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90

황성 2025. 8. 12.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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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친구 제자들과의 문답) 書知舊門人問答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해제이 글은 1190(소희 원년, 경술, 61)에 장흡(張洽)에게 답하는 첫 번째 편지로 추정된다.

 

보내신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고 학문에 나아가는 뜻이 게으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글을 읽으면서 가장 꺼려야 할 것은 많이 읽으려는 것입니다. 적게 읽어야만 쉽사리 정밀하고 익숙해지는 것이니, 학문을 하면서 힘을 얻을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맹자󰡕에서) “(오곡이 좋다고 하나) 진실로 영글지 않으면 피만도 못하다고 한 것은 빈 말이 아닙니다. 󰡔대학󰡕 등의 책은 요즘 개정한 곳이 많은데 써 보낼 겨를이 없습니다. 󰡔논어󰡕․󰡔맹자󰡕 같은 책들은 아직 정돈도 못했는데 지나치게 빨리 세상에 내놓은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이곳의 일이 많지는 않지만 하루 종일 어지럽기만 해서 문자를 볼 겨를이 조금밖에 없으니 세월이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통서(通書)󰡕의 태극(太極)에 대한 뜻은 다시 마음을 비우고 익숙하게 음미해야 저의 말이 한 글자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설령 염계(濂溪) 선생이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빙그레 웃으실 것입니다.

細讀來書, 知進學之意不倦, 甚慰. 讀書切忌貪多, 唯少則易以精熟, 而學問得力處正在於此. 苟爲不熟, 不如稊稗, 非虛語也. 大學等書近多改定處, 未暇錄寄. 亦有未及整頓者, 兩書, 甚恨其出之早也. 此間事雖不多, 然亦終日擾擾, 少得暇看文字, 甚覺歲月之可惜也. 通書太極之旨更宜虛心熟玩, 乃見鄙說一字不可易處. 政使濂溪復生, 亦必莞爾而笑也.

 

만약 논한 바와 같다면 이른바 ()”은 별도로 4자의 밖에 서로 상관없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니 옳겠습니까? 안연이 성인의 뜻을 다 드러낸 것은 아마도 하나의 일로써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인의 온전한 체의 큰 쓰임이 안연의 신상에서 하나하나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무엇을 차마 못하겠는가라는 말 또한 반드시 이 말과 같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곳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는데, 당시에 두 가지로 설명한 것은 모두 우연이 아닐 것이니, 다시 상세히 완미해 보아야 합니다. 󰡔서경󰡕 「무성(武成)편의 글은 일찍이 그것을 따르지 않는 터라, 능히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춘추󰡕의 설은 더욱 궁구하지 못한바 이러한 유() 또한 일종의 공부이니, 알지 못한 즉 또한 비워 두어도 좋은 것입니다. 역수의 설은 가까운(물음에 답이 될만한)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일없을 때 가서 읽으면 물어 온 의심난 것들이 이미 다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칠경(七經)󰡕은 지난번에 초기에 완성한 판본을 보았는데, 나중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 또한 유공(劉公: 劉敞)의 젊었을 적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또 분량이 많아서 정밀하지 못한 때문일까요? 중간에 시에 관한 설명은 더욱 허술합니다.

若如所論, 則所謂靜者別在四者之外而不相管矣, 而可乎? 顔子所以發聖人之蘊, 恐不可以一事言. 蓋聖人全體大用無不一一於顔子身上發見也. ‘孰不可忍亦不必如此說, 此等處有兩說, 當時存之, 皆不偶然, 更宜詳玩也. 武成文字不曾帶來, 不能盡記. 春秋之說尤所未究, 此類又是一種功夫, 未曉卽且闕之可也. 數之說, 近有一書, 謾往讀之, 來問所疑已悉具其中矣. 七經向見其初成之本, 後未得也. 計此亦是劉公少時作, 不然, 則亦以其多而不能精故耶? 其間說尤草草也.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해제이 글은 1190(소희 원년, 경술, 61) 연말 혹은 그 이듬해에 장흡(張洽)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말씀하신 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한 뜻은 진실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니 비록 사우(師友)를 가까이 할 수는 없더라도 스스로 공정(工程)을 만들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묵묵히 연구하여 가슴속이 확 트이게 하여서 도리를 보는데 전혀 의심이나 장애가 없게 되어야 실천하는 공부에 대해서 진보(進步)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시간만 한가하게 보낸다면 진실로 애석합니다. 보여 주신 여러 말씀들은 도리(道理)로 가는 길목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비록 이미 각각 그 뒤에 주석은 달랐지만 그렇게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큰 보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집에 이름을 붙인 뜻이 매우 좋기는 합니다만 착실하게 공부를 해야지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비록 크게 해될 것은 없지만 곧 마음씀이 얕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만약 실제로 공부를 타당하게 한다면 자연히 급하지 않은 그런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게 될 것입니다.

示喩欲來未能之意, 此固無可如何. 但日月侵尋, 縱不得親師友, 亦須自作工程, 潛思黙究, 今胸中明徹, 見得道理都無疑礙, 方是於踐履功夫有進步處. 若只如此悠悠閑過了, 誠可惜耳. 所示諸說, 似未尋着縫罅. 雖已各注其後, 然只如此講學, 恐末有深益也. 名濟之意甚善, 然着實用功, 不在如此安立標榜處. 雖亦未有大害, 然亦便見用心淺處. 若實做得功夫是當, 自無暇及此等不急之務也.

 

󰡔대학󰡕은 최근에 이미 간행했는데, 지금 1권을 부칩니다. 비록 아직 정본은 아니라 하더라도 구본 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임장(臨漳)에서 󰡔사자(四子)󰡕․󰡔사경(四經)󰡕을 각각 1권씩 보내왔는데, 그 뒤에 각각 발문한 말을 두어, 그것을 읽는 방법을 볼 수 있으니, 청컨대 상세하게 살펴보십시오. 물은 바의 수는 비록 학문을 강론하는 데 급한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또 역시 용()의 뜻이 정밀하지 못함을 볼 수 있으니, 장차 다시 미루어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스스로 하나의 요점(중요한 출입처)을 깨달아 결단코 모름지기 스스로 믿을 수 있는 곳에 미친다면 바로 이천이나 횡거의 설이 어떠한가를 반드시 물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앞 사람의 설명이 이미 분명했다면 이 책은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설명한 것들이 너무 간략하여 부득이 한 까닭에 지었습니다. 공의부(孔毅夫)의 잡설은 베껴 쓴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 원본을 지금 돌려보냅니다. 내용 가운데 많은 부분이 강린기(江隣幾)󰡔가우잡지(嘉祐雜志)󰡕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大學近已刊行, 今附去一本. 雖未是定本, 然亦稍勝於舊也. 臨漳四子四經各往一本, 其後各有跋語, 可見讀之之法, 請詳之. 所問, 雖非講學所急, 然亦見用意未精, 且更推事爲佳. 若如此自見得一門戶, 決額自信得及, 正正不必問伊氏橫渠說如何也. 若前人說已分明, 則此書不作矣. 正爲說者太支離, 不說者又太簡略, 所以不得已而作. 孔氏雜說寫了多時, 今附還. 其間多是抄出江鄰幾嘉祐雜志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말씀하신 학문하는 뜻은 그다지 확고하거나 전일(專一)하지 못한 것 같으니, 다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과거 시험이 멀지 않았으니, 공부를 나누어 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고 안하고는 진실로 명()에 달린 것이니 만약 믿지도 못하고 놓아 버리지도 못하더라도 우선은 이 글자를 눈앞에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설사 온전하게 힘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약간은 줄일 수 있어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신,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君子)가 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감군(甘君)의 거처에서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말을 보았는데, 영형(令兄)의 뜻은 또한 매우 훌륭합니다. 형제가 저마다 박문약례(博文約禮)하고 있으니, 참다운 맛을 느끼시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감군의 문장 실력은 상당히 능숙하지만 취향은 바르지 못합니다. 며칠 동안 입 아프게 일러 주기는 했으나 용감하게 결단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示喩爲學之意, 似覺末甚果決專一, 更宜麴力. 科場不遠, 想不免分了功夫. 然此等得失眞實有命, 若信未及, 放不下, 亦須且將此字頓在面前, 政使未全得力, 亦可減得些小分數, 不爲無助. 夫子所謂不知命無以爲君子, 正謂此也. 甘君處見送行語, 令兄意亦甚佳, 兄弟自爲博約, 想有味也. 甘君詞筆頗工而趣向未正, 數日苦口告之, 未知能勇決否耳.

 

깨우쳐주신 󰡔󰡕의 수()에 대한 말씀은 대개 그럴싸합니다. 다만 역수(易數)는 자연스러운 법칙의 상징들이니, 깊이 완미하고 사색하면 저절로 확실함을 볼 것입니다. 처음 보기에는 마치 사람이 안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능히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에 3을 얻었다, 한 번에 ‘2’를 얻었다는 말에서 한 번[]’이란 한번 설시(揲蓍)하여 기수(奇數: 홀수, 3)와 우수(偶數: 짝수, 2)를 얻는 것을 말하지, 하나의 효()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한번 설시(揲蓍)해서 기수 ‘3’을 얻는 까닭에, 기수인 ‘3’이 세 번 모이면 ‘9’가 되어, 바야흐로 (變爻) 노양(老陽)의 효()를 얻게 됩니다. 한번 설시해서 우수 ‘2’를 얻는 까닭에, ‘2’가 세 번 모이면 ‘6’이 되어, 바야흐로 (變爻) 노음(老陰)의 효를 얻게 됩니다. 우수 ‘2’가 두 번, 기수 ‘3’이 한 번 모이면, 이내 (不變爻) 소양(少陽) ‘7’이 되고, 기수 ‘3’이 두 번 우수 ‘2’가 한 번 모이면, 이내 (不變爻) 소음(少陰) ‘8’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역수(易數)는 매우 분명하니, 다만 살펴봄이 자세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所喩數大槪近之, 但此等自然法象, 深玩索之, 自見端的. 初見似人安排, 而實非人所能安排也. 以一爲三, 以一爲二, 所謂一者, 謂一擛所得之奇偶, 末是一爻也. 一奇爲三, 故三奇爲九, 方得老陽之爻. 一偶爲二, 故三偶爲六, 方得老陰之爻. 兩偶一奇, 乃爲少陽之七, 兩奇一偶, 乃爲少陰之八. 此數甚明, 但看得不子細耳.

 

감군이 돌아가면 다시 더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인재(人才)란 얻기 어려운 것인데, 그렇게 평생을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합니다.

甘君, 可更切磋之. 人材難得, 可惜只如此汨沒了一生也.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신, 67) 봄에 장흡(張洽)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형양(衡陽)의 부고(訃告)는 이미 들으셨겠지요? 매우 상심이 됩니다. 그러나 요로(要路)에서 공격하는 일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지금은 비록 그렇지만 또한 다시 관직을 추탈(追奪)하고 금고(禁錮)하는 일이 생겨 당대의 선한 사람들이 차례로 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우리들이 한가하게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점이 매우 두려우니 그대가 팽자수(彭子壽)에게 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衡陽之訃想已聞之, 深足傷歎. 然當路攻擊意殊未巳, 今雖如此, 亦恐更有追削禁錮之類, 而一時善類次第皆不可保. 吾輩閑中講學, 固爲美事, 然亦恐有不可測者. 此方深以爲懼, 而賢者乃以勸彭丈, 何也?

 

저는 다행히 사록(祠祿)을 얻었으니, 조금 편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요사이 학자들과 강론할 때 횡거(橫渠)의 암송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 의리(義理)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막론하고 우선 이 마음을 거두어 돌아갈 곳이 있게 하여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전일(專一)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한 권의 책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무르익게 읽어서 암기하는 것보다 흥기되지 않음이 없게 된 다음에 다른 책으로 바꾸어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차례로 되풀이하여 읽으며 생각만 하고 정밀하게 복습하지 않으면 공부하는데 헛되이 시간을 소비하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다 완전하게 이해한 뒤에 또 이렇게 복습해야 좋습니다.

聿已得祠, 差可自安. 近與學者謠論, 尤覺橫渠成誦之說最爲徑捷. 蓋未論看得義理如何, 且是收得此心有歸著處, 不至走作. 然亦須是專一精硏, 使一書通透爛熟, 都無記不起處, 方可別換一書, 乃爲有益. 若但輪流通念而覈之不精, 則亦未免枉費工夫也. 須是都通透後, 又却如此溫習, 乃爲佳耳.

 

말씀하신 것처럼 󰡔이천역전(伊川易傳)󰡕에는 매우 기억하고 이해하기 힘든 곳이 있습니다. 󰡔주역󰡕의 경문(經文)이 가진 뜻은 본래 이어지고 평이한데[貫平], 지금의 󰡔이천역전󰡕은 너무 자세하고 복잡하니 (󰡔주역󰡕 경문의) 본 뜻이 아닙니다. 그 까닭에 단지 경문을 거론하면 곧 󰡔이천역전󰡕에서 말하는 것이 이끌려 나오지도 않고, (의미가) 꿰뚫려 통하지도 못하니, 반드시 󰡔주역󰡕의 바깥에 별도의 생각을 만들어서 읽어야만 그 심오한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항상 중요한 항목마다 발췌해서 따로 한 책을 만들려 했지만 겨를이 없었습니다. 글을 읽어 의리를 구하려면 간략하게 볼지언정 자세하게 보지 않으며, 대강대강 볼지언정 세밀하게 보지 말아야, 비로소 남은 곳이 있게 됩니다.(자세하게 보기 때문에 자잘해지고, 세밀하게 보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구양희손, 엄시형, 그리고 담군(譚君)은 근래 보는 것이 또 어떻습니까? 다시 이 말로 서로 권면하기를 바랍니다. 다만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는 경문(經文)과 주석을 전체적으로 기억하여 하나로 꿰어 몸에 푹 적게 해야만 이치를 탐색할 만한 곳이 있을 것이니,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범범하게 여러 학설을 보면서 한갓 시간만 버린다면 절대로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所說易傳極有難記當處, 蓋經之文意本自寬平, 今傳却太詳密, 便非本意, 所以只擧經文, 則傳之所言提挈不起, 貫穿不來, 須是於之外別作一意思讀之, 方得其極. 尋常每欲將緊要處逐項抄出, 別爲一書而未暇. 大抵讀書求義, 寧略毋詳, 寧疎毋密, 始有餘地也.(詳故碎, 密故拘.) 譚君近來看得又如何? 更望以此相勉, 但於所讀之書經文注脚記得首尾, 通貫浹洽, 方有可玩繹處. 如其不然, 泛觀雜論, 徒費日月, 決無所益也.

 

신법(新法)에 대해 논하신 것은, 대개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개보(介甫: 王安石)가 이른바 세속을 눌렀다는 것은, 또한 먼저 그러한 뜻을 세워서 여러 현자들을 억눌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치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넓게 마음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이른 것일 뿐입니다. 만일 명도선생과 당시의 여러 현자들이 함께 근원을 지향하면서 그와 함께 의논하고, 그의 마음이 분명하게 의리를 파악하도록 했더라면 수많은 욕심과 객기(客氣)도 저절로 드러나지 못하게 되어, 그의 잘못을 고치지 못할까 걱정하지도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당시 여러 현자들이 그와 함께 무슨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대우하면서도, 그가 이기고자 했더 세속의 사람들 역시 모두 선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살피지 못했으니, 또한 세상의 공론이 될 수 없었고 저절로 한 쪽에 치우친 주장에 빠졌던 것입니다. 지난 번 조승상(趙丞相)이 편집해 놓은 상소문들의 논의를 살펴보니, 신법에 대한 논의가 몇 권이나 되어서, 그 말들이 많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그 병폐의 근원을 알고서 핵심적인 폐단을 지적한 것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것은 왕안석이 세속의 근거 없는 말이라고 여겨 고려할 필요도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의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희조(僖祖)를 조묘에 옮기는 일에 대해서는, 당시에 발언이 조정에 가득해서, 많게는 수천 자나 되었지만, 가히 개보와 더불어 시비를 논쟁하기에 적당한 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 사람들은 단지 개보(介父)가 말한 것만 보면 곧 잘못이라고 하고, 개보를 배척하는 글을 보면 곧 옳다고 여깁니다. 이 때문에 한갓 다투며 따지기만 할 뿐 세상의 의논을 하나로 귀결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장황해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쉽게 궁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所論新法, 大槪亦是如此. 介甫所謂勝流俗者, 亦非先立此意以壓諸賢, 只是見理不明, 用心不廣, 故至於此. 若得明道先生與一時諸賢向源頭與之商量, 令其胸中見得義理分明, 許多人欲客氣自無處著, 亦不患其不改矣. 若便以不可與有爲待之, 而不察其所欲勝之流俗亦眞有未盡善處, 則亦非所以爲天下之公, 而自陷於一偏之說矣. 頃見趙丞相所編諸公奏議, 論新法者自有數卷, 其言雖不爲不多, 然眞能識其病根而中其要害者殊少, 無惑乎彼之以爲流俗之浮言而不足恤也. 至如桃廟一事, 當時發言盈庭, 多者累數千字, 而無一言可以的當與介父爭是非者. 但今人只見介父所言, 便以爲非; 介父, 便以爲是, 所以徒爲競辨, 而不能使天下之論卒定於一也. 此說甚長, 非面論未易究.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해제이 글의 저술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앞 편지의 연대와 편집의 순서를 고려하면 1196(경원 2, 병신, 67) 봄 이후에 장흡(張洽)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논하신 것 중에, ‘()’()’ 두 글자에 대한 견해는 매우 정밀하지만 또한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도를 잇는 것이 선()이다라고 한 것은 조화(造化)가 유행하여 만물(萬物)이 그것에 힘입어 시작되지만 실상은 없는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성이다고 한 것은 만물의 생성이 이미 실상이 있어서 조화와 만물이 저마다 그 쓰임을 감추고 있지만 작용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만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이 통()이고,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 복()이니, 이것을 가지고 추론해 본다면 도상(圖象)에 함축된 숨겨진 뜻은 말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묵묵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덕(원형리정)은 음양이 각기 두 개로서 성()이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찌 오행의 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이것을 다시 반복하여 생각해본다면 마땅히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來書所論 通復二字甚密, 然亦有未切處. ‘繼之者善云者, 造化流行, 萬物方資以始而未實也. ‘成之者性云者, 物生巳實, 造化與物各藏其用而無所爲也. 在人則感物而動者通也, 寂然不動者復也. 以此推之, 圖象隱然, 不待多言而自可黙喩矣. 四德則陰陽各二, 而誠無不貫, 安得不謂五行之性乎? 凡此更反復之, 當自見也.

 

태백(太伯)의 일은 정도(正道), 문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무왕(武王)의 일은 권도(權道)입니다. 권도(權道)이면서도 그 바름을 잃지 않는다면 병행한다 하여도 어그러짐은 없을 것입니다. 이 뜻은 성인이라도 모두 말하기 어려우니, 만약 보아도 명백하지 않다면 잠시 놓아두어야지, 깊이 의심할 필요도 없으며 번다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종묘에 관한 논의는 그럴 듯 하나 정미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손이 조상에 대해 은혜가 비록 무궁하다하나 의리(義理)에는 한계가 있으니 지나쳐서도 안되며, 부족해서도 안될 것이니, 역시 병행하여야 어긋짐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주나라를 들어 말한다면 후직(后稷)을 폐출(廢黜)하고 문무(文武)를 종묘의 시조로 삼으려 한다면 진실로 세속의 천박한 논의가 될 것이요, 만약 마침내 후직(后稷) 보다 거슬러 올라가 제곡(帝嚳)을 시조로 삼으려 하여 무궁(無窮)에까지 이르게 한다면 또한 현자의 지나친 실책일 것입니다.

太伯之事, 正也; 太王王委之事, 權也. 權而不矢其正, 則並行而不相悖矣. 此義聖人蓋難言之, 若看未透, 且姑置之, 不必深致疑, 亦不必多爲說也. 廟議看得似亦未精. 子孫之於祖考, 恩雖無窮而義則有止, 不可過, 不可不及, 亦並行而不悖. 且以而言之, 欲使之黜后稷而祖文武, 固世俗淺薄之論; 若遂欲使之越后稷而祖帝嚳以至於無窮, 又賢者過之之矢也.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해제이 글은 1197(경원 3, 정사, 68)에 장흡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와 도()에 짝한다고 한 것에 대한 말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글을 읽는 것은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생각하여 문장의 뜻에 의거해서 구절의 중요한 곳을 찾아 이 글귀가 가리키는 뜻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본 뒤에 대략 지금 사람들의 말을 채용해서 한두 글자를 츤첩(襯帖)도 하고 체환(替換)도 하여 옛사람의 뜻을 말하되 먼저 자신의 마음에서 분명하게 갈피가 잡히도록 하여, 마치 옛사람과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것처럼 하며 서로 대답하는 것이 한 마디 말이나 한 글자도 서로 인정하지 않음이 없게 해야 하고, 이밖에는 전혀 쓸데없는 말이 없게 되어야 들어갈 곳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본문의 내용을 버리고 제멋대로 근거 없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여 처음에 무슨 말을 하다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조차 다 잊어버릴까 염려되는데, 그것이 학자들의 가장 큰 병폐입니다. 그래서 정() 선생께서, “책을 강의하는데 옛 뜻대로 하지 않는지라 도리어 사람을 경박하게 만든다. () 나라 학자들이 장막을 내리고 강의하던 것은 꼭 책을 강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고, , “󰡔논어해(論語解)󰡕를 지은 것은 이미 군더더기이다고 하고, 모공(毛公)이 시()를 강의한 것을 두고 유학자의 기상이 있다고 하신 것이니, 이런 부분들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配義與道之說殊不可曉. 大抵讀書須且虛心靜慮, 依傍文義, 推尋句脈, 看定此句指意是說何事, 略用今人言語襯帖替換一兩字, 說得古人意思出來, 先敎自家心裏分明歷落, 如與古人對面說話, 彼此對答, 無一言一字不相肯可, 此外都無閑雜說話, 方是得箇入處. 怕見如此棄却本文, 肆爲浮說, 說得郞當, 都忘了從初因甚話頭說得到此, 此最學者之大病也. 程先生說書非古意, 轉使人薄. 儒下帷講誦, 未必是說書.’ 又說作論語解已是剩了, 又以毛公爲有儒者氣象. 觀此等處, 其意蓋可見.

 

지금, ‘()와 의()에 짝한다고 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 도리어 󰡔맹자󰡕를 통해 어떠한 것이 의이고, 어떠한 것이 도이며, 어떠한 것이 기()이고, 어떠한 것이 짝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뒤흔들어 놓고서 다만, ‘()’자만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미 진상을 포착할 곳이 없습니다. 자를 가지고 ()’자로 풀이하여 더욱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게 만들었으니,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치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우선 어떠한 것이 의인지를 이해하고, ‘자에서 어떠한 것이 도이며, 도와 의의 같은 점과 차이점은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기()가 그것과 짝할 수 있으며, 짝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지를 추론(推論)해 보아야 할 것이니(마침 󰡔집주를 검토하고 있는 데 설명이 극진하고 분명합니다. 증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몇 글자에 대해 분명하게 되면, 맹자의 의사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한 충막(沖漠)한 기상이라는 것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 애당초 두 개의 말이 아닙니다. 여자약(呂子約)이 말한 것도 맹자의 뜻과는 배치되는 것이니, 이렇게 조리 없이 하여 도리어 아무런 상관이 없게 한다면 진실로 두 손을 합장(合掌)하고 불자(佛字)를 세우는 자들의 비웃음을 사지나 않을는지 염려됩니다. 기타 시습(時習)’솔성(率性)’연어(鳶魚)’ 등의 설()은 지금 논할 겨를이 없으니, 논한다 해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선 배의여도(配義與道)’를 분명히 깨닫는다면 인편에 조속히 보내주십시오.

今說 配義與道’, 却不就孟子上理會如何是義, 如何是道, 如何是氣, 如何地配, 便一鄕掉開了, 只單說箇 , 已是無捉摸處. 又將 字訓作 , 尤無交涉, 說得愈多, 去理愈遠矣. 今合且先理曾如何是義, 却就義字上推如何是道, 道之與義同異如何, 如何又要氣來配他, ‘字又是何意,(適檢集注 說得儘分明了, 不知曾子細看否?) 只此數字分明, 孟子意思分明可見, 程子所謂冲漠氣象亦在其中, 初非有二說也. 子約所說亦未免向別處去, 如此支離, 轉無交捗, 却恐不免眞爲擎拳竪拂者所笑矣. 其它所論時習率性鳶魚等說, 今皆未暇論, 論得亦未有益. 可且理會此配義與道令分明, 便中早報及也.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진, 67)1197년 사이에 장흡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사람 마음에 비록 희로애락이 있지 않더라도 물욕의 뿌리가 보존되어 있다면 진실로 이미 여기(물욕)에 치우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치우친 것에서 그것()을 얻으면 기쁘고 즐겁고, 그것을 잃으면 화나고 슬퍼하게 되어 다시 의리를 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人心雖末有喜怒哀樂, 而物欲之根存焉, 則固已偏於此矣. 故於其所偏者得之則喜且樂, 失之則怒而哀, 無復顧義理也.

 

 

이 문단의 설명은 옳습니다. 다만 물욕(物欲)의 뿌리가 보존되어 있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은 진실로 어떤 한 사물을 편벽되게 좋아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사물이 마음에 있지 않을 때에 어떻게 미발(未發)한 상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부를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러한 곳을 잘 보고서 취해야 합니다. 子約의 심성에 관한 설은 매우 놀랄 만 하고, 보내오신 편지에서 인용한 맹자의 설(심성에 관한 설)은 매우 마땅합니다. (장원덕은 맹자가 성을 논하면서 측은수오공경시비의 마음으로 설명했는데, 또한 심성의 분별을 인식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

此段說得是, 但物欲之根存焉之說恐末然. 人固有偏好一物者, 然此一物未上心時, 安得不謂之未發之中乎? 欲下功夫, 正當於此看取. 子約心性之說甚可駭, 來喩所引孟子甚當. (, 孟子論性而以側隱羞惡恭敬是非之心爲說, 亦可謂失心性之辨乎?)

 

성은 알기 어렵지만 마음을 다 할 수는 있으니, 이른바 그 마음을 다 하는 것은 정자가 핵심처가 곧 확실히 기억해 두어야 할 곳이다라고 말한바와 같이, (이 구절은 상관이 없다)금일 일물을 격()하고 다음 날 일물을 격하여, (지성)습관이 쌓여 이미 오래되면 탈연히 관통함을 말합니다. (진심)또 논어집주에서 말한바와 같이 일에 따라서 정밀하게 살피더라도 그 체의 하나도 알지 못하며, 진실로 힘을 쌓는 것이 오래되어야 장차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것인 즉(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고 성을 아는 방안입이다.(이 단락 안에 주()는 선생이 평해 놓은 것을 달았다)

性難知而心可盡, 所謂盡其心者, 程子所謂當處便認取, (此句不干事)與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 (知性也)積習旣久, 脫然貫通之謂也. (盡心也)又如論語集注所云隨事精察(知性也)而未知其體之一, (盡心也)眞積力久而將有所得, 此卽盡心知性之案. (此段內注字係先生批.)

 

심성 일물은 안다면 모두 알 것이나, 다 알기는 어려울 뿐입니다. 또 성은 일에 따라 말 할 수 있으나, 마음인 즉 그 전체를 들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心性一物, 知則皆知, 但盡之爲難耳. 又性可逐事言, 心則擧其全體也.

 

우임금은 달콤한 술을 싫어했다는 한 장에 대하여.

惡旨酒一章

 

이 곳 등은 단지 구에 따라 보아야지, 꼭 이와 같이 견강부회해서는 안 됩니다.

此等處只逐句看, 不必如此牽合.

 

천왕이 하양에서 수렵했다는 구절에 대하여

天王狩于河陽

 

춘추는 제가 아직 배우지 못해서 감히 억지로 주장을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정으로 헤아려 본다면 천왕이 하양에서 수렵을 했다는 것은 아마도 당시의 역사 문서에 이와 같이 기록된 것 같습니다. 당시에 주나라 왕실이 비록 쇠약했다고 하더라도 명분은 아직 존재하고 있었으니, 진문공(晉文公)이 왕을 부른 것은 본시 순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생각건대 노골적으로 진나라 제후가 왕을 불렀다고 감히 말 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각(李傕), 곽사(郭汜), 주전충(朱全忠) 같은 자들은 제멋대로 행동했던 도적들로서, 힘만 믿고 의지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또한 󰡔춘추󰡕를 읽었다고 단정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 역시도) 이러한 일이 있었음을 알고서 본받았던 것입니다.

春秋所未學, 不敢强爲之說. 然以人情度之, 天王狩于河陽, 恐是當時史策已如此書. 蓋當時室雖微, 名分尙在, 晉文公召王固是不順, 然史策所書想必不敢明言侯召王也. 李傕郭汜朱全忠盜賊狂恣, 唯力是視, 亦未必曾讀春秋, 見有此事而效之也.

 

정좌를 익혀서 그 근본을 세우고 일에 응하는 사려를 오로지 그 쓰임에 이르도록 하는 이것을 주로 삼는 방법은 어떠한지요?

習靜坐以立其本, 而於思慮應事專以致其用, 以此爲主一之法, 如何?

 

명도(明道) 선생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좌(靜坐)하게 하신 것은 대개 그 당시 여러 사람들이 다만 학교 안에서만 서로 어울리다 보니 외부적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지금 아무런 일이 없으면 진실로 정좌할 수 있지만, 만약 특별히 정좌를 하나의 공부로 여긴다면 이것은 도리어 불교도[釋子]의 좌선(坐禪)입니다. 다만, ‘()’ 자를 마음에 붙여 동()과 정()에 다 통용하게 한다면 그 둘 사이에는 자연이 끊어짐이 없을 것이니, 굳이 그렇게 동정을 분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明道敎人靜坐. 蓋爲是時諸人相從, 只在學中, 無甚外事, 故敎之如此. 今若(6-3218)無事, 固是只得靜坐. 若特地將靜坐做一件功夫, 則却是釋子坐禪矣. 但只著一 , 通貫動靜, 則於二者之間自無間斷處, 不須如此分別也.

 

󰡔논어혹문󰡕․󰡔맹자혹문󰡕은 정유년 판본인데, 그 후에 개정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孟或問乃丁酉本, 不知後來改定如何?

 

󰡔논어집주󰡕․󰡔맹자집주󰡕는 나중에 개정한 곳이 많아서 결국 󰡔혹문󰡕과는 별로 부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혹문󰡕을 수정할 만한 공부도 못했기 때문에 이어서 내놓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선 바른 경에 나아가 완미해 보고, 통하지 않는 곳이 있으면 집주를 참고하고, 다시 스스로 사색해 보는 것이 좋겠고, 이 확정되지 않은 책을 믿고서 곧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孟集注後來改定處多, 遂與或問不甚相應. 又無功夫修得或問, 故不曾傳出. 今莫若且就正經上玩味, 有未通處, 參考集注, 更自思索爲佳, 不可恃此未定之書便以爲是也.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진, 67)1197년 사이에 장흡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예전에 구양공(歐陽公: 歐陽修)이 논한 허() 나라 세자 지()의 일을 읽고 의심을 떨칠 수 없었는데, 호문정공(胡文定公: 胡安國)󰡔()󰡕을 읽어보아도 의심이 해소되기에는 충분치 못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살펴보았더니, 󰡔좌전󰡕󰡔공양전󰡕의 말이 그 자체로 분명한데도 후대 사람들이 󰡔곡량전󰡕에 기록된 약을 맛보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인해서, 이 한 구절에 붙들려서는 지()의 죄는 이와 같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좌전󰡕에서는 허 나라 도공(悼公)이 학질에 걸렸는데, 세자 지()가 올린 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했고, 󰡔공양전󰡕에서는 ()가 약을 올려 약으로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도공(悼公)의 죽음이 약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지만, 제가 근세에 학질을 치료하는 것을 보니, 비상(砒霜)을 만들어 먹여 낫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면 병이 낫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도공의 죽음은 반드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당시에 올린 약이 사람을 죽이는 독약은 아니었는데 지()가 우연히 맛보지 않았을 뿐이라면, 󰡔공양전󰡕에서는 어째서 약으로 죽였다[藥殺]이라고 했을 것이며, 세자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겠습니까? 맹자는 사람을 죽이면서 몽둥이로 죽이던 칼로 죽이던 다른 점이 있습니까라고 했고,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이 다른 점이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약을 올려서 약으로 죽였으니 임금을 시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상신(商臣)과 채나라 세자 반[蔡般]의 경우와 다른 점은 과실이냐 고의적이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마음가짐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춘추󰡕에서 똑 같이 (시해했다고) 표현한 것은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게 과실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근세 경전의 잘못을 바로잡고 구양공의 의심도 해소하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嘗讀歐陽公世子之事, 未免疑之. 及讀胡文定公, 未足以破其疑. 繼而考之, 左氏公羊之傳自明, 但後人因穀梁不嘗蘗之說, 遂執此一句, 以爲之罪, 如此而已. 殊不考左氏: 許悼公, 飮世子之藥卒.’ 公羊: ‘進藥而藥殺也’, 此可以見悼公之死於藥矣. 當時之事雖夫有明文, 嘗觀近世治渡者以砒霜鍛而餌之多愈, 然不得法, 不愈而反殺人者亦多矣. 悼公之死, 必此類也. 不然, 當時所進非必死之藥, 偶不嘗而已, 公羊何以謂之藥殺, 世子何爲遽棄國而出奔? 孟子: ‘殺人以梃與刃, 有以異乎? 以刃與政, 有以異乎’ ? 進藥而藥殺, 可不謂之弑哉? 其所以異於蔡般, 過與故之不同耳. 心雖不同, 春秋之文一施之者, 以臣子之於君父不可過也. 如此觀之, 似足以正近世經傳之失而破歐公之疑. 不識先生以爲如何?

 

호문정의 󰡔춘추통지󰡕 가운데 증길보(曾吉父)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율령에 있는 임금이 마실 약을 조제하면서 잘못 본래 처방과 다르게 하는 것과 임금이 탈 배를 만들면서 잘못 튼튼하게 만들지 않는 경우 등에 대해서는 이미 이러한 뜻이 있습니다. 다만 경에서 살펴보아도 허 나라 세자 지()가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일은 볼 수가 없으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胡文定通旨中引曾吉父, 如律中合御藥誤不如本方, 造御舟養誤不牢固之類, 已有此意矣. 但考之於經, 不見許止棄國出奔之事, 不知果何謂也.

 

 

장원덕에게 답함 答張元德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진, 67)1197년 사이에 장흡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예전에 벗들과 말하면서 언제나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상했습니다. 그 이유를 내 몰랐다가 요즈음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학자들이 글을 읽고 말을 들을 적에 처음부터 마음에 간직해서 기억하려 하지 않고, 실마리를 찾아 음미하지 않으려는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에는 2년 동안 󰡔역전(易傳)󰡕 한 부를 보면서도 도무지 긴요한 곳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타고난 자질이 둔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노력하지 않는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횡거(橫渠)가 사람들에게 글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암송하게 한 것이 진실로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쓸 곳이 있을 것입니다. ()와 엄() 두 사람을 뒤에 서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곳에서는 인재를 얻기가 매우 어려우니 매우 걱정스럽고 두렵습니다. 사문(斯文)을 길이 전승(傳承)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만한 자 중에 저들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 없습니다.

舊與朋友說話, 每怪其不解人意, 而不知其所以然者. 近方覺得學者讀了書, 聽了話, 元不曾著心記當, 紬繹玩味, 至有雨年看一部易傳, 都不記得緊要處者. 雖其根鈍使然, 亦是不肯用力. 乃知橫渠敎人讀書必欲成誦, 眞是學者第一義. 須是如此, 已上方有著力處也. 二君後來曾相見否? 此中甚難得人, 深可憂懼也. 所望以永斯文之傳者, 如二三君蓋無幾人也.

 

 

감길보에게 답함 答甘吉甫

 

해제이 글은 1197(경원 3, 정사, 68)에 감길보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이곳의 근황은 다행히도 평소와 다름없지만 다만 붕우(朋友)들이 감히 머무르지 못하고 대부분 이미 떠나갔으니, 또한 시대 상황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보여 주신 말씀은 지금 돌려보냅니다. 대체로 본 것이 그다지 푹 배지 않아서 말이 막힌 부분이 많으니, 우선 분량을 적게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풀이하여 음미하는 공부에 더욱더 박차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此間爲况幸亦如常, 但朋友自不敢住, 多已引去, 亦隨時之義也. 所示之說, 今却附還. 大抵看得未甚浹洽, 言多窒礙. 且宜少讀, 而益加潛心反復玩味之功也.

 

󰡔중용󰡕에 대해 말씀하시길 건순(健順)은 인의예지의 성()이다고 하셨는데, 망령된 제 생각으로는 건순은 용()이고 인의예지의 성은 체()인것 같습니다. ‘건순이라는 두 글자가 위에 있는 것은, 먼저 용을 말씀하시고 후에 체를 말씀하신 것이요, 또한 위에 있는 문장과 짝지어 살펴보면 음양을 먼저 말씀하시고 후에 오행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맞은 것입니까 틀린 것입니까?

中庸健順, 智之性.’ 妄意以爲健順用也, 智之性, 體也. ‘健順二字在上者, 先言用而後言體, 又以配上文先言陰陽而後言五行. 末知是否?

 

건순(健順)’의 체()가 곧 ()’입니다. 합해서 말하면 곧 건순이요, 나누어서 말하면 곧 라 하는 것입니다. ‘()’이고 ()’입니다.

健順之體郞性也. 合而言之則健順, 分而言之則曰仁. 禮健而義智順也.

 

선생께서는 지난해에 이윤은 요순의 도를 즐겼다는 한 단락을 논하면서 순의 도를 즐기려면 반드시 견해가 스스로 홀로 얻은 것이어야지, 사람들의 집안에 늘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올해엔 선생께서 또 사람들의 집안에 늘 있는 것이 어느 것이라고 요순의 도가 아니겠는가?”라 하시고, 만일 요순의 도가 사람들의 집안에 늘 있는 것이라면 다시 요순을 말할 필요가 없다라 하셨습니다.

先生前歲論伊尹堯舜之道一段云: ‘堯舜之道, 須是見得是獨自底, 非是衆家常住底.’ 今歲先生又言: ‘衆家常住底, 何者非堯舜之道? ’ 又言: ‘堯舜之道便是衆家常住底, 則不消更說堯舜.’

 

나중 설명이 좀 괜찮습니다만 기억하고 있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당시에 어떤 말 때문에 이렇게 설명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後說近是, 但所記語有差. 今亦不記當時因何說此也.

 

채장(蔡丈)천근(天根)은 호인(好人)의 정상이요, 월굴(月窟)은 소인의 정상이다. 36궁은 8괘의 양효와 음효이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란 두 글자를 곧장 선악을 가지고 나눌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의심이 듭니다. 또한 ‘36궁이 모두 봄이로구나라고 한 말은, 곧 월굴(月窟) 역시 봄이라는 것입니다.

蔡丈: ‘天根是好人之情狀, 月窟是小人之情狀, 三十六宮是八卦陰陽之爻.’ 某疑 人物二字恐未可便以善惡斷之. 又言三十六自都是春, 卽月窟亦爲春也.

 

성현들께서 양은 선하고 음은 악하다고 말한 곳은 아주 많습니다. 올바른 이치로부터 말하자면, 이 두 가지는 진실로 상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대(對待)로써 말하자면, 또한 각자 주장하는 바가 있습니다. 강절선생이 읊은 것은, 사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가리켜 말한 것 같습니다. 즉 올바른 기[正氣]가 사람이 되고 치우친 기[偏氣]가 사물이 되어, 음양의 분별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계통이 논한 것은 추론해서 설명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뜻은 통합니다.

陽善陰惡, 聖賢如此說處極多. 蓋自正理而言, 二者固不可相無; 以對待而言, 則又各自有所主. 康節所詠, 恐是指生物之源而言, 則正氣爲人, 偏氣爲物, 爲陰陽之辨. 季通所論却是推說, 然意亦通也.

 

 

감길보에게 답함 答甘吉甫

 

해제이 글은 1197(경원 3, 정사, 68)에 감길보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집주󰡕에서 증점을 설명하는 부분에 죽을 때까지 이것을 즐겼다[樂此終身]’는 한 구절이 있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集注中說曾點處有 樂此終身一句, 不知如何.

 

순임금은 깊은 산중에 거하고, 이윤은 유재의 들에서 경작한 것을 보면, 어찌 거기에서 즐거워하여 종신토록 행하는 것이 없었겠습니까? 후대의 사업은 다만 우연일 뿐입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안배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앞서서 있었더라면, 곧 병이 생기고 말았을 것이다. 󰡔집주󰡕 가운데 이 구절이 없는 것은, 곧 이 하나의 轉補 말은 收拾할 것이 전혀 없어서이며, 대답을 저 성인의 물음머리에 붙이지 않은 것은, 단지 선가(禪家)에서 주먹을 들어 올리거나 총채를 세우려는 의도와 같습니다.

居深山之中, 伊尹耕於有莘之野, 豈不是樂此以終身? 後來事業, 亦偶然耳. 若先有一毫安排等待之心, 便成病痛矣. 注中若無此句, 卽此一轉語全無收拾, 答它聖人問頭不著, 只如禪家擎拳竪拂之意矣.

 

군자가 일반인과 다른 까닭은, 存心하기 때문이다.”에 대해서 지난번에 가르침을 입었을 때는, “‘存心處心이다.”라 하셨었습니다. 󰡔집주󰡕에서는 또 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이것을 마음에 보존하여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라 하셨는데, 황직경은 이것은 그 마음이 보존된 바의 장소를 가지고 저 생각하고 생각함이 어느 곳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라 합니다. 제가 생각건대 만약 선생의 가르침대로라면, 를 마음속에 보존하여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황직경의 말대로라면, 마음을 위에 두는 것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습니까?

君子所以異於人, 以其存心’, 昨蒙賜敎, 謂存心者處心也. 集注又曰:‘以仁存心, 言以是存於心而不忘也.’ 直卿說是以其心之所存處看它念念在何處. 某以爲若如先生之誨, 則是以仁禮存在心中. 直卿之言, 則是以心存在仁禮上. 二說孰是?

 

직경의 설명도 옳습니다. 다만 본문의 意義를 따르고자 한다면 󰡔집주󰡕의 설과 같이해야합니다. 또한 모름지기 마음을 가지고 가서 의 위에 두는 것은 아니며, 를 가지고(와서) 마음속에 두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直卿說得亦是, 但要本文意義順似注說. 又須知不是將心去存在仁禮上, 亦不是將仁禮存在心裏也.

 

채계통은 天根好人情狀이 되며, 月窟小人情狀이 된다.”라 하고, 陰陽 둘 다 장차 好說을 짓는 것이 가능하니, 으로 으로 삼는 것 또한 가능하다.”라 했는데, 삼가 가르침을 입어(보니), (선생께선)“이고 이니, 성현이 이와 같이 설명한 곳은 허다하다. 대개 공정한 이치로부터 말하자면, ()둘은 진실로 상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음이요, 상대하여 말하자면, 또한 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다.”라 하셨습니다. 제가 의심컨대 강절선생께서는 앞서 天根月窟을 말씀하실 때는 똑바로 보거나 치우쳐 보는 것을 합쳐서 말씀하셨고, 뒤에 모두 봄이다라 말씀에서는 오로지 공정한 측면에서(正氣로써?)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맞습니까 틀립니까?

蔡丈: ‘天根爲好人之情狀, 月窟爲小人之情狀’, 又云: ‘陰陽都將做好說也得, 以陰爲惡, 陽爲善亦得.’ 伏蒙賜敎, 以爲 陽善陰惡, 聖賢如此說處極多. 蓋自正理而言, 二者固不可相無; 以對待而言, 則又各有所主.’ 某疑康節先言天根月窟是合偏正而言, 後言以爲都是春者, 是專以正者言之. 不知是否?

 

󰡔이정유서󰡕를 보면 그 안에는 선악이 모두 천리이다”, “악 또한 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러워지지 않는 것은 물이라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있고, 󰡔이천역전󰡕에는 ()은 다하는 이치가 없다.”는 한 구절이 있으니, 곧 이런 뜻으로 미루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사실로써 고찰해보면 올빼미[鴟梟]독사[蝮蝎]악초(惡草)독약(毒藥)과 같은 것들이라고 한들, 천지와 음양의 기운[]에 의해 생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遺書中善惡皆天理及惡亦不可不謂之性, 不可以濁者不謂之水等語, 易傳陽無可盡之理一節, 卽此義可推矣. 更以事實考之, 只如鴟梟蝮蝎惡草毒藥, 還可道不是天地陰陽之氣所生否?

 

 

임퇴사[]에게 답함 答林退思()

 

해제이 글은 1198( 경원 4, 무오, 69) 혹은 그 이후에 임보(林補)에게 답한 편지로 추정된다. 말년의 주자가 독서법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견해를 알 수 있다.

 

글을 읽으면서 차츰차츰 진보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좋습니다. 다만 한 권의 책을 읽되 가깝고 알기 쉬운 것부터 먼저 하여 글자마다 고찰하고 징험하며, 글귀마다 추론하고 상세하게 보아서 윗 구절이 끝난 다음에 아랫 구절에 미치고, 앞 단락이 끝난 뒤에 뒷 단락에 미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진실하게 두루 다 알아서 통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여 자신의 의사가 곧 옛 성현의 의사와 전혀 차이가 없게 되어서 고금(古今)과 피차(彼此)의 간격이 보이지 않아야 진정으로 글을 읽은 것이 될 것입니다.

知讀書有漸, 甚善甚善. 但亦須且讀一書, 先其近而易知者, 字字考驗, 句句推詳, 上句了然後及下句, 前段了然後及後段, 乃能眞實該徧, 無所不通. 使自家意思便與古聖賢意思泯然無間, 不見古今彼此之隔, 乃爲眞讀書耳.

 

 

임퇴사에게 답함答林退思

 

해제이 글은 1198( 경원 4, 무오, 69) 혹은 그 이후에 임보(林補)에게 답한 편지로 추정된다.

 

내 모자란 식견은 유학자의 직분조차 쉽사리 다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모두들 작은 그릇이 쉽사리 넘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듣고도 강론하지 않으며, 혹은 강론을 하더라도 정밀하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도를 이해하는 것은 온전치 못하고, 응용하는 데에도 흠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괴로워하고 답답해하면서 스스로 안주하지 않고, 식견이 치우칠까 두려워한다면 이를 곳이 멀지 않은 것입니다. 성현의 가르침을 되풀이하면서 널리 백가의 서적으로 섭렵하고, 이름난 유학자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의심스러운 것을 증명해 나가며, 자신의 견해로 묻는다면 거의 사도(斯道)의 전체를 알 수 있고, 덕에 들어가는 큰 방책을 밝히게 될 것입니다. 큰 변화가 일어나도 대처할 수 있고, 시국의 커다란 기미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 안의 군자들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리고, 비전을 넓고 크게 가지고 진덕수업을 그치지 않은다면, 체와 용이 함께 겸비되고 본말을 모두 갖추게 되는 사람은 오직 선생 한 사람 뿐일 것입니다. 지금 빈곤에 시달리느라 반 걸음조차 나아가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원하는 것에 보답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몸은 비록 여기에 있으나 마음만은 함장(函丈)에게 있습니다.

某區區之見, 亦惟以儒者職分實不易盡. 今之學者皆有小器易盈之患, 於所當知或聞而不講, 或講而不精, 是以見道不全而應用有闕. 用是憤悱, 不遑自安, 懼所見之有偏, 則所至之不遠. 反復聖賢之典, 泛參百氏之書, 師事名儒, 以證所疑, 以質所見, 庶幾識斯道之全體, 明入德之大方, 事有大變, 則有以處之; 時有大幾, 則足以應之. 顧瞻海內之君子, 自治嚴密, 規摹廣大而進修不已, 體用兼該, 本末具擧, 惟先生一人. 今屈於貧困, 寸步不能自致, 不獲以酬其所欲. 身雖在此, 而心則在函丈也.

 

제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야 말할 것이 못됩니다만 또한 소인유(小人儒)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도학이 순수하고 밝았었는데, 춘추 시대에 이르러 현사와 대부의 의론이 그 나라를 경영하는 것과 오히려 배치되었습니다. 바른 학문은 이미 어두워졌고, 평가할 만한 인물들조차 없었습니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온화한 이들은 그 사이에 옛 사람들의 어진 마음과 암암리에 합치해서 국가를 유지하도록 해서 의맥이 끊이지 않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또 타고난 자질이 남다르게 뛰어난 이들은 그 사이에 옛 사람들의 어진 정치와 암암리에 합치해서 사무를 담당해서 세상의 변화가 너무 혼란한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에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것을 짐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저절로 나아갈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제가 드급하게 자신을 이루는 어짐과 외물을 이루는 지혜를 강구해서 옛 사람들이 대학이라고 말한 것을 알려는 이유입니다. 지금 재물이 궁핍해서 함장에게 나아가 절하지 못한다면 누가 그것을 성취시켜 주겠습니까? 율력과 병법에 대해 단애를 알고자 해도 그 종적을 가리킬 수 없으며, 고금의 손익과 큰 변화, 직분상 급하게 해야 할 일 등에 대해 밤낮으로 여러 유학자들의 의논을 보지만 제 식견이 부족해서 결국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향리의 여러 현자들조차 저를 거두어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서 다만 육경 속에서 노닐고 있을 뿐입니다.

某在天地間甚不足道, 亦知不肯爲小人儒. 慨念往古道學素明, 春秋, 賢士大夫議論與夫經理其國, 尙有標置. 正學旣晦, 人物便不耐檢點. 資禀粹溫者, 間有暗合古人仁心處, 問足以維持國體, 使意脈未絶; 資禀奇偉者, 間有暗合古人仁政處, 尙足以把持事務, 使世變末極. 更要進前擔負, 自應是去不得. 此某所以欲汲汲講究成己之仁成物之知, 庶幾識古人所謂大學者. 今以乏財, 不得進拜函丈, 誰其成就之? 律曆兵法要識端涯, 莫指其蹤; 古今損益大變, 職分所當急, 朝夕看諸儒之論, 以己見揣摩, 迄不知其旨. 鄕間諸賢無有收而敎之者, 只得將六經涵泳耳.

 

저는 학문의 전체를 밝힌 다음에야 대성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곳에 이른 줄을 알고서도 끝마쳐야 할 곳에서 끝마치지 못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이를 곳에 이른 줄을 알 지 못하면서 끝마쳐야 할 곳에서 끝마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들 가운데 예를 들자면 자하자유자장 같은 이들도 성인의 한 부분만을 가지는 데 그쳤을 뿐이었으니, 전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 몇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전체를 알지 못한다면 문은 같지만 창문은 다른 근심이 생겨, 비록 모든 것을 얻고자 하나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옛 군자들이 하루 종일 애쓰면서도 오직 학문이 성명의 올바름을 알기에 충분치 못할까만을 두려워했고, 재주가 천하의 시무를 완성하기에 부족하고, 식견이 만물의 실정을 두루 보살피기에 부족한 사람들도 이와 같지 못하면 치우치고 기울어서 그 큰 것을 확립하지 못할 것이라고들 여겼습니다. 큰 것이 확립되지 않는 것은 태산을 오르지 못해서 천하가 좁은 것을 알 지 못하는 것과 같고, 큰 바다를 돌아다니지 못해서 온갖 물길들이 모두 하나의 근원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알 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 둔 것이 천박해서 여곽의 단 맛에 안주하게 되면 태뢰의 맛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某聞明學問之全體, 而後可以底夫大成. 蓋知至其所至而不能終其所終者有矣, 未有不知至其所至而能終其所終者也. 門之高弟, 子夏子游子張, 止於有聖人一體, 則造夫全體者寧有幾人? 然全體之不知, 則有同門異戶之患, 雖欲有其一體, 不可得矣. 古之君子所以終日孜孜, 惟恐學不足以知性命之正, 才不足以成天下之務, 識不足以周萬物之情者, 以爲不如是, 則有所偏倚而無以立乎其大者也. 大者之不立, 猶不登泰山, 無以見天下之小; 不遊大海, 無以見(6-3225)衆流之同歸一源. 所存旣卑, 安藜藿之甘, 難語太牢之味.

 

본시 총명함이 장애가 되고, 사려가 도적이 되어 스스로 견성성불했다고 여겨 끝내 적연부동한 본체를 밝게 알 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력으로 붙잡고 모략으로 조종해서 스스로 공업을 세울만하다고 자부해서 끝내 일 없는 것을 행하는 지혜를 밝게 알 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선 선각자들의 논의를 섭렵하고 고금의 책을 널리 읽고서 스스로 박학다식하다고 여겨 끝내 살갗이 없어서 털을 장차 어디에 연결할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들이야말로 그 큰 것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근본에 종사할 줄을 안다면 도의 전체를 기존으로 삼는다면 학문은 성명의 올바름을 알기에 충분해서, 반드시 생사의 설에 통하게 될 것이요, 이단에 의해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재주는 천하의 시무를 이루기에 충분해서 편안하게 왕도를 쉽사리 행할 주을 알아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대로 백성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식견이 만물의 실정을 두루 알기에 충분해지면 과거의 말과 행실에 대해 아는 것이 덕을 쌓지 않는 것이 없어서 이리저리 넘쳐나 계통이 서지 않는 데에 이르러 자신을 확립하는 위치가 없어지는 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자는 경으로 돌이킬 뿐입니다. 경이 올바르면 세상의 바른 길로 말미암아 사업이 크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혈기에는 성하고 쇠함이 있지만 탄생과 함께 생겨나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처하는 경우에는 궁핍과 영달의 차이가 있지만 나에게 있는 것은 조금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지혜가 여기에 이르면 함께 전체에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固有以聰明爲障, 思慮爲賊, 自以爲見性成佛, 終不明寂然不動之體也. 以智力之所操持, 謀略之所駕馭, 自許以致功立業, 終不明行所無事之知也. 涉獵先民之論, 泛觀古今之書, 自許以博學多聞, 終不知皮之不存, 毛將焉傳也. 夫是之謂無以立乎其大者也. 若知從事於其本而以道之全體爲準的, 則學足以知性命之正, 必通乎死生之說, 而異端不能惑矣. 才足以成天下之務, 則坦然見王道之易行, 不至於不以之折以洽民者治民矣. 識足以周萬物之情, 則所識前言往行無非畜德, 不至泛濫無統, 迄無立身之地矣. 君子反經而已, 經正則由天下之正路而業可大也, 德可新也. 血氣有盛衰, 而與生俱生者未嘗變也. 所遇有窮達, 在我末嘗有加損也. 智及乎此, 則可與造全體矣.

 

저는 비록 어둡고 어리석지만 오히려 스스로 힘쓸 줄을 알고 있으니, 옛 사람을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데에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지금 세상에 영재들이 누가 스스로 낮추기를 기꺼이 합니까? 지금 여러 학자들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상고하고자 그 조각들을 거두어 들여 그것의 온전함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곳은 궁벽지고 누추하여 서책을 취할 바가 없으니 사방의 이름 있는 사람들과 넓게 교류해서 그 좋은 점을 합하여 스스로 되돌리는데 쓰고자 하나 가난하여 자금이 없어서 한발도 스스로 옮길 수 없습니다. 세월이 쉽게 흘러가 버려 처음의 뜻을 저버릴까 깊게 염려 하여 띠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들어 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 부모를 봉양하는 틈틈이 육경을 함영하여 일상생활 사이에서 를 살피고 스스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구하니, 얻음이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감히 바라건대 선생님께서 그 뜻을 발휘하게 해 주십시오.

某雖昏蒙, 尙知自勉, 迫懷古人, 夫豈無志? 今世英才, 誰肯自卑? 今欲考百氏之同異, 收歛其偏, 以求其全. 鄕居僻陋, 書冊無所取, 欲廣交四方之名人, 合其所長, 用以自反, 貧窶無資, 寸步不能自致. 深慮日月易流, 有負初志, 結茅爲庵, 退爲名, 奉親之暇, 涵泳六經, 退省乎日用之間, 自求日新之功, 庶乎有得焉耳. 敢望先生發渾其義.

 

보내 온 편지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학자의 뜻은 진실로 스스로 기약하기를 원대함으로써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공문의 가르침을 보면 좇아서 말하는 바가 지극히 비근하여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지수송습(持守誦習, 지킬 것을 잡고 외우고 익히는 것)) 사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른바 학문의 전체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살피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뛰어난 제자들도 대부분 겨우 하나의 체단(體段)만을 터득했을 뿐입니다. 대저 부자의 성()과 제자(諸子)의 현()으로써 도의 전체에 관하여 어찌 한 말로 다하여 서로 주고받지 못하고, 도리어 구애된 것 같이 하여 도의 전수를 좁게 하고 사람의 뜻을 한정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來示備悉. 學者之志固不可不以遠大自期, 然觀門之敎, 則其所從言之者至爲卑近, 不過孝弟忠信持守誦習之間. 而於所謂學間之全體, 初不察察言之也. 若其高第弟子, 多亦僅得其一體. 夫以夫子之聖, 諸子之賢, 其於道之全體, 豈不能一言盡之以相授納, 而顧爲是拘拘者以狹道之傳, 晝人之志, 何哉?

 

대개 이른바 도의 전체는 비록 높고 크나 실은 일용의 미세하고 절실히 가까운 사이를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 높은 것을 기뻐하여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며, 큰 것을 사모하여 작은 것을 소략하게 하면, 점차 경유(經由, 경험, 경력)하는 실상은 없고 한갓 생각을 매달아 놓고 발 돋음 하여 바라보는 수고로움만 있을 것이니, 끝내 스스로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순순(徇徇)히 차례가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돌이켜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작은 가운데 구하고, ()으로써 견문을 넓혀 강학의 단서를 열고, ()로써 행실을 구속(요점을 얻게 )하여 그 실천하는 실상을 엄정하게 하여 한 치를 얻으면 그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그 한 자를 지키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이와 같이 오래하여 날로 불어나고 달로 더한 뒤에 도의 전체를 향하여 바라보고 점차 알 수 있는 것이 있게 되며, 차례대로 익혀 점차 잘 하는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로부터 나아가 부지런히 힘써 죽은 뒤에야 그칠 것이니, 조예(造詣)의 천심(淺深)과 성취(成就)의 광협(廣狹)은 또한 반드시 지적하여 예기(預期)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蓋所謂道之全體雖高且大, 而其實夫嘗不貫乎日用細微切近之間. 蔔悅其高而忽於近, 慕於大而略於細, 則無漸次經由之實, 而徒有懸想跂望之勞, 亦終不能以自達矣. 故聖人之敎循循有序, 不過使人反而求之至近至小之中, 博之以文, 以閑其講學之端; 約之以禮, 以嚴其踐履之實, 使之得寸則守其寸, 得尺則守其尺, 如是久之, 日滋月益, 然後道之全體乃有所鄕望而漸可識, 有所循習而漸可能. 自是而往, 俛焉孶, 斃而後已, 而其所造之淺深, 所就之廣狹, 亦非可以必詣而預期也.

 

그러므로 부자께서 일찍이, “어려운 것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하고,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을 덕()을 높인다했으니, 대개 여기에서 조금만 어긋나면 마음이 그 바름을 잃어 비록 뚫을수록 더욱 견고해지며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아지는 뜻이 있다 하더라도, 도리어 이익을 도모하고 공효를 계산하는 사욕(私欲)이 될 것입니다. ()은 어디로부터 얻어지며 덕은 어디로부터 높여집니까?

우선 그런대로 들은 바를 말하여 하문한 뜻에 답합니다. 암기(菴記)를 큰 글자로 써 달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학문에 급한 일이 아니지만 역시 늙고 게으른 제가 겨를이 없다고 여겨서입니다. 서대부는 일전에 회계에서 만나보았는데, 논한 것이 합당하지 못했습니다만 지금은 그의 학문이 더욱 완성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듣건대 그의 정사 또한 매우 좋다고 하니, 근본이 있는 자가 본디 이와 같습니다. 편지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은 만나서 대충 속뜻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故夫子嘗以先難後獲爲仁, 又以先事後得爲崇德, 蓋於此小差, 則心失其正, 雖有鑽堅仰高之志, 而反爲謀利計功之私矣. 仁何自而得, 德何自而崇哉? 聊誦所間, 以答下問之意. 至於庵記大字之需, 則非學之急, 亦老懶之所不暇也. 舒大夫向嘗相見於會稽, 所論末合, 今想其學益有成矣. 闕其政亦甚佳, 有本者固如是也. 不及爲書, 因見幸略道意.

 

 

왕진보[]에게 답함 答王晉輔()

 

해제이 글은 1197( 경원 3, 정사, 68)에 왕현(王峴)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학문을 하는 것은 대개 우선 몸과 마음을 수습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은 다음에 다시 성현(聖賢)의 말씀을 처음부터 익숙하게 읽어서 글자마다 해석하고, 글귀마다 자세하게 보며, 단락마다 반복하여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역량을 헤아려 우선 글귀 아래에 보이는 문장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지, 자기의 소견대로 함부로 근거없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爲學夫槪且以收拾身心爲本, 更將聖賢之言從頭熟讀, 逐字訓釋, 逐旬消詳, 逐段反復, 虛心量力, 且要曉得句下文意, 末可便肆己見, 妄起浮論也.

 

 

왕진보에게 답함 答王晉輔

 

해제이 글은 1197( 경원 3, 정사, 68)에 왕현(王峴)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편지에서 말씀하신 졸곡(卒哭)의 예는 근세에는 100일로 기한을 삼고 있으니, 대개 개원(開元) 연간부터 예를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의 제도를 좇아 장례 후에 삼우제를 지낸 이후에 졸곡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부제[]와 같은 경우 공자가 비록 은()의 제도가 좋다는 말을 했다하더라도 󰡔논어󰡕․󰡔중용󰡕에서는 모두 주의 제도를 좇는 말을 두었으니, 그의 위치에서 감히 예악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은 아니나, 계책(생각건대) 또한 감히 갑자기 주의 제도를 버리고 은의 제도를 따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조부에게 합사하면서 바야흐로 조부에게 장차 다른 묘당으로 옮긴다고 고하고, 새로 죽은 자에게 장차 묘당에 들어간다는 뜻을 고하며, 이미 제사를 마치면 신주를 정침(正寢)에 다시 모셔서 두 개의 신주를 (한 곳에)모시는 혐의를 두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主復于寢의례정현의 주에 보인다.) 삼년의 상을 마침에 이른 즉, 합사하는 제사를 지내고 조부의 신주를 옮겨서 다른 묘당에 모시고, 새로 죽은 자의 신주를 받들어 조묘에 모신 즉, 합사하는 제사를 지내고 신주를 옮기는 이 두 가지 일(로부터) 또한 은()이 소상을 마치고 합사하는 것 보다 반드시 못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법에 중요한 일은 대충대충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졸곡하고 합사하는 것은 우선 온공의 설을 따른다면 거의 잘못이 적을 것입니다.

示喩卒哭之禮, 近世以百日爲期, 蓋自開元失之. 今從, 葬後三虞而後卒哭, 得之矣. 若祔, 孔子雖有善之語, 論語中庸皆有從之說, 則無其位而不敢作禮樂, 計亦末敢遮然舍而從. 况祔于祖父, 方是告祖父以將遷它廟, 告新死者以將入祖廟之意, 已祭則主復于寢, 非有二主之嫌也. (主復于寢, 儀禮(6-3228)鄭氏.) 至三年之喪畢, 則又袷祭而遷祖父之主以入它廟, 奉新死者之主以入祖廟, (此見周禮橫渠先生.) 則祔與遷自是兩事, 亦不必如之練而祔矣. 禮法重事, 不容草草. 卒哭而祔, 不若且從溫公之說, 庶幾寡過耳.

 

 

왕진보에게 답함 答王晉輔

 

해제이 글은 1198( 경원 4, 무오, 69)을 전후해서 왕현(王峴)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왕현이 치루는 부친상을 위로하면서 자신이 주석한 󰡔태극도설󰡕󰡔서명의 판본을 간행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있다.

 

가을과 겨울로부터 새해에 이를 때까지 세 차례나 편지를 받았음에도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의사람을 보내어 또 다시 안부를 물어주시니, 더욱 위로가 됩니다. 조문 이후 또 다시 해가 바뀌었는데도 멀리서까지 그 당시의 추모함과 거상기간의 삶(일상)을 감당하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제 병이 더욱 깊어진 것이야 말씀드릴 것이 못됩니다.

自去秋冬及此開正, 三辱枉書, 皆無便可報. 無疑人來, 又承惠間, 尤以爲慰. 訊後已復改歲, 遠惟感時追慕, 孝履支勝. 病益深, 無可言者.

 

앞 편지에서 논한 고자(告子)의 말에 대해서는 그러한 의논들을 마음에 담아 둘 것이 없을 뿐더러 쉽게 그들과 변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자신이 성현께서 이미 하신 말씀을 이해하여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서 오래도록 정밀하고 익숙하게 하면 자연히 시비(是非)를 알아서 남에게 묻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대학은 이미 수령했으나 문득 중요한 부분은 십 수본을 구하여 견해가 분명하고도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고치려 하였습니다. (제가 주석한) 태극도설서명은 절대로 널리 알리지 마십시오. 세상에 이미 간행된 판본이 있는데, 이 책들을 쓸데없이 늘리는 것을 일에도 보탬이 되지 않고, 혹은 반대로 서로 누가 되게나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서시랑(徐侍郞)이 간행하고자 하는 책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또한 꼭 볼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갓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착실하게 내면(內面)을 향해서 매우 가깝고도 명백한 실제적인 데에서 이해해야만 곧 남을 그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前書所論告子之說, 此等義論不須置意中, 亦不須容易與之辨論, 且只自家理會聖賢之所已言而求其旨意之所在, 久之精熟, 自然見得是非, 不著間人矣. 大學已領, 便中却欲更求十數本, 可以分及同志也. 太極西銘切不須廣, 蓋世間已自有本, 爲此冗長, 無益於事, 或徒能相累耳. 徐侍郞所欲鏤版之書, 恨未之見. 然此等亦不必看, 徒亂人耳. 且著實向裏, 就切近明白實處理會, 便不誤人也.

 

근래의 여러 책들은 남강판본이 완성된 이후 또한 크게 고칠 곳을 없으나 검은 점이 있는 것은 어떤 판본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그 차이가 대동소이한 곳이 있으니 자세히 계장에게 자문해 보고 득실을 참고한다면 문득 저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의심나는 곳은 깨우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니, 마땅히 살펴서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남헌의 글이 대부분 미정의 글인데 불행히도 세상에 배포되어 혹자는 살피지 않고 하나의 본보기로 유전시키고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 여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 판목했던 것을 별도로 정본으로 만들었으니, 대개 본래의 빠뜨린 생각들의 본의를 추구한 것으로 감히 사사로운 견해로 쉽게 버리고 취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대우의 설을 함께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만 그 규모 역시 너무 넓기 때문에, 우선 본래 경문의 뜻에 잘 통달하고 깊이 완미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무의 사람이 당도한지 여러 날인데다, 뜻하지 않게 눈과 추위 때문에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나, 그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기에 이처럼 대략적인 말씀만 드리긴 했으나 특별히 뜻을 다 말씀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멀리서 바라오니, 부디 슬픔을 자제하시고 건강을 돌보십시오.

此間諸書, 南康板本成後, 亦無甚大修改處, 不知有黑點子者是何本也. 只看其間有大同小異處, 子細咨問季章, 參考得矢, 便自見得. 若有所疑, 切冀見(6-3229), 當爲契勘奉報也. 南軒之書多末斷手, 而不幸卽世, 而或者不察, 一例流傳, 使人不能無遺恨. 所以前此爲之刊削, 別爲定本, 蓋推本其遺意, 非敢以私見輒有去取也. 大愚之說, 兼看亦佳. 但其規模亦太闊遠, 不若且就本經文義上爛熟咀嚼之爲愈也. 無疑人到多日, 偶以雪寒, 不能作書, 而其人不能久候, 口占布此, 殊不盡意. 正遠, 千萬節哀自愛.

 

 

왕진보에게 답함 答王晉輔

 

해제이 글은 1198( 경원 4, 무오, 69)에 왕현(王峴)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왕현이 부친의 명문(銘文)을 부탁한 것에 대해 답하는 내용이다.

 

거듭 부탁하시는 편지를 받으니,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점은 더없이 고맙습니다만 실로 많은 병 때문에 일을 하기가 두려워 감히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보다 앞서 감히 말씀을 따르지 못했던 것인데, 지금 어쩔 수 없이 갑자기 몇 글자를 󰡔행장(行狀)󰡕의 끝에 붙여서 조금이나마 저의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이미 속을 아마도 너무 드러냈다는 것을 느끼니, 절대로 남에게 보여 주지 말라고 이르십시오. 그것은 서로에게 편안하지 않을 듯하니, 단순하게 죄지은 사람이 해를 입는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荐承委喩, 極荷不鄙. 實以多病畏事, 不敢作文字, 以故前此不敢聞命. 今不獲已, 輒以數字附于行狀之末, 少見鄙意. 然已覺太露筋骨, 切告勿以示人, 恐彼此不穩便, 非獨罪戾之蹤爲有害也.

 

예전에 여자약(呂子約)이 매번 그대의 향학열(向學熱)이 매우 아름답다고 말하곤 했지만, 제 생각에는 실제에 힘을 쓰는 정신이 명성(名聲)을 매우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를 배우려는 정신이 문장을 짓는 데 쏟는 힘보다 못하지 않나 염려됩니다. 이것도 향당(鄕黨)에서 숭상하는 유풍(流風)에서 온 폐단인데 그 유래가 오래 되었으니, 그대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합니다. 지금부터 다시 자신에게 돌이켜 성찰(省察)하여 앞의 둘 중에서 선택하여 어느 것을 천천히 하고 어느 것을 서둘러야 할 것인지를 살펴서 선후(先後)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우선 옛습관을 버리고 󰡔󰡔대학󰡕󰡕,󰡔󰡔논어󰡕󰡕,󰡔맹자󰡕,󰡔중용󰡕과 같은 여러 성현의 말을 가져다가 아침 저녁으로 읽어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행하여 차례대로 넓혀서 도의(道義)의 실제를 마음으로 좋아하고 자신에게 채운다면 자연히 외부의 것을 흠모함이 없어질 것이고, 부모(父母)를 드러나게 하며 명성(名聲)을 드날리는 것도 틀림없이 전에 하던 것과는 다른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한갓 명성과 지위를 높이고 언어(言語)를 아름답게 꾸미고, 명예를 과시하고자 하여[徒近以] 조급하게 돌이나 나무에 새기는 것을 일삼는다면 이것은 비단 늙은 저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여자약(呂子約)이 평소에 그대에게 기대했던 것으로 보더라도 저승에서 매우 불만스러워 할 것입니다. 말씀하신 저의 글을 간행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는지요? 이미 유계장(劉季章)에게 부탁하여 말을 해놓았습니다. 그것이 어찌 재앙을 실어다가 서로에게 보내는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向來子約每言鄕學之意甚美, 然於愚意, 竊恐務實之意未若好名之多, 學道之志未若爲文之力. 此亦鄕黨習尙流風之弊, 其所從來也遠, 宜賢者之未免也. 自今(6-3230)以往, 更願反躬自省, 以擇乎二者之間, 察其執緩執急, 以爲先後. 姑屛舊習, 而取凡聖賢之言, 大學, , 中庸, 朝夕讀之, 精思力行, 以序而廣, 使道義之實有以悅於心而充諸己, 則自將無慕於外, 而所以願親揚名者必有以異乎前日之爲矣. 若徒以名位之爲尊, 言語之爲麗, 聞譽之爲誇, 而汲汲乎伐石攻木以爲事, 則是非濁老拙羞之, 子約平生所望於賢者, 亦將大不滿於泉下矣. 所喩鄙文, 何乃爲此曲折? 已託劉季章言之, 此豈止載禍相餉而已耶

 

 

왕진보에게 답함 答王晉輔

 

해제이 글은 1198( 경원 4, 무오, 69)에 왕현(王峴)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보내주신 跋文에대해서는 지금 다시 몇 글자 적어 보냅니다. 임천(臨川)에서 보낸 跋文에 또한 여러 질문이 있었지만 대답을 못했습니다. 書信이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으리라 생각되지만, [아직 그쪽에서]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 또한 [새삼]질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가]의심스러워하는 것들은 학문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도[자체]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所喩跋語, 今再寫去. 臨川者亦累問不得報, 此書度已浮湛, 不可得矣. 今亦不須問也. 疑義足見向學之意.

 

묘제(墓祭)에 대해서는 고찰할 수 없지만 선대 학자의 말은 아마도 토신(土神)에게 제사지내는 것인 듯합니다. 다만 오늘날의 풍속에 성묘(省墓)의 예()를 행한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없애서는 안 될 듯합니다. 또 분묘(墳墓)는 옛사람들처럼 족장(族葬)을 한 것이 아닌데, 만약 한 곳에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멀리서 제사지내는 것은 또한 온당치 못할 듯하니, 그런 것은 풍속에 따라 각각 제사지내는 것이 더 나은 것만 못합니다.

墓祭不可考, 先儒說恐是祭土神. 但今俗行拜掃之禮, 其來已久, 似不可廢. 又墳墓非如古人之族葬, 若只一處, 合爲一分而遙祭之, 亦似未便. 此等不若隨俗各祭之爲便也.

 

여타의 闕文이 많이 있는 곳은, 혹은 옳은 곳도 있고 혹은 틀린 곳도 있는데, 모두 급히 講學해야할 것들은 아닙니다. 게다가 집주에서 또한 이미 깊고 분명하게 설명을 해두었으니, 스스로 자세히 상고해보면 될 것이요, [저에게]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畏縮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소황문에게 또한 그러한 이 있습니다. 그러나 本文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아닙니다. 역시 집주가운데 이미 定論[구비되어]있습니다. 禮書에서 이라 새긴 곳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훗날 그것을 보게 되더라도, 先儒舊說은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범문정공에 관해서는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일찍이 제 견해를 익공에게 말씀드렸으나, [명확한]판결을 얻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문정공께서 경력을 휘날린 지가 오래되었고, 또 업적이 많으시니, 필시 볼만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뒷사람들이 더구나[하필이면?] 이 일을 거론하지 않는 것을, 어찌 그 편리대로 의론하여 익공의 잘못이라 하겠습니까? 達尊에게 경의를 표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其他闕文數處, 或是或否, 皆非講學之急務. 集注中又已有說甚明, 自可觀考, 不必問也. ‘畏縮之說, 蘇黃門亦云, 然非本文之意. 集注中亦已有定論. 禮書者非一, 它日當見之, 乃先儒之舊, 不可易也. 碑曲折, 嘗以鄙意諸於益公, 未蒙剖決. 然此公揚歷之久, 更事爲多, 必有見處. 後生况亦末須遽論此事, 豈可因此便議前輩之失? 非所以致敬於達尊也.

 

정규(程糾)가 편찬한 󰡔연보(年譜)󰡕는 평생동안 그 일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 것이니 매우 가엾습니다. 그가 애초에 보낸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른 사람에 의해 광주에서 판각이 되고서야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속히 그만두도록 하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이것을 화두로 삼아 세상에서 없앨 수 있기를 기약해봅니다. 그러나 세간의 식견있는 자들이 또한 적으니 아마도 후세에 눈이 밝은 이라야 지적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친구는 지금 굳이 이것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고, 우선 자신에게 아주 절실히 필요한 도리(道理)를 이해하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하다 보면 견식(見識)이 점차 밝아지고 실천하는 것이 점차 진실되어서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 기만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남과 변론하고 분쟁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유계장(劉季章)은 지조가 굳어 남에게 선()을 권면하는 유익한 점이 있으니, 99일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힘껏 부르면 될 것입니다. 한가하게 독학(獨學)만 하고 사우(師友)의 도움이 없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날마다 잘못이 늘어 공부가 크게 진보(進步)할 수 없을 것이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경양(景陽)이 세상을 떠날까 염려됩니다. 재신(才臣)의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고, 손백(巽伯) 또한 인편이 오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무녀(婺女)로 보내면 돌아가느라 소식이 통하기 어려울 터이니 지금 이후로는 인편에 맡겨서 임천의 유교수가 있는 곳으로 보내면 될 것입니다. 매번 인리(仁里)의 제현(諸賢)들이 서로 매우 가깝게 지내면서도 함께 애써 절차탁마(切磋琢磨)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유유하게 흐르는 세월은 날이 갈수록 저물어만 가니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증무의(曾無疑)와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니, 만나게 되면 번거롭지만 제 생각을 전해 주십시오.

程糾所編年譜, 是終身看得此事不透, 深可憐憫. 渠元不曾寄來, 却是身後爲人在廣州鏤版, 方得見之. 甚恨不得及早止之, 做此話欛, 沒了期也. 然世間識者亦少, 但恐後世有明眼人指點出來耳. 吾友今亦未須理會此等, 且理曾自家著緊切身要用底道理, 久之見識漸明, 履踐漸實, 自不被人瞞, 亦不須與人辨論紛爭也.

季章耿介, 於人有責善之益. 重九後若未來, 可力致之. 逸居獨學, 無師友之益, 不知不覺過失日滋, 功夫無由長進, 不可忽也. 景陽悼亡可念, 才臣書未到, 巽伯亦未有人來. 書寄婺女, 迂迴難通, 今後只託人寄臨川劉敎授處可也. 不知渠書中有何說? 每念仁里諸賢相與甚至, 而未得與之痛相切磨, 悠悠歲月, 日益晩暮, 良以爲恨. 無疑亦然也. 因見各煩爲致此意.

 

 

두인중(두양중)에게 답함 答杜仁仲(良仲) 1

 

해제이 글은 1195(경원 5, 을묘, 66)에 두인중두양중 형제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예전부터 형제의 명성을 듣고 한번 만나 보기를 원했던 것이 오래 되었는데, 중간에 겨우 양중(良仲)의 얼굴만 보고 인중(仁仲)과는 여전히 어긋나서 지금까지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저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 물어 주시고 찾아오신다는 편지를 받으니, 그 마음이 아주 후하십니다. 그러나 의리(義理)는 내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에게 돌이켜 힘써 구하면서 그대로 답습하거나 중단하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니, 맹자께서 말씀하신, “돌아가 구하면 남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욱 노력하여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랍니다. 훗날 자득(自得)하게 되면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해도 한 집에서 지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自頃閔昆仲之名, 而願得一見久矣. 中間僅得識良仲之面, 而於仁仲尙復差池, 至今爲恨. 玆者乃承不鄙致問, 許以來辱, 此意厚矣. 然理義不外於吾身, 但能反射力素, 毋使因循, 有所間斷, 則無不得之理. 孟子所謂歸而求之有餘師者, 此也. 願益勉旃, 以副此望. 異時有以自得之, 則雖相望之遠, 亦不異於合堂同席而居矣.

 

 

두인중에게 답함 答杜仁仲

 

말씀하신 학문하는 뜻이 매우 좋습니다. 잡으면 보존되고 놓아 두면 잃는 것 외에 별도로 힘을 쓸 곳이 없으니, 다만 늘 절실하게 분발하기만 하고 효과를 따지지 말면 오래 되면 저절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示喩爲學之意, 甚善. 操存舍亡, 此外無著力處. 但常切提撕, 勿計功效, 久當自得力耳.

 

는 본디 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氣稟에는 이미 차이가(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에 치우침이 있[]는 것은 곧 에 치우침이 있어서 그렇다할 수 있으며, 에 막힘이 있는 것은(막힘이 있다면) 곧 저절로 와 더불어 서로 격차가 있는 것이니, [만약]이러한 가 사람에게 있다면, 또한 []치우침이나 막힘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횡거선생께서 논하시길 햇빛을 받음에는 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들어오는 빛이 둘인 것은 아니다.”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매우 일리가 있으니, 시험 삼아 고찰해 볼만합니다. “人心道心은 다르지 않을 수 없다.”라 하신 말씀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또한 의심을 두어서는 안 되며, 다만 惟精惟一’[하는 것] 이것이 []힘을 쏟아야할 緊要處가 될 뿐입니다. ‘魂魄에 대한 이론은 매우 자세하고 복잡합니다. 문숙書信[을 보내와 그]가운데서 또한 이것을 논했는데, 이미 답장을 써주었으니, 구할 수 있다면 구해서 한번 살펴보십시오. 말씀하신 得失’(얻는 것은 무엇이며 잃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또한 이미 그 속에 적어두었습니다.

理固不可以偏正通塞言, 然氣禀旣殊, 則氣之偏者便只得理之偏, 氣之塞者便自與理相隔, 是理之在人, 亦不能無偏塞也. 橫渠論受光有大小昏明而照納不二, 其說甚備, 可試考之. 人心道心不能無異, 亦是如此. 然亦不須致疑, 但惟精惟一是著力要切處耳. 魂魄之銳極詳密矣, 文叔書中亦論此, 已答之, 可取一觀. 來喩得失亦已具其中也.

 

 

두인중에게 답함 答杜仁仲

 

문숙(文叔)의 편지를 받고서 도와 재질의 아름다움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아직 한 번 만나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고맙게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요사이 생활이 더욱 좋다는 걸 듣게 되니 기쁩니다. 말씀하신 학문하는 뜻이 매우 좋습니다. 만약 과연 단서(端緖)를 보게 되면 늘 절실하게 분발하여 조금도 자신을 용서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기질(氣質)이 혼약(昏弱)한 사람은 문제될 바가 아니니, 천만 번 노력하여 기대에 부응[少副]하십시오.

文叔, 具道才質之美, 恨未一見. 玆辱惠書, 喜聞比日斫履佳勝. 示喩爲學之意 甚善. 若果見得端緖, 常切提撕, 不少自恕, 則氣質昏弱非所病矣. 千萬勉旃, 少副所望.

 

 

두인중에게 답함 答杜仁仲 4

 

양중이 말한, ‘()’ 자 공부는 매우 좋습니다. 무릇 성현(聖賢)의 말씀은 다 동정(動靜)에 통하고 있으니, ‘그 방치된 마음을 구한다고 한 것과 같은 것도 눈썹을 모으고 눈을 감고서 죽은 듯이 이 마음을 지켜서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 마음의 올바름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과 같은 것을 동정(動靜)의 사이에서 달아나는 일이 없게 하는 것뿐입니다. 그대가 논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괜찮다고 한 것은 제 생각에는 두 분 선생의 말씀이 애당초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는 곧 사물의 당연하며 바뀔 수 없는 이치이니, 만약 그것을 간파하게 되면 살든지 죽든지 다 대처하는바가 있습니다. 사는 것은 진실로 원하는 것이지만 죽는 것도 해 될 것은 없습니다.

良仲示喩 字工夫, 甚善. 凡聖賢之言, 皆貫動靜. 如云求其放心, 亦不是閉眉合眼, 死守此心, 不令放出也, 只是要得識此心之正, 如惻隱羞惡之類, 於動靜間都無走失耳. 所論氣禀有偏而理之統體未嘗有異, 亦得之. 明道又謂不可以濁者不爲水, 亦是此意也. 但謂神卽是理, 却恐未然, 更宜思之. 仁仲所論朝聞夕死, 則愚意見得二先生之說初不甚異. 蓋道卽事物當然不易之理 若見得破, 卽隨生隨死皆有所處. 生固所欲, 死亦無害也.

 

 

두인중에게 답함 答杜仁仲 5

 

양중(良仲)이 앞 편지에서 논한 몇 조목은 다 좋습니다. 다만 다시 노력하여 연구하고 완미(玩味)하여 오래 되면 자연히 보는 것이 명백하고 실천이 여유로워서 안배하는데 시간을 뺏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대개 묻기를 간절하게 하고 가깝게 하는 학문에 뜻을 두고 있는 자이지만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시 문()으로서 지식을 넓혀야 비로소 진보(進步)하게 될 것입니다.

良仲前書所論數條皆善, 但更勉力硏究玩味, 久之自然見處明白, 踐履從容, 不費安批. 仁仲蓋有意於切問近思之學者, 然亦便如此不得, 更須博之以文, 始有進步處耳.

 

 

두인중에게 답함 答杜仁仲 6

 

양중(良仲)이 보여 준 의의(疑義)는 이미 그 뒤에 제 생각을 붙여 놓았으니, 상세하게 고찰하여 다시 마음을 비우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되풀이하여 완미(玩味)하여 오래 되면 저절로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그대는 자신에게 돌이켜 자기의 사욕(私欲)을 극복하는 뜻이 매우 간절합니다. 비록 무엇이 문제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 문제를 안 뒤에는 곧 안으로 반성하여 속히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겨를에 소곤거리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이미 지나간 잘못을 탓하며 허물을 고쳤다는 이름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빨리 고치지 않고 한갓 말만 하게 되면 이는 또 스스로 잘못을 고친 사실이 없음을 드러내는 셈이니, 그것은 병이 병을 낳고 이름 밖에서 이름을 취하는 격이니 도움이 없을 뿐만이 아닙니다.

良仲所示疑義, 已附己意於其後, 試詳考之, 更加虛心游意, 反復玩味, 久當自釋然也. 仁仲反躬克己之意甚切, 雖末知所病者何事, 然旣知其病, 卽內自訟而亟改之耳, 何蝦岾唯誦言以咎旣往之失而求改過之名哉? 今不亟改而徒言之, 又自表其未有改之之實也, 則是病中生病, 名外取名, 不但無益而已.

오행의 신에 대하여

五行之神

 

신은 이()의 용이 발해서 기를 타고 출입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역에서 신이라는 것은 만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편지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대개 옳습니다만 도리어 신()자를 전부 ()’라고 적은 것은 아마도 잘못인 것 같습니다.

神是理之發用而乘氣以出入者, :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 來喩大槪得之, 但恐却將 字全作氣看, 則又誤耳.

 

명도가 말한 타고난 것을 성이라 한다[生之謂性]’는 한 조목에 대하여

明道生之謂性一條

 

명도가 말한 이 장() 안에서 ()’자는 그 기질 가운데에 떨어져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있고, 그 본원의 지극한 선을 가리켜 말한 것이 있으니, 모름지기 이 성()이라는 한 글자를 분별하여 어긋남이 없이 분명하게 해야 바야흐로 매 항마다 내용이 자세해질 것입니다. 지금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 하신 것들은 대개 옳습니다만 단지 그 사이에 아직 세밀하지 못한 곳이 있는데, 우선 다시 마음을 비우고 완미하여 오래되면 당연히 더욱 정밀해질 것입니다. “繼之者善(계속해서 하는 것은 선이다)”은 역 가운데 본래 사물의 변화와 유행의 묘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도리어 일신상에 나아가서 용을 발하는 단서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맹자가 논한 성선(性善)은 단지 선이 될만한 정()으로써 설을 삼은 것이니, 대개 이 용을 발한 곳은 곧 본원의 지선(至善)을 드러낸 것이지, 별도의 구함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만약 별도로 구하게 되면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면 고요하다. 그 이상은 도리어 말할 수 있다’(人生而靜以上却容說)는 것이 됩니다. 맹자가 논한바 천하에서 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디부터 그렇게 있을 따름이다는 것 또한 이러한 뜻이니, 다시 상세히 살펴보십시오. “물이 바야흐로 여러 갈래로 나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말을 꺼낸 의도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겠는데, 아마도 명도의 본지(本旨)는 아닌 것 같습니다.

明道此章內 字有指其墮在氣質中者而言, 有指其本原至善者而言, 須且分別此一字, 令分明不差, 方可子細逐項消詳. 今來喩大槪蓋已得之, 只其間有未細密處. 且更虛心玩味, 久當益精耳. 繼之者善, 中本指道化流行之妙而言, 此却是就人身上指其發用之端而言. 孟子論性善, 只以情可爲善爲說, 蓋此發用處便見本原之至善, 不待別求. 若可別求, 則是人生而靜以上却容說也. 孟子所論 天下之言性者, 則故而已矣’, 亦是此意, 更詳之. 所云水之方分派者, 未曉來意, 恐非明道之本旨也.

 

 

두관도에게 답함 答杜貫道

 

해제이 글은 1194(소희 5, 갑인, 65)에 두관도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글을 읽는 과정을 정한 것이 매우 좋습니다. 다만 사려(思慮)를 지나치도록 힘들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니, 마음을 비우고 여유있는 생각을 가지고 때때로 이치를 탐구하기를 오래하면 자연히 도리(道理)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잡아 지키는 것도 의도적인 생각으로 안배해서는 안 되니, 또한 그렇게 여유있게 하되 산만(散漫)해지는 것을 느끼는 즉시 분발하기만 하면 자연히 그 마음이 늘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讀書課程甚善, 但思慮亦不可過苦. 但虛心游意, 時時玩索, 久之當自見縫罅意味. 持守亦不必著意安排, 但亦只且如此從容, 纔覺散漫, 卽便提撕, 卽自常在此矣.

 

 

두관도에게 답함 答杜貫道

 

해제이 글은 1194(소희 5, 갑인, 65)에 두관도(杜貫道)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차례로 보여 주신 여러 학설들은 다 좋습니다. 다만 공부를 쉬지 않고 오래 되면 보는 것이 점차로 분명해질 것입니다. 어진 마을의 제현(諸賢)들과는 많이 만났지만 그대와 두양중(杜良仲), 두인중(杜仁仲)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함께 찾아 주신다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직접 만나서 설명하는 것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묻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節次示及諸說皆善, 但不已其功, 久之見處漸分明矣. 其間雖有小未通處, 今亦不暇一一條析奉報也. 致道, 草草附此. 作書多, 不能詳細. 仁里諸賢多得相處, 但賢者與良仲仁仲未得一見耳. 或能相與一來, 大幸面見指說, 殊勝書問往還也.

 

 

지종주에게 답함答池從周

 

해제이 글은 지종주(池從周)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구체적인 저술 년도는 자세하지 않다.

 

이보다 앞서 보내신 편지에 대해 답장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 또 질문하시는 편지를 받게 되니 더욱 부끄럽고 감사합니다. 의문나는 부분을 물어 오신 데에서 학문을 좋아하는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논어󰡕󰡔대학󰡕을 읽는 것은 또한 초학자(初學者)들이 덕()에 들어가는 문이니 우선은 그렇게 하면 되겠지만, 앞으로 다시 많은 공부가 있는데 어찌 곧 그 어려운 것을[] 염려하십니까? 그 두 권의 책을 또한 반복해서 익숙하게 읽고 힘을 써서 연구해야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하신 󰡔논어󰡕의 머릿장은 다만 배운 것을 가지고 반복해서 생각하여 늘 절실하게 실행에 옮기는 것이 곧 때때로 익히는 것이니, 익히기를 오래하면 저절로 희열(喜悅)을 맛보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학문을 하는 실제적인 일이지, 별도로 심원(深遠)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前此辱書未報, 今又承惠問, 尤以愧感. 詢及所疑, 足見嗜學之意. 但讀論語太學亦是初學門戶, 且得如此向前, 更有多少功夫? 豈可便慮其雜? 但此二書亦須反復熟讀, 著力硏究, 乃可見其意耳. 所問論語首章, 但將所學反復思繹, 常切遵行, 便是時習. 習之之久, 自有說處. 此只是爲學實事, 別無深遠旨趣也.

 

널리 사랑하는 것은 비록 초학자가 절실히 힘써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만, 이미 사물과 접한다면 모두 소홀히 하여 베풀기를 서로 잊는 것 역시 의리가 아닌 것 같으니 이것부터 널리 사랑해야 합니다. 그대의 뜻을 살펴보니 단지 우뚝하게 스스로 지키는 것만을 옳게 여기려 하는 것 같으니 그 때문에 논하는 것이 매번 이와 같은 것입니다. 원컨대 조금이라도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다만 (마음이) 혼매하고 적으며 좁고 한정되어 밝힐 것이 없게 됨을 끝내 면치 못할 것입니다.

汎愛雖非初學之切務, 然旣與物接, 若都恝然與之相忘, 亦非義理, 自是須泛愛也. 觀賢者之意, 似只欲以兀然自守爲是, 故所論每每如此. 願少恢廓之, 不然, 只終不免於昏陋狹隘而無所發明也.

 

 

호문숙()에게 답하는 편지 答胡文叔()

 

해제이 글은 호경(胡璟)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구체적인 저술 년도는 자세하지 않다.

 

편지를 받고서 선대(先代)에서 사이좋게 지냈다는 말을 보게 되니 감격스럽고 슬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습니다. 거듭 편지의 사연을 읽고 나서 집안에 전해오는 학문에 뜻을 두려는 줄 알게 되어 또 위로가 됩니다. 오늘날 세상의 풍속을 따라 남에게나 잘 보이려는 학문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내면에 마음 쓸 줄 아는 사람조차 종종 고원(高遠)한 데에 정신을 팔려서 잘못되기도 하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은 이미 이런 점을 살피고 계신 듯합니다. 다만 늘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고 뜻을 다하여 생각하고 실천하되, 의심이 있거든 동지(同志)들과 강론하여 밝힌다면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承書, 喩及先世交遊之好, 不勝感愴. 三復書詞, 乃知有志傳家之學, 又以爲慰. 今世徇俗爲人之學固不足道, 其稍知用心於內者, 往往又以騖於高遠而失之, 是可歎也. 來喩之云, 似已察於此者. 但常專心致志, 思繹踐行, 有疑則與同志講而明之, 則庶乎其有得矣.

 

 

반탄옹[履孫]에게 답함 答潘坦翁(履孫)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 이후에 반리손(潘履孫)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논어집주󰡕에서 많이 듣고서 그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라는 말을 풀이하면서 좇는 것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고, ‘많이 보고서 기억해 둔다는 말을 풀이하면서는 선과 악을 모두 마음속에 기억해 두고서, 그것들을 참고할 경우에 대비하라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 경문에 다만 기억해 둔다[識之]’라고만 했으니, 선과 악을 모두 기억해서 참고할 경우에 대비하라는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集注多間擇其善者而從’, 謂所從不可不擇, ‘多見而識’, 謂善惡皆當存之, 以備參孜. 某恐經文止曰識之, 未有皆存善惡以備參孜之意.

 

본문의 뜻은 이와 같을 뿐이니 다른 주장을 따로 만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는 ()’자에서 생겼으나, ‘()’자에는 곧바로 따른다[便從]’는 뜻이 없기 때문에 선을 가린다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本文之義只如此, 不容別爲之說. 字生於 , ‘則未有便從之意, 故不言擇善也.

 

(논어󰡕 「술이편의) ‘공자께서는 남과 함께 노래를 불러 상대방이 노래를 잘하면이란 장에 대해 정자는 노래를 하면 반드시 온전한 장() 전체를 부르셨다는 것은 자른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으시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고 하신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子與人歌而善’, 程子: ‘歌必全章也, 與割不正不食, 席不正不坐同.’ 某未曉其義.

 

다시 부르게 하다[反之]’는 것은 처음부터 다시 부르게 한 것입니다. 만약 중간에 이어서 따라 부른다면 하나의 온전한 장[全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노래가 다 끝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한 후 따라 부르면 온전한 장[全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자의 뜻도 대개 이와 같을 것이나 그 뜻은 미진한 듯합니다.

反之猶言從頭再起也. 若只就中間接續便和, 則不成全章矣. 故必使其歌已畢, 從頭再起, 然後和之, 則得全章. 程子意蓋如此, 然其意亦恐未盡也.

 

(󰡔논어󰡕 「태백편의) ‘악사인 지()가 처음 벼슬할 때에 연주하던 관저의 끝장 악곡이란 장에서, 제 생각으로 []’이란 그 완성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악장은 끝에 이르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니, 그 완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성한 아름다움을 볼 수 없으니 오로지 (음악의) 끝장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師摯之始, 關雎之亂’, 某謂亂者, 指其成言之爾. 蓋樂章至亂而始成, 不要其成, 無以見其美盛爾, 非專指亂而言也.

 

이러한 곳들은 지금 옛 사람들의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심도있는 논의는 어렵습니다. 다만 우선 󰡔논어집주󰡕 대략만 설명하고 지나가는 것도 괜찮습니다.

此等處今不得聞古人之樂, 難以深論, 且如集注大槪說過可也.

 

(󰡔논어󰡕 「선진편의) ‘성인의 자취를 밟지 않는다[不踐迹]’는 장에 대해, 󰡔논어집주󰡕에서는 선한 사람이란 자질은 아름다우나 배우지 못한 자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자질이 아름답기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지만,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행한 것을 밟아나가지 못하며, 오직 (성인의) 자취를 밟지 않기 때문에 또한 어딘가로부터 성인의 방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不踐迹一章, 集注: ‘善人質美而未學者也.’ 某謂質美故不爲惡, 未學故不能知古人所以行者而踐之. 惟其不踐跡, 故亦無自而人於室也.

 

󰡔논어집주󰡕에서 정()() 두 선생의 말을 인용한 것은, 그 이치가 매우 정밀해서 아마도 보내신 편지에서 논한 내용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다시 살펴보기 바랍니다.

集注二先生說, 其理甚精, 恐非如來喩之云也. 更詳之.

 

 

해중연에게 답함 答奚仲淵

 

보내온 편지를 통해 도에 뜻을 두고 몸소 실천하려는 실상을 충분히 알게 되어 다행스럽고 대견스런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 의로움이 모이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일 뿐이요, ‘여기에서 의로움을 모아 저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호연지기를) 응용하는 곳에서 옳고 그름을 참작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안팎을 분리하고 마음가짐과 행실을 가르는 폐단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현께서 의로움[]’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응용해야할 곳에서 참작하기를 바라셨던 것일 뿐입니다. 다만 일상생활의 공부에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급한 것과 급하지 않은 것이 있기 마련이므로 자질구레한 것을 우선하고 대체가 되는 것을 나중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연(仲淵)의 생각 또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좀 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의리는 참으로 밝게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격물치지(格物致知)’경을 통해 내면을 곧게 하는[敬以直內]’ 공부가 없다면, 또한 분명히 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것입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익숙학 곳에서 떨쳐내기 힘들다고 하신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학자들의 공통된 근심거리여서, ()와 같은 경우에도 이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示喩所聞, 足見志道躬行之實, 慰幸歎仰蓋不勝言. 孟子論浩然之氣是集義所生, 非謂集義於此以養彼浩然之氣也. 又謂不必於應用處斟酌是否, 亦恐未免離內外判心迹之病. 聖賢所謂義者, 正欲於應用處斟酌耳. 但日用功夫自有先後緩急, 不可先其細者而緩於大體. 仲淵意是如此, 若其不然, 恐更合商量也. 義理之間, 誠當明辨, 然非有格物致知與敬以直內之功, 則亦難明而易失. 來喩所謂熟處難忘者, 恐坐此也. 然亦學者之通患, 正苦此而未能自脫耳.

 

백기(伯起)는 예전에 어울릴 때 매번 이 일을 급선무로 삼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용맹하게 정진하니, 사람이란 실로 쉽게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춘추좌전󰡕) ‘여러모로 곁에서 이끌어 준다[左提右挈]’는 말을 생각해보면 어른의 힘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훗날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유익한 한 친구를 만나게 될 터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조덕광(趙德廣)은 매일 만납니다만 그의 의지(意志)를 일깨우지 못하는 것이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대가 그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서야 스스로 노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伯起舊游, 每病其不以此事爲急. 今乃能勇猛精進如此, 人固未易量也. 計左提右挈, 長者之力爲多. 異時歸老田間, 復得此一益友, 爲幸甚矣. 趙德廣在此日相見, 殊愧不能有以發其志意者. 昨見所與渠書, 當知所以自勉也.

 

 

여계침에게 답함 答黎季忱

 

보여 주신 두 권의 책에 대해서는 각각 이미 찌붙이를 붙여 주석을 달아 돌려보냈으니 자세하게 살펴보시면 고맙겠습니다. 󰡔논어󰡕󰡔맹자󰡕를 다시 여유있는 마음과 주의력을 가지고 완전히 이해되도록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역(周易)󰡕은 읽기가 수월치 않으니, 그렇게 파고드는 것은 마음과 힘을 헛되이 낭비하는 것 같습니다. 󰡔주역󰡕은 본래 점치는 책입니다. 때문에 선왕들이 관을 만들어 태복(太卜)에게 관장하게 했지 학교에에 (가르치는 과목으로) 넣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일 뿐이었습니다. 공자에 이르러서 그 가운데 괘를 만들고 상징을 관찰하고 말을 덧붙인 뜻을 뽑아냈고, 또 이로 인해 길흉진퇴존망의 도를 기록하셨습니다. 성인께서 당시에 이미 점치는 방법과 그 말과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예를 들자면 전수(田狩)를 말한 것은 실제로 전수(田狩)이고, 제사를 말하면 실제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정벌이라거나 배우자를 구한다는 종류의 것들도 모두 이와 같아서 비유가 아닙니다.) 그 속에서 이런 이치를 뽑아내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경우 이미 그 당시의 법도를 알 수도 없고, 그 때의 문장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둠 속에서 찾고 뒤지며 멋대로 주관적인 생각을 개입시킨다면 성인이 다시 태어나신다고 한들 쉽사리 통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 힘을 헛되이 버리는 것보다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경(樂經)󰡕처럼 명백하고 알기 쉬운 것을 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이 앞의 네 가지보다 앞에 있으니, 모두 다 완전하게 이해한 뒤에 󰡔주역󰡕의 큰 뜻을 대강이나마 보는 것도 늦지는 않습니다. 지금 논하신 󰡔논어󰡕도 오히려 통하지 못하면서 어찌 갑자기 거기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示及兩卷, 各已批注封還, 幸細考之. 更須寬心細意看令通徹, 則恐末易讀, 如此穿鑿, 似枉費心力也. 本卜筮之書, 故先王設官, 掌於太卜, 而不列於學校. 學校所敎, 而已. 孔子, 乃於其中推出所以設卦觀象繫詞之旨, 而因以識夫吉凶進退存亡之道. 蓋聖人當時已曉筮之法與其詞意所在, (如說田狩卽實是田狩, 說祭祀卽實是祭祀, 征伐昏媾之類皆然, 非譬喩也.) 故就其間推出此理耳. 若在今日, 則已不得其法, 又不曉其詞, 而暗中摸索, 妄起私意, 竊恐便有聖賢復生, 亦未易通. 與其虛費心力於此, 不若且看之爲明白而易知也. 大學中庸又在四者之先, 須都理會得透徹, 方可略看之大指, 亦未爲晩. 今所論論語尙爾末通, 豈宜遽及此耶?

 

 

부경자에게 답함 答傅敬子

 

해제이 글은 1197( 경원 3, 정사, 68)에 부정(傅定)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지난 번 멀리에서 찾아와 주신 뒤로 이별한 지 또 몇 달이 흘렀습니다. 편지를 받고 근래에 잘 지내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모름지기 착실하게 스스로 이해하여 생각을 넓게 가진 다음 거기에 푹 잠겨 사색해야 소득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보내 온 말씀과 같은 것도 모름지기 스스로 의심이 나는 부분을 보아서 상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그렇게 범연하게 묻기만 한다면 일을 제대로 성사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원하신 대자(大字)와 두 괘설(卦說)은 더욱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니, 만약 진실로 공부를 하려고 한다면 어찌 이런 것을 장식하려고 하십니까?

昨承遠訪, 別來又已累月. 辱書, 欣審比曰所履佳勝. 講學須且著實自家理會, 寬著意思涵泳思素, 方能有得. 如今夾所喩, 亦須且自看有疑處, 方好商量. 若只如此泛問, 不濟事. 又所記心性之語, 亦似語脈中不無差誤. 今不省記當時如何說也. 所欲大字及二卦說, 尤是兒戲. 若眞貢做功夫, 何用此等裝飾耶?

 

 

부성자에게 답함 答傅誠子

 

해제이 글은 1197( 경원 3, 정사, 68)에 부성자(傅誠子)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이 은혜로운 편지를 받고 학문을 좋아하는 돈독함을 충분히 볼 수 있었으니, 매우 위안이 됩니다. 보여 주신 의문에 대한 것은 다 서두르는 뜻이 있으니, 그것은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은 그대로 놓아두고 다만 평탄한 부분에서 글을 읽어 그 뜻을 음미하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우선 기록을 해두고 때때로 끄집어 내어 보면 오래 되면 힘을 얻는 곳이 있겠지만, 만약 그렇게만 힘을 헛되이 쏟는다면 일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기미(幾微)의 사이에서 선()은 천리(天理)이고, ()은 인욕(人欲)이니, 이와 같은 점을 깨달았으면 곧 그 선은 보존하고 그 악은 제거해야 됩니다. 그러면 선과 악을 나누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두 번째 조목도 그렇게 이해할 필요가 없으니, 우선 책의 내용을 탐구하여 읽으면서 혼란스러운 생각을 바꾼다면 오래 되면 그것을 놓아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조목은, 매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곧 없애버리면 되는데 무슨 질문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혼란스럽게 자신을 옭아맨다면 끝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玆承患書, 足見好學之篤, 已足爲慰矣. 比想冬溫, 所履佳勝. 所示疑問皆有急迫之意, 此最爲學之筈. 須且放下, 只平平地讀書, 玩味其意, 理曾未得處, 且記著, 時時拈起看, 恐久之須有得力處. 若只如此枉費心力, 不濟事也. 幾微之間, 善者便是天理, 惡者便是人欲. 纔覺如此, 便存其善去其惡可也, 何難剖析之有?

第二條亦不須得如此理會, 且討箇書讀, 換却許多勞壤, 久之須放得下. 第三條旣知得大有妨害, 便掃除了, 何問之有? 如此紛紜, 自作纏繞, 無了期也.

 

 

고국영에게 답함 答高國楹

 

해제이 글은 1196(경원 2, 병신, 67)에 고송(高松)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말씀하신 것 중에 사리에 맞도록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학자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그러나 별도로 방법을 찾아서 힘을 다해 그것을 이겨 내려고 한다면 도리어 어지럽게 되어 마침내 이길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글을 읽으며 이치를 보아서 생각을 가다듬어 전일하게 한다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저절로 정밀하고 분명해져서 그러한 문제를 없앨 수 있게 되는 것만 못합니다. 다만 글을 읽는 데에는 또한 순서가 있으니, 우선 자신에게 아주 절실한 것을 가져다가 읽어야 합니다. 만약 세상사를 다스리는 문제와 고금의 역사를 헤아리는 것이라면 지금의 역량으로 갑자기 미치기는 어려울 듯하니, 우선 조금 늦추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所喩不能處事, 乃學者之通病. 然欲別求方法, 力與之競, 轉成紛擾, 而卒無可勝之理. 不若虛心讀書觀理, 收拾念慮, 使之專一, 長久則自然精明, 而此病可除矣. 但讀書亦有次第, 且取其切於身心者讀之. 若經理世務, 商略古今, 竊恐今日力量未易遽及. 且少緩之, 亦未爲矢也.

 

 

상정경에게 답함答常鄭卿

 

해제이 글은 1194(소희 5, 갑인, 65) 정월 30일에 복주 주학의 교수였던 상준손(常濬孫)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듣기로는 학교안의 여러 가지 일들이 점점 조리를 갖춰간다고 하니 더욱 기쁩니다. 학교에 규범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오로지 거기에만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붕우(朋友)들이 그 안에 많이 있으면서 모범을 보이며 잘 인도하여 그들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면 가르치는 사람은 힘들지 않고 배우는 사람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임택지(林擇之)를 다시 올 수 있게 한다면 그를 통해 그 나머지 사람들도 불러 올 수 있을 겁니다. 제 생각에는 또 본분(本分)을 따르고 도리(道理)를 아는 자로서 능히 과거 공부를 할 만한 세 명 정도의 사람을 불러다 거기에 함께 있게 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이 일종의 후생(後生)들을 이끌어 나아가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서두르지 말고 자세하게 도모해야 하니, 그 안에 취향이 같지 않은 자가 있어서 도리어 해를 끼치기라도 한다면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될까 해서입니다. 근년에 또 황숙장(黃叔張)이 이곳에 있으면서 교관이었을 때 만난 적이 있었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책을 외우게 하면서 열흘에 한번씩 시험을 치뤘고, 묵의(墨義)를 치루듯이 대답하게 하면서, 등급과 순서를 정해서 머물거나 쫓아내어서 상당히 유익했습니다(어린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은 담당하는 직무가 없이, 이런 교육의 책임만을 맡기면 아마도 양 측면에 걸쳐서 편리할 듯합니다.) 이런 것들을 유추해보면 방법은 많이 있으니, 이것저것을 수습해서 가르치고 기른다면 인정이 감화되고 기뻐할 것이며, 학생들을 바로잡는 일이 가로막힐 걱정도 없을 것입니다.

聞學中諸事漸有條理, 尤以爲喜. 學校規矩雖不可無, 亦不可專恃. 須多得好朋友在其間表率勸導, 使之有鄕慕之意, 則敎者不勞而學者有益. 今得擇之復來, 則可因之以招致其餘矣. 鄙意又恐更須招致得依本分識道理能作擧業者三數輩, 參錯其間, 使之誘進此一等後生, 亦是一事. 但此須緩緩子細圖之, 恐其間有趨向不同, 反能爲害, 則不濟事也. 頃年又見黃叔張在此作敎官時, 敎小學生誦書, 旬日一試, 如答墨義然, 立定分數, 考察去留, 似亦有益. (小學敎諭見無職事可掌, 使任其責, 似亦兩便.) 試推此類, 多爲之塗, 以收拾敎養之, 則人情感悅, 當無扞格之患矣.

 

 

이회숙()에게 답함 答李晦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이휘(李煇)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지난번에 먼 곳에서 방문을 받고 헤어진 후에 또 고맙게도 편지까지 보내 주시니, 매우 감격스럽고 위로가 됩니다. 요즘 생활이 더욱 좋으시리라고 생각하는데, 언제 쯤 상을 면하시는지요? 세월이 쉬이 지나가 버리니 몸을 마치도록 사모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공부는 또한 우선 이와 같이 해나가야 하지만 오래하고 원대하게 하느냐 여하에 달려 있으니, 의심을 두었던 곳도 깨우침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오연 또한 그 사람 됨됨이를 들었는데, 서로 만나 무슨 의논이 있었는지요? 융흥 사람 강법조는 이곳 사람이니, 그에게 부칠 편지가 있으면 반드시 그때 인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됨이 맑고 학문에 온 힘을 다하나 불학에 빠져서 꼬치꼬치 캐기만을 좋아합니다. 영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전에 그의 편지를 받고 아직 별도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안자를 준칙으로 삼겠다고 한 말은 매우 좋습디다만 이와 같이 구체성이 없는 논의로는 곤란하니. 모름지기 일용공부의 순서와 내용을 자세하게 끄집어내야만 바야흐로 옳고 그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러한 뜻으로써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올해 질병과 환난을 거의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니, 형세가 결단코 다시 나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로 만날 기약이 있지 않으니, 천만 번 학문에 힘쓰고 스스로 사랑하십시오.

昨承遠訪, 別後又辱枉書, 感慰感慰. 比想所履益佳, 何時當遂免喪? 日月易得, 想終身之慕也. 所說工夫, 亦且如此做去, 看久遠如何, 有疑却喩及. 吳掾亦聞其人, 相處有何議論邪? 隆興江法曹此間人, 有書寄渠處, 必時有便也. 其人淸苦力學, 但溺佛好穿鑿耳. 今弟今在何處? 前得其書, 未能別答. 所論顔子凖的甚善, 但難如此泛論, 須子細說出日用工夫次第曲折, 方見得是非耳. 幸以此意語之也. 今年疾痛患難, 殆不可堪, 勢決不能復出. 未有相見之期, 千萬(6-3244)力學自愛.

 

 

이회숙에게 답함 答李晦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이휘(李煇)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는 아룁니다. 편지를 받고서, 근래에 평안하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위안이 됩니다. 논하신 경()을 지키고 글을 읽으며 안팎으로 힘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실제적인 공부를 해야지 한갓 공허한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안과 밖은 또한 두 가지가 아니니, 다만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실제는 서로 쓰임이 되는 것이니 다만 하나의 일일 뿐입니다. 일단, ‘()’이라고 말하였으면 이는 곧 사람이 부여받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니, 이 리()는 곧 기()와 합한 것입니다. 다만 곧바로 그 성만을 가리킬 경우는 기 안에 또 별도의 한 물건이 있음을 보아야 비로소 (성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니, (기와) 뒤섞어서 함께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강연이 말한 물성이 본래 악하다는 것은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보내신 글이 이미 옳습니다. 다시 간절하게 함양(涵養)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로 만나지 못해 글만 대하고 보니 정신이 멍합니다. 남은 날도 자중자애하시기 바랍니다.

: 承書, 獲審比日所履佳勝, 爲慰. 所論持敬讀書表裏用力, 切須實下功夫, 不可徒爲虛說. 然表裏亦非二事, 但不可取此而舍彼耳. 其實互相爲用, 只是一事, 纔說性字, 便是以人所受而言, 此理便與氣合了. 但直指其性, 則於氣中又須見得別是一物始得, 不可混幷說也. 江掾所言物性本惡, 安有是理? 來諭已得之矣. 更切涵養爲佳耳. 未卽相見, 臨書惘惘. 餘幾自愛

 

 

이회숙에게 답함 答李晦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이휘(李煇)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편지를 받아보고서, 요즘 평안하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대상(大祥)을 이미 치렀다지만 평생을 사모하는 마음이야 또한 어느 날인들 잊겠습니까? ()을 지키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은 다만 한 가지 일이나 안과 밖에는 각각 힘을 써야 합니다. 만약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곧 공부를 한 적이 없다는 것으로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니, 지금은 우선 날마다 착실하게 공부를 해 나가야지 난이도(難易度)를 비교하고 득실(得失)을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갓 분란만 일으켜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일에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모름지기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서 본심(本心)에 의리(義理)가 있는 것만 보고 다른 것이 있는 것은 보지 않아야 힘을 얻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물어보신 祭禮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소견을 적어서 보냈으니, 다시 상고해보십시오. 듣기에 호조(戶曹)에는 예를 공부한 사람도 많고, 당나라 사람들을 논한 의론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의견을 묻고, 점검하묘 살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承書, 具審比日所履佳勝. 大祥想已過, 終身之慕, 亦何日而忘邪! 持敬讀書只是一事, 而表裏各用力耳. 若有所偏, 便疑都不曾做工夫. 今且逐曰著實做將去, 末須比量難易, 計較得失, 徒然紛擾, 不濟事反害事. 要令日用之間只見本心義理, 都不見有它物, 方有得力處耳. 所問祭禮, 各以所見報去, 可更詳之. 聞戶曹多學禮, 人議論, 可試扣之, 可檢看也.

 

강법연(江法掾)은 청렴하고 고달픈 생활을 하면서 학문에 힘을 쓰니 많이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소견이 또한 다 같을 수는 없지만 한쪽만 고집한 채 융통성이 없고, 경솔하게 저술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불편한 것일 뿐입니다. 순필(舜弼)은 올해어디에서 지냅니까? 그대의 아우가 또한 때때로 [舜弼]안부를 주고받을 것 같은데, 近況은 어떠한지요? 만나볼 순 없지만, [세월을 아껴]自愛한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江法掾淸苦力學, 不可多得. 人之所見要亦未能盡同, 但偏執不通, 輕於述作, 此爲大不便耳. 舜弼今歲復在何許? 令弟想亦時收安問, 爲况復如何耶? 未由面會, 千萬自愛.

 

二程선생의 󰡔祭儀󰡕에 이르길, “무릇 配享本妻 한 사람에게만 그치는 일이다. 혹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後妻의 소생이라도, 生母配享하는 것처럼 한다.” 했습니다. 가 가만히 생각건대 무릇 配享本妻 한 사람에게만 한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고]만약 後妻가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祔祭를 지내더라도 位牌를 따로 두는 것, [이것]또한 옳습니다. [그러나]만약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後妻의 자식이라면, 所生[로써] 配享하는 것은 허용되겠지만, 本妻가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마침내 配享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옳은 일이겠습니까?

程氏祭儀謂凡配止以正妻一人, 或奉祠之人是再娶所生, 卽以所生母配. 竊謂凡配止用正妻一人是也, 若再娶者無子, 或祔祭別位, 亦可也. 若奉祀者是再娶之子, 乃許用所生配, 而正妻無子, 遂不得配享, 可乎?

 

정선생(程先生)의 이 말은 잘못인 듯합니다. 󰡔당회요󰡕 가운데 논의가 있는데, ‘무릇 嫡母가 있다면, 先後에 관계없이, 다 함께 祔祭를 지낸다.’하니, 옛날 諸侯와는 같지 않습니다.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에도 또한 이 단락이 있는데, 다만 그곳에는 []판본이 없는 것 같군요.

程先生此說恐誤. 唐會要中有論, 凡是嫡母, 無先後, 皆當並祔合祭, 與古者諸侯之禮不同. 古今家祭禮中亦有此段, 但恐彼無本耳.

 

신주가 둘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사명(四明) 고씨(高氏: 高閌)의 이론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가 그 의미를 살펴보건대, 종자(宗子)의 집에서 제사를 주관하기 때문에, 서자(庶子)는 종자의 집에서 그의 희생을 쓰는 제사만을 드리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신주가 둘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형제가 서로 다른 곳에 살면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따로따로 조상의 제사를 모시려고 하는데, 신주가 둘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夫主不可以二者也, 四明高氏之說云耳. 詳此意, 謂有宗子之家主祭, 故庶子止以其牲祭于宗子之家可也, 是不可以有二主也. 今人若兄弟異居, 相去遼遠, 欲各祭其父祖, 亦謂不可以二主乎?

 

형제간에 사는 곳은 다른데 사당은 애당초 다르지 않다면 형은 당연히 제사를 맡고 동생은 일을 맡거나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지난 번에, “선배들 중에 그와 같은 처지에 서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형의 집에 신주(神主)를 설치하고 아우는 신주를 만들지 않고 다만 제사지낼 때 곧 자리를 만들어 지방(紙榜)으로 자리마다 표시한 뒤에 제사가 끝나면 불태워 버린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예()의 변형된 모습인 듯하니, 다시 상세하게 살펴 보십시오.

兄弟異居, 廟初不異, 只合兄祭而弟與執事, 或以物助之爲宜. 向見說前輩有如此而相去遠者, 則兄家設主, 弟不立主, 只於祭時旋設位, 以紙榜標記, 逐位祭畢焚之, 如此似亦得禮之變也. 更詳之.

 

위공(魏公)의 시호를 더한 것 대해서는, 다만 사당에서 고하는 것이 예에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은 모두 무덤 앞에서 고하는데, 풍속을 따르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魏公贈謚只告于廟, 疑爲得禮. 但今世皆告墓, 恐未免隨俗耳. 更冀裁之.

 

대체로 글을 읽는 것은 선대 학자들의 옛 학설 중에 이치에 맞는 것을 선택한 뒤에 반복하여 완미하고 아침 저녁으로 거기에 푹 젖어서 본경(本經)에서 말한 뜻과 통하여 그것이 가슴속에 무젖게 되어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단락마다 주장을 내세워 한갖 보기에 아름답게만 하고 실제로는 마음에 얻는 것이 없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大抵讀書當擇先懦舊說之當於理者, 反覆玩味, 朝夕涵泳, 使輿本經之言之意通貫浹洽於胸中, 然後有益, 不必段段立說, 徒爲觀美而實末有得於心也.

 

 

이회숙에게 답함 答李晦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이휘(李煇)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물어 오신 여러 조항들은 대개 서로 비슷비슷한 것이니, 단지 어디로부터 나온 바의 말인가만 다르지, 그 실상인즉 [서로]다른 뜻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에 妄想을 버리고 집중해서, 함께 갖추어놓고서 살펴보기를 오래해야지만, 마땅히 저절로 그 실상은 진실로 함께 행해져야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정자께서 하신 不得於言에 대한 말씀은, 기록한 사람의 오류인 듯하니, 깊게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후(呂后, B.C241B.C180))가 제()라고 호칭한 일과 무씨(武氏: 측천무후)가 혁명한 일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저절로 분명하나, 광무제[光武] 여태후를 핍박하여 폐위한 것은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이치에 맞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所間數條大槪相類, 只是所從言之不同, 其實則無異義. 但虛心遊意, 兼存而並觀之, 久當自見其實固並行而不悖也. 程子不得於言之說, 恐記者之誤, 不必深疑. 呂后稻制武氏革命事體不同自分明, 光武追廢自其私意, 不得爲中理也.

 

 

이회숙에게 답함 答李晦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이휘(李煇)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범씨(范氏: 范祖禹)성인(聖人)이 보통사람과 같은 것은 혈기이며, 다른 것은 지기(志氣)이다. 혈기는 때에 따라 쇠퇴하지만, 지기는 때에 따라 쇠퇴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선생은 󰡔논어집주󰡕에서 윗 구절의 ()’자와 아래 구절의 ()’자를 빼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강군의 간행본에서는 여전히 예전처럼 범씨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范氏: ‘聖人同於人者, 血氣也; 異於人者, 志氣也. 血氣有時而衰, 志氣則無時而衰也.’ 先生於集注中去却上句 字及下句 , 然今南康所刊本又却仍舊從, 不知如何?

 

()는 하나인데 마음을 주장하는 것은 지기(志氣)가 되고, 몸뚱이를 주장하는 것은 곧 혈기가 됩니다. 범씨의 본래 주장은 이와 같습니다. 지난번엔 그 본문의 두 글자를 잘못 빠뜨렸다가 뒤에 온당치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고쳐서 범씨의 옛 주장을 따른 것입니다.

氣一也, 主於心者則爲志氣, 主於形體者卽爲血氣. 范氏本說蓋如此. 向來誤去其本文兩字, 後來覺得末穩, 故改從舊說.

 

󰡔논어집주󰡕에서 ()을 알지 못한다면 군자라 할 수 없다는 구절을 풀이하면서, “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 그것을 믿는 것이다. 사람이 명을 알지 못한다면 해로운 것은 피하고 이로운 것을 좇을 것이니, 어찌 군자라 이를 수 있겠는가?”라 하셨는데, ‘공백료가 자로를 일러바치는 장을 해석하시면서는, ‘성인은 이로움과 해로움의 갈림길에 섰을 때 명에서 결정되기를 기다린 이후에 편안해하시는 것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두 말씀이 서로 상반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공백료장은 성인(聖人)을 가리켜 말했기 때문에 명에서 결단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군자가 되고자하는 이들을 위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集注不知命無以爲君子’, 知有命而信之. 人不知命則避害趨利, (6-3248)何以爲君子? ’ 而解公伯寮子路章乃云: ‘聖人於利害之際, 則不待決於命而後安.’ 二說似相反. 某謂公伯寮章指聖人言, 所以不決之於命. 而此章乃爲欲爲君子者而設, 不知如何?

 

보내온 설명이 옳습니다. 상채(上蔡)가 이런 뜻을 설명한 것이 좋은데, 󰡔상채어록󰡕 가운데 있습니다.

來說是也. 上蔡說得此意思好, 語錄中有之.

 

(󰡔대학혹문󰡕에서) “살과 살갗이 만나고, 근육과 뼈가 모인다고 하셨는데 바로 경()을 지키는 공부를 오래하면 곧 몸과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동래(呂東萊)마음을 잡아 보존하면 혈기(血氣)도 따라서 어지럽지 않고, 수렴(收斂)하면 정신이 안에서 지켜져 들뜨지 않는다고 한 것이 그 뜻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평소에 시험하여 참으로 그렇다는 것을 느꼈지만 소란스러운 곳에서는 도리어 그렇지 않았습니다.

肌膚之會, 筋骸之束, 乃是持敬用力之久, 便覺得身心如此. 東萊謂操存則血氣循軌而不亂, 收斂則精神內守不浮, 恐是此意. 某尋常試之, 誠覺得如此, 然於鬧處又却不然.

 

여동래의 이 설명이 맞기는 하지만, 두 개의 구절로 만들어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놓치면 사라지고, 거두어들이면 오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어서, ‘잡는다[]’는 한 글자도 이미 많으니, 이와 같이 의도적으로 안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東萊此說是也, 然不當作兩句看. 此處只是放去收來, 頃刻間事, 只一字已是多了, 不須如此著意安排也.

 

선생께선 지난번에 차대관(次對官)이 되셨던 것은 실제로 시강(侍講)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을 제수받으신 것인데, 이천선생께서 설서(說書)를 제수받고 조관(朝官)이 된 것과는 무엇이 다릅니까? 이천선생께서 설서를 그만두면서 조관을 사직한 것이나, 선생께선 시강을 그만두면서 대제(待制)를 사직한 것이나 일의 성격이 사실상 같습니다. 그런데 이천선생은 평소에 작위를 책봉해달라고 빌지도 않았는데, 선생은 이미 차대관으로 천거되셨는데도, 오히려 힘써 직명(職名)을 사양하시니, 학자들 가운데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화보(陳和父)이천선생과 선생의 처신이 같지 않다. 그럴만한 지위에 있으면서 그럴만한 은혜를 받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훗날 합치되지 않아서 떠나가게 되더라도 그 관직을 사직하면 될 뿐, 임금이 내려주신 은혜까지 사양하는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라고 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先生頃者次對, 實以侍講之故除此, 伊川除說書而授朝官者何異? 伊川罷說書而辭朝官, 先生罷待講而辭待制, 事體實同. 伊川素不曾陳乞封叙, 先生旣用次對奏薦, 又却力辭職名, 學者多未喩. 陳和父以爲伊川出處與先生不同, 居其位則受其恩數, 乃理之常. 至他日不合而去, 但當辭其職耳, 不當幷辭恩數也. 不知如何?

 

이 일에 대해서는 감히 제 스스로 변명할 수 없습니다. 훗날 저절로 공론이 생겨날 것입니다.

此事不敢自分疎, 後世須自有公論也.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에 대해, 유원승(劉元承)이 편집한 두 선생[二先生] 어록에서 며느리는 당() 아래에서 절하지만, 자식이 당 아래에서 절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대개 부모 자식 사이는 은애(恩愛)를 위주로 하지만, 며느리는 의()로써 화합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子事父母, 劉元承所編二先生語錄謂婦拜於堂下, 子不當拜於堂下, 蓋父子主恩, 婦乃義合.

 

아들자식과 며느리는 동등하니, 분별을 두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온공(溫公)은 제사를 마치고 헌수(獻壽)할 때, 제사지내는 곳에서의 위치처럼 차례대로 선다고 했지만, 위아래로 오르내린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모두 당 위에서 절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子婦一例, 恐不當有分別. 溫公祭畢獻壽, 雖言叙立如祭所之位, 而不言陞降, 恐亦皆在堂上也.

 

맏아들을 위해서는 삼년복(三年服)을 입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兄弟)를 위해서는 다 기년복(朞年服)을 입지만 관직을 그만두지 않으며, ()에게는 과거(科擧) 응시를 허락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직에 있거나 과거를 응시할 때에 길복(吉服)을 입는지, 최복(衰服)을 입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길복을 입어야 한다면 또 오복(五服) 제도에 정해진 햇 수와 달 수와는 서로 어긋납니다.

爲長子三年及爲伯叔兄弟皆期服而不解官, 爲士者許赴擧, 不知當官與赴擧時還吉服耶? 衰服耶? 若須吉服, 則又與五服所截年月有戾矣.

 

그런 것들은 다만 조정(朝廷)의 법령(法令)을 준수할 뿐입니다. 만약 마음이 편치 못해서 과거를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다만 관직에 있다면 관직을 그만둘 방법이 없습니다. 이천(伊川) 선생께서 학제(學制)를 자세히 보시고는 또한, “슬픔을 무릅쓰고 평상시대로 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에서 그 뜻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잠시 상복을 벗지 않을 수는 없지만 또한 갑자기 길복을 입어서도 안 됩니다.

此等事只得遵朝廷法令. 若心自不安, 不欲赴擧, 則勿行可也. 當官則無法可解罷. 伊川先生看詳學制亦云不禁冒哀守常, 此可見矣. 但雖不得不暫釋衰, 亦未可遽純吉也.

 

 

이회숙에게 답함 答李晦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이휘(李煇)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대학혹문󰡕 가운데에 음양오행설에 대하여 선생님이 황시승(黃寺丞: 黃灝)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음양오행은 나누어 말한 것이 있고, 합하여 말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가 예전에 아래와 같이 추론해 본 적이 있습니다…….

大學或問中陰陽五行之說, 先生答黃寺丞: ‘陰陽之爲五行, 有分而言之, 有合而言之.’ 嘗推之(云云.)

 

나누어서 말한 것과 합하여 말한 것이 있다는 주장은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체를 정하는 근원에 나아가서 말한다면 오행이 아직 나누어지지 아니한 때를 단지 음양이라고 말하고, 오성(五性)이 아직 나누어지지 아니한 때를 단지 건순(健順)이라 말합니다. 나누어짐에 미쳐서 말한다면 양은 목과 화가 되고 음은 금과 수가 되며. 건은 인과 예가 되고 순은 지와 의가 됩니다.

分合之說固如此, 然就原頭定體上說, 則未分五行時只謂之陰陽, 未分五性時只謂之健順. 及分而言之, 則陽爲木, 陰爲金, 健爲仁, 順爲智.

 

󰡔대학혹문󰡕에서 그러나 그 치우침과 또 막힘이 없는 (바름과 또 관통하는)가운데서도 또한 혹 청탁과 미오(美惡)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품부 받은 바탕(기질) 또한 지우(智愚)와 현불초(賢不肖)의 차이가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일찍이 은 품부 받았다 말할 수 있고, 은 받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지우와 현불초는 그 품부 받은 기질에 청탁과 미오의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도리어 지우와 현불초의 차이를 품부 받은 데에 돌리지 않고 부여받은 데에 돌리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或間: ‘然於其正且通之中, 又或不無淸濁美惡之異, 故其所賦之質又有智愚賢不肖之殊.’ 竊嘗謂命可言所賦, 性可言所受, 而智愚賢不肖是其所禀之氣有淸濁美惡之不同也. 先生却以智愚賢不肖不歸於所禀而歸於所賦, 何耶?

 

()는 세속에서 말하는 나누어 고르게 분할한다는 뜻과 같으며, 󰡔서집전󰡕에서 혹 성()으로써 말하고, 혹 형()으로 말한다는 설과도 같으니, 경우에 따라 보아야 합니다.

賦猶俗語云分俵均敷之意, 書傳之說或以性言, 或以形言, 當隨處看.

 

󰡔대학혹문󰡕에서 그러나 본래부터 밝은 체()는 하늘에서 얻은 것이라 끝내 어두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이 때문에 비록 그 어두고 가리움이 극에 달하더라도 순간적인 한 깨달음이 있으면, 이 깨달음에 근거해서 잠깐 사이에 그 본체가 이미 꿰뚫리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가 가만히 몇 개 구절을 살펴보건대, 단지 본래부터 밝은 체는 끝내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뜻을 발명한 것일 뿐, 만약 배우는 자가 공부하는 데에 나가서 말한다면 순식간에 저절로 깨닫는 이치란 결코 없습니다. 반드시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 공부를 순서대로 거친 연후에 본래 밝은 체를 얻어서 밝히게 될 것입니다.

或問: ‘然而本明之體得之於天, 終有不可得而昧者. 是以雖其昏蔽之極, 而恍惚之間一有覺焉, 則卽此介然之頃而其本體已洞然矣.’ 竊詳數句只是發明本明之體終有不可得而昧之意, 若就學者用工夫上說, 則恍惚之間, 斷無自覺之理, 須是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功夫次第曲折, 然後本明之體可得而明.

 

이처럼 흐리멍덩하게 전혀 깨달은 것이 없다면 여기에서 능히 치지(致知)할 수 있는 자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곳이 가장 절실한 곳이니,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若是冥然都無覺處, 則此能致知者是何人耶? 此是最親切處, 所宜深察.

 

 

이회숙에게 답함答李晦叔

 

해제이 글은 1195(경원 원년, 을묘, 66)에 이휘(李煇)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는 지난번에 살과 살갗이 한곳으로 모이고, 근육과 뼈가 단단하게 묶인다[肌膚之會筋骸之束]”두 구를 든 것으로 인하여 가만히 생각해보니, 동래(東萊)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른바 마음을 잡아 보존하면 혈기가 준칙을 따르게 되어 어지럽지 않고, 수렴하면 정신이 안에서 지켜져 들뜨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 뜻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비평해서 이 말은 옳다. 그러나 꼭 두 구절로 만들어서 볼 필요는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 말로)인하여 생각건대 아직 중첩된 곳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曩者因擧肌膚之會筋骸之束兩句, 竊意謂與東萊所謂操存則氣血循軌而不亂, 收歛則精神內守而不浮正是此意. 先生批誨云: ‘此說是也, 然不必作兩句看.’ 因思之, 未見有重疊處.

 

이런 것들은 단지 한가한 말일 뿐입니다. 꼭 힘을 써가며 다시 아래에 주석을 달아 부질없이 기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此等處只是閑說, 不須著力更下注脚, 枉費心力.

 

선생님이 또 비평하시기를 이곳에서 놓치면 사라지고, 거두어 들이면 오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니, ‘잡는다[]’는 한 글자조차 이미 낳다, 꼭 이처럼 의도적으로 안배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가만히 생각건대 마음의 보존과 상실, 그리고 드나듦은 다만 사람이 잡느냐 버리느냐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단 성인만은 잡지 않아도 항상 보존되며, 일반 사람들은 잡은 이후에 보존됩니다.

先生又批誨云: ‘此處只是放去收來, 頃刻間事, 只一操字已是多了, 不須如此著意安排也.’ 竊謂心之存亡出入, 特繫於人之操舍如何耳. 但聖人則不操而常存, 衆人則操之而後存也.

 

선생께서 다만 잡는다[]’는 한 글자조차 이미 많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휘()는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는데, 근래에는 양구산(楊龜山), “나이 일흔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른다고 한 뜻을 풀이하면서, “성인께서는 종용(從容)히 법도에 맞으시므로 굳이 마음을 잡는 것을 일삼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선생께서 가르치신 뜻은 바로 이미 보존하고 있는 자를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마음을 방치하지 않을 수 없다면 진실로 잡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만 너무 의도적으로 안배하는 것은 바로 조장(助長)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先生云只一操字已是多了, 久而未喩. 近者看龜山解 七十而從心所欲之義, 謂聖人從容中道, 無事乎操, 然後始悟先生批誨之意, 正是爲已存者設. 若心不能無放, 則固不可不操. 但太著意安排, 是助長也. 未審先生以爲如何?

 

이 말이 아주 친절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구산의 말은 이런 뜻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마음에 돌이켜서 방치되었거나 거두었을 때에 이를 체험한다면 마음을 잡는 그 순간에 곧 보존될 것이니, 다만 공부를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此是至親切處, 龜山之說亦不謂此. 須反之於心, 只就放去收來時體看, 只此操時, 當處便存. 只要功夫接續, 不令間斷耳.

 

()는 예전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배우는 자는 도리어 모름지기 마땅히 항상 이 마음을 엄숙 단정하고 정일한 가운데 두어야 하니, 털끝만큼의 사사로운 뜻이라도 그 가운데 섞이게 한다면 마음 가운데에 저절로 주재하는 것이 있게 되어 산만하게 달리고 일어나는 것을 불러오게 되어 허령하고 통철한 본체를 거의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허령하고 통철한 본체를 알고자 한다면 또한 모름지기 날마다 의리와 더불어 서로 친히 하고, 자기의 사사로움을 극복한 연후에 마음의 본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竊嘗謂學者却須當常存此心於莊端靜一之中, 毋使一毫私意難乎其間, 則方寸之間自有王宰, 不致散漫走作, 而虛靈洞徹之本體庶乎可以黙識矣. 然欲眞實識其虛靈洞徹之本體, 則又須是日與義理相親, 克去己私, 然後心之本體可得而識.

 

쓸데없이 안배한 많은 것들을 중지하며, 쓸데없는 많은 말들을 없애고 다만 잡으면 보존된다는 한 구절이 어떠한 지만을 보아야 할 것이니, 또한 거듭해서 중첩되게 주석을 달아서는 안 됩니다.

罷却許多閑安排, 除却許多閑言語, 只看 操則存一句是如何, 亦不可重疊更下注脚.

 

저는 일찍이 예로부터 천하에 명덕(明德)을 밝히는 자는 또한 모름지기 격물 치지공부로 말미암아 차례를 거친 연후에 비로소 스스로 명덕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명덕을 밝히게 하여 곧 각각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각각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각각 그 몸을 닦게 하고 그 친척을 친히 하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공경하게 하면서도 격물치지의 공부를 생략하여 힘을 쓰는 데에 번거롭지 않게 한다면 어찌 그 근본을 가리지 않는 데에 떨어져서 그 말단만을 도모하는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竊嘗謂自昔明明德於天下者, 亦須由格物致知功夫次第曲折, 然後始能自明其明德也. 今使天下之人皆有以明其明德, 便能各誠其意, 各正其心, 各修其身, 各親其親, 各長其長, 而格物致知之功略不煩於用力焉, 豈不墮於不擇其本而直圖其末之弊?

 

정심(正心)성의(誠意)를 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각각 그 물() ()하고 각각 그 지() ()한다고 말한다면 말이 성립되지 않는 것 같아서 이와 같이 말한 것뿐입니다. 만약 한결 같이 모두 수신(修身)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말한다면, 어찌 위에 네 가지 것을 빼겠습니까?

若欲正心誠意, 須是格物致知. 然若說道各格其物, 各致其知, 則似不成言語, 只得如此說過. 如云 一是皆以修身爲本’, 豈是刪了上四事耶?

 

󰡔대학혹문󰡕에서 다만 그 기질은 청탁(淸濁) 편정(偏正)의 다름이 있고, 물욕은 천심(淺深)후박(厚薄)의 차이가 있으니, 이 때문에 성인이 어리석은 자에 있어, 사람이 사물과, 서로 더불어 현격한 차이가 있게 되고 같을 수 없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이 단락에서 말한 기질(氣質)물욕(物欲)성우(聖愚)인물(人物)이 나뉘는 곳을 자세하게 살펴 보건대, 의심할 만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청탁으로써 성우(聖愚)를 분별하고 편정(偏正)으로써 인물을 분별한다면 물욕이 두텁거나 박하거나, 깊거나 얕거나[物欲厚薄淺深]”라는 한 구절은 다시 장차 어떤 것을 가리키게 되는지요? 만약 성우(聖愚)를 가리킨다고 말한다면 성인은 물욕의 사사로움이 없으며, 만약 인물(人物)을 설한다고 말한다면 물()은 또한 두텁다거나 박하다거나, 깊거나 얕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或間: ‘但其氣質有淸濁偏正之殊, 物欲有淺深厚薄之異, 是以聖之於愚, 人之與物, 相與懸絶而不能同耳.’ 竊詳此段所說氣質物欲分塾愚人物處, 似覺可疑. 若以淸濁分聖愚, 偏正分人物, 物欲厚薄淺深一句復將何指? (6-3253)若謂指聖愚, 則聖人無物欲之私; 若謂說人物, 則物又不可以淺深厚薄論. 未曉.

 

청탁편정(淸濁偏正) 등의 설은 󰡔정몽(正蒙)󰡕의 말에 근거했고, 여박사(呂博士)중용상설(中庸詳說)또한 미루어서 밝혔습니다. 그러나 또한 장차 이 인물(人物) 현우(賢愚) 우불초(愚不肖)를 상대하여 나누어 말한다면 모름지기 이와 같습니다. 만약 크게 개괄해서 논한다면 인()은 청()하나 물()은 탁()하며, ()은 정()하나 물()은 편()합니다. 또 세밀하게 구별한다면 지()는 청()한 것 중에서도 청()한 것이고, ()은 이내 정()한 것 중에서도 정()한 것이며, ()는 이내 청()한 것 중에서 탁()한 것이고 불초(不肖)는 이내 정()한 것 중에서 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횡거가 이른바 물에 사람에 가까운 성()이 있다.”고 말한 것, 또한 탁()한 것 가운데 청()한 것, ()한 것 가운데 정()한 것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물욕천심후박(物欲厚薄淺深)은 이내 여러 사람을 통틀어서 말한 것입니다. 만약 유무라고 쓴다면 이 일등급의 사람은 매우 적어서 많은 무리가 들어가기 어려운 까닭에 단지 우선 이처럼 말했을 뿐입니다. 만약 의심된다면 ()”자를 ()”자로 고치고, 또한 나누어 해석하여 성인은 스스로 방해받지 않고 초연히 그 밖에 벗어나 있음을 살피는 것만 못합니다.

淸濁偏正等說, 乃本正蒙中語, 呂博士中庸詳說又推明之. 然亦是將人物賢智愚不肖相對而分言之, 卽須如此. 若大槪而論, 則人淸而物濁, 人正而物偏. 又細別之, 則智乃淸之淸, 賢乃正之正, 愚乃淸之濁, 不肖乃正之偏. 橫渠所謂物有近人之性者, 又濁之淸偏之正也. 物欲淺深厚薄, 乃通爲衆人而言. 若作有無, 則此一等人甚少, 難入群隊, 故只得且如此下語. 若以爲疑, 則不若改字作, 亦省得分解, 而聖人自不妨超然出於其外也.

 

횡거 선생께서 부장(祔葬)과 부제(祔祭)는 지극한 이치를 다하여 말한다면 한 사람만을 합부(合祔)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도는 처음 혼인을 당하여 일찍이 재배(再配)(재취재가의 배필)를 기약하지 않으니, 이에 남편은 한번 장가가는 것이 합당하고, 부인은 한번 시집가는 것이 합당합니다. 지금 부인이 남편이 죽었는데도 재가(再嫁)할 수 없는 것은 천지의 큰 도리와 같으니, 그러니 남편이 어찌 재취(再娶)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중대한 것으로써 헤아려 보건대, 어버이를 봉양하고, 가계를 잇고, 제사를 계속하는 것은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취의 이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부장(祔葬)과 부제(祔祭)가 비록 동혈(同穴) 동궤연(同几筵)이라 하더라도 인정에 비유한다면 한 방에 어찌 두 명의 아내를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의리로써 단정한다면, 모름지기 적처(嫡妻)에게는 부제(祔祭)를 지내고, 계실(繼室; 후처)은 별도로 한 곳을 만드는 것이 가하다.”고 하셨는데, 제가 지난번 정씨(程氏)제의(祭儀)를 보니 무릇 배향은 정처(正妻 ; 嫡妻) 1인으로써 하니, 혹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재취(再娶)의 소생(所生)이면 곧 소생의 (모를) 배향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일찍이 무릇 배향은 정처(正妻) 1인에 그친다.”고 말한 이 부분을 의심했는데, 재취한 자가 자식이 없으면 혹 별도의 자리에서 부제를 지내는 것은 또한 가합니다. 만약 제사를 받드는 이가 재취의 아들이고, 이내 소생의 모를 배향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정처(正妻)가 자식이 없다면 마침내 배향하지 못하는 것이 가하겠습니까?” 제가 전에 일찍이 이와 같이 선생님께 물음을 청했는데, 나중에 정 선생의 이설은 아마도 잘못인 것 같다. 당해요에서 논한 것이 있는데, 무릇 적모(嫡母)는 선후가 없이 모두 병부(並祔) 합제(合祭)가 마땅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옛날 제후의 예와는 같지 않다.” 라고 선생께서 비평해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비평을 상세하게 살펴보니 이미 저절로 인정에 지극히 합당합니다. 그러나 횡거가 말한 것 또한 이와 같으니, 늘 내 동생도 또한 부장(祔葬)과 부제(祔祭)의 뜻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의심해왔는데, 마침 횡거가 논한 것과 우연히 일치했습니다. 저는 일찍이 의심컨대, 횡거는 이내 이 지극한 이치를 다하여 논하려고 하다보니 ,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인정에 가깝게 처리하고자 한다면 단지 선생님 설을 따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만일 횡거 설을 따른다면 전처(前妻)가 자식이 없는데, 제사를 받드는 자가 도리어 재취의 자식이면 또한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橫渠先生: ‘祔葬祔祭, 極至理而論, 只合拊一人. 夫婦之道, 當其初婚, 未嘗約再配, 是夫只合一娶, 婦只合一嫁. 今婦人夫死而不可再嫁, 如天地之大義, 然夫豈得而再娶? 然以重者計之, 養親承家, 祭祀繼續, 不可無也, 故有再娶之理. 然其葬其祔雖爲同穴同几筵, 然譬之人情, 一室中豈容二妻? 以義斷之, 須祔以首娶, 繼室別爲一所可也.’ 頃看程氏祭儀, 謂凡配用正妻, 或奉祀之人是再娶所生, 卽以所生配. 嘗疑之, 謂凡配止用正妻一人是也, 若再娶者無子, 或祔祭別位亦可也. 若奉祀者是再娶之子, 乃許用所生配, 而正妻(6-3254)無子, 遂不得配享, 可乎? 舊曾如此請問先生, 後來拜領批誨: ‘程先生此說恐誤. 唐會要中有論, 凡是嫡母, 無先後, 皆當並祔合祭, 與古者諸侯之禮不同.’ 伏詳先生批誨, 已自極合人情. 橫渠所說又如此, 尋常舍弟亦疑祔葬祔祭之義爲未安, 適與橫渠所論暗合. 竊疑橫渠乃是極至理而論, 不得不然. 若欲處之近人情, 只合從先生說. 萬一從橫渠, 則前妻無子而祀奉者却是再娶之子, 又將何以處之?

 

부부(夫婦)의 도리는 건()은 위대하고 곤()은 지극한 것과 같아서 그 나름대로의 차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존해 있을 때에 남편은 처()와 첩()을 두기도 하지만 처가 하늘로 삼는 남편은 두 사람을 둘 수가 없는데, 하물며 죽은 뒤에 함께 부제를 지내는 것이 생존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횡거의 말도 추론(推論)해 보면 큰 잘못이 있는 것 같으니, 다만 당() 나라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타당합니다. 더구나 또 전처(前妻)에게 자식이 없고 후처(後妻)에게 자식이 있는 것이 걸림돌이 되어 그 형편이 마음에 매우 편치 못한 점이 있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장례지내는 것 만큼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부부라고 다 합장(合葬)하는 것이 아니니, 계실(繼室)은 따로 묘를 만들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夫婦之義如乾大坤至, 自有等差. 故方其生存, 夫得有妻有妾, 而妻之所天, 不容有二. 况於死而配祔, 又非生存之比? 橫渠之說, 似亦推之有太過也. 只合從人所議爲允. 况又有前妻無子後妻有子之礙, 其勢將有甚机隍而不安考. 唯葬則今人夫婦未必皆合莽, 繼室別營兆域, 宜亦可耳.

 

질문은 누락되었다.

問缺

 

이치가 진실로 이와 같으나 모름지기 그 힘을 실제에 써야지 말 만들기나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또 마땅히 배양이 있게 한 연후에 점점 쌓아 푹 익혀야 위로 향한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理固如此, 然須實用其力, 不可只做好語說過. 又當有以培養之, 然後積漸純熟; 向上有進步處.

 

 

여국수(송걸)에게 답함 答余國秀(宋傑)

 

해제이 글은 1194(소희 5, 갑인, 65)에 여송걸(余宋傑)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이른바 내면(內面)을 향한다는 것은 다만 외면(外面)을 향해 자기와 상관없는 일을 이해한다거나 남에게 알아 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는 것만을 말합니다. 학문하는 공부의 경우는 안과 밖이나 몸과 마음의 간격도 없고, 거칠고 세밀함과 은미하고 드러나는 구분도 없으니, 처음에 우선 큰 강령(綱領)을 지켜서 제멋대로 하지 않게 하여 늘 절실하게 분발하여 점차로 더 엄밀하게 하고, 그런 다음 성현(聖賢)의 책을 읽어 구절마다 글자마다 하나씩 이해해야지 처음부터 끝까지 가리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오래도록 하면 자연히 보는 것이 분명해지고 지키는 것이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책을 보니, 대개 착실하게 지킨 적도 없으면서 갑자기 익숙한 공부를 바라고, 순서에 따라 강론한 적도 없으면서 지극히 정미(精微)한 깊이에 힘을 쓰니,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과거(科擧)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어서 자기에게는 전혀 상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면(內面)을 향하지 않아서 초래된 병통이니, 아래의 몇 단락도 다 그러한 문제라서 일일이 변론할 수가 없습니다.

所謂貼裏者, 但謂不可向外理會不干己事及求知於人之類耳. 若學問之功, 則無內外身心之間, 無粗細隱顯之分. 初時且要大綱持守, 勿令放逸而常切提撕, 漸加嚴密. 更讀聖賢之書, 逐句逐字一一理曾, 從頭至尾, 不要揀擇. 如此久之, 自當見得分明, 守得純熟矣. 今看此冊, 大抵不曾著實持守而遽責純熟之功, 不曾循序講究而務極精微之蘊, 正使說得相似, 只與做擧業一般, 於己分上全無干涉. 此正不貼裏之病也. 以下數段, 皆是此病, 不能一一論辨也.

 

일찍이 생각하기를, “성인(聖人)의 도는 간이(簡易)하고 명백(明白)한데, 학자들이 자기에 대한 처신과 사물을 응접하는 것은 대체로 화()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매번 순종하고 구차하게 답습하는 잘못이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하지만 억지로 한두 개의 일을 바로잡으려 하면 또 굽은 것을 바로잡는데 지나치게 바르게 하려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느낀다고 여겼습니다. 이미 그런 줄을 알았으면 서둘러 고치면 되는 것이지 굳이 물을 필요가 있습니까? 매사에는 그 나름대로 꼭맞는 도리가 있으니, 다시 정밀하게 살피면 지나치게 바르게 하려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宋傑嘗謂聖人之道簡易明白, 而學者所以處己接物大抵以和爲貴, 故每覺有順從苟且因循之失. 然纖著意擧一二事, 又覺有矯枉過正之病. 旣知如此, 便速改之, 何問之有? 凡事亦自有恰好道理, 更積察之, 則無過亘之弊矣.

 

제 생각에 옛사람들은 빈곤한 처지에 많이 있으면서도 태연하여 그 빈곤으로 인하여 마음이 속박받지 않았는데 일절 따지지 않는 것은 이치로나 형편으로나 그만 둘 수 없을 것이고, 만약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뜻을 굽혀 얼굴을 붉히게 되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宋傑竊惟古人多處貧困而泰然不以累其心, 不知何道. 今値窮困, 若一切不間, 則理勢不容已; 若欲辨集, 則末免有屈志靦顔之事.

 

곤궁한 것은 참아야만 하니, 참는 것이 익숙해지면 자연히 걱정하는 생각도 없어질 것입니다. 한퇴지(韓退之)성산시(盛山詩)(), “완미(玩味)하여 즐기는 것은 문사(文辭)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문사는 하찮은 일이지만 진실로 완미하여 즐길 수 있게 되면 오히려 벼슬해서 출세하는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를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날마다 성현의 말씀을 외우며 이렇게 고원(高遠)한 뜻을 탐구하면서도 일에 임해서는 전혀 힘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여기에서도 완미한 것이 깊지 못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窮須是忍, 忍到熟處, 自無戚戚之念矣. 韓退之盛山詩序說玩而忘之以文辭也(云云), 文辭淺事, 苟能玩而樂之, 尙可以忘仕進之窮通, 况吾日誦聖賢之言, 探索高遠如此, 而臨事全不得力, 此亦足以見其玩之未深矣.

 

 

여국수에게 답함 答余國秀

 

해제이 글은 1198( 경원 4, 무오, 69)에 여송걸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예전에 처음부터 사람의 몸은 천지와 음양이 교제하는 곳이다고 추측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설명을 얻지 못했었습니다. 이윽고 󰡔태극도설󰡕을 읽어보니, 그 가운데 사람과 만물의 시작은 기가 변화하여[氣化] 생겨난다. ()가 모여서 형태[]를 이루면 곧 형태와 기가 교감해서 마침내 형태가 변화한다[形化]”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제하는 곳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태의 변화가 일정하게 되면 비록 다시 기가 변화하지는 못하지만, 위대한 조화의 흐름은 계속되어 마치 시냇물이 멈추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음식을 먹고 호흡하는 것이 모두 (위대한 조화가) 흘러다니면 통하는 곳입니다. 이 몸이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생겨났지만 천지 음양의 조화가 아닌 것이 없으니, 이것이 천지를 소유하고, 성정(性情)을 갖추고서 천지에 참여하여 화육을 돕는다라고 하는 것일까요!

始嘗推測人之身所以與天地陰陽交際處, 而不得其說. 旣讀太極圖說, 其中有云: ‘人物之始, 以氣化而生者也. 氣聚成形, 則形交氣感, 遂以形化.’ 竊謂交際處於此可見. 然形化旣定, 雖不復氣化, 而大化之流行接續如川流之不(6-3257), 凡飮食呼吸, 皆是流通處. 此身雖由父母生, 而莫非天地陰陽之化, 此其所以有天地具情性而可以參天地贊化育也歟.

 

대체적인 내용은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성정(性情)의 덕()과 체용(體用)의 분별에 각각 어떠한 면모가 있는가를 이해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좇아가면서 체험을 통해 알고 깊이 음미하여,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것들이 정확하고 분명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其大槪來歷固是如此, 然須理會得其性倩之德體用分別各是何面目始得. 須逐一體認玩味, 令日用間發見處的當分明也.

 

또 사람의 몸에서 추론한 것으로 인해 아울러 만물에까지 추론을 해보고, 심지어는 동물과 식물의 차이에까지 추론을 해보면서, 각각 그들의 본원을 살펴보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음양오행의 기가 만물을 변화 생성시키는데, 그 청탁(淸濁)편정(偏正)이 똑같지 않은 것은 애초부터 정해진 것입니다. 그 뒤에 위대한 조화가 흘러가도 또한 변경하거나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사람은 반드시 만물의 영장이 되고, 기린봉황거북용은 신령한 지혜를 갖추며, 성성이앵무새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것과 같으니, 모두 처음부터 이러하고, 뒤에도 또한 이러합니다.

又嘗因推測人之身而幷及於物, 以至動植之殊, 各極其本原而察之. 竊謂陰陽五行之氣化生萬物, 其淸濁偏正之不同, 亦從初有定. 而其後大化流行, 亦不能變易. 如人之必爲萬物之靈, 麟鳳龜龍之靈知, 猩猩鸚武之能言之類, 皆是從初如此, 後來亦如此.

 

신체를 가지고 말한다면, 입이나 四肢의 온갖 부분이 [그렇게]된 까닭에는 모두 당연한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여러 사람에게 미쳐보고, 온갖 사물에 미쳐보더라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하나 辨別하여(일일이 따져보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다만 이와 같이 추측하여 설명하려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以身而言, 則所以爲耳目鼻口四肢百體者皆有當然之理. 以至爲衆人, 爲百物, 皆然. 不可不一一辨別得, 非是只要如此推說也.

 

(󰡔맹자󰡕에서 말하는) “놓친 마음을 구한다[求放心]”는 말로 인해서 보고 듣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서 말미암을 때는 이 마음이 보존되지만, 자신에게서 말미암지 않을 때는 이 마음을 잃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경자는 이치에 합당할 때에 이 마음이 보존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를 마음이라고 여기는 병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竊嘗因求放心而謂視聽思慮由己時是心存, 不由己時是心放, 李敬子以爲合理時是心存, 且謂某有認氣爲心之病.

 

맹자께서 그 마음을 보존하고그 본성을 기르라고 하신 것은, 다만 사람들이 항상 그 마음을 잡아 지켜서 잃거나 놓치지 않게 한다면, 스스로 강학을 통해 의리를 밝힐 수 있게 되고 또 일상적인 행동거지 모두가 그 본성의 당연함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것일 뿐입니다.

孟子說存其心, 養其性, 只是要人常常操守此心, 不令放逸, 則自能去講學以明義理, 而動靜之間皆有以順其性之當然也.

 

생각해보면 사람의 본성은 본래부터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고, 본래 온갖 선()을 밝히고 있지만, 기질과 물욕이 뒤섞임 때문에 어두워지고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이러한 뒤섞임이 없기 때문에 하나를 밝히면 모든 것이 밝아져 남은 찌꺼기라곤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반드시 이러한 뒤섞임이 있기는 하지만, 많고 적으며, 도탑고 엷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하나씩 쫓아가며 밝혀서 10%의 밝음을 얻으면 10%의 뒤섞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견해가 모두 밝아지고, 뒤섞인 것들이 모두 사라져야 본성이 비로소 회복되는 것입니다. 학자는 이것을 체득해서 본성을 회복하는 공부를 지극하게 해야 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竊謂人性本具衆理, 本明萬善, 由氣質物欲之雜, 所以昏蔽. 上智之資無此(6-3258), 故一明盡明, 無有査滓. 中人以降必有此雜, 但多少厚薄之不同耳. 故必逐一求明, 明得一分, 則去得一分之雜, 直待所見盡明, 所雜盡去, 本性方復. 學者體此以致復性之功, 不知如何?

 

이 말이 옳습니다만 반드시 그 내면에 있는 의리의 본체와 작용[體用]을 확실하게 이해해야만이 밝힐 수 있는 것이니만치 이처럼 애매모호하게 설명만 해서는 안 됩니다.

此說是. 但須是實識得其裏面義理之體用, 乃爲有以明之, 不可只如此鶻突說過也.

 

(󰡔맹자󰡕 「진심 상에서) “순임금이 한마디 좋은 말을 듣거나, 한 가지 선한 행위를 보면 황하와 양자강을 터놓은 것처럼 했다는 것은 기품과 물욕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 마음의 이치와 보고 듣는 것이 입술이 합치듯이 서로 들어맞아 그 터짐이 이와 같았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논어󰡕 「위정에서) ‘안회는 어기지 않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았다는 말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논어󰡕 「공야장에서) ‘자로는 이전에 들은 것이 있으나 미처 행하지 못했으면, 오직 다른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했다고 한 말 같은 경우는, 비록 그가 뜻을 세우는 데는 용감했을지라도 힘을 쓰는 데에는 또한 어려움을 느꼈던 것이니, 아마도 기품과 물욕에 얽매인 데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聞一善言, 見一善行, 若決江河, 恐只是無氣禀物欲之累, 故吾心之理與聞見吻然相契, 其決如此. 顔子不違如愚, 亦是如此. 子路有聞(云云), 則其立志雖勇, 然用力亦似覺難, 恐亦未免爲氣禀物欲所累也.

 

위와 같습니다.

同上.

 

기품과 물욕은 똑같이 본성에 해를 끼치지만 물욕의 해로움은 쉽게 볼 수 있으되, 기품의 해로움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품에는 또 두 가지 해로움이 있으니, ‘어둡고 밝지 못한 것은 배운 것을 따라 점점 밝은 데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쪽으로 치우쳐서 중()에 처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강한 사람은 성현의 강한 부분만을 보고, 약한 사람은 또 성현의 온화한 부분만을 살핀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氣稟物欲均爲害性, 然物欲之害易見, 氣稟之害難知. 然氣稟有二, 若昏而不明, 則隨所學可以漸進於明; 若偏而不中, 則强者只見得聖賢剛處, 弱者又只見聖賢寬和處. 不知如何?

 

배운 것이 점점 밝아지면 치우친 것에 대해서도 점점 깨달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所學漸明, 則所偏亦當漸覺矣.

 

()이 움직이는 곳을 체험하고 살핌.

體察情之動處

 

학문을 하는 공부에는 본래 선후의 순서가 있습니다만 끊듯이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먼저 성()의 본체를 밝히고, 공경함[]으로 지킨다는 말은 진실로 이처럼 옳습니다만 처음부터 도무지 공경함이 없다면 또한 어디로부터 이해갈 수 있겠습니까?

爲學功夫固當有先後, 然亦不是截然今日爲此, 明日爲彼也. 且如所謂先明性(6-3259)之本體而敬以守之, 固是如此. 然從初若都不敬, 亦何由得有見耶?

 

선생께서는 이 네 가지에 순서를 매기면서 격물(格物)’을 우선해야 할 것으로 삼으셨는데, 생각해보면 학자가 학문에 종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여기에 대해 먼저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학문에 나아가는 공부가 근거할만한 곳이 있게 됩니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깨달음이 산만해져 계통이 없어져 공부했던 것도 결국 귀결되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先生序此四者爲格物之先, 竊謂學者欲從事於學, 必先明乎此, 而後進學之功有實地之可據. 苟爲不然, 則終覺散漫無統, 而所學終無所歸宿矣.

 

󰡔혹문󰡕 가운데 이 단락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미루어 설명해 나간 것일 뿐이고, 사물에 이르러 가면 수많은 도리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조목마다 일마다 좇아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이처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或問中此段只是說從自己身心上推去, 到事物上都有許多道理, 但要逐節逐件識得, 不是只要如此包說也.

 

 

이경자() 및 여국수(송걸)에게 답함答李敬子 () 余國秀 (宋傑)

 

해제이 글은 1194(소희 5, 갑인, 65)에 이번여송걸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은 기질(氣質)이 조급하여 매번 선생께서, 억지로 탐구하고 물리적인 힘으로 취하려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점차로 함양(涵養)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대해 완미(玩味)하며 노력하였으나 일에 임해서는 마침내 해가 됨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다만 시청언동(視聽言動)에 의지하여 늘 그 네 가지의 일에 힘을 쓰면서 또 의리(義理)를 가지고 융화를 시키니, 상당히 힘을 얻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마침내 병의 뿌리는 늘 없어지지 않습니다.

氣質躁迫, 每於先生强探力取之戒積漸涵泳之訓玩味用功, 但臨事時終覺爲害. 今只靠定視聽言動, 常於此四事上著力, 又以義理融液之, 頗覺得力. 然終是病根常在.

 

그렇게 재주를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해가 된다고 느꼈으면 곧 이겨 내면 되는 것이지, 다시 그 효과의 빠르고 느림을 따지지 마십시오. 아래 문단도 이에 따릅니다.

不須如此做伎倆, 但才覺時便克將去, 莫更計較功效遲速也. 後段放此.

 

()의 생각에는 안자(顔子)의 사물(四物)에 대해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다만 무엇이 예()이고, 무엇이 예가 아닌지를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선 박문약례(博文約禮)를 먼저하고, 사물에 대한 경계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하면서 남과 응대하는데 시행하여 점차로 사물에 가깝게 되기를 바란다면 거의 실제적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竊謂顔子四勿’, 今人非不欲如此, 只爲不知其執爲禮, 孰爲非禮. 顔子所以纔間 克復之語便知請間其自, 纔閠四勿之語便承當去, 雖是資質絶人, 亦必是索於博文約禮上用功. 今之學者且先以博約爲先, 四勿之戒隨其所知施之應酬, 漸漸望其貼近, 庶有實效.

 

이미 그런 사실을 알았으면 어찌하여 힘을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박문약례도 두 가지 일이 아니니, 훗날 깊어지고 순수해지는 것도 지금 노력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旣知如此, 何不用力? 然博文約禮亦非二事, 而異時之深純亦不外乎今日之勉强也.

 

 

()의 생각에 성()을 망령되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면으로부터 (살펴) 외면의 일에까지 달하게 하면 저절로 외면의 공부가 해이해지지 않을 것이라 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외면의 일을 바탕으로 하여 내면을 수양하면 비로소 내면의 이치와 부합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안자의 네 가지 하지 말 것[四勿]’과 증자의 세 차례 반성[三省]’과 널리 문장을 배워 예로 요약하는 것[博文約禮]행동거지에서 낯빛을 바르게 하는[動容正顔]’ 일 등은 모두 외면의 일에 힘입어 내면을 수양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학자는 오직 모두 여기에 뜻을 두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竊妄謂性之者多由內以達諸外, 而自不廢夫在外之功; 反之者多資外以養乎內, 而始有契夫內之理. 顔子四勿’, 曾子三省’, 與夫博文約禮動容正顔之事, 皆資外養內之事也. 今之學者唯當悉意於此.

 

하지 않고’ ‘반성하는것 역시 내면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요컨대 안과 밖의 일은 판연하게 나눌 수 있는 두 가지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勿之省之亦由內, 要之內外不是判然兩件事也.

 

()의 생각에 선생께서는 사람을 가르침에 다만 사람이 공경함을 지켜 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며, 극기로써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바라시니, 그 조목들 간에는 도리어 별도의 여러 단서를 말씀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竊謂先生敎人, 只是欲人持敬致知, 克己以復其性, 其間條自却自多端.

 

스스로 공부해나가면 곧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니, 그 같은 범범한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自做功夫看, 卽自見得, 不須如此泛問也.

 

()의 생각에 (선생께서) 경재잠(敬齋箴)뒷부분에 말씀하신 것은 약간은 강제하는 뜻으로 선생께서는 재차 몇 말씀을 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지키게 하려 하신 것 같습니다만 거의 지켜질 수 없음이 너무 심하니, 편안히 즐기지 못하는 폐단에 빠지게 됩니다.

敬齋箴後面似少從容意思, 欲先生更著數語, 使學者遵守, 庶幾無持之太甚, 轉不安樂之弊.

 

전에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前已言之矣.

 

()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친구가 유휘(劉輝)가 적손(嫡孫)으로써 승중(承重)했던 일을 일러주어, 마침내 주()에 말하여 조정에 청하도록 해서 법도에 따라 행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범탁공(范蜀公: 范鎭, 1008-1089)이 이런 일에 대해 논의한 것을 보고서야 유휘가 구차하게 그렇게 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순필(舜弼)은 시종일관 이 일은 다만 중론을 따라야 마땅하다고만 합니다. 지금의 일은 이미 손 쓸 수도 없습니다만 친구 간에 불행히도 이런 일로 마주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는지요?

祖妣捐棄, 朋友以劉輝嫡孫承重事見告, 遂申州以請干朝, 續準報許. 後見范蜀公亦嘗論及, 乃知非苟然者. 舜弼始終以爲此事只當從衆. 今事已無及, 但朋友間不幸而値此, 不知當如何?

 

아버지가 조부의 적장자고 본인이 아버지의 적장자라면 마땅히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주 노릇을 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지난날에 행했던 일이 지나치게 도탑기는 했지만 또한 후회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친구가 물어오면 당연히 예법과 형률에 따라서만 일러줄 뿐이지 친구에게 자신의 잘못을 따르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마땅히 이치에 따라 법을 준수하라고 말할 뿐이지 중론을 따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若父是祖之嫡長子, 己是父之嫡長子, 卽合承重無疑. 如其不然, 則前日之擧爲過於厚, 亦不必以爲悔也. 朋友之問, 則但當以禮律告之, 不可使人從己之誤也. 當言循理守法, 不當言從衆.

 

()은 예전에 이천(伊川)이 평소에 남의 묘지(墓誌)를 지어주지 않겠노라고 결정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선친인 태중(太中: 程珦)과 명도(明道)의 경우에는 도리어 묘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숙부와 질녀 등을 위해서는 손수 묘지를 짓기도 했는데 이는 어째서입니까?

嘗疑伊川平日斷不肯與人作墓誌, 不知其意何在. 至太中及明道, 又却用之. 而其叔父姪女之類, 亦復自作, 何也?

 

이천선생(伊川先生)은 처음부터 묘지를 짓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글을 잘 쓸 수 없었거나, 또 혹은 그 사실만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 지었을 뿐입니다. 문집에도 숙부의 묘지명이 있는 것은 집안에 베푼 것이니 앞의 두 가지의 우려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伊川先生初無斷不作志之說, 疑以不能甚工於文, 又或未必得其事實, 故少作耳. 集中亦有叔父墓誌者, 施之於家, 可無前二者之慮也.

 

()의 집에는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하던 사업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 숙부에게 여쭈어 각각 사람 수대로 생활용품을 장만하여 당 앞에 쌓아 놓고 오래도록 단란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도 뜻을 알기가 어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家中舊有祖産, 今欲禀家叔諸房, 各以人口多少備辨經用, 儲之堂前, 以爲久遠團欒之計. 然衆志難諧, 未有所處.

 

여러 사람들이 각각 일년의 살림살이를 장만하는데, 마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문제는 충분히 생각하고 널리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니, 성급하게 서둘러서는 안 될 듯합니다.

諸位各辨歲計, 其力不能辨者如之何? 此須熟慮, 博訪其宜, 不可草草也.

 

()이 상()을 마치자 친척과 붕우들이 부()에서 보는 과거에 응시하라고 권하였지만 병 때문에 보지 못하였습니다. 혹 교관(敎官)은 사록(祠祿)을 청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은 우선 전에 지녔던 뜻을 지키며 병든 몸을 조리하고 글을 읽고자 합니다.

免喪之後, 親戚朋友勸以赴部, 以病不能行. 或以爲敎官可以請祠, 欲姑守前志, 且爲養病讀書計.

 

벼슬하지 않으려는 것이 어떤 의도에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스스로 대의(大義)를 가지고 판단할 일이지, 남에게 물을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벼슬하지 않는데 정당한 의리가 없다면 가난 때문에 벼슬하는 경우는 옛사람 가운데에도 있었으니, 그렇게 물러설 필요는 없습니다.

未知不仕之意有何義理? 只可自以大義裁之, 不須問人, 亦非它人所能決也. 若無正定義理, 則爲貧而仕, 古人有之, 不須如此前却也.

 

()은 일찍이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자 하면 마땅히 보육 사부의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하고, 사풍(士風)이 아름답고자 하면 마땅히 선비를 가르치고 취하는 법이 바루어져야 하고, 관리의 도가 양심적이고자 하면 마땅히 그 직임이 오래되어야 하고, 민속이 두텁고자 하면 마땅히 예악이 흥기하여야 하고, 갑병이 강하고자 하면 마땅히 우병(㝢兵)을 둔 뜻을 본떠야 하고, 재용이 족하고자 하면 마땅히 농사에 힘씀을 급하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嘗謂欲君德之美, 當重保傳之選; 欲士風之美, 當正敎取之法; 欲吏道之(6-3262), 當久其任; 欲民俗厚, 當興禮樂; 欲彊甲兵, 當倣寓兵之意; 欲足財用, 當急農桑之務.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다시 독서 궁리하여 고금 성현들이 대처한 방법을 널리 관찰하여야만 비로소 실제적인 쓰임이 있게 되어 빈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大槪是如此. 然須更讀書窮理, 博觀古今聖賢所處之方, 始有實用, 不爲空言也.

 

()은 후세 인재가 진작되지 못하고 사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과거를 치루는 제도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도의 빈흥(賓興)의 논과 이천의 간상(看詳)의 제도를 쓴다 하더라도 지금 학교를 담당하는 자들이 모두 과거를 통해 배출된 자들이니, 어찌 갑자기 변화되어 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謂後世人才不振, 士風不美, 在於科擧之法. 然使便用明道賓興之論, 伊川看詳之制, 則今之任學校者皆由科擧而出, 亦豈能遽變而至道哉?

 

명도가 말한 것은 시종본말의 차례가 매우 분명하고, 이천이 세운 법은 임시로 그러한 조짐을 만든 것이 뿐입니다. 그러나 현재를 바꿔서 과거를 좇으려고 한다면 또한 이런 비전을 좇아 점점 변화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처음에는 (뒤틀린 것을) 바로잡느라 힘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오래되어 성숙하게 되면 자연히 크게 변할 것입니다.

明道所言, 始終本末次序甚明, 伊川立法, 姑以爲之兆耳. 然欲變今而從古, 亦不過從此規模以漸爲之. 其初不能不費力矯揉, 久之成熟, 則自然丕變矣.

 

()은 생각건대 석가노자의 학문이 어그러지고 잘못된 까닭은 단지 치지(致知)하지 못한데서 연유하는데, 다만 도리에 근거해서 보면 자기의 심정이 내키는 대로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 유자의 도와는 배치되는 곳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성인에게 통하기를 구하게 한다면 그들이 이르는 곳이 어찌 소소하겠습니까? 또 일찍이 석가 노자의 학문이 구하는 것이 성하고 되고 쇠하게 되기 때문인데, 석씨는 마음에 주하여 그 근본 상에 나아가서 힘을 쓰는데 인연하는 까닭에 오래되면 더욱 성하게 되고, 노씨는 몸에 주하여 그 잡은 것이 또한 쇠잔해지고 협소해지는데 인연하는 까닭에 오래되면 미약하고 깎이게 됩니다.

釋老之學所以舛謬, 只緣不能致知, 但據倫見直情徑行, 所以與吾道背馳. 使其能求通於聖人, 則其所至豈小小哉. 又嘗求二氏之學所以盛衰之故, 釋氏主於心, 緣其就根本上用力, 故久而愈熾; 老氏王於身, 緣其所執亦淺狹, 故久而微削.

 

우선 의리를 익숙하게 관찰하여 오래되면 자연히 정밀해질 것이니, 이와 같이 고정된 사법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且熟觀義理, 久之自然精密, 末須如此椿定死法也.

 

()의 외가는 ()’씨 성인데, 외조부가 일찍 죽자 외증조부가 한명의 대씨 성을 가진 자를 복자(復子)하였습니다. 대씨가 아들이 없이 외동딸만을 남겨 두고 죽자 외삼촌이 그를 위해 3년 상을 치르고 조상의 무덤에 합장하고 가족 사당에서 제사 지냈습니다. 누차 외삼촌에게 아뢰기를 대씨를 다른 곳에 장사지내고, 외조부를 외조모 곁에 합장하고(옳지 않다), 대씨의 제사를 벗어버리고, 그 딸로 하여금 제주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을 헤아려 나누어 그녀로 하여금 예를 갖추게 해야 합니다. 일이 지금 아직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벗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후사()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外家, 外祖早世. 外曾祖復子. 姓者. 死無子, 只一女, 舅氏爲之服三年喪, 且合葬租犖, 祠之家廟. 屢禀之舅氏, 戴氏莽之它所, 改外祖合(6-3263)葬外(不是)祖母之側, 戴氏之享, 使其女主之. 量分産業, 使之備禮. 事今雖未行, 而朋舊多以爲然. 續又思之(云云.)

 

처음 이야기는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 구절은 옳지 않음이 있으니, ‘하광(河廣)’편의 뜻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사(又思)’ 이하의 내용도 잘못입니다. 불공대천은 부모가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인 자가 죽지 않은 것이니, 여기에 옮기는 것은(여기에 옮겨다 말 한 것은) 그 이치(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예경에서 무엇 때문에 복을 입는 것을 제정했겠습니까? 남편이 죽고 재가를 하는 것은 본디 절개를 잃은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성인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제정해서 그 사람의 문제를 처리한다하더라도 어미는 그 제사에 참여할 수 없으니, 처를 폄하하는 것 또한 분명하게 됩니다.

初說甚善, 然亦有一句未是, 河廣之義推之可見. ‘又思以下, 則又過矣. 不共戴天, 謂父母見殺而其人不死者耳, 移之於此, 似非其倫. 若果如此, 禮經何爲而制服邪? 夫死而嫁, 固爲失節, 然亦有不得已者, 聖人不能禁也. 則爲之制禮以處其子, 而母不得與其祭焉, 其貶之亦明矣.

 

()은 친구들 사이에 많은 이들이 부모의 나이를 늘려서 나라의 은택을 바라다가, 또 후회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형제간에 굳이 그것을 청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 통의 글을 써서 주현(州縣)에 올려 앞의 일을 고치고 다시 주현에서 이러한 뜻을 갖추어 성부(省部)에 아뢰게 하여 이를 조회한 다음에 확실하게 결정짓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見朋友間多有增親年以希恩霈者, 且悔之, 又恐兄弟間有堅欲陳乞者. 以爲不若作一狀子刺破, 乞備申省部照會, 方爲堅決.

 

형제가 만약 청하고자 하면 다만 부모의 나이를 속여 임금을 속일 수 없다는 뜻을 자세하게 진술하면 충분한데, 하필 그런 흔적을 남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兄弟若欲陳乞, 但委曲爲陳不可誣親以欺其君之意足矣, 何必作此痕迹邪?

 

()이 친구들과 본적(本籍)을 속이고 시험에 응시하는 문제를 변론하다가 그런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고 했더니, 여국수(余國秀)만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부디 한 말씀해 주시어 사람들의 마음을 정하도록 해 주소서.

因與朋友論及冒貫赴試事, 以爲豈可不攻. 國秀以爲不須攻, 幸一言以定衆志.

 

어떤 식으로 공격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관리를 통해 글을 올려 두루 약속을 행하기를 청한다면 무방하지만, 만약 그 사람의 이름을 지적하여 고시하여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공격한다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不知要如何攻? 若只經官陳狀, 乞泛行約束, 卽不妨. 若指名告示, 聚衆毆擊, 則非所宜矣.

 

()은 생각건대 명덕신민은 자기 한 몸의 일이 아니니, 모두 공부를 마친 후에야 바야흐로 가서 신민을 하고 미치는 바 만나는 바에 따라 그것을 할 뿐입니다.

竊謂明德新民不是自己一切事都做了後, 方去新民, 隨所及所値而爲之耳.

 

두 말이 다 문제가 있습니다.

兩語有病.

 

지선은 만 가지 이치가 다 밝혀진 것이니, 각각 그 지극한 것에 나아간 연후에 이르게 됩니다.

至善乃萬理盡明, 各造其極, 然後爲至.

 

지선은 자연스러운 도리이니, 이와 같이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至善是自然底道理, 如此說不得.

 

지선(至善)은 요 문왕이 성스러움을 행하는 것과 탕 무가 정벌하는 것, 주공이 신하가 되는 것, 공자가 스승이 되는 것, 이윤이 지조를 행하는 것, 안자가 학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지선은 자기에게 있으면 천명의 성이 되고, 일에 있으면 솔성의 도가 되고, 천하에 미루면 수도의 교가 되니, 이것은 성인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배우는 자라면 가르침 상에 나아가서 향상을 구해 가서 지극 처에 도달하는 것이니, 모두 단지 일반이니(똑 같으니) 원래 더하고 덜 것이 없습니다.

至善, 堯舜文王之爲聖, 湯武之爲征伐, 周公之爲臣, 孔子之爲師, 伊尹之爲志, 顔子之爲學. 又謂至善在己, 則爲夫命之性; 在事, 則爲率性之道; 推之天下, 則爲修道之敎, 此聖人之事也. 若學者, 則就敎上尋求向上去, 到得極處, 皆只一般, 元無加損.

 

설명이 옳지 않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긴요하지 않은 말들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說得未是, 亦不須如此閑說.

 

그칠 곳을 안다능히 얻는다.’ 번은 예전에 뚫린 듯이 가리움이 없는 것이 앎[]를 말하고, 확고하게 내실이 가득찬 것이 얻음[]을 말하니, 밝으면 정성스러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知止能得’, 嘗謂洞然無蔽之謂知, 確然有實之謂得, 明則誠矣.

 

근사하기는 합니다만 말이 분명하지 못합니다.

近之, 但語未瑩.

 

밝게 선을 알고, 정성스럽게 몸을 얻는다.

知善之明也, 得身之誠也.

 

근사합니다.

近之.

 

생각[]’이란 앎이 더욱 정밀해지고, 생각이 이르는 곳마다 두루 다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謂知之尤精而心思所値無不周悉.

 

옳습니다.

.

 

()의 생각에 그칠 곳을 알면 뜻이 미혹되거나 어지럽지 않아 안정된 방향을 갖게 되고, 뜻이 안정되면 이 마음에는 어지러움이 없어 고요하게 되며, 마음이 고요하면 이 몸은 가는 곳마다 편하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몸이 편안하면 쓰임은 저절로 이롭게 되고, 사물이 다가 오더라도 특별히 일에 나아가 이치를 파악하지 않더라도 또한 일에 앞서서 예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갑으로 3일 후라거나 경으로 3일 후라고 말한 것은 그 일의 처음과 끝, 앞과 뒤, 이미 일어났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모두 교훈을 두어 어떤 경우에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다음에 그 그칠 곳을 얻는다면 참으로 이 선함이 있고, 또 참으로 극히 옳다고 할 만합니다.

謂知止則志不惑亂而有定嚮, 志定則此心無擾而靜, 心靜則此身無適而不安. 心靜身安則用自利, 事物之來, 不特能卽事見理, 又能先事爲防. 後甲三日後庚三日之云, 其於事之終始先後已至未然皆無遺鑒, 皆無失擧矣. 如是而後爲得其所止, 則可以謂之誠有是善而誠極是矣.

 

이 문단은 좋습니다.

此段得之.

 

()의 생각에 이란 그 소당연을 아는 것이요, ‘생각이란 (소당연과) 함께 그렇지 않은 것까지를 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則知其所當然, ‘則幷極其未然.

 

앎이란 한가한 때에 아는 것이요, 생각이란 손에 이르른 다음에 반드시 처리가 올바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知是閑時知得, 慮是到手後須要處置得是.

 

번의 생각에 그칠 곳을 안다는 것은 밝기는 하지만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는 것이요, ‘그칠 곳을 얻었다고 한다면 하나하나 모두 정성스러운 것입니다. 지극한 정성스러움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 위에는 또 측량할 수 없는 변화의 단계가 있습니다.

知止有明而未誠處, ‘得止則一一皆誠矣. 到得至誠田地, 上面更有變化不測在.

 

꼭 이렇게 생각을 닫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자를 보면서 해당 부분의 의리를 이해했다면, 점점 의미가 깊어가야 좋은 것이지, 이렇게 지리하게 이해하면 일을 다스리지도 못하게 됩니다.

未須如此閑思想. 看文字且理會當處義理, 漸覺意味深長乃佳, 如此支離, 不濟事也.

 

번의 생각에 󰡔대학󰡕의 뜻은 공경함을 유지함으로써 앎의 근본을 기르고, 격물을 통해 앎의단서를 넓혀서, 내 마음의 허명하고 통철함이 감촉되지 않는 것이 없게 만들면 시비의 당부가 각각 드러나고 지극한 선의 소재도 저절로 가리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순필(周舜), “그칠 곳을 안다는 것은 모든 이치를 다 밝게 알아야 그칠 곳을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에는 곧 하나의 이치가 있게 마련이니, 알고 있는데에 나아가 그칠 곳을 구하여 얻는 것이다. 이른바 능히 얻는다는 것은 기거동작(起居動作)이 각각 법칙에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에서 그칠 곳을 얻은 것이 다 지선(至善)인 것이다. 만약 반드시 기거동작이 법칙에 맞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장차 학자들로 하여금 죽을 때가지 다시는 그칠 곳을 알아서 그칠 곳을 얻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大學之意當持敬以養其所知之本, 格物以廣其所知之端, 使吾心虛明洞徹, 擧無不燭, 則是非當否各以呈露, 而至善所在自不容有所蔽矣. 周舜弼以謂知止者, 非萬理倂皆昭徹然後謂之知止, 一事便有一理, 卽其折知而求得其所止. 所謂能得者, 非是動容周旋各當其則, 一事得其所止, 如仁敬孝慈之類, 皆爲至善. 若必以動容周旋當則言之, 則將使學者沒世窮年無復可以知止而得其所止矣.

 

()에서 말한 것은 바로 학문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아는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얻는 데에는 크기의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어서 일괄적으로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經之所言是學之等級, 然知有淺深, 得有大小, 存乎其人, 難以一槪論也.

 

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 ()은 선후 가운데는 또 무겁고 가벼움의 차이가 있으니, 본말의 선후는 무겁고, 시종의 선후는 가볍다고 생각합니다.

物有本末, (云云). 謂先後之中更有輕重, 本末之先後重, 始終之先後輕.

 

꼭 이렇게 나누느라 생각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는 또한 이와 같지 않으니,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할 것입니다.

不須如此分別, 枉費心思, 道理又不如此, 無益而有害也.

 

번의 생각에는 주의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구절 아래는 자기에게서 미루어보려는 뜻이 적은 것 같습니다.

謂注文於明明德於天下者之下, 似少自己推之之意.

 

경문의 순서가 이미 그 자체로 상세한데 무엇 때문에 설명을 더하겠습니까?

經文次序已自詳悉, 何用更說?

 

󰡔혹문󰡕밝은 덕을 천하에 밝힌다고 한 곳에서는 다만 성의정심수신만을 말하고, 치지를 말하지 않았고, 또 어버이를 친애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모신다는 말만 더하고서 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하지 않았는데, 그 뜻을 알고 싶습니다.

或間於明明德於天下處, 只言誠意正心脩身, 而不及致知, 又益以親親長長而不及齊家洽國平天下, 願聞其指.

 

치지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요, 어버이를 친애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는 것은 제가를 위한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致知所以明之, 親親長長卽齊家之大者.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일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가운데서 최고의 일이니, 그 쓰임은 더욱 넓으며 법은 더욱 상세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의 글을 살펴보면 모두가 감동하여 발흥시키고 유지시키려는 뜻은 있는데, 다른 것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소략함을 벗어나지 못한 듯 합니다.

平天下之事, 蓋新民之極功, 則用益廣而法宜益詳. 今考傳文, 則皆感發維持之意, 而不及乎它, 似未免乎略.

 

평천하장은 혈구의 도로 미루어서 재물과 이익을 똑같이 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을 공정하게 하는 일을 자세하게 말했으니, 그 법도가 상세하다고 할 만 한 데 어떻게 소략하다고 하겠는가?

平天下章以絜矩推之而詳言同貨利公好惡之事, 其法可謂詳矣, 何謂略耶?

 

󰡔대학󰡕 9장에서 그 집안을 가르칠 수 없다[其家不可敎]”고 했는데, 저는 ()’자가 ()’자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大學傳九章 其家不可敎’, 竊疑 字當爲 .

 

그가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내가 교육될 수 없는 것이다. ‘은 그와 나[彼此]를 나누는 말이다. 만일 집에서 가르칠 수 없다고 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彼之不可敎, 卽我之不能敎也. 可之與能, 彼此之詞也. 若作家不能敎, 則不詞矣.

 

󰡔대학󰡕의 전 9장은 대개의 내용이 모두 몸소 행하는 일들이지 정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8장 역시 그렇습니다.

傳之九章, 大率皆躬行之事, 而未及乎爲政, 八章亦然.

 

나라에서 가르침이 이루어진다면 정사를 베푸는 것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다만, 반드시 몸소 행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기 때문에 특별히 자세히 말한 것일 뿐이니, 본말과 경중이 본시 자체로 다릅니다.

(6-3267)成敎於國, 則政事之施在其中矣. 但須以躬行爲本, 故特詳之, 本末輕重固自不同也.

 

송걸(宋傑)이 일찍이, ‘친애(親愛)하는 바에 편벽된다는 말에 힘을 써서 형의 자식을 늘 내 자식처럼 사랑하고자 하여 매번 제오륜(第五倫)을 귀감으로 삼고자 했지만, 결국은 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형의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비중이 더 컸습니다.

宋傑嘗於 親愛而辟上用功, 如兄之子, 常欲愛之如己子, 每以第五倫爲鑒. 但愛己子之心終重於愛兄之子.

 

늘 그렇게 하고자 한다는 것은 곧 제오륜이 자다가 열 번 일어나서 살펴 보았던 마음이니, 모름지기 천리(天理)가 발현(發現)하는 본연(本然)의 모습을 보았으면 대처함에 있어서는 비록 차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가 하나인 것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常欲二字卽十起之心也. 須見得夫理發見之本然, 則所處厚薄雖有差等, 而不害其理之一矣.

 

()이 근래 집안에서 한두 가지의 일을 처리하다 보면 곧 위아래로 통하지 아니하여 의욕이 줄어드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마침내 치워버리고 묻지 않고자 하면 또 모든 일이 정돈되지 않습니다. 우선은 자신에게서 이해하고, 다른 것들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자잘하게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近於家間區處一二事, 便覺上下暖隔, 情意寖薄. 欲遂置而不問, 則諸事不整. 不知且只於身上自理會, 莫屑屑間它如何?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 ‘위엄이 있으면 길하다고 한 것은 자신에게 돌이켜 살피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威如之吉, 反身之謂也.

 

송걸은 예전에 (󰡔대학󰡕) 전문(傳文)에서 수신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논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매번 자신을 극복하는 데 힘써서 자못 상당한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경자(敬子)는 옳지 않다고 여기고서 논의로 치자면 당연하다 하겠으나 반드시 기뻐하고 화내는 것이 절도에 들어맞아야 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송걸이 지금 말하는 힘을 얻었다는 말은 뜻이 편안한 것에 따라서 힘을 쏟는다는 것으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경지를 깊이 체찰한 것은 아닙니다.

宋傑嘗觀傳文論脩身在正其心, 嘗每用力自克, 亦頗得力. 敬子不以爲然, 以謂若論是當, 須還是喜怒中節乃可. 宋傑今日之所謂得力者, 乃是隨意之所便者以致力, 而實未深察夫不能自已者也.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효는 지식이 지극해지고 뜻이 성실해지는 가운데 저절로 이뤄지는 것 같으니, 그렇다면 모름지기 이와 같이 안배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루어지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아직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또한 (자신의) 힘과 분수에 따라 성찰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니, 이처럼 의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격물하는 것에서부터 공부한다면 이내 먼저하고 나중에 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正心之功若自知至意誠中來, 則不須如此安排而自無不正矣. 末到此地, 則亦隨力隨分省察持守可也, 不須如此計較. 且向格物處用功, 乃爲知所先後耳.

 

()이 생각하건대 喜怒憂懼는 마음이 진실로 통솔하는 것인데, 통솔함에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있어서 가 명령을 듣지 않으면 반드시 이 네 가지의 병폐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학자는 진실로 하나하나에 힘을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 통솔이 바르지 않으면 또한 그 온전한 성과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謂喜怒憂懼之氣心實帥之, 帥稍動搖, 氣不聽命, 則必有是四者之累. (6-3268)者固當逐件上用功, 然非先正其帥, 亦未見其爲全功也.

 

이와 같다면 󰡔대학󰡕 ()의 본 뜻과 완전히 어긋나게 됩니다. 시험삼아 다시 추론해 보는 것이 어떨지요?

如此則與此傳文意全然背戾矣. 試更推之, 如何?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은 그 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고, ‘마음을 바루고자 하는 것(正心)’은 그 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성의란 진실로 나에게서 발한 것이며 내가 명한 것이니, 마음이 바르게 되면 물을 것도 없이 感發이 적연해져서 본체가 항상 보존된다고 합니다.

誠意謹其發, 正心存其體. 又曰誠意者, 實所發於我而我命之, 心正則不間寂感而本體常在.

 

두 조목에서 뜻이 성실해짐[意誠]’을 설명한 것은 모두 온당치 않습니다.

兩條說意誠皆未安.

 

송걸은 예전에 전 6장을 주석하는 글에서 스스로를 속임[自欺]’홀로를 삼가는 것[謹獨]’에 대한 해석을 본 적이 있는데, 모두 물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혹문󰡕에서는 기품을 겸하여 말해서, (󰡔혹문󰡕의 내용이) 온전히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宋傑嘗觀傳之六章注文釋自欺謹獨處皆以物欲爲言, 或問則兼氣稟言之, 似爲全備.

 

이곳은 의심할 필요가 없으니, 말과 뜻에 그 자체로 상세하고 소략한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此等處不須疑, 語意自合有詳略處也.

 

송걸의 생각에 물욕에 동요되면서도 선을 가장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판별하기도 쉽고 다스리기도 쉬우나, 기품이 탁하여 선을 행함이 절실하지 않는 것은 판별하기도 어렵고 다스리기도 어렵습니다. 기품의 위해함을 정밀하게 살펴, 능히 다스리고자 한다면 어떤 방법이 마땅하겠는지요?

宋傑竊謂動於物欲而假善以自欺, 易識而易治; 雜於氣稟而爲善之不切, 難識而難治. 欲得精察氣稟之爲害而克治之, 當以何道?

 

경문을 고찰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考之經文可也.

 

()은 평상시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 감정을 상하면 남에게 베풀 때에도 억지를 부리고 고집을 피우면서 받아들이고 기르려는 뜻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정말로 이와 같은 데도 병폐가 뒤따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居常好善惡惡, 覺得直是分明. 然或至自傷其和, 而施之於人亦多彊猛固必, 而無容養之意. 夫好惡眞切如此而病復隨之者, 何哉?

 

그러한 점들이 병통임을 자각(自覺)했으면 스스로 다스릴 것이니 남에게 물을 것이 없고 또 남이 간여할 일도 아닙니다.

此等處自覺是病, 便自治之, 不須問人, 亦非人所能預也.

 

강숙림(康叔臨: 康淵)은 하나의 사물의 이치에 이르면(物格) 하나의 지식이 지극해진다고 여기나, 제가 생각하기에 이른바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는 것(物格)’은 곧 모든 이치가 함께 궁달(窮達)하게 되고 서로 통달하게 되며 사리가 밝고 뛰어나게 되어 더 이상의 남음이 없게 될 것이니, 그런 후에야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의 사물에 밝아져서 하나의 지식에 나아간다고 한다면 옳겠으나, 하나의 사물에 이른 후 하나의 지식이 지극해졌다고 한다면 옳지 않습니다.

康叔臨()以爲一物格則一知至, 謂所謂物格者, 乃衆理俱窮, 相發互通, (6-3269)以至透徹, 無復餘蘊, 然後爲格. 若謂一物明一知進則可, 一物格一知至則不可.

 

이천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오늘 하나의 일에 이르고, 다음 날 하나의 일에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伊川先生: ‘今日格一件, 明日格一件.’

 

숙림(叔臨)은 또 󰡔혹문󰡕에서 안팎이 밝게 융화된다고 한 것에 대해 안[]은 이치가 자기에게 있고, []은 이치가 사물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叔臨又謂或問所謂內外昭融, 內謂理之在己者, 外謂理之在物者.

 

안은 이치의 은미한 곳을 일컫고, 밖은 이치가 두루 미치는 곳을 일컫습니다.

內謂理之隱微處, 外謂理之周偏處.

 

()은 석씨(釋氏) 격물에 힘쓰지 않고 다만 저절로 알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나의 뜻이 맑게 정립된다 해도 보는 것이 두루 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유학자는 고요함으로 그 지식의 근본을 기르고 움직임으로 그 지식의 단서를 넓히니 두 가지는 서로를 진보시키는 것으로 빠뜨림 없이 정밀하게 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 두루 다하여 자연스럽게 저절로 갖춰지는 가운데 온전하게 됩니다.

釋氏不務格物, 而但欲自知, 故一意澄定而所見不周盡. 吾儒靜以養其所知之本, 動以廣其所知之端, 兩者互進, 精密無遺, 故所見周盡而有以全其天然自有之中.

 

대략은 그럴 듯하나 미진합니다.

大槪近之, 然亦未盡.

 

󰡔혹문󰡕에 그 지극함에 나아가되 남음이 없게 하여, 나아갈 바에 따라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여기기에 그 지극함에 나아가는 것은 성취와 같은 것이며, 그 나아갈 바를 따르는 것은 마치 물이 수로를 따라 이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或間所謂詣其極而無餘, 隨斫詣無不盡, 謂詣其極猶渠成, 隨所詣猶水隨渠至.

 

비유가 정밀하지 않고, 또 이처럼 묘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譬喩未精, 然亦不須如此模寫.

 

정선생(程先生)께서는 학자가 도를 아는 것은 반드시 호랑이를 아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은 위세나 법도에 의해 다구침을 당하지도 않고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며,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없이 즐겨 하는 것이 참된 앎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고서 익히고, 익히고서 익숙해지며, 또 정치하게 생각한 뒤에 점점 그 참됨을 얻는 것이니, 한 가지를 아는 것이 곧바로 다 꿰뚫는 것은 아닙니다.

程先生說學者之知道, 必如知虎者. 謂不待勢法迫驅而自不能已, 無所爲而樂於爲之者, 眞知者也. 然知而習, 習而熟, 又精思而後浸得其眞, 非一知卽能洞徹也.

 

이 또한 중간 단계의 사람으로 말한 것으로, 앞에서 대충 논했습니다.

此亦以中人言之, 前已略論之.

 

송걸은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을 만나면 곧장 흔들리며 두 번 세 번을 읽습니다. 그러다 끝내 이해하지 못하면 곧장 버려두고 다시 묻지를 않는데, 그의 병폐는 어디에 있습니까?

宋傑讀書, 遇曉不得處, 卽掉下再三讀之. 竟不曉, 卽置不復問, 不知其病何在?

 

바로 이렇게 하는 데에 그의 병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其病在是.

 

고금의 인물을 논하면서 그들의 시비를 구별하다(송걸)

論古今人物而別其是非(宋傑)

 

사람의 잘못과 악행을 어떻게 가볍게 논하겠습니까? 다만 말없이 살피고서 자기에게 돌이켜 보고, 그러고도 간혹 분명치 못하면 조심스럽게 스승이나 벗들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밖으로는 떠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人之過惡, 豈可輕論? 但黙觀之而反諸己, 或有未明, 則密以資於師友而勿暴於外可也.

 

천지가 높고 깊은 이유를 논한다()

論天地之所以高深

 

하늘의 바깥은 끝이 없지만, 그 중앙의 빈 곳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늘의 왼쪽으로 회전하고, 별들은 북극성을 감싸고 돈다는 것은 위를 쳐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별들이) 사방으로 노닌다는 설명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역법가들의 설명으로서 수를 계산해서 얻은 것이지 쓸데없이 천착해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실제로 그런게 있다면 또한 하늘이 왼쪽으로 회전하고, 별들이 북극성을 감싸고 돈다는 설명과도 배치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허공 가운데 하나의 동그란 공이 있다면, 그 안에서 보면 앉은 방위가 일정하면 언제나 왼쪽으로 회전합니다. 그런데 밖에서 본다면 즉 한쪽 측면이 사방으로 노닐면서 네 끝에 가서야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天之外無窮, 而其中央空處有限. 天左旋而星拱極, 仰觀可見. 四遊之說, 則未可知. 然曆家之說乃以算數得之, 非鑿空而言也. 若果有之, 亦與左旋拱北之說不相妨. 如虛空中一圓毬, 自內而觀之, 其坐向不動而常左旋; 自外而觀之, 則又一面四遊, 以薄四表而止也.

 

강절은 하늘과 땅이 서로에게 의지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의 생각에 이 설명과 주자(周子)의 태극도 및 정자(程子)움직임과 고요함에는 단어가 없고, 음양에는 시작이 없다는 뜻이 일치하니, 역법가들이 엿보고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康節天地自相依附之說, 以爲此說與周子太極圖程子動靜無端陰陽無始之義一致, 非曆家所能窺測.

 

강절의 말은 큰 내용이 본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역법가들의 설명도 반드시 살펴보아야만이 세밀한 곳까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기󰡕 「월령편의 소() 및 진나라[]천문지또한 다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요사이 󰡔천경󰡕이란 제목의 책을 보았습니다. 요즘 사람의 작품이었을 뿐이었습니다만 하늘을 설명한 고금의 내용들을 종류별로 모았는데, 아주 잘 갖추어진 것이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본 적이 있습니까?)

康節之言大體固如是矣, 然曆家之說亦須考之, 方見其細密處. 禮記月令(6-3271)晉天文志皆不可不讀也.(近見一書, 天經, 只是近世人所作, 然類集古今言天者極爲該備, 不知曾見之否?)

 

귀와 신이 드러나고 숨겨진 까닭에 대해 상채는 그치지 않고 움직이니 그것은 신인가? 정체되어 자취가 있으니 그것은 귀인가?”라고 했습니다. ()의 생각에 귀가 비록 움츠러들기는 하지만 오래되면 반드시 흩어질 것이니, 자취에 정체되어 머문다는 이치는 없을 듯 합니다…….

鬼神之所以幽顯, 上蔡: ‘動而不已, 其神乎? 滯而有迹, 其鬼乎?’ 謂鬼雖爲屈, 久而必散, 似無滯留於迹之理(云云)

 

신은 드러나고 귀는 숨습니다. 상채가 정체되어 자취가 있다는 말은 참으로 논하신 대로입니다. 그 나머지 대개의 내용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부자(夫子)께서 계로의 질문에 대답한 것도 당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神顯而鬼幽, 上蔡滯而有迹之語誠如所論, 其它大槪亦是如此. 然夫子所以答季路之問者, 又所當思也.

 

󰡔소학󰡕의 주에 따르면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과 손자가 조부모를 섬기는 것은 같다고 했습니다. ()의 생각에 여러 아버지[諸父]와 여러 어머니[諸母]들은 친함의 정도가 같으면 복제도 같겠습니다만 친함의 정도가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小學注子事父母孫事祖父母同. 謂諸父諸母親同服同, 而不及之者, 何哉?

 

여러 아버지들은 집을 달리하는데, 어떻게 다 찾아뵈면서 혼정신성의 예를 지키겠습니까? 게다가 설령 이와 같이 한다고 한다면 친부모만을 섬기는데 전심전력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공경에도 등급과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諸父異宮, 非可以徧詣而定省之. 且若如此, 則將不得專乎事父母矣, 此愛敬之等差也.

 

정선생(程先生)은 제계하면서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은 예전에 깨끗지 못한 것을 깨끗이 해서 귀신과 접할 수 있기를 구하며, 한 마음으로 제사지내는 어버이를 생각하는 것이 제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의편의 말도 잘못이 아닐성 싶은데 모르겠습니다만 그 뜻은 과연 어떻습니까?

程先生齊不容有思之說, 嘗以爲齊其不齊, 求與鬼神接, 一意所祭之親, 乃所以致齊也. 祭義之言似末爲失, 不知其意果如何?

 

제의편이 말이 대개 옳습니다. 이천선생(伊川先生)의 말은 최고 수준의 의논입니다. 드시 실제 일에 나아가 징험해야만 그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祭義之言大槪然爾, 伊川先生之言乃極至之論, 須就事上驗之, 乃見其實.

 

정선생은 치지의 요체는 지극한 선의 소재지를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멈추고 자식은 효에 멈춘다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고 했습니다. ()의 생각에 물()의 큰 뜻에는 각각 정치한 요체가 있어서, 만일 평범하게 구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거의 어지러워지기만 할 뿐 그칠 곳은 없게 될 것 같습니다.

程先生, 致知之要, 當知至善之所在, 如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謂物之大旨各有精要, 若泛求之, 殆亦徒爲紛紛, 無所底止.

 

이천선생이 논한 격물공부에 관한 몇 조목들은 한 가지 뜻으로 통틀어 보아야만이 서로 발명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 조목도 반드시 받들어 보살피고 따뜻하고 서늘함을 살피는 방법을 구하는 것과 통틀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伊川先生所論格物功夫數條須通作一義看, 方見互相發明處, 如此一條, 須與求其所以奉養溫淸之法者通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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