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권
편지(친구․제자들과의 문답)書(知舊門人問答)
장인숙(의)에게 답함[答張仁叔(毅)]
【해제】이 글은 순희 4년(정유, 1177, 48세) 장의(張毅)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주로 논어와 맹자 및 율려(律呂)와 연관된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 있다.
‘공경함에 머무르면서 간략하게 행하는 것[居敬行簡]’에 대한 정자(程子)의 생각은 중궁(仲弓)과 다른데, 중궁의 말이 옳다고 해야 합니다.
‘居敬行簡’, 程子意與仲弓不同, 當以仲弓之言爲正.
“그 즐거움을 변치 않는다[不改其樂]”는 구절에 대해 논어집주에서 극기복례의 항목으로 설명한 것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닫고, 이미 박문․약례의 차례에 따라 바꿨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배우는 사람들이 단계를 뛰어넘으면서 나아갈 수 없고, 오직 자공과 같이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병폐가 있으니,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오.
‘不改其樂’, 近覺集注克己復禮之目說得未盡, 已改作博文約禮之序矣. 更思之. 所說 ‘不改其樂, 學者不能躐進, 唯子貢之無諂可爲’, 此語有病, 可幷思之.
(논어에서) 맹지반(孟之反)을 언급한 한 대목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지리하니 성인의 본 뜻이 아닙니다.
孟之反一段所說支離, 非聖人本意.
‘예로써 요약한다[約之以禮]’고 할 때의 ‘예’자는 ‘리(理)’자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바로 보존하고 지키는 데에 절도와 문채가 있는 곳입니다. ― 자기를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克己復禮]고 할 때의 ‘예’자 역시 그렇습니다.
‘約之以禮’, ‘禮’字便作‘理’字看不得, 正是持守有節文處.(‘克己復禮’之‘禮’亦然.)
의학 서적에서 어질지 못하다[不仁]고 한 것에 대해 논한 말은 옳습니다. 다만, 진실로 이 이치를 보아야지 단지 이렇게만 설명하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醫書不仁之說, 所論得之, 但亦須實見此理, 不可只如此說過也.
‘써준다면 도를 행한다[用之則行]’ ― 이 구절에서 ‘즉(則)’자의 뜻은 아마도 이와 같지는 않을 겁니다.
‘用之則行’, ‘則’字之意恐不如此.
‘부를 추구해도 얻을 수 없다면[富不可求]’ ― 이 장의 뜻은 부를 추구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 뿐 부를 추구해서 도리어 화를 초래하는 것 까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뜻이 비록 서로 닮은 듯 하지만 크게 다르니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富不可求’, 此章之意但方言其不可求耳, 未遽及夫求之而得禍也. 兩意雖略相似而大不同, 可更審之.
‘군자가 귀중히 여기는 도가 셋 있다[君子所貴乎道者三]’ ― 이렇게 설명한다면 도와 사물이 둘이 되는 격입니다. 하물며 그 문장의 의미가 본래 이렇지 않았음에야 어떻겠습니까? 집주의 설명이 아주 분명하니 다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君子所貴乎道者三’, 若如此說, 則道與物爲二矣. 况其文義本不如此, 集註說得甚明, 可更詳之.
곽광(霍光)도 큰 절개를 지켜야 할 곳에서 크게 잘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霍光臨大節亦大有虧欠處.
오래도록 견뎌내며 멀리 나아간다는 설명은 옳습니다. 다만, 인을 어떻게 파악하고서 자신의 무거운 책임으로 여길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인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그것을 담당할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耐久行遠之說得之, 但不知如何見得仁以爲己任之重, 仁是何物, 又如何其任也. 可更思之.
농지를 (1년에) 한 번 묵히고 (2년에) 한 번 묵힌다는 설명은 질문한데로이다. 혹은 중원은 땅이 좋아서, 그곳의 척박한 땅이 이곳의 비옥한 곳보다 더 났다는 말 같기도 하다.
一易再易之說, 問之果然, 或恐中原地美, 其瘠土亦勝此間之膏腴也.
수익의 10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은 오늘날까지 대충 이렇게 전해져 내려오지만 상세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맹자를 통해 살펴보면 들판[野]에서는 1/9를 조세[助]로 냈고, 도읍[國]에서는 1/10을 부세로 내도록 해서, 경중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주례를 살펴보면 조법(助法)은 공전(公田)이 있는 곳에서 시행했고, 공전이 없는 곳에서는 공법(貢法)을 시행했습니다. 맹자집주에서 제도의 대략을 이미 설명했으니 다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끝내 다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주례를 근본으로 삼고 맹자(孟子)․반고(班固)․하휴(何休) 등의 여러 설명을 참고해서 바로잡아야만이 거의 비슷하게 될 것입이다. 그렇지만 결국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할 것이요, 그 같고 다른 점을 모두 살펴보는 것일 뿐입니다.
什一之法傳於今者大略如此, 其詳則不可得而知矣. 以孟子考之, 野九一而助, 國中什一, 使自賦, 其輕重又不同. 而考之周禮, 則行助法處有公田, 而行貢法處無公田也. 孟子集注中似已言其大略, 可更詳之. 此等亦難卒曉, 須以周禮爲本, 而參取孟子․班固․何休諸說訂之, 庶幾可見髣髴. 然恐終亦不能有定論也, 但不可不盡其異同耳.
조 한 석은 돈으로 30문에 해당하는데, 한 해에 돈 300문을 쓰는 데 불과하니, 예부터 돈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고 파는 것이 모두 그랬더라면 사람들도 병폐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고증할 수 없습니다.
粟一石値錢三十文, 一歲而止用錢三百, 可見古來錢重. 然其賣買皆然, 則人亦不以爲病也. 其他蓋不可考云.
이리(李悝)가 100묘에서 150석을 거둔다고 한 것은 조이고, 조착(鼂錯)이 100묘에서 100석을 거둔데 불과했다는 것은 아마도 쌀인 듯 합니다. 그러므로 그 많고 적음에 본래부터 차이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李悝百畝而收百五十石者, 粟也. 鼂錯百畝而收不過百石者, 似恐是米. 然則其多少固自有不同耳.
율려(律呂)를 논한 것은 아마도 이해가 자세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반드시 그림 한 장을 그려서 12율(十二律)의 위치를 나누어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림) 가운데 빈 곳에 따로 작은 종이로 바퀴를 만들어 오성(五聲)의 위치를 베껴 넣고 한 가운데 구멍을 뚫어 종이를 말아 끼워 회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아가 통전(通典)에 나오는 12율의 표준음[均]에 의거해서 하나하나 알아나아가면서 정성(正聲)과 자성(子聲)을 분별하면 저절로 순서를 분명하게 이해할 것이니, 이처럼 헛되이 설명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정성은 온전한 비율의 소리이고 ― 예를 들자면 황종이 9촌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 자성은 절반 비율의 소리이니다. ― 예를 들자면 황종이 4촌 반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 한 무리의 표준음[一均] 안에서는 중심으로 삼는 궁성의 음률이 당연히 가장 깁니다. 궁․상․치․우의 음률이 짧으면 곧 정성을 사용하고, 간혹 더 긴 것일 경우에는 다만 절반으로 나누어 자성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다섯 가지 소리를 한 번 조절해서 정성과 자성을 나누는 방법입니다. 12율에는 이미 자체에 정성이 있고, 또 (12정성마다) 모두 자성이 있어서 12가지 표준음의 쓰임새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종․태려․태주에 자성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한 무더기의 표준음들 속에서 상각치우의 네 가지 소리가 모두 근본이 되는 음율보다 짧기 때문입니다. 만일 중려(中呂)를 궁(宮)이라고 한다면 황종은 치(徵)가 되어 자성을 써야 합니다. 여빈(藜賓)을 궁으로 하면 대려(大呂)가 치(徵)가 되어 다연히 자성을 써야 합니다. 만일 임종(林鐘)을 궁으로 할 경우에는 태주(太簇)가 치(徵)가 되고 당연히 자성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12율에 모두 자성이 있는 이유입니다. 다시 이런 내용으로 유추해 본다면 저절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얼굴을 맞대고 논의해야지만이 서로 의사가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所論律呂, 恐看得未子細. 須作一圖子, 分定十二律之位, 却於中間空處別用紙作一小輪子, 寫五聲位, 當心用紙條穿定, 令可輪轉. 却依通典十二律之均逐一認定, 分別正聲․子聲, 則自見得次序分明, 不可只如此空說也. 蓋正聲是全律之聲,(如黃鐘九寸是也.) 子聲是半律之聲,(如黃鐘四寸半是也.) 一均之內以宮聲爲主, 其律當最長. 其商․角․徵․羽之律若短, 卽用正聲. 或有長者, 則只可折半用子聲. 此所謂一均五聲而分正聲․子聲之法也. 十二律旣自有正聲, 又皆有子聲以待十二均之用. 所謂黃鐘․大呂․太簇無子聲, 以其一均之內商․角․徵․羽四聲皆短於本律故也. 若以中呂爲宮, 則黃鐘爲徵而當用子聲矣. 若以藜賓爲宮, 則大呂爲徵而當用子聲矣. 若以林鐘爲官, 則太簇爲徵而當用子聲矣. 此十二律所以皆有子聲也. 試更用此推之, 當自曉得. 不然, 卽須面論, 乃可通也.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다’․‘사람은 태어날 때에는 곧다’․‘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그 뒤에 얻는다’․‘제나라와 노나라 정치의 변화’․‘중용의 덕’․‘널리 베풀고 뭇 사람을 제도한다’․‘말없이 이해한다’․‘덕이 닦이지 않았다’․‘도에 뜻을 둔다’․‘네 가지 가르침’․‘인이 멀다’는 내용을 논한 장들에 대한 설명은 모두 옳지만 다시 상세하게 음미해야만 할 것입니다.
所論三月不違仁․人之生也直․先難後獲․齊魯之變․中庸之德․博施濟衆․黙而識之․德之不脩․志於道․四敎․仁遠等章說皆得之, 然亦更宜詳味.
양중사에게 답함[答楊仲思]
【해제】이 글은 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양도부(楊道夫)에게 답하는 글이다. 인(仁)과 경(敬)에 대한 양도부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보내신 편지의 인에 대한 설명은 분명치 못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인으로 행동한다면 한결같은 마음이 된다’고 하신 말은 아주 잘못입니다. 또 ‘사려(思慮)가 없을 때마다 주의를 기울인다[提省]’고 하신 말도 옳지 않습니다. ‘경(敬)’이란 다만 전일(專一)하고자 하는 것일 뿐, 처음부터 정적(靜的)인 면에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또 존장(尊丈)께서 멀리 출타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디쯤 가고 계시는지요? 존장의 연세에 혼자 여행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자제분들이 그 수고를 대신해야 할 것입니다. 장주(漳州)의 진안경(陳安卿: 陳淳)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상당히 진보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얻기란 싶지 않습니다.
來喩仁說似亦未瑩. 如云 ‘仁以行之, 則心無不一’, 此語甚有病. 又云 ‘無思無慮之時每加提省’, 此亦非是. 所謂敬者, 只是要專一耳, 初不偏在靜處也. 又聞尊丈遠出, 不知是往何許? 尊年獨旅, 恐非所宜, 爲子弟者當有以代其勞也. 漳州陳安卿書來, 甚長進, 不易得也.
양중사에게 답함[答楊仲思]
【해제】이 글은 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양도부(楊道夫)에게 답하는 글이다.
논하신 ‘인(仁)’자에 대해서 큰 뜻은 옳게 보았으나 여기에서 다시 더 자세하게 나아가 완미(玩味)한다면 점차적으로 간결해지고 분명해질 것이니, 그런 다음 실제적인 데에 나아가 공부를 더해 중단되지 않도록 해야만 실제로 자기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밀하게 따지고 분석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所論仁字大意得之, 更宜子細就此玩味, 庶幾漸次簡潔分明. 仍就實處加功, 勿令間斷, 乃實爲己物耳. 不然, 辨析雖精, 無益於得也.
양중사에게 답함[答楊仲思]
【해제】이 글은 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양도부(楊道夫)에게 답하는 글로 추정된다.
지난 번 편지에서 물었던 몇몇 조목은 모두 중요한 의미들입니다. 다만 글자의 의미상 차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갑자기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다만 횡거(橫渠)의 ‘형체가 있은 다음에 기질의 성이 있다. 이를 잘 돌이키면 천지의 성이 보존된다’는 한 문단만을 보고서, 이 두 개의 ‘성’자를 분별하면, ‘타고난 것이 성이다’는 구절 이하에서 일반적으로 ‘성’자를 말한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천지의 성이고, 어느 것이 기질의 성인가 하는 것은 이치가 자명합니다. 공정함[公]․ 어짐[仁]에 대한 설명도 이와 같습니다. 공정하면 (사적인) 감정이 없고, 어질면 사랑이 있는데, 공(公)이란 글자는 이치에 속하고, 인(仁)이란 글자는 사람에게 속합니다. 자기를 이기고 예를 회복해서 조금의 사사로움도 용납지 않으니 어찌 공정치 않겠습니까? 어버이를 친해하고 백성들에게 어질게 대하면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어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유추한다면 그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前書所問數條, 皆大義也. 但字義同異之間分別未明, 故難遽曉. 今但看橫渠 ‘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 一段, 將此兩箇‘性’字分別, 自‘生之謂性’以下, 凡說‘性’字者, 孰是天地之性, 孰是氣質之性, 則其理自明矣. 公․仁之說, 亦是如此. 公則無情, 仁則有愛, 公字屬理, 仁字屬人. 克己復禮, 不容一毫之私, 豈非公乎? 親親仁民, 而無一物之不愛, 豈非仁乎? 以此推之, 意亦可見.
양중사에게 답함[答楊仲思]
【해제】이 글은 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양도부(楊道夫)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주역 간괘의 ‘간기배(艮其背)’에 대한 이천의 주장을 검토하고 있다.
의심하는 뜻에 대한 논의는 역의 문장에 근거한다면 ‘등에 그친다[艮其背]’는 것은 ‘그칠 곳에 그친다’는 의미인데, 이천(伊川: 정이)이 두 문단으로 만들어 설명한 것은 아마도 주역의 본 뜻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치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쓸모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所示疑義, 若據易文, 卽‘艮其背’卽是止其所之義. 而伊川說作兩般, 恐非經之本指. 然其言止欲於無見, 乃非禮勿視勿聽之義, 於學者亦不爲無用. 更思之.
사성지에게 답함[答謝成之]
【해제】이 글은 경원 3년과 4년 사이에 사성지에게 답한 편지로 추정된다. 전반부는 상서를 논하고 있고, 후반부는 도잠과 소식의 시 세계를 비교 평가하고 있다.
나는 병들고 늙은 몸이 갈수록 쇠약해져 올해 들어서는 한층 더 심합니다. 이것은 또한 이치상 당연한 것이어서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아득하기만 한 바깥의 일들을 또 다시 가슴속에 담아 두겠습니까? 한스러운 것은 뒤늦게 도(道)를 듣고도 부지런히 행하지 못해서 위로는 임금을 깨우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시대의 습속(習俗)을 변화시키지 못하여 사문(斯文)이 암담한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이니, 이 점이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熹病老益衰, 今年尤甚, 亦理之常, 無足怪者. 况身外之悠悠, 又可復置胸中耶? 所恨聞道旣晩而行之不力, 上無以悟主聽, 下無以變時習, 而使斯文蒙其黮闇, 是則不能無愧於古人耳.
보여주신 두 전(典)에 대한 설명은 크게는 근사한 듯 합니다만 눈이 어두워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이곳은 올해 들어 다녀가는 학자들도 끊겼습니다. 단지 소무(邵武)의 한 친구만이 현재 상서에 대한 책을 편집하고 있는데, 완벽하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요즘 상을 당하는 바람에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불러서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면서 시전을 본떠 책을 한 권 만들어야겠습니다. 당신이 편집한 책에서 내가 살펴본 부분 이후의 여러 편들도 이어서 보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아마도 보탬이 될 것입니다. 다만 삼산(三山)의 임소영(林少穎: 林之奇)의 설명들에도 골라 뽑을 만한 것이 많은데 어째서 당신의 편집본 속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까? 이씨(李氏)의 설명이라고 한 것은 누구입니까? ‘방훈(放勛)’이란 글자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임소영의 설명과 아주 닮았고, 또 ‘흠재(欽哉)’를 두 딸을 경계하는 말이라고 한 것은 정말이지 제 생각과 똑같습니다. ‘이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 그 법도를 두 딸에게서 관찰하겠다[女于時, 觀厥刑于二女]’고 한 것은 모두 요임금의 말이고, 그 아래에 “두 딸에게 규수의 북쪽으로 내려가도록 우에게 시집보냈다[釐降二女于嬀汭, 嬪于虞]”라고 한 대목은 사관이 그 아래에다 두 딸을 규수로 내려보내 우에게 시집보냈다는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요임금은 ‘흠재(欽哉)’라고 경계한 것이니 바로 반드시 공경하고 경계하라는 말이요,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일을 서술하는 체제입니다. 공영달의 전(傳)에서부터 ‘여우시(女于時)’ 이하를 사관이 기록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잃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所示二典說大槪近似, 目昏, 尙未及細看. 此中今年絶無來學者, 只邵武一朋友, 見編書說未備. 近又遭喪, 俟其稍定, 當招來講究, 亦放詩傳作一書. 彼編所看後篇得接續寄來尤幸, 恐當有所助耳. 但三山林少穎說亦多可取, 乃不見編人, 何耶? 李氏說爲誰? 其論‘放勛’字義與林說正相似, 又以‘欽哉’爲戒飭二女之詞, 則正與鄙意合也. 蓋‘女于時, 觀厥刑于二女’皆堯語, 其下云‘釐降二女于嬀汭, 嬪于虞’, 乃是史記其下嫁二女於嬀水而爲婦於虞氏, 於是堯戒以‘欽哉’, 正如所謂必敬必戒者, 乃敍事之體也. 自孔傳便以‘女于時’以下爲史官所記, 故失其指耳.
여러 편의 시도 아름답습니다만 이런 것은 헛된 힘만 쓰는 공부요,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않은 일입니다. 만일 학문하는 것을 논한다면 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다스리는 데 몇 가지 일이나 있겠습니까? 천문과 지리 예악과 제도 군려와 형법이 모두 실제로 유용한 사업들이요, 자신의 본분 안에 있는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옛 사람들이 육례를 가르쳐 사람의 마음을 노닐게 한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말에나 신경을 기울이고 시문이나 글나부랭이 사이에서 교묘한 기교나 부리는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만 가지고 말한다면 연명(淵明: 도잠)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그가 세속을 벗어나 스스로 터득해서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동파(東坡: 소식)는 도연명의 시편과 구절마다 운을 맞춰가며 화답하는 시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비록 그의 재능이 뛰어나 들어맞듯이 조화를 이루어 힘이 든 것처럼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이미 도연명의 자연스러운 풍모는 잃었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동파보다 뒤에 태어나서 힘들게 운에 맞춰 시를 짓는 일로 인해 신기한 구절을 만들어 낸다 한들 이것이 어찌 시를 말하는 이유이겠습니까? 동파 자신도 이것을 깨달았으니, 그가 지은 「황자사시서(橫子思詩序)」에서 이백과 두보를 논한 곳을 보면 저절로 알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동파는 재기에 휘둘렸고 자못 세속의 눈들을 놀래키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세속의 하책을 쓰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諸詩亦佳, 但此等亦是枉費功夫, 不切自己底事. 若論爲學, 治己治人, 有多少事? 至如天文地理․禮樂制度․軍旅刑法, 皆是著實有用之事業, 無非自己本分內事. 古人六藝之敎, 所以游其心者正在於此. 其與玩意於空言, 以校工拙於篇牘之間者, 其損益相萬萬矣. 若但以詩言之, 則淵明所以爲高, 正在其超然自得, 不費安排處. 東坡乃欲篇篇句句依韻而和之, 雖其高才, 合揍得著, 似不費力, 然已失其自然之趣矣. 况今又出其後, 正使能因難而見奇, 亦豈所以言詩也哉? 東坡亦自曉此, 觀其所作橫子思詩序論李杜處, 便自可見. 但爲才氣所使, 又頗要驚俗眼, 所以不免爲此俗下之計耳.
황도부에게 답함[答黃道夫]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치[理]가 있고 기(氣)가 있습니다. 이치란 형이상의 도(道)이고 만물을 낳는 근본입니다. 기란 형이하의 기(器)이고 만물을 낳는 도구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 반드시 이 이치를 부여받은 다음에 본성[性]이 있게 되고, 반드시 이 기를 부여받은 다음에 형체[形]를 갖추게 됩니다. 본성과 형체는 한 몸에서 벗어날 수 없다지만 도와 기 사이는 구별이 아주 분명해서 뒤섞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유나라[劉] 강공(康公)이 말한 ‘천지의 중[天地之中]’과 ‘명(命)’은 이치이지 기가 아닙니다. 그가 말한 ‘사람이 받아 태어났다’ ‘움직임과 위엄있는 거동의 법칙’이란 것도 본성이지 형체가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 혼과 백, 귀와 신으로 풀이하려는 것은 기를 가리켜 이치라고 하는 격이요, 형체 속에서 본성을 찾는 격이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인용한 「예운」편의 말도 애초부터 저절로 분별이 있습니다. ‘천지의 덕’이라고 말한 것은 이치입니다. ‘음양의 사귐․귀신의 모임’이라고 말한 것은 기입니다. 지금 그 둘을 하나로 만들려는 것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오류입니다. 시경에서는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으시니 사물이 있음에 법칙이 있다”고 했고, 주자(周子: 주돈이)는 “무극의 진수와 음양 오행의 정수가 오묘하게 결합해서 엉겼다”고 했습니다. 주자가 말한 (무극의) 진수[眞]란 이치이고, (음양 오행의) 정수[精]란 기이며, (사물의) 법칙[則]이란 본성이고, 사물[物]이란 형체입니다. 위 아래로는 1,000여년의 간격이 있고, 한 사람이 말한 것도 아니요 한 사람의 붓끝에서 기록된 것도 아닌데도 그들의 설명은 부절이 합하듯이 똑같습니다. 이것은 끌어다 연결시키고 자리를 맞춰가며 억지로 고르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학자는 이 의리의 근원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天地之間, 有理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是以人物之生, 必稟此理然後有性, 必禀此氣然後有形. 其性其形雖不外乎一身, 然其道器之間, 分際甚明, 不可亂也. 若劉康公所謂天地之中, 所謂命者, 理也, 非氣也. 所謂人受以生, 所謂動作威儀之則者, 性也, 非形也. 今不審此, 而以魂魄鬼神解之, 則是指氣爲理而索性於形矣, 豈不鼓哉!所引禮運之言, 本亦自有分別. 其曰天地之德者, 理也. 其日陰陽之交․鬼神之會者, 氣也. 今乃一之, 亦不審之誤也. 詩曰: ‘天生烝民, 有物有則.’ 周子曰: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所謂眞者, 理也; 所謂精者, 氣也; 所謂則者, 性也; 所謂物者, 形也. 上下千有餘年之間, 言者非一人, 記者非一筆, 而其說之同如合符契, 非能牽聯配合而强使之齊也. 此義埋之原, 學者不可不察.
황도부에게 답함[答黃道夫]
보내주신 본성과 기에 관한 설명은 아주 훌륭합니다. 다만 “법칙이란 사람이 하늘을 좇는 이유이다[則者人之所以循乎天]’라고 한 말에서 좇는다[循]는 글자는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칙(則)이란 한 글자는 사람이 하늘에게 받은 것으로 ‘복으로 기른다[養之以福]’고 말한 대목에 이르러야만이 하늘을 좇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서명(西銘)」에서 ‘천지에 가득 쌓였다[天地之塞]’고 한 대목에도 ‘확충(擴充)’이란 글자를 붙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서명」은) 다만 천지 사이에 가득 쌓인 것이 기 아닌 것이 없어서 내가 얻어서 형체로 삼은 것이 모두 이 기일 뿐이라고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천지를 이끌어 나가는 것[天地之帥]’은 천지의 마음이고 이치는 그 가운데 있습니다. 오행은 수․화․목․금․토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각각 그 본성을 하나씩 갖는다[各一其性]’는 것은 인․의․예․지․신이 되는 이치를 오행은 각각 그 가운데 하나씩만을 전유하지만, 사람은 이 본성을 모두 갖추어 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 느끼고 움직일 경우에는 절도에 들어맞는 것은 선이 되지만, 절도에 들어맞지 않으면 선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示喩性氣之說, 甚善. 但‘則者人之所以循乎天’, ‘循’字恐未安. 蓋‘則’之一字, 方是人之所受乎天者, 至於所謂養之以福, 乃所謂循乎天耳. ‘西銘’ ‘天地之塞’, 似亦著 ‘擴充’ 字未得. 但謂充滿乎天地之間莫非氣, 而吾所得以爲形骸者皆此氣耳. 天地之帥, 則天地之心而理在其間也. 五行謂水․火․木․金․土耳, 各一其性, 則爲仁․義․禮․智․信之理. 而五行各專其一, 人則兼備此性而(5-2949)無不善. 及其感動, 則中節者爲善, 不中節者爲不善也.
이자능(항종)에게 답함[答李子能(亢宗)]
여러차례 학문을 하는 뜻에 대해 언급하신 편지를 받으니 너무도 좋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힘을 쓴다면 두서(頭緖)가 너무 많아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선생(程先生: 정이)께서, “함양(涵養)은 반드시 경(敬)을 통해서 해야 하고, 학문에 나아가는 것은 치지(致知)에 달려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에만 힘을 쏟으면 자연히 이 마음은 언제나 보존되어 모든 이치가 절로 드러나 일상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각각 조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근사록(近思錄)의 앞 3, 4권에서는 이런 일만을 오로지 설명했고 요즘 대학을 풀이한 글을 고치면서도 이 일의 순서를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근사록이야 이미 가지고 계실 터이니 지금 대학 한 부를 보내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을 터이니 이런 순서에 의거해서 1, 2년 정도 공부를 하시면 저절로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알게 되어 근본을 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후지(陳後之: 陳易)의 식견과 지조는 모두 얻기 힘든 것인데 올해 그곳에 다시 들른 적이 있는지요? 그와 함께 강론하면서 뚫고 나간다면 응당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숙문(劉叔文)의 지조 역시 훌륭합니다만 (만나 보지 못한) 이후의 견해는 어떤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학문을 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지만 벗들의 도움에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요컨대 살펴서 선택하는 데 달려있을 뿐입니다. 주비경(朱飛卿)이 멀리서 와서 이렇게 서로 모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병으로 고달파 함께 이야기하는 도중에 자능(子能)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累承喩及爲學之意, 甚善甚善. 但如此用力頭緖太多, 令人紛擾, 無進步處. 故程先生說涵養須是敬, 進學則在致知. 若只於此用力, 自然此心常存, 衆理自著, 日用應接各有條理矣. 近思錄前三四卷專說此事, 近修定大學解, 亦說得此次第分明. 近思必已有之, 大學今往一本, 可細考之, 依此節次做一兩年功夫, 自當見得門路, 立得根本也. 陳後之持守見識皆不易得, 不知今年曾復來城中否? 與之講貫, 當有燦益. 劉叔文守得亦好, 但未知後來所見如何耳. 爲學十分要自己著力, 然亦不可不資朋友之助, 要在審取之耳. 朱飛卿遠來, 見此相聚, 但亦苦多病, 未嘗不相與談及子能也.
진렴부에게 답함[答陳廉夫]
【해제】이 글은 진지(陳址: 1170~1197)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말씀하신 뜻이 곡진하여 고상하신 의중을 충분히 파악하였습니다. 다만 학문을 하는 공부는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거나 말하거나 잠자코 있을 때에는 몸가짐을 단속하고,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와 윗 사람을 섬기고, 글을 읽어 그 의리를 강론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것입니다. 대개 하나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저 그른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은 치하고자 할 뿐이지 달리 말할 만한 현묘(玄妙)한 이치는 없습니다. 지극히 가깝고 쉬운 것으로 말하면 지금 곧 힘을 쏟을 수 있는 것이고, 지극히 가깝고 쉬운 것으로 말하면 지금 즉시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지 더 이상 늦추거나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깊이와 얇음에 따라서 하루의 힘을 쏟으면 곧 하루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의심나는 곳에 이르면 사람을 찾아가서 상의하는 것이 좋으니, 그렇게 되면 얼마나 크게 진보하고 통달할지는 예측(豫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 즉시 착수하지 않고 굳이 뒷날을 기다려 멀리에서 사우(師友)를 찾은 다음에 힘을 쓰려고 한다면 눈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절실한 공부를 놓쳐버릴 것이고, 얻기 어려운 젊은 시절을 무의미하게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령 성현(聖賢)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되더라도 겸추(鉗錘)를 받아 의지할 만한 축적된 바탕이 없으니 틀림없이 진정한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示喩縷縷, 足認雅意. 但爲學功夫不在日用之外, 檢身則動靜語黙, 居家則事親事長, 窮理則讀書講義, 大抵只要分別一箇是非而去彼取此耳, 無他玄妙之可言也. 論其至近至易, 則卽今便可用力; 論其至急至切, 則卽今便當用力. 莫更遲疑, 且隨深淺, 用一日之力便有一曰之救. 到有疑處, 方好尋人商量, 則其長進通達不可量矣. 若卽今全不下手, 必待他日遠求師友然後用力, 則目下蹉過却合做底親切功夫, 虛度了難得底少壯時節. 正使他日得聖賢而師之, 亦無積累憑藉之資可受鉗錘, 未必能眞有益也.
진숙향(규)에게 답함[答陳叔向(葵)]
【해제】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에 진규(陳葵: 1139~1194)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보내 오신 편지에서 학자(學者)가 몸소 실천하지 못하고 공허(空虛)한 말로만 치닫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막대한 근심거리입니다. 그러나 또한 제대로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의 탓이기도 합니다. 책을 만든 것이 어찌 부질없이 한 것이겠습니까? 대개 성현(聖賢)의 가르침은 한 마디 한 구절도 덕(德)에 들어가는 문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를테면 이른바, “예약(禮樂)은 잠시도 몸에서 떠나게 할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 아주 깊고 간절한 말입니다. 참으로 종신토록 마음속에 담아 두고 살펴야 하는 것이니, 비단 후학(後學) 뿐만이 아닙니다. 다만 도체(道體)는 끝이 없고 사람들의 소견은 한쪽으로 치우치기가 쉽기 때문에 내외(內外)와 본말(本末)을 또 겸하여 거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점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去歲南遊, 幸遂旣見之願. 別後匆匆踰年, 欲致一書末暇而便至, 竟辱先施, 感愧不可言. 示喩學者不能身踐而驚於空言, 此誠今世莫大之患. 然亦不善讀書者之咎耳. 書之設, 豈端使然哉? 大抵聖賢之敎無一言一句不是人德門尸, 如所謂禮樂不可斯須去身者, 尤爲深切, 眞當佩服存省, 以終其身, 不但後學也. 但道體無盡, 人見易偏, 內外本末又不可不兼擧, 此亦所當知耳.
서제간에게 답함[答舒提幹]
보내 오신 편지의 두 조목에서 처방을 내려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침 봉사(奉祀)에 대한 허락을 받았으니 당분간 기색(氣色)을 피하고 말을 피하는 계획은 될 것 같습니다. 진번(陳蕃)과 이고(李固)가 당한 재앙은 아마도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물러나지 못한’ 데에 연유한 것일 뿐입니다. 제 생각에 판각한 두 책에서 당신께서 정씨의 주[鄭注]와 여씨의 설명[呂說]에 대해 운운하신 것은 깊이 살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의리가 합치하지 않는 것을 모아서 다시 가르침을 주신다면 아주 좋겠습니다.
示喩兩條, 深荷發藥. 偶奉柄已得請, 姑爲辟色辟言之計. 蕃․固之禍, 恐亦正坐不能知難而退耳. 所刻二書, 竊意賢者於鄭注呂說之云猶有未深考者. 願少加詳焉, 而摭其義理之不合者復以見敎, 則幸甚幸甚.
안자수에게 답함[答顔子壽(鑄)]
【해제】이 글은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 혹은 그 직후에 안주(顔鑄)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지난 번에 찾아 주시고 아울러 긴 편지까지 보내 주시어 고상하신 뜻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군자(君子)가 처신하는 데에는 스스로 의리와 법도가 있는 것이니, 구차하게 남다르기를 추구할 필요도 없거니와, 남들과 같기를 기약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道)를 행하여 한 시대를 구제한다든가 등용되면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은둔하는 것 등은 또 사람의 힘으로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성현의 가르침은 분명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논한 내용은 이익을 도모하고 공적을 헤아리려는 뜻이 담겨 있으니 저는 감히 듣고 싶지가 않습니다. 근세에 그러한 주장이 매우 들끓어서 사람들의 마음은 바르지 못하고 습속(習俗)이 좋지 못한 것이 바로 여기에 그 원인이 있을 뿐입니다. 부디 다시 생각하여 끝끝내 이런데 빠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昨辱枉顧, 幷示長書, 具悉雅意. 但君子行身自有法義, 固不求於苟異, 亦不期於必同. 至於行道濟時, 用舍行藏又有非人力所能必致者. 聖賢之敎, 歷歷可考. 如賢者之所論, 是乃謀利計功之意, 非熹之所敢聞也. 大率近世此說甚熾, 人心不正而習俗不美, 正坐此耳. 願更思之, 毋爲卒陷溺也.
변여실에게 답함[答邊汝實]
【해제】이 글의 저술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같은 내용이 주자대전 권44에 「답오무실」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기도 하다. 편년고증은 임시로 순희 12년(을사, 1185, 56세)에 쓴 편지들 속에 배열하고 있다.
所欲言者不過前夕, 然亦非謂全然不事其心, 但資次等級未應遽爾超躐, 須物格知至, 然後意可誠, 心可正耳.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난 저녁에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전혀 그 마음을 일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차와 등급이 갑자기 몇 단계를 뛰어넘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니 반드시 격물을 통해 앎이 지극해진 다음에야 뜻이 정성스러워질 수 있고, 마음은 바로잡힐 수 있을 뿐입니다.
이차장에게 답함[答李次張]
【해제】이 편지는 순희 7년(경자, 1180, 51세) 2월 이전에 이차장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맹자(孟子) 7편의 가르침에 마음을 두고 계신다는 편지를 받으니 마음 속에 깊이 부합하는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의(義)와 이(利)에 대해서는 진실로 깊이 밝히고 힘껏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락(伊洛: 정이)께서, “사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에는 경(敬)을 위주로 하는 것이 곧 선(善)을 하는 것이다”고 한 단락의 공부를 밝히셨으니 다시 정진(精進)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의와 이를 구별을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이것을 남헌(南軒: 張栻)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도 제 말이 옳다고 할 것입니다.
承留意七篇之指, 想深有所契. 義利之際, 固當深明而力辨, 然伊洛發明末接物時主敬爲善一段功夫, 更須精進乃佳. 不爾, 幾無所據以審夫義利之分也. 試以此質之南軒, 當亦以爲然耳.
방평숙(전)에게 답함 答方平叔(銓)
삼가 멀리에서 보내 주신 편지를 받으니 예우해 주시는 뜻이 깊고 가르치시고 바라는 마음도 매우 지극했습니다. 저는 어리석고 보잘 것 없어 이런 기대에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일을 줄인 뒤로 스승과 벗들의 가르침을 듣고 성인의 책을 읽어 보니,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학문을 강론(講論)하고 자신을 수양하여 하늘에서 받은 것을 온전히 하는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벼슬하여 세상에 쓰여지면 책임의 크기에 따라 자신이 가진 것을 미루어 남에게가지 이르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등용되는냐 안 되느냐와 부합되느냐 안되느냐는 곧 내버려 둘 뿐입니다. 이런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기필한 적도 없고 이것 때문에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한 적도 없으며, 그렇게 스스로를 믿고서 죽을 때까지 이대로 행하리라 다짐하면서 자신의 힘이 과연 미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보내 주신 편지를 읽어 보니 세상의 변화에 대해 상세하게 관찰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으로 늘 합치되지 않을까 근심하여 반드시 합치되기를 구하는 뜻을 갖고 있고, 군자들을 너무 상세히 꾸짖으면서 소인(小人)들에게는 지나치게 굽신거리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깊이 세상을 근심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근심했던 옛 성현들의 규모와 기상은 이와 같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맹자(孟子)는 “사람들의 병통은 자기 밭은 버려 두고 남의 밭을 김매는 데에 있으니, 남에게는 너무 무거운 것을 요구하면서 자기는 가벼운 책임만을 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논의는 광자(狂者), 견자(狷者), 향원(鄕原)의 잘잘못을 논하면서 군자(君子)가 원칙[經]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으로, 깊고 간절하며 밝고 환하게 드러냈다고 할 만 합니다. 공자(孔子)께서도, “옛날의 학자는 자신을 위한 학문을 추구했는데, 오늘날의 학자는 남을 위해서 학문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뜻 있는 선비가 이 점을 깊이 있게 살핀다면 또한 순(舜)과 도척(盜蹠)의 차이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伏承遠賂書箚, 禮意甚勤, 而所以敎誨責望之者甚至. 熹愚不肖, 懼不足以當也. 顧獨惟念自省事來, 聞師友之訓, 讀聖人之書, 觀其敎人, 不過講學修身, 以全其所受於天者. 出爲世用, 則隨其大小, 推吾之所有以及人. 至於用與不用, 合與不合, 則直任之. 蓋未嘗以是必於人, 亦末嘗以是變於己, 以此自信, 誓將終身由之, 而不自知其力之果足以有至焉否也. 今讀來敎, 其觀於當世之變詳矣, 然諰諰然常有憂其不合而必於求合之意, 其責君子也已詳, 其狥小人也已甚, 是雖憂世之心甚深, 而古之聖賢非不憂世者, 其規模氣象似或不如此也. 孟子曰: ‘人病舍其田而耘人之田, 所求於人者重而所以自任也輕.’ 其論狂狷鄕原之得失以及君子反經之意, 尤所謂燦切而著明者. 孔子亦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有志之士深省乎此, 亦足以判然無疑於舜․蹠之間矣. 不審明者以爲如何?
왕흠지에게 답함[答王欽之]
【해제】이 글은 순희 5년(무술, 1178, 49세) 경에 친구인 왕흠지(王欽之)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편지에서 정자(程子)의 글에 순서를 매겨 편집하고 종류별로 분류했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공부하는 한 방법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구하면서 일상생활의 생각과 행동에서 징험하여 이치를 깊이 탐색하고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 두 가지 중 어느 한쪽도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치를 궁구하고 경(敬)을 생활화한 효과가 상호간에 도움이 되어 둘 다 극치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에 정신이 팔려 뜻을 잃는다[玩物喪志]”고 경계한 것은 많은 견문만을 추구하면서 자신에게는 절실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말한 것입니다. 유서(遺書)에서 “외면에서 다만 평범하게 사물의 이치를 보는 데에만 힘써서는 안 되니, 이것은 바로 유격(遊擊)하는 기병(騎兵)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한 말도 이런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의리(義理)에는 밝지만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는 경우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의리를)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어떤 경우는 힘껏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혹은 변화시키기도 어려울 정도로 기질이 치우친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이유들이 저들에게야 정말로 덕(德)에 허물이 되겠지만 우리는 다만 안으로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하여 그런 것들이 우리 몸에 더해지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그러한 이유로 갑자기 선배를 깔보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강학(講學)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물으신 것 때문에 문득 제 어리석은 생각을 말슴드렸습니다만 옳은 지는 모르겠습니다. 온당치 않은 점이 있서든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承喩縞次程書, 以類相從, 此亦用功之一端. 若求之於此而驗之於日用思慮作爲之間, 玩素操存, 無所偏廢, 則窮理居敬之功交相爲助而兩造其極矣. 玩物喪志之戒, 乃爲求多聞而不切己者發. 遺書又有 ‘不可外面只務泛觀物理, 正如游騎無所歸’之說, 亦爲此耳. 至於義理雖明而踐履不至者, 則亦多端, 或是知之未深, 或是行之不力, 或是氣質之偏有難化處. 在彼誠爲累德, 然在我觀之, 但當內自警省, 不使加乎其身, 而不可以此遽起輕視前輩之心, 且疑講學之無益也. 因下問之及, 輒救其愚, 未知中否? 有未當者, 却望垂喩.
왕흠지에게 답함 答王欽之
【해제】이 글은 순희 5년(무술, 1178, 49세) 경에 왕흠지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독서법(讀書法)을 논하고 있다.
기다리는 문목(問目)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책 한 권을 가져다가 처음부터 단락단락을 따라가며 자세하게 이해하다 보면 시간이 지난 후에 자연스럽게 의심스러운 부분도 생기고 이해되는 부분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 그럭저럭 보아 넘기면서 순서에 따라 착실하게 읽어가지 않는다면 의리를 정치하게 설명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또 마음도 갈피를 잡지 못해서 주재(主宰)할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절로 의리와 친할 수도 없게 되고 또 서로 고증할 만한 누적된 공부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갑자기 한 두 가지를 이해하려 하지만, 자잘한 제목들은 원래 마음에 담아 둘 가치가 없는 것이요, 큰 것을 택하려 해도 순서를 건너 뛰는 폐단이 있게 되어 결국에는 푹 젖어드는 성과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못난 제가 존형(尊兄)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감히 명을 받들어 문목(問目)에 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내용을 받아 들이셔서 우선 논어(論語)를 하루에 한 두 단락씩만 보면서, 정치하거나 조야하거나, 쉽거나 어렵거나를 막론하고 다만 처음부터 읽어 나가십시오.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면 생각해 보고 생각해도 모르겠으면 또 읽어서 반복적으로 곱씹어 본다면 시간이 흐른 후에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 벗들과 상의를 할 때에도 대부분 이런 내용으로 일러 주었지만 철두철미하게 보았다는 사람은 아직껏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새로운 것은 좋아하면서 일상적인 것을 싫어하니 매우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논어 20편조차 귀찮음을 참아가며 끝까지 읽지 못하는 판국에 하물며, ‘죽은 뒤에야 그만 둔다’고 하는 이와 같이 길고 요원한 공부에 또 어떻게 힘쓸 수 있겠습니까?
所須問目, 竊謂不必如此. 但取一書從頭逐段子細理會, 久之必自有疑有得. 若平時泛泛, 都不著實循序讀書, 未說義理不精, 且是心緖支離, 無箇主宰處, 與義理自不相親. 又無積累功夫參互考證, 驟然理會一件兩件, 若是小小題目, 則不足留心; 擇其大者, 又有躐等之弊, 終無浹洽之功, 非區區所以望於尊兄者, 故不敢承命晩聞. 但願頗釆前說, 而以論語爲先, 一日只看一二段, 莫間精粗難易, 但只從頭看將去. 讀而末曉則思, 思而未曉則讀, 反復玩味, 久之必自有得矣. 近年與朋友商量, 亦多以此告之, 然未見有看得徹尾者. 人情喜新厭常乃如此, 甚可歎. 論語二十篇尙不耐煩看得了, 况所謂死而後已者, 又豈能辨如此長遠功夫耶?
왕흠지에게 답함[答王欽之]
보내신 편지에서 ‘이치를 궁구하는 데 굳이 옛사람의 말과 글귀에 구애받을 것은 없다’고 하셨는데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찌 옛사람의 말과 글귀를 다 버릴 수야 있겠습니까? 정부자(程夫子)께서는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독서를 통해 도리(道理)를 강구하여 밝히기도 하고, 고금(古今)의 인물을 논하여 그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도 하며, 어떤 일이나 물건에 대응할 때에는 그 타당성의 여부를 찾기도 하는데, 이들이 모두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리를 강구하여 밝히고 시비를 분별하며, 일이나 물건에 대응할 때에 잘 살펴서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이겨내고 천리(天理)를 추구하여 순서에 따라 나아가되, 서두르거나 단계를 뛰어넘는 폐단이 없다면 또한 옛사람과 배치될 것을 왜 근심하겠습니까? 만약 옛사람의 말과 글귀를 다 버리려고 한다면 도리는 밝혀지지 않고 시비도 분별되지 않아서, 멍하니 무엇을 결정하고 택해야 할 지를 모르게 됩니다. 나가던지 물러서던지, 말을 하던지 말없이 있던지 간에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살피려 해도, 이것은 남쪽에 있는 월(越) 나라를 가는 사람이 동서남북도 모른채 길에서 우왕좌왕하며 바삐 설치는 격입니다. 그 사람은 결국 북쪽 연(燕)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동쪽 제(齊) 나라로 가든지 서쪽 진(秦) 나라로 가게 될 뿐입니다.
來書謂窮理不必泥古人言句, 固是也. 然亦豈可盡捨古人言句哉? 程夫子曰, 窮理亦多端, 或讀書講明道理, 或論古今人物, 別其是非; 或應事接物, 求其當否, 皆窮理也. 夫講道明理, 別是非而察之於應接事物之際, 以克去己私, 求夫天理, 循循而進, 無迫切陵節之弊, 則亦何患夫與古人背馳也? 若欲盡捨去古人言句, 道理之不明, 是非之不別, 泛然無所決擇, 雖欲惟出處語黙之察, 譬之適越者不知東西南北之殊而僕僕然奔走於途, 其不北入燕, 則東入齊․西入秦耳.
호평일(원형)에게 답함[答胡平一(元衡)]
【해제】이 글은 순희 8년(신축, 1181, 52세) 혹은 그 직후에 호원형(胡元衡)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백록동서원에 대해 깊이 마음써 주신다고 하니 너무도 기쁘고 좋습니다. 하지만 시문 이외에는 달리 서로 계발할 것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지나치게 겸양해 하신 듯 합니다. 이 역시 노력에 달려있을 뿐인데 어떻게 정말로 정해진 한계가 있어 그 문호를 단 한 번도 엿볼 수 없겠습니까?
말씀하신 삼대(三代)의 정삭(正朔)에 대한 주장에 대해 저는 예전에 의심하면서 깊이 따져들더라도 결국 고증할 수도 없을뿐더러 의심만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제쳐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보내신 편지를 읽고보니 고증이 비록 상세합니다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어도 역시 의심은 풀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나라에서 한 해를 기록할 때 반드시 11월부터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춘추는 ‘봄 정월[春正月]’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달의 호칭을 바꾸지도 않았고, 겨울을 봄이라 여기지도 않았으며, 하나라의 달력을 빌어서 주나라의 전례를 어지럽히지도 않았다고 하신다면, 춘추에서 ‘봄 정월’이라고 말한 다음 그 아래 기록한 일은 건자(建子)의 달에 있었던 일입니까? 건인(建寅)의 달에 있었던 일입니까? 만일 건자의 달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면 ‘봄 정월’이라고 한 것이 어째서 달의 호칭을 바꾸고 겨울을 봄으로 여긴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또 건인의 달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라의 정월을 사용한 것으로 주나라의 전례를 어지럽힌 것입니다. 어떻게 이처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전 사람들도 이미 이런 주장이 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호씨의 학문을 배운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즉, ‘봄 정월이란 부자께서 하나라의 달력을 행하시고 싶은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건인의 달을 한 해의 처음으로 여기신 것이다. 그 아래 기록된 일은 즉 건자의 달에 있었던 일인데, 이것은 부자께서 제왕의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달력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이 설명한다면 막힌 데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더라도) 춘추에 쓰여진 달은 결국 그 달 아래에 쓰여진 사건들과 언제나 두 달의 차이가 있게 됩니다. 성인께서 경전을 만들면서 이렇게 복잡다단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반복해서 유추해 보아도 충분히 통하는 곳도 있고 또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곳도 있습니다. 비록 일찍이 선배들에게 두루 물어 보기는 했지만 역시 두 번 다시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확정적인 주장은 없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런 종류의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의미가 통하기를 추구하다가 천착하는데 빠지거나 또 시간과 힘만 낭비하면서 일상생활의 절실한 공부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하는 것 보다는 (의심스러운 채로)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저 ‘일상생활의 절실한 공부’란 성현들이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학(大學)․논어․중용(中庸)․맹자에 실린 내용들은 의미가 분명하고 가리키고자 하는 뜻도 평이하고 실제적입니다. 읽어 보면 환하니 이해되는 것이 마치 아버지나 형님이 집안일을 얘기하는 것을 곁에서 보는 것 같아서 열에 여덟 아홉은 의심할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굳이 저 험준한 곳에 마음을 써야 되겠습니까? 편지로 인해 답장을 보내려다 우연이 여기까지 말하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잘 살펴주시면 좋겠습니다.
白鹿聞極留念, 甚喜甚善. 所謂時文之外別無可相啓發者, 語似過謙. 此亦在夫爲之而已, 豈眞有限隔而不容一窺其門戶哉!
所喩三代正朔之說, 舊嘗疑此而深究之, 卒至於不可稽考而益重其所疑, 因置不論. 今讀來喩, 考究雖詳, 然反復再三, 亦未有以釋所疑也. 如云周家記年必首十一月, 而春秋乃書春正月, 又云未嘗改月號, 以冬爲春, 假夏月而亂周典, 則未知春秋所謂春正月者, 其下所書之事爲建子月之事耶? 建寅月之事耶? 若云建子月事, 則春正月者豈非改月號而以冬爲春? 若云建寅月事, 則是用夏正月而亂周典矣, 安得云末嘗云云如是耶? 前人蓋已見此不通, 故爲胡氏之學者爲之說曰, 春正月者, 夫子意在行夏之時, 而以建寅之月爲歲首也. 其下所書之事卽建子月之事, 無其位而不敢自專也. 如此則或可以不礙. 然春秋所書之月遂與月下之事常差兩月, 則恐聖人作經又不若是之紛更多事也. 凡此之類, 反復推說, 儘有可通, 亦儘有可難. 雖嘗遍問前輩, 亦未有決然堅定不可移之說.
竊謂讀書凡若此類, 與其求必通而陷於鑿, 且又虛費曰力而無補於日用切己之功, 則似不若闕之之爲愈也. 若夫所謂日用切己之功, 則聖賢言之詳矣. 其在大學․論語․中庸․孟子者文義分明, 指意平實, 讀之曉然, 如見父兄說門內事, 無片言半詞之可疑者什八九也. 曷爲不少置其心於此, 而必用意於彼之崎嶇哉? 因書附報, 偶及於此察之也.
양지인[복]에게 답함[答楊志仁(璹)]
【해제】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 69세) 겨울 무렵에 양복(楊復)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편지에서 말한 것을 살피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당신께서 학문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이런 마음 씀씀이를 살펴보면 환하니 잘못을 알 것입니다. 부탁하건대 여기에 나아가서 이 마음의 내력을 추구하면서 통렬하게 쓸어 없애버려야 진실한 격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마음이 밖으로만 내달리면서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게 되어 헛되이 외우고 말할 뿐 아무런 보탬도 없을 겁니다.
示諭不省所謂, 然不知賢者之所爲學者, 欲得之於己耶? 欲見稱於人耶? 觀此用心, 妁見差誤. 請便就此推究來歷, 痛與掃除, 乃爲格物之實耳. 不然, 此心外馳, 不著自己, 徒然誦說, 恐無所益也.
양지인에게 답함[答楊志仁]
【해제】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 69세) 겨울 무렵에 양복(楊復)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두 통의 편지에서 존양(存養) 공부에 대해 일러주셨는데 매우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이처럼 착실하게 공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 또한 본분에 따라 하는 일일 뿐이니 기이하고 특별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밝고 깨끗한 이 마음을 커다랗게 가슴 속에 붙들어 두고서 안팎의 성글고 정치한 세상의 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이해한 다음, 세상의 도리를 진정으로 궤뚫듯이 환하게 알아서 어떤 의심이나 장애도 없이 만들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존양(存養) 공부에만 매달려 마음을 열어젖히지 못한다면 의리를 볼 때마다 현묘(玄妙)하고 고원(高遠)하며, 형체도 형상도 없는 것을 일부러 골라가며 이해하려는 꼴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치우치고 생기를 잃을 뿐만 아니라, 한쪽으로만 기울어 체(體)만 있을 뿐 용(用)은 없는 학문이 될 것이요 도가나 불교와도 다를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兩書所喩存養工夫, 甚喜甚慰. 固知他人不能如此著實用工, 但此亦且是依本分事, 正不須把來作奇特想. 只合趁此心地明淨處, 大著胸懷, 將世間道理精粗表裏從頭至尾理會一番, 交他眞箇通透, 無疑礙處, 方是向進. 若只守此些箇, 不敢放開, 每看義理, 亦只揀取玄妙高遠․無形無象處方肯理會, 如此則遂成偏枯, 倒向一邊, 將爲有體無用之學, 而與老佛無以異矣.
이치와 기의 선후 등을 논하신 내용도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가 있으면 이 이치를 갖춘다고 말하기를 두려워 하는 것은 기가 이치에 앞서게 될까봐 겁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슨 까닭으로 이 이치가 있은 다음에 기가 있고, 이미 이 기가 있은 다음에야 이 이치가 자리잡을 곳이 있어서 크게는 하늘과 땅에서 작게는 땅강아지나 개미같은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탄생이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어째서 천지가 탄생하는데 (이치가) 부여될 곳이 없다는 점을 걱정하십니까? 요컨대 ‘리(理)’란 한 글자는 있다[有]․ 없다[無]는 말로 논할 수 없습니다. 천지가 있기 이전에도 여전히 이와 같았습니다. 장자(張子: 장재)도 설명하느라 힘을 들였고 태극도설」과 통서의 몇 몇 장에서 설명한 것도 아주 분명하며, 제가 풀이한 것도 분명하니, 자세히 살펴보면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所論理氣先後等說, 正坐如此. 怕說有氣方具此理, 恐成氣先於理, 何故却都不看有此理後方有此氣, 旣有此氣然後此理有安頓處, 大而天地, 細而螻蟻, 其生皆是如此, 又何盧天地之生無所付受耶? 要之‘理’ 之一字不可以有無論, 未有天地之時, 便已如此了也. 張子說得寶力, 惟是太極․通書數章說得極分明, 熹解得又極分明, 可更子細看, 便自見得也.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맹자가 말한 것에 근거한다면 투박한 곳에 나아가서 보는 것이 마땅하지, 명도선생(明道先生: 정호)처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명도선생이 말한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단지 일상 생활 속의 자기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려 이해하려 해야지 이렇게 힘들여가며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浩然之氣’, 若據孟子所言, 卽合儘就粗處看, 不須如明道先生之說. 若欲理會明道先生說底, 則亦只合就日用間己身上回頭識取, 不須如此說作費力也.
‘하루나 한 달 정도 (인에) 이르렀다’는 것은 만일 안자를 말하려면 정말이지 이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미 “회(回)는 그 마음이 세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했으므로 그 나머지는 이런 정도에 그쳤다고 한 것이라면 그들의 공부의 조밀하고 성금, 오래고 가까움을 비교하듯이 알 수 있을 것인데, 어째서 다시 이런 의심을 하는 것입니까? 또 본문의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본문의 뜻은 또 어떠해야 한단 말입니까?
‘日月至焉’, 若說顔子, 卽誠不可如此說. 今旣明言 ‘回也其心三月不違’, 其餘則但止如此, 則其工夫疏密久近較然可見, 何爲而復有此疑耶? 且曰非本文之義, 則未知以本文之義爲當如何耶?
지덕(至德)에 대한 의론은 또 말하기 힘듭니다. 논어에도 단지 두 곳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문왕을 위해 말한 것이니 이것은 무왕이 군대를 향해 맹세한 것에 대해 말한 것이요, 또 하나는 태백을 위해 말한 것으로 문왕이 상을 정벌한 것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만약 그 뜻으로 논한다면 문왕(文王)이 무왕(武王)보다 높고 태백(泰伯)이 처신한 것이 또 문왕보다 높으나, 그 일로써 논한다면 태백, 왕계(王季), 문왕, 무왕은 다 성인(聖人)으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지만 태백만이 그 마음을 온전하게 보존하여 안팎으로 유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또 무슨 이유로 무왕의 음악이 진선(盡善)이 못된다고 탄식을 하였으며, 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두고 인(仁)을 얻었다고 했겠습니까? 이보다 앞서 여러 학자들이 말하다가 이 부분에 이르면 이들에 대한 평가를 아껴 완고하게 돌려 감싸면서 감히 끝까지 파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감히 입을 열어 튼 소리를 못하니 사람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 스스로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대는 오히려[尤] 마땅히 의아해하고 놀라시어 감히 저의 생각을 옳다고 하지 않으실 줄 압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서 만약 믿지 못하겠으면 우선은 놓아 두고 뒷날 때때로 그 문제를 제기하여 대략 한 번 곰곰이 살펴 본다면 곧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至德之論, 又更難言. 諭語中只有兩處, 一爲文王而發, 則是對武王誓師而言. 一爲泰伯而發, 則是對太王翦商而言. 若論其志, 則文王固高於武王, 而泰伯所處又高於文王. 若論其事, 則泰伯․王季․文王․武王皆處聖人之不得已, 而泰伯爲獨全其心, 表裏無憾也. 不然, 則又何以有 ‘武未盡善’ 之嘆, 且以夷․齊爲得仁耶? 前此諸儒說到此處, 皆爲愛惜人情, 宛轉回護, 不敢窮究到底, 所以更不敢大開口說, 令人胸次償憒. 自欺自誑, 此病不小, 想賢者尤當疑駭, 未敢以爲然也. 然當更思之, 若信未及, 卽且放下, 向後時時提起, 略一審玩, 便自見得也.
듣기에 통노(通老: 楊楫)가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그가 찾아주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편지를 보내지는 못합니다. 번거롭더라도 이 편지로 인해 제 뜻을 전달해주십시오. 그러나 한스럽게도 지인(志仁: 楊復)이 서사(書社)를 지키는 책임을 맡고 있어 함께 올 수 없는 것이 불만일 뿐입니다.
通老聞欲見訪, 顒俟其來. 不及作書, 因見煩爲致意. 然又恨志仁有書社之守, 不能偕來, 爲不滿耳.
서자융에게 답함[答徐子融(昭然)]
【해제】이 글은 서소연(徐昭然)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정확한 저술 연대는 자세하지 않고 기해년(1178) 이후라고 추정될 뿐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논한 것은 너무 좋습니다. 자융(子融)은 지기(志氣)가 굳세고 결단성이 있기 때문에 소견도 이처럼 통쾌하고 직설적이어서 갈피를 못잡거나 얽매이는 폐단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더욱 상세하게 살펴서 오로지 평이하고 실제적이고 친절한 곳에 나아가 추구하여 체인해서 오래 되면 자신할 수 있게 되어 고상한 담론이나 허무맹랑한 견해에 뜻을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정숙(正叔: 余大雅)을 만났더니 지난 번에 (당신이) 증삼의 뛰어난 한 번 대답[曾參多一唯]’이라는 싯귀를 얻고서 마음이 아주 잘 들어 맞았다고 하던데, 이것이 바로 큰 문제입니다. 지금 다만 (증삼이 ‘예’라고 했던) 한 번 대답[一唯]의 의미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시 그 너머에까지 나아가려 하는 것입니까?
所論浩氣, 甚善甚善. 大率子融志氣剛決, 故所見亦如此, 痛快直截, 無支離纏繞之弊. 更願益加詳審, 專就平實親切處推究體認, 久當有以自信, 不爲高談虛見所移奪也. 見正叔說向得 ‘曾參多一唯’之句, 深有契合, 此正是大病. 今只此一唯尙且理會不得, 如何欲更向他頭上過去也?
서자융에게 답함[答徐子融]
【해제】이 글은 서소연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정확한 저술 연대는 자세하지 않고 기해년(1178) 이후라고 추정될 뿐이다. 서소연의 학문이 외면에만 치우치고 내적인 측면에 대해 소흘히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자융(子融)이 품은 뜻과 지조는 다른 사람으로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애초의 마음가짐이 내면을 향하지 않았는데도 이를 애써 좇으려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눈썹을 모으고 눈을 감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없이 연구하여 정미(精微)한 부분까지 분석한 적은 없이, 거칠고 얄팍한 한 때의 견해에 기대서 주장을 내세우고 이리저리 말을 해나가니 아무런 의미도 없고 쓸데없이 붓과 입만 낭비하는 꼴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난 번에 논했던 닭이 알을 품었다는 일과 같은 것이 그런 사례입니다. 재경(才卿: 陳文蔚)은 승려[僧]들의 말을 가져다가 극히 당연하다고만 여기면서 저 승려[僧]들이 일삼는 것과 우리가 일삼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따져보지 않았으니 정말이지 성글고 대충 말했다고 할 만 합니다. 그런데 자융은 애써 그의 잘못을 공격하였으되 결국 이 점에 대해서는 착안조차 하지 못하고 지루하게 말만 많이 할 뿐이었습니다. 자융은 다만 닭이 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만 하면서 품고 있는 것이 알이 아니라는 것을 점검(點檢)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이처럼 자세하지도 않고 다만 바깥으로 달려갈 뿐, 자기의 본분이란 면에서는 전혀 얻은 것이라곤 없습니다. 이 때문에 중간에 (제가) 자주 그대를 위해 말했던 것입니다. ‘바깥을 향한다’는 말은 자융이 눈썹을 모으고 눈을 감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자융은 스스로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고 믿고서 곧, ‘나는 이미 내면으로 향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라고 여기고는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아서 북문(北門)에서 변론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자융이 했던) 말이나 말하는 투나 모두 드세어 보고 듣는 사람들이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자융이 했던 말을 음미해보면 예를 들어 귀신은 없다거나, 부처[釋氏]도 없다는 등의 말은 모두 의리에 닿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귀신(鬼神)’이란 두 글자는 육경에 나와 있고, 부처의 주장은 세상 사람들에게 설파되고 있습니다. 학자라면 당연히 그것들을 강론하고 연구해서 참과 거짓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든 설령 입을 닫고 말하지 않을 지언정 어떻게 없다고야 하겠습니까? 자융의 이론이 거칠고 가벼우며 정치하지 못한 것은 대개가 이렇습니다. 만일 실제로 내면을 향해 추구하려는 생각이 있고, 분별이 상세했다면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지금 보낸 편지를 자세히 보면 “책을 보고 의리를 연구하고, 자신의 몸에 돌이켜 이치를 따르며, 악을 공격하되, 다른 사람의 악을 공격하지는 않는다”고 한 것도 예전처럼 여전히 잘못된 화두(話頭)입니다. 만일 예전처럼 공부룰 계속해 나가기만 한다면 연구하고자 하는 의리나, 따르려는 이치, 공격하려는 악이 모두 진실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옳고 그름을 강론하는 것도 바로 자신을 위해 이 이치를 밝히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악행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 자기의 분수에 알맞게 힘쓸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착각하면 종일토록 입을 닫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필경 옳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날 이치를 정밀하게 궁구하지 못하고서도 곧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고 또 자기보다 못한 자들을 위하여 함부로 서로를 높이고 부추기며 너무 높게 자처(自處)하면서 의리(義理)를 아주 낮고 얄팍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깨달았으면 우선 마음을 비우고 뒤로 물러나서 자세히 살피고 분명하게 인식하여 자신의 가슴 속에 조금의 의혹도 없도록 만드신다면 거의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子融志趣操守非他人所及, 但苦從初心不向裏, 故雖稠人廣坐, 閉眉合眼, 而實有矜能異衆之心. 非不讀書講義, 而未嘗潛心黙究, 剖析精微, 但據一時所見粗淺意思, 便立議論, 說來說去, 都無意味, 枉費筆舌. 如向來所論雞抱卵事, 才聊便取僧言以爲至當, 而不究彼之所事與吾不同之實, 固爲疏略. 而子融力攻其失, 乃不於此著眼, 而支離蔓衍, 但言難不合抱卵, 而不知檢點其所抱之非卵. 凡皆類此, 全不子細; 只向外走, 自己分上了無所得, 故中間數爲賢者言之. 所謂向外, 非謂子融不能閉眉合眼也. 想子融自恃有此, 便謂已能向裏而人不知, 故心不服, 而有北門之辨. 至於詞氣俱厲, 殊駭觀聽. 然味其言, 如所謂無鬼神․無釋氏者, 皆無義理. 夫 ‘鬼神’ 二字著於六經, 而釋氏之說見行於世, 學者當講究, 識其眞妄. 若不識得, 縱使絶口不談, 豈能使之無邪? 子融議論粗率不精, 大率類此. 若是果能向裏思量, 分別詳細, 豈至此耶? 今詳來書, 所謂觀書究義, 反身順理, 攻其惡毋攻人之惡者, 依舊是錯謂話頭. 若只似日前做功夫, 卽所究之義․折順之理․所攻之惡皆恐未眞實也. 且講論是非, 正爲自家欲明此理, 不是攻人之惡. 若理會得, 是於自家分上儘有得力處. 若看錯了, 卽終日閉口, 不別是非, 剗地不是矣. 此蓋日前窮理未精, 便自主張得重; 又爲不勝己者妄相尊獎, 致得自處太高, 將義理都低看淺看了. 今若覺悟, 須且虛心退後, 審細辨認, 令自己胸中了然不惑, 庶幾有進步處耳.
서자융에게 답함[答徐子融]
성(性)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주장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 방숙(方叔: 余大猷)이 여기에 대해 애초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순서를 뛰어넘어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제가 만일에 이것을 제대로 살펴보았더라면 이런 질문엔 대답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여기고, 단지 그에게 성현들의 명백하고 평이하며 절실한 만을 자세하게 숙독하라고 하면서 자신의 본분에서 순서에 따라 공부하도록 했더라면 그에게도 보탬이 되었을 것이고, 제 자신도 실언을 하지는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찮게도 그의 질문을 따라 경솔하게 답하는 바람에 그가 이렇게 광망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이것은 저의 죄입니다. 날랜 말도 혀끝은 따라잡을 수 없다더니 후회막급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런 화두가 있었으니 또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지라 지금 여러분들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만일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또한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이천(伊川) 선생께서 “성이 곧 이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예로부터 감히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음은 지각(知覺)이 사람에게 갖추어진 것이요 이 이치를 구비한 것입니다. 횡거(橫渠) 선생은 또 “태허(太虛)로 인해 하늘이라는 이름이 있고, 기화(氣化)로 말미암아 도(道)라는 이름이 있으며, 허(虛)와 기(氣)를 합하여 성(性)이라는 이름이 있고, 성과 지각을 합하여 마음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했는데 그 명칭에 대한 정의가 또한 매우 정밀하여 모두 다 바뀔 수 없는 지극한 의론입니다.
하늘이 만물을 낳으면서 그 이치에는 진실로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과 만물이 부여받은 형기(形氣)는 같지 않기 때문에 그 마음에 밝고 어두운 차이가 있고 성에는 온전하고 온전하지 못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仁)이란 성(性) 가운데 있는 사덕(四德) 가운데 으뜸인 것이지, 성 밖에 따로 하나의 물건이 있어서 성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신령스럽기 때문에 이 사덕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그것을 사단(四端)으로 드러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외물들은 기(氣)는 치우치고 뒤섞이며, 마음은 어둡고 가리워져서 능히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와 자식간에 서로 친하고 임금과 신하간에 서로 통솔하는 사이사이에 겨우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다만 사욕을 이겨 예(禮)를 돌아가는 것을 인이라고 여기고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것을 의(義)라고 여기는 등의 일은 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어서, 이 성(性)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지각이 없는 부류들은 형기(形氣)가 치우친 것 중에서 더욱 치우친 것이기 때문에 이 사물에 있는 이치 역시 그 형기를 따라서 저절로 한 사물의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인의예지(仁義禮智)와 비슷한 것을 다시 논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그 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치는 아주 명백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방숙이 어둡고 고집스러운 것이야 깊이 책망할 것이 없다지만 자융마저 깨닫지 못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有性無性之說殊不可曉. 當時方叔於此本自不曾理會, 率然躐等, 揀難底問. 熹若照管得到, 則於此自合不答, 且只敎他子細熟讀聖賢明白平易切實之言, 就己分上依次第做功夫, 方有益於彼, 而我亦不爲失言. 却不合隨其所問率然答之, 致渠一向如此狂妄. 此熹之罪也. 駟不及舌, 雖悔莫追. 然旣有此話頭, 又不容不結末, 今試更爲諸君言之. 若猶末以爲然, 則亦可以忘言矣.
伊川先生言, 性卽理也, 此一句自古無人敢如此道. 心則知覺之在人而具此理者也. 橫渠先生又言, 由太虛有天之名, 由氣化有道之名, 合虛與氣有性之名, 合性與知覺有心之名, 其名義亦甚密, 皆不易之至論也. 蓋天之生物, 其理固無差別, 但人物所禀形氣不同, 故其心有明暗之殊, 而性有全不全之異耳. 若所謂仁, 則是性中四德之首, 非在性外別爲一物而與性並行也. 然惟人心至靈, 故能全此四德而發爲四端. 物則氣偏駁而心昏蔽, 固有所不能全矣. 然其父子之相親, 君臣之相統, 間亦有僅存而不昧者. 然欲其克己復禮以爲仁, 善善惡惡以爲義, 則有所不能矣. 然不可謂無是性也. 若生物之無知覺者, 則又其形氣偏中之偏者, 故理之在是物者, 亦隨其形氣而自爲一物之理. 雖若不復可論仁義禮智之彷彿, 然亦不可謂無是性也. 此理甚明, 無難曉者. 自是方叔暗眛膠固, 不足深責, 不謂子融亦不曉也.
불교[釋氏]의 식신(識神)에 대한 이론을 인용한 것도 (유학의 성론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불교는 허공적멸(虛空寂滅)을 종지로 삼기 때문에 식신을 생사의 근본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 유학의 이론에 따르면 식신은 바로 마음의 오묘한 작용[心之妙用]인데 어떻게 얻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이것으로 성을 말하려 하면 즉 아무런 연관도 없을 뿐입니다.
至引釋氏識神之說, 則又無干捗. 蓋釋氏以虛空寂滅爲宗, 故以識神爲生死根本. 若吾儒之論, 則識神乃是心之妙用, 如何無得? 但以此言性, 則無交涉耳.
그리고, “말라죽은 사물에는 기질(氣質)의 성만 있고 본연(本然)의 성은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더욱 웃음을 자아냅니다. 만약 과연 이 말씀대로라면 그것은 사물에는 하나의 성이 있지만 사람에게는 도리어 두 개의 성이 있다는 것이니, 이 말은 너무도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질의 성은 다만 그 성이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질에 따라서 절로 하나의 성이 되고, 이것이 바로 주자(周子)가 말한, “각각 그 하나의 성을 타고난다”고 한 것이라는 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원래 본연의 성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 기질의 성이 또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더구나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가 그렇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공자께서도, “갖추고 있는 것이 성이다”라고 하시고, 또 “각각 그 성명(性命)을 바르게 타고난다”고 하셨지, 어느 물건에는 성이 있고 어는 물건에는 성이 없다고 분별하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맹자께서도 산의 성과 물의 성을 말씀하셨지만 산과 물에 일찍이 지각이 있었습니까? 만약 이 부분에서 확실하게 꿰뚫어 알게 된다면 곧 천하에는 성이 없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사물이 없어야 이 성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물이 있다면 곧 당신이 보내 온 편지에서처럼 “나무가 타면 재가 되고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된다[人陰爲土]”고 한다면, 이 또한 재와 흙의 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재와 흙의 기가 있다면 곧 재와 흙의 성이 있는 것이거늘 어째서 말라 죽은 사물에 성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又謂枯槁之物只有氣質之性而無本然之性, 此語尤可笑. 若果如此, 則是物只有一性, 而人却有兩性矣. 此語非常醜差, 蓋由不知氣質之性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隨氣質而自爲一性, 正周子所謂各一其性者. 向使元無本然之性, 則此氣質之性又從何處得來耶? 况亦非獨周․程․張子之言爲然, 如孔子言成之者性, 又言各正性命, 何嘗分別某物是有性底, 某物是無性底? 孟子言山之性․水之性, 山水何嘗有知覺耶? 若於此看得通透, 卽知天下無無性之物, 除是無物, 方無此性. 若有此物, 卽如來喩木燒爲灰, 人陰爲土, 亦有此灰土之氣. 旣有灰土之氣, 旣有灰土之性, 安得謂枯槁無性也?
또 예를 들어 “狹其性而遺之” 이하의 갖가지 괴상한 주장들은 더욱 가소롭습니다만 지금은 자세히 논변할 겨를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생각하여 저의 이 말을 자세하게 음미하면 당연히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곧 그냥 두고 평이하고 명백하고 절실한 곳에 나아가 이치를 탐색하고 마음을 함양(涵養)하여 그 마음을 허명(虛明)하게 한다면 오래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이렇게 생각없이 내키는 대로 말하여 실속없는 말로만 치달려 결국 자기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없이 한갓 말을 쉽게 하는 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고 생각지 않으시면 자융과 방숙(方叔)은 스스로의 주장을 내세워 종지(宗旨)로 삼도록 하십시오. 나 역시 두 사람이 내 의견을 따를 것이라고 어떻게 기필하겠습니까? 역(易)에 대한 학설은 또 별도의 일입니다. 지금은 자기에게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역에 미치겠습니까? 뒷날 마음이 비고 기가 평온해져서 모든 이치를 다 알게 되어 세상의 문자와 언어를 보는데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 뒤에야 비로소 세세하게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만약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무방하니, 우선은 의심나는 부분을 단정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야지 이렇게 성내는 것처럼 무례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又如 ‘狹其性而遺之’ 以下種種怪說, 尤爲可笑. 今亦不暇細辨, 但請虛心靜慮, 詳味此說, 當自見得. 如看未透, 卽且放下, 就川易明白切實處玩索涵養, 使心地虛明, 久之須自見得. 不須如此信口信意馳騁空言, 無益於己而徒取易言之罪也. 如不謂然, 則請子融․方叔自立此論, 以爲宗旨, 熹亦安能必二公之見從耶? 至於易之說, 又別是一事. 今於自己分上見成易曉底物尙且理會不得, 何暇及此? 當俟異日心虛氣平, 萬理融徹, 看得世間文字言語無不通達, 始可細細商量耳. 此等若理會不得, 亦未妨事, 且闕所疑而徐思之, 不當便如此咆哮無禮也.
서자융에게 답함[答徐子融]
저는 올해 병으로 거의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단오절(端午節)이 지난 뒤에야 억지로라도 일어날 수 있었으나 근래 한두 해 사이에 거의 10년의 정기가 소모된 것 같습니다. 늙으막에 이런 일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10여 명의 벗들이 이곳에 모였지만 아주 총명하고 간절하게 갈구하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전에 병중에서 힘껏 반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배우는 자들을 탓해서도 안 되는지라 깊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다시 더욱 더 채찍질한다면 찾아 온 사람들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거리가 조금 멀어 그대를 본보기로 삼아 서로 만나 보고서 선하게 되도록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논한 방숙의 주장은 대개 옳지만 그 끝에서, “성에 어둡고 밝은 것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또 성을 지각(知覺)으로 만들어서 본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熹今年一病, 幾至不可支吾, 午節後方能强起. 比前一二年, 幾似爭十年氣血矣. 老境如此, 無足怪者. 亦有朋友十數人在此相聚, 絶少得穎悟懇切者. 前日病中猛省, 亦不可全責學者, 深自恐懼. 今幸稍蘇, 更當益加策勵, 庶幾不負所以來之意. 但眼相去差遠, 不得子融爲之表率, 使相觀而善耳. 前書所論方叔之說大槪已是, 但其末云性有昏明, 則又將性作知覺看矣. 試更思之, 如何?
송심지에게 답함[答宋深之(之源)]
【해제】이 글은 순희 11년(갑신, 1184, 55세)에 송지원(宋之源)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제가 지난 번 성에 들어갔다가 다행히 다시 한 번 뵙게 되었습니다. 비록 일로 바빠 말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이미 스스로 위안이 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이별 후에 소식을 듣지 못해 그리는 마음만 쌓여갑니다. 지금 편지를 받고서 요즘 보살핌도 좋도 학문도 날로 새로워지는 진보의 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경전과 역사에 대한 여러 주장은 이치를 음미하고 문장을 닦는 뜻을 보기에 충분해서 후배들의 독서하는 법도로 삼을만 합니다. 때 마침 눈이 병들어 한 두 편 정도를 이제 막 읽어 보았는데 문장의 기세가 넓고 깊으며 의리는 통창해서 아주 기쁩니다. 훗날 자기보다 뛰어난 벗을 구해 서로 함께 옛 사람들의 위기지학을 강명하고 힘껏 노력한다면 학문의 진보가 여기에만 그치지는 않을 겁니다.
熹往者入城, 幸一再見, 雖人事匆匆, 未得款語, 然已足以自慰矣. 別後不得奉問, 積有馳情. 玆辱惠書, 獲聞比日侍奉佳慶, 進學有日新之功, 尤以忻沃. 經史諸說, 足見玩理修辭之意, 可爲後生讀書之法. 屬以病目, 方讀得一二篇, 其詞氣深愽而義理通暢, 甚可喜也. 異時益求勝己之友, 相與講明古人爲己之學而力行之, 則其所進當有不止於此者矣.
세 분의 성인이 서로 전한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는 것과 맹자가 말한 자막이 중을 잡았다는 것은 문장은 같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은미한 도심에 정일(정일)하게 되면 가는 곳마다 중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진실로 잡으로[允執]’고 말한 것은 쓸데없이 잡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막이 중을 잡은 것은 위아(爲我)를 하되 양주처럼 깊이 빠지지은 않고, 겸애를 하되 묵적처럼 지나치게 하지는 않겠다는 것으로 두 가지 사이에서 한 대목을 붙잡고서 중이라고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 분 성인이 중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 중이 살아 있지만, 자막이 중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 중이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중은 저울질[權]할 필요도 없이 언제나 중이지만, 죽은 중은 성인의 학문을 배우지 않고서는 저울질해서 언제나 중에 맞출 수 없습니다. 저울질(權)이란 저울추와 저울대[權衡]에서 저울추[權]가 가진 기능으로서 사물의 경중을 재면서 이리저리 옮김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인의의 경중을 재고 헤아려 때에 맞춰 조치하려는 것으로, 근세에 인의의 궁핍함을 구제하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三聖相授, 允執厥中, 與孟子所論子莫執中者文同而意異. 蓋精一於道心之微, 則無適而非中者. 其曰 ‘允執’, 則非徒然而執之矣. 子莫之爲執中, 則其爲我不敢爲楊朱之深, 兼愛不敢爲墨擢之過, 而於二者之間執其一節以爲中耳. 故由三聖以爲中, 則其中活; 由子莫以爲中, 則其中死. 中之活者, 不待權而無不中; 中之死者, 則非學乎聖人之學不能有以權之而常適於中也. 權者, 權衡之權, 言其可以稱物之輕重而游移前却, 以適於平. 蓋所以節量仁義之輕重而時措之, 非如近世所謂將以濟乎仁義之窮者也.
공자와 맹자가 성을 다르게 말한 것에 대한 설명이 길어서 몇 마디 말로 쉽사리 질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충이나마 논해 본다면 부자(夫子: 공자)께서는 기질과 뒤섞어 말했고, 맹자는 오로지 성의 이치만을 말했습니다. 기질과 뒤섞어 말했기 때문에 ‘같다[同]’고 하지 않고 ‘가깝다[近]’고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선악의 차이가 없을 수는 없지만 습관에 따라 현저하게 차이가 갈리지는 않았다고 여기신 것일 뿐입니다. 이치로 말한다면 상제가 내려주신 것과 사람 마음의 떳떳한 본성에 애초부터 두 가지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이치가 사람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언어로 표현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맹자는 공도자에게 ‘재(才)’와 ‘정(精)’으로만 밝혀주었을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맑다는 것을 관찰하고 싶은데, 수원을 관찰할 수는 없다고 한다면, 또한 머지 않은 여러 물줄기를 관찰해보면 수원이 반드시 맑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至於孔孟言性之異, 則其說又長, 未易以片言質. 然略而論之, 則夫子雜乎氣質而言之, 孟子乃專言其性之理也. 雜乎氣質而言之, 故不曰同而日近. 蓋以爲不能無善惡之殊, 但未至如其所習之遠耳. 以理而言, 則上帝之降衷, 人心之秉彝, 初豈有二理哉? 但此理在人有難以指言者, 故孟子之告公都子但以其才與情者明之. 譬如欲觀水之必淸, 而其源不可到, 則亦觀諸流之末遠者, 而源之必淸可知矣.
이 두 가지 의리는 성현들이 드물게 말했던 것으로, 근세의 큰 학자인 하남 정선생(河南 程先生)과 횡거 장선생(橫渠 張先生)이 이런 의리를 발명한 적이 있는데 그 설명이 매우 상세합니다. 모두 책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 창사가 간행한 유서(遺書)는 정씨(程氏)의 학설들입니다. 그리고 장씨(張氏)의 글은 촉(蜀) 지방에 (간인된) 판본이 있을 터인데 살펴보셨는지요?
此二義皆聖賢所罕言者, 而近世大儒如河南程先生․橫渠張先生嘗發明之, 其說甚詳. 具在方冊者, 今倉司所印遺書, 卽程氏說, 而張氏之書則蜀中自有版本, 不知亦嘗考之否?
저는 열 넷, 다섯부터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두 사람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들의 심원한 의미와 심오한 가르침을 깨닫는 것만으로 근세세 문장이네 의론이네 하고 어지럽게 떠드는 것들이 눈길 한 번 주기에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맹씨(孟氏: 맹자) 이래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만 깊이 힘쓴 사람이 아니라면 또한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예전에 그들의 말 가운데 비근한 것들을 골라서 따로 근사록(近思錄)이란 책 한 권을 만들었는데, 지금 한 통 보내드립니다. 요옹(了翁: 陳瓘)의 「책침(責沈)」 묵각본 역시 선배들과 스승 및 벗들의 연원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보내 드립니다. 자세하게 읽어보시고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다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동생의 시와 역」에 대한 학설도 매우 자세하고 분명하니 그들에 대한 저의 바램도 앞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熹自十四五時得兩家之書讀之, 至今四十餘年, 但覺其義之深, 指之遠, 而近世紛紛, 所謂文章議論者, 殆不足復過眼. 信乎孟氏以來一人而已!然非用力之深者, 亦無以信其必然也. 舊嘗擇其言之近者別爲一書, 名近思錄, 今往一通. 了翁責沈墨刻亦可見前輩師友源流, 倂以奉寄. 幸細讀之, 有疑復見告也. 今弟叔季詩․易之說亦甚詳明, 區區所望, 蓋不殊前之云也.
송심지에게 답함 答宋深之
또 대학․중용과 「대학서」․「소학서」 두 편을 보냈는데, 눈길이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은 중용의 앞에 있어야 하는데, 희(熹)가 예전 절동에 있을 때 판각했던 판본을 지금 함께 편집 했습니다. 아마도 구창(勾倉)이 그곳에 있을 터이니 가서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 가지 판본은 형제들 간에 나누어 보십시오.
且附去大學․中庸本, 大․小學序兩篇, 幸視至. 大學當在中庸之前, 熹向在浙東刻本, 見爲一編. 恐勾倉尙在彼, 可就求之. 此三本者, 昆仲且分讀也.
근래 학자들이 대부분 글을 읽지 않았는데 그대의 형제가 이처럼 뜻을 돈독하게 가진 것을 보니 매우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늦게 서로 모여서 진심을 다 토로하지 못한 것인데 지난 번에 헤어질 때는 슬픔을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문을 강구하는 데에는 실제로 의리를 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니, 요컨대 익숙하게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해야지, 많은 양을 탐하고 소득에 힘써 광범위하게 찾아 헤매어 말을 늘어 놓고는 곧 끝까지 탐구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두 서문은 아버님을 모시면서 대략이나마 내용을 아뢰어 혹여 지적하는 곳이 있다면 인편을 통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近年學者多不讀書, 見昆仲篤志如此, 甚不易得. 所恨相聚之晩, 不得盡吐腹心. 前日臨岐, 不勝忡悵. 然講學貴於實見義理, 要在熟讀精思, 潛心玩味, 不可貧多務得, 搜獵敷衍, 便爲究竟也. 二序侍次略爲呈白, 恐有指摘處, 便中幸喩及也.
송심지에게 답함 答宋深之
대학은 우리 유학[聖門]에서 처음 힘써야 할 곳이요, 격물(格物)은 또 대학에서 제일 먼저 힘써야 할 곳입니다. 시험삼아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일상 생활에서 이렇게 공부를 해나가 오랜 후에 뜻과 생각이 저절로 구별되어, 세상의 모든 이욕과 호오가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게 이것은 (격물의) 보잘것 없는 효과를 본 것일 뿐입니다. 순자와 양웅이 성을 말한 잘잘못은 앞 말의 시종이 어떠했는지를 모른 채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곳에 대해 자기의 본분에서 견해가 분명해진다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독서할 때 자신을 위한다[爲己]는 의식이 없이 다만 입과 귀를 위해서 혹은 문자나 짓기위해서일 뿐라면 뜻과 생각이 천박한 것이니, 글을 읽고도 의리를 발견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大學是聖門最初用功處, 格物又是大學最初用功處. 試考其說, 就日用間如此(5-2968)作功夫, 久之意思自別, 見得世間一切利欲好樂皆不足以動心, 便是小小見效處也. 荀․揚言性得失, 忘記前語首尾云何. 然此等處若於自己分上見得分明, 則亦不待人言, 自然見得矣. 但恐讀書之時無爲己之意, 只欲以資口耳, 作文字, 卽意思浮淺, 看他義理不出也.
송심지에게 답함 答宋深之
(대학의) ‘그칠 곳을 안다(知止)’에 대한 설명에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칠 곳[止]’이란 만물에 제각각 정해진 이치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컨대 ‘격물’과 ‘궁리’를 통해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의심이 없는 지식 이후에 이 마음이 안정되어 외물에 응대할 수 있는 것이지, 억지고 막고 힘써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격물 공부는 지난 번 편지에서 이미 다시 기록해 보내 드렸습니다만 완전치는 못합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한 번 써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전에 보내드린 것은 만에 하나라도 남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곳을 발견하게 되면 이곳이 바로 진보한 것일 뿐입니다. 과거를 위한 사업은 애초부터 고상한 의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명한 이들이 자기를 굽히면서 과거에 나가는 것도 대개 힘에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명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아셨다면 일상 생활에서 안팎과 본말을 꼭 둘로 나누어 보고서, 반드시 이 일을 완료한 다음에 저 일에 미쳐야 할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감묘(戴監廟)는 오래도록 이름을 들어 왔고, 차분하게 학문을 강론한다고 하니 반드시 지극한 의론이 있을 겁니다. 계수(季隨: 胡大時)와 윤승(允升: 周奭)이 함께 모였다는데 그들은 각각 어떤 주장을 하던가요? 인편을 보낼 때 하나하나 기록해 보여주신다면 그 지역의 학문의 진보와 순서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示喩知止之說, 足見留意. 然所謂止, 乃萬物各有定理之謂. 要在格物窮理, 乃可知之. 知之不疑, 然後此心有定而可以應物, 非强遏而力制之也. 格物功夫前書已再錄去, 然亦未盡, 旦夕當再寫一本去也. 前本千萬且勿示人, 看令有疑處, 乃有進處耳. 科擧事業初無高諭, 賢者俯就, 蓋有餘力. 旣知有命之說, 則日用之間內外本末不須作兩截看, 必先了此, 然後及彼也. 戴監廟久聞其名, 講學從容, 必有至論. 季隨․允升相聚, 各有何說? 因來一一錄示, 庶知彼中進學次第也.
송심지에게 답함[答宋深之]
보내주신 대학에 대한 의문은 모두 잘 알았습니다. 대학장구에서 이미 격물에 대한 전문[傳]이 없는 것은 빠진 문장[闕文]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상세하게 말했습니다. 마지막 장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유추해서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는 것인데, 문장의 의미가 아주 분명하다는 것도 이미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아직도 의심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독서가 농익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완미하시면서 반복하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저절로 분명해질 것입니다.
示喩大學所疑已悉. 格物無傳, 爲有闕文, 章句已詳言之. 卒章是推治國之道以平天下, 文意甚明, 亦已詳說. 不知何故尙以爲疑? 豈讀之未熟耶? 更宜玩味, 不厭煩復, 則自分明矣.
격물(格物) 치지(致知)는 대학의 가장 중요한 뜻입니다.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도가 다 여기에서 나오므로 종신토록 받아들여 응용해야 할 것이니 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보내신 편지에서 마침내 애쓰지 않고 저절로 이르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던데 어찌 그렇게 쉽게 말을 하십니까? 근래 학자들은 기질이 가볍고 얄팍해서 오래도록 버티지를 못하고 매번 빨리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요행히 등급을 건너뛸 희망을 품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과거(科擧)라는 세속의 학문에 그 뜻을 빼앗기기 때문에 늘 무엇엔가 쫓기고 협박당하는 것이 있는 듯하여 차분하게 결실을 맺을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格物致知是大學第一義, 修己治人之道無不從此而出, 終身要得受用, 豈是細事!來喩乃欲不勞而俟其自格, 一何言之易耶!近世學者氣輕質薄, 不耐持久, 每以欲速之心, 懷徼幸臘等之望, 又有科擧世俗之學以奪其志, 所以常若有所驅脅迫逐而不暇從容以及乎有成也.
송심지에게 답함 答宋深之
보내주신 편지에서 대학에서 격물을 먼저해야 한다고 한 것은 옳습니다. 다만 치지(致知)를 격물하는 까닭을 철저하게 하는 것이라 여기고, 물격을 사람과 사물에 미치는 일이라고 여긴다면, 아마도 문장의 의미에 자못 이해가 깊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과거에 대학에 대한 주장을 베껴서 보냈는데, 그 사이에 완전치 못한 부분이 있어서 요즘 많은 부분을 다시 고쳤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정선생이 이 두 곳을 설명한 것은 문장의 이치가 극히 분명하고, 또 공부의 순서도 모두 완비하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가볍게 보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런 폐단은 평소 과거에 대한 학문이 마음 씀씀이를 무너뜨린 데서 연유해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마침 자용(子容)에게 답하는 편지를 쓰느라 거기에서도 충분히 말했습니다. 공자께서는 “옛 학자들은 자신을 위했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다”고 하셨습니다(정선생(程先生)은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소득이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요 남을 위한다는 것은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너는 군자유가 되어야지 소인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정선생은 군자유는 자신을 위하고 소인유는 남을 위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학자들이 군자․소인의 분별에 대해 조금의 차이를 빚게 되면 결국 엄청난 잘못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데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所喩大學以格物爲先, 此得之矣. 但以致知爲致其所以格物, 而謂格物爲及人及物之事, 則似於文義殊未詳也. 向來寫去大學說, 其間固未盡善, 近已復多改更. 然其所載程先生說此二處文理極分明, 又幷功夫節次一時俱盡, 不知何故看得如此草率? 竊意此病從平日科擧之學壞了心衍, 致得如此. 適答子容書已極言之矣. 孔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程先生曰: 爲已者, 欲得之於已也; 爲人者, 欲見知於人也.) 又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程先生曰: ‘君子儒爲己, 小人儒爲人).’ 此是古今學者君子小人之分, 羞之毫釐, 繆以千里處, 切宜審之.
송심지에게 답함 答宋深之
【해제】이 글은 순희 11년(갑신, 1184, 55세) 무렵에 송지원(宋之源)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보내 오신 편지에서 학문을 하려는 뜻이 더욱 정밀하고 전일하며, 또 형제끼리 서로 권면하는 것이 여러 시(詩)에 드러나서 늙은이의 마음에 매우 위로가 됩니다. 또 소(蘇)씨와 범(范)씨 등 여러 분들과 서로 절차탁마함을 알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질문한 몸가짐을 바르게하고 마음을 수양하며 글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자세하게 강론했습니다. 간추려서 말한다면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은 ‘경(敬)’이란 한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서의 경우에는 세상의 어느 한 가지라도 몰라서는 안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독서의 순서와 자신의 능력을 헤아려서 나아가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오봉(五峰: 胡宏)의 글 가운데서는 지언(知言)이 가장 정치합니다. 그렇지만 지언도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종종 지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에전에 경부(敬夫: 장식)도 오봉의 저술을 세상이 널리 알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광중(廣仲: 胡寔)의 생각에도 말하기 힘든 점이 있었던 것이지, 그것이 오봉의 글을 애석하게 여겨서는 아니었던 듯 합니다. 남헌(南軒)의 글은 이 곳에 두 종류의 판각본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제[熹]가 서문을 쓴 것인데, 부끄럽기는 하지만 잡다하지는 않습니다. 광주(黃州)에도 관에서 판각한 판본이 있는데 편집된 내용이 더욱 많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젊었을 적에 쓴 것이라 아쉽습니다. 이곳의 판본 속에 현재 없는 것은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구하게 되면 응당 따로 인편에 보내겠습니다. 그렇지만 독서는 반드시 정추와 득실을 변별해 내어냐만 자신에게 보탬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평범하게 보고 지나가 버린다면 쓸데없이 힘만 쓰는 격입니다. 한자(韓子: 한유)는 도의 대체와 규모에 대해 아주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도의 소종래를 충분히 궁구하지 못했고, 몸에 체득해서 실천하는 것이 모두 세밀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가 불교와 도가를 배척한 것도 자신의 소견에 근거해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정선생(程先生)은 「서명(西銘)」이 「원도」의 조종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서 높낮이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단(異端)의 학설도 근사한 것 같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이를 분석해서 깨닫지 못한 자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자기에게서 도리를 분명하게 본 뒤에야 이 책임을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서 말로만 승부를 다투고자 하면 한갓 분쟁의 실마리만 제공하는 셈이 되어 결국 도의 밝고 어두움에 아무런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맹자(孟子)께서 향원(鄕原)이 덕을 어지럽히는 피해를 논하다가 끝에 가서는 군자(君子)가 떳떳한 도로 돌이켜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 끝없이 나오는 것은 근래에 들어서 더욱 심해졌고, 이것을 이루 다 배척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학문이 밝아지면 저들의 주장은 자연 소멸될 뿐입니다. 이것은 학자들이 힘써야 할 것이지,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택지․용지에게 따를 글을 보내지 못하지만 마음만은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기약도 없습니다. 부디 학문에 힘쓰시고 스스로를 아끼십시오.
示喩爲學之意益以精專, 而兄弟相勉, 見於詩什, 深慰老懷. 又知更有蘇․范諸賢相與切磋, 尤以爲喜. 所問持養觀書之說, 前此講之已詳. 約而言之, 持養之方不過敬之一字, 而讀書則世間無一事是不合知者, 但要循序量力而進耳. 五峰之書, 知言爲精, 然其間亦不能無小小可議處. 其他往往又不能及, 故向來敬夫不欲甚廣其傳. 今想廣仲之意恐亦有所難言者, 非斬惜也. 南軒文此間鏤版有兩本, 其一熹爲序者, 差不雜. 黃州亦有官本, 篇秩尤多, 然多是少作, 可恨也. 此間本無見存者, 不及寄去, 後得之當別附便耳. 然讀書要須辨得精粗得失, 乃於己分有益. 若但泛然看過, 卽枉費功力矣. 韓子於道見其大體規模極分明, 但未能究其所從來, 而體察操履處皆不細密. 其排佛老, 亦據其所見而言之耳. 程先生說西銘乃原道宗祖, 此言可以推其淺深也. 近似之說固應辨析, 以曉未悟, 然須自見得己分上道理極分明, 然後可以任此責. 如其未然, 而欲以口舌校勝負, 恐徒起紛競之端, 而卒無益於道術之明暗也. 孟子論鄕原亂德之害, 而卒以君子反經爲說, 此所謂上策莫如自洽者. 况異端邪說日增月益, 其出無窮, 近年尤甚, 蓋有不可勝排者. 惟吾學旣明, 則彼自滅熄耳. 此學者所當勉而不可以外求者也. 澤之․容之不及別狀, 意不殊前. 相望數千里, 會見無期, 惟千萬力學自愛.
송용지(지왕)에게 답함[答宋容之(之汪)]
【해제】이 글은 송지왕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과거를 위한 학문을 경계하면서 독서법을 논하고 있다.
편지에서 ‘글을 읽으면서 의심할 줄 모른다’고 하신 말씀은 초학자들의 공통적인 근심입니다. 이것은 평소 글을 읽을 적에 다만 과거(科擧)를 볼 계획으로 많은 것을 욕심내면서 소득을 얻는 것에만 힘쓰느라 자세하게 볼 겨를도 없게 되고, 뜻과 생각이 이런 데에 버릇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랜 동안 조급하게 다구치면서 문자를 볼 때 정밀하고 거친 것을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널리 읽기만 했던 것입니다(예를 들자면 동파(東坡)의 역해(易解)에서 건괘[乾] 가운데 성명(性命)을 말한 곳이나, 계사(繫辭)」에서 도(道)를 말한 몇 장들, 그리고 영빈(潁濱: 蘇轍)이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풀이한 곳이 모든 이런 종류들로 한 글자도 말이 되는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을 깊이 경계하여 다 씻어버리고, 따로 규모를 세워 마땅히 보아야 할 글 가운데 더욱 정밀하고 시급한 것을 고르십시오. 또 한 권의 책을 보면서 하루에 능력껏 우선 한두 단락을 보되, 그 단락이 이해가 되면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고 그 책을 다 마치면 다른 책으로 넘어가십시오. 이에 앞서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힌 다음 익숙하게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한 글자 한 구절도 다 귀착(歸着)될 곳이 있게 하고, 여러 사람들의 주해(注解)를 하나하나 통찰하고 나서 그 옳고 그름을 비교하여 성현(聖賢)이 입언(立言)하신 본 뜻을 찾아야 합니다. 비록 이미 터득했더라도 또 다시 이렇게 반복적으로 음미하여 그 의리가 마음속에 푹 젖어들고 살갗과 골수에 스며든다면 그때 가서야 학문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所喩讀書未能有疑, 此初學之通患. 蓋緣平日讀書只爲科擧之計, 貪多務得, 不暇子細, 慣得意思, 長時忙迫, 凡看文字不問精粗, 一例只作如此涉獵. (如東坡易解乾卦中說性命, 繫辭中說道處數章, 及潁濱解孟子浩然之氣處, 皆是此類, 無一字成言語). 今當深以此事爲戒: 洗滌淨盡, 別立規模, 將合看文字擇其尤精而最急者, 且看一書, 一日隨力且看一兩段, 俟一段已曉, 方換一段, 一書皆畢, 方換一書. 先要虛心平氣, 熟讀精思, 今一字一句皆有下落, 諸家注解一 一通貫, 然後可以較其是非, 以求聖賢立言之本意. 雖已得之, 亦且更如此反復玩味, 今其義理浹洽於中, 淪肌浹髓, 然後乃可言學耳.
다만 대학에서 정심(正心)․성의(誠意)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자세하지 못합니다. 경문을 고찰해 보면 정심(正心)․성의(誠意)․치지(致知)․격물(格物) 가운데 어느 것을 앞세우고 어느 것을 뒤세워야 한단 말입니까? 나머지 ‘일시적인 선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올바름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나, ‘반드시 일삼을 것이 있으되 마음 속으로 예단하지는 말라’는 주장, ‘경은 반드시 정성스러움을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 등은 모두 잘잘못이 있습니다. 다만 본령이 끝내 올바르지 않다면 경솔하게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하나 분석해 나가는 것이 꼭 보탬이 된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이 서너가지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생각하시고, ‘마음 속으로 예단하지 말라’에 대해서는 옛 주석과 여러 선생들의 설명을 본 다음에 일러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에 나아가 되풀이 하는 것이 평범한 의론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과거를 위한 학문은 사람의 식견을 오도하고, 마음 씀씀이를 무너뜨려서, 기교가 정밀해질수록 피해가 더욱 깊어집니다. 정말로 걱정되는 것은 예전에 따랐던 스승과 벗들이 대부분 이런 부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상의 여러 설명으로 구해보면 최근 석고서원[石鼓]에서 들었다는 내용도 이런 데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只如所論大學以正心誠意爲本, 此便是不子細處. 且請試考經文, 正心誠意․致知格物何者爲先後耶? 其他如好樂苟善不害於正之說, 必有事焉而勿正心之說, 敬必以誠爲先之說, 亦互有得失. 但終是本領未正, 未容輕議. 便使一一剖析將去, 亦恐末必有益. 可且就此三四義上子細思索, 勿正心卽更看古注及諸先生說, 後便見喩爲佳. 就此反復, 殊勝泛論也. 大抵科擧之學誤人知見, 壞人心術, 其技愈精, 其害愈甚. 正恐前日所從師友多是只得此流, 今以上來諸說求之, 則比所聞於石鼓者, 恐亦未免於此也.
송택지에게 답함 [答宋澤之]
【해제】이 글은 소희 2년(신해, 1191, 62세)에 송지윤(宋之潤)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지난 번 인편이 돌아와 편지를 받은 이후로 다시 안부를 묻지 못했습니다. 요사이 임장(臨漳)의 역이 있어 길조차 더욱 멀어졌으니 한낮 처량한 상념만 늘어날 뿐입니다. 올 봄에 불행히도 큰녀석이 세상을 떠나 슬픈 마음을 견딜 수 없으니 한시바삐 사관을 청해 돌아가야겠습니다. 삼산(三山)을 지나면서 비로소 보내신 사람을 만나 다섯 통의 편지를 받고서 선친이신 낭중(郞中)의 장례를 치루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이 전에 보낸 것과 지금 다시 보낸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형제분들이 어버이를 행적을 드러내 후세에까지 전하려는 뜻이 가이없이 정성스럽고 확고해서 남들이 따라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어 비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처럼 한 여름에 비오고 날이 찬데 멀리서나마 어버이 봉양에 다복하시길 바랍니다.
自頃人還辱書之後, 不能再致問訊, 尋有臨漳之役. 道里益遠, 音問益難通, 徒增悵想而已. 今春不幸長子喪亡, 哀痛不堪, 亟請祠以歸. 行過三山, 始遇來使, 幷領書五通. 乃知先丈郞中已遂窀穸之奉, 及前此遣人與今再遣曲折, 備見昆仲顯親傳遠之意悠久誠確, 有人所甚難者, 又不勝其悲歎也. 卽此盛夏雨寒, 遠惟侍奉佳福.
명문을 부탁하신 것은 지난 번에 연락을 받았지만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대의 교분을 생각해보면 본시 마음 속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승낙한 상태였습니다. 지금 사람이 왔습니다만 마침 저도 이런 환란을 당했습니다. 애초 생각으로는 당장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인편을 돌려보내고 조금 시간이 흘러 틈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쓰고, 따로 적당한 인편을 찾아 보내려고 했습니다. 조금 지나 생각해보니 형제가 수천 리 길을 넘어 와서 명문(銘文)을 청하면서 다시 사람을 보내고서야 전달이 되었으니, 이 마음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미적거리며 뒤로 미루었다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라도 하게 되면 돌아가신 어르신을 어떻게 지하(地下)에서 뵐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온 사람을 붙잡아 두고 건양(建陽)에 이르도록 수행하게 하고는 輟哀排冗 서둘러 초고를 작성하고 정서해서 보내 드립니다. 다만 못난 제가 글솜씨도 없어서 행실과 치적의 실상을 발휘할 수 없고, 사장(事狀)에 실린 것도 모두 쓰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志)와 장(狀)의 형식 자체가 간략하고 자세한 서술의 정도가 서로 다르고, 둘째는 기록을 보태려다 오히려 망치는 경우가 있으며(예를 들어 제게 보내준 기록 속에 있는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의 일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는 신비하고 괴상한 내용에 젖어든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이 세 가지 주장에 대해서는 당신께서 다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지금은 한 부만을 정서했을 뿐인지라, 하루속히 일이 안정되면 따로 몇 부를 베껴서 도하에 보내 범문숙(范文叔)에게 부탁해서 역참의 인편을 통해 발송해 드린다면 반드시 닿을 것입니다.
銘文之喩, 昨承喩及, 極知不能. 然念先契之厚, 固已心許久矣. 今玆人來, 適此禍難, 初意決不能辦, 欲且遣還來人, 俟向後梢間, 爲之別尋的便附去. 旣而思之, 昆仲越數千里而來求銘, 再遣使而後得達, 此意已不可孤. 向後因循, 末必得償此諾, 則何以見先丈於地下? 遂留來人隨至建陽, 輟哀排冗, 亟爲草定, 繕寫封內. 但鄙拙不文, 無以發揮行洽之實, 而事狀所載, 亦有不能悉書者. 一則志狀之體, 詳略自應不同; 二則盧其欲益而反損;(如所記未第時事之類). 三則病其頗涉於神怪. 此三說者, 更望高明有以察之也. 今且寫得一本, 旦夕事定, 別抄數本寄都下, 託范文叔發遞附便, 必可達也.
또 심지(深之)가 결국 선대의 은택을 이어 관직에 올라 선친께서 실천하고 싶었지만 다하지 못했던 뜻을 펴고, 택지와 용지도 글을 읽고 자신의 뜻을 추구해서 가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제가 깊이 바라는 것입니다. 물으시는 뜻이 간절하니 또 스스로 만족치 않는다는 뜻을 알겠습니다. 다만 멀리서 드리는 편지인지라 속내를 다 말하기 힘들어 중요한 것만을 말했습니다.
及承深之遂承遺澤, 卽登仕版, 以究先公欲行末盡之志, 而澤之․容之亦將讀書求志, 以承家學之傳, 此皆區區之所深望. 而垂問勤懇, 又見不自滿足之意. 但千里遠書, 難盡心曲. 今且以其大者言之.
요즘 학자들이 가장 큰 문제점은 글을 지어 녹(祿)이나 구하는 것을 가장 앞세워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깊이있게 의리(義理)를 궁구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금(古今)의 학문과 의리(義利)의 차이에 대해 다시는 그 경계와 분별점을 살피지 못하여 어느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어느 것을 택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는 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널리 외우고 솜씨있게 글을 짓는다 하더라도 한갓 이 마음에 해로움만 커질 뿐이니, 반드시 이와 반대로 한 다음에야 학문하는 방법을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도 여러 번 이 점에 대해 말을 했었지만 그대의 의중에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문자와 언어를 공부로 여기로 성명(聲名)과 이록(利祿)을 귀결처로 삼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기술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살펴 보더라도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 분들이 과연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긴다면 부디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고 사람을 응접하고 남은 시간에 생각을 수습하고 정신을 함양(涵養)하여 잠시 이미 배운 것을 놓아 두어 마음이 소란스럽게 동요하지 않게 한 다음, 문득 그 부분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고금(古今)의 학문과 의리를 깊이 살펴서 이를 낱낱이 분석하여 서로 엇갈리지 않게 한다면, 그 경중(輕重)과 취사(取捨)의 표준이 자연히 가슴속에 뚜렷해져서 굳이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지향(指向)이 저절로 구분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학(聖學)의 문호를 점차로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학자가 마음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뜻이 먼저 정해져야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비로소 확실하게 선택하여 닦고 지켜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편이 돌아가는데 제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임장(臨漳)에서 판각한 책 10여종으로 뒤늦게 멀리있는 사람의 속내를 보입니다. 책의 뒤에 제와 발이 있으니 판각한 뜻을 알 것입니다. 근사록(近思錄)은 옛 판본에 비해 몇 조 늘어난 곳이 있으니, 예를 들어 함을 사고 구슬은 돌려주었다는 등의 논의는 더욱 오늘날 학자들의 잘못된 마음씀씀이에 대해 경계가 될 것입니다. 가의(家儀)와 향의(鄕儀)도 풍속의 교화에 보탬이 될 것이니 빈 말이라고 가볍게 읽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大抵今之學者之病, 最是先學作文干祿, 使心不寧靜, 不暇深究義理, 故於古今之學․義利之間不復能察其界限分別之際, 而無以知其輕重取捨之所宜. 所以誦數雖博, 文詞雖工, 而祇以重爲此心之害. 要須反此, 然後可以議爲學之方耳. 向者蓋亦屢嘗相爲道此, 然覺賢者意中未甚明了, 終未免以文字言語爲功夫, 馨名利祿爲歸趣. 今以所述事狀觀之, 亦可驗其不誣矣. 若諸賢者果以愚言爲不謬, 則願且以定省應接之餘功收拾思盧, 完養精神, 暫置其所已學者, 勿今泅湧, 鼓發狂鬧, 却於此處深察前所謂古今之學․義利之間, 粒剖銖分, 勿今交互, 則其輕重取舍之極自當判然於胸中, 不待矯拂而趣操自分, 聖學之門庭始可以漸而推尋矣. 此是學者立心第一義, 此志先定, 然後修己治人之方乃可決擇而修持耳. 人還, 無以爲意, 臨漳所刻諸書十餘種謾見遠懷. 書後各有題跋, 見所爲刻之意. 近思錄比舊本增多數絛, 如買櫝還珠之論, 尤可以警今日學者用心之鯵. 家儀․鄕儀亦有補於風敎, 幸勿以爲空言而輕讀之也.
진기지에게 답함[答陳器之]
【해제】 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에 진식(陳埴)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보여주신 네 조목에서 제1․제3조는 옳습니다. 다만 공정함을 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정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천 선생(伊川先生)은 분명하게 인의 도는 말하기 어려우니 오직 공정함만이 인에 가깝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공정함을 곧장 인이라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또 “공정한 것인데 사람이 체득하기 때문에 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을 자세히 생각해보니 공정함이 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쌓이고 막힌 것을 없애고나면 물은 저절로 흘러 통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쌓이고 막힌 것 자체가 없는 것이 물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이런 뜻으로 유추해보면 ‘인(仁)’이란 글자의 귀결을 알 것입니다.
또 중(中)의 의미는 전적으로 강함과 부드러움이 반반씩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강할 때는 강하게, 부드러울 때는 부드럽게, 강함과 부드러움이 반반씩 있어야 할 때는 반반씩 하는 것이 또한 다 중에 맞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所示四條, 第一․第三兩條得之. 但以公爲仁, 似未精. 伊川先生明言仁道難言, 惟公近之, 非以公便爲仁. 又云公而以人體之, 故爲仁. 竊詳此意, 公之爲仁, 猶言去其壅塞則水自通流. 然便謂無壅塞者爲水, 則不可. 更以此意推之, 可見仁字下落也.
又中之爲義, 固非專爲剛柔相半之謂. 然當剛則剛, 當柔則柔, 當剛柔相半則相半, 亦皆自有中也. 試更思之, 如何?
진기지에게 답함(옥산강의를 묻다) 答陳器之(問玉山講義)
【해제】 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에 진식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성(性)은 태극의 혼연(渾然)한 체(體)이기 때문에 본래 어떤 명칭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에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고, 그 이치의 큰 강령(綱領)이 네 가지가 있어 그것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에서 이것을 다 말한 적이 없다가 맹자(孟子)에 와서야 비로소 다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공자가 살아 계시던 때에는 성선(性善)의 이치가 본래 밝아서 비록 그 조목을 상세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성선에 대한 학설이 저절로 구비되었지만 맹자의 시대에는 이단(異端)이 벌떼처럼 일어나 종종 성(性)을 선하지 못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맹자는 그 이치가 밝혀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그것을 밝힐 생각을 하시면서 만약에 혼연한 전체라고만 말하면 마치 눈금없는 저울과 마디없는 자와 같아서 끝내는 천하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을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구별해 말하면서 네 개로 나눈 결과 사단(四端)의 학설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性是太極渾然之體, 本不可以名字言. 但其中含具萬理, 而綱理之大者有四, 故命之曰仁․義․禮․智. 孔門未嘗備言, 至孟子而始備言之者, 蓋孔子時性善之理素明, 雖不詳著其條而說自具. 至孟子時, 異端蜂起, 往往以性爲不善. 孟子懼是理之不明而思有以明之, 苟但曰渾然全體, 則恐其如無星之秤, 無寸之尺, 終不足以曉天下. 於是別而言之, 界爲四破, 而四端之說於是而立.
사단이 드러나기 전에는 비록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도 그 속에는 저절로 조리가 있고 짜임새가 있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는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접촉하기만 하면 안에서 곧 응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상황이 느껴지면인의 이치가 곧 응하여 측은(惻隱)한 마음이 드러나고, 사당(祠堂)에 들리거나 조정(朝廷)에 들리는 일이 느껴지면 예의 이치가 곧 응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그 안에 많은 이치가 혼연히 갖추어져 있어 저마다 분명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맞닥뜨리는 일에 느끼는 대로 응하는 것이니, 그 결과 사단(四端)이 드러면서 모양새가 각각 같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께서 넷으로 분류하여 학자들에게 보여 주어 혼연한 전체 가운데 이렇게 분명한 조목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니, 성(性)이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四端)이 드러나기 전에는 이른바 혼연한 전체에 대해 말할 만한 소리나 냄새도 없고 볼 만한 형상도 없는데, 어떻게 이처럼 분명한 조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이치를 징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곳에 나아가 징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반드시 근거가 있게 마련인데, 성(性)의 이치는 비록 형체가 없지만 단서(端緖)가 드러나는 것을 가장 잘 징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측은(惻隱)한 마음로 인해 반드시 인(仁)이 있음을 아는 것이고, 수오(羞惡)하는 마음으로 인해 반드시 의(義)가 있음을 아는 것이며, 공경하는 마음 때문에 예(禮)가 있음을 아는 것이고, 시비(是非)를 분별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지(智)가 있음을 아는 것이니, 만약 본래 그런 이치가 안에 없다면 어떻게 이 단서가 외부에 있겠습니까? 밖에 이런 단서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안에 부정할 수 없는 이치가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그 정(情)으로 말하면 선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선이라는 것이다”고 하셨으니, 맹자께서 성선(性善)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정을 거슬러 올라가서 역으로 알아차린 것일 뿐입니다.
蓋四端之未發也, 雖寂然不動, 而其中自有絛理, 自有間架, 不是儱侗都無一物. 所以外邊纔感, 中間便應. 如赤子人井之事感, 則仁之理便應, 而惻隱之心於是乎形. 如過廟過朝之事感, 則禮之理便應, 而恭敬之心於是乎形. 蓋由其中間衆理渾具, 各各分明, 故外邊所遇隨感而應, 所以四端之發各有面貌之不同. 是以孟子析而爲四, 以示學者, 使知渾然全體之中而粲然有條若此, 則性之善可知矣.
然四端之未發也, 所謂渾然全體, 無馨臭之可言, 無形象之可見, 何以知其粲然有絛如此? 蓋是理之可驗, 乃依然就他發處驗得. 凡物必有本根, 性之理雖無形, 而端的之發最可驗. 故由其惻隱所以必知其有仁, 由其羞惡所以必知其有義, 由其恭敬所以必知其有禮, 由其是非所以必知其有智. 使其本無是理於內, 則何以有是端於外? 由其有是端於外, 所以必知有是理於內而不可誣也. 故孟子言 ‘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是則孟子之言性善, 蓋亦遡其情而逆知之耳.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대해 그 경계선을 분명하게 알고 나서는 또 네 가지 가운데에는 인의(仁義) 가 대립되는 관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은 인이지만 예(禮)는 인이 드러난 것이며, 의는 의이지만 지(智)는 의가 감추어진 것이니, 봄․여름․가을․겨울이 비록 네 계절이기는 하지만 봄과 여름은 양(陽)에 속하고, 가을과 겨울은 음(陰)에 속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워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를 세움워 인과 의라 한다”고 했으니, 여기에서 천지의 도가 둘이 아니면 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서는 비록 넷이 있지만 세우는 것은 둘일 뿐입니다.
仁․義․禮․智旣知得界限分曉, 又須知四者之中仁義是箇對立底關鍵. 蓋仁, 仁也, 而禮則仁之著; 義, 義也, 而智則義之藏. 猶春․夏․秋․冬雖爲四時, 然春․夏皆陽之屬也, 秋․冬皆陰之屬也. 故曰 ‘立天之道, 曰陰與陽, 立地之道, 曰柔與剛; 立人之道, 曰仁與義.’ 是知天地之道不兩則不能以立, 故端雖有四而立之者則兩耳.
인의(仁義)가 비록 대립해서 둘이라지만 인(仁)은 실제로 이 넷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일이고 전체적으로 말하면 네 가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 가운데 하나인) 인(仁)은 인의 본체(本體)에 해당하고, 예(禮)는 인의 절문(節文)에 해당하며, 의는 인의 단제(斷制)적인 측면이고, 지(智)는 인의 분별(分別)의 측면입니다. 이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이 같지 않지만 다 봄에서 나온 것과 같아서, 봄은 봄의 생겨남이고, 여름은 봄의 자람이고, 가을은 봄의 완성(性)이고, 겨울은 봄의 감추어진 것입니다. 넷에서 둘이 되고 둘에서 하나가 되는데 이것은 계통[統]에는 우두머리[宗]가이 있고 한데 모인 것[會]들에는 으뜸[元]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陰陽)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太極)’이라고 한 것이니, 천지의 이치는 본래 그런 것입니다.
仁義雖對立而成兩, 然仁實貫通乎四者之中. 蓋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 故仁者, 仁之本體; 禮者, 仁之節文; 義者, 仁之斷制; 智者, 仁之分別. 猶春․夏․秋․冬雖不同, 而同出乎春. 春則春之生也, 夏則春之長也, 秋則春之成也, 冬則春之藏也. 自四而兩, 自兩而一, 則統之有宗, 會之有元矣. 故曰五行一陰陽, 陰陽一太極, 是天地之理固然也.
인(仁)이 사단(四端)을 포괄하고 있고 지(智)가 사단(四端)의 끝에 위치한 것은 겨울은 감춤으로서 만물을 시작하고 만물을 끝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지(智)에는 감춘다는 뜻도 들어 있고 시작하고 끝낸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공경(恭敬) 이 세 가지는 다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지는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다만 옳은지 그른지만을 판단할 뿐이라서 감춘다고 한 것입니다. 또 측은(惻隱), 수오(羞惡), 공경(恭敬)은 다 한 측면의 도리이지만 시비(是非)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미 옳은지를 분별하고 또 그른지를 분별하니, 그것이 바로 만물을 끝내고 시작한다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인(仁)이 사단의 으뜸이 되지만 지(智)가 처음과 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이는 바로 원기(元氣)가 비록 사덕(四德)의 우두머리이지만 원(元)은 원에서 생겨나지 않고 정(貞)에서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은 대개 천지의 변화는 모이지 않으면 발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인과 지가 교제하는 지점이 바로 모든 변화의 축입니다. 그 이치는 끝없이 순환하며 빈틈이 없이 꼭 맞으니, 정자께서 말씀하신, “동정(動靜)이 끝이 없고 음양이 시작이 없다”고 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仁包四端, 而智居四端之末者, 蓋冬者藏也, 所以始萬物而終萬物者也. 智有藏之義焉, 有終始之義焉, 則惻隱․羞惡․恭敬是三者皆有可爲之事, 而智則無事可爲, 但分別其爲是爲非爾, 是以謂之藏也. 又惻隱․羞惡․恭敬皆是一面底道理, 而是非則有兩面. 旣別其所是, 又則其所非, 是終始萬物之象. 故仁爲四端之首, 而智則能成始, 能成終. 猶元氣雖四德之長, 然元不生於元而生於貞. 蓋由天地之化, 不翕聚則不能發散, 理固然也. 仁智交際之間, 乃萬化之機軸, 此理循環不窮, 吻合無間. 程子所謂動靜無端, 陰陽無始者, 此也.
섭미도에게 답함[答葉味道(賀)]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에 섭미도(葉味道)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부제(祔祭)와 연관된 제례를 논하고 있다.
보내신 편지에서 부제(祔祭)를 지낸 뒤에는 신주(神主)를 다시 정침(正寢)에 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옳지 않은 듯 합니다. 지난 번에 육자정(陸子靜: 육구연)이 모친의 상중에 있을 때 힘껏 이렇게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형인 육자수(陸子壽)는 동생의 주장을 의심해서 그 내용을 모두 편지를 보내 물어와 저는 의례(儀禮) 주석 가운데 있는 내용으로 일러 주었습니다. 육자수도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않고 경솔하게 주장을 내세우느라 제 설명을 들었음에도 주석의 내용일 뿐이지 애당초 경서(經書)의 본문(本文)이 아니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그의 말을 호되게 물리치면서 매우 자세하게 고증을 했고, 또 옛날의 예가 어떠한 지는 논할 것도 없이 다만 지금 이렇게 졸곡(卒哭)한 뒤에 곧 신령이 있을 자리를 없앤다면 효자의 마음이 어떻게 편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뒤에 육자수의 편지가 왔는데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뒷날 사죄하겠다[他日負荊]’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당시 주고 받았던 오래된 편지들을 찾을 수가 없어 다른 글을 고찰해서 논해 보겠습니다.
所喩旣祔之後主不當復于寢, 此恐不然. 向見陸子靜居母喪時力主此說, 其兄子壽疑之, 皆以書來見問, 因以儀禮注中之說告之. 渠初乃不曾細看, 而率然立論, 及聞此說, 遂以爲只是注說, 初非經之本文, 不足據信. 當時嘗痛闕之, 考訂甚詳. 且以爲禾論古襤如何, 但今只如此卒哭之後便除靈席, 則孝子之心豈能自安邪? 其後子壽書來, 乃伏其謬, 而有‘他日負荊’之語. 今偶不見當時往還舊牘, 因更以他書考而論之.
대대례(大戴禮)의 「제후천묘(諸侯遷廟)」에, “임금과 종자(從者)가 다 현복(玄服)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3년 대상(大祥)이 지난 뒤에 상복(喪服)을 벗고 나서 옮기는 것입니다. 그 고사(告詞)에서 옮긴다고만 아뢰고 부제(祔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제(祔祭)를 지낸 뒤에 신주(神主)를 정침(正寢)으로 둘려 보냈다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당으로 옮긴 것입니다. 곡량전(穀梁傳)에서는, “처마를 고치고 칠을 바꾼다”고 했고, 예지(禮志)에서는, “다시 그 사당에 흙을 바른다”고 했는데, 이것은 반드시 고조(高祖)를 태묘(太廟)의 협실(夾室)로 옮기고 나서 비로소 그 옛사당을 허물거나 흙을 발라서 조고(祖考)의 신주(神主)를 들이고, 또 새 사당에 조고를 옮기기를 기다린 뒤에 옛사당을 허물거나 흙을 발라 세로 부제를 지낼 신주를 들이는 것입니다. 좌씨춘추(左氏春秋)에서는, “특별히 정침(正寢)에 제사지낸다”고 했고, 국어(國語)에는 날마다 제사지낸다는 글이 있으니(위소(韋昭)는 “매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당에 음식을 올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주를 정침에 돌려 놓은 뒤에도 날마다 음식을 올린 것입니다. 다만 곡량전에서 말한, “연제(練祭)를 지내고 나서 사당을 허문다”고 한 것은 3년이 되기 전에 있는 일이니 이는 아마도 너무 빠른 것 같고, 예지(禮志)에서 말한, “사당에 흙을 발라 옛 신주(神主)를 옮긴다”고 한 것은 사당이 비기도 전에 갑자기 허무는 것이니 이는 인정(人情)이 아닌 듯합니다. 좌씨춘추에서 “부제(祔祭)를 지낸 뒤에 신주(神主)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경(禮經)의, “우제(虞祭)에 쓰는 신주는 뽕나무로 만든다”고 한 것과 부합되지 않고, 이른바, “사당에 증제(烝祭), 상제(嘗祭), 체제(禘祭)를 지낸다”고 한 것은 왕제(王制)의, “삼년상을 지내는 동안에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것과 부합되지 않으니(좌(左)씨가 주장한 것은 그 당시의 잘못인데 두(杜)씨가 그대로 따라서 마침내 임금이 졸곡(卒哭)한 뒤에는 복을 벗는다는 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모두 다 예의 올바른 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좌씨가 예를 말한 것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모두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국어의, “일제(日祭) 월사(月祀) 시향(時享)”은 이미 주례(周禮)의, “천신(天神)에게 교사(郊祀)를 지내고 지기(地祇)에게 제사(祭祀)를 지내고 인귀(人鬼)에게 제향(祭享)을 드린다”고 한 것과 그 명칭이 맞지 않고, 위소(韋昭)가 또 “매일 할아버지와 어버지의 사당에 음식을 올리고 매달 증조부와 고조부에게 제사지내고, 계절마다 이조(二祧)에 제사지낸다”고 했는데 이것도 제사지내는 법과는 서로 표리(表裏)가 되지만 다른 경전(經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또 신주(神主)를 이미 정침(正寢)에 돌려 놓고 날마다 제사를 지낸다면 그 궤연(几筵)은 제사지낼 때를 기다렸다가 설치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늘 설치해 놓고 치우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다 분명한 글이 없으니 다시 상세하게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如大戴禮諸侯遷廟篇云: ‘君及從者皆玄服’, 則是三年大祥之後, 旣除喪而後遷矣. 其詞但告遷而不言祔, 則是旣祔之後主復于寢, 而至此方遷于廟矣. 如穀梁云: ‘易檐改塗’, 禮志云: ‘更釁其廟’, 則是必先遷高柤於太廟夾室, 然後可以壞釁其故廟而納祖考之主. 又俟遷祖考於新廟, 然後可以壞釁其故廟而納新祔之主矣. 如左氏云: ‘特祀於寢’, 而國語有日祭之文, (韋昭曰: ‘謂日上食於祖禰.’) 則是王復寢後, 猶日上食矣. 但穀梁所謂練而壞廟, 乃在三年之內, 似恐太速. 禮志所謂釁廟而移故主, 乃不俟其廟之虛而遽壞之, 恐非人情. 左氏所謂祔而作王, 則與禮經虞主用桑者不合. 所謂烝嘗楴於廟, 則與王制喪三年不祭者不合, (疑左氏此說乃當時之失, 杜氏因之, 遂有國君卒哭而除服之說, 皆非禮之正. 大率左氏言禮多此類也,) 皆不足信. 而國語日祭月祀時享旣與周體祀天神․祭地視․享人鬼之名不合, 韋昭又謂日上食於祖禰, 月祀於曾高, 時享於二桃, 亦但與祭法略相表裏, 而不見於他經. 又主旣復寢而曰祭之, 則其几筵未知當俟臨祭而後設耶? 或常設而不除也? 此類皆無明文, 更當詳攷.
또 옛날에는 사당에 소목(昭穆)의 차례가 있어서 소(昭)는 늘 소가 되고 목은 늘 목(穆)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온 신주(神主)를 그 할아버지의 사당에서 부제를 지내게 되면 그 할아버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고, 새로 들어온 신주에게는 점차적으로 이 사당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공적인 사당이나 사적인 사당을 다 같이 한 건물에 방을 달리 만들고[同堂異室] 서쪽을 윗 자리로 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고서, 다시 왼쪽을 소로 하고 오른쪽을 목으로 하는 순서는 없앴으므로 일단 번갈아 옮길 일이 생기면 모든 방들의 신주를 다 옮기므로 새로 들어온 신주는 그 아버지의 신주가 있던 옛 방으로 들어갑니다.
又古者廟有昭穆之次, 昭常爲昭, 穆常爲穆, 故祔新死者于其祖父之廟, 則爲告其祖父以當遷他廟, 而告新死者以當人此廟之漸也. 今公私之廟皆爲同堂異室․以西爲上之制, 而無復左昭右穆之次, 一有遞遷而羣室皆遷, 而新死者當人于其禰之放室矣.
이것은 예(禮)의 중요한 절목으로 고대의 예제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예를 행하는 자들은 여전히 “할아버지에게 부제를 지낸다”는 글을 고집하니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아버지의 사당에 부제를 지내는 것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이 또한 (공자께서) 예를 아껴 양(羊)을 남겨두려던 뜻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하느냐 바꾸느냐 하는 문제에 휘둘려 똑같이 예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조정에 의견을 올려 공적인 사당과 사적인 사당을 다 회복하되 왼쪽은 소(昭)로 하고 오른쪽은 목(穆)으로 하는 제도를 만들어 그 잘못된 부분을 일거에 씻어내어 시원하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此乃禮之大節, 與古不同. 而爲禮者猶執祔于祖父之文, 似無意義. 然欲遂變而祔于禰廟, 則又非愛禮存羊之意. 竊意與其依違牽制而均不免爲失禮, 曷若獻議於朝, 盡復公私之廟, 皆爲左昭右穆之制, 而一洗其鏐之爲快乎!
섭미도에게 답함[答葉味道]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에 섭미도(葉味道)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위 편지에 이어 부제와 연관된 제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부제에 대한 설명은 지난 번에 세밀하게 고찰해서 답신을 보내려 마음먹었기 때문에 이미 보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아직도 받지 못했다는 편지를 받고보니 이전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기의 주와 춘추곡량전」은 모두 연제(練祭)를 지낸 이후에 (신주를) 사당으로 옮긴다고 했고 「대대례」 「제후천묘」의 설명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연제를 지낸 다음에는 궤연을 사당으로 옮기고서도 오히려 날마다 제수를 올렸다는 것으로 횡거(橫渠)의 설명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가묘 한 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함께 모시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미 때가 늦었으니 다만 온공(溫公: 사마광)의 의례를 따라 오늘날에 마땅한 인정을 따라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과거에 비춰볼 때 비록 조금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크게 예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군(錢君: )이 의론한 것도 아주 자세하고 정밀합니다. 다만 부제를 지낸 후에 신주를 정침에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부제를 지내는 것과 사당을 옮기는 것은 그 자체로 두 가지 일입니다. 부제는 마악 죽은 사람의 신주를 당연히 들어가야 할 할아버지 사당에 제사지내면서 아울러 할아버지를 제사지냅니다. 할아버지에게는 다른 사당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아뢰고(마침 사(士)에게 사당이 둘 있으면 이 할아버지는 이미 협실로 옮겼어야 합니다) 마악 돌아가신 분께는 이 사당으로 옮길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이미 알리고 난 후에는 다시 마악 죽은 사람의 신주를 침소에 두고 할아버지의 신주 역시 옮기지 않습니다. 이윽고 연제를 지낼 때가 되면 할아버지의 신주를 다른 사당이나 협실에 옮기고, 마악 죽은 사람의 신주는 할아버지의 신주가 계셨던 묘에 옮길 뿐입니다. 아직 옮기기 전이나 이미 옮기고서도 상제를 치루지 않았을 때는 궤수는 다른 때와 똑 같이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사당은 저절로 비지 않게 되고, 침소에도 궤수가 놓이게 되어 모두가 전군이 걱정한 것처럼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육자수 형제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이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 때에도 이미 부제를 지낸 다음에 신주를 정침에 돌려다 놓는다고 일러주었는데도 자정은 완강하게 그렇지않다고 여겨, 곧장 졸곡 때에 부제를 지낸 다음에 궤연을 치우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효자의 마음가짐도 아닐뿐더러 이미 예의 큰 근본을 잃은 것입니다. 자정은 끝내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자수는 마침내 수긍하고서 글을 보내 사죄하면서 ‘가시나무를 지고 죄를 청하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지금 전군의 논의는 비록 자정처럼 박하지는 않다지만 의심스러워하는 내용은 또한 잘못입니다. 미도는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전군과 강론하고서 내게 일러주면 좋겠습니다.
祔說向嘗細考, 欲以奉報, 意謂已遣. 今承喩却末收得, 必是不曾遣去. 然今又尋不見. 大抵禮注穀梁皆謂煉而遷廟, 大戴禮諸侯遷廟其說亦然, 此是古人必以鰊而遷其几筵於廟而猶日祭之, 如橫渠之說. 然今人家廟只有一間, 祖考同之, 豈容如此? 况又已過時, 只得從溫公之儀, 亦適當世人情之宜. 雖孜之於古少有不同, 要未爲大失禮也. 錢君所諭亦甚精詳, 但謂旣祔之後主不當復于寢, 則似未安. 蓋祔與遷自是兩事, 祔者, 奉新死之主以祭于其所當入之祖廟, 而幷祭其祖, 若告其祖以將遷于他廟(若適士二廟, 則此祖已當遷于夾室矣.), 而告新死者以將遷于此廟也. 旣告已, 則復新死者之主於寢, 而祖亦未遷. 比至於練, 乃遷其祖入他廟或夾室, 而遷新死者之主于其廟耳. 其未遷于廟與旣遷而未祥, 饋羞自如他日. 如此則廟自不虛, 寢亦有饋, 皆非如錢君所慮也. 頃年陸子壽兄弟親喪, 亦來問此. 時以旣祔復主告之, 而子靜固以爲不然, 直欲於卒哭而祔之後徹其几筵. 子壽疑而復問, 因又告之, 以爲如此則亦無復間其禮之如何, 只此卒哭之後便徹几筵, 便非孝子之心, 已失禮之大本矣. 子靜終不謂然, 而子壽遂服, 以書來謝, 至有‘負荊請罪’之語. 今錢君之論雖無子靜之薄, 而其所疑亦非也. 不知味道看得如何? 幸更與錢講之, 復以見告也.
섭미도에게 답함[答葉味道]
【해제】 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에 섭미도(葉味道)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상례와 연관된 예절을 논하고 있다. 상복의 종류에 따른 음식과 기거 생활, 상례 절차에 따른 행위의 규범, 경서에 명문화되지 않은 경우에 대한 상례의 적용 등을 논하고 있다.
오복(五服)에 따른 음식과 거처의 절차에 대하여 지난 번에 그 대략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만 「상대기(喪大記)」에서, “숙모(叔母), 세모(世母), 고주(故主), 종자(宗子)는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다”고 한 문장 주석에, ‘의복(義腹)은 은혜가 가볍다’고 했는데, 죽은 순간부터 장례지내기 전까지 공통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 구석진 데를 항하고만 있어도 방안 사람 모두가 즐겁지 않은 법이니, 복이 가볍지 않은데도 음식과 거처를 유독 절제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五服飮食居處之節, 昨嘗閠其略. 但喪大記有 ‘叔母․也母․故王․宗子, 食肉飮酒’之文, 注云‘義服恩輕’, 不知自始死至未葬之前, 可以通行何如? 但一人向隅, 滿堂不樂, 服旣不輕, 而飮食居處獨不爲之制節, 可乎?
예기에 이미 명시된 문장이 없어서 억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제 생각에는 상차(喪次)에 있으면 마땅히 본복(本服)의 제도와 같이 해야 할 것이고, 사가(私家)에 돌아왔으면 평소처럼 하는 것이 혹 맞을 거 같습니다.
禮旣無文, 不可强說. 竊意在喪次, 則自當如本服之制, 歸私家則自如, 其或可也.
「상대기(喪大記)」에, “삼년상(三年喪)에서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는 정사(政事)에 종사하여 일을 보고 길제(吉祭)를 지낸 뒤에는 정침으로 돌아가며, 기년(期年)동안 여막(廬幕)에 묵고 상이 끝날 때까지 안에서 일을 보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해서 하는 일이고, 아내를 위하여 자최(齊衰) 기년(期年)과 대공(大功)으로 포최(布衰) 아홉달을 입는 자는 다 석달 동안 안에서 일을 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소공복(小功服)과 시마복(緦麻服)에 대해서는 유독 분명한 문장이 없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喪大記: 三年之喪, ‘禫而從御, 吉祭而復寢. 期, 居廬, 終喪 不御於內者, 父在, 爲母爲妻齊衰期者, 大功布衰九月者, 皆三月不御於內’. 不知小功緦獨無明文, 其義安在?
예기에 이미 명시된 문장이 없는 만큼 곧 평상시처럼 해야할 것이니, 이는 복(服)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禮旣無文, 卽當自如矣, 服輕故也.
친영(親迎)한 남녀가 상(喪)을 만났을 때의 예에 대해서는 증자(曾子)께서 상세하게 질문하셨습니다. 지금 남자가 여자 집에서 혼례(婚禮)를 치루고 오랫 동안 본가(本家)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러한 상태에서 만약 사위의 부모가 죽었다면 여자의 분상(奔喪)은 어떻게 해야 하며, 만약 여자의 부모가 죽었다면 그 여자가 입을 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親迎男女遭喪之禮, 曾子問之詳矣. 今有男就成於女家, 久而未歸, 若壻之父母死, 女之本喪如之何? 若女之父母死, 其女之制服如之何?
이것은 시작부터 옳지 않은 것이니, 우선은 도중(道中)에 상을 당했을 때의 예(禮)를 모방해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뒤라면 상복은 당연히 강등(降等)을 해야 하니 상복(服)을 벗고 나서 남편의 집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此乃原頭不是, 且放在塗之禮行之可也. 然旣嫁則服自當降, 旣除而婦夫家耳.
증자가 “혼례를 치루는 도중에 납폐를 거치고 이미 성혼할 날을 잡았는데 여자의 부모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공자께서는 “사위의 집안에서 사람을 시켜 조문한다. 사위의 부모가 죽은 경우에도 여자의 집안에서 사람을 시켜 조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혼할 날을 잡지 않았을 경우에만 조문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입니까?
曾子問曰: ‘昏禮旣納弊有吉日, 女之父母死, 則如之何? ’ 孔子曰: ‘壻使人弔. 如壻父母死, 則女之家亦使人弔’ (云云.) 如未有吉日, 獨不當弔乎?
아마도 (성혼할 날을 잡지 않았다고 해서) 조문하지 않는다는 도리는 없을 것이다.
恐無不弔之理.
하(賀)가 지난 겨울에 모시고서 고금의 제도를 비교 검토할 때, 말씀하시기를 상중의 관복은 길복과 어울려야 한다고 하셨고, 그 제도와 등급에 대해서도 대략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친척 중에 어머니의 상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온공(溫公)의 넓은 소매의 난삼(欄衫)․ 베로 만든 복두(幞頭)을 써서 길복과 서로 어울리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또 수질(首絰)․요질(要經)을 씀으로서 온공이 베로 복두를 만들라[布四脚]고 한 것을 무시했습니다. 이렇게 해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賀去冬侍坐, 承斟酌古今之制, 謂居喪冠服當與吉服稱, 其制度等級已略言及. 近見親戚有居母喪, 用溫公寬袖欄衫․布幞頭, 取其與吉服相符, 而又加首絰․要絰而去溫公之布四脚, 不知可行否?
이제 정화오례(政和五禮)를 살펴보니 상복의 경우에는 오히려 옛 제도를 썼습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실행한다면 특별히 제도를 고쳤다는 혐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길복 경우에는 반드시 적절한 제도를 찾아야만이 함께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今考政和五禮, 喪服却用古制, 準此而行, 則亦無特然改制之嫌. 却恐吉服須講求一酌中制度, 相與行之耳.
옛날에 선생을 모실 적에 아침 일찍 영당(影堂)에 들어가 향을 피운 뒤에 절을 하면서도 저물녘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으시던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昔侍先生, 見早晨人影堂焚香展拜, 而昏暮無復再入, 未知尊意如何?
지난 번에 지금의 조승상(趙丞相)이 매일 영당에서 혼정(昏定)의 예를 행하되 더러 잔치를 벌이고 나서 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는 온당하지 않다고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매번 늘 옛날의 예에 따라 새벽에만 들어가 절을 하는 것입니다.
向見今趙丞相日於影堂行昏定之禮, 或在燕集之後, 竊疑未安, 故每常只循舊禮晨謁而已.
「잡기(雜記)」에, “고자매(姑姉妹)가 그 남편이 죽은 뒤에 남편의 집에 형제가 없으면 남편의 친척들로 하여금 主喪을 하게 하고, 아내의 집에서는 비록 친척이라도 주관하지 않는다(이것은 고자매가 자식이 없이 혼자 지내다가 죽은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남편에게 만약 친족(親族)이 없거나 앞 뒷집과 동 서의 집에도 없으면 이장(里長)이 주관한다. 어떤 사람은 아내의 집에서 주관은 하되 남편의 집안에서 부제(祔祭)를 지낸다고 하였다” 하였는데(아내의 집에서 주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남편의 집이란 그 조고(祖姑)이다). 지금 저에게 고모가 있는데 그 남편의 ○○은 부모의 집으로 돌아간 데다가 이미 늙으셨기 때문에 뒷날 형제와 조카 외에는 주관할 자가 없습니다. 다만 이미 부제지낼 곳이 없다고 하여 어떻게 차마 그 신(神)이 돌아갈 곳조차 없는 지경이 되도록 그냥 두겠습니까?
按雜記, 姑妓妹其夫死而夫黨無兄弟, 使夫之族人王喪, 妻之黨雖親不主. (此讀姑妓沫無子, 寡而死也.) 夫若無族矣, 則前後家, 東西家, 無有則里尹主之. 或日主之而附於夫之黨. (妻之黨自主之, 非也, 夫之黨其祖姑也.) 今賀有姑, 其夫家○反歸父母家. 旣耆耄, 他日捨兄弟姪之外, 無爲主者. 但不知旣無所祔, 豈忍其神之無歸乎?
옛 법이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이웃의 이장(里長)이 결코 다른 사람의 친상(親喪)을 제사지내려고 하지 않은 것이니, 그렇다면 사리에 따라서 별실(別室)에서 제사지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古法旣廢, 鄰家里尹決不肯祭他人之親, 則從宜而祀之別室, 其亦可也.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을 갔으면 부모를 위해 기년복(朞年服)을 입습니다. 전(傳)에서는, “참최복(斬衰服)을 두 번 입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제 아내가 모친을 잃고 마침내 장례를 치룬 뒤 졸곡(卒哭)하고 나서 돌아왔는데, 「상대기(喪大記)」를 보니, “부모의 상을 당하면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돌아오고 기년복(朞年服)과 구월복(九月服)은 장사를 지낸 뒤에 돌아온다”고 하였으니, 제가 비록 아내의 집에 가서 그 달 수를 다 마치게 했지만 그냥 돌아와서 다 채우지 않은 달수는 어떻게 메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이 혹 어머니 집에 있는데 서로가 불편한 점이 있어 연제(練祭)가 지날 때까지의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없다면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女子適人, 爲父母服期, 傳云: ‘不貳斬也.’ 賤婦喪母, 遂於旣葬卒哭而歸. 繼看喪大記曰: ‘喪父母, 旣練而歸. 期九月, 旣莽而歸.’ 注云: ‘歸謂婦夫家也.’ 其旣葬而歸者, 乃婦人爲祖父母․爲兄弟之爲父後者耳. 賀雖令反終其月數, 而誤歸之月, 不知尙可補埴乎? 因思他人或在母家, 彼此有所不便, 不可以待練之久, 其不可以不歸也, 又如之何?
메꾼다는 것은 오늘날의 추복(追服)과 같은 것이니 후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혹 불편한 점이 있으면 돌아가되 그 거처와 음식의 절차는 바꾸지 않아도 되지만 의복(服)은 바꾸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또한 내 생각을 가지고 말한 것인데 너무 심하다는 비난을 받을까 매우 염려됩니다.
補塡如今追服, 意亦近厚. 或有不便, 嚴而不變其居處飮食之節可也. 衣服則不可不變. 此亦以意言之, 深恐不免汰哉之諸也.
섭미도에게 답함[答葉味道]
【해제】 이 글은 경원 5년(기미, 1199, 70세)에 섭미도(葉味道)에게 답하는 편지로 추정된다. 섭미도의 과거 응시 결과를 묻는 일상적인 안부 편지이다.
시험 결과는 뜻대로 되어 합격자 명단을 아뢸 때 분명히 앞 줄에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문생(門生)이 좌주(座主)를 뵙는 예는 등수가 높다면 관례상 뵈어야 하기 때문에 즉시 폐지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등수가 그렇게 높지 않다면 굳이 나아가 뵙지 않아도 됩니다. 한경(漢卿: 輔廣)은 분명 때때로 만날 것인데 사방에는 또 다시 어떤 벗들이 있습니까? 도성에서의 모든 일은 마땅히 근실하고 치밀하게 하는 것을 최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과거가 끝난 뒤에 이곳에서 한 번 모일 수 있겠습니까? 이경자(李敬子: 李燔)는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 있는데 그 뜻이 여전히 견고하고 아주 간절하여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의리(義理)를 보는 시각이 그다지 철저하고 세밀하지는 않습니다.
省闈想甚得意, 奏名必在前列. 但尙未見後場題目, 不知主司意鄕如何. 要之得矢已有定分, 人徒自爲擾擾耳. 改字不若只就舊名之爲安. 門生之禮, 若在高等, 恐例須謁見, 卽不可廢. 若只在行間, 亦不必詣之也. 禮書未能得了, 而衰病日侵, 恐未必能究竟此事也. 漢卿必時相見, 四方更有何朋友在都下? 凡百宜以謹密爲上. 事了, 能一過此相聚否? 李敬子尙留此, 志尙堅苦, 不易得. 但看義理未甚明徹細密耳.
서거보(徐居甫)에게 답함[答徐居甫]
【해제】이 글은 서우(徐寓)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서우가 주자를 처음 만난 시기가 1190년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저술 년대는 미상이다. 호굉(胡肱)의 ‘천리와 인욕이 함께 간다’는 주장과 주자의 ‘인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다’는 주장 등에 관해 논하고 있다.
우(寓: 徐寓)는 지난 번 오봉(五峰: 호굉)이 말한 “천리와 인욕은 행위는 같지만 실정은 다르고, 본체는 같지만 작용은 다르다”는 두 구절을 보았습니다. 본체는 같은데 작용은 다르다는 주장에 대해 상당한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온당치 않은 곳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에서야 천리는 바로 자연스러운 이치이고 인욕이란 스스로를 속이는 감정이며, 자연을 따르지 않으면 바로 사사로운 인위요, 천리가 아니면 바로 인욕이어서, 이 두 가지가 저절로 구별되어 인심에서 발동하는 것이 그 자체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寓)가 항상 행동거지에서 징험해 보면 진정으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천리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 속이 저절로 공정해져 거리낌이나 부끄러움이 없었고, 저절로 관대해져 부족한 것이 없었으며, 사람이나 외물을 대할 때 어긋나고 거스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학자들이 언제나 이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요컨대 이 마음이 보존될 때에는 곧 이와 같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이와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책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면서 언제나 이 마음이 끊이지 않도록 한다면 천리는 언제나 보존될 것입니다. 만일 방만한 때에 인욕이 발동하는 대로 두게 되면 마음이 저절로 급하게 쫓기는 것처럼 거칠고 경솔하게 되어, 공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좋지 않은 일을 저지르게 되면 다른 사람이 알기를 원치 않더라도 마음 속에서 저절로 부끄러움이 일어납니다. 더구나 스스로 가릴 수 조차 없는데 어떻게 천리 속에서 인욕을 볼 수 있고, 인욕 속에서 천리를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둘 가지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는 분명하니 ‘본체를 같이 한다’고 말해서도 안 되고 ‘행위가 같다’고 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본래 이익을 추구하면서 짐짓 (의리를) 가탁해서 행위하는 것이 참으로 의리를 실천하는 자의 자취와 서로 비슷한 경우에나 이처럼 행위가 같다고 말하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쓴 천리․인욕이란 글자가 조금은 분별을 한 듯 한 데 옳은 지는 모르겠습니다.?
寓向看五峰言 ‘天理人欲同行而異情, 同體而異用’兩句, 頗疑同體異用之說, 然猶未見眞有未安處. 今看得天理乃自然之理, 人欲乃自欺之情, 不順自然, 卽是私僞, 不是天理, 卽是人欲, 二者面目自別, 發於人心自不同. 寓常驗之擧動間, 苟出於天理之所當爲, 胸中自是平正, 無有慊愧, 自是寬泰, 無有不足, 接人待物自是無乖忤. 學者雖不常會如此, 要是此心存時便如此, 此心不存則不如此. 須是讀書講義理, 常今此心不間斷, 則天理常存矣. 若有放慢時節, 任人欲發去, 則胸中自是急迫粗率, 自是不公不正. 爲不善事, 雖不欲人之知, 胸中自是有愧赧. 然亦自不可揜, 如何要去天理中見得人欲, 人欲中見得天理? 二者夐然判別, 恐說同體不可, 亦恐無同行之理. 若曰心本爲利, 却假以行, 與那眞於爲義者其迹相似, 如此說同行猶可. 今下天理人欲字, 似少分別. 未審是然否?
예전에 흠부(欽夫: 장식)과 서로 논의하면서 이 두 구절 중에 ‘행위는 같고 실정은 다르다’고 한 것은 옳지만, ‘본체는 같고 작용은 다르다’고 한 것은 틀리다고 했으니, 다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頃與欽夫商量, 此兩句謂同行異情者是, 謂同體異用者非, 請更詳之.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키며 인에 의지한다”는 장은 논어집주의 설명이 잘 갖추어졌습니다. 우(寓)가 보기에는 한 구절이 다른 한 구절을 긴밀하게 이어받고 있습니다. 도에 뜻을 두면 낱낱의 마음가짐과 생각들이 일상 생활의 인륜 관계에서 당연히 실행해야 하는 것들에 있어서 결코 이익과 욕망이란 측면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뜻이 안정됩니다. 덕을 지키면, 예를 들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웃사람을 공경하는 등의 일은 모두 내가 스스로 얻어서 실행하는 것입니다. 비춰보지 못하는 때가 있을까 걱정되거든 당연히 지키고 붙잡고서 잃지 않는다면 내가 얻은 것들이 진실해 집니다. 인에 의지하면 본심의 덕을 온전히 해서 사사로운 인욕이 끼어들지 못하게 되어 끊임없는 창조의 본체가 저절로 그치지 않고 유행합니다. 공부가 여기에 이르면 또한 농익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구절은 커다란 강령을 확립하는 데서부터 이와 같이 공부가 정찰한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도에 뜻을 두었다는 것은 부자(夫子: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둔 곳으로 등급과 순서로 말했을 뿐입니다. 덕을 지킨다는 것은 예를 들자면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다”는 종류와 같아서 능히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인에 의지한다는 것은 예를 들자면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인을 어기지 않음을 말합니다. ‘예에 노닌다’는 것은 ‘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거는 문장을 배운다’는 건인데, 이런 설명이 통할는지 모르겠습니다.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一章, 集注之說備矣. 寓看來一節密似一節, 志於道則心心念念惟在人倫日用之所當行者, 決不向利欲邊去, 其志定矣. 據於德, 如孝親悌長等事, 皆吾所自得而行之者, 慮有照管不到時節, 當據守之而勿失, 則吾之所得者實矣. 依於仁, 則全其本心之德而不間於人欲之私, 生生之體自流行不息. 工夫至此, 亦云熟矣. 此三節自立脚大綱以至工夫精察如此. 志道卽夫子志學處, 以等級次第言耳. 據德大略如貧而無諂․富而無驕之類, 謂其能守也. 依仁如貧而樂․富而好禮, 謂其不違仁也. 游於藝是行有餘力, 則以學文. 未知此說通否?
이 문단의 견해는 좋습니다. 다만 인용한 가난과 부유함은 서로 (경우가) 비슷하지 않습니다.
此段看得好, 但所引貧富者不相似.
‘효와 우애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는 장의 주에서는 ‘인이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다’라고 했습니다. ‘안연이 인을 물었다’는 장에서도 또 “인이란 마음의 온전한 덕‘이라고 했습니다. 두 곳의 설명을 합쳐서 유추해 보았는데, 옳은 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음의 덕[心德]은 낳음의 덕[生德]입니다.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으로 마음을 삼기 때문에 사람도 이것을 얻어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이를 일러 인(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본체는 천지와 같고 만물을 관통하며, 그 이치는 모든 선을 통합하고 사단을 포함합니다. 그 이름과 모양을 논하자면 조화롭게 화합하고 원만하고 순수하며, 크게 합치고 품고 길러주며, 언제나 낳고낳아 죽지 앟아야만이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건(乾)의 원(元)이요, 네 계절에서는 봄입니다. 인(仁)으로 네 가지를 주재하면 그 영역에 따라 수오․사양․시비로 나뉘어 나타나서 각기 그 자리에 적당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만일 인으로 주재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주재하면 서로 부응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고, 서로 어긋나고 순조롭지 않다는 것만을 알게 될 뿐입니다. 또 천지는 그들이 주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잃게 되고 사람도 탄생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인이 오로지 마음의 덕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니 어떻게 기강이 되고 통괄 주재하는 오묘함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공경함과 사랑의 이치란 단지 효도와 우애라는 측면에서 의리를 발명한 것일 뿐입니다. 효도와 우애로부터 그 근본을 미루어 탐구해보면 오직 이 이치가 있을 뿐이니, 인으로 효제의 근본을 삼는다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효도와 우애로부터 그 작용을 넓히고 채워나가면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사랑하는 일이 되니, 인을 실천하는 것은 효도와 우애로서 근본을 삼는다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음의 덕이란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요, 사랑의 이치란 부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말한 근본은 드러나서는 부분적으로 말한 작용이 되고, 부분적으로 말한 작요응 전체적으로 말한 근본에 합일되어 크다 작다, 근본이다 말단이다는 것으로 둘로 나눠서는 안 됩니다. 인도(仁道)가 밝지 못해지면서부터 사람들은 기품에 얽매이고, 사욕에 가리우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낳음의 도는 그치고 천리는 운행되지 않았으며, 막히고 거리가 생겨 관통하지 못하게 되어씃ㅂ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병이 들면 피와 기운이 사지로 옮겨지지 않아 손과 발이 마비되어 아프고 가려운 줄도 모르게 되면 의사들도 불인(不仁)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인을 체득할 수 있으니 반드시 조금의 사사로움조차 끊임없는 창조의 본체에 끼여들지 못하도록 하고, 그 본체가 유행하면서서 관통해서 흘러다니도록 하면서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 없고, 모든 것에 미치지 않음이 없게 한 다음에야 그 마음의 덕과 사랑의 이치를 완전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자(顔子)의 극기와 중궁(仲弓)의 경과 서[敬恕], 성인께서 머무르실 적에는 공손하게, 일을 처리할 때에는 공경하게,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히 하며,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것을 생각하는 곳 등이 모두 공부를 치밀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반드시그 사사로움을 씻어 없애버려 조금도 남아있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인을 불러 채우고 자라 통달하게 하고, 어느 곳이나 통하지 않음이 없게 한다면 마음의 덕은 저절로 완전해 지고 인은 바로 나에게 있게 됩니다. 엄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孝弟爲仁之本’章注謂仁者心之德, 愛之理, ‘顔淵問仁’章又謂仁者心之全德‘. 合二處推明其說, 未審當否. 心德則生道也. 蓋天地以生物爲心, 故人得之以爲心者謂之仁. 其體則同天地而貫萬物, 其理則統萬善而包四端. 論其名狀, 則冲和溫粹, 渾龐涵蓄, 常生生不死, 乃得謂之仁焉. 此卽乾之元, 在四時而爲春者也. 以仁而主四者, 則隨其地分, 發爲羞惡, 爲諸辭遜, 爲是非, 莫不各當其所. 若不以仁爲主, 而以別箇爲主, 則但見不相對副, 但見乖隔不順. 且夫地失其所以爲主, 而人亦不得其所以生者矣. 此所以言仁專一心之德者, 豈不以其維綱管攝之妙乎? 敬愛之理, 只從孝弟上發明. 自孝弟而推原其本, 則惟有此理耳. ․所謂以仁爲孝弟之本是也. 孝弟而擴充其用, 則爲仁民愛物之事, 所謂爲仁以孝弟爲本是也. 竊恐心之德以專言, 愛之理以偏言. 專言之本則發爲偏言之用, 偏言之用則合於專言之本, 不可以小大本末二之也. 自仁道之不明也, 人惟拘於氣禀, 敝於私欲, 則生道有息而天理不行, 否隔壅塞, 不能貫通. 如人疾病, 血氣不運於四支, 則手足頑麻, 不知痛癢, 而醫者亦謂之不仁. 人能有以體乎仁, 必其無一毫之私得以間其生生之體, 使之流行貫注, 無有不達, 無有不偏, 然後爲能全其心之德․愛之理也. 此顔子之克己, 仲弓之敬恕, 與聖人居處恭․執事敬․博學篤志․切問近思等處, 正欲使工夫縝密也. 必磨洗蕩滌其私, 使無一毫之留, 所以喚此仁, 使之充長絛達, 無不周偏, 則心德自全而仁斯在我矣. 伏乞嚴喩.
이 문단의 큰 뜻은 옳습니다. 다만 사랑의 이치는 ‘작용’으로 말할 수 없을 뿐입니다. 다시 음미해서 오래되어 마음 속에 젖어들게 되면 저절로 잘잘못을 알 것입니다.
此段大意得之, 但愛之理未可以用言耳. 更味之, 久當浹洽, 自見得失也.
‘경(敬)’이란 한 글자를 처음에는 두 가지 뜻[兩體]이 있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나에 집중해서 옮기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가 언제나 보존되어 딴 마음이 일어나거나 다른 곳으로 내달려가는 것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을 당하면 조심스런 마음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감히 태만하거나 쉬이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요즘들어 일을 당해서 조심스런 마음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면 하나하나의 마음과 생각이 언제나 이 일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여럿으로 갈라지는 미혹이 없어, 마음은 넓고 몸은 쭉펴지는 기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에 집중해서 옮겨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이 움직이되 둘 셋의 잡념이 없는 것은 이 하나에 집중한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되 사악한 망념이 없는 것 역시 이 하나에 집중한 것입니다. 하나에 집중한다는 것은 움직임과 고요함을 겸해서 말하는 것으로, 고요하면서 일이 없다는 것은 오직 오고가며 드나드는 것이 그친 상태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敬’之一字, 初看似有兩體, 一是主一無適, 心體常存, 無所走作之意; 一是遇事小心謹畏, 不敢慢易之意. 近看得遇事小心謹畏是心心念念常在這一事上, 無多岐之惑, 便有心廣體胱之氣象. 此非主一無適而何? 動而無二三之雜者, 主此一也. 靜而無邪妄之念者, 亦主此一也. 主一蓋兼動靜而言, 靜而無事, 惟主於往來出人之息耳. 未審然否?
‘하나에 집중하는 것[主一]은 움직임과 고요함을 겸해서 말한다’고 한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드나드는 것이 그쳤다는 구절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謂主一兼動靜而言是也, 出入之息, 此句不可曉.
우(寓)가 하루는 번수선생(蕃叟先生: 陳武)을 방문했는데, 맹자의 ‘마음을 극진히 발휘하고 본성을 안다’는 대목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진선생(陳先生)은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만이 비로소 얻게 된다. 만일 알지 못하면 일을 위해 사소한 행위를 하더라도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우(寓)는 이 설명이 아주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선생은 제게 그 마음을 극진히 발휘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물었습니다. 우(寓)는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통솔하고, 온갖 이치를 모아 만물에 오묘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극진히 발휘하기가 가장 어렵지만 오직 본성을 알아야 만이 그 마음을 극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극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 본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성이란 하늘에서 얻은 이치로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임금의 인, 아버지의 자애로움, 자식의 효도에서 일상 생활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 등이 모두 근원과 유래가 되는 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앎에 조금이라도 극진하지 못한 점이 없고, 한 마디조차 극치에 이르지 못한 곳이 없은 다음에야 내 마음의 본체가 지극하게 밝고 통하며, 가리고 미혹된 곳이 없어지니, 이것이 바로 그 마음을 극진히 발휘했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라고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지 않겠는가? 단지 이 마음을 극진히 발휘하기만 하면 존재하며 주재하는 것과 머무르며 활동하는 것이 이치에 합치되게 하면 이것이 바로 이 마음을 극진히 발휘햇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이미 극진히 발휘되면 저절로 본성을 알 수 있게 되니, 예를 들어 귀가 정성을 듣고, 눈이 정색을 보며, 행동거지가 예에 합치하는 것이 모두 이 본성대로입니다.” 우(寓)는 “예전에 선생과 어른들에게 들은 것은 이와 다릅니다. 눈과 귀, 손과 발은 단지 형체[形]일 뿐이요, 눈과 귀, 손과 발이 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본성입니다.” 진선생은 “내가 주장(朱丈)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일 뿐입니다. 그대는 결국 나의 설명이 옳다는 것은 스스로 알았으면서도 나와는 생각을 쓰는 것이 다르니 아마도 갑자기 일치를 보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寓)는 이와 같이 들었는데, 그 정밀한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마음을 극진히 발휘한 사람은 그 본성을 안다”는 구절에서, ‘진(盡)’자의 위에 ‘자(者)’자는 아래에 응당 ‘야(也)’자가 있어야 할 것인데, 모르겠습니다만 맥락을 응당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우가 대답한 내용이 선생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아닙니까?
寓一日訪蕃叟先生, 因說孟子盡心知性處. 陳先生云: ‘人須是知得始得, 若不知得, 就事上做得些小, 濟得甚事? ’ 寓以爲此說甚然. 陳先生問盡其心者作如何說, 寓對言: ‘心統性情․會衆理而妙萬物者也. 心最難盡, 惟是知得性, 方能盡得心. 能盡其心者, 以知其性故也. 蓋性者, 理之得於天而自然者也. 如君之仁, 父之慈, 子之孝, 以至於日用之所當爲者, 皆有箇根原來歷處. 惟知之無一毫之不盡, 無一節之不極, 然後吾心之體至通至明, 無所蔽惑, 斯爲盡其心矣.’ 陳先生以爲不然, 乃言: ‘甚事不從心生? 只要盡得此心. 凡所存主, 凡所動作起居使合於理, 便是盡得此心. 此心旣盡, 則自能知性. 如耳之聽正馨, 目之視正色, 手足擧動合禮, 皆是性.’ 寓云: ‘向所聞於先生長者與此不同, 耳目手足只是形, 耳目手足之所以能如此者方是性.’ 陳先生曰: ‘某之所以與朱丈不同者, 正以此耳. 公下稍自知某說爲是, 某之用意不同, 恐難猝合.’ 寓所聞如此, 未得其精. 但 ‘盡其心者知其性也’ 一句, ‘盡’ 上一箇 ‘者’ 字, 下應一箇 ‘也’ 字, 不知語脈當如何說? 寓之所對, 不畔尊旨否?
이 문단에 논한 내용은 아주 좋습니다. 다만 결국 오래도록 진보하지 않는다면 거꾸로 그의 설명을 옳다고 여길까 걱정될 뿐입니다. 지금은 정말로 힘을 잘 쓰고 있습니다.
此段論得甚好, 但恐下稍不長進, 則反見彼說爲是耳. 今日正好著力也.
우(寓)가 예전에 도원(道院)에 있을 때, 친영(親迎)의 예를 물었더니, 선생님께서 친영 이후는 온공(溫公)을 따르고, 며느리가 문을 들어섰다는 대목 이후는 이천(伊川)을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시댁의) 사당에 인사드리는 것은 꼭 석 달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단지 보름 정도만 늦추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옛 사람들이 배필을 중시하고 대를 잇는다는 것을 드러내는[著代] 의리를 조금이라도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며느리가 문을 들어서면 즉 사당에 인사를 올리는 것은 온 세상이 그렇게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향리의 여러 어진 이들이 좌씨(左氏)의 ‘배우자를 앞세우고 조상을 뒤로 미룬다[先配後祖]’는 주장을 상당히 신뢰하는데, 후세의 어지러운 말들이 믿고 따르기에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과거의 예를 따라 올바르게 하는 것만도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寓向在道院, 問親迎禮, 先生言親迎以來從溫公, 婦人門以後從伊川. 云廟見不必候三月, 只遲之半月亦可. 蓋少存古人重配著代之義. 今婦人入門卽廟見, 蓋擧世行之. 近見鄕里諸賢頗信左氏先配後祖之說, 豈後世紛紛之言不足(5-2989)據, 莫若從古爲正否?
영가(永嘉) 연간에는 의례(儀禮)를 다루는 학문이 있었으니, 이 일의 시시비비를 알 것이다. 좌씨(左氏)는 본시 다 믿기는 힘들지만 그 뒤에 친영을 설명한 곳에는 궤연(几筵)을 펴고, 사당에 아뢰고 왔다는 말이 있는데, (좌전에서) ‘조상을 뒤로 미룬다[後祖]’고 기록한 것은 다만 이 예를 어긴 것을 꾸짖은 것인 듯 하다.
永嘉有儀禮之學, 合見得此事是非. 左氏固難盡信, 然其後說親迎處, 亦有布几筵告廟而來之說, 恐所謂後祖者, 譏其失此禮耳.
예에 의하면 “지자(支子)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종자(宗子)에게 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 아들의 적자가 작위를 계승하게 되면 그 둘째 아들이 비로소 종자(宗)를 세울 수 있습니다. 대부․사가 종자를 적자로 삼는 것은 위로는 조상의 소중함을 계승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영원한 전통을 드리우기 위해 조금도 게으를 수 없는 것입니다. 후세에 예교가 밝지 못하게 되어 사람들의 집안에서 이성(異姓)으로 후사를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본 일인데, 어느 마을에 한 집에 두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형이 일찍 죽어 후사가 없다 보니 마침내 이성(異姓)을 후사로 세웠습니다. 그 뒤에 동생에게 아들이 생겼지만 제례(祭禮)를 거행하게 되자 이성인 아들이 이미 적자인 상주노릇을 하여 모든 제주(題主)와 축판(祝板)에다 그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만약 종법(宗法)으로 논한다면 제사는 오직 종자(宗子)가 주관해야 하고, 다른 지자(支子)는 다만 그 제사에 참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성으로 후사가 된 자는 이미 조상의 혈통을 전해 받은 자가 아니거늘, 마침내 그를 종자로 삼아 그 제사를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고자 한단 말입니까? 제 생각에는 도제(從弟) 가운데 나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제사를 공동으로 주관하게 해서 역시 함께 이름을 드러내어 제례(祭禮)를 행하게 한다면 조상의 영혼이 혹 흠향(歆饗)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응용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禮, 支子不祭, 祭必告宗子. 然諸子之嫡子有是襲爵, 其次子始立宗. 大夫․士以嫡子爲宗, 所以上承祖宗之重, 下垂百代之傳而不敢少慢者. 後世禮敎不明, 人家多以異姓爲後. 寓所見鄕里有一人家, 兄弟二人, 其兄早亡無後, 遂立異姓爲後. 後來弟却有子, 及擧行祭禮, 異姓子旣爲嫡主, 與凡題王及祝版皆用其名. .若論宗法, 祭惟宗子主之, 其他支子但得預其祭而已. 今異姓爲後者旣非柤宗氣血所傳, 乃欲以爲宗子而專主其祭乎? 寓意欲以從弟之長者共王其祭事, 亦同著名行禮, 庶幾祖先之靈或歆享之. 不知可以義起否? 伏乞裁敎.
이성을 후사로 세운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또한 올바른 예를 따르기가 어려우니, 다만 제사에 참여했을 때에 지성으로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면 됩니다.
立異姓爲後, 此固今人之失, 今亦難以追正. 但預祭之時, 盡吾孝敬之誠心可也.
조상(弔喪)하는 날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복(服)이 있는 친족이나 정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인을 조문했다면 조문할 때에만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고, 조문을 마치면 평상시대로 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과 평소 소원하게 지냈던 사람은 다만 평소처럼 하던 것을 조금만 변화시켜 옛 예의 뜻을 지키면 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옳다고 생각하시는지요?
行弔之日不飮酒食肉, 此古人因變而變常, 爲得情性之正. 然先王制禮, 因人情而爲之節文, 必情與文稱, 乃爲得宜. 寓恐弔喪之曰不飮酒食肉, 可以施於有服之親或情分之厚者. 若弔泛常之人, 只當於行弔之時不飮酒食肉, 弔畢則復(5-2990)常, 旣與死者平時分疏, 但則少變平日以存古意可也. 未審尊意以爲然否?
복(服)이 있으면 조상하는 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지 않을 뿐만이 아니지만 그 외에는 친분의 정도를 보고 하면 됩니다.
有服則不但弔日不飮酒食肉矣, 其他則視情分之厚薄可也.
서거보에게 답함 答徐居甫
【해제】서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이다. 중용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중용 “군자의 도는 넓고 은미하다”는 장
“君子之道費而隱”章.
“소리개는 날고 물고기는 뛰어 논다”는 구절은 자사(子思)가 사람들을 위해 핵심적으로 말한 것이요, “반드시 일삼을 것을 두되 예단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한 것은 맹자께서 사람들을 위해 핵심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이렇게 언듯 본 경지에 나아가서 천리의 전체를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천리의 전체를 인식하지 못하면 다시 마음을 비우고 젖어들 듯이 노닐 것이지 급하게 추구해서 억지로 주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鳶飛魚躍, 是子思喫緊爲人處; 必有事焉而勿正心, 是孟子喫緊爲人處, 皆是要人就此瞥地便見得箇天理全體. 若未見得, 且更虛心涵泳, 不可迫切追求, 穿鑿注解也.
중용 12장에서는 “군자(君子)의 도(道)는 단서가 부부(夫婦)에게서 시작되니,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천지(天地)에 밝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부부 사이는 정의가 가까워 빠지기 쉽기 때문에 여기에서 극진하게 삼가지 않으면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 속에서 사욕이 횡행하고, 사람들이 모르는 영역에서 스스로 속이게 됩니다. 인륜의 커다란 법도를 스승과 벗들 앞에서 강론한다지만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곳에서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단서의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서 은미한 곳에서 두려워하면서 경계하고 삼간다면 공부가 내면으로 부터 이루어져서 나와 이것으로 어버이와 손위의 형을 섬기고, 벗들 사이에서 대처하게 되어, 쉽사리 힘을 써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君子之道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蓋夫婦則情意密而易於陷溺, 不於此致謹, 則私欲行於玩狎之地, 自欺於人所不知之境. 人倫大法雖講於師友之前, 亦未保其不壞於幽隱之處. 儻知造端之重, 隱微之際恐懼戒謹, 則是(5-2991)工夫從裏面做出, 以之事父兄․處朋友皆易爲力而有功矣.
애초부터 아주 가까운 곳을 설명했을 뿐이지만, 이렇게 유추해서 설명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本只是說至近處, 似此推說亦好.
중용 12장에서는 “천지가 거대하지만 사람은 오히려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하늘[天]이 만물을 낳고 덮어주기는 하지만 형체를 실어주지 못하고, 땅[地]이 형체를 실어주지만 만물을 낳고 덮어주지는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이 오히려 한스럽게 여기는 부분은 음과 양, 추위와 더위가 간혹 정상 상태를 벗어나고, 길과 흉, 재해와 상서로움이 간혹 그 마땅함을 잃으며, 뭇 부류들이 말라죽고 엎어지며, 요절하는 등 그들의 이치를 이루지 못하는 점에 있을 뿐인 듯 합니다. 이것은 비록 천지라도 한스러움이 없지 않겠지만, 사람으로서도 본시 여기에 대해 한스러움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恐非謂天能生覆而不能形載, 地能形載而不能生覆. 人猶有憾處, 恐只在於陰陽寒暑之或乖其常, 吉凶災祥之或失其宜, 品類之枯敗夭折而不得遂其理. 此雖天地不能無憾, 人固不能無憾於此也.
이미 그 완전함을 반드시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것이 바로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旣是不可必望其全, 便是有未足處.
‘두 가지 단서[兩端]’이란 여러 의론이 일치를 보지 못하는 극단으로서 모두 선한 곳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옥사를 판단할 때 한 사람은 당연히 사형을 시켜야 하고, 한 사람은 당연히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면, 지금 그 중간을 참작해서 시행하는 것입니까?
兩端謂衆論不同之極致, 都是就善處說. 如斷獄, 一人以爲當死, 一人以爲當罰, 今酌其中而行之否?
그러나 ‘가운데[中]’라고 하는 것은 자막(子莫)이 붙잡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然所謂中, 非如子莫之所執也.
중용 16장의 ‘귀신의 덕’장의 주에서 “체물(體物)에 대해 ‘사물의 본체가 된다’고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의 ‘체’란 글자는 ‘체용’이라고 할 때의 ‘체’자입니까? ‘체질’이라고 할 때의 ‘체’자입니까?
“鬼神爲德”注云: ‘體物是其爲物之體‘ 不知此‘體’字是‘體用’之‘體’, 還復是‘體質’之‘體’?
귀신이란 기의 오고감이다. 반드시 이 기가 있어야 이 물건이 있게 된다. 이것이 물건의 체가 된다.
鬼神者, 氣之往來也. 須有此氣 方有此物, 是爲物之體也.
서지백에게 답함 答徐志伯(浩)
【해제】이 글은 무오년을 전후해서 서호(徐浩)에게 답한 편지로 추정된다. 거처하는 당에 선현들의 화상을 걸어두는 일이 부당함을 논하고 있다.
당명(堂銘)에 대해 가르쳐 주신 것은 아주 감사드립니다. 3, 4년 동안 ‘도(道)’라는 한 글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도 몸 붙일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해서 그 죄를 가중키고, 게다가 그 여파가 당신에게까지 미치도록 하겠습니까? 방안의 사방 벽에 선배들의 초상을 빙 둘러 붙여 놓고 복건(幅巾)과 편복(便腹) 차림으로 그 안에서 노닐거나 잠자는 것은 아마도 편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유자징(劉子澄)이 형양(衡陽)에 있을 때 주릉도원(朱陵道院)을 지어 자신은 정당(政堂)에 거처하고 양쪽의 곁채를 선현(先賢)의 사당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여겼었는데 그가 떠나가는 바람에 미처 바로잡아 주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횡거(橫渠) 선생도 ‘부자(夫子: 공자)의 화상(畵像)을 전해 받았지만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뿐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일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그 사이에는 의리가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示喩堂銘, 極荷不鄙. 三數年來, 不敢開口道一字, 尙且無著身處. 今安敢爲此以重其罪, 又使餘彼所濺及於賢者乎? 兼堂中四壁環列前輩之象, 吾乃幅巾便服而遊燕寢掛於其中, 似亦非便. 鄕聞劉子澄在衡陽作朱陵道院, 自居正堂, 而以兩廡爲前賢祠堂, 嘗竊疑其非是. 恨渠已去, 不及正之也. 橫渠先生亦言, 傳得夫子畵像, 而無可設之處, 正爲此耳. 幸試思之, 此雖細故, 其間亦自不容無義理也.
등위로(경)에게 답함(근사록을 묻다)[答鄧衛老(絅 問近思錄)]
【해제】이 글은 순희 2년(을미, 1175, 46세) 이후에 등경에게 답하는 편지다. 근사록에 대한 등경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정이는) ‘건(乾)은 굳세다[健]는 뜻으로, 굳세면서 쉼이 없는 것을 일러 건(乾)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乾, 健也, 健而無息之謂乾.
하늘이 굳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如何見得天之健處?
(정이는) “(원․형․리․정의) 네 가지 덕 가운데 원(元)은 오상 가운데 인(仁)과 같다…”고 했습니다. 저[絅]는 ‘부분적으로 말하면 한 가지 일’이라고 한 것은 인의 작용이요, ‘전체적으로 말하면 네 가지 덕을 포괄한다’고 한 것은 인의 본체라고 생각합니다. 인의 작용은 사랑[愛]만한 것이 없지만, 인의 본체는 사랑으로 다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네 가지를 포괄한다고 논한 다음에야 인의 본체를 알 수 있습니다.
四德之元猶五常之仁(云云.) 絅謂偏言一事, 仁之用也; 專言四者, 仁之體也. 仁之用莫若愛, 仁之體則愛有所不能盡, 必包四者論之, 而後仁之體可見.
인이란 한 가지 일이 바로 네 가지를 포함합니다. 그 한 가지 일을 떠나서 따로 네 가지를 겸하는 인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仁之一事乃所以包四者, 不可離其一事而別求兼四者之仁也.
(이정은) “몸[腔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고 했는데, 이 말은 다만 굶주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마음은 몸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놓치거나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강자(腔子)’라고 하는 뜻이 어떻게 선종의 속어이겠습니까?
‘滿腔子是惻隱之心’, 莫只是不餒否? ‘心要在腔子裏’, 莫只是不放却否? 所謂腔子之義, 豈禪俗語耶?
‘강자(腔子)’란 다만 몸 껍데기[軀殼]라는 말과 같을 뿐이서 속어에 불과하지, 선종의 말은 아닙니다. ‘몸을 채우고 있다’는 것은 모든 곳이 두루 채워진 것이 본래 이렇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 굶주리지 않는다는 것까지 말한 것은 아닙니다. 아래 구절에서 말한 것은 옳습니다.
腔子猶言軀殼耳, 只是俗語, 非禪語也. 滿腔子 只是言充塞周備本來如此, 未說到不餒處. 下句所說得之.
(정이는)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지만 두 가지 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물뿌리고 쓸며 사람이나 물건을 상대하는 것이 모두 그런 것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그러한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것[是其然]’은 사람의 일이요, 그러한 이유[所以然]는 천리이기 때문에, 아래에서 배워서 위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凡物有本末, 不可分爲兩段事. 灑掃應對是其然, 必有所以然. 絅竊謂是其然者, 人事也; 所以然者, 天理也, 下學而上達也.
대개 이와 같습니다만 다시 자세히 완미해 보십시오.
大槪是如此, 更詳玩之.
양자는 (천하를 위해) 한 오라기 털조차 뽑지 않았다…. 저는 세 사람이 모두 하나만을 붙잡고서 권도를 알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양자가 한 오라기의 털조차 뽑지 않겠다고 한 것을 누항에 있을 때 베푼다면 즉 안자입니다. 묵자가 이마와 발뒤꿈치가 닳아 없어지도록 (세상을 위해서) 한 것을 세 번이나 문 앞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 베푼다면 즉 우임금입니다. 그러므로 ‘중(中)’이라고 하는 것은 권도와 함께 할 때 가능할 뿐입니다.
楊子拔一毛不爲(云云.) 絅竊謂三子皆執一而不知權故也. 便楊子之拔一毛不爲施之在陋巷之時, 卽顔子矣. 墨子摩頂放踵施之三過其門不入之時, 卽禹矣. 故所謂中者, 惟可與權者能之.
양자․묵자의 학문은 도를 안다고 하기에 충분치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치우쳐 ‘중’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우임금이나 안자의 일에 능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楊․墨學不足以知道, 其心偏而不中, 豈復能禹․顔之事? 可更思之.
(이정은) “예전에 주무숙(周茂叔: 주돈이)에게 배울 때에 언제나 안자․중니가 즐거워 한 곳에서 즐거워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찾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 한 것은 이치를 따르는 것일 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昔受學於周茂叔, 每令尋顔子․仲尼樂處所樂者何事.’ 絅謂孔․顔之所樂者, 循理而已矣.
이런 곳은 말 한마디로 쉽사리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마음을 비우고 완미하면서 겸하여 성현들이 학문을 하면서 힘쓴 곳을 고찰하며 실제로 공부를 해나가야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렇게 딱딱하게 말하는 것은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此等處未易一言斷, 且宜虛心玩味, 兼考聖賢爲學用力處, 實下功夫, 方自見得. 如此硬說, 無益於事也.
(이정은) “증점과 칠조개는 이미 (도의) 큰 뜻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큰 뜻[大意]’이란 천리가 유행하는 오묘함과 성현이 작용하는 기상이 아닌가 합니다. 두 사람의 마음은 깨끗해서 조금의 이지러짐이나 부족함이 없어 편안하게 지극한 천리를 실천했습니다. 순임금은 천하를 가지고도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두 사람은 이미 이것을 엿보았음에도 몸소 여기에서부터 시작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큰 뜻을 알았다’고만 하는 것입니다.
‘曾點漆雕已見大意’, 絅謂大意者, 得非天理流行之妙, 聖賢作用之氣象與? 二子胸中灑落, 無一毫虧欠, 安行天理之至, 蓋舜有天下而不與焉者也. 但二子已能窺測乎此, 未必身造乎此也, 故曰已見大意.
이렇게 말하더라도 잘못은 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실제로 공부를 해서 진실하게 아는 곳이 있어야 의미를 알게 될 뿐이다.
且如此說, 亦未有病. 然須實下功夫, 眞有見處, 方有意味耳.
(이정은) “경(敬)과 의(義)를 둘 다 지녀야 한다. 위로 곧바로 올라가 천덕(天德)에 이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둘 다 지닌다[夾持]’는 말이 어찌 안팎이 함께 나아간다는 말이겠습니까? ‘위로 곧바로 올라간다[直上]’는 말이 어찌 그치지 않고 나아간다는 말이겠습니까?
‘敬義夾持, 直上達天德自此.’ 絅謂夾持者, 豈內外並進之謂乎? 直上者, 豈進進不已之謂乎?
곧바로 위로 올라 간다는 것은 물욕(物慾)에 얽매어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直上者, 不爲物欲所累而倒東來西之謂也.
(정호는) “보고 듣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이 모두 천리(天理)이다. 사람은 그 사이에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인식해야 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視聽․思慮․動作皆天理也, 人但於其中要識得眞與妄爾.
‘인식한다[識]’는 글자가 긴요한 곳입니다. 인식을 필요로 하는 때에 반드시 배움이 시작됩니다.
‘識’字是緊要處, 要識得時, 須是學始得.
횡거선생(橫渠先生)이 범선지(范巽之: 范育)에게 “우리들이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선지가 다시 물었을 때 횡거선생은 “이것은 깨닫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한 이유는 학자들이 뜻을 보존하는 것을 잊지 않고, 많이 떠도는 마음이 깊이 안정되어, 어느 날 큰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탈연하게 벗어나기를 바란 것일 뿐입니다.
橫渠先生謂范巽之曰: ‘吾輩不及古人, 病源何在? ’ 巽之請問, 先生曰:‘此非難悟.’ 設此語者, 蓋欲學者存意之不妄, 庶游心浸熟, 有一日脫然, 如大寐之得醒耳.
횡거선생은 뜻은 학자들이 이런 제목으로 시시때때로 성찰해서, 오래 쌓이고 관통하며, 성숙되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 것일 뿐 이와 같이 말해서 맞추려고만 한 말은 아닙니다.
橫渠先生之意, 正要學者將此題目時時省察, 使之積久貫熟而自得之耳, 非謂只要如此說殺也.
명도선생(明道先生)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글자를 쓸 때에는 매우 공경스런 태도를 취했는데 이것은 글자를 잘 쓰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것이 바로 학문이기 때문이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勿忘勿助]는 사이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지금 글자를 쓰는데 서두르면 다시는 제대로 글자를 완성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잊는 것이 되고, 혹 의도적으로 잘 쓰려고 하면 더더욱 잘 쓰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조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통해 경(敬)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明道先生曰: ‘某寫字時甚敬, 非是要字好, 只此是學.’ 絅謂此正在勿忘勿助之間也. 今作字匆匆, 則不復成字, 是忘也. 或作意令好, 則愈不成好, 是忘也. 或作意令好, 則愈不能好, 是助也. 以此知持敬者正勿忘勿助之間也.
만약 그대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다만 글자를 잘 쓰려고 하는 것일 뿐 명도선생의 뜻은 아닙니다.
若如此說, 則只是要字好矣, 非明道先生之意也.
이천(伊川)께서 강설(講說)하는 자리에 계실 적에 녹봉을 청한 적도 없고 증직이나 음관[封敍]을 구하지도 않으셨는데, 제 생각에는 만약 과거를 통해 관직을 얻었다면 곧 벼슬아치로 처신해야 하므로 비록 증직이나 음관[封蔭]을 청한다 하더라도 괜찮다고 봅니다.
伊川在講筵, 不曾請俸, 又不求封敍. 絅謂若是應擧得官, 便只當以常調自處, 雖陳乞封蔭可也.
본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을 얻은 것이라면 벼슬아치로 자처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니, 이것은 오늘날의 일반인이 경우로 말하면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것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천 선생께서 말씀하기 곤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그 이유를 ‘설명하자니 너무 길다’고만 하신 것이니, 마땅히 과거법(科擧法)부터 다 고쳐야만 바로잡을 수 있는 문제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근래 한위공(韓魏公)이 도사(道士)로 하여금 정전(正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초제를 지내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도 바로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도사(道士)를 다 없애고 초제를 지내는 제도도 혁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최후의 말입니다.
本以應擧得官, 則當只以常調自處, 此自今常人言之, 如此可也. 然朝廷待士却不當如此, 伊川先生所以難言之也. 但云其說甚長, 則是其意以爲要當從科擧法都改變了, 乃爲正耳. 近看韓魏公論不當使道士於正殿設醮, 而不知設醮之非, 亦是此類. 須說到廢道士而罷設醮, 方是究竟也.
“개보(介甫: 王安石)는 ‘율(律)은 (고대의 법제를) 80% 정도 담고 있는 책[八分書]’이라고 했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80%라는 것은 어떻게 왕씨가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고도 100%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겠습니까?
介甫言律是八分書, 絅謂八分者, 豈王氏謂其深刻猶未及於十分也?
율(律)이란 법을 밝히고, 잘못을 금지시키려는 것으로 교화에 보탬이 됩니다. 다만 근본적인 면에 작은 흠이 있을 뿐입니다. 80%란 율의 장점이요, 20%는 율의 단점입니다. ‘이것이 그의 식견이다’는 말은 인정하는 말이지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律所以明法禁非, 亦有助於敎化, 但於根本上少有欠闕耳. 八分是其所長處, 二分乃其所闕, 此言是他見得者. 蓋許之之詞, 非譏之也.
(장재는) “천하를 다스리면서 정전제로부터 하지 않으면 결국 공평하게 할 방법이 없다. 주나라의 방법도 단지 고르고 공평했을 뿐이다”고 했고, 또 “정전제는 결국 봉건제에 귀결되어야 안정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살피기에 장씨(張氏: 張載)는 다스림을 말하면서 정전제와 봉건제를 위주로 했고, 정선생(程先生)은 봉건제를 논하면서 상당 부분 유자후(柳子厚: ■宗元)의 주장을 택했는데, 범조우(范祖禹)의 당감(唐鑑)」에서는 (유자후의 논의를) 미루어 넓혔습니다. 호씨(胡氏)의 관견(管見)에 이르러서야 힘껏 자후(子厚)를 비난했고, 아울러 소씨[蘇]와 범씨[范]를 물리쳤는데, 그의 설명이 도리어 정자의 입장[程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治天下不由井地, 終無由得平. 周道只是均平’. 又曰, ‘井田卒歸於封建乃定’. 絅按張氏言治〔一〕, 大抵以井田封建爲主. 程先生論封建, 頗取柳子厚之說, 而范唐鑑亦推廣之. 至胡氏管見, 乃力詆子厚, 幷排蘇․范, 其說反與程門不合. 何也?
이정유서 가운데 단지 한 조목에서만 봉건제를 논하면서 유자후의 주장을 채택했고, 다른 곳에서는 오히려 이와 달랐다. 아마도 이 한 문단은 기록의 잘못인 것 같다. 범씨의 설명은 대부분 구차하고 간단해서 법도로 삼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호씨의 의론이 비록 올바르지만 그의 말은 이해 관계가 치우친 점이 있다. 요컨대 봉건제와 군현제는 서로 이해 득실이 있다. 다만 그 이치상으로는 당연히 봉건제가 올바를 뿐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천천히 강론할 것이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다.
遺書中只有一條論封建而取柳子厚者, 其他處却不如此, 恐此一段乃記錄之誤也. 范氏說多苟簡, 不足爲法. 胡氏之論雖正, 然其言利害亦有所偏. 要之封建郡縣互有利害, 但其理則當以封建爲公耳. 此類且徐講之, 非今日所急也.
(정이는) “불교[釋氏]의 학설은 만일 그들의 주장을 궁구한 다음에 취사 선택하려면 궁구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중간에 이미 불교도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이단의 글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낮 그들의 행적만 알 뿐 그들의 거취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만일 변론하는 일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말이 막힐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제가 스스로 헤아리기에는 결코 빠져들지야 않겠지만 능수능란하게 이리저리 논변할 수 있는 순준에도 이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물건이라도 아지 못하는 것이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니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釋氏之說, 若欲窮其說而去取之, 則其說未能窮, 固已化而爲佛矣. 絅索不喜讀異端之書, 然徒知其跡而未究其去著, 儻遇辯話, 詞必窮矣. 絅自度決不至陷溺, 則亦不至騁辯. 然一物不知, 君子所耻也, 不知於此當何以處之?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면 마음 속에 의심과 장애가 없을 수 없습니다. 비록 빠져들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연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물며 반드시 빠져들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는 경우야 어떻겠습니까? 자유롭게 논변하기를 원하고 아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더욱 말단의 일이라 말할 것도 못됩니다. 다만 궁리 공부에 빠뜨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또 그 완급의 순서도 살펴야만 합니다.
理有未窮, 則胸中不能無疑礙, 雖不陷溺, 亦偶然耳. 况未必不陷溺耶? 至於欲騁辯而耻不知, 尤是末節, 不足言. 但窮理功夫不可有所遺, 然又當審其緩急之序也.
명도선생은 “주무숙(周茂叔: 주돈이)은 창 앞의 잡초를 제거하지 않았고, 자후(子厚: 張載)도 나귀가 우는 것을 보고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자후가 황자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와 비슷하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요, 사람과 사물이 얻어서 자신의 마음으로 삼은 것이며, 대개 인의 일입니다. 성현들의 온갖 말에서 ‘마음을 전했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이것일 뿐입니다.
明道先生曰, 周茂叔窗前草不除去, 子厚觀驢鳴亦謂如此. 又曰, 子厚聞生皇子(云云). 絅謂此卽天地生物之心而人物所得以爲心者, 蓋仁之事也. 聖賢千言萬句, 所謂傳心者, 惟此而已.
대개는 맞습니다 다만 이와 같이 좋다고만 말해서는 안되고, 항상 절실하게 완미하면서 함양해야만 합니다.
大槪然矣. 但不可只如此說了便休, 須是常切玩味涵養也.
등위노에게 답함 答鄧衛老
【해제】이 글은 순희 2년(을미, 1175, 46세) 이후에 등경에게 답하는 편지다.
지난 번에 보내신 권자(卷子)에 대해 오래도록 인편이 없어 답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귀신을 논하신 것은 매우 조리가 있으니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기에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건(乾)이 굳세다[健]고 말한 곳에서 ‘행(行)’이란 한 글자는 지나치게 경솔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래 문장에서 말한 것도 질문에는 전연 상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깊이 생각하고서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듯 합니다. 또 양주와 묵적이 인의를 배웠으되 지나쳤다고 여기신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인의를 알지 못했을 뿐이지, 배운 것이 지나쳐서 알맞음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증점에 대한 설명은 더욱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꼭 견해를 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응당 어떻게 하는 것이 실제로 공부하는 방법과 순서인지를 이해하고서 힘을 쓴다면 오래되면 당연히 저절로 소득이 있을 것입니다. 단지 이처럼 무성한 그물을 찾아 헤메듯이 할 뿐이라면 사람들이 설명해준다 하더라도 또한 고상하고 오묘한 것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일을 처리할 수도 없고 거꾸러 일을 해칠 뿐입니다.
昨所示卷子, 久無便, 不得報. 所論鬼神者甚有條理, 不易看得如此. 但說乾健處云只‘行’ 之一字, 便見草率之甚. 下文云云, 則又全不應所問矣. 恐可更深思而詳說之也. 又以楊․墨爲學仁義而過, 亦非是. 彼乃正爲不識仁義耳, 非學之過而不得中也. 曾點之說, 乃不眞實之尤者. 今亦末須便論見處, 且當理會如何是實下功夫底方法次第而用力焉, 久當自有得耳. 若只如此揣摸蘢罩將去, 卽人人會說, 更要高妙亦得, 但不濟事, 反害事耳.
장경지에게 답합(현보) 答張敬之(顯父)
양혜왕(粱惠王)이 백성과 곡식을 옮긴 조치에 대해 주관의 늠인(廩人)의 직책이 없어지지 않았는데도 맹자가 잘못이라고 한 것은 어찌 혜왕이 인정의 근본을 몰랐기 때문이겠습니까?
粱惠王移民移粟之政, 周官廩人之職未嘗廢, 孟子非之者, 豈以惠王不知仁政之本耶?
여기에는 다른 논의가 없습니다. 다만 맹자가 말한 왕정의 처음과 끝, 그가 조치하고 시행한 방책들의 순서를 상세하게 완미해야만 할 뿐이다.
此無異議, 但當熟玩孟子所說王政之始終, 其措置施行之方略次第耳.
맹자가 제선왕이 소를 아낀 것에 대해 대답한 한 문단
孟子答齊宣王愛牛一段
이런 곳과 위 장은 역시 다른 논의가 없고, 자세하게 읽고 상세하게 완미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此等處與上章亦無甚異, 但要熟讀詳玩耳.
‘반드시 일삼을 것이 있다’는 한 문단에 대해 제 생각으로는 이 두 가지의 한계는 분별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힘을 다하지 않으면 곧장 일삼을 것이 사라려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 되고, 뜻을 기울이자 마자 빨리 이루기를 미리 기대하고 조장하는 데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만을 평이하게 삼가고 지키려 하면 또 깨끗하게 벗어나는 곳을 알 수도 없습니다.
‘必有事焉’一段, 顯父謂此二者界限極難分別, 蓋不致力則便無所事而幾於忘, 才著意則未免預期欲速而流於助. 但將心平鋪謹守, 則又未見脫灑處.
이 한 문단은 맹자의 본문에 의거하면 다만 양기라는 측면에서 설명한 것으로, 맹자집주의 말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명도선생이 이것을 지경의 측면에다 옮겨 설명했는데, 이것은 양기 이전 한 차원의 일입니다. 공부가 비록 치밀하다지만 아마도 맹자에 근거해서 이해하는 것만 못한 것 같습니다.
此一段依孟子本文, 只合就養氣上說, 集注言之備矣. 明道先生移就持敬上說, 却是養氣已前一段事, 功夫雖密, 然恐不若且依孟子看也.
(이자(夷子)는) “사랑에는 차등이 없지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어버이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자는 이미 이런 내용을 알고서 당연히 친소와 귀천을 하나로 합쳐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사랑을 베푸는 것은 어버이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또 친소를 좌우로 대비시켜 말한 것이니, 어떻게 나의 사랑에 또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의 맥락이 서로 모순되어 참으로 말문이 막혔던 것입니다.
愛無差等, 施由親始, 夷子旣知此說, 便當一親疏․合貴賤方得. 今却曰施由親始, 則是又將親疏對待而言, 豈非吾之愛又有差等哉? 其詞氣抵牾, 信乎遁而窮矣.
이지(夷之)가 말한 사랑에는 차등이 없다는 말은 큰 잘못이다. 그가 말한 ‘사랑을 베푸는 것은 어버이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비록 조금은 차별이 있는 듯 하지만 역시 이 차등이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맹자는 그가 근본이 둘이라는 점만을 책망하고 그 아래 구절이 서로 모순이라는 것을 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지가 결국 감동해서 스스로 잘못을 알게 된 것은 맹자가 ‘다른 사람 때문에 땀에 젖은 것이 아닌’ 마음을 극진하게 설명해서 그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긴요한 곳이니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夷之所說愛無差等, 此是大病. 其言施由親始, 雖若粗有差別, 然亦是施此無差等之愛耳. 故孟子但責其二本, 而不論其下句之自相矛盾也. 夷之所以卒能感動而自知其非, 蓋因孟子極言非爲人泚之心有以切中其病耳. 此是緊要處, 當著眼目也.
등문공의 질문이 급박해질수록 맹자는 마치 그를 위해 도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대답했습니다. 그 규모가 나아가는 방향을 끝까지 추구해 보면 또한 태왕이 하늘을 두려워하며 나라를 보존한 일에 불과했습니다. 만장이 송나라를 물었을 때에 맹자는 갑자기 성탕이 하늘을 즐거워 했던 일로 반복해서 일러주었습니다. 어찌 등나라 땅이 치우치고 작아서 도모하기에 부족하다고 그렇게 했겠습니까? 어찌 왕언이 등나라를 멸망시키고 설나라를 정벌했으며, 제후의 군대를 패배시켜 실제로 두려워할만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藤文公之問逾迫, 而孟子所以答之者若無可爲謀者. 極其規模所就, 亦不過太王畏天保國之事. 至於萬章之問宋, 而孟子遽以成湯樂天之事反覆告之. 豈勝之地褊小, 不足以有爲, 而王偃滅膝伐薜, 敗諸侯之兵, 果有可畏之實耶?
강학고 약한 것은 세력이고, 얻고 잃는 것은 일이다. 송나라와 등나라는 강약이 다르기 때문에 그 득실의 효과도 같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그 한 가지 일이 이와 같이 하고서 얻고, 이와 같이 하고서 잃는다면 그 이치는 같을 뿐입니다. 만일 강약을 득실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강한 자는 언제나 얻고, 약한 자는 언제나 잃는다는 것이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彊弱者, 勢也; 得失者, 事也. 宋․藤之疆弱有異, 故其得失之效不同. 但其一事之如此而爲得, 如此而爲失, 則其理未嘗不同耳. 若曰以彊弱爲得失, 則是彊者常得, 弱者常失也, 豈其然乎?
선으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려 하는 것은 승리를 추구하는 데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기게 됩니다. 선으로 다른 사람을 기르는 것은 지극한 정성으로 함께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도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며 진심으로 복종합니다. 그 근원은 공과 사, 의와 리 사이에서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以善服人, 則有心於求勝, 故人得以勝之. 以善養人, 則至誠樂與, 而人自心悅誠服. 其原亦判於公私義利之間也.
선으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자는 오직 다른 사람이 선에 나아가는 것만을 두려워 합니다. 예를 들자면 장화(張華: 232∼300)가 진무제에게 대답하면서 오나라 사람들이 영주를 다시 세우면 강남을 취할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라고 한 것이 이런 사례입니다. 선으로 다른 사람을 기르는 사람은 오직 다른 사람이 선에 들어가지 못할까만을 걱정합니다. 예를 들자면 탕이 갈을 섬기면서 소와 양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 갈나라를 위해 밭을 갈게 한 것이 이런 사례입니다.
以善服人者, 惟恐人之進於善也. 如張華之對晉武帝, 恐吳人更立令主, 則江南不可取之類是也. 以善養人者, 唯恐人之不入於善也. 若湯之事葛, 遺之牛羊, 使人往爲之耕之類是也.
맹자가 이미 지혜를 시작으로 삼고, 성스러움을 마지막으로 삼았다면 지혜란 앎을 철저하게 하는 일이요, 성스러움이란 극치에 도달했다는 이름입니다. 그 마지막에 다시 말하기를 ‘지혜란 비유하면 공교로움이요 성스러움이란 힘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도리어 지혜가 성스러움보다 오묘하다는 것입니다. 남헌은 배움을 논하자면 지혜와 성스러움에 처음과 끝의 순서가 있지만, 도를 말하자면 성스러움의 극치가 곧 지혜의 극치라고 여겼습니다. 이 설명이 아마도 앞에 의심한 것을 깨트릴 수 있을 듯 한데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孟子旣以智爲始, 聖爲終, 則智者致知之事, 聖者極至之名. 其終復曰智巧聖力, 是智反妙於聖矣. 南軒以爲論學則智聖有始終之序, 語道則聖之極是智之極者也. 此說似可以破前所疑, 不知如何?
지혜란 앎이 철저하다는 명칭이고, 성스러움이란 행실이 극치에 도달했다는 호칭입니다. 선후야 있겠지만 깊고 낮은 차이는 없습니다. 성스러우면서도 지혜롭지 못한 것은 마치 수모(水母)에게 새우[鰕]가 없는 격이니 장차 어디에 이르겠습니까?
智是見得徹之名, 聖是行得到之號, 有先後而無淺深也. 聖而不智, 如水母之無鰕, 亦將何所到乎?
맹자에서는 “그 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선이라 할 수 있다”고 했고, 주자(周子)는 ‘다섯 가지 성이 감동해서 선악이 나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또 선과 악을 움직이는 곳에서 함께 말한 것입니다. 어찌 맹자는 그 정이 미발한 곳에 나아갔고, 주자는 그 정이 이발한 곳에 나아가 말했다고 하겠습니까?
孟子謂乃若其情, 則可以爲善, 而周子有五性感動而善惡分, 是又以善惡於動處並言之. 豈孟子就其情之未發, 而周子就其情之已發者言之乎?
정은 모두 선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선이라 할 수 있지 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 정에 거스르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맹자는 그 올바른 것을 가리켜 말했고, 주자는 올바른 것과 거스른 것을 겸해서 말했습니다. 장자에 있는 “遁天倍情”이란 말도 이런 뜻입니다.
情未必皆善也, 然而本則可以爲善而不可以爲惡. 唯反其情, 故爲惡耳. 孟子指其正者而言也, 周子兼其正與反者而言也. 莊子有 ‘遁天倍情’之語, 亦此意也.
지난 번 말씀에, “예전에 동안(同安)에서 종소리를 듣고는 마침내 마음을 거두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하셨는데, 제가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지 못하였는데 징험해 보니 진실로 그러하였습니다.
頃蒙見敎云, 往者同安因聞鍾, 遂悟收心之法. 顯父不揆, 驗之信然.
당시에 종소리를 들었다고 말한 것은 본 뜻이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인심(人心)은 드나드는데 일정한 때가 없기 때문에 한 번의 종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내 마음은 이미 여러 번 바뀌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當時所說聞鍾聲者, 本意不謂如此, 但言人心出人無時, 鍾之一聲末息, 而吾之心已屢變矣.
조수는 달이 자오에 오면 조수가 가득하게 되는데, 그 이치는 무엇을 이릅니까? 어떻게 자는 양의 시작이 되고, 오는 양의 극처가 되며 달은 음에 속하기 때문에 그 기가 서로 부딪쳐 여기에 이르는 것이겠습니까?
潮汐月臨子午則潮王, 其理謂何? 豈以子者陽之始, 午者陽之極, 月爲陰屬, 故其氣交激而至此耶?
조수에 관한 설명은 여양공(余襄公: 余靖, 1000~1064)이 말한 것이 아주 자세합니다. 무릇 천지의 사이는 동서가 씨줄이 되고, 남북이 날줄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오묘유는 사방의 정위요, 조수의 진퇴는 달이 이 위치에 오는 것을 절기로 삼습니다. 기의 소식으로 말한다면 자는 음의 극처요 양이 시작이오, 오는 양의 극처요 음이 시작입니다. 묘는 양의 중앙이며, 유는 음의 중앙입니다.
潮汐之說, 余襄公言之尤詳. 大抵天地之間東西爲緯, 南北爲經, 故子午卯酉爲四方之正位, 而潮之進退以月至此位爲節耳. 以氣之消息言之, 則子者陰之極而陽之始, 午者陽之極而陰之始, 卯爲陽中, 西爲陰中也.
장경지에게 답함[答張敬之]
지난 번 보내주신 질문의 조목들은 살펴보니 문장의 맥락이 전연 옳지 않고 또 대부분 이 장의 올바른 뜻을 환히 알지 못하고서 갑자기 다른 주장을 인용해서 그 사이에 잡다하게 끼워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의견을 개진할수록 서로 미혹되어 피차 모두 알 수 없게 되고, 일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응당 본문에 의거해서 개개의 구절과 낱낱의 글자를 따라가며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분명하게 이해되도록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옛 사람들이 이 말은 이런 뜻이라고 설명한 것을 보고 다시 장차 반목해서 음미하면 오래되어 저저로 견해가 생길 것이니 이와 같이 부류를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스러움은 비유하자면 힘이요, 지혜를 공교로움이라는 주장은 옳습니다. 이것이 다른 곳을 살피는 표본입니다. 성현(聖賢)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나이가 많고 적고를 비교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학문하는 공부는 다 여기에 있지 않으니, 그것은 생각하고 말하는데 힘을 헛되이 쓸 뿐입니다.
向所示問目, 看得路脈全未是, 又多未曉此章之正意, 而遽引他說, 以雜乎其間, 展轉相迷, 彼此都曉不得, 不濟得事. 且當依傍本文, 逐句逐字解釋文理, 令其通透, 見得古人說此話是此意了, 更將來反覆玩味, 久之自有見處, 不須如此比類也. 聖智巧力之說, 則已得之矣. 此便是看他處底樣子也. 又論聖賢優劣, 此亦是癡人比較父祖年甲高下之說. 學問工夫都不在此, 枉費心思言語之力也.
정빈신에게 답함 答丁賓臣(碩)
12월 11일 희(熹)는 머리를 조아리고 성원(省元) 정군(丁君) 노우(老友)에게 글을 올립니다. 지난 번 다행히도 만나서 모실 수 있었는데 욕되게도 질문을 내려 주셨습니다. 비록 고원한데 마음쓰는 것을 좋아하시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행동거지가 그다지 온화하고 순수하지도 않아서, 유학자의 기상과는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물어주신 내용이 너무 많고 절실하지도 않으며, 한 마디로 서로 반복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서, 이에 말없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서로 만나서 질문을 두 번 세 번이나 하시는 바람에 제 속내를 조금이나마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족하께서는 이미 낮빛이 붉어지시면서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이후로 피차의 속내를 결국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편지를 받고 보니 마침내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돌려보내는 바람에 부끄러운 마음만 그치질 않습니다.
十二月十一日, 憙扣首上啓丁君省元老友: 頃幸接承, 便辱垂問. 雖喜用意之高遠, 然竊觀容止之間未甚和粹, 意其未似聖門學者氣象, 而所問又太多而不切, 有不容以一詞相反復者, 用是黙黙, 不知所對. 及承訪逮, 至於再三, 而不免少露鄙懷, 則足下已艴然於色而不欲聞矣. 自是以來, 彼此之懷終不相悉. 而今者承書, 遂有督過之意. 三復以還, 愧怍亡已.
도(道)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가운데 있으면서 성현(聖賢)의 책 속에서 드러난 것이니, 진실로 선지자(先知者)나 선각자(先覺者)만이 얻을 수 있고 후배들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또 선지자나 선각자만 독점하여 후배들로 하여금 들을 수 없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점은 학자가 마음을 비우고 순서에 따라 반복적으로 차분하게 음미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등급을 건너뛰어 스스로 본 것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강론하는 중에는 또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 주기만을 바라고 그 올바름을 구하지 않으므로 만약 조금이라도 자기와 부합되지 않음이 있으면 마침내 성을 내며 멋대로 욕을 하는 등 무슨 짓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하기를 서두를수록 더욱 가까워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족하(足下)께서 진실로 그러한 것을 심사숙고했다면 제가 전에 족하에게 일러 준 것을 다 알았을 것이고, 족하의 학문에 대한 시비(是非)와 득실(得失)도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만약 제 말을 옳다고 여긴다면 앞으로 계속되는 물음에 대해 감히 공경하게 대답해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옳지 않다고 한다면 고명(高明)한 그대의 깊은 속에 대해 우매한 나로서는 반드시 미처 알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이니, 부디 저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일단은 제 말을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내주신 게[蟹]는 지극하신 마음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강다(江茶) 다섯 병으로 약간의 성의를 보입니다. 베(布)는 관례상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전에 가국재(柯國材)의 아들이 음식을 보내 왔을 때에도 돌려 보낸 일이 있었으니, 그대에게만 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夫道在生人日用之間, 而著於聖賢方冊之內, 固非先知先覺者所獨得, 而後來者無所與也. 又非先知先覺者折能專, 而使後來者不得聞也. 患在學者不能虛心循序反復沈潛, 而妄意躐等, 自謂有見, 講論之際, 則又不過欲人之知己, 而不求其益; 欲人之同己, 而不求其正, 一有不合, 則遂發憤肆罵而無新不至, 此斬以求之愈迫而愈不近也. 足下誠以是而深思之, 則熹之前日所以告足下者已悉矣. 足下之學, 其是非得矢亦明矣. 如以爲然, 繼此見間, 敢不敬對. 如日不然, 則高明之蘊必有非愚眛所及知者, 幸寬其咎而姑自信其說焉可也. 惠况江蟹, 感預至意. 江茶五甁, 少見微意. 布則例不敢受, 前日柯國材之子來鑛, 亦已却之, 非獨於左右爲然也.
정빈신에게 답함[答丁賓臣]
보내신 편지에서 부귀와 이달은 천명이 아닌 것이 없으니, 헌면이 만일 오더라도 아마도 가히 기필할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 독실히 도를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말을 거듭해보고서 이에 득실의 사이에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뜻이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해서 아마도 또 온전히 힘을 얻지 못한 듯 하니 어째서입니까? 만나서 이야기할 방도가 없어 이르는 바람에 생각만 내달립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때에 맞춰 스스로를 아끼시고 더욱 물러나 의리의 학문에 뜻을 두시는 것이 바로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來喩富貴利達莫非天命, 軒冕儻來, 似未可必, 足見信道之篤. 然反復其言, 乃於得失之間未免有尤人之意, 似又全未得力, 何耶? 未由面扣, 臨風馳想. 切翼以時自愛, 益遜志於義理之學, 是所願望.
정○○에게 답함[答鄭囗囗 (艮)]
편지에서 의심을 품은 내용을 보니 학문에 힘쓰는 뜻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이미 대충 답을 올렸습니다. 다만 뜻을 쓰는 것이 매우 친절하지는 않으니,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음미하는 것이 마땅하지 의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또 임일지(林一之)가 맹자의 양기(養氣)장을 본 것과 비슷하니 문장을 따라 보아 간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오래되면 저절로 이해하는 곳과 의심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示及疑義, 足見勉學之意. 已略奉答, 但大抵用意未甚親切, 更宜虛心詳味, 未要生疑, 只且似林一之看養氣章, 順文看去足矣, 久之自當有見處․有疑處也.
황숭로에게 답함 答黃嵩老
대체로 사람의 감정은 이럴까저럴까 고민하다가 대부분 어제 하던 일을 오늘 되풀이하는 와중에 예외없이 게을러져서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이제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며 실천해야지 주저하고 의심하면서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바로 여기 내 눈앞에서 눈깜짝할 사이에라도 반드시 조금씩 계속되는 효과를 느끼게 됩니다. 세월은 쉽게 지나가고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하물며 중년 이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더욱 부지런히 해야 할 것입니다.
大抵人情苦於猶豫, 多致因循, 一向懶廢. 今但心所欲爲, 向前便做, 不要遲疑等待, 卽只此目下, 頃刻之間, 亦須漸見功效矣. 年運易往, 時不待人, 況中歲以後, 允宜汲汲也.
황령유에게 답함 答黃令裕
보내 오신 편지에서, “도(道)의 큰 근본을 참으로 볼 기약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성급히 판단하시는 병폐입니다. 도의 큰 근본이 어찌 별도의 한 사물이겠습니까? 다만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일에 따라 살핀다면 오래 되면 저절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을 비우고 유연성있는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니, 만약 줄곧 이렇게 성급하게 구한다면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하여 끝내는 얻을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示喩道之大本末有眞見之期, 此只是急迫之病. 道之大本豈別是一物? 但日用中隨事觀省, 久當自見. 然亦須是虛心游意, 積其功力, 庶幾有得. 若一向如此急迫, 則方寸之間躁擾不寧, 終無可得之期矣.
황령유에게 답함[答黃令裕 一作(黃敬之)]
깨우쳐 주신 일상의 공부는 아주 친절합니다. 다만 다시 여기에 나아가 힘껏 노력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책도 그만 둘 수는 없으니, 만일 한결같이 이렇게만 한다면 또 치우치고 야위워가면서 다른 병이나 생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좌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만일 당연히 읽어야 하는 책을 논한다면 어떻게 좌씨에서만 그치겟습니까? 다만 벗들이 단지 논어․맹자만 보고서도 이미 남은 힘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책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所喩日用功夫甚親切, 但更就此勉力爲佳. 然書策亦不可廢, 若一向如此, 又恐偏枯, 別生病也. 左氏之說, 未暇及此. 若論當讀之書, 何止左氏? 但朋友只看論語․孟子, 已無餘力, 何暇更及他書也?
황령유에게 답함[答黃令裕 一作(黃敬之)]
글을 받고 간절하게 도를 향하는 것은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넉넉하니 머무르면서 여유있게 점점 젖어들어 스스로 얻는 것이 있어야 보탬이 되지 이처럼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학은 의미가 관통해서 보기에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반복하면서 손쓸 곳을 보아서 종사해야만이 자기에게 갖추어질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이 안배하고 벌려 놓으면서 입으로만 말할 뿐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공부를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收書, 雖見鄕道之切, 然更宜寬以居之, 使其優柔漸漬, 有以自得, 乃爲有益, 正不在如此迫切也. 大學文義通貫, 所不難見. 須更反復, 要見下手用力處而從事焉 乃爲有諸己耳. 若只如此安排布置, 口說得, 行未至, 末當得功夫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