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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음사 신창기(惠陰寺新創記)

황성 2011. 4. 30. 19:07

혜음사 신창기(惠陰寺新創記)

 

峯城縣南二十許里애 有一小寺하니 㢮廢已久에 而鄕人이猶稱其地爲石寺洞이라하다 自東南百郡趣京都와 與夫自上流而下者가 無不取道於此라 故人磨肩馬接跡하여 憧憧然未甞絶러니 而山丘幽遠하고 草木蒙翳하여 虎狼類聚하여 自以爲安室利處하여 潛伏而傍睨하고 時出而爲害라 非止此而已라 閒或有寇賊敓攘之徒가 便其地荒而易隱하고 人畏而易劫하여 爰來爰處하여 以濟其姧하니 二邊行者가 躊躇莫之敢前하고 相戒以盛徒侶하여 挾兵刃而後過焉이라도 而猶或不免以死焉者가 歲數百人러라 先王睿王在宥十五年己亥秋八月에 近臣少千奉使南地迴러니 上問若此行也에 有所聞民之疾苦乎아하니 則以是聞之하니 上惻然哀之하여曰如之何可以除害而安人고하니 奏曰殿下幸聽臣하소서 臣有一計하니이다 不費國財하고 不勞民力이라 但募浮圖人하여 新其廢寺하여 以集淸衆하고 又爲之屋廬於其側하여 以著閒民이면 則禽獸盜賊之害自遠하여 行路之難平矣리이다 上曰可하다 汝其圖之하라하니 於是에 以公事抵妙香山寺하여 告於衆中曰 某所有巨害를 上不忍動民以土木營造之事하니 先師見遘難者면 必施無畏하니 疇克從我하여 有事於彼乎아하니 寺主比丘惠觀이 隨喜之하니 其徒欲從者一百人이라 惠觀老不能行하여 擇勤恪有技能者證如等十六人하여 資送之하다 以冬十一月에 到其所하여 作草舍以次之한데 上命比丘應濟하여 主典其事하고 弟子敏淸副之하다 利器械鳩材瓦하여 經始於庚子春二月하고 至壬寅春二月하여 工旣告畢하다 齋祠息宿으로 以至廚庫히 咸各有所하고 又謂若乘輿南巡이면 則不可知其不一幸而駐蹕於此하니 宜其有以待之라하여 遂營別院一區하니 此亦嘉麗可觀이라 至今上卽位에 賜額爲惠陰寺하다

 

봉성현(峰城縣, 경기 파주(坡州)) 남쪽 20리쯤에 한 작은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은 허물어진 지가 오래였지만 고을 사람들은 그곳을 여전히 석사동(石寺洞)이라 부른다. 동남에 있는 여러 고을에서 개경으로 가거나 위에서 내려가는 자들이 모두 이 길을 이용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깨가 부딪치고, 말굽이 서로 부딪히는 등 항상 북적거리며 인적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골짜기가 깊고 언덕이 높으며 초목이 무성하여 범이 떼 지어 다니며 편안하게 숨을 곳으로 여기니, 몰래 숨어서 엿보다가 수시로 나타나서 사람을 해친다. 피해는 이뿐만 아니다. 간혹 이곳이 음산하여 숨기 쉽고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어 약탈하기 쉽다는 점을 이용하여 도적 떼가 여기에 은신하며 간사한 짓을 일삼았다. 그래서 양방향에서 통행하는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서로 경계하고 무리를 모아서 무기를 지니고서 통과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 해에 수백 명이 살해당하였다.

선왕(先王) 예종(睿宗) 15년 기해(己亥, 1119) 가을 8월에 근신(近臣) 소천(少千)이 사명을 받들어 남쪽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는데, 상께서

“이번 행차에 백성들의 괴로운 일을 들은 것이 있는가?”

물으시니, 곧 이러한 정황을 아뢰었다. 상이 이 점을 딱하게 여기시고

“어떻게 하면 폐해를 제거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가?”

하셨다.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의 말씀을 들어주신다면 신에게 한 가지 묘책이 있습니다. 국가의 재정을 축내거나 민간의 인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승려들을 모집하여 지금 방치되어 버려진 절을 다시 세우고 다시 승려를 모으고, 그 주위에다 집을 지어 직업이 없는 백성을 정착시키면 짐승이나 도둑의 피해가 절로 사라져 백성들이 편안하게 오고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좋다. 네가 이 책임을 맡아라.”

하셨다. 이리하여 공무를 띠고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절에 가서 승려들에게 말하길,

“아무 곳에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으니, 나라에서는 차마 토목 공사로 백성을 괴롭힐 수가 없다. 옛날 승려들은 곤경에 처한 상황을 보면 반드시 한량없는 보시를 베풀었으니, 그대들이 나를 따라 그곳에서 도와 줄 수 있겠는가?”

하자, 주지 혜관(惠觀)이 기꺼이 따라 주었다. 그리고 그 문도 가운데 따라가려는 자들이 백 명이나 되었다. 혜관은 늙어서 가지 못하기에, 증여(證如) 등 성실하며 기술이 있는 16명을 선발하고는 경비를 마련하여 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그곳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머물렀다. 상이 승려 응제(應濟)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제자 민청(敏淸)을 부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연장을 정비하고 목재와 기와를 마련하여 경자년(1120) 봄 2월에 착공하여 임인년(1122) 봄 2월에 완공하였다. 불당과 숙소에서부터 주방과 창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물이 갖추어졌다. 그리고 ‘주상이 행차 하시면 혹시 한 번 머무를지도 모르니, 이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는 별원(別院)을 지었는데, 이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매우 볼만하였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시어 혜음사(惠陰寺)라는 편액을 내리셨다.

 

噫變深榛爲精舍하고 化畏途爲平路하니 其於利也에 不其博哉아 又偫以米穀으로 擧之取利하고 設粥以施行人이 至今幾於息焉이라 少千意欲繼之於無窮러니 精誠有感이라 檀施荐來이라 上聞之하고 惠捨頗厚하며 王妃任氏亦聞而悅之曰 凡其施事를 我其尸之호리라하고 增其委積之將盡者하고 補其什物之就缺者然後에 事無不備者矣라 或曰 孟子言堯之時에 洪水橫流하여 使禹治之어늘 鳥獸之害人者消然後에 人得平土而居之하고 使益烈山澤而焚之하여 鳥獸逃匿하며 周公相武王하여 驅虎豹犀象而遠之하신대 天下大悅이라하다 其或春秋時에鄭國多盜하여 取人於萑符之澤하니 子大叔除之하고 漢時渤海民飢하여 弄兵於潢池之中하니 龔遂安之하다 其他以盜賊課로 寄名於史傳者가 無代無之하니 則逐虎豹除盜賊은 亦公卿大夫之任也어늘 而少千下官也요 應濟敏淸開士也니 非所謂官治其職하고 人憂其事라야 乃無所陵者也니 其可記之以話於後乎아 又釋氏之施貴於無住相하고 莊周亦云施於人而不忘은 非天布也라하니 則區區小惠를 亦宜若不足書이라하니 答曰不然하다 唐貞元季年夏大水에 人物蔽流而東이 若木柹然이러니 有僧愀焉하여 援溺救沉하여 致之生地者가 數十百어늘 劉夢得志之하고 宋煕寧中에 陳述古知杭州하여 問民之所病하니 皆曰六井不治하여 民不給於水라하니 乃命僧仲文子珪하여 辨其事어늘 蘇子瞻記之라 君子樂道人之善如此하니 豈可以廢乎아 而又人之爲善을 自忘可也어니와 不有傳者면 何以勸善리오 其經論所言를 不可縷敍라 至若唐僧代病이 作施食道塲하여 前後八會러니 通慧師載之僧傳요 至於儒書하야도 亦有之하니 如禮記云 衛公叔文子爲粥하여 與國之餓者하니 不亦惠乎아 則此又不可不書者也라 少千은姓李氏라 父晟은 善屬文登科하여 爲左拾遺知制誥卒하다 少千仕至七品官한대 公事餘閒에 事佛尤謹이라 今則麻衣蔬食하여 自號爲居士하여 勤苦其行으로 爲上所知라 故有所立如此라 應濟住持日淺하고 敏淸繼之하여 訖用有成하니 可謂能矣라 其所資用은 皆出於上所賜及諸信施하니 其名目이 具如陰記云爾라 時甲子春二月日에 記하노라

 

아, 깊은 숲을 바꾸어 고요한 집으로 만들었고, 두려움에 떨던 길을 평온한 길로 바꾸었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함이 있었다. 또 곡식을 빌려주어 불린 이자로 죽을 쑤어서 여행자에게 공급하던 식량이 지금은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소천(少千)이 이것을 계속하려 하자 그의 정성에 감화를 받아 사람들의 희사품이 계속 이어졌다. 상이 이러한 말을 듣고 많은 희사를 했으며, 왕비(王妃) 임씨(任氏)도 듣고 기뻐하여 “그곳의 모든 일을 내가 주관하리라.” 하시고는 떨어져가는 식량을 보태주시며 파손된 물건을 보충해 주시니, 그런 뒤에 모든 일이 완비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맹자(孟子)가 ‘요(堯)임금 시대에 홍수로 물이 범람하자 우(禹)에게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물길을 잡아 사람을 해치는 짐승이 사라진 뒤에 사람이 평지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익(益)에게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 불을 놓아 태우게 하니 짐승이 달아났으며, 주공(周公)은 무왕(武王)을 도와 범ㆍ표범ㆍ물소ㆍ코끼리 등을 몰아 멀리 보내니 천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춘추시대 정(鄭)나라에 도둑이 많아 환부(萑符)의 못에서 사람을 해쳤는데, 대숙(大叔)이 도둑을 없애 버렸고, 한나라 때에 발해(渤海) 지역에 흉년이 들었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마치 어린애들이 못 속에서 병기(兵器)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도둑질을 하자 공수(襲遂)가 평정하였다. 그 밖에 도적을 평정한 일로 역사 전기 속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어느 시대든지 항상 있었다. 짐승을 몰아내며 도둑을 잡는 일은 공경(公卿)과 대부의 임무이다. 그런데 소천(少千)은 하급 관리이고, 응제(應濟)와 민청(敏淸)은 승려이니, 이것을 ‘관리는 자신의 직책을 수행하고 일반 사람은 자기의 일을 해야지만 능멸하지 않다.’라는 말에 비추어 보면, 어찌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또 불교에서 보시 가운데 무주상(無住相)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장주(莊周)도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나서 잊지 않는 것은 진실한 베풂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보잘것없는 은혜를 기록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당나라 정원(貞元, 덕종(德宗)의 연호) 말년 여름 큰 홍수가 났을 적에 사람들이 나무 조각 떠내려가 듯 휩쓸려서 동쪽으로 떠내려갔는데, 이 관경을 보고 딱하게 여긴 어떤 중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였는데, 살려 낸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유몽득(劉夢得)이 이 일을 기록하였고, 송나라 희령(熙寧 신종(神宗)의 연호) 연간에 진술고(陳述古)가 항주(杭州)의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 민간의 질고에 대해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우물 6개가 모두 파손되어 백성들이 식수를 공급받지 못한다.’ 하였다. 마침내 승려 중문(仲文)과 자규(子珪)에게 명하여 그 일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소자첨(蘇子瞻)이 이 일을 기록하였다. 군자가 이처럼 남의 선을 칭찬하기를 좋아하니,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서 스스로 잊어버리는 것은 괜찮지만 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무엇으로 선을 권장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경론(經論)에서 서술한 것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지만, 이를테면 당나라 승려 대병(代病)이 시식도량(施食道場)을 설치한 것이 그동안 여덟 번이었는데, 통혜(通慧) 대사가 승전(僧傳)에 실었다. 유가의 경전에도 이런 예가 있다. 이를테면 《예기(禮記)》에 ‘위(衛) 공숙문자(公叔文子)가 죽을 쑤어서 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하였으니, 이번 일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소천(少千)은 성은 이씨(李氏)이다. 아버지 이성(李晟)은 글을 잘 지어 과거에 합격하여 좌습유 지제고(左拾遣知制誥)로 졸하였다. 소천은 벼슬이 7품관에 이르렀으며, 공무를 보는 여가에 불교에 심취하였다. 지금은 베옷을 입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자칭 거사(居士)라 한다. 실천이 철저하다고 임금에게 알려져 이러한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응제(應濟)는 일을 맡았다가 오래 가지 못하고 민청(敏淸)이 이를 이어서 완성을 보았으니 유능하다 할 수 있다. 그곳에 든 모든 경비는 모두 상이 하사한 것과 여러 신도들이 보시한 것이다. 그 이름과 목록은 모두 후면에 기록한 바와 같다. 갑자년(1144) 봄 2월 어느 날 기(記)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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