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발/기서발

백곡집서(栢谷集序)

황성 2011. 6. 5. 14:00

栢谷集序.hwp

민진후(閔鎭厚)

 

昔歲龍蛇에 島夷猖獗하여 肆然發射天之語而假途於我하니 我昭敬大王이 赫然而怒하여 斥其使而奏于帝라 俄而賊兵蔽海而至하여 犯我都城하니 車駕西巡龍灣하여 謂羣臣曰 父母孔邇하니 庶抒我于艱리니 誰能爲我赴愬者오 于時에 栢谷鄭公이 挺身請往하니 上亟加嘉歎하고 慰諭而遣之라

옛날 임진년 난리 때 섬나라 오랑캐가 창궐하여 멋대로 하늘을 쏜다는 말을 제멋대로 지껄이며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하니,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宣祖))께서 크게 노하시어 일본 사신을 물리치고 명나라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그러자 갑자기 왜적의 함선이 바다를 뒤덮고 몰려와서 우리 도성을 침략하니, 이에 어가(御駕)가 급히 서쪽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피난하였다. 상께서 신하들에게,

“부모의 나라가 매우 가까이 있으니 곤경에 처한 나를 풀어주실 것이다. 누가 나를 위해 명나라에 가서 사정을 호소하겠는가?”

하였다. 이 때 백곡 정 공(鄭公)이 앞장서서 가기를 자원하니 상이 매우 가상히 여기시고 위로하여 보냈다.

 

旣至에 詣兵部하여 白其狀하고 仍痛哭於庭하니 石尙書가 大感動于心曰 古之申包胥도 亦何以加此哉리오 遂入告于后하여 大發兵救之이라 皇威所加에 凶鋒自挫하고 封疆克復하여 宗社再安이라 吾東方式至于今日者가 秋毫莫非帝力이니 而鄭公至誠籲天之功이 亦豈少哉아

공이 중국에 도착하여 병부(兵部)에 나아가 우리나라의 상황을 아뢰고 이어 뜰에서 통곡하니, 석 상서(石尙書)가 크게 감동하여,

“옛날 신포서(申包胥)도 어찌 이보다 더 간절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궁궐로 들어가 황제께 고하여 구원병을 크게 일으켜 구원하였다. 황제의 위용이 가해지는 곳에 왜적의 기세가 꺾여 국토를 회복하고 종묘사직이 다시 안정되었다. 우리나라의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모두 명나라 황제의 은덕이니, 정공이 지극 정성으로 명나라에 호소한 공로가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百年之間에 滄桑屢變하여 神州陸沈하니 事有不忍言者이라 甲申春에 我殿下以皇明覆亡之回甲에 益切匪風下泉之思하여 設壇禁中而親祀之하니 猗歟盛哉인저 其將永有辭於天下後世矣로다 顧公後裔零替하여 若敖之鬼不免餒러니 而賤臣鎭厚가 竊不勝衋然而傷하여 嘗於筵席에 敢請官廩其主祀者하니 上傾聽而許之라 聞者莫不感聳焉이라

그 후 백여 년간 세상이 많이 변하여 명나라가 망하였으니, 차마 입에 담아 말하지 못할 일이다. 갑신년(1704, 숙종30) 봄에 우리 전하께서 명나라가 멸망한 지 60년 되는 해에 명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시어 궁궐 안에 제단을 세우고 직접 제사를 지내니, 아, 성대한 일이다. 천하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다만 공의 후손들이 몰락하여 공의 제사를 지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니, 내 몹시 슬퍼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언젠가 연석(筵席)에서 그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손에게 물품을 내려줄 것을 감히 간청한 적이 있었는데, 상께서 듣고 기꺼이 허락해 주시니, 이 말을 듣고 모두 크게 감동하였다.

 

一日에 公之耳孫鍵이 袖公詩文若干篇하여 來謁于不侫曰 吾祖巾衍之藏이 散落殆盡하니 其得保於兵燹者가 惟有此耳라 誠不忍湮没無傳이나 而家貧力綿하여 無以刊行하니 望子之終始垂惠也하소서하다 不侫再拜而受之하고 就加考訂하니 大司徒金公宇杭과 嶺南方伯洪公萬朝가 聞風而相其役하여 乃付之剞劂氏라 其中科場所製은 非文集可載而一倂收入者은 以公咳唾之餘는 隻字猶爲可貴也일새니라 論禮之書은 或不無可疑而不敢去取者는 旣有退陶之答하여 後學難於容議也니 觀者宜加察焉이라

어느 날 공의 이손(耳孫, 현손(玄孫)의 아들) 정건(鄭鍵)이 공의 시문 약간 편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집에 보관해 오던 선조의 글이 병란 중에 거의 다 흩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라곤 겨우 이것뿐입니다. 실로 차마 망실한 채 후대에 전하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집안이 가난하고 힘이 미약하여 간행할 길이 없으니, 선생은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나는 재배하고 받아 교정하였는데, 호조 판서 김우항(金宇杭) 공과 영남 관찰사 홍만조(洪萬朝) 공이 이 소문을 듣고 간행하는 일을 도와주어 이윽고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과장(科場)에서 지은 글은 문집에 실을 만한 내용이 아니지만 모두 실은 이유는 공이 남기신 글은 단 한 글자라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예(禮)를 논한 편지는 혹 의문 나는 점이 있지만 감히 마음대로 빼버리지 않은 것은 이 편지에 대해서 이미 퇴계선생의 답장이 있어 후학들이 쉽게 논란할 점이 못되기 때문이다. 읽는 자는 더 자세히 참작하여 살펴야 할 것이다.

 

不侫於公에 實有曠世之感러니 今適謬膺使命하여 來赴燕京하니 由當日請兵之路하여 作虜庭輸幣之行이라 懷高風而已遠하여 撫吾身而潛悲하니 俯仰慙憤하여 寧欲無生이라 只傾新亭之淚하여 注之東海之波而已이라 噫라 崇禎紀元之八十二年己丑孟春에 崇政大夫 判敦寧府事閔鎭厚는 謹序하노라

나는 공을 실로 시대를 초월하여 사모하였는데, 지금 마침 사명(使命)을 띠고 연경(燕京, 북경(北京))에 가게 되었다. 선생이 당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가신 길이 이제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길이 되었으니, 선생의 고아한 풍모를 생각하지만 시대가 이미 아득하여 내 마음을 달래며 남몰래 슬퍼하니, 이리보고 저리보나 부끄럽고 분한 생각이 들어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다. 다만 이 신정(新亭)에서 눈물을 쏟아 동해의 물결에 흘려보낼 뿐이다. 아, 슬프도다.

숭정(崇禎) 82년 기축년(1709, 숙종35) 이른 봄에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민진후는 삼가 쓰다.

 

 

栢谷集序.hwp
0.03MB

'기서발 > 기서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동집속집발(別洞集續集跋)  (0) 2011.06.05
해봉집서(海峯集序)  (0) 2011.04.30
혜음사 신창기(惠陰寺新創記)  (0) 2011.04.30
운금루기  (0) 2011.04.18
잠와기  (0) 2011.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