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99

황성 2025. 8. 19. 22:59
728x90

72朱子大全 卷七十二

잡저 雜著

 

 

북신(北辰)에 대한 변론 北辰辨

 

 

 

‘제의 자리[帝坐]는 오직 자미원[紫微]에만 있다’는 것은 언제나 드러나 있고 가려지지 않는 북극(의 주위) 72도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신(北辰)’이란 호칭이 있고,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하늘은 그 모습이 돌며 움직이고 낮과 밤은 쉼이 없는데 이것이 그 지도리가 된다. 바퀴의 바퀴통[轂]과 같고, 맷돌의 꼭지[齊]와 같아서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지만 움직이지 않으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태미(太微)가 익(翼)에 있고, 천시(天市)가 미(尾)에 있으며, 섭제(攝提)가 항(亢)에 있듯이, 그 남쪽은 적도와의 거리가 모두 가깝지만, 북쪽은 북극[天極]과의 거리가 모두 멀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28수와 함께 운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동쪽으로, 어떤 것을 서쪽으로 운행하며, 어떤 것은 숨겨지고 어떤 것은 드러나 각각 도수(度數)가 있어서 우러러 살펴보면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는다. 이제 ‘자미원에 있는 것과 함께 그 장소에 머물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넷이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늘은 하나인데 지도리는 넷이고, 바퀴는 하나인데 바퀴통은 넷이며, 맷돌은 하나인데 배꼽은 넷인 것과 같다. 잠시라도 한 번 옮기게 되면 바퀴살은 부러지고, 돌은 부서지며, 해는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 끝없이 운행하며 회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역술가들의 사소한 일인지라 깊이 변론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간혹 옮겨 쓰면서 잘못되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帝坐惟在紫微者據北極七十二度常見不隱之中, 故有北辰之號而常居其所. 蓋天形運轉, 晝夜不息, 而此爲之樞. 如輪之轂, 如磑之齊, 雖欲動而不可得, 非有意於不動也. 若太微之在翼. 天市之在尾, 攝提之在亢, 其南距赤道也皆近, 其北距天極也皆遠, 則固不容於不動, 而不免與二十八宿同其運行矣. 故其或東或西, 或隱或見, 各有度數. 仰而觀之, 蓋無晷刻之或停也. 今曰是與在紫微者皆居其所而爲不動者四, 則是一天而四樞, 一輪而四轂, 一磑而四齊也. 分寸一移, 則其輻裂而瓦碎也無日矣, 若之何而能爲運轉之無窮哉? 此星家淺事, 不足深辨. 然或傳寫之誤, 則不可以不正也.

 

 

성(聲)과 율(律)에 대한 변론 聲律辨

 

 

 

【해제】이 글은 경원 3년(정사, 1197, 68세) 3월경에 쓴 것으로 추론되는 오성(五聲)과 십이율(十二律)의 상관 관계를 변론한 것이다.

 

 

다섯 소리[五聲]의 순서는 궁(宮)이 가장 크지만 가라앉고 탁하며, 우(羽)가 가장 미세하지만 가볍고 맑다. 상(商)은 궁 다음으로 크고, 치(徵)는 우 다음으로 미세하며 각(角)은 네 가지 소리 가운데 머문다. 그러나 세상에서 중성(中聲)을 논하면서 각으로 논하지 않고 궁으로 논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말한다. : 소리는 양(陽)에 속하는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데, 절반에 미치지 못하면 음(陰)에 속해서 펴지 못하기 때문에 써서는 안 된다. 위로 올라가 절반에 이른 연후에 양에 속하기 때문에 비로소 조화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처음 만나서 사용하는 소리를 궁으로 삼고, 매번 변하면서 더욱 올라가면 상이 되고, 각이 되며, 변치(變徵)가 되고, 치가 되고, 우가 되고, 변궁(變宮)이 되기 때문에 이 모두를 궁이란 소리의 쓰임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궁이란 한 소리는 오행으로 따지면 토(土)가 되고, 오상에서는 미더움[信]이 되며 오사(五事)에서는 생각[思]이 된다. 이것은 (궁이란 소리가) 뭇 소리의 조화와 부조화․씀과 쓰지 않음 및 음양이 교제하는 중을 올바로 담당하기 때문에 융성한 이유이다. 만일 각의 경우에는 비록 다섯 소리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뭇 소리가 모이는 것이 아니다. 또 칠균(七均)으로 논한다면 변치(變徵)가 (한 가운데) 머무르고 있지만, 또한 다섯 소리가 취할 수 있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五聲之序, 宮最大而沈濁, 羽最細而輕淸. 商之大次宮, 徵之細次羽, 而角居四者之中焉. 然世之論中聲者, 不以角而以宮, 何也? 曰, 凡聲陽也, 自下而上, 未及其半, 則屬於陰而未暢, 故不可用. 上而及半, 然後屬於陽而始和, 故卽其始而用之以爲宮, 因其每變而益上, 則爲商, 爲角, 爲變徵, 爲徵, 爲羽, 爲變宮, 而皆以爲自之用焉. 是以宮之一聲, 在五行爲土, 在五常爲信, 在五事爲思. 蓋以其正當衆聲和與未和, 用與未用陰陽際會之中, 所以爲盛. 若角則雖當五聲之中, 而非衆聲之會. 且以七均論之, 又有變徵以居焉, 亦非五聲之所取正也.

 

그러나 그 소리의 처음에 조화로운 것을 미루어 위로 올라가면 또한 변궁(變宮)에 이르러 그칠 뿐이다. 이 이상은 지나치게 가볍고 맑아 궁으로 삼을 수 없다. 여기에서 그 둘 사이에 나아가 자세히 나누면 따로 12율이 있다. 가장 크고 가라앉고 탁한 것이 황종(黃鍾)이 되고, 가장 미세하고 가볍고 탁한 것이 응종(應鍾)이 된다. 그들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궁이 되고 위 아래로 소리를 서로 낳아 다섯 소리와 두 가지 변화된 소리[二變]의 작용을 극진히 발휘하면 궁성은 항상 12율에서 벗어나지 않고, (나머지) 네 소리는 간혹 그 바깥으로 나가서 여러 율(律) 가운데 반성(半聲)를 내는 관을 취한 다음에야 칠균이 갖추어지고 하나의 음조[調]가 이루어진다. 황종과 나머지 율이 귀하고 천한 이유도 또한 이 때문이다. 만일 여러 반성을 넘어선 그 이상은 또 지나치게 가볍고 맑아서 악(樂)으로 삼을 수 없다. 황종(黃鍾)의 궁은 시작의 시작이요, 가운데의 가운데이다. 10율(十律)의 궁은 시작의 다음이요, 가운데를 조금 지나쳤고, 응종의 궁은 시작의 마지막이요 가운데라는 뜻은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머지 여러 율의 반성은 지나치게 가볍고 맑으니 시작의 바깥이요 가운데의 위이다. 반성의 바깥에서 가볍고 맑은 것을 심하게 지나친 것은 또한 바깥의 바깥이요, 위의 위이서 악(樂)으로 삼을 수 없다(예를 들자면 자시(子時)의 경우 초반부 4각(四刻)은 오늘[前日]에 속하고, 정시의 4각은 다음날[後日]에 속한다. 그 두 날 사이가 즉 시작의 시작이요 가운데의 가운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리는 음에 속한 부분 이하에도 또한 당연히 12율의 정율(正律)과 변율(變律)․반율(半律)의 영역이 있어서, 가운데 소리의 전단계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시의 앞 4각이 그런 것과 같지만 다만 성기(聲氣)의 벼리로 삼을 수는 없을 뿐이다).

然自其聲之始和者推而上之, 亦至於變宮而止耳. 自是以上, 則又過乎輕淸而不可以爲宮. 於是就其兩間而細分之, 則其別又十有二. 以其最大而沈濁者爲黃鍾, 以其極細而輕淸者爲應鍾. 及其旋相爲宮而上下相生, 以盡五聲二變之用, 則宮聲常不越乎十二之中, 而四聲者或時出於其外, 以取諸律半聲之管, 然後七均備而一調成也. 黃鍾之與餘律, 其所以爲貴賤者亦然. 若諸半聲以上, 則又過乎輕淸之甚而不可以爲樂矣. 蓋黃鍾之宮, 始之始, 中之中也. 十律之宮, 始之次而中少過也. 應鍾之宮, 始之終而中已盡也. 諸律半聲過乎輕淸, 始之外而中之上也. 半聲之外過乎輕淸之甚, 則又外之外, 上之上而不可爲樂者也. 正如子時, 初四刻屬前日, 正四刻屬後日. 其兩日之間, 卽所謂始之始, 中之中也. 然則聲自屬陰以下, 亦當黙有十二正變半律之地, 以爲中聲之前段, 如子初四刻之爲者, 但無聲氣之可紀耳.

 

이로써 논하자면 음(音)을 살피는 것의 어려움은 소리[聲]에 있지 않고 율에 있으며, 궁에 있지 않고 황종에 있다. 12율로 절제하지 않는다면 다섯 소리의 실상을 드러낼 방도가 없기 때문이고, 황종의 올바름을 얻지 못하면 11율도 또 본래 율의 궁을 얻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궁 소리의 묘함을 지극히 논하면서 황종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소리와 음, 법과 제도에서 오히려 미진함이 있는 것 같다. 소리와 음, 법과 제도가 거칠고 오히려 미진하다면 비록 황제․대순과 같은 임금이 있고, 영윤(伶倫)․후기(后夔) 같은 이가 보좌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손을 대서 위대한 음악의 조화를 의론할 수 있겠는가? 또한 궁을 어짊[仁]에 배당하는 주장이 있는데 아마도 이 또한 옳지 않은 것 같다. 그 까닭을 쫓아가 보면 어짊을 네 덕의 으뜸[元]에 배당할 수 있고, 네 가지를 포함한다는 뜻일 뿐이다. 어짊은 목(木)이 운행하고 각(角) 소리가 난다. 이것을 궁(宮)에 배당하면 어짊은 이미 불안해지고, 믿음[信] 또한 근거를 잃는다. 그러나 (어짊이) 네 가지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치에 지장받지 않는다. 오행의 순서는 목이 시작이고, 수(水)가 마지막이며, 토(土)가 가운데이기 때문이다. 「하도(河圖)」․「낙서(洛書)」의 수로 말한다면 수는 1이고, 목은 3이며, 토는 5인데, 모두 양이 낳은 수로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번갈아 바꿔가면서 주인이 되어 오행의 벼리가 된다. 덕으로 말하자면 목은 발생(發生)시키는 성질이요, 수는 곧고 고요함[貞靜]의 본체이며, 토(土)는 또 포괄하고 기르는 어미이다. 그러므로 목이 오행을 포괄하는 것이다. 목은 흘러 통하고 꿰뚫어 있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수가 오행을 포괄하는 것은 그 근원이 근본으로 돌이켜 이곳에 보관되기 때문이다. 만일 토라면 수․화가 의탁하는 곳이고, 금․목이 자뢰하는 곳이며 가운데 머물면서 사방에 응하고, 하나의 본체이면서 온갖 것을 싣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건(乾)의 네 덕을 찬탄하시면서 곧음[貞]과 으뜸[元]을 마지막과 처음으로 들었고, 맹자가 사람의 사단(四端)을 논하면서 감히 미더움[信]을 그 사이에 배열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어디를 가든지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궁이 다섯 소리를 통솔하고, 인이 오상을 포괄하는 것은 둘을 함께 주장해도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저것을 빼앗아 이것에다 준 다음에야 그 마음이 통쾌할 것인가?

由是論之, 則審音之難不在於聲而在於律, 不在於宮而在於黃鍾. 蓋不以十二律節之, 則無以著夫五聲之實;不得黃鍾之正, 則十一律者又無所受以爲本律之宮也. 今有極論宮聲之妙而無曰黃鍾云者, 則恐其於聲音法制之間猶有所未盡也. 夫以聲音法制之粗而猶有未盡, 則雖有黃帝大舜之君, 伶倫后夔之佐, 亦如之何徒手而可以議大樂之和哉? 又有爲宮當配仁之說者, 恐亦非是. 逆其所以, 蓋以仁當四德之元而有包四者之義耳. 夫仁, 木行而角聲者也. 以之配宮, 則仁旣不安而信亦失據. 然以爲可包四者, 則不害其有是理也. 夫五行之序, 木爲之始, 水爲之終, 而土爲之中. 以河圖洛書之數言之, 則水一, 木三而土五, 皆陽之生數而不可易者也, 故得以更迭爲主而爲五行之綱. 以德言之, 則木爲發生之性, 水爲貞靜之體, 而土又包育之母也. 故木之包五行也. 以其流通貫徹而無不在也. 水之包五行也, 以其歸根反本而藏於此也. 若夫土, 則水火之所寄, 金木之所資, 居中而應四方, 一體而載萬類者也. 故孔子贊乾之四德而以貞元擧其終始, 孟子論人之四端而不敢以信者列序於其間, 蓋以爲無適而非此也. 是則宮之統五聲, 仁之包五常, 蓋有竝行而不悖者矣, 何必奪彼以予此, 然後快於其心哉!

 

 

‘천맥(阡陌)을 열었다’는 구절에 대한 변론 開阡陌辨

 

 

 

【해제】이 글은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에 정형(程逈)과 전부(田賦)와 전제(田制)에 대해 토론하고 난 후 쓴 것으로, 천맥이 주나라의 정전제를 없애고 진나라 때에 시작된 토지 제도가 아니라, 농지를 구분하기 위해 만든 가로․세로의 길임을 주장하고 있다. 󰡔주자대전󰡕 권37 「답정가구(答程可久)」 제1서 역시 천맥에 대해 이 글과 같은 논조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서󰡕 「식화지」에서는 ‘진나라[秦]가 정전(井田)을 없애고 천맥(阡陌)을 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설명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開)’자를 ‘처음 설치한다[開置]’는 뜻의 ‘개(開)’자로 여겨서, 진나라가 정전을 없애고 처음 천맥을 설치했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백거이(白居易)는 “사람이 드물고 땅이 넓으면 마땅히 천맥을 다스려야 하고, 인호가 많고 고장이 협소하면 정전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으니, 그 또한 천맥을 진나라의 제도로 여기고, 정전을 옛 법제로 여긴 것이다. 이들 모두는 아마도 일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살펴보면 천맥에 대해 옛 설명에서는 농지 사이에 난 길이라고 여겼다. 농지의 경계로 인해 그 좁고 넓은 것을 마름질하고, 가로 세로를 분별해서 사람과 물건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니, 곧 󰡔주례󰡕에서 말하는 ‘수(遂) 위의 경(徑)’, ‘구(溝) 위의 진(畛)’, ‘혁(洫) 위의 도(涂)’, ‘회(澮) 위의 도(道)’이다. 그러나 󰡔풍속통(風俗通)󰡕에서는 ‘남북으로 난 길을 천(阡)이라 하고 동서로 난 길을 맥(陌)이라 한다’고 했고, 또 ‘하남(河南) 지역에서는 동서로 난 길이 천(阡)이고 남북으로 난 길이 맥(陌)이다’고 했으니 두 설명이 같지 않다. 오늘날에 수인(遂人)과 전답 및 집의 수로 살펴보면 마땅히 나중 설명이 옳다고 해야 한다. 맥(陌)이란 말은 백(百)을 뜻하니, 수와 혁이 세로이면 경과 도 역시 세로이므로, 수(遂)의 간격이 100무(畝)이고, 혁의 간격이 100부라면 경과 도 역시 100이 되는 것이다. 천(阡)이란 말은 1,000을 뜻하니, 구(溝)와 회(澮)가 가로이면 진(畛)과 도(道) 역시 가로이므로 구의 간격은 1,000무이고, 회의 간격은 1,000부라면 진과 도 역시 1,000이 되는 것이다. 천맥이란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이다. 10,000부가 되는 곳에는 천(川)이 있고, 천 위에는 노(路)가 그 밖을 휘감고 도는 것이니, 「장인(匠人)」편의 정전제와 함께 수(遂), 구(溝), 혁(洫), 회(澮)도 모두 사방을 휘감고 돈다면 천맥이란 이름은 아마도 그 가로 세로를 따라서 이름 지은 것 같다.

漢志言秦廢井田, 開阡陌, 說者之意皆以‘開’爲開置之開, 言秦廢井田而始置阡陌也. 故白居易云: ‘人稀土曠者宜修阡陌, 戶繁鄕狹者則復井田’, 蓋亦以阡陌爲秦制, 井田爲古法. 此恐皆未得其事之實也. 按阡陌者, 奮說以爲田間之道, 蓋因田之疆畔制其廣狹, 辨其橫從以通人物之往來, 卽周禮所謂‘遂上之徑’, ‘溝上之畛’, ‘洫上之涂’, ‘澮上之道’也. 然風俗通云: ‘南北曰阡, 東西曰陌.’ 又云: ‘河南以東西爲阡, 南北爲陌’, 二說不同. 今以遂人田畝夫家之數考之, 則當以後說爲正. 蓋陌之爲言百也, 遂洫從而徑涂亦從, 則遂間百畝, 洫間百夫而徑涂爲陌矣. 阡之爲言千也, 溝澮橫而畛道亦橫, 則溝間千畝, 澮間千夫而畛道爲阡矣. 阡陌之名, 由此而得. 至於萬夫有川, 而川上之路周於其外, 與夫匠人井田之制, 遂, 溝, 洫, 澮亦皆四周, 則阡陌之名疑亦因其橫從而命之也.

 

그러나 수(遂)는 넓이가 2척(二尺)이요, 구(溝)는 4척이며, 혁(洫)은 8척이요, 회는 2심(二尋)이니 1장 6척에 해당한다. 경(徑)은 소나 말이 드나들고, 진(畛)은 큰 수레가 드나들면, 도(涂)는 1궤(一軌) 정도의 타는 수레[乘車]가 드나들며, 도는 2궤, 노는 3궤이니 거의 2장에 달한다. 이것은 물이건 뭍에서건 땅을 점유해서 농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상당히 많으니, 선왕의 뜻은 애석하지 않다고 여겨 헛되이 버려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경계를 바로잡고, 다툼을 그치게 하며, 때에 맞춰 쌓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 이유는, 수재나 한재에 대비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 뜻이 깊은 것이다. 상군(商君)이 급하고 각박한 마음에 구차스러운 정사를 행하려고 하면서 다만 농지가 천맥에 의해 속박당해 농사짓는 것이 100무에 제한되어 사람들의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을 병폐라 여기고, 천맥이 땅을 점유하는 것이 지나치게 넓어 농지로 만들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만 보고서 땅을 버려둔다는 점만을 병페라 여겼다. 또 세교가 쇠퇴하고 법도가 무너지는 시대를 당해서 관에서 농지를 주고 농민들이 다시 돌려주는 즈음에 반드시 복잡하게 속이고 어지럽게 숨기는 간사함을 벗어나지 못하며, 천맥의 땅이 민전에 절실하게 가깝고, 또 반드시 남몰래 스스로의 사적인 것에 근거해서 부세가 공상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하루 아침에 떨쳐 일어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천맥을 다 열어 젖히고, 제한을 모조리 없애버리고서 백성들이 겸병하고 매매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다 발휘하도록 만들고, 버려진 땅을 개간해서 모두 농지를 만들되 조금의 땅도 버리지 않도록 함으로써 지리적인 이점을 다 발휘하도록 했다. 또 백성들이 농지를 소유하고 영구히 농사를 지으면서 다시 관에 되돌려주지 않도록 함으로써 복잡하고 속이는 간사한 짓들을 끊어벼렸다. 땅은 모두 농지를 만들어서 모든 농지에서 부세를 내놓게 함으로써 남몰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요행수를 파헤쳐버렸다. 이 계획은 참으로 양염(楊炎)이 떠도는 인호들의 폐단을 병폐라 여겨 조(租)와 용(庸)을 없애고 (여름 가을의) 양세(兩稅)를 거두는 것으로 만든 것과 같으니, 한 때의 폐해는 비록 제거되었지만 천고의 성현들이 전수한 정미한 뜻은 여기에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진기(秦紀)󰡕와 「앙전(鞅傳)󰡕에서는 모두 ‘농지에서 천맥을 열어젖혀 두둑을 북돋우고 부세가 공평해졌다’고 했고, 채택(蔡澤) 또한 :‘천맥을 트고 무너트려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풍속을 하나로 통일했다’고 한 것이다. 그들의 말을 상세히 음미하면 ‘열었다[開]’는 말은 파괴시키고 없애버렸다는 뜻이지, 새로 만들어 설치했다는 말이 아니다. 천맥도 정전제를 시행하던 삼대의 옛 것이지 진나라가 (새로이) 만든 것이 아니다. ‘부세가 공평해졌다’는 말도 숨기고, 남몰래 훔치는 간사함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는 말도 농지를 백성에게 주었다 다시 관에 돌려주는 번거로움을 없앴다는 말이다. 이러한 몇 가지를 합쳐서 증거하자면 그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채택의 말도 더욱 분명할 것이다.

然遂廣二尺, 溝四尺, 洫八尺, 澮二尋, 則丈有六尺矣. 徑容牛馬, 畛容大車, 涂容乘車一軌, 道二軌, 路三軌, 則幾二丈矣. 此其水陸占地, 不得爲田者頗多, 先王之意非不惜而虛棄之也, 所以正經界, 止侵爭, 時畜洩, 俑水旱, 爲永久之計, 有不得不然者, 其意深矣. 商君以其急刻之心行苟且之政, 但見田爲阡陌所束而耕者限於百畝, 則病其人力之不盡 ; 但見阡陌之占地太廣而不得爲田者多, 則病其地利之有遺. 又當世衰法壞之時, 則其歸授之際, 必不免有煩擾欺隱之姦, 而阡陌之地切近民田, 又必有陰據以自私而稅不人於公上者. 是以一旦奮然不顧, 盡開阡陌, 悉除禁限而聽民兼幷買賣, 以盡人力;墾闢棄地, 悉爲田疇, 而不使其有尺寸之遺, 以盡地利. 使民有田卽爲永業而不復歸授, 以絶煩擾欺隱之姦 ; 使地皆爲田而田皆出稅, 以覈陰據自私之幸. 此其爲計, 正猶楊炎疾浮戶之弊而遂破租庸以爲兩稅, 蓋一時之害雖除, 而千古聖賢傳授精微之意於此盡矣. 故秦紀, 鞅傳皆云‘爲田開阡陌封疆而賦稅平’, 蔡澤亦曰:‘決裂阡陌以靜生民之業而一其俗.’ 詳味其言, 則所謂‘開’者, 乃破壤剗削之意, 而非創置建立之名. 所謂阡陌, 乃三代井田之舊, 而非秦之所置矣. 所謂賦稅平者, 以無欺隱竊據之姦也. 所謂靜生民之業者, 以無歸授取予之煩也. 以是數者合而證之, 其理可見, 而蔡澤之言尤爲明白.

 

또 선왕들이 천하를 다스리면서 백성들에게 균등하게 (토지를) 주었기 때문에 농지 사이의 길에도 날실과 씨실이 있어, 법도가 없을 수 없었다. 만일 진나라가 이미 정전을 주고받는 제도를 없애버렸다면 땅에 따라 농지를 만들고, 농지에 따라 길을 만들어 요철과 굴곡을 어떻게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을 텐데 또 하필이면 동서남북의 올바른 방향을 택해서 천맥을 만든 다음에야 오고 가는데 통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또 사물의 실정과 일의 이치로 미뤄보아도 그 설명에 의심할 것이 없음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한나라 때에도 오히려 천맥이란 명목이 있었다고 하면서 진나라가 설치한 데서 유래했다는 것을 의심하는데, 자못 알지 못하겠거니와 진나라가 열었던 것은 또한 황폐한 땅이었지 오가는 길은 아니었을 뿐이다. 만일 요충지로서 적당하고 오가는 데도 편리했다면 어떻게 다 없앨 수 있겠는가? 다만 반드시 조금이라도 없애버려서 다시 선왕의 옛 제도처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이는 또 동중서(董仲舒)가 “부유한 이들은 천맥이 연이었다[富者連阡陌]”고 하면서 백성들의 사유지를 제한하자고 청한 것 때문에 토지 제도의 붕괴가 천맥에서 유래했다고 의심하는데 이 또한 잘못이다. (동중서의 말은) 부유한 한 집안이 천부와 백부의 농지를 겸해서 갖고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장사치들이 농사짓는 이가 겪는 고생이 없이도 천맥의 농지를 소유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천부 백수의 수입으로 말한 것이다. 이 당시에 고대와의 간격이 멀지 않아 이러한 명목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남겨진 자취 역시 살펴볼 수 있었음에도 한 때의 군신들이 미루어 살피고 강구해서 다시 회복할 수 없었을 뿐이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且先王疆理天下, 均以予民, 故其田間之道有經有緯, 不得無法. 若秦旣除井授之制矣, 則隨地爲田, 隨田爲路, 尖斜屈曲, 無所不可, 又何必取其東西南北之正以爲阡陌而後可以通往來哉? 此又以物情事理推之而益見其說之無疑者. 或乃以漢世猶有阡陌之名, 而疑其出於秦之所置, 殊不知秦之所開, 亦其曠僻而非通路者耳. 若其適當衝要而便於往來, 則亦豈得而盡廢之哉? 但必稍侵削之, 不使復如先王之舊耳. 或者又以董仲舒言富者連阡陌而請限民名田, 疑田制之壞由於阡陌, 此亦非也. 蓋曰富者一家而兼有千夫百夫之田耳. 至於所謂商賈無農夫之苦, 有阡陌之得, 亦以千夫百夫之收而言. 蓋當是時, 去古未遠, 此名尙在而遺迹猶有可考者. 顧一時君臣乃不能推尋講究而修復之耳, 豈不可惜也哉!

 

 

구강 팽려에 대한 변론 九江彭蠡辨

 

 

 

【해제】이 글은 󰡔상서󰡕 「우공」편의 구강과 팽려에 대한 지리적 기술을 실제 지리와 비교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파총산[嶓冢]에 양수[漾]를 인도하여 동쪽으로 흘러 한수[漢]가 되며, 또 동쪽으로 창랑(滄浪)의 물이 되며, 삼서[三澨]를 지나 대별산[大別]에 이르러 남쪽으로 강(江)에 들어가며, 동쪽으로 돌아 못[澤]이 되어 팽려(彭蠡)가 되며, 동쪽으로 북강(北江)이 되어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고 했다. 또 “민산(岷山)에 강(江)을 인도하여 동쪽으로 나뉘어 타수[沱]가 되며, 또 동쪽으로 예수[澧]에 이르며, 구강(九江)을 지나 동릉(東陵)에 이르며, 동쪽으로 비스듬히 돌아서 북쪽에서 못에서 모이고, 동쪽으로 중강(中江)이 되어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고 했다. 또 “민산(岷山)의 남쪽으로부터 형산(衡山)에 이르며, 구강(九江)을 지나 부천원(敷淺原)에 이르게 하였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상서󰡕 「우공」의 글이다. 고금의 독자들이 모두 이것이 성인의 손에서 나왔다고 여긴다. 그래서 본시 오류가 있을 수 없으므로 먼 후대에서도 다만 믿고 따르고 외우기만 하면서 끝없이 전달하는 것만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또한 그 사실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설명하는 사람들도 글에 따라 뜻을 풀이해서 장구에 나아가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예를 들어 구강(九江)을 설명하는 경우에는 곧장 ‘강(江)이 심양(尋陽)를 지나 물길이 아홉 개로 갈라진다’고 하고, 어떤 이는 ‘작은 강 아홉 개가 있어, 북쪽에서 와서 물을 주입한다’고 한다. 팽려(彭蠡)를 설명하는 경우에는 ‘한수(漢水)가 돌아 (못이 되는) 곳에 강(江)의 물도 와서 모인다’고 한다. 북강(北江)․중강( 中江)을 설명하면서는 ‘한수[漢]가 이미 못이 되어서 흘러나와 북강이 된다. 강(江)이 이미 모여서 흘러 나와 중강이 된다’고 한다. 구강(九江)을 설명하면서는 오늘날 강주(江州)의 치소(治所)를 가리켜 배당하려고만 한다. 부천원(敷淺原)은 다만 한나라 역릉현(歷陵縣)의 부역산(傳易山)이라고 여겨, 오늘날 강주의 덕안현(德安縣)이 되었다고만 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선 외우고 설명하는 데는 괜찮겠지만 산천 형세의 실상으로 살피자면 그 설명에는 통하지 않는 점들이 있어서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걱정된다.

‘嶓冢導漾, 東流爲漢, 又東爲滄浪之水, 過三澨, 至于大別, 南入于江, 東匯澤爲彭蠡. 東爲北江, 入于海.’ 又曰:‘岷山導江, 東別爲沱, 又東至于灃, 過九江, 至于東陵, 東迆, 北會于匯. 東爲中江, 入于海.’ 又曰: ‘岷山之陽至于衡山, 過九江, 至于敷淺原.’ 此皆禹貢之文也. 古今讀者皆以爲是旣出於聖人之手, 則固不容復有訛謬󰡑萬世之下, 但當尊信誦習, 傳之無窮, 亦無以覈其事實是否爲也. 是以爲之說者不過隨文解義, 以就章句. 如說九江則曰, 江過尋陽, 派別爲九. 或曰有小江九, 北來注之. 說彭蠡則曰, 漢水所匯, 而江水亦往會焉. 說北江, 中江則曰, 漢旣匯而出爲北江, 江旣會而出爲中江也. 說九江則但指今日江州治所以當之, 說敷淺原則但以爲漢歷陵縣之傳易山, 在今日爲江州之德安縣而已. 如是而言, 姑爲誦說則可矣, 若以山川形勢之實考之, 吾恐其說有所不通而不能使人無所疑也.

 

만일 ‘물길이 아홉으로 나뉘었다’고 한다면 강이 위 아래로 흐르면서 모래섬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헤아려 아홉이라고 여기는 것은 반드시 처음과 끝, 길고 짧음이 균등하게 한 가지로 분포되었다면, 즉 가로로 한 마디를 끊어내고, 세로로 아홉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물 사이에는 마땅히 한 모래섬이 있을 터인데, 구강(九江)의 사이에는 모래와 물이 서로 번갈아가며 17개의 길을 이루고 있어 (심양) 땅에는 받아들일 곳이 없다. 만일 이리저리 선택해서 한 가지로 가지런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면 또 모르겠거니와 어디에서부터 끊어내서 아홉 개로 센단 말인가? 하물며 모래섬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그 형세가 일정하지 않다. 강릉(江陵)에 먼저 99주(洲)가 있어도, 그 뒤에 다시 한 주가 생기는데, 어떻게 한 지역의 일정한 명칭이라고 여길 수 있겠는가? 이것은 통용할 수 없는 허망한 설명이다. 만일 옆에서 흘러드는 작은 강의 수를 센 것이라고 한다면 민산(岷山)의 동쪽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은 몇 십, 몇 백의 강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이 또한 통할 수 없는 허망한 설명이다. 또 경(經)에서는 ‘구강은 매우 바르게 흐른다[九江孔殷]’고 했으니, 흘러들었다 나오는 것이 아주 왕성하고, 끝없이 드넓은 기세를 알 수 있으니 결코 평범하게 갈라져 나온 작은 강을 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들을 이은 이후에 타수[沱]․잠수[潛]․운몽[雲夢]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들이 오늘날 강주에서 아주 먼 하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또 앞의 두 설명이 통할 수 없는 허망한 설명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만일 강수가 못을 이루는 곳이 팽려가 되고, 강수 또한 가서 모인다고 한다면 팽려가 못이 되는 곳은 실제로는 대강(大江)의 남쪽에 있으니, 오늘날 강주(江州) 호구현(湖口縣) 남쪽에서부터 남강군(南康軍)과 요주(饒州)의 경계를 넘어서서, 융흥부(隆興府)의 북쪽에까지 잇닿아 있어서 수 십, 수 백리에 걸쳐 물이 넘쳐 흐른다. 그 근원은 동쪽으로는 요(饒)․휘(徽)․신주(信州)․건창군(建昌軍)에서, 남쪽으로는 공주(贛州)․남안군(南安軍)에서, 서쪽으로는 원(袁)․균(筠)에서 융흥(隆興)․분령(分寧)의 여러 읍에 이르기까지 사방 수 천리의 물이 모두 모여들어 합쳐진다. 북쪽으로는 남강(南康)․양란(揚瀾)․좌리(左里)를 지나면 양쪽 언덕이 점점 산록에 의해 좁혀져 호수의 면적이 조금 협소해지다가, 마침내 동북쪽으로 흘러 호구(湖口)를 향해 가다 강(江)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지세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기 때문에 강으로 들어가지만 도리어 강(江)의 물에 의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나 스스로 땅에 고이게 되어 수 십, 수 백리를 넘실대는 큰 호수[大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팽려 땅이 팽려가 되는 이유이니, 처음부터 강과 한수가 돌아들어오기를 기다린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수와 한수를 기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물줄기가 흘러들어 쌓이는 것이 날로 막이고, 날로 물이 높아지면 형세상 강수와 한수가 와서 들어오는 것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한수는 한양군(漢陽軍) 대별산(大別山) 아래서부터 남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가니, 그 물과 강의 물이 합쳐서 하나가 되는데,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700여리나 된다. 지금 여기에 이른 다음에야 하나가 앞서고 다른 하나가 뒤서면서 팽려로 흘러들어, 이미 못을 이룬 다음에 또 다시 순서에 따라 나와서 두 강이 된다면 그것이 들어올 때 어떻게 예전의 한수가 앞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예전의 강의 물이 나중에 와서 모인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이 나갈 때 어떻게 예전의 한수가 지금 나뉘어 북으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예전의 강의 물이 지금 나뉘어 가운에 머문다는 것을 알겠는가? 또 방향으로 말한다면 남쪽에서 모인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지, 북쪽에서 모인다고 하는 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실제로 헤아려 보아도 호구(湖口)의 동쪽은 오늘날 하나의 강만을 볼 수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수가 못을 이뤄 팽택이 되고, 강의 물이 또한 가서 모인다는 것은 통할 수 없는 허망한 설명인 것이다.

 

若曰派別爲九, 則江流上下, 洲渚不一. 今所計以爲九者, 若必首尾短長均布若一, 則橫斷一節, 縱別爲九, 一水之間當有一洲, 九江之間, 沙水相間, 乃爲十有七道, 於地將無所容. 若曰參差取之, 不必齊一, 則又不知斷自何許而數其九也. 况洲渚出沒, 其勢不常. 江陵先有九十九洲, 後乃復生一洲, 是豈可以爲地理之定名乎? 此不可通之妄說也. 若曰旁計橫入小江之數, 則自岷山以東至入海處, 不知其當爲幾十百江矣, 此又不可通之妄說也. 且經又言‘九江孔殷’, 正以見其吐呑壯盛, 浩無津涯之勢, 決非尋常分派小江之可當. 又繼此而後, 及夫沱潛雲夢, 則又見其決非今日江州甚遠之下流. 此又可以證前二說者爲不可通之妄說也. 若曰漢水匯爲彭蠡而江水亦往曾焉, 則彭蠡之爲澤也, 實在大江之南, 自今江州湖口縣南跨南康軍, 饒州之境以援于隆興府之北, 瀰漫數十百里. 其源則東自饒, 徽, 信州, 建昌軍, 南自贛州, 南安軍, 西自袁, 筠以至隆興分寧諸邑, 方數千里之水, 皆會而歸焉. 北過南康, 揚瀾左里, 則兩岸漸迫山麓而湖面稍狹, 遂東北流以趨湖口而入于江矣. 然以地勢北高而南下, 故其入于江也, 反爲江水所遏而不得遂, 因却而自猪, 以爲是瀰漫數十百里之大澤. 是則彭蠡之所以爲彭蠡者, 初非有所仰於江漢之匯而後成也. 不唯無所仰於江漢, 而衆流之積日遏日高, 勢亦不復容江漢之來入矣. 又況漢水自漢陽軍大別山下南流入江, 則其水與江混而爲一, 至此已七百餘里矣. 今謂其至此而後, 一先一後以入于彭蠡, 旣匯之後, 又復循次而出, 以爲二江, 則其入也, 何以識其爲昔日之漢水而先行, 何以識其爲昔日之江水而後會? 其出也, 何以識其爲昔日之漢水而今分以之北, 何以識其爲昔日之江水而今分以居中耶? 且以方言之, 則宜曰南會而不應曰北會. 以實計之, 則湖口之東, 今但見其爲一江, 而不見其分流. 然則所謂漢水匯爲彭澤而江水亦往會焉者, 亦不可通之妄說也.

 

이 몇 설명은 어느 것 하나 막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맛으로 분별한다[味別]’, ‘모래섬으로 분별한다[洲別]’는 의론이 나왔지만 또한 끝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맛으로 분별한다’고 하면 모르겠다. 우(禹)가 문을 지나며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손발에 군살이 박히면서도 병폐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온 세상의 우매한 백성들을 크게 구제해서 평평한 땅에 살게 하고, 입고 먹게 하면서 그들의 생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육유(陸羽)나 장우신(張又新) 같은 무리배 처럼 다만 입 속에서 자그마한 것을 비교 계산하며 한 때 이름난 차나 마시는 것을 유쾌하게 여기려는 것이겠는가? 아! 이런 것으로 설명하려는 저들은 또한 생각이 없는 어리석은 아이라 할 것이다. 황하에 모이는 것은 칠(漆)․저(沮)․경(涇)․위( 渭)․이(伊)․낙(洛)․전(瀍)․간(澗)이고, 가지친 하천은 더욱 많으니 처음부터 맛으로 구별한다는 주장은 불가능한 것이다. 제(濟)의 날실이 되는 것은 혹은 숨겨지고 혹은 드러나며, 혹은 멈추고 혹은 흘러가서 그 변화가 일정치 않으니, 처음부터 맛으로 구별한다는 주장은 불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유독 여기에 이르러서 이 모든 것을 다 구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또 통할 수 없는 허망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모래섬으로 구별한다고 한다면 구강을 뚫은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앞에서 변론했다. 만일 정말과 이와 같다면 한수의 물이 장강에 들어간 다음에 반드시 하나의 모래섬이 그 사이에 끼어있어서, 장강과 한수를 구별시켜주어야 한다. 그리고 호구(湖口)에서 회돌아 들어오는 것에 또 당연히 나뉘어 둘이 되어 드나드는 분별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한 주장이다. 오늘날 모두 없고 호구를 가로지르는 곳을 내가 항상 지나가는데 다만 배의 북쪽은 대강(大江)의 탁한 물이고, 배의 남쪽은 팽려의 맑은 물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팽려의 물은 비록 장강에 한정된다지만 누설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평평한 곳을 만나면 또한 움직일만한 틈으로 인해 언제나 동으로 흐른다. 어떻게 중강․북강을 구별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또한 통할 수 없는 허망한 설명임을 알 수 있다.

此數說者, 旣無一之不窮, 於是味別, 洲別之論出焉, 而終亦不免於窮也. 蓋曰味別, 則不知凡禹之所爲過門不入, 胼手胝足而不以爲病者, 爲欲大濟天下昏塾之民, 使得平土而居, 以衣且食而遂其生耶? 抑如陸羽, 張又新輩, 但欲較計毫分於齒頰間, 以爲茗飮一時之快也? 嗚呼!彼以是而爲說者, 亦可謂童騃不思之甚矣. 且河之所會, 漆, 沮, 涇, 渭, 伊, 洛, 瀍, 澗, 支川尤多, 而初無味別之說. 濟之所經, 或潛或見, 或止或流, 其變不一而初無味別之說. 何獨至此而辨之若是悉耶? 此又可見其爲不通之妄說也. 若曰洲別, 則又九江之鑿, 吾旣辨於前矣. 若果如此, 則漢水入江之後, 便須常有一洲介於其間, 以爲江漢之別;而湖口入匯之處, 又當各分爲二, 以爲出入之辨而後可也. 今皆無之, 而湖口橫度之處 予常過之, 但見舟北爲大江之濁流, 舟南爲彭蠡之淸漲而已. 蓋彭蠡之水雖限於江而不得洩, 然及其旣平, 則亦因其可行之隙而又未嘗不相持以東也. 惡睹所謂中江, 北江之別乎? 此又可見其爲不通之妄說也.

 

옛 구강(九江)이 바로 오늘날의 강주(江州)이고, 옛 부천원(敷淺原)이 바로 오늘날의 덕안현(德安縣)이라고 한다면 한나라의 구강군(九江郡)은 본래 장강 북쪽에 있었고, 오늘날 말하는 강주는 실제로 무창군(武昌郡)의 시상현(柴桑縣)으로, 나중에 장강 북쪽의 심양을 시상현과 병합해서 군을 만든 것이다. 또 장강 북쪽으로부터 장강 남쪽을 다스리기 때문에 장강 남쪽이 심양(尋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중에 심양(尋陽)으로 인해 이름을 고쳐 강주가 되었으니, 실제로는 옛 구강의 땅이 아니다. 또 하물며 경(經)에서는 구강을 지나 동릉에 이르고, 그 다음에 팽려에서 모인다고 했으니, 오늘날 강주성에서 호구현에 이르기까지는 겨우 40리에 불과하니, 모르겠거니와 동릉 지역은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 어느 곳이 남달라서 그 기록이 이렇게 긴밀하고 번잡하단 말인가? 또 ‘구강을 지나 부천원에 이른다’고 했으니 이미 강주에서 순조로이 흘러 동으로 호구로 내려갔다, 다시 물길을 거슬러 남쪽으로 팽려로 올라가서 100여리를 지난 후에 이른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이것이 또 통할 수 없는 허망한 설명이다.

若曰古之九江卽今之江州, 古之敷淺原卽今之德安縣, 則漢九江郡本在江北, 而今所謂江州者寔武昌郡之柴桑縣, 後以江北之尋陽幷柴桑而立郡, 又自江北從治江南, 故江南得有尋陽之名. 後又因尋陽而改爲江州, 實非古九江地也. 又况經言過九江, 至于東陵, 而後會于彭蠡, 則自今江州城下至湖口縣才四十里, 不知東陵的在何處? 何所表異, 而其志之繁密促數乃如此? 又曰過九江, 至於敷淺原, 則已自江州順流東下湖口, 又復泝流南上彭蠡, 百有餘里而後至焉, 亦何說哉? 此又不可通之妄說也.

 

오늘날 부천원이라고 말하는 곳은 산이 아주 작고 낮아서 뭐라 말하기에도 부족하지만 그 전체 정맥(正脈)이 마침내 일어나 여부(廬阜)를 이루면 아주 높고 커서 대강과 팽려의 교류를 다 받아들일만 하니, 이 때문에 형산(衡山)이 동쪽으로 지나가는 한 자락의 극단은 오직 이것만이 그에 마땅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은 모두 이에 반대되니 나로서는 산천의 이름이 옛날과 지금이 혹 다른데도 전하는 자들이 그 진실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至於今之所謂敷淺原者, 爲山甚小而庳, 不足以有所表見. 而其全體正脈遂起而爲廬阜, 則甚高且大, 以盡乎大江彭蠡之交, 而所以識夫衡山東過一支之所極者, 唯是乃爲宜耳. 今皆反之, 則吾恐其山川之名古今或異, 而傳者未必得其眞也.

 

이러한 잘못은 한 둘이 아니다. 글을 읽고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하기만 하고 살피지 않으면 이미 어리석고 거친 것을 뭐라 말할 수도 없다. 그 사이에는 또 마음으로 잘못을 알지만 입으로 감히 말하지 못하고서 도리어 부화뇌동하고 천착하면서 그 잘못을 덮으려는 자들이 있으니, 교묘함이 심할수록 잘못은 더욱 드러나, 식견있는 선비가 읽을수록 의심만 들고, 더욱 믿을 수 없게 만든다. 오직 우리나라의 초창기에 비감(秘監) 호단(胡旦)과 근래에 첨사(詹事) 조설지(晁說之)만이 모두 구강은 동정호[洞庭]라고 여겼으니 그들아 증거를 대는 것들은 모두 극히 넓고 정밀했다. 보전(莆田)의 어중(漁仲) 정초(鄭樵)는 홀로 ‘동쪽으로 돌아 못[澤]이 되어 팽려(彭蠡)가 되며, 동쪽으로 북강(北江)이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東匯澤爲彭蠡 東爲北江 入于海]’는 열 세 글자를 연문이라 여겼는데, 또한 옳다. 나는 이미 팽려의 근원이 있고, 두 강이 나뉘지 않는다는 실제 모습을 목격했고, 또 이 세 사람의 주장을 참고해서 깊이 사리와 정세로 따져본 연후에 과연 그것이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홍수에 대한 걱정은 황하가 가장 심했는데, 곤주(袞州)는 그 중류에 해당해서 물길이 휘고 흐름이 느리며, 땅은 평평하고 흙은 트였다. 그러므로 황하가 넘칠까 하는 근심은 이곳에서 가장 심했다. 이런 까닭에 치수의 노력을 시작한 지 13년이 지난 후에 다른 주들과 같아지게 된 것이다. 헤아려 보면 당시에 오직 이런 지역만이 사태가 급하고 백성들은 곤궁해서 형세가 무겁고 부역이 번거로왔으므로 우(禹)는 친히 자리에 나아가 몸소 독려하면서 하루도 버려두지 않았다. 양(梁)․옹(雍)․형(荊)․(揚) 같은 곳은 땅이 치우치고 물이 급해서 트고 뚫지 않아도 본시 이미 통행하였으니 관원을 파견해서 가서 살펴보게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물며 동정호와 팽려 사이는 삼묘씨(三苗氏)가 살던 곳이다. 이런 시대를 맞이해서 물과 못, 산림이 측량할 수 없이 깊고 어두웠으니, 저들은 험란함을 믿고서 고집스럽게 장인을 맞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파견된 관원은 본시 그 경계를 깊이 들어가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평려 지역이 못이라는 것만 알고서, 그 근원이 아주 멀고 또 많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다만 동정호가 아래로 흘러 이미 장강이 된다는 것만 알고서 그 중류에서 아주 넓은 못을 이룬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잘못을 저지른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凡此差舛, 其類不一. 讀而不思, 思而不考者旣昏憒鹵莽而無足言矣, 其間亦有心知其誤而口不敢言, 乃反爲之遷就穿鑿以蓋其失者, 則其巧愈甚而其謬愈彰, 使有識之土讀之愈疑而愈不敢信. 唯國初胡秘監旦, 近世晁詹事說之皆以九江爲洞庭, 則其援證皆極精博. 而莆田鄭樵漁仲獨謂‘東匯澤爲彭蠡, 東爲北江, 入于海’十三字爲衍文, 亦爲得之. 予旣目睹彭蠡有原兩江不分之實, 又參之以此三說者, 而深以事理情勢求之, 然後果得其所以誤也. 蓋洪水之患, 唯河爲甚, 而袞州乃其中流, 水曲而流緩, 地平而土疏, 故河之患於此爲尤甚. 是以作治之功十有三載, 然後同於諸州. 竊計當時唯此等處事急民困, 勢重役煩, 禹乃親涖而身督之, 不可一日而舍去. 若梁, 雍, 荊, 揚, 地偏水急, 不待疏鑿固已通行, 則分遣官屬往而視之, 其亦可也. 况洞庭彭蠡之間, 乃三苗氏之所居. 當是之時, 水澤山林深昧不測, 彼方負其險阻, 頑不卽工, 則官屬之往者, 固未必遽敢深入其境. 是以但見彭蠡之爲澤, 而不知其源之甚遠而且多;但見洞庭下流之已爲江, 而不知其中流之嘗爲澤而甚廣也. 以此致誤, 宜無足怪.

 

글자를 사용하는 동이의 경우에도 경의 범례를 그 자체로 살펴 볼 수 있는데도 오히려 읽는 이들이 깊이 생각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다만 ‘동회북강(東匯北江)’만을 연자라고 삭제해 버리고, 바로 동정호를 구강이라고 여기고, 다시 경의 범례로 통용시켜보면 ‘구강을 지나 동릉에 이른다’는 것은 민산(岷山)의 물을 인도하면, 이 물의 흐름이 동정호의 입구를 가로로 끊으면서 동릉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것은 한수가 삼서를 지나는 사례이다. ‘구강을 지나 부천원에 이른다’는 것은 민산 남쪽의 산을 인도해서, 산을 이끄는 사람이 형산 기슭에 이르면 마침내 동정호의 꼬리를 넘게 되어서, 동쪽으로 산길을 택해서 부천원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견(岍)․기(岐)․형산(荊山)을 인도해서 황하를 넘어 항산의 갈석에 다다르는 사례이다. 이로써 보건대 경문의 뜻은 또한 이미 분명치 않는가!

若其用字之同異, 則經之凡例, 亦自可考, 顧讀者未深思耳. 今但刪去東匯北江之衍字, 而正以洞庭爲九江, 更以經之凡例通之, 則過九江至於東陵者, 言導岷山之水, 而是水之流 橫截乎洞庭之口, 以至東陵也. 是漢水過三澨之例也. 過九江至于敷淺原者, 言導岷陽之山, 而導山之人至于衡山之麓, 遂越洞庭之尾, 東取山路以至乎敷淺原也. 是導岍, 岐, 荊山而逾于河, 以盡恒碣之例也. 以是觀之, 則經之文意不亦旣明矣乎?

 

또 다른 글로 살펴보자면 󰡔산해경󰡕에서는 “여강(廬江)이 삼천자도(三天子都)에서 나온다”고 했는데(본문의 주에서는 “혹은 장(鄣)이라고 한다’고 했다. 지금 살펴보자면 단양(丹陽)은 옛날 장군(鄣郡)이었다. 그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니 ‘장(鄣)’으로 쓰는 것이 옳다.) 장강으로 들어가니 팽택의 서쪽이다(본문의 주에서는 “팽택(彭澤)은 오늘날 팽려(彭蠡)다. 파양(鄱陽)의 팽택현(彭澤縣)에 있다고 했다”)”고 했다. 󰡔한지(漢志)󰡕에서도 또한 “여강이 능양(廬江)이 능양(陵陽)의 동남쪽에서 나와 북으로 장강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능양(陵陽)은 단양( 丹陽)의 속현이다. 오늘날 영국부(寧國府) 정덕현(旌德縣)에 능양산(陵陽山)이 있고 삼천자도(三天子都)는 휘주[徽]․요주[饒]의 경계에 있으니 아마도 능양과는 등과 배처럼 서로 놓여 있기 때문에 여강이 그 동남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흐르다 북쪽으로 꺽여 파수[鄱]와 여수[餘] 두 물줄기가 되고 마침내 팽려에서 모여 장강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장강으로 들어가면 여산(廬山) 그 서남쪽에 우뚝 서있고, 강의 북쪽 연안은 군의 남쪽 경계가 되니 아마도 장강과 산이 서로에 기인해서 이름을 얻게 되었고, 군의 경계가 비록 장강의 북쪽에 있지만 또한 그 남쪽은 이 장강과 이 산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붙인 것 같다. 그러므로 팽려가 어떻게 근원이 없을 수 있으며, 반드시 한수고 돌아들고 장강이 모인 다음에야 이뤄지겠는가? 󰡔한지󰡕에 의하면 예장(豫章)이란 군은 열 여덟 현을 거느린다고 했고, ‘팽택현’이란 구절 아래의 주에 의하면 “「우공」편에 의하면 팽려택(彭蠡澤)이 서쪽에 있다”고 했고 그 나머지는 물이 호한(湖漢)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덟이다(파양(鄱陽) 파수(鄱水)․여간(餘干) 여수(餘水)․애수수(艾脩水)․감감수(淦淦水)․남월(南城) 우수(旴水)․건성(建成) 촉수(蜀水)․의춘(宜春) 남수(南水)․남야(南壄) 팽수(彭水)). 대강(大江)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다이다.(공주[贛]의 예장수(豫章水)이다). 그리고 호한이란 물줄기 하나는 또 우도(雩都)에서 동으로 팽택에 이르러 장강으로 들어가는데 1,980리를 간다. 오늘날의 지세로 살피자면 팽려는 이미 장강과 통하고 있으니, 예장의 여러 물줄기가 팽려에서 말미암지 않고 따로 장강으로 들어가는 길이 없다면 호한(湖漢)이란 즉 팽려이고, 그곳에서 받아들이는 여러 물줄기의 근원은 또한 여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보자면 󰡔산해경󰡕의 말은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다. 또 “장강으로 들어가고 팽택의 서쪽이다”고 말한 것은 본래 팽려현의 서쪽을 경유해서 장강으로 들어간다는 말일 뿐이지만 말의 뜻이 분명치 않아서 마침내 장강과 못을 나누어서 각각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고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가서 장강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한 말의 잘못이다. 󰡔한지󰡕에서는 또 호한이 곧 팽려인 것을 아지 못하고 둘로 나누어 말했고, 또 대강으로 들어가는 것도 반드시 팽려에서 고여서 따로 하나의 사례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또 호한이 호수[湖]임을 알지 못하고 못[澤]으로 이름짓고서, 다시 한(漢)과 겸해서 호칭했으니 또한 「우공」의 잘못을 이어 받고서 깊이 살피지 못한 것이다. 우도(雩都)의 물줄기에 대해서도 다만 한 군의 많은 흐름들 가운데 가장 먼 것만을 보고서 마침내 호한의 근원이라고 추론해서 그 이름을 주장했으니, 또한 호한이란 이름이 애초에 한 물줄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융흥 이북에서부터 여러 물줄기가 모두 모이고 고여서 큰 못을 이룬 다음에 이렇게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지, 우도라는 물줄기 하나가 전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정어중(鄭漁仲)의 한수(漢水)와 연문(衍文)에 대한 주장은 진실로 좋다. 그러나 그 아래 문장의 “장강의 물이 동쪽으로 비스듬히 흘러, 북쪽으로는 회택의 동에서 모이고 동쪽으로는 중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는 몇 말은 아마도 의심스러울 것 같은데 그는 오히려 다 바로잡지 못했다. 아! 「우공」에 기록된 것은 구주(九州)의 산천인데, 내 발길은 형양(荊揚)조차 다 돌아보지 못했음에도 그 의심스러운 것을 이미 이와같이 보게되었다. 모르겠거니와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없는 데서는 의심할만한 것이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이것은 진실로 알 수 없는 것이다.

若更以它書考之, 則山海經云: ‘廬江出三天子都, 本注云: ‘-作鄣.’ 今按丹陽故爲鄣郡, 其得名蓋以此, 則作‘鄣’爲是. 入江, 彭澤西.’ 本注云: ‘彭澤, 今彭蠡也, 在鄱陽彭澤縣.’ 漢志亦云:‘廬江出陵陽東南, 北入江.’ 蓋陵陽者, 丹陽之屬縣. 今寧國府旌德縣有陵陽山, 而三天子都乃在徽, 饒之境, 疑與陵陽腹背相直, 故廬江者得出其東南, 而西流北折以爲鄱, 餘二水, 遂以會于彭蠡而入于江也. 及其入江, 則廬山屹立乎其西南, 而江之北岸卽爲郡之南境, 疑江與山蓋相因以得名, 而郡境雖在江北, 亦以其南直此江此山而名之也. 然則彭蠡安得爲無原, 而必待漢匯江會而成哉? 漢志豫章爲郡, 領縣十八, 其彭澤縣下注云.‘禹貢彭蠡澤在西’, 其餘則言水入湖漢者八, 鄱陽鄱水, 餘汗餘水, 艾脩水, 淦淦水, 南城旴水, 建成蜀水, 宜春南水, 南壄彭水. 入大江者一. 贛豫章水. 而湖漢一水, 則又自雩都東至彭澤入江, 行千九百八十里也. 按今地勢, 彭蠡旣與江通, 而豫章諸水不由彭蠡別無入江之路, 則湖漢者卽是彭蠡, 而其所受衆水之原又不止於廬江而已也. 以此而觀, 則山海經之言猶有未盡. 且其曰‘入江, 彭澤西’ 者, 本謂逕彭蠡縣之西而入江耳, 而語意不明, 遂若析江與澤各爲一水而一東一西以入江者, 此亦其立言之疵也. 漢志又自不知湖漢之卽爲彭蠡而兩言之, 又不知入大江者亦必猪于彭蠡而別爲一例, 又不知湖漢之爲湖, 正以其澤名之, 而復兼以漢稱, 則又承禹貢之誤而弗深考也. 至於雩都之水, 則但見其爲一郡衆流之最遠者, 而遂推爲湖漢之源, 以主其名, 則又不知湖漢之名初非一水, 必自隆興以北, 衆水皆會, 猪爲大澤, 然後可以名之, 非雩都一水所可得而專也. 至如鄭漁仲漢水衍文之說, 固善矣. 而其下文江水‘東迤, 北會于匯, 東爲中江, 入于海’之數言, 似亦可疑, 而彼猶未能盡正也. 嗚呼!禹貢所載者九州之山川, 吾之足迹未能遍乎荊揚, 而見其所可疑者已如此, 不知耳目見聞之所不及, 所可疑者又當幾何? 是固不可得而知矣.

 

경의 범례 같은 경우 본래 그 자체로 명백한데도 여러 유자들은 지나치게 신기한 주장을 만들어 어지럽힌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산을 인도해서 황하를 지나는 것을 논하면서 견(岍)․지(岐)․형산(荊山)의 맥을 인도하는 것이라 여기고, 황하를 지나게 하는 것은 호구의 려러 산과 같은 종류라고 여긴다면 또한 보고 듣지 않더라도 그 잘못을 알 수 있다. 우가 치수를 하면서 산을 따라 나무를 베어내고 표식을 한 여러 산들의 이름은 반드시 크고 높아 강역을 나눌만 하고, 너비가 넓어 백성들을 머무르게 할 만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글을 지어 노력을 기울인 순서를 내보였으니 마치 오늘날 장례지내는 법을 논하는 자들이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그 맥락이 유래한 곳을 미루어보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만일 반드시 산맥으로 말한다면 또한 그 자체로 말할만한 것이 있고 또한 더욱 그 주장의 잘못을 드러내 보이기에도 충분하다. 하북의 여러 산들은 본래 산등성[脊]과 산맥[脈]에 근본하고 있으며, 모두 대주[代]에서 북쪽으로 환(寰)․무(武)․풍(嵐)․헌(憲) 등 여러 주에 이르기까지 높이 타고서 오며, 그 등성이 서쪽의 물은 서쪽으로 흘러가서 용문(龍門)과 서하(西河)의 상류로 들어간다. 그 등성이 동쪽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 상건(桑乾)이 되고 유주[幽]․기주[冀]의 길을 따라 바다로 들어간다. 그 서쪽의 한 가지는 호구(壺口)․태악(太岳)이 된다. 그 다음 한 자락은 분(汾)․진(晉)의 근원을 감싸안고 남쪽으로 나와 석성(析城)․왕옥(王屋)을 이루고 또 서쪽으로 꺽여 뇌수(雷首)를 이룬다. 또 다음 한 자락은 태행(太行)이 된다. 또 다음 한 자락은 상산(常山)이 된다. 그 사이에 각각 심(沁)․sh(潞) 등 여러 하천 사이를 벌려 놓아 서로 연속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견(岍)․기(岐)에서 황하를 동쪽으로 건너가서 거꾸로 이러한 여러 산들을 이룰 수 있겠는가?

至於經之凡例, 本自明白, 而諸儒乃有過爲新奇之說以亂之者. 若論導山而逾于河, 而以爲導岍, 岐, 荊山之脈, 使之度河, 以爲壺口諸山之類, 則亦不待聞見之及而知其謬矣. 夫禹之治水, 隨山刊木, 其所表識諸山之名, 必其高大可以辨疆域, 廣博可以奠民居, 故謹而書之, 以見其施功之次第, 初非有意推其脈絡之所自來, 若今論葬法者之所言也. 若必寔以山脈言之, 則亦自有可言, 而尤足以見其說之謬者. 蓋河北諸山, 本根脊脈皆自代北寰, 武, 嵐, 憲諸州乘高而來, 其脊以西之水, 則西流以入龍門西河之上流;其脊以東之水, 則東流而爲桑乾, 道幽, 冀以入于海. 其西一支爲壺口, 太岳;次一支包汾, 晉之源而南出, 以爲析城, 王屋, 而又西折, 以爲雷首;又次一支乃爲太行;又次一支乃爲常山. 其間各隔沁, 潞諸川, 不相連屬, 豈自岍, 岐跨河東度而反爲是諸山哉?

 

예를 들어 “구강을 지나서 부천원에 이른다” 구절도 답습되는 잘못이 있다. (이 구절을) 형산의 산맥이 동쪽으로 건너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민산의 산맥 한 자락이 형산을 이루는 것은 이미 구강의 서쪽에서 끝난다. 그 한 자락이 또 남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계령(桂嶺)을 건너면 상수[湘]의 근원을 감싸안고 북쪽으로 가서, 담주[潭]․원주[袁]의 경계를 경유해서 여부(廬阜)에서 끝난다. 그 한 자락은 또 남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대유(大庾)를 건너는 것은 팽려의 근원을 감싸한고 북쪽으로 건강(建康)에 이른다. 그 한 자락은 또 동쪽으로 절강(浙江)의 근원을 감사한고 그 머리를 북쪽으로 해서 회계(會稽)에서 끝나고, 그 꼬리를 남쪽으로 해서는 민(閩)․월(越)에서 끝난다. 그런데 어떻게 형산의 산맥이 구강을 넘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건너가서 또 부천원을 이루는 곳에 놓이겠는가?

若過九江至于敷淺原, 亦有襲其謬者, 以爲衡山之脈東度而來, 則以見聞所及而知其必不然也. 蓋岷山之脈, 其一支爲衡山者, 已盡於九江之西 ; 其一支又南而東度桂嶺者, 則包湘原而北, 徑潭, 袁之境以盡於廬阜 ; 其一支又南而東度大庾者, 則包彭蠡之原以北至乎建康;其一支則又東包浙江之原而北其首以盡于會稽, 南其尾以盡乎閩, 越也. 豈衡山之脈能度九江, 而其度也又直爲敷淺原而已哉?

 

또 양주(揚州)의 세 강이 곧 형주(荊州)의 중강(中江)․북강(北江)이 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가 빠진 것을 문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팽려의 남은 물줄기에 마침 호칭이 없다는 것을 돌이켜 보고서는 우선 거기에 남강(南江)이란 이름을 참칭해서 충당하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성인의 경은 서법이 오묘해서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극히 교묘하고 신기하다. 그러나 호구(湖口) 아래로는 장강이 본래부터 둘이 아닌데 어떻게 셋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아래 문장의 진택(震澤)과는 아주 먼 차이가 나서 서로 소속될 수가 없으니 또 어떻게 왜곡된 주장으로 견강부회할 수 있겠는가? 오(吳) 땅의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진택(震澤)의 하류에는 실제로 세 강이 있어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저들은 이미 눈으로 징험한 것이니 아마도 그 주장은 반드시 믿을만 하고, 오늘날에도 오히려 살펴볼만한 것이다. 아울러 이것을 논하면서 와서 묻는 이를 기다린다.

又有欲以揚州之三江卽爲荊州之中江, 北江, 而猶病其闕一, 乃顧彭蠡之餘波適未有號, 則姑使之潛冒南江之名以足之. 且又自謂聖經書法之妙, 非它人之所及, 是亦極巧而且新矣. 然自湖口而下, 江本無二, 安得有三? 且於下文之震澤, 又懸隔遼夐而不相屬也, 則又安能曲說而彊附之哉? 問諸吳人, 震澤下流實有三江以入于海, 彼旣以目驗之, 恐其說之必可信而於今尙可考也. 因幷論之, 以俟來者(7-3743)有以質焉.

 

 

황극에 대한 변론 皇極辨

 

 

 

【해제】이 글은 순희 16년(기유, 1189, 60) 6월경에 쓴 것으로, 󰡔상서󰡕 「주서․홍범」의 ‘황극’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해석과 그것을 추종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다.

 

 

「낙서」의 아홉 개 수에서 5는 가운데 머물고, 「홍범」의 구주(九疇)에서 황극(皇極)은 5에 머문다. 이 때문에 공씨(孔氏)의 「전(傳)」에서 황극을 대중(大中)이라 풀이한 이후로 많은 유자들이 모두 이 주장을 조술한다. 나는 홀로 경문의 뜻과 말의 맥락으로 구해 보고서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皇)이란 임금의 호칭이다. 극(極)이란 지극하다[至極]는 뜻으로 표준의 이름이요 언제나 사물의 가운데 있어서 사방의 외면에서 바라보면서 올바름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을 가운데 있는 기준[準的]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극을 곧바로 중(中)이라고 풀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북신(北辰)을 천극(天極)이라 하고, 척동(脊棟)을 옥극(屋極)이라 하는 뜻이 모두 그런 것이다. 󰡔예󰡕에서 말하는 민극(民極), 󰡔시󰡕에서 말하는 ‘사방의 극[四方之極]’은 황극의 듯에 더욱 가깝다. 그런데 오늘날 설명하는 이들은 이미 여기에서 잘못을 저지르고서 아울러 저기에서 실수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굴러갈수록 어지럽고 어긋나 끝내 스스로 분명하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옛 주장에 대면시켜 보면 우선 다른 것은 묻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만 경문을 마주하고 황(皇)을 크다[大]고 읽고, 극(極)을 가운데[中]라고 읽는다면, ‘오직 커야만 중을 지을 수 있다[惟大作中]’거나 ‘크면 받는다[大則受之]’는 말은 어떤 말이란 말인가? 이제 내 설명으로 추론해보면 인군(人君)이 작은 몸으로 지극히 존귀한 자리를 차지하면, 사방에서 몰려들어서 안쪽을 향해 사방에서 바라본다. 동쪽에서 쳐다보는 이는 이것을 지나 서쪽으로 갈 수 없고, 남쪽에서 쳐다보는 이는 여기를 지나 북쪽으로 갈 수 없다. 이것이 천하의 한 가운데인 것이다. 이미 천하의 한 가운데 머무른다면 반드시 천하의 순수한 덕을 가진 다음에야 지극한 표준을 확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오행을 따르고 다섯 가지 일을 공경하면서 자신의 몸을 닦고 여덟 가지 정사를 도타이 하며, 다섯 가지 기강을 화합시켜 정사를 고르게 한 다음에 지극한 표준이 우뚝하니 천하의 한 가운데 확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쪽을 향해 사방에서 쳐다보는 사람들도 여기에서 법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 어짊[仁]을 말하자면 어짊을 극치에 이르도록 해서 온 세상에서 어짊을 일삼는 자들이 더 이상 더할 것이 없고, 그 효성스러움을 말하자면 천하의 효를 극치에 달하도록 해서 온 세상의 효도를 하는 자들이 더 이상 높일 수도 없다. 이것이 ‘황극’이란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세 가지 덕[三德]으로 권장하고, 복서(卜筮)로 살펴서 하늘에서 좇고 나쁜 것을 징험하며, 사람에게서 재앙과 복을 살펴서, 마치 가죽옷의 옷깃을 들어 올리듯이 한다면 어떻게 모두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낙서」의 수가 비록 1에서 시작해서 9에서 끝나지만, 반드시 5가 그 가운데 머무는 이유이고, 「홍범」의 가르침이 비록 오행에 근본을 두지만 복의 극치를 추구하려면 반드시 황극을 위주로 하는 이유인 것이다.

洛書九數而五居中, 洪範九疇而皇極居五, 故自孔氏傳訓皇極爲大中而諸儒皆祖其說. 余獨嘗以經之文義語脈求之, 而有以知其必不然也. 蓋皇者, 君之稱也; 極者, 至極之義, 標準之名, 常在物之中央而四外望之以取正焉者也. 故以極爲在中之準的則可, 而便訓極爲中則不可. 若北辰之爲天極, 脊棟之爲屋極, 其義皆然. 而禮所謂民極, 詩所謂四方之極者, 於皇極之義爲尤近. 顧今之說者旣誤於此(7-3744)而幷失於彼, 是以其說展轉迷繆而終不能以自明也. 卽如舊說, 姑亦無問其它, 但卽經文而讀皇爲大, 讀極爲中, 則夫所謂‘惟大作中’, ‘大則受之’爲何等語乎? 今以余說推之, 則人君以眇然之身履至尊之位, 四方輻湊, 面內而環觀之. 自東而望者, 不過此而西也; 自南而望者, 不過此而北也, 此天下之至中也. 旣居天下之至中, 則必有天下之純德, 而後可以立至極之標準. 故必順五行, 敬五事以修其身, 厚八政, 協五紀以齊其政, 然後至極之標準卓然有以立乎天下之至中, 使夫面內而環觀者莫不於是而取則焉. 語其仁, 則極天下之仁而天下之爲仁者莫能加也. 語其孝, 則極天下之孝而天下之爲孝者莫能尙也. 是則所謂皇極者也. 由是而權之以三德, 審之以ト筮, 驗其休咎於天, 考其禍福於人, 如挈裘領, 豈有一毛之不順哉? 此洛書之數所以雖始於一, 終於九而必以五居其中, 洪範之疇所以雖本於五行, 究於福極而必以皇極爲之主也.

 

예를 들어 기자(箕子)의 말에 ‘임금이 극을 세운다’고 한 것은 인군이 자신의 자신의 몸을 천하의 지극한 표준으로 세웠음을 말한 것이다. ‘이 오복(五福)을 거두어서 여러 백성들에게 복(福)을 펴서 준다’고 한 것은 인군이 그 극을 세웠다면 다섯 가지 복이 모여들고, 또 백성들이 보고 감화를 받게 했다면 또한 이 복을 펼쳐서 백성들에게 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여러 백성들이 너의 극(極)에 대하여 너에게 극(極)을 보존함을 줄 것이다’고 한 것은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서 지극한 표준이라고 여기고 그를 좇아 감화한다면 이것은 다시 이 복을 그 임금에게 돌려줘 임금이 오래도록 지극한 표준이 되게 함을 말한 것이다.

“무릇 서민들이 간사한 무리[邪黨]를 만들지 않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비(阿比)함이 없는 것은 임금이 극(極)이 되기 때문이다”고 한 것은 백성들이 이 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두 군의 덕을 지극한 표준으로 여기기 때문임을 말한다. “무릇 서민(庶民)들이 꾀함이 있고 시위(施爲)함이 있고 지킴이 있는 것을 네가 생각하며, 극(極)에 합하지 않더라도 허물에 걸리지 않거든 임금은 받아 주라”고 한 것은 군이 이미 위에서 극을 세우면 아래에서 좇아서 감화하더라도 혹은 깊고 낮거나,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꾀함이 있는 이거나, 재주가 있는 이거나, 덕이 있는 이는 인군이 본시 염두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하다. 그러나 간혹 다 합치하지 못하고 큰 잘못에 부닥치지 않은 사람 또한 받아들이고 밀쳐내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얼굴빛을 편안히 하여 말하기를 ‘내가 좋아하는 바가 덕(德)이다.’라고 하거든 네가 그에게 복(福)을 주면 이 사람이 이에 임금의 극(極)에 맞게 할 것이다”고 한 것은 사람이 면모를 일신시키고 임금을 좇으면서 ‘덕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이름붙인 이가 있다면 비록 반드시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지는 않았더라도 인군은 또한 그가 스스로 이름붙인 것으로 인해 선하다고 허락해준다면 이 사람도 임금을 극이라 여겨 그 실상에 힘쓸 것임을 말한다. “미천한 사람이라고 학대하지 말고 고명한 이라고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 중에 재능이 있고 시위(施爲)함이 있는 자를 그 행함에 나아가게 하면 나라가 번창할 것이다”고 한 것은 임금은 백성에 대해서 똑같이 보고 똑같은 어짊을 느끼며 재능있는 자들을 모두 선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인재는 많아지고 나라는 이들에 힘입어 흥함을 말한다. “무릇 정인(正人)[벼슬아치]들은 부유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선하니, 네가 하여금 집에서 좋아함이 있게 하지 못하면 이 사람이 죄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덕(德)을 좋아하지 않는 이에게 네가 비록 복(福)을 주더라도 이는 네가 허물이 있는 사람을 씀이 될 것이다”고 한 것은 관직에 있는 사람[正人]에게는 반드시먼저 부유하게 해 준 다음에 선으로 향하기를 바래야 함을 말한다. 만일 그 집안이 의지할 수 없도록 한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불의한 데로 빠질 것이다. 두 번 다시 덕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이른 다음에 비로소 몸을 닦으라고 하고, 복을 구하라고 권하는 것은 이미 일을 바로잡을 수 없게 되어버려, 그가 몸을 일으켜 너에게 돌려주는 것은 오직 악일 뿐 선은 없게 된다. 사람의 기품은 혹은 맑고 혹은 탁하며, 혹은 순수하고 혹은 잡박해서 일률적으로 가지런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위에서 극을 세우신 것이 지극히 엄밀하고, 아래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은 지극히 관대한 것이다. 비록 저들이 여기에서 감화되는 데에 깊거나 낮고, 늦거나 빨라서 그 효과에 간혹 차이가 있지만, 내가 저들에게 응하는 것은 오래도록 보살피고 받아들이고 기르면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것이다. “편벽(偏僻)됨이 없고 기욺이 없어 왕(王)의 의(義)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좋아함을 일으키지 말아 왕(王)의 도(道)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미워함을 일으키지 말아 왕(王)의 길을 따르라.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王)의 도(道)가 탕탕(蕩蕩)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王)의 도(道)가 평평(平平)하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王)의 도(道)가 정직(正直)할 것이니, 그 극(極)에 모여 그 극(極)에 돌아올 것이다”고 한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것을 좇지 않고, 위의 교화를 좇아 지극한 표준으로 모이고 돌아옴을 말한다. 편벽되고 기울어져 악을 좋아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이기심이 마음에 생긴 것이다. 치우치고 당파를 만들어 이리저리 눈을 굴린다는 것은 개이적인 이기심이 일에 드러난 것이다. 왕의 의, 왕의 도, 왕의 길은 왕의 교화이니, ‘황극(皇極)’이라 말하는 것이다. 의를 따르고, 도를 따르고, 길을 따르는 것은 그 극에 모이는 것이다. 탕탕하고 평평하며, 정직하다면 이미 극에 돌아온 것이다. “임금이 극(極)으로 부연(敷衍)한 말이 이것이 바로 떳떳한 이치이고 가르침이니, 이는 상제(上帝)가 가르쳐주신 것이다”고 한 것은 인군이 자신의 몸으로 극을 세워 아래에 명을 펴면 그것이 항상하고, 교훈이 되는 이유는 모두 하늘의 이치여서 상제가 충을 내려준 것과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무릇 서민(庶民)들이 극(極)으로 부연한 말을 교훈(敎訓)으로 삼고 행하면 천자(天子)의 빛을 가까이한다”고 한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임금에게 명을 받아 모두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 삼가며 행한다면, 스스로 이것을 멀리하고 끊어버릴 수 없고 오히려 그 도덕의 광채를 직접 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우리들의 부모가 되시어 천하(天下)의 왕(王)이 된다’”고 한 것은 인군이 지극한 표준을 세울 수 있다면 억조 백성들의 부모가 되어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위는 있으나 그 덕은 없어서, 사물들 가운데서 으뜸으로 나올 수도 없고, 사람들의 무리를 통솔해서 천하의 극히 존귀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若箕子之言有曰‘皇建其有極’云者, 則以言夫人君以其一身而立至極之標準於天下也. 其曰‘歛時五福, 用敷錫厥庶民’云者, 則以言夫人君能建其極, 則爲五福之所聚, 而又有以使民觀感而化焉, 則是又能布此福而與其民也. 其曰‘惟時厥庶民于汝極, 錫汝保極’云者, 則以言夫民視君以爲至極之標準而從其化, 則是復以此福還錫其君而使之長爲至極之標凖也. 其曰‘凡厥庶民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云者, 則以言夫民之所以能有是德者, 皆君之德有以爲至極之標準也. 其曰‘凡厥庶民, 有猷, 有爲, 有守, 汝則念之; 不協于極, 不罹于咎, 皇則受之’云者, 則以言夫君旣立極於上, 而下之從化或有淺深遲速之不同. 其有謀者, 有才者, 有德者, 人君固當念之而不忘; 其或未能盡合而未抵乎大戾者, 亦當受之而不拒也. 其曰‘而康而色, 曰予攸好德, 汝則錫之福, 時人斯其惟皇之極’云者, 則以言夫人之有能革面從君而以好德自名, 則雖未必出於中心之實, 人君亦當因其自名而與之以善, 則是人者亦得以君爲極而勉其實也. 其曰‘無虐煢獨而畏高明, 人之有能有爲, 使羞其行而邦其昌’云者, 則以言夫君之於民, 一視同仁, 凡有才能皆使進善, 則人材衆多而國賴以興也. 其曰‘凡厥正人, 旣富方穀. 汝弗能使有好于而家, 時人斯其辜. 于其無好德, 汝雖錫之福, 其作汝用咎’云者, 則以言夫凡欲正人者, 必先有以富之, 然後可以納之於善. 若不能使之有所賴於其家, 則此人必將陷於不義. 至其無復更有好德之心而後始欲敎之以修身, 勸之以求福, 則已無及於事, 而其起以報汝, 唯有惡而無善矣. 蓋人之氣禀或淸或濁, 或純或駁, 有不可以一律齊者. 是以聖人所以立極乎上者至嚴至密, 而所以援引乎下者至寬至廣, 雖彼之所以化於此者, 淺深遲速, 其效或有不同, 而吾之所以應於彼者, 長養涵育, 其心未嘗不一也. 其曰‘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備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云者, 則以言夫天下之人皆不敢狥其己之私, 以從乎上之化而會歸乎至極之標準也. 蓋偏陂好惡者, 己私之生於心者也. 偏黨反側者, 己私之見於事者也. 王之義, 王之道, 王之路, 上之化也, 所謂皇極者也. 遵義, 遵道, 遵路, 方會其極也. 蕩蕩, 平平, 正直, 則已歸于極矣. 其曰‘皇極之敷言, 是彝是訓, 于帝其訓’云者, 則以言夫人君以身立極而布命于下, 則其所以爲常爲敎者, 皆天之理, 而不異乎上帝之降衷也. 其曰‘凡厥庶民, 極之敷言, 是訓是行, 以近天子之光’云者, 則以言夫天下之人於君所命皆能受其敎而謹行之, 則是能不自絶遠而有以親被其道德之光華也. 其曰‘曰天子作民父母, 以爲天下王’云者, 則以言夫人君能立至極之標準, 所以能作億兆之父母而爲天下之王也. 不然, 則有其位無其德, 不足以首出庶物, 統御人群而履天下之極尊矣.

 

이 글은 하늘이 우에게 내린 것에 근원해서, 비록 아득하니 멀고 신비해서 알 수 없는 점이 있지만, 기자가 말하면서 무왕에게 일러주었으니 이미 완비되었다. 그 말의 넓고 깊음과 심오하고 진실함을 돌이켜 보면 쉽사리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평안히 하고서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자 탄연(坦然)하게 명백해져서 한 글자도 의심할 것이 없었다. 다만 선대의 유자들은 그 뜻을 깊이 탐구하지 못하고 인군이 자신을 닦아 도를 세운 근본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황극을 대중(大中)으로 잘못 풀이한 것이다. 또 그 말을 보면 대부분이 폭넓고 관대한 말들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다시 중(中)을 애매모호하고 구차해서 선악이 나뉘지 않는 뜻으로 잘못 알아듣게 된 것이다. 자못 아지 못하겠으나 극이 비록 가운데 머문다고 해서 ‘가운데[中]’란 뜻을 취한 것은 아니다. 또 가운데[中]란 말의 뜻은 지나침도 부족함도 없고, 지극히 정밀하고 마땅해서 조금의 어긋남도 없다는 것이니, 또한 가리키며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이에 잘못 이해한 중으로 극을 잘못 풀이했으니 지극히 엄밀한 체에 삼가고, 지극히 관대한 양에도 힘쓰지 못해서 그 폐단이 장차 인군이 자신을 닦아 정사를 세워야 함을 알지 못하게 만들고, 한나라 원제의 우유함[優游]이나, 당나라 대종(代宗)의 임시변통적인 데에 빠져들게 해서, 결국 시비가 전도되고, 현부가 어지럽혀져 재앙이 뒤따르게 만드니 어떻게 복을 거두어 백성들에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是書也, 原於天之所以錫禹, 雖其茫昧幽眇, 有不可得而知者, 然箕子之所以言之而告武王者, 則已備矣. 顧其詞之宏深奧雅, 若有未易言者. 然嘗試虛心平氣而再三反復焉, 則亦坦然明白而無一字之可疑. 但先儒未嘗深求其意, 而不察乎人君所以修身立道之本, 是以誤訓皇極爲大中. 又見其詞多爲含洪寬大之言, 因復誤認中爲含胡苟且, 不分善惡之意. 殊不知極雖居中, 而非有取乎中之義. 且中之爲義, 又以其無過不及, 至精至當而無有毫釐之差, 亦非如其所指之云也. 乃以誤認之中爲誤訓之極, 不謹乎至嚴至密之體而務爲至寬至廣之量, 其弊將使人君不知修身以立政, 而墮於漢元帝之優游, 唐代宗之姑息. 卒至於是非顚倒, 賢否貿亂而禍敗隨之, 尙何歛福錫民之可望哉?

 

아! 공씨(孔氏)는 참으로 잘못이로다! 그러나 그의 본심을 생각해보면 또한 우선 글을 따라 뜻을 풀이하면서 보고 들으면서 책장이나 넘기려는 계획일 뿐이었으니, 그 화가 여기에 이를 줄을 알 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 이래로 지금까지 1,000여년이 되었지만 배우는 선비와 대부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시대의 변동이 많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다행이도 남겨진 경이 보존되어 있고, 본문을 살펴 볼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난 것을 얻지 못하고 어둡기만 했던 것이다. 이에 한 사람도 그 시비를 깨달아 바로잡은 이가 없어서 그 피해가 영원한 후대에까지 이르게 했으니, 이것이 어찌 공씨 한 사람만의 죄일 것인가! 나는 이 때문에 느끼는 것이 있어서 「황극변」을 짓는 것이다.

嗚呼, 孔氏則誠誤矣! 然迹其本心, 亦曰姑以隨文解義爲口耳估畢之計而已, 不知其禍之至此也. 而自漢以來, 迄今千有餘年, 學士大夫不爲不衆, 更歷世變不爲不多, 幸而遺經尙存, 本文可考, 其出於人心者又不可得而昧也, 乃無一人覺其非是而一言以正之者, 使其患害流于萬世, 是則豈獨孔氏之罪哉!予於是竊有感焉, 作皇極辨.

 

풍당가의 자는 시행(時行)이고 촉땅 사람인데 박식하고 문장에 능했습니다. 그의 문집 속에 봉사가 있는데 거기에서 “오직 폐하께서 아첨꾼과 주변의 측근들을 멀리하고,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줄여 사태의 변화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사업을 이루어나가는 근본입니다. 「홍범」에서 ‘임금이 극을 세운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고 했습니다. 그가 황극에 대해 논한 것은 깊이 제 뜻과 들어맞습니다. 그런즉 내가 앞에서 1,000여년 동안 그 잘못을 깨달아 바로잡은 이가 없다고 한 것도 거의 거짓에 가깝습니다. 다만 경만을 전공하는 선비가 이에 이른 자가 없는데 글짓는 선비가 거꾸로 이를 알 수 있었으니, 어찌 전과 주석에 골몰하느라 비루함으로 인해 잘못을 거듭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을 비우고 외우며 음미한 자가 때로 문자의 바깥에서 얻는 것이겠습니까? 경원 병신년 납월 갑인일에 동재(東齋)의 남쪽 창 아래서 씁니다.

馮當可字時行, 蜀人, 博學能文. 其集中有封事云: ‘願陛下遠便佞, 疏近習, 淸心寡欲, 以臨事變, 此興事造業之根本, 洪範所謂󰡔皇建其有極󰡕者也.’ 其論皇極深合鄙意. 然則予前所謂千有餘年無一人覺其繆而正之者, 亦近誣矣. 但專經之士無及之者, 而文士反能識之, 豈汨沒傳注者不免於因陋踵訛, 而平心誦味者有時而得之文字之外耶? 慶元丙辰臘月甲寅, 東齋南窗記.

 

 

윤화정이 손수 쓴 것에 대한 변론 尹和靜手筆辨

 

 

 

【해제】이 글은 정이의 제자인 윤돈이 쓴 단편적인 글에 대한 비평이다.

 

 

이천선생이 말했다. “내가 있는데, 어째서 꼭 이 글을 보려는가? 만일 내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단지 다른 사람의 뜻을 기억하는 것일 뿐이니 어찌 어긋나지 않겠는가?”

伊川先生曰: ‘某在 何必看此書? 若不得某之心, 只是記得它意, 豈不有差?’

 

이미 ‘내가 있으면 꼭 볼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선생이 계시지 않을 때라면 어록은 진실로 없어서는 안 된다. 선생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한낮 자신의 뜻을 기록했더라도 이 또한 배우는 이들이 널리 배우고 따져 물으며, 정치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변론해서 말 한 마디의 잘못 대문에 그 나머지를 전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선생이 계시다면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꼭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읽고서 의심난 것을 선생에게 질문한다면 어떻게 발명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예를 들어 양준도(楊遵道)의 기록 가운데 이단백(李端伯)이 기록한 “至大至剛以直”에 대한 논의를 싣고 있는데, 만일 준도가 이것을 없애고 보지 않으며, 보존되었더라도 논하지 않았다면 이 말의 득실을 결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천이 화정에게 일러준 이유는 그의 역량이 이르는 곳을 말해주려는 것이었고, 그가 다시 여기에서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갑자기 끝까지 외우려고만 했던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旣云某在不必看, 則先生不在之時, 語錄固不可廢矣. 不得先生之心而徒記己意, 此亦學者所當博學審問, 精思而明辨之, 不可以一詞之失而盡廢其餘也. 但先生在則可以式瞻儀刑, 親受音旨, 自是不必看耳. 然讀焉而質其疑於先生, 豈不益有助於發明哉? 如楊遵道錄中記李端伯錄至大至剛以直之論, 若使遵道於此廢而不觀, 存而不論, 則亦無以決此語之得失矣. 伊川所以告和靖者, 蓋就其力量所至而語之, 惜乎其不復致疑於此而遽誦以終身也.

 

소견에 깊고 낮음이 있기 때문에 기록에도 뛰어나고 졸렬한 것이 있다. 그 뜻을 잃은 것은 한 두 마디로 말할 겨를이 없다.

所見有淺深, 故所記有工拙. 失其意者, 不假一二言也.

 

낮고 졸렬해서 그 뜻을 잃은 것은 본시 살펴보기에 충분치 못하다. 그러나 그의 견해가 깊고, 기록이 뛰어나 그 뜻을 얻은 것은 어떻게 저것의 잘못 때문에 갑자기 없앨 수 있단 말인가?

淺拙而失其意者, 固不足觀矣. 其見深, 其記工而得其意者, 豈可以彼之失而遽廢之哉?

 

예를 들어 세상에 전하는 「사평(史評)」 류의 글은 모두 선생이 쓴 것이 아니다.

如世傳史評之類, 皆非先生所著.

 

󰡔사평󰡕은 본시 선생이 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논변을 통해 배우는 이들에게 밝혀줄 것이지 이로 인해 󰡔어록󰡕을 함께 없애서는 안 된다.

史評固非先生所著, 但當論辨以曉學者, 不可因此幷廢語錄也.

 

소흥 초기에 사대부들이 상당이 이천의 어록을 밑천삼아 외우고 말하고 다녔다. 말하는 자들은 곧장 제멋대로이고 괴상하며, 간사하고 인색하다고 비난했는데, 힘껏 변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紹興初, 士大夫頗以伊川語錄資誦說, 言事者直以狂怪淫鄙詆之, 蓋難力辨也.

 

󰡔어록󰡕을 밑천삼아 외우고 말하는 것은 당시 사대부들의 죄이고, 제멋대로이고 괴상하며, 간사하고 인색하다고 비난한 것은 당시 일을 말하던 자들의 실수이지 󰡔어록󰡕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이제 당시 사대부들을 싫어하면서, 당시의 말하던 자들을 두려워해서 󰡔어록󰡕을 기피하면서 살펴보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말하는 자들을 도와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이니, 또한 당시 학자들의 마음을 설복시킬 수도 없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以語錄資誦說者, 當時士大夫之罪 ; 以狂怪浮鄙詆之, 當時言事者之失, 非語錄使然也. 今惡當時士大夫, 畏當時言事者, 而諱語錄, 以爲不足觀, 是旣助言者以自攻, 而又無以服當時學者之心也, 豈不誤哉!

 

동문들이 기록한 겨우 몇 십 단을 엮어서 보여주었다.

掇同門所記僅數十端示之.

 

내가 예전에 이 글을 읽어 보았는데 종류가 대부분 경의 뜻을 풀이하는 말이었다. 만일 정씨의 학문이 이와 같은 데에 그쳤다면 또한 공자와 맹자의 전해지지 않았던 단서를 계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대의 선배들은 배우면서 박식하기를 원해야지 잡다하기를 원해서는 안 되고, 간략하기를 원해야지 비루하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진실로 음미할 만하다.

愚嘗讀此書矣, 類多解釋經義之言. 若程氏之學止於如此, 則亦無以繼孔孟不傳之緖矣. 前輩言學欲博不欲雜, 欲約不欲陋, 誠有味哉.

 

이천의 학문은 󰡔역전󰡕에 있으니 다른 데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伊川之學在易傳, 不必它求也.

 

공자가 󰡔시󰡕를 삭제하고, 󰡔상서󰡕를 정했으며, 󰡔주역󰡕에 (십익을) 매달았고, 󰡔춘추󰡕를 지었지만, 그 문도들이 또한 그의 말을 기술하여 󰡔논어󰡕를 만들었다. 그 말이 반복해서 증명하고 서로 안팎을 이루었지만 이것 때문에 저것을 버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孔子刪詩, 定書, 繫周易, 作春秋, 而其徒又述其言以爲論語, 其言反復證明, 相爲表裏, 未聞其以此而廢彼也.

 

󰡔역전󰡕은 스스로 지은 것이고, 󰡔어록󰡕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 남의 뜻을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易傳所自作也, 語錄它人作也. 人之意, 它人能道者幾何哉?

 

이와 같다면 공씨(孔氏)의 문하에서도 오직 󰡔춘추󰡕만을 공부하면서 결국 󰡔논어󰡕를 버렸어야만 했단 말인가?

如是則孔氏之門亦可以專治春秋而遂廢論語矣, 而可乎?

 

이천선생이 󰡔중용해󰡕를 지었는데, 병이 낫자 눈 앞에서 불태우도록 명했다. 문인이 묻자 이천선생은 “내게는 󰡔역전󰡕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무엇 때문에 많이 만들겠는가?”라고 했다.

伊川先生爲中庸解, 疾革, 命焚於前. 門人問焉, 伊川先生曰:‘某有易傳在足矣, 何以多爲?’

 

내가 예전에 다른 판본의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가 화정에게 “󰡔어록󰡕에 근거하면 선생께서 스스로 󰡔중용󰡕은 이미 책을 완성했다고 하셨는데, 지금 그 책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화정이 말했다. “선생께서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기시고 불태워버렸다.” 이 말이 아마도 진실을 얻은 것 같다. 설령 그 마음에 불만족스러운 점이 없었는데, 오직 󰡔역전󰡕만을 믿고 거꾸로 󰡔중용󰡕을 없앴을 수 있겠지만, 나는 아마도 선생의 마음이 이처럼 협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嘗見別本記或問和靖: ‘據語錄, 先生自言中庸已成書, 今其書安在?’ 和靖曰: ‘先生自以爲不滿意而焚之矣.’ 此言恐得其眞. 若無所不滿於其意而專恃易傳, 逆廢中庸, 吾恐先生之心不如是之隘也.

 

 

잡다한 학문에 대한 변론 雜學辨

 

 

[해제] 이 글은 당대의 저명한 유자들의 학술적 경향을 비판한 몇 편의 글을 모아 「잡학변」이란 제목으로 건도 2년(1166, 병술, 37세) 10월에 편집한 것이다. 󰡔총목제요󰡕에 의하면 “당대 여러 유자들이 불교와 도가에 잡다하게 영향 받은 것을 논척하는 글이다. 소식(蘇軾)의 󰡔역전󰡕에서 19조목, 소철(蘇轍)의 󰡔노자해󰡕에서 14조목, 장구성(張九成)의 󰡔중용해󰡕에서 52조목, 여희철(吕希哲)의 󰡔대학해󰡕에서 4조목들을 추려 모두 원문을 싣고 그 아래에 반박하는 글을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소씨(蘇氏: 蘇軾)의 󰡔역해󰡕 蘇氏易解

 

 

 

건괘[乾]의 「단사(彖辭)」는 성명(性命)의 이치를 발명해서 󰡔시󰡕의 ‘증민(蒸民)’, ‘유천지명(維天之命)’편과 󰡔상서󰡕의 「탕고(湯誥)」․「태서(太誓)」편, 󰡔중용󰡕․󰡔맹자󰡕와 서로 표리가 되고 「대전(大傳)」의 말 또한 부절을 합친 듯이 일치한다. 소씨(蘇氏)는 그 내용을 아지 못하고 자신이 멋대로 억측한 대로 말하려 하면서 또한 남들이 그 잘못을 손가락질 할까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언제나 ‘말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다’는 주장을 앞뒤에서 하면서 불빛이 번뜩이듯이, 큰 물결이 넘치듯이 붙잡을 수 없는 형상을 만드는데 힘써 읽는 이로 하여금 멍하게 만든다. 그래서 비록 그를 공박하려 해도 그 변론을 적용할 곳조차 없는 것이다. 성명의 이치는 매우 분명하고 그 학설도 지극히 간단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제 말하려 하면 앞서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이미 손으로 가리키고 나서는 또 다시 ‘알 수 없다’고 하니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떻게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데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징험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도가 쇠퇴하고 학문이 끊겨 세상이 많이 미혹당하기 때문에 변론을 지어 훗날의 군자를 기다린다. 그 나머지 생사와 귀신에 관해 말한 것이 합치하지 않는 것 역시 아울러 덧붙인다.

乾之彖辭發明性命之理 與詩, 蒸民, 維天之命 書, 湯誥 太誓 中庸, 孟子相表裏, 而大傳之言亦若符契. 蘇氏不知其說, 而欲以其所臆度者言之, 又畏人之指其失也, 故每爲不可言, 不可見之說以先後之, 務爲閃倏滉漾不可捕捉之形, 使讀者茫然, 雖欲攻之, 而無所措其辨. 殊不知性命之理甚明而其爲說至簡, 今將言之而先曰不可言, 旣指之而又曰不可見, 足以眩夫未嘗學問之庸人矣. 由學者觀之, 豈不適所以爲未嘗見, 未嘗知之驗哉? 然道衰學絶, 世頗惑之, 故爲之辨, 以待後之君子, 而其它言死生鬼神之不合者亦幷附焉.

 

“위대하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하니, 이에 하늘을 통합하였도다.”

大哉乾元, 萬物資始乃統天.

 

소씨는 말했다. “이것은 원(元)을 논했다. 원의 덕은 (눈으로) 볼 수 없다. 보일 수 있는 것은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하는 것뿐이다. 하늘의 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오직 이것만이 통합할 수 있을 뿐이다.”

蘇曰, 此論元也. 元之爲德, 不可見也. 所可見者, 萬物資始而已. 天之德不可勝言也, 惟是爲能統之.

 

내 생각에 네 덕 가운데 원(元)은 네 계절 가운데 봄과 같고, 오상(五常) 가운데 어짐[仁]과 같으니, 바로 천지가 조화 발육하는 단서이고, 만물이 좇아서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한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취해서 말한 것이다. 이것을 보존하고 몸과 마음 사이에서 살피면 그 체단이 환하게 되어 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오직 도를 아는 자라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씨는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것을 병폐로 여길 줄을 모르고 오히려 자기가 보지 못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참으로 볼 수 있는 이치가 없다고 하니 또한 미혹됨이 심하지 않는가!

愚謂四德之元猶四時之春, 五常之仁, 乃天地造化發育之端, 萬物之所從出, 故曰萬物資始, 言取其始於是也. 存而察之心目之間, 體段昭然, 夫嘗不可見也. 然惟知道者乃能識之, 是以蘇氏未之見耳. 不知病此, 顧以己之不見爲當然而謂眞無可見之理, 不亦惑之甚與!

 

구름이 떠다니고 비가 내려 만물이 형체를 바꾼다.

雲行雨施, 品物流形.

 

소씨는 말했다. “이것이 형통함[亨]이 되는 이유이다.”

蘇曰, 此所以爲亭也.

 

시작과 끝을 크게 밝히면 육위(六位)가 때로 이루어지나니, 때로 여섯 용(龍)을 타고서 하늘을 날아다닌다.

大明終始, 六位時成, 時乘六龍以御夫.

 

소씨는 말했다. “이것이 이로움[利]이 되는 이유이다.”

蘇曰, 此所以爲利也.

 

내 생각에 이것은 성인이 원형(元亭)의 쓰임을 체득했음을 말한 것이지 이로움을 말한 것이 아니다.

愚謂此言聖人髏元亭之用, 非言利也.

 

건도(乾道)가 변(變)하여 화(化)함에 각각 성명(性命)을 바루니, 대화(大和)를 보합(保合)한다.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

 

소씨는 말했다. “이것이 정(貞)이 되는 이유이다.”

蘇曰, 此所以爲貞也.

 

내 생각에 이것은 이정을 합쳐서 말한 것이고, 아래 구절에서 결론을 맺으려는 것이다.

愚謂此兼言利貞而下句結之也.

 

이에 이롭고 정(貞)하다.

乃利貞

 

소씨는 말했다. “아울러 말한 것이다.”

蘇曰, 幷言之也.

 

내 생각에 이것은 위의 ‘건도(乾道)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性命)을 바루고, 태화(太和)를 보합한다’는 문장을 결론맺은 것이다. ‘크게 종시(終始)를 밝혀 육위(六位)가 때로 이루어져 육룡을 타서 하늘을 통어한다’는 문장과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소씨의 설명은 또한 잘못이다.

愚謂此結上‘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之文, 與‘大明終始, 六位(7-3758)時成, 時乘六龍以御天’不相蒙. 蘇氏之說亦誤矣.

 

소씨는 말했다. “‘정(正)’은 ‘바르다[直]’는 뜻이다. 바야흐로 그 변화가 각각 정(情)에 이르지 않은 바가 없다. 도리어 이를 따라서 각각 그 본성을 바루어 명(命)에 이르니 이것이 정(貞)이 되는 이유이다.”

蘇曰, 正, 直也. 方其變化, 各之於情, 無所不至. 反而循之, 各直其性, 以至於命. 此所以爲貞也.

 

내 생각에 ‘만물이 형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건도의 변화가 아님이 없다. 그 가운데에 사물이 각각 그 성명(性命)을 바루어 그 태화(太和)를 보합하니, 이것이 건괘[乾]가 이로움[利]이 되고 또 정(貞)이 되는 까닭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화육의 근원이니, 다시 이를 어느 곳으로 돌이킬 것인가를 알지 못하면, 또 어떤 성(性)이 바르게 될 수 있고, 어떤 명(命)이 가히 이를 수 있겠는가? 만약 그의 설명대로라면 보합태화(保合太和)란 한 구절은 쓸모가 없을 것이다.”

愚謂品物流形, 莫非乾道之變化, 而於其中物各正其性命, 以保合其大和焉. 此乾之所以爲利且貞也. 此乃天地化育之源, 不知更欲反之於何地, 而又何性之可直, 何命之可至乎? 若如其說, 則‘保合大和’一句無所用矣.

 

소씨는 말했다. “옛 군자는 성(性)을 보기가 어려움을 걱정했다. 그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으로 성(性)을 말했다. 볼 수 있는 것으로 성(性)을 말한 것은 모두 성과 비슷한 것이다.”

蘇曰, 古之君子患性之難見也, 故以可見者言性. 以可見者言性, 皆性之似也.

 

내 생각에 옛 군자는 그 마음을 극진히 발휘하면 그 성(性)을 안다고 했으니, 일찍이 그 보기 어려움을 근심하지 않았다. 그 성(性)을 말함에 또한 일찍이 가리켜 말하지 않은 바가 없으니 비단 그 비슷한 것만 말한 것이 아니다. 또 무릇 성이란 것이 또 어떻게 그와 비슷한 하나의 사물이 있어서, 이것을 가져다 그것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런즉, 소씨의 소견이란 한갓 그 비슷함만을 보았을 뿐 일찍이 성과 유사한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愚謂古之君子盡其心則知其性矣, 未嘗患其難見也. 其言性也, 亦未嘗不指而言之, 非但言其似而已也. 且夫性者, 又豈有一物似之, 而可取此以况彼耶? 然則蘇氏所見, 殆徒見其似者, 而未知夫性之未嘗有所似也.

 

소씨는 말했다. “군자가 날마다 그 선을 닦아 그 선하지 않은 것을 없애나간다. 그러나 선하지 않은 것을 날마다 없애나가더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 있다. 소인은 날마다 그 선하지 않은 것을 닦아 그 선(善)을 없애나간다. 그러나 그 선을 날마다 없애려 해도 없앨 수 없는 것이 있다. 없앨 수 없는 것은 요순조차도 여기[性]에 뭔가를 더하지 못하고, 걸주(桀紂)라고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성의 소재이다.” 또 말했다. ”성의 소재는 어쩌면 알 수 있겠지만 성은 끝내 말할 수 없다.”

蘇曰, 君子日修其善以消其不善, 不善者日消, 有不可得而消者焉. 小人日修其不善以消其善, 善者日消, 有不可得而消者焉. 夫不可得而消者, 堯舜不能加焉, 桀紂不能逃焉. 是則性之所在也. 又曰, 性之所在庶幾知之, 而性卒不可得而言也.

 

내 생각에 소씨의 이 말은 가장 이치에 가까우니, 앞 장에서 말한 ‘성과 비슷한 것’이란 이것을 말하는 것인가? ‘선하지 않은 것을 날로 없애더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은 아마도 마치 본연(本然)의 지선(至善)이라 할 수 있는 것 같다. ‘선을 날마다 없애더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마치 양심(良心)의 싹[萌孽]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을 성(性)의 소재라고 여기는 것은 비슷하지만, 소씨가 처음부터 성(性)이 유래하는 곳과 선이 (성을 좇아) 확립되는 곳[所從立]을 알지 못한 것이라면, 그의 뜻은 아마도 이것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한낮 불교[浮屠]의 ‘허깨비[幻]가 아니기 때문에 불멸한다’ ‘돌아갈 것이 없는 것을 얻는다’는 말에 가탁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니 요행이 만의 하나 정도나 들어맞을 뿐이다. 이것은 ‘선을 잇고 본성을 이룬다[繼善成性]’는 것의 유래와 ‘(사람의 본성을) 반복적으로 해치는 것[梏亡反覆]’의 해로운 점을 살피지 못하고 사람과 개, 소의 성이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괜찮다고 하겠는가? 그가 성(性)을 말할 수 없다고 거듭해서 탄식하는 것은 ‘성(性)’이라 불리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까닭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愚謂蘇氏此言最近於理, 前章所謂性之所似, 殆謂是耶? 夫謂不善日消而有不可得而消者, 則疑若謂夫本然之至善矣. 謂善日消而有不可得而消者, 則疑若謂夫良心之萌蘖矣. 以是爲性之所在, 則似矣. 而蘇氏初不知性之所自來, 善之所從立, 則其意似不謂是也. 特假於浮屠‘非幻不滅, 得無所還’者而爲是說, 以幸其萬一之或中耳. 是將不察乎繼善成性之所由, 梏亡反覆之所害, 而謂人與犬牛之性無以異也, 而可乎? 夫其所以重歎性之不可言, 蓋未嘗見所謂性者, 是以不得而言之也.

 

소씨는 말했다. “성인이 마치 성(性)이 내 마음에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면, 이것은 오히려 이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음이 있는 것은 거짓의 시작이다. 또 여기에서 그 지극한 것을 미루어서 이것을 빌어다 명(命)이라 말하니, 명(命)이란 명령[令]이다. 임금의 명(命)을 명령[令]이라고 하고, 하늘의 명령[令]은 명(命)이라 한다. 성(性)의 지극한 것은 명(命)이 아니면 이름붙일 수 없기 때문에 명(命)에 기탁한 것일 뿐이다.”

蘇曰, 聖人以爲猶有性者存乎吾心, 則是猶有是心也. 有是心也, 僞之始也. 於是又推其至者而假之曰命. 命, 今也. 君之命曰令, 天之令曰命. 性之至者非命也無以名之, 而寄之命耳.

 

내 생각에 소씨는 ‘성(性)이 내 마음에 있다면 거짓의 시작이 된다’고 하니 이것은 성(性)의 참됨[眞]을 모르는 것이요, ‘성의 지극한 것은 명(命)이 아니고, 가탁해서 이름지은 것[假名]이다’고 하니, 이것은 명(命)의 실상[實]을 모르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사람이 태어나서 아무런 까닭 없이 이 큰 거짓[大僞]의 근본을 갖게 되고, 성인은 또 계획적으로 숨겨 거짓으로 이름과 글자를 만들어 미봉하려는 것이라면, 이것은 어떤 이치란 말인가? 이것은 일찍이 󰡔주역대전(周易大傳)󰡕, 󰡔시경󰡕, 󰡔상서󰡕, 󰡔중용󰡕, 󰡔맹자󰡕의 설을 깊이 살펴서 이 장(章)의 뜻을 밝히지 못하고, 불교의 ‘천지(天地)가 있기 전에 이미 이 성(性)이 있다’는 주장에 빠져서 성(性)을 천지가 사물을 낳기 이전에 말하려는 것이다. 또 무릇 명령하는 자[命者]가 기탁할 곳이 없는 것을 근심해서 이런 주장을 만들어 대처하면서, 둘[兩]이 서로 병통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설사 진실로 성명(性命)의 설을 알아서 천지가 사물을 낳이 이전에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었다면 또한 방법이 있을 것이나, 반드시 이렇게 지리하고 음둔한 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愚謂蘇氏以性存於吾心則爲僞之始, 是不知性之眞也. 以性之至者非命而假名之, 是不知命之實也. 如此則是人生而無故有此大僞之本, 聖人又爲之計度隨諱, 僞立名字以彌縫之, 此何理哉? 此蓋未嘗深考夫大傳, 詩, 書, 中庸, 孟子之說以明此章之義, 而溺於釋氏‘未有天地已有此性’之言, 欲語性於天地生物之前而患夫命者之無所寄, 於是爲此說以處之, 使兩不相病焉耳. 使其誠知性命之說矣, 而欲語之於天地生物之前, 蓋亦有道, 必不爲是支離浮遁之辭也.

 

소씨는 말했다. “죽거나 살거나, 오래 살거나 일찍 죽는 것이 명(命)이 아님이 없어서 나를 떠난 적이 없지만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성인이 성에 대해 지극하다고 하지만 또한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니 이것은 생각컨대 명(命)이다.” 또 말했다. “명(命)과 성(性)은 하늘과 사람처럼 분별되지 않는다. 그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명(命)이라 하는 것이다.”

蘇曰, 死生壽夭無非命者, 未嘗去我也, 而我未嘗覺知焉. 聖人之於性也至焉, 則亦不自覺知而已矣. 此以爲命也. 又曰, 命之與性, 非有天人之辨也, 於其不自覺知則謂之命.

 

내 생각에 소씨의 말대로라면 명(命)은 용납될 곳이 없다. 명(命)이 용납될 수 없으면 성인이 말한 ‘명(命)에 이른다’는 것은 더욱 둘 곳조차 없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 주장을 만들어 스스로 미혹되고, 또 세상의 무식한 자들을 혼란케 했을 뿐이다. 어찌 명(命)이 나에게 있는데도 스스로 깨닺지 못한 이를 성인이라 이를 것인가? 소씨가 󰡔문언전󰡕의 이정성정(利貞性情)의 문장을 인용하고 자신의 주장을 견강부회하니 모두 경(經)의 참뜻이 아니다. 이제 다시 변론하지 않겠다.

愚謂如蘇氏之說, 則命無所容. 命無所容, 則聖人所謂至命者益無地以處之. 故爲是說以自述罔, 又以罔夫世之不知者而已. 豈有命在我而不自覺知而可謂之聖人哉? 蘇氏又引文言利貞性情之文傳曾其說, 皆非經之本旨, 今不復辨.

 

많은 물건 중에서 처음으로 나와 모든 나라가 다 평안하다.

首出庶物, 萬國咸寧.

 

소씨는 운운했다.

蘇氏云云

 

내 생각에 이것은 성인이 이정(利貞)의 덕을 체득했음을 말한다. 소씨의 설명에도 병페는 없지만 그는 장구에 대해 설명이 미진한 점이 있다.

愚謂此言聖人體利貞之德也. 蘇氏說無病, 然其於章句有未盡其說者.

 

한 번 음(陰)하고 한 번 양(陽)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이를 계승한 것이 선(善)이고, 이를 이룬 것이 성(性)이다.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소씨는 말했다. 음양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루․사광처럼 총명한 이도 그 비슷한 것조차 얻을 수 없었다. 음양이 사귄 다음에 사물을 낳고, 사물이 생긴 다음에 형상[象]이 있으며, 형상이 확립되고서 음양이 숨는다. 그렇다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물이지 음양이 아니다. 그렇다고 음양이 있지 않다고 한다면 괜찮겠는가? 가장 어리석은 이조차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사물이 어떻게 스스로 생기겠는가? 이런 까닭에 사물을 낳는 것을 가리켜 음양이라고 말하는 것과, 음양과 비슷한 것조차 보지 못했다고 해서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미혹된 것이다.

蘇曰, 陰陽果何物哉? 雖有婁曠之聰明, 未有能得其髣髴者也. 陰陽交然後生物, 物生然後有象, 象立而陰陽隱. 凡可見者皆物也, 非陰陽也. 然謂陰陽爲無有, 可乎? 雖至愚知其不然也. 物何自生哉? 是故指生物而謂之陰陽與不見陰陽之髣髴而謂之無有, 皆惑也.

 

내 생각에 음양은 천지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것이 늘었다 줄었다, 열렸다 닫혔다하면서 만물의 시작과 끝이 되니 눈에 접하는 것들은 형체가 있든지 없든지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소씨는 ‘형상이 확립되면 음양이 숨어버려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물이요 음양이 아니다’고 하니 그 이치를 잃어버렸다. 음양의 근본에 통달한 이는 본시 물을 낳고서야 음양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또한 음양을 사물의 형상과 보고 듣는 것의 밖에서 찾지도 않는다.

愚謂陰陽盈天地之間, 其消息闔闢, 終始萬物, 觸目之間, 有形無形無非是也. 而蘇氏以爲象立而陰陽隱, 凡可見者皆物也, 非陰陽也, 失其理矣. 達陰陽之本者固不措生物而謂之陰陽, 亦不別求陰陽於物象見間之外也.

 

소씨는 말했다. “성인은 도를 말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음양을 빌려서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 한다’고 했다.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한다는 것은 음양이 사귀지 않아서 물을 낳기 이전을 말한다. 도를 근사하게 비유하는 것으로는 이것보다 더 치밀한 것이 없다. 음양이 한 번 사귀어 사물을 낳으면 그 처음은 물이 된다. 물은 유와 무의 경계이다. 처음 무에서 떨어져나와 유로 들어가는 것이다. 노자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도에 가깝다’는 구절이 있다. 성인의 덕은 이름 지을 수는 있지만 하나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마치 물이 항상하는 형체가 없는 것과 같으니, 이 선의 최고는 도에 가깝다는 것이지 도는 아니다. 만일 물이 생기지 않고 음양이 사귀지 않았다면 휑하니 하나의 사물도 없어서 있다 없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이것이 진실로 도와 비슷한 것이다.

蘇曰, 聖人知道之難言也, 故借陰陽以言之曰‘一陰一陽之謂道’. 一陰一陽者, 陰陽未交而物未生之謂也. 喩道之似, 莫密於此者矣. 陰陽一交而生物, 其始爲水. 水者無有之際也, 始離於無而入於有矣. 老子識之, 故其言曰‘上善若水’, 又曰‘水幾於道’. 聖人之德雖可以名而不囿於一物, 若水之無常, 此善之上者, 幾於道矣而非道也. 若夫水之未生, 陰陽之未交, 廓然無一物而不可謂之無有, 此眞道之似也.

 

내 생각에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은 오고 가는 것이 그치지 않으니, 도의 전체를 들어서 말하자면 이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음양을 빌려다 도와 근사한 것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도와 음양이 각각 하나의 사물이 되는데, 이것을 빌려다 저것을 형용하는 것이 된다. 음양의 단서는 움직임과 고요함의 기미[機]일 뿐이다.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움직이기 때문에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어서 홀로 서고, 외롭게 머무는 경우는 없다. 이것이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이 도가 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제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은 음양이 사귀지 않아서 물을 낳기 이전이어서 휑하니 하나의 사물도 없다.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도와 근사하다’고 한다면 도란 과연 어떤 것이란 말인가? 이것은 모두 도가 어째서 도가 되는지를 모르면서 허무적멸(虛無寂滅)한 학문으로 측량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이와 같은 것이다.

愚謂一陰一陽往來不息, 擧道之全體而言, 莫著於此者矣. 而以爲借陰陽以喩道之似, 則是道與陰陽各爲一物, 借此而况彼也. 陰陽之端, 動靜之機而已. 動極而靜, 靜極而動, 故陰中有陽, 陽中有陰, 未有獨立而孤居者. 此一陰一陽所以爲道也. 今曰一陰一陽者, 陰陽未交而物未生, 廓然無一物, 不可謂之無有者, 道之似也, 然則道果何物乎? 此皆不知道之所以爲道, 而欲以虛無寂滅之學揣摸而言之, 故其說如此.

 

소씨는 말했다. “음양이 사귀어 사물을 낳는다. 도와 사물이 접해서 선을 낳는다. 사물이 생기면 음양은 숨는다. 선이 확립되면 도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잇는 것은 선이요 이것을 이루는 것은 성이다’고 하는 것이다. 어진 이는 도를 보고서 어질다고 하고, 지혜로운 이는 도를 보고서 지혜롭다고 한다. 어질고 지혜로움은 성인께서 선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이란 도를 잇는 것이니, 그것을 가리켜 도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어떤 사람은 알 지 못하지만 그의 아들을 안다면, 이론 인해 그 사람을 드러내는 것은 괜찮겠지만, (자식을) 그 아들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잇는 것이 선이다’고 하는 것이다. 도를 배우면서 그 이어진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도는 완전치 못하다.

蘇曰, 陰陽交而生物, 道與物接而生善. 物生而陰陽隱, 善立而道不見矣. 故曰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道而謂之仁, 智者見道而謂之智. 夫仁智, 聖人之所謂善也. 善者道之繼, 而指以爲道則不可. 今不識其人而識其子, 因之以見其人則可, 以謂其人則不可, 故曰繼之者善也. 學道而自其繼者始, 則道不全.

蘇曰, 陰陽交而生物, 道與物接而生善. 物生而陰陽隱, 善立而道不見矣. 故曰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道而謂之仁, 智者見道而謂之智. 夫仁智, 聖人之所謂善也. 善者道之繼, 而指以爲道則不可. 今不識其人而識其子, 因之以見其人則可, 以謂其人則不可, 故曰繼之者善也. 學道而自其繼者始, 則道不全.

 

내 생각에 ‘이를 잇는 것이 선이다’고 한 것은 도가 나오는 것이 모두 선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니 ‘원(元)’이라 하는 것이다. 사물이 이를 얻어 이루어지면 각각 그들의 성명을 바루니 (이를 가리켜) ‘도가 본시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성을 따라 행하면 어디를 가든 도가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과 사람이 두 갈래 도가 없고, 밝고 어두움이 두 갈래 이치가 없어서 하나로 관통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음양이 사귀어 사물을 낳고 도와 물이 접해서 선을 낳는다. 사물이 생기면 음양은 숨는다. 선이 확립되면 도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고, ‘선이란 도를 잇는 것이다. 도를 배우면서 그 이어진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도는 완전치 못하다.’고 한다면 그 말의 잘못을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도의 밖에는 사물이 없고, 사물의 밖에는 도가 없는데, 이제 ‘도와 사물이 접한다’고 하니 이것은 도와 사물을 둘로 만들어 각자 한 곳에 있도록 단절시켜 버리고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로 접한다고 하니 또한 잘못이 아닌가?

愚謂繼之者善, 言道之所出無非善也, 所謂元也. 物得是而成之, 則各正其性命矣, 而所謂道者固自若也. 故率性而行, 則無往而非道. 此所以天人無二道, 幽明無二理而一以貫之也. 而曰陰陽交而生物, 道與物接而生善, 物生而陰陽隨, 善立而道不見, 善者道之繼而已, 學道而自其繼者始, 則道不全, 何其言之繆耶? 且道外無物, 物外無道. 今曰道與物接, 則是道與物爲二, 截然各號一方, 至是而始相接也, 不亦繆乎?

 

소씨는 말했다. “예전에는 맹자가 성이 선하다고 여긴 것을 지극하다고 생각했는데, 󰡔주역󰡕을 읽은 다음에는 지극하지 못한 점을 알게 되었다. 맹자가 성에 대해 그 이은 것[繼者]을 보았을 뿐이다. 선이란 성의 효과[性之效]이다. 맹자는 성은 보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성의 효과를 보고서, 이로 인해 자신이 본 것을 성이라고 여겼다. 이는 마치 불이 사물을 익힐 수 있는데, 나는 불은 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익은 물건만을 가리켜 불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익힌 물건이라는 불의 효과인 것이다.

蘇曰, 昔者孟子以爲性善, 以爲至矣, 讀易而後知其未至也. 孟子之於性, 蓋見其繼者而已矣. 夫善, 性之效也. 孟子未及見性而見其性之效, 因以所見者爲性. 猶火之能熟物也, 吾未見火而指天下之熟物以爲火. 夫熟物則火之效也.

 

내 생각에 맹자가 성이 선하다고 한 것은 그 근본을 탐구해서 말한 것으로, 󰡔주역󰡕의 가르침과 처음부터 조금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니, 성의 효과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소씨는 자신의 주장을 세우는데 급급해서 󰡔주역󰡕을 살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맹자󰡕에도 상세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이처럼 어긋난 것이다.

愚謂孟子道性善, 蓋探其本而言之, 與易之旨未始有毫髮之異, 非但言性之效而已也. 蘇氏急於立說, 非特不察於易, 又不及詳於孟子, 故其言之悖如此.

 

소씨는 말했다. “‘감히 성과 도의 분별에 대해 묻겠습니다.’ 말했다. ‘말하기 어렵다. 그 비슷한 것만 말할 수 있으니 도와 비슷한 것은 소리이고, 성과 비슷한 것은 듣는 것[聞]이다. ’소리가 있은 다음에 듣는 것입니까? 들은 다음에야 소리라 하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는 과연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공자께서는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고 했고, 또 신묘하게 밝히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했다. 성이란 사람이 되는 이유이니, 이것이 없다면 도를 이룰 수 없다.

蘇曰, 敢問性與道之辨. 曰, 難言也, 可言其似. 道之似則聲也, 性之似則聞也. 有聲而後聞耶? 有聞而後聲耶? 是二者果一乎? 果二乎? 孔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又曰神而明之, 存乎其人. 性者所以爲人者也, 非是無以成道矣.

 

내 생각에 자사자(子思子)는 ‘성을 따르는 것이 도이다’고 했고 소자(邵子)는 ‘성이란 도의 형체이다’고 했다. 󰡔주역대전󰡕과 이 장의 가르침은 서로 처음과 끝이 된다. 성과 도를 말하마년 이 말처럼 드러난 것은 없었다. 소씨(蘇氏)의 말은 왜곡되고 교묘한 비유로 그 비슷한 것은 말할 수 있지만 얻을 수 없는 없다고 말하려 하니 어떻게 성현의 말이 곧장 보여주면서 숨기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옛날 공자순(孔子順: 혹은 공자고(孔子高))은 ‘공손룡(公孫龍)의 변설은 아마도 세 개의 귀를 갖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개의 귀라 말하는 것이 아주 간단하고 진실로 옳은데, 세 개의 귀를 말하는 것은 아주 어렵고 실제로도 틀린 것이다. 그 쉽고 옳은 것을 따르려는 것인가? 그 어렵고 틀린 것을 따르겠는가?’라고 했으니, 이 말이 근사하다.

愚謂子思子曰, 率性之謂道. 邵子曰, 性者道之形體也, 與大傳此章之旨相爲終始. 言性與道, 未有若此言之著者也. 蘇氏之言曲譬巧喩, 欲言其似而不可得, 豈若聖賢之言直示而無隱耶? 昔孔子順謂公孫龍之辨幾能令臧三耳矣, 然謂兩耳者甚易而實是也, 謂三耳者甚難而實非也. 將從其易而是者乎? 將從其難而非者乎? 此言似之矣.

 

어진 이는 이를 보고 어질다고 하고, 지혜로운 이는 이를 보고 지혜롭다고 한다. 백성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군자의 도(道)는 드물다.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智.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소씨는 말했다. “형체가 없는 것에 눈을 떴던 사람은 간혹 그들의 뜻에 있는 것을 보기도 하기 때문에 어진 이는 도를 어질다고 여기니 뜻이 어짊을 보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는 도를 지혜롭다고 여기니 뜻이 지혜를 보존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이는 뜻을 보존하고 보는 것은 잊어버리지만, 어리석은 이는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군자의 도를 성(性)으로 이루는 사람은 드문 것이다.

蘇曰, 屬目於無形者或見其意之所存, 故仁者以道爲仁, 意存乎仁也;知者以道爲智, 意存乎智也. 賢者存意而妄見, 愚者日用而不知. 是以君子之道成之以性者鮮矣.

 

내 생각에 소씨는 어짐과 지혜가 성에 뿌리를 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어짐과 지혜를 잊어야 할 견해라고 보니, 이는 마로 불교와 도교의 주장이다. 성인의 말이 어떻게 이런 것이 있겠는가? 그 전체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혹 괜찮을 것이다. 또 군자의 도를 성으로써 이루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 것도 문장의 뜻이 또한 잘못이다.

愚謂蘇氏不知仁智之根於性, 顧以仁智爲妄見, 乃釋老之說. 聖人之言豈嘗有是哉? 謂之不見其全, 則或可矣. 又曰君子之道成之以性者鮮矣, 文義亦非.

 

처음을 미루어 끝에 돌이키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원리를 안다.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소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원리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깜짝 놀라기 때문일 뿐이다. 처음을 미루어 끝에다 돌이키되 분명하게 해준다면 놀라지 않을 것이다.

蘇曰, 人所以不知死生之說者, 駭之耳. 原始反終, 使之了然而不駭也.

 

내 생각에 사람들은 이치를 궁구하지 않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소씨는 거꾸로 놀랐기 때문에 그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하니 그 가르침을 놓쳤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그 처음이 나오는 곳을 미루어 보면 태어나는 까닭을 알게 되고, 그 마지막이 귀결되는 곳을 돌이켜보면 죽는 이유를 알게 된다. 이와 같기 때문에 삶에 따르고 죽음에 편안하게 여기는 이유는 도가 있기 때문이지 어떻게 한낮 환하게 놀라지 않는 것을 기특하게 여겨서이겠는가? 소씨는 처음을 미루어 끝에 돌이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주 간략해서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놀라지 않는다’는 말로 징험해 보자면 그가 좌망 입화․오고감이 자유롭다는 주장을 기이하게 여기는 데 빠져서 성인의 뜻에 어두움을 알 수 있다.

愚謂人不窮理, 故不知死生之說. 不知死生之說, 故不能不駭於死生之變. 蘇氏反謂由駭之而不知其說, 矢其指矣. 窮理者原其始之所自出, 則知其所以生;反其終之所於歸, 則知其所以死. 夫如是, 凡所以順生而安死者, 蓋有道矣, 豈徒以了然不駭爲奇哉? 蘇氏於原始反終言之甚略, 無以知其所謂. 然以不駭云者驗之, 知其溺於坐亡立化, 去來自在之說以爲奇, 而於聖人之意則昧矣.

 

정(精)과 기(氣)가 합하여 물(物)이 되고 혼(魂)이 흩어진 것이 변하니, 이런 까닭에 귀신의 실상[情狀]을 안다.

精氣爲物, 遊魂爲變, 是故知鬼神之情狀.

 

소씨는 말했다. “사물[物]은 귀이고 변하는 것[變]은 신이다. 귀는 언제나 체(體)와 백(魄)을 함께 갖기 때문에 물(物)이라고 한다. 신은 어느 곳이든지 갈 수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과 기는 백을 이루고 백은 귀를 이룬다. 지와 기는 혼을 이루고 혼은 신을 이룬다. 그러므로 󰡔예기󰡕에서는 체와 백은 아래로 내려가고 지와 기는 위에 있다’고 했고, 정자산(鄭子産)은 ‘그가 사물을 쓴 것은 매우 많았고 그가 정수를 흡수한 것도 많았다’고 했으니 옛날의 통달한 자들은 이미 이것을 알았다.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앎[二知]이 있는 이런 도는 없다. 그러나 백이 있고 혼이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통 사람의 지는 음식이나 남녀 관계의 사이거나 먹고 기르는 재물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그 재물이 풍부하면 기가 강해지고, 그 재물이 적으면 그 기는 미약해진다. 그러므로 기가 지를 이겨 백이 되는 것이다. 성현은 그렇지 않으니 지로 기를 하나로 통일시켜 맑고 밝은 것이 몸에 있어서 지와 기가 마치 신과 같다. 비록 온 세상을 녹으로 주고, 궁핍함이 필부에 이르더라도 더하거나 덜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지가 기를 이겨 혼이 된다. 보통 사람은 죽어서 귀가 되고 성인은 신이 되지만 두 갈래 귀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의 소재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蘇曰, 物鬼也, 變神也. 鬼常與體魄俱, 故謂之物. 神無適而不可, 故謂之變. 精氣爲魄, 魄爲鬼. 志氣爲魂, 魂爲神. 故禮曰:‘體魄則降, 志氣在上.’ 鄭子産曰:‘其用物也弘矣, 其取精也多矣.’ 古之達者已知此矣. 一人而有二知, 無是道也. 然而有魄者, 有魂者, 何也? 衆人之志不出於飮食男女之間與凡養生之資, 其資厚者其氣彊, 其資約者其氣微. 故氣勝志而爲魄. 聖賢則不然, 以志一氣, 淸明在躬, 志氣如神, 雖祿之天下, 窮至匹夫, 無所損益也. 故志勝氣而爲魂. 衆人之死爲鬼, 而聖人爲神, 非有二致也. 志之所在者異也.

 

내 생각에 정이 모이면 백이 모이고, 기가 모이면 혼이 모인다. 이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몸뚱이[體]를 이루는 것이다. 정이 다 없어지고 백이 아래로 내려가는 지경에 이르면 기는 흩어지고 혼은 떠돌아 가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내려간 것은 움추러 들어 형체가 없기 때문에 귀라고 하고, 떠도는 것은 펼쳐져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라고 한다. 사람과 사물이 무도 그런 것이지 성현과 어리석은 이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재아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상세하게 말씀하셨다. 소씨는 여기에서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은 것이다. 자산의 말은 혹여 일리가 있겠지만 이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愚謂精聚則魄聚, 氣聚則魂聚, 是以爲人物之體. 至於精竭魄降, 則氣散魂遊而無不之矣. 降者屈而無形, 故謂之鬼;遊者伸而不測, 故謂之神. 人物皆然, 非有聖愚之異也. 孔子答宰我之問, 言之詳矣. 蘇氏蓋不考諸此而失之. 子産之言是或一道, 而非此之謂也

 

 

소황문(蘇黃門: 蘇轍)의 󰡔노자해󰡕 蘇黃門老子解

 

소시랑(蘇侍郞)이 만년에 이 책을 만들면서 우리 유학을 노자(老子)와 합치되도록 했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여겨, 또 불교[釋氏]를 아울러 미봉하려 했으니 (이미) 어긋났다고 말할 만 하다. 그러나 스스로는 아주 고원하다고 여겨 당대에 더불어 이것을 말할 수 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의 형인 동파공(東坡公) 또한 뜻하지 않게 만년에 이 책을 보고서 기특하다고 여겼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서 변론을 하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소씨 형제는 문장과 의리로 불승(佛乘)을 찬양한 것은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전등록해」와 같은 것은 그 잘못이 더욱 심하니 변론할 만한 것이 이 책만 잇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대꾸하면서 “내가 병페로 여기는 것은 유학을 잘못 배워 이단으로 흘러간 것을 병폐로 삼는 것이지, 불교를 배워 이르지 못하고서 문장과 의리에 빠진 것을 병폐로 삼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어서 이것을 논한다면 어떻게 좋은 변론이겠는가? 진심으로 그들이 우리 학문의 전통을 어지럽히고 인심의 올바름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저기에서 찾아서 그들의 주장을 얻지 못한다면 나 또한 어떻게 알 겨를이 있겠는가?

蘇侍郞晩爲是書, 合吾儒於老子, 以爲未足, 又幷釋氏而彌縫之, 可謂舛矣. 然其自許甚高, 至謂當世無一人可與語此者. 而其兄東坡公亦以爲不意晩年見此奇特. 以予觀之, 其可謂無忌憚者與, 因爲之辨. 而或者謂蘇氏兄弟以文義贊佛乘, 蓋未得其所謂. 如傳燈錄解之屬, 其失又有甚焉, 不但此書爲可辨也. 應之曰, 予之所病, 病其學儒之失而流於異端, 不病其學佛未至而溺於文義也. 其不得已而論此, 豈好辯哉? 誠懼其亂吾學之傳而失人心之正耳. 若求諸彼而不得其說, 則予又何暇知焉!

 

소씨는 말했다. “공자는 어짐․의로움․예의․음악으로 세상을 다스렸는데, 노자는 이들을 끊고 버렸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이) 같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주역󰡕에서는 ‘형이상의 것을 도라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器)라 한다’고 했다.

蘇曰, 孔子以仁義禮樂治天下, 老子絶而棄之, 或者以爲不同. 易曰:‘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내 생각에 도와 기라는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실제로는 한 물건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내 도는 하나로 꿰뚫었다’고 했으니, 이것이 성인의 도가 대중지정(大中至正)의 극치를 이루고 영원한 세월에 걸쳐 아무런 흠이 없는 이유이다. 소씨는 그 말을 외우면서도 그 뜻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한 마디도 들어맞는 것이 없는 것이다. 배우는 이는 여기에서 먼저 내 주장으로 찾아서 성인의 뜻에 환하게 의심이 없어지도록 한 다음에 소씨의 말을 읽는 다면 득실 관계가 또렷이 드러난 것이다.

愚謂道器之名雖異, 然其實一物也. 故曰‘吾道一以貫之’, 此聖人之道所以爲大中至正之極, 亘萬世而無弊者也. 蘇氏誦其言不得其意, 故其爲說無一辭之合. 學者於此先以予說求之, 使聖人之意曉然無疑, 然後以次讀蘇氏之言, 其得失判然矣.

 

공자께서 깊이 후세를 염려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를 보여주시면서 도는 숨겼다.

孔子之慮後世也深, 故示人以器而晦其道.

 

내 생각에 도와 기는 하나이니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도는 그 가운데 있다. 성인이 어째서 숨기겠는가? 공자는 “나는 너희에게 숨김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 도를 숨긴다면 또한 어떻게 성인의 마음이겠는가? 소씨가 말하는 ‘도’는 모두 기를 떠나서 말하니 어떤 것을 가리켜 그렇게 이름붙인 것인지 모르겠다.

愚謂道器一也, 示人以器, 則道在其中. 聖人安得而晦之? 孔子曰‘吾無隱乎爾’, 然則晦其道者, 又豈聖人之心哉? 大抵蘇氏所謂道者皆離器而言, 不知其指何物而名之也.

 

중인(中人) 이하에게는 그 기를 지키게 하고, 도에 의해 현혹되지 않게 함으로써 군자됨을 잃지 않도록 했다.

使中人以下守其器, 不爲道之所眩, 以不失爲君子.

 

내 생각에 만일 소씨의 이 말대로라면 이것은 도가 사람을 현혹시켜 군자가 되지 못하도록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도가 있다는 것은 이 사람들의 재앙이 되기에 알맞을 것이다.

愚謂如蘇氏此言, 是以道爲能眩人, 而使之不爲君子也. 則道之在天下, 適所以爲斯人之禍矣.

 

그리고 중인 이상은 여기에서부터 위에 통달한다[達].

而中人以上自是以上達也.

 

내 생각에 성인이 말하는 통달함[達]이란 본말 정추를 겸해서 하나로 꿰뚫었다. 소씨가 말하는 통달함은 기를 버리고 도로 들어가는 것이다.

愚謂聖人所謂達, 兼本末精粗而一以貫之也. 蘇氏之所謂達, 則舍器而入道矣.

 

노자는 그렇지 않으니 도를 밝히는 데에 뜻을 두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젖히는데 급급해했다.

老子則不然, 志於明道而急於開人心.

 

내 생각에 노자의 학문은 ‘무위’를 종지로 삼는다. 그런데 과연 이 말대로라면 이는 유위에 급급해하는 것이니, 오직 그 느슨함을 두려워해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즉 노자의 뜻에 소씨는 또한 엿보지 못할 것이 있는 것이다.

愚謂老子之學以無爲爲宗, 果如此言, 乃是急急有爲, 惟恐其緩而失之也. 然則老子之意, 蘇氏亦有所不能窺者矣.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도를 보이고 기에 대해서는 가볍게 다룬 것은 배우는 자들이 오직 기만을 안다면 도는 숨겨질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어짐과 의로움을 끊고 예의와 음악을 버림으로써 도를 밝히는 것이다.

故示人以道而薄於器, 以爲學者惟器之知, 則道隱矣. 故絶仁義, 棄禮樂以明道.

 

내 생각에 도는 어짐․의로움․예의․음악의 총체적인 명칭이고, 어짐․의로움․예의․음악은 모두 도의 체(體)와 용(用)이다. 성인이 어짐과 의로움을 닦고 예의와 음악을 제정한 것은 도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제 어짐과 의로움을 끊고 예의와 음악을 버림으로써 도를 밝힌다면 이것은 2와 5를 버리고 10을 찾으려는 것이니 어찌 어긋나지 않겠는가?

愚謂道者仁義禮樂之總名, 而仁義禮樂皆道之體用也. 聖人之修仁義, 制禮樂, 凡以明道故也. 今曰絶仁義, 棄禮樂以明道, 則是舍二五而求十也, 豈不悖哉?

 

도는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와 비슷한 것이다. 통달한 이는 비슷한 것으로 인해 참된 것을 알아차리지만, 미혹된 자는 비슷한 것을 붙잡고서 거짓에 빠진다.

夫道不可言, 可言者皆其似者也. 達者因似以識眞, 而昧者執似以陷於僞.

 

내 생각에 성인이 도를 말한 것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그리고 벗들 사이의 교제였다. 모르겠으나 이것이 도를 말한 것인가? 아니면 그 비슷한 것을 말한 것일 뿐인가? 이것을 붙잡고 행하면 또한 빠질 곳이 있단 말인가? 그런즉 도란 어찌 참으로 말할 수 없겠는가?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도와 기가 일찍이 떨어질 수 없음을 아지 못하고 거꾸로 소리도 없이 어두운 형체 없는 것 속에서 찾으려는 것일 뿐이다. 이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 뿐이다.

愚謂聖人之言道,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 不知此言道邪? 抑言其似者而已耶? 執此而行, 亦有所陷者耶? 然則道豈眞不可言? 但人自不識道與器之未嘗相離也, 而反求之於昏黙無形之中, 所以爲是言耳.

 

그러므로 후세에 노자의 이론에 집착해서 세상을 어지럽힌 자는 있었지만 공자를 배우고서는 큰 잘못이 없었다.

故後世執老子之說以亂天下者有之, 而學孔子者無大過.

 

내 생각에 노자를 잘 배운 사람은 예를 들자면 한나라 문제와 경제, 조참(曹參) 등은 또한 세상을 어지럽히는 데 이르지 않았다. 만일 소씨의 주장대로라면 그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공자를 배우는 사람들도 그들의 얻음에 깊이의 차이가 있고, 허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일괄적으로 논할 수 없다. 또 예를 들어 소씨도 공자의 글을 읽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가 책을 쓰고 주장을 내세운 것들이 후세 세상을 이처럼 미혹시키기도 하고, 깨우치기도 하는데, ‘허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愚謂善學老子者, 如漢文, 景, 曹參, 則亦不至亂天下. 如蘇氏之說, 則其亂天下也必矣. 學孔子者所得亦有淺深, 有過無過, 未可槪論. 且如蘇氏, 非不讀孔子之書, 而其著書立言以惑悟天下後世如此, 謂之無過. 其可得乎?

 

노자의 말로 인해 도에 통달한 이는 적지 않지만, 공자에게 찾았던 사람들은 언제나 괴롭기만 하고 좇아 (들어갈) 곳이 없었다.

因老子之言以達道者不少, 而求之於孔子者常苦其無所從.

 

내 생각에 ‘노자의 말로 인해 도에 통달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모르겠으나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그 통달했다는 것은 무엇이며, 통달한 것은 어떤 도인가? 또 ‘적지 않다’고 한다면 한 두 사람이 아닐 것이니, 도에 통달한 자가 과연 이처럼 많단 말인가? 공자는 순순한 태도로 선으로 이끄시고, 사람을 가르치면서 게으르지 않으셨으며, 도에 들어가는 길이 평평하고 뚜렷했다. 그런데 ‘언제나 괴롭기만 하고 좇아 들어갈 곳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하루도 여기에 종사한 적이 없어서 그 문을 얻어 들어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도와 기를 분석해 나누고 어짐․의로움․예의․음악을 도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긴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즉 좇아 들어갈 곳이 없다는 말은 공자의 도를 병폐로 치부하지도 못하고, 배우는 이들의 의지를 없앨 수도 없으니, 이는 바로 스스로 도를 아지 못하고 멋대로 말하는 실상을 형용할 뿐이다.

愚謂因老子之言以達道者不少, 不知指謂何人? 如何其達而所達者何道也? 且曰不少, 則非一二人而已. 達道者果如是之衆耶? 孔子循循善誘, 誨人不倦, 入德之途坦然明白. 而曰常苦其無所從入, 則其未嘗一日從事於此, 不得其門而入可知矣. 宜其析道與器而以仁義禮樂爲無與於道也. 然則無所從入之言非能病孔子之道而絶學者之志, 乃所以自狀其不知道而妄言之實耳.

 

두 성인은 모두 부득이했다.

二聖人者, 皆不得已也.

 

내 생각에 공자․노담을 성인으로 병칭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태사공(太史公)이 황노를 앞세우고 육경을 뒤에 두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태사공은 (󰡔사기󰡕에서) 공자를 세가(世家)편에 두고, 노자는 한비(韓非)와 함께 열전에 넣었다. 어찌 은미한 뜻이 없다 하겠는가? 그는 소씨와 비교해서 훨씬 현명했던 것이다.

愚謂以孔子老聃竝稱聖人, 可乎? 世人譏太史公先黃老後六經, 然太史公列孔子於世家而以老子與韓非同傳, 豈不有微意焉? 其賢於蘇氏遠矣.

 

여기에 완전하다면 반드시 저기에는 간략하다.

全於此必略於彼矣.

 

내 생각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언제다 두 가지 도가 있는 것이다.

愚謂有彼有此, 則天下常有二道也.

 

소씨는 후서에서 말했다. “육조(六祖: 慧能)가 말한 선을 생각하지도 말고, 악을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은 즉 희노애락이 발하지 않은 것[未發]이다.”

蘇氏後序云, 六祖所云不思善, 不思惡, 卽喜怒哀樂之未發也.

 

내 생각에 성현이 비록 미발을 말했지만 그 선한 것은 본시 보존되어 있고, 다만 악이 없을 뿐이다. 불교도의 말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다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愚謂聖賢雖言未發, 然其善者固存, 但無惡耳. 佛者之言似同而實異, 不可不察.

 

또 말했다. “중(中)이란 불성의 다른 이름이다. 화(和)란 육도(六度)와 모든 행실의 총체적인 조목이다.”

又云, 蓋中者佛性之異名, 而和者六度萬行之總目也.

 

내 생각에 기뻐하고 성내며, 슬퍼하고 즐거워하면서 모두 절도에 알맞은 것을 ‘화’라 하니, 화란 천하의 보편적인 도이다. 육고와 모든 행실이란 나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훼손하고,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끊어버리면서 인도의 단서를 커다란 금기로 여기는 ‘보편적인 도’가 본시 이렇단 말인가?

愚謂喜怒哀樂而皆中節謂之和, 而和者天下之達道也. 六度萬行, 吾不知其所謂. 然毁君臣, 絶父子, 以人道之端爲大禁, 所謂達道, 固如是耶?

 

또 말했다. 세상에는 본시 두 가지 도가 없지만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차이가 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의 사이는 예의와 법이 아니면 어지러워진다. 예의와 법을 알고서 도를 알지 못하면 세상의 속된 유자들도 귀하게 여기기에 불충분하다고 한다. 산림에 머물면서 나무를 먹고 계곡물을 마셔도, 마음이 지극한 도를 보존하고 있으면, 비록 사람과 하늘이 스승이라고 해서 괜찮다. 그러나 이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면 어지러워진다. 옛 성인들은 마음 속에서는 도를 행하면서도 세상의 법도를 훼손하지 않았으니, 그런 다음에야 괜찮을 뿐이다.

又云, 天下固無二道, 而所以治人則異. 君臣父子之間, 非禮法則亂 ; 知禮法而不知道, 則世之俗儒不足貴也. 居山林, 木食澗飮而心存至道, 雖爲人天師可也. 而以之治世則亂. 古之聖人中心行道而不毁世法, 然後可耳.

 

내 생각에 세상에 두 가지 도가 없는데, 또 지극한 도가 있다고 하니, 세상의 법이 다른 것은 두 가지 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도가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상은 도에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왕씨(王氏)에게 “고명함으로 스스로를 처신하고, 중용으로 남에게 처신한다”는 이론이 있다. 구산(龜山) 양공(楊公)은 이와 같다면 이 도는 언제나 세상에 소용이 없고, 세상을 경영하려는 노력이 모두 이기적인 지혜의 천착이라고 여겼다. 나 또한 소씨에 대해 똑같이 말한다.

愚謂天下無二道, 而又有至道, 世法之殊, 則是有二道矣. 然則道何所用於世, 而世何所資於道耶? 王氏有‘高明處己, 中庸處人’之論, 而龜山楊公以爲如此則是道常無用於天下, 而經世之務皆私智之鑿. , 愚於蘇氏亦云.

 

 

장무구(張無垢: 張九成)의 󰡔중용해󰡕 張無垢中庸解

 

 

장공(張公)은 처음에 구산(龜山: 楊時)의 문하에서 배웠지만 유학에서 도망쳐 불교에 귀의하고서 스스로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교계의 스승이 그에게 “그대는 이미 병자루를 손에 쥐었으니 학문을 열고 인도하는 즈음에 당연히 머리와 얼굴을 바꿔서 시의에 맞게 법을 설해서 길은 다르지만 귀결은 똑같이 만든다면 출세간이나 세간이나 양쪽에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세속의 무리들이 알아서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대혜선사(大慧禪師)의 「여장시랑서(與張侍郞書)」에 보인다. 지금 󰡔어록󰡕에는 보이지 않으니 그의 문도들이 기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쓴 까닭에 장씨(張氏)의 논저는 모두 겉으로는 유학이면서 속으로는 불교인 것이다. 그가 떨어뜨렸다 합치시켰다, 나왔다 들어갔다는 하는 즈음에 한 시대의 이목을 어리석게 만드는데 힘을 써서 그들이 편안하게 느껴 깨닫지도 못하게 만들고서 불교의 문에 들어가도록 했으니, 비록 다시 나오려 해도 나올 수가 없었다. 근본과 말단의 가르침과 뜻이 대략 그의 스승에게 받은 것과 같았다. 두 근본이 귀결을 달리하는 것은 장주(莊周)가 자하(子夏)에게 나오고, 이사(李斯)가 순경(荀卿)에게 근본을 둔 것만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일찍이 논변을 지어 당대의 미혹을 깨치려 했다. 그러나 큰 근본이 이미 달라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 없었다. 이로 인해 그의 「중용설」을 읽고, 우선 그 가운데 더욱 심한 것 열 한 두개를 묶었고, 그 나머지 󰡔논어󰡕, 󰡔효경󰡕, 󰡔대학󰡕, 󰡔맹자󰡕 등에 대한 주장은 두루 변론할 틈이 없었다. 갑작스럽고 급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 글과 같은 부류이다.

張公始學於龜山之門而逃儒以歸於釋, 旣自以爲有得矣, 而其釋之師語之曰: ‘左右旣得파●柄入手, 開導之際, 當改頭換面, 隨宜說法, 使殊塗同歸, 則世出世間兩無遺恨矣. 然此語亦不可使俗輩知, 將謂實有恁麽事也.’ 見大慧禪師與張侍郞書. 今不見於語錄中, 蓋其徒諱之也. 用此之故, 凡張氏所論著, 皆陽儒而陰釋. 其離合出入之際, 務在愚一世之耳目而使之恬不覺悟, 以入乎釋氏之門, 雖欲復出而不可得. 本末指意, 略如其所受於師者. 其二本殊歸, 蓋不特莊周出於子夏, 李斯原於荀卿而已也. 竊不自揆, 嘗欲爲之論辨, 以曉當世之惑. 而大本旣殊, 無所不異, 因覽其中庸說, 姑掇其尤甚者什一二著于篇. 其他如論語, 孝經, 大學, 孟子之說, 不暇遍爲之辨. 大抵忽遽急迫, 其所以爲說, 皆此書之類也.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이른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장씨는 말했다. :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른다”는 말은 다만 성이 귀할 수 있음만을 찬탄한 것이지, 사람이 그것을 거두어 자신의 것[己物]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른다”는 말은 사람이 체득해서 자신의 것으로 삼고서, 어짐․의로움․예의․지혜의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풀고 운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이른다”는 말은 어짐이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행해지고, 의로움이 임금과 신하 사이에 행해지며, 예의가 손님과 주인 사이에 행해지고, 지혜가 현명한 이에게서 행해지고 도의 등급과 차등이 여기에서 드러나게 된다.

張云, 天命之謂性, 第贊性之可貴耳, 未見人收之爲己物也. 率性之謂道, 則人體之爲己物而人於仁義禮智中矣, 然而未見其施設運用也. 修道之謂敎, 則仁行於父子, 義行於君臣, 禮行於賓主, 知行於賢者, 而道之等降隆殺於是而見焉.

 

내 생각에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른다”는 것은 성이란 이름이 지어진 이유가 바로 하늘이 부여하고, 사람이 받은 의리의 본원을 말하려는 것이지 귀할 수 있음만을 찬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이 또 어떻게 사람이 그 귀함을 찬탄할 것을 기대하겠는가? 동자(董子: 董仲舒)는 ‘명(命)이란 하늘의 명령[令]이니, 성이란 타고나는 바탕이다[生之質]’고 했다. 이 말은 자사의 뜻에 가깝고 장씨의 말과는 다르다고 할 만 하다. 또 이미 성이라고 했다면 본시 이미 사람이 받은 것으로 말한 것이다. 이제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늘이 이 사람을 낳으면서 이것을 주되, 다른 곳에 두면 반드시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서 그것들 거둔 다음에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르겠으나 이 성을 얻기 이전에 그 사람은 또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쉬고 먹고 마시다가 이 성을 거두어 들이는 것인가? 또 성이란 것이 어떻게 덩어리 진 하나의 사물로서 한 곳에 머무는데 붙잡아다 내 몸뚱이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어짐․의로움․예의․지혜는 송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성과 함께 체(體)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체득해서 자신의 것으로 삼고서, 어짐․의로움․예의․지혜의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면 이 네 가지는 거꾸로 여기에 설치되었는데 나중에 성이 저기서 온다는 것이다. 모르겠으나 성이 성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 이 네 가지는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런 모든 것은 큰 근본을 알지 못하고 멋대로 천착하는 말이다. 지헤로운 이가 보면 또한 그의 글을 다 읽어보지 않더라도 시비와 사정이 이 장에서 이미 뚜렷하게 나뉘는 것이다. 어짐이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행해지고, 의로움이 임금과 신하 사이에 행해지는 것이 성을 따르는 도라고 하고, 갑자기 도를 닦는 가르침이라고 하니 또한 그 순서를 잃었다. 며,

愚謂天命之謂性, 言性之所以名乃天之所賦, 人之所受義理之本原, 非但贊其可貴而已. 性亦何待於人贊其貴耶? 董子曰‘命者天之令也, 性者生之質也’, 此可謂庶幾子思之意而異乎張氏之言矣. 且旣謂之性, 則固已自人所受而言之. 今曰未爲己物, 則是天之生是人也未以此與之而置之他所, 必是人者自起而收之, 而後得以爲己物也. 不知未得此性之前, 其爲人也執使之呼吸食息於天地之間, 以收此性? 且夫性者又豈塊然一物, 寓於一處, 可搏而置之軀穀之中耶? 仁義禮智, 性之所有, 與性爲體者也. 今曰體爲己物然後入於仁義禮智之中, 則是四者逆設於此而後性來於彼也. 不知方性之未入也, 是四者又何自而來哉? 凡此皆不知大本, 妄意穿鑿之言, 智者觀之, 亦不待盡讀其書而是非邪正已判於此章矣. 仁行於父子, 義行於君臣, 是乃率性之道, 而遽以爲修道之敎, 亦失其次序矣.

 

‘이런 까닭에 군자는 그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에서 ‘그 홀로를 삼간다’까지.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止‘愼其獨也’.

 

장씨는 말했다. :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데에서 약간만 소흘히 하는 것은 당연히 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게으로고 소홀한 마음이 이미 몸과 마음에 드러난 것이다 ……. 사람과 사물을 감동시키기에 충분치 못하고 뜻밖의 욕됨과, (내가) 하지 않은 재앙을 불러 온다. 이것이 군자가 그 홀로 있음을 삼가야 하는 이유이다.

張云, 不睹不聞, 少致其忽, 宜若無害矣. 然而怠忽之心已顯於心目之間云云, 不足以感人動物而招非意之辱, 莫爲之禍焉. 此君子所以愼其獨也.

 

내 생각에 군자가 홀로 있음을 삼가야 하는 이유는 재앙과 욕됨을 불러오는 것을 두려워해서 만은 아니다. 이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데에서 약간 소홀히 하는 것은 처음에는 피해가 없다가, 특별히 재앙과 욕됨을 불러올 것을 겁낸 이후에 그 홀로 있음을 삼간다’고 한다면 도를 아는 이의 말이 아니다.

愚謂君子所以愼其獨者, 非爲恐招禍辱而已也. 今曰不睹不聞之間少致其忽, 初無所害, 特恐招禍辱而後愼其獨焉, 非知道者之言也.

 

희노애락이 발하지 않은 것[未發]을 중(中)이라 한다.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장씨는 말했다. : 미발 이전에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면 조금의 사욕도 없다.

張云, 未發以前戒愼恐懼, 無一毫私欲.

 

내 생각에 미발 이전은 천리(天理)가 혼연(渾然)하니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한다면 이미 발한 것이다.

愚謂未發以前天理渾然, 戒愼恐懼則旣發矣.

 

군자는 중용이다.

君子中庸

 

장씨는 말했다. 성을 따르려 할 때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것, 이것이 배우는 자의 일이다. 깊이 성의 본원에 들어가게 되면 곧장 내게 있는 천명에 나아간 다음에,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의 가르침으로 온 세상에 바라게 되니, 이
때에 이르러 성인의 공용이 흥기한다.

張云, 方率性時戒愼恐懼, 此學者之事也. 及其深入性之本原, 直造所謂天命在我, 然後爲君臣, 父子, 兄弟, 夫婦之敎 以幸於天下, 至於此時, 聖人之功用興矣.

 

내 생각에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는 것은 도가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이 이와 같음을 말한다. 각각 그 성의 본연을 따른다면 곧 ‘도’라는 것일 뿐이다. 이것을 배우는 이의 일로 삼은 것도 아니고, 또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라는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는 것은 위 아래를 통틀어 말한 것으로, 성인이 표준을 확립라고 현인이 스스로를 닦는 것이 모두 여기에 달려있다는 것이지 장씨가 말한 것과 같지는 않다. 또 “깊이 성의 본원에 들어가게 되면 곧장 내게 있는 천명에 나아간다”고 하니 이치상 또한 장애가 있다. 또 이러한 지경에 이른 다음에 인륜의 가르침을 천하에 바랄 수 있다면 이것은 성인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기 이전의 때에는 인륜의 가르침이 없었고, 이러한 경지에 이른 이유도 또한 인륜으로 말미암아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처럼 흩어지고 근거없는 말들은 모두 불교의 남은 단서들이지 우리 유학의 본지가 아니다.

愚謂率性之謂道, 言道之所以得名者如此. 蓋曰各循其性之本然, 卽所謂道爾. 非以此爲學者之事, 亦未有戒愼恐懼之意也. 修道之謂敎 通上下而言之, 聖人所以立極, 賢人所以修身, 皆在於此, 非如張氏之說也. 又曰, 深入性之本原, 直造所謂天命在我, 理亦有礙. 且必至此地然後爲人倫之敎以幸天下, 則是聖人未至此地之時, 未有人倫之敎, 而所以至此地者, 亦不由人倫而入也. 凡此皆爛漫無根之言, 乃釋氏之緖餘, 非吾儒之本指也.

 

장씨는 말했다. : ‘성을 따르는 것이 도이다’는 것은 본래 자리[本位]를 떠나지 않았고, ‘도를 닦는 것이 교이다’는 것은 떠났다거나 떠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름붙일 수 없다.

張云, 率性之謂道, 未離本位, 修道之謂敎, 不可以離不離名之也.

 

내 생각에 성에 본래 자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성에 장소[方所]가 있다는 뜻이다. 성현이 성을 말하신 것은 아마도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그 주장대로라도 앞 장에서는 성을 따르는 것이 중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찾는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저것을 찾는다는 것이니 본래 자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도를 닦는 것을 성인의 공용이라 여기는 데에 이르러서는 또 떠났다거나 떠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름붙일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그 주장들에 서로 소통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재빨리 달아나려는 것이다.

愚謂言性有本位, 則性有方所矣, 聖賢言性似不如此. 假如其說, 則前章云率性所以求中, 言求, 則是自此求彼, 非離本位而何? 至於以修道爲聖人之功用, 則又曰不可以離不離名之, 蓋其說有所不通, 而駸駸乎遁矣.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지혜롭다고 말한다.

人皆曰予知

 

장씨는 말했다. : 사람들은 모두 지혜를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설명하는 데 쓰면서도,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데에는 쓸 줄을 모른다.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설명하려는 마음을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데로 옮긴다면 어떤 지혜가 이보다 크겠는가?

張曰, 人皆用知於詮品是非而不知用知於戒愼恐懼. 使移詮品是非之心於戒愼恐懼, 知孰大焉?

 

내 생각에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는 것은 세상의 바른 이치이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가르는 마음은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어서 지혜의 단서가 된다. 이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치를 궁구하는 일이요, 또한 배우는 이가 급하게 힘써야 할 일이다. 장씨(張氏)는 이것을 끊어버렸으니 내가 보기에 그는 사사로움에 맡겨 지혜를 천착하지 천리의 올바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이 어찌 불교에서 말하는 “곧장 위 없는 보리를 취하여 일체의 시비가 관여할 수 없다”는 뜻이겠는가? 아! 이 말은 유학과 불교가 나뉘는 시작이로다!

愚謂有是有非, 天下之正理, 而是非之心人皆有之, 所以爲知之端也. 無焉則非人矣. 故詮品是非乃窮理之事, 亦學者之急務也. 張氏絶之, 吾見其任私鑿知, 不得循天理之正矣. 然斯言也, 豈釋氏所稱, ‘直取無上菩提, 一切是非莫管’之遺意耶? 嗚呼!斯言也, 其儒釋所以分之始與?

 

안회[回]의 사람됨.

回之爲人

 

장씨는 말했다. : 안자(顔子)는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면서 초연하게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곳에서 미발과 이발의 기미를 깨달아, 한 번 하늘이 명한 성의 ‘선한 것’을 얻으면 깊이 그 속으로 들어가 인욕이 모두 사라지고, 자기의 마음[我心]조차 모두 없어졌다.

張云, 顔子戒愼恐懼, 超然悟未發已發之幾於喜怒哀樂處, 一得天命之性所謂善者, 則深入其中, 人欲都忘, 我心皆喪.

 

내 생각에 󰡔중용󰡕에는 ‘초연하게 미발과 이발의 기미를 깨닫는다’는 뜻이란 없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 하는 것은 성이 아님이 없지만 절도에 맞으면 선하지 않음이 없다. 모르겠거니와 다시 어떻게 얻으려는 것이고, 또 어떻게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간단 말인가? 이와 같다면 이보다 앞서는 이 성을 얻지 못해서 항상 성의 바깥에 있다는 것인가? 또 자기의 마음조차 모두 없어졌다는 것은 이치에 더욱 해가 된다.

愚謂超然悟未發已發之幾, 中庸無此意也. 喜怒哀樂莫非性也, 中節則無不善矣. 不知更欲如何得之, 而又如何深入其中也? 若此, 則是前乎此者未得此性而常在性之外也耶? 且曰我心皆喪, 尤害於理.

 

장씨는 말했다. : 사람들은 다만 그가 받들어서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만 보고서 안자가 천리와 하나가 되어 작은 사욕마저 그 사이에 걸쳐 있지 않음을 알 지 못한다. 인식도 지각도 없고 자기 자신도 없음을 알 지 못한다.

張云, 人第見其拳拳服膺, 而不知顔子與天理爲一, 無一毫私欲橫乎其間. 不識不知, 我己且無有矣.

 

내 생각에 이 말은 안자에게 극도로 아첨하려 하면서 준칙이 없는데도 스스로 그 말의 잘못을 알지도 못한다.

愚謂此言蓋欲極意以諛顔子, 而無所準則, 不自知其言之過也.

 

오직 성자(聖者)만이 이에 능하다.

惟聖者能之

 

장씨는 말했다. : 나는 일찍이 성인이 되기를 추구했지만 되지는 못했고, 지금은 지혜가 겨우 희노애락이 미발한 곳에 머물 뿐이다.

張云, 予嘗求聖人而不可得, 今乃知止在喜怒哀樂未發處爾.

 

내 생각에 도를 체득한 사람은 견해와 이치가 평이하고 일정하며, 그 말이 부드럽고 한가해도 이치는 스스로 멀리까지 뻗어나간다. 이처럼 급하고 갑작스러우며 장황하지는 않을 것이다.

愚謂有道者見理平常, 其言雍容閑暇而理致自遠, 似不如此之駭遽而張皇也.

 

군자의 도는 넓고 은미하다.

君子之道費而隱

 

장씨는 말했다. :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것에서 말미암아 희노애락을 길러 중이 되고 화가 되게 해서 하늘과 땅을 제자리를 잡게 하고 만물을 기른다.

張云, 由戒愼恐懼以養喜怒哀樂, 使爲中爲和, 以位天地, 育萬物.

 

내 생각에 희노애락이 미발한 것은 본연의 중(中)이요, 발하여 절도에 들어맞은 것은 본연의 화(和)이이니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는 것 또한 이치가 저절로 그런 것이다. 이제 ‘이(以)’자로 그 글을 뒤집으니 자사의 본 뜻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 한편의 핵심적인 내용인데 장씨의 말은 번번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니 어떻게 ‘말을 안다[知言]’고 하겠는가?

愚謂喜怒哀樂之未發乃本然之中, 發而中節乃本然之和, 非人之所能使也. (7-3775)天地位焉, 萬物育焉, 亦理之自然. 今加‘以’字而倒其文, 非子思之本意矣. 此乃一篇之指要, 而張氏語之輒有差繆, 尙安得爲知言哉?

 

장씨는 말했다. : 󰡔중용󰡕에는 그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에게도 알 지 못하고, 능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스스로 알고 능한다고 하는 것은 그치는 것이다. 또 말했다. : 군자의 도가 커서 실을 수가 없고, 작아서 깨트릴 수가 없는 이유는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면서 은미하고 아득한 것을 살피는 노력 때문이다.

張云, 中庸無止法, 故聖人有所不知不能, 自謂知能止矣. 又曰, 君子之道所以大莫能載, 小莫能破, 以其戒愼恐懼, 察於微茫之功也.

 

내 생각에 󰡔대학󰡕의 도는 그칠 곳[所止]을 아는 데에 있다. 그것은 그침이 없다면 고상한 자는 지나치고 비근한 자는 빠져들어 중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인은 본시 자기 스스로 알고 능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지만 (그것이) 이 장의 가르침은 아니다. 알 지 못하고 능하지 못한다거나, 실을 수도 깨트릴 수도 없다는 말들은 모두 도체(道體)의 끝없음을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지, 성인을 일러 말한 것이 아니요, 또한 은미하고 아득한 것을 살핀다는 뜻도 없다.

愚謂大學之道在知所止, 蓋無止則高者過, 卑者陷, 非所以爲中庸矣. 聖人固未嘗自謂知能, 然非此章之指也. 蓋所謂不知不能, 莫能載, 莫能破, 皆極言道體之無窮爾, 非謂聖人而言, 亦無察於微茫之意也.

 

장씨는 말했다. :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한다면 싹트기 이전에 이미 그 살피는 것을 이루고,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데에 이르러서도 살피는 것이 있게 된다. 또 말했다. : 위에 있건 아래에 있건 살피는 것은 없는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살핌[察]은 날고 뛰어오르는 것을 따라서 드러난다.

張云, 戒愼恐懼, 則未萌之始已致其察, 至於鳶飛魚躍而察乃在焉. 又曰, 上際下蟠, 察無不在, 所以如鳶飛魚躍. 察乃隨飛躍而見焉.

 

내 생각에 󰡔중용󰡕은 이 시를 인용해서 도체가 없는 곳이 없음을 밝혔으니, ‘넓고 은미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명도(明道)․상채(上蔡)의 말이 이미 상세하니, 자사께서 다시 태어나신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 장씨가 말하는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는가? 또 싹트기 이전에 이미 살피는 것을 이룬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이 있어 바로잡는 것’이다.

愚謂中庸引此詩以發明道體之無所不在, 所謂費而隱也. 明道, 上蔡言之已詳, 子思復生, 不能易也. 張氏之云, 不亦異乎? 且曰未萌之始已致其察, 則是有事焉而正之也.

 

장씨는 말했다. : 오직 이러한 살핌이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데에서 시작해서 중화를 기르고, 희노애락의 미발과 이발의 사이에서 일어나 중화가 된다.

張云, 顧惟此察始於戒愼恐懼以養中和, 而喜怒哀樂未發已發之間, 乃起而爲中和.

 

내 생각에 ‘일어나 중화가 된다’고 하니 어떻게 그것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어떻게 중화를 아는 이의 말이겠는가?

愚謂起而爲中和, 如之何其起也? 此豈知中和者之語哉?

 

군자(君子)는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리다가 잘못을 고치면 그친다.

君子以人治人, 改而止.

 

장씨는 말했다. : ‘사람[人]’은 즉 성(性)이니, 나의 성으로 그의 성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張云, 人卽性也, 以我之性覺彼之性.

 

내 생각에 경전의 글을 상세히 살펴봐도 애초부터 이런 뜻은 없으니 모두 불교의 이론이다. 또 성에 어떻게 피아가 있겠는가? 또 어떻게 능히 이렇게 하겠는가?

愚謂詳經文初無此意, 皆釋氏之說也. 且性豈有彼我乎? 又如之何其能以也?

 

장씨는 말했다. : 이로부터 말미암아 성을 보도록 하면 저절로 중용에서 말미암게 되어 과거의 ‘사물이 없는 말, 일정치 않은 행실’ 등을 모두 쓸어버려 종적을 볼 수 없게 된다.

張云, 使其由此見性, 則自然由乎中庸, 而向來無物之言, 不常之行皆掃不見跡矣.

 

내 생각에 ‘성을 본다[見性]’는 것은 불교의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유학자는 ‘성을 안다’고 말하니, 이미 알았다면 또 반드시 기르고 확충해서 극진한 지경에 이르게 해야 한다. 그 힘쓰는 것은 점진적이어서 본시부터 하루 이틀의 노력이 아이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라도 해이해지면 기미의 사이에 피해가 많게 된다. 이것이 자기를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이고, 증자가 전전긍긍하면서 죽음에 이르고 나서야 거기에서 벗어났음을 알았던 이유이다. 장씨의 말은 이들과 그 종류가 다르다. 그러나 불교도들 중에는 이미 스스로는 성을 보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관습화된 기운과 기욕이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어떻게 쓸어버려서 종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헛된 말을 믿고서 사물도 없고 항상함도 없는 것을 살피지 못한 실제 폐단이 이런 데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겟는가? 그러니 장씨의 말은 그 연원의 유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愚謂見性本釋氏語, 蓋一見則已矣. 儒者則曰知性, 旣知之矣, 又必有以養而充之, 以至於盡. 其用力有漸, 固非一日二日之功, 日用之際一有懈焉, 則幾微之間所害多矣. 此克己復禮之所以爲難, 而曾子所以戰戰兢兢, 至死而後知其免也. 張氏之言與此亦不類矣. 然釋氏之徒有旣自謂見性不疑而其習氣嗜欲無以異於衆人者, 豈非恃夫掃不見跡之虛談而不察乎無物不常之實弊以至此乎? 然則張氏之言, 其淵源所自蓋可知矣.

 

충서(忠恕)는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다.

忠恕違道不遠

 

장씨는 말했다. : 서(恕)는 충(忠)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충이란 자기를 책망하는 것이다.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주을 안 다음에야 온 세상에서 성을 보지 못한 자들을 깊이 죄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또 말했다. : 자기 한 사람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줄을 알고서 온 세상이 모두 용서할만한 사람임을 아는 것이다.

張云, 恕由忠而生, 忠所以責己也. 知己之難克, 然後知天下之未見性者不可深罪也. 又曰, 知一己之難克而知天下皆可恕之人.

 

내 생각에 서가 충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것은 명도(明道), 사자(謝子), 후자(侯子)가 이미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설명은 이것과는 달랐다. 만일 자기 한 사람을 극복하기가 어려움울 알고서 온 세상이 모두 용서할만한 사람임을 안다면 이것은 자신의 사사로움으로 남을 대하는 것이다. 서(恕)란 말의 뜻은 본래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몽󰡕에서는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책망하면 도를 극진히 발휘한 것이요, 자기를 아끼는 마음으로 남을 아끼면 인을 극진히 발휘한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바라게 한다면 쉽사리 좇을 것이다”고 했다. 이것은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각각 이치에 따르기에 힘써 어김이 없는 것이다. 성현의 말에는 그 자체로 준칙이 잇으니,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비록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바랜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 역시 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자기조차 그 사사로움을 이겨내지 못했으면서 아울러 다른 사람을 용납해서, 그의 악행을 이루어준다면 이것은 서로를 이끌고 짐승이 되는 것이다. 충도 못되고 서도 못되는 것이 어떤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愚謂恕由忠生, 明道, 謝子, 侯子蓋嘗言之. 然其爲說與此不相似也. 若曰知一己之難克而知天下皆可恕之人, 則是以己之私待人也, 恕之爲義本不如此. 正蒙曰:‘以責人之心責己則盡道, 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 以衆人望人則易從’, 此則物我一致, 各務循理而無違矣. 聖賢之言自有凖則, 所謂以人治人者, 雖曰以衆人望人, 然而必曰道不遠人, 則所以爲衆人者亦有道矣. 以己不能克其私而幷容他人, 使之成其惡, 則是相率而禽獸也. 其爲不忠不恕, 執大於是?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한 구절이다) 부모(父母)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한다.

所求乎子(句), 以事父未能也.

 

장씨는 말했다.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 동생이 형을 섬기고, 벗이 먼저 베푸는 것이 모두 ‘바란다[求]’고 한 것은 그 살핌을 극진히 하라는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에 내가 능하지 못함을 살핀다면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을 아끼는 것을 책망할 수 있겠는가?

張云, 子事父, 臣事君, 弟事兄, 朋友先施之, 皆曰求者, 蓋所以致其察也. 察子之事父吾未能, 安敢責父之愛子乎?

 

내 생각에 이 네 구절은 여덟 구절이 되어야 한다. 자(子)․신(臣)․제(弟)․우(友) 네 글자는 구절을 끊는 곳이다. 바란다[求]는 말은 책망한다[責]는 말과 같다. 자식에게 책망하는 것이 이와 같지만 내가 이것으로 아버지를 섬기는 것에는 능하지 못함이 있다는 것이다. 󰡔정몽󰡕에서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책망하면 도를 극진히 발휘할 수 있다’고 한 것도 이로 말미암아 노력을 더해 자신의 몸을 바로잡아 다른 사물에 미치라는 것이지 위 장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를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아울러 다른 사람을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에 내가 능하지 못함을 살핀다면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을 아끼는 것을 책망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이 멀찌감치 길에서 만난 사람이 되어버릴 뿐이다. ‘민천’의 울음과 ‘소반’의 원한이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 고상하고 기묘한 데로만 내달려 장구에 대해 상세하게 다 살피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릇되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바란다[求]’를 ‘살피다[察]’는 뜻으로 여긴 것도 또한 문장의 바른 뜻이 아니다.

愚謂此四句當爲八句, 子, 臣, 弟, 友四字是句絶處. 求猶責也, 所責乎子者如此, 然我以之事父, 則自有所未能. 正蒙所謂以責人之心責己則盡道, 蓋將由是而加勉, 正身以及物, 非如上章所云以己難克而幷容他人也. 且又曰察子之事父吾未能, 則安敢責父之愛子乎, 則是君臣父子漠然爲路人矣. 旻天之泣, 小弁之怨, 又何謂也? 蓋其馳心高妙而於章句未及致詳, 故困以誤爲此說. 以求爲察, 亦非文義.

 

말은 행실은 돌아본다.

言顧行

 

장씨는 말했다. : 돌아본다[顧]는 것은 ‘살핀다[察]’는 뜻이다.

張云, 顧者, 察也.

 

내 생각에 위 장을 이어서 ‘바란다[求]’를 ‘살피다[察]’는 뜻으로 여긴 것에 대해서는 본시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돌아본다[顧]는 것은 ‘살핀다[察]’로 여기니 더욱 억지로 끌어다 합친 것이다. 장씨는 이 글을 만들면서 추론할 말한 한 글자를 앞에서 얻으면, 극단적인 뜻으로 추론해서 어느 곳에 이르고 가능한 지 불가능한 지를 따져 묻지 않았다. 󰡔중용󰡕편 안에서 말하는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한다’는 말과 아래 장에서 말하는 ‘충서’나 ‘지혜․어짐․용기’, ‘(만물을) 발육(發育)하여 높음이 (하늘에) 다하였다’는 말들이 모두 이런 부류이다.

愚接上章以求爲察, 固已無謂, 此又以顧爲察, 尤爲牽合. 大抵張氏之爲是說, 得一字可推而前者, 則極意推之, 不問其至於何處與其可行不可行也. 篇內所謂戒愼恐懼, 下章所謂忠恕, 所謂知仁勇, 所謂發育峻極, 皆此類也.

 

윗자리에 있으면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는다.

在上位不陵下

 

장씨는 말했다. : 군자는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면서 숙성시켜 중용의 도를 이룬다.

張云, 君子自戒愼恐懼醞釀成中庸之道.

 

내 생각에 중용의 도는 천리의 저절로 그러함이니, 술을 빚는 것처럼 반드시 숙성시켜서 이루는 것과는 다르다.

愚謂中庸之道天理自然, 非如酒醴, 必醞釀而成也.

군자의 도는 비유하자면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한다.

君子之道, 譬如行遠必自邇.

 

장씨는 말했다. :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효과를 알고자 한다면 당연히 충서에서 점쳐 보아야 한다. 충서의 효과를 알고 싶다면 당연히 부모에게서 점쳐 보아야 한다.

張云, 欲知戒愼恐懼之效, 當於忠恕卜之. 欲知忠恕之效, 當於父母卜之.

 

내 생각에 이것은 모두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라 이치에 닿치 않는다. 또 부모는 지극히 존귀한데 어떻게 사람의 자식이 된 자가 충서를 점치는 것이겠는가?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하면 두 근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愚謂此言皆牽合無理. 且父母至尊, 豈人子所以卜忠恕之物乎? 詳味此言, 可見其二本矣.

 

귀신의 덕.

鬼神之爲德

 

장씨는 말했다. : 하늘과 땅에는 만물이 빽빽이 들어찼고 귀신은 그 가운데 들어 있으니 어길 수 없다.

張云, 天地萬物森然, 鬼神列于中, 不可違也.

 

내가 살피기에 장씨의 다른 장에 대한 설명은 아주 상세한데, 이곳에 대해서만 유독 간략하다.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서 감히 다 말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그가 말하는 귀신이라는 것이 다만 세속의 의론과 같아서 탐구하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들어 있다[列]’는 글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하면 귀신을 따로 하나의 것[一物]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 귀신을 아는 자의 말이라 하겠는가?

愚按張氏他章之說甚詳, 而此獨略, 將有所疑而不敢盡耶? 抑其所謂鬼神者, 特如世俗之論而不之究耶? 然詳味‘列’字之意, 則以鬼神別爲一物明矣, 豈知鬼神者之言哉?

 

큰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천명(天命)을 받는다.

大德必受命

 

장씨는 말했다. : 이것은 천하를 위해 힘쓰는 것이 덕이 되는 것은 당연히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데서 시작해서 지위와 녹 명성과 장수로써 덕의 진부를 점치는 것임을 말했다.

張云, 言此所以勉天下之爲德也, 當始於戒愼恐懼, 而以位祿名壽卜德之進否.

 

내 생각에 덕이 융성하면 명예와 지위, 녹과 장수가 따르는 것은 이치의 필연이지, 임시로 이런 말을 해서 천하에 힘쓰는 것이 덕이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배우는 이들이 이 네 가지로 덕의 진부를 점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순이 죽이나 잡초를 먹으면서 그대로 생을 마칠 것처럼 하다가, 천명을 받게 된 것은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이르렀을 뿐인데, 어떻게 ‘점쳤다’고 말하겠는가? 장씨의 주장은 더욱 더 이익을 도모하고 공적을 계산하는 짓이다. 배우는 자들이 마음속에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덕에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愚謂德盛則名位祿壽從之, 乃理之必然, 非姑爲此言以勉天下之爲德, 亦非使學者以是四者卜其德之進否也. 舜之飯糗茹草, 若將終身焉, 其受命也, 乃不期而自至耳, 豈曰卜之云乎? 張氏之說, 乃謀利計功之尤者. 學者一有此念存乎胸中, 則不可以進德矣.

 

걱정이 없었던 이는 그 오직 문왕이신가!

無憂者, 其惟文王乎.

 

장씨는 말했다. :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한다면 어디를 가든지 중화 속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걱정이 없다는 것은 또한 필연적이다. 중황의 가운데에는 저절로 현명한 아버지와 성스러운 자식이 있을 것이다. 또 말했다. : 무왕의 거병은 위태로운 도[危道]였다.

張云, 戒愼恐懼則無適而不在中和中, 其無憂也必矣. 中和之中, 自當有賢父聖子. 又曰, 武王之擧危道也.

 

내 생각에 이러한 부류는 모두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들인데 이 몇 구절은 더욱 엉성하고 이치에 닿치 않는다. 또 무왕의 거병을 위도라고 여긴다면 성인이 요행수를 바라고 위험한 일을 행한 것이다. 어찌 하늘에 따르고 사람들에게 호응하는 것이 평안함이 되는 것임을 알겠는가?

愚謂凡此類皆牽合, 而此數句尤疏闊無理. 又以武王之擧爲危道, 則是聖人行險以徼幸也. 是豈知順天應人之爲安哉?

 

교제(郊祭)와 사직(社稷) 제사의 예(禮)와 체제(祭)·상제(嘗祭)의 의의(意義).

郊社之禮, 禘嘗之義.

 

장씨는 말했다. 선왕이 어느 곳에서 머물렀는지를 알지 못하고서 천신을 교외에서 찾아야 하고, 지지를 사직에서 찾아야 하며, 인귀는 체제와 상제에서 찾아야 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張云, 不知先王居於何地, 乃知天神自郊求, 地祇自社求, 人鬼自禘嘗求哉?

 

 

내 생각에 선왕이 이것을 아는 이유는 그 이치 때문일 뿐이니, 번거롭게 다시 기괴한 이론을 만들 필요가 없다.

愚謂先王所以知此, 以其理而已矣, 不煩更爲奇怪之說.

 

땅의 도(道)는 나무에 빠르게 나타난다.

地道敏樹

 

장씨는 말했다. : 씨앗을 파종하고 아래가 튼튼하다면 잠시의 순간도 걸리지 않는다 운운.

張云布種下實, 未及頃刻云云.

 

내 생각에 비록 세상에서 아주 빠르게 생기는 것이라고 해도 씨앗을 뿌리고 잠시도 안 걸려 발생하는 것은 없다. 여기에서 기괴한 것을 자랑하고 빨리 이루기를 원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愚謂雖天下至易生之物, 亦未有下種未及頃刻而發生者. 此可見其矜奇欲速之心矣.

 

“군자(君子)는 몸을 닦지 않을 수 없다” …… “하늘의 이치를 알지 않을 수 없다.”

‘故君子不可不修身’止‘不可以不知天’.

 

장씨는 말했다. :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면서 깊이 그 살핌을 극치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에 하늘을 안다.”

張云, 戒愼恐懼, 深致其察, 所以知天也.

 

내 생각에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살핌을 극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이미 하늘을 알고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 이미 하늘을 알 수 없다면 어느 곳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겠는가?

愚謂戒懼致察, 旣知天而事天之事也. 未能知天, 則何所戒懼乎?

 

장씨는 말했다. 하늘을 아는 마음을 미루어 사람을 알고, 사람을 아는 마음을 미루어 어비이를 섬긴다.

張云, 推知天之心以知人, 推知人之心以事親.

 

내가 살피기에 하늘을 아는 것을 미루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오히려 괜찮다. 그러나 사람을 미루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또한 어긋나지 않는가? 이천선생은 “사람을 아지 못하면 함께하는 사람이 혹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고, 그 유래가 혹 도가 아니어서 자신의 몸을 욕되게 하고 어버이를 위험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섬길 것을 생각한다면 사람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이 논의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행하는 것이 똑같고, 그 앎에 미쳐서도 똑같으며, 그 공을 이루는 것에 미쳐서도 똑같은 것이다.

愚按推知天以知人, 猶之可也;推知人以事親, 不亦悖乎? 伊川先生曰: ‘不知人則所與或非其人, 所由或非其道, 而辱身危親者有之. 故思事親, 不可以不知人.’ 此論不可易也. 所以行之者一也, 及其知之一也, 及其成功一也.

 

장씨는 말했다. : 알면서 행할 수 없는 것은 이 정성스러움[誠]을 운용할 수 없는 것이다.

張曰, 知而未能行, 是未能運用此誠也.

 

내 생각에 알면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에게 얻지 못한 것이지, 어떻게 다만 운용하지 못해서일 뿐이겠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앎[知]이란 또한 참된 앎이 아니다. 참되게 안다면 행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정성스러움을 운용한다’고 하는 것도 또한 정성스러음을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정성스러우면 함이 없어도 이루어져, 처음부터 번거롭게 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愚謂知而未能行, 乃未能得之於己, 豈特未能用而已乎? 然此所謂知者, 亦非眞知也. 眞知則未有不能行者. 且曰運用此誠, 亦非知誠者之語. 蓋誠則無爲而成, 初不煩運用矣.

 

장씨는 말했다. 지혜․어짐․용기를 행하는 것은 정성스러움이다. 이 정성스러움을 아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라 또한 정성스러움이다. 이 정성스러움을 행하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라 또한 정성스러움이이다. 이것이 성인 정성스러움의 소재를 극치에까지 이뤄서 가리킨 것이다. 또 말했다. : ‘정성스러움’이란 글자는 비록 같지만 지혜․어짐․용기를 행하는 정성스러움은 정성스러움을 아는 정성스러움만 못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고, 정성스러움을 아는 정성스러움은 정성스러움을 행하는 정성스러움이 더욱 위대한 것만 못하다.

張云, 行知仁勇者, 誠也. 而所以知此誠者, 非他物也, 亦卽誠也. 所以行此誠者, 非他物也, 亦卽誠也. 此聖人極誠之所在而指之也. 又云, 誠字雖同, 而行知仁勇之誠不若知誠之誠爲甚明, 知誠之誠不若行誠之誠爲甚大也.

 

내가 살피기에 경문에서 ‘행하는 것은 똑같다’고 한 것과, ‘그 앎에 미쳐서는 똑같다’ ‘그 공을 이룸에 미쳐서는 똑같다’고 한 두 구절은 말과 주장하는 뜻이 서로 다르다. 장씨는 아마도 그릇되게도 똑같은 용례로 읽었기 때문에 이처럼 주장한 것 같다. 문장의 의의에 대해서도 오히려 통하지 못했으면서 갑자기 그 정미함을 말하려고 하는, 이것이 바로 그가 잘못된 이유이다. 또 ‘정성스러움’이란 하나일 뿐인데, 지금은 찢어서 셋으로 나누고, 또 그 가운데서 서로서로 우열을 만들었으니, 천리를 궁구하지 못하고 준칙도 없으면서 사사로운 지혜를 굳세게 주장하면서 거꾸로 심원하고 유현한 경지를 추구하며, 멋대로 내달리고 갑작스레 내놓으면서 반드시 그가 가고자 하는 극단에 이른 다음에야 그만주니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근원을 미루어보면 낳고낳고, 변화하고 변화하며,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은 것의 자투리 단서들이다.

愚按經文‘所以行之者一也’與‘及其知之一也’, ‘及其成功一也’兩句立語命意不同, 張氏似誤作一例讀之, 故其爲說如此. 文義猶不暇通, 而遽欲語其精微, 此其所以失之也. 且所謂誠者一而已矣, 今乃裂而三之, 又於其中相與自爲優劣. 蓋不窮天理, 無所準則, 而逞其私智, 逆探幽深, 橫騖捷出, 必極其所如往而後已, 則安得不至於是乎? 然推其本原, 則生生化化, 見見聞聞之緖餘也.

 

배움을 좋아하는 것은 지혜로움[智]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어짐[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勇]에 가깝다.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耻近乎勇.

 

장씨는 말했다. : 가깝다는 말은 멀지 않기 때문이다. 멀지 않다면 즉 여기에 있다는 것일 뿐이니, 다만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힘껏 행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지혜․어짐․용기를 이루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에 나타난 것이 모두 가까울 뿐이다. 오직 사람만이 이를 체득해서 체(體)가 되는 이유를 알아서 기미에 마주쳐 밝히고, 일에 나아가 풀이한다면 지혜․어짐․용기가 어떻게 다른 것이겠는가?

張云, 近之爲言以不遠也. 不遠卽在此而已, 第知所以好學者誰, 所以力行者誰, 所以知耻者誰, 則爲知仁勇矣. 見於言語文字者, 皆近之而已. 惟人體之, 識所以體者爲當幾而明, 卽事而解, 則知仁勇豈他物哉?

 

내 생각에 위 장에서 이미 ‘달덕(達德)’이란 명목을 말했으나 배우는 자들이 좇아 들어갈 곳이 없을까 걱정했기 때문에 또 ‘그 멀지 않음’을 말해서 보여 주어, 이로 말미암아 찾아나간다면 덕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의 말은 깊거나 낮거나, 멀거나 가까운 순서가 이처럼 어긋날 수 없는 것이다. 장씨가 ‘멀지 않다’고 여긴 것은 옳지만 또 ‘즉 여기에 있을 뿐이다’고 하니 어떻게 그 말이 서로 어긋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주장을 하면서 이를 끌어다 황당하고 잘못된 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형세상 스스로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이다. 배움을 좋아하고, 힘껏 행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또 반드시 이와 같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은 다음에야 이르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몸 밖에 또 하나의 몸이 있고, 마음 밖에 또 하나의 마음이 있어서 어지러운 것이 과연 어느 때나 그친단 말인가? 설령 그의 말대로 라고 해도 ‘무엇’이란 하나일 뿐이다. 성인이 다시 어째서 세 가지 조목을 헛되이 늘려서 써서 배우는 이들이 한갓 이런 여러 방향에서 찾아 헤매도록 하겠는가?상세히 성인의 뜻을 찾아보면 결코 이와 같지 않으니, 다만 불교의 주장일 뿐이다. 이 장의 뜻은 오직 여박사(呂博士)의 말이 깊이 있고 성실해서 (음미할 만한) 맛이 있으니, 거의 옳다고 할 만 하다. 장씨의 무리는 천근하다고 여겨 소홀이 대했다. 그러니 어떻게 말은 가깝지만 뜻은 멀어서 참으로 성현의 뜻을 얻었음을 알겠는가?

愚謂上章旣言達德之名, 恐學者無所從入, 故又言其不遠者以示之, 使由是而求之, 則可以入德也. 聖人之言, 淺深遠近之序不可差次如此. 張氏以爲不遠者是矣, 而又曰卽在此而已, 何其言之相戾也? 蓋其所以爲說者牽之以入於荒唐繆悠之中, 其勢不得而自已爾. 夫好學, 力行, 知耻在我而已, 又必求其所以如此者爲誰而後爲至, 則是身外復有一身, 心外復有一心, 紛紛乎果何時而已耶? 設使果如其言, 則所謂誰者, 一而巳矣. 聖人復何用虛張三者之目, 使學者徒爲是多方以求之耶? 詳求聖人之意, 決不如是, 特釋氏之說耳. 此章之指, 惟呂博士之言淵慤有味, 庶幾得之. 張氏之徒蓋以爲淺近而忽之矣. 然豈知其言近指遠, 眞得聖賢之意也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원리[九經]가 있다.

凡爲天下國家有九經

 

장씨는 말했다. : 그 지혜․어짐․용기대로 라면 또한 몸을 닦고, 현명한 이를 존중하고, 친족을 친애하고, 대신(大臣)을 공경하며,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체찰(體察)하고, 여러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백공(百工)들을 오게 하고, 제후(諸侯)들을 은혜롭게 하며,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것을 기약할 것이 없다. 또 말했다. : 아홉 가지 원리를 순서대로 행하면 모두 그 기회에 들어맞는다.

張云, 如其知仁勇, 則亦不期於修身, 尊賢, 親親, 敬大臣, 體羣臣, 子庶民, 來百工, 懷諸侯, 柔遠人矣. 又曰, 九經以次而行, 皆中其會矣.

 

내 생각에 장씨가 말한 대로라면 아홉 가지 원리는 모두 군더더기 말이다. 성인의 도는 이단과 달라서 그 본말과 내외가 하나로 꿰뚫어져 정추의 분별이 없다. 그러므로 자사는 아홉 가지 원리에 대해 반복해서 세 번이나 뜻을 쏟았다. 그런데 장씨는 이렇게 소홀히 대하니, 그 까닭은 매사에 성현보다 한 등급이 더 높아지고자 해서 헛된 것에 빙자해서 실제에 잘못을 범하는 줄을 모르니 다만 비루해질 뿐이다.

愚謂如張氏之云, 則九經皆剩語矣. 聖人之道所以異於異端者, 以其本末內外一以貫之, 而無精粗之辨也. 故子思於九經, 反復三致意焉. 而張氏忽之如此, 蓋每事欲高於聖賢一等, 而不知憑虛失實, 祇其所以爲卑也.

 

모든 일은 미리 하면 성립된다.

凡事豫則立

 

장씨는 말했다. 배우는 이들이 평소에 양성하기를 원한 것이다.

張云, 欲學者養誠於平日也.

 

내 생각에 먼저 정성스러움을 확립하면 먼저 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지 미리 양성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미 정성스럽다면 어째서 미리 길러야 한다고 말한단 말인가?

愚謂先立乎誠, 則無不豫矣, 非謂豫養誠也. 旣誠矣, 則何豫養之云乎?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다.

不誠乎身矣

 

장씨는 말했다. 세속의 성실함을 논하는 사람은 대부분 ‘오로지 하는 것[專]’을 성으로 잘못 알았다. 지극한 성실함은 쉼이 없으니, 오로지 하는 것은 성실함이 아니다. 오로지 하는 것을 성실함이라고 여긴다면 이 말이 그치는 곳에서 응대하고 수작하는 것이 모두 본래 자리를 떠나게 된다.

張云, 世之論誠者多錯認專爲誠. 夫至誠無息, 專非誠也. 以專爲誠, 則是語言寢處, 應對酬酢皆離本位矣.

 

내 생각에 ‘오로지 한다’는 것은 본시 성실함을 다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그러나 마침내 ‘쉼이 없음’을 성실함이라고 한다면 또한 잘못이다. 그 이유는 오직 지극한 성실함이라야 쉼이 없는 것이지, 쉼이 없음으로 인해서 ‘성실함’이라고 명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 자리를 떠난다는 말은 성인에게 없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변론했다. 그러나 ‘오로지 하는 것’이 또 어떻게 갑자기 본래 자리를 떠나는 것이겠는가?

愚謂專固不足以盡誠, 然遂以無息爲誠, 則亦誤矣. 蓋惟至誠爲無息, 非因其無息而命之以誠也. 離本位之言, 聖人無有, 已辨於前矣. 然專亦豈遽離本位哉?

 

장씨는 말했다. : 세속에서 성실함을 행한다는 자들은 그 대부분이 모두 변통할 줄을 모른다. 심지어는 󰡔효경󰡕을 외어 도적을 막으려 하고, 󰡔인왕경󰡕을 읽어 재앙을 멈추려고까지 한다.

張云, 世之行誠者類皆不知變通, 至於誦孝經以禦賊, 讀仁王以消災.

 

내 생각에 성현은 오직 성실함을 보존하고 성실함을 생각하라고 했지, 성실함을 행하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생각해서 이미 얻고 보존한 것이 이미 드러났다면 그 성실함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요, 행사에 나타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성실함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성실함을 행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자기와 성실함이 둘이 되어 나로부터 저것을 시행하는 것이다. 성실함의 도는 이와 같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은 그 잘못이 변통을 모르는 것에만 그치지 않을 뿐이다. 만일 ‘행하는 것이 이미 성실함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또한 ‘성실함을 행한다’고 말할 수 없고, 또한 변통의 이치를 아지 못한다고 할 수 없다. 장씨의 말은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근거할 것이 없다. 󰡔효경󰡕을 외워서 도적을 막는 데 이르러서는 이치에 밝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우활하고 어리석은 폐단조차 있다. 이것을 성실함을 행하면서 변통을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장씨가 말하는 ‘성실함’이란 또한 ‘오로지 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인왕경󰡕을 읽는 것은 더욱 심하게 사벽한 데 빠진 것이어서 󰡔효경󰡕을 외우는 것과 같은 급으로 취급할 수도 없다.

愚謂聖賢惟言存誠思誠, 未嘗言行誠. 蓋思之旣得, 存之旣著, 則其誠在己, 而見於行事者無一不出於誠. 謂之行誠, 則是己與誠爲二, 而自我以行彼. 誠之爲道, 不如是也. 如此者, 其失不但不知變通而已. 若曰所行旣出於誠, 則又不可謂之行誠, 而亦無不知變通之理. 張氏之言進退無所據矣. 至於誦孝經以禦賊, 蓋不知明理而有迂愚之蔽. 以是爲行誠而不知變通, 然則張氏之所謂誠, 亦無以異於專矣. 讀仁王經者, 其溺於邪僻又甚, 不得與誦孝經者同科矣.

 

장씨는 말했다. : 물을 격하고 앎이 이르는 학문은 안으로는 한 가지 생각이고, 밖으로는 만 가지 일이어도 그 처음과 끝을 궁구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궁구하고 또 궁구해서 극진한 지경에 이르면 인욕이 모두 없어지고 하루 아침에 툭하니 트여 성의 선한이 환히 밝아져 의심이 없어진다.

張云, 格物知至之學, 內而一念, 外而萬事, 無不窮其終始. 窮而又窮, 以至於極盡之地, 人欲都盡, 一旦廓然, 則性善昭昭, 無可疑矣.

 

내가 살피기에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은 두 선생 이래로 여러 군자들의 논의가 갖추어져 있다. 장씨가 말한 것은 불교에서 화두를 보는 방법이지 성현이 남기신 가르침이 아니다. 여사인(呂舍人: 呂本中)이 󰡔대학해󰡕에서 ‘격물’을 논한 것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은 나 또한 이미 변론했었다.

愚按格物之學, 二先生以來諸君子論之備矣. 張氏之云, 乃釋氏看話之法, 非聖賢之遺旨也. 呂舍人大學解所論格物, 正與此同, 愚亦已爲之辨矣.

 

장씨는 말했다. 몸에 주의를 집중하면 몸이 성실해지고 어버이에 주의를 집중하면 어버이가 기뻐하며, 벗에게 주의를 집중하면 벗들이 믿고, 임금과 백성들에게 주의를 집중하면 윗 사람에게 등용되고, 백성들이 다스려진다.

張云, 注之於身則身誠, 注之於親則親悅, 注之於友則友信, 注之於君於民則獲上而民治.

 

내 생각에 선에 밝아지면 몸은 스스로 성실해 지는 것은 이치가 저절로 그런 것이다. 몸이 성실해지면 어버이는 스스로 기뻐하고, 이로 말미암아 벗이나 임금, 백성들에게 이르러도 모두 그렇게 된다. 이는 바로 충실하고 융성하게 쌓아서 저절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이제 주의를 집중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이것은 여기에 시설하고, 저기에 쏴서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불성실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愚謂明乎善則身自誠, 乃理之自然. 身誠則親自悅, 由是以至於友, 於君, 於民皆然. 乃積盛充實而自致耳. 今曰注之而然, 則是設之於此, 射之於彼而冀其必然也. 其爲不誠, 莫大於是.

 

장씨는 말했다. : 성실함의 소재는 접촉해 부딪치면 굴러가서 옮겨 간다.

張云, 誠之所在, 擊觸轉移.

 

내 생각에 지극한 성실함이 안에 쌓이면 사물이 바깥에서 호응하는 것은 이치의 항상함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처럼 깜짝 놀라면서 폭질(暴疾)한단 말인가?

愚謂至誠積於中而事物應於外, 理之常也. 然豈若是其驚遽暴疾哉?

 

장씨는 말했다. 어째서 공자․맹자를 생각하면서 재배하고서 그들의 격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張云, 安得不想孔子孟子, 再拜以謝其格言乎?

 

내 생각에 이 기상을 살펴보니 비루하고 경박함이 심하다.

愚謂觀此氣象, 甚矣, 其粗鄙而輕浮也!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행한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장씨는 말했다. : 널리 배우는 것은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등 한 가지 일이 아니다.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것도 이에 따른다.

張曰, 博學者, 戒愼恐懼非一事也. 問思辨放此

 

내 생각에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것은 독실이 행하는 일이지, 널리 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愚謂戒愼恐懼乃篤行之事, 非博學之謂也.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고,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성실해 진다.

誠明明誠

 

장씨는 말했다. : 최상의 지혜로 스스로 얻음으로 말미암아 성인의 가르침에 합치하는 것은 성(性)이다.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서 말미암아 최상의 지혜라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가르침이다. 취상의 지혜로 스스로 얻었으되 성인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이단이 된다.

張云, 由上智之自得而合乎聖人之敎者, 性也. 由遵聖人之敎而造乎上智之地者, 敎也. 上智自得而不合於聖人之敎, 則爲異端矣.

내 생각에 장씨(張氏)의 성실함과 밝음[誠明]에 대한 설명은 깊이 살피지도 못하고 이 주장르 만들어 그의 평소 논의와 부합시키려 했으니, 그가 스스로 이미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영역에 있다고 오만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상의 지혜로 스스로 얻었으되 성인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얻은 것’이 과연 어떤 일인지 모르겠다. 또 ‘이단’이란 다시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어찌 스스로를 여기에 잘못 빠트린 줄을 아지도 못하면서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머리와 얼굴을 바꾼다’는 것이니 속으로는 주면서 겉으로는 밀쳐내어 스스로 그 자취를 덮어버리고 남들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다. 그 불성실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이 마음으로 중용을 말한다면 또한 어긋나지 않겠는가?(‘위대하도다. 성인의 도여!’라는 장에서 ‘허황되고 허깨비 같은 학문學’이라고 한 것도 그 뜻이 또한 이와 같다. 뒤에서 다시 거듭 말하지 않는다.)

愚謂張氏於誠明之說蓋未嘗深考, 而爲此說以合其素論, 觀其自處傲然, 已在誠明之域矣. 然謂上智自得而有不合於聖人之敎者, 則未知其所得果何事也? 且所謂異端者復誰謂乎? 夫豈不自知其已失身於此, 而故爲是言者? 是乃所謂改頭換面, 陰予而陽擠之, 將以自蓋其迹而幸人之不疑己. 其爲不誠, 莫大於是. 以是心而語中庸, 不亦戾乎?(‘大哉聖人之道’章云‘荒庸夢幻之學’, 其意亦猶是也. 後不復重出矣.)

 

“오직 천하(天下)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그 성(性)을 다 발휘할 수 있다”에서 “천하에 참여한다”까지.

‘惟天下至誠爲能盡其性’止‘天地參矣’.

 

장씨는 말했다. : 이 성실함이 이미 드러나면, 자기의 성도 드러나고, 다른 이의 성도 드러나며, 사물의 성도 드러나고, 천지의 성도 드러난다.

張云, 此誠旣見, 己性亦見, 人性亦見, 物性亦見, 天地之性亦見.

 

내 생각에 경(經)에서는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기 때문에 그 성을 다 발휘할 수 있다’고 했지, 성실함이 드러나고 성이 드러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드러난다[見]’와 ‘다 발휘한다[盡]’는 글자의 의의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대부분 불교는 ‘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을 기준으로 여기기 때문에 성인이 성을 극진히 발휘하는 것의 위대함을 모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장씨의 말은 매번 이와 같은 것이다.

愚謂經言惟至誠故能盡性, 非曰誠見而性見也. ‘見’字與‘盡’字意義逈別. 大率釋氏以見性成佛爲極, 而不知聖人盡性之大, 故張氏之言每如此.

 

그 다음은 한 측면에서만 지극히 하는 것이다.

其次致曲

 

장씨는 말했다. : 예의[禮]․음악[樂]․활쏘기[射]․말기술[御]․글씨․산수[數] 가운데서도 곧장 성실함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張云, 禮, 樂, 射, 御, 書, 數中, 直造乎誠之地也.

 

내 생각에 ‘곧장 성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면 한 측면에서만 지극히 하는 것이 아니다.

愚謂直造乎誠, 則非致曲也.

 

장씨는 말했다. : ‘변한다[變]’는 것은 이 성실함이 홀연히 있었다가,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다.

張云, 變者, 此誠忽然而有, 倏然而無.

 

내 생각에 성실함이 만일 이와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사물의 처음과 끝이 되겠는가?

愚謂誠若如此, 何以爲物之終始乎?

 

지극한 성실함의 도는 미리 알 수 있다.

至誠之道可以前知

 

장씨는 말했다. 이미 미리 안다면 성실함으로 조화를 부려 점점 옮겨가고 변화시켜 화를 복으로, 흉조를 길조로, 망하는 것을 흥하는 것으로 만드는데 어려움이 없다.

張云, 旣前知之, 則以誠造化, 轉移變易, 使禍爲福, 妖爲祥, 亡爲興, 蓋無難也.

 

내 생각에 지극한 성실함의 도는 ‘…(수단)으로서[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성실함이 아니다. 화를 복으로 만들고, 재앙을 길상으로 만드는 것은 태무(太戊) 고종(高宗)의 고사에서 살펴 볼 수 있으니, 이치에 본시 이런 것이 있지만 이처럼 바꾼 것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옛 성현들은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하면서 엄하게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그 일을 바로 잡았으니, 이는 오히려 만의 하나라도 감히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호천(昊天)을 우러러 보니 언제 그 편안함을 내려주시려는가”고 말하는 것이다. 언제 옮기고 변역시켜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장의 가르침 또한 애초부터 이를 위해 말한 것도 아니다.

愚謂至誠之道非可‘以’者, 以之則非誠矣. 夫轉禍爲福, 易災爲祥, 以太戊高宗之事觀之, 則理固有是, 然不如是之易也. 是以古之聖賢遇災而懼, 嚴恭紙畏, 以正厥事, 猶不敢庶幾其萬一. 故曰‘瞻仰昊天, 曷惠其寧?’ 豈曰轉移變易而無難哉? 然此章之指初亦不爲是發也.

 

성실함이 없다면 사물이란 없다.

不誠無物

 

장씨는 말했다. : 나의 성실함이 한 번 떠나가면 눈 귀 코 입이 모두 무너진다.

張云, 吾誠一往, 則耳目口鼻皆壞矣.

 

내 생각에 성실함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으니 나를 말할 필요도 없고, 피차의 구별이 없으니 ‘떠나갔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눈귀코입 또한 어떻게 어느날 갑자기 무너지는 이치가 있겠는가? 이 장의 주장은 여러 선생들이 다 말하고 있다. 그것으로 이것을 본다면 득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愚謂誠無人我之別, 不必言吾;無彼此之殊, 不必言往. 耳目鼻口, 亦豈有一旦遽壞之理哉? 此章之說, 諸先生言之悉矣. 以彼觀此, 得失可見.

 

군자는 성실함을 귀하게 여긴다.

君子誠之爲貴

 

장씨는 말했다. : 성실함은 귀하게 여기기에 충분치 못하고, 성실하고 또 성실히 하는 것이 귀하게 여기기에 충분하다.

張云, 誠未足貴, 誠而又誠之, 斯足貴也.

 

내 생각에 성인이 세상의 이치가 성실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장씨는) “성실함은 귀하게 여기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하니 그의 말은 어찌 이렇게 어긋났는가? 또 이미 성실함을 귀하게 여기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했음에도 또 성실하게 하는 것은 귀하게 여기기에 충분하다고 한다면 앞에서 말한 ‘성실함’이란 버려진 물건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본래 성실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오직 자신의 말이 작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의 말은 매번 이와 같은 것이다. 또 성실함이란 하늘의 도인데 어떻게 귀하게 여기기에 충분치 못하고 반드시 ‘성실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도’라는 것을 기다린 다음에야 귀하게 여기기에 충분할 것인가? 아주 어리석은 이조차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愚謂聖人言天下之理無出於誠, 而曰誠未足貴, 何其言之悖也? 且旣誠矣, 以爲未足貴, 而又誠之乃足貴, 則前之所謂誠者, 無乃爲棄物與? 蓋緣本不知誠, 而惟恐其言之小, 故其言每如此. 且誠者天之道, 豈亦未足貴, 必待誠之者人之道, 乃足貴耶? 雖至愚有以知其不然矣.

 

지극한 성실함은 쉼이 없다.

至誠無息

 

장씨는 말했다. : 형상으로 볼 수 없지만 천지는 스스로 드러나고, 소리나 색깔이 움직이지 않아도 천지는 스스로 변하며, 옷자락을 드리우고 함이 없어도 천지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천지 또한 위대하지만 드러나게 하고, 변하게 하고, 이루게 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다. 또 말했다. : 지극한 성실함이 쉬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아도 드러남이 있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화가 있으며, 함이 없어도 이루어짐이 있다. 천지가 또한 이렇게 함으로부터 조화가 오묘해진다.

張云, 不見形象而天地自章, 不動聲色而天地自變, 垂拱無爲而天地自成. 天地亦大矣, 而使之章, 使之變, 使之成, 皆在於我. 又曰, 至誠不息, 則有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天地又自此而造化之妙矣.

 

내가 경의 뜻을 상세히 보니 지극한 성실함의 이치는 형체로 드러남이 없어도 스스로 빛나게 드러나며, 동작함이 없어도 스스로 변화하며, 영위함이 없어도 성취해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천지의 도를 한 마디로 다 표현하자면 또한 이와 같은 데 불과할 뿐이다. 장씨는 성인이 여기에서 지극히 성실하다면 저기에서 천지가 밝게 빛나고 변화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니, 문자의 의미도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애초부터 이런 이치란 없었다. ‘천지가 여기에서부터 조화한다’고 한 것은 말이 더욱 기괴하다. 성인은 천지에 대해 그 자연스러운 이치로 인해 마름질해서 이루고 곁에서 도우는데 불과할 뿐이다. 만일 성인 거꾸로 능히 천지를 조화시킬 수 있다면 이것은 자순이 거꾸로 조상을 잉태하고 키우는 격이니, 이런 이치란 없다. 이런 큰 것을 좋아하고 근거없는 말은 모두 심술의 폐단인데 또한 불교의 ‘심법이 천지를 생기게 했다 없애기도 한다’는 뜻에 근원하고 있는 것이다. 󰡔정몽󰡕에서 상세하게 배척했다.

愚詳經意蓋謂至誠之理未嘗形見而自彰著, 未嘗動作而自變化, 無所營爲而自成就. 天地之道, 一言而盡, 亦不過如此而已. 張氏乃以爲聖人至誠於此, 能使天地章明變化於彼, 不惟文義不通, 而亦本無此理. 其曰天地自此而造化, 語尤險怪. 蓋聖人之於天地, 不過因其自然之理以裁成輔相之而已. 若聖人反能造化天地, 則是子孫反能孕育父祖, 無是理也. 凡此好大不根之言, 皆其心術之蔽, 又原於釋氏‘心法起滅天地’之意, 正蒙斥之詳矣.

 

“덕성(德性)을 높이고 문학(問學)에서 말미암는다”에서 “후(厚)함을 도타이 하고 예(禮)를 높인다”까지.

‘尊德性而道問學’止‘敦厚以崇禮’.

 

장씨는 말했다. : 경계하고 삼가며, 의심하고 겁내는 데서부터 들어가고, 들어가서는 발육이 극치에 이른 지경에까지 나아가면서 그만두지 않는다면, 3,300 가운데서 행하더라도 학문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덕성을 높이면서 그만두지 않는다면 또한 변하여 크고 넓은 데에 이른다. 이 아래에 ‘그만 두지 않는 것’이 셋이고, 또 변해서 되는 것이 셋이다. 새로운 것을 알고 예를 높이면 또한 크고 넓은 데에 이르는 것은 고명함을 다 발휘하는 것의 바뀐 이름이다.

張云, 自戒愼恐懼而入, 入而造於發育峻極之地而不敢已, 則行乎三千三百之中而道問學矣. 尊德性而不敢已, 則又變而爲致廣大. 此下不敢巳者三, 又變而爲者三. 知新崇禮又致廣大, 極高明之變名也.

 

내가 살피기에 이것은 모두 도를 체득하고 덕을 이루는 조목을 말한 것이지, 그만 두지 않고 또 변한다는 뜻은 없다. ‘바뀐 이름’이라는 주장은 더욱 이치에 닿치 않는다.

愚按此皆言體道成德之目, 無不敢已而又變之意. 變名之說亦無義理.

 

장씨는 말했다. 어떻게 조그마한 변괴가 온 세상의 이목을 깜짝 현혹시키는 일이 있겠는가?

張云, 豈有一毫之變怪以驚眩天下之耳目哉?

 

내가 살피기에 장씨의 글에는 변괴와 깜짝 현혹시키는 것이 적지 않은데도 오히려 없다고 하니, 모르겠다, 다시 어떻게 해야 변괴가 되고 깜짝 현혹시키는 것이 되겠는가?

愚按張氏之書變怪驚眩蓋不少矣, 猶以爲無有, 不知更欲如何, 乃爲變怪驚眩哉?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吾從周

 

장씨는 말했다. : 주나라의 법도는 이미 없어졌으니, 지나친 것이 많다. 공자는 그 자신이 임금을 보필하는 재상이 아니었고, 존귀한 자리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경솔하고 멋대로 논의하지 않고 뜻을 굽혀 주나라의 법도를 따른 것이다.

張云, 周法已弊, 其過多矣. 孔子身非輔相, 不在尊位, 所以不敢輕議妄論, 而曲意以從周之法度也.

 

내가 살피기에 공자는 “주나라는 하(夏)·은(殷) 이대(二代)를 보았으니, 찬란하다. 그 문(文)이여! 나는 주(周)나라를 따르겠다”고 했으니, 그가 주나라를 따른 것은 또한 도가 있기 때문이지, 어쩔 수 없어서 멋대로 따른 것이 아니다. 만일 말세의 폐단으로서 예를 들어 윗사람에게 교만하게 배(拜)하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따른 것도 또한 의리의 소재가 있다. 이것은 진실로 옳다고 여겨 따른 것인데 (이것을 오히려) 뜻을 굽혀 따랐다고 여긴다면 성인의 마음이 아니다. 장씨는 마음을 불교에 귀의하고도 유자들에게 뜻을 굽히려 했기 때문에 성인을 엿보는 것이 이와 같으니 말 한 마디의 잘못이 아니다. 그 소종래가 먼 것이다.

愚按孔子言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則其從周也亦有道矣, 非不得已而妄從之也. 若末世之弊有如拜上之泰, 則不盡從矣. 其不得不從者, 是亦義理之所在. 斯誠然而從之, 以爲曲意而從, 非聖人之心也. 張氏歸心乎釋氏而曲意於儒者, 故其所以窺聖人者如此, 非一辭之失也, 其所從來遠矣.

 

군자(君子)가 이렇게 하지 않고서 일찍이 천하에 명예를 얻은 자는 있지 않다.

君子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也

 

장씨는 말했다. : ‘이와 같다’는 것은 어떤 일을 가리켜 말하는가? 즉 내가 말하는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하고 겁낸다는 것이다.

張云, 夫如此, 指何事而言哉? 卽予所謂戒愼不睹, 恐懼不聞也.

 

내가 살피기에 장씨는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겁낸다는 두 구절이 󰡔중용󰡕 한 편을 가로질러 꿰뚫는다고 하니 견강부회하고 장구를 늘렸다 묶었다는 하는 것이 이미 일일이 분변해서 바로잡을 수도 없다. 이 장에 이르러서도 경문에서 ‘이와 같다’고 말한 것은 바로 위 글의 “군자의 도는 자기 몸에 근본한다”는 대목 이하일 뿐이다. 장씨는 그의 이전 주장을 완성하기 위해 가까이 이 장의 윗 글에 있는 의미를 버리고서 멀리 몇 천 자 앞에 있는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겁낸다는 글자를 가리켰다. 의리의 타당성 여부를 논할 것도 없이 어떻게 언어와 문자의 통상적인 체제와 형세라 하겠는가? 이 때문에 특별히 이 한 장의 더욱 소루한 것을 논함으로써 그 나머지도 모두 이러한 부류임을 보이고자 한다.

愚按張氏戒愼恐懼二句, 橫貫中庸一篇之中, 其牽合附會, 連章累句, 已不容一一辨正矣. 至於此章經文所謂如此, 乃上文‘君子之道本諸身’以下耳. 張氏欲成其前說, 乃近舍本章上文之義, 遠指戒愼恐懼於數千字之前. 未論義理之當否, 而豈言語文字體勢之常哉? 故特論此一章尤疏漏處, 以見其餘之皆此類也.

 

이것이 천지(天地)가 위대한 이유이다.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장씨는 말했다. : 논의가 여기에 이르렀다면 부자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것이다. 천지에서 관찰하는 이 또한 부자의 건곤(乾坤)이다.

張云, 論至於此, 則夫子蓋未嘗死也. 觀乎天地, 此亦夫子之乾坤也.

 

내가 살피기에 공자께서는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셨으니, 문왕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말은 가깝지만 그 의미는 심원해서 그 맛이 끝이 없으니 이것이 성인의 말이 되는 이유이다.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운운한 것은 괴상한 변화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실제로는 남겨진 맛이라곤 없다. 그러므로 정자에게 “주장을 세울 때는 당연히 뜻과 생각을 함축하고 있어서 지혜와 덕을 갖춘 이는 물리지 않고, 덕이 없는 이는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인 것이다.

愚按孔子言‘文王旣沒, 文不在玆乎?’ 未嘗言文王之不死也. 然言近旨遠, 其味無窮, 所以爲聖人之言也. ‘不死’之云, 變怪駭人而實無餘味. 故程子有言, ‘立言當涵畜意思, 不使知德者厭, 無德者惑’, 正爲此耳.

 

 

여씨(呂氏: 呂希哲)의 󰡔대학해󰡕 呂氏大學解

 

여씨(呂氏)의 선조는 두 정부자(程夫子)와 함께 유학했기 때문에 그의 가학은 가장 올바름에 가깝다. 그러나 불교[浮屠]와 노자(老子)의 학설에 미혹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말류에 (불교와 노자에) 드나든 폐해가 없을 수 없다.(살펴보면 정헌공(正獻公: 呂公著)의 신도비에 공이 진강할 때의 일을 싣고 있다. 임금이 불교와 노자의 허무[虛]․적멸[寂]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하자 공이 “요순(堯舜)은 비록 이것을 알았지만 사람을 다스리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습니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그 잘못된 것의 한 단서이다. 요순의 도는 정추와 본말이 하나로 꿰뚫었으니 그들이 알았던 것은 아마도 불교나 노자와는 서로 비슷하지 않을 것이다. 아는 것은 여기에 있는데 급선무로 여기는 것은 저기에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근본이 둘이라는 것이다. 본원이 이와 같다면 그 말류의 폐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그 한 두 가지를 밝혀서 그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나머지 올바름에 가까운 주장의 경우에는 군자들이 오히려 취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呂氏之先與二程夫子遊, 故其家學最爲近正. 然未能不惑於浮屠老子之說, 故其末流不能無出入之弊.(按正獻公神道碑載公進讀, 上語及釋老虛寂之旨. 公曰:‘堯舜雖知此, 乃以知人安民爲急, 此其所差之端也. 堯舜之道精粗本末一以貫之, 其所知者似與釋老不相似也. 以爲所知在此而所急在彼, 是二本也. 本原如此, 則其末流之弊豈可勝道哉?) 今諭其一二, 以補其闕. 蓋其他說之近正者, 則君子猶有取焉.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깝다.

知所先後, 則近道矣.

 

여씨는 말했다. 이단의 학문은 모두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아지 못한다. 수고로이 찾고 고생스럽게 헤메는 것이 간절함에도 결국 (도에) 가까워지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두 갈래 길이 되고, 근본과 말단이 양단을 이루는 것이다.

呂氏曰, 異端之學皆不知所先後, 考索勤苦, 雖切而終不近, 故有終始爲二道, 本末爲兩端者.

 

내 생각에 이 말은 아마도 불교[釋氏] 때문에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여씨가 종신토록 학문을 하면서도 어느 것을 이단이라 여겨서 이런 주장을 만들어 비난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이 반드시 선후가 있는 것을 세간의 거친 학문이라 여기지도 않았고, 선후가 없는 것을 출세간의 오묘한 도라고 여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처음부터 서로 도모할 것이 못되니 비록 함께 행한다고 한들 서로 어긋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것을 말하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것은 옳고 저것은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저것을 하면서는 또 어떻게 저것을 옳다 하고 이것을 잘못이라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그는 겉으로는 떨어진 척 하면서 속으로는 합치되어서 스스로 좌우에서 채획해서 유학과 불교를 모아 크게 이루었다고 여기지만, 일찍이 말과 행실이 서로 어긋나고, 지루하게 드나드는 것이 마음에 해가 됨을 알지 못하고, 피가 벼를 어지럽히고 자색이 주색을 빼앗는 근심이 또한 장차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아는 것이 여기에 있고 급선무로 여기는 것이 저기에 있다는 생각에 근원한 것이니 그 잘못이 또한 깊습니다. 근세에 도를 말하는 자들은 대부분 이와 같아서 후학들을 매우 오도시킵니다.

愚謂此言似爲釋氏發, 然呂氏終身學焉, 不知以誰爲異端, 而爲是說以詆之耶? 蓋其心未必不以爲有先後者, 世間之粗學 ; 而無先後者, 出世間之妙道. 兩者初不相爲謀, 雖竝行而不相悖也. 方其言此, 故不得不是此而非彼;及其爲彼, 則又安知其不是彼而非此哉? 彼其陽離陰合, 自以爲左右采獲而集儒佛之大成矣, 曾不悟夫言行不類, 出入支離之爲心害, 而莠亂苗, 紫奪朱之患又將無所不至也. 此蓋原於所知在此, 所急在彼之意, 而其失又甚焉. 近世之言道者蓋多如此, 其誤後學深矣.

 

앎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고, 사물의 이치가 이른 뒤에 앎이 지극해진다.

致知在格物, 物格而後知至.

 

여씨는 말했다. : ‘앎을 지극히 함’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스스로의 몸을 닦는 근본이다. 앎[知]이란 ‘양지(良知)’로서 (보통 사람이) 요순과 함께 똑같은 것이다. 이치를 이미 궁구했다면 앎은 스스로 이르러, 요순과 똑같은 것이 홀연히 스스로 드러나니 말없이 알아차릴 수 있다.

呂氏曰, 致知格物, 修身之本也. 知者, 良知也, 與堯舜同者也. 理旣窮則知自至, 與堯舜同者忽然自見, 黙而識之.

 

내 생각에 ‘앎을 지극히 함’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대학의 단서요 처음 배우는 사람의 일이다.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면 하나의 앎이 이르니, 그 노력은 점진적이고, 오래도록 쌓여 꿰뚫은 다음에 마음속에 분명해져 행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고, 뜻은 성실해지고 마음은 바르게 된다. 그러니 지극한 앎에도 본시 깊고 낮음이 있는데 어떻게 갑자기 요순과 같은 것이 하루아침에 홀연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거의 불교의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는다’, ‘한 번 초탈해서 곧장 들어간다’는 헛된 담론과 같은 것이지, 성인의 문하에서 선을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는 진실한 노력이 아니다. 앞 장에서 배척했던 이단의 학문이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아지 못한다고 한 것과 또 무엇이 다른가?

愚謂致知格物, 大學之端, 始學之事也. 一物格則一知至, 其功有漸, 積久貫通, 然後胸中判然, 不疑所行而意誠心正矣. 然則所致之知固有淺深, 豈遽以爲與堯舜同者一旦忽然而見之也哉? 此殆釋氏‘一聞千悟’, ‘一超直入’之虛談, 非聖門明善誠身之實務也. 其與前章所斥異端之學不知所先後者, 又何以異哉?

 

여씨는 말했다. : 풀과 나무 같은 작은 것에서 그릇과 용품 같은 것들의 구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사물의 이치이다. 그들이 풀과 나무가 되고, 그릇과 용품이 되는 까닭으로서의 이치를 찾는 것이 곧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格物]’이다. 풀과 나무, 그릇과 용품의 이치가 내 마음에 보존되어 홀연히 알게 되면 이것이 ‘사물의 이치가 이른 것[物格]’이다.

呂氏曰, 草木之微, 器用之別, 皆物之理也. 求其所以爲草木器用之理, 則爲格物. 草木器用之理吾心存焉, 忽然識之, 此爲物格.

 

내가 살피기에 이천선생은 일찍이 ‘하나의 사물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다. 작은 사물에게도 이치는 있다’고 했고, 또 ‘크게는 천지가 높고 두터운 이유에서, 작게는 하나의 사물이 그러한 이유[所以然]에 이르기까지 배우는 이는 당연히 모두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여씨는 이것을 미루어서 주장을 만들면서 잘못을 저질렀다. 정자(程子)가 이 말을 한 것은 다만 천리의 소재지는 크거나 작거나, 정밀하거나 거칠거나 간격이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일 뿐이었다. 만일 배우는 이가 노력을 써야 하는 이유라면 반드시 앞과 뒤, 늦추거나 급히 하는 순서가 있어서, 체득하고 징험하는 방법을 구별한 다음에 쌓고 익혀 꿰뚫고, 따르면서 그 극치에 이르는 것이다. 어떻게 곧장 하나의 풀과 나무, 그릇과 용품 사이에 마음을 보존해 두고 요순과 같은 것인 까닭 없이 홀연히 스스로 인식되겠는가? 이 또한 불교의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 색을 보고 마음을 맑힌다는 주장이니, 자못 공씨(遺經)가 남긴 경과 정씨(程氏)가 발명한 본뜻이 아니다. 예전에 여씨가 견문이 넓고 인식이 굳건해서 이 글에서 서술한 내용을 만들지 않았을 때는 여기에 힘을 쓰면 일은 절반이지만 공은 반드시 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가 견문을 익숙하게 하는 것을 주변적인 일이라고 여기고 다시는 그 이치가 나오는 곳을 정밀하게 살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풀과 나무, 그릇와 용품의 사이에 두고서 홀연히 한 번의 깨달음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것이 처음과 끝, 근본과 말단이 두 갈래 길이 되는데도 스스로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 이유이다. 옛날 여씨의 만년에 쓴 편지의 몇몇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충분이 이런 뜻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 인에 뒤에 서술해 두고서 아울러 (내) 주장을 말해 둔다.

愚按伊川先生嘗言, ‘凡一物上有一理, 物之微者亦有理’. 又曰, ‘大而天地之所以高厚, 小而一物之所以然, 學者皆當理會’. 呂氏蓋推此以爲說而失之者. 程子之爲是言也, 特以明天理之所在無間於大小精粗而已. 若夫學者之所以用功, 則必有先後緩急之序, 區別體驗之方, 然後積習貫通, 馴致其極. 豈以爲直存心於一草木器用之間, 而與堯舜同者無故忽然自識之哉? 此又釋氏聞聲悟道, 見色明心之說, 殊非孔氏遺經, 程氏發明之本意也. 嚮以呂氏之博聞彊識而不爲是說所述, 則其用力於此, 事半而功必倍矣. 今乃以其習熟見聞者爲餘事, 而不復精察其理之所自來, 顧欲置心草木器用之間, 以俟其忽然而一悟, 此其所以始終本末判爲兩途而不自知其非也. 舊見呂氏晩年尺牘數語, 有足以證成此義者, 因系之于後, 幷爲之說云.

 

여씨는 말했다. : 보고 듣는 것이 철저하지 못하면 마땅히 깨달음으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앎을 지극히 함’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말은 바로 이 일이다. 요즘 우선 문자를 제쳐두고 체득하고 탐구할 것에 오로지 힘을 기울입니다만, 오히려 잡다한 일 때문에 어지러워 져 전일하게 공부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만일 이천의 설명대로라면 사물은 각각 사물에 붙어서 (다른) 사물에 부림을 당할 수 있으니 오히려 애매모호한 지경으로 잘못 빠질까 걱정입니다.(여씨는 스스로 주를 달아서 “그 뜻은 사물은 버릴 수 없고, 일이란 없을 수 없으니 마땅히 각각 책임을 질 뿐이다”고 했습니다.)

呂氏曰, 聞見未徹, 正當以悟爲則, 所謂致知格物, 正此事也. 比來權去文字, 專務體究, 尙患雜事紛擾, 無專一工夫. 若如伊川之說, 物各付物便能役物, 却恐失涉顢頇爾. 呂自注云: ‘其意以爲物不可去, 事不可無, 正當各任之耳.’

 

내 생각에 깨달음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이것은 바로 불교의 법(法)이니, 우리 유학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씨는 오히려 (이것을) 앎을 지극히 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일이라고 여기니, 이것이 그릇되게 이전의 주장을 하면서도 그 잘못을 아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이런 주장이) 옳다면 또 어째서 홀로 먼저 하고 나중에 하는 것을 아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단의 병폐는 삼는단 말입니까? 만일 우리 유학의 주장에서 말미암는다면 글을 읽고 그 득실의 근원을 따지며, 일에 응하면서 그 시비를 살피는 것이 바로 앎을 지극히 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일이니, 어느 곳을 가든지 이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문자를 버리고 체득하고 탐구하는 것만 오로지 하면서 오히려 잡다한 일 때문에 어지러워져 전일하지 못할까 근심한다면 이것은 이치와 일이 둘이 되어, 반드시 일을 모두 막아버린 다음에야 이치를 궁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과 처음이 두 갈래 길이 되고, 근본과 말단이 두 가지 단서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여씨가 체득하려 하고 탐구하려는 것은 과연 어떤 이치입니까? 이천의 설명은 바로 사물마다 각각 이치가 있으니, 일이 이르고 사물이 다가오면 그 이치에 따라 응한다면 사사물물이 각각 그 이치의 소당연을 얻지 않음이 없어서, 마치 순(舜)이 16상(相)을 등용하고 4흉(凶)을 쫓아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물에 의해 부림을 당하지 않고 사물을 부릴 수 있는 이유인데 어째서 ‘각각 책임을 질뿐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책임을 질뿐이다고 한다면 이것은 느긋하니 옳고 그름의 가부를 묻지 않고 모두가 그 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다면 사물에 의해 부림을 당하지 않는 자가 드물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애매모호함을 제쳐두고서 다른 사람들이 애매모호하다고 하니 어찌 미혹되지 않겠습니까!

愚謂以悟爲則乃釋氏之法, 而吾儒所無有. 呂氏顧以爲致知格物之事, 此其所以誤爲前說而不知其非也. 若然, 則又安得獨以不知所先後者爲異端之病哉? 若由吾儒之說, 則讀書而原其得失, 應事而察其是非, 乃所以爲致知格物之事, 蓋無適而非此理者. 今乃去文字而專體究, 猶患雜事紛擾, 不能專一, 則是理與事爲二, 必事盡屛而後理可窮也. 終始二道, 本末兩端, 孰甚於此? 則未知呂氏所體所究果何理哉? 伊川之說, 正謂物各有理, 事至物來, 隨其理而應之, 則事事物物無不各得其理之所當然者, 如舜之擧十六相, 去四凶也. 此其所以不爲物之所役而能役物, 豈曰各任之而已哉? 如曰任之而已, 則是漫然不察其是非可否而一切聽其所爲也. 如此則能不爲物之所役者鮮矣. 顧舍其顢頇而謂人顢頇, 豈不惑哉!

 

선왕(先王)들의 시대에는 도덕이 일치했고, 풍속이 똑같았기 때문에 세상이 크다지만 사람들을 서로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집에서는 서로 다른 학문이 없었으니 어떻게 다시 이단의 폐해가 있었음을 알 것인가? 주나라가 쇠미함에 미쳐서 바른 도가 쇠퇴하고 예악이 무너져 부자(夫子)께서 근심하시고, 이에 육경을 바로잡아 선왕의 가르침을 밝히셨다. 이런 시대를 만나 이단이 없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따로 이름을 붙일만한 것은 없었다. 부자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세도는 더욱 쇠퇴했고, 광망하고 참람한 선비들이 성인께서 저술을 하신 것을 보고고는 드디어 각각 자신들의 총명함을 뽐내려 경쟁해서 이단의 주장을 세워 세상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내세우는 바람에 오히려 바른 도[正道]와 함께 내달리면서 승부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가 현혹되고 막혀서 어느 것을 좇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제자백가들이 각각 그들의 학설을 주장했지만, 그들의 폐해에도 깊고 낮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노자와 장자의 허무하고 뜬구름 같은 주장[虛浮]은 사람들이 본시 적용할 곳이 없음[無著]을 알았고, 신한(申韓)의 형명(刑名)의 술은 사람들이 본시 은혜가 적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두들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오직 양주와 묵적의 학문은 어짐과 의로움을 빌려서 명목을 삼았지만, 실제로는 어짐과 의로움을 해쳤으니 사람들을 미혹시킴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맹자께서 일어나 선성(先聖)의 도를 바로잡고, 제자를 제쳐두고서 유독 양주․묵적만을 물리쳐 인심을 바루고, 사설(邪說)을 그치게 했으며, 편벽된 행실을 막고, 방탕한 말을 물리침으로서 온 세상이 취했다가 깬 듯, 잠들었다 일어난 듯하도록 한 다음에야 바른 도가 드넓어졌다. 아! 맹자 이래로 1,000여 년 동안 유학자들은 사장의 문채에 빠져 진실하게 도를 보지 못하고 한낮 양주․묵적의 잘못이나 변론하면서, 스스로는 양주․묵적이 되어가는 데에 이르면서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또 한낮 양주․묵적의 폐해를 미워할 뿐 스스로가 양주․묵적의 행적을 밟는데 이르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맹씨와 같은 공적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교[浮屠]가 오랑캐에게서 나와 중화(中華)로 흘러들어오면서 처음에는 또한 말이 통하지 않아 사람들이 본시 미혹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晉]․송나라[宋] 이하로 내려오며 사대부들이 기이하고 괴상한 것을 좋아하게 되어 외국의 말[侏離之言]을 가져다 문식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비로소 크게 미혹되게 되었습니다. 불교가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끌어다 쓴 이들의 죄인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옷이면 관을 삐딱하게 입고 쓰고서는 공하다거나 없다거나[空無]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저지하고서 꾸짖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귀하고 명성 높은 선비들이 그런 행동을 좇아서 따라하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뜨악하니 놀라면서 다시 보게 됩니다. 그 일의 옳고 그름을 논하지도 않고, 또 그들이 (귀하고 명성 높은)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말을 믿게 된다면 어찌 모두 다 오랑캐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식견 있는 이들이 깊이 근심하면서 장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두 소씨[二蘇]․장(張)․여(呂) 등이 어찌 근래에 귀하고 명성 높은 선비라 일컫는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학문이 도덕과 성명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노자[老]․장자[莊] 및 불교의 불경스러운 학설을 끌어다 선왕의 교훈을 어지럽히고, 글을 써서 책을 만들어 세상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들은 것이 없다면 반드시 그들이 (귀하고 명성 높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존경하고 믿을 터이니, 점점 깊이 물들어가서 장차에는 고질병처럼 되어버린다면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안(新安) 주원회(朱元晦)는 맹자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우리의 도[吾道]가 밝지 못한 것을 크게 걱정했기 때문에 세속이 비난하고 논박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일찍이 그들의 글을 대하고서 잘못과 오류를 논파했습니다. 마치 고황에 침을 놓은 것처럼 읽는 이들이 환하게 이단이 잘못이고 성인의 말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게 만들었습니다. 배우는 이들이 진실로 그의 주장으로 인해서 지극히 당연한 귀결을 찾는다면 여러 사람들의 잘못이 마음과 눈 사이에서 도망칠 수 없을 것입니다. 의심을 깨우치고 미혹된 것은 분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도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 번이나 반복해 읽고서 기꺼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건도 병술년(1166) 맹하 그믐날 대계(臺溪) 하호(何鎬)는 삼가 발문을 씁니다.

先王之世, 一道德, 同風俗, 故天下之大, 人無異言, 家無異學, 豈復知有異端之害哉. 及周之衰, 正道陵遲, 禮壞樂崩, 夫子憂之, 乃緖正六經, 以明先王之敎. 當是時, 異端雖不能無, 猶未有以名家者也. 及夫子沒, 世道益衰, 狂僭之士見聖人之有作也, 遂各逞其聰明, 競立異說, 以自名於世, 顧與正道竝馳而爭勝. 於是天下之人耳目眩聵而莫知適從矣. 然諸子百家雖各主其說, 而其爲害則有淺深. 如老莊之虛浮, 人固知其無著 ; 申韓之刑名, 人固知其少恩, 皆不足以惑人也. 惟楊墨之學假仁義以爲名, 而實爲仁義之害, 惑人之尤深者也. 故孟子起而閑先聖之道, 舍諸子而獨闢楊墨, 以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使天下若醉而醒, 夢而覺, 然後正道廓如也. 噫!孟子以來, 千有餘載, 儒者溺於詞采, 實不見道, 徒辨楊墨之非, 至身爲楊墨則不自覺;徒惡楊墨之害, 至躬蹈楊墨則不自知, 况敢冀其有孟氏之功乎? 夫浮屠出於夷狄, 流入中華, 其始也言語不通, 人固未之惑也. 晉宋而下, 士大夫好奇嗜怪, 取其侏離之言而文飾之, 而人始大惑矣. 非浮屠之能惑人也, 導之者之罪也. 今有人於此, 詭衣冠而談空無, 衆必止而詬之. 一旦有貴顯名譽之士亦從而效尤, 則人皆胎愕改觀. 未論其事之是非, 且以其人而信之矣, 幾何其不胥而爲夷狄哉? 此有識之所甚憂而永嘆也. 二蘇, 張, 呂, 豈非近世所謂貴顯名譽之士乎? 而其學乃不知道德性命之根原, 反引老, 莊, 浮屠不經之說而紊亂先王之典, 著爲成書, 以行於世. 後生旣未有所聞, 必以其人而尊信之, 漸染旣深, 將如錮疾, 可不哀乎? 新安朱元晦以孟子之心爲心, 大懼吾道之不明也, 弗顧流俗之譏議, 嘗卽其書破其疵繆, 鍼其膏肓, 使讀者曉然知異端爲非而聖言之爲正也. 學者苟能因其說而求至當之歸, 則諸家之失不逃乎心目之間, 非特足以悟疑辨惑, 亦由是而可以造道焉. 故余三復而樂爲之書云. 乾道丙戌孟冬晦日, 臺溪何鎬謹跋.

 

 

󰡔고사󰡕여론 古史餘論

 

 

 

【해제】 이 글은 소철(蘇轍)의 저술인 󰡔고사󰡕에 나타난 사론(史論)을 비평한 것이다.

 

 

 

근세에 역사를 말한 것 가운데 오직 이 책만이 이치에 가까운데도 학자들은 소홀히 취급합니다. 나는 홀로 그 서문에서 “옛 성인들은 반드시 선(善)을 행하셨는데, 마치 불이 언제나 뜨겁고 물은 언제나 찬 것과 같이 꼭 실천하셨으며, 불선(不善)한 짓을 하지는 않으셨는데 추우(騶虞)가 생물을 죽이지 아니하고 절지(竊脂)가 곡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하셨습니다”고 말한 대목을 아끼는데, 근세의 논자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천(史遷: 사마천)의 잘못을 논하면서 “견문이 얕고 천박했으며 배우지를 않았고, 성글고 간략하면서도 경솔하게 믿었다”고 한 것도 그의 병폐를 정확히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책의 근본과 말단에 크게 상응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여기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성현에 도달하기에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고사여론」을 씁니다.

近世之言史者, 唯此書爲近理, 而學者忽之. 予獨愛其序言, 古之帝王皆聖人也, 其於爲善, 如水之必寒, 火之必熱;其於不爲不善, 如騶虞之不殺, 竊脂之不穀, 非近世論者所能及. 而所論史遷之失, 以爲淺近而不學, 疏略而輕信, 亦中其病. 顧其本末乃有大不相應者, 竊以爲於此有以識之, 則其達於聖賢不遠矣. 作古史餘論.

 

본기 本紀

 

“소자는 말한다. ‘옛 제왕들은 모두 성인이셨고, 그들의 도는 ‘무(위)’를 마루로 삼았기 때문에 만물이 범접할 수 없다’[蘇子曰, 古之帝王皆聖人也, 其道以無爲宗, 萬物莫能嬰之].” 저는 이것은 단지 노자나 불교의 학설로 성인을 논하는 것일 뿐 성인이 성스러운 이유를 알 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공허하고 실제가 없어서 안과 바깥, 처음과 끝이 서로 작용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의 도[其道]’ 이하의 내용을 삭제하고, ‘그들의 마음은 혼연해서 하늘의 덕을 온전히 갖고 있고 온갖 일의 이치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사사로운 인욕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고친다면 아마도 그 근본이 올바르게 되고 본체와 작용이 온전해 질 것입니.(󰡔고사󰡕의 간행본에서는 모두 ‘무위를 마루로 삼는다[以無爲爲宗]’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자(蘇子)는 일찍이 “불교의 서적에서는 무를 법도로 삼는다고 했으니, 무를 법도로 삼는다는 말일 뿐 ‘무위의 법도’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승려들이 문장의 의미에 서툴러 불법(佛法)을 무위(無爲)의 법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 이와 같고, 그가 황제의 「본기」를 쓰면서도 다만 ‘무를 마루로 여긴다[以無爲宗]’고만 했을 뿐 ‘위(爲)’자가 두 번 나오지 않으니, 이 서문에서 ‘무(無)자의 아래에 홀로 두 개의 ‘위(爲)’가 있는 것과는 호응하지 않습니다. 소자(蘇子)의 말이 비록 극히 타당한 의론은 아니지만 불서(佛書)에 쓰인 문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히려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간행본이) 다시 그의 뜻을 놓친 것을 아우르고자 대략 이렇게 변론합니다.)

그가 “마음 속에 쌓인 것이 여유가 있기 때문에 미루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은 비록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쌓는다[積]’와 ‘미루어 나간다[推]’는 것은 결국 성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말을 바꾸어서 “말없이 쌓은 것이 이미 두루 넓고 고요하고 깊은 근본을 갖고 있기 때문에 휘둘러 흩뿌린 것이 저절로 때에 맞게 나와서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낮거나 깊거나 간에 다른 논의를 할 만한 여지가 없게 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는 관중(管仲), 자산(子産), 숙향(叔向)의 부류를 말하면서 모두 지혜로운 이라고 하기에 불충분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공자에 대해서 지혜가 지극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고 맹자에 대해서는 그 한 두 가지를 알아서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고 하니, 이것은 부자의 말에 숨기는 것이 있고, 맹자의 지혜에 미진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여러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과 맹자의 미진함 그리고 공자가 안다고 한 것은 모두 과연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만일 다만 무를 마루로 삼아서 만물이 범접할 수 없었다고만 하는 것이라면 여러 사람이 알지 못한 것은 한탄할 것까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공․맹이 안다고 하는 것 또한 저로서는 아마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반드시 말을 바꾸어서 “공자에 이르러 온전한 본체를 갖추었고, 맹자의 앎도 또한 그 극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여러 사람이 알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때때로 사람들에게 일러주었다[時以告人]’는 구절에서 ‘때때로[時]’라는 글자도 타당치 않으니, 당연히 ‘그럼에도 언제나[然每]’라는 글자로 고쳐야 합니다.) 아! 진나라․한나라 이래로 역사책의 말들이 이치에 가까워 볼만 한 것으로는 이 책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합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또한 모든 의리의 본원에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는 법인데, 어째서 그 학문에 들어간 것이 이미 그 올바름을 얻지 못하고, 갈고 닦아 몸소 실천하는 것이 또 정밀하지 못해서, 이런 까닭에 비록 그 문장을 다 발휘했음에도 그 내용은 다 발휘하지 못해서, 비록 그 호령을 들었지만 그 이치는 밝히지 못했단 말입니까? 아! 성인의 학문이 전해지지 못한 그 폐해를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蘇子曰, 古之帝王皆聖人也, 其道以無爲宗, 萬物莫能嬰之. 予竊以爲此特以老子, 浮屠之說論聖人, 非能知聖人之所以聖者也. 故其爲說空虛無實, 而中外首尾不相爲用. 若削其‘其道’以下而更之曰‘其心渾然, 天德完具, 萬事之理無一不備 而無有一毫人欲之私焉’, 則庶乎其本正而體用可全矣.(印本皆作‘以無爲爲宗’, 而蘇子嘗云, 佛書言以無爲法者, 謂以無而爲法耳, 非謂有無爲之法也. 僧徒拙於文義, 乃以佛法爲無爲之法, 誤矣. 其言如此, 而其爲黃帝紀亦但言以無爲宗而‘爲’字不再出, 不應此序‘無’字之下獨得有兩‘爲’字也. 蘇子之言雖非至論, 而於佛書文義猶爲得之. 今復幷失其指, 故略爲之辨云.) 至其所謂其積之中者有餘, 故推以治天下, 有不可得而知者, 則雖非大失, 而積與推者終非所以言聖人. 不若易之曰‘黙而該之者旣溥博而淵泉, 故其揮而散之者自以時出而無不當’, 則庶乎輕重淺深之間亦無可得而議也. 其曰管仲, 子産, 叔向之流皆不足以知者, 是則然矣. 至謂孔子知之至而未嘗言, 孟子知其一二而人不信, 則是以夫子之言爲有隱, 孟子之知爲未盡也. 且其謂數子之所未知, 孟子之所夫盡與孔子之所知者, 皆果爲何事耶? 若但曰以無爲宗, 萬物莫能嬰之而已, 則數子之未知也不足恨. 而孔, 孟之所知, 吾恐其非此之謂也. 其必易之曰‘至於孔子, 蓋全體焉. 而孟子之知, 亦足以至乎其極’, 則庶乎數子之所未知者可得而言耳.(‘時以告人’, ‘時’字亦未當, 當改作‘然每’字.) 嗚呼!秦漢以來, 史冊之言近理而可觀者莫若此書, 而其所未合猶若此, 又皆義理之本原而不可失者, 豈其學之所從入者旣已未得其正, 而其所以講磨體蹈之者又有所未精, 是以雖旣其文而未旣其實, 雖聞其號而未燭厥理也歟? 嗚呼, 聖學不傳, 其害可勝言哉!

 

황제(黃帝)의 본기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기백(岐伯)을 스승으로 섬겨 방술에 뛰어나 세상에서 의학을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종사로 여겼다. 그러나 황제의 책은 전국 시대에도 아직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 말은 노자와 서로 유사한 점이 있었고, 무를 마루로 삼았다. 그가 세상에 베푼 것은 시대와 더불어 오르내렸으니 모두 그 밖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내 생각에 이 말은 더욱 이치에 해롭습니다. 생각해 보면 황제는 하늘로부터 총명하고 신성한 지혜를 타고나 온 세상의 이치에 아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온 세상의 일에 능하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위로는 하늘과 땅, 음과 양이 조화를 부리고 발육하는 근원에서, 아래로는 신을 보우하고 기를 단련해서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방술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 사이에 모든 사물과 모든 일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크거나 작거나 정밀하거나 거칠거나 마음속에 환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말이 여기까지 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것을 말하는 자는 이를 기화로 스스로 의탁해서 그 주장을 후세에서 믿게 되었고, 전국 시대에 이르러 방술을 하는 선비들이 비로소 책에 기록하고, 서로 전수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열자(列子)가 인용하는 것과 󰡔소문(素問)󰡕․󰡔악기(握奇)󰡕 같은 것은 반드시 거칠게나마 그가 남긴 말 가운데 비슷한 것을 얻은 것이니, 이는 마치 허행(許行)이 말하는 것이 신농(神農)의 말인 것과 같을 뿐입니다. 주나라의 관제에 외사(外史)가 관장했던 삼황(三皇)․오제(五帝)의 책은 아마도 이와 같은 데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소자는 홀로 노자와 서로 비슷한 것만을 가리켜 황제의 본래 진면목이라고 여기는 데 그가 앞에서 서술한 제정하고 만들고, 정벌하고 죽이며, 사물을 열어주고 일을 이루어주는 큰 법도와 아래로 의술, 방술, 침과 뜸과 같은 부류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세상에 베풀되, 밖으로 드러내고 시대와 더불어 오르내렸다면 이것은 성인의 안과 밖, 마음과 행적이 판이하게 두 갈래가 되어 그 문장과 사업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 모두가 그 마음의 진실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되니 괜찮다고 하겠습니까?

黃帝紀云, 其師岐伯明於方, 世之言醫者宗焉. 然黃帝之書戰國之間猶存, 其言與老子相出入, 以無爲宗. 其設於世者與時俯仰, 皆其見於外者也. 予謂此言尤害於理. 竊意黃帝聰明神聖得之於天, 其於天下之理無所不知, 天下之事無所不能. 上而天地陰陽, 造化發育之原, 下而保神鰊氣, 愈疾引年之術, 以至其間庶物萬事之理, 巨細精粗, 莫不洞然於胸次, 是以其言有及之者. 而世之言此者因自託焉, 以信其說於後世. 至於戰國之時, 方術之士遂筆之書, 以相傳授. 如列子之所引與夫素問, 握奇之屬, 蓋必有粗得其遺言之彷彿者, 如許行所道神農之言耳. 周官外史所掌三皇五帝之書, 恐不但若此而已也. 今蘇子乃獨指其與老子相出入者爲黃帝之本眞, 而其前所敍載制作征誅, 開物成務之大法, 下至醫方灸刺之屬, 皆以爲設於世, 見於外而與時俯仰者, 則是聖人之內外心跡判然兩途, 而其文章事業之見於世者, 皆不出於其中心之實然矣, 而可乎哉?

 

순(舜)의 「본기」에서는 세 가지 일을 논했습니다. 첫째 허유(許由)를 논한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사천(史遷)의 본래 말을 다 기록함으로써 변수(卞隨), 무광(務光)의 무리를 다 포함시켜야지, 허유 한 사람만을 배척한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태사공(太史公)은 또 기산(箕山) 위에 허유의 집이 있다고 했으니, 또한 실제로 이 사람이 있었고 당대의 고명한 선비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요(堯)가 제위를 선양하려 했던 일은 없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그 곡절의 뜻인데도 소자는 또한 이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고수와 상이 순을 죽이려 했다는 것인데,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다만 순이 죄를 떠맡고 악을 자신에게 돌렸으며 (하늘과 부모에게) 울부짖으며 원망하고 사모하며, 상이 근심하면 또한 함께 근심했고, 상이 기뻐하면 또한 함께 기뻐했으며, 사소한 장형이면 맞았고 심각한 장형이면 도망쳤으며, 부모가 그를 부리고자 하면 언제나 곁에 있었고, 그를 죽이려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도망쳤다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지 꼭 고수와 상이 순을 죽이려 했던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깊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는 순과 우가 주와 균을 피하려 했는데도 온 세상이 그들에게 귀의하려 했다는 것이니, 즉 소자는 그들이 피함으로써 천하의 반역자로 몰리기에 충분했다는 점을 염려한 것입니다. 익(益)이 계(啓)를 피했음에도 세상 사람들이 계(啓)에게 귀의하자 소자는 또 그 피하는 것이 헤아리지 못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에 맹자와 사천(史遷)이 전한 것을 모두 허무맹랑하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본시 그런 일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물을 겨를은 없으나 소자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모두가 세속의 성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성현을 헤아리려 하는 것이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연의 마음은 담박하니 욕심이 없는데 어떻게 천하를 갖고자 하는 뜻을 품었겠습니까? 오히려 그 사양하는 말이 나온 것도 본성으로 삼는 것[所性]에 뿌리를 두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근거하고자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잔에 담긴 술과 그릇에 담긴 고기조차도 오히려 알고서 피했을 것인데 하물며 권세를 잡고 무거운 지위에 자리 잡아 온 세상에 자기에게 귀의하려는 형국이었다면 또한 어떻게 능히 마음속에 놀라는 것이 없이 멀리 물러나 피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피했음에도 저들이 나를 풀어주지 않았다면 그만 둘 수 없어서 받은 것인데 어찌 반역이라 비난하겠습니까? 피했는데 다행히 그대로 버려졌더라면 본시 내 본마음이 원하던 것을 얻은 것인데 또 무엇이 부끄러울 것입니까? 오직 피하지 않고 억지로 손에 넣으려는 것이 바로 반역이요, 교만한 태도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저들이 나에게 귀의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 뿐입니다. 소자의 말대로라면 세상에서 사양하는 모든 사람들은 속으로는 갖고 싶으면서도 겉으로는 겸손해하며 피하는 것이니, 이런 까닭에 그 말은 사실에 반대되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는데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순․우의 일은 세상이 본시 의심하지 않으니 지금 다시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익(益)의 일은 또한 그 주장에 의심이 없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자못 모르겠거니와, 만일 태갑(太甲)이 현명하자 이윤(伊尹)이 돌아가겠다고한 것이라든지, 성왕(成王)이 성인이 되자 주공(周公)이 정사에서 복귀한 일이라든지, 선왕(宣王)이 (통치에) 뜻을 두자 공화(共和)를 그만두는 등의 일은 많았습니다. 행하는 것이 마땅하면 행하고, 그치는 것이 마땅하면 그치는데 또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소자는 공백(共伯)을 현명하다고 여기면서 오히려 익(益)에 대해 무엇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만일 ‘다른 사람이 맡긴 것을 받았다면 당연히 끝까지 가지고서 돌려주면 안 된다. 돌려주는 것은 헤아리지 못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짓이다’고 한다면 이것은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 부자의 마음이요, 양견(楊堅) 부부가 말한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세’라는 격입니이다. 이런 것으로 성현의 일을 말한다면 또한 잘못입니다.

舜紀所論三事, 其一許由者是已. 然當全載史遷本語, 以該卞隨, 務光之流, 不當但斥一許由而已也. 然太史公又言箕山之上有許由家, 則又明其實有是人, 亦當世之高士, 但無堯讓之事耳. 此其曲折之意, 蘇子亦有所未及也. 其一瞽象殺舜, 蓋不可知其有無. 今但當知舜之負罪引慝, 號泣怨慕, 象憂亦憂, 象喜亦喜, 與夫小杖則受, 大杖則走, 父母欲使之, 未嘗不在側, 欲求殺之, 則不可得而已爾. 不必深辨瞽象殺舜之有無也. 其一舜禹避朱均而天下歸之, 則蘇子慮其避之足以致天下之逆. 至益避啓而天下歸啓, 則蘇子又譏其避之爲不度而無耻. 於是凡孟子, 史遷之所傳者, 皆以爲誕妄而不之信. 今固未暇質其有無, 然蘇子之所以爲說者, 類皆以世俗不誠之心度聖賢, 則不可以不之辨也. 聖賢之心淡然無欲, 豈有取天下之意哉? 顧辭讓之發, 則有根於所性而不能已者. 苟非所據, 則雖巵酒豆肉猶知避之. 况乎秉權據重而天下有歸己之勢, 則亦安能無所惕然於中而不遠引以避之哉? 避之而彼不吾釋, 則不獲已而受之, 何病於逆? 避之而幸其見舍, 則固得吾本心之所欲, 而又何耻焉? 唯不避而彊取之乃爲逆, 偃然當之而彼不吾歸乃可耻耳. 如蘇子之言, 則是凡世之爲辭讓者皆陰欲取之而陽爲遜避, 是以其言反於事實至於如此而不自知其非也. 舜禹之事, 世固不以爲疑, 今不復論. 至益之事, 則亦有不能無惑於其說者. 殊不知若太甲賢而伊尹告歸, 成王冠而周公還政, 宣王有志而共和罷, 此類多矣. 當行而行, 當止而止, 而又何耻焉? 蘇子蓋賢共伯, 而尙何疑於益哉? 若曰受人之寄, 則當遂有之而不可歸, 歸之則爲不度而無耻, 則是王莽, 曹操, 司馬懿父子之心而楊堅夫婦所謂騎虎之勢也. 乃欲以是而語聖賢之事, 其亦誤矣.

 

󰡔하기󰡕에서 (천하를) 현자에게 혹은 자식에게 물려준 것을 논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맹자가 말한 것이 극진합니다. 저 ‘이상한 것을 선호한다고 성인에게 기대하는 자’들은 본시 망령된 것이지만, 성인이 천하 후세가 명목을 좋아하면서 실질을 놓치는 병폐를 두려워한 다음에야 현자에게 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면서 수 백 마디 말로 변론하는 것은 또한 성인을 이해하는 수준이 낮은 것입니다. 서문에서 말한 ‘물이 차고 불이 뜨거운 것, 추우와 절지’는 또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또 이 편의 첫머리에서 ‘구(苟)’자를 써서 말했으니, 천박하게 인정을 따르려는 뜻이 많고, 또 ‘이상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을 위주로 했으니 시류를 따라 더러운 것과 합치려는 소원이 깊은 것입니다. 천명과 인심이 의리의 올바른 본원이 됨을 알지 못하고 기운 것을 가로로 만들고 곧은 것을 휘게 만들어 오직 그 뜻대로만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씨의 고황(膏肓)에 깃든 고질병이이니, 그들 부자와 형제가 젊었을 적의 말에 이와 같은 종류를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공(少公)은 천부적인 자질이 조금이나마 고요하고 도타웠기 때문에 만년에 다소나마 알고 깨닫게 되어 성현의 마음이 한낮 이처럼 비천하지 많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특별이 이 글에 서문을 달면서 이전의 잘못을 구제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옛 습속에 이미 물든지 오래인지라 갑자기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고, 본원과 강령에 대해 끝내 분명치 못했기 때문에 평상시의 사특한 의론이 틈을 타고 몰래 흘러나와서 한 때의 올바른 견해가 잠시 밝기는 했지만, 그것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장공(長公: 소식)의 「지림(志林)」 같은 경우에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 옛 것에서 조금도 변하지 못했으니 또한 그 동생과의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夏紀與賢與子之論, 孟子言之盡矣. 彼以好異期聖人者固妄, 而謂聖人畏天下後世喜名失實之弊, 而後不敢與賢以爲異, 至累數十百言以辨之者, 亦淺乎其知聖人矣. 序文所謂水寒火熱, 騶虞竊脂者, 又安在哉? 且於篇首卽以‘苟’字爲言, 則其簡慢狥情之意勝. 又以不求爲異爲主, 則其同流合汚之願深. 大抵不知天命人心爲義理本原之正, 而橫斜曲直, 唯其意之所欲. 此則蘇氏膏肓況痼之疾, 凡其父子兄弟少日之言若此類者不可勝擧. 而少公資禀稍爲靜厚, 故其晩歲粗知省悟, 而意聖賢之心不徒若是其卑也. 是以特序此書, 以救前失. 然舊習已安, 未易猝拔, 而本原綱領終未明了, 故其平日之邪論乘間竊發, 而一時正見之暫明者不足以勝之也. 若長公之志林, 則終身不能有以少變於其舊, 又不逮其弟遠矣.

 

「주본기(周本紀)」에서 말한 것은 근사한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시험 삼아 말해보겠습니다. 백성들이 태어난 처음에는 본시 예의의 문식이 있기 이전입니다. 그러나 서로 낳아 길러줌으로 인해 아버지와 자식이 있다면 서로 아끼는 은혜가 있음을 알 것이요, 또 서로 보호하고 모여서 군신 관계가 있다면 서로 공경하는 의리를 알 것입니다. 이것이 예의의 실제인데 어떻게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백성들이 태어난 처음에 아버지와 자식 간에 의리가 없고, 군주와 신하 간에 예절이 없다”고 하는 이것은 도체를 모르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아버지와 자식 간에 의리[義]를 말하고, 군주와 신하 간에 예절[禮]을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지금 이러한 곳이 많지만 모두 변론할 겨를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은 본래부터 예의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는 일마다 준칙이 되는 것이 있어서 편안한지 편안치 못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백성이 떳떳한 성품을 갖고 있는지라 이 아름다운 덕(德)을 좋아하도다”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예의가 없다고 말한다면 인정에 느끼는 대로 행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서도 당연하다고 여겨 못하는 짓이 없을 것입니다. 또 슬퍼하면서 편치 않게 여기는 것이 있은 다음에 돌이켜 마음에서 찾아서 편안한 것을 얻는다면 모르겠습니다만, 무엇을 준칙으로 삼아서 안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그가 도체를 모르는 말 가운데 두 번째입니다.

周論之云似矣, 然細考之, 有不能無失者, 請試言之. 夫民生之初, 固末始有禮義之文也. 然自其相生養而有父子, 則知有相愛之恩矣. 自其相保聚而有君臣, 則知有相敬之義矣. 是則禮義之實, 豈可謂之無哉? 今曰民生之初, 父子無義, 君臣無禮, 此其不知道體之言一也. 父子言義, 君臣言禮, 亦非是. 今以此等處多, 皆不暇辨也. 夫人唯其本有禮義之心也, 是以凡所作爲, 有所準則而知其安與不安. 所謂‘民之秉彝, 好是懿德’者也. 今曰無禮義矣, 則觸情而行, 從欲而動, 乃其當然, 無所不可. 而又謂其戚然有所不寧而後反求諸心, 以得所安, 則未知其何所準則而知之也? 此其不知道體之言二也.

 

또 인심에는 본시 예의의 실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계셔서 이 마음을 온전히 체득하고서, 임금과 스승에게 기탁해서 담당토록 하시고, 이 실상이 있는 것으로 인해서 품절하지 않는다면 예의의 문장은 또한 어디에서 능히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품절하면서도 비록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으로 강제한 것은 아니지만 구차하게 그들의 사적인 뜻에 편한 대로 따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소자의 말을 음미해 보면 마치 온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예절을 만들 수 있어서 성인을 기다릴 것이 없다고 여기고, 또 사람이 예절을 실천하면서 다만 그들이 편안하게 여기는 데에 나아가서 찾을 뿐 편안하게 여기는 준칙을 논하지 않으니 그 말류의 폐단은 반드시 도리어 옷을 벗은 채로 멋대로 기대앉은 이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이 또한 사리를 살피지 못한 말입니다. 고금의 변화 같은 것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돌아오니, 마치 밤과 낮이 서로 생겨나고, 더위와 추위가 번갈아 드는 것이 이치의 당연함이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삼대(三代)가 서로를 계승해서 서로 인습해서 변하지 않은 것도 있고, 서로 더하고 덜어내서 늘 똑같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오직 성인만이 그 이치의 소재를 살피고 그로 인해 개혁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크고 작은 벼리[紀綱]들이 백세의 뒤에까지 전해져도 폐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한 이미 극치에 도달한 것으로 인해 멋대로 사방으로 무너져 그 기세가 흘러가는 데로 따라갈 것으로 요구하게 될 것이요, 변화의 좋고 나쁨도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나라의 쇠퇴기에 문식이 극에 달해 폐해가 되었으니 이것은 당연히 변화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성왕(聖王)이 일어나지 않아 하나라를 이용해서 주나라를 변화시키고, 충성으로 막고 구하려는 예를 들자면 공자․동생(董生: 동중서)․태사(太史: 사마천)의 말과 같은 것들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문식이 날로 더욱 성해지고, 예절이 날로 더욱 번잡해져 보통 사람들의 인정에 감당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로소 법도를 어기고 거짓을 행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마저도 오래되자 더욱 감당할 수 없게 되었으니 결국 피곤해하고 싫어하며 소홀히 여기면서 멋대로 사방으로 무너지는 근심이 생겨났습니다. 마치 진나라가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자취를 모두 없애버리고 독단적으로 멋대로 경솔하고 소홀한 정치를 일삼은 것과 같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결국 소자가 “관혼상제를 예절대로 하지 않고, 묘에서는 제사 지내면서 사당은 세우지 않고, 실에서 제사를 지내되 장소가 없다”는 말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 연루된 것입니다. 그러나 소자는 본시 백성들이 태어난 이래로 온 세상이 하루도 문식으로 나아가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하고, 또 예속의 변화는 모두 오직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것일 뿐 성인이 그 변통하는 것은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고 합니다. 또 날마다 문식으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또 어떻게 진나라의 경솔하고 소홀함과 오늘날의 예의 없음이 소자가 말한 것처럼 병폐일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진나라의 경솔하고 소홀함과 오늘날의 예의 없음이 또 그가 꾸짖는 것처럼 어떻게 다스리는 자가 어떻게 부박한 것을 개혁하고 충실한 것을 좇으려는 뜻에서 일부러 문식하지 않고, 당․우․하․상의 질박함[質]를 따르는 것이겠습니까? 그의 말은 되풀이할수록 스스로 서로 모순이 되니 이 또한 시대의 변화를 살피지 못하고 사물의 실정을 살피지 못한 것 가운데 심한 일입니다.

且人心固有禮義之實矣, 然非有聖人全體此心, 以當君師之寄, 因其有是實者而品節之, 則禮義之文亦何自而能立? 其品節之也, 雖非彊之以其所不欲, 然亦非苟狥其私意之所便也. 今味蘇子之言, 乃若以爲天下之人自能爲禮而無待於聖人, 又以爲人之爲禮但求以卽其所安而不論其所安之準則, 則其末流之弊必將反有至於裸袒踞肆而後已者. 此又其不察事理之言也. 若夫古今之變, 極而必反, 如晝夜之相生, 寒暑之相代, 乃理之當然, 非人力之可爲者也. 是以三代相承, 有相因襲而不得變者, 有相損益而不可常者. 然亦唯聖人爲能察其理之所在而因革之, 是以人綱人紀得以傳之百世而無弊. 不然, 則亦將因其旣極而橫潰四出, 要以趨其勢之所便, 而其所變之善惡, 則有不可知者矣. 若周之衰, 文極而弊, 此當變之時也. 而聖王不作, 莫有能變周用夏, 救僿以忠, 如孔子, 董生, 太史之言者. 是以文日益勝, 禮日益繁, 使常人之情有所不能堪者. 於是始違則作僞以赴之, 至於久而不堪之甚, 則遂厭倦簡忽而有橫潰四出之患, 若秦之掃除二帝三王之迹而專爲自恣苟簡之治. 以至于今, 遂有如蘇子所謂冠婚喪祭不爲之禮, 墓祭而不廟, 室祭而無所者, 正坐此也. 而蘇子固謂生民以來, 天下未嘗一日不趨於文 ; 卽是又謂禮俗之變, 皆唯衆人之所自爲, 而聖人之通其變者爲無所與於其間也. 且曰日趨於文矣, 則又安有秦之苟簡與今之無禮, 如蘇子之所病? 而秦之苟簡與今之無禮, 又豈爲治者眞有革薄從忠之意而故爲不文, 以從唐, 虞, 夏, 商之質, 如彼之所譏者耶? 其言反覆, 自相矛盾, 此又不察時變, 不審物情之甚者也.

 

그러니 성현이 세상에 나와 오늘날의 예를 제정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대답하기를, 하나라의 예를 행하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나라의 관을 쓰고, 소무(韶舞)를 연주하는 것 이것이 우리 부자의 말이요, 영원토록 변할 수 없는 보편적 법칙이다. 지금 주나라를 계승해서 말한다면 본시 충실함으로써 구제하는 것이 마땅하고, 다시 때에 맞춰 근심해도 또한 갑자기 그 문식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된다. 또한 말하기를 몸소 행하면서 이끌고, 학문을 강론하면서 열어준다며, 그 실질을 도타이 해주고, 조금이라도 품절하게 해서 그 문식이 비록 갖춰지지 않더라도 부박하고 조야한 데 이르지 않게 하고, 큰 벼리를 대충이나마 들어서 행하기 어려운데 이르도록 하지 않는다면 또한 거의 천천히 풍속을 옮기고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然則有聖賢出, 而欲爲今日之禮者, 宜奈何? 曰行夏時, 乘殷輅, 服周冕, 樂韶舞, 此吾夫子之言, 萬世不易之通法也. 今以繼周而言, 則固當救之以忠, 更以適時而慮, 亦恐其未能遽及夫文也. 亦曰躬行以率之, 講學以開之, 厚其實而粗品節之, 使其文雖未備而不至於鄙野, 大綱略擧而不至於難行, 則亦庶乎其有移風易俗之漸矣.

 

소자는 전국 시대의 형세를 논하면서 ‘이러한 시대를 당해서는 비록 환공․문공 같은 임금이 인의를 빌리고, 천자의 권위를 옆에 끼고 호령하더라도 그 형세상 행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오직 지극히 성실한 군자를 얻어서 상나라․주나라의 선왕들처럼 스스로를 닦고 싸우지 않는다면 아마도 복종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진나라를 위한 계책으로는 ‘진나라의 영토로 인해서 진나라의 백성을 쓰고 군대를 억누르고 스스로 지키고, 덕을 닦아 천하의 백성들이 오게 한다면, 저들은 어린아이를 등에 지고 이를 것이니 (나머지 여섯 나라의 임금들은) 누구와 더불어 (그들의 나라를) 지키겠는가’라고 했으니, 이 말들은 모두 훌륭합니다. 사천(史遷)의 「육국연표」에서 말한 것과 비교해 보면 아름다운 옥을 옥돌에 비교하는 것에 불과할 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위한 계책에서는 다만 제나라와 위나라가 침략을 받지 않는 것만을 가지고 징험을 삼았으니, 이것은 또한 문후(文侯)의 시대에 진나라가 융(戎)과 적(翟)을 중국에 손님으로 맞이하느라 본시 산동 지역에서 무력을 도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군왕후(君王后)의 시대에 진나라는 먼 곳과는 교린책을, 가까운 곳에 대해서는 무력을 사용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날마나 삼진(三晉)․형초(荊楚)를 도모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두 나라는 잠시나마 근심이 없는 평온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효공(孝公)과 상앙(商鞅)의 이후에 시황(始皇)과 이사(李斯)의 시대라면 초나라는 자란(子蘭)을 등용하고, 제나라는 후승(后勝)을 등용했지만, 모이라고 명하면 모여들었고, 조회하라고 겁을 주면 조회를 했으며, 오늘 다섯 성을 떼어주고, 내일은 열 읍을 바쳤으니, 진나라를 섬기는 것이 어찌 아주 신중하게 다투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국은 여유도 없이 망하고 말았으니 소자의 책략 또한 그 나라들을 지탱하기에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했겠습니까? 또한 굳세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보살피기를 도타이 하며, 널리 성현을 찾아서 스스로를 보좌하게 하고, 스스로 덕을 닦기를 진나라가 하나를 한다면 자신은 백을 하고, 진나라가 열을 한다면 자신은 천의 노력을 해서 굳게 사방의 국경을 지키고, 도에 따라 교린책을 쓰고, 그 기세가 나서면 정벌을 할만 하고, 들어서면 나라를 지킬 만하게 만들어서, 한 시대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한시바삐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오직 내 나라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만을 따지는 마음가짐을 갖지 않는다면 거의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만일 일시적으로 ‘스스로를 닦는다’는 것을 구실로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싸우지 않고 진나라를 섬길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스스로를 닦는다’는 말은 내가 보기에는 한 잔의 물로 불타는 읍과 도성의 불을 끄지 못하는 격이 될까 걱정되고, ‘싸우지 않는다’는 말도 자란(子蘭)이나 후승(后勝)의 재앙을 키우는 원인이 될까 걱정됩니다. 저 맹자가 제나라․양나라의 임금들에게 일러준 말들의 본말과 순서의 상세함이 어떠했습니까. 그 마지막에 또 언제나 온 세상에 적이 없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찌 소자처럼 구차하게 수나 갖추자는 말에만 그쳤습니까?

蘇子論戰國之勢, 以爲當是之時, 雖有桓, 文之君假仁義, 挾天子以令之, 其勢將有所不行. 必得至誠之君子, 自修而不爭, 如商周之先王, 庶幾可以服之. 其爲秦計, 則曰因秦之地, 用秦之民, 按兵自守, 修德以來天下之民. 彼將襁負其子而至, 誰與共守? 此其言皆善矣. 其視史遷六國年表之云, 不啻美玉之視碔砆也. 然其爲六國計, 但以齊魏之不受兵爲驗, 則是不知文侯之時, 秦方以戎翟見擯於中國, 固未能窺兵於山東. 君王后之時, 秦方用遠交近攻之術, 日以三晉, 荊, 楚爲事, 故爲二國者得以少安而無患. 若孝公, 商鞅之後, 始皇, 李斯之時, 則如楚用子蘭, 齊用后勝, 召之會則會, 劫之朝則朝, 今日割五城, 明日獻十邑, 其事秦豈不甚謹而不爭哉? 而卒以危亡之不暇, 蘇子之策亦不足以支矣. 然則宜奈何? 曰, 其亦彊於自治, 厚於養民, 博求聖賢之佐以自輔, 使德之修於己者秦一己百, 秦十己千, 固守四封, 交鄰以道, 使其勢出可以征而入可以守, 汲汲乎以一世生民塗炭陷溺爲己任, 而不專以求利於吾國爲心焉, 則亦庶乎其可也. 若姑以自修者藉口而實專主於不爭以事秦, 則所謂自修者, 吾恐區區之杯水不足以救焦邑滅都之火 ; 而所謂不爭者, 乃所以稔子蘭, 后勝之禍也. 彼孟子所以告齊梁之君者, 其本末次第之詳爲如何? 而其終也又未嘗不以無敵於天下爲效. 豈若蘇子苟簡備數之言而已哉?

 

 

「시황기(始皇紀)」에서 봉건제를 다시 시행할 수는 없다는 것을 논했는데, 설명이 비록 상세했지만 큰 요지는 곧장 기인할 만큼 오랜 나라[故國]들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일찍이 상고해 보니 상나라․주나라의 초기에 크게 베풀어 부유하게 된 것은 이미 모두 선인(善人)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토지의 넓이는 때에 따라 알맞게 헤아려 꼬리가 더 크고 바깥이 더 강성해지는 우환이 없도록 했습니다. 왕이 된 자[王者]는 세세토록 덕을 닦아 정사에 임해서 또 모두 오래도록 평안하고 어느 날 갑자기 기울어지는 변란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제후를 봉하는 것은 모두 세대에서 세대로 오랜 세월 동안 전해지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었지 옛 나라들의 도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나라는 극히 무도했기 때문에 결코 오래 존속될만한 이치가 없었습니다. 설사 공경의 의론을 채택하고, 순우월(淳于越)의 주장을 쓰면서 아울러 자제들을 (제후로) 세워 스스로 울타리가 되게 했더라도, 진(陳: 진승)․오(吳: 오광)․유(劉: 유방)․항(項: 項羽)에 의해 도륙당하는 밑천이 되는 데 불과했을 것입니다. 비록 오래된 나라들의 도움이 있더라도 또한 어떻게 능히 스스로 편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설사 한나라․진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도 혹은 땅도 넓고 군대도 강성했지만 반역이 싹터 일어났고, 혹은 임금이 어리석어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골육 간에 서로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지 오래된 나라들의 도움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소자의 고찰은 이미 상세하지 못합니다.

始皇紀論封建之不可復, 其說雖詳, 而大要直謂無故國之可因而已. 嘗試考之, 商周之初, 大賚所富, 已皆善人; 而其土地廣狹隨時合度, 無尾大外彊之患;王者世世修德以臨之, 又皆長久安寧而無倉卒傾搖之變, 是以諸侯之封皆得傳世長久而不可動, 非以有故國之助而然也. 秦至無道, 決無久存之理. 正使采公卿之議, 用淳于越之說, 竝建子弟以自藩屛, 不過爲陳, 吳, 劉, 項魚肉之資. 雖有故國之助, 亦豈能以自安也哉? 至若漢晉之事, 則或以地廣兵彊而逆節萌起, 或以主昏政亂而骨肉相淺, 又非以無故國之助而亡也. 蘇子之考之也, 其已不詳矣.

 

또한 ‘후세에 (제후에) 봉해주고 (나라를) 세워주었다[封建]는 것은 근본이 없는 사람을 들어 이민들의 위에 기생하게 하는 것으로, 임금과 백성들이 친목하지 못해서, 일단 변고가 생기면 물결에 떠밀리듯이 떠나 버리니, 또한 진나라의 군현제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일 진나라가 형벌을 관대하게 하고 부세를 가볍게 해주고, 백성들이 휴식하도록 하면서 군현을 통해 통치했더라면 삼대와 융성함을 비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임금과 백성이 친목하지 못해서 물결에 떠밀리듯 떠나가는 근심이 군현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본시 봉건제가 군현제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만 후세의 봉건이 고대의 봉건만 못하기 때문에 그 이해관계가 군현제와 차이가 없다는 것일 뿐입니다. 또 반드시 군현제로만 잘 다스릴 수 있어서, 오히려 삼대와 융성함을 비교할 수 있고, 봉건제로는 본시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봉건제로는 잘 다스릴 수가 없고, 반드시 군현제를 해야만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뿌리 없는 것을 근심으로 여긴다면 나는 또한 그것을 반박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으시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고 했으니,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성정의 저절로 그러함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임금을 일컬으면 반드시 그 백성을 어루만질 줄 알고, 백성을 일컬으면 반드시 그 임금을 섬길 줄 아는 것이, 마치 부부가 서로 합하는 것과 같고, 벗들이 서로 구하는 것과 같아서, 이미 서로 연결되고서 서로 따른다면 그들의 위치와 호칭은 스스로 서로 감응해서 서로를 지탱하기에 충분하니 그들이 친목하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태공(太公)이 제나라에, 백어(伯禽)가 노나라에 어떤 뿌리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위나라와 강숙(康叔) 사이에는 또한 마땅히 두 세대에 걸친 깊은 원한이 있음에도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수십 세대를 이어갔고 위나라는 훗날 주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수 십 년을 이어가다 비로소 망했으니, 어떻게 반드시 뿌리가 있은 다음에야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항우(項羽)가 처음 (세력을) 일으킬 때 하북의 전투에 나아갔고, 노공(魯公)이 되었지만, 일찍이 단 하루도 그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나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망했을 때 노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성을 지키면서 (한나라에) 항복하지 않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항복했습니다. 팽월(彭越)과 양나라[梁], 장오(張敖)와 조나라[趙] 사이에도 그들이 두 나라의 임금이 된 것은 잠시 동안 뿐이었지만, 난포(欒布)․관고(貫高)의 무리는 다투어 그를 위해 죽으려 했습니다. 한나라[漢]․위나라[魏] 이후에 이르러서는 군현제를 실시한 지 이미 오래였지만, 목수(牧守)가 어려움에 처할 때면 휘하의 관리들이 오히려 목숨을 걸고 막아섰습니다. 이것이 어찌 뿌리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본시 이와 같은 것입니다.

至於又謂後世之封建者擧無根之人寄之吏民之上, 君民不親, 一有變故, 則將漂卷而去, 亦與秦之郡縣何異? 若使秦能寬刑薄賦, 與民休息而以郡縣治之, 雖與三代比隆可也. 夫以君民不親而有漂卷之患爲不異於郡縣, 是固以封建爲賢於郡縣. 但後世之封建不能如古之封建, 故其利害無以異於郡縣耳. 而又必曰以郡縣善而治之, 猶可以比隆於三代, 至於封建, 則固以爲不可, 豈封建則不可以善治, 而必爲郡縣乃可以善治耶? 若以無根爲慮, 則吾又有以折之. 夫天生蒸民, 有物有則, 君臣之義根於情性之自然, 非人之所能爲也. 故謂之君則必知撫其民, 謂之民則必知戴其君. 如夫婦之相合, 朋友之相求, 旣已聯而比之, 則其位置名號自足以相感而相持, 不慮其不親也. 如太公之於齊, 伯禽之於魯, 豈其有根? 而康叔之於衛, 又合其再世之深仇而君之. 然皆傳世數十, 衛乃後周數十年而始亡, 豈必有根而後能久耶? 至於項羽初起, 卽戰河北, 其爲魯公, 未必嘗得一日臨涖其民也. 而其亡也, 魯人猶且爲之城守不下. 至聞其死, 然後乃降. 以至彭越之於梁, 張敖之於趙, 其爲君也亦暫耳. 而欒布, 貫高之徒爭爲之死. 以至漢魏之後, 則已爲郡縣久矣, 而牧守有難, 爲之掾屬者猶以其死捍之. 是豈有根而然哉? 君臣之義固如此也.

 

만일 진나라 시대에 여섯 나라가 강대했더라면 참으로 다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라도 다스릴 수 있었다면 마땅히 그 종사를 이어 받고, 그 토양을 나누어서 자제와 공신들을 봉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갖가지로 유지하도록 해야합니다. 의리로 말하자면 이미 보존과 상실, 계승과 단절의 아름다움을 얻었고, 형세로 말하자면 소자가 병폐로 여긴 것과 같은 데로 나아간다면 오래된 나라들의 도움과 근본의 견고함은 또한 여기에서 일거양득이 될 것이니 또한 무엇 때문에 불가능하겠습니까? 다만 진나라가 극히 무도했기 때문에, 봉건이 본시 오래가면서 서로 평안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었고, 군현제를 한 것 역시 오래지 않아 패망한 것입니다. 그 이해득실의 계산은 애초부터 여기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소자는 천하고 좁은 마음과 평소에 익혔던 견해로 경솔하게 논지를 세웠으니 본시 천리와 백성의 떳떳함이 본래부터 있는 항구적인 본성임을 살피지 못했고, 고금의 변화와 이해의 실상에 대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알고서 쉬이 발견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금 이처럼 어그러졌으니 이것은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이 본원에 나아가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말년의 정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若秦之時, 六國彊大, 誠不可以爲治. 旣幸有以一之矣, 則宜繼續其宗祀而分裂其土壤, 以封子弟功臣, 使之維持參錯於其間. 以義言之, 旣得存亡繼絶之美;以勢言之, 就使有如蘇子之所病, 則夫故國之助, 根本之固者又可於此一擧而兩得之, 亦何爲而不可哉? 但秦至無道, 封建固不能待其久而相安, 而爲郡縣亦不旋踵而敗亡. 蓋其利害得失之算初不擊乎此耳. 蘇子乃以其淺狹之心, 狃習之見率然而立論, 固未嘗察乎天理民彝本有之常性, 而於古今之變, 利害之實, 人所共知而易見者, 亦復乖戾如此, 是則不惟其窮理之學未造本原, 抑其暮年精力亦有所不逮而然也.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을 위한 계책은 반드시 봉건제를 시행한 이후에 다스릴 수 있단 것인가? 그 형세를 헤아려보면 또한 반드시 행할 수 있고 폐단도 없다는 것인가? 대답합니다. 꼭 봉건제를 하지 않고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만 통치의 체제를 논하자면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천하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천하에서 임금과 신하의 의리에 통달해서, 은혜와 예절이 충분히 서로에게 미칠 수 있게 하고, 인정과 뜻이 충분히 서로 통할 수 있게 하며, 또 국가를 가진 자는 각각 스스로 그 토지와 인민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 선조의 사업을 삼가며 지키는 것으로 자손에게 물려줄 계책을 삼습니다. 그리고 종묘와 사직을 받드는 것이나, 여항을 열이나, 다섯으로 구획하는 규범이나, 법제나 도수[數度]를 지키는 것도 모두 영원토록 서로 이어가면서 오늘날처럼 아침에 만들었다가 저녁에 없애는 데에는 이르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그런데도 간혹 멋대로 굴면서 법을 없애버리고, 강대한 세력을 가져 통제하기 힘든 것이 병폐가 된다면 군현의 사이에 잡다하게 나라를 세워주고, 또 방백과 연수로 하여금 나누어 통치하게 하면서,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보살피는지, 예절을 어기고 법을 넘어서는 지를 살펴서 높이거나 낮추는 전례를 행한다면 무엇 때문에 폐단이 있겠습니까?

或曰, 然則爲今之計, 必封建而後可以爲治耶? 而度其勢亦可必行而無弊耶? 曰, 不必封建而後可爲治也. 但論治體, 則必如是, 然後能公天下以爲心而達君臣之義於天下, 使其恩禮足以相及, 情意足以相通, 且使有國家者各自愛惜其土地人民, 謹守其祖先之業以爲遺其子孫之計;而凡爲宗廟社稷之奉, 什伍閭井之規, 法制數度之守, 亦皆得以久遠相承, 而不至如今日之朝成而暮毁也. 若猶病其或自恣而廢法, 或彊大而難制, 則雜建於郡縣之間, 又使方伯連帥分而統之, 察其敬上而恤下與其違禮而越法者, 以行慶讓之典, 則曷爲而有弊耶?

728x90

'고전원전자료 > 주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자101  (1) 2025.08.19
주자100  (0) 2025.08.19
주자98  (1) 2025.08.19
주자97  (0) 2025.08.19
주자96  (3) 2025.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