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忠厚, 民甚愛之. 此不必言, 但欲知之耳. 洞主命官事記亦見之, 決非僻書, 但此無書可檢耳. 此類傳疑, 正不必深說也.
깨우쳐 주신 몇 조목에는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만 이전에 회답을 받기 전에 이미 다시 글을 올렸습니다. 또 지진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 못하니, 주장을 써서 삼성과 추밀원에 맡겨 처분해달라고 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또한 드문 일인지라 거스르고 미움을 타게 될까 두렵습니다만 그로 인해 청한 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떠나기 전까지 군의 사무는 하루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다만 결국 마음은 절로 게을러져 열심히 힘쓰기 힘들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입니다. 다시 조정의 회답이 어떤 지를 보고 제가 청한 대로 되지 못하면 가르쳐주신대로 따르겠습니다.
誨諭數條, 極荷愛念. 但前日未得回報間, 已再申矣. 又因地震之變, 心自不安, 不■具奏, 乞降付三省密院. 此亦面生, 或恐觸忤憎嫌, 因得遂請也. 末去以前, 郡事一日不敢廢, 但終是心意自懶, 覺得難勉彊耳. 更看回報如何, 不得請卽當如所敎也.
재정 관리가 지나치게 급하고, 형벌이 너무 엄하다는 두 가지 일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군의 재정은 버틸만 하지만, 경사로 상공하는 일이 늘어져 두 해 동안 보내지를 못한 일이 자나깨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 긴급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관대한 편입니다.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할 곳은 모두 방면했으니, 여기에서 다시 느슨하게 하려고 한다면 주현의 재정을 뒤집어 엎고 말 것입니다. 소식을 전한 사람의 말은 아마도 건창현의 일 때문에 나온 것 같은데 이것은 제가 전에 스스로 탄핵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이 현이 제대로 일을 주관하지 못해서 모연[戶掾]을 보내 대신하게 했습니다. 이 사람의 성품은 예민하고 바탕이 가벼워 일처리를 하면서 정도를 넘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걱정하기는 했지만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두 세 번 간절히 당부하고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아니나다를까 지나친 일처리로 백성들의 화합을 크게 망치고 말았습니다. 빨리 첨판을 보내 직접 가서 위무하고 깨우친 다음에야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선발이 정밀하지 못했고, 상세하게 깨우치고 훈계하지 못한 죄입니다. 지금은 이미 명을 내려 돌아왔습니다. 다만 이 현에 다시 일을 맡길 사람이 없어서 말할 수 없이 소란스럽게 되리라는 것을 느낄 뿐입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짐작하지 못했다’고 하신 것이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고 하겠습니다. 옥송의 결과를 조금 기다렸다 일이 헌사를 경유하게 되면 마땅히 당신의 생각대로 깨우치겠습니다.
治財太急, 用刑過嚴二事, 亦實有之. 蓋州郡用度猶可支吾, 最是上供綱連施下兩年不起, 令人坐臥不安, 不得不緊急. 然比之他人, 已是寬了. 稍可寬處無不放過, 若更寬著, 卽倒却人州縣矣. 傳者之言, 似爲建昌而發, 便是向來自劾事. 初以此縣不辦, 令戶掾往代之. 此公性銳質薄, 作事不無過當. 初蓋亦慮之, 但以無人, 不免再三丁寧而遣之. 到彼果然過甚, 大失民和. 亟遣簽判親往慰喩, 然後粗定. 此則選擇不精․戒喩不詳之罪, 今已令且還矣. 但此縣便覺無分付處, 撓不可言. 來喩所謂未斟酌者, 可謂切中其病. 少俟訟竟, 事經憲司, 當以尊意開喩之也.
법을 어긴 사인(士人)은 다른 사람을 교사하고, 관리와 결탁하는 등 죄가 한 둘이 아닙니다. 다만 나중에 형법대로 판단을 내릴 때에는 장죄만을 무겁게 처벌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단지 학교에 개오동나무와 가시나무[夏楚]를 보내고 강주로 쫓아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는 사면이 되어 곧 그곳의 관리들과 결탁해서 불법적으로 방환되었습니다. 오늘 집에 도착해서는 다음날 종실에 참석해 옥사의 문서를 꾸미는 것을 교사해서 다른 사람이 하소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시 붙잡아다 매질을 하려고 했는데, 같은 반열의 관리들이 대부분 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몇 대의 장형을 결정하고, 다시 다른 주로 쫓아냈습으니, 또한 지나치게 처리한 것은 아닙니다. 못난 정사에 본래 성글고 빠진 것이 많겠지만, 이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자주 충고하고 규모를 보았던 자들이 있었지만, 길에서 물어보면 이 일이 정당치 않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옥사를 판결한 말에 잘못이 있다는 것은 가르쳐주신 대로입니다. 이전에도 깨닫고는 있었는데 이미 시행이 된지라 고칠 겨를이 없었을 뿐입니다. 논쟁이 된 것은 어떤 사람이 남의 부인과 함께 남편을 살해했는데, 무더위 속에 옥에 갇혀있다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실에서 자신들의 종복이라고 해서, 관리를 끼고 가까운 10명을 옥에 가두어 두고, 해를 넘기도록 결론을 못내리고 있습니다. 형세상 어쩔 수 없어서 마침내 방면을 허락했습니다. 다만 한 때 그 화를 이기지 못해 판결문에 대한 불평이 이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士人犯法者, 敎唆把持, 其罪不一. 但後來坐法結斷, 臟罪爲重耳. 然亦但送學夏楚, 編管江州. 其人經赦, 便計會彼州官吏違法放還. 今日到家, 明日便陪涉宗室, 敎唆詞訟, 爲人所訴. 復追來欲撻之, 而同官多不欲者, 只決却小杖數下, 再送他州, 亦不爲過也. 弊政固多疎脫, 至此一事, 往來之人雖有苦口見規者, 問於道途, 無不以此事爲當也. 判語之失, 誠如所喩. 前亦覺之, 但已施行, 無及於改耳. 其所爭者, 乃是一人與妻有私而共殺其夫, 暑中繫獄病死, 而此宗室者乃認爲己僕, 而脅持官吏, 禁近十人在獄, 踰年不決. 勢不得已, 須與放却. 但一時不勝其忿, 故詞語不平至此耳.
시경에 대한 해설은 이미 소아 이후의 두 책을 보내드립니다. 소서에 대한 해설은 말 한 마디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내주실 가르침을 기다렸다 다시 반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 생각은 완전히 손을 놓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완천치 못하다고 깨우치신 것도 반드시 보충 설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생각이 저와 다른 곳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자세하게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또 내용이 어떤지를 살펴서 점차 비평해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한꺼번에 다 비평해 주시면 오히려 보기가 힘듭니다. 요즘 오재로가 풀이한 윤정․강고․신재편 등을 보았는데 변론과 증명이 아주 좋았습니다. 다만 이미 (상서) 소서의 잘못을 알아차리고서도 용기있게 결정하지 못하고 다시 서문을 위해 끌여들였으니 자못 힘만 낭비한 꼴입니다.
詩說昨已附小雅後二冊去矣. 小序之說, 未容以一言定, 更俟來誨, 却得反復. 區區之意, 巳是不敢十分放手了. 前諭未極, 更須有說話也. 恐尊意見得不如此處, 却望子細一一垂喩, 更容考究爲如何. 逐旋 批示尤幸, 幷得之却難看也. 近看吳才老說胤征․康誥․梓材等篇, 辨證極好. 但已看破小序之失而不敢勇決, 復爲序文所牽, 亦殊覺費力耳.
말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은 이 사람을 빨리 보내야 하는 통에 상세하게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 도리는 심원한 것이니, 우리의 도를 위해 스스로를 아끼시기 바랍니다. 자식인 숙(塾)은 때로 깨우치고 신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게으르거나 안일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나마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재삼 간절히 바랍니다. 이곳으로 올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며느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반숙도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학교에 가서 지내려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계획은 처리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이 돌아오면 다행이 회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무구 어르신께서는 어쩌다 이런 명을 받들게 되었습니까? 이곳에서는 조보를 볼 수 없어서 과연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며 지금은 이미 떠났을 것인데 어느 곳으로 돌아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야겠습니다. 정월 4일에 장을 올리며 이만 줄입니다. 희(熹)는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고서, 백공(伯恭) 충우(冲祐) 직각(直閣) 대저(大著) 형에게 장을 올립니다.
所欲言者甚多, 亟遣此人, 未暇詳布. 正遠, 千萬爲道自愛. 塾子更望時賜誨飭, 今不至怠惰放逸爲幸, 千萬至懇. 欲趁此有人, 令其挈婦還家, 叔度書來, 又似留其就學, 二者之計, 未知所處. 不審尊意以爲如何? 此人回, 幸報及. 韓丈何爲忽有此命? 此未見報, 不知果爲何事. 今想已行矣, 不知却歸何處? 後便當致書也. 正月四日上狀, 不宣. 熹頓首再拜, 上狀伯恭冲祐直閣 大著契兄坐下.
와룡암기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원하건대 제가 받아볼 수 있도록 내려 보내 주십시오. 장흠부가 한 편의 시를 부쳐왔는데, 당연히 새겨둘 것입니다. 신양의 일은 진실로 보내준 편지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장흠부 홀로 마음 속에 품고있을 것만은 아닙니다. 어리석고 졸렬한 저에게도 깨우쳐 준 것이 많습니다. 숙창(叔昌)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 여러 가지 말들이 있지만 한바탕 웃고 제낄만한 내용입니다. 자약(子約)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말한 것도 그 옳고 그름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희(熹)는 또 아룁니다.
臥龍菴記聞已蒙落筆, 願幷受賜也. 欽夫寄一詩來, 當幷刻之耳. 信陽事誠如來誨, 然此言非獨欽夫當佩服也, 在於戇拙, 所警多矣. 叔昌書中有數語, 可發一笑. 子約書中所諭, 却望喩其當否也. 熹又覆.
오늘 기주(蘄州)에서 왕신백(王信伯: 王蘋)의 문집과 어록을 부쳐온 것을 받아보았는데, 읽어보니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백록동기를 써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목이 한 번 메인다고 해서 밥 먹기를 그만두는 것도 도를 지나친 일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당신께서 좀 더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오늘날을) 보기를 다시 오늘날에 과거를 보는 것처럼 여길까 걱정됩니다.
今日得蘄州寄來王信伯集幷語錄, 讀之駭人, 此洞記所爲作也. 然以一噎而廢食, 又似過當, 故愚意欲明者更加意也. 恐後人觀之, 復如今之視昔也.
여동래에게 보내는 백록동서원기를 논한 편지 與東萊論白鹿書院記
【해제】 이 글은 순희 7년(경자, 1180, 51세) 정월에 여조겸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조겸이 초안한 백록동서원기의 구절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교정하는 글이다.
“이 때에 이르러 선비들이 모두 실질을 숭상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신불해․상앙․불교․도교에 빠지고서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當是時, 士皆上質實, 實則人於申․商․釋老而不自知.
과거의 융성했던 시절에 풍속이 아름다웠다는 것은 정말이지 말한 대로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선비들이 했던 학문이라는 것은 장구와 문장의 의미나 따지는 것에 불과했고, 또 비루하고 잡다한 폐단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선각자격인 선비들은 가끔씩 선왕의 위대한 가르침을 밝히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병폐를 지적하면서 어떻게 이런 풍조를 혁신할 것인지 논의했습니다. 이정과 장횡거를 비롯한 여러 선생들도 (선비를) 가르치고 길러서 (학자로) 완성시킬 수단들을 논의하였는데, 이것은 정명도[明道]의 학제에 대한 글에 자세히 실려있습니다. 왕양명[王氏] 한 사람만이 이런 학문을 ‘속된 학문[俗學]’이라고 부르면서 개혁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왕양명이 (과거제를) 변경하자는 의론을 했을 때 여형공[滎公]도 처음에는 함께 아뢴 적이 있습니다). 왕씨(王氏)의 학문은 (속학을) 도를 이해하기에 불충분한 것이라고 여겼고 불교와 도가에서 말하는 도를 (진정한) 도라 여겼기 때문에 고치려고 했던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그 폐단은 도리어 이전보다 더 깊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말단의 풍속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문자의 의미나 장구나 따지는 학문에 힘쓰는 폐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 이미 조금 치우쳤습니다. 희령․원풍․숭정․선화 연간에 당했던 재앙을 거울삼아 보면 당시의 옛 풍속을 최고로 융성했고 정당해서 바꿀 수 없는 모범이라고 여기는 것도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또 왕씨에 대해 논한 내용도 왕학의 병폐를 정확하게 지적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祖宗盛時風俗之美固如所論, 然當時士之所以爲學者, 不過章句文義之間, 亦有淺陋駁雜之弊. 故當時先覺之士往往病其未足以明先王之大道, 而議所以新之者. 至於程張諸先生論其所以敎養作成之具, 則見於明道學制之書詳矣, 非獨王氏指以爲俗學而欲改之也. 王氏變更之義, 滎公初亦與聞 王氏之學, 正以其學不足以知道, 而以老釋之所謂道者爲道, 是以改之, 而其弊反甚於前日耳. 今病於末俗之好奇而力主文義章句之學, 意已稍偏, 懲於熙․豐․崇․宣之禍而以當時舊俗爲極盛至當而不可易, 又似太過. 且所以論王氏者, 亦恐未爲切中其病也.
‘명도(明道) 정선생(程先生)’에서 ‘충신을 낮게 보고 하찮게 여겼다[卑忠信而小之也]’는 구절까지
‘明道程先生’止‘卑忠信而小之也’.
세상에는 원래 충성스럽고 미덥지만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공자께서 말씀한 ‘충성스럽고 미덥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이천(伊川)이 꾸짖은 ‘독실하게 배우고 애써 실천하면서도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왕씨(王氏)의 이 말도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도를 아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거꾸로 도를 아는 사람을 도를 알지 못한다고 여긴 점이 큰 착각일 뿐입니다. 충성스럽고 미덥다는 것으로 명도를 말하려고 한다면, 명도를 낮게 보고 하찮게 평가하는 것은 괜찮지만, 충성과 미더움을 낮게 보고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충성과 미더움’으로 ‘도를 아는 것’을 상대시키면 높낮이와 크고 작은 차이를 분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世固有忠信而不知道者, 如孔子所稱忠信而不好學者, 伊川所譏篤學力行而不知道者是也. 然則王氏此言亦未爲失, 但不自知其不知道, 而反以知道者爲不知道, 此則爲大惑耳. 其以忠信目明道, 以爲卑明道而小之則可, 以爲卑忠信而小之則不可. 蓋以忠信對知道, 固當自有高卑小大之辨也.
‘관락의 서언’에서 ‘어째서 돌이킬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가’라는 구절까지
‘關洛緖言’止‘盍思所以反之哉’.
정씨(程氏)가 말한 학문의 본말과 시종을 갖추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은 덕을 완성한 사람만을 위해서 말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 이 말의 의미도 조금 치우쳤고, 겸해서 윗 문장과도 맥락이 닿치 않습니다.
程氏之言學之本末始終無所不具, 非專爲成德者言也. 今此語意似亦少偏, 兼於上文無所繫屬.
‘가령 장구와 문장의 의미만을 따지는 데서 그친다면’에서 ‘삼대의 처음과 끝’이란 구절까지
‘政使止於章句文義之間’止‘三代之始終也’.
삼대의 가르침은 스스로 경서의 구독에서 벗어나, 의지의 향배를 변별한 다음에 순서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곳이 있어서, 선비가 되는 데에서 시작해서 성인이 되는 데에서 끝납니다. 지금 단지 이렇게만 말한다면 여기에서 끝날 뿐 삼대의 가르침과 학문의 본 뜻은 아닐 것입니다.
三代之敎, 自離經辨志以後, 節次有進步處, 是以始乎爲士而終乎爲聖人也. 今但如此言之, 則終於此而已, 恐非三代敎學之本意也.
‘이 산이 있은 이래로’에서 ‘또한 군자의 뜻이다’까지
‘自有此山以來’止‘亦君子之意也’.
‘해와 달과 함께 빛을 뿌린다’는 말은 무엇을 가르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 ‘구구한 준지(區區濬之: 濬之는 李渤의 자)’라고 표현한 것은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어서 윗 문장의 통일되고 도타운 문세를 해치는 것이 마치 마복파(馬伏波: 馬援)가 두계량(杜季良: 杜保)을 논한 것과 같습니다. 겸해서 이 사업은 본래 선대 왕조에서 학문을 권장한 뜻을 발명하려는 것이었으니, 처음부터 물꼬를 트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말이 이런 생각에서 나와서, 선대에 교화하려는 뜻을 계승하는 측면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사리가 명백하니 이처럼 꾸짖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所謂與日月參光者, 不知何所指? 更望批喩. 其曰‘區區濬之’者, 又恐卑之已甚, 有傷上文渾厚之氣, 如馬伏波之論杜季良也. 兼此役本爲發明先朝勸學之意, 初不專爲濬之. 今但得多說此邊意思出來, 而略帶續其風聲之意, 則事理自明, 不必如此罵破也.
제 생각에는 첫 번째 문단에서 논했던 것처럼 명도의 차자를 인용한 뒤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명도의 주장은 시행되지 않았고 왕씨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왕씨는 속학이 도를 아지 못하는 폐단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자신의 학문이 도를 알기에 충분히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노자와 석가로 주공과 공자의 진실을 어지럽혔습니다. 비록 학제를 새롭게 고쳐 경의를 반포하고 시부를 없애버렸지만, 배우는 사람의 폐단은 도리어 이전보다 더욱 깊어졌습니다. 건염 연간의 중흥기에 정씨의 주장이 다시 나왔지만 학자들이 또 다시 처음과 끝, 근본과 말단의 순서를 살피지 못하고, 뜻을 잊고 순서를 뛰어넘는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다퉜습니다 이렇게 해서 학자들은 많아졌지만 풍속의 아름다움은 끝내 원우․치평 이전 시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선왕의 가르침을 발명하려는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지금 서원을 세우는 것은 앞선 시대에 교화를 불러 일으키고 학문을 권장했던 유택을 다시 베풀려는 것이니, 그 뜻이 깊고 먼 것입니다. 여기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당시의 학문을 살펴 그 기초를 확립하고 정자와 장자가 의논했던 내용에 힘을 써서 그 극치를 추구하면 제나라가 변해서 노나라가 되고, 노나라가 변해서 왕도에 이르는 격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초고인지라 제대로 된 문장은 아닙니다만 대체와 규모는 조금이나마 공평해서 오래가더라도 다른 폐단이 없을 듯 합니다. 이런 제 생각을 받아들이시고 좋은 말로 글을 짓기를 바랍니다만 당신은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보여주신 그대로라면 도리어 지나치게 억누르고, 추켜세운다는 허물을 벗지 못하고, 훗날 다른 병폐를 만들어내고, 또 수재과를 모두 학구과로 바꾸게 되는 결과가 될까 걱정됩니다. 이 글은 비석에 새겨 영원히 전할 글입니다. 한 때 한 두 사람이 횡설수설하면서, 편의에 따라 말을 만들어 내거나, (임시방편으로) 병의 증세에 따라 약을 처방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鄙意欲如第一段所論, 引明道箚子後, 卽云. ‘不幸其說不試而王氏得政, 知俗學不知道之弊, 而不知其學未足以知道, 於是以老釋之似亂周孔之實, 雖新學制, 頒經義, 黜詩賦, 而學者之弊反有甚於前日. 建炎中興, 程氏之言復出, 學者又不考其始終本末之序, 而爭爲妄意蠟等之說以相高, 是以學者雖多, 而風俗之美終亦不迨於嘉祐․治平之前, 而况欲其有以發明於先王之道乎? 今書院之立, 蓋所以究宣祖宗興化勸學之遺澤, 其意亦深遠矣. 學於是者, 誠能考於當時之學以立其基, 而用力於程張之所議者以會其極, 則齊變而魯, 魯變而道矣.’ 此語草略不文, 而其大體規模似稍平正, 久遠無弊. 欲乞頗采此意, 文以偉辭, 不審尊意以爲可否? 若只如此示, 却恐不免有抑揚之過, 將來別生弊病, 且將盡變秀才而爲學究矣. 蓋此刻之金石, 傳之無窮, 不比一時之間, 爲一兩人東說西話, 隨宜說法, 應病與藥也.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보낸 32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2월 경에 씌여진 것이다. 주희는 순희(淳熙) 5년(1178년, 주자 49세) 8월에 남강군 지사를 제수받지만 사록관을 청한 채 부임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순희 6년(1179년, 주자 50세) 3월 그믐에 남강군에 도착 남강군지사로 부임한다. 남강군에 부임하자마자 주자는 주렴계의 사당을 세우고, 10월에 백록동 서원을 복원한다. 또한 이 해에「백록동서원게시」를 완성하고,「태극도설」,「통서」를 재차 교정하는 등 왕성한 학문할동을 병행해 나간다. 그러나 주자가 남강군지사로 부임한 이듬해인 순희 7년(51세) 2월에 그의 지기인 장남헌이 사망하고 9월에는 그를 점차 깊이 이해하기 시작했던 육구령까지 사망한다. 이 편지는 장남헌이 죽은 직후에 씌여진 듯하다. 이 편지를 통해 주희는 여백공에게 부탁한 백록동서원기, 장남헌의 죽음, 시전, 자신의 장남인 숙(塾), 육자정과 육자수과 관련된 내용 등 여러 가지 소식을 간략하게 적고 있다.
인편에 보내준 편지를 받았습니다. 봄이 오자 그대의 몸이 더욱 가볍고 건강해져, 지팡이를 짚지 않고 가볍게 산책하며, 또 꽃을 찾고 들길을 걷는 즐거움도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대가 지어 보내신]「백록동서원기(白鹿洞書院記)」의 정본(定本)은 글이 압축되고 의미도 방정하여 재삼 우러러 감탄하오며, [그 글을] 이미 산간(山間)에 보내어, 황자후(黃子厚)에게 예서(隸書)로 써 달라 부탁했습니다. 글이 도착하면 곧바로 돌에 새길 것입니다.
장흠부(張欽夫 즉 張軾)는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가 처음 병을 얻었을 때 속을 훑어내리는 약을 잘못 복용하여 드디어 폐병(肺病)에 이르게 되어 계속해서 줄곧 부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병이 처음 났을 때부터 [일이 많아 임금께] 여러 가지 일들을 주청(奏請)해야만 했고, 이로 인해 으레 그렇듯이 [임금의] 꾸지람과 물리침을 당했으나 동료 중에 그를 도와주는 자 없었으니 이 때문에 자주 마음이 편치 않아 그리되었을 것입니다. [남헌이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것은] 비록 천명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인사(人事)로 인해 그리 된 점이 있으니, 이 점이 더욱 애통할 뿐입니다. 제가 지난 달 초에 사람을 보내 사록관을 청했건만 [보낸 사람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또 다시 사람을 보내 거듭 사록관을 간청하였으니, 일이 뜻대로 될 것 같긴 합니다. 그렇다면 우선은 그저 명(命)을 기다렸다가 [저의 사록관직 청원이 받아들여지면] 이곳에서 [저의 임지로 가는 중에] 곧바로 한 번 장사(長沙)로 가서 [남헌의 사당에] 곡이라도 하려 합니다.
[보내주신]『시전(詩傳)』은 이미 받았습니다만, [그런데]「소아(小雅)」는 어찌 보이지 않는지요? 여기서는 일찍이 [그대가「소아(小雅)」를 저에게] 보내셨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어떤 사람에게 부친 것인지에 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더군요. 혹시라도 [저의 우려와는 달리「소아(小雅)」가] 이미 도착한 것이라면, [이 편지를 빌어] 일찌감치 [그대가 나를] 지적해 깨우쳐주심(批喩)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대가 나의] ‘강목(綱目) 가운데는 곧바로 사람들이 베껴내기 힘든 곳’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또한 [제가]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가져 자세히 공부함이 없었음을 고민하고 있으니 [제가] 갈고 닦은 공부가 반드시 마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청컨대 다시 후일을 기다려 주십시오. ‘우레가 빈번하면 위엄을 잃는다(雷頻失威)’는 [그대의] 가르침에 대해 [저로서는] 경건하게 그대의 가르침에 따르고자 합니다. 그대의 여러 가르침이 모두 하나같이 절실하고 마땅하니 삼가 가슴 깊이 새겨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소서(小序)」에 관한 말씀은 헤아려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此人)이 급히 사록관 청할 자를 보내야 한다며, 오래 머물러 있고자 하지 않으니, 따로 [사람을 보내어「소서(小序)」에 관한 그대의] 가르침을 받들어야 할 듯합니다.
[저의 장남 아이인] 숙(塾)을 [그대께서] 수습해 가르쳐 주시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다행입니다. 바라옵건대 다시금 ‘문자를 살피고 따지는 가르침’을 주시는 것 이외에, ‘몸과 마음을 검속하는 큰 요점’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육자수(陸子壽)의 학생 중에 또 흥국(興國)과 만인걸(萬人傑)이 있습니다. 자(字)를 정순(正純)이라 하는데 훌륭한 자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현재 이리로 와서 서로들 모여 “육자정(陸子靜)이 도리어 사람들에게 독서와 강학을 하라고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또 강서(江西)지역 붕우(朋友)로부터 받은 편지에도 또 그렇다고들 말하니, 이 또한 [어려운] 일 하나를 결국 성취시킨 셈입니다. 바삐 이 편지를 쓰다보니 상세한 말씀 다 올릴 수 없군요. 오로지 도(道)를 위해 진중(珍重)하소서.
答呂伯恭
人至, 辱手書, 得聞春來尊體益輕健, 放杖徐行, 又有問花隨柳之樂, 甚慰. 記文定本辭約義正, 三復歎仰, 已送山間, 屬黃子厚隸書, 到卽入石矣.
欽夫竟不起疾, 極可痛傷. 蓋緣初得疾時, 誤服轉下之藥, 遂致虛損, 一向不可扶持. 從初得疾, 又緣奏請數事例遭譴却, 而同寮無助之者, 種種不快而然. 雖云天數, 亦人事有以致之, 此尤可痛耳. 熹前月初遣人請祠, 至今未還, 今又專人再懇, 勢必可得. 只俟命下, 便自此便道一過長沙哭之也.
詩傳已領, 小雅何爲未見? 此但記得曾遣去, 卽不記所附何人. 或已到, 幸早批喩也. 綱目此中正自難得人寫, 亦苦無專一子細工夫, 所修未必是當, 請更須後也. 雷頻失威之喩, 敬聞命矣. 諸喩皆一一切當, 謹當佩服. 但小序之說, 更有商量. 此人亟欲遣請祠者, 不欲稽留之, 別得奉扣耳.
塾蒙收拾敎誨, 感幸不可言. 望更賜程督文字之外, 因語及檢束身心大要, 幸甚幸甚.
子壽學生又有興國萬人傑, 字正純者, 亦佳. 見來此相聚, 云子靜却敎人讀書講學. 亦得江西朋友書, 亦云然, 此亦皆濟事也. 匆匆作此, 未及詳, 唯爲道珍重.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 주희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보낸 33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앞의 32번째 편지에 이어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봄 3월에 씌여진 것이다. 사록관 청원(祠請), 남헌의 죽음과 장례 문제, 남헌이 죽기 전에 조정에 올린 상주문, 주자가 여백공에게 부탁한 백록동서원기, 시경에 관한 주자의 의견 등이 언급되고 있다.
오래 소식 듣지 못했습니다. 마침 반복주(潘復州)가 와서 대략 [그대의] 동정(動靜)에 관해 듣고서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늦봄인지라 날씨가 청명하고 화창하니 그대의 생활도 다복하리라 믿습니다. 저의 사록관 요청에 대해 [조정에서는] 아직까지 끝내 [어떻게 하라시는] 명(命)이 없습니다. 어제 다시 사람을 보냈지만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일이] 이와 같이 되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내 마음은 이미 [이곳을] 떠나버린 상태인지라 [몸이] 여기에 머물러 있으나 특별히 좋아할만한 상황이 없어, 하는 일마다 모두 나태해져 있는 형편입니다. 비록 억지로라도 ‘하루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계획해서 해 나가고는 있지만 끝내 지극한 공부는 없습니다. 관리들과 백성들은 [내가 이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은 알고 있기에, [상관인 나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도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을 부리는 데 마음과 힘을 갑절로 허비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무엇 하러 고생해가며 이런 악업(惡業)을 짓는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때문에 돌아가고픈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지만 도대체 어떤 계책을 내야 할지 알 수가 없군요.
형주(荊州)로부터 날아온 부음(訃音)에 관해서는 아마도 앞서 [제가 당신께] 보낸 편지에서 알려드린 듯합니다. [그 후 약] 두 달을 지나오면서 한 순간이라도 그 일에 생각이 미치면 문득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곤 합니다. 벗[남헌]의 오래된 편지(舊書)가 도착함에 [이를 보는 사람마다] 서로 조문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도가 쇠약해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강서(江西)로부터 온 편지에 따르면, 그[장남헌]의 관을 이미 위공(魏公)의 분묘있는 데로 옮겨 나란히 장사지내었다고 합니다. 어제 사람을 보내 제수를 올렸습니다만 아직 [심부름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주 황보사(江州 皇甫帥)의 아들이 1년 전에 그곳에 가서 그[장남헌]가 아직 병들기 전에 여러 차례 [조정에] 주청을 드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또 남들로부터 여러 차례 기만을 당했고, 궁중의 여론도 남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합니다. 또한 단교의용군(團敎義勇軍)에 대해 조정에서는 보통 수준의 물전(物錢)조차 지급해주지 않았으며, [의용군이] 해산하던 날, 사람들이 [겨우] 500금(五百金)을 얻어 갔다 합니다. 이 때문에 상하 간의 감정이 매우 화목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남헌에게] 자연히 질병이 생긴 거라고 하는군요. [남헌의 죽음을 초래하게 된] 발단이 여기에서 말미암았다니, [이는 이 사실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통분(痛憤)케 하는군요. 또한 이를 계기로 오늘날과 같은 험한 시대에 [더 이상] 벼슬살이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헌이 [죽기 전 올린,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에야 조정에 올라간 상주문은 이에 사람들에 의해 석본(石本)으로 모각(摹刻)되어 사방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니, [이 소식 역시 저를] 지극히 편치 않게 하는군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남헌의 아우인] 장정수(張定叟)의 뜻이었다 합니다만, 그것은 제대로 된 일처리가 아닙니다. 마땅히 이러한 지경에는 이르지 말았어야 했다고 봅니다만 [속 사정이 구체적으로 어떤한지에 대해] 깊이 깨닫지는 못하겠습니다. [남헌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상주문(遺奏)은 [그대가] 이미 보았을 것 같아 다시 기록해 보내드리지 않겠습니다. 생각건대 [만약 그대가 남헌의 이 유주(遺奏)가 담고 있는] 이와 같은 곡절에 관해 들으시게 되시면 또한 깊이 개탄하시게 되실 것입니다.
「백록동서원기(洞記)」에 관해서는 황자후(子厚)께 사람을 보내 예서(隸書)로 써 주실 것을 부탁드렸는데 아직 [심부름 간 사람이] 도착하지 않아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내가] 비록 여기를 떠나더라도 내 후임자가 반드시 그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18일에 이미 백록동 서원에 들어가 개강(開講)하고, 낙성(落成)도 했습니다. 강론한 내용(講義)은 그저『中庸』1장의 의미를 강론하면서 제가 이미『中庸或問』에서 언급했던 내용에 불과한 것이어서 다시 기록해 보내드리지 않습니다.
「시서(詩序)」에 관해 그대의 의견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雅)와 정(鄭)’ 이 두 글자를 보건대, ‘아(雅)’는 아마도 대아(大雅) ․ 소아(小雅)인 듯하고 ‘정(鄭)’은 아마도 정풍(鄭風)인 듯 합니다. [그러니] 마땅히 [그대가 주장 하신 바] ‘대개 [공자께서 산(刪)하신 이후『시경』에 실려 있는 모든] ‘풍(風)’은 ‘아(雅)’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논어』등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정풍(鄭風)은 시경의] 정풍(鄭風) 밖에서 별도로 [공자 당시에는 존재했었지만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 그 당시의] 정풍(鄭聲)을 구해야 한다’는 [그대의] 주장은 성립되기 힘들 듯합니다. 공자가 [시를] 산정해서 기록할 때, 그 선한 것을 취해 법으로 삼으시고, 그 악한 것을 취해 경계하셨으니, [선과 악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인께서] 어찌 그 전적 자료를 없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성인의] 이 의사는 매우 통달하여 막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상도 또한 저절로 공평정대(公平正大)하여, 허다히 머뭇거리며 힘을 낭비한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모르긴 합니다만 그대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한씨 어른(韓丈)이 상요(上饒)에서 쓴 편지 및 우연지(尤延之)의 편지를 얻었는데, 모두 [나로 하여금] 노형께 ‘우선 인간사(人事)를 쉬고 서책도 버리며, 정신을 오로지하고 의약(醫藥)을 가까이 하도록’ 권고하라 합니다. 보잘것없는 [저의] 뜻 또한 [그대가 이렇게 함이 옳다고 여겨] 이 점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그대가] 이 점에 다시금 조금이라도 뜻을 두신다면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바입니다. 배우려하는 자들이 오면 대략 역량에 따라 그들을 대접하고, 다시는 지난 날 했듯이 제생을 위해 출제하여 과제물 대신 시험을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맏아들 놈인] 숙(塾子)이 [그대 계신] 그 곳에 있으니, [그 놈으로서는 당연히] 이렇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감히 사사로운 계책으로 이 지극한 정리를 방해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제 자식 놈으로서는 그대의] 밝은 지도를 받음이 더욱 마땅할 것입니다.
양교수(楊敎授)가 사람을 보내왔기에, 이 [편지를] 써서 질문을 드립니다. 자약(子約)은 별도의 다른 편지를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자약(子約)이] 이전에 제게 보내오신 편지 말미에서 해주신 경계는 [저를] 깊이 경계시키고 계발시켜 주신 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나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신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요즈음 감히 다시 [사록관직을 요구하는] 청을 올릴 수가 없군요. [그럭저럭 견뎌낼 만한] 한두 가지 일은 잘 참아내고 있습니다. 다만 그대 소식이 늦어짐을 애석해 할 뿐입니다. [이 점이야말로 제가 참기 힘든 일이올시다.]
答呂伯恭
久不拜書, 適潘復州來, 略聞動靜, 粗足爲慰. 比日春晩淸和, 伏惟尊候萬福. 熹祠請竟未聞命, 昨再遣人, 亦無消息, 不知何故如此? 此心已去, 住此殊無好况, 百事皆懶. 雖彊爲一日必葺之計, 終是無十分功夫. 吏民知其不久, 亦不馴服, 倍費心力駕馭. 細思何苦造此惡業? 以此思歸益切, 不知所以爲計也.
荊州之訃, 前書想已奉聞. 兩月來, 每一念及之, 輒爲之泫然. 朋舊書來, 無不相弔. 吾道之衰乃至於此, 爲將奈何? 得江西書, 傳聞其柩已徑歸魏公墳所祔葬矣. 昨遣人致奠, 亦未歸, 未知端的也. 江州皇甫帥之子歲前至彼, 見其未病時奏請多不遂, 且多爲人所賣, 中語亦不與之 : 團敎義勇, 亦不與支例物錢, 放散之日, 人得五百金而去, 以此上下之情不甚和輯, 馴致疾病, 端亦由此, 益令人痛憤. 又以知今日仕宦之不可爲也. 但其身後所上遺奏, 乃爲人摹刻石本, 流傳四出, 極爲非便. 或云是定叟意, 其不解事不應至此, 殊不可曉也. 遺奏想已見之, 更不錄去. 想聞此曲折, 亦深爲慨然耳.
洞記專人託子厚隸書未到, 甚以爲撓. 然雖去此, 同官必能爲成其事也. 十八日已入院開講, 以落其成矣. 講義只是中庸首章或問中語, 更不錄呈也.
向來所喩詩序之說, 不知後來尊意看得如何?. ‘雅鄭’二字, ‘雅’恐便是大․小雅, ‘鄭’恐便是鄭風, 不應槪以風爲雅, 又於鄭風之外別求鄭聲也. 聖人刪錄, 取其善者以爲法, 存其惡者以爲戒, 無非敎者, 豈必滅其籍哉? 看此意思甚覺通達, 無所滯礙, 氣象亦自公平正大, 無許多回互費力處. 不審高明竟以爲如何也?
得韓丈上饒書及尤延之書, 皆令勸老兄且屛人事, 捐書冊, 專精神, 近醫藥, 區區之意亦深念此. 幸更於此少留意焉, 千萬之望. 學者之來, 略隨分量接之, 不可更似前日命題改課, 爲此無益而有損也. 塾子在彼, 不能無望於此. 然不敢以私計妨此至情, 尤當蒙見亮耳.
因楊敎授遣人, 草此爲問. 子約老友不及別書. 前日書尾之戒甚有警發, 近日更不敢申請, 已忍却一兩事, 但惜乎聞命之晩耳.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보낸 34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6월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에 앞서 주자는 무술년(1178년, 주자 49세) 8월 남강군 지사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3월 임지에 도착했다.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3월 9일에 효종은 “감사와 군수들은 백성들의 이해득실에 관련된 것을 숨김없이 보고하라”는 조칙을 내렸고 주자는 이 조칙에 응하여 4월 21일 경자응조봉사(庚子應詔封事, 주희집 11권)을 올렸다. 그러나 주자의 봉사문 중 일부 내용이 문제가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희는 본 편지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초래하게 된 자신의 성품과 관련하여 깊이 있는 자기반성을 가하고 있다. 아울러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절친한 친구 여동래의 조언을 청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 편지에서 주희는 흠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옥송(獄訟) 문제, 육자수 형제에 관한 간략한 평가, 양원범이 추진하고 있었던 주자 관련 비문 문제, 여동래에게 부탁한 ‘백록동서원기’에 관한 것 등을 언급하고 있다.
원범(元範)이 보낸 인편이 돌아옴에 따라, [그대가] 손수 쓴 글을 전해주어, 근자에 [그대의] 존체(尊體)가 더욱 가볍고 건강해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또 여러 조목에 걸친 그대의 깨우치심을 받자옵고 저를 아끼고 생각해주시는 그대의 깊은 정을 느낍니다. 서신을 받은 후 [곧바로] 비가 온 나머지 무더워 숨이 막히는 듯 합니다만, 엎드려 바라옵건대 여유롭게 즐거운 마음 지니시고 하시는 일 모두에 만복이 깃드시길 빕니다. 저는 보문(報聞)의 명(命)을 받자온 이래로, 감히 다시 청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저의] 이 전날의 망발(妄發)은 본래 은밀히 성총(聖聰)을 돕고자 한 것인데, 어제 [상께서 저의 봉사를] 문하후성(門下後省)에 내려 보내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려운 때에 신하가] ‘말을 엄밀하게 하지 않으면 몸을 잃게 된다’는 교훈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온 몸을 다 바쳐 주인을 섬길 뿐 생사화복은 오직 주인 하시기에 달린 것이어서 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엔 그저 서너 너 댓 사람의 짐 나르는 심부름꾼과 생질 아이 한 둘이 있을 뿐이어서, 가고 머무는 것도 그다지 힘 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숨죽이고 우레와 같이 위엄 있는 [임금님의 명]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이 전날 자명(自明) 등이 올린 문자가 [즉 그들이 올린 상소문에서, 임금님의] ‘근습(近習)’ [운운하는 데까지]에 미친 것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그들의 상소문을] 모두 [문하후성(門下後省)에] 내려 보내지는 않으셨는데, [제가 이번에 올린] 이 글은 이에 문하후성(門下後省)에 내려 보내셨다고 하니, 또한 [그 속사정을] 깊이 깨닫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구차스럽고 어리석은 충성심으로는, 아직도 만에 하나 [상께서 저의 의견을 시행해주시리라는] 요행을 바라지 않을 수가 없군요.
장흠부(張欽夫)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 듯 반년이 흘렀습니다만 매양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일찌기 슬픔으로 인해 목이 메이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 동지들의 편지가 올 때마다, 또한 서로를 위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와 같은 상황이]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개탄스럽게 하는군요. [남헌의 죽음은] 대개 우리 도의 쇠미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금 당대의 세태를 두고 보더라도 크게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접때 사람이 돌아온 후 지금까지 정수(定叟)의 편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재차 사람을 보내 [남헌의] 장례 시 제물을 올리게 했습니다. [남헌의] 소식을 대할 때마다 슬픔에 목이 메여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오직 그대만이 [남헌을 향한 저의] 이와 같은 속마음을 깊이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의 이와 같은 속 마음을] 붙들어 주시는 그대의 글이 여기에 도착하고 보니 이 때문에 더욱 눈물이 앞을 가리는 군요. 슬프고도 슬픈 일입니다. [남헌께 올린 그대의] 제문은 진실한 내용으로 가득 찬 가운데, 타인들로서는 도저히 형용(形容)해낼 수조차 없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탄복하는 바입니다. 이제 남헌이 떠난 후, [제가] 또 한 편의 제문을 지은 것이 있어 [그대를 위해] 삼가 기록해 보내 드립니다. 흠부(欽夫)가 전에 편지를 보내와서 이르기를, [그가] 저의 여러 경설(經說)을 보고, 이에 ‘한가한 가운데 이러한 업에 나아갈 수 있음은 자못 하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남헌이 하신 이 말을 상기하면서, 그대에게 보내는 이번 이 편지에는 경학에 대해] 지금까지 강학해온 내용과 [강학을 위해 서로 만날 것을] 기약하고자 하는 [저의] 뜻을 대략 서술하고 아울러 우리 도가 외롭고 곤궁한 데 처해있는 상황을 탄식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만, 흠부(欽夫)[의 도와 덕]에 관해서는 발명(發明)하지 못했군요.[즉 흠부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해내지는 못했다는 말인 듯]
그대의 훌륭한 글에서 서술하신 바 [남헌이] ‘선을 따르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여, 말하는 자로 하여금 할 말을 다 할 수 있게 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대는 소견이] 편협한 저에 대해서도 [남헌에 대해 하신 것과 같은] 그와 같은 은혜를 베푸시니, [부끄러움으로 인해] 놀라는 바 더욱 많습니다. 평소(平日)에도 또 [그대가 말씀하신 바 ‘남의 선을 따르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라’는]이 한 구절에 경복(敬服)할 줄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배울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심신에] 해묵은 병은 여전한데 어떤 약으로 대처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근자에 깨달은 바로는 [제가] 온갖 응사접물을 해나감에 있어서 매사 약간이나마 ‘마땅함을 지나친 점’이 필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정돈해야만 사방팔방으로 정정당당하여 크고 작은 허다한 실수를 없앨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번거로움을 참아내고, 남의 과오를 용인해 주라 하신 그대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공경히 그대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제 [정사(政事)의] 대강에 대해서는 본디 일찍부터 감히 ‘방종하고 게을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때때로 구차한 마음이 있음을 면치 못하여, ‘무엇하러 스스로를 이와 같이 고생시키는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때문에 일에 마음을 두고 유의하다가도 돌아서면 곧바로 빠트리고 잊게 되는 경우도 있으며, 또 감히 마음과 힘을 너무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 생각하여 남에게 맡겨버리는 경우도 있으며, 또한 위로 말은 하나 청을 넣을 수는 없고 아래로 가르치긴 하나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므로, [자연히 저의 경우에 있어서도] 뜻이 꺾이고 생각이 흩어져 그럭저럭 이전에 하던 식으로 해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2개월 이래로 이미 [조정에서는 저의 사면 청원을] 윤허하지 않는다고 지시하셨으니, [이 명을 받은 저로서는] 감히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런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 것은 결국] 또 광망한 짓(狂妄之擧)을 하여, 귀양(竄謫)갈 준비나 하고 있는 셈이니, [저의 이런 식의 생각은] 더욱이 오랜 계책이 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몸을 군의 관사에 기탁하고는 있으나 뜻은 단지 ‘제비가 바람에 나부끼는 천막 위에 둥지를 튼다’는 시구의 형국과 흡사합니다. [저의 봉사문(封事文)에서의] 언사(言事)는 본래 단지 임금께서 내리신 지시에 의거하여 민간(民間)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목조목 갖추어 말씀드리고자 한 것일 뿐이었지만 결국 또한 생각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마땅함을 상실하게 되었고 드디어 그만 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언설을 하게 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제가 임금님께 올린 봉사문(封事文)의] 처음부터 끝까지 병의 뿌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옥사와 관련된 송사문제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인지라 감히 초초(草草)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뿐만 아니라] 남들도 또한 [나의 옥송 처리 방식에] 지나친 점이 많다고들 합니다. 즉 [나의 옥송처리 방식이] 말하자면 숙(塾)이 논한 바 제갈공명의 정형(政刑)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가령] 한결같이 구차스럽게도 당장 편한 것만을 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간흉한 자들을 보호 양성하고, 선량한 백성을 동요시키면서 결국은 세속의 흐름에 휩쓸려가면서 한 때의 명예를 사게 된다면 이는 평소 본심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과연 어찌해야만 중도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대는] “남헌의 제자들 중에는 득력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고 논하신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진실로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즉 남헌)의 경우는 오히려 [본인이 아닌, 제자들 즉] 타인이 힘을 얻지 못한 경우이지만, 이제 스스로 차근차근 살펴보니 [저의 경우는, 저에게 배운 제자들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제 자신 즉] 이에 제 스스로 일찍이 힘을 얻은 적이 없는 경우이니 이것이 더욱 두려워할만한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노형께서 보시기에 저의 이 병통을 어떻게 고쳐나가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다행히 한 마디 말씀을 가지고 긴요하고 절실한 곳에 나아가 가르침을 보여주신다면 이야말로 천만번 바라던 바입니다. 육자수 형제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육자정은 대략 가을 서늘할 즈음 려산 언덕에 놀러 올 듯합니다. 그러나 [자정이 놀러오게 될] 이 때는 아마도 이미 주인이 바뀐 상태일 것입니다. [육자수, 육자정과 같은] 그런 형제를 요즈음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육자정은 아직도 옛날 생각을 약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그의 문인(門人)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육자수가 [육자정을 평가하기를] 육자정이 비록 이미 발걸음은 바꾸어 옮겼으나 몸까지 옮기지는 못했다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와 같은 형세가 오래되면 또한 반드시 저절로 [그 자신의 몸을 올바른 길에로] 옮겨올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아호(鵝湖)에서 강론하던 때 [그들이] 어떤 기세였던가요? 이제 어찌 열에 일곱 여덟을 버리는 데 그치겠습니까?
원범(元範)이 [나를 위한] 비(碑)를 세우려 한다는 말에 관해서는 접때 일찍이 [원범으로부터 그] 내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점에 관해, 원범에게] 일찍이 ‘나는 본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사람들이 [나, 주원회의 비를 세우려는] 노형을 비웃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이러한 의론은 이미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제 다시 그 논의를 재개했다 하는군요. 이 소식을 들으니 [부끄러움으로 인해] 땀이 흐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로서는] 이미 그대가 [원범을 깨우쳐서 비 세우는 일을] 그만두게 해 주신 은혜를 입었으니, [원범으로서도, 그 일을] 필시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저는] 늘 성품이 [너무] 곧이곧대로여서, ‘광범위한 비유를 담은 은미한 말이야말로 사람들을 선에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남이 조그마한 실수를 하는 것을 보더라도 매양 참으며 말하지 않으려고 [저 나름대로는] 노력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부득이하여 일단 말하기 시작하면, 곧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척척 말해버리게되어 반드시 일을 어렵게 만든 뒤에야 그만두게 됩니다. 이야말로 [저의 지나친 양강(陽剛)함으로 인해 생긴 병통인] ‘태양지여증(太陽之餘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숙(塾)의 편지를 보니, 그대가 ‘근자에 가묘를 건축하여 종법을 확립하겠다’고 말씀하셨다는군요. 이 문제는 [저로서도] 토론하고 싶은 내용이니, 편지를 통해 현재 행하여지고 있는 조목조목의 내용을 자세히 일러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백록동서원(白鹿書院)에는 [그대의 ‘백록동서원기’를] 받자와 [그것을 서원 안에다]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대의 ‘백록동서원기’문에는] 비단 일의 본말(本末)에 대해 차후에 상고함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학문(學問)의 시종심천(始終深淺)의 순서를 드러내 밝혀주신 점이 더욱 지극하고 간절합니다. 이 나라 선비들 중 그대의 가르침을 깊이 받은 자들이 이미 많습니다만 [그대의 가르침이] 사방으로 전해짐에 따라 [그대의 가르침을] 사숙(私淑)하는 행운을 누리는 자 또한 적지 않습니다. 삼가 십일본(十一本)으로 서궤(書几)에 투납(投納)했습니다. [십일본(十一本) 안에 있는] 일본(一本)의 겉가죽 꾸민 것(裝褾)이 [남헌이 지은] 염계사당기(濂溪祠堂記)와 짝(對)이 되어 유사하면서도 또한 [이는 염계사당기(濂溪祠堂記)와는 달리] 여러 종류을 섞어 판각하여 나란히 배치한 점이 있습니다. 이천(伊川) 선생과 윤화정(尹和靖)의 필적 중 배접할만한 것이 한 권 있어서 제가 급히 이 일을 시행하고자 하나 그럴 여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천선생께서는 바야흐로 ‘병이 있으면 곧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윤화정께서는 도리어 애당초 본래 죽은 말 고치는 의사인 듯 했습니다. 이 도가 지금까지 전해져 왔습니다만 참으로 아직까지는 쉽사리 일반인들에게는 부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책 살피는 일이 참으로 병을 낫게 하는 데는 마땅치 않습니다. 만약 그만둘 수 없다면 마땅히 분량을 한정해서 매일 약간씩 [정해둔 분량] 그 이하로만 읽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영가(永嘉)로 가는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 편에] 신첨(新簽)이 이곳에 빨리 부임해 줄 것을 독촉하였습니다. [이 곳에 부임할] 그 사람의 성은 설(薛)이요, 이름은 홍(洪)이라 합니다. 설사룡(士龍)의 집안 사람이 아니었던가요? 중간에 가뭄이 심하여 농토의 대부분은 경작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자주 비가 내리긴 합니다만 무더워 숨이 막히는 듯한 날씨가 아직까지 풀리지 않아 한낮에는 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 다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우리의 도를 위해 자중(自重)해 주실 것을 간절히 빕니다. 이만 줄입니다. 6월 6일, 저 주희는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무이산(武夷山) 충우관(沖佑觀) 직비각(直秘閣) 저작랑(著作郞), 백공(伯恭) 계형(契兄)께 계(啓)를 올립니다.
훌륭하신 자제분께서도 날로 학업이 성장해 가시리라 생각됩니다. 주자충(周子充)이 결국 대정(大政)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실을] 일찍이 그대에게 고한 적이 있습니까? 사태가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만약 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면, 곧 더욱 더 할 말이 없을 것인 즉, 모르겠습니다만 그럴듯한 계책을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요? 저 주희는 다시 [그대에게] 절한 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립니다]. 이에 [저는] 오로지 사람을 숙탁(叔度)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 [숙탁으로] 하여금 곧바로 돌아오도록 하렵니다. [제가] 빠른 시일 안에 [그대의] 가르침을 주십사하는 뜻을 전하는 몇몇 글자에 대해, 혹시라도 [그대가 직접 응답하기가 곤란하시다면] 여자약(子約)에게 [그대의 대답 내용을] 말로 전해 주시어 그로 하여금 [그대의 답을 저에게] 알리도록 해 주세요. [제가 편지전달을 위해 보낸 사람이] 대개 그 곳에 도착하여 [저의] 아이와 며느리(兒婦)의 소식(消息)을 물을 것인 즉 [제가 보낸] 그 사람이 신속히 돌아올(速還) 수 있도록 [그대가 조처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答呂伯恭
元範人回, 承手字, 獲聞比日尊體益輕健, 爲慰之劇. 又承誨諭數條, 尤荷愛念. 信後雨餘蒸鬱, 伏惟玩心有相, 起處享福 熹自被報聞之命, 不敢復有請. 但前日妄發, 本蘄密贊聖聰, 昨日乃聞降付後省. 不密失身, 從是始矣. 然業已致身事主, 生死禍福惟其所制, 非己所得專也. 此間只有三五檐行李及兒甥一兩人, (3-1503)去住亦不費力, 但屛息以俟雷霆之威耳. 前日如自明諸人文字及近習者, 皆不降出, 此乃付外, 又不可曉. 區區愚忠, 猶不能無冀幸於萬一耳.
欽夫之逝, 忽忽半載, 每一念之, 未嘗不酸噎. 同志書來, 亦無不相弔者, 益使人慨歎. 蓋不惟吾道之衰, 於當世亦大有利害也. 自向來人還, 至今不得定叟書, 今日方再遣人往致葬奠. 臨風哽愴, 殆不自勝. 計海內獨尊兄爲同此懷也. 援筆至此, 爲之淚落. 痛哉痛哉 祭文眞實中有他人所形容不到處, 歎服. 今此人去, 亦有一篇, 謹錄呈. 蓋欽夫向來嘗有書來, 云見熹諸經說, 乃知閑中得就此業, 殆天意也. 因此略述向來議學與所以相期之意, 而嘆吾道之孤且窮, 於欽夫則不能有所發明也.
盛文所敍從善受言, 使言者得自盡, 施於褊狹, 所警尤多. 平日亦知敬服渠此一節, 而不能學. 今老矣, 而舊病依然, 未知所以藥之也. 不唯如此, 近日覺得凡百應接, 每事須有些過當處, 不知如何整頓得此身心四亭八當, 無許多凹凸也. 耐煩忍垢之誨, 敬聞矣. 今大綱固未嘗敢放倒, 但不免時有偸心, 以爲何爲自苦如此? 故事有經心而旋卽遺忘者, 亦有不敢甚勞心力而委之於人者, 亦有上說不從, 下敎不入而意思闌珊, 因循廢弛者. 此兩月來, 旣得不允指揮, 不敢作此念. 又爲(3-1504)狂妄之擧, 準備竄謫, 尤不敢爲久計. 身寄郡舍, 而意只似燕之巢於幕上也. 言事本只欲依元降指揮絛具民間利病, 亦坐意思過當, 遂殺不住, 不免索性說了. 從頭徹尾, 只是此一箇病根也.
獄訟極不敢草草, 然見人說亦多過處, 乃與塾子所論諸葛政刑相似. 然欲一切姑息, 保養姦凶, 以擾良善而沽流俗一時之譽, 則平生素心 深竊耻之, 亦未知其果如何而得其中也. 所論荊州從遊之士多不得力, 此固當深警. 然彼猶是他人不得力, 今自循省, 乃是自己不曾得力, 此尤爲可懼也. 不知老兄看得此病合作如何醫治? 幸以一言就緊切處見敎, 千萬之望. 子壽兄弟得書, 子靜約秋凉來遊廬阜, 但恐此時已換却主人耳. 渠兄弟今日豈易得? 但子靜似猶有些舊來意思. 聞其門人說, 子壽言其雖已轉步而未曾移身, 然其勢久之亦必自轉. 回思鵝湖講論時是甚氣勢? 今何止什去七八耶?
元範立碑之說, 向曾見告. 嘗語之云: ‘熹固不足道, 但恐人笑老兄耳.’ 意其已罷此議. 不謂乃復爲之, 聞之令人汗下. 幸已蒙喩止, 必且罷休矣. 平生性直, 不解微詞廣譬, 道人於善, 故見人有小失, 每忍而不欲言. 至於不得已而有言, 則衝口而出, 必至於傷事而後已, 此亦太陽之餘證也.
(3-1505)塾書說近建家廟, 立宗法, 此正所欲討論者, 便中得以見行條目子細見敎爲幸.
白鹿書院承爲記述, 非惟使事之本末後有考焉, 而所以發明學問始終深淺之序, 尤爲至切. 此邦之士蒙益旣多, 而傳之四方, 私淑之幸又不少矣. 謹以十一本投納書几. 內一本裝褾與濂溪祠堂記爲對, 又有雜刻數種幷往. 伊川先生與尹和靖者可背作一卷, 此人亟行不暇也. 然伊川先生才說病便有藥, 和靖却似合下便作死馬醫. 此道之傳, 眞未易以屬人也.
觀書實非養病所宜, 若不能已, 當有以程之, 日讀若干以下也.
因人往永嘉督新簽赴任附此. 其人姓薛名洪, 不是士龍之宗族否? 中間旱甚, 田幾不可耕. 今幸數得雨, 然鬱蒸未解, 亭午揮汗. 未能盡所欲言, 惟千萬爲道自重, 不宣. 六月六日, 熹頓首再拜, 上啓伯恭武夷直閣大著契兄坐下.
令子想日佳茂. 周子充遂參大政, 不知嘗有以告之否? 至此若復喑黙, 則更無可說, 不知其計安出也. 熹又拜. 此專遣人至叔度處, 令便歸. 告早批數字或口授子約見報. 蓋至彼問兒婦消息, 望其速還也.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35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7-8월 경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는 주자가 남강군 지사로 있을 때 큰 가뭄을 겪은 후 황정(荒政)에 대비하면서 썼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주희는 34번째 편지에 이어 자신이 올린 봉사가 정치적 반대세력에 의해 조정에서 분분하게 논의되는 사실을 염려하며 근신해야겠다고 말하고 있다. 주희는 이 해 4월에 효종이 내린 구언(求言) 조서에 응하여 금나라와의 강화설에 반대하는 논리를 중심으로 봉사를 올렸었는데, 매우 강도 높은 현실비판을 담고 있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편지의 내용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주희의 마음의 한 편린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아들 숙(塾)의 공부를 궁금해 하고, 마지막으로 위급한 시사 상황에는 보다 철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승국(承局)께서 돌아오심에, 그대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듣자하니 요즈음 [그대는] 존후만복(尊候萬福)하시다 하고, 또 그대의 필찰(筆札)을 자세히 살펴보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건강이 좋아진 듯하여], 매우 위로가 됩니다. 제가 [조정으로부터 저의 사록관 청원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지시를 받은 지 이미 3개월이나 지났습니다. 하여 바야흐로 다시금 사록관직을 청하는 글을 올릴까 합니다. 이번에 만난 가뭄(旱災)의 경우 아직은 기도로도 [하늘을] 감동시켜 이르게 할 수는 없나 봅니다. 이제 올벼는 이미 구할 수 없게 되었거니와 만약 여기다 또 다시 수일 내로 비가 오지 않는다면 늦벼조차도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피건대 일이 되어가는 형세로 보아 반드시 큰 낭패가 생겨날 것이 틀림없기에, 마침내 감히 사직하겠다는 말도 못하고 그저 노둔하나마 최선을 다해왔을 따름입니다. 만약 광범위한 실패로 인해 나 스스로 죄목에 저촉된다면 그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일 뿐입니다. 가만히 일의 형세를 살피건대 만에 하나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으면, 필시 군량미 공급이 제일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고 이 문제가 해결된 후에라야 [조정의 관심이 백성들의] 진휼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다방면으로 조처해 나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일이 제대로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떨지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소문을 들으시고 나의 사려가 미치지 못한 점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니 너무나 다행스럽습니다.
제의 봉사(囊封)를 후성(後省)에 내려 보낸 사실을 저리(邸吏)가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 당시 참으로 가볍게 봉사를 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의를 쌓으며 때를 기다리다가 의견을 표해야 한다는 그대의 말씀이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속담에서 말하는 대로 “금년에 내가 눈 속에서 얼어 죽으면 내년에 어떤 사람이 큰 사발로 수제비를 먹는지 모르겠구나!”라는 경우가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이런 말을 하자니 가슴이 아픕니다. 괴로운 일입니다. 삼가고 엄밀하게 하라는 [그대의] 경계를 이제 들었습니다. 애초부터 다만 감히 [봉사의] 초본(草本)을 남들에게 보이지도 않았고, 또 사람들과 [봉사] 속에서 말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감히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것과 함께 진언한 [몇 가지] 제목을 이야기 하지도 않았으며, 누설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뭔가를 누설했다고 누군가가 나를 헐뜯는 모양인데] 수년 전의 풍속은 오히려 이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는 깊이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저를 옹호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은 곧 황제께서 꾸짖고 노여워한 일이 있었다는 의미이니 은밀하게 알려주심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근래 한발의 재앙으로 인하여 온갖 일이 느슨해지고 풀어졌습니다. ‘비와 이슬이 눈과 서리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또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된 것은 이전에 진실로 지나친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륙(二陸)과는 그 후로 아직 서신을 주고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황(救荒)의 대책이 시급하나 아직까지 사람을 보내 물어볼 여가가 없습니다. 육자정은 와서 산에 놀러가도 싶어 하지만 이 곳의 화색(火色)이 이와 같은 상황임을 전해 들었을 터인데, 그런데도 올 수 있을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사당 세우는 등의 일은 매우 좋습니다. [그대가 보내오신 가묘(家廟)의 조목(條目)에 대해서는] 다른 때에 수정해서 마땅히 그대의 가르침을 받아야겠습니다. 소강절의 글을 새긴 것이 매우 오래 되었는데, [제가 참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어찌된 연고로 일찍이 [그대에게 이를] 붙여 보내지 않았는지요? 이제 다섯 본(本)을 보내드립니다. 판각한 강절의 글을 [아마도 그대는] 남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입니다. 또한 각각은 한 둘씩 병치(幷致)했습니다. 숙(塾)이 과연 [실력이 늘어 맡은] 일을 점차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되었는지 어떤지요? 사람의 자식 되어 단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뜻만 가지고 있으면 가망이 있는 것인데 이 놈은 정녕 이런 근본이 없으니 제가 걱정입니다. 이제 [이놈을] 귀향하게 해서 과거시험이나 보게 해 주십시오. 그놈이 길 떠날 때 단단히 주의해 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이 끝나면 우선 이리로 오라고 해 주십시오. [그 놈이 여기로 오면] 글로 다 할 수가 없는 [그대로부터 받아야 할] 가르침을 [그놈과의] 대화를 통해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다만 [숙(塾)이 그대의 귀중한 말씀을] 붙일 만한 곳이 되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책을 많이 보시지 않았다고 하시니 [그대 건강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시는 결국 어떻게 지어보아야 할지요? 근래에 [시에 관한] 이전의 학설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이전의 학설이란 것이] 흡사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 것’과 비슷하여 끝내 마음에 편안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군요. [제가] 인편에 [그대께서] 定하신 [시설(詩說) 중 큰] 절목(節目)이 있는 곳 한 두 편을 구해 본다면, 아마도 경발(警發)할 바가 있을 듯합니다. 우연지(尢延之)께서 그대가 지으신 장경부(張敬夫)의 제문을 보고서 ‘뜻은 지극하나 언어선택에 있어서 평소의 따뜻하고 윤기 있었던 [그대의 글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또한 그것(그대의 제문이) 과연 우연지의 말과 같은지 자못 의심이 됩니다. 그[우연지]가 이제 [나로] 하여금 그대를 깊이 권면하고 또 사려를 줄이도록 충고해 달라 하니 그[우연지]가 그대[동래]를 생각하는 뜻이 매우 절실합니다.
새로 참지정사가 된 분(新參)께서 근래 [그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까? 대승기증(大承氣證)에 사군자탕(四君子湯)을 쓰면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별다른 증세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노형은 그와 친분이 두터우니 따끔하게 훈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과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모두 물이 새는 배 위에 실려 있는 형국입니다. 만약 이등급 정도의 재간이라도 지닌 뱃사공)을 불러 [다행스럽게도 그가] 술에 심하게 취한 상태가 아니라면, 위급한 상황에서 그래도 [그를]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재차 장사(長沙)로 보낸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전날 인편으로 또 정수(定叟)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저로서는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에 정수(定叟)에게] ‘금일 사록관을 청하는 것이야말로 곧 장경부의 유계(遺戒) 중 제일 중요한 것을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늘 이 마음을 잊지 마시고 나아가 이를 확충해 나가신다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노형께서도 편지를 통해 [정수(定叟)를] 권면해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대 가르침 받자올 날을 기약할 수 없군요. [그대가 그리워 그대 계신 곳으로부터 날아오는] 바람을 맞아 길게 목을 늘여 봅니다. 우리의 도를 위해 자중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答呂伯恭
承局回, 承書, 得聞比日尊候萬福. 細觀筆札, 又比前日不同, 深以爲慰. 熹前被不允指揮, 今已三月, 方始再上祠請. 適此旱災, 祈禱未能感格. 今早禾已不可救, 若更數日不雨, 卽晩禾亦不可保. 觀此事勢, 必致大段狼狽, 遂不敢言去, 只得竭盡駑力. 若自以曠敗抵罪, 則無可奈何耳. 竊觀事勢, 萬一不稔, 卽軍食所須是第一義, 而後可及賑恤. 已多方擘畫, 未知其濟否如何. 切幸因風有以見敎於其思慮之所不及者, 幸甚幸甚.
囊封付出, 乃邸吏云爾. 方竊怪之, 當時誠亦輕發, 然今已不可悔矣. 積其誠意, 待時而發, 固所當然. 但恐如諺所謂 ‘今年自家雪裏凍殺, 不知明年甚人喫大椀不托’耳. 言之痛心, 苦事苦事 謹密之戒, 乃今聞之. 初但不敢以草本示人及與人說其中所論, 不謂乃幷此題目不得漏洩也. 數年前風俗尙不如此, 自今當深戒(3-1507)之耳. 旣云有調護者, 卽是嘗有譴怒之意, 亦幸密見告也.
近緣旱虐, 百事放寬, 又覺得雨露太勝雪霜. 然亦且得如此, 前日誠有過當處也. 二陸後來未再得信, 救荒方急, 未暇遣人問之. 子靜欲來遊山, 聞此中火色如此, 又未知能來否耳. 立廟等事甚善, 他時脩定, 當得求敎也. 康節刻成甚久, 何故不曾寄去耶? 今往五本. 他刻恐欲分人, 亦各幷致一二也. 塾不知果能漸解事否? 人家後生, 只得自有意做好人, 便有可望. 此卽正坐無此根本, 使人憂心耳. 今令歸鄕應擧, 臨行更望丁寧之也. 試罷略令此來, 有可見敎, 書不能盡者, 幸以語之. 但恐亦不是寄附處耳. 知看書不多, 甚善. 詩不知竟作如何看? 近來看得前日之說猶是泥裹洗土塊, 畢竟心下未安穩淸脫. 便中求所定者節目處一二篇一觀, 恐或有所警發也. 尢延之見祭敬夫文, 以爲意到而詞語不若平日之溫潤, 鄙意亦頗疑其如此. 渠令深勸且省思慮, 意甚拳拳也.
新參近通問否? 大承氣證, 却下四君子湯, 如何得相當? 然尙幸其不發病耳. 老兄與之分厚, 須痛箴之. 吾輩與百萬生靈性命盡在此漏船上, 若喚得副手稍工不至沈醉, 緩急猶可恃也.
再去長沙人未回, 前日因便又作書與定叟, 略致盛意矣. 與說今日請祠, 便是(3-1508)奉行敬夫遺戒第一義, 時時勿忘此心而充擴之, 則甚善. 老兄因書更自勸勉之爲佳耳. 承敎未期, 臨風引領, 千萬爲道自重.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36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가을 8월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 역시 앞의 편지에 이어 주자가 남강군 지사로 있을 때 큰 가뭄을 겪은 후 황정(荒政)에 고심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주자는 이 일로 인해 몸에 병이 나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고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황정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관원들 간의 불충분한 의사소통으로 인한 문제, 아전들의 안이한 태도 등이 지적되고 있다. 여러모로 고생스럽지만 민간이나 향촌의 선비들이 그래도 조금은 주자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어 보람을 느낀다고도 적고 있다. 편지 말미에, 주자는 시서(詩書) 등에 관한 그의 관심과 아이들 과거시험 등을 언급함으로써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을 보여주고 있다.
오래 동안 소식이 없어 [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요즈음 가을비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대의 심신에 만복이 깃들기를 빕니다. 저는 올 여름과 가을 이래로 가뭄을 물리기 위한 각종 기도회 등으로 분주했으며, 거의 매일 들로 산으로 다니느라 조금도 쉴 수가 없었읍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도] 이미 효과가 없으니 또 부득부 구황(救荒) 대비책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소(郡小)의 재궤(財匱)는 처리할 방도가 없어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다해 궁리해 보느라 드디어 마음 병이 발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몸도 성치 않아] 위는 불덩이요 아래는 홍수라 형세가 매우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이미 급히 사람을 보내 둘째 아이를 부르고 아울러 유자징에게도 [제 사후의 일을] 약속해 놓았습니다. 제가 혹시 죽기라도 한다면 [내가 하던 일을 맡아] 주재할 사람이 없어 걱정입니다. 이미 약도 복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진정이 됩니다만 또 각근(脚跟)병의 고통이 너무나 지독하여 땅을 밟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요 이틀 사이에 겨우 걸음을 옮겨놓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만 그러나 또한 끝내 상쾌하지는 못합니다. 군중(郡中)의 진조(賑助) 검방(檢放) 등의 일은 도리어 약간의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다만 군량미의 경우는 지의(指擬)할만한 바가 없으니(해결할 방도가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주(奏)를 갖추어 기애(祈哀)하고 아울러 [나의] 쇠약해지고 병든 실상을 들어 [현직에서] 파면해 주십사 청할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이 방법 외에] 다시 어떤 방도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물러나 쭈그리고 앉아 [나의 잘못된] 일을 반성하면서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싶습니다만, 일의 형세가 매우 급박하여 나의 생각대로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직은 우선 [만사를] 운수에 맡기고 있습니다만 과연 안식할만한 곳을 찾아 편안히 쉴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올 여름과 가을 이래로 오늘에서 비로소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군요. 민간에서 보리씨를 뿌리고 채소 모종을 할 만한 정도는 되니 [이제는] 거의 백성들이 농사에 마음을 두게 되어 더 이상 떠돌아다닐 생각을 하지 않게 될 듯 싶습니다. 이 후로는 공사간 다방면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질 듯 합니다. 그러다 봄이 와서 보리곡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일이 좀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그 사이엔 보내야 할 날들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 일이 과연 내가 헤아리는 바와 같이 될 수 있을는지 어떨런지에 대해서도 아직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일의 성격에 따라 [하나 하나] 조치해 나가긴 합니다만, 곡절이 매우 많아 일일이 [그대의] 가르침을 구할 겨를이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민간에서 그래도 조금은 [내가 하는 일을] 믿어 준다는 것입니다. 향촌의 선비들도 일이 있으면 곧 [내게] 와서 말을 걸 정도는 됩니다. [이리하여] 상하의 실정이 조금은 상통이 되고 있으니, 관(官)의 아전들도 감히 서로 간에 철저히 속일 수는 없게 되어 일처리에 힘을 많이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금일에 여러 성(省)으로부터 보내온 명령서의 내용들을 검토해 보니, [나의] 일처리 방식에 대해 무어라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 점에 관해서야 무겁다 가볍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저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요즈음 와서 [그대의 학문적] 계획이 더욱 경쾌하고 꾸준해 보입니다. [그대의]「시설(詩說)」중 한 두 큰 절목을 [나에게] 보여 주실 수 있겠는지요?「서설(書說)」의 경우와 같이 [이「시설(詩說)」또한]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는 않았겠지요. 그 밖에 [제가]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만한 [그대의] 논저가 있다면, 아끼지 마시고 [내게도 한 질] 보내 주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자약(子約)은 [그 후로] 달리 편지를 보내온 것이 없습니다. 이이들은 아마도 今日 과거 시험을 마쳤을 테니 다음 달 10일 사이에 이 곳에 도착할 것 같군요. 드리고 싶은 말씀이 너무나 많지만 이 사람을 급히 보내야 하기에 [더 이상 자세한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그대 계신 곳까지의 거리가] 참으로 멀군요. 오직 무겁게 보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8월 19일,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한 후 이 글을 올립니다.
장사(長沙)로 심부름 보낸 사람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고, 또 [남헌의 장례일과 관련된] 분명한 소식을 알 수가 없어 [이 때문에 나는] 마음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듯 안정할 수가 없습니다. 육자수 형제로부터 오래 편지를 받지 못했습니다만 육자정이 [이곳으로] 오고 싶다고 한 적이 있지만, 아마도 가뭄 때문에 아직 움직일 수 없는 게 분명할 것입니다. 조만간(旦夕) 사람을 보내 안부라도 물어야겠습니다. 자명(自明)이 죽다니,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늘도 이 무리들의 편을 들어 [우리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까? [하늘의 깊은 뜻은 정말이지] 모를 일입니다.
答呂伯恭
久不辱問, 向仰良深. 比日秋雨稍凉, 伏惟尊候萬福. 熹夏秋以來, 以旱暵祈禳奔走, 日日暴露, 不得少休. 旣無所效, 又不得不爲救荒之備, 郡小財匱, 無擘畫處, 日夕究心, 遂發心疾, 上炎下潦, 勢甚可畏. 已急遣人呼二兒及約子澄, 恐有不測, 無人主宰. 旣而飮藥, 僅得少定. 又苦脚跟痛, 不能履地, 此兩日方能移步, 然亦終未脫然. 郡中賑助檢放等事, 却已稍有緖. 但軍糧無所指擬, 不免具奏祈哀, 幷以衰病之實丐求罷免, 未知復如何. 但欲退縮省事, 以俟終更, 而事勢驅迫, 有不自由者. 今且信緣, 未知果安所稅駕也.
夏秋以來, 今日方得竟日之雨, 民間遂可種麥蒔蔬, 庶幾有以係其心志而不至於流移. 此後公私多方接濟, 到得春來, 則麥可食而無所事矣. 但其間日月尙多, 又未知果能如人所料否耳. 其間隨事措置, 曲折甚多, 未暇一一求敎. 所幸民間却(3-1509)稍相信, 鄕村士人有事便可來說, 上下之情稍通, 官吏不敢十分相罔, 凡事省力. 但一味無錢, 沒撰處耳. 今日見省符幷致文字, 有相及者. 此固不足爲重輕, 亦殊可笑也.
比來計益輕健, 詩說可見示一二大節目處否? 不似書說, 又被人傳印也. 別有論著可見敎者, 勿吝幸甚. 子約不及別書. 兒輩計今日方終場, 度後月十間可到此也. 所欲言者甚衆, 急遣此人, 不暇. 正遠, 惟千萬保重, 不宣. 八月十九日, 熹頓首再拜上啓.
長沙人至今未還, 亦不得明信, 令人懸心耳. 子壽兄弟久不得書, 子靜欲來, 想以旱故, 未必能動. 旦夕或遣人候之也. 自明之亡, 極可痛惜, 天亦爲此曹復讎也耶? 不可曉.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37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가을 9월 중에 씌여진 것이다. 앞 편지에 이어 이 편지는 주희가 구황(救荒)대책에 관해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씌여졌으며, 아울러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그 간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현 직을 사직하고자 하는 뜻을 이미 세 차례에 걸처 [조정에] 알렸으며, 하루 빨리 자신의 소원이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 큰 아들 숙(塾)의 과거시험이 낙방일 거라는 예상을 하면서 아울러 큰 아들의 게으름을 질책하면서 주희가 터트리는 불만이 이채롭다. 아이 키우는 부모의 솔직하고도 담백한 정서를 느끼게 해 준다.
어제 사람을 보내 그대에게 글을 전하라 하였는데 아마도 도착했을 듯싶습니다. 요즈음 가을이라 날씨가 제법 서늘합니다. 그대의 생활 역시 다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하다고는 있지만, 정력이 날로 쇠약해지고 있으니 그저 [상심이 되어] 멍해진 상태에서 흡사 꿈꾸는 사이에 날을 보내 듯 하고 있습니다. 구황(救荒)대책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실수하고 뒤로 망각하는 등 질서 잡힌 대책을 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현 직을] 사직하고자 하는 뜻을 이미 세 차례에 걸처 [조정에] 알렸습니다만, 아직도 [조정에서] 이러한 나의 청을 허락해주실지 여부를 알 길이 없어, 이제는 자못 걱정이 됩니다. 근자에 두 번째로 대농(大農) 증장(曾丈)께서 알려오신 소식을 받았습니다만, 그분에 따르면 반드시 [현직을 사직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중증장(曾丈)께서 알려 오신 그와 같은 조정의] 명령이 지금 이미 이래로 내려온 것인지 어떤지에 관해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큰 아이가 고향 마을로부터 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놈의] 게으름은 옛날과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습니다. [그놈으로 하여금] 과거시험답안지을 암송해 보라 했더니, 겨우 두 세 구절을 기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수일 동안 마을이 조용한 것을 보아 필시 또 낙방일 것입니다. 우선 [그놈으로 하여금 그대가 계신 곳으로] 가서 며느리와 손자 녀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라 일러야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그놈이] 스승이 계신 곳으로부터 멀리 떠나오게 되면 더욱 게을러지지나 않을까 하여 그 점이 걱정입니다만 [그리된다 한들 또] 어쩌겠습니까? 이 곳 사정에 대해서는 그[이번에 이 편지를 들고 그대에게 가는 나의 큰 아이]도 대략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 글을 너무 많이 썼더니 마음은 근심스럽고 눈은 글이 매끄럽지 않아 [그대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나의 속마음을] 상세히 펼쳐낼 수가 없습니다. 어제 그저께 호백봉(胡伯逢)에게 보낼 편지를 썼는데 거기서 다음과 같이 희롱하는 말을 했습니다. ‘원래부터 우직(禹稷)의 일이란 이처럼 잘 되기가 힘들다.’ 금일 이 편지를 쓰면서 또 그대의 병이 반드시 복되지 않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약(子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만감이 교차됩니다. 아프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하여 달리 글을 보내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는군요. 부디 천만번이라도 더욱 마음 쓰시어 건강에 조리하세요. 그리하여 멀리서 그대 생각하는 나의 마음에 위로가 된다면 너무나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答呂伯恭
昨專人去拜狀, 想達. 比日秋冷, 伏惟尊候萬福. 熹彊勉於此, 精力日衰, 大抵罔罔, 如夢寐間度日耳. 救荒不得不經心, 然亦失前忘後, 不成倫理. 告歸已三(3-1510)請, 未知可得否, 方以爲憂. 近再得大農曾丈報云必可得, 幸甚. 不知今已命下未也. 大兒來自里中, 懶慢如故, 令誦程文, 僅能記三兩句耳. 數日鄕間寂然, 必是又遭黜矣. 且令往挈婦孫歸家, 但恐自此遠去師席, 愈益怠惰, 奈何? 此中事渠亦略能言之, 偶作書多, 心㥙目澀, 不能詳布. 昨日答胡伯逢書, 戱語之云: ‘元來禹稷如此不好做.’ 今日作此, 又思尊兄之病未必不爲福也. 子約老友承書, 多感. 病倦不及別狀. 正遠, 千萬加意攝理, 以慰遠懷. 幸甚幸甚.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38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는 여백공의 저작랑 제수와 양절동안무사참의(兩浙東安撫司參議)로의 파견에 관해 언급하면서 자신은 병으로 쇠약해져 군사(郡事)를 감당할 수 없음을 호소하고 있다. 민간에서 이미 도적이 일어날만한 조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계책을 낼 수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오직 현직을 면하고 사록관직에로 나아갔으면 하는 자신의 소원을 반복하고 있다. 인품이 훌륭한 조경소(趙景昭)가 자신을 방문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큰아들 숙(塾)에 대해서도 거듭 언급하고 있다.
오랜 동안 그대 소식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대의] 작은 근심들은 아마도 이미 사라진 듯 합니다. 저작랑 제수와 양절동안무사참의(兩浙東安撫司參議)로의 파견을 명하는 조정의 명령이 연이어서 내려오니, 특히나 [조정의 깊은 뜻을 저로서는]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결국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임금님의 뜻을 받자올 작정이십니까? 저는 병으로 쇠해져 날이 갈수록 더욱 정신이 어지러워지는지라, 군의 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목하 아직까지는 민간에서 비록 기근을 호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만 이미 도적이 일어날만한 단서가 상당한 정도로 포착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고심해보지만 뾰족한 계책을 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사록관직을 원하는 저의 요구가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 뿐입니다. 이전에 증장(曾丈)께서 알려온 소식은 매우 확실한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사정이 달라진 듯하니 조물주의 뜻이란 과연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육자수(陸子燾)마저 고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올해는 어떤 운수이기에 우리 당에 이처럼 불리한 일들만 생기는 지 알 수가 없군요. 조경소(趙景昭)이란 사람이 [그의 관직] 임기가 만료되어 이 곳을 지나가면서 [나에게] 들렀더군요. [그 인품이] 매우 친근하고 품고 있는 생각도 매우 좋았습니다. 요즈음(今日) 이 정도 되는 사람 얻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숙(塾)은 그곳에 도착했는지요? 근자에 숙탁(叔度)의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아마도 [현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뜻을 아직은 [조정으로부터] 허락받지 못한 듯 합니다. 이번에 [손자아이와 며느리 데려오는 일을 위해]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관인을 보내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부탁했습니다. 공사(公私)간 힘을 허비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만약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힘만] 헛되이 낭비했을 뿐만이 아니라 향후에 더 이상 [심부름 등으로 부리거나] 부탁할 사람이 없어져 더욱 힘을 낭비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대가 저를 위해 제 아들 녀석에게 이점에 관해] 한 마디 언급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빨리 [아비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도록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원범(元範)이 돌아왔기에 연일 마주대하여 시간 낭비를 많이 했습니다. [잠시] 밤 시간을 이용해 이 편지를 쓰다보니 다른 것에 관해 언급할 겨를이 없어 이만 줄입니다. 우리 도를 위해 자중할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答呂伯恭
久不奉問, 向來微恙計已平復矣. 著庭議幕之命相繼而下, 殊不可曉. 不知果彊起承上意否? 熹衰病日益昏耗, 恐不堪郡事. 目下民間雖未告饑, 然盜賊頗已有端, 日夕憂窘, 不知所以爲計, 惟望祠請之果遂耳. 昨曾丈報甚的, 旣而復不然, 造物之意果難測也. 陸子燾復爲古人, 可痛可傷. 不知今年是何氣數? 而吾黨不利如此也. 趙景昭官滿過此, 甚款, 意思甚好. 今日如此等人亦難得也. 塾到復何如? 近得叔度書, 似未許其歸. 此番破戒差人, 借請糜費公私不少, 若不成行, 不(3-1511)惟枉費, 向後恐亦無人可使, 轉見費力. 幸爲一言及此, 令其早歸爲望. 元範歸, 偶連日冗甚, 夜作此書, 未暇他及. 惟千萬爲道自重.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39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10월에 씌여진 것으로 메모에 가까운 짧은 길이의 편지이다. 앞의 편지에 이어 새로운 사실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저는 근자에 숙(塾)을 통해 그대의 편지를 이미 받아 보았습니다. 오늘 서산(西山)으로부터 지황(地黃) 다섯 근(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이] 마치 모연(毛掾)처럼 편리한 점이 있어 조심스럽게 편지와 함께 [그대에게] 부쳐 보냅니다. [그대가] 접때 숙(塾)을 보고 약간의 약이 필요하다 하셨다기에 말씀입니다. 몹시 번거롭고 눈은 침침하여 달리 자세한 말씀 올리지 않겠습니다. 10월 9일, 저는 두 번 절하고 이 편지를 올립니다.
자약(子約)으로부터 다른 편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증장(曾丈)은 이미 경구(京口)땅을 지났다 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고 싶지만 아직은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증장(曾丈)이 이곳으로 알려온 소식에 따르면 나의] 사록관 청원은 아마도 효과가 없는 듯합니다.
答呂伯恭
熹近因塾行, 已拜狀. 今日求得西山地黃五斤, 洽毛掾有便, 謹以附內. 向見塾說藥裹所須也. 冗甚目昏, 不容他及. 十月九日, 熹再拜.
子約不及別書. 曾丈聞已過京口, 欲遣人致問, 尙未暇也. 但所報祠請殊不效耳.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40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가을 남강(南康)에서 큰 가뭄을 맞은 초기에 씌여진 것이다. 장경부(張敬夫) 제문(祭文)과 관련한 사실, 그리고 주자의 과격한 성격에 대한 여백공의 충고에 감사하다는 말, 천사(泉司)에서 근자에 주청하여, 삼현(三縣) 인호(人戶)의 목탄전(木炭錢) 2000민(緡)을 줄일 수 있었지만 처음 기대했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점 등을 적고 있다. 비교적 짧은 편지이다.
[내가 지은] 두 번째 장경부(張敬夫) 제문은, 말의 뜻이 가볍고 소홀한 점이 있다는 것을 [제문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곧 깨달았습니다만 결국 고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대가 나를] 가르쳐 주신 뜻은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절실합니다.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중 특히] ‘넓고 크며 편평하고 순수하게 하라’ 하신 이 네 글자는 삼가 [내가] 기거하는 자리 모퉁이에 써 붙여 둠으로써 죽을 때까지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지적해 주신] ‘치우치게 품부받은 나의 기질’에 관해 지금까지 [내가] 참으로 이를 연마해 갈아 없애려 노력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곧바로 [그대 앞에서] 이런 저런 핑게를 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는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거듭 그대의 가르쳐 인도해주심과 따끔한 채찍질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이 점에 관해 그대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저의 속마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두 번 절하고 이 편지를 올립니다.
저는 이미 떠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경망(景望)의 일이 교훈이 될 듯합니다. 이 힘든 재난을 만났으니, 마땅히 사태를 정확하게 깨달아 알게 된다면 부득불 정부와 서신을 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우 부득이한 것은 아니어서, 또한 감히 발설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이곳에 다행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또한 [관청들 간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없다는 것인데, 제사(諸司)가 자못 또한 상실(相悉)합니다. 천사(泉司)에서 근자에 주청하여, 삼현(三縣) 인호(人戶)의 목탄전(木炭錢) 2000민(緡)을 줄일 수 있었습니만 처음 기대했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사(漕司)에서는 호오도 분간치 못하고 있으니 비록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인데도 혹 도리어 빼앗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전날 편지를 써서 크게 꾸짖었습니다만, 다시금 노형의 말씀 중 ‘우선 잠시 참고, 단지 자세히 사리를 조목조목 분석해 나가다 보면 아마도 거의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라 하신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해 봅니다.
答呂伯恭
再祭敬夫之文, 語意輕脫, 尋亦覺之, 則已不及改矣. 誨諭之意微婉深切, 銘佩何敢忘也! ‘弘大平粹’四字, 謹書坐隅以爲終身之念. 禀賦之偏, 前日實是不曾用力消磨, 豈敢便論分數? 然自今不敢不勉, 更望時有以提撕警策之也. 專此布謝, 言不盡意. 熹再拜.
熹旣不得去, 景望之事可以爲法. 値此災傷, 恐有合理曾事, 不得不通政府書. 然非甚不得已, 亦不敢發也. 此間幸亦無大齟齬, 諸司頗亦相悉. 泉司近爲奏請, 減得三縣人戶木炭錢二千緡, 殊非始望所及. 却是漕司不識好惡, 雖當予者或反奪之. 前日作書, 已大罵之. 復思老兄之言, 且忍須臾, 只細與倏析事理, 庶幾其或悟耳.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41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경자년(庚子, 1180년, 주자 51세) 세말(歲末)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여백공이 사록관직을 청했다는 소식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사록관직 청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한여묘미(旱餘苗米)를 수령한 사실, 당첩지명(堂帖之命)을 받았다는 사실 등 구황대책과 관련한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육자수(陸子壽)가 작고한 데 대한 슬픔, 새롭게 살아나는 남헌에 대한 그리움 등이 적혀 있다.
오랜 동안 그대 소식 듣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그대 곁으로 달려가고픈 생각 뿐입니다. 근자에 듣자하니 [그대는 조정에] 이미 사록관직을 청했다 하더군요.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이제 날마다 서리가 내려 [날씨가 몹시] 차갑습니다. 그대의 생활은 여전히 다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이리 저리 애쓰다 보니 두 번째로 [이 곳에서] 해가 저무는 것을 보게 되는군요. [저의] 사록관직 청원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기 만료일까지는 단지 100여일 남짓 남았을 뿐이니, 이제는 또다시 이 문제로 청원을 올릴 수는 없겠습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두 번째로 요구한 한여묘미(旱餘苗米)를 이미 다 수령하였다는 점입니다. 보낸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당첩지명(堂帖之命)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일이 이렇게 되게 된 데에는 주참(周參)의 힘이 컷을 것입니다. 이것을 얻게 됨으로써 군사들이 먹을 것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책임을 면할 수 있게 되었고 민간에서도 장래에 현도(縣道)에서 예차(預借)하는 요동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은혜가 이로써 두텁게 되었습니다. 구휼은 마땅히 원단(元旦)으로부터 거행해야 한다고 하나 민간에서 한 해 전에 이미 궐식처(闕食處)가 있었으니, 조금 늦게 구휼하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민간에 돈이 너무 부족하다는 소문이 나도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강의 제방을 수리하는 일을 진행하다 보면, [관(官)에서 돈으로] 일꾼을 고용해 부리게 될 것이고, [또 관(官)에서 민간으로부터] 나무를 [돈을 주고] 사들이게 될 것이니, [이리 되면] 관전(官錢)이 [자연스럽게] 민간에 흩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만, [그 액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수(子壽)가 작고했다 합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프군요. 근자에 사람을 보내어 [그의 영전에] 잔을 부어 올렸습니다. 우리 도가 떨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인가 봅니다. 이를 어찌 하겠습니까? 장흠부의 유문(遺文)을 살펴 베껴오도록 했는데, 그의 유문 중에는 [남이] 도저히 미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탁월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남에게 전할 필요가 없는 오래된 말들도 있고 해서 이번 편지에는 베끼라 하지 않았습니다. 매양 한번씩 장흠부가 쓴 책을 펼칠 때마다 참담한 마음이 되곤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다만 해인(解印)한 후에, 곧바로 [흠부의 사당에] 가서 곡(哭)하려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나의 슬픔이 조금은 풀리겠지요. 사람을 보내 자중(子重)을 맞이하였습니다. 허둥지둥 바삐 이 사람[즉 석자중]에게 의탁하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의 작은 삼매(小三昧)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곧 [그대와 만나 서로] 마주대하지 못하고 있으나, 오직 우리 도를 위해 자중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答呂伯恭
久不拜狀, 日以馳情. 比聞已遂祠官之請, 良以爲慰. 卽日霜寒, 伏惟尊候萬福. 熹黽俛於此, 再見歲晩. 祠請未報, 然去替只百餘日, 今亦不復請矣. 幸再乞旱餘苗米, 已盡得之. 所遣人猶未還, 而已被堂帖之命, 計此周參之力爲多也. 得此不唯軍士得食, 官吏免責, 民間亦免將來縣道預借之擾, 上恩此爲厚也. 賑濟當自元旦擧行, 民間歲前有闕食處, 稍已賑濟之. 但聞頗苦乏錢, 此則無如之何. 然見脩江隄, 役工買木, 亦足以散錢於民間, 但不多耳. 子壽云亡, 深可痛惜. 近遣(3-1513)人酹之. 吾道不振, 此天也, 奈何奈何欽夫遺文見令抄寫, 其間極有卓絶不可及處. 然亦有舊說不必傳者, 今便不令抄矣. 每一開卷, 令人慘然. 只俟解印, 徑往哭之, 小洩此哀也. 遣人迓子重, 草草附此, 此亦是小三昧矣. 未卽承晤, 惟千萬爲道自重, 不宣.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42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초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가 사록관직을 청해온 자신의 소원이 받아들여져 곧 공무를 인수인계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편지 앞머리에 밝히면서 아직도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구황책을 걱정하고 있다. 이어서 육자정으로부터 육자수 묘지명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는 사실, 여동래의 저서인『대사기(大事記)』를 칭찬하는 말 등을 담고 있다.
저는 다행히도 그런대로 편안합니다. 이미 사람을 보내어 자중(子重)을 맞이하였습니다. [자중(自重) 일행이] 도착하면 곧 부신(符信)을 합(合)한 후 [나는 이 곳을] 떠날 것입니다. 구휼을 위한 대비책이 그런대로 나를 지탱해 줍니다. [내가 조정에] 주청한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조정의 승낙을 받았습니다. 늙고 재주 없는 저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대체로 올해 들어 강동(江東)의 여러 군(郡)에서 실시한 가뭄 구제책의 정도는 자못 너그러운 편입니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아직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등의 동요(流徙)가 없습니다. 이 곳 여러 현(縣)에서는 향촌 40리(里)마다 장(場) 하나를 설치하여 관미(官米)를 [민간에] 팔기도 하고, 부자들의 미곡(米穀)이 [싼 값에 방출될 수 있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원일(元日) 초부터 쌀을 팔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아직 쌀을 사러 오는 자들이 없습니다. 상격(賞格)으로 거의 2만석이나 되는 삼가미(三家米)를 모아들여 구휼에 나서고 있는데, [이 사업으로 인해 희생적으로 노력한 사람들이 많아] 마땅히 관에 취직시킬만한 자가 네 명이나 되는데 혜택을 받은 굶주린 백성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아직은 감히 [구휼 대책반을] 흩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深春까지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어제 양교수(楊敎授)에게 보낸 사람이 돌아 왔습니다. 그가 도착하던 바로 그 날, 그대의 견해를 달아 보내준 편지를 받아 보고 그대의 지극한 뜻을 모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다른 청은 없습니다. 육자수의 죽음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참으로 그대의 말씀과 같습니다. 근자에 육자정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서 말하기를] 이미 [그대에게 육자수의] 묘지명을 부탁했다더군요. 그러면서 나에게도 써 줄 것을 부탁하는데 이를 감히 사양할 수가 없군요. 다만 그[육자정]가 [직접] 쓴 [육자수의] 행장(行狀)에 대해서는 특히 부만입니다. 아마도 반드시 [육자정이 쓴 육자수의 행장에 의거할 필요는 없고, 여동래가 스스로] 따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서 묘지명을 지어야만) 비로소 만족스럽게 [육자수의 면모가] 드러나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모중감(毛仲益)이 강서(江西)로부터 [이 곳에] 도착했습니다. 한 해가 다 지나갈 무렵 [그대가] 이전에 [써서 모중익(毛仲益)편에 제게 부친 편지가 [그대의 손으로부터]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위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또 [모중익에게] 그후 [그대의] 동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의] 저서는 예정대로 집필이 되고 있는 듯합니다만 저로서는 아직 그대의 초고를 엿보아 살필 수 없는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붕우들이 [그대가 아직은] 병중에 있는지라 [저술에 너무] 마음을 쓰는 것은 아니 될 일이라고 많이들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붕우들의 말을 들으니 나로서도] 그대가 이 책에 마음을 쓰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그대의] 『대사기(大事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탁월하고 너무나 유익한 책입니다. 그러나 더욱 힘을 들여 이 책이 더욱 완비되도록 보완(斟酌)해주시기를 거듭 바라는 바입니다. 두 서책에 대해서는 사람을 시켜 [그대가 특히] 발명한 점이 많은 부분에 속하는 한 두 권이라도 기록해서 나에게 부쳐 보내주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우선 반경(潘卿)이 있는 곳으로 [이 책을] 보내, 군리(郡吏)를 시켜 저에게로 보내 주세요. 여소(汝昭)가 이곳을 들렀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는 역시] 정성이 좀 부족합니다. 그는 그 당시 마땅히 사록관 청원을 했어야 했습니다. [여소(汝昭)의] 이번 행차는 매우 힘들인 것이긴 하지만 의리상에서도 편치 않은 점[즉 잘못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에 대해]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기경(奇卿)에게 보낸 사람이 돌아왔기에 [그를 시켜 그대에게 보낼] 이 편지를 부칩니다. 눈으로 인한 추위 때문에 손이 얼어, 드리고 싶은 말씀 상세히 다 드릴 수 없겠군요. [그대는] 오로지 더욱 스스로를 아끼시어 진심을 다해 [그대를] 걱정하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答呂伯恭
熹幸粗安, 已遣人迓子重, 至卽合符而行矣. 賑恤之備, 粗有支吾. 奏請數事, 悉蒙朝廷應副, 衰拙之幸. 大抵今歲江東諸郡放旱分數稍寬, 緣此民間未至流徙. 此間諸縣鄕村四十里置一場, 糶官米及勸喩到富民米穀. 元日初糶, 殊未有來糴者. 以賞格募得三家米近二萬石賑濟, 當得官者四人, 而饑民受惠不少矣. 然今未敢散, 須俟深春也. 昨楊敎授人還, 領至日批示, 具曉至意, 不復有他請矣. 子壽之亡極可痛惜, 誠如所喩. 近得子靜書云, 已求銘於門下, 屬熹書之. 此不敢辭, 但渠作得行狀殊不滿人意, 恐須別爲抒思, 始足有發明也. 毛仲益自江西來, 逼歲方領前此所惠書, 已久, 猶足慰意. 又得細詢昨來動靜, 如著書日有課程, 甚(3-1514)恨未得一窺草稿. 然朋友之論多以爲病中未可勞心, 深不欲老兄之就此編也. 大事記想尤奇尤有益, 然尤費力, 此更望斟酌也. 二書告令人錄一二卷多發明處見寄, 甚幸. 只送潘卿處, 令付郡吏以來. 汝昭過此小款, 渠當時自合請祠, 此行極費力, 於義亦覺未安, 不審尊意以爲如何? 因奇卿人還附此, 雪寒手凍, 未能詳悉, 惟益自愛, 以慰惓惓之望.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43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제44서가 씌여진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2-3월보다 조금 앞에 씌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하루빨리 후임자가 나타나서 자신은 현직을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남강군 지사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낌새가 역력하다. 그 밖에 그 전에 유추(劉樞)가 죽으면서, 그의 딸을 주자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그 여아의 혼사를 걱정하는 내용 등을 싣고 있다.
저는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지탱해나가는 것조차 매우 힘이 듭니다. 자중(子重)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내 오수(吳守)에게 편지로 통지하여 그를 조속히 이곳으로 오게 해야겠습니다.
경내(境內)는 지금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떠돌아다니다 굶어죽은 사람이 생겨나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로서는] 다만 빨리 이곳을 떠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되면 가까스로 낭패는 면할 수 있겠지요. 곧 이제 비가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만약 또 다시 이와 같은 상태로 수일이 지난다면 우려할만합니다. 조그마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전에 유추(劉樞)가 죽으면서, 그의 딸아이를 [내게]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딸아이가 [혼인할 만큼]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혼처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와서 논의하는 자들은 많지만 대개 뜻에 차질 않아 감히 가볍게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 끝에] 평보(平父)와 논의하여 [다음과 같이 해보면 어떠하겠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마도 금년에 새로 진사가 된 자 중에 훌륭한 선비가 있을 듯 합니다. 그대가 평소에 면식이 있는 이들 선비 중에 한 사람을 물색해서 죽은 유추(劉樞)에게 보답해 주실 수만 있다면 [그대와 의논하여] 함께 혼인 문제를 확정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평보(平父)가 자진해서 [그대에게 이와 같은 부탁을 담은] 서신을 올리고 사람을 보내 정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헤아리시어 다행스럽게도 [그대가 좋은 신랑감 하나] 가려 뽑아 주시기만 하신다면, 그 집안으로서는 훌륭한 사위 하나 얻는 셈이고, 나로서는 [저승으로] 떠난 자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게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천만 매우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 편지는 아마도 급히 전달되지는 못할 듯 합니다. 이 밖에 다른 말씀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참으로 멀게만 생각되는군요. 그대가 늘 그대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자약(子約)으로부터 편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숙탁(叔度)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번거롭지만 두 사람에게 내 뜻을 말해 주십시오. 숙(塾)에 대해서는 [그대가] 자주 단속해 주시고 나무라 주셔서 더 이상 게으름 피우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答呂伯恭
熹在此支撑甚費力, 子重不來, 已遣人通吳守書, 速其來矣. 境內目今幸未至流殍, 未知將來復如何. 但願早去, 庶免疎脫耳. 卽今覺闕雨, 若更數日如此, 卽可慮也. 少懇: 向來劉樞之亡, 以其兒女爲託. 今其女年漸長, 未有許婚之所. 來議者多, 往往未滿人意, 不敢輕諾. 與平父議, 恐今年新進士中有佳士, 老兄所素知者, 得爲物色一人報劉氏, 與之定議. 平父欲自拜書, 專人致懇. 幸與留念推擇, 使其家得佳婿, 而熹不孤逝者之託, 千萬幸甚幸甚. 此書恐未遽達, 不復他及. 正遠, 惟以時加衛, 幸甚幸甚. 子約不及書, 叔度亦然, 幷煩爲道意. 塾子望(3-1515)時賜檢責, 不至怠惰爲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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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44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순희 8년 2월 육자정이 남강을 방문한 조금 후인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2-3월 경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이전의 편지에서와는 달리 백성들이 새로이 생명력을 되찾아 가고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밖에 새로 남강군 지사로 임명된 오수의 부임 문제, 장남헌의 유문(遺文), 육자수의 묘지명, 육자정의 학문 등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인편을 통해 최근 그대가 보내오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를 쓴 그대의] 필적이 경쾌하고 예리하여 이전과는 다르니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요즈음은 봄인지라 날씨가 화창합니다만 그대의 건강이 날로 더욱 좋아지기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질병은 아주 심한 편은 아닙니다. 주린 백성들 역시 아직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고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군량미도 아직은 버틸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자에 연이어 비와 눈이 왔습니다. 보리 이삭이 피어 나오고 있으며 땅은 기름지고 윤택합니다. 인정은 삶을 기꺼워하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 듯 합니다. 자중(子重)이 오지 않은 것이 한스럽습니다. 오수(吳守)는 윤월(閏月) 초쯤에 도착할 듯 합니다. 도착하면 곧 부(符)를 합한 후 남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작년의 가뭄은 대단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조정에서 일찍 마음 써 주심에 힘입어 여러 곳에서 [조정에] 주청한 것이 모두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단한 낭패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처리 방식이 나라에 손해를 가져온 것은 거의 없습니다만 이익은 참으로 광범위한 것입니다. 이 곳 남강의 일(此間)은 곧 주참정(周參政)께서 조리해 돌보아 주신 힘에 많은 도움을 입은 것이 사실입니다. 장흠부의 유문(遺文)은 베껴 내기를 기다렸다가 부쳐 보내 드리겠습니다. 육자정이 이리로 온지 수일이 지났습니다. [그대께서] 지으신 육자수의 매명(埋銘)은 제가 이미 보았습니다. [그대가 육자수에 관해] 서술하고 발명해 낸 그 공이 참으로 지극합니다. [더구나 당신 글의] 마지막 장은 문체가 부드러우면서도 더욱 깊은 마음 씀씀이를 드러내고 있어 탄복하고 또 탄복합니다. 육자정의 요즈음 강론은 옛날에 비해 달라지긴 했지만, 그러나 끝내 아직까지는 [우리 도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 점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깊이 헤아리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니, [함께 토론을 거듭하다 보면] 피차에 유익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시설(詩說)』과『대사기(大事記)』에 관한 내용을 그대 편지를 통해 알려 주신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습니다. 자약(子約)으로부터는 다른 편지가 없습니다. 아마도 [상황이] 전과는 다른 듯합니다.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도를 위해 자중(自重)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答呂伯恭
便中伏奉近書, 筆蹟輕利, 視前有異, 深以爲喜. 比日春和, 伏想日益佳健. 熹疾病幸不至劇, 饑民亦幸未至流徒, 軍食想可支吾. 比連得雨雪, 麥秀土膏, 人情似有樂生之望矣. 子重不來, 可恨. 吳守度閏月初可到, 到卽合符而南矣. 去年之旱非常, 幸賴朝廷留意得早, 諸處奏請, 悉皆應副, 故得不至大段狼狽. 此於國計所損幾何? 而其利甚博. 此間卽是周參政調護之力爲多也. 欽夫遺文俟抄出寄去. 子靜到此數日, 所作子壽埋銘已見之. 敍述發明, 此極有功, 卒章微婉, 尤見用意深處, 歎服欺服. 子靜近日講論比舊亦不同, 但終有未盡合處. 幸其却好商量, 亦彼此有益也. 詩說․大事記便中切幸垂示. 子約不及別書, 意不殊前. 正遠, 切冀爲道自重.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45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순희 8년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여름에 씌여진 것이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근자에 벼슬에 출사하여 보낸 이년간을 회고하면서 “공사(公私)에 도움된 것은 없는데 정신은 피폐하여졌고, 학업도 황폐해졌노라” 말하고 있다. 그는 남강군 지사로서의 관직을 그만 둔 후 여행을 하면서 잠시 휴식과 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듯하다. 그러면서 그는 벼슬기간 동안 소원했던 학문에 다시금 전념할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그는 여행 중에 이전에 정리해 둔 『중용』원고를 보면서 수정을 가하고 있다. 그는 ‘[나의] 구설(舊說)에 힘을 낭비한 곳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약간의 수정을 가했더니...’라 말하고 있다. 아울러 얼마 전에 있었던 육자정과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그와 육자정과의 대화 내용에 관해 꽤 상세하게 회고하고 있다. 요지는 육자정의 학문이 선학에 접근하고 있다는 우려의 표명이다. 끝 부분에 장남헌의 유문(遺文)과 관련한 기사를 싣고 있다.
근자에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부터, 그대에게 문안드릴 여가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서너 차례나 거르지 않고 거듭 연락 주시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과 위로가 됩니다. [그대의] 최근 소식 중에는 [그대 병이 매우 호전되어] 남의 손 빌지 않고 음식이나 의복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게 되었다 하시니 더욱 기쁩니다. 우리 도가 쇠약해져 감이 날로 더욱 심해지니 참으로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요즈음 와서 다시 더워지고 있습니다. 엎드려 오직 그대의 건강이 더욱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한 차례 벼슬에 출사하여 이년을 보냈지만, 공사(公私) 간에 도움된 것은 없는데 정신은 피곤하여 피폐해졌고, 학업도 황폐해졌습니다. 벌써 떠났어야 했다는 후회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작년 가을, 겨울에 걸친 재난이 있은 후, [차마 이곳을] 떠나겠다고 간구하지 못했고, [그러다가] 금년 봄, 드디어 강서(江西)의 명(命)을 받들게까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윤월(閏月) 27일이 되어 비로소 인수인계한 후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번 기회를 타서 단숨에 장사(長沙)로 내달려서 그곳으로부터 분녕현(分寧縣)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다녀오는 길이 매우 단축되겠다 싶었었는데,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서 여동생의 부고를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엄청난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정분상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어 드디어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였습니다. [신관(新官)과 임무를] 교체한 후 그저 한 열흘 정도 잡고서 [여산(廬山)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돌면서, 염계서당(濂溪書堂)을 배알하고 돌아왔습니다. 4월 19일에 집에 도착했습니다만, [이제] 비록 책임을 벗어난 것은 다행스러우나, 인간사의 번거로움으로 인해 괴로움이 있고, 이런 저런 병환으로 인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체로 [지금의 나의 상황은] 이미 청량한 경계(淸凉境界) 속에 들었습니다.
여행 중에 중용(中庸)을 보았습니다. [하여 나의] 옛 학설에는 쓸 데 없이 힘을 허비한 곳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약간의 수정을 가했더니 전보다는 좀 나아진 듯싶습니다. [제가 쓴] 다른 책을 보더라도 필시 이와 같은 형국일 것입니다. 의리(義理)는 무궁하나, 지식(知識)은 한계가 있으니, 언어 사이에서 [의리에 관한 정확한 표현을] 추구하나 오히려 차질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겠지요. 하물며 몸으로 체득하여 사업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우리 유가의 도에] 있어서는 말할 나위 없겠지요. 번거로운 일이 조금 안정되고 나면, [중용에 대한 나의 저술에 대해] 처음부터 한 차례 정돈하여, 반드시 바꿀 것은 바꾸고 생략할 것은 생략하는 등 이전에 비해 훨씬 낫게 수정해야겠습니다.
육자정에게는 아직도 옛날의 방식이 끝내 남아 있는 듯 합니다. 그는 배움의 병통(爲學之病)에 관해 많은 말을 했는데 이처럼 사색하면 이는 곧 ‘의견(意見)’일 뿐이다. 이와 같이 사색하면 이는 단지 ‘의론(議論)’일 뿐이다. 이와 같이 사색한다면 이는 단지 ‘정본(定本)’일 뿐이다 라는 등의 말이 그것입니다. 나는 [그의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이미 사색을 하게 되면 ‘의견(意見)’이 없을 수 없고, 또 이미 강학을 하게 되면 ‘의론(議論)’이 없을 수 없다. 또 학문하는 법도를 통괄해서 말하자면 어찌 ‘정본(定本)’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사람의 재질이나 병통에 따라 그에 알맞은 약을 처방해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점에 있어서는] ‘정본(定本)을 고집해서는 아니 될 뿐이다. [이와 같은 나의 반론에 대해] 그는 도리어 다음과 같이 응수하더군요. [이른바] ‘올바르다(正)’는 주장이 ‘사의견(邪意見)’이오 ‘한의론(閑議論)’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그것이 의견(意見)이고 의론(議論)인 한] 이는 배우는 자에게는 병통이 됩니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육자정의 주장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습니다.] 만약 당신의 주장과 같다면 이는 그대 스스로 그 꾸짖음의 정도가 분수를 넘었습니다. [그대의 주장이 정당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邪)’자와 ‘한(閑)’자를 [의견(意見)과 의혼(議論)이라는 말 앞에] 붙여야만 비로소 의미가 분명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선불교식의 이해를 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아마도 반드시 먼저 정본(定本)을 세우게 해야 합니다. 그런 후 도리어 그 上面에 나아가 정돈해나가야만 비로소 ‘정본(定本)이 없는 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육자정의 경우처럼 [모든 의견과 의론을] 한 데 아울러 물리치게 되면, 아마도 선학(禪學)으로 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그는 비록 예! 예! 하면서 공손히 대답은 했지만 그러나 끝내 아직은 궁(窮)한 모습을 보이지 않더군요.
그대가 보내온 편지에서 [저의 학문이] ‘충분히 마땅하다’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제가 어찌 이 말씀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아직은 저의 공부가 완전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셨습니다만 [저의 경우] 일찍이 온전하게 공부를 시작한 적도 없으니, [그저]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만 말씀하실 정도만이 아닙니다. [또 그대의 지적과는 달리] 육자정의 병통은 반드시 ‘[그가] 사람은 보았으나 리(理)를 보지 못한 데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로서 볼 때 그는 틀림없이 약간의 선(禪)적인 의사(意思)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 스스로 주장이 너무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필시 그분 스스로는 ‘나의 학문은 선학(禪學)이 아니다. 다만 여러 제자들이 나의 학문을 선으로 잘못 오인했기 때문에 이러한 지경에까지 흘러오게 되었다.’라고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대가 저에게 깨우쳐 주신 바 진정기(陳正己)같은 경우도 선에 빠졌다 하여 그[육자정]의 꾸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진정기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또]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알지 모합니다. [육자정의 학문은] 두 개의 머리에 세 실마리가 있는 것과도 같고, 동쪽으로 나왔다가 서쪽에서 없어지는 것과도 같아서 [그 실체를]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성현 중에 이러한 법도는 없었습니다. 곧 호남(湖南)으로 향할까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만약 호남으로 가게 되면, 호남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육자정이 있는 곳을] 지나면서, [그를 만나 그와] 함께 다시 한번 [서로간의 학설에 토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자세하게 헤아려 바로잡을 요량이었습니다만 마침 또 차질이 생겨나게 되어 [장사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랜 뒤에 [육자정의 학설이 후세에 끼칠 영향이] 어떤 양상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만이 지닌 좋은 점을 그냥 덮어버려서는 안 되니 [그와 같은 점에 대해서는] 경복(敬服)할만합니다. 그는 때때로 [저와] 약속하기를, [저와 그가] 함께 가서 그대[여동래를 말함]를 뵙고 서로 더불어 극록(劇論)하면 더욱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선 편지를 보내 [그대의] 의견이 어떠한지 [답장을] 기다립니다. 혹 내년 봄이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장경부의 유문(遺文)은 일찍이 베낄 수가 없었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대략이라도 [유고를] 순대대로 정리해서 베껴내기를 기다렸다가 [이 베껴낸 원고에] 나란히 원본을 부쳐 교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첨체인(詹體仁)이 새로 [목판에] 새긴 장흠부의『논어(論語)』를 보내왔습니다만, [이는 그의] 옛 원본에 비해 많이 다릅니다. 만약 하늘이 [장흠부에게] 수년을 더 살게 하셨더라면 또한 [저술의 수준이] 응당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고 또 불의에 일찍 죽은 장흠부를 생각하면] 더욱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유씨(劉氏) 가정사(家庭事)에 관해 [그대가] 걱정해 주신 데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그 집(劉氏家)은 [혼사 문제로] 와서 묻는 한인(閑人)들이 많아, [이들을] 응수하는 데 자못 힘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이들 한인(閑人)들로부터] 원망과 노여움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빠른 시일 안에 [이번 혼사에 관한 그대의] 확정적인 논의를 듣고 싶습니다. [저의 아들 녀석인] 숙(塾)이 그대께서 강목(綱目)중 큰 글자[로 된 부분]을 베끼도록 지도하셨다지요. 그 녀석은 매우 나태합니다. 접때 [내가 그 녀석으로] 하여금『대사기(大事記)』 속에서 편(編)한 한 두 해의 일과 기타 문자 한 두 편(篇)을 베껴 쓰게 한 적이 있었는데 끝내 베껴 내지를 못하더군요. [그 녀석이] 마침내 이것을 잘 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마음의 발동인] 의(意)의 단서가 본래 아름답지 못한 상태[즉 자식에 대한 지나친 욕심, 혹은 그 때문에 자식을 평정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는 주자의 마음상태]에서 이러한 사태들을 바라보니, 더욱 한탄스럽기만 하군요. [그러나 그런들] 어찌 하겠습니까! 유자징(劉子澄)과 1개월 남짓 함께 있었는데 [그의 현재] 의사는 매우 좋았습니다. [유자징은 약 1개월 동안 나와 함께 있다가] 곧바로 호구(湖口)나루에 이르러 작별했습니다. 듣자 하니 제중(淛中)에 홍수와 전염병이 돌아, 죽은 자가 매우 많다고 하는군요. 이 소식을 들으니 [불쌍한 백성들 생각에] 콧잔등이 시큰해지는군요. [이런 상황인데도] 제공(諸公)들은 [불쌍한 백성들을] 간절히 구휼하는 정치를 포기하고 있는 듯이 보이니 [그야말로] 탄복할 만한 일입니다. 아직도 그대의 가르침[소식]을 받지 못하고 있어, 목을 길게 늘여 그대 생각에 마음이 내달립니다. [그대는] 두텁게 자중자애 하시어 [그대를 생각하는] 이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答呂伯恭
自頃謀歸, 卽無暇奉問, 而辱書至三四, 感慰不可言. 近書報及飮食衣服已不.須人, 尤以爲喜. 吾道之衰, 日以益甚, 天意亦不應如此之恝然也. 比日庚暑, 伏惟尊候益輕健. 熹一出兩年, 無補公私, 而精神困弊, 學業荒廢, 旣往之悔, 有不可言者. 自去年秋冬災傷之後, 不能求去, 以及今春, 遂有江西之命. 又俟代者, 至閏月二十七日方得合符而歸. 初欲乘此一走長沙, 自彼取道分寧, 往還甚徑. 尋以女弟之訃, 悲傷殊甚, 誼不可以他適, 遂罷前議. 替後只走山南山北旬日, 拜謁濂溪書堂而歸. 以四月十九日至家, 雖幸息肩, 又苦人事紛冗, 老幼病患, 未能有好况. 然大槪已是入淸凉境界中矣.
道中看中庸, 覺得舊說有費力處, 略加修訂, 稍覺勝前. 計他書亦須如此. 義理無窮, 知識有限, 求之言語之間, 尙乃不能無差, 况體之身․見諸事業哉? 稍定, 從頭整頓一過, 會須更略長進也.
子靜舊日規模終在, 其論爲學之病, 多說如此卽只是意見, 如此卽只是議論, 如此卽只是定本. 熹因與說旣是思索, 卽不容無意見 : 旣是講學, 卽不容無議論 : 統論爲學規模, 亦豈容無定本? 但隨人材質病痛而救藥之, 卽不可有定本耳. 渠却云正爲多是邪意見․閑議論, 故爲學者之病. 熹云如此卽是自家呵叱亦過分了, 須著‘邪’字․‘閑’字方始分明, 不敎人作禪會耳. 又敎人恐須先立定本, 却就上面整頓, 方始說得無定本底道理. 今如此一槪揮斥, 其不爲禪學者幾希矣. 渠雖唯唯, 然終亦未竟窮也.
來喩十分是當之說, 豈所敢當? 功夫未到, 則乃是全不曾下功夫, 不但未到而已也. 子靜之病, 恐未必是看人不看理, 自是渠合下有些禪底意思, 又自主張太過, 須說我不是禪, 而諸生錯會了, 故其流至此. 如所喩陳正己, 亦其所訶, 以爲溺於禪者. 熹未識之, 不知其果然否也. 大抵兩頭三緖, 東出西沒, 無提撮處. 從上聖賢, 無此樣轍. 方擬湖南欲歸途過之, 再與子細商訂, 偶復蹉跌, 未知久遠竟如何也. 然其好處自不可掩覆, 可敬服也. 他時或約與俱詣見, 相與劇論尤佳. 俟寄書扣之, 或是來春始可動也.
敬夫遺文不曾謄得, 俟旦夕略爲整次寫出, 却幷寄元本求是正也. 詹體仁寄得新刻欽夫論語來, 比舊本甚不干事. 若天假之年, 又應不止於此, 令人益傷悼也. 劉家事極感垂念. 渠家爲閑人來問者多, 頗費應酬, 又招怨怒, 亦欲早聞定論也. 塾子蒙招撝, 令寫綱目大字. 渠懶甚, 向令寫一二年大事記及他文字一兩篇, 竟不寫來, 不知竟能爲辦此否耳. 意緖本自不佳, 見此等事, 益令人歎惋, 奈何奈何子澄相聚月餘, 意思盡好, 直至湖口渡頭, 方分手也. 聞淛中水潦疾疫, 死者甚衆, 聞之令人酸鼻. 諸公直是放得下, 可歎服也. 未卽承敎, 引領馳情, 切冀厚自愛重, 以幸斯人.
여백공에게 답함 答呂伯恭
【해제】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46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34(汪張呂劉問答)에 실려 있다. 진래에 따르면, 이 편지는 순희 8년 신축년(辛丑, 1181년, 주자 52세) 7월에 씌여진 것이다. 신축년 8월에 여백공이 죽었으므로 이 편지는 마땅히 주자와 여백공 사이에 오간 편지 중 가장 늦은 편지, 즉 여백공이 죽기 전에 주자가 여백공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라 말할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주자는 여배공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여백공의 죽음이 어느 정도는 예견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대체로 앞 편지에 이어 자신이 학문적 관심을 재확인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그는 곧 이어 “나이 들어 생긴 저의 병은 이전과 비슷합니다만, 인간사로 인해 이리저리 얽매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뜻을 집중하여 독서할 수 없음이 한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자신의 관심이 복잡한 인사를 벗어나 공부에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어 정수(鄭守 즉 鄭景望)라는 관료와 연관된 언급, 선주(仙洲)에로의 여행 이야기, 여백공의 저술과 관련한 그 자신의 관심 등이 언급되고 있다.
여름 중에 반씨(潘氏)네 집 사람이 돌아간다기에 그 사람 편에 안부편지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후] 편지가 없어 소식을 접할 수가 없었으니 참으로 그대를 향해 우러르는 마음이 더합니다. 요즈음 가을이 제법 깊어가 날씨가 점차 서늘해지고 있습니다. 그대 건강이 더욱 좋아지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 생긴 저의 병은 이전과 비슷합니다만, 인간사로 인해 이리저리 얽매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뜻을 집중하여 독서할 수 없음이 한이 되고 있습니다. 근자에 한 번 건녕군(建寧郡)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정수(鄭守)는 그 당시 이미 오랜 동안 병에 시달리느라, 응접(應接)하는 데도 매우 힘들어했지만 [그렇다고 또 군(郡)의 일을 그냥] 내버려 두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의 정력이 시들고 닳아 군의 사무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제사(諸司)에서 여러 차례 견문(譴問)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에게] 권유하기를 ‘힘써 사퇴하기를 청하라’ 했습니다. 그는 [저의 권유가] 참으로 옳다고 여기었는데, 그가 [저의 권유를]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병석에서] 일어나질 못했군요. 이와 같이 인재를 등용은 해 놓고도 그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중도에서 일찍 죽게 만드니 매우 슬픈 일입니다. 저는 [벼슬에] 한 번 나와 2년을 보내느라 선주(仙洲)엔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때는] 마침 큰 비가 종일 내리는 바람에 폭포수가 대단히 장관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다시 날씨가 개이자 드디어 계곡과 골짜기를 마음껏 탐방할 수 있었는데, 볼만한 수석(水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이미 물길을 틔우고, 풀을 깎아내고 흙을 모우고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 구경했습니다. 앞으로 이 곳을 유람한다면 볼만한 경치가 더욱 풍부해서 예전에 유람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터인데, 다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지팡이와 신발에 의지해서 한 번 올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럽군요. [그대의] 논저는 마땅히 더욱 체계를 잡아 나가고 있으시겠지요. [그대의] 모든 저서 [중요한 곳 몇 단락이라도 저에게 보여주시어] 제가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요즈음 와서『문감(文鑑)』의 목록은 보았습니다만, [검토해 볼 수 있는 이 책의] 본문(本文)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저로서는 논할 말이 없긴 합니다. 그러나 [내가] 검토 가능한 곳 중에서도 의문이 없을 수 없는 곳이 있으니, [그대를] 직접 만나 면전에서 그대 학설에 대한 나의 의문을 여쭈어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직접 그대의 설명을 듣게 되면 그대가] 마땅히 깊은 뜻이 있어서 [『文監』에서 이런 저런 설을 취한 것]임을 알 수 있겠지요. 여러 철 지나는 동안 학자들과 만나 강학한 것이 없어, [학문이] 무너지고 나태해져가는데도 [서로] 가르쳐 인도해 주고 경계하여 채찍질해주는 도움은 없는 형편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체계적인 독서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아직은 [토론을 통해] 남에게서 유익함을 얻을 수 있기를 기필할 수는 없고 그저 나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여] 유익함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아들 숙(塾)이 집으로 돌아와 글을 읽는데 너무나 두서가 없습니다. 아직은 [이에]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대가] 이곳으로 오는 사람 편에 편지로 [저의 아들 숙(塾)을] 가르쳐 독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저도] 숙(塾)으로 하여금 ‘어떻게 공부하면서 이 세월을 보낼 것인지 [계획을] 세우라’고 독려하겠습니다. 산중(山中)에서 돌아온 후 게으름이 심해져 바삐 허둥대면서 이 글을 올립니다. 자약(子約) 역시 달리 편지할 여가가 없나 봅니다. [그의 사정] 또한 이곳 [나의 사정과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자애(自愛)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答呂伯恭
夏中潘家人還奉問, 無便, 不能嗣音, 良以向仰. 比日新秋已半, 天氣漸凉, 伏惟尊體益勝健. 熹衰病如昨, 非但人事縈絆, 不得一意讀書爲限. 比一至軍中, 鄭守時已久病, 應接甚費力, 又放不下. 覺其精力凋耗而郡事不理, 諸司數有譴(3-1519)問, 勸其力請引去, 渠甚以爲然, 未及用而已不起矣. 如此人材, 用之違其所長, 中道夭喪, 甚可傷也. 熹一出兩年, 仙洲久不到. 前日方得一往, 會大雨竟日, 瀑水甚壯. 旣而復霽, 遂得窮搜澗壑, 水石可觀處非止一二, 悉已疏薙而聚土累石, 爲臺以臨之. 自此往遊, 觀賞益富, 不但如前日矣. 但恨不能致杖屨之一來. 論著當益有次第, 每書各得數段見敎爲幸. 比看文鑑目錄, 無書者固不論. 其可檢者尙有不能無疑處, 恨不得面扣其說, 當有深意也. 數時絶無學者講學, 便覺頹惰, 無提斯警策之助. 旦夕亦欲作一課社, 未必有益於人, 庶幾自有益耳. 但塾子歸家, 讀書殊無頭緖, 未有以處之. 因來幸有以敎督之, 幷令如何度此光陰也. 歸自山中, 倦甚, 草草布此. 子約未暇別書, 亦不能異此. 惟千萬自愛爲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