득하시면 그대로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셨다.’ (孟子曰 禹는 惡旨酒而好善言이러시다 湯은 執中하시며 立賢無方이러시다 文王은 視民如傷하시며 望道而(如)未之見이러시다 武王은 不泄邇하시며 不忘遠이러시다 周公은 思兼三王하사 以施四事하시되 其有不合者어든 仰而思之하여 夜以繼日하사 幸而得之어시든 坐以待旦이러시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241-3쪽 참고. 
이었던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 6] [중용 13장에 나오는]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못한다’는 이 말은 그저 ‘지나가던 사람이 굽어보고 나아가는(俯而就之)’ 부이취지(俯而就之) 
󰡔차의󰡕『중용장구(中庸章句)』와는 같지 않다. (󰡔箚疑󰡕 與中庸章句不同)  [역주] *『중용장구(中庸章句)』제 13장에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구(求)는 책(責)[바람]과 같다.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니, 무릇 자기가 남에게 바라는 것은 모두 도(道)의 당연(當然)함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돌이켜 자책(自責)하여 스스로 닦는 것이다. 용(庸)은 평상(平常)함이다. 행(行)은 그 실행을 밟는 것이요, 근(謹)은 그 가(可)함을 택하는 것이다. 덕행(德行)은 부족(不足)한데 힘쓴다면 행(行)이 더욱 힘써질 것이요, 말은 유여(有餘)한데 참는다면 삼감이 더욱 지극할 것이니, 삼가기를 지극히 하면 말이 행(行)을 돌아보게 될 것이요, 행(行)을 힘쓰면 행(行)이 말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조조(慥慥)는 독실(篤實)한 모양이다. ‘군자(君子)의 언행(言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조조(慥慥)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했으니, 찬미(贊美)한 것이다. 이는 모두 사람을 멀리 하지 않고 도(道)를 하는 일이니, 장자(張子)가 이른바 ‘남에게 바라는 마음으로써 자기을 책하면 도(道)를 다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求는 猶責也라 道不遠人하니 凡己之所以責人者는 皆道之所當然也라 故로 反之以自責而自修焉이라 庸은 平常也라 行者는 踐其實이요 謹者는 擇其可라 德不足而勉이면 則行益力이요 言有餘而訒이면 則謹益至니 謹之至則言顧行矣요 行之力則行顧言矣라 慥慥는 篤實貌니 言 君子之言行如此하니 豈不慥慥乎리오하니 贊美之也라 凡此皆不遠人以爲道之事니 張子所謂以責人之心責己則盡道가 是也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74-5쪽 참고. 
 정도의 의미인 듯하다. * 즉 이 말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고, 의미 내용을 담은 문장을 직접 말하기 전에 가볍게 이 말을 던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그 말 아래 ‘말은 행실을 돌아보며 행실은 말을 돌아보아야 하니, 군자(君子)가 어찌 조조(慥慥)[독실함]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뒷 구절을 통해 앞 구절에서 말하려 한] 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有餘不敢盡’云云. 在我雖有餘, 然猶不敢以爲盡, 謂只如此了. 蓋道體無窮, 雖文王亦只得云‘望道而未之見’耳. 
‘有餘不敢盡’, 似止是過者俯而就之之意. 故下文云 ‘言顧行, 行顧言, 君子(4-1776)胡不慥慥爾’, 其文意可見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0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0서)는 제7서에 이어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제10서) 가운데 “석장(石丈)의 편지에서 나를 ‘부자(夫子)’라고 호칭하였습니다.(石丈惠書 以夫子見謂)”라 하고, 또 “제가 [석장과는] 처음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여서 분분하게 이런 문제까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라건대, [그대는 석장에게] 한 말씀 해 주시어 이 뒤로 [석장이 내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이 두 글자는 빼도록 해주십시오.(熹初通書 不欲紛紜及此 幸爲一言 繼此惠音削去二字)”라고 말하고 있다. 대개 주자가 석자중(石子重)과 처음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석자중이 주자를 부자(夫子)라고 호칭함에 따라 주자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이 편지(제10서)를 통해 사양의 뜻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자가 석자중과 처음으로 왕래하기 시작한 것은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이다. [이 사실은 갑신년에 주자가 가국재(柯國材)에게 보낸 편지, 즉 답가국재(答柯國材) 제2-4서에 보인다.] 이 당시 가국재(柯國材)는 허순지(許順之)와 함께 동안(同安)에 있다가, 을유년(乙酉, 1165년, 주자 36세)에 우계(尤溪)로 뽑혀 가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편지 역시 마땅히 갑신년(甲申, 1164년, 주자 35세)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0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석자중(石子重)이 자신을 부자(夫子)라 부르는 것과 관련하여 이 용어의 역사적 유래를 밝힌 뒤 이후 석자중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이 두 글자를 사용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주자 자신의 뜻을 허순지가 대신 석자중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석장(石丈)의 편지 석장혜서(石丈惠書)
󰡔차보󰡕 석자중(石子重) 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에 있는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稱謂不改)’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箚補󰡕 石子重第五書有稱謂不改之語卽此)
에서 나를 ‘부자(夫子)’ 이부자(以夫子)  
󰡔기의󰡕 ‘부자(夫子)’라는 말로 선생을 호칭했다는 말이다. (󰡔記疑󰡕 以夫子見稱於先生)
󰡔차의󰡕 살피건대 [󰡔기의󰡕에서] ‘견(見)’과 ‘어(於)’라는 이 두 글자는 연문(衍文)인 듯하다. (󰡔箚疑󰡕 按見於二字似衍) [역주] * 즉 󰡔기의󰡕의 ‘이부자견칭어선생(以夫子見稱於先生)’을 ‘이부자칭선생(以夫子稱先生)’이라 써야 한다는 말이다.
󰡔차보󰡕 ‘부(夫)’는 남자의 미칭(美稱)이다. (󰡔箚補󰡕 夫者男子之美稱)
라고 호칭하였습니다만 이 두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옛날 사람들이 쓸 때는 본래 존칭이 아니었습니다. 전유(顓臾)를 치려는 계씨(季氏) 전유(顓臾)를 …… 불렀으니 : 『논어(論語)』,「계씨(季氏)」편과「자장(子張)」편에 보인다.
와 중니(仲尼)를 헐뜯는 숙손(叔孫) *『논어(論語)』,「자장(子張)」제23장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조정에서 대부(大夫)들에게 말하기를 ‘자공(子貢)이 중니(仲尼)보다 낫다.’ 하였다.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이 말을 자공(子貢)에게 일러주자, 자공(子貢)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궐의 담장에 비유하면 나[사(賜)]의 담장은 어깨에 미친다. 그래서 집안의 좋은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거니와, 부자(夫子)의 담장은 여러 길이 된다. 그래서 그 문을 얻어 들어 가지 못하면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많음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문을 얻는 자가 드물다. 부자(夫子)[숙손(叔孫)]의 말씀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叔孫武叔이 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하니라 子服景伯이 以告子貢한대 子貢曰 譬之宮牆컨댄 賜之牆也는 及肩이라 窺見室家之好어니와 夫子之牆은 數칅이라 不得其門而入이면 不見宗廟之美와 百官之富니 得其門者或寡矣니 夫子之云이 不亦宜乎아) 밑줄친 夫子는 숙손무숙을 가리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381-2쪽 참고.
을 모두 ‘부자(夫子)’라고 불렀으니, ‘부부(夫夫)’와 ‘지인(之人)’ ‘부부(夫夫)’ ‘지인(之人)’
󰡔기의󰡕 ‘부부(夫夫)’란 말이『좌전(左傳)』에 나온다고 말한 사람이 있지만 살펴보지 못했다. ‘지인(之人)’은『장자(莊子)』에 나온다. (󰡔記疑󰡕 夫夫 或云出左傳 未考 之人 出莊子)
󰡔차의󰡕 『예기(禮記)』,「단궁(檀弓)」을 보면 [부부(夫夫)라는 말에서] 앞의 ‘부(夫)’자는 어조사이고 뒤의 ‘부(夫)’자는 장부(丈夫)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箚疑󰡕 按見檀弓 上夫字語辭 下夫字丈夫也)
󰡔익증󰡕 ‘지인(之人)’에 관해서는『장자(莊子)』에 “이 사람은 장차 만물을 혼합하여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고  그 주(註)에 ‘[지인(之人)은] 이 사람(是人)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翼增󰡕 之人 莊子曰 之人也 將旁礴萬物 註猶是人也) [역주] * 안동림(安東林) 역주, 󰡔장자(莊子)󰡕 내편(內篇), 소요유(逍遙遊), (서울, 玄岩社, 1980), 51쪽 참고.
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종류일 뿐입니다. 그러나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중니를 부를 때 이 호칭을 썼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종종 그 호칭을 피한 것이니, 감히 사람들로 하여금 이 호칭을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이 호칭을 남에게 사용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석장과는] 처음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여서 분분하게 이런 문제까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라건대, [그대는 석장에게] 한 말씀 해 주시어 행위일언(幸爲一言)
󰡔기의󰡕 허순지(許順之)가 석장(石丈)에게 말하도록 시키신 것이다. (󰡔記疑󰡕 令順之言於石丈)
 이 뒤로 [석장이 내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이 두 글자는 빼도록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감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니, [이러한 나의 입장을 석장에게] 간곡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이미 도(道)로써 서로를 인정하고 있으니 무릇 지나친 예문(禮文)에 대해서는 아마도 과감하게 빼버려야만 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도 [그대가 석장에게] 함께 말씀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石丈惠書, 以‘夫子’見謂. 詳此二字, 古人用之本非尊稱, 如伐顓臾之季氏, 毁仲尼之叔孫, 皆得以稱, 蓋猶曰 ‘夫夫’ ․ ‘之人’ 之比耳. 然以孔門弟子稱仲尼以此, 故後之人往往避其號. 蓋不惟不敢使人以是加諸己, 亦不敢以是加諸人也. 熹初通書, 不欲紛紜及此. 幸爲一言, 繼此惠音削去二字, 乃所願望, 不然不敢拜而受也. 告爲深陳之, 至懇至懇. 且旣以道相知, 凡百禮文之過其宜者, 恐亦有可刊落者, 得幷及之, 幸甚幸甚!





(4-1777)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1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 한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1서)는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가을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제11서)는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가을에 씌어진 것이니, 답하숙경(答何叔京) 제2서와 동일한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6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범백숭(范伯崇)과 만나 수십 일 강론(講論)한 일, 장남헌(張南軒)과의 만남을 위한 호남(湖南)에로의 여행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일종의 도학시(道学詩)라 할 수 있는 시 한 수를 써 보이고 있다. 

저는 곤궁하고 비루한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범백숭(范伯崇)이 이 곳에 왔기에 서로들 모여 수십 일을 강론(講論)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조금은 [진리에] 계합(契合)되는 바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뒤로 저는 거의 강론을 끊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가을이 되면서 모친 노인(老人) 
󰡔간보󰡕 석인(碩人)을 감축(感祝)해서 하는 말이다. (󰡔刊補󰡕 祝碩人也) [역주] * 석인(碩人) ; (1) 덕이 높은 사람, 대인, 군자. (2) 은사(隱士). (3) 미인(美人).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459쪽.] 여기서는 선생의 모친을 높여 부른 호칭인 듯하다.) 
이 조금 건강해져 마음이 한가롭고 심한(心間)
󰡔기의󰡕 ‘한(間)’의 음(音)은 ‘한’이다. (󰡔記疑󰡕 間音閑)
󰡔익증󰡕 한유의 글에 ‘마음이 한가하여 아무 일이 없으니 밖으로부터 근심도 들지 않는구나’라는 말이 나온다. (󰡔翼增󰡕 韓文有心閑無事外患不入之語)
 일이 없어 한결같은 생각으로 직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니 옛날에 비해 점차 [문제를 보는 안목이 더욱] 명쾌해져서 바야흐로 [참된] 공부에 착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일전에는 애꾸눈 일목(一目)  
󰡔간보󰡕 선생 자신을 말한다. (󰡔刊補󰡕 先生自謂)
격인 제가 장님 중맹(衆盲)  
󰡔기의󰡕 여러 제자(弟子)를 가리킨다. (󰡔記疑󰡕 指群弟子)
격인 여러 제자들을 인도해 주는 정도였을 뿐이었습니다. * 주희집 주 ; ‘일맹(一盲)’은 원래 ‘일목(一目)’으로 되어 있었으나, 송(宋)나라 절(浙)본과 명(明)나라 만력(萬曆)본에 의거하여 [‘일맹(一盲)’으로] 고친다.(一盲: 原作‘一目’, 據宋浙本․明萬曆本改.)
 그 내용이 석장(石丈)에게 보낸 편지에 있으니 기설재...서중(其說在...書中) 
󰡔기의󰡕 가을이 오자 [선생께서] 체험해 얻은 바에 있어 흡족하게 공부하신 것에 관한 내용을 말한다. (󰡔記疑󰡕 秋來體驗所得快下工夫之說)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이 편지를] 한 번 가져다가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위여하(爲如何)
󰡔차의󰡕 [그대는] ‘나의 설을 어떻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말이다. (󰡔箚疑󰡕 謂以吾說爲如何也)
 [보시고는 꼭] 한 말씀 해주십시오. 각일어야(却一語也)
󰡔차의󰡕 허순지(許順之)가 한 마디 해서 [선생께] 보여주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箚疑󰡕 謂欲順之爲一語以示之也)
 시 한 수 적습니다.

반 이랑 되는 네모진 웅덩이 거울처럼 열리니 半畝方塘一鑑開
하늘 빛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네        天光雲影共徘徊
묻노니 어찌하여 저리도 맑은가 問渠那得清如許
원줄기에 솟아나는 살아있는 물이 있어서라네 반무...활수래(半畝...活水來) 
󰡔간보󰡕 퇴계(退溪)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반묘 운운(半畝云云)’한 것은 마음의 온전한 바탕(全體)이 담연(湛然)한 기상을 말한 것이다. ‘천광 운운(天光云云)’한 것은 [마음의 온전한 바탕은] 고요하면서도 감응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이 [이 마음에] 다가오면 반드시 다 비추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문거 운운(問渠云云)’한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허명(虛明)한 체단(體段)이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위유 운운(爲有云云)’한 것은 천명(天命)이 본래 그러함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刊補󰡕 溪訓 半畝云云 言心之全體湛然底氣象 天光云云 言寂而能感物來畢照之意 問渠云云 言何由而有此虛明體段 爲有云云 明天命之本然)
    為有源頭活水来

이 시를 석장 거사석장(擧似石丈)
󰡔기의󰡕 ‘사(似)’는 ‘...을 향해(向)’라는 말이다. 이 시를 석장(石丈)에게도 보여주라는 말이다. (󰡔記疑󰡕 似向也 言擧此詩向石丈也)
󰡔차의󰡕 살피건대 ‘사(似)’는 ‘...에(於)’와 같은 의미이다. (󰡔箚疑󰡕 按似於也)
에게도 보여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호남(湖南)에로의 여행 호남지행(湖南之行) 
󰡔차의󰡕 아마도 이것은 [선생께서] 장남헌(張南軒)을 방문하실 때의 일인 듯하다. 생각건대 이 해 여름은 더위로 인해 [호남으로의 여행을] 그만두고 8월이 되어 떠난 것이다. (󰡔箚疑󰡕 疑此是訪南軒時事也 意是年夏以熱輟行 至八月而乃行)
에 대해, 그만 두라 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 이유는 다 달랐습니다만 오직 그대(吾友)의 말씀이 온당합니다. 그러나 또한 미진한 곳도 있습니다. 유미진처(有未盡處)
󰡔차의󰡕 [호남으로의 여행을] 하는 것이 옳은지 그만 두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한 허순지의 말이 미진하다는 말이다. (󰡔箚疑󰡕 謂其言於行止之義未盡也)
 후에 유사(劉帥) 류수(劉帥)
󰡔관보󰡕 ‘유(劉)’는 공보(共父)이다. 공보(共父)는 건도 원년(乾道1년, 1165년, 주자 36세)에 형호남로안무사(荊湖南路安撫使)에 제수되었고 건도 3년(1167년 주자 38세)에 소환(召還)되었다. 선생께서 장남헌(張南軒)을 방문한 것은 건도 3년 정해(丁亥)년이었다. 호남(湖南)으로의 여행이 곧 남헌(南軒)을 방문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管補󰡕 劉是共父 共父以乾道年除荊湖南路安撫使 三年召還 先生之訪南軒 實在三年丁亥上 湖南之行卽訪南軒無疑)
께서 보낸 사람이 [이 곳에] 도착했을 때 유도인(遺到人) 
󰡔차의󰡕 [유공보(劉共父)가] 선생을 맞이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 [선생의 처소로] 왔다는 말이다. (󰡔箚疑󰡕 謂遣邀先生人來到也) 
는 너무 더워서 드디어 [호남으로의 여행을] 그만두었습니다만 요컨대 [나 또한 이 호남에로의 여행을] ‘극도로 의욕하여 기필코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삭성(不索性) 
󰡔차의󰡕 그 당시 더위 때문에 부득이 [호남(湖南)으로의] 여행을 그만두기로 하였다는 뜻이니, ‘가고 머무는 것을 극진히 다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箚疑󰡕 謂以時熱不得已輟行 非行止極盡之義)
󰡔절보󰡕 더위 때문에 [호남(湖南)으로의 여행 계획을] 잠시 중단한 것이지 영원히 중단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節補󰡕 謂以熱而姑停 非永停也)
󰡔익증󰡕 매우 긴급(緊急)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翼增󰡕 不甚緊急之意)
󰡔표보󰡕 ‘삭성(索性)’은 ‘극도로 의욕하여 기필코 하고자 함’을 말한다. 선생의 본심은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는 말이다. 즉 호남(湖南)에로의 여행을 그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 마음에도 또 일찌기 [이 여행을] ‘극도로 의욕하여 기필코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드디어 [호남으로의 여행을] 중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標補󰡕 索性 極意必欲之謂 先生之意 似謂湖南之行 非但人之勸止者多 吾心亦未嘗極意必欲 故以時熱而遂輟行也) [역주] * 삭성(索性 ; 속어로 ‘차라리’라는 뜻임.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79쪽.] 

此間窮陋, 夏秋間伯崇來, 相聚得數十日, 講論稍有所契. 自其去, 此間幾絶講矣. 幸秋來老人粗健, 心間無事, 得一意體驗, 比之舊日漸覺明快, 方有下工夫處. 日前眞是一盲引衆盲耳. 其說在石丈書中, 更不縷縷. 試取觀之爲如何, 却一語也. 更有一絶云: ‘半畝方塘 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試擧似石丈, 如何? 湖南之行, 勸止者多, 然其說不一. 獨吾友之言爲當, 然亦有未盡處. 後來劉帥遣到人時已熱, 遂輟行. 要之亦是不索性也.





(4-1778)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2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 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2서)는 정해년(丁亥, 1167년, 주자 38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답허순지 제12서)는 정해년(丁亥, 1167년, 주자 38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답허순지 제12서)에 “‘경(敬)자는 활동적(活動的)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라는 논의를 그대가 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대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것은] 그대(허순지)가 [선의 영향을 받아] ‘경’공부를 활동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해왔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경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도리어 ‘경’자의 본래 뜻과는 관계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직 경하기 때문에 활동적인 것이니, 경하지 않으면 곧 활동적이지 못합니다.(聞有‘敬字不活’之論 莫是順之敬得來不活否? 却不干‘敬’字事 惟敬故活 不敬便不活矣)”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음에 나오는 답허순지 제13서에도 “저번에 논한 바 ‘경(敬)자는 활동적인 것이 아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요사이 또 ['경'이라는] 이 글자의 긴요하면서도 절실한 곳(緊切處)을 보게 되었습니다만...,(向所論‘敬字不活’者如何? 近日又見此字緊切處)”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12서와 13서 이 두 편지는 서로 이어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제13서 첫 부분에 “올 해 임택지(林擇之)가 여기에 있는 동안 나에게는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今歲却得擇之在此 大有所益)”라고 했는데, 이는 답하숙경(答何叔京) 제8서에서 “금년에 여기서 동인(同人)인 임씨(林氏)를 얻어 서로 더불어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조행(操行)이 매우 신중하고 사색하는 것은 더욱 정밀하여, 저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크게 유익한 바가 있습니다.(今年却得一林同人在此 名用中 字擇之 相與討論 其人操履甚謹 思索愈精 大有所益)”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답하숙경(答何叔京) 제8서는 정해년(丁亥, 1167년, 주자 38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이 편지 역시 같은 해에 씌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1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대학 전8장에 나오는 ‘지소비언(之所譬焉)’이라는 구절에 대해, ‘자기에게 돌이켜 구(求)해본다’는 뜻으로 해석한 석장(石丈)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경문(経文) 자체의 문맥에 충실한 해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경재기(敬斎記)』에 관한 허순지의 견해가 ‘지극히 적절하고도 타당함’을 인정하며, 야기(夜気)설에 관한 허순지의 해설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시한다. 다만 ‘경(敬)자는 활동적(活動的)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라고 보는 허순지의 입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한다.

편지의 말씀이 모두 타당하기는 합니다만 은근한 뒷맛(餘味)이 없는 것이 아쉽군요. 평이하고 착실한 곳에 나아가 자세하게 완미하여 모름지기 무미(無味)한 가운데에서 참된 맛이 있음을 알아야 뒷맛이 주는 독특한 맛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 전8장에 나오는] ‘지소비언(之所譬焉)’ 지소비언(之所譬焉)[ 譬가 현행 판본에는 辟로 되어 있다.]
󰡔차의󰡕『대학(大學)』, 전(傳) 8장에 나오는 말이다. (󰡔箚疑󰡕 大學傳八章語) [역주] * 비(譬)가 현행『대학(大學)』판본에는 ‘비(辟)’로 되어 있다. *『대학(大學)』전(傳) 8장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른바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함이 몸을 닦음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친애(親愛)하는 바에 편벽되며,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바에 편벽되며,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바에 편벽되며, 가엽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바에 편벽되며, 거만하고 태만히 하는 바에 편벽된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의 나쁨을 알며, 미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움을 아는 자가 천하에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러한 말이 있으니, ‘사람들이 그 자식의 악(惡)함을 알지 못하며, 그 묘(苗)의 큼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것을 일러 ‘몸이 닦아지지 않으면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所謂齊其家 在修其身者는 人이 之其所親愛而辟焉하며 之其所賤惡而辟焉하며 之其所畏敬而辟焉하며 之其所哀矜而辟焉하며 之其所敖惰而辟焉하나니 故로 好而知其惡하며 惡而知其美者 天下에 鮮矣니라 故로 諺有之하니 曰 人莫知其子之惡하며 莫知其苗之碩이라하니라 此謂身不修면 不可以齊其家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38쪽 참고.
󰡔익증󰡕 석장(石丈)의 해석은 곧 정현(鄭玄) 주(注)의 뜻이다. 정현(鄭玄)의 소(疏)에 그와 같은 해석이 갖추어져 있다. 선생은 이 당시 [『대학(大學)』전(傳) 8장에 대한] 이론이 아직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던 듯하다. (󰡔翼增󰡕 石丈所解 卽鄭注之義 彼疏具有其解 先生此時其論亦未定也)
이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석장(石丈)이 해설한 바와 같이 ‘자기에게 돌이켜 구(求)해본다’는 뜻으로 보더라도 또한 긴요하고도 절실하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경문(經文)이 가리키고 있는 의미는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은 듯합니다. 수신(修身) 등의 일은 앞 장(前章 즉 傳 7장)에서 이미 말했으니, 이 장(傳 8장)은 바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중간에 해당하는 일을 리회(理會) * 리회(理會) ; 깨달아 앎. 이해(理解).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329쪽.]
한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야불여차(若不如此) 
󰡔차의󰡕 ‘여차(如此)’는 ‘비(譬)’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箚疑󰡕 如此指譬字而言)
 곧 사랑․미움․줌․빼앗음(愛․憎․予․奪)이 모두 제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비(譬)’자는 단지 ‘헤아리고 재어 미리 의론해본다(度量擬議)’는 뜻일 뿐이니 ‘의로움으로서 밖을 방정하게 하는 일(義以方外之事)’입니다. 그러나 의(義)는 애당초부터 밖에 있는 것이 아닌 법인데 비자...외야(譬字...外也)
󰡔차의󰡕 이는『대학장구(大學章句)』의 설명과는 같지 않다. (󰡔箚疑󰡕 此與章句說不同)
󰡔차보󰡕 [이 구절을] 33권「여동래에게 답하는 글(答東萊書)」과 함께 참고해보면 선생께서 말씀하신 전후 맥락의 자세한 내용에 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箚補󰡕 與三十三卷答東萊書參看可見先生立言本末)
 [그렇다면 ‘의내(義內)’의 원칙과 ‘의이방외(義以方外)’의 경우 안 뿐만 아니라 반드시 ‘밖’을 고려해야만 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書中所諭, 皆的當之論, 所恨無餘味耳. 更向平易著實處子細玩索, 須於無味中得味, 乃知有餘味之味耳. ‘之所譬焉’ 如石丈所說反求諸身, 亦是要切 : 但經文指意恐不必如此. 脩身等事前章已說了, 此章正是理會脩身齊家中間事. 若不如此, 卽愛憎予奪皆不得其所矣. ‘譬’字只是度量擬議之意, 義以方外之事, 然義初不在外也. 如何如何?

『경재기(敬斎記)』 경재기(敬齋記)
󰡔기의󰡕 누가 지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記疑󰡕 未知誰作) 
󰡔차의󰡕 살피건대 장남헌(張南軒)이 최자림(崔子霖)을 위해 지은 것인데, [선생께서] 아마도 우연히 아직 보지 못하셨던 듯하다. (󰡔箚疑󰡕 按南軒爲崔子霖作者 豈偶未之見耶)
󰡔간보󰡕 장남헌(張南軒)과 육상산(陸象山)이 모두 나름의「경재기(敬齋記)」를 지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누구의「경재기(敬齋記)」를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다. (󰡔刊補󰡕 南軒象山 皆有是記 此未知何指)
는 논의는 지극히 적절하고도 타당합니다. 근래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이치의] 안팎을 비교적 환하게 볼 수 있어서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간득무의(看得無疑)
󰡔차의󰡕 선생께서 스스로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箚疑󰡕 謂先生自得無疑也)
󰡔절보󰡕 이 도리(道理)의 표리(表裏)를 본 것이 통철(洞徹)하여 아무런 의심이나 장애가 없다는 말이다. (󰡔節補󰡕 謂看得此道理表裏洞徹無疑碍也)
 이 이치는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것인데, [이 이치를 제대로] 알면 비록 [그것이] 백․천․만․억 백천만억(百千萬億)
󰡔기의󰡕 ‘만수(萬殊)’를 가리킨다. (󰡔記疑󰡕 指萬殊)
이 된다 하더라도 많은 것이 아니며 불위다(不爲多)  
󰡔절보󰡕 ‘하나의 이치’로 관통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이 아닌 것이다. (󰡔節補󰡕 貫於一 故不爲多)
, 소리와 냄새가 없다 무성무취(無聲無臭) 
󰡔익증󰡕 ‘하나의 근본(一本)’을 가리킨다. (󰡔翼增󰡕 指一本)  
고 하여 적은 것이 아닙니다. 불위소(不爲少) 
󰡔절보󰡕 육합(六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적은 것이 아니다. (󰡔節補󰡕 彌六合故不爲少) [역주] * 육합(六合) ; (1) 천지와 사방 (2) 천하, 우주, 세계.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59쪽.]
 그러나 만약 [이 이치가 바로 그대가] 의심한 대로라면 삼강(三綱)과 오상(五常)도 모두 편안하게 있을 곳 돈처(頓處) 
󰡔익증󰡕 안돈(安頓)할 곳을 말한다. (󰡔翼增󰡕 安頓處) [역주] * 안돈(安頓) ; (1) 사물을 잘 정돈함 (2) 安心.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570쪽.]
이 없고, 구경(九経)과 삼사(三史) 구경삼사(九經三史) 
󰡔기의󰡕 구경(九經)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삼사(三史)는 󰡔운부군옥(韻府群玉)󰡕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그리고 󰡔전한서(前漢書)󰡕와 󰡔후한서(後漢書)󰡕이다. (󰡔記疑󰡕 九經未詳 三史 韻府群玉 馬遷史 前後漢書)  
󰡔차의󰡕 살피건대 구경(九經)은 곧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의례(儀禮)󰡕, 󰡔주례(周禮)󰡕,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말한다. (󰡔箚疑󰡕 按九經 卽詩書易春秋禮記儀禮周禮論語孝經)
󰡔익증󰡕『당서(唐書)』「선거지(選擧志)」에는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좌씨춘추(左氏春秋)󰡕, 󰡔공양춘추(公羊春秋)󰡕, 󰡔곡량춘추(谷梁春秋)󰡕을 [구경(九經)으로] 본다. ‘삼사(三史)’는 일설에 󰡔춘추(春秋)󰡕의 삼전(三傳)을 가리킨다고 한다. (󰡔翼增󰡕 唐書先擧志 易詩書儀禮周禮禮記左氏春秋公羊春秋穀梁春秋 三史一說春秋三傳)
도 모두 군더더기 말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대(허순지)가 지금까지 [몸담아 편안히 여겼던 그대만의 잘못된] ‘보금자리’ 과구(窠臼) 
󰡔익증󰡕 새들이 보금자리 만들어 둥지를 튼 것(窠鳥巢臼)을 말한다. 옛날에 땅을 파서 이것을 만들었으니 모두 가리고 숨겨 은밀하게 감추어 두는 곳이다. 이는 허순지(許順之)가 선(禪)을 배운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翼增󰡕 窠鳥巢臼 古者穴地爲之 皆掩匿隱藏之處 指順之學禪而言) [역주] * 과구(窠臼) ; (1) 구멍 (2) 보금자리. 전(轉)하여 일정한 형식, 상투.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12쪽.]
인 셈인데,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대가 잘못된 그대의 이 보금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대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스스로를 옳다고 여김으로써 저지르게 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敬齋記所諭極切當, 近方表裏看得無疑. 此理要人識得, 識得卽雖百千萬億不爲多, 無聲無臭不爲少. 若如所疑, 卽三綱五常都無頓處, 九經三史皆爲剩語矣. 此正是順之從來一箇窠臼, 何故至今出脫不得? 豈自以爲是之過耶? 

‘경(敬)자는 활동적(活動的)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경자불활(敬字不活)
󰡔익증󰡕 ‘활(活)’은 활동(活動)을 의미한다. (󰡔翼增󰡕 活活動也)
라는 논의를 그대가 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대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것은] 그대(허순지)가 [선의 영향을 받아] ‘경’공부를 활동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해왔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경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도리어 ‘경’자의 본래 뜻과는 관계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각불간경(却不干敬)
󰡔간보󰡕 [허순지(許順之)가] ‘경(敬)’을 활동적이지 않은 것으로 본 것은 허순지의 ‘경(敬)’공부 방식이 활동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이와 같은 견해를 지니게 된 것이므로 [그의 이러한 견해는] ‘경(敬)’자의 본래 뜻과는 애초부터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이다. (󰡔刊補󰡕 言以敬爲不活 是順之持敬不活之致 於敬字之義 初無所干預也)
 오직 경(敬)하기 때문에 활동적인 것이니, 경(敬)하지 않으면 곧 활동적이지 못합니다. 이 일(경공부)의 경우는 [처음에]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나중에는] 곧 천 리 만큼 잘못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는 그 상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편지로는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대로서는] 우선 이 점에 관해 세심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절실합니다. 그리하다 보면 이윽고 마땅히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논어의] ‘선각(先覚)’ 선각(先覺) 
󰡔차의󰡕『논어(論語)』에 ‘먼저 깨닫는 자가 어진 것이다’라 할 때의 ‘선각(先覺)’을 말한다. (󰡔箚疑󰡕 謂論語先覺者是賢乎之先覺也) [역주] *『논어(論語)』,「헌문(憲問)」편 제33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속일까 역탐(逆探)[미리 짐작]하지 않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臆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먼저 깨닫는 자가 어진 것이다.’ (子曰 不逆詐하며 不億不信이나 抑亦先覺者是賢乎인저)”라고 했다. 이에 대해 주자는『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역(逆)은 [일이]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을 미리 짐작하는 것이요, 억(億)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억측하는 것이다. 사(詐)는 남이 자신을 속이는 것을 말하고, 불신(不信)은 남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억(抑)은 반어사(反語辭)이다. 비록 역탐(逆探)하지 않고 억측(臆測)하지 않으나, 남의 정위(情僞)[실정과 허위]에 대하여 자연히 먼저 깨달아야 어짊이 된다고 말씀한 것이다. ○ 양씨(楊氏)가 말하였다. ‘군자(君子)는 성실(誠實)에만 한결같이 할뿐이다. 그러나 성실(誠實)하고도 밝지 않은 자는 있지 않다. 그러므로 비록 남이 나를 속일까 역탐(逆探)하지 않고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억측(臆測)하지 않더라도 항상 먼저 깨닫는 것이다. 만일 역탐(逆探)하지 않고 억측(臆測)하지 않다가 끝내 소인(小人)에게 속임을 당하면 이 또한 볼 것이 없는 것이다.’ (逆은 未至而迎之也요 億은 未見而意之也라 詐는 謂人欺己요 不信은 謂人疑己라 抑은 反語辭라 言雖不逆不億이나 而於人之情僞에 自然先覺이라야 乃爲賢也라 ○ 楊氏曰 君子一於誠而已라 然이나 未有誠而不明者라 故로 雖不逆詐, 不億不信이라도 而常先覺也라 若夫不逆不億이라가 而卒爲小人所罔焉이면 斯亦不足觀也已니라)라고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94쪽 참고. 
을 논함에 있어, ‘성(誠)’자나 ‘감(感)’자를 붙인다면 이는 군더더기 말이 될 것입니다. 지착...췌어(只着...贅語) 
󰡔차의󰡕 이 구절은 [논어의 이] ‘선각(先覺)’에 대해서는 [‘성(誠)’자나 ‘감(感)’자와 같은] 이 두 글자를 붙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箚疑󰡕 句謂於先覺不可着此二字也) 
 다만 만약에 [그대가 선각(先覺)과 관련된] 이 문자(文字)를 [가장(柯丈)이 옳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여겨서] 가장(柯丈) 문자...장견(文字...丈見)
󰡔차의󰡕 ‘문자(文字)’는 선생과 허순지(許順之)가 토론해온 ‘선각(先覺)’이라는 문자를 말한다. 대개 허순지(許順之)는 가장(柯丈)이 [선생과 허순지가 토론해 온 ‘선각(先覺)’이라는] 그 문자를 옳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아래 문장에서 ‘남이 나를 속일까 역탐(逆探)[미리 짐작]하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臆測)한다’고 말한 것이다. (󰡔箚疑󰡕 文字 先生與順之所論先覺文字也 蓋順之意柯丈不是其文字而不使見之 故下文有逆詐億不信之云) [역주] *『논어(論語)』,「헌문(憲問)」편, 제33장.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94쪽 참고.
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이러한 그대의 행위야말로] 바로 [논어에서 말한]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짐작하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미리 억측(臆測)’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논어(論語)』,「헌문(憲問)」편, 제33장 원문을 참고할 것.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94쪽 참고. 
 우리네 마음 속에 어찌 허다한 일이야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서로 담론하다보면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기(夜氣)설에 관해, 근래에 그대가 보내온 해설을 받아보고 비로소 [야기(夜氣)에 관한 나의] 이전의 해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聞有‘敬字不活’之論, 莫是順之敬得來不活否? 却不干‘敬’字事. 惟敬故活, 不敬便不活矣. 此事所差豪釐, 便有千里之繆, 非書札所能盡. 切在細思, 會當有契耳. 先覺之論, 只著得‘誠’字, ‘感’字, 亦是贅語. 只如文字不敢與柯丈見, 便是逆詐億不信了. 吾人心中豈有許多事耶? 夜氣之說, 近得來答, 始覺前說之有病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3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 세 번째 편지(제13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3서)는 제12서에 이어 정해년(丁亥, 1167년, 주자 38세)에 씌어진 것이다. 답허순지 제12서 해제의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1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임택지(林択之)와 함께 절차탁마하는 즐거움,『대학(大学)』에 대한 학설을 다듬어간다는 소식, 그리고 제12서에 이어 ‘경(敬)’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올 해 임택지(林択之)가 여기에 있는 동안 나에게는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내가] 지금껏 유유(悠悠)히 유유(悠悠)
󰡔익증󰡕『열자(列子)』에 “세상의 한가한 인간들(悠悠者)은 끊임없이 명예를 향해 달린다(悠悠者趨名而已)”라 했고, 이를 주석(註釋)하여 말하기를 “유유(悠悠)는 뱃놀이 하듯 한가하고 느긋하다(閑漫游汎)는 뜻이다”고 했다. (󰡔翼增󰡕 列子曰 悠悠者趨名而已 注悠悠閑漫游汎之意) [역주] *『열자(列子)』「양주(楊朱)」편에 “... 죽자(鬻子)가 말하기를 ‘명예를 떠나면 근심이 없어진다’고 하였고 노자는 말하기를 ‘명분(名)은 실질(實)의 객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세상의 한가한 인간들(悠悠者)은 끊임없이 명예를 향해 달린다... (鬻子曰 去名者無憂 老子曰 名者實之賓 而悠悠者趨名不已)” [유평수(柳坪秀) 역해(譯解), 󰡔열자(列子)󰡕, (서울, 자유문고, 1995), 253쪽 참고.]
 허송세월 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경계하여 감히 삼가지 않을 수 없겠지만 [제가 공부한] 도학(道学)의 힘 도력(道力) 
󰡔간보󰡕 도학(道學)의 힘을 말한다. (󰡔刊補󰡕 道學之力也) 
이 약하여 끝내 뒤로 물러서게 퇴전(退轉)
󰡔간보󰡕 뒤로 물러난다(退却)는 말과 같다. (󰡔刊補󰡕 猶退却也)
 되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대학(大学)』에 대한 학설은 근래 고친 곳이 많습니다. [나의] 옛 학설 가운데는 매우 비루한 곳이 적지 않았는데 대개 본령(本領) 본령(本領) 
󰡔익증󰡕 나무의 ‘뿌리’나 옷의 ‘깃’과 같이 바탕이 되는 것을 말한다. (󰡔翼增󰡕 如木之根 如衣之)
이 옳지 않은데도 함부로 학설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나 자신을 그르쳤을 뿐만 아니라 남까지 그르쳤으니 매우 두렵습니다. 저번에 논한 바 ‘경(敬)자는 활동적인 것이 아니다’ 소론...불활(所論...不活)
󰡔차의󰡕 ‘경(敬)’이 쾌활(快活)한 것이 아니다’는 것은 허순지(許順之)의 말인데, 이에 관해 선생께서 논의하셨다. (󰡔箚疑󰡕 敬之不快活是順之語 而先生論之也)
󰡔잡지󰡕 ‘활(活)’은 ‘활동적’이라는 의미이므로 [󰡔차의󰡕에서와 같이] 반드시 ‘쾌(快)’자를 붙힐 필요는 없다. (󰡔雜識󰡕 活是活動之意 恐不必着箇快字)
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요사이 또 [‘경(敬)’이라는] 이 글자의 긴요하면서도 절실한 곳(緊切處)을 보게 되었습니다만, [지금처럼 경의 긴절한 곳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종전에는 또한 우선 [저번 편지에서와 같은 정도의] 그와 같이 설명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차설(此說) 
󰡔차의󰡕 [이 설명이란] 곧 ‘경(敬)’을 ‘쾌활(快活)’이라 본 설명을 말한다. 대개 선생의 뜻에는 [그 자신이] 종전에는 ‘경(敬)’을 ‘쾌활(快活)이다’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箚疑󰡕 卽以敬爲快活之說 蓋先生之意 從前以敬爲快活也)
󰡔잡지󰡕 선생께서는 경(敬)에 힘을 쓰셔서 진실로 터득한 것이 있게 된 연후에 비로소 [당신이] 종전에 경(敬)에 논한 것이 깔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 [과거에 경(敬)에 대해] 이처럼 설명해 나간 것은 지금(今日)에 깨달은 것과는 깊이(淺深)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운운(云云) 하신 것이다.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대개 [경을 깨달은 것에 대한] 기쁨의 뜻을 표현하신 것이다. (󰡔雜識󰡕 先生用力於敬 眞實有得 然後始知從前論敬者亦是漫 且如是說去者 與今日所見淺深不同云云 蓋歡喜之意也)
󰡔절보󰡕 [선생께서는] 요즈음 와서 ‘경(敬)’자에 대해 또다시 그 긴절(緊切)한 곳을 깨닫게 되었는데, 종전에 본 것은 [지금에 본 것과 같은] 이런 수준에 미칠 수 없었기에 그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이전 편지에서 운운(云云)한 정도의 뜻만 말해줄 수 있었다는 말이다. (󰡔節補󰡕 謂近日於敬字 又見其緊切處 從前所見 不能及此 而只說到前書云云之意也)
󰡔표보󰡕 ‘또한 다만 우선 이처럼 설명했을 따름(亦只是且如此說)’이라는 것은 아마도 [선생께서] 전일에 경(敬)을 논할 때는, ‘경(敬)하기 때문에 활동적일 수 있으며, 경(敬)하지 않는다면 활동적이지 않다’는 등(等)과 같은 말을 했는데 단지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었을 뿐, [그 당시는] 아직 [경을] 진실하게 볼 수가 없었기에 지금처럼 친절(親切)하게 설명해 낼 수 없었다는 말인 듯하다. (󰡔標補󰡕 亦只是且如此說者 似謂前日論敬如敬故活不敬便不活等語 只是說得如此 而猶不能眞實見得如今日之親切也)
 [이와 관련하여 그 밖에 내가 그대에게 하고 알리고 싶은 여러 가지 사정에 대해서는] 임택지(林擇之)가 반드시 도와서 알려줄 것입니다. 
今歲却得擇之在此, 大有所益, 始知前後多是悠悠度日. 自玆策勵, 不敢不虔. 但道力衰薄, 未知能終不退轉否耳. 大學之說, 近日多所更定. 舊說極陋處不少, 大抵本領不是, 只管妄作, 自悞悞人, 深爲可懼耳. 向所論‘敬字不活’者如何? 近日又見此字緊切處, 從前亦只是且如此說. 擇之必相報矣.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4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 네 번째 편지(제14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4서)는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초에 씌어진 것이다. 주자가 무자(戊子)년 석자중(石子重)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답석자중 제5서) 가운데 “순지(順之)가 이곳에 왔었지만 한 번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생각건대, 그의 수양한 바가 더욱 순숙(純熟)해졌을 것입니다. 편지를 남겨서 나에게 주의하는 말을 했던데, 매우 지극했습니다만, 결국은 불교의 기미(氣味)가 있었습니다. 그가 집에 도착한 뒤에 또 편지를 부쳐 이곳의 친척에게 보내 왔는데, 장사(長沙)에서 한 논의에 대해서 물으면서 말하기를, “부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꼭 부쳐 보낼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順之此來不及一見 所養想更純熟 留書見徹甚至 但終有桑門․伊蒲塞氣味 到家後又寄書來 與此間親戚間湘中議論 而曰謗釋氏者不須寄來)”라고 했는데, 이는 주자가 상(湘)으로부터 돌아온 것을 가리킨다. 허순지(許順之)는 주자의 내제(內弟)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주자 등이 상(湘)에 있을 때 어떤 의론을 했는지 물었다. 그러나 주자가 불교를 비판한 내용에 관해서는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주자가 허순지에 답한 이 편지(제14서)에서도 “지금 [그대가] 축제(祝弟)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그대는 내가] “석씨를 비방했다”는 말을 하고 있어 참으로 놀랐습니다. (今觀所與祝弟書 乃有謗釋氏之語 殊使人驚嘆)”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답석자중 제5서에서 말한 것과 [내용이 같으므로 이 편지를 쓴 시기 역시] 동시(同時)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편지를 쓴 시기도 역시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초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8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이전부터 거론되어온 허순지의 이단적 학문경향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 주자는 “성문(聖門)에서 인(仁)을 구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어서 석씨(釈氏)와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전제한 후, 허순지가 주장한 몇몇 명제들은 “한 글자도 병통이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주자에 따르면 마음은 활물(活物)임에도 불구하고 허순지는 “[이 마음을] 담박한 데 깃들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그에게는 불교적 정적(静寂)주의의 경향이 다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주자학이 도․불교와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는 거의 반 년 동안 밖에서 보냈습니다. 일출기반년(一出幾半年) 
󰡔차의󰡕 건도(乾道) 정해년(丁亥, 1167년, 주자 38세) 8월에 선생께서는 장사(長沙)로 가서 장남헌(張南軒)을 방문하시고 그해 12월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 때문에 ‘거의 반년(半年)’이라 하신 것이다. (󰡔箚疑󰡕 乾道丁亥八月 先生如長沙訪南軒 其十二月還家 故云幾半年)
 [그 동안 여라 선후배들과 함께] 배우고 물으며 생각하고 논변(学問思辨) * 학문(學問)과 사변(思辨) : “널리 배우고[博學之] 자세히 묻고[審問之]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之] 분명하게 분변한다[明辯之]”의 준말이다.『중용(中庸)』제20장에서 인용된 말이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94쪽 참고.
한 것이 도움이 되어 깜짝 놀랄 정도로 깨우치게 된 것이 많습니다. 대개 성문(聖門)에서 인(仁)을 구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어서 석씨(釈氏)와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평범하게 논의하던 중에 우연히 [이와 같은 요지의 말을] 기억해 내어 우인기억(偶因記憶)
󰡔간보󰡕 유교와 불교가 같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늘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다. (󰡔刊補󰡕 謂儒釋不同處 有時記憶也)
 저절로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히 뜻을 세워 그들과 승부를 다투고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한 말은 아닙니다. 맹자(孟子)께서 양자(楊子)와 묵자(墨子)를 물리친 것도 또한 이와 같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내 어찌 변론을 좋아해서이겠는가.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맹자(孟子)』,「등문공(滕文公)」하, 제9장에 “공도자(公都子)가 물었다. ‘외인(外人)들이 모두 부자(夫子)더러 변론하기를 좋아한다고 칭하니, 감히 묻겠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내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 부득이 해서이다. 천하(天下)에 인간이 살아온 지가 오래 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하였다. ... ’(公都子曰 外人이 皆稱夫子好辯하나니 敢問何也잇고 孟子曰 予豈好辯哉리오 予不得已也로라 天下之生이 久矣니 一治一亂이니라 ... )”라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184쪽 이하 참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축제(祝弟) 축제[祝弟, 주차집보에는 祝第로 잘못 되어 있다.]
󰡔기의󰡕 출강국(祝康國)은 선생의 내제(內弟)이다. (󰡔記疑󰡕 祝康國先生內弟) [역주] * 내제(內弟)는 처의 동생이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1권 1356쪽 참고.]
에게 보내신 편지를 보니, [그대는 내가] “석씨를 비방했다” 방석씨(謗釋氏)
󰡔익증󰡕 선생께서는「석자중에게 답하는 글(答石子重書)」에서 “허순지(許順之)가 여기로 편지를 보내와서 [나의] 친척(親戚)에게 힐문하면서 말하기를 ‘석씨(釋氏)를 비방하는 자[의 편지는 나에게] 반드시 부쳐 보낼 필요가 없다. 운운(云云)’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한 ‘친척(親戚)’이란 당연이 축강국(祝康國)이다. (󰡔翼增󰡕 先生答石子重書 曰順之寄書與此 問親戚而曰謗釋氏者不須寄來云云 親戚當是祝康國)
는 말을 하고 있어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대(吾友)가 [나와] 이별한 뒤에 [나에게서] 본 것이 무엇이기에 [내가 “석씨를 비방했다”와 같은] 이와 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두 통의 편지 이서(二書)
󰡔기의󰡕 [허순지가] 화제(禍第)에게 보낸 편지 및 선생에게 올린 편지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記疑󰡕 與禍第及上先生書 未可必也)
󰡔차의󰡕 허순지(許順之)는 일찍이 두 통의 편지를 선생께 보내왔는데, 지금 선생께서는 이 편지로 [허순지(許順之)의 두 통의 편지에] 한꺼번에 답하신 것이다. (󰡔箚疑󰡕 順之曾二書 而今先生以此書幷答之也)
󰡔차보󰡕 󰡔기의󰡕의 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선생께서 석자중(石子重)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추정컨대 허순지가 선생의 동생을 만나러 왔을 때, 선생께서는 장사(長沙)로부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허순지는 선생에게] 편지를 남겨놓은 채 돌아간 것이다. 그 후에 [허순지는] 또 다시 축강국(祝康國)에게 편지를 보내왔고 선생께서 이를 보았다. 이 때문에서 ‘두 통의 편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箚補󰡕 當從記疑 蓋以石子重書考之 則順之來先生第而先生自長沙未還 故留書而去歸 後又寄書康國 而先生見之 故曰二書)
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것이 이것만이 아니더군요. 
熹一出幾半年, 學問思辨之益, 警發爲多. 大抵聖門求仁格物之學無一事與釋氏同, 所以尋常議論間偶因記憶自然及之, 非是特然立意, 與之爭勝負․較曲直也. 想見孟子之闢楊․墨亦是如此, 故其言曰: ‘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 今觀所與祝弟書, 乃有‘謗釋氏’之語, 殊使人驚嘆, 不知吾友別後所見如何而爲是語也. 及細讀二書, 則所可怪者不特此耳. 

우선 그 큰 것부터 논해 보겠습니다. [그대는] “마음을 담박한 곳에 두어 세상에서 구하는 것을 줄이면서 나의 정신을 돕고 내 진성(真性)을 기를 수 있도록 성현의 말씀을 완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말을] 하나하나 검토 감과(勘過)
󰡔차의󰡕 ‘감(勘)’은 ‘조사하다(校)’는 뜻이다. ‘과(過)’는 어조사이다. (󰡔箚疑󰡕 勘校也 過語辭)
해 보니 이 20 여 글자 중에 한 글자도 병통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란 살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이 마땅히] 움직여야 할 때면 움직이고 고요해야 할 때면 고요히 함으로써, 동정(動静)이 그 때를 잃지 않게 되면 곧 그 도가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동정...광명(動靜...光明)
󰡔익증󰡕 이는『주역(周易)』간괘(艮卦) 단전(彖傳 즉 彖辭傳을 말함)에 나오는 말이다. (󰡔翼增󰡕 易艮彖傳辭) [역주] *『주역(周易)』간괘(艮卦) 단전(彖傳)에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간(艮)은 그침이니, 때가 그쳐야 할 경우에는 그치고 때가 가야 할 경우에는 가서 동(動)과 정(靜)이 때를 잃지 않으니 그 도(道)가 광명(光明)하니... (彖曰 艮은 止也니 時止則止하고 時行則行하여 動靜不失其時하니 其道光明이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본심의 전체(全体)와 대용(大用)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반드시 [이 마음을] 담박한 데 깃들이도록 해야만 된다는 말입니까? 또 이 마음이 무엇 십마(什麽)
󰡔기의󰡕 ‘무엇(何物)’이라는 말과 같다. (󰡔記疑󰡕 猶言何物 )
󰡔익증󰡕 ‘어떠한(甚麽)’라는 말과 같다. (󰡔翼增󰡕 與甚麽同)
이길래 [그것을] 어떻게 깃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현의 말씀은 정조(精粗)와 대소에 관계없이 본심(本心)과 천리(天理)의 신묘함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성인의 말씀을 간파한다면 곧 ‘자신을 완성하는 것’과 ‘만물을 완성하는 것’이 더 이상 두 가지가 아니며 안과 밖, 그리고 근본과 지말이 하나의 이치로 관통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께서] 어찌 [그대의 주장과 같이] 다만 내 정신을 돕고 내 진성(真性)을 기르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겠습니까? 그대(吾友)가 만약 성현의 말씀을 이런 것으로 [즉 성인의 말씀은 내 정신을 돕고 내 진성(真性)을 기르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식] 간주한다면 이는 성인의 본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문의 배움이 이단의 배움과 다른 것은 바로 이 점 재차(在此)
󰡔차의󰡕 ‘이 점(此)’이란 ‘안과 밖, 그리고 근본과 지말이 하나로 관통되어 있음’과 ‘마음을 담박한 데 깃들이며 내 정신을 돕고 내 진성(眞性)을 기름’이라는 이 둘을 가리킨다. (󰡔箚疑󰡕 此指內外本末一以貫之 與捷心澹泊資神養眞二者)
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말씀이 지닌 참뜻을 제대로] 간파해내지도 못한 채 곧바로 [나에 관해] “석씨(釈氏)를 비방한다.”는 식의 평가를 하신다면 얼마나 괴상한 일입니까? 그대가 만약 [성현의 말씀을] 돈독하게 믿는다면 신득급(信得及)
󰡔익증󰡕 성현(聖賢)의 말씀을 돈독히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翼增󰡕 謂於聖賢之言 篤信無疑也)
 우선 몇 년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여 옛 습관을 없애 나가야 합니다. 또 책상 위에는 단지 육경(六経) * 육경(六經) : 여섯 가지 경서(經書)로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춘추(春秋)』․『예경(禮經)』․『악기(樂記)』를 말한다.
과『논어』․『맹자』․ 정자(程子)의 글만을 놓고 보면서 지간...자착(只看...字着)
󰡔절요주󰡕 ‘착(着)’은 ‘간(看)’자와 마땅히 호환(互換)될 수 있을 듯하다. (󰡔節要注󰡕 着與看字疑當互換)
󰡔차의󰡕 ‘운경(云經)’이라할 때의 ‘운(云)’이 당본(唐本)에는 ‘육(六)’으로 되어 있다. (󰡔箚疑󰡕 云經之云唐本作六)
 마음을 넓게 열어젖혀서 일체의 구체적인 사사물물에 나아가 이해해 나가야만 합니다. [주 ; 제일 중요한 것은 [사사물물은] ‘마음을 어둡게 하는 세속의 일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부득...혼심([注]不得...昏心)
󰡔차의󰡕 허순지(許順之)가 사사(事事) 물물(物物)은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세속의 일이라 여겨 이를 이회(理會)하지 않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箚疑󰡕 謂順之不可以事物謂爲塵事昏心而不理會也)
󰡔익증󰡕 승가(僧家)에서는 사사물물을 ‘[눈] 앞에 있는 티끌이요, [내 마음] 밖에 있는 장애물’이라 여긴다. (󰡔翼增󰡕 僧家以事物爲前塵外障)
 그리하면 비로소, “본체와 그 발용은 그 근원이 하나이며, 드러남과 은미함 사이에는 틈이 없다” * 본체와 …… 없다 :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서(序)」에 나오는 말이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16-7쪽 참고.
는 [정이천의] 이 말씀이 진실된 것이어서, 이것이 그저 두 구절의 좋은 말 양구호언어(兩句好言語) 
󰡔차의󰡕 ‘본체와 그 발용은 그 근원이 하나(體用一源)’라는 구절과 ‘드러남과 은미함 사이에는 틈이 없다(顯微無間)’는 이 두 구절을 가리킨다. (󰡔箚疑󰡕 指體用一源顯微無間)
로서 ‘내 정신을 돕고 내 진성(真性)을 기른다’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정이천이] 멋대로 자기의 설을 분식해 꾸민 호다(胡茶)
󰡔차의󰡕 자세히 알 수 없다. (󰡔箚疑󰡕 未詳)
󰡔익증󰡕 ‘도(荼)’는 마땅히 ‘다(茶)’로 써야 한다. 의심컨대 혹 ‘차(搽)’일지도 모르겠으니 ‘분칠하여 꾸민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본체와 그 발용은 그 근원이 하나(體用一源)’라는 구절과 ‘드러남과 은미함 사이에는 틈이 없다(顯微無間)’라는] 이 두 구절을 가지고 멋대로 ‘내 정신을 돕고 내 진성(眞性)을 기른다’는 自已의 설을 분칠하여 꾸민다는 말이다. (󰡔翼增󰡕 荼宜作茶 疑或搽字 塗餙也 謂將此兩句 胡亂塗飾自已資神養眞之說也) [역주] * 胡亂 ; (2) 사물이 거칠고 난잡함 (2) 의심스러움 (3) 호인들로 인하여 일어난 병란.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684쪽.]
 정도 그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且論其大者. 如所謂棲心淡泊, 與世少(4-1780)求, 玩聖賢之言可以資吾神․善吾眞者, 一一勘過, 只此二十餘字無一字不有病痛. 夫人心是活物, 當動而動, 當靜而靜, 動靜不失其時, 則其道光明矣. 是乃本心全體大用, 如何須要棲之淡泊然後爲得? 且此心是箇什麽, 又如何其可棲也耶? 聖賢之言無精粗巨細, 無非本心天理之妙. 若眞看得破, 便成己成物更無二致, 內外本末一以貫之, 豈獨爲資吾神 ․ 養吾眞者而設哉? 若將聖賢之言作如此看, 直是全無交涉. 聖門之學所以與異端不同者, 灼然在此, 若看不破, 便直喚作 ‘謗釋氏’, 亦何足怪. 吾友若信得及, 且做年歲工夫, 屛除舊習, 案上只看六經․語孟及程氏文字, 著開擴心胸, 向一切事物上理會, [주 ; 第ー不得喚作塵事昏心也.] 方知‘體用一源․顯微無間’是眞實語, 不但做兩句好言語說, 爲資神養眞․胡荼自己之說而己也.

또 [그대가 나를] 경계하신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를 깊이 아껴주신 [그대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유학자의 학문은 드러냄이나 침묵함 어차(於此) 
󰡔익증󰡕 아래에 나오는 글인 ‘드러내는 것(顯)’과 ‘침묵을 지키는 것(黙)’을 가리켜 한 말이다. (󰡔翼增󰡕 指下文顯黙而言)
이 모두 이치에 순조로워야 하는 법이니, 마땅히 드러내야 할 상황이면 드러내고 침묵을 지켜야 할 경우면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함양(涵養)함이 깊고 순수(深淳)해지면 드러나는 것이 반드시 절도에 맞게 되어 다시는 어긋나는 일이 없겠지만,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저절로 그 기질과 습관을 쫓게 되어 드러나는 것이 [함양이 깊고 순수한 경우와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굽은 것을 교정해나가는 것을 지나치게 강직하게 해나가다 보면, 유약(柔弱)한 자는 반드시 광포(狂暴)한 데 이르고, 강한 자는 반드시 움츠러들게 되어 모두 천리의 당연함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성문(聖門)의 학문은 인(仁)을 구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이런 공부를 철저히 해 나가다보면] 드러나는 곳에서 저절로 시비와 가부(可否)가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공부가 성숙한 경지에 이르느냐 이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吾友)는 편지에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있음을 모르도록’ 부지유자가(不知有自家)
󰡔차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감춤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 수 없도록 한 연후에 [올바른]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장주(莊周)의 ‘선한 일을 내나감에 있어서는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爲善無近名)’는 학설이다 ○ 어떤 사람은 이것이 사마자미(司馬子微)의 좌망(坐忘)이나 동곽자기(東郭子綦)의 상아(喪我)와 같은 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箚疑󰡕 謂人藏名匿迹 使天下人不知 然後可以做事 此正莊周所謂爲善無近名之說 ○一云此與司馬子微坐忘東郭子綦喪我同意) [역주] * ‘선한 일을 내나감에 있어서는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爲善無近名)’ ; 안동림(安東林) 역주, 󰡔장자(莊子)󰡕 내편(內篇), 양생주(養生主)편, (서울, 玄岩社, 1980), 138쪽 참고. * 사마자미(司馬子微)의 좌망(坐忘) ; 안동림(安東林) 역주, 󰡔장자(莊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편, (서울, 玄岩社, 1980), 343쪽 이하 참고. * 동곽자기(東郭子綦)의 상아(喪我) ; 안동림(安東林) 역주, 󰡔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편, (서울, 玄岩社, 1980), 63쪽 이하 참고.
 가르쳐야만 비로소 [그들이 옳은]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하시는데, 우선 그대의 이러한 생각 차일념(此一念) 
󰡔익증󰡕 곧 앞에 나온 문장인 ‘자기가 있는 줄 모르게 한다’는 그 생각을 말한다. (󰡔翼增󰡕 卽上文不知有自家之念也)
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부터 말씀해 보세요. 차도(且道)
󰡔차의󰡕 허순지(許順之)로 하여금 우선 [이 점에 관해] 말하도록 하신 것이다. (󰡔箚疑󰡕 謂使順之且言之也) 
 본심(本心)에 관해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천리(天理)에 관해 큰 소리로 떠들어댈 수 있다고 보십니까? * ‘큰 소리로 떠들어 대다(喚做)’ ; 주자의 의도는 ‘心’이나 ‘天理’는 우리의 직접적 인식 혹은 장황한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체득해가야 할 우리 자신의 본래적 모습이요 우주의 실상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사의(私意)에서 또 사의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비록 ‘기운를 꺽고 육신을 가리고 덮어’ 마좌엄장득(磨挫掩藏得)
󰡔기의󰡕 [불서(佛書)에서] 난수(蘭秀)가 묻는 말 중에 ‘그 기운를 꺽어버리고 그 육신을 가려서 전혀 드러나지 않게 합니까?’라는 말이 나오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 가운데 ‘大槪옳지만 기운과 육신을 반드시 구분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記疑󰡕 蘭秀問言挫磨其氣而掩藏其身歟 答來說大槪得之 但未必分氣與身) [역주] * 난수(蘭秀) ; 산의 이름이다. 절강(浙江)성 정해(定海)현 북쪽 바다에 있다. ...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8권 248쪽 참고.] 여기서는 사람 이름인 듯하다.
󰡔절보󰡕 ‘난수(蘭秀)’ 위에 [의미상] ‘불서(佛書)’라는 두 글자를 넣어서 해석해야 한다. (󰡔節補󰡕 蘭秀上有佛書二字)
 전혀 생기가 없는 죽은 사람과 같이 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어색한 행위는] 역시 이해(利害)를 따지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성문(聖門)에서 인을 구하고 사물의 이치를 추구하며 [나아가] 그 이치에 순응하고 함양해나가는 기상과는 현격한 대고(大故)
󰡔차의󰡕 ‘대단(大段)’이라는 말과 같다. (󰡔箚疑󰡕 猶言大段)
 차이를 보이니, 진실로 유가(儒家)와 석가(釈家)는 이와 같은 털끝만큼의 차이로 인해 곧 [끝내] 천리로 어긋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대(吾友)는 [이 점에 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고 이 편지를 여러 동지들에게 두루 보여주어 [이 문제에 대해] 함께 반복해서 상의하고 토론해야만 할 것이니, 저 번처럼 ‘선각(先覚)’의 의미에 관해 토론한 것을 서원빙(徐元聘)과 가국재(柯国材) 두 사람 서가이장(徐柯二丈) 
󰡔차의󰡕 이 일은 24판에 나온다. ‘서(徐)’는 서원민(徐元敏)이다. 
󰡔標補󰡕 敏恐當作聘 
󰡔표보󰡕 [󰡔차의󰡕에서 말한] ‘민(敏)’은 아마도 ‘빙(聘)’으로 써야 할 것 같다. (󰡔箚疑󰡕 事見卄四板徐卽元敏)
󰡔차보󰡕 ‘서원빙(徐元聘)’과 ‘가국재(柯國材)’를 말한다. (󰡔箚補󰡕 元聘國材也)
에게는 보여 주지 않은 것처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가우사(不可又似)
󰡔익증󰡕 이 뜻이 ‘견야(見也)’까지 걸린다. (󰡔翼增󰡕 此意止見也)
 친구 사이에 이루어지는 토론에 있어서는 득실(得失) * 득실(得失) ; (1) 얻음과 잃음, 이익과 손해, 이익과 불리 (2) 성공과 실패 (3) 마땅함과 마땅하지 아니함 (4) 장점과 단점.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725쪽]
이 분명해야만 피차간에 도움이 있는 것인데, 어찌 이처럼 하필어차(何必於此)
󰡔익증󰡕 ‘어(於)’는 아마도 ‘여(如)’를 써야 할 것을 [‘어(於)’로] 잘못 쓴 것 같다. (󰡔翼增󰡕 於疑如之誤)
 가리고 덮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의(私意)의 뿌리이니, 만약 이를 제거하여 확 틔워 크게 공평하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실된 의리를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그대도 “[맹자께서 말씀하신 바] ‘선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천하를 다스리는데 넉넉하다’ *『맹자(孟子)』,「고자(告子)」하, 제13장에 “노(魯)나라에서 악정자(樂正子)로 하여금 정사를 다스리게 하려고 하였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내 이 말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노라.’ 공손추(公孫丑)가 말하였다. ‘악정자(樂正子)는 강합니까?’ ‘아니다.’ ‘지식과 생각이 있습니까?’ ‘아니다.’ ‘문견(聞見)과 식견(識見)이 많습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까?’ ‘그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한다.’ ‘선(善)을 좋아함이 족합니까?’ ‘선(善)을 좋아함은 천하를 다스리는데도 충분하거늘, 하물며 노(魯)나라에 있어서랴!’ ... (魯欲使樂正子로 爲政이러니 孟子曰 吾聞之하고 喜而不寐호라. 公孫丑曰 樂正子는 强乎잇가 曰 否라 有知慮乎잇가 曰 否라 多聞識乎잇가 曰 否라 然則奚爲喜而不寐시니잇고 曰 其爲人也好善이니라 好善이 足乎잇가 曰 好善이 優於天下어든 而況魯國乎아 ... )”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67-7쪽 참고.
는 이 말은 바로 ‘공정함(公)’이라는 이 한 글자로 [맹자의 진심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이 곳 등에서 此等外(此等外)
󰡔기의󰡕 이에 ‘덮어버린 곳’을 말한다. (󰡔記疑󰡕 乃掩覆處)
는 어찌 그리도 공정하지 못하십니까?
又承見警, 此則甚荷相愛之深. 然儒者之學, 於此亦只是順理而已, 當顯則顯, 當黙則黙. 若涵養深淳, 則發必中節, 更無差互. 旣未到此地位, 自是隨其氣習, 所發不同. 然若一向矯枉過直, 則柔弱者必致狂暴, 剛彊者必爲退縮, 都不見天理之當然. 惟聖門之學以求仁格物爲先, 所以發處自然見得是非可否不差毫髮, 其工夫到與不到, 却在人. 今吾友見敎, 要使天下之人不知有自家方做得事, 且道(4-1781)此一念從何處來? 喚做本心得否? 喚倣天理得否? 直是私意上又起私意, 縱使磨挫掩藏得全不發露, 似箇沒氣底死人, 亦只是計校利害之私, 興聖門求仁格物․順理涵養氣象大故懸隔. 信知儒釋只此豪釐間, 便是繆以千里處. 却望吾友更深思之, 仍將此書遍呈諸同志, 相與反復商榷, 不可又似向來說‘先覺’之義, 更不與徐․柯二丈見也. 朋友商論, 正要得失分明, 彼此有益, 何必於此揜覆? 只此是私意根株, 若不拔去, 使之廓然大公, 何緣見得義理眞實處耶? 所論好善優於天下, 只是一箇‘公’字, 此等處何不公之甚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5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다섯 번째 편지(제15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5서)는 제14서에 이어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봄에 씌어진 것이다. 주자는 이 편지(제15서)에서 “요사이 월주(越州)의 홍괄(洪适)이 장자소(張子韶)의 경해(經解)를 간행코자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이 때문에 걱정이 되고 탄식이 나옵니다. [이 일을] 못내 내 생각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군요.(近聞越州洪适欲刊張子韶經解, 爲之憂嘆, 不能去懷)”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자(戊子)년 주자가 석자중(石子重)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답석자중 제5서) 가운데 “들으니 홍괄(洪适)이 회계(會稽)에서 장자소(張子韶)의 경전 주석을 모두 가져다가 판각(板刻)하여 간행한다고 하는군요. 이 화(禍)는 매우 참혹한 것으로, 홍수나 오랑캐나 맹수의 피해보다 못하지 않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한심하게 합니다.(聞洪造在會稽盡取張子韶經解板行 此禍甚酷 不在洪水夷狄猛獸之下 今人寒心)”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편지(제15서) 역시 답석자중 제5서와 동일한 시기인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봄에 쓴 것으로 본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8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석자중(石子重), 임택지(林択之), 서원빙(徐元聘), 가국재(柯国材) 등의 근황에 관심을 표명한 이외에 이정자(二程子)의 어록(語錄)을 간행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고 있다. 한편 주자는 그 당시 주자학과는 그 학문적 경향을 달리하는 장자소(張子韶)의 경해(経解)를 홍괄(洪适)이 간행코자 하는데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우계(尤渓) 우계(尤溪) 
󰡔기의󰡕 석돈(石●)이니 석자중(石子重)이 당시 우계(尤溪)에서 벼슬하고 있었다. (󰡔記疑󰡕 石●(돈 = 敦+山) 子重時爲尤溪 )
의 석자중(石子重)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논의(論議)한 내용이 매우 좋더군요. [그대의] 평소 강론은 [석자중이 내게 보낸 편지에서 논의한 바와 같은] 이러한 내용과 다른 점이 있는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그대와 석자중의 강론에 아무런] 다른 점이 없다 해도 역시 의심해볼만한 점이 있습니다. 약무...의이(若無...疑耳)
󰡔기의󰡕 허순지(許順之)의 견해에 이미 잘못이 있는 만큼 석장(石丈)이 강론(講論)한 말에는 마땅히 [허순지와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만약 차이가 없다면 석장(石丈)의 설(說) 역시 의심할만한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記疑󰡕 順之所見已差 則石丈講論之言 當有不同者 若無異同 則石丈說亦可疑耳) [역주] * 이동(異同) ; (1) 다름, 같지 아니함. ‘동(同)’은 무의미한 조자(助字)임. (2)[韓] 다름과 같음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365쪽.]
󰡔차의󰡕 살피건대 [이는 선생께서] 석장(石丈)의 설(說)을 의심할만하다는 것이 아니다. 대개 석장(石丈)의 견해는 매우 훌륭하지만, [그가] 허순지(許順之)의 치우친 견해에 대해서는 바로잡아주지 않고 있으니 이는 붕우에 대해 진실한 태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이 의심할만한 것이라는 것이다. (󰡔箚疑󰡕 按非疑石丈說也 盖石丈所見極佳 而於順之偏見不爲相規 是於朋友不誠 是可疑也)
 임택지(林択之)는 깨달음이 날로 정밀하고 공부가 날로 세밀해지고 있으니 두려워할 만큼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이제 단지 ‘[유교에서의] 하나의 큰 강령(大綱)이 이와 같은 것임’을 본 정도이니 그저 이단 사마외도(邪魔外道)
󰡔차의󰡕 본래 불교 용어이다. 불자(佛者)들은 그들과 다른 주장을 펼치는 자들을 ‘사악한 마귀와도 같아서 정도 밖에 있는 자들’이라 부른다. 이제 선생께서 [이 용어를] 차용하신 것이다. (󰡔箚疑󰡕 本佛語 佛者指其異於佛者 謂之邪魔外道 今先生借用之)
에 빠지지 않을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니 자세한 공부에 있어서야 [내가] 어찌 감히 그(임택지)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망거(望渠)  
󰡔차의󰡕 ‘그(渠)’는 임택지(林擇之)를 말한다. (󰡔箚疑󰡕 渠謂擇之)
 서원빙(徐元聘)과 가국재(柯国材) 두 분 및 임여기(林汝器) 여기(汝器)
󰡔차의󰡕 성(姓)은 ‘임(林)’씨이다. (󰡔箚疑󰡕 姓林)
, 왕근사(王近思) 근사(近思) 
󰡔차의󰡕 성(姓)은 ‘왕(王)’씨이다. (󰡔箚疑󰡕 姓王) 
󰡔표보󰡕 [왕근사(王近思)의] 이름은 역행(力行)이다. 여기(汝器)와 함께 두 사람 모두 동안(同安) 사람으로 선생의 문인(門人)이다. (󰡔標補󰡕 名力行 與汝器 皆同安人 先生門人)
 등 여러 친구들이 모이면 무슨 말씀들을 나누시는지요? 저번에 정박(程舶) 정박(程舶) 
󰡔차의󰡕 정(程)씨 성(姓)으로 박사(舶司)를 관리하던 사람이다. (󰡔箚疑󰡕 謂程姓人管舶司者) [역주] * 박사(舶司) ; 시박사(市舶司) 혹은 제거시박사(提擧市舶司)의 간칭(簡稱)이다. 제거시박사(提擧市舶司)는 송(宋)대에 설치된 관청의 이름인데, 해외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선박이나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무역 등의 일을 맡아보았던 곳이다. 서연달(徐連達), 󰡔중국역대관제사전(中國歷代官制詞典)󰡕, (中國, 安徽敎育出版社, 1991), 918쪽, 958쪽 및 345-6쪽 참고.
이 이 곳에 와서 이정자(二程子)의 어록(語錄) 어록본자(語錄本字)
󰡔익증󰡕 정자(程子)의 어록(語錄)을 말한다. (󰡔翼增󰡕 程子語錄)
을 구해 가서 [이를] 간행한다기에, 이참에 [저는 간행된 책을] 읍(邑)으로 송부하여 제공(諸公)들에게 맡겨 각각 일부를 나누어 교정을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만, 근래에 서신을 받아보니 아직도 송부하지 않았더군요. 지금으로서는 다만 엽학고(葉學古)에게 성(城) 안으로 가서 혼자 책임지고 교정을 보라 시켰습니다만, 이런 씩으로 해서야 어떻게 제대로 모양을 갖춘 문자 성하문자(成何文字)
󰡔차의󰡕 그것이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箚疑󰡕 謂其不成貌樣也)
로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미 [정박(程舶)에게] 답장 편지를 써 보내어, 그(程舶)가 다시 읍(邑)으로 [원고를] 송부하여 거듭 교정하도록 했습니다. 재작...복교(再作...覆校)
󰡔절보󰡕 선생께서 다시 정박(程舶)에게 답장 편지를 써 보내어, 그(程舶)가 다시 읍(邑)으로 [원고를] 송부하여 거듭 교정하도록 했다는 말이다. (󰡔節補󰡕 先生再答程舶書 令更送邑覆校也)
 황송스럽게도 두 어른과 세 벗 삼우(三友) 
󰡔차의󰡕 여기(汝器), 근사(近思), 학고(學古)를 말한다. (󰡔箚疑󰡕 汝器近思學古)
󰡔표보󰡕 아래에 나오는 문장인 ‘임(林)․왕(王)․진(陳) 제우(諸友)’라는 말로 볼 때, [이 중] 한 사람은 아마도 진제중(陳齊仲)이지 학고(學古)가 아닌 듯하다. (󰡔標補󰡕 以下文林王陳諸友觀之 一人似是齊仲非學古)
께서 자세히 교정해주셨습니다. 다만 불교에 관해 언급한 곳에 대해서는 함부로 가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상하기수(上下其手)
󰡔차의󰡕 그 손을 올리거니 내리거니 하여 덜어내기도 하고 보태기도 한다는 말이다. (󰡔箚疑󰡕 謂上下其手以損益之也) 
󰡔익증󰡕『춘추좌전(春秋左傳)』[양공(襄公) 26년 조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초(楚)나라가 정(鄭)나라를 침공하였다. [초나라 장수인] 천봉수(穿封戍)가 정(鄭)나라의 황힐(皇頡)을 사로잡았다. [초나라] 공자위(公子圍)가 [천봉수(穿封戍)와 황힐(皇頡)을 사로잡은 전공에 관해] 다투면서 [이 문제를] 백주리(伯州犁)에게 바로잡아 달라 하였다. [백주리(伯州犁)는] ‘포로에게 물어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에] 백주리(伯州犁)는 [포로인 정(鄭)나라의 황힐(皇頡)를 향해] 그의 손을 위로 올리면서 ‘이 분은 왕자위(王子圍)이신데 우리 초나라 임금의 훌륭한 동생분이시다’라고 하고, 또 그의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이 사람은 천봉수(穿封戌)라는 사람인데 방성(方城) 밖의 현윤(縣尹)이다.’ 누가 너를 사로잡았는가? [이에 황힐(皇頡)이] 대답하기를 ‘제가 王子를 만나 그에게 패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상의 기사를 통해 볼 때 ‘상하기수(上下其手)’란 말은] 의도적으로 추켜세우거나 내리누르는 것(扶抑)을 말한다. (󰡔翼增󰡕 左傳 楚侵鄭 穿封戍囚鄭皇頡 公子圍爭之 正于伯州犁 曰請問於囚 州犁 上其手 曰夫子爲王子圍 寡君之介弟也 下其手 曰此子乃穿封戌 方城外之縣尹也 誰獲子囚 曰頡遇王子弱焉 此言用意扶抑之也)  [역주] *『춘추좌전(春秋左傳)』양공(襄公) 26년 조. 이석호(李錫浩) 역주, 󰡔춘추좌전(春秋左傳)󰡕(中), (서울, 平凡社, 1979), 518-9쪽 참고.
 [내가 여기서 불교에 관해 언급한 것은] 사해(四海) * 사해(四海) ; (1) 사방의 바다. (2) 온 세상. 천하(天下), 세계(世界), 만국(萬國). [4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38쪽.]
와 구주(九州) * 구주(九州) : 중국의 전 영토를 아홉 구역으로 나눈 것의 명칭.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20쪽.] 
에 천만년 동안 내려오던 문자(文字)로서 [나]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의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월주(越州)의 홍괄(洪适) 월주홍괄(越州洪适) 
󰡔표보󰡕 자(字)는 경백(景伯)이다. [그는] 일찍이 일 때문에 월(越) 지방에 장수로 나가 있었다. 42권 31판에 보인다. (󰡔標補󰡕 字 景伯 嘗以故相帥越 見四十二卷三十一板 )
이 장자소(張子韶)의 경해(經解)를 간행코자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이 때문에 걱정이 되고 탄식이 나옵니다. [이 일을] 못내 내 생각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군요. [그대가] 만약에 ‘맹자께서 인심(人心)을 바로잡으시고 세 성인(三聖)을 계승하고자 하셨던 그 포부(意思)’를 이해하신다면, [불교적 경향성을 다분히 지닌 장자소(張子韶)의 경해(經解)를 간행하는 이 일에 관해 걱정하고 탄식하는 나의] 이 마음 차심(此心)
󰡔차의󰡕 선생께서 그 점에 관해 ‘걱정과 탄식의 마음’을 지니셨다는 말씀이다. (󰡔箚疑󰡕 先生自言其憂歎之心也)
이 구차히 그러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실 것입니다.『이선생집(二先生集)』한 부를 보냅니다. 두 어른과 임(林)․왕(王)․진(陳) 등 여러 벗님들께서 함께 보셨으면 합니다. [『이선생집(二先生集)』] 한 부가 더 있어서 이를『통서(通書)』와 함께 현학(縣學)에 보냈습니다.『통서(通書)』는 다른 판본이 없어서 우진(偶盡)
󰡔익증󰡕 다른 판본이 없다는 말이다. (󰡔翼增󰡕 謂無他本)
 우선 『이선생집(二先生集)』 기차(寄此)
󰡔차의󰡕 ‘이것(此)’은『이선생집(二先生集)』을 말한다. (󰡔箚疑󰡕 此二先生集)
과 함께 부쳐 보내드립니다. 적실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 한 권의 책 차일본(此一本)
󰡔절보󰡕 이 또한 이선생(二先生)의 학설을 가리킨다. (󰡔節補󰡕 亦指二先生說)
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여러분 모두에게] 두루 부쳐 보내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주 ; 이미 고기를 먹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매우 좋은 일입니다. [주]끽육심선([注]喫肉甚善) 
󰡔차의󰡕 허순지(許順之)가 일찌기 불교를 공부하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箚疑󰡕 順之 曾學佛不食肉 故先生之言如此)
 이러한 것들을 미루어 넓혀 나간다면 이단이 [그대의 학문을] 의혹케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尤溪書來, 議論極佳. 不知平日講論於此等處有異同否? 若無異同, 則亦可疑耳. 擇之所見日精, 工夫日密, 甚覺可畏. 如熹輩, 今只是見得一大綱如此, 不至墮落邪魔外道耳. 若子細工夫, 則豈敢望渠也. 徐․柯二丈及汝器․近思諸友相聚說何等話? 向者程舶來求語錄本子去刊, 因屬令送下邑中, 委諸公分校. 近得信却不送往, 只令葉學古就城中獨校, 如此成何文字? 已再作書答之, 再送下覆校. 千(4-1782)萬與二丈三友子細校過. 但說釋氏處不可上下其手, 此是四海九州千年萬歲文字, 非一己之私也. 近聞越州洪适欲刊張子韶經解, 爲之憂嘆, 不能去懷. 若見得孟子正人心․承三聖意思, 方知此心不是苟然也. 二先生集一部納去, 可與二丈及林․王․陳諸友同看. 已有一本幷通書送縣學. 通書偶盡, 且寄此去, 亦適値只有此一本, 不能徧寄耳. [주 ; 聞已喫肉, 甚善. 推此類而擴充, 則異說不能惑矣.]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6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여섯 번째 편지(제16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6서)는 제14서와 제15서에 이어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3월에 씌어진 것이다.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다섯 번째 편지(제15서)에서 “저번에 정박(程舶)이 이 곳에 와서 이정자(二程子)의 어록(語錄)을 구해 가서 [이를] 간행한다기에, 이참에 [저는 간행된 책을] 읍(邑)으로 송부하여 제공(諸公)들에게 맡겨 각각 일부를 나누어 교정을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만, 근래에 서신을 받아보니 아직도 송부하지 않았더군요. 지금으로서는 다만 엽학고(葉學古)에게 성(城) 안으로 가서 혼자 책임지고 교정을 보라 시켰습니다만, 이런 씩으로 해서야 어떻게 제대로 모양을 갖춘 문자로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미 [정박(程舶)에게] 답장 편지를 써 보내어, 그(程舶)가 다시 읍(邑)으로 [원고를] 송부하여 거듭 교정하도록 했습니다. 황송스럽게도 두 어른과 세 벗 삼우(三友) 
󰡔차의󰡕 여기(汝器), 근사(近思), 학고(學古)를 말한다. (󰡔箚疑󰡕 汝器近思學古)
󰡔표보󰡕 아래에 나오는 문장인 ‘임(林)․왕(王)․진(陳) 제우(諸友)’라는 말로 볼 때, [이 중] 한 사람은 아마도 진제중(陳齊仲)이지 학고(學古)가 아닌 듯하다. (󰡔標補󰡕 以下文林王陳諸友觀之 一人似是齊仲非學古)
께서 자세히 교정해주셨습니다.(向者程舶來求語錄本子去刊 因屬令送下邑中 委諸公分校 近得信却不送往 只令葉學古就城中獨校 如此成何文字 已再作書答之 再送下覆校 千萬與二丈三友子細校過)”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이정유서(二程遺書)』간행을 위해 허순지(許順之) 등으로 하여금 이 책에 대한 교정을 보도록 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이정유서(二程遺書)』는 무자(戊子)년에 간행되었다. 또 이 편지(제16서)에서도 “[그대가] 상사일(上巳日)에 쓴 편지를 받았습니다. 일찍이 [그대가] 성중(城中)에 들어가 책을 교정하신 이런 저런 곡절에 관해 듣고 나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承上巳日書 知嘗到城中校書曲折 甚慰甚慰)”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제15서에서 언급한『이정유서(二程遺書)』교정과 관련된 일을 이어서 말한 것이다. 또 ‘상사(上巳)’라 한 말을 참고해 본다면 주자의 이 편지(제16서)는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3월에 작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8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제 15서에 이어 이정자 어록의 간행을 위한 교정 작업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허순지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이정자 어록의 교정을 함께 했던 듯하다. 주자는 미심쩍은 부분에 대해서는 “우선 구본(旧本)에 근거해서 확정해 두고, 만약에 오류가 분명한 곳이라면 깊이 검토한 후에 개정해도 무방할 것”이라 하면서 신중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대가] 상사일(上巳日)에 쓴 편지를 받았습니다. 일찍이 [그대가] 성중(城中)에 들어가 책을 교정하신 이런 저런 곡절에 관해 듣고 나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우선은 구본(舊本)에 근거해서 확정해 두고, 만약에 오류가 분명한 곳이라면 깊이 검토한 후에 개정해도 무방할 것입니다만, 그 중에 ‘빠지거나 잘못된 것’이 의심할 만한 수준이거나 아예 의거할만한 것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차라리 우선 그대로 두어 후학을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결코 사사로운 뜻에 따라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개 선현(先賢)들께서 담고자 한 뜻(指意)은 깊고도 원대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사사로운 뜻에 따라] 쉽사리 고쳐버린다면, 혹시라도 [선현들이 전하고자 한] 본래의 참뜻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로 인해 후학들을 오도하게 될 것이니 그 죄가 장차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결코 쉽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천만번 당부드립니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나의] 망령된 뜻에 따라 함부로 [선현들의 글에] 보태기도 하고 덜어내기도 하기를 좋아했습니다만 역호(亦好)
󰡔차의󰡕 선생 스스로를 일컬으신 것이다. (󰡔箚疑󰡕 先生自謂)
 요사이 다른 판본(別本)을 얻어 검증해볼 수 있었는데, 간혹 [별본(別本)을 통해 본문의 올바른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나] 스스로 사색하여 간파 간파(看破)
󰡔차의󰡕 늘어나거나 줄어서 잘못된 곳을 간파해내었다는 말이다. (󰡔箚疑󰡕 謂看破增損之誤者) 
󰡔익증󰡕 본문의 올바른 뜻을 간파해내었다는 말이다. (󰡔翼增󰡕 看破本文正義)
하게 됨에 따라 [내가 이전에 함부로 선현들의 글에 보태기도 하고 덜어내기도 한 것이] 극히 가소로운 점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주; 간혹 朋友들이 지적해주기도 합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이전에 선현들의 글에 보태기도 하고 덜어내기도 할 그] 당시에는 단지 [나의 의견을] 선현들의 글 곁에 붙혀 적었을 뿐 일찍이 온전히 도개(塗改) * 도개(塗改_ ; 지워 고침, 개찬(改竄)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473쪽.]
한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또 일찍이 남을 위해 책을 교정하다가, [나의 사사로운 뜻에 따름으로써] 한두 군데를 잘못 고친 적이 있는데, 이를 추적하여 [내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이 일은 내게 지금까지 한이 됩니다.
承上巳日書, 知嘗到城中校書曲折, 甚慰甚慰. 但且據舊本爲定, 若顯然謬誤, 商量改正不妨. 其有闕誤可疑, 無可依據者, 寧且存之, 以俟後學, 切不可以私意輒有更改. 蓋前賢指意深遠, 容易更改, 或失本眞以誤後來, 其罪將有所歸, 不可容易. 千萬千萬! 舊來亦好妄意有所增損, 近來或得別本證之, 或自思索看破, 極有可笑者. [주; 或得朋友指出] 所幸當時只是附注其傍, 不曾全然塗改耳. 亦嘗爲人校書, 誤以意改一兩處, 追之不及, 至今以爲恨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7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일곱 번째 편지(제17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7서)는 제15서와 제16서에 이어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여름에 씌어진 것이다.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다섯 번째 편지(제15서)와 열여섯 번째 편지(제16서)에서는 모두 이정자(二程子)의 어록(語錄)을 간행하기 위한 교정 작업과 관련된 글이다. 그런데 이 편지(제17서)에도 “문자(文字)를 새긴 판에 순서를 정했습니까? (文字鏤板有次第否)”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이미 교정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마땅히 제15서와 제16서에 이어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여름에 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9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제 15서와 16서에 이어 정자 어록의 간행과 관련하여 문자(文字)를 새긴 판에 순서를 정했는지를 궁금해 하고 있다.

문자(文字)를 새긴 판에 순서를 정했습니까? 이론(異論)은 없습니까? 서(徐)․가(柯) 두 어른과는 소식을 주고 받습니까? [올바른] 학문을 강론하지 않아 사이비 이론(邪説)들이 멋대로 횡행하게 되어 이를 금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학지...지금(學之...之禁) 
󰡔차의󰡕 [올바른] 학문을 강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설(邪說)이 멋대로 횡행하게 되어 이를 금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箚疑󰡕 謂以學之不講之 故邪說肆行而莫之禁也 )
 드리고 싶은 말씀을 편지로 이루 다할 수가 없군요. 
文字鏤板有次第否? 無異論否? 徐․柯二丈通問否? 學之不講, 似是而非之論肆行而莫之禁. 所欲言者, 非書可旣.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8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여덟 번째 편지(제18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8서)는 적어도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이후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제18서)에서 “석형(石兄)이 보내 온 편지에서...(石兄書來...)”라고 했는데, 여기서 석형(石兄)은 석자중(石子重)을 말한다. 또 “어린 아이(幼兒)가 아직도 읽은 글이 없어 매우 옳지 않게 휘어져 가고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 [이 아이를 석자중(石子重)이 계신] 우계(尤溪)로 보낼 수 없는 것이 매우 한이 됩니다. (幼兒未有讀書處 甚以爲撓 地遠 不能遣去尤溪 甚可恨也)”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주자가 자신의 아들을 우계(尤溪)로 보내 석자중에게 배우게 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데 석자중은 을유년(乙酉, 1165년, 주자 36세)에 우계(尤溪)로 발령이 난 상태에서 대차(待次)하고 있다가 3년 후에 비로소 우계(尤溪)의 지사(知事)가 되었으니 곧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이후에야 우계(尤溪)에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도 무자년 이후에 쓴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9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간단한 안부에 이어 ‘어린 아이(幼児)가 아직도 읽은 글이 없음’을 걱정하면서 석자중(石子重)에게 보내 공부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석형(石兄)이 보내 온 편지에서 말하기를, ‘허순지(許順之)가 곧 그곳에 도착한다’ 하니 나도 그곳에 가서 함께 만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의 일의 실마리가 이리 저리 뒤얽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 없군요.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아보니, 줄곧 내년 봄여름 사이쯤 되어야 비소로 조금 틈이 날 것 같군요. 어린 아이(幼兒)가 아직도 읽은 글이 없어 매우 옳지 않게 휘어져 가고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 [이 아이를 석자중(石子重)이 계신] 우계(尤溪)로 보낼 수 없는 것이 매우 한이 됩니다. [그대는 그대의] 경각(經閣) 경각(經閣)
󰡔차의󰡕 허순지(許順之)의 경각(經閣)을 말한다. (󰡔箚疑󰡕 謂順之經閣也)
에 두 종류의 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만 [나는] 아직도 [이 두 종류의 책을] 입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책을 입수하여] 부쳐 보낼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군요. 
石兄書來, 云順之旦夕到彼. 深欲去相聚, 以此間事緖牽繫動不得. 屈指月日, 直到來年春夏間始得少間耳. 幼兒未有讀書處, 甚以爲撓. 地遠, 不能遣去尤溪, 甚可恨也. 經閣所要二書, 偶未有本, 俟有寄去.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19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열아홉 번째 편지(제19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제19서)와 제20서에 대해서는 년대 고증을 빼 놓고 있다. 그러나 제18서가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이후에 씌어졌고, 제21서가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에 씌어졌으니 이 편지(제19서)는 아마도 주자 40세 전후 시기가 아닌가 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9쪽 및 107쪽 참고.
 40세 전후한 시기에 주자는 자신의 정론(定論)을 확립하게 되는데 제19서의 내용이 경전의 해석에 관한 심도있는 내용이고, 그의 정론(定論)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40세 전후에 씌어진 것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 편지에서는『주역(周易)』『논어(論語)』『맹자(孟子)』『서경(書経)』등의 내용과 관련한 허순지의 의견에 대해 주자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주역(周易)』건괘(乾卦) 육효(六爻)의 의미,『논어(論語)』와『맹자(孟子)』의 인(仁) 개념, 그리고『서경(書経)』의 인심(人心), 도심(道心) 등이 토론되고 있다.

[허순지 질문 1] [64괘의 첫 번째인] 건괘(乾卦)는 위 아래(즉 내괘와 외괘)가 모두 순수한 건(乾)이니 하늘의 움직임이요, 인욕(人欲)은 [이에] 간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초구(初九)의] ‘잠(潛)’은 단지 [하늘의 움직임이] ‘잠(潛)’할 뿐임을 표시한 것이며, [구이(九二)의] ‘현(見)’은 마땅히 [하늘의 움직임이] ‘드러나(見)’야만 함을 표시한 것이며, 구삼(九三)효의 경우는 [중(中)을] 지나쳤기 때문에 군자가 더욱 신중히 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구사(九四)효의 경우는 덕(德)이 왕성하고 인(仁)에 익숙하여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높은 경지’ * 마불린날불치(磨不磷, 涅不緇) ; 『논어(論語)』,「양화(陽貨)」, 제7장에 “...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거니와,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 ’(子曰 然하다 有是言也어니와 不曰堅乎아 磨而不磷이니라 不曰白乎아 涅而不緇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345-6쪽 참고.
를 말한 것이니, 보통의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높은 경지를]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진퇴거취(進退去就)에 언제나 실수해서는 아니 될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 나의 덕(德)에 나아가고 나의 업(業)을 닦아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선유(先儒)들 중에 ‘순(舜)이 심산(深山) 가운데서부터 시작하여 천하를 다스린 일 천하지사(天下之事)
󰡔차의󰡕 본문 아래 나오는 내용에 근거하여 [‘하(下)’자를] ‘자(子)’자로 쓴다. (󰡔箚疑󰡕 據本文下作子)
에까지 미친 것’을 가지고 [주역 건괘의 육효(六爻)의 의미를] 밝힌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 해석하다 보면] 그 폐단이 반드시 왕씨(王氏 즉 王弼)가 [이 구절을] ‘구삼효가 구오 임금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알아 [그 임금 자리에] 이르는 것’ 구삼...지지(九三...至之)
󰡔차의󰡕 ‘이를 데를 알아 이른다(知至至之)’는 말은『주역(周易)』건괘(乾卦) 구삼효(九三爻) 문언(文言)에 나오는 말이다. 왕씨(王氏, 즉 王弼)는 이 구절을 ‘구삼효(九三爻)가 구오(九五) 임금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알아 이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箚疑󰡕 知至至之 易九三文言 王氏以此而謂九三爻知九五君位可至而至也)  [역주]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삼효(九三爻) 문언(文言)에 “구삼(九三)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君子)는 덕(德)을 진전시키고 업(業)을 닦나니, 충(忠)·신(信)이 덕(德)을 진전시키는 것이요 말을 함에 그 성실함을 세움이 업(業)을 보유(保有)하는 것이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므로 더불어 기미를 알 수 있고, 마칠 데를 알아 마치므로 더불어 의(義)를 보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쓰고 힘써 때에 따라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는 것이다.’(九三曰 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는 何謂也오 子曰 君子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이 所以進德也요 修辭立其誠이 所以居業也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니 是故로 居上位而不驕하며 在下位而不憂하나니 故로 乾乾하여 因其時而惕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68쪽 참고.  * 왕필(王弼)은 ‘지지지지(知至至之)’의 ‘지(至)’에 대해 ‘일체(一體)의 극에 처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를 󰡔차의󰡕에서는 ‘구삼효(九三爻)가 구오(九五) 임금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알아 이르는 것’이라 이해한 것이다. 왕필(王弼) 지음, 임채우 옮김, 󰡔주역 왕필주󰡕, 길, 2000[초판은 1998] 29-30쪽 참고.
이라고 해석하게 되는 데까지 도달할까 두렵습니다. [이런 식의 주역해석은 의로움(義)이 아닌] ‘이로움(利)’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주역을] 해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의 답변1] 건괘(乾卦)는 모두 성인(聖人)의 덕(德)을 표현한 것이니, [건괘의] 육효는 [성인이] 처(處)한 [서로 다른] 지위(位)를 드러낸 것입니다. 순(舜)을 예로 들어 이 이치를 밝힌 것은 [건괘의] 괘상과 효상의 의미를 깊이 터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舜) 또한 [자신이] 요(堯)의 지위에 이를 수 있음을 [미리 계산해] 알고 나서 [요임금의 천자 자리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정전(程傳)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별도로 새로운 학설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오로지 ‘덕에 나아감(進德)’이라는 주제로 말한다면, 구오효와 상구효의 경우는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요? 구오상구...하해(九五上九...何解)
󰡔차의󰡕 [건괘(乾卦)] 구오(九五)효에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고 했고 상구(上九)효에는 ‘끝까지 올라간 용(龍)이니, 뉘우침이 있다(亢龍有悔)’고 했는데 이 경우는 ‘덕에 나아감(進德)’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箚疑󰡕 九五言飛龍在天 上九言亢龍有悔 此則不可以進德言) [역주] *『주역(周易)』건괘(乾卦) 구오(九五)효 효사 ; “구오(九五)는 나는 용(龍)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만나봄이 이롭다.(九五는 飛龍在天이니 利見大人이니라)” *『주역(周易)』건괘(乾卦) 상구(上九)효 효사 ;  “상구(上九)는 끝까지 올라간 용(龍)이니, 뉘우침이 있으리라.(上九는 亢龍이니 有悔리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52-3쪽 참고.

乾之爲卦, 上下純乾, 天之動也, 人欲不與焉. 潛只得潛, 見合當見. 三則(4-1784)過矣, 君子尤當致謹. 四則德盛仁熟, 磨不磷, 涅不緇, 不可以常情測. 進退去就, 時不可失, 皆所以進吾德․修吾業也. 先儒多以舜自深山之中及其爲天下之事明之, 其弊恐必至於王氏謂九三之知․九五之位可至而至之, 得非以利而言乎? 
乾卦皆聖人之德, 六爻乃其所處之位也. 如以舜明之, 深得其象, 舜亦非知堯之位可至而往至之也. 熟讀程傳可見, 不須別立說. 若專以進德爲言, 則九五․上九兩爻又如何解?

[허순지 질문2] [공자께서는] “사람으로서 인(仁)하지 못하면 예(礼)를 어떻게 사용하며, 사람으로서 인(仁)하지 못하면 악(楽)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논어(論語)』,「팔일(八佾)」, 제3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인(仁)하지 못하면 예(禮)를 어떻게 사용하며, 사람으로서 인(仁)하지 못하면 악(樂)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子曰 人而不仁이면 如禮何며 人而不仁이면 如樂可리오)”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51쪽 참고. 
라고 하셨고, [맹자께서는] “인(仁)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합하여 말하면 도(道)이다.(仁也者, 人也. 合而言之, 道也.)” *『맹자(孟子)』,「진심(盡心)」하, 제16장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인(仁)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합하여 말하면 도(道)이다.’(孟子曰 仁也者는 人也니 合而言之하면 道也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422쪽 참고.
라고 하셨습니다. 몸이 마비(不仁)가 되어버리면, 고질적인 가려움증이나 각종 질병에 대해서도 내 몸은 오히려 느껴 알지 못합니다. 완명(頑冥) * 완명(頑冥) ; 어리석어 사리에 어두움.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251쪽.]
함이 극심한 경우, 어찌 그 예악(禮樂)이 예악(禮樂)인 줄을 느껴 알겠습니까? 이와 같은 경우는 아마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선생의 답변2] 대략 이와 같습니다만, 더욱 완미하여 착실하게 되도록 거듭 성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간교착실(看敎着實)
󰡔차의󰡕 스스로 그것이 착실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핀다는 말이다. ‘교(敎)’자는 [너무 무게를 실어] 깊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간(看)’자는 마땅히 위 구절에 붙여 읽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箚疑󰡕 謂自看其着實與否也 敎字不必深釋 一云看字當屬上句)
󰡔절보󰡕 착실하게 되도록 살피라는 말이다. ‘교(敎)’는 ‘사(使)’의 의미이다. (󰡔節補󰡕 謂看得使着實也 敎是使字意)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仁也者, 人也. 合而言之, 道也. 旣已不仁, 癢痾疾痛己尙不知, 頑冥之甚, 安知其禮樂之爲禮樂也? 是其無如之何也宜矣. 
大略如此, 更宜玩味, 看敎著實. 

[허순지 질문3] [공자께서는]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어려운 점이 있겠는가?(何有於我哉)’ *『논어(論語)』,「술이(述而)」, 제2장에 “공자(孔子)게서 말씀하셨다. ‘묵묵히 기억하며 배우고 싫어하지 않으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子曰 黙而識之하며 學而不厭하며 誨人不倦이 何有於我哉오)라 했고 또  *『논어(論語)』,「자한(子罕)」, 제15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가서는 공경(公卿)을 섬기고, 들어와서는 부형(父兄)을 섬기며, 상사(喪事)를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으며, 술에 곤(困)함을 당하지 않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 (子曰 出則事公卿하고 入則事父兄하며 喪事를 不敢不勉하며 不爲酒困이 何有於我哉오)”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27쪽 및 175쪽 참고.  
라고 하셨습니다만, 성인(聖人)의 관점에서 중인(衆人)을 보면, 곧 ‘두루 너의 덕’ 편위이덕(徧爲爾德)
󰡔간보󰡕 허순지(許順之)는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마음’은 ‘위태로운 인심(人心)’이고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마음’은 ‘은미한 도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선생께서 이와 같이 답하신 것이다. (󰡔刊補󰡕 順之 以操舍存亡爲人心惟危 以出入無時莫知其鄕爲道心惟微 先生答之如此)  [역주] *『맹자(孟子)』,「고자(告子)」상, 제 8장에 “...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셨다....(...孔子曰 操則存하고 舍則亡하여 出入無時하며 莫知其鄕은 惟心之謂與인저하시니라...)”라고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28쪽 참고. * 또『서경(書經)』,「우서(虞書)」,「대우모(大禹謨)」제15장에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人心은 惟危하고 道心은 惟微하니 惟精惟一하야사 允執厥中하리라)”라고 했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83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94쪽 참고. 
이어서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만, 중인(衆人)의 관점에서 성인(聖人)을 보면, 흡사 하늘을 사다리로 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논어(論語)』,「자장(子張)」, 제25장에 “ ... 부자(夫子)를 따르지 못함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로 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夫子之不可及也는 猶天之不可階而升也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383쪽 참고.
 이 때문에 성인께서는 사안에 따라 드러내시되, [이 중에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공자께서 자로에게] ‘너는 어찌 ... 라 말하지 않았느냐(女奚不曰)’ *『논어(論語)』,「술이(述而)」, 제18장에 “섭공(葉公)이 자로(子路)에게 공자(孔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子路)가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 그의 사람됨이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이치를 깨달으면> 즐거워 근심을 잊어 늙음이 장차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葉公이 問孔子於子路어늘 子路不對한대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發憤忘食하고 樂以忘憂하여 不知老之將至云爾오)”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37-8쪽 참고.
운운하신 것과 같은 것도 모두 성인의 본분사(本分事)일 뿐입니다. 
[선생의 답변3] 이 단락의 뜻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성인(聖人)의 말씀은 [그대가 이해한 바와 같이] 이처럼 과장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何有於我哉]은 그저 ‘겸손히 물러나서, 스스로 자처하지는 않으려 하는 뜻’을 담고 있는 말씀인 듯합니다.『논어(論語)』에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何有於我哉)’라 말씀하신 곳이 두 군데 있는데 반드시 함께 살펴야 할 것입니다. *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논어(論語)』에 두 군데 나오는 ‘하유어아재(何有於我哉)’의 ‘하유(何有)’를 허순지(許順之)는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何難之有)’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비해 주자(朱子)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何有於我哉’, 自聖人觀衆人, 則徧爲爾德, 無不可者. 自衆人觀聖人, 則猶天之不可階而升也. 故聖人因事發見, 示之以無有也. 猶曰‘女奚不曰’云云, 皆其本分事爾. 
此意固好, 然聖人之詞不如是之夸也, 恐只是謙退不居之詞. 論語有兩處‘何(4-1785)有於我哉’, 須幷觀之. 

[허순지 질문4] [맹자께서] ‘야기(夜気)가 족히 보존될 수 없다(夜氣不足以存)’ *『맹자(孟子)』,「고자(告子)」상, 제8장에 “ ... 비록 사람에게 보존된 것인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그 양심(良心)을 잃어버림이 또한 도끼와 자귀가 나무에 대해서 아침마다 베어 가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일야(日夜)에 자라나는 바와 평단(平旦)의 맑은 기운에 그 좋아하고 미워함이 남들과 서로 가까운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낮에 하는 소행이 이것을 곡망(梏亡)하니, 곡망(梏亡)하기를 반복하면 야기(夜氣)가 족히 보존될 수 없고, 야기(夜氣)가 보존될 수 없으면 금수(禽獸)와 거리가 멀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그 금수(禽獸) 같은 행실만 보고는 일찍이 훌륭한 재질(材質)이 있지 않았다고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실정(實情)이겠는가. (雖存乎人者인들 豈無仁義之心哉리오마는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에 旦旦而伐之어니 可以爲美乎아 其日夜之所息과 平旦之氣에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어늘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나니 梏之反覆이면 則其夜氣不足以存이요 夜氣不足以存이면 則其違禽獸 不遠矣니 人見其禽獸也하고 而以爲未嘗有才焉者라하나니 是豈人之情也哉리오)”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27-8쪽 참고.
라고 했습니다만, [이 말을 할] 처음에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으리오(豈無仁義之心哉)’라고 하셨으니, [우리에게 인의의 마음이] 없다면 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감각기관이 대상 사물과 서로 물질적인 접촉(物交物)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본래부터 존재해온 인의의 마음을 망각하고] 오직 물질만 있다고 여기게 되어 드디어 [인의의 마음과] 현격하게 단절(隔絶)되어버린 것입니다. 맹자께서는 야기(夜氣)를 언급하는 가운데 ‘마땅히 온갖 생각이 맑아지고 고요해진 가운데서 [마음의 본체를] 체득해야만 [마음의] 허명(虚明)함이 저절로 두드러져서 [외물(外物)에] 이끌려 [마음의 본체를] 상실하는 경우가 없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복괘(復卦) 초효(初爻) *『주역(周易)』,「복괘(復卦)」, 초구(初九)효 효사(爻辭)에 “초구(初九)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는지라 뉘우침에 이름이 없으니, 크게 선(善)하여 길(吉)하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옴은 이로써 몸을 닦는 것이다.’”(初九는 不遠復이라 无祗悔니 元吉하니라 象曰 不遠之復은 以修身也라)라 했다. 복괘(復卦)는 64괘 중 24번째 괘이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537-8쪽 참고.
를 가지고서 [맹자의 야기설을] 이해한 다음 [이에 입각하여] 공부에 힘써 보고자 합니다. [선생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선생의 답변4] 사람은 누구나 본 바탕에 인의(仁義)의 마음을 지나고 있습니다. 다만 물욕이 이를 해치게 됨에 따라 흡사 [인의(仁義)의 마음이] 전혀 없는 듯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밤중에 휴식할 때, 대상과 접촉하지 않은 채 지내다 보면 그 기운이 점차 맑아져서 저절로 인의(仁義)의 양심(良心)이 어느 정도 보존이 됩니다. 그래서 평일 아침(平旦)에 일어나 아직 사물과 접촉하지 않고 있을 즈음에는 호오(好惡)가 모두 이치에 합당하게 됩니다. 본래 타고난 도덕적 자질(才)이 바야흐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낮(旦晝) 동안에 [물욕에 이끌린 우리들의] 행위가 곧 [우리의 타고난 도덕적 자질을] 질곡시켜 없애버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이 인의(仁義)의 마음이 곧 앞서와 같이 [더 이상]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질곡이 매우] 심한 경우, 밤 사이에 비록 휴식을 한다 해도 기(氣)가 맑아지지 않아서 이 인의(仁義)의 마음이 보존되지 못함에 따라 [인간이라고는 하나] 짐승과 별 차이가 없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낮 동안에 이런 저런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사욕을 이겨내고 예(禮)에 돌아가야 하며” “분노를 억제하고 욕심을 막아야 함”을 이해하여 이 기운(즉 夜気 : 본연의 양심)을 늘 맑게 하면 인의(仁義)의 마음이 늘 보존될 것입니다. 이는 [그대의 주장과 같이] 굳이 ‘밤 사이에 온갖 생각이 맑고 고요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공부에 힘쓰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반드시 이와 같이 해야 한다면 낮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 ‘불원복(不遠復)’에 대해서는 다시금 [이천선생의] 역전(易傳)을 검토해 보십시오, [그대가] 논한 것과는 다릅니다.] * ‘불원복(不遠復)’에 대해 이천은『역전(易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復)은 양(陽)이 돌아와서 회복함이니, 양(陽)은 군자(君子)의 도(道)이므로 복(復)은 선(善)으로 돌아오는 뜻이 된다. 초(初)는 양강(陽剛)이 와서 회복하여 괘(卦)의 초(初)에 처하였으니, 돌아오기를 가장 먼저 한 자이니, 이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잃은 뒤에 돌아옴이[회복함이] 있는 것이니, 잃지 않았다면 무슨 돌아옴이 있겠는가. 오직 잃기를 멀리 하지 않고 돌아오면 뉘우침에 이르지 않으니, 이는 크게 선(善)하여 길(吉)한 것이다. 지(祗)는 마땅히 음(音)이 저(抵)여야 하니, 이름이다. 《옥편(玉篇)》에는 ‘적(適)[감]’이라 하였는데 뜻이 또한 같으니, ‘무지회(无祗悔)’는 뉘우침에 이르지 않는 것이다. 감괘(坎卦)에 이르기를 “지기평무구(祗旣平无咎)[이미 평함에 이르러 허물이 없다.]”라 하였으니, 이미 평(平)함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안자(顔子)는 드러난 과실이 없으므로 부자(夫子)가 “도(道)에 가깝다.”고 이르셨으니, 바로 뉘우침에 이름이 없는 것이다. 과실이 이미 드러나기 전에 고치면 무슨 뉘우침이 있겠는가. 이미 힘쓰지 않고 도(道)에 맞지 못하며 하고자 하는 바가 법도를 넘지 않게 하지 못한다면 이는 허물이 있는 것이나, 밝고 강(剛)하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불선(不善)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함이 없고, 이미 알면 일찍이 급히 고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뉘우침에 이르지 않은 것이니, 바로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지(祗)는 육덕명(陸德明)은 음(音)이 지(支)라 하였고,《옥편(玉篇)》과《오경문자(五經文字)》와 《군경음변(群經音辨)》에는 모두 의부(衣部)에 보인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옴은 군자(君子)가 몸을 닦는 도(道)이다. 학문(學問)하는 방도는 다른 것이 없다. 오직 불선(不善)임을 알면 빨리 고쳐 선(善)을 따를 뿐이다. (復者는 陽反來復也니 陽은 君子之道라 故復爲反善之義라 初는 剛陽來復하여 處卦之初하니 復之最先者也니 是不遠而復也라 失而後有復이니 不失則何復之有리오 唯失之不遠而復이면 則不至於悔니 大善而吉也라 祗는 宜音抵니 抵也라 玉篇云適也라하니 義亦同하니 无祗悔는 不至於悔也라 坎卦曰 祗旣平无咎라하니 謂至旣平也라 顔子无形顯之過일새 夫子謂其庶幾라하시니 乃无祗悔也라 過旣未形而改면 何悔之有리오 旣未能不勉而中하고 所欲不踰矩면 是有過也나 然其明而剛이라 故一有不善이면 未嘗不知요 旣知면 未嘗不遽改라 故不至於悔하니 乃不遠復也라 祗는 陸德明音支라하고 玉篇, 五經文字, 群經音辨에 쯂見衣部하니라 不遠而復者는 君子所以修其身之道也라 學問[一无問字]之道는 无他也라 唯其知不善이면 則速改以從善而已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周易傳義󰡕,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537-8쪽 참고.

‘夜氣不足以存’ 始論‘豈無仁義之心哉’, 無之是生不得. 惟其物交物, 則惟知有物, 遂與隔絶. 孟子於夜氣言之, 當其萬慮澄寂之中體之, 虛明自別, 引而喪之者無有矣. 故欲以復之初爻及之, 庶幾有以用力. 如何? 
人皆本有仁義之心, 但爲物欲所害, 恰似都無了. 然及其夜中休息之時, 不與物接, 其氣稍淸, 自然仁義之良心却存得些子. 所以平旦起來, 未與物接之際, 好惡皆合於理. 然才方如此, 旦晝之所爲便來梏亡之, 此仁義之心便依前都不見了. 至其甚也, 夜間雖得休息, 氣亦不淸, 存此仁義之心不得, 便與禽獸不遠. 學者正當於旦晝之所爲處理會克己復禮, 懲忿窒欲, 令此氣常淸, 則仁義之心常存, 非是必待夜間萬慮澄寂, 然後用功也. 若必如此, 則日間幹當甚事也? [주; ‘不遠復’更檢易傳看, 與所論亦不相似. ]
 
[허순지 질문5] [맹자께서는] ‘잡으면 보존되고[주; 인(仁)을 지킬 수 있다.] 놓으면 잃어서[주; 인(仁)을 지킬 수 없다.]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맹자(孟子)』,「고자(告子)」상, 8장에 “ ....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셨다....(...孔子曰 操則存하고 舍則亡하여 出入無時하며 莫知其鄕은 惟心之謂與인저하시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27쪽 참고. 
 [주 ; 인(仁)을 그만둘 수 없음이 또한 이와 같다.]’ 라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 맹자가 여기서] ‘잡으면 보존되고 * 주희집 주 ; ‘사(似)’는 송(宋)나라 절(浙)본에는 ‘승(升)’으로 되어 있다.(似: 宋浙本作‘升’.)
, 놓으면 잃는다’한 것은 [서경의]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롭다.’ *『서경(書經)』,「우서(虞書)」,「대우모(大禹謨)」제15장에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人心은 惟危하고 道心은 惟微하니 惟精惟一하야사 允執厥中하리라)”라고 했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83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94쪽 참고.
고 한 것과 같고,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서경의] ‘도심(道心)은 오직 은미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저의] 망령된 뜻으로 이와 같이 추측해봅니다만, 몹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바라옵건대 한두 가지 가르침을 내려주시어 [저의 공부가] 향할 곳을 알려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선생의 답변5]『맹자(孟子)』의 이 네 구절 *『맹자』의 네 구절 : 앞의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으니,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어 그 향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는 것을 가리킴.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28쪽 참고. 
은 사람의 마음(人心)이 ‘살아있는 것(活物)’임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활물(活物)인 이 마음을] 반드시 잘 잡아서 지켜야 하고 놓아두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선생처럼 안배 * 선생처럼 안배 : 허순지(許順之)는,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는 것[操則存舍則亡]’을 ‘인심은 오직 위태롭다[人心惟危]’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향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出入無時莫知其鄕]’을 ‘도심은 오직 은미하다[道心惟微]’로 보았다. 허순지가 『맹자』의 이 네 구절과 순(舜)의 16자 심법(心法)을 접목시켜 이해하였기 때문에 선생께서 이러한 안배를 경계하신 것이다.
해서도 안 됩니다. * 주희집 주 ; ‘역(亦)’이 순희(淳熙)본에는 ‘이(耳)’로 되어 있다. (亦: 淳熙本作‘耳’.)
 마음은 하나이지만 잡아 보존하면 의리가 밝아지므로 그것을 도심(道心) 도심(道心)
󰡔차의󰡕 여기서 말하는 도심(道心)이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序文)에서의 도심(道心)과는 같지 않다. (󰡔箚疑󰡕 此與中庸序不同) [역주] * 주자가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序文)에서 인심과 도심에 관해 설명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논하건대, 심(心)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性命)의 올바른 것에서 근원하여, 지각(知覺)을 한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혹은 위태로워 편안치 못하고, 혹은 미묘(微妙)하여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비록 상지(上智)라도 인심(人心)이 없지 못하고, 또한 이 성(性)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비록 하우(下愚)라도 도심(道心)이 없지 않으니, 이 두 가지가 방촌(方寸)[마음]의 사이에 섞여 있어서 다스릴 바를 알지 못하면, 위태로운 것이 더욱 위태로워지고, 은미한 것이 더욱 은미해져서 천리(天理)의 공변됨이 끝내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정(精)은 두 가지의 사이를 살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요, 일(一)은 본심(本心)의 올바름을 지켜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에 종사(從事)하여 조금도 간단(間斷)함이 없어, 반드시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일신(一身)의 주장을 삼고, 인심(人心)이 매양 명령(命令)을 듣게 하면, 위태로운 것이 편안하게 되고, 은미한 것이 드러나게 되어, 동(動)·정(靜)과 말하고 행하는 것이 저절로 과(過)·불급(不及)의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蓋嘗論之컨대 心之虛靈知覺은 一而已矣어늘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는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하고 或原於性命之正하여 而所以爲知覺者不同이라 是以로 或危殆而不安하고 或微妙而難見耳라 然이나 人莫不有是形이라 故로 雖上智나 不能無人心하고 亦莫不有是性이라 故로 雖下愚나 不能無道心하니 二者가 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면 則危者愈危하고 微者愈微하여 而天理之公이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리라 精은 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요 一은 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니 從事於斯하여 無少間斷하여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하고 而人心每聽命焉이면 則危者安하고 微者著하여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리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53-4쪽 참고.
이라고 하고, 놓아 두어 잃어버리게 되면 물욕이 방자해지므로 그것을 인심(人心)이라고 합니다. [주 ; ‘망(亡)’은 ‘없는 것(無)’이 아니라 다만 [마음이 밖으로] 내달려 나가 외물(外物)을 따라 가는 것이다.] 인심으로부터 거두어 돌이키면 바로 도심이고, 도심으로부터 흩어져 나가면 곧 인심입니다. [이 인심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잠깐 동안에 온갖 형상이 어슴프레하게 교차하게 되니, 이른바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어 그 향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대의 글에서] 이끌어 들인 ‘인(仁)’ 자는 더욱 옳지 않습니다. 꼭 반대로 말한 것 도설료(倒說了)
󰡔차의󰡕 사람이 반드시 이 마음(道心)을 항시 보존함으로써 천리(天理)가 밝아지고 인욕(人欲)이 소멸되게끔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仁)을 언급할 수 있는데, 이제 허순지(許順之)는 [마음을] ‘잡거나 내버려 두는 곳’에 仁을 끌어들여 설명했기 때문에 [선생께서는 이를] ‘거꾸로 말했다’고 하신 것이다. (󰡔箚疑󰡕 人須常存此心 使天理明而人欲消 方謂之仁 今順之於操舍處 便以仁爲言 故曰倒說)
󰡔익증󰡕 사람이 [마음을] 잡아 보존(操存)할 수 있어야 [조존(操存)한 결과에 대해 비로소] 인(仁)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 [허순지(許順之)는] ‘인(仁)으로 지켜낼 수 있다’로서 [마음을] ‘잡아 보존함(操存)’이라는 말에 [주를 달아] 배당시켰는데, 이는 인(仁)이 ‘조존(操存)’에 앞서 있다고 말한 셈이니, 결국 거꾸로 말한 것이다. (󰡔翼增󰡕 人能操存 乃可謂仁 而今以仁能守配操存 則是仁在操存之先 乃倒說也)
이니, 우선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완미(玩味)해야지 지나치게 고상하고 오묘하게 여겨 감을 잡을 수 없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성현의 말씀을 밝게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아랫 단계에 나아가 [성현의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 敎分明(敎分明)
󰡔기의󰡕 ‘교(敎)’는 ‘령(令)’과 의미가 같다. (󰡔記疑󰡕 敎猶令也)
입니다. 만약 윗 단계 하면상면(下面上面)
󰡔차의󰡕 여기서 성현(聖賢)이 하신 말씀의 ‘상면(上面)’ 혹은 ‘하면(下面)’이라 함은 대개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공자(孔子)께서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는다(操則存舍則亡)’고 하신 말씀은 ‘하면(下面)’에 나아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허순지의 경우 다짜고자 인을 말했으니 이는 ‘상면(上面)’으로부터 말한 것이다.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는다(操則存舍則亡)’는 말은 ‘공부(工夫)’이지만 ‘인(仁)’은 ‘성리(性理)’이니 그 분야가 현격하게 다르다. (󰡔箚疑󰡕 謂聖賢之言之上下面 蓋就孔子言操舍處說出其意 則是就下面說也 而如順之則却說仁是從上面說也 操舍是工夫 仁是性理也 其界分逈然不同)
를 지향하면서 [현학적인 내용을] 토론해 나간다면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건주(建州) 사람이 아직 천주(泉州)로 가는 길을 모른다면 그에게 남검주(南剣州)를 따라 길을 물어 가게 해야지 어찌 그로 하여금 장주(漳州)를 지나 [천주(泉州)를] 찾아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건주...장주(建州...漳州)
󰡔익증󰡕 건주(建州)는 건녕(建寧)의 옛 이름이다. 천주(泉州)는 그 남쪽에 있다. 장주(漳州)는 천주(泉州)의 남쪽에 있고 남검주(南劒州)는 천주(泉州)의 북쪽에 있다. 하면(下面)에 나아가 강설(講說)하지 않고 도리어 상면(上面)에 나아가 강설(講說)해 나가는 것은 흡사 사람이 검주(劒州)로부터 천주(泉州)로 가는 길을 묻지 않고 도리어 장주(漳州)를 지나 천주(泉州)로 가는 길을 찾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翼增󰡕 建州建寧舊名 泉州在其南 漳州在泉州之南 南劒州在泉州北 言不就下面講說却向上面說去 猶人不從劒州問泉州路 却過漳州尋泉州路也)
 이것은 큰 문제이니 모른 채 있어서는 안 됩니다.
‘操則存,,[주; 仁能守之] 舍則亡,[주; 仁不能守之]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仁之不可已也如是. 似以‘操則存, 舍則亡’爲人心惟危, ‘出入無時, 莫知其鄕’爲道心惟微. 妄意推測, 慙作之甚, 乞賜提誨一二, 庶知所向. 幸甚幸甚!
孟子此四句只是說人心是箇活物, 須是操守, 不要放舍, 亦不須如此安排(4-1786)也. 心一也, 操而存則義理明而謂之道心, 舍而亡則物欲肆而謂之人心. 亡不是無, 只是走出逐物去了. 自人心而收回, 便是道心 : 自道心而放出, 便是人心. 頃刻之間, 恍惚萬狀, 所謂‘出入無時, 莫知其鄕’也. 所引‘仁’字尤不是, 正是倒說了. 且更平心玩味, 不要說得太高妙, 無形影, 非唯敎他人理會不得, 自家亦理會不得也. 大率講學本爲聖賢之言難明, 故就下面說出, 敎分明. 若是向上面說將去, 卽轉見理會不得矣. 如建州人未識泉州, 須且敎他從南劍州問路去, 豈可敎他過漳州尋耶? 此是大病, 不可不知.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0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스무 번째 편지(제20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제19서와 함께 이 편지(제20서)에 대해서도 년대 고증을 빼 놓고 있다. 그러나 제18서가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 이후에 씌어졌고, 제21서가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에 씌어졌으니 이 편지(제19서)는 아마도 주자 40세 전후 시기가 아닌가 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9쪽 및 107쪽 참고.
 『맹자(孟子)』의 ‘명(命)’ 개념에 대한 논의가 이 편지의 핵심이다.

논의 하신 바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린다(操舍存亡)’는 그대의 학설은 대체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아직 분명치 못한 곳이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반드시 다른 날 직접 만나 토론해야 할 것입니다. 산 머리에서 깨달은 몇 조목에서 비로소 옛 학설이 지나치게 높은 폐단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在山...之弊(在山...之弊)
󰡔차의󰡕 [이] 또한 허순지(許順之)가 논한 말이다. (󰡔箚疑󰡕 又順之所論之語)
 예를 들어 [맹자가] ‘군자는 [이를] 명(命)이라 이르지 않는다.(君子不謂命)’ *『맹자(孟子)』,「진심(盡心)」하, 제24장에 “입이 맛에 있어서와 눈이 색깔에 있어서와 귀가 음악에 있어서와 코가 냄새에 있어서와 사지(四肢)가 안일(安佚)에 있어서는 본성(本性)이나, 명(命)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이것을 성(性)이라 이르지 않는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인(仁)이 부자간(父子間)에 있어서와 의(義)가 군신간(君臣間)에 있어서와 예(禮)가 빈주간(賓主間)에 있어서와 지(智)가 현자(賢者)에 있어서와 성인(聖人)이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명(命)이나, 본성(本性)에 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명(命)이라 이르지 않는다.’ (孟子曰 口之於味也와 目之於色也와 耳之於聲也와 鼻之於臭也와 四肢之於安佚也에 性也나 有命焉이라 君子不謂性也니라 仁之於父子也와 義之於君臣也와 禮之於賓主也와 智之於賢者也와 聖人之於天道也에 命也나 有性焉이라 君子不謂命也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427쪽 참고.
라고 할 때의 명(命)은 다만 ‘[나의 의지를 넘어선] 밖에서 만나게 된 것’ 소치어외(所値於外)
󰡔절보󰡕 이는 󰡔맹자집주(孟子集註)󰡕와 같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 ‘명(命)’을 설명한 것이] 마땅히 정론(正論)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또 살피건대 이 편지는 마땅히「오백풍에게 답하는 글(答吳伯豐書)」과 함께 참고해서 연구해야 한다. 백풍(伯豐)에게 보낸 문목(問目)의 내용이 바로 이 편지의 뜻과 같다. (󰡔節補󰡕 此與集注不同 然恐當爲正論 又按此書當與答吳伯豐書參究 伯豐問目 正與此書之意同)  [역주] * 주자(朱子)는 “군자(君子)는 [그것을] 명(命)이라 하지 않는다(君子不謂命也)”에 대해 󰡔맹자집주(孟子集註)󰡕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인(仁)·의(義)·예(禮)·지(智)와 천도(天道)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명(命)에서 받은 것이나, 받은 것이 후박(厚薄)과 청탁(淸濁)이 있다. 그러나 본성(本性)이 선(善)하여, 배워서 다할 수 있으므로 명(命)이라 이르지 않는다.’ 장자(張子)가 말씀하였다. ‘안영(晏嬰)은 지혜로웠으나 중니(仲尼)를 알지 못했으니, 이는 명(命)이 아니겠는가.’ 내가 상고해 보건대, 받은 것이 후(厚)하고 청(淸)하면 그 인(仁)이 부자간(父子間)에 있어서 지극하고 의(義)가 군신간(君臣間)에 있어서 극진하고, 예(禮)가 빈주간(賓主間)에 있어서 공손하고, 지(智)가 현부(賢否)에 대해서 밝고, 성인(聖人)이 천도(天道)에 대해서 부합되지 않음이 없어, 순수함이 또한 그치지 않는 것이요, 박(薄)하고 탁(濁)하면 이와 반대이니, 이는 모두 이른바 명(命)이라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자(者)는 마땅히 부(否)가 되어야 하고, 인(人)은 연자(衍字)이다.’하니,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내 스승께 들으니, 말씀하시기를 ‘이 두 조항은 다 본성(本性)에 있는 것으로서 하늘에서 명(命)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앞의 다섯 가지를 본성(本性)이라고 여겨서 비록 얻지 못함이 있더라도 반드시 구하고자 하고, 뒤의 다섯 가지를 명(命)이라고 여겨서 한 번이라도 이르지 못함이 있으면 다시 힘을 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께서 각기 그 중요한 부분을 가지고 말씀하시어, 이것을 펴고 저것을 억제하려 하신 것이다.’ 이는 장자(張子)의 이른바 ‘봉양은 하늘에 명(命)을 맡기고, 도(道)는 자신에게 이름을 책(責)한다.’는 것이니, 그 말씀이 요약하고도 극진하였다. (程子曰 仁義禮智天道在人이면 則賦於命者나 所稟이 有厚薄淸濁이라 然而性善하여 可學而盡이라 故로 不謂之命也니라 張子曰 晏嬰이 智矣로되 而不知仲尼하니 是非命邪아 愚按 所稟者厚而淸이면 則其仁之於父子也에 至하고 義之於君臣也에 盡하고 禮之於賓主也에 恭하고 智之於賢否也에 哲하고 聖人之於天道也에 無不脗合而純亦不已焉이요 薄而濁이면 則反是하니 是皆所謂命也니라 或曰 者는 當作否요 人은 衍字라하니 更詳之니라 ○ 愚聞之師하니 曰 此二條者는 皆性之所有而命於天者也라 然이나 世之人이 以前五者로 爲性이라하여 雖有不得이라도 而必欲求之하고 以後五者로 爲命이라하여 一有不至하면 則不復致力이라 故로 孟子各就其重處言之하여 以伸此而抑彼也시니 張子所謂 養則付命於天이요 道則責成於己니 其言이 約而盡矣로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428쪽 참고.
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또 순(舜)이 고수(瞽瞍)에 있어서나, 문왕(文王)이 주(紂)에 있어서나, 안영(晏嬰)이 공자(孔子)에 대해서나, 공자께서 시대와 지위(時位)를 얻지 못한 것과 같은 종류는 ‘기질이 같지 않았음’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수...부동(不須...不同)
󰡔차의󰡕 허순지(許順之)의 생각에는 대개 ‘인지어부자(仁之於父子)’ 이하 다섯 가지의 경우 모두가 기질이 같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는 위의 세 구절은 그래도 ‘기질의 부동(不同)’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아래 두 구절 즉 ‘지(智)가 현자(賢者)에 있어서와 성인(聖人)이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기질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고 보신 것이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아래 두 구절에 대해서는 이 말이 시행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또 ‘지(智)가 현자(賢者)에 있어서의 경우’는 그래도 기질이 같지 않음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성인(聖人)이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경우’는 [성인과 천도가] 아득히 합일되어 아무런 틈이 없는데 어떻게 [기질이] 같지 않음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 (󰡔箚疑󰡕 順之之意 蓋以仁之於父子以下五者 皆以爲氣質不同 故先生以爲上三句猶可言氣質不同 而下二句 智之於賢者 聖人之於天道 則不可以氣質言 故曰下兩句說不行 且智之於賢者 猶可以氣質不同言 至於聖人之於天道則沕合無間 何可以不同言乎)  [역주] * 󰡔맹자(孟子)󰡕,「진심(盡心)」하, 24장.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427-8쪽 참고.
󰡔잡지󰡕 ‘구설(舊說)’은 아마도 선생의 구설(舊說)인 듯하다. 선생께서는 허순지(許順之)가 󰡔맹자(孟子)󰡕에 관해 [선생께] 질문한 것을 계기로 하여, 비로소 [선생] 스스로 [선생의] 구설(舊說) 여러 조목에 지나치게 고원(高遠)한 폐단이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허순지(許順之)가 이점을 경계하여 평이(平易)하고 절실하며 비근한 데서 이해해 나가고 다시는 종전과 같은 높은 것을 좋아하지 말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렇다면 ‘기질이 부동(不同)하다’는 말은 아마도 허순지의 말이 아닌 듯하다. (󰡔雜識󰡕 舊說疑先生舊說也 先生因順之之問孟子 自理會舊說數條始覺有太高之弊 故欲順之以此爲戒 理會平易切近處而不復如前好高也 然則氣質不同 恐非順之之語也)
󰡔익증󰡕 이는 󰡔맹자집주(孟子集註)󰡕의 내용과는 같지 않다. [선생의] 이런 의리는 또「남헌에게 답하는 글(答南軒書)」에도 보인다. (󰡔翼增󰡕 此與集注不同 此義又見答南軒書)
 왜냐하면 아래 두 구절에 대해서는 이 말이 시행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이와 같은 부류는 매우 많으니, 모두 높은 것을 좋아한 데서 빚어진 문제입니다. 대저 글을 읽을 때는 매번 이 점을 경계하면서, 우선 평이하고 절실하며 비근하여 분명한 곳에서 이해(理會)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주희집 주 ; 순희(淳熙)본에 이 구절 끝에 ‘운운(云云)’이라는 두 글자가 붙어 있다.(淳熙本句末有‘云云’二字.)

所論操舍存亡之說, 大槪得之. 然有未分明處, 須他日面論也. 在山頭理會數條, 始知舊說太高之弊. 如‘君子不謂命’, 止是以所値於外者而言. 如舜之於瞽(4-1787)瞍, 文王之於紂, 晏嬰之於孔子, 孔子之不得時位之類, 不須說氣質不同, 蓋爲下兩句說不行故也. 凡若此類甚多, 皆好高之弊. 大抵讀書日以此爲戒, 且於平易切近分明處理會爲佳耳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1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스물한 번째 편지(제21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제21서)가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봄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제21서) 내용 중에 “다만 봄에 조문도 하고 문병도 하느라 조금의 여유도 없었는데 지난 달 말쯤 위원리(魏元履)께서 또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친구의 죽음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春來弔喪問疾 略無少暇 前月末間 元履又不起疾 交遊凋落 可爲傷歎)”라고 했는데, 위원리(魏元履)는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에 죽었다. 따라서 이 편지는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봄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07쪽 참고.
 이 편지의 전반부는 친구 위원리(魏元履)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으며, 후반부는『맹자(孟子)』진심 하, 24장에 나오는 ‘성(性)’과 ‘명(命)’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주제로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심도 있는 토론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삼가 머리를 조아립니다. 축제(祝弟)가 돌아옴에 따라 그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대가] 우천(尤川)에 와서 연일 강습(講習)하는 즐거움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매우 위로가 됩니다. 서신을 받은 후 날씨가 따뜻해졌습니다. 빼어난 봄 경치 많이 감상하기길 바랍니다. 이곳에서 저의 생활은 작년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봄에 조문도 하고 문병도 하느라 주희집 주 ; ‘단(但)’자 이상의 내용은 원래 빠져 있어서, 순희(淳熙)본에 근거하여 보충한다.(‘但’字以上原缺, 據淳熙本補.) 
 조금의 여유도 없었는데 지난 달 전월(前月)
󰡔절보󰡕 건도(乾道, 宋나라 孝宗의 연호) 계사년(癸已, 1173년, 주자 44세) 윤월(閏月)이다. (󰡔節補󰡕 乾道癸已閏月)
 말쯤 위원리(魏元履)께서 또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원리우불기(元履又不起)
󰡔翼增󰡕 위원리(魏元履)는 건도(乾道)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에 [진준경(陳俊卿)의 추천으로] 태학록(太學錄)에 임명되어 시무(時務)에 대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하다가 태주교수(台州敎授)로 좌천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翼增󰡕 元履 以乾道戊子 召爲太學錄 抗疏盡言 罷爲台州敎授 尋病卒)
 친구의 죽음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흐르고 허물을 고치지 못한 후회 * 회린(悔吝) ; (1) 회한(悔恨). (2) 조그마한 과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758쪽.] 
는 날로 쌓이는데 이 세상에 알려질 만한 일을 한 것도 없이 죽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熹頓首: 祝弟歸, 承書, 知來尤川日有講習之樂, 甚慰. 信後喧暖, 伏惟德履佳勝. 熹此如昨,但春來弔喪問疾, 略無少暇. 前月末間, 元履又不起疾, 交遊凋落, 可爲傷歎. 而歲月如流, 悔吝日積, 亦將無聞而死, 爲可懼耳. 

『맹자(孟子)』의 의심스런 부분에 대한 그대의 생각은 매우 좋습니다. 나도 심상(尋常) * 심상(尋常) ; (1) 여덟 자와 열 여섯 자, 약간의 길이, 약간의 땅 (2) 평범함, 보통.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606쪽.]
 바로 이점을 의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 주희집 주 ; ‘역(亦)’은 원래 ‘이(以)’로 씌여 있었는데 순희(淳熙)본과 송(宋)나라 절(浙)본에 근거하여 고친다.(亦: 原作‘以’, 據右引及宋浙本改.)
 만약 여러 학자들의 학설과 같이 생각한다면 곧 매사 그저 일변(一邊)만 말한 셈이 됩니다. 매사...일변(每事...一邊)
󰡔차의󰡕 ‘매사(每事)’는 ‘입이 맛에 대한 것’, ‘귀가 들음에 대한 것’, ‘인(仁)이 부자(父子)에 대한 것’, ‘의(義)가 군신(君臣)에 대한 것’ 등을 말한다. ‘일변(一邊)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여섯 가지 경우(口之於味 등)에 있어서는 단지 성(性)만 말하고 명(命)은 말하지 않으며, 아래 여섯 가지 경우(仁之於父子 등)에 있어서는 단지 명(命)만 말하고 성(性)은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箚疑󰡕 每事 謂口之於味 耳之於聽 仁之於父子 義之於君臣等也 說得一邊 謂於上六者 只言性而不言命 於下六者 只言命而不言性也)
󰡔절보󰡕 ‘재인(在人)’과 ‘재리(在理)’ 그리고 ‘재아(在我)’와 ‘재피(在彼)’가 양변(兩邊)이다. 만약 오로지 부여받은 분(所賦之分)만 말하고 바꿀 수 없는 법칙(不易之則)을 말하지 않거나, 오로지 바꿀 수 없는 법칙(不易之則)만 말하고 부여받은 분(所賦之分)은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일변(一邊)만 말한 것이다. ‘재아(在我)’와 ‘재피(在彼)’의 경우도 이와 같다. (󰡔節補󰡕 在人與在理 在我與在彼 是兩邊 若專言所賦之分而不言不易之則 或專言不易之則而不言所賦之分別 是只說一邊也 在我在彼倣此)
󰡔익증󰡕 정씨(程氏) 및 장씨(張氏)의 학설에서는 다만 ‘부여받은 분수(所賦之分)’와 ‘부여받은 것이 두텁고 엷은 차이(厚薄之稟)’가 있다는 것만 말하고, ‘이치가 바뀌지 않음(理之有不易)’과 ‘만남과 만나지 못함의 차이(遇不遇之殊)’가 있음을 겸하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생의] 이 학설은 앞 편지에 비해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맹자집주(孟子集註)󰡕와는 같지 않다. (󰡔翼增󰡕 程張所說 只言所賦之分厚薄之稟 而不兼言理之有不易及遇不遇之殊也 此說比前書稍變而亦與集注不同)
 요컨대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합니다. 요수설(要須說)
󰡔차의󰡕 이 말 다음에 나오는 말을 통해 선생께서는 일변(一邊)만을 말함으로써 생긴 폐단을 바로잡으신 것이다. (󰡔箚疑󰡕 此下所以正說得一邊之弊者也)
󰡔잡지󰡕 선생의 구설(舊說)은 제가(諸家)의 설(說)을 따랐기 때문에 병통이 있음을 면치 못했는데 이제 비로소 이를 바로잡았다는 것이다.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要須說)’라고 한 그 이하의 내용이 바로 선생의 정론(定論)이다. (󰡔雜識󰡕 先生舊說 從諸家說 故不免有病 今始正之 要須說以下 乃定論也)
 즉 ‘입이 맛에 있어서(口之於味)’운운 *『맹자(孟子)』,「진심(盡心)」하, 제24장.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427-8쪽 참고.
한 것은 본래 본성상의 욕구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있어서는 부여 받은 분수(分)가 있고, 이치에 있어서는 바꿀 수 없는 법칙이 있으니 모두 명(命)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군자는 이를 성(性)이라 하지 않고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명(命)이라 하는 것입니다. 또 ‘인이 부자간에 있어서(仁之於父子)’운운한 것은 나(我)에게 있어서는 부여받은 것이 후(厚)하거나 박(薄)한 차이가 있고, 저(彼)에게 있어서는 ‘만나거나 만나지 못함(遇不遇)’의 다름이 있으니 모두 命입니다. 그러나 본성(性)이라 여길 수 있는 점이 있으니, 이 때문에 군자는 이를 명(命)이라 하지 않고 [성이라 여겨] 자기에게서 그것이 성취되기를 독려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와 같이 보아야만 의사(意思)가 비로소 원만해져서 방원(方圓)
󰡔차의󰡕 ‘방(方)’은 ‘시(始)’와 의미가 같다. (󰡔箚疑󰡕 方猶始也)
 결점이 없게 됩니다. 시험 삼아 이 점을 깊이 생각해보시고 다시금 석장(石丈) 및 여러 분들의 의견을 참고하고 비교하여 [저를] 깨우쳐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동안(同安)에서 때맞추어 편지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천하고 누추한데도 일일이 안부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이들도 그대 안부를 묻는군요. 나머지는 오직 때에 맞추어 자중자애하기를 바랍니다. 자세한 말씀 다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두 번 절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 주희집 주 ; ‘동안(同安)’ 이하의 내용이 원래 빠져 있어서, 순희(淳熙)본에 의거하여 보충한다. (‘同安’以下原缺, 據淳熙本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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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喩孟子疑處甚善, 鄙意尋常正亦疑此. 若如諸家之說, 卽每事只說得一邊. 要須說‘口之於味’云云, 此固性之所欲, 然在人則有所賦之分, 在理則有不易之則, 皆命也. 是以君子不謂之性而付命於天. ‘仁之於父子’云云, 在我則有厚薄之稟, 在彼則有遇不遇之殊, 是皆命也. 然有性焉, 是以君子不謂之命而責成於己. 須如此(4-1788)看, 意思方圓, 無欠闕處. 請試思之, 更與石丈諸公參較喩及爲幸. 同安想時得書, 賤累一一承問, 感感. 兒輩附拜問意. 餘惟以時自愛, 不宣. 熹再拜上狀.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2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스물두 번째 편지(제22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제22서) 역시 제21서에 이어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제22서) 내용 중에 “우천(尤川)에서는 학교 교육의 정사를 매우 엄숙하게 시행하여 한 고을이 교화가 되고 있으니 매우 기쁩니다. 임택지(林擇之)의 편지에, “고전현감(古田縣監)이 듣고 본받고자 한다”고 하니, 과연 그렇다면 석재(石宰 : 석자중(石子重)의 교화가 우천에 행해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겠군요.(尤川學政甚肅 一方向風 極可喜 擇之書來 云古田宰聞之亦欲效顰 果爾則石宰之化不止行於尤川矣)”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석자중(石子重)의 우계(尤溪)에서의 학정(學政)을 가리키는 것이다. 살피건대 석자중이 우계에서 학정을 단속(整肅)한 것은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과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사이다. 21서를 계사년 봄으로 추정했으니, 이 편지(22서)도 마땅히 계사년에 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07쪽 참고.
 이 편지는 석자중(石子重)이 우계(尤渓)에서 학정(学政)을 훌륭하게 단속한 것과 이를 다른 고을에서도 본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허순지(許順之)의 경제를 걱정하기도 한다.

우천(尤川)에서는 학교 교육의 정사 우천학정(尤川學政)
󰡔기의󰡕 ‘우천(尤川)’은 곧 ‘우계(尤溪)’이다. 석자중(石子重)이 우계(尤溪)를 다스리면서 임택지(林擇之)에게 교학(敎學)을 맡게 했다. 이에 배우는 자들이 매우 왕성하게 모여들게 되었다. (󰡔記疑󰡕 尤川卽尤溪 子重爲尤溪命擇之掌敎學 學者甚盛)
를 매우 엄숙하게 시행하여 한 고을이 교화가 되고 있으니 매우 기쁩니다. 임택지(林択之)의 편지에, “고전현감(古田 고전(古田) 
󰡔익증󰡕 [고전(古田)은] 복주(福州)에 속해 있었다. (󰡔翼增󰡕 屬福州)
県監)이 듣고 본받고자 효빈(效顰) 
󰡔절보󰡕『장자(莊子)』,「천운(天運)」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즉 서시(西施)라는 미인이 가슴에 병이 나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더니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어] 그 마을의 추녀도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꼴이 너무나 흉측하였기에] 그 마을의 부자들(富人)은 문을 굳게 잠근 채 밖을 나가지 않게 되고 가난한 자들(貧人)은 처자(妻子)를 이끌고 마을에서 달아나 버렸다는 것이다. (󰡔節補󰡕 莊子 西施病心而顰 其里之醜人 亦捧心而矉 其里之富人堅閉門而不出 貧人挈妻子而去之走) [역주] * 안동림(安東林) 역주, 󰡔장자(莊子)󰡕 외편(外篇), (서울, 玄岩社, 1980), 620쪽 참고.
󰡔익증󰡕 ‘빈(顰)’이 ‘빈(矉)’으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 (󰡔翼增󰡕 顰或作矉)
 한다”고 하니, 과연 그렇다면 석재(石宰 : 석자중(石子重)의 교화가 우천(尤川)에 행해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겠군요. 천하의 일은 할만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니 이번 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순지(順之)는 이미 가정을 이루었으니 생활을 꾸려가야 하겠군요. 편지에서 말한 내용은 어떻게 조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식주(衣食住)의 바탕이 있어야 곧 남들과 어울리는 중에 남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니 이것도 기(気) 양기(養氣)
󰡔차의󰡕 여기서의 ‘기(氣)’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말한다. (󰡔箚疑󰡕 氣謂浩然之氣)
를 기르는데 일조가 되겠지만 조급하게 황황(皇皇) 
󰡔익증󰡕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허둥지둥 재물과 이익을 추구하면서 항시 결핍을 두려워하는 것이 庶人의 행동방식이다.” (󰡔翼增󰡕 董仲舒曰 皇皇求財利 常恐匱乏者 庶人之行也)
󰡔간보󰡕 ‘황황(皇皇)’은 ‘구하지만 얻지 못한다’는 뜻과 같다. (󰡔刊補󰡕 皇皇如有求而不得之意) [역주] * 황황(皇皇) ; (1) 사방으로 탁 트인 모양, 통달한 모양 (2) 아름다운 모양 (3) 큰 모양 (4) 마음이 안정되지 아니한 모양 (5) 마음이 몹시 급하여 허둥지둥하는 모양.  황황(遑遑)도 같은 뜻이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403쪽.]
 마음을 부려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건대 순지는 이점에 대해 반드시 [특별한 조처를 취함이] 있을 것이니, 이런 지경 여차(如此)
󰡔차의󰡕 ‘급급황황(汲汲皇皇)’ 이하를 말한다. (󰡔箚疑󰡕 謂汲汲皇皇以下也)
에까지는 이르지 않겠지요.
尤川學政甚肅, 一方向風, 極可喜. 擇之書來, 云古田宰聞之亦欲效顰, 果爾則石宰之化不止行於尤川矣. 天下事無不可爲, 但在人自彊如何耳. 觀此可見也. 順之旣有室家, 不免略營生理. 書中所說, 不知當如何措畫. 此固不得不爾也. 粗有衣食之資, 便免俯仰於人, 敗人意思, 此亦養氣之一助也. 但不可汲汲皇皇, 役心規利耳. 想順之於此必有處, 決不至如此也. 





(4-1789)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3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스물세 번째 편지(제23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제23서) 역시 제21서와 제22서에 이어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제23서)가 씌어진 시기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편지의 앞 부분(序)의 내용에 입각하여 추정해 보건대, 이 편지는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07쪽 참고.
 여기서는 주자가 허순지를 위해 지은「존재기(存斎記)」를 아직은 굳이 간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허순지가 이를 간행하려 한 듯하다. 

「존재기(存齋記)」 재기(齋記)
󰡔차의󰡕 선생께서 지으신「존재기(存齋記)」를 말한다. (󰡔箚疑󰡕 先生所作存齋記)
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은 [「존재기(存齋記)」의 각 구절들이] 살아 움직이듯 서로 관련을 맺지(活絡) 활락(活絡)
󰡔익증󰡕 살아 움직여 서로 관련을 맺는다는 말이다. (󰡔翼增󰡕 活動連絡也) [역주] * 연락(連絡) ; 서로 잇닿음, 서로 관련을 맺음.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056쪽.])
 못하고 있으니 아직은 간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대 생각은 어떤지요? 나의 배움이 아직도 [「존재기(存齋記)」에서 말한] 이와 같은 지위 지위(地位) 
󰡔차의󰡕「존재기(存齋記)」에서 이른바 ‘물정(勿正)’ ‘물망(勿忘)’ ‘물조(勿助)’ ‘존이구(存而久)’ ‘구이숙(久而熟)’의 지위(地位)를 말한다. (󰡔箚疑󰡕 謂記文所謂 勿正 勿忘 勿助 存而久 久而熟之地位也)
에 도달하지 못한 채 그저 억지로 힘쓰고 다투어 지식을 모우는 수준 강면투진(疆勉鬪溱)
󰡔차의󰡕 힘으로 위협하여 모은다는 말이다. (󰡔箚疑󰡕 謂以力刦持而湊合也) [역주] * 주합(湊合) ; 모음.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184쪽.]
󰡔익증󰡕 ‘투(鬪)’ 또한 ‘합한다’는 의미이다. (󰡔翼增󰡕 鬪 亦合也)
󰡔표보󰡕 ‘투(鬪)’는 ‘지식을 자랑하고 화려함을 다툰다(誇多鬪靡)’라고 할 때의 ‘투(鬪)’이다.『용천집(龍川集)』에 ‘다투어 쌓아두고 모아둔다(鬪飣湊合)’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뜻이다. (󰡔標補󰡕 鬪卽誇多鬪靡之鬪 龍川集有鬪飣湊合之語 政此義也) [역주] * ‘지식을 자랑하고 화려함을 다툰다(誇多鬪靡)’라는 말은 󰡔맹자집주(孟子集註)󰡕에도 보인다. 󰡔맹자(孟子)󰡕,「이루(離婁)」하, 제15장에 나오는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널리 배우고 상세히 말함은 장차 돌이켜서 요약함을 말하고자 해서이다.’(孟子曰 博學而詳說之는 將以反說約也니라)”에 대한 주자의 주석 중에 ‘다과투미(誇多鬪靡)’라는 말이 나온다. 즉 “글을 널리 배우고 그 이치를 상세히 말하는 까닭은 많은 지식을 자랑하고 화려함을 다투고자 해서가 아니요, 융회(融會)하고 관통(貫通)하여 돌이켜서 지극히 요약한 것을 설명하고자 해서임을 말씀한 것이다. 이는 위 장(章)의 뜻을 이어 말씀하였으니, 학문은 다만 박학(博學)하고자 할 것이 아니요, 또한 곧바로 요약(要約)만을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言 所以博學於文而詳說其理者는 非欲以誇多而鬪靡也라 欲其融會貫通하여 有以反而說到至約之地耳니라 蓋承上章之意而言하니 學은 非欲其徒博이요 而亦不可以徑約也니라)”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238쪽 참고.
이어서 이처럼 토론하기에도 크게 부족한 실정 불통검점(不通檢點)
󰡔차의󰡕 점검하기에 크게 부족하도록 했다는 말이다. ‘점검(點檢)’은 ‘토론(討論)’이라는 말과 같다. (󰡔箚疑󰡕 謂使大不足點檢也 點檢猶言討論也)
입니다만, [「존재기(存齋記)」에서 말한] 이와 같은 지위야말로 곧 영험(靈驗) 영험(靈驗)
󰡔차의󰡕 효험(效驗)이니, 곧 배워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험(靈驗)함을 말한다. (󰡔箚疑󰡕 謂效驗卽學不到之靈驗也)
한 곳이라 할 수 있겠지요. 
齋記子細看未甚活絡, 未須刊刻. 如何? 學不到此地位, 彊勉鬪湊, 不通檢點如此, 如此便是靈驗處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4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스물네 번째 편지(제24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제24서)는 역시 제21서, 제22서 및 제23서에 이어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제24서)의 앞 부분에 “그대 안 사람이 편안하시다 하니, 아마도 담박한 생활을 즐기면서 서로 도와 집안 일을 꾸려가고 계시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閤中安好 想亦能甘淡泊 相助經家務也)”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허순지의 가실(家室. 즉 부인)을 가리킨다. 주자가 허순지에게 답한 제22서에 “순지(順之)는 이미 가정을 이루었으니 생활을 꾸려가야 하겠군요. (順之旣有室家 不免略營生理)”라고 말하고 있다. 이 편지를 보낼 당시 허순지(許順之)는 바야흐로 장가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제 24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역시 허순지가 장가든 초기에 할만한 말이다. 따라서 이 편지(제24서)는 제22서와 가까운 시기에 씌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마도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경에 씌어진 것 같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08쪽 참고.
 이 편지를 통해 주자는 지인들에 대한 가벼운 안부와 함께 새신랑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허순지의 살림살이에도 자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저는 머리를 조아려 인사드립니다. 인편을 통해 그대의 편지를 받고, 앞으로 조금은 위로가 될 듯 합니다. 요즈음 이미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는데,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물론 잘 지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주희집 주 ; 이 이상(以上)의 내용은 원래 빠져 있었는데, 순희(淳熙)본에 근거하여 보충한다.(以上原缺, 據淳熙本補.) 
 그대 안 사람이 편안하시다 하니, 합중안호(閤中安好)
󰡔기의󰡕 허순지(許順之)의 처(妻)는 아마도 선생의 일족이었던 듯하다. (󰡔記疑󰡕 順之妻 疑先生之族) [역주] * 합중(閤中) ; 송(宋)대에 남의 처를 부르는 호칭이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9권 984쪽 참고.]
 아마도 담박한 생활을 즐기면서 서로 도와 집안일을 꾸려가고 계시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수신(修身), 제가(斉家)가 바로 우리네 학문인데 별도로 어느 곳에 마음을 두고자 하시는지요? 저 역시 지금껏 구차스럽게 구습을 버리지 못한 채 * 인순(因循) ; (1) 무기력하여 姑息적임 (2) 구습에 따라 행함 [440쪽] * 苟且 ; 일시를 미봉함, 등한히 함, (2) 가난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738쪽.]
 이제는 장차 늙어가려 합니다. 그리하여 덕을 닦아가는 공부가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점 어차(於此)
󰡔차의󰡕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말한다. (󰡔箚疑󰡕 謂修身齊家)
을 생각하면 매번 부끄러움에 빠져듭니다. 겨울 사이에 혹시라도 한 차례 우계(尤溪)에 이르러 외숙모 * 구모(舅母) ; 외숙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714쪽.]
를 찾아 뵈올까 생각 중입니다만, 그 때 그대도 그곳으로 와서 나와 서로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희집 주 ; ‘동간(冬間)’ 이하의 내용은 원래 빠져 있었는데, 순희(淳熙)본에 근거하여 보충한다. (‘冬間’以下原缺, 據右引補.)
 서로 만나서는 할 말이 없는 것 같더니 헤어진 뒤에는 또 상의해야 할 말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합상량(合商量)
󰡔차의󰡕 ‘우각(又覺)’의 의미가 여기까지 걸린다. (󰡔箚疑󰡕 又覺之意止此)
 이 때문에 바람을 향해 서면 매번 깊은 회상에 빠집니다. 주희집 주 ; 순희(淳熙)본에는 ‘운운(云云)’ 두 글자가 없다. (右引句未有‘云云’二字.)

熹頓首: 便中承書, 粗慰向往. 比日已復秋風, 不審所履如何? 伏想佳勝, 閤中安好, 想亦能甘淡泊, 相助經家務也. 修身齊家, 只此是學, 更欲別於何處留心耶? 熹因循苟且, 今將老矣, 而進修之功略不加進, 於此每有愧焉. 冬間或欲一到尤溪省舅母, 不知彼時能來彼相聚否. 相見似無可說, 別後又覺得有無限說話合商量, 以此臨風每深懷想耳.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5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스물다섯 번째 편지(제25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제25서)는 갑오년(甲午, 1174년, 주자 45세)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제25서)의 내용 가운데 “조정(朝廷)에서는 저의 사직(辭免)을 하락하지 않으시고, 주부(州府)에서도 관원을 파견하여 나에게 핍박을 가해 오니, 저의 사정은 참으로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저 나의 뜻을 펼치는 데 힘쓸 뿐 달리 할 말이 없군요. (熹爲朝廷不許辭免 州府差官逼迫 甚無好况 然亦只得力伸己志)”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순희(淳熙) 갑오년(甲午, 1174년, 주자 45세)에 사면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26서와 27서가 언제 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허순지(許順之)는 순희(淳熙) 12년(乙巳, 1185년, 주자 56세)에 죽었고, 주자는 그를 위해 제문(祭文)을 지었다.[문집 87권에 보인다.] 허순지에게 보내는 제 25서, 26세, 27서 이세 통의 편지는 갑오년(甲午, 1174년, 주자 45세)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19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논어(論語)』「술이(述而)」편, 제3장에 나오는 “이것이 바로 나의 걱정거리이다.(是吾憂也)”라는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양구산(楊亀山)과 사상채(謝上蔡), 허순지(許順之)의 입장에 반대하고 윤화정과 정(程)선생의 입장에 동의한다.

조정(朝廷)에서는 저의 사직(辭免)을 하락하지 않으시고, 주부(州府)에서도 관원을 파견하여 나에게 핍박을 가해 오니, 저의 사정은 참으로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저 나의 뜻을 펼치는 데 힘쓸 뿐 달리 할 말이 없군요. [논어의]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이다(是吾憂也)’ 시오우(是吾憂)
󰡔차의󰡕『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말씀이다. (󰡔箚疑󰡕 論語孔子語)
  *『논어(論語)』,「술이(述而)」편, 제3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덕(德)이 닦아지지 못함과 학문이 강마(講磨)되지 못함과 의(義)를 듣고 옮겨가지 못함과 불선(不善)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나의 걱정거리이다.’(子曰 德之不修와 學之不講과 聞義不能徙와 不善不能改가 是吾憂也니라)”라고 한 데 대해 주자는 윤화정의 말을 인용하여 “윤씨(尹氏)가 말하였다. ‘덕(德)은 반드시 닦은 뒤에야 이루어지고, 학문은 반드시 강마(講磨)한 뒤에야 밝아지며, 선(善)을 보면 능히 옮기고, 허물을 고침에 인색하지 않는 이 네 가지 일은 나날이 새롭게 하는 공부의 요체(要諦)이다. 만일 이에 능하지 못한다면 성인(聖人)도 근심하였으니, 하물며 배우는 자에 있어서랴!’(尹氏曰 德必修而後成하고 學必講而後明하며 見善能徙하고 改過不吝이니 此四者는 日新之要也라 苟未能之면 聖人猶憂어든 況學者乎아)”라고 말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27쪽 참고.
라는 구절에 대해 그대의 생각을 피력하셨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양구산(楊龜山)과 사상채(謝上蔡)의 설명 양사지설(楊謝之說)
󰡔차의󰡕 양씨(楊氏)는 “덕(德)이 닦아지지 않으면 몸을 성실하게 할 수 없고, 학문이 강마(講磨)되지 못하면 선을 밝혀낼 수 없다. 선을 밝혔다 해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 용기가 부족하다면 덕에 나아가기 힘들다. 이 점은 마땅히 걱정해야할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사씨(謝氏)는 “도(道)를 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오직 덕(德)을 닦은 연후에 도를 터득할 수 있다. 또 도(道)에 관해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오직 강학한 연후에 도(道)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 의(義)를 듣고 옮겨가지 못한다면 이는 [의(義)를] 듣지 않은 것과 같다. 불선(不善)을 고치지 못한다면 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스스로 포기(自棄)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중인(衆人)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찌 두드러지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인(聖人)은 끝내 이와 같이 생각하시는 것일 따름이니, 이는 성인(聖人)이 [자신 때문에 하는] 걱정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걱정은『맹자(孟子)』에서 이른바 “배불리 먹고 따뜻이 옷을 입어서 편안히 거처하기만 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禽獸)와 가까워진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이를 걱정하신다”라고 할 때의 [성인의] 걱정과 의미가 동일하다.”라고 말했다. ○ 살피건대 혹문(或問)에서는 양설(楊說)이 [성인의 본의를] 올바르게 터득했다고 여기셨고, 여기서는 [양설(楊說)이] 아직 [성인의 본의를] 올바르게 터득하지 못했다 하시니,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다. (󰡔箚疑󰡕 楊氏曰 德之不修則無以誠身 學之不講則無以明善 明乎善矣而勇不足以行之 則難於進德矣 是宜憂也 謝氏曰 見道易 惟修德然後 可以得道 言道易 惟講學然後 可以明道 聞義不能徒 與不聞同 不善不能改 則安於自棄矣 此四者 自衆人觀之 亦豈爲顯過哉 聖人則以爲終於此而已 此非聖人之憂也 與孟子所謂飽食煖衣逸居無敎 聖人有憂之其意同 ○ 按或問以楊說爲得之 此則謂未爲得未可曉) [역주] *『맹자(孟子)』,「등문공(滕文公)」상(上), 제4장에 “ ... 후직(后稷)이 백성들에게 가색(稼穡)을 가르쳐서 오곡(五穀)을 심고 가꾸게 하셨는데, 오곡(五穀)이 성숙(成熟)함에 인민(人民)이 잘 길러졌으니, 인간에게는 도리가 있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이 옷을 입어서 편안히 거처하기만 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禽獸)와 가까워진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이를 근심하시어, 설(契)로 하여금 사도(司徒)를 삼아 인륜(人倫)을 가르치게 하셨으니, 부자(父子)간에는 친함이 있으며, 군신(君臣)간에는 의리가 있으며, 부부(夫婦)간에는 분별이 있으며, 장유(長幼)간에는 차례가 있으며, 붕우(朋友)간에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방훈(放勳)이 말씀하기를 ‘위로하고 오게 하며, 바로잡아주고 펴주며, 도와주고 도와주어 스스로 <본성(本性)을> 얻게 하고, 또 따라서 진작하고 은혜를 베풀어준다.’ 하셨으니, 성인(聖人)이 백성을 걱정함이 이와 같으시니, 어느 겨를에 밭을 갈겠는가. ( ... 后稷이 敎民稼穡하여 樹藝五穀한대 五穀熟而民人育하니 人之有道也에 飽食煖衣하여 逸居而無敎면 則近於禽獸일새 聖人이 有憂之하사 使契爲司徒하여 敎以人倫하시니 父子有親하며 君臣有義하며 夫婦有別하며 長幼有序하며 朋友有信이니라 放勳曰 勞之來之하며 匡之直之하며 輔之翼之하여 使自得之하고 又從而振德之라하시니 聖人之憂民이 如此하시니 而暇耕乎아)”라고 한 내용이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158쪽 참고.
은 아직은 성인의 본의를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대(順之)가 논(論)한 것 역시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오직 윤공(尹公)이 정(程)선생의 뜻을 잘 드러내 주었습니다. 윤공...지의(尹公...之意)
󰡔차의󰡕 이천(伊川)께서는 “걱정을 이와 같이 한다면 덕(德)이 날로 새로워진다.”라고 말씀하셨다. 윤씨(尹氏)는 이 네 조목을 ‘날로 덕을 새롭게 하는 핵심 지침’으로 삼았다. 이것이 이른바 [주선생께서 말씀하신 바 윤씨가 정선생의 학설을] 드러낸 것이다. 윤씨(尹氏)의 학설은『논어집주(論語集註)』에 보인다. (󰡔箚疑󰡕 伊川曰 憂如是則德日新 尹氏以四者爲日新之要 此所謂發明也 尹說見論語集注)
 시험 삼아 이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 이것은 아마도 [성인께서] 자신을 일컬어 남들로 하여금 힘쓰게 하려는 뜻인 듯합니다. [주]칭이...지의([注]稱已...之意)
󰡔차의󰡕 윤씨(尹氏)가 말한 “만일 이에 능하지 못한다면 성인(聖人)도 근심하였으니, 하물며 배우는 자에 있어서랴!”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箚疑󰡕 指尹氏所謂苟未能之聖人憂况學者乎之語)
󰡔문목󰡕 여기서의 ‘사(似)’는 성인(聖人)의 뜻이 이와 같다는 말이다. 윤씨(尹氏)의 설(說)은 본래 곧 성인(聖人)의 뜻이긴 하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이 말이 윤씨(尹氏)의 설(說)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問目󰡕 此似言聖人之意如此也 尹氏說固卽聖人之意 然直以此謂指尹氏說則恐未安)
󰡔익증󰡕 이는 선생께서 성인(聖人)의 뜻을 곧바로 말씀하신 것이다. 일설(一說)에 [주(註)로 표시되어 있는] 이 열 개의 글자는 마땅히 큰 글자로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주(註)가 아닌 원문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翼增󰡕 此先生直說聖人之意也 一說此十字當作大字書)
] 성인(聖人)의 본의(本意)는 아마도 윤공(尹公)이 말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熹爲朝廷不許辭免, 州府差官逼迫, 甚無好况. 然亦只得力伸己志, 他無可言者. 示喩 ‘是吾憂也’, 楊․謝之說固未爲得, 順之所論亦過當. 唯尹公乃是發明程子之意. 試更思之, [주; 似亦只是稱己勉人之意.] 聖人本意似只如此也.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6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스물여섯 번째 편지(제26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제26서)는 제 27서와 함께 씌어진 시기가 불확실하지만 우선 제25서와 함께 갑오년(甲午, 1174년, 주자 45세)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19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자신의 이론이 “지나치게 고상함을 추구하는 폐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허순지의 경우는 이러한 병통이 더욱 깊음을 우려하고 있다. 가국재(柯国材)와 등위(鄧尉)의 안부를 묻고 천태(天台)라는 사람의 주역학설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저는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오래도록 소식을 듣지 못하다 편지를 받고 보니 깊이 위안이 됩니다. 소식 받은 후 겨울 날씨가 따뜻해졌습니다. 멀리서나마 그대의 후덕함으로 이 훌륭한 경치를 만끽했으면 합니다. 부인과 아드님 * 영랑(令郞) ; 남의 아들의 존칭, 영윤(令胤), 영식(令息).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2쪽.]
도 모두 편안하시지요. 이곳에서 나도 대체로 편안하여 말씀드릴만한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주희집 주 ; 이상(以上)의 내용이 원래 빠져 있었는데 순희(淳熙)본에 근거하여 보충한다. (以上原缺, 據淳熙本補.) 

熹頓首: 久不聞問, 承書, 甚慰. 信後冬溫, 遠惟德履佳勝, 閤中令郞均安. 熹此粗安, 無足言者也. 

보여 주신 몇 조목 중에 제가 보기에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어 [이에 관한 나의 의견을] 편지의 끝에 적습니다. 대체로 지금까지 저는 불교와 노장 사상이 공맹(孔孟)의 참 진리를 거의 어지럽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응해 나가기 위해 힘쓰다 보니 나 자신의 학설이] 매 번 지나치게 고상함을 추구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다이...지폐(多以...之弊)
󰡔기의󰡕 선생 스스로에 관해 하시는 말씀이다. (󰡔記疑󰡕 先生自謂)
 근래에 그 잘못을 깨달았지만 아직 다 고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때로 깨닫는 바가 있어 점차 평온한 데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대(순지)의 경우는 [나에 비해] 이러한 병통이 더욱 깊으니 통렬히 성찰하여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국재(國材)는 현재 어디에 계신가요? 오랜 동안 편지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매우 염려됩니다. 번거롭더라도 편지로 [그에게] 내 뜻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주희집 주 ; ‘국재(國材)’ 이하의 내용이 원래 빠져 있었는데 순희(淳熙)본에 근거하여 보충한다. (‘國材’以下原缺, 據右引補) 
 등위(鄧尉) 등위(鄧尉)
󰡔기의󰡕 자세히 알 수 없다. (󰡔記疑󰡕 未詳)
는 지조를 지키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주희집 주 ; ‘인(人)’이 순희(淳熙)본에는 ‘민(民)’으로 되어 있다.(人 : 右引作‘民’.)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의 학자들이 경솔하게 큰 소리를 치면서 공경하고 겸양하는 마음을 먼저 무너뜨리려 하니 이점이야말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위기(為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먼저 이러한 병통을 없애야 [위기(為己)의 학문이] 가능할 것입니다.
所示數條, 鄙意有未安者已具紙尾. 大抵舊來多以佛老之似亂孔孟之眞, 故每有過高之弊. 近年方覺其非, 而亦未能盡革, 但時有所覺, 漸趨平穩耳. 順之此病尤深, 當痛省察矯揉也. 國材在甚處? 久不得書, 甚念(4-1791)之. 因書煩致意也. 鄧尉持己愛人如此, 甚不易得. 但今時學者輕率大言, 先將恭敬退讓之心壞了, 不是小病. 若實有爲己之意, 先去此病然後可耳.

근자에 천태(天台)가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역학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군요. 더구나 아직까지는 [그의 주역학설의] 자세한 내용을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산(山)에 노니는 흥겨움을 누려보려 여러 차례 계획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잃어버린지라, 지금은 [이를 포기하고] 우선 문을 닫아걸고 고요히 앉아서 지내고 있습니다. [내 형편상] 아직은 그대를 만나 볼 수 없군요. 천만번 진중(珍重)하소서. 이만 줄입니다. 10월 10일 저는 두 번 절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주희집 주 ; ‘천태(天台)’ 이하(以下)의 내용은 원래 빠져 있었는데 순희(淳熙)본에 근거하여 보충한다.(‘天台’以下原缺, 據右引補. ) 

天台近得書, 易說不知如何理會, 亦未聞其詳也. 向來游山之興屢謀屢失, 今且杜門靜坐矣. 未由會見, 千萬珍重, 不宣. 十月十日熹再拜. 




허순지에게 답함 答許順之 27


【해제】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스물일곱 번째 편지(제27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제27서)는 제 26서와 함께 씌어진 시기가 불확실하지만 우선 제25서와 함께 갑오년(甲午, 1174년, 주자 45세)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119쪽 참고.
 몇 몇 인물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짧은 편지이다.

조주(潮州)에 허경지(許敬之)라는 분이 계신데, 듣자 하니 그 분이 그대와 매우 절친하다 相過甚好(相過甚好) 
󰡔절보󰡕 허경지(許敬之)가 허순지(許順之)와 매우 좋게 지낸다는 말이다. (󰡔節補󰡕 許敬之過順之甚好也)
고 하더군요. 사부(謝簿) 사부(謝簿)
󰡔절보󰡕 아마도 사씨(謝氏) 성을 지닌 사람으로 조주(潮州)에 속한 어느 현(縣)의 주부(主簿)벼슬을 하던 자인 듯하다. (󰡔節補󰡕 似是謝姓人 爲潮州屬縣主簿者也)
도 그분을 알고 있습니까? 번거롭더라도 그대가 [사부(謝簿)에게 허경지(許敬之)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금재하처(今在何處)  
󰡔절보󰡕 허경지(許敬之)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말이다. (󰡔節補󰡕 許敬之方在何處也)
 물어보고 위문(爲問)
󰡔절보󰡕 허순지(許順之)가 사부(謝簿)에게 질문한다는 말이다.(󰡔節補󰡕 謂順之問於謝簿也) 
 편지로 알려 주십시오. 진군(陳君)의 시(詩)도 훌륭합니다. 무릇 배움의 과정에 있는 사람은 실질적인 데 힘쓰고 될 수 있는 한 [헛된] 명성에 대해서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潮州有一許敬之者, 聞嘗相過甚好, 不知謝簿識之否? 煩爲問云今在何處, 因書報及. 陳君詩亦佳, 大凡學者勉其務實, 少近名爲佳耳.





진제중 진제중(陳齊仲)
󰡔익증󰡕 동안(同安) 사람이다. 허순지(許順之), 서원빙(徐元聘)과 함께 모두 선생께 강학(講學)하였다. (󰡔翼增󰡕 同安人 與許順之徐元聘 皆講學於先生)
에게 답함 答陳齊仲


【해제】주자가 진제중(陳斉仲)에게 보낸 편지(제1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가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겨울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答陳齊仲)에서 “나는 요사이 들어 잡학가(雜學家) 여러 사람의 학설을 변론한 적이 있습니다.(近嘗辯論雜學家數家之說)”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주자가 지은『잡학변(雜學辯)』(문집72권에 보인다.)을 가리킨다.『잡학변(雜學辯)』에는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겨울에 지은 하숙경(何叔京)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따라서 이 편지(答陳齊仲) 역시 병술년 겨울에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편지 말미에 “그(즉 許順之)가 부쳐 보내온『맹자설(孟子說)』의 경우, 대저(大抵) 그 학설이 너무 높아 도리어 [맹자의] 본의(本意)를 잃어버렸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금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渠所寄來孟子說, 大抵其說亦苦於太高, 却失本意. 可更商量)”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자가 “다시금 깊이 헤아려 본 것”이 바로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답한 제8서와 제9서이다. 그런데 이 두 편지를 쓴 것이 또한 병술년 겨울이니, 이 편지(答陳齊仲)는 당연히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겨울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8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진제중이 지은 시해(詩解)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데서 시작하여,『중용(中庸)』13장에서 언급된 충서(忠恕)와『논어(論語)』「이인(里仁)」편에서 말한 충서(忠恕)가 어떤 연관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격물(格物)에 관한 올바른 이해, 주자가 지은『잡학변(雑学辯)』 등에 관해 말한다. 주자는 “요사이 학문을 한다면서 천리(天理)를 궁구하고 인륜(人倫)을 밝히고 성인의 말씀을 강론하며 세상의 일에 통달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힘쓰지 아니하지 마침내 오뚝이처럼 앉아서 하나의 초목과 기용에 마음을 둔다면 이것이 도대체 무슨 학문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면서 이단적 경향의 학문방법을 비판한다. 

그대가 저번에 부쳐 보내온 시해(詩解)는 마음 씀이 매우 깊더군요. 그런데 마음을 너무 깊이 썼기 때문에 도리어 실수한 경우가 많더군요. 무릇 의심나는 곳에 대해서는 이미 거듭 표시해 두었다가 구설(舊說)과 함께 기록하여 가르침을 구합니다. 시험 삼아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인편으로 [편지를 써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삼사(三事)’의 가르침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긍(驕矜)함이 이미 잘못된 길로 내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아직은 제거할 정도는 아니라 여긴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제거할만하다고 여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군요. 당초의 조그마한 차이가 나중에는 천리만큼 어그러지는 법입니다. 어찌 공공연히 잘못된 길로 내달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向所寄示詩解, 用意甚深, 多以太深之故, 而反失之. 凡所疑處, 重已標出, 及錄舊說求敎, 幸試思之, 因便垂誨, 幸幸. 三事之喩甚善, 但旣知其驕矜走失而猶以爲未可去, 不知更欲如何方可去也? 差之毫釐, 繆以千里, 豈容公然走失耶?
 
상마(相馬)에 대한 말씀 상마지설(相馬之說) 
󰡔기의󰡕 진(秦) 목공(穆公)이 구방고(九方皐)를 시켜 좋은 말을 구하게 했는데 그가 돌아와서 ‘암컷으로 색깔은 누런 말을 구했다’고 했다. 가서 보니 수컷으로 검은 색이었다. 목공이 말하기를, “수컷인지 암컷인지도 모르고 무슨 색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좋은 말을 알아보겠는가?” 하니 백락(伯樂)이 대답하기를, “구방고가 본 것은 천기(天機)입니다. 정밀한 것과 보고 거친 것은 내버려 두었으며, 내면만 보고 겉모습은 내버려 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말이 도착했는데 과연 천하의 명마였다. 이제 [진제중(陳齊仲)이] 이를 가지고『논어(論語)』의 충서(忠恕)와 관련시켜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본문에서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記疑󰡕 秦穆公 使九方皐求善馬 還報曰已得之牝而黃 往視之牡而驪 公曰牝牡色物不能知 何知馬 伯樂曰 皐之所觀天機也 得其精遺其粗 在其內而忘其外 馬至果天下良馬 今以此論忠恕則不可故云云) [역주] *『열자(列子)』「설부(說符)」편 참고. 유평수(柳坪秀) 역해(譯解), 󰡔열자(列子)󰡕, (서울, 자유문고, 1995), 276-8쪽.
󰡔차의󰡕 살피건대 진제중(陳齊仲)의 생각에 따르면, ‘상마(相馬)가 정미함을 얻은 것’은 ‘『논어(論語)』의 충서(忠恕)’에 비유할 수 있고, ‘상마(相馬)가 거친 것’ 은 ‘『중용(中庸)』의 충서(忠恕)’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箚疑󰡕 按齊仲之意 以相馬之得其精 比論語忠恕 以得其粗 比中庸忠恕)
󰡔절보󰡕『열자(列子)』「설부(說符)」에 진(秦) 목공(穆公)이 운운(云云)한 대목이 있다. (󰡔節補󰡕 列子 秦穆公云云)
은 아마도 충서(忠恕)의 뜻과는 다른 듯합니다. 충서의 경우 이치는 하나인데 사람들의 시각(視角)에 정도에 따라 [입론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니, 어찌 그 사이에 [양마를 고르듯] 선별(選別)하고 취사(取捨)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배우는 자가 모름지기 ‘충서(忠恕)’가 바로 ‘일관(一貫)’의 가르침임 *『논어(論語)』,「이인(里仁)」편, 제15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우리 도(道)는 한 가지 이(理)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하시니, 증자(曾子)께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증자(曾子)께서 대답하셨다.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 하셨다. (子曰 參乎아 吾道는 一以貫之니라 曾子曰 唯라 子出이어시늘 門人問曰 何謂也잇고 曾子曰 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시니라)”라고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77-8쪽 참고.
을 알고자 한다면 아마도, [충서(忠恕)는]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違道不遠)’ *『중용(中庸)』, 제13장에 “충서(忠恕)는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자기 몸에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않는 것을 나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마는 것이다. (忠恕違道不遠하니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이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73쪽 참고.
고 한 [『중용(中庸)』13장의 글]에서부터 힘을 써야 비로소 [『논어(論語)』「이인(里仁)」편에서 말하는] ‘충서’가 ‘일관(一貫)’하는 기상 일개기상(一个氣象) 
󰡔절보󰡕 충서(忠恕)가 일관(一貫)하는 기상을 말한다. (󰡔節補󰡕 忠恕一貫之氣象也)
을 방불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니 은약(隱約)
󰡔기의󰡕 ‘어렴풋이 보인다’는 뜻과 같다. (󰡔記疑󰡕 猶依希髣髴之意) [역주] * 의희(依希) ; (1) 헷갈릴 만큼 비슷한 모양, 彷佛한 모양 (2) 어렴풋이 보이는 모양.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84쪽] * 방불(髣髴) ; (1) 서로 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려운 모양 (2) 보아 잘 알 수 없는 모양.[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314쪽]
 어찌 [이 두 경우를] 판연하게 둘로 나누어 이위이물(以爲二物)
󰡔기의󰡕 진제중(陳齊仲)이 ‘충(忠) 없이는 서(恕)가 나올 수 없는 이치’를 몰랐기 때문에 [충(忠)과 서(恕)를] 둘로 여긴 것이다. (󰡔記疑󰡕 齊仲不知無忠做恕不出之理 故以爲二物耳)
󰡔차의󰡕 살피건대 [『중용(中庸)』에서 말한 바] ‘도(道)에서 멀지 않은 충서(忠恕)’와 [논어에서 말한 바] ‘충(忠)과 서(恕)는 일관(一貫)되어 있다’고 말할 때의 충서(忠恕)를 나누어 둘로 여긴다는 말이다. 대개 충서(忠恕)에는 성인(聖人)[의 충서]와 학자(學者)[의 충서]에 따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나로부터 시작하여 만물에로 미치어가는 뜻에 있어서는 같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는 전후에 걸쳐 누차 이 점을 말씀하신 것이다. 󰡔기의󰡕의 설명은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箚疑󰡕 按謂以違道不遠之忠恕 忠恕一貫之忠恕 判爲二物也 蓋忠恕有聖人學者之異 然其自我及物之意則同 故云先生前後累有此說 記疑說 恐未然) [역주] * 주자는 충서(忠恕)를 (1) 천지(天地)의 충서, (2) 성인(聖人)의 충서, (3) 학자(學者)의 충서로 나누어 설명한다. 즉 『중용(中庸)』의 ‘도에서 멀지 않은 충서’가 학자(學者)의 충서라면, 『논어(論語)』에서 말한 ‘忠과 恕는 一貫되어 있다’고 말할 때의 忠恕는 聖人의 충서이다. 반면에 정이(程頤)가 말한 충서는 천지(天地)의 충서라는 것이다. [『논어(論語)』,「이인(里仁)」편, 제15장의 주자 주 및『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천(天), (학민문화사영인본, 1990), 319쪽 세주(細註) 참고.]
󰡔간보󰡕 ‘충서(忠恕)가 일관(一貫)되어 있다’는 말과 ‘[충서(忠恕)는] 도(道)에서 멀지 않다’는 말은 비록 깊고 얕은 차이가 있지만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제중(陳齊仲)이 이를 두 가지 사태로 간주하려했기 때문에 선생께서 이처럼 답하신 것이다. 이 글은 마땅히 위에 나온「상답범직각서(上答範直閣書)」와 함께 참고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刊補󰡕 忠恕一貫與違道不遠 雖有淺深 本非二事 齊仲欲作二物看 故答之如此 當與上答範直閣書參看)
 서로 상관없는 듯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相馬之說, 恐與忠恕之意不同. 蓋忠恕之理則一, 而人之所見有淺深耳, 豈有所揀擇取舍於其間哉? 學者欲知忠恕一貫之指, 恐亦當自‘違道不遠’處著力, 方始隱約得一箇氣象, 豈可判然以爲二物而不相管耶? 

격물(格物) 격물지론(格物之論)
󰡔익증󰡕 이천(伊川)께서는 그의 격물설(格物說)에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각각의] 리가 있으니 마땅히 모두 궁구(窮究)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상세한 것은『대학혹문(大學或問)』에 보인다. (󰡔翼增󰡕 伊川格物說曰 一草一木亦皆有理 皆所當窮 詳見大學或問)
에 대해 정이천(程伊川) 선생의 뜻은, ‘비록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 물(物)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이를 규명하는 데에는 또한 완급(緩急)과 선후(先後)의 순서가 있으니, 어찌 대번에 하나의 초목(草木)과 기용(器用)에 마음을 둠으로써 홀연히 깨달을 수 있겠소. 또 지금 이 학문을 하면서 천리(天理)를 궁구하고 인륜(人倫)을 밝히고 성인의 말씀을 강론하며 세상의 일에 통달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힘쓰지 아니하지 마침내 오뚝이처럼 앉아서 하나의 초목과 기용에 마음을 둔다면 이것이 도대체 무슨 학문이란 말이오? 이와 같이 하면서 얻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모래로 밥을 짓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 취사...성반(炊沙...成飯) 
󰡔절보󰡕『능엄경(楞嚴經)』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음욕을 끊어버리지 않은 채 선정(禪定)을 닦는 자는 흡사 모래돌을 삶아서 밥을 짓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백천겁(百千刦)을 경과하더라도 그저 뜨거운 모래로 남을 뿐이다”라고 하셨다. (󰡔節補󰡕 楞嚴經 佛云 若不斷淫修定禪者 如蒸沙石欲其成飯 經百千刦只名熱沙) 
입니다. 편지의 말씀을 볼 때, 그대는 이러한 병통을 간파하지 못한 것 같으니, 매사를 처리해 나감(出入) * 출입(出入) ; (1) 나감과 들어옴, 드나듦. (2) 내놓음과 들여놓음. (3) 왕래함. (4) 出納. (5) 시집 간 여자와 시집 안 간 여자. (6) 혹은 지방관으로 부임하고 혹은 들어와 조정에서 벼슬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78쪽.]
에 있어서 마음을 굳게 확정하지 못하는 폐단 * 의위(依違) ; (1) 마음이 확정되지 아니한 모양, 꾸물거려 망설이는 모양. (2) 독단하지 않음, 겸허한 태도를 이름[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84쪽.]
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格物之論, 伊川意雖謂眼前無非是物, 然其格之也, 亦須有緩急先後之序, 豈遽以爲存心於一草木器用之間而忽然懸悟也哉? 且如今爲此學而不窮天理․明人倫․講聖言․通世故, 乃兀然存心於一草木․一器用之間, 此是何學問? 如此而望有所得, 是炊沙而欲其成飯也. 來諭似未看破此處病敗, 恐不免出入依違之弊耳. 

나는 요사이 들어 잡학가(雜學 잡학(雜學)
󰡔차의󰡕 선생께서는 일찍이『소씨역해(蘇氏易解)』,『장무구중용해(張無咎中庸解)』,『여씨대학해(呂氏大學解)』를 비판하신 적이 있다. 문집 72권에 보인다. (󰡔箚疑󰡕 先生嘗卞 蘇氏易解 張無咎中庸解 呂氏大學解 見七十二卷)
󰡔절보󰡕 [󰡔차의󰡕의] ‘역해(易解)’ 아래 ‘소황문노자해(蘇黃門老子解)’라는 여섯 글자가 더 있다. (󰡔節補󰡕 易解下有蘇黃門老子解六字)
家) 여러 사람의 학설을 변론(辯論)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몇 조목을 대충 기록(謾錄)하여 보내드립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는 [잡학가들에 대한 나의 변론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순지(許順之)는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 불이법문(不二法門)
󰡔차의󰡕 문수(文殊)가 유마힐(維摩詰)에게 묻기를 ‘어떠한 것이 둘 아닌 법문(法門)입니까?’라고 했다. 이에 유마(維摩)는 침묵하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문수(文殊)가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문자(文字)와 언어(言語)가 없는 곳, 그 곳이 바로 진인(眞人)의 둘 아닌 법문(法門)이로다’라고 하였다. (󰡔箚疑󰡕 文殊問維摩詰何等是不二法門 維摩黙然不應 殊曰善哉善哉 無有文字言語 是眞人不二法門也)
은 그쳐서는 안 된다 不可休(不可休)
󰡔차의󰡕 자세히 알 수 없다. (󰡔箚疑󰡕 未詳)
’고 합디다만, 그쳐서 안 되는 것이라면 아직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아닌 듯하군요. 바라건대 다시금 이 점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는 것 하어(下語)
󰡔익증󰡕 [하어(下語)는] 곧 선가(禪家)에서 하나의 전어(轉語)를 던져 [피교육자로 하여금] 돈오(頓悟)케 하는 그 말을 가리킨다. (󰡔翼增󰡕 卽禪家下一轉語 使之頓悟者) [역주] * 전어(轉語) ; 본래의 말에서 변하여 나온 말.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033쪽.]
이 어떻겠습니까? 그(즉 許順之)가 부쳐 보내온『맹자설(孟子說)』의 경우, 대저(大抵) 그 학설 기설(其說)
󰡔차의󰡕 ‘심(甚)’이 당본(唐本)에는 ‘기(其)’로 되어 있다. (󰡔箚疑󰡕 甚唐本作其)
이 너무 높아 도리어 [맹자의] 본의(本意)를 잃어버렸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금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평이하고 명백한 가운데 받아 가질(薦取) 천취(薦取) 
󰡔차의󰡕 선가어(禪家語)로서 ‘받아 가진다(領取)’라는 뜻이다. (󰡔箚疑󰡕 禪家語 領取之意) [역주] * 영취(領取) ; 받아 가짐(受取)을 말한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10권 15쪽 참고.]
 일이고, 반드시 이처럼 초점 없이 허원(虚遠)한 곳을 빙빙 돌(打遶) 타요(打遶)
󰡔차의󰡕 ‘타(打)’는 ‘하다(爲)’는 말이다. ‘요(遶)’는 그 정확한 뜻은 내버려둔 채 주변의 허원(虛遠)한 곳을 빙빙 돈다는 말이다. (󰡔箚疑󰡕 打爲也 遶 舍其正意而周撓虛遠之地也)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近嘗辯論雜學家數家之說, 謾錄此數條去, 不審高明以爲如何? 順之‘不二法門則不可休’, 不可休似未是不二法門, 請更於此下語, 如何? 渠所寄來孟子說, 大抵其說亦苦於太高, 却失本意. 可更商(4-1793)量, 須於平易明白中薦取, 不必如此打遶也. 





서원빙 서원빙(徐元聘)
󰡔익증󰡕 역시 동안(同安) 사람인 듯하다. (󰡔翼增󰡕 疑亦同安人)
에게 답함 答徐元聘


【해제】주자가 서원빙(徐元聘)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제1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가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이나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주자가 서원빙(徐元聘)에게 보낸 편지는 두 통이 있다. 그런데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제 8서에 “진제중(陳齊仲)과 서원빙(徐元聘)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도 각각 조금씩 변론한 것이 있습니다. (齊仲․元聘書中各有少辨論)”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조금씩 변론한 것(有少辨論)”이란 바로 주자가 서원빙(徐元聘)에게 보낸 이 두 통의 편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통의 편지는 주자가 병술년 혹은 그보다 조금 뒤에 허순지에 보낸 제8서와 동일 시기일 것이다. 따라서 이 두 통의 편지(답서원빙 제 1서 및 제2서) 역시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혹은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로 볼 수 있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8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주로『서경(書経)』의 내용, 즉 주(周)초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의리(義理)를 검토하고 있다. 주자는 문왕과 무왕의 역사적 처신이 달랐지만 사사로운 뜻(私意) 없이 하늘과 민심에 따랐다는 점에서 그들의 “마음은 일찌기 같지 않음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 밖에도 무왕이 “상(商)나라의 정사(政事)를 살펴보았다(観政于商)”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 주공(周公)의 ‘동으로의 정벌(東征)’이 권도(権道)인가 정도(正道 즉 정당한 의리)인가 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고 있다.

문왕(文王)에게는 주(紂)를 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지만, [문왕 당시에만 해도] 하늘이 [주(紂)에 대한 문왕의 정벌을] 허락하셨고 사람들이 동조하게 됨에 따라, 그 형세가 [문왕이] 반드시 주(紂)를 죽인 이후에야 그칠만한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늘이 문왕으로 하여금] ‘엄숙히 하늘의 위엄을 받들어 행하게 하셨지만, 대훈(大勳)을 이루지는 못하셨다.(肅將天威, 大勳未集) *『서경(書經)』,「주서(周書)」,「태서(泰誓)」상, 제5장에 “술에 빠지고 여색(女色)에 혼란해서 감히 포학함을 행하여, 사람을 죄주되 친족(親族)에까지 미치고 사람을 벼슬시키되 대대로 하며, 궁실(宮室)과 대사(臺榭)와 피지(陂池)와 사치한 의복으로 너희 만성(萬姓)들을 잔해(殘害)하며, 충량(忠良)을 불태워 죽이고, 아이밴 부인의 배를 갈라 보니, 황천(皇天)이 진노(震怒)하여 우리 문고(文考)에게 명(命)하시어 엄숙히 하늘의 위엄을 받들어 행하게 하셨는데, 대훈(大勳)을 이루지 못하셨다.(沈澹冒色하여 敢行暴虐하여 罪人以族하고 官人以世하며 惟宮室臺榭陂池侈服으로 以殘害于爾萬姓하며 焚炙忠良하며 刳剔孕婦한대 皇天이 震怒하사 命我文考하사 肅將天威하시니 大勳을 未集하시니라)”라 했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255-6쪽 참고.
’는 [무왕(武王)의] 말씀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왕 당시에는] 아직은 주(紂)의 악(惡)함이 가득 찬 상태가 아니었고 또 천명(天命)도 아직 끊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문왕 문왕(文王) 
󰡔익증󰡕 여기서 논(論)한 내용이 아래에 나오는「범백숭에게 답하는 글(答范伯崇書)」의 내용과는 같지 않다. (󰡔翼增󰡕 所論與下答范伯崇書不同)
은 [천하 민심의] 삼분(三分)의 이(二)를 얻고서도 여전히 주(紂)를 섬겼던 것입니다. 가령 문왕이 붕어(崩御)하시지 않은 채 십 이삼년이 흘렀는데도 주(紂)의 악행이 여전히 그치지 않아 천명이 이미 끊어진 상황이라면 맹진(孟津)에서의 일 * 주(周) 무왕(武王)이 맹진(孟津)이라는 나루터에서 제후들과 장병들을 모아 은(殷)나라 주(紂)를 정벌한 일을 말한다. 자세한 것은『서경(書經)』,「주서(周書)」,「태서(泰誓)」편을 참고할 것.
을 문왕이라 해서 어찌 사양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문왕과 무왕의 마음이 일찌기 같지 않음이 없었으니, [두 분 모두] 사사로운 뜻(私意) 없이 하늘과 민심에 따랐을 뿐인 것입니다.
文王無伐紂之心, 而天與之, 人歸之, 其勢必誅紂而後已, 故有‘肅將天威, 大勳未集’之語. 但紂惡未盈, 天命未絶, 故文王猶得以三分之二而服事紂. 若使文王未崩, 十二三年, 紂惡不悛, 天命已絶, 則孟津之事文王亦豈得而辭哉? 以此見文․武之心未嘗不同, 皆無私意, 視天與人而已.
 
이천(伊川)께서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주(紂)의] 정사(政事)를 살핀 일 관정지사(觀政之事)
󰡔차의󰡕『서경(書經)』에 이른바 ‘[무왕이] 상(商)나라의 정사(政事)를 살펴본다’는 것을 말한다. 대개 [상(商)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기 위한 것이다. (󰡔箚疑󰡕 書所謂觀政於商者也 蓋欲觀可伐與否也) [역주] *『서경(書經)』,「주서(周書)」,「태서(泰誓)」상, 제6장에 “이러므로 나 소자(小子) 발(發)이 너희 우방(友邦)의 총군(冢君)들을 데리고 상(商)나라의 정사(政事)를 살펴보니, 수(受)[주왕(紂王)]가 개전(改悛)할 마음이 없어서 걸터앉아 거하여 상제(上帝)와 신기(神祗)를 섬기지 않고, 선조(先祖)의 종묘(宗廟)를 버려 제사(祭祀)하지 아니하여 희생(犧牲)과 자성(粢盛)을 흉악한 도적에게 이미 모두 빼앗겼는데도 말하기를 ‘내 백성을 소유하고 천명(天命)을 소유했다’ 하여, 업신여김을 징계하지 않는구나. (肆予小子發이 以爾友邦冢君으로 觀政于商하니 惟受罔有悛心하여 乃夷居하여 弗事上帝神祗하며 遺厥先宗廟하여 弗祀하여 犧牲粢盛이 旣于凶盜어늘 乃曰吾有民有命이라하여 罔懲其侮하나다)”라고 했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256-7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14쪽 참고.
󰡔익증󰡕 이천(伊川)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주(紂)에게] 군대의 위세를 보였다’는 학설이 있지만,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오늘 천명(天命)이 끊어지면 오늘 곧바로 독부(獨夫)로 되니 어떻게 3년 동안이나 그대로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 天命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면 여전히 곧 임금이니, 신하된 자로서 어찌 군대로 자기의 임금을 위협할 수 있겠는가? 어찌 이런 의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구설(舊說)에 [『서경(書經)』,「주서(周書)」,「태서(泰誓)」상(上), 제6장에 나오는] ‘관정(觀政)’을 ‘관병(觀兵)’으로 해석하는 학설이 있었기 때문에 이천(伊川)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翼增󰡕 伊川曰 觀兵之說 自無此事 如今日天命絶則 今日便是獨夫 豈容更留至三年 今日天命未絶 便是君也 爲人臣者 豈可以兵䝱其君 安有此義 舊說以觀政爲觀兵 故伊川說如此) [역주] * 관병(觀兵) ; (1)군대의 위세를 보임. (2) 군대를 정렬시키고 사열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889쪽.]
󰡔절보󰡕 河南程氏遺書 卷19(伊川先生語5) 楊遵道錄에 상세히 보인다. (󰡔節補󰡕 詳見遺書楊遵道錄) [역주] *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권 250쪽 참고.
은 없었다고 하셨는데, 이는 문왕과 무왕의 마음을 깊이 꿰뚫어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군신간의 대의(大義 즉 名敎) 존명교(存名敎) 
󰡔차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실제로 상(商)을 취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말이니, 이천(伊川)이 명교(名敎)를 보존하고자 하여 이런 학설을 세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명교(名敎)는 군신(君臣)간의 대의(大義)를 말한다. (󰡔箚疑󰡕 謂文武實無取商之心 非伊川欲存名敎而有此說也 名敎謂君臣大義也)
를 보존하기 위해 [이천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의 주장과 같이], 만약 [이천께서] 명교(名敎)를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경(書經)』「태서(泰誓)」편의 역사적] 사실을 바꾸어 해석한 것으로 보신다면, 부자(夫子)께서 기록하신 [『서경(書經)』]「태서(泰誓)」와 「무성(武成)」편은 군신간의 대의(名敎)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심각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근세(近世)에 나온 ‘명교(名敎)를 보존한다’는 학설은 일을 크게 그르치니, [이 학설에 따르면] 장차 성인(聖人)의 마음과 자취를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듯이] 둘로 나누어 보게 됩니다. 심적...간료(心迹...看了)
󰡔차의󰡕 마음과 자취를 둘로 나누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箚疑󰡕 謂以心與迹爲兩截也)
 [이와 같은 잘못은] 특히 ‘성인(聖人)께서 행(行)하신 것 그대로가 곧바로 명교(名敎)’이니 만약 행(行)하는 것은 이와 같이 하고, 가르치는 것은 저와 같이 한다면 성인(聖人)일 수가 없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발생한 잘못입니다.  
伊川謂無觀政之事, 非深見文․武之心不能及此, 非爲存名敎而發也. 若有心要存名敎, 而於事實有所改易, 則夫子之錄泰誓武成, 其不存名敎甚矣. 近世有存名敎之說, 大害事, 將聖人心迹都做兩截看了. 殊不知聖人所行便是名敎, 若所行如此而所敎如彼, 則非所以爲聖人矣. 

주공(周公)의 ‘동으로의 정벌(東征)’ 주공동정(周公東征)
󰡔익증󰡕 ‘동정(東征)’은 [주공(周公)이] 관숙(管叔)을 토벌한 것을 말하고, ‘용권(用權)’이란 권도(權道)를 써서 관숙(管叔)을 토벌했다는 말이다. 이 편지에서 [선생은] 공전(孔傳)의 주벽지설(誅辟之說)를 따르면서,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의 피방지의(避謗之義)를 배척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은 이론을 확정짓지 않고 있다. 상세한 것은 후권(後卷)의 답서(答書)에 보인다. (󰡔翼增󰡕 東征謂征管叔 用權謂用權道討管叔 此書從孔傳誅辟之說而斥馬鄭避謗之義 然乃未定之論 詳見後卷答書)
에 대해서, 반드시 권도(權道)를 사용한 것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이 제후(諸侯) 지친여제후(至親與諸侯) 
󰡔차의󰡕 지친(至親)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말하고 제후(諸侯)는 무경(武庚)을 말한다. (󰡔箚疑󰡕 至親管蔡 諸侯武庚)
와 연형(連衡)하여 [왕실을] 배반하였으니, 나라를 책임진 대신(大臣)인 [주공이] 어찌 이런 사태를 앉아서 보기만 하고 왕실을 구원하지 않을 리(理)가 있겠습니까? 이에 [주공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관숙 등을] 정벌하였으니 이는 정당한 의리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대의 주장과 같이]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있는 자 *『논어(論語)』,「자한(子罕)」편, 제29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더불어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道)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道)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權道)를 행할 수는 없다.’ (子曰 可與共學이라도 未可與適道며 可與適道라도 未可與立이며 可與立이라도 未可與權이니라)라고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81쪽 참고.
를 기다린 이후에 [비로소 정벌이]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마융(馬融)과 정현(鄭玄) 마정(馬鄭)
󰡔차의󰡕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을 말한다. (󰡔箚疑󰡕 馬融鄭玄)
은 ‘[주공이]동으로 옮겨 간 것은 비방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東行避謗)’라고 했는데, 이는 시무(時務)에 통달하지 못한 비루하고 부패한 유생들의 학설 내비...지설(乃鄙...之說)
󰡔표보󰡕 ‘동으로 옮겨 가서 비방을 피함(東行避謗)’이란 곧『서경(書經)』,「주서(周書)」,「금등(金縢)」편에서 “[주공이] 동쪽에 가서 2년을 지낸” 일이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논의하고 있는 내용이 구봉(九峰)이 전해 받은『서집전(書集傳)』의 설(說)과는 같지 않다. (󰡔標補󰡕 東行避謗 卽金騰居東二年事 而此書所論 與九峰所受集傳說不同)  [역주] *『서경(書經)』,「주서(周書)」,「금등(金縢)」편, 제12-14장에 “무왕(武王)이 별세하시자, 관숙(管叔)은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라에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공(公)이 장차 유자(孺子)[성왕(成王)]에게 이롭지 못하다.’ 하였다. 주공(周公)이 두 공(公)에게 고하기를 ‘내가 피하지 않으면 나는 우리 선왕(先王)에게 고할 수 없다.’ 하셨다.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한 지 2년에 죄인(罪人)을 이에 얻었다. (武王이 旣喪이어시늘 管叔이 及其群弟로 乃流言於國曰 公將不利於孺子하리라 周公이 乃告二公曰 我之弗辟(避)면 我無以告我先王이라하시고 周公이 居東二年에 則罪人을 斯得하시다.)”라 하였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309-310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98-100쪽 참고.]
󰡔익증󰡕『주자대전(朱子大全)』․『속집(續集)』․「답채중묵서(答蔡仲黙書)」에는 “정씨(鄭氏)의 설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했다. [따라서] 이 편지에서 운운(云云)한 것은 곧 초년(初年)의 학설(學說)이다. 아래에 나오는「하숙경에게 답하는 글(答何叔京書)」와「동숙중에게 답하는 글(答董叔重書)」모두 이 편지에서 논의한 내용과 동일하다. 모두 정설(定說)이 아니다. (󰡔翼增󰡕 續集 答蔡仲黙書 謂從鄭氏爲是 此書云云卽初年說 下答何叔京董叔重書 皆與此書所論同 幷未定說)
입니다. 굳이 분명히 해두지 않더라도 不可(不可)
󰡔차의󰡕 당본(唐本)에는 ‘가불(可不)’로 되어 있다. (󰡔箚疑󰡕 唐本作乙)
 저절로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진소남(陳小南) 진소남(陳少南) 
󰡔표보󰡕 이름은 붕비(鵬飛)이며 영가(永嘉) 사람이다. 고종(高宗) 때에 유학(儒學)으로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 벼슬을 했다. 진회(秦檜)를 거슬러 혜주(惠州)에 귀양 가 거기서 죽었다. 저서에『시해(詩解)』,『서해(書解)』등의 책이 있다. (󰡔標補󰡕 名鵬飛 永嘉人 高宗時以儒學爲崇政殿說書 忤秦檜謫惠州卒 所著有詩解書解等書)
은 경서(經書)의 뜻을 설명한 것 * 경지(經旨) ; 경서의 뜻, 경서의 취지.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98쪽.]
이 소략(疏略)한 데가 많고, [뜻이 잘] 통하지 않아 점검(點檢)해 보아야 할 곳이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그의 학설에 근거하여 거이(遽以) 
󰡔차의󰡕 당본(唐本)에는 ‘거(遽)’가 ‘거(據)’로 되어 있다. (󰡔箚疑󰡕 唐本遽作據)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기엔] 부족합니다. 그대가 편지에서 “주공(周公)의 뜻은 자기 일신(一身)을 위해 도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선왕(先王)을 위해 도모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단순히] 선왕을 위해 도모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 한 몸으로 천하의 중임(重任)을 감당하려는 것이었다”고 한 말씀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周公東征, 不必言用權. 自是王室至親與諸侯連衡背叛, 當國大臣豈有坐視不救之理? 帥師征之, 乃是正義, 不待可與權者而後能也. 若馬․鄭以爲東行避謗, 乃鄙生腐儒不達時務之說, 可不辨而自明. 陳小南於經旨多疏略, 不通點檢處極(4-1794)多, 不足據以爲說. 來敎所謂周公之志非爲身謀也, 爲先王謀也 : 非爲先王謀也, 以身任天下之重也, 此語極佳. 

소공(召公)이 [주공(周公)에 대해] 기뻐하지 않은 것 소공불열(召公不說)
󰡔차의󰡕 [소공(召公)이] 주공(周公)에 대해 기뻐하지 않은 것이다. (󰡔箚疑󰡕 不說周公也)
󰡔절보󰡕『서경(書經)』,「군석(君奭)」,「소서(小序)」에 “소공(召公)이 태보(太保)가 되었는데 주공(周公)이 태사(太師)가 되어 성왕(成王)을 도와 좌우(左右)가 되자, 소공(召公)이 기뻐하지 않으므로 주공(周公)이「군석(君奭)」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節補󰡕 書君奭小序 召公爲保 周公爲師 相成王 爲左右 召公不說 周公作君爽)  [역주] * 『서경(書經)』,「주서(周書)」,「군석(君奭)」편 소서(小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부록 39쪽 참고.
은 대개 주공이 정무에 복귀한 후이니, [소공으로서는 주공이] 마땅히 [정무에] 복귀하여 머물지 말아야 하며, 자신도 또한 늙었기 때문에 마땅히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주공은 두 사람 二人(二人)
󰡔차의󰡕 [주공(周公)] 자신과 소공(召公)을 말한다. (󰡔箚疑󰡕 已與召公)
이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표현하여 말하기를 ‘아! 군(君 즉 召公)이 이미 말씀하기를 ‘이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 하였으니, 나 또한 감히 상제(上帝)의 명을 편안히 여겨 하늘의 위엄이 우리 백성들에게 원망하고 위배하는 때가 없음을 길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나니,(嗚呼, 君已!曰時我, 我亦不敢寧于上帝命, 弗永遠念天威, 越我民岡尤違.’) *『서경(書經)』,「주서(周書)」,「군석(君奭)」, 제3장에 “아! 군(君)[소공(召公)]이 이미 말씀하기를 ‘이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 하였으니, 나 또한 감히 상제(上帝)의 명을 편안히 여겨 하늘의 위엄이 우리 백성들에게 원망하고 위배하는 때가 없음을 길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나니, 이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우리 후사(後嗣)의 자손에 있어 크게 상하(上下)를 공경하지 못하여 전인(前人)의 빛나는 업적을 끊고 실추하면 집에 있으면서 모른다고 하겠는가. (嗚呼라 君이 已曰 時我라하더니 我亦不敢寧于上帝命하여 弗永遠念天威 越我民에 罔尤違하노니 惟人이니라 在我後嗣子孫하여 大弗克恭上下하여 遏佚前人光하면 在家不知아)”라 했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401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259쪽 참고.]
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 [주공께서는 소공에게] 고금(古今)의 성현(聖賢)들이 노성(老成)한 [신하들을] 의뢰(倚賴)하여 국가를 공고히 한 일들을 두루 말하였으며, 또 ‘[군(君)아!] 내 이치에 순하지 못하고서 이와 같이 고하기를 많이 하겠는가. 나는 써 하늘과 백성을 걱정하노라.(予不惠若玆多誥, 予惟用閔于天越民.)’ *『서경(書經)』,「주서(周書)」,「군석(君奭)」, 제22장에 “공(公)이 말씀하였다. ‘군(君)아! 내 이치에 순하지 못하고서 이와 같이 고하기를 많이 하겠는가. 나는 써 하늘과 백성을 걱정하노라.’(公曰 君아 予不惠요 若玆多誥아 予惟用閔于天越民이니라)”라 했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411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276쪽 참고.]
라는 말을 하기도 했으니, 여기에서 곧 주공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매번 독서하다가 이 곳에 이르면, 일찍이 위연(喟然)히 크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시험 삼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은] 이런 곳 등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공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求)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召公不說, 蓋以爲周公歸政之後, 不當復留, 而己亦老而當去. 故周公言二人不可不留之意曰: ‘嗚呼, 君已!曰時我, 我亦不敢寧于上帝命, 弗永遠念天威, 越我民岡尤違’. 又歷道古今聖賢倚賴老成以固其國家之事, 又曰: ‘予不惠若玆多誥, 予惟用閔于天越民. ’只此便見周公之心. 每讀至此, 未嘗不喟然太息也. 試於此等處虛心求之, 如何? 





서원빙에게 답함 答徐元聘


【해제】주자가 서원빙(徐元聘)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제2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제1서와 함께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이나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주자가 서원빙(徐元聘)에게 첫 번째 편지 해제 부분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8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 ‘인(人)․물(物)의 성(性)이 같고 다름’에 관한 문제를 주로 토론하고 있다. 아마도 서원빙은 호굉(胡宏)의 입장에 가까웠던 듯한데 주자는 이정의 학설에 입각하여 서원빙을 비판한다.

[편지를 통해] 그대가 말씀하신 ‘인(人)․물(物)의 성(性)이 같고 다름’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마땅히 의문을 가져야만 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강론해보아야 할 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한 그대의] 고정(考訂)이 정밀하고도 상세하니, 또한 [진리 탐구를 향한 그대의] 의지(志意)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며 다행한 일입니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의 성(性)은 본래 같지 않음이 없으나, 본무불동(本無不同)
󰡔차의󰡕 호랑(虎狼)의 부자(父子)관계, 벌과 매미에서의 군신(君臣)관계, 물수리에서의 부부(夫婦)관계와 같은 경우를 말한다. (󰡔箚疑󰡕 如虎狼之父子 蜂蟻之君臣 睢鳩之夫婦也) [역주] * 봉의(蜂蟻) ; 벌과 개미.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822쪽 및 1839쪽 참고.] * 저구(睢鳩) ; 물수리, 징경이를 말한다.『시경(詩經)』,「주남(周南)」, 관저(關雎)장의 주자 주에 “저구(雎鳩)는 물새이니, 일명은 왕저(王雎)이다. 모양이 부예(鳧鷖)와 유사하니, 지금 강(江)과 회수(淮水) 사이에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짝이 있어서 서로 난잡하게 하지 않고, 짝이 항상 같이 놀되 서로 친압(親狎)하지 않는다. 그러므로『모전(毛傳)』에 이르기를 “정이 두터우면서도 분별이 있다.” 하였고,『열녀전(列女傳)』에는 “사람들이 일찍이 네 마리가 같이 살고 혼자서 처하는 것을 본 자가 없다.” 하였으니, 그 천성(天性)이 그러한 것이다. (雎鳩는 水鳥니 一名王雎라 狀類鳧鷖하니 今江淮間有之라 生有定偶而不相亂하고 偶常竝遊而不相狎이라 故로 毛傳에 以爲摯而有別이라하고 列女傳에 以爲人未嘗見其乘居而匹處者라하니 蓋其性然也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시경집전(詩經集傳)󰡕,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26쪽 참고]
 타고난 기운(氣禀)에는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정자(程子) * 이하 정자(程子)의 말은『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2권/상(「이선생어(二先生語)」2권/상) 110항에 보인다.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29-30쪽 참고.
께서 이른바 ‘본성을 따르는 것을 일러 도(道)라 하는데, 이는 사람과 사물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하셨고, 또 ‘홀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만물이 다 그러하다’고 하신 것은, [사람과 사물의] 성(性)을 같다고 여기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사람은 천지의 올바른 기운을 타고 났다는 점에서는 만물과 다릅니다. [이에 정자(程子)께서는] 또 ‘다만 이 사물은 미루어 나갈 수 없지만 사람은 미루어 나갈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는 [사람과 사물의] 타고난 기운의 차이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자께서는 이를 종합하여] ‘性만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으면 구비되지 않고, 기(氣)만 논하고 성(性)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치 않다. 그러나 [성(性)과 기(氣)를 판연히] 둘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익히 완미해본다면 선생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학에서의 본성이론이] 어찌 불교에서 말하는 것 석씨지운(釋氏之云) 
󰡔익증󰡕 불교에서는 ‘꿈틀대고 움직이며 신령(神靈)함을 머금은 것들에게는 모두 불성(佛性)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개 기(氣)를 성(性)으로 여긴 것이다. (󰡔翼增󰡕 佛云蠢動含靈皆具佛性 此蓋以氣爲性也)
과 같겠습니까? 
承喩人物之性同異之說, 此正所當疑當講者, 而考訂精詳, 又見志意之不衰也. 慰幸慰幸!熹聞之, 人物之性本無不同, 而氣禀則不能無異耳. 程子所謂 ‘率性之謂道, 兼人․物而言’, 又云 ‘不獨人爾, 萬物皆然’者, 以性之同然者而言也. 所謂人受天地之正氣, 與萬物不同, 又云 ‘只是物不能推, 人則能推之’者, 以氣禀之異而言也. 故又曰: ‘論性不論氣不備, 論氣不論性不明, 二之便不是.’ (4-1795) 熟味此言, 可見先生之意, 豈若釋氏之云哉.

보내준 편지에서 말한 것들은 호자(胡子 즉 胡宏)의『지언(知言)』 호자지언(胡子知言)
󰡔차보󰡕 ‘자사자왈(子思子曰)’장(章)에서 ‘성이 하나이지 않음(性之不一)’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래「호광중(胡廣仲)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라. (󰡔箚補󰡕 子思子曰章 說性之不一 見下胡廣仲書) 
의 설과 같습니다. 래유...차설(來喩...此說)
󰡔箚疑󰡕 謂胡子知言 正如來喩云云說也 
󰡔차의󰡕『호자지언(胡子知言)』의 내용이 바로 [서원빙이 선생께] 보내온 편지에서 운운(云云)한 학설의 내용과 같다는 말이다. 
󰡔익증󰡕 아래「호광중서(胡廣仲書)」에 보인다. (󰡔翼增󰡕 見下胡廣仲書)
󰡔동이고󰡕「서원빙(徐元聘)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주선생께서는] “보내준 편지에서 말한 것들은 호굉(胡宏)의『지언(知言)』의 설과 같습니다... (󰡔同異考󰡕 答徐元聘曰 來諭云云 胡子知言 正如此說 ...) [역주] * 너무 번쇄하여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주자대전차의집보󰡕의 본 항목을 참고할 것. 
 (주; [『지언(知言)』안의 한 장 [주]내일장([注]內一章)
󰡔차의󰡕『지언(知言)』안의 일장(一章)을 말한다. (󰡔箚疑󰡕 知言內一章)
 중 에서 <子思子曰>로 시작되는 구절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성(性)은 리(理)일 뿐이므로 아마도 [성을] 이처럼 자세하게 나누기 여차분열(如此分裂)
󰡔차의󰡕 호굉의『지언(知言)』에서 논한 성(性)과 서원빙(徐元聘)이 논한 성(性)은 모두 [인성과 물성을] 나누어 말한 것이라는 말이다. (󰡔箚疑󰡕 謂胡子知言及元聘之論性 皆分裂言之也)
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타고난 기질이 같지 않기 때문에 혹 가리는 바 있어 밝지 못할 경우가 있을 따름입니다. 리(理)는 애초부터 둘이 없는데,『맹자』에서 말한 것 가운데 인용된 것 맹자...소인(孟子...所引)
󰡔차의󰡕 [여기서] ‘맹자설(孟子說)’이란 아마도 선생께서 편(編)하신『맹자정의(孟子精義)』나『맹자집주(孟子集注)』와 같은 책에서 인용한 것을 가리키는 듯한데,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이 편지의] 윗 문장에서 두 번씩이나 ‘이른바(所謂)’와 ‘또 이르시기를(又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모두 정선생(程先生)의 말씀이다. 따라서 여기서 ‘맹자설(孟子說) 가운데서 인용한 것’이란 바로 정선생(程先生)의 말씀 가운데 인성(人性)을 전문적으로 논한 부분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箚疑󰡕 孟子說 似是先生所編 精義 集注之類所引 不知其爲何說 然據上文兩所謂 兩又云 及又曰 皆是程先生語 此亦恐是程說中專論人性語也) 
은 이에 맹자의 말 孟子之言(孟子之言)
󰡔차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맹자의 말이라는 말이다. (󰡔箚疑󰡕 謂性善之說) 
󰡔익증󰡕 이는 [『맹자(孟子)』,「고자(告子)」편에서] 개의 본성, 소의 본성, 사람의 본성 운운(云云)한 것을 말한다. (󰡔翼增󰡕 卽告子犬牛人性云云)
에 근거한 것으로써 오직 사람의 도리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자사(子思)의 의도 자사지의(子思之意)
󰡔차의󰡕 ‘본성을 따르는 것, 그것을 도(道)라 한다’ 는 구절이 담고 있는 뜻을 말한다. (󰡔箚疑󰡕 率性之謂道)
는 본래 사람과 사물을 겸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性)은 같으나 기(気)는 다르다(性同気異)’는 이 네 글자야말로 무한한 도리(道理)를 함축하고 있는 만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기서 깨달을 수만 있다면 곧 성현의 말씀에 도무지 막힘(窒礙)이 없을 것입니다. 주희집 주 ; 순희(淳熙)본에는 이 구절 끝에 ‘운운(云云)’이라는 두 글자가 추가되어 있다.(淳熙本句末有‘云云’二字.)

來喩云云, 胡子知言正如此說. [주 ; 內一章首云‘子思子曰’者是也.] 然性只是理, 恐難如此分裂. 只是隨氣質所賦之不同, 故或有所蔽而不能明耳. 理則初無二也. 至孟子說中所引, 乃因孟子之言, 只說人分上道理. 若子思之意, 則本兼人․物而言之也. ‘性同氣異’, 只此四字包含無限道理, 幸試思之. 若於此見得, 卽於聖賢之言都無窒礙矣.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1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제1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제7서와 함께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1서)에서 “여기(汝器) 등 여러 벗들이 서로 모여 연일 어떤 주제에 대해 강론하십니까?(汝器諸友相聚 日所講者何事)”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제 15서에도 또 “서원빙(徐元聘)과 가국재(柯國材) 두 분 및 임여기(林汝器), 왕근사(王近思) 등 여러 친구들이 모이면 무슨 말씀들을 나누시는지요?(徐․柯二丈及汝器․近思諸友相聚說何等話?)”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편지(答王近思 제1서)는 답허순지(答許順之) 제15서와 같은 시기인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에 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9쪽 참고.
 이 편지는 왕근사의 글쓰기에 대한 주의와 당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주자는 글쓰기에 있어서는 ‘중심적 의도(主意)’가 분명해야 하며, 장자(荘子)의 말을 자주 이용하는 것은 ‘글이 허랑하게 떠버리고 무력(無力)하게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보다는 맹자(孟子)․한유(韓愈)․반고(班固)․사마천(司馬遷)의 글과 후세의 구양수(欧陽修)․증공(曾鞏)․소순(蘇洵)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저번에 부쳐 보내온 논문의 필세(筆勢)는 매우 볼만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에 있어서의] ‘중심적 의도(主意)’가 분명치 못합니다. 큰 절목(節目)을 붙여 놓다 보니 소주...안목(少主...眼目)
󰡔차의󰡕 ‘소(少)’는 ‘없다(無)’는 말과 같다. ‘주재(主宰)’는 글쓰기에 있어서의 ‘중심적 의도(主意)’를 말하다. ‘안목(眼目)’은 ‘큰 절목(節目)’이라는 말과 같다. [한유의]「원도(原道)」를 가지고 말하자면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이 [이 글의] 주재(主宰)로서 안목(眼目)을 두어야 할 곳이다. (󰡔箚疑󰡕 少 猶無也 主宰 作文之主意也 眼目 猶言大節目 以原道言之 則仁義道德是主宰 而着眼目處也) [역주] * 절목(節目) ; (1) 마디와 마디의 가운데의 구멍. (2) 세목(細目), 조목(條目).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41쪽])
 도리어 이 제목(題目)에 의해 굴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다피...전각(多被...轉却) 
󰡔차의󰡕 [글에서] 제출한 제목(題目)에 의해 [내가 도리어] 굴려짐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안목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箚疑󰡕 謂多被所出題目所轉却 而不能自主張着眼目也) [역주] * 제목(題目) ; (1) 책의 표제(標題). (2) 품평(品評). (3) 명호, 명칭. (4) 문제, 물음. (5) 글제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257쪽.] 
󰡔익증󰡕 제목(題目)을 굴리지 못하고, 도리어 제목(題目)에 의해 굴림을 당한다는 말이다. (󰡔翼增󰡕 不能轉題目 而爲題目所轉也)
, 이것 자체가 이미 큰 병통입니다. 또 장자(莊子)의 말을 이용한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글이 허랑하게 떠버리고 무력(無力)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무골조(無骨助) 
󰡔차의󰡕 문자(文字)가 무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箚疑󰡕 謂文字無力也)
 시험 삼아 맹자(孟子)․한유(韓愈)․반고(班固)․사마천(司馬遷)의 글 중에 크게 의론(議論)한 곳을 숙독(熟讀)해보고 또 후세의 구양수(歐陽修)․증공(曾鞏)․소순(蘇洵)의 문자(文字)에 대해서도 또한 마땅히 상세하게 고찰해 본다면, 이에 ‘글쓰기를 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곳(爲文用力處)’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장자(莊子)에서 [글의] 제목(題目)을 발견해낸 후에 곧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글쓰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렇게 하여 지어낸 문장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사용하는 문장일 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만약 장자(莊子)에서 [글쓰기의] 제목(題目)을 찾아내더라도, 자신이 도리어 다른 곳으로부터 나온 문자(文字)를 사용해서 글을 써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출중한 문자(文字)라 할 수 있습니다. 금인...문자(今人...文字) 
󰡔차의󰡕 제목(題目)이『장자(莊子)』에 나오고 [글의 내용 역시] 여전히『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는 수준이라면, 이는 보통 사람들의 판에 박힌 듯한(一例) 문장에 불과한 것이어서 특출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이러한 글쓰기 방법(規模)은 바꾸어야만 하니, 제목이『장자(莊子)』로부터 나왔더라도 다른 곳의 문자(文字)를 사용해서 글을 써내야만 비로소 출중(出衆)할 수 있다는 말이다. (󰡔箚疑󰡕 謂題出於莊子 而因用莊子語 是衆人一例文章 而不能特出也 必須變此規模 題出於莊子 而作者用他處文字做來 方能出衆也)
 [나는] 노둔(老鈍)하여 오랜 동안 글쓰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외람되게도] 이와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재삼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행하는 배움이 오로지 과거를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대(吾友)는 요사이 들어 ‘자기를 위하는 배움(爲己之學)’에 대해 또한 마음을 다하고 계신지요? 여기(汝器) 등 여러 벗들이 서로 모여 연일 어떤 주제에 대해 강론하십니까? [그대가 이 곳으로] 한 번 오시어 이 점에 대해 상세히 언급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向所寄論筆勢甚可觀, 但少主宰. 著眼目多被題目轉却, 已是大病. 又多用莊子語, 虛浮無骨肋. 試取孟․韓子․班․馬書大議論處熟讀之, 及後世歐․曾․老蘇文字亦當細考, 乃見爲文用力處. 今人多見出莊子題目, 便用莊子語, 殊不知此正是千人一律文章. 若出莊子題目, 自家却從別處做將來, 方是出衆文字也. 老鈍久不爲文, 如此主張未知是否, 更思之, 更思之. 抑人之爲學, 亦不專爲科擧而(4-1796)已, 不審吾友比來於爲己之學亦嘗致意否? 汝器諸友相聚, 日所講者何事? 因來更詳及此爲佳.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2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제2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제3서 제4서와 함께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경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2서)에서 “모친상을 마친 뒤인지라 다시 벼슬길에 나설 뜻이 없어... (窮居且爾 憂苦之餘 無復仕進意...)”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편지는 그가 모상(母喪) 중에 있을 때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자는 기축년(己丑, 1169년, 주자 40세) 가을에 모상을 당했는데, 이 편지는 아마도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경에 씌어진 듯하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9쪽 참고.
 과거공부에 관심을 두는 왕근사를 다소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저는 어렵기는 하나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궁거차이(窮居且爾)
󰡔기의󰡕 ‘그러히(爾)’란 이 구절 아래 ‘궁박하게 살아가는 중에, ‘애오라지 또 이처럼 소일하며 보낸다’고 말하는 것이다. (󰡔記疑󰡕 爾下句 言窮居之中 聊且如此消遣也)
 모친상을 마친 뒤인지라 우고지여(憂苦之余)
󰡔절보󰡕 아마도 祝夫人에 대한 상기(喪期)가 끝난 후인 듯하다. (󰡔節補󰡕 似是祝夫人喪服闋後) [역주] * 결(闋) ; (1) 끝나다, 마치다. (2) 쉬다, 휴식하다. (3) 다하다, 다 없어지다. (4) 비다, 아무 것도 없음, 공허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170쪽.]
 다시 벼슬길에 나설 뜻이 없어 문을 닫고 들어 앉아 몸을 닦으면서 여생을 보낼 생각입니다. 여러 통의 편지로 물어 오신 말씀은 출입이 많은 관계로 수습할 사람이 없어 종종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미처 답장을 보내지 못했지만 [그대 관심의] 대략은 다만 글공부해서 과거에 응시해 세상에 드러내고 싶다는 것이더군요. 근래 게으름으로 학업을 폐지하다 보니 나폐어차(懶廢於此)
󰡔기의󰡕 ‘이것(此)’은 과거(科擧)를 위한 글을 말한다. (󰡔記疑󰡕 此乃科擧之文)
󰡔차의󰡕 살피건대 ‘년래나폐(年來懶廢)’를 마땅히 한 구절로 보아야 한다. (󰡔箚疑󰡕 按年來懶廢當句)
, 과거공부에 대해서는 더욱이 버려둔 상태인지라 어차실기치(於此悉棄置)
󰡔간보󰡕 문자(文字)를 지어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刊補󰡕 指做文字應科擧而言)
 이 문제에 대해 더더욱 가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窮居且爾, 憂苦之餘, 無復仕進意, 杜門脩身, 以畢此生而已. 累書所問, 緣多出入, 無人收拾, 往往散落, 以此不及奉報. 然其大略只是要做文字․應科擧․誇世俗而已. 年來懶廢, 於此尤悉棄置, 不能有所可否於其間也.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3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제3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제2서 및 제4서와 함께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3서)와 제4서의 경우 언제 쓴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제4서에서 “일상 생활해나가는 가운데 경(敬)을 위주로 공부해 나가세요.(日用之間以敬爲主)”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제8서(己丑․庚寅년)에서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장엄함과 공경을 주로 삼아야 할 것이고...(日用之間以莊敬爲主...)”라고 말하는 것과 뜻이 같다. 또 주경(主敬)사상은 주자의 기축년(己丑, 1169년, 주자 40세) 이후에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통의 편지(답왕근사 제3서와 제4서)는 아마도 모두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경에 씌어진 것 같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75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왕근사가 과거공부 외에 도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삶 속에서 주체적으로 학문을 연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그대는] ‘학문의 난이도(難易度)’를 언급하시고, 별지(別紙)에서는 또 ‘[몇 가지] 의문(疑問)’을 제기하셨더군요. [이러한 그대의 글을 마주하니] 묻기를 좋아하는 그대의 뜻을 충분히 볼 수 있더군요. 본래는 하나하나 대답해 주고자 했지만 [그대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일찍이 생각을 극진히 다하지 않은 채 범범하게 질문한 것 같더군요. [그런데도] 만약 내가 또 약차우(若此又)
󰡔차의󰡕 ‘차(此)’는 선생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箚疑󰡕 此先生自謂)
 금방 대답해 주면 다만 입과 귀의 자료만 될 뿐, 묻고 배워나가는 [참 공부의] 실상에는 아무런 보탬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이제 그대(吾友)는 우선 [그대가 내게] 질문한 몇 조목에 대해 스스로 더욱 연구하고, 스스로 의문점을 찾아서, 내 마음이 편안하지의 여부를 가지고 여러 이치의 시비(是非)를 징험해 보기 바랍니다. [그렇게 공부해 나가다 보면] 비록 완전하게 통하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 대략을 볼 수 있을 것이니, 그런 뒤에 저에게 다시 가르침을 주십시오. 생각건대 그 사이에 제게 묻지 않아도 부대문(不待問)
󰡔기의󰡕 나에게 묻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記疑󰡕 不待問我也) 
 시원하게 결론이 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대는 편지에서] “혹자(或者)가 다투어 새로운 뜻을 지어 낸다”고 했는데 [다투어 새로운 뜻을 지어 낸다는] 이 분이 누구인지 모르겠군요? 아울러 그 분에게도 깨우침이 미치게 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示喩學之難易及別紙所疑, 足見好問之意. 本欲一一答去, 然熟觀之, 似未嘗致思而汎然發問者. 若此又率然奉答, 竊恐秖爲口耳之資而無益問學之實. 今且請吾友只將所問數條自加硏究, 自設疑難, 以吾心之安否驗衆理之是非, 縱未全通, 亦須可見大略, 然後復以見諭. 計其間當有不待問而決者矣. 所云或者競生新意, (4-1797)不知此是何人? 幷幸喩及.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4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제4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제2서 및 제3서와 함께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답왕근사(答王近思) 제3서 해제 부분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75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왕근사로 하여금 ‘경(敬)을 위주’로 하고 ‘옛 성현(聖賢) 및 근세의 이선생(二先生)의 말씀에 근거’해서 공부해 나갈 것을 촉고하고 있다.

별지(別紙)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마침 [내가] 이런 저런 일로 너무 바빠서 * 용용(冗冗) ; ‘용(冗)’은 ‘용(宂)’과 같은 글자이다. ‘용(宂)’은 ‘한가롭다.’ ‘쓸데없다.’ ‘번거롭다.’ ‘떠 다니다.’ ‘바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용용(冗冗)은 (1) 난잡한 모양. (2) 분망(奔忙)한 모양이란 뜻이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569쪽.]
 자세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대개 고상하고 현묘한 내용을 담아 훌륭한 문장을 짓겠다는 그대의 뜻이 담겨있는 듯합니다만, 이는 요사이 배우는 자들의 크나큰 걱정거리입니다. 다만 일상 생활해나가는 가운데 경(敬)을 위주로 공부해 나가세요. 그러면서 동시에 옛 성현(聖賢) 및 근세의 이선생(二先生)의 말씀을 하나하나 반복해서 읽어보고 자세하게 완미(玩味)해 나가야 할 것이며, 갑자기 [새로운] 학설을 세워 쉽사리 공(功 - 결과)을 이루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씩으로 오래 동안 공부해나가다 보면 마땅히 꿰뚫어 통하는 곳(貫通處)이 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가슴 속이 명료해져서 모든 의심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別紙所示, 適此冗冗, 不及細觀. 大抵似有要說高妙․作文章之意. 此近世學者之大患也. 但日用之間以敬爲主, 而於古昔聖賢及近世二先生之言逐一反復子細玩味, 勿遽立說以求近功, 則久之當有貫通處, 而胸次了然無疑矣.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5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제5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5서)는 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제6서, 제8서 및 제10서와 함께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3서)와 제4서의 경우 언제 쓴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제4서에서 “일상 생활해나가는 가운데 경(敬)을 위주로 공부해 나가세요.(日用之間以敬爲主)”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제8서(己丑․庚寅년)에서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장엄함과 공경을 주로 삼아야 할 것이고...(日用之間以莊敬爲主...)”라고 말하는 것과 뜻이 같다. 또 주경(主敬)사상은 주자의 기축년(己丑, 1169년, 주자 40세) 이후에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통의 편지(답왕근사 제3서와 제4서)는 아마도 모두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경에 씌어진 것 같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75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왕근사가 명민하고 근면하긴 하지만 중후한 점이 모자람을 경계한다. 또 아직은 초고에 불과한 자신의『대학(大学)』과『논어(論語)』등에 관한 학설이 사람들 사이에게 논의되고 있는데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상세하게 논해 주셨더군요. * 루루(縷縷) ; ‘縷’는 ‘실’, ‘자세하다’, ‘잘게 썰다’, ‘누더기’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루루(縷縷) 는 (1) 실이 길게 연속하는 모양. (2) 가늘고 끊이지 아니하는 모양. (3) 모두 가는 모양. (4) 細細하고 잗단 모양(편지에 쓰는 말)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619쪽.]  
 [내가 보기에] 대체로 그대(吾友)는 너무나 명민하고 근면하긴 하지만 중후하게 [자신의 재주와 덕을] 숨기고 감추는(韜晦) * 도회(韜晦) ; ‘韜’는 ‘활집’, ‘싸다’, ‘감추다’, ‘비결’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도회(韜晦)는 (1) 才德을 숨기어 감추다. (2) 어둠침침함 등의 뜻이 있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245쪽.]
 기상이 모자랍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올 가을 [그대가] 향공(鄕貢)을 천거해 보내는 일에 참여하게 되면 야여천송(若與薦送)
󰡔차의󰡕 ‘여(興)’는 ‘참(參)’과 같은 의미이다. 향공(鄕貢)을 천거해 보낸 일을 말한다. (󰡔箚疑󰡕 興猶參也 薦送鄕貢事) [역주] * 향공(鄕貢) ; 지방장관이 천거하는 사람.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089쪽.]
 길을 돌아가더라도 [내가 있는 이 곳을] 한 번 다녀가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품고 있던 많은 것들을 그 때 가서 얼굴을 맞대고 속 시원히 다 펼쳐낼 수 있을 것 같군요. 듣자하니 축제(祝弟)가 『대학(大學)』과 [『논어(論語)』‘관과지인(觀過知仁)’ 관과지인(觀過知仁)
󰡔익증󰡕「관과설(觀過說)」은 67권에 보인다. (󰡔翼增󰡕 觀過說 見六十七卷)
에 관한 [나의] 학설에 관해 변론(辨論)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 글들은] 모두 지금까지 [내가] 써 두었던 초고(草稿)입니다. 아직은 오락가락 하는 수준으로 정설이 아닙니다.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축제(祝弟)는 본말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이 글을] 가져다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으니 매우 편치 못합니다. [아예 원고를] 태워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所論縷縷, 已悉. 大抵吾友明勉有餘而少持重韜晦氣象, 此是大病. 今秋若與薦送, 能迂道一見過, 幸幸. 所懷當面布之, 乃可盡耳. 聞祝弟持大學說及‘觀過知仁’辨論去, 皆是向來草稿, 往返未定之說. 渠乃不知本末, 持去悞人, 甚不便, 可爲焚之.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6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제6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6서)는 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제5서, 제8서 및 제10서와 함께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6서)와 제8서 그리고 제10서의 경우 언제 쓴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대체로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 이후에 씌어진 것 같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92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자신에게 부탁하여 묘지명(墓誌銘)과 제문(祭文)을 남기고자 하는 왕근사를 타이른다. 아울러 왕근사가 성실한 마음이 모자라고 문(文)이 질(質)보다 우세하여 침착하고 온후한 기풍이 없음을 혹독하게 나무라고 있다.

이보다 앞서 선부인(先夫人)의 묘(墓)에 묘지명(墓誌銘)을 쓰고자 하였지만 일찍이 그것을 익힌 적이 없는 관계로 부탁에 응할 수가 없었고, 또 제 생각에는 군자가 부모를 섬김에 가치 있는 것은 정성(誠)을 다하는 데 있지 묘지명(墓誌銘) 등을 남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다만 뜻을 돈독하게 하고 힘써 실천해 나감으로써 남들이 ‘[이 사람은 참으로] 군자의 자식이다’라는 소리를 하게 될 정도가 된다면 부모를 위한 [그대의] 영광이 클 것입니다. 제문(祭文) 제문(祭文)
󰡔기의󰡕 왕근사(王近思)가 자신의 모친에게 드린 제문을 말한다. (󰡔記疑󰡕 王近思所作祭其母之文)
은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상사(喪事)는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지가 주관하는 것인데 지금 [그대가] 직접 주관하시니 첫 번째 잘못이고, 옛날에 장례(葬礼)를 치를 때에는 조전(祖奠) * 조전(祖奠) ; 상제(喪祭)의 이름이다. 발인(發引)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드리는 전(奠)[發引前一夕之奠]을 말한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6권 1399쪽 참고.]
과 견전(遣奠) * 견전(遣奠) ; 상례(喪禮)에 발인(發引)하는 날에 올리는 전(奠)이다. 조전(祖奠)을 드린 다음날 아침에 이를 행한다. 견전(遣奠)이 끝나고 나면 널(柩)을 광(壙)으로 향하게 한 다음 장사(葬事)지낸다. 그 의제(儀制)는『의례(儀禮)』제13「기석례(旣夕禮)」에 보인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9권 196쪽 참고.]
을 축관(祝官)이 해당 사실로써 고하기는 하되 문사(文辞)는 없었는데, [이제 그대는 글로 남기려 하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고 무문사이실(無文辭二失)
󰡔차의󰡕 축관(祝官)이 해당 사실로써 고하기만 하고 문사(文辭)는 없이 하는 것이 예(禮)이다. 그런데도 이제 [그대는] 스스로 글을 쓰고자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라는 말이다. (󰡔箚疑󰡕 謂祝以事告而無文辭禮也 而今自爲文辭 是二失也)
, 옛사람이 상을 당하면 말을 함에 수식하지 않았으니 언불문(言不文)
󰡔절보󰡕『효경』에, “효자가 부모의 상을 맞이하면 곡을 하는데 다른 웅얼거림이 있지 아니하고, 언어에는 꾸밈이 있지 아니하다”고 했다. (󰡔節補󰡕 孝經 孝子之喪親 哭不偯 言不文也) [역주] *『효경』제18장(「상친(喪親)」장)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효자가 부모의 상을 맞이하면 곡을 하는데 다른 웅얼거림이 있지 아니하고, 예절에서 용모를 갖추지 아니하며, 언어에는 꾸밈이 있지 아니하며, 좋은 의복도 편안하지 아니하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아니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애통해하고 서러워하는 정이 있기 때문이다... (子曰, 孝子之喪親也. 哭不偯. 禮無容. 言不文. 服美不安. 聞樂不樂. 食旨不甘. 此哀戚之情也.)”라고 했다. 박명용(朴明用)․황송문(黃松文) 편저, 󰡔효경(孝經)󰡕, (서울, 자유문고, 1993), 184쪽 참고.
 이는 슬픔이 워낙에 커서 미처 이를 수식할 수 없었던 것인데 지금 수식이 심하고 더구나 위세를 부리고 자긍심을 갖기까지 하니 진이긍지(振而矜之)
󰡔절보󰡕『춘추공양전』희공(僖公) 9년 조에 “규구(葵丘)의 회동(會同)에서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위세를 부리고 자긍심을 보였는데 배반한 나라가 아홉 개 나라였다. 위세를 어떻게 부렸다는 말인가? 진진(振振)하게 행동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자긍심을 어떻게 보였다는 말인가? 말하자면 아무도 나만한 사람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라고 하였다. (󰡔節補󰡕 公羊僖九年 葵丘之會 齊桓公振[震]而矜之 叛者九國 振[震]之者何 猶曰振振然 矜之者何 猶曰莫我若也)  [역주] * 이학근 주편(李學勤 主編),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9), 223쪽에는 ‘진(振)’이 ‘진(震)’으로 표기되어 있다. * 진진(振振) ; (1) 떼를 지어 나는 모양. (2) 인후(仁厚)한 모양. (3) 위용(威容)이 있는 모양.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836쪽.]
 이것이 세 번째 잘못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상(喪)은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 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한다”『논어(論語)』,「팔일(八佾)」편, 제4장에 “임방(林放)이 예(禮)의 근본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질문이여! 예(禮)는 그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여야 하고, 상(喪)은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한다.’(林放이 問禮之本한대 子曰 大哉라 問이여 禮는 與其奢也론 寧儉이요 喪은 與其易也론 寧戚이니라)”라고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52쪽 참고.
고 하셨으니 그대(吾友)는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까? 대체로 그대(吾友)는 성실한 마음이 지극하지 않고 화려한 수식이 늘 슬픔보다 지나친 듯합니다. 그러므로 글을 쓴 것이 모두 문사가 이치에 비해 지나치고 문(文)이 질(質)보다 우세하여, 경솔하고 괴이한 태도는 있지만 침착하고 온후한 기풍이 없으니, 깊이 경계하고 성찰하여 말은 어눌하게 행동을 민첩하게 하여『논어(論語)』,「이인(里仁)」편, 제24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君子)는 말은 어눌(語訥)하게 하고, 실행(實行)에는 민첩하고자 한다.’(子曰 君子는 欲訥於言而敏於行이니라)”라고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82쪽 참고.
 잘못된 옛 습관을 고치셔야 합니다.
前此欲銘先夫人之墓, 以未嘗習爲之, 無以應命. 亦自念君子之事親以誠, 正不在此. 但能篤志力行, 使人謂之君子之子, 則其爲貌榮也大矣. 祭文尤所末解. 凡喪, 父在父爲主, 今自主之, 一失也. 古者將葬, 祖奠․遣奠祝以事告而無文辭, 二失也. 古人居喪則言不文, 蓋哀戚勝之, 不能文也. 今文甚矣, 又將據而矜之, 此三失也. 孔子曰: ‘喪與其易也寧戚.’ 吾友其未之思歟? 大抵吾友誠慤之心似有未至, 而華藻之飾常過其哀, 故所爲文亦皆辭勝理, 文勝質, 有輕揚詭異之態而無沉潛溫厚之風. 不可不深自警省, 訥言敏行, 以改故習之謬也.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7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일곱 번째 편지(제7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7서)는 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제1서와 같은 시기인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7서)는 정자(程子)의 어록(語錄)을 교정하는 일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허순지(許順之) 왕근사(王近思) 등이 주자의 부탁을 받고 함께 이정자의 어록(語錄)을 교감한 일을 가리킨다.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보낸 제 15서를 참고해 보라. 또 이 편지(答王近思 제7서)에서 “요사이 [나는] 서문(序文) 하나를 써서...(近作一序)”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당연히『이정유서(二程遺書)』의 후서(後序)를 가리킨다. 이 서문에서 주자는『이정유서(二程遺書)』를 편(編)하게 된 취지를 논하고 있다. 따라서 이 편지(答王近思 제7서)는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에 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49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이정유서(二程遺書)』교감 작업에 수고하는 왕근사의 노고를 은근히 치하하면서도 왕근사가 쓴 제문이 지나치게 화려한 점을 몹시 나무라고 있다.

듣자 하니 정자(程子)의 어록(語錄)을 교정하는 일 교서(校書)
󰡔차의󰡕 정자(程子) 어록(語錄)을 교정한 것을 말한다. (󰡔箚疑󰡕 校程子語錄)
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지요. 요사이 [나는] 정자어록(程子語錄)에 서문(序文) 근작일서(近作一序)
󰡔차의󰡕 선생께서 지으신『정자어록(程子語錄)』서문(序文)을 말한다. (󰡔箚疑󰡕 先生所作程子語錄序)
󰡔절보󰡕 어록(語錄)은『이정유서(二程遺書)』를 말한다. (󰡔節補󰡕 語錄作遺書)
을 써서 [이 글을] 편찬(編纂)하게 된 뜻을 대략이나마 드러내 보였습니다. 만약 [그대의 말씀과 같이 그대가] 다만 아침저녁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이 제문을 지은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그 말이 그토록 아름답도록 꾸미려 했습니까? 하필...지미(何必...之美)
󰡔차의󰡕 왕근사(王近思)가 선생의 서문(序文)이 문채나는 아름다움이 없음을 문제 삼았기 때문에 [선생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箚疑󰡕 近思病先生序文無文采之美故云) 
󰡔차보󰡕 ‘약단(若但)’이하의 내용은 마땅히 그 자체 한 단락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단락은]은 아마도 앞의 편지에서 말한 제문(祭文)에 관한 이야기와 어맥(語脈)을 같이하는 듯하다. 대개 앞의 편지에서 선생께서는 왕근사(王近思)의 제문(祭文)을 두고 세 가지 잘못이 있음을 나무라셨는데, [이에 대해] 왕근사는 “다만 아침저녁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이 제문을 지었노라”는 식으로 해명한 것이 틀림없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써 [왕근사의 변병을] 꺾어놓으신 것이다. 아래에 나오는 ‘죽은 사람을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긴다(送往事居)’라는 말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더욱 상세히 밝혀 두는 것이 마땅하다. (󰡔箚補󰡕 若但以下 恐當自爲一段 似是前書祭文語脈 蓋前書先生以近思祭文之三失責之 而近思必以但欲朝夕自警爲解 故先生又以是折之 觀於下文送往事居之語可見 當更詳之)
 ‘죽은 사람을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기는 일(送往事居) 송왕사거(送往事居)
󰡔차의󰡕 [이 말은]『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9년조에 보인다. ‘왕(往)’은 죽은 사람을 말하고, ‘거(居)’는 살아있는 사람을 말한다. 대개 [이 말은] 본래 임금에게 사용한 말인데 이제 이를 부모에게 借用하신 것이다. (󰡔箚疑󰡕 見左傳 往死者也 居生者也 蓋本用於君而今借用於父母也) [역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9년조에 “ ... 진(晉)나라 헌공(獻公)이 순식(荀息)에게 말하기를 ‘무엇을 충(忠)이라 하며 정(貞)이라 하는가?’ [순식(荀息)이] 대답하기를 ‘왕실을 위해서라면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돌아가신 임금을 중하게 보내고, 뒤를 잇는 임금을 섬겨, 양쪽에서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진심으로써 섬기는 것을 貞이라고 합니다.’(公曰 何謂忠貞 對曰 公家之利 知無不爲 忠也 送往事居 耦俱無猜 貞也)”라고 하였다. 이석호(李錫浩) 역주, 󰡔춘추좌전(春秋左傳)󰡕(上), (서울, 平凡社, 1979), 295-6쪽 참고.
에 관해 정미롭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이] 말미암은 유래에 관해서까지 인식해나가는 것 식기소유래(識其所由來)
󰡔차의󰡕 ‘죽은 사람을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기는 도(道)’가 본래 천리(天理)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箚疑󰡕 謂識送往事居之道 其本由於天理也)
이야말로 곧 배우는 자의 급선무일 것입니다.
校書聞用力甚勤, 近作一序, 略見編纂之意. 若但欲旦夕自警, 則亦何必求其辭之美耶? 精思力行於送往事居之際而識其所由來, 是則學者之急務也.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8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여덟 번째 편지(제8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8서)는 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제5서, 제6서 및 제10서와 함께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8서)와 제6서 그리고 제10서의 경우 언제 쓴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대체로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 이후에 씌어진 것 같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92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처음으로 왕근사의 호학(好学)을 칭찬하면서 공부와 관련한 몇 가지 당부를 한다.

그대가 피력하신 의문점들을 보니, 그대가 얼마나 돈독하게 호학(好學)하는지 알 수 있겠군요. 이미 문득 [그대 스스로] 주(注)를 갖추어 [글] 아래 제시했더군요. [이처럼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확정하지 말고] 우선은 거듭 선배 학자들이 하신 말씀 중에서 정요(精要)한 한 말씀을 가려내어 반복해서 완미(玩味)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으면 마땅히 마음에 이해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멋대로 사사로운 뜻으로 천착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만약 멋대로 사사로운 뜻으로 천착해 나가다 보면] 잘못이 점점 [진리와] 멀어지게 되어 나중에는 수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논어(論語)』의] ‘필문기정(必聞其政)’에 관한 [그대의] 논설 필문...지설(必聞...之說
󰡔차의󰡕 ‘반드시 그 정사(政事)를 들으신다(必聞其政)’는 말은『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다. ‘반드시 그 정사(政事)를 들으신다는 데 대한 학설(必聞其政之說)’은 왕근사(王近思)가 [논어의 이 말을] 풀이한 논설문이다. (󰡔箚疑󰡕 必聞其政 論語語 說近思釋此語之說也) [역주] *『논어(論語)』,「학이(學而)」편, 제10장에 “자금(子禽)이 자공(子貢)에게 물었다. ‘부자(夫子)께서 한 나라에 이르셔서는 반드시 그 정사(政事)를 들으시니, 구해서 그리 된 것입니까? 아니면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 된 것입니까?’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부자(夫子)는 온순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여 이것을 얻으시는 것이니, 부자(夫子)의 구하심은 일반인의 구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子禽이 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하사 必聞其政하시나니 求之與아 抑與之與아 子貢曰 夫子는 溫良恭儉讓以得之시니 夫子之求之也는 其諸異乎人之求之與인저)”라고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5-6쪽 참고.
 역시 서서히 [진리와는 먼 곳으로] 내달려 가고 있습니다. 매우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所示疑問, 深見好學之篤, 已輒具注所見於下. 且更於先達所言之中擇取其精要者一說, 反復玩味, 久而不忘, 當自有心解處 : 不可妄以私意穿鑿, 恐失之浸遠, 難收拾也. 如必聞其政之說, 亦駸駸然走作了也. 戒之戒之!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9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아홉 번째 편지(제9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9서)는 경술년(庚戌, 1190년, 주자 61세) 7월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9서)에 “이곳에 도착한 지 바쁘게 석 달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정무(政務)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대가 있는 그곳과 내가 있는] 이 곳까지는 서로 멀지 않으니, 그대가 이곳을 한 번 방문하여 나와 함께 여러 날 만날 수 있을까요? (到此悤悤三月 政不得施...此間相去不遠 不知能略見訪 相聚數日否)”라고 했다. 왕력행(王力行, 즉 王近思)는 천주(泉州) 동안(同安) 사람[진영첩(陳榮捷) 저, 󰡔주자문인(朱子門人)󰡕, 59쪽 참고,]이고, 이 편지(答王近思 제9서)에서 “이곳에 도착한 지 바쁘게 석 달이 흘렀다.(到此悤悤三月)”라고 한 것을 보아 이 당시 주자는 외임(外任)에 있은 것이 분명하다. 또 이 편지(答王近思 제9서)에서 주자 자신의 임소(任所)와 왕근사(王近思)가 있는 곳과는 그리 멀지 않다고 했으니, 주자의 임지(任地)는 당연히 장주(漳州)라 볼 수 있다. 주자는 장주(漳州) 지사로 경술년(庚戌, 1190년, 주자 61세) 4월에 그곳에 도착했는데, 이 편지(答王近思 제9서)에서 “이곳에 도착한 지 바쁘게 석 달이 흘렀다.(到此悤悤三月)”라고 했으니, 이 편지는 경술년(庚戌, 1190년, 주자 61세) 7월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06-7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왕근사의 홍범설(洪範説)에 관해서는 직접 만나서 의견을 교환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곳 장주(漳州)에 도착 到此(到此) 
󰡔익증󰡕 왕근사(王近思)는 천주(泉州) 사람인데, 아래 문장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곳(此)’은 곧 장주(漳州)이다. (󰡔翼增󰡕 近思 泉州人 而下文有相去不遠之語 此卽漳州也)
한 지, 바쁘게 총총[悤悤, 주차집보에는 ‘총총(怱怱)’으로 되어 있다.]
󰡔차의󰡕 ‘총(怱)’은 아마도 ‘홀(忽)’자로 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箚疑󰡕 怱恐當作忽) 
 석 달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정무(政務)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가르침을 시행하지도 못하고 있어서, 늘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논의한 것이 두루 갖추어졌습니다만, 홍범설(洪範說)에 관해서는 아직 자세히 들여다 볼 여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있는 그곳과 내가 있는] 이 곳까지는 서로 멀지 않으니, 그대가 이곳을 한 번 방문하여 나와 함께 여러 날 만날 수 있을까요? [홍범설(洪範說)에 관한] 이 일은 반드시 성의 있게 자세히(款曲) * 관곡(款曲) ; (1) 다정하고 성의가 있음. (2) 자세한 사정. = 委曲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067쪽.]
 강론(講論)해야만 바야흐로 [그 참된] 의미(意味)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니, 문자(文字)와 언어(言語)에 부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심부름꾼이 돌아갈 길을 바삐 서두르니, 남은 이야기는 [그대와 내가 직접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到此悤悤三月, 政不得施, 敎不得行, 日有愧怍而已. 所論已悉, 洪範說未暇細看. 此間相去不遠, 不知能略見訪, 相聚數日否? 此事須款曲講論, 方見意味, 非文字言語可寄也. 人還草草, 餘俟面道.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10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제10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0서)는 제6서 그리고 제8서와 함께 언제 쓴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대체로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10서)는 제6서 그리고 제8서와 함께 언제 쓴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대체로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 이후에 씌어진 것 같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92쪽 참고.
 이 편지는 주자가 왕근사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근사는 ‘평소에 조심한다고 해도 늘 잘못을 반복하는 자신의 문제점’을 고백하면서 스승의 대답을 기다린다. 주자는 왕근사의 이러한 문제는 본심(本心)이 인욕(人欲)에 빠져 의리가 투철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발생한 병폐라고 보고, 이치를 궁구하여 물욕을 극복하여 의리를 편안하고 견고하게 가져야 한다고 알려준다. 이 밖에도 왕근사는『논어(論語)』에서 안자(顔子)의 안빈(安貧)이 지닌 갈등의 여지, 백이(伯夷)와 숙제(叔斉)의 고민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또 주자가 유청지와 함께 편한『소학(小学)』에서의 자료 선택의 타당성에 관해서도 질문한다. 우리는 왕근사의 질문을 통해 그가 도학자적 근엄성 보다는 매우 정감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관심을 지닌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왕근사의 질문1] 평소 일이 없을 때에는 시비를 가리는 일에 대해 의혹이 없을 듯합니다만, 일이 생겨 대응해나가다 보면 잘못에 빠지는 것이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됩니다. 비록 곧 바로 후회하지만 뒷날의 실수가 또 지난번과 같습니다. 지금 일에 임했을 때 이른바 ‘기뻐할만하고, 괴이히 여길 만하며, 두려워 할만하고, 막힐만한 일들’에 대처해 나갈 때, 평상시의 [평정한] 마음을 바꾸지 않고자 합니다만 그 방법(道)을 어떻게 강구해야만 하겠습니까?
[선생의 대답1] 이것은 바로 본심(本心)이 인욕(人欲)에 빠진 지 오래되어, 의리가 점차 투철하지 못하게 됨으로 인해 발생한 병폐입니다. 우선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언제나 쉬지 않는다면 물욕의 마음이 절로 앞설 수 없게 되어 본심의 의리가 편안하고 견고해질 것입니다.
平時無事, 是非之辯似不能惑. 事至而應, 則陷於非者十七八. 雖隨卽追悔, 後來之失又只如故. 今欲臨事時, 所謂可喜可怪可畏可沮者不能移其平時之心, 其道何由? 
此是本心陷溺之久, 義理浸灌未透之病. 且宜讀書窮理, 常不間斷, 則物欲之心自不能勝而本心之義理安且固矣. 

[왕근사의 질문2] 안자(顔子)는 더러운 거리에 살고 있는데, 안로(顔路)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큰 집에서 살았다 하니 자식 된 입장에서는 근심이 없을 수 없었겠습니다. [그런데도] 안자(顔子)가 바야흐로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으니, [안자 나름대로] 반드시 이러한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생의 대답2] 여기서도 역시 앞 조목에서 밝힌 뜻 상조의사(上條意思)
󰡔익증󰡕 의리(義理)가 편안하고 견고하다는 말이다. (󰡔翼增󰡕 義理安且固)
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쪽(義理)이 중시되면 저쪽(人欲)은 [자연히] 경시될 수밖에 없었기에 [그리된 것이지, 특별히 [안자에게 무슨 묘한] 방법이나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顔子在陋巷, 而顔路甘旨有闕, 則人子不能無憂. 顔子方不改其樂, 必有處此矣. 
此說亦只是上條意思, 此重則彼自輕, 別無方法, 別無意思也.

[왕근사의 질문3] 공자(孔子)께서 “백이(伯夷)와 숙제(叔斉)는 옛날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다.(不念舊惡)”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편, 제22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남이 옛날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드물었다.’(子曰 伯夷叔齊는 不念舊惡이라 怨是用希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00쪽 참고.
고 하셨는데 그들 부자 간이나 형제 간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할만한 어떤 사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소씨(蘇氏)가 주장한 ‘어긋난 말(違言) 소씨달언(蘇氏達言) 
󰡔차의󰡕 [이 점에 관해서는] 마땅히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소씨(蘇氏)의 뜻이란 아마도 ‘백이(伯夷)가 그의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였고,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백이(伯夷)를] 미워하여 [그를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은 채] 방치했다’는 것이리라. (󰡔箚疑󰡕 當攷 竊意蘇意以爲伯夷有違言於其父 故惡而舍之也) [역주] * 위언(違言) ; (1) 말다툼. (2) 도리에 어긋나는 말.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067쪽.]
󰡔잡지󰡕 소씨(蘇氏)의 설(說)은『논어혹문(論語或問)』에 보이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이 숙제의 일은 먼 예날 일인지라 후세에 전해오는 가운데 그 말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들이 부모를] 떠나게 된 것은 부자(父子) 간에 [누군가의] 이간질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니, 신생(申生)이 죽게 된 것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다지도 [서로] 미워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논어혹문(論語或問)』의 이 장(章)에서 ‘원망함(怨)’을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원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는『논어집주(論語集註)』와는 같지 않다. 이 편지는『논어혹문(論語或問)』의 설과 같다. (󰡔雜識󰡕 蘇氏說 見論語或問 曰夷齊之事遠矣 傳失其辭意其出也 父子之間有間言焉 若申生之死歟 不若是 又何惡之可念哉 先生於或問 此章亦以怨爲夷齊之怨 與集注不同 此則或問之說)  [역주] * 간언(間言) ; 남을 이간시키는 말.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165쪽.] * 소씨(蘇氏)의 학설에 대해서는 주희, 󰡔사서혹문(四書或問)󰡕, (보경문화사 영인본, 1986), 101쪽 참고.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 제22장에 대한 주희의 집주 가운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두 아들이다. 맹자(孟子)는 그들을 일컬어 ‘악한 사람[임금]의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았고, 악한 사람과는 함께 말하지 않았으며, 무식한 시골사람과 서 있을 때에 그의 갓[冠]이 바르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려, 마치 자기가 오염될 것처럼 여겼다’고 하셨다. 그의 꼿꼿한 지조(志操)가 이와 같았으니, 당연히 포용하는 바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미워하던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즉시 미워하는 마음을 그쳤다. 그러므로 사람들도 심히 그를 원망하지 않은 것이다.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남이 옛날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청자(淸者)의 도량이다.’ 또 말씀하였다. ‘두 사람의 마음을 부자(夫子)가 아니셨다면 누가 알았겠는가?’ (伯夷叔齊는 孤竹君之二子라 孟子稱其不立於惡人之朝하고 不與惡人言하며 與鄕人立에 其冠不正이어든 望望然去之하여 若將퐠焉이라하시니 其介如此하니 宜若無所容矣라 然이나 其所惡之人이 能改卽止라 故로 人亦不甚怨之也니라 ○ 程子曰 不念舊惡은 此淸者之量이니라 又曰 二子之心을 非夫子면 孰能知之리오)”라고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00쪽 참고.
 때문이라는 설(說)은 과연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공자께서는 반드시 [무엇인가의 근거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이처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선생의 대답3] 백이(伯夷)는 이미 나이도 많고 또 어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아비는 이유 없이 그를 내버려 두고 숙제(叔齊)를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필시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소씨(蘇氏)가 의심을 한 것입니다. 살피건대 [이 문제는] 자공(子貢)이 [백이 숙제가] ‘후회했습니까(怨乎)’라고 질문했을 때 [자공의] 뜻『논어(論語)』,「술이(述而)」편, 제14장에 “염유(冉有)가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 위(衛)나라 군주(君主)를 도우실까?’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내 장차 여쭈어보리다.’ 하였다. 들어가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孔子)께서는 ‘옛날의 현인(賢人)이시다.’ 하고 대답하셨다. ‘후회(後悔)하셨습니까?’ 하고 묻자,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으니, 다시 어찌 후회(後悔)하였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 자공(子貢)이 나와서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는 그를 돕지 않으실 것이다.’ 하였다.(冉有曰 夫子爲衛君乎아 子貢曰 諾다 吾將問之호리라 入하여 曰 伯夷叔齊는 何人也잇고 曰古之賢人也니라 曰怨乎잇가 曰求仁而得仁이어니 又何怨이리오 出하여 曰 夫子不爲也시리라)”라는 내용이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34-5쪽 참고.
이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반드시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앞의 자공의 질문 뒤에 공자께서]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으니, [백이와 숙제는] 후회(後悔)가 없었다”고 하신 데서 성현(聖賢)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곧 [중인(衆人)이 이른바] ‘죽음으로서 서로 갚아야 할 원수’라는 무슨 그런 원한이 있었다 하더라도 변유심사수(便有甚死讎)
󰡔차의󰡕 ‘사(死)’자는 아마도 ‘원(怨)’자의 잘못인 듯하니, ‘비록 무슨 원수처럼 여기는 뜻이 있었다 하더라도’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箚疑󰡕 死疑怨字之誤 謂雖有甚麽怨讎之意)
󰡔익증󰡕 ‘무슨 피맺힌 원한이야 있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翼增󰡕 猶言有何等血怨)
󰡔표보󰡕 ‘사(死)’자를 반드시 잘못이라 볼 필요는 없다. [‘사수(死讎)’라 할 때의] ‘사(死)’는 ‘죽음으로서 서로 갚아야 할 벗(死友)’이나 ‘죽음으로서 서로 갚아야 할 선비(死士)’라 할 때의 ‘사(死)’인데, [따라서 ‘사수(死讎)’는] ‘죽음으로서 서로 갚아야 할 원수’라는 말이다. 죽음으로서 서로 갚아야 할 원수는 원수 중에서도 가장 [원한을] 풀기 어려운 원수이다. 성현(聖賢)의 마음은 다만 천리(天理)일 뿐 조금의 사사로운 뜻도 없다. 이 때문에 곧 중인(衆人)이 이른바 ‘죽음으로서 서로 갚아야 할 원수’라는 무슨 그런 원한이 있더라도 또한 [그 원한을] 이처럼 녹여 없앤다는 것이니, 대개 ‘원한이 없다(無怨)’는 이 두 글자로 인해 [그 정신을] 끝까지 미루어 나가서 [이처럼] 말한 것이다. 만약 ‘사(死)’를 ‘원(怨)’으로 보게 되면 [이 말] 이하의 내용은 다만 ‘무원(無怨)’이라는 이 두 글자를 중첩하여 말하는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같은 글자를 [중복해서] 쓴 꼴이 되어서, 끝까지 미루어 나가서 말하려는 의도를 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아마도 [이 문맥의 위미는 󰡔차의󰡕를 그대로 따르지 말고] 다시 따져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標補󰡕 死字未必誤 死如死友死士之死 謂以死相報之讎 讎之最難消融者也 聖賢之心 只是天理 無一毫私意 故便有甚麽衆人所謂以死相報之讎 亦只如此消融也 蓋因無怨二字而推說到極也 若以死作怨 則可以以下只是疊說無怨二字 便有亦只等字下得沒着 不見推說到極之意 恐當更商)
 또한 [성인은 그 원한을] 이처럼 녹여 없앤다는 것입니다.
孔子謂夷齊不念舊惡, 則是其父子兄弟之間猶有可議也. 蘇氏違言之說, 果可據乎? 孔子之言必有見矣.
伯夷旣長且賢, 其父無故舍之而立叔齊, 此必有故, 故蘇氏疑之. 觀子貢問‘怨乎’之意, 似或有此意. 然不必疑, 但看後來求仁得仁便無怨處, 則可以見聖(4-1801)賢之心. 便有甚死讎, 亦只如此消融了也.

[왕근사의 질문4] 손사막(孫思邈)이 ‘담(膽)을 크게 하고자 한다’ *『소학(小學)』권5, 가언(嘉言) 57조에 “손사막(孫思邈)이 말하였다. ‘담은 크고자 하되 마음은 작고자 하며, 지혜는 둥글고자 하되, 행실은 방정하고자 해야 한다.’ (孫思邈曰, 膽欲大, 而心欲小, 智欲圓, 而行欲方.)”라는 구절이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소학집주(小學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4), 327쪽 참고.
고 말한 것은 이해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선생의 대답4] [이는 『맹자』에서] “저도 장부(丈夫)이고, 나도 장부(丈夫)이니, 내 어찌 그를 두려워하리요!” *『맹자(孟子)』,「등문공(滕文公)」상, 제1장에 “등문공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장차 초(楚)나라로 가기 위하여 송(宋)나라를 지나다가 맹자(孟子)를 만나 뵈었다. 맹자(孟子)께서 성(性)의 선(善)함을 말씀하시되, 말씀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칭하셨다. 세자(世子)가 초(楚)나라에서 돌아와 다시 맹자(孟子)를 뵙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세자(世子)는 내 말을 의심하십니까? 도(道)는 하나일 뿐입니다.’ 성간(成覵)이 제경공(齊景公)에게 이르기를 ‘저[성현(聖賢)]들도 장부(丈夫)이며 나도 장부(丈夫)이니, 내 어찌 저 성현(聖賢)들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으며, 안연(顔淵)이 말씀하기를 ‘순(舜)임금은 어떠한 분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이 순(舜)임금과 같다.’ 하였으며,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주공(周公)은>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 하셨으니, 주공(周公)이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 하였습니다.... (滕文公이 爲世子에 將之楚할새 過宋而見孟子한대 孟子道性善하시되 言必稱堯舜이러시다 世子自楚反하여 復見孟子하신대 孟子曰 世子는 疑吾言乎잇가 夫道는 一而已矣니이다 成覵이 謂齊景公曰 彼丈夫也며 我丈夫也니 吾何畏彼哉리오하며 顔淵曰舜何人也며 予何人也오 有爲者亦若是라하며 公明儀曰 文王은 我師也라하시니 周公이 豈欺我哉시리오하니이다....)”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138-9쪽 참고.
라고 것과 동일한 뜻일 것입니다.
孫思邈 ‘膽欲大’之說有所未喩. 
彼丈夫也, 我丈夫也, 吾何畏彼哉!

[왕근사의 질문5] 곽광(霍光) * 곽광(霍光) ; 전한(前漢) 사람. 무제(武帝) 시 흉노(匈奴) 정벌에 큰 공이 있었던 곽거병(霍去病)의 이모제(異母弟)이다.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장군(大司馬將軍)으로서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그 후 창읍왕(昌邑王)이 음란하므로 그를 폐위시켜 중기(中期)의 정치실력자 선제(宣帝)를 세웠다. 금중(禁中) 출입 20 여년에 기린각공신(麒麟閣功臣)의 으뜸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사후 3년만에 곽씨일문은 역모죄에 연루되어 몰살당하게 된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220쪽.] 보다 자세한 내용은 반고(班固) 저, 안대희 편역, 󰡔한서열전(漢書列傳)󰡕, (까치, 1997), 153쪽 이하 참고.
이 소심(小心)하고 근후(謹厚)했지만, 허후(許后)의 일 * ‘허후(許后)의 일’이란 선제(宣帝)가 황제로 옹립되었을 때, 평민시절의 아내 허비(許妃)를 황후로 세웠는데, 곽광(霍光)의 부인인 태부인(太夫人) 현(顯)이 자기의 막내 딸 성군(成君)을 귀하게 해주고 싶어 했고, 이에 사사로이 부인과(婦人科) 의원(醫阮)인 순우연(淳于衍)을 시켜 허황후(許皇后)를 독살한 일을 말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반고(班固) 저, 안대희 편역, 󰡔한서열전(漢書列傳)󰡕, (까치, 1997), 178쪽 이하 참고.
을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마원(馬援) * 마원(馬援) ; 후한(後漢)의 정치가. 처음에는 외효(隗囂)를 따르다가 광무제에게 벼슬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었다. 세상에서 그를 마복파(馬伏波)라 부른다. 오수전(五銖錢)의 주조(鑄造)를 실현했음.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288쪽 참고.] 보다 상세한 내용은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10권 300-301쪽 및『후한서(後漢書)』54권 참고.
은 [자신의] 여러 자식들에게 말조심하라고 경계시켰지만, [그가] ‘과시(裹屍) 과시(裹屍)
󰡔차의󰡕 복파(伏波)에게 ‘고장(藁葬)의 화(禍)’가 있었다. ‘시신을 싼다(裏屍)’고 한 것은 아마도 잘못 사용한 것 같다. (󰡔箚疑󰡕 伏波有藁葬之禍 謂之裏屍 恐是誤用) [역주] * 고장(藁葬) ; 예의를 갖추지 아니한 간략한 장례를 말한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501쪽.] * 복파장군(伏波將軍) ; 한(漢) 무제(武帝) 때 무관(武官)의 이름이다. 수군(水軍)을 거느렸다.  복파(伏波)란 배로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파랑(波浪)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힌 이름이다. [이상은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1권 843쪽 참고] 특히 이름난 복파장군으로는 남월(南越)을 정벌한 공으로 유명한 路博德이 있다. 자세한 것은 『사기(史記)』53권,「남월열전(南越列傳)」참고.
󰡔표보󰡕 ‘말가죽에 시신을 싼다’ 는 것은 본래 복파(伏波)의 말이다. 이 때문에 왕근사(王近思)가 이 말을 사용했다. 그 자신이 죽고 난 후에 닥친 재앙(禍)을 두고 한 말이다. (󰡔標補󰡕 馬革裏屍 本伏波語 故近思用之 言其身後之禍也)
󰡔차보󰡕 대개 그 말을 사용한 것은 ‘고장(藁葬)’의 화(禍)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箚補󰡕 蓋遂用其語以指藁葬之禍也)
의 화(禍)’를 당한 것은 이에 말조심을 하지 않아서 발생한 재앙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일을『소학(小學)』에 기록하면서, [이처럼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관해서는] 어찌 한 구절도 취하지 않으셨습니까?
[선생의 대답5] ‘순무우를 캐고 순무우를 뜯음은 하체(下体)[뿌리] 때문이 아니다(采葑采菲, 無以下體)’ 채구...하체(采鞲...下體)
󰡔익증󰡕 이는『시경(詩經)』곡풍(谷風)편에 나오는 말이다. (󰡔翼增󰡕 詩谷風語) [역주] *『시경(詩經)』국풍(國風), 패(邶), 곡풍(谷風) 제 1장에서 “습습(習習)한 곡풍(谷風)에 날씨가 흐려지며 비가 내리나니, 힘쓰고 힘써 마음을 함께 할지언정 노함을 두어서는 안 되느니라. 순무우를 캐고 순무우를 뜯음은 하체(下體, 즉 뿌리) 때문이 아니니, 덕음(德音)이 어긋남이 없을진댄 그대와 죽을 때까지 함께 할지니라. (習習谷風이 以陰以雨나니, 黽勉同心이언정 不宜有怒니라. 采葑采菲은 無以下體니, 德音莫違인댄 及爾同死니라)”라고 했다. 곡풍(谷風)시에 대해「모서(毛序)」에서는 “곡풍(谷風)〉은 부부간(夫婦間)에 도리를 잃음을 풍자한 시(詩)이다. 위(衛)나라 사람들이 웃 사람의 나쁜 행위에 교화되어 신혼(新婚)에 빠지고 옛 아내를 버려 부부(夫婦)가 서로 헤어져서 나라의 풍속이 상패(傷敗)[무너짐]하였기 때문이다.(谷風은 刺夫婦失道也라 衛人化其上하여 淫於新昏而棄其舊室하여 夫婦離絶하여 國俗傷敗焉하니라)”라고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시경집전(詩經集傳)󰡕,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94쪽 및 100쪽 참고.
라고 했으니, 남의 선한 것을 취하여 자신의 스승이나 법(師法)으로 삼을 것이지, 이와 같이 논란하는 것은 참으로 부당합니다. 
霍光小心謹厚, 而許后之事不可以爲不知 : 馬援戒諸子以口過, 而裹屍之禍乃口過之所致. 二人之編在小學, 無亦取其一節耶? 
‘采葑采菲, 無以下體’, 取人之善, 爲已師法, 正不當如此論也.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11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열한 번째 편지(제11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1서)는 제12서와 함께 제9서(庚戌년)보다도 늦은 신해년(辛亥, 1191년, 주자 62세) 12월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答王近思 제11서)에 “그저께 군(郡)에서는 너무나 바쁘고 급해서 그대와 다정하고 성의 있게 대면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 곳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만, [큰 아이] 장일(葬日)을 아직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잘못 호남운부(湖南運副)에 제수해 주신 [임금님의] 은혜(湖南誤恩)를 [저로서는 감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 듣자하니 [제가 주청한] 경계법(經界法) 시행은 이미 끝난 일이라더군요. [내가] 조정에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저로서는] 어떻게 또 다시 공문서 한장(一道)의 명령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올린 [나의] 사직서에 대해서는 아직도 윤허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근자에 이미 글을 올려 스스로를 탄핵했으니......(昨在郡匆匆 不能款曲 ... 熹歸來數日 卜莽未定 湖南誤恩 不容祗赴 又聞經界報罷 不見信於朝廷如此 如何更可任一道之寄耶 初辭未允 近已上章自劾)”라고 말하고 있는데, ‘돌아와 ... [큰 아이] 장일(葬日)을 확정한 것’은 바로 신해년(辛亥) 장주(漳州)를 떠나 귀가하여 장남의 장례를 치른 것을 말한다. ‘호남오은(湖南誤恩)’이란 주자가 신해년 9월 호남전운부사(湖南轉運副使)에 제수된 것을 말한다. ‘글을 올려 스스로를 탄핵했다(上章自劾)’는 말은『연보(年譜)』에 따르면 신해년 12월 경계법(經界法)이 시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 스스로를 탄핵(彈劾)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편지(答王近思 제11서)는 신해년(辛亥, 1191년, 주자 62세) 12월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22-3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왕근사를 직접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주자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왕근사와 진지한 대화의 기회를 갖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저께 군(郡)에서는 너무나 바쁘고 급해서 그대와 다정하고 성의 있게 대면하지 못했는데 * 관곡(款曲) ; (1) 다정하고 성의가 있음. (2) 자세한 사정. 위곡(委曲)이라는 말과 같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067쪽.]
, 그것이 지금까지 한이 됩니다. 별지(別紙)를 통해 [그대가] 제기한 의문점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모두 답했습니다만, 지금껏 얼굴을 마주하고 토론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자못 한(恨)이 됩니다. 나는 [이 곳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만, [큰 아이] 장일(葬日) 복장(卜葬) 
󰡔차의󰡕 [여기서의] 장례란 [선생의] 맏아들 수지(受之)의 장례를 말한다. (󰡔箚疑󰡕 葬受之葬也) [역주] * ‘수지(受之)’의 이름은 주숙(朱塾, 1153-1191)이다. 주선생의 장남으로 선생 62세 되던 정월에 죽었다. 미우라 쿠니오 지음, 김영식․이승연 옮김, 󰡔인간 주자󰡕, 190쪽 및 272쪽 참고.
을 아직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잘못 호남전운부사(湖南轉運副使)에 제수해 주신 [임금님의] 은혜(湖南誤恩) 호남오은(湖南誤恩)
󰡔차의󰡕 신해년(辛亥, 1191년, 주자 62세) 9월에 형호남로전운부사(湖南運副)에 제수되신 것을 말한다. (󰡔箚疑󰡕 辛亥九月除湖南運副)
를 [저로서는 감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 듣자하니 [제가 주청한] 경계법(經界法) 시행은 이미 끝난 일 경계보파(經界報罷)
󰡔차의󰡕 선생께서는 창주(漳州)에서 경계법(經界法)을 시행할 것을 주청하신 일이 있는데, 당시까지 시행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箚疑󰡕 先生在彰州請行經界 至是不行故云)
이라더군요. [내가] 조정에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저로서는] 어떻게 또 다시 공문서 한장(一道) * 일도(一道) ; (1) 한 가지 이치, 일리(一理). (2) 한 줄, 한 가닥. (3) 한 통, 편지나 서류 등을 세는 말.[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67쪽] 이 밖에도 ‘동도(同道)’ ‘같은 종류의 방법’ ‘일조(一條)’ ‘공문(公文) 한 건’ 등의 뜻이 있다.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5), 1권 123쪽 참고.]
의 명령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올린 [나의] 사직서에 대해서는 아직도 윤허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근자에 이미 글을 올려 스스로를 탄핵했으니, 이 번에는 [이 관직을 그만두고자 하는 나의] 청(請)을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昨在郡匆匆, 不能款曲, 至今爲恨耳. 別紙疑義已悉奉答, 亦恨向來不得面論也. 熹歸來數日, 卜莽未定, 湖南誤恩, 不容祗赴. 又聞經界報罷, 不見信於朝廷如此, 如何更可任一道之寄耶? 初辭未允, 近已上章自劾, 次第必得請矣. 





왕근사에게 답함 答王近思 12


【해제】주자가 왕근사(王近思)에게 보낸 열두 번째 편지(제12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2서)는 제11서와 함께 신해년(辛亥, 1191년, 주자 62세) 12월에 씌어진 것이며 제11서의 별지(別紙)이다. 이 편지 앞에 나온 답왕근사(答王近思) 제11서에서 “별지(別紙)를 통해 그대가 제기한 의문점에 대해서는 모두 대답했습니다만... (別紙疑義已悉奉答...)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 편지(제12서)에서 ‘왕근사의 질문에 조목별로 답한 내용(答問目)’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제12서는 제11서의 별지(別紙)라고 보는 것이 옳으며, 따라서 이것이 바로 답왕근사(答王近思) 제11서에서 “별지(別紙)를 통해 그대가 제기한 의문점에 대해서는 모두 대답했다 (別紙疑義已悉奉答)”는 바로 그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答王近思 제12서)는 신해년(辛亥, 1191년, 주자 62세) 12월에 씌어진 것이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23쪽 참고.
 여기서 주자는 왕근사의 질문 중 일이관지(一以貫之)와 인(仁)에 관해 답하고 있다. 주자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답하기보다 이 문제와 관련된 이천(伊川) 등의 학설을 참고할 것을 권하고 있다.

[왕근사의 질문1] 우리 도(道)는 한 가지 이(理)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一以貫之) *『논어(論語)』,「이인(里仁)」편, 제15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우리 도(道)는 한 가지 이(理)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하시니, 증자(曾子)께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증자(曾子)께서 대답하셨다.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子曰 參乎아 吾道는 一以貫之니라 曾子曰 唯라 子出이어시늘 門人問曰 何謂也잇고 曾子曰 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시니라)”라고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77-8쪽 참고.
는 것에 관하여
[선생의 답변1] [일이관지(一以貫之)에 관한] 그대의 이 학설이 아직은 옳지 못합니다. 우선『논어정의(論語精義)』가운데 나오는 이정(二程)선생 및 사량좌(謝良佐)와 후중량(侯仲良) 이 두사람의 학설 사후이설(謝侯二說)
󰡔익증󰡕 사량좌(謝良佐)의 설(說)은 37권에 보인다. 후중량(侯仲良)이 말하기를 “하늘이 만물에게 내려주는 것을 명(命)이라 한다. 봄에는 생성시키고 겨울에는 갈무리한다. 해마다 이러하니, 일찍이 하늘은 한 해도 만물을 그르친 적이 없으니, 이는 ‘충(忠)’이라 말할 수 있다. 크고 작으며, 높고 낮은 모든 만물이 각각 [그들이 있어야 할]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를 ‘서(恕)’라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자사(子思)의 충서(忠恕)는 자기에게 베풀어 원치 않은 것을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니, 자기는 도(道)를 어기지만 성인(聖人)은 ‘자기에게 베풀어 원치 않게 됨’을 기다린 연후에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 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후중량이] ‘일찍이 [하늘은 한 해도] 만물을 그르친 적이 없다’고 한 것은 적절치 않은 것 아닐까요? ”라고 했다. (󰡔翼增󰡕 謝氏說 見三十七卷 侯氏曰天授萬物之謂命 春生之 冬藏之 歲歲如是 天未嘗一歲誤萬物也 可謂忠矣 萬物洪纖高下各得其所 可謂恕矣 又曰 子思之忠恕 施諸已而不願 亦勿施於人 已是違道 聖人則不待施諸已而不願然後勿施諸人也 或問以未嘗誤萬物爲不切) [역주] * 홍섬(洪纖) ; 홍세(洪細)와 같음. 큼과 작음. 전(轉)하여 모조리, 빠짐없이.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144쪽.]
을 검토해서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양씨(楊氏)와 윤씨(尹氏)의 학설은 명도(明道)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양윤...도의(楊尹...道意)
󰡔차의󰡕 명도(明道)께서는 “『중용(中庸)』에서의 충서(忠恕)는 아래로 인간(人間)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通達)해나가는 공부이다”고 했다. 대개『중용(中庸)』의 충서(忠恕)는『논어(論語)』의 충서(忠恕)와 등급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양씨(楊氏)와 윤씨(尹氏)는 명도(明道)가 거론한 바『중용(中庸)』의 충서(忠恕)는『논어(論語)』에 나오는 충서(忠恕)의 의미를 펼쳐 밝힌 것이라 여겼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인 것이다. (󰡔箚疑󰡕 明道則論中庸忠恕之旨 以爲下學上達之功 蓋言中庸忠恕 與論語忠恕 等級異也 楊尹氏 則以明道所擧中庸忠恕爲發明論語忠恕之意是錯會也) [역주] *『논어집주(論語集註)』,「이인(里仁)」제15장에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정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충서 개념을 정리해서 말하고 있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자신으로써 남에게 미침은 인(仁)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침은 서(恕)이니,『중용(中庸)』에 ‘충(忠)과 서(恕)는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다. 충서(忠恕)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이니, 충(忠)이란 천도(天道)요 서(恕)란 인도(人道)이며, 충(忠)이란 무망(無妄 - 사망(詐妄)함이 없는 것)이요 서(恕)란 충(忠)을 이행(履行)하는 것이다. 충(忠)은 체(體)요 서(恕)는 용(用)이니, 대본(大本)과 대도(大道)이다. 이것이『중용(中庸)』‘충서위도불원(忠恕違道不遠)’과 다른 것은 동(動)하기를 천(天 - 自然)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 말씀하였다. ‘하늘의 명(命)이, 아! 심원(深遠)하여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충(忠)이요, ‘건도(乾道)가 변화(變化)하여 각기 성명(性命)을 바루고 있다’는 것은 서(恕)이다.’ 또 말씀하였다. ‘성인(聖人)이 사람을 가르침에 각기 그 재질(才質)을 따르셨다. 우리 도(道)가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것은 오직 증자(曾子)만이 이것을 통달할 수 있었으니, 공자(孔子)께서 이 때문에 증자(曾子)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증자(曾子)는 문인(門人)에게 말씀하기를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뿐이다.’하셨으니, 이 또한 부자(夫子)께서 증자(曾子)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중용(中庸)』에 이른바 충서위도불원(忠恕違道不遠)이란 것은 바로 아래로 인간(人間)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通達)한다는 뜻이다.’ (程子曰 以己及物은 仁也요 推己及物은 恕也니 違道不遠이 是也라 忠恕一以貫之니 忠者는 天道요 恕者는 人道며 忠者는 無妄이요 恕者는 所以行乎忠也라 忠者는 體요 恕者는 用이니 大本達道也라 此與違道不遠異者는 動以天爾니라 又曰 維天之命이 於穆不已은 忠也요 乾道變化하여 各正性命은 恕也니라 又曰 聖人敎人에 各因其才하시니 吾道一以貫之는 惟曾子爲能達此니 孔子所以告之也시니라 曾子告門人曰 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라하시니 亦猶夫子之告曾子也라 中庸所謂忠恕違道不遠은 斯乃下學上達之義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78-9쪽 참고.
󰡔표보󰡕 양시(楊時)가 말하기를 “충서(忠恕)만으로는 본래 만족스럽게 도(道)를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충서(忠恕)를 실천해 나가면] 도(道)에서 멀리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로부터 말미암아 추구해 나간다면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의미를 거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윤돈(尹焞)은 말하기를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자신을 미루어 나가는 것을 서(恕)라 한다. 그러니 충(忠)과 서(恕)만으로 과연 도(道)를 다할 수 있는가? 충서(忠恕)는 도(道)에서 멀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대개 [『논어(論語)』,「이인(里仁)」제15장의] 오도일관(吾道一貫)장에 대한 이정(二程), 사씨(謝氏) 및 후씨(侯氏)의 설(說)은 모두 [『논어』의 오도일관장에서 제시된] 충서는 성인(聖人)의 본분에 속하는 일이어서『중용』의 충서와는 다르다고 본 데 비해, 양씨(楊氏)와 윤씨(尹氏)의 설(說)에 따르면, [오도일관장에서 제시된 충서 역시] 단지 [『중용』에 나오는 충서의 의미인] ‘도(道)에 멀지 않음’의 뜻과 같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라는 것이다.『차의』의 대의(大義)는 아마도 이와 같은 듯한데도 [도리어]『논어』는 내버려두고 먼저『중용』을 거론하고 있으니, 아마도 주객이 뒤바뀐 듯하다. [따라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 같다. 즉 명도(明道)께서 이른바 “자신으로써 남에게 미침은 인(仁)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침은 서(恕)이니, [『중용』에서 말한] ‘충(忠)과 서(恕)는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다. [『논어』에서] ‘충서(忠恕)가 바로 일이관지(一以貫之)이다’라는 것이 [『중용』에서 말한] ‘충서는 도에서 멀지 않다’는 것과 다른 점은 동(動)하기를 천(天)로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논어』와『중용』에서 말한 충서(忠恕)의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씨(楊氏)와 윤씨(尹氏)는 [이정자(二程子)의 의도를] 오인하여 [이정자(二程子)가] 저(『중용』에서 충서)를 인용하여 이(『논어』에서의 충서)를 입증하려 했다고 여긴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중용』에서의 충서와『논어』에서의 충서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標補󰡕 楊氏曰 忠恕固未足以盡道 然而違道不遠矣 由是而求之 則於一以貫之之義 其庶幾乎 尹氏曰 盡已之謂忠 推已之謂恕 則忠恕果可以盡道乎 忠恕違道不遠者也 蓋吾道一貫章 二程及謝侯說 皆以忠恕爲聖人分上事 與中庸忠恕不同 而楊尹說 則只是違道不遠之意 此所謂錯會也 箚疑大義 似亦如此 而捨却論語 先擧中庸 恐換主客 似當曰明道所謂以已及物仁也 推已及物恕也 違道不遠是也 忠恕一以貫之與違道不遠異者 動以天耳者 政所以明論語中庸所說忠恕地位之異 而楊尹誤認爲引彼證此之意 故說得無分別也)
󰡔절보󰡕 명도(明道)는『논어』의 충서는 ‘동(動)하기를 천(天)로 하는 것’인 반면『중용』에서 말한 충서는 ‘동(動)하기를 사람(人)으로 하는 것’이어서 등급이 같지 않다고 보았는데 양씨(楊氏)와 윤씨(尹氏)는『논어』의 충서를 다만『중용』에서 말한 충서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 충서로부터 말미암아 ‘일관(一貫)하는 도(道)’에로 나아간다고 말했는데, 이는 명도(明道)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말이다. (󰡔節補󰡕 明道 以論語忠恕爲動以天 中庸忠恕爲動以人 等級不同 而楊尹 則以論語忠恕只作中庸忠恕意看 而謂由此而進於一貫 是錯會明道之意也)
󰡔익증󰡕 [양씨(楊氏)와 윤씨(尹氏)는] ‘도(道)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한 [명도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여 곧바로 ‘도(道)에서 멀지 않다(違道不遠)’는 이 말을 가지고 ‘하나로 관통되어 있는 [『논어』의] 충서’를 해석한 것이라는 말이다. (󰡔翼增󰡕 錯會違道不遠是也之意 而直以違道不遠解一貫忠恕也)
 그러나 증자(曾子)는 힘써 실천해 나감(力行)이 익숙해진 이후에 [충서일관지도(忠恕一貫之道)를] 깨달은 것입니다만, 요즈음 사람들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어서 저절로 의미(意味)가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즈음 사람들의 경우] 가령 [이 이치를] 말로는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다고 해도 또한 일을 제대로 이루어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一以貫之
此說未是. 更檢精義中二程先生及謝․侯二說熟看. 楊․尹說正是錯會明道意, 然曾子是力行得熟後見得, 今人只是說得, 自是意味不同. 正使說得十分, 亦不濟事. 

[왕근사의 질문2] ‘인(仁)’에 관하여
[선생의 답변2] [인(仁)에 관한] 그대의 이 학설이 아직은 옳지 못합니다. 다시금 [『논어』의] ‘효제(孝悌)는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효제위인지본(孝悌爲仁之本)
󰡔절보󰡕『논어집주(論語集註)』에 보인다. (󰡔節補󰡕 見論語集注) [역주] * 󰡔논어(論語)󰡕,「학이(學而)」편 제2장에 “유자(有子)가 말하였다. ‘그 사람됨이 효(孝)하고, 공경(恭敬)스럽고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무니,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고서 난(亂)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지 않다. 군자(君子)는 근본(根本)을 힘쓰니, 근본(根本)이 확립되면 도(道)가 발생(發生)하는 것이다. 효(孝)와 제(弟)[제(悌)]라는 것은 그 인(仁)을 행하는 근본(根本)일 것이다.’ (有子曰 其爲人也孝弟요 而好犯上者鮮矣니 不好犯上이요 而好作亂者未之有也니라 君子는 務本이니 本立而道生하나니 孝弟也者는 其爲仁之本與인저)”라 했다. 이 구절에 대해 주자는 “무(務)는 전력(專力)하는 것이요, 본(本)은 근(根)과 같다. 인(仁)이란 사랑의 원리(原理)요, 마음의 덕(德)이니, 위인(爲仁)이란 행인(行仁)이란 말과 같다. 여(與)는 의문사이니, 겸손하여 감히 질정해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군자(君子)가 모든 일을 오로지 근본에 힘을 쓰니,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그 도(道)가 스스로 생겨난다. 위 글에서 말한 바 효제(孝弟)로 말하면 바로 이 인(仁)을 하는 근본이니, 배우는 자들이 이것을 힘쓰면 인(仁)의 도(道)가 이로부터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효제(孝弟)는 순한 덕(德)이다. 그러므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다시 이치를 거스르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겠는가? 덕(德)은 근본(根本)이 있으니, 근본이 확립되면 그 도(道)가 충만하고 커진다. 효(孝)와 제(弟)를 집안에 행한 뒤에 인(仁)과 사랑이 남에게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친한 이[친척]를 친히 하고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을 하는데는 효제(孝弟)를 근본(根本)으로 삼으며, 본성(本性)을 논한다면 인(仁)이 효제(孝弟)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혹자가 묻기를 ‘효제(孝弟)가 인(仁)의 근본(根本)이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효제(孝弟)로 말미암아 인(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나는 대답하였다. ‘이것은 아니다. 인(仁)을 행하는 것이 효제(孝弟)로부터 시작됨을 말했을 뿐이다. 효제(孝弟)는 이 인(仁)의 한 가지 일이니,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이른다면 가(可)하거니와, 이것이 인(仁)의 근본(根本)이라고 한다면 불가(不可)한다. 인(仁)은 본성(本性)이요, 효제(孝弟)는 용(用)이다. 성(性) 가운데에는 다만 인(仁)·의(義)·예(禮)·지(智)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효제(孝弟)가 있겠는가. 그러나 인(仁)은 사랑을 주장(主張)하고, 사랑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효제(孝弟)란 그 인(仁)을 행하는 근본(根本)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務는 專力也요 本은 猶根也라 仁者는 愛之理요 心之德也니 爲仁은 猶曰行仁이라 與者는 疑辭니 謙退不敢質言也라 言君子凡事를 專用力於根本이니 根本旣立이면 則其道自生이라 若上文所謂孝弟는 乃是爲仁之本이니 學者務此면 則仁道自此而生也라 ○ 程子曰 孝弟는 順德也라 故로 不好犯上이니 豈復有逆理亂常之事리오 德有本이니 本立則其道充大라 孝弟行於家而後에 仁愛及於物이니 所謂親親而仁民也라 故로 爲仁은 以孝弟爲本이요 論性則以仁爲孝弟之本이니라 或問 孝弟爲仁之本이라하니 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아 曰 非也라 謂行仁自孝弟始라 孝弟는 是仁之一事니 謂之行仁之本則可커니와 謂是仁之本則不可하니 蓋仁은 是性也요 孝弟는 是用也라 性中에 只有箇仁義禮智四者而已니 曷嘗有孝弟來리오 然이나 仁主於愛하고 愛莫大於愛親이라 故로 曰 孝弟也者는 其爲仁之本與인저)”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9-20쪽 참고.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18권(「이천선생어(伊川先生語)」4권) 3항에도 관련 내용이 보인다.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183쪽 참고.
라는 구절에 대한 이천(伊川)선생의 해설과 [한퇴지의]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 박애지위인(博愛之謂仁)
󰡔익증󰡕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한퇴지(韓退之)가 ‘널리 사랑함을 인(仁)이라 한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어진 자는 본래 널리 사랑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널리 사람함’을 곧바로 ‘인(仁)’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翼增󰡕 伊川曰 退之言博愛之謂仁非也 仁者固博愛 然便以博愛爲仁則不可) [역주]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18권(「이천선생어(伊川先生語)」4) 1항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182쪽 참고.
는 구절에 대한 이천선생의 해설 그리고 ‘마음은 곡식 종자에 비유할 수 있다’ 심비여곡종(心譬如穀種) 
󰡔익증󰡕 ‘인(仁)과 심(心)이 어떻게 다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천(伊川)은 “심(心)은 곡식 종자(穀種)에 비유할 수 있는데, 자라나려는 본성이 곧 인(仁)이고, 양기(陽氣)가 드러난 곳이 바로 정(情)이다.”라고 대답했다. (󰡔翼增󰡕 問仁與心何異 伊川曰 心譬如穀種 生之性便是仁 陽氣發處 乃情也) [역주]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18권(「이천선생어(伊川先生語)」4) 6항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183-4쪽 참고.
󰡔절보󰡕  ‘널리 사랑함을 인(仁)이라 한다’는 것과 ‘심(心)은 곡식 종자(穀種)에 비유할 수 있다’는 두 학설은 나란히『근사록(近思錄)』1권에 보인다. (󰡔節補󰡕 博愛之謂仁 心譬如穀種二說 幷見近思首卷) [역주] *『근사록(近思錄)』1권「도체(道體)」편 35조 및 36조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진영첩(陳榮捷) 저, 󰡔근사록상주집평(近思錄詳註集評)󰡕, (臺灣, 學生書局, 1992), 43-6쪽 참고.
는 이천선생의 말씀 등 이 세 군데를 잘 점검하여 살펴보시고, 또『역전(易傳)』복괘(復卦)의 단사(彖辭) 및 맹자께서 사단(四端)을 논한 곳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此說未是. 更檢伊川先生說孝悌爲仁之本․博愛之謂仁․心譬如穀種三處看, 更檢易傳復卦彖辭及孟子論四端處子細看. 




위원리에게 답함 答魏元履 1


【해제】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제1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1서)는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제2서 및 제3서와 함께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전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答魏元履 제1서)는 그것이 씌어진 시기를 알 수 없다. 제2서(答魏元履 제2서)에서는 공명(孔明)에 관한 일을 논하고 있다. 그런데 주자가 하숙경(何叔京)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답하숙경 제4서)에 “공명전(傳孔明)을 근래에 위원리(魏元履)가 빌려갔습니다.(孔明傳近爲元履借去)”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답하숙경 제4서는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겨울이나 이보다 조금 뒤에 씌어진 것이다. 따라서 위원리(魏元履)에게 공명(孔明)을 논한 이 편지(즉 答魏元履 제2서) 역시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겨울이나 이보다 조금 뒤에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세 번째 편지(答魏元履 제3서)에서는 쓴 시기를 추정할만한 문구가 그 속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제1서와 2서 뒤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주자가 위원리에게 보낸 이 세통의 편지는 건도(乾道) 2년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을 전후한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해 둔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8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이치에 밝고 의리에 정밀하지 않으면서『춘추(春秋)』를 공부하는 것은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보다는 우선『논어(論語)』를 보는 보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춘추(春秋)』를 공부하고자 하신다니 매우 좋은 일입니다. 다만 선배들이, “이것은 바로 배우는 자들의 마지막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전배...단사(前輩...段事)
󰡔익증󰡕 이천(伊川)께서 배우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선 논어와 맹자를 먼저 읽어야 한다. 더욱 강조해서 말하자면 [『춘추(春秋)』이외의 다른 경전(經傳)을] 한 차례 다 읽은 후에『춘추(春秋)』를 보아야 한다. 먼저 의리(義理)를 알고 나야 비로소『춘추(春秋)』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翼增󰡕 伊川語 學者曰且先讀論孟 更讀一經後看春秋 先識得箇義理 方可看春秋) [역주]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15권(「이천선생어(伊川先生語)」1권) 147항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163-4쪽 참고.)
, 대개 이치에 밝고 의리에 정밀하지 않으면[서『춘추(春秋)』를 공부하게 되면], 다만 잘잘못을 비교하고 차이를 고찰하는 정도에 머물 뿐이어서, 마음의 갈피가 더욱 복잡스러워져 ‘역사서와 전기(史伝)’를 읽고 옛 사실을 주워 모우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하물며 노형(老兄)의 경우는 마음속이 본래 시끄러우니 [노형에 있어서『춘추』공부는] 잘못을 바로 잡아 중도(中道)로 나아가는 적절한 방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공비...추중(恐非...趨中)
󰡔차의󰡕 [노형(老兄)의 경우]『춘추(春秋)』를 읽는 것이 잘못을 바로 잡아 중도(中道)로 나아가는 적절한 [공부의] 방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箚疑󰡕 謂讀春秋 非所以矯失而趨中也)
 제 생각에는 다만『논어(論語)』를 보면서 몇 년 공부를 하여 병통의 정도를 살펴보아서 각간증후(却看證候) 
󰡔기의󰡕 문제점(病處)이라는 말과 같다. (󰡔記疑󰡕 猶言病處)
󰡔익증󰡕 ‘증후(證侯)’는 ‘증상(證狀)의 기후(氣候)’라는 말과 같다.『논어(論語)』를 보면서 [공부의] 효과가 깊은지 옅은지 여부를 살펴보아서, [그 결과] 자미(滋味)는 적고 득력(得力)한 것도 없으면 곧 계책을 달리하여, [『논어(論語)』이외의] 다른 경전을 공부함으로써 올바른 공부의 출발점(入頭處)를 모색한다는 말이다. (󰡔翼增󰡕 證侯猶言證狀氣候 謂看論語 觀其得效深淺之如何 少滋味無得力 則宜換作他計 別看他經以求入頭處)  [역주] * 기후(氣候) ; (1) 1년간을 구획한 기간을 일컬음. 곧 5일을 일후(一候), 15일을 일기(一氣)로 하고 1년을 24기(氣), 72후(候)로 나눔. (2) 대기의 변동과 수륙의 형세에 따라서 생기는 조습(燥濕), 청우(晴雨), 한서(寒暑) 등의 현상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104쪽] 여기서는 ‘기운’ 정도의 의미로 쓰인 듯 하다.
 별도의 도리를 마련 별작(別作)
󰡔간보󰡕 책을 보는 방법(道理)를 별도로 모색한다는 말이다. (󰡔刊補󰡕 別作看書道理)
하는 것이 더 낫다 불약(不若)
󰡔차의󰡕 ‘불약(不若)’의 뜻이 ‘도리(道理)’라는 말까지 걸린다. (󰡔箚疑󰡕 此意止道理)
고 봅니다. 그러나『논어』에서 맛이 있음을 알면 나머지 경서(経書)도 대나무에 칼만 대면 갈라지듯이 풀릴 것 여경...이해(餘經...而解)
󰡔간보󰡕 ‘여경(餘經)’이란 ‘여러 경전’이라는 말과 같으니『춘추(春秋)』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 살피건대 두예(杜預)가 오(吳)나라를 치면서 말하기를 “지금 군대가 위세를 이미 떨쳤으니 비유하자면, 대나무를 쪼갤 때, 여러 마디를 쪼갠 후에는 그저 칼만 갖다대면 쉽게 쪼갤 수 있어 더 이상 [애써] 손 댈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刊補󰡕 餘經 猶諸經 春秋亦在其中矣 按杜預伐吳曰 今兵威已振 譬如跛竹數節之後迎刃而解 無復着手處)
입니다. 성인의 말씀은 평이한 가운데 정밀하고 깊은 곳이 있으니 천착(穿鑿)하여 급히 이루고자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구차히 대충 보아 넘겨서도 안 됩니다. 곧 마음을 평이하고도 담박하며 또 착실한 곳에 두어서, 완미(玩味)하고 탐색해 나가되 마음을 비우고 일을 줄여 [본성을] 길러나가 오래도록 게으르지 않는다면 저절로 유익함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경솔하고 급박한 마음으로 짧은 시간의 성과를 구해서도 안 되고, 또 옛 습관을 그대로 따라 게으름을 피우면서 허송세월을 보내서도 안 됩니다.『어록(語録)』 어록(語錄)
󰡔기의󰡕 정자(程子)의『어록(語錄)』을 말한다. (󰡔記疑󰡕 程子語錄)
 가운데 이 일에 대해 말한 설차사(說此事)
󰡔차의󰡕 ‘『춘추(春秋)』는 쉽사리 공부할 수 없다’는 뜻을 말한다. (󰡔箚疑󰡕 謂春秋未易學之意) 
󰡔절보󰡕 ‘이 일을 말한 곳’이란 살피건대 ‘먼저『논어(論語)』를 읽을 것을 말한 곳’이다. (󰡔節補󰡕 說此事處 按說先讀論語處)
 한 두 구절을 별지(別紙)로 올려 보내니, [정자의 말씀을 통해 볼 때, 내가 지금까지 말한] 이것은 억측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며,『춘추』는 결코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도 아울러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논어』공부를 통하여 若於此(若於此)
󰡔절보󰡕 ‘여기(此)’는『논어(論語)』를 가리킨다. (󰡔節補󰡕 此指論語)
 한 가지 의리의 혈맥을 보게 된다면 그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종전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한 덩어리 일단(一團) 
󰡔익증󰡕 ‘한 덩어리’ 혹은 ‘한 단락’이라는 말과 같다. (󰡔翼增󰡕 猶一塊一段) 
의 사심(私心)과 망상(妄想)일 뿐이며, 나 자신의 심신(心身)조차 아직은 어찌할 수 없는 상태 상차내하불하(尙且奈何不下) 
󰡔익증󰡕 마땅히 여기까지 한 구절이 되어야 한다.「진동보(陳同甫)에게 답하는 글」에 보인다. (󰡔翼增󰡕 當爲句 見答陳同甫書)
에서 어떻게 도를 행하여 시대를 구제한다는 말 행도...저화(行道...底話) 
󰡔기의󰡕 “도(道)를 행하여 시대를 구한다”는 말은 위원리(魏元履)의 말이다. 위원리(魏元履)는 학관(學官)의 신분으로 천하의 일을 언급한 것이 너무 많았다. 이 당시 [사대부 사이의] 여론(時論)은 [누구라도] 자신의 지위를 벗어난 경우 비난과 배척을 가했다. 대개 [위원리(魏元履)의 경우] 배움은 엉성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의식은 지나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바로잡으신 것이다. (󰡔記疑󰡕 行道救時 此元履之說 元履以學官言天下事太多 時論以出位爲非而逐之 蓋疎於學而過於自任者 故以此規之)
󰡔절보󰡕 위원리(魏元履)는 관직에 있지도 않으면서 도(道)를 행하여 시대를 구제하고자 하는 뜻이 너무 지나쳤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이와 같이 경계하신 것이다. (󰡔節補󰡕 元履以布衣而行道救時之意太過 故先生告戒之如此) [역주] * 포의(布衣) ; (1) 베옷.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입는 옷. 전(轉)하여 (2) 벼슬하지 않는 사람. 무위(無位) 무관(無官)의 사람. 백의(白衣)라고도 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657쪽]
을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가소롭다’ 진시가소(眞是可笑)
󰡔차의󰡕 윗 글을 이어서 말한 것이다. 즉 이와 같이 한 연후에 바야흐로 ‘자기에게 절실한 병통(病痛)조차도 어찌할 수 없으면서, 이 전날(前日)에 도대체 어찌하려고 도(道)를 행하여 시대의 문제를 해결(行道救時)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함부로 지껄여대었는지... 이는 참으로 가소로운 일임을 바야흐로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야흐로 깨닫는다(方覺)’의 의미가 여기까지 걸린다. (󰡔箚疑󰡕 承上文言 如此然後 方覺切已病痛尙且無如之何而前日如何妄說得行道救時底說話乎 眞是可笑事也 方覺意止此)
라고 말입니다. 어록(語錄)이 산만하여 또한 보기도 어렵고 끝내 입두처(入頭處)도 없다 하여, [그대가] 혹시라도 ‘[차라리] 눈을 가려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그 또한 일을 이루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그저『논어』를 공부해 나가세요. 호장(胡丈) 호장(胡丈)
󰡔절보󰡕 아마도 호오봉(胡五峰)인 듯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節補󰡕 似是五峰而不詳)
의『논어회의(論語會義)』 회의(會義)
󰡔차의󰡕『논어회의(論語會義)』를 말한다. (󰡔箚疑󰡕 論語會義也)
초본(初本)은 가지고 있습니까? 이선생(二先生)께서『논어』를 해설해 놓으신 것이 모두 그 책 속에 들어 있습니다. 대체로 이선생과 이선생의 문인 몇몇 분들 문인수가(門人數家) 
󰡔차의󰡕 선생께서는 일찍이 [이선생의 몇몇 문인을] 범태사(范太史)와 윤화정(尹和靖)이라고 여기셨다. (󰡔箚疑󰡕 先生嘗以爲范太史尹和靖也)
󰡔문목󰡕 선생께서는 자신의 논어설(論語說) 가운데 윤씨(尹氏)의 논어설을 가장 중시하셨다. 범씨(范氏)와 같은 경우, 선생께서는 비록 [그의 학설이] 너그럽고 공평하며 올바르고 크긴 하지만 그 분 나름의 특색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여기셨다. 그러나 [범씨에 대해] 언급은 하셨다. 여기서 ‘이선생의 몇몇 문인(文人)’이라 했을 때는 아마도 오로지 이 두 분만 가리켜 그리 말씀하신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허순지(許順之)에게 답하는 글」에 “범윤이공(范尹二公) 운운(云云)”한 대목이 있기 때문에 󰡔차의󰡕에서 이  이처럼 말한 것 같다. (󰡔問目󰡕 先生於論語說 最取尹氏 若范氏 則雖以爲寬平正大 而亦未見其特 然稱之此云門人數家 恐不專指此二氏而言也 豈以答許順之書有范尹二公云云語 故箚疑說如此耶)
의 학설만 제대로 살펴본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논어회의(論語會義)』가운데는 왕원택(王元澤) 王元澤(王元澤)
󰡔차의󰡕 왕안석(王安石)의 아들 왕방(王雱)이다. (󰡔箚疑󰡕 安石子雱也)
󰡔익증󰡕 왕방(王雱)은『논어해(論語解)』10권을 지었다. (󰡔翼增󰡕 雩有論語解十卷)
, 이소(二蘇), 송함(宋咸) 송함(宋咸) 
󰡔차의󰡕『구양공집(歐陽公集)』에 보인다. 송(宋)나라 때 사람이다. (󰡔箚疑󰡕 見歐陽公集 宋時人也)
󰡔익증󰡕『논어증주(論語增注)』10권을 지었다. (󰡔翼增󰡕 有論語增注十卷)
 등의 잡박한 학설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반드시 다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한갓 [마음만] 어지럽힐 뿐이기 때문이지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편지에서 독서의 자세한] 순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기서설미도(其序說未到)
󰡔차의󰡕 말하려 했던 [독서의] 순서에 대해 아직 다 말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대개 [선생께서는] 위원리(魏元履)가 우선『논어』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箚疑󰡕 謂所言之次序姑未能說到也 蓋欲元履只於論語勉力也) 
󰡔절보󰡕 ‘기서(其序)’는 아마도 오자(誤字)인 듯하다. (󰡔節補󰡕 其序恐有誤字)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논어』를] 힘써 공부해 나가세요. 그러다보면 마침내 감히 밖으로부터 [자극받아 일어나는 번잡한 관심을] 그만둘 수 있을 것입니다.
欲爲春秋學, 甚善. 但前輩以爲此乃學者最後一段事, 蓋自非理明義精, 則止是較得失․考同異, 心緖轉雜, 與讀史傳摭故實無以異. 况如老兄心中本鬧, 恐非(4-1803)所以矯失而趨中也. 愚意以爲不若只看論語, 用年歲工夫, 却看證候淺深, 別作道理. 然但論語中看得有味, 餘經亦迎刃而解矣. 聖人之言平易中有精深處, 不可穿鑿求速成, 又不可苟且閑看過. 直須是置心平淡慤實之地, 玩味探索而虛恬省事以養之, 遲久不據, 當自覺其益 : 切不可以輕易急迫之心求旦暮之功, 又不可因循媊惰, 虛度光陰也. 語錄中一兩段說此事處則紙上呈, 可見此非臆說, 亦見春秋之未易學也. 若於此見得一義理血脈, 方覺從前一團私意妄想, 自家身心尙且奈何不下, 如何說得行道救時底話? 眞是可笑. 語錄散漫, 亦難看, 卒無入頭處. 若只欲遮眼, 又不濟事. 不若且只就論語中做工夫. 有胡丈會義初本否? 二先生說論語處皆在其中矣. 大抵只看二先生及其門人數家之說足矣. 會義中如王元澤․二蘇․宋咸雜說甚多, 皆未須看, 徒亂人耳. 所欲言者甚多, 然其序說未到, 幸且勉力, 終不敢自外也.





위원리에게 답함 答魏元履 2


【해제】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두 번째 편지(제2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2서)는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제1서 및 제3서와 함께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전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答魏元履 제1서)의 해제 부분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8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만약 글을 읽으면서 먼저 학설을 세우려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울러 삼국시기 촉한(蜀漢)의 인물평이 이어진다. 즉 ‘소열제(昭烈帝)는 권도(権道)만 알았지 정도(正道)를 몰랐다’는 위원리의 주장에 대해 주자는 ‘선주(先主=昭烈帝)가 기미를 보는데 밝지 못하여 결국 정도와 권도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제갈무후(諸葛武候)의 경우는 바로 명분과 의리가 모두 바르고 숨기는 것이 없다’고 하여 그를 장자방보다 높이 평가한다.

증구보(曾裘父) 구보(裘父)
󰡔익증󰡕 증계리(曾季貍)이다. (󰡔翼增󰡕 曾季貍)
가, “『논어』에 대해 몇 가지 학설을 지어내고 싶어한다”고 하는데 이 말이 의심스럽습니다. 평시에 글을 읽다가 그저 가슴 속에서 우연히 본 것이 있으면 속짐작 * 묵계(黙契) ; (1) 마음 속으로 서로 승낙함. (2) 은연 중에 뜻이 서로 통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2372쪽]. 여기서는 글자 그대로의 뜻인 ‘묵묵히 입 다물고 마음 속에만 새겨두다’ 정도의 의미로 본다.   
만 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말로 표현하는 것이고, 잊을까 염려되어 부득이 글로 쓰는 것이어서, 처음에는 [그것이] 어떤 학설로 이루어지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만약 글을 읽으면서 먼저 설을 세우려는 마음을 둔다면, [설을 세우려는] 이 한 생각이 이미 밖으로 내달린 것이니 어찌 [진실한] 맛이 있겠습니까? 노형(老兄)께서는, “소열제(昭烈帝)는 권도(権道)만 알았지 정도(正道)를 몰랐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선주(先主=昭烈帝)가 기미를 보는데 밝지 못하여 결국 정도와 권도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유종(劉琮)이 조조(曹操)에게 항복 유종영강(劉琮迎降)
󰡔절보󰡕 ‘맞이하여 항복했다’는 말은 조조(曹操)를 맞이하여 그에게 항복했다는 말이다. 당시 先主는 樊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유종(劉琮)을 공격하여 형주(荊州)를 빼앗을 것을 권했지만 先主는 이를 듣지 않았던 것을 말한다. (󰡔節補󰡕 迎降 迎降於曹操也 時先主屯樊 或勸攻琮取荊州而先生不聽)
󰡔간보󰡕 선안(建安) 13년(208년) [무자(戊子)에]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가 죽자 그 아들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는데, 얼마 안 있어 조조의 군대(曹操軍)가 오자 유종은 자신의 주(州)를 가지고 항복하였다. 그 때 선주는 번(樊)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유종을 공격하면 형주를 얻을 수 있다고 권하자 선주는, “유표가 죽으면서 그 아들을 나에게 부탁했는데 그를 친다면 죽어 무슨 면목으로 유표를 만나겠는가”하면서 사람들을 이끌고 강릉(江陵)으로 피한 것을 말한다. (󰡔刊補󰡕 建安十三年 荊州牧劉表卒 子琮嗣 未幾曹操軍至 琮擧州降 時先主屯樊 或勸攻琮荊州可得 先主曰 劉荊州臨終托我以孤遺 背信 自濟死 何面目見劉荊州乎 將其衆奔江陵)
했을 때, [선주는] 형주(荊州)를 취하지 않았으니 그가 권도를 알았다는 것을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낭패하여 근거지를 잃게 되어서는 부득이 훔치는 계책 도절지계(盜竊之計)
󰡔차의󰡕 유장(劉璋)을 취한 일을 말한다. (󰡔箚疑󰡕 謂取劉璋事也)
󰡔익증󰡕 건안(建安) 16년(211년) [신묘(辛卯)에] 익주목사(益州牧司) 유종(劉璋)은 법정(法正)을 내보내어 선주(先主)를 맞아들였다. 이에 선주(先主)는 제갈량(諸葛亮)과 관우(關羽)을 머물러 두어 형주(荊州)를 지키게 한 다음, 배장(涪漳)으로 하여금 나아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유종(劉璋)을] 만나 즐겁게 마신 다음 물자를 넉넉히 주어 장로(張魯)를 치게 했다. 이듬해에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배성(涪城)을 근거지로 삼았다. 또 이듬해에는 제갈량이 관우(關羽)를 남겨두어 형주(荊州)를 지키게 한 다음 장비(張飛), 조운(趙雲)과 함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파군(巴郡)을 정복하고 선주(先主)를 따라 나아가 성도(成都)를 포위하니 유종(劉璋)이 성(城)을 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이를 본] 모든 신하들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명도(明道)께서는 일찍이 이를 두고 “공명(孔明)은 기필코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결국 유종(劉璋)을 취(取)했다. 그러나 성인(聖人)이라면 차라리 일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이런 일을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유종(劉琮)이 장차 조조(曹操)에게 병취(幷取)될 상황이었다면, 유씨(劉氏)의 군대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翼增󰡕 建安十六年 益州牧劉璋 遣法正迎先主 先主留諸葛亮關羽守荊州 詣涪漳率兵往會歡飮 厚資使擊張魯 明年進據涪城 又明年亮留關羽守荊州 與張飛趙雲泝流克巴郡  從先主進圍成都 璋開城出降 群下莫不流涕 明道嘗論此曰 孔明必求有成而取劉璋 聖人寧無成 此不可爲耳 若劉琮將爲曹公所幷取而興劉氏可也) [역주] * 배(涪) ; 사천성 松潘縣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가릉강(嘉陵江)의 지류이다.[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160쪽.] * 장(漳) ; 산서성에서 발원하여 하남성, 하북성을 거쳐 위하(衛河)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208쪽.]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24권(「이천선생어(伊川先生語)」10권) 23항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313쪽 참고.
을 냈으니 권도를 잘 쓰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정정당당히 상대의] 죄를 성토 성죄(聲罪)
󰡔차의󰡕 유종(劉璋)의 죄를 성토한 것을 말한다.『소미통감(少微通監)』섭민론(葉民論)에 보인다. (󰡔箚疑󰡕 聲劉璋之罪也 見少微通監葉民論) [역주] * 소미(少微) ; 강지(江贄)의 별호이다. 강지는 송대(宋代) 숭안현(崇安縣) 사람으로 자(字)를 숙규(叔圭)라 했다. 일찍이 상상(上庠)에서 학업을 닦았고,『역경(易經)』에 조예가 깊어서 저명하였는데, 은거하면서 징소(徵召)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화(政和, 북송 徽宗의 연호) 때에 태사(太史)가 소미성(少微星 즉 處士星)이 나타났음을 주달(奏達)하니 조명(詔命)으로 유일(遺逸)을 천거케 하였다. 그러자 유사(有司)가 강지(江贄)를 천거하여 세 번 초빙(招聘)되었는데 끝내 나아가지 않으니 소미선생(少微先生)이라 사호(賜號)하였다. 이 때문에 그가 편(編)한『통감절요(通監節要)』를『소미통감(少微通監)』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294권을 절요(節要)하여 50권에 담은 것이다. [김도련(金都鍊),「통감절요해제(通鑑節要解題)」, 󰡔통감절요(通鑑節要)󰡕, (1990, 보경문화사영인본) 참고.] 
하고 토벌하여 의로써 취하는 것이 바로 권도를 잘 쓰는 것입니다. 대개 권도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정도에 저절로 권도가 있는 것이니 이 둘은 애당초 두 가지가 아닙니다. 장자방(張子房)은 지나치게 계교를 부려 약간 속임수에 가까운 점이 있었으니, 소소한 것으로는 ‘한(漢) 고조(高祖)의 발을 밟아 귀뜸해 준 것 * 섭족지류(躡足之類) : 한 고조가 항우(項羽)와 천하를 다툴 적에 제(齊)나라를 점령한 한신(韓信)이 사람을 보내어 제왕(齊王)으로 봉해 주어야 항우를 공격하러 가겠다고 하니 한 고조가 화를 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량(張良)이 곁에 있다가 한 고조의 발을 밟으며,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니 거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참고.]
’과 같은 것이고, 큰 것은 한(漢)을 끼고서 자신의 본국인 한(韓)의 원수를 갚고도 종신토록 그것을 남에게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희집 주 : ‘협(挾)’은 원래 ‘부(扶)’로 되어 있었다. 송(宋)의 민(閩)본과 절(浙)본에 근거하여 고친다. (挾 : 原作‘扶’, 據宋閩․浙本改.) 
 제갈무후(諸葛武候)의 경우는 바로 명분과 의리가 모두 바르고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그가 한(漢)을 위해 복수하고자 한 뜻은 마치 청천백일(青天白日)과 같아서 사람마다 모두 알고 있으니, 천하 후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장자방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대개 제갈무후가 한 것처럼 하면 성공하기가 어렵지만 장자방은 틈을 봐서 할만 하면 즉시 했기 때문에 이루기가 쉬웠던 것입니다. 지난 번 이연평 선생을 뵈었을 때 선생께서도,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장자방의 조용함만 못하고, 장자방은 제갈무후의 정대함만 못하다”고 하시더군요. 이와 같은 나의 생각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裘父所云欲於論語作數說, 此語可疑. 尋常讀書, 只爲胸中偶有所見, 不能黙(4-1804)契, 故不得已而形之於口 : 恐其遺忘, 故不得已而筆之於書, 初不覺其成說也. 若讀書而先有立說之心, 則此一念已外馳矣, 若何而有味耶? 老兄所論昭烈知有權而不知有正, 愚意則以謂先王見幾不明, 經權俱失. 當劉琮迎降之際, 不能取荊州, 烏在其知權耶? 至於狼狽失據, 乃不得已而出於盜竊之計, 善用權者正不如此. 若聲罪致討, 以義取之, 乃是用權之善. 蓋權不離正, 正自有權, 二者初非二物也. 子房用智之過, 有微近譎處. 其小者如躡足之類, 其大則挾漢以爲韓而終身不以語人也. 若武侯卽名義俱正, 無所隱匿. 其爲漢復讎之志如靑天白日, 人人得而知之. 有補於天下後世, 非子房比也. 蓋爲武侯之所爲則難, 而子房投間乘隙, 得爲卽爲, 故其就之爲易耳. 頃見李先生亦言孔明不若子房之從容, 而子房不若武侯之正大也. 不審尊意以爲如何? 





위원리에게 답함 答魏元履 3


【해제】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세 번째 편지(제2서)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3서)는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제1서 및 제2서와 함께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전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答魏元履 제1서)의 해제 부분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8쪽 참고.
 일상사의 안부를 묻는 짧은 편지이다.

요사이 무슨 책을 보십니까? 대개 사람은 스스로 즐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곧 등용이 되면 도(道)를 행하고, 버려지면 도를 숨겨두는 등, 만나는 상황에 따라 편안히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용행...이안(用行...以安)
󰡔익증󰡕 아마도 위원리(魏元履)가 대교(台敎)를 그만두었을 때를 두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翼增󰡕 疑元履罷爲台敎時)
 윤화정(尹和靖) 선생께서, “장마가 걷히면 가고 장마가 계속 되면 쉰다”고 하셨으니 和靜先生云(和靜先生云[주차집보에는 ‘和靜云云’으로 되어 있다.] 
󰡔익증󰡕『연원록(淵源錄)』에 실린「여견중(呂堅中)이 화정(和靖)선생께 드리는 제문(祭文)」에서 “아릅답구나! 우리 도는 쉽고 간편하게 추구하나니, 장마가 걷히면 가고, 장마가 계속 되면 쉰다”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말이 윤화정(尹和靖)의 말이라 하니, 마땅히 거듭 살펴야 한다. (󰡔翼增󰡕 淵源錄 呂堅中祭和靖文曰猗靖文曰 猗歟吾道易簡以求 如霽則行 如潦則休 今以爲和靖語 當更考)
 이 말에 맛이 있습니다. 셋째 아드님 삼가(三哥) 
󰡔기의󰡕 위원리(魏元履)의 아들인 위응중(魏應仲)을 말한다. (󰡔記疑󰡕 元履子應仲也)
은 향시(郷試)에 낙방 실해(失解)
󰡔기의󰡕 과거시험장에서  뜻이 좌절된 것을 말한다. (󰡔記疑󰡕 言見屈於場中)
󰡔문목󰡕 이는 ‘발해(發解)’를 말한다. 󰡔기의󰡕에서 범범하게 ‘장중(場中)’이라 했는데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다. (󰡔問目󰡕 卽發解 記疑泛云場中 未分曉) [역주] * 발해(發解) ; 주현(州縣)의 고시(考試)에서 급제한 학생을 그 지방 관청에서 중앙정부에 공진(貢進)하는 일. 공문서를 중앙정부에 발송하여 거인(擧人)을 경사(京師)에서 과거에 응시하게 하는 일.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394쪽. 및 배숙희(裵淑姬), 󰡔송대(宋代) 과거제도(科擧制度)와 관료사회(官僚社會)󰡕, (서울 : 三知院, 2001), 22쪽 이하 참고.]
󰡔익증󰡕 ‘해(解)’는 ‘어진 사람을 조정에 천거하다(貢)’는 뜻이다. [따라서] ‘실해(失解)’는 향시(鄕試)에서 뜻이 좌절되어 [조정에 천거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 (󰡔翼增󰡕 解猶貢也 失解謂見屈鄕試也)
한 후에 잘 지내고 있는지요? 후생이 염려해야 할 것은 그저 배움이 부족하여 입신(立身)조차 할 수 없지나 않을까 하는 점에 있을 뿐입니다. 자그마한 득실 따위에 어찌 깊이 마음을 두겠습니까?
比來觀何書? 大抵人當有以自樂, 則用行捨藏之間, 隨所遇以安之. 和靜先生云: ‘如霽則行, 如潦則休’, 此言有味也. 三哥失解, 能自遣否? 後生所慮學不足․身不立爾, 得矢區區何足深介意也. 





위응중 魏應仲(魏應仲)
󰡔익증󰡕 [위응중(魏應仲)은]『문인록(門人錄)』에 나오는 위효백(魏孝伯)이니 달양(達陽) 사람이다. 91권의 국록(國錄)의 묘지명(墓志銘)에도 보인다. (󰡔翼增󰡕 門人錄 魏孝伯 達陽人 亦見九十一卷 國錄墓志)
에게 보냄(원리의 아들) 與魏應仲[元履子]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위원리(魏元履)의 아들인 위응중(魏応仲)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는 이 편지에 대해 년대 고증을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주자가 위응중의 아버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세 통의 편지를 쓴 시기보가 앞설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与魏応仲)는 병술년(丙戌, 1166년, 주자 37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자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答魏元履 제1서)의 해제 부분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38쪽 참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춘추』,『맹자』,『예기』등 고전을 소리내어 여러 번 읽고,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하되 그래도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주자 자신에게 가져와 묻도록 당부하고 있다. 이 밖에도 ‘앉거나 서거나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도록 힘쓰고 게을러지지 않도록 힘쓸 것 등을 자상하게 타이르고 있다.

셋째야! 너는 나이가 들었으니 학문에 힘씀으로써 ‘집안 어른이 꾸짖고 기대하는 뜻’에 부응할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어리다고 여기면서 헛되이 시간만 축내서는 안 될 것이다. 虛度時日(虛度時日)
󰡔차의󰡕 여기서 끊어야 한다. (󰡔箚疑󰡕 句)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예기(禮記)』와『춘추좌전(春秋左伝)』의 본문(本点) 본점(本點)
󰡔차의󰡕 예전에 읽을 만하다고 여겨 표시해 놓은 곳을 말한다. (󰡔箚疑󰡕 謂舊日所點可讀者)
󰡔절보󰡕 아마도 본서(本書)에 표시된 구두에 따라 읽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節補󰡕 似謂依本書所點句而讀之也)
󰡔표보󰡕 중화인(中華人)은 ‘책을 주는 것(授書)’를 ‘점서(點書)’라 한다. 사조제(謝肇淛)의『오잡조(五雜組)』에 이르기를 종실(宗室)에 종한(宗漢)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있었는데, 남들이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인] 한(漢)이라는 글자를 ‘병사(兵士)’라는 글자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그의 아들에게『한서(漢書)』를 내려주었는데, 이를 두고 궁중(宮中) 사람들이 말하기를 금일(今日) 태보(太保)께서 관(官)에 청하여 [그의 아들에게]『병사서(兵士書)』를 주셨다(敎點)라고 말하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웃었다. (󰡔標補󰡕 中華人 以授書爲點書 謝肇淛五雜組云 有宗室名宗漢 自惡人犯其名 謂漢字曰兵士 其子授漢書 宮中人曰 今日太保請官敎點兵士書 都下傳笑) [역주] * 사조제(謝肇淛) ; 명(明)나라 복건(福建) 장락(長樂) 사람이다. 자(字)를 재항(在杭) 혹은 무림(武林)이라 했다. 만력(萬曆) 시기에 진사(進士)였다. 여러 차례 공부랑중(工部郞中)을 지내면서 황하(黃河)를 잘 다스렸으며, 시도 잘 지었으며 민파(閩派)의 유명한 시인으로 통한다. 저서에『북하기략(北河紀略)』,『하고집(下菰集)』,『거동집(居東集)』,『오잡조(五雜組)』등이 있다. *『오잡조(五雜組)』; 사조제(謝肇淛)의 저서, 장고(掌固)와 풍물(風物)을 기록한 책임. 료개륭(廖盖隆) 등 주편(主編),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詞典)󰡕, (歷史人物卷) [上海 : 上海辭書出版社, 1991), 618쪽 참고.
󰡔간보󰡕 경전(經傳)과 사서(史書)의 본문(本文)에 의거한다는 말이다. (󰡔刊補󰡕 依經史本文也) [역주] * 󰡔표보󰡕에서 사조제(謝肇淛)의『오잡조(五雜組)』의 기사로 인용된 것과 동일한 내용이 󰡔사고전서(四庫全書)󰡕, 󰡔자부(子部)󰡕, 󰡔잡가류(雜家類)󰡕, 󰡔잡설지속(雜說之屬)󰡕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 권(卷) 3 등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각각 200字를 가지고『석문(釈文)』 석문(釋文)
󰡔익증󰡕 육덕명(陸德明)의『경전석문(經傳釋文)』을 말한다. (󰡔翼增󰡕 陸德明 經傳釋文)
을 참고하여 음(音)과 구두(句讀)를 바르게 하되, 엄숙한 자세로 단정하게 앉아 각각 백 번을 읽거라. 다 읽은 후에는『맹자(孟子)』를 20-30번 소리 내어 읽으면서 반복해서 익히거라. 그리고 나서 역사서 몇 장 [5-6 장을 넘지 말거라]을 보되 여러 번 반복하거라. [문사(文詞)가 통창(通暢)하고 의론(․議論)이 정밀(精密)한 곳에서 여러 번 소리 내어 외우는 것이 좋다.] 대개 경서(経書)와 사서(史書)를 읽어 나갈 때는, 반복해서 읽고 또 정밀하게 읽는 것이야말로 절실하고 긴요하다. 이렇게 해야만 점차 깊은 맛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암송을 할 적에는 급박하지 않게 천천히 해서 글자마다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더구나 모름지기 단정히 앉아 성현을 마주 대한 듯한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마음이 안정되어 의리를 궁구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많은 분량을 탐하고 광범위하게 하는데 힘쓰거나 엽등(躐等)하고 거칠게 하여 대충 보고서는 이미 통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즉시 다시 생각해보고, 생각해 보아도 통하지 않으면 곧 작은 책자를 비치해 놓고 매일 [통하지 않는 부분을 그 곳에다] 기록하여 수시로 살펴보고 이곳에 돌아오는 날 귀일(歸日)
󰡔기의󰡕 스승의 문하에서부터 돌아온다는 말이다. (󰡔記疑󰡕 自師門歸也)
󰡔간보󰡕 그의 집 혹은 다른 곳에서부터 선생의 문하(門下)로 돌아오는 날이라는 말이다. (󰡔刊補󰡕 自其家或他處歸先生門下之)
 하나하나 이해해 나가도록 하거라. [그러니] 모호하게 자신의 단점을 감싸면서 묻기를 부끄러워함으로써 종신토록 이처럼 어리석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여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또 장부를 두고 매일 암송한 부분의 시작과 끝을 기록하였다가 치부...기지(置簿...起止) 
󰡔기의󰡕 [매일] 암송한 부분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그치는지를 기록한다는 말이다. (󰡔記疑󰡕 記所誦說之起於何處止於何處也) 
 이곳에 돌아오는 날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앉거나 서거나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도록 힘써서 한쪽으로 기울이거나 기대서는 안 되며, 자칫 혼미해지거나 나태해질까 두려워해야 하느니라. 들어가고 나가거나 걷고 달릴 때는 엄숙하면서도 신중하도록 힘쓰고 자칫 가벼이 움직임 표경(票輕) 
󰡔익증󰡕 ‘표(票)’는『한서(漢書)』주(注)에 따르면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輕擧貌)’이라 했다. 또『사기(史記)』에 ‘형초(荊楚)가 경솔했다’라는 말이 나온다. (󰡔翼增󰡕 票 漢書注 輕擧貌 又史記 荊楚剽輕) [역주] * 표경(剽輕) ; 경솔함. 경박함.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303쪽.]
으로써 덕성을 해쳐서는 안 된다. 겸손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겸손자목(謙遜自牧)
󰡔익증󰡕『주역(周易)』에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낮춤으로 자처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翼增󰡕 易謙謙君子卑以自牧) [역주] *『주역』겸괘(謙卦), 초육(初六) ; 초육(初六)은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니, 대천(大川)을 건너더라도 길(吉)하다.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겸겸군자(謙謙君子)’는 낮춤으로 자처하는 것이다. (初六은 謙謙君子니 用涉大川이라도 吉하니라 象曰 謙謙君子는 卑以自牧也라)
 온화함과 공경함을 가지고 남을 대하거라. 매사에 삼가고 경계하여 이유 없이 함부로 출입해서는 안 된다. 한담(閑談)을 적게 하거라. 시간을 허비하게 될까 염려되니라. 잡서를 읽지 말거라. 정력을 분산시키게 될까 염려되니라. 아침저녁으로 자주 익힌 학업을 점검하고 열흘마다 한 번 쉬는 날에 휴일(休日)
󰡔기의󰡕 아마도 옛 사람들은 매 열흘마다 휴식을 가졌던 듯하다. (󰡔記疑󰡕 疑古人每旬休息也)
는 열흘 동안 본 책을 가지고 익숙해지도록 몇 번을 익혀 마음을 조금도 방일(放逸)하게 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점차 도리에 가까워져서 강습한 것이 쉽고 분명해질 것이다.
三哥年長, 宜自知力學, 以副親庭責望之意, 不可自比兒曹, 虛度時日. 逐日早起, 依本點禮記․左傳各二百字, 參以釋文, 正其音讀, 儼然端坐, 各誦百遍訖, 誦孟子三二十遍, 熟復玩味訖, 看史數板, [不過五六]反復數遍. [文詞通暢․議論精密處誦數過爲佳]. 大抵所讀經史, 切要反復精詳, 方能漸見旨趣. 誦之宜舒緩不迫, 令字字分明. 更須端莊正坐, 如對聖賢, 則心定而義理易究. 不可貪多務廣, 涉獵鹵奔, 纔看過了, 便謂已通. 小有疑處, 卽更思索, 思索不通, 卽置小冊子逐日抄(4-1806)記, 以時省閱, 俟歸日逐一理會. 切不可含糊護短, 耻於資問而終身受此黯暗以自欺也. 又置簿記逐日所誦說起止, 以俟歸日稽考. 起居坐立, 務要端莊, 不可傾倚, 恐至昏怠. 出入步趨務要凝重, 不可票輕, 以害德性. 以謙遜自牧, 以和敬待人. 凡事切須謹飭, 無故不須出入. 少說閑話, 恐廢光陰. 勿觀雜書, 恐分精力. 早晩頻自點檢所習之業, 每旬休日, 將一旬內書溫習數過, 勿令心少有放佚, 則自然漸近道理, 講習易明矣. 





범백숭 범백숭(范伯崇) 
󰡔익증󰡕 이름은 염덕(念德)이다. 여규(如圭)의 아들이고, 선생의 우서(友婿)이다. 조봉랑여릉속읍주부(朝奉郎廬陵屬邑主簿)를 지냈다. (󰡔翼增󰡕 名念德 如圭子先生友婿也 官朝奉郎廬陵屬邑主簿) [역주] * 우서(友婿) ; 동서(同壻)와 같은 말이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358쪽.]
에게 답함 答范伯崇 1 [주 ; 癸未]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계미(癸未)라는 주가 붙어 있기 때문에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에 쓴 것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6쪽 참고.
 이 편지에서는『논어』,「태백」편, 제9장에 나오는 ‘민가사유지(民但可使由之)’에 대한 두 학설 즉 정자(程子)의 설(説)과 여씨(呂氏)의 설(説)이이 양립가능한지 여부를 문제 삼고 있다. 주자는 이 두 학설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는 정자(程子)의 설(説)만 채택하고 있다.

이전 편지에서 자문하신 ‘백성은 도리(道理)에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民可使由之)’ *『논어(論語)』,「태백(泰伯)」편, 제9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은 <도리(道理)에>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원리(原理)를>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子曰 民은 可使由之요 不可使知之니라)”라 했다. 이에 대해 주자는 “백성은 당연한 도리(道理)에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이치의 소이연(所以然)을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民은 可使之由於是理之當然이요 而不能使之知其所以然也라)”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56쪽 참고.
라 한 단락은 내(熹)가 보기에는 두 학설(兩說) 양설(兩說)
󰡔차의󰡕 [이 편지에 소개되고 있는 바] ‘민가사유지(民但可使由之)’ 이하가 일설(一說)이고, ‘필사지지즉(必使之知則)’ 이하가 또 일설(一說)이다. 대개 앞의 일설(一說)에 따르면, [民은 可使由之요 不可使知之라는 말은]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한다’는 의미이다. 뒤의 일설(一說)에 따르면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알게 하고자 하다보면 도리어 병폐가 생긴다’는 의미이다. 이 두 설은 비록 약간 다르지만 [두 설을] 나란히 병행시킨다 해도 괜찮다. 그런데 범백숭(范伯崇)은 [이 두 설을 나란히 병행시키면] 서로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箚疑󰡕 民但可使由之以下一說也 必使之知則以下一說也 蓋前一說則是使之自覺之意也 後一說則是必欲其知之則反生弊病之意也 此兩說 雖有些不同 不害其幷行而伯崇疑其相妨 故先生云然) [역주] *『논어집주(論語集註)』,「태백(泰伯)」편, 제9장을 참고할 것.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56쪽 참고.
󰡔절보󰡕 [두 학설 중] 하나는 정자(程子)의 설(說)이고, 또 하나는 여씨(呂氏)의 설(說)이다. 범백숭(范伯崇)이 이 두 학설을 거론하면서 질문했기 때문에 선생께서 미루어 부연하심으로써 [이 두 학설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여씨(呂氏)의 설(說)은 결국 성인께서 말씀하신 본래 의미는 아니므로 정자(程子)의 설(說)과 서로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는 오로지 정자(程子)의 설(說)만 사용했다. (󰡔節補󰡕 一則程子說 一則呂氏說 伯崇擧此兩說而爲問 故先生推衍爲說 以明不相妨之意 然呂說終非聖言本意 與程子說不相入 故集注專用程子說)
󰡔익증󰡕『주자어류(朱子語類)』의 본장(本章)과『논어혹문(論語或問)』에 상세히 보인다. (󰡔翼增󰡕 詳見語類本章及或問) 
󰡔차보󰡕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한다’는 것이 일설(一說)이고, ‘알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일설(一說)이다.『주자어류(朱子語類)』의 본장과『논어혹문(論語或問)』에 상세히 보인다. 그러나 이 두 학설은 끝내 서로 맞아 들어갈 수 없다. 이 때문에『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는 오로지 앞의 일설(一說)만 취했으며, 정자(程子)의 설(說)을 인용하여 뒤의 일설(一說)의 잘못을 밝혔다. (󰡔箚補󰡕 使之知之一說也 不可使知一說也 詳見語類本章及或問 然此兩說終不可相入 故集注專取前一說而引程子說以明後一說之非)
이 서로를 방해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대개 백성은 다만 [도리(道理)에] 따르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들이 스스로 깨우치기를 가다려야지, 억지로 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백성이 도리(道理)에] 따르면서 알지는 못한다 해도, [백성의 삶이] 이치를 따라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이 이치를 자각하여 알게 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한 백성들로 하여금] 반드시 알도록 하게 되면, [의도적으로] 앎을 추구하려는 마음(求知之心) 구지지심(求知之心) 
󰡔익증󰡕 ‘기심(機心)’을 말한다. (󰡔翼增󰡕 卽機心之謂) [역주] * 기심(機心) ; 교사(巧詐)한 마음.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049쪽] * 기심(機心)은 󰡔장자(莊子)󰡕 외편(外篇), 천지(天地)편에 나온다. 안동림(安東林) 역주, 󰡔장자(莊子)󰡕 외편(外篇), (서울, 玄岩社, 1980), 552-3쪽 참고. 
이 드세어져서 ‘도리(道理)에 따름’조차 편치 않게 됩니다. 심한 경우 마침내 다시는 도리(道理)에 따르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오로지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데만 힘쓰다보면 그 해로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석씨(釋氏)의 학(學) 석씨지학(釋氏之學,『주자대전차의집보』에는 ‘學’이 ‘事’로 되어 있다.)
󰡔익증󰡕 선자(禪者)는 항상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를 알려 한다.『주자어류(朱子語類)』에도 보인다. (󰡔翼增󰡕 禪者常求知所以然之故 亦見語類)
은 이런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백성이 도리(道理)에] 따르면서 [그 도리를] 스스로 알게 되면, 그 얕고 깊음에 따라 저절로 편안한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위정자가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알게 한다면, 결국은 알게 되지도 못할 것이 뻔하고, [또 다행하게도] 알게 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 앎이] 지나치게 마련이어서 [앎이] 미치지 못한 경우와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기심(機心)이 생겨나서 뜻을 미혹시키는 일(惑志) 기심혹지(機心惑志)
󰡔표보󰡕『논어정의(論語精義)』에서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백성을 어리석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개 [백성들이] 충분히 알지 못하면 곧 기심(機心)을 일으켜 뜻을 미혹케 하는 일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標補󰡕 論語精義 呂氏曰 不可使知 非以愚民 蓋知之不到 適以起機心而生惑志) [역주] 󰡔표보󰡕에서 인용한『논어정의(論語精義)』의 내용은 󰡔주자전서(朱子全書)』(上海: 上海古籍出版社, 安徽敎育出版社, 2002) 제7책, 297쪽 참고.
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前書所詢‘民可使由之’一段, 熹竊謂兩說似不相妨. 蓋民但可使由之耳, 至於知之, 必待其自覺, 非可使也. 由之而不知, 不害其爲循理. 及其自覺此理而知之, 則沛然矣. 必使之知, 則人求知之心勝而由之不安, 甚者遂不復由, 而惟知之爲務, 其害豈可勝言? 釋氏之學是已. 大抵由之而自知, 則隨其淺深, 自有安處 : 使之知, 則知之必不至, 至者亦過之而與不及者無以異. 此機心惑志所以生也.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2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두 번 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2서)는 제1서에 이어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에 쓴 것이다.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제1서)의 해제 주석 및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6쪽 참고.
 이 편지의 전반부는 󰡔시경(詩経)󰡕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진(陳)나라 영공(霊公) 이후에도 시(詩)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 ‘국풍(国風)의 순서에 관한 문제’ 등이 논의되는데, 주자는 이소(二蘇)의 시론(詩論)이 ‘너무 통쾌한 데서 실수하고 있다’고 보지만 구양공(欧陽公)의 본말론(本末論)은 매우 좋다고 말한다. 또 이 편지의 후반부는『논어』,「태백」편, 제9장에 나오는 “민가사유지(民但可使由之)’ 및『논어(論語)』,「학이(学而)」편, 제2장에 나오는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孝弟也者 其為仁之本与)”라는 구절의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 토론되고 있다.

‘진(陳)나라 영공(靈公) 진령(陳靈) 
󰡔차의󰡕 진(陳)나라 영공(靈公)이니, 주림시(株林詩)에서 말했다. (󰡔箚疑󰡕 陳靈公也 卽株林詩所稱也) [역주] * 주림시(株林詩)는『시경』,『진풍(陳風)』에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시경집전(詩經集傳)󰡕, 상(上)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302쪽 이하 참고.
 이후에도 일찍이 시(詩)가 없지 않았다’는 소씨(蘇氏)의 학설 소씨...지설(蘇氏...之說)
󰡔잡지󰡕 “일찍이 시가 없어진 적은 없지만 부자(夫子)께서 취(取)하지 않은 것”이라는 소씨(蘇氏)의 학설은 취(取)할만하지만 [선유(先儒)의 학설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이니, 선유(先儒)가 이른바 ‘시가 없다(無詩)’는 것은 ‘시(詩)가 다시는 지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부자(夫子)께서 취(取)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소씨(蘇氏)는 이 점을 이해라지 못한 채, 도리어 선유(先儒)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는, 소씨의 학설이 너무 통쾌하여 곱씹어 볼만한 가치가 적을 뿐만 아니라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雜識󰡕 蘇氏 未嘗無詩而夫子不取之說 可取而不察 先儒所謂無詩者 非謂詩不復作也 亦以夫子不取 故云然而非之 故先生以其太快不耐咀嚼而謂之有病也)
은 취할 만한 점이 있는 듯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대개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시가 없다(無詩)’라는 말은 본래 ‘시(詩)가 더 이상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夫子)께서 [더 이상 시를] 취(取)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강절(康節)선생이 말씀하신 바 ‘[공자께서] 시를 산정(刪定)하신 이후에는 다시는 시가 없다’는 것이 또한 이런 의미입니다. 소씨(蘇氏)가 [소강절의 이 말을] 비난한 것은 또한 살피지 못함이 심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시집전(詩集傳)』가운데서 소씨(蘇氏)의 학설을 인용 집전...소씨지설(集傳...蘇氏之說)
󰡔차의󰡕 소씨(蘇氏)가 “변풍(變風)이 진(陳)나라 영공(靈公)에서 끝난 것은 왜인가? 진(陳)나라 영공(靈公) 이후에도 일찍이 시(詩)가 없었던 적이 없지만 중니(仲尼)께서 취(取)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 살피건대 소씨설(蘇氏說)이『시집전(詩集傳』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소주(小注)에 보이니, 아마도 선생께서 처음에는 수록했다가 나중에 다시 깎아내 버린 듯하다. (󰡔箚疑󰡕 蘇氏曰 變風終於陳靈何也 陳靈以後未嘗無詩而仲尼有所不取也 ○按蘇說不見於集傳而只見於小注 豈先生初嘗收錄而後復刪去耶)
한 후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내가 보기에, ‘백락(伯樂)이 돌아보지 않은 것’을 ‘말이 없다(無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자(夫子)께서 취(取)하지 않으신 것’을 ‘시가 없다(無詩)’라고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바로 선유(先儒)의 뜻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대체로 이소(二蘇)의 의론(議論)은 모두 ‘너무 통쾌한 데’서 실수하고 있으며, 선유(先儒)의 돈실(惇實)한 기상이 없기 때문에 곱씹어 볼만한 깊이가 없습니다. 불내저작(不奈咀嚼)
󰡔익증󰡕 ‘내(奈)’는 ‘견디다(堪)’는 말과 같다. 의미(意味)가 얕고 짧다는 말이다. (󰡔翼增󰡕 奈猶堪也 言意味淺短也)
 따라서 참으로 [이소(二蘇)의 의론(議論)이 지닌] 장점을 없애서는 안 되지만 또한 그들이 잃고 있는 점에 대해 몰라서도 안 됩니다. 열다섯 나라의 국풍(國風)을 그와 같은 순서로 배열한 데 대해, 반드시 무슨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 듯합니다. 그렇지만 선유(先儒) 및 근세의 여러 선생들께서는 모두 이점에 관해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나는『시집전(詩集傳)』에서 감히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선유들의 학설을] 마지못해 좇아가는 것(詭隨) 궤수(詭隨)  
󰡔차의󰡕 마음속에서는 여러 선생들의 설(說)을 믿지 않으면서 억지로 따라간다는 말이다. (󰡔箚疑󰡕 謂中心不信諸先生之說而强從之也)
이 편치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뚜렷한 근거 없이 선유들의 학설을] 감히 변론(辨論) 변론(辨論)
󰡔차의󰡕 공격해서 논파한다는 말이다. (󰡔箚疑󰡕 謂攻破也)
󰡔익증󰡕 열다섯 개 나라의 국풍(國風)을 [그와 같은] 차례로 배열한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모시(毛詩)의 수편(首篇)과 공씨(孔氏)의 소(疏), 그리고『구양공문집(歐陽公文集)』에서는 모두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말 중에는 반드시 믿을만하지 못한 점들이 있다. 그렇다고 비난해야할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선생께서는『시집전(詩集傳』에서 다만 열다섯 개 나라의 지역에 관한 사실의 처음과 끝(始末)만 상세하게 기록하고, [국풍 시를 그와 같은 순서로] 배열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원래 의론을 제출하지 않으셨다. (󰡔翼增󰡕 十五國風次第 必有其由 故毛詩首篇孔氏疏 及歐陽公文集 皆言其所以然 其說有未可必信而亦無可據以非之者 故先生詩傳 但詳記十五國地域事實始末 至於次第之由 則元不提論)
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양공(歐陽公)의 본말론(本末論)은 매우 좋습니다. 그래서 나(熹)도 [구양공(歐陽公)의 본말론(本末論)을] 후어(後語) 후어(後語)
󰡔차의󰡕「시집전후어(詩集傳後語)」라 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선생의『시집전(詩集傳』에는] 그 글이 보이지 않는다. (󰡔箚疑󰡕 詩集傳後語 今不見其書)
 속에 수록했습니다. 국풍(國風)의 순서를 논하는 것과 같은 문제(此等) 사차등(似此等) 
󰡔차의󰡕 국풍(國風)의 순서를 말한다. (󰡔箚疑󰡕 謂國風次序)
에 대해서는 일단 제쳐 두고, 급한 문제부터 우선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蘇氏‘陳靈以後未嘗無詩’之說, 似可取而有病. 蓋先儒所謂無詩者, 固非謂詩不復作也, 但謂夫子不取耳. 康節先生云‘自從刪後更無詩’者, 亦是此意. 蘇氏非之, 亦不察之甚矣. 故熹於集傳中引蘇氏之說而繫之曰: ‘愚謂伯樂之所不顧, 則謂之無馬可矣. 夫子之所不取, 則謂之無詩可矣.’正發明先儒之意也. 大抵二蘇議論皆失之太快, 無先儒惇實氣象, 不奈咀嚼. 所長固不可廢, 然亦不可不知其失也. 十五國風次序恐未必有意, 而先儒及近世諸先生皆言之, 故集傳中不敢提起. 蓋詭隨非所安, 而辨論非所敢也. 歐陽公本末論甚佳, 熹亦收在後語中矣. 似此等且當闕之, 而先其所急乃爲得耳. 

‘백성으로 하여금 다 알게 할 수는 없다(民可使知之)’ *『논어(論語)』,「태백(泰伯)」편, 제9장.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56쪽 참고.
고 했습니다만, [이는] 무릇 백성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지, 배우는 자(學者)는 본래 알고자 하는 법입니다. 다만 반드시 차곡차곡 쌓아 함영(涵泳)하듯 하여 익숙하게 됨에 따라 어느 날 환하게 스스로 알게 되는 곳이 있다면 괜찮지만 [학자들의 앎] 또한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알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심혹지(機心惑志)’에 관해서는 여박사(呂博士)의 학설 여박사지설(呂博士之說) 
󰡔차보󰡕『논어혹문(論語或問』에 “이(呂博士之說)는 성인 말씀의 본의(本意)는 아니다. 그러나 또한 자못 근세 학자들의 문제점을 적중시키고 있다”고 했다. (󰡔箚補󰡕 或問此非聖言之本意 然亦頗中近世學者之病)
을 참고하여 연구해 보시면, 이전 날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 전일소견(前日所見)
󰡔절보󰡕 곧 상편(上篇)에서의 ‘필사지지(必使之知)’ 이하를 말한다.(󰡔節補󰡕 卽上篇必使之知以下也)
이 옳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우는 자가 아직 그쳐야할 곳을 알지도 못하고 있을 경우는 곧 ‘기심혹지(機心惑志)’라는 말조차도 할 필요가 없으니, [배우는 자가 아직 그쳐야할 곳을 알지 못하고 있을 경우는] 단지 ‘어두운 길을 걸으며 제 멋대로 짓는 것(冥行妄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심혹지(機心惑志)’는 바로 [대롱을 통해 여러 아롱진 무늬 중의] 한 점(一斑) 일반(一斑) 
󰡔익증󰡕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왕자경(王子敬 즉 王獻之를 말함)이 몇 살 안 되었을 때, 한 번은 문생(門生)들이 저포(樗蒲)놀이 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이미 승부가 나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남쪽 노래(南風)는 상대가 되지 못하겠네요’라고 했다. 문생들이 그를 어린아이라고 깔보고 말하기를 ‘이 도령은 또한 대롱으로 표범을 살펴보는지라 때때로 표범 가죽 무늬의 한 반점만 보는구만’이라고 했다.” (󰡔翼增󰡕 世說 王子敬數歲時 嘗看諸門生樗蒲 見有勝負 因曰 南風不競 門生輩輕其小兒 迺曰 此則亦管中窺時見一斑)  [역주] * 󰡔익증󰡕에 인용된 내용은 󰡔세설신어(世說新語)󰡕,「방정(方正)」편에 나온다. ‘남쪽 노래(南風)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南風不競)는 말은『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18년조에 보인다. 초(楚)나라가 정(鄭)나라를 치려고 할 때, 진(晉)나라 악사(樂師)였던 사광(師曠)이 말하기를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자주 남쪽 노래를 불러보았는데, 죽어있는 소리가 많아서 남쪽 노래는 상대가 되지 못하니(南風不競) 초나라는 틀림없이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더 자세한 것은 유의경(劉義慶) 찬(撰), 유효표(劉孝標) 주(注), 김장환(金長煥) 역주, 󰡔세설신어(世說新語)󰡕(中), (서울, 살림출판사, 2001), 96-7쪽 참고. * 일반(一斑) ; 여러 아롱진 무늬 중의 한 점. 전(轉)하여 일부분, 일단(一端)과 동일한 뜻임.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68쪽.]
이나 반점(半點)을 보고 앎을 천착(鑿知) 착지(鑿知)
󰡔익증󰡕『맹자(孟子)』[「이루(離婁)」하, 제26장에] “지혜로움을 미워하는 까닭은 그 천착(穿鑿)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翼增󰡕 孟子 所惡於知者爲其鑿也)  [역주] *『맹자(孟子)』,「이루(離婁)」하, 제26장 전문에 관해서는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248-50쪽 참고.
함으로써 스스로의 사사로움에로 흘러가버린 경우를 말합니다. 성인(聖人)의 가르침은 “문(文)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礼)로써 요약한다는 것” *『논어(論語)』,「옹야(雍也)」편, 제25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君子)가 문(文)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道)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子曰 君子博學於文이요 約之以禮면 亦可以弗畔矣夫인저)라고 나오고, *「안연(顔淵)」편, 제15장 에도 “子曰 博學於文이요 約之以禮면 亦可以弗畔矣夫인저”라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22쪽 및 243쪽 참고.
에 불과하지만, 배우는 자가 나아가는 바에는 저절로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연의] ‘크게 탄식함(喟然)’과 [공자의] ‘[도(道)에 어긋나지 않음(弗畔)’ 위연불반(喟然弗畔)  
󰡔차의󰡕 [『논어(論語)』,「자한(子罕)」, 제10장에] “안연(顔淵)이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부자(夫子)께서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하게 해주셨다”라 하였고, [『논어(論語)』,「옹야(雍也))」, 제25장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君子)가 문(文)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約〕한다면 또한 <도(道)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 하였다. (󰡔箚疑󰡕 顔淵喟然嘆曰 夫子博我以文 約我以禮 子曰 孔子曰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不畔矣夫)  [역주] *『논어(論語)』「안연(顔淵)」, 제15장 에도 “ 문(文)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約〕한다면 또한 <도(道)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子曰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70-72쪽, 122쪽 및 242쪽 참고. 
이 같이 않은 이유입니다. 소이불동(所以不同)
󰡔차의󰡕 안연(顔淵)의 ‘크게 탄식함(喟然)’은 깊다. 그러나 [안연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의 ‘[도(道)에] 어긋나지 않음(不畔)’은 얕다. [이것이] 이른바 같지 않음이다. (󰡔箚疑󰡕 顔淵之喟然深也 餘人之不畔淺也 所謂不同也)
 안자(顔子)는 [자신이 성인의 경지에 완벽하게 도달하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성인(聖人)이 다른 사람들을 접하는 곳 모두가 근본으로부터의 발현임’을 분명히 볼 수는 있었던 것이니, 횡거(橫渠)가 가리키는 것 횡거소지(橫渠所指)
󰡔차의󰡕 횡거(橫渠)는 [그의]『어록(語錄)』[「중(中)」편]에서 말하기를 “안자(顔子)는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을 알아서 그친다. 고로 ‘그가 나아감에 있어서는 지극히 선(善)하지 않으면 [그에] 처(處)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여태껏 그가 중단함을 보지 못한다. ‘반드시 그쳐야 할 곳을 안다’는 것은 도(道)에 뜻을 두고, 광대(廣大)함을 지극히 하고 고명(高明)함을 극진히 해 나가는 것이니 [이처럼 지(知)의 경우에는] ‘원대(遠大)함을 극진히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대처해 나감 [즉 행(行)]에 있어서는 정미롭고 요약되는 것이 참으로 옳다. 지극히 선(善)한 것은 모름지기 중도(中道)로써 해야 하니, [그래야만] 바야흐로 지극히 선하다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안자(顔子)가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자는] ‘바라봄에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라고 했는데 [이는 안자가] 부자(夫子)의 고원(高遠)한 경지에 도달하기를 요구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부자의] 정약(精約)의 경지에도 도달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 당시] 안자(顔子)의 본분(本分)은 필시(必是) 입신(入神)의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으며 정의(精義)의 경지에도 아직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자(顔子)가 평소에 품고 있었던 뜻(雅意)은 바로 [자신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箚疑󰡕 橫渠語錄 顔子知當止而止焉 故見其進也 不極善不處焉 故未見其止焉 知必止者 如志於道 致廣大極高明 此則盡遠大 所處則眞是精約 極善者 須以中道方謂極善 是顔子所求也 所以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高遠處又要求 精約處又要至 顔子之分 必是入神處又不能 精義處又未至 然顔子雅意則只要做聖人)  [역주] * 󰡔차의󰡕에서 인용한 횡거(橫渠)『어록(語錄)』의 말은『논어(論語)』,「자한(子罕)」, 제10장을 염두에 둔 언급이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70-72쪽 참고.]  * 또 여기에서 인용된 횡거의 말은 사부간요본(四部刊要本) 횡거(橫渠)『어록(語錄)』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글자에 약간의 출입이 있고 또 사부간요본(四部刊要本)의 내용에 비해 부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장재(張載), 󰡔장재집(張載集)󰡕(四部刊要), 장석탐(章錫琛)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780, 332쪽 참고.
󰡔표보󰡕 횡거(橫渠)가 말하기를 “대중(大中)과 지정(至正)의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문(文)을 통해 반드시 그 작용을 극진하게 이루고, 약(約)을 통해 반드시 [외부세계를 적당하게] 느껴 소통시켜(感而通) 낼 수 있다. 아직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성인(聖人)을 보면 [앞에 계신지 뒤에 계신지] 황홀하여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 안자(顔子)의 탄식인가?”라고 했다. [횡거가] 또 말하기를 “높고 밝음을 다하지 못하고 넓고 두터움을 극진히 하지 못하면 중도(中道)를 알 수 없으니, 대개 안자가 탄식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라고도 했다. [본문에] 선생께서 인용한 것은 바로 [횡거의] 이 말인 듯하다. (󰡔標補󰡕 橫渠曰 大中至正之極 文必能致其用 約必能感而通 未至於此 其視聖人惶惚不可爲之象 此顔子之歡乎 又曰 高明不可窮 博厚不可極 則中道不可識 蓋顔子之歡也 先生所引似指此語)  [역주] * 󰡔표보󰡕에서 인용한 횡거(橫渠)의 말은 횡거의『정몽(正蒙)』에 나온다. 장재(張載), 󰡔장재집(張載集)󰡕(四部刊要), 장석탐(章錫琛)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78, 27쪽 참고. 
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인과 안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다만 성인(聖人)께서 보여주신 방법에 근거하여 문(文)에 대하여 널리 배워 이치를 궁구하고, 예(礼)로써 요약하여 몸을 닦아나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공부해 나가서 안정적으로 자립하게 되면, 또한 외물(外物)에 의한 유혹이나 두려움을 당하지 않으며 이단(異端)에 의해 뜻이 변하거나 미혹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보면, 안자(顔子)가 [성인의 경지를] 보는 곳(見處)에까지 도달한 것인지에 대해 아직은 감히 가볍게 의론할 수 없습니다. 다만 ‘[도(道)에] 어긋나지 않음(弗畔)’이라는 한 구절을 통해볼 때, [안자의] 工夫가 아직 이런 정도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성인의 경지를] 쉽게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不可使知之謂, 凡民耳學者固欲知之, 但亦須積累涵泳, 由之而熟, 一日脫然自有知處乃可, 亦非可使之彊求知也. 機心惑志, 就呂博士之說求之, 則只如前日所說爲是. 學者未知所止, 則不必言機心惑志, 只是冥行妄作耳. 機心惑志正謂見得一斑半點而鑿知自私之流也. 聖人敎人不過博文約禮, 而學者所造自有淺深, 此(4-1808)‘喟然’․‘弗畔’所以不同也. 顔子見聖人接人處都從根本上發見, 橫渠所指是也. 餘人但能因聖人所示之方, 博文以窮理, 約禮以脩身, 如此立得定, 則亦庶乎可以不爲外物誘怵, 異端遷惑矣. 自今觀之, 顔子地位見處固未敢輕議, 只弗畔一節, 亦恐工夫未到此, 不可容易看也. 

‘성(性) 가운데에는 다만 인(仁)·의(義)·예(礼)·지(智)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효제(孝弟)가 있겠는가?’ *『논어(論語)』,「학이(學而)」편, 제2장을 풀이하면서 주자는 정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효제(孝弟)는 순한 덕(德)이다. 그러므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다시 이치를 거스르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겠는가? 덕(德)은 근본(根本)이 있으니, 근본이 확립되면 그 도(道)가 충만하고 커진다. 효(孝)와 제(弟)를 집안에 행한 뒤에 인(仁)과 사랑이 남에게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친한 이[친척]를 친히 하고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을 실천하는 데는 효제(孝弟)를 근본(根本)으로 삼으며, 본성(本性)을 논한다면 인(仁)이 효제(孝弟)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혹자가 묻기를 ‘효제(孝弟)가 인(仁)의 근본(根本)이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효제(孝弟)로 말미암아 인(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나는 대답하였다. ‘이것은 아니다. 인(仁)을 행하는 것이 효제(孝弟)로부터 시작됨을 말했을 뿐이다. 효제(孝弟)는 이 인(仁)의 한 가지 일이니,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이른다면 가(可)하거니와, 이것이 인(仁)의 근본(根本)이라고 한다면 불가(不可)한다. 인(仁)은 본성(本性)이요, 효제(孝弟)는 용(用)이다. 성(性) 가운데에는 다만 인(仁)·의(義)·예(禮)·지(智)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효제(孝弟)가 있겠는가. 그러나 인(仁)은 사랑을 주장(主張)하고, 사랑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효제(孝弟)란 그 인(仁)을 행하는 근본(根本)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 程子曰 孝弟는 順德也라 故로 不好犯上이니 豈復有逆理亂常之事리오 德有本이니 本立則其道充大라 孝弟行於家而後에 仁愛及於物이니 所謂親親而仁民也라 故로 爲仁은 以孝弟爲本이요 論性則以仁爲孝弟之本이니라 或問 孝弟爲仁之本이라하니 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아 曰 非也라 謂行仁自孝弟始라 孝弟는 是仁之一事니 謂之行仁之本則可커니와 謂是仁之本則不可하니 蓋仁은 是性也요 孝弟는 是用也라 性中에 只有箇仁義禮智四者而已니 曷嘗有孝弟來리오 然이나 仁主於愛하고 愛莫大於愛親이라 故로 曰 孝弟也者는 其爲仁之本與인저)”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9-20쪽 참고.
라고 한 [정자의] 이 말씀은 또한 깊이 체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체회득시(體會得是) 
󰡔익증󰡕 ‘체회(體會)’는 ‘체인(體認)’이라는 말과 같다. ‘득(得)’은 어조사이다. ‘시(是)’는 ‘마땅하다(當)’는 뜻이다. (󰡔翼增󰡕 體會猶言體認  得語辭 是當也)
 만약 [이 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에] 차질이 생기면 도리(道理)를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대개 천하의 어떤 사물도  성(性) 밖에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성(性) 밖에 별도로 효제라 불리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자의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만 성(性)이라 하면 곧 인(仁)․의(義)․예(禮)․지(智) 이 넷만 있을 뿐이며, 인(仁)이 곧 효제(孝悌)를 포섭하고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을 때는 효제(孝悌)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일 뿐입니다. 즉 효제(孝悌)와 인(仁)이 각각 일물(一物)이어서 성(性) 속에는 인(仁)만 있고 효제(孝悌)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효제(非孝悌) 
󰡔차의󰡕 ‘비(非)’자의 의미가 ‘효제(孝悌)’까지 걸린다. (󰡔箚疑󰡕 非字意止孝悌也)
 [주 ; 인(仁)이 포섭하고 있는 것은 효제(孝悌)뿐만은 아니며, 무릇 자애(慈愛)나 측은(惻隱)한 마음도 모두 인에 포합되어 있습니다.] 이는 흡사 천지의 일원기지(一元之氣)에는 단지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만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물(水)은 말하지만 강수(江水), 하수(河水), 회수(淮水), 제수(濟水)를 말하지는 않으며, 나무(木)를 말하지만 오동나무 가래나무 작은 대추나무(梧檟樲棘) *『맹자(孟子)』,「고자(告子)」상, 제14장에서 주자는 “오(梧)는 오동(梧桐)나무요, 가(檟)는 재(梓)나무이니, 다 아름다운 재목이다. 이극(貳棘)은 작은 대추나무이니, 아름다운 재목이 아니다.(梧는 桐也요 檟는 梓也니 皆美材也라 樲棘은 小棗니 非美材也라)”라 하였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337쪽 참고.
을 말하지는 않지만, 저것만 있고 이것은 없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천(伊川)께서 또 “인(仁)을 실천하는 데는 효제(孝弟)를 근본(根本)으로 삼으며, [주; ‘사지본(事之本)’이나 ‘수지본(守之本)’ [주]사지본수지본([注]事之本守之本)
󰡔차의󰡕 맹자가 말하기를 “[섬기는 일 중에] 무엇인들 섬김이 되지 않겠는가마는 어버이를 섬김이 섬김의 근본이요 [지키는 일 중에] 무엇인들 지킴이 되지 않겠는가는 몸을 지킴이 지킴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箚疑󰡕 孟子曰 孰不爲事 事親事之本也 孰不爲守 守身守之本也)  [역주] * 󰡔차의󰡕에서 인용된 맹자의 말은 『맹자(孟子)』,「이루(離婁)」상, 제19장에 “<섬기는 일 중에> 무엇인들 섬김이 되지 않겠는가마는 어버이를 섬김이 섬김의 근본이요 <지키는 일 중에> 무엇인들 지킴이 되지 않겠는가는 몸을 지킴이 지킴의 근본이다.(孰不爲事리오마는 事親이 事之本也요 孰不爲守리오마는 守身이 守之本也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220-21쪽 참고. 
과 같은 종류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성(本性)을 논한다면 인(仁)이 효제(孝弟)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주 ; ‘천하의 큰 근본’ [주]천하지대본([注]天下之大本)
󰡔차의󰡕『중용』[1장]에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라고 했다.(󰡔箚疑󰡕 中庸 中者天下之大本也)  [역주] *『중용』1장에 “...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道)이다...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라고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61쪽 참고.
과 같은 종류가 바로 이것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이는 중요한 말씀이니 자세히 생각해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性中只有仁․義․禮․智, 曷嘗有孝悌來?’ 此語亦要體會得是, 若差了, 卽不成道理. 蓋天下無性外之物, 豈性外別有一物名孝悌乎? 但方在性中, 卽但見仁․義․禮․智四者而已. 仁便包攝了孝悌在其中, 但未發出來, 未有孝悌之名耳. 非孝悌與仁各是一物, 性中只有仁而無孝悌也. [주 ; 仁所包攝不止孝悌, 凡慈愛惻隱之心皆所包也.] 猶天地一元之氣, 只有水․火․木․金․土, 言水而不曰江河淮濟, 言木而不曰梧檟樲棘, 非有彼而無此也. 伊川又云 ‘爲仁以孝悌爲本, [주; ‘事之本’․‘守之本’之類是也] 論性則以仁爲孝悌之本’, [주 ; ‘天下之大本’之類是也.] 此皆要言, 細思之則自見矣.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3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세 번 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3서)는 제1, 2서에 이어 제 4서와 함께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 이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 즉 제3서)와 네 번째 편지(제4서)를 쓴 정확한 시기를 상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처음 나오는 문장(序)으로 추정컨대 대개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 이후에 쓴 것인 듯하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6쪽 참고.
 이 편지는 크게 두 가지 문제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첫째는『논어(論語)』,「자로(子路)」, 제3장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하여 위(衛)나라 괴외(蒯聵) 부자의 충돌을 염두에 둔 의리문제를 주로 분석하고 있다. 즉 망명해 나간 태자 괴외(蒯聵)와 현재 위(衛)나라 임금으로 있는 그의 아들 첩(輒)이 충돌할 경우, 주자는 “첩은 다만 부자의 관계가 큰 것만을 알아야 하며, [따라서] 단 하루도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겉으로나 속으로나 오로지 도망가는 것 한 가지밖에 다른 일은 전연 있을 수 없으며, 그 외의 것은 전혀 보지 않는 것이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것이라 여겨집니다”라고 말한다. 둘째는『논어(論語)』,「자로(子路)」, 제20장에 나오는 내용, 즉 선비(士)에 대한 공자와 자공의 대화를 문제 삼고 있다.

[범백숭의 질문1] 논어의 “위(衛)나라 군주(君主)가 선생님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고 하십니다” *『논어(論語)』,「자로(子路)」, 제3장에 “자로(子路)가 말하였다. ‘위(衛)나라 군주(君主)가 선생님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고 하십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무엇을 우선하시렵니까?’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셨다.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 자로(子路)가 말하였다. ‘이러하십니다. 선생님의 우활(迂闊)하심이여!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비속(鄙俗)하구나 유(由)여! 군자(君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는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순하지 못하고, 말이 <이치에>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刑罰)이 알맞지 못하고, 형벌(刑罰)이 알맞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이름[명분]을 붙이면 반드시 말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으면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니, 군자(君子)는 그 말에 대하여 구차히 함이 없을 뿐이다.’ (子路曰 衛君이 待子而爲政인댄 子將奚先이시리잇고 子曰 必也正名乎인저 子路曰 有是哉라 子之迂也여 奚其正이시리잇고 子曰 野哉라 由也여 君子於其所不知에 蓋闕如也니라 名不正이면 則言不順하고 言不順이면 則事不成하고 事不成이면 則禮樂不興하고 禮樂不興이면 則刑罰不中하고 刑罰不中이면 則民無所措手足이니라 故로 君子名之면 必可言也며 言之면 必可行也니 君子於其言에 無所苟而已矣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53-5쪽 참고.
라는 구절에 대하여 묻습니다.
[선생의 답변1] 제가 일찍이 [돌아가신 이연평] 선생 선생(先生) 
󰡔절요주󰡕 이연평(李延平)을 말한다. (󰡔節要注󰡕 延平)
께 고수(瞽瞍)가 살인했을 경우 고수(瞽瞍가 살인했을 경우 : 『맹자(孟子)』,「진심(盡心)」상, 35장에, “만약에 순(舜)의 아버지인 고수가 살인을 하게 되어 사사(士師)가 구속을 할 경우 순임금이 어떻게 했을까요?” 하고 묻는 도응(桃應)에게, “순 임금은 임금 자리에 연연하는 분이 아니니 임금 자리를 버리고 몰래 탈출시켜 멀리 도망가서 살았을 것이다”라고 대답한 내용을 가리킨 것이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400-402쪽 참고.
를 묻자 선생께서는 “괴외(蒯聵) 부자 괴외부자(蒯聵父子) 
󰡔간보󰡕『춘추좌전』애공(哀公) 2년(BC493년) 진(晋)나라 조앙(趙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위(衛)나라 세자(世子)인 괴외(蒯聵)를 척(戚) 땅에 들여보냈다. 애공 3년(BC492년) 봄에 제(齊)나라 국하(國夏)와 위(衛)나라 석만고(石曼姑)가 군대를 거느리고 척(戚)땅을 포위하였다. 이 편지는 이일을 논한 것이다. (󰡔刊補󰡕 春秋哀二年 晋趙鞅 帥師納衛世子蒯聵於戚 三年春 齊國夏 衛石曼姑 帥師圍戚 此書論此事也)  [역주] * 이석호(李錫浩) 역주, 󰡔춘추좌전(春秋左傳)󰡕(下), (서울, 平凡社, 1979), 508-516쪽 참고.) 위(衛) 영공(靈公)의 세자(世子)인 괴외가 그의 어머니 남자(南子)의 음행(淫行)을 수치로 여겨 죽이려고 하자 영공이 그를 추방시켰다. 영공이 죽은 뒤에 괴외의 아들 첩(輒)을 후계자로 삼으니 진(晋)나라에서는 망명 와 있는 괴외를 위(衛)로 들여 보내면서 순서상 첩의 아버지인 괴외가 임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첩이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부자(父子)간에 싸움을 일으킨 것을 가리킨 말이다.『춘추좌전(春秋左傳)』,「정공(定公)」 14년 및 「애공(哀公)」 2년 조 참고.
는 [순(舜)과 같은] 그러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무차심(無此心)
󰡔기의󰡕 순(舜)이 [살인자인 그의 아비 고수를] 남몰래 업고서 [멀리 도망감으로써 부자지간의 정리를 보존하려한] 마음을 말한다. (󰡔記疑󰡕 無舜竊負之心也)  [역주] * 이 내용은『맹자』,「진심(盡心)」상, 제35장에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400-101쪽 참고.
 법에 속박되어 모두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였다. 순(舜)의 마음은 법이 그를 속박시킬 수 없으므로 종신토록 즐거워하며 천하를 잊으셨을 것이니,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마음을 논한 것일 뿐이니, [순의 신하들이] 어찌 실제로 [순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했겠는가” 기용...거득(豈容...去得) 
󰡔차의󰡕 ‘그(他)’는 ‘순(舜)’을 말한다. 순(舜)의 여러 신하들이 어찌 순(舜)이 [그의 아비 고수를] 남몰래 업고서 도망하는 것을 허락하겠는가 하는 말이다. (󰡔箚疑󰡕 他謂舜也 謂舜之諸臣 豈許舜之竊負而去也) 
라고 하셨고, 선유(先儒)들이 팔의(八議)를 적용하는 설 팔의(八議)
󰡔기의󰡕 친(親), 고(故), 공(功), 현(賢), 능(能), 근(勤), 귀(貴), 빈(賓)을 말한다. (󰡔記疑󰡕 親故功賢能勤貴賓)
󰡔익증󰡕『주례(周禮)』에 “여덟 가지 법으로써 [국가의] 법에 붙여서 법에 저촉되는지를 본다.  첫째는 종친들과 의논(議親)하는 법이요, 둘째는 친구들과 의논(議故)하는 법이요, 셋째는 어진 이와 의논(議賢)하는 법이요, 넷째는 능력 있는 자와 의논(議能)하는 법이요, 다섯째는 공로가 있는 자와 의논(議功)하는 법이요, 여섯째는 높은 관직에 있는 이와 의논(議貴)하는 법이요, 일곱째는 국사에 분주한 사람과 의논(議勤)하는 법이요, 여덟째는 빈객과 의논(議賓)하는 법이다. 이천(伊川)께서 일찍이 ‘한(漢) 문제(文帝)가 박소(薄昭)를 죽인 일’을 두고 “여덟 가지 법에 따라 의론한 이후에 경중(輕重)이 그 마땅함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선유(先儒) 운운’한 것은 아마도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翼增󰡕 周禮 少司寇 以八辟麗刑法附刑罰 一曰議親之辟 二曰議故之辟 三曰議賢之辟 四曰議能之辟 五曰議功之辟 六曰議貴之辟 七曰議勤之辟 八曰議賓之辟 伊川嘗論漢文殺薄昭事曰 八議而後輕重得其宜 先儒云云 恐指此)  [역주] *『주례(周禮)』,「추관(秋官)」, ‘소사구(小司寇)’편에 나오는 이 팔의(八議)는 여덟 가지 부칙(附則)으로써 그 때 그 때 의논하여 적용하는 법칙이다. 이상의 여덟 가지 법은 일단 의논을 거쳐 정상참작한 뒤에 죄를 적용한다. [지재희․이준영 해역(解譯), 󰡔주례(周禮)󰡕, (서울, 자유문고, 2002), 411쪽 참고.]  * 󰡔익증󰡕에서 인용한 이천(伊川)의 말은『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18권(「이천선생어(伊川先生語)」4), 211항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234쪽 참고.
에 관해 묻자, [선생께서는] “이것은 죄를 결단 폐죄(蔽罪)
󰡔기의󰡕 ‘폐(蔽)’는 ‘결단하다(斷)’는 말과 같다.『서경(書經)』,「강고(康誥)」편에 보인다. (󰡔記疑󰡕 蔽斷也 見書康誥)  [역주] *『서경(書經)』,「주서(周書)」, 강고(康誥)편 제13장에 “왕(王)이 말씀하였다. ‘너는 이 법(法)과 일을 펴서 형벌함에 은(殷)나라의 떳떳한 법(法)으로 결단하되 마땅한 형벌과 마땅한 죽임을 쓸 것이요, 너 봉(封)의 뜻에 나아가지 말도록 하라. 네가 모두 의리에 순하여 이 차서(次序)가 있다 하더라도 너는 의리에 순한 일이 있지 못하다고 말하라.’” (王曰 汝陳時고[自+木]事하여 罰蔽殷彛호되 用其義刑義殺이요 勿庸以次汝封하라 乃汝盡遜하여 曰時敍라도 惟曰未有遜事라하라)라는 내용이 보인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334-5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140쪽 참고.]  
󰡔익증󰡕『서경(書經)』,「주서(周書)」, 강고(康誥)편에 “요수(要囚)를 크게 결단하라”라는 말이 나온다. (󰡔翼增󰡕 康誥丕蔽要囚)  [역주] *『서경(書經)』,「주서(周書)」강고(康誥)편 제12장에 “또 말씀하였다. ‘요수(要囚)를 5∼6일 동안 가슴속에 두고 생각하며, 열흘이나 한 철에 이르러서 요수(要囚)를 크게 결단하라.’(又曰 要囚를 服念五六日하며 至于旬時하여서 丕蔽要囚하라)”라고 나온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334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139쪽 참고.]
할 때의 일이다. 처음에는 반드시 구속해야 할 것이니, 구속하지 않게 되면 사사(士師)가 그 직분을 잃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일찍이 선생의 뜻을 염두에 두고 정명도(程明道)와 문정(文定) 문정(文定) : 호안국(胡安國)의 시호(諡號)이다.
의 학설을 참고해 보고는 [주 ; 명도(明道)의 설(說) 명도설(明道說)
󰡔차의󰡕 공회(孔悝)가 명령을 받아 첩(輒)을 세웠는데, [이제 또 다시] 만약 괴외(蒯聵)를 들인다면 곧 그의 직분을 상실한 셈이다. 만약에 첩(輒)이 아비를 막는다면 이는 패륜이니만큼 공손히 물러나는 것이 옳다. 공자영(公子郢)의 뜻은 가상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마땅히 임금이 되어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되지 않음으로 인해 위(衛)나라를 어지럽게 한 점에 대해서는 역시 성인(聖人)께서도 마땅히 [그에게] 죄가 있다고 여기실 것이다. (󰡔箚疑󰡕 孔悝受命立輒 若納蒯聵 則失職 與輒拒父則悖倫 奉身而退可也 公子郢志可嘉 然當立而不立 以致衛亂 亦聖人所當罪也)  [역주] * 󰡔차의󰡕에서 인용된 명도(明道)의 말 가운데 ‘與輒拒父’의 ‘여(與)’가 현행『이정유서』에는 ‘여(如)’로 되어 있는데, ‘여(如)’가 ‘여(與)’보다 문맥에 순조로우므로 현행본에 따라 해석했다. 명도의 이 말은『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11권(「명도선생어(明道先生語)」1), 제76조 및『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20권(「이천선생어(伊川先生語)」6), 제1조에 보인다. [정호(程顥)・정이(程頤), 󰡔이정집(二程集)󰡕, 왕효어(王孝魚) 점교(點校), (北京, 中華書局, 1981), 제1책 123-4쪽 및 266쪽 참고.]
󰡔절보󰡕 명도(明道)께서 “공회(孔悝) 운운” 하신 것이다. (󰡔節補󰡕 明道曰 孔悝云云)
은 사혼(師訓)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권11,「명도선생어(明道先生語)」1[사훈(師訓)], [유순질부록(劉絢質夫錄)]을 말한다.
에 보이고, 문정(文定)의 說 문정설(文定說)
󰡔차의󰡕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위(衛)나라 세자(世子)인] 괴외(蒯聵)가 그의 모친을 죽이려고 하다가 아버지께 죄를 얻게 되었다. 또 첩(輒)은 나라를 차지하고서 아버지를 막았는데, [두 경우] 모두 아버지를 무시하는 자들이니, 이들이 나라를 소유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부자(夫子)께서 정사(政事)를 하실 경우 명분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으니, 반드시 장차 그 일의 본말(本末)을 갖추어 천왕(天王)에게 아뢰고 방백(方伯)에게 청하여 공자(公子) 영(郢)을 명하여 군주(君主)로 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인륜(人倫)이 바루어지고 천리(天理)에 맞아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理致)에 순해져서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箚疑󰡕 夫蒯聵欲殺毋 得罪於父 而輒據國以拒父 皆無父之人也 其不可有國也 明矣 夫子爲政而以正名爲先 必將具其事之本末 告諸天王 請於方伯 命公子郢而立之 則人倫正天理得 名正言順而事成矣)
󰡔절보󰡕 호씨(胡氏)의 설(說)은『논어(論語)․자로(子路)』正名章(제3장) 集注에 보인다. [그러나 이 편지 뒤편에 나오는] 주석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여기서 말하는] 호문정공(胡文定公)의 설(說)은 집주(集注)에서 인용된 호씨(胡氏)의 설(說)이 아니라『춘추(春秋)』애공(哀公) 2년 전문(傳文)의 내용을 말하다. (󰡔節補󰡕 胡氏說見論語正名章集注 以下註觀之 文定說非集注胡氏說也 乃春秋哀二年傳文也)
󰡔익증󰡕 춘추호전(春秋胡傳)에 말하기를 “괴외(蒯聵)가 무도(無道)했기 때문에 위(衛)나라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세자(世子)’라 호칭한 것은 위나라 사람들이 [그를] 막은 것에 대해 죄준 것이다. 괴외는 천리(天理)를 거역했기에 마땅히 폐출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아비가 비록 아비답지 못하다 해도 자식이 불효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아들인] 첩(輒)이 나라를 차지한 채 [그의 아비와] 더불어 다투었구나!”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첩(輒)은 마땅히 나라를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옳다. ‘만약에 아버지께서 죄가 있다 해도 [나는] 장차 왕부(王父)의 명(命)을 따를 것이다. 사직(社稷)을 진무(鎭撫)하는 일이라면 公子가 계시니 내가 어찌 임금이 될 수 있겠는가? 만일 아버지께서 무죄(無罪)하시다면, 나라는 본래 세자(世子)가 차지하는 법이다. 천하에 어찌 아비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치가 이와 같은데도] 나를 그 자리에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된다면 말이 순(順)하여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첩(輒)이 그 자리를 사양하여 아비를 피한다면 위(衛)나라의 신자(臣子)들은 괴외를 막고 [첩(輒)을] 보좌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첩(輒)이 그 자리를 이롭게 여겨 아비를 막는다면 위(衛)나라의 신자(臣子)들은 작록(爵祿)을 사양하고 [위나라를] 떠나는 것이 옳다 운운.”이라 했다. 또『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주(朱)선생께서는 “명도(明道)께서는 ‘첩(輒)이 임금의 자리를 차지한 채 아비를 막으면 위(衛)나라의 臣子들이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첩(輒)이 [위나라를] 떠나 아비의 뜻을 따른다면 위(衛)나라의 신자(臣子)들은 괴외를 막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 이는 괴외는 아비에게 죄를 얻었으니 마땅히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신 것이다. 호문정공(胡文定公)이『춘추(春秋)』를 해설하면서 [정자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상구(上句)의 설(說)은 옳다. 그러나 하구(下句)에서 첩(輒)이 위나라를 떠나 아비를 따른다면 위(衛)나라의 신자(臣子)들은 마땅히 첩(輒)을 보좌하여 괴외를 막아야 한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후에 호치당(胡致堂)이 차라리 ‘공자영(公子郢)을 세우는 것이 옳다’라고 했는데 이는 이전의 호문정공(胡文定公) 학설의 착오를 바로잡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편지에서 [주선생께서는] ‘만약 그가 기필코 사양하면 [천자에게] 명(命)을 청하여 다시 임금을 세운다’고 하셨으니 이는 명도(明道)의 취지를 따르신 것이다. (󰡔翼增󰡕 春秋胡傳曰 蒯聵無道 爲國人之所不受也 而稱世子者 罪衛人之拒之也 蒯聵之於天理逆矣 何疑於廢出 然父雖不父 子不可以不孝 輒乃據國而與之爭乎 又曰 輒宜辭於國曰 若以父爲有罪 將從王父之命 則有社稷之鎭 公子在 我焉得爲君 以爲無罪 則國乃世子之所有也 天下豈有無父之國哉 而使我立乎其位 如此則言順而事成矣 輒辭其位以避父 則衛之臣子 拒蒯聵而輔之可也 輒利其位而拒父 則衛之臣子 辭爵祿而去之可也云云 又語類 先生曰 明道說輒據位而拒父 則衛之臣子去之可也 輒去而從父 則衛之臣子 拒蒯聵可也 是以蒯聵爲得罪於父 亦不當立也 胡文定引在春秋中 如上句說却是 下句却云 輒去而從父 則衛之臣子 當輔輒以拒蒯聵 則是錯了 後來胡致堂 却說立郢爲是 乃是救文定前說之錯云云 此書若其必辭則請命而更立君矣 從明道之指也)  [역주] *『주자어류(朱子語類)』34권, 염유왈부자위위군호장(冉有曰夫子爲衛君乎章)에 보인다. [여정덕(黎靖德) 편(編), 왕성현(王星賢) 점교(點校), 󰡔주자어류(朱子語類)󰡕, (北京, 中華書局, 1986), 제3권, 880-883쪽 참고.]
은 [좌전] 애공(哀公) 2년에 보인다.] 저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괴외(蒯聵) 부자의 일에 대해 진퇴(進退)의 옳고 그름은 첩(輒)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볼 뿐이다. 만약 첩(輒)이 아버지를 거역할 마음이 있었다면 말할 것도 없지만, 아버지를 피할 마음이 있었다면 위(衛)나라 신하들은 군신(君臣)의 의리를 내세워 마땅히 괴외(蒯聵)를 막고 [첩(輒)을] 도왔어야 한다. 보지(輔之)
󰡔기의󰡕 첩(輒)을 보좌한다는 말이다. (󰡔記疑󰡕 輔其輒也) 
󰡔차보󰡕 살피건대 ‘기(其)’자는 잘못 불어난 글자이다. (󰡔箚補󰡕 按其字疑衍)
 만약 [첩(輒)이] 굳이 사양한다면 천자에게 명을 청하여 다시 임금을 세웠어야 할 것이고, 설령 첩(輒)이 어질어 백성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첩(輒)을 위하는 자들은 또 경중(軽重)을 헤아려 처신하여 군신과 부자의 도가 함께 행해져 서로 어긋남이 없게 했어야 할 것이니, [여기에는] 반드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도망가는 도리밖에 없다. 의리(義理)가 이런 정도에 미치면 이미 지극히 정미(精微)한 수준이다. 다만 그 사이에 털 끝 만큼의 사의(私意)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1809)熹嘗問先生瞽瞍殺人事, 先生曰: ‘蒯聵父子只爲無此心, 所以爲法律所縛, 都轉動不得. 若舜之心, 則法律縛他不住, 終身訢然, 樂而忘天下, 求仁得仁, 何怨之有? 然此亦只是論其心爾, 豈容他如此去得?’ 問先儒八議之說如何, 曰: ‘此乃蔽罪時事, 其初須著執之, 不執則士師失其職矣.’ 熹嘗以先生之意參諸明道及文定之說, [주 ; 明道說見師訓, 文定說見哀二年.] 竊謂蒯聵父子之事, 其進退可否只看輒之心如何爾. 若輒有拒父之心, 則固無可論 : 若有避父之心, 則衛之臣子以君臣之義當拒蒯聵而輔之. 若其必辭, 則請命而更立君可矣. 設或輒賢而國人不聽其去, 則爲輒者又當權輕重而處之, 使君臣父子之間道竝行而不相悖, 亦必有道. 苟不能然, 則逃之而巳矣. 義至於此, 已極精微, 但不可有毫髮私意於其間耳. 

보내 오신 편지에, “괴외(蒯聵)가 오면 여러 대부(大夫)들은 마땅히 직접 책임을 지고 천자에게 명을 청하여 반역의 명으로 그를 토벌했어야 한다 이역명토지(以逆命討之)
󰡔차의󰡕 범백숭(范伯崇)의 말이 여기까지 걸린다. (󰡔箚疑󰡕 伯崇說止此)
”고 하신 말씀은 맞습니다. [주 ; 일찍이 천자의 명(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괴외(蒯聵)가 이를 어겼으니, [또 다시 천자의 명(命)을] 청(請)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불청명역가([注]不請命亦可) 
󰡔차의󰡕 이미 천자(天子)의 명(命)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천자의 명(命)을] 청(請)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箚疑󰡕 謂已有天子之命 故不更請命也)
] 다만 또 [그대의 주장과 같이] “첩이 그 일을 도모하는데 관여하지 않고, 자리를 피해 천자에게 명을 청한다” 첩불...청어천자(輒不...聽於天子)
󰡔차의󰡕 범백숭(范伯崇)의 설(說)이다. (󰡔箚疑󰡕 伯崇說)
고 한다면, 이는 아마도 [첩 자신이] 대부의 손을 빌어 아버지를 막고 몰래 천자가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바란 행위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흡사] 귀를 막고 종을 훔친 격 엄이도종(掩耳盜鐘)
󰡔절보󰡕『회남자(淮南子)』에 “범씨(范氏)가 패(敗)했을 때, 범씨의 종을 도적질하여 [어깨에] 매고 내달린 자가 있었는데, [그는] 종에서 나는 소리를 싫어하여 스스로 그 귀를 막았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節補󰡕 淮南子 范氏之敗 有竊其鍾 負而走者 憎其聲 自掩其耳)  [역주] * 󰡔절보󰡕에 인용된 것은『회남자(淮南子)』,「설산훈(說山訓)」에 나온다.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유문전(劉文典) 찬(撰),『회남홍렬집해(淮南鴻烈集解)』(下), (北京, 中華書局, 1989), 533쪽 참고. 
󰡔간보󰡕 대개 ‘나쁜 소문은 싫어하면서도 남몰래 불선(不善)한 짓을 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刊補󰡕 蓋譬惡惡聲而陰爲不善也)
이니 죄가 더욱 큽니다. [허다한 사의(私意)는 오직 자신이 직접 범법행위(犯法行為)를 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려는 데 있는 것일 뿐 [주]허다...범수([注]許多...犯手)
󰡔차의󰡕 첩(輒)의 사의(私意)는 오로지 ‘단지 그 스스로 아비를 막는 일에 참여했다는 혐의를 모면하고 싶어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箚疑󰡕 謂輒之私意 都在於只欲免其自犯手於其父之嫌也)
󰡔표보󰡕 이는 포괄적으로 한 말이지, 반드시 첩(輒)의 일만을 오로지 지목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標補󰡕 此似泛說 非必專指輒事也)
이니, 그 정리(情理)가 더욱 좋지 않습니다.] [그대는] 또 말씀하시기를, “갑자기 군대를 일으켜 자기 아버지를 협박하는 것이 자식의 마음에 편안한 것인가?” 거연...안호(遽然...安乎)
󰡔차의󰡕 범백숭(范伯崇)의 설(說)이다. (󰡔箚疑󰡕 伯崇說)
 하셨는데, 위(衛)나라의 처지에서 말한다면, 군대를 일으켜 ‘선군(先君)에게 죄를 얻어 세자로 세워서는 안 되는 사람(즉 괴외)’을 막은 것이니, 이는 의(義)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첩의 처지에서 말한다면 비록 스스로 모의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천자에게 명을 청하여 토벌한 것이니 이것은 또 무슨 마음입니까? [그대가 앞서와 같은] 말씀을 하신 근본 의도는 신하의 도리와 자식의 도리를 둘 다 얻고자 한 것이니, [그대가 이와 같은] 뜻을 세운 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씀 내용을] 미루어 말해보면 곧 [첩에게는 제가 지적했던] 이러한 병폐가 있으니 편유차병(便有此病)
󰡔차의󰡕 [첩(輒) 자신이] 남몰래 ‘천자가 자기를 인정해 준 것’을 다행으로 여겨 대부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준 것을 말한다. (󰡔箚疑󰡕 陰幸天子之與已 聽大夫之所爲也)
 [이는 그대가] 첩의 마음의 긴요한 부분에 대해 본 것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주; 맹자께서 이른바 “[고자(告子)의 말 중에] ‘말에서 납득되지 않으면, 더 이상 마음에 구하지 말라’는 말은 옳지 않다” *『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상, 제2장에 “‘... 감히 묻겠습니다. 부자(夫子)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告子)의 부동심(不動心)을 얻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고자(告子)가 말하기를 ‘말에 대해서 이해되지 못하거든 마음에 알려고 구하지 말며, 마음에 얻지 못하거든 기운에 도움을 구하지 말라.’ 하였으니, 마음에 얻지 못하거든 기운에 도움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가(可)하거니와, 말에 이해되지 못하거든 마음에 알려고 구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의지(意志)는 기(氣)의 장수(將帥)요, 기(氣)는 몸에 꽉 차 있는 것이니, 의지(意志)가 최고요, 기(氣)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 의지(意志)를 잘 잡고도 또 그 기(氣)를 포악히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 曰 敢問夫子之不動心과 與告子之不動心을 可得聞與잇가 告子曰 不得於言이어든 勿求於心하며 不得於心이어든 勿求於氣라하니 不得於心이어든 勿求於氣는 可커니와 不得於言이어든 勿求於心은 不可하니 夫志는 氣之帥也요 氣는 體之充也니 夫志至焉요 氣次焉이라 故로 曰 持其志오도 無暴其氣라하니라... )”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85-6쪽 참고.
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첩은 다만 부자의 관계가 큰 것만을 알아야 하며, [따라서] 단 하루도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겉으로나 속으로나 오로지 도망가는 것 한 가지밖에 다른 일은 전연 있을 수 없으며, 그 외의 것은 전혀 보지 않는 것이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백숭께서는 [이와 같은 나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來喩以謂蒯聵之來, 諸大夫當身任其責, 請命於天子而以逆命討之, 是矣. [주 ; 已嘗有天子之命而蒯聵違之, 則不請命亦可.] 但又云‘輒不與謀其事, 避位而聽於天子’, 則恐不免有假手於大夫以拒父, 而陰幸天子之與己之心焉. 掩耳盜鐘, 爲罪愈大. [주 ; 許多私意都在, 只是免得自家犯手, 情理尤不好也.] 又云‘遽然興師以脅其父, 於人子之心安乎? ’自衛國言之, 則興師以拒得罪於先君而不當立之世子, 義也. 自輒言之, 則雖己不與謀, 而聽大夫之所爲, 請命於天子而討之, 亦何心哉? 來喩本欲臣子之義(4-1810)兩得, 立意甚善. 但推而言之, 便有此病. 似是於輒之處心緊要處看得未甚灑落, 折以如此. [주; 孟子所謂‘不得於言, 勿求於心不可’者, 此也.] 故愚竊謂輒之心但當只見父子之親爲大, 而不可一日立乎其位, 自始至終, 自表至裏, 只是一箇逃而去之, 便無一事, 都不見其他, 方是直截. 不審伯崇以爲如何? 

[범백숭의 질문] 자공(子貢)이 선비에 관해 질문(問士) *『논어(論語)』,「자로(子路)」, 제20장에 “자공(子貢)이 ‘어떠하여야 이 선비라 말할 만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으며 사방(四方)에 사신(使臣)으로 가서는 군주(君主)의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이를 만하다.’ ‘감히 그 다음을 묻겠습니다.’ 하자, ‘종족(宗族)들이 효성(孝誠)스럽다고 칭찬하고 향당(鄕黨)[지방]에서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인물이다.’라고 하셨다. ‘감히 그 다음을 묻겠습니다.’ 하자, ‘말을 반드시 미덥게 하고 행실을 반드시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은 국량이 좁은 소인(小人)이나, 그래도 또한 그 다음이 될 만하다.’ 하고 하셨다. ‘지금 정사에 종사하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하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 한 말이나 한 말 두 되 들어갈 정도의 좁은 소견을 가진 사람들을 어찌 족히 따질 것이 있겠는가?’ (子貢問曰 何如라야 斯可謂之士矣잇고 子曰 行己有恥하며 使於四方하여 不辱君命이면 可謂士矣니라 曰 敢問其次하노이다 曰 宗族稱孝焉하며 鄕黨稱弟焉이니라 曰 敢問其次하노이다 曰 言必信하며 行必果가 경[石+巠]경然小人哉나 抑亦可以爲次矣니라 曰 今之從政者는 何如하니잇고 子曰 噫라 斗筲之人을 何足算也리오)”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67-8쪽 참고. 
한 것에 대하여.
[선생의 답변] 이천(伊川)선생께서 말씀하신 것 이천...소운(伊川...所云)  
󰡔차의󰡕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자공(子貢)의 뜻은 남들이 알아주는 특별한 행동을 하여 남들에게 소문나려고 하는 것이었는데,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독실하여 스스로 만족해하는 일이었다.”(󰡔箚疑󰡕 子貢之志 蓋欲爲皎皎之行聞於人者 夫子告之 皆篤實自得之事)
󰡔절보󰡕 “이천(伊川)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공(子貢) 운운”하는 내용은『논어집주(論語集註)』에 보인다. (󰡔節補󰡕 伊川早子貢云云 見集注)  [역주] * 『논어집주(論語集註)』,「자로(子路)」, 제20장, 집주에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자공(子貢)의 뜻은 남들이 알아주는 특별한 행동을 하여 남들에게 소문나려고 하는 것이었는데,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독실하여 스스로 만족해하는 일이었다.(程子曰 子貢之意는 蓋欲爲皎皎之行하여 聞於人者요 夫子告之는 皆篤實自得之事니라)”라고 나온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67-8쪽 참고.
은 자공(子貢)의 평소 기상(氣象)을 통해 알아낸 것입니다. 또 공자께서 [자공에게] 대답하신 내용 즉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으며, [사방(四方)에 사신(使臣)으로 가서는 군주(君主)의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이를 만하다]’라는 말씀을 음미해보면  [이는] 다만 본분(本分)에 의거 의본분(依本分)
󰡔차의󰡕 자공(子貢) 정도라면 본분(本分)상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에 의거했다는 말이다. (󰡔箚疑󰡕 謂依子貢本分能爲底事也)
󰡔익증󰡕 선비의 본분(本分)에 의거한다는 말이다. (󰡔翼增󰡕 依士之本分也)
󰡔표보󰡕 ‘본분에 따른다(依本分)’는 말은 ‘분(分)에 따르고 예(例)를 쫓는다’는 것이니, 특별히 신기(神奇)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 없다. 󰡔차의󰡕의 설명은 아마도 본지(本旨)를 잃은 듯하다. (󰡔標補󰡕 依本分 是隨分循例 別無新奇之稱 箚訓似失本旨)
하고 소탈하거나 지나친 일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들은 모두 [군자의 극치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한 걸음 후퇴한 듯한 소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진사...보설(盡似...步說) 
󰡔차의󰡕 군자의 극치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한 걸음 후퇴한 듯하다는 말이다. (󰡔箚疑󰡕 自君子極致而言 則似爲退後一步也)
 그러나 그 실제내용을 고찰해보면 [이 일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천께서] 말씀하신 바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독실하여 스스로 만족해하는 일이었다’ *『논어집주』,「자로(子路)」, 제20장에 대해 주자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자공(子貢)의 뜻은 남들이 알아주는 특별한 행동을 하여 남들에게 소문나려고 하는 것이었는데,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독실하여 스스로 만족해하는 일이었다.’ (程子曰 子貢之意는 蓋欲爲皎皎之行하여 聞於人者요 夫子告之는 皆篤實自得之事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268쪽 참고. 
라는 것입니다. [이천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곧 [자공과 공자 사이에] 오고 간 질문과 답변이 지닌 속 뜻(意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실...의지(篤實...意旨) 
󰡔차의󰡕 ‘독실(篤實)...’은 ‘... 사야(事也)’까지 걸린다. 이천(伊川)이 논한 바 ‘공자(孔子)가 자공(子貢)에게 대답하신 뜻’을 말한다. ‘왕래(往來)’는 ‘반복(反覆)’이라는 말과 같다. ‘의지(意旨)’는 ‘자공과 공자의 의지(意旨)’를 말한다. (󰡔箚疑󰡕 篤實止事也 伊川論孔子答子貢之意 往來猶言反覆 意旨子貢孔子之意旨也) 
󰡔절보󰡕 ‘편가견(便可見)’의 의미는 ‘의지(意旨)’까지 걸린다. 살피건대 이천(伊川)의 설(說)을 통해 곧 ‘[본문에서] 운운한 내용’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節補󰡕 便可見止意旨 按謂伊川說 便可見云云也)
 자공(子貢)이 [공자께] ‘그 다음을 물은 것’은 대개 스스로 반성하여 아직은 [스스로에게] 온당치 못한 점 미온당처(未穩當處)
󰡔차의󰡕 자공(子貢) 스스로의 생각에 [자신이 공자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넉넉하게 실천해낼 수 없는 듯이 여긴다는 말이다. (󰡔箚疑󰡕 謂於子貢之意 似不能優爲也)
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니, 공문(孔門)에서 배우는 자들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태가 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대가 이를 두고] 만약 ‘자공(子貢) 스스로 본래 [이 정도는] 여유 있게 실천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이는 그대가 자공에 대해] 제대로 된 조처(照管) * 조관(照管) ; 처리함[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258쪽.]
를 취하지 못한 것입니다. 약왈...관야(若曰...管也)
󰡔차의󰡕 범백숭(范伯崇)이 만약 ‘자공(子貢)이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으며, [사방(四方)에 사신(使臣)으로 가서는 군주(君主)의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는 [선비의 본분]에 대해 자기는 본래 이미 [이 정도는] 여유 있게 실천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자공에 관해] 제대로 된 조처(照管)를 취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箚疑󰡕 謂伯崇若曰子貢於有恥不辱 固已優爲云 則便是失於照管也)
 
子貢問士
伊川先生所云以子貢平時氣象知之, 又味夫子所答之意, 有耻不辱, 纔是依本分, 不疏脫, 不是過當底事, 儘似退後一步說. 然考其實則甚難, 所謂篤實自得之事也, 便可見往來答間意旨. 子貢所以請問其次者, 蓋爲自省見得有未穩當處, 可見孔門學者爲己之實. 若曰固已優爲, 便是失照管也. 





범백숭에게 답함 答范伯崇 4


【해제】이 편지는 주자가 범백숭(范伯崇)에게 보낸 네 번 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9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4서)는 앞의 제 3서와 함께 계미년(癸未, 1163년, 주자 34세) 이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진래(陳來), 󰡔주자서신편년고증(朱子書信編年考證)󰡕,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7), 26쪽 참고.
 이 편지의 주제는 성인론인 듯하다. 주자는 범백숭이 “성인(聖人)은 일찍이 천하[의 민심을] 얻는 것을 아음에 두지는 않는다”고 한 데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성인은] 취(取)할만하면 취하고, 아직 취할만하지 많으면 취하지 않아서 천리(天理)에 순응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다. 왜냐하면 성인은 ‘[상황에 따른 적절한 판단을] 기다려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의 옳음 때문에 행위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주자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행위와 마음가짐에 관해 검토하고 있다. 주자는 왕도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인격중심의 성인론을 그리고 결과주의가 아닌 동기주의적 윤리학을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내주신 편지 래서(來書)
󰡔차의󰡕 [보내온 편지에서의] ‘이 뜻(此意)’이 ‘위심(爲心)’까지 걸린다. (󰡔箚疑󰡕 此意止爲心)
를 통해 그대가 “성인(聖人)은 일찍이 천하[의 민심을] 얻는 것을 아음에 두지는 않는다”고 한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성인은] 취(取)할만하면 취하고, 아직 취할만하지 많으면 취하지 않아서 천리(天理)에 순응하지 않음이 없다” 가취...천리(可取...天理)
󰡔차의󰡕 [이 또한] 범백숭(范伯崇)의 말이다. (󰡔箚疑󰡕 又伯崇語)
고 하셨는데, 이와 같다면 [성인이] ‘[상황에 따른 적절한 판단을] 기다려 행위하는 것’이 되니, 말씀에 병통이 있는 듯합니다. [이와는 달리 저는] 일찍이 ‘문왕(文王)이 주(紂)를 섬길 때, 오직 신하의 신분에서 임금 섬긴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 나머지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왕의 덕이] 지극한 덕(至德)이 된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여차...덕지(如此...德止)
󰡔차의󰡕 [‘여차(如此)’에서 ‘덕지(德止)’까지는] 선생의 말씀이다. (󰡔箚疑󰡕 先生語)
 만약 [그대가 주장하듯이, 문왕 당시] 천하를 셋으로 나누었을 때, 주(紂)가 여전히 그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문왕으로서는] 아직은 차마 가볍게 신하의 입장을 버리지 못했고, 또 상(商)나라 선왕(先王)의 덕택(德澤)이 아직은 잊혀지지 않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겪어온 [상나라의] 역사전통(歷數)이 아직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며, 주(紂)의 악(惡)함도 아직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으니, 성인(聖人 즉 문왕)이 어찌 [주(紂)를] 취할 수 있었겠는가? 삼분...이취지(三分...而取之) 
󰡔차의󰡕 [이 또한] 범백숭(范伯崇)의 말이다. (󰡔箚疑󰡕 又伯崇語)
라는 식으로 보신다면, 이는 곧 문왕(文王)이 주(紂)를 섬긴 것은 그의 본심(本心)이 아니고, 대개 부득이하여 그리했다고 보는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다면 어떻게 [문왕의 덕을] 지극한 덕(至德)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한 일만해도 그렇습니다. [무왕이] (商)나라의 정사(政事)를 살펴보았다(觀政于商)『서경(書經)』,「주서(周書)」,「태서(泰誓)」상, 제6장에 “이러므로 나 소자(小子) 발(發)이 너희 우방(友邦)의 총군(冢君)들을 데리고 상(商)나라의 정사(政事)를 살펴보니, 수(受)[주왕(紂王)]가 개전(改悛)할 마음이 없어서 걸터앉아 거하여 상제(上帝)와 신기(神祗)를 섬기지 않고, 선조(先祖)의 종묘(宗廟)를 버려 제사(祭祀)하지 아니하여 희생(犧牲)과 자성(粢盛)을 흉악한 도적에게 이미 모두 빼앗겼는데도 말하기를 ‘내 백성을 소유하고 천명(天命)을 소유했다’ 하여, 업신여김을 징계하지 않는구나. (肆予小子發이 以爾友邦冢君으로 觀政于商하니 惟受罔有悛心하여 乃夷居하여 弗事上帝神祗하며 遺厥先宗廟하여 弗祀하여 犧牲칞盛이 旣于凶盜어늘 乃曰吾有民有命이라하여 罔懲其侮하나다)”라 했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256-7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14쪽 참고.
해서 어찌 [무왕이 상나라를] 취(取)하고자 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주왕(紂王)이 개전(改悛)할 마음이 없었기에, 이에 무왕(武王)으로서는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당신에게로 돌아오고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어 부득불 순응(順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무왕께서] ‘내가 하늘의 뜻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죄(罪)가 주왕(紂王)과 같을 것이다’『서경(書經)』,「주서(周書)」,「태서(泰誓)」상, 제9장에 “상(商)나라의 죄가 관통(貫通)하여 가득하기에 하늘이 명(命)하여 주벌(誅伐)하게 하시니, 내가 하늘의 뜻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죄(罪)가 주왕(紂王)과 같을 것이다. (商罪貫盈이라 天命誅之하시나니 予弗順天하면 厥罪惟鈞하리라)”라 했다. 김학주(金學主) 역저, 󰡔신완역 서경(書經)󰡕, (서울, 明文堂, 2002), 258쪽 및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서경집전(書經集傳)󰡕, 하(下)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2), 17쪽 참고.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 등을 보건대, 무왕이 주(紂)를 정벌한 것은 하늘의 뜻과 민심에 순응한 결과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의] 이 설(說)과 그대가 편지에서 하신 말씀 주희집 주 ; ‘열(說)’은 원래 ‘열(悅)’로 되어있다. 송(宋)나라 민(閩)본과 절(折)본에 근거해 고친다.[說: 原作‘悅’, 據宋閩․折本改.]
 사이에는 본래 많은 쟁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른 적절한 판단을 기다려 행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이 점에 관한 한 털끝만큼의 차질조차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그리고 왕도(王道)와 패술(覇術) 천리...패술(天理...霸術) 
󰡔차의󰡕 ‘오직 신하로서 임금 섬길 줄만 안 것’과 ‘하늘의 뜻과 민심에 순응한 것’은 천리(天理)요 왕도(王道)이지만, ‘부득이함을 기다림’과 ‘탈취(脫取)할 마음을 가진 것’은 인욕(人欲)이요 패술(覇術)이다. (󰡔箚疑󰡕 惟知以臣事君及順天應人天理與王道也 有待不得已及有取之之心人欲與霸術也)
이 나누어지는 근거가 되는 출발점이 특히 이 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대는 편지에서 “문왕과 무왕이 마음에 애초부터 다른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 분명치 않으면 곧 [그대의] 이른바 ‘다른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함이 [문왕과 무왕의 마음을] 일시에 잃어버린 것 일시차각(一時差却)
󰡔차의󰡕 대개 범백숭(范伯崇)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그리고 왕도(王道)와 패술(覇術)이 나누어지는 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께서는] 범백숭이 말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애초부터 다른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고 한 이 말조차도 한 때의 잘못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箚疑󰡕 蓋伯崇不知天理人欲王道霸術之所以分 故其謂初無異旨者 與之一時差却也)
󰡔절보󰡕 문왕과 무왕의 마음이 일시에 나란히 상실된다는 말이다. (󰡔節補󰡕 於文武之心一時幷失之)
󰡔익증󰡕 범백숭(范伯崇)은 ‘[무왕의 경우] 취(取)할만해서 취한 것과, [문왕의 경우] 아직 취할만하지 않아서 취하지 않는 것’을 두고 ‘[이 두 경우가 서로] 다른 뜻이 없었다’라고 여긴 반면 선생께서는 ‘[두 경우] 모두 취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뜻이 없었다’고 보신 것이다. (󰡔翼增󰡕 伯崇以可取而取 未可取而不取 爲無異旨 先生以皆無取之之心爲無異旨)
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來書謂聖人未嘗以得天下爲心, 是矣. 但謂可取則取, 未可以取則不取, 莫非順乎天理, 如此則是有待而爲也, 語似有病. 嘗謂文王之事紂, 惟知以臣事君而已, 都不見其他, 玆其所以爲至德也. 若謂三分天下, 紂尙有其一, 未忍輕去臣(4-1811)位, 以商之先王德澤未忘, 歷數未終, 紂惡未甚, 聖人若之何而取之? 則是文王之事紂非其本心, 蓋有不得已焉耳. 若是則安得謂之至德哉? 至於武王之伐紂, 觀政于商, 亦豈有取之之心? 而紂罔有悛心, 武王灼見天命人心之歸己也, 不得不順而應之, 故曰: ‘予弗順天, 厥罪惟均.’ 以此觀之, 足見武王之伐紂順乎天而應乎人, 無可疑矣. 此說與來書云云, 固不多爭. 但此處不容有亳髮之差, 天理人欲․王道覇術之所以分, 其端特在於此耳. 來書以謂文武之心初無異旨, 固是如此. 但恐此處不分明, 卽所謂無異旨者, 乃是一時差却耳.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취하여 연(燕)나라 백성이 좋아하지 않으면 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문왕(文王)이 그렇게 한 분이고, 취하여 연나라 백성이 좋아하면 취해야 할 것이니 무왕(武王)이 그렇게 한 분입니다 취하여 …… 분입니다 :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하, 제10장에 보이는 말이다.
”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또한 단지 제(斉)나라 선왕(宣王)이 연(燕)나라를 탈취하고자 했기 때문에 [맹자께서] 문왕과 무왕의 도(道)에서 인용한 것이지, 문왕이 상(商)나라를 취하고자 했지만 상나라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두었고, 무왕(武王)이 상나라 백성들이 기뻐하여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보고서 마침내 가서 취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중니(仲尼)께서 천하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과 익(益)과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천하를 소유하지 못했다고 한 말 중니(仲尼) …… 한 말 : 서민 출신으로서 천하(天下)를 소유하게 되는 것은 덕(德)도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천자(天子)의 추천이 있어야 하므로 중니(仲尼)가 천하를 소유하지 못했고, 조상의 대물림을 받은 임금은 걸(桀)이나 주(紂)처럼 고약하지 않으면 천하를 잃지 않으므로 익(益)․이윤(伊尹)․주공(周公)이 천하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맹자(孟子)』,「만장(萬章)」상, 제6장.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274-7쪽 참고.
이 어찌 익과 주공과 중니 같은 이가 모두 천하를 소유하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자의 천거가 없고 하늘이 아직은 상대 나라의 임금을 폐하지 않아서 얻지 못했다는 말이겠습니까? 바로 그 이치가 이와 같음을 논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연구하고 체득함으로써, ‘성인의 마음은 [원래] 막힘이 없어서 털끝만큼 사호(私毫, 주희집에는 ‘私’가 ‘絲’로 되어 있다.) 
* 주희집 주 ; ‘絲’는 원래 ‘私’로 되어 있었다. 문맥에 따라 잘못을 바로잡는다. (絲 : 原作‘私’, 據正訛改.)
「절요주」 ‘사(私)’는 마땅히 ‘사(絲)’가 되어야 할 듯하다. (「節要注」 私恐當作絲)
도 사의(私意)에 얽매이는 것 야반(惹絆)
󰡔차의󰡕 ‘야(惹)’는 사의(私意)가 싹터 움직인다는 말이다. ‘반(絆)’은 사의(私意)가 휘감는다는 뜻이다. (󰡔箚疑󰡕 惹謂私意萌動也 絆爲私意纏繞也)  [역주] * 전요(纏繞) ; 휘감음. 전(轉)하여 계루(繫婁)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1630쪽.]
󰡔익증󰡕 ‘야(惹)’는 ‘당긴다(引)’는 뜻이다. (󰡔翼增󰡕 惹引也) 
󰡔간보󰡕 ‘야(惹)’는 ‘아’로 발음해야 한다. ‘어지럽다’, ‘걸리다’, ‘끌어당겨 붙히다’라는 뜻이다. ‘반(絆)’은 ‘얽히다’는 뜻이다. (󰡔刊補󰡕 惹 爾者切 亂也 絓也 引著也 絆猶纏也)  [역주] * 야(惹)는 오늘날은 ‘야’로 발음한다. [민중서림편집국 편,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서울 : 民衆書林, 2001), 770쪽.]
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의리의 정미(精微)함을 보고서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저절로 힘을 얻게 될 것이니, 이른바 “아는 것이 지극한 뒤에 뜻이 성실해진다” 지지의성(知至意誠)  
󰡔차의󰡕 의리(義理)의 정미(精微)한 곳까지 보는 것이 ‘아는 것이 지극함’이고, 저절로 힘을 얻는 것이 ‘뜻이 성실해짐’이다. (󰡔箚疑󰡕 得見義理精微 知至也 自然得力 意誠也)
는 것입니다. 대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미의 차원에서 모든 이치를 밝게 알면 중리소석(衆理昭晰) 
󰡔기의󰡕 ‘아는 것이 지극함’을 말한다. (󰡔記疑󰡕 言知至)
 비록 스스로를 속이고자 해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수욕...가득(雖欲...可得)
󰡔기의󰡕 ‘뜻을 성실히 함’을 말한다. (󰡔記疑󰡕 言誠意)
 이 정도에 이르러야 비로소 말 밖에서 뜻을 보고, 뜻을 얻어 말을 잊는다 득의망언(得意忘言) 
󰡔절보󰡕『장자(莊子)』에,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잊고,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는 말이 나온다. (󰡔節補󰡕 莊子得魚而忘筌 得兎而忘蹄 得意而忘言)  [역주] * 󰡔절보󰡕에서 인용된 글은 󰡔장자(莊子)󰡕외편(外篇),「외물(外物)」편에 나온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장자(莊子)󰡕 외편(外篇), (서울, 玄岩社, 1980), 1117-9쪽 참고.
고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찌든 책만을 뚫어지게 파고드는 것 찬고지(贊故紙) 
󰡔차의󰡕 ‘고지(故紙)’는 서책(書冊)을 말한다. 헛되이 서책만 뚫어지게 연구했지 의리(義理)를 터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箚疑󰡕 故紙謂書冊 謂徒贊硏冊而不得義理也)
󰡔익증󰡕『전등록(傳燈錄)』에 계현(戒玄)이 바야흐로 경(經)을 외우는데, 그 제자인 신찬(神贊)이 ‘벌(蜂子)이 종이로 된 창문(紙窗)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이를] 구출해주면서 말하기를 “세계(世界)가 이처럼 광활(廣闊)한데도 [이 벌은 어리석게도 이 창 문 속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은 채, 어찌하여 그 오래된 종이를 뚫으려고만 하는가?” (󰡔翼增󰡕 傳燈錄 戒玄方誦經 其徒神贊 見蜂子投紙窗中 求出曰 世界如許廣闊 不肯出贊他故紙何爲)
󰡔절보󰡕 ‘신찬(神贊) 운운’한 것은 또 시(詩)를 가지고 그 스승을 풍자(諷刺)해 말한 것이니, 말하자만 ‘[쉽게 다닐 수 있는] 빈 문으로 나가는 것은 즐기지 않고 [쉽게 나갈 수 없는] 창에 머리를 쳐박아 대니 숱한 세월 걸려 찌든 종이를 뚫은들 어느 세월에 밖으로 나갈 도리가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節補󰡕 神贊云云 又以詩諷其師 曰空門不肯出投窗也 多百年贊故紙 何日出頭時)
 뿐일 것입니다.
孟子論取之而燕民不悅, 則勿取, 文王是也. 取之而燕民悅, 則取之, 武王是也. 此亦止爲齊王欲取燕, 故引之於文武之道, 非謂文王欲取商, 以商人不悅而止, 而武王見商人之悅而歸己, 而遂往取之也. 如言仲尼不有天下, 益․伊尹․周公不有天下, 豈益․周公․伊尹․仲尼皆有有天下之願, 而以無天子薦之與天意未有所廢而不得乎? 直是論其理如此耳. 凡此類皆須硏究體味, 見得聖人之心脫落自在, 無絲毫惹絆處, 方見義理之精微, 於日用中自然得力. 所謂知至而意誠也. 蓋幾微之間, 衆理昭晰, 雖欲自欺而不可得矣. 至此方可說言外見意, 得意忘言. 不然, 止是鑽故紙耳. 愚意如此, 不知伯崇以爲如何? 恐有疏繆處, 切望反復, 幸甚.

‘삼분천하(三分天下)’ 일절(一節)은 아마도 ‘십란지사(十亂之事)’로 인해 드디어 이러한 언급을 하신 듯합니다. *『논어(論語)』,「태백(泰伯)」편, 제20장에 “순(舜)임금이 어진 신하 다섯 사람을 두심에 천하(天下)가 다스려졌다. 무왕(武王)이 말씀하셨다. ‘나는 다스리는 신하 열 사람을 두었노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인재 얻기가 어렵다 한 말이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당우(唐虞)의 즈음만이 주(周)나라보다 성하였다. 그런데도 열 사람 중에 부인이 들어 있으니, <남자(男子)는> 아홉 사람일뿐이다. 문왕(文王)은 천하(天下)를 삼분(三分)하여 그 둘을 소유하시고도 복종하여 은(殷)나라를 섬기셨으니,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덕(德)은 지극한 덕(德)이라 말할 만하다.’ (舜有臣五人而天下治하니라 武王曰 予有亂臣十人호라 孔子曰 才難이 不其然乎아 唐虞之際가 於斯爲盛하나 有婦人焉이라 九人而已니라 三分天下에 有其二하사 以服事殷하시니 周之德은 其可謂至德也已矣로다)”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61-2쪽 참고.
 이 장을 포함한 앞뒤의 여러 장은 모두 [공자께서] 옛 성왕(聖王)의 사적을 두루 거론하신 것입니다. 이는 흡사『맹자(孟子)』의 ‘순(舜)은 여러 사물의 이치에 밝으시며...’ *『맹자(孟子)』,「이루(離婁)」하, 제19장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것이 얼마 안되니, 서민(庶民)[중인(衆人)]들은 이것을 버리고, 군자(君子)는 이것을 보존한다. 순(舜)임금은 여러 사물의 이치에 밝으시며 인륜(人倫)에 특히 살피셨으니, 인의(仁義)를 따라 행하신 것이요. 인의(仁義)를 행하려고 하신 것은 아니었다. (孟子曰 人之所以異於禽獸者幾希하니 庶民은 去之하고 君子는 存之니라 舜은 明於庶物하시며 察於人倫하시니 由仁義行이라 非行仁義也시니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맹자집주(孟子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8), 240-241쪽 참고.
라고 한 그 이하 여러 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다시금 그대의 의견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달항당(達巷黨) 사람 *『논어(論語)』,「자한(子罕)」편, 제2장에 “달항당(達巷黨)의 사람이 말하기를 ‘위대하구나, 공자(孔子)여! 박학(博學)하였으나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낸 것이 없구나.’ 하였다. 공자(孔子)께서 이를 들으시고 문하(門下)의 제자(弟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무엇을 전문(專門)으로 잡아야 하겠는가? 말 모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활 쏘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내 말 모는 일을 잡겠다.’(達巷黨人曰 大哉라 孔子여 博學而無所成名이로다 子聞之하시고 謂門弟子曰 吾何執고 執御乎아 執射乎아 吾執御矣로리라)”라 했다.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2001), 164쪽 참고.
은 본래부터 공자(孔子)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자의] 박학하심을 탄미하면서도 공자께서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낸 것이 없음’을 애석하게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한 가지 특장(一善)으로 이름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지극히 천근(淺近)합니다. 그러나 비근한 말(邇言)조차 세심히 살핀다는 견지에서 보자면, [우리는 달항당 사람의 이 말을 통해서] 곧 ‘성인(聖人)은 도덕(道德)을 순수하게 갖추고 있기에, 한 가지 특장으로 이름붙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남녀도 참여해서 알 수 있지만 그 근거(所以然)에 대해서는 성인(聖人)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기소...지야(其所...知也) 
󰡔절보󰡕『중용장구(中庸章句)』와는 같지 않다. (󰡔節補󰡕 與中庸章句不同)  [역주] * [『중용(中庸)』제 12장 원문] : 군자(君子)의 도(道)는 비(費)하고 은미(隱微)하니라. 부부(夫婦)의 어리석음으로도 참여하여 알 수 있으되 그 지극함에 이르러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부부(夫婦)의 불초(不肖)함으로도 능히 행할 수 있으되 그 지극함에 이르러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능하지 못한 바가 있으며, 천지(天地)의 큼으로도 사람이 오히려 한(恨)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큰 것을 말할진댄 천하(天下)가 능히 싣지 못하며, 작은 것을 말할진댄 천하(天下)가 능히 깨뜨리지 못한다.《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上下)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君子)의 도(道)는 단서가 부부(夫婦)에게서 시작되니,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천지(天地)에 밝게 드러난다.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夫婦之愚로도 可以與知焉이로되 及其至也하여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知焉하며 夫婦之不肖로도 可以能行焉이로되 及其之也하여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能焉하며 天地之大也에도 人猶有所憾이라 故로 君子語大인댄 天下莫能載焉하며 語小인댄 天下莫能破焉이니라 詩云 鳶飛戾天이어늘 魚躍于淵이라하니 言其上下察也니라 君子之道는 造端乎夫婦니 及其至也하여는 察乎天地니라)  * [‘부부지불초...(夫婦之不肖...)’ 에 대한 주자의 주석] : 군자(君子)의 도(道)는, 가까이는 부부(夫婦)가 집에 거처하는 사이로부터 멀리는 성인(聖人)과 천지(天地)도 능히 다할 수 없는 것에 이르러, 그 큼이 밖이 없고, 그 작음이 안이 없으니, 비(費)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 이치의 소이연(所以然)은 은미하여 드러나지 않는다. 알 수 있고 능할 수 있는 것은 도(道)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이요, 그 지극함에 이르러 성인(聖人)도 알지 못하고 능하지 못한 것은 전체(全體)를 들어 말한 것이니, 성인(聖人)도 진실로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 후씨(侯氏)[후중량(侯仲良)]가 말하였다. “성인(聖人)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자(孔子)께서 예(禮)를 묻고, 관제(官制)을 물은 것과 같은 종류요, 능하지 못한 것은 공자(孔子)께서 지위를 얻지 못함과 요순(堯舜)이 널리 베푸는 것을 부족하게 여김과 같은 종류이다.” 내가 생각건대, 사람이 천지(天地)에 대하여 한(恨)한다는 것은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어 생성(生成)함에 있어서의 편벽됨과 추위와 더위, 재앙과 상서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함을 이른다... 자사(子思)는 이 시(詩)를 인용하여 화육(化育)이 유행(流行)하여 상하(上下)에 밝게 드러남이 이 이(理)의 용(用) 아님이 없음을 밝혔으니, 이른바 비(費)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이연(所以然)은 보고 들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른바 은(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이 1절(節)은 끽긴(喫緊)[요긴(要緊)]하게 사람을 위한 것으로 활발발(活潑潑)[생동감(生動感) 넘침]한 곳이다.” 하였으니, 읽는 자들은 생각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君子之道는 近自夫婦居室之間으로 遠而至於聖人天地之所不能盡하여 其大無外하고 其小無內하니 可謂費矣라 然이나 其理之所以然은 則隱而莫之見也라 蓋可知可能者는 道中之一事요 及其至而聖人不知不能은 則擧全體而言이니 聖人도 固有所不能盡也니라 侯氏曰 聖人所不知는 如孔子問禮問官之類요 所不能은 如孔子不得位, 堯舜病博施之類라 愚謂 人所憾於天地는 如覆載生成之偏, 及寒署災祥之不得其正者라 ... 子思引此詩하사 以明化育流行하여 上下昭著가 莫非此理之用이니 所謂費也라 然이나 其所以然者는 則非見聞所及이니 所謂隱也라 故로 程子曰 此一節은 子思喫緊爲人處니 活潑潑地라하시니 讀者其致思焉이니라) [성백효(成百曉) 역주, 󰡔현토완역 대학(大學)․중용(中庸)집주(集註)󰡕, (서울, 傳統文化硏究會, 1997), 71-2쪽 참고.]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달항당 사람이 말한 그대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자께서는] ‘반드시 나로 하여금 어느 일을 전문으로 잡아서 이름을 이루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일찍이 말 모는 일을 잡은 적이 있다. [그러나] 어찌 이 말모는 일로 세상에 이름을 얻겠는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장에 관한 여여숙(呂與叔)의 학설 여여숙설(呂與叔說) 
󰡔차의󰡕『논어혹문(論語或問)』에서는 “범씨(范氏)와 여씨(呂氏)는 ‘달항당인이 성인을 [제대로] 알아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잘못이다”라 했는데, 여기서의 입장과 같지 않다. (󰡔箚疑󰡕 論語或問 則以爲范呂以黨人爲知聖人者非是 與此不同)
  [역주] * 주희(朱熹), 󰡔사서혹문(四書或問)󰡕, (보경문화사 영인본, 1986), 136쪽 참고.
󰡔절보󰡕 여씨(呂氏)는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낸 것이 없는 것이 성인(聖人)이다. [성인께서는 당항당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처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에 대해] 한 가지 재주(즉 말을 모는 재주)를 거론하기를 원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節補󰡕 呂曰無所成名聖也 不欲自居故願名一藝)
󰡔차보󰡕 여씨(呂氏)의 설(說)이 이곳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다.『논어혹문(論語或問)』에서 운운(云云)한 것은 혹시 [“범씨(范)氏와 여씨(呂氏)는 ‘달항당인이 성인을 [제대로] 알아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잘못이다”라고 한] 이상(以上)의 한 구절만을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것인가? 다시금 상세히 따져야 한다. (󰡔箚補󰡕 呂氏說 未見與此不同 或問云云 或以上一句而云耶 更詳之) 
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압축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나머지 학설은 아마도 모두 사람들의 뜻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듯합니다. 여설...인의(餘說...人意)
󰡔익증󰡕 이 편지에서는 여씨(呂氏)의 설(說)을 위주로 한 듯하지만『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는 여씨의 설을 취하지 않았고,『논어혹문(論語或問)』에서는 또 정자(程子)와 윤씨(尹氏)의 설(說)을 좋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편지의 입장은] 아마도 주자 초년(初年)의 학설인 듯하다. (󰡔翼增󰡕 此書意 似以呂氏說爲主 而集注不取呂說 或問又以程子尹氏說爲善 恐初年說)
 [나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1812)三分天下一節, 似因十亂之事而遂言之. 兼此前後數章, 皆是歷擧古聖王事, 如孟子‘舜明庶物’以下數章之比, 更詳考見敎爲幸. 達巷黨人本不知孔子, 但歎美其博學而惜其無所成名, 謂不以一善得名也. 此言至爲淺近, 然自察邇言者觀之, 則於此便見聖人道德純備, 不可以一善名. 愚夫愚婦可以與知, 而其所以然者, 聖人有所不知也. 故孔子不欲以黨人之所稱者自居, 而曰: ‘必欲使我有所執而成名, 則吾嘗執御矣, 何不以是見名乎? ’此章呂與叔說蓋如此, 但其辭約耳. 餘說似皆未滿人意. 如何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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