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80

황성 2025. 8. 12.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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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친구와 제자들과의 문답) (知舊門人問答)

 

 

 

양원범(대법)에게 답함 答楊元範(大法)

 

해제1179(己亥, 宋 孝宗, 淳熙 6) 주자 50세 때의 편지이다. 양원범은 주희가 남강에 태수로 있을 때 軍學敎授로 있던 사람이다. 양원범이 지은 󰡔易說󰡕의 몇 구절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새로 지은 역설(易說)을 받아보고, 책을 펴서 한 번 읽어보니 깨우쳐주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요 며칠 계속해서 여러 곳에서 온 편지들이 많이 쌓였는데 내버려두고 답장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글은 미쳐 상세하게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략 지나가면서 본 바로는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 두 세 조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형이정(元亨利貞)’은 문왕(文王)의 본 뜻은 단지 크게 형통하고 바른데서 이롭다는 것일 뿐인데, 단전(彖傳)과 문언(文言)에 이르면 사덕(四德)의 설이 있습니다. 지금 그것에 의거하여 해석하면 이 건괘(乾卦)는 마땅히 양기(陽氣)로 미루어 설명해야 하고,()’ 자에서 갑자기 음기(陰氣)로 양()을 돕는 것을 말하면 안 됩니다. 또 하나의 나무로 말하면 싹은 원()이고, 꽃과 잎은 형()이며, 나뭇가지가 단단하고 강한 것은 이()이고, 열매가 성숙한 것은 정()입니다. ()은 성숙한 열매이면서 또 씨앗으로 원()이 될 수 있으니 순환함이 끝이 없습니다. 만약 다만 근본으로 돌아가고 본원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면 또한 정() 자의 의미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반드시 천지(天地) 대화(大化)의 본체를 두루 꿰뚫어 관찰하여야 하니 그 자세한 내용은 편지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명종시(大明終始)’는 성인(聖人)이 건도(乾道)의 종시(終始)를 크게 밝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의 설은 본래 이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역전(易傳)󰡕 중의 말은 간략한데, 오히려 어록 가운데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그대의 말처럼 건도가 스스로 그 종시를 크게 밝힌다고 하는 것이라면 다만 말을 낭비하는 것일 뿐 결국 글의 뜻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대유(大有) 괘의 ()’()’이란 두 글자는 󰡔설문(說文)󰡕에 의하면 본래 같은 글자이므로 󰡔주역󰡕에서는 대부분 서로 섞어서 썼습니다. 예를 들자면 왕용형우기산(王用亨于岐山)’이란 문장은 당연히 ()’자로 써야 하니, ‘왕용향우제(王用享于帝)’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획과 음운은 경전을 연구하는데 초보적인 일입니다. 때문에 선유(先儒)들은 경전의 대의(大意)를 얻으면 대부분 이러한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수많은 말을 부질없이 낭비하면서 끌어다가 설명을 돕더라도 끝내 본뜻을 해득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크게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역학만이 아니라, 모든 경전의 해석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제가 이미 쇠약하여 정력을 기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저 음양(陰陽)은 단지 하나의 기()일 뿐입니다. 음기(陰氣)가 유행하면 곧 양()이 되고, 양기(陽氣)가 모여서 엉기면 곧 음()이 되는 것이지, 바로 두 가지가 상대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하여 주() 선생이 태극도󰡕 가운데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答楊元範(大法)

承示及新著易說 開卷一讀 啓發已多 屬此數日諸處書問萃集 撥置不下 未及詳細 但所略看過處 其不能無疑者已兩三條 如元亭利貞 文王本意只是大亭而利於正耳 至彖傳文言 乃有四德之說 今若依而釋之 則此乾卦只合且以陽氣推說 不應於利字遽以陰氣佐陽爲言 且以一木言之 萌芽則元 華葉則亨 枝幹堅彊則利 子實成熟則貞 貞則所成之實又可種而爲元 循環蓋無窮也 若但謂歸根復命 則亦不見貞字之意矣 此須更於天地大化通體觀察 其曲折未易以尺紙言也

又大明終始 乃言聖人大明乾道之終始 程先生說本如比 但傳中言之簡略 却是語錄中有此意 若示乾道自能大明其終始 殊費言語 卒不成文義也

大有卦亨享二字 據說文本是一字 故易中多互用 如王用亨于岐山 亦當爲享 如王用享于帝之云也 字晝音韻是經中淺事 故先儒得其大者多不留意 然不知此等處不理會 却枉費了無限辭說牽補而卒不得其本義 亦甚害事也 非但易學 凡經之說 無不如此 獨恨早衰 無精力整頓得耳

大抵陰陽只是一氣 陰氣流行卽爲陽 陽氣凝聚卽爲陰 非直有二物相對也 此理甚明 周先生於太極圖中已言之矣

 

 

반문숙(우문)에게 답함 答潘文叔(友文)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 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반문숙은 金華인이다. 友端友恭의 종형제로 선생의 문인이다. 공부를 하는 방법을 알았으면 실제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과 공부는 하루아침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착실하게 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학문을 하는데서의 손익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매우 섬세하고 또 다 갖추어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이러한 것을 알고 있으면 곧 실제로 공부를 해야 하니, 그 옳은 것에 나아가고 그른 것은 물리쳐 그렇게 오래 하면 자연히 효과가 있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이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고 비교할 필요는 없으니, 오히려 공언(空言)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일에 무익합니다. 더구나 그 말하는 것이 진퇴(進退)를 거듭하고 어지럽게 뒤얽혀 있으며, 종일 번거롭고 어지럽게 지내면서도, 공부는 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의심을 그대로 가지고만 있으면서 시일을 보내기만 하니 매우 애석합니다. 지난번 여자약(如子約)의 편지가 왔는데 대부분이 이러한 것들이라서 통렬하게 그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자약은 근래에야 비로소 손을 놓고 앞을 향하여 몇 걸음 걸을 줄을 알게 되었으니, 비록 다 옳지는 않더라도 또 이렇게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며 양단간에 결정하지 못하는 것에서는 벗어날 것입니다.

지행(知行)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고인(古人)이 말한 지() 자는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학󰡕의 이른바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곧 사물에 나아가 본래 스스로 그러한 당연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인데, 본심(本心) 지각(知覺)의 본체(本體)는 환하게 밝고 막힘없이 통하여 밝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머리를 벽 틈을 향하여 돌리고 삽시간에 자기 마음의 빛과 그림자를 엿보아 곧 천명(天命)의 전체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수레바퀴를 깎는 일<斲輪>과 말을 고르는 일<相馬>로 말한 것 역시 이러한 병통입니다. 편지 말미에서 말씀하신 괴증(壞證)이라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부디 바로 지금 일체를 쓸어 없애버리고 일상생활 가운데서 점점 과정을 세워나가고 착실하게 공부해야 하는 것이지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날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答潘文叔(友文)

所喩爲學利病 至纖至悉 旣知如此 便當實下功夫 就其所是 去其所非 久之自然有得力處 正不必如此論量計較 却成空言 無益己事也 况其所說一前一却 纏綿繳繞 終日勞攘 更不曾得下功夫 只如此疑惑擔閣 過却日時 深爲可惜 向見子約書來多是如此 嘗痛言之 近日方覺撒手向前行得數步 雖未必盡是 且免如此遲疑惶惑 首鼠兩端也

知行之說 恐古人說字不如此 大學所謂格物致知 乃是卽事物上窮得本來自然當然之理 而本心知覺之體光明洞達 無所不照耳 非是回頭向壁隙間窺取一霎時間己心光影 便爲天命全體也 斲輪相馬之說 亦是此病 紙尾所謂壞證者 似已有之 切宜便就脚下一切掃去 而於日用之間稍立程課 著實下工夫 不要如此胡思亂量 過却日子也

 

반문숙에게 답함 答潘文叔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 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상서󰡕󰡔시경󰡕 등에 대하여 저술하고 있거나 계획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간략한 지견(知見)에 관한 설은 이전의 편지에서 이미 말씀드린 듯합니다. 󰡔상서󰡕 역시 다른 설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화평하게 하여 의심스러운 것을 없애고 역량에 따라 합치되게 하면 곧 저절로 효과를 보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미리 비교하고 헤아려보지 않아도 반드시 혁혁한 공을 취할 것입니다. 근래에 또한 󰡔상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설을 정리하였고, 여백공의 󰡔󰡕에 관한 설을 본받아 책 한 권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 성격이 편협하여 사사로운 사정을 따르는 것을 다 허용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조금 어지러운 것을 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 또한 다시 보니 이전의 이론이 온당하지 않은 것이 많아 삭제하고 정정을 가하여 따로 작은 책 한 권을 만들었으니 간단하고 쉽게 읽기를 바랍니다. 만약 상세히 살펴보려고 한다면 여백공의 책에 이미 있습니다. 󰡔대학󰡕의 격물(格物)󰡔중용󰡕의 명선(明善)은 근래에야 비로소 절실하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한스러운 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을 맞대고 토론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答潘文叔

瞥然知見之說 前書似已奉聞矣 尙書亦無他說 只是虛心平氣 闕其所疑 隨力量看敎浹洽 便自有得力處 不須預爲較計 必求赫赫之近功也 近亦整頓諸家說 欲放伯恭詩說作一書 但鄙性褊狹 不能兼容曲徇 恐又不免少紛紜耳 詩亦再看 舊說多所未安 見加刪改 別作一小書 庶幾簡約易讀 若詳考 卽自有伯恭之書矣 大學之格物 中庸之明善 近日方亦看得親切 恨相遠 無由面論耳

 

 

반문숙에게 답함 答潘文叔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 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반문숙이 편지로 물어온 여러 가지 문제에 간단하게 대답하고 있다.

 

명지이사(命之以事)’와 윗글의 위지유(謂之有)’ 위지무(‘謂之無)’라는 한 예는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선생의 글은 거칠고 가벼워서 단지 대강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은 뜻밖에 병통이 없습니다.

사람의 기질은 같지 않으니 들판에서 모의하면 이루어지는 것은 역시 텅비고 밝으며 한갓진 곳에서는 일에 대해서 정밀하게 볼 수 있어서 어지러워질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기질이 치우친 것이지만 또한 큰 흠은 아닙니다.

좌우(左右)’는 확실히 대신(大臣)은 아니고, 또한 내시나 임금이 총애하여 가까이 둔 신하도 아니며, 다만 친근한 신하를 말하니, ()의 시중(侍中)급사중(給事中), ()와 진() 이래의 중서(中書)문하(門下)와 같은 가까운 신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좌우의 지나치게 친한 자가 몸을 헤친다는 것은 바로 유방(劉放)과 손자(孫資)를 가리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부(大夫)’는 국정을 맡은 신하일 뿐입니다. 육경(六卿)은 육관(六官)의 장이며 또한 상대부(上大夫)입니다. 맹자의 뜻은 다만 제()나라 왕이 사람을 뽑는데 자세히 살피게 하고자 한 것이지 꼭 좌우의 말을 믿는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大臣)을 믿지 않도록 하였다고 하신 것 역시 추론의 오류입니다. 대개 독서는 다만 평온한 마음으로 이치를 설해야 하는 것이지, 꼭 이렇게 지나치게 의미를 찾다가 오히려 바른 의미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答潘文叔

命之以事 與上文 謂之有 謂之無 一例 未是指殺之語 侯先生文字疏率 只可大槪看 然此一節却無病也

人之氣質不同 謀野而獲 亦是虛曠閒靜處見事精審 無膠擾之患耳 固是質之所偏 然亦非大病也

左右固非大臣 亦非閹宦弄臣 但謂親近之臣 如漢侍中給事中 魏晉以來中書門下之比云耳 所謂左右太親者身蔽 正指劉放孫資而言耳 大夫却是任政之臣 六卿官之長 亦上大夫也 孟子之意 但欲齊王審於擇人 未必以其信左右之言而發 所云敎之以不信大臣 亦是推說之過 大抵讀書只合平心說理 不必如此過求 却失正意也

 

 

반문숙에게 답함 答潘文叔

 

해제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앞의 편지에 이어 보낸 것 같다.

 

독서는 도()를 구하고 깊이 사고하고 힘써 행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저의 바람을 깊이 위로해 줍니다. 그러나 특히 평소에 의거해야할 공부나 때에 따라 점차적으로 진보하는 것은 볼 수가 없고, 다만 감히 바깥을 향하여 쫓아 구해서는 안 되고, 쓸데없는 말을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고만 말씀하셨으니, 이렇게 하다가는 아마도 또 멍하게 세월을 보내기만 하고 영원히 진실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듯 합니다. 관리의 임기를 끝내고 나면 방문해주신다고 허락해 주시어 대면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그 때 상세히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세월이 유수와 같아 광음도 아까워 이미 자탄하고 있는데, 또 인물과 세도(世道)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答潘文叔

所喩讀書求道 深思力行之意 深慰所望 然殊未見常日端的用功及逐時漸次進步之處 而但說不敢向外馳求 不作空言解曾 恐又只成悠悠度日 永不到眞實地頭也 承許官滿見訪 會面非遠 當得細論 但歲月如流 光陰可惜 旣以自嘆 又不能不以人物世道爲憂也

 

 

반단숙(우단)에게 답함 答潘端叔 (友端)

 

해제1173(乙未, 宋 孝宗, 淳熙 2) 주자 46세 때의 편지이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를 바라고 계산적인 당시 학자들의 강학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편지에서 강학(講學)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본분의 일이니, 다만 평소의 생각으로 자주 더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오래도록 공부하면서 그 효과를 따지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날로 쌓여서 홀연히 스스로도 그 유익함을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의 학자들은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고, 얻을 것을 따지는 사사로움이 승한데, 그것은 학문과 사변의 공에는 눈곱만큼의 보탬도 되지 않는데, 나누고 구획하여 배치하며, 미리 헤아리고 계산하는 의도가 이미 그 바깥에까지 떠들썩합니다. 그러므로 내실(內實)이 부족하여 허황된 소리가 사방으로 내달아 그 끝까지 이르게 되니, 이것은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 유학(儒學)에 누가 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께서 생각을 돌이키실 수 있기를 바라니 이것이 벗들의 바람입니다.

 

答潘端叔 (友端)

示諭講學之意 甚善甚善 但此乃吾人本分事 只以平常意思密加慤實久遠功夫而勿計其效 則從容之間日積月累 而忽不自知其益矣 近時學者求聞計獲之私勝 其於學問思辨之功未加毫末 而其分畫布置準擬度量之意已譁然於其外矣 是以內實不足而游聲四馳 及其究也 非徒無益於己 而其爲此學之累有不可勝言者 惟明者思有以反之 則友朋之望也

 

 

반단숙에게 답함 答潘端叔

 

해제1185(乙巳, 宋 孝宗 淳熙12) 주희 56세 때의 편지이다. 여자약의 학문이 道義를 버리고 功利를 쫒게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논어혹문󰡕에 비해 󰡔논어집주󰡕는 여러 번 교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여자약에 대해 써 보내 주신 자세한 내용은 매우 타당합니다. 그가 지키는 것은 실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그의 이론은 매우 괴이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서로 이끌어서 도의(道義)의 길을 버리고 공리(功利)의 영역을 쫓게 하니, 인의(仁義)를 막고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먹게 하는 것과 같으니 작은 병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하여 그것을 설명하여 밝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지키는 것으로 말하면 저의 말이 참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이 있지만, 만약 그의 논의에 의거해보면 내 말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논어혹문󰡕을 구한다고 하셨는데, 이 책은 오래도록 공부하지 않고 찬수한 것이지만, 󰡔논어집주󰡕는 여러 번 정확하지 않은 것을 고쳤으니 󰡔논어혹문󰡕과 앞뒤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산간이라 기록할 만한 사람이 없어 부쳐드릴 수가 없습니다. 구본(舊本)을 가지고 볼 수는 있으니, 온당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살펴서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올해 모든 책을 다 한 번 수정하였는데, 󰡔대학󰡕에 고친 것이 그 중에서도 많으니, 구본에 비하여 매우 상세하고 세밀합니다만 앞으로 또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습니다. 의리(義理)는 무궁하고 정신(精神)은 유한한데, 당시의 성현들은 또 어떻게 이렇게 빠진 것 없이 온당하고 정밀하게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答潘端叔

示喩子約曲折 甚當 渠所守固無可疑 但其論甚怪 敎得學者相率而舍道義之塗以趨功利之域 充塞仁義 率獸食人 不是小病 故不免極力陳之 以其所守言之 固有過當 若據其議論 則亦不得不說到此地位也 承需論語或問 此書久無功夫脩得 只集注屢改不定 却與或問前後不相應矣 山間無人錄得 不得奉寄 可只用舊本看 有不穩處子細喩及 却得評量也 今年諸書都脩得一過 大學所改尤多 比舊已極詳密 但未知將來看得又如何耳 義理無窮 精神有限 又不知當年聖賢如何說得如此穩當精密 無些漻漏也

 

 

반단숙에게 답함 答潘端叔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아래의 반공숙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의 일부분에 거의 그대로 나온다. 형제 사이인 반공숙과 반단숙에게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은 의아한 일이다. 이 편지에는 처음이나 시작의 의례적인 말이 전혀 없어 잘못 편입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절조를 지키고 성찰하는 것을 끊임이 없게 하면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알지 못하는 사이에 힘을 얻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예기(禮記)󰡕는 반드시 󰡔의례(儀禮)󰡕와 서로 참조하여 한 책으로 연구해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중간에 백공(伯恭)이 문인(門人)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였고, 근래에 노덕장(路德章)이 두 편으로 편찬한 것을 보았는데 자못 차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여기에 힘들게 진력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서는 자득한 것이 전혀 없으니 또한 부질없이 공부를 낭비했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答潘端叔

持守省察 不令間斷 則日用之間不覺自有得力處矣 禮記須與儀禮相參 通修作一書 方可觀 中間伯恭令門人爲之 近見路德章編得兩篇 頗有次第 然渠輩又苦盡力於此 反身都無自得處 亦覺枉費工夫爾

 

 

반단숙에게 답함 答潘端叔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반단숙이 󰡔논어󰡕의 몇 구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주희가 간단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반단숙의 말과 그에 대한 주희의 평이 교차 편집되어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을 인()에서 떠나지 않고, 그 나머지는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를 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제가<반단숙> 생각하기에 인()과 인심(人心)은 두개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인()과 인심(人心)을 나누어서 말하였으니, 마음은 마치 인()의 형상을 말하는 것 같고, ()은 마음의 이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안자(顔子)는 마음이 인()을 떠나지 않았으니 비록 혹시라도 떠날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인<공자>을 보면 마치 이것으로 저것을 합하는 기상이 있는 듯 합니다. 대개 성인은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서, 편안하게 도()에 맞으며, 천리(天理)를 다하니 자신이 곧 인()입니다. 안자는 반드시 힘써야 적중하고, 반드시 생각해야 얻었으며, 사욕(私欲)이 싹트지 않고 천리가 항상 간직되어 있었으며, 마음은 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쓰는 것은 매우 미미했지만 그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침이 없었으므로 성인이 석 달로 그것이 오래 감을 말했으니, 아마도 항상 그러하여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자가 이르지 못한 아주 작은 차이는 바로 떠나지 않는 곳에 있어서, 아직 약간의 생각과 노력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혹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면 곧 혹 떠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은 것이 석 달이라는 것은 혹 석 달 외에는 떠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머지는 하루나 한달에 한 번 이른다고 했는데, 하루에 한 번 이른다는 것은 하루 동안 끊임이 없다는 것이고, 한 달에 한 번 이른다는 것은 한 달 동안 끊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비록 항상 인을 보존하는 안자와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분명 공부가 매우 익숙하여 아주 오랜 동안 쌓여야 비로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뿐입니다.

석 달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석 달 외에는 혹 조금 떠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저것을 합한다는 것 역시 마음과 인을 진실로 두 가지로 하여 말하는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은 다시 생각을 함양하여 보아야 할 것이니 이렇게 지나치게 급박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에 뜻을 두고, ()을 지키며, ()에 의지하고, ()에서 노닌다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모든 사물마다 모두 이치가 있는데, 도에 뜻을 두면 생각이 함영한 가운데까지 이릅니다. 몸은 이치가 보존된 곳입니다. 덕에 의거하면 몸소 그것을 실천하여 행하는데 돈독해집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몸의 주인입니다. 인에 의지하면 몸으로 인을 절실히 하여 이 마음을 온전히 체득하게 됩니다. 만약 예()에서 노닐면 또 외부의 것들을 막아서 마음을 함양할 수 있습니다.

뜻이라는 것은 이 이치를 알기를 구하고, 반드시 거기에 이르기를 기약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는데, 환퇴(桓魋)가 나를 어찌하겠느냐?”라고 하셨는데,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성인은 그 지위를 바탕으로 하여 행하여, 들어가는 곳마다 자득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보통 사람들이 환란 중에 얻은 것을 잃는 것처럼 하늘의 명()을 어기겠습니까? 부자(夫子)의 몸은 환퇴가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부자의 덕을 환퇴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 땅에서 경계해야 할 일을 당했을 때의 말로 참고해 보면, 이것은 성인이 환퇴가 자신을 해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한 말입니다. 편지에서 의 몸’ ‘의 덕이라고 한 말은 지나칩니다.

 

공자께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노래를 불러서 그 사람이 잘하면, 반드시 그것을 반복하도록 하시고, 뒤에 그것을 따라하셨다고 했는데, 이천(伊川)선생은 해석하기를 노래는 반드시 온전한 절을 다 했을 것이니, 자른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은 잡숫지 않으셨고, 자리는 바르지 않으면 않지 않으셨던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장은 성인이 겸손히 물러나 자세히 살피는 것과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가리지 않는 뜻을 보여주고서야 그 곡을 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천 선생은 다만 공자께서 그 노래의 중간의 한 구절만을 따라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비록 이 역시 하나의 의견일 뿐이지만 미진한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태백(泰伯)은 지극한 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 번 천하를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할 수도 없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문왕(文王)은 성덕(聖德)이 있으니, 대개 천명의 소재입니다. 태백은 천명의 소재를 알았으므로 그 사양함도 천하의 공변됨을 순수하게 하고, 자기 한 몸의 사사로움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단발(斷髮)하고 문신(文身)하였지만, 온 세상에서 알고서 뉘우치지 않음을 보지 못하였고, 지극한 선()에 머물렀을 뿐이니, 어찌 그가 계획한 것이겠습니까? ()에 면밀하지 않고, 권력에 정통한 자 그 누가 여기에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지극한 덕이라고 하는 것은 인심(人心)이 편안하고 천리(天理)가 다하여 지나침과 미치지 않음이 없어 눈곱만큼도 더하고 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 대한 의견은 매우 좋습니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육척의 어린 임금을 맡길만하고, 백리(百里)의 명()을 부탁할만하며, 생사가 달린 큰 일에 임하여서도 절조를 빼앗을 수 없으면 군자인가? 군자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생사가 달린 큰 일에 임하여 절조를 빼앗을 수 없다는 구절이 위 두 구절을 관통한다고 생각하는데, 대개 생사가 달린 큰 일에 임하여 빼앗을 수 없어야 비로소 어린 임금을 맡길만하고, 백리의 명을 부탁할만합니다. 대개 어린 임금을 맡기고, 백리의 명을 부탁하여 다행히 큰 변고가 없으면 그 어려움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기미가 나타나는 동안에 의리가 정밀하고 밝으며, 위태롭고 불안한 때에 의지가 확고하면 비록 나라의 정세가 어수선하고, 인심이 불안하여도 오히려 어린 임금을 보좌할 수 있고, 그 사직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백리를 유지하여 생령(生靈)을 온전히 할 수 있으니, 이해(利害)도 그 생각을 바꿀 수 없고, 생사(生死)도 그가 지키는 것을 바꿀 수 없으므로 생사가 달린 큰 일에 임하여서도 빼앗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이른바 어린 임금을 맡길만하고, 백리의 명을 부탁할 수 있다는 말을 감당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단락에 대한 의견 역시 좋으니, 제 생각도 바로 이 설과 같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可以)’는 두 글자는 대개 그 재질(才質)로 말하는 것이고, ‘빼앗을 수 없다는 곳에서는 그 절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곳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주공(周公)의 훌륭한 기예를 가지고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가 생각하기에, 교만한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는 데 오로지 하는 것이고, 인색한 것은 참으로 자신의 사사로움을 위하고 자신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모두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생길 뿐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고, 인색한 자는 자기에게 인색하니, 교만하면 밖은 여유가 있는 듯 하고, 인색하면 내면은 항상 부족할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 나머지라는 것은 훌륭한 기예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대개 선한 것은 천하가 함께 선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함이 있는 것은 훌륭한 기예가 자신에게 있는 것과 같으니, 비록 주공과 같이 많더라도 또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일 뿐이니, 대저 무엇이 자기에게 있겠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면 이른바 훌륭한 기예란 것은 모두 자기 한 몸의 사사로움에서 나오니, 비록 선함이라도 이익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선을 가지고 있다’, ‘그 선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습니다. 교만함과 인색함, 두 가지의 병통은 쉽게 없애지 못합니다. 학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한 가지 능한 것으로 잘난 척하고, 한 가지 안다고 스스로 기뻐하는 것 모두가 이른바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은 것과 잘못이 있으면서 자신을 바꾸기 꺼리는 것 모두가 이른바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앎을 깊이까지 다하고, 자신을 이기는데 용감한 자라야 비로소 그 두 가지가 참으로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그것이 일어남을 깨달아 그 싹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 대한 생각 역시 좋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년을 배우고서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자를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삼년 동안에 존양하고 성찰하는 공을 잠깐이라도 잊지 않았다면 공부 또한 무르익었을 것이고, 쌓인 것 또한 오래 되었을 것이니 그는 반드시 선함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얻기 어려운 것이니, 배운 것이 잘못되었거나 공부하는 과정이 끊어졌다가 이어졌다가 하여 그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이 장의 의미는 아마도 성인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선이라는 것은 부서진 것을 보수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래 쌓은 다음에야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학자들이 선을 업신여기는 것을 징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학자들이 선으로 나아가는 마음을 이끌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장의 글의 뜻은 통하기가 어려운데, 일찍이 뜻은 마땅히 양()선생의 설을 따라야 하지만 ()’자는 마땅히 ()’로 써야 통합니다. 위 아래 장의 의미 역시 이러한 것들입니다.

 

공자께서 광() 땅에서 경계할 일을 당하셨다에서부터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라는 구절에 대해서, 저는 요무왕주공은 그 때를 만나서 세상에 도를 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왕(文王)은 그 때를 만나지 못하여 도를 전하는 글을 남긴 사람입니다. 공자는 성인의 아래 대에 있어서 늙어서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물러나서 장차 전할 글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은 사문(斯文)을 말하였으니, 다만 문왕이 이미 세상을 뜨셨다고 한 것입니다.

이 장의 의미는 말씀하신 것과 같지 않은 듯합니다. 문왕은 당시에 도를 행하였고, 후세에까지 은택을 미치셨습니다.

 

안연(顔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아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구절에 대하여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홀연히 뒤에 있다는 구절은 안자가 도체(道體)가 크다는 것을 찬탄한 것입니다. ()는 방소가 없어, 힘으로 적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러러보고 찬탄하여도 더욱 높고 견고합니다. 도는 형상이 없어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바라보아도 앞에 있기도 하고 뒤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 대개 지극한 이치 중에는 한 물건도 드러낼 수가 없고 단지 우러러보고 찬탄하며, 바라보고 홀연히 하는 곳이라고 하여도 이미 맞지 않습니다. 아마도 마땅히 물격(物格) 지지(知至) 이상이라야 비로소 여기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니, 학자의 지력(知力)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학자가 도리어 치지(致知) 주경(主敬)의 공부에 힘을 쓰고 종사하는 것은 중에서 머무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지지(知至) 격물(格物)하면 공부가 스스로 이르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니 짧은 시간에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끌어서 학자로 하여금 순서를 따라 구하게 하시고, 엽등하여 나아가게 하지 않으셨으니, 박문약례(博文約禮)가 실제로 착수해야 할 곳입니다. ()선생이 말하는 듣고 본 것에 많은 의()를 모으고, 은미한 때에 지극한 이치를 머무르게 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만두고자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안자가 한 순간도 쉬지 않았으니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나의 재주를 다 했다는 것은 공부가 깊어지고 능력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내 앞에 우뚝 서있는 듯하다는 것은 성()이 형상화하는 것이고,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고자 하여도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은 비록 옳음을 보았지만 옳음에 머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자가 중에 머무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대개 편안히 도에 맞을 수가 없고 중을 말미암아 행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약간 미치지 못한 것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한 곳이 모두 하자가 있는데, 약례(約禮)는 마땅히 후()선생의 설을 따라야 하고, 주경(主敬) 두 글자는 다 갖추어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라와 채()나라에서 나를 따르던 자 자유(子游)자하(子夏)”까지의 구절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염옹(冉雍)은 그 배움을 일컬었고, 재아(宰我)와 자공(子貢)은 그 재주를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안연과 민자건 등 네 사람이 재주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이름나기에는 부족했으므로 그 배움을 칭한 것입니다. 재아 이하는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움이 완성되기에는 이르지 못했으므로 재주를 칭찬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그 중한 것을 들어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유()()()()의 무리는 종신토록 일삼아온 것이 아니라 칭하는데 머물렀을 뿐입니다. 대개 재주에는 다른 것이 있지만 배움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 재주의 치우침에 따라서 누르거나 키우기도 하고, 나아가게 하거나 물러나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일입니다. 그 재주의 치우침에 따라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배우는 사람의 일입니다. 이제 정()선생이 말하는 문학(文學)으로 입문한 자가 있고, 정사(政事)로 입문한 자가 있고, 언어(言語)로 입문한 자가 있고, 덕행(德行)으로 입문한 자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배움에 많은 길이 있어 입문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록한 자의 잘못인 듯 합니다.

배움은 한 가지 일로 이름붙일 수 없으니,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장(文章)이 모두 배움입니다. 지금 오로지 덕행으로만 배웠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천선생의 말씀은 분명 깊이 음미하여 실재의 일에서 증험했을 것입니다. ()()()()의 무리가 종신토록 일삼은 것은 공자께서 칭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니, 반드시 지나치게 말하거나 왜곡되게 떠받들 필요는 없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그 말을 조심하고, 그 행동을 낫게 한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 그 행동을 낫게 한다는 것은 󰡔󰡕에서 말하는 이른바 행동은 공손함을 과하게 하며, 상사(喪事)는 슬픔을 과하게 하고, 쓰는 것은 검소함을 과하게 한다고 할 때의 ()’와 같은 것이지 말이 그 행위를 넘어선다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로 그 가운데를 이은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씨 이하의 설은 문세(文勢)가 순조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미 이 장이 마땅히 이 설과 같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는데, 지금 편지를 받고 보니 저의 생각과 매우 합치됩니다.

 

자장(子張)이 행함에 대하여 묻자 ~ 띠에 썼다 까지에 대하여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 장은, 말은 충심스럽고 믿음이 있으며, 행위는 도탑고 정중하게 하여 존양하는 공부를 계속하여 쉬지 않으면 일이 닥쳤을 때 지각이 생겨나서 물욕이 어둡게 하지 못하고 이치가 존재하게 되어 성찰하는 때를 빼앗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야 행할 수 있습니다. “앞에 참여하고 ~, 멍에에 기댄다운운한 것은 이()의 드러남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날마다 쓰는 것으로 말하면, 존주(存主)를 근본으로 삼으면 사물이 다가왔을 때 지각 작용이 일어나고 마음이 부족함을 알아 힘써 행하게 될 것이니, 이러한 생각이 순조롭게 되어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양()씨와 같이 <>’ 자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면 <>’는 과연 어떤 물건입니까? 학자가 이것을 본 다음에 행하면 들어가는 곳마다 자득하지 못하는 것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담아 두게 될 것이니, 사물이 다가왔을 때 도리어 다른 마음이 생겨 오히려 손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 자는 바로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을 가리키는 것일 뿐입니다. “앞에 참여하고, 멍에에 기댄다라는 것은, 말은 반드시 충신스럽게 하고자 하며, 행위는 반드시 도탑고 정중하게 하고자하여, 잊지 않고 항상 생각하기를 마치 이 두 가지가 늘 눈앞에 있는 듯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할까, 어찌할까라고 말하지 않는 자는 나도 어찌할 수가 없을 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어찌할까라는 말은 어찌할 수가 없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천하에 할 수 없는 일은 없으므로 성인(聖人)어찌할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배움이 이르지 않았다고 하여 재질에 잘못을 돌리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명()에 잘못을 돌이고,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여 시대에 잘못을 돌리는 것 모두가 어찌할 수가 없다고 맡겨두는 것입니다. 진실로 어찌할 수가 없다고 맡겨두면 그만이니, 비록 성인이라고 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장의 여러 설은 모두 통하니, 어떤 사람의 것이 바른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냥 두어도 될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여기에서 말하는 소인은 곧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니 하인과 같은 종류인 것 같습니다. 만약 소인을 범칭하는 것이라면 기른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하면 감정을 상하게 하고 무람없이 하며, 멀리하면 은택이 적다고 하여 불손하고 원망하니, 모두 그것을 감응하는 방법에 미숙한 것이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엄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는 서()로써 하면 불손함과 원망함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장에 대한 저의 생각 역시 같습니다.

 

答潘端叔

子曰 回也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友端竊謂仁 人心也 蓋非二物 曰心不違仁者 分而言之 則心猶言仁之形 仁猶言心之理也 顔子心不違仁 雖無時而或違 然視聖人則猶有以此合彼氣象 蓋聖人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純乎天理 己則仁也 顔子必勉而中 必思而得 私欲不萌 天理常存 心不違仁也 然其用力也甚微 而其所存者無息 故聖人以三月言其久 蓋常而不變也 顔子未達一間者 政在不違處 以尙有些小思勉而已 或謂不違 則有時而或違 不違者三月 則或違於三月之外 非也 其餘則日月至 日至謂一日無間斷 月至謂一月無間斷 雖不若顔子之常存 然亦必工夫純熟 積累深久者 始能至於此耳

三月不違 則三月之外或有時而少違矣 以此合彼 亦恐說得心與仁眞成二物了 所謂仁之形者亦然 此類更涵養意思看 不容如此太急迫也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友端竊謂事事物物皆有理也 志於道則思以極之於涵泳之中也 身者 理之所在也 據於德 則躬以踐之 敦篤於行也 心者 身之主也 依於仁 則體切於仁 全體此心也 若夫游於藝 則又所以防閑於外而涵養於中耳 志者 求知是理而期於必至之謂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友端竊謂聖人素其位而行 無入而不自得也 豈若常人隕穫於患難 畔天之命哉 夫子之身 桓魋所能害也 夫子之德 桓魋其如之何哉

以畏匡之語參之 此聖人決知桓魋不能害己之詞 之身之德 其說過矣

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而後和之 伊川先生解歌必全章也 與割不正不食 席不正不坐同也 未曉 乞鬨誨

嘗謂此章見聖人謙退詳審 不掩人善之意 乃爲盡其曲折 伊川先生但言其不從中間一截和起耳 雖亦是一意思 然恐未盡

子曰 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德而稱焉 友端竊謂文王有聖德 蓋天命之所在也 泰伯知天命之所在 故其讓也純乎天下之公 而不係乎一己之私 雖斷髮文身 擧世不見知而不悔 止於至善而已 庸他計乎 非精於義 達於權者 其孰能與於此 至德云者 人心之安 天理之極 無過與不及 而不可一毫加損者也

此段意思甚佳

曾子曰 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友端竊謂臨大節而不可奪也貫上二句 蓋惟臨大節而不可奪 方見得可以託 可以寄耳 夫託孤寄命 幸而無大變 未見其難也 唯其幾微之間義理精明 危疑之時志意堅定 雖國勢搶攘 人心搖兀 猶能保輔幼孤而安其社稷 維持百里而全其生靈 利害不能移其見 死生不能易其守 故曰臨大節而不可奪也 斯足以當夫所謂可以託 可以寄矣

此段亦好 鄙意正如此說 然可以二字蓋猶以其才言之 不可奪處 乃見其節 重處正在此也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矣 友端竊謂驕則挾爲己有 專於夸己者也 吝則固爲己私 不肯舍己者也 二者皆生於有己而已 但驕者驕於人 吝者吝於己 驕則外若有餘 吝則內常不足耳 曰其餘不足觀者 其餘指才美而言 蓋善者 天下之公善也 人之有善 如才美在身 雖若周公之多 亦人之所當爲耳 夫何有於己 以爲己有 則所謂才美者皆出於一己之私 雖善猶利也 故曰有其善 喪厥善 是以其餘不足觀也 二者之病 未易去也 自學者言之 以一能自居 以一知自喜 皆所謂驕也 善而不公於人 過而憚改於己 皆所謂吝也 惟深致其知而勇於克己者 始知二者之誠有害 而後能覺其起而化其萌矣

此義亦善

子曰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 友端竊謂三年之間 存察之功無斯須之忘也 則工夫亦熟矣 積累亦久矣 其必至於善矣 有不至焉者 難得也 則以夫所學之差謬 施工之斷續而然耳 此章之意 竊恐聖人欲使人知夫善非作輟之可成 必積而後至 蓋不惟可以懲學者玩善之病 而又足以啓學者進善之心也

此章文義難通 嘗意當從楊先生說 但至當作志乃通耳 考上下章意亦此類

子畏於匡至匡人其如予何 友端竊讀堯舜禹湯武王周公 有其時而道行於世者也 文王 非其時而道傳之書者也 孔子 聖人之在下者 老而不遇 退而將傳之書 故此章以斯文爲言 而獨曰 文王旣沒也

此章意恐未然 文王道行於當時 澤及於後世矣

顔淵喟然嘆曰 至 末由也已 友端竊謂自仰之彌高至忽焉在後 此顔子贊歎道體之大也 道無方也 非力之所能中 故雖仰之鑽之而益高堅也 道無形也 非見之所能及 故雖瞻之而在前在後也 蓋至理中著一物不得 只仰之鑽之瞻之忽之之處便已非中矣 恐須物格知至以上始能及此 而非學者知力之所能到也 然在學者 却當用力從事於致知主敬之功 所以求止乎中也 乃若知至格物 則聽夫工夫之自至 而非旦暮之可期也 所以夫子循循善誘 使學者循序以求 而不使之躐等以進 博文約禮 乃實下手處 張先生所謂集衆義於聞見之間 宅至理於隱微之際是也 欲罷不能 顔子無一息間斷而自不能已也 旣竭吾才 工夫深而力到也 如有所立卓爾 誠之形而行之著也 雖欲從之 末由也已 雖見是而未能遂止乎是 非顔子未止於中 蓋未能從容中道 由中而行耳 故曰末由也已 未達一間者 其在玆歟

抹處皆有病 約禮當從侯先生說 主敬二字亦該未盡

子曰 從我於陳蔡者 至 子游子夏 友端竊謂顔閔冉雍稱其學 宰我子貢稱其才 顔閔四子非無才 才不足以名之 故所稱者學也 宰我以下非不學 學未至於成 故所稱者止於才也 皆擧其重者言之耳 然非由賜游夏之徒終身之事 而止於稱者而已也 蓋才有不同 學則無不同 因其才之偏而抑揚進退之 敎者之事也 因其才之偏而求有以化之 學者之事也 今程先生曰有以文學入者 有以政事入者 有以言語入者 有以德行入者 是學有多岐而所入之門各不同也 蓋恐記者之誤耳

學不可以一事名 德行言語政事文章 皆學也 今專以德行爲學 誤矣 伊川先生之言 恐當深味而以實事驗之 由賜游夏之徒終身之事 孔子所稱蓋亦如此 不必過爲辭說 曲加尊奉也

子曰 君子耻其言而過其行 友端竊謂過其行猶易所謂 行過乎恭 喪過乎哀 用過乎儉之過 非言過其行也 以而字貫其中 可見矣 范氏以下之說 恐文勢不順

舊嘗疑此章當如此說 今得來喩 甚合鄙意也

子張問行 止 子張書諸紳 友端竊謂此章謂言忠信 行篤敬 存養之工繼而不息 則事來知起 不爲物欲所昏 而理之所在 不能揜於省察之際矣 夫然後可行也 參前倚衡云者 理之形 非實有物也 今以日用言之 以存主爲本 至事物之來 知之所覺 心之所慊 乃力行之 庶幾此意循循而有進焉 若如楊氏 其者指物之辭 所謂其者果何物? 學者見此而後行 則無入而不自得之說置之胸中 則恐事物之來反成疑貳 却反無下手處

其字正指忠信篤敬耳 參前倚衡謂言必欲其忠信 行必欲其篤敬 念念不忘 常如有此二物在目前也

子曰 不曰如之何 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 友端竊謂 如之何 猶言無可奈何也 天下無不可爲之事 聖人不曰如之何也 學未至而歸咎於質 事不成而歸咎於命 國不治而歸咎於時 皆付之無可奈何者 苟付之無可奈何 則已矣 雖聖人亦無如之何矣

此章數說皆通 未知何者的爲正意 且存之可也

子曰 惟女子與小人爲難養也 近之則不遜 遠之則怨 友端竊謂此所謂小人 乃服役之人 僮僕之類 若泛言小人 則不應謂之養耳 女子小人近之則傷褻 遠之則寡恩 不遜與怨 皆感之之道有未至耳 其惟嚴於治己 恕以待人 則不遜與怨庶免乎

此章鄙意亦如此

 

 

 

반공숙(우공)에게 답함 答潘恭叔(友恭)

 

해제1175(乙未, 宋 孝宗, 淳熙 2) 주자 46세 때의 편지이다. 여기에서는 학문하는 태도와 성리 문제, 경전 구절의 의미, 󰡔춘추󰡕의 괴외와 출공의 처신의 옳고 그름 등에 대하여 반공숙이 묻고 주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가 앉아 있을 때 간혹 허정(虛靜)한 모양이 있지만, (이 때는 오히려 무욕의 상태입니다.) 욕심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이것은 평상시를 말합니다.) 한스러운 것은 공부가 이어지지지 않아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실수하는 곳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번거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더욱 더 실수가 많습니다. 그것을 심각하게 알면서도 고칠 수가 없으니, 고요하고자 하여도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모든 것이 좋습니다만 이렇게 절박하게 공을 따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손해가 됩니다.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횡거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이 기()를 이기지 못하면 성()은 기()에서 명령을 받고, ()이 그 기()를 이기면 성()은 덕()에서 명령을 받는다. 이치를 궁구하고 성()을 다하면 곧 성()은 천덕(天德)이고 명()은 천리(天理)이다. ()에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죽고 사는 일과 오래살고 빨리 죽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횡거선생이 성명어기(性命於氣)’ ‘(性命於德)이라고 할 때의 명()은 다만 명령을 받는다는 의미인 듯 합니다. ‘()은 천덕(天德)이고, ()은 천리(天理)이다라고 할 때의 천리라고 하는 것 또한 덕에서 명을 받아 천리의 당연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제 말이 옳습니까?

성명어기(性命於氣)’라고 할 때의 성명(性命) 두 글자는 같은 차원에서 보아야 할 듯하니, 성과 명이 모두 치우친 기품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성은 천덕이고 명은 천리이다라고 하는 것은 성명이 덕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오직 성인(聖人)이라야 형상대로 실천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본래<當來> 내 몸이 갖춘 이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치를 다하여 남김이나 흠이 없는 것입니다. ()씨의 체성(體性)의 설은 어떻습니까?

()선생이 사람이라는 명칭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천형(踐形)’을 해석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 ()이라는 것은 말을 실천한다, 약속을 실천한다고 하는 천()이지 갖추고 있는 이치를 실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양씨의 체성(體性)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태자 괴외(蒯聵)가 영공(靈公)에게 죄를 얻어서 진()나라의 조씨(趙氏)에게로 달아났습니다. 영공이 일찍이 성밖에서 노닐다가 공자(公子) ()에게 말하기를 내가 장차 너를 세워 후사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영공이 죽자 부인이 유명을 받들어 영을 세웠습니다. 영은 첩()이 있다고 하여 사양하였고, 이에 국인들이 첩()을 세웠습니다. 첩이 임금이 된지 12년에 첩()은 도망하고 괴외가 들어오니 이 사람이 장공(莊公)입니다. 장공은 임금이 된지 30년 만에 달아났습니다. 제가 이 일에 대하여 자세히 생각해 보니, 첩이 그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선 것은 실로 이미 부자(父子)의 의리를 잃은 것입니다. 괴외는 그 아버지에게 죄를 얻어서 달아났는데, 하인인 혼량부(渾良夫)와 공회(孔悝)의 어미가 공회를 협박하여 대에 올라 괴외를 임금에 세우기롤 맹약하였으니, 이것은 선군(先君)의 유명(遺命)을 행하지 않은 것이니,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의리를 모두 잃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국(宗國)에서 마땅히 임금에 오를 사람은 누구입니까? 반드시 영()이어야만 합니까? 영이 나라의 임금 자리를 사양한 날, 국인들이 첩()을 세울 때에 첩은 달아날 수 있었으니, 그랬다면 영은 사양할 수 없었을 것이고, 괴외 또한 다시 위()의 임금이 될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괴외가 이미 위나라로 들어오고, 혼량부와 공회의 어미가 서로 공회를 협박했습니다. 이 때 공회가 죽음으로 그것을 지킬 수 있었으면 괴외가 어찌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공회가 빠져나갈 방법을 알지 못하여 어찌할 수 없이 모두 그것을 따랐으니, 이것이 괴외가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천하에 어찌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없는 나라가 있겠습니까? 괴외가 오래지 않아서 다시 달아난 것은 마땅합니다.

이 논의는 대체로 좋습니다. 그러나 첩이 달아났으면 괴외가 다시 위 나라의 임금이 되려는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과 괴외가 이미 임금에 올랐으나 다시 달아났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대개 첩은 당연히 달아나야하지만 그렇게 하여 괴외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괴외가 그 나라를 벗어날지 혹은 지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으니 다만 의리가 본래 옳지 않다는 것일 뿐이지 꼭 이렇게 억지로 끌어다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공회는 어미가 있었는데 막지 못하고 그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위나라의 신하가 된 자로서는 그 사람의 신하노릇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자로(子路)의 현명함으로 그 집의 가신(家臣)이 되었는데 그 일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또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까?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성인(聖人)의 문하에는 사람들이 세상과 사람에게서 달아나 숨는 것을 고결하다고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제자들이 어지러운 나라에서 벼슬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로염유와 같은 사람들 역시 지나치게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학자가 깊이 경계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중니는 원기(元氣)이고라는 단락 중의 병() 자는 위 두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때가 그러했다고 할 때의 나는 아마도 전국(戰國) 시기의 기풍이 초래했다는 말 같습니다.

아울러가을에 죽는 것까지 다 보았다는 것은 봄에 나는 것을 주로 하고 아울러서 거론한 것입니다. “때가 그러하였을 뿐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아 단적인 취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통하지만 그 때에 사람이 없어 부득이하게 자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추살(秋殺)의 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혹 그러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으니 모두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유()범상작난(犯上作亂)’이라는 것을 두 구절로 본다고 하였는데, 제 생각으로는 단지 한 구절입니다.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충순(忠順)함을 통틀어 말하였다는 것에 의거해 보면 그것이 두 구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작난(作亂)’ 이상은 뒤의 설이 맞습니다.위인지본(爲仁之本)’이란 한 구절은 모두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자의 설은 본래 사()씨의 설과 달라서 하나로 섞을 수가 없습니다. 정자의 설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 사씨의 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불습호(傳不習乎)’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데, 저는 익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충신(忠信)은 서로 존재하게 할 수 있지 서로 없앨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선생은 내외표리(內外表裏)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자신을 다한다는 것은 스스로 돌아보아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라고 합니다. 충실하게 한다는 것은 이것에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므로 ()’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씨가 말을 실천하는 것이 신()이라는데 그치지 않고 확충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다 포괄하지는 못한 듯 합니다. 글의 뒷부분을 끝맺으면서 말하기를 거의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러야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쉬운 것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신()을 말한 곳에서는 오히려 포괄한 것이 부족하지는 않은데, 단지 말을 실천하는 것을 신()의 본 뜻으로 본 것이 흠입니다. 거의 무아(無我)의 경지에 가까워야 한다는 것 역시 지나치지 않습니다.

전습(傳習)’은 앞의 설이 맞는 듯합니다. 충신(忠信)은 뒤의 설이 가깝지만 역시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 충신(忠信)은 하나의 이치이지만 말미암아 말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스스로 돌아보아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이것에 나아가서 베푼다라고 하신 말은 모두 잘못되었으니 다시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실천한다<踐言>’는 것에 대한 것은 뒤의 말이 맞고, ‘무아(無我)’에 대한 것은 앞의 말이 맞습니다. 대체로 앞의 말은 글의 뜻을 평범하고 솔직하게 보아서 너무 거칠고 간략한데 흠이 있고, 뒤의 말은 자세하지만 지루한 잘못이 있으니 서로 바꾸고 양보할 뜻이 있습니다. 앞의 말의 누구의 말인지 모르겠으나 경솔함을 허물하지는 마십시오.

 

민자건은 옆에서 모시는데는 구절에 대하여.

구설(舊說)은은(誾誾)은 온화하고 기뻐하며 간하는 것이고, 간간(侃侃)은 강직한 모양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해석이 맞으니 다시 상세히 음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라는 것은 다만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의미입니다. “자득(自得)하는데 해가 되지 않는다” “모두 힘과 분수가 미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필요 없는 말인 듯 합니다. ()씨가 인용한 용맹을 상하였다(傷勇)’는 말 역시 맹자의 뜻이 아닙니다.

 

()는 지나치고, ()은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 장을 자세히 음미해보고 두 사람의 언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편벽된 기품으로 인하여 성정(性情)의 바름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아주 좋습니다. 두 사람이 만년(晩年)에 덕()으로 나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장(子張)의 말은 끝내 강개(慷慨)하고 격양(激揚)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자하(子夏)는 끝내 법도를 엄하게 지켰습니다. “기품이 비록 변화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 역시 옳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병통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겠습니다. 양묵(楊墨)의 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씨의 학()은 노담(老聃)의 책에서 나왔고, 묵자(墨子)는 안자(晏子) 시대에 이미 그 설이 있었으니, 두 사람의 부류는 아닙니다.

 

자주 쌀독이 비었다는 구절에 대하여.

이것은 단지 공핍(空乏)의 공()입니다. 옛 사람들이 단표누공(簞瓢屢空)’이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만 안자(顔子)는 자주 궁핍한 지경에 처했어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래 글에서 자공(子貢)을 화식(貨殖)으로 말했는데, 바로 이것에 대하여 상반되는 말을 하여, 안자의 어짊이 매우 분명해졌습니다. 만약 심공(心空)’이라고 했다면 성인(聖人)이 평소에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은 없습니다. 또 자주자주 하여 비었다는 것 역시 틈이 생김을 어쩌지 못합니다. 이것은 본래 하안(何晏)이 노장(老莊)의 말을 받아 적은 것인데, 여러 선생들은 그것을 옳지 않다고 하는 잘못을 했습니다.

 

정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자의 제자에 안연(顔淵)이 있고, 그 아래에 자공(子貢)이 있다고 했는데, 부자의 문인(門人)은 그 귀의처로 논하면 증자(曾子)중궁(仲弓)민자(閔子)염자(冉子) 등은 아마도 자공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한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자가 가리키는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러한 것들은 어렴풋이 헤아릴 것이 아니니, 조리가 깊어진 다음에 당연히 자득할 것입니다.

 

答潘恭叔(友恭)

友恭坐時亦間有虛靜之象 此時却是無欲 而未能無欲也 此謂平時 所恨工夫未能接續 故憚煩失錯之處極多 惟其憚煩 愈多失錯 深知之而不能改 蓋欲靜意勝也

所論皆善 但不可如此迫切計功 非惟無益 反有所害 宜深戒之

橫渠先生曰 德不勝氣 性命於氣 德勝其氣 性命於德 窮理盡性則性天德 命天理 氣之不可變者 死生修夭而已 橫渠說 性命於氣 性命於德之命 恐只是聽命之意 性天德 命天理 天理云者 亦曰聽命於德 無非天理之當然耳 不知是否

性命於氣 恐性命兩字須作一般看 言性命皆出於氣禀之偏也 性天德 命天理 卽所謂性命於德

惟聖人可以踐形云者 踐行當來吾身所具之理也 可云者 盡理而無餘欠也 楊氏體性之說如何

程先生以充人之名解踐形字 甚善 踐猶踐言踐約之踐 非謂踐行所具之理也 楊氏體性之語不可曉

太子蒯聵得罪靈公 出奔晉趙氏 靈公嘗遊於郊 謂公子郢曰 我將立若爲後 靈公卒 夫人奉遺命而立郢 郢以輒在爲辭 於是國人立輒 輒立十二年 輒出亡 蒯聵入 是爲莊公 莊公立三十年而出奔 友恭竊詳此事 妄意謂輒不顧其父而自立 固已失父子之義矣 蒯聵得罪於父而出奔 乃因竪良夫及孔悝母劫悝升臺而盟立之 是不用先君之遺命 父子君臣之義俱失之矣 然則宗國所宜立者何人 其必郢乎 當郢辭國之日 國人立輒之時 輒能逃去 則郢無得而辭 蒯聵亦無復君衛之意 及夫蒯聵旣入 良夫悝母相與劫悝 是時悝能守之以死 則蒯聵安得而立哉 惜乎孔悝不知出此 一切付之無可奈何 此蒯聵所以立也 雖然 天下豈有無父子君臣之國哉 宜乎蒯聵未幾而復奔也

此論大槪得之 但謂輒逃去 則蒯聵無復君衛之意 及蒯聵旣立而復奔者 非是 蓋輒自當逃去 非欲爲是以拒蒯聵之來也 蒯聵脫或能守其國 亦不可知 但義理自不是耳 不必如此牽合也

孔悝有母不能禁而使之爲亂 及爲衛之臣 又不能有所立 以子路之賢 爲其家臣 其事如何 心甚疑之 亦何所見而如此 乞賜敎

聖人之門不使人逃世避人以爲潔 故羣弟子多仕於亂邦 然若子路冉有之徒 亦太不擇矣 此學者所當深戒也

仲尼元氣段中幷字莫是包上兩句否 時焉而已 時字恐是戰國風氣所致

幷 秋殺盡見 則以春生爲主而兼擧之也 時焉而已 語意不分明 未知端的指趣 如此所說亦通 或恐更有時旣無人 不得不自任之意 或說秋殺氣象不常如此 蓋有時而或見之也 未知執是 試幷思之

或謂游氏以犯上作亂爲雨節 據友恭所見 只是一節 據說一不好犯上處亦貫忠順而言 則知其非兩節也

作亂以上 後說得之 爲仁之本一句 似皆未得其說 程說自與謝說不同 不可混爲一說也 看得程說分明 則自見謝說之非矣

或謂 傳不習乎是得於人而不習 友恭謂不習而傳與人 或謂忠信能相有而不能相無 故程先生以爲內外表裏 友恭謂盡己者自反而無慊於中 故曰內 以實者卽此而施之於人 故曰外 或謂謝氏雖推廣見得不止踐言爲信 亦恐包括不盡 後結云 幾於無我則能之 莫傷易否 友恭謂說信處却不少包總 只欠以踐言爲信作本意 幾於無我亦不爲過

傳習 恐當如前說 忠信後說近之 而亦未盡 蓋忠信一理 但以所從言之則異耳 所云自反無慊卽此而施之語皆失之 更當別下語也 踐言後說得之 無我前說得之 大率前說看得文意平直而傷於草略 後說子細而失之支蔓 有回互遷就之意 不知前說誰所論 不罪輕率也

閔子侍側

舊說 誾誾 和悅而諍也 侃侃 剛直之貌 此訓得之 更宜詳味 子樂 但爲樂得英才而敎育之之意 如云不害爲自得 皆其力分之所至 似皆衍說也 楊氏所引傷勇 亦非孟子之意

師過商不及 詳味此章 歷考二子言行之間 有以知其因氣禀之偏而失性情之正

此說甚佳 二子晩年進德雖不可知 然子張之語終有慷慨激揚之氣 子夏終是謹守規矩也 所云 氣禀雖爲未化 亦不可謂全未化也 此語亦是 但似此立語 微覺有病耳 楊墨之說恐未然 楊氏之學出於老聃之書 墨子則晏子時已有其說也 非二子之流也

屢空

只是 空乏之空 古人有簞瓢屢空之語是也 但言顔子數數空匱而不改其樂耳 下文以子貢貨殖爲言 正對此相反而言 以深明顔子之賢也 若曰心空 則聖人平日之言無若此者 且數數而空 亦不勝其間斷矣 此本何晏祖述老莊之言 諸先生蓋失不之正耳

程子曰 孔子弟子 顔淵而下有子貢 夫子門人 要其歸而論之 則曾子仲弓閔子冉子恐不在子貢之下 莫以其天資穎悟而言否 程子所指意果如何

此等不須遙度 造理深後當自見得

 

 

반공숙에게 답함答潘恭叔

 

해제1175(乙未, 宋 孝宗, 淳熙 2) 주자 46세 때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반공숙은 경전 구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그에 대한 주희의 견해를 묻거나 주희의 경전 해석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또 편지의 뒷부분에서는 관중의 처신이 옳고 그른지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고 있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앞의 편지에 이어서 보낸 것 같다.

 

제가 생각하기에 성명(性命)은 이()를 주로 하여 말하고, 덕기(德氣)는 신()을 주로 하여 말한 것입니다. 성명(性命)의 이치가 몸에서 얻어지는 것은 덕()이고, 곡망(梏亡)하여 빠진 것은 기()입니다. 대개 덕()은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기()는 치우침이 있습니다. ()은 성()을 이루고 명()을 세우는 까닭이지만, ()가 치우치면 그것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양단(兩端)이 몸에 있어 서로 소장(消長)하고, 그에 따라 많아지고 적어지며, 번갈아 이기고 집니다. 덕이 기를 이기지 못하면 그 치우침을 이길 수 없어서, 치우친 날이 승하고 선한 날은 적으니 이 성명의 이치가 기에서 뒤집히고 어지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덕이 기를 이기지 못하고 성명이 기에서 나오게 됩니다. 덕이 그 기를 이기면 그 치우침을 이겨서 선한 날이 충분하고 치우친 날은 변하게 되니, 성명의 이치가 덕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그 기를 이기면 성명이 덕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기 또한 순수한 것이 있고 잡박한 것이 있으니, 오로지 곡망하여 빠지는 것으로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덕이 기를 이기지 못하면 그 선한 것 역시 부여받은 혈기에서 나올 뿐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형색은 천성이니 오직 성인(聖人)만이 그 형색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선생님께서는 말을 실천한다’ ‘약속을 실천한다는 천()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복하여 단서를 찾아보고 의미가 있음을 극진히 깨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성()이 있으면 형색(形色)이 있으니, 형색만을 거론하면 천성(天性)은 실로 그 가운데 있으므로 형색은 천성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자께서 성인을 말하면서 성을 다한다고 하지 않고 형색을 실천한다고 하셨습니다. 형색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다해도 근본에서 넘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증자(曾子)(형색을) 온전히 하여 돌아갔으니 나의 발을 보고 나의 손을 보아라라고 한 것 역시 이러한 의미이니 거의 실천한 것에 가깝습니다. 학자가 충신(忠信)을 주로 하여 실천하기를 구하는 까닭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씨의 설은 양()씨에 비하여 치밀하여, “형상은 성()의 바탕이다”, “그 성을 다할 수 있으면 형상을 실천하여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고, 성을 다할 수 없으면 재질에 충분하지 않은 것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드러내 밝힌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끝내 정()선생의 사람의 형체를 충만하게 한다는 설의 적확함만은 못합니다. 대게 성을 다하면 곧 형상을 실천할 수 있는데, ()에 있어서는 다한다<>고 하고, 형상에 있어서는 실천한다<>고 하지만 실은 한가지입니다. 만약 자신을 돌이켜보아 진실되다는 설을 이끌어서 어찌 형상에 충분하지 않음이 없겠는가?”라는 말에 이르는 것 역시 정선생의 뜻에 근본한 것입니다. ()씨는 형색을 가리켜 물()이라고 하였고, 천성을 가리며 법칙이라고 하였는데 아주 훌륭합니다. 만약 형상을 실천하고 성을 본받는다고 했으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윤씨가 정선생의 설을 인용한 것 역시 충인지형(充人之形)’의 의미입니다. 이 말을 어떤 책에서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의 설은 모두 좋습니다만 그 사이에 소략하고 세밀한 것이 약간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러하니 비판과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학자가 형상을 실천할 수 있는데 이르기를 구하는 일은 충신(忠信)을 주로 하는 한 가지 일만이 아닙니다.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 역시 분명하지 않으니, 대개 형상에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을 다한 연후에 형상을 실천할 수 있는데 지금 성을 다하면 형상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역시 분명하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충신(忠信)은 한 가지 이치인데, 다만 말미암아 말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충신은 한 가지 이치이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충()이라 하고, ()에 있어서는 신()이라고 하는 것이니, 대개 자신은 마음을 주로 하여 말하고, 사물은 이치를 주로 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것은 충이고, 사물의 이치를 따르는 것은 신입니다. 비록 내외가 다르더라도 요컨대 모두 나에게 진실하게 할 뿐입니다.

마음과 이치는 남과 나로 나눌 수 없지만 이치를 일이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을 따라서 어기지 않는 것을 물()의 이치를 따른다고 하지는 않지만 이 물만을 말하면, 곧 이 물의 실질을 따라서 어기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이른바 신()입니다.

 

염유와 자공은 강직<侃侃>하였다는 구절에 대하여 선생께서는 간간(侃侃)은 강직한 모양이다라고 하셨는데, 두 글자가 강직한 모양이라는 것은 드러내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논어󰡕를 살펴보면 제 생각에는, 염유는 스스로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하다고 하였으니, 덮어서 가리려고 하지 않고 감히 속이고 숨기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화(子華)를 위하여 곡식을 청하자 부자께서는 부()를 주라고 하니 더 주기를 청하였고, ()를 주라고 하니 자신의 뜻에 차지 않아 곧 가서 스스로 곡식 5()을 주었습니다. 자공으로 말하자면 숙손무숙(叔孫武叔)으로 인하여 부자께서 헐뜯음을 당하자 곧 사람이 스스로 끊고자 하여도 어찌 해와 달을 손상시킬 수 있겠는가? 다만 자신의 도량을 알지 못함을 드러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자께서는 벗에 대한 물음에 답하여 할 수 없으면 그만두어서 스스로 욕을 당하지는 말아라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자공이 평소에 자신의 생각을 많이 펼쳐놓으니 그 성질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릇 이것이 강직함을 가지고 있는 형상인 듯하나 따로 근거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강직<侃侃>’이라는 것은 다만 온화<誾誾>’한 자가 기상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적은 것과 비교한 것으로, 곧 아직 함양이 아주 깊고 두텁지 않은 것입니다.

 

선생께서 자장과 자공은 기질이 비록 변화되지는 않았지만 또한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 역시 옳다. 이것으로 입론하는 것은 병통이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학자의 기질이 실로 성인에 이르지 않았으면 모두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장과 자공 두 사람이 공부에 나아간 지 오래지만 겨우 변화는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뿐 마치지는 못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힘을 써야 마땅하니 변화되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질을 변화시킨다<變化氣質>”고 할 때의 화()대인으로서 화한다<大而化之>”라고 할 때의 화()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정자(程子)는 박소(薄昭)의 말로서 환공(桓公)이 형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였는데,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순경(荀卿)은 일찍이 환공이 나라를 두고 다투다가 형을 죽였다고 했는데, 그 말은 실로 박소의 이전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관중(管仲)에 대하여 그 처신의 옳음에 대해서 다시 논하지 않고, 다만 이룬 공만을 칭했을 뿐입니다. 대개 관중의 사람됨은 의()로 책()한다면 이루 다 책망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명교(名敎)의 가운데 다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으로 취하면 그 공이 사람에게 미친 영향은 함부로 폄하하여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루 다 책망할 수 없는 것은 남겨두고, 다만 폄하할 수 없는 것으로 칭하는 것입니다. 칭하는 것은 실로 그것을 허여하는 것이지만, 남겨두고 논하지 않은 것은 또 장차 때가 되면 논할 것입니다. 대개 장차 때가 되어 그것을 논한다면 만세의 방패로 존재하게 된 까닭 역시 절실하고 지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성인의 마음은 지극히 밝고 지극히 공정하여 사람의 공()과 죄(), ()과 실()이 그 사이에서 도망할 곳이 없으며, 누르거나 높이고, 취하거나 버릴 때에 또한 일찍이 한 쪽만 승하거나 서로 덮어 가리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함께 견주어볼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정자(程子)가 틀린 것입니까?” “정자는 성인이 놓아두고 논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왜곡되게 의미를 더하였는데, 은미하고 드러나며, 드러내고 숨기는 까닭과 사람의 도리를 세운 뜻은 지극히 깊고 넓습니다. 학자는 마땅히 숙고하고 깊이 구하여야 하고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두 사람의 질문을 자세히 살펴보니, 자로(子路)가 말하기를 소홀(召忽)은 죽고,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 아닌지요라고 하여 소홀을 관중에 대비시켜 말하였으니, 이는 소홀이 죽은 것을 옳다고 보고, 관중이 죽지 않은 것을 의심하여 그 잘못됨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하지 못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죽지 못하고, 또 그를 도왔다고 하여 이미 죽지 못했다고 했는데, 다시 이어서 또 그를 도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관중이 단지 죽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 자신의 군주를 죽인 사람을 섬겼으므로 또한 인()하지 못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자로는 관중이 마땅히 죽어야 하고 살아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자공은 아울러 설사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환공(桓公)은 또한 섬기면 안된다고 보아서 모두 인하지 않다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관중이 규()와 함께 모의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으나 비록 죽어야 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환공이 마땅히 자리에 올라야 한다면 섬길 수 없는 도리는 없을 것입니다. 대개 관중이 비록 규의 후견이긴 하지만 규의 신하는 아니고 제()나라의 신하였습니다. 환공이 마땅히 임금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면 환공은 곧 나의 임금이니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관중의 죄는 규의 다툼을 간하지 못하고 도리어 규의 다툼을 도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죽지는 않았으나 처음부터 전날의 다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기를 구한 무리는 아닙니다. 환공은 그 죄를 버리고 그를 등용했으니 명분(名分)은 옳지 않지만 일은 옳으니, 또한 불충(不忠)을 반복한 무리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자께서는 자로의 인하지 않다는 물음에 답하여 제후들을 규합한 공을 일컬어 누가 그의 인()함 만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죽지 않은 불인함이 제후들을 규합한 인함만 못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대저 제후들을 규합한 인()이 죽지 않은 불인을 넘어서니, 부자의 생각은 바로 죽지 않은 것을 그르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지도 않고, 또 환공을 도운 것이 인()하지 않다는 자공의 물음에 답하여서는, 그 공을 반복하여 칭하고 또 그가 죽지 않음에 대하여 변론하기를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구렁에서 목메어 죽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어찌 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은 또 관중이 죽지 않은 것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는 부자의 생각은 관중이 죽지 않은 것과 환공을 도운 것이 모두 옳다고 여기고, 그 처신을 그르다고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이 장을 읽으면서 정선생의 설이 옳다고 여겼고, 환공이 형이고 규가 동생이며, 소홀의 죽음은 절개를 지킨 것이며, 관중은 죽지 않음으로 과실(過失)을 고쳤다고 보았습니다. 자로와 자공 두 사람의 불인(不仁)에 대한 질문은 바로 그 처신의 그릇됨을 의심하였으나 부자의 답변은 그 처신의 옳음을 논하고, 단지 그가 이룬 공만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엎드려 선생의 설을 읽어보고 망연자실하였습니다. 여러 날을 완미하여 보아도 마침내 얻는 것이 없습니다. 저의 생각은 만약 순경(荀卿)의 설을 따른다면 환공은 형을 죽인 것이고, 관중은 원수를 섬긴 것이 되어 관중은 명교의 가운데 다시는 설 수가 없습니다. 성인이 마땅히 그것을 분명하게 변론하여 만세의 방패로 존재할 수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질문을 벼려두고 그가 성취한 공까지 널리 언급하였으니, 공으로 의()를 가린 것이 아닙니까? 가령 두 사람이 관중의 공에 대하여 물었는데, 부자께서 그 처신의 의()를 놓아두고 폄하할 수 없는 것으로 그를 칭할 수는 있습니다. 이제 물은 것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대답한 것은 질문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그 의() 빼앗고 그 공을 취한 것입니다. 또 두 사람의 질문을 분명하게 변론하지 않고, 은근히 만세의 방패로 놓아두고 당시에는 논하지 않았으니, 장차 때가 되어 그것을 논하면 거의 절실하지 않은 것을 절실하고 지당하다고 할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박소의 말이 비록 반드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성인이 취하신 뜻은, 제 생각에는 환공은 형을 죽인 것이 아니고, 관중은 원수를 섬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논의는 매우 좋습니다. 지난번에 여자약 또한 그것을 변론하였지만 보내주신 편지만큼 상세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관중의 뜻은 반드시 살기를 구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당시의 의()는 오히려 살만한 도리가 있었던 것이니, ()을 해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뿐입니다.

 

答潘恭叔

 

友恭竊謂性命主理而言 德氣主身而言 性命之理得之於身者 德也 而其梏亡陷溺之者 氣也 蓋德無不善 而氣則有偏 善所以成性立命 而氣偏則隔之耳 兩端之在身 相爲消長 隨其多寡 迭爲勝負 德不勝氣 是無以勝其偏 偏日以勝而善日以微 則是性命之理反亂於氣矣 故德不勝氣 性命於氣 德勝其氣 是有以勝其偏 善日以充而偏日以化 則是性命之理不外於德矣 故曰德勝其氣 性命於德 未知是否

氣亦有純有駁 不得專以梏亡陷溺爲言 但德不勝氣 則其善者亦出於血氣之禀耳

孟子曰 形色 天性也 惟聖人可以踐形 先生謂踐言踐約之踐 反復紬釋 極覺有味 竊謂有是性則有是形色 單擧形色則天性固在其中矣 故曰 形色 天性 故孟子言聖人不曰盡性 而曰踐形也 踐形云者 猶言爽厥子 不愆于素云耳 曾子全而歸之 曰 啓予足 啓予手 亦此意 蓋幾於踐矣 學者主忠信 所以求夫踐也 一息不存 則非踐矣 游氏之說比楊氏爲密 曰 形者 性之質 曰 能盡其性 則踐形而無愧 又曰 未能盡性 則於質有所不充 如此發明固好 但終不若程先生充人之形爲的也 蓋盡性乃能踐形 在性則言盡 在形則言踐 其實一也 如引反身而誠之說及豈不慊於形哉之論 則亦本程先生之意矣 楊氏指形色爲物 指天性爲則 固佳 如謂踐形體性 恐未善 尹氏引程先生之說 蓋亦充人之形之意也 不知此語見於何書 先生之說皆善 但其間微有疏密 妄意如此 乞賜批誨

學者求至於可以踐形之功 非但主忠信一事而已 非踐語亦未瑩 蓋曰形有所不踐云耳 盡性然後可以踐形 今曰盡性乃能踐形 亦未瑩

先生曰 忠信一理 但所從言之異耳 友恭竊謂忠信一理 而於己言忠 於物言信者 蓋己則主心而言 物則主理而言 故盡己之心爲忠 循物之理爲信 雖內外之不同 要之皆誠於我耳

心理不可以彼己分 以理爲事可也 循物無違 非謂循物之理 但言此物則循於此物之實而無所違 則是所謂信耳

冉有子貢侃侃如也 先生曰 侃侃 剛直之貌 二子剛直之象 無顯言者 以論語考之 妄意冉有自謂非不悅子之道 力不足也 有以見其不肯掩覆 不敢欺隱 爲子華請粟 夫子與之釜 請益 與之庾 不滿其意 便往 自與粟五秉 至於子貢因叔孫武叔毁夫子 便曰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 夫子答問友曰 不可卽止 毋自辱焉 意者子貢平日多直己見 因其質而語之 凡此恐帶剛直之象 恐別有所據

侃侃只是比之 誾誾者微有發露顯著氣象 便是涵養未甚深厚處

先生所云 子張子貢氣質雖爲未化 亦不可謂全未化 此語亦是 似此立語 漸覺有病耳 友恭竊謂學者氣質苟未至於聖人 皆不可以言化 以二子進工之久 殆曰愛而未已者 然尙當用力 則未可謂之化也

變化氣質之 化與 大而化之之 化不同

或問 程子以薄昭之言證桓公之爲兄 信乎 曰 筍卿嘗謂桓公殺兄以爭國 而其言固在薄昭之前矣 蓋亦未有以知其必然 但孔子之於管仲 不復論其所處之義 而獨稱其所就之功耳 蓋管仲之爲人 以義責之 則有不可勝責者 不可以復立於名敎之中 以功取之 則其功所以及人者未可以遽貶而絶之也 是以置其所不勝責者而獨以其不可貶者稱之 稱之固若與之 而其所置而不論者 又若將有時而論之也 夫若將有時而論之 則其所以爲存萬世之防者 亦不可不謂之切至耳矣 蓋聖人之心至明至公 人之功罪得失固無所逃於其間 而其抑揚取舍之際 亦未嘗有所偏勝而相掩也 非可與權者 其孰能知之 曰 然則程子非與 曰 彼於聖人之所存而不論者曲加意焉 其所以微顯闡幽 建立民彝之意至深遠矣 學者當熟考而深求之 未可以率然議也

友恭竊詳二子之問 子路曰 召忽死之 管仲不死 未仁乎 以召忽對管仲言之 是以召忽之死爲是 以疑仲不死難爲非 故以爲未仁也 子貢曰 不能死 又相之 旣言 不能死 復繼以 又相之 是疑仲不特不能死 而又事殺其主之人 故亦以爲非仁也 意者子路以仲爲當死而不當生 而子貢則幷以爲設使可生 桓公亦不當事 而俱有未仁之問也 殊不知仲同糾謀 則雖有可死之道 而桓乃當立 則無不可事之理 蓋仲雖糾之傳 然非糾之臣 乃齊之臣也 桓公當立 則桓乃吾君 所當事也 但仲之罪乃在於不能諫糾之爭而反輔糾之爭耳 是其不死 殆知前日之爭爲不義 而非求生之比也 桓公舍其罪而用之 則名不正而事正 亦非反覆不忠之比也 故夫子答子路爲未仁之間 則稱九合之功曰 如其仁 以爲不死之未仁不如九合之仁也 夫以九合之仁過於不死之未仁 則夫子之意未直以不死爲非可知矣 答子貢不死 又相桓爲非仁之問 則復稱其功 又辨其不死而曰 豈若匹夫匹婦之爲諒 自經於溝瀆而莫之知 曰 豈若云者 是又以仲之不死過於死也 是夫子之意皆以不死相桓爲可 而不以其所處爲非也 故舊日讀此一章 以程先生之說爲正 以桓公爲兄 子糾爲弟 召忽之死爲守節 管仲不死爲改過 二子不仁之問 正疑其所處之非 而夫子答之 乃論其所處之義 而非專取其所就之功也 今伏讀先生之說 恍然自失 玩味累日 迄未有得 區區之意 竊謂若從荀卿之說 則桓公爲殺兄 管仲爲事讎 是仲不可復立於名敎之中 聖人當明辨之 以存萬世之防可也 舍二子之所問而旁及其所成就之功 毋乃以功而揜義乎 使二子問仲之功 夫子置其所處之義 而以不可貶者稱之可也 今所問考不答 而所答者非問 則是略其義而取其功也 且不明以辨二子之問 而陰以存萬世之防 當其時而不論 而將有時而論之 幾於不切而謂之切至 何也 薄昭之言雖未知其必然 然以聖人取之之意 則妄意謂桓公非殺兄 管仲非事讎可也

此論甚善 向呂子約亦來辨之 然不若來喩之詳也 但管仲之意未必不出於求生 但其時義尙有可生之道 未至於害仁耳

 

 

반공숙에게 답함 答潘恭叔

 

해제1173(乙未, 宋 孝宗, 淳熙 2) 주자 46세 때의 편지이다. 불교에 대한 반공숙의 생각에 대하여 주희가 비평한 것이다. 앞부분에 반공숙이 질문한 내용을 놓고, 뒤 부분에 주희가 비평한 내용을 달아놓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불학(佛學)을 배우는 것이 잘못된 까닭은 일찍이 마음을 알았던 적이 없다는 것일 뿐입니다. 대저 성()은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고, ()이 나타내는 것은 성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심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대저 성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을 떠나서 인생이정(人生而靜)’ 이상에서 성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사단(四端)이 드러나는 것을 심의 망상(妄想)으로 여겨 성의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하고, 도리어 그것을 다 없애버리려 힘씁니다. 저들이 삼강오상(三綱五常)이 없는 것은 대개 여기에 근원이 있을 뿐입니다.

 

성은 실로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으나, 그것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없는데, 그것은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이 된 다음에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움직이지 않더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또 어찌 일찍이 이지러지고 부족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씨의 병은 정신(精神) 혼백(魂魄)이 성이라고 잘못 아는 것이지, 성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몰라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성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을 망령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망령된 생각이라고 말했으면 무릇 성이 본래 공()함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지 않은 것 역시 아는 것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듯합니다.

 

答潘恭叔

學佛之所以差者 蓋未嘗識心耳 夫性不能不動 心之所形 性之所有也 彼之所以不識心者 以不知夫性之不能不動 故離心以求性於 人生而靜以上耳 夫是以四端之著 則以爲心之妄想而非性之本然 反用力以殄滅之 彼之無三綱五常 蓋原於此耳 云云

性固不能不動 然其無所不有 非爲其不能不動而後然也 雖不動 而其無所不有亦曷嘗有虧欠哉 釋氏之病 乃爲錯認精神魂魄爲性 非爲不知性之不能不動而然也 使其果能識性 卽不可謂之妄見 旣曰妄見 則不可言見夫性之本空 此等處立語未瑩 恐亦是見得未分明也

 

 

반공숙에게 답함 答潘恭叔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앞부분에서 학문은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해야함을 말하였다. 또 이 편지에서 주희가 꾸준히 四書集註의 교정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뒷부분에서는 몸이 노쇠하여 󰡔강목󰡕의 편찬 작업을 계속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다.

 

편지에서 학문을 하는 의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따지지 않고 다만 지키고 성찰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면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효과를 보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시경󰡕을 읽고 하신 말씀은 매우 좋습니다. 근래에 기거지(祁居之)󰡔논어󰡕에 대한 설을 보았습니다. 이 한 단락 역시 좋은데, 대체로 보내주신 편지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각자 편견을 근거로 하여 논의를 하였으니, 특히 드러내 밝힌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실로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여백공의 󰡔집해(集解)󰡕 첫 장에서 사()씨의 설을 인용하였으니 이미 한 쪽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상중편(桑中篇)후에 이르면 말한 것이 매우 좋지만 변호하는데 힘을 쓰느라 사람들이 다투지 않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래의 독서는 평온하여 주해한 것의 의미가 깊고 정밀한 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여러 책을 다듬었는데, 구본(舊本)보다 낫습니다. 󰡔예기󰡕󰡔의례󰡕와 서로 참조하여 한권으로 이어서 정리하였으니 볼만합니다. 중간에 백공(伯恭)이 문인(門人)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였고, 근래에 노덕장(路德章)이 두 편으로 편찬한 것을 보았는데 자못 차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여기에 힘들게 진력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서는 자득한 것이 전혀 없으니 또한 부질없이 공부를 낭비했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정력이 이미 쇠하여 결코 감히 처음부터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공숙께서는 시간을 내어 그것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거리가 멀어 서로 모여서 평가하고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회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면 본보기를 써서 보내겠습니다. 지금 편목이 있으니 먼저 기록하여 보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이니 노덕장과는 다릅니다. 󰡔강목(綱目)󰡕 또한 괴롭게도 처리할만한 심력이 없고, 마음과 눈이 모두 어두워져서 노고를 견디지 못하니, 또 조만간 마음과 눈이 어떨지를 다시 지켜보겠습니다. 억지로라도 할 수가 있다면 마땅히 점차 그것을 완성할 것입니다.

 

答潘恭叔

示喩爲學之意甚善 然不須如此計較 但持守省察 不令間斷 則日用之間不覺自有得力處矣 謂詩之說甚善 頃見祁居之論語說 此一段亦好 大槪如來喩之云也 其他各據偏見 便爲成說 殊不能有所發明 此固無足怪者 而伯恭集解首章便引謝氏之說 已落一邊 至桑中篇後爲說甚長 回護費力 尤不能使人無競

不審亦嘗致思否 近年讀書 頗覺平穩不費注解處意味深長 脩得大學中庸語孟諸書 頗勝舊本

禮記須與儀禮相參 通修作一書 乃可觀 中間伯恭欲令門人爲之 近見路德章編得兩篇 頗有次第 然渠輩又苦盡力於此 反身都無自得處 亦覺枉費功夫 熹則精力已衰 決不敢自下功夫矣 恭叔暇日能爲成之 亦一段有利益事 但地遠 不得相聚評訂恨 如欲爲之 可見報 當寫樣子去也 今有篇目 先錄去 此又是一例 與德章者不同也 網目亦苦無心力了得 蓋心目俱昏 不耐勞苦 且更看幾時如何 如可勉强 或當以漸成之耳

 

 

반공숙에게 답함 答潘恭叔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학문의 근본은 持敬執義애 있음을 말하고, 唐 高祖 父子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학문의 근본은 일상생황을 하는 동안에 지경(持敬)하고 집의(集義)하는데 있으니 항상 성찰해야 합니다. 독서와 의()를 구하는 것은 단지 그 중의 한 가지 일일 뿐입니다. 예전부터 이러한 의미를 알고 있었으나 천천히 하고 급하게 해야 할 것, 먼저하고 나중에 할 것 사이에서 거꾸로 된 것이 있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하고 사람을 그르친 것이 적지 않으니, 지금에야 비로소 스스로 후회할 뿐입니다. 󰡔󰡕에 대한 설에는 이미 그 아래에 주()를 달았는데 또한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으니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대개 근래의 학자들의 폐단은 그 설이 너무 높고 너무 많은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만 생각이 번잡하기만 하고 완미하는 공부는 전혀 없어서, 도리어 성현의 본래의 의도를 잃을 뿐만 아니라 또 일상생활의 실질적인 공부를 분리해 버리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범공(范公)입자(立子)’의 설은 참으로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왕(太王)의 현명함과, 태백(太伯)의 양보, 왕계(王季)의 우애는 모두 당() 고조(高祖) 부자가 미칠 바가 아닙니다. 대개 이러한 생각은 하루 아침에 거짓으로 꾸며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범공은 차라리 경()을 지키고 바른 것에 의거해야 하는 것이지 감히 함부로 절의에 맞는다고 논해서는 안됩니다. 󰡔의례󰡕는 이미 고요(高要)의 범령(范令)에게 부쳐 보냈는데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공부는 도량에 여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니, 함양(涵養)성찰(省察)의 실질을 뛰어넘게 해서는 안됩니다.

 

答潘恭叔

學問根本在日用間持敬集義工夫 直是要得念念省察 讀書求義乃其間之一事耳 舊來雖知此意 然於緩急先後之間終是不覺有倒置處 誤人不少 今方自悔耳 詩說已注其下 亦未知是否 更告詳之 大抵近日學者之弊 苦其說之太高與太多耳 如此只見意緖叢雜 都無玩味功夫 不唯失却聖賢本意 亦分却日用實功 不可不戒也 范公立子之說 誠有未盡 然太王之明太伯之讓王季之友 皆有非唐高祖父子所及者 蓋此意思不是一朝一夕捏合得成 故范公寧守經據正 而不敢遽以用權達節論之也 儀禮已附高要范令去 不知今已到否 此等功夫度有餘力乃可爲 不可使勝却涵養省察之實也

 

 

반공숙에게 답함 答潘恭叔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시경󰡕의 여러 편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데, 특히 정현의 주와 모씨의 서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시경󰡕 주석의 득실을 논하고 있다.

 

󰡔()󰡕는 육의(六義)의 의미를 갖추었다.

육의(六義)의 차서는 공()씨가 잘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여섯 글자의 의미는 극히 명백한데 다만 정()씨가 󰡔주례󰡕약장(龠章)󰡕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령되게 칠월시 한 편을 삼체(三體)로 나누었으므로 여러 유학자들이 대부분 그 설을 따라서 억지로 끌어다 붙이고, 어지럽게 뒤섞으며, 알맞게 배치하는데 힘을 다 쓰면서 다만 정씨가 곡해한 󰡔주례󰡕 한 장에 부합하려고만 하여, 󰡔󰡕의 글의 의미와 뜻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은 감히 그것을 따르지 않고, 다만 바로 글에 의지하여 뜻을 해석합니다. 이미 어지러움과 쓸데없이 기력을 낭비하는 일을 벗어나면 육의는 또 모두 쓸모가 있으니 헛되어 나열된 것은 아닙니다. 󰡔󰡕를 읽는 사람이 이러한 의()를 알면 곧 이러한 의()를 짓게 되어 추구하는 것이 매우 수월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를 말하는 것은 공허하게 무한한 도리만 있고 조금의 의미도 없는 것은 다만 이러한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주례󰡕에서 육시(六詩)로 나라의 자제들을 가르쳤고, 역시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의례(義例)를 밝히게 하고, 󰡔󰡕의 의미를 찾게 하여 대체로 쉽게 깨닫게 했습니다. 만약 지금 말하는 것과 같다면, 곧 경전을 통달하지 못했을 때는 드러내 밝히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다가 이미 경을 통달한 후에 헛되이 쓸데없는 말만 더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자제를 가르치는 사람이 왜 꼭 이것을 우선으로 하겠습니까? 󰡔󰡕의 의()가 되는 것이 또 어찌 여섯 가지에 그치겠습니까? 약장(籥章)빈아(豳雅)」 「빈송(豳頌)대전(大田)양사(良耜) 편들이 거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왕()씨의 설과 같이 따로 이 시가 있는데 없어졌을 것입니다. 또 그것도 아니라면 이 칠월한 편을 세 가지 음조로 불어서, 가사는 같지만 음이 다를 것입니다. 만약 정씨의 설과 같다면 두 장이 빈풍(豳風)이 되어 혹 음절을 이룰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장(四章) ()빈아가 되고, 삼장(三章) ()빈송이 되는데 이르면 어떤 곡조와 박자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관저는 주공(周公)이 지은 것 같다.

무릇 ()’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민간의 가요인데, 시를 채집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으면 성인(聖人)이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고, 그로써 풍속교화의 작용이 세상에 널리 드러나게 되면, 깊은 감명을 받아서 이렇게 목소리로 발성되는 것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이니 바람이 사물을 움직여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관저(關雎)의 시는 바로 당시의 사람들이 문왕(文王)과 태사(太姒)의 깊은 덕화(德化)를 입어 심담폐장(心膽肺腸)이 일시에 바뀌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렇게 노래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음악을 지을 때 편의 첫 부분에 배열하여, 한 때의 성함을 드러내어 만세의 법으로 삼았으니, 더욱 사람을 감동시키는 오묘한 것입니다. 만약 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면 국풍(國風)」․ 「()」․「()은 한 편도 민간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다만 차관(差官)이 서로 비슷한 악장을 찬한 것이어서, 자연히 발현된 생생한 의미는 전혀 없으니, 또 풍속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효과를 보겠습니까?

 

권이(卷耳)는 아마도 문왕(文王)이 사방을 정벌하고, 제후(諸侯)들을 조회할 때 후비(后妃)가 지은 것 같다.

권이는 아마도 문왕이 사방을 정벌하고, 제후들을 조회할 때에 후비가 지은 것인 듯합니다. 첫 장은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이 맞고, 뒤의 삼 장은 첫 장의 뜻을 이어서 말한 것 같은데, 높이 올라 멀리보고 따라가려 하니, 마부와 말이 모두 병들어 갈 수가 없으므로 술을 따라 마시고 그 근심을 스스로 푼다는 것입니다. 대의는 초충(草蟲)등의 편과 서로 비슷합니다. 사수시(四愁詩)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태산(太山)에 있는데, 양보(梁父)에 가서 따르기도 어렵구나라고 한 것 역시 이 장과 우연히 그 뜻이 합치될 뿐입니다.

 

규목(樛木)의 서문.

질투하는 마음이 있으면 분명 은혜를 아랫사람에게까지 베풀 마음도 없습니다. 이 서문은 도리어 해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종사(螽斯)의 서문.

종사가 투기하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살펴본 적이 없습니다. 소서(小序)는 또 적확하여 믿을만한 글이 아니고, 시 중에는 또한 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없고 다만 많은 것이 모여 있는 상태가 사람이 투기하지 않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도요(桃夭)에서 꽃<>이라고 하고, <>이라고 한 것은 본래 그 생의(生意)가 미치는 바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이른다는 것이고, 실가(室家)가실(家室)가인(家人)이라고 말한 것 역시 그 덕이 미치는 바가 미치지 않는 곳 없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생의(生意)가 점점 커지는 것이고, 하나는 덕의(德意)가 점점 넓어지는 것으로 완곡하게 비유한 것이니 이 말의 의미는 무궁한 것입니다.

도요서문의 첫 구절은 너무 끌어다 붙인 듯하고, 다른 설은 적당한 것 같습니다.

고양(羔羊)의 서문과 도요는 서로 비슷한데, 이남(二南)편 중의 것들이 대부분 이렇게 의젓합니다. 모씨의 설과 같은 것은 정직(正直)’ 두 글자에서 의미가 더욱 친절합니다. 그러나 소서의 본말은 분명 󰡔󰡕의 의미를 다할 수 있으니, 정현(鄭玄)과 장흔(張訢) 두 사람의 설은 의미는 또 나름대로 좋으니 다시 상세히 살펴보고 취사해야 할 것입니다. 혹 나란히 있으면서도 자연히 하나의 의미도 방해하지 않을 수가 있지만 억지로 끌어다가 하나의 설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성실한 군자<振振君子>는 아내가 군자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은 드러내지 않고 선()을 드러내었으니, 대개 머물러 있는 사람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은기뢰(殷其雷)는 본래 그 악한 뜻을 드러낸 것이 없으니 반드시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사균(死麕)길사(吉士)’, 일월(日月)덕음(德音)’과 같이 설파해야 할 뿐입니다.

 

표유매의 위 네 구절은, 대개 남녀에 대한 생각은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여자의 정()에서 발하지만 스스로 이를 수는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아래 두 구절은 반드시 맺어질 약속의 말과 혼례의 준비를 기다린 다음에야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역시 예의에 머무름을 말한 것입니다. 이 시는 곧 인정이 비슷하다는 것을 가지고 당시 부모 된 사람이 자식들을 혼인시키는데 있어서 때를 잃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을 절실하게 느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모두 당시 여자들이 스스로 지은 말이므로 ()의 정식 경문(經文)을 삼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에서 발한다고 하고, 예의에 머무름을 말한 것이라고 한 것은 아주 좋습니다만 부모된 사람의 심정을 절실하게 느낀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반드시 이런 뜻이 있는 것은 아닌듯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자의 자작(自作)이라고 한 것 역시 좋지 않습니다. 대개 이항(里巷)의 시는 단지 이와 같으니 바름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소성(小星)은 정씨의 설을 아울러 취하는 것이 아주 좋습니다.

강타(江沱)의 서문은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또 처음에는 뉘우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으니 그 만난 사람을 따라서 안정되었다고 한 데에 이르고, 끝에는 나를 방문하지 않았으니 처해있음이 이미 익숙하여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알므로 다시 우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는 도연명의 서소(舒嘯)’와 같습니다.

소서는 참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만 강타지간(江沱之間)을 말한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대개 혹은 보이는 산천을 가지고 흥()을 일으켰습니다. “그 뒤에는 뉘우쳤다” “그 뒤에는 처하였다고 한 두 구절은 지금의 설과 같다면 잉첩이 스스로 한 말이 되니 ()’ 자는 통하지 않습니다. 또 삼장의 ()’ 자는 다 사물을 가리키는 칭호이니 역시 스스로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집전(集傳)󰡕의 소() 자의 의미는 지난번에 여백공께서 깊이 공감 하셨습니다. 야유사균(野有死麕)󰡕은 강포한 자가 예를 갖추지 않고 침범하여 능멸하려는 도구로 삼음을 말한 것인데, 맞습니다. 추우(騶虞)는 말을 몰아서 화살을 쏘는 것에 대한 말인데 거의 들어맞게 해석하였으나 또한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초사󰡕에서 말하기를 군왕이 친히 쏘아서 청시(靑兕)를 떨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활을 쏘는 의미를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구설에서 우인(虞人)이 암퇘지 다섯 마리를 몰아서 함께 쏘기를 기다렸는데, 맞아서 죽은 것은 한 마리뿐이었다고 한 것은 글의 어조가 순조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것 역시 금수가 많아도 사냥을 때에 맞추어 하여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땅히 죽여야 해서 죽이는 것이라도 이른바 알맞은 때를 골라서 하고, 예에 따라서 행하면 많이 죽인다고 해도 참으로 나쁘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개 기르는 자는 어질고, 죽이는 자는 의로우면 저절로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공정하지 않은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문세는 이렇게 해야 순조로우니, 예를 들면 두보(杜甫) 시의 화살 하나에 두 마리의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구절에 비유됩니다. 만약 해석하신 것과 같다면 마땅히 먼저 암퇘지 다섯 마리<五豝>’를 말하고, 후에 한번 쏘다<一發>’를 말해야 통합니다.

 

하피농의(何彼穠矣)가 의심스럽습니다.

하피농의(何彼穠矣)이 시가 의심스러우므로 두 설을 다 놓아 둔 것입니다. 동천(東遷)한 초기에는 왕실(王室)이 아주 낮아지지는 않았으나 왕이 제후에게 명하면서 실로 그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미자(微子)와 필공(畢公)과 같은 것입니다. 문후는 당시에 이미 큰 공이 있어 자()를 부르거나 예우와 녹봉을 주는 것이 당연하니 이것이 곧 왕실이 쇠약해진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答潘恭叔

 

詩備六義之旨

六義次序 孔氏得之 但六字之旨極爲明白 只因鄭氏不曉周禮籥章之文 妄以七月一詩分爲三體 故諸儒多從其說 牽合附會 紊亂顚錯 費盡安排 只符合得鄭氏曲解周禮一章 而於詩之文義意旨了無所益 故鄙意不敢從之 只且白直依文解義 旣免得紛紜 枉費心力 而六義又都有用處 不爲虛設 蓋使讀詩者知是 此義 便作此義 推求極爲省力 今人說詩空有無限道理 而無一點意味 只爲不曉此意耳 周禮以六詩敎國子 亦是使之明此義例 推求詩意 庶乎易曉 若如今說 卽是未通經時無所助於發明 旣通經後徒然增此贅說 敎國子者 何必以是爲先 而詩之爲義 又豈止於六而已耶 籥章之豳雅豳頌 恐大田良耜諸篇當之 不然 卽是別有此詩而亡之 如王氏說 又不然 卽是以此七月一篇吹成三調 詞同而音異耳 若如鄭說 卽兩章爲豳風 猶或可成音節 至於四章半爲豳雅 三章半爲豳頌 不知成何曲拍耶

關雎疑周公所作

凡言 風者 皆民間歌謠 採詩者得之 而聖人因以爲樂 以見風化流行 淪肌浹髓而發於聲氣者如此 其謂之風 正以其自然而然 如風之動物而成聲耳 如關雎之詩 正是當時之人被文王太姒德化之深 心膽肺腸一時換了 自然不覺形於歌詠如此 故當作樂之時 列爲篇首 以見一時之盛 爲萬世之法 尤是感人妙處 若云周公所作 卽國風雅頌無一篇是出於民言 只與後世差官撰樂章相似 都無些子自然發見活底意思 亦何以致移風易俗之效耶

卷耳諸疑文王征伐四方朝會諸侯時后妃所作

卷耳詩恐是文王征伐四方朝會諸侯時后妃所作 首章來喩得之 後三章疑承首章之意而言 欲登高望遠而往從之 則僕馬皆病而不得往 故欲酌酒以自解其憂傷耳 大意與草蟲等篇相似 又四愁詩云 我所思兮在太山 欲往從之梁父艱 亦暗合此章耳

樛木序文

有嫉妬之心 則必無逮下之思矣 此序却未有害也

螽斯序文

螽斯不妬忌 未有以察之 小序又非的確可信之書 詩中亦無不妬忌之意 但見其衆多和集之狀 如人之不妬忌耳

桃夭詩曰華 曰葉 自其生意之所及以至無所不及 言室家家室家人 亦其德之所及以至無所不及也 一則生意浸大 一則德意浸廣 宛轉取譬 此言意之所以無窮也

桃夭序文首句恐已涉附會矣 他說得之

羔羊之序與桃夭相似 二南篇中類多如此委蛇 如毛氏說 卽於 正直二字意尤親切 然小序本未必能盡詩意 卽鄭張二說 意亦自佳 更須審擇取舍 或兼存而自爲一義不妨 不可彊合爲一說也

振振君子 卽是家室思念君子 不著其惡而著其善 蓋居者念行者 事之常也

殷其雷本無著其惡之意 不必爲此說 但如死麕之 吉士 日月之 德音 則須說破耳

摽有梅上二句蓋言男女之念 人皆有之 而若是者 皆女子之發乎情而不能以自達者也 下兩句蓋言必待媒妁之言婚禮之備而後可行 亦止乎禮義之謂也 此詩卽人情之近以感切當時之爲人父母者 使之婚姻之不失其時而已 或曰是皆當時女子自賦之辭 則不足以爲風之正經矣

發乎情 止乎禮義之說甚善 感切人之父母却恐未必有此意 或是女子自作 亦不害 蓋里巷之詩但如此 已爲不失正矣

小星兼取程說 甚善

江沱之序恐未安 又始則不能無悔 至不我與則隨其所遇而安 終不我過則處之已熟 知其無可奈何 無復憂慮 嘯如淵明之 舒嘯

小序固不足信 然謂江沱之間 則未有以見其不然 蓋或因其所見山川以起興也 其後也悔 其後也處兩句 若如今說 以爲媵之自言 則 後字不通 而三章 其字皆指物之稱 亦非所以自命也 集傳歗字之義 向來伯恭深以爲然 野有死麕 言彊暴者欲以不備之禮爲侵凌之具者 得之 騶虞驅發之說 近亦疑之 楚詞云 君王親發兮憚靑兕 此爲發矢之義明矣 然舊說虞人翼五豝以待公射 中則殺一而已 恐文勢不順 疑此亦爲禽數之多 見蒐田以時 不妄殺伐 至於當殺而殺 則所謂取之以時 用之以禮 固不病其殺之多也 蓋養之者仁也 殺之者義也 自不相妨 不必曲爲之說 兼文勢如此乃順 如杜詩 一箭正墜雙飛翼之比 若如所解 卽當先言 五豝而後言 一發 乃可通耳

疑何彼穠矣

何彼穠矣此詩義疑 故兩存之 束遷之初 王室猶未甚卑也 王命諸侯固有不斥其名者 如微子畢公之類 文侯當時旣有大功 稱字或是禮秩當然 未可便爲王室衰弱之證

 

 

반공숙에게 답함 答潘恭叔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시경󰡕 󰡔주례󰡕 󰡔통감강목󰡕 등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또 이 편지 말미에서 󰡔소학󰡕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학󰡕은 유자징이 鄂州에서 간행한 것과 주희가 간행한 것, 두 판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 관한 여러 설들에 대해서는 이전의 편지에서 이미 보내드렸습니다. 근래에 이남(二南)의 구설(舊說)을 다시 읽어보니 너무 간략한 곳이 있어서 이미 대략 교정하여서 따로 하나의 글로 만들었는데, 너무 간략해져서 아직 바로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주례(周禮)󰡕는 아마도 호오봉(胡五峯)의 논설이 아주 편파적인 듯 합니다. 다만 총재일관(冢宰一官)과 같은 것은 왕의 음식 및 수례와 예복, 시첩(侍妾)을 아울러 관리하는데 이 모든 것이 관직을 설치한 자의 깊은 뜻입니다. 대개 천하의 일 가운데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데, ()씨는 그것을 심하게 비난하여 주공(周公)이 부당하게 성왕(成王)의 연사(燕私)의 일을 관리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씨가 󰡔대기(大紀)󰡕에서 논한 정전(井田)과 관련된 것들 역시 대부분 억측에서 나온 것이어서, 주소(注疏)의 정밀함에 미치지 못합니다. 항상 설()씨와 진()를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데 그 설은 또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통감거요(通鑑擧要)󰡕는 자세하게는 수미를 갖추지 못하였고, 간략하게는 검열을 제공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강목(綱目)󰡕을 쓴 까닭입니다. 다만 정력이 일찍 쇠잔하여 작업을 마칠 수가 없으니 마침내 천고의 한이 될 뿐입니다. 󰡔소학(小學)󰡕은 완성되지 않았는데, 유자징이 판각할 것입니다. 이것의 교정이 조만간 이루어지면 마땅히 책을 도시로 보내어 별도로 간행할 것이니 완성되면 마땅히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答潘恭叔

讀詩諸說前書已報去 近再看二南舊說 極有草草處 已略刊訂 別爲一書 以趨簡約 尙未能便就也 周禮恐五峰之論太偏 只如冢宰一官 兼領王之膳服嬪御 此最是說官者之深意 蓋天下之事無重於此 而胡氏乃痛詆之 以爲周公不當治成王燕私之事 其誤甚矣 胡氏大紀所論井田之屬 亦多出臆斷 不及注疏之精密 常恨不曾得見薛陳諸人 不知其說又如何也 通鑑擧要詳不能備首尾 略不可供檢閱 此綱目之書所爲作也 但精力早衰 不能卒業 終爲千古之恨耳 小學未成 而爲子澄所刻 見此刊修 旦夕可就 當送書市別刊 成當奉寄 此書甚有益也

 

 

반공숙에게 답함 答潘恭叔

 

해제1187(丁未, 宋 孝宗 淳熙14) 주자 58세 때의 편지이다. 첫머리에서는 은 모든 공부의 근본임을 말하고, 다음에는 󰡔예기󰡕의 편찬 방법에 대하여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란 한 글자는 모든 선()의 근본이니 함양(涵養) 성찰(省察)과 격물(格物) 치지(致知) 등 모든 공부가 모두 여기에서 나와야 비로소 근거가 있게 됩니다. 평상시의 강학(講學)이 이것을 모른 것은 아니지만 지금에서야 더욱 밀접하고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원컨대 더욱 공을 더해서 저의 바램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기(禮記)󰡕는 이렇게 편찬하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만 다만 취사선택이 너무 심하여 문자는 비록 적어도 공력은 참으로 많아서 이루기가 어렵고 또 부담이 될 것입니다. 온 사람을 여러 날 머물게 하였는데, 의심나는 것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고 싶지만 객이 많아서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비로소 한 편을 끝마쳤으니 이제 따로 기록하여 보냅니다. 책자는 반드시 거기에도 볼 수 있는 별본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남겨두었다가 동봉할 편지를 끝내면 곧 보내겠습니다. 󰡔의례(儀禮)󰡕󰡔예기󰡕를 덧붙이는 것은 마땅히 노덕장(路德章)의 본보기에 의거해야 할 듯한데, 대개 그렇게 하면 󰡔예기󰡕 본편이 분리되어 나가는 것을 면할 수 있습니다. 단락을 따라 참조하려고 하면 장() 말미에 오른 쪽은 제 장이다라고 하고, 󰡔의례󰡕는 곧 󰡔예기󰡕 ~ 편 제 장에 이것을 덧붙여야 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 본문을 실을 필요는 없고 단지 이렇게만 하면 자연히 겸열하기에 편할 것입니다. 󰡔예기󰡕는 곧 󰡔의례󰡕 ~편 제 장을 덧붙여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대대례기(大戴禮記)󰡕 또한 합하여 들여서 󰡔의례󰡕에 붙일 수 있는 것은 붙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다섯 가지 종류에 나누어 넣어야 합니다. 󰡔관자(管子)󰡕 「제자직(弟子職)󰡕편 과 같은 것 역시 마땅히 󰡔곡례󰡕류에 덧붙여야 하고 그 밖의 경()과 전()류의 서적들 중에서 예()를 말하고 있는 글은 함께 모아서 편집하여 별도로 하나의 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례󰡕는 곧 제례(祭禮)빈객(賓客)사전(師田)상기(喪記)에 속하는 일은 따로 분류하여 각자 하나의 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예서(禮書)는 대략 갖추어집니다. 다만 공력이 적지 않으니 반드시 여러 사람이 따로 나누어서 해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통감󰡕과 정사(正史)는 복잡한 사연이 매우 많아 배움이 넓지 않으면 안되니 바로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역량을 헤아려 보아야 하는데, 지나치게 정신을 밖으로 이끌어서 내성(內省) 공부가 줄어들까 두려울 뿐입니다.

만약 집주(集註)를 짓는다면 여러 학자의 설을 덧붙여 넣을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소견이 있으면 또한 온공(溫公)󰡔양자법언󰡕․󰡔태현경󰡕의 예를 따를 수 있습니다. 만약 단지 주()와 소()만을 쓰려면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으니, 그것은 사람을 번민하게 할 뿐입니다.

다섯 종류를 나눈다는 것은 이러한 말을 한 선유(先儒)는 없습니다. 첫 번째 종류는 상하(上下)와 대소(大小)에 모두 통용되는 예()이고, 두 번째 종류는 국가의 큰 제도이며, 세 번째 종류는 예악(禮樂)의 설이고, 네 번째는 모든 학문을 자세하게 논한 말이며, 다섯 번째는 대강대강 학문을 논한 것입니다.󰡔대대례기󰡕 또한 이것에 의거하여 나눌 수 있습니다.

권수(卷數)에 관한 말은 모름지기 모두 마치기를 기다려서 그 다소를 따져서 나누어야 하니 지금은 정할 수 없습니다. 그 책은 합하여 하나의 책으로 하는 것이 옳은데, 다만 통틀어 󰡔예서󰡕라고 이름붙이고, 󰡔의례󰡕󰡔예기󰡕를 덧붙인 것을 앞으로 하고, 󰡔예기󰡕를 분류한 것을 뒤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기󰡕를 덧붙인 첫 권의 첫머리에 예서제일(禮書第一)”이라고 하고, 본행(本行)의 아래에 의례부기일(儀禮附記一)”이라는 다섯 글자를 쓰는 것입니다. 다음 행에 사관례제일(士冠禮第一)”이라고 하고, 본행의 아래에 의례일(儀禮一)” 석자를 쓰고, “관의제이(冠義第二)”, 본행의 아래에 예기일(禮記一)” 석자를 씁니다. 분류한 첫 권 첫머리 제 1행에 예서 제 몇(禮書第幾)”, 본항의 아래에 예기분류일(禮記分類一)” 다섯 글자를 쓰고, 다음 행에는 곡례상제일(曲禮上第一)”, 본행의 아래에 예기 몇(禮記幾)”라고 씁니다. 전편의 수를 통틀어서 헤아립니다. 󰡔대대례기󰡕󰡔관자(管子)󰡕 등의 책 역시 이것에 의거하여 분류합니다.

첫 번째 장에서 군자(君子) 수신(修身)을 말했는데, 그 요점은 세 가지에 있으니 그 효과는 족히 백성을 편안히 하여 예의 근본이 되므로 편의 첫머리가 된 것입니다. 무불경(無不敬)’에서 안민재(安民哉)’까지.

현자(賢者)’에서 능천(能遷)’까지, 이것은 현자는 그 친숙한 것을 공경할 수 있고, 그 두려워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그 나쁜 것을 알 수 있고, 그 미워하는 것에 대하여 그 선함을 알 수 있으니, 비록 재산을 모으더라도 흩어서 베풀 줄 알며, 비록 편안한 것을 편안히 여기더라도 의()로 옮길 줄을 알아서 모범으로 삼을 수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 아래의 글에서 금지하고 경계하는 말과 다르니 구설은 옳지 않습니다.편안한 것을 편안히 여기더라도 옮길 수 있다<安安而能遷>’에 대해서는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다만 말이 지나치게 번잡할 뿐입니다. ‘의심스러운 일을 바로잡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말하지만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두 구절은 이어서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의심스러운 일을 바로잡으려 하지 말라는 것은 소의(少儀)에서 이른바 몸소 언어를 바로잡지 말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말하지만 고집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은 자신의 소견을 말하고, 상대방이 의심스러운 것을 없애고 이치를 분별하는 것을 들어야지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오직 힘써 변론하는데만 힘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없으면 곧 몸소 언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오만함을 키워서는 안된다운운했는데, 이 편은 여러 책의 정밀하고 긴요한 말을 골라 모아서 편찬했는데 비록 대의는 서로 비슷하지만 문장은 연속되지 않습니다. 첫 장의 네 구절은 곡례고경(古經)의 말인데, “오만함을 키워서는 안된다이하의 네 구절은 어떤 책의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 한 구절부터는 모두 금지하고 경계하는 말입니다. ‘현자(賢者)’ 이하 여섯 구절은 또 별도로 한 책이어야 합니다. 앞 단락에서 말했습니다. 재물에 임하여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말라이하 여섯 구절은 또 한 책인데, 역시 금지하고 경계하는 말입니다. 만약 앉는 것은 시동(尸童)처럼 하고, 서는 것은 제계하듯이 하라와 같은 것은, 유원부(劉原夫)는 이것을 󰡔대대례기󰡕 「증자사부모(曾子事父母)편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대대례기󰡕에서는 말하기를 효자는 오직 공교하게 변하므로 부모가 그것을 편하게 여긴다. 만약 시동과 같이 앉고, 제계할 때와 같이 서며,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말하면 반드시 재계하는 안색을 한다면 이것은 성인(成人)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이니, 아들 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편은 대개 그 문장을 취하였으나 약부(若夫)’ 두 글자는 없애버렸습니다. ()씨는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곧 이 두 구절이 장부(丈夫)의 일이라고 하였으니, 그 설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설이 옳습니다. 설 때는 제계하듯이 하라는 구절에 대해서 주소(注疏)에서 서는 몸가짐에 대해서 말한 것은 매우 상세한데, 이제 공숙께서는 모두 취하지 않으시고, 취한 것은 곧 뜻을 드러내 밝힌 것이 없는 군더더기 말이니, 이러한 것들은 마땅히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 택해야 합니다. “예는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르고,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그 나라의 풍속을 따른다고 한 것은 또 하나의 책인데 그에 관한 설은 구주(舊注) 역시 옳습니다. ()씨의 󰡔칠경소전(七經小傳)󰡕󰡔의례󰡕 등의 설이 있으니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부(若夫)’ 두 글자는 󰡔중용󰡕배우기를 좋아함은 지()에 가깝다는 구절 위에 자왈(子曰)’ 두 글자와 서로 비슷한데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성인작(聖人作)”은 구(󰡕를 끊어야 하는데, 이전에 촉() 지방에서 간행한 판본에서는 이렇게 점을 찍은 것을 보았으니, 또한 이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열 살이 되면 유()라고 한다는 것 역시 구를 끊어야 하니, ‘()’은 자연히 하나의 구가 됩니다. 아래 문장의 백세가 되면 기()라고 한다. 이 대는 부양받는다는 구절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한데, 역시 옳은 듯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와서 취하는 것이다<取於人>’라고 했는데, 이것은 󰡔맹자󰡕치인(治人)’ ‘치어인(治於人)’ ‘식인(食人)’ ‘식어인(食於人)’이란 구절과 말 뜻이 서로 같은 종류이니, ‘어인(於人)’이란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서 본보기를 취하는 것이고, ‘취인(取人)’이란 것은 다른 사람이 오지 않는데 내가 그를 끌어다가 취하는 것입니다. 아래 문장에서 와서 배우고’ ‘가서 가르치고라고 한 것이 곧 그 일의 실상입니다. 재계(齋戒), 󰡔의례󰡕는 비록 처를 맞이하는데 사당에 고하는 글이 없지만, 󰡔좌전󰡕()가 궤연을 펼쳐놓고 장왕(莊王)과 공왕(共王)의 사당에 고하고 왔다고 한 것은 옛 사람들 역시 사당에 고하는 예가 있었다는 것인데, 무슨 이유로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答潘恭叔

敬之一字 萬善根本 涵養省察格物致知種種功夫皆從此出 方有據依 平時講學非不知此 今乃覺得愈見親切端的耳 願益加功 以慰千里之望

禮記如此編甚好 但去取太深 文字雖少而功力實多 恐難得就 又有據負耳 留來人累日 欲逐一奉答所疑 以客冗不暇 昨夕方了得一篇 今別錄去 冊子必有別本可看 却且留此 俟畢附的便 去也 儀禮附記似合只依德章本子 蓋免得拆碎記文本篇 如要逐段參照 卽於章末結云 右第幾章 儀禮卽云 記某篇第幾章當附此 不必載其全文 只如此亦自便於檢閱 禮記卽云 當時儀禮某篇第幾章 又如此大戴禮亦合收入 可附儀禮者附之 不可者分入五類 如管子弟子職篇 亦合附入曲禮類 其他經傳類書說禮文者竝合編集 別爲一書 周禮卽以祭禮賓客師田喪紀之屬事別爲門 自爲一書 如此卽禮書大備 但功力不少 須得數人分手乃可成耳

所諭讀通鑑正史曲折甚善 學不可不博 正須如此 然亦須量力 恐太拽出精神向外 減却內省功夫耳

若作集注 卽諸家說可附入 或有己見 亦可放溫公揚子法言太玄例也 若只用注疏 卽不必然 亦悶人耳

分爲五類 先儒未有此說 第一類皆上下大小通用之禮 第二類卽國家之大制度 第三類乃禮樂之說 第四類皆論學之精語 第五類論學之粗者也 大戴禮亦可依此分之

卷數之說 須俟都畢 通計其多少而分之 今未可定也 其書則合爲一書者爲是 但通以禮書名之 而以儀禮附記爲先 禮記分類爲後 如附記初卷首卽云 禮書第一 本行下寫 儀禮附記一 五字 次行云 士冠禮第一 本行下寫 儀禮一三字 冠義第二 本行下寫 禮記一三字 分類初卷首第一行云 禮書第幾 本行下寫 禮記分類一五字 次行云 曲禮上第一 本行下寫 禮記幾 通前篇數計之 其大戴管子等書亦依此分題之

首章言君子修身 其要在此三者 而其效足以安民 乃禮之本 故以冠篇 毋不敬止 安民哉

賢者至 能遷 此言賢者於其所狎能敬之 於其所畏能愛之 於其所愛能知其惡 於其所憎能知其善 雖積財而能散施 雖安安而能徙義 可以爲法 與上下文禁戒之辭不同 舊說非是 安安而能遷 來說得之 但辭太煩耳 疑事勿質 直而勿有兩句 連說爲是 疑事毋質 卽少儀所謂 毋身質言語是也 直而勿有 謂陳所見 聽彼決擇 不可據而有之 專務彊辨 不能如此 則是以身質言語矣

敖不可長云云 此篇雜取諸書精要之語 集以成編 雖大意相似而文不連屬 如首章四句 乃曲禮古經之言 敖不可長以下四句 不知是何書語 又自爲一節 皆禁戒之辭也 賢者以下六句 又當別是一書 說見前段 臨財毋苟得以下六句 又是一書 亦禁戒之辭 若夫 坐如尸 立如齊 劉原父以爲此乃大戴記曾子事父母篇之辭 曰 孝子惟巧變 故父母安之 若夫坐如尸 立如齊 弗訊不言 言必齊色 此成人之善者也 未得爲人子之道也 此篇蓋取彼文 而 若夫二字失於刪去 鄭氏不知其然 乃謂此二句爲丈夫之事 其說誤矣 此說得之 又 立如齊 注疏所說立容甚詳 今皆不取 而所取者乃無所發明之剩語 此類恐更宜詳擇也 禮從宜 使從俗 當又是一書 其說舊注亦得之 劉氏七經小傳有儀禮等說 不可不看 若夫二字與中庸 好學近乎智上 子曰二字相似 皆失於刪去者也

聖人作絶句 舊見蜀中印本有如此點者 似亦有理 又 人生十年曰幼亦爲絶句 學字自爲一句 下文至 百年曰期頤皆然 似亦得之 取於人 此與孟子 治人 治於人 食人 食於人語意相類 於人者 爲人所取法也 取人者 人不來而我引取之也 下文 來學往敎卽其事之實也 齋戒儀禮雖無娶妻告廟之文 而左傳曰 圍布几筵 告於莊共之廟而來 是古人亦有告廟之禮 不知何故不同耳

 

 

반공숙에게 답함 答潘恭叔

 

해제1187(丁未, 宋 孝宗 淳熙14) 주자 58세 때의 편지이다. 󰡔논어󰡕, 󰡔대학󰡕, 󰡔예기󰡕 등의 구절에 대하여 공숙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거기에 대하여 주희가 답변한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특히 󰡔논어󰡕 집주의 내용에 대해서 반공숙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 주희가 집주와는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에서 이룬다고 하였으니, 음악을 배우고 시()를 읊으며, 문무(文舞)를 배우고 무무(武舞)를 배우는 것이 어찌 학자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기()에게 명하여 전악(典樂)을 삼아 맏아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니 어찌 이것이 학자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점차 효과를 나타내어 바로 성인(聖人)의 지위에 이르면 비로소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만하고 태만하다<敖惰>’는 것에 대해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 의심스러워하는데, 일찍이 󰡔혹문󰡕에서 여러 말을 보충하여 밝히고자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습니다. 대개 이것은 본래 한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위로는 친애하고 외경할 수 있는데 이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며, 가엾고 불쌍하게 여길 수 있는 데 이르지 못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범상하게 보도록 하여 염려하지 않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편벽됨이 있음을 두려워하여 경계하였으니 어찌 진정으로 오만하고 소홀하여 그것을 잊겠습니까?

 

자신이 서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자신이 이르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이르게 해 준다고 했는데, 서고 싶다는 것은 세상에 스스로 서는 것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세워 준다는 것은 도와주고 북돋워 그로 하여금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르고 싶다는 것은 스스로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이르게 한다는 것은 막고 저지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숨어 살면서 그 뜻을 구하고, ()를 행하며 그 도()를 행한다고 한 것에 대하여 󰡔집주󰡕에서는 이윤(伊尹)과 태공(太公)과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하였는데, 옳습니다. 안자(顔子)가 이룬 것과 얻은 것은 이 두 현자도 그것을 넘어서지 못할 듯한데, “거의 여기에 가깝다고 하셨고, 아래에서 경중(輕重)과 억양(抑揚)을 말한 곳에서는 아마도 안자를 조금 폄하한 것 같습니다. 만약 옛 사람 중에 그것을 행한 자는 이윤태공과 같은 사람들이다. 안자와 같은 사람은 거기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숨어서 드러내지 않았고, 또 불행하여 일찍 죽었으므로 부자(夫子)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일을 말했지 덕()이 얕고 깊음을 논한 것은 아닙니다. 말의 의미에 참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 있는지 다시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교린(驕吝)’ 두 글자는 평상시에는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자(夫子)만약 교만하고 인색하다면~”이라는 말은 곧 경중을 나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정자(程子)()가 차고 기()가 부족하다는 설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 󰡔집주󰡕에서 정자의 말을 인용하고 다시 근본과 지엽에 대한 말을 했는데, 이 설은 매우 정밀하지만 정자의 설과는 같지 않습니다. 또 비색(鄙嗇)으로 ()’ 자를 해석하였는데 말뜻이 충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린() 자를 중요하게 보아서, 한결같이 완고하고 이기적이며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기심의 발동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교만함의 유래가 이와 같으면 공부는 온전히 린()에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또한 사람이 이러한 폐단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그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요컨대 두 가지 병통이 피차 서로 조장하더라도 린() 자가 잘 드러나지 않는 병이고 내적인 증상만 있음을 자세히 알게 되면 더욱 두려울 뿐입니다.

 

󰡔예기󰡕에서 비루하고 사악한 마음과 경솔하고 태만한 마음이 들어온다고 한 것은 곧 안팎에 두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들어온다고 한 것은 이 마음이 밖에 있는 것입니다. 비루하고 사악하며 태만하고 경솔함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들어간다<>’는 한 글자는 바로 밖에서 그렇게 하도록 유혹하는 것이지 본심(本心)에 실제로 이러한 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본심을 빼앗기고 안에서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答潘恭叔

成於樂 如學樂誦詩 舞勺舞象 豈不是學者事 舜命夔典樂敎冑子 豈不是學者事 但漸次見效 直至聖人地位 始可言成耳

敖惰 讀者多以爲疑 嘗欲於或問中補數語以發之而未暇 大抵此本有一等人 上不至於可親愛畏敬 下不至於可賤惡哀矜 使人視之泛然 不入念慮者耳 然於此而猶以恐其有偏爲戒 則豈眞敖忽而忘之哉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欲立謂欲自立於世 立人謂扶持培植 使之有以自立也 欲達謂欲自遂其志 達人謂無遏塞沮抑 使之得以自達也

此說是

隱居求志 行義達道 集注謂伊尹太公之流可當之 是也 顔子所造所得 二賢恐無以過之 而云 亦庶乎此 下語輕重抑揚處 疑若於顔子少貶者 若云 古之人有行之者 伊尹太公之流是也 若顔子 可以當之矣 然隱而未見 又不幸蚤死 故夫子言然 不知可否

當時正以事言 非論其德之淺深然也 語意之間 誠有如所論者 更俟詳之

驕吝二字 平時作兩種看 然夫子 使驕且吝之言 則若不分輕重者 程子 氣盈氣歉之說亦然 今集注引程子之言而復有本根枝葉之論 此說雖甚精 但與程子說不同 而以鄙嗇訓釋 吝字 若語意未足者 蓋先生將 吝字看得重 直是說到蔽固自私不肯放下處 故凡形於外者無非私己之發 此驕之所由有如此 則工夫全在吝上

此義亦因見人有如此之弊 故微發之 要是兩種病痛彼此相助 但細看得吝字是陰病裏證 尤可畏耳

禮記言 鄙詐慢易之心入之 則是內外有兩心 曰 入之 則此心是在外矣 鄙詐慢易 似非所以言心

入之一字 正是見得外誘使然 非本心實有此惡也 雖非本有 然旣爲所奪而得以爲主於內 則非心而何 恐不必致疑也

 

 

정중례에게 답함 答鄭仲禮

 

해제1193(癸丑, 宋 光宗 紹熙4) 주희 64세 때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주희는 장경부 사후 그의 제자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강론하는지를 걱정하고 있다. 󰡔주역본의󰡕󰡔역학계몽󰡕을 쓴 이유에 대하여 󰡔이천역전󰡕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헤어지고 나서 이십여 년 동안 다시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계수(季隨)가 이해하기 어려운 의미에 대해 보낸 글을 받았는데, 유독 선생님의 말씀이 우연히 저의 생각과 합치되었으나, 여러 사람들의 입에 재앙을 당하여 스스로 제 생각을 말하지 못하였고, 처음에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개명(改名)한 사연을 알고 나니 헤어지고 난 다음 제 마음에 매우 위안이 됩니다. 이에 황공하게도 편지를 보내주시니 더욱 기쁩니다. 요즘에 봄 날씨가 화창하니 덕행이 수승하시기를 멀리서 기원합니다.

저는 우환과 쇠약함으로, 중간에 상() 지역으로 가는 기회가 있을 뻔 했으나 결국은 병과 게으름으로 우활하고 소홀하여 다시는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이제 또 분분히 어지러운데, 형세를 헤아려보니 끝내 움직이지 어렵겠습니다. 매번 우리 장경부(張敬夫) 선생이 서거하신 다음을 생각해보면 그 뒤의 여러 현자들이 말씀하시는 것이 또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계수(季隨)의 편지를 받았는데 또 10년 전의 기상과 의지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세월은 쉽게 지나가고, 갈림길은 쉽게 지나칩니다. 서로 무리를 짓지 말고 통렬하게 서로 절차탁마하기를 멀리서 바라며 헛되이 개탄할 뿐입니다.

보내주신 󰡔󰡕을 읽고 쓴 해설은 아주 좋습니다. 과거에 장경부와 여백공은 모두 학자들에게 오로지 󰡔이천역전(伊川易傳)󰡕만을 읽도록 했는데, 종종 전혀 소득이 없기도 했습니다. 󰡔이천역전󰡕은 단지 (역의) 이치만을 살피고 괘획(卦劃)과 경문(經文)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미가 무궁하고 각각 쓸 곳이 있어서 진실로 일상생활의 공부에는 절실합니다. 그러나 괘획과 경문으로 살펴보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일찍이 소강절의 말로 탐구해 보면서 괘를 그린 순서를 알고서, 성인은 단지 음양(陰陽)이 저절로 생생(生生)하는 상()을 보았을 뿐 모사(摹寫)하는 초기에는 안배하는데 주의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경문에 대해서는 단지 마음을 비우고 읽어가면서 그 사이에서 한 두 가지를 대략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이르면 곧 내버려두고 감히 천착해서 반드시 통달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면 또 일찍이 그 설을 거친 글 솜씨로 썼지만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획괘(畫卦)와 설시(揲蓍)의 방법에 대한 것은 또 책 한권을 본보기로 간행해서 전파시켰는데 󰡔계몽(啓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보내드리니 자세히 살펴보시고 다시 깨우침을 보여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이른바 은자(隱者)’라고 하신 것이 어찌 마의(麻衣)의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곧 위서(僞書)이므로 지난번에 장경부 선생이 비록 그 설이 그렇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또한 그것이 진실로 희이(希夷)의 사설(師說)인줄로 잘못 알았습니다. 그 말은 오직 괘획 만을 설명하는데 대개는 옳은 것 같지만, 그 말하는 것들이 모두 자질구레하고 지루하며 억지로 끌어다 붙여 천착하는 것들이니 더욱 옳은 곳이 없습니다. 별지에서 말씀하신 몇가지 설과 같은 것 역시 이러한 병통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학장구󰡕 한 책을 함께 보냅니다. 거기에 비록 현묘하고 기이한 설은 없지만 모두가 성문(聖門)의 착실한 공부를 바로 말하고 있으니 자세히 살펴주신다면 또한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아울러 일러주시면 제가 가진 생각을 감히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 벗들이 이제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 취향과 성취가 과연 선인(先人)이 전한 의발(衣鉢)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오히려 때때로 왕래하면서 헤아려 바로잡는 유익함이 있어서 그 소밀(疏密)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근년에는 드디어 생각과 말의 의미에 상관없다거나 허무하고 무심하다거나 찾아서 따져 물을 수 없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모두가 평소에 우리 망우(亡友)에게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기회가 되어 이 편지를 보내는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먼 곳이지만 자애하시기를 천만번 당부 드립니다.

 

答鄭仲禮

一別二十餘年 不復聞動靜 但中間得季隨所寄疑義 獨賢者之言偶合鄙意 而厄於衆口 不能自伸 初不知其爲誰何 旣而乃知改名曲折 甚慰別後之思也 滋辱惠書 益以爲喜 比日春和 遠惟德履殊勝

熹憂患衰朽 中間幾有浮湘之便 竟以病懶迂疏 不復敢出 今又紛紛 度其勢終亦難動 每念吾敬夫逝去之後 不知後來諸賢所講復如何 比得季隨書 又無復十年前意象矣 歲月易失 岐路易差 無由相聚 痛相切磨 千里相望 徒有慨歎耳

示諭讀易之說甚善 向見敬夫及呂伯恭皆令學者專讀程傳 往往皆無所得 蓋程傳但觀其理而不考卦畫經文 則其意味無窮 各有用處 誠爲切於日用功夫 但以卦畫經文考之 則不免有可疑者 熹蓋嘗以康節之言求之 而得其畫卦之次第 方知聖人只是見得陰陽自然生生之象 而摹寫之初 未嘗有意安排也 至於經文 亦但虛心讀之 間略曉其一二 至有不可曉處 則便放下 不敢穿鑿以求必通 如此却似看得有些意思 亦嘗粗筆其說而未成也 至於畫卦揲蓍之法 則又嘗有一書模印以傳 名曰啓蒙 不知賢者曾見之否 今以奉寄 試詳考之 復以見喩 幸也

來喩所謂隱者 豈非麻衣之流乎 此乃僞書 向來敬夫雖不以其說爲然 然亦誤以爲眞希夷之師說也 其言專說卦畫 大槪似是 而其所以爲說者則皆瑣碎支離附會穿鑿 更無是處 如別紙所示數說 恐亦未免此病也 大學章句一本幷往 其間雖無玄妙奇特之說 然皆是直說聖門著實用功處 亦幸細觀 如有所疑 幷以見告 不敢不盡所懷也

彼中朋友今有幾人 其趣向成就果能不失前人衣鉢之傳否 向來猶時有往來商訂之益 得以知其疏密 近年遂有不涉思慮言語之意 虛無象罔 不可捕詰 皆非平日所聞於吾亡友者 不知何故變得如此 甚可歎也 因便寓此 未能盡所欲言 正遠 千萬以時自愛

 

 

정중례에게 답함 答鄭仲禮

 

해제1193(癸丑, 宋 光宗 紹熙4) 주희 64세 때의 편지이다. 학문은 독서보다 을 주로 하여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학문을 하는 의미에 대해 보내주신 편지는 매우 좋습니다. 독서는 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만 또 모름지기 경()을 주로 하여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되어야 비로소 이 바탕 위에 나아가서 의리(義理)를 추구하고 여러 일들을 처리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평상시 아무 생각없이 지내며 전혀 존양(存養) 공부가 없고, 또 실천할 의지도 없으면서 다만 문장의 뜻만을 분명하게 해석하려 하고, 분명하게 말하려 하면 비록 모든 경전에 다 통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또한 유익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또 반드시 능통하여 잘못이 없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근래에 벗들이 독서와 강론에 대부분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이 드러나는데, 그 병은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깊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수(季隨)와 계침(季忱)의 공부는 어떻습니까? 근래에 어떤 강론이 있었습니까? 이러한 뜻을 편지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答鄭仲禮

示喩爲學之意 甚善 讀書固不可廢 然亦須以主敬立志爲先 方可就此田地上推尋義理 見諸行事 若平居泛然 略無存養之功 又無實踐之志 而但欲曉解文義 說得分明 則雖盡通諸經 不錯一字 亦何所益 况又未必能通而不誤乎 近覺朋友讀書講論多不得力 其病皆出於此 不可不深戒也 季隨 季忱爲學如何 近來有何講論 因書幸致此意

 

 

여점지에게 답함 答余占之

 

해제1198(戊午, 宋 寧宗 慶元4) 주희 69세 때의 편지이다. 의 관계와 思無邪 등 경전과 관련된 여점지의 물음에 답하고, 학문은 평이한데서부터 시작하고 독서는 숙독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시험 볼 시기가 멀지 않았으니 또한 거자(擧子)의 글을 짓는 것이 실로 당연하지만 의리(義理)와 의미(意味) 또한 갑자기 단절할 수 없습니다. 사무사(思無邪)에 대한 말은 이천선생의 뜻이 이미 이와 같고, 또 그 말의 의미가 본래 훌륭하므로 반드시 여러 설을 억지로 끌어다 붙일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의미가 짧아지게 됩니다. 인자(仁者)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채(上蔡)도 사사로움이 없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 중에서 ()’ 자 한 자를 줄였으니 곧 병통이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말로 뜻을 해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평이(平易)한 것은 실로 비근(卑近)할까 의심스럽지만 오히려 비로 이것이 초학자(初學者)의 일이니, 모름지기 이것을 따라가면 점차 저절로 고원(高遠)한 곳에 이를 것이니, 바로 이것이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아래로부터 하고, 먼 곳에 가는 것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한다는 의미입니다. 높고 먼 것을 먼저 하고, 평이한 것을 나중에 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은 애()의 이치이지만 바로 애를 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또 다시 잠심(潛心)해서 오래도록 하여 소견이 생기면 비로소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제 또 마땅히 이 두 구절의 이면에 나아가서 헤아려보아야 하고, 반드시 밖을 향하여 먼저 달려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 두 분의 책은 언급한 겨를이 없을 듯 합니다. 만약 보고 넘어가려 한다면 숙독하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니 이 밖에 다른 기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두 책만이 아니라 모든 독서의 방법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答余占之

試期不遠 且作擧子文固所當然 然義理意味亦不可遽斷絶耳 思無邪之說 伊川意已如此 氣味自長 不必牽合諸說 却味短也 仁者能好惡人 上蔡亦謂無私好惡耳 但語中少却一私字 便覺有病 不以辭害意可也 平易固疑於卑近 然却正是初學事 須從此去 漸次自到高遠處 乃是升高自下陟遐自邇之義 未聞先高遠而後平易也 仁者愛之理 而直以愛爲仁則不可 此處且更潛心 久之有見 方信得及 今且當就此兩句裏面思量 不必向外頭走作也 周張二書恐未暇及 若欲便看過 熟讀深思 此外更無別巧 然亦不惟二書 凡讀書之法皆不外此也

 

 

여점지에게 답함 答余占之

 

해제1198(戊午, 宋 寧宗 慶元4) 주희 69세 때의 편지이다. 󰡔논어󰡕󰡔시경󰡕의 의심스러운 곳에 대한 여점지의 질문에 대답하는 내용이다. 내용 중에 󰡔집주󰡕와 다른 내용이 있어 주희의 생각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다.

 

()과 애()에 대한 말은 대개는 비슷하니, 또 다시 함영(涵泳)하고 넓혀 나가서 오래도록 하여 젖어들면 당연히 저절로 분명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는 것은 우물에 가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인()이라는 말일 뿐입니다. 글의 뜻이 비록 대체로 사리에 맞지 않지만 대의(大意)는 당연히 이와 같습니다. 아래의 가게 할 수는 있어도 빠지게 할 수는 없다는 문장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칠월의 얼음을 깬다는 말에 대하여 근래에 또한 벗들이 이렇게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얼음을 캐어서 달을 지난 이후에야 저장하게 되므로 또 너무 느린 듯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다만 앞 뒤가 서로 연결된 문장이지 실제로 오늘 내일이라고 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경전(經傳) 류에는 이러한 것들이 많습니다. 다만 여러 설에 아울러 통하여 강구하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비우고 그것을 받아들일 뿐 반드시 서둘러서 일정한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答余占之

仁愛之說大槪近之 且更涵泳推廣 久之浹洽 自當信得及也 井有仁焉 謂赴井以救人爲仁耳 文義雖略迂晦 然大意當是如此 以下文可逝不可陷者觀之可見也 七月開冰之說 近亦有朋友如此致疑 但不如此說 則鑿冰踰月而後納之 又似太緩 恐此但先後相因之文 非實以爲今日明日也 經傳類此處多 但兼通衆說以俟講究 虛心以容之 不必遽爲一定之說也

여점지에게 답함 答余占之

 

해제1198(戊午, 宋 寧宗 慶元4) 주희 69세 때의 편지이다.

 

저는 이 편지도 겨우 보내니, 다만 노쇠함이 더욱 심해지고, 질병이 더욱 몸을 침범하며, 원망과 한탄이 번갈아 공격하는데도 편하게 쉴 수가 없습니다. 금년에 벗들이 지나다 들르는 일이 전혀 없었는데 근래에 비로소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두 사람일 뿐이지만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으니, 만약에 많은 사람이 왔더라면 아마도 번거로운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만나서 얼굴을 볼 수가 없는데, 멀리서 보내는 글로는 회포를 다 풀 수가 없습니다. 겨울 동안에 한번 방문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答余占之

熹此亦粗遣 但老衰殊甚 疾病益侵 仇怨交攻 蓋未知所稅駕也 今年絶無朋友相過 近日方有至者 只一二輩 猶未有害 若多 則恐生事矣 無由會面 遠書不能盡懷 不知冬間能枉路一顧否

 

 

여점지에게 답함 答余占之

 

해제1199(기미, 宋 寧宗 慶元5) 주희 70세 때의 편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道學 자체를 말하는 듯하기도 하다.

 

직경(直卿)은 이미 돌아와서 여기에 있습니다. 금년에 왕래한 사람도 역시 1, 20 인이 있었는데, 그들이 지나다 들러 강습하였으니 그 가운데 어찌 제 생각을 이해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니 매우 우려가 됩니다.

 

答余占之

直卿已歸在此 今年往來亦有一二十人相過講習 其間豈無曉會得意思者 然未見大段斷然可負荷此事者 甚可慮也

 

 

왕청경에게 답함 答汪淸卿

 

해제1180(庚子, 宋 孝宗, 淳熙 7) 주자 51세 때 제자인 왕청경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한 오상(五常)이 곧 오행(五行)의 성()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성은 본래 선()하지만 감응하여 움직인 다음에 혹 그 바름을 잃으면 악()으로 흐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자신에게 돌이킨다면 곧 스스로 깨달을 것이니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스스로 감응하여 움직이는 선악의 단서를 반드시 항상 성찰하고 지켜야 할 뿐입니다.

 

答汪淸卿

所喩五常卽是五行之性 初無異義 此性本善 但感動之後或失其正 則流於惡耳 此等處反之於身 便自見得 不必致疑 只是自家感動善惡之端須常省察持守耳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76(丙申, 宋 孝宗, 淳熙 3) 주자 47세 때의 편지이다. 장례의 절차와 의미에 대한 정정사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정사는 주희의 제자이다.

 

전제(奠祭)를 진설하고 빈전(殯殿)에 축문(祝文)을 고하고, 꿇어 앉아 축사(祝詞)를 아뢰는데, ()의 책에 의하면 이 날 안에 다시 찬()을 갖추어 축사(祝辭)를 하여 이별합니다.

장례 며칠 전에 빈소를 여니 축사(祝辭)를 하여 이별한다고 할 수 없으니, 아마도 이 날에는 다만 전()을 진설하고 빈소를 열며, 장례 하루 전날 저녁에야 비로소 전()을 진설하고 축사(祝辭)를 하여 이별합니다.

 

상례를 열고 견전(遣奠)을 지낼 때 고씨가 쓴 축문을 씁니다.

고씨의 축사(祝詞)에서 형신불유(形神不留)’라고 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계원례󰡕에 의하면 마땅히 영신불유(靈辰不留)’라고 해야 하고, ‘()’자 역시 ()’라고 해야 합니다. 지금 비록 이러한 말을 쓰지 않지만 되는대로 말해 보았습니다.

 

󰡔예기󰡕를 살펴보면 우제(虞祭)를 지낸 후에는 상제(喪祭)를 길제(吉祭)로 바꾼다고 했습니다. 길제와 상제는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장례를 지내지 않았을 때는 전()을 지내지 제()를 지내지 않고, 다만 술을 따르고 찬()을 진설하고 재배(再拜)를 할 뿐입니다. 우제(虞祭)에서 비로소 제례(祭禮)를 사용하며, 졸곡(卒哭)은 곧 또 길제(吉祭)라고도 하는데, 거기에 대한 말은 고씨가 이미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례(古禮)는 지금은 이미 행하지 않으니, 그 제정된 의례에 대해서는 다시 길흉(吉凶)의 분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온공(溫公)은 우제(虞祭)에 주인의 오른쪽에서 축문을 읽는 것을 졸곡(卒哭)에 주인의 왼쪽에서 축문을 읽는 것과 다르다고 하였는데, 대개 󰡔예기󰡕의 뜻을 이해한 듯합니다. 대저 고씨는 비록 예전의 의례를 상세히 살폈지만 제정한 의례의 실속 있음과 우활함을 살피는데 있어서는 온공의 성실함만 못합니다.

 

答程正思

設啓奠 祝詣殯前跪告祝詞 依高氏書 日內復具饌以辭訣

葬前數日啓殯前未可謂之辭訣 恐是日但設奠而啓殯 至葬前一夕 乃設奠辭訣

啓喪遣奠 用高氏書祝文

高氏祝詞云 形神不留者非是 據開元禮 當作靈辰不留 旋亦當作柩 今雖不用此詞 亦謾及之

按禮 旣虞之後 以吉祭易喪祭 吉祭喪祭何辨

未葬時奠而不祭 但酌酒陳饌再拜而已 虞始用祭禮 卒哭則又謂之吉祭 其說則高氏說已詳矣 但古禮於今旣無所施 而其所制儀復無吉凶之辨 惟溫公以虞祭讀祝於主人之右 卒哭讀祝於主人之左爲別 蓋得禮意 大抵高氏考古雖詳而制儀實疏 不若溫公之慤實耳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76(丙申, 宋 孝宗, 淳熙 3) 주자 47세 때의 편지이다. 상중에 있는 정정사에게 禮書를 읽는 한편으로 󰡔논어󰡕를 꼼꼼히 볼 것을 권하고 있다.

 

편지에서 말씀하신 일상생황에서 (본심을) 잡아서 보존한다는 뜻은 매우 좋습니다. 노력이 이와 같으니 이룬 것을 어찌 쉽게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반드시 궁리(窮理) 공부에 바탕을 두고 마음 속을 쇄락하게 해야 비로소 진보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대학󰡕에서 앎이 지극해진 다음에 뜻이 정성스러워진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서를 읽는 틈틈이 응당 󰡔논어󰡕를 펼쳐놓고 장()을 따라 자세히 살펴보되, 하루에 두 세 단락을 넘지 말 것이며, 먼저 여러 해설의 동이(同異)에 모두 통한 다음에 성인이 말씀하신 본 뜻을 탐구하여 오래도록 계속하다보면 저절로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答程正思

示喩日用操存之意 甚善甚善 用功如此 所造豈易量? 然亦須藉窮理功夫 令胸次灑落 始有進步處 大學所謂知至而後意誠者 正謂此也 謂禮之暇 宜取論語逐章細看 每日不過兩三段 先令盡通諸說異同 然後深求聖言本意 則久久自當見效矣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76(丙申, 宋 孝宗, 淳熙 3) 주자 47세 때의 편지이다. 정정사가 교정한 예문에 대해서 칭찬하고, 몸소 실행하여 모범이 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문(禮文)의 고정(考訂)에 대해 보내주신 것은 자세하고 치밀해서, 위로는 󰡔󰡕의 뜻에 합치하고, 아래로는 시의(時宜)에 들어맞으니 아주 좋습니다. 그간의 다소 미비한 곳은 이미 모두 보충되었습니다. 자세히 살피고 선택해서 열심히 실행하기를 바라니, 그렇게 하여 동리에서 본받을만한 모범이 된다면 그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答程正思

所示禮文考訂詳悉 上合禮意 下適時宜 甚善甚善 其間小未備處 已輒補之矣 幸詳擇而勉行之 使州里之間有所觀法 非細事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1(辛丑, 宋 孝宗, 淳熙 8) 주자 52세 때 정정사에게 보낸 네 번재 편지이다. 유학 공부의 근본은 임을 말하고 있다.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의 의미에 대해서 보내주신 글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 두 글자를 치지와 역행에 다 해당시키고자 하는데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현(聖賢)의 학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지 하나의 ()’자일 뿐입니다. 치지(致知)라는 것은 경으로써 앎을 지극히 하는 것이요, 역행이라는 것은 경으로써 아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이치가 분명하고 마음이 안정되어 저절로 어지러움이 없어진 효과일 뿐입니다. 이제 정을 치지의 유래라고 하고, 경을 역행의 준칙이라고 한다면 공부의 차서가 모두 마땅함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박학(博學)심문(審問)근사(近思)명변(明辨)이라는 것은 모두 치지의 일이지만, 반드시 독행(篤行)으로 끝내야 이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학문과 사변을 일삼지도 않으면서 단지 정()을 주로 하여 이치가 저절로 밝아지기를 기다린다면 세상이 끝나고 목숨이 다해도 얻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答程正思

承喩致知力行之意 甚善 然欲以靜敬二字該之 則恐末然 蓋聖賢之學 徹頭徹尾只是一敬字 致知者 以敬而致之也 力行者 以敬而行之也 靜之爲言 則亦理明心定 自無紛擾之效耳 今以靜爲致知之由 敬爲力行之準 則其功夫次序皆不得其當矣 中庸所謂博學審問 謹思明辨者 皆致知之事 而必以篤行終之 此可見也 苟不從事於學問思辨之間 但欲以靜爲主而待理之自明 則亦沒世窮年而無所獲矣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정정사에게 장지(葬地)에 대한 소송이 있었던 듯하며, 주희는 관가에 호소하는 것 보다는 마을에서 화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장지(葬地)를 둘러싼 소송은 이미 바른 해결책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다시 마땅히 헤아려야 할 것은 관리에게서 바른 해결책을 얻는 것 보다는 향리(鄕里)에서 양자(兩者)가 화해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편지를 보니 몸소 체험한 것이 실로 절실합니다. 그러나 또한 뭇 이치를 두루 살펴 그 종지를 합치시켜야 좋겠습니다. 단지 자신의 견해에만 근거를 둔다면 오히려 사리에 두루 통하지 못하게 되니, 급히 가려다 도리어 늦어지게 됩니다.

 

答程正思

葬地之訟 想已得直 凡百更宜審處 與其得直於有司 不若兩平於鄕曲之爲愈也 觀書以己體驗固爲親切 然亦須遍觀衆理而合其歸趣乃佳 若只據己見 却恐於事理有所不周 欲徑急而反疏緩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0(庚子, 宋 孝宗, 淳熙 7) 주자 51세때 제자인 정정사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이다.

 

󰡔논어󰡕는 이전에 여러 학자들의 해설을 편집했는데, 요즘 자세히 살펴보니, 고쳐야 할 곳이 열대여섯 곳이나 됩니다. 근래에 이 책을 읽으며 단서가 있음을 알았으니, 또한 함께 자세히 보고 바로잡기를 깊이 바랄 뿐입니다.

 

答程正思

論語舊嘗纂定諸說 近細考之 所當改易者什過五六 知近讀此書有緖 亦甚欲相與商訂耳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0(庚子, 宋 孝宗, 淳熙 7) 주자 51세 때 정정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논어󰡕 3편에 대한 해설은 아주 자세하지만, 복잡하고 많아서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습니다. 󰡔집주󰡕 가운데 한 두 글자를 교정한 것은 아주 좋습니다. 예를 들면 삼사(三事)’()’ 같은 것은 당연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이 곳에서 강설을 폐하지는 않았어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두 세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염계사기(濂溪祠記)󰡕의 판각이 완성된 지 이미 오래인데 어찌하여 보지 못했습니까? 지금 아울러 새로 판각한 3종을 은밀하게 보내며, 선인(先人)의 소집 한 권도 같이 보냅니다. 이 곳에는 보낼만한 다른 것이 없습니다.

 

答程正思

論語三篇說甚子細 袞袞未暇詳看 所訂集注中一二字甚善 如三事之爲三者, 當卽改易也 此間講說不廢 能問者不過二三人耳 濂溪祠記刻成已久 何爲未見 今倂新刻三種內去 先人小集一冊倂往 此間無他物可爲寄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1(辛丑, 宋 孝宗, 淳熙 8) 주자 52세 때 의 편지이다. 여기서는 치지와 역행에 대하여 순서는 치지가 먼저이지만 중요성에 있어서는 역행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가 갑자기 바꿔 제수한다는 명령을 받고 내일 당장 주사(奏事)로 가야 합니다. 돌연 조정을 우러러보게 되었으니 감히 몸을 아껴 벗들의 부끄러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거칠고 졸렬하여 임금의 뜻을 감동시킬 수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치지(致知) 역행(力行)에 대해서는 그 선후(先後)를 논하면 실로 당연히 치지가 먼저입니다만, 그 경중(輕重)을 논하면 마땅히 역행이 중요합니다. 어제 임택지(林擇之)에게 말한 것은 바로 다만 그것을 알기만 하고 말할 수만 있지 행할 수는 없는 자를 위하여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치에는 참으로 큰 해가 없습니다.

 

答程正思

熹忽被改除之命 來日當往奏事 儻得遂瞻玉陛 不敢愛身 以爲朋友羞 但恐疏拙 不能有以感動上意耳 致知力行 論其先後 固當以致知爲先 然論其輕重 則當以力行爲重 昨告擇之 正爲徒能知之言之而不能行者設耳 於理固無大害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1(辛丑, 宋 孝宗, 淳熙 8) 주자 52세 때 의 편지이다.

 

여러 책을 다시 보니 의리가 온당치 못한 곳이 매우 많은데, 모두가 중요하고 핵심적인 곳이어서 사람들이 두려워서 말할 수 없게 합니다.

 

答程正思

諸書再看 義理未安處甚多 皆是要切大頭項處 令人恐懼不可言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0(庚子, 宋 孝宗, 淳熙 7) 주자 51세 때 정정사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이다. 정가구와 왕청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특히 왕청경이 은거학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제가 병들고 피로하여 감히 힘을 다하여 편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한가한 가운데 충분히 요양하면서 거칠게나마 진보가 있는 것을 자못 깨달았습니다. 한스럽게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조석으로 친하게 만날 수 없군요. 또한 다행히 벗 한 두 명이 여기에 있어 강론을 폐하지 않고, 일이 있으면 서로 단속해 주니 도움이 없지 않습니다. 정사(正思)는 한 번 올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사수(沙隨) 정장(程丈)은 들으니 또 민() 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데 꼭 언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루어낸 학문이 매우 정밀하다고 들었고, 또 한 두 글자를 보았는데, 얼굴을 마주하고 가르침을 구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청경(淸卿)이 깨달은 것은 신뢰할 수 없을 듯한데, 그는 요즘 어떻게 공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동료들을 떠나서 은거하면 쉽게 둔하고 막힌 사람이 될 수 있으니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答程正思

熹病倦 不敢極力觀書 閑中玩養 頗覺粗有進處 恨相去遠 不得朝夕款聚 亦幸有一二朋友在此 不廢講論 因事提掇 不爲無助 不知正思能一來否 沙隨程丈聞亦欲入閩 不知何時定成行也 聞其制度之學甚精 亦見其一二文字 恨未得面扣之耳 淸卿省處恐靠不得 不知他日來如何做功夫 離羣索居 易得鈍滯了人 甚可懼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 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異論이 어지럽게 일어나지만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강하게 내세워 논쟁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며, 자신이 지난날 그렇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장(移葬)하는 중요한 일은 마땅히 쉽게 움직여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무릇 모든 일은 더욱 절실하고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좋은데,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장차 그만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론(異論)이 어지럽게 일어나는데, 깊이 변론할 필요는 없으니, 또 스스로 존양(存養)하고 강학(講學)하는 곳을 조석으로 점검하는 것이 자신에게 절실한 급무입니다. 벗들이 서로 믿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밀하게 평가하고 바로잡아서 스스로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넓게 둘러 앉아 있는 곳에서 시비를 논설하고, 글을 지어서 자신의 이론을 세워 함부로 배격하여 부질없이 논쟁의 단서를 만들어, 일에 도움이 되지 않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대체로 이렇게 해왔는데, 지금은 그것을 후회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그렇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뿐입니다.

 

答程正思

遷葬重事 似不宜容易擧動 凡百更切審細爲佳 若得已不如且已也 異論紛耘 不必深辨 且於自家存養講學處朝夕點檢 是切身之急務 朋友相信得及者 密加評訂 自不可廢 切不可於稠人廣坐論說是非 著書立言 肆意排擊 徒爲競辨之端 無益於事 向來蓋嘗如此 今乃悔之 故不願賢者之爲之耳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 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정정사가 󰡔맹자󰡕을 논한 것에 오류가 있는데, 이것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본원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존양의 바탕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이단에 대해서 깊이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다시 말하고 있다.

 

또 시방(侍旁)에게 보냅니다. 날마다 여러 동생조카들과 강학을 한다니 매우 좋습니다. 이른바 성현(聖賢)의 큰 뜻은 결코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오래전에 그대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건조하고 생경한 기상이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 그래서 마땅히 의심할 곳이 있어도 의심할 줄을 모르는 듯 합니다. 󰡔맹자󰡕의 몇 조목에 대해서 보내주신 것은 대개는 옳습니다. 그러나 심()을 논한 곳은 이것이 심의 본체(本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 본체 외에 따로 하나의 부차적으로 일을 하는 정해지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 공자와 맹자가 사람들에게 그 본체를 버리고 이것이 지시하는 것에 나아가 공부를 하도록 한 것이 되니, 어찌된 것입니까? 이러한 것은 해석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본원처(本原處)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함영(涵泳) 존양(存養)의 바탕이 없으므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학문이 밝지 못하여 이단(異端)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단은 대개 모두가 실제로는 사의(私意)와 인욕(人欲)을 편안하게 여기면서도 명목으로는 도의(道義)와 문학(問學)을 잃지 않으므로 학자들이 흔쾌히 그것을 쫓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어(俗語)진실된 것은 없애기 어렵고, 거짓된 것은 없애기 쉽다는 말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우리 도()를 힘써 행하여 더욱 광명하게 하면 저들의 사설(邪說)은 해를 보면 사라지는 눈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더불어 깊이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答程正思

且歸侍旁 日與諸弟姪講學 甚善 所謂聖賢大旨斷然無疑 久知賢者有此意思 但覺有枯燥生硬氣象 恐却有合疑處不知致疑耳 所示孟子數條 大槪得之 但論心處以爲此非心之本體 若果如此 則是本體之外別有一副走作不定之心 而孔孟敎人却舍其本體而就此指示 令做工夫 何耶 此等處非解釋之誤 乃是本原處見得未明 無箇涵泳存養田地 所以如此 更願察之也 世學不明 異端蜂起 大率皆便於私意人欲之實 而可以不失道義問學之名 以故學者翁然趨之 然喭有之 是眞難滅 是假易除 但當力行吾道 使益光明 則彼之邪說如見睍耳 故不必深與之辨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 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방심(放心)의 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매우 좋습니다. 또 다시 이렇게 존양(存養)하고 체험(體驗)하여 오래도록 하여 아주 익숙해지면 또 모름지기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이 두 가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언충(彦忠)은 그 부모를 장사지내지 못했는데, 멀리서 부휼(賻恤)을 받으니 벗의 뜻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 사람이 매우 감격하고, 집안사람들도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答程正思

所論放心之說甚善 且更如此存養體驗 久久純熟 又須見得存養省察不是兩事也

彦忠不能葬其親 遠承賻恤 足見朋友之義 渠甚感激 同舍亦無不動心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 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지난번에 간행한 󰡔왕사(王謝論)󰡕을 보았는데, 대의는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실제로 한 일을 논한 것은 너무 간략한데, 아마도 사서(史書)를 본 것이 미숙한 듯하니, 또한 의미를 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바로 이 두 사람이 공은 적고 죄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비로소 유자(儒者)가 하는 큰 학문의 공용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심설(心說)에 대해 말씀하신 것 역시 면밀하지 않은 듯하니, 대개 이 마음은 바른 것만 있고 삿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보존되면 바르고, 없어지면 삿될 뿐입니다.

 

答程正思

向見印行王謝論 大意甚善 但論此兩人實事太草草 恐是看得史書未熟 亦不可不加意 今日正要見得此兩人功少罪多處 方見儒者大學功用之實耳 所喩心說亦恐未精 大抵此心有正而無邪 故其存則正而亡則邪耳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6(丙午, 宋 孝宗, 淳熙 13)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맹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전일에 한 두명의 벗들이 여기에 와서 보고, 그 설이 분명하지 않다고 의심하여 비로소 적절하게 개정하였는데, 바로 보내신 편지의 내용과 합치됩니다. 숙중(叔重)이 필경 스스로 알려드리러 갈 것입니다. 진동보(陳同父)에게 답한 편지는 자세히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충분히 깊게 변론하지 않았다고 여기는데 이들은 시속의 학문의 폐단을 살피지 않은 자들입니다. 저의 생각을 어찌 한 사람을 위하여 드러내겠습니까? 책을 간행하는 일은 여기에서 여원주(呂沅州)가 했는데 무본(婺本)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마땅히 평온한 마음으로 관찰해야 하니 이렇게 너무 심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答程正思

所喩孟子 前日因一二朋友看到此 疑其說之不明 方略改定 正與來喩合 叔重必自報去矣 答陳同父書 不知曾細看否 人皆以爲此不足深辨 此未察時學之弊者也 區區之意 豈爲一人發哉 鋟版乃此間呂沅州爲之 婺本初未有也 此等事當平心觀之 不必如此爲已甚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7(丁未, 宋 孝宗 淳熙14) 주자 58세 때의 편지이다. 사현도, 혹은 육자정 무리가 와서 방자한 행동을 하기에 단호하게 대처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여동래의 학문이 그 제자들에게 와서는 더 누추하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맹자󰡕生之謂性에 대한 를 개정할 뜻을 밝히고 정정사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

 

말씀하신 것은 모두 정당하고 확실하며, ()를 지키는 뜻 또한 매우 엄하니 병중에 있는 저의 마음에 매우 위로가 됩니다. 성시(省試)의 득실에 대해서는 다시 마음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고자(告子)생지위성(生之謂性)’이란 구절은 󰡔집주󰡕에서는 비록 고쳤지만 자세히 보니 결국 분명하지 않습니다. 근래에 다시 한 번 고쳤는데, 여기에서 아직 언어 해석이 나오지 않은 것을 알았으니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자세하게 보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 때에 서로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정주(祝汀州)가 견책한 뜻은 감히 삼가 받들 수가 없습니다. 대개 예전에 일찍이 선종(禪宗)을 배웠으므로 그 설이 비록 그른지 알지만 개인적인 기호의 의미가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 설은 앞뒤가 가려져 있어 그 깊은 뜻까지 다 보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면 양()()과 같은 사람은 다만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만을 알 수 있을 뿐, 그것이 무부무군(無父無君)에 이른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비록 그것이 무부무군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또한 그것이 곧 금수(禽獸)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지난 겨울 그들이 여기에 와서 방자하고 흉한 소리를 하며, 수족(手足)을 다 드러내기에 이로부터 곧 분명하게 성토하고 공격하여 다시는 전날의 허용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학(浙學)은 또 더욱 누추한데, 반숙창(潘叔昌)이나 여자약(呂子約)과 같은 무리는 모두 이미 깊게 그 가운데 빠졌으니, 당시에 전수(傳授)한 사설(師說)이 무슨 이유로 그릇되어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원선(元善)이 이것을 변론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감탄하고 칭찬할 만 합니다. 내가 늙고 어리석어 이러한 것들을 그냥 놓아두어서, 오늘날 부질없이 혀를 힘들게 하고, 힘은 많이 쓰면서도 드러나는 공은 적게 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개의 성()은 소의 성()과 같고, 소의 성은 사람의 성과 같습니까? 개와 소, 사람의 형기(形氣)가 이미 갖추어지고 지각(知覺)이 있으며, 운동할 수 있는 것으로 태어납니다.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비록 같지만 그러나 형기가 이미 다르니 나면서 하늘에서 얻어서 가지고 있는 이() 또한 다릅니다. 대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온전함을 얻어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사물에 있어서는 막힌 것이 있어서 그 온전함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곧 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고자(告子)가 말하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은 횐 것을 희다고 하는 것과 같은데, 모든 횐 것의 흼은 다른 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곧 이것은 타고난 형기를 가리켜 성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사람과 사물이 하늘에서 얻은 것 또한 같지 않음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이것으로 따졌고, 고자는 이치가 닺지 않아 말문이 막혀 다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오른 쪽 3장은 고자의 오류의 근본이고 맹자가 드러내 보여준 긴요하고 절실한 도리입니다. 대개 지각하고 운동하는 것은 형기가 하는 것이고, ()()()()는 천명(天命)이 부여한 것입니다. 학자는 여기에서 마땅히 그 치우치고 바르며 온전하고 빠진 것을 살펴서 스스로가 물()보다 귀한 까닭을 알려고 해야 하고, 타고난 것이 같음을 가지고 도리어 금수에 빠져서 자기의 성()이 크고 온전함을 스스로 알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고자 일단은 이렇게 개정하려고 하는데, 이전의 해설을 삭제해버리면 너무 간단한 듯합니다. 다만 일원처(一原處)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자세히 살펴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答程正思

所論皆正當確實 而衛道之意又甚嚴 深慰病中懷抱 省試得失 想不復置胸中也 告子 生之謂性 集注雖改 細看終未分明 近日再改一過 此處覺得尙未有言語解析得出 更俟款曲細看 他時相見 却得面論 祝汀州見責之意 敢不敬承 蓋緣舊日曾學禪宗 故於彼說雖知其非 而不免有私嗜之意 亦是被渠說得遽前揜後 未盡見其底蘊 譬如楊墨 但能知其爲我兼愛 而不知其至於無父無君 雖知其無父無君 亦不知其便是禽獸也 去冬因其徒來此狂妄凶狠 手足盡露 自此乃始顯然鳴鼓攻之 不復爲前日之唯阿矣 浙學尤更醜陋 如潘叔昌呂子約之徒 皆已深陷其中 不知當時傳授師說何故乖訛便至於此 深可痛恨 元善遂能辦此 深可歎賞 深慚老繆放過此著 今日徒勞頰舌 用力多而見功寡也

然則犬之性猶牛之性 牛之性猶人之性與 犬牛人之形氣旣具 而有知覺能運動者生也 有生雖同 然形氣旣異 則其生而有得乎天之理亦異 蓋在人則得其全而無有不善 在物則有所蔽而不得其全 是乃所謂性也 今告子曰生之謂性如白之謂白 而凡白之白無異白焉 則是指形氣之生者以爲性 而謂人物之所得於天者亦無不同矣 故孟子以此語之 而告子理屈詞窮 不能復對也

右第三章 乃告子述繆之本根 孟子開示之要切 蓋知覺運動者 形氣之所爲 仁義禮智者 天命之所賦 學者於此正當審其偏正全闕 而求知所以自貴於物 不可以有生之同 反自陷於禽獸而不自知己性之大全也

告子一段 欲如此改定 仍刪去舊論 似已簡徑 但恐於一原處未甚分明 請看詳之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7(丁未, 宋 孝宗 淳熙14) 주자 58세 때의 편지이다. 󰡔맹자집주󰡕󰡔대학장구󰡕 󰡔대학혹문󰡕 등에 대해서 정정사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는 오직 正思만이 의지가 도탑고 부지런하여, 하나라도 보고 들은 것이 있으면 기꺼이 궁구하니, 이것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여 정정사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있다. 경전에 대한 정정사의 견해를 거듭 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주희가 정정사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몇 가지는 모두 좋습니다. 󰡔맹자󰡕 중간에서 또 하나의 과실을 고쳤는데, 일찍이 베껴간 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은 듯하니 따로 한 권을 보냅니다. 그러나 처음에 볼 때는 매우 분명했는데, 지금 그것을 읽어보니 또 분명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좋아서 처음에 그것을 취하여 쓰려고 하였는데, 또 너무 번거롭고 주 가운데서 많은 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다시 그 말을 간략하게 할 수 있으면 몇 마디 말을 보내주십시오. 만약 생각을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다면 다시 이 말을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치지(致知)에 대한 설과 그 밖의 몇 곳을 쉽게 고친 것은 덕수(德粹)가 옮겨 적었습니다. 지금 󰡔혹문󰡕의 한 두 조목을 고친 것이 있는데, 역시 베껴서 보냈으니 덕수에게 가서 취하여 볼 수 있을 것입니다.일신(日新)’ 한 조목은 이전 것에 비하여 성과가 있는 듯 합니다. 양심발현(良心發見)에 대한 설은 숙중(叔重)의 편지에 이미 적었으니 그와 함께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용 공부가 가장 정미롭고도 간략한 곳인데 지금까지의 호오봉(胡五峯)장경부(張敬夫)의 설과는 다르니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설명이 투철하지 못하여 다시 별도의 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학혹문󰡕에서 인용한 󰡔맹자󰡕는 바로 전수(傳授)의 혈맥인데, 남의 설을 끌어다가 억지로 부합시킨 것과는 다르니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인심(人心) 도심(道心)은 근래의 편지에서 비록 의심할 것이 없다고 했지만, 역시 다 통하지 않는 곳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잘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는 듯하니 또한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나머지 말한 것은 대개가 모두 정당한데, 다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는 곳에서는 자세히 살피지 않은 곳이 있으니, 이른바 정정당당(亭亭當當)하고 꼭 알맞다고 한 말을 적용시키면 자세하지 못함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개 근래의 벗들이 대부분 어리석고 약하여 의지가 없으며, 산만하여 줏대가 없고 편책(鞭策)이 앞서지를 않는데, 오직 정사(正思)만이 의지가 도탑고 부지런하여, 하나라도 보고 들은 것이 있으면 기꺼이 궁구하니, 이것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그대와 이야기를 하면 학문을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되니, 비로소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또한 생각에 거칠고 서투른 곳이 있고, 변론공부가 깊이 생각을 탐구하는 공부를 넘어서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므로 기상(氣象)에 소란스럽고 서두르는 흠이 있고 조용히 자득한 뜻이 적습니다. 이것이 제 뜻에 차지 않을 뿐입니다.

 

 

答程正思

所喩數說皆善 孟子中間又改一過 不記曾錄去否 今恐未曾 別寄一本 但初看甚分明 今讀之又似不分曉 試更爲思之 如來喩固佳 初欲取而用之 又覺太繁 注中著不得許多言語 今可更約其辭 爲下數語來 若發脫得意思分明 又當改却此說乃佳也 致知說及他數處近改者 德粹寫得 今有所改或問一二條 亦寫寄之 可就取看 日新一條 似比舊有功也 發見之說 已具叔重書中 可更相與詳之 此是日用功夫最精約處 與向來五峰敬夫之說不同 可更思之 恐說未透 却又須別下語也 大學或問所引孟子 正是傳授血脈 與援引牽合者不同 試更詳之 人心道心 近書雖云無疑 恐亦有未徹處 故猶有不善看之說 亦請更察之也 其他所論大槪皆正當 但於曲折處間有未察 則恐於所謂亭亭當當恰好處未免不子細也 大抵近日朋友例皆昏弱無志 散漫無主 鞭策不前 獨正思篤志勤懇 一有見聞 便肯窮究 此爲甚不易得 常與朋友言之 以爲爲學正須如此 方有可望 然亦覺得意思有粗疏處 辨論功夫勝却玩索意思 故氣象間有喧鬧急迫之病 而少從容自得之意 此爲未滿人意耳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8(戊申, 宋 孝宗 淳熙15) 주희 59세 때의 편지이다. 8월에 제수된 朝奉郞을 사직하고 은거하고 싶은 뜻을 강하게 밝히고 있다. 또 육자정과 󰡔태극도설󰡕에 대하여 시끄럽게 논쟁한 것을 후회하는 말을 하고 있다.

 

제가 거듭 사직하는 글과 하나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여름에 올린 것 중에 미진한 것까지 미루어서 말하여,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한 듯하니 죄를 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이 달7, 8일 간에 보냈는데, 지금까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황제의 뜻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서투르고 졸렬함을 알고 있으니 이 두터운 은덕을 감당할 수가 없어, 외람되지만 나아가서 반드시 사직을 얻어낼 것입니다. 만약 제 말이 행하여져서 몸을 숨길 수가 있으면 곧 이보다 큰 행운은 없을 것입니다. 보내주신 여러 편지는 매우 좋습니다. 다만 임천(臨川)의 변론은 당시에는 헤아림이 부족한듯하니, 부질없이 시끄럽게 싸워서 일에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편지는 근래에 비로소 답을 하였는데, 거기서 말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과 같지만 조금 더 상세해졌을 뿐입니다. 이 또한 답장을 받지 못했으니 후학(後學)들이 그 설이 미혹됨을 알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그는 분명 회답을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의 서원(書院)이 근래에 비로소 지어져 강()()의 벗들이 거기에 서로 모였습니다. 흥국(興國)만정순(萬正淳)과는 예전에 남강에 있을 때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닙니까? 그 가운데 한 두 사람은 역시 항상 강론을 할 수 있습니다. 󰡔소학자훈(小學字訓)󰡕은 아주 좋으니, 말이 비록 많지 않더라도 오히려 이 일부가 󰡔이아(爾雅)󰡕보다 큽니다.

 

答程正思

熹再辭之章幷一疏上之 頗推夏間所言之未盡者 語似太訐 未知得免於戾否 所遣人以月初七八間行 至今未還 不知聖意定何如 自覺疏拙 無以堪此厚恩 冒昧而前 必取顚踣 若得話行而身隱 乃爲莫大之幸耳 所示諸書 甚善甚善 但臨川之辨當時似少商量 徒然合鬧 無益於事也 其書近日方答之 所說不過如所示者而稍加詳耳 此亦不獲已而答 恐後學不知爲惑耳 渠則必然不肯回也 此間書院近方結裹 江浙間有朋友在彼相聚 興國萬正淳不知舊在南康曾相識否 其間一二人亦儘可講論也 小學字訓甚佳 言語雖不多 却是一部大爾雅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9(己酉, 宋 孝宗 淳熙16) 주희 60세 때의 편지이다. 󰡔태극도설󰡕에 대하여 육자정에게 보낸 편지가 육자정에 의하여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희는 육자정의 이러한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나, 덕분에 힘을 덜었고, 또 학자들이 주렴계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육자정에게 답한 편지는 사람이 없어 써두지 않았는데, 이미 베껴놓은 사본을 네 번 간행한 지가 오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바로 그 단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여 그가 스스로 이렇게 한 것이니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또한 나에게는 힘을 더는 것이고, 또 사방의 학자들이 전현(前賢)이 말씀하신 본래의 뜻을 대략이라도 알게 하는데,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깊이 변론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대는 아마도 성현이 도()를 자임(自任)한 마음을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答程正思

答子靜書無人寫得 聞其已謄本四出久矣 此正不欲暴其短 渠乃自如此 可歎可歎 然得渠如此 亦甚省力 且得四方學者略知前賢立言本旨 不爲無益 不必深辨之云 似未知聖賢任道之心也

 

 

정정사에게 답함 答程正思

 

해제1184(甲辰, 宋 孝宗, 淳熙 11)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보내주신 책문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기운에 역시 아직 화평한 곳이 모자라니, 어찌 마음 속에 화평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까? 진정기(陳正己)의 논의는 무엇이 충분히 깊게 변론할 만한 것이겠습니까? 고로(杲老)가 말하기를, 일찍이 젊은 시절에 장천각(張天覺)을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장천각에게 말하기를 채원장이 상공(相公)을 말한 것은 매우 정당한데, 다만 계략이 조금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천각이 말하기를 채경은 머리를 베고 배를 가르는 사람이니 내가 만약 계략이 있었으면 당신과 같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만약 진정기가 말한 이천의 행함은 두루 미치지 않는다고 한 것에 상대하여 말하면 이천과 당신은 마찬가지이니 이것은 일소에 붙일 만한 것입니다. 󰡔통서(通書)󰡕의 주에 선악이 분명하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하였는데, 어찌 오히려 선선후악(先善後惡)의 의미가 없다고 의심하십니까? () 자에 대한 설 역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만 그대가 이렇게 드러내 밝힌 것 또한 도움이 됩니다.

 

答程正思

所示策甚佳 然詞氣之間亦覺尙欠平和處 豈有所不能平於中耶 陳正己之論 何足深辨 杲老嘗說少時見張天覺 或告之曰 蔡元長說相公極正當 只是少些機數 張應之曰 蔡京斫頭破肚漢 我若有機數 却與你一般也 若待它說伊川用處不周 卽伊川與你一般矣 此可付一笑也 通書注說善惡分明作兩節 何爲尙疑無先善後惡之意耶 性字之說亦無可疑 然得賢者如此發明 亦有助也

 

 

왕자문에게 답함 答汪子文

 

해제1184(甲辰, 宋 孝宗, 淳熙 11)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왕자문이 하루빨리 벼슬에 나가고자 신에게 제사를 지낸 일을 나무라고 있다.

 

들으니 요사이 공명(功名)을 이루는데 급하여 드디어 이상하고 괴이한 것에 현혹되었다고 하니 내가 들은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확실하지 않은 것을 붙잡고 있으면 서책에서 익히고 들은 것은 장차 어디에다 쓰려고 하십니까? 지금부터 절실하게 상규(常規)를 편안히 지키고, 바른 것을 지켜서 학문에 나아갈 바탕으로 삼고, 다시는 이전의 실수를 따라서 삿되고 망령된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答汪子文

似聞比來急於進取 遂爲神怪所惑 殊駭聞聽 於此等處把捉不定 則所講聞於簡冊者將以何用耶 自此切須安常守正 以爲進學之地 不宜復徇前失 以陷於邪妄之域也.

 

 

왕성가에게 답함 答汪聖可

 

해제1184(甲辰, 宋 孝宗, 淳熙 11)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씀하신 독서와 실천에 힘쓴다는 의미는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또 바라건대 자신을 돌이켜 실질에 힘씀으로써 그 말을 충실하게 하고, 말이 행동을 앞서는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나의 깊은 소망입니다.

 

答汪聖可

示喩讀書勵行之意 甚善甚善 然更願反躬務實 以充其言 使無浮行之愧 則區區之深望也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79(己亥, 宋 孝宗, 淳熙 6) 주자 50세 때의 편지이다. 주희의 제자인 주순필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제가 막 내방을 받았는데 또 긴 편지를 보내주시어, 실제보다도 지나치게 칭송해 주시니, 소견이 좁고 미천한 제가 결코 감당할 것이 아니니 감히 스스로 변론하여 말하지 않겠습니다. ()씨의 두 책이 기록한 것 이외의 것에서 나와 오류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지금까지 각각 본편(本篇)에 근거해서 그 성()과 호()를 남겨 두어서 서로 구별한 것은 바로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 옳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른 것이 있고, 그른 듯하지만 옳은 것이 있는데, (지금 그것을 읽는 자가)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고, 깊이 좋아하지 않으면서 변별하여 밝히는 것은 혹 오류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한가한 날에 내방해 주시어 얼굴을 마주 대하고 한 두 가지를 물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答周舜弼()

熹適承枉顧 示以長牋 稱道過實 決非淺陋所敢當 不敢自辨數也 至謂程氏二書出於記錄之餘 不能無誤 誠如所論 向來所以各因本篇而存其姓號以相別者 正謂是爾 然言有似是而實非者 有似非而實是者 非好之篤玩之深而辨之明者 或未能無誤也 暇日見過 得面叩其一二 幸甚幸甚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79(己亥, 宋 孝宗, 淳熙 6) 주자 50세 때의 편지이다. 실질에 나아가 공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차에 임박하여 말한 무실(務實)에 대해서는 가는 도중에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늘날의 학자가 진보할 수 없는 것을 보면 병통이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실질에 나아가서 공부를 하면 자연히 얻는 것이 있으니, 급하게 효험을 따지면 안됩니다. () 자에 대해서는 이별한 후에 소견이 더욱 절실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혹 의론할 것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答周舜弼

臨行所說務實一事 途中曾致思否 觀之今日學者不能進步 病痛全在此處 但就實做工夫 自然有得 未須遽責效驗也 仁字想別後所見尤親切 或有議論 因來不妨見寄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79(己亥, 宋 孝宗, 淳熙 6) 주자 50세 때의 편지이다.

 

장사(葬事)는 쉽지 않은 일인데 곧 끝냈습니다. 상례(喪禮)는 정성을 다하고 유속(流俗)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은 특히 어려운 것입니다. 또 민자건과 복자하 두 사람이 상복을 벗고 공자를 뵌 뜻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것으로써 예제(禮制)를 마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그곳의 벗들이 공부하는 학문의 차제는 어떻습니까? 편지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번에는 매번 지경(持敬)과 궁리(窮理) 두 가지를 말했는데, 지금의 생각 역시 이와 같습니다. 다만 선후(先後)와 완급(緩急)의 차서를 더욱 분명하고 친절하게 깨달아서 마침내 먼저 지수(持守) 상에서 노력하면, 비로소 진보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性善)과 구방심(求放心)을 말한 곳이 가장 깊이 완미해야할 것입니다.

 

答周舜弼

葬事不易便能了辦 喪禮盡誠 不狥流俗 此尤所難 更宜深念閔卜二子除喪而見之意 以終禮制 區區之望也

彼中朋友用功爲學次第如何 便中喩及 向時每說持敬窮理二事 今日所見 亦只是如此 但覺得先後緩急之序愈分明親切 直是先要於持守上著力 方有進步處也 孟子說性善及求放心處 最宜深玩之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79(己亥, 宋 孝宗, 淳熙 6) 주자 50세 때의 편지이다. 글을 쓸 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말라는 것과, 실질에 나아가서 일상생활에서 持敬求放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전에 보내주신 별지의 조목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그 대강은 다만 실제로 지경(持敬)하지 않았고, 실제로 궁리(窮理)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성선(性善)을 믿지 않았고, 실제로 방심(放心)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인데, 문장을 잇달아서 의미를 만들어내어 말을 많이 허비하고, 설명은 더욱 길어졌으며, 잃은 것은 더욱 많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병통입니다. 다만 그간에 말한 자세한 사정과 뒤 단락의 극벌원욕(克伐怨慾)향원(鄕原)의 사()와 학(), 첨홀전후(瞻忽前後)와 같은 것을 보기만 해도 곧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실제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면 곧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본래 의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잘 헤아려 보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정말로 병통이 있으면 이렇게 대충 해서는 안됩니다. 증자(曾子) 일단의 글 뜻은 비록 말은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참된 생각이 아닌 듯 합니다. 이러한 곳에는 또 허심(虛心)으로 함영(涵泳)하고 말을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하며, 또 일상생황에 나아가서 실제로 지경(持敬)공부를 하고, 방심(放心)을 구한 다음에야, 스스로 본성이 원래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 스스로가 요순(堯舜)과 원래 같은가 다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실로 그렇게 할 수가 있으면 생각이 저절로 밝게 열려서 지수(持守) 공부 역시 힘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군자(君子)로서 때에 맞게 한다는 것은 오히려 󰡔집주󰡕에서는 너무 간략하게 한 실수를 하여 사람들이 의심을 하게 하였으니, 지금은 없애버렸습니다. 단지 지금 있는 글의 의미만으로도 자연히 분명해질 것이니 이 구절을 끌어다 붙이지 않아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쓸데없이 지나치게 사색하였으므로 그것을 함께 언급한 듯합니다. 그러나 절실하고 중요한 공부는 앞에서 말한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깊이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答周舜弼

前此所示別紙條目雖多 然其大槪只是不曾實持得敬 不曾實窮得理 不曾實信得性善 不曾實求得放心 而乃緣文生義 虛費說詞 其說愈長 其失愈遠 此是莫大之病 只以其間所論曲折及後段克伐怨欲鄕原思學瞻忽前後之類觀之 便自可見 若果是實曾下得工夫 卽此等處自無可疑 縱有商量 亦須有著實病痛 不應如此泛泛矣 曾子一段文意雖說得行 然似亦未是眞見 似此等處 且須虛心涵泳 未要生說 却且就日用間實下持敬工夫 求取放心 然後却看自家本性元是善與不善 自家與堯舜元是同與不同 若信得及 意思自然開明 持守亦不費力矣 君子而時中 却是集注失於太簡 令人生疑 今已削去 只見存文義已自分明 若不爲此句所牽 則亦無可疑矣 恐枉費思索 故幷及之 然其切要功夫 無如前件所銳 千萬留意也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88(戊申, 宋 孝宗 淳熙15) 주희 59세 때의 편지이다. 에 대한 주순필의 설이 어수선하다는 것과 의 중요성을 말하고, 주순필의 강론이 절실하지 못하고 문자상으로만 꾸며내어 의미가 없다고 훈계하고 있다.

 

()’자에 대한 논의는 전혀 친절하지도 않고, 말의 의미도 어수선해서 특히 병폐가 있음을 알겠습니다. 소위 마음의 덕<心之德>’이란 곧 정()선생이 말한 곡종(穀種)의 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사랑의 이치<愛之理>’란 것은 바로 이른바()은 미발(未發)한 사랑이고, 사랑은 이발(已發)한 인()이라는 것일 뿐입니다. 단지 이러한 의미로 추구할 뿐, 다시 바깥에서 도리를 더 더하여 넣어서 도리어 혼잡해서 분명한 곳이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 자를 인식한다면 천지만물(天地萬物)과 동체(同體)라는 것도 해치지 못합니다. 만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곧 천지만물동체가 인()이라는 것이 도리어 나와는 서로 상관이 없게 됩니다. ()()()()는 성()의 큰 절목이요, 모두 형이상(形而上)의 것이므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없습니다. 안자(顔子)의 용기는 단지 증자(曾子)가 말한 몇 가지 일을 몸에 체득한 것이니, 큰 용기를 가진 자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극기(克己)에 대한 설명은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와같이 언어에서만 이해한다면 아마도 유익함은 없을 것입니다. 나머지 몇 조목은 모두 절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저 전후의 순필의 여러 강론(講論)을 보니 대부분 자신을 바로잡지 못하고 문자 상에서만 억지로 꾸며내므로, 의미가 없고 힘도 얻지 못합니다. 반드시 이것을 바꾸어야만 비로소 실제적인 공부가 될 것입니다.

 

答周舜弼

所論 仁字殊末親切 而語意叢雜 尤覺有病 須知所謂心之德者 卽程先生穀種之說 所謂愛之理者 則正所謂仁是未發之愛 愛是已發之仁耳 只以此意推之 更不須外邊添入道理 反混雜得無分曉處 若於此處認得仁字 卽不妨與天地萬物同體 若不會得 而便將天地萬物同體爲仁 却轉見無交涉矣 仁義禮智 便是性之大目 皆是形而上者 不可分爲兩事 顔子之勇 只以曾子所稱數事體之於身 非大勇者 其孰能之 克己之說未爲不是 但如此言語上理會 恐無益耳 其他數條似皆末切 大抵前後見舜弼諸論多是不切己而止於文字上捏合 所以無意味 不得力 須更就此斡轉 方有實地功夫也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91(辛亥, 宋 光宗 紹熙2) 주희 62세 때의 편지이다. 주순필의 공부하는 자세를 칭찬하고 이번(경자) 등과 서로 이끌어주며 공부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편지에서 의문나는 것을 물어 주셨는데, 마땅히 이렇게 함영해야 하니, 매우 좋습니다. 치지(致知) 공부 역시 또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완색(玩索)하고 확충해나가는 것일 뿐이니, 마음에 갖추어진 것은 본래부터 부족함이 없습니다. 경자(敬子)는 멀리서 오기가 쉽지 않은데, 그 뜻이 매우 용기가 있지만 공부는 아직 치밀하지 못하니, 또 마땅히 함께 절차(切磋)하여, 더욱 정밀하고 자세하며 평온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병통을 보면 장유(長孺)와 서로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하는 것도 같고, 우리가 배우는 것이 자신에게 긴요하고 절실하다는 것과 바로 이러한 것으로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부모님을 봉양하기가 편하지 않으면 또한 자신의 뜻을 굽혀서 따르고 헤아려야 하는 것이지 이렇게 성급하게 다그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천(伊川) 고칙에 있는 말이 이와 같은데, 이 역시 소흥(紹興) 초년의 의론이어서 포폄(襃貶)이 섞여있음을 면치 못합니다.

 

答周舜弼

示及疑問 且當如此涵泳 甚善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本自無不足也 敬子遠來不易 其志甚勇 而功夫未密 更宣根與切磋 更令精細平穩乃佳耳 觀其病痛與長孺頗相似 所以做處一般 不知吾人所學且要切身 正不以此等爲高也 若親養未便 亦須委曲商量 不須如此躁迫也 伊川告詞如此 是亦紹興初年議論 未免一褒一貶之雜也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91(辛亥, 宋 光宗 紹熙2) 주희 62세 때의 편지이다. 공부는 고요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천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편지에서 사물에 응하여 ()’ 자 공부를 할 때 힘을 쓰는 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이 역시 통상적인 이치입니다. 다만, 성현(聖賢)이 말씀하신 행동은 독실하고 정중하게 하라<行篤敬>’, ‘일을 처리할 때에는 공경스럽게 하라<執事敬>’는 말을 보면 ()’ 자는 본래 묵묵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를 위하여 한 말이 아니니, 반드시 실천하기 어려운 곳에서 노력하여 붙잡고 지켜야,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거의 한결같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것 역시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적은 병력으로 갑자기 강한 적군을 만났다면, 다만 힘을 다해 죽기를 각오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니 또 무엇을 묻겠습니까?

 

答周舜弼

所諭敬字工夫於應事處用力爲難 此亦常理 但看聖賢說 行篤敬執事敬 則敬字本不爲黙然無爲時設 須向難處力加持守 庶幾動靜如一耳 克己亦別無巧法 譬如孤軍猝遇彊敵 只得盡力舍死向前而已 尙何問哉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97(丁巳, 宋 寧宗 慶元3) 주희 68세 때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한 학문하는 의미는 대개가 이와 같을 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힘을 쓰면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 나가 끊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答周舜弼

示喩爲學之意 大槪不過如此 更在日用之間實用其力 念念相續 勿令間斷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97(丁巳, 宋 寧宗 慶元3) 주희 68세 때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한 것은 모두 학자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서란 실제로 그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요, 스스로의 실천[行己]은 실제로 그 자취를 밟아가는 것이니, 생각마다 앞을 향하고, 가볍게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있는 것이 비록 아주 고고(孤高)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는 애초부터 상관이 없는 것이니, 또 어찌 반드시 혼자서 걱정하고 지나치게 헤아려서 동류들과 몰려다니며 부끄러운 지경에 빠지겠습니까?

 

答周舜弼

來喩所云 皆學者不能無疑之處 然讀書則實究其理 行己則實踐其迹 念念鄕前 不輕自恕 則在我者雖甚孤高 然與他人元無干預 亦何必私憂過計而陷於同流合汙之地耶

 

 

주순필에게 답함 答周舜弼

 

해제1197(丁巳, 宋 寧宗 慶元3) 주희 68세 때의 편지이다. 주순필은 편지로 주로 󰡔대학󰡕󰡔중용󰡕을 비롯한 경전의 몇 구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주희의 의견을 구하였는데, 주희는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곁들여 보네고 있다.

 

학문을 강론하고 자신을 다잡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더욱 열심히 하니 저의 바람에 매우 위로가 됩니다. 또 듣자하니 친구들의 도움이 많이 있어서,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여서도 친구들이 그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은 더욱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바라건대 서로 함께 갈고 닦아 지극한 경지를 추구해 나아가고, 한낮 헛된 명성만 얻고 실제로는 화를 얻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혈구(絜矩)에 관해 설명한 것은 대개는 옳습니다. 두 글자의 의미는, ()로 재어서 방형(方形)을 얻는다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보낸 몇 조목에 대해서는 각각 내 생각을 그 뒤에 덧붙여서 다시 되돌려 보내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내온 설명은 대개는 분명하고 자세하지만, 다만 또 여기에서 더 반복하고,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사려하며, 치밀하고 간절하게 완미하여 오래 되면 반드시 저절로 정미(精微)한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니, 다만 이와 같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고 싶다고 하니, 나로서도 한 번 보기를 참으로 원하는 것이지만, 다만 먼 곳에서 오려면 힘이 많이 들 것이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착실하게 공부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게 되면 한 방에 함께 앉은 것과 또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세속에서 변화를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학(大學)의 도()치지(致知)’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성의(誠意)’보다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뜻에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으면, 반드시 일에 따라 사물에 나아가서 그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의 이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하(天下)의 일을 살펴보면 그 기미는 아주 미미해서 선악사정(善惡邪正)과 시비득실(是非得失)이 분명하지 않은 사이에 서로 어지럽게 뒤섞여있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고요하게 살피는 것이 정밀하게 되면 움직여 실행하는 것은 선()하게 됩니다. 성현(聖賢)들의 학문이 반드시 실천을 말한 것은, 역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평소에 본래 결정된 것이라는 말일 뿐입니다. 지금 선생님의 가르침은 반드시 앎이 절실한 다음에야 뜻이 정성스럽지 않음이 없다고 합니다. 만일 지지(知至)’를 평범하게 말하면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끝까지 다하여 남음이 없게 한다는 것과 같으니, 결국 위 문장에서 말하는 치지(致知)’란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만물의 이치를 모두 알기를 기다려서 그 다음에 따로 성의(誠意)의 공을 구한다면 이 뜻은 언제 정성스러워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학자들이 긴요하고 절실하게 노력을 해야 할 곳인데, 선생의 해석이 정밀하고 분명하여, 진실로 성현들이 드러내지 않은 온축을 드러낸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찍이 마음에 체득하고 있으면, 사물이 오면 반드시 선악(善惡)의 양단을 정밀하게 살펴서 만일 선하면 확실히 지켜 어기지 말고, 만일 악하다면 확실히 끊어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선생은 이것과 위 구절 둘을 없애버렸다. 또한 거의 치지(致知)에 얽매이지 않지만, 아는 것은 도리어 평범하여 사리에 절실하지 않는 것이 없고, 성의(誠意)에 얽매이지 않지만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여,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속이는 뜻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삼가 이 마음을 지켜 감히 게으르고 소홀함이 없고, 공부를 하고 효과를 헤아리는 것은 감히 뜻으로 삼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무엇을 모르겠습니까?

지지(知至)는 단지 앎을 끝까지 다하여 도달하는 곳일 뿐 따로 다른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본래 마땅히 이와 같은 올바른 이치가 자연히 투철하게 발현된다는 것을 알면 아는 것이 저절로 절실해져서, 또 다시 확고히 지키거나 분명하게 끊는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이 의미가 저절로 진실되지 않은 것이 없게 됩니다.

 

() 2장은 자신을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해석하여, “군자는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으로 맺은 것은 모두 지선(至善)에 그치고자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치지(致知)로부터 수신(修身)에 이르기까지는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제가(齊家)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무릇 이 여덟 가지는 진실로 󰡔대학󰡕의 조목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지어지선(至於至善)을 말하는 것은 선을 택하는 것이 정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간절히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저 선이란 한가지는 지극히 선한 것이 있으면 아직 선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선생은 선하나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고쳤다. 선을 택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움을 말하는 까닭은 지나치면 중()을 잃고, 미치지 않아도 역시 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하는 때에, 참으로 공정하게 하려하지만 도리어 사사롭게 되고, 의롭게 하려하지만 이()를 따르게 되어, 후하기도 하고 박하기도 하며, 가볍기도 하고 중하기도 하며 범연하게 응하여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앎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망장(補亡章)에서는, 노력하는 것이 오래되면 하루아침에 확연히 관통하게 되니, 이치의 표리정조(表裏精粗)가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되고, 마음의 분별과 취사가 절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익히는 공을 쌓아서 확연관통(廓然貫通)에 가까워진 다음에야 지어지선의 일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실로 여기에 이르지 않으면 마음에 분별(分別)과 취사(取捨)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가지 일은 본래 하나의 지극한 선이 있으니, ()()()()와 같은 것들입니다.

 

성내고 두려워하며, 좋아하고 근심하는 것은 사람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라도 있으면 마음은 그 바름을 얻지 못하니, 왜 그렇습니까? 대개 이 마음은 경각(頃刻)이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실로 희노애구(喜怒哀懼)가 하나라도 마음에서 싹트면 마음은 속박됨이 있어서 기()를 통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 도리어 그 마음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성이 날 때는 다만 성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미 성냄이 주가 되었는데, 또 어떤 마음이 남아 있겠습니까? 두려움과 같은 것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습니다. 성인(聖人)은 여기에서, 학자가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여 조금도 끊임이 없기를 깊이 바라니, 희노애구도 남아있지 않은데, 하물며 넓은 바깥으로 내달리고 사악하고 편벽된 망념이 이 마음의 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이 보존되어 있지 않으면 그 마음을 단속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체득하면 어떻습니까?

희노애구가 있으면 네 가지의 드러남은 그 바름을 얻지 못합니다. 희노애구가 없으면 내 가지의 드러남이 어찌 바르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혈구지도(絜矩之道)는 자신을 미루어서 사물을 헤아려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하좌우전후의 사이에서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두 노인을 공경하고, 어른을 섬기며, 고아를 불쌍히 여기는 세 가지로 미루어보면 민심(民心)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에서는 호오(好惡)는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없으며, 재화와 이익은 자신에게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악을 취하는 방법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한 장의 뜻이 ()’ 한 글자를 드러내 밝히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위 장에서 이미 자신의 몸에 간직한 것이 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깨우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다시 그것을 미루어서 그 불통(不通)의 의미를 다하였습니다. ()의 쓰임은 그 크기가 이와 같은데, 그 의미를 구하면 효()()() 세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집안에 행하여지면 미루어서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에까지 이르니 모두 하나의 기틀일 뿐입니다. 자는 서가 아닙니다. 자신에게서 집안으로, 집안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천하로 가까운 것을 미루어 나가, 베푸는 것이 넓어지면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하고자 하는 것을 같이 하여 사람의 성()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서()가 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보면 옳지 않습니까?

이 단락의 말은 막힘없이 잘 통합니다.

 

치중화(致中和)”의 주에서 말하기를 계근공구(戒謹恐懼)로부터 지켜서 잠시라도 있지 않음이 없는 데에 이르면, 그 중()을 지극히 하여 천지가 자리잡는다. 반드시 근독(謹篤)으로부터 살펴 한 행동도 흡족하지 않음이 없는데 이르면, 그 화()를 지극히 하여 만물이 자라난다고 하셨습니다. 대저 희락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는데, 계근공구는 것은 드러나지 않았을 때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있지 않을 때가 없어서 그 중을 다할 수 있습니다.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은 이미 드러났을 때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행위라도 흡족하지 않을 때가 없어서 그 화()를 다 할 수 있습니다. 천지가 자리를 잡는 것은 중()을 어기지 않는 것이고, 만물이 자라나는 까닭은 화()를 잃지 않는 것이니, 치중화하여 천지가 저절로 자리 잡고, 만물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대개 이와 같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이 고요한 때에 그 잡은 것을 잃지 않고, 움직일 때에 그 드러나는 것을 어기지 않으면, 또한 거의 중화(中和)가 나에게 있을 것입니다. 천지만물이 자리잡고 자라나는 까닭은 감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설이 이와 같기만 하면 깨닫기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노력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입니다.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은 미리 하면 성립된다는 한 구절은 말과 일, 행위와 도는 모두 그 처음을 먼저 안정시키면 차질이 있거나 곤란하지 않고, 하자가 있거나 곤궁하지 않은 것은 분명 그렇게 증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은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 붕우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는 것, 부모를 따르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미루어나가면 모두 자신에게 성실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을 먼저 세우는 것이 이 장의 요지인데, 선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자신에게 성실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선을 분명하게 아는 일에 나아가고자 하면 반드시 격물(格物)하여서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하고, 치지(致知)하여서 그 의로움에 처해야 하니, 대저 그러한 다음에 진정으로 선이 좋아할 만하여 좋아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 좋은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을 것이요, 진정으로 악을 미워할 만하여 미워할 줄을 알면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분명하게 아는데 어찌 성실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중용󰡕에서 말하는 이른바 선을 분명하게 안다는 것<明善>’은 곧 󰡔대학󰡕의 치지(致知)의 일이고, 󰡔중용󰡕에서 말하는 자신에게 성실하다는 것은 󰡔대학󰡕 뜻이 성실하다는 일입니다. 그 의미를 요약하면 그 이치는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비이은(費而隱)” 장은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시를 인용하여 그 뜻을 밝혔습니다. 정부자(程夫子)께서는 자사(子思)가 긴요하게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에 종사하되 미리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와 같아서 활발발(活潑潑)한 곳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사의 말은 실리가 아님이 없다고 생각되며, 정부자의 말 역시 모두 진견(眞見)입니다. 지금 또 선생님께서 이 장을 정정하고 반복하여 깨우쳐 주시어 의미와 생각이 분명해졌습니다. 오래도록 좋아하면 마음과 뜻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대개 형이하(形而下)의 것은 도()의 쓰임이니, 반드시 형이상(形而上)의 것이 있어서 그것을 체()로 삼아야 합니다. 그 쓰임이 넓은데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체()는 미미(微微)한데, 또 어찌 은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체용(體用)과 현미(顯微)는 애초에 사이가 떨어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그 쓰임의 드러남만 보고, 그 체의 미미함은 보지 못하므로 종신토록 그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사는 여기에서 솔개와 물고기에 의탁하여 이 이치가 뚜렷함을 분명히 하였고, 그 소이연의 이치는 또한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대저 솔개와 물고기에서 보이는 것도 또한 이러한데, 하물며 부부의 은미한 사이에서부터 다하여 천지의 넓은 사이에 이르러 화육(化育)하고 유행(流行)하면, 크고 작은 것과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모두 그렇지 아니함이 없겠습니까? 이 이치는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지만 또한 누가 그것을 허여했습니까? 자사의 말은 정밀하고 엄숙하고 깨끗하고 정자의 논리는 조금도 막히거나 치우친 뜻이 없는데, 선생님이 아니면 그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선생님의 큰 뜻은 어떠하십니까?

단지 이러할 뿐이나 더욱 더 상세하게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27의 처음에서는 도()의 체()는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데까지 이르고, ()의 용()은 지극히 작아서 틈이 없는데까지 들어감을 말했습니다. 지극한 덕()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중간에서는 지극한 도의 응취(凝聚)를 말하였는데, 대소(大小)와 정조(精粗)를 들어서 함께 행하지 않으면 이 도를 모을 수 없습니다. 끝에서는 처한 바가 마땅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였는데, 지극한 도가 모이면 그 효과가 이와 같음을 다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소와 정조의 뜻은 여러 사람이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장자(張子)는 구()를 따라서 뜻을 말하였고, ()씨는 그것을 말미암아 한 구를 스스로 상반되게 뒤집어서 말하였으며, ()씨는 구를 따라 서로 이어나가며 말했고, ()씨는 구를 따라서 위의 한 절은 위 절을 잇고, 아래 한 절은 아래 절을 이어서 말했는데, 결국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도문학(道問學)의 일로 보고, 돈후숭례(敦厚崇禮)를 도중용(道中庸)의 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설명들을 함께 읽으면 역시 큰 뜻을 밝힐만합니다. 그러나 나눈 것이 비교적 정밀하고 조리가 다 관통하지만 결국은 존덕성을 마음을 보존하는 근본으로 삼아서 도체(道體)의 큼을 다하는 것만 못하고, 도문학을 치지의 근본으로 삼아서 도체의 세밀함을 다하는 것만 못합니다. 마침내 광대(廣大)고명(高明)과 온고(溫故)돈후(敦厚)를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하고, 정미(精微)중용(中庸)과 지신(知新)숭례(崇禮)를 치지(致知)의 것으로 삼아서, 이에 분명하게 인심(人心)에 각각 해당시켜, 학자로 하여금 노력할 곳이 있게 하여 많은 명칭과 의미를 거스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른바 조금의 사의(私意)로 스스로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니, ‘광대함을 다한다<致廣大>’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고, 조금의 사욕(私欲)으로 스스로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명함을 다한다<極高明>’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 듯 합니다. 두 구절을 언뜻 읽어보면 마치 한 뜻과 같이 서로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체득해보면 하나는 사의로 스스로 가리는 것이니, 마음이 넓게 트이지 않고 좁고 궁색한데 어찌 광대함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는 사욕으로 스스로 얽매이는 것이니 이 마음이 빠져서 어둡고 비루한데, 어찌 고명함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구절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러한데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잘 이해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여덟 번 󰡔󰡕를 인용했는데, 앞 다섯 조목은 배움을 시작하는 것에서 덕()을 완성하는데 이르는 소밀(疏密)과 심천(深淺)의 순서를 논했고, 뒤 세 조목은 모두 드러나지 않은 덕을 찬미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 뜻이 이처럼 밝고 명백하다는 것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지금 상경(尙絅)’ 한 조목을 보면 위기지학(爲己之學)이란 명성이나 좇는 것이 아니요, ()에 들어가는 방법이 모두 자기에게서 말미암을 뿐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나아가 역공지소(亦孔之昭)’에 이르면 혼자 있을 때 삼가는 행동[謹獨之行]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또 나아가서 불괴옥루(不愧屋漏)’에 이르면 홀로 있을 때 삼가는 효과가 더욱 뚜렷합니다. 거기서 주가무언(奏假無言)’이라고 말한 것은 그 덕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말합니다. 불현유덕(不顯惟德)’이라 말한 것은 그 덕이 지극히 성대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앞서 칭찬하거나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두려워하며 권장하고, 마침내는 도탑고 공손해져서 천하가 평안해집니다. 무릇 기본적인 것부터 배워 홀로 있을 때 삼가는 일이 쌓이는 것에서 시작해서 도탑고 공손해져서 천하가 평안해짐에 이르면, 마음을 보존함은 더욱 삼가게 되고 덕에 나아감은 더욱 충만하고 성대해 질 것입니다. 재삼 시를 인용해서 드러나지 않는 덕이 본시 성색(聲色)의 말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영탄했으니, 덕유여모(德輶如毛)’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 오묘함을 극진히 논한 것은 무성무취(無聲無臭)’의 시가 그 드러나지 않는 지극함을 형용할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 장의 의미는 바로 첫 장과 상응합니다. 첫 장에서는 도체의 큰 단서를 논했으므로 성()()()라는 세 가지를 처음에 말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위태롭게 여기면서, 드러나기 이전의 중()을 보존하고,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고, 이미 드러난 화()를 보존해야 합니다. ()과 화()의 지극함이 천지를 제자리에 세우고, 만물을 기르는 것은 그 덕의 융성함이 하늘과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용󰡕이란 책이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 의미가 깊은 것 같습니다. 배움에 뜻을 둔 사람이, 천덕(天德)이 성인(聖人)에게 있는 것이 어떠한가를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뿐입니다. 맞는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역공지소(亦孔之昭)’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는 뜻이고, ‘불괴옥누(不愧屋陋)’는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위태롭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군자는 밥을 먹는 동안에도 인()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은 밥 먹는 동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비록 잠깐 동안이라도 반드시 이러해야 합니다. 단지 잠깐 동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엎어지는 사이에도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이 마음이 아주 짧은 잠깐의 간단(間斷)도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안자(顔子)를 칭찬하여 석 달을 어기지 않았다고 했으나, 다른 뭇 사람에 대해서는 하루나 한달에 한번 인에 이른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이제 배우는 사람이 하루나 한달에 한번 인에 이르는 것에 대해서도 멍하니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이상의 경지야 어떻겠습니까? 극기(克己) 공부는 마땅히 하루나 한달에 한 번 이르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올라가서, 밥먹는 동안에까지 이르고, 잠깐 사이에까지 이르고, 엎어지는 사이에까지 이르니, 조금씩 치밀해지고 조금씩 나아가면 거의 유지하고 기르는 것이 순수하고 익숙해져서 석 달을 어기지 않는경지도 배워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성인(聖人)을 배우고자 한다면 순수함이 그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그 진보의 단계입니까?

기본적인 것부터 배우는 공부는 정말이지 이와 같아야 합니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저절로 이런 한계가 있지 않겠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해치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으면 어찌 선하지 않겠는가?[不忮不求, 何用不臧?]’라고 했는데, 가난한 이가 부자와 사귈 때, 강하면 해치고, 약하면 탐하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 속에 소양이 없으면, 굶주림과 갈증이 그의 마음을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가난함 속에서 편안하지 못하고, 남의 부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한 번 움직이면 물욕(物欲)이 움직이므로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궁실의 아름다움과 처첩의 봉양과 나를 평소에 아는 궁핍한 사람들이 나를 고맙게 여기는 것을 위해서 (만종의 봉녹을 예의를 분별하지 않고 받는 짓을) 하는 것이다는 것들은 다 궁구할 수 없는 사()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본심을 잃고 질투하고 시기하며 해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첨하여 구하면서 비굴하고 천박함이 얼마나 심한가 조차 알지 못합니다. 자로(子路)의 뜻은 외물(外物)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께서 칭찬하시면서 그의 덕을 나아가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위로 나아가려고 하여 결국 종신토록 암송하기만 하는 폐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즐거움을 마땅히 안연과 같이 했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의 공부라는 것은 진실로 갑자기 할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答周舜弼

講學持守不懈益勤 深慰所望 又聞頗有朋友之助 當此歲寒 不改其操 尤不易得也 更願相與磨厲 以造其極 毋使徒得虛名以取實禍 乃爲佳耳 前書絜矩之說大槪得之 二字文義 蓋謂度之以矩而取其方耳 今所示數條 各以鄙意附於其後 却以封還 幸試思之 來說大槪明白詳細 但且於此更加反復 虛心靜慮 密切玩味 久之須自見得更有精微處 不但如此而已也 承欲見訪 固願一見 但遠來費力 不若如前所說 著實下功 果自得之 則與合堂同席亦無以異也 鄕來蔡君今安在 能不受變於俗否耶

大學之道 莫切於致知 莫難於誠意 意有未誠 必當隨事卽物 求其所以當然之理 然觀天下之事 其幾甚微 善惡邪正是非得失未有不 相揉雜乎芒芴之間者 靜而察之者精 則動而行之者善 聖賢之學必以踐履爲言者 亦曰見諸行事皆平日之所素定者耳 今先生之敎必曰知之者切而後意無不誠 蓋若泛論知至 如諸家所謂極盡而無餘 則遂與上文所謂致知者爲無別 况必待盡知萬物之理而後別求誠意之功 則此意何時而可誠耶 此正學者緊切用功之地 而先生訓釋精明 誠有以發聖賢未發之蘊 竊嘗體之於心 事物之來 必精察乎善惡之兩端 如是而爲善 則確守而不違 如是而爲惡 則深絶而勿近 先生勾去此幷上二句 亦庶幾不苟於致知 而所知者非復泛然無切於事理 不苟於誠意 而好善惡惡 直欲無一毫自欺之意 敬守此心 無敢怠忽 課功計效 則不敢以爲意焉 如此用力 不知如何

知至只是致知到處 非別有一事也 但見得本來合當如此之正理 自然發見透徹 則所知自切 不須更說確守深絶而意自無不誠矣

傳之二章釋自新新民而結之以君子無所不用其極者 言皆欲止於至善也 蓋自致知以至修身 無非所以自新也 自齊家以至平天下 無非所以新民也 凡此八者 誠大學之條目 然必曰止於至善者 深言擇善不可以不精耳 夫善一也 有至善則有未善 先生改云 善而未至 所以言擇善之難如此 過則失中 不及則亦未至于中 宜其應事接物之際 固有欲爲公而反遂其私 欲爲義而乃徇乎利 厚薄輕重 泛然而應 不得其當 是皆知之有未切也 補亡之章謂用力之久而一旦廓然貫通焉 則理之表裏精粗無不盡 而心之分別取舍無不切 是必加之以積習之功 庶乎廓然貫通 然後可以言止於至善之事乎 苟未至此 則分別取舍於心當如何

一事自有一事之至善 如仁敬孝慈之類

忿懥恐懼 好樂憂患 人之所不能無者 然有一于此 則心不得其正 何哉 蓋此心不可以頃刻而不存 苟喜怒憂懼一萌于中 則心有係累 不特不能帥乎氣 而氣反得以動其心矣 故當忿懥之時 唯有忿懥而已 旣以忿懥爲主 尙何心之可存 恐懼之類 莫不皆然 聖人於此深欲學者常存此心 無少間斷 喜怒哀懼猶不可有 而况於曠蕩外馳 邪辟妄念以爲此心之累者乎 故曰心有不存則無以檢其身矣 以此意體之如何

有喜怒憂懼 則四者之發不得其正 無喜怒憂懼 則四者之發何不正之有

絜矩之道 推己度物而求所以處之之方 故於上下左右前後之際 皆不以己之所不欲者施諸彼而已矣 然皆以敬老事長恤孤之三者推之 以見民心之同然 故下文極言好惡不可以異乎人 而財利不可以擅乎己 苟惟不然 皆取惡之道也 是則一章之意無非發明 恕之一字 上章旣言所藏乎身 不恕則不能喩諸人矣 於此復推廣之 以極其所不通之意 恕之爲用 其大如此 求其措歸 則不過孝弟慈三者 行乎一家 推而至於治國平天下 同一機而已 孝弟慈 非恕也 自身而家 自家而國 自國而天下 推之者近 施之者廣 必與人同其欲而不拂乎人之性 玆其所以爲恕 以此觀之 是否

此段說得條暢

致中和注云 自戒謹恐懼而守之 以至於無一息之不存 則極其中而天地位矣 自必謹其獨而察之 以至於無一行之不慊 則極其和而萬物育矣 夫喜怒哀樂未發謂之中 戒謹恐懼 所以守之於未發之時 故無一息之不存而能極其中 發而皆中節謂之和 必謹其獨 所以察之於旣發之際 故無一行之不慊而能極其和 天地之所以位者不違乎中 萬物之所以育者不失乎和 致中和而天地自位萬物自育者蓋如此 學者於此靜而不失其所操 動而不乖其所發 亦庶幾乎中和之在我而已 天地萬物之所以位且育焉 則不敢易而言之 未識是否

其說只如此 不難曉 但用力爲不易耳 勉旃勉旃

凡事豫則立一節 言與事行與道皆欲先定於其初 則不跲不困不疚不窮斯有必然之驗 故下文自不獲乎上不信乎朋友不順乎親而推之 皆始於不誠乎身而已 然則先立乎誠爲此章之要旨 而不明乎善則不可以誠乎身也 今欲進乎明善之功 要必格物以窮其理 致知以處其義 夫然後眞知善之爲可好而好之 則如好好色 眞知惡之爲可惡而惡之 則如惡惡臭 明善如此 夫安得而不誠哉以是觀之 則中庸所謂明善 卽大學致知之事中庸之所謂誠身 卽大學意誠之功 要其指歸 其理則一而已 是否

得之

費而隱章 引鳶飛魚躍之詩以明其旨 程夫子以爲子思喫緊爲人 與必有事焉而勿正之意同 活潑潑地 竊以爲子思之言無非實理 而程夫子之說亦皆眞見 今又得先生竄定此章 反復開曉 昭然義見 耽玩久之 心融意釋 夫形而下者 道之用矣 必有形而上者爲之體 其用廣 夫安得而不費 其體微 又安得而不隱 體用顯微 初無間絶 人惟睹其用之顯而不見其體之微也 是以終身由之而不知 子思於是託鳶魚以明此理之昭著 而其所以然之故 則亦可知其隱然爲難見也 夫見於鳶魚者尙爾 而况自夫婦隱微之間極而至於天地廣博之際 化育流行 洪纖高下 莫不皆然 此理固非偶然者 而亦孰與之哉 子思之言精密峻潔 而程子之論無纖毫擬滯倚著之意 非先生其執知之 大意如何

只是如此 更宜詳味

二十七章始言道之體極於至大而無外 道之用入於至小而無間 非至德之人 不足以疑之 中言至道之凝 非大小精粗擧而竝行 則不足以凝是道也 末言所處之無不宜 所以極言至道之凝其效如此 然大小精粗之旨 諸家所論不同 張子逐句爲義 呂氏因之 以一句自相反覆爲說 游氏以逐句相承接爲說 楊氏以逐句上一節承上節下一節承下節爲說 却以溫故知新爲道問學之事 敦厚崇禮爲道中庸之事 兼而讀之 亦足以發明大旨 然分比精密 條理該貫 終不若以尊德性爲存心之本 而極乎道體之大 以道問學爲致知之本 而盡乎道體之細 遂以廣大高明溫故敦厚爲存心之屬 以精微中庸知新崇禮爲致知之屬 於是犂然各當於人心 使學者有用力之地而不悖乎名義之紛紜也 竊嘗玩索所謂不以一毫私意自蔽者 指致廣大而言也 不以一毫私欲而自累者 指極高明而言也 乍讀兩句 似若一意相同 然試體之 一以私意自蔽 則心不洪放而狹隘迫窄 何以致廣大乎 一以私欲自累 則此心沈溺而昏暗卑陋 何以極高明乎 此二句若相似而實不同者 妄意如此 是否

得之

末章八引詩 前五條論始學至成德疏密淺深之序 後三條皆所以贊不顯之德 前此蓋未有發明斯義若此昭著明白也 今觀 尙絅一條 則知爲己之學不可以徇名 而入德之方皆由乎己而已 進而至於 亦孔之昭 則謹獨之行已著 又進而至於 不愧屋漏 則謹獨之效益彰 其曰 奏假無言 所以言其德之已成 又曰 不顯惟德 所以言其德之至盛 故先之以不賞不怒而民自畏勸 終之以篤恭而天下平也 夫自下學謹獨之事積而至於篤恭而天下平 則其存心也愈謹而進德也彌盛 復三引詩 以歎詠不顯之德固不在乎聲色之末 亦非 德輶如毛之可比 極論其妙 不若 無聲無臭之詩爲可以形容其不顯之至耳 竊嘗謂此章之旨正與首章相應 首章論道體之大端 故以性命敎之三者言之於始 然必戒謹恐懼而存其未發之中 必謹其獨而保其旣發之和 中和之至 所以能位天地育萬物者 蓋其德之盛同乎天而然也 中庸之書所以始於是者 其旨深哉 有志於學者 可不知天德之在聖人者爲如何 於此宜盡心焉爾 未審是否

亦孔之昭是謹獨意 不愧屋陋是戒謹恐懼意

君子無終食之間違仁 不但終食之間而已也 雖造次必於是 不但造次而已也 雖顚沛必於是 蓋欲此心無頃刻須臾之間斷也 及稱顔子 則曰 三月不違 於衆人則曰 日月至焉而已 今學者於日月至焉且茫然不知其所謂 况其上者乎 克己工夫要當自日月至焉推而上之 至終食之間 以至造次 至顚沛 一節密一節去 庶幾持養純熟 而三月不違可學而至 不學則己 欲學聖人 則純亦不已 此其進步之階歟

下學之功誠當如此 其資質之高明者 自應不在此限 但我末之見耳 不忮不求 何用不臧 貧與富交 彊則忮 弱則求 人惟中無所養 而後飢渴得以害其心也 故不能自安於貧 而有慕乎彼之富 此心一動 物欲行焉 故雖可已而不已 孟子所謂宮室之美 妻妾之奉 所識窮乏者得我而爲之類 蓋有不可勝窮之私 由是以失其本心 而忌嫉忮害生焉 否則諂曲以求之 而不自知其爲卑汚淺陋之甚也 子路之志不牽乎外物之誘 夫子稱之 欲以進其德 借乎不能充此而上之 至有終身誦之之蔽 不然 簞瓢陋巷之樂當與顔子同之 日用功夫信乎不可遽已也

是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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