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논어

서실

황성 2012. 11. 29. 18:58

    

▣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史記世家曰 孔子는 名丘요 字仲尼니 其先은 宋人이라 父는 叔梁紇이요 母는 顔氏니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十一月庚子에 生孔子於魯昌平鄕★邑하다 爲兒嬉★에 常陳俎豆하며 設禮容이러시니 及長爲委吏하여는 料量平하고 爲司職吏하여는 畜蕃息하시니라 適周하사 問禮於老子하시고 旣反而弟子益進이러라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孔子)는 이름이 구(丘)요, 자(字)가 중니(仲尼)이니, 그 선대(先代)는 송(宋)나라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요, 어머니는 안씨(顔氏)이니,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年)[B.C. 551] 경술년(庚戌年) 11월(月) 경자일(庚子日)[21일(日)]에 공자(孔子)를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출생하였다.

  공자(孔子)는 아이가 되어 장난할 때에 항상 조두(俎豆)를 진설(陳設)하며 예(禮)를 행하는 용모(容貌)를 베풀었었다. 장성하여 위리(委吏)[창고관리자]가 되어서는 요량(料量)을 평(平)하게 하시고, 사직리(司★吏)[축산 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으시고 돌아오자, 제자(弟子)들이 더욱 많이 찾아왔다.”


昭公二十五年甲申은 孔子年三十五라 而昭公奔齊魯亂하니 於是에 適齊하여 爲高昭子家臣하여 以通乎景公하시다 公欲封以尼谿之田한대 晏쵥不可라하니 公惑之어늘 孔子遂行하여 反乎魯하시다 定公元年壬辰은 孔子年四十三이라 而季氏强僭하고 其臣陽虎作亂專政이라 故로 孔子不仕하시고 而退修詩書禮樂하시니 弟子彌衆이러라


  소공(昭公) 25년(年)[B.C. 517] 갑신(甲申)은 공자(孔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昭公)이 제(齊)나라로 달아나 노(魯)나라가 혼란하니, 공자(孔子)께서는 이에 제(齊)나라로 가시어 고소자(高昭子)의 가신(家臣)이 되어서 경공(景公)에 통(通)하였다.

  경공(景公)이 이계(尼谿)의 토지(土地)로 공자(孔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안영(晏쵥)이 불가(不可)하다 하니, 경공(景公)이 의혹 하였다. 공자(孔子)는 마침내 제(齊)나라를 떠나 노(魯)나라로 돌아오셨다.

  정공(定公) 원년(元年)[B.C. 509] 임진(壬辰)은 나이 43세였는데, 계씨(季氏)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家臣)인 양호(陽虎)가 난(亂)을 일으켜 정권(政權)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닦으시니, 제자(弟子)들이 더욱 많아졌다.


九年庚子는 孔子年五十一이라 公山不★ 以費畔季氏하고 召孔子어늘 欲往而卒不行하시니라 定公이 以孔子爲中都宰하니 一年에 四方則之라 遂爲司空하시고 又爲大司寇하시다 十年辛丑에 相定公하사 會齊侯于夾谷하시니 齊人歸魯侵地하다 十二年癸卯에 使仲由爲季氏宰하여 墮三都하고 收其甲兵이러니 孟氏不肯墮成이어늘 圍之不克하시다


  정공(定公) 9년(年) 경자(庚子)는 공자(孔子) 나이 51세였다. 공산불뉴(公山不★)가 비읍(費邑)을 가지고 계씨(季氏)를 배반하고 공자(孔子)를 부르자, 가시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

  정공(定公)이 공자(孔子)를 중도(中都)의 읍재(邑宰)로 삼으니, 1년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공(司空)이 되시고, 또 대사구(大司寇)가 되시었다.

  10년(年) 신축(辛丑)에 정공(定公)을 도와서 제(齊)나라 군주(君主)[경공(景公)]와 협곡(夾谷)에서 회맹(會盟)하시니, 제(齊)나라 사람들은 노(魯)나라에게서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12년(年) 계묘(癸卯)에 중유(仲由)로 하여금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을 삼아 세 도읍(都邑)의 성(城)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맹씨(孟氏)의 집안에서는 성(成)땅의 성(城)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四年乙巳는 孔子年五十六이라 攝行相事하사 誅少正卯하시고 與聞國政하시니 三月에 魯國大治라 齊人歸女樂以沮之하니 季桓子受之하고 郊又不致쮨俎於大夫한대 孔子行하시니라 適衛하사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하시다 適陳하실새 過匡하시니 匡人以爲陽虎而拘之하다 旣解에 還衛하사 主蘧伯玉家하사 見南子하시다 去適宋하신대 司馬桓魋 欲殺之어늘 又去適陳하사 主司城貞子家하시고 居三歲而反于衛하시니 靈公不能用하다 晉趙氏家臣佛肹이 以中牟畔하여 召孔子어늘 孔子欲往이라가 亦不果하시다 將西見趙簡子라가 至河而反하사 又主蘧伯玉家러시니 靈公問陳이어늘 不對而行하사 復如陳하시다


  정공(定公) 14년(年) 을사(乙巳)는 공자(孔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섭행(攝行)하여 소정묘(少正卯)를 베시고, 국정(國政)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만에 노(魯)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齊)나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 악사(樂師)를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季桓子)가 이것을 받았으며, 교제(郊祭)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大夫)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孔子)는 노(魯)나라를 떠나셨다.

  위(衛)나라에 가서 자로(子路)의 처형(妻兄)인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주인(主人)을 정하시었다.

  진(陳)나라를 가실 적에 광(匡)땅을 지나니, 광(匡)땅 사람들은 양호(陽虎)라고 여겨 구류(拘留)하였었다. 풀려나자 위(衛)나라로 돌아와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주인(主人)을 정하시고 남자(南子)를 만나보셨다.

  위(衛)나라를 떠나 송(宋)나라에 가시니, 사마(司馬)인 환퇴(桓魋)가 죽이고자 하므로, 또 송(宋)나라를 떠나 진(陳)나라에 가서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주인(主人)을 정하시고, 3년 동안 거주하다가 위(衛)나라로 돌아오셨는데, 영공(靈公)은 등용하지 못하였다.

  진(晉)나라 조씨(趙氏)의 가신(家臣)인 필힐(佛肹)이 중모(中牟)땅을 가지고 배반한 다음 공자(孔子)를 부르니, 공자(孔子)는 가시려고 하였으나 또한 결행하지 않으셨다.

  장차 서쪽으로 가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 보려고 하시다가 황하(黃河)에 이르러 돌아와 다시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주인(主人)을 정하셨는데, 영공(靈公)이 진법(陣法)을 묻자 대답하지 않고 떠나 다시 진(陳)나라로 가셨다.


季桓子卒에 遺言謂康子하되 必召孔子라하더니 其臣止之한대 康子乃召冉求하다 孔子 如蔡及葉하시니라 楚昭王이 將以書社地로 封孔子러니 令尹子西不可라하니 乃止하니라 又反乎衛하시니 時에 靈公已卒하고 衛君輒이 欲得孔子爲政하며 而冉求爲季氏將하여 與齊戰有功한대 康子乃召孔子어늘 而孔子歸魯하시니 實哀公之十一年丁巳而孔子年六十八矣라 然이나 魯終不能用孔子하고 孔子亦不求仕하사 乃敍書傳禮記하시며 刪詩正樂하시며 序易彖繫象說卦文言하시니라 弟子蓋三千焉에 身通六藝者七十二人이러라 十四年庚申에 魯西狩獲麟하니 孔子 作春秋하시니라 明年辛酉에 子路死於衛하고 十六年壬戌四月己丑에 孔子卒하시니 年七十三이라 葬魯城北泗上하다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하되 惟子貢廬於★上하니 凡六年이러라 孔子生鯉하시니 字伯魚라 先卒하고 伯魚生伋하니 字子思니 作中庸하시니라


  계환자(季桓子)가 죽을 적에 유언(遺言)하여 이르되 반드시 공자(孔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하자 강자(康子)는 마침내 염구(冉求)를 불러왔다.

  공자(孔子)는 채(蔡)나라로 가시어 섭(葉) 땅에 이르셨다.

  초(楚)나라 소왕(昭王)은 장차 서사(書社)의 땅을 가지고 공자(孔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영윤(令尹)인 자서(子西)가 불가(不可)하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다시 위(衛)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영공(靈公)이 이미 죽고, 위(衛)나라 군주(君主)인 첩(輒)이 공자(孔子)를 얻어 정치(政治)를 하고자 하였으며, 염구(冉求)가 <노(魯)나라> 계씨(季氏)의 장수(將帥)가 되어 제(齊)나라와 싸워 전공(戰功)을 세우자, 강자(康子)가 마침내 공자(孔子)를 불렀으므로 공자(孔子)가 노(魯)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애공(哀公) 11년(年) 정사년(丁巳年)으로 공자(孔子)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노(魯)나라에서는 끝내 공자(孔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공자(孔子)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를 서(敍)하시며, 《시(詩)》를 산정(刪定)하고 악(樂)을 바로잡으시며, 《주역(周易)》의 단전(彖傳)·계사전(繫辭傳)·상전(象傳)·설괘전(說卦傳)·문언전(文言傳)을 차례로 지으셨다.

  제자(弟子)가 3천 명이었는데, 몸소 육예(六藝)를 통달(通達)한 자는 72명이었다.

  애공(哀公) 14년(年) 경신(庚申)에 노(魯)나라에서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麒麟)을 잡으니, 공자(孔子)는 《춘추(春秋)》를 지으셨다.

  이듬해 신유(辛酉)에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으며, 애공(哀公) 16년(年)[B.C. 479] 임술(壬戌) 4월(月) 기축일(己丑日)[11일(日)]에 공자(孔子)가 별세하시니, 나이가 73세였다. 노(魯)나라 도성(都城)의 사수(泗水)가에 장례(葬禮)하니, 제자(弟子)들이 모두 심상(心喪) 3년(年)을 입고 떠났으나, 오직 자공(子貢)만은 무덤 가에 여막(廬幕)을 짓고 모두 6년을 지내었다.

  공자(孔子)는 이(鯉)를 낳으니, 자(字)가 백어(伯魚)였는데 먼저 죽었고, 백어(伯魚)가 급(伋)을 낳으니, 자(字)가 자사(子思)로 《중용(中庸)》을 지으셨다.


何氏曰 魯論語는 二十篇이요 齊論語는 別有問王知道하여 凡二十二篇이요 其二十篇中章句도 頗多於魯論이라 古論은 出孔氏壁中하니 分堯曰下章子張問하여 以爲一篇하여 有兩子張하니 凡二十一篇이요 篇次不與齊魯論同이니라


  하씨(何氏)가 말하였다. “《노논어(魯論語)》는 20편(篇)이요, 《제논어(齊論語)》는 별도로 〈문왕(問王)〉과 〈지도(知道)〉두 편(篇)이 있어서 모두 22편(篇)이며, 그 20편(篇) 가운데의 장구(章句)도 노논(魯論)보다 상당히 많다. 《고논어(古論語)》는 공씨(孔氏)[공안국(孔安國)]의 집 벽 속에서 나왔는데, 〈요왈(堯曰)〉 아래 장(章)의 〈자장문(子張問)〉을 나누어 한 편(篇)을 만들어서 두 〈자장편(子張篇)〉이 있으니, 모두 21편(篇)이며, 편(篇)의 차례도 《제논어(齊論語)》나 《노논어(魯論語)》와 같지 않다.”


程子曰 論語之書는 成於有子曾子之門人이라 故로 其書獨二子以子稱하니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논어(論語)》의 책은 유자(有子)와 증자(曾子)의 문인(門人)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책은 유독 두 분만을 자(子)라고 칭하였다.”


程子曰 讀論語에 有讀了全然無事者하며 有讀了後에 其中得一兩句喜者하며 有讀了後에 知好之者하며 有讀了後에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니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논어(論語)》를 읽음에 다 읽은 뒤에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 두 구(句)를 터득하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는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


程子曰 今人은 不會讀書로다 如讀論語에 未讀時도 是此等人이요 讀了後에도 又只是此等人이면 便是不曾讀이니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면 《논어(論語)》를 읽었을 때에,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요, 다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곧 읽지 않은 것이다”


程子曰 ★自十七八로 讀論語하니 當時已曉文義러니 讀之愈久에 但覺意味深長이로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나는 나이가 17∼18세 때로부터 《논어(論語)》를 읽었는데, 당시에도 이미 글 뜻을 알고 있었다. 읽기를 더욱 오래할수록 다만 의미(意味)가 심장(深長)함을 느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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