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몽구

황패정수

황성 2009. 5. 26. 09:52

黃覇政殊

前漢黃覇字次公 淮陽陽夏人. 武帝末以待詔入錢賞官 補侍郞謁者. 後復入穀 補左馮翊二百石卒史. 馮翊以覇入財爲官 不署右職 使領郡錢穀計. 簿書正 以廉稱. 宣帝時擢揚州刺史 以賢良高第爲穎川太守. 力行敎化 而後誅罰. 外寬內明 得吏民心 戶口歲增 治爲天下第一. 徵守京兆尹. 坐貶秩歸穎川. 前後八年 郡中愈治. 是時鳳凰‧神爵數集郡國 穎川尤多. 天子以覇治行終長者 下詔稱揚 賜爵關內侯‧黃金百斤‧秩中二千石. 後爲丞相. 覇材長於治民. 及爲相總綱紀號令 風采不及丙‧魏‧于定國. 功名損於治郡.

전한(前漢) 황패(黃覇)는 자가 차공(次公)이니 회양(淮陽) 양하(陽夏) 사람이다. 무제(武帝) 말기에 대조(待詔)1)로 전상관(錢賞官)에 들어가 시랑알자(侍郞謁者)에 보임되었다. 뒤에 다시 곡물을 바쳐 좌풍익(馮翊) 2백석 졸사(卒史)에 보임되었다. 풍익이 황패가 재물을 들이는 것으로 직책을 삼고 중요한 직책에 두지 않았다. 하여금 군의 전곡계를 다스리게 하니, 문서가 엄정하여 청렴함으로 일컬어졌다.

선제(宣帝) 때에 양주자사(揚州刺史)에 발탁되었으며, 현량(賢良)시에 일등으로 급제하여 영주태수(穎川太守)가 되었다. 힘써 교화를 실천하고 가혹한 형벌을 뒤로하였으며, 밖으로는 관대하며 자신에게는 명철하게 하여 관리와 백성의 마음을 얻으니, 호구수가 해마다 불어나 다스림이 천하에 으뜸이었다. 경조윤(京兆尹)에 징수(徵守)2)되었고, 연좌되어 지위가 폄하되어 영천(穎川)으로 돌아갔다. 전후 8년에 고을이 더욱 다스려졌다. 이 때에 봉황‧신작(神爵)이 자주 군국에 모였는데, 영천이 더욱 많았다. 천자가 황패의 다스림이 종장(終長//)이라고 하여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작위를 작관내후(關內侯)를 내리고, 황금 백근에 봉록 2천석을 하사하였다. 뒤에 승상이 되었는데, 황패의 재주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능하였다. 재상이 됨에 미쳐서 기강과 호령을 총괄하였지만 풍채(風采)는 병길‧위상‧우정국에 미치지 못했다. 공명은 군현을 다스릴 때 보다 줄어들었다.


1) [待詔】1.等待詔命. 《文選·揚雄<甘泉賦>序》:“孝成帝時, 客有薦雄文似相如者……召雄待詔承明之庭.” 張銑注:“待詔, 待天子命也.” 唐王績《晩年敘志示翟處士》詩:“明經思待詔, 學劍覓封侯.” 淸惠士奇《送蔣樹存之官餘慶》詩:“待詔吾留金馬門, 修書君上南薰殿.”2.官名. 漢代徵士未有正官者, 均待詔公車, 其特異者待詔金馬門, 備顧問, 后遂以待詔爲官名. 《漢書·王莽傳中》:“莽誅滅待詔, 而封告者.” 唐有翰林待詔, 負責四方表疏批答、應和文章等事. 后改爲翰林供奉. 明淸翰林院屬官有待詔, 秩從九品, 掌校對章疏文史, 爲低級事務官. 3.待命供奉內廷的人. 唐代不僅文詞經學之士, 即醫卜技術之流, 亦供直於內廷別院, 以待詔命. 因有醫待詔、畫待詔等名稱. 宋元時對手藝工匠尊稱爲待詔, 本此. 《京本通俗小說·碾玉觀音》:“<裱褙鋪裏>璩待詔問:‘府幹有何見諭?’虞候道:‘無甚事, 閒問則個.’”《水滸傳》第四回:“智深走到鐵匠鋪門前看時, 見三個人打鐵. 智深道:‘兀那待詔, 有好鋼鐵麽?’”《醒世恒言·呂洞賓飛劍斬黃龍》:“看那娘子, 正與澆蠟燭待詔說話.”4.舊時農村里稱理發師爲“待詔”. 李劼人《大波》第一部第二章:“楚用幾個人早都交卷完畢, 在理發室找待詔梳了發辮.”

2) [徵守】謂天子征召守國的諸侯. 《周禮·春官·典瑞》:“珍圭以徵守, 以恤凶荒.” 鄭玄注:“‘以徵守’者, 以徵召守國諸侯, 若今時徵郡守以竹使符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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