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권
書 (知舊門人問答)
공중지(풍)에게 답함 答鞏仲至(豐)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이다.
당신의 명성을 듣고 뵙고 싶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버렸습니다. 당신이 직접 저를 방문하시어 오랜 숙원을 이루어 주시니 매우 기쁩니다. 헤어진 뒤에는 또 편지를 주심과 아울러 (제가 살고 있는) 무이 지방에 대한 아름다운 글까지 주셨습니다. 공무에 종사하시면서도 산수를 유람하고, 조용한 시간에는 시를 짓고 읊어, 마음속의 아름다운 정취를 표현하신다고 하니, 더욱 기쁩니다. 관사로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리가 내린 뒤로는,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막부에 도움을 받아 하시는 모든 일에 행복이 함께 하길 빕니다. 저는 병이 날로 심해지고, 최근에는 손발이 저리는 고통 때문에 굽히고 펼 수초자 없어 일상생활 모두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당신의 상관이 이 곳을 지나갔었지만, 이런 이유로 하여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관대하고 온화하여 아랫사람의 사정을 잘 헤아려준다고 하니, 당신께서도 저의 공경한 예를 반드시 아실 것입니다. 창보는 도성에 들어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올해 안에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인편이 있어 이 편지를 붙입니다. 병든 몸으로 안석에 기대어 받아쓰게 하는 것이니, (정중하지 못한) 이 점 이해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聞名願見, 爲日久矣. 玆辱枉顧, 乃遂夙心, 慰幸可量. 別後又承惠問, 幷示武夷佳句, 獲聞于役之暇, 不廢山水之娛, 賦詠從容, 曲盡佳致, 尤以爲喜. 比想已還官次久矣. 霜寒之後, 繼以暄暖, 諒惟幕府有相, 起處多福. 熹衰病益甚, 最苦拘攣, 不能信詘, 起居動作皆有所妨. 樞帥經由, 以此不得敬謁. 然聞其寬和盡下, 想於賢佐必知所敬禮也. 昌父入城未歸, 計必還此度歲矣. 偶便寓此, 病軀憚於憑几, 口占不謹, 幸深原照.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두 번째 편지이다.
장승(掌丞)이 최근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봄기운이 조금씩 짙어지는 요즈음 막부에 머물러 계시면서 하시는 일이 잘 되신다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저는 늙고 병들어 손발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증상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본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죽기도 전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사람을 더욱 처량하게 합니다. 늙어 벼슬을 그만두려는 장계를 주군(州郡)에서 아직까지 기꺼이 위로 올리지 않고 있습니다.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에 화를 당하게 하고 싶지 않지만, 저는 이미 뜻을 결정하였기에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저의 글을 자꾸 미루면서 위로 올리지 않으니, 저의 마음이 참으로 복잡합니다. 당신의 장관이 이 곳을 지나갔는데 한번 만나 뵙지 못했는데, 당신이 답장한 편지의 내용이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감히 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장관의 훌륭한 행정력을 이야기하고, 보내주신 편지에서 밝히신 것은 사람의 뜻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여자약(呂子約) 자제에게서 최근 편지를 받고, 지난해에 명초산에 큰 불이 나서 그 널을 거의 태울 뻔하다가 다행히 온전히 보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도리어 후장(厚葬)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왕시발(汪時發)의 편지를 보니, 여자약 집안에서 장사지낸 일에 대해 자못 불쾌해 하신 것 같은데, 그와 관련한 자세한 내막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반숙창(潘叔昌)이 나이 많도록 크게 진전이 없는 것은 전날에 밖으로 향하는 뜻이 너무 많아 발판[脚根]이 견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표(簞瓢)를 가볍게 버린다’는 글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반성하게 합니다. 다만 참 즐거움의 소재를 모르면 비록 버리지 않으려고 하여도 될 수가 없을 것이니, 여기에 별도로 힘을 기울여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掌丞轉致近問, 獲聞比日春序浸暄, 慕府優游, 起處佳福, 足以爲慰. 熹衰病拘攣, 日甚一日. 死生長短本所不計, 但未死之前, 轉動不得, 亦令人無况耳. 告老之章, 州郡未肯騰奏, 雖荷其見憐, 不欲使觸禍機, 然鄙意已決, 無所復顧, 爲此宿留, 令人腹煩耳. 樞帥經由, 不及一見, 荷其答書之意甚勤, 繼此未敢爲問. 往來多能道其政事之美, 而來書之所發明尤足起人意也. 子約子弟近得書云, 歲前明招大火, 其柩幾不免, 幸而獲全, 却不知其厚葬之說. 但得汪時發書, 似頗有所不快意, 不知曲折如何也. 叔昌老不長進, 亦是前日向外意多, 脚根不牢實耳. 輕棄簞瓢之句, 今人深省. 顧未知眞樂所在, 則雖欲不棄而不可得. 此須別有箇著力處, 乃足恃耳.
‘무이(武夷)’의 속시(續詩)를 읽어 보니 모두 지난 날 다녀 본 곳이어서 경물(景物)이 눈에 선하여 오묘한 모사(模寫)에 더욱 감탄하였습니다. 그리고 종횡(縱橫) 방사(放肆)한 시서(詩序)는 전 사람도 미쳐 밝히지 않은 것을 많이 표출시켰습니다. 다만 강서(江西)를 비평하고 완릉(宛陵)을 추켜세운 것은 세상 사람의 귀를 매우 놀라게 한 것입니다. 젊었을 적에 매성유(梅聖兪)의 시를 읽어보고 좋아할 줄을 알았지요. 그러나 한 때의 여러분이 말하는 하돈(河豚) 등의 시편(詩篇)에 대하여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의문을 가졌으며, 장(張)씨와 서(徐)씨의 논리도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적막한 단편시가 한가하고 스산하다고 한 것도 위(魏)․진(晉) 이전 시대의 고상한 품격의 여운(餘韻)이 있는 것인데 당세(當世)의 궤도에 힘을 기울인 자가 아니면 아마도 평론하는 자가 다 살피지 못함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당신이 쓴 경책(警策) 두 권을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심부름꾼)이 돌아오는 날 그 책을 볼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당신의 부인과 자제들이 모두 훌륭하고 뛰어나며, 아이들의 문안을 받으니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창보(昌父)가 어제 책을 얻어가지고 이미 집에 도착했습니다. 보내주신 시의 의미가 매우 풍부하고, 고수(孤瘦: 시격詩格)는 더욱 훌륭합니다. 얼마 전 헌대(憲臺) 왕간(王幹)이 여기를 지나면서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이제 그것과 함께 책 한 권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전달해주십시오. 책 중에서 그 사람에게 부탁한 한두 가지 일에 관한 가부를 황직경에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武夷續詩讀之, 無非向來經行所歷, 景物宛然, 益歎墓寫之妙. 詩序縱橫放肆, 多出前人未發之祕. 但詆江西而進宛陸, 不能不駭俗聽耳. 少時嘗讀(6-3335)梅詩, 亦知愛之, 而於一時諸公所稱道, 如河豚等篇, 有所未喩, 用此頗疑張徐之論亦未爲過. 至於寂寥短章, 閑暇蕭散, 猶有魏晉以前高風餘韻, 而不極力於當世之軌轍者, 則恐論者有未盡察也. 不審賢者雅意謂何? 所錄警策二卷者, 亦可使得一見耶? 此人還日, 幸望錄寄, 千萬之望. 貴眷郞娘, 一一佳裕, 兒輩蒙問, 感感. 昌父昨日得書, 已到家矣. 寄詩甚富, 孤瘦亦益甚矣. 憲臺王幹前日過此, 嘗託致區區. 今有一書與之, 煩爲轉達. 書中囑渠一二事, 幸爲扣其可否, 以語直卿也.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세 번째 편지이다.
한동안 당신의 안부를 듣지 못했으나, 저의 마음은 이미 당신이 계신 곳으로 가 있습니다. 엊그제 역참을 통해 당신의 소식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봄 날씨가 따뜻하고 막부도 별일 없이 한가하고 당신도 잘 지내신다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기록하여 보내주신 옛날의 시를 읽어보니,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참으로 정치하여 깊이 감탄하였습니다. 또 ‘단표(簞瓢)」 구절은 그 전편을 보고서 더 깊이 감탄하였습니다. 다만 매성유 시에 대한 평가는 아직 모두 다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의 글이 편집되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거산(張巨山)은 위진육조(魏晉六朝)의 작품을 본받은 것이지, 강서(江西) 황산곡을 추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의 한담(閑澹) 고원(高遠)함 역시 시에 조예가 깊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동파 선생이 이태백과 두자미는 문제시 하고, 위응물과 유종원을 추숭하였으니, 이는 대개 평소에 쓴 작품들에 대해 스스로 후회하면서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그 말이 음미할만한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할 수 없어, 마음만 당신이 계신 곳으로 달려갑니다. 더욱 절차탁마 탐구해주시기 바랍니다. 늙고 병든 몸이라 이미 더 이상의 바람이 없으니, 한갓 한가한 날들을 즐기며 근심을 하지 않으려 할 뿐입니다. 늙어 더 이상 벼슬을 할 수 없다는 장계는 이미 올렸습니다만, 이미 조금 늦어버린 것이 한스러우니, 이는 옛 벗들이 (장계를 늦게 올린)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유(留) 서(徐)가 비로소 죄수의 신분에서 풀려났고, 팽(彭) 증(曾)은 거의 보처(補處)에 떨어질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참으로 험난하고 위험하니,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을 어찌 피하겠습니까.
稍不聞問, 已劇馳情. 昨日遞中奉告之辱, 獲審比日春和, 幕府多餘, 體履佳適, 良以爲慰. 錄寄舊詩, 得以快讀, 雄麗精切, 歎服深矣. 簞瓢之句, 得其全篇, 又深感慨也. 但梅語之評, 未能盡解, 當挨得所集錄, 始敢扣也. 張巨山乃學魏晉六朝之作, 非宗江西者, 其詩閑澹高遠, 恐亦未可謂不深於詩者也. 坡公病李杜而推韋柳, 蓋亦自悔其平時之作而未能自拔者. 其言似亦有味, 不審明者視之, (6-3336)以爲如何也. 無由面論, 臨風快想, 因來更望切磋. 究之, 老病久已無復此夢, 亦聊以暇日鎖憂耳. 告老之章已上, 但已差晩爲可恨, 故舊諸賢不得不任其責也. 留徐方脫囚拘, 彭曾幾墮補處, 世途難險, 吁, 可畏哉! 然亦何可避也.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이다.
역참을 통해 당신의 편지를 두 차례 받고, 아울러 시통(詩筒)까지 받았으니, 저를 생각해주시는 정성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작은 조카와 유근(劉瑾) 모두 당신의 배려 덕분에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소식을 접한 뒤로도, 몸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잘 이루시며, 아름다운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당신께서 변변찮은 저의 글을 구해 보시려고 하시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찌 이 글을 아껴서 그러겠습니까. 요즘엔 이러한 글은 일체 쓰지 않고 않았습니다. 저번에 방옹(放翁)의 부탁을 받고 「노학재명(老學齋銘)」을 썼지만, 나중엔 감히 다시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자질구레하게 변명하지 않더라도, 당신께서는 이미 묵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듣건대, 옛날 성현이 사람을 가르친 것은 천하의 의리를 강구하여 밝혀서 그 마음의 지식을 개발하고, 그렇게 한 뒤에 종신토록 이를 힘써 행하고 굳게 지키도록 하는 데 불과했습니다. 무릇 그 말로 나타내고 사업으로 시행하는 것이 모두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이지 애당초 그밖에 별도의 다른 길에다 공력(功力)을 들여서 문자를 아름답게 하거나 사업을 넓혀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역의 건괘(乾卦) 구삼(九三)에 대한 「문언(文言)」은 사실상 학문의 시종(始終)을 밝힌 것으로서, “충(忠)과 신(信)이 덕(德)을 진전시키는 것이다”고 한 것은 나의 마음이 실제로 이 이치에 밝아서 참으로 좋아하고 싫어하기를 마치 미색(美色)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게 하고자 함이고, “말을 함에 성실하게 하는 것이 학업을 닦는 것이다”고 한 것은 나의 마음의 움직임을 삼가하여 그 성실함을 다하되 나가기는 쉽고 거두어들이기는 어려운 말에 대하여 더욱 우선으로 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문언」의 ‘말을 한다[修辭]’는 것이 어찌 문장 짓는 것을 말함이겠는가? 지금 어떤 사람은 (「문언(文言)」에 있는) ‘수사(修辭)’를 가지고 자기 재사(齋舍)의 이름으로 쓰기도 하는데, 나는 참으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령 「문언」의 본뜻과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충(忠)과 신(信)이 덕(德)을 진전시킨다’고 한 뒤에 있어야지 성급하게 먼저 언급할 성질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부시(賦詩)에서 읊은 경우라면, 아마도 그 ‘온종일 힘쓰고 노력하고서도 저녁까지 조심한다’고 한 뜻과는 더욱 멀어서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 대하여 깊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감히 기문을 지으라는 명을 받들지는 않았으나 생각하여 보면 이 일은 사람에게 관계된 바가 적지 않음으로 강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개인 의견을 말한 것이니, 잘 생각하여 보시고 한 말씀으로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遞中兩辱惠書, 幷有詩筒之况, 荷意勤矣. 又知小姪劉親皆以垂念之故, 得以竊食, 益深感愧. 信後淸和, 恭惟幕府有相, 起處佳福. 所需惡語, 尤荷不鄙. 此於吾人豈有所愛? 但近年此等一切廢置. 向已許爲放翁作老學齋銘, 後亦不復敢著語. 高明應已黙解, 不待縷縷自辨數也. 抑又聞之, 古之聖賢所以敎人, 不過使之講明天下之義理, 以開發其心之知識, 然後力行固守, 以終其身. 而凡其見之言論措之事業者, 莫不由是以出, 初非此外別有歧路, 可施功力, 以致文字之華靡․事業之恢宏也. 故易之文言於乾九三實明學之始終 (6-3337)而其所謂忠信所以進德者, 欲吾之心實明是理而眞好惡之, 若其好好色而惡惡臭也. 所謂修辭立誠以居業者, 欲吾之謹夫所發, 以致其實, 而尤先於言語之易放而難收也. 其曰修辭, 豈作文之謂哉. 今或者以修辭名左右之齋, 吾固未知其所謂. 然設若盡如文言之本指 則猶恐此事當在忠信進德之後, 而未可以遽及 若如或者賦詩之所詠歎 則恐其於乾乾夕惕之意又益遠而不相似也. 鄙意於此深有所不能無疑者. 今雖不敢承命以爲記 然念此事於人所關不細, 有不可以不之講者, 故敢私以爲請. 幸試思之而還以一言, 判其是非焉.
아름다운 시편(詩篇)을 보내 준 두터운 뜻은 감사합니다. 다만 우둔한 제가 거기에 대하여 어찌 감히 참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 번 이상 반복하여 읽으면서 감탄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우연히 기억나는 것은 근년에 도(道)를 공부하면서 전일(專一)하지 못하였을 적에 간혹 시의 본말을 고찰하여 고금(古今)의 시에 삼변(三變)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서경에 기록된 우(虞)․하(夏) 시대로부터 위(魏)․진(晉) 때까지가 한 등급이 되고, 진(晉)․송(宋) 사이의 안연지(顔延之)․사영운(謝靈運) 으로부터 당(唐)의 초기까지가 한 등급이 되고, 심전기(沈佺期)․송지문(宋之問) 이후로부터 율시(律詩)가 정착되고서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또 한 등급이 됩니다. 그러나 당(唐)의 초기 이전에는 그 시를 짓는 것이 진실로 수준의 고하(高下)는 있었으나 법은 오히려 변하지 않았습니다. 율시(律詩)가 나온 뒤에는 시와 법이 비로소 모두 크게 변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더욱 교묘하고 치밀하게 되어 옛사람의 품격은 다시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망령되게 여러 경전과 역사서에 실려 있는 운어(韻語)와 문선(文選)에 실려 있는 한(漢)․위(魏) 시대의 고사(古詞), 그리고 곽경순(郭景純)과 도연명(陶淵明)이 작품까지 다 발췌하여 따로 한 편을 만들어서 시경 300 편과 초사(楚辭)의 뒤에 붙여서 시의 근본과 준칙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또 삼변(三變)의 후자인 두 등급 중에서 고시(古詩)에 가까운 것을 선별하여 각각 한 편을 만들어서 우익(羽翼)과 호위(護衛)[輿衛]의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또 이태백과 두자미로 말하자면, 이태백의 「고풍」 50수(首)와 두자미의 진(秦)나라․촉(蜀)나라 기행(紀行)․「유흥(遺興)」․「출새(出塞)」․「동관(潼關)」․「석호(石濠)」․「하일(夏日)」․「하야(夏夜)」와 같은 여러 편들입니다. 율시(律時)로는 왕유(王維)․위응물(韋應物) 같은 무리 역시 소산(蕭散)한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잔재주나 부리고 천박하여 아무 맛도 없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의(詩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 제거하여 우리의 눈에 띄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음속에는 한 글자도 세속적인 말과 생각이 없게 하면, 그 시 공부에 있어서 고원(高遠)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여도 절로 고원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만 학문을 해야 할 것이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는데다가 재주와 능력도 모자라서 결코 옛사람을 따라가 같게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 포기하고 다시 하려고 들지 아니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늙고 병들어 온갖 생각이 줄어드는 지경인데 어떻게 다시 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의 깊은 배려에 감동하여 이 말이 통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말하는 것이니 혹시라도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형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至於佳篇之貺 則意益厚矣. 顧惟鈍拙, 於此豈敢有所與? 三復以還, 但知贊歎而已. 然因此偶記頃年學道未能專一之時 亦嘗間考詩之原委, 因知古今之詩凡有三變 蓋自書傳所記, 虞夏以來, 下及魏晉 自爲一等; 自晉宋間顔謝以後, 下及唐初, 自爲一等; 自沈宋以後, 定著律詩, 下及今日, 又爲一等. 然自唐初以前, 其爲詩者 固有高下而法猶未變. 至律詩出, 而後詩之與法始皆大變. 以至今日, 益巧益密, 而無復古人之風矣. 故嘗妄欲抄取經史諸書所載韻語, 下及文選․漢魏古詞, 以盡乎郭景純․陶淵明之所作, 自爲一編, 以附于三百篇․楚辭之後, 以爲詩之根本準則. 又於其下二等之中擇其近於古者, 各爲一編, 以爲之羽翼(6-3338)輿衛. (且以李杜言之, 則如李之古風五十首, 杜之秦蜀紀行․遺興․出塞․潼關․石濠․夏日․夏夜諸篇. 律時則如王維․韋應物輩, 亦自有蕭散之趣, 未至如今日之細碎卑冗 無餘味也.) 其不合者則悉去之 不使其接於吾之耳目而入於吾之胸次 要使方寸之中無一字世俗言語意思 則其爲詩不期於高遠而自高遠矣. 然顧爲學之務有急於此者, 亦復自知材力短弱, 決不能追古人而與之並, 遂悉棄去 不能復爲 況今老病, 百念休歇, 寧尙復語此乎? 然感左右見顧之重, 若以爲可語此者, 故聊復言之, 恐或可以少助百尺竿頭更進一步之勢也.
보내 온 편지에서 육예(六藝)의 아름다운 것들을 깨끗이 빨아서 참으로 맑은 것만을 찾아내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지극한 의론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모름지기 고금의 체제의 아정(雅正)함과 저속(低俗)함의 향배(向背)부터 먼저 알고, 다시 장부(臟腑) 속의 묵은 찌꺼기들을 모두 깨끗이 씻어낸 후라야 바야흐로 이 말이 먹혀 들어갈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 찌들고 탁한 것이 주체가 되어 아름다운 것이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근래의 시인들은 일찍이 그 관문을 뚫지 못하고 가까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룩한 것 모두 사람의 뜻에 차지 않으니 깊이 거론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에서 논하자면, 서로 장단점이 있으니, 일률적으로 이쪽은 억누리고 저쪽만 추켜세워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권도(權度)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그 버리고 취함에 있어서 천하의 공공성에 다 부합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관해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 편지로는 다할 수 없으니, 다음 날 직접 대면하여 말하게 되면 아마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지난번에는 ‘수사(修辭)’의 공안(公案)을 매듭짓고자 하여, 이것을 논의할 겨를이 없었을 뿐입니다. 기문(記文)의 내용은 매우 좋아 사리를 모두 설명했습니다. 다만 마땅히 구(歐)․증(曾)의 유법(遺法)을 다시 고찰하고 갈고 닦아서, 그 청명하고 높고 순결한 가운데 자연스럽게 온화한 용모와 우러르는 태도를 지니게 한다면, 그 전통이 오래되면 될 수록 사람들이 더욱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말하게 되어 참으로 죄송합니다.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복해서 살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來喩所云漱六藝之芳潤以求眞澹, 此誠極至之論 然恐亦須先識得古今體製, 雅俗鄕背, 仍更洗滌得盡腸胃間夙生葷血脂膏, 然後此語方有所措. 如其未然, 竊恐穢濁爲主, 芳潤入不得也. 近世詩人正緣不曾透得此關, 而規規於近局. 故其所就皆不滿人意, 無足深論. 然旣就其中而論之, 則又互有短長, 不可一槪抑此伸彼. 況權度未審, 其所去取又或未能盡合天下之公也. 此說甚長, 非書可究. 他詩惑得面論, 庶幾可盡. 但恐彼時且要結絶修辭公案, 無暇可及此耳. 記文甚健, 說盡事理. 但恐亦當更考歐曾遺法, 料簡刮摩, 使其淸明峻潔之中自有雍容俯仰之態, 則其傳當愈遠而使人愈無遺憾矣. 僭易倂及, 愧悚之深. 不審(6-3339)明者於意云何, 亦幸有以反覆之也. 長溪王君之詩竟如何?
장계 지방 왕수의 시는 어떠합니까? 여기에 황자후(黃子厚)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시는 초(楚)․한(漢)의 여러 작품 중에서 온 것이어서 세속 사람이 말을 전연 닮지 않았으며 알아주는 사람도 적었습니다. 근래에 사창(社倉)의 출납 관계에 대해 감찰(監察)을 받아 낭패를 당하고 우울증이 걸려서 죽었는데 매우 슬픈 일입니다. 방옹(放翁)의 시서(詩書)를 적어 보내주시니 매우 고맙습니다. 여기서도 근래에 편지를 받았는데 필력(筆力)이 더욱 건실해졌습니다. 지난 날 일찍이 그이 행적이 너무 고상한 수준에 가까워서 혹시라도 권세가에게 휘둘려 만년을 온전하게 보내지 못하게 될까하고 걱정하였었는데 이제는 거의 면하게 된 것 같으니 그것도 작은 일은 아닙니다. 선유 지방의 정치에 대해 기꺼이 추출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이치나 추세로 볼 때 정상적인 것으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가법에 있어서, 또다시 스스로 이와 같이 부당한 계책을 내겠습니까. 우연히 절조(浙漕)의 지난해 책문(策問)을 얻었는데, 적어 보내드립니다. 보신 적이 있는지요? 청의(淸議)는 없애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이를 벗어나면 역시 바꿀 수 없습니다.
長溪王君之詩竟如何? 此有一黃子厚者, 其詩自楚漢諸作中來, 絶不類世人語, 人亦少能知之. 近以社倉出內譏察不謹, 狼狽憂鬱, 以至於死, 甚可傷也. 放翁詩書錄寄, 幸甚. 此亦得其近書, 筆力愈精健. 頃嘗憂其迹太近, 能太高, 或爲有力者所牽挽, 不得全此晩節, 計今決可免矣. 此亦非細事也. 仙遊之政, 無人肯爲推出, 此理勢之常, 無足怪者. 况在渠家法, 又自不當計此耶. 偶得浙漕去秋策問, 謾錄去, 不知曾見之否? 淸議固知不可泯滅, 然能出此, 亦不易也.
제가 병이 깊어 혼자서는 반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고, 정신은 혼미하고 기운은 막혀서 온몸이 쑤시고 아프니 죽을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늙어 관직을 그만두고자 하는 요청은 지난달 초에 인편을 통해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가하는 답장도 없이 조용하니, 문건을 전달하는 사람이 지체되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합니다. 설령 다시 지체되더라도, (빨리 오도록) 재촉하지 말고 대관(臺官)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주십시오.
熹病益甚, 跬步不能自致, 而神昏氣痞, 支體酸痛, 殆非久作人間客者矣. 休致之請, 前月初間附便以行, 至今寂然, 未聞可報, 恐所附人遲滯不達. 設更淹留, 當自有臺劾施行, 不待催督矣.
(6-3340)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다섯 번째 편지이다.
오랫동안 당신의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마음은 진실로 당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인편을 통해 특별한 당신의 편지를 받고 최근의 상황을 알고 나니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고 난 후 더위가 아주 심했는데,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잘 처리하시고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늙고 병들었는데, 그 고질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늙어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장계는 다행히 허락을 받았으니, 세상은 이미 서로를 잊어버린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 장차 죽을 것인데 무엇을 더 생각하겠습니까? 그대 역시 스스로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입니다. 멀리서 안부를 주시니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편지에서 저에 대해 공경한 것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훗날 문집에 이름을 부탁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재실(齋室)의 이름을 ‘수사(修辭)’라 한 본래의 뜻은 이와 같지만, 주역의 본래 취지에는 선후가 있습니다. 이 점은 이전 편지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율(栗)’자는 상서 「우서」에 두 번 보이는데, 모두 장경(莊敬) 근엄(謹嚴)의 의미입니다. 이것으로 재실의 이름을 삼는 것은 한갓 나무[木]에서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판은 쓰려고 했는데, 우연하게 요 며칠 팔이 아파 붓을 들 수 없었습니다. 조금 기다리셔야겠습니다.
久不聞問, 良以鄕往. 前日便中特承惠書, 具聞近况, 足以爲慰. 訊後劇暑, 恭惟幕府有相, 尊履佳福. 熹衰病沈痼, 日甚一日. 告老之章且幸得請, 將謂世已相忘, 然猶未脫誰何之域, 尸居餘氣, 何足加念? 彼亦正自過慮也. 遠承垂問, 深感愛念. 牋敬固非所敢當者, 然亦恨異時不得託名文集中耳. ‘修辭’ 齋名本意乃如此, 然易之本旨自有先後, 前書固已言之矣. ‘栗’ 字再見虞書, 皆莊敬謹嚴之意. 以是名齋, 非徒有取於木也. 扁榜便欲爲書, 偶數日臂痛, 不能運筆, 且當少須也.
시를 잘못 설명한 것은 매우 죄송하고 경솔했습니다. 그 뒤에 당신이 보내주신 전후 여러 편들을 자세하게 읽고나서 비로소 심오한 취지를 깊이 맛볼 수 있었습니다. 대개 이미 스스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말씀이었으니, 어찌 그것들을 다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보내 온 글에서 논한 ‘평담(平淡)’이란 두 글자는 천하의 시인을 다 그르친 것이니 아마도 지당한 말씀이 아닌 듯합니다. 현명한 그대도 그르다고 하지 않으니, 내가 매우 이해하기 힘든 바입니다. 저 옛사람의 시가 어찌 본래 평담(平淡)한 데에 뜻을 두었겠습니까? 다만 요즈음의 시가 광적으로 다듬어서 귀신의 두면(頭面)처럼 한 것에 비하면 그 평이함을 볼 수 있고, 요즈음 시의 살찌고 비린 것과 시고 짜고 쓴 것에 비하면 그 담박함을 볼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시가 있은 이후로 위․진에 이르기까지 작자가 하나 뿐이 아니지만, 그 수준이 높은 것은 이 ‘평담’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대는 진실로 일찍이 처음부터 한 차례 읽어 보아서 그 수준의 오르내림과 그대로 따르고 따르지 않음을 스스로 알았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 점을 살피지 않았겠습니까만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한(李漢)이 말한 것처럼, “주역 이하를 고문(古文)이라고 한다”고 하여, 요즘 세상에는 소용이 없으니 근체(近體)의 율시(律詩)가 사람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옳고 옛것이 그르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마침내 옛 사람의 높은 품격과 원대한 운치에 뜻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평담(平淡)에 뜻을 둔 것도 순수한 옛것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요즈음의 평담하지 못한 것이 순수한 옛것이란 말입니까? 또 말하기를, “물이 줄어지면 돌이 드러나듯이 자연 그 길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평생토록 정(鄭)․위(衛)의 순수하지 못한 음악을 익힌 사람이 마침내 저절로 태고시대의 음악이나 순임금의 음악과 같은 바른 음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견해가 이러하니 시험삼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어떻게 여기는지요?
說詩之繆, 甚愧率爾. 然後來細讀前後所示諸篇, 始能深味雋永之趣. 蓋已自成一家之言矣, 豈當復有所措說於其間哉? 但來書所論 ‘平淡’ 二字誤盡天下詩人, 恐非至當之言. 而明者亦復不以爲非, 是則熹所深不識也. 夫古人之詩, 本豈有意於平淡哉? 但對今之狂怪雕鎪, 神頭鬼面, 則見其平; 對今之肥膩腥燥, 酸鹹苦澀, 則見其淡耳. 自有詩之初以及魏晉, 作者非一, 而其高處無不出此. 左右固(6-3341)自以爲亦譬從頭看得一過, 而諳其升降沿革矣, 則豈不察於此者? 但恐如李漢所謂, 謂易以下爲古文, 因以爲無所用於今世, 不若近體之可以悅人之觀聽, 以是不免有是今非古之意, 遂不復有意於古人之高風遠韻耳. 又謂有意於平淡者, 卽非純古. 然則有意於今之不平淡者, 得爲純古乎? 又謂水落石出, 自歸此路, 則吾未見終身習於鄭衛之哇淫, 而能卒自歸於英․莖․韶․頀之雅正者也. 鄙見如此, 幸試思之, 以爲如何也.
왕안석의 당선(唐選)은 본래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게 아니라 송차도의 집에 있는 것 중에서 몇 가지를 수정한 것뿐입니다. 그 서문에서 “여기에 며칠을 소비하디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 노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구차하게 당나라 사람들의 한마디 한구절을 남김없이 모두 모아 기술하려고 했겠습니까? 지금 그것을 보아도, 그 모아 놓은 것 역시 겨우 앞의 몇 권만 볼만할 뿐입니다. 만약 내게 이 책을 편집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다시 그 절반은 제거할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荊公唐選本非其用意處, 乃就宋次道家折有而因爲點定耳. 觀其序引有 ‘費日力於此, 良可惜也’ 之嘆, 則可以見此老之用心矣. 夫豈以區區掇拾唐人ラ己半旬爲述作, 而必欲其無所遺哉? 且自今觀之, 其所集錄亦只前數卷爲可觀. 若使老僕任此筆削, 恐當更去其半, 乃厭人意耳. 不知此說明者又以爲如何也?
방옹(放翁)은 근래의 소식에 의하면 벼슬을 그만 두었다고 하는데 아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이 임금 곁에서 와서 말하기를, “금년 봄에 의논하는 자가 홍경로(洪景盧)와 그 노인에게 사필(史筆)을 맡겨 호산(湖山)에 사국(史局)을 두어 한광(閒廣)한테 나아가게 하려고 하였었는데 얼마 안 가서 당국(當局)에 시기하는 무리가 있어서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어 오늘의 이렇게 좋은 일도 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에게 있어서는 우선 한 차례 끌어내는 것은 면하게 되었으니 역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전번 편지에서 이미 이 문제를 염려하였는데 사람의 견해는 대략 같음을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는 장백자(張伯子)가 이 설을 제창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매우 쉽지 않습니다. 강서에서 온 편지를 보니, 손종지(孫從之) 역시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작고 작은 것인데, 이 사람을 죽고 살게 하는 것 역시 사람으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위공(留衛公)의 편지는 혹여 적당한 인편이 있으면 번거롭더라도 보내주십시오. 듣건대 추수께서 이미 봉사의 직책을 임명받았다고 하던데, 정말로 그렇습니까? 과연 그렇다면, 그를 반드시 송별할 것인데, 그때 이곳을 지나갈 때 며칠 이곳에 머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放翁近報亦已掛冠, 蓋自不得不爾. 近有人自日邊來, 云今春議者欲起洪景盧與此老, 付以史筆, 置局湖山, 以就間曠. 已而當路有忌之者, 其事遂寢. 今日此等好事亦做不得, 然在此翁, 却且免得一番捲出來, 亦非細事. 前書蓋已慮此, 乃知人之所見有略同者. 或云張伯子實唱其說, 此亦甚不易也. 得江西書云, 孫從之亦已物故. 人物眇然, 令人短氣, 此亦非人力所能爲也. 留衛公一書, 恐有的便, (6-3342)煩爲遣去. 似聞樞帥已有奉祠之命, 不知然否? 果爾必送來, 因得過留, 爲數日之款, 幸甚!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여섯 번째 편지이다.
역참을 통해 편지를 받았는데, 요즈음 날씨가 매우 더운데 직장에서는 별일 없이 한가하시고 몸 건강하시다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새로 지은 시(詩)를 보내 주어 깊은 배려에 더욱 감사하였고, 자세히 읽어 보니 오석(烏石)․영원(靈源)이 사람에게서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이 더운 때를 당하여 시원하기가 마치 한문(寒門)에 날아 올라가서 맑은 바람을 쏘는 것과 같았습니다. 기문(記文)을 다시 정한 것은 장중(莊重)하고 자세하여 충분히 멀리 전할 수 있으니 오로(悟老)는 참으로 썩지 않겠습니다. 방옹(放翁)은 필력(筆力)이 더욱 건실(健實)하여졌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까닭 없이 천진교(天津橋) 위에서 원숭이의 난동(亂動)을 만나 문득 대이삼장(大耳三藏)에게 희롱을 당한 꼴이 된 것입니다. 기후(氣候)가 아름답지 못하여 옛친구 중에 지조가 무너지는 한두 사람이 있어 사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중지(仲止)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자립(自立)하고 있으니 매우 사랑스럽고 공경스럽습니다. 남간(南澗)에게 후사(後嗣)다운 후사가 있음이 더욱 기뻐 충분히 사람의 뜻을 굳세게 합니다. 황엄로가 중간에 이 곳을 지나갔는데, 역시 서로 방문했다가 시 한편을 받았는데 시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가 간행한 작은 문집도 보았는데, 성재(誠齋)의 시로 표지를 하였고, 그가 소동부(蕭東夫)와 비슷하며 또 소동부는 진후산(陳後山)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평생토록 소동부의 시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지만, 위진 시대 이전의 여러 작품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니, 매우 가소로울 뿐입니다.
遞中辱書, 獲聞比日盛暑, 幕府優游, 起居超勝, 良以爲慰. 新詩見寄, 尤荷不鄙, 讀之便覺烏石靈源去人不遠, 當此炎煥, 灑然如羾寒門而濯淸風也. 記文更定, 莊重詳實, 足以傳遠, 悟老眞不朽矣. 放翁筆力愈健, 但恨無故被天律橋上胡孫擾亂, 却爲大耳三藏覷見. 柳州南澗等詩, 最是放不下者. 但其氣格高遠, 旨趣幽深, 故讀之者苦不甚覺. 此亦古今文字言語得失利病之所由, 可不蕃哉! 景迂誌文謾令錄示, 亦幸, 渠文要自不可曉也. 氣候不佳, 故舊中時復塌了一兩人, 令人鬱鬱. 仲止不謂乃能自立如此, 深可愛敬. 尤喜南澗之有後, 足强人意也. 黃巖老中間過此, 亦嘗相訪, 惠請一篇甚佳. 亦見其刊行小集, 冠以誠齋之詩, 稱其似蕭東(6-3343)夫, 且謂東夫似陳後山, 而平生未見東夫詩也. 此事至爲淺末, 然看却魏晉以前諸作, 便覺無開口處, 甚可笑耳.
초산(焦山)의 예학명(瘞鶴銘) 아래에 「동일범주(冬日泛舟)」라는 시 한편이 있는데, 구법(句法)이 훌륭하고 자체(字體) 역시 뛰어나니, 명문(銘文)과 의상(意象)이 대략 서로 비슷하니, 뛰어난 고수임에 틀림없습니다. 지은이가 스스로 성이 왕(王)씨라고 적어놓았는데 이름은 빠져있습니다. 근래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조덕부의 금석록(金石錄)만이 상당히 자세하게 평론하면서 지은이를 왕찬(王瓚)이라고 하고 있는데, 당시 전해오던 판본에 그 이름이 더욱 완비되어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지금의 선(選)의 시 가운데 이 사람의 이름이 있는데, 그 시의 체제가 당나라 사람과 유사하니, 아마도 한 사람이 아는 것 같습니다. 혹시 보신 적이 있는지요? 중간에 진안행의 자제에게 물어보도록 부탁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동안 그에 대해 묻거나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장기중이란 사람이 진에 부임해왔을 당시 사람을 파견하여 베꼈고, 이로 인해 몇 본(本)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제 한 통을 보내니, 시험삼아 살펴봐 주시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저의 병은 이젠 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이번 겨울 절(浙)지방에 돌아오실 때, 이곳에 며칠 머물면서 마음을 터놓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焦山痙鶴銘下有冬日泛舟詩一篇, 句法旣高, 字體亦勝, 與銘文意象大略相似, 必是一手. 作者自題王姓而名逸, 近世好事者亦少稱之. 濁趙德夫金石錄題識頗詳, 而以作者爲王瓚, 必是當時所傳本其名尙完也. 今選詩中有此名字, 而此詩體製只似唐人, 恐又或非一人, 不知亦曾見之否? 中間託陳安行子弟問之, 云從來無問及者, 獨張機仲臨鎭時嘗遣人摹之, 因得數本. 今往一通, 幸試考之, 以爲如何也. 熹病日益侵, 無足言者. 承欲冬間謁告還浙, 千萬迂轡爲數日之留, 當得款晤, 以盡所欲言者.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일곱 번째 편지이다.
저는 기운이 막히는 증상이 더욱 심해져 이제는 직접 편지조차 쓰지도 못합니다. 보내주신 편지가 오는 도중에 시 부분이 조금 뜯어진 흔적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하니 멀리서 편지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지난번에 간재의 시는 고쳐야 할 곳이 있다고 말했는데, 만일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인쇄본 한 부를 보내주면 좋겠습니다. 다만 거친 종이를 사용하면 바로 책에다 지우고 고쳐 써서 돌려보내 쉽게 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상서의 주의(奏議)에 관한 인쇄본을 최근에야 비로소 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일의 규모와 기회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니, 참으로 탄식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누락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복사본과 서로 비교해보니 자세하고 간략함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부분은 아마도 그 자제들이 상대방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 빼버린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범경을 죽여야한다는 계책을 은밀하게 상소한 조목 같은 경우, 나중에 끝내 시행되었고, 그 말 역시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던 커다란 안건인데, 어떤 이유로 실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황자후의 죽음을 알렸는데, 이제 방백모도 죽었습니다. 그의 시는 황자후에 비해 더욱 온윤(溫潤)함이 볼만했고, 쉬지 않고 진보했는데 나이 50에 가버리니 더욱 슬픕니다.
이곳에 유숙통이란 사람이 있는데, 역시 시에 뛰어납니다. 오늘 그의 시 두 편을 얻어 늦게나마 보내드립니다. 고명하신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 주희가 올립니다.
熹以氣痞益甚, 不能親布. 前幅來書在遞角中, 而詩卷乃似有拆動處, 不知何故. 以此知遠書亦難多談也. 向說簡齋詩有合改定處, 如能爲之料理, 幸爲印一本來. 只用粗紙, 庶得就冊塗改, 附回改正, 易爲力. 呂書奏議近方得見印本, 因得詳考當日規模機會, 深可嘆息. 但其間亦不免有漏落, 此間人有寫本, 與此互有詳(6-3344)略. 其間擊人者, 恐其子弟避仇刪去. 如密奏條晝誅范瓊計策, 後卒施行, 其語亦是一大公案, 不知何故亦不載也. 前書方報黃子厚之死, 今有方伯謨者亦死矣. 其詩比子厚更溫潤可觀, 方進未已, 乃年甫五十而逝, 尤足傷惜也.
此間有劉叔通者, 亦能詩. 今日得其兩篇, 謾以寄呈, 不識高明以爲如何也. 熹又上.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여덟 번째 편지이다.
요즈음 서늘한 가을날씨에 막부는 한가하고 여유로우며 하시는 일마다 잘 풀리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며칠 전에 큰비가 한차례 왔는데 다행히 지금은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듣기로는, 하류지방에는 제법 손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어는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비가 아직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는데, 조생종 벼는 벌써 완전히 익었는데도 때에 맞춰 수확을 하지 못하는 게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근래에 창보와 사원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 딸려온 한통의 편지를 지금 이 편지와 함께 보내드립니다. 중간에 큰 권(卷)이 있던데, 생각하건대 시가 틀림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사원이 쓴 시를 한 글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개봉해서 보고 싶기도 하고, 또 파계(破戒)하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혹시 다 보신 후에 제게 돌려볼 수 있게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다만 사원이 짝을 만나지 못해 집안에서 내조를 받지 못하니,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갈 대책도 막연합니다. 급하게 혼인할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지만, 아직 마땅한 혼처가 없습니다. 친구분들 가운데 혼인할만한 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분의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와서 부탁을 하는데, 여기에는 힘쓸만한 혼처가 없습니다. 외람되게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比日秋冷, 恭惟幕府燕閑, 起處佳福. 此間數日前一水非常, 今幸無他. 聞下流頗有所損, 不知果如何. 但雨意未已, 早稻十分成熟, 而不得以時收割, 此爲可慮耳. 近日得昌父․斯遠書, 附到書一角, 今附往. 中有大卷, 意必是詩. 累年不見斯遠一字, 欲發封觀之, 又不欲破戒. 或看畢, 幸轉以見示也. 但斯遠省闈不偶, 家無內助, 嗣續之計亦復茫然. 急欲爲謀婚之計, 而未有其處. 不知親舊間亦有可爲物色處否? 想二公書中亦須說及此事. 渠來見囑, 此間無處可致力, 只得幷奉浼也.
(6-3345)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아홉 번째 편지이다.
전에는 채군이 돌아오면서 편지를 가져왔고, 이번에는 직접 사람을 보내 이렇게 편지를 주셨습니다. 요즈음 가을 날씨가 좀 무더운데,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한바탕의 큰비로 인해 주변의 여러 곳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곳 역시 마찬가지여서, 빗물이 바로 문앞 3-5척까지 밀려왔었습니다. 간재의 시는 이미 받았습니다만, 민본(閩本)을 가지고 교정을 하면, 더욱 쉽게 교정하고 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여 아침저녁으로 조금 틈을 내어 여기에 있는 판본으로 교정하여 보내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공의 상소에 관한 문의는 정무자가 교정 간행한 판본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정무자는 제삼자이기 때문에 억지로 뜯어고친 부분이 없을 것입니다. 왕찬의 시는 말씀하신대로 훌륭합니다. 유숙통의 시는 좋게 평해주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몇 편을 더 베껴 보내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스스로 시문을 간행하는 풍조는 참으로 우습고 또 한탄스럽습니다. 누기(樓記)와 자명(姊銘)의 필력은 참으로 굳세고 날카로워 우러러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소직의 글은 요즘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인데, 만년에 낭패를 당했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조명(晁銘)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또 이 편만 그런 게 아니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차를 보내주시니 그 두터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편지를 가져온 심부름꾼이 서서 기다리고 있어서 자세한 답장을 하지 못합니다.
前蔡君歸辱書, 及此專人又奉手告, 欣蕃比日秋暑, 尊候萬福. 一水遠近多罹其害, 此間亦然, 所不及門者, 三五尺耳. 簡齋詩已領, 但得閩本就校, 却刊脩覆校尤易爲力. 旦夕稍暇, 或取此間所有者塗改寄呈也. 呂公奏議, 恨未見鄭武子所校本, 鄭乃其客, 必無舛繆也. 王瓚詩誠如所喩, 劉詩得經題品, 甚幸, 旦夕當令錄數篇奉寄也. 所論自刊詩文, 此風極可笑, 又可歎也. 樓記姊銘筆力甚勁, 歎仰亡已. 尹少稷文近世誠不易得, 晩節狼狽, 殊可惜也. 晁銘不可曉, 亦不但此篇, 不知當時何以得重名於世也. 日鑄之惠, 感領厚意. 來使立俟, 未有以爲報也.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 번째 편지이다.
저번에 사람이 당신이 계신 곳으로 간다기에 급하게 답장을 하느라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들어 가을날씨가 더욱 서늘해졌는데, 몸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간재 시의 틀린 글자는 이제 다른 종이에 적어 보냅니다. 모름지기 글자마다 (새로운 글자를 틀린 글자 옆에) 나누어 붙여 수정합니다. 여기에서 틀린 글자는 빼고 다시 새 글자를 붙여야 착오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자잘한 일이지만 모름지기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자연스럽게 성법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기(樓記)는 돌에 새겼는지요? 자세히 보니 두세 군데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서 따로 적어놓았으니 다시 검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급하게 인편에게 딸려 보내느라 다른 일들은 언급할 겨를이 없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지만, 늘 몸조심하십시오.
前日人還, 草草附報, 殊不盡意. 比秋益凉, 恭惟起處多勝. 陳詩誤字, 今別用紙錄去, 須逐字分付, 修了看過, 就此勾消了, 方再付一字, 乃可無誤. 此雖細(6-3346)事, 然亦須經歷, 方見自然成法也. 樓記不知已入石未? 細看尙有兩三處可疑, 具之別紙, 幸更詳之也. 匆匆附遞, 不暇他及. 未由承晤, 千萬自愛.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한 번째 편지이다.
무인이이 건(建)지방 산의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또 여기에서 위아래의 문장과 연결되지도 않으니, 불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소동파의 다포(茶圃)의 설을 깨고 싶다는 것과 같은 경우는 그 말이 너무 간략할 뿐만아니라 아울러 본래적으로 상관도 없습니다. 조사(漕司)가 관할하는 차의 사업은 토공(土貢) 옥식(玉食)의 하나의 단서일 뿐이니, 다른 로(路)에서 염법(鹽法)과 병행하면서 한 관청에서 관할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지금 소금은 중대하고 차는 그 다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또 수레를 이용해 운반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무릇 정치를 하는 사람은 재질이 자기가 맡은 일보다 뛰어나야지, 맡은 일이 재질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이 두 구절은 마치 시험을 치는 수험생의 답안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재질이 맡은 일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것이지 맡은 일이 재질을 넘어서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면 괜찮습니다. 지금 이 말의 어세가 매우 적절한 것은 아닌 듯하니, 깊이 음미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이(可以)’ 두 자는 부공비(富公碑)에 나오는 ‘조제능요(趙濟能搖)’라 할 때의 ‘능요(能搖)’와 같은 종류입니다. 주희 올립니다.
武夷非建山之全體, 不待辨而知. 且於此上下文無所屬, 似成剩語. 若欲破蘇公茶圃之說, 則語又太略, 兼亦本不相關也. 漕司所領茶事, 止爲土貢玉食之一端耳, 非如他路, 與鹽法並行而領於一司也. 今云鹽爲大而茶次之, 似非事實. 又車運之策, 此殊不聞, 不知其說果如何也. ‘夫爲政者材可以勝乎事, 事不可以勝乎材’, 此兩句頗類擧子文. 然亦謂欲其材之勝乎事, 不欲事之勝乎材則可. 今此語勢似末妥帖, 試深味之可見. ‘可以’ 二字, 正富公碑中 ‘趙濟能搖’ 之類也. 熹上呈.
(6-3347)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두 번째 편지이다.
여행 도중 역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요즘 가을날씨가 맑은데 행복하게 생활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양시삼기(兩詩三記)을 함께 받았는데, 아름다운 은혜에 더욱더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다만 정군(鄭君)의 사람됨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의 말씀대로라면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인재일 것입니다. 종사(宗司)를 돌에 새겼는데 간단하면서도 엄중하여 본체를 얻었으며, 글 역시 맑고 고와 사랑스러웠습니다. 안제(安濟)는 너무 자세한 것 같지만, 비록 해야 할 말이 많이 있다고 말하지만 마땅히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야 합니다. 선배들이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솔하게 여기까지 언급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관(帥官)을 칭하느 것은 아마도 묘당의 구(舊)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겠지만, 옛날에도 그러한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직명만 쓰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창보(昌父)의 편지를 받았는데, 찾아오고 싶지만 병이 다시 크게 도져 오지 못하고, 겨우 구술한 편지 한 장과 아프기 전에 직접 쓴 시 한편을 보내왔는데, 마치 그 사람됨과 같이 맑고 청빈하였습니다. 그 곳의 사원(斯遠)․중지(仲止)도 몇 편의 시가 있는데, 모두 의경(意境), 의취(意趣)를 담고 있어 외롭고 쓸쓸함을 달랩니다. 그러나 지난 방문 후에 병은 좀 나아졌는지요. 황직경은 오랫동안 편지가 없었는데, 이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제가 바라던 것입니다. 다만 황직경은 그동안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 생활해 왔는데, 아마 이사를 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면 생활할 수 없을 듯한데, 모름지기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벼슬살이를 생각하는 것은 진실로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 생활하는 것만 못합니다. 우연히 왕응진과 함께 지나가다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이 편지를 보내느라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늙고 병들었는데, 중간에 조금 나아졌다가 이제 다시 크게 나빠졌습니다. 경련이 나고 답답한 증상이 전보다 심해졌습니다.
置中奉告, 欣審比日秋淸, 尊履佳福. 兩詩三記倂領, 嘉惠尤增慰懌. 但鄭君之爲人, 不復記憶, 有如來示, 誠不易得也. 宗司刻石, 簡嚴得體, 書亦淸婉可愛. 安濟則似太詳, 雖云合有許多說話, 然亦當有所取舍, 觀前輩所作可見也. 率易及此, 如何如何? 帥官稱蓋欲以見廟堂之舊, 然不知於古亦有初否? 似不若只書職名之爲正也. 昌父得書, 欲來相訪, 而病復大作, 但能口占一紙, 及寄未病時手寫詩一編, 淸苦寒瘦, 如其爲人. 其間亦有斯遠․仲止數詩, 皆有思致, 足以慰離索. 但未知訊後病已差未耳. 直卿久不得書, 聞有徙家之興, 此固所欲. 但於渠聚徒之計, 則恐失之便無以爲生, 亦須細商量耳. 論作官, 則誠不若聚徒之爲安也. 偶與應辰過門, 云欲請見, 亟附此紙, 不能究懷抱. 衰病中間嘗小愈, 今復大作, 拘攣痞滿, 有甚於前矣.
방옹이 근래 편지를 보내와, 늦게나마 그가 매우 건강함을 알았습니다. 「시괘고오」는 다른 판본이 없으니, 번양(番易)에게서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사와 발문을 쓴 이가 당금(黨禁)의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이미 삭제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放翁得近書, 甚健, 謾知之. 蓍卦考誤無別本, 當於番易求之. 但恐題跋者恐其累己, 已遭投削耳.
(6-3348)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세 번째 편지이다.
한동안 안부 여쭙지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겨울날씨치고는 따뜻한데, 막부는 여유롭고 몸은 건강하시며, 댁내 두루 평안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늙고 병들어 여위었는데 나아지는 기미조차 없으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책을 편집하는 일을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몸을 구부리거나 안석에 앉아 그 작업을 계속할 수 없으니, 이것이 슬프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때마침 수사(帥司)께서 ‘거자창(擧子倉)의 조미(租米)를 내다 팔아 은을 사서 관아에 송납하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不省何謂. 전의 읍재(邑宰)는 부지러히 힘쓰고 규칙이 있었는데, 이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계책으로 그 마음씀이 매우 인자하고 그 은혜는 멀리까지 미쳤습니다. 어찌 갑자기 하루아침에 그것을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정치한다는 변변치 못한 이들에게서 그것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만, 오직 현명한 당신만은 그와 같은 정사에 종사하였으니, 아마도 당신께서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보통 문서를 하달하는 기관 역시 참서(參署)를 거쳐서 시행하는데, 벼슬아치들이 그것을 곧장 내려 보내버리고 애당초 알리지도 않은 것입니까? 주현에서 공문을 받고서 곧바로 시행에 들어갔다면,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쌀을 내다파는 시기도 아니고 또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삼가 말씀올리니, 다시 살펴주면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긴급한 용도가 아니라면, 또 공문의 하달과 함께 수습하여 예전처럼 지출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이 현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 800여곡(斛)에 불과하니, 그것을 내다 팔아도 1000민(緡)밖에 안 됩니다. 수사(帥司)께서 이것으로 부유해지지 않고, 한갓 이를 계속 시행함으로써 자식을 낳은 집이 구휼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되고 또 옛날의 살기(殺棄)의 풍속이 다시 일어나면, 이와 같은 좋지 못한 선례를 만들었다는 잘못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설령 반드시 긴급하고 절실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것을 용도변경하여 써야 할 것입니다. 즉 지난번 후산지방의 1000민의 쌀을 용도변경하여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도 사창(社倉)이 있으니, 상인과 촌민들이 일률적으로 임대를 요청하면 처음부터 차이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처럼 상인만을 우대하여 한쪽에만 혜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애당초 저장할 공간도 없고 전담할 관리도 없어 올 여름처럼 사적으로 쌀을 내다 파는 사례로 볼 때, 그것이 쓸모는 없고 도리어 해로움만 있다는 것 역시 알 것입니다. 만약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이와 같이 되거나 아니면 더 큰 해로움을 낳아 후세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지금 공문을 내려 보내 곡식을 수습하여 저장 관리하고 내년 봄에 적당한 가격으로 오를 때를 기다렸다가 내다 팔아 사사(使司)에게 보내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 일은 올 해 이 일을 행하면 매우 어그러지고 소요를 불러 일으켜 몇 달이 지나도 안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리들이 사적인 욕망을 채운 후에 죄를 지은 사람은 빠져나가고 죄 없는 이들은 헛고생할 것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면, 속이 타서 주먹을 불끈 쥐게 합니다. 다만 아직 결정되지 않은 때에는 청탁의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미 일이 지나갔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수습하여 되돌리고자 하신다면, 바로 공문을 내려 보내 곧바로 지정하시고, 일을 전담할 한 두 사람을 뽑아 빨리 수습하십시오. 채(蔡)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매우 부유하고 또 일을 삼가니, 일을 맡겨도 될 것 같습니다. (즉 지난번 가서 만났던 육서(六瑞)라는 사람의 친족입니다.) 쇠퇴한 사람은 이러한 일에 간여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막부에 있지 않았다면, 다시 입을 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부(可否)는 당신 스스로 재량하시고, 밖의 사람들이 알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여 저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 편지를 쓰면서, 떠나려는 임위의 인편에 이 편지를 부탁하려고 다급하게 쓰느라 다른 것은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 황직경의 편지 한 통은 당신
께서 처리하여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난번에 듣기로는, 겨울에 찾아뵙고자 잠시 절(浙) 지방에 들린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반드시 이것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찾아주시면, 庶幾少款.
稍不聞問, 積有馳情. 比日冬溫, 恭惟幕府多暇, 動履有休, 眷集郞娘, 一一佳慶. 熹老病衰朽, 有加無瘳, 置之不足道也. 但書課未畢, 而不能俯躬伏几以究其業, 此爲悵恨耳. 適聞帥司行下, 發諸擧子倉租米變糶買銀, 赴司送納, 不省何謂. 前政辛勤規晝, 爲此活人之計, 其心甚仁, 其惠甚遠, 何忍一旦遽破壤之耶? 今之從政者固不可以此望之, 特賢者適從事於其間, 則似不宜有此耳. 不審文書所下, 亦嘗關由參署而後行, 抑吏輩徑下之, 而初不以白也? 州縣得之, 直便行下, 無復商量. 所幸今非糶變之時, 且得宿留, 故爲奉扣, 幸更審之. 若無急切之用, 不知亦可且與行下, 仍舊收支否? 况此一縣, 所有不多, 不過八百餘斛, 糶之得千緡耳. 帥司不待此而後富, 而徒使自是以往, 生子之家失救接之助, 且將復起故時殺棄之風, 則作俑之過, 將於誰責而可耶? 設若必有急切, 須至移用, 則向時後山千緡之米, 似却可以抽回. 蓋彼處已有社倉, 市戶村民一例請貸, 初無間隔, 不必爲此偏惠, 以厚游(6-3349)手. 而又初無收貯之地, 又無專掌之人, 以今夏私糶之事驗之, 亦可見其無用而有害矣. 若不收回, 將來不過又只如此, 或更別生大害, 負累後人. 不若及今行下, 令其收拾樁管, 俟來春以後得價之時發糶, 解赴使司之爲便也. 兼此事今年行得非常乖繆, 追呼驚擾, 數月不定. 及至胥吏乞覓飽足之後, 有罪者不坐, 而無辜者枉費, 從旁觀之, 令人扼腕. 但以未決之時, 嫌於請囑, 不欲言之. 今事已過, 乃敢說耳. 若欲收回, 便可行下, 徑自指定, 專委一二人爲首, 及早收拾. 蔡姓者極富, 且畏事, 似可託也. (卽鄕時去相見名六瑞者之族.) 衰退之人, 不當與此. 若非幕府有吾人在, 則亦不復能啓口矣. 然其可否, 當自以盛意財之, 勿使外間人知拙者嘗有言, 以重其咎也. 亟作此, 托任尉附便, 或發遞以行. 匆匆不暇他及. 直卿一書, 幸指揮送達. 向見說冬間欲謁告暫歸浙中, 計必取道於此, 儻得左顧, 庶幾少款.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네 번째 편지이다.
며칠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인편을 통해 편지를 받고서, 요즈음 겨울날씨치고는 따뜻한데 막부는 여유롭고 늘 아름답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신다는 것을 아니, 위로가 됩니다. 수서(水西)의 유람에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시문(詩文)을 자세히 읽어보니, 마치 내 자신이 유람하면서 눈으로 직접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도 이곳이 매우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창보에게서는 편지가 없는데, 그곳의 아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병 때문에 문밖출입도 못한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본(世本)에 대해서는 선인에게서 들었었고 집에도 있었는데, 병화(兵火)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그 판본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여러 경전의 주소(注疏)에 보이는 것은 억지로 끼워 맞춘 부분도 있어 근거로 삼을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애써 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사봉(謝鳳)의 글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노릉지방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소흥연간(1131년-1162년)에 장락지방의 대부승(大府丞)이었던 진강중(陳剛中) 언유(彦柔)란 사람이 호담암(胡澹庵)을 축하해 준 것에 연루되어 안원(安遠)지방으로 유배를 가서 죽었다고 하는데, 주익공(周益公)도 그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장락지(長樂志)를 검사해보니, 강음(江陰) 첨판(簽判)을 지내다 마침내 죽었다고만 할뿐, 그 관력이나 유배가서 죽은 일에 대해서는 모두 언급하고 않았습니다. 方此爲扣其鄕人, 使尋訪之. 이는 불행한 일이고, 또 사봉보다 더 심한 면이 있으니 더욱 안타깝습니다. 예전 편지에서 논한 창고의 곡식에 관한 일은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절대 밖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예전에 복주지방에 주석이 달리지 않은 초사판본이 있었는데, 그 인쇄본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초사판본의) 글자체나 판형이 상당히 좋은데, 시간이 오래 흐름에 따라 없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교정도 아주 정밀하지는 못하니, 옛판본을 다시 교정하고 인쇄하여 남기는 것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제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간략하게나마 교정을 보는 인연을 기다리겠습니다. 최근 여백공이 편집한 문감을 읽었는데, 매우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선배들 가운데는 헛되이 이름을 얻은 자가 많으니, 후세의 공론은 마침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습니다.
前日方以尺書附遞, 不審已達未也. 便中獲書, 得聞比日冬溫, 幕府從容, 起(6-3350)處佳福, 足以爲慰. 水西之遊, 甚恨不得陪杖履. 然細讀詩文, 已如身歷而目見之矣. 舊聞此處頗佳, 亦未嘗得到也. 昌父後來不得書, 只得彼中知識報來云, 病未能出戶, 不知後來復如何, 良可念也. 世本舊聞先人說, 家間亦嘗有之, 以兵火失去. 然則世間亦須尙有本. 但今見於諸經注疏者, 恐亦或出附會假託, 未必可憑據, 正亦不必苦求耳. 謝鳳之文, 不知果何如? 近日廬陵人來, 說紹興間有大府丞長樂陳剛中彦柔者, 坐以啓賀胡澹庵, 謫安遠宰而死, 周益公尙識其人. 因爲檢長樂志, 則但云終於江陰簽判, 都不及所歷官及謫死事. 方此爲扣其鄕人, 使尋訪之. 此其不幸, 又有甚於謝鳳者, 尤可歎也. 前書所論廩粟事, 不知已爲料理否? 切勿令外間知僕嘗有言也. 福州舊有楚詞白本, 不知印板今尙在否? 字書板樣頗佳, 歲久計或漫滅. 然讎校亦不至精, 不知能爲區處, 因其舊本再校重刻, 以貽好事否? 如能作此, 卽幸報及, 待爲略看過結緣也. 近讀伯恭所集文鑑, 極有可商量處. 前輩要亦多浪得名者, 不知後世公論竟如何爾.
(6-3351)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다섯 번째 편지이다.
제가 최근 두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받아보셨습니까? 이교수(李敎授)가 이곳을 거쳐 갔는데 너무 빨라 가버려, 편지를 쓰고자 했지만 겨를이 없었습니다. 「시괘설(蓍卦說)」은 오늘에야 얻었는데, 함께 보내드리니 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熹近以兩書附遞, 知皆達否? 李敎授過門甚遽, 欲作書而不暇. 蓍卦說今曰方得之, 因以附納, 幸視至.
강서지방의 여러 현에서는 원성어록(元城語錄)와 같은 종류의 책들을 모두 높은 시렁에 묶어두어 진나라 분서의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이것만이 다행히 화를 면한 것이 어찌 농사․의약 등과 같은 실용적 책들은 모두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스워 웃음이 나옵니다.
江西諸都, 如元城語錄之類雖免雜燒, 然皆束之高閣. 此獨幸免, 豈非種樹․醫藥之儔, 皆所不禁也耶? 可發一笑.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여섯 번째 편지이다.
어제 오응진이 와서 편지를 받았는데, 오늘 또 역참에서 답장을 받았습니다. 요즘 겨울날씨가 차가운데 몸 건강하시다 하니, 깊은 위로가 됩니다. 서적을 모두 불태워버린 뒤의 좋은 구절에 대해서는 그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는데, 曲盡事情, 引而伸之, 한심스러운 것이 어찌 이 뿐이겠습니까. 示喩米事已悉, 其人前日亦錄得縣中所被倅廳公文來看, 云奉帥司之命. 本欲封呈, 猝尋不見也. 度今自不能已, 須別得一文字, 說破前日之誤乃可止耳. 須早行下爲佳, 不可更待報矣. 後山之人不待別儲而飽, 收還乃爲上策, 幸更審之. 此却須俟見(6-3352)報. 萬一必以前人已行, 不欲廢罷, 卽俟丞歸, 當如所諭也. 但富家深懲往事, 亦自畏其累己, 未必敢承當耳.
昨日吳應辰來, 辱書, 今日又得遞中答字, 獲審比日冬寒, 尊履佳福, 深用慰感. 火後佳句, 曲盡事情, 引而伸之, 有足爲長太息者, 豈止此而已哉. 示喩米事已悉, 其人前日亦錄得縣中所被倅廳公文來看, 云奉帥司之命. 本欲封呈, 猝尋不見也. 度今自不能已, 須別得一文字, 說破前日之誤乃可止耳. 須早行下爲佳, 不可更待報矣. 後山之人不待別儲而飽, 收還乃爲上策, 幸更審之. 此却須俟見(6-3352)報. 萬一必以前人已行, 不欲廢罷, 卽俟丞歸, 當如所諭也. 但富家深懲往事, 亦自畏其累己, 未必敢承當耳.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5년(기미, 1199, 70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일곱 번째 편지이다.
어제 역참을 통해 편지를 받았는데, 요즈음 막부는 여유롭고 생활은 행복하시다 하니, 참으로 위안이 됩니다. 치질은 이미 회복하셨습니까. 이 질환에 걸린 사람이 많은데, 저 역시 전에 치질 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칼과 독한 약으로 치료하려다가 도리어 큰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봤습니다. 그냥 황련(黃連)․지각(枳殼) 등의 약을 복용하고, 마람채전탕훈(馬藍菜煎湯薰)을 쓰면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써보셨습니까? 저는 발이 약하고 기가 잘 막히는데, 날씨가 추우지면 더 심해집니다. 요즘 한 이틀은 두 사람이 곁에서 부축해도 역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동짓 전후로는 병상에서 거의 일어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늙고 병드는 것은 본래 이러하니, 너무 이상하게 여길 것도 아닙니다.
昨日遞中辱書, 具審比日幕府優游, 所履佳福, 良以爲慰. 痔疾想已平復. 此疾人多有之, 僕亦嘗爲所苦. 然見人用刀仗毒藥攻之者, 或至反爲大害. 因只服黃連․枳殼等藥, 及用馬藍菜煎湯薰, 似覺有效. 不審曾用之否? 熹足弱氣痞, 遇寒益甚. 此兩日來, 雖用兩人扶掖, 亦行不得. 長至前後, 因感嘗伏枕, 幾不能起. 衰老自應如此, 亦不足深怪也.
초사의 판본이 이미 만멸(漫滅)하니, 비록 조금 수정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간행이라도 하고 싶지만 또 정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능한 것은 교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 수정이 이루어지면, 그곳에서 먼저 한번 교정을 보아 정본(淨本)을 보여주시면, 그것을 참고하여 정정하고 헤아려 개정해야 합니다. 만약 별도로 한 본을 간행하는 것 역시 좋은 일입니다. 최근에 고전(古田)지방의 한 선비가 지은 보음(補音) 1권을 얻었는데 많은 노력을 한 책이었습니다. 나중에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楚詞板旣漫滅, 雖修得亦不濟事. 然欲重刊, 又不可整理. 使其可以, 就加讎校. 若修得了, 可就彼中先校一番, 却以一淨本見示, 當爲參訂, 改定商量. 若別刊得一本, 亦佳事也. 近得古田一士人所著補音一卷, 亦甚有功, 異時當倂以奉(6-3353)寄也.
진사승(陳寺丞)에 관한 일은 암로(巖老)의 형이 아직 소식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오래 되지 않았으니 오히려 자문을 구하는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 지지(地志)을 쓴 사람들 역시 지나치게 간략하게 했습니다. 문감(文鑑)은 참으로 당신이 논한대로 입니다. 이문숙(李文叔)은 전에도 논문 몇 편을 보았었는데 상당히 괜찮았던 같은데, 지금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전국책서문」의 경우, 글은 강건하나 의지가 박약하니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정기를 상하게 할 뿐입니다. 요컨대 문장의 정통은 당대와 송대에 있으며, 각기 두 세 사람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만족스럽지 못하고, 단지 알만한 사람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황직경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와서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만 했지, 여러 학생들이 머물게 되는 것 역시 그 생활이 가난해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 생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세 편의 시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첫편에서 사용한 운(韻)은 대부분 분명하지 않습니다. 전에 보여주신 여러 편들 역시 이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리려 했는데 잠시 까먹고 있었습니다. 고운(古韻)에 이러한 사례가 있긴 합니다.(「대명(大明)」시의 ‘임(林)’과 ‘흥(興)’ 협운(叶韵)과 같은 종류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도리어 와류(訛謬)의 혐의가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임(林)’과 ‘흥(興)’과 같은 협운(叶韵) 역시 진나라 말로서, ‘흥(興)’으로 운(韻)을 삼는 것은 그 사투리이니 올바른 음운이 아닙니다. (지금 촉나라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은데, 대부분 비음(鼻音)을 사용합니다.)
陳寺丞事, 巖老之兄尙未報來. 年歲未遠, 亦須尙可詢問. 但當時作地志之人亦太草草耳. 文鑑誠如所論. 李文叔前此亦但見其論文數篇, 頗有可觀, 今亦不能記憶. 但如戰國策序, 則恐文健意弱, 太作爲․傷正氣耳. 要之, 文章正統, 在唐及本朝, 各不過兩三人, 其餘大率多不滿人意, 止可爲知者道耳. 直卿尙未到此, 初意其來, 可以久遠相聚, 不謂又爲諸生所留, 亦其食貧, 不得不爲此耳. 三詩皆佳作, 但首篇用韻, 多所未曉. 前此所示諸篇, 亦多有類此者, 屢欲奉扣而輒忘之. 古韻雖有此例, (如大明詩 ‘林’ 與 ‘興’ 叶之類.) 然在今日, 却恐不無訛謬之嫌耳. 然 ‘林’ 與 ‘興’ 叶, 亦是秦語, 以 ‘興’ 爲韻, 乃其方言, 終非音韻之正. (今蜀人語猶如此, 蓋多用鼻音也.)
좋은 그림은 많이 있고 본성은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고 생각h면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나중에 이곳을 지나갈 때, 모두 보여주시고 또 함께 훓어볼 수 있게 해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그곳에도 좋은 화가들이 있을텐데, 옛사람들의 사적을 그릴 의향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집 가까운 곳의 여러 사람들이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옛 이름이 ‘취성(聚星)’입니다. 이제 그 정자의 좌우 벽면에 진태구(陳太丘)가 순낭릉(荀朗陵)을 만나는 일을 그리고자 하는데, 글을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매우 난처합니다. 이제 그 일의 본문을 기록하여 보내드리니, 그릴만한 사람을 찾아 대강이나마 그리게 하여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단 두 폭의 종이로 만들어주면, 여기에서 다른 종이를 덧대어 합치도록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지난번 성천사에 있는 이읍(李邕)의 비(碑)를 보았는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의 조각이 매우 정밀했습니다. 여섯 마리의 교룡(이무기??)이 얽힌 모습이 오늘날 제작한 것과는 달랐고, 거북의 형상이 진짜와 흡사했습니다. 비록 조금 깨지고 쪼개지진 했지만, 오히려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조각을 잘하는 목공 한 사람을 찾아 나무로 그것을 모사하되 (거북 발높이의 크기) 1척을 1촌으로 줄여서 하면 높이가 약 1척에 불과할 것입니다. 인편을 통해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名畫想多有之, 性甚愛此, 而無由多見. 他時經由, 得盡携以見, 顧使獲與寓目焉, 千萬幸也! 彼中亦有畫手, 能以意作古人事跡否? 此間門前, 衆人作一小亭, 舊名‘聚星’. 今欲於照壁上晝陳太丘見荀朗陵事, 而無可屬筆者, 甚以爲撓. 今錄其事之本文去, 幸試爲尋訪能畫者, 令作一草卷寄及爲幸. 但以兩幅紙爲之, 此間却自可添展也. 又有一事, 鄕見聖泉寺有李邕碑, 龜趺螭首, 攜刻甚精. 六螭糾結, 旣異今製, 而龜狀逼眞, 雖稍破析, 然猶有生意也. 幸爲尋一木工巧於雕鏤(6-3354)者, 以木寫之, 用寸折尺, 不過高尺餘, 便中寄示爲望.
방옹(放翁)은 나이 들어서도 글이 더욱 강건하니, 오늘날 제일류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다시 사관(史官)으로 초청받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막 가서 글을 하나 구하려 했는데, 혹시라도 이것 때문에 천적의 의심을 사서 잘못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悟老)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으로 슬픕니다. 혈질(血疾)은 그가 예전부터 앓았던 병이니, 꼭 약을 잘못 복용해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의공(意公)이 그를 알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유숙통(劉叔通)의 말에 따르면, 전에 삼산에서 늙은 스님을 한 번 만났었는데, 자신이 석림(石林)의 집에서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말하면서, 그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찾아 방문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 나이가 70은 넘었을 것입니다. ‘비록 나이든 어른이 없어도, 오히려 전형(典刑)이 있다.’ 이 말은 깊이 생각해볼만 합니다. 전에 회안위(懷安尉) 양악(楊岳)이 벼슬을 했는데, 바로 양구산 선생의 자손입니다. 고향에 와서 벼슬을 했는데, 불행히도 눈이 멀었습니다. 가헌(稼軒)이 이를 불쌍히 여겨, 그를 위해 의원을 불러 치료를 했지만 끝내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정추(鄭樞)가 특별히 사당을 요청했고, 그는 지금 당신이 벼슬하고 있는 복주성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심부름하는 사람이 돌아간다고 하여 이 글을 급하게 대충 써서 보냅니다. 그 사람은 나와서 당신을 찾지는 않을 것이니, 시간을 내어 당신의 후임자를 보내 그의 안부를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조금이라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힘써 도와야 할 것입니다. 병중에 어쩔 수 없어서 이 글을 씁니다만, 정력이 미치지 못하니 매우 힘이 듭니다. 이곳은 외진 시골이라 함께 상의할 사람도 없으니, 멀리 떨어져 있어 정정(訂正)을 구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放翁老筆尤健, 在今當推爲第一流. 近聞復有載筆之招, 不知果否. 方欲往求一文字, 或恐以此疑賤迹之爲累, 未必肯作耳. 悟老化去, 甚可傷. 血疾渠舊有之, 未必服藥之誤也. 意公恨未之識, 見劉叔通說向在三山見一老僧, 自云客石林家甚久, 頗能道其餘論, 不知便是此人否. 如其不然, 亦可因令尋訪, 計其年事, 亦當是七十以上矣. ‘雖無老成人, 尙有典刑’, 此語深可念也. 前懷安尉楊岳從事, 乃龜山先生之孫, 鄕來在官, 不幸盲廢. 稼軒憐之, 爲之呼醫治療, 竟不能視. 後來鄭樞特爲請祠, 今在彼城中寓居. 因其便還, 匆匆附此. 渠必不能出謁, 以其賢者之後, 時遣人存問之, 少有乏無, 力可周卹, 計亦所不憚也. 病中迫不得已, 不免作一文字, 精力不逮, 殊覺辛苦. 此間窮陋, 無人商量. 甚恨相去之遠, 不得就求訂正也.
(6-3355)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6년(경신, 1200, 71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여덟 번째 편지이다.
차가운 봄기운에 병이 악화되어 새해를 축하하는 글조차 올릴 수가 없습니다. 역참을 통해 문득 당신의 편지를 받고서, 요즈음 막부는 한가롭고 건강하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매우 위로가 됩니다. 저는 병 때문에 날로 쇠약해져 가는데, 이는 말씀드릴 것조차 없습니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병도 안정되어간다 하니, 참 좋습니다. 이 병은 술이 가장 좋지 않습니다. 만약 술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다면, 약을 쓰지 않아도 나을 것입니다.
春寒多病, 未能奉一字以爲新歲之慶. 遞中忽辱惠問, 獲聞比日幕中多暇, 起處寧適, 足慰馳情. 熹病益衰, 無足云者. 示喩所苦亦已向安, 甚善. 此疾最忌飮酒, 若能痛節, 當不藥而愈也.
초사의 수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돌고 돌아서 어렵게 몇 편의 판본을 부쳤고, 순서대로 보내와서 다행입니다. 이곳에는 고전(古田)의 보음(補音)을 필사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소군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냅니다. 현의 관리에게 부탁해서, 사람을 고향에 내려 보내 그를 찾도록 하고, 그에게 그 책을 전록(傳錄)하게 하는 것이 더욱 편리할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의 필사본에 상당부분의 절(節)이 빠져있다고 해서, 전체를 기록해서 당신께 보내도록 이미 부탁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예전에 음고(音考) 한 권을 편집했었는데, ‘음(音)’이란 고금의 정음(正音)과 협운(協韻)을 모아 하나로 꿰뚫은 것을 말하고, ‘고(考)’는 여러 판본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고찰해서 거기에 덧붙인 것을 말하는데, 다만 따로 한 권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책 뒤에 붙인 것은 정문의 바로 아래에 끼워 넣으면 책을 보는 사람의 눈을 가로막고 음풍(吟諷)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지는 못합니다. 정문에 차이가 있을 때는 온당한 것을 선택하여 정하면 될 것입니다. 또 이 고전전서를 첨부하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조금 겨를이 있을 때를 기다려 음고를 수정하여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작업을 시작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업이 마무리되는 순서대로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판본이 상세하고 좋다면, 이곳의 판본을 다시 보내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楚詞脩未? 旋了旋寄數板, 節次發來爲幸. 古田補音此間無人寫得, 今寄一書與蘇君, 幸轉託縣官, 差人賚去鄕下尋之, 就其傳錄尤便. 亦聞渠寫本頗經刪節, 已囑今爲全錄去矣. 然此嘗編得音考一卷, 音謂集古今正音協韻通而爲一, 考謂考諸本同異幷附其間. 只欲別爲一卷, 附之書後, 不必攙入正文之下, 礙人眼目, 妨人吟諷. 但亦未甚詳密. 正文有異同, 但擇一穩者爲定可也. 又可附此古田全書, 俟旦夕稍暇, 一面修寫寄呈. 彼中不知已曾下手未? 亦望隨得已了者節次寄來也. 若已詳善, 卽此中本更不須寄去矣.
유시(劉侍)의 글을 읽어보면 기운은 평안하고 문채는 완만하니 경술(經術)에서 나온 것으로 소공(蘇公)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고고(高古)한 지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많지만 담고 있는 이치는 적으니 고심한 발명함이 없음을 느낍니다. 대개 옛사람의 글은 모름지기 그 장점을 따라가면서 취해야지, 한 때의 소견으로 갑작스럽게 품격이나 안목을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문숙의 여러 이론과 논문은 지난번에 임택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었는데 복사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임택지에게 복사하여 당신에게 보내라고 편지를 하였으니, 혹시 고전의 보음을 옮겨 적으면서 이문숙의 글을 참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상자를 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만일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더욱 바라던 바입니다. 취성각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이미 대충 하도록 해 두었는데, 보통 수준의 장인(匠人)의 속필이라 뛰어나지는 못합니다. 취성찬도 지었는데, 이제 복사하여 보내드립니다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아 주십시오. 여군(余君)은 취성찬을 썼는지요? 인편을 통해 함께 빨리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석림 지방의 호승(胡僧)은 지난번에도 보았는데, 섭공 자신이 감상하려고 사람을 시켜 본떠 만들었다는데, 당시 뛰어난 화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요약하자면, 해가 갈수록 수준은 점차 낮아지고, 이와 같이 수준 높은 인물들은 날이 갈수록 적어지니 탄식할 뿐입니다. 아마도 귀부(龜趺)는 온전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 비석에서 떨어져 나온 원래의 것도 옆에 있었습니다. 오생(吳生)이 그린 현무는 참으로 기발합니다. 그렇지만 거북 뒷면의 글에서 정척(正脊)의 갑오(甲五)는 오행에 상응하고, 갑팔(甲八)은 팔괘에 상응하고, 또 그 다음의 갑이십사(甲廿四)는 절기에 상응해야 하니, 역시 자연의 이치이라 했는데, 이는 도리어 (갑수甲數가) 부족하며, 자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방고(九方臯)의 상마(相馬)를 이로써 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지난번 두기(杜記)는 보지 못했는데, 세상에서 이렇게 빠뜨린 채 알려지지 않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방옹(放翁)에겐 오랫동안 편지를 하지 못했는데, 편지 한통이라도 하지 싶지만 걸린 게 자못 중대하고 또 잘못하여 누라도 끼칠까 염려되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겠습니다. 양군(楊君)이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이는 쉽지 않은 일일 뿐만아니라 이공보다 더 심합니다. 형양(滎陽) 역시 처음에는 몹시 망설였는데, 왕계로로 하여금 온갖 방법으로 설득하고서야 사록관의 청을 승낙받았습니다. 이 사람(양군)은 상당히 아까운 사람이니,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장락(長樂)의 유군(劉君)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도 번거롭더라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직경이 말하기를, 유군이 아는 사람이 성에 있다고 하여 이미 편지 뒷면에 이름을 적어놓았으니, 유군을 아는 사람을 찾아 전달하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혹시 사람이 없으면 현으로 사람을 보내 현관에게 전달해주도록 부탁바랍니다. 편집된 예서가 거기(유군의 처소)에 있어서 빨리 가져와서 질병이 조금 덜한 때에 힘껏 마무리 짓고 싶기 때문에 늦출 수 없으니, 이 점 고려해주기 바랍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늘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오로(悟老)가 그 탑에 뜻을 품고 있다 들었는데, 그만 두면 좋겠습니다.
劉侍讀書氣平文緩, 乃自經術中來, 比之蘇公, 誠有高古之趣. 但亦覺詞多理寡, 苦無甚發明耳. 大抵古人文字要當隨其所長取之, 難以一時所見遽定品目也. (6-3356)李文叔論文諸說, 向見林擇之有之. 不曾寫得, 已書報今錄去, 或可幷移書古田就取也. 畫笥許觀, 甚幸. 儻得附名, 尤所願也. 聚星閣此亦已令草草爲之, 市工俗筆, 殊不能起人意. 亦嘗輒爲之贊, 今謾錄去, 幸勿示人也. 余君之作竟能否? 便中幷望早寄及也. 石林胡僧頃亦見之, 蓋葉公自有鑒賞, 其所使臨摹者, 必當時之善工也. 要之, 年來事事漸低, 此等人物, 亦自日少一日, 爲可歎耳. 龜趺恐須作全者, 向見所隕之元故亦在側也. 吳生玄武信爲奇筆, 但龜背之文, 正脊之甲五, 應五行; 次甲八, 應八卦; 又次甲廿四, 應節氣, 亦自然之理. 此却不足, 亦欠子細. 然九方臯之相馬, 又不當以此論耳. 社記頃未之見, 世間此等遺落不遇知者, 可勝數哉! 放翁久不得書, 欲往從覓一文字, 所繫頗重, 又恐賤跡累其升騰, 未敢啓口也. 楊君荷枉顧, 此其不易得又有甚於前二公矣. 滎陽始亦甚趦趄, 令汪季路百計脅之, 乃肯聽耳. 此君殊可念, 有可垂手處, 幸曲爲拯拔也. 長樂劉君一書, 煩爲轉達. 直卿云渠有知識在城中, 已令批在書背, 幸令人問之. 恐未有便, 卽告專介爲送至縣中, 託縣官遣人達之. 蓋所編禮書在渠處, 欲亟取來, 趁此疾病少間之際, 幷力了之, 故不可緩, 切幸垂念也. 欲言甚衆, 書不能盡. 唯冀以時自愛, 千萬之禱. 悟老聞欲爲志其塔, 果爾, 亦甚幸也.
(6-3357)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6년(경신, 1200, 71세)에 공풍에게 답한 열아홉 번째 편지이다.
진태구(陳太丘)가 순낭릉(荀朗陵)을 찾아갔는데, 가난하고 검소하여 노복이 없어, (진식전陳寔傳에 “진식의 자는 중궁仲弓이고, 영천穎川 허창許昌 사람이다. 문희聞喜 지방의 수령과 태구太丘 지방의 장관이 되었는데, 그 풍모와 교화가 널리 미쳤다.”고 했다. 선현행장先賢行狀에는 “순숙荀淑의 자는 계화季和이고, 영천穎川 영음穎陰 사람이다.”고 했다. 위포와 갈관, 양치기 중에서 뽑힌 문안을 지닌 이들 모두가 빼어난 인물들이었다.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낭릉후(朗陵侯)를 잘 보좌하여 백성들이 학하게 교화되었다.) 원방(元方)에게 장거(將車)하게 하고 (선현행장 “진기陳紀는 자가 원방元方으로, 진식寔의 장자長子이다. 덕이 지극하고 세속과 단절하여 높은 이름이 진식과 나란히 하여 동생 진심諶이 또 그를 배향했다. 늘 (재상이 일하는) 관청에서는 등용하기 위해 그를 부르고 예물禮物이 쌓였고, 세상에서는 ‘삼군三君’이라 불렀고, 백성이 모두 그림으로 그렸다.”) 계방(季方)이 지팡이를 짚고 뒤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장문(長文)은 오히려 작고, 재저(載著)는 수레에 있습니다. 이윽고 도착하자, 순낭릉이 숙자(叔慈)를 시켜 문에서 응접하고, 자명(慈明)이 술을 따르고, 나머지 육룡(六龍)이 하식(下食)합니다. (장번張璠의 한기漢紀에 “숙淑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는데, 검儉․곤緄․정靖․도燾․왕汪․협爽․숙肅․부敷이다. 숙淑은 서쪽 호리豪里에 거처했는데, 현의 수령 원강苑康이 ‘옛날 고양씨高陽氏가 재주 많은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마침내 관청에서 그 마을을 고양리高陽里라 부르고 당시 사람들도 팔용八龍이라 불렀다’고 했다.”) 문약(文苦) 역시 작은데, 무릎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 때에 태사(太史)가 진인(眞人)이 동쪽으로 간다고 아룁니다. (단도란檀道鸞의 속진양추續晉陽秋에 “진중궁陳仲弓이 여러 아들과 조카들과 함께 순낭릉 부자에게 갔는데, 그 때에 덕성(德星)이 모여,태사가 ‘오백리의 현인이 모였다’고 아룄다‘고 했다.”)
陳太丘詣荀朗陵, 貧儉無僕役, (陳寔傳曰: 寔字仲弓, 穎川許昌人. 爲聞喜令․太丘長, 風化宣流. 先賢行狀曰: 荀淑字季和, 穎川穎陰人也. 所拔韋褐芻牧之中, 執案刀筆之吏, 皆爲英彦. 擧方正, 補朗陵侯相, 所在流化.) 乃使元方將車, (先賢行狀曰: 陳紀, 字元方, 寔長子也. 至德絶俗, 與寔高名並著, 而弟諶又配之. 每宰府辟召, 羔鴈成羣, 世號三君, 百城皆圖畫.) 季方持杖從後. 長文尙小, 載著車中. 旣至, 荀使叔慈應門, 慈明行酒, 餘六龍下食. (張璠漢紀曰: 淑有八子, 儉․緄․靖․燾․汪․爽․肅․敷. 淑居西豪里. 縣令苑康曰, 昔高陽氏有才子八人, 遂署其里曰高陽里, 時人號曰八龍.) 文苦亦小, 坐著膝前. 于時, 太史奏眞人東行. (檀道鸞續晉陽秋曰: 陳仲弓從諸子姪造荀父子, 于時德星聚, 太史奏: 五百里賢人聚.)
진(陳)․순(荀)의 취성사(聚星事)의 그림을 두 단락으로 나누자면, 앞 단락은 태구가 길에서 수레를 타고 있는데 원방 등이 모시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뒤의 단락은 숙자(叔慈)는 응문(應門)하고 낭릉은 손님을 접대하고 있으며, 칠룡(七龍)이 모시고 식사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또 태구와 낭릉이 상대하고 있고 두 아들과 손자 한 사람이 곁에서 모시고 서 있는 모습을 다시 그려야 마땅합니다. 또 숙자는 문 밖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데, 손님은 이미 잔치에 참여하고 있으니, 문 밖에서 오래 기다리며 서있지 않아야 하니, 역시 낭릉의 곁에서 모시고 서 있는 모습을 그려야 마땅합니다. 이 모두는 중복되는 것 같습니다. 두 단락 사이에 다시 산과 돌, 나무와 사슴을 나누어 그려야 하고, 앞뒤로 모두 주해를 달아야 합니다. 만약 다시 한 단락을 그린다면, 태구는 수레를 타고 문에 도달하는 형상이 되고, 숙자는 문 밖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으며, 칠룡은 낭릉을 모시고 정원으로 나가고 있고, 문약이 그 뒤에 있다면, 중복을 면할 것 같고, 이것이 또한 고화의 유의(遺意)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음식을 하고 문약이 무릎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일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생각해보시고 그림을 그린 사람과 함께 헤아려 온당함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更考後漢處士冠服敎之.
所畫陳․荀聚星事, 若作兩段, 卽前段當畫太丘乘牛車在塗, 而元方等侍行, (6-3358)後段當畫叔慈應門, 朗陵對客, 七龍侍食. 又當重畫太丘與朗陵相對, 而二子一孫侍立. 又叔慈本在門外迎客, 客旣入燕, 則又不當久立門外, 亦須畫其侍立於朗陵之側. 此皆似涉重複. 兩段之間, 又須更作山石林麓分隔, 前後皆費注解. 若只畫作一段, 則但爲太丘乘車到門之象, 而叔慈在門外迎客, 七龍扶侍朗陵出至庭中, 而文若在其後, 卽免重複, 亦有遺意. 但却不見對飮行食, 及坐文若於膝前, 事有不備耳. 凡此未能自決, 不知盛意如何, 更望相度, 及與畫者商量, 取令穩當乃佳耳.
更考後漢處士冠服敎之.
공중지에게 답함 答鞏仲至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6년(경신, 1200, 71세)에 공풍에게 답한 스무 번째 편지이다.
두 번이나 편지를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요즈음 봄이 완연하지만 따뜻하기도 하고 춥기도 하여 날씨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막부에 도움을 받아 하시는 모든 일에 행복이 함께 하길 빕니다. 섭수가 어제 이곳을 거쳐갔습니다. 장씨의 편지에 따르면 머지 않아 당신께서 장수를 호위하느라 이곳 경계에 온다 하는데, 만약 일찍 오게 되면 하루이틀이라도 머물러 주신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초사(楚詞)는 당연히 만나서 논의해야 하겠지만 원본의 글자 역시 작지 않으니, 소죽지(小竹紙)의 초본을 가지고 보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곳의 장인이 책편집의 일을 하고 있는데, 만약 초간본을 가지고 정정한다면 앞으로 상판하기도 편하고, 다시 복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오탈자가 생기지도 않을 것이니 일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소군(蘇君)이 필사했다는 보음(補音)이 이미 도착했다면 가져오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있는 본자(本子)는 온전하지 못해, 빠진 부분이 있어 사람들이 불만스러워할까 염려됩니다. 「취성도(聚星圖)」는 이미 여기에서 사람을 시켜 그리도록 했는데, 보내주신 것과 비교해보니 대체로 비슷합니다. 다만 여기에 있는 것에는 수레 가운데와 당상(堂上)에 두 개의 태구(太丘)가 있어 매우 미심쩍었는데, 이제 보내주신 것을 보니 자못 온당하니, 이는 이치에 밝은 사람이 비교하여 헤아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만 민지방 사람들이 일을 좋아하지 않아 그림 그리는 화필(畫筆)이 거의 단절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예서(禮書)의 절반 정도를 필사했다하니 황직경이 있는 곳으로 빨리 보내서 관청의 글쓰는 사람 몇 명을 시켜 한 부를 초록하게 하십시오. 왕원석(王元石)도 한 부를 필사하고 하니 다시 한 부를 더 필사하고, 그곳에서 필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보(莆)지방으로 보내십시오. 시국의 여론이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블랙리스트(살생부)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 것이 다르지만 사실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옵니다. 요직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외직으로 발령을 받는 것도 우리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듣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그곳의 소문은 어떻습니까?) 방옹(放翁)의 좋은 결말은 작지 않은 일인데도 아직 축하 편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더욱 늙고 병들어 고통스런 모습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시 직접 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兩承惠書, 良慰馳想. 比日春深, 寒暖尙末定, 恭惟幕府有相, 所履佳福. 葉(6-3359)帥昨日已過此, 聞張書當來, 不久計賢者必護印至境上. 若得早來, 使可宿留, 爲一兩日款, 深所望也. 楚詞當俟面議, 元本字亦不小, 可便以小竹紙草印一本, 携以見示. 此間匠者工於剪貼, 若只就此訂正, 將來便可上板, 不須再寫, 又生一重脫誤, 亦省事也. 蘇君處所寫補音如已到, 幸亦携來. 此間所有本子不全, 恐將來闕略, 却不滿人意也. 聚星圖此間已先令人畫, 今詳折寄, 大槪不甚相遠. 今詳所寄, 大槪不甚相遠. 但此間者車中堂上有兩太丘, 心頗疑之. 今得所示, 却差穩當, 此必嘗經明者較量也. 但閩中人不好事, 畫筆幾絶, 爲可歎耳. 禮書半稿略可寫淨, 旦夕寄直卿處, 仍就使廳借筆吏數人抄過一本. 王元石亦要抄一本, 仍更爲寫一本, 當挨彼中寫了, 却寄莆中也. 時論少寬, 但置籍事豫奪不同而同出一手, 要路諸人有忽從外補者, 亦非意料所及, 不知彼中所聞果如何也. 放翁且喜結局, 不是小事, 尙未得以書賀之. 熹衰病益甚, 苦楚之態亦非言語所能形容者, 不能復縷縷也. 會面有期, 預以爲喜.
(6-3360)林易簡에게 답함 答林簡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2년(신해, 1191, 62세)에 임이간에게 답한 편지이다.
질문: 효제를 다하는 것이 바로 인이다. (운운)
답변: 논거가 지나치게 빈약하고 뜻도 정밀하지 못합니다. 뒷부분도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질문: 말은 경솔하고 조급하며, 행동은 저도 모르게 어긋납니다. 조화하고 조금 느슨해야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에 부딪치면 다시 그렇게 됩니다. 소학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귀를 보고서 흠모하지 않고, 빈천을 보고 싫어하지 않으며, 어려움이 닥쳐도 억지로 모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광대가 업신여기거나 몸을 해치면서 재물을 늘리는 일까지도 모두 넉넉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이 책을 편집한 것도 이런 의도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씨가훈의 여섯 가지 일의 경우, 어찌 이름이나 탐내고 세속적인 것들을 연모하는 자가 그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추론해보면, 태교에서 시작하여 오품(五品)의 겸손함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도를 다하는 것은 모두 이로부터 확충해가는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우리가 죄과에 빠지고 굴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긍심(矜心) 하나를 없애지 못하는 데 있으니, 모든 병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답변: 글을 보는 것과 각 조목을 보는 것은 각기 다른 일이니, 이처럼 억지로 합쳐보아서는 안 됩니다.
질문: 소학은 명륜의 다섯 문단으로부터 시작하는데, 명부자장(明父子章)의 핵심은 ‘친(親)’이라는 한 글자에 있고, 명군신장(明君臣章)의 핵심은 ‘의(義)’라는 한 글자에 있으며, 명부부장(明夫婦章)의 핵심은 ‘별(別)’이라는 한 글자에 있고, 명장유장(明長幼章)의 핵심은 ‘서(序)’라는 한 글자에 있고, 명붕우장(明朋友章)의 핵심은 ‘교(交)’라는 한 글자에 있습니다. 처음 혼례를 읽으니, 만세의 시작은 남녀의 구별이 있은 뒤라야 부모와 자식이 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답변: 한무제(漢武帝)는 음악과 여색(女色)에 빠져 후궁(後宮)에 노니는 것을 즐기다가 부자간에 친하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 여태자(戾太子)의 변을 빚어냈으니, 그것도 부부 사이에 분별이 없음으로 인해 부자간에 친하기 못하게 된 한 사례입니다. 그 말은 여태자전(戾太子傳)에 실려 있으니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무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질문: 경(敬)은 무엇입니까.
답변: 경(敬)은 온갖 생각을 쉬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따라 전일(專一)하게 하면서 조심하고 방일하지 않는 것이니,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盡得孝弟便是仁(云云)
立說太冗而意不精切, 大抵後多類此.
言語輕躁, 動輒有忤, 知和緩可療, 而臨事復然. 小學之書先在於一切世味淡薄, 自然見富貴不歆羨, 見貧賤不厭惡, 臨患難無求免. 一向優人抑己, 損躬裕物之事, 皆可優爲之. 先生編集是書, 此意尤多. 如顔氏家訓六事, 豈貪名徇俗羨慕者能之? 推此則貽敎之始以至五品之遜, 各盡其道, 皆由此充. 按伏罪過, 全在不能去一矜心, 所以諸病皆由於此.
看文字且逐條看, 各是一事, 不須如此牽合.
小學之書, 自明倫五段, 明父子章全在一 ‘親’ 字上, 明君臣章全在一 ‘義’ 字上, 明夫婦章全在一 ‘別’ 字上, 明長幼章全在一 ‘序’ 字上, 明朋友章全在一 ‘交’ 字上. 始讀昏禮, 萬世之始, 至男女有別, 然後父子親.
漢武帝溺於聲色, 游燕後宮, 父子不親, 遂致戾太子之變. 此亦夫婦無別而父(6-3361)子不親之一證. 語在戾太子傳, 可檢看. 然亦非獨此也.
問敬
敬不是萬慮休置之謂, 只要隨事專一謹畏, 不放逸耳, 不須許多閑說話也.
질문: 소학에서 빈객(賓客)의 예법은 붕우(朋友)장에 보이는데, 한 때의 사귐이라도 서로 공경하고 절차탁마하도록 힘쓰는 뜻과 서로 관찰하면서 선하게 여기는 이치가 아닐까요?
답변: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손님과 주인 자체도 붕우의 부류이니, 예를 들면 고향에서 이웃들과 오가는 것과 스승과 제자의 경우 역시, 오달도의 관점에서 보면 붕우의 부류입니다. 이 붕우의 문에 들어가지 않으면 관섭할 곳이 없습니다.
질문: 책을 읽을 때는 의의(핵심)를 추구해야 하므로 정독하는 것이 좋다고 알고 있지만, 이미 잘못된 습관에 젖어 아직도 잡다한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걱정입니다.
답변: 이미 그 잘못을 알았다면, 곧바로 고쳐야 할 것이지, 다시 이처럼 질질 끌어서는 안 됩니다.
질문: 소학 「입교」편에 실린 예기 「내칙」편의 “(남자는) 나이 30이 되면 아내를 맞이한다”, “벗을 좇아 그 뜻하는 바를 보고 그것을 자기 수양의 밑거름으로 삼는다”는 구절.
답변: 남녀의 교육에 대해서는 사마광이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 나머지 역시 그 대강은 한 구절로 압축할 수 있으니, 이처럼 자질구레하게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 마원(馮援)은 기의(譏議)로써 사람들을 경계했지만, 기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답변: 마원의 말 자체는 본받을 만하니, 이처럼 지루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문단은 삭제해야 할 것이니, 후생들은 또 어떻게 이 문단의 말을 이해하고 경계로 삼겠습니까?
질문: 리의 근원은 효도의 뜻을 추연(推演)하는 것입니다.
답변: 이 화두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만약 안경이 질문한 것과 같은 시기에 들은 것이라면, 그 사람의 설명이 맞습니다.
질문: 경이 태만함을 이기면 길하고, 태만함이 경을 이기면 멸합니다. 의가 욕심을 이기면 따르고, 욕심이 의를 이기면 흉합니다.
답변: 경의 뜻에 경중이 있기는 하지만, 당신의 설명은 지나치게 뒤죽박죽입니다.
질문: 맹자의 양기설(養氣說).
답변: 이 조목은 그럭저럭 괜찮습니다만, 집주를 따르는 것 이외에 새로운 설명은 없습니다. 글을 볼 때는 이와 같이 이해하고 교본의 본문을 정독하여야 하고, 이를 오래도록 하면 자연스럽게 그 깊고 얕음에 따라 깨닫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지리멸렬하게 새로운 설명을 끌어대거나 잡다한 것들을 인용하여 천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小學賓客之禮見於朋友之章, 莫以一時之交亦有切偲之意․相觀而善之理否?
不須如此理會. 賓主自是朋友之類, 如鄕鄰還往及師弟子之屬, 於五達道亦朋友之類也. 不入此門, 則無管攝處矣.
讀書求意義, 雖知爛熟之爲美, 而氣習已慣, 惟恐不多之念未能頓忘.
旣知其非, 便當改之, 不須更如此支蔓.
小學載內則三十有室․遜友視志.
男女之敎, 溫公已有說, 其餘亦大槪立一節限耳, 不必如此細碎.
馮援以譏議戒諸子, 而不免於譏議.
馬援之言, 自可爲法, 不須如此支蔓. 如此則須削去此段, 後生又如何得聞此一段說話而以爲戒乎?
理之根原, 推演孝義.
不記此話頭因何而起. 若與安卿所問同是一時所聞, 則渠說已得之矣.
(6-3362)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敬義自有輕重, 然所說太冗.
孟子養氣說
此條差勝, 然却只是依放集注, 別無新說. 看文字且要如此理會, 敎本文說精熟, 久之自隨淺深有見處. 正不必支蔓生說, 穿鑿援引也.
하쉬에게 답함 答何倅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2년(신해, 1191, 62세)에 하쉬에게 답한 편지이다.
전에 보내주신 편지 및 경서에서 말한 ‘욕(欲)’자에 대한 제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기 「악기」에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품의 욕구다”고 한 것인데 이 말은 성품에 고유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 주재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주재를 하면 정(情)이 올바름을 얻어서 정상적인 성품에 따라갈 것이므로 인욕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마음이 주재하지 못하면 정이 흘러 넘쳐 성품을 침몰시켜 오로지 인욕이 될 것입니다. 이른바 ‘하고자 할만한 것을 선이라고 한다’는 말은 본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원(元)은 선의 으뜸이다’는 마음이 주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묵묵히 기억해야 할 것이지, 언어로 이러쿵저러쿵 논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다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가 짧아 저의 생각을 다 담지 못했습니다.
前蒙誨及經書中所說 ‘欲’ 字, 以鄙意所見, 人之生不能不感物而動. 曰感物而動, 性之欲也, 言亦性所有也, 而其要係乎心君宰與不宰耳. 心宰則情得正, 率乎性之常而不可以欲言矣; 心不宰則情流而陷溺其性, 專爲人欲矣. 若夫所謂可欲之謂善, 蓋指言體 ‘元者善之長’ 之意, 心之所爲宰者也. 要當黙識之, 而不可以言語論也. 不知是否, 更望見敎, 尺書莫盡此悰.
(6-3363)강언모에게 답함 答江彦謀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2년(신해, 1191, 62세)에 강언모에게 답한 편지이다.
당신이 논한 정몽의 큰 뜻에 대하여서는 아마도 너무 쉽게 보는 잘못이 있는 듯합니다. 무릇 도의 극치는 사물과 내가 진실로 하나입니다. 그러나 어찌 사물과 나 사이에서만 이를 체험하겠습니까. 대개 천지(天地), 귀신(鬼神), 유명(幽明), 은현(隱現), 본말(本末), 정추(精粗)가 하나로 관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정몽의 뜻은 진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현의 말씀이 이미 많은데 굳이 정몽을 지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마도 모름지기 그 학설을 반복하여 연구하여 하나가 되는 소이연(所以然)을 찾아내서 그 이른바 하나(理)에 부합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반드시 수(銖) 단위마다 계산하여 균(鈞) 단위에 부합하고, 촌(寸) 단위마다 재보아 장(丈) 단위에 이르러도 어긋나지 않게 되어야만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자세히 말하는 것은 도리어 간략하게 말하고자 함이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널리 배우지도 못하고 설명도 자세히 못하면서 성급하게 한 마디로 그 극치를 탐색하려고 드니, 이는 수(銖)와 양(兩)도 구분 못하면서 균(鈞)과 석(石)을 억측(臆測)하고, 분(分)과 촌(寸)도 분변하지 못하면서 장(丈)과 인(引)을 눈대중으로 계산하는 격이니, 이는 정밀함과 조잡함을 두 가지로 여기고 크고 작음을 다르게 보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하나로 관통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로서는 아마도 적은 차질이 쌓여 큰 어긋남이 생겨서 이른바 균(鈞), 석(石), 장(丈), 인(引)도 그 참됨을 얻지 못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이는 바로 망령되게 엽등(躐等)을 생각한 데에서 온 병폐이니 세상에 자기 수양을 위주로 하는 학문에 뜻을 두고서도 그 방법을 모르는 자는 그 병폐가 늘 이러합니다. 명도 선생 행장에 이르기를, “선생이 사람을 가르칠 때에, 치지(致知)로부터 지지(知止)에 이르고, 성의(誠意)에서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며, 물 뿌리고 쓸고 응대(應對)하는 데에서 이치를 궁리하여 성품을 다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다. 세상의 학자들은 가까운 것은 버리고 먼 것을 추구하며 낮은 데에 있으면서 높은 것을 엿보아 경솔하게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면서도 끝내 얻는 게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지극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所論正蒙大旨, 則恐失之太容易爾. 夫道之極致, 物我固爲一矣, 然豈獨物我之間驗之? 蓋天地鬼神․幽明隱顯․本末精粗無不通貫而爲一也. 正蒙之旨誠不外是, 然聖賢言之則已多矣, 正蒙之作, 復何爲乎? 恐須反復硏究其說, 求其所以一者而合之於其所謂一者, 必銖銖而較之, 至於鉤而必合; 寸寸而度之, 至於丈而不差, 然後爲得也. 孟子曰: ‘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 正爲是爾. 今學之未博, 說之未詳, 而遽欲一言深其極致, 則是銖兩末分而臆料鉤石, 分寸不辨而目計丈引, 不惟精粗二致, 大小殊觀, 非所謂一以貫之者, 愚恐小差積而大繆生, 所謂鉤石丈引者亦不得其眞矣. 此躐等妄意之蔽, 世之有志於爲己之學而未知其方者, 其病每如此也. 明道先生行狀云: ‘先生敎人, 自致知至於知止, 誠意至於平天下, 灑掃應對至於窮理盡性, 循循有序, 病世之學者舍近而趨遠, 處下(6-3364)而窺高, 所以輕自大而卒無得也.’ 此言至矣!彦謀以爲如何?
조재에게 답함 答趙宰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2년(신해, 1191, 62세)에 조재에게 답한 편지이다.
당신의 편지를 받고서, 당신께서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터라 감히 바깥일에 간여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 당신이 맡고 계신 현에서 관전을 출자하여 기장(耆長)을 고용하도록 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고통스러워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감히 함부로 아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물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롭게 여기는 것과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에 사정에 관해 폭넓게 자문하여 백성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그만두고 이롭게 여기는 것은 실행하도록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창사(倉司)가 그것을 지휘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또 다른 현에도 이러한 제도가 있다는 것도 듣지 못했었습니다. 이제 이미 그만두었으니, 노역에 동원됐던 이 곳의 농가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은덕을 누림이 이미 두텁고 상사 역시 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을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불필요하게 졸렬한 이들의 말을 기준으로 삼을까 걱정스럽습니다.
伏承誨諭, 良荷不鄙. 但屛居杜門, 不敢干與外事. 向來雖聞貴縣令保正副出錢雇募耆長, 人甚苦之, 亦不敢遽有禀白. 但嘗因下問之辱, 欲乞博詢民情之所利病而罷行之, 正爲此耳. 初不知其爲倉司指揮, 亦不聞他縣之有此也. 今聞已行罷去, 自此境內應役之家得保生業, 則其受賜已厚, 而上司當亦能察其無他矣, 恐不必更假拙者之言以爲重輕也. 自餘曲折, 更託劉監廟票知, 幷幾情照.
(6-3365) 오위에게 답함 答吳尉
【해제】미상.
들으니 직사(職事)로 인하여 헌대(憲臺)에 인정을 받았다고 하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명성이 사실보다 지나치게 나는 것을 군자는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벽지(僻地)에 고을에 처음 벼슬인데 갑자기 상관에게 이러한 칭찬을 받았으니 이는 두려워하여야지 성급하게 기뻐할 것은 못됩니다. 마땅히 엄격하게 스스로를 단속하여 나라 일에 힘쓰며 마지막까지 처음처럼 조심하여야지 방자한 행동과 조급하게 나아가려는 마음을 싹틔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熹(云云).) 聞以職事見知憲臺, 甚尉. 然聲聞過情, 君子耻之. 初官僻縣, 遽爲上官獎拔如此, 可以爲懼而未可遽以爲喜. 且當痛自檢飭, 黽勉王事, 謹終如始, 不可便爲恣肆, 及萌躁進之心也. (王宰書來, 盛相稱道. 同官相與如此, 殊不易得. 聞其留意, 尤邑人之幸也.)
오위에게 답함 答吳尉
【해제】미상.
악창(岳倉)의 글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이미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그것은 바로 학문하는 도리로서 평소에 강론한 것이 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벼슬살이는 다만 청렴하고 부지런함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나아가고 물러남과 더디고 빠름은 자연 때가 있는 것이니 절대로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熹頓首再拜.) 岳倉書曲折, 前書已報矣. 只此便是學問底道理. 平日所與講論者, 不過此耳, 幸思之. 仕宦只是廉勤自守, 進退遲速自有時節, 切不可起(6-3366)妄念也. 官期不遠, 不審何日定行? 到官凡百以廉勤愛民爲心乃佳.
오위에게 답함 答吳尉
【해제】미상.
대체로 관직을 지키는 도리는 자기의 몸가짐을 공평하게 단속하고 청렴하게 하며 일 수행을 부지런하게 하고 삼가며, 밤낮 없이 노력하여 마치 깊은 못과 골짝에 임한 듯이 조심하면 자연 다른 잘못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바가 있게 되면 문득 사람으로 하여금 게으르고 방종하게 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그르치게 됩니다. 관직 생활은 시골 생활과 달라서 온갖 것이 이해와 관계되니, 모든 일을 매우 삼가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熹頓首再拜.:) 大抵守官只要律己公廉, 執事勤謹․畫夜孜孜, 如臨淵谷, 便自無他患害. 纔是有所依倚, 便使人怠惰放縱, 不知不覺錯做了事也. 官所不比鄕居, 凡百動有利害, 諸事切宜畏謹也. (云云).
(6-3367)조랑중에게 답함 答趙郞中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5년(갑인, 1194, 65세)에 조낭중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주신 당신의 선조이신 충간공 조정(趙鼎)의 행장을 받으니, 당황스럽고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애당초 당신의 형님이신 제거낭중(提擧郞中)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것이지만, 마땅히 쉽게 승낙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미 힘이 나날이 쇠약해져 앞에서 잘못한 것을 뒤에서 잊어버릴 지경이니, 일을 기록하고 글을 쓰는 것도 예전과 비교할 때 훨씬 힘들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물며 이 일은 일의 핵심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선조이신 승상 한 사람의 덕업조차도 쉽사리 형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이 국론과 관련되어 장차 사관이 전거로 삼아 만세에 드리울 것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제 스스로 생각해보건대 이 일을 감당하기에는 끝내 부족합니다. 지금 낭중이신 진군거(陳君擧) 어르신이 계신데, 정밀하고 총명하며 해박하여 사필(詞筆)이 고상하고 신묘하니, 모든 것이 제가 그 만의 하나도 바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 분을 추천한다면, 모든 사람이 마땅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내가 그 분과 인연을 맺은 지가 오래되었고 또 두텁기 때문에 진실로 핑계 때문에 기피한다는 오해가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이 점만을 간절히 바라오니,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熹伏蒙垂喩先正忠簡公行狀, 不勝恐悚. 此事初以令兄提擧郞中見屬之勤, 不合容易承當. 旣而精力日衰, 失前忘後, 記事作文, 比之昔日倍覺費力. 况此事體之大, 不唯先丞相一身之德業難遽形容, 而事關國論, 將來史官所據以垂萬世者, 將在於此. 自度恐終不足以辨此. 今陳丈君擧郞中精敏該洽, 詞筆高妙, 皆熹所不能望其萬一者. 若擧而屬之, 公論無不以爲宜者. 而熹託契門下旣久且厚, 固無形迹之嫌也. 專此布懇, 伏幸深察.
조위(학)에게 답함 答趙尉(壆)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3년(계축, 1193, 64세)에 조학에게 답한 편지이다.
9월 8일,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섬위(剡尉: 섬지방의 위 벼슬)인 조군에게 의견을 다음과 같이 올립니다: 저는 아직 당신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는데, 멀리서 그것도 수차(手箚)로써 글을 주시니, 저를 배려해주시는 그 두터움이 매우 깊습니다. 그리고 승상을 지내신 선조 조군석(趙君錫)의 행실을 보여주셨는데, 그 분의 행실을 논술하여 그 뒤에 덧붙이면 그 뜻이 더욱 두터워 못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의 덕을 깊이 사모하는 정을 보고서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몇 마디 말을 별지와 같이 적었습니다. 만약 지금 여러 현인들의 발어(跋語)가 있다면, 제 글은 그 뒤에 붙여주면 좋겠습니다. 주의(奏議)의 글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만약 허락하신다면, 저주에 있는 석씨에게 부탁하여 상우현의 반간이 있는 곳으로 부쳐주거나, 아니면 임안에 있는 조절추에게 맡겨주십시오. 그에게 곧 이곳으로 오는 인편이 있을 것입니다. 마침 누추한 이곳에 며칠 머무는 심부름꾼이 있어서 이 글을 씁니다. 병과 게으름으로 인해 대충대충 쓰고 다시 차자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너그럽게 헤아려주십시오. 날씨가 조금씩 차가워집니다.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강학에 관한 문제는 다음에 직접 만나서 논의했으면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다시 절합니다.
九月八日, 熹扣首復書剡尉趙君奉議: 熹未得識面, 而遠辱貽書, 副以手箚, 已荷厚意; 而示以先正中丞行實, 使之論述以附其後, 則意又甚厚, 而非熹區區所得當也. 顧於先德慕用之深, 又不敢辭, 輒具數語如別紙. 若當代諸賢已有跋語, (6-3368)幸以附其後. 而奏議之書, 尙欲寅緣請得一觀, 儻辱開許, 只託石滁州附上虞潘幹處, 或寄臨安趙節推, 彼應時有便來也. 適此俗冗, 留來使數日, 乃得布此. 病倦草草, 仍不復作箚, 倂幾情亮. 向寒, 千萬以時爲門戶自愛. 講學之意, 尙俟他日得以面論. 不宣, 熹再拜.
탁주좌에게 답함 答卓周佐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8년(신축, 1181, 52세)에 탁주좌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 온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조정에서 관직을 설치하여 현인을 구하므로 위에 있는 이는 청탁으로써 사람을 추천해서는 안 되며, 선비는 마땅히 예의와 염치를 지켜야 하므로 아래에 있는 이는 스스로 나서서 추천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평생토록 이런 견해를 지켰기 때문에 작은 벼슬살이할 때에는 감히 추천을 구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외람되게 군현의 관리를 추천하고 물리치는 관직(刺擧)을 맡았으나 감히 천거(薦擧)와 삭직(削職)을 인정(人情)에 부응하도록 못하였고, 관리도 감히 글을 가지고 와서 추천을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한가롭게 지낼 적에는 관직에 있는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역시 감히 남을 위해 글을 지어 추천을 구한 적도 없었습니다. 오직 노성(老成)한 재덕(才德)을 갖추고서도 묻혀있는 분으로서 모두가 힘을 다해야 한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마침내 공론(公論)으로 아뢰었습니다. 그 일의 전후 사정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고, 지난번에도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또다시 이렇게 말하니 어쩌면 그렇게 탐욕스럽고 조급하여 전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지요? 지난 날 존장(尊丈)에게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마도 올바르게 지도하는 방법(義方)이 아니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만약에 관직에 있다면 당연히 추천해야 할 사람이라도 그 이러함을 보게 되면 다시는 천거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글을 지어 가지고 추천을 구함이겠습니까? 시험삼아 이 말을 생각하여서 자기에게 반성하는 학문을 하여 다음날 재덕(才德)이 알려지게 되면 자연 출세하지 못할 것은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지금은 그렇게 성급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도리어 비루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示喩已悉. 鄙意嘗謂朝廷設官求賢, 故在上者不當以諸託而薦人; 士人當有禮義廉耻, 故在下者不當自衒鬻而求薦. 平生守此愚見, 故爲小官時不敢求薦, 後來叨冒剌擧, 亦不敢以擧削應副人情, 官吏亦不敢浹書求薦. 其在閑居, 非無親舊在官, 亦末嘗敢爲人作書求薦. 唯老成淹滯, 實有才德之人, 衆謂當與致力者, 乃以公論告之. 此事首末, 衆所共知, 向者亦屢嘗奉告矣. 今乃復見喩如此, 何貪躁不.思之甚耶!前日已稟尊丈, 敎子如此, 似非所謂義方. 熹若在官, 有人合薦者, 見其如此, 亦不復薦之矣, 况使作書宛轉求薦耶? 試思此言, 反己爲學, 異時才德有聞, 自不患於不達. 今不須如此汲汲, 反取人鄙薄也.
(6-3369)임행보에게 답함 答任行甫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2년(병진, 1196, 67세)에 임행보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이다.
군기(軍器)를 맡아 다스리고 소초(銷鈔)를 한다고 하니 주군(州郡)의 관장(官長)이 신임하는 뜻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직무에 관한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갖 것을 되도록 드러내지 말고 너무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治甲錯鈔, 足見州郡相知之意. 職事固不可不盡心, 然凡百亦宜韜晦, 勿太向前爲佳.
임행보에게 답함 答任行甫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2년(병진, 1196, 67세)에 임행보에게 답한 두 번째 편지이다.
세상일에 골몰하다 보니 사람의 도리를 실추시켰습니다. 모름지기 바쁜 중에도 조만간 일깨우고, 때때로 책을 가까이 하여 단절되지 않게 하면 될 것입니다. 반씨의 책 역시 급한 것이 아니지만, 임씨의 판본을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한선생과 범선생 두 분이 편집한 것은 상당히 상세하고 조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만약 필사하는 관리가 있으면, 한 부 필사해 두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塵中汨沒墜墮了人, 須是忙裏早晩提撕, 時以書冊灌槪, 勿令斷絶, 爲庶幾爾. 潘書亦非所急, 不知林本竟如何. 當時是韓范二公所編, 須稍詳備有條理. 若有筆吏, 抄取一本亦佳也.
(6-3370)임행보에게 답함 答任行甫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2년(병진, 1196, 67세)에 임행보에게 답한 세 번째 편지이다.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하신 매염(賣鹽)의 일은 이미 주부(州府)에 위임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단지 있는 힘껏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갱장을 많이 하여 전인의 잘못을 드러내고 널리 이해를 개진하여 대중들의 원성을 사지(사적으로 관리들의 모임을 갖는 것과 같은 종류)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물며 소금을 파는 일은 주부(州府) 재정의 근본으로 보통 막관(幕官)이 맡고 있는 일인데, 이제 감당관(監當官)의 신분으로 그것을 처리하니 온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두 가지 경계를 범한다면, 더욱 불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을 핑계로 삼거나 아니면 따로 다른 이유를 만들어 강력하게 사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미 한번 고려하도록 편지를 했고 본 직책에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스스로 물러날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이러한 책임을 맡아 사람들의 미움과 질투를 사려고 합니까? 설령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일이 없더라도 대중들은 반드시 눈을 흘길 것이니, 만약 일찍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은 반드시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오래전부터 이 일을 말씀드리고자 했으나 게으름으로 해서 지금까지 왔는데,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마침 인편이 있어 몇 자 적어 보내느라 다른 일은 언급할 겨를이 없습니다.
前書所喩賣鹽事, 旣是州府相委, 無如之何, 只得竭力. 但不可因此多有更張, 以形跡前人, 廣陳利害, 以取衆怨, (如私會之類.) 乃爲佳爾. 况賣鹽一事, 是州府財計本根, 尋常是幕官職事, 今以監當處之, 已不穩當. 萬一須犯此二戒, 尤爲不便. 卽不若託以病, 或別作緣故, 以力辭之之爲愈也. 况今已書一考, 在任之日不多, 自可漸爲去計, 豈可更當此委任, 取人忌嫉? 正使無前所說二事, 衆人亦必側目, 若不早自引退, 必有後侮無疑, 更審思之. 久欲奉報此事, 因循至今, 深以爲慮. 偶有此便, 謾附此紙, 不暇他及也.
입행보에게 답함答任行甫
【해제】이 글은 경원(慶元) 2년(병진, 1196, 67세)에 임행보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이다.
나에게 찾아 올 시기가 있다고 하니 더욱 기쁩니다. 다만 신임 관리가 부임한 뒤라야 벗어날 수 있습니까? “감히 스스로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다시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요즈음 세상에 살면서 그저 물러난 뒤에는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벼슬이 낮고 녹봉이 작은 것이 비록 마음에 차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하나의 청빈한 선비가 학생이나 가르치면서 남에게 의지하여 먹고 사는 것보다는 풍족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를 부족하게 여겨 망령되게 분에 넘치는 것을 엿보게 되면 아마도 소득은 얼마 되지 않으면서 뒷날의 후회를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니 천만 번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직접 만나서 결정하면 좋겠습니다.
承有來期, 尤以爲喜. 但不知新官到後, 便得脫否? 所謂不敢不自警者, 更宜深念. 居今之世, 惟有一味退後, 勿求人知, 爲上策耳. 官卑祿薄, 雖不快意, 然比(6-3371)之一介寒士, 區區敎學, 仰食於人者, 則已爲泰矣. 若以爲不足, 妄有覬覦, 恐所得無幾, 而後日之侮, 將有不可追者, 千萬深思. 餘俟面見, 乃可決爾.
허진지에게 답함 答許進之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60세)에 허진지에게 답한 편지이다.
사람의 모든 일은 대체로 자기의 처지에 순응하면서 힘써 독서하고 쓸데 없는 일에 힘을 낭비하지 말고 절약하여 조금 여유를 가짐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논의한 맹자는 그 때 마침 병중이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제 찾아보니 보이지 않습니다. 독서는 모름지기 숙독하여 자세히 보면 저절로 그 의미가 점차 드러날 것이니 지리하여 천착하여 견해를 구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人生諸事, 大抵且得隨緣順處, 勉力讀書, 省節浮費, 今稍有贏餘, 以俟不時之須, 乃佳耳. 前書所論孟子, 偶以病中, 不暇細看, 今尋不見. 讀書且熟讀細看, 自當漸見意味, 不可支離穿鑿, 以求見解也.
정전지에게 답함 答程傅之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60세)에 정부지에게 답한 편지이다.
저는 귀하와 같은 고향사람입니다만, 아직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귀하께서 먼저 글을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대개 불교와 도가의 말은 도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는 귀하의 설명은 맞습니다. 우리 유학의 도와 그것을 궁구하는 방법에 관한 귀하의 말씀은 간략하여 아직 그 깊은 뜻을 궁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서로 만나 강론할 길이 없으니 귀하가 계신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만 쳐다보며 슬퍼할 뿐입니다. 언제 오셔서 말씀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곳을 지나더라도 제가 알 수가 없으니 어떻게 알려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熹與足下爲同郡人, 然彼此未相識面, 而足下以書先之, 此意厚矣. 夫佛老之言, 不得以道名, 足下之說是也. 至於吾之所謂道, 與其所以求之之方, 則足下之言有略而未究其蘊者, 無從面講, 臨風悵然. 異時因來, 有以見語, 千萬甚望. 過此則有非衰拙之所敢知者, 不知所以報也.
(6-3372)여소선에게 답함 答呂紹先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60세)에 여소선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이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가문을 지키면서 망령스럽게 취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제가 바라던 바로서 참 좋습니다. 다시 힘써서 선조의 가르침을 계승하기 바랍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속마음을 다할 수가 없지만, 이 뜻만은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示喩所以持守門戶, 不妄取予之意, 甚慰所望. 更冀勉旃, 以承先訓. 地遠無以致區區, 此意不敢不盡也.
여소선에게 답함 答呂紹先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60세)에 여소선에게 답한 두 번째 편지이다.
보내주신 편지에서도 말씀하신 가난함으로 인한 고통은 우리들이 늘 겪는 문제입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더욱 견고하게 지키면 선조의 가르침을 실추시키지 않게 될 것입니다.
承喩亦苦食貧, 此吾輩之常. 唯當益堅所守, 庶不墜先訓爲佳耳.
강단백에게 답함 答江端伯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60세)에 강단백에게 답한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한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보니 사물에 유의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확실히 보지 못하였을 적에는 지레 짐작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으니, 오직 성현이 이미 말씀하신 것으로 인하여 거의 정도(正道)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는데 글을 읽는 방법은 마땅히 익숙하게 읽고 깊이 생각하여 푹 젖도록 반복하여서 수(銖)가 쌓이고 촌(寸)이 포개져서 오래 되면 자연 성과가 나타나 이치만 밝을 뿐만이 아니고 마음도 안정이 되겠지만 만약에 섭렵하면서 그 이치가 밝아지기를 구하고 또 별도로 방편을 구하여 이 마음이 안정되기를 바라면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示喩爲學之方, 足見留意事物. 未見不可逆料, 誠如所論. 唯有因聖賢之所已言者而求之, 爲庶幾耳. 故爲學不可以不讀書, 而讀書之法又當熟讀沈思, 反覆涵泳, 銖積寸累, 久自見功, 不惟理明, 心亦自定. 若欲徒爲涉獵而求此理之明, 又(6-3373)欲別求方便以望此心之定, 其亦難矣.
반립지에게 답함 答潘立之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4년(계축, 1193, 64세)에 반립지에게 답한 편지이다.
논하신 서명은 대체로 이와 같이 볼 뿐입니다. 요즘은 다시 무슨 책을 읽으십니까? 좋은 생각이 있으면, 인편을 통해 알려주십시오. 제례에 대해 물으셨는데, 옛날에는 시조가 있더라도 대종(大宗)의 집안에서만 제사를 지냈습니다. 만약 소종(小宗)이라면 고조까지만 제사지냈습니다. 그러나 3묘(三廟)․2묘(二廟)․1묘(一廟)․제침(祭寢) 등의 차이가 있어서 그 존비에 따라 낮추어 가는 것이 매우 상세하니, 집집마다 모두 시조를 제사지낼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대개의 가정에서는 세속적인 관습을 따르고 있고, 이러한 일은 갑작스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세속을 따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서자(庶子)의 제사 역시 이와 같습니다. 생각하건대, 종가에서만 신주를 세워 제사지내고, 서자의 경우는 단지 패자(牌子; 위패)만을 사용하는데, 그 형상이 목주(木主)와 같아서 앞뒤를 판단할 수 없고, 두 개의 구멍을 뚫지도 않고 그것을 담는 함도 만들지 않음으로써 강쇄(降殺)의 뜻을 나타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所論西銘, 大槪亦只是如此看. 不知近日更讀何書? 有商量處, 便中可示及也. 所問祭禮, 古人雖有始祖, 亦只是祭於大宗之家. 若小宗, 則祭止高祖而下. 然又有三廟․二廟․一廟․祭寢之差, 其尊卑之殺, 極爲詳悉, 非謂家家皆可祭始祖也. 今法制不立, 家自爲俗, 此等事若未能遽變, 則且從俗可也. 支子之祭, 亦是如此. 竊謂只於宗子之家立主而祭, 其支子則只用牌子, 其形如木主, 而不判前後, 不爲陷中及兩竅, 不爲櫝, 以從降殺之義. 不知如何? 可更商量也.
(6-3374)조민표에게 답함 答趙民表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4년(계축, 1193, 64세)에 조민표에게 답한 편지이다.
옛사람의 학문은 치지(致知)를 우선으로 하였는데 치지하는 방법은 격물(格物)에 있습니다. 격물이라는 것은 하남(河南) 정(程)선생님은 “글을 읽어서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기도 하고, 옛사람의 일을 강론하여 그 시비(是非)를 분별하기도 하며, 사물을 접응(接應)하여 합당하게 대처하는 것이 다 격물의 일이다”고 했습니다. 격물을 하여 지(知)가 이르게 되면 실행을 함에 힘을 기울이지 않음이 없게 되어 일을 만남더라도 의지가 확립되지 않음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종사하려고 하면, 모름지기 밖을 좋아하는 것을 멀리 물리치고서 힘을 모아 분산시키지 않으면 쉽게 진전이 될 것입니다.
古人之學以致知爲先, 而致知之方在乎格物. 所謂格物云者, 河南夫子所讀或讀書講明義理, 或尙論古人, 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否, 皆格物之事也. 格物知至, 則行無不力而遇事不患其無立矣. 然欲從事於此, 要須屛遠外好, 使力專而不分, 則庶乎其進之易耳.
사여권에게 답함 答謝與權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4년(계축, 1193, 64세)에 사여권에게 답한 편지이다.
엎드려 정지현 학사이신 당신께서 손수 편지를 써서 내려주시고 깨우쳐 먼저 인연을 맺어주시니, 엎드려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슬픈 마음을 이루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봄날씨가 화창한 요즈음 한가롭고 여유롭게 지내시며 건강하시다고 하니, 기쁩니다. 저는 학문이 늦어 변변한 것도 없고, 다만 어릴 적에 부형과 사우의 가르침을 들어 익혔을 뿐입니다. 그래서 글의 구두점이나 찍고 문장의 뜻이나 조금 파악할 줄 알 뿐이며, 스스로 그것을 지켜 허물을 적게 하고자 노력했지만 뜻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현묘하고 오묘한 것들을 담론하여 세상을 놀라게 함으로써 (부형과 사우에게서) 전해들은 것을 등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잘못 들으시고 가르칠만하다고 여겨 먼저 편지를 주시고, 가학의 연원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제가 어떤 사람인데,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엎드려 있으면서 달려가 곁에서 모실 기약도 없으니, 당신을 계신 곳을 바라보면서 우러르는 마음만 간절합니다. 정자(程子)의 글에 틀린 곳이 없을 수 없는데, 직접 만나 뵙고 그 옳고 그름을 질정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당신의 소식을 듣고서 마침 인편이 있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바라건대 계절에 알맞게 잘 조절하시어 더욱 건강하게 오래 동안 행복을 누리십시오. 바로 저의 깊은 바람입니다.
伏蒙致政知縣學土寵賜手書, 喩以先契, 伏讀悲感, 不可具言. 且審卽日春和, 燕居淸暇, 壽體康寧, 又竊欣慰. 熹學晩無似, 徒以少日習聞父兄師友之訓, 稍知用力於句讀文義之間, 區區自守, 欲寡其過而未能. 固不敢坐談玄奧, 驚(6-3375)世駭俗, 以負所聞也. 老丈過聽, 以爲可敎, 辱先以書, 語以淵源所自來者. 顧熹何人, 可以與此? 屬此跧伏, 未有趨待之期, 引領向風, 但切傾仰. 程書固不能無誤, 亦恨未得面承, 質其是非, 姑因便風, 寓此致謝. 伏惟以時節宣, 益綏壽祉, 是所深望.
진모에게 답함 答陳謩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4년(계축, 1193, 64세)에 진모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 준 편지는 매우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다만 이른바, 선지(先知), 선각(先覺)에 대하여서는 지금 세상에 절로 그 책임을 질 자가 있으니 나는 그 사람이 못됩니다. 당신이 논한 학문하는 뜻도 매우 훌륭합니다. 다만 이는 평생토록 꾸준히 해나갈 사업이지 순식간에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순서에 따라 강구하여 밝혀서 착실하게 지켜가고, 일상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공간과 단절되지 않게 하고, 이상과 같이 오래도록 노력하면 절로 터득할 것입니다. 돈놀이를 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꾼들처럼 공부의 과정을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辱書甚厚, 但所謂先知先覺, 則今世自有慨然任其責者, 而熹非其人也. 所論爲學之意亦甚善, 顧此乃終身事業, 非可寮於咄嗟指顧之間者. 但當循序講明, 著實持守, 不令日用之間少有間斷. 如是久久, 當自得之. 不當較計功程, 如世之出擧錢商子本者之營營也.
(6-3376) 유조필에게 답함 答劉朝弼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4년(계축, 1193, 64세)에 유조필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 주신 문편(文編)을 받고 보니 나를 인정해 준 뜻이 매우 두터움에 감사합니다. 3일을 두고 읽었으나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서 감히 당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군자가 학문을 함에는 요즈음의 과거 공부하는 학자와 어울려서 하루아침의 공을 다투는 것뿐만이 아니고, 진실로 옛사람이 이른 경지에 이르기를 추구한 뒤라야 그만두며, 그렇게 한 연후에 학문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옛사람이 이른 경지에 이르기를 구한 이후에 그만둔다는 것은 어떤 규정을 지어 엮어가는 것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세속의 평상적인 견해를 초월하여 곧바로 옛사람의 일로 스스로를 기약하여야만 거기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옛사람의 학문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치지(致知)하여 밝히고, 입지(立志)하여 지키며, 정밀하고 깊은 경지에 나아가고, 광명 정대한 것으로 충만하게 하면 비록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급하게 말류(末流)로만 달려가면서 정력을 다 쏟으며 생각을 피곤하게 하여 오직 풍부하게 축적하지 못하는 것과 능숙하게 암송하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게 되면 비록 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유학이 아닙니다. 대개 옛사람의 일을 따르면 위로는 성현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아래로는 성명(性命)을 편안히 하여 가난하거나 곤궁함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때를 얻어 실행함에 있어 무엇이 불리하겠습니까? 그런데 현재 하는 방법대로 하면 그 효과를 극진히 하였다고 하더라도 요즈음의 학자들과 어울려서 하루아침의 공(功)만 다툴 수 있는 정도이지, 그 득실은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보존하는 득실은 학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대가 해야 할 걱정은 분명히 알지 못하고, 뜻이 과감하지 못하며, 아직 강대(剛大)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축적이 풍부하지 못하고, 암송을 능숙하게 못하는 것은 군자가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상과 같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글과 단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承示以文編, 感相與之意甚厚. 讀之三日, 未得其所以然, 故敢布之左右. 熹聞之, 君子之於學, 非特與今之學者並而爭一旦之功也, 固將求至乎古人之所至者而後已, 然後可與語學矣. 夫將求至乎古人之所至者而後已, 則非規橅綴緝之所能就, 其必有以度越世俗庸常之見, 而直以古人之事自期, 然後可得而至也. 夫古人之學何爲哉? 致知以明之, 立志以守之, 造之以精深, 充之以光大, 雖至乎聖人可也. 不出乎此而營營馳騁於末流, 竭精憊思, 惟懼夫蓄藏之不富, 誦說之不工, 雖曰能之, 非吾之所謂學也. 蓋循乎古人之事, 上之可以至聖賢之域, 下之可以安性命而固貧窮, 得時而行, 亦何所不利哉. 由今之所爲, 極其效, 足以與今之爲士者並而爭一旦之功, 其得與失, 又未可知也. 心存得失, 非棄學與? 故足下之患, 患知之不明, 志之不果, 造之未至乎剛大而已. 蓄藏之不富, 誦說之不工, 則君子不患矣. 僕之所聞如此, 故於足下之文, 詞義之間, 不知所以裁, 惟足下有以亮之.
진이강에게 답함 答陳頤剛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4년(계축, 1193, 64세)에 진이강에게 답한 편지이다.
몸이 늙고 의욕도 떨어져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들과 접촉도 끊고 지내느라 일찍이 얼굴도 뵌 적이 없는데 변변찮은 제게 먼저 글을 주셨습니다. 짧은 너비로 장문의 글을 써서 두터운 예의를 갖추시고, 선집(先集)․고문(高文)을 함께 보내주시니, 그 뜻이 더욱 근면하십니다. 그러나 둔하고 재주도 없는 변변찮은 저는 어려서부터 학문은 장구(章句)를 지키고 행동을 삼가는 것이라고 알았고,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여 선인들을 욕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당신의 고상한 지조와 광대한 규모는 제가 평생토록 감히 꿈에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보답할 길이 없으니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선친의 빼어난 사상에는 생기(生氣)가 있는데, 마침 멀리 다녀와야 할 일 생겨 자세하게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두 가지만 보아도 평소에 쌓으신 학문의 깊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서문을 제게 부탁하셨는데,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또 시간의 여유도 없는데, 당신의 살핌을 입었습니다. 훌륭하게 제작한 두 편은 말이 대부분 적절하게 쓰여 구차하게 만든 것이 아니니, 새삼 우러러 감탄합니다. 고을을 통치하는 조목은 더욱 실제 사정에 잘 들어맞습니다. 벼슬하기 위한 학문이 여기에 있으니, 반드시 관리를 스승으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衰懶杜門, 罕接人事, 未嘗得見顔色, 而足下不鄙, 以書先之. 長牋短幅, 爲禮以厚, 而先集高文, 幷以見貺, 則此意又益勤矣. 然區區頑鈍, 自少爲學, 知守章句․謹行止, 冀以獨善其身, 無爲先人羞辱而已. 有如足下志尙之高, 規模之廣, 則非平生夢寐之所敢及也. 無以爲報, 愧恨亡已. 先公胸中之奇, 凜有生氣, 適有遠役, 未及細觀. 然竊窺一二, 亦足以見蘊蓄之不凡矣. 序引見屬, 豈所敢當? 况又不假, 固當蒙見察也. 盛製兩編, 言多適用, 不爲苟作, 三復嘆仰. 所論治郡條目, 尤切事情. 宦學得此, 不必以吏爲師矣.
(6-3378) 요래에게 답함 答姚棶(一云答廬粹中)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4년(계축, 1193, 64세)에 요래에게 답한 편지이다.
학문을 하는 뜻에 대해 언급한 질문을 받고 보니 고상한 뜻이 원대함을 충분히 알 수 있어 매우 위안이 됩니다. 대개 저는 일찍이 사람의 한 몸이 일을 처리하고 사물과 접촉하는 곳마다 의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록 다 알지 못하더라도 그 큰 실마리는 듣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요점은 그 이미 아는 것을 힘써 행하면서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구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가까운 데에서 먼 곳에 이르고, 거친 데에서 정밀한 데로 이르러, 차례차례 순서를 따라가면 나날이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시험 삼아 생각해보고 노력해 주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承問及爲學之意, 足見志尙之遠, 甚慰甚慰. 蓋嘗聞之, 人之一身, 應事接物, 無非義理之所在. 人雖不能盡知, 然其大端宜亦無不聞者. 要在力行其所已知, 而勉求其所未至, 則自近及遠, 由粗至精, 循循有序, 而日有可見之功矣. 幸試思而勉之, 幸甚幸甚!
임질에게 답함 答林質
【해제】이 글은 소희(紹熙) 1년(경술, 1190, 61세)에 임질에게 답한 편지이다.
질문하신 두 조목에서, ‘지성(至誠)’의 설명은 순서를 건너뛰어 갑작스럽게 설명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미 네 선생의 후서(後序)에서 이미 간략하게 언급하였습니다. ‘불위성명(不謂性命)’은 집주에 매우 분명한데, 아마 미처 상세히 고찰하지 못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마땅히 마음과 생각을 여유롭고 바르게 하여 반복해서 생각하면 반드시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혹시 벗들과 그것을 강론하더라도 반드시 그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疑問兩條, 至誠之說, 固難躐等遽論, 熹已於四子後序中已略言之矣. 不謂性命, 集注甚明, 恐未詳考之過. 宜且平心寬意, 反復玩味, 必當自見. 或與朋友講之, 亦必得其說也.
(6-3379) 이호고에게 답함 答李好古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0년(계묘, 1183, 54세)에 이호고에게 답한 편지이다.
지난번에 육산정(陸刪定)을 만나보고 무엇을 들었습니까? 만약에 그 말이 옳다고 여기면 마땅히 그 말을 가지고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뜻을 다하면 아마 얻어짐이 있을 것이니, 굳이 다른 학설을 끌어들여서 그 뜻이 분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마땅히 그 쪽에 나아가 헤아려 보아야지 갑자기 지금까지 받아들였던 것을 버리고 멀리서 구하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 동쪽에 물어 보고 서쪽에서 들으면서 의혹을 일으켜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기만 하며, 공연히 가지와 잎사귀만 키우게 되면 학문의 실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니,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문에는 감히 대답을 않는 것입니다.
向來見陸刪定, 所聞如何? 若以爲然, 當用其言, 專心致志, 庶幾可以有得, 不當復引他說, 以分其志. 若有所疑, 亦當且就此處商量, 不當遽舍所受而遠求也. 東問西聽, 以致煌惑, 徒資口耳, 空長枝葉, 而無益於學問之實, 不願賢者爲之, 是以有問而未敢對也.
범숙응에게 답함 答范叔應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70세)에 범숙응에게 답한 편지이다.
대학 「혈구장(絜矩章)」에서 특별히 재용(財用)을 말하고 계속해서 용인(用人)을 말했습니다. 대개 군주가 혈구(絜矩)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이기심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으니, 그래서 자기의 욕심을 쫓느라 다른 사람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용(財用)을 특별히 말하는 까닭입니다. 인재를 쓰는 것과 버리는 것은 인심의 향배와 가장 관계되니, 만약 공평함으로 사적인 것을 없애고 대중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따른다면, 쓰고 버리는 것은 인심에 합당합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용인(用人)을 말하는 까닭입니다.
絜矩章專言財用, 繼言用人. 蓋人主不能絜矩者, 皆由利心之起, 故徇己欲而不知有人. 此所以專言財用也. 人才用舍最係人心向背, 若能以公滅私, 好惡從衆, 則用舍當於人心矣. 此所以繼言用人也.
(6-3380)서경광에게 답함 答徐景光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70세)에 서경광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주신 복성(復性) 한 편을 두 번 세 번 읽어보니 깨우쳐주는 바가 매우 지극합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이른바 성인은 깨우침을 기다리지 않고도 회복하며, 현명한 이는 그 본성의 회복을 능히 추구한다는 말은 “요임금과 순임금은 본성 그대로 하신 것이고, 탕임금과 무임금은 본성을 회복하셨다”는 맹자의 말과 매우 부합합니다. 또 당신께서 논한 안회의 극기복례(克己復禮) 단락의 뜻 역시 매우 올바르니 탄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인의 본성은 허적(虛寂)하면서 고요하다고 말한 것은 본성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심재(心齋)․좌망(坐忘) 역시 안회의 극기복례의 실질이 아닙니다. 마지막 장에서 논한 마음과 본성의 구별에서, 마음이 본성을 미혹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매우 의심스런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이 형체가 있으면 이 마음이 있고, 마음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을 일러 본성이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의․예․지가 이것입니다.) 본성이 사물과 감응하여 움직이면, 그것을 일러 정이라 합니다. (측은․수오․시비․사양이 이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으니, 성인이나 보통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성인은 기가 맑고 마음이 바르기 때문에 본성이 온전하고 정이 어지럽히지 않을 뿐입니다. 학자는 마땅히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함양하여 그 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성인에게는 이 마음이 없다고 여겨, 마침내는 마음이 잠시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하늘이 나에게 준 것에 어찌하여 유독 이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있겠습니까?
寵示復性一篇, 伏讀再三, 開警甚至. 如所謂聖人不待覺而復, 賢者能求復其性者, 深合乎孟子‘堯舜性之, 湯武反之’之說. 又所論顔子克己復禮一節, 意亦甚正, 歎服亡已. 但所云聖人之性虛寂而靜者, 非所以語性; 所云心齋坐忘者, 亦非所以論顔氏克己復禮之實也. 至於卒章所論心性之別, 以爲心能惑性, 則又可疑之大者. 熹嘗謂有是形則有是心, 而心之所得乎天之理, 則謂之性. (仁․義․禮․智是也.) 性之所感於物而動, 則謂之情. (惻隱․羞惡․是非․辭遜是也.) 是三者, 人皆有之, 不以聖凡爲有無也. 但聖人則氣淸而心正, 故性全而情不亂耳. 學者則當存心以養性, 而節其情也. 今以聖人爲無心, 而遂以爲心不可以須臾有事, 然則天之所以與我者, 何爲而獨有此贅物乎?
(6-3381)오심보에게 답함 答吳深父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70세)에 오심보에게 답한 편지이다.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혹시 의문스러운 것이라도 반드시 불선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선을 보되 분명하지 못한 잘못이며, 이치를 탐구하는데 급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해야 할 것은 실제로 의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도 의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욱 강구하고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示喩日用之間, 或有所疑, 而未必不善者, 此固見善不明之過, 當汲汲於窮理. 然所可懼者, 則恐實有可疑而不知以爲疑耳. 此則尤當講究體察也.
주잠에게 답함 答朱岑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6년(기유, 1189, 70세)에 주잠에게 답한 편지이다.
지난번 고마운 편지를 받고서도 얼른 답장하지 못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이제 다시 편지를 받으니 참으로 저를 잊지 않으신 뜻을 알겠습니다. 예전 편지에서 질문하신 조목은 모두 마땅히 의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것에서부터 차례차례 묻고 탐구하여, 그 첫 번째를 정확히 이해한 뒤에 두 번째 문제로 나아가면 의문이 조금씩 조금씩 풀릴 것입니다. 만약 온갖 어려운 문제들과 의문들을 한꺼번에 마음에 담는다면, 그것들의 어지럽힘 때문에 끝내 깨닫지 못할까 걱정스럽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 당신의 의문점 가운데 한두 조목을 제게 알려주십시오. 제가 아는 바를 당신께 말씀드릴 것이니,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昨辱枉書, 爲報不謹, 方以自愧. 玆被再告, 良荷不忘之意. 前書下問之目, 皆所當疑. 但當自其近者以次詢究, 通其一而後及其二, 則疑之釋也有漸矣. 若衆難羣疑輻輳於胸中, 僕懼其徒爲此擾擾, 而卒無開悟之日也. 不識足下以爲如何也? 如有取焉, 願擧其疑之近者一二條以告熹, 請得以所聞爲足下言之, 而明者擇焉.
손길보에게 답함 答孫吉甫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4년(정미, 1187, 68세)에 손길보에게 답한 편지이다.
덕수가 와서 당신의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비록 아직 뵙지는 못했지만, 현명한 당신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기질이 지나치게 강하여 스스로 이겨낼 수가 없어서 이를 변화시킬 방법을 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그 치우친 것을 알고서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은 나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반성하여 엄격하게 징계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돈이의 통서에 “스스로 그 악한 것을 고치고, 스스로 그 중(中)에 이르렀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어찌 다른 사람이 그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도 학설이 있습니다. 이치에 밝지 못하면서 그 치우친 것만을 구하려고 하면 아마도 굽은 것을 지나치게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도리어 중도를 잃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비록 자수(自修)를 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으나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는 공부도 폐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체(道體)의 완전함을 보아서 그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의 실마리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만나 볼 수 가 없으니 우선 노력하여 주기 바랄 뿐입니다.
德粹之來, 遠辱惠書, 雖未識面, 然足以知賢者之志矣. 所喩氣質過剛, 未能自克, 而欲求其所以轉移變化之道, 夫知其所偏而欲勝之, 在吾日用之間屢省而痛懲之耳. 故周子有 ‘自易其惡, 自至其中’之說, 是豈他人所得而與於其間哉? 然此亦或有說焉, 不明於理而徒欲救其偏, 亦恐矯枉之過而反失夫中也. 故古人之學雖莫急於自修, 而讀書竊學之功有所不廢. 蓋不如是, 無以見夫道體之全而審其是非邪正之端也. 未由相見, 幸且勉力.
왕회지에게 답함 答汪會之
【해제】이 글은 순희(淳熙) 14년(정미, 1187, 68세)에 왕회지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주신 대학은 번거롭게 판각을 맡겨서 미안하고, 발문은 더욱 유의하여 보십시오. 수 많은 성인이 서로 전해온 문호와 경로가 이와 같을 뿐입니다. 예전 시대의 유학자들은 숙독하고 그 의미를 깊이 탐구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학문을 한다는 것이 이것을 벗어날 줄 모른채 암기와 글짓기와 지엽적인 것에 빠졌던 것입니다. 또 고원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노자와 불교에 흘러들어가니, 유학의 도가 밝혀지지 않고 행해지지 않으며, 인재가 감소하고 풍속이 쇠퇴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행스럽게도 대강의 취지를 알았지만, 그 순서에 따라 실제로 노력하면서도 아직 옛사람들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것은 늘 그것을 미루어 동지에게 말하고 인을 보좌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제 왕회지 당신을 얻었으니, 어찌 매우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더욱 깊이 고찰하고 실제로 종사하여 그 순서에 따라 공부해 가면 나날이 효험이 나타나, 그 진보를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所寄大學, 愧煩刊刻, 跋語尤見留意. 千聖相傳, 門戶路徑不過如此. 前世儒者未嘗熟讀而深求其意, 故所以爲學者, 不知出此, 而墮於記誦文詞之末; 其好高者, 又轉而入於老子釋氏之門, 此道之所以不明不行, 而人才少․風俗哀也. 但今雖幸略(6-3383)窺大旨, 然循其序而實用力焉, 亦恨未能到得古人地位. 所以每欲推之以語同志, 而求其輔仁之助. 於今乃得吾會之於中表間, 豈不幸甚! 更願益深考之而實從事焉, 使其次第功程, 日有可見之驗, 則其進步自不能已矣.
호남의 여러 사람들과 중화를 논한 첫 편지 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
【해제】이 글은 건도(乾道) 5년(기축, 1169, 40세)에 쓴 글이다.
중용의 이발(已發)과 미발(未發)에 대한 뜻에 대하여서는 이보다 앞서 그것은 이 마음의 유행하는 본체임을 알았으나 또 정자(程子)가 무릇 “마음이라는 것은 다 이발(已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라고 한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마음을 지목하여 ‘이발(已發)’이라고 하고 성품을 ‘미발(未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자의 글을 보면 부합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하여 마침내 전날에 한 말은 심성(心性)에 대한 명명(命名)이 합당치 않을 뿐만이 아니고 일상생활 속의 공부도 본령도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는데 잘못된 것은 글 뜻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문집과 유서(遺書)의 여러 학설을 고찰하니 모두가 생각이 아직 싹트지 않고 사물이 이르지 않았을 때를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미발(未發)했다고 한 것 같았습니다. 바로 이때가 곧 이 마음의 조용하게 움직이지 않는 본체이자 천명지성(天命之性)으로, 바로 거기에 본체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과불급(過不及)과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으므로 중(中)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감응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하면 희․노․애․락의 본성이 발하니, 마음의 작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고 사리에 어긋남이 없으므로 화(和)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마음의 올바름이며 정성(情性)의 덕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발하기 전에는 찾아볼 수 없고, 이미 지각한 뒤에는 안배(按排)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평소에 씩씩한 마음으로 함양공부를 지극하게 하면 사사로운 인욕(人欲)이 이를 어지럽히지 않아서, 그것이 발하지 않았을 적에는 밝은 거울이나 조용한 물과 같고, 그것이 발했을 때는 절도에 들어맞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생활에서 공부의 본령입니다.
中庸未發已發之義, 前此認得此心流行之體, 又因程子 ‘凡言心者, 皆指已發而言’ 遂目心爲已發, 性爲未發 然觀程子之書 多所不合. 因復思之, 乃知前日之說非惟心性之名命之不當. 而日用功夫 全無本領, 盖所失者不但文義之間而已. 按文集遺書諸說, 似思慮未萌․事物未至之時爲喜怒愛樂之未發. 當此之時, 卽是此心寂然不動之體, 而天命之性本體具焉, 以其無過不及, 不偏不倚, 故謂之中 及其感而遂通天下之故, 則喜怒愛樂之性發焉, 而心之用可見. 以其無不中節, 無所乖戾, 故謂之和 此則人心之正而情性之德然也. 然未發之前, 不可尋覓, 已覺之後, 不容安排. 但平日莊敬涵養之功至, 而無人欲之私以亂之, 則其未發也鏡明水止, 而其發也無不中節矣. 此是日用本領功夫.
그리고 일에 따라 성찰하고 사물에 나아가 미루어 밝히는 것 역시 반드시 장경함양의 공부를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때 그것을 살펴보면, 아직 움직이기 이전에 갖추어진 것을 진실로 묵묵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자가 소계명(蘇季明)에게 답한 글에서 반복해서 논변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고 치밀하였지만, 끝내는 경(敬)이라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 말하기를, “경(敬)을 하여 잘못됨이 없으면 곧 중(中)이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도에 들어가는 데에는 경(敬)만한 것이 없으며, 치지(致知)하면서 경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함양하려면 모름지기 경(敬)하여야 하고, 학문의 진보는 치지에 달려있다”고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강론하고 사색하면서, 곧바로 마음을 이발(已發)로 여기고 일상생활 속의 공부도 다만 실마리를 살펴서 아는 것[察識端倪]을 가지고 최초에 착수하는 곳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함양하는 한 부분의 공부가 빠져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속이 안정되지 못하게 하고 마침내 깊이 있고 차분하며 순수한 맛이 없게 하였으며, 그 말과 행동에도 항상 급박하고 경박하여 조용하고 깊이 있는 풍모가 없습니다. 대개 소견이 한 번 어긋나면 그 해(害)가 마침내 여기에 이르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자(程子)의 이른바 “무릇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했는데, 이것은 곧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무릇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이른 것은 그 설명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스스로 그것을 온당치 않게 여겨 다시 바로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 이미 고친 말에 집착하여 다른 학설이 전부 잘못되었다고 의심하여도 옳지 않으며, 또 마침내 온당치 않다고 하여 그 가리킨 내용이 같지 않은 것까지 연구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至於隨事省察, 卽物推(6-3384)明, 亦必以是爲本. 而於已發之際觀之, 則其具於未發之前者, 固可黙識. 故程子之答蘇季明, 反復論辨, 極於詳密, 而卒之不過以敬爲言. 又曰: ‘敬而無失卽所以中’, 又曰: ‘入道莫如敬, 未有致知而不在敬者’, 又曰: ‘涵養須是敬, 進學則在致知’, 蓋爲此也. 向來講論思索, 直以心爲已發, 而日用功夫, 亦止以察識端倪爲最初下手處, 以故闕却平日涵養一段功夫, 使人胸中擾擾, 無深潛純一之味, 而其發之言語事爲之間, 亦常急迫浮露, 無復雍容深厚之風. 蓋所見一差, 其害乃至於此, 不可以不審也. 程子所謂 ‘凡言心者, 皆指已發而言’, 此乃指赤子之心而言. 而謂凡言心者, 則其爲說之誤, 故又自以爲未當, 而復正之. 固不可以執其己改之言, 而盡疑諸說之誤, 又不可遂以爲未當, 而不究其所指之殊也. 不審諸君子以爲如何?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학문을 함에 존심(存心)과 격물(格物)의 두 길이 있음은 진실로 당신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에 따라 나아가는 것은 역시 하나일 뿐입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격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을 보존시키는 것은 이를 잡아 묶어 두고서 질곡(桎梏)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안정되지 아니하여 밖으로 달려갈 적에 한 생각을 하는 순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되면 곧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보존하려는 생각을 잊지도 말고 그렇다고 자라는 것을 인위적(人爲的)으로 도우려고 하지도 말아서 털끝만큼도 거기에 인위적인 지혜와 힘을 더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제대로 보존이 될 것입니다.
爲學兩途, 誠如所喩. 然循其序而進之, 亦一而已矣. 心有不存, 物何可格? (6-3385)然所謂存心者, 非拘執係縛而加桎梏焉也. 蓋嘗於紛擾外馳之際, 一念之間一有覺焉, 則卽此而在矣. 勿忘勿助長, 不加一毫智力於其間, 則是心也其庶幾乎.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맹자의) “인(仁)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합하여 말하면 도(道)이다.”
이 장은 ‘인(仁)’이라는 글자와 ‘도(道)’라는 글자의 이름을 해석했습니다.
(맹자의) “군자는 활을 당기고 쏘지 않으나, 약여(躍如)하다.”
활을 당기고 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단서를 조금씩 열어가지만 그 학설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한 것을 말합니다. 약여(躍如)는 사물이 눈앞에 확 드러난 것처럼 의리가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仁者人也, 合而言之道也.
此章解釋 ‘仁’ 字 ‘道’ 字之所以名.
君子引而不發, 躍如也.
引而不發, 謂漸啓其端而不竟其說. 躍如, 謂義理昭著, 如有物躍然於心目之間.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一云與余正甫)
【해제】미상. 이 편지는 권45, 「요자회에게 답하는 (첫 번째) 편지」에 나온다.
두 선생께서 ‘경(敬)’자를 논하신 것은 모름지기 동정(動靜)을 다 관통하여 보아야만 됩니다. 대저 바야흐로 그 일이 없을 때 간직하고 주재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경(敬)입니다. 사물에 응하여 서로 작용하면서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도 또한 경입니다. 그래서 예기에 “경하지 않음이 없고, 장엄하게 생각하듯 한다”고 했고, 또 “일할 때는 경을 생각하고”, “일을 집행할 때는 경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어찌 꼭 마음을 잡고 좌선하는 것만을 경이라 이르겠습니까? 예(禮)와 악(樂)은 본디 반드시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인데, 이른바 악은 물론 가슴속에 아무런 얽매인 일이 없어 저절로 화락(和樂)한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지, 마음을 먹고서 길을 하나 열어서 화락(和樂)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슴속에 아무런 얽매인 일이 없으려고 하면 경(敬)이 아니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은 자연스럽게 화락하는 것이다”고 했고, 주돈이 선생 또한 예가 먼저이고 악이 나중이라고 여겼으니, 이러한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자득(自得)한 뒤에 모름지기 놓아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다만 지키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것은 다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자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과 이치가 회통하여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고 저절로 절도에 맞게 됩니다. 만약 이와 같지 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득한 바가 없이 겨우 예법이나 지키는 사람일 따름이니, 자득했다거나 또 모름지기 도리어 놓아버려야 한다고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극기복례는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자(顔子)가 노력한 것은 바로 보는 것․듣는 것․말하는 것․움직이는 것과 예(禮)와 비례(非禮)의 사이에 있었으므로, 이것은 그 본심(本心)을 얻어서 전혀 한 가지 일도 없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을 먼저하고 이익은 나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말하기는 매우 쉽지만, 애써 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또한 여기서 고찰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二先生所論‘敬’字, 須該貫動靜看. 方其無事而存主不懈者, 固敬也. 及其(6-3386)酬酢不亂者, 亦敬也. 故曰‘毋不敬, 儼若思’, 又曰 ‘事思敬’, ‘執事敬’, 豈必以攝心坐禪而謂之敬哉? 禮樂固必相須, 然所謂樂者, 亦不過謂胸中無事而自和樂耳, 非是著意放開一路, 而欲其和樂也. 然欲胸中無事, 非敬不能. 故程子曰 ‘敬則自然和樂’, 而周子亦以爲 ‘禮先而樂後’, 此可見也. ‘則自得後須放開, 不然却只是守’, 此言旣自得之, 則自然心與理會, 不爲禮法所拘而自中節. 若未能如此, 則是末有所得, 纔方是守法之人爾. 亦非謂旣自得之, 又却須放開也. 克己復禮固非易事, 然顔子用力, 乃在於視聽言動禮與非禮之間, 未敢便道得其本心而了無一事也. 此其所以先難而後獲難. 今言之甚易而苦其行之之難, 亦不考諸此而已矣.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이 아래로 모두 10통의 편지가 있다. 원래 제목은 「어떤 사람에게 답함」인데, 어떤 사람은 그 사이에 「유공도에게 답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自此已下共十書, 元題答或人, 一云其間是答劉公度)
【해제】미상.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하신 의의(疑義)는 오래도록 인편이 없어 답장을 드리지 못했는데, 이제 함께 드립니다. 혹시 제 견해에 문제가 있으면 통렬하게 분석하여 가려 주십시오. 대학 등의 책은 근래 다시 교정 간행하였는데, 책의 체제가 옛날 것과 달라졌는데, 기록하여 보낼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유감입니다. 예전에 상서를 읽었지만, 난해하여 끝내 완전히 깨치지 못한 것이 괴롭습니다. 상서 주소(注疏)와 정(程)․장(張)의 설 이외에 소(蘇)씨說의 설도 괜찮지만, 순수하지 못한 문제점이있습니다. 임소영(林少穎)의 상서 「소고(召誥)」는 이미 옛날에도 상세했습니다. 신안에 사는 오재로(吳材老)에게 비전(裨傳)이 있는데 상당히 괜찮다고 들었는데,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시험 삼아 함께 살펴보십시오. 여러 학설이 비록 천박하기는 하지만 전혀 도움이 없지는 않으니, 잘 살펴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들이 너무 많아 번거롭고 귀찮다고 하여 아무렇게나 내쳐서는 안 됩니다.
대체로 글을 읽는 것은 먼저 마음을 비워두고 그 문사(文詞)에서 가리킨 뜻의 취지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그 다음에 해당하는 의리가 있는 곳을 탐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의 학자들을 보면 대다수가 자기의 의견을 먼저 세워 놓고 경문(經文)에서 지향하는 방향의 추세는 묻지도 않으며 멋대로 자기식의 의리를 덧붙이는데 이는 그 말이 비록 이치에는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경문의 본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다만 자기의 견해에 의거하여 스스로 책을 하나 만들면 되는 것이지 굳이 옛 성현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글을 읽는 목적은 바로 내가 본 것이 반드시 옳지 못할까하여 거기에서 올바름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만 그 빠진 글과 없어진 간책(簡策)이라던가 기물(器物)에 따른 명색(名色)으로서 고찰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겠으나 그밖에 유추하여 알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반드시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반복하여 자세히 검토해야지 대충대충 넘겨서는 안 됩니다.
昨來所示疑義, 久無便可奉報, 今幷納還. 鄙說或恐未安, 不惜痛加辨析也. 大學等書近復刊訂, 體製比舊亦已不同, 恨未有人可錄寄耳. 尙書頃嘗讀之, 苦其(6-3387)難而不能竟也. 注疏程․張之外, 蘇氏說亦有可觀, 但終是不純粹. 林少穎說召誥已前亦詳備. 聞新安有吳材老裨傳, 頗有發明, 却未曾見, 試幷考之. 諸家雖或淺近, 要亦不無小補, 但在詳擇之耳. 不可以篇帙浩瀚而遽憚其煩也. 大抵讀書先且虛心考其文詞指意所歸, 然後可以要其義理之所在. 近見學者多是先立己見, 不問經文向背之勢, 而橫以義理加之. 其說離不悖理, 然非經文本意也. 如此則但據己見自爲一書亦可, 何必讀古聖賢之書哉? 所以讀書, 政恐吾之所見未必是而求正於彼耳. 惟其闕文斷簡, 名器物色有不可考者, 則無可奈何. 其他在義理中可推而得者, 切須字字句句反復消詳, 不可草草說過也.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지난 번 편지에서 논한 것은 잘 읽어 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과연 이치에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우(師友)에게 들은 것이 그러하고 성현의 말씀에서 징험한 것도 그러하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그것이 편하여져서 감히 스스로 이를 버리고 풍속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의 논의와 문장은 대체로 충후(忠厚)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자신에게 돌이켜 스스로 구하면 스스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쓰여지지 않는 것만 걱정하며, 그 다음을 생각하려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제사(題詞)와 발문(跋文)은 마음을 더욱 간곡하게 쓴 것이어서 그 내용을 미루어 가면 온 세상의 풍속을 착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이 탄복하며 다시 더 보탤 말이 없습니다.
前書妄論, 想荷不鄙. 然亦未知果中理否. 但所聞於師友者如此, 驗之聖賢之言又如此, 竊獨安之, 不敢自棄, 以徇流俗耳. 執事議論文章多出於忠厚之意, 反(6-3388)身自求, 宜有以自樂者. 乃獨以無名爲患, 不得試爲憂, 而欲思其次者, 何耶? 題跋用意尤懇惻, 推此足以善一世之俗矣. 歎服之深, 不容復措詞也.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대학과 중용은 도가 다르지 않고, 그로부터 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깊고 얕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순서에 따라 나아가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니, 지금 꼭 그것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맹자 「진심」에 대한 설명은 저의 사서혹문에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 있으니, 그 순서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책을 읽을 때에는 구절 속에서 대의를 찾아야 하니, 이제 각각의 곳마다 그 뜻이 분명해지면, 이것저것의 깊고 얕음이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제 본문 각 구절의 문장의 뜻을 탐구하지도 않고서 이것저것을 참고하는 것은 많은 힘을 쓰면서도 쉽게 합치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분명하게 이해하고 반복하여 새기는 것이 공부의 요체이며, 깊고 얕음에 대한 분석은 학문의 급무가 아닙니다.)
大學中庸無異道, 而所自立者有淺深. 但循序以進, 其義自見, 今未須縣料也. 孟子盡心之說, 熹於大學或問中嘗略言之, 其序可見. 大抵讀書且求句中大意, 今逐處各自分明, 卽彼此深淺自然可見. 今未及各求本處文義, 便於彼此參考, 所以費力多而未易合也. (見得分明, 反復涵泳, 此是要切功夫, 淺深之辨, 本非學之急務也.)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혹인: 사(謝)․유(游)․양(楊)․윤(尹)․후(侯)․곽(郭)․장(張)은 모두 문인입니다.
답변: 정 선생 문하의 뛰어난 제자들은 이 몇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유질부(劉質夫)․이단백(李端伯)․여여숙(呂與叔)과 같은 여러 분들이 나아간 경지는 더욱 깊고, 이룬 바는 더욱 빼어납니다.
혹인: 사단(四端)과 오전(五典)은 궁리(窮理)의 근본[本]입니다.
답변: 아마도 ‘사단을 밝히고 오전을 살피는 것이 궁리의 요체[要]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체로 이것을 다하고서 추론하여 그 나머지 것들에 미치는 것이 근본[本]이며, 어떤 한 가지 일이 가지고 있는 처음과 끝의 이름입니다. 이를 이해하고 차례차례로 나머지 것들로 미루어 가는 것은 요체[要]이니, 여러 가지 일들에 있는 완급의 명칭입니다. 이렇게 추론하면, 서른 가지 조목의 득실을 대략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인: 어떤 사람은 인(仁)을 각(覺)이나 공(公)으로 해석합니다.
답변: 이 두 가지 해석은 정선생이 이미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혹인: 감전(藍田) 지방의 여시강(呂侍講).
답변: 여(呂)씨는 마지막에 정자(正字) 벼슬을 지냈고, 강관(講官)을 지낸 적이 없습니다.
혹인: 장무구(張無垢).
답변: 이 책은 매우 심하게 불교를 물리치고 있지만, 인용하고 있는 말을 가지고 호(號)로 삼으니, 이는 끝내 온당치 못합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 공(公)들의 칭호는 마땅히 일정한 법식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태산(泰山)․해릉(海陵)․조래(徂徠)․염계(濂溪)․명도(明道)․이천(伊川)․횡거(橫渠)․강절(康節)은 선생이라 칭하고, (예를 들면 태산泰山 손선생孫先生이라 칭하는 것과 같다.) 공경公卿은 시호謚를 칭하고, (예를 들면 왕문정공王文正公이라 하는 것이다.) 시호가 없으면 작위爵를 칭하고, (예를 들면 왕형공王荊公이라 부르는 것이다.) 작위가 없으면 관직官을 칭하고, (예를 들면 범태사范太史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程․장張의 문인들과 근세의 선배들 역시 그와 같습니다. 관직이 없는 사람은 자字를 칭하거나, (예를 들면 장은숙張恩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혹은 호號를 함께 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상채上蔡․귀산龜山․형록衡麓․횡포橫浦와 같은 종류이다.) 지금 사람들은 군郡․성명姓名을 칭한다. (예를 들면 동래東萊 여아무개呂某라고 부르는 것이다.) 간사한 이들은 곧장 성명을 쓴다. (예를 들면 장돈章惇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혹인: 측은(惻隱)한 때를 당하여 그 인(仁)을 체득합니다.
답변: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한 것은 다만 사람이 그 마음을 확충하면 인의예지를 이루 다 쓸 수 없게 되는 것이지 그러한 때를 당하였을 적에 따로 한 생각을 일으켜 그 어떤 물건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무구(無垢)의 그 말은 오히려 선학(禪學)과 같은 생각으로, 단지 이러한 정령(精靈)을 상상하여 체인(體認)하려 할 뿐 실제로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한편으로는 확충하고 한편으로 체인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의 마음을 둘로 쓰는 것이니 아마도 번거롭고 어지러움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을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한 듯합니다. 또 “한쪽을 확실하게 통찰하면 네 곳이 탁 트인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선학(禪學)의 생각입니다. 이는 바로 앞장에서 비평한 초학자가 등급을 뛰어 넘으려는 병폐에 해당하는 것이니 더욱 증거로 인용할 수는 없습니다.
謝․游․楊․尹․侯․郭․張, 皆門人也.
(6-3389)程門高第不止此數人, 如劉質夫․李端伯․呂與叔諸公, 所造尤深, 所得尤粹.
四端五典者, 窮理之本.
恐當云明四端․察五典者, 窮理之要. 大凡盡此而可以推及其餘者, 本也, 一事而有首尾之名也. 了此而可以次及其餘者, 要也, 衆事而有緩急之名也. 以此推之, 則三十條者之得失略可見矣.
或以仁訓覺訓公者.
此二訓程子已嘗明其不然, 恐不必更著於此.
藍田呂侍講
呂終於正字, 未嘗作講官.
張無垢
此書深闢釋氏, 而所引之言以此爲號, 終不穩當, 請更詳之. 又諸公稱號, 合立一條例差等, 如泰山․海陵․徂徠․濂溪․明道․伊川․橫渠․康節稱先生, (如云泰山孫先生.) 公卿稱謚, (如云王文正公.) 無謚稱爵, (如云王荊公.) 無爵稱官. (如云范太史.) 程․張門人及近世前輩亦如之. 其無官者稱字, (如云張恩叔.) 或兼以號擧, (如上蔡․龜山․衡麓․橫浦之類.) 今人稱郡姓名, (如東萊呂某.) 凡姦邪則直書姓名. (如云章惇)
(6-3390)當惻隱時體其仁.
孟子論四端, 只欲人擴而充之, 則仁․義․禮․智不可勝用, 不言當此之時別起一念, 以體其爲何物也. 無垢此言猶是憚學意思, 只要想象認得此箇精靈, 而不求之踐履之實. 若曰一面充擴, 一面體認, 則是一心而兩用之, 亦不勝其煩且擾矣. 疑此不足引以爲證. 又云一處通透, 四處廓然, 此亦殫學意思, 正前章所譏初學躐等之病, 尤不當引以爲證也.
혹인: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답변: 마땅히 “然世本豈得而出哉.’
혹인: 격물하여 궁리하고, 선인들의 언행을 많이 알아서 선택하며, 도를 깨친 사람에게 나아가 바로잡으며, 마음으로 돌아가 거주한다.
답변: 많이 알아서 선택하는 것은 곧 격물하는 것이니, 격물과 다식(多識)을 나누어 두 가지 일로 삼는 것은 부당합니다. 도리어 격물을 먼저 하고 다식을 뒤에 해야 합니다. 격물과 취정(就正)은 모두 마음이 하는 것이니, 다시 마음으로 돌아간 뒤를 기다려 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 역시 상상하는 것일 뿐이니,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그와 같이 거주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학문하는 순서를 논하자면, 중용에서 말하는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독행(篤行)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선생께서 “이 다섯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학문이 아니”라 했고, 여대림의 해석이 매우 자세한데, 그 말이 모두 참되고 신실해서 깊은 맛이 있습니다.
혹인: “천행(天行)을 살피고” … “순리(循理)를 즐긴다.”
답변: 이치를 궁리하는 것은 사물의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을 알고자 할 뿐입니다. 그 소이연을 앎으로써 뜻이 미혹되지 않고 소당연을 앎으로써 행동이 어긋나지 않는 것이지, 저쪽의 이치를 가져다가 이쪽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이르는 게 아닙니다. 정자(程子)가 “만물과 나는 이치가 하나이므로 저쪽 것을 밝히면 즉시 이쪽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 굳이 상대를 관찰하여 자신을 헤아린다”고 말할 것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이미 이러한 병폐를 설파한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에게 돌아오도록 굴린다고 한 것은 그 조리도 없고 간격을 생기게 하는 병폐가 더욱 심합니다.
復何言哉
當云 ‘然世本豈得而出哉.’
格物以窮之, 多識前言往行以擇之, 就有道以正之, 歸諸心以居之.
多識而擇之, 乃所以格物, 不當分格物․多識爲二事, 而反以格物爲先, 多識爲後也. 格物就正, 固皆心之所爲, 不待更歸諸心而後可居也. 且歸諸心者, 亦想象之而已矣, 未見其踐履之實, 亦若之何而能居乎? 竊恐此語不能無病. 若論爲學之序, 則中庸所謂博學․蕃問․愼思․明辨․篤行者盡之. 故程子以爲五者廢其一則非學, 而藍田呂氏解釋甚詳, 其語皆慤實而有味也.
‘察於天行’ 止 ‘樂循理也’
(6-3391)窮理者, 欲知事物之所以然與其所當然者而已. 知其所以然, 故志不惑; 知其所當然, 故行不謬. 非謂取彼之理而歸諸此也. 程子所謂物我一理, 纔明彼卽曉此, 不必言顴物而反諸身者, 蓋已說破此病. 况又加所謂宛轉者焉, 則其支離間隔之病益已甚矣.
혹인: 여대림은 “성(誠)은 리가 실제로 그러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답변: 성(誠)이란 말하자면 실(實)입니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사용할 때는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으니,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여대림의 이 설명 같은 경우는 바로 주돈이가 말하는 “성이란 성인의 근본이다”는 것이니, 대체로 실리(實理)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돈이의 “성인은 성(誠)일 뿐이다”는 바로 중용에서 말하는 “천하의 지성(至誠)”이란 것이니, 사람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이 리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광이 말하는 성은 대학에서 말하는 성의(誠意)라는 것이니,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참되게 하여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편지에서 말하는 ‘성’자의 경우는 인용하는 것이 한결 같지 않아 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니, 그것들을 조금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혹인: 여시강(呂侍講)의 과욕(寡欲)에 관한 논의.
답변: 이는 곧 여원명(呂原明) 시강(侍講)입니다.
혹인: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곧 또 확충하여 크게 하는 것입니다.
답변: 자신을 수양하여 사람을 편안히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은 대개 그것[경敬]이 축적될수록 그 효과는 더욱 넓어질 뿐입니다. 넓어진다[廣]는 것은 확충하여 크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혹인: 치용(致用)은 경전을 공부하는 근본입니다.
답변: 정선생께서 “경전을 공부하는 건 장차 실제 삶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다”고 하셨으니, 그 본말과 선후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제 치용(致用)을 경전을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실제 생활에서의 쓰임을 추구하는 것이 경전을 궁구하는 근본이다’고 한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혹인: 자기를 미루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이 치도(治道)의 근본이고, 서(恕)는 사람을 대하는 근본입니다.
답변: 자기를 미루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이 바로 이른바 서(恕)입니다. 이 두 조목은 중복될 뿐만 아니라 따로 ‘서’자를 따로 두는 것은 아마도 임시방편의 병통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혹인: 정명도 선생은 집안에 ‘신독(愼獨)’ 두 글자를 걸어두었습니다.
답변: 옛 현인들은 실리(實理)에 의거하여 사람을 가르쳤으니, 처음부터 문정(門庭)을 세우려는 뜻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독(愼獨)은 참으로 마음을 다잡고 보존하는 요체이지만, 명도선생의 교육에 본말이 있으니, 단지 이 두 글자만은 아닙니다.
혹인: 세(勢)를 잘 살피는 것은 천하를 평정하는 근본입니다.
답변: 이 말은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래에도 이와 같은 말들이 많습니다. 단지 ‘징원(澄源)․절용(節用)․입지(立志)․수정(守正)’ 네 구절만이 가장 온전할 뿐입니다.
혹인: 인정을 따른다.
답변: 인정이 모두 바를 순 없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대덕(大德)으로 다스렸지 작은 은혜로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한즉 진실로 반드시 모두 인정에 따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인심을 따른다고 말하면, 기상이 조금 정당할 것입니다. 정전(井田)과 육형(肉刑) 두 가지 일은 모두 얽힌 사연이 있으니, 아마도 갑작스럽게 시비를 가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인: 양심을 아는 것이 악을 없애는 근본입니다.
답변: 이 단락의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봉건의 설과 정전(井田)․육형(肉刑)은 같은 종류이니, 모두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 됩니다.
혹인: 상과 벌은 군사를 행하는 근본입니다. 또 군대의 도는 정직을 귀하게 여깁니다.
답변: 이 두 마디 말은 도치된 것 같습니다.
혹인: 홍의(弘毅)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는 근본이다.
답변: 증자의 설에 따르자면, 홍(弘)은 무거운 책임을 위주로 하고, 의(毅)는 먼 곳에 이르는 것을 위주로 한 것입니다.
혹인: 이천선생이 수령(守令)에 대해 논하고, 소강절은 신법을 논했습니다.
답변: 이 두 가지 일은 위아래 글의 뜻과 맥락이 다른 것 같습니다.
혹인: 원사(原思)가 (공자의) 가신이 되었다.
답변: 형록(衡麓)의 설은 그 문장의 의미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혹인: 그칠 데를 안다(知止).
답변: 아래의 글에서 자세히 인용한 부분에서부터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낭패를 당한다’까지는 힘을 헤아리는 일입니다. 이천(伊川)과 원성(元城) 그리고 주역의 세 구절은 멀리 내다보고 사전에 예방하는 일이며, 진희이(陳希夷) 이하는 지지(知止)하는 일입니다. 지금처럼 대충 지지(知止)로 지목하는 것은 미진한 것 같습니다.
혹인: 윤돈의 논어록 (운운).
답변: 이 말은 통론이 아닌 듯합니다. 공자 문하에서는 가르치면서 전적으로 춘추만 믿고 곧장 논어를 폐해버린 적이 없습니다.
혹자: 도의 큰 근본.
답변: 정선생께서 미발(未發)의 중(中)과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못함도 없음(無過不及)의 중(中)이 같지 않음에 대해 논하였으니, 마땅히 다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혹자: 여(呂)씨와 양(楊)씨의 ‘중(中)’자에 대한 설.
답변: 이 두 설은 온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자: 東學溫公語常不及變
답변: 이 말은 매우 좋기는 하지만 끝내 지키기는 어려울 듯하니, 차라리 논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혹자: 학자는 이발처(已發處)에서의 공부에 힘써야 하며, 이는 심력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답변: 정선생님은 미발하기 전의 존양(存養)은 괜찮지만, 미발하기 전에 중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미발하기 전에는 진실로 평소의 존양하는 공부가 있으니, 꼭 이발을 기다렸다가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呂氏謂誠者理之實然.
誠之爲言實也, 然經傳用之, 各有所指, 不可一槪論也. 如呂氏此說, 卽周子所謂 ‘誠者聖人之本’, 蓋指實理而言之者也. 如周子所謂 ‘聖誠而已矣’, 卽中庸所謂天下至誠者, 指人之實有此理者而言也. 溫公所謂誠, 卽大學所謂誠其意者, 指人之實其心而不自欺者言也. 此條 ‘誠’ 字援引不一, 使學者不能曉, 當稍分別之.
呂侍講論寡欲
此乃呂原明待講.
安人安百姓, 則又擴而大之也.
修己而安人, 以安百姓, 蓋其積愈盛而其效益廣爾. 廣非有擴而大之之意也.
致用者窮經之本.
(6-3392)程子曰: ‘窮經將以致用也’, 則其本末先後固有在矣. 今以致用爲窮經之本, 恐未安也. 若曰 ‘求實用者窮經之本’, 其庶幾乎.
推己及人者治道之本, 恕者待人之本.
推己及人, 卽所謂恕. 此兩條不惟重複, 而別出 ‘恕’ 字, 恐有流於姑息之病.
程明道立門庭以 ‘愼獨’ 兩字.
前賢據實理以敎人, 初無立門庭之意. 愼獨固操存之要, 然明道敎人本末具備, 亦非獨此二字而已.
審勢者平天下之本.
此語未安, 下文亦多此類. 唯 ‘澄源․節用․立志․守正’ 四語爲最穩耳.
順人情
人情不能皆正, 故古人治世以大德不以小惠, 然則固有不必皆順之人情者. 若曰順人心, 則氣象差正當耳. 井田肉刑二事儘有曲折, 恐亦未可遽以爲非.
知良心者去惡之本.
此段意思未安. 封建之說與井田肉刑相類, 皆未易輕論也.
賞罰者行師之本, 又曰師之道, 又貴乎以正耳.
(6-3393)此二語似倒置.
弘毅者任重之本.
據曾子說, 弘主任重, 毅主致遠.
伊川論守令云云, 康節論新法.
此二事恐不類上下文意.
原思爲宰
衡麓之說, 其文義恐未安.
知止
詳下文所引云云至 ‘物我俱敗矣’ 是量力之事, 伊川元城及易三節是防微慮遠之事, 陳希夷以下乃爲知止之事. 今槪以知止目之, 恐未盡也.
和靖論語錄(云云)
此語恐非通論. 孔門之敎, 未嘗專恃春秋而直廢論語也.
道之大本
程子論未發之中, 與無過不及之中不同, 恐更當詳考.
呂氏楊氏 ‘中’ 字之說
(6-3394)此二說恐有未安處.
東學溫公語常不及變
此諸甚佳, 然終恐難持, 不若不論之爲愈.
學者於已發處用工, 此却不枉費心力.
程子言存養於未發之前則可, 求中於未發之前則不可, 然則未發之前, 固有平日存養之功矣, 不必須待已發然後用工也.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예전 현인의 경전에 대한 주석이 번잡하여 도리어 경전의 뜻에 밝지 못한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그 근원은 깊고 미치는 영향은 멀리 가며 기상이 차분한 것은 사실상 성현의 은미한 뜻과 은연중 부합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주석 작업은 비록 간결하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도리어 기상은 천박하며 정밀하게 탐구하지 못하고 익숙하게 함양하지 못하여 말과 구절 사이가 거칠어서 이치에 통하지 않는 곳이 많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윤돈이 일찍이 경문(經文)은 비록 암송을 하여 전하지만 강해(講解) 때문에 수준이 낮아지기도 한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이 매우 의미 있는 말입니다. 근래에야 바야흐로 그러한 의미를 알았습니다. 만약에 죽기 전에 다시 몇 년의 시간 여유를 얻게 된다면, 마땅히 한가롭고 고요함 속에서 다시금 그것들을 도태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안으로의 함양과 밖으로의 도태가 모두 진보되어서 평소의 사우(師友)에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다만 그런 날이 다시 없을까 걱정입니다. 양시의 논리는 함축에 뜻을 두었으나 다하지 못한 것 같으며, 마침내 가차(假借)와 기탁(寄託)하는 말을 많이 하여 사람의 마음을 자못 불쾌하게 합니다. 성현의 말씀은 본래 사람들이 쉽게 깨닫도록 한 것이지만, 그 중에는 저절로 함축된 바가 있습니다.
前賢之說雖或煩冗, 反晦經旨, 然其遠深流遠, 氣象從容, 實與聖賢微意泯然黙契. 今雖務爲簡潔, 然細觀之, 覺得却有淺迫氣象. 而玩索未精, 涵養不熟, 言句之間, 粗率而礙理處却多有之. 尹和靖嘗言, 經雖以誦說而傳, 亦以講解而陋, 此言深有味也. 近方見此意思, 若更得數年閑放未死, 當更於閑靜中陶汰之, 庶幾內(6-3395)外俱進, 不負平日師友之訓. 但恐無復此日耳. 龜山立言, 却似有意於含蓄而不盡, 遂多假借寄託之語, 殊不快人意. 聖賢之言, 則本是欲人易曉, 而其中自然有含蓄耳.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예전 편지에서 논하신 인의예지에 대해서는 따로 무슨 말을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큰 틀은 오늘날 인의예지라는 네 글자의 이름과 훈고(訓詁)를 알아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설명은 지나치게 고원한 것 같아 도리어 적당하지 않습니다. 다시 이정유서에서 논한 ‘효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 및 ‘인(仁)은 본성이고, 효제는 쓰임이다’이라는 곳과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일러 인이라고 한다’, 또 ‘비유하자면, 마음은 곡식의 종자와 같다’고 답한 설명을 검토하여 보십시오. 이 세 단락을 살펴보고, 다시 이전 성현들의 말씀을 참고하면 의문이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측은이 (나머지 수오, 사양, 시비의) 셋을 관통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난번 하형(何兄)도 매우 의심스러워하면서도 끝내 풀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니, 다시 맹자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장 및 이정외서 가운데 정호선생이 사량좌에게 ‘외물에 정신이 팔려 본심을 잃어버린다[玩物喪志]’고 말한 설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절로 분명해질 것입니다. ‘야기(夜氣)’장에 대한 당신의 말씀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작년에 순지(順之)에게 답장한 편지가 있는데, 이 편지를 참고하면 의심난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논한 것은 착실하거나 원만하지 못한 점이 많으며 또 때로는 순수하지 못한 구절과 기이한 말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니 더욱 온당하지 못합니다. 이는 아마도 글을 많이 보지 못한데다가 또 평이한 곳은 대충 보고 넘어가버리고 어렵고 고차원적인 곳만을 골라 보기 때문에 그 힘을 쓰면 쓸수록 설명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시험 삼아 다시 생각하고 보아주면 좋겠습니다.
前書所論仁義禮智, 不記別有何語. 然其大槪, 今且是要識此四字之名件訓詁而已. 如所示說, 似太高遠, 反不的當也. 更檢遺書論孝弟爲仁之本及 ‘仁性也, 孝弟用也’ 處及 ‘博愛之謂仁’, 又答心如穀種之說, 但看此三段, 更以前聖賢之言參之, 則自見無所疑. 惻隱不能貫三者, 向見何兄亦深以爲疑, 竟不能決. 此不難曉, 更熟看孟子不忍人之心一章, 及外書中明道說謝子玩物喪志之說, 則亦自分明矣. 夜氣一章, 所示尤未安. 去年曾答順之, 此可就取看, 有疑處却喩及. 大抵所論多未著實, 不周匝, 又時爲險句奇語軒輊於其間, 尤覺不穩當. 似是看文字少, 又忽略了平易處, 而專揀艱難高遠底看, 故其用力愈勞而爲說愈雜. 可試更思之, 復以見示, 幸幸.
보내주신 편지의 많은 불만스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따로 갖추어 썼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자세하게 궁구하여 그 의미를 침잠하면 저절로 잘 정리될 것이니, 이처럼 이상야릇하게 절룩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所示多所未安, 別紙具報. 幸更平心詳緩細繹, 令意味浹洽, 自然安頓穩帖, 不如此踸踔奇險也.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이와 같은 것이 병이니 곧 이와 같지 않는 것이 약이다. 만약 다시 어떻게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이는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것으로 한바탕의 실없는 말이 될 뿐입니다. 성경은 진실로 궁리하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줄곧 이와 같이 억지스럽게 앞부분만 이야기하다가 도리어 바로 지금 해야 할 공부를 지나쳐버릴까 걱정됩니다.
知得如此是病, 卽便不如此是藥. 若更問何由得如此, 則是騎驢覓驢, 只成一場閑說話矣. 誠敬固非窮理不能, 然一向如此牽連說過前頭, 却恐蹉過脚下工夫也.
박문약례(博文約禮)에 대해, 학문의 초기에는 모름지기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하고 그 각각에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하면 공부의 효과가 나타나는데, 박문과 약례가 도리어 서로를 보조하여 마침내 하나로 융합됩니다. 若合下便要兩相倚靠, 互相推託, 則彼此擔閣, 都不成次第矣. 然所謂博, 非泛然廣覽雜記, 掇拾異聞, 以讀多取勝之謂, 此又不可不知.
博文約禮, 學者之初, 須作兩般理會而各盡其力, 則久之見得功效, 却能交相爲助而打成一片. 若合下便要兩相倚靠, 互相推託, 則彼此擔閣, 都不成次第矣. 然所謂博, 非泛然廣覽雜記, 掇拾異聞, 以讀多取勝之謂, 此又不可不知.
(상서에서) ‘임금은 현자가 아니면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은 군주는 현명한 신하에게 맡긴 뒤에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음을 말하고, ‘현자는 임금이 아니면 먹지 못한다’는 것은 군주는 마땅히 현명한 신하를 양성하는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종(高宗)의 본래 뜻이 이러한데 질문하는 이가 그것이 병폐가 되지 않을까 의심한 것은 참으로 자세히 살피지 못한 때문인데, 답하는 사람 역시 어느 누구도 이러한 뜻을 설파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惟后非賢不乂’, 言人君必任賢而後可以致治也; ‘惟賢非后不食’, 言人君當任養賢之責也. 高宗本意如此, 問者疑其成病, 固察之不詳, 而答者亦無一人說破此意, 何耶?
근사록은 본래 학자들이 여러 선생의 책을 골고루 볼 수 가 없기 때문에 그 요긴하고 절실한 것들을 엮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조금씩 도에 접근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만약에 이미 보고서 푹 젖게 통달하였으면 스스로 마땅히 유추하여 그 넓은 세계를 두루 통하게 하면 될 것이고, 만약 익숙하게 보지 못하였다면 그 몇 권의 책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겨를에 전면(前面)에 실려 있는 글을 모두 구하여 다 보려고 하십니까? 又云少輟功夫, 取而詳味, 不知是輟何功夫? 此語尤不可曉.
近思錄本爲學者不能徧觀諸先生之書, 故掇其要切者, 使有入道之漸. 若已看(6-3397)得浹洽通曉, 自當推類旁通, 以致其博. 若看得未熟, 只此數卷之書尙不能曉會, 何暇盡求頭邊所載之書而悉觀之乎? 又云少輟功夫, 取而詳味, 不知是輟何功夫? 此語尤不可曉.
무후는 의리와 이로움의 큰 구분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이는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또한 타고난 자질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부분입니다. 만약 그 세세한 부분에 관한 것이라면, 무후도 미쳐 살피지 못한 곳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 학문이 아직 충분하지 못한 때문이겠습니까? 그가 독서할 때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정독과 숙독에 힘쓰는데 자기만 홀로 대지大旨를 파악하니, 그 큰 것其大이란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독과 숙독에 힘쓰지 않았으니 어찌 빠진 부분이 없겠습니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맹자․안연이라도 이러한 결점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재선생은 “孟子之於聖人, 猶是粗者”라고 했습니다.
義利之大分, 武侯知之, 有非他人所及者, 亦其天資有過人處. 若其細微之間, 則不能無未察處. 豈其學有未足故耶? 觀其讀書之時, 他人務爲精熟, 而己則獨觀大旨, 此其大者固非人所及, 而不務精熟, 亦登得無缺闕耶? 若極言之, 則以孟子․顔子亦未免有如此處. 故橫渠先生云, 孟子之於聖人, 猶是粗者.
성인에 뜻을 두면서도 표준을 세우는 것을 꺼리는 사람은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하되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순하여 그치지 않아 저절로 이르는 바가 있는 사람은 ‘마음에 잊지도 말며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생각하건대 어려운 것은 남보다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뒤에 하는 것이 이러한 부류일 것입니다.
以聖爲志而忌立標凖者, 必有事焉而勿正也. 循循不已而自有所至者, 心勿忘勿助長也. 先難後獲, 意亦類此.
학자가 강론하고 사색하여 사물의 이치와 성현의 사상을 구하려면 당연히 그 폭넓게 탐구해야 합니다. 만약에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없어지는 마음을 논한다면, 다만 이 아주 작은 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천리와 인욕의 죽느냐 사느냐하는 것처럼 구분이 되는 것이니, 이는 지극히 간략하므로 굳이 비교해야 헤아려 보는 등 허다하게 앞뒤를 생각하고 계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질문을 한 것이 절로 병통이 있는데 답을 하는 자도 능히 한 칼로 딱 잘라서 가르지를 못하여 말이 많을수록 도와는 더욱 멀어지고 있습니다.
學者講論思索, 以求事物義理․聖賢指意, 則當極其博. 若論操存舍亡之間, 則只此毫釐之間, 便是天理人欲․死生存亡之分, 至簡至約, 無許多比並較量․思前算後也. 今問頭自有病痛, 答者又不能一剪剪斷, 頁下剖判, 言愈多而道愈遠矣.
질문한 사람의 이른바 사려변(思慮邊)․의리상(義理上)이란 역시 일을 마땅하게 처리하는 까닭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엄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숙은 그가 잘못 말하지 않았을까 의심했고, 황간 역시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問者所謂思慮邊․義理上者, 亦曰思所以處事之宜耳. 但其語不莊, 故正叔疑其誤, 而直卿亦似未得其語意也.
정(程)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동정(動靜)은 음양의 근본이지만, 하물며 다섯 기운이 서로 뒤섞여 교류 운행하면 더욱 가지런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형체를 부여받은 것과 같은 경우, 잡다하게 뒤섞인 사람이나 사물은 많고 순정하고 한결같은 사람이나 사물은 드뭅니다. 이로써 볼 때, 양은 하나요 음은 둘 운운한 것 역시 아직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치는 순수하고 지선하지만, 기는 잡다하게 뒤섞여 가지런하지 못합니다. 내면은 군자요 외면은 소인이니, 무릇 음을 억누르고 양을 떠받드는 까닭은 이치에 순응하여 서로 도와 이루어 기수(氣數)의 부족한 부분을 구제하려는 것이니,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程子曰, 動靜者陰陽之本, 况五氣交運, 則益參差不齊矣. 賦形之類, 宜其雜揉者衆, 而精一者間或値焉. 以此觀之, 則陽一陰二之云, 恐亦未可以爲非也. 蓋理則純粹至善, 而氣則雜揉不齊. 內君子, 外小人, 凡所以抑陰而扶陽者, 乃順乎理以裁成輔相而濟夫氣數之不及者也, 又何病乎?
향원(鄕原)은 일종의 염치도 부족하고 부지런한 체 하며 세속적인 것을 추종하는 사람이니, 지금 이러저러하게 하는 말은 그 본래 뜻이 아닙니다. 또 가슴속이 밝고 상쾌하며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는 실제로 매우 노력한 사람이니, 그의 설이 비록 좋다 하더라도 실제로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유가 없이 아주 급하게 하려는 병폐와 교만하고 인색한 사사로움은 또한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또 말씀하신 습속의 견해와 불교의 선에 빠진 사람이 문을 걸어 잠그고 홀로 선하려는 것은 괜찮지만, 이것 역시 옳은 것은 아니니,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鄕原是一種小廉曲謹․阿世狥俗之人, 今曰(云云), 非其義也. 又云胸懷明爽, 一日千里者, 此爲實曾用力之人, 與他說雖善而未必實有功夫者不同. 然其迫切之病, 驕吝之私, 亦非他人所及也. 又有謂墮於習俗之見․釋氏之善者, 杜門獨善則可, 此亦非是, 更思之.
선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평일의 공부에 의한 것이고 마음을 강하게 쓰는 것은 일에 임하는 결단력이니 두 가지는 다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나 마땅히 평일의 공부를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강한 것이 지나치게 광망(狂妄)스럽거나 충격스러운 행동이 안 된다는 보장이 없을 것입니다.
見善明是平日功夫, 用心剛是臨事決斷, 二者皆不可闕, 而當以平日功夫爲先. 不然, 則其所謂剛者, 未必不爲狂妄激發過中之行矣.
(6-3399) 유공도에게 답함 答劉公度
【해제】미상.
보내 온 편지에 호상(湖湘)에서 졸업을 하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도에 뜻을 둔 것이 돈독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팔아먹기 위한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까하여 입학 신청을 늦추었다는 것은 너무 용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명예를 구한다고 하더라고 나는 학문만을 강마하면 그들이 어떻게 나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공자 제자 3천 명이 어찌 다 확실하게 도를 구하기 위하여 왔겠습니까? 만약에 스스로 찾아가는 것을 혐의쩍게 여긴다면 안회나 증자 같은 이들도 공자의 제자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니, 그대의 생각은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경(敬)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한 당신의 말은 진실로 학자에게 절실한 일입니다. 그러나 역시 학문을 강구하고 이치를 궁리하는 공부를 하려면, 세상의 도리를 낱낱이 분명하게 알아야만 바야흐로 그렇게 힘을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성현의 말씀을 소홀이 하여 일찍이 한 구절과 한 글자를 자세하게 이해하지 아니하여 도리를 전연 분명하게 보지 못한 상태라면 어떻게 어거지로 경(敬)을 위주로 하는 공부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마치 새벽녘에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경을 다하여 이치의 소재를 구한다 하더라도 아마도 수고롭기만 하고 도움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옛사람의 학문은 황급하게 쫓기는 때에도 그 마음을 버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새벽녘에만 구하려고 하니, 그 밖의 시간에는 무슨 일을 한단 말입니까? 당신이 논한 주돈이의 견해에 관한 부분 역시 옳지 않는 듯합니다. 주돈이의 소견은 바로 이단과 같지 않는 것이니, 때문에 견해와 가르침이 모두 이와 같이 현실과 들어맞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논한 바와 같다면 곧 소견이 불교와 같게 됩니다. 그러나 유학은 공적이지만 불교는 사적이며, 유학은 위대하지만 불교는 사소한 것입니다. 이미 공과 사, 대와 소의 차이가 있는데, 그 같은 것이란 또 무슨 일입니까. 이는 모두 안이하게 논할 것들이 아닌 듯합니다. 요컨대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겸손하게 하고 또 글을 읽거나 학문을 강구할 때 자세하게 하는 데에 힘을 써서 오래 되면 저절로 이해되는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의리는 세밀한 것이므로, 차분하지 않은 마음으로서는 제대로 볼 수가 없으며 언뜻 보면 지극히 복잡한 것 같지만, 오래 되어 익숙해지고 관통하면 마치 벼리 줄을 들면 그물눈이 펼쳐지는 것처럼 자연 힘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당신이 일을 논한 문자가 강령이 매우 분명하지 않은 것을 보았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변통이 여기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참람하게 함부로 언급한 것이니 천만 번 이해해주십시오.
來書深以不得卒業於湖湘爲恨, 此見志道之篤. 然往者以衒鬻之嫌而緩於請益, 亦太不勇矣. 彼自干名, 我自講學, 彼亦安能浼我耶? 三千之徒, 豈皆確然爲道而來? 若以自附爲嫌, 則顔曾之流亦且不屑於孔氏之門矣, 豈不誤哉! 所論主敬之說, 固學者之切務. 然此亦要得講學窮理之功, 見得世間道理歷歷分明, 方肯如此著力. 若於聖賢之言有所忽略, 不曾逐句逐字子細理曾, 見得道理都未分明, 却如何捺生硬做得成? 如所謂齊心致敬於平旦之頃, 以求理之所在者, 亦恐徒勞而無補也. 古人之學, 欲其造次顚沛之不離. 今乃獨求之平旦之頃, 則其他時節是勾當甚事耶? 所論濂溪見處, 亦恐未然. 濂溪所見, 正爲與異端不同, 故立言垂敎句句著實如此. 若如所論, 卽是所見一般, 但此公而彼私, 此大而彼小耳. 且旣有公私大小之不同, 則其所同者又何事耶? 凡此皆恐未易遽論, 要當降心遜志, 且就讀書講學上子細用功, 久之自有見處也. 義理細密, 直是使粗心看不得. 乍看極似繁碎, 久之純熟貫通, 則綱擧目張, 有自然省力處. 向見論事文字, 綱領不甚分明, (6-3400)今乃知其病之在此也. 儧易及之, 千萬照亮.
호안국의 춘추호전(春秋胡傳)을 자세하게 보셨습니까? 의리는 논하려고 들지 말고 우선 그 문자를 보게 되면 곧 그 늙은이의 가슴속에 짜여진 규모가 소략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황간은 뜻이 굳고 생각이 깊어서 함께 있으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이 도는 작은 일이 아니므로 모름지기 힘들여 노력을 하여야 바야흐로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胡文定春秋曾熟看否? 未論義理, 且看其文字, 亦便見此老胸中間架規(木+無)不草草也. 直卿志堅思苦, 與之處甚有益. 此道不是小事, 須喫些辛苦, 方可望也.
어떤 사람에게 답함 答或人
【해제】미상.
학문하는 차례를 말씀하신 것은 매우 기대에 위로가 됩니다. 과연 그것만 충족시키면 성현의 문호(門戶)에 참으로 책려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의 학자들은 대다수가 외부로 달려가기 때문에 이 마음의 오묘함이 모든 일의 근본임을 모르고, 또 그것을 아는 사람은 다만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고서 꾸짖으며 바로 이것이 양심이고 본성은 착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서, 도리어 만약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이를 실천하며 강구하여 체험하지 않으면 그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는 것이 곧 사의(私意)이고 인욕임을 도리어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감이 돈독할수록 그 광망(狂妄)함은 더욱 심하니, 이 점을 깊이 살펴서 멀리 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示喩爲學次第, 甚慰所望. 果能充此, 聖賢門戶眞可策而進矣. 近世學者多是向外走作, 不知此心之妙是爲萬事根本. 其知之者, 又只是撑眉努眼, 喝罵將去, 便謂只此便是良心本性無有不善. 却不知道若不操存踐履, 講究體驗, 則只此撑眉努眼便是私意人欲, 自信愈篤, 則其狂妄愈甚, 此不可不深察而遠避之也.
(6-3401)答或人
【해제】미상.
어진 사람은 하늘과 하나가 되고,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의 명령을 듣습니다. 하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의 선을 아름답게 여기고 사람의 악을 불쌍히 여겨 이해관계로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치에 따라 행동하고 때에 맞게 움직여 감히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에 능히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각각 한 가지 일로 말한 것이니, 오직 어진 사람만이 이와 같을 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이와 같을 수 있을 뿐이지, 단지 일의 크고 작음만 가지고 어짊과 지혜로움을 구분하고 낙천(樂天)과 외천(畏天)을 구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진 사람은 진실로 작은 것을 섬길 수 있지만, 어찌 큰 것을 섬기지 못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참으로 큰 것을 섬기지만, 어찌 작은 것이라고 섬기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그 섬김의 정황에는 낙천과 외천의 차이가 있습니다. 천하를 보위하고 한 나라를 보위하는 것은, 그 덕의 두텁과 얇음과 도량의 크고 작음으로 말하자면, 역시 하나의 정해진 제한은 없습니다.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이에 보전하니, 이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을 두려워하여 천하의 일을 보위합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사사로움을 잊고 자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외천(畏天)의 일입니다. 낙천이라면, 잊어야 할 사사로움도 없고, 극복해야 할 나도 없습니다. 추세를 헤아리고 힘을 계산하는 것은 곧 이해관계를 따지는 사사로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천리의 당연함을 알고 그것을 공경하고 순응하니, 하늘을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仁者與天爲一, 智者聽天所命. 與天爲一者, 嘉人之善, 矜人之惡, 無所擇於利害, 故能以大事小. 聽天所命者, 循理而行, 順時而動, 不敢用其私心, 故能以小事大. 然此亦各因一事而言, 惟仁者能如此, 智者能如此耳, 非專以事大事小爲仁智之分․樂天畏天之別也. 仁者固能事小, 然豈不能事大? 智者固能事大, 然豈不能事小? 但其事之情, 則有樂天畏天之異耳. 保天下․保一國, 以其德之厚薄․量之大小而言, 亦無一定之拘. 畏天之威, 于時保之, 此智者畏天而保天下之事也. 所云忘私克己, 乃畏天之事, 樂天則無私之可忘, 無己之可克矣. 度勢量力, 乃計利害之私. 智者知天理之當然而敬以循之, 所以爲畏天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