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권 朱子大全 卷七十
잡저 雜著
여씨의 시기 가운데 ‘상중’편을 읽고(갑진년 봄) 讀呂氏詩記桑中篇(甲辰春)
【해제】 이 글은 순희 11년(갑진, 1184, 55세) 봄에 여조겸이 찬한 여씨가숙독시기에서 시경의 ‘상중(桑中)’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쓴 것이다. 주자는 순희 9년 「여씨가숙독서기후서」를 쓰던 시기부터 이미 여씨가숙독시기에서 표함된 여조겸의 몇몇 견해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 글을 통해 표명된 것이다.
(여씨가숙독시기 ‘상중’편에서는) ‘시의 체재는 서로 다르다. …… 진실로 그 일을 서술해서 말 한 마디를 더하지 않더라도 뜻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일에는 오히려 말할 만 한 내용이 있는 것이 있으니, ‘청인’편과 같은 시가 이런 종류이다. ‘상중’·‘주유’편 같은 경우는 아인과 장사들은 말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공자가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고 한 것은 시경의 300여 편의 시가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벌하는 내용이어서, 비록 그 요점은 올바른 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이 말처럼 간략하게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일 뿐이지, 시를 지었던 사람들의 생각에 모두 사특함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반드시 ‘저들이 사특함이 없는 생각으로 음란한 일을 서술했는데 징창하는 뜻이 말 밖에 저절로 드러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면 어째서 저들이 비록 사특한 생각으로 시를 지었지만 나는 사특함이 없는 마음으로 시를 읽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저들의 스스로 추한 면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내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징창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입니까? 하물며 곡진하게 깨우치고 설교하면서 저들에게 사특함이 없기를 구하는 것은 돌이켜 자기에게 얻는 것이 더 쉬운 것만 못합니다. 교묘하게 숫자를 변론하면서 저들이 사특함이 없는 데로 귀결시키려는 것은 돌이켜 자신을 책망하는 절실함만 못합니다.
詩體不同, 固有鋪陳其事, 不加一詞而意自見者. 然必其事之猶可言者, 若淸人之詩是也. 至於桑中湊洧之篇, 則雅人莊土有難言之者矣. 孔子之稱思無邪也, 以爲詩三百篇勸善懲惡, 雖其要歸無不出於正, 然未有若此言之約而盡者耳, 非以作詩之人所思皆無邪也. 今必曰彼以無邪之思鋪陳淫亂之事, 而閔惜懲創之意自見於言外, 則曷若日彼雖以有邪之思作之, 而我以無邪之思讀之, 則彼之自狀其醜者, 乃所以爲吾警催懲創之資耶? 而況曲爲訓說而求其無邪於彼, 不若反而得之於我之易也. 巧爲辨數而歸其無邪於彼, 不若反而責之於我之切也.
아(雅)네, 정(鄭)이네, ‘위(衛)’네 하는 것은 여러 시들에서 찾아보면 진실로 각각 그 조목들이 있습니다. ‘아’는 「대아」·「소아」의 몇몇 편이 이것입니다. ‘정’은 「정풍」의 몇몇 편이 이것입니다. ‘위’는 「빈풍」·「용풍」·「위풍」의 몇몇 편이 이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로 고치지 않은 것입니다. 풍·아의 편을 설명하면서 또 정·변을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중’편의 「소서(小序)」에서 “정사가 흩어져 백성이 유랑하는데도 그치지 앟는다”는 문장은 「악기」와 일치하니, 이 시가 상간(桑間) 지방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또한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지금 반드시 ‘(시) 300여 편이 모두 아(雅)이다’고 하면서 「대아」·「소아」만이 ‘아’인 것은 아니고, 「정풍」도 「정풍」이 아니며, 「빈풍」·「용풍」·「위풍」도 「위풍」이 아니고, ‘상중’도 상간 지방의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이 아니라고 한다면 차례와 편제가 혼란스럽고 정사가 뒤섞여 공자께서 (산정한)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남(二南)의 정풍(正風)은 규방의 음악이요, 지방의 음악이며, 이아(二雅)의 정아(正雅)는 조정의 음악이고, 상·주의 송(頌)은 종묘의 음악이라는 것은,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은 「시서」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전기 자료에서 나오기도 한 것이어서 모두 근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변아(變雅)에 이르러서는 본시부터 일에 쓰이지도 않았고, 변풍(變風)은 특히 리항(里巷)의 노래로서 악관에 반포한 이유도 시국의 변화를 알고, 선비들의 풍속을 관찰하며, 사방 오랑캐보다 더 어진 음악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뿐입니다. 지금 반드시 시 300여 편이 모두 제사와 조회와 초빙에 쓰이던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상중’·‘주유’편 같은 것들은 어떤 귀신들에게 올려야 하는 것이며, 어떤 빈객을 접대하려는 것이란 말입니까?
若夫雅也, 鄭也, 衛也, 求之諸篇, 固各有其目矣. 雅則大雅小雅若干篇是也, 鄭則鄭風若干篇是也, 衛則邶鄘衛風若干篇是也. 是則自衛反魯以來, 未之有改, 而風雅之篇, 說者又有正․變之別焉. 至於桑中小序 ‘政散民流而不可止’ 之文與樂記合, 則是詩之爲桑間, 又不爲無所據者. 今必日三百篇皆雅, 而大․小雅不獨爲雅, 鄭風不爲鄭, 邶․鄘․衛之風不爲衛, 桑中不爲桑間亡國之音, 則其篇帙混亂, 邪正錯糅, 非復孔子之舊矣. 夫二南正風, 房中之樂也, 鄕樂也. 二雅之正, 朝廷之樂也. 商周之頌, 宗廟之樂也. 是或見於序義, 或出於傳記, 皆有可考. 至於變雅, 則固巳無施於事, 而變風又特里巷之歌諸. 其領在樂官者, 以爲可以識時變․觀土風而賢於四夷之樂耳. 今必曰三百篇者皆祭祀朝聘之所用, 則末知桑中湊洧之屬當以薦何等之鬼神, 接何等之賓客耶?
옛날 천자가 순수(巡守)할 때 태사(太師)에게 시를 진술하도록 명해서 백성들의 풍속을 살폈는데, 본시부터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다 진술하도록 해서 살폈습니다. 이미 진술한 다음에도 본시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가르치기 위해 모두 보존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선왕들의 정아·정송은 편집과 체제가 다르고, 베풀어 쓰는 것도 달랐다는 것은 앞에서 진술한 대로이니, 본시 어지럽게 뒤섞는다는 혐의를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雅)·정(鄭)의 실제가 이미 상세하지 않은데도, 어지럽게 뒤섞는다는 명목을 너무 지나치게 겁내고, 오히려 근거도 없는 비루한 말을 인용하고, 풍자한다는 허울좋은 주장으로 문식을 꾸며 반드시 억지로 선왕들의 아·송의 반열에 두려고 하니 이것이 거꾸로 크게 어지럽게 뒤섞으면서도 스스로 아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랑캐의 음악[胡部]과 ‘정풍’·‘위풍’을 합주하는 것조차도 안 된다고 하는 데, 하물며 ‘상중’·‘주유’편을 억지로 아악으로 만들어 ‘녹명지십’·‘문왕지십’·‘청묘지십’과 합쳐 종묘에서 조정에서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두 시를 오히려 치우치지 않는 성조[中聲]에서 그쳤다고 여기는 데, 이것은 태사공이 공자께서 모두 연주하며 노래해서 소·무의 음악과 일치하기를 추구했다는 격이니 그 잘못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옛 음악은 이미 사라져서 고찰해서 바로잡을 것이 없으니, 내가 굳이 어떤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이치와 그 말로서 추론해 보자면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蓋古者天子巡守, 命太師陳詩以觀民風, 固不間其美惡而悉陳以觀也. 旣已陳之, 固不問其美惡而悉存以訓也. 然其與先王雅頌之正, 篇帙不同, 施用亦異, 如前所陳, 則固不嫌於厖雜矣. 今於雅鄭之實察之旣不詳, 於厖雜之名畏之又太甚, 顧乃引夫浮放之鄙訶, 而文以風剌之美說, 必欲强而置諸先王雅頌之列, 是乃反爲厖雜之甚而不自知也. 夫以胡部與鄭衛合奏猶日不可, 而况强以桑中湊陏爲雅樂, 又欲合於鹿鳴文王淸廟之什而奏之宗廟之中․朝廷之上乎? 其以二詩爲猶止於中聲者, 太史公所謂孔子皆弦歌之以求合於韶武之音, 其叢蓋亦如此. 然古樂旣亡, 無所考正, 則吾不敢必爲之說. 獨以其理與其詞推之, 有以知其必不然耳.
또 (동래가) 문사만 화려할 뿐 풍자는 드물고 예의에 그치는 데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또한 「대서」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허부」·「상림부」는 호사스러운 문장입니다. 그러나 ‘천자가 멍하니 생각한다[天子芒然而思]’는 구절 아래는 또한 실제로 풍자한다[諷]고 이를만한 점이 있습니다. ‘한광’편은 얻을 수 없음을 알아서 구하지 않고, ‘대거’편은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서 감히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예의에서 그친다’고 이를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중’·‘주유’편의 경우 나로서는 어떤 말이 풍자하는 것이고, 어떤 점이 예의에 그친다는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공자께서 정나라의 음악을 내치시려 했었다고 말한다면 이들을 또 여섯 전적[六籍] 속에 거두어들인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이것은 증남풍(曾南豐)이 전국책에서, 유원성(劉元城: 劉安世)이 ‘세 가지 부족한 것’에 대한 논의에서 이미 모두 말한 것인데, 어떻게 내 말을 듣고 난 후에야 명백해진다고 하겠습니까!
又以爲近於勸百諷一而止乎禮義, 則又信大序之過者. 夫子虛上林侈矣, 然自‘天子芒然而思’以下, 猶實有所謂諷也. 漢廣知不可而不求, 大車有所畏而不敢, 則猶有所謂禮義之止也. 若桑中湊侑, 則吾不知其何詞之諷而何禮義之止乎? 若曰孔子嘗欲放鄭聲矣, 不當於此又收之以備六籍也, 此則曾南豐於戰國策, 劉元城於三不足之論皆嘗言之, 又豈俟吾言而後白也哉!
제 주장의 병폐는 상간 지방이나, 유강[洧] 유역의 사람들에게나 죄를 짓는 데 불과할 뿐이지만, 그 힘은 오히려 선왕의 음악을 완성하기에 충분합니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두 시로서는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유’편에서 범씨의 주장을 택한다면 또한 정나라의 음악을 내친 것과 비슷하니 어떻게 이치가 자연스러워 본시 빼앗을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로 인해서 ‘상중’편에 대한 주장을 읽어 보고서 과거의 논의가 경계에 이르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또한 백공이 다시 책을 만들 수 없게 된 점을 애통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책에 후서를 쓴 다음에 만일 백공이 다시 살아나 이 주장을 듣는다면 듣자마자 옳다고 여긴다고야 못하겠지만, 또한 마땅히 나 때문에 느긋하니 한 번 웃었을 것입니다. 아! (그가 세상을 떠나고 없는 것이) 슬플 따름입니다.
大抵吾說之病, 不過得罪於桑間洧外之人, 而其力猶足以完先王之樂. 彼說而善, 則二詩之幸甚矣. 抑其於湊洧而取范氏之說, 則又似以放鄭聲者, 豈理之自然, 固有不可奪耶? 因讀桑中之說而惜前論之不及竟, 又痛伯恭之不可作也, 因書其後, 以爲使伯恭生而間此, 雖未必遽以爲然, 亦當爲我逌然而一笑也. 嗚呼悲夫!
신당서 「예문지」를 읽고 讀唐志
【해제】이 글은 신당서 권11 「예문지」의 한 구절을 화제로 삼아 문론(文論)을 전개한 것이다.
구양자(歐陽子: 歐陽修)는 이렇게 말했다. “삼대 이상은 다스림이 하나에서 나왔고 예악은 온 세상에 통달했다. 그러나 삼대 이하는 다스림이 두 갈래에서 나왔고 예악은 공허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을 지극한 의론이다. 그러나 그는 정사와 예악이 하나에서 나오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만 알았을 뿐 도덕과 문장은 더욱 두 갈래에서 나오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옛 성현은 그 문장이 융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것이 어떻게 배움에 뜻을 두어서 이와 같은 문장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마음속에 이러한 실상이 있으면 바깥에는 반드시 이런 문장이 있는 것이니, 마치 하늘에 이 기가 있으면, 반드시 일월성신의 광채가 있고, 땅에 이 형상이 있으면 반드시 산천초목이 열지어 늘어서는 것과 같다. 성현의 마음이 이 이러한 정명하고 순수한 진실을 마음 속에 널리 가득채우고 있으면 밖으로 드러나는 것도 저절로 조리가 분명하게 되고, 빛나는 광채를 발하며 드러나 가릴 수 없으니, 언어에 의탁하고, 서책에 기록한 다음에야 문장이라고 이를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한 몸이 온갖 일을 응대하면서 행동거지를 사람들이 보게 되면 그들이 모두 문장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선 최상의 것만 들어서 말한다면 역의 괘와 획·시경의 노래·서경이 기록한 말·춘추에 서술된 일과 예의 위엄과 악의 절도있는 연주 등이 모두 이미 육경에 진열되어 영원한 후세에까지 드리우고 있으니, 그 문장의 융성함은 후세가 진실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융성해서 따라 잡을 수 없는 이유가 어찌 유래가 없을 것이며, 어찌 세상이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자께서는 “문왕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문장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니, 이것은 비록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음을 이미 아신 것이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주저하고 돌이켜 보면서 의심이 없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 흥망성쇠를 추론해 보면 또한 이는 모두 천명이 하시는 데에서 나온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그 체제가 매우 무거우니 어떻게 세속에서 말하는 ‘문장’이라는 것이 감당할 것이겠습니까?
歐陽子曰: ‘三代而上, 治出於一而禮樂達於天下. 三代而下, 治出於二而禮樂爲虛名.’ 此古今不易之至論也. 然彼知政事禮樂之不可不出於一, 而未知道德文章之尤不可使出於二也. 夫古之聖賢, 其文可謂盛矣. 然初豈有意學爲如是之文哉? 有是實於中, 則必有是文於外. 如天有是氣, 則必有日月星辰之光耀; 地有是形, 則必有山川草木之行列. 聖賢之心旣有是精明純粹之實以旁薄充塞乎其內, 則其著見於外者, 亦必自然條理分明, 光輝發越而不可揜, 蓋不必託於言語․著於簡冊而後謂之文. 但自一身接於萬事, 凡其語黙動靜, 人所可得而見者, 無所適而非文也. 姑擧其最而靑, 則易之卦畫, 詩之詠歌, 書之記言, 春秋之迷事, 與夫禮之威儀, 樂之節奏, 皆已列爲六經而垂萬世, 其文之盛, 後世固莫能及. 而不可及者, 豈無所自來? 而世亦莫之識也. 故夫子之言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蓋雖已決知不得辭其責矣, 然猶若逡巡顧望而不能無所疑也. 至於推其所以興衰, 則又以爲是皆出於天命之所爲, 而非人力之所及. 此其體之甚重, 夫豈世俗所謂文者所能當哉?
맹가씨(孟軻氏)가 세상을 떠나자 성인의 학문이 전수되지 못했고, 세상의 선비들은 근본을 등지고 말단을 쫓아 다녔으며, 도를 알고 덕을 길어 그 내면을 채우지 못하고 헛되니 문장을 사업으로 여기는 데에만 급급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전구 시대에도 신·상·손·오의 술, 소·장·범·채의 변설, 열어구·장주·순황의 말, 굴평의 부에서부터 진·한 시대 즈음에 한비·이사·육생·가보·동상·사천·유향·반고에 이르기까지, 아래로는 엄안·서락의 부류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모두 먼저 그 진실을 갖고 잇었고, 그 뒤에 말에 의탁을 했습니다. 오직 근본이 없고 도에서 한결 같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까닭에 군자들이 간혹 부끄러워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또한 송옥·상여·옥포·양웅의 무리들에 이르러서는 하나같이 부화한 것만을 숭상해서 말할만한 진실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양웅의 태현(경)·법언은 또한 장양(長楊)의 교렵등의 부류를 조금 그 음절을 변화시킨 것으로 처음부터 진실로 도를 밝히고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경(東京) 이후로 수·당에 이르기까지 수 백 년 동안 아래로 내려올수록 더욱 쇠퇴했으니, 도에서는 더욱 멀어져서 진실성이 없는 문장들은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孟軻氏沒, 聖學失傳, 天下之士背本趨末, 不求知道養德以充其內, 而汲汲乎徒以文章爲事業. 然在戰國之時, 若申․商․孫․臭之術, 蘇․張․范․蔡之辯, 列禦寇․莊周․荀況之言, 屈平之賦, 以至秦漢之間韓非․李斯․陵生․賈傳․董相․史遷․劉向․班固, 下至嚴安․徐樂之流, 猶皆先有其盲而後託之於言. 唯其無本而不能一出於道, 是以君子猶或羞之. 及至宋玉․相如․王褒․揚雄之徒, 則一以浮華爲尙, 而無實之可言矣. 雄之太玄․法言, 蓋亦長楊校獵之流而粗愛其音節, 初非實爲明道講學而作也. 東京以降, 訖于隋唐, 數百年間, 愈下愈衰, 則其去道益還而無實之文亦無足論.
한유씨(韓愈氏)가 나와 비로소 그 비루함을 깨닫고 탄식하면서 한 시대를 호령하며, 말을 올려 시·서 육예의 저술을 따르고자 하면서 이전 시대의 여러 사람들이 했던 것보다 더욱 심하게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세월을 허비했다. 그러나 요행히 뿌리도 없고 진실도 없는 것들을 믿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대략이나마 알게되었고, 이로 인해 그 근원을 파헤쳐 마침 깨우침에 이르렀다. 이에 「원도」를 비롯한 몇 편을 비로소 만들었으니 그의 말에 “뿌리가 무성한 것은 그 열매를 맺고, 비옥한 옥토는 그 광채가 빛나듯이 어질고 의로운 사람은 그 말이 풍성하다”는 대목이 있다. 그의 문도가 화답하면서 또한 “도에 조예가 깊지 않고서 문장에 능한 이는 없다”고 했으니, 또한 현명함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의 글을 읽어보면 아첨이나 장난에서 나와 떠돌듯이 내용이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가 파헤치고자 했던 도 역시 한낮 그 큰 체제만을 말할 수 있었을 뿐 깊이 실제로 행하는 효과를 토론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설령 그의 말이 문장으로 만들어진 것들도 모두 이 도로 말미암아 나오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옛 사람을 논하면서 곧장 굴원·맹가·마천·상여·양웅을 일등급으로 여기면서도 오히려 동·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고, 당대의 폐단을 논하면서도 ‘문장이 이미 나오지 않더니 마침내 신령한 성인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한탄할 뿐이었다. 그의 문도가 의론하면서는 다만 ‘(남의 글을) 도적질하고 멋대로 훔쳐서 문장을 짓는다’는 것을 병폐로 삼을 뿐 퇴락한 풍조를 크게 진작시켜 사람들이 스스로 문장을 짓게 한 것은 한(韓)의 공이라고 여겼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학문을) 주고받는 즈음에 도와 문장을 찢어서 두 가지 것으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중과 완급 본말과 빈주의 구분 역시 뒤집어서 거꾸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韓愈氏出, 始覺其陋, 慨然號於一世, 欲去陳言以追詩書六藝之作. 而其弊精神․糜歲月, 又有甚於前世諸人之所爲者. 然猶幸其略知不根無實之不足恃, 因是(6-3655)頗泝其源而適有會焉, 於是原道諸篇始作, 而其言曰: ‘根之茂者其實遂, 膏之沃者其光曄, 仁義之人, 其言藹如也.’ 其徒和之, 亦曰未有不深於道而能文者, 則亦庶幾其賢矣. 然今讀其書, 則其出於諂諛戱豫, 放浪而無實者自不爲少. 若夫所原之道, 則亦徒能言其大體, 而未見其有深討服行之效, 使其言之爲文者皆必由是以出也. 故其論古人, 則又直以屈原․孟軻․馬遷․相如․楊雄爲一等, 而猶不及於董․賈; 其論當世之弊, 則但以詞不己出而遂有神徂聖伏之嘆. 至於其徒之論, 亦但以剽掠僭竊爲文之病, 大振頹風, 敎人自爲爲韓之功, 則其師生之間, 傳受之際, 蓋未免裂道與文以爲兩物, 而於其輊重緩急․本末賓主之分又未免於倒懸而逆置之也.
이 때 이후로 또 다시 쇠퇴한 지 수십, 백여년 뒤에 구양자가 나왔다. 그의 문장의 오묘함은 이미 한씨(韓氏)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니, 그가 ‘다스림이 하나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순자·양웅 이래로 아무도 언급하지 못했던 것이요, 한(韓)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것은 거의 도에 가까운 듯하다. 그러나 그의 평생의 말과 행실의 실상을 살펴보면 또한 한씨의 병폐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또 그의 문도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들이 외우는 말 가운데 이미 “우리 늙은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대에게 우리 문장[斯文]을 부탁한다”고 한 것이 있고, 또 반드시 “내가 문장[文]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도와 함께 한다”고 한 것도 있다. 그를 추존하면서 이미 ‘오늘날의 한유’라고 했고, 또 반드시 ‘문장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 주장을 펴곤 했다. 앞의 주장에서 보자면 도와 문장은 나는 모르겠거니와 과연 하나인가? 둘인가? 뒤의 주장으로 보자면 문왕·공자의 문장은 나는 모르겠거니와 한·구의 문장과 과연 같은 반열에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아! 학문이 강론되지 못한 것이 오래로구나. 습속의 잘못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당서를 읽다가 느낀 것이 있어 그 내용을 적고서 바로잡고자 한다.
自是以來, 又復衰歇. 數十百年而後, 歐陽子出, 其文之妙, 蓋已不愧於韓氏, 而其曰治出於: 公者, 則自荀․揚以下皆不能及, 而韓亦未有聞焉. 是則疑若幾於道矣. 然考其終身之言與其行事之實, 則恐其亦未免於韓氏之病也. 抑又嘗以其徒之說考之, 則誦其言者旣曰 ‘吾老將休, 付子斯文’ 矣, 而又必曰 ‘我所謂文, 必與道俱’ ; 其推尊之也, 旣曰今之韓愈矣, 而又必引夫 ‘文不在玆者’ 以張其說. 由前之說, 則道之與文, 吾不知其果爲一耶? 爲二耶? 由後之說, 則文王․(6-3656)孔子之文, 吾又不知其與韓․歐之文果若是其班乎否也. 嗚呼, 學之不講久矣, 習俗之謬, 其可勝言也哉!吾讀唐書而有感, 因書其說以訂之.
「대기」를 읽고 讀大紀
우주에는 하나의 리(理) 뿐이다. 하늘은 이것을 얻어서 하늘이 되었고, 땅은 이것을 얻어서 땅이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태어나는 모든 것은 또 이것을 얻어서 본성[性]을 삼는다. 펼치면 삼강(三綱)이 되고, 그 벼리는 오상(五常)이 되니 모두가 이 리의 유행이요 어느 곳이나 없는 곳이 없다. 늘고 줄어들고 비었다 차는 순환이 멈추지 않으므로 어떤 것도 있지 않았던 때로부터 사람과 사물이 모두 사라진 이후까지, 끝나면 다시 시작되고, 시작되면 다시 끝을 맞이해서, 조금이라고 그친 적이라고는 없다. 유자(儒者)는 여기에서 이미 마음의 본연을 얻을 수 있으니 안과 밖, 정밀하거나 거칠거나 조금의 간격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며, 가르침을 세워 교화를 드리우는 것도 또한 조금의 조작이나, 사소한 사사로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자연스러운 리로 인해서 자연스러운 공을 이루는 것이니, 천지에 참여해서 변화와 양육을 도우면서 밝거나 어둡거나, 크거나 작거나 간에 단 하나의 물건도 빠트리는 일이 없는 것이다.
宇宙之間, 一理而已. 天得之而爲天, 地得之而爲地. 而凡生於天地之間者, 又各得之以爲性. 其張之爲三綱, 其紀之爲五常, 蓋皆此理之流行, 無所適而不在. 若其消息盈虛, 循環不已, 則自未始有物之前, 以至人消物盡之後, 終則復始, 始復有終, 又未嘗有頃刻之或停也. 儒者於此旣有以得於心之本然矣, 則其內外精粗自不容有纖毫之間, 而其所以修己治人․垂世立敎者, 亦不容其有纖毫造作輕重之私焉. 是以因其自然之理而成自然之功, 則有以參天地․贊化育, 而幽明巨細, 無一物之遺也.
석씨(釋氏)의 경우에는 ‘인지(因地)’의 처음부터 이 리와 이미 배치된다. 그런데도 견해가 어긋나지 않고, 행실이 잘못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들이 학문은 하는 본심은 바로 이 리가 간격이 없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리가 없는 지경에 한 자리를 얻어 스스로 편안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요, 이 리가 그치지 않고 유행해서 리가 없는 한 순간을 얻어 제 멋대로 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임금과 어버이를 등지고 처와 자식을 버리며, 산림에 들어가 몸뚱이와 운명을 내던지고 공무적멸(空無寂滅)이라고 부르는 경지를 구해서 도망치는 것이다. 그들의 도량은 이미 협소하고 그들의 형세 역시 이미 거슬렸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가짐이 견고하고 힘쓰는 것이 전일하고 정치한 것은 또한 보통사람을 넘어서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결국 원하는 데로 되고 실제로 본 것도 있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말과 행실로 찾아본다면 그들이 보았다는 것이 비록 스스로는 지극히 현묘하고 오묘해서 사려와 언어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들이 말하는 천지를 궁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으며, 본래 그런 면모를 바꿀 수 없는 진실한 이치[實理]에 대해서는 어둑하니 하나도 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는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아지 못하고, 비록 스스로는 ‘본성을 보면 부처를 이룬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본성을 아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떳떳한 윤리를 모조리 없애버리고 짐승의 영역으로 떨어지고서도 도리어 자신에게 죄가 있는 줄을 아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의 실제로 잘못된 견해가 그를 빠트린 것이지 그의 마음이 옳지 않아 일부러 이렇게 세상을 미혹하게 하고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장이 막다른 데 이르른 연후에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는 의론에 이르러서는 처음에는 이렇게 도망치는 말로 앞의 잘못을 덮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떳떳한 본성의 선함이 끝내 다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없애고 난 나머지에도 오히러 이러한 것이 겨우 보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실제로 잘못된 견해에 이끌리기 때문에 그 뜻은 있지만 그 리는 없고, 말은 할 수 있지만 결국 그 말을 실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若夫釋氏, 則自其因地之初, 而與此理已背馳矣. 乃欲其所見之不差, 所行之(6-3657)不繆, 則豈可得哉? 蓋其所以爲學之本心, 正爲惡此理之充塞無間, 而使己不得一席無理之地以自安; 厭此理之流行不息, 而使己不得一息無理之時以自肆也. 是以叛君親․葉妻子, 入山林․捐軀命, 以求其所謂空無寂減之地而逃焉. 其量亦已隘而其勢亦已逆矣. 然以其立心之堅苦․用力之精專亦有以大過人者, 故能卒如所欲而實有見焉. 但以其言行求之, 則其所見雖自以爲至玄極妙, 有不可以思慮言語到者, 而於吾之所謂窮天地․亘古今, 本然不可易之實理, 則反瞢然其一無所覩也. 數自以爲直指人心而實不識心, 雖自以爲見性成佛而實不識性, 是以殄滅彝倫, 墮於禽獸之域, 而猶不自知其有罪. 蓋其實見之差有以陷之, 非其心之不然, 而故欲爲是以惑世而罔人也. 至其爲說之窮, 然後乃有不舍一法之論, 則似始有爲是遁詞以蓋前失之意. 然亦其秉彝之善, 有終不可得而殄滅者. 是以剪伐之餘, 而猶有此之僅存. 又以牽於實見之差, 是以有其意而無其理, 能言之而卒不能有以踐其言也.
석씨가 석씨일 수 있는 까닭은 시종과 본말이 이와 같은데 불과하니 말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공적(空寂)에 대한 주장이 있어 물욕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현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또 현묘한 주장이 있어서 형기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지자들이 기뻐했습니다. 생사와 윤회에 대한 주장이 있어서 스스로 죄나 고통에 빠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세상에서 품파는 종이나 불때는 하녀 머리를 풀어헤친 도적들이 엎드리며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학설이 장황하게 불타듯이 빛나고, 오랜 세월을 벼락치듯이 밝히고 있는데도 우리의 무리들이 꿈틀대듯이 몸을 낮추고 기운을 숨겨가며 그들을 위해 바삐 복역하면서도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요행이 세상에 뛰어난 인걸이라도 있게 되면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들을 성토하고 치죄하고 싶은 마음을 갖지만 또한 그들의 실제 잘못된 견해를 궁구하지 못하고, 환상적인 견해요 헛된 이론이라고만 비난하며, 거대한 천리의 전체로서 바로잡지 못하고, 남녀의 정기가 교통해서 만물을 생성 화육한다는 한 가지 주장만을 편벽되게 인용하면서 주로 삼으니 이미 그 요령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한낮 오랑캐의 못된 호칭만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우리 무리에 대해서는 또한 내수와 자치의 실상을 가르치지도 않고서 한낮 중화의 여러 성인들을 소중이 여길만 하다고 뻐길 뿐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저는 앉은 채고 싸워서 깨끗이 일소하는 공로는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왕유의 금[往遺之禽]과 같은 격이 되어 거꾸로 우리 당(黨)의 치욕이 될까 두렵습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凡釋氏之所以爲釋氏者, 始終本末不過如此, 蓋亦無足言矣. 然以其有空寂之說而不累於物欲也, 則世之所謂賢者好之矣. 以其有玄妙之說而不滯於形器也, 則世之所謂智者悅之矣. 以其有生死輪回之說而自謂可以不淪於罪苦也, 則天下之傭奴爨婢․黥髡盜賊亦匍匐而嚴之矣. 此其爲說所以張皇輝赫․震耀千古, 而爲吾徒者方且蠢蠢焉鞠躬屛氣, 爲之奔走服役之不暇也. 幸而一有間世之傑, 乃能不爲之屈, 而有聲罪致討之心焉, 然又不能究其貢見之差, 而詆以爲幻見空說; 不能正之以夫理全體之大, 而偏引交通生育之一說以爲主, 則旣不得其要頒矣, 而徒欲以戎狄之醜號加之, 其於吾徒又未嘗敎之以內脩自治之實, 而徒驕之以中華列聖之可以爲重, 則吾恐其不唯無以坐收摧陷廓淸之功, 或乃往遺之禽而反爲吾黨之詬也. 鳴呼惜哉!
두 진씨가 간쟁한 의론의 유묵을 읽고 讀兩陳諌議遺墨
【해제】이 글은 경원 5년(1199, 기미, 70세) 8월 하순 경에 진사석(陳師錫)이 남긴 서첩과 진관(陳瓘)이 올린 표문을 소재로 삼아 왕안석의 학술 경향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세상에는 저절로 바꾸지 못할 공론(公論)이 있지만 말하는 사람이 혹 치우친 데서 벗어나지 못해 대부분 (공론을) 잃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 사람들의 희령일록(熙寧日錄)에 대한 변론이 이런 경우입니다. 기억하기로는 작년에 돌아가신 단전(端殿) 상요(上饒) 왕공(汪公: 汪應辰)을 모시고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일록을 언급하게 되었는데 희(熹)는 망령되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록이 본시 사설이기는 하지만, 여러 현자들이 공격한 것 역시 요령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말하는 사람은 모독하고 듣는 사람은 의심하면서 힘쓴 것은 많았지만 드러난 공을 적었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예전에 그 책을 손에 넣어 살펴보니 안석(安石)이 신조(神祖: 神宗)의 총명함을 미혹시켜 어지럽히고, 마음씀씀이를 변화시켜 (중원을 도모하고자 하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고서 도리어 한 시대의 재앙의 근원을 만들었는데, 그 은미하고 심절한 것이 모두 이 책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말의 예봉과 붓의 형세가 종횡으로 마음대로 오가며, 화려하게 빛나며 속이는 것이 또한 안석의 입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이요, 안석의 손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채변(蔡卞)이 지어낸 말에는 본시 이런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행사에 드러난 것들 가운데 심절하고 저명한 것과 이미 서로 표리를 이루고 있으니, 또한 만년의 원망스런 필치로 더한 내용을 기다린 다음에야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에 숨넘어가는 순간에도 지모를 발휘해서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나중에 붓 끝에 올리려는 선비들이 장막 사이에서 심각하게 도모하고 은밀하게 계획을 짜면서 비록 힘을 다해 찾아 묻고, 뜻을 다해 형용하고자 했으나, 형세상 이처럼 모두를 다 얻을 수 없었고, 전해들은 내용인지라 서로 말이 달라서, 진실과 거짓이 반반이 뒤섞여 사람들이 나쁜 점만을 지나치게 비방한다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임금께서 알게 하지 말라[勿令上知]’라는 말은 세상에 전해져 오는 것이지만, 결국 손으로 쓴 것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육전(陸佃)같은 사람이 숨기고 핑계를 대기도 했던 것입니다. 비록 원우 연간의 여러 현자들의 힘으로도 힘들게 쟁론하고 변론했지만, 바로잡지는 못했던 것입니다(이것은 육전의 「공답사원취문장(供答史院取問狀)」에 보입니다). 어떻게 운이 좋아 그 무리들이 스스로 잘못된 계획 때문에 이러한 참된 흔적을 드러내 온 세상에 그들의 악함을 폭로했으니, 곧바로 멋대로 행동하며 이치에 어긋나는 실상을 주워 모아 나라를 미혹시키고 조정을 오도한 죄를 바로잡으려면 곧장 안석을 수괴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저절로 바꾸지 못할 공론이라는 것이니, 이왕의 잘못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또 후세의 미혹을 열어주기에도 충분합니다. 입니다. 어떻게 혐의를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이유 때문에 도리어 완곡하고 에두르는 말을 하면서 만들고 위조하고 덧붙였고·거짓으로 무고하며 비방하는 책이라고 지목하면서 빼거나 삭제함으로써 그 흔적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까?” 왕공(汪公)은 한숨을 내쉬면서 깊이 어리석은 제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한락(閑樂) 진공(陳公: 陳師錫)이 남긴 서첩과 요재(了齋) 진공(陳公: 陳瓘)이 올린 표문의 원고를 보고서, 이전의 말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스스로 학문이 진보하지도 못해서 아는 것이 지난 시절보다 뛰어나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왕공(汪公)을 다시 볼 수 없는 것도 한스럽습니다. 이에 책을 덮고 큰 한숨을 내쉬고서 그 뒤에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天下有自然不易之公論, 而言之者或不免於有所避就, 故多失之. 若諸公熙寧日錄之辯是也. 嘗記頃年獲侍坐於故端殿上饒汪公, 縱言及於日錄, 熹因妄謂日錄固爲邪說, 然諸賢攻之亦未得其要領, 是以靑者瀆而聽考疑, 用力多而見功寡也. 蓋嘗卽其書而考之, 則凡安石之所以惑亂神祖之聰明而變移其心術, 使不得遂其大有爲之志, 而反爲一世禍敗之原者, 其隱微深切, 皆聚此書. 而其詞鋒筆勢縱橫捭闔, 煒燁譎誑, 又非安石之口不能言, 非安石之手不能書也. 以爲蔡卞撰造之言, 固無是理. 況其見諸行事, 深切著明者, 又已相爲表裏, 亦不待晩年懟筆有所增加而後爲可罪也. 然使當時用其垂絶之智擧而焚之, 則後來載筆之士於其帷幄之間深謀密計 雖欲畢力搜訪, 意形容, 勢必不能得之如此之悉. 而傳聞異詞, 虛實相半, 亦不能使人無溢惡之疑. 且如‘勿令上知’之語, 世所共傳, 終以手筆不存, 故使陸佃得爲隱諱. 雖以元祐衆賢之力, 爭辯之苦而不能有以正也.(此見陸佃供答史院取問狀) 何幸其徒自爲失計, 出此眞蹟以暴其惡於天下, 便當摭其肆情反理之實, 正其迷國誤朝之罪, 而直以安石爲誅首, 是乃所謂自然不易之公論. 不唯可以訂已往之謬, 而又足以開後來之惑. 柰何乃以畏避嫌疑之故, 反爲迂曲回互之言, 指爲撰造增加․誣僞謗諭之書, 而欲加刊削, 以滅其迹乎? 汪公歎息, 深以愚言爲然. 今觀閑樂陳公遺帖․了齋陳公表稿, 追憶前語, 自愧學之不進, 所知不能有以甚異於往時, 又歎汪公之不可復見也, 爲之掩卷太息而書其後.
또 예전에 요옹(了翁)의 만년 의론이 대부분 이 서첩의 언저리에서 나온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반성하며 잘못을 고치려는 글에서는 한 마디도 이것을 언급한 것이 없이, 오직 ‘구산 양씨가 진실로 그 기기를 발했다’고만 했으니(이 말은 책심에 보입니다. 형의 손자인 점(漸)에게 준 것으로 점은 기수(幾叟)의 소경(少卿)이었고, 나중에 이름을 연(淵)으로 바꿨습니다. 기수는 양공의 사위로 예전에 ‘다시 저 늙은이[老子]를 머물게 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라는 양공(楊公)의 말을 요옹에게 고한 적이 있습니다. 요옹은 처음에 그 말에 깜짝 놀랐는데, 기수가 다시 반복해서 그 말을 들려주자 이내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이 때문에 “내가 스스로 반성하며 잘못을 고치려는 것은 이 한 마디에 힘입었다. 점 또한 이때에 자신이 들은 내용을 나의 잘못을 경계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논하는 사람들도 사뭇 의아해 했습니다. 지금 살펴보면 이 글을 지은 것은 실재로 건중·숭령 사이였습니다(이 글에 “내 벗이 유배지를 옮겼는데 오히려 머물기에 좋은 곳이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아마도 원주(袁州)에 머물 때인 듯합니다). 또 그의 말은 일록을 오히려 채경에게 청탁된 것으로 여기고, 그 나중에 요옹이 합포(合捕)에서 쓴 존요집에서도 또한 곧바로 안석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대관 초년에 이른 다음에 사명(四明)의 논의가 비로소 시작되었으니(표문을 올린 것은 정화 원년이지만 공이 명주에 머문 것은 실제로 대관 초년입니다), 그 말의 유래를 유추해 보면 오직 양씨에게 공적을 귀결시킬 뿐 한락에게까지 미칠 수 없다는 것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 후의 글들을 돌이켜 보면 비록 ‘하늘이 안석에게 무고하고 어그러진 마음을 스스로 베껴 주었다’고 했지만 오히려 ‘원망하는 마음에 붓을 들어 내용을 덧붙이며 허물을 신고(神考)에게 돌렸다’고 말한 것은 결국 ‘에두르며 치우쳐 잘못을 범했다’는 데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抑又嘗怪了翁晩歲之論多出此帖之餘, 然其自訟改過之書, 曾無一言以及此. 而獨謂龜山楊氏實發其機,(語見責沈. 其所贈兄孫漸者, 卽幾叟少卿, 後改名淵者也. 幾叟, 楊公之壻, 嘗以楊公之語告翁曰: ‘更留那老子做甚底? ’ 翁初亦駭其言, 幾叟復爲反復申言之, 翁乃悔悟, 故其語曰: ‘余之自訟改過, 賴其一言. 而漸於是時亦以所聞警余之謬云.’) 是則論者亦頗疑之. 而以今考之, 此書之作寔在建中․崇寧之間, (書云: ‘吾友遷竊, 猶居善地’, 疑居袁州時也.) 且其言猶以曰錄爲蔡卞之所託. 而其後了翁合捕尊堯之書, 亦未直攻安石也. 至於大觀初年, 而後四明之論始作.(進表雖在政和元年, 然公居明州, 實大觀初年也.) 則其推言所自, 獨歸功於楊氏, 而不及閑樂, 有不可誣者矣. 顧其後書雖謂天使安石自寫誣悖之心, 然猶有‘懟筆增加, 歸過神考’之云, 則終未免於所謂有所回互避就而失之者也.
또 한락의 이 글의 요지를 살펴보니 안석의 죄상을 극히 잘 드러내었습니다만 그 일을 살펴보면 몇몇 조목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조상들의 법을 바꾸고 삼대의 정사를 시행했다’거나, ‘춘추를 폐지하고 인주에게도 북면하는 예가 있다’고 한 것이나, ‘학문이 본시 형명 도수에서 나와서 성명과 도덕에 대해서는 충분치 못하다’거나, ‘경의 오의를 풀이하는 것이 대부분 선유들에게서 나왔지만 방증으로 석씨를 인용했다’거나 하는 몇몇 조목들의 경우, 안석은 진실로 자신의 죄를 회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병을 얻게 된 원인과 재앙을 남긴 근본 이유는 한락의 말에도 미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가 지목하며 설명하는 것이 그 자체로 사람으로 하여금 여한이 없게는 하지 못합니다.
又觀閑樂此書之指, 所以罪狀安石者至深切矣, 然考其事, 不過數條. 若曰改祖宗之法而行三代之政也, 廢春秋而謂人主有北面之禮也, 學本出於刑名度數而不足於性命道德也, 釋經奧義多出先儒而旁引釋氏也. 是數絛者, 安石信無所逃其罪矣. 然其所以受病之源, 遺禍之本, 則閑樂之言有所未及, 而其指以爲說者, 亦自不能使人無可恨也.
오늘날 다른 것은 논할 것도 없이 우선 안석의 평소 행실과 일록의 첫 장으로만 말해 보겠습니다. 안석이 자신의 행실을 통해 조정에 자리 잡게 된 큰 절목은 그 당시에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처음 신종을 뵈었을 때 곧장 한나라 문제·당나라 태종은 본받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말했고, 다시 제갈량(諸葛亮)·위현성(魏玄成: 魏徵)이 했던 일은 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으로 자임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식견과 뜻은 진·한 이래의 여러 유자들에게서조차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는데, 어떻게 당시의 많은 현자들이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사람됨은 바탕은 맑고 지조가 있었다지만 기국은 본래 편협했고, 뜻은 높고 원대했지만 학문은 실제로 그저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가 논한 내용들은 대개가 보고 듣거나 억측한 내용들이 근사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런 것을 믿고 뽐내며 스스로를 족히 성인이라 할 만하다 여기고, 다시 격물치지·극기복례에 종사하고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힘써 추구해서 할 수 없는 것을 넓혀나갈 줄을 알 지 못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세상사에 대해 매양 앞에서는 경솔하게도 임의대로 처리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또 뒤에서는 사납고 고약한 성질로 사적인 것을 좇아 일을 그르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그가 병을 얻게 된 원인이지만 한락은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今亦無論其他, 而姑以安石之素行與日錄之首章言之, 則安石行己立朝之大節在當世爲如何? 而其始見神宗也, 直以漢文帝․唐太宗之不足法者爲言, 復以諸葛亮․魏玄成之不足爲者自任, 此其志識之卓然, 又皆秦漢以來諸儒所末聞者, 而豈一時諸賢之所及哉!然其爲人, 質雖淸介而器本偏狹, 志雖高遠而學實凡近. 其所論說, 蓋特見聞億度之近似耳. 顧乃挾以爲高, 足己自聖, 不復知以格物致知․克己復禮爲事, 而勉求其折未至, 以增益其所不能, 是以其於天下之事, 每以躁率任意而失之於前, 又以狠愎徇私而敗之於後. 此其所以爲受病之原而閑樂未之言也.
그가 재앙을 끼친 근본 원인은 그가 군주의 신임을 얻은 초기부터 이미 군주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점이 있었습니다. 군주로 하여금 그 높은 것을 기뻐하게 만들고, 그 신기한 것에 놀라게 하며,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을 맡기고서 날마다 그의 말을 듣게 되면서는 또 이 사람이 과연 없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힘껏 많은 신하들을 물리치고 한결 같이 그가 하는 대로만 말을 들어주면서 오직 ‘어느 날 (이 사람이) 나를 떠난다면 더불어 나의 일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는 것만 걱정했던 것입니다. 또 그 커다란 계책이 이미 오래되자 점점 철저하게 젖어들어, 마침내는 마음과 신령이 융회되어 그와 함께 하나가 되어서는 그의 병권을 끌어 당겨 스스로 조종하게 되었습니다. 그 잇달은 움직임과 늦췄다 늘리는 것이 또 내게 있게 되면서 그를 쓰거나 버리거나, 내치거나 머물게 하거나 내게는 별문제가 되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안석이 갑자기 떠나게 되자 천하의 정사가 비로소 천자에게서 다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옹이 ‘모든 기미들이 원풍에 의해 홀로 움직였다’는 말이나, 한락이 ‘금릉으로 내치고서 10년동안 부르지 않았다’는 말은 모두 이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옹은 홀로 움직이는 줄만 알았지 그 움직이는 것들이 안석의 기틀[機]임을 알지 못했고, 한락은 안석의 몸이 정사에 쓰이지 않은 줄만 알았지 그의 마음이 (정사에) 쓰이지 않은 적이 없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안석이 했던 것들이 결국에는 능묘의 존엄함에 함께 붙여졌고, 중요한 가르침과 교훈에 의탁되어 온 세상 사람들이 더욱 더 의론할 수 없게 되어버려 황하가 터져 물고기들이 썩어 문드러진 이후에나 그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안석이 (후세에) 재앙을 끼친 근본 이유인데 한락은 또한 말하지 못했습니다.
若其所以遺禍之本, 則自其得君之初而已有以中之, 使之悅其高․駭其奇而意斯人之不可無矣. 及其任之以事而日聽其言, 則又有以信夫斯人之果不可無也, 於是爲之力拒群言而一聽其所爲, 唯恐其一旦去我而無與成吾事也. 及其訐謨旣久, 漸涵透徹, 則遂心融神曾而與之爲一, 以至於能掣其柄而自操之, 則其連動弛張, 又已在我, 而彼之用舍去留, 不足爲吾重輕矣. 於是安石卒去, 而天下之政始盡出於宸衷. 了翁所謂 ‘萬幾獨運於元豐’, 閑樂所謂 ‘屛蒹金陵, 十年不召’ 者, 蓋皆指此. 然了翁知其獨運, 而不知其所運者乃安石之機; 閑樂見安石之身若不用, 而不知其心之未嘗不用也. 是以凡安石之所爲, 卒之得以附於陵廟之尊, 託於謨訓之重, 而天下之人愈不敢議, 以至於魚爛河決而後已焉. 此則安石所以遺禍之本, 而閑樂亦未之言也.
한락이 조종의 법도는 삼가며 지키면서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더욱 통절하니, 이 주장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조종이 법을 만든 까닭은 또한 일로 인해 마땅한 것을 마련해서 한 시대의 편리함을 좇으려는 것이지만, 이전 시대를 우러르고 따르기도 하고, 세속의 풍속을 굽어보며 좇기도 한 것이 오히려 많았지 그 모두가 반드시 생각을 극진히 하고, 성현의 지혜를 본받아 자손에게 남겨 영원토록 지키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행한 지 오래되어 폐단이 발생하면 변화시켜 소통시키는 것은 바로 후대 사람들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력(慶曆) 초기에 두(杜: 杜衍)․범(范: 範仲淹)․한(韓: 韓琦)․부(富: 富弼) 등 여러분들이 변경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서 논하는 자들이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또 수 십 년이나 되었으니 그 폐단은 진실로 이전보다 더욱 심할 것입니다. 당시에 의론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마땅히 변경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정헌공(呂正歔公: 呂公著) 부자의 가전 및 하남 정씨(河南程氏)․미산 소씨(眉山蘇氏)의 글에 모두 살필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비록 한락(閑樂)의 이 논의가 마치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지만 ‘인황(仁皇)의 말기에 개혁하기에 적당한 시기’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와 같다면 안석(安石)의 변법(變法)은 본시 시기가 맞지 않다고 할 수 없고, 그가 마음먹은 것도 그 올바름을 잃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경솔하게 제 마음대로 하면서 충분히 강구하고 정치하게 생각하지도 못하면서 완전하기 때문에 폐단이라곤 전혀 없으며 오래 갈수도 있는 계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온 백성들이 편케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때의 원로 대신들과 현사·대부들이 무리를 지어 일어나 힘껏 쟁론했지만, 그들은 간혹 이해의 실상을 파헤치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주장이 대부분 안석의 비전보다 낮은 데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안석은 마음속으로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온 세상 사람들 가운데 참으로 자기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기게 되어 속으로 남몰래 그 말들이 자신의 병이 되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이로 인해 마침내 멋대로 사납고 고약한 성질을 부리며 행실이 전도되고 베푸는 것이 거꾸로 되어 진실로 다시는 그가 능히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기고 이해의 실상을 추구할 것이란 기대를 할 수도 없게 되었고, 평소에 자임하던 본심을 채우는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신법(新法)의 재앙이 결국 넘쳐흐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구제하지 못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한락(閑樂)이 비록 깊이 그의 잘못을 논박했지만, 그가 잘못인 이유가 여기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 다른 사람에게 여한을 남기게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若閑樂之論祖宗法度但當謹守而不可變, 尤爲痛切, 是固然矣. 然祖宗之所以爲法, 蓋亦因事制宜, 以趨一時之便, 而其仰循前代, 俯狗流俗者, 尙多有之, 未必皆其竭心思․法聖智以遺子孫, 而欲其萬世守之者也. 是以行之旣久而不能無弊, 則變而通之, 是乃後人之責. 故慶曆之初, 杜․范․韓․富諸公變之不遂, 而論者至今以爲恨. 况其後此又數十年, 其弊固當益甚於前, 而當時議者亦多以爲當變. 如呂正歔公父子家傳及河南程氏․眉山蘇氏之書, 蓋皆可考. 雖閑樂此論若有不同, 而不免亦有 ‘仁皇之末, 適當因革之時’ 之說, 則是安石之變法, 固不可謂非其時, 而其設心亦未爲失其正也. 但以其躁率任意而不能熟講精思, 以爲百全無弊可久之計, 是以天下之民不以爲便. 而一時元臣故老․賢士大夫群起而力爭之者, 乃或未能究其利病之實, 至其所以爲說, 又多出於安石規模之下, 由是安石之心愈益自信, 以爲天下之人眞莫己若, 而陰幸其言之不足爲己病, 因遂肆其狠愎, 倒行逆施, 固不復可望其能勝己私以求利病之實, 而充其平日所以自任之本心矣. 此新法之禍所以卒至於橫流而不可救. 閑樂雖能深斥其非, 而未察其所以爲非者乃由於此, 此其爲說所以不能使人無所恨者一也.
(한락은) 안석이 멀리 삼대의 아득한 상고할 수 없는 일을 취해서 힘껏 행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삼대의 정사가 방책에 펼쳐져 있음을 모르는 것이요, 비록 시대에는 선후가 있지만 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서, 이를 들어 행하는 것은 바로 훗날의 군자에게 소망하는 점이 없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그 명목과 실상의 변별과 근본과 말단의 순서, 완급의 적절함은 조금의 차이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실로 여기에서 살펴서 어그러뜨리지 않을 수 있다면 남기신 법이 비록 아득하니 상고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신령으로 밝히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니 어떻게 행하지 못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저 안석이 말하는 주례는 임시로 자신의 뜻에 따른 것만을 취한 것이요 높은 명성을 빌어다 여러 사람의 입을 복종시키려는 것일 뿐이니, 어떻게 참으로 옛 것에 뜻을 두었다 하겠습니까? 만일 참으로 옛 것에 뜻을 두었다면 임금을 바로잡는 근본과, 현자를 가까이 하는 노력, 백성을 돌보는 정사, 풍속을 교화하는 방법 등 옛날의 당연히 먼저하고 마땅히 급하게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어째서 조금도 뜻을 두지 않고, 유독 재리나 형병에만 급급해 하는 것입니까? 큰 근본이 바르지 못하면, 명목은 옳지만 실제로는 틀리고, 앞뒤의 마땅함이 또 모두 뒤집히며, 이로써 옛날을 상고해 보아도 한낮 어지러움만 키울 뿐입니다. 어떻게 오로지 아득하니 상고할 것이 없는 죄이기만 하겠습니까? 한락이 여기에서 살피지 못하고, 결단하듯이 스스로 선을 그어 곧장 삼대의 법은 행할 수 없다고 하고, 또 유독 아득하니 상고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 꾸짖으니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여한을 남기게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至謂安石遠取三代渺茫不可稽考之事而力行之, 此又不知三代之政布在方冊, 雖時有先後而道無古今, 擧而行之, 正不能無望於後之君子. 但其名實之辨, 本末之序, 緩急之宜, 則有不可以毫釐差者. 苟能於此察焉而無所悖, 則其遺法雖若渺茫不可稽考, 然神而明之在我而已, 何不可行之有? 彼安石之所謂周禮, 乃姑取其附於己意者, 而借其名高以服衆口耳, 豈眞有意於古者哉? 若眞有意於古, 則格君之本, 親賢之務, 養民之政, 善俗之方, 凡古之所謂當先而宜急者, 曷爲不少留意, 而燭於財利兵刑爲汲汲耶? 大本不正, 名是實非, 先後之宜又皆倒置, 以是稽古, 徒益亂耳, 豈專渺茫不可稽考之罪哉? 閑樂不察乎此而斷然自晝, 直以三代之法爲不可行, 又獨指其渺茫不可稽考者而譏之, 此又使人不能無恨者二也.
안석이 춘추를 폐지하고 ‘(임금도) 북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뜻과 의론이 지나치게 높기만 하고 이치를 궁구하고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한 폐해입니다. 이 때문에 (춘추) 삼전(三傳)의 범례와 조목이 번잡한 것에 염증을 내고, 여러 유자들이 억측하면서 덧붙인 교묘한 것들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싫어하면서, 큰 질서와 큰 법도가 본시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어서 속일 수 없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전대의 성인들과 존중받을 스승들이 도를 중시한 뜻으로 인해서 무왕(武王)․태공(太公)의 일에 너무 지나친 점이 있다고 유추한 것은 예경의 문장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때문입니다. 중요하게 살피지는 낳고 가벼이 논설하면서 곧장 큰 규범[大典]을 폐지한 것은 본시 죄가 될 만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군신의 명분을 어지럽혔다고 하고, 또 맹자의 번갈아 가며 손님과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아울러 그릇되었다고 하는 것은 또한 자질구레한 조목으로 지나치게 꾸짖는 것이요, 휜 것을 바로잡으려다 똑바른 것을 놓친 격입니다. 이것이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여한을 남기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若安石之廢春秋, 語北面, 則亦其志議過高而不能窮理勝私之弊. 是以厭三傳凡例絛目之煩, 惡諸儒臆度附致之巧有太過者, 而不思其大倫大法固有炳如日星而不可誣者也. 因前聖尊師重道之意, 以推武王․太公之事有太過者, 而所以考其禮之文者有未詳也. 是其闕於審重而輕爲論說, 直廢大典, 固爲可罪. 然謂其因此而亂君臣之名分, 又幷與孟子迭爲賓主之說而非之, 則亦峻文深譏而矯枉過直矣. 此又其使人不能無恨者三也.
도덕·성명과 형명·도수 같은 것은 정추 본말이 비록 사이가 있지만 서로 표리가 되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 또한 나누어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안석의 학문이 유독 형명·도수에서만 얻은 것이 있고 도덕·성명에서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서 이미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기에는 장차 어디에서부터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불교와 도가의 말을 오묘한 도라고 여기고 예법과 일의 변화를 거친 자취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로 왕씨의 깊은 폐해입니다. 지금 그를 꾸짖으려면서 도리어 그의 주장 가운데 떨어지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하물며 거친 자취의 잘못에서 가리켜 말한 것이 또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경솔하게 허여한 것이 있지 않나 두렵습니다. 지금 임시로 그 가운데 한 두 가지를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만일 그가 진실로 형명·도수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가 스스로의 몸에서 닦은 것이 전경심(錢景諶)이 서술한 것처럼 어떻게 승려와 함께 땅에 누워서 손님을 돌아보며 옷을 푸는 데 이르렀겠습니까? 저술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떻게 문자를 분석하는 것을 학문이라 여기면서 자설(字說)이란 책이 그런 것처럼 또한 육서의 방법을 변석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렀겠습니까?(요옹(了隣)은 안석이 자설을 올린 것은 온 나라 안에 퍼뜨리려는 욕심에서였는데, 신고(神考)께서 비록 그 책을 좋아해서, 잊지 않고 완미했지만 나라 안에 퍼트리려고 하지 않은 것은 교화의 근본이 여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또한 옳지 않습니다. 주례(周禮) ‘육예(六藝)’의 가르침에서 서법[書]이란 사람들에게 육서의 법으로 온 세상의 글자와 문장을 분별하게 만들어서, 이 글자의 소리와 형태가 어떤가를 알게 만들어 머나 가까우나 한결같이 똑같이 만들어 혼란스럽게 않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진공(眞空)의 상태에서 형태도 없고 작용도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안석(安石)은 이미 다섯 가지 서법을 폐하고서도 오직 회의(曾意)로만 말을 했습니다. 소통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결국 주변에서 가져 온 훗날의 서전에서 한 때의 우연이라는 말을 가져다가 증거로 삼았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또 멀리서 도가 불교의 말을 인용해서 이전 시대에 중국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설명하면서 합치려고 했습니다. 천착하고 어긋남이 이처럼 뚜렷한 자취가 있으니 어떻게 성명·도덕의 근본만을 몰랐다 할 것이며, 또 어떻게 형명·도수의 말단에서나마 얻은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자신을 오도함은 물론 또 위로는 인주에게 유세해서 미혹시키고, 인주로 하여금 이것을 완미하면서 잊지 못하도록 만드니 그 큰 죄는 요옹의 말조차도 성글다고 하겠습니다.) 집안에 베푼 것도 임희(林希)․위태(魏泰)가 쓴 것처럼 어떻게 그 부인이 사치함이 극에 달하고, 동생과 언니를 쫓아내고 관리들을 욕하고 꾸짖는 데에 이르렀겠습니까? 어떻게 소백온(邵伯溫)이 기록한 것처럼 그 자식이 산발머리와 맨 발로 앞에서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국정에 간섭하는 데에 이르렀겠습니까? 정사에 베푼 것도 어떻게 사리에 어긋나고 백성들의 성정을 어기며 당대의 예악과 문장, 교화의 근본에도 간혹 그 도리를 잃은 것을 하나도 바로잡지 못했는데, 메추리를 둘러싼 사건[鵪鶉公事]·법조항을 조사하고 물었던 작은 일에 이르러서도 잘못되고 번잡해서 인심에 들어맞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런 것으로 유추해 보면 한락이 말한 것과 같은 것은 또한 나를 지나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고 이것이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여한을 남기게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若夫道德性命之與刑名度數, 則其精粗本末雖若有間, 然其相爲表裏, 如影隨形, 則又不可得而分別也. 今謂安石之學獨有得於刑名度數, 而道德性命則爲有所不足, 是不知其於此旣有不足, 則於彼也亦將何自而得其正耶? 夫以佛老之言爲妙道, 而謂禮法事變爲粗迹, 此正王氏之深蔽. 今欲譏之而不免反墮其說之中, 則已誤矣. 又況其於粗迹之謬, 可指而言者蓋亦不可勝數, 政恐未可輕以有得許之也. 今姑擧其一二而言之. 若其實有得於刑名度數也, 則其所以修於身者, 豈至於與僧臥地而顧客褫衣, 如錢景諶之所叙乎? 所以著于篇者, 豈至於分文析字以爲學, 而又不能辨乎六書之法, 如字說之書乎?(了隣以爲安石之進字說, 蓋欲布之海內. 神考雖好其書, 玩味不忘, 而不以布於海內者, 以敎化之本不在是也. 此亦非是. 夫周禮六藝之敎所謂書者, 不過使人以六書之法分別天下之書文, 而知此字之聲形爲如何, 欲其遠近齊香同而不亂耳. 非有眞空無相無作之說也. 安石旣廢其五法, 而專以曾意爲言, 有所不通, 則遂旁取後來書傳一時偶然之語以爲證. 至其甚也, 則又遠引老佛之言, 前世中國所未嘗有者而說合之, 其穿擊舛繆, 顯然之迹如此, 豈但不知性命道德之本, 而亦豈可謂其有得於刑名度數之末哉? 不唯以此自誤, 又以其說上惑人主, 使其玩味於此而不忘, 其罪爲大. 了翁之言, 蓋亦疏矣.) 所以施於家者, 豈至於使其妻窮奢極侈, 斥逐娣姒而詬叱官吏, 如林希․魏泰之所書? 豈至於使其子囚首跣足, 箕踞於前而干預國政, 如邵伯溫之所記乎? 所以施於政者, 豈至於乖事理․咈民情, 而於當世禮樂文章敎化之本或有失其道理者, 乃不能一有所正, 至其小者, 如鵪鶉公事, 按問絛法亦皆繆戾煩碎, 而不卽於人心乎? 以此等而推之, 則如閑樂之所云, 亦恐其未免於過予, 而其所以不能使人無可恨者四也.
예를 들어 경을 풀이하는 병폐는 또한 지나치게 높이 자처하면서도 이치를 밝히고 사사로움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현의 말에 대해 텅 빈 마음으로 조용히 생각하면서 말하신 본뜻을 구하지 못했고, 여러 유자들의 동이에 대해서도 또 반복해서 상세하고 치밀하게 그들의 주장의 시비를 변별할 수 없었으면서도, 다만 자신의 뜻을 천착하고 부회에서 그 힘이 통하는 곳까지 극력 추구해서 멋대로 지엽적이고 허황된 주장을 만들어 냈습니다. 천명·인심과 일상사에서 쓰는 사물의 소이연(所以然)에 대해서는 이미 자신의 몸에 돌이켜 구함으로써 그 실질을 징험하지도 못했으면서 모두를 들어 불교와 도가에 귀결시켰습니다. 또 선왕의 정사를 논하면서는 사사로운 뜻에 내맡기고 간사한 말을 수식함으로써 중론을 어기고 스스로를 등용하며, 백성을 괴롭혀 이익을 따지며 충신·현사들을 쫓아내고 공론을 막아버리는 바탕을 삼았습니다. 오직 그의 뜻에 소홀함이 있을 뿐 일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혹은 진실로 과거의 주장에 기인하면서도 그 시비를 가릴 겨를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락이 여기에서 그가 본지에 어긋나고, 과거의 주장을 버리며, 이단의 가르침에 미혹되고, 간사한 말을 문식한 죄를 책망하지 못하고, 한낮 깊은 뜻이 대부분 정현·공영달에게서 나왔다고 꾸짖으면서, 그 뜻이 마치 거꾸로 그가 선유의 주장을 다 쫓아내고 스스로 일가의 주장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병폐로 여기는 것이라면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여한을 남기게 하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若其釋經之病, 則亦以自處太高而不能明理勝私之故, 故於聖賢之言旣不能虛心靜慮以求其立言之本意, 於諸儒之同異又不能反復詳密以辨其爲說之是非, 但以己意穿鑿附麗, 極其力之所通而肆爲支蔓浮虛之說. 至於天命人心․日用事物之所以然, 旣已不能反求諸身以驗其實, 則一切擧而嚴之於佛老. 及論先王之政, 則又騁私意․飾姦言以爲違衆自用․剝民興利․斥逐忠賢․杜塞公論之地. 唯其意有所忽而不以爲事者, 則或苟因舊說而不暇擇其是非也. 閑樂於此乃不責其違本旨․棄舊說․惑異敎․文姦言之罪, 而徒機其奧義多出鄭․孔, 意若反病其不能盡黜先儒之說, 以自爲一家之言者, 則又不能使人無恨者五也.
안석은 학술의 잘못으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죽이는 것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희·풍 연간에서 시작해서 선·정에 이르는 60년 사이에 외우고 말하며, 미루어 밝히는 것이 국시(國是)를 안위(按爲)했습니다. 비루한 유자와 세속적인 서생들은 유행에 빠졌고, 그렇지 않은 자는 이미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식견있는 선비 가운데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간사한 도적이 가리고 금기가 그물처럼 엄밀했기 때문에 기운을 들이마시고 소리를 삼키며, 감히 손가락질 하면서 논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직 두 진공(陳公)만이 죽을힘을 다해서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서신을 주고받고, 강론하고 절차탁마하면서 오직 말을 끝까지 다 하지 못하는 것만을 걱정했으니, 이 또한 현명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것은 또 이와 같은 데 불과하니, 어째서 학문을 했던 것이 또한 스스로 성현의 문호를 얻지 못하는 것이고, 이치를 보고 사태를 제어하는 데에 오히려 가리운 점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한 시대의 여러 현자들의 의론을 모두 살펴보고서 지극히 온당한 의론을 찾아보았더니 오직 구산(龜山) 양씨(楊氏)가 안팎이 분리되고, 마음과 자취가 떨어져서 도가 언제나 세상에 쓸모없도록 만들고, 세상을 경영하는 책무가 모두 사사로운 지혜의 천착이라고 한 말이 가장 가까웠습니다. 그의 의논은 계속해서 당연히 그 뜻을 스승으로 섬겨야지 그 자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또한 그 이치의 마땅함을 다 펼쳤고 주저하면 눈치를 보는 잘못이 없다 할 것입니다.(구산어록(龜山諸錄에 보이는데, 추도향(鄒道鄕: 鄒浩)의 논의로 인해서 말한 것이다.) 비록 원성(元城) 유공(劉公: 劉安世)이 ‘다만 신고(神考)를 종(宗)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한 말도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으니(유공(劉公)의 말은 한관(韓瓘)의 담록(談錄)에 보인다.) 비단 두 진공(陳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당[廟]과 학교에서 배향하고 제사 지내는 것을 그만두라고 청한 장에서는 또 평소의 말처럼 그 죄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급하게 ‘부예(鳧鷖)’의 한 가지 뜻을 편벽되이 가리키며 실제로 사치함을 열어 준 근원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재물 때문에 사람을 죽인 도적을 붙잡고도 물건을 훔친 죄만을 논하는 꼴이요, 밥숟갈을 크게 뜨고 국을 흘려 마시는 손님을 대하면서, 마른 고기를 이빨로 끊는 잘못을 따지는 격이니, 두 진공(陳公)의 말과 비교해도 도리어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금까지 거의 100여년이 되어 가지만 시비의 근원은 결국 명백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나간 것이야 논할 것이 못된다지만 후세의 거울이 되는 것이니 또한 학자들이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아울러 기록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강론하며 선택할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夫安石以其學術之誤, 敗國殄民, 至於如此, 而起自熙․豐, 訖于宣․靖, 六十年間, 誦說推明, 按爲國是. 鄙儒俗生隨風而靡者旣無足道, 有識之土則孰有不寒心者? 顧以姦賊蔽蒙, 禁網嚴密, 是以飮氣呑聲, 莫敢指議. 獨兩陳公乃能出死力以排之, 其於平居書疏還往, 講論切磨, 唯恐其言之不盡, 斯亦可謂賢矣. 然其所以爲說者不過如此, 豈其所以爲學者亦自未得聖賢之門戶, 所以觀埋制事者猶未免於有蔽而然耶? 故嘗歷考一時諸賢之論以求至當, 則唯龜山楊氏指其離內外․判心迹, 使道常無用於天下, 而經世之務皆私智之鑿者, 最爲近之. 其論紹述而以爲當師其意, 不當泥其迹者, 亦能曲盡其理之當, 而無回互之失.(見龜山語錄因鄒道鄕之論而發者.) 雖元城劉公, 所謂只宗神考者有所不逮, (劉公語見韓瓘談錄.) 不但兩陳公而已也. 然及其請罷廟學配食之章, 則又不能如其平日之言, 以正其罪. 顧乃屑屑焉偏指鳧鷖一義以爲實啓奢汰之原, 此爲獲殺人于貨之盜而議其竊鉤之罪, 對放飯流歠之客而議其齒決之非, 視兩陳公之言, 乃反有不能及者. 是以至今又幾百年, 而其是非之原終未明白. 往者雖不足論, 而來者之監亦學者之所不可不知也. 故竊幷著其說, 以俟同志講而擇焉.
기미년 8월에 정사(精舍)의 여러 학생들에게 말하다가 우연히 “그가 도라고 말하는 것은 도가 아니어서 그가 말하는 옳다는 것은 결국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장생(莊生: 莊子)의 말을 떠올렸는데, 이것은 바로 왕씨(王氏)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틀 후에 내게 “‘형공(荊公)은 바로 하나의 도덕[一道德]에 의해서 오도되었을 뿐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의 도덕이란 선왕의 정사이지 왕씨의 사사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그대는 무엇을 병이라 여기는 것입니까? 만일 이 말을 형공의 앞에서 한다면 그는 쳐다보며 한 번 웃으면서 ‘참으로 공은 도덕을 아지 못할 뿐이로다’라고 말할 뿐이지만, 나는 그대가 그에게 대답할 말이 없을까 걱정입니다.” 두 마디 법어[兩轉語]가 우연히 앞 주장과 비슷해서 붓을 들어 뒤에다 적는다.
己未八月, 因爲精舍諸生說, 偶記莊生語云: ‘其所謂道非道, 則所言之韙不免於非’, 此正王氏之謂也. 後兩日, 有語予曰: ‘荊公正坐爲一道德所誤耳.’ 予謂之曰: ‘一道德者, 先王之政, 非王氏之私說也. 子何病焉? 若道此語於荊公之前, 彼不過相視一笑而言曰: ‘正爲公不識道德耳.’ 吾恐子之將無詞以對也.’ 兩轉語偶與前說相似, 故筆其後云.
「소씨기년」을 읽고 讀蘇氏紀年
정제(程弟) 윤부(允夫)는 평소에 소학(蘇學)을 좋아해서 전에 내게 강론한 적이 있었으니, 결국 학문의 동이에 대한 논의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 글을 지으면서 또한 마음 씀씀이가 아주 힘들었음에도 유독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않았다. 최근 그가 세상을 떠나고서야 얻어 볼 수 있었는데 아주 미천하고 부끄러운 점이 있어서 그와 더불어 반복해서 논의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우선 그 중에 더욱 심한 것만을 모아서 한 두 가지를 논하려 한다.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마땅히 내 뜻을 알아 줄 것이다.
程弟允夫雅好蘇學, 蓋嘗以講於余, 而終不能無異同之論. 故其爲此書也用心甚苦, 而獨不以見視. 比其旣沒, 乃得見之, 則有甚陋而可愧者, 恨不及與之反復其說也. 姑掇其尤者一二論之, 以爲死者有知, 尙當有以識余之意爾.
소황문(蘇黃門: 蘇轍)은 “나는 늘그막에 의리에 대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공자께서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되었다’고 말하신 뜻을 깨달았다”고 했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자의 도가 하나로 관통되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로 모든 변화에 능하면서도 막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제자들이 혹은 어짊에 대해서, 혹은 효도에 대해서, 혹은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서, 혹은 군주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 묻는 등, 묻는 것이 서로 달랐는데도 부자께서 막히지 않고 대답하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로 관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하나로 관통된 것[一貫]으로 사람들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부자께서 중도(中道)에 서계시면 저들이 이로 말미암아 깨닫는다. 예를 들어 안자(顔子)같은 이가 (부자에게) 얻었던 것도 어짊을 묻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물어서 얻었던 것에 불과했으나 결국 성인과 깊이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나머지는 비록 크게 얻은 것이 없었지만 진실로 날마다 어짊과 효도, 정치를 하고 임금을 섬기는 일에 종사해서 또한 사군자가 되기에 잘못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배워 위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 배운 것이 이렇기 때문에 이르는 것도 이러해서 둘이 있지 않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르지 못해서 배운 것 외에 따로 형이상의 것이 있다고 의심하기 때문에 ‘부자(夫子)를 따르지 못하는 것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로 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부자의 도에 어떻게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 있겠는가?” 또 말했습니다. “군자는 사람을 가르치면서 똑같이 다뤄서는 안 된다. 풀과 나무에 비유하자면 큰 것은 크게 자라게 해주고, 작은 것은 작게 자라게 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분수와 양을 구별해서 각각 극치에 이르도록 해주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중인(中人) 이하의 사람들은 곧 물 뿌리고 청소하며 사람을 대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종사하도록 해도 좋다. 진실로 그 크고 작음을 비교해서 한 가지도 똑같이 만들어 학자들이 단계를 뛰어넘는 것을 진보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하며, 서로 비난하는 것을 고상한 것이라고 여기게 만든다면 어떻게 잘 가르친다고 하겠는가? 성인(聖人) 같은 경우에는 단서를 여는 것은 그 자체로 크고 심원하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미쳐서는 또한 이와 같은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처음과 끝을 갖춘 이는 오직 성인뿐이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과 끝을 갖춘다는 것은 시작에서 끝에 이른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인이 된 이후에야 처음과 끝이 일치함을 말한다.
蘇黃門言: ‘吾暮年於義理無所不通, 蓋悟孔子一以貫之之旨.’ 又曰:‘夫子之道一以貫之, 惟一爲能萬變而不窮. 故諸弟子之問, ー或仁或孝, 或從政, 或事君, 所問不同而夫子答之亦無窮者, 一以貫之故也. 然夫子不以一貫者告人, 何哉? 夫子中道而立, 彼由此而悟, 如顔子者, 其所得亦不過於問仁․問爲邦爾, 而終與聖人交臂. 其它雖未大有所得, 苟日從事於仁孝從政事君之間, 亦不失爲士君子. 故曰下學而上達, 蓋其所學者此而其所達者亦此, 非有二也. 衆人未達, 疑夫學之外別有形而上者, 故曰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 夫子之道, 豈果若登夫之難哉? ’ 又曰: ‘君子之敎人, 不可以同科也. 譬諸草木, 大者使之遂其大, 小者使之成其小, 區別使各極其分量斯足矣. 故中人以下, 姑使之從事於洒掃應對進退可也. 苟比其大小而同乎一科, 使學者躐等以爲進, 相誣以爲高, 豈善敎者哉? 若乃聖人, 則其開端便自遠大. 及其至也, 亦不過是而已. 故曰有始有卒者, 其唯聖人乎. 有始有卒, 非自始以至終, 言唯聖人然後能始終一致也.’
고사(古史)에서는 “훌륭하구나. 자하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물뿌리고 청소하며 사람을 대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에서 시작해서, 도에 급급해 하지 않고 찾아 온 이가 스스로 학문에 진력하도록 하면서, 날마다 끌어주고 달마다 성장시켜 도가 스스로 지극해지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온갖 공인(工人)들은 공장에 있으면서 그 일을 이루고, 군자(君子)는 배워서 그 도(道)를 지극히 한다’고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풀과 나무를 기르는 것과 같으니 이미 두둑을 만들었으면, 물을 대서 씨앗을 심고 때에 맞춰 김을 매준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크거나 작거나, 달거나 쓰거나 모두가 그들의 성품을 얻게 되어 농부는 기교를 쓸 곳이 없게 된다. 공자께서는 ‘군자는 위에 다다르고 소인은 아래에 다다른다’고 했으니, 다다르는 것[達]에 위 아래가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지 가르치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상하다! 오늘날의 가르침은 도를 듣는 것도 분명치 않는데도 세상에 과시하는 데만 급급해 한다. 성명·도덕이 아니면 입에서 나오지를 않아서 예악과 형정이라 할지라도 언급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하물며 물뿌리고 청소하고 사람을 대하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꼭 아는 것이 아니고 배우는 사람이라고 꼭 믿지도 않고, 큰 소리를 내는 데 힘쓰면서 서로를 속이니, 온 세상의 거짓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이것이 자하가 말한 ‘속인다[誣]’는 것이다.” 또 말했다. “공(公)은 매일 저녁 깊이 잠들었다 오경[五鼓] 초에 일어나 옷을 입고 일어나 앉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는가’라고 하는 때를 말한다. 천하는 본래 생각과 염려가 없다. 다만 사람이 이런 안목을 갖추지 못해 알지 못할 뿐이다. 태사(太史)는 말했다. ‘도는 말로 이름붙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옛 성인은 이를 하나[一]라고 이름붙였고, 중(中)이란 글자에 의탁시켰다.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선양하면서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정(精)하게 하고 한결 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을 것이다’고 했다. 성인께서 도로써 서로 일러주시고자 한 것은 ‘일(一)’과 ‘중(中)’에 이르러 극진해졌다. 옛날 공자께서 여러 제자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이르지 않는 것이 없었지만 여기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일찍이 자공과 말하면서 ‘사(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기억하는 자라고 여기느냐’고 하시자, ‘그렇습니다.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아니다. 나는 하나로 관통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비록 자공과 말했지만, 공자께서도 힘들게 말씀하셨고, 자공도 받아들이면서 믿지 못했다. 증자의 경우에는 이와 달랐다. 공자께서 ‘삼(參)아! 우리 도(道)는 하나로 관통하고 있다’고 하자, 증자는 ‘예’ 하고 대답했다. 증자가 문을 나서자 문인(門人)들이 물었고 증자는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고 대답했다. 공자께서도 의심없이 일러 주었고, 증자도 미혹됨이 없이 받아들였으니 자공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러나 증자가 ‘일(一)’을 충과 서로 여긴 것은 문인들은 일러주기에 충분치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증자가 자사에게 전했고, 자사는 그 설명으로 인해 넓혀서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道)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萬物)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고 했다. 자사의 설명이 나오자 세상은 비로소 일(一)과 중(中)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사가 이것을 맹자에게 전하고, 맹자가 또 이를 미루어 성이 선하다는 이론을 만들었다. 성선론이 나오자 일과 중은 비로소 나뉘기 시작했다. 아!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일러주지 않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던가?”(앞 두 단락은 기년」에 실린 것으로 모두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다. 말이 누락되고 뜻이 생략되었다. 아마도 소공(蘇公)의 말에 잘못이 없지 않아서 나의 변론을 극진하게 하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고사」를 살펴서 이처럼 충분하게 만든 것 같다.)
古史曰: ‘善乎, 子夏之敎人也!始於洒掃應對進退而不急於道, 使其來者自盡於學, 曰引月長而道自至. 故曰百工居肆以成其事, 君子學以致其道. 譬如農夫之碵草木, 旣爲之區, 漑種而時耨之, 風雨旣至, 大小甘苦莫不威得其性, 而農夫無所用巧也. 孔子曰:君子上達, 小人下達. 達之有上下, 出乎其人而非敎者之力也. 異哉! 今世之敎者聞道不明而急於夸世, 非性命道德不出於口, 雖禮樂政刑有所不言矣, 而况於洒掃應對進退也哉? 敎者未必知而學者未必信, 務爲大言以相欺, 天下之僞, 自是而起. 此子夏所謂誣也.’ 又曰: ‘公言每夜熟寐至五鼓初, 卽攬衣起坐, 此卽所謂天下何思何慮之時也. 蓋天下本自無思慮, 但人不具此眼目, 不能識之爾. 太史曰, 道有不可以名言者, 古之聖人命之曰一, 寄之曰中. 舜之禪禹曰: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聖人之欲以道相詔者, 至於一與中盡矣. 昔者孔子與諸弟子言, 無所不至, 然而未嘗及此也. 蓋嘗與子貢言之矣, 曰:賜也, 汝以予爲多學而識之者歟? 曰:然非歟? 曰:非也. 予一以貫之. 雖與子貢言之, 而孔子之言之也難, 而子貢之受之也未信. 至於曾子不然. 孔子曰: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日唯. 曾子出, 門人問, 曾子曰:夫子之道, 忠恕而已矣. 蓋孔子之告之也不疑, 而曾子之受之也不惑, 則與子貢異矣. 然曾子以一爲忠恕, 則知門人之不足告也夫. 及孔子旣沒, 曾子傳之子思, 子思因其說而廣之曰: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者, 天下之大本也. 和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夫地位焉, 萬物育焉. 子思之說旣出, 而天下始知一之與中在是矣. 然子思以授孟子, 孟子又推之以爲性善之論. 性善之論出, 而一與中始枝矣. 烏乎!孔子之折以不告諸弟子者, 蓋爲是歟.’ (前兩段紀年所載, 皆其門人所記, 謂意闕略, 恐於蘇公之言有不能無失者, 不足以極余之辨, 故考諸古史以足之如此云.)
성인이 말하는 ‘도’란 하늘[天]일 뿐이다. 하늘은 커서 바깥이 없고 조화와 발육이 모두 그 안에 있으며, 운전하고 유행하는 데 조금의 빈틈도 없고 그침도 없다. 비록 그 형상의 변화에 온갖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그 이치[理]는 하나일 뿐이다. 성인은 나면서부터 알고, 억지로 힘쓰지 않고 편안히 행하시며, 하늘과 덕을 같이 하니, 온 세상의 이치와 밝거나 어둡거나, 크거나 작거나 진실로 한 가지 것이라도 모르는 것이 없으며, 일상생활에서 일에 응하고 외물을 대할 때나, 행동하거나 주선하거나 하나라도 부당한 이치라고는 없다. 그러나 물건마다 생각한 것이 아니요, 일마다 힘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덩어리진 흙더미 인양 우두커니 무심[象罔]한 지경에서 한 물건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오경에 옷을 털고 일어나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겠는가’라는 말을 가리켜 마침내 현묘한 도의 극치로 여겨 남몰래 감추고 사람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다가 때로 그 나머지를 내놓되, 어리석은 학자들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 선인과 군자가 되라고 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부자가 자공에게 일러준 것은 ‘앎[知]’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증자에게 일러준 것은 ‘행실[行]’을 가지고 논한 것이다. 부자께서 말한 것이 쉬웠거나 어려웠던 것과 두 사람이 얻거나 놓쳤던 것은 고사의 말이 비록 근사한 듯 하지만, 증자가 문인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선 충서로만 말했다고 한 것은 충과 서가 서로 체용을 이루고, 이것이 바로 하나로 관통한다[一貫]는 실상을 밝히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자유와 자하가 물뿌리고 쓸고 일에 응하고 외물을 상대하는 일을 논한 것에 대해 운운한 것은 바로 어린아이의 학문은 마땅히 이로 말미암아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지, 한 번 이것을 일러주어 할 것을 한 번 듣도록 했으니 죽을 때까지 다시 일러주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부자와 안연(顔淵)이 하루 종일 말했는데 안연이 ‘차근차근하게 사람을 잘 이끄시고 지식을 넓혀 예로서 요약하게 해주신다’고 탄식했으니 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처음과 끝을 또한 알 수 있으니, 또한 순서를 뛰어넘지 않는 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가르치면서 똑같이 다뤄서는 안 된다. 우선 여기에 종사하게 만들고, 가르치는 이가 마침내 다시는 허여함이 없다면 이는 참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순서에 어두운 것이다. 또 안자(顔子)가 평생 동안 들었던 것이 논어에 기록된 어짊과 나라를 다스리는 두 가지 조목에만 그쳤다면 이것은 그 고찰이 또한 상세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부자께서 아래에서 배워 위에 다다른다고 한 것은 참으로 아래로는 인사의 비근한 데에서 배워서 쉬로는 천리의 정치 미묘한 데에 다다른다는 말일 뿐이다. 이제 배운 것이 이것이고 다다른 곳도 또한 이것이다고 한다면 이것은 죽을 때까지 아래에서 배우기만 할 뿐 위에 다다르지는 못한 것이다. 또 자공이 다다르지 못했다고 여겨 배운 것 이외에 따로 형이상의 것이 있다고 의심해서, ‘(하늘을) 사다리로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은’ 폐해를 말했다면 형이상·형이하는 비록 두 물건으로 말할 수 없지만, 배운 것 이외에 따로 형이상의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다만 일이 있을 뿐 이치는 없다는 것이요, 다만 아래에서 배울 뿐 위에 다다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하지만 반드시 어려움 없이 이를 수 있다고 한다면, 안자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탄식한 것이나, 맹자가 ‘대인이면서 저절로 화(化)한다’고 한 말이 모두 다다르지 못한 것이 된다. 도에 급급해 하지 않고 저절로 지극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치 농부가 두둑을 만들어 씨앗을 심고 기교를 쓰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은 모두 옳지 않다. 오직 당대에 도를 말하는 잘못을 꾸짖은 것이 왕씨(王氏)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이는 근사하다. 그러나 ‘도’를 자신도 알지 못한다면 속이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 왕씨(王氏)가 사람을 속인 것은 그가 말한 것으로 속인 것이요, 소씨(蘇氏)가 사람을 속이는 것은 그가 말하지 않은 것으로 속인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르지만 그 잘못은 똑같다. 이것은 모두 그 배움이 미치지 못하는데도 멋대로 말했기 때문에 이처럼 잘못된 것이다.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할 것인가’라고 한 것도 비록 온갖 변화가 어지럽지만 응하는 데에는 각각 정해진 이치가 있어서 생각을 빌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한 밤중에 일어나 앉은 짧은 순간으로 대응하게 한다면 이것은 해가 뜨고 일이 생긴 다음에 이러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근심할 것인가’라는 것은 마침내 가로막히고 닫힌 물건이 되고 말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말하는 ‘일관의 가르침을 얻었다’는 것은 거의가 이러한 것에 불과하니 어떻게 비루하지 않겠는가? 고사에서 인용한 순과 우가 주고받은 말도 또한 본뜻이 아니다. ‘오직 정하고 오직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것이다’는 것은 또한 인심과 도심의 사이를 정치하고 한결같이 구별해서, 그 도심을 지키고, 시종 일관하게 한다면 행하는 것이 저절로 과불급이 없이 중도에 합치함을 말한 것일 뿐이다. 일(一)로 도를 이름 짓고 중(中)에 의탁한 것이 아니다. 또 맹자가 성선의 이론을 만들어 일(一)과 중(中)이 비로소 나뉘었다는 것은 더욱 잘못이다. 지금은 변론할 겨를이 없어 뒷장에서 자세히 말하겠다.
聖人生知安行, 與天同德, 其於天下之理, 幽明巨細, 固無一物之不知, 而日用之間應事接物, 動容周旋, 又無一理之不當. 然非物物而思之, 事事而勉之也, 故曰 ‘吾道一以貫之’. 固非塊然以守一物於象罔之間, 如所謂五鼓振衣, 何思何慮者, 遂指以爲妙道之極而陰祕藏之, 不以告人, 而時出其餘, 以愚學者之末達, 使姑爲善人君子而已也. 然夫子之告子貢, 蓋以知而言; 其告曾子, 則以行而論. 至於夫子言之之難易, 二子聞之之得失, 則古史之言雖若近之, 然謂曾子以門人不足告而姑以忠恕爲言, 則是不知忠恕之相爲體用, 正所以明夫一貫之實矣. 至於游夏之論洒掃應對之云云者, 乃謂小子之學所當由此而漸進, 非謂一告以此, 而遂一聽其所爲, 終身無復有所告語也. 觀夫子之與顔淵言至于終日, 而淵歎之以爲善誘循循, 博文約禮, 則聖人之所以敎人, 有始有卒, 蓋亦可見, 但不躐等而已. 今曰敎不可以同科, 姑使之從事於此, 而敎者遂不復有所與, 則固眛於敎學之序. 又謂顔子平生所問止於論語所記爲仁․爲邦之二條, 則其考之又可謂不詳矣. 夫子之言下學而上達, 正謂下學於人事之卑近而上達於天理之精微爾. 今曰所學者此而其所達者亦此, 則是終身下學而未嘗上達也. 又以子貢爲未達, 而疑夫學之外別有形而上者, 以病其猶夫不可階之言, 則夫形而上下者雖不可以二物言, 然謂學之外別無形而上者, 則是但有事而無(6-3671)理, 但有下學而無可上達也. 雖曰人皆可以爲堯舜. 然謂其必可至而無難, 則是顔子 ‘未由也已’ 之歎, 孟子 ‘大而化之’ 之語皆爲未達也. 其言不急於道而待其自至, 如農夫區種而無所用巧, 皆非是. 獨其譏當世言道之失, 蓋指王氏而言, 則爲近之. 然所謂道者, 己亦莫之識而未免於誣也. 蓋王氏之誣人, 以其言者誣之也. 蘇氏之誣人, 以其不言者誣之也. 二者雖殊, 其失則均矣. 凡此皆其學之所不及而妄言之, 故其失如此. 至於天下何思何慮, 正謂雖萬變之紛耘, 而所以應之各有定理, 不假思慮而知也. 今以中夜起坐斯須之頃當之, 則是日出事生之後, 此何思何慮者遂爲閑廢之物而無所用矣. 彼所謂得一貫之旨者, 殆不過此, 豈不陋哉? 古史所引舜禹授受之言, 亦非本義. 蓋 ‘惟精惟一, 允執厥中’, 亦言精一別於人心道心之間, 而守其道心, 始終不貳, 則其所行自無過不及而合中道耳, 非以一名道而寄之於中也. 又謂孟子爲性善之論而一與中始枝, 尤爲謬妄. 今未暇辨, 後章詳之.
역의 오류를 기록하다 記易誤
‘否之匪人’이란 구절에 대해 요즘 아래와 같은 한 가지 설명을 보았다. ‘‘之匪人’이란 세 글자는 부당하니, ‘比之匪人’이란 구절로 인해 잘못되었다. 만일 소리[音]로 말한다면 ‘比’는 거성(去聲)이고 ‘否’는 상성이니, 글자의 뜻이 이미 다르다. 또 뜻으로 말한다면 ‘比之匪人’은 따르는 이가 모두 그 사람이 아니다는 뜻이요, ‘否之匪人’은 막힌 것은 사람의 도[人道]가 아니다는 뜻이어서, 말의 맥락이 또 같지 않으니, 반드시 연자(衍字)일 것이다. 「단전(彖傳)」의 문장도 마침내 이로 인해 잘못되었다. 예를 들어 감괘[坎] 「상전(象傳)」의 ‘樽酒簋’에서 ‘簋’의 아래에 다시 잘못 읽은 것으로 인해 ‘貳’자를 더했다.’ 어떤 사람의 주장인 지 생각나지가 않아 우선 여기에 기록해 둔다.
‘否之匪人’, 近見一說, 謂不當有‘之匪人’三字, 蓋由‘比之匪人’而誤. 若以音言, 則‘比’自去聲, ‘否’自上聲, 字義已不同. 若以義言, 則‘比之匪人’爲所附非其人, ‘否之匪人’爲否塞非人道, 語脈又不同, 決是衍字. 其彖傳之文, 遂亦因之而誤. 如坎象之‘樽酒簋’, ‘簋’下復因誤讀而加‘貳’字也. 不記是何人說, 姑記於此云.
영가본 의례」의 오자를 기록하다 記永嘉儀禮誤字
의례(儀禮)를 읽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좋은 판본을 구하기 힘들다. 정현의 주[鄭注]․가공언의 소[賈疏] 외에 선유들의 옛 설명도 대부분 다시 찾아 볼 수 없고 육씨(陸氏)의 석문(釋文) 또한 아주 소략하다. 근래에 영가(氷嘉)의 장순(張淳)·충포(忠甫)가 교정해서 간인한 판본이 있고,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어 그 잘못을 표시했는데, 정밀하다고 일컬어지지만 잘못된 곳이 없을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경의 첫 머리에 정씨(鄭氏)의 목록을 두었는데, 첫 권의 제1판 「사관례」편 가운데 세 번째 행에서는 ‘주인이 검은 관[玄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는다면 이것은 천자·제후의 선비가 조복을 입고, 흰 사슴가죽 관[皮弁]에 흰 아랫도리[素積]를 한다는 것이다[主人玄冠朝服 則是於天子諸侯之士朝服皮弁素積]’고 했는데, 여기에서 ‘제후(諸侯)’란 두 글자는 가공언의 소에 실린 것을 살펴보면 본래 ‘천자(天子)’라는 글자 앞에 있고, 구절을 이룬다. 석문이 인용한 것에서부터 그 문장이 잘못 뒤집혔는데, 이 판본도 그것을 따르고 있으니, 마침내 문리(文理)가 없어져버려, 다시 읽을 수가 없다. 매일 조회하는 옷은 천자는 흰 사슴가죽 관을 쓰고 제후는 조복을 입는 데, 군신이 똑같다. 그러므로 정씨의 생각에는 이 주인이 검은 관에 조복을 입으면 이것은 제후의 선비요, 만일 천자의 선비라면 당연히 흰 사슴가죽 관을 쓰고, 흰 아랫도리를 입는 것이 이와 다르다는 것일 뿐이었다. 지금 석문이 이미 잘못 뒤집었는데, 장순의 판본이 그 잘못을 답습해서 바로 잡지 못했으니, 그가 어떻게 읽어서 구절을 만들고, 또 어떻게 설명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날은 정기를 쓴다[日用丁己]’고 했으니, (이 때의 ‘기(己)’는) 바로 무기(戊己)라고 할 때의 ‘기(己)’이다. 옛 주에서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취하여 스스로 정녕스러워 하고, 스스로 변하고 고친다[取其令名 自丁寧, 自變改]’고 했다. 본래 설문에서 ‘개(改)’자는 ‘기(己)’를 부수로 하거나, ‘지(支)’를 부수로 한다. ‘자기에게 허물이 있어서 가지를 치면 즉 고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래 조목의 주에서는 또 ‘정해일을 얻지 못하면 즉 기해일도 쓸 수 있다’고 했으니 그 이치가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판본에서 간혹 ‘기(己)’를 진사(辰巳)라고 할 때의 ‘사(已)’로 썼고, 석문에서 마침내 소리는 ‘사(祀)’이다고 했으며 장씨(張氏) 또한 그 잘못을 깨달을 수 없었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향사(鄕射)」편에서 ‘횡으로 든다[橫而奉]’고 할 때의 ‘봉(奉)’을 간혹 ‘거(擧)’로 잘못 베꼈고 석문에서는 마침내 ‘권(權)’으로 읽는다고 했으니 매번 읽을 때마다 부지불식 중에 웃음이 나온다. 장(張) 또한 바로 잡지 못하고 이를 따랐다. 이로 미루어 말하자면 그 나머지 잘못도 세어보면 반드시 많은 것이다. 병으로 피곤하고 상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어서, 우선 이 세 조목만 기록해서 살피려는 자들에게 일러주는 것일 뿐이다. 촉(蜀) 지방의 석본(石本)에는 더욱 많은 것이 틀렸는데 이 ‘기(己)’자를 세 네 곳에서 그 윗부분을 뚫어 버렸으니 어찌 또한 의심하고서도 결론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儀禮人所罕讀, 難得善本. 而鄭注․賈疏之外, 先儒舊說多不復見, 陸氏釋文亦甚疏略. 近世氷嘉張淳忠甫校定印本, 又爲ー書以識其誤, 號爲精密, 然亦不能無舛謬. 若其經首冠以鄭氏目錄, 而其開卷第一板士冠體篇中第三行卽云: ‘主人玄冠朝服, 則是於天子諸侯之士朝服皮辯秦積.’ 此 ‘諸侯’ 二字, 按賈疏所載, 本在‘天子’字上而爲句絶. 自釋文所引誤倒其文, 而此本因之, 遂無文理, 不復可讀. 蓋曰視朝之服, 天子皮辯而諸侯朝服, 君臣同之, 故鄭氏之意以爲此主人玄冠朝服, 則是諸侯之士. 若天子之士, 則當服皮辯素積, 與此不同耳. 今釋文旣羨倒之, 張本又襲其態而不能正, 則末知其讀之如何而爲句, 又如何而爲說也. 又少牢饋食禮 ‘日用丁己' 乃戊己之 ‘己’, 故注云: ‘取其令名自丁寧, 自變改’, 蓋本說文 ‘改’ 字從 ‘己' 從 ‘支’, 爲己有過, 支之則改之義. 而下條之注又云: ー ‘不得丁亥, 則己亥亦可用’, 其理甚明. 而諸本或寫 ‘己’ 爲辰巳之 ‘已’, 釋文
遂以 ‘祀’ 音, 張氏亦不能覺其誤也. 其尤甚者, 則如鄕射篇 ‘橫而奉’ 之 ‘奉’ 或誤寫作 ‘擧’, 而釋文遂以 ‘權’ 音, 每讀令人不覺失笑. 張亦不能正而曲從之. 推此而言, 則其它舛謬計必尙多. 病倦, 不暇細考, 姑記此三條, 以告觀者耳. 蜀中石本尤多誤, 於此 ‘巳’ 字三四乃鑱滅其上體, 豈亦疑之而未知所決耶?
「향사」편을 잘못 의심한 것에 대해 기록하다 記鄕射疑誤
(의례) 「향사」편의 “만일 대부가 없으면 빈(賓)이 한다[若無大夫則唯賓]”는 구절에 대한 주에서 “중빈(衆賓)의 장 가운데 한 사람이 연례(燕禮)에서 잉작(媵爵)을 할 때처럼 치(觶)를 든다”고 했다. 내가 처음 이 구절을 읽고 ‘중빈의 장 가운데 한 사람이 치를 든다[長一人擧觶]’는 다섯 글자는 본래 경의 문장인데, 간인본에서 잘못 주 가운데 넣은 것이라고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 뒤에 살펴보니 치(觶)를 드는 것은 모두 신분이 낮고 어린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빈 가운데 장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주인을 돕는 사람 두 명이 치를 들어 손님과 대부들에게 주는데, 만일 대부가 없으면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그에게 치를 들어 빈에게 주도록 하는 것이지, 거꾸로 빈 가운데 장이 스스로 치를 든다는 것이 아니었다. 「연례(燕禮)」까지 살펴보았더니 “소신(小臣)이 작(爵)을 올릴 사람을 청한다. 임금은 (하대부 가운데) 장(長)에게 명을 내린다.[小臣請勝爵者而公命長]”는 구절의 주에서 “장(長)은 나이 차이가 나는 경·대부 중에서 시킬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또 ‘장(長)’자의 뜻을 알 수 있다. “소신(小臣)이 하대부(下大夫) 두 사람에게 작을 올리도록 한다”고 한 구절과 또 “(소신이 임금에게 치를) 올리라는 명을 내릴 것을 청하고, 임금이 모두 올리라고 명하면 순서에 따라 나아간다”는 구절에 이르면 또한 간혹 장(長)에게 명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작을 올리게 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이 편에서 “장 한 사람에게 치를 들어 손님에게 주도록 한다”는 것과 같으니 주의 문장에서 인용한 분명한 증거이다. 다만 그 말이 지나치게 간략해서 읽는 사람에게 의심이 들도록 할 따름이다. 옛날 형자재(邢子才: 邢邵)는 글을 교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날마다 그 잘못을 생각하는 것도 또한 하나의 유쾌한 일이다[日思其誤, 更是一適]”고 했는데, 유사립(劉斯立: 劉跂)은 오히려 이를 아주 심한 병폐로 여겼다. 하물며 이 경우에는 책은 틀리지 않았는데 사람이 스스로 오도되었으면서도 도리어 책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멋대로 그 사이에 문자를 고치려고 하였으니, 옛 것을 믿고 의심스러운 것을 빼버리는 군자에게 죄를 얻은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그 일에 감동된 것으로 인해 뒷날의 군자가 혹 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까 두려워 드디어 글로써 남긴다.
鄕射篇 ‘若無大夫則唯賓’, 而注云: ‘長一人擧觶, 如燕禮媵爵之爲者.’ 余始讀此, 嘗疑 ‘長一人擧觶’ 五字本是經文, 而印本誤人注中. 旣而考之, 凡擧觶皆卑且少者爲之, 非賓長之事. 故此乃王人之贊者二人, 擧觶于賓及大夫. 若無大夫, 則於二人長幼之中但選一人, 使之擧觶于賓, 而非反使賓長自擧觶也. 至考燕禮 ‘小臣請勝爵者而公命長’, 注云: ‘長謂選卿大夫中長幼可使者’, 於是又見‘長’ 字之義. 至 ‘小臣作下大夫, 二人勝爵, 又請致者, 而公命皆致, 則序進’, 又知其或命長, 則但以一人勝爵. 如此篇之 ‘長一人以擧觶于賓’, 乃注文所引之明證, 但其詞太略, 有以致讀者之疑耳. 昔刑子才不喜校書, 而曰日思其誤, 更是一適, 劉斯立猶深病之. 况此書不誤而人自誤, 反謂書誤而欲妄下雌黃於其間, 其得罪於信古闕疑之君子當如何耶? 因感其事, 又恐後之謂者亦或如余之誤, 遂書以識云.
정자 문하의 제자들이 학문을 논한 동이를 기록하다 記程門諸子論學同異
【해제】이 글은 건도 5년(기축, 1169, 40세)에 쓴 것이다. 이 해는 주자의 학문 여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유명한 「중화신설」의 깨달음이 이 해 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징난은 “이 글은 정이의 ‘덕성의 함양은 반드시 경을 통해야 하고 학문의 진보는 철저한 인식에 달려 있다’는 구절은 논하고 있는데, 이 당시 주자는 「중화신설」을 깨닫고 평생 학문의 큰 요지를 확립한 이후에 쓴 것이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희(熹)가 정문(程門) 제자들의 글을 보고서, 그들이 학문하는 방법을 논한 것에 다른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정자의 말로 질문을 하고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熹讀程門諸子之書, 見其所論爲學之方有不同者, 因以程子之言質之而竊記之如左.
호씨(胡氏: 胡安國)는 “사물 하나하나를 다 살피면 돌고 돌아 나에게 귀결된다”고 했고, 양씨(楊氏: 楊時)는 “사물은 다 궁구할 수 없다. 자신을 정성스럽게 반성한다면 모든 세상의 사물이 내게 있게 된다”고 했다.
胡氏曰: ‘物物致察, 宛轉歸己.’ 楊氏曰: ‘物不可勝窮也, 反身而誠, 則擧天下之物在我矣.’
정자(程子)는 말했다. ‘이치를 궁구한다[窮理]는 것은 온 세상의 외물을 다 궁구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 가지 사물만을 궁구해서 수많은 이치에 다 통하게 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쌓은 것이 많아진 다음에 시원하게 꿰뚫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또 말했다. “사물과 나는 하나의 이치이다. 저것에 밝아지자마자 이것에도 환하게 깨닫게 된다. 꼭 사물을 본 것으로 인해 돌이켜 스스로에게서 구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 큰 것을 말하자면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운 이유에 이르기까지, 작은 것을 말하자면 한 가지 사물의 소이연에 이르기까지 배우는 자들은 모두 이해해야 한다.”
程子曰: ‘所謂窮理者, 非必盡窮天下之物, 又非只窮一物而衆理皆通, 但要積累多後, 脫然有貫通處.’ 又曰: ‘物我一理, 才明彼卽曉此, 不必言因見物而反求諸身也. 然語其大, 至天地之所以高厚; 語其小, 至一物之所以然, 學者皆當理會.’
호씨는 “다만 이미 발동한 곳[已發處]에서 노력한다면 오히려 심력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고, 양씨는 “아직 발동하기 이전의 즈음에 마음으로 체득한다면 중(中)의 모습[體]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를 붙잡고 놓치지 않으면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어지고, 발동하면 반드시 절도에 맞게 된다”고 했다.
‘胡氏曰: ‘只於已發處用功, 却不枉費心力.’ 楊氏曰: ‘未發之際以心體之, 則中之體自見. 執而勿失, 無人欲之私焉, 發必中節矣.’
정자는 말했다. “아직 발동하기 이전에 중(中)을 구할 것을 생각했다면, 즉 이미 발동한 것이다. 다만 아직 발동하기 이전의 때에 보존하고 기른다고만 말한다면 괜찮다. 함양이 오래되면 희노애락의 발동이 저절로 절도에 맞게 된다.” 또 말했다. “배우는 이는 무엇보다 먼저 경(敬)을 이해해야 한다. 경할 수 있다면 저절로 이것을 알 것이다.”
程子曰: ‘思於未發之前求中, 卽是已發. 但言存養於未發之時則可, 惟涵養久則喜怒哀樂之發自中節矣.’ 又曰: ‘學者莫若先理會敬, 能敬則自知此矣.’
사씨(謝氏: 謝良佐)는 말했다. “명도선생(明道先生)은 배우는 이들에게 먼저 지식을 갖게 했고, 또 오히려 경(敬)을 좇아 들어가도록 했다.” 또 말했다. “이미 지식이 있으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게 된다. 오히려 경(敬)을 좇아 함양해 나오는 것과는 저절로 구별이 있다. 용모를 바로 하고 절도를 삼가는 것은 외면의 태도로서 예의 근본이 아니다.”
謝氏曰: ‘明道先生先使學者有所知識, 却從敬入.’ 又曰: ‘旣有知識, 窮得物理, 却從敬上涵養出來, 自然是別. 正容謹節, 外面威儀, 非禮之本.’
윤씨(尹氏: 尹焞)는 말했다. “선생이 사람을 가르치면서 오로지 경으로 안을 바르게 하도록 했을 뿐이니, 오래도록 이를 익히면 저절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尹氏曰: ‘先生敎人, 只是專令用敬以直內, 習之旣久, 自然有所得也.’
정자는 말했다. “도에 들어가는데 경(敬)만한 것이 없다. 치지(致知)에 능하면서 경(敬)에 자리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또 말했다. “용모를 움직이고, 사려를 바로 잡는다면 저절로 경(敬)이 생긴다. 이것을 오래도록 보존하면 저절로 천리(天理)가 밝아진다.” 또 말했다. “(덕성의) 함양은 반드시 경을 통해야 하고, 학문의 진보는 철저한 인식에 달려 있다” 또 말했다. “경은 단지 함양이란 한 가지 일이다. 반드시 일삼을 것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의를 모아야 한다. 다만 경을 쓸 줄 만 알고 의를 모을 줄 모른다면 이것은 오히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程子曰: ‘入道莫如敬, 未有能致知而不在敬者.’ 又曰: ‘動容貌․整思慮, 則自然生敬. 存此久之, 則自然天理明.’ 又曰: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又曰: ‘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 須當集義. 只知用敬, 不知集義, 却是都無事也.’
이상의 여러 주장이 서로 다른데, 정자의 말로 물어보자면 오직 윤씨의 말이 가장 근사하다. 적은 것은 치지와 집의의 노력에 대한 것일 뿐이다. 그 말의 순서에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의 생각이 과연 여기에서 끝나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큰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또한 그 덕을 숭상할 여지가 없음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면서 뒤에서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알리는 것이다.
右諸說之不同者, 以程子之言質之, 唯尹氏之言爲近, 所少者, 致知集義之功耳. 不知其言之序有未及耶? 抑其意果盡於此也? 然大本旣立, 則亦不患無地以崇其德矣. 故愚於此竊願盡心焉, 因書其後以自詔云.
사상채(謝上蔡: 謝良佐)의 논어에 대한 의심스러운 풀이에 대해 기록하다 記謝上蔡論語疑義
【해제】이 글은 사량좌가 논어를 풀이한 대목 가운데 의심스러운 몇 대목을 골라 비평을 가한 후, 장식에게 보낸 것이다.
배우고 때로 익힌다.
學而時習之
‘배움[學]’이란 한 걸음 전단계의 일이다. 이미 배우고 또한 때로 익힐 수 있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상채가 ‘익힌다[習]’는 글자를 설명한 것은 훌륭하지만, ‘배운다’는 글자의 뜻을 발명한 것은 드물어 마치 (별다른) 내력이 없는 것만 같다. ‘기쁨[悅]’이란 익히는 것이 충실해져서 의리가 유연(油然)하게 생겨나는 곳이다. 상채는 다만 “이와 같이 하면 덕이 모인다”고만 했으니, 말이 또한 분명치 않다. 벗이 멀리서 찾아온다는 구절에서 성인께서 이렇게 말한 바른 뜻을 살펴보면 다만 벗들과 강습한다는 것일 뿐이다. 상채가 유추한 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먼 것 같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는 구절에서, 배움이란 본시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남들이 몰라주기를 원하는 데 뜻을 두는 것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남들이 알아주더라도 기쁨이 더할 수 없고,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를 더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성인의 문하에서 의리를 올바르게 발명한 것이다. 노씨(老氏: 老子)는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내가 귀한 것이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단의 사사로운 견해로서 성인 문하의 기상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상채가 이것을 인용한 것은 아마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 같다(또 말하기를 ‘스스로를 대우함이 도탑다’고 한 것도 또한 말에 병폐가 있다). 살펴보면, 이 장은 오직 이천선생의 설명만이 말이 간략하면서 의미가 심장해서 성인의 본뜻을 가장 잘 얻었다. 그 다음은 아마도 모두가 윤화정(尹和靖: 尹焞)만 못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상채의 설명은 뛰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중도를 지나쳐 여운을 갖는 맛이 적다.
學是前一段事, 旣學矣, 又能時習, 所以悅也. 上蔡說得‘習’字好, 然少發明‘學’字之意, 似無來歷耳. 悅乃習之之熟, 義理油然而生處, 上察但云‘如此則德聚’, 語亦未瑩. 有朋自遠方來, 觀聖人立言正意, 止爲朋友講習. 上察所推, 似亦太遠. ‘人不知而不慍’, 學固非欲人知, 亦非有意欲人不知, 是以人知之不加喜, 人不知不加慍, 此聖門所發義理之正也. 老氏‘知我者希, 則我貴矣’, 此異端自私之見, 與聖門氣象逈然不同. 上蔡引之, 似未察也. (又云自待者厚, 亦是語病.) 按, 此章惟伊川先生之說語約而味長, 最得聖人本意. 其次似皆不若尹和靖. 如上蔡之說, 非不奇偉, 然多過中, 少餘味矣.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우애롭다.
其爲人也孝弟
‘어짊[仁]’은 아주 말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성현의 말도 어떤 것은 그 방법을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 작용을 말하기도 했지만, 곧장 그 본체를 가리켜서 이름붙이고 말한 적은 없었다. 상채는 “옛 사람들이 어짊에 대해 말한 것이 많지만 결국 어짊이 아니었다”고 하고, 또 “효성스러움과 우애로움으로 어짊을 논할 수 있지만, 효성스러움과 우애로움은 어짊이 아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을 발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때의 통쾌한 뜻만을 좇아 한쪽으로만 설명해 나가는 줄은 깨닫지 못했다. 그 사이에 경계의 나뉨과 맥락의 분기에 이르러서는 저절로 서로 관계되고 연결된 것이 있는데, 오히려 분명하게 사람들을 위해 지적해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읽는 이들이 다만 광활하니 손댈 수 없는 것만을 보고서 곧바로 다른 곳을 향해 내달려가는 것이 그의 말의 병폐인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인심(人心)의 거짓될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이 마음으로 채워나간다면 어느 곳을 간들 어질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고 했다. 이 말 또한 모두 온당치 않다. 본성[性]이 갖고 있는 것으로 마음에 뿌리를 둔 것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효성스러움과 우애로움만 거짓이 아닌 것이 아니다. 다만 효성스러움과 우애로움은 인심에서 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발명하는 뜻이 가장 친절하며, 연계된 것이 가장 중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짊을 행하는 방법은 반드시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효성스러움과 우애로움을 확충해서 어짊을 추구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장의 뜻은 아마도 이천(伊川)의 설명을 따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仁至難言, 故聖賢之言或指其方, 或語其用, 未嘗直指其體而名言之也. 上蔡云: ‘古人語仁多矣, 然終非仁也’, 又云: ‘孝弟可以論仁, 而孝弟非仁也’, 正欲發明此意. 然不覺乘快一向說開了. 至於其間界分脈絡, 自有相管攝聯屬處, 却不曾分明爲人指出. 故讀之者只見曠蕩無可撈摸, 便更向別處走, 此其立言之病也. 又云: ‘人心之不僞者, 莫如事親從兄. 以是心而充之, 則無適而非仁矣.’ 此語亦皆未安. 蓋性之所有而根於心者, 莫非眞實, 不但孝弟爲不僞也. 但孝弟乃人心之不可已者, 所發最親切, 所繫最重大, 故行仁之道, 必自此始. 非謂充擴孝弟可以求仁也. 此章之義, 恐只當從伊川說.
교묘한 말과 꾸민 낯빛
巧言令色
말이 자체로 교묘하고, 낯빛이 자체로 꾸밈이 있는 것은 어짐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 말을 좋게 하고 그 낯빛을 꾸미는 것이 바로 어질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어질지 않다고 여기겠는가?”라고 한 것은 말이 온당치 않은 듯하다.
言自巧, 色自令, 不害其爲仁. 好其言, 令其色, 便是不仁矣. 云‘豈以此爲不仁’, 立語恐未安.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린다.
道千乘之國
배우는 이가 오로지 기억하고 외우는 학문만 하고 쓰이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본시 안 될 일이지만, 마침내 독서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 갑자기 정사를 배운다고 하는 것도 더욱 안 된다. 자신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은 모두 배우는 이의 본분 안에 있는 일이지만, 선후에는 본시 순서가 있다. 책을 읽어 의리를 구하는 것은 바로 격물·치지의 일이요, 정심·성의를 발명하는 단서가 된다. 배우는 이가 여기에 근본하지 않고 백성들과 사직의 사이에서 (배움을) 완성하려 독촉하고, 이치에 반드시 마땅한 것을 추구하며 어긋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완수하기) 힘든 일이다. 또 천하와 국가에는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성인은 여기에서 제각각 그 (적절한) 곳에 멈추셨으니, 그렇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상채는 “옛 사람은 사방 백 리가 되는 땅을 얻고서도 임금 노릇을 하면서, 제후들을 조회하고, 천하를 거느렸으니 천승의 나라에서도 그 마음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아마도 제후를 조회하고 천하를 거느린 자취이고, 천승의 나라에 마음을 쓰신 뜻이라 여기는 것 같은데, 또한 병폐가 있는 것 같다.
學者專爲記誦之學而不知所用固不可, 然遂以爲不待讀書而遽以政學則尤不可. 大抵修身齊家․治國平天下皆學者分內事, 而其先後固有序矣. 讀書求義理, 乃格物致知之事, 所以發明正心誠意之端也. 學者不本於此, 乃欲責成於人民社稷之間, 求其必當於理而無悖, 吾見其難矣. 且天下國家雖有大小之殊, 然聖人於此亦各止其所焉, 非有所爲而爲之也. 上蔡云: ‘古人得百里之地而君之, 皆能以朝諸侯․有天下, 則千乘之國亦可見其用心矣.’ 此似以爲朝諸侯․有天下之故而用心於千乘之國之意, 恐亦有病.
제자는 들어와서는 효도한다.
弟子入則孝
이 장은 사람이 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 배우는 이에게 앞뒤를 알게 하려는 것일 뿐이지, 갑자기 효성과 우애를 극진히 발휘하고, 인륜을 살피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채의 기상은 널리 트이고 견해가 고명해서 좋지 않고 비근한 뜻을 두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설명은 반드시 이런 데에 도달한 연후에야 그만 두었으니, 또한 한 가지 병폐이다.
此章指人以所向之方, 使學者知所先後而已, 未遽及盡孝弟․察人倫也. 大抵上蔡氣象宏闊, 所見高明, 微有不屑卑近之意, 故其說必至此然後已, 亦一病也.
현자를 현자로 대하며 색(色)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꾼다.
賢賢易色
‘비록 배우지 않았을지라도’라는 말은 가설적인 말이지, 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곧장 대순(大舜)이 나면서부터 인륜을 알았다는 지극함으로 말한다면 아무래도 문장에 사로잡혀 의미를 잃은 것 같다. 또 성현의 말은 그 높낮이에 따라 각각 지극한 이치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성인의 지위를 하나로 개괄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
‘雖曰未學’, 乃假設之辭, 非指一人而言. 今直以大舜生知人倫之至言之, 却似執文害義也. 且聖賢之語隨其淺深各有至理, 亦不必須一槪說到聖人地位也.
충신을 주로 한다.
主忠信
이 한 구절은 모두 배우는 이의 일이다. ‘충신을 주로 한다’는 것은 이 진실한 이치를 알고서 감히 어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갑자기 “말없이 이루고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고 풀이하는 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고상한 것 같다.
此一節皆學者之事. 主忠信蓋見此實理而不敢違之謂, 遽以‘黙而成之, 不言而信’釋之, 似亦太高矣.
예의 쓰임은 조화를 귀하게 여긴다.
禮之用, 和爲貴.
“거의 (원양이) 걸터앉아 기다리고, 걸터앉아 제멋대로 굴었던 것보다 못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고치려는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올바른 곳에서 지나친 줄을 모르는 것이다.
‘殆不若夷俟踞肆之愈’, 此語欲有所矯, 而不知其過於正.
남을 알지 못함을 근심한다.
患不知人
“남을 아는 것이 위대한 것인가?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 위대한 것인가?” 이것은 또 나를 아는 사람은 드물고 (그 때문에 내가 귀하다) ·자신을 대우함이 도타운 사사로움에 빠져있는 것이다. 근래의 배우는 이들이 조금의 얻은 것도 없으면서 (남을) 똑같이 낮춰보는 것은 어찌 이 말이 흘러들어가서 일으킨 재앙이 아니겠는가? 상채가 「공야장」과 「서(序)」 편에서 ‘사람을 아는 것’에 대해 논한 것이 아주 훌륭한데 이 장에는 아마도 병폐가 있는 것 같다.
‘知人者爲大乎, 人知者爲大乎’, 此又涉乎知我希․自待厚之私矣. 近世學者蓋有未少有得而俯視等夷者, 豈非此語之流生禍哉? 上蔡於公治長序篇論知人處甚佳, 此章却有病.
상채의 말 가운데는 이와 같은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제 견해에 근거를 두고 그 가운데 더욱 심한 것만을 논한 것일 뿐입니다. 뒤편에서도 발견하는 대로 추려낸다면 거의 단락마다 의심스러운 곳이 있겠지만, 그것을 다 써서 보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다만 한 종류의 병폐일 뿐이니 이곳을 본다면 그 나머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여러 설명을 보니 이천이 풀이한 말의 뜻과 함축이 무궁한 음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 나머지 윤씨(尹氏) 같은 경우에는 지키는 것은 안정되어, 내달리며 일을 일으키지는 않으나, 정신을 적다고 여길 뿐이었습니다. 상채는 고명한 식견으로 정자 문하에서 짝을 찾기 어려운데 그의 말이 이처럼 다른 사람의 뜻에 불만족스러우니 하물며 그 나머지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저 역시 이에 속하니 또한 스스로 깊이 경계할 일입니다.
上察語中諸如此類甚多, 此據鄙見, 諭其尤甚者耳. 後篇隨看抄出, 幾於段段有可疑處, 不欲盡寫呈. 大槪亦只是一種病, 卽此亦可以見其餘也. 近看諸說, 惟伊川所解語意涵滀, 旨味無窮. 其次尹氏守得定, 不走作, 所少者精神耳. 夫以上察高明之見, 在程門蓋鮮儷焉, 而其立言不滿人意處尙如此, 况其餘哉? 然則吾屬於此亦可以深自警矣.
의심스러운 것을 기록하다 記疑
【해제】이 글의 원래 제목은 「잡서기의(雜書記疑)」이고, 순희 3년(병신, 1176, 47세) 3월 주헌(周憲)의 「진택기선록(震澤記善錄)」을 읽고 그 속에 포함된 왕빈(王蘋)의 불교적 입장에 대해 비판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연히 잡다한 글 한 편을 얻었는데, 누가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 무리[吾黨]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생각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오래도록 세상에 돌아다니게 되면 위로 사문(師門)에 누가 될까 두려워 기록하고서 군자들이 살펴주기를 기다린다. 순희 병신년(1176) 3월 을묘일.
偶得雜書一編, 不知何人所記, 意其或出於吾黨, 而於鄙意不能無所疑也. 懼其流傳久遠, 上累師門, 因竊識之, 以俟君子考焉. 淳熙丙申三月乙卯.
선생이 임금에게 말했다. “앞 성인과 뒤의 성인이 부절이 합치듯 일치하는 것은, 성인의 도를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인의 마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마음을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드넓기가 끝이 없고 온갖 선이 모두 갖춰졌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를 전하려 한다면 이 마음을 확충하면 될 뿐입니다.”
先生言於上曰: “先聖後聖, 若合符節. 非傳聖人之道, 傳聖人之心也. 非傳聖人之心也, 傳己之心也. 己之心無異聖人之心, 廣大無限, 萬善皆備. 欲傳聖人之道, 擴充此心焉耳.”
내 생각에 이것은 고원한 데에 힘쓰라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힘쓸 곳이 없는 말이다. 성현이 그 임금에게 일러준 것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성인의 도를 배우면 바로 성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의 마음을 알아서 그 마음을 다스리면 성인의 마음과 다를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성인의 도를 전하지 않고 그 마음을 전했으며, 그 마음을 전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이미 ‘나의 마음’이라고 했다면 또한 무엇을 전할 것이 있단 것인가? 하물며 천천히 강론하고 밝히고 존양하는 데에 근본을 두지 않고 곧장 확충한다고 말한다면 또한 무엇을 마음의 올바른 것이라고 여겨 확충한단 말인가? 임금에게 말을 올리면서 쓸데없이 과장하는 것이 이처럼 진실치 못하니 이것은 부족한 것을 보충하지 못할뿐더러 공리공론으로 스스로를 성인이라 여기는 폐해를 열기에 족할 뿐이니, 훗날의 학자들이 더욱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愚謂此言務爲高遠而實無用力之地. 聖賢所以告其君者, 似不如是也. 夫學聖人之道乃能知聖人之心, 知聖人之心以治其心, 而至於與聖人之心無以異焉, 是乃所謂傳心者也. 豈曰不傳其道而傳其心, 不傳其心而傳己之心哉? 且旣曰己之心矣, 則又何傳之有? 况不本於講明存養之漸, 而直以擴充爲言, 則亦將以何者爲心之正而擴充之耶? 夫進言於君而其虛夸不實如此, 是不惟不能有所裨補, 而適所以放其談空自聖之弊. 後之學者尤不可以不戒也.
내가 처음 선생을 뵙자마자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사람이 만물보다 신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마음인가? ‘성’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성인가?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某初見先生, 卽誨之曰: ‘人之所以靈於萬物者, 何也? 謂之心. 如何是心? 謂之性. 如何是性? 宜思之.’
내 생각에 이것은 본래 이치를 궁구하는 일이지, 처음 배움에 접어든 이에게 말할 것은 아니다.
愚謂此固窮理之事, 然非所以語初學者.
내가 양문정공(楊文靖公)에게 물었다. “이천에게 듣기로는 치우침이 없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변함이 없는 것을 용(庸)이라 했는데 어떻습니까?” 선생은 “이것은 선생의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초년의 주장일 것이다. 예전에 이천이 몸소 여여숙(呂與叔)의 「중용설(中庸說)」에 대해 ‘의지함이 없는 것을 중이라 한다는 말은 분명하지 않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내가 직접 이천에게 물었더니, 이천은 ‘중은 의지함이 없다’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선생은 ‘만일 의지함이 없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사방이 있어야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의지함이 없다는 것은 가운데 서서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某問楊文靖公云: ‘聞之伊川,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如何?’ 先生曰: ‘是非先生之言, 不然則初年之說也. 昔伊川親批呂與叔中庸說曰: ‘不倚之謂中, 其言未瑩.’ 吾親問伊川, 伊川曰: ‘中無倚著.’ 某未達, 先生曰: ‘若說不倚, 須是有四旁, 方言不倚得. 不倚者, 中立不倚也.’”
내 생각에 치우침이 없다는 것은 도체(道體)의 저절로 그러한 모습을 밝힌 것이니 즉, 의지하거나 기대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의지함이 없다는 것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사물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정자는 ‘치우침이 없다’는 것으로 중을 이름붙이고 의지함이 없다는 것은 분명치 않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의지함이 없는 것을 분명치 않다고 한 것으로 ‘치우침이 없다’고 한 말을 취소하려고 하니 또한 잘못이다.
愚謂不偏者, 明道體之自然, 卽無所倚著之意也. 不倚則以人而言, 乃見其不倚於物耳. 故程子以不偏名中, 而謂不倚者爲未瑩. 今以不倚者之未瑩, 乃欲擧不偏者而廢之, 其亦誤矣.
물었다. “희노애락이 발동하기 이전을 보아야 한다. 보자마자 곧 이미 발동한 것이다고 하니 어떻게 중을 알 수 있습니까?” 대답했다. “또한 단지 조용히 관찰할 뿐이다.”
問: ‘要看喜怒哀樂未發, 才看便是已發, 如何見得中?’ 曰: ‘且只靜觀.’
내 생각에 이 질문은 아주 절실한데도 대답이 뛰어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조용히 관찰한다’고 말한다면 본시 이미 발동한 것이다. 또 그와 더불어 둘이 된다. 정자는 사람들에게 발동하기 이전에 함양하라고 했지, 사람들에게 그 사이에서 중을 구하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그 가르침이 심오하다.
愚謂此問甚切, 惜乎答之不善也. 蓋曰靜觀, 則固爲已發, 而且與之爲二矣. 程子使人涵養於未發之前, 而不使人求中於其間, 其旨深矣.
물었다. “이천선생이 선우신(鮮于侁)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마치 안자처럼 도를 즐긴다면 안자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했는데 무슨 말입니까?” 대답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마음에 도를 즐기려는 생각이 있다면 곧 들러붙는 것이 있다.”
問: “伊川先生答鮮于侁之問曰: ‘若顔子而樂道, 則不足爲顔子.’ 如何?” 曰: “心上一毫不留. 若有心樂道, 卽有著矣.”
내가 생각하기에 정자의 말은 다만 성현의 마음은 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곳을 가나 (도를) 즐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말일 뿐이다. 만일 도를 하나의 사물로 보고 그것을 즐기려 한다면 마음과 도가 둘이 되어 안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일 뿐이다. 아무개의 말은 도가와 불교의 언저리이지 정자의 본뜻이 아니다.
愚按, 程子之言但謂聖賢之心與道爲一, 故無適而不樂. 若以道爲一物而樂(6-3682)之, 則心與道二而非所以爲顔子耳. 某子之云, 乃老佛緖餘, 非程子之本意也.
스스로 얻은 곳을 어떻게 잘게 나누어 논할 수 있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바로 안 것이다. 명도는 “내일을 말하자마자 게으른 것이다”고 했다. 배우는 이는 한 곳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곧 보려고 하는데, 만일 생각한다면 즉 희롱하는 것이다. 만일 알지 못한다면 또한 지나쳐야 한다.
自得處豈得分毫論? 若見則便見. 明道云: ‘才說明日, 便是悠悠.’ 學者拈起一處思量, 須是要便見. 若悠悠, 卽玩矣. 若未有見, 又且放過.
내 생각에 배움이란 본시 스스로 얻으려는 것이다. 스스로 얻은 것은 진실로 잘게 나누어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스스로 얻으려면 반드시 오랜 동안 축적해서 천천히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충분히 젖어든 상태에서 꿰뚫는 것이다. 맹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로써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스스로 얻기를 바라면서 보는 것을 책망한다면, 이는 바로 매우 성마르고 조급한 것이다. 또 그 본 것을 알 지 못한다는 것은 또 과연 어떤 일이란 말인가? 정자의 말은 ‘배움은 마치 미치지 못하듯이’라는 (논어의 구절로) 인해 말한 것이지, 처음부터 본 것으로 인해 말한 것이 아니다. 또 “만일 알지 못한다면 또한 지나쳐야 한다”면 나아가고 물러남, 빠르고 느림에 아무런 근거가 없을 것이다. 후학들을 너무나 오도하는 것이다.
愚謂學固欲其自得, 而自得誠不可以分毫論. 然欲其自得, 則必其積累漸漬, 然後有以浹洽而貫通焉爾. 孟子所謂深造之以道者, 此也. 今欲自得而責其便見, 則無乃狂躁急迫之甚. 且未知其所見者又果何事也耶? 程子之言, 乃因學如不及而言, 初不爲見處發也. 又曰‘若未有見, 又且放過’, 則其進退遲速, 無所據矣. 其誤後學亦甚矣哉.
황연하게 정신이 깨닫는 곳에 도달하는 것은 지력으로 추구할 수 있는 도리가 아니다. 배우는 이가 어떻게 힘을 쓰는 데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到恍然神悟處, 不是智力求底道理, 學者安能免得不用力?
‘황연(恍然)하게 정신이 깨닫는다’는 것은 이단의 학문에서 쓰는 말이다. 유자는 오직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를 오랜 기간 익히고 쌓아서 접하는 종류마다 꿰뚫고 말없이 스스로 믿을 뿐이다.
恍然神悟, 乃異學之語. 儒者則惟有窮理之功, 積習之久, 觸類貫通而黙有以自信耳.
물었다. “온 세상이 어짊을 허여함을 보지 못했다면 또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고,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것은 마땅히 스스로 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말했다. “본시 옳다. 그러나 온 세상이 어짊을 허여함을 보아야 한다. 학문에 나아감은 치지에 달려 있고, 함양은 경에 달려 있으니,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問: ‘未見天下歸仁, 且非禮勿視聽言動, 當自有見否?’ 曰: ‘固是. 然要便見天下歸仁, 進學在致知, 涵養在敬, 不可偏廢.’
내가 생각하기에 온 세상이 인을 허여한다는 것은 정자가 공자·안자의 뜻을 서술한 것이니, 또한 온 세상이 그의 어짊을 칭송한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바로 몸소 실천한 효과를 말하는 것이지 ‘본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꼭 ‘본 곳’으로 말해야 한다면 질문한 사람의 말이 오히려 멀지 않다. 그러나 ‘반드시 바로 보아야 한다’고 한 것은 매우 성마르고 급박한 것이다. 학문에 나아가고 함양하는 것은 정자의 말이다. 그러나 정자가 말하는 ‘치지’는 일에 즉해서 이치를 궁구하고 쌓아서 꿰뚫기를 바란 것이지, 황연히 정신이 깨달아 온 세상이 인을 허여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愚按, 天下歸仁, 程子述孔․顔之意, 亦曰天下皆稱其仁而已. 乃謂躬行實履之效, 非語其見處也. 必若以見處言, 則如問者之言猶爲未遠. 而所謂須要便見者, 則其狂躁而迫切也甚矣. 進學涵養, 乃程子語. 然程子所謂致知, 正欲其卽事窮理而積累貫通, 非欲其恍然神悟而便見天下歸仁也.
물었다. “생각이 어지러우면 어떻게 합니까?” 대답했다. “사람의 마음에는 본래 생각이 없다. 대부분이 과거나 미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問: ‘思慮紛擾, 如何?’ 曰: ‘人心本無思廬, 多是憶旣往與未來事.’
내가 생각하기에 마음에 생각이 있는 것은 본체에 작용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올 것을 알고 지난 것은 간직하고서 두루 꿰뚫고서 하나의 사물조차 빠뜨리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다. 다만 경(敬)으로 부릴 수 있다면 언제나 그 바름을 얻어 어지러울까 하는 근심이 없게 된다. 이제 그 어지러움을 근심하면서 본래부터 (생각이) 없다고 일러준다면, 본시 마음의 본체와 작용을 극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본래부터 없다는 설명으로 또 어떻게 어지러운 것을 그칠 수 있겠는가?
愚謂心之有思, 乃體之有用, 所以知來藏往, 周流貫徹而無一物之不該也. 但能敬以操之, 則常得其正而無紛擾之患. 今患其紛擾而告以本無, 則固不盡乎心之體用. 且夫本無之說, 又惡能止其紛擾之已然哉?
물었다. “호연지기가 천지의 사이를 꽉 채운다.” 대답했다. “맹자는 또한 이렇게 설명했을 뿐이지만, 그 간격이 없이 통달한 것을 논하자면 또 어떻게 천지를 꽉 채우는데서 그치겠는가?”
問: ‘浩然之氣塞乎天地之間.’ 曰: ‘孟子且如此說耳, 論其洞達無間, 又豈止塞乎天地而已哉? ’
나는 예전부터 근래의 학자들이 단계를 뛰어넘는 폐단을 매우 걱정했다. 그 폐단이란 말하고 이론을 세우면서 그 이치가 마땅한 지의 여부를 묻지 않고 오직 그 학설이 고상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제 이 글을 읽고서 이전 선배들이 말에 이미 계발하는 내용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운을 기른다[養氣]는 학설에 대해 배우는 이들은 또한 마땅히 익숙하게 그 방법을 강론하고 진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이 모두 의리에 합치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이 기는 크고 왕성해져서 천지를 가득 채운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것을 논하지 않고 갑자기 끝이 없는 허황된 주장을 해서 맹자보다 높은 데로 나가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이 또한 심하지 않는가!
愚嘗深患近世學者躐等之弊, 發言立論, 不問其理之當否, 而惟恐其說之不高. 今讀此書, 乃知前輩之言旣有以啓之者矣. 養氣之說, 學者且當熟講其方而實用力焉. 至於事皆合義而無不歉於心, 則是氣浩然, 充塞天地, 蓋不待言而自喩矣. 今不論此而遽爲浩蕩無涯之說, 以求出乎孟子之上, 其欺己而誣人亦甚矣哉!
본성을 알면 즉 생사의 학설에 밝아진다. 본성은 물과 같다.
知性卽明死生之說, 性猶水也.
내 생각에 본성는 곧 이치[理]이다. 그 조목은 인·의·예·지일 뿐이다. 이제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 본성을 알면 생사의 학설에 밝아진다고 하고, 이로써 성을 한 사물로 삼아 생과 사의 사이에서 오가며 출몰한다고 하니, 불교[釋氏]적 생각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愚謂性卽理也, 其目則仁․義․禮․智是已. 今不察此, 而曰知性卽明死生(6-3684)之說, 是以性爲一物而往來出沒乎生死之間也. 非釋氏之意而何哉?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춰집니까?” 선생이 안색을 바로하고 말했다. “만물은 (이미) 나에게 갖춰졌다.” 어떤 이는 말을 듣자마자 깨우침이 있었다.
某問: ‘如何是萬物皆備於我?’ 先生正容曰: ‘萬物皆備於我.’ 某言下有省.
내가 살펴보니 예나 지금이나 성현이 묻고 답하는 말에 이와 같은 사례는 없었고, 배우는 이도 이처럼 갑자기 (깨우침을) 얻은 이가 없었다. 이것은 모두 근래 선학(禪學)의 풍조를 배워 그것을 좋아하고 본받으려 하면서, 서로 이끌어가며 스스로를 속이는 지경에 빠지는 것을 아지 못하는 것이다.
愚觀古今聖賢問答之詞, 未有如此之例, 其學者亦未有如此遽有得者. 此皆習聞近世禪學之風而慕效之, 不自知其相率而陷於自欺也.
배우는 이는 반드시 아래에서 배워 위에 통달해야 한다…….
學者須是下學而上達(云云).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이치는 본시 옳다. 그러나 아래에서 배우는 방법을 일러주지 않고 갑자기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빨리 단계를 뛰어넘게 만들고, 아래에서 배우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뜻이 있다.
愚謂此理固然, 然未嘗告以下學之方而遽爲此說, 便有使人躐等欲速而不安於下學之意.
어떤 이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란 말에 의문이 있어서 매번 선배를 만날 때마다 반드시 물어보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주장을 갖고 일러주었다. 선생에게도 물었는데, 선생께서는 “만일 공에게 설명한다면 다만 나의 것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공은 오히려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고 했다. 그 사람은 마침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1, 2년 동안 만나게 되면 곧 물었더니, 선생은 다만‘이치가 이와 같다’고만 하셨다. 그 후에 그 사람은 시를 지어 운운했다.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소득이 있었다.
某人自言初疑 ‘逝者如斯夫’, 每見先達必問, 人皆有說以相告. 及問先生, 則曰: ‘若說與公, 只說得我底, 公却自無所得.’ 某遂心服. 一二年間, 才見卽問, 先生但曰理是如此. 其後某人有詩云云, 至此方有所得.
내 생각에 시내 옆에서 찬탄한 것은 성인께서 끝없는 도체에 감동하셔서 사람들에게 학문에 나아가는데 바삐 노력하도록 면려하신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선대의 유자들이 감동한 뜻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정자가 특별히 그 뜻을 발명하면서 다른 데에 미칠 겨를이 없었을 뿐이었다. 전하는 사람이 깊이 살피지 못하고 마침내 성인의 이 말이 오로지 도체를 가리켜 한 것이라고만 했다면 이미 잘못이다. 이제 그 올바른 것으로 말하자면 질문한 사람은 본래부터 의심할 것이 없었고, 다만 일러주는 사람이 다만 학문에 나아가는데 바삐 서두르라는 뜻으로만 일러주었어야 했을 뿐이다. 만일 그 잘못을 따라 말하자면 배우는 이는 만날 때마다 꼭 물어보고, 보자마자 물어보았으니 매우 단계를 뛰어 넘었다. 일러주는 사람도 그를 억제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황홀하니 측량할 수 없는 경계로 이끌었으니, 지나치게 절도를 넘어섰다. 또 어떤 이가 스스로 얻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시를 짓는 것은 도가와 불교에 늘상 하는 진부한 말일 뿐이니, 어디에 그가 얻었다는 것이 있단 말인가?
愚謂川上之歎, 聖人有感於道體之無窮而語之以勉人, 便汲汲於進學耳. 然先儒不明其所感之意, 故程子特發明之, 而不暇及乎其他. 傳者不深考, 遂以聖人此言專爲指示道體而發, 則已誤矣. 今若以其正而言之, 則問者本無可疑, 而告者但當告以汲汲進學之意. 若循其誤而言之, 則學者每見必問, 才見卽問, 其躐等甚矣. 告者乃不之抑, 而反引之於恍惚不可測知之境, 其凌節亦甚矣. 且某人者自謂有得, 而所爲詩語, 乃老佛陳腐之常談而已, 惡在其有得耶?
어떤 사람이 유학과 불교의 같고 다른 점을 묻자 선생이 말했다. “공의 본래 자리[本來處]에 유자나 부처가 있는가?”
或問儒佛同異, 先生曰: ‘公本來處還有儒佛否?’
내 생각에 하늘이 명한 본성[天命之性]은 본시 유자나 불자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유자와 불자, 옳고 그름의 이치는 이미 갖추어졌다. 반드시 ‘(차이가) 있지 않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어째서 유독 유자나 불자뿐이겠는가. 본시 요(堯)와 걸(桀)의 (차이도)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요가 요가 되는 까닭과 걸이 걸이 되는 까닭은 어떻게 분별할 수 없겠는가? 이제 아무개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것은 본래 있지 않는 것으로 유불을 뒤섞어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것은 선학의 말류에서 늘상 하는 음둔(淫遁)한 말이니, 속학을 하는 선비가 풍조를 좇아 휩쓸려가는 것은 이상할 것도 못된다. 유독 아무개는 스스로 도를 갖춘 이에게 직접 배웠다고 하면서 이처럼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
愚謂天命之性, 固未嘗有儒佛也. 然儒佛是非之理, 則已具矣. 必以未嘗有者爲言, 則奚獨儒佛也, 固亦未嘗有堯桀也. 然堯之所以爲堯, 桀之所以爲桀, 則豈可以莫之辨哉? 今某子之言乃如此, 是欲以夫本來無有者混儒彿而一之也. 此禪學末流淫遁之常談, 俗學之士從風而靡, 有不足怪. 獨某子自謂親承有道, 而立言如此, 則爲不可解耳.
어떤 이가 ‘일어서면 그것이 앞에 참여함을 볼 수 있고, 수레에 있으면 그것이 멍에에 기댐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물었다. 선생이 대답했다. “앞에 참여하고 멍에게 기댄다는 것은 어떤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다’고 해서도 안 된다.” 아무개 역시 시에서 “앞에서 참여하고 멍에게 기대는 것을 어찌 바꿀 수 있을까? 다만 지금 편료(便了)라도 서로 친할 뿐. 옛 사람은 배 흔적에서 칼을 찾았다하니, 자장이 띠에 글 쓴 것과 닮았구려.”
或問立則見其參於前, 在興則見其倚於衡. 先生曰: ‘參前倚衡, 非有物也, 謂之無則不可.’ 某人亦有詩云: ‘參倚前衡豈易陳? 只今便了乃相親. 昔人求劍尋舟跡, 大似子張書在紳.’
내 생각에 공자께서 자장에게 충신과 독경으로 대답하면서 앞에 참여하고 멍에에 기댄다는 설명을 하신 것은 두 말을 힘껏 실천하면서 잠시라도 잊지 말기를 바라서였다. 이를테면 앉아서는 담장을 보고 먹을 때는 국을 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근래에 설명하는 사람들이 괴상하게 변형시켜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또한 탄식할 일이다. 또한 ‘다만 이제 편로라도 서로 친하다’고 말한 것은 이단의 학문에서 늘상 하는 천박한 말을 가져다 쓴 것이니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에 전대의 현자들을 낮춰보고 멋대로 꾸짖고 모욕하니 또한 너무나도 거리낌이 없지 않는가!
愚謂孔子答子張以忠信篤敬, 而有參前倚衡之說, 蓋欲其力行二語, 造次不忘. 若曰坐見於牆, 食見於羹云耳. 而近世說者展轉怪妄至於如此, 亦可歎已. 且其所謂 ‘只今便了乃相親’者, 竊取異學鄙俚之常談, 可羞甚矣. 乃敢下視前賢, 肆其譏侮, 不亦無忌憚之甚哉!
어떤 이가 말했다. “온 세상이 인을 허여한다는 것은 다만 사물마다 모두 내 인을 허여한다는 것일 뿐이다.” 선생이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오히려 인을 허여한단 것인가?” 어떤 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개가 시를 지어서 “큰 바다는 바람으로 인해 갖가지 거품 일어나네, 형태는 비록 다르지만 암암리에 두루 흘러. 바람과 거품 형용할 수 없는데, 무엇이 단서인가? 이곳이 마땅히 정점에 이르러야 할 곳이다”고 했다.
或云: ‘天下歸仁, 只是物物皆歸吾仁.’ 先生指窗問曰: ‘此還歸仁否?’ 或人黙然. 某人有詩云: ‘大海因風起萬漚, 形軀雖異暗周流. 風漚未狀端何若? 此處應須要徹頭.’
내 생각에 천하가 인을 허여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은 이미 앞에 나온다. 지금 또 사물마다 나의 어짊을 허여한다는 말로 논하자면 창문을 가리킬 때 또한 대꾸하면서 “이것은 마치 내 어짊을 허여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반드시 까닭없이 깨트리지는 않는다”고 할 것이다. 의리란 이와 같지 않아서 모두 체험의 실질을 갖고 있다. 만일 다만 이 시처럼 설명한다면 근래 선학의 하류들은 능히 말할 수 있겠지만 어찌 공자·안자가 서로 전한 진실한 학문이겠는가?
愚按, 天下歸仁說已見前. 今且以所謂物物皆歸吾仁者論之, 則指窗之問, 亦應之曰: ‘此若不歸吾仁, 則必無故而戕敗之矣.’ 大凡義理莫不如此, 皆有體驗之實. 若但如此詩之說, 則近世襌學之下者類能言之, 豈孔․顔所以相傳之實學哉?
안자는 ‘온 세상이 인을 허여한다’는 말을 듣고 또 극기의 조목을 물었으며, ‘청컨대 이 말에 종사하겠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이 이치에서 헤엄치듯 노닐 수 있었다.
顔子聞天下歸仁, 又問克己之目, 請事斯語, 所以游泳此理也.
내 생각에 온 세상이 인을 허여하는 것은 극기의 효과이다. 조목을 묻고 종사하겠다고 청한 것은 노력의 실제이다. 아무개의 말은 순서를 잃었다.
愚謂天下歸仁者, 克己之效, 問目請事, 乃其用功之實也. 某子之言失其序矣.
물었다. “마음을 극진히 발휘하고, 본성을 알며, 하늘을 아는 것은 아는 것[知之]이요,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며, 하늘을 섬기는 것은 기르는 것[養之]이다.” 선생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 예전에 이천에게 ‘나아가 도달한 뒤에도 오히려 함양을 해야합니까?’라고 묻자 이천이 말했다. ‘나아가 도달한 후에 다시 무엇을 함양한다고 하겠는가?’ 마음을 극진히 발휘하고 본성을 아는 것은 앎이 지극한 것이요, 앎이 지극하면 마음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하늘이며, 하늘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마음이다. 때문에 하늘을 낳고 땅을 낳으며(이것은 하늘의 형체를 말한다) 만물을 화육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하늘을 섬기려는 것이다.”
問: ‘盡心知性知天是知之, 存心養性事天是養之.’ 先生曰: ‘不然. 昔嘗問伊川造得到後還要涵養否? 伊川曰: ‘造得到後, 更說甚涵養?’ 盡心知性, 知之至也. 知之至, 則心卽性, 性卽天, 天卽性, 性卽心, 所以生天生地, (此言天之形體)化育萬物. 其次則欲存心養性以事天.’
내가 살피건대, 질문한 사람의 말이 맹자 본문의 뜻을 얻었다. 아무개가 인용한 정자의 말은 성인의 일이지, 보통 사람을 위해 가설한 것이 아니다. 정자가 말한 ‘나아가 도달했다’는 것은 바로 눈과 발이 함께 도달해서 극진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일 뿐이다. 아무개는 홀로 ‘아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또 보통 사람에게 통하도록 하려 하는데 어찌 질문할 때에 말했던 ‘나아가 도달했다’는 것이 이미 지금 말하는 것과 같은데 정자가 살피지 못한 것이겠는가? 만일 정자가 여기에서 공자에게 자장이 ‘달(達)’을 물었을 때와 똑같이 했다고 한다면 일러주었던 것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마음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하늘이며, 하늘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마음이다”는 말도 조리가 없다. 또 하늘과 땅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니 마음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마음이 하늘의 형체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에서 ‘생각이 모여 국토를 이룬다’는 주장의 언저리에 있는 의론이니 장자(張子)가 일찍이 힘껏 배척했다.
愚按, 問者之言, 於孟子之文義得之矣. 某子所引程子之言, 乃聖人之事, 非爲衆人設也. 程子所謂造得到者, 正謂足目俱到, 無所不盡耳. 而某子乃獨以知之爲說, 而又通之衆人, 豈其本發問之時, 所謂造得到者, 已如今之所謂, 而程子不之察耶? 若使程子於此如孔子於子張之問達也, 則所以告之者必不然矣. 又云 ‘心卽性, 性卽天, 天卽性, 性卽心’, 此語亦無倫理. 且天地乃本有之物, 非心所能生也. 若曰心能生天之形體, 是乃釋氏想澄成國土之餘論, 張子嘗力排之矣.
선생의 문인 가운데 갑(甲)이 시에서 “누가 도가 견고해서 쉬이 알 수 없다 했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잠시라도 떨어진 적 없다네”라고 하자 을(乙)이 대답하면서 말했다. “만일 도가 견고해서 쉬이 알 수 없다면, 반드시 알아야 하네, 이 말은 이미 잘못인 줄을. 요군은 이에 대해 단적하게 안다지만, 나와 그가 (둘이 됨을) 면치 못했네” 선생은 을의 말을 옳다고 했다.
先生之門人甲有詩云: ‘誰道堅高不易知? 生來頃刻未嘗離.’ 乙答之云: ‘若道堅高不易知, 須知此語已成非. 饒君向此知端的, 未免猶爲我與伊.’ 先生以乙之言爲是.
내가 살피기에, 견고(堅高) 운운한 것은 안자가 부자의 도를 쉽사리 측량할 수 없음을 형용한 말일 뿐 한 물건이 완고하니 굳세고 아득하니 높이 서있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갑이 이미 잘못을 했는데 을은 더욱 더 심한 잘못을 했다. 또 모두가 근거도 없이 경솔하고 부박한 말이어서 결코 유자의 기상과 같은 부류가 아니다. 아무개가 갑을 잘못이라 하지 않고, 또 을을 옳다고 한 것도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愚按, 堅高云者, 顔子形容夫子之道不易窺測之辭爾, 非有一物頑然而堅·嶢然而高也. 今甲已失之, 而乙又甚焉, 且皆儇淺無稽, 絶不類儒者氣象. 某子乃不以甲爲非 而又以乙爲是, 亦不可曉也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