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몽구

胡廣補闕

황성 2009. 5. 25. 10:04

胡廣補闕(36)

後漢胡廣字伯始 南郡華容人. 察孝廉 試章奏. 安帝以廣爲天下第一. 累爲三公. 年已八十而心力克壯. 性溫柔謹素 常遜言恭色. 達練事體 明解朝章. 雖無謇直之風 屢有補闕之益. 故京師諺曰 萬事不理問伯始 天下中庸有胡公. 及共李固‧趙戒‧杜喬議立淸河王蒜 而蠡吾侯志取梁冀妹 冀欲立之. 廣‧戒憚冀 皆曰 惟大將軍令. 獨固與喬 堅守本議 竟立蠡吾侯. 是爲桓帝. 以此議毁於時. 自再公臺三十餘年 歷事安‧順‧冲‧質‧桓‧靈六帝 凡一履司空 再作司徒 三登大尉 又爲太傅. 其所辟命 皆天下名士. 與故吏陳蕃‧李咸 竝爲三司. 蕃等每朝會輒稱疾避廣. 時人榮之.

후한(後漢) 호광(胡廣)은 자가 백시(伯始)니 남군(南郡) 화용(華容) 사람이다. 효렴(孝廉)을 살펴 장주(章奏)를 시험하니, 안제(安帝)가 호광으로 천하의 으뜸으로 삼았다. 여러 번 삼공(三公)이 되었는데, 나이가 이미 80세였지만 힘이 굳세었으며, 성품은 온유(溫柔) 근소(謹素)하고, 항상 말과 얼굴을 공손하게 하고 사체(事體)1)를 달련(達練)2)하고 조장(朝章)을 분명하게 이해하였다. 비록 건직(謇直)3)의 풍도는 없지만 자주 보궐(補闕)4)의 보탬이 있었다. 그러므로 경성의 속담에 “만사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백시(伯始)에게 물어라, 천하가 공평함은 호공이 있음일세.” 하였다. 이고(李固)‧조계(趙戒)‧두교(杜喬)가 의논하여 청하왕(淸河王) 산(蒜)을 세우려는데 여오후(蠡吾侯) 는 마음으로  志取양기(梁冀)의 누이에게 장가들었으니, 양기가 세우고자 하니, 호광과 조계가 양기의 위세를 꺼려 함께 말하기를, “오직 대장군의 명령입니다.” 하였다. 유독 이고와 두교만 굳건히 본래의 의논을 지켰지만 끝내 여오후를 세웠다. 이가 환제(桓帝)이다. 이 의논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다시 공대(公臺)가 됨으로부터 30년간 안(安)‧순(順)‧충(冲)‧질(質)‧환(桓)‧령(靈) 여섯 황제를 섬겼다. 모두 한 번 사공(司空)이 되고, 두 번 사도(司徒)가 되고, 세 번 태위(大尉)의 반열에 올랐으며, 도 태부(太傅)가 되었다. 그가 임명한 사람은 모두 천하의 유명한 선비였다. 고리(故吏)5) 진번(陳蕃)‧이함(李咸)과 나란히 삼사(三司)가 되었다. 진번 등이 매번 조회 때 문득 병을 구실로 호광을 피었다. 당시 사람들이 영예롭게 생각하였다.


1) [事體】事理;道理

2) [達練】通曉熟習;精明干練.

3) [謇直】正直

4) [補闕】1.匡補君王的缺失. 《左傳·襄公元年》:“凡諸侯即位, 小國朝之, 大國聘焉, 以繼好、結信、謀事、補闕, 禮之大者也.” 杜預注:“闕, 猶過也.”《後漢書·胡廣傳》:“達練事體, 明解朝章. 雖無謇直之風, 屢有補闕之益.”《明史·孫磐傳》:“請定建言者爲四等:最上, 不避患害, 抗彈權貴者;其次, 揚淸激濁, 能補闕拾遺.” 淸朱克敬《瞑庵雜識》卷一:“且使外廷共見共聞, 則懷忠抱義之士, 於朝廷之得失, 皆得以補闕拾遺, 隨時論捄.”2.引申爲彌補缺漏. 吳格《<詩三家義集疏>點校說明》:“搜殘補闕, 網羅遺佚, 爲后人提供迄今最完備之三家《詩》讀本.

5) [故吏】1.曾經擔任官吏的人. 《漢書·昭帝紀》:“冬, 發習戰射士詣朔方, 調故吏將屯田張掖郡.”顏師古注:“故吏, 前爲官職者.”《漢書·尹翁歸傳》:“會田延年爲河東太守, 行縣至平陽, 悉召故吏五六十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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