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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봉집서(海峯集序)

황성 2011. 4. 30. 19:08

해봉집서(海峯集序)

 

채제공(蔡濟恭)

 

今有衣縫掖, 冠章甫하야 行則徐하고 坐則危호되 叩其有하면 茅塞也요 觀其由하면 慾坑也인댄 若是者를 可謂之儒乎아 衣方袍하고 荷念珠하야 拜則膜하고 夏則結한대 問其業하면 羲易不離手하고 讀其文하면 衆體無不具인댄 若是者를 可謂之釋乎아 然於外하고 不然於內하면 吾以其不然而不然之요 不然於外하고 然於內하면 吾從其然而然之호리니 然이면 果可不重之乎며 不然이면 果可不恥之乎아 日에 伽倻僧旨學이 千里飛錫하야 訪余於維楊樵牧社하야 袖其師海峯所裒錄一冊하고 要得余一言이라 余進學而謂曰 異哉라 而師之語也여 而師는 釋也니 釋而爲釋語 可也어늘 今其詩若文은 以皮則往往雜西方偈語也로되 以體裁則無往非操觚家結構三昧라 且其感慨不平之氣가 有時呈露於音調之間하니 豈其無所以哉아 余雖不見師나 余之得於文如此라 余以師謂師之非釋也면 則師固釋也니 其可乎哉아 以師謂師之爲釋也면 則釋之語 固不應爾니 其可乎哉아 異哉라 而師之語也여 使余言爲不知師者인댄 不可以不知文 師之文也요 言果知師인댄 已言之矣니 又安用文爲리오 學瞠然久라가 徐以對曰 吾師本簪纓世어늘 幼而失怙恃하고 家貧하야 無所於託身하야 卒爲如來弟子하니이다 然意未嘗不在於儒也하야 貝葉諸書를 雖無不淹貫이나 乃若所嗜는 羲易也요 見星微旨를 雖無不講說이나 乃若所服은 儒敎也라 然師嘗不欲人知師하야 師之事를 師知之하고 二三闍梨知之하고 餘人莫師知也라 今公以文而知師하고 知師而言之하시니 文은 言之載也니 何有乎以是言而載之리잇고 且吾師見公嘗爲鳳巖師作銘하고 歎曰 古文也라 吾死而得公文이면 死亦榮矣라하시니 師之知公이 在公之知師之先也니 敢以是爲請하노이다 余曰諾다 師法名有璣요 俗姓柳니 文簡公公權之裔也사 九歲에 入俗離山하야 讀小學할새 目三過면 口能誦이러니 十五에 落紺하야 七十九에 示寂于伽倻之海印寺하니 火浴之夕에 頂骨超騰云이라 師嘗自字曰好隱이라하니 葢儒之隱於浮屠者也라

 

어떤 사람이 도포를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서 천천히 걷고 단정하게 앉아 있지만 그의 마음가짐을 보면 꽉 막혔고 동기를 살펴보면 욕심이 가득한데, 이와 같은 자 유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가사(袈裟)를 입고 염주(念珠)를 목에 걸고는 합장을 하고 하안거(夏安居)를 하는데, 그가 일삼는 것을 물어보면 《주역(周易)》을 손에 놓지 않고 그의 글을 읽어보면 온갖 문체가 모두 구비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자를 승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겉모습은 훌륭하지만 내면이 훌륭하지 않다면, 나는 훌륭한 점을 따라 훌륭하게 여길 터이니, 훌륭하다면 과연 그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며, 훌륭하지 않다면 과연 그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는 가야산 승려 지학(旨學)이 천리 밖에서 석장(錫杖)을 날려, 유양(維楊)의 초목사(樵牧社)로 나를 방문해 와서, 그의 스승 해봉의 저서 한 권을 소매에서 꺼내 나에게 한마디 글을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지학을 앞으로 나오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사의 글은 이상하다. 대사는 승려이니, 승려는 승려의 말을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지금 그의 시문은 겉으로 보면 종종 불교의 게어(偈語)가 섞여 있지만, 체재로 보면 어느 곳이든 문장가가 지은 최고의 경지 아닌 것이 없고, 또 그 감개하여 불평한 기운이 때로 음조(音調) 사이에 드러나곤 하니, 어찌 까닭 없이 그런 것이겠는가. 내 대사를 만나 보지는 못하였지만, 내가 글에서 느낀 것이 이와 같다. 내가 대사를 가지고 승려가 아니라고 한다면, 대사는 실제로 승려였으니 옳겠는가. 그렇다고 대사를 가지고 승려라고 한다면, 승려의 말에 참으로 걸맞지 않으니 옳겠는가. 대사의 말은 이상하다. 만약 나의 말이 대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사를 모르는 사람이 대상의 글에 서문을 쓸 수 없을 것이고, 나의 말이 과연 대사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이것을 말했으니, 또 무엇 하러 서문을 지겠는가.”

지학이 한참동안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천천히 대답하였다.

“제 스승은 본래 명문세족의 출신이었는데, 어려서 부모를 잃고 집이 가난하여 몸을 의탁할 데가 없으므로 마침내 불가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뜻은 항상 유가에 있어서, 불가의 서적을 널리 통달하였지만 좋아하는 바는 《주역(周易)》이었으며, 견성의 심오한 뜻을 모두 강설하였지만, 행한 것은 유교였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자신에 대해 남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스승의 일은 스승과 두서너 명의 사리(闍梨)들만 알 뿐이고, 다른 이들은 스승에 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서는 스승의 글을 보고서 스승을 알아 보셨고, 또 스승을 알아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글은 말을 기재하는 것이니, 이 말을 기재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또 우리 스승이 예전에 공께서 봉암대사(鳳巖大師)를 위하여 지으신 명문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고문(古文)이구나. 내 죽어 공의 글을 얻는다면 죽어도 영광일 것이다.’ 하였으니 스승이 공을 알아본 것이 공이 스승을 알아본 것 보다 먼저였습니다. 그러니 감히 글을 써주시길 청합니다.”

이에 나는 승낙하였다.

대사의 법명은 유기(유기)이고 속성은 유(류)씨이니, 문간공 유공권의 후예이다. 9세 때 속리산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눈으로 세 번 보면 입으로 외울 수가 있었고, 15세 때에 불가에 들어가 79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시적(示寂)하였다. // 머리뼈가 날아올랐다고 한다. 대사는 일찍이 자호하기를 호은(好隱)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유학자로서 불교에 은둔한 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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