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권
편지(왕상서․장식․여조겸․유자징과의 문답) 書汪張呂劉問答
여백공이 질문한 양구산의 중용에 대해 답함 答呂伯恭問龜山中庸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편지[답여백공35-1(35권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 시에 씌여진 것이다. 주자는 26세 경에 여동래와 교유하면서 점차 학문적 인간적 신뢰를 쌓아 나간다. 주자 41세 시에 씌여진 이 편지는 중용에 관한 여백공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양구산의 중용해를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공과 주자 사이에 양구산의 중용설이 중심 화제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모두 이정 계열의 학문적 동지로서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자는 장남헌을 만난 후 30대 중 후반을 거치면서 40세 경에는 이미 나름의 확고한 이론적 토대를 갖춘다. 그는 이제 독보적인 경전 주석을 해 나감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보편화하고 객관화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41세 경에 씌여진 이 편지를 통해 그는 이미 중용과 관련된 자신의 뚜렷한 입장이 표명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대학장구와 함께 중용장구의 초고는 주자 45세 경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구상은 매우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대학장구 및 중용장구의 서문이 주자 60세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그의 경전에 대한 각고의 연찬과정에 혀를 내두를 만하다.
양구산(楊龜山)의『중용해(中庸解)』첫째 장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 이전부터 의심스럽게 생각해 왔었는데, 장흠부(張欽夫) 역시 [이를] 깊이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양선생의 학설에] 도리어 병통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양선생께서] 문집 속에서 언급하신 바 “희노애락이 아직 드러나지 않을 즈음에, 마음으로 체득해낸다면, 곧 중(中)의 본체(本體)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이 중의 본체를] 단단히 붙들어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없어지게 되어 [미발이 이발의 희노애락 등으로] 발현될 때 반드시 적절한 중도를 얻게 된다”라고 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천지가 지위를 지니게 된 근거와 만물이 양육되게 되는 이유는 비록 하나의 이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또한 [‘天地位焉’과 ‘萬物育焉’은] 각자 [나름의] 부터 나온 바(所從來)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기상(氣象)을 완미해보면 스스로 양구산의 말 역시 병통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신 ‘시조리(始條理)․종조리(終條理)’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도, 또한 어찌 [이 둘을] 분별하지 않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중용해(中庸解)』의] ‘달도달덕(達道達德)’장의 보면, 무본(婺本)의 경우 ‘달덕(達德)’자가 두 번 나옴으로 인해 중간의 여러 구절이 빠져버렸고, 이 때문에 문리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 무본(婺本)이] 엄본(嚴本)보다 낫다고 생각하시니 이 또한 합(合)하기만 좋아하고 분리하기를 싫어하는 허물일 뿐입니다.
‘자기를 완성해 나가고 사물을 완성시켜나가는 방법’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내외의 도를 합일시켜 때에 맞추어 조처해 나가는 적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개 무르녹듯 투철하고 환하게 통달한 것은 하나로서 꿰뚫음으로서 그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세히 구분해 보면, 그 속에 구산(龜山)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다만 이 점만 가지고 말하다가 도리어 총괄하여 통솔하는 곳이 없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자성야(誠自成也)’[에 관한 양구산의] 이 학설은 옳은 듯 합니다. 대개 이는 도리가 저절로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정성스러워지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존덕성(尊德性)’장에 관해, 양구산은 위로부터 아래를 말했고, 여여숙(呂與叔)은 아래로부터 위를 말했습니다만 대개 서로 통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부존줄신(不尊不信)에 관한 이 단락은 그 학설이 아직 충분히 잘 된 것 같지 않습니다. 접때 이천(伊川)께서도 단지 이처럼 말한 것을 본 적이 있으니 우선 마땅히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이보다 나은 학설이 있으면 [그 학설로] 바꾸면 될 것입니다.
양구산(楊龜山)의『중용설(中庸說)』에는 의심할만한 곳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용불가능(中庸不可能)”, “불가이위도(不可以爲道)”, “귀신지위덕(鬼神之爲德)” 따위의 장을 논한 곳에 참으로 병통이 있으며, 그대 편지에서 지적한 바는 [이에 비하면] 도리어 허물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答呂伯恭問龜山中庸
龜山中庸首章之語, 往者蓋以爲疑, 欽夫亦深不取. 自今觀之, 却未有病. 但集中云‘喜怒哀樂未發之際, 以心體之, 則中之體自見. 執而勿失, 無人欲之私焉, 發必中節矣’, 此則不可.
天地之所以位, 萬物之所以育, 雖出一理, 然亦各有所從來. 玩其氣象, 自可見龜山之語亦不爲病. 如孟子語‘始․終條理’, 則亦豈不分別而言耶?
‘達道達德’ 一章, 婺本因有兩‘達德’字, 而脫去中間數句, 以故不成文理. (3-1521)今以爲勝嚴本, 是亦喜合而惡離之過耳.
成己成物之道無不備, 故能合內外之道而得時措之宜. 蓋融徹洞達, 一以貫之而然也. 然細分之, 亦有龜山之意. 但不當專以此爲說, 却無總統耳.
‘誠自成也’, 此說恐是. 蓋此是道理自然如此, 但人却只要誠之耳.
‘尊德性’一章, 龜山從上說下, 呂與叔從下說上, 蓋無所不通.
‘不尊不信’, 此段未得其說. 向見伊川亦只如此說, 且當從之. 有說勝此, 乃可易耳.
龜山中庸有可疑處, 如論中庸不可能, 不可以爲道, 鬼神之爲德等章, 實有病. 而來敎所指, 却不爲疵也.
별지 別紙
성현의 말씀은 나누고 합치거나, 느슨하게 하고 긴장시킬 때에 각기 나름의 질서가 있어서 한 구절로 모든 의미를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중용(中庸)』1장에서 중(中)과 화(和)가 다른 이유를 말씀하셨으니, 하나[中]는 곧 대본(大本)이고, 하나[和]는 곧 달도(達道)라 하셨습니다. 비록 분별력이 뛰어난 자가 있다 해도 [이들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이천선생(伊川先生)은 “대본(大本)은 그 체(體)를 말한 것이고, 달도(達道)는 그 용(用)을 말한 것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체와 용은 저절로 다르니 어찌 둘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즈음에서 하나하나 분명하게 알아내야만 합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체와 용이 하나의 근원인 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단지 하나의 근원일 뿐, 체와 용이 같지 않다는 것은 본래 처음부터 그러한 것입니다. ‘천지가 제 자리를 잡음(天地位)’이 바로 ‘큰 근본(大本)’이 성립되는 곳이며, ‘만물이 길러짐(萬物育)’이 바로 ‘보편적인 도(達道)’가 시행되는 곳입니다. 이 점은 불꽃을 확인하듯 분명합니다. 다만 이 둘은 항상 서로 기다리는 관계(相須)여서 한 곳에는 능하지만 다른 곳에는 능치 못한 그러한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자사(子思)의 말이 구산(龜山)의 기상과는 본래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구산(龜山)이 [중용에 대해 주해를 하지 않고] 단지 ‘치중화(致中和)’, ‘천지위(天地位)’, ‘만물육(萬物育)’의 세 구절을 말하기만 했을 뿐이라면, 책에 대한 풀이를 제대로 한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석씨(釋氏)야말로 바로 이와 같이 했습니다. 일찍이 그 무리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존욱(李遵朂)이란 사람이 어떤 승려에게「신심명(信心銘)」에 주석을 달아줄 것을 청했는데, [부탁을 받은] 그 승려는 [「신심명(信心銘)」의] 각각의 구절을 크게 써서 이를 다시 [「신심명(信心銘)」의] 본래 구절 밑에 다시 주석를 다는 식으로 했다 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한 것은] 곧 단지 [선기(禪機)의 한 방편으로, 일부러] 이처럼 두루뭉실(鶻突)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중용불가능(中庸不可能)’이라는 구절에 대해, 명도(明道)께서는 “극기(克己)가 가장 어렵다. 이 때문에 ‘중용(中庸)은 능(能)할 수 없다’라고 했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상하를 꿰뚫는 것으로서 기이하면서도 험난한 구산(龜山)의 말과는 같지 않습니다. 구산(龜山)의 말에는 여전히 불노(佛老)의 실마리가 남아 있어서, 결코 공자(孔子)․자사(子思)의 근본정신을 계승하고 있지 못합니다. 겸하여 또 ‘사람의 도라 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면 [참된] 도가 될 수 없다’라는 두 구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만약 구산(龜山)의 뜻과 같이 해석한다면, 곧 문리(文理)가 저절로 통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양구산 학설의] 그 신기함만을 좋아하고, 그것이 지닌 장애를 깨닫지는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지금 사람들이 本分에 따라 문자를 [해석]한다면 곧 [중용 13장의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에서] ‘이도인(而遠人)’이라 할 때, ‘이(而)’라는 글자를 쓸 수가 없고, 반드시 ‘즉(則)’자를 써야만 바야흐로 문리가 이루어진다. 뒤에 비록 ‘구인(求仁)’에 관한 설명이 있지만 그러나 그[양구산]가 말한 바, ‘도의 관점에서 말하자면(自道言之)’, ‘배우는 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自學者言之)’과 같은 경우는 왕씨(王氏)의 말과 흡사합니다. 도가 만약 끝내 인위적인 노력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면, 곧 배우는 자가 또 어찌 [인위적으로] 인을 추구하는 것을 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와는 반대로] 배우는 자가 [인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도가] 인위적인 노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론’은 군더더기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논의는] 헛되이 언어를 낭비하기만 하고, 배우는 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의리의 올바름을 해치는 측면이 있으므로 따를 수 없습니다. 접때 보니, 이선생(李先生)께서도 이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선생께서는 저에게] “나선생(羅先生)․진기수(陳幾叟)등 몇몇 분들께서 일찍이 구산(龜山)이 해설한 중용(中庸)의 말뜻이 말라 비틀어진 듯하여, 여여숙(呂與叔)[이 해설한 중용(中庸)의 말뜻이] 축축히 푹 배어드는 듯한 것만은 못하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또한 [선배학자들 사이의] 공론이란 덮어 무시해버릴 수만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여숙(呂與叔)이 [중용 13장의] ‘도불원인(道不遠人)...’ 이하 구절을 해설한 것은 참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다시 검토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중용』 12장인] ‘연어(鳶魚)’장과 [『중용』 16장인] ‘귀신(鬼神)’장 두장에 관해서는 상채(上蔡)께서 매우 투철하게 해설하였는데, [배우는] 사람을 깨우쳐주고 계발시켜주는 점이 있습니다. [양구산이 하듯] 이와 같이 말하게 되면 비록 한 조각의 멋진 언어를 [경전해석에] 배치해서 사용한다 해도, 도리어 핵심을 꿰뚫는 점은 없을 것입니다.
지(智)․인(仁)․용(勇)에 관해서는 반드시 경중을 두어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어진 자는 반드시 용기가 있다’라고만 말한다면 인(仁)과 용(勇)이 하나라 여길 뿐, 어찌 [이 둘 사이에] 경중을 두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용기 있는 자라 해도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다’라 말한다면 또한 어찌 곧 [이 둘 사이에] 경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智)․인(仁)․용(勇)] 이 셋은 천하의 보편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것과 [태어난 후 수양에 의해 스스로] 성취한 것이 [서로] 같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생지안행(生知安行)․학지리행(學知利行)․곤지면행(困知勉行)’과 같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仁)은 혼연한 전체(全體)이므로 지(智)와 용(勇)은 본래 그 [인(仁)]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알며, 편안히 실천하는 경우’이라면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도와 부합할 수 있는 경우이니, ‘배워서 알고, 이롭게 여겨 인을 실천하는 경우’이나, ‘힘들여 겨우 알아내고 애써 실천해 나가는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 그대로 움직여 나간다 함(動以天)’은 성인의 일”’이라 한 구산(龜山)의 이 문장이 만약에 윗 장[즉 중용 20장]에 나오는 “일관된 진실성이야말로 하늘의 도이다(誠者天之道)”라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동이천(動以天)’의] ‘이(以)’자를 그대로 써도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곧바로 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이(以)’자를 써서는 안 됩니다.
[양구산이 말한] ‘가까이 하긴 하지만 높이지는 않는다(近而不尊)’란 어떤 종류의 일입니까? [양구산은] 시험 삼아 한두 가지 예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만, 요컨대 [양구산이] 이 장에서 한 말은 항상 사람의 뜻을 즐겁지 않게 합니다.
별지 別紙
聖賢之言, 離合弛張各有次序, 不容一句都道得盡. 故中庸首章言中․和之所以異, 一則爲大本, 一則爲達道. 是雖有善辨者, 不能合之而爲一矣. 故伊川先生云: ‘大本言其體, 達道言其用’, 體用自殊, 安得不爲二乎? 學者須是於未發已(3-1522)發之際識得一一分明, 然後可以言體用一源處. 然亦只是一源耳, 體用之不同, 則固自若也. 天地位便是大本立處, 萬物育便是達道行處, 此事灼然分明. 但二者常相須, 無有能此而不能彼者耳. 子思之言與龜山氣象固不同, 然若使龜山又只道箇致中和․天地位․萬物育, 則不成解書矣. 釋氏便要如此, 嘗見其徒說李遵朂請某僧注信心銘, 其人每句大書而再注本句於其下, 便是只要如此鶻突也.
‘中庸不可能’, 明道但云克己最難, 故曰中庸不可能也. 此言貫徹上下, 不若龜山之奇險也. 龜山之說, 乃是佛老緖餘, 決非孔子․子思本意. 兼‘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兩句, 若如龜山之意, 則文理自不通. 但人悅其新奇, 不覺其礙耳. 若今人依本分做文字, 則‘而遠人’處下‘而’字不得, 須下‘則’字方成文理. 後面雖有求仁之說, 然其言自道言之, 自學者言之, 又似王氏說話. 道若果不可爲, 則學者又安可求仁以爲道? 若學者可求, 則不可爲之說又贅矣. 枉費說詞, 無益學者, 而反有害於義理之正, 不可從也. 向見李先生亦自不守此說, 又言羅先生․陳幾叟諸人嘗以爲龜山中庸語意枯燥, 不若呂與叔之浹洽, 此又可見公論之不可揜矣. 呂與叔說道不遠人處記得儘好, 可更檢看.
‘鳶魚’․‘鬼神’兩章, 却是上蔡說得通透, 有省發人處. 如此說雖是排著一(3-1523)片好言語, 然却無箇貫穿處也.
智․仁․勇須做有輕重看, 若言仁者必有勇, 則仁勇一而已, 豈有輕重? 然言勇者不必有仁, 則又豈可便言無輕重乎? 此三者, 天下之達德, 然逐人禀賦成就不同, 故有生知安行․學知利行․困知勉行之異. 然仁則渾然全體, 智․勇固在其中. 生知安行則從容中道, 而學利․困勉不足言矣.
‘其動以天, 聖人之事’, 龜山此章若以上章‘誠者天之道’言之, 則‘以’字不爲害. 若直指道體而言, 則‘以’字下不得矣.
‘近而不尊’者, 謂何等事? 試擧一二以證之. 要之此章說得常不快人意也.
여백공에게 답함(윤정월) 答呂伯恭(閏正月)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편지[답여백공35-2(35권 두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 정월에 씌여진 것이다. 앞의 편지[답여백공35-1서(35권 두 번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편지 본문과 함께 긴 별지가 붙어 있다. 이정 이래 양구산의 학설을 논의의 중심에 두면서 논어, 중용, 주역에 관한 주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논어의 ‘천상(川上)’, 중용의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중용(中庸)과 중화(中和)’, 논어의 ‘참전의형(參前倚衡)’, 주역의 ‘간기배(艮其背)’ 논어의 ‘인(仁)’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니 “정돈하고 수렴하게 되면 조장(助長)하는 잘못에 빠져들게 되고, 자연스럽게 노닐다 보면 또한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병통에 떨어진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배우는 자들의 일반적인 병폐입니다. 그러나 정자(程子)는 일찍이 “또 반드시 우선은 여기[정돈․수렴]로부터 나아가야 하니 덕이 왕성해진 뒤에는 저절로 좌우로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정돈하고 수렴한다’는 [원칙 하에] 나아가 힘써야 합니다. 다만 사사로운 의도를 개입시켜 적당히 배치하는 짓을 하거나 [가만히 앉아] 기다리듯 함으로써 병폐를 만들어내어서는 안될 뿐입니다. “미리 기대하지 말라(勿正)”고 할 때의 ‘정(正)’은 그 글자의 의미가 바로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확실한 지시를 기다려라(等候指準)”는 말과 같다.『춘추전(春秋傳)』에 “군대를 내기만 하고 올바르게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싸움에 이기기를 미리 기대할 수 없다(師出不正反, 戰不正勝)”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사용한 ‘정(正)’자의 의미와 동일합니다.
答呂伯恭(閏正月)
承喩整頓牧斂則人於著力, 從容游泳又墮於悠悠, 此正學者之通患. 然程子嘗論之曰: ‘亦須且自此去, 到德盛後, 自然左右逢其原.’ 今亦當且就整頓收斂處著力, 但不可用意安排, 等候卽成病耳. ‘勿正’之‘正’, 其字義正如今人所謂等候指準. 春秋傳云: ‘師出不正反, 戰不正勝’, 用字之意亦正如此耳.
별지 別紙
[양구산의] ‘천상(川上)’에 관한 논의는 매우 타당합니다. [그러나] ‘불서(不逝)’에 관해 언급하신 점들은 옳지 않음을 분명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처럼 분명히 말씀드려야만 배우는 자의 의심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의 교(敎)]를 설교(設敎)로 여기는 것에는 본래 여러 유자들의 학설이 있습니다. 정자(程子)의 말을 [그대의 주장과 같이] “이것[즉 수도(修道)]을 위해 가르침을 베푼다(爲此而設敎)”는 것으로 이해하신다면 아마도 약간 [정자의 학설과 그대의 학설을] 억지로 합치시키려는 병폐가 있는 듯합니다. 대저 여러 선생들의 경전 해석에는 같지 않은 곳이 많은데, 비록 명도(明道)․이천(伊川)이라 해도 저절로 같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대개 간혹 선후득실(先後得失)의 다름이 있기도 하고, 혹은 [언급하는] 시기에 따라 각각 지칭하는 것이 다르기도 하여, 억지로 묶어 한 가지 학설이라 우겨서는 안 됩니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 할 때의 교(敎)는] 아마도 ‘자명성위지교(自明誠謂之敎)’라 할 때의 ‘교(敎)’와 같으니, 모두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진리에] 들어감’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자의] 이른바 ‘그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닦아서 회복함을 구한다(以失其性, 故修而求復)’라는 것은 단지 이 문장[즉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을 곧바로 풀이한 것일 뿐 ‘이 때문에 [즉 본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등의] 복잡한 내막은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아래 문장에서 드디어 ‘계신공구(戒愼恐懼)’ 및 ‘치중화(致中和)’까지 언급했으니, [이것은] 이에 수도(修道)의 시작과 끝인 것입니다. 근자에 후씨(候氏)의 중용(中庸)을 얻어 보았는데 [거기서도] 역시 바로 이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선생 스스로 달라놓은 주석에 ‘이 말은 옳지 않다’라고 하셨다.]
중화(中和) 및 중용(中庸) 개념에 대해서는 [그대가] 논한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중화(中和)’라 할 때의 ‘중(中)’은 오로지 미발(未發)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중용(中庸)’이라 할 때의 ‘중(中)’은 체(體)와 용(用)을 겸해 말한 것입니다.
[그대의] ‘참전의형(參前倚衡)’에 관한 말씀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타당합니다. 윤공(尹公)께서 “이 구절은 단지 마음을 수습하여, 편안히 둘 곳을 마련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의 뜻이 또한 좋습니다.
‘그 등에 머무는(艮背)’ [정도의] 작용(用)은 진실로 ‘그 [머물러야 할] 바에 머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마음 본바탕에서의 수양이 되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머물러야 할]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이에 ‘앎이 확장되어 사사물물이 [나의 앎에] 이른’ [정도의 수양] 이후의 일입니다. 배움을 시작한 자가 곧 [이와 같은 수준의 수양론을 실제로] 운용할 수 있겠는지요? 이 점에 관해 다시 그대의 가르침을 청하는 바입니다.
‘인(仁)’자의 의미에 관해, 맹자(孟子)께서는 [인(仁)을] 심(心)이라 하셨는데, [이 경우의 인(仁)은] 체(體)와 용(用)을 두루 꿰뚫으며, 성(性)과 정(情)을 통솔하여 한꺼번에 말씀하신 경우입니다. 또 정자(程子)께서는 [인(仁)을] 성(性)이라 하셨는데, [이 경우의 인(仁)은] 비슷해 보이는 것조차도 쪼개 내어, [인을] 체(體)와 용(用)을 나누어 [성(性)으로서의 인(仁)을 측은(惻隱)이라는 정(情)과] 대비시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갖추어 별도로 말씀드린 그 밖의 문제에 관해 편지를 통해 보내오신 그대의 견해는 참으로 좋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대의 학설이] 딱 부러지게 분명히 정리되신 것 같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그대는 또] “배우는 자들이 언구(言句)상에서의 공부를 추구하는 경우는 항상 많고, 일용공부(日用工夫)를 점검(點檢)하는 경우는 항상 적다”고 했습니다. [지적하신 바와 같이] 지금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간혹 자질이 명민하고 예리하여, 그들 중 가끔 채택할 만한 훌륭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강론의 유익함에 힘입은 바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자신 몸소 실행해보지만 득력한 곳은 없고, 또 그 폐단을 깊이 있게 교정해내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 점이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이제 그대의 깨우쳐줌을 받고 [앞으로는 저와] 더불어 왕래하는 자들에게 경건한 태도로 항시 두루 경고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찰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노성(老成)하고 돈독(敦篤)하여 [충분히] 그 뜻과 행위를 보전할만한 사람조차도 도리어 느리고 둔하게 되어 도리를 투철하게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강절의 시에서와 같이] “정신을 보존하면서도 순후(醇厚)한 자” 정도를 구한다 해도 [이러한 사람을] 얻기는 참으로 어려울 뿐입니다.
요즈음 와서『중용(中庸)』에 관한 옛 주석을 보았는데, 좋은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중용』의 첫머리 한 구절을 해석하면서 곧 오행(五行)과 오상(五常)으로 말하고 있더군요. 뒤에 와서 [유교에다] 불노(佛老)를 섞어 해설한 것 중에 어찌 이처럼 성실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바야흐로 “주석을 싹 쓸어버리는” 일은 두 정선생(程先生)이라야만 비로소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에 [정선생과 같은]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지도 못한 후학이 껍데기만 계승하고 메아리만 접하는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옛 주석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다면 [이는] 참람한 월권행위에 속하는 것이어서 그 기상도 좋지 않을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인(仁)이란 곧 사람이다(仁者, 人也)”라는 구절에 대한 한대 유학자들의 주석 가운데 “사람(人)이란 사람들이 서로 친애하고 공경한다(相人偶)라 할 때의 ‘인(人)’과 같은 뜻으로 읽어야 한다. 사람들이 친애하는 뜻으로 서로 안부를 묻는 것이 바로 상우인(相人偶)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글귀가 어떤 책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공영달의 소(疏) 가운데서도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밝혀놓지 않았습니다. [이 학설이 누구의 학설인지에 대해] 저에게 알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른바 사람들이 친애하는 뜻으로 서로 안부를 묻는 것은 도리어 글자의 의미에 뜻이 들어 있음을 설명한 듯합니다.
別紙
‘川上’之論甚當, ‘不逝’之云, 極知非是. 然須如此說破, 乃可以釋學者之疑耳.
以‘修道之謂敎’爲設敎, 此固有諸儒之說. 以程子之言爲爲此而設敎, 則恐微有牽合之弊. 大抵諸先生解經不同處多, 雖明道․伊川亦自有不同處. 蓋或有先後得失之殊, 或是一時意各有指, 不可彊牽合爲一說也. ‘修道之謂敎’, 疑只與‘自明誠謂之敎’之‘敎’皆同言由敎而人者耳. 所謂‘以失其性, 故修而求復’, 只是直解此文, 非有爲此設敎之曲折也. 故下文遂言戒愼恐懼, 及致中和, 乃修道之始終也. 近得候氏中庸, 亦正如此說, 不知高明以爲如何? 先生自注云: ‘此說非是.’
中和․中庸, 如所論得之. 然‘中和’之‘中’專指未發而言, ‘中庸’之‘中’則兼體用而言.
參前倚衡之說甚簡當. 尹公云: “此只是收拾心, 令有頓放處”, 此意亦好.
艮背之用固在於止其所, 然能止其所, 乃知至物格以後事, 始學者還便可用(3-1525)否? 更告喩及也.
‘仁’字之義, 孟子言心, 該貫體用, 統性情而合言之也. 程子言性, 剖析疑似, 分體用而對言之也. 其他已具別說. 如來喩之云固好, 然恐未爲直截分明耳.
學者推求言句工夫常多, 點檢日用工夫常少, 今日此等人極多, 然或資質敏利, 其言往往有可采者, 則不免資其講論之益. 而在我者躬行無力, 又無以深矯其弊, 方此愧懼. 今得來喩, 敬當徧以警告常所與往來者, 使自省察耳. 却是老成敦篤, 志行可保之人, 往往又却遲鈍, 看道理不透. 求其有精神而醇者, 眞難得耳.
近看中庸古注, 極有好處. 如說篇首一句, 便以五行五常言之. 後來雜佛老而言之者, 豈能如是之慤實耶? 因此方知擺落傳注, 須是兩程先生方始開得這口. 若後學未到此地位, 便承虛接響, 容易呵叱, 恐屬僭越, 氣象不好, 不可以不戒耳. 又注‘仁者,人也’云: ‘人也, 讀如相人偶之人. 以人意相存問之言相人偶.’ 此句不知出於何書, 疏中亦不說破, 幸以見告. 所謂人意相存問者, 却似說得字義有意思也.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편지[답여백공35-3서(35권 세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 역시 앞의 편지[답여백공35-2서(35권 두 번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 역시 앞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경전 해석상의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 논어의 ‘태백(泰伯)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일’, ‘부이가구(富而可求)’, ‘수훼수예(誰毁誰譽)’, ‘삼대직도이행(三代直道而行)’ 등이 언급되고 있다.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사상채의 이론을 많이 참고하고 있는데 이 편지에서도 사상채가 비중있게 거론되고 있다.
태백(泰伯)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일을 말씀드리자면, 저의 생각도 바로 그대와 같습니다. 대개 [자식이] 아비를 떠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만, 일이 반드시 이와 같이 [자식이 아비 곁을 떠나야만 할] 상황이라면 반드시 권도(權道)를 운용한 연후에 비로소 중용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변통을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올바름을 상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춘추좌전(春秋左傳)』에 근거해서 곧 “태백(泰伯)은 일찍이 단발문신(斷髮文身)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점에 대해서 [저로서는] 아직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가령 [태백이] 바로 단발문신(斷髮文身)했다한들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부이가구(富而可求)’는 글의 뜻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사상채와 양구산의 학설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천선생의 학설은 비록 의리(義理)에 장점이 있지만 문의(文義)에는 그다지 타당한 것 같지 않으며, 아무래도 생경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상채는 본래 “시를 배우는 자는 장구(章句)를 가슴 속에 걸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것이고, 이 말로 인해 “요순의 사업을 가슴 속에 걸쳐 둔다”는 말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스스로 선(善)을 사유화하면 도리어 선(善)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이런 해석이야말로 “잊기를 익혀 마음을 기르는(習忘養心)” 수양법의 여파로 생겨난 병폐입니다. 그리고『이정유서(二程遺書)』중 사상채가 기록한 곳에는 이러한 말들이 많습니다. [주] 예를 들어 완물상지(玩物喪志)와 같은 것이 그러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마도 다시금 마땅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곳으로서 대충 보아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훼수예(誰毁誰譽)’장에 관한 그대의 논의는 타당합니다. 다만 ‘삼대직도이행(三代直道而行)’의 의미에 관해 언급하셨을 뿐, ‘사민야지소이(斯民也之所以)’ 여섯 글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백성(斯民也)’이란 [공자]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듯 합니다. [즉 이 구절의 뜻은] ‘지금의 세상이 비록 習俗이 아름답지 못하여 정도(正道)가 시행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삼대(三代)가 왕성할 때 정도(正道)를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사람들에게서 [정도를] 실행했기 때문일 [억지로] 백성을 다스려서 교화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보면 이 점에 관해 글의 뜻이 특히 불분명합니다. 도리어 반고(班固)가 인용한 경찬(景贊)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그의 주(注) 속에 나오는 말도 또 좋습니다. 대저 성인(聖人)의 뜻은 오직 실천할만한 정도는 고금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성인께서] 남을 실상 이상으로 칭찬하기는 했지만 남을 실상 이하로 비난하지는 않은 의도에 대한 그대의 설명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다만 비난함(毁)과 칭찬함(譽) 이 두 글자를 더욱 자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칭찬함(譽)’란 선(善)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서둘러 칭찬하는 것이고, ‘비난함(毁)’이란 악(惡)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발 빠르게 나무라는 것입니다. ‘시험함(試)’이란 또한 그것이 장차 그러할 거라는 징험이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것이 이미 그러함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성인(聖人)의 마음이란 사람들이 선을 행하기를 바라는 법입니다. 이 때문에 한 번 시험해 보아 일단 그의 현명함을 알게 되면, 그의 善이 비록 아직은 드러나지 않고 있어도 [그에게로] 나아가 그를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성인(聖人)의 마음이란]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법이지요.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의] 惡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불선한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더라도 또한 일찍이 갑자기 그것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께서] ‘칭찬(譽)’은 하면서도 ‘비난(毁)’은 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대개 온전하게 시비를 구별하여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먼저 선을 드러내어 칭찬해주기는 하지만 악에 대해 미리 비난하지는 않는 것이야말로 성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주교수(周敎授)의『어해(語解)』는 참으로 그대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 독실함이 윤공(尹公)과 흡사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는 근엄함이 다소 지나친 듯하고, 순숙(純熟)함은 다소 부족한 듯 한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새로 판각한 작은 판본의『역전(易傳)』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제목은 관본(官本)에 의거하여『주역정씨전(周易程氏傳)』이라 하는 것이 더욱 좋겠습니다. 옛날부터 일찍이 뜻이 있었으니, 무릇 경전을 해석한 경우 마땅히 이처럼 전(傳)을 경(經)보다 앞에 내세우지 않은 것은 경(經)을 높이는 뜻을 드러내는 입니다. 한(漢)나라와 진(晉)나라 시대의 학자들이 경전을 주석할 때 모두 이와 같은 관례를 따랐습니다. 후에 벗의 말을 들으니 조경우(晁景迂)도 이런 논의를 했다는군요. 이로써 선배학자들의 뜻이 이미 [경전을 높이고자 하는] 이 점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또 조경우(晁景迂)의『논어강의(論語講義)』를 얻었는데 또한 좋은 곳이 있습니다. 대저 북방(北方)의 학문은 근본과 실질에 가깝습니다.
答呂伯恭
泰伯夷齊事, 鄙意正如此. 蓋逃父非正, 但事須如此, 必用權然後得中, 故雖變而不失其正也. 然以左傳爲據, 便謂泰伯未嘗斷髮文身, 此則未可知. 正使斷髮文身, 亦何害也?
‘富而可求’, 以文義推之, 恐只得依謝楊說. 伊川說雖於義理爲長, 恐文義不妥帖, 似硬說也.
上蔡本說學詩者不得以章句橫在胸中, 因有堯舜事業橫在胸中之說. 然則非爲‘有其善’之意矣. 竊疑此乃習忘養心之餘病, 而遺書中上蔡所記亦多此等說話. 如‘玩物喪志’之類. 此恐須更有合商量處, 不可草草看過也.
‘誰毁誰譽’一章, 所論得之. 但只說得三代直道而行意思, 更有‘斯民也之所以’六字未有下落. 疑‘斯民也’是指當時之人而言, 今世雖是習俗不美, 直道難行, 然三代盛時所以直道而行者, 亦只是行之於此人耳, 不待易民而化也. 諸儒之說, 於此文義殊不分明, 却是班固景贊引得有意思, 注中說得亦好. 大抵聖人之(3-1527)意, 止是說直道可行, 無古今之異耳. 言譽而不及毁之意, 來喩亦善. 但‘毁譽’兩字更須細看. 譽者, 善未顯而亟稱之也 : 毁者, 惡未著而遽詆之也, ‘試’亦驗其將然而未見其已然之辭. 聖人之心欲人之善, 故但有所試而知其賢, 則善雖未顯已進而譽之矣. 不欲人之惡, 故惡之未著者, 雖有以決知其不善, 而亦未嘗遽詆之也. 此所以言譽而不及毁, 蓋非全不別白是非, 但有先褒之善而無預詆之惡, 是則聖人之心耳.
周敎授語解誠如所喩, 愚意其篤實似尹公, 謹嚴過之而純熟不及, 高明以爲如何?
新刻小本易傳甚佳, 但籤題不若依官本, 作周易程氏傳. 舊嘗有意, 凡經解皆當如此, 不以傳先乎經, 乃見尊經之意. 漢晉諸儒經注皆如此也. 後見朋友說晁景迂亦有此論, 乃知前輩意巳及此矣. 今日又得景迂語解, 亦有好處. 大抵北方之學終是近本實也.
여백공에게 답함(별지) 答呂伯恭(別紙)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편지[답여백공35-4서(35권 네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 역시 앞의 편지[답여백공35-2서 및 3서]와 마찬가지로 계사년(癸巳, 1173년, 주자 44세)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 역시 앞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경전 해석상의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 ‘요순의 사업을 가슴 속에 걸쳐 둔다’는 상채(上蔡)의 언설을 두고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논어의 ‘수훼수예(誰毁誰譽)’, ‘인(仁)에 관한 이론들’ ‘성과 천도에 관해서는 들을 수 없다(性與天道不可得而聞)’는 구절, 및 孟子의 ‘호연한 기운(浩然之氣)’ ‘선지선각(先知先覺)’ 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요순(堯舜)의 사업을 가슴 속에 걸쳐 둔다”는 사상채의 말이 만약 “요순 스스로 자신이 이룩해낸 사업을 가슴 속에 걸쳐 둔다’는 그런 뜻이라면 세간에 이처럼 도량이 작은 요순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만약 ”배우는 자가 무릇 성현의 언행(言行) 하나하나에 대해서조차 모두 마땅히 마음을 가드듬어 깊이 탐구함으로써, 그 심오한 속내를 알아내어 각자 처한 본분상에서 하나하나응용하고자 한다“는 그런 취지를 담고 있는 말이라면 어찌 [상채의 말과 같이 요순의 사업을 배우는 자의] 가슴에 보존해 머물러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명도(明道)의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은, 아마도 [그 당시] ‘기억해 암송하고 폭넓게 알기는 하지만 정작 도리(道理) 자체는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상채의 병통’에 일침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상채는 명도의 이 말씀을 터득한 후, 드디어 한결같이 [그 이전의 병통을] 깨끗이 쓸어낼 수 있었습니다만, [상채는 자신의 병통을 고치기 위해, 그리고 명도의 가르침에 지나친 노력을 기울인 나머지] 가슴 속을 텅 비우듯 하여, 털 끝 하나 [용납이]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올바름을 지나쳐 버린 것’이라 할만합니다. 상채가 증점(曾點)의 일을 논하다가 드디어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다녔다는 [황당한 일]을 언급하면서 [열자의 이와 같은 경지를] 쉽게 이루어낼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데서 [이와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저 명도(明道)가 “배우는 자와의 대화는 흡사 취한 사람 부축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상채의 이 경우야말로] 참으로 [명도의 말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대 서신에서 “너무 지나친 부분에 대해서는 징계한다”는 말 역시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것이니 우리가 참으로 깊이 경계하고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논어』의 “누구를 [실상 이하로] 비난하며 누구를 [실상 이상으로] 칭찬하리오(誰毁誰譽)”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이미 자약(子約)에게 답하는 편지 속에서 [저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백공(伯恭)의 의론(議論)에는 항시 지나치게 후한 뜻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이제 이 곳에서의 논의는 도리어 [소문으로 듣던] 지난 번 의견과는 같지 않군요. [그렇다고] 이것이 어찌 앞서 말한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올바름을 지나쳐 버린’ 논의라고까지야 하겠습니까? 聖人의 덕목 중 ‘위대한 공변됨과 지극한 올바름이라는 곳’만 보면 흡사 아무런 인정(人情)도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악에 대해서는 숨겨주고 선에 대해서는 선양해주시고자 하는 [성인의] 마음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 마음’ 바로 그것입니다. 공자의 문하에서 사람들에게 ‘인을 구하라(求仁)’고 가르친 것은 결국 바로 이와 같은 정신을 터득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시험 삼아 다시 한번 생각하여 다시 [저에게] 가르침을 주면 다행이겠습니다.
仁에 관한 이런저런 학설들이 있습니다만, 근자에 흠부(欽夫)도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흠부의 답장은 그의] 이전의 글에 비해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는 아직도 [흠부의 답장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어 마음에] 편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략 이 글은 당시로서는 반드시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이미 [저술을] 했으니 반드시 한 구절, 한 글자마다 정리하여 제대로 된 책을 만들어야만 됩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성인(聖人)이 인(仁)에 관해 문답한 곳이 인체(仁體)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를 갖추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는 식의 말을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언인록(言仁錄)』속에 둠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인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의 길로] 내달리도록 용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논어의 한 구절인] “성과 천도에 관해서는 들을 수 없다”라는 구절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이는] 다만 듣는 자가 아직 쉽게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니, 성현의 말은 본디 다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맹자는 ‘호연한 기운(浩然之氣)’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맹자가 처음 이 말을 했을 때는 이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호연지기를 말한 후에 맹자는] 또 [이 ‘호연지기’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맹자는 이 말의 의미에 대해] 하나 하나 지적하면서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조금의 미진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또] 이윤(伊尹)의 ‘선지선각(先知先覺)’이라는 말에 대해, 이천(伊川)은 ‘[여기서] 지(知)는 이 일을 안다는 것이고, 각(覺)은 이 이치를 깨닫는다 뜻이다’라고 했는데, [정자의 이 말은] 사상채의 이른바 ‘마음에 지각이 있다(心有知覺)’는 말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 회숙(晦叔)등 여러 분들이 또한 바로 이것을 이끌어내어 서로 힐난하곤 했습니다만 대체로 심도 있는 고찰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우선 예를 들어 이제 [상채의 생각대로라면] 도리어 감히 이윤(伊尹)을 ‘천민의 선인(天民之先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요? 시험 삼아 다시 자세히 검토해보면 곧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편지를 통해] ‘징계함이 지나치면’ ‘기대는 병통’[이 생겨남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만, 근자에 또 그 말씀 그대로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명도(明道)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즉 “배우는 자는 반드시 ‘아래로부터 배워 위로 통달한다(下學上達)’는 말을 [공부의 원칙으로] 지켜야 하니, 이 원칙이야말로 배움의 요점이다”라고 했습니다. [명도의 뜻은] 또한 다음과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즉 우선 이와 같이 힘써나가다 보면, 기초가 조금씩 견고해져서, 감히 하학의 영역을 떠나 따로 상달처를 추구하는 그러한 공부를 하지는 않게 되고, 마땅히 더욱 [미발의 마음을] 보존하고 함양하여 [이를] 실천해나가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하며, 그저 ‘같고 다름’이나 ‘상세함과 소략함’만 따지고 문제 삼아 오로지 장구(章句)의 학(學)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도리는 평탄하게 골고루 퍼져있어서 지극히 낮고 평이한 곳에 지극히 높고 오묘한 도리가 있으니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남쪽을 말하면서 북쪽을 논하는 등 장황한 논의를 한 후에 비로소 ‘전하기 힘든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명철한 자는 분명히 이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지요?
[그대의] “충후함을 길러 나가고, 부박함은 고쳐 나간다”는 주장은 매우 좋습니다. 요컨대 마땅히 이것을 위주로 해야 하니, 그리되면 정미롭게 분석해 들어가는 공부가 [‘충후함을 길러 나가고, 부박함은 고쳐 나가는’ 공부와]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윤화정(尹和靖)이 기록한 말 중에 ‘이천은 일찍이 선배 학자들의 단점을 말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 뜻이 매우 좋습니다. 요즘 사람들 중에는 흔히 ‘두 선생이 스스로 고매함을 자부한 점’을 보고 곧바로 선배 학자들을 낮추어 보려는 생각을 품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속은 키워 나갈만한 것이 못됩니다. 요컨대 윤화정의 말을 마땅히 드러내내야만 하겠습니다.
答呂伯恭(別紙)
上蔡‘堯舜事業橫在胸中’之說, 若謂堯舜自將已做了底事業橫在胸中, 則世間無此等小器量底堯舜. 若說學者, 則凡聖賢一言一行, 皆當潛心玩索, 要識得他底蘊, 自家分上一 一要用, 豈可不存留在胸次耶? 明道‘玩物喪志’之說, 蓋是箴上蔡記誦博識而不理曾道理之病. 渠得此語, 遂一向掃蕩, 直要得胸中曠然, 無一毫所能, 則可謂矯枉過其正矣. 觀其論曾點事, 遂及列子御風, 以爲易做, 則可見也. 大抵明道所謂與學者語如扶醉人, 眞是如此. 來喩有懲創太過之說, 亦正謂此, 吾人眞不可不深自警察耳.
‘誰毁誰譽’, 已具答子約書中. 然頃時聞伯恭議論常有過厚之意, 今此所論, 却與往者不同, 豈亦前所謂矯枉過正之論耶? 聖人大公至正處, 似無人情. 然其隱惡揚善之心, 則未嘗無也. 此乃天地生物之心, 孔門敎人求仁, 正是要得如此耳. 試更思之, 復以見敎爲幸.
言仁諸說, 欽夫近亦答來, 於舊文頗有所改易, 然於鄙意亦尙有未安處. 大率(3-1529)此書當時自不必作, 今旣爲之, 則須句句字字安頓得有下落始得, 不容更有非指言仁體而備禮說過之語在裏面, 敎後人走作也. 性與天道不可得而聞, 但是聞者未易解耳. 聖賢之言固無所不盡, 如孟子說箇浩然之氣, 大小面生, 然亦只說得箇難言了, 下面便指陳剖析, 一向說將去, 更無毫髮不盡處也. 伊尹先知先覺, 伊川以爲‘知是知此事, 覺是覺此理’, 與上蔡所謂‘心有知覺’意思逈然不同. 向來晦叔諸公亦正引此相難, 蓋不深考也. 且如而今還敢道伊尹天民之先仁否? 試更子細較量, 便可見矣. 懲創太過, 不免倚著之病, 近亦深覺其然. 然嘗見明道有言, 學者須守‘下學上達’之語, 乃學之要, 又似且如此用功, 基脚却稍牢固, 未敢便離却下學之地, 別求上達處也. 但當更於存養踐履上著力, 不可只考同異, 校詳略, 專爲章句之學而已. 大率道理平鋪放著, 極低平處, 有至高妙底道理, 不待指東畫西, 說南道北, 然後爲得不傳之妙也. 明者思之, 以爲如何?
養忠厚․革澆浮之論甚善, 要當以此爲主, 而剖析精微之功自不相妨耳. 和靖錄中說伊川未嘗言前輩之短, 此意甚善. 今人往往見二先生兄弟自許之高, 便都有箇下視前輩意思. 此俗不可長. 和靖之言, 要當表而出之也.
여백공에게 답함(연원록을 논함) 答呂伯恭(論淵源錄)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52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5, 왕상서․장식․여조겸․유자징과의 문답(書汪張呂劉問答)에 5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는 이 편지를 ‘여백공이 [주희의] 연원록 중 의심스런 부분에 대해 질문한 것에 대한 응답의 편지’라 보고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기해 및 경자년 사이(1179-1180년, 주자 50-51세 사이)에 씌여진 것으로 보여지지만 일단 경자년에 씌여진 것으로 본다. 이 펴지는 연원록의 내용 중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해 조목조목 주자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때로 여백공의 의견을 수용하고 있다. 특히 학문의 연원에 대해 논하면서, 소동파의 학문은 이정자 계열과 완전히 다른 계통임을 지적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원풍(元豐, 1078-1085, 神宗 때) 년간에 여신공(呂申公)을 기용하는 조서를 내렸다”는 이 대목은 애초부터 참으로 잘못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여신공(呂申公)을 기용하는 일]이 대체(大體)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었기에 깎아내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를 바루고자 하니 [이것] 또한 좋습니다. 다만 ‘사마온공(司馬溫公)․온공불기(溫公不起)’ 8자를 버리고 아울러『이정집(二程集)』의 본래 제목에 의거하여 ‘기(寄)’를 ‘증(贈)’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명도(明道)가 “마땅히 원풍대신(元豐大臣)과 정사(政事)를 함께해야 한다”고 한 이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이미 논한 바 있습니다만 논의가 미진하긴 했었지요. 이제 이 일에 대해 상세히 하는 것은 [이 일이 바로] 성현의 작용처(作用處)이고, 또 [이 일로 인해] 의리(義理)의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한 때문이지, 우선 임시방편으로 속여, 구차히 한 때에 일을 성사시키려는 때문은 아닙니다. 대개 이천(伊川)의 기상은 본디 명도(明道)와는 같지 않습니다. 또 그[정이천]가 ‘인재를 변화시키는 문제’를 논한 데에서도 또한 이런 뜻이 있습니다. [주]『이정전서』「외서(外書)」에서 호씨(胡氏)가 기록한 부분 중에 [이 내용이] 나온다.『역전(易傳)』규괘(睽卦) 초효(初爻)에도 ‘소인을 끊어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점 등으로 볼 때, 명도와 이천이 소인을 끊어내지 않은] 이 일은 저절로 올바른 이치로서 당연한 것이며, 임시로 속인 사사로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모름지기 명도(明道)가 보여준 이와 같은 광대한 규모와 화평한 기상을 지니고 있어야만 그 정성스런 마음이 환하게 드러나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된 연후에 [성현의] 작용을 다 발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마음은 이미 이 이치를 엿보아 헤아릴 수 없고 또 [명도와 같은] 이런 정도의 역량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 [명도의 일과 같은 성현의 일을]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이를 확신하는 자가 있다 해도 또 [그는 보통 사람들 수준의] ‘임시로 속여 이익이나 따지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되어, 도리어 이치를 거슬러 재앙을 불러들임이 더욱 심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요즈음의 군자라는 사람들이 명도(明道)의 말에 의심이 없을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주]호씨(胡氏)의 기록을 윤씨(尹氏)조차도 의심을 했습니다. 이 어찌 ‘아직은 더불어 권도(權道)를 펼칠만한 자들’이라 아니하겠습니까? 소자문(邵子文)이 만년에 이 책을 저술했으므로 그가 이 책을 저술하기 훨씬 전에 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년월(年月)의 선후에 간혹 약간의 차질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다. [물론] 어의(語意)의 본말(本末)은 응당 온전히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예를 들어 말씀드리지요] 우선 [소자문(邵子文)의『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에] 이른바 “이공(二公)이 나란히 재상이 되셨다”는 기록은 대개 최종적인 것으로 말한 것이고 또 “종승(宗丞)을 불렀는데 아직 가지 못한 상태에서 병으로 죽었다”는 것 역시 그가 [결국] 등용되지 못했음을 기록한 것을 뿐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이공(二公)이 이미 재상이 되고 나서 명도(明道)를 불러들였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 “소씨의 기록(邵錄)이 공제(公濟)로부터 나온 것이 많다”고들 합니다만 아마도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부자(父子)의 문체가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지요.
“[철종께서] 버드나무 꺾은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유공(劉公)은 망령된 말을 할 사람이 아니고,『춘추(春秋)』에 전의(傳疑)하는 법(法)이 있으니, 응당 서둘러 [이 사실을] 깎아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이천(伊川)이 [철종께] 간한 것을 보건대, 그의 슬픔이 일어날 정도의 지극한 정성과 미약할 때 미리 방비하시려는 긴 안목이 이미 임금을 아끼는 [선생의] 정성에서 피어 나온 것입니다. 또 [이천의 충간(忠諫)이 담고 있는 바] ‘선의 단서를 함양하고, 다스림의 근본을 북돋우어 세움’이 또한 ‘임금께 고하는 도’에도 부합하니, 모두 후세의 법도가 될만합니다. [이러한 점 등은] 어린 임금을 보좌하고 안내하는 데 있어서 더욱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입니다. [나아가 이천의 충간 그 이면에 담겨있는] 그 무궁한 여운을 통해 선을 배우려는 자들이 자신의 [선심(善心)을] 기르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보잘것없는 저의 생각에는 [이 일을] 반드시 보존했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그 말이 이상에서 보듯이 그저 하나의 단서가 있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대가] 이제 한쪽 말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일을] 의심하여 [이 일을] 갑자기 삭제해 버린다면, 이 어찌 애석해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저의 뜻과 같이 해서는] 그래도 여전히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면, 곧 그 사실을 기록한 다음 그 아래 다음과 같이 주를 달면 어떻겠습니까? 즉 “아무개가 이르되 ‘국조(國朝) 강연(講筵)의 의전 제도는 매우 엄숙했다. 아마도 이런 일은 없었다’” 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찬성과 반대의견을 모두 보존해 둠으로써] 후대의 군자가 이치로 구할 경우는 그 마음을 터득하고, 일로써 고찰할 경우 그 자취를 믿게 된다면, 그 또한 잘된 일라 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범공(范公)이 정자(程子) 문하의 제자가 아님은 [『연원록(淵源錄)』] 하권(下卷)에 있는 범공(范公)의 말 가운데에서 이미 상세히 논의했습니다. 이 연보(年譜)에 실린 것은 다만 선우작(鮮于綽)이 기록한 본래 있던 글일 뿐입니다. 그러나 ‘문인(門人)’이라는 두 글자를 삭제하지 않은 것은 범공(范公)의 일을 기록한 말 중에 이미 [이 말을] 이끌어 논설하였으므로 여기서도 [‘문인(門人)’이라는 두 글자를] 삭제하지 않은 것입니다. 역사에는 본래 변칙적인 사례(變例)가 있습니다. 다만 그대는 범공(范公)의 『일기(日記)』를 인용하여, ‘이천(伊川)이 행한 바를 범공(范公)이 다 안 것은 아니다’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만약에 [범공(范公)이] 먼저 소찬(素饌)을 갖출 것을 주창했다면, 이는 응당 동파(東坡)와는 [그 입장이] 크게 거슬리는 것인데 어찌 [그가] 정이천과 소동파의 사이에 처하여 [양쪽 모두를] 어기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대의 생각은 아마도 사리에 미진한 듯 합니다. 대개 범공(范公)은 “정숙(正叔)이 홀로 주청하여, 여유있고 맑은 곳에 나아가 강독(講讀)할 것과 아울러 이영각(邇英閣)을 수리하는 차례를 업급했다”고 기록했습니다만, 이는 본디 [범공(范公)께서 정숙(正叔)을] 선(善)하게 여긴 말이지 나무라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천께서 이미 주청하여 일이 바야흐로 시행되려 하던 즈음인지라 [범공] 스스로 반드시 거듭 말씀드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나아가 범공(范公)이 처한 지위로 보아 [이런 종류의 주청을] 감히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국기(國忌) 때 재연(齋筵)하는 자리에서, 훈채(葷菜)와 소식(素食)을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범공(范公) 정도 현인이라면 자신이 실천할 것을 전제로 하여, 마땅히 의리의 시시비비를 고려하여 따르거나 말거나 했어야 할 일이지,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아 나갈지 말지를 결정해서는 아니 될 일이었습니다. 가령 그가 둘 사이를 오가면서 양쪽 모두와 적당히 잘 지내려고 했다면, 소찬(素饌)을 갖추어서는 이미 동파에게 거슬리고 주육(酒肉)을 갖추어서는 이천선생에게 거슬리는 것이 됩니다. 만약 저쪽을 고려하여 이쪽에 소홀했다면, 이는 역시 양쪽 관계를 온전히 한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범공(范公)의 뜻도 반드시 이것[양쪽 관계를 온전히 하려는 의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글의 기록도 역시 “범순부의 무리들은 소찬을 먹고 진소유와 황산곡의 무리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기록된 내용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범공이 동파를 두려워하여 매사에 그의 주장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당시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범공이 비록 정씨(程氏)를 완전히 스승으로 받들지는 않았더라도 실제로는 존경하고 우러러보면서 모범으로 여겼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동파에 대해서는 단지 같은 고향 사람으로써 교제하던 터라 평소 가까이 지내고 정의가 두터웠으며 조정에서 함께 논의할 때도 취향이 대체로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실천 상에 있어서는 물과 불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 이천 선생을 변호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을 보건대 범공이 어찌 동파를 모두 옳게 여겼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그 당시에 판별하지 못하고 일이 일어난 몇 해 뒤에야 밝힌 것은 강단이 부족하여 양쪽 모두를 따르려는 사사로운 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시한 사람은 이천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의리의 공변됨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정자와 소동파는 학문과 행동에 있어서 사(邪)와 정(正)이 같지 않아 [즉 가치판단 기준이 서로 달라] 형세상 서로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동파는 이천에 대해 평소 미워하고 비방하는 마음을 품어 왔으므로 비록 소찬(素饌)의 문제 때문에 생긴 틈이 없었다 하더라도 서로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범공에 대해서는 [그가] 소동파와 사귄 정이 이미 깊고 그 기상(氣象)과 성세(聲勢)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동파의 편을 든 혐의가 있더라도 평생토록 사귀는 기쁨을 해치지는 않은 것입니다.
후사성(侯師聖)이 이선생(二先生)에 관해 의론한 것은 대체로 타당합니다. 다만 말 뜻에 약간 부족한 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또한 반드시 삭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로공(文潞公)의 일은 다만 그 뒤에 다음과 같이 주(注)를 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무개가 이르기를 선생께서 판감(判監)이 되었을 때, 로공(潞公)이 일찍이 락(洛) 땅을 다스리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에는 약간의 잘못이 있는 듯하다.”
‘대롱으로 하늘을 본다(以管窺天)’는 이 말은 본래 이천의 말인데『유서(遺書)』에 보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이 사실을] 왜곡시켜서 숨기거나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울러 그 말에는 [이천이 횡거를] 높이기고 하고 낮추기도 하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으니 의미 파악을 잘 하는 독자라면 마땅히 스스로 [이천의 진의를] 알아볼 것입니다. 만약 의미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독자를 위해 우리 학설의 일부를 이리 저리 잘라내 버림으로써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려 한다면 古今의 서적 중에 후세에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적을 것입니다.
횡거(橫渠)의 묘표(墓表)는 여급공(呂汲公)에게서 나왔습니다. 여급공(呂汲公)이 비록 횡거를 존경하였지만 그러나 횡거의 학을 강론하지 않고 불교에 탐닉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말이 이리저리 헤메는 곳이 많고, 속으로는 불로(佛老)의 경지를 추구하였으니, 아마도 [여급공(呂汲公)은] 횡거(橫渠)를 깊이 안 자가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당시의 명망 있는 여러 선생들이 이 일을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급공(呂汲公)이 쓴 횡거(橫渠)의 묘표(墓表) 중에] “배우는 자가 성인의 도가 은미하여 알기 어려운 점을 고통스럽게 여겨 불로(佛老)를 통해 쉽게 [도에] 들어갈 수 있음을 진귀하게 여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유학이나 이단이 모두 도에 들 수 있지만, 이쪽은 어렵고 저쪽은 쉽다는 말이 될 뿐입니다. [여급공(呂汲公)이 쓴 횡거(橫渠)의 묘표(墓表) 중에는] 또 “횡거는 반드시 불로(佛老)로서 선왕의 도에 부합시키려 한 것은 아니다”라고 일컬은 곳이 있습니다. [만약] 이 말대로라면, 마땅히 불로(老佛)를 말미암은 연후에 도와 합일할 수 있는데, 다만 횡거의 경우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불로(佛老)를 말미암지 않고서] 우연히 저절로 [도와] 합일이 되었을 뿐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말들은 횡거가 글을 쓰고 말을 세워 이단의 학(學)을 물리치느라, 한 평생 고생했던 그 마음과는 완전히 배치됩니다. [이와 같이 문제가 많은 글을] 만약 지금 보존해 둔다면, [이런 종류의 글은 진리를] 펼쳐내어 분명히 하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반드시 불로(老佛)을 경유해야만 쉽게 도에 들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오게 할 것이니, 그것이 끼치는 해로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는] 앞 단락에서 년월(年月)이 의심되는 바 [그에 따른 정자의] 사적(事跡)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또「행장(行狀)」의 기사(記事)가 이미 자세할 경우,「묘표(墓表)」의 기록이「행장(行狀)」내용을 넘어서지 않는다고 한다면 반드시 거듭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시강(呂侍講)이 불교를 배운 일은 반드시 기재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구봉(溝封)을 설치하여 봉성향(奉聖鄕)을 만들자는 [이천의] 주장이 비록 [그 당시 당장] 봉건(封建)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또한 점진적으로 封建하는 것이 가능하며, 우선 아무 때라도 [이를] 시작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이천의 이 말씀이] 만약 모토(茅土)를 나누어 주고 토지로 보답하여 대대적으로 왕후(王侯)를 봉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 당시] 임금은 연소하시고 온 나라가 의심에 휩싸인 상태였으니 참으로 [이와 같은 획기적인 봉건제는] 시행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천은 결단코 이와 같은 잘못된 사태 파악을 했을 리 없고 반드시 많은 경력을 거친 만년이 된 연후에 그것이 불가함을 알았습니다. 대저 선배들의 의론(議論)에 약간의 견해차가 없을 수 없었던 만큼, 이제 양쪽 견해를 모두 보존해 둔다면 배우는 자가 깊이 헤아려 사색하기에 좋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여급공(呂汲公)이 횡거(橫渠)를 의론한 것과는 다릅니다. 큰 근본이 같지 않으면, 그 흐름에 해로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양응지(楊應之)의 일은 조금 보이므로 모두 취(取)했으니 또한 변례(變例)입니다.[주 : 방문(訪問)해서 더욱 보태고 넓혀나가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양응지(楊應之)는 정자(程子) 문하(門下)를 드나들긴 했지만, 반드시 제자의 반열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진백(呂進伯)과 여화숙(呂和叔)은 본래 마땅히 따로 분류해야 하나 사적(事跡)이 적고 또 [사적 중에도] 본말(本末)이 제대로 갖추어진 것도 없기 때문에 여여숙(呂與叔)에게 붙여 놓았는데 이는 매우 옳지 못합니다. [이들의 사적에 대해 아는 사람을 물색해서, 이곳의 사정을] 알린 다음 [그들을] 찾아 물어보아 [이들과 관련된 사료들을] 더욱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따로 두 조항을 설립해야 하겠습니다. [주 : 임천(臨川)에 살고 있는 설씨(薛氏)는 여급공(呂汲公)의 생질입니다. 사람을 통해 그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박사(蘇博士)의 말 가운데에서 호공(胡公)에 대한 의론(議論)은 대개 직책을 넘어선 언사(言事)로서 합당한 언어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가 무거운 죄를 얻은 것으로 보아 그의 말에 반드시 마땅함을 지나친 곳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말이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심할만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계명은 원부(元符, 1096-1100) 말년에 임금님의 조서에 응해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직분을 넘었다고 해서 [호공이 소공에게] 죄가 있다고 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 : 이 일은 우리들이 마땅히 다시금 재검토해보아야 할 사안이며, 그저 소공(蘇公) 혼자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공(楊公)의「묘지(墓志)」는 수미가 이어져 있어 [군데 군데] 잘라 싣기가 곤란하기에 [연원록에] 온전히 다 실었습니다만, 이 또한 [역사 기술상에 있어서의] 변례(變例)라 할 수 있습니다. 호공(胡公)이 분변(分辨)해서 발명(發明)해낸 ‘술작(述作)의 의미’는 [유교적 진리에] 매우 큰 공(功)이 있는 만큼 이를 삭제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호공(胡公)의 「행장(行狀)」에는 [호공이 태학에서] 학생을 징계한 일을 취했는데 [호공이] 태학록(太學錄)으로 있으면서 학규(學規)를 시행한 것이 매우 투철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지 그저 단지 후에 [호공이 학규와 관련된 문제를] 의론한 장본(張本)이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명도(明道)가 서술한 가운데서도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주 : 유립지(劉立之)가 판무학(判武學)의 직책을 파(罷)한 일을 기록했다.] 이천은 이 일을 보존해두고 내버리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일의 진실한 상황을 갖추어 드러내고자 한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비록 기상이 작은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호공이 일을 기록하는 것을] 피(避)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 밖의 뜬소리는 대부분 삭제하여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 글을 쓸 당시 너무나 허둥대다가 실수한 것들일 뿐입니다. 첫 권에 언급된 많은 분들은 [그 글을 처음 쓸] 당시 그 명실(名實)이 이미 조금은 드러났다고 보았으므로 소소한 일에 대해서는 다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참으로 빠진 곳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곳의 약간의 문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검열을 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백공(伯恭) 및 여러 붕우들과 함께 [이 일을] 이루어내어야 하겠습니다.
答呂伯恭(論淵源錄)
元豐中詔起呂申公, 此段初固知其有誤, 然以其不害大體, 故不復刊. 今欲正之, 亦善. 但去‘司馬溫公․溫公不起’八字, 及依程集本題改‘寄’爲‘贈’可也.
明道言當與元豐大臣共政, 此事昨來已嘗論之, 然亦有未盡. 今詳此事乃是聖賢之用, 義理之正, 非姑爲權譎, 苟以濟事於一時也. 蓋伊川氣象自與明道不同, 而其論變化人材, 亦有此意. [주]見外書胡氏所記. 易傳於睽之初爻, 亦有‘不絶小人’之說, 足見此事自是正理當然, 非權譎之私也. 然亦須有明道如此廣大規模, 和平氣象, 而其誠心昭著, 足以感人, 然後有以盡其用耳. 常人之心旣不足以窺測此理, 又無此等力量, 自是信不及. 設有信者, 又不免以權譎利害之心爲之, 則其悖理而速禍也爲尢甚矣. 此今之君子所以不能無疑於明道之言也. [주]胡氏所記, 尹氏亦疑之, 豈所(3-1531)謂未可與權者耶? 邵子文晩著此書, 於其早歲之所逮聞者, 年月先後, 容或小差. 若語意本末, 則不應全誤. 且所謂二公幷相, 蓋終言之 : 召宗丞夫行, 以疾卒, 亦記其不及用耳. 非必以爲二公旣相, 然後召明道也. 又謂邵錄多出公濟, 恐亦未然. 蓋其父子文體自不同也.
折柳事有無不可知, 但劉公非妄語人, 而春秋有傳疑之法, 不應遽削之也. 且伊川之諫, 其至誠惻怛, 防微慮遠旣發乎愛君之誠, 其涵養善端, 培植治本又合乎告君之道, 皆可以爲後世法. 而於輔導少主, 尤所當知. 至其餘味之無窮, 則善學者雖以自養可也. 故區區鄙意深欲存之, 蓋其說如此, 非一端也. 今乃以一說疑之而遽欲刊去, 豈不可惜? 若猶必以爲病, 則但注其下云 : ‘某人云: 國朝講筵儀制甚肅, 恐無此事’, 使後之君子以理求者得其心, 以事考者信其迹, 其亦庶乎其可矣.
范公不爲程門弟子, 下卷范公語中論之已詳. 此年譜所截, 特鮮于所錄之本文耳. 然不削去 ‘門人’二字者, 范公語中旣引以爲說, 則此不可削, 史固有變例也. 但來喩引范公日記, 以爲伊川所爲范公未必盡知. 若率先具素饌, 則應大與東坡忤, 何以能處程蘇之間而無違言乎? 此則恐於事理皆未盡也. 蓋范公所記正叔獨(3-1532)奏, 乞就寬凉處講讀, 而幷及修展邇英次弟, 則固善之之辭, 而非有譏貶之意也.
但伊川已奏而事方施行, 則自不必更言. 而在范公之自處, 則亦或有不敢言者. 至於國忌齋筵, 葷素所宜, 則以范公之賢, 於己之所行自當顧義理之是非以爲從違, 不當視同列之喜怒以爲前却也. 使其果欲依違兩間, 曲全交好, 則具素饌旣忤東坡, 具肉食亦忤伊川. 若慮於彼而忽於此, 則亦非所以兩全矣. 况范公之意未必出此, 而他書所記亦云范醇夫輩食素, 秦黃輩食肉, 則所記雖不同, 而范公之不畏東坡而每事狥從, 亦當時所共知矣. 故嘗竊意范公雖不純師程氏, 而實尊仰取法焉. 其於東坡, 則但以鄕黨游從之好素相親厚, 而立朝議論趣向略同. 至其制行之殊, 則逈然水火之不相入. 且觀其辨理伊川之奏, 則其心豈盡以東坡爲是哉? 但不能辨之於當時, 而發之於數年之後, 此則剛强不足, 不免乎兩狥之私者. 而其所重在此, 故卒不能勝其義理之公也. 大抵程蘇學行邪正不同, 勢不兩立, 故東坡之於伊川素懷憎疾, 雖無素饌之隙, 亦不相容. 若於范公, 則交情旣深, 而其氣象聲勢無足畏者, 故雖有右袒之嫌, 而不以害其平生之驩也.
侯師聖論二先生大槪亦得之, 但語意少不足耳, 亦不必刪去也.
文潞公事但注其後云: ‘某人云: 先生判監時, 潞公未嘗尹洛, 疑此有小誤.’
(3-1533)‘以管窺天’, 此伊川本語, 見於遺書, 不必曲爲隱諱. 兼其語有抑揚, 善讀者當自知之. 若爲其不善讀而毁吾說以避之, 則古今書傳之得存者寡矣.
橫渠墓表出於呂汲公, 汲公雖尊橫渠, 然不講其學而溺於釋氏, 故其言多依違兩間, 陰爲佛老之地, 蓋非深知橫渠者. 惜乎當時諸老先生莫之正也. 如云學者苦聖人之微而珍佛老之易人, 如此則是懦學異端皆可人道, 但此難而彼易耳. 又稱橫渠不必以佛老而合乎先王之道, 如此則是本合由老佛, 然後可以合道, 但橫渠不必然而偶自合耳. 此等言語與橫渠著書立言, 攘斥異學, 一生辛苦之心全背馳了. 今若存之, 非但無所發明, 且使讀者謂必由老佛易以人道, 則其爲害有不可勝言者, 非若前段所疑年月事迹之差而已也. 又行狀記事已詳, 表文所記無居狀外者, 亦不必重出.
呂侍講學佛事似不必載, 如何?
溝封奉聖鄕雖非封建, 然亦可以爲封建之漸, 且無時不可爲. 若曰分茅胙土, 大封王侯, 則主少國疑, 誠非可爲之時矣. 但伊川決不至如此不曉事, 必待晩年更歷之多, 然後知其不可也. 大抵前輩議論不能無小不同, 今兩存之, 學者正好思索商量, 非若汲公之論橫渠, 大本不同, 其流有害也.
(3-1534)楊應之事以少見, 故悉取之, 亦變例也. 恐可訪問, 更增廣之.
楊於程門, 亦未必在弟子列也.
呂進伯․和叔本當別出, 以事少無本末, 故附之與叔, 甚非是. 告訪問增益, 別立兩絛. 臨川有薛氏, 汲公甥也, 可因人問之.
蘇博士語中胡公所論, 蓋以越職言事, 便非語黙之當然. 又以其得罪之重, 知其言必有過當處耳. 詞之未瑩, 故若可疑. 然蘇乃元符末年應詔上書, 恐未可以越職罪之也. 此事吾輩更合商量, 非持爲蘇公之是非也.
楊公墓志首尾聯貫, 不容剪載, 故全書之, 亦變例也. 胡公所辨發明述作之意最爲有功, 似不可去.
胡松行狀取屛斥學生事, 乃爲作學錄, 行學規之樣轍, 非獨爲後來論列張本也. 然明道敍述中亦有如此者, 劉立之記罷判武學事. 伊川存而不去, 蓋欲備見事情. 雖知氣象之小, 而不得避也. 其他浮辭多合刪節, 當時失於草草耳. 卷首諸公, 當時以其名實稍著, 故不悉書. 自今觀之, 誠覺曠闕. 但此間少文字, 乏人檢閱, 須仗伯恭與諸朋友共成之也.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53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5, 왕상서․장식․여조겸․유자징과의 문답(書汪張呂劉問答)에 6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는 이 편지가 씌여진 정확한 연대를 알 수가 없으나, 대체로 순희년간에 씌여진 것으로 보고, 우선 경자년(1180년, 주자 51세)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여백공의 강의지도 절차(講授次第)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동래는 논어나 맹자와 같은 경전보다는 역사를 중시하여 춘추좌전 및 여러 현인들의 주소(奏疏)를 우선적으로 학생들에게 읽히고 있었는데 주자는 이에 반대하여 경전 공부를 먼저 하게 한 연후에 역사를 공부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는 어저께 기경(奇卿)을 보았는데 근자에 [그대의] 강의지도 절차에 관해 삼가 물어보았습니다. 듣자하니 [그대는] 여러 학생들로 하여금『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및 여러 현인들의 주소(奏疏)를 읽도록 지도한다 하더군요. [그러나] 『논어』,『맹자』와 같은 여러 경전에 대해서는, 배우는 자들이 한갓 빈말에 힘쓰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이를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하니, 이런 일이 실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실정이] 이와 같다면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대개 배움의 순서는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익힌 다음에 남과 관련된 것을 익히는 데로 나아갈 수 있으며, [우선] 이치를 깨닫고 난 후에 일 처리를 배우는 데로 배움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때문에 정부자(程夫子)는 학생을 지도할 때 먼저『논어』와『맹자』를 읽게 하고, 그 다음 여러 경전을 학습하도록 했으며 [이처럼 경전 공부를 먼저 하게 한] 연후에 역사를 공부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정부자가 정한] 그 공부 순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에 학생들이 한갓 빈말에 힘쓸까 걱정이 되면 마땅히『논어』,『맹자』등과 같은 경서를 교재로 하여 [학생들이] 몸으로 실천해나가도록 가르쳐 나간다면 거의 [이상적인 교육과] 서로 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및 주소(奏疏)에 나오는 말들은 모두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관련된 시사적인 일들이어서 배우는 자들 스스로에게 절실한 급선무가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그대의 생각과는 달리 『논어』,『맹자』와 같은 경서에 비해『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주소(奏疏)에서의 말들이 배우는 자들에게] 빈말이 되는 것이 더욱 심합니다. 그런데도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공부하도록 하면서 몸소 실천하는 실질을 터득하도록 지도한다면 이야말로 [목표와 방법이] 많이 배치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의 견해는 이와 같습니다. 감히 의심되는 점을 그대에게 여쭙지 않을 수 없어 몇 말씀 올립니다. 그대의 재량에 맡깁니다.
答呂伯恭
熹昨見奇卿, 敬扣之以比日講授次第, 聞只令諸生讀左氏及諸賢奏疏, 至於諸經論孟, 則恐學者徒務空言而不以告也. 不知是否? 若果如此, 則恐未安. 蓋爲學之序, 爲己而後可以及人, 達理然後可以制事. 故程夫子敎人先讀論孟, 次及諸經, 然後看史, 其序不可亂也. 若恐其徒務空言, 但當就論孟經書中敎以躬行之意, 庶不相遠. 至於左氏奏疏之言, 則皆時事利害, 而非學者切身之急務也. 其爲空言, 亦益甚矣. 而欲使之從事其間而得躬行之實, 不亦背馳之甚乎? 愚見如此, 不敢不獻所疑, 惟高明裁之.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답유자징35-1서(35권 첫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7번째로 실려 있다. 유자징의 이름은 유청지(劉淸之)이고 정춘(靜春)선생으로 불렸다. 주자와 가깝게 교유하였고, 강학도 매우 활발하였다. 아호의 모임에도 참가하였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신사년(辛巳, 1161년, 주자 32세)이나 그보다 조금 뒤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는 자징의 예의바른 는 안부 편지에 가까운 내용이다. 겸허하게 자신의 실상과 주요 관심사를 상대에게 알리고 예의바르게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내고 있다. 자징(子澄)이 이미 진사가 되고 난 후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고자 했으나 선생을 뵙고 나서는 [그 동안] 익혀오던 것을 모두 모아 불살라 버리고 개연히 의리지학(義理之學)에 뜻을 두었을 만큼 다. 본문 중에 ‘그대께서는...아직은 그다지 들은 것도 없는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한 저에게 예를 갖추시고 편지까지 보내주시고... 겸손하게 몸을 낮추시어 여기까지 오셨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유자징은 선생께 예를 갖춘 편지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직접 선생을 방문하여 선생의 말씀을 경청하기까지 했는데, 이 편지를 통해 주자는 이와 같은 유자징의 배려에 대한 감사와 아룰러 그러한 유자징의 배려가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임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4월 13일, 좌적공랑(左廸功郞)․감담주남악묘(監潭州南嶽廟) 주희(朱熹)는 삼가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주부학사(主簿學士) 족하(足下)께 글을 올립니다. 저는 지극히 어리석고 비루하여 어릴 적부터 무슨 일을 하든지 남에게 미칠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헛되이 옛 사람의 ‘자기완성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에 뜻을 두어왔습니다. 비록 강론한지는 여러 해 되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 공부에] 종사한지 오래되어 선생(先生)과 장자(長者)의 문(門)에 잇달아 발걸음을 하면서 반복해서 논변해 왔으므로 [제가 벌여 온 논변들이] 한 두 친구의 입에서 끝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간혹 [저에게] 배움에 힘쓰는 학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저의 면목을 알지 못하고 저의 의론에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드디어 ‘이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라면서 서로 의심합니다. 가령 하루 정도 저의 면목을 보고, 저의 말투를 들어 보고 나서 저의 행위를 천천히 관찰해보면 그야말로 그저 별 볼일 없는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니, 챔을 뱉고 가버리지 않을 자 거의 드물 것입니다. 집사(執事)는 한창 나이에 건장한 기운과 청렴한 절개와 곧은 도를 지니고 출발하여 벼슬길에 오름으로써 이미 세상에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런데도 배우기를 즐기고 묻기를 좋아하는 뜻을 더욱 강하게 가지시니 또 장차 고인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있어서 그러합니까? 참으로 그러하다면 ‘벗을 취하여 인을 돕고자 하는 그대는 [훌륭한 벗을] 잘 가리고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저 길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도를 굽혀 돌아보면서 ‘배움에 힘쓴다는 이름만 있지 아직은 명성이 없는 평범한 사람인’ 저에게 예를 갖추어 편지까지 보내주니, [그대의] 말씀은 고상하나 예법은 지극히 겸손합니다. 저는 재능이 없건만 그대는 저들의 말이 무에 그리 믿을 만하다고 그들 말을 믿고서 문득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며칠을 머물면서 온 종일 고하는 말에 지친 기색이 없고, 비록 거친 밥에 나물국을 함께 나누었지만 싫증나거나 게으른 듯한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아마도 그대는 참으로 저에게서 무언가 취할만한 것이 있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돌아보건대 저는 비루하고 거칠어 거의 한 두 가지조차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뜻 가는대로 함부로 지껄인 점에 대해서는 간혹 제 스스로도 그것이 웃음거리가 됨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과연 여기에게 무얼 취하려는 것입니까? 두려움이 말할 수 없이 커져만 가는데, 편지를 통해 터놓으려 하지만 속 마음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연일 날씨가 쾌청합니다. 지금쯤 아마 소무(昭武)에 머물고 있겠군요. 그대 얼굴을 마주 대할 때는 매우 기뻤고, 그대가 간 후에도 여전히 뿌듯한 즐거움이 남아 있어, 요즘 저의 형편이 참으로 나쁘지 않습니다. 날씨가 점차 더워지니 항상 스스로 보중(保重)하시기 바랍니다.
答劉子澄
四月十三日, 左廸功郞․監潭州南嶽廟朱熹謹西向再拜, 復書主簿學士足下: 嘉至愚極陋, 自幼事事不能及人. 顧乃不自度量, 妄竊有意於古人爲己之學. 雖講之有年矣, 而未始有聞也. 徒以從事之久, 足迹相接於先生長者之門, 反復論辨, 不絶於一二友朋之口, 是以人或以務學之名歸之. 而世之不識其面目, 不接其言議者, 遂相與疑之, 以爲是果何如人也. 誠使一日見其面目, 聽其辭氣而徐察其所爲, 則冗然一庸人耳, 其不唾之而去者幾希. 執事以盛年壯氣․淸節直道發軔進塗, 旣有聞於當世矣, 而說學好問之意勤勤有加, 又將有意於古人爲己之學者而然邪? 誠如是, 則所以取友而輔仁者, 擇之亦宜審矣. 乃道聽於人, 枉道垂顧, 以禮於名爲務學而未始有聞之庸人, 畀之手書, 辭高而禮下. 熹誠不佞, 不識執事於夫人之言何所取信, 而遽爲謙屈以至於此也. 旣又留連竟日, 告語不倦, 雖疏食菜羹, 相與共之, 略無厭怠之色, 則又疑執事眞若有取於熹者. 顧樸陋荒淺, 殆不能有以裨補一二爲慚, 率意妄言, 間亦自知其可笑也. 然則執事果何所取於斯哉? 恐(3-1537)懼增劇, 因風陳布, 莫究所懷. 連日快晴, 計已次昭武矣. 承顔盡懽, 退有怡怡之樂, 爲况良不惡. 向暑, 千萬以時自重.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답유자징35-2서]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8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연보에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에 씌어진 것으로 나열되어 있으나 기실은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우선은 연보를 따라 주자 41세 때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여기서는 이단에 대한 대결의식을 표명하면서 이단을 극복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유교적 이치를 보다 적극적으로 분명하게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평상시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점을 거듭 확인하면서 정자가 말한 함양과 진학의 공부법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단의 학문이 [유교를] 침범하여 거슬르는 것이 매우 걱정된다고 했는데 이런 정도의 것으로 걱정한다면 걱정거리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강학하고 체험하는 공부에 더욱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내 가슴 속이 확 트여 한 점 의혹이 없도록 할 수만 있다면 저 [이단의 학문]은 저절로 우리의 걱정거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적극적으로 유교의] 수많은 이치의 분명함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소극적으로 그저 이단을 배척하는] 단편적인 몇 마디 말만을 지키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즉] 비록 아침 저녁으로 [유교가 이단에 침범되는 현실을 ] 근심하고 걱정한다 해도 겨우 저 이단의 학문에 [노골적으로] 침범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에 그칠 뿐, 나의 가슴 속은 처음부터 혼란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되는] 이런 것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노형께서는 오로지 성현의 말씀으로써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고 하나하나 몸으로 체험해 살펴나가서 반드시 하나하나 똑똑하고 분명하게 깨달아 의혹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오랜] 세월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보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마음 씀이 정밀하지 못하여 간혹 많은 책을 탐내어 넓히기에만 힘쓰거나, 조금 성취하고 만족해 버린다면 [우리 도를] 밝힐 길이 없게 됩니다.
저는 요즘 들어 익숙해질 만큼 반복해서 익히다 보니, 지난날 미치지 못했던 한두 가지 큰 조목을 대략 깨닫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못 힘을 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바탕이 어리석고 허약해서 단단히 붙잡지 못하다 보니 허물과 뉘우침만 날로 쌓여갑니다. [이와 같은 저의 근심은] 그대가 [스스로를 위해] 걱정하는 것보다 더 심한 듯합니다. 이에 [그대는] 의심나는 것을 가지고 저를 방문하셨습니다만, [그대의 질문에 대해 제가 과연]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 요령 있는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선 제가 들은 것에 따라 대답하자면 두 가지 일을 함께 실행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정부자(程夫子)께서 말하기를 “함양은 반드시 경(敬)으로서 해야 하고 진학(進學)은 곧 치지(致知)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말에 체용(體用)과 본말(本末)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시험 삼아 하루라도 [정부자의 이와 같은 공부방법에] 공력을 들인다면 마땅히 그 취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만 헛되이 의심과 후회만 끌어안게 되니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있게 될 것입니다. 무릇 함양(涵養) 공부는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성공여부는] 그대가 이 공부에 얼마만큼 의지를 두는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치지(致知) 공부에 관한 한, 벗들과 함께 강학하면서 도움을 받아야 발명함이 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합니다만, [그대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어떻게 사색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습니까? 오직 빨리 도달하고자 하지도 말고, 의문을 쌓아 두지도 말며, 앞뒤 순서와 완급을 온당하게 조절해 간다면 공부가 날로 진보하여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책을 읽다가 혹시라도 제에게 가르침을 주실만한 곳[즉 나와 상의할만한 일,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배우고 싶은 것을 말한다.]이라도 있으시면 말씀하시는 것을 꺼리지 마십시오. 저도 [그대와의 변론에] 어리석은 견해나마 다 발휘할 것입니다. 전에 선배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두면서도 성격이 우유부단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면의 성찰에 매우 깊이가 있었고, 질문이 매우 절실했습니다만, 일상 생활 속에서 줄기차게 노력하지 않아 종신토록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경계해야 할 것이고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백공(伯恭)과는 요사이도 서로 문답하고 지내십니까? 근자에도 책 한 권을 부친 적이 있습니다만 도착했는지 어쩐지 모르겠군요. 전에 보여주신 세 가지 기록물에도 이 글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는 훌륭한 점이 있으나 [그 기록은] 마땅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왕실에서 불교를 배운다’거나 또 ‘고자돈(顧子敦)이 통전을 연구한다’는 설을 말해주었는데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그대는] 백공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미 “조용히 [어른을] 모시고 식사할 때에 일깨워준 드린 말씀이 상세하다”고 했는데 [그 후에] 또 무어라 말을 했다고 한다면 [이천이 ‘지피공가학불(只被公家學佛)’이라 한 말의 뜻이] 아마도 ‘상세히 말하고자 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이를 다하지 못했다는 듯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이미 ‘[고자돈이] 오로지 통전을 연구하여 변화에 흡족하게 대응해 나갔다’고 기술되어 있는데도 원우(元祐)의 경연에서 의논이 잡박하게 되었다면 이는 처음부터 고자돈(顧子敦)이 지금이나 옛날의 사정에 대해 거의 모르는 사람인 듯한데, [이 점에 대해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백공의 말 중에] 이런 설명이 있습니까? 만일 아직 언급한 적이 없다면 편지를 보내 백공에게 물어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학자들은 고원한 것을 말하면 공적(空寂)한 데 빠지고, 낮은 것을 말하면 형기(形器)에 정체되어, 중간의 ‘바르고 합당하며 긴요하고 친절하여 [사람으로서] 마땅히 이해해야만 하는 곳’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뜻을 두지 않으니 이것이 도가 밝아지지도 않고 행해지지도 않는 까닭이며, 사특한 학설과 폭압적인 행위가 멋대로 횡행하는 데도 이를 금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백공께서는 결국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보시고 계셨는지 모르겠군요. 말하고 싶은 것들 중에 이와 같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만나뵙고 토론할 길이 없으니 걱정만 더해 갑니다.
答劉子澄
來書深以異學侵畔爲憂, 自是而憂之, 則有不勝其憂者. 惟能於講學體驗處加功, 使吾胸中洞然無疑, 則彼自不能爲吾疾矣. 若不求衆理之明而徒恃片言之守, 則雖早夜憂虞, 僅能不爲所奪, 而吾之胸中初未免於憒憒, 則是亦何足道? 願老兄專以聖賢之言反求諸身, 一一體察, 須使一一曉然無疑, 積日旣久, 自當有見. 但恐用意不精, 或貪多務廣, 或得少爲足, 則無由明爾.
熹比來溫習, 略見日前所未到一二大節目, 頗覺省力. 但昏弱之姿, 執之不固, 尤悔日積, 計有甚於吾友之所患者. 乃承訪以所疑, 使將何辭以對耶? 然以所聞質之, 則似不可不兩進也. 程夫子曰: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此二言者, 體用本末無不該備. 試用一日之功, 當得其趣. 不然, 空抱疑悔, 不惟無益, 反有害矣. 夫涵養之功, 則非他人所得與, 在賢者加之意而已. 若致知之事, 則正(3-1538)須友朋講學之助, 庶有發明. 不知今者見讀何書? 作如何究索? 與何人辨論? 惟毋欲速, 毋蓄疑, 先後疾徐適當其可, 則功日進而不窮矣. 因書或有以見敎, 勿憚辭費, 熹亦不敢不盡愚也. 向見前輩有志於學而性涉猶豫者, 其內省甚深, 下問甚切, 然不肯沛然用力於日用間, 以是終身抱不決之疑, 此可以爲戒而不可以爲法也.
伯恭近通間否? 比亦嘗附一書, 不知達否. 所示三錄, 極有警發人處, 然亦有合商量者. 所云只被公家學佛, 又顧子敦治通典之說, 此兩絛曾與伯恭商量否? 旣云從容侍食, 告語之詳, 而又云云, 則疑若有欲告而不得盡之意. 旣云專治通典, 使應變浹洽, 而元祐經筵駮議, 乃似未始略知今古之人, 此不知亦有說耶? 如未嘗語及, 告因書爲扣伯恭, 却以見敎爲幸. 今世學者語高則淪於空寂, 卑則滯於形器, 中間正當緊要親切合理會處, 却無人留意, 此道之所以不明不行, 而邪說暴行所以肆行而莫之禁也. 不知伯恭後來見得此事如何, 所欲言似此者非一, 無由面論, 徒增耿耿.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답유자징35-3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9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 역시 앞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경인년(庚寅, 1170년, 주자 41세)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에서는 정자를 근거로 하여 격물치지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성현께서 하신 말씀은 본래 저절로 평역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높은 곳을 오르려면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하고, 먼 곳을 가려면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는 법임’을 말하고 있다.
여러 차례 서신을 왕복하다 보니 [그대의] 근황(近况)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배우는 자가 가슴 속이 확 트여 크게 공정하고 [눈과 귀가] 밝게 열려 있어야 바야흐로 치지(致知) 궁리(窮理)에서 힘을 얻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지금 이미 지나간 [자신의] 일을 책망하고 허물하여 생각 생각마다 잊지 않고 있으니 부질없이 [그대] 스스로 애만 태울 뿐 마음으로 이치와 의리를 즐기는 맛이 없을 듯합니다. 程子께서 이른바 ‘[너무] 조급하게 굴다가하여 이치에 맞지 않으면, 곧 도리어 성실하지 않게 된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점을 염려해서입니다. 높은 곳을 오르려면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하고, 먼 곳을 가려면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는 법입니다. 잠시라도 놓치지 않고 비근한 결과를 셈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마침내 반드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저의 생각에 대해]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장흠부와 여백공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수시로 [그분들의] 편지를 받고 강론한 바 있습니다만 또한 확정하지 못한 곳이 많아 아직은 답서를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대체로 성현께서 하신 말씀은 본래 평이합니다. 그렇지만 평이한 가운데도 [담고 있는 그] 뜻은 무궁한 법이지요. 이제 기필코 추앙하여 높게 하고, 천착해서 깊게 하려 해도 이는 참으로 반드시 높고 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본지에서 벗어나 [성현의 말씀이 지닌] 평이하면서도 무궁한 맛을 잃어버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대가] 논한『시경』 「녹의(綠衣)」편은 뜻이 지극히 순후(溫厚)합니다. 시를 배우는 근본을 터득하셨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본지에서 벗어난 생각을 첨가해 넣은 것이 너무 많아서, 『시경』본문의 근본 의미를 도리어 소통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이점이 제가 『詩集傳』에서 여러 선생들의 말을 감히 다 실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시험 삼아 다시 깊이 생각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答劉子澄
反復書辭, 具悉近况. 但學者正欲胸中廓然大公, 明白四達, 方於致知窮理有得力處. 今乃追咎往昔, 念念不忘, 竊恐徒自煎熬, 無復理義悅心之味也. 程子所謂 ‘迫切不中理, 則反爲不誠’, 亦正慮此耳. 升高自下, 陟遐自邇, 能不遺寸구[日+咎]而不計近功, 則終必有至矣. 如何如何? 張呂時得書, 有所講論, 然亦頗有未定者, 未欲報去也. 大紙聖賢立言本自平易, 而平易之中其旨無窮. 今必推之使高, 鑿之使深, 是未必眞能高深而固已離其本指, 喪其平易無窮之味矣. 所論綠衣篇意極溫厚, 得學詩之本矣. 但添入外來意思太多, 致本文本意反不條暢, 此集傳所以於諸先生之言有不敢盡載者也. 試更思之, 如何?
유자징에게 답함(임진) 答劉子澄(壬辰)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답유자징35-4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0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원주(原注)에 따라 임진년(壬辰, 1172년, 주자 43세)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 편지에서는 장암헌의 스승인 호오봉의『지언』을 언급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다루나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고 있다. ‘근자에 흠부(欽夫), 백공(伯恭)과 함께 [이 문제를] 논한 것이 매우 자세’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편지에는 30대 중반에서부터 40세 전후에 걸쳐 장남헌, 여조겸 등 - 특히 장남헌과 열띤 논쟁을 거친 흥분이 아직 남아 있다. 아울러 주자는 이 편지 안에서 이정을 존중하면서 이정 문하의 고제들을 자신 있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주자의 학문적 입장이 점차 확고해져 감과 동시에 자신의 학통에 대한 뿌리 찾기가 어느 정도 정리된 형태로 드러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지언(知言)이란 책은 그 마음 씀이 정밀하고 절실하지만 그 기상이 급박하다보니 결국 화평함이 적습니다. 또 [지언(知言)] 여러 큰 조목 역시 모두 착오가 있으니, 예를 들어 ‘성(性)에는 선악(善惡)이 없다’, ‘마음은 이미 발한 것이다’, ‘知를 우선하고 敬을 뒤에 한다’ 는 등의 주장은 모두 성현의 본래 종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근자에 흠부(欽夫), 백공(伯恭)과 함께 [이 문제를] 논한 것이 매우 자세하지만 역시 모두 [비슷한 내용을] 반복한 것들입니다. [저와 백공, 그리고 흠부 사이에] 비록 작은 문제들에 관해서는 아직 [의견이] 합치되지 않고 있다 해도 큰 줄거리는 대략 같습니다. 글자 수가 너무 많아 아직은 모두 베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또 선배의 흠을 취하여 치우치게 인용했다는 혐의도 있고 하니, 역시 세상에 유포하여 전해지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글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못되니 스스로 논어나 맹자 등 여러 경전들 중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서 분명하게 이해하여 의심이 없어지기를 기다린 뒤에는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깊이 연구해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아직은 다 옳다고 여길 수도 없고, 또 경솔히 그르다 여길 수도 없습니다.
하늘의 운행은 쉬지 않고, 만물은 계속해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그러니] 만물은 모두 떠나가는데 자기만 홀로 가지 않는 이치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께서는 한공(韓公)이 탄식하자, 이로 인해 [그에게] ‘이 평상의 이치가 지금까지 늘 이와 같거늘, 무얼 그리 탄식하는가?’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이미 분명합니다. 한공은 깨닫지 못하고 ‘늙은이가 떠나가는구나’ 라고 했으므로 선생은 또 그에게 ‘그대는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이치가 전혀 닿지 않는 것을 말씀하심으로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한공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남정씨유서] 첫 편에서 ‘별도로 다른 하나의 좋은 성을 찾아서 여기에 있는 이 좋지 않은 성과 바꾸어버리기를 바란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한공이 스스로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즈음에 이르러, 정자께서는 한공에게 ‘[떠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떠나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니, [정자의 그] 말씀이 또한 저 평상의 이치를 따르신 것일 뿐입니다. 거듭 이 장의 뜻을 살펴보아도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니 아마도 ‘떠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부분에서 기필코 특별한 도리를 추구하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명도(明道)선생은 덕성이 관대하고 규모가 넓게 트이셨지만 이천(伊川)선생은 기질이 강직하며 문리가 자세하고 명확합니다. 그분들의 도는 비록 같지만 덕에 나아감은 각기 다릅니다. 그러므로 명도께서는 일찍이 [당신께서] 조례사(條例司)의 관리가 되신 것을 치욕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천께서 지으신 「명도선생행장」에는 유독 그 일만은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명도는 오히려 청묘(靑苗)도 그냥 지나칠 수 있다고 했지만 이천은 결국 서감(西監)의 신분으로 올린 하나의 주장에서 비교하고 따진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볼 때, [이정자께서는 그 덕성이 서로] 같지 않다 이를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명도가 그냥 지나친 것은 바로 공자의 엽각(獵較)을 본뜬 것이요, 이천이 하나하나 이해한 것은 맹자가 제후를 만나보지 않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 또한 그들이 같다는 점에 있어서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다만 명도가 처한 것은 대현 이상의 일이니, 학자로서 아직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도 못한 체 경솔하게 이런 수준의 일에 대해서 논한다면 지켜야 할 것을 잃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이천이 처한 경지는 비록 높지만 사실 중간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돋움해서 미칠 수 있는 경지니 배우는 자들이 다만 이것을 가지고 법으로 삼는다면 거의 허물이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마땅히 마음 씀씀이의 얕고 깊음과 일의 크고 작음을 살피고 그 마땅함을 적절히 짐작하여야지 [변통성 없게] 하나의 뜻만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군자가 궁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횡거(橫渠)의 ‘용녀(龍女) 의관에 대한 일’도 도리어 한 때 우연히 [횡거가 사태를] 철저하게 살피지 못한 데서 생긴 일일 뿐입니다. 만약 철저히 살폈더라면 횡거는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개 이는 예관의 직무와 관련된 일인만큼 가령 명도에게 그것을 담당하게 했더라도 또한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劉)공이나 이(李)공이나 유(游)공이나 양(楊)공 네 분이 도달한 경지도 진실로 감히 가볍게 의논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대가] 논한 바와 같이 [이분들] 역시 [진리에] 가까이 간 분들입니다. 다만 도리어 ‘오로지 벼슬 때문에 뜻을 빼앗겨서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유(劉)공이나 이(李)공이 일찍이 벼슬하지 않은 것도 아니요, 유(游)공이나 양(楊)공도 진실로 세속의 논리만 추종한 것도 아니니, 저절로 그들 소견에는 얕고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아감에 순수하고 잡박한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대저 배우고 물음에 있어 긴요한 점은 살피는 것이 투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경(主敬)과 치지(致知)에서부터 공부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진정한 출발이 없는 셈입니다.
배우는 자들이 뜻을 두어야 하는 곳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일을 논하게 될 경우에는 마땅히 ‘자기가 처한 입장’과 ‘논하는 일’, ‘말하는 사람’ 등을 살펴서 얕고 깊은 정도를 정하여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되면 실언을 하거나 사람을 잃을 염려도 없고, 벼슬에 나아가 직무를 게을리 한다는 견책을 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나의 학문이 만약에 아직까지는 그다지 지극하지도 못하고, 또 나의 견해가 아직까지는 그다지 밝지 못하여, 이미 스스로를 믿을 수도 없고 또 남에게 신임을 받지도 못한다면 차라리 물러나 자구지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말이 배운 것을 저버리거나, 응용했는데도 말과 부합되지 않는 경우 등은 모두 [있어서는] 안 될 일들입니다.
마지막 장에서 질문한 것은 매우 절실합니다. 그대(현자)의 조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는] 반드시 이미 익숙해 졌을 듯 합니다. 천하고 비루한 [제가] 어찌 이 문제를 언급하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은 말로 논의를 확정하기는 어려우니, 반드시 우선 마음을 비운 채 이치를 관찰하여, 오랫동안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가슴 속이 환하고 명확해진다면, 내가 만나는 사건이나 사물에 따라 [각각 내가 대처해나가야 하는] 일정한 이치가 있음을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대의 말과 같이] ‘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없이 다만 명예만을 취하는 것’은 진실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으니, 혹시라도 이 ‘두 가지’에 의심이 생긴다면 또한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곳과 같은 경우는 이리 저리 헤아려 짐작해 볼 것이 극도로 요구되는 만큼 반드시 이치를 분명히 하고, 의리를 정밀하게 따지다 보면 점차 [해결책이] 드러나 남에게 질문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答劉子澄(壬辰)
知言之書用意精切, 但其氣象急迫, 終少和平. 又數大節目亦皆差誤, 如性無善惡, 心爲已發, 先知後敬之類, 皆失聖賢本指. 頃與欽夫․伯恭論之甚詳, 亦皆有反復. 雖有小小未合, 然其大槪亦略同矣. 文字頗多, 未能寫去, 又有掎摭前輩之嫌, 亦不欲其流傳也. 然此等文字且未須看, 俟自家於論孟諸經平易明白處見得分明無疑, 然後可以逐一考究, 判其是否. 固未可盡以爲是, 亦未易輕以爲非也.
天運不息, 品物流形, 無萬物皆逝而己獨不去之理. 故程子因韓公之歎而告之曰: ‘此常理從來如是, 何歎焉?’ 此意已分明矣. 韓公不喩, 而曰: ‘老者行去矣’, 故夫子又告之曰: ‘公勿去可也’, 以理之所必無者曉之, 如首篇所云 ‘請別尋一箇好底性來, 換了此不好底性著’ 之意爾. 及公自知其不能不去, 則告之曰: ‘不能則去可也’, 言亦順夫常理而已. 反復此章之意只如此, 恐不必於 ‘不去’ 處別求道理也.
明道德性寬大, 規模廣闊 : 伊川氣質剛方, 文理密察, 其道雖同而造德各異. (3-1541)故明道嘗爲條例司官, 不以爲浼, 而伊川所作行狀, 乃獨不載其事. 明道猶謂靑苗可且放過, 而伊川乃於西監一狀較計如此, 此可謂不同矣. 然明道之放過, 乃孔子之獵較爲兆 : 而伊川之一一理會, 乃孟子之不見諸侯也. 此亦何害其爲同耶? 但明道所處是大賢以上事, 學者未至而輕議之, 恐失所守. 伊川所處雖高, 然實中人皆可跂及, 學者只當以此爲法, 則庶乎寡過矣. 然又當觀用之淺深․事之大小, 裁酌其宜, 難執一意, 此君子所以貴窮理也. 橫渠龍女衣冠事, 却是一時偶見未到. 若見得到, 橫渠必不肯放過. 蓋此乃禮官職事, 使明道當之, 亦不肯放過也.
劉․李․游․楊四公所到固未敢輕議, 然如所論, 亦近之矣. 但却不專爲仕宦奪志而然, 蓋劉․李未嘗不仕, 游․楊非固徇俗, 自其所見有淺深, 故所就有純駁耳. 大抵學問緊要是見處要得透徹, 然不自主敬致知上著功夫, 亦無入頭處也.
學者所志固當大, 至於論事, 則當視己之所處與所論之事․所告之人而爲淺深, 則無失言失人之患, 出位曠官之責矣. 吾學若果未至, 見若果末明, 旣未能自信, 且不爲人所信, 則寧退而自求耳. 言而背其所學, 用而不副其言, 皆不可也.
卒章所問甚切, 在賢者處之, 必已熟矣, 淺陋何足以及此? 然竊謂此事難以言語定論, 須且虛心觀理, 積習功夫, 令一日之間胸次洞然, 則隨事隨物無不各有一(3-1542)定之理矣. 無補於事而秖以取名固所不爲, 然亦有義所當爲, 而或疑於二者, 則亦不得而避也. 如此處極要斟酌, 須是理明義精, 則源源自見, 不待問人矣.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답유자징35-5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1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무술년(戊戌, 1178년, 주자 49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43세 경에 초고를 완성한 바 있었던 통감강목을 수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이 작업을 하면서 통감강목의 대본이라 볼 수 있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언급하면서 사마광의 역사관을 비판하기도 한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주자 역사관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즈음 문자(文字)를 수정하는 일이 안정되지 못하여 아침에 완성한 것을 저녁에 허물어버리니 참으로 가소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경(直卿)이 이러한 사정을 말로 잘 전달했을 것입니다. 보내준 편지에서 “배우는 자들은 마음이 거칠어 이미 이루어진 의리(義理)를 보기만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이 또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근심거리입니다. 비록 이와 같긴 하나, [올바른 공부는] 결국 자기 스스로 푹 배어들 정도로 충분히 완미하고, [나아가 하나하나] 정미롭고 상세하게 고찰해본 후 [그 때서야 비로소 현재 이미 이루어진 의리]를 미더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이러한 공부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강목(綱目)』역시 약 20권정도 수정했는데 [주 : (내가 지금 그대에게 보내드리는) 이 한 권은 강목 20권 중 정본(正本) 5권입니다.] 의미와 범례가 더욱 정밀해져서 상하 약 천 여년 사이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참으로 [역사적 심판으로부터] 그들의 형적을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대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대의] 남은 힘을 조금 빌어 한 차례 수정(訂正)을 가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脫稿하게 되면, 마땅히 그대에게 한 부 보내드려 질정을 받고 싶군요.
근래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동한(東漢)시대의 저명한 절사(節士)를 논한 대목을 보고 미진한 데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사마온공께서는] 당고(黨錮)의 피해를 당한 제현(諸賢)이 죽음을 피하지 않은 행위가 광무제(光武帝), 명제(明帝), 장제(章帝)를 위한 공렬(功烈)이라는 것만 알았지, 건안(建安)이후의 중주(中州) 사대부들이 단지 조씨(曹氏)가 있는 줄만 알고 한(漢)나라 왕실(王室)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 일이 결국 [이와 같은] 당고(黨錮) 살륙의 환란을 몰고 온 것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선 순씨(荀氏) 일가를 예로 들어 논하면, 순숙(荀淑)은 양씨(粱氏)가 [조정의] 일을 움직여 나갈 때 바른 말을 하였고, 그의 아들 순상(荀爽)은 이미 동탁(董卓)이 [왕명을] 전횡하는 조정에 몸을 담았으며 그 손자 순욱(荀彧)은 드디어 당형(唐衡)의 사위가 되고 조조(曹操)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그것이 잘못인 줄 몰랐습니다. 대개 강대(剛大)하고 곧으며 방정한 기개가 흉학(兇虐)한 자들에게 꺾인 나머지 점점 자기 한 몸만을 보전하고 출세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이 때문에 침몰해가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런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상기해 보면 부형사우(父兄師友) 사이에도, 꾸미고 덮어주려는 모종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 상황이 이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령 갑자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 잘못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옳은 일이라 여겨, [그 속에는] 만에 하나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심오하고 기이한 계책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사특한 학설이 횡행함은 홍수나 맹수의 폐해보다 더욱 심각하다’고 했으니 맹자께서 어찌 나를 속이겠습니까? 근년에 독서하면서 이러한 생각이 분명해지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스스로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들의 미움을 받아 끝내 궁지에 몰려 삶을 마치게 되더라도 진심으로 이를 달게 여길 뿐 후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편지에서 “참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무슨 말입니까! 원컨대 자징(子澄)께서는 이러한 나의 뜻을 깊이 살피시어, 무너져 가는 세파 속에서 스스로를 떨쳐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흠부(欽夫)의 편지를 받았는데, 흠부도 “일찍이 자징(子澄)의 편지를 받고 ‘이른바 云云한 것‘에 대해 역시 매우 의심스런 점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此間文字修改不定, 朝成暮毁, 甚覺可笑. 直卿必能言之. 所喩學者心粗, 愛看見成義理, 此亦人之通患. 但雖如此, 終是須要自家玩味浹洽, 考訂精詳, 方信得及. 通計亦是許多工夫也. 綱目亦修得二十許卷, [주 : 此一卷是正本五卷.] 義例益精密, 上下千有餘年, 亂臣賊子眞無所匿其形矣. 恨相去遠, 不得少借餘力, 一加訂正. 異時脫稿, 終當以奉累耳.
近看溫公論東漢名節處, 覺得有未盡處. 但知黨錮諸賢趨死不避爲光武․明․章之烈, 而不知健安以後, 中州士大夫只知有曹氏, 不知有漢室, 却是黨錮殺戮之禍有以毆之也. 且以荀氏一門論之, 則荀淑正言於粱氏用事之日, 而其子爽已濡跡(3-1543)於董卓專命之朝. 及其孫彧, 則遂爲唐衡之壻, 曹操之臣, 而不知以爲非矣. 蓋剛大直方之氣折於兇虐之餘, 而漸圖所以全身就事之計, 故不覺其淪胥而至此耳. 想其當時, 父兄師友之間, 亦自有一種議論文飾蓋覆, 使驟而聽之者不覺其爲非而眞以爲是, 必有深謀奇計, 可以活國救民於萬分有一之中也. 邪說橫流, 所以甚於洪水猛獸之害, 孟子豈欺予哉 年來讀書, 只覺得此意思分明, 參前倚衡, 自不能舍. 雖知以是爲人所惡, 而終窮以死, 其心誠甘樂之, 不自以爲悔也. 來喩之云, 眞知我者, 尙何言哉 然亦願子澄深察此意, 有以自振於頹波之中也. 欽夫得書, 云嘗得子澄書, 於所謂云云者, 亦頗有所疑也.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답유자징35-6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2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계묘년(癸卯, 1183년, 주자 54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정자유서(程子遺書)』, 유선생(游先生) 가문의 소장본을 수집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지언(知言)』의 간행 소식도 알리고 있다. 대개의 학자들이 서지학적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주자는 특히 이 점에 관해 엄밀하고도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광동(廣東)에서 아직 정자(程子)의 『유서(遺書)』를 부쳐오지 않았습니다. 길이 멀어 감독하고 재촉하기도 어려우니, 어찌해야 할지 안절부절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근자에 붕우 한 사람이 유선생(游先生) 집안의 판본을 빌려왔는데 포약우(鮑若雨)가 기록한 몇몇 조목이 들어있어 자못 훌륭합니다. 과거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입니다. 기타 잡스럽게 기록된 부분들은 이미 전면적으로 편집하였습니다. 다만 특별히 애를 많이 먹긴 했습니다. 『지언(知言)』은 이미 간행하여 한 부를 그대에게 보내드렸으니 한 번 살펴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나중에라도] 여가 있는 날 [이 책을] 자세히 관찰해보신다면 또한 사람의 생각(意思)을 감발시키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충지(周之)가 때때로 들러 종유(從遊)할 터인데 무슨 일을 논의한 것입니까? 훗날 그대가 연평(延平)에 주부(主簿)로 부임해 오시면 뵙고 가르침을 받을 있을 것입니다. 부탁하신 기문(記文)에 대해서는 감히 잊지 않고 있으나 너무 바빠 아직은 여가가 나지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그대의] 부탁에 응할 방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사정을] 헤아려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程子遺書廣東未寄來, 道遠難督趣, 甚撓人耳. 近一朋友借得游先生家本, 有鮑若雨錄數條, 頗佳, 昨所未見也. 他雜出者已一面編集, 但殊費心力. 知言已刊行, 謹納一本, 幸視至. 暇日熟觀, 亦發人意思也. 周之想時過從, 所論何事? 異時來簿延平, 則有承敎之期矣. 所諉記文非敢忘之, 亦袞袞未暇, 旦夕當思所以應命者, 幸察.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일곱 번째 편지[답유자징35-7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3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임인년(壬寅, 1182년, 주자 53세) 7월 혹은 계묘년(癸卯, 1183년, 주자 54세)에 씌어진 것일 수도 있어 확정하기 힘들다. 제법 긴 이 편지를 통해 주자는 자신의 건강 걱정, 이미 작고한 절친한 벗인 경부(敬夫)와 백공(伯恭)에 대한 그리움을 전한다. 아울러 그들이 없는 지금 이제 그들을 대신할 사람으로 은근히 황직경이나 유자징에 대해 기대하고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그 밖에 유자징의 여행과 관련한 관심, 황전(荒田)과 관련된 문제 등이 언급되고 있으나, 특히 그와 유자징이 함께 엮어나가고 있었던『소학』책에 관한 내용이 이 편지의 주를 이룬다. “『소학』책은 정리가 되었습니까? 다행히 빨리 정돈하시게 되어, 곧바로 인편을 통해 저에게 한 부 보내주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그저께 [제가] 그대에게 통보드릴 때까지만 해도 [저의 입장은 그대가 『소학』책을 정리할 때] 오직 여기서 [제가『소학』책을] 엮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제 와서 자세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계획하시는 훌륭한 규모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는 어떻게 조치하셨는지요? 그 시행하고자 하시는 조목을 기록해서 [저에게] 보여 주시다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7월 21일, 저는 통수봉상(通守奉常) 유자징(劉子澄) 노형(老兄)께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합니다. 첨총간(詹總幹)․장삼의(章參議)두 분께서 손으로 베낀 서류를 보내오셨습니다.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요즈음 [날씨가] 이미 가을로 접어들어 제법 서늘합니다. 그대가 하시는 모든 일에 만복이 깃드시길 빕니다. 제가 5월 무렵 조정지(曹挺之)편에 [그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는] 이미 도착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너무나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심기(心氣)가 간혹 발작을 하는데다, 부스럼병(瘡腫) 등 각종 질병들이 교대로 공격해오니, 다시는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아마도 [제 건강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듯합니다. 지난 날(日前) 배움이 자기반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느슨해졌다고 생각되었기에 온갖 여러 가지 후회할만한 것들을 돌이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제가] 논저(論著)한 문자(文字) 역시 이러한 병통에 빠져 착실하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뒤돌아보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세월을 보내며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했지만 [이러한 나의 공부마저도 여전히 나의 이러한 병통을] 구제해 다스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마음이 유쾌하지 못합니다. 그 전에 그래도 경부(敬夫)와 백공(伯恭) 같은 [벗들을] 얻었을 때는 [그분이] 바로잡아주시는 은혜를 많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바로잡아주심으로 인해 나 스스로도] 깜짝 놀라며 [나의 잘못을] 반성해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이 두 분의 친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나는 더 이상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이와 같은 벗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더 이상의 반성이 없어져서] 그저 이전에 해 오던 대로 따르기만 하여 갈수록 구차스러워져 타락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어찌 현재와 같은 이러한 [문제 많은] 상황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는] 우리 자징(子澄)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에게] 자주 편지하여 아낌없는 가르침(鐫誨)을 주십시오. 이렇게 해 주시는 것이야말로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아닐까요?
낭풍(朗灃)에 가신 걸음에 그 곳 산천을 두루 구경하시면서 고금의 감개무량하심을 경험했다 하니, 그 노고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보답 받으셨습니다. 또한 [그대는 이번 여행에서] 동생이 이번 기회로 인해 감발정진(感發精進)할 수 있게 되었다니 이점이 더욱 기쁜 일입니다. [여행을 다녀오셨으니] 아마도 기행문이 있을 법 하군요. [혹시라도] 한 때의 훌륭한 경치를 기록해 두신 것이 있으면 [저에게 한 부] 부쳐 보내 주세요. 이장(李丈)께서 입궐하셨다 하나, [그분이 입궐하여] 어떤 큼지막한 의론을 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연관(經筵官)으로 당직을 서게 되면 조용히 흉금을 털어놓고 성의껏 [임금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작은 일은 아닙니다. 유성지(游誠之)가 삼산(三山)에 도착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여태껏 편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의 강하면서도 민첩한 면은 [훌륭하여] 기뻐할만 합니다. [그러나 그의] 해치고 거스르는 성품의 뿌리가 여전히 제거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그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세속의 이해관계를 따집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그가] 아무래도 상채(上蔡)가 말한 ‘앵무(鸚鵡)’의 조롱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허생(許生)이 지녔던 애초의 뜻은 아마도 표연(飄然)히 [세상사를] 마음에 쌓아둠이 없고자 했고, [그래서] 바야흐로 이 곳에 와서 어린 아이를 가르치기로 약속을 하고 싶어 했던 게지요. 이제 들으니 그가 이미 혼인했다 하니, 이 일 또한 어긋나 버렸군요. 궁벽한 산에 흙덩이처럼 앉아 있어본들, 엄한 스승과 두려워할만한 벗의 도움이 없다면, 결국 소인의 삶으로 귀착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직경(直卿)이 장사(長沙)에서 시험에 응시하였는데 청강(淸江)에서 병이 들어버렸습니다. [이에] 상장(向丈)의 진찰해주심에 힘입었습니다. 이 전날 [이 소문을] 듣고, [저는] 급히 사람을 보내 소식을 물었으나 20일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보낸 사람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이 때문에 아주 마음이 걸립니다. 그러나 필시 [지금쯤은] 이미 많이 평안해져서 서쪽으로 길을 떠났으리라 생각됩니다. 이곳 후생들 중에 그[황직경]가 있기에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너무 좁은 것이 문제이긴 합니다. 접 때 이곳으로부터 그가 떠날 때 또한 경양(景陽)과 공도(公度)를 찾아 살펴봐 달라 부탁했습니다. 병을 앓은 후에 굳이 길에 올라 들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소학(小學)』책은 이미 정리가 되었습니까? 속히 정리하여 인편을 통해 저에게 한 부 보내주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구 전날에 그대에게 통보드릴 때까지만 해도 [저의 입장은 그대가 『소학(小學)』책을 정리할 때] 오직 여기서 제가 엮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제 와서 자세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의 훌륭한 기힉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제 그대께서 엮으신 것은 [그 내용이] 모두 법제(法制)에 관한 말들인데, [여기다] 만약 다시 ‘가언(嘉言)’, ‘선행(善行)’ 두 종류[의 내용]을 첨가하고자 하신다면, 곧 두 종류의 내용 속에 반드시 각각 경(經), 사(史), 자(子), 집(集)으로부터 발췌해낸 말을 고루 편집해 넣어야만 그 설명이 완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요약해서 편집함으로써 너무 산만하지 않게 해야만 좋을 것입니다. [주] 예를 들어 관중(管仲)의 ‘두려워하기를 질병과 같이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은, [산만하지 않아] 마음으로 항상 [이 말을] 사랑하게 됩니다. 문장(文章)은 붕 뜨게 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이소(離騷)」가 담고 있는 ‘고결한 충정의 뜻’은 진실로 숭상할만합니다. 그러나 「정경(正經)」한 편에 이미 다양하게 나와 있으니 좀더 자세히 판단하여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서고(敍古)』,『몽구(蒙求)』[로부터 발췌해낸 것]도 너무 많은데 심오하고 난삽하여 읽기조차 어려운 내용은 계몽의 자료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도리어 여기에서 옛 악부(樂府) 및 두자미(杜子美)의 시가 담고 있는 의사가 좋으니 여기에서 취할 만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이를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노래하듯 외우게 하여 쉽게 마음 속으로 파고들게 가장 유익할 것입니다. 그대 편지 가운데는 또 [그대의 이론이] ‘정씨(程氏)의 이론을 주로 펄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하는 뜻이 엿보이는데 정씨(程氏)가 어찌 우리 같은 사람들을 미리 기대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쳤겠습니까? 그러나 말을 세워 가르침을 펴는 일은 구원(久遠)한 계책과 관계되니 또한 어찌 이런 혐의를 피하는 것만이 마땅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정씨의 학설 중 보다] 상세한 것은 비록 『근사록(近思錄)』속에서 이미 잘 드러나 있으나 그[정씨의 학설] 중 일언반구(一言半句)나마 그 내용이 너무나 친절(親切)하여, 불가불 후학들로 하여금 일찌감치 듣게 하고 우선적으로 입문시킬 필요가 있는 것은 특별히 이 책[소학 책]에 싣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만약 [정씨의 학설을] 세속에 부합시켜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아끼도록 하고 싶다면, 부(符)의「독서성남(讀書城南)」 한 편이면 충분할 것이니 어찌 그대가 이리저리 주워 모으는 수고스러운 노력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황전(荒田)과 관련된 문제는 어떻게 조치하셨는지요? 시행하고자 하시는 조목을 기록해서 [저에게] 보여 주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다시 어떻게 해서든지 군대를 떠나 귀정(歸正)한 사람들에게 자원(自願)해서 토지를 빌려 경작하도록 권유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제가] 일찍이 봉사(封事) 가운데서 이 일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겨울 주대(奏對)할 때에 오히려 황제께서 [이를] 기억(記憶)하시어 [저를] 깨우쳐 주시면서 [제가 건의 드린 내용이] 좋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학교는 자못 남들의 모범이 될만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無益하여 한갓 재물만 낭비할 뿐입니다.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사언(四言)과 10영(十詠)을 속히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침 기사충(祁師忠)의 글을 얻어 보니 서당(書堂)이 7월 15일 전후해서 기둥을 세울 수 있다고 하는군요. [그대가] 부쳐 준 [기사충(祁師忠)이 편정(編定)한]『무당후록(武當集錄)』은 [그 내용이] 매우 간단하면서도 합당합니다. 특히 왕숙견(王叔堅)․임질부(林質夫)와 더불어 군대문제를 논한 한 두 편의 글은 매우 훌륭한데 어찌 기록해두지 않았습니까?
저는 접때 [그대가 나에게] 형제의 맹약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서는, 감히 갑자기 이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그대가 나를 스승의 예로 대하심으로써]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칭호를 그대가 사용하시니, [이런 상황을 마주한 저로서는] 줄곧 차일피일 하다가 사양해 물릴 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다시금 옛 약속을 살피시어 [지금 그대가 나에게 사용하시는 바] 실제 내용과 부합되지 않는 [스승이라는] 호칭을 그만두시고, [전에 저에게 보내주신] 글에서와 같이 형제의 예(禮)로 저를 대해 주신다면, 크게 다행이겠습니다. 천만번 깊이 살펴주십시오.「사단기(社壇記)」에 수십 마리를 지어서 본말을 서술하니, 교졸한 부분에서 절반(一半)정도의 기력(氣力)을 줄여나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글이] 더욱 기묘해졌습니다.
형주(荊州)는 땅의 형세로 볼 때 사방이 평평하여, 수비를 하려면 마땅히 [형주의] 외곽에서 해야만 합니다. 옛날 초(楚)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방성(方城)을 성(城)으로 삼고, 한수(漢水)를 해자로 삼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형주를 적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하여 [적들이] 곧바로 城 아래까지 이르게 된다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즉 모두가 죽게 되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答劉子澄
七月二十一日, 熹頓首再拜子澄通守奉常老兄: 詹總幹․章參議兩致手帖, 良以爲慰. 比日秋已復凉, 伏惟尊候萬福. 熹五月間因曹挺之行附書, 想已達矣. 悲惱之餘, 心氣間作, 加以瘡腫諸疾交攻, 更無一日寧帖, 恐不復能支久矣. 日前爲學緩於反己, 追思凡百多可悔者. 所論著文字, 亦坐此病, 多無著實處. 回首茫然, 計非歲月功夫所能救洽, 以此愈不自快. 前時猶得敬夫․伯恭時惠規益, 得以警省. 二友云亡, 耳中絶不聞此等語, 因循偸愉墮, 安得不至於此? 今乃深有望於吾子澄, 自此惠書, 痛加鐫誨, 乃君子愛人之意也.
朗灃之行, 覽觀山川, 感今慨古, 亦足償其勞矣. 又有同行令弟感發精進, 此尢可樂者. 恐有行記, 撰錄一時之勝, 願以見寄也. 李丈到闕, 未聞有何大議論. 經筵直宿, 足以從容啓沃, 亦非細事也. 游誠之聞到三山已久, 一向不得書. 其人彊敏可喜, 而忮很之根不除, 又計較世俗利害太切, 切恐不免上察‘鸚鵡’之譏(3-1545)耳. 許生初意其飄然無累, 方欲約之來此敎小兒, 今聞其旣授室, 此事又差池矣. 塊坐窮山, 無嚴師畏友之益, 其不爲小人之歸也鮮矣. 奈何奈何直卿赴試長沙, 病於淸江, 賴向丈診視之. 前日聞得, 亟遣人往筧信, 至今兩旬未還, 甚令人懸心. 然必是已向安, 遂西行矣. 此間後生中只有渠尙可望, 但亦傷太狹耳. 昨渠行時, 亦屬令過省景陽公度, 不知病後能枉道經由否.
小學書曾爲整頓否? 幸早爲之, 尋便見寄, 幸幸. 昨來奉報, 只欲如此間所編者. 今細思之, 不若來敎規模之善. 但今所編皆法制之語, 若欲更添‘嘉言’․‘善行’․兩類, 卽兩類之中自須各兼取經史子集之言, 其說乃備. 但須約取, 勿令太泛乃佳. [주] 如管仲‘畏威如疾’之語, 心每愛之. 文章尤不可泛, 如離騷忠潔之志固亦可尙, 然只正經一篇, 已自多了. 此須更子細決擇. 敍古蒙求亦太多, 兼奧澀難讀, 恐非啓蒙之具. 却是古樂府及杜子美詩意思好, 可取者多, 令其喜諷詠, 易人心, 最爲有益也. 來喩又有避主張程氏之嫌, 程氏何待吾輩主張? 然立言垂訓, 事關久遠, 亦豈當避此嫌耶? 其詳雖已見於近思, 然其一言半句, 灼然親切, 不可不使後學早聞而先入者, 自不妨特見於此書也. 若只欲其合於世俗而使庸人愛之, 則符讀書城南一篇足矣, 何事勞吾人捃摭之功哉?
(3-1546)荒田如何措置? 能錄示其施行條目爲幸. 更如何勸得離軍歸正人情願耕佃尤佳. 向曾於封事中及此, 去冬奏對, 猶蒙上記憶宣喩, 以爲善也. 學校頗得人表率否? 不然, 亦恐無益, 徒費錢糧耳. 精舍四言幷十詠幸早爲賦之. 適得祁師忠書, 聞書堂中元前後可立木. 又寄得所爲編定武當集錄, 甚簡當. 但與王叔堅․林質夫論兵一二篇頗佳, 何爲不錄耶?
熹向承見語有爲昆弟之約, 未敢遽信. 而忽蒙加以非據之稱, 一向因循, 不得辭避. 今欲復尋故約而罷去無實之稱, 如蒙報書, 須用此禮, 卽大幸也. 千萬痛察痛察. 社記得爲撰數十言, 敍致本末, 亦使拙者省得一半氣力, 尢妙.
荊州地勢四平, 其守當在外, 楚人所謂‘方城爲城, 漢水爲池’是也. 若不能守, 直至城下, 則無說矣.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여덟 번째 편지[답유자징35-8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4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앞의 제6서 및 7서와 함께 계묘년(癸卯, 1183년, 주자 54세) 가을에 씌어진 것이다. 유자징의 여산 여행에 관한 관심을 표명한 짧은 편지이다.
보내준 여행기록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사람이 [여산(廬山)의] 천지(天池)에 이상한 빛이 공중으로 이리 저리 날아다니다가 혹 처마 기둥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 방이나 문가리개로부터 나오기도 한다는데, 그대의 여행기록은 이 같은 소문과는 다르니 [그대는 이와 같은 소문을 들었으면서도] 우연히 이 사실을 빠트렸나요? 아니면 그대가 직접 목격하신 것이 마침 이것[즉 그대가 기록한 내용]에 그쳤기 때문입니까? 이는 진보(陳寶)의 [전설과 같은] 부류이니 특히 괴이하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슴 속은 어둡고 좁아서 스스로 이를 의심할 뿐입니다. 이 기록이 세상에 유포되어 전해지지면 [세상 사람들의 그와 같은 터무니없는] 의혹을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答劉子澄
行記甚佳, 但人說天池光怪有飛空往來, 或入簷楹, 或出自房闥者, 與所記不類, 豈偶有所遺? 抑所見適止此耶? 此爲陳寶之屬, 無足深怪. 世人胸次昏憒隘狹, 自以爲疑耳. 此記流傳, 亦足以少祛其惑也.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아홉 번째 편지[답유자징35-9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5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갑진년(甲辰, 1184년, 주자 55세) 봄에 씌어진 것이다. 어깨의 통증을 호소하는 등 신병을 간략히 언급한 후, 당시 주목을 끄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비롯, 잡다한 내용을 담은 제법 긴 편지이다. 그는 진규(陳葵)라는 인물에 대해 ‘그의 학문은 륙자정과 비슷했지만 온후간직(溫厚簡直)한 그의 성품은 [육자정보다] 나았습니다’라고 평하고 있다. 편지 말미에 이습지(李習之)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면서 주자는 그가 선학에 기울어져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 당시 주자에게는 주로 육상산 풍의 유가와 이들 사상의 뿌리가 되고 있다고 여겨졌던 선학(禪學)이 문제였다. 이 밖에도 주자는 박학풍의 문장학 내지 역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는데, 이 점은 이 편지에서 주자가 유자징의 박학적 문장학에 대해 다소간의 실망감을 표명하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즉 잡박한 문장에 대한 관심은 쉽사리 ‘완물상지(玩物喪志)’가 될 수 있어 진리의 인식과 실천에 해롭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武夷書院記, 군대문제를 논한 기거지(祁居之)에 관한 언급, 염계서당(濂溪書堂)에 관한 간략한 평도 있다.
저는 [또] 한 차례 출사(出仕)한 지 어느덧 3개월이 흘렀습니다. 돌아오니 이미 년말이 다 되었군요. [저의] 병든 몸에는 다행히 다른 일은 없습니다. 어깨의 통증이 아무래도 시원스레 낫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데 크게 방해되지는 않으니 그냥 내버려두고 문제 되지 않을 만합니다. 도리어 정신이 극도로 피곤하고 시력이 흐릿해져 문자를 온전히 볼 수 없을 정도이니 심각하게 일에 해가 됨을 느낄 뿐입니다. 구서(舊書)는 우선 직경(直卿)이 이곳에서 꼼꼼하게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고칠 수 있어서 이전에 비해 조금은 더 정밀해진 듯합니다. 우선 정본(凈本)을 한 부 베껴내라고 했습니다만, 향후에 보면 또 어떠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천주(泉州)에 도착해 보니 남종사(南宗司) 교관(敎官) 중에 진규(陳葵)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주(處州)사람이었는데 매우 좋았습니다. 그의 학문은 육자정(陸子靜)과 비슷했지만 온후간직(溫厚簡直)한 그의 성품은 [육자정보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독서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강학을 하더라도 두찬(杜撰)하는 곳이 있음을 면치 못한다는 점 등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 스스로를 신뢰함이 너무 돈독하여,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분의] 후생 중에 가르칠만한 자들이 한 둘 있습니다만, 그 중 한 사람은 이미 진군(陳君)의 보사(保社)로 들어갔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아마도 올 해 안에 한 번 쯤은 이리로 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스스로를 굳게 지키는 데만 주력할 듯하므로, 큰 가망이 있으리라 기필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나머지는 더더욱 기대하기 힘든 수준이니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대개 세속의 소란스러움이 현재와 같은 일상적인 상태로부터 더욱 심해져서 심지어 분서갱유와 같은 재앙을 불러오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들로서는 부끄러워해야할만한 일이 없으니] 이 점에 관해서는 무슨 말인들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도리어 우리들 중에 이 일로 인해 이후 계속 이어서 공부할 자들이 없어질까 그 점이 극히 우려스러울 뿐입니다.
부쳐 준 문자를 읽어보니, [그대의 글 속에는] 절절(切切)히 세속과 다투고 곡직(曲直)을 비교하려는 뜻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반드시 이와 같이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만약 [제대로] 강학하여 공부가 실질적으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저절로 성인(聖人)께서 이르신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성내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빈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요즈음은 도리어 배우는 사람들이 그저 옛 종이만 희롱하면서 [옛 종이 위에 글을 쓰신] 예사람처럼 범속하지 않으려 하지만 시간만 흘러 보내게 되어 [결과적으로] 여기[講學]에는 도무지 착실하게 힘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으로 그것[잡박한 문장에 대한 그대의 관심]이 ‘완물상지(玩物喪志)’가 되는 줄 알면서도 결연히 [이에 관한 그대의 관심을] 내버릴 수 없다는 바로 이 점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 [잡박한 문장에 대한 그대의 관심이] ‘완물상지(玩物喪志)’임이 분명하다면, 그대가 지닌 문제는 곧 하남(河南) 정선생께서 [사마군실의 수양론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시면서 하신 바] ‘염주 세는 것’과는 다릅니다. 정선생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이 외물에로 치닫게 됨으로써 내면의] 뜻을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해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반범외사(班范外事)』를 엮는다는 것이 자신의 본분에 무슨 이익이라도 있는지요? 또 세상을 교화시키는 데에도 무슨 도움 되는 점이 있습니까? [이런 일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그대가] 이런 일에 몸과 마음을 매몰시켜 [이러한 관심으로부터 몸과 마음을 완전히] 초탈할 수는 없게 된다면 또 육자정의 무리들이 높게 보고 크게 말하면서 은근히 우리들에 대해 마음을 굽혀서 쓴다고 비웃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ㅏ. 또 나수(羅守)는 아시는 바와 같이 어진 분입니다. [그대는] 그와 함께 관직생활을 하면서 서로 사이가 좋았으면서도 그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주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넉넉한 점을 더욱 보태 주셨습니다. 또 [그대는 그를] 쫓아가 스스로 빠지기까지 하시니 또한 홀로 이를 어찌 하겠습니까? 수년(數年) 이래 우리의 도(道)가 불행하여 [함께 도를 추구해온] 오래된 벗들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잘것없는 저의 소망은 함께 우리의 도를 붙들 사람으로 우리 자징(子澄)을 깊이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대에 대한 나의 기대가 이런데도, 그대의 관심이] 이제 이와 같으니, 나로서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도학과 관련된 저의] 계획을 포기해야할 정도입니다. 슬픈 마음으로 보낸 여러 날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속사정을] 깊이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대(子澄)는 나의 이 어리석은 말을 굽어 경청하시어 [그대의 지금까지의 공부관심을 혹] 바꾸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 하시면 그것으로 그만두겠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이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을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소학(小學)』 책은 도리어 이것과 비교도 안 되니 일찍 완성 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정사(精舍)에 붙힐 시 집필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셨다면 조속히 저에게 한 부 보내주시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나수(羅守)의 글은 ‘옛 취향’에 뜻을 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단기(社壇記)」는 이미 베껴서 보낸 듯합니다. 이 글은 장체(狀體)로 된 문장으로 고문(古文)도 금문(今文)도 아니니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그 정도를 알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와서 그 글을 끊임없이 요구하니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없지만 어쩐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우위(于尉)의 책제(策題)도 쉽게 얻을 수 없으니 이런 취향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선 [그들의 글을] 수습하여 문장지향적인 분량을 줄여나가는 것 이 또한 중요한 한 가지 일거리입니다. 도원(桃原)의 시권(詩卷)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습지(李習之)의 『복성서(復性書)』에는 이미 선적인 기풍이 있습니다. 『석림(石林)』이 씌여진 년대를 고찰해보면 이 작품은 [이고가] 아직 약산(藥山)을 만나보지 않았을 때 지은 것입니다만 [그런데도 그가 선에 경도될 수 있는] 뿌리와 싹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고의 스승이었던] 한공(韓公)께서도 일찍이 [이고의 이런 점을] 잘라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승이 죽고 난] 후에 와서 [선에 경도될 자질을 지닌 이고의 이런 측면이] 더욱 확장되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시(詩) 속에서 변론하신 점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아마도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상장(向丈)의 시를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대의 깨우쳐 주심을 받아, [급기야 제가] 그분[즉 상장(向丈)]의 깊은 사랑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마땅히 편지를 통해 감사를 표시해야겠습니다. 못난 저의 시도 아울러 몇 수 적어 보내드려야 겠습니다. 한 장(韓丈)[즉 한원길(韓元吉)]께서 「무이서원기(武夷書院記)」를 써서 보내오셨는데 의태(意態)가 한가(閑暇)한 것이 매우 아낄만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한 두 군데를 고치고 싶어하시기 때문에, 아직은 [그대에게] 베껴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거지(祁居之)가 군대문제를 논한 곳을, 왜 취하지 않습니까? 그 상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기거지가 지은] 「설역시(說易詩)」는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염계서당(濂溪書堂)은 그 규모가 매우 넓다고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반드시 이처럼 규모를 넓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래에 그곳에 거주할 사람이 없게 될 경우엔 도리어 상황이 거꾸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 전체 규모는 조절해서 줄이되 그 재식(材植)은 장엄하게 하고, 더욱이 약간의 토지를 구입하여 [서당을] 지키는 자들을 위한 비용에 충당함으로서 그것[서당]이 더욱 장구히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수안명(壽安銘)」은 대단히 훌륭하여, 이 글을 너무 늦게 얻게 된 것이 한스러울 정도입니다. 이제 마땅히 판각해서 널리 배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기수(趙蘄水)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듣자 하니 [그대가] 일찍이 [조기수(趙蘄水)에게서, 제가 효경의] ‘서인(庶人)’장을 풀이한 것을 가지고 가셨다지요. [제가 그 글을 쓸] 당시는 너무나 마음이 급하여 말이 두루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회계(會稽)에 있으면서 우혈(禹穴)을 파내던 중 벽 사이에 「고령권유문(古靈勸喩文)」이 있는 것을 보고 그 말이 간절(簡切)하면서도 조리가 있음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를 판각 인쇄하여 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투첩(投牒)도 또한 사람들이 한 통을 보내주어 아울러 돌에 새겨 대문(臺門) 밖에 두었습니다. 이제 [그대에게「서인(庶人)」장 및 「고령권유문(古靈勸喩文)」을] 각각 한 통씩 보내니, 또한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유포할 수 있다면 혹 도움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공도(公度)는 듣자하니 근자에 건창(建昌)에 와서 장가들었다고 하더군요. 한 번 보았으면 하고 애타게 생각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편지를 통해서나마 다시금 그가 더욱 내면을 향해 공부해 나감으로써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권해야겠습니다. 지사와 통판이 호송(互送)[피차에 서로 보냄]을 받아들이지 많고 있으니, 그 죄가 결코 담뢰(譚賴)를 전살(專殺)한 죄보다 적지 않습니다. 그저 한 통의 탄핵문을 써서 공론(公論)이 어떠한지를 조금이나마 알리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입니다. 그저 웃어넘겨야겠지요.
그러나 노형(老兄)께서는 이미 묵은 빚을 다 갚으셨고 먹을 만한 나물과 밥도 있으시고 나아가 사후 계획까지 이미 다 세워두셨으니) 할일을 다하여 행복한 사람이라 할만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아직 [세상을 향한 온갖] 부채를 다 갚지도 못하고 있고, 먹을 것도 부족하여 [그동안] 오래 계속해온 사록관 벼슬을 그만두는 것도 힘든 형편입니다. [왜냐하면, 사록관 직을 계속해서 그나마 적은 봉급이라도 받아야] 비로소 도랑이나 골짜기에서 죽는 신세를 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즈음같이 정세가 비색할 때는 세상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덕을 거두어들이는 것에 바야흐로 힘쓸 때인 듯합니다만 다만 너무 늦어버린 것이 애석할 따름입니다. [제가 사는] 민(閩)으로 들어와 서로 만나볼 생각을 두었다 하니 매우 좋습니다. 저는 참으로 쇠약하고 고달픈 처지에 있는데 노형(老兄)께서는 [저와 같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편지에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니, 또한 두려워할 만합니다. 참으로 한두 번 정도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회합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공의(公議)를 너무나 급박하게 몰고 감으로 인해, 부득이하여 서로 만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이로 인해] 혹시라도 [민에 가서 한] 이 약속을 무효로 만들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제공(諸公)의 만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드디어 지언(至言)을 토로하여 힘써 공의(公議)를 부지해 나가실 수만 있다면, 그 공이 작은 것이 아닙니다. 또 [일이 이렇게만 된다면, 이러한 공적인 일을 하느라] 개인적인 계획을 성사시키지 못한다해도 감히 원망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양자직(楊子直)이 무슨 일로 그곳에 가셨는지요? 며칠이나 함께 계셨습니까? 일찍이 [양자직이] 맹자를 문묘에 배향하여 올려야 하는지 내쳐야 하는지에 관한 의론을 제기한 사실이 있었는지요? [그가] 마땅히 조(晁)씨 집 사람들과는 서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그가 조이도(晁以道)를 만난 후] 드디어 한결같이 맹자(孟子)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니 또한 괴상한 일이라 할만합니다. 삼산(三山)에서 조자직(趙子直)을 만났는데 갈수록 그에게 정이 갑니다. 보중(莆中)에서 공실지(龔實之)의 묘소 아래를 지나가다가 그분의 자제들을 만나보니 너무나 감탄스럽습니다. 승사론회복(陛辭論恢復)은 가볍게 거론[문제삼지]하지 말아야 함을 권면하려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추악한 무리들의 비방을 듣게 되었으니, 매우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答劉子澄
熹一出三月, 歸已迫歲. 病軀幸無他, 臂痛竟不脫然去體, 但不甚妨事, 可置不問. 却是精神困憊, 目力昏暗, 全看文字不得, 甚覺害事耳. 舊書且得直卿在此商量, 逐日改得些少, 比舊儘覺精密. 且令寫出凈本, 未知向後看得又如何也.
到泉南, 宗司敎官有陳葵者, 處州人, 頗佳. 其學似陸子靜, 而溫厚簡直過之. 但亦傷不讀書, 講學不免有杜撰處. 又自信甚篤, 不可回耳. 後生中亦有一二可敎, 其一已人陳君保社, 其一度今歲當來此. 然亦恐只堪自守, 未必可大望. 自(3-1548)餘則更是難指望, 此甚可慮. 蓋世俗啾暄, 自其常態, 正使能致焚坑之禍, 亦何足道? 却是自家這裏無人接續, 極爲可憂耳.
讀所寄文字, 切切然有與世俗爭較曲直之意, 竊謂不必如此. 若講學功夫實有所到, 自然見得聖人所謂‘不知不慍’不是虛語. 今却爲只學人弄故紙, 要得似他不俗, 過了光陰, 所以於此都無實得力處. 又且心知其爲玩物喪志而不能決然舍棄, 此爲深可惜者. 且旣謂之玩物喪志, 便與河南數珠不同, 彼其爲此, 正是恐喪志耳. 班范外事不知編得於己分有何所益? 於世敎有何所補? 而埋沒身心於此, 不得超脫, 亦無惑乎子靜之徒高視大言而竊笑吾徒之枉用心也且羅守之賢如此, 與之同官相好, 乃不能補其所不足, 而反益其所有餘, 又從而自陷焉, 亦獨何哉? 數年來, 此道不幸, 朋舊凋喪, 區區所望以共扶此道者, 尙賴吾子澄耳. 今乃如此, 令人悼心失圖, 悵然累日, 不知所以爲懷. 不審子澄能俯聽愚言而改之乎? 不然則已矣, 無復有望於此世矣. 奈何奈何
小學書却非此比, 幸早成之. 精舍詩拈筆可就, 亦不妨早見寄也. 羅守之文, 可謂有意於古矣. 社壇記已寫送似矣, 此是狀體文章, 不古不今, 不知是何亂道. 而人來求不已, 殊不可曉, 但可笑耳. 于尉策題亦不易, 此等人且收拾敎減得分(3-1549)數, 亦是一事. 桃原詩卷甚佳, 但李習之復性書已有禪了, 石林考其年是未見藥山時作. 必是有此根苗, 韓公不曾斬截得斷, 後來遂張主耳. 詩中所辯, 却恐未必然也. 向丈詩初亦未解, 承喩乃荷其見愛之深, 當因書謝之也. 拙詩幷序錄呈. 韓丈爲作記來, 意態閑暇, 甚可愛. 渠更欲改一二處, 未及寫去也. 祁居之論兵處, 何爲不取? 願聞其說. 說易詩誠可疑也.
濂溪書堂聞規摹甚廣, 鄙意恐不必如此. 將來無人住得, 亦只是倒了. 不若裁損制度而壯其材植, 更爲買少田以贍守者, 使其可以長久, 乃爲佳耳. 壽安銘乃大佳, 恨得之晩. 今亦當刻版散施也. 趙蘄水書來, 聞嘗就取‘庶人’章解. 當時草草, 說得不周徧. 後在會稽, 因採禹穴, 見壁間有古靈勸喩文, 愛其言簡切有理, 因刻印散之. 凡投牒者, 亦人與一本, 幷刻石置臺門外. 今各往一通, 恐亦可散施, 或有益也. 公度聞近到建昌娶婦, 甚念一見之而不可得, 奈何奈何因書更勸其向裏做工夫, 莫又錯了路頭也. 知通不受互送罪不在專殺譚賴之下, 可惜不作一章劾了, 少快公論耳. 一笑一笑.
然老兄宿逋已盡償, 又有菜飯可喫, 又已穿壙買棺, 可謂了事快活人. 如僕則債未盡償, 食米不足, 將來不免永作祠官, 方免溝壑. 儉德亦方用力, 但惜乎其已(3-1550)晩耳. 有意入閩相見, 甚善. 熹固衰憊, 意老兄未至此. 然觀來書, 說得亦可畏, 誠不可不謀一再會合. 但恐諸公迫於公議, 有不得已而相挽者, 或能敗此約耳. 然若能遂吐至言, 力扶公議, 則其功不細, 又不敢以私計不遂爲恨也.
楊子直何爲到彼? 相聚幾日? 曾說廟學配祀升黜之議杏? 不合與晁家人相聚來, 遂一向與孟子不足, 亦可怪也. 三山見趙子直, 稍款. 莆中過龔實之下, 幷見其子弟, 令人感歎. 陛辭論恢復, 乃是勸勿輕擧之意, 反遭醜詆, 甚可傷耳.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답유자징35-10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6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갑진년(甲辰, 1184년, 주자 55세) 봄에 씌어진 앞의 편지[답유자징35-9서]에 이어 이 편지 역시 갑진년에 씨여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오생(吳生)이라는 사람과 연루된 유자징의 관사(官事) 및 유자징의 양양(襄陽)의 벼슬살이에 관해 걱정을 함께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곧이어 이어 같은 현실 문제에 대해 ‘우리들 정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로서는] 그저 강학하면서 몸을 닦고, 큰 가르침을 왜곡 없이 잘 전하여, 후배들로 하여금 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는 유자징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치가로써 보다는 교육자 내지 학자로써의 주자학단의 시대적 사명감을 확인하고 있는 대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앞 편지에 이어 유자징의 박학지향적 공부 스타일에 대한 잔소리가 이어지고, 『소학』책은 [박잡함을 추구하는] 이런 것과는 종류 자체가 다르니, 이 책을 빨리 완성시켜서 보내라 촉구한다. 이를 통해 주자학단에서의 ‘저술’작업은 그 자체가 공부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업적주의에 침몰해 있는 우리네 사정과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오생(吳生)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으니 너무나 놀랍습니다. 화근(禍根)이 곧 여기에 있음을 예상치 못했습니다. 요즈음 이런 무리들이 비일비재하여 관사(官事)를 제대로 처리할 수도 없고, 부질없이 평인(平人)들과 연루(連累)되기만 합니다. 그 형세가 빨리 진행되어 금방 그치게 될 것 같지가 않아 걱정이 됩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양(襄陽)의 관직생활은 [민생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되지는 않겠지만 그대의 편지와 시를 자세히 읽어보니 그저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조정에서] 이 일을 장차 어떤 사람에게 분부(分付)할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황제의 뜻은 반드시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정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로서는] 그저 강학하면서 몸을 닦고, 큰 가르침을 왜곡 없이 잘 전하여, 후배들로 하여금 이러한 도리(道理)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일에] 크게 힘쓴다면, 얼마 되지 않아 인재(人材)와 풍속(風俗)이 [순화되어] 후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희학(戱謔)한 것은 본래 말을 교묘하게 만들려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설사 그대의 말씀 그대로일지라도] 이 또한 [그대] 자신이 이와 같은 장난삼아 모멸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마음이 화근이 되어 그와 같은 희학에 가까운 말투가 나오게 된 것이겠지요. 또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뜻을 발휘하여 기계적으로 익숙하게 [그런 뜻과 그런 투의 말을] 활용해 왔기 때문에, 일에 마주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투가] 튀어나온 것일 테지요. 또 [그대] 스스로 “실정(實情)에 관해서는 미덥게 그리고 말은 교묘하게 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주안점을 두지만 의리(義理)에 해가 되는 일을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그와 같은 잘못된 습관과 마음가짐이 발출되지 않도록] 더욱 단속을 하지 않아 이러한 지경에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처럼 희학이나 하는 잘못된 언어습관은] 일을 해칠 뿐만 아니라 심술(心術)을 해치게 되는 심각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날 횡거선생(橫渠先生)께서 일찍이 [이 점에 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근사록(近思錄)』4권에 보인다. 이런 잘못된 언어습관은 마땅히 통렬하게 고쳐야 하며 조금이라도 [고치는 것을] 늦추어서는 아니 됩니다. [저는 요] 근자에 와서 ‘들은 것과 아는 것을 진실되게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만 사람들을 대단히 기쁘게 할 수 있으며, 이는 그저 알고서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므로 이를 몰라서도 안 되거니와 이를 힘써 실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박잡(博雜)함을 추구하는 데서 생길 수 있는 병통에 대해, [그대는] 또한 [이런 정도의 병통을] 작은 일로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어, [박잡함을 추구하는 공부를 한다 해서 공부하는] 사람의 의지를 손상시키지는 않을 것이라 여기십니다. [그대는] 또 [박잡함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병통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계시는데 [이는 박잡함을 추구하는 공부가] 인정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고 이것으로 변명을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잡함을 추구하는] 이 병통은 참으로 큰 병통으로서 [그대의 생각처럼] 작은 병통이 아닙니다. 그러니 반드시 통렬하게 이러한 병통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아직 늙기도 전에 먼저 쇠약해지고 있으니 남아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됩니까? 그런대로 헛되이 박잡함을 추구하는 데만 날로 힘쓰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어찌 전도(顚倒)되고 미혹(迷惑)됨이 심각한 것이라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소학(小學)』책은 [박잡함을 추구하는] 이런 것과는 종류 자체가 다릅니다. 그저 며칠만 공부해보아도 곧 제대로 판별해 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빨리 완성시켜서 인편을 통해 저에게 한 부 부쳐 보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공도(公度)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글에는]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픔이 배여 있더군요. 또 생활도 매우 궁색하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이 쓰입니다. 서로 사는 곳은 멀고, [나로서는] 그가 사는 그 곳까지 갈 힘도 없어 조그마한 도움조차 드릴 수 없는 것이 한이 됩니다. 계장(季章) 역시 쉽지 않은 듯합니다. 요즈음 와서는 어떤 공부를 하시는지요? 모름지기 더욱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를 쫓아 힘을 써야만 하니, 그래야만 비로소 참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고, 아울러 지향해 나아갈 목표도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곳에서 배우는 자들 중에는 크게 [우리 도를] 나누어 줄만한 자가 아직은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 둘은 있으니 장래에 [부족하나마 이들] 남은 자들을 모은다면 혹시라도 크게 [우리 도를] 부지(扶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與劉子澄
吳生之傳, 甚駭人聽, 不謂禍根乃爾. 近日此類非一, 不了官事, 連累平人, 其勢駸駸, 恐未遽已, 使人憂懼. 奈何奈何襄陽之役不爲無補, 細讀來書及詩, 令人慨歎. 此事未知將來分付甚人, 天意必有在矣. 吾徒之力, 無如之何, 只有講學修身, 傳扶大敎, 使後生輩知有此道理, 大家用力, 庶幾人材風俗他日有以(3-1551)爲濟世安民之助而已.
所喩戱謔本欲詞之巧而然, 此固有之. 然亦是自家有此玩侮之意以爲之根, 而日用之間流轉運用, 機械活熟, 致得臨事不覺出來. 又自以爲情信詞巧主於愛人, 可以無害於義理, 故不復更加防遏, 以至於此. 蓋不惟害事, 而所以害於心術者尤深. 昔橫渠先生嘗言之矣. [주] 見近思之四. 此當痛改, 不可緩也. 近覺所聞所知眞實行得, 令人大段歡喜, 與尋常曾得說得不同. 此不可不知, 不可不勉也. 博雜之病, 亦是把做小事怱略了, 以爲不足以喪人之志, 又不自知是自家病痛, 却以應副人情爲解. 此亦是大病, 非小病, 須痛斬截也. 吾人未老先衰, 餘日幾何? 而費日力於此, 却於自家身心上都不著力, 豈不是顚倒迷惑之甚耶?
小學書却與此殊科, 只用數日功夫便可辦, 幸早成之, 便中遣寄也. 得公度書, 有哭弟之悲, 又云甚窘, 深以爲念. 地遠無力, 不能少助之爲恨. 季章甚不易, 比來作何功夫? 須更切己用力, 乃有實頭進步處耳. 此間學者未有大段可分付者, 然亦有一二, 將來零星揍合, 或可大家扶持也.
유자징에게 답함 答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열한 번째 편지[답유자징35-11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7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을사년(乙巳, 1185년, 주자 56세) 봄 2월 주자의 사록관 임기가 만료된 시점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소학』에 대해 윤색 및 수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도학이 밖으로는 속인들의 공격을 받아왔으며, 안으로는 [도학을 추구하는] 우리 무리들이 거의 무너지게 되’어가고 있는 사정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주(婺州)의 경우, 백공(伯恭)이 죽은 후에...공맹의 규모가 아닌 관중(管仲)이나 상앙(商鞅)의 견식(見識)에 따르고 있”으며 “육자정은 선(禪) 일색”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주자는 “지난해에 사람들의 강요에 못 이겨 장남헌과 여백공의 화찬(畫贊)을... 지었는데... 무주(婺州)의 여백공 학파 사람들이 주자의 글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 거론되고 있다. 그 간에 공동전선을 형성해온 정주학, 상산학 및 동래학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며, 이에 이 편지는 유교적 진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주자의 위기의식이 점차 강해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편지다.
치재(治財), 청송(聽訟), 망사(望祀)의 의미에 관해 그대가 깨우쳐 설명해 주신 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리고] 판각하신 서적은 모두 유익한 것이더군요. 다만 『소학(小學)』만은 너무 서두르다보니 아직 윤색(潤色)도 하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근자에 [저는] 대략이나마 [소학을] 수정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각 장의 첫머리에 인용된 원전이나 인용된 작자의 이름(名)이나 자(字)를 추가했습니다. 또 별도로 제사(題詞)를 넉 자씩 시어(詩語)로 만들어 붙여 아동들이 학습하기에 편하게 했습니다. 이제 제멋대로 한 부를 적어 보내니 다른 때 혹 여가가 생기면 [현재] 빠져 있는 고사(故事)를 보충했으면 합니다. 나원(羅愿)의 문집(文集) 등은 홋날 판각하게 되면 한 두 부 정도 구했으면 합니다. [자질있는] 단량(端良)[즉 나원(羅愿)을 말함]이 이 정도에 그치다니 너무나 아쉽고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는] 도를 절실히 신뢰하지 못했으며 아울러 처음부터 시종 ‘시문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데 너무 치중했습니다. 뒤에 와서 [자연히] 이 공부에 맛을 느끼게 되자 한결같이 이를 버리는 것을 기꺼워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경우] 아직까지는 타인이 [그 자신더러] 도학(道學)이라 지목하는 것을 전적으로 금기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노력하여] 만약 그로 하여금 [우리가 추구하는] 이 도리가 실로 막중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여, [그로 하여금] 온갖 잡다한 관심을 끊어버리고, 반드시 [도학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로서는 그에 관한 걱정을 접어 두어도 되니] 이 어찌 뒤돌아보며 깊이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근래에 도학(道學)이 밖으로는 속인들의 공격을 받아왔으며, 안으로는 [도학을 추구하는] 우리 무리들이 거의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무주(婺州)의 경우 백공(伯恭)이 죽은 이후에 온갖 해괴한 일들이 다 일어났었지요. 심지어 자약(子約)과 같은 경우는 독자적으로 온통 [진리와] 어그러지고 달라진 학설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공맹(孔孟)의 규모(規模)는 전혀 아니고 도리어 관중(管仲)이나 상앙(商鞅)의 견식(見識)에 따르고 있으니 놀라 자빠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또한 백공(伯恭) 자신에게 [이미]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진흙을 가져다 물에 섞은’ 적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결국 이런 일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니 백공이 살아계실 때 좀 더 책선(責善)을 하지 못한 것이] 상각할수록 한이 됩니다. 자정(子靜)은 선(禪) 일색이지만 도리어 공리(功利)나 술수(術數)를 추구하는 측면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에 배우는 자의 신심을 수렴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나름대로 힘이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의거할 바 없게 되니 일을 해치게 될 것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지난해에 사람들의 강요에 못이겨 장경부와 여동래의 화상(畵像)에 대한 찬(贊)과 장경부 문집의 서문를 지었는데, 이제 [이 글들을 이 편지와] 함께 기록해 보내드립니다. 무주(婺州)의 배우는 자들이 [제가 쓴 동래의 찬(贊)에 불만이어서] 매우 즐겁질 못합니다. 이장(李丈)의 주의(奏議)와 행장(行狀)을 한 번 열람해 볼 수 있어 매우 다행입니다. 이 어르신을 한 차례 뵈올 수 없게 되어 몹시 한이 됩니다. 그러나 이 분의 글을 읽어보면 그 규모와 수단이 웅대하여 [보통 사람들이] 그저 좌우에서 이리 저리 주워다가 자세히 밝히거나 이리 저리 비교하는 일을 자질구레하게 행하여 결국 쓸 데 없는 배움이 되고 마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분은 한 때『나악주소집(羅鄂州小集)』을 제게 보내주시면서 그 책 뒤에다 [내 이름을] 부기해줄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제발(題跋) 정도 쓸 수 있었을 뿐 웅대한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향림(薌林)의 상장(向丈)께서 오셔서 후서(後序)를 재촉하였습니다. 마침 바쁜 일이 생겨 미처 글을 쓸 수가 없었는데 근자에 그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보았더니 죽기로 요구를 해대니 그저 두렵기만 합니다. 사기(社記)는 졸렬하고 거칠어 제대로 된 글이 아닙니다. 단량(端良)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문자는 세밀하며 경위(經緯)가 있어 아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대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여소(汝昭)가 한 해 전에 산중(山中)에 이르러 그저 하루 밤을 묵었는데 그만 병이 나서 곧바로 귀가한 적이 있습니다. 근자에 듣자하니 [그가] 아직도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하니, [아마도] 그는 자신의 몸을 너무 지나치게 보호했기 때문에 도리어 쉽사리 병이 생긴 듯합니다. 듣자하니 백기(伯起)가 벌써 관청에 도착했다 하더군요. 생각건대 [그가 그대가 계신 그곳을] 들렀을 터인즉 필시 다정하고 성의 있는 만남이 되었겠지요. 근자에 한두 번 거회(居晦)와 서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만 만날 적마다 사람들이 많아 [거회(居晦)와는]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가 혹] 아침저녁으로 일이 없으시면, 마땅히 그 분을 초대하여 [그대 계신 그곳으로] 입산(入山)하라 하시지요. 그리하여 그분이 혹시 무이(武夷)를 지나게 되면 [나와] 수일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채계통(蔡季通)과 유도중(劉韜仲) 등은 모두들 요즈음 와서 장족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반덕부(播德夫)의 아들인 우단(友端)이 조정에서 제시한 대책은 매우 절실하면서도 정직합니다. [이 때문에] 우연지(尢延之)가 그를 매우 아낍니다. [그러나] 동료들의 견제를 받아 [그의 지위가] 자못 강등되었습니다만, 이런 정도의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아무튼] 그 두 형제는 모두 자질이 훌륭합니다. 이들 후배들 모두가 장래를 기대할만합니다.
저는 또 [앞으로] 3-4일이 지나면 사록관 임기가 만료됩니다. 이 전날 이미 우연지(尢延之)에게 [나의 사록관직을] 재청(再請)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돌아가는 형세로 보아 [저의 요청은] 필시 성사될 듯하긴 합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빈궁하여 부득이 이 관직에 몸을 담지 않을 수 없는 저의 처지가 저로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울 따름입니다. 이전에 들으니, 사람들 사이에 자못 [나를] 비호하여 잘못을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듯한데 저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는 부질없이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핑계거리를 줄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소(汝昭)의 고사(故事)를 이용할 수만 있다면 또한 여유 있게 한 해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건양(建陽)에 구백흥(丘伯興)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字)를 돈시(敦詩)하고 합니다. 청렴근후하며 질박하면서도 실질적인 성품의 소유자인데 지금은 무안절도추관(武安節度推官)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보니 “조청헌(趙淸獻)이 일찍이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이 관직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백흥(丘伯興) 자신이] 일찍이 관청건물에다 당(堂) 하나를 짓고 [이를 계기로 그는] 조공(趙公)을 스승으로 사모하는 뜻을 담은 당명(堂名)을 하나 [저에게] 지어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그를 위해 ‘애직(愛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대개 [조공(趙公)의] 비액(碑額)에서 취하여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일 뿐입니다. [그랬더니] 그는 다시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기문(記文)을 지을 여가가 나지 않는다고 사양했습니다. [아울러] 미리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해버렸습니다. 장차 이 일을 내가 아닌 유자징(劉子澄)이게 부탁해 보라고 말입니다. 모르긴 합니다만 [그대는 이 부탁을 받아들여 그가 요구하는 기문(記文)을] 지으실 수 있겠는지요? 이 또한 좋은 글제(題目)이니 [그대가] 힘써 몇 마디의 글을 지어내실 수만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공도(公度)로부터 별다른 편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유생들이 다시 와서 모인 적이 있습니까? 다들 흩어진 후에 누가 더 진보했습니까? 서산시(西山詩)와 소동파, 황산곡 외에도 도리어 삼공(三孔)이란 분들이 있는데 이분들의 시에 필력(筆力)이 있습니다. 다만 이른바 참창왕시(攙搶枉矢)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이도(晁以道)와 장뢰조(張耒晁)는 한 때 그들의 성가(聲價)가 다들 아시는 바와 같았는데, 그들의 시가 아직까지는 대중들 속에서 특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와 같은] 이런 등속의 작은 재주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곧 정분(定分)이 있는 법이거늘 하물며 [학문과 같은] 그 큰 것에 있어서 공력(功力)이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이를] 억지로 강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광릉(廣陵)에서 돌아오시는 길이시니 반드시 절중(浙中)으로 길을 잡으시겠군요. 구주(衢州)와 신주(信州) 사이에 이르러 잠시 나를 찾아와 붕우들을 불러 모아서 며칠간 이런 저런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까요? [저는 이제] 늙어 이런 저런 병이 많아 이후의 만남을 기약할 수 없으니 [그대와 마주할 수 있는] 이 날을 하염없이 아낄 뿐입니다.
與劉子澄
喩及治財聽訟望祀之意, 甚善. 所刻之書皆有益, 但小學惜乎太遽, 又不蒙潤色耳. 近略修改, 每章之首加以本書或本人名字, 又別爲題詞韻語, 庶便童習. 今謾錄去一觀, 他時有暇, 終望爲補故事之缺也. 羅集等異時刻就, 各求一二本. 端良止此, 極可傷惜. 信道不及, 亦是合下看得記誦詞章太重了, 後來又於此得味, 所以一向不肯放下, 未必專爲禁忌指目也. 若使見得此道理重, 便斬作萬段, 亦須向前, 豈容復有顧慮耶?
近年道學外面被俗人攻擊, 裏面被吾黨作壞, 婺州自伯恭死後, 百怪都出. 至如子約, 別說一般差異底話, 全然不是孔孟規模, 却做管商見識, 令人駭歎. 然亦是伯恭自有些拖泥帶水, 致得如此, 又令人追恨也. 子靜一味是禪, 却無許多功利術數. 目下收斂得學者身心, 不爲無力. 然其下稍無所據依, 恐亦未■害事也.
去年被人强作張呂畫贊及敬夫集序, 今幷錄呈. 婺州學者甚不樂也. 李丈奏議(3-1553)行狀可得一觀, 幸甚. 甚恨不得一見此老, 然讀其書, 却是大模樣, 大手段, 非如一種左右綴拾, 委曲計校小小家計, 爲無用之學也. 他時與羅鄂州小集皆願附名於其後, 然亦只能作題跋, 無力做得大文字也. 被薌林向丈來催後序, 正冗, 未能下筆. 近得書, 乃以死見要, 甚令人皇恐也. 社記樸拙粗疎, 不成文字, 不知端良以爲如何. 渠文字細密, 有經緯可愛, 眞如來喩之云也.
汝昭歲前到山間, 只得一宿, 便發病遽歸. 近聞尙未全安. 渠却是將護太過, 易得生疾耳. 伯起聞已到官, 想經由必款曲. 居晦近一再相會, 皆爲人多, 說話不得. 旦夕無事, 當招其入山, 或過武夷相聚數日也. 蔡季通․劉韜仲諸人近日皆長進, 播德夫之子友端廷對甚切直, 尢延之甚愛之. 爲同寮所抑, 頗降其等. 此不足計, 渠兄弟皆好, 此輩後生將來皆可望也.
熹又三四日, 柄祿便滿. 前日因便已託尢延之爲再請, 勢必得之. 食貧, 不得已復爲此擧, 甚不滿人意. 前此聞諸人頗有蓋抹之意, 決難承當, 此不過徒與談者藉口耳. 然若得其用汝昭故事, 亦可優游卒歲也. 不審明者以爲如何?
建陽有丘伯興者, 字敦詩, 廉謹質實, 今爲武安節度推官. 得書云趙淸獻嘗爲此官, 嘗卽廨舍營一堂, 求名以見師慕趙公之意. 熹爲名曰‘愛直’, 蓋取碑額云(3-1554)爾. 渠復求記, 以不暇作辭之. 已語之, 將爲轉求於子澄矣, 不識能爲作否? 此亦好題目, 得勉爲出數語爲幸.
公度不及別書, 向來諸生頗復來集否? 離群之後, 誰更進益耶? 西山詩蘇․黃之外, 却是三孔有筆力, 但不知所謂 ‘攙搶枉矢’ 指何人耳. 晁․張一時聲價如此, 詩在衆人中未覺穎出也. 此等小技, 直是有定分, 况其大者, 功力不到處, 可强耶? 廣陵歸塗必取道浙中, 到衢․信間, 能略見過, 喚集朋友說話數日否? 老矣多病, 後會不可知, 此日足可惜也.
유자징에게 보냄(7월 9일) 與劉子澄(七月九日)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열두 번째 편지[답유자징35-12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8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을사년(乙巳, 1185년, 주자 56세) 7월에 씌어진 것이다. 편지 서두에서 주자는 자징과 직접 만나 자신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전하고 있다. 앞의 글에 이에 이 글에서는 특히 당시의 학풍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배우는 자들의 병폐를 지적하였다. 하나는 여조겸의 사학적 관점에 영향을 받은 후배들의 경향이다. 그들은 여조겸에 근거한다는 미명 아래 공리적 학풍을 내놓았는데, 특히 여조겸의 동생 여자약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분명한 입장도 갖추지 못한 채, 자기 형이 말한 내용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다른 하나는 육구연의 영향 아래에 있는 선학(禪學)적 학풍이다. 육구연의 학문이 총령을 건너온 듯하다는 비유를 통해 그 불교적 색채를 비판하였다. 주희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육구연의 영향 아래 있는 현실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이 글에는 주희가 평생동안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삼았던 학풍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이 들어있다.
올해 들어 [그 동안 써 놓았던] 여러 글들을 모두 한 차례 수정하고 보니 옛날에 비해 참으로 간이(簡易)하고 활달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수정된 글을 그대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실 수 있게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됩니다. 『소학(小學)』은 현재 수정과 개고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즉 이전의 원고에다] 고금의 고사(故事)를 더 보태고 있으며, [초고의] 수편(首篇)을 책의 말미로 옮겨 초학자들이 책을 열자마자 곧 받아들여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 마지막 권에다가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가 학생을 지도한 대략의 내용을 담은 글과 「향약(鄕約)」, 「잡의(雜儀)」와 같은 부류의 글들을 더 보태면서 구별하여 하편(下篇)으로 삼아 모두 여섯 편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시 며칠이 지나면 바야흐로 사본 한 부를 베껴 [그대에게 보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다 베껴낼 때까지] 중숙(仲叔)이 기다려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지만 나중에 인편을 통해 보낼 것입니다.
한 번 건안(建安)에 오고자 하신다니 매우 좋은 일입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도 그대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만 여행길 중간쯤 어디 깊숙하고 궁벽한 곳에서 여러 날 서로 만나보고 싶다고 했는데 벌써 이런 곳을 답사해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고산(麻姑山)은 분명 아름다운 곳이지만 성(城)에서 그리 멀지 않아 세상 인간사의 소란스러움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리어 뜻한 바의 일을 이룰 수 없을 듯 합니다. 무이(武夷)에 집을 짓는 일은 거의 완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 역시 인간사의 소란스러움으로 인해 고달픕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즉 내가 그리로 갈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벗께서 곧바로 이리로 오시어 이곳에서 나와 서로 만납시다. 침식은 곧 저의 서실(書院)에서 해결하시고요. 이렇게 함으로써 밖에서 일 없는 사람들이 소란피우는 일을 아예 없도록 하면 어떨까요. 진릉(晉陵)의 일을 장차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우연지(尤延之)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또한 “현명한 수령이신 그대가 이 곳에 오실 수 있기를 매우 소원한다”고 하더군요. 다만 합치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이제 豐守는 점점 일을 올바르게 처리해 나가고 있습니다만 여러 유사(有司)들이 이미 [그를] 기꺼워하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찌 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전에 서로 물색하여 사관(史官)으로 삼으려 하는 듯하였습니다만 이제 또 다시 조용한 것을 보니 아마도 [사관을 삼으려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일에는 저절로 때가 있는 법입니다. 다만 [조정의] 상황이 날로 좋지 않게 변해가는 듯하니 만일 [사관에 임명되는 것을] 면할 수 없다면 곧 지금 다듬고 있는 문장을 탈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상장(向丈)께서 하신 말씀 중에 “무슨 까닭인가(著甚來由)”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노자(老子)가 수용(受用)하여 힘을 얻은 곳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향림(薌林)의 구법(句法)이 아닙니다. [저는] 향림문집서문(向薌林文集序文)에서 힘을 다해 이러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매우 좋은 제목(題目)이긴 합니다만 [좋은 제목에 걸맞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저의] 필력이 약한 것이 한이 될 뿐입니다. 중숙(仲叔)이 여기에 왔습니다. 이전에는 사창(社倉)에서 숙식(宿食)을 하여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근자에 비로소 누각 아래로 옮겨왔는데 그가 또 돌아가겠다고 하는군요. 그 사람의 타고난 성품은 고르고도 온화합니다. 글을 보면 또한 쉽게 깨닫습니다. 그러나 한가하고 게으른 데 습성이 되어 무리를 떠난 뒤에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다] 이 곳에 이르러 바야흐로 책자(冊子)를 찾아 연구하지만 아직까지는 상량(商量)할만한 곳이 없습니다. [이는] 흡사 창고(倉庫)에는 곡식이 붉게 변하고 돈궤미가 썩는 자취가 없으며, 군사에게는 대항하여 돌을 던지는 용기가 없고, 단지 거두어들이다가 바로 지출하고, 진격하다 도중에 그만두는 것과 같아서 끝내 일의 두서가 서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미 [다음과 같은 말을] 그에게 해 주었습니다. [즉] ‘이제 헤어진 뒤에는 세월을 아껴서 반드시 의심과 난문들로 가슴 속을 가득 채우도록 해야 한다. [이제] 서로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 서로 만난 뒤에는 여러 날 말을 계속해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되어야만 비로소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희중(希仲)과 서로 만났습니다만, 그는 매양 [그대의] 동정에 관해 묻더군요. 아울러 그는 진릉(晉陵)의 행차 문제를 깊이 염려하더군요. 거회(居晦)는 재주와 힘이 넉넉하지만 회백(晦伯)과 도중(韜仲)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하여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의취(意趣)는 모두 기뻐할만합니다. 성지(誠之)를 오래 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모르긴 합니다만 [그가] 후에 여러 훌륭한 분들 사이를 노닌 듯한데 얼마나 진보했는지요. 그러나 접 때 깨달은 바에 의하면, 그는 물아(物我)의 구분이 너무 심하여 가슴 속이 매우 평탄하지 않으니 이 점은 일에 매우 방해가 될 뿐입니다.
백공(伯恭)께서는 무병 시에 사학(史學)을 즐겨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에는 그의 후생들이 [백공의 학설을] 불분명하게 만들어 악(惡)한 말을 하는 작은 선비들의 의론(議論)을 만들어 내었으니 “왕도를 천시하고 패도를 존중한다”든지 “이익을 도모하고 결과를 계산한다”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더 이상 들을 수조차 없습니다. 자약(子約)은 뚜렷한 자신의 입장도 없이 그저 “나의 형께서 일찍이 이처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라고만 말할 뿐입니다. 중간에 [제가] 힘을 다해 [그점을] 배척했는데 이제 다행히 조금은 안정이 된 듯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에 대하여 억지로 명령할 수는 없는 처지이고, [그래서 그런지 그는] 아직도 기꺼이 항복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에 무인(婺人)으로부터 받은 서신에 따르면 “자약(子約)이 5월 사이에 어지름증을 얻었으며 곧 이어 오장육부도 편치 않아 발작했다가 다시 그치기를 반복한다”고 하는군요. 멀리 떨어져 살면서 평안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니 매우 염려가 됩니다. 자정(子靜)이 경연에서 진언한 것을 부쳐 보내 왔는데 그 말뜻이 모난 데가 없고 호방하여 막힌 구석이 없으니 이는 역시 그의 학문이 터득해낸 소득입니다. 그러나 약간의 선적(襌的)인 기미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육구연에게 보낸] 지난 번 답서에서는 이 점을 희롱하여 “아마도 이[육구연의 이론] 중 약간은 총령(葱嶺)에서 가져온 듯합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이 점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실상은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아서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건창(建昌)에서 하는 말들이 땅을 뒤흔들 정도여서,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면서 온갖 괴이한 짓들을 다 한다고 하니 매우 걱정이 됩니다. 그들 또한 본래는 좋은 뜻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한 일들 중에] 마땅치 않은 점은 [그들이] 사의(私意)를 위주로 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강학과 함양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곧바로 이와 같은 광망(狂妄)한 지경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세속이 도도히 [선풍(禪風)에] 휩싸이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만 배움에 뜻을 둔 사람까지 이러한 설에 이끌려 가다니 참으로 우리 도(道)의 불행입니다.
공도(公度)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는데, 아마도 [그에게도] 역시 이러한 병통이 있는 듯합니다. 계장(季章)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학문은 참으로 용맹스러워야 하는 법입니다만 이 용맹(勇猛)이란 것도 사용할만한 데다 써야 합니다. 그저 두 손 불끈 쥐고 애써 근골에 힘을 붙여 온갖 기력(氣力)을 헛되이 낭비한다면, 끝내 [소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는 없고 [그와는 반대로] 반드시 괴이하고 망령될 뿐인 것입니다. 오백기(吳伯起)의 자질은 본래 매우 흐릿하고 취약하기 때문에, [그로서는 선가에서 유행하는] 이러한 기력(氣力)을 얻어 곧 떨치고 일어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괴이한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한 쪽이 꽉 막혀있기 때문에 크게 무언가를 성취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만일 그의 타고난 성품 속에 약간이라도 [이러한 선학(禪學)적인] 정신이 있었다면 이 선학(禪學)으로 인해 발작(發作)했을 터이니 이는 흡사 오장육부에 양기운이 왕성한 사람이 복화단사(伏火丹砂)를 먹는다면 발광(發狂)하지 않을 자가 드문 것 같습니다. 근자에 『대학(大學)』을 읽으면서 이러한 뜻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현께서 이미 분명하게 제시해 놓으셨는데도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밖을 향해 미친 듯 내달리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보내오신 여러 책들의 판각은 모두 좋습니다. 단량(端良)이 죽다니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글 뜻은 또한 번잡함으로 인해 손상을 입어 그가 지닌 다른 장점을 곤란하게 만들 뿐입니다. 「군수제명기(郡守題名記)」는 본보기와 경계가 잘 완비되어 있습니다. 「석정사필(射亭詞筆)」도 모두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 글을 지은 두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군요.
유자징에게 보냄(7월 9일) 與劉子澄(七月九日)
諸書今歲都修得一過, 比舊儘覺簡易倏暢矣, 恨不得呈似商量也. 小學見此修改, 益以古今故事, 移首篇於書尾, 使初學開卷便有受用, 而末卷益以周․程․張子敎人大略及鄕約雜儀之類別爲下篇, 凡定著六篇. 更數日方寫得成, 恨仲叔不能等候, 得後便當附呈也.
知欲一來建安, 甚善甚善. 前書亦嘗奉問, 欲就中路深僻處相聚數時, 不知曾(3-1555)踏逐得此去處否? 麻姑當是佳處, 但聞去城差近, 不■人事之擾, 却不濟事耳. 武夷結茅雖就, 然亦苦此. 覺得却是朋友直來相訪, 只就書院中寢食, 則都無外面閑人相擾也. 晉陵將來如何? 尤丈得書, 亦云甚願得賢守臨之, 但恐難合耳. 今豐守稍正當, 諸司已不樂之, 不知將來竟如何. 前此似有相物色作史官者, 今又寂然, 想又有不主張者. 此等自有時節, 但景色日見不佳, 萬一不免, 卽難出手耳.
向丈‘著甚來由’之語, 是此老子受用得力處, 然却不是薌林句法也. 序文極力只做得如此, 却是好箇題目, 所限筆力弱耳. 仲叔來此, 前此在社倉宿食, 相去差遠, 近方移來閣下, 渠又告歸. 其人資性平和, 看文字亦易曉, 然似亦習成閑瀨, 離群之後全不曾做得功夫. 到此方討冊子看, 便未有可商量處. 如倉庫無紅腐貫朽之積, 軍士無超距投石之勇, 只是旋收旋支, 或鼓或罷, 終是不成頭緖. 已向渠說, 別後惜取光陰, 須看敎滿肚疑難, 不能得相見, 相見後三五日說不透, 方是長進也. 希仲相見, 每問動靜, 亦甚以晉陵之行爲慮也. 居晦才力有餘, 晦伯․韜仲恐不及. 然意趣則皆可喜. 誠之久不相見, 不知後來遊諸賢間所進如何. 但向覺其物我太深, 胸中不甚坦夷, 此甚礙著事耳.
伯恭無恙時愛說史學, 身後爲後生輩糊塗說出一般惡口小家議論, 賤王尊霸, (3-1556)謀利計功, 更不可聽. 子約立脚不住, 亦曰‘吾兄蓋嘗言之’云爾. 中間不免極力排之, 今幸少定. 然其彊不可令者, 猶未肯竪降幡也. 但昨日得婺人書云, 子約五月間得眩瞀之疾, 繼以臧府不安, 或作或止. 地遠, 未得安信, 甚令人念之也. 子靜寄得對語來, 語意圓轉渾浩, 無擬滯處, 亦是渠所得效驗. 但不■有些襌底意思. 昨答書戱之云:‘這些子恐是葱嶺帶來’, 渠定不伏. 然實是如此, 諱不得也. 近日建昌說得動地, 撑眉努眼, 百怪俱出, 甚可憂懼. 渠亦本是好意, 但不合只以私意爲主, 更不講學涵養, 頁做得如此狂妄. 世俗滔滔, 無話可說, 有志於學者又爲此說引去, 眞吾道之不幸也.
公度書來, 似有此病痛, 不知季章如何? 學問固是須著勇猛, 然此勇猛却要有箇用處. 若只兩手握拳, 努筋著力, 枉費十分氣力, 下稍無可成就, 便須只是怪妄而已. 吳伯起資質本是大段昏弱, 故得此氣力, 便能振厲而短長相補, 不至於怪. 然亦失之偏枯, 恐不能大有所就. 若資性中本有些子精神, 被此發作, 如陽藏人喫却伏火丹砂, 其不發狂者幾希矣. 近日因看大學, 見得此意甚分明. 聖賢已是八字打閑了, 但人自不領會, 却向外狂走耳.
所寄諸書刻皆佳. 端良之亡, 爲可惜也. 然其文意亦傷冗, 乃是困於所長耳. (3-1557)郡守題名記法戒甚備, 射亭詞筆皆佳, 不知兩君爲如何人也.
유자징에게 보냄與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열세 번째 편지[답유자징35-13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19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병오년(丙午, 1186년, 주자 57세)에 씌어진 것이다. 주자는 이 편지를 통해 유자직의 근무지 변동,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유자직이 ‘학관(學館)에의 문답과 교육’ ‘석채례(釋菜禮)’ ‘시령(時令)에 관한 유자징의 글’ 등에 대해 일일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어서 자로의 기질변화와 관련된 수양론 토론, 조자직(趙子直)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과 실망, 주자충, 황직경에 대한 언급 등이 이어진다. 인간에 대한 주자의 지속적이고도 정열적인 관심은 놀랄만하다. 인문학이 과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와 함께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그대의 근무지를] 형양(衡陽)으로 바꾼다는 조정의 명이 있었다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문득 소자직(蘇訓直)에게 또 특별히 가까운 순번을 부여한다는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는 조정에서 인재를 취하고 버릴 때에 의심스런 점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어떻게 대처하려 하시는지요? 반드시 정론(定論)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근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학관(學館)에서 하신 문답은 매우 좋습니다. 증군(曾君)도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인재가 아닙니다. 다만 [학교에서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먼저 ‘명확히 주안점을 두어야할 곳’을 지녀야 하며, [그런 연후에 배우는 자들의 질문에 대한 교사의 대답과 같은 등속의 일이] 비로소 도움이 되는 법입니다. 가숙(家塾)에서 부자(夫子)를 제사했다는 말을 옛적에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만약 의(義)에 따라 이러한 행사를 거행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석채례(釋菜禮)에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석채례(釋菜禮)에 관해서는] 개원(開元, 713-741, 唐 玄宗 때), 정화(政和, 1111-1117, 宋 徽宗 때) 년간의 두 가지 글에 틀림없이 실려 있으니 삼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령(時令)에 관한 그대의 글을 제가 볼 수 없는 것이 한이 됩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보시기에] 가(家)와 국(國)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 과연 어떤 일을 가장 시급한 일로 여겨야 할까요? 인편을 통해 [그대가 쓴 글을] 저에게 한 부 보내주식, 아울러 자세하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자로(子路)는 [그 자신의] 기질(氣質)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는 논의에 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시행하기 쉽지 않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가볍게 말하기가 어려울 따름입니다. 주자(周子)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악을 바꾸어 스스로 중도(中道)에 도달하도록 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로(子路)와 같은 분은 자신의 악을 [용감하게] 바꿀 수 있었던 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의 공부와 같은 경우, 비록 부자(夫子)께서 매번 인도해주셨지만 여전히 그가 [특히] 힘써야 할 곳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남이 백배의 노력을 하는데, 자기는 천배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끝내는 [원대한 목표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은 끝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제가 지금 예로 든] 두 가지 경우는 진정 저절로 같지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근자에 『대학(大學)』을 보아 나가다가 바야흐로 공부를 착수하여 힘써야 할 곳에 빠르고 곧은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제가] 일전(日前)에 본 것은 참으로 절실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그저] 도를 어지럽히고 사람을 오도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조자직(趙子直)이 촉(蜀)으로 들어갔다지요. [저는] 이전 날 무이(武夷)에서 [그와] 이별하였는데, 그 당시 [저는 조자직과] 더불어 유성지(游誠之)와 주거회(周居晦)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조자직]는 도리어 “이제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야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이미 이 직언 잘하는 한 부류의 사람들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귀인이 되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겠지요. [조자직이 현재와 같은 태도에서] 다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곧 주자충(周子充)과 같은 지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장생(張甥)의 향학열은 대단하여 그만한 인재를 얻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그저 읽기만 할 뿐이어서 장족의 진보는 없는 듯합니다. 반드시 내면을 향해 진실되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이 무엇인지를 찾아 검토해볼 수 있어야만 비소로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직경(直卿)이 지난 겨울에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지금은 이미 [이곳으로] 돌아 왔습니다. 인경(仁卿)도 이 곳에 와서 [나와] 서로 만났는데, [그는] 현재 이 곳에 있습니다. [대화를 해 보니] 그의 생각도 또한 매우 좋습니다.
심부름꾼이 간다 하기에 다시금 이 편지를 써서 부칩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 다 못 드리겠습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그대가] 과연 湖南으로 가버리고 나면 곧 이곳과는 더욱 멀어져서 저를 모질게 만들 뿐입니다. 송헌(宋憲)은 선을 즐기고 백성을 아끼니, 함께 일해 볼만합니다. 향학에 의지를 지닌 분들이 여러 분 있습니다만, 이에 앞서 아직 스승과 벗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곳 호남의 상황은 또 대계(戴溪)로 인해 [공부가] 흐리멍덩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만약 그곳에 도착하시거든 힘써 이러한 폐단을 구해내어 분위기를 쇄신시켜야 할 것이니 이 또한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與劉子澄
衡陽改命, 不省所繇. 今日忽聞蘇訓直又有別與近次之命, 此於取舍之際, 不無可疑. 不審何以處之? 計必有定論, 不容草草也. 學館答問甚佳, 曾君亦不易得, 但亦須有的當存主處, 此等始爲有助耳. 家塾祀夫子, 於古末聞. 若以義起, 當約釋菜禮爲之乃佳. 開元政和兩書必有之, 可參考也. 時令之書恨未得見, 不知所補於家國者何事爲急? 因便幸示及, 幷喩及子細也.
子路不能變化氣質之論, 言之不難, 政懼行之不易, 是以難輕言耳. 周子有言 : ‘聖人之敎, 使人自易其惡, 自至其中而已爾.’ 竊意如子路者, 可謂能易其(3-1558)惡矣. 若至其中一節功夫, 則雖夫子每每提撕, 然未見其有用力處也. 人百己千者終可必至, 宜若登天則終不可及, 兩論正自不同, 又何疑耶? 大學近再看過, 方見得下手用功處路陌徑直. 日前看得誠是不切, 亂道誤人也.
趙子直人蜀, 前日至武夷別之. 亦與說游誠之․周居晦, 渠却云今只要尋箇不說話底人. 看此議論, 似已怕此一等人了, 宜乎作貴人也. 更進一步, 便參到周子充地位矣. 張甥向學不易得, 可喜. 但讀大學章句恐無長進, 須向裏面尋討實下手處乃佳耳. 直卿去冬暫歸, 今已復來. 仁卿亦來相訪, 見在此, 意思亦甚好也.
便人告行, 復作此附之, 未能盡所欲言. 但念果爲湖南之行, 卽相望益遠, 令人作惡耳. 宋憲樂善愛民, 可與共事. 諸子頗有意向學, 但前此未得師友, 今在彼又爲戴溪鶻突. 若到彼, 可力與救拔, 亦一事也.
유자징에게 보냄與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열네 번째 편지[답유자징35-14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20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병오년(丙午, 1186년, 주자 57세) 가을에 씌어진 것이다. 앞의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편제에서도 주자는 스승 혹은 선배의 입장에서 유자직의 관직 생황에 대해 자상한 지도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 당시 학파 대립에 관해 ‘여동래 진동보 등(浙中)의 학문은 후에 와서... 대단히 지리하고 괴벽(乖僻)하게 되어, 그저 옳은 듯도 하고 그른 듯도 한 수준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아무래도 [저로서는] 오로지 저의 구설(舊說)을 고집함으로써 [그들의 학설을] 취사하려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주자학이 그 형성 과정에서 얼마나 학문적 긴장 속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편지 말미에 소학의 간행에 관한 관심도 보여주고 있다.
심부름꾼이 도착함에 따라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대의 편지를 통해 저는] 郡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걱정하던 일이 잘 처리되고 있는 듯하여] 매우 위로가 되고 또 기쁩니다. 소식 전하신 이후 점점 가을이 깊어 햇볕이 더욱 따갑습니다. 오직 그대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빕니다. 여러 가지 내용을 먼저 말해주니 반드시 먼 곳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의 기대를 크게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니, 필시 상하 간에도 편안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술을 살 수 있는 관청의 인증서[酒引]는 결국 어떻게 처치하시려 합니까? 송헌(宋憲) 역시 마땅히 상량(商量)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하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매사] 지극히 자세해야만 합니다. 조자직(趙子直)이 이 당시 임정(臨汀) 염법(鹽法)의 이익과 병통에 대해 강구한 것이 매우 상세합니다. 결국 여러 부서의 의론이 일치되지 않아서 [조자직이 강구한 복안]이 파기되고 말았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조자직] 역시 마땅히 조사(漕司)와 더불어 상량(商量)하지 않은 잘못이 있으니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대는 제게 보내온 편지를 통해] “관직에 있다 보니 학업을 닦는 데서 생기는 유익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 속학(俗學)으로 말하자면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른바 성문(聖門)에서의 덕업(德業)을 논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애초부터 일상생활 밖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단지 공문서에 대해 자필 서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 곧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장소인 것이니 반드시 특이한 소문을 모아 엮어내는 것만이 수업(修業)인 것은 아닙니다. 근자에 와서 나는 지금까지의 나의 학문함이 실로 밖을 향해 들떠 있었던 폐단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나의 잘못된 학문은] 나 스스로를 잘못되게 할 뿐만 아니라 남을 잘못되게 하는 점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야흐로 하나의 [믿을 만한] 실마리를 찾아낸 듯한데, 조금은 간결하고 분명한 듯 합니다. 이제 비로소 문자와 언어 밖에 참으로 특별히 마음 쓸 곳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대와 직접 대면하여 자세한 논의를 펴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됩니다.
여동래와 진동보의 학문은 후에 와서 일의 바탕이 대단히 지리하고 괴벽(乖僻)하게 되어 그저 옳은 듯도 하고 그른 듯도 한 수준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말하기는 지극히 어려우니 그저 두려워하면서 아프게 나 스스로 경각심을 가지고 반성할 뿐입니다. 아무래도 [저로서는] 오로지 저의 구설(舊說)을 고집함으로써 [그들의 학설을] 취사(取舍)하려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조만간] 『소학(小學)』을 간행할 수 있다면, 또한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다만 반드시 더욱 자세하게 수정하고 보완해야만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근자에 한장(韓丈)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鄧攸이 자식을 나무에다 결박했다”와 같은 부류는 관계가 너무 심한 듯하니 이와 같은 곳은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사례들을 다 없애고 싶지 않으시다면 우선 『소학』을 간행하시면서 이 말만은 삭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사전(史傳) 가운데 나오는 가언(嘉言), 선행(善行) 및 근세(近世)의 여러 선생들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하신 절실하면도 비근한 말들 중에, 아직도 싣지 않은 것이 많으니 다시 삭제하거나 보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되면 『소학』책이]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형주(衡州) 유덕노(劉德老)와 송헌(宋憲)이 일찍이 “이군(二君)에 관해서는 아직도 소문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더군요. 궁벽한 군(郡)에 이와 같은 인재가 있다니 기뻐할 일입니다. 제가 있는 이곳에서는 도리어 이런 정도의 인재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與劉子澄
使至, 辱誨示, 得聞到郡諸况, 深用慰喜. 信後秋深益熱, 恭惟尊候萬福. 條敎所先, 必有以大慰遠人之望者, 不審謂何? 今旣累月, 上下亦必已相安矣. 酒引(3-1559)竟作如何處置? 宋憲亦當可商量. 天下事有極要委曲者. 趙子直在此, 講求臨汀鹽法利病甚悉, 竟以諸司議論不一而罷, 甚可惜. 然亦是渠合下不與漕司商量之過, 不可專罪他人也. 居官無修業之益, 若以俗學言之, 誠是如此. 若論聖門所謂德業者, 却初不在日用之外, 只押文字, 便是進德修業地頭, 不必編綴異聞, 乃爲修業也. 近覺向來爲學實有向外浮泛之弊, 不惟自誤, 而誤人亦不少. 方別尋得一頭緖, 似差簡約端的, 始知文字言語之外眞別有用心處, 恨未得面論也.
浙中後來事體大段支離乖僻, 恐不止似正似邪而已. 極令人難說, 只得皇恐, 痛自警省, 恐未可專執舊說以爲取舍也. 小學能爲刊行, 亦佳. 但須更爲稍加損益乃善. 近得韓丈書云, 如鄧攸縛子於樹之屬, 似涉已甚, 恐此等處誠可削也. 若不欲盡去其事, 且刊前此語亦佳耳. 史傳中嘉言善行及近世諸先生敎人切近之語, 亦多有未載者. 更望刷出補入, 乃爲佳也. 衡州劉德老, 宋憲嘗言之, 二君却未聞. 僻郡有此, 亦可喜. 此間却自艱得也.
유자징에게 보냄與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열다섯 번째 편지[답유자징35-15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21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무신년(戊申, 1188년, 주자 59세)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유자징이 사록관에 임명된 것에 대한 축하인사를 시작으로 간단한 신볍잡사를 언급한 후, 주렴계의『통서(通書)』 중 ‘기(幾)’ 자의 의미를 수양론과 연관하여 강조한다. 또 유자징이 여릉(盧陵)으로 돌아감에 따라 유자징이 고유(高劉) 등 몇몇 사람들을 포함하여 ‘후생들을 모아 갈고 닦아 성취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다. 편지 말미에는 『여계(女戒)』에 관한 주자의 관심이 피력되고 있다.
노형(老兄)께서는 무사히 돌아왔고 또 [돌아오자 말자 곧바로] 사록관에 임명됨에 따라 봉급이 더욱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이제는 더 이상 옷 입고 밥 먹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니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느라 매우 즐거우리라 생각됩니다. 궁금합니다. 요즈음 와서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우선 [그대는 지금까지 해 오시던 바] 잡서(雜書) 보시는 것에 대해 반성하시고, 내면을 향해 조금이나마 공부해 나가심이 좋을 듯합니다.
저는 병으로 인해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사(意思)만은 도리어 볼수록 더욱 분명하고 친절(親切)해져 가는 듯합니다. 한 해 전에 [주렴계 선생의] 『통서(通書)』를 보고 [저는] 힘을 다해 ‘기(幾)’ 자를 해설하였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점이 꽤 있습니다. 가깝게는 공사(公私)와 사정(邪正)의 분간을, 그리고 멀게는 [국가, 가정, 혹은 일신의] 흥폐(廢興)과 존망(存亡)을 오직 이곳에서 미리 간파할 수 있다면 곧 [사(邪)와 망(亡)을 정(正)과 흥(興)에로] 그 방향을 바꾸어나가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미(幾)’에서의 공부야말로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 있어서 가장 가깝고도 절실한 공부이니 정미한 일이든 거친 일이든 그리고 숨겨진 일이든 환히 드러난 일이든 간에 [바로 이 ‘기미(幾)’에서] 일시에 투철하게 뚫리는 것입니다. 요순이 말한 ‘유정유일(惟精惟一)’이나, 孔子가 말한 ‘克己復禮’는 바로 이 일인 것입니다. 미나리 맛을 보니 그 맛이 참으로 좋아 그대에게 이를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지난 해에 고언선(高彦先)의 「사당기(祠堂記)」를 지었습니다. 이 전날 장주(漳州) 태수(太守)가「사당기(祠堂記)」의 인쇄본을 보내왔기에 이제 [그대에게] 한 부를 보냅니다. 이같은 의론은 또한 이 시대가 꺼리는 일에 저촉되어 사람들에게 탁핵 상소를 올리게 할 빌미를 줄 것입니다. [이제 그대가 그곳에 당도했으니 그곳] 여릉(盧陵)의 오래된 학인들이 필시 그대 주변에 모여들고 있겠군요. 고류(高劉) 등 몇몇 사람들은 장족의 진보를 했는지요? [시기가 좋지 않아] 현재는 [적극적으로 추진]해 볼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후생들을 모아서 갈고 닦아 성취시키는 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힘써야 할 일일 것입니다. 이곳 붕우들은 [의기소침하여 도무지] 고무진작되질 않으니 매우 걱정이 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그 곳 사정은 어떠한지요? 부디 그대는 이와 같은 저간의 사정들을 염두에 두고 솔선수범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접때 『여계(女戒)』를 읽고 그 말에 미흡한 곳과 비천한 곳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돌아가신] 백공(伯恭)께서도 이 점을 병통으로 여기셨지요. 그래서 특별히 고어를 모아서 『소학』과 동일한 모습을 갖추게 하여 여러 편으로 묶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그 편목(篇目)을 ‘정정(正靜)’, ‘비약(卑弱)’, ‘효애(孝愛)’, ‘화목(和睦)’, ‘근근(勤謹)’, ‘검질(儉質)’, ‘관혜(寬惠)’, ‘강학(講學)’ 등으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반씨(班氏)의 글 중 취할만한 것들에 대해서도 깎아낼 것은 깎아낸 뒤에 취하면 되겠지요. [또] ‘정정(正靜)’편과 같은 곳에는 곧 두자미(杜子美)의 “마음을 붙잡아 근심하면서 몸 단속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네”와 같은 말들도 취해 넣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류는] 무릇 [여인네들이] 몸을 단속하고 지아비를 섬기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화목(和睦)’은 [여인이 시집가서] 그 집안 식구를 잘 섬김을 이르는 말이고, ‘관혜(寬惠)’는 [여인이 집안의] 아래 사람들을 대할 때 질투가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릇 [집안에서] 아래 사람 거느리는 일에 있어서, [아래 사람들이] 게으름 피는 것에 대해서는 잔소리해도 되지만 사사건건 일마다 간섭하고 검열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제시한] 이 제목 중에 누락된 것이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고, 만약 누락된 점이 있으면 보충해서 한 권의 책을 편집해낸다면 이 또한 [우리들이 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일일 것입니다. 접때 [그대가] 엮어낸 『가훈(家訓)』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이미 [여러 가지 내용을] 두루 갖추신 듯합니다. 다만 저 책[즉『여계(女戒)』]을 참고해서 채택해 넣으시고 나아가 경(經), 사(史), 자(子), 집(集) 중의 일로 더 보태시되 경(經)을 우선시해야 할 것입니다. [책의 내용이] 지나치게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정밀하게 선택하여 자세히 살핀 다음 취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합니다.
與劉子澄
老兄歸來無事, 又得祠祿添助俸餘, 無復衣食之累, 杜門讀書, 有足樂者. 不審比來日用事復如何? 且省雜看, 向裏做些功夫爲善.
熹病雖日衰, 然此意思却似看得轉見分明親切. 歲前看通書極力說箇‘幾’字, 儘有警發人處. 近則公私邪正, 遠則廢興存亡, 只於此處看破, 便斡轉了. 此是日用第一親切工夫, 精粗隱顯, 一時穿透. 堯舜所謂‘惟精惟一’, 孔子所謂‘克己復禮’, 便是此事. 食芹而美, 甚欲獻之吾君也.
去歲作高彦先祠堂記, 前日漳守方送來, 今往一本. 此等議論亦觸時忌, 會帶累人喫章也. 盧陵舊學子却須聚集, 高劉諸人頗長進否? 今日無事可爲, 只有收拾後生, 磨礱成就, 是著得力處. 而此間朋友鼓作不起, 深爲可慮. 不知彼中如何? 更望留意, 以身率之, 乃所望也.
向讀女戒, 見其言有未備及鄙淺處, 伯恭亦嘗病之. 間嘗欲別集古語, 如小學之狀, 爲數篇, 其目曰‘正靜’, 曰‘卑弱’, 曰‘孝愛’, 曰‘和睦’, 曰‘動謹’, (3-1561)曰‘儉質’, 曰‘寬惠’, 曰‘議學’. 班氏書可取者, 亦刪取之. 如正靜篇, 卽如杜子美‘秉心仲仲, 防身如律’之語, 亦可入. 凡守身事夫之事皆是也. ‘和睦’謂宜其家人, ‘寬惠’謂逮下無疾妬, 凡御下之事, 病倦不能檢閱. 幸更爲詳此目有無漏落, 有卽補之而輯成一書, 亦一事也. 向見所編家訓, 其中似已該備. 只就彼釆擇, 更益以經史子集中事, 以經爲先, 不必太多, 精擇而審取之尢佳也.
유자징에게 보냄與劉子澄
【해제】주자가 유자징(劉子澄)에게 보낸 열여섯 번째 편지[답유자징35-16서]이다. 주자대전 권 35(書汪張呂劉問答)에 22번째로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무신년(戊申, 1188년, 주자 59세)에서 기유년(己酉, 1189, 주자 60세) 사이에 씌어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자신의 시에 대한 유자징의 화답시를 언급한 후, 계장(季章)과 경양(景陽)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편지 중반부터는 아마도 유자징의 학습지도안인 듯 보이는 두루마리(卷子)의 내용에 관해 길게 언급한다. 주자는 이 두루마리 뒤에다 상세하게 자신의 의견을 부기하여 유자징에게 돌려 주었던 듯하다. 요지는 ‘쓸 데 없는 말(閑言語)’을 줄이고 학생의 수준에 맞게 실천에 힘쓰도록 학생을 지도하라는 것이다.
제가 오래 전 홍경사(鴻慶祠)에서 쓴 시에 대해 화답시를 지어 보내주셨는데 거듭 읽고 탄복하는 바입니다. [그대는 화답시를 통해] 마혜(麻鞋)의 계합(契合)을 언급하셨습니다만, 이제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괴음(槐陰)에서의 시문과 강권(講卷)은 모두 훌륭합니다. 계장(季章)은 아마도 이른바 “절실하게 묻고 비근한 데서 진리를 생각하는” 학자인 듯한데, [요사이 이런 분은] 참으로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너무 절박하여 여유가 없고 협애하여 인색한 뜻이 있어 보입니다. 道理를 봄이 세밀한 데서는 충분히 세밀한 반면 세밀하지 않은 곳에서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정도입니다. 생각건대 [이러한 약점은 그가] 도무지 독서는 않은 채 글 뜻을 이해하려 한 데 그 원인이 있는 듯한데 [이런 식이라면] 비록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먼저 자기의 뜻을 가지고 곧바로 앞을 향해 나아가 성현의 언어를 멋대로 성급하게 판단해버리거나, 글의 [진정한] 의미는 모르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억지 해석을 하거나 또는 스스로 옳다고 여겨 망령되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내게 될 것이니, 결국 그대가 [내게 보낸] 편지에서 지적하신 것과 같은 병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경양(景陽)은 또 너무 지나칠 정도로 느슨합니다. [그의 경우 너무나 느슨하여 그저] 자기 본분 상에서 생각해보는 정도로는 친절(親切)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접때 공도(公度)를 만나본 후에 그의 자질이 여러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에게도] 또한 국량이 좁고 사사롭게 인색한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군요.
[그대가 보내주신] 두루마리를 열람하면서 뒷면에다 군데군데 저의 의견을 붙여보았습니다. 다시 상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한] 이런 식의 강론을 [내가] 처음 들었을 때는 마땅히 유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문목(問目)을 구해다가 [나의] 여러 문하생들로 하여금 조목조목 대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대의 두루마리를] 보니, 묻는 자는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바가 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자도 애초에 자기 나름으로 터득한 것이 없이 대답하는 것이어서 대부분 임시방편으로 시험에 응해 빈 종이를 채우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강론은 아마도 무익할 듯합니다. 나아가 [이와 같은 식의 강론에는 다음과 같은] 일종의 자신에게 절실한 병통이 있습니다. 즉 일상의 공부는 [그 관건이] 오직 당사자가 착실히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데 있으며, 자기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합당하게 깨달아 섭취해 들이는 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남들과 더불어 비교하고 헤아려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타인이 언설로 간섭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가령 [그대가 이러한 문답을 둔 것이] 동지들을 경각시키고자 한 것이라면, 단지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화두를 들어 그들로 하여금 깊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것을 듣는 자도 역시 마땅히 맹렬하게 반성하고 스스로를 단속하여 자기 본분 상에서 힘쓰게 될 것이니, 여기에 또 다시 이런 저런 말들을 달아서 국량에 따라 대응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만약 병통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다만 마땅히 시급하게 그 병에 맞는 약을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 이미 약을 얻었다면 마땅히 시급하게 그 약을 복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다시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으면서, 이 병이 어떤 병인지를 형용하거나, 이 약이 얼마나 좋은 약인지를 찬탄하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제 [그대가 저술하신 이 두루마리에서] 장차 “실천해야 하며 일을 처리해나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만 이런 말들은 따지고 보면 그저 쓸 데 없는 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바야흐로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뜻이 그 말을 하는 데 있게 되어 실천에는 뜻을 두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롭기까지 할 듯합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차라리 성현의 글에 대가가 강구(講究)한 것을 가지고 의문이 있으면 질문하고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질문에 대답해주면 될 것입니다. [이와 달리 만약에] 의문이 없거나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굳이 과정(課程)을 설정하여 구속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와 같이 해나가기만 하면 도리어 참된 공부가 가능하며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노형(老兄)께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與劉子澄
承寄示所和鴻慶舊詩, 三復感歎. 但麻鞋之契, 今何敢望有如此事耶? 槐陰詩文講卷皆佳, 季章蓋所謂爲切問近思之學者, 眞不易得. 但似有迫切狹吝之意, 見得道理到處十分到, 不到處亦十分不到. 想見都不讀書, 理曾文義, 雖理會, 亦是先將己意向前攙斷, 扭捏主張, 所以有來喩云云之病. 景陽又忒寬慢, 自己分上想見是不親切也. 公度向時得見, 資質儘過諸人, 但後來覺得亦有局促私吝之意, 不知今又如何也.
卷子隨看各以鄙見批在紙背, 請更詳之. 似此講論, 初聞之以爲當有益, 故嘗(3-1562)往求問目, 欲令諸生條對. 以今觀之, 則問者本無所疑而答者初無所見, 多是臨時應課塞白. 似此講論, 恐無所益. 又有一種切己病痛: 日用功夫只在當人著實向前, 自家了取, 本不用與人商量, 亦非他人言說所能干預. 縱欲警覺同志, 只合擧起話頭, 令其思省, 其聞之者亦只合猛省提掇, 向自己分上著力, 不當更著言語, 論量應對. 如人有病, 只合急急求藥 : 旣得藥, 只合急急服餌, 不當更著言語形容此病, 更著言語贊歎此藥也. 今將實踐履事却作閑言語說了, 方其說時, 意在於說而不在於行, 此恐不惟無益, 而又反有害也. 以愚見觀之, 似不若將聖賢之書大家講究一件, 有疑卽問, 有見卽答, 無疑無見者, 不必拘以課程, 如此却似實有功夫, 不枉了閑言語. 不知老兄以爲如何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