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권
편지(친구 제자들과의 문답) 書(知舊門人問答)
유평보(평)에게 답함 答劉平甫(坪) 1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초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유자우(劉子羽)의 아들인 유평보(劉平甫)에게 일상사 안부와 함께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공부를 등한히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즉 강학(講学)하고 일처리 하는 이외의 시간에, 활 쏘는 일, 거문고 연주하는 일, 글을 요약해서 베끼는 일, 책 교정하는 일 등은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이며, 공부할 시간을 앗아가는 교유관계에 대해서도 주의하라고 말한다.
새해의 인사(人事)는 며칠 만에 확정되었는지요? 확정된 후에는 학업에 정진하는 일을 아마도 그만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번 날(昨日) 세전(歲前)에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도무지 한가한 틈이 없어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일찍이 사제(四弟)로 하여금 그대에게 [나의 뜻을] 고하라 했습니다만 그를 만나보셨습니까? 대개 집안일이나 잡무 등이 많으실 텐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 만약 그 나머지 시간에조차 또 급하지 않은 잡무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끝내 글 읽을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강학(講学)하고 일처리(幹蠱)하는 이외의 시간에, 활 쏘는 일, 거문고 연주하는 일, 글을 요약해서 베끼는 일, 책 교정하는 일 등은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글을 못 읽게 할 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평보께서도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일들이 내 자신에게 과연 어느 것이 더 친밀하고 급한 것입니까?
新年人事幾日而定? 定後進業, 恐不可廢. 昨日歲前有欲奉聞者, 以無間處, 不暇及. 亦嘗今四弟相告, 曾及之否? 大抵家務冗幹旣多, 此不可已者. 若於其餘時又以不急雜務虛費光陰, 則是終無時讀書也. 愚意講學幹蠱之外, 挽弓鳴琴․抄書讎校之類皆可且罷. 此等不惟廢讀書, 亦妨幹也. 平甫試思此等於吾身計果孰親且急哉?
또 요즈음 그대의 교유관계(친구들과 어울려 사귀는 것)가 다소간 잡스런 점이 없지 않은 듯 합니다. 이런 무리들과 어울려 사귀다보면 흔히 서로 친압(親狎)해지기가 쉽고 교만한 마음도 날로 자라나게 됩니다. [이런 식의 교유는] 덕(徳)있는 인격을 기르는 것이 아니어서 보고 듣기에도 아름답지 못하니, 해로운 바가 많을 것입니다. 국가를 맡아 다스리는 사람도 오히려 근습(近習)이 덕을 상하고 정사를 해친다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그렇지만 또 반드시 그들과 절교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니, 다만 내가 마음을 맑게 가지고 일을 줄여서, 정당하게 만날만할 때에 만나고, 만나서는 예법에 맞게 대한다면, 저들이 저절로 [나와] 거리를 두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들에 대해 덕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실로 말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그대(平甫)가 이 전에 우리 집에 잡된 손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저 예를 갖추어서 오는 사람은 예로 맞이할 뿐입니다. [그대는] 또 [우리 집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 적을 먹으며 절제 없이 계속 눌러 붙어 팔을 잡고 같이 놀고 침상을 마주하고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고 이야기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다만 그대(평보)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절제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한갓 외부 사람들에게 소문만 나게 만들고 그대가 내 말을 들어 주는 실제적 효과는 없다면, 뭇 사람들의 원망만 돌아와 나의 화근이 될 뿐일 것입니다. 부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배씨(裴氏) 어른이 정초에 산에서 나왔는데, 다행히 도를 위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 분은 사람됨이 강직하니, 무릇 훈계하여 일러 주는 말을 천만번이라도 믿고 받아 들여야지, 저(熹)의 말 듣듯이 대충대충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又比來遊從稍雜, 與此曹交處, 最易親狎, 而驕慢之心曰滋. 旣非所以養成德(4-1831)器, 其於觀聽亦自不美, 所損多矣. 有國家者猶以近習傷德害政, 況吾徒乎? 然亦非必絶之, 但吾淸心省事, 援之以時, 遇之以禮, 彼將自疏. 如僕輩固不足道, 然平甫亦嘗見衡門之下有雜賓乎? 以禮來者以禮接之, 亦嘗有留連酒炙․把臂竝遊․對牀夜語者乎? 此不足爲外人道, 但欲平甫自知而節之. 若徒暴露於外而無見聽之實, 但使衆怨見歸, 爲僕作禍耳. 千萬幸察. 斐丈正歲出山來, 幸爲道區區. 此公勁直, 凡所告戒千萬信受, 不可如聽熹言之悠悠, 恐不能堪耳.
유평보(평)에게 답함 答劉平甫 2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2서)는 제1서에 이어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가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아마도 이 당시 주자는 유평보와 함께『시경』과 『논어』에 관한 선유(先儒)들이 학설을 수집하는 한편 자신들이 토론한 것을 기록하고 수정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듯하다. 편지 말미에는 제1서에 이어 유평보의 교우관계가 지나치게 무절제한 점을 경계하고 있다.
이 전날 [내가 그대에게] 들려드린 것은 읽을만하기도 하거니와 나 스스로 읽어보았던 글들입니다. 아마도 여러 학설들이 번잡하여 [그대가] 아직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면 우선은 곧 이전에 읽었던 글들을 정리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남설(二南說)을 아직 편집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편집해서 다른 날 [그대와 내가] 서로 만나 함께 내용을 검토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논어(論語)』의 경우, 저번에 본 네 편이 아무래도 아직은 충분히 익지(浹熟) 않은 듯합니다. 그러니 최근에 본 것과 이전에 이미 본 것(新舊)을 함께 검토해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작년에 읽은 것은 대체로 아직은 익지 않은 것인 만큼, 지금 모두 반복해서 검토(溫尋)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 번에 그대가 하신 말씀(奉語) 중에,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한 장의 종이 위에 차례대로 기록해내어 수시로 아직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여부를 반복해서 성찰해보는 것이 옳다’고 하신 이 말씀이야말로 가장 좋으니, 그대 생각대로 실천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서로 모여 함께 지낸 지가 비록 일 년이 되었지만, 학업의 진보는 아주 적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인데도 아직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주 많습니다. 이제 또 병으로 이처럼 쇠약해졌으니, 나가서 형(兄)과 서로 모일 형편이 못됩니다. 서로 모인다 해도 사색과 강학을 못하게 되었으니, 그대 어머님과 공보(共甫)형의 책망하는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서 특별히 다시 아뢰오니, 오직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이 없으면 출입을 하지 마세요. 공보형이 댁에 계시지 않고 자제들도 별로 없어 집안은 깊숙하고 넓으니,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염려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게으름 피우고 놀면서 학업을 팽개치는 것도 물론 안 될 일입니다만, 찾아오는 손님들이 이야기하고 희롱해 웃고 하는 것 등이 자신의 일과 집안일에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들과의] 수작을 줄이십시오. 그러면 저들이 저절로 찾아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간절하게 빕니다. 또 복습하는 일을 그만 두지 말며, 늘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나감으로써 이 마음이 방탕하게 되지 않도록 한다면, 뒷날 다시 서로 만났을 때 수습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시험 삼아 지난 겨울 이래로 지나간 날이 얼마나 되는지, 또 그 동안 마음 쓴 것 가운데서 방탕한 것이 얼마나 되며 단속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본다면, 또한 족히 스스로 경계가 될 것입니다.
前日奉聞, 可且自觀書. 恐衆說紛紜, 未能自決, 卽且理舊書如何? 二南說未編次, 可及今爲之, 它日相聚裁定也. 論語向者看四篇似未浹熟, 可兼新舊看爲佳. 去歲所治, 大抵未熟者, 今悉溫尋之爲善. 向數奉語, 可錄出所作工夫次第作一紙, 時復省察了與未了分數. 此最善, 可便爲之. 蓋雖相聚一年, 所進業殊少, (4-1832)所當爲而未爲者殊多. 今又疾痛如此, 羸頓勢未能出與兄相聚, 相聚亦思索講究未得, 恐負太碩人與共甫兄相責望之意 特復奉白, 幸惟思之. 無事勿出入, 蓋共甫兄不在, 宅中別無子弟, 戶門深闊, 事有不可勝虞者. 不惟惰遊廢業爲不可, 賓客至者談說戱笑, 度無益於身事家事者少酬酢之, 則彼自不來矣. 切祝且溫習勿廢, 使有常業而此心不放, 則異日復相聚亦易收拾. 試思自去冬以來已過之日多少, 其間用心處放蕩幾何, 存在幾何, 則亦足以自警矣.
유평보(평)에게 답함 答劉平甫 3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3서)는 제1서나 2서보다 빠른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의 전반부는 병산(屏山)선생의 묘표(墓表)와 관련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 당시 주자는 유병산 묘표의 초고를 거듭 수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편지의 후반부는 “군자가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없고, 배워도 그 앎이 단단하게 되지 않는다”는『논어(論語)』,「학이(学而)」편의 말을 인용하면서 유평보의 공부를 단속하고 있다.
[병산(屏山)선생의] 묘표(墓表)는 반드시 국법에서 정해 놓은 기준을 보아 적당하게 높여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이미 확보해 놓은 돌이 기준(格)에 맞지 않다면, 곧 [기준에 맞는] 돌을 구매하면 됩니다. 그러니 비문의 글자가 많고 적음을 문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윗부분(上一截)과 아랫부분(下一截)으로 나누어] 윗부분에는 제목을 쓰고 아랫부분에는 글을 새길 수도 있습니다. 곧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아서 글자의 크기를 조정하면 될 것이니, 지금 미리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병산(屏山)선생 묘표(墓表)의] 구문(舊文)을 이틀 동안에 새로이 많이 고쳤습니다. 점차 상세해지고 갖추어진 듯 합니다. 명문(銘文)의 경우 이미 [그 내용에 넣을] 말을 많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울러 돌아오는 날 직접 만나서 의론하기로 하십시다.
墓表須看令式合高多少, 若所有石不及格, 便可買石, 不必問字之多少也. 臨時分上一截寫額, 下一截刻文, 却看廣狹如何爲字大小, 今難預定也. 舊文兩日多所更定, 漸覺詳備. 銘文亦已得數語, 但不甚佳. 幷歸日面議也.
듣자하니 존수(尊嫂)의 병환이 점차 나아지신다지요. 매우 기뻐할 일입니다. 탕약(湯藥)을 세밀하게 살펴드리는 여가에, 오랜 배움을 다스려나갈 수 있을 듯하군요. 시간은 쉽게 지나가는 법이니, 구습(舊習)에 따르면서 공부할 기회를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대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전날 농담 같은 말로 충고를 드렸는데 능히 유의하시는지요? 옛 성인의 말씀에, “군자가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없고, 배워도 그 앎이 단단하게 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일찍이 이 뜻을 익숙하게 강론한 적이 있습니다만, 일상생활 하는 가운데 다만 이 한 구절에라도 어긋나게 하지 않는다면 공부가 이미 반을 넘어선 것입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의 경우, 함께 피소된 자는 으레 임기가 만료되면 [함께 조정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기에, [함께 피소된 자의] 전례(前例)를 끌어와서 [저의] 청을 드리지 수 없었습니다. 범씨 어른(范丈)께서도 [이 점에 대해서] ‘그대(兄)이 이에 이르는 것이, 그 사람으로서는 매우 무익하나, 말 자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와 평보의 의견이] 도리어 완전히 합치하니, 조부(早賦)가 모순(矛盾)이 되는 그러한 상황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돌아오는 날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 나누십시다. 아무쪼록 배운 바를 더욱 힘써 진보되도록 하고 아는 바를 힘써 행하도록 하십시오. 원리(元履)가 접 때 태령(泰寧)에 이르렀는데, 여러 사람들이 있는 데서 그대를 극구 칭찬합디다. 실제보다 지나친 소문이 되지 않도록 한다면 매우 좋겠습니다.
尊嫂聞向安, 殊可喜. 點視湯藥之暇, 可以理舊學矣. 日月易得, 毋因循失(4-1833)之, 乃所深望. 前以戱謔奉規, 能留意否? 先聖言‘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向曾講此至熟. 日用之間, 只此一句勿令違失, 則工夫已過半. 千萬千萬! 熹以同召者例有任滿指揮, 不免援例陳請. 范丈亦以爲兄至此, 渠冗甚, 不得疑語. 然却儘有合處, 不至如早賦之矛盾也. 歸日當面言之. 惟益力進所學, 力行所知. 元履向至泰寧, 譽兄於諸人間不容口. 無使爲過情之聞, 則甚善.
유평보(평)에게 답함 答劉平甫 4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4서)는 제1, 2, 3서와는 달리 쓴 시기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주자의『시경(詩経)』해설의 일부를 담고 있다. 당시 주자는 횡거(横渠)의 『시설(詩説)』을 연구하고 있었던 듯하다.『시경(詩経)』,「주남(周南)」, 권이(巻耳)시와 『시경(詩経)』,「용풍(鄘風)」에 나오는 정지방중(定之方中)시가 거론된다.
그저께 아이들이 시를 외는 것을 듣고서 우연히 다음과 같은 뜻을 터득하게 되었으니, 횡거(橫渠)의『시설(詩說)』에서 빠진 부분(遺)을 보충할 수 있을 듯합니다. 대충 기록해 보냅니다. 의심나는 뜻에 대해서는 노트에 기록해 두면 좋을 듯합니다.
昨因聽兒輩誦詩, 偶得此義, 可以補橫渠說之遺. 謾錄去, 可於疑義簿上錄之.
[권이(巻耳)시] 제1장은 후비(后妃)가 현자(賢者)를 찾고 관직을 살피며, 또 신하들의 수고로움을 알고자 하는 뜻을 피력한 것이다. 짐짓 [그녀는] 권이(卷耳)를 뜯고, 술과 간장을 갖추어 두지만, 비록 후비(后妃)의 입장이라고는 하나, 그녀가 마음속에 [이와 같은 뜻을] 품고 있기에 곧 기울인 광주리에도 [권이(卷耳)를] 채우지 못한 채 넓은 길에다 내버려 두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녀의 근심이 간절하고 지극한 것을 말해준다.
一章言后妃志於求賢審官, 又知臣下之勤勞, 故釆卷耳․備酒漿, 雖后妃之職, 然及其有懷也, 則不盈頃筐而棄置之於周行之道矣. 言其憂之切至也.
2장과 3장은 모두 신하들의 수고로움이 심하여, [신하들이] 술잔을 주고받음으로써 스스로 [그 수고로움이] 풀어질 것을 생각한 말이다. 무릇 [시 속에 나오는] ‘나(我)’는 모두 신하들 자신이다. 여기서는 곧 그녀(후비)가 근심하는 바를 서술하고, 또 [이 때문에 그녀가] 부득불 권이(卷耳)를 따는 데 급급함을 보이는 것이다. 4장은 신하의 수고로움을 더욱 심각하게 말한 것이다.
二章․三章皆臣下勤勞之甚, 思欲酌酒以自解之辭. 凡言‘我’者, 皆臣下自我也. 此則述其所憂, 又見不得不汲汲於釆卷耳也. 四章甚言臣下之勒勞也.
또 [『시경(詩經)』,「용풍(鄘風)」 중] 정지방중(定之方中) 시에서 ‘비직야인(匪直也人)’ 운운한 것은 비단 사람들이 그(衛나라 文公)의 덕(德)에 감화되어 가득 차고 깊은(塞淵) 아름다움이 있음을 말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만물들도 그의 공(功)에 힘입어, 또한 많이도 번성하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又定之方中‘匪直也人’云云, 言非特人化其德而有塞淵之美, 至於物被其(4-1834)功, 亦至衆多之盛也.
유평보(평)에게 답함 答劉平甫 5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5서)는 제4서와 마찬가지로 쓴 시기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 역시 제4서에 이어 주자의『시경(詩経)』연구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주로『시경(詩経)』,「주남(周南)」, 관저(関雎)편의 장구(章句)를 나누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詩), 주남(周南)] 관저(關雎)편의 장구(章句)를 나누는 문제에 대해서는 또한 바야흐로 의심되는 점이 있으니, 마땅히 4장으로 해야 합니다. 세 개의 장(章)은 각 장마다 4구로 하고, 나머지 1장은 8구로 해야만 편안해집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나의 주장은 이전의] 옛 학설과는 모두 부합되지 않습니다. [구설과 새로운 나의 주장을] 나란히 보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관저(關雎)편에 나오는] ‘좋은 짝(好逑)’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공(毛公)은 [관저(關雎)편에서는] ‘호(好)’자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시금 [주남] 토저(兎罝)편에 ‘좋은 짝(好仇)’이라 한 곳에서 [이 글자의] 음(音)이 어떠한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지만 아마도 반드시 음을 표시(點破)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소황문(蘇黃門)께서는 ‘재치(載馳)시 가운데 두 장 [각] 4구’와 아울러 [이를] 1장 8구로 했습니다만, 문의(文意) 또한 근사합니다. 관저(關雎)편 끝의 두 장 ‘거문고와 비파로 친히 하도다.(琴瑟友之)’는 구절과 ‘ 종과 북으로 즐겁게 하도다.(鐘鼓樂之)’라는 구절을 한 데 묶어 1장 8구로 한다면, 고훈(故訓)에 그대로 의거해 해설하더라도 괜찮을 듯합니다.
關雎章句亦方疑之, 當作四章, 三章章四句, 一章章八句乃安. 但於舊說俱不合, 莫可兼存之否? ‘好逑’如字乃安, 毛公自不作‘好’字說. 更檢兎罝‘好仇’處看音如何, 恐不須點破也. 蘇黃門倂載馳詩中兩章四句作一章八句, 文意亦似. 關雎末後兩章‘琴瑟友之’․‘鐘鼓樂之’作一章人句, 依故訓說亦得.
유평보(평)에게 답함 答劉平甫 6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6서)는 제4서 및 5서와 마찬가지로 쓴 시기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주자가 유평보로부터 영당(影堂)에 대한 질문을 받고 고례(古礼)에 입각하여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예기(禮記),「증자문(曾子問)」편,「악기(樂記)」편, 및「상복소기(喪服小記)」편 등이 본 편지의 내용과 연관되고 있다. 주자는 고금의 사례를 두고 볼 때 예의 뜻에 차이가 있는 만큼 “옛것에 얽매이면 현재의 사정에 어둡게 되고, 세속의 논리를 따르면 바람직한 예절을 부흥시킬 수가 없는 것이니, 반드시 그 중정(中正)의 도(道)를 참작하여 고금에 의당하게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대로부터] 나(熹)는 영당(影堂)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만, 고례(古礼)에 따르면, ‘사당에는 두 개의 신주가 있지 않습니다.(廟無二主)’ 그 의의를 궁구해 봤더니, 조고(祖考)의 정(精)과 신(神)이 이미 흩어지고 난 상황에서 이곳에다 그것을 다시 모으려고 하는 것이므로 [신주를] 둘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위(祠版)가 있고 또 영정(影)이 있다면 이는 신주가 두 개가 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경우에는 종자(宗子)가 집안을 계승하여 제사를 주관하면 벼슬하여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당에 신주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고 제사도 반드시 사당에서 지냈습니다. 오직 종자가 다른 나라에 가 있을 경우에는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아들 가운데서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를 대신하였습니다. 그 축인(祝人)이 “효자 아무개[주 ; 종자(宗子)의 이름이다.]가 작은 아들(介子) 아무개[주 ; 서자(庶子)의 이름이다.]로 하여금 사시에 늘 지내는 제사를 거행하게 하나이다(孝子某使介子某執其常事)”라고 고합니다. 그래도 감히 사당 안에는 못 들어가고, 다만 산소(墓)를 바라보고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낼 뿐입니다. 대개 조상을 높이고 종통(宗統)을 공경함이 이렇게 엄격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설사] 사방을 다니면서 벼슬하거나 혹은 직위가 높아져서 조정에서 벼슬한다 해도 그것이 옛날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가 있는 것에 비교할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러니 곧 그 전답에서 나오는 녹봉을 가지고서 제사를 거행하는 일은 더욱 빠뜨릴 수 없는 일이고, 몸이 국도(国都)를 떠났다는 핑계로 지차 자식으로 하여금 [제사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熹承詢及影堂, 按古禮, 廟無二主. 嘗原其意, 以爲祖考之精神旣散, 欲其萃聚於此, 故不可以二. 今有祠版, 又有影, 是有二主矣. 古人宗子承家主祭, 仕不出鄕, 故廟無虛主, 而祭必於廟. 惟宗子越在他國, 則不得祭, 而庶子居者代之. 祝曰: ‘孝子某[주 ; 宗子名]使介子某[주; 庶子名]執其常事’, 然猶不敢入廟, 特望墓爲壇以祭. (4-1835)蓋其尊祖敬宗之嚴如此. 今人主祭者遊宦四方, 或貴仕於朝, 又非古人越在他國之比. 則以其田祿修其薦享尤不可闕, 不得以身去國而使支子代之也.
[이처럼 고금의 사례를 두고 볼 때] 예의 뜻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서로 비슷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옛것에 얽매이면 사정에 어둡게 되고, 세속을 따르면 상황에 알맞는 예절(品節)을 부흥시킬 수가 없는 것이니, 반드시 그 중정(中正)의 도(道)를 참작하여 고금에 의당하게 하고자 하여야 할 것인데, 그렇다면 종자(宗子)가 있는 곳에서 두 신주를 받들어 따르는 것이 사리에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만 한다면] 대개 위로는 조상의 정(精)과 신(神)을 모으는 뜻을 잃지 않는 것이 되고 [주 ; 두 신주가 항상 서로 의지하면 정신이 분산되지 않는다.] 아래로는 종자로 하여금 전답에서 나오는 녹봉을 가지고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니, 조상도 의당 흠향할 것입니다. 예법을 변통하면서도 중정의 도를 잃지 않는 것이 이른바, ‘비록 선왕 때 있었던 예는 아니지만, 의리로써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대개 이러한 것입니다. 다만 지차의 자식이 스스로 주재할 수 있는 제사는 마땅히 남겨 두어 제사를 받들게 해야 하는 것이지, 종자를 따라서 옮겨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집에 영정을 남겨 두고 신위(祠版)를 모시고 가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되면 조상의] 정과 신이 분산되어 귀신이 편히 여기지 아니할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지차 자식이 사사로이 위로 고조 증조에까지 제사지내는 형편이 되고 있으니, 이 또한 대종(大宗)의 바름을 엄격히 하는 것은 못 됩니다. 이승에는 예악(禮楽)이 있고 저승에는 귀신이 있는 데, 그 예는 한 가집니다. 이 점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처할 바를 알 것입니다. 학문은 끊어졌고 도는 잃어버려 세상에서 이와 같은 말을 들을 기회가 드물고, 듣고서도 반드시 우습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吾友)가 애써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질문해 왔으니 감히 바르게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부인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모부인에게 아뢰어 아시게 하고, 다시 규보(圭甫)와 함께 충분히 강론하여 단호히 실행하여 퇴패한 풍속을 일신시키십시오. 공보(共甫)는 박학다문(博学多聞)하니, 또한 응당 이런 일을 괴이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禮意終始全不相似, 泥古則闊於事情, 徇俗則無復品節. 必欲酌其中制, 適古今之宜, 則宗子所在, 奉二主以從之, 於事爲宜. 蓋上不失萃聚祖考精神之義, [주 ; 二主常相依則精神不分矣.] 下使宗子得以田祿薦享, 祖宗宜亦歆之. 處禮之變而不矢其中, 所謂‘禮雖先王未之有, 可以義起’者蓋如此. 但支子所得自主之祭, 則當留以奉祀, 不得隨宗子而徙也. 所喩留影於家, 奉祠版而行, 恐精神分散, 非鬼神所安. 而支子私祭上及高曾, 又非所以嚴大宗之正也. 明則有禮樂, 幽則有鬼神, 其禮一致. 推此思之, 則知所處矣. 學絶道喪, 此語世所罕聞, 聞之必以爲笑. 然以吾友下問之勤, 不敢不以正對. 侍次試以稟知, 更與圭甫熟講, 斷然行之, 一新弊俗. 共甫博學多聞, 亦不應以此爲怪也. 更詳思之.
유평보(평)에게 답함 答劉平甫 7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일곱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7서)는 제4서, 5서, 6서와 마찬가지로 쓴 시기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기묘년(己卯, 1159년, 주자 30세)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논어(論語)』,『예기(禮記)』, 명도선생의 말씀 등을 인용하면서 유평보에게 언행(言行)이나 교우관계, 부모 섬기는 일 등을 원만히 해나가도록 당부하고 있다. 주자는 이치와 기운, 마음과 말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만큼 이 둘이 나란히 중요하다고 보지만 기운과 말, 즉 하학에서 공부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심기(心気)가 조화되면 말이 저절로 이치에 맞게 되지만, 일단 말에 나아가서 공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천(伊川)이 “말로 드러냄(発)에 조망(躁妄)함을 금하면 속으로 마음이 고요하고 전일(専一)하게 된다”고 한 것 역시 같은 취지라 말한다.
공자(孔子)께서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 대해] 선유(先儒)들은 “마음이 평안하고 기운이 조화되면 능히 말을 할 수가 있다”고 이해했습니다.『주역』‘계사전(繋辞伝)’에 이르기를, “마음을 이(易)하게 한 뒤에야 말한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그 마음을 화평(平易)하게 한 뒤에라야 말한다는 뜻입니다. 명도(明道)선생께서는 “무릇 사람이 말을 할 때 이치(理)가 [기운(気)을] 이기면 일이 분명해지고, 기운(気)이 [이치(理)를 이기어] 분노하면 어그러짐을 자초한다”라고 했습니다. 고자(告子)는 “말에서 납득이 되지 않거든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고 했는데, 맹자는 [고자의 이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주 ; 이것은 모두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자식이 부모를 섬길 때는 “부모에게 허물이 있으면 기세를 낮추고 얼굴빛을 즐겁게 갖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간한다”라고 했습니다. [주 ; 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섬기는 방법이다.] 마침 이상과 같은 뜻으로 [공부할 내용의] 그 대략을 알립니다. 그러니 이런 일들에 대해서 더욱 유의하여 몸소 살피고, 부지런히 명심하여 단속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번 이별(此別)에는 반드시 만 일개월(旬月)이라는 기간이 소용될 것입니다. 그만둘 수 없어서 애오라지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다른 날 서로 만났을 때는, 단지 [앞서 내가 말한] 이 점을 통해서 [그대가] 배움에 나아가는 공부를 [제대로 해 내었는지를]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니, 더 이상 의심나거나 어려운 것을 질문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임지인] 저쪽으로 옮겨가서도 일이 있을 때마다 여전히 이러한 뜻(此意)을 지니고 잘 대처해 나간다면 좋을 것입니다. [임지로 가는] 도중에도 내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중자애하시기 바랍니다.
夫子云: ‘不學詩無以言.’ 先儒以爲心平氣和則能言. 易繫辭曰‘易其心然(4-1836)後語’, 謂平易其心而後語也. 明道先生曰 : ‘凡爲人言者, 理勝則事明, 氣忿則招拂.’ 告子云 : ‘不得於言, 勿求於心’, 孟子以爲不可. [주 ; 此凡言與人交際之道.] 記曰: 子事父母, ‘父母有過, 下氣怡色, 柔聲以諫.’ [주 ; 此事親事長之道也.] 適以此意奉聞大略, 然此等事更留意體察, 勤加鐫治爲妙. 此別須有旬月之期, 懷不能已, 聊復言之. 他日相見, 只此可驗進學工夫, 更不須問疑難也. 在彼凡事存此意, 善處爲佳. 途中望寬懷自愛.
맹자의 생각으로는, ‘[어떤 사람의] 말이 이치에 순조롭지 않으며 자득한 것이 없다면, 곧 [이러한 말을 하는 이 사람의] 마음 역시 이치에 순조롭지 못한 점이 있으며, 또 자득하지 못한 곳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사람의] 말에서 [이치를] 터득하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이 사람의] 마음에서 그 이유를 추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니, 마음에 나아가 [말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심기(心気)가 조화되면 말이 저절로 이치에 맞게 되지만, 또한 [우선은] 반드시 말에 나아가서 공부해야만 합니다. 이천(伊川)이 “말로 드러냄(発)에 조망(躁妄)함을 금하면 속으로 마음이 고요하고 전일(専一)하게 된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안과 바깥 겉과 속을 잘 살펴서 조금도 비거나 빠진 곳이 없어야 비로소 상응하게 됩니다. 이렇게 공부해 보심이 어떨는지요?
孟子之意, 以言有不順理不自得處, 卽是心有不順理不自得處, 故不得於言, 須求之於心, 就心上理會也. 心氣和則言順理矣. 然亦須就言上做工夫始得. 伊川曰‘發禁躁妄, 內斯靜專’是也. 內外表裏照管無少空闕, 始得相應. 試如此用工夫, 如何?
유평보(평)에게 답함 答劉平甫 8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여덟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8서)는 무인년(戊寅, 1158년, 주자 29세) 전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충서(忠恕)와 일이관지(一以貫之)에 관해 주자가 오경로(呉耕老)와 토론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근자에 경로(耕老)의 글을 얻어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하나로 꿴다(一貫)’는 취지의 설(說)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충서(忠恕)에 관해서는 [일관이 아닌] 양관(兩貫)으로 설하고 있더군요. ‘양관(兩貫)’의 논리로는 전혀 충서(忠恕) 개념의 이면(裏面)을 뚫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실이 그의 말과 같다면 곧 어디에 ‘일관(一貫)’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자득(自得)해야만 하는데도, 그분은 스승의 학설을 굳게 지킴으로써 스스로 장애를 만들어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 전개는] 순서 정연하여 차질이 없으니, 아무런 엽등(獵等)의 근심이 없습니다. 이 점은 또한 귀하게 여길만한 것입니다.
近收耕老書, 說一貫之旨甚善, 但忠恕卽說成兩貫了. 兩貫之理, 全然透不過忠恕裏面來. 如此卽惡在其爲一貫耶? 此事政須自得, 而渠堅守師說, 自作障礙, 無如之何. 但循循不差, 却無躐等之患, 亦可貴爾.
유평보(평)에게 답함 與平父書中難雜說 9
【해제】주자가 유평보(劉平甫)에게 보낸 아홉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제9서)는 무자년(戊子, 1168년, 주자 39세)『정씨유서(程氏遺書)』가 처음 이루어진 무렵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는 여러 가지 사태에 관해 짤막짤막한 단신을 모은 것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도 오래된 법첩(法帖)인 듯한 묘당기(廟堂記), 선성(先聖)의 화상(画像), 특히 이선생(二先生)과 소공(邵公) 및 장공(張公) 이 네 분의 화상(画像), 위원리(魏元履)가 올린 차서(箚書), 증구보(曾裘父)의 시(詩),『정씨유서(程氏遺書)』에 아직도 잘못된 글자가 많다는 지적, 문정공(文定公)의 춘추(春秋) 및 이서(二書)를 전록(伝録)한 것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근자에 묘당기(廟堂記) 한 부(一本)를 수중에 넣었는데 매우 기이합니다. 대개 110년 전의 물건인데, 새긴 그림(刻畫) 매우 잘 보존되어 아직도 계행(界行)이 있습니다. 이를 평보(平甫)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
近得廟堂記一本奇甚, 蓋百十年前物, 刻畫完好, 尙有界行, 恨未令平甫見也.
『논어(論語)』를 읽고 [참으로『논어(論語)』에는 깊은] 맛이 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훈몽(訓蒙)』은 [내가] 바쁜 가운데 허둥지둥 쓴 책인지라 [그대가 보아주심을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만『요의(要義)』를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論語讀之想有味. 訓蒙草草不堪看, 只看要義自佳也.
사현(沙縣)에 있는 나씨(羅氏)의 집에는 매우 훌륭한 선성(先聖)의 화상(畵像)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 화상(畵像)은 무후본(武侯本)이나 성도본(成都本)과 나란히 염본(閻本)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화상(畵像)이 엄숙 강직하면서도 깊고 단정(嚴毅沈正)하여 아마도 [다른 것에 비해 선성(先聖)의 본래모습에] 조금 더 근접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沙縣羅家傳得先聖像甚佳, 幷武侯成都本, 與閻本大異. 此像嚴毅沈正, 恐差近之也.
이선생(二先生)과 소공(邵公) 및 장공(張公) 이 네 분의 화상(畵像)에 대해, 지금 나란히 [이 네 분의 화상(畵像) 뒷면에 종이를 대고] 배접(背之)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직 장횡거 선생의 화상은 그 복장(服章)이 다른 세분의 복장(服章)과 다릅니다. 혹자는 [세분의 화상(畵像)과 같은] 이러한 넓이의 비단(闊絹)이 있으면 구해다가 나란히 베껴서 바꾸라 합니다만 이선생(二先生)의 야복(野服)과 같이 하는 것은 어떨까요?
二先生․邵․張公四象, 今幷欲煩爲背之. 惟橫渠一象服章不類, 或有此闊(4-1838)絹, 幷告爲摹易之. 如二先生野服, 如何?
위원리(魏元履)의 이 차서(箚書)를 일찍이 추형(樞兄)에게도 보내 드렸나요? [차서(箚書)의] 이 제목(題目)은 부치기 어려운 것으로, ‘유준존상제(籲俊尊上帝)’[라 이름한 차서(箚書)]에 비할 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쉽게 그렇게 하였으니, 또한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그러니 당시 재상(時宰)인들 어찌 일찍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경솔하게 발설(發說)하다 보니 특히나 중절(中節)하질 못했습니다. 요사이 와서 글(書)을 통해 바로잡았지만 이미 뒤늦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저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元履此箚曾寄呈樞兄否? 此題目難做, 非‘籲俊尊上帝’之比, 而彼易爲之, 亦不思矣. 又時宰何嘗知有此事? 率爾發之, 殊不中節. 比以書正之, 已不及矣. 可笑可笑!
구보(裘父)는 시(詩)가 그의 문장(文)에 비해 낫습니다. [시 중에서도] 근체(近體)시가 또 고풍(古風)보다 낫습니다. 지금 [그의 시를] 다시금 살펴볼 수 있어서 매우 다행입니다.
裘父詩勝他文, 近體又勝古風, 今乃見之, 幸甚.
증구보(曾裘父)의 시(詩) 가운데 여산도(廬山圖)를 언급한 시가 있습니다만, 모르겠습니다. 이 도(圖)가 실제로 존재합니까? 만약 여태껏 [廬山에서] 놀아보지 못했다면, 우선 이 여산도(廬山圖)를 얻어 [여산(廬山)의] 훌륭한 경치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曾詩有廬山圖者, 不知有此圖否? 若未得遊, 且得一圖想像勝處亦佳.
저(熹)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碌碌)이 처음과 마찬가지입니다만, 병이 날로 침입해 들어오니, 벼슬하고픈 마음은 더욱 엷어집니다. 나의 목숨은 조물주의 통제 하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熹碌碌如初, 貧病日侵, 而仕宦之意愈薄, 吾命有所制矣.
『정씨유서(程氏遺書)』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도 잘못된 글자가 많습니다. 대체로 원본(元本)이 이와 같으니, 이제 다른 판본을 가지고 참고한다면 이에 그 잘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程氏遺書細看尙多誤字, 蓋元本如此, 今以它本參之, 乃覺其誤耳.
문정공(文定公)의 춘추(春秋) 및 이서(二書)를 전록(傳錄)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시금 장흠부(張欽夫)에게도 [그가] 이 책들을 보았는지 물어보십시오. 그(장흠부)는 [문정공(文定公)의]『통지(通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나의 뜻에는 [그 책] 역시 전(傳)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文定春秋幷二書傳之甚善, 更問欽夫看如何. 渠似不甚愛通旨, 愚意則以爲亦可傳也.
오경로에게 답함 答吳耕老
【해제】주자가 오경로(呉耕老)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40에 실려 있다. 진래(陳来)에 따르면, 이 편지는 무인년(戊寅, 1158년, 주자 29세) 전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호헌(胡憲)의 제자였던 오경로는 스승의 학설에 입각하여『중용(中庸)』과『역전(易伝)』의 말을 인용하면서 일관지리(一貫之理)를 설명한다. 그러나 주자는 오경로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주자의 이해에 따르면 경로(耕老)의 설(説)은 “일관(一貫) 밖에 따로 ‘충서(忠恕)’를 남겨두어” 이 둘을 이원화시키므로 잘못이라는 것이다.
[오경로(吳耕老)의 질문] ; 호씨 어른(胡丈)께서는 지난 해(昔年)에 일관(一貫)의 뜻을 묻는 황계도(黃繼道)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로 꿰고 있는 것(一貫)은 성(誠)이니, 충서(忠恕)는 성(誠)을 생각하는 것(思誠)이다.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誠)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이 말씀은 그 표현이 매우 오묘합니다.『중용(中庸)』[제12장]에 “[『시경(詩経)』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上下)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君子)의 도(道)는 단서가 부부(夫婦)에게서 시작되니,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천지(天地)에 밝게 드러난다.(鳶飛戾天, 魚躍于淵, 言上下察也. 君子之道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라고 했는데, 이는 자사(子思)께서 하늘에서 하나의 사물을 들고, 땅에서 하나의 사물을 들고, 사람에서는 부부(夫婦)를 든 것입니다. 솔개나 물고기는 날거나 뛴다는 점에서 비록 [이 둘이] 다르지만 실은 하나의 존재(즉 一理)가 그리되도록 하는 것일 뿐입니다. 부부(夫婦)의 도(道) 역시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자사(子思)께서 드러내신 일관지도(一貫之道)인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는『주역(周易)』을 해석하시면서 “[역(易)이 넓고 크다.] 멂 멂을 말하면 다함이 없고, 가까움을 말하면 고요하여 바르고, 천(天)·지(地)의 사이를 말하면 구비되었다.(以言乎遠則不禦, 以言乎邇則靜而正,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라고 하셨는데, 이 역시 이 일관지도(一貫之道)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대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胡丈昔年答黃繼道問一貫義云: ‘一貫, 誠也, 忠恕, 思誠也. 誠者天之道, 思誠者人之道.’ 此語形容得甚妙. 中庸曰: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上下察也. (4-1839)君子之道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此是子思在天擧一物, 在地擧一物, 在人擧夫婦. 鳶與魚其飛躍雖不同, 其實則一物爲之耳. 夫婦之道亦不出乎此. 是皆子思發見一貫之道也. 孔子繫易辭有曰: ‘以言乎遠則不禦, 以言乎邇則靜而正,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 亦發明斯道也. 如何如何?
[주자의 답장] ; [그대가] 편지를 통해『중용(中庸)』과『역전(易傳)』의 말을 인용하여 일관지리(一貫之理)를 증명하신 것은 매우 좋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른바 일관(一貫)이라는 것은 또한 그대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제가 본 바와 여러 선생의 설명에 따라 증명해 본다면, 충(忠)과 서(恕)는 곧 하나로 꿴 것(一貫) 가운데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이른바 ‘솔개가 날고 물고기는 뛴다는 점에서 비록 [이 둘이] 다르지만 실은 하나의 존재(즉 一理)’라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로(耕老)의 설(說)대로라면, 곧 솔개나 물고기가 날거나 뛰며, 안과 밖 그리고 정미한 것과 거친 것(內外精粗)이 합(合)한 것이 일관(一貫)이고, 일관(一貫) 밖에 따로 ‘충서(忠恕)’ 두 글자가 남아 있으니, 아마도 [이것이] 성현의 뜻은 아닌 듯합니다. 호씨 어른(胡丈)께서는 일관(一貫)이 성(誠)이고, 충서(忠恕)는 사성(思誠)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나(熹)의 생각에는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신 한 충서(忠恕)는 곧바로 성(誠) 그 자체이고, 자사(子思)께서 ‘도에서 멀지 않다(違道不遠)’고 하신 것과 맹자(孟子)께서 ‘인(仁)을 구함이 이보다 가까울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사성(思誠)입니다. 이 점을 미루어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來敎引中庸易傳之言以證一貫之理, 甚善. 愚意所謂一貫者亦是如是. 但據熹所見而以諸先生之說證之, 則忠恕便已在一貫之中. 如所謂‘鳶飛魚躍雖不同, 然其實則一物’之意是也. 若耕老之說, 則是鳶魚飛躍, 內外精粗合爲一貫矣. 而一貫之外, 零却‘忠恕’二字, 恐非聖賢之意也. 胡丈以一貫爲誠, 而以忠恕爲思誠也. 若熹之意, 則曾子之言忠恕卽誠也, 子思之言違道不遠, 孟子之言求仁莫近, 乃思誠也. 試推此思之, 如何?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에 하숙경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서도 밝혔듯이 병술 5월 18일에 썼다. 이 편지에서는 하숙경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경위와, 그와 교유하기를 바랐던 심정을 고백하고 있다. 또한 이 편지에서 당시의 학문 풍토를 비판하고, 아울러 하숙경이 잘못된 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고 바른 길을 선택해서 나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오월 십팔 일에 신안(新安) 주희는 삼가 두 번 절하고 편지를 써서 지승학사(知丞学士) 집사에게 답합니다.
저는 어려서는 노둔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유독 다행히도 옛사람들의 위기지학(為己之学)에 뜻을 둘 줄을 조금 알고서 그것을 구했지만, 그 요령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좀 들어서야 도(道) 있는 분을 가까이하여 그 실마리의 한둘을 대략 듣고서야 다행히 지향하는 바가 있게 되어 그 학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어지는 탄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허둥지둥 하기가 마치 눈 없는 소경이 진흙길을 지팡이로 더듬으며 길을 하루 종일 찾으나 끝내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리하여 벗의 도움을 받으려는 뜻을 가졌으나, 돌아 보건대 촌스럽고 고루하여 천하의 영준(英俊)한 사람들과 사귀어 그들의 장점을 배워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을 뿐이라, 천하의 선비로서 총명하고 널리 통달하여 스스로 설만한 사람들은 왕왕 사장(詞章)이나 기송(記誦)의 습관으로 흘러 다시 이 학문에 뜻을 두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머뭇머뭇하는 까닭은 인(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만한 친구를 구하려는 것이었지만, 얻은 것은 한두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사이 가만히 들으니, 그대는 가학(家学)의 연원(淵源)이 바르고 재주와 자질이 민첩하고 예리하여 무리에서 아주 뛰어났고, 그 깊은 조예와 침착한 식견은 초연한 바가 있어서, 글을 외워 말하거나 보고 듣고 아는 사람의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입으로 강론하는 것이나 마음으로 침잠하는 것이나 몸소 행하고 힘써 실천하는 것은 이미 하루아침에 쌓은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런 까닭에 일찍이 그대를 한 번 만나 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들려오는 풍문에 또 들으니, 그대는 일찍이 흘러 다니는 잘못된 이야기를 지나치면서 듣고는 그 배우기를 원한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들은 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합니다. 또 장차 그들의 말을 끌어다가 교유하는 사람들의 말석에 두고서 도의(道誼)의 여분에 감화 받아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게 하도록 한다하니, 이 때문에 저는 더욱 더 때를 타서 이 소원을 일찍 이루었으면 합니다. 가난과 병 때문에 양식을 싸 짊어지고서 먼 길을 찾아가 몇 일을 머물면서 도(道) 있는 분에게 나아가 저를 바로 잡는 유익함을 구해서 저의 오랫동안 품어왔던 마음을 위로받고 그대의 두터운 뜻을 받들려고 하나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보잘 것 없고 고루하며 명성이나 자취가 본래 알려질 게 없음을 생각해보니, 또 감히 섣불리 짧은 편지를 올려 그대의 아래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번거롭게 하여 다른 날 가르침을 받들 계제(階梯)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러러보면서 하루도 잊지 못하고 한편으로 부끄러워하고 한편으로 한탄하면서도, 또한 일찍이 하루라도 마음속으로 그대에게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뜻밖에도 그대가 저의 어리석음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어느 날 고맙게도 편지를 내려 주셨습니다. 뜻이 고명(高明)하신 그대가 도(道)를 끌어안고 홀로 서서, 세상의 말학(末学)들이 바깥으로 치닫는데도 말해 줄 수 없는 것을 걱정하시어, 이에 우둔하고 조용하게 물러나 있는 저에게서도 취함이 있으시니, 의기(意気)가 혹 같은 데도 있어 그 나머지는 다 책망하지 않은 것일 뿐인 듯합니다. 말의 뜻이 깊고 넓은 곳에 이르서는 반복해서 읽어보고 관통해서 읽어보기도 하니, 세 번씩이나 거듭 정신이 번쩍 들어 그대의 속에 간직한 오묘한 바를 우러러 볼 수 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분발이 되고 기뻐서 뛰게 되는 것을 스스로 견딜 수 없어, 비록 앞에서 직접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칭찬하는 말이 너무 지나치시고 기대가 매우 깊으신데, 그것은 제가 주변사람들에게 청하려고 하던 바였습니다. 하지만 저가 게으르고 꾸물거리고 민첩하지 못하다 보니 도리어 그대에게 선수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존재하는 도(道)는 넓은 천지 어디에나 고금의 어느 때나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비(是非)나 가부(可否)가 가지런하지 않는 것은 공정(公正)함에서 결정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하니 제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나 그대가 저에게 기대하는 것이 또한 어찌 피차(彼此)와 선후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이후로 계속 그대는 가르쳐 주시고 저는 가르침을 청하여, 원컨대 형적(形迹)의 사사로움 같은 것은 다 떨쳐 버리고서, 토론하고 분석하여 지극히 당연한 귀결처(帰結処)에 합치되기를 힘써 구하여 광대(広大)한 경지에 이르고 정미(精微)함을 다하여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에 머물지 않게 된다면, 저의 다행이요 그대의 덕택입니다. 그밖에 일은 낱낱이 아뢸 겨를이 없기에 우선 이것으로써 감사하는 뜻의 답신을 써서 백숭(伯崇)편에 부쳐 전해 드리도록 했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더위에 비가 내려 답답합니다. 엎드려 생각하노니, 자당 모시고서 모든 일 기쁘게 하시고, 존체 만복 받으시옵기를 …… 저는 두문불출하며 모친을 모시고 지내니, 날로 더욱 고루해집니다. 그대 계신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서 고개를 빼고 바라보노라니 그 쪽으로 달려 가는 마음을 가눌 길 없습니다. 가을이 되어 날씨가 서늘해지면 찾아 주신다는 허락을 받았으니, 이처럼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감히 바랄 바는 아닙니다만, 곧 만났으면 합니다. 다시 바라건대, 도를 위해서 항상 부디 스스로 아끼시고, 나아가서는 항상 등용되시어 우리 학문을 발전시키시고 산야에 사는 사람의 바램을 위로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五月十八日 新安朱熹謹再拝裁書 复于知丞学士執事 熹少而魯鈍 百事不及人 独幸稍知有意於古人為己之学 而求之不得其要 晩親有道 粗得其緒余之一二 方幸有所向而為之焉, 則又未及卒業而遽有山頽梁壊之歎 倀倀然如瞽之無日, 擿埴秦途終曰而莫知所適 以是窃有意於朋友之助 顧以鄙樸窮陋 既不獲交天下之英俊 以資其所長 而天下之士其聡明博達足以自立者 又往往流於詞章記誦之習 少复留意於此 熹所以趑趄於世 求輔仁之益 所得不過一二人而已 間者窃聞執事家学淵源之正 而才資敏鋭 絶出等夷 其深造黙織 固有超然非誦説見聞之所及也 而其口講心潜 躬行力践 已非一日之積 是以嘗欲一見執事而有謁焉 聴於下風 又聞執事蓋嘗過聴遊談之誤 憐其願学之久而末始有聞 且将引而寘之交游之末 使得薫沐道誼之余以自警飭 以此尤欲及時早遂此願. 而貧病之故 不能贏糧数舎 求就正之益 以慰夙心而承厚意 自惟薄陋 声迹本疏 又不敢率然奉咫尺之書以煩隸人 而為異日承教之漸. 惟是胆仰不能一日而忘 而且愧 且恨亦未嘗不一日往来于心也
不謂執事不鄙其愚 一日恵然辱貺以書 意者高明抱独立 亦病夫世之末学外驚不可告語 於是有取乎熹之鈍愚静退 以為臭味之或同 而不尽責其余耳 至於詞旨奥博 反复通貫 三复竦然 有以仰見所存之妙 窃不自勝其振癘踴躍 以為雖未獲瞻望於前 而亦無以異於親承指誨也 惟其称道太過 責望太深 乃熹所欲請於左右者 而怠緩不敏 反為執事所先 此則不能不以為愧 然道之在天下 天地古今而已矣 其是非可否之不斉 決於公而已矣 然則熹之折望於執事而執事之所以責於熹者 又豈有彼此先後之間哉 継自今以往 執事有以見教而熹有以求教 願悉屏去形迹之私 商訂辨析 務以求合乎至当之帰 庶幾有以致広大 尽精微而不滞於一偏之見 則熹之幸也 執事之賜也 其它未暇一二 姑先以此為謝 复属伯崇転致 不審高明以為如何
暑雨煩欝 伏惟承顔尽懽 尊候神相万福 熹杜門奉親 日益孤陋 向風引領 不任馳情 承許秋涼見過 何幸如之 而非所敢望也 未間 更冀以時為道千万自愛 進為時用 以張斯文 慰山野之望 幸甚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건도 2년(병술; 1166, 37세) 초가을에 하숙경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이연평의 교육방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것이 구산(龜山) 문하에서 서로 전해 오는 지결(指訣)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이 편지에서는 배우는 사람들이 결국에 가서는 처음부터 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우둔하게 되는 까닭에 대해 그 본 바가 도체(道體)의 전부를 뚜렷하게 정말로 본 것이 아니라, 단지 듣고 본 것만을 바탕해서 헤아려서 알았기 때문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 편지에서는 당시에 정리하던 어록과 맹자집해에 대한 자평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저는 고루하기가 예전과 같습니다. 요사이 백숭(伯崇)이 이곳에 들러 한 달 넘게 강론을 했는데, 유익한 줄을 분명히 느끼겠습니다. 한스러운 것은 그대에게 나아가 바로 잡지 못한 것일 따름입니다. 다른 날 백숭과 서로 만나거나 혹 서신이라도 왕래를 하게 된다면 마땅히 갖추어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가르침을 아끼지 말아 주시면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이선생(李先生)께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고요함 속에서 큰 근본을 체인(体認)하여, 아직 발(発)하지 않았을 때에 기상이 분명하여 일을 처리하고 만물에 대응하는 것이 자연히 절도(節度)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구산(龜山) 문하의 서로 전해 오는 지결(指訣)입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가르침을 받을 당시엔 강론을 듣기에만 탐을 내었고, 또 바야흐로 남 몰래 장구(章句)나 훈고(訓詁)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어 이 공부에 마음을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남아 있는 듯하기도 하고 없는 듯하기도 하여 확실하게 본 것이 하나도 없으니, 허물을 말하면서 교육해 주신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항상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땀이 나서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얽매임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라는 말은 이선생이 저를 지나치게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저는 낚시에 걸린 물고기와 같은 데, 그 때에 어찌 이런 점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배우는 사람들이 한 때 우연히 본 바가 있으면 그 처음에는 모두 스스로 기뻐서 진실로 자득한 것이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래 되게 되면 점차 어두워지고 덤덤해지고, 또 더 오래 되면 결국 없어져 버리게 되어, 처음부터 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우둔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본 바가 도체(道体)의 전부를 뚜렷하게 정말로 본 것이 아니라, 단지 듣고 본 것만을 바탕해서 헤아려서 알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저으기 생각건대, 그 당시 날마다 지극한 말을 듣고 아름다운 덕행을 보았으면서도, 저의 마음에는 진실로 그 까닭을 모르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엔 돌아가 의지할 곳도 잃고 또 더군다나 오랜 세월이 지나게 되니, 일에 빠지고 습관에 젖어들어 지금은 더욱더 용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그대의 질문이 이 점에 대해서 언급하셨기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구슬퍼지는데, 저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동평선생(東平先生)의 유사(遺事)는 보여 주신 것을 외람되게 받아 보고서, 선현들의 출처(出処)의 큰 원칙을 고찰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대의 돌아가신 어르신의 학문의 연원을 그대와 더불어 편찬하여 책을 이루어 세상에 전하고 후세에 드리우고자 하는 뜻은 매우 다행합니다. 다시 자세히 반복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갖추어 아뢸 수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몇몇 학파들에 대해 수습한 어록은 각각 편마다 차례가 정연하니, 기록한 사람들의 성명도 요즘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완전히 잘 보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각각 그 예전의 목차에 따라 편집을 하였으니 감히 조금이라도 옮기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근래에는 관사에서 목판에 새기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마침내 기다렸다가 그것을 주고자 합니다. 앞서서 이미 간행한 것은 마땅히 그 사본을 얻어 드릴 것이나 지금은 내면을 유지할 만한 별본이 없습니다. 맹자집해는 본래 빠뜨리고 잃어버린 것을 스스로 갖추고자한 것이므로 초록을 쓸 때 쯤 해서는 마침내 조금이라도 자기의 뜻을 버리거나 취하고 덧붙이는 곳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 그것을 읽어보니 구절마다 잘못된 곳이 있지만 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후에 만약 조금이라도 진전된 것이 있으면 마땅히 모두 정정하여 가르침을 구할 것이나 지금은 감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백숭과 함께 강론한 것을 보니 공경하고 우러를만함이 깊습니다. 하지만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으니 일찍이 백숭과 논한 것이 아마도 이치에 적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바라건데, 가르침을 주시어 미치지 못한 부분을 경계시켜 주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熹孤陋如昨 近得伯崇過此 講論踰月 甚覚有益 所恨者 不得就正於高明耳 它日伯崇相見或通書 当能備言之 或有羞誤 不吝指誨 幸甚
李先生教人 大抵令於静中体認大本 未発時気象分明 即処事応物 自然中節 此乃龜山門下相伝指訣 然当時親炙之時 貪聴講論 又方窃好章句訓詁之習 不得尽心於此 至今若存若亡 無一的実見処 辜負教育之意 毎一念此 未嘗不愧汗沾衣也 脱然之語 乃先生称道之過 今日猶如掛鈞之魚 当時寧有是耶 然学者一時偶有所見 其初皆自悦懌 以為真有所自得矣 及其久也 漸次昏暗淡泊 又久 則遂泯減 而頑然如初無所睹 此無他 其所見者非卓然真見道体之全 特因聞見揣度而知故耳 窃意当時日聞至言観懿行 其心固必有不知所以然者 洎失其所依帰 而又加以歳月之久 汨没浸漬 今則尤然為庸人矣 此亦無足怪者 因下問之及 不覚悵然 未知其終何所止泊也
東平先生遺事猥蒙垂示 得以究観前賢出処之大致 先廷問学之淵源 与夫高明纂輯成書 以伝世垂後之意 幸幸甚甚 更容熟复 続得具禀也語錄頃来収拾数家 各有篇帙首尾 記錄姓名 比之近世所行者 差為完善 故各仍其旧目而編之 不敢輒有移易 近有欲刻板於官司者 方欲待以畀之 前已刊行 当得其摹本以献 今無別本可以持内也 孟子集解本欲自備遺忘 抄錄之際 因遂不能無少去取及附己意処 近日読之 句句是病 不堪拈出 它時若稍有所進 当悉訂正以求教 今未敢也 見所与伯崇講論 敬仰之深 然有少疑 嘗与伯崇論之 恐未中理 更乞垂喩 以警不逮 幸幸甚甚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에 쓴 것이다. 병술 가을 하숙경에게 보낸 편지인데, 장경부에게 답한 4번째 편지와 같은 시기에 썼다. 하숙경은 일찍이 천성과 인심 미발・이발 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분명하게 본다면, 천성과 인심, 미발(未發)과 이발(已發) 등이 혼연히 일치되어 다시 다른 사물이 없게 되고 의심이 어름 풀리듯 풀릴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주자는 이로 말미암아 극기(克己)공부와 거경(居敬)공부를 함께하면 일상생활에 있어 어디를 가도 이 일과 관계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주자는 이 편지에서 보다 더 높은 곳을 논할 때는 본령(本領)을 투철하게 해야하며, 그렇지 못한다면 지극한 말과 오묘한 논의를 한다 하더라도 쓸 데 없는 말이 되고 만다고 말하였다.
지난 번 저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고맙게도 몸을 굽혀 저를 찾아 주셨기에 여러 날 동안 가르침을 받들어 몽매하고 고루함을 계발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큰 행운이었습니다. 문을 닫고 지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니 녹녹하기가 예전과 같습니다. 체험하고 조존(操存)하는 공부를 비록 감히 그만 둘 수는 없지만 결국 얽매임이 없이 자득(自得)한 곳은 없습니다. 다만 전날과 비교하면 역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친구의 도움이 전혀 없어서 종일토록 꼼짝 않고 있으면서 엄격하게 성찰하고 마음을 잡아 거두어야, 겨우 마음이 어지러운 것을 면할 뿐이니, 조금이라도 해이하면 다시 멍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리와 인욕이 사라졌다 자라났다 하는 기미(幾微)이니 힘을 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어진 이래로 그대의 정진한 바는 다시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의심나던 것은 이미 얼음 풀리듯이 풀렸는지요? 만약 분명하게 본다면, 천성과 인심, 미발(未発)과 이발(已発) 등이 혼연히 일치되어 다시 다른 사물이 없을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극기(克己)공부와 거경(居敬)공부를 하여 일삼는 바를 마친다면, 일상생활에 있어 어디를 가도 이 일과 관계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중용이란 책은 마땅히 이 점을 위주로 해야 하는데도 여러 어른들의 이 점에 대해서 뜻풀이한 것을 보건대, 유감스럽지 않은 것이 드뭅니다. 요즈음 그것들을 읽고 또 의문스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자정자(子程子)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문인들이 기록한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개 기록한 사람의 잘못은 살펴서 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맹자집해는 마땅히 모두 이미 직접 보셨을 터이니, 차이가 나거나 잘못된 곳이 있으면 통렬하게 깍아 낼 것을 절실히 바라니, 이처럼 어두운 점만 경계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백숭(伯崇)이 이르기를, “논어요의(論語要義)를 무양(武陽)의 학교에서 이미 책의 정본(定本)을 필사하여 차례로 판각을 한다”고 하는군요. 만약 이책이 완성된다면 공부하는 사람들이 열람하기에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높은 곳을 논할 때는 안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본령(本領)에 해당되는 곳에 오래도록 투철하게 하지 못한다면 비록 지극한 말과 오묘한 논의를 날마다 앞에 펴 놓는다 해도 단지 쓸 데 없는 말일 뿐일 것입니다. 광문(広文)에서 다시 통서를 간행하려고 한다는데 이것 역시 매우 좋은 일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취향이 이와같은 자들은 또한 어려서부터 종종 백숭의 유세가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맹자를 다 보셨으면 우선 백숭이 있는 곳으로 보내십시오. 근래엔 성도에서 보낸 횡거의 글 여러 종이 도착했는데, 그 사이에 붙여 넣을 만한 것들이 많으니 주(注)를 달아 보충을 하려고 합니다. 연원록 역시 일찍이 얻고자 하나 소씨는 우선 남겨 두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본래는 사람을 특별히 내어 편지를 보내서 수고한데 사례 하고, 또 고된 작업에 쇠하고 궁핍해진 사람들을 위로하려 했었는데, 다만 이것을 백숭이 있는 곳에 보낼 뿐이니 어느 때 도착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쓰면서도 창망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昨承不鄙 恵然枉顧 得以奉教累日 啓発蒙陋 為幸多矣 社門奉親 碌碌仍昔 体験操存雖不敢廃 然竟無脱然自得処 但比之旧日 則亦有間矣 所患絶無朋友之助 終日兀然 猛省提掇 僅免憒憒而已 一小懈則复惘然 此正天理人欲消長之幾 不敢不著力 不審別来高明所進复如何 向来所疑 定已冰釈否 若果見得分明 則天性人心 未発已発渾然一致 更無別物 由是而克己居敬 以終其業 則日用之間亦無適而非此事矣 中庸之書要当以是為主 而諸君子訓義於此鮮無遺恨 比来読之 亦覚其有可疑者 雖子程子之言 其門人所記錄亦不能無失 蓋記者之誤 不可不審所取也
孟子集解当悉已過目 有差謬処切望痛加刊削 警此昏憒 幸甚幸甚 伯崇云 論語要義武陽学中已写本 次第下手刊板矣 若成此書 甚便学者観覧 然向上侭索眼力 若在本領処久不透徹 則雖至言妙論日陳於前 只是閑言語也 広文更欲刊通書 此亦甚善 今人知趣向如此者 亦自少得 往往伯崇遊談之助為多也 孟子看畢 先送伯崇処 近成都寄得横渠書数種来 其間多可附入者 欲及注補也 淵源錄亦欲早得 邵氏且留不妨也 本欲専人致書以謝臨辱 又苦農収乏人 只附此於伯崇処 未知達在何時 臨書悵惘不自勝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에 쓴 편지인데, 병술년 겨울 하숙경에게 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서는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기미(幾微)에 당하여서는 묵묵히 알아 마음으로 이해해야하고 그런 뒤에 글의 뜻과 사물의 이치가 가는 데마다 다 통할 수가 있음을 이야기 하였다. 또한 이 편지를 통해 주자는 중용집설(中庸集說)이 하나하나 궁구하여야 각각 귀결하는 곳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할 것이라고 하였고, 맹자집해에 대해서는 의심나는 곳에 대해 발명시켜 주고 치료해 주시기를 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록에 대해서 대략 작업을 마쳤음을 이야기 하였고, 공명전에 대해서 하숙경이 공명 역시 습속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 것에 대해 바로잡아 주었다. 이외에도 잡학변에 대한 품평이 지나치게 좋은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하였다.
사람을 특별히 내어 편지를 보내 주시니, 사람을 가르쳐 주고 너그러이 대해 주시는 바가 매우 두텁습니다. 이 모두가 제가 감당(敢当)할 수 없는 바입니다만 뜻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마땅히 받들어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여 그 밝히지 못한 바를 더욱 더 생각하고, 그 이르지 못한 것에 더욱 힘쓴다면, 거의 혹시라도 그대가 기대하는 뜻에 부흥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문을 닫고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면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어 말씀 드릴만한 것이 없습니다. 요 얼마 전에 요량을 잘못하여 저의 오두막을 손 좀 보아 손님 접대와 제사 받드는 일에 편리하도록 할까 분수 넘치게 생각해서 공사를 일으켜 재력을 모두 소모하였는데, 또 형편상 중지할 수도 없어, 여러 날 동안 계속되는 쓸데없는 일이 한창 어지러워 거의 밥 먹을 틈도 휴식할 틈도 없습니다. 내년 봄에는 또 마땅히 동쪽으로 정화(政和)로 가서 성묘를 해야 하고, 남으로 우천(尤川)에 내려가 친척들을 만나야 합니다. 이 걸음에 지나가거나 머무르는 데는 두서너 달이 아니면 왕복하기에 부족할 것이고,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초여름이 될 것입니다.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이런 일에다 낭비해 버리고 길을 나섰다 하면 그 기간이 계절이 바뀔 정도가 됩니다. 비록 일을 따르고 만물에 응하면서 감히 경계하여 성찰하는 공부를 늦추지는 못하지만, 객기(客気)만 성하고 천리(天理)는 미미하여 조금만 소란스런 데로 다가가기만 하면 바로 응접하는 사이에 더욱 어긋나는 것이 많습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한 마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써 잘못된 말이 있음을 깨닫고, 한 가지 일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잘못한 행동이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야 꼭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저는 실로 그런 사람에 해당됩니다. 이 때문에 늘 미적미적 이런 습관에 빠져 평생의 스승과 벗들의 가르침을 저버릴까 두려워했는데, 오히려 그대가 곧바로 멀리 버리지 않으시니 도리어 때때로 진작하고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강론한 것에 오류가 없다고 보장할 수가 없을 텐데, 결국 지적하여 알려줌을 전혀 입지 못하고 도리어 보내 주신 서신이 간곡하여 정말로 그 말을 망령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으니, 어쩐 일인지요? 어찌 이것을 가지고 나아가 그 뜻을 방자하게 하고 말을 마음껏 해서 털끝만큼의 숨김도 없게 하여 그 가운데서 가리고 취하는 바고 있고자하신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용렬하고 망령된 제가 들은 것이 우연하게 그대의 견해와 맞는 것이 반드시 있었던 것입니다.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
중용집설(中庸集説)은 분부하신 대로 돌려 드립니다. 제 생각에는, 다시 정밀하게 선택해야지 일괄적으로 취사선택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개 선현들이 해석한 어떤 장(章) 안의 문구와 의의에는, 잘된 것과 잘못된 것, 정밀한 것과 거친 것 등이 본래 있기 마련이니, 모름지기 하나하나 궁구하여야 각각 귀결하는 곳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옛날에 스승께 들으니, “미발(未発)과 이발(已発)의 기미(幾微)에 당하여서는 묵묵히 알아 마음으로 이해해야하고 그런 뒤에 글의 뜻과 사물의 이치가 가는 데마다 다 통할 수가 있다. 이 이(理)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구구하게 장구(章句)나 훈고의 사이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전에 비록 이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하신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제와서 보고서 그 말씀이 절실하고 요긴하고 지당한 말씀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지만, 결국 한 달음에 그 경지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람되게 섣불리 알려 드립니다만, 그대의 마음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맹자집해는 거듭 베풀어 보여주심을 입었는데, 유설 일편으로 가르쳐 주시니 삼가 읽어보고 기쁘고도 다행스러워 열리고 통하는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바야흐로 쓸데없이 분주하여 정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어 우선 의심나는 한 두 군대를 갖추어 발명시켜 주시고 치료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조금씩 정리하여 마땅히 그 더욱 정밀한 것을 가려 해설 가운데 드러낼 것을 기다리고 다시 아직 안정되지 않은 것을 조리있게 하여 모두 보텔 것을 청합니다. 흠부와 백숭 사이에 이 전에 여러 설이 오갔는데 모두 이 예를 사용하여 따르려고 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고금집험방이라는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 역시 “고금집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스스로 잃어버린 것들을 갖추고 있기에 또 여러 동지에게 전해지니 벗들의 유익함에 있어 그 이로움이 넓을 것입니다.
어록을 요사이 다시 열어보니 오히려 합하고 정돈된 곳이 있습니다. 이미 대략 손을 대어 쓸데없는 부분을 모으는 작업은 마쳤습니다. 다른 때 붙여 드려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질부와 이단백이 기록한 것은 모두 명도의 말이고, 나머지는 이것저것이 섞여 있는 것들입니다. 영가 연간에 여러 사람들과 양준도․당언사․장사숙이 기록한 것에 이르러서는 또 모두 이천의 말입니다. 지난번 편찬할 때에 하나의 목록이 있었는데, 근래에도 수정하고 고치면서도 아직 정리하지 못했고 또 바쁘다 보니 삼가 드릴 기회가 없으므로 아울러 다른 날을 기약해 봅니다.
연원록과 문견록 두 책은 이미 받았고, 서산집을 맡아 보고 나누어 읽고서야 이장(李丈)의 의론의 본말이 이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매우 다행입니다. 그 사이에 의견이 합하는 것이 있어 가르침을 청하는 것도 자세히 살피기를 기다렸다가 이에 감히 올립니다. 고명한 문장을 맡아 보니 더욱 생각해주시는 뜻과 아껴주심이 두텁습니다. 반드시 의리에 근본하여야 말의 기운이 높고 오묘하며, 또 충분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펼 수 있는 것이니 근세의 헛된 말과 쓸데없는 글이 아닙니다. 역설「서문」 삼가 크게 내려주심에 세 번 반복해서 연구하고 음미해보니 앞선 현인들의 깊은 조예와 익숙한 실천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말마다 지엽이 없이 부드럽게 돈독하고 두터우며 성실한 기운이 있었습니다. 다른날 만약 남은 편들을 다 볼 수 있다면 어떤 행운이 그와 같겠습니까? 유록과 행장은 아울러 또 돌려 드리니 개정한 후에 별도로 한 본을 다시 보기를 바라니 그럴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공명전은 요즘 원리가 빌려 갔는데, 보내주신 편지에서 공명의 일에 대해 백성의 일 중에서 순수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의론이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수천 호를 정벌하고 돌아감에 자랑스럽게 귀환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평범한 사람의 태도인데 공명도 이 일에서 또한 습속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하시니 전 이점이 아무래도 의심스럽습니다. 공명이 기산(祁山)을 나올 때 삼군이 향응(嚮応)하여 이미 지키고 돌아갈 수 없었다면 위나라 사람이 다시 삼군을 취했을 것이니 반드시 제일 먼저 훼손시킨 일은 분묘에 대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대중을 공략하고 돌아가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두었으니 사람을 해치고 빈 손을 꺼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사이에 남북이 교전을 하였는데 회수와 한수 사이에서 자주 투항하여 복종하는 자가 있었는데 우리의 힘으로 지킬 수가 없어 오랑캐의 기병이 다시오면 내쳐 두고 떠나버려 충성스럽고 의로운 남은 백성 중에 우리를 위해 죽은 사람들의 간과 뇌가 진흙탕에 나뒹굴어도 거두어 살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명이 차마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위력이 거행되지 않으면 갖난 아기를 시랑의 입속에서 곤경에 처하게 한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여기에서 옛 사람의 충성스럽고 인애한 마음을 볼 수 있으니 후회를 초래할 만한 침략은 아마도 반드시 그대의 논설과 꼭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의견이 이와 같으니 만일 합당치 않은 부분이 있으면 편지로 가르쳐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잡학변이 제게서 망령되이 나왔는데 품평이 지나치게 좋아 위로 지언(知言)의 밝음에 누가 될까 매우 두럽습니다. 삼가 읽어봄에 두렵고 송구함을 스스로 이길 수 없습니다. 종례가 있는 곳에서는 또한 아직 인편이 없기에 편지를 써서 마땅히 경계하신 바와 같이 할 것입니다.
백숭(伯崇)이 요사이 건양(建陽)에 들렸기에 서로 만나 이틀 저녁을 즐겁게 보냈는데, 논의가 더욱 정밀하여, 그의 진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 것이 기뻐할 만합니다. 학자는 뜻을 씀이 분산되지 않아야 진보가 있을 수 있습니. 저는 게으름이 날로 심하여 조금의 진보가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에 진보하지 않으면서 퇴보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퇴보하고 있는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저에게 서신을 주실 때는 마땅히 아프게 채찍을 때려 주신다면 아마도 소인이 되고 말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 마음에 드는 말씀만 하는 것은, 곧고 미덥고 들은 것이 많은 벗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専人賜教 所以誨誘仮借之者甚厚 悉非所敢当 然而此意不可忘也 謹当奉以周旋 益思其所未明 益勉其所未至 庶幾或能副期待之意耳 杜門奉競 幸粗遣日 無足言者 前此失於会計 妄意増葺弊廬以奉賓祭 工役一興 財力倶耗 又勢不容中止 数日袞冗方劇 幾無食息之暇也 来春又当東走政和展墓 南下尤川省親 此行所過留滞 非兩三月不足往返 比獲寧居 当复首夏矣 光陰幾何 而靡敝於事役 塗路之間 動渉時序 雖随事応物 不敢弛其警省之功 然客気盛而天理微 才渉紛擾 即応接之間尤多舛逆 如来教ラ己未終 已覚其有過言 一事未終 已覚其有過行者 在高明未必然 而熹実当之矣 以此常恐因循汨没 辜負平生師友之教 尚頼尊兄未即遐葉 猶時有以振徳之也
前此所論 未能保其不無紕繆 乃殊不蒙指告 来諭勤勤 若真以其言為不妄者 何哉 豈其以是進之 欲其肆志極言而無毫髪之隠 因有所択取於其間哉 不然 則庸妄所聞必有偶合高明之見者矣 欣幸欣幸
中庸集説如戒帰納 愚意窃謂更当精択 未易一概去取 蓋先賢所釈一章之中文句意義 自有得失精粗 須一一究之 今各有下落 方愜人意 然又有大者 昔聞之師 以為当於未発已発之幾 黙識而心契焉 然後文義事理 触類可通 莫非此理之所出 不待区区求之於章句訓詁之間也 向雖聞此而莫測其所謂 由今観之 始知其為切要至当之説 而竟亦未能一蹴而至其域也 僭易陳聞 不識尊意以為如何
孟子集解重蒙頒示 以遺説一編見教 伏読喜幸 開豁良多 然方冗擾 未暇精思 姑具所疑之一二以求発薬 俟旦夕稍定 当択其尤精者著之解中 而复条其未安者尽以請益 欽夫伯崇前此往還諸説 皆欲用此例附之 昔人有古今集験方者 此書亦可為古今集解矣 既以自備遺忘 又以伝諸同志 友朋之益 其利広矣
語錄比因再閲 尚有合整頓処 已略下手 会冗中輟 它時附呈未晩 大抵劉質夫李端伯所記 皆明道語 余則雑有 至永嘉諸人及楊遵道唐彦思張思叔所記 則又皆伊川語也 向編次時有一目錄 近亦修改未定 又忙 不暇拝呈 并俟它日
淵源聞見二錄已領 西山集委示 得以披読 乃知李丈議論本末如此 甚幸甚幸 其間有合請教者 亦俟詳観 乃敢以進也 高文委示 尤荷意愛之厚 大抵必根於義理 而詞気高妙 又足以発夫中之所欲言者 非近世空言無用之文也 易説序文敬拝大賜 三复研味 想見前賢造詣之深 践履之熟 故詞無枝葉而譪然有篤厚愨誠之気 它時若得尽見遺編 何幸如之 遺錄行状并且帰内 改定後更望別示一本 幸幸
孔明伝近為元履借去 示喩孔明事 以為天民之未粋者 此論甚当 然以為略数千戸而帰 不肯徒還 乃常人之態 而孔明於此亦未能免俗者 則熹窃疑之 夫孔明之出祁山 三郡嚮応 既不能守而帰 則魏人复取三郡 必齮齕首事者墳墓矣 抜衆而帰 蓋所以全之 非賊人諱空手之謂也 近年南北交兵 淮漢之間数有降附 而吾力不能守 虜騎复来 則委而去之 使忠義遺民為我死者肝脳塗地而莫之収省 此則孔明之所不忍也 故其言曰 国家威力未挙 使赤子困於豺狼之吻 蓋傷此耳 此見古人忠誠仁愛之心 招徠懐附之略 恐未必如明者之論也 妄論如此 如有未当 因便有以見教 幸甚
雑学辨出於妄作 乃蒙品題過当 深懼上累知言之明 伏読恐悚不自勝 宗禮処亦未有便 因書当如所戒也 伯崇近過建陽相見 得両夕之欸 所論益精密 可喜其進未可量也 大抵学者用志不分 必有進益 惟熹懶堕日甚 不覚有分寸之進 世間無有不進而不退者 然則其却行者必矣 自此予書 当痛加鞭策 庶乎不為小人之帰 舎是而唯唯焉 殆非所望於直諒多聞之友也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에 하숙경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숙경이 맡긴 미도당기에 대해 사양했다고 했는데, 아래 하숙경에게 답한 6번째 편지에서 “미도당기는 진실로 제가 감당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날의 간청이 있었던 것이지 감히 말을 꾸며 번거롭게 재삼 욕을 보이려 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들어서 살펴주심을 입지 못하고, 맡겨 깨우쳐 주심을 더욱 부지런히 하시니, 불민한 죄 더욱 중하여 삼가 재배하고 명을 받들고 감히 다시는 사양치 못하겠 습니다”고 하였는데, 이 편지(6번째 편지)가 건도 3년 정해 초에 쓰여 졌다고 하나 이 편지(5번째 편지)를 가지고 미루어보면 5번째 편지는 마땅히 건도 2년 병술 겨울에 쓰여진 것으로 봐야 한다.
삼가 미도당기를 지으라는 위임을 받았는데, 전에도 이미 간곡하게 사양했었는데, 지금 또 욕되게도 가르침을 주시니 더욱 간절하게 송구하고 외람될 뿐입니다. 저는 문사에서는 취할 만한 것이 없으니, 달리 글을 지으라시면 혹 경솔한 뜻으로 말을 망령되이 하게 될 것이므로 비웃을 만한 질문거리도 없습니다. 이제 먼저의 뜻을 드러내려고 하시는데, 밝게 보여주신 후로는 이일의 체(体)가 중 하니, 어찌 마땅히 가볍게 사람을 빌어 쓸 수 있겠습니까? 절실히 바라건대 다시 세 번 생각을 더하여 그 일을 가벼이 하지 않는다면 소인만이 바르지 않다는 기롱을 면할 뿐만이 아니요, 현자도 사람을 잃는 누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계살자문은 근래 건양인본을 몇 차례의 편지로 올렸습니다. 간혹 비록 언급한 말이 이상한 부분이 있지만 모른체 눈감아 주신다면 또한 근리하고도 알기 쉬워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이웃에 주어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과 중요한 나루터마다 나누어주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공의 설은 구산이 일찍이 논하였는데 또한 이해(利害)를 가지고 말한 것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 논리가 더욱 순수하고 절실합니다. 지난 번에 원리(元履)를 깨우쳐 주고 지금 그 설을 뒤에 붙였는데, 지금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기록을 잊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아 별지에 기록하여 드립니다. 만약 이웃 마을에 간혹 말로 깨우쳐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이제 별도로 하나의 판본을 새겨 이 여씨설의 뒤에 붙여놓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별도로 노형의 몇 마디 말로 그것을 대신하고, 게다가 대신한 것 가운데 구산이 도에 대해 발명한 한 마디 말을 싣는다면 거의 자기를 굽히고 바른 소리를 아뢰는 뜻이 더욱 갸륵할 것입니다. 어떠하신지요? 만약 그렇다면 대신한 것 가운데는 더욱 숭고하고 높게 보답하고 응하는 일을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伏蒙委撰味道堂記 前者已嘗懇辞 今又辱貶喩 尤切悚畏 熹於文辞無所可取 使為它文 則或可以率意妄言 無問嗤点 今欲発揚先志 昭示後来 玆事体重 豈宜軽以仮人 切望更加三思 無軽其事 則非独小人免於不韙之譏 亦不為賢者失人之累 幸甚幸甚
戒殺子文近建陽印本納上数紙 其間雖渉語怪 然施之盲俗 亦近而易知 不為無助 幸以授鄰里 使張之通塗要津也 呂公之説 龜山嘗論之 亦以為不過喩以利害 其論尤粋而切 向喩元履今附其説於後 今不見 恐是忘記 別紙錄呈 若鄰里間有可説諭者 今別刻一版 附此呂説之後為佳 不然 則別得老兄数語跋之 却於跋中載龜山之語一道発明 庶幾曲終奏雅之意尤善 如何 若然 則跋中更不須説機祥報応事矣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건도 3년(정해; 1167, 38세)에 하숙경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정이천의 말을 빌어 마음을 잡고 단속하는 것은 경(敬)일 따름이며, 오직 경만이 충분히 안으로 마음을 곧게 할 수 있으므로 그 의(義)가 바깥을 반듯하게 할 수 있고, 의가 모이고 기(氣)가 길러질 수 있으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발(發)함이 절도에 맞지 않음이 적다고 하였다. 또한 맹자의 말을 빌어 거경으로써 의(義)를 모으는 근본으로 삼을 것을 말하였다. 또한 이 편지에서는 사당기에 대해 의심할 만한 것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고 변설하였다.
저는 어머니 모시고 조용히 살고 있으면서 여러 가지 사정은 옛날 그대로입니다. 저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바는 보내오신 편지에서 이른 바와 대체로 다를 바가 없고, 그보다 더 심한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어진 그대에게 어찌 조급하고 망령된 병이 있겠습니까? 돌아 보건대 저는 바야흐로 이 병을 근심하면서도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 일부러 이런 병을 가지고서 서로를 절실히 경계시키는 것인지요? 깊이 감복한 나머지 일찍이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았더니, 이런 병통이 있게 된 까닭은 아마도 거경(居敬)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사물을 주재하지 못하고 기(気)가 뜻을 움직여 그렇게 된 것일 따름입니다. 만약 하나를 위주로 하여 둘로 분산되지 않고, 일에 임하고 만물을 접할 즈음에 참된 마음이 앞에 나타나 뚜렷하여 어지럽힐 수 없다면, 또 어찌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정자(子程子)에게 일러 말하기를, “마음은 가장 잡고 있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정자는 “경(敬)하라”라고 말씀하셨고, 또 일찍이, “잡고 단속하는 것은 경(敬)일 따름이다. 오직 경만이 충분히 안으로 마음을 곧게 할 수 있으므로 그 의(義)가 바깥을 반듯하게 할 수 있다. 의가 모이고 기(気)가 길러질 수 있으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발(発)함이 절도에 맞지 않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맹자는 자신의 호연지기(浩然之気)를 기르는 것을 논하면서 의(儀)가 모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계속해서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気)를 기름에 종사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며 억지로 조장(助長)하지도 말라”고 했으니, 또한 거경으로써 의(義)를 모으는 근본으로 삼은 것입니다.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気)를 기름에 종사하라’고 한 것은 ‘경(敬)’을 이른 것이니, “그 마음이 엄연(儼然)하여 항상 일 삼는 것이 있는 것 같이 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그 마음이 엄숙하여 항상 일삼는 것이 있는 것 같이 한다면, 비록 사물이 어지러이 이르고 뒤섞여 올지라도 어찌 나의 앎과 생각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마땅함과 마땅하지 않음, 가함과 가하지 않음의 기미(幾微)가 이미 가슴속에서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러하면 내 마음은 느긋하게 만물의 변화에 대응할 수가 있을 것이니 무슨 조급하고 망령됨이 있겠습니까? 비록 그런 줄은 알고 있지만 아직 그것을 행하는데 힘을 들이지 않았으므로, 바야흐로 혼자서 가만히 자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감히 보내오신 가르침에서 이 점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 인해서 그대에게 묻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유설의 의심나는 부분은 거듭 타일러 깊이 깨우쳐 주심을 입어 개발됨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뒤에 인편으로 설명해주심에 미쳐 아울러 가르침을 구하겠습니다. 아직 이치에 적중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삼가 반복의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덕을 떨침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공명이 삼군(三郡)을 잃은 것은 그 백성을 모두 옮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마도 미쳐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힘이 미친 곳이 이에 그쳤을 뿐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마음 같아서는 어찌 궁함이 있었겠습니까? 이른바 “시랑의 입속에서 곤경에 처하게 한다”는 말을 가지고 보면 또한 어찌 전날 위나라 사람이 그 변경의 백성을 폭압함이 오늘날 오랑케만 같지 못함을 알았겠습니까? 공명이 가까운 공에 급급해하고 작은 이익을 본 것이 아닙니다. 대중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였다면 백성을 옮겨서 돌아갔다 하더라도, 아마도 또한 소열(昭烈)이 기꺼이 백성들의 뜻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흠부가 전해온 논의와 아울러 제가 의심했던 몇 조목들에 대해 지적해 가르쳐 주기를 청하니 한마디로 결론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미도당기는 진실로 제가 감당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날의 간청이 있었던 것이지 감히 말을 꾸며 번거롭게 재삼 욕을 보이려 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들어서 살펴주심을 입지 못하고, 맡겨 깨우쳐 주심을 더욱 부지런히 하시니, 불민한 죄 더욱 중하여 삼가 재배하고 명을 받들고 감히 다시는 사양치 못하겠 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조금의 세월이라도 빌어, 선현의 듯이 보존되어 있는 곳을 미루어 연역할 수 있도록 해서 대략 비슷한 점이라도 보기를 기다린 후에 붓을 대야, 거의 혹시 조금이라도 발명함이 있을 수 있고, 수정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몸가짐을 행하고 관직에 임하는 도리에 대해서 가르침을 내려 주셨는데, 이는 그대가 평소에 배운 바대로 시행하신다면, 세속의 이른바 청렴하고 삼가고 공정하고 근면함은 족히 말할 것도 못될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저는 바야흐로 이 점에 부끄러움이 있는데 어찌 만 분의 일이라도 우러러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사당기에서 추존한 뜻이 매우 좋습니다만, 이른바 “인심과 천리는 없어지거나 멸할 수 없으니 학자들은 이에 대해 백세토록 성인을 기다릴 뿐이다”는 것 역시 훌륭한 말씀입니다만, 단지 또한 따져볼 만한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以)자를 제선생(諸先生)이라고 한 것이 첫 번째 이고, “서서 가르치지 않고 앉아서 의론하지 않으며 말 없이 마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바로 장주의 황당한 설이지 성현들이 주고 받은 본래의 취지가 아니다는 것이 두 번째 이며, 목(穆)․윤(尹)․구양(欧陽)의 문장의 말엽적이고 지엽적인 것을 성학에 견줌에 유(類)로써 견주지 않음이 세 번째 이며, 명도(明道)가 병이 없을 때에는 학자들이 매우 많았는데에도 이제 “일찍이 스승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네 번째입니다. 여정헌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이천이 이미 강의 자리를 거두었으니 아마도 그 도(道)는 당시의 제현(諸賢)들이 미쳐 알 바가 아닌 것이 있었을 것이니, 이 때문에 합하기 어려운 것이지 특별히 두 공이 있고 없음을 경중으로 삼은 것은 아닌데, 이제 “두 공이 죽자 이천이 떠났다”고 하는 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또 “정숙이 스스로 도가 이미 크게 이루어짐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기상이 얕고 좁은 것은 아마도 선생의 뜻이 아닐 것이다”고 한 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세상에 전해지는 요옹(了翁)이 서(序)한 명도의 중용은 바로 여여숙이 지은 것인데, 요옹이 아무래도 오해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그것을 따르니 이것이 일곱 번째입니다. 그 말들을 모아 논하면 그 잘못이 이와 같습니다. 대개 절절하게 비난을 변명하고 말을 해석하는 것을 일삼는다면 또한 선생을 아는 데 있어 천박해질 것입니다. 일찍이 명도의 묘표에 “배우는 자들은 도에 있어서 지향해야할 바를 알고 그런 후에 이 사람이 하는 공부를 보아야 한다. 이를 곳을 안 후에 이 이름이 실정을 잃컬었음을 믿을 수 있다”고 적힌 것을 좋아 했었는데, 이 일은 사람에게 있어 이른 바가 얕고 깊음에 따라 스스로 아는 것이니, 저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찌 입과 혀를 가지고 억지로 다투겠으며, 저들이 안다면 또한 어찌 짧고 긴 것을 비교하기를 기다린 후에 알겠습니까?
기문(記文)에서 일컬어진 겸산(兼山)씨는 이름이 충효(忠孝)인데, 정자(程子)의어록(語録)가운데 이천(伊川)에게 문병한 말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그가 지은 주역에 관계된 책을 보니 상수(象数)의 설(説)에 빠져 있어서 정자의 문하에서는 아주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윤자(尹子)의 문인이 기록한 바로는, “충효는 당론(党論)이 일어난 때로부터는 스승의 문하에 자취를 끊었고, 선생이 돌아갔을 때는 치전(致奠)도 하지 않았고, 문병을 한 말도 충효의 말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하니 그 사람됨과 학문 또한 알만 합니다. 저의 견해와 들은 바는 이와 같습니다. 현명하신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실런지요?
몇해 전에 섭(葉)과 위(魏)가 등용되고 장참(蒋参)이 참여하여 다스리며, 진응구가 함께 추밀지원이 된 일과, 남북의 사신이 서로 폐백을 가지고 왕래한 것, 정월 대보름 밤엔 뜻이 있기 때문에 주와 현에서 등을 켜 놓는다는 것에 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산 속에서 들은 것이 불과 이와 같고, 나(羅)와 이(李)를 제수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듣자하니 상마(相麻)에는 네 가지 일을 경계하고 신칙한다고 하니, 재용을 다스리고, 쓸데 없는 관직을 없애고, 쓸대 없는 병사를 도태 시키는 것인데, 그 나마지 하나에 대해서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일찍을 마(麻)를 보지는 못하고 다만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재상(宰相)이 국용(国用)을 겸하여 담당하고, 참정(参政)과 동지(同知)가 모두 입함(入銜)인 것은, 모두 그것을 들으려 한 것 같습니다. 금성옥진(金声玉振)이 설이 옛 설을 개정하고 베끼고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옳은지 안닌지는 모르겠 습니다. 제갈전에서 의심했던 자질 구래한 것들은 다 기록할 수 없어서 그 큰 것만 책 안에다 적었습니다.
熹奉親屏居 諸况仍昔 所憂所懼 大略不異来教之云 而又有甚者焉耳 躁妄之病 在賢者豈有是哉 顧熹則方患於此未能自克 豈故以是相警切耶 佩服之余 嘗窃思之 所以有此病者 殆居敬之功有所未至 故心不能宰物 気有以動志而致然耳 若使主一不二 臨事接物之際 真心現前 卓然而不可乱 則又安有此患哉 或謂子程子曰 心術最難執持 如何而可 子曰 敬 又嘗曰 操約者 敬而已矣 惟其敬足以直内 故其義有以方外 義集而気得所養 則夫喜怒哀樂之発 其不中節者寡矣 孟子論養吾浩然之気 以為集義所生 而継之曰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 蓋又以居敬為集義之本也 夫必有事焉者 敬之謂也 若曰其心儼然 常若有所事云爾 夫其心儼然粛然 常若有所事 則雖事物紛至而沓来 豈足以乱吾之知思? 而宜不宜可不可之幾 已判然於胸中矣 如此則此心晏然有以応万物之変 而何躁妄之有哉 雖知其然 而行之未力 方窃自悼 敢因来教之及而以質於左右 不識其果然乎否也
遺説所疑 重蒙鐫喩 開発為多 然愚尚有未安者 及後人篇之説并以求教 有未中理 伏惟不憚反复之労 有以振徳之
孔明失三郡, 非不欲尽徙其民 意其倉卒之際 力之所及止是而已 若其心則豈有窮哉 以其所謂困於豺狼之吻者観之 則亦安知前日魏人之暴其邊境之民 不若今之胡虜哉 孔明非急近功見小利 詭衆而自欺者 徙民而帰 殆亦昭烈不肯棄民之意歟 欽夫伝論并熹所疑数絛請求指誨 幸以一言決之
味道堂記誠非浅陋所敢当 故有前日之懇 非敢飾辞以煩再三之辱 既不蒙聴察而委喩益勤 益重不敏之罪 謹再拝承命 不敢复辞矣 然須少仮歳月 使得追繹先志之所存 俟其略見彷彿而後下筆 庶幾或能小有発明 可以仰丐斤削耳
下喩行己臨官之道 此在高明平日所学挙而措之 則夫世俗所謂廉謹公勤有不足言矣 区区乃方有愧於此 其何以仰助万分之一乎
祠堂記推尊之意甚善 而所謂人心天理不容亡減 学者於此百世以俟聖人而已者亦佳 但亦有可議者 如以字謂諸先生 一也 立不教 坐不議 無言心成 乃荘周荒唐之説 非聖賢授受本旨 二也 以穆尹欧陽文章末技比方聖学 擬不以倫 三也 明道無恙時 学者甚衆 今曰未嘗為師 四也 呂正献之未薨 伊川已去講席 蓋其道有非当時諸賢所及知者 是以難合 非持以両公之在亡為軽重 今曰二公薨而伊川去 五也 又曰正叔自謂道已大成 可以無愧 気象浅狭 恐非先生之志 六也 世伝了翁所序明道中庸 乃呂与叔所著 了翁蓋誤 而今又因之 七也 摭其語而論之 其失如此 蓋其大概切切然以辨謗釈言為事 亦浅乎其知先生矣 嘗愛明道墓表有云 学者於道知所向 然後見斯人之為功 知所至 然後信斯名之称情 蓋此事在人随其所至之浅深而自知之 彼不知者豈可以口舌彊争 彼知之矣 則又何待較短長而後喩哉
記中所稲兼山氏者名忠孝 語錄中載其問疾伊川之語 然頃見其易書溺象数之説 去程門遠甚 而尹子門人所記 則以為忠孝自党論起絶迹師門 先生没不致奠 而問疾之語亦非忠孝也 然則其人其学亦可見矣 愚見与所聞如此 不審明者謂之何哉
歳前報葉魏登庸 蒋參預政 陳応求同枢密知院事 南北之使 交贄往来 元夕有旨 州県張灯 山間所聞者不過如此 羅李之除 則未知也 聞相麻以四事戒飭 理財用省冗官汰冗兵 其一則未聞 蓋未嘗見麻 但伝聞爾 宰相帯知国用 參政同知皆入銜 并恐欲聞之 金声玉振之説改定旧説 写呈求教 不知是否 諸葛伝所疑瑣細 不能尽錄 其大者帖於冊内矣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건도 3년(정해; 1167, 38세) 하숙경에게 보낸 편지이다. 앞의 6번째 편지에서 “유설의 의심나는 부분은 거듭 타일러 깊이 깨우쳐 주심을 입어 개발됨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뒤에 인편으로 설명해주심에 미쳐 아울러 가르침을 구하겠습니다”고 하였는데, 이 편지의 첫 부분에서 “지난 번에 보내주신 유설의 후 8편을 보니 의론이 매우 정밀하다”고 한 것을 보면 이 편지가 건도 3년 정해에 6번째 편지에 이어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편지에서는 유설의 내용 중에서 주로 맹자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지난 번에 보내주신 유설의 후 8편을 보니 의론이 매우 정밀하여 제가 미칠 바가 아닙니다. 혹 이전의 선비들이 아직 발명하지 못한 것은 대부분 이미 해설 중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 사이에 오히려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다시 가르침을 구하여 거듭 반복하기를 바라오니 그럴 수 만 있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거실(巨室)’에 대한 설도 이미 붙여 넣었으니 구설에서 갖추지 못했던 것을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설을 다 버리고 오로지 이 뜻만을 주장하면 또 한 곳에 뒤섞어 마음대로 부리는 마음이 있을 듯하니 성현의 용처(用処)가 아닙니다. 맥구읍 사람들의 말 역시 천하의 이치를 진술하여 그 군주를 경계시킨 것일 뿐입니다. 맹자가 “일부(一夫)인 주(紂)를 베었다는 말은 들었다”고 한 말과 같으니 어찌 그 군주를 위협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인용한 것은 “득죄(得罪)” 두 글자는 인군의 몸에 바르지 않음이 있는 것에서 나온 것이지 거실(巨室)을 원망하는 사사로움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한 것이니 또한 이치에 해로움이 없지 않겠습니까? 임소영(林少穎)은 배진공(裴晉公)이 “어찌 조정의 힘이 사명(死命)을 쥐고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조정의> 처치(処置)가 마땅함을 얻어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었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으니 또한 매우 잘한 것입니다. 당시에 다 실을 수 없었던 것은 찾아서 마땅히 더해 넣어야 그 뜻이 갖추어질 뿐입니다.
“인의(仁義)” 두 글자는 일찍이 서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제 “인(仁)으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의로써 몸을 지킨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리하고 막고 끊겨 병통이 작지 않을 것 같습니다. “효와 공손함은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고 했는데, 이것은 효와 공손함이 바로 인의 도를 미루어 행하는 근본이라는 말이니 인(仁)자는 두루 모든 것에 통하는 것으로 오로지 효와 공손함 한가지 일만을 주로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루어 행하는 근본은 여기서부터 시작될 따름이니, ‘위(為)’자가 미루어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내(乃)’자를 상대하여 글을 세우니 아마도 유자(有子)의 뜻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자는 “인(仁)을 행함을 논하면 효와 공손함을 근본으로 삼고, 성(性)을 논하면 인(仁)을 효와 공함의 근본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이 말이 매우 훌륭합니다.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뛴다’는 말은 논한 바가 좋습니다. 그러나 이(李)씨의 설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제 그 아래 주를 붙이면 이치가 자명해질 것입니다. 그 사이의 구절은 의미가 조금 불편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정정해서 ‘뛰듯이 하다’를 ‘좌우로 근원을 막다’로 ‘그 덕을 신명으로 삼다’를 ‘조용히 도에 적중하다’로 하려고 하는데 어떠신지요?
“수레로 사람을 건너준다”는 설은 제가 스승께 들은 것과 서로 표리가 되므로 다만 구지 간사한 사람을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성현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인인(仁人) 군자(君子)의 털끝만큼의 차이일 뿐이니 간사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종류에 대해서는 조금씩 정밀한 관찰을 더하는 것이 좋습니다. ‘벽제(辟除)’라고 할 때의 벽(辟)은 바로 조씨본의 설로서 위 아래 문장의 뜻과 서로 발명이 되니, 수레를 내주어 사람을 건네준 것과는 서로 정 반대가 됩니다. 이 단락의 주석은 근래에 대략 조금씩 고쳐서 예전의 것보다 조금 자세해 졌습니다. 대략 “혜(恵)는 사사로운 은혜와 작은 이(利)를 이르고, 정(政)은 공평(公平)․정대(正大)한 체통과 기강(紀綱)․법도(法度)의 시행(施行)이 있는 것이다. 은혜로우나 정치를 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인한 마음과 인하다는 명성이 있더라도 확충하여 선왕의 도를 행할 수 없다”고 했을 뿐이며, 또 “10월에 다리를 이루는 것은 대개 때가 장차 추워져서 백성들로 하여금 도보로 건너게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 농사일이 이미 끝나서 백성들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선왕의 정치는 자세함과 큼이 모두 갖추어 시행되므로 어떤 일이든 민심과 합치되거나 천리에 순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그 공평․정대한 체통과 기강․법도의 시행이 있는 것이다. 비록 미세한 사이라도 또한 남은 한이 없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자산이 미칠 바이겠는가? 제갈무후가 촉땅을 윤택하게 함에 관부와 차사․교량과 도로가 잘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어 백성들이 수고롭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을 다스림에는 큰 덕을 가지고 하고 작은 은혜를 가지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 그 또한 거의 정치하는 방법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또 “군자가 선왕의 정치를 시행하여 작거나 큰 일이 다 시행되지 않음이 없게 하면 은혜가 미치는 것 역시 이미 넓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출입하는 때에 비록 사람들을 벽제(辟除)하여 자기를 피하게 하더라도 상하의 구분이 진실로 마땅할 것이니, 하필이면 뜻을 굽히고 사사로움을 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나온 것을 알게한 후에 은혜를 베풀겠는가? 더군다나 그 많은 인민들을 또한 어찌 사람마다 일일이 구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연고가 있어 떠난다”함은 대의가 연계된 말이 아니니, 깊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하가 나라를 떠나는 것은 그 연고가 하나의 까닭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친척이 연좌된다”고 한다면 선왕의 제도에 부자와 형제의 죄가 서로 미치지 않았으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옛날엔 간언을 행하고 들어주었는데, 지금은 연고가 있어 떠나니 임금이 또 그들에게 예를 가한다면 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악의(楽毅)가 연(燕)을 떠난 것이 거기에 가깝습니다.
“예의(禮義)가 아닌 예의”는 논한바가 좋습니다. 다만 그 마음이 모두 다른 풍속에 있어서 이름이 그러하다고 여긴다면 모두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대개 거기에서 가림이 정밀하지 않은 데에도 선(善)하다고 여겨 그것을 행하는 것은 지언의 이른바 “정에 연하여 뜻을 세우면 스스로 정대한 덕을 말미암았다고 여기지만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잘못과 자산(子産)을 논하면서 간사한 사람을 지적한 것이 서로 유사 합니다.
맹자가 왕환을 비루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예가 이미 그러하다면 이때를 당하여 비록 그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한 그와 함께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왕환을 비루하게 여겨 싫어한 일은 조문을 나가는 곳에서 이미 보였으니 이 장의 의도는 조정의 예를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때의 일이 같지 않아도 이치는 각각 마땅함이 있습니다. 성현의 말씀은 구애되는 바가 없는데, 어찌 중인을 부끄럽게 여김이 지나치게 심하여 처음부터 이것을 가지고 대답했겠습니까? 바로 조정의 예를 밝히고 뭇사람들의 잘못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상이 근심하거나 기뻐하면 역시 근심하거나 기뻐하셨다”고 하였는데, 이 뜻은 집해의 설명이 처음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은데, 세밀하게 완미함에 미쳐보면 말이 뜻에 미치지 못한 잘못입니다. 이제 대략 개정해서 “순임금이 상이 찾아온 것을 기뻐한 것은 그가 장차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다만 순의 마음에 그가 근심하는 것을 보면 역시 근심하였고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 역시 기뻐하였다. 이제 그가 기뻐하면서 오는 것을 보았으므로 역시 기뻐한 것이다. 비록 그가 장차 자신을 죽이려고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아우일 뿐이니 형제간의 우애를 끝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혹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운운...... ‘내가 선생께 들으니 「형제간의 친함은 천리 인륜이니 대체로 본연의 우애가 있다. 비록 불령한 사람이 그 사이에서 거만한 이리처럼 싸우고 다툴지라도 친애하는 본심은 없어지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오직 성인만이 성(性)을 다하므로 전체가 이 이치일 수 있으므로 비록 예기치 않게 거스르는 변화를 만나 거의 그 몸이 죽게 되더라도 이 마음의 담담함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천 선생의 이른바 운운......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일 뿐이다. 혹자가 말한 것은 진실로 좋지만 성인의 마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말하면 조금씩 다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망(罔)’은 뜻이 ‘덮어 씌워 가림’이고, ‘득지방(得之方)’은 뜻이 ‘술수(術数)’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道)가 아닌 것으로써 터무니없이 속이는 것이 유독 술수가 아니겠습니까? 형을 사랑하고 물고기를 놓아준 것은 그 방(方)[도(道)]으로써 속인 것입니다. 저자거리에 범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증참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도가 아닌 것으로써 터무니없이 속이는 것입니다.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군자는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짐작하지 않기 때문에 이치에 있는 말로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리를 밝힘이 분명하기 때문에 저들이 이러한 도가 없는 말을 가지고 온다면 어찌 덮어 씌워 가릴 수 있겠습니까?
‘애(艾)’는 ‘예(乂)’라고 읽는데, 설문에서는 “풀을 베는 것이니, 丿와 乀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좌는 ‘ノ’이고 우는 ‘乀’이니 풀을 베는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육서 중에서 지사(指事)의 등속이 됩니다. ‘스스로 다스린다’느니 ‘선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모두 베고 끊어버려 스스로를 새롭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징예(懲乂)’니 ‘창예(創乂)’니 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취한 것으로 다시 저것을 인용해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금성옥진(金声玉振)’의 설은 마땅치 않습니다. 금성(金声)은 박학의 일이고, 옥진(玉振)은 돌이켜 요약하는 것입니다. 돌이켜 요약함이란 처음과 끝의 차이를 보지 않아도 처음과 끝의 이치가 거기에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활쏘기가 끝나고 과녁을 꿰뚧은 화살을 보면 그 공교한 힘을 보지 않아도 공교한 힘을 모두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에서 또 활쏘기를 가지고 비유한 것입니다. 만약 금성을 가지고 처음을 융성하게 하고 끝을 감쇄하게 하여 박문약례(博文約礼)의 일을 함께 거론한다면 옥진은 쓸데가 없어질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와 같지만 아무래도 미진한 것 같아 다시 생각해 보기를 기다립니다.
‘상우’장에서의 이른바 ‘입으로는 선생의 말을 하면서 행실은 저자거리의 사람처럼 한다.’는 것은 맹자의 상우장에서 취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당세를 논한 것은 바로 그 언행의 곡절과 정미함을 알고자 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두 뜻을 겸하여도 말할 수 없다.
‘오동나무(桐)와 재나무(梓)’에 대한 설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굿이 몸과 마음을 두 부분으로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또 나무뿌리를 가지고 비유하면 지나치게 구애되고 막힌 것 같습니다. 대개 몸을 말하면 마음은 거기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일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제 다만 이치와 의리를 가지고 마음을 기른다고 한다면 덕이 높고 몸은 편안해 질 것이니 뜻도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랑질(狼疾)’에 대한 해석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옛날 글자들은 대체로 통용이 되었으므로 오자(誤字)을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맹자 중에 ‘유(由)’ 자와 ‘유(猶)’ 자는 항상 호환되어 사용합니다.
‘천작(天爵)’에 대한 두 개의 설명 중 하나는 아주 좋은데, 다른 하나는 적당하지 않은데, 역시 「집해」의 설명이 스스로 명백하지 않아 의심을 불러 일으킨 점이 있습니다. 이제 그 답글을 다음과 같이 고쳤습니다. “또한 그 마음이 보존하고 있는 것이 어떠한가를 볼 뿐이다. 만약 인(仁)을 가장해서 이익을 요구하는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 천작을 버리지 않는 사람도 또한 장차 자기가 얻은 인작을 견고하게 할 뿐이다. 혹시라도 요행이 망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지만 비루하고 인색한 사사로움에 근본하고 있다면 어찌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반드시 본디 가지고 있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진실로 알고 점차 평소 인을 가장해서 이익을 요구하는 사사로움을 잊는다면 거의 괜찮을 것이다.” 대체로 인을 가장하는 것과 인을 이롭게 여기는 것은 같지 않으니 반드시 분명하게 분석하여 차이가 나지 않은 후라야 괜찮을 따름입니다. 역전에서 성인의 공평함과 후왕(後王)의 사사로움을 논한 것 역시 이 뜻입니다. 비괘(比卦) 단사(彖辞)의 주(注) 가운데 보인다.
‘향도(郷道)’와 ‘지인(志仁)’은 두 개의 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중용에서 “도를 닦되 인으로써 해야한다”고 하였고, 맹자는 “인(仁)에 뜻을 두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위 문장의 ‘도를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해석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그 군주를 이끌어 도(道)에 합하게 하여 인(仁)에 뜻을 두게 하기를 힘쓸 뿐이다.”고 했는데, 역시 인에 뜻을 두는 것이 도에 합하게 됨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함’은 여러 선생들의 말에서 이미 다한 것입니다. 의가 삶보다 중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야기(夜気)’를 휴식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옳지만 적연하게 아직 발(発)하지 아니한 때라고 여긴다면 잘못입니다. 혼(魂)이 사귀어 꿈을 꾸고 온갖 느낌이 뒤섞여 어지러운데 어찌 아직 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이 또 어찌 오로지 몽매간에만 있겠습니까? 갓난 아기의 마음을 정자(程子)는 오히려 발하였지만 중(中)에서 멀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야기(夜気)란 다만 “돌이켜 천지의 마음을 본다”는 기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미발(未発)의 중(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있음도 없고 있지 않음도 없는 것입니다.
‘이목(耳目)의 기능이 곧 마음의 기능이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목과 심(心)은 각각 주관하는 것이 있으니 어찌 똑같이 하나의 기능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보고 들음에 얕은가 막히는가는 방법이 있고 마음의 신명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는 사이에 반드시 마음으로 제어한 연후에 그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목의 욕심을 좇는데 마음이 그것을 주재하지 못하면 사물에게 이끌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상채(上蔡)가 논한 안자와 증자가 공부한 곳을 살펴보면 ‘먼저 그 큰 것을 세운다’는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서경에서 “귀와 눈에 사역당하지 말아 온갖 법도를 바르게 하소서.”라고 한 것도 이 뜻입니다.
예(羿)와 장인에 대해 설명한 이치는 매우 훌륭합니다만 단지 문의가 번잡하고 두서가 지나치게 많아 윤씨의 설명이 명백하고 두루 다한 것만 같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가 활 당기는 율(率)과 대장이 규구(規矩)로써 하는 것과 같이 한 다음에야 지극해진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예와 대장이 활당기는 율과 규구를 가지고 있음에 저절로 구별되는 것으로 맹자의 뜻과는 정히 서로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규구와 활당기는 율이라면 단지 뭇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는 법이지, 또한 말이 지극해지는 원인은 아닙니다.
구양공(欧陽公)이 세종(世宗)을 논한 것은 잘못이 없지만, “맹자(孟子)가 세상을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라고 여긴 것은 의리에 해가 됩니다. 성현이 말을 함에 있어 어찌 그 일이 행할만한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를 헤아리지도 않고서 우선 즐길만한 논의라고 하여 세상 사람들이 전해 가며 이야기하고 길에서 지껄이는데 이바지할 따름이겠습니까? 대개 반드시 이런 이치가 있은 뒤에 이런 마음이 있고, 이런 마음이 있은 뒤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이고,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이런 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단계의 서로 관계됨은 마치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필요로 하여 애초부터 잠시도 떠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요(皐陶)가 잡는 것과 순임금이 도망가는 것은 천리와 인륜의 지극한 것으로 성인의 마음에 반드시 행하려는 것인데, 어찌 지어낸 이야기이겠습니까? 성인이 일을 돌아봄에 있어 자신의 뜻과 꼭 같지 못할 경우가 있을 때는 경중(軽重)과 완급(緩急)의 사이에서 권도(権道)를 쓰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심정에 바탕하여 법을 제정하여 사람 사람마다 도모할 수 있게 만들었으므로 팔의(八議)의 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권도라는 것 또한 친한 사람을 친하게 여기고 귀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큰 법도를 떠나지 않고, 처음부터 천리(天理)나 인심(人心)의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구양공(欧陽公)이 반드시 바른 이치를 공허한 말로 여기어 오직 권도만 따르려고 하는데, 불행히도 털끝만큼의 차이라도 있으면 바른 것을 잃지 않는 사람이 드뭅니다. 이런 뜻은 귀구(龜山)도 일찍이 논한 적이 있으니 구산집 제 21권에 보입니다.
‘뛰듯이 한다’는 것은 바로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큰 고통에서 벗어나 갑자기 나아간다는 뜻을 형용한 것입니다. ‘뜻에 감촉하는 바가 있어서 움직인다’는 말은 도리어 친절하지 않습니다. ‘감촉’이라는 두 글자는 나름대로 훌륭하지만 다만 조금 갑자기 나아간다는 뜻이 있을 뿐입니다. 끌어도 발(発)하지 않으니, 그 생각이 반드시 깊습니다. 생각이 이미 깊으면 감촉하는 바가 있어서 움직이니 그 나아감은 반드시 빠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면 뜻이 조금은 갖추어진 것 같은데 어떠하신지요?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만일 그러한 사람이 아니면’이라고 한 하나의 구절이 통하지 않으니 이 장의 두 가지 일이 또한 수습하여 결단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자장(子臧)과 계찰(季札)은 절개를 지킨 사람이니 아마도 사물에 뜻을 사역당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몸에 돌이켜보아 성실하다’는 것은 체득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 온전함을 체득할 수 있음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로 고치려 함. ‘서(恕)를 힘써서 행한다’는 것은 이미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함이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미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하는 방법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로 고치려 함. ‘행하면서도 밝게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룬 바가 지극하지 못한 것입니다. ‘치지(致知)를 먼저하지 않음’으로 고치려 함.
‘기계(機械)와 변사(変詐)의 공교로운 짓’은 논한 바가 매우 합당합니다만 다시 다음과 같은 몇 마디를 더하고자 합니다. “때를 타고 편리함을 좇아 그 욕심을 만족시키는 짓은 사람들이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인데, 자기는 결국 스스로 꽤를 얻었다고 여기니 이것은 오직 이익이 있는 것만을 알 뿐이니 어디에 다시 그 부끄러운 마음을 쓰겠는가?” 이와 같이 하여야 비로소 그 실정을 다하는 것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람의 마음까지도 또한 모두 해(害)가 있는 것이다.”는 말에 대해 조씨는 “사람의 마음이 이욕(利欲)에 의해 해를 당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매우 좋습니다. 제 생각엔 기갈(饑渇)이 맛을 아는 성(性)을 해친다면 음식이 비록 달지 않더라도 또한 달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욕이 그 인의(仁義)의 본성을 해친다면 하는 바가 비록 불가한 것이라도 또한 가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보내주신 편지가 말이 많고 이치가 번거로우니 아무래도 맹자가 비유를 좋게 여긴 본지가 아닌 듯 싶습니다.
‘중(中)을 잡는 데는 마땅히 때를 알아야 하는데, 진실로 그 때를 잃는다면 또한 중(中)을 잃는 것이다.’는 이 말은 아마도 합당치 않은 듯합니다. 정자(程子)는 이르기를, “자막(子莫)이 중(中)을 잡는 것은 양주(楊朱)나 묵적(墨翟) 보다는 근리(近理)하지만, ‘중(中)’이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자막이 중정함을 잡는다는 것은 순임금 탕(湯)임금 우(禹)임금의 집중(集中)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마땅히 아신다면 이 주장을 아실 것입니다. 대개 성인은 의리가 정밀하고 인(仁)이 푹 익어 있으므로, 중을 잡으려는데 뜻을 두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집중(集中)한다는 이름은 있지만, 실제로는 일찍이 잡은 것이 없습니다. 중(中)하지 않은 때가 없기 때문에 또 시중(時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학문이 지극하지도 못하고 이치가 밝지 못하면서 한갓 이른바 ‘중(中)’만을 구하여 잡고자 하여 그것만 잡고 있다면 이른바 ‘중’이란 것이 과연 어떤 모양이길래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잡을수록 더욱 잃게 될 것입니다. 자막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미 ‘중’을 알지도 못하면서 저 시중(時中)만을 사모하여 때에 따르는 것을 중이라고 여기려고 하니, 저는 그의 잘못이 너무 멀리 흘러가 거리낌이 없는 소인이 되고야 말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중용(中庸)에서는 다만 착함을 택하라고 했지, 중(中)을 택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서는 “중용을 택한다”고 하였고, 또 반드시 이어서 ‘한 가지 착함을 얻어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선(善)의 실마리는 구할 수 있으면서 중의 체(体)는 알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했겠습니까? 오직 선(善)에 밝으면 중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과 의는 도의 전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참 좋습니다. 또 ‘인에 거처하면서 의를 말미암을 수 있으면 이로 말미암아 미루어 나아감에 가는 곳마다 도 아님이 없다’고 했는데 또 인의 외에 도리어 이른바 도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어찌 전체가 될 수있겠습니까? ‘친한 이를 친히 하고 더하기를 은혜로써 한다’는 것은 이자(夷子)의 베풂에 친한 사람을 말미암아 시작하는 병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친한 이를 친히 함에 은혜가 있는 것은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한 이를 친히 하고자 하면서 은혜에 돈독하지 않으면 오히려 병통이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묵씨(墨氏)는 유자(儒者)의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구분한다고 하여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것이 도리어 돈후하지 아니함이 있다고 여깁니다. 석씨(釈氏)는 유자(儒者)의 백성을 사랑함이 물(物)을 사랑함을 구분한다고 하여 인민(仁民)이 도리어 지극하지 못함이 있다고 여깁니다.
‘산길에 사람들이 다니는 곳’은 굿이 고자를 위해 발한 것이라고 말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그러하니 한 순간이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방벽하고 사치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군자의 큰 도를 듣지 못했다’는 말은 정(情)을 멋대로 하여 망령되이 한 말로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다만 세력을 믿고 사람을 능멸한 것 뿐만이 아닙니다.
‘향원’에 대한 의론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공자가 일컬은 숫자만 채우는 신하라는 것은 오히려 좇지 않는 바가 있을 수 있으니 풍도(馮道)의 무리로 말할 것 같으면 좇지 않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허락하되 숫자만 채우는 신하로써 함이 이미 그 분수를 지났으니 다시 해 보심이 어떠하실 런지요?
昨承示及遺説後八篇 議論甚精 非浅陋所至 或前儒所未発 多已附於解中 其間尚有不能無疑者 复以求教 更望反复之 幸甚 巨室之説亦已附人 可以補旧説之末備 然廃旧説而専主此意 則又似有牢籠駕御之心 非聖賢用処也 麦丘邑人之語 亦陳天下之理以警其君耳 如孟子聞誅一夫紂矣之語 豈可謂脅其君哉 引之欲証‘得罪二字出於人君之身有不正 而非巨室怨望之私也 莫亦無害於理否 林少穎引斐晉公豈朝廷之力能制其死命哉 宜以処置得宜 能服其心之語為証 亦甚善 当時不能尽載 尋当添人 其意乃備耳
仁義二字未嘗相離 今曰 事親以仁 守身以義 恐捗支離隔截 為病不細 孝弟也者 其為仁之本歟 此言孝弟乃推行仁道之本 仁字則流通該貫 不専主於孝弟之一事也 但推行之本自此始耳 為字蓋推行之意 今以対乃字立文 恐未詳有子之意也 程子曰 論行仁則以孝弟為本 論性則以仁為孝弟之本 此語甚尽
手舞足蹈 所論得之 然李説亦有不可廃者 今注於其下 則理自明矣 其間旬意小有未安処 欲更定躍如也為左右逢原 ー神明其徳為従容中道 如何
乗輿済人之説 与熹所閠於師者相表裏 但不必言姦人 聖賢所警 正為仁人君子豪釐之羞爾 姦人則尚何説哉 諸若此類 稍加密察為佳 辟除之 辟 乃趙氏本説 与上下文意正相発明 蓋与舎車済人正相反也 此段注釈近略稍改 稍詳於旧 略云 恵謂私恩小利 政則有公平正大之体 綱紀法度之施焉 恵而不知為政者 亦有仁心仁閠 而不能拡充以行先王之道云爾 又云 十月成粱 蓋時将寒沍 不可使民徒渉 又農功既畢 可以役民之時 先王之政細大具挙 而無事不合民心順天理 故其公平正大之体綱紀法度之施 雖繊悉之間亦無遺恨如此 豈子産所及哉 諸葛武侯之洽蜀也 官府次舎橋粱道路莫不繕理而民不告労 蓋其言曰 治世以大徳不以小恵 其亦庶幾知為政矣 又云 君子能行先王之政 使細大之務無不畢挙 則恵之所及亦已広矣 是其出人之際 雖辟除人 使之避己 亦上下之分固所宜然 何必曲意行私 使人知己出然後為恵 又況人民之衆 亦安得人人而済之哉
有故而去 非大義所係 不必深為之説 臣之去国 其故非一端 如曰親戚連坐 則先王之制 父子兄弟罪不相及 亦豈有此事哉 但昔者諫行言聴 而今也有故而去 而君又加礼焉 則不得不為之服矣 楽毅之去燕近之
非横義之礼義 所論善矣 但以為其心皆在於異俗而邀名 則不必皆然 蓋有択焉不精 以為善而為之者 知言所謂縁情立義 自以為由正大之徳而不之覚者也 此句之失与論子産而指姦人相類
孟子鄙王驩而不与言固是 然朝廷之禮既然 則当是之時 雖不鄙之 亦不得与之言矣 鄙圧王驩事於出弔処已見之 此章之意 則以朝廷之礼為重 時事不同 理各有当 聖賢之言無所苟也 豈為愧衆人為已甚而始以是答之哉 正所以明朝廷之礼而警衆人之失也
象憂喜亦憂喜 此義集解之説初若不明 及細玩之 則詞不逮意之罪也 今略改定云 言瞬喜象之来 非不知其将殺己 但舜之心見其憂則亦憂 見其喜則亦喜 今見其喜而来 故亦為之喜 蓋雖明知彼之将殺己 而自我観之 則吾弟耳 兄弟之愛終豈能忘也哉 或曰云云 愚間之師曰 兄弟之観 天理人倫 蓋有本然之愛矣 雖有不令之人傲狼闘鬩於其間 而親愛之本心則有不可得而磨滅者 惟聖人尽性 故能全体此理 雖遭横逆之変 幾殺其身 而此心湛然 不少揺動 伊川先生所謂云云 正謂此耳 或者之云固善 然恐非所以語聖人之心也 如此言之 莫稍尽否
罔訓蒙蔽 得之方訓術数 恐未是 罔以非其道者 独非術数耶 蓋愛兄放魚 欺以其方也 市有虎 曾參殺人 罔以非其道也 井有仁焉亦是 君子不逆詐 故可欺 然燭理明 故彼以無是道之語来 則豈得而蒙蔽哉
艾読為乂 説文云 芟草也 従ノ乀 左ノ右乀 芟草之状 故六書為指事之属 自艾淑艾 皆有斬絶自新之意 懲乂創乂 亦取諸此 不得复引彼為釈也
金声玉振之説未安 金声 博学之事 玉振 則反約矣 反約者 不見始終之異 而始終之理具焉 如射畢而観破的之矢 不見其巧力而巧力皆可見 故下文又以射譬之 若以金声始隆終殺兼挙博約之事 則玉振無所用矣 愚意如此 亦恐未尽 俟更思之
尚友章所謂口道先王語而行如市人者 恐非孟子尚友之所取 以論其世者 正欲知其言行之曲折精微耳 兼兩意説不得
桐梓之説甚善 但不必分身心為兩節 又以木根為譬 似太拘滞 蓋言身則心具焉 壱是皆以脩身為本是已 今但云以理義養其心 則徳尊而身安矣 意亦自見
狼疾之訓甚善 然古字多通用 不必言誤也 如孟子中由猶二字常互用之
天爵二説 其一極善 其一未安 亦由集解之説自不明白 有以致疑 今改其答辞曰 亦観其心之所存者如何耳 若仮仁要利之心不去 則夫不捨其天爵者 亦将以固其所得之人爵而已 是或可以幸而不至於亡 然根於鄙吝之私 是豈可以入尭舜之道哉 必也真知固有之可貴 而浸忘其平日仮仁要利之私 則庶乎其可矣 大抵仮仁与利仁不同 須暁析不差 然後可耳 易伝論聖人之公後王之私亦是此意 見比卦彖辞注中
郷道志仁不可分為二事 中庸曰 修道以仁 孟子言不志於仁 所以釈上文不郷道之実也 又云 務引其君以当道 志於仁而已 亦言志仁之為当道爾 舎生取義 諸先生説已尽之矣 義重於生 不仮言也
夜気以為休息之時則可 以為寂然未発之時則恐未安 魂交而夢 百感紛紜 安得為未発 而未発者又豈専在夢寐間耶 赤子之心程子猶以為発而未遠乎中 然則夜気特可以言复而見天地心之気象耳 若夫未発之中 則無在而無乎不在也
耳目之官即心之官也 恐末安 耳目与心各有所主 安得同為一官耶 視聴浅滞有方而心之神明不測 故見聞之際必以心御之 然後不失其正 若従耳目之欲而心不宰焉 則不為物引者鮮矣 観上蔡所論顔曾下功処 可見先立乎其大之意矣 書之不役耳目 百度惟貞 亦此意也
羿匠之説理則甚長 但恐文意繁雑 頭緒太多 不如尹氏之説明白而周尽 故云必如羿之彀率 大匠之規矩 然後為至 則是羿与大匠自別有彀率規矩 与孟子意正相戻矣 若是所以教人之規矩彀率 則只是衆所共由之法 又非所以言至也
欧陽公論世宗之事未為失 但以孟子為為世立言之説則害於理矣 夫聖賢之立言 豈不度其事之可行与否而姑為是可喜之論 以供世之伝誦道説而已哉 蓋必有是理然後有是心 有是心而後有是事 有是事然後有是言 四者如形影之相須 而未始須臾離也 皐陶之執 舜之逃 天理人倫之至 聖人之心所必行也 夫豈立言之説哉 聖人顧事有不能必得如其志者 則軽重緩急之間於是乎有権矣 故縁人之情以制法 使人人得以企而八議之説生焉 然其所謂権者 是亦不離乎親親貴貴之大経 而未始出於天理人心之外也 今必以正理為空言而唯権之為狥 不幸而有毫釐之差 則不失於正者鮮矣 此義龜山亦嘗論之 見集第二十一巻
躍如也 正是形容懸解頓進之意 意有所感触而動却不親切 感触二字自佳 但少頓進意耳 引而不発 其思也必深 思之既深 則有所感触而動 其進也必驟矣 如此而言 意似稍備 如何
好名之人如此説甚善 但苟非其人一句不通 而此章両事亦無収拾結断処 子臧季札 守節者也 恐其不可謂役志於物
反身而誠 言能体而有之者如此 欲作言能体其全者如此 強恕而行 言既失而反之者如此 欲作言既失而所以反之者如此 行之不著者 所造未至也 欲作不先致知也
機変之巧所論甚当 更欲増数語云 乗時逐便以快欲 人所甚羞而己方且自以為得計 蓋惟知有利而已 何所复用其愧耻之心哉 如此乃尽其情 如何
人心亦皆有害 趙氏謂人心為利欲所害 此説甚善 愚謂饑渇害其知味之性 則飲食雖不甘 亦以為甘 利欲害其仁義之性 則所為雖不可 亦以為可 来喩辞費而理煩 恐非孟子長於譬喩之本旨也
執中当知時 苟失其時 則亦失中矣 此語恐未安 蓋程子謂子莫執中比楊墨為近 而中則不可執也 当知子莫執中与舜禹湯之執中不同 則知此説矣 蓋聖人義精仁熟 非有意於執中 而自然無過不及 故有執中之名 而実未嘗有所孰也 以其無時不中 故又曰 時中 若学未至理未明而徒欲求夫所謂中者而執之 則所謂中者 果何形状而可執也 殆愈執而愈失矣 子莫是也 既不識中 乃慕夫時中者而欲随時以為中 吾恐其失之弥遠 未必不流而為小人之無忌憚也 中庸但言択善 而不言択中 其日択乎中庸 亦必継之曰 得一善 豈不知善端可求而中体難識乎 夫惟明善則中可得而識矣
仁義者道之全体 此説善矣 又云能居仁由義 則由是而推焉 無所往而非道 則又似仁義之外猶有所謂道者矣 是安得為全体哉 親親而加以恩 似有夷子施由親始之病 夫親親之有恩 非加之也 欲親親而不篤於恩 不知猶有病否 大抵墨氏以儒者親親之分仁民 而親親反有不厚 釈氏以儒者仁民之分愛物 而仁民反有未至
山徑之蹊 恐不必言為高子発 人心皆然 一息不存 則放僻邪侈之心生矣
不聞君子之大道者 肆情妄作 無所不至 不但挟勢陵人而已
郷原之論甚佳 但孔子所称具臣者 猶能有所不従 若馮道之徒 則無所不従矣 許以具臣已過其分 有以更之 如何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건도 3년(정해; 1167, 38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주로 하숙경의 유설 및 제갈공명과 관련된 여러 일들을 논하였는데, 모두 하숙경에게 답한 6번째 편지와 7번째 편지를 이어서 보낸 것이다. 또 이 편지에서는 “요사이 일 중에 한 두 가지 전해 들리는 소문이 축하할 만합니다만 큰 병이 새로 물러감에 더욱 몸을 양생하여 장차 보호하려고 하는데 좌우의 한 두 공들이 낮 밤으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면서 인도함에 어떤 말을 할지 모를 뿐입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큰 병이 새로 물러났다”는 것은 용대연(龍大淵)과 증적(曾覿)이 총애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다가 탄핵을 받아, 용대연은 절동총관(浙東總管)으로, 증적은 복건총관(福建總管)이 되어 나간 것을 가리키는데, 이 일이 건도 3년 정해 봄에 있었던 것을 보면 이 편지 역시 정해 봄에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어머니 곁에서 보잘 것 없이 강학을 하면서 사색하기를 감히 그만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소견이 끝내 명료하지 못하여 동정어묵(動静語黙)의 사이에 허물과 더러움이 산처럼 쌓여, 군자를 만나 씻을 방법을 도모할 것을 생각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금년에 여기서 동인(同人)인 임씨(林氏) - 이름은 용중이고 자는 택지이다. - 를 얻어 서로 더불어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조행이 매우 신중하고 사색하는 것은 더욱 정밀하여, 크게 유익한 바가 있으며, 저보다 나을 뿐만이 아닙니다. 흠부(欽夫)에게서도 때때로 서신을 받아 깨우쳐 계발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는 강론하는 것이 날로 조예가 깊어져 갑니다. 지난번에 보내 주신 유설(遺説)의 몇 부분을 흠부에게 부쳐 보냈더니, 이렇게 회답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너무 지나치지 않나 의심을 했는데, 자세히 생각해 보니, 하나 하나가 모두 다 그러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과 지혜 없는 사람의 차이가 어찌 삼십 리에 그치겠습니까? 이제 기록한 것을 올려 보내니 그 외의 반복한 답문과 다른 기서(記序) 등의 문장은 오히려 많으니 백수(伯修)가 길만 재촉한다면 베끼는데 있어 한이 되지는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전에 이 편지에서 가르침을 청한 것이 그대의 뜻에는 어떠하셨는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설이 이와 같음에 불과 하지만 유지하는데 힘쓰지 않아 아무래도 말하는 사이에 병통이 없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적하여 가르쳐 주시기를 깊이 바라니 스스로 경개하여 고칠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지난 번 일찍이 위에서 부여한 아부(迓夫)가 당도하는 날에 몇 사람을 빌려와 서로 모여 몇 일의 계획을 세웠는데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나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 생각건대 이 사람이 이미 당도해서 오래 머물 수 없더라도 존형께서는 이미 도를 이루신지 오래일 것입니다. 혹 이미 관직에 이르렀어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서너 집이 멀리 있고 험하게 가로막혀 있어 서로 소식을 들을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깊이 한탄할 만합니다.
무후전은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다시 의론할 만한 곳이 있으셨는지요? 의심나는 것에 대해 질문했던 몇 가지 조례가 조금 차이남에 편지로 흠부(欽夫)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모두 옳다고 생각 됩니다. 다만 저는 끝부분에 대략 실려 있는 제갈담(諸葛瞻) 및 아들 상이 죽은 구절의 일을 전하여 선(善)을 선(善)하게 여기는 것과 자손의 의리를 보이고자 하는데, 흠부는 도리어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생각건대 담(聸)이 장상을 겸임하고서도 일찍이 황호를 버리지 못하고, 또 몸을 받들고 버리지 못하면서도 그 군주가 깨닫기를 바란 것은 불초하다고 이를만 합니다. 이 법은 매우 엄하므로 생각해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다만 흠부는 천지의 마음을 다시 볼 것을 극론하였을 뿐이므로 야기(夜気)를 가지고 비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야기가 바로 돌아오는 곳이므로 진실로 곧바로 천지의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 중의 뜻에서도 애초부터 복(复)이 천지의 마음이 된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노형께서는 “사람은 모두 이 선의 근본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떳떳한 덕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흠부의 설은 별지에 보이는데, 저는 아무래도 노형의 이 말이 아직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은 듭니다. 다만 ‘좋아함’이 하고자할 만한 것(可欲)이 되고 ‘떳떳한 덕’을 하고자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잘못임을 모를 뿐입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선(善)의 근본이 발(発)한 것입니다. 떳떳한 덕이란 여러 선(善)의 이름입니다. 선의 근본이란 상대가 없는 선입니다. 여러 선은 상대가 있는 선입니다. 상대가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말한 것이고, 상대가 있다는 것은 일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하고자할 만한 선은 바로 선의 단서로서 일을 가지고 말하면 그 잘못이 멀어집니다. 이 두 조목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주시기를 바라니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서산집은 읽어보니 의심스러운 부분과 믿을만한 부분이 반반이니 우선 여기에 두고 확실한 인편을 기다립니다.
요사이 일 중에 한 두 가지 전해 들리는 소문이 축하할 만합니다만 큰 병이 새로 물러감에 더욱 몸을 양생하여 장차 보호하려고 하는데 좌우의 한 두 공들이 낮 밤으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면서 인도함에 어떤 말을 할지 모를 뿐입니다. 이는 또 생각해 볼만 한데 어떠신지요? 흠부의 편지는 교제를 바라는 뜻을 이루게 했으나 충분히 알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다른 날 가르침을 받을 만한 것이 있으니 서로를 버림이 없도록 하십시오. 아마도 듣기를 바랄 것입니다.
熹碌碌講学親旁 思素不敢廃 但所見終未明了 動静語黙之間 疵吝山積 思見君子 図所以灑濯之者而未可得 今年却得一林同人在此 名用中 字択之 相与討論 其人操履甚謹 思索愈精 大有所益 不但勝己而已 欽夫亦時時得書 多所警発 所論日精詣 向以所示遺説数段寄之 得報如此 始亦疑其太過 及細思之 一一皆然 有智無智 豈止校三十里也 今錄去上呈 其它答問反复及它記序等文尚多 以伯修行速 不能抄為恨
熹前此書中所請教者 於尊意云何 窃意其説不過如此 但持之不力 恐言語間不容無病 深望指誨 得以自警而改之 幸也 向曾上禀迓夫到日借数人来 為相聚数日之計 今恐已熱 難出人 又意此人已到 不能久留 而尊兄已就道久矣 或已到官 亦未可知 三四舎之遠 阻隔不相聞如此 可為深恨也
武侯伝読之如何 更有可議処否 問疑数条例小差 以書問之欽夫 皆以為然 但熹欲伝末略載諸葛瞻及子尚死節事 以見善善及子孫之義 欽夫却不以為然 以為胆任兼将相而不能早去黄皓 又不能奉身而去 以冀其君之悟 可謂不克肖矣 此法甚厳 非慮所及也 老兄以為如何
但欽夫極論复見天地心 不可以夜気為比 熹則以為夜気正是复処 固不可便謂天地心 然於此可以見天地心矣 易中之意亦初不謂复為天地心也 又老兄云 人皆有是善根 故好是懿徳 欽夫説見別紙 熹則窃以為老兄此言未失 但不知好者為可欲而以懿徳為可欲 此為失耳 蓋好者 善根之発也 懿徳者 衆善之名也 善根 無対之善也 衆善者 有対之善也 無対者以心言 有対者以事言 夫可欲之善乃善之端 而以事言之 其失遠矣 此兩条更望思之 却以見教 幸甚幸甚 西山集読之疑信相半 姑留此以俟的便
近事一二伝聞可慶 然大病新去 尤要調摂将護 不知左右一二公日夕啓沃用何説耳 此又似可慮 如何如何 欽夫書令致願交之意 恨未詹識 它日有可見教者 無相棄也 恐願聞之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건도 3년(정해; 1167, 38세)에 하숙경에게 보낸 번째 편지이다. 앞의 8번째 편지에서 “금년에 동인(同人)인 임씨(林氏)를 얻어 서로 더불어 토론하였는데, 그 사람이 매우 신중하고 사색하는 것은 더욱 정밀하여 크게 유익한 바가 있었다”고 하고 이 편지에서 “올해 고전(古田)에 사는 임택지林(擇之)군이 이곳에 있으면서 서로 더불어 강학함에 크게 유익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 편지에서 논한 것이 전체적으로 앞의 8번째 편지와 같은 것을 보면 아마도 8번째 편지를 보내고 숙경이 답장을 하기 전에 또 이 편지를 보낸 것 같다. 역시 주로 유설과 공명의 일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온습(温習)의 유익함과 체험하는 공(功)에 대해 가르침을 보내 주셨는데, 공력(功力)을 들임이 깊어 조금도 게을리 하거나 태만함이 없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탄복한 나머지 매우 두렵고 숙연해집니다. 적어 보내 주신 몇몇 조목은 정미(精微)하고 광대(広大)한 이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만, 다만 비루한 제가 어찌 충분히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르침을 구하는 데는 욕심이 있기에 다시 저의 좁은 견해로써 그대에게서 바른 길을 얻고자 하니, 지적하여 알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저는 근래에 머리가 흐릿하여 진보한 곳이 없음을 더욱 느낍니다. 아마도 전날 투박하고 게으르며 구차하고 건성으로 지내면서 깊이 탐구하거나 힘써 행할 뜻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논하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다 귀와 입에서만 들락날락한 나머지, 이런 까닭에 전혀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깨닫고서 전날의 습관을 과감히 고치려고 하나 혈기는 이미 노쇠했고 심지도 다시 굳건해지지 못하니, 결국 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고전(古田)에 사는 임택지林(択之)군이 이곳에 있으면서 서로 더불어 강학함에 크게 유익한 바가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제가 조금씩 다시 자극을 받아 분발할 줄 알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기 까지는 그대의 힘이 많았습니다.
유설(遺説)에 대해서 전에 되는 대로 대충 갖추어 아뢰었는데, 거기에는 수준 낮고 고루하고 엉성한 곳이 매우 많을 것인데에도 전혀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은 어째서 인지요? 전날 백수(伯脩)의 서신에 흠부(欽夫)가 논한 몇몇 조목이 들어 있는 데 매우 정밀하던데, 시험 삼아 한번 생각해 보시면 마땅히 계발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 우리들의 병통은 모두가 깊이가 없고 조급하게 구는 데 있습니다. 도(道)나 이(理)에 있어서 한 가지 설(説)만 있으면 다 직접 경험해서 이해한 듯이 하지만 대충대충 경험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이런 까닭에 설을 내기는 어렵지 않으나 이(理)에 대한 조예가 날로 천박해 집니다. 이제 바야흐로 통렬하게 스스로 징계하여 고치려고 하나, 생각이 혼미하고 막힘이 이미 심하여 다시 진보가 있을수 있을지 못하겠습니다. 이쪽 저쪽으로 이끌어 주시는 도움을 그대에게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공명이 관(管)과 락(樂)보다 더 그 군주의 신임을 얻어 뜻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하셨는데, 이 설은 아무래도 미진한 것 같습니다. 흠부는 첨(瞻)을 논하면서 권세가 장상(将相)을 겸하였으면서도 지극히 간하여 황호(黄皓)를 물리치지 못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음에 또한 몸을 받들어 물러나지도 못해서 군주가 한 번 깨닫기를 바라다가 군대가 패하고 몸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비록 항복을 할 수는 없었지만 겨우 매국자보다는 낳을 수 있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오히려 이와 같았으므로 “자첨이 벼슬을 이어갔다”고 써서 조금이나마 선(善)을 선(善)으로 여기는 장점을 드러내었습니다. 그 지혜는 족히 일컬을 것도 없기 때문에 그 일도 자세하지 않고, 족히 본받을 것도 못됩니다. 이 의론은 매우 정밀하여 제가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빌어온 책은 모두 경계한 바와 같습니다. 단지 역전은 베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다만 인쇄본만 보내 드립니다. 여기에 별본이 있으니 우선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지언에서 전한 것은 이미 빌렸는데, 다만 빌린 한 본을 여기에서 보았습니다. 본래는 돌려서 올려 드리려 했었으나 빌린 책이 이미 많으니 한쪽 눈의 시력으로 대번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정밀하게 생각하고 앉아서 나아가는 공부에 해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 이 병을 오래 묵힌 사람인지라 이젠 제거하지 못하지만, 이미 이 병을 알고는 있습니다. 서산집은 앞에 아무래도 부침이 있는 것 같아 감히 부치지 않습니다. 지금 붙일 사람이 와서 그 사이 크게 의심할 만한 곳이 있지만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示喩温習之益 体験之功 有以見用力之深 無少逸予 歎服之余 悚厲多矣 錄寄数条 無非精微広大之致 顧鄙陋何足知之 然貪於求教 輒复以管見取正於左右 却望指摘見告 幸甚
熹近来尤覚昏憒 無進歩処 蓋縁日前婾堕苟簡 無深探力行之志 凡所論説 皆出入口耳之余 以故全不得力 今方覚悟 欲勇革旧習而血気已衰 心志亦不復彊 不知終能有所済否 今年有古田林君択之者在此 相与講学 大有所益 区区稍知复加激厲 此公之力為多也
遺説向来草草具稟 其間極有賎陋疏脱処 都不蒙一倍撃 何耶 前日伯修書有欽夫所論数倏甚精 試一思之 当有発耳 大率吾曹之病 皆在浅急処 於道理上纔有一説 似打得過 便草草打過 以故為説不難而造理日残 今方欲痛自懲革 然思慮昏窒已甚 不知能复有所進否 左提右摯之所助 深不能無望於尊兄也
所喩孔明於管樂取其得君以行志 此説恐未尽 欽夫論瞻権兼将相而不能極諌以去黄皓 諌而不聴 又不能奉身而退 以冀主之一悟 兵敗身死 雖能不降 僅勝於売国者耳 以其猶能如此 故書‘子贍嗣爵’ 以微見善善之長 以其智不足称 故不詳其事 不足法也 此論甚精 愚所不及 不知高明以為如何
所借書悉如所戒 但易伝無人抄得 只納印本去 此有別本 遂留几間可也 知言所伝已借出 却借得一本在此看 本欲転以上内 然所借書已多 一目之力 何能遽及 無乃有妨精思坐進之功耶 熹蓋宿有此病者 今未能除 然已覚知是病矣 西山集前便恐有浮沉 不敢附 今付来人 其間大有可疑処 未暇論也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건도 3년(정해; 1167, 38세)에 하숙경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보면 “봄 동안에 용씨(龍氏)와 증씨(曾氏)가 모두 부수(副帥)로서 서울을 떠남에 임금님의 영단이 준엄하다”고 하였는데, 속자치통감에 보면 효종 건도 3년에 용대연(龍大淵)과 증적(曾覿)이 총애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다가 탄핵을 받아, 용대연은 절동총관(浙東總管)으로, 증적은 복건총관(福建總管)이 되어 나간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편지가 건도 3년 정해에 쓴 편지임을 알 수 있다.
보내 주신 편지와 ‘미도당기(味道堂記)’의 글을 받아보니, 흠칫하여 마치 놀랄 것 같았습니다. 요사이 이미 삼가 허락을 하였으니, 어찌 감히 식언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모름지기 조금 시간을 주시면 거의 하늘의 신령(神霊)에 힘입어 혹 조금이라도 진보가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비로소 감히 글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금성옥진(金声玉振)에 대해서 그 때 써 보낸 것에 무엇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사색하여 그 설(説)을 다시 확정하고 나서, 비로소 의심이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요사이 다시 보고서, 또 막힌 것이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 서로 더불어 탐토(探討)하기를 다시 바랍니다. 서로 다른 시기에 각각 그 설(説)을 내어 서로 참고하고 시험하는 것도 학문을 진보시키는 한 방법입니다. 도리(道理)는 무궁한데, 사색과 견문은 유한합니다. 성인의 말씀은 참으로 무궁한 데 있는데, 우리들이 유한한 것으로써 엿보려고 하니, 문을 닫고 다시 자물쇠로 잠근 것이 겹겹입니다. 어느 날에나 다 꿰뚫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점친다는 설은 족히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예전에 말씀하신 본의 판매가격은 또한 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농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선왕이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할 때 본래부터 일정한 법도를 두어 스스로 점치기를 기다린 연후에 풍부함과 절약함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되를 깎고 저울을 꺾는 다는 것은 아마도 선왕의 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순임금의 성덕으로도 오히려 법률과 도량형을 같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으며, 공자 역시 저울과 도량형을 삼가고, 법도를 살필 것을 말씀하셨으니 어찌 깎고 자르는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도량형기와 저울은 천하의 지극히 공정한 물건인데 다만 그것을 잡고 있는 사람이 사심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을 잡고 있는자가 사사로우면서 천리의 공정함을 미워한다면 이는 뜻을 사사롭게 하여 피차간에 서로 살 궁리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크게 공정하지 못한 곳으로 귀결됩니다.
요즈음 세상 일을 오래도록 듣지 못했습니다. 봄 동안에 용씨(龍氏)와 증씨(曾氏)가 모두 부수(副帥)로서 서울을 떠남에 임금님의 영단이 준엄하여 안팎이 두려워 떨만 한데도 조정에는 이 뜻을 능히 받들어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그들의 당파가 꽉 포진해 있어 한 사람도 흔들리지 않고, 간신의 우두머리가 길에 있으면서 또한 다시 그 걸음을 미적미적하고 있으니, 또한 어찌 나의 발길을 돌리게할 희망이 있겠습니까? 화(禍)와 복(福)의 순환의 기미(幾微)는 아직 결정되는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시골에 묻혀 지내지만, 지나친 계획의 근심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대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承喩及味道堂記文 惕然若驚 比既敬諾 安敢食言 然須少仮歳月 庶幾頼天之霊 或有少進 始敢措辞耳
金声玉振 不知当時写去者云何 近嘗思索 更定其説 始亦以為無疑矣 比再閲之 又覚有碍 更望相与探討 異時各出其説以相參験 亦進学之一方也 道理無窮 思索見聞有限 聖人之言正在無窮処 而吾以其有限者窺之 関鑽重重 末知何日透得尽耳
自占之説 甚不足較 然旧説本之商賈 似亦無害 若農民 則先王制民之産自有常度 不待自占然後知其豊約矣 所謂拮斗折衡者 恐非先王之法 以舜之盛徳 猶以同律度量衡為先 孔子亦言謹権量蕃法度 夫豈以掊折為可耶 度量権衡 天理至公之器 但操之者有私心耳 以其操之者私而疾夫天理之公 是私意彼此展転相生 而卒帰於大不公也
近事久不聞 春間竜曾皆以副帥去国 英断赫然 中外震懾 而在廷無能将順此意者 今其党与布護星羅 未有一人動 姦竪在途 亦复遅遅其行 亦豈尚有反予之望耶 倚伏之機 未知所決 雖在畉畎 窃不勝過計之憂 不蕃高明以為如何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에서 논한 것은 주로 재갈과 첨에 대한 일인 데, 이는 앞의 8번째 편지와 9번째 편지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건도 3년(정해; 1167, 38세)에 하숙경에게 보낸 11번째 편지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편지에서 “‘대(對)가 있다, 없다’에 대한 설은 모두 잘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엔 ‘이 아름다운 덕(德)을 좋아한다’는 말에 따라 문장을 쓴 것일 뿐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8번째 편지의 “좋아한다는 것은 선(善)의 근본이 발(發)한 것이다. 떳떳한 덕이란 여러 선(善)의 이름이다”고 한 것을 이어서 말한 것이다. 대개 8번째 편지를 보낸 후에 숙경이 아직 답장을 보내기 전에, 9번째 편지를 보냈는데, 이 11번째 편지는 바로 숙경이 주자의 8번째 편지에 답한 것에 대한 답장이 된다. 또 편지 끝에 “주상과 가까운 자들 80만 민(緡)을 내어 양주(揚洲)의 성을 쌓으니, 여러 신하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견강부회 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좋은 자리로 옮겨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해 여름 왕기(王琪)가 양주에 성을 쌓은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편지는 정해년 여름에 쓴 것임이 분명하다. 또 편지에 보면 “여우나 쥐 같은 무리가 비록 떠났지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8번째 편지와 9번째 편지, 그리고 10번째 편지에서 용대연과 증적이 쫓겨난 것을 지적해서 한 말이다. 따라서 이 편지가 11번째 편지가 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머니 받들고서 살아가는 것은 옛날과 같습니다. 다만 학문은 더 진보되지 않고 비루함과 인색함이 날로 불어나니, 군자를 만나서 절차(切磋)의 유익함을 구하고자 하나 얻지 못하여 날마다 마음이 어지러운데,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날 망령되이 논한 지경(持敬)의 설은 무어라고 말했는지 스스로 기억하지도 못하겠습니다. 다만 양심이 발현하는 것이 은미(隠微)하기 때문에 맹렬하게 반성하고 분발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어둡지 않게 한다면 한다면 이는 공부하는 본령(本領)이 될것입니다. 본령이 이미 섰으면 자연스럽게 하학(下学)하여 상달(上達)하게 됩니다. 만약 양심이 발현한 곳을 살피지 않는다면, 곧 아득하고 흐릿하여져 손댈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중간의 한 편지에서 “반드시 일삼을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 논한 말도 모두 병통이 있습니다. 특별히 변론이나 힐난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지요?
보내 주신 말씀에 옛사람의 언행을 많이 아는 것은 진실로 군자가 급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전에까지는 줄곧 소견이 이와 같았습니다. 근래에 돌이켜 구해도 안온한 곳을 얻지 못함에 따라 이것은 지리함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만일 여러 분들로 인해서 정씨(程氏)를 구하고 정씨로 인해서 성인(聖人)을 구한다고 한다면, 이는 몇 겹의 공안(公案)을 사이에 둔 것이겠습니까? 어찌 가만히 마음에서 이해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서도 그 말의 득실(得失)에 대해서는 스스로 나의 거울을 숨길 수 없는 것과 같이 하겠습니까? 흠부(欽夫)의 학문이 여러 가지 얽매임을 벗어나 자유스럽고, 보는 것이 분명하여 문구(文句)에 구애되지 않는 까닭은 마땅히 도(道)에 들어간 곳이 친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한 것이 비록 전혀 결점이 없을 수는 없지만 끝내 본령(本領)이 정당하니,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다만 논한 바를 상세히 보신다면 저절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에 대한 의론은 바로 춘추에서 현자를 책하는 방법을 가지고 꾸짖은 것인데 첨(瞻)에 대해서는 너그러우십니다. 춘추에서는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것을 기리지만 또한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매우 많은데, 취하고 버리는 사이에 반드시 은미한 뜻이 있습니다. 생각이 정밀하지 못하고 두루 상고하지 못하여 감히 가볍게 말을할 수 없으니 다른 날을 기다릴 것을 청합니다. 은미한 것은 마음입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이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도하게 거침없이 나아가 사물과 경쟁적으로 달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스스로 이것을 보고서 정일한 공력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대(対)가 있다, 없다’에 대한 설은 참으로 모두 잘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엔 바로 “이 아름다운 덕(徳)을 좋아한다.”는 말에 따라 문장을 쓴 것일 뿐입니다. 마치 역에서 이른바 “원(元)이란 선(善)의 으뜸이다”고 한 것과 같으니 원(元)이 어찌 선과 더불어 두 가지 이겠습니까? 단지 이 선근(善根)이 발함에 아득히 대(対)가 없고, 이미 발한 후에야 비로소 그 정(情) 같기도 하고, 정(情)같지 않기도 한 것이 있어서 선과 악이 마침내 나뉜다면, 이러한 선(善)은 악(悪)을 상대로 삼지 않을 수 없지만 그 근본은 사실 둘이 아닙니다. 무릇 이 몇 가지 단서는 제 견해에 근거하여 곧바로 쓴 것이니 바로잡아 주시기를 길이 바랍니다. 또 의맹의 설은 도리어 미진한 뜻이 있으니 우선 보내주신 가르침에 따라 인용하여 말하고 별지로 갖추어 올리겠습니다. 다시 두 단락이 있는데 택지(択之)가 지난날 말한 것이 매우 정밀합니다. 우연히 그가 집에 돌감에 베껴드리지 못하여 아침 저녁으로 인편에 붙여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논한 것을 우선 인색하다 여기지 말으시고 통렬하게 반복하기를 바라니 그렇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근래에 여우나 쥐 같은 무리가 비록 떠났지만, 주인이 그 굴을 막을 줄을 모르기에 이어서 온 자들이 전날보다 몇 배나 됩니다. 이미 떠난 자들은 그들이 다시 오는 것을 꼭 용납하지는 않겠지만, 멋대로 하는 권리는 더 단단히 잡을 것입니다. 중서성(中書省)에서 문서만 처리하고 있고,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인원만 갖추어 자리만 채우고 있을 따름이라서 간사한 자들이 형세를 관망하고서 임금님의 뜻에 영합하여, “천하에 재물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니, 임금님은 모두 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크게 걱정되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쉽게 다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북쪽의 포로들은 투항을 책하기에 매우 급하니 그들에게 준다면 신의를 잃고 난리를 피울 것이고 주지 않는다면 또한 틈이 벌릴 것을 생각할 것이니 아직은 응할만한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은 단호하게 주지 말라하고, 다만 주상과 가까운 자들 80만 민(緡)을 내어 양주(揚洲)의 성을 쌓으니, 여러 신하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견강부회 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좋은 자리로 옮겨가니 이 변방의 일을 살펴보면 또한 오래 편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근본이 이와 같은데 대비할 수 있을 지요? 염려스럽고도 염려스럽습니다.
奉親遣日如昔 但学不加進 鄙吝日滋 思見君子以求切磋之益而不可得 日以慣慣 未知所済也
向来妄論持敬之説 亦不自記其云何 但因其良心発見之微 猛省提撕 使心不眛 則是做工夫底本領 本領立自然下学而上達矣 若不察於良心発見処 即渺渺茫茫 恐無下手処也 中間一書論‘必有事焉’之説 却侭有病 殊不蒙辨詰 何耶
所喩多識前言往行 固君子之所急 熹向来所見亦是如此 近因反求未得箇安穏処 却始知此未免支離 如謂因諸公以求程氏 因程氏以求聖人 是隔幾重公案 曷若黙会諸心 以立其本而其言之得失 自不能逃吾鑒耶 欽夫之学所以超脱自在 見得分明 不為言句所桎梏 只為合下入処親切 今日説話雖末能絶無滲漏 終是本領是当 非吾輩所及 但詳観所論 自可見矣
諸葛之論 乃是以春秋責備賢者之法責之 於瞻不薄矣 春秋褒死節 然亦有不書者甚多 取舎之間 必有微意 思之未精 考之未徧 不敢軽為之説 請俟它日也 惟微者 心也 复者 所以伝是心也 若滔滔汩汩 与物競馳而不反 亦何自見此而施精一之功乎
有対無対之説誠未尽善 然当時正縁‘好是懿徳’而立文耳 如易所謂‘元者善之長’ 元豈与善而二哉 但此善根之発 迥然無対 既発之後 方有若其情不若其情而善悪遂分 則此善也不得不以悪為対矣 其本則実無二也 凡此数端 拠愚見直書 遠求質正 又疑孟之説 尚有未尽之意 輒因来教引而伸之 別紙具呈 更有二段 択之前日為説甚精 偶其還家 未得写内 旦歹附便致之也 今此所論 且望不吝痛加反复 幸甚
近日狐鼠雖去 主人未知窒其穴 継来者数倍於前 已去者未必容其复来 但独断之権執之益固 中書行文書 迩臣具員充位而已 其姦憸者観望迎合 至謂天下不患無財 皆欣然納之 此則可憂之大者 其它未易以言既也 北虜責帰降甚急 予之則失信生乱 不予又慮生釁隙 未有以応之 然廟堂之議断然不予 但上近者捐八十万緡築揚洲之城 群臣之諫不聴 其附会賛成者遂得美遷 観此邊事亦不能久寧矣 根本如此 何以待之 可慮可慮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언제 쓴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순서상 볼 때 이 편지 역시 건도 4년(무자; 1168, 39세)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하숙경이 주자에게 천도・성・인・심・귀신 등에 대해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였는데, 주자는 이 편지에서 하숙경의 질문에 대해 구절마다 차이나는 것을 지적해서 말하였다.
의심나는 뜻에 대해 보내주신 편지는 대체로 여러 설들이 한결 같이 병통이 많습니다. 크게 근본이 되는 곳에서 아주 깨끗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억측하여 헤아리고 상상해서 결국엔 또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뜻을 유지하면 마음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뜻이 저절로 밝아진다.”고 한 것이나, 또 “체득하여 알 수 있으면 천덕이 된다.”고 한 것, 또 “심성(心性)과 인의(仁義)의 도(道)는 서로간의 거리가 털끝만큼의 차이인데, 이 말은 더욱 병통이 있습니다. 마음은 발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것과 귀신이 능히 정성스러우면 감응하여 반드시 통한다고 논한 것 등 이 몇 가지 조목들은 모두 구절마다 차이가 있는데 무슨 까닭에 이같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우연한 생각이 미숙해서이겠습니까? 대학의 순서는 격물치지해서 앎이 지극해지고 뜻이 정성스러워지는데 이른 후에 마음이 그 올바름을 얻는 것인데 이제 다만 뜻만 유지하고서 곧바로 마음이 올발라 지고 의가 밝아지기를 원하니 또한 지나치게 조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性)은 천리(天理)이며, 이(理)가 갖춘 것은 바로 천덕(天徳)이니 사람이 알아서 체득하는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체득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천덕(天徳)이니 체인은 바로 사람의 능력이다.”고 하시니 어찌 천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성(性)과 심(心)은 다만 본체와 작용일 뿐인데 본체와 작용이 어찌 서로 떠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성(性)은 도(道)이고 심(心)은 인(仁)이다”는 말도 분명하지 않으니 반드시 다시 곡절을 보아야 옳습니다. 심(心)이란 본체와 작용이 두루 흘러 관철하지 않음이 없다고 해서 이에 ‘발하였지만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움직이는 곳은 심(心)에 속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역시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귀신의 본체는 곧 단지 정성스러움일 뿐이니, 그것이 실제 이 이(理)를 가지고 있으므로 조화⋅발육하고, 향응(響応)⋅감통(感通)함에 이 이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체득하여 빠뜨릴 수 없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마음이 정성스러우면 감응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곳은 여전히 많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쓸데없이 바빠 자세하게 유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질문도 이미 거칠고 간략하니 우선 대강을 들어 노형께서 생각해 보심이 옳을 것 같습니다. 참람하고 소홀함을 거듭 용서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듣자하니 숭경(嵩卿)이 어짊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 나머지 의론을 들을 수 있다하니 더욱 기쁘게 여겨집니다. 우리의 도를 알고 좋아하는 자가 날로 많아지니 지금은 고루하지만 참으로 희망이 있습니다. 다행이도 도를 행할 뜻에 갑자기 삼가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자세한 의론을 하고 싶은 것이 매우 많은데 언제나 모여서 뵐 수 있을이지 모르겠습니다. 원하는 문자는 우연히도 성 중에 있지만 안으로 들어갈 연줄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충 널리 보기는 하였지만 쓸데없이 마음과 눈의 힘만 허비하였을 뿐, 한 곳에 나아가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 유익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인(仁)’자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선은 공자⋅맹자⋅정자⋅사씨(謝氏)가 말한 곳을 기록해 내어 말씀드리니 반복해서 완미하여 진실로 이해하기를 기다린다면 그 외에는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서(恕)와 성(性) 등의 말씀은 모두 별도의 설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숭경이 한자(韓子)의 말을 옳게 여긴 것은 진실로 잘못된 것인데, 노형께서 논하신 것도 아직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박애가 인(仁)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친절한 곳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약 친절한 곳을 본다면 박애란 진실로 인자(仁者)의 일입니다. 우선 이 뜻을 가지고 생각하심이 어떠신지요?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한다는 한 단락은 숭경이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다시 자세하게 보아야 합니다.
所喩疑義 大抵諸説一概多病 蓋於大本処未甚脱然見得 所以臆度想象 終亦有差 如云持志則心自正 心正則義自明 又云能体認之則為天徳 又云心性仁義之道相去毫髪之間 此語尢有病 心者発而未動 及論鬼神能誠則有感必通 此数条皆句句有差 不知何故如此 豈偶思之未熟耶 大学之序格物致知至於知至意誠 然後心得其正 今只持志便欲心正義明 不亦太草草乎 性天理也 理之所具 便是天徳 在人識而体之爾 云能体認之便是天徳 体認乃是人力 何以為天徳乎 性心只是体用 体用豈有相去之理乎 性即道 心即仁 語亦未瑩 須更見曲折乃可 心者 体用周流 無不貫徹 乃云発而未動 則動処不属心矣 恐亦未安也 鬼神之体便只是箇誠 以其実有是理 故造化発育 響応感通 無非此理 所以云‘体物而不可遺’ 非為人心能誠則有感応也 此等処尚多 人事冗迫 不容詳遣布 此禀亦已草略 且挙大綱而老兄思之可也 仍恕僭易 幸甚
又聞嵩卿之賢好学 得聞其余論 尢以為喜 此道知好之者日衆 孤陋真有望矣 幸為道意 未敢率然拝書也
所欲細論者甚多 不知何日得会面也 所欲文字偶在城中 無縁取内 然博観草草 徒費心目之力 不若就一処精思之為有益也 如‘仁’字 恐未能無疑 且告錄出孔孟程謝説処 反复玩味 須真見得 則其它自可見 恕性等説皆不待別立説也 嵩卿是韓子之言固失之 而老兄所論亦未尽得 博愛之不得為仁 正為不見親切処耳 若見親切処 則博愛固仁者之事也 試以此意思之如何 博施済衆一段 不知嵩卿如何看 恐更須子細也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처음에 “금년의 흉작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초여름에 이르는 곳마다 흉흉하니, 마침내 현(縣)에서 저에게 곡식을 빌려 와서 구제하는 일을 맡겼다”고 하였는데, 주자대전 권77 「건영부숭안현오부사창기(建寧府崇安縣五夫社倉記)」에 보면 “건도 무자년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건영에 큰 기근이 들었다. 나는 숭안현 개요향에 있었는데, 현의 일을 담당하던 제갈후(諸葛侯) 정서(廷瑞)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 것을 보면 무자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건도 4년(무자; 1168, 39세)에 쓴 것임이 분명하다. 편지에서 주자는 하숙경에게 조정의 근황에 대해 일러주고 자신의 주변 일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금년의 흉작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른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초여름에 이르는 곳마다 흉흉하니, 마침내 현(県)에서 저에게 곡식을 빌려 와서 구제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 사이 또 이웃 고을 경내에서는 뭇 도적들이 몰래 발생하였기에, 백방으로 처리하여 겨우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올벼가 이미 익었으니, 비록 아직 흡족하지는 못하다 해도 아마 다른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사변(事変)에 대응하여 처리하면서 몸으로 살피는 일을 감히 그만 두지 못하고서, 거의 혹 허물을 적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후회와 허물이 쌓여 처리하지 못한 곳이 매우 많으니, 이로 인해서 스스로 두려울 따름입니다.
노형께서 남쪽으로 가신 뒤로부터 날마다 생각하던 중에, 보내 온 서신을 읽고서 뜻을 펴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심부름 온 사람에게 자세히 묻고서야 그 사정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친구된 저의 책임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삼가 이미 전운사(転運使)에게 서신을 보내고, 또 형을 위해서 차사원(差使員) 자리 하나를 구해서 건녕(建寧)이나 소무(邵武)로 올 수 있도록 했으니, 이르게 되거든 처신할 바를 천천히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이로 인해서 잠시 어버이께 문안하는 계획을 하는 것도 또한 급한 일입니다. 오늘날 향하는 바는 이러합니다만, 임정(臨汀)은 깊고 궁벽하여 왕의 교화(教化)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마땅히 더욱 심할 것일 따름입니다.
조정은 예전보다 가지런하지 않습니다. 요사이엔 또 한 두 명 가까운 신하를 내치더니, 가까운 신하 중에 붙어 있던 자들 역시 배척하고 내치니 다만 도를 곧게 하려 해도 끝내 행할 수가 없습니다. 왕구령(王龜齢)이 기부(夔府)로부터 조정에 들어왔지만 머물지 못하고 나아가 호주(湖州)의 지사가 되었는데, 또 받아들여지지 않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왕수(汪帥)가 왔으니 우선 만나보는 것이 또한 어떠하실 런지요? 위에서 천거한 사람이 자못 힘을 쓰고 또 그가 하는 바를 익히 살피면 그 돌아보고 정치 하는 것이 예전과는 조금 차이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일이란 안위가 걸려 있으므로 결국엔 어찌 될지 알지 못할 따름입니다. 저는 족히 경중을 따질 것도 없는 자취 같은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것이 결정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흠부(欽夫)와 임천(臨川)을 제수함에 그들을 천거한 사람들의 의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한 때의 소장에 달려 있으니 인력으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사이 붙이신 한 두 편의 문자를 받아 보니 전날에 백숭(伯崇)이 빌려 갔던 것인데 이미 붙였던 말을 두루 기록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니 그 사이에 다시 마땅히 헤아려 볼 곳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참람되고 소홀하게 널리 보는 것의 폐단을 삼가 아뢰었는데, 진실로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옳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무엇이 이처럼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보내 오신 편지를 보면 마치 아직 훌쩍 버리지 못하는 뜻이 있는 듯한데 어쩐 일인지요? 이 이치는 분명하니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많이 듣고 널리 보는 것으로써 도(道)를 얻을 수 있다면, 세상에 도를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일로 말미암아 성찰(省察)하여 발명(発明)함이 적습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鳶飛魚躍]’ 같은 것은 명도(明道)는 ‘반드시 호연지기(浩然之気)를 기름에 종사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라[必有事焉, 勿正]’는 뜻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에야 분명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일용지간에서 이런 유행하는 체(体)에는 애초부터 중간에 끊어지는 것이 없고 공을 들이는 곳 있음을 살피고서야 얼마 전에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인 죄가 속죄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책만 지키면서 언어에 구애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일상생활 속에서 살핀다면 다행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인(仁)을 알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지만 심부름꾼을 오래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아 대략 이와 같이 갖추어 답하니 자못 품을 뜻을 다 풀지는 못하겠습니다.
접 때 그대 선대부(先大夫)의 역집의(易集義)를 보내 주신 은혜를 입고 읽어 보았습니다. 상(象)을 보고 말을 음미한 의미를 저으기 엿보고서 선배들의 도를 구하는 데 있어 근면함이 이러함을 알고는 탄복하고 우러러 봄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경서를 들고서 그 문하에서 의심 나는 것을 직접 물어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남기신 책을 세 번 반복하여 읽으니 다만 깊이 구슬픔만 느낄 뿐입니다. 지난날 찾아 주신 것을 받들어 부중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즉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삼가 기록한 것을 봉하여 온 사람에게 주었으니 봉해 받칠 수 있게 되었으니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너무도 다행스러움을 이루 감당할 수 없습니다.
상체어록 상권의 몇 단락은 매우 친절합니다. 한가한 날 푹 잠겨서 읽어 보면 마땅히 저절로 맛이 있을 것입니다. 구지 널리 구할 필요가 없으니, 더욱이 말에 따라 이해가 생겨나니 씻어 버릴 수 없을 따름입니다.
今年不謂饑歉至此. 夏初所至洶洶, 遂為県中委以賑糶之役. 中間又為鄰境羣盗窃発, 百方区処, 僅得無事. 今早稲已熟, 雖有未浹洽処, 然想無它虞矣. 対接事変, 不敢廃体察, 以為庶幾或可寡過. 然悔尢之積, 打不過処甚多, 即以自懼耳.
自老兄南去, 日以為念. 読来書, 知志不獲伸, 細詢来使, 乃尽知曲折. 此朋友之責也, 夫复何言? 謹已移書漕台, 且為兄求一差檄来建․邵, 到即又徐図所処. 因此且可暫為寧親之計, 亦急事也. 今日所向如此, 但臨汀深僻, 王霊不及, 当愈甚爾.
朝政比日前不侔矣, 近又去一二近習, 近臣之附麗者亦斥去之, 但直道終未可行. 王龜齢自夔府造朝, 不得留, 出知湖州, 又不容而去. 今汪帥来, 且看又如何. 上以薦者頗力, 又熟察其所為, 其眷佇少異於前矣. 然事係安危, 未知竟如何耳. 熹無似之蹤不足為軽重, 然亦俟此決之耳.
欽夫臨川之除, 薦者意不止此, 亦係時之消長, 非人力能為也. 近寄得一二篇文字来, 前日伯崇方借去, 已寄語令転錄呈, 其間更有合商量処也.
前此僭易拝禀博観之敝, 誠不自揆. 乃蒙見是, 何幸如此!然観来喩, 似有未能遽舎之意, 何耶? 此理甚明, 何疑之有? 若使道可以多聞博観而得, 則世之知道者為不少矣. 熹近日因事方有少省発処, 如‘鳶飛魚躍’, 明道以為与‘必有事焉, (4-1870)勿正’之意同者, 今乃暁然無疑. 日用之間, 観此流行之体初無間断処, 有下功夫処, 乃知日前自誑誑人之罪 蓋不可勝贖也. 此与守書冊․泥言語全無交渉, 幸於日用問察之, 知此則知仁矣. 所欲言甚衆, 不欲久稽来使, 草草略具報如此, 殊不尽懐.
向蒙垂示先大夫易集義, 得以伏読. 窃窺観象玩辞之意, 知前輩求道之勤蓋如比. 不勝歎仰. 顧恨不得執経門下, 躬扣所疑, 三复遺篇, 徒深感悵. 昨承見索, 以在府中, 不得即帰内. 今謹封識, 以授来人, 至幸検納, 不勝幸甚!
上蔡語錄上巻数段極親切, 暇日試涵泳之, 当自有味. 不必広求, 愈令随語生解. 不得脱灑耳.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와 다음의 15번째 편지는 건도 5년(기축; 1169, 40세)에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편지 중에 “관직을 마칠 날도 아직 미치지 않았는데”라고 하였고, 15번째 편지에서는 “관직의 임기도 이미 다가와, 당첩(堂帖)을 내려 취임하라는 재촉을 두 번이나 받았다”, “이미 편지를 보내어 사록(祠錄) 자리를 부탁했다”고 했는데, 「연보」에 근거해 보면 주자는 정해(丁亥)년 겨울 추밀원편수관대차(樞密院編修官待次)에 제수되었다가 기축(己丑)년 여름 관직을 그만둘 시기가 비로소 미침에 재촉하는 당첩(堂帖)을 받았으니 이 두 편지는 마땅히 기축년에 쓴 것임이 분명하다.
한 번 나갔다가 오십 일이 된 뒤에 돌아 왔는데, 저의 직분에 따라 소란스러워 책을 펴 보지도 못했습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데도 천리(天理)는 밝아지지 않고 물욕만 마구 치솟습니다. 매번 벗들의 논변(論辨)하는 서신을 받게 되면 이 때문에 부끄러워 땀을 흘려 마지 않습니다. 끝내 어떻게 하면 스스로 소인이 되는 데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행이 마을이 크게 편안해서 노인과 아이들이 평안하게 세월을 보내니 비록 가난과 초라함이 날로 심해지지만 또 다시 살 곳을 찾아 옮겨 갑니다. 관직을 마칠 날도 아직 미치지 않았는데, 저는 이번 길이 몹시 꺼려지니 잠시 들렀다가 다시 사록(祠録)을 청할 계획을 세울 것을 기다리려 합니다. 만약 명을 얻지 못한다면 비로소 마땅히 가르침을 받들고 두루 시행해야 겠지요. 경부(敬夫)와 서로 도모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가만히 서신을 받아 보니, 어버이와 떨어진 것을 매우 염려하고, 또 벼슬에 종사하는 것이 배운 바를 방해하는 것을 탄식하여 훌쩍 돌아가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 같은데, 이는 우리들의 같은 바입니다. 그러나 주현(州県)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법령의 범위 안에서 견강부회하여 맞추기를 힘써서, 오히려 혹 뜻 한 바를 한두 가지 실행을 할 수는 있지만,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이런 점도 다시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불가한 것을 알면서도 무릅쓰고 나아가 자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오랫 동안 배회하면서도 한 번 떠나기를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온려(温厲)’에 대해 말씀하신 편지를 받아 보니 당시에 뭐라고 언급했는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곧장 려(厲)를 주로 한다면 참으로 잘 갖추어진 의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치우친 기질을 바로잡아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허물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온화하면서도 성을 내는 것은 바로 천리(天理)의 극치로서 힘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 흡족하고 좋아 털 끝 만큼도 차이나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줄어들고 불어나는 것을 보려면 힘써 바로잡아 그 마땅한 바를 좇아 스스로 준칙을 가지고 치우친 곳에 이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술취한 사람을 부축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긴 성인이 중(中)에 처할 수 있는 까닭은 본래의 뜻이 아닌 것 같으니 다시 아뢰건대 자세하게 살펴 보십시오.
요즈음 백숭(伯崇)한테서 편지를 받아 보니, 강학(講学)하기를 멈추지 않는 모양이고, 조금 진보가 있는 듯합니다. 다만 도둑이 집에 들어, 이 때문에 옷 주머니가 다 비었으니, 가난한 사람이 마땅히 당할 바가 아닙니다. 편지로 질문에 답한 여섯 가지 조목을 보여주심에 가까이서 힘쓸 곳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다소 편치 않아 우선 감히 조목마다 분석하여 바로잡았지만 역시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길 수 도 없습니다.
종례(宗禮)가 세상을 뜬 것은 애통할만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 배운바가 어떠한지요? 아직 선학을 벗어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친구들 사이에서 자질이 이와 같은 사람도 얻기 쉽지 않으니 그가 여기에서 그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一出五旬而後反 帰来随分擾擾 未得開巻 歳月逝矣 天理未明 物欲方熾 毎得朋友論辯之書 為之愧杆不能已 未知終何以自脱於小人之帰也 幸閭里粗寧 老幼平遣 雖貧悴日甚 且复推遷 官期亦未及 区区甚憚此行 欲俟暫到 复為請祠計 若不獲命 始当奉来教以周旋 敬夫相為謀亦如此也
窃承深以去親為念 又歎従仕之害其所学 浩然有帰与之志 此固吾人之所同 然仕州県者遷就於法令之中 猶或可以行所志之一二 仕於朝者又不复有此 但知其不可而冒進自処 便不是了 更無可説 此所以徘徊之久而重於一行也
承喩‘温厲’之説 不記当時如何及之 若直以厲為主 誠可謂一備之論矣 或恐以気質之偏而欲矯以趨中 則有当如是者 亦不為過矣 然聖人之温而厲 乃是天理之極致 不勉不思 自然恰好 毫髪無差処 要須見此消息 則用力矯揉 随其所当自有準則 不至偏倚矣 不然 正恐如扶酔人也 来教所謂聖人所以処中 似非本旨 更告詳之
伯崇近得書 講学不輟 似亦稍進 但為偸児人室 夜嚢為之一空 亦非貧者所宜遭也 寄示答問六条 得以見迩来用功処 然鄙意多所未安 輒敢条析以求訂正 亦未敢自以為是也
宗禮之亡可傷 不知後来所学如何 似未能脱去襌学也 今朋友間資質如此人亦不易得 惜其止於此耳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앞의 14번째 편지와 마찬가지 근거로 건도 5년(기축; 1169, 40세)에 쓴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관직을 그만 두고 사록를 희망하는 마음과 당시 벼슬아치들의 잘못된 태도에 물들지 않고자하는 마음을 편지에 적었다.
관직에 종사하는 뜻에 대해 보내주신 편지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예전에 범손지(范巽之)가 횡거(横渠)에게 정치에 대하여 물었는데, 횡거는 그에게 “들은 것을 높이고 미칠 것에 힘써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원컨대 존형께서 이 마음을 더욱 채우신다면 힘이 미치는 바가 애초부터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심부름 꾼이 와서 “자못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을 생업에 복귀하도록 부를 수 있었던 점과 하나의 가개 터라도 얻기를 바라는 새로운 백성들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것이 가장 아래 백성들에게 후하고 근본을 견고하게 하는 양책입니다. 그러나 또 방편이 있으니 한 두 항목의 급하지 않은 법령을 관대하게 처리해 준다면 역시 구원(久遠)한 이익이 있을 터이니, 몰려드는 사람들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어떠신지요? 새로운 창고 관리인인 정경망(鄭景望)이 매우 현명하다 하니 혹시라도 아뢸 수 있을 따름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관직의 임기도 이미 다가와, 당첩(堂帖)을 내려 취임하라는 재촉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저의 본래의 뜻은 이미 가고자 하지 않은데, 요사이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는 친구를 보니 본래의 태도를 잃지 않은 사람이 없고, 학력(学力)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니, 저도 이렇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깊이 있습니다. 이미 편지를 보내어 사록(祠録) 자리를 부탁했습니다. 만일 이루어지지 않거나, 혹 한 사람만 가야 한다면 혼자 가는 것은 마음에 편안한 바가 아닐 뿐 아니라 맞이하여 봉양하기에도 또 불편합니다. 오직 이 한 가지가 난처합니다만 그 자세한 사정을 멀리 보내는 편지에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示喩所以居官之意 甚善 昔范巽之問政於横渠 横渠告之曰 尊所聞 力所及 願尊兄益充此心 則力之所及初亦無限量也 来使云頗招得流亡复業 及募得新民願受一廛者 此最厚下固本之良策 然更有方便 与寛得一兩項泛科 亦久遠之利 来者必益衆矣 如何? 聞新倉使鄭景望甚賢 或可告語耳
熹奉親粗遣 官期已及 再被堂帖趣行 然区区本志已不欲往 而近見交親入仕於朝 無不矢其故歩 学力未充 深有此懼 已遣書丐祠矣 万一不遂 或当一行 但単行非所安 迎養又不便 只此一節 便自難処 其曲折又有非遠書所能致者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편지 중에 “어록은 정헌(程憲)이 아직부쳐오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정헌은 정박(丁舶)을 가리키니, 주자가 편찬한 정씨의 유서는 바로 정박을 통해 천주(泉州)에서 간행된 것이다. 주자가 이 편지를 쓸 당시 유서가 아직 간행이 끝나지 않았으니, 주자의 유서서문에 의거하면 유서의 산행은 무자년 여름에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 이 편지는 아무래도 건도 4년(무자; 1168, 39세) 봄에 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제가 당기(堂記)에 대한 편지를 받고 보니 송구스러움이 깊습니다. 이는 진실로 감히 잊을 수 없는 것인데, 단지 제목이 커서 감히 쉽게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 세월을 빌어 그래도 학문에 아주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게되기를 바란 후에 그것을 하고자할 생각인데, 거의 선배들의 뜻 한 두 가지라도 엿보아 헤아려 형용할 수 있다면 헛된 일이 되지 않을 따름입니다. 보잘 것 없는 제 마음으론 다시 살펴주시기를 바라니 그렇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지언 한 책을 바쳤는데 어록은 정헌(程憲)이 아직 부쳐오지 않았습니다. 의심했던 「기선은 깊이 생각했음을 족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득실이 또한 서로 반반이니 별지로 그 자세한 것을 갖추어 아룁니다. 예전의 도리에 어두운 설들은 진실로 병통이 없을 수 없었는데, 반복하여 가르쳐 주시니 막혀 있던 것들이 깊이 계몽되었습니다. 아직 편치 않은 부분은 또 별지에 갖추었으니 다시 이끌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니, 그렇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화편(和篇)의 비유는 제가 감당할 많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계속 이어져 아직 계획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사람들의 질병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윤씨가 “밥먹는 동안이라도 인(仁)에서 떠남이 없다”는 구절을 해석한 부분은 본래 명도선생의 말인데 잘못된 것입니다. 명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수함이 그치지 않음은 천덕이다. 경황 중이라도 이 인(仁)에 반드시 함은 삼개월 동안 인을 어기지 않는기상이다. 또 그 다음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거기에 이르는 것인데, 이러한 사람은 삼등인(三等人)이다.” “인심(人心)은 사욕이고, 도심(道心)은 천리(天理)이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정씨가 남긴 말입니다. 하지만 중간에 의심하긴 했지만 후에 바로 그가 말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옛책들 가운데 두 단락을 기록해서 올리니 옳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지적하여 깨우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熹蒙喩堂記 悚仄之深 此固所不敢忘者 但題目大 未敢率爾措辞 意欲少仮歳時 尚冀学有分寸之進而後為之 庶有以窺測先志之一二而形容之 不為虚作耳 区区此心 更望垂察 幸甚幸甚 知言一冊納上 語錄程憲未寄来也 所疑記善 足見思索之深 然得失亦相半 別紙具禀其詳 向者瞽説固不能無病 来誨反复 深啓蒙滞 所未安処 亦具別紙 更望提耳 幸甚幸甚 和篇之喩 非所敢当 正此沉綿 未有以為計 何暇救人之疾乎? 尹氏解‘無終食違仁’処 蓋本明道先生之言而失之 朋道云 純亦不已 天徳也 造次必於是 三月不違仁之気象也 又其次 則日月至焉 此是三等人 人心私欲 道心天理 此亦程氏遺言 中間疑之 後乃得其所謂 旧書中兩段錄呈 有未然者 更告指喩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에서 논한 복괘의 ‘천지의 마음을 본다’는 것은 17번째 편지와 18번째 편지에서 논한 ‘천지의 마음을 본다’는 것과 뜻이 서로 선후가 된다. 따라서 이 편지는 건도 3년(정해; 1167, 38세)에 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바로 천지지심이며, 원(元)이 그 중 으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아울러 심(心)과 인(仁)의 관계에 대한 하숙경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천지의 마음은 헤아려 알 수 없으니 오직 일양(一陽)이 돌아와 회복되어야 이에 낳고 낳아 다하지 않는 뜻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인(仁)이 되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읽어보니 만약 이 설과 같다면 이 일양(一陽)이 아직 회복되기 이 전에 별도로 하나의 천지지심(天地之心)이 있지만 막연히 만물을 낳을 뜻이 없다가 곧바로 일양(一陽)이 회복되어 그 낳고 낳아 다하지 않음을 본 후에 인(仁)이라고 하는데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다면 본체와 작용이 괴리되고 수미(首尾)가 이어지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도리를 이루겠습니까? 왕필(王弼)의 설이 바로 이와 같아서 정자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반드시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바로 천지지심이며, 원(元)이 그 중 으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크도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이를 바탕으로 삼아 시작되도다!” 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 건원(乾元)이 있은 그런 후에 만물이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시작 되는 것이지, 만물이 이것을 바탕으로 삼게됨을 인한 연후에 원(元)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인(仁)은 심(心)의 작용이고, 심(心)은 인(仁)의 본체이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크게 병통이 있기 때문에 정자(程子)는 일찍이 배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아래 문장에 바로 곡식 종자에 대한 설이 있는데 바로 이것을 배척한 뜻을 발명한 것입니다. 이제 곡식의 종자를 인용하여 말하면서 입론한 것이 이와 같으니 정자(程子)가 배척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곡식종자의 뜻을 아우르긴 했지만 분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来教云 天地之心不可測識 惟於一陽来复 乃見其生生不窮之意 所以為仁也 熹読若果如此説 則是一陽未复已前 別有一截天地之心 漠然無生物意 直到一陽之復 見其生生不窮 然後謂之仁也 如此則体用乖離 首尾衡決 成何道理 王弼之説便是如此 所以見闢於程子也 須知元亨利貞便是天地之心 而元為之長 故曰 大哉乾元 万物資始 便是有此乾元 然後万物資之以始 非因万物資始然後得元之名也
仁者心之用 心者仁之体 此語大有病 程子已嘗闢之矣 其下文乃有穀種之説 正是発明闢此之意 今引穀種為説而立論乃如此 非惟不解程子所闢之意 窃恐并穀種之意而不明也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건도 8년(임진; 1172, 43세)에 쓴 편지이다. 편지 중에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서 사람과 사물이 얻어서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주자가 임진년에 지은 극제기(克齊記)와 인설(仁說)에 나오는 말이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임진년에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편지에서는 심(心)과 인(仁)의 관계 및 성(性)과 정(情), 미발(未發)과 이발(已發), 사단(四端) 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저의 이른바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서 사람과 사물이 얻어서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는 말은 비록 한 때의 억견(臆見)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생각하기엔 하늘과 사람이 틈이 갈라진 곳이 없음을 올바로 발명한 것이 조금은 정밀한 것 같습니다. 만약 이것을 간파했다면 인(仁)자와 심(心)자를 혼연한 일체(一体)가운데에서 보더라도 저절로 분별이 있을 것이니 털끝만큼이라도 구별이 있는 때라도 도리어 깨지고 부서지지 않으니 불교에서 의심하는 것과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성(性)과 정(情)은 하나인데 그것이 구분되는 까닭은 다만 아직 발하지 않음과 이미 발함이 같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약 아직 발하지 않음과 이미 발함을 가지고 구분한다면 무엇이 성(性)이 되고 무엇이 정(情)이 되겠습니까? 인(仁)은 통섭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측은(惻隠)도 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체와 작용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오묘함입니다. 만약 인(仁)이면서 통섭하지 않고 측은이면서 통하지 않음이 있다면 본체는 커지고 작용은 작아지며, 본체는 원만하고 작용은 치우치게 됩니다. 사자(謝子)가 정자(程子)에게 힐난을 당한 부분을 보면 곧바로 얼굴이 붉어지고 땀이 흐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수오지심(羞郡之心)이라는 것입니다. 정자는 그것을 지적해서 “다만 이것이 바로 측은지심이다”고 했는데,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맹자는 이 장의 첫머리에서 다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야기 하고 그로 인해 어린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일을 인용하여 증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바로 “이로 말미암아 보면 측은⋅수오⋅사양⋅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고 했으니, 이것 역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각(知覚)을 인(仁)이라고 말하는데, 정자는 이미 분명하게 그 잘못을 말했습니다. 24권에 보인다. 대개 지각을 가지고 인(仁)을 말하면 다만 인(仁)의 작용만을 말한 것이어서 오히려 미진한 바가 있으니, 애(愛)자로 인(仁)의 작용을 말함에 두루 두루 공평하고 올바른 것만 같지 못합니다.
熹所謂仁者天地生物之心 而人物之所得以為心 此雖出於一時之臆見 然窃自謂正発明得天人無間断処稍似精密 若看得破 則見仁字与心字渾然一体之中自有分別 毫釐有辨之際却不破砕 恐非如来教所疑也
性情一物 其所以分 只為未発已発之不同耳 若不以未発已発分之 則何者為性 何者為情耶 仁無不統 故惻隠無不通 此正是体用不相離之妙 若仁而不統而惻隠有不通 則体大用小 体圓用偏矣 観謝子為程子所難 直得面赤汗下 是乃所謂羞悪之心者 而程子指之曰 只此便是惻隠之心 則可見矣 孟子此章之首但言不忍之心 因引孺子人井之事以験之 而其後即云由是観之 無惻隠羞悪辞譲是非之心 則非人也 此亦可見矣
知覚言仁 程子已明言其非 見二十四巻 蓋以知覚言仁只説得仁之用而猶有所未尽 不若愛字却説得仁之用平正周徧也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다음의 20 번 째 편지와 함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주자서신편년고증에서 진래는 건도 8년(임진; 1172, 43세)을 전후 해서 쓴 편지인 것 같다고 하였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하숙경이 질문한 천리(天理)・명(命), 성의(誠意)・정심(正心) 등에 대해 하나하나 세밀하고 답하고 있으며, 역의 의미와 시초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성(性)을 알며 하늘을 안다는 것은 배우는 자들이 도(道)에 나아가는 일을 말한 것입니다. 이치를 궁구하고 성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는 것은 성인이 역(易)을 지은 일을 말한 것입니다.
“천리(天理)를 즐거워하고 명(命)을 안다”고 하였는데, 천(天)은 이치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명(命)은 부여한 것으로써 말한 것이지만 두 가지 일은 아닙니다. “나이 오십에 천명(天命)을 알았다”는 것도 역시 이것을 아는 것일 뿐입니다. “앎”이란 다만 이 도리를 아는 것이지 애초부터 다른 설이 없습니다. “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서 이 “명을 안다(知命)”는 글자는 진실로 “천명을 안다(知天命)”는 말과 다릅니다. 정자(程子)가 일찍이 거기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보존하고 성(性)을 기른다는 말은 정심(正心)과 성의(誠意)의 일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치지(致知)⋅격물(格物) 뒤에 달려 있다고 해서는 안되고 다만 반드시 물(物)이 이르고 앎이 지극해진 후에야 그 도(道)를 다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아님을 체득하여 안다(体会非心)”는 말은 횡거의 본래 말에서 보지 못했으므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성(至誠)”이라고 할 때의 “지(至)”는 바로 “극지(極至)”라고 할 때의 “지(至)”와 같으니 “지도(至道)”, “지덕(至徳)”이 비슷한 것과 같습니다.
“유정유일(惟精惟一)”이란 진실로 경입니다. 그러나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거와 같다면 오히려 자못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정(精)”⋅“일(一)” 두 글자는 역시 분별이 있으니 아울러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구덕(九徳)의 조목은 대개 사람을 취함에 구비할 수 없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을 관직에 임명할 때에는 마땅히 등급으로써 할 뿐이니 어찌 덕은 참람할 수 없음을 이르는 것이겠습니까?
“세심(洗心)”이란 말은 성인이 말을 완미하고 상(象)을 살피는 것이니, 이치와 마음의 모임입니다. “제계(斎戒)”란 성인이 변화를 관찰하고 점을 완미함이니 일에 임하여 공경함입니다.
“명덕(明徳)”은 자기에게 있는 덕 중에 본래 티끌이나 때가 없는 곳을 통틀어 말한 것이고, “지선(至善)”은 이(理)의 극치가 일에 따라 있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시초점은 7을 수로 삼는데, 이는 아직 괘를 이루지 않았을 때에 사용하는 것이 일정한 체(体)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덕이 둥글어 신묘하며서 미래[来]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괘는 8로 수를 삼는데, 이는 시초의 변화에 따라 이루기 때문에 이미 일정한 체(体)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덕은 모난 것으로 알 수 있고, 감[往]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괘에는 오직 세 가지 역이 있는데, 모두 점치는 법입니다. 거북을 구어서 점을 치는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조짐이라고 하는데 주례에 보이니 상고할 수 있습니다.
“안토(安土)”란 것은 만나는 바에 따라 편안한 곳입니다. “인(仁)을 돈독히 함”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잃지 않음입니다. 자리에 편안하고 인(仁)을 돈독히 하면 가는 곳 마다 인(仁)이 아님이 없을 것이니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仁)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망은 재앙이 오는 것이다”고 했는데, 말하는 사람이 이미 그것을 얻은 것 같은데 의심하는 것이 무엇을 이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평해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밭을 갈고 일구는 것은 때에 따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수확하고 개간하는 것에 상대해서 말하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입니다. 역 가운데에서 상(象)을 취하는 것도 글로 말을 해칠 수 없고 말로 뜻을 해칠 수 없습니다. 만약 굿이 글자마다 잡고 늘어진다면 밭을 갈지도 않고 수확을 바라고, 일구지도 않고 개간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또한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목민관을 세우고 감독을 두는 것은 순수(巡狩)한다는 뜻과 병행해서 사용해도 도리에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하늘에 제사 지내고 제후에게 조회하고 몸소 순수해서 어루만지는 뜻은 모두 그 가운데 있습니다. 선왕의 정치는 체(体)와 용(用)을 함께 들어 써서 본말이 갖추어져 있으니 후세 유자(儒者)들의 한 쪽으로 치우쳐진 설이 체(体)만 있고 용(用)은 없으며 본(本)은 얻었지만 말(末)을 빠뜨린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때로 익힌다”⋅“세 번 반성한다”는 것은 진실로 성인이 덕을 이루는 일이 되지는 못합니다만, 또한 오로지 초학자들의 일 만도 아니니 대개는 위 아래도 모두 통하는 말일 뿐입니다.
尽心知性知天 言学者造道之事 窮理尽性至命 言聖人作易之事
樂天知命 天以理言 命以付与言 非二事也 五十而知天命 亦知此而已矣 知只是知得此道理 初無它説 不知命無以為君子 此知命字真与知天命不同 程子嘗言之矣
存心養性 便是正心誠意之事 然不可謂全在致知格物之後 但必物格知至然後能尽其道耳
体会非心 不見横渠本語 未暁其説
至誠之至 乃極至之至 如至道至徳之比
惟精惟一 固是敬 然如来諭之云 却殊不端的 精一 二字亦有分別 請并詳之
九徳之目 蓋言取人不可求備 官人当以其等耳 豈徳不可僭之謂耶
洗心 聖人玩辞観象 理与心会也 斎戒 聖人観変玩占 臨事而敬也
明徳統言在己之徳本無瑕垢処 至善指言理之極致随事而在処
蓍以七為数 是未成卦時 所用未有定体 故其徳員而神 所以知来 卦以八為数 是因蓍之変而成 已有定体 故其徳方以知 所以蔵往 卦惟三易有之 皆筮法也 若灼龜而卜則謂之兆 見於周礼 可考也
安土者 随所遇而安也 敦乎仁者 不失其天地生物之心也 安土而敦乎仁 則無適而非仁矣 所以能愛也 仁者樂山之意 於此可見
無妄災也 説者似已得之 不知所疑者何謂 却望批誨
耕菑固必因時而作 然対穫畭而言 則為首造矣 易中取象 亦不可以文害辞辞害意 若必字字拘泥 則不耕而望穫 不菑而望畭 亦豈有此理耶
建牧立監 与巡狩之義並行不悖 祭天朝諸侯躬巡撫之意 皆在其中矣 先王之政 体用兼挙 本末備具 非若後世儒者一偏之説 有体而無用 得本而遺末也
時習三省 固未為聖人成徳事 然亦不専是初学事也 蓋通上下之言耳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위의 19번째 편지와 함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주자서신편년고증에서 진래는 건도 8년(임진; 1172, 43세)을 전후 해서 쓴 편지인 것 같다고 하였으므로 이 설에 따른다. 이 편지에서는 춘추공양전에서의 의심나는 부분과, 패풍(邶豊)⋅용풍(鄘豊)⋅위풍(衛豊)의 시가 그 설이 자세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아울러, 호씨(胡氏)의 가록(家祿)을 참고해 볼 것에 대해 하숙경에게 말하고 있다.
춘추공양전에서 섬(陝)땅을 중심으로 나눈 설은 의심할만 합니다. 섬동(陝東)의 땅은 넓고 섬서(陝西)는 다만 관중(関中) 옹주(雍州)의 땅일 뿐이니 아무래도 이와 같이 불균등하게 나누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공(周公)은 밖에 있었는 데에도 그 시가 왕자의 풍이 되고, 소공은 안에 있었는 데에도 그 시가 제후의 풍이 된 것은 모두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소남(陳少南)은 그 잘못된 부분 때문에 마침내 기(岐) 땅을 동서로 나누는 설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천착함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소공이 나눈 땅은 더욱 협소해 보이니 그렇다면 겨우 오늘날 농서(隴西), 천수(天水) 몇 군의 땅을 얻었을 뿐이니, 아무래도 또한 이러한 이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2남(주남⋅소남)의 편의는 다만 마땅히 정자(程子)의 설로 올바름을 삼아야 합니다.
패풍(邶豊)⋅용풍(鄘豊)⋅위풍(衛豊)의 시는 그 설이 자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의 본의를 깊이 연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공(欧公)의 이 논의가 합당합니다.
“죄인을 이에 얻었다”는 말은 지난 번의 편지에서 이미 갖추어 말씀을 드렸는데 어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등의 곳은 반드시 아주 넓고 커서 물아(物我)의 구분이 없는 마음에 입각해서 보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으니 만약 한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롭고 인색하게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피하며 꺼리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성인이 하신 말씀과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현격한 차이가 나게 됩니다. 만일 성왕(成王)이 끝내 개닫지 못했다면 주공(周公)은 다시 몇 년 동안 죄를 기다렸을 것이니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목숨을 거두었겠습니까? 호씨(胡氏)의 가록(家禄)에 여기에 대해 논한 것이 한 단락 있는데 지극한 뜻이 있으니 깊이 생각해 보심이 어떠실런지요?
“큰 저 운한(雲漢)”은 하늘에 문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왕(周王)이 장수를 누리면 어찌 사람을 진직시키지 않겠습니까? 하(遐)라는 말은 어찌(何)이다. 이런 등의 말은 스스로 혈맥이 흘러 통하는 곳이 있어서 다만 오래 동안 푹 잠기어 있으면 자연 조달(条達)하여 창무(暢茂)함이 무젖을 것이니 굿이 밖의 도리와 언어를 많이 인용해서 시인의 살아있는 뜻을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주왕(周王)이 이미 장수를 누리니 어찌 인재를 진작시켜 이루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이미 스스로 분명합니다. 다시 “큰 저 운한이 하늘에 문장이 되었다”는 단락에 입각해서 보면 환기되어 더욱 활발발한 경지를 보게될 것입니다. 이것이 육의(六義)에서의 이른바 ‘흥(興)’입니다. ‘흥’이란 바로 흥기한다는 뜻입니다. 흥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마땅이 이러한 예로다 보아야 합니다. 역에서 말로 뜻을 다할수 없어서 상(象)을 세워 뜻을 다하였으니, 대게는 또한 이와 같습니다.
公羊分陝之説可疑 蓋陜東地広 陜西只是関中雍州之地耳 恐不応分得如此不均 周公在外 而其詩為王者之風 召公在内 而其詩為諸侯之風 似皆有碍 陳少南以其有碍 遂創為分岐東西之説 不惟穿鑿無拠 而召公所分之地愈見促狭 蓋僅得今隴西天水数郡之地耳 恐亦無此理 二南篇義但当以程子之説為正
邶鄘衛之詩未詳其説 然非詩之本義 不足深究 欧公此論得之
罪人斯得 前書已具報矣 不知看得如何 此等処須著箇極広大無物我底心胸看方得 若有一毫私吝自愛惜避嫌疑之心 即与聖人做処天地懸隔矣 万一成王終不悟 周公更待罪幾年 不知如何収殺 胡氏家錄有一段論此 極有意思 深思之 如何
倬彼雲漢 則為章于天矣 周王寿考 則何不作人乎 遐之為言何也 此等語言自有箇血脈流通処 但涵泳久之 自然見得倏暢浹洽 不必多引外来道理言語 却壅滞却詩人活底意思也 周王既是寿考 豈不作成人材 此事已自分明 更著箇倬彼雲漢 為章于夭 喚起来便愈見活溌溌地 此六義所謂興也 興乃興起之義 凡言興者 皆当以此例観之 易以言不尽意而立象以尽意 蓋亦如此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주자어류 12권의 양방(楊方)의 기록에 의하면 “하승(何丞)이 말하였다. ‘경(敬)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다만 존심(存心)이 곧 경(敬)이다.’ 주자가 말하였다. ‘모름지기 용모를 움직임에 생각을 정돈하면 경(敬)이 생겨난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은 주자가 하숙경의 몇 편의 편지에 답하여 논변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록성씨(語錄姓氏)를 살펴보면 양방의 기록은 병인년에 있었으므로 이 논변이 병인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주로 하숙경과 경(敬)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편지는 건도 6년(병인; 1170, 41세)에 보낸 것 같다.
뒤에 보내신 편지에서 논의한 지키는 것에 관한 설은 알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서로 차이 나는 바가 비록 많지는 않지만, 이는 실제로 공력(功力)을 들여야 할 바탕이므로 서로간에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서는 안됩니다. 일찍이 계통(季通)과 더불어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계통은 그대가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 자연 어지럽고 번잡할 염려가 없으므로 공력을 들이는 어려움을 살피지 않고 말하는 것이 이처럼 쉽다고 여깁니다. 이 말은 매우 당연합니다. 그러나 저가 가만히 보건대, 그대의 평소 용모 가운데서 조용하고 화이(和易)한 뜻은 충분하지만 장엄하고 정제(整斉)하는 공력에 있어서는 끝내 부족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어찌하여 그 존양(存養)하는 바가 경(敬)을 주로 하지 않아서, 이 때문에 존재하는 듯하다가 없는 듯함을 면하지 못하는데도, 그 버려서 잃어버림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십니까? 두 분 선생이 끄집어 낸 ‘경(敬)’이란 한자는, 참으로 성학(聖学)의 강령(綱領)이요, 마음을 보존하고 성(性)을 기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한결같이 이것을 주로 하면, 다시는 내외․정조(精粗)의 구분이 없게 되니, 진실로 ‘다만 밖에서 그것을 통제하면 존양하는 데 일삼을 것이 없을 뿐이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이미 능히 마음에 잊지도 않고 조장(助長)하지도 않는다면, 어찌 경(敬)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은 마치 ‘경(敬)’으로써 공효(功效)의 이름으로 삼은 것 같으니, 아마도 잘못된 것이 더욱 멀어진 것 같습니다. 다시 청하노니, 두 분 선생이 ‘경(敬)’을 말한 곳을 모아서 자세히 연구하시면 저절로 마땅히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後書所論持守之説 有所未喩 所較雖不多 然此乃実下功夫田地 不容小有差互 嘗与季通論之 季通以為尊兄天資粋美 自無紛擾之患 故不察夫用力之難而言之之易如此 此語甚当 然熹窃観尊兄平日之容貌之間 従容和易之意有余 而於荘整薺粛之功 終若有所不足 豈其所存不主於敬 是以不免於若存若亡而不自覚其舎而失之乎 二先生拈出敬之一字 真聖学之綱領 存養之要法 一主乎此 更無内外精粗之間 固非謂但制之於外則無事於存也 所謂既能勿忘勿助 則安有不敬者 乃似以敬為功效之名 恐其失之益遠矣 更請会集二先生言敬処子細尋繹 自当見之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건도 6년(병인; 1170, 41세)에 보낸 것이다. 편지의 처음에 “경(敬)을 유지하는 데 대한 설(說)은 전날의 편지에서도 다 말하지 못했는데”라고 한 것을 보면 이 편지는 앞의 편지에 이어서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는 주로 지경(持敬)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경(敬)을 유지하는 데 대한 설(説)은 전날의 편지에서도 다 말하지 못했는데, 이제 숭경(嵩卿)이 상세히 말한 것을 보고, 그 차이나는 까닭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이 마음은 잡고 있으면 보존되는데, 경(敬)이란 것은 그것을 잡는 방법입니다. 그대는 깨달아서 그것을 잡을 때 그 깨달은 것을 가리켜서 곧 보존된 것으로 여겨, 그것을 잡는 방법에는 다시 힘을 들이지 않으니, 이것이 설(説)을 낼 때 치우칠 뿐만 아니라, 일용(日用)의 공부에서도 중간에 끊어지는 바가 있어 주도(周到)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마땅히 이 깨닫는 곳에 나아가 경(敬)으로써 그것을 잡아 그것으로 하여금 항상 존재하고 항상 깨닫게 하여야만, 주역의 건곤(乾坤)과 괘에서 이(易)⋅간(簡)이 번갈아 가며 작용하는 오묘함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느끼는 것을 보존된 것으로 여겨 경(敬)을 간직하는 공부를 더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하루 동안에 보존되는 것이 얼마나 되겠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십에 팔구는 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것을 가지고 살펴서 혹시라도 저의 말에서 취함이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두루 찾고 널리 인용하는 일은 힘을 많이 들인다고 한 것은, 또한 알지 못하겠습니다. 의리가 밝아지지 않았으면, 모름지기 반복해서 연구하고 서로 참조해서 고증한 그런 뒤에라야 올바름을 얻어서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널리 배우고 살펴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변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찌 한 때 힘쓰는 것을 꺼려서 대충대충하여 스스로를 속이겠습니까? 저으기 생각건대, 그대의 병은 바로 이러한 데 있는 것 같으니,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해 보신다면,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持敬之説 前書亦未尽 今見嵩卿 具道尊意 乃得其所以差者 蓋此心操之則存 而敬者所以操之之道也 尊兄乃於覚而操之之際 指其覚者便以為存 而於操之之道不复致力 此所以不惟立説之偏 而於日用功夫亦有所間断而不周也 愚意窃謂正当就此覚処敬以操之 使之常存而常覚 是乃乾坤易簡交相為用之妙 若便以覚為存而不加持敬之功 則恐一日之間存者無幾何 而不存者什八九矣 願尊兄以是察之 或有取於愚言耳 所喩旁捜広引 頗費筋力者 亦所未喩 義理未明 正須反复鑽研 參互考証 然後可以得正而無失 古人所謂博学審問慎思明辯者 正為是也 奈何憚於一時之費力而草草自欺乎 窃謂高明之病或恐正在於此 試反求之 当自見矣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 역시 첫머리에서 “경(敬)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앞의 편지에서 이미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먼저 그 마음을 가진 뒤에 능히 예(禮)로써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하신 것 같은 것은 ‘보존 되면 잡고 없어지면 놓는다는 것’이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짐’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고 한 것을 보면 앞의 편지의 ‘예(禮)로써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다’,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진다’는 것에대해 논의한 것을 이어서 보낸 편지임을 알 수 있다. 또 편지의 끝에 “지난 해 겨울 보낸 한 장의 편지에서, 정자(程子)가 경(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종류별로 모아 고찰해 보기를 청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21번째 편지에서 “두 분 선생이 ‘경(敬)’을 말한 곳을 모아서 자세히 연구하면 저절로 마땅히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앞의 몇 편의 편지에 이어 건도 6년(병인; 1170, 41세)에 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敬)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앞의 편지에서 이미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먼저 그 마음을 가진 뒤에 능히 예(禮)로써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하신 것 같은 것은 ‘보존 되면 잡고 없어지면 놓는다는 것’이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짐’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 ‘안으로 말미암아서 밖으로 응한다’는 것은 ‘사잠(四箴)’의 서문 가운데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은 다만 이(理)의 자연스러움을 말한 것이고, 아래 구절의, ‘밖에서 제어하는 것이 그 안을 기르기는 방법이다’가 비로소 공부를 해야하는 곳을 말한 것입니다. 잠에 나오는 말로써 고찰해 보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보존하는 방법이 과연 어떠해야 힘을 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해 겨울 보낸 한 장의 편지에서, 정자(程子)가 경(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종류별로 모아 고찰해 보시기를 청했었는데, 이것이 가장 직절(直截)합니다. 여러 차례의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니, 여기에 공부를 더 하는 것을 달가워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찌 힘쓰는 것을 꺼려하여 하지 않겠습니까?
持敬之説 前書已詳禀矣 如今所喩先存其心 然後能視聴言動以禮 則是存則操 亡則舎 而非操則存 舎則亡之謂也 由乎中而応乎外 乃四箴序中語 然此一句但説理之自然 下句制之於外所以養其中 方是説下功夫処 以箴語考之可見矣 若必曰 先存其心 則末知所以存者果若何而著力邪 去冬嘗有一書 請類集程子言敬処考之 此最直截 窃観累書之諭 似未肯於此加功也 豈憚於費力而不為邪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분 선생의 심술(心術)을 논한 것을 보면, ‘마음을 간직한다’고 하지 않고, ‘경(敬)을 주로 한다’라고 하였고, ‘경(敬)을 주로 하는 것’을 논함에 있어서는, ‘허정(虛靜)하여 깊이 있고 묵묵히 한다’고 말하지 않고, 반드시 의관(衣冠)과 용모를 삼가 하였으니, 말은 비근(卑近)하면서도 가르치는 바가 심원(深遠)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편지 역시 존심(存心)과 주경(主敬)에 대해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앞에서 삺펴본 몇 편의 편지를 가지고 미루어보면 건도 6년(병인; 1170, 41세)에 쓴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보내 주신 근본에 관한 설(説)은 그대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근본과 지엽은 본래 일관(一貫)된 것이고, 마음과 몸, 안과 밖은 원래 간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로지 안에 그것을 간직하고 바깥은 소홀히 해도 된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이는 스스로 간격을 만드는 것으로서, 이 마음이 유행(流行)하는 전체 가운데서 항상 그 반만 얻고 반은 잃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동정(動静)과 어묵(語黙)이 안으로부터 말미암아 밖으로 미쳐서 한 가지 일도 경(敬)아님이 없어서, 마음의 전체로 하여금 유행하여 두루 무젖고 , 한 가지 물건도 두루 하지 않음이 없으며 한 순간도 보존되지 않음이 없도록 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두 분 선생의 심술(心術)을 논한 것을 보면, “마음을 간직한다”라고 하시지 않고, “경(敬)을 주로 한다”라고 하셨고, ‘경(敬)을 주로 하는 것’을 논함에 있어서는, ‘허정(虚静)하여 깊이 있고 묵묵히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의관(衣冠)과 용모를 삼가 하였으니, 말은 비근(卑近)하면서도 가르치는 바가 심원(深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 위에서 공부를 하도록 하지 않고 곧바로 경을 말하면, 왕왕 줄곧 바깥으로 치닫게 되어 지킬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을 살피지 못한 잘못입니다. 대저 천하에 어찌 줄곧 바깥으로만 달려 근거하여 지킬 수 없는 경(敬)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대가 논의하신 바와 같이 한다면, 그 근본을 간직하는 방법은 의도적으로 안배하고, 알묘조장(揠苗助長)하는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그것을 보존했다’고 말할지라도, 역시 있는 듯 없는 듯하여 그 방향을 알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 소견은 이와같으니 우선 몸에서 구하여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가르침을 주십시오. 태극 중의 인의에 관한 설은 매우 익숙하게 완미하였습니다. 이글은 사방으로 통하고 무성하며 막힘없이 환히 통하여 절대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건(乾)은 크게 형통하고 정(貞)함이 이롭다”는 다섯 글자만 가지고 개괄을 해도 스스로 다할 수 있으니, 단지 상하와 주빈(主賓)의 구별만 알고자 할 뿐입니다.
示喩根本之説 敢不承命 但根本枝葉本是一貫 身心内外元無間隔 今曰 専存諸内而略夫外 則是自為間隔 而此心流行之全体常得其半而失其半也 曷若動静語黙由中及外 無一事之不敬 使心之全体流行周浹而無一物之不徧 無一息之不存哉 観二先生之論心術 不曰 存心而曰 主敬 其論主敬 不曰 虚静淵黙而必謹之於衣冠容貌之間 其亦可謂言近而指遠矣 今乃曰 不教人従根本上做起而便語以敬 往往一向外馳 無可拠守 則不察乎此之過也 夫天下豈有一向外馳無所拠守之敬哉 必如所論 則所以存夫根本者 不免著意安排揠苗助長之患 否則雖曰存之 亦且若存若亡 莫知其郷而不自覚矣
愚見如此 伏惟試反諸身而察焉 有所未安 却望垂教也 太極中正仁義之説 玩之甚熟 此書条暢洞達 絶無可疑 只以乾元亨利貞五字括之 亦自可尽 大抵只要識得上下主賓之辨耳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순희 원년(갑오; 1174, 45세)에 쓴 편지이다. 편지 가운데 심설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처음 여자약(呂子約)이 심설을 썼을 때 주자는 이것을 석자중(石子重), 방백모(方伯謨)에게 논평을 하게하고 후에 각 가(家)의 득실을 총론하였으며, 아울러 유성지(游誠之), 오회숙(吳晦叔), 장경부(張敬夫), 하숙경과 함께 그 뜻에 대해 의론하였는데. 이 일이 순희 갑오년에 있었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순희 원년 갑오년에 쓴 편지임을 알 수 있다.
보내 주신 심설(心説)을 삼가 받들어 보니 매우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혹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대개 들어가서 보존되는 것은 곧 참된 마음이고 나와서 없어지는 것도 또한 이 참된 마음이 사물에 유혹되어서 그런 것일 따름입니다. 이제, ‘보존되고 없어지는 것과 나가고 들어가는 것을 모두 사물에 유혹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보존된 것 밖에 따로 참된 마음이 있게 되는데 공자(孔子)의 말에서는 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자중(子重)이 논한 것도 병통이 또한 이와 같은데 자약(子約)이 또 나와서 없어지는 것마저도 아울러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지 않고서 모두 신명(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이 오묘한 것이라고 여기려고 하니, 두 사람이 아마도 서로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번에 두 사람에게 답하였는데 미진한 바가 있었는데, 뒤에 유성지(游誠之)에게 답한 편지의 한 단락에서 비로소 조금 온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삼가 적어 드리니 지도하여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음의 체용(体用)과 시종(始終)은 비록 참되고 망령된 것과 비뚤어지고 바른 것의 구분은 있지만, 그 실제에 있어서는 신명스러워 헤아릴 수 없이 오묘한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비록 모두가 신명스러워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참되고 망령된 것과 비뚤어지고 바른 것은 또 구분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입니다. 그대의 뜻에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반군(潘君)의 논의는 들은 바와 다릅니다. 그가 외워서 이야기하는 환계(環渓)의 책을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그 말로써 고찰해 보건대, 아마도 그 아버지가 일찍이 환계(環渓)를 만났는데, 환계는 곧 염계(濂渓)의 아들 원옹(元翁)의 형제인 듯 싶습니다. 원옹은 소동파(蘇東坡)․황산곡(黄山谷)과 어울려 놀면서 불교를 배우고 선(禅)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니, 대개 그 가학(家学)의 전통을 잃어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그의 말은 진실로 족히 전거로 삼을만 하지 못합니다. 또 반군이란 사람도 아무래도 청일(清逸) 집안의 사람인 듯 합니다. 청일의 아들 역시 참선(参禅)을 했으니, 비록 혹 염계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 학문은 달랐던 것입니다. 이제 또 이 책에 근거해서 논한다 할지라도, 다만 문자와 언어만이라도 태극도설(太極図説)⋅통서(通書) 등과는 전혀 유사하지도 않습니다. 대개통서는, 문장은 비록 고고(高古)하면서도 간결하지만 그 체(体)는 깊고 신실합니다. 그가 논한 바는 음양(陰陽)의 변화와, 수기(修己)․치인(治人)의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일찍이 사물의 이전이나 문자의 밖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는 ‘중(中)’을 ‘사물이 있는 것’으로 여겨 굿이 그것의 소재(所在)를 생겨나기 이전에서 구하려고 하니, 이는 선가(禅家)에서 말하는 본래면목(本来面目)의 나머지일 따름입니다. 특히 모르겠습니다만, ‘중(中)’이란 다만 치우침도 기댐도 없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을 이름으로서, 본성의 체단(体段)을 형상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성(性)’이란 삼재(三才)․오행(五行)․만물의 이치일 뿐, 생겨나기 전에 먼저 서서 이미 없어지고 난 뒤에도 홀로 존재하는 하나의 물건이 아닙니다. ‘집(執)’이니, ‘용(用)’이니, ‘건(建)’이니 하는 것 또한 이 이치를 체득하여 자기를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일 따름이지, 손에 잡고 운용하면서 건립할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 아닙니다. 통서에서는 “중(中)”에 대해 논하면서 다만 “중(中)이란 화(和)이며 절도에 적중함이다”고 했을 뿐이고, 또 “중(中)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주자(周子)의 뜻이 더욱 명백하다. 그 후에 이른바 ‘상(象)을 세워 사람에게 보여주고서 건원(乾元)으로 주를 삼았다고 하는 것은 더욱 거짓스러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대체로 본래 족히 구별할 것도 못되고 보내주신 편지도 정론이 없기 때문에 대충 말씀 드립니다. 보내주신 편지로 인해 깨달을 수 있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伏蒙示及心説 甚善 然恐或有所未尽 蓋入而存者即是真心 出而亡者亦此真心為物誘而然耳 今以存亡出入皆為物誘所致 則是所存之外別有真心 而於孔子之言乃不及之 何邪 子重所論 病亦如此 而子約又欲并其出而亡者不分真妄 皆為神明不測之妙 二者蓋胥失之 熹向答二公 有所未尽 後来答游誠之一段方稍穏当 今謹錄呈 幸乞指誨 然心之体用始終雖有真妄邪正之分 其実莫非神明不測之妙 雖皆神明不測之妙 而其真妄邪正又不可不分耳 不審尊意以為如何
潘君之論 則異乎所聞矣 其所誦説環渓之書雖未之見 然以其言考之 豈其父嘗見環渓 而環渓者 即濂渓之子元翁兄弟也歟 元翁与蘇黄遊 学仏談襌 蓋失其家学之伝已久 其言固不足拠 且潘君者又豈非清逸家子弟耶 清逸之子亦參禅 雖或及識濂渓 然其学則異矣 今且拠此書論之 只文字語言便与太極通書等 絶不相類 蓋通書文雖高簡 而体実淵愨 且其所論不出乎陰陽変化修己治人之事 未嘗劇談無物之先文字之外也 而此書乃謂中為有物 而必求其所在於未生之前 則是禅家本来面目之緒余耳 殊不知中者 特無偏倚過不及之名 以状性之体段 而所謂性者 三才五行万物之理而已矣 非有一物先立乎 末生之前而独存乎既没之後也 其曰執 曰用 曰建 亦体此理以修己治人而已矣 非有一物可以握持運用而建立之也 通書論中但云 中者 和也 中節也 又曰 中焉止矣 周子之意尤為明白 其後所謂立象示人以乾元為主者 尤為誑誕無稽 大概本不足辨 以来教未有定論 故略言之 因来誨諭 幸甚幸甚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주자는 여자약의 심설(心說)에 대한 병통을 여러 문인들과 의론하였는데, 하숙경 역시 심설을 지어 논하였다. 그러므로 25번째 편지 첫머리에서 “심설(心說)을 받아 보니 매우 좋았다”고 하였으며, 이 편지에서 또 “마음에 관한 설은 이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만”이라고 한 것이다. 또 25번째 편지에서 “들어가서 보존되는 것은 곧 참된 마음이고 나와서 없어지는 것도 또한 이 참된 마음이 사물에 유혹되어서 그런 것일 따름이다. 이제, ‘보존되고 없어지는 것과 나가고 들어가는 것을 모두 사물에 유혹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보존된 것 밖에 따로 참된 마음이 있게되는 것이다”고 하고, 이 편지에서 “바야흐로 없어질 때는 진실로 마음의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별도로 하나의 보존되거나 없어지고,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마음이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린다고 하거나, 따로 하나의 보존되거나 없어지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없는 마음을 구하여 잡아당긴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25번째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서 쓴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갑오년의 심설에 대한 논변이 있을 때 쓴 편지 로서 순희 원년(갑오; 1174, 45세)에 쓴 것임이 분명하다.
마음에 관한 설은 이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만 이른바, “성인(聖人)의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아 천리가 순전(純全)한 것이다”라는 것이 바로 보존된 곳입니다. 다만 성인(聖人)은 잡지 않아도 항상 보존될 따름이지만, 보통 사람은 잡아서 보존해야 비로소 그것이 보존될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다만 잡지 않으면 보존되지 않을 따름입니다. 보존되는 것은 도심(道心)이고 없어지는 것은 인심(人心)입니다. 마음은 하나이지, 실제로 이 두 가지 마음이 있어 각각 한 가지 사물이 되어 서로 교섭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보존되고 없어지면서 그 이름을 달리할 뿐입니다. 바야흐로 없어질 때는 진실로 마음의 본연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별도로 하나의 보존되거나 없어지고,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마음이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린다고 하거나, 따로 하나의 보존되거나 없어지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없는 마음을 구하여 잡아당긴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이 마음은 보존하지 않으면 곧 없어지고, 없어지지 않으면 곧 보존 되는 것일 뿐, 그 사이에 빈 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잡아 보존하기에 급급한 것이고, 비록 순(舜)임금과 우(禹)임금 사이라 할지라도 또한 정일(精一)을 훈계로 삼았던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안위(安危)와 치란(治乱)같은 것은, 비록 요순(尭舜)과 같은 성인일지라도 또한 단지 다스려져 편안함이 있었지, 위태롭고 어지러운 것은 없었을 뿐입니다. 어찌 요순의 시대라 하여 이렇다 할만한 안위와 치란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주장하신다면, 곧 지난 번 호씨(胡氏)의 “성(性)에는 선악(善悪)이 없다”는 설이니, 청컨대 다시 생각하시어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心説已喩 但所謂聖人之心如明鏡止水 天理純全者 即是存処 但聖人則不操而常存耳 衆人則操而存之方其存時 亦是如此 但不操則不存耳 存者 道心也 亡者 人心也 心一也 非是実有此二心 各為一物 不相交渉也 但以存亡而異其名耳 方其亡也 固非心之本 然亦不可謂別是一箇有存亡出人之心 却待反本還原 別求一箇無存亡出人之心来挽却 只是此心但不存便亡 不亡便存 中間無空隙処 所以学者必汲汲於操存 而雖舜禹之間 亦以精一為戒也 且如世之有安危治乱 雖尭舜之聖 亦只是有治安而無危乱耳 豈可謂尭舜之世無安危治乱之可名邪 如此則便是向来胡氏性無善悪之説 請更思之 却以見教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27번째 편지와 28번째 편지, 그리고 32번째 편지는 주로 심성(心性)과 인애(仁愛)에 관한 설을 다루고 있는데, 27번째 편지에서 “다만 만일 ‘인의란 천리의 베품이다’고 한다만 이 말은 극히 옳지 않다”고 하고, 또 “심성(心性)과 인애(仁愛)의 설이 합해지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곳에 투철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고 하고, 다음의 28번째 편지에서는 “모름지기 천리는 다만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총체적인 이름이고, 인(仁)․의(義)․예(禮)․지(智)는 천리의 건수(件數)임을 알아야 한다.”, “심성(心性)과 인애(仁愛)에 관한 설(說)은 다 분변하지 않아도 절로 밝혀질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두 편의 편지는 서로 이어서 심성(心性)과 인애(仁愛)에 관한 설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32번째 편지에서도 보면 “인애(仁愛)에 관한 말은 여러차례 편지로 이미 상세하게 말했다”고 하고 또 “더욱이 인의예지 네 글자를 아울러 분별해 놓은 곳에 이제 각각 버리고 남겨 둘 것이 있으면 스스로 마땅히 알게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27번째 편지와 28번째 편지에서 논한 심성과 인애의 설을 이어서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세 편의 편지는 같은 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자가 하숙경에게 답한 편지 32번째 편지를 보면 “오직 여백공(呂伯恭)만이 재노가 암기하고 암송하는 것을 학문으로 삼는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말이 비록 도리가 있는 듯하지만 그 뜻이 주로 하는 바는 편협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갑오년 봄에 여백공이 주자에게 답한 28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순희 원년(갑오; 1174, 45세)에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내주신 근래의 글을 삼가 한 두 번 읽어보고 이와 같이 번잡한 곳을 보았지만 아직 자세히 연구하고 음미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만일 “인의란 천리의 베품이다”고 한다만 이 말은 극히 옳지 않습니다. 이와 같다면 천리가 베풀어지지 않았을 때에 인의가 있지 않은 것도 가합니까? 심성(心性)과 인애(仁愛)의 설이 합해지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곳에 투철하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인의는 천리의 조목이며, 자애와 수오(羞郡)는 천리의 배풂이다”고 하는 것만 같지 않으니 여기에서 분명하게 보면 성(性)과 정(情)의 구분을 볼 수 있고, 전날에 의심했던 것을 모두 칼로 베듯이 판가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承示近文 伏読一再 適此冗中 未及子細研味 但如云仁義者 天理之施 此語極未安 如此則是天理之未施時 未有仁義也 而可乎 心性仁愛之説所以未契 正坐此等処未透耳 窃意不若云仁義者 天理之目 而慈愛羞悪者 天理之施 於此看得分明 則性情之分可見 而前日所疑皆可迎刃而判矣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순희 원년(갑오; 1174, 45세)에 보낸 편지이다. 앞의 27번째 편지에 이어 심성(心性) 인애(仁愛)의 설을 논하였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주자는 천리는 다만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총체적인 이름이고, 인(仁)․의(義)․예(禮)․지(智)는 천리의 건수(件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를 위해 정자(程子)의 호학론(好學論)을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천리(天理)가 이미 혼연(渾然)한데 이미 이것을 ‘이(理)’라고 일컬었으니 ‘조리(条理)’가 있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의 이른바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네 가지는 마땅히 각각 하나의 도리가 있어 서로 뒤섞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직 발(発)하지 않았을 때엔 실마리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하나의 이치로써 이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러 혼연(渾然)하다고 하는 것이지, 혼연한 것의 속은 전혀 분별이 없고, 인(仁)․의(義)․예(禮)․지(智)는 뒤에 차례로 생겨난 네 가지 형상이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천리는 다만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총체적인 이름이고, 인(仁)․의(義)․예(禮)․지(智)는 천리의 건수(件数)임을 알아야 합니다. 정자(程子)의 ‘호학론(好学論)’수장(首章)으로써 이 이치를 구해 보시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보시게 되면 심성(心性)과 인애(仁愛)에 관한 설(説)은 다 분변하지 않아도 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다시 정자(程子)의 호학론 첫장을 가지고 구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해하기만 한다면 심성(心性) 인애(仁愛)의 설은 모두 구별하지 않아도 저절로 명백해 질것입니다.
天理既渾然 然既謂之理 則便是箇有条理底名字 故其中所謂仁義禮智四者 合下便各有一箇道理 不相混雑 以其未発 莫見端緒 不可以一理名 是以謂之揮然 非是渾然裏面都無分別 而仁義禮智却是後来旋次生出四件有形有状之物也 須知天理只是仁義禮智之総名 仁義禮智便是天理之件数 更以程子好学論首章求之 即可見得 果然見得 即心性仁愛之説皆不辨而自明矣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와 다음의 30번째 편지는 같은 시기에 쓴 것이다. 이 편지에서 “인(仁)은 공부가 친절한 효과이며 심(心)은 본래 완전한 물건이다”고 하였고, 다음의 30번째 편지에서는 “전의 편지에서, ‘인은 공부를 친절하게 한 효과’라는 설이 있게 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보면 30번째 펴지는 이 29번 째 편지를 이어서 같은 시기에 쓴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30번째 편지에서 “구산(龜山)의, ‘인욕(人慾)은 성(性)이 아니다’는 말은 그것대로 좋다.”, “요즈음 광중(廣仲)이 질문함으로 인해 답하면서 몇 마디 했지만 광중에게 준 편지는 그 물음에 따라서 답했기 때문에, 지금 보내 준 말과 서로 같지 않아 다 기록할 수없다”고 하였는데, 광중이 구산의 말에 대해서 질문한 것은 주자가 호광중에게 답한 3번째 편지에 보이고 그 편지는 신유년과 임진년 연간에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마땅히 건도 8년(임진; 1172, 43세)에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발(発)하기 전은 태극(太極)의 정(静)이면서 음(陰)이고, 이미 발하고 난 뒤에는 태극의 동(動)이면서 양(陽)이다. 아직 발하지 않아서는 경(敬)이 그것의 주가 되어서 의(義)가 이미 갖추어지고, 이미 발하여서는 반드시 의를 주로하여 경이 행해지니, 무슨 간단(間断)함이 있겠습니까?
주경(主敬)과 존양(存養)에 대해서는 비록 ‘반드시 일삼음이 있으며’라고 말했지만, 사려(思慮)나 작위(作為)가 있지 않으니, 또한 정(静)일 따름입니다. 이른바 ‘정(静)’이란 것은 말라 죽은 나무나 죽은 재를 이른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반드시 일삼음이 있다’는 것도 또한 어찌 중(中)을 구함을 이르는 것이겠습니까?
“참되고 고요하다(真而静)”는 이 두 글자이지만, “순일하여 인위가 없다”는 말은 단지 “진(真)”자를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인(仁)은 공부가 친절한 효과이며 심(心)은 본래 완전한 물건입니다. 사람은 비록 이 마음이 있지만 공부가 도달하지 않으면 그 본체의 오묘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난 번에 망령되이 “사람이 이 마음을 가지고도 혹 불인(不仁)하면 이 마음의 오묘함을 분명히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이 때문에 그랬던 것일 뿐이지, 두루 안배함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글자에 천착해서 잘못이 가중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면 또 쓸만한 글자가 없으니 다만 이것이 역시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래 구절과 같은 것은 애초에 병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은 공부가 친절한 효과이다는 구절은 병통이 있어서 뒤에 별도로 설명을 붙였다.
심(心)은 몸에서 주가 되는데 그것이 체(体)가 되는 까닭은 성(性)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동정(動静)을 관통하여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이미 지나치게 거칠게 드러난 것 같으니 어찌 다시 분명함과 어두움이 없게 되겠습니까?
맹자가 비록 존양(存養)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그 조목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기(気)를 기름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다만 의를 주로 삼았으니 안자에게 비유하면 곧 짜임새가 없이 어설픈 곳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자(程子)의 말은 오로지 주어진 기상만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개 배우는 바는 부여받는 바에 달려 있는데, 기상은 또 배운 바에 달려 있으니 트이면 모두 트이고, 빽빽하면 모두 빽빽하므로 오직 대인의 경지에 이르러 성인의 경지로 화(化)한 연후에 이것을 논하지 않을 뿐입니다.
빗물은 얼음인데 위로 올라가면 따뜻하기 때문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지 않으며, 내려오면 차가워지기 때문에 물에 붙어서 얼음이 됩니다.
양경(楊庚)에게 답한 편지에서 마음을 보존하고 이치를 밝히며, 경을 주로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에 대해 논한 두 구절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통섭함이 없어 오히려 서로 반대되는 것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하고 뒤에할 바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요컨대 반드시 두 자가 번갈아 가며 서로 기르고 상호간에 발명해서 붙잡고 보존하는 것이 주가 된다고 말해야 이에 분명해질 뿐입니다.
작숙(作粛)에게 답한 편지에서의 이른바 “성리의 근본”이란 말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본(本)이란 말(末)에 상대되는 이름인데 이제 성(性)을 이(理)의 본(本)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이(理)를 성(性)의 말(末)로 여기는 것이 가합니까? 인용한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다”고 하신 부분도 비교적 또한 유사하지 않습니다. 원(元)은 뭇 선(善)들 중의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뭇 선(善)들 중의 으뜸이 되니, 이 문장의 뜻과는 저절로 같지 않습니다. 여여숙은 다음과 같은 “중(中)이란 도(道)가 말미암아 나오는 바이다”고 했는데, 정자(程子)는 만약 도(道)가 중(中)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도(道)는 중(中) 안에서 별도의 한 물건이 된다고 여겼으니 바로 오늘날의 차이점과 같은점입니다. “각(覚)”과 “동(動)”자는 진실로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각(覚)”자는 모름지기 동정(動静)을 관통하여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졸고 깨고 하는 비유로 말할 것 같으면 동정(動静)을 성(性)과 정(情)에 분속시켜 다만 중간에 머물 수 있는 작은 것들 중에 동(動)하고자 하지만 아직 동(動)하지 않은 곳을 마음에 귀속시키는 것이니, 지난 번의 이른바 심(心)이란 있지 아니한 때가 없다고 한 것과도 저절로 서로 모순이 됩니다. 또 “심(心)과 정(情)은 공통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고, 또 “정(情)이 곧 심(心)이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모두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 작숙(作粛)을 힐난하시면서 “성(性)이란 이(理)가 모인 것이니, 이 성(性)은 본래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이(理)가 여기에 모이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성(性)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이른바 이(理)가 모였다는 것은 “뭇 이치가 모두 모인 곳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또 인용하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는 부분 역시 바로 여씨(呂氏)의 설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말씀드린 이 세 구절의 말이 비록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자(程子)의 뜻입니다. 동견록(東見録)에 보인다. 우선 참고해 보시면 혹시라도 취할 것이 있으실 겁니다. 또 “성리(性理)의 본(本)을 말한 것은 그것이 일원(一源)이기 때문이다”고 하셨는데, 이것 역시 합당치 않습니다. 체용(体用)은 두가지 것이나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일원(一源)을 말할 수 있고, ‘성(性)’과 ‘이(理)’ 두 글자는 두 가지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일원(一源)이라고 하면 도리어 말을 거꾸로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이미 작숙(作粛)에게 답한 편지에 보인다.
쫓겨난 어머니는 복을 입는다는 말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가 합당합니다. 의례의 기록에는 아버지의 뒤가 되는 사람은 복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조종(祖宗)을 높이고 공경하며, 집안에 두 주인이 없다는 뜻입니다. 선왕(先王)이 예를 제작함에 정미하지만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습니다. 자상(子上)은 자사(子思)의 적장자 같은데 스스로 이 예를 합용하였지만 자사는 도리어 이와 같이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의심할만 합니다. 제 생각엔 「단궁」에서 기록한 것은 반드시 그 전함을 잃어 버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자(程子)가, 어떤 사람의 “경(敬)은 정(静)이 아닙니까?”라는 물음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정(静)이라고 말하게 되면 바로 불교의 설로 들어가게 됩니다. ‘정(静)’자를 쓰지 말고 다만 ‘경(敬)’자를 쓰십시오. ‘정(静)’자를 이야기하게 되면 곧 잊게 되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일삼음이 있으되 기필(期必)하지 말며, 마음으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일삼음이 있는 것’은 곧 ‘마음으로 잊지 않는 것’이고, ‘기필하지 말라는 것’은 곧 ‘조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숙경(叔京)은 정자의 이 말로 인하여 선생[朱子]에게 의문이 있게 되었으나, 숙경의 설은 참고할 수가 없다. 이제 나의 뜻으로 대신 말한다면, “정자께서 ‘정(静)’자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선(禅)으로 잘못 들어갈까를 염려해서일 따름이지, 정(静)을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일삼음이 있으되’라는 말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는데, 일삼음이 있으면 정(静)을 해칠까 두렵습니다. 또 정자께서는 일찍이 여씨(呂氏)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않을 때에 중정(中正)함을 구하라’는 말을 불가하다고 여기셨는데, 이제 ‘반드시 일삼음이 있는 것’으로써 주경(主敬)과 존양(存養)의 공부로 삼으시는데, 이는 ‘고요할 때 중정함을 구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요?”라고 했을 것이다. 이것으로써 숙경이 물었던 내용으로 삼아, 선생이 답한 말을 본다면 분명해져 의심이 없게 될 것이다.
“즐거움을 고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인(仁)이 곧 여기에 있다”고 한 말씀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仁)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고치지 않을 수 있을 뿐입니다.
“경(敬)이 오래되면 성(誠)해진다. 성(誠)이란 충(忠)과 신(信)이 쌓인 것이다”고 하셨는데, 이 말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광무(光武)는 비록 중흥(中興)을 이름하지만 실은 창업(創業)과 같습니다. 사당의 제도를 세움에 의로써 일으킨 것도 절도에 적중하는 것 같습니다. 살피지 않으심이 과연 무엇 때문인지요? 다시 참고하여 바로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머지 의론은 모두 합당하니 지난번 호명중(胡明仲)이 시랑(侍郎)으로 있으면서 이고(李固)를 논한 일을 봐도 또한 바로 이와 같습니다.
未発之前, 太極之静而陰也. 巳発之後, 太極之動而陽也. 其未発也, 敬為之主而義已具 : 其已発也, 必主於義而敬行焉. 則何間断之有哉?
主敬存養雖説必有事焉, 然未有思慮作為, 亦静而已. 所謂静者, 固非槁木死灰之謂 : 而所謂必有事者, 亦豈求中之謂哉?
‘真而静’是兩字, ‘純一無偽’却只説得‘真’字.
仁是用功親切之效, 心是本来完全之物. 人雖本有是心, 而功夫不到, 則無以見其本体之妙. 故熹向者妄謂人有是心而或不仁, 則無以著此心之妙, 以此故爾, 非謂旋安排也, 但著字差重耳. 然舎此又未有字可下, 只此似亦不妨. 若下句則似初無病 ‘仁是用功親切之效’ 此句有病, 後別有説
心主於身, 其所以為体者性也, 所以為用者情也. 是以貫乎動静而無不在焉. 以此言之, 已似太粗露了, 何得更為無著莫乎?
孟子雖多言存養, 然不及其目. 至論養気, 則只以義為主, 比之顔子便覚有疏闊処. 程子之言, 恐不専為所禀与気象. 蓋所学繋於所禀, 気象又繋於所学, 疏則皆疏, 密則皆密, 唯大而化之, 然後不論此耳.
雨水冰’, 上温, 故雨而不雪 : 下冷, 故著水而冰.
答楊庚書論存心明理․主敬窮理兩段意好, 然無総摂, 却似相反, 使人不知所先後. 要之須説二字交相養․互相発而操存者為主, 乃分明耳.
答作粛書所謂‘性理之本’, 此語未安. 夫本対末之名也, 今以性為理之本, 然則以理為性之末, 可乎? 所引‘元者, 善之長’, 為比亦不類. 元在衆善之先, 故為衆善之長, 与此文意自不同也. 呂与叔云: ‘中者道之所由出’, 程子以為若謂道出於中, 則道在中内別為一物, 正今日之異同也. ‘覚’与‘動’字固不同, 然‘覚’字須貫動静而無不在. 若睡覚之喩, 則是動静分属性․情, 只留得中間些子欲動未動処属心也, 与前所謂心無時不在者亦自相矛盾矣. 又云‘心情亦可通言’, 而又云․情即心也’, 此皆未安. 又難作粛云: ‘性者理之会, 是性本無, 須待理会於此方以為性’, 此亦非也. 所謂理之会者, 猶曰‘衆理之総会処’. 爾. 又所引‘率性之謂道’, 亦正是呂氏之説. 熹向説此三句語雖未瑩, 然却是程子意. 見東見録. 試參考之, 或有取爾. 又云‘所以言性理之本, 以其一源也’, 此亦未安. 体用是両物而不相離, 故可以言一源. ‘性理’両字即非兩物, 謂之一源, 却倒説開了. 余已見答作粛書.
出母有服, 所論得之. 記得儀礼却説為父後者則無服, 此尊祖敬宗․家無二主之意. 先王制作精微不苟蓋如此. 子上若是子思嫡長子, 自合用此禮, 而子思却不如此説, 此則可疑. 窃意檀弓所記必有失其伝者.云‘能不改樂, 仁便在此’, 亦末安, 唯仁故能不改樂耳.
云‘敬久則誠, 誠者忠信之積’, 此語恐未安.
光武雖名中興, 実同創業, 所立廟制以義起之, 似亦中節. 不審果何如? 更望參訂也. 余論皆当, 向見胡明仲侍郎論李固事, 亦正如此也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건도 8년(임진; 1172, 43세)에 쓴 편지이다. 앞의 29번째 편지와 이 편지는 모두 문목(問目)의 형식으로, 하숙경의 질문에 주자가 대답한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가 주로 답한 내용은 심(心)과 성(性) 인(仁)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또 체(體)와 용(用)이 한 가지 근원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 외에도 한나라 광무제와 헌제, 그리고 진나라 애제의 상례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리고 구산의 성론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사람의 본심(本心)은 인(仁)하지 않음이 없지만, 이미 물욕에 빠져 본심을 잃었으므로 반드시 공부를 친절하게 해야만 비로소 그 본심의 인(仁)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의 편지에서, ‘인은 공부를 친절하게 한 효과’라는 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보니, 다만 아래 부분 한 쪽만 말을 했습니다. ‘마음은 본래 완전한 것이다’라는 것도 또한 위 쪽 한 부분만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말이 병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원만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만약, ‘마음은 처음과 끝을 통하여 꿰뚫는 것이고, 인은 심체(心体) 본래의 오묘한 모습인데, 물욕에 빠지면 비록 이 마음이 있더라도 본연의 오묘함을 잃게 되니, 오직 공부를 친절하게 해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이 한다면 거의 근사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맹자(孟子)의 말은 진실로 혼연(渾然)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일찍이 이 마음이 없지 않은데 혹 인(仁)하지 못한 데 이르는 것은, 다만 그 본심의 오묘함을 잃어서 그런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한즉, ‘인(仁)’자와 ‘심(心)’자도 또한 모름지기 약간의 분별이 있어야만 될 것 같습니다. 이선생(李先生)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니, “맹자가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다’라고 말한 것은 ‘심(心)’자를 가지고서 ‘인(仁)’자의 뜻을 단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설이 가장 의미가 있으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자(顔子)와 맹자(孟子)의 기상은 또한 헛되이 지적해서 말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그 글을 익숙히 읽고 완미해야할 따름입니다.
‘체(体)와 용(用)이 한 가지 근원’인 것은, 이(理)에서 본다면 이(理)가 체(体)가 되고 상(象)이 용(用)이 되는데, 이(理) 가운데 상이 있는 것이, 한 가지 근원입니다. 드러남과 은미함 사이에 간격이 없다는 것은 상(象)에서 본다면 상(象)은 드러남이 되고 이(理)는 은미한 것이 되어, 상(象) 가운데 이(理)가 있는 것이 간격이 없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뒤에 답한 것은 말뜻이 매우 분명하니, 자세히 상고하면 귀착하는 곳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미, “이(理)가 있은 뒤에 상(象)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와 상이 곧 한 가지가 아닌 까닭에 이천(伊川)은 다만 ‘한 가지 근원’과 ‘간격이 없다’는 말만 했을 뿐입니다. 사실 체용(体用)과 현미(顕微)의 구분은 없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이와 상은 하나이므로 꼭 분별할 것은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요사이의 어물어물하는 폐단에 빠질 것 같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명을 성(性)이라 한다”고 했으니, 이 성(性)이 있으면 곧 많은 도리가 모두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性)은 곧 이(理)가 모여있는 곳이다”고 한 것이지 먼저 이(理)가 없는 성이 있어서 그것이 여기에 와서 모이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이천(伊川)의 ‘성(性)이 이(理)이다’는 한 구절만 가지고 보아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묘하게 하는 덕이다”고 했는데, 이 때의 “묘(妙)”자는 주재하고 운용한다는 뜻입니다. 인용하신 효와 덕의 근본은 비록 본말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지만 효란 덕 가운데의 한 가지 일로서 이 효덕(孝徳)이 본이 되고 저 중덕(衆徳)은 말이 될 뿐입니다. 이제 “성(性)은 이(理)의 근본이다”고 한다면 성(性)은 이(理)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이다고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또 천하의 이(理)는 모두 이것을 최고의 근본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이 천하의 이(理)는 성(性)을 좇아 생겨나 성(性) 밖에 있게 되어 두 가지 물건이 되니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번 편지에서 인용한 정이천과 여여숙의 대답과 질문을 기억해보니 이미 다한 것 같으니 다시 자세히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의 일은 처음에는 다만 그가 의리로써 일어났는가를 의심했을 뿐, 바른 법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논의하신 바, “백승(伯升)의 아들을 세워서 4대를 모신 사묘(私廟)를 받들게 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가장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성제(成帝)와 애제(哀帝) 이하는 능(陵) 가까이에 묘(廟)를 만드는 것이 아주 타당할 것 같습니다. 대개 저 황제들은 도적을 끌여들여 나라를 망하게 만든 임금들이고, 또 나라를 다시 일으키라고 광무제에게 명한 적도 없으니, 서울에다 다시 사당을 세우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한나라 헌제(献帝)나 진(晉)나라 회제(懐帝) 같은 경우도 같지 않습니다. 대개 소열제(昭烈帝)와 원제(元帝)는 두 황제의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예(禮)의 변경된 절차인 것으로서, 모름지기 의리에 정밀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차이나지 않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만 정상적인 규정만 지키고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면,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니, 예를 들면 온공(温公)과 이천(伊川)이 복원(濮園)의 일을 논한 것이 같지 않은 것 같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구산(龜山)의, “인욕(人慾)은 성(性)이 아니다”는 말은 그것대로 좋은데, 며칠 전 호씨(胡氏)는 그 말을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요즈음 광중(広仲)이 질문함으로 인해 제가 답하면서 몇 마디 했습니다. 여기서 광중에게 준 편지는 그 물음에 따라서 답했기 때문에, 지금 보내 주신 말씀과 서로 같지 않아 다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을 보니, “어디로부터 이 인욕이 있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이 물음은 매우 긴절(緊切)합니다. 저는 ‘인욕이라고 이르는 것은 바로 천리(天理)의 반대일 따름이다’고 생각됩니다. ‘천리를 인하여 인욕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되지만, ‘인욕도 역시 천리다’라고 말한다면 되지 않습니다. 대개 천리 속에는 본래 인욕이 없습니다. 오직 그 흐름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마침내 인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정자는 “선과 악은 모두 천리이니, 이 구절은 매우 놀라운 듯하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악이 아니다. 이 구절은 완전히 전변(転変)되었다. 다만 과(過)와 불급(不及)이 곧 이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디서부터 이 인욕이 있게 되었는가?’ 라는 물음이 이 구절에서 답이 되었다. 인용하신 악도 역시 본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人之本心無有不仁 但既汨於物欲而失之 便須用功親切 方可复得其本心之仁 故前書有仁是用功親切之效之説 以今観之 只説得下一截 心是本来完全之物 又却只説得上一截 然則兩語非有病 但不圓耳 若云心是通貫始終之物 仁是心体本来之妙 汨於物欲 則雖有是心而失其本然之妙 惟用功親切者為能复之 如此則庶幾近之矣 孟子之言固是渾然 然人未嘗無是心 而或至於不仁 只是失其本心之妙而然耳 然則仁字心字亦須略有分別始得 記得李先生説孟子言仁 人心也 不是将心訓仁字 此説最有味 試思之
顔孟気象 此亦難以空言指説 正当熟読其書而玩味之耳
体用一源者 自理而観 則理為体 象為用 而理中有象 是一源也 顕微無間者 自象而観 則象為顕 理為微 而象中有理 是無間也 先生後答語意甚明 子細消詳 便見帰著 且既曰有理而後有象 則理象便非一物 故伊川但言其一源与無間耳 其実体用顕微之分 則不能無也 今曰理象一物 不必分別 恐陥於近日含胡之弊 不可不察
天命之謂性 有是性便有許多道理総在裏許 故曰性便是理之所会之地 非謂先有無理之性而待其来会於此也 但以伊川性即理也一旬観之 亦自可見矣 心妙性情之徳 妙字是主宰運用之意 又所引孝徳之本雖不可以本末言 然孝是徳中之一事 此孝徳為本而彼衆徳為末耳 今曰性理之本 則謂性是理中之一事 可乎 又云天下之理皆宗本於此 則是天下之理従性生出而在性之外矣 其為両物 不亦大乎 記得前書所引程呂答問者似已尽之 更乞詳考
光武之事 始者特疑其可以義起耳 非以為正法当然也 所論立伯升之子以奉私廟 此最得之 但成哀以下 即陵為廟 似已允当 蓋彼皆致冦亡国之君 又未嘗命光武以興复 自不当更立廟於京師也 如漢献帝晉懐帝又不同 蓋昭烈元帝嘗受二帝之命矣 此等事乃体之変節 須精於義理 乃能於毫釐之間処之不差 若只守常執一 便不相応 如温公伊川論濮園事之不同 亦可見矣
亀山人欲非性之語自好 昨来胡氏深非之 近因広仲来問 熹答之云云 此与広仲書随其所問而答之 故与今所諭者不相似 不能尽錄 然観来教謂不知自何而有此人欲 此問甚緊切 熹窃以謂人欲云者 正天理之反耳 謂因天理而有人欲則可 謂人欲亦是天理則不可 蓋天理中本無人欲 惟其流之有羞遂生出人欲来 程子謂善悪皆天理 此句若甚可駭 謂之悪者本非悪 此句便都転了 但過与不及便如此 自何而有此人欲之間 此旬答了 所引悪亦不可不謂之性 意亦如此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이 편지는 내용 중에 “단지 유지하고 기르기만 해도 곧 저절로 분명하게 드러나니 다만 궁리하고 공부하여 상호간에 발명해야할 따름이다. 보내준 편지에서 반드시 먼저 근본을 알려고 해야한다고 하면서 아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또한 두 부분으로 이루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먼저 살펴서 알고 그런 후에 함양한다는 것에 대해 변론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 편지 역시 앞의 14번째 편지와 15번째 편지와 함께 건도 5년(기축; 1169, 40세)에 쓴 것으로 봐야 한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반드시 마음을 다하고 성을 알며 그 근본을 안 후에 유지하고 기르는 공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 뜻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과 이 성(性)을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물욕이 어둡게 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 근본을 알고자 한다면 역시 반드시 우선 유지하고 기르는 공부의 순서를 알아서 공을 더 들여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알게 된 후에도 유지하고 기르는 공부를 버리지 않아야 비로소 지킬 수 있습니다. 애초에 밖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므로 단지 유지하고 기르기만 해도 곧 저절로 분명하게 드러나니 다만 궁리하고 공부하여 상호간에 발명해야할 따름입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반드시 먼저 근본을 알려고 해야한다고 하시면서 아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아마도 또한 두 부분으로 이루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덞을 주로하는 사람은 나아감을 문체로 삼고, 채움을 주로하는 사람은 돌아옴을 문체로 삼는데 그 중간에 본디 아주 좋은 부분이 있으니 이른바 성(性)과 정(情)의 올바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중화(中和)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그러나 다만 중화(中和)라고만 하면 말이 미약해 집니다. 반드시 다시 완미하시어 나아감과 돌아옴의 사이에서 하나의 아주 좋은 부분을 보셔야 비로서 중화(中和)를 실제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학문과 벼슬은 두 가지 일이지만 그래도 서로간에 발명하는 곳이 있습니다.
“경(敬)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주재하는 곳을 총괄해서 말한 것입니다. “엄숙히 생각하는 듯하다”는 것은 경(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말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경하는 사람의 말입니다. “백성이 편안해 짐”은 경하는 사람의 효과입니다. 이는 다만 대강과 본령만 말한 것일 뿐이지만 일마다 잘못이 없으면 저절로 그 가운데 있게 됩니다. 만약 다만 일마다 잘못이 없다고 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말할 뿐이라면 기상이 천박해져서 함축함이 없을 것입니다.
“경(敬)하면 마음에 주재가 있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매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오직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사물(事物)의 본체(本体)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제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많이들 ‘가(可)’자를 빼먹기 때문에 말을 행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귀신의 오묘함과 만물의 처음과 끝을 알아야하니 만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른바 빠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다 궁구한 후에 선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앎이 지극해진 후에 뜻이 정성스러워지는 것입니다.
示喩必先尽心知性 識其本根 然後致持養之功 此意甚善 然此心此性人皆有之 所以不識者 物欲昏之耳 欲識此本根 亦須合下且識得箇持養功夫次第而加功焉 方始見得 見得之後 又不舎其持養之功 方始守得 蓋初不従外来 只持養得便自著見 但要窮理功夫互相発耳 来喩必欲先識本根 而不言所以識之之道 恐亦未免成兩截也 主於减者 以進為文 主於盈者 以反為文 中間便自有箇恰好処 所謂性情之正也 此固不離於中和 然只喚作中和 便説殺了 須更玩味 進反之間 見得一箇恰好処 方是実識得中和也
学仕是兩事 然却有互相発処
毋不敬 是統言主宰処 儼若思 敬者之貌也 安定辞 敬者之言也 安民哉 敬者之效也 此只言大綱本領 而事無過挙 自在其中 若只以事無過挙 可以安民為説 則気象浅迫 無涵畜矣
敬則心有主宰而無偏系 惟勿忘勿助者知之
体物而不可遺 今人読此句多脱却可字 故説不行 当知鬼神之妙始終万物 物莫得而遁焉 所謂不可遺也
窮尽物理 然後好善如好色 悪悪如悪臭 故必知至而後意誠
하숙경에게 답함 答何叔京
【해제】순희 원년(갑오; 1174, 45세)에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는 논어「학이」에 나오는 구절들에 대해 변론하였으며, 아울러 앞의 27, 28번째 편지에 이어 인애(仁愛)에 대한 설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인애(仁愛)의 설에 대해서는 인의예지 네 글자를 아울러 분별해 놓은 곳에 각각 버리고 남겨 둘 것이 있으면 스스로 마땅히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
천하의 이치는 크고 작음과 본말(本末)이 있으니 모두 천리(天理)에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의 일에는 완급과 선후가 있어야 하며 한쪽으로 치우쳐서 폐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말(末)로 하여금 본(本)을 이기게 하거나 완(緩)을 급(急)보다 먼저 하게해서는 안될 뿐입니다. 성인의 이른바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운다’는 말만 봐도 그 말뜻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하의 의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굽은 것을 바로잡고 그 올바른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재노(呉才老)는 그 말을 병통으로 여겼지만 대개는 여기에서 본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도리어 그 뜻을 아직 다 깨닫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오직 여백공(呂伯恭)만이 재노가 암기하고 암송하는 것을 학문으로 삼는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말이 비록 도리가 있는 듯하지만 그 뜻이 주로 하는 바는 편협합니다. 이 의론은 이해할만 합니다. 뜻이 치우치더라도 의론이 올바르면 저절로 서로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아버지의 도(道)를 고침이 없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아버지가 혹 행실에 잘못함이 있더라도 자식이 안하면 되니 무슨 고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는데, 제 생각엔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성인의 뜻을 고친 것이니, 바로 여기에서 마땅함을 얻어야할 따름입니다. 이 장의 가르침은 애당초 나라를 소유한 자를 위하여 베푼 것이 아닙니다. 대의는 차마 고치지 못하는 마음이 근본처로서 그 일의 권형(権衡)은 유씨(游氏)의 설에서 다하였습니다. 우선 상고해 보시면 아실수 있으실 겁니다. 구산의 설을 이장에서는 펼쳐 놓았는데, 참으로 본문의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른바 ‘차마 어버이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아마도 죽어서 삶을 이루는 병과는 같지 않은 것 같으니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일과 큰 일에 모두 이것을 따른 것이다.”
마땅히 이천의 설에 의거해야 합니다. 다만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는 아래 구절에 귀속시켜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설을 잠간만 보아도 우뚝할 따름입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서 음미하면 스스로 귀착할 곳을 보게 될 것이니 무한한 기력을 허비하는 일을 덜게될 것입니다. 만약 아래구절에 귀속 시키면 위 구절은 말이 되지 않고, 또한 ‘(和)를 알아서 화(和)만 한다’는 뜻과 중첩됩니다.
“약속이 의리(義理)에 가깝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약속은 말을 실천할 것을 기필하니, 복(复)은 약속 아닌 것을 말한 것이다.”고 하셨는데, 이 구절은 제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빈(蜡賓)에 대한 질문은 당시에 반드시 내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전하는 자가 혹 그 진실을 잃었기 때문에 그 말이 잘못이 없을 수 없을 뿐입니다.
백공(伯恭)의 백이와 숙제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괜찮습니다. 나라를 양보하는 일을 만약 유하혜(柳下恵)나 소련(少連)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또한 마땅히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갑자기 회오리바람처럼 멀리 당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위론(危論)” 등의 말은 혹자들은 백공의 말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에 자못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편지에 따라서 빼버렸는데, 백공은 스스로 분변하기를 예전에 말한 것과 같이할 뿐입니다. “때를 따른다(随時)”고 한 것은 바로 혹은 위태롭기도 하고 혹은 겸손하기도 해서 따를 수 없는 때가 없음을 이를 뿐입니다.
만약 “마땅히 때가 따를만 한가 아닌가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면 성인의 이른바 때를 따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오로지하고 뜻을 이룬다”는 등의 말은 바로 사람을 가르침에 이와 같이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다만 의리를 강가하여 밝히고 시비를 분별함에 힘쓸 뿐이니 배우는 사람이 넓게 듣고서 있는 듯 하기도 하고 없는 듯 하기도 하다면 무엇을 말미암아 가슴에 들어가 깨닫는 바가 있겠습니까?
인애(仁愛)에 관한 말씀은 여러차례 편지로 이미 상세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다시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인의예지 네 글자를 아울러 분별해 놓은 곳에 이제 각각 버리고 남겨 둘 것이 있으면 스스로 마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일러주심을 모독하는 허물을 취할까 해서입니다. 만약 보내오신 편지와 같다면 맹자의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다”는 이 말도 마땅히 병통이 있습니다. 마땅히 “공각지심(公覚之心)이 인의 단서이다”고 해야 갖추어질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무슨 간섭이 있겠습니까?
雖曰未学 吾必謂之学矣
天下之理有大小本末 皆天理之不可無者 故学者之務有緩急先後而不可以偏廃 但不可使末勝本緩先急耳 観聖人所謂行有余力則以学文者 其語意正如此 若子夏之論 則矯枉過其正矣 故呉才老病其言 蓋有見於此者 来喩之云 却似未領其意 唯呂伯恭謂才老蓋以記誦為学者 故其言雖若有理 然其意之所主則偏矣 此論為得之 蓋意偏論正 自不相妨也
三年無改於父之道
来喩云父或行有不善 子不為則可矣 何改之有 熹謂不為便是改聖人之意 正要於此処之得宜耳 此章之指初不為有国家者設也 大意不忍改之心是根本処 而其事之権衡 則游氏之説尽之 試詳考之可見 龜山之説施於此章 誠非本文之意 然其所謂不忍死其親者 恐与之死致生之病不同 幸詳之
小大由之
当依伊川説 但人自少時即読属下句 故今乍見其説突兀耳 平心味之 自見帰著 省無限気力也 若属下句 即上句説不来 又与知和而和意思重畳
信近於義
来喩云信必践言 則复言非信也 此句熹所未暁
蜡賓之問 当時必有来歴 恐伝者或失其真 故其言不能無失耳
伯恭夷斉之論大概得之 譲国之事 若使柳下恵少連処之 不知又当如何 恐未遽飄然遠引也
危論等語 此或者道伯恭之言 其間頗有可疑処 故因書扣之 而伯恭自辨如前所云耳 随時云者 正謂或危或孫 無不可随之時耳 若曰当視時之可随与否 則非聖人所謂随時矣
専心致志等語 正是教人如此著力 教者但務講明義理 分別是非 而学者汎然聴之 若存若亡 則亦何由入於胸次而有所醒悟邪
仁愛之説 累書言之已詳 請更検看 更并仁義禮智四字分別区処 今各有去著 則自当見之 不欲多言 以取涜告之咎也 若如来喩 則孟子惻隠之心 仁之端也 此語亦当有病 当云公覚之心 仁之端也 乃為備耳 如此立言 有何干渉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