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권
書(知舊門人問答)
주붕손에게 답함 答朱朋孫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주붕손에게 쓴 편지이다.
긴 편지를 써서 깨우쳐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학문하는 방법을 논한 글은 당신이 지닌 고상한 뜻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학문이란 독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글을 읽지 않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길이 없기 때문에 글을 읽는 사람은 전일(專一)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방대하게 보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대개 전일해야 그 의미를 알아서 그 응용처를 얻을 수 있지만, 한갓 방대하게만 하면 도리어 혼란스럽고 깊이가 없게 보는 데에 시달려 아무런 소득이 없게 됩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여덟 권의 책을 읽으면 막막하여 그 요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상한 것이겠습니까? 부디 우선은 한 권의 책을 정밀하게 읽고 여유 있게 충분히 되새겨서 성학(聖學)의 공부와 차례의 실제를 찾은 다음 마음으로 깨달아 뜻이 이해되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래서 서책 외에 별도로 실제 공부를 하는 곳이 있은 뒤에는 다시 다른 책으로 바꾸어 조금씩 나아간다면 한 자 한 치씩 얻는 것이 비록 양이 적기는 해도 그것이 다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사수 정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려는 것은 참 좋습니다. 다만 늙고 병들어 여러 가지 깊은 생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정보에게 말해놓았으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長書垂示, 尤荷不鄙. 所論爲學之意, 又足以見雅志之所存也. 夫學非讀書之謂, 然不讀書又無以知爲學之方, 故讀之者貴專而不貴博. 蓋惟專爲能知其意而得其用, 徒博則反苦於雜亂淺略而無所得也. 今一旦而讀八書 則其茫然而不得其要也豈足怪哉? 願且致精一書 優柔厭飫 以求聖學工夫次第之實. 俟其心通意解, 書冊之外別有實下功夫處, 然後更易而少進焉, 則得尺得寸雖少, 而皆爲吾有矣. 欲爲沙隨程丈立祠甚善, 但衰病不堪思慮, 曲折已報余正父矣, 幸察之.
주순인에게 답함 周純仁
[해제] 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년, 69세)에 주순인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그 곳에는 서로 의지할만한 친구가 있고 날씨도 고개 넘어보다는 낫고, 또 고향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때때로 가까운 이들의 안부를 듣는다 하니, 조금 안심할 만합니다. 근래 시론(時論)이 점차로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는데, 어제 또 조정에서 관직에 임명한 사람들이 진실로 우리 도(道)에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그들 중에는 더러 귀양지에 있은 옛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자기의 분수를 지키려면 문을 닫고 들어가 앉아서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야지 절대로 제수된 일로 인하여 곧 망령된 생각을 일으켜서 한갓 분분하게 손실만 있고 이익이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고자 하는 책은 우연히 작은 아이가 시험 보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이미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사서 오는 사람에게 보내도록 했습니다. 숫자는 별지에 있으니, 점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부쳐온 돈(楮券)이 상당히 적어 쓰기에 부족하여 이미 수권(數券)을 용도 변경하여 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 사지 못한 것이 있고, 또 보충해서 인쇄해야 할 한서는 어떤 종이를 쓸지, 판형의 크기는 어떤한 지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이 감히 인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편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자세하게 알려 계속해서 인쇄해야 합니다.
한가한 중에 일이 없을 때에는 진실로 출입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한꺼번에 많은 책을 읽을 수도 없으면서 이처럼 전담자를 두어 수고롭게 왕래하게 하는 것은 역시 일을 줄이고 처지에 따라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병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약성(藥性)이 건조하고 열이 많은 약을 많이 복용하면 또한 사람의 혈기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여 화평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는 생명을 지켜주는 방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다시 더 깊이 스스로 성찰하여 몸과 마음을 수습한 뒤에 점차로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편안하고 조용히 물러나려는 뜻을 기르고 날아오르거나 조급하게 서두르려고 하는 기운을 가라앉혀 세상에 처신하고 사물을 응접함에 있어 자연히 안온해지는 한편, 일시에 크게 발전하여 다시는 전날처럼 안팎의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彼中旣有故舊可以相依, 氣候亦須差勝嶺外, 又在鄕里遠, 亦時得親闈安問, 於理似亦可少安. 年來時論似亦漸平, 昨日又聞廟堂一番除拜, 固不足爲吾道之重輕, 然於故舊或略能垂意. 但在自己分上只合閉門堅坐, 聽其所爲, 切不可因此便起妄念, 徒爾紛紜, 有損無益也. 所欲買書, 偶小兒赴銓未歸, 已爲託相識置到, 付之來人. 數在別紙, 可自檢點. 付來楮券殊少, 不足於用, 已爲兌數券買去. 然尙有不能盡買者, 及所補印漢書, 不知是要何等紙, 板樣大小如何, 其人未敢爲印. 有便子細報及, 當續爲印也. 閑中無事, 固宜謹出, 然想亦不能一倂讀得許多. 似此專人來往勞費, 亦是未能省事, 隨寓而安之病. 又如多服燥熱藥, 亦使人血氣偏勝, 不得和平, 不但非所以衛生, 亦非所以養心. 竊恐更須深自思省, 收拾身心漸令向裏, 令寧靜閑退之意勝而飛揚躁擾之氣消, 則治心養氣․處世接物自然安穩, 一時長進, 無復前日內外之患矣.
주순인에게 답함 答周純仁
[해제] 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년, 69세)에 주순인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질문 : 주역 「설괘전」 6장의 ‘신(神)이란 만물을 신묘하게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 이미 만물을 이룬다’에 대해 주역본의에서 이러저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위에서 육자(六子)는 문왕 8괘의 위치를 썼다고 말한 것은 때를 위주로 하여 작용을 완성하는 육자로써 말했기 때문에 사계절로 순서를 삼고 문왕 후천의 순서를 사용했습니다. 아래에서 복희 8괘의 순서를 썼다고 말한 것은 육자가 때를 위주로 하여 작용을 완성하는 까닭을 추론하여 말했기 때문에 음양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를 삼아 복희 8괘의 순서를 사용했습니다. 음양은 각기 그 짝과 합함으로써 육자의 작용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변화하고 만물을 모두 완성하는 까닭입니다. 복희 8괘에서, 태진(兌震)은 큰아들이 막내딸과 화합하고, 간손(艮巽)은 큰딸이 막내아들과 화합하니, 모두 非其偶然. 그러므로 ‘만물을 움직이는 것은 우레보다 빠른 것이 없다’ ~ ‘만물을 끝내고 만물을 시작하는 것이 산보다 성대한 것이 없다’에서는 육자의 작용을 모두 따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계절의 차례로 그것을 말했고 문왕 8괘의 순서를 사용했습니다. 아래에서는 그것이 작용하는 까닭, 음양이 각기 그 짝을 얻는 것을 추론했기 때문에 복희 8괘의 순서를 사용했습니다. 만약 위에서 복희 8괘의 차례를 따른다면 사계절이 그 순서를 잃게 되고, 아래에서 문왕 8괘를 사용한다면 태진간손(兌震艮巽)괘가 모두 그 짝이 아닙니다. 복희의 괘의 순서는 오늘날의 괘의 순서와 같지 않습니다. 공자께서 이를 창제하여 「서괘」를 지었습니까, 아니면 문왕․주공이 계사(繫辭)한 후에 이미 복희의 괘의 순서가 이와 같은데도 공자께서 특별히 「서괘」로써 그 뜻을 밝힌 것입니까?
답변 : 복희에게는 복희의 괘의 순서가 있고, 문왕․주공에게는 문왕․주공의 괘의 순서가 있을 뿐입니다.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止‘旣成萬物也’ 本義(云云). 某竊謂止言六子用文王八卦之位者, 以六子之主時成用而言, 故以四時爲序, 而用文王後天之序. 下言六子用伏羲八卦之位者, 推六子之所以主時成用而言, 故以陰陽交合爲義, 而用伏羲八卦之序. 蓋陰陽各以其偶合而六子之用行, 所以能變化, 盡成萬物也. 伏羲八卦, 則兌震以長男而合少女, 艮巽以長女而合少男, 皆非其偶然. 故自 ‘動萬物者莫疾乎雷’ 至 ‘終萬物始萬物者莫盛乎艮’, 皆別言六子之用, 故以四時之次言之, 而用文王八卦之序. 下則推其所以成用, 於陰陽各得其偶, 故用伏羲八卦之序. 若上用伏羲卦次, 則四時失其序; 下用文王八卦, 則兌震艮巽皆非其偶矣. 伏羲卦序與今卦序不同, 不知是孔子創爲之而作序卦耶, 抑自文王․周公繫辭之後, 已更伏羲之序如此, 而孔子特以序卦明其義耶?
伏羲自是伏羲卦序, 文王․周公自是文王․周公卦序.
주남중에게 답함 答周南仲 (南)
[해제] 이 편지는 아직 정확히 고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아래에 나오는 「두숙고에게 답함(答杜叔高)」이라는 편지를 보면, 이 편지의 첫 구절과 마찬가지로 ‘지난 해 호사(湖寺)를 찾아주시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이 편지를 쓴 시점은 호사(湖寺)에 머물다 돌아와 「두숙고에게 답함」을 쓴 시점과 대략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두숙고에게 답함」을 쓴 1188년 무렵의 편지로 추정할 수 있다.
지난 해 호사(湖寺)에서 한 번 뵙기는 하였지만, 병이 깊어져 남은 이야기를 진지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임금의 물음에 답하는 글을 보고, 이 시대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을 보고 깊이 탄복했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함께 만나 공부한 것을 강론할 수 없는 것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이제 당신의 편지를 받고, 또 채계통을 만나보니, 도를 함께하면서 서로 벗하고 절차탁마한다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요즈음 눈이 오고 날씨가 춥습니다. 당신에게 행복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저의 학문은 완고하고 둔한데, 나이 들어서야 스스로 믿게 되었습니다. 매번 당대의 도술(道術)이 분열되어 위에 있는 자들은 불가(佛家)나 노자(老子)에게로 빠져 들고, 아래에 있는 자들은 관자(管子)나 상앙(常鞅)의 학문으로 흐르는 것을 근심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이미 저마다 가깝고 편리하게 먼저 들어간 것을 위주로 하고, 게다가 고상한 것만 좋아하며 빨리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앞에 간 자들은 이미 자신을 그르친 것으로 마침내 자신을 속이게 되고, 뒤에 가는 자들은 이미 거기에 속아 다시 다른 사람을 속입니다. 그래서 문자가 매끄러울수록 변설(辨說)은 더욱 능란해져서 그 해로움이 더욱 심하니, 현명한 자가 아니고서는 그 누가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보내오신 편지에서 의심나는 부분을 물어 주시니 매우 고맙습니다. 대개 성현의 말씀은 이미 명백하고 진실하여 도리를 다 말했으니, 읽는 사람들은 다만 마음을 비우고 한 생각으로 순서에 따라 자세하게 읽으며 구절 안에서 한 글자도 통하지 않는 부분이 없게 한다면 그 도리에 대해 조금도 살피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하여 서로 속이기를 마치 구방고(九方皐)가 말의 관상을 볼 때 했던 말처럼, 망령되게 언어를 벗어난 세계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방빈왕(方賓王)은 편지를 보내 올 때마다 도리를 말하는데 곧 귀착(歸着)할 곳이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니 좋은 벗을 두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미 가화(嘉禾)로 돌아갔을 것 같습니다. 주숙근(周叔謹)이 간다기에, 그 사람에게 보내느라 빨리 쓰는 통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往歲湖寺雖嘗獲一面, 而病冗, 不能款和餘論. 後乃得見廷對之文, 切中時病, 深以歎服. 益恨相去之遠, 不得會聚, 以講所聞也. 玆辱惠書, 又見季通, 具道遊從切磋之益, 深以爲慰. 比日雪寒, 德履佳福.
熹頑鈍之學, 晩方自情. 每病當世道術分裂, 上者人於佛老, 下者流於管․商, 學者旣各以其所近便先人者爲王, 而又驅之以其好高欲速之心, 是以前者旣以自誤而遂以自欺, 後者旣爲所欺而復以欺人. 文字愈工, 辨說愈巧, 而其爲害愈甚. 不有明者, 熟能舍其舊而新是謀哉? 來喩許以所疑下詢, 幸甚. 大抵聖賢之言已是明白眞實, 說盡道理, 讀者但能虛心一意, 循序致詳, 使其句內無一字之不通, 則其道理無一毫之不察矣. 切不可爲人大言相誑, 如九方臯相馬之說者, 而妄意馳逐於言語之外也. 方賓王每書來, 說得道理儘有歸著, 知與遊從, 可謂得友. 恐今已歸嘉禾也. 周叔謹行, 草草附此, 不能究所言. 政還, 切祈珍重.
주남중에게 답함(6-3087)答周南仲
[해제] 이 글은 경원 2년(병진, 1196년, 67세)에 주남중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보내 온 편지에서 말씀하신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뜻은 더욱 저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다만 학문을 하는 순서는 반드시 먼저 자신부터 성숙하게 한 다음에 남을 성숙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내 주신 편지를 반복해서 읽어보니 자기 본분에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는 듯하니, 우선 내면을 향해 공부하는 것만 못할 것 같습니다. 이 마음과 이 도리는 원래 끊어지거나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성현이 남기신 가르침은 책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만약 과연 확고한 뜻이 있으면 어찌하여 의심하며 늑장을 부린 채 기다리고 있으며, 어찌하여 그전대로 안배만 하시는지요? 다만 오늘부터 시작하여 어는 곳 어디서든지 각성하고 수습하며 어느 때 무슨 일이든지 연구하고 토론하여 다만 하루 사이에 열다섯 번 정돈하고 열다섯 가지 일을 이해하면 날이 갈수록 축적되어 저절로 익숙해지고 저절로 밝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제목만을 만들어 눈앞에 그냥 둔 채 도리어 고개를 숙이고 배회하며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하면서 결코 앞을 향해 진실하게 착수하지 않는다면 유유히 흐르는 저 세월이 어찌 사람을 기다려 주겠습니까? 다만 자신을 속이는 결과가 되어 마침내 믿을 수 있는 학문의 힘을 얻을 곳이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何)군과 정(程)군 두 사람은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니 참으로 좋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미 그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하(何) 형의 편지에서는 세 가지 일을 질문하고 있는데, 비록 그 질문들이 절실한 요점을 건드리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착실하게 공부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더욱 공부에 정진한다면 빠르게 진보할 것입니다. 뛰어난 후배들 가운데, 용감하게 앞을 향해 나아가고 유학의 도를 계승하여 연구 토론하여 우리 유학의 도를 전승하는 맥을 이어가려는 이를 아직 보지 못했으니, 이에 탄식할 뿐입니다.
承喩敎學相長之意, 尤副所望. 但爲學之序, 必先成己, 然後可以成物. 反復來示, 似於自己分上未免猶有所闕, 恐不若且更向裏用工也. 此心此理元無間斷虧欠, 聖賢遺訓具在方冊. 若果有意, 何用遲疑等待, 何用凖擬安排? 只從今日爲始, 隨處提撕, 隨處收拾, 隨時體究, 隨事討論, 但使一日之間整頓得三五次, 理會得三五事, 則日積月累, 自然純熟, 自然光明矣. 若只如此立得箇題目頓在面前, 又却低徊前却, 不肯果決向前, 眞實下手, 則悠悠歲月豈肯待人? 恐不免但爲自欺自誣之流, 而終無得力可恃之地也. 何․程二君能招致之, 甚善甚善, 來書已報之矣. 何兄書中問及三事, 雖未要切, 然已是能著實講究. 若更精進, 未可量也. 後來之秀, 未見有能勇往直前, 探討負荷, 以續傳道之脈 玆爲可歎耳.
주남중에게 답함(6-3088)答周南仲
[해제] 이 글은 경원 2년(병진, 1196년, 67세)에 주남중에게 쓴 세 번째 편지이다.
‘그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자기수양의 으뜸입니다. ‘무(毋)’는 금지하는 말입니다. ‘자기를 속인다’는 것은 선을 실천하여 악을 제거해야 함을 알면서도 마음 씀에는 성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겸(慊)’은 유쾌함이며 만족함입니다. ‘독(獨)’이란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자기 자신만 홀로 아는 곳입니다. 자기 수양을 하는 자는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해야 함을 알았으면, 마땅히 실제 생활에서 그에 힘써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을 금지하여, 가령 악취를 싫어하는 것처럼 악을 미워하고 호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선을 좋아하게 하여, 모두 힘써 결단하여 버리고, 구하여 반드시 얻어서 스스로 자기에게 만족하게 할 것이요, 한갓 구차하게 외면(外面)을 따라 (자기 수양을 위해서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성실하고 성실하지 못함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자기 혼자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여기에서 그 점을 삼가하여 그 기미를 살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誠其意者, 自修之首也. 毋者, 禁止之辭. 自欺云者, 知爲善以去惡而心之所發有未實也. 慊, 快也, 足也. 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 言自修者知爲善以去其惡, 則當實用其力而禁止其自欺, 使其惡惡則如惡惡臭, 好善則如好好色, 皆務決去而求必得之, 以自快足於己, 不可徒苟且以徇外而爲人也. 然其實與不實, 蓋有他人所不及知而己獨知之者, 故必謹之於此, 以審其幾焉.
주남중에게 답함答周南仲
[해제] 이 글은 경원 2년(병진, 1196년, 67세)에 주남중에게 쓴 네 번째 편지이다.
이는 소인이 속으로 불선을 하고 겉으로는 이를 감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선을 마땅히 해야 함과 악을 마땅히 제거해야 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로되, 다만 실제로 그 힘을 쓰지 못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악을 숨기고자 하여도 끝내 숨기지 못하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속이려 해도 끝내는 속일 수가 없으니,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군자가 거듭 경계하여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까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此言小人陰爲不善而陽欲揜之, 則是非不知善之當爲與惡之當去, 但不能實用其力, 以至此耳. 然欲揜其惡而卒不可揜, 欲詐爲善而卒不可詐, 則亦何益之有哉? 此君子所以重以爲戒而必謹其獨也.
맹양부에게 답함 答孟良夫(猷)
[해제] 이 글은 순희 7년(경자, 1180년, 61세)에 맹양부에게 쓴 편지이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학문하는 뜻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이락(伊洛)의 가르침에서, “경(敬)을 지키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한 것은 긴요하고 간절한 말입니다. 만약 그 부분에서 근본을 세우지 못한다면, 곧 글을 읽고 일에 응접하며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이 한갓 어지럽게 되어 끝내 귀착(歸着)할 곳이 없게 됩니다. 만약 그 부분에 힘을 쓸 수 있다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간에 무엇이든지 학문이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책이 몇 권 있어서, 무실(茂實)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학교에 가서 그 책을 한 번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듣자하니 요직에 있는 사람 중에 그대를 천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공론(公論)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어 매우 위로됩니다. 그러나 다시 그 근본을 깊이 굳혀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곧 저의 소망입니다.
示喩爲學之意, 甚善. 但伊洛垂訓以持敬爲先, 此要切之語. 若不於此處立得根本, 旣讀書應事, 思惟計度, 徒成紛擾, 卒無歸宿之地. 若能於此用力, 則動靜之間無適而不爲學矣. 有書數冊, 託茂實送學中, 與諸生共之. 能往一觀, 當有益也. 聞當路有奉薦者, 足見公論之不泯, 甚慰. 然更深其本以須時用, 乃所望耳.
허생에게 답함答許生 (中應)
[해제] 이 글은 소희 4년(계축, 1193년, 64세)에 허생에게 쓴 편지이다.
지난 해 설상선(薛象先)이 이 곳을 지나가면서, 당신의 훌륭한 덕망과 명망을 매우 칭찬하는 것을 듣고, 엎드려 당신을 뵐 수 없음을 깊이 한탄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편지 한 통을 받고 되풀이하여 읽어 보니 도를 구하고 학문으로 향하는 그 마음을 더욱 볼 수 있어 매우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선배들을 추켜올리면서 저를 대단한 인물에 비긴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去歲薛象先過此, 極道左右賢德令聞之美, 甚恨跧伏, 無因緣相見. 今者乃承惑書一通, 反復讀之, 益見所以求道鄕學之意, 深以爲幸. 至於稱引前輩, 比擬非(6-3090)倫, 則有所不敢當也.
그대가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을 구하는 것과 좋은 평판을 얻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학문에 대해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여겨 의리를 강론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구하고자 하니, 참으로 지향(志向)하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저 천지 사이에 꽉 차 있는 도의 체용(體用)에 대하여 옛날의 성인께서는 이미 그것을 깊이 아시고서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학설을 세우고 교훈을 주어 근본에서 말단까지 후세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고 가르쳐 주신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학자들이 바로 그 책을 충분하게 읽고 그 의미를 정밀하게 찾아서 자신의 마음에서 고찰하여 그 실상을 구하고, 사물에서 참고하여 그 결과를 징험한다면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읊조리고 생각하고 일에 응하고 사물을 응접하는 것이 어느 것 하나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글을 읽으면 문장의 뜻을 따르게 되고, 이치를 탐구하면 개인적인 의견에 빠져서 자기에게 절실한 실제의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쇠퇴해지고 도가 미약해지자 이론(異論)이 벌떼처럼 일어나더니 근래에는 불석(佛釋)과 유사한 학설을 빌어서 공맹(孔孟)의 실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법은 제일 먼저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크게 금하고 늘 학자들로 하여금 아득하여 알 수 없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여, 요행이 하루아침에 황홀함을 홀로 본 뒤에 알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대개 그들 스스로는 알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용모와 말하는 것, 그리고 자기를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실제를 살펴보면 성현의 학문과 크게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 말에 미혹되어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저 글을 읽음에 있어서 문장의 의미를 찾지 않고, 이치를 탐구함에 있어서 전혀 자기의 의견이 없는 것은 바로 근래 석(釋)씨가 말하는 화두(話頭)로 본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글에 대혜어록(大慧語錄)이라는 것이 있는데 설명이 매우 자세합니다. 한번 가져다 보면 그들의 내력(來歷)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유가(儒家)와 석씨의 오묘한 경지는 본래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저들이 은혜를 해치고 의를 해치며 풍속을 훼손시키고 가르침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성현이 매우 불안해하던 것들에 대하여, 저들이 도를 깨닫고 나서는 마침내 그것을 덧없는 것이라고 더욱 확신하여 처신을 더욱 편안하게 합니다. 그런 것들은 굳이 다른 데에서 구하지 않더라도 사정(邪正)과 시비(是非)가 이미 여기에서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左右以應擧覓官․美名好事之學爲不足學, 而欲講乎義理, 以求修己治人之方, 固已不繆於折趨矣. 夫道之體用盈於天地之間, 古先聖人旣深得之, 而慮後世之不能以達此, 於是立言垂敎, 自本至末, 所以提撕誨飭於後人者無所不備. 學者正當熟讀其書, 精求其義, 考之吾心, 以求其實, 參之事物, 以驗其歸, 則日用之間諷誦思存․應務援物無一事之不切於己矣. 來喩乃謂讀書逐於文義, 玩索墮於意見, 而非所以爲切己之實, 則愚有所不知其說也. 世衰道微, 異論蜂起, 近年以來, 乃有假佛釋之似以亂孔孟之實者. 其法首以讀書窮理爲大禁, 常欲學者注其心於茫昧不可知之地, 以僥倖一旦恍然獨見, 然後爲得. 蓋亦有自謂得之者矣, 而察其容貌辭氣之間, 修己治人之際, 乃與聖賢之學有大不相似者. 左右於此, 無乃亦惑其說而未能忘耶? 夫讀書不求文義, 玩索都無意見, 此正近年釋氏所謂看話頭者. 世俗書有所謂大慧語錄者, 其說甚詳, 試取一觀, 則其來歷見矣. 若日儒釋之妙本自一同, 則凡彼之所以賊恩害義․傷風壞敎, 聖賢之所大不安者, 彼旣悟道之後, 乃益信其爲幻妄而處之愈安, 則亦不待他求而邪正是非已判然於此矣.
또 보내주신 편지에서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 수 있는 잘못을 범할지언정,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바에 속임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용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도의 본체의 유행은 애당초 끊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지 은밀하고 미세한 곳에서만 경계하고 두려워할 뿐, 훤히 드러나는 곳에서는 대충한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다면,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생활하는 곳에서는 끊김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따라 보존하고 함양하되, 서둘지도 않고 너무 천천히 하지도 않는다’고 한 것은 지나치게 고상한 것과 빨리 하고자 하는 허물을 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맹자의 ‘의(義)란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는 말씀 같은 경우, 문장의 뜻이 본래 분명한데도, 오늘날의 학자들은 자세하게 고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단지 입으로 전해오는 것에만 의존하니 잘못된 해석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자가 열이면 열 모두 그러합니다. 변변찮은 저에게 질문하시니,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세한 내용을 모두 다 궁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점 깊이 살펴주시고, 저의 생각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기다리겠습니다.
又如所謂寧有人皆得見之過, 無或有不睹不聞之欺, 夫中庸之言, 正謂道體流(6-3091)行 初無間斷, 是以無所不致其戒懼, 非謂獨戒懼乎隱微而忽略其顯著也. 若如來喩, 則人所共見之處間斷多矣. 而曰循是存養, 不疾不徐, 吾恐其未免爲好高欲速之尤者也. 至如孟子所謂非義襲而取之, 文義本自分明, 而今學者未嘗細考, 但據口耳相承, 以至施安失所者, 蓋十人而二五也. 旣勤下問, 不敢不盡其愚. 然亦未暇詳究其曲折, 幸深察之, 當否俟報也.
최근 부사 지방을 지나다가, 사인(舍人)인 진수가 건각장서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기문이라도 써서 보내고 싶었는데 그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원․원선과 채계통 형의 편지를 받아보고 자세한 사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며칠 동안 각기병이 일어나 음식을 먹지 못했고, 오른 어깨도 아파서 직접 글씨를 쓸 수조차 없어서, 힘겹게 누워 구술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인의 교체 시기가 멀지 않고 훗날 병이 또 일어날까 걱정스러워 설경을 통해 대신할 사람에게 전달할 것이니, 함께 있는 관리 중에 반드시 그 일을 끝마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 글의 문사가 비속하고 의론이 같지 않으니, 반드시 쓰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近至富沙, 見陳守舍人說及建閣藏書事, 欲以記文見委, 而未得其詳. 今收張卿․元善․蔡兄季通書, 備見首末. 偶數日脚氣發作, 不能飮食, 而右臂亦痛, 至不能親執筆, 憊臥支離, 口占布此. 知代期不遠, 他日病起, 草得記成, 當因薜卿轉達代者, 或同官中必有能竟其事者. 但恐文詞鄙俚, 議論不同, 未必可用耳.
장계사에게 답함 答章季思 (康)
[해제] 이 글은 순희 16년(기유, 1189년, 60세)에 장계사에게 쓴 편지이다.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당신의 고상한 뜻이 가득했습니다. 대체로 성현의 가르침은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네 글자에 불과합니다. 박문(博文)은 많이 구하고 넓게 취하여 익숙하게 강론하고 정밀하게 선택해야 몸에 푹 배어 관통할 수 있을 것이고, 약례(約禮)는 그저 경(敬)이라는 한 글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일상 생활하는데 다만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과정을 세워서 중단되지 않게 한다면 오래 되면 자연히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辱書, 具悉雅志. 大抵聖賢之敎, 不過博文約禮四字. 博文則須多求博取, 熟講而精擇之, 乃可以浹洽而通貫. 約禮則只敬之一字已是多了. 日用之間, 只以此兩端立定程課, 不今間斷, 則久之自有進步處矣.
안백기와 안곤중에게 답함 答顔伯奇昆仲 (椅․柖)
[해제] 이 글은 순희 16년(기유, 1189년, 60세)에 안백기곤중에게 쓴 편지이다.
성인 문하의 가르침은 과정과 조목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를 지키고 강론하여 익히며, 마땅히 그 각각을 공부하여야지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공부가 짧은 시간이라도 끊어지지 않게 하면 저절로 성인의 가르침의 핵심을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聖門設敎, 具有科條, 持守講習, 要當各致其功, 無所偏廢, 而不使有頃刻之間斷焉, 則當有以自得其趣矣.
두숙고에게 답함 答杜叔高(游)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에 두숙고에게 쓴 편지이다.
지난 해 호사를 방문해주시고 또 좋은 글까지 주셨는데, 그것을 읽고 그대의 훌륭한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쁘게 서울을 떠나느라 조용히 만나 나의 품은 생각을 모두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대가 편지를 보내주고 아울러 두 가지 논의를 부쳐주었는데, 문장의 뜻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그대가 나를 매우 깊이 생각해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번에 그 곳의 여러 현자들과 여러 차례 이 문제를 강론하였지만 아직까지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대가 분명히 이미 들었을 것이니, 만약 내 말을 옳게 생각했다면 진실로 지금과 같은 말은 없었을 것이고, 만약 잘못되었다고 여긴다면 또 무엇 때문에 말을 해주는지요? 성인의 시대가 멀어지고 도가 어둡게 되어서 사람의 마음이 편벽하여지자 거친 말과 괴상한 주장이 잡다하게 일어나 하늘과 성인을 무시하고 경전을 헐뜯고 의리를 무너뜨리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하고, 이욕(利欲)의 사사로움을 따르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니 강건(剛健)하고 명철(明哲)한 재주가 있어 확고하게 사욕을 이겨 천리를 회복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은 자가 아니면 거기에 미혹되지 않는 자가 드물 것입니다. 짐승을 몰고 와서 사람 고기를 먹게 하다가 장차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게 될 조짐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으니, 매우 두렵습니다. 그대가 한 번 제 말을 생각해서 자신에게 돌이켜 성현의 분명한 가르침으로 징험한다면 반드시 그 올바른 본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리를 밝게 알아서 합치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한갓 마음과 힘을 고달프게 하면서 억지로 끌어대고 파고들다가 결국에는 그 양심을 빠뜨리게 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往歲辱訪於湖寺, 且以佳篇爲贈, 讀之知所志之不凡. 然恨去國匆匆, 未得從容罄所懷也. 玆辱枉書, 幷寄兩論, 詞意奇偉, 則所以知足下者益以深矣. 顧念頃與仁里諸賢屢講此事, 尙多未契, 足下必已聞之. 若以愚言爲是, 則固無今日之辨; 若以爲非, 則又何以見語爲哉? 聖遠道晦, 人心頗僻, 險詞怪說雜然並起, 不憚於誣天罔聖, 詭經破義, 而務以適其利欲之私. 自非剛健明哲之才, 確然以勝私復理爲已任者, 鮮不惑焉. 率獸食人, 人將相食, 其兆巳見於此, 甚可懼也. 足下試以愚言思之, 反諸其身而驗以聖賢之明訓, 必有以得其本心之正, 然後可以燭理(6-3093)揆事而無不合. 毋徒苦心勞力, 爲此附會穿鑿, 而卒以陷溺其良心也.
두숙고에게 답함 答杜叔高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에 두숙고에게 쓴 편지이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극기(克己)에 대한 설명은 기대하는 마음에 매우 위로가 됩니다. 도리는 분명하여 본래 큰 길과 같은 것입니다. 성현께서도 그렇게 지시하고 일깨워 주어 간절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문득 따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天生萬受] 없는 사실을 한없이 꾸며대며 정신없게 말을 해서 자기에게는 전혀 털끝만큼의 이익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만 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이나 속일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 옆에서 비웃으면서 보게 된다면 어떤 모양새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제가 전날 직접 만나서 강론할 때에 그대의 말을 듣고 실소(失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지금 보내오신 편지를 받고서 마침내 나중에 생각하여 학문의 힘을 얻는 곳이 있음을 알았으니, 여기에서 또 그대의 자질이 남보다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종전에는 본래 남을 속이려고 하다가 도리어 남에게 속임을 당했는데, 지금 한 번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고 나서 곧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으니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극기(克己)는 진실로 학자들의 급선무이지만 역시 일체의 도리를 보는 것이 분명해야 일상 생활하는 데에서 한 마디 말이나 행동 하나가 어는 것이 옳고 어느 것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곧 이 부분에서 근본을 세워서 무릇 사적(私的)인 것으로 천리(天理)가 아닌 것을 곧 이겨내고 제거해야 하는 것이지, 단지 ‘경조(輕躁)’ 두 글자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장(辛丈)과 만나서 서로의 심정을 다 털어놓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그런 사람을 어떻게 쉽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일찍부터 내면을 향해서 마음을 썼다면 사업이 커지고 빛난 것이 어찌 지금 성취한 것과 같은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이 어찌 조금 온당치 못한 점이 없겠습니까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다 일러 주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미 나 같은 늙은이의 어줍잖은 말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분명 그대의 말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示喩克己之說, 甚慰所望. 道理分明, 本如大路, 聖賢又如此措示提撕, 不爲不切. 今人都不理會, 却別去千生萬受, 杜撰百般, 胡說亂道, 於自己分上了無分毫利益, 只可誑嚇他人. 然亦只誑嚇得不議底人, 若被識道理人旁邊冷看, 成甚模樣? 此區區所以於前日面論之際不能不失笑於賢者之言也. 今承來喩, 乃知後來思之有得力處, 此又見賢者資質本自過人. 但從前本欲誑人, 却反爲人所誑, 今曰一聞逆耳, 便能發晤於心, 不易得也. 然克己固學者之急務, 亦須見得一切道理了了分明, 方見日用之間一言一動何者是正, 何者是邪, 便於此處立定脚根, 凡是己私, 不是天理者, 便克將去, 不但輕躁二字也. 辛丈相會, 想極款曲. 今日如此人物豈易可得? 向使早向裏來, 有用心處, 則其事業後偉光明, 豈但如今所就而已耶! 彼中見聞, 豈不有小未安者? 想亦具以告之. 渠旣不以老拙之言爲嫌, 亦必不以賢者之言爲忤也.
정공에게 답함 答程珙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년, 65세)에 정공에게 쓴 편지이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정명(正名)의 설명에서, 호씨(胡氏)의 논의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의는 근엄하고 성인의 묘용과 변통은 또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과 상식으로 그 방법을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의심하는 것과 같다면, 고기를 먹으면서 말의 간은 먹지 않았다고 해서 맛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이를 놓아두고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논의하는 것이 옳습니다.
示喩正名之說, 胡氏所論固有未盡, 然其大義謹嚴, 而聖人之妙用變通又自有不可測者, 不可以私情常識議其方也. 如以爲疑, 則食肉不食馬肝, 未爲不知味. 姑置此而議其切於吾身者焉可也.
왕남경에게 답함 答王南卿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년, 65세)에 왕남경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저는 한가한 가운데 한 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옛날 책들을 정리하다가 갑작스럽게 임금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비록 실제로 늙고 쇠약하지만, 감히 멀다는 이유만으로 사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물정에 어둡고 거친 저의 의견은 대부분 시론과 배치됩니다. 그래서 한 번 사양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아, 근래에 다시 한번 사양하는 저의 뜻을 올렸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조정의 여러 분들 역시 애써 저를 밀려는 뜻이 없다고 하니, 반드시 사양하는 저의 의견이 수용될 걸로 생각합니다. 만일 저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보내주신 대도(隊圖)는, 제가 비록 병법을 잘 모르지만, 예전에 조조와 두목(杜牧)의 손자를 읽었는데, 여러 유학자들이 아직 말하지 않은 수레에 타는 사람의 숫자를 논한 것을 보았습니다. 오직 저의 벗인 채계통만이 늘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주례의 군제(軍制)를 가지고 고증해보니 모두 틀림없었습니다. 이제 이 글을 보니, 선배들이 이미 그것을 사용하여 효과를 보았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후세에 전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熹方幸閑中得與一二學徒整理舊書, 而忽蒙恩收用. 雖實衰老, 不敢以遠爲辭, 但恐迂疏議論多與時背, 一辭不獲, 比已再上. 傳聞諸公亦無相彊之意, 計必得之矣. 萬一未遂, 則又未知所以爲計也. 示及隊圖, 雖不知兵, 然頃讀曹公․杜牧孫子, 見其所論車乘人數諸儒皆所未言, 唯友人蔡季通每論此事, 以考周禮軍制皆合. 今得此書, 乃知前輩已嘗用之而有效矣, 是其可傳無疑也.
발문의 끝부분에서 논한 것은 모두 정당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 변론한 형공의 일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집안에 형공(형공: 왕안석)과 양민공(왕소)의 수첩의 몇 장 있는데, 당시에 형공이 내치에 주력하지 않았다면 군중의 의론이 동요되어 성공을 거두기 힘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양민(襄敏)이 다른 정책들이 대부분 세금을 과도하게 물리고 배신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다른 의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희(熙)․하(河)의 일을 논하자면, 사실 두 분의 마음은 똑같아 이설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아마도 생각을 조금 바꾸면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수첩을 필사하여 올립니다. 형공의 정사는 잘못이 많지는 하지만, 이 일만은 그렇지 않음을 아실 것입니다.
跋尾所論皆精當, 卒章辨荊公事, 則恐未然. 家有荊公與襄敏公手帖數紙, 見(6-3095)當時事若非荊公力主於內, 則群議動搖, 決難成功. 但是後來襄敏見其他政事多出於聚歛揹克之意, 故不免有異論耳. 若論熙河之事, 則二公實同心膂, 無異說也. 幸試思之, 恐須略轉換過, 乃可取信. 其帖今錄以上呈, 荊公政事固多失, 然此一事却是看得破也.
왕남경에게 답함 答王南卿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년, 65세)에 왕남경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장사 지방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고서 임금님의 깊은 은혜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젠 늙고 병들어 여위고 의욕이 떨어지며 사리 판단이 어둡고 능력이 떨어져 한 도를 책임지고 맡아 다스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임금의 말씀이 정성스럽고 친절하여 읽고 나니 황공하여 곧바로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의심스런 생각도 있고, 또 다리에 질병도 있고 해서 마침내 여기에 좀 더 머물기로 했습니다. 다시 십 여일 기다리면 거취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가게 되면, 서로 한 번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면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 못한다면,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겠습니다.
長沙除命, 深感上恩. 但老病衰懶, 昏塞廢忘, 恐不能堪一道之寄. 而再辭不獲, 上語丁寧, 伏讀皇恐, 遽欲起拜, 而鄙意尙有少疑, 又苦足疾, 未容拜受, 遂且宿留. 更須旬日, 可決去就. 萬一可往, 不知老兄能一乘興相過否? 所欲扣者千條萬端, 非面不能究. 但恐不成行, 卽此會又未可知耳.
개정하신 후어는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금나라 사람이 옹립한 곡씨(곡시라) 한 단락은 깊은 논변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곡씨는 외신(外臣)이 되지만, 도리어 잇달아 하나라의 포로가 되어 변방의 근심거리였으니, 우리의 토벌은 의거인 것입니다. 곡씨는 금나라 포로에게는 서로 병탄하는 나라가 아니니, 금나라 사람들은 그를 세워 당파를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먼 나라와는 친교를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계책이 되고, 밖으로는 망하는 것을 보존하고 단절되는 것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위장하니 어찌 그로 하여금 우리를 원망하고 그를 덕스럽게 여기게 하는 것 또한 그 계책의 교활함이 보통이 넘습니다. 어찌 의거가 되겠습니까? 또 곡시라는 이미 죄를 졌으니, 당시 그가 옹립한 아들을 정벌한 것은 허물이 되지 않으니, 반드시 그 반란을 일으킨 자손을 토벌하여 스스로 해결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혹여 금나라 포로가 곡시라가 세운 후손을 옹립하더라도 나를 부끄럽게 하고 현명함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진법」에 관해서도, 때론 형공을 책망하면서도 누구의 설인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단지 곡시라를 취한 것에 대한 옳고 그름만을 논해야지,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만약 옳다면 「진법」이라도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지금 형공의 잘못이다고 하였는데, 이 구절도 매우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신의 뜻은 내가 그를 괴롭힌다는 것입니까, 그가 나를 괴롭힌다는 것입니까? 만약 내가 그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쓸 수 있기는 하지만 입론한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개정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혹시 지금 형공이 잘못했다고 말한다면, 말의 뜻이 매우 두터운 것 같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와 같습니다. 눈이 어두워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글이 엉망지이지만 괴이하게 여기지 말고 자세히 살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진법」 인쇄본은 곧 몇 권을 구하겠습니다.
所改後語甚佳, 但恐金人立唃氏後一節恐不足深辨耳. 彼於我爲外臣, 而反連夏虜以爲邊患, 則我之討伐自爲義擧. 彼於金虜非相呑之國, 則金人立之以樹黨, 在彼不失爲遠交近攻之計, 而外假存亡繼絶之名, 又足以使之怨我而德彼, 亦其狡計之過人也, 豈足爲義擧哉? 且唃厮囉旣有罪, 則當時討其所立之子自不爲過, 正不必以討其叛孫自解. 雖或金(6-3096)虜能立厮囉所立之後, 亦未足以愧我而爲賢也. 又謂因進陣法, 而或以咎荊公, 亦不記是誰說. 然此事只合論其取之是非, 而其瑣細皆不足較. 若果是矣, 則雖進陣法, 亦何不可之有耶? 又云今爲荊公之累, 恐此句亦未甚穩. 不知盛意是謂我累彼耶? 彼累我耶? 若我累彼, 則此語可用, 而非所爲立說之意. 不然, 則恐當改之爲安. 或云今以荊公爲累, 語意似覺深厚也. 妄論如此, 目昏不見字, 老草勿怪, 而幷詳之, 幸幸甚甚! 陣法印本有便求數冊.
신주(信州)에 휼수집(潏水集) 인쇄본이 있는데, 장안 사람인 이복(李復)의 문집입니다. 문집에 동전(董氈)은 곡시라(唃廝囉)의 아들이 아니며, 시라의 부인을 훔치고 나라를 도둑질했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이 하찮은지라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시 살펴봐 주십시오.
信州有潏水集印本, 乃長安人李復之文, 記董氈非唃廝囉之子, 乃盜厮囉之妻而竊其國, 不知曾見之否? 事冗不暇細看, 更考之也.
왕남경에게 답함 答王南卿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년, 65세)에 왕남경에게 쓴 세 번째 편지이다.
진법(陣法)을 자세히 살펴보니, 틀린 곳이 있습니다. 예컨대 상권 제5판의 진법도에 오른쪽 두 부대 모두 마군 홍점 25인이 빠져 있고, 제4판의 진법에는 마군 뒤에 압대와 조대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권 제1판에서 “四十萬人而增之至三十萬”의 ‘사(四)’자는 마땅히 ‘유(由)’자로 써야 할 것입니다. 다시 살펴봐 주시고, 또 이와 같은 곳이 있다면 마땅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陣法細看, 尙有誤處. 如上卷第五板陣法內, 右邊兩隊各欠馬軍紅點二十五人, 第四版陣法, 凡馬軍後並無押隊照隊; 中卷第一版四十萬人而增之至三十萬, 其 ‘四’ 字當作 ‘由’ 字. 幸更詳考, 恐更有此等, 當改正也.
왕이직에게 답함 答汪易直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에 왕이직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편지에서 자(字)에 관해 저에게 의논하고자 한 뜻을 보고, 감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난 번 물음에 답할 생각은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나중에 비평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돌아가신 단명의 본지를 얻었다면, 고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示喩尊名之意, 極荷不鄙. 但今朋友必已有所稱, 往時忘記奉扣, 後便幸批示. 或已得先端明本旨, 卽不必改也.
의리가 의심스러운 몇 조목에 관한 당신의 생각은 모두 매우 정당합니다. 다만 첫 장의 관중에 관한 일은 정자가 추론한 성인의 본 뜻을 이미 얻은 것 같습니다. 그가 자규를 따라 죽지 않고 살아남아 환공을 따른 것은 처음은 잘못됐지만 나중에는 올바름을 얻은 것입니다. 마치 반역을 하여 죄를 죄었다가 사면을 받은 것과 같으니, 사형시킬 이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해 공자께서는 당시에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단지 관중의 공로만을 말씀하시고 그 비웃고 폄하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 걸로 추론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죄가 있었다면, 성인께서는 단지 이와 같이 말씀하시지 않고, 반드시 미사(微詞)로써 잘잘못을 서로 뒤섞어버리지 않는 뜻을 드러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자께서 이러한 의리를 강론한 것이 매우 정밀한데도 제게 의심스러웠던 것은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으면, 나중에 비록 공로가 있더라도 다시 취하지 않는다’고 한 말이니, 이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공로는 공로이고, 잘못은 잘못이니, 만약 잘못으로 공로를 덮어버릴 수 있다면 공로 역시 그 잘못을 덮어버릴 수 있습니다. 강절(康節: 소옹) 선생이 춘추를 배우는 이는 먼저 오백(五伯)의 공로와 잘못을 결정해야 한다고 논하여 오백(五伯)을 공로의 으뜸이자 잘못의 으뜸으로 삼았는데, 이 말은 가장 적절합니다. 그러나 옛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상벌을 주관하는 권한과 등용과 퇴출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만 한 시대의 인재를 모두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처리하고 그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仁)’이라는 한 글자는 그 덕으로 말한 것이니, 반드시 그 마음에는 사사로움이 없고 일처리는 사리에 합당해야 그것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공로로만 보면, 오직 이로움과 혜택이 여러 사람에게 미치고 은혜가 있으면 곧 그를 칭찬하니, 애당초 그 덕이 어떠한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疑義數條, 意皆甚正. 但首章管仲事, 程子所推聖人本意, 恐已得之. 蓋其不死子糾而從桓公, 乃是先迷後得. 如今叛逆而遭赦宥, 自無可死之理. 然此事夫子當時不曾明言, 但今以其言專取其功而略無譏貶之詞, 可以推見之耳. 若果有罪, 則聖人必有微詞, 以見功過不相掩之意, 不特如此說矣. 故疑程子此義講之甚精, 而鄙意所疑, 則其曰若當死而不死, 則後雖有功, 亦不復取, 此則未安耳. 功自功, 過自過, 若過可以掩功, 則功亦得以掩其過矣. 康節先生論學春秋者當先定五伯之功罪, 而以五伯爲功之首, 罪之魁, 此語最爲切當. 然非獨論古事爲然也, 見諸行事, 則操賞罰之權․持黜陟之柄者, 亦當以是爲心, 乃能盡用一世之材, 以濟天下之務而不失其正耳. 仁之一字, 以其德而言, 則必心無私而事當理, 乃能當之. 若其功, 則惟利澤及人․有恩有惠, 便可稱之, 初不計其德之如何也.
우연히 서울에 왔는데 여기저기 인사가 번거로워 이 조목을 대략 논했으니,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나머지는 집에 돌아가서 답을 올려 별도의 인편으로 보내겠습니다. 공자께서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고 하신 말씀과 정자께서 ‘춘추의 대의는 쉽게 알 수 있지만, 때에 맞춰 마땅함을 쫓는 것은 알기 어렵다’고 했으니, 이러한 부분은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서 이 도리를 이해하신다면, 편지에서 말씀하신 몇 조목은 모두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로 통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돌이켜 자기 마음에서 구해야 하고, 자신의 본성에서 강구하고 함양하여야 비로소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나 뵙고 말씀드릴 수 없어, 당신을 향한 마음만 간절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6-3098) 偶來城中, 人事冗擾, 且略爲論此條, 試更思之. 餘俟還家奉答, 別附便也. 夫子說可與立未可與權, 程子說春秋大義易見, 而時措從宜者爲難知, 此等處更宜致思. 思而得之, 則所示數條皆可類推矣. 然此不可以强通, 却須反求諸心, 向性分上講究存養, 始當有以自得耳. 未由面論, 臨風馳想, 切幾力學自愛.
왕이직에게 답함 答汪易直
[해제] 이 글은 순희 15년(무신, 1188년, 59세)에 왕이직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보내오신 「자송편(自訟篇)」에서 뜻을 세우고 자기의 수양을 위한 학문에 간절함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더욱 위로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대학에서 말한 그 뜻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스스로 성실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차례를 미루어 보면,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또 반드시 격물(格物) 치지(致知)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의(仁義)의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이 몸이 있는 이상 곧 물질적 욕망에 가리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示喩自訟之篇, 足見立志爲己之切, 尤以爲慰. 此正大學所謂誠其意者. 然意不能以自誠, 故推其次第, 則欲誠其意者又必以格物致知爲先. 蓋仁義之心人皆有之, 但人有此身, 便不能無物欲之蔽, 故不能以自知.
만약 일에 따라 강론해 밝혀 투철하게 하여 정밀함과 조잡함이나 크고 작음을 관통하지 않음이 없게 할 수 있으면 자연히 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마치 고기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어 굳이 스스로 속이기를 기다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금지하거나 막기만 하면서 감히 자신을 속이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문득 그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연히 그렇게 절박하게만 하다가 은미(隱微)한 곳에서는 결국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게 될까 걱정입니다. 과거에 대학의 이 장을 이와 같은 뜻으로 설명하고자 했었는데, 요즘 그것을 읽어보니 투철하지 못한 것 같아 다시 대략 몇 구절을 개정했습니다. 뒤늦게 이제야 적어 보내니 자세히 살펴주십시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若能隨事講明, 今其透徹, 精粗巨細無不貫通, 則自然見得義理之悅心猶芻豢之悅口, 而無待於自欺. 如其不然, 而但欲禁制抑遏, 使之不敢自欺, 便謂所以誠其意者不過如此, 則恐徒然爲是迫切, 而隱微之間終不免爲自欺也. 舊說大學此章, 蓋欲發明此意, 而近日讀之, 殊覺未透, 因略更定數句. 今謾錄去, 試深察之, 以爲何如也.
근사록 소판본은 교감을 하지 못해 잘못된 곳이 있는데, 이는 제가 성실하지 못한 잘못입니다. 나중에 이 곳의 책가게에서 한 판본을 간행하고, 책의 끝부분에 덧붙였던 것을 책의 중간에 집어넣었고, 또 중복되는 몇 글자는 삭제했습니다. 아직까지 다른 판본이 없으니, 빨리 구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近思小本失於契勘, 致有差誤, 此執事不敬之罪也. 後來此間書坊別刊得一(6-3099)本, 卷尾所增已附入卷中, 仍削去重出數字矣. 偶未有別本, 旦夕求得, 續當附去也.
팽자수에게 답함 答彭子壽 (龜年)
[해제] 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년, 69세)에 팽자수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재명(齋銘)에 대한 부탁의 말씀을 어찌 감히 받들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병을 앓고 난 뒤라 정신이 없고 지쳐 있는데, 장차 어떻게 성현의 뜻을 밝혀 일상생활의 공부에 도움이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 나름대로 들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학은 이 부분에서 비록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속이는 것을 경계시키고 있는 것 같지만, 그 근본을 미루어 보면 반드시 격물(格物) 치지(致知)에 힘을 써야만 이치가 밝아지고 마음이 전일(專一)해져서, 드러나는 것이 저절로 진실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비록 은미할 때 막고 자기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면서 감히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없고자 하더라도, 바른 생각이 막 싹이 뜨려고 할 적에 사욕이 뒤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대가 그 점에 대하여 살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보내 온 편지로 인해서 분수에 맞지 않게 다시 말씀드리는 것이니, 진실로 여기에서 더욱 그 공부를 다 하면 굳이 가까이에 잠언(箴言)을 두지 않더라도 학문이 날로 진보하고 덕이 날로 닦여질 것입니다.
齋銘之屬, 豈所敢承? 况此病餘昏憊, 將何以發明聖賢之旨, 爲日用功夫之助乎? 然竊聞之, 大學於此雖若使人戒夫自欺, 而推其本則必其有以用力於格物致知.之地, 然後理明心一, 而所發自然莫非眞實. 如其不然, 則雖欲防微謹獨, 無敢自欺, 而正念方萌, 私欲隨起, 亦非力之所能制矣. 竊意高明於此非有所末察, 特因來喩僭復言之, 以爲誠能於此益致其功, 則亦無待於暬御之箴而學日益進, 德日益修矣.
팽자수에게 답함 答彭子壽
[해제] 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년, 69세)에 팽자수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당신의 편지를 보니, 중용 의의(疑義)에 대해 별지에서 매우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이에 대해 경전의 본뜻을 강구하고 정밀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깊이 연구하시면서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 날마다 탐구하느라, 세속적인 이해관계에는 관심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修道之敎]에서, ‘그것을 닦는 것’는 인사(人事)에서 나오며, 닦는 바의 도는 천지 만물의 이치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인합일이니, 하늘과 사람이 같다는 데에 방해가 되겠습니까. 또 사예(事豫)에 대한 설명은 장재와 유작이 같지 않음을 논하였는데,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誠)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니, 성이 되는 까닭을 추론해보면 선을 밝히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그 문장의 뜻 역시 성(誠)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컨대 대학의 순서는 격물(格物)에서 시작하지만, 그 뒤에 바로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 또한 이러한 종류입니다. 은미문견(隱微聞見)에 대한 구분은 당시 우연히 그렇게 보여 그 순서에 따른 것입니다. 만약 의문스러워 합당치 않다면, 제껴두어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대의가 걸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깊이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 경전의 본문에서는 지(智)․인․용(勇)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만, 설령 의심스럽더라도 논의할만한 정도의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제가(諸家)가 분류한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꼭 나누고자 한다면, 지금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만약 당신의 편지와 같이 한다면, 인(仁) 자는 삼덕(三德) 속에 열거할 수 없게 되고, 또 삼덕의 다음에 위치하게 됩니다. 성인의 말씀은 그 명리(名理)가 곳에 따라 경중이 있고 가리키는 바가 같지 않습니다. 읽는 이가 그 경중에 따라 읽어야 그 뜻을 알 수 있으니, 죽어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배열하고 고정시켜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은 이와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비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垂喩中庸疑義別紙甚詳, 乃知賢者於此方且以講求經旨․究極精微不足, 日以(6-3100)爲事, 世間利害固未易以入其胸次也. 修道之敎, 修之者固專出於人事, 而所脩之道, 則天地萬物之理莫不具焉. 是乃天人之合, 亦何害其爲同耶? 又論事豫之說, 張丶游不同, 蓋此章首尾以誠爲本, 而推其所以誠者乃出於明善, 故釋其文義且得以誠爲言. 如大學之序始於格物, 而其後乃云 ‘壹是以修身爲本’, 亦此類也. 隱微聞見之分, 當時偶見如此而謾序之, 若疑未安, 置之無害. 此非大義所繫, 不足深論也. 智․仁․勇經文本不曾分, 若以爲疑, 亦不足論. 但諸家所分却未穩當, 必欲分之, 則須從今說, 乃爲盡善 若如來喩, 則仁字不合列於三德之中, 而又位於其次. 蓋聖人之言其名理隨處輕重, 所指不同, 讀者須隨其輕重而讀之, 乃見其意, 不可一槪死殺排定也. 鄙見如此, 不審明者以爲如何? 如復未安, 更望報及也.
절자명에게 답함 答折子明
[해제] 이 글은 경원 5년(기미, 1199년, 70세)에 절자명에게 쓴 편지이다.
삼가 깊이 감동이 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선정의 묘비문(墓碑文)에 대해서 세 차례에 걸쳐 사람이 다녀갔는데 간절한 마음이 더욱 지극합니다. 제가 더없이 어리석기는 하지만 목석(木石)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측은한 마음이 속에서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어찌 고집스럽게 거절하여 당신의 지극한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실제로 늙고 야위어 마음과 눈이 모두 피로하여 생각하고 검토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2년 전부터 저의 이름이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데 매번 저보(邸報)를 볼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가는 모습을 봅니다. 앞으로 제가 끝내 어떻게 해야 그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두려움으로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적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요즈음에는 절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글자도 써주지 않고 있고, 근래 간절하게 백 배 사양한 경우가 이미 여러 사람입니다. 만약 그대의 엄한 부탁 때문에 갑자기 이 관례를 푼다면 글을 청하는 요구가 사방에서 빗발쳐 올 것입니다. 따르자니 화를 부를 것이고 따르지 않자니 원망을 사게 될 것이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더 살지 기약도 없고 질병은 심해지고 정신은 혼미합니다. 그런데 무슨 정력이 있어 그것을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간절히 긍량(矜亮)에게 말씀드려 남은 삶을 부지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천만 번 간곡하게 애원합니다.
伏蒙■喩先正墓文, 使人三返而勤懇益至. 熹雖至愚, 心非木石, 豈不惻然有動於中? 亦何忍爲此牢辭固拒, 以逆盛意? 實以衰悴, 心目俱疲, 不堪思慮檢閱, 而兩年以來, 名在罪籍, 每讀邸報, 觀其怒目切齒之態, 未知將以此身終作如何處置然後快於其心, 未嘗不惕然汗出, 浹背沾衣也. 是以年來絶不敢爲人作一字, 近所祈懇, 百拜而辭者已數家矣. 若以尊喩之嚴遽弛此禁, 則四面之責紛然而至, 從之則召禍, 不從則取怨, 反復思之, 未見其可. 兼餘年無幾, 疾病侵凌, 神思昏然, 豈有精力可以給此? 切告矜亮, 貸此殘生, 不勝千萬哀懇之至!
유군방(劉君房: 유원성劉元城의 손자)에게 답함 答劉君房(元城之孫)
선정(先正) 충정공(忠定公)께서 훌륭한 덕과 말씀을 남기셔서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이름은 없어지지 않았으니, 백 세 뒤에라도 그 명성을 들은 자들은 분발하게 될 것입니다. 저의 장인이신 빙사(聘士) 유공(劉公)께서는 일찍이 직접 뵙고 스승으로 받들었는데, 제가 젊었을 때에 그 분에 대한 적잖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충정공의 언행 및 지조와 절개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그 문하(門下)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음성과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어서 마치 서로 만난 것과 같으니 오늘날 종이 위에서 전하고 있는 것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 편지를 받고는 그 후손이 가업(家業)을 받드는 뜻이 이와 같고 저를 대우하시는 것도 매우 후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보잘 것 없는 제가 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보내오신 편지에서 대대로 녹(祿)을 받지 못하는 것을 대단히 근심하고 계시던데 그 점은 그대의 염려가 지나친 것입니다. 선덕(先德)의 유풍(遺風)이 모두 방책(方冊)에 갖추어져 있으니, 그 말을 외우고 그 행실을 행하여 그 지조와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면 대대로 그 집안을 지켜가는 데에 그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저 하찮은 외물(外物)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남기신 글을 종류별로 나누고 순서를 매겨 이미 편집에 착수하고 그 서문을 지어 후세에 전하려 한다 하니, 이는 저 같은 하찮은 사람이 어찌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다만 빨리 인쇄본을 완성하여 그 분에게 전하고, 저 역시 그 대체의 순수하고 온전함을 알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先正忠定公有德有言, 沒而不朽, 百世之下, 聞者興起. 而熹之外舅聘士劉公嘗得親見而師承之, 熹少時猶及竊聞其餘論, 於忠定公之言行志節詳矣. 是以雖不(6-3102)得及其門牆, 而想望其聲容, 猶若相接, 不止於今世紙上所傳而已也. 今唇惠書, 乃知其後人所以繼業承家之意如此, 而所以見顧者又甚厚, 非淺陋之所敢承也. 但來喩頗以未有世其祿者爲憂, 此則賢者慮之過矣. 先德遺風具在方冊, 有能誦其言, 行其行, 不替其志節, 則所以世其家者孰大於是? 彼區區之外物, 何足道哉? 又承類次遺文, 已就篇帙, 見使爲之序引, 以傳來世, 此則又豈晩生妄意所敢幾及? 但願亟遂鋟木, 傳之其人, 使熹與有聞於大體之純全, 則爲幸甚矣.
유군방에게 답함 答劉君房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유군방에게 쓴 편지이다.
보내주신 편지에 주역을 읽으신다 하니, 참 좋습니다. 이 책은 본래 점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말이 모두 상수(象數)에 근거하여 길흉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 방법이 이미 전해오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유학자가 말하는 상수는 모두 근거가 빈약하고, 그들이 말하는 의리 역시 매우 탐탐치 못해 그 책을 읽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주역본의와 역학계몽을 쓴 이유입니다. 그러나 본의가 채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몰래 반출되어 다시 인쇄되는 바람에 보는 데에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몽은 본래 배우는 사람이 대전에서 말하는 괘획(卦畫)과 시수(蓍數)를 추론하여 찾고, 지나치게 해석하여 뜬구름 잡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하도」 「낙서」를 논한 것에도 불필요한 말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참으로 읽기 어려워 시․서․논어․맹자처럼 명백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러한데,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所喩讀易甚善. 此書本爲卜筮而作, 其言皆依象數以斷吉凶. 今其法已不傳, 諸儒之言象數者例皆穿鑿, 言義理者又太汗漫, 故其書爲難讀. 此本義․啓蒙所以作也. 然本義未能成書, 而爲人竊出, 再行模印, 有誤觀覽; 啓蒙本欲學者且就大傳所言卦畫蓍數推尋, 不須過爲浮說, 而自今觀之, 如論河圖洛書亦未免有剩語. 要之此書眞是難讀, 不若詩․書․論․孟之明白而易曉也. 此是僞學見識, 不審明者以爲如何?
증무택에게 답함 答曾無擇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증무택에게 쓴 편지이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의의(疑義)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적어 보냈습니다. 다만 (의의의) 대부분이 주변에서 맴돌 뿐, 핵심을 겨눈 것은 없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게 사려하여, 성현의 말씀을 그 내면의 핵심적인 곳으로부터 이해해가면 그 참된 의미가 빈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매모호한 말들만 넘쳐 실제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고 끝내는 어떠한 효력도 없을 것입니다.
所示疑義悉已報去, 但覺得多是在外邊看, 未有箇入頭處. 須更虛心靜慮, 將聖賢言語從裏面親切處看出來, 庶幾見得意味, 不爲空言. 不然, 似此泛濫含胡, 無益於事, 終久不得力也.
증무의에게 답함 答曾無疑 (三異)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증무의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지난 번 편지를 받고서 급하게 대충 답장을 보내놓고서 부끄러웠는데, 문득 다시 보내주신 글을 받으니 아껴주시는 마음이 더욱 느껴집니다. 또 요즈음 차가운 가을 날씨에도 건강하시다니, 무척 위로가 됩니다. 시권(詩卷)을 보여 주시니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더욱 잘 알겠습니다. 되풀이해서 읽은 뒤에 그 정밀하고 아름답고 기발하여 따를 수 없는 점에 감탄하였고, 또 큰소리를 치거나 험악한 말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던지지 않은 점에 거듭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학문하는 뜻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을 보니 뜻하는 것이 시문(詩文)에만 그치지 않는 것 같던데, 특히 그것은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대의 고상한 뜻이 우선 대충 한 번 학문의 영역을 엿보고서 저것이 이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장차 용감하게 옛 습관을 고쳐서 진실로 한 걸음에 도에 이르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제가 감히 알고 싶은 바가 아니고, 후자의 경우라면 보내오신 편지의 말씀이 진실로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빈 말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대개 사람이 학문하는 것은 마땅히 무엇을 위해서 학문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무엇에 종사하여야 학문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그 순서에 따라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반드시 그러한 마음 외에는 다시 다른 생각이 없게 하고, 옛 습관 중에 능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세속의 헐뜯음과 칭찬, 자신이 출세하느냐 못하느냐에 대한 생각을 조금도 마음속에 들이지 않아야 거의 가깝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쉽게 글로는 다 말씀드릴 수 없는 것인데 보내오신 말씀을 보니 또한 앞으로 찾아주실 예정이더군요. 만약 직접 뵙고 말씀드리게 된다면 저의 속마음을 다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현실사정에 밝지 못하여 학문하는 법도에 저촉되었으니, 그대가 세상에 나아가 명성을 취하는 데 잇점이 못 됩니다. 다시 바라건대 출발하기 전에 잘 살펴 처신하여 뒷날의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십시오. 제 소원입니다.
昨承枉書, 奉報草草, 方以爲愧, 忽辱再告, 益荷眷勤. 且審比日凉秋, 起處佳福, 足以爲慰. 詩卷寵示, 尢認不鄙之意. 三復以還, 旣歎其精麗警撥之不可及, 又重歎其不爲大言險語以投世俗之耳目也. 然承諭及爲學之意, 則似所志又有不止於此者, 此允區區所樂聞. 但未知雅意姑欲粗一闖其藩籬, 而爲彼善於此之計耶? 抑將勇革舊習, 而眞欲一蹴以至道也? 如前之銳, 則非區踵所敢知. 如後之說, 則如來喩之云固非不善, 然欲自是以求道, 則恐亦末免爲空言也. 大率人之爲(6-3104)學, 當知其何所爲而爲學, 又知其何所事而可以爲學, 然後循其次第, 勉勉而用力焉. 必使此心之外更無異念, 而舊習之能否․世俗之毁譽․身計之通塞自無一毫入於其心, 然後乃可幾耳. 此固未易以毫緖旣, 而承見語, 亦將有枉顧之期矣. 儻得面論, 庶揭鄙懷. 顧此迂闊, 干觸科禁, 恐非賢者進取之利. 更冀審處於未動之前, 屛使賂後日之悔焉, 乃所願也.
증무의에게 답함 答曾無疑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증무의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저에게 글을 보내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당신의 글을 반복해서 읽어보고서 당신의 고상한 뜻을 알 수 있었고, 제가 품은 의문 역시 감히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들으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얼마 되지 않는데, 일반 사람들은 그 얼마 안 되는 것을 버리고, 군자는 그것을 보존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군자가 무엇인가를 위해서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고, 알고 나서는 보존하기를 또 반드시 부지런히 하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야 거기에 가깝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군자가 학문을 하되, 종신토록 힘써서 오직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을까 하여 잠시도 그 마음을 방치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지금 그대가 스스로 학문에 본원이 없고 마음이 늘 복잡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또한 일찍이 여기에 힘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점이 또한 자신을 아는 것이 명백한 것이니, 우선 앞에서 인용한 맹자의 말씀을 위주로 널리 옛 성현이 남기신 가르침을 고찰하여 참고하면서 징험한다면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학문을 하는지와 그 학문하는 방법을 굳이 밖에서 구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얻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난번에 말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해 순서에 따라 익힌다”고 한 것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어 옛날의 오래된 습관은 참으로 배울 것이 못 되어 지금 새로 배우는 것에 방해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학문하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이것을 알아서 취사선택을 정할 줄 안 뒤에 그 공부의 잇점과 병폐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고 한갓 논설(論說)만 내세운다면 다 공허한 말로 귀착(歸着)할 곳이 없게 되어서 일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미 세상에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자신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문호(門戶)가 분명하고 단서가 정당하여 실제로 약간의 기력을 쓸 줄을 안다면 마침내 하늘에서 부여받은 떳떳한 성(性)의 중요함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니, 이 밖의 사소한 지식으로서는 바로 영향을 미치기에 부족합니다. 그대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辱書, 良以爲慰. 而反復來喩, 已得雅志之所存, 則區區所疑亦不敢隱也. 蓋嘗聞之, 孟子之言有日, 人之所以異於禽獸者幾希, 庶民去之, 君子存之, 此君子所爲而學也. 然欲存此, 則必有以識此之爲何物, 而後有以存之. 旣識之, 則所以存之者又必勉勉孜孜而不少懈焉, 然後乃可幾也. 此君子之斫以爲學者而終身勉寫, 唯恐一毫之不盡, 而不敢少貳其心者也.
(6-3105)今足下自讚學無本原, 心常駁雜, 豈亦自覺其未嘗用力於此而然耶? 此其自知亦明矣. 然又欲因其固有而循習之, 則亦可以殊塗而同歸, 則未知足下所謂固有者爲何物? 又如何而循習之? 與何者爲殊塗? 又同歸於何許也? 又謂雖舊習之未忘, 而末嘗爲學之累, 則又未知今之新者爲何學? 而昔之舊者若何而能不爲之累也? 凡此所云, 竊恐非獨熹之愚有所不解, 意者足下之心亦未必能別其孰爲同異而執爲是非也. 足下幸試思之, 其然乎? 其不然乎? 如其果然, 則願姑以前者所引孟子之言爲主, 而博考古昔聖賢之遺訓以參驗之, 則夫人之所爲而學與其所以學者, 不待外求而得之於我; 向之所謂固有, 所謂同歸者, 始爲有以識之, 而知昔之舊者眞不足而果有累乎今日之新矣. 人之爲學, 必其有以先識乎此而知取舍之所定, 然後其功夫利病可得而言. 如其不然, 徒爲論說, 皆是空言, 無下落處, 無所補於事也.
景陽․季章於此皆嘗有聞, 雖未知其後來所進如何, 然苟善取之, 亦當有以爲助矣. 吾人旣不見用於世, 只有自己分上一段功夫. 若見得門戶分明, 端緖正當, 實用得些子氣力, 乃可以不負降衷秉彝之重. 此外瑣瑣一知半解, 正不足爲重輕也. 不審明者亦有意乎?
증무의에게 답함 答曾無疑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증무의에게 쓴 세 번째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씀하신 학문하는 방법은 진실로 그 핵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와 같이 하고서 그쳐버린다면, 논어에는 이 두 조목밖에 없는 것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지워버려도 될 것입니다. 성인이 널리 배우고(博學)․자세히 묻고(審問)․신중하게 생각하고(謹思)․밝게 분변하고(明辨) 독실하게 실천하라(篤行)고 가르치고, 그 이치의 크고 작음과 거칠고 정밀함을 강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마음이 밝아지고 명철해져서 통하지 않는 게 없고, 실천함에 있어서 진실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당신과 같이 먼저 한계를 세우고 미리 스스로를 방해하는 듯한 혐의를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示喩爲學之方, 固得其要. 然若只如此便了, 則論語只須存此兩條, 其餘皆可以削去矣. 聖人敎人博學․審問․謹思․明辨而篤行之, 蓋於理之巨細精粗無所不講, 然後胸次光輝明徹, 無所不通, 踐履服行, 無非眞盲. 似不當如此先立界限, 預設嫌疑以自障礙也.
증무의에게 답함 答曾無疑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증무의에게 쓴 네 번째 편지이다.
말씀하신 형님의 상기(喪期)에 대해, 예(禮)에서는 부고(訃告)를 들으면 곧 성복(成服)해야 하는데, 그때에 성복(成服)하는 것은 너무 늦었으니 진실로 이미 앞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련(祥練)의 예에 있어서는 문득 성복한 날로부터 지금까지의 실제적인 날짜를 계산하여 그것을 법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다만 그 사이의 기일(忌日)에는 별도로 제전(祭奠)을 설치해야 비로소 인정(人情)을 다하는 것입니다.
承喩令兄喪期, 於禮聞訃便合成服. 當時自是成服太晩, 固已失之於前; 然在今日祥練之禮, 却當計成服之日至今月日實數爲節. 但其間忌日却須別設祭奠, 始盡人情耳.
성인은 즐거움과 성냄으로 그 뜻을 움직인다는 것은 진실로 안 된다고 하셨는데, 만약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이는 성인의 마음이 나무나 돌과 같이 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즐거움과 성냄은 단지 거짓이 될 뿐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부분은 본성을 보존하고 함양하는 체험을 통해 스스로 공부해가면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얄팍한 식견으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謂聖人以喜怒動其志固爲不可, 若謂都無所動, 則是聖人心如木石, 而喜怒之見於外者特爲僞耳, 豈有是理哉? 此等處須是存養體驗, 自做得些工夫, 當自見(6-3107)之, 難以淺識懸斷也.
학습이라고 할 때의 ‘습(習)’과 전습(傳習)의 ‘습(習)’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傳)이란 바로 배운 것을 말합니다. 대체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는 것은 배우는 일이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실천하는 것은 익히는(習) 일입니다. 집주에 실려 있는 여러 선생의 설명이 매우 잘 되어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學習之 ‘習’ 與傳習之 ‘習’ 非有不同, 傳卽謂所學也. 大抵博學審問, 學之事也; 謹思明辨而力行之, 習之事也. 集注中所載諸先生說甚備, 可細考之.
편지의 충서(忠恕) 두 설명은 모두 진실에 가깝습니다. 제가 저번에 논했던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최근에 다시 자세히 보니 미진한 부분이 있어 이미 논어집주에서 다시 그 설명을 수정했습니다. 상세히 살펴보시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광무고원한(狂騖高遠) 자가 성인의 말씀을 멸시할까 염려 ……’한 말씀은 도리어 이와 같이 고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죽는 날까지 실천하는 것이 학자의 일인데, 성인이라 하더라도 무엇이 미리 예정되어 있겠습니까?
來喩忠恕二說皆近之. 熹鄕來所論, 正謂如此. 近復細觀, 乃有未盡, 已於論語集注中更定其說矣. 試詳考之, 當見曲折. 所謂 ‘竊恐狂鷺高遠者視之’ (云云)却不當如此顧慮. 終身行之, 自是學者事, 於聖人何所預哉?
시초의 숫자에 대한 설명은 그 뜻이 매우 정밀합니다. 다만 이른바 노음 노양은 그 수가 하나이고, 소음 소양은 그 수가 셋임은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사상(四象)의 변화는 64에서 끝나는데, 노양 12, 노음 4, 소음 12, 소양 20, 소음 28은 곧 자연의 수로서, 늘이거나 줄여서는 안 됩니다. 시초를 셈하는 이는 시초를 셈하여 나오는 것에 따라 말하는 것이니, 또 어찌 변화를 볼 수 없다고 염려하십니까?
蓍數之說, 其義亦精. 但不知所謂老陰老陽其數則一, 少陰少陽其數乃三是如何? 蓋四象之變, 極於六十有四, 老陽十二, 老陰四, 少陽二十, 少陰二十八, 乃自然之數, 不容增減. 楪者隨其所得而言之, 又何慮其不可觀變耶?
시초 셈하는 법: 초효가 나오면 곧 32괘가 있게 되고, 2효가 나오면 16괘, 3효가 나오면 8괘, 5효가 나오면 단지 2괘만 있게 되니, 역시 자연의 순서이니, 절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의심하는 것 역시 무슨 혐의입니까?
揲法: 初爻成則便止有三十二卦, 二爻成則便止有十六卦, 三爻成則便止有八卦, 四爻成則便止有四卦, 五爻成則便止有二卦, 亦是自然次序, 節次可見. 今所疑者, 亦何嫌哉?
시초를 셈하는 방법은 주례에서는 태복(太卜)의 관리가 관리한다 했으니, 그 방법이 매우 상세하고 엄밀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알 수가 없어 오직 역대전의 몇 구절에만 의존하고 있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것으로 추론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학자가 당시의 옛 방법을 알 수 없다면, 마땅히 이 방법을 지켜야지 멋대로 개인적인 생각으로 계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쑥(蒿)은 진짜 시초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러한 종류라 할 것입니다. 만약 목기(木棋), 죽산(竹算), 금전(金錢)으로 대신한다면, 시초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또 말씀하신 교중(交重)의 이론 역시 아직 분명하지 못합니다. 교(交)는 拆之聚이기 때문에 노음(老陰)이 되고, 중(重)이란 單之積이기 때문에 노양이 되는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는지요? 그러나 이 육효가 완성되면 땅에 선을 그어 상을 기록할 뿐이니, 처음부터 설법에는 예정된 것이 없습니다.
揲蓍之法, 周禮領於太卜之官, 計其法度必甚詳密. 今皆不可見矣, 獨賴大傳有此數句, 可以略見彷彿. 而以今推之, 亦無不可通處. 學者旣不得見當時舊法, 則亦且當守此, 不當妄以私意橫起計度也. 蒿固非蓍, 然亦猶是其類. 若以木棋竹(6-3108)算金錢當之, 則其去蓍益遠矣. 又如所言交重之論, 亦所未曉. 交者拆之聚, 故爲老陰; 重者單之積, 故爲老陽, 亦何疑之有乎? 然此六爻旣成, 而晝地以記之象耳, 於抴法初無所預也.
증무의에게 답함 答曾無疑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증무의에게 쓴 다섯 번째 편지이다.
학문하는 뜻을 논하면서 저를 매우 높게 평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참으로 소득이 있다면, 말을 기운을 내뿜는 것이 소득이 없을 때와는 저절로 다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누고 해설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능력을 알면서도 오직 다른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면, 실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눈이 밝은 사람이 그것을 보면, 다른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알아차릴 것입니다.
所論爲學之意甚荷不鄙, 但若果有所得, 出言吐氣便自不同. 纔見如此分疏解說, 欲以自見其能而唯恐人之不信, 便是實無所得. 自明眼人觀之, 固不待其詞之畢而有以識之矣.
효제(孝悌)와 충서(忠恕)를 가볍게 말하면 바로 사람이 늘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곧 일상 생활하는 데에 있어서 다시 설 곳이 없기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은 그것을 먼저 강조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른바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와서는 공경한다는 것과 충서가 도(道)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효제와 충서를 극대화시켜 말하면 효경에서 “신명(神明)과 통하고 사해(四海)에 빛나서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 것으로, 증자가 성인의 하나로 통하는 오묘한 도를 표현한 것도 충서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자에서 말한 것처럼 쉽게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대학의 도는 반드시 격물 치지를 우선으로 한 것이니, 천하의 이치와 온 세상의 책들을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묻고 삼가 생각하고 분명하게 변론하여 그 의리의 궁극점에 도달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일상 생활하는 데 늘 행하는 도로 인하여 성찰하고 실천하며 뜻을 돈독하게 하고 힘써 행해야만 이른바, 지극한 효제는 신명과 통한다는 것과 충서는 하나로 통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이른바, 효제와 충서는 비록 한 가지 일일 뿐이지만 모름지기 천하의 이치를 보아서 안팎으로 환히 통하게 되면 그 효제와 충서가 살아있는 것이 되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곧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 효제와 충서를 비록 종신토록 지켜서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시골구석에 사는 사람이나 부녀자의 몸조심[檢押] 정도가 될 뿐인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우선 거론한 유자(有子)와 증자(曾子)의 말을 가지고 살펴보면 문장의 뜻에 대해 전혀 끝까지 고찰하지 못한 듯합니다. 비록 정부자(程夫子)와 같은 근세 선각자의 말씀도 그 오묘함을 밝힌 것이 아마도 다 본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하물며 천차만별인 그 외의 정미한 의리에 대해 어찌 하나하나 그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 스스로 변론하여 합치되기를 구하면서 언어와 심력(心力)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체 놓아두고, 곧 그 말에 따라서 우선 대학과 논어를 가져다가 반복하여 충분히 읽고 난 다음, 정자(程子)의 말과 그 문인 몇 분의 말을 가지고 성현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서 구절마다 강론하고 글자마다 생각하여 털끝만큼도 관통되지 않은 곳이 없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니, 굳이 스스로를 그렇게 함부로 구속하며 억지 주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혹 믿을 수 있으면 한두 달 안에 날씨가 조금 따뜻해질 것이니, 그때 마음이 내키거든 한번 와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 서로의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어서 이렇게 질질 끌며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검압(檢押)] : 몸조심[檢押]의 검(檢)은 수(手) 변의 검(撿)이 되어야 한다.
孝悌忠恕, 若淺言之, 則方是人之常行, 若不由此, 卽日用之間更無立脚處. 故聖人之敎未嘗不以爲先, 如所謂入則孝, 出則悌, 忠恕違道不遠是也. 若極言之, 則所謂通于神明, 光于四海, 無所不通. 而曾子所以形容聖人一貫之妙者, 亦不過如此, 又非如前者言之可易而及也. 故大學之道必以格物致知爲先, 而於天下之理․天下之書無不博學蕃問, 謹思明辨, 以求造其義理之極, 然後因吾日用之間․常行之道, 省察踐履, 篤志力行, 而所謂孝悌之至, 通于神明, 忠恕之一以貫.(6-3109)之者, 乃可言耳. 蓋其所謂孝悌忠恕雖只是此一事, 然須見得天下義理表裏通透, 則此孝悌忠恕方是括物. 如其不然, 便只是箇死底孝悌忠恕, 雖能待守終身, 不致失墜, 亦不免但爲鄕曲之常人, 婦女之檢押而已, 何足道哉? 今且以所擧有子․曾子之言觀之, 似於文義之間全未考究. 雖近世先覺, 如程夫子之言, 所以發明其妙者, 恐皆未嘗過目而經心, 而况於其他義理精微, 千差萬別, 豈能一一會其旨歸也哉?
故熹竊以爲今日與其自辨以求合, 枉費言語, 枉費心力, 不若一切放下, 便依此說, 且將大學․論語反復熟讀, 而因程子之言與其門人數公之說以求聖賢之指意所在, 句句而講, 字字而思, 使無薯髮不通透處, 則自不須如此妄自拘束, 强作主張也. 無疑試更思之, 恐或可信, 則一兩月間, 天氣差暖, 或能乘興一來, 面馨其說, 庶幾彼此殫盡, 免至如此擔閣, 虛賚光陰也.
해시계의 제작은 매우 정밀하니, 삼구에 있는 왕백조 시랑이 제정한 관력각루도(官曆刻漏圖) 일편 역시 이것과 같습니다. 역상(曆象)의 학문은 그 자체가 하나의 학파이니, 그 이치를 탐구하고 싶다면, 강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대체를 세운 후에 거기에 나아가야 어려움에 부딪치지 않고 통달할 것입니다. ‘북궁유(北宮黝)는 맹시사(孟施舍)와 비슷하다’는 말은 맹자 본문에 없는 말인데, 보통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 구절은 함부로 그 득실을 논할 수 없습니다.
晷景制作甚精, 三衢有王伯照侍郞所定官曆刻漏圖一編, 亦與此同. 曆象之學, 自是一家, 若欲窮理, 亦不可以不講. 然亦須大者先立, 然後及之, 則亦不至難曉而無不通矣. ‘北宮黝似孟施舍’, 孟子本文無此語, 不知尋常如何曉會? 此句未敢輕論其得失也.
증무의에게 답함 答曾無疑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증무의에게 쓴 여섯 번째 편지이다.
여자약(呂子約)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그대의 사람됨을 대단하게 칭찬하고는 있지만 그 사이에 서로 만나 함께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며 암송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긴요하고 친절한 곳에 또한 속마음을 다 털어 놓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은 흘러가 세월이 우리와 함께 해주지 않는데, 뜻을 가진 정부가 어찌 이처럼 막연하게 배회하고 머뭇거리면서 늙어서야 되겠습니까?
子約書來, 必盛種無疑之爲人. 但不知中間相聚, 所與切磨誦說者果爲何事? 計於緊要親切處亦未必能盡所懷爾. 日月逝矣, 歲不我與, 丈夫有志者, 豈當爲此悠悠泛泛, 徘徊猶豫, 以老其身乎?
증택지에게 답함 答曾擇之(祖道)
[해제] 이 글은 경원 3년(정사, 1197년, 68세)에 증택지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예(禮)는 곧 리(理)입니다. 다만 그저 리라고 하면 마치 말할 수 있는 형체나 흔적이 없다고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나 예로 만들면 경험 가능한 품절(品節)과 문장(文章)이 있게 됩니다. 오상과 같은 인사는 모두 마땅한 바의 대강을 볼 수 있지만, 예에서는 그 위의(威儀)와 법칙을 상세히 볼 수 있습니다. 절문(節文)과 의칙(儀則)을 사(事)라 하니,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禮卽理也, 但謂之理, 則疑若未有形迹之可言; 制而爲禮, 則有品節文章之可見矣. 人事如五者, 固皆可見其大槪之所宜, 然到禮上, 方見其威儀法則之詳也. 節文儀則是曰事, 宜細考之.
‘충서’ 두 글자의 그 본래 의미는 배우는 사람과 보통 사람들의 일입니다. 증자가 말한 것은 이를 빌어 하나로 꿰뚫는 성인의 신묘한 도를 형용한 것입니다. 정자의 말씀도 천지조화의 체용을 빌려 성인의 일을 밝힌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세 부분에서 보고 각각의 핵심을 이해하면, 이 문장의 뜻도 저절로 관통할 것입니다. 다시 천천히 깊이 생각하시고, 빨리 도달하려고 욕심내지 마십시오.
‘忠恕’ 二字, 其本義只是學者衆人之事, 曾子所言, 乃借此以形容聖人一貫之妙; 程子之言, 又借天地造化之體用以明聖人之事. 須作三節看, 見得各有下落, 則一章之指自通貫矣. 更徐玩之, 非欲速所能達也.
이 설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칠조개의 말은 의미가 심밀(深密)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증점의 말은 천천히 생각하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증점의 뜻을 이해한다면, 칠조개의 뜻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정자가 말씀한 ‘대의(大意)’라는 두 글자의 뜻이 무엇이고, 두 분의 이해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십시오.
(6-3111)此說未然 ‘但漆雕語意深密難尋, 而曾點之言可以玩索而見其意. 若見得曾點意, 則漆雕之意亦可得矣. 且看程子說 ‘大意’ 兩字是何意, 二子見得是向甚處, 如何見得.
증택지에게 답함 答曾擇之
[해제] 이 글은 경원 3년(정사, 1197년, 68세)에 증택지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질문: 인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입니다.
답변: 인은 마음의 덕이란 말은 적셔주는 것은 물의 덕이요, 말려 주는 것은 불의 덕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이치란 나무의 뿌리요 물의 원천이란 말과 같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仁者心之德, 愛之理也.’
仁者心之德, 猶言潤者水之德, 燥者火之德. 愛之理, 猶言木之根․水之原. 試以此意思之.
질문: ‘자기를 다하는 것을 충이라 한다.’에 대해, 저는 처음에 내 마음에 이르는 것을 다해서 조금의 숨김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선생님께서 말이 명료하지 못하고 여기셨습니다. 제가 다시 생각해보니, 내 마음을 다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대답: 뒤의 말은 본래의 뜻과 더 멀어졌습니다. 앞의 말은 단지 ‘스스로 숨긴다[自隱]’는 두 글자만 부적절했습니다. 꼭 스스로 숨길 필요가 없는 뒤에 비로소 불충(不忠)이 되고,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곧 병임을 알아야 합니다.
‘盡己之謂忠’, 祖道初以爲盡吾心之所至而無一毫自隱, 先生以爲語未瑩. 祖道再思之, 恐止是竭盡吾心而無一亳不足之義.
後語轉疏, 前語只 ‘自隱’ 二字不切. 須知不必自隱然後爲不忠, 但有不盡處, 便是病也.
질문: 하나만을 주장해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것을 경이라 한다.
대답: 이러한 말은 힘써 실천해야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主一無適之謂敬.
此等語須力行之, 方見得眞實意味.
질문: ‘예는 천리의 절문(節文)이요, 인사의 의칙이다.’
대답: 천인의 관계에서 보십시오.
(6-3112)‘禮者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
更就天人上看.
질문: 의란 일의 마땅함이다.
대답: 맹자가 의를 설명하는 곳에서 다시 추론해보십시오.
義者事之宜也.
更以孟子說義處推之.
질문: 논어 「이인」편의 충서(忠恕).
대답: 증자의 ‘충서’ 두 글자는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한 주석입니다. 다시 이정 선생과 사상채의 설을 반복해서 체인(體認)해보고, 집주의 설을 참고하면 성인의 뜻이 세밀하지 대충 말하지 않았음을 알 것입니다.
忠恕
曾子 ‘忠恕’ 二字便是一以貫之底注脚. 可更以二程先生及上蔡說反復體認, 仍以集注之說參之, 便見聖賢之意直是細密, 不是泛然儱侗說話.
질문: 논어 「이인」편의 ‘약(約)으로써 잃는 자는 적다.’
대답: 약(約)에는 안으로 수렴하여 착실히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대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채의 설이 좋습니다.)
以約失之者鮮矣
約有收歛近裏著實之意, 非徒簡而已. (上蔡說得好).
질문: 논어 「이인」편의 ‘덕은 외롭지 않다.’
대답: 이 덕은 주역 곤괘 문언전의 ‘덕은 외롭지 않다’와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단지 덕이 있는 사람의 의기(意氣)는 서로 구하여 저절로 고립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이웃이 있습니다. 역에서는 도리어 경의(敬義)가 이미 확립되면 안과 밖이 모두 갖추어져서 그 덕이 성하여 외롭지 않음을 설하고 있습니다.
德不孤
此德不孤與易中說德不孤不同, 此但言有德者聲氣相求, 自不孤立, 故必有鄰. 易中却是說敬義旣立, 則內外兼備, 則其德盛而不孤也.
질문: 칠조개(漆雕開)․증점(曾點)
대답: 두 분은 믿음이 매우 깊으니, 또 어떻게 믿음을 말하겠습니까? 증점의 말은 다시 집주을 위주로 하여 자세히 체험해 보고, 아울러 상채의 설을 보면 역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漆雕開․曾點
二子是信箇甚底, 又是如何地信? 曾點語可更以集注爲主, 子細體驗, 仍看上蔡之說, 發明得亦親切.
질문: 3년상을 하고 다시 기상(期喪)을 한다는 것은 기상의 복을 입고서 그 상에 임하고, 일이 끝나면 다시 초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복중(服重)하는 것이니 경복(輕服)으로 갈아입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떤지요?
대답: 혹자(或者)의 설은 옳지 않다.
(6-3113)三年之喪而復有期喪者, 當服期喪之服以臨其喪, 卒事則反初服. 或者以爲方服重, 不當改衣輕服. 不知如何?
或者之說非是.
질문: 졸곡(卒哭).
대답: 100일이 지나 졸곡(卒哭)하는 것은 바로 개원례(開元禮)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의 장례(葬禮)는 정해진 날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서 왕공(王公) 이하가 다 100일로 자르게 된 것이니, 그것은 예(禮)의 본뜻을 상당 부분 잃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선비가 달을 넘기고 나서 장례를 지냈고, 장례를 지낸 뒤에는 우제(虞祭)를 지냈고, 우제를 지낸 뒤에는 졸곡을 하여 그 나름대로의 일 수가 있었으니, 무슨 의심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집안의 모든 일을 잘 알지 못하여 자연히 그 정해진 날짜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날짜가 지나도록 장례를 지내지 않았으면 졸곡을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만약 한 달이 되지 않았으면 또 장례를 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卒哭
百日卒哭乃開元禮以今人葬或不能如期, 故爲此權制, 王公以下皆以百日爲斷, 殊失禮意. 古者士輸月而莽, 葬而虞, 虞而卒哭, 自有曰數, 何疑之有? 但今人家諸事不辨, 自不能及此期耳. 若過期未葬, 自不當卒哭, 未滿一月, 則又自不當葬也.
증택지에게 답함 答曾擇之
[해제] 이 글은 경원 3년(정사, 1197년, 68세)에 증택지에게 쓴 세 번째 편지이다.
지난 번 편지에서 말씀하신 ‘일(一)’자에서 곡절을 찾고 싶다 하였는데, 나중에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반드시 이와 같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핵심이 되는 부분을 보고 다시 공부를 통해 자세히 변별하며 중요하지 않은 곳이라도 대충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오래 하면, 저절로 관통하게 되고 정추(精粗)가 일치할 것입니다. 계장이 자세히 설명한 부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또 당시 말한 것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대개 그 곳의 친구들이 글을 보는 것이 소략(疏略)하여, 선유들이 완성해 놓은 이론을 반복해서 체험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경솔하게 자기의 의견으로 자구를 해석하니, 설령 그 대의를 이해하더라도 중간 중간에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생기게 되어 앞뒤가 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겸손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배 유학자들이 말한 글을 반복하여 익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래하면 저절로 의미를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前書所說欲於 ‘一’ 字中推尋曲折, 不知後來看得如何? 恐亦不必如此, 但從頭看到要緊處, 更加功夫子細辨別, 而不緊要處亦不可草草, 則久之自然浹洽貫通, 精粗一致矣. 季章說致曲處, 不知如何? 今亦不記當時所說. 大抵彼中朋友看得文字疏略, 不肯依傍先儒成說反覆體驗, 而便輕以己意著字下語, 正使得其大(6-3114)意, 中間亦不免有空闕處, 相接不著. 欲革此弊, 莫若凡百放低, 且將先儒所說正文本句反覆涵泳, 庶幾久久自見意味也.
증택지에게 답함 答曾擇之
[해제] 이 글은 경원 3년(정사, 1197년, 68세)에 증택지에게 쓴 네 번째 편지이다.
말씀하신 증점의 대의는 맞습니다. 칠조개(漆雕開)가 천하를 경륜하는 뜻을 가졌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로 자기에게 지극히 친절한 곳에 미진한 점이 있음을 자각한 것일 뿐입니다. 비록 그 본 곳이 증점처럼 가슴이 확 트이지도 않았고, 얻은 곳이 증점처럼 차분한 수준에 이르지도 않았지만 그 공부의 정밀함은 증점으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규모와 국량이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만 성현의 가슴속이 확 트인 곳을 상상하고자 한다면 도리어 도움이 없을 것이니, 모름지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의 측면에 나아가 공부를 하여 매우 고생스럽고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곧 점차로 좋은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所論曾點大意則然, 但謂漆雕開有經綸天下之志, 則未必然. 正是己分上極親切處, 自覺有未盡耳. 雖其見處不及曾點之開闊, 得處未至如曾點之從容, 然其功夫精密, 則恐點有所不逮也. 以此見二人之規模格局大槪不相上下. 然今日只欲想象聖賢胸襟灑落處, 却未有益, 須就自家下學致知力行處做功夫, 覺得極辛苦, 不快活, 便漸見好意思也.
천하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간다는 설에 대해, 정선생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설하고 있고, 여여숙은 허견(虛見)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 득실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계굉(季宏)이 왔는데, 발미(跋尾)만 요구할 뿐 전혀 강론을 하지 않는데, 글 짓는 것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의 선비들은 대부분 이와 같이 밖으로만 나가려 하고 내면을 향해 사려하고 그 연원을 논하지 않아 그 책임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간다기에 이 글을 보냅니다. 저는 늙고 병듦이 더욱 고질이 되어 이미 고칠 수 없는 병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친구들과 이 문제를 강론하여 잘못된 폐단을 조금이라도 개혁하여 영원하게 하십시오. 당신께서 일이 없을 때 들려주셔서 서로 한 보름 정도 만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天下歸仁之說, 程先生是說實事, 呂與叔恐不免墮於虛見, 其得失自可見也. 季宏之來, 只是要求跋尾, 全然不曾講學, 却須曾理會作文. 大率彼間士人多是如此鄕外走作, 不曾鄕裏思量, 論其淵源, 蓋有不得不任其責者矣, 甚可嘆也. 因其告歸, 附此爲報. 熹衰病沈痼, 腹心之患已成, 尙思更與朋友講論此事, 少革流弊, 以垂永久. 賢者無事更能見過, 相聚旬月, 是所望也.
왕재신에게 답함 答王才臣
[해제] 이 글은 경원 6년(경신, 1200년, 71세)에 왕재신에게 쓴 편지이다.
당신의 긴 편지를 받고서 당신의 훌륭한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독서하고 궁리하면서 이해한 것과 아직 의심스러운 것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장단점을 헤아리면서도 남을 틀리다 하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뜻이 사실 많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의리의 핵심을 이해하신다면, 바라건대 다시는 이러한 병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받아들인다면, 잠시 이를 접어놓고 의문나는 점에 대해 함께 강론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무의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편지의 큰 틀은 당신과 서로 비슷했습니다. 이미 자세하게 답장을 했습니다. 혹시 보게 되면 그 득실에 관해 한 말씀 하여도 괜찮을 것입니다. 부탁하신 육영(六詠)은 까먹은 게 아닙니다. 실은 근년에 예학에 관한 글들을 편집하는데, 항목은 상당히 많은데 늙고 병든지라 온 힘을 다하느라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급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지, 감히 받들지 못했을 뿐입니다. 「격재(格齋)」의 큰 글자는 좋은 제목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채울 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글자를 베끼는 것 역시 어려운 건 아니지만, 마침 요 며칠 동안 날씨가 매우 춥고 쇠약한 병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날씨가 풀리면 써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곳으로 오시겠다고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만약 만나서 서로 툭 터놓고서 의심나는 점을 판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未間千萬及時專力, 使有箇端的用心處, 庶幾合幷之日有可討論也. 子直詩甚佳, 南容之篇尤有餘味, 已輒爲題其後, 因書幸以報之也.
來喩縷縷, 備見雅志. 然於讀書窮理所得所疑未有以見敎者, 而較短量長, 非人是己之意實多. 若果有得於義理之歸, 懇不應更有此病也. 明者思之, 以爲如何? 苟有取焉, 則願置此, 而姑相與實講所疑, 乃千萬之幸也. 無疑書來, 其大指與左右亦相似, 已詳報之. 或因過目, 倂以一言論其得失可也. 六詠之需, 非敢忘之. 實以年來纂次禮家文字, 頭項頗多, 衰病之餘, 精力向盡, 無暇可及. 亦覺未是急務, 故不敢以奉浼爾. 格齋大字, 此却好箇題目, 顧未知所以充之者如何. 寫字亦非所難, 適此兩日寒甚, 衰病拘攣, 不可轉動. 向後晴暖, 當試爲之, 以奉寄也. 承有枉顧之意, 尤荷不鄙. 若得曾面, 彼此傾倒, 以判所疑, 何幸如之! 未間千萬及時專力, 使有箇端的用心處, 庶幾合幷之日有可討論也. 子直詩甚佳, 南容之篇尤有餘味, 已輒爲題其後, 因書幸以報之也.
도주경에게 답함 答度周卿 (正)
[해제] 이 글은 경원 3년(정사, 1197년, 68세)에 도주경에게 쓴 편지이다.
요즈음 근황이 어떠하십니까? 글을 읽고 도를 탐구하는 데에 또한 새로운 성과가 많이 있었습니까? 시간을 얻기는 쉽지만 의리를 밝히기는 어려우니, 다만 일상생활하는 데에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이 마음을 일깨워 방일(放逸)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일에 따라 이치를 관찰하며 강구하고 사색하여 깊이 탐구하면서 반복하면 성현의 가르침에 대해 점차 묵묵히 서로 부합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천도(天道)와 성명(性命)이 진실로 이 몸에서 벗어나지 않고, 우리가 말하는 학문이 이것 외에 별도로 힘써야 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편지가 와서 손 가는 대로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는데,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十月十六日, 熹頓首: 去歲囗河幸辱遠訪, 得遂少款, 爲慰. 慰次客舍囗別, 忽忽期年, 又兩三閱月矣. 不審何日得遂舊隱? 官期尙幾何時?) 比來爲况如何? 讀書探道亦頗有新功否耶? 歲月易得, 義理難明. 但於日用之間隨時隨處提撕此心, 勿令放逸, 而於其中隨事觀理, 講求思索, 沈潛反復, 庶於聖賢之敎漸有黙相契處, 則自然見得天道性命眞不外乎此身, 而吾之所謂學者舍是無有別用力處矣. (相望數千里, 奚由再會一日?) 因書信筆, 不覺縷縷, 切勿爲外人道也. (此書附建昌包生去, 渠云自腎相識, 且欲求一致公書, 不知果有囗否? 刻舟求劍, 似亦可笑, 然亦可試爲物色也. 所欲言者非書可盡, 燈下目昏, 萬萬, 不宣. 熹再拜周卿敎授學士賢友.)
(囗溪大字後事處曾訪問得否? 去歲回建陽後, 方得囗此所惠書幷書藁策問. 所需囗囗, 又何敢復告邪? 熹.)
이성지에게 답함 答李誠之 (訧)
[해제] 이 글은 소희 3년(임자, 1192년, 63세)에 이성지에게 쓴 편지이다.
새로 간행한 이선생사기(二先生詞記)를 특별히 보내주시고, 아울러 긴 편지 한 통까지 보내주시니, 기문(記文)은 별 것 없는데 편지에서 두텁게 평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도는 곧 복희․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맹자가 전해준 도이며, 선생의 글은 육경과 공자 맹자의 글의 요지를 밝힌 것이지, 처음부터 별도로 기묘하고 특이한 것이 있어서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옛 성현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군자들이 그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읽으니 갑작스럽게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정씨의 학문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옛 성현의 학문도 사실 알지 못합니다. 온 세상이 어두워 성현의 글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안주하니, 총명하고 박식하며 언어와 문자에 능하며 이름나 기개와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러한 것을 더욱 하기 싫어합니다. 지금 당신은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몇 가지 부끄러운 잘못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씀씀이는 홀로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성현의 사당을 세우고 기문을 새겨 그 존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또 하찮은 제게까지 질문해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의지가 홀로 오늘날 세속의 선비들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삼가 제게까지 질문을 주셨기 때문에 이와 같이 대강의 틀을 논했습니다. 대학장구가 곧 간행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 번 읽고 세 번 생각하면, 장차 반드시 그 요체를 얻을 것이고, 이후에 문장과 사업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함부로 지껄여 죄송합니다.
特承寄示新刻二先生詞記, 幷枉長書一通, 記文鄙淺而書意勤厚, 非區區所敢當也. 然先生之道, 卽伏羲․堯․舜․禹․湯․文․武․周公․孔․孟所傳之道; 先生之書, 卽所以發明六經孔孟之書, 初非別有奇妙奇特, 自爲一家之說, 而與古之聖賢異軌殊轍也. 世之君子固未必嘗讀其書, 而驟讀其書, 亦未能遽曉, 是蓋不唯不知程氏之學, 實乃幷與古昔聖賢之學而不之知也. 擧世昏冥, 恬不覺悟, 而其聰明辯博, 能爲文字語言, 名有氣槪才力者, 則其惡之爲尤甚. 今以門下之才之美, 宜已無愧此數者. 而其用心獨不然, 蓋不惟立祠伐石, 以著其尊慕之意, 而來書之喩, 又將不鄙迂陋而辱問津焉, 此其志豈獨賢於今世之士也哉! 竊感下問之勤, 故粗論其梗槪如此. 近所刊定大學章句一通, 今致几下. 所欲言者, 不能外(6-3118)此. 幸一讀而三思之, 其必將有以得之, 而異時所以見於文章事業者愈有光矣. 僭率皇恐.
이성지에게 답함 答李誠之
[해제] 이 글은 소희 1년(경술, 1190년, 61세)에 이성지에게 쓴 편지이다.
지난 번에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선현(先賢)의 문집(文集)에 후서(後序)를 지어달라고 하셨는데, 제 자신이 문장 실력이 없어 그대의 호의에 부응하기가 부족한 줄은 압니다. 다만 선대(先代)의 친분이 두터움과 매우 사모하는 심정을 우선, 이것을 계기로 하여 절의(絶義)를 높이 장려하고 혐의쩍었다는 일을 구별하며 은미함을 밝히는 뜻을 조금이라도 보이고자 하여 감히 강력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곧바로 대강 그 내용을 정하여 정정해 주기를 청하였던 것이니, 저의 마음으로는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존복명벽(尊復明辟)’이라는 네 글자를 고쳐서 쓸데없는 것을 빼버리고자 하신 것은 어구(語句) 배치에 대한 견해가 정밀하고 적절한 것이니, 선배들이 말한, “본래 온당한 글자가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완미(玩味)하고서 탄복하기를 절로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다만, “적도(賊徒)를 평정한 공이 비록 외부의 도움으로 말미암았지만”이라고 한 말은 바로 공적(功績)을 나누고 사실을 기록하여 쟁론(爭論)을 종식시키자는 저의 하찮은 뜻입니다. 주승상(朱丞相)이 기록한 당시의 일이 상세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공을 독점하고자 하여 도리어 여이호(呂頤浩)와 장준(張浚)이 일을 망쳤다고 헐뜯었으며 또 그 뒤에 이강(李剛)과 조정(趙鼎) 등 여러 사람들을 헐뜯어 너무 심하게 무고하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래서 읽는 자들이 종종 그르다고 여겨 코웃음을 치면서 그 믿을 수 있는 것까지도 믿지 않으니, 부디 충분히 생각하십시오. 아마도 고쳐서는 안 될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주승상(朱丞相)] : 승비(勝非)이다.
昨蒙不鄙, 俾撰先正文集後序. 自知不文, 不足以副厚意. 顧以先契之重, 鄕往之深, 且欲託此以少見尊獎節義․別嫌明微之意, 以是不敢力辭, 而輒草定其說, 以求商訂. 區區之心, 蓋未敢自以爲是也. 所欲更定 ‘尊復明辟’ 四字, 刊去繁冗, 著語精切, 前輩所謂自有穩字, 正此謂也. 玩味欸服, 不能自已. 但 ‘平賊之功離由外濟’ 之語, 乃是區區鄙意分功紀實, 以息爭論之微指. 朱丞相所記當時之事非不詳明, 正以欲專其功而反詆呂․張爲敗事, 又其後深詣李․趙諸公, 誣謗已甚, 故讀者往往心非而鼻笑之, 幷與其可信者而不信之也. 願熟思之, 恐不可改. 如何?
여숭보에게 답함 答徐崇父 (僑)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서숭보에게 쓴 편지이다.
일상생활이 공부를 우선 그렇게 살펴서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오래 되면 몸에 푹 배이게 되어 자연히 보는 곳이 있을 것이니, 또한 별도로 목표를 세워 곧바로 공정(工程)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오타(敖惰)’에 대한 말씀은 인용하신 바와 같이 맹자께서 안석에 기대어 누운 것과 같은 것이니,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겼으면 이미 된 것인데 하필 성인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性)이 아니라고 의심하십니까? 맹자뿐만이 아니라 공자께서 비파를 가져다가 노래 부르신 것과 같은 것도 그런 종류입니다. 다만 대학의 뜻은 문득 사람이 그 부분에 한결같이 치우쳐서 다시 더 살피지 못하게 될까 염려한 것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이 중요한 곳을 보아서 바른 뜻을 알아 취한 다음 이를 받아 들여 성찰해야 할 것이지, 굳이 긴요하지 않은 곳을 부질없이 사색하는데 시간을 낭비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日用功夫且得如此照管, 莫令間斷, 久之浹洽, 自有見處. 亦不須別立標的, 便計工程也. 敖惰之說, 如所引孟子隱几而臥而以爲當然, 則已得之矣, 何必疑其非本有耶? 不但孟子, 如孔子取瑟而歌, 亦是此類. 但大學之意, 却是恐人於此一向偏却, 更不照管. 今當看此重處, 識取正意, 受用省察, 不必向閑慢處枉費思索也. 子顔時時往來, 甚佳. 才卿得託門館, 甚善. 其人有立作, 看得道理亦子細, 儘好從容講論也.
임숙공에게 답함 答林叔恭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임숙공에게 쓴 편지이다.
학문하는 것은 다만 정성을 다하고 오래도록 견디면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굳이 딴 생각하여 앞뒤를 잴 필요가 없습니다.
爲學只要致誠耐久, 無有不得, 不須別生計較, 思前算後也.
반자선에게 답함 (6-3120)答潘子善 (時擧)
[해제] 이 글은 ??년(??, ??년, ??세)에 반자선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편지를 보고, 당신께서 학문하는 뜻을 알았습니다. 참 좋고 다행입니다.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독학(獨學)하는 것과 사우(師友)를 두루 찾아다니며 배우는 것이 그 난이도(難易度)는 본래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하는 것은 실로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곳에 있는 붕우 중에 편지를 보내 온 자가 이미 몇 사람이 있으니, 간절히 노력하면서 서로 본보기로 삼아 선하게 되도록 힘쓰면 아마도 전연 도움이 없지 않은 듯하니, 다시 부지런히 노력하는데 달렸을 뿐입니다.
辱書, 備知學問之志, 甚善甚幸. 杜門獨學與周旋師友之間, 學之難易固不同矣. 然其用力實在於我, 非他人所能代也. 况彼中朋友以書來者已自數人, 切切偲偲, 相觀而善, 似亦不可謂之全然無助者. 更在勉力而已.
반자선에게 답함 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반자선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사람을 통해 두 번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습니다. 요즈음 가을 날씨가 서늘한데,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늙고 병들어 가을을 넘기면서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늙음을 이유로 사직서를 올렸으나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해, 날마다 걱정스런 마음이 깊을 뿐입니다. 조공보는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늘 종용합니다. 그가 떠난다기에 대충 써서 보내니, 나머지는 공보가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그 간이라도 늘 몸조심하시기를 하시는 일마다 잘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의문점에 대해서는, 각각의 물음 아래에 설명을 하였고, 자세한 것은 공보가 말해줄 것입니다.
便中兩承惠書, 深以爲慰. 比日秋凉, 所履佳勝. 熹衰病涉秋似有向安之漸, 但辭職告老皆未報可, 日深悚惕之懷耳. 恭父留此甚久, 儘得從容. 因其行草草附此, 其他恭父必能言之. 未間, 唯冀以時自愛, 眷集一一佳慶.
諸疑問各疏其下矣, 恭父當能道其詳.
반자선에게 답함(역전과 근사록을 질문함) 答潘子善(問易傳近思錄)
[해제] 이 글은 경원 1년(을묘, 1195년, 66세)에 반자선에게 쓴 세 번째 편지이다.
질문: 대축괘 「단전」에서 “능히 강건함을 저지함이 크게 바른 것이다”라고 하고, 「역전(易傳)」에서 “강건함을 저지함은 크게 바르지 않으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인 대축괘에 의거하면, 그 강건함을 아래에서 저지한 것입니다. 지금 ‘강건함을 저지한다[止乎健]’고 말하는 것은 강건함에 그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강건함을 저지한다는 말입니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능히 강건함을 저지한다[能止健]’는 간(艮)괘의 그침으로 건괘의 강건함을 저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역전」의 뜻 또한 이와 같은데, 다만 문세가 전도된 듯합니다. 다른 것도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大畜彖曰: ‘能止健, 大正也.’ 傳曰: ‘能止乎健者, 非大正則安能?’ 據大畜天在山中之象, 則是能止其健於下也. 今曰止乎健者, 不知是止於健, 還是止其健耶? 伏乞批誨.
能止健, 言以艮之止止乾之健也. 傳意亦是如此, 但其文勢似倒, 他亦多此類也.
질문: 습감(習坎)괘는 팔괘 중에서 유일하게 감괘에 ‘습(習)’자를 덧붙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설들이 많습니다. 과연 무슨 뜻입니까?
대답: 이러한 곳에 관해 반드시 그 설을 깊이 탐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習坎, 八卦中獨坎加 ‘習’ 字, 說者多矣, 未知義果如何?
此等不必深求其說.
질문: 습감 괘의에 관해 역전에서 “양효(陽爻) 하나가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태어남에 가장 먼저 하는 자이므로 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무릇 양기가 생겨날 때에는 반드시에 아래에서 시작하니, 복괘의 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가운데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뜻이 무엇입니까?
대답: 기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정자의 설명은 이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서로 뒤섞어서는 안 됩니다.
習坎卦義, 傳云: “‘一始於中, 有生之最先者也, 故爲水.” 夫陽氣之生必始於下, 復卦之象是也. 今曰始於中, 其義如何?
氣自下而上爲始, 程說別是一義, 各有所王, 不相妨, 然亦不可相雜.
질문: 함(咸)괘 상육(上六)에 ‘감동함이 광대뼈와 뺨과 혀이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상육효에는 회린(悔吝)이 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회린(悔吝)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답: 길흉회린(吉凶悔吝)은 사정(邪正)과 관련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단지 그것이 사람을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뜻을 나타낼 뿐이지 과실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린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咸上六: ‘咸其輔頰舌’, 竊意此爻宜有悔吝, 而不言悔吝, 何也?
吉凶悔吝係乎邪正, 此但見其不足以感人之意耳, 未見有失, 故不得以悔吝言(6-3122)也.
질문: 돈(遯)괘 구삼(九三) 효사에 “신첩(臣妾)을 기름에는 길하다”고 했고, 역전은 “사사로운 은혜로 얽어매어 사랑함은 소인과 여자를 감싸주는 도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써 신첩(臣妾)을 기르면 그 마음을 얻어 길함이 된다”고 했습니다. 소인과 여자는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합니다. 만약 사사로운 은혜로만 그들을 품는다면 반드시 회린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효를 길하다고 하였으니, 왜 그렇습니까?
대답: 이 효는 대사가 아니고, 단지 신첩을 기를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아랫사람을 거느려 그들을 품으면서 바름을 잃지 않고, 그들을 감싸주는 데 있어서 그 바름을 잃지 않을까 걱정할 뿐입니다.
遯九三: ‘畜臣妾, 吉.’ 傳曰: ‘係戀之私恩, 懷小人女子之道也, 故以畜養臣妾則得其心爲吉也.’ 小人女子近之則不孫, 遠之則怨. 若專以私恩懷之, 未必不有侮吝. 而此爻以爲吉, 何耶?
此爻不可大事, 但可畜臣妾耳. 御下而有以懷之, 未爲失正, 但恐所以懷之者失其正耳.
질문: 대장(大壯)괘 상육(上六)효에 “숫양이 울타리를 떠받아 물러가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하여 이로운 바가 없으니, 어려우면 길(吉)하리라” 했는데, 역전은 ‘어려움[艱]’을 어려움과 곤궁함을 만나면 그 강장함을 잃게 되고, 도리어 유약한 분수를 얻게 되므로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물러나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하여 이로운 바가 없으면 이미 어렵고 곤란한 것인데, 또 어려움을 만난다고 말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이 ‘간(艱)’자는 그 일이 어렵고 힘들어 감히 나아려하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으면 길하다는 것이니, 마치 대축괘의 구삼효의 ‘어렵게 여기고 정함(貞)이 이롭다’고 할 때의 ‘간(艱)’처럼 설명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대답: 당연히 대축괘의 예와 같습니다.
大壯上六: ‘羝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無攸利, 艱則吉.’ 傳以 ‘艱’ 字爲遇艱困則失其壯而得柔弱之分, 故吉. 竊意不能退遂而無所利, 則是已艱困矣, 而又曰遇艱, 何也? 恐此 ‘艱’ 字只作艱難其事而不敢求進不已則吉, 如大畜九三 ‘利艱貞’ 之 ‘艱’ 說, 如何?
當如大畜之例.
질문: 진괘 「서괘전」에 ‘사물은 끝내 장성할 수 없으므로 진괘로 받는다’ 했는데, 역전은 ‘사물은 장성하고서 끝내 멈추는 이치는 없으니, 이미 장성하면 반드시 나아간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사물이 나아간 뒤에는 장성함에 이르고, 이미 장성하면 쇠퇴함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지금 장성하면 반드시 나아간다고 하니,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대답: 사물에는 장성한 뒤에 나아가는 것이 있고, 또 나아간 뒤에 장성하는 것이 있습니다. 각각 그 일에 따라 말하는 것이니, 어느 하나의 설로 제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12월의 괘로 논하자면, 대장괘가 쾌괘가 되고, 쾌괘가 건괘가 되는 것은 장성한 이후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건괘에 이름은 바로 극에 달했으니 쇠퇴하는 것입니다.
晉序卦: ‘物不可以終壯, 故受之以晉.’ 傳曰: ‘物無壯而終止之理, 旣壯盛, 則必進.’ 竊意物進而後至於壯盛, 旣壯盛則衰退繼之矣. 今曰壯盛則必進, 此義如何?
物固有壯而後進者, 亦有進而後壯者, 各隨其事而言, 難以一說拘也. 且以十(6-3123)二月卦論, 大壯之爲夬, 夬之爲乾, 豈非壯而後進乎? 至乾乃極而衰耳.
질문: 진괘 역전에서 ‘나아감이 성한데도 덕을 말함이 없는 것은 있을 필요가 없어서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유괘는 성하다 할 수 있고, 괘에는 괘덕이 있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대답: 원형리정(元亨利貞)은 본래 사덕(四德)이 아닙니다. 다만 크게 형통하고 정도를 지킴이 이롭다는 점괘일 뿐입니다. 건괘의 「단전」․「문언」은 가차하여 사덕을 삼은 것이니, 다른 괘에서 덕으로 논하는 것은 더욱 부당합니다.
晉傳曰: ‘晉之盛而無德者, 無用有也.’ 然大有可謂盛矣, 而卦有卦德, 不知如何?
元亨利貞本非四德, 但爲大亨而利於正之占耳. 乾卦之彖傳․文言乃借爲四德, 在他卦尤不當以德論也.
질문: 진괘 육삼효사에 ‘많은 사람이 믿어주니 뉘우침이 없다’ 했고, 역전에서는 “혹자가 말하기를 ‘중정(中正)을 따르지 않고 무리와 함께 함이 선(善)이 될 수 있는가?’ 하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무리가 믿는 것은 반드시 지당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의롭지 못하면서도 무리를 얻는 경우가 있는데, 제나라의 진씨(陳氏), 노나라의 계씨(季氏)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 역은 있지 않은 상황을 설정하여 말한 것이지 실제 상황을 논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괘상으로 말하자면, 순종하여 대명(大明)에 붙는 덕이 있으니, 자체로는 불선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晉六三: ‘衆允, 悔亡’, 傳曰: ‘或曰, 不由中正而與衆同, 得爲善乎? 曰, 衆所允者, 必至當也.’ 竊謂世固有不義而得衆, 如齊之陳氏, 魯之季氏者矣, 顧可以爲善乎?
易是虛設之辭, 不可以實迹論. 若以卦象言之, 則順而麗乎大明, 自不應有不善也.
질문: 가인괘에 ‘엄한 군주가 있다’고 했는데, 역전에서는 ‘가인(家人)의 도는 반드시 존엄하여 군장(君長) 노릇하는 자가 있으니, 부모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엄군을 (嚴君과 君長의) 둘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대부분 (엄한 군주) 하나로만 설명하고 있는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대답: 존엄한 군장입니다.
家人 ‘有嚴君焉’, 傳曰: ‘家人之道, 必有所尊嚴而君長者, 謂父母也.’ 如此則嚴君作兩字說. 然自舊諸家只作一字說, 未知如何?
所尊嚴之君長也.
질문: 건(蹇)괘 구오(九五) 효사에 ‘크게 어려움에 벗이 오도다’라고 했는데, 역전은 강양(剛陽)의 신하가 없으면 천하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예로부터 군주를 걱정하는 강명(不剛)하지 못하는 신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군주는 있는데 그 신하가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또 역전은 이고(李固)․왕윤(王允)․주의(周顗)․왕도(王導)을 말하고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당시에 마침 강명한 군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었다 하더라도, 몇 분은 반드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르쳐주십시오.
대답: 역을 읽을 때는 마땅히 卦畫時節을 보아야 하고, 이를 가지고 논해서는 안 됩니다.
蹇九五 ‘大蹇, 朋來’, 傳以其無剛陽之臣, 不足以濟蹇. 竊謂自古患君之不剛明耳, 未有有其君而無其臣者也. 傳又以李固․王允․周顗․王導爲(6-3124)言, 竊意當時正以無剛明之君故耳, 設使有之, 數子夫必能有爲也. 更乞指敎.
讀易當看卦畫時節, 不可以此論.
질문: 쾌괘 「상전」에 ‘덕에 거하여 금기 사항을 법제화한다’ 했는데, 역전은 ‘칙(則)은 약조(約條)를 만드는 것이고 기(忌)는 방지함이니, 방금(防禁)을 약조(約條)로 만들어 세움을 이르니, 방금(防禁)이 있으면 터져 흩어짐이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뜻은 의심스러우니,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잘 모르겠습니다.
夬象曰: ‘居德則忌.’ 傳曰: ‘則, 約也, 忌, 防也. 謂約立防禁, 則無潰散.’ 某於此義不能無疑, 更乞批報.
未詳.
질문: 간괘에 ‘그 뜰을 가면서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 했는데, 역전은 ‘정제(庭除)의 사이는 매우 가깝다. 그러나 등쪽에 있으면 매우 가깝더라도 보지 못하니, 사물과 사귀지 않음을 말한다. 밖으로는 사물과 접하지 않고 안으로는 욕심이 싹트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치면 곧 그침의 도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찌 사람이 사물과 사귀지 않고, 세상에서 홀로 자립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사귀지 않는다[不交]’는 것은 자기가 마땅히 감응해야 할 것이 아니면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오히려 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마땅히 감응하여 움직여야 할 것이 아니면 그쳐야 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이 맞는지요?
대답: 「단전」의 말을 자세히 읽어야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등에 그친다’는 것은 곧 그쳐야 할 곳(제자리)에 그친다는 뜻이니, 이천역전은 본문의 취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艮: ‘行其庭, 不見其人’, 傳曰: ‘庭除之間, 至近也. 在背則雖至近不見, 謂不交於物也. 外物不接, 內欲不萌, 如是而止, 乃得止之道.’ 夫人豈能不交於物而孑然自立於世哉? 意此所謂不交者, 謂非己之所當應, 則雖在至近而猶不見也. 若非所當應亦感之而動, 則非所以爲止矣. 未知是否?
熟讀彖傳之詞, 可見文義. ‘艮其背’ 乃止其所之意, 程傳恐非本文之旨.
질문: 역학계몽 「술지(述旨)」편에 “우러러 하늘을 관찰하고 구부려 땅을 살펴 비로소 음양의 효를 그엇다. 그리고 복서(卜筮)를 가르쳐 가부를 판단하게 했다”고 합니다. 복희 이후 문왕․주공이 나오기 전까지는 괘와 사(辭)가 없었는데 어떻게 길흉을 결정했습니까? 가르쳐주십시오.
대답: 이는 고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례와 삼역(三易)의 경전은 모두 8괘이고, 다른 경전들은 모두 64괘이니, 아마도 이미 괘효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啓蒙述旨篇云: “仰觀俯察, 始晝奇偶. 敎之卜筮, 以斷可否.” 不知伏羲之後, 文王․周公之前, 未有卦及辭, 何以定吉凶? 敢乞批示.
此無可考, 但周禮三易經卦皆八, 別皆六十有四, 則疑已有辭矣.
질문: 의(義)는 의(宜)로 새기고, 예(禮)는 별(別)로 새기고, 지(智)는 지(知)로 새기는데, 인(仁)은 무슨 뜻으로 새겨야 할까요? 저는 인(仁)이란 사람 마음의 생리(生理)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生)’자로 새기면 어떤지요?
대답: 반드시 한 글자로만 새길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대의를 투철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義訓宜, 禮訓別, 智訓知, 仁當何訓? 竊意仁只是人心一箇生理, 不知以‘生’ 字訓得否?
(6-3125)不必須用一字訓, 但要曉得大意通透耳.
질문: 명도선생이 “학문은 채찍질하여 내면에 가깝게 하고, 자기 몸에 붙이기를 요(要)할 뿐이다. 그러므로 묻기를 간절히 하고 생각을 가까이 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다.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 하더라도 행할 수 있다. 말이 충신하지 못하고 행실이 독경하지 못하면 주리(州里)라 하더라도 행해질 수 있겠는가? 일어서면 그것이 앞에 참여함을 볼 수 있고, 수레에 있으면 그것이 멍에에 기댐을 볼 수 있어야 하니, 이와 같은 뒤에야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와 같은 것이 학문이다. 자질이 아름다운 자는 밝히기를 다하여 찌꺼기가 다 없어져서 곧 한 덩어리로 화하여 천지와 같아질 수 있다. 그 다음은 장경(莊敬)으로써 유지하고 길러야 하니, 그 지극한 데 이르러서는 똑같은 것이다.’ 저는 절실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는 것은 치지를 위주로 한 것이며, 말이 충신하고 행실이 독경한 것은 역행(力行)을 위주로 한 것인데, 지(知)와 행(行)은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조목의 뜻은 묻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각기 그 힘을 쓰면 도달함에 이르러서는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다면 실천함에 지식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어떤지요?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절실히 묻고 충신하다는 것은 대략 자기에게 절실한 것을 인용하는 의미일 뿐이지, 치지와 역행을 나누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은 앎과 실천이 함께 가지만, 그에 다음 가는 사람이라도 어찌 전혀 알지 못하면서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지키고 함양함으로써 더욱 밝아질 뿐입니다.
明道先生曰: ‘學只要鞭辟近裏, 著己而已, 故切問而近思, 則仁在其中矣.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行乎哉?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 只此是學. 質美者明得盡, 査滓便渾化却, 與夫地同體. 其次惟莊敬以持養之, 及其至則一也.’ 竊謂切問近思是主於致知, 忠信篤敬是主於力行, 知與行不可偏廢. 而此條之意謂隨人資質, 各用其力, 而其至則一. 如是則亦有行不假於知者, 未知如何? 伏乞指敎.
切問忠信只是泛引切己底意思, 非以爲致知力行之分也. 質美者固是知行俱到, 其次亦豈有全不知而能行者? 但因持養而所知愈明耳.
질문: ‘서(恕)는 인(仁)의 베풂(施)이요, 사랑(愛)은 인의 작용(用)이다’고 하는데, 베풂(施)과 작용(用)은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서(恕)를 베푼다는 것은 그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서(恕)가 아니면 비록 사랑이 있더라도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없을 것입니다.
‘恕則仁之施, 愛則仁之用’, 施與用不知如何分?
恕之所施, 施其愛耳, 不恕則雖有愛而不能及人也.
질문: 사람이 학문하는데 있어서 먼저 표준을 세우는 것을 꺼리는 것이니, 만약 차근차근하게 그치지 않고 해나가면 자연히 이르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만약 성인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지향하는 것이 없이 막연하게 가기만 한다면 장차 어느 곳으로 귀착되겠습니까?
대답: 먼저 표준을 세우는 것을 삼가라는 것은 맹자에서 말씀하신,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학자들이 진실로 성인을 표준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 어깨를 나란히 하듯이 견줄 수 있겠습니까? 안자(顔子)의 위연(喟然)한 탄식도,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으려고 할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봄에 앞에 있었는데 문득 뒤에 있다”고 한 데에서 공부를 추구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박문약례(博文約禮)에 나아가 진보했다는 것을 관찰한다면 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人之爲學, 忌先立標準, 若循循不已, 自有所至矣’. 竊意若以聖人爲標準, 何不可之有? 若無所指擬, 茫然而去, 將何所歸宿哉? 伏乞措敎.
忌先立標準, 如孟子所譖勿正者. 學者固當以聖人爲標準, 然豈可日日比並而(6-3126)較量之乎? 觀顔子喟然之嘆, 不於堅高膽忽處用功, 却就博文約禮上進步, 則可見矣.
질문: ‘덕(德)이 기(氣)를 이기지 못하면, 성명(性命)이 기를 따르게 되고; 덕이 기를 이기면, 성명이 덕을 따르게 된다. 이치를 탐구하여 본성을 다하면 성(性)이 곧 천덕(天德)이요 명이 곧 천리가 된다. 기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삶과 죽음, 오래 사는 것과 요절함 뿐이다.’ 섭생과 존양을 잘할 줄 알면 대부분 장수하고, 기욕(嗜欲)을 함부로 하면 대부분 요절하니, 사는 것과 죽는 것․오래 사는 것과 짧게 사는 것 역시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정자가 불(火)로 비유한 것은 이 설명과 들어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 정몽의 말에 치우친 면이 없지 않는 것 같습니다.
‘德不勝氣, 性命於氣; 德勝其氣, 性命於德; 窮理盡性, 則性天德․命天理. 氣之不可變者, 獨死生修夭而已’. 竊謂知所攝養者則多壽考, 肆其嗜欲者則多夭喪, 是死生修夭亦可變也. 故程子以火爲喩, 與此說不合. 如何?
正蒙之言恐不能無偏.
질문: 장횡거가 “마음은 크고 자유롭게 가져야 한다”고 하고, 또, “마음을 크게 가지면 만물이 다 통하고, 마음을 적게 먹으면 만물이 다 병든다”고 하였고, 또 손사막(孫思邈)이, “담력은 크게 하고자 하고 마음을 적게 갖고자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장횡거의 말은 마음의 체(體)를 말한 것이고, 손사막의 말은 마음의 용(用)을 말한 것이라고 보는데, 옳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답: 마음은 크게 가져야 할 경우도 있고 적게 가져야 할 경우도 있으니, 만약 제목에만 집착하여 단정 짓는다면 곧 제대로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橫渠云 ‘心要洪放’, 又曰 ‘心大則百物皆通, 心小則百物皆病’. 孫思邈云 ‘膽欲大而心欲小’. 竊謂橫渠之說是心之體, 思邈之說是言心之用, 未知是否?
心自有合要大處, 有合要小處, 若只著題目斷了, 則便無可思量矣.
질문: ‘그리고 길(路逕)을 안 뒤에는 각자 자신의 방법론을 확립하고, 그에 따라 구하는 것이 맞다.’ 저의 생각으로는 각자 자기의 방법을 세우는 것이 용납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대답: 이는 육경을 읽을 때에는 스승을 따라 묻고 강론해야 할 것이고, 또 어떻게 공부해가야 방법을 확립하는 것인지를 알고, 돌아가 이 방법에 의거하여 실제 공부하는 것이 곧 돌아가 구하는 것입니다.
‘且見得路逕後, 各自立得箇門庭, 歸而求之可矣’. 竊謂門庭豈容各立耶? 有所未解, 伏乞指敎.
此是說讀六經只要從師講問, 且識得如何下工夫, 便是立得門庭, 却歸去依此實下工夫, 便是歸而求之.
반자선에게 답함 (6-3127)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2년(병진, 1196년, 67세)에 반자선에게 쓴 네 번째 편지이다.
여러 달 동안 함께 하다가 당신이 떠나고 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요즘 가을 날씨가 차갑습니다. 집에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으니 편안히 잘 지내고 집안 일들을 처리하는 가운데서도 공부 또한 열심히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곳에는 떠나는 벗들은 많고 찾아오는 벗은 적으니, 조만간 평소처럼 강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정력이 더욱 쇠약해져 절실하게 깨우치는 공부가 없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比奉從容累月, 別去不勝悵惘. 比日秋冷, 計還舍之久, 諸况安適, 家務酬酢之餘, 當亦不廢學也. 此間朋友去多來少, 早晩亦且講論如常. 但精力愈衰, 愧無警切之功耳.
반자선에게 답함 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3년(정사, 1197년, 68세)에 반자선에게 쓴 다섯 번째 편지이다.
학문하는 뜻을 말씀하신 것이 좋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정좌(靜坐)에만 힘쓰고자 하신다면 그쪽으로 추락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다만 이 마음을 비워서 동(動)하든 정(靜)하든지 간에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그 계근공구(戒謹恐懼)에다가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면 자연히 주재(主宰)가 분명해지고 의리가 밝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계근공구의 네 글자에만 집착하는 것은 이미 부담이 크니, 요컨대 다만 가볍게 분발해서 스스로 성찰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 곧 공부의 근본입니다. 보여 주신 몇 조목에 대해서는 지금 각각 답을 하였으니, 다시 상세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맹자와 대학에서 정심(正心)에 대해 말한 부분을 양경중(楊敬仲)이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물어서 그의 말을 다 들어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니, 문득 자기의 뜻으로 남의 말을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순인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여기는 채계통이 멀리 귀양가서 마음이 안 좋은데 갑자기 그 소식을 들으니, 그 화가 채계통보다 더 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근래에 새 학교를 뜯어서 다시 승방(僧坊)을 만들고 성현의 초상을 부수어 중요한 부분을 끊어버려 사람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듭니다. 저 성현도 오히려[尤] 이러한 재앙을 만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인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정사(精舍)에는 봄에는 그래도 몇 사람의 붕우가 있었으나 근래에는 대부분 뿔뿔이 떠나가고 겨우 한두 명만 있는데 정진할 가망이 보이는 자가 없습니다. 또한 나이 많은 사람 중에서 앞에서 솔선하여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공부가 자못 순서가 없으니, 여러 붕우들이 동숙중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 [경중(敬仲)] : 양간(楊簡)이다. [우(尤)] : 오히려[尤]는 사경(士敬)이 말하기를, “운회(韻會)에 유(冘)는 유(猶)와 통용되니 시전(詩傳)서(序)에, ‘오히려 후세에 말을 잘하는 선비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할 때의 우(尤)의 뜻이다.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책들에서는 곧바로 유(猶)라고 쓰고 있다. 서(書)「대우모(大禹謨)」주(註)에, ‘오히려 자신을 견고하게 지키는 자를 두려워한다’고 하였고, 근사록(近思錄)에서도 유(猶)로 보았다. 여기에서, ‘성현도 더욱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아무런 뜻이 없으니, 마땅히 시전의 서(序)와 서이 주와 같이 유(冘)자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맞다.
所論爲學之意善矣, 然欲專務靜坐, 又恐墮落那一邊去. 只是虛著此心, 隨動隨靜, 無時無處不致其戒謹恐懼之力, 則自然主宰分明, 義理昭著矣. 然著箇 ‘戒愼恐懼’ 四字, 已是壓得重了. 要之只是略綽提撕, 令自省覺, 便是工夫也. 所示數條, 今各奉答, 可更詳之. 所論孟子․大學說正心處, 不知敬仲如何說? (如何是二(6-3128)說相似處, 如何是有此四者心便不正?) 可更扣之, 須盡彼說, 方可判斷, 未可便以己意障斷他人話頭也. 純仁可念, 此間方爲季通遠謫作惡, 忽又聞此, 其禍乃更甚於季通, 使人不能忘懷. 然此中近日改移新學, 復爲僧坊, 塑象推毁, 要臂斷折, 令人痛心. 彼聖賢者尤不免道此厄會, 况如吾輩, 何足道哉! 精舍春間有朋友數人, 近多散去, 僅存一二, 末有精進可望者. 亦緣無長上在彼唱率, 功夫殊無次第. 諸友頗思董叔重也.
질문: 어떤 사람은 다음을 의심스러워합니다. 시경 「청묘(淸廟)」 시는 문왕을 제사하는 악가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문왕의 덕을 높이여 노래하지 않고 제사를 돕는 제후들이 공경하고 또 화(和)하며, 與夫與祭 집사(執事)하는 사람이 문왕의 덕을 집행하는 것만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문왕의 덕은 말로 이름할 수 없다. 무릇 한 때 왕위에 있는 사람이 능히 공경하고 또 화(和)하며 함께 문왕의 덕을 집행할 수 있는 것이 곧 문왕의 덕이 있는 곳이다. 반드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곳에서 덮어버릴 수 없는 실상을 보아야 시인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당시에 그 노래를 듣는 것처럼 생각하기를, 진실로 마치 머리 위에 넘쳐흐르고 있는 것처럼, 그 좌우에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 또 어찌 많은 언어를 동원하여 자질구레하게 형용한 뒤에야 충분하겠습니까? 저의 망령된 생각은 이러한데, 맞는지요?
대답: 이 설명이 맞습니다.
或疑淸廟詩是祀文王之樂歌, 然初不顯頌文王之德, 止言助祭諸侯旣敬且和, 與夫與祭執事之人能執行文王之德者, 何也? 某曰, 文王之德不可名言, 凡一時在位之人, 所以能敬且和與執行文王之德者, 卽文王盛德之所在也. 必於其不可容言之中而見其不可掩之實, 則詩人之意得矣. 讀此詩, 想當時聞其歌者, 眞若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又何待多著言語, 委曲形容而後足之哉? 妄意如此, 不知是否?
此說是.
질문: 시경 「곡풍」시 4장에 ‘깊은 곳에 나아갈 때는 뗏목을 타고 배를 타며, 얕은 곳에 나아갈 때에는 수영을 하고 헤엄을 쳤노라.’라고 했는데, 시집전에서는 흥체(興體)라고 했습니다. 저는 비체(比體)가 아닐까하고 생각하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만약 아래의 네 구절이 없다면 비(比)이고, 아래에 네 구절이 있다면 흥(興)입니다. 이 장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부류가 모두 그렇습니다.
谷風詩四章: ‘就其深矣, 方之舟之. 就其淺矣, 泳之游之.’ 集傳以爲興體, 某疑是比體, 未知如何? 乞指敎.
(6-3129)若無下面四句卽是比, 旣有下四句, 則只是興矣. 凡此類皆然, 非獨此章也.
질문: 논어 「이인」편에서 자유는 ‘임금을 섬김에 자주 간하면 욕(辱)을 당하고, 친구 사이에 자주 충고하면 소원해진다’고 했는데, 호씨는 ‘임금을 섬김에 간하는 말이 행해지지 않으면 마땅히 떠나야 하고, 벗을 인도함에 착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마땅히 중지해야 하니, 번독(煩瀆)함에 이르면 말한 자가 가벼워지고, 듣는 자가 싫어한다. 이 때문에 영화를 구하다가 도리어 욕(辱)을 당하고, 친하기를 구하다가 도리어 소원해지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임금을 섬기되 충성을 다하고 친구와 사귀면서 선을 요구하는 것은 직책상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서 어쩔 수 없는 마음인 것이지 본래 영화를 구하고 친하기를 구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호씨의 설에 지나침이 없지 않는 듯한데, 어떻습니까?
대답: 호씨의 설은 인정을 극진히 한 것으로 옳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胡氏曰: ‘事君諫不行則當去, 導友善不納則當止. 至於煩瀆, 則言者輕, 聽者厭矣. 是以求榮而反辱, 求親而反疏也.’ 某竊以爲事君而納忠, 交友而責善, 職所當然而心之不能已者, 本非有求榮求親之心, 恐胡氏之說不能無過. 未知如何?
胡氏說盡人情, 未有不是處.
질문: 맹자는 ‘유하혜는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어짊을 숨기지 않았다’고 했는데, 집주는 ‘어짊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은 도(道)를 굽히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반드시 그 도를 다 한다’는 아래의 문장과 뜻이 중복되는 것 같습니다.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두 구절은 서로 이어지니 한 가지 뜻으로 읽어야 하니, 문세(文勢)가 그러합니다.
孟子謂 ‘柳下惠進不隱賢’ , 集註謂 ‘不隱賢, 不枉道也’. 某竊疑與下文 ‘必以其道’ 意莫重疊否? 尙乞指敎.
兩句相承, 只作一意讀, 文勢然也.
질문: 맹자 「고자 하」에서 ‘공자께서는 하찮은 죄(罪)로써 구실을 삼아 떠나고자 하셨다’고 했는데, 하찮은 죄란 노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공자 스스로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대답: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乃孔子則欲以微罪行’, 微罪不知是指魯言, 是孔子自謂也耶? 乞指敎.
自謂.
질문: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지성(知性)을 알지 못하면 하늘을 알 수 없을 것인데, 여기에도 얕고 깊은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 이치를 탐구하여 하늘을 알게 되면, 저절로 알 것입니다.
‘知其性則知天矣’, 不知知性便能知天, 亦有淺深耶? 乞指敎.
窮理到知天處, 自然見得.
질문: ‘굶주린 자는 달게 먹고, 목마른 자는 달게 마신다.’ 이 장은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를 빌려 사람 마음의 해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사람 마음의 해[人心之害]란 단지 빈천(貧賤)만이 아니라, 욕망하고 추구하면서도 얻지 못하여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는 것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사람이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로움으로 마음의 해로움을 받지 않게 한다’는 것은 사람이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로움이나 육체적 욕망과 같은 종류로 그 마음을 해롭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해해도 괜찮은지요?
대답: 예부터 이 장에 관한 설명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의미상으로 보면, 이 설명이 좋습니다. 사람이 예컨대 굶주림․목마름․구복(口腹)과 같은 이익이나 욕망으로 그 마음을 해치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구로 보자면,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로써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문의(文義)에 더 적절합니다. 과연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뒤의 설명이 조금 효율적입니다.
‘飢者甘食, 渴者甘飮.’ 某竊謂此章是借飢渴之害以言人心之害. 所謂人心之害, 恐不止爲貧賤而已, 凡一切欲有․求之不得而遂不暇擇焉, 皆是(6-3130)也. 所謂人能無以飢渴之害爲心害者, 謂人能無以飢渴害口腹之類爲其心害, 則不憂其不及人矣. 未知如此說得否? 更乞指敎.
此章從來有兩說, 以意則此說勝, 蓋不欲人以利欲害其心, 如飢渴之害口腹也. 以語則不以飢渴之害動其心者爲切於文義. 未知果孰是, 但後說差不費力耳.
질문: 사마온공(사마광)은 계고록에서 ‘지혜가 거기에 미치더라도 인(仁)이 그것을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더라도 반드시 잃게 되니, 진나라를 두고 한 말이다’라 했고, 또 가생(賈生)의 논의를 인용하여 ‘인의는 베풀지 않고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가 다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저는 진나라가 호랑이처럼 천하를 먹어치웠지만, 설령 도로써 지키더라도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도로써 하지 않으니 말할 것조차 없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멸망을 논하는 사람이 왜 도로써 나라를 지키지 않은 것만 허물하고 진나라가 다른 나라를 치졸하게 공격한 것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는 것입니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賈生․溫公之論若究其極, 固爲有病. 然彼其立論, 非爲攻取者謀, 以爲可以如是取之而無害也, 乃爲旣得之後而謀, 以爲如是則或可以守耳. 今且試以身處胡亥子嬰之地, 而自謀斫以處之之宜, 則彼前日取之之逆者旣不可及矣, 吾乃可以拱手安坐以待其亡耶?
溫公稽古錄秦論謂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秦之謂矣.’ 又引賈生之論曰: ‘仁義不施而攻守之勢異也.’ 某竊謂秦以虎狼幷天下, 設使守之有道, 且不可保, 况又非其道耶? 然則論秦之亡者, 豈可徒咎其守之非道, 而不論其攻之已不善哉? 更乞指敎.
賈生․溫公之論若究其極, 固爲有病. 然彼其立論, 非爲攻取者謀, 以爲可以如是取之而無害也, 乃爲旣得之後而謀, 以爲如是則或可以守耳. 今且試以身處胡亥子嬰之地, 而自謀斫以處之之宜, 則彼前日取之之逆者旣不可及矣, 吾乃可以拱手安坐以待其亡耶?
질문: 위론(魏論)에서 사마온공은 위나라 태조는 도적의 손아귀에서 천하를 취한 것이지 한나라 왕실에서 천하를 취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저는 이 점에 의문이 있습니다. 충성을 다해서 군주를 섬기고 쇠망해가는 나라를 부흥시키고 난리를 바로잡는 것은 신하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어찌 나라가 위급하고 혼란한 틈을 타서 공적을 과시하고 마침내 몰래 쌓고 취해버리는 것입니까? 지금 큰 집이 있는데, 어느날 밤 도둑떼가 몰려와 그 거실을 점거하고 그 재물을 빼앗으며, 하인과 종들을 강제하고 거기에 있던 많은 도적들을 물리치고는 그것을 본래 주인인 왕에게 돌려주지 않고 마침내 자기가 가져버리고서, 나는 주인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니라 도둑의 손에서 취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사마온공의 논의는 앞으로 천하의 간사한 영웅의 마음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에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사마온공의 이 논의는 자세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논의가 옳지 않음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니, 꼭 선배 현인의 실수를 깊이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魏論, 溫公謂魏太祖取天下於盜手而非取之于漢室, 某於此有所未喩. 蓋盡忠以事君, 興衰而撥亂, 此人臣之職也, 安可因其危亂, 自多其功, 遂掩取之(6-3131)耶? 今有巨室, 一夕寇至, 據其室廬而攘其貲財, 有强奴悍僕却其群盜而復其室廬, 不歸之於王而遂以爲己有, 謂吾取之於盜手, 而非取之於主人, 其可乎? 溫公之論, 殆將啓天下姦雄之心, 故不能無疑. 倂乞敎誨.
溫公此論殊不可曉, 知其非是足矣, 不須深論前賢之失也.
반자선에게 답함 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3년(정사, 1197년, 68세)에 반자선에게 쓴 여섯 번째 편지이다.
학문하는 공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또한 매우 온당하고 치밀하니 더욱 기쁩니다. 다시 간절하게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양경중(楊敬仲)은 그 사람됨이 대범하고 담박하고 성실하여 절로 아끼고 공경할 만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견식(見識)이 우리와는 별개이고 또 너무 독실하고 자신을 믿어서 다시 함께 변론할 수 없으니,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所論爲學工夫, 亦甚穩密, 尤以爲喜. 更切勉力, 乃折望也. 楊敬仲其人簡淡誠懲, 自可愛敬; 而其論議見識自是一般, 又自信已篤, 不可復與辨論, 正不必徒(6-3132)爲嘵嘵也.
반자선에게 답함 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년, 69세)에 반자선에게 쓴 일곱 번째 편지이다.
질문: 서경 「요전」의 ‘공경하고 밝고 문채롭고 생각함[欽明文思]’에서, ‘사(思)’는 ‘의사(意思)’의 ‘사(思)’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만약 ‘사려’의 ‘사(思)’로만 보면, 사업처에서 발현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거성으로 읽어야만 그 사업에서 발현하는 것이 상황에 정확히 들어맞음을 볼 수 있으니, 마치 논어에서 말하는 ‘윤리에 맞음’, ‘사려에 맞음’과 같은 종류임을 환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거성으로 읽어야 맞습니다.
‘欽明文思’, 某竊謂 ‘思’ 猶 ‘意思’ 之 ‘思’, 若只作 ‘思慮’ 之 ‘思’, 未見發於事業處. 惟從去聲讀, 則見其發於事業者莫不切中情否, 煥然可觀, 彷彿如論語 ‘中倫’ ‘中慮’ 之類. 未知是否, 伏乞批誨.
作去聲讀爲是.
질문: 서경 「요전」의 ‘능히 큰 덕(德)을 밝혀’ ― ‘여민(黎民)들이 아! 변하여 이에 화(和)하였다.’에서, ‘큰 덕[俊德]’을 어떤 사람은 자기의 밝은 덕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큰 덕을 지닌 선비라 합니다. ‘백성’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민(民)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백관(百官)이라 하니, 두 설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대학의 차례로 본다면, 큰 덕은 자기의 밝은 덕이고 백성은 민(民)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대답: 큰 덕[俊德]은 대학의 설을 따라야 하고, 백성에 관해서는 정 선생님이 기내(畿內)의 백성이라 한 것이 맞습니다.
‘克明俊德’ 止 ‘黎民於變時雍’, ‘俊德’ 或以爲己之明德, 或以爲俊德之士; ‘百姓’ 或以爲民, 或以爲百官, 未知二說如何? 若以大學之序觀之, 則俊德爲己之明德, 百姓爲民, 似無可疑者.
俊德當依大學說, 百姓程先生以爲畿內之民是也.
질문: 서경 「요전」의 ‘남와(南訛)[여름에 변화하는 일]를 평질(平秩)하여 공경히 맞이한다’에서, 임씨는 ‘치(致)’는 주례의 ‘치일(致日)’의 치(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곧 남방의 중성을 맞이한다는 것인데, 맞는지요?
대답: 致日乃考日中之景, 如周禮土圭之法, 非考中星也.
‘平秩南訛, 敬致’, 林氏謂如周禮致日之致. 此乃致南方之中星耳, 未知是否?
致日乃考日中之景, 如周禮土圭之法, 非考中星也.
질문: 서경 「대우모」의 ‘경계하고 깨우쳐서 아름답게 여기며 독책하여 두렵게 하며 권면하되 구가(九歌)로 하시다’에서, 임씨는 스스로 경계하고 스스로 감독하고 스스로 권장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설은 어떻습니까?
대답: ‘구가(九歌)’는 현재 그 가사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고증할 수 없습니다. 이치로 추론해 보자면, 아마도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계하는 ‘갱가(賡歌)’와 같은 종류일 것입니다.
(6-3133)‘戒之用休, 華之用威, 觀之以九歌’, 林氏謂自戒自董自勸, 未知此說如何?
九歌今亡其詞, 不可稽考. 以理觀之, 恐是君臣相戒, 如賡歌之頰.
질문: 서경 「대우모」의 ‘고요(皐陶)가 좋은 말씀을 아뢰고, 우(禹)임금이 공을 이루자, 제순(帝舜)이 이를 거듭하였다’에서 ‘신(申)’자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대답: 이것은 세 편의 순서입니다. 첫 번째 구절은 고요모를 설했고, 두 번째 구절은 대우모를 설했고, 세 번째 구절은 익직을 설했습니다. 이른바 ‘신지(申之)’란 곧 서경 「익직」편의 ‘너도 창언(昌言)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복생의 판본에 따르면, 단지 두 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요모」와 「익직」편 사이의 말들도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공씨의 벽에서 나온 판본은 세 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순서가 이와 같지만,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설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 점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臯陶矢厥謨, 禹成厥功, 帝舜申之’, 未知 ‘申’ 字如何看?
此是三篇之叙. 第一句說臯陶謨, 第二句說大禹謨, 第三句說益稷. 所謂申之, 卽所謂 ‘汝亦昌言’ 者也. 此書伏生本只是二篇, 臯陶謨․益稷之間語勢亦相連, 孔璧中析爲三篇, 故其序如此, 亦不足據. 而說者又多失之, 甚可笑也.
질문: 서경 「대우모」의 ‘이를 생각하여도 이에 있으며, 이를 버려도 이에 있으며, 진실로 마음에서 나옴도 이에 있다’에 대해, 여러 설들이 모두 우임금이 순임금이 고요를 생각하기 바란다고 해석하는데, 임씨는 우임금 자신이 이와 같이 생각함을 말한 것이라 하니, 두 설이 어떠합니까?
대답: 임씨의 설이 맞습니다.
‘念茲在玆, 釋玆在玆, 允出玆在玆’, 諸說皆以禹欲舜念臯陶, 而林氏以爲禹自言其念之如此, 未知二說如何?
林說是.
질문: 서경 「고요모」의 ‘진실로 그 덕(德)을 실행하면 도모하는 것이 밝아지며 보필하는 자가 화할 것입니다’에서, 고요를 칭한 것입니까?
대답: 만약 고요를 칭한 것이라 한다면, 아래 구절의 “우임금이 ‘너의 말이 옳다’”고 한 것은 누구의 말이 옳다는 것이겠습니까? 이 여덟 자는 고요의 말로서 우임금이 이를 좋게 여겨 그 상세한 내용을 묻자 고요가 다시 아래의 구절에서 이 여덟 자의 뜻을 해설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여덟 글자는 고요의 덕을 말한 것으로 ‘해(諧)’자 아래에 따로 고요의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빠지고 없다 하니, 맞는지 틀린지를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 보는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允迪厥德, 謨明弼諧’, 疑是稱陶. 未是否?
若以爲稱臯陶, 則下句禹曰 ‘兪’ 者爲何所兪耶? 恐此八字是臯陶之言, 禹善之而問其詳, 故臯陶復說下句, 解此八字之義. 或云此八字是言臯陶之德, ‘諧’ 字下別有臯陶之言, 今脫去, 未知是否. 姑存之可也.
질문: 서경 「고요모」에 ‘행실을 총괄하여 말할진댄 아홉 가지 덕(德)이 있습니다’라고 한대, 어떤 사람은 사람의 성행(性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군주의 행실이라 하니, 어느 설을 따라야 할까요?
대답: ‘행실을 총괄하여 말할진댄 아홉 가지 덕(德)이 있다’란 사람의 행실에 이 아홉 가지 덕이 있음을 대략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덕이 있으면 마땅히 이로써 그 덕을 논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재채채(載釆釆)’는 고어(古語)로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니 빼야 할 것입니다.
‘亦行有九德’, 或以爲人之性行, 或以爲君之行, 未知二說當何從?
亦行有九德, 泛言人之行有此九德, 故言其人之有德, 則當以此而論之. ‘載(6-3134)釆釆’ 古語, 不可曉, 當闕之.
질문: 서경 「고요모」의 ‘날마다 세 가지 덕을 밝힐진댄 밤낮으로 소유한 집을 다스려 밝힐 것이며’ ~ ‘소유한 나라의 일을 밝힐 것이다’에 대해, 고주(古注)는 모두 경대부 및 제후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하는데, 임씨는 경대부와 제후가 이 삼덕과 육덕을 지닌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라 하니, 누가 맞습니까?
대답: 임씨의 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 효경에서 말하는 ‘쟁신(爭臣)’과 같은 종류이니, 이와 같으면 괜찮다는 것이지 반드시 이를 한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夙夜浚明有家’ 止 ‘亮釆有邦’, 古注以爲可以爲卿大夫及諸侯, 林氏以爲卿大夫諸侯用此三德六德之人, 未知孰是?
林說恐得之. 猶孝經說爭臣之類, 蓋曰如是足矣, 非必以是爲限也.
질문: 서경 「고요모」에서 ‘하늘의 듣고 봄이 우리 백성[인간]의 듣고 봄으로부터 하며, 하늘이 선한 자를 밝혀[드러내] 주고 악한 자를 두렵게 함이 우리 백성의 밝혀 주고 두렵게 함으로부터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명외(明畏)’는 두 글자로 새겨야 합니까, 아니면 한 글자로 새겨야 합니까? 임씨는 총명(聰明)은 보고 듣는 것을 말하고, 명외(明畏)는 호오(好惡)를 말한다고 하는데, 어떠한지요?
대답: 임씨가 맞는 것 같습니다. 명외(明畏)는 하늘이 밝히고 두려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이 밝히는 것이란 ‘현달한 자를 밝히며 미천한 자를 천거하라’에서의 ‘명(明)’ (위의 명자明字)와 같고, 두려워하는 것이란 ‘감독하여 두렵게 하다’, ‘위엄을 보임을 육극(六極)으로써 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天聰明自我民聰明, 天明畏自我民明威’, 不知明畏是兩字還是一字? 林氏以爲聰明言視聽, 明畏言好惡, 未知如何?
林氏似是. 明畏言天之所明所畏, 所明如 ‘明明揚側陋’ 之 ‘明’, (上明字). 所畏如 ‘董之用威’, ‘威用六極’ 之意.
질문: 서경 「익직」편에서 ‘오언(五言)으로 출납한다’고 한데 대해, 임씨는 궁․상․각․치․우를 가리키는 말이라 하고, 고주(古注)는 인․의․예․지․신이라 하니, 누구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대답: 자세히 알 수 없으니, 빼야 마땅합니다. (‘후지명지(侯以明之)’부터 그 아래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以出內五言’, 林氏以爲宮․商․角․徵․羽之言, 古往以爲仁․義․禮․智․信之言, 未知當執從?
未詳, 當闕. (自 ‘侯以明之’ 以下皆然.)
질문: 서경 「오자지가」의 ‘통하는 석(石)과 화평(和平)하는 균(鈞)[關石和鈞]’에서, 이것은 단지 균석(鈞石)의 이름일 뿐으로, 예컨대 주례의 ‘가량(嘉量)’과 같은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대답: 맞는 것 같습니다.
‘關石和鈞’, 竊謂此只是鈞石之名, 如周禮嘉量之類耳. 未知是否?
恐是.
질문: 서경 「대우모」에 ‘귀신(鬼神)이 따라 순하여 거북점과 시초점이 화합하여 따랐다’는 것은 이미 한 번 점을 친 것입니까 아니면 아직 점치지 않은 것입니까? 문장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미 점을 쳤는데, 우임금이 다시 일일이 점치기를 요청하였기 때문에 순임금이 다시 점칠 필요가 없다는 의사를 말한 것 같습니다. ‘귀신기의(鬼神其依)’란 귀신의 뜻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계책이 이미 화합을 이뤘다면 귀신도 반드시 그를 따를 것이요, 또한 지난번에 점을 쳤을 때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으니 지금 다시 점칠 필요가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맞는지요?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아마 애당초 점을 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鬼神其依, 龜筮協從’, 不知已是曾ト一番了, 還是末曾ト? 按文義, 恐是已曾ト了, 禹更請枚ト, 故舜言其不必再ト之意. ‘鬼神其依’ 者, 以鬼神不(6-3135)可得而知, 但人謀旣協. 則鬼神亦必依之, 亦是言向者ト時已是無可疑者, 今不必更ト也. 末知是否? 伏乞批誨.
恐是初未嘗ト.
질문: 서경 「윤정」에 ‘때보다 먼저 하는 자도 죽여 용서하지 말며, 때에 미치지 못하는 자도 죽여 용서하지 말라’ 했는데, 임씨는 대중을 경계한 말이지 천상(天象)을 혼동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대답: 위의 문장으로 고찰해보면, 임씨의 설명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편 자체가 의심스러우니, 빼는 것이 마땅합니다.
‘先時者殺無赦, 不及時者殺無赦’, 林氏謂是誓衆之辭, 非言昏迷天象之人.
以上文考之, 林說非是. 然此篇自可疑, 當闕之.
질문: 서경 「중훼지고」의 ‘더구나 우리 탕왕(湯王)의 덕이 말하면 사람들의 들음에 흡족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에 대해 고주는 ‘도덕선언(道德善言)’이라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언족청문(言足聽閠)’은 하나의 구절로 만들어야 하니, 나의 덕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듣게 할만하니, 저들이 어찌 그것을 꺼리지 않겠는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맞는지요?
대답: 맞습니다.
‘矧予之德, 言足難閭’, 據古注云: ‘道德善言.’ 某竊意 ‘言足聽閠’ 自當作一句, 言吾之德言之足使人聽聞, 彼安得不忌之? 未知是否?
是.
질문: 서경 「탕고」의 ‘찬란함이 초목(草木)과 같아 만백성들이 진실로 생식(生殖)된다’는 구절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설명이 대부분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대답: 위 구절의 ‘천명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과 연결되는 것으로, 명백하고 쉽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삶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賁若草木, 兆民允殖’, 諸家說多不同, 未知當如何看?
連上句言天命不僭, 明白易見, 故人得遂其生也.
질문: 서경 「태갑 상」의 ‘스스로 주(周)하여 종(終)이 있다’에 대해, 고주(古注)와 여러 학자들은 모두 ‘주(周)’를 충신(忠信)으로 해석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以忠信自周라 하는 것은 괜찮지만, 충신(忠信)으로 주(周)를 해석하는 것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 ‘자주(自周)’ 두 글자는 본래 알 수가 없습니다.
‘自周有終’, 古注及諸家皆以 ‘周’ 訓忠信. 竊謂以忠信自周則可, 以忠信訓周恐未安. 未知如何?
‘自周’ 二字本不可曉.
질문: 서경 「태갑 상」의 ‘왕이 심상하게 여겨 생각하고 듣지 않았다[王惟庸罔念聞]’에서, 여러 학자들은 모두가 ‘용(庸)’자에서 끊어 한 구절로 읽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전체를 하나의 구절로 읽고, 서경 「열명 상」편의 ‘왕이 글을 지어 고하였다’고 할 때의 ‘용(庸)’처럼, 용(庸)은 용(用)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맞는지요?
대답: 여섯 글자가 한 구절입니다.
‘王惟庸罔念聞’, 諸家皆於 ‘庸’ 字絶句. 竊謂只作一句讀, 以庸訓用, (6-3136)如說命中 ‘王庸作書以告’ 之 ‘庸’ 未知是否?
六字一句.
질문: 서경 「태갑 상」의 ‘약우기장(若虞機張)’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모두가 ‘우(虞)’를 도(度)로 해석합니다. 저는 우나라 사람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대답: 우인(虞人)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若虞機張’, 諸家皆訓 ‘虞’ 爲度. 竊謂只作虞人說, 如何?
作虞人爲是.
질문: 서경 「함유일덕」의 ‘신하는 위를 위해서는 덕을 위하고 아래를 위해서는 백성을 위해야 한다[臣爲上爲德 爲下爲民]’에서, 여러 학설이 다르니, 이 네 개의 ‘위(爲)’자를 무슨 음으로 읽어야 합니까?
대답: 네 개의 ‘위(爲)’자는 모두 거성입니다. 위를 위한다[爲上]는 것은 그 덕을 보좌하고 하고 싶어 하는 바의 뜻에 아부하지 않는 것이고, 아래를 위한다[爲下]는 것은 백성을 이롭게 하고 자기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臣爲上爲德, 爲下爲民’, 諸說不同, 不知此四 ‘爲’ 字當如何音?
四 ‘爲’ 字竝去聲. 爲上者, 輔其德而不阿其意之所欲; 爲下者, 利於民而不狥己之所安.
질문: 많은 학자들이 서경의 「무성」편은 빠진 부분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약왈(王若曰)’부터 그 이후는 모두 사관이 그 이전의 일을 차례로 기록한 것입니다. 비록 무왕이 여러 제후에게 고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사관이 서술한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간에 ‘도(道)가 있는 사람의 증손인 발(發)’ 그리고 ‘우리 주왕(周王)을 밝힌다’는 것과 같은 말은 모두 사관의 말이지 당시에 무왕이 이와 같이 자칭한 것이 아닙니다. 또 「오고」에 있는 것처럼, ‘왕약왈(王若日)’ 이하는 대부분 주공의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꼭 개정하거나 편을 옮기지 않아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생백(旣生魄)’은 아마도 그믐날이고, ‘기(旣)’란 그 백(魄)이 이미 충분해진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이 구절은 옳지 않다’고 가르쳐주셔서, 그것을 추론하여 차례차례 읽어보니 마땅히 4월 그믐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편을 평소에 어떻게 보시는지요?
대답: ‘왕약왈(王若曰)’ 이하는 여러 제후에게 고하는 말이며, 아울러 기도를 올리는 말이니, 「탕고」편과 같은 종류입니다. 다만 이 말은 결론맺은 곳(結殺處)이 없이 단지 그 공렬(功烈)과 정사(政事)의 훌륭함을 서술하였고, 또 무오(戊午) 계해(癸亥) 갑자(甲子)의 일진(日辰)을 쓰니 고명체(誥命體)도 아닙니다. 아마 착간(錯簡)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씨(王氏)․정씨(程氏)․유원부(劉原父) 이하 교정한 것도 모두 다릅니다. 예전에 그것을 고증해보니, 유원부는 왕의 말 끝부분에 빠진 글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칠경소전(七經小傳)이 있으면,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서 「역지(曆志)」도 이 해에 윤달이 있다고 했는데, 역시 맞습니다.
武成一篇, 諸家多以爲錯簡. 然反覆讀之, 竊以爲自 ‘王若曰’ 以後皆是史官歷敍以前之事, 雖作武王告群后之辭, 而實史官叙述之文, 故其間如 ‘有道曾孫周王發’ 及 ‘昭我周王’ 之語, 皆是史官之言, 非武王當時自稱如此也. 亦如五誥中, ‘王若曰’ 以下多是周公之語. 若如此看, 則似不必改移, 亦自可讀. 又 ‘旣生魄’ 恐是晦日, ‘旣’ 者, 言其魄之旣足也. 先生批云: ‘此句非是.’ 以歷推之, 當爲四月晦. 未知此篇先生尋常如何看?
‘王若曰’ 以下固是告群后之辭, 兼叙其致禱之辭, 亦與湯誥相類. 但此詞却無結殺處, 只自叙其功烈政事之美, 又書戊午癸亥甲子日辰, 亦非誥命之體, 恐須(6-3137)是有錯簡. 然自王氏․程氏․劉原父以下, 所定亦各不同. 舊嘗考之, 劉以爲王語之末有闕文, 似得之. 彼有七經小傳否? 可檢看. 又漢書曆志謂是歲有閏, 亦是也.
질문: 서경 「홍범」에 대해, 임씨는 낙수에서 「홍범」이 나왔다는 설은 신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상제가 진노(震怒)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내려주지 않으시니, 이륜(彛倫)이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은 하늘이 그것을 빼앗아버린 본보기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이 우왕에게 홍범구주를 내려 주시니, 이륜(彛倫)이 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른바 하늘이 그 정성을 권장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홍범구주라는 책은 떳떳한 인륜의 차례를 발명한 것이지 수(數)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 ‘하늘은 우임금에게 홍범구주를 내려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이 곧 왕에게 용기와 지혜를 내려주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꼭 너무 깊이 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하수에서 그림(圖)이 나오고 낙수에서 책이 나왔다는 것은 주역에 분명하게 이 설이 있는데, 어찌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씨의 설은 어떻습니까, 절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설령 지금 하늘이 낙서(洛書)를 내려준다 하더라도, 하늘이 그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면 우리 사람이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洪範之書, 林氏以爲洛出書之說不可深信, 謂 ‘帝乃震怒, 不畀洪範九疇, 彝倫攸斁’, 猶言天奪之鑒也. ‘天乃錫禹洪範九疇, 彝倫攸叙’, 猶言所謂天誘其衷也. 又云洪範之書大抵發明彝倫之叙, 本非由數而起. 又日 ‘天乃錫禹洪範九疇’, 猶言天乃錫王勇智耳, 不必求之太深也. 某竊謂河出圖, 洛出書, 易中明有此說, 豈得而不之信耶? 未知林氏之說如何, 望折衷.
便使如今天錫洛書, 若非天啓其心, 亦無人理會得, 兩說似不可偏廢也.
질문: 서경 「홍범」의 ‘팔서징(八庶徵)’, ‘왈시(曰時)’에 대해, 임씨는 채씨의 설을 받아들여, 이것은 해, 달, 일의 때를 말한다고 하고, ‘다섯 가지가 와서’부터 아래로는 ‘왈우(曰雨)․왈사(曰賜)․왈욱(曰燠)․왈한(曰寒)․왈풍(曰風)’의 뜻을 다시 말한 것이고, ‘왕이 살필 것은 해이고’부터 아래는 ‘왈시(曰時)’의 뜻을 다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시(時)’자는 다섯 가지가 각기 그 때로 삼는다는 공씨의 설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임씨처럼 ‘시’자를 비(雨)․볕(賜)․따뜻함(燠)․추움(寒)․바람(風) 다섯 가지와 병렬하면 여섯이 되니, 마침내 이 ‘시(時)’자를 군더더기로 여깁니다. 잘 모르지만, 옛 선인들이 이렇게 말한 사례가 많습니다. 또 인․의․예․지가 사단(四端)인데, 여기에 ‘신(信)’자를 더하면 오상(五常)이 되니, 인․의․예․지의 밖에 따로 신(信)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시(時)가 서징(庶徵)에 있는 것은 마치 신(信)이 오상(五常)에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 맞는지요?
대답: 임씨의 설은 고설(古說)과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세(歲)로써 그 시(時)와 불시(不時)를 논한 것이 있고, 월(月)로써 그 시(時)와 불시(不時)를 논한 것이 있고, 일(日)로써 그 시(時)와 불시(不時)를 논한 것이 있으니, 다시 추론해보십시오.
‘八庶徵’, ‘曰時’, 林氏取蔡氏說, 謂是歲月日之時, 自 ‘五者來備’ 而下, 所以申言 ‘曰雨․曰賜․曰燠․曰寒․曰風’ 之義; 自 ‘王省惟歲’ 而下, 所以申言 ‘曰時’ 之義. 某竊謂此 ‘時’ 字當如孔氏五者各以其時之說爲長. 林氏徒見 ‘時’ 字與雨․賜․燠․寒․風五者竝列而爲六, 則遂以此 ‘時’ 字爲․贅, 不知古人之言如此類者多矣. 且仁․義․禮․智是爲四端, 加一 ‘信’ 字, 則爲五常, 非仁․義․禮․智之外別有所謂信也. 故某以爲時之在庶徵, 猶信之(6-3138)在五常, 不知是否?
林氏之說只與古說無異, 但謂有以歲而論其時與不時者, 有以月而論其時與不時者, 有以日而論其時與不時者, 可更推之.
질문: 제가 서경을 읽다보니 「반경」과 「오고」 등의 편에 의심스런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만약 억지로 여러 학자들의 설로 해석하자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가리키던 뜻이 꼭 이와 같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곳들은 그대로 놔두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답: 장주에서 간행한 사경(四經)의 「서경 서문」에 그러한 설이 있습니다.
某讀書至盤庚及五誥諸篇, 其疑不可數擧. 若以諸家之說勉强解去, 亦說得行, 但恐當時指意未必如此耳. 如此等處只得姑存之, 如何?
漳州所刻四經書序有此說.
질문: 수괘(需卦) 육사(六四)에 ‘구멍으로부터 나온다’ 하고, 상육(上六)에 ‘구멍으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천역전은 ‘구멍은 물건이 편안히 여기는 곳이다’라고 했고, 주역본의는 ‘혈(穴)은 험함(險陷)한 곳이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 험함(險陷)한 곳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감체(坎體)의 상(象)이라고 보이는데, 맞는지요?
대답: 감(坎)이 곧 혈(穴)입니다.
需卦六四: ‘出自穴’, 上六: ‘入于穴’, 程傳謂 ‘穴, 物之所安也.’ 本義謂 ‘穴者, 險陷之所.’ 某以爲謂之險陷之所, 正得坎體之象, 未知是否?
坎卽穴也.
질문: 송괘 육삼에 ‘혹 왕사(王事; 국사)에 종사하더라도 이룸이 없으리라’에 대해, 본의는 반드시 성공이 없을 것임을 말한다고 하였는데, 송괘 「상전」에서 ‘윗사람을 따르더라도 길할 것이다’는 뜻과 맞지 않으며, 또 곤괘 육삼 「문언전」의 말과도 맞지 않습니다. 본의는 점사를 곧장 이와 같이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맞는지요?
대답: 역에서 이와 같이 경전이 일치하지 않는 곳이 많지만 둘 다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의 뜻이 근본이고. 전(傳)의 말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訟六三: ‘或從王事無成’, 本義謂必無成功, 似與象辭 ‘從上吉也’ 之意不協, 又與坤六三文言亦不協. 竊意本義是直作占辭解如此, 未知是否?
易中經傳不同如此處多, 且兼存之. 然經意是本, 傳辭是第二節話也.
질문: 소축괘 구오에 ‘부자 그 이웃들을 도와주도다’에 대해, 본의는 손체(巽體)의 세 효가 힘을 합하여 건을 저지하니 이웃의 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천역전에 따르면, ‘한 음으로써 다섯 양을 저지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통체(統體)로 말하면 진실로 한 음이 다섯 양을 저지하지만, 구오에서 말하자면 아래로는 구사와 비하고 위로는 아래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웃의 상입니다. 손체 세 효가 힘을 합쳐 건을 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에서 아래를 저지한다는 뜻을 분명한 데, 이렇게 이해해도 괜찮은지요?
대답: 다시 태괘 육사의 ‘부유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웃과 함께 한다’는 구절로 대조하면 그 문장의 뜻을 알 것입니다.
小畜九五 ‘富以其鄰’, 本義謂巽體三爻同力畜乾, 鄰之象也. 據程傳則曰: ‘以一陰畜五陽.’ 某竊謂以統體言之, 固是以一陰畜五陽, 然就九五而言, (6-3139)則下與四比, 上與下連, 爲鄰之象. 謂巽三爻同力畜乾, 却見得自上畜下之意分明, 未知是如此否?
更以泰卦 ‘不富以其鄰’ 對之, 卽可見其文意.
질문: 대과괘의 상육효에 대해, 본의는 이를 살신성인의 일이라 하니, 진나라 순식(荀息)과 같은 종류입니까?
대답: 순식의 처신은 아직 살신성인의 수준이 아닙니다.
大過上六爻, 本義謂是殺身成仁之事, 莫是如晉荀息之類否?
荀息所處未得爲成仁者.
질문: 돈괘 괘사에 ‘조금 바르면 이로우리라[小利貞]’ 한대, 본의에서는 소인이라고 했습니다. 살벼보건대, 주역에서 ‘소(小)’자를 소인으로 보는 곳은 없습니다. 예컨대 ‘가는 바를 둠이 조금 이롭다[小利有攸往]’와 ‘조금씩 바로잡으면 길하다[小貞吉]’과 같은 경우, 모두 크고 작다는 대소(大小)의 소(小)일뿐입니다. 이 뜻은 어떻습니까?
대답: 경전의 문구에는 이러한 용례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전으로 추론해보면, 이것은 소인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땅히 경에 의거하여 전을 보존해야 합니다.
遯 ‘小利貞’, 本義謂小人也. 按易中 ‘小’ 字未有以爲小人者, 如 ‘小利有攸往’ 與 ‘小貞吉’ 之類, 皆大小之小耳. 未知此義如何?
經文固無此例, 然以彖傳推之, 則是指小人而言. 今當且依經而存傳耳.
질문: 풍괘 「단전」에 ‘천지의 영허(盈虛; 흥쇠)도 때와 더불어 소식(消息)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하물며 귀신에 있어서랴?’라 한대, 정자께서는 ‘귀신은 조화의 흔적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천지의 영허(盈虛)가 바로 조화의 흔적인데, 다시 귀신을 말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대답: 천지는 전체를 들어 말하는 것이고, 귀신은 그 공용의 흔적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에게 행위하는 바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겸괘 「단전」의 말로 유추해보면 더욱 명백합니다.)
豐, 彖曰: ‘天地盈虛, 與時消息, 而况於人乎? 况於鬼神乎?’ 程子曰: ‘鬼神者, 造化之跡.’ 然天地盈虛, 卽是造化之跡矣, 而復言鬼神, 何耶?
天地擧全體而言, 鬼神指其功用之迹, 似有人所爲者. (以謙卦彖辭推之尤明白.)
질문: 주역 「계사 상」의 ‘성인이 천하의 잡란함을 보고서’에 대해, 본의는 ‘이(賾)는 잡란(雜亂)함이다’고 했습니다. 훈고에 따르면, 모두 '깊다[深]'고 하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대답: 선유가 이렇게 훈고한 것이 있는데, 이제 기억나지 않아 검토할 수가 없습니다. 사전에 ‘이(賾)’자가 없고(신구(臣口)는 동의同義), 단지 ‘책(嘖)’이라고만 쓰고, 크게 부르는 것이라 합니다. 좌전에 ‘여러 가지로 알력이 있다[噴有煩言]’ 했으니, 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깊다(深)는 뜻이라면, ‘은심원(隱深遠)’이라는 세 글자와 한 뜻이 되어버리니, 또 어찌 ‘싫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聖人有以見天下之賾’, 本義云: ‘賾, 雜亂也.’ 據訓詁皆云深也, 未知如何?
先儒有此訓, 今忘記, 檢不得. 字書無 ‘賾’ 字, (臣口同義)只作 ‘嘖’, 云大呼(6-3140)也. 左傳曰 ‘嘖有煩言’, 非謂深也. 若是深義, 卽與 ‘隱深遠’ 三字一義矣, 且又何以云不可惡乎?
질문: 본의에 ‘변화(變化)하고 운위(云爲)하므로 일을 형상하면 기물(器物)을 알 수 있고, 길(吉)한 일에 상서로움이 있으므로 일을 점치면 미래를 알 수 있다.’ 하셨는데, 변화 운위는 사람을 위주로 하신 말씀입니까?
대답: 변화란 음양이 하는 것이고, 운위(云爲)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本義云: ‘變化云爲, 故象事可以知器; 吉事有祥, 故占事可以知來.’ 不知變化云爲主於人而言否?
變化者, 陰陽之所爲; 云爲者, 人事之所作.
질문: 주역 「설괘전」에 ‘그윽히 신명을 도와 시초를 내었다’에 대해, 본의는 「귀협전(龜莢傳)」의 ‘시초가 온 가지에 꽉 차도록 생겨난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생(生)’자는 마땅히 아래 쪽에 나오는 ‘입괘(立卦)’라 할 때의 ‘립(立)’자․ ‘생효(生爻)’의 ‘생(生)’자와 같은 사례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시초를 내었다[生著]라는 것은 시초를 세워 사용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답: 괘효는 사람이 그은 것이고, 시초는 천지가 낳은 것이니, 한 가지 사례로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생시[生著]를 시초를 세우고 그 시초를 사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리에 맞지 않습니다.
‘幽贊於神明而生蓍’, 本義引龜莢傳 ‘蓍生滿百莖’ 爲證, 某竊謂 ‘生’ 字似只當與下面對 ‘立卦’ ‘立’ 字․ ‘生爻’ ‘生’ 字同例看. 所謂生蓍者, 猶言立蓍而用之耳. 未知是否?
卦爻是人所畫, 生蓍是天地所生, 不可作一例說. 兼以立生蓍而用之爲生著, 亦不成文理.
질문: 「설괘전」에서 ‘감에 위로한다[勞乎坎]’고 하였는데, 아래의 문장에서 ‘만물이 돌아가는 바이므로 감에 위로한다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노(勞)’자는 거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답: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문단은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
‘勞乎坎’, 據下文云 ‘萬物之所歸也, 故曰勞乎坎’, 竊意 ‘勞’ 字當作去聲讀. 未知是否?
恐或如此. 然此一節多難曉處.
질문: 시경 「대아」편에 ‘아, 질서정연하게 종을 침이여. 아, 즐거운 벽옹(辟廱)에서 하도다.’라 한대, 주석에서 ‘벽옹(辟雍)은 천자의 학문이다’고 했습니다. 벽옹은 예부터 천자의 학문이었습니까. 아니면 문왕이 처음으로 시작하고 주나라가 천하를 소유하고서 마침내 천자의 학문으로 삼고, 또 예컨대 고문․응문을 처음으로 태왕에 세운 이후에 천자의 문으로 삼은 것입니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모르겠습니다.
‘於論鼓鍾, 於樂辟雍’, 註云: ‘辟雍, 天子之學也.’ 不知辟雍從來是天子之學否? 還是文王始爲之, 及周有天下, 遂以爲天子之學, 亦如臯門․應門始(6-3141)立於太王, 而後遂以爲天子之門耶? 伏乞指敎.
見不得.
질문: 시경 「소아․소민」 제6장에 대해, 집전은 부체(賦體)라 하는데, 제 생각에는 비체(比體)가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답: 비로 하는 게 맞습니다.
召旻第六章, 集傳作賦體, 竊疑是比體. 未知如何?
作比爲是.
이 문단은 주자전서본에는 빠져 있다. 小序麟趾詩: ‘雖衰世之公子, 皆信厚如麟趾之時也’, 此句似無義理. 江有汜詩是勝自作, 非美勝也. 此二處下皆未曾註, 未知如何?
當補.
질문: 논어 ‘인한 사람은 근심하지 않는다’는 구절에 대해, 집주는 ‘천리가 사욕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추론하기에는, 아마도 단지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하면서 한가하게 사려하지 않으며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맞는지요?
대답: 맞지 않습니다.
論語 ‘仁者不憂’, 集注云: ‘理足以勝私, 故不憂.’ 某嘗推之, 恐只是此心常存, 不暇閑思慮, 惹起閑煩惱耳. 未知是否?
未是.
질문: 제가 춘추를 읽다가 ‘휘(翬)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송공(宋公)․진후(陳侯)․채인(蔡人)․위인(衛人)과 함게 정나라를 정벌했다’는 부분에서, 성인이 춘추를 지은 뜻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어 함부로 글을 적어 올리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춘추는 성인이 포폄한(襃貶)한 책이라는 설명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인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한 글자로 포폄하는 공적을 덧붙였겠습니까?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썼을 뿐이니, 예컨대 ‘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갔다’는 것과 같은 종류가 그것입니다. 군주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요청해서 행한 것은 춘추에 기록한 것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세대의 일이 있으면 자연히 한 세대의 역사서가 있어야 할 것인데, 춘추는 왜 성인이 나온 이후에 씌여졌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춘추는 노나라 역사서의 옛 명칭이지, 공자가 이 경전을 창작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역사서의 기록이 모두 그 객관적 사실성을 잃지 않았다면, 성인이 무엇 때문에 이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겠습니까? 사관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저서와 주석이 대부분 옛 제도와 문물과 어긋났기 때문에 성인이 사법(史法)의 옛 법도로 그 사실을 바르게 써서 그 사실이 상실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뿐이지, 처음부터 포폄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춘추를 보면, 성인의 광명정대한 뜻을 충분히 볼 수 있으니, 한 글자로 포폄하는 공적으로 사사로이 영욕을 휘두르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만 유실되지 않으면, 선을 행하는 사람이 어찌 선에 힘쓰지 않을 수 있으며, 악을 범하는 자가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시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 하시니, 참으로 마땅합니다.
대답: 춘추의 ‘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갔다’는 구절은 모르겠습니다. 군주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군사를 행한 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또 옛 관례가 이 경전과 같이 합치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부분은 다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某讀春秋, 至 ‘翬帥師會宋公․陳侯․蔡人․衛人伐鄭’ 處, 略窺見聖人所以作春秋之意, 僭易錄呈, 伏乞指敎. 某謂春秋爲聖人褒貶之書, 其說舊矣. 然聖人豈損其實而加吾一字之功哉? 亦卽其事之固然者而書之耳, 如 ‘翬帥師’ 之類是也. 蓋不待君命而固請以行, 則書之如是宜也. 或以爲若是則一代之事自有一代之史, 春秋何待聖人而後作哉? 曰, 春秋卽魯史之舊名, 非孔子之創(6-3142)爲此經也. 使史筆之傳擧不失其實, 聖人亦何必以是爲己任? 惟官失其守而策書記注多違舊章, 故聖人卽史法之舊例以直書其事, 而使之不失其實耳, 初末嘗有意於褒之貶之也. 以是而觀春秋, 庶足以見聖人光明正大之意, 而非持夫一字之功以私榮辱之權也. 惟夫不失其賓, 則爲善者安得而不勸, 爲惡者安得而不懼? 孟子曰: ‘孔子作春秋而亂臣賊子懼’, 宜哉!
不知書 ‘翬帥師’ 如何見得其不待君命而行之罪? 又如何見得舊例合如此書? 此須更有商量, 未達則闕之可也.
(6-3143)
반자선에게 답함 (6-3144)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년, 69세)에 반자선에게 쓴 여덟 번째 편지이다.
한서 「율력지」는 서경 「무성」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1월 임진 방사패(旁死覇) 다음날인 계사(癸巳)에 무왕이 아침에 주(호경)로부터 행하여 가서 은나라의 주왕을 정벌하였다.’ (이는 고문과 일치하지만, 한 두 글자가 다릅니다.) 또 말하기를 ‘월약래(粤若來) 3월 기사패(旣死覇) 5일 갑자에 모두 함께 상나라 왕 주(紂)를 베었다’고 했습니다. (안씨顔氏: 顔師古는 ‘금문상서의 말이다’고 합니다.) 또 ‘4월 기방생패(旣旁生覇) 6일 경오(庚戌)에 무왕이 주나라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다음날 신해(辛亥)에는 천위(天位)에 제사지냈다. 5일 을묘(乙卯)에 여러 나라가 주나라 사당에서 괵(馘)으로 제사지냈다.’고 했습니다. (안씨는 ‘이 역시 금문상서이다’고 합니다.) 또 「필명」․「풍형」에 말하기를 ‘12년 6월 경오비(庚午朏)에 왕이 명령하여 책을 만들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맹강은 「풍형」은 ‘서경의 유실된 편명이다’고 합니다.) 지금 살펴보면, 복생의 금문상서에는 「무성」편이 없고, 공씨의 고문상서에만 이 편이 있습니다. 지금 안씨가 주석한 유흠이 인용한 두 구절은, 안씨가 그것이 고문과 같지 않음을 보고 마침내 모두 금문상서라고 생각하였지만, 어떻게 고증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학자들은 책력을 추론하여, 이 해 3월에 윤달이 있고, 4월 정미는 19일이며, 경술은 22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윤달이 없다면, 4월에는 정미(丁未) 경술(庚戌)일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2일이 모두 생백(生魄)의 뒤에 있으니, 고문은 거꾸로가 되고, 한서 「율력지」가 맞게 됩니다. 다만 주나라 사당에 제사지냈다는 말은 무리인 듯합니다. 하물며 고문의 이 편의 글들은 모두 뒤섞이고 잘못되어 있는데, ‘기생백(旣生魄)에 여러 나라의 총군(冢君)과 백공(百工)들이 주나라에서 명(命)을 받았다[旣生魄, 庶邦冢君曁百工受命于周]’는 14글자가 본래에는 ‘시천하불복(示天下弗服)’의 아래, ‘정미사우주묘(丁未祀于周廟)’의 위에 있지 않으며, ‘왕약왈(王若曰)’ 이하는 크게 무성(武成)을 고유(告由)한 글임을 알겠습니까? (「틍고」편으로 고증해보면, 이 설명이 맞습니다.) 고문에 「필명」편이 있는데, 그 연월일은 한서 「율력지」가 인용한 「필명」과 같은데, ‘왕이 책을 만들도록 명령했다’는 구절은 곧 고문 「필명」편의 서문입니다. 오직 「풍형」편만 근거가 없지만, 연월의 아래에 ‘지우풍(至于豐)’이라는 글자가 있으니, 어찌 「이훈」편의 ‘방명(方明)’과 같겠습니까? 다만 고문상서 서문의 ‘책(冊)’ 아래에 다시 ‘필(畢)’자가 있으니, 공전(孔傳)은 명령을 하고 서책을 만드는 것을 필공에게 명령한 것으로 보는데, 이와 같이 하면 문리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아마도 본문에 빠진 말이 있는 듯하니, ‘작책(作冊)’ 두 글자는 연문(衍文)이고 ‘공(公)’이라는 한 글자도 빼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흠이 본 고문도 이미 정본이 아니고, 금문본 역시 빠지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니, 완전히 믿기는 어렵습니다. 맹강은 「풍형」을 일서逸書의 편명이라 했는데, 본래 위의 글에 「필명」이 있으니, 이 역시 매우 잘못입니다. (이는 유씨의 칠경소전(七經小傳)의 설 같은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漢志引武成篇曰: ‘惟一月壬辰, 旁死覇, 若翌日癸巳, 武王乃朝步自周, 于征伐紂.’ (此與古文合, 但一二字差.) 又曰: ‘粤若來三月, 旣死覇, 粤五日甲子, 咸劉商王紂.’ (顔氏曰: ‘今文尙書之辭.’) 又曰: ‘惟四月, 旣旁生覇, 粤六日庚戌, 武王燎于周廟. 翌日辛亥, 祀于天位. 粤五日乙卯, 乃以庶國祀馘于周廟.’ (顔氏曰: ‘亦今文尙書也.’) 又畢命․豐刑曰: ‘惟十有二年六月庚午朏, 王命作策.’ (豐刑, 孟康曰 ‘逸書篇名.’) 今按, 伏生今文尙書無武成, 獨孔氏古文尙書乃有此篇. 今顔氏注劉歆所引兩節, 見其與古文不同, 遂皆以爲今文尙書, 不知何所考也. 諸家推曆, 以爲此年二月有閠, 四月丁未爲十九日, 庚戌爲二十二日. (若無閏, 卽四月無丁未庚戌.) 然二日皆在生魄之後, 則古文爲倒而此志所引者爲順. 但其言燎于周廟, 似無理耳. 况古文此篇文皆錯鯵, 安知 ‘旣生魄, 庶邦冢君曁百工受命于周’ 十四字非本在 ‘示天下弗服’ 之下, ‘丁未祀于周廟’ 之上, 而 ‘王若曰’ 以下乃大告武成之文耶? (以湯諾考之, 此說爲是.) 畢命古文有此篇, 其年月日與此同, 而 ‘王命作冊’ 乃序文. 唯豐(6-3145)刑爲無據, 然年月之下亦有 ‘至于豐’ 字, 豈又若伊訓之 ‘方明’ 耶? 但古文之序‘冊’ 下更有 ‘畢’ 字, 孔傳以爲命爲冊書以命畢公, 如此則全不成文理. 本文似亦有闕語, 疑 ‘作冊’ 二字乃衍文, 而闕一 ‘公’ 字也. 以此可見劉歆所見古文已非其正, 而今本亦有闕誤, 難盡信也. 孟康便以豐刑爲逸書篇名, 則亦不復本上文自有畢命矣, 此又誤之甚也. (此恐是劉氏七經小傳之說, 當考.)
반자선에게 답함 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년, 69세)에 반자선에게 쓴 아홉 번째 편지이다.
말씀하신 주일(主一)의 공부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천만 번 다시 노력을 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경에 관한 학설에 대한 답장을 지금 다시 보냅니다. 지난 해 8월쯤에 황암에게 부쳤는데 무슨 까닭으로 도착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해가 소략하고 천박하니, 다시 그 사이의 상세한 내용과 의미를 깊이 사색하여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경(禮經)을 배운다는 뜻이 매우 좋기는 하지만 그 일은 두서가 상당히 많으니, 정력이 모자라 포괄적으로 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지금은 우선 시경을 읽다가 뒷날 편찬한 책이 완성되거든 읽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책을 비록 다 읽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복습해야 하니, 대학․논어․맹자․중용과 같은 것은 모름지기 되풀이 복습하는 것을 그치지 않고 푹 익도록 해야 좋습니다. 춘추는 과거에는 학자가 함부로 볼 책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전과 삼전을 조금씩 읽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또 마땅히 역사 공부를 하여 포폄의 도리를 함부로 억측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오래도록 깊이 사려해 보는 것도 하나의 일입니다. 의례 「공식례」는 아직까지 부쳐오지 않았는데, 공숙․치도에게 가도록 이미 조치했습니다. 자약이 없어 매우 마음 아프고 슬픈데, 이 곳의 채계통 역시 유배지에서 죽으니 더욱 가슴 아픕니다. 주위에 이야기 나눌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所喩主一功夫甚善, 千萬更加勉力爲佳. 書說今再報去, 去歲卷子八月間已寄往黃巖矣, 不知何故未到. 然大抵看得似皆疏淺, 更宜玩索其間曲折意味, 方有得力處也. 學禮之意甚善, 然此事頭緖頗多, 恐精力短, 包羅不得. 今可且讀詩, 俟他日所編書成, 讀之未晩. 書雖讀了, 亦更宜溫習. 如大學․語․孟․中庸, 則須循還, 不住溫習, 令其爛熟爲佳. 春秋一經, 從前不敢容易令學者看, 今恐亦可漸讀正經及三傳. 且當看史功夫, 未要便穿鑿說褒貶道理, 久之却別商量, 亦是一事也. 公食禮至今未寄來, 已報恭叔․致道趣之矣. 子約之亡深可傷痛, 此間蔡季通(6-3146)亦死貶所, 尤可惜. 目前便覺無人說得話也.
반자선에게 답함 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년, 69세)에 반자선에게 쓴 열 번째 편지이다.
질문: 서경 「홍범의 휴징(休徵)과 구징(咎徵)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의리로 추론하여 설명합니다. 이는 오히려 주역에서 상을 취하는 것과 비슷하니, 개략적으로 이해해야지 아주 깊게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징조에는 비록 다섯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는 음양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추위는 음이고, 날이 갬․따뜻함․바람은 양입니다. 엄숙하고 헤아림을 깊이 하는 것은 고요함에 속하니 음의 부류입니다. 그러므로 제때에 비가 내리고 날이 추워 그것에 응하는 것입니다. 또 지혜롭고 성스러움이 발현하는 것은 움직임에 속하니 양의 부류입니다. 그러므로 제때에 날이 개고 따뜻하며 바람이 불어 그것에 응하는 것입니다. 미친 짓은 엄숙함에 상반되고, 급박함은 헤아림을 상실한 것이니 항상 비가 내려 거기에 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도 괜찮은지요?
대답: 대체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비는 목(木)에 속하고, 날이 개는 것은 금(金)에 속하고, 따뜻함은 화(火)에 속하고, 추위는 수(水)에 속한다고 했는데, 또 어떤 사람은 비는 수(水)에 속하고, 날이 개는 것은 화(火)에 속하고, 따뜻함은 목(木)에 속하고, 추위는 금(金)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싶어 하는데, 어는 설명이 맞는지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洪範中休徵咎徵, 諸家多以義推說. 竊以爲此猶易中取象相似, 但可以彷彿看, 而不可以十分親切求也. 庶微雖有五者, 大抵不出陰陽二端而已. 雨․寒, 陰也; 暘․燠․風, 陽也. 肅謀深沉而屬靜, 陰類也, 故時雨時寒應之. 又哲聖發見而屬動, 陽類也, 故時暘時燠時風應之. 狂反於肅, 急失於謀, 故恒雨應之. 未知如此看得否?
大槪如此. 然舊以雨屬木, 暘屬金, 燠屬火, 寒屬水, 而或者又欲以雨屬水, 暘屬火, 燠屬木, 寒屬金, 其說孰是, 可試思之.
질문: 서경 「여오」의 ‘사람들이 물건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구절에 대해, 학자들 모두가 ‘역(易)’자를 글자 그대로 읽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땅히 ‘경이(輕易)’의 ‘이(易)’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답: 아마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旅獒 ‘人不易物’, 諸家皆讀 ‘易’ 如字. 某竊意當讀作 ‘輕易’ 之 ‘易’.
恐不然.
질문: 서경 「요오」의 ‘시용전친(時庸展親)’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전(展)’을 ‘신(信)’으로 해석하는데, 맞습니까?
대답: 전(展)은 살펴보는 것이니, 신(信)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時庸展親’, 諸家多訓 ‘展’ 作 ‘信’, 是否?
展, 審視也, 不當訓信.
질문: 서경 「소고」편의 글은 소공이 먼저 낙읍에 오고 뒤이어 주공이 온 것만 말하고, 성왕 역시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공이 나가서 폐백을 취해 들어와 주니, 이에 주공은 ‘왕과 공에게 아뢴다’고 하니, 또 그 말이 대부분 성왕을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 이는 대개 주공이 상나라의 왕들에게 고한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낙고」의 글들에는 명확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 뒷부분은 새 도읍지에서 왕들에게 말한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묻고 대답한 말들이 있습니다.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召誥文只說召公先至洛而周公繼至, 不說成王亦來也. 然召公出取幣入錫, 周公乃曰 ‘旅王若公’, 其辭又多是戒成王, 未知如何?
此蓋因周公以告于王耳. 但洛誥之文則有不可曉者, 其後乃言王在新邑, 而其前已屢有問答之誦矣. 可試考之.
질문: 서경 「입정」편에 ‘이에 삼택(三宅)에 의민(義民)이 없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삼택(三宅)은 바로 윗문장의 ‘택사(宅事)’․‘택목(宅牧)’․‘택준(宅準)’의 ‘택(宅)’입니다. 지금 공씨(孔氏)․소씨(蘇氏)는 의리가 없는 백성들에 거처하는 것이니, 마치 「순전」의 ‘다섯 가지 머무는 곳에 세 등급으로 거처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여씨(呂氏)는 ‘삼택무의민(三宅無義民)’이라는 한 구절은 ‘걸왕의 악덕은 옛날에 임용한 것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니, 걸왕 당시에 삼택(三宅)에 의민(義民)이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둘 가운데 어느 설이 더 나은지요?
대답: 여씨의 설이 맞습니다.
立政 ‘玆乃三宅無義民’, 據此三宅卽上文 ‘宅事’ ‘宅牧’ ‘宅準’ 之‘宅’. 今孔氏․蘇氏以爲居無義之民, 猶舜典五宅三居之意, 呂氏以 ‘三宅無義民’ 一句, ‘桀德惟乃弗作往任’, 謂當桀之時, 三宅者曾無義民. 未知二說執長?
呂說是.
질문: 사도(司徒)․사마(司馬)․사공(司空)․아려(亞旅)가 무엇 때문에 태사(太史)․윤백(尹伯)․서상(庶常)․길사(吉士)의 아래에 위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씨(呂氏)는 제후의 관리라고 하는데, 맞는지요?
대답: 삼관의 부관과 그 관속을 말합니다. (아(亞)는 소사도에 속하고, 려(旅)는 하사입니다. 주례 「서관」에 있습니다.)
(6-3148)司徒․司馬․司空․亞旅不知何故叙於太史․尹伯․庶常․吉士之下, 呂氏以爲諸侯之官, 未知是否?
謂三官之副與其屬耳. (亞謂小司徒之屬, 旅則下士也. 見周禮序官.)
질문: 「고명」편의 ‘의지하여 살 바를 정해주고 가르침을 베풀자 백성들이 익혔다’에서, 공씨는 ‘리(麗)’자의 음은 리이고 베푼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부려(附麗)의 려(麗)라 하니 토착(土著)을 말합니다. 전려(奠麗)는 기름을 말하고, 진교(陳敎)는 교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설을 따라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 공씨의 설을 따르더라도 평평하고 곧은 것 같습니다. 전려(奠麗)란 그 시행할 바의 호령을 결정하는 것이고, 진교(陳敎)는 그 교화해야 할 바의 도를 펴는 것입니다. ‘예(肄)’는 혹 노(勞)․습(習)으로 해석하는데, 제 생각에는 습(習)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저 혼자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답: 전편(前篇)에 ‘려(麗)’를 형(刑)으로 해석한 것이 있고, ‘예(肄)’는 당연히 습(習)으로 새겨야 합니다.
‘奠麗陳敎則肄’, ‘麗’ 字據孔氏音力馳反, 施也. 諸家多作附麗之麗, 謂土著也. 奠麗謂養之, 陳敎則敎之. 未知其說如何? 某竊謂從孔氏說亦自平直, 奠麗者謂定其所施之號令也, 陳敎則陳其所以敎之之道也. ‘肄’ 或訓勞․習, 愚意謂從習爲長. 未敢自決, 尙幸批誨.
前篇有以 ‘麗’ 訓刑者, ‘肄’ 當訓習.
질문: 「고명」편의 ‘생각하건대 사람은 스스로 위의(威儀)를 다스려야 하니, 너희들은 소(釗)를 데리고 나쁜 기미에 나아가지 말라’에서, 대부분 ‘기(幾)’자를 위(危)로 해석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기(幾)는 곧 사(事)이니, ‘만기(萬幾)’의 ‘기(幾)’와 같습니다. ‘나쁜 기미에 무릅쓰고 나아가다(冒貢于非幾)’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 일에 무릅쓰고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답: 기(幾)란 일의 기미입니다.
‘思夫人自亂於威儀, 爾無以釗冒貢於非幾’, ‘幾’ 字多訓危. 某竊謂幾卽事也, 猶 ‘萬幾’ 之 ‘幾’. ‘冒貢于非幾’, 謂冒進于非所當爲之事. 未知是否?
幾者, 事之微也.
질문: 강왕이 상복을 벗고 곤면을 입고서 남문의 밖에서 호분(虎賁)을 맞이하고, 또 황주(黃朱)의 규(圭)와 폐백의 봉헌을 받았습니다. 여러 학자들은 모두 예의 변화라고 여기는데, 소씨만 예에 벗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답: 천자 제후의 예는 선비나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맹자에 ‘내 아직 배우지 않았다’는 말씀이 있으니, 대개 이러한 종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如伊訓元杷十二月朔, 亦是新喪, 伊尹已奉嗣王祗見厥祖, 固不可用凶服矣. 漢․唐新主卽位皆行冊禮, 君臣亦皆吉服, 追迷先帝之命, 以告嗣君. (韓文外集․順宗實錄中有此事, 可考. 蓋易世傳授, 國之大事, 當嚴其禮. 而王侯以國爲家, 雖先君之喪, 猶以爲己私服也. 五代以來, 此禮不講, 則始終之際殊草草矣.
康王釋喪服而被袞冕, 受虎賁之逆于南門之外, 且受黃朱圭幣之獻. 諸家皆以爲禮之變, 獨蘇氏以爲失禮, 使周公在, 必不爲此. 未知當此際合如何區處?
(6-3149)天子諸侯之禮與士․庶人不同, 故孟子有 ‘吾未之學’ 之語, 蓋謂此類耳. 如伊訓元杷十二月朔, 亦是新喪, 伊尹已奉嗣王祗見厥祖, 固不可用凶服矣. 漢․唐新主卽位皆行冊禮, 君臣亦皆吉服, 追迷先帝之命, 以告嗣君. (韓文外集․順宗實錄中有此事, 可考. 蓋易世傳授, 國之大事, 當嚴其禮. 而王侯以國爲家, 雖先君之喪, 猶以爲己私服也. 五代以來, 此禮不講, 則始終之際殊草草矣.
질문: 정선생의 문집 중에서 「주식(主式)」과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는 길이와 넓이가 다릅니다. 이른바 고척(古尺)은 지금의 5촌(寸) 5분(分)에 조금 못 미치는데, 지금은 무슨 척(尺)을 사용해야 합니까? 「고금가제례」에는 고척(古尺)의 모양이 있는데, 지금 자와 비교해보면, 5촌 5분이 조금 넘습니다. 그리고 주석에 ‘성척(省尺)’이라 했는데, 성척은 지금의 회척(淮尺)입니까?
대답: 두 책을 점검해보니, 주식의 높낮이에 차이가 있지만, 본래 양식을 보이려는 것뿐이니, 그 높이나 넓이의 척도에는 정해진 길이[尺寸]가 있으니 애당초 이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성척은 곧 경척(京尺)으로 사마천에게 그림책(圖子)이 있는데, 이른바 ‘三司布帛尺’가 이것입니다. 회계사마시랑(會稽司馬侍郞)의 집안에 이 판본이 있을 것이니,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그림책에는 고척(古尺)의 수 등이 있는데, 이 책은 오래전부터 집에 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본지가 오래되었습니다.
程先生文集中主式與古今家祭禮長短闊狹不同, 所謂古尺當今五寸五分弱, 不知當用今何尺? 古今家祭禮中有古尺樣, 較之今尺又不止五寸五分, 注云 ‘省尺’, 省尺莫是今淮尺否?
主式適檢二書, 高低雖有少不同, 然本只要見式樣, 其高廣之度自有尺寸, 初不取此爲準也. 省尺乃是京尺, 溫公有圖子, 所謂三司布帛尺者是也. 會稽司馬侍郞家必有此本, 可轉求之. 其圖幷有古尺數等, 此舊有之, 今久不見矣.
(6-3150)
반자선에게 답함 答潘子善
[해제] 이 글은 경원 5년(기미, 1199년, 70세)에 반자선에게 쓴 열한 번째 편지이다.
6월 27일에 주희 올립니다. 오래도록 안부를 묻지 못하다가 당신의 편지를 받고 요즈음 하시는 일마다 다 좋으시고 또 이미 결혼까지 하신 것을 알고서 참으로 기뻤습니다. 저의 늙고 병듦이야 본래 말할 것도 없지만, 최근 기운이 더욱 막혀 책상에 앉아 책을 볼 수도 없어 상당히 근심스럽습니다. 요즘은 어떤 공부를 하십니까? 이전의 질문해주신 조목은 이미 답변을 했습니다. 여기에 10여 명의 벗들이 있어 강론에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만, 모두 오래 머물지는 못합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여러 동지들과 함께 오셔서 보름이나 한 달 정도 머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나눌 수 있겠는지요? 직접 글을 쓰지 못하고 구술(口述)하느라 대충 이만 줄입니다. 늘 몸 건강하십시오.
六月二十七日, 熹頓首: 久不聞問, 便中辱書, 具審比日所履佳勝, 又知已遂親迎, 良以爲慰. 熹衰病益侵, 本無足言, 最是氣痞, 不可伏几觀書, 殊以爲撓耳. 近日作何工夫? 前此問目, 已嘗奉報矣. 此間朋友亦有十餘人, 頗有講論之益, 然亦皆不能久留也. 不知秋冬間能率諸同志一來, 爲旬月之集, 以盡所欲言者否? 因便口占布此, 草草, 餘唯以時自愛.
여이손에게 답함 (6-3151)答余彛孫 (範)
[해제] 이 글은 건도 9년(계사, 1173년, 44세)에 여이손에게 쓴 편지이다.
질문: 근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의지가 기를 이기지 못해 기가 도리어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만약 뜻이 확립된다면, 기는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어에서 “안으로 반성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어찌 근심하며 어찌 두려워하겠는가?”라 한 것입니다.
대답: 근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내면에 미덥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반성하여 거리낌이 없으면 마음은 넓어지고 몸은 펴지니[心廣體胖] 어찌 근심하고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공자의 말씀이 이미 명백하고 완벽합니다. 그런데 지금 뜻을 세우고 기를 안정시키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경전의 본문을 정밀하게 읽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有憂有懼者, 志不勝氣, 氣反動其心. 若志立, 則氣定矣. 故曰內省不疚, 夫何憂何懼?
有憂有懼者, 內有所慊也. 自省其內而無所病, 則心廣體胖而何憂何懼之有? 夫子之語, 固已明白完備. 今以志立氣定爲言, 則是未嘗熟復本文而別生枝節也.
질문: 문중자(文中子)는 중설에서 ‘인의는 교화의 근본이니, 선왕이 이로써 도덕을 계승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도덕을 앞으로 하고 인의를 뒤로 하는 설명입니다.
대답: 이 설명이 맞습니다.
文中子曰: ‘仁義敎之本, 先王以是繼道德.’ 此先道德而後仁義之說也.
此說得之.
질문: 대학 경1장의 ‘그칠 데를 앎[知止]’에서 ‘능히 얻음[能得]’에 이르는 부분과 맹자 「이루 하」의 ‘자득(自得)’에서 ‘근원을 만남[逢原]’에 이르는 부분에 대해, 어떤 사람은 두 장의 순서가 서로 비슷하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그칠 데를 아는 것에서부터 아래는 곧 맹자의 자득하고자 하는 일이며, 능히 얻음에 이르는 것은 자득하는 곳입니다. 거처함에 편안하면 이용함이 깊고, 이용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씀에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자득한 후에 그치지 않고 더욱 나아가는 것입니다.
대답: 이 또한 맞습니다. 다만 성현의 말씀은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어서 그 순서와 깊고 얕음에 따라 말씀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억지로 갖다 부쳐서는 안 됩니다. 이 설명은 오히려 정밀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大學 ‘知止’ 以至 ‘能得’, 孟子 ‘自得’ 以至 ‘逢原’, 或以二章次第相似, 範以爲不然. 大學知止而下, 乃孟子欲其自得之事, 至於能得, 乃自得處. 居之安則資之深, 資之深則取之左右逢其原, 此乃自得後所進愈不止也.
此亦得之. 但聖賢之言各有所指, 其次序深淺隨事而言, 不可如此牽合. 此說猶爲粗可通耳.
질문: 무망괘 육이의 ‘밭 갈지 않고서도 수확하며, 1년 된 밭을 만들지 않고서도 3년 된 밭이 된다[不耕穫, 不菑畬]’에 대해, 정자 역전의 효사(爻辭)는 명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밭 갈지 않고서 수확하거나 1년된 밭을 만들지 않고서 3년된 밭이 되는 이치는 없으니, 단지 밭가는 데가 아니라 수확의 이로움만 계산하는 것입니다. 정자가 해석한 「상사(象辭)」를 효사로 옮겨 효사를 해석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대답: 역전의 효사와 「상사(象辭)」가 서로 반대되는 것 같지만, 뜻은 사실 서로 가깝고 단지 말에 미진함이 있을 뿐입니다. 효사는 마땅히 이치에 따라야 함을 말했고, 「상사」는 이익을 계산하지 말 것을 말했으니, 이치를 따르면 이익을 계산하지 않게 되고 이익을 계산하면 이치를 따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경전의 문장을 살펴보면, 역전과 당신의 설명은 문장의 의미상 모두 의심스런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밭 갈지 않고 수확한다고 말하면 도리어 ‘이(而)’자가 많아지고, 만약 밭가는 데는 관심이 없고 수확의 이익만 챙기려 한다고 말하면 또 몇 글자를 보태야 뜻이 통합니다. 예전에 이 효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인위적 경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얻게 된다는 의미가 있고, 밭 갈아 1년 된 밭을 만들고 3년 된 밭을 만드는 것은 일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망(无妄)의 세상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의미로 말하자면, 성인의 무위의 통치, 벼슬을 쫒지 않아도 벼슬이 따르는 학자가 모두 이런 사례입니다. 대체로 이 효는 이른바 무망의 복(福)이고, 육삼효는 이른바 무망의 화(禍)입니다.
‘不耕穫, 不菑畬’, 程子易傳爻辭恐未明白. 範竊謂無不耕而穫․不菑而(6-3152)畬之理, 只是不於耕而計穫之利. 如程子所象辭, 移之以解爻辭則可.
易傳爻象之辭雖若相反, 而意實相近, 特辭有未足耳. 爻辭言當循理, 象辭言不計利, 循理則不計利, 計利非循理也. 但攷之經文, 則傳與來說於文義之間皆若有可疑者. 若曰不耕而穫, 則多却 ‘而’ 字; 若曰不於耕而求穫之利, 則又須增數字方通. 嘗謂此爻乃自始至終都不營爲而偶然有得之意, 耕穫菑畬, 擧事之始終而言也. 當无妄之世, 事蓋有如此者. 若以義言, 則聖人之無爲而治, 學者之不要人爵而人爵從之, 皆是也. 大抵此爻所謂无妄之福, 而六三則所謂无妄之禍也.
질문: 간괘 육이에 ‘구원하지 못하고 따른다’고 하니, 정자가 ‘이(二)가 삼(三)의 중정하지 못함을 구원하지 못하면 억지로 그를 따를 것이니,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따른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유(惟)’자는 적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따른다고 말하면, 자오에 대한 악정자의 관계나 계씨에 대한 염구의 관계와 같게 됩니다. 당연히 ‘그 따르는 바를 구원하지 못해서 그 마음이 불쾌하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예컨대 공자와 맹자께서 당시의 군주에게 간언하고 군주가 받아들여 행하지 않으면 떠날 뿐인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그를 따른다는 것은 시지(時止)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답: 맞습니다.
艮六二 ‘不拯其隨’, 程子謂 ‘二不得以拯三之不中, 則勉而隨之, 不拯而惟隨也’, 恐 ‘惟’ 字未的當. 若不拯而惟隨, 則如樂正子之於子敖, 冉求之於季氏也. 當只言 ‘不拯其所隨, 故其心不快.’ 如孔孟之於時君, 諫不行․言不聽則去而已. 勉而隨之, 恐非時止之義.
得之.
질문: 주례 「대사악」편에 따르면, 천지 사망(四望)에 제사하는데 모두 오성(五聲)으로 수식합니다. 그런데 천신(天神)․지기(地祇)․인귀(人鬼)를 제사지낼 때에는 단지 궁(宮)․각(角)․치(徵)․우(羽)만 쓰고 상(商)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사는 부드러움을 숭상하는데, 왜 오성을 통틀어 말하느냐 합니다. 일변(一變)은 우물(羽物)을 致하고, 육변(六變)은 상물(象物)을 치하니, 감응이 있으면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순서나 선후로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然下管鼗鼓而鳥獸蹌, 簫韶九成(6-3153)而鳳凰儀, 또 순서와 선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감응함에 깊고 얕음이 있어서 이와 감응하겠습니까?
대답: 오성(五聲)은 총합해서 말한 것이니, 그것을 사용할 때는 상(商)에 미치지 않습니다. 심존중(沈存仲)의 필담(筆談)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고증할 수가 없으니 너무 깊이 탐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응에 깊고 얕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옛날의 주석들이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만, 또한 지금은 그 실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大司樂: 祀天地四望, 皆文之以五聲. 至於祀天神․地祇․人鬼, 獨用宮․角․徵․羽而不及商. 或曰祭尙柔, 又何以統言五聲耶? 一變致羽物, 六變致象物, 有感則無不通, 似不可以次序先後言. 然下管鼗鼓而鳥獸蹌, 簫韶九成(6-3153)而鳳凰儀, 又若有次序先後. 豈所感有淺深, 故其應如之耶?
五聲蓋總言之, 其用則不及商也. 沈存仲筆談亦有說, 然此等今無所考, 未須深究. 感有淺深, 古注之說已詳, 然今亦未睹其實也.
질문: 주례 「사복」편에 경(卿)이나 대부(大夫)는 의복은 대공(大功)이나 소공(小功)을 더한다고 했는데, 경대부(卿大夫) 이상은 모두 이것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답: 이것의 의미에 관해서는 주례의 소(疏)에 이미 설명되어 있는데, 중용에서 말한 ‘기년상은 대부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리고 옛사람들이 귀인(경대부)를 귀하게 여기는 뜻은 여씨가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정의의 ‘군자는 떳떳한 도를 회복한다’는 곳에도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공이 예악을 제정한 이후에 이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기 「단궁」편은 또 ‘옛날에는 강복(降服)하지 않고 상하가 각기 그 친등(親等)에 좇아 복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악제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장과 같이 한 두 가지의 설만 대충 해서는 안 되고 시초부터 공부해야만 합니다. 아마도 하루 이틀 노력해서 여기에 이를 수는 없을 것이니, 우선 가까이 있는 것(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司服: 卿大夫加以大功小功, 則自卿大夫而上皆無此者, 何也?
此義周禮疏中其說已備, 中庸所謂期之喪達乎大夫是也. 乃古人貴貴之義, 呂氏之說詳矣. (精義君子反經處亦有說.) 然亦是周公制禮以後方如此, 故檀弓又云 ‘古者不降, 上下各以其親.’ 大凡禮樂制度若欲理會, 須從頭做功夫, 不可只如此章, 草略說一二, 但恐日力未據及此, 不若且專意於其近者爲佳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