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권
편지(친구 제자들과의 문답) 書(知舊門人問答)
왕자합(우)에게 답함 答王子合遇
저는 자합께서 어진 벗을 받들어 의논함에 대해 가르쳐 주심에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 합니다. 오랫동안 듣지도 묻지도 못했었는데, 이제야 고향으로 가 소식을 듣고는, 그대가 요사이 다복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초여름에 백공이 찾아 왔었는데, 그 때문에 함께 성에 들어갔습니다. 후리(候吏)를 만나 보고하고 부판 어른을 경유하려는 뜻을 한 번 볼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성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옛 처소에 머물러 거처하고 계신지를 몰랐습니다. 지난 달 아직 백공을 보내 아호에 당도하지 않아 육자수 형제가 와서 모였습니다. 강론하는 사이에 유익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달 8일에야 손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백공의 봉사(奉祠)도 이미 오래 되었으니, 또한 뜻과 행실의 아름다움을 항상 담론합니다. 논한 바 기질을 변화시켜야 비로소 학문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뜻이 매우 좋습니다. 다만 내 생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직 학문만이 능히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며, 경을 주로하고 마음을 보존하지 않고서 다만 오늘과 어제의 시비 사이에서 절절하게 따지고만 든다면 수고롭기만 하지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현명하신 그대는 어떻게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붙여온 자회의 편지는 결국은 살펴보지 못하다가 근래 성 중에 당도하여 물어 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비로소 사람에게 부탁하여 살펴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밝은 견해를 따르지 않고 오직 때의 진중(珍重)함을 가지고 기도할 뿐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희 머리 조아리고 재배합니다.
熹頓首再拜子合敎授奉議賢友 久不聞問 方此鄕往 奉告 欣審比日尊履多福 熹杜門如昨 夏初伯恭見訪 因同人城 見候吏報丈丈府判經由 意可以一見 已而聞不人城 甚以爲恨 不知乃留居舊第也 前月末送伯恭至鵝湖 陸子壽兄弟來會 講論之間 深覺有益 此月八日 方分手而歸也 伯恭奉祠已久 亦每談志行之美也 所論變化氣質 方可言學 此意甚善 但如鄙意 則以爲惟學爲能變化氣質耳 若不讀書窮理 主敬存心 而徒切切計較於今昨是非之間 恐其勞而無補也 不審明者以爲如何 昨來所附子晦書竟末之領 近至城中 問得下落 方託人督取也 未由晤見 惟以時珍重爲禱 不宣 熹頓首再拜
왕자합에게 답함 答王子合
지난 번 ‘복(復)은 그 천지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는 것을 보았는데, 역전에서는 “움직임의 단서가 바로 천지의 마음이다”고 하였는데, 그 뜻을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요사이 그것을 생각해 보고 감히 선생께 질문을 드립니다. 내 생각으로는 천지의 마음은 낳고 낳아 그치지 않으니 태극이 한 번 동(動)하면 이기(二氣)가 운행을 하면서 서로 그 뿌리가 되고, 대체로 일찍이 혹시라도 쉬지 않으니 동정(動靜)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임의 단서”라고 한 것은 유행의 체(體)를 가리켜 보여준 것이니 바로 사물을 낳는 근원입니다. 유서에서 “하늘은 다만 낳음을 도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천지의 마음은 진실로 만물을 낳는데 있지만, 낳는 곳에서 살펴보면 움직임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움직임의 소이연(所以然)을 알지 못하겠느니, 그 단서가 낳고 낳는 이치를 볼 수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측은지심이 이것입니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반드시 가엽게 여기고 측은하게 여김이 있는데, 이 마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여기에서 샆펴보면 거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이 비록 마음의 본체가 아닐지라도 처음에는 여기에서 발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미루어보면 천지의 사이를 두루 사랑하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사람만이 욕심에 빠져 회복할 줄 모르니 이 마음이 없어진 듯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음이 다하면 찬 것이 덮고, 만물은 뿌리로 돌아가는 것 처럼 낳고 낳는 이치가 비록 일찍이 혹시라도 그침이 없지만 어찌 저절로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양(陽)이 작게 움직임은, 낳는 의지가 모락모락 오르는 것이니 이것이 복괘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까닭입니다. 배우는 자들의 공부에 있어서는 평소에 함양하고 말하고 묵묵히 있으며 움직고 정지해 있는 가운데 모름지기 실마리를 알아 내려고 한다면 심체(心體)가 밝아져 묵묵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천은 “잘 배운다는 것은 이미 발할 즈음에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이미 발한 것을 살펴보면 그 아직 발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극기공부를 그치지 않아 하루 아침에 회복하기만 하면 경황 중이거나 넘어지려는 찰나에도 모두 이 마음의 오묘함을 보게 되니, 비로소 인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별지에 보내주신 복(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동정ㆍ음양ㆍ선악을 통틀어서 보아야 각각 하나의 이치임을 알 수 있고, 이 뜻이 통하지 않음이 없어야 비로소 그 곡절을 다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배우는 자들의 공부는 다만 역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 불선(不善)을 알면 빨리 고쳐서 선을 따를 것이니, 이것이 요약된 곳입니다. 만약 반드시 단서를 알고자 하여 심체(心體)는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도리어 하나의 일거리를 더하는 것입니다. 내 견해는 이와같은데 혹시라도 그렇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다시 편지를 보내주십시오. 자회를 서로 만나보고 번거롭게 뜻을 전달했는데, 편지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구양경사(歐陽慶嗣)의 편지에서는 “절차탁마의 유익함에 깊이 의지하여 날마다 지론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였습니다. 희! 재배합니다.
向來觀復其見天地之心乎 易傳云動之端 乃天地之心也 未睹其旨 近思得之 敢質於先生 遇謂天地之心生生不已 太極一動 二氣運行 互爲其根 蓋未嘗或息 非可以動靜言也 其日動之端云者 指流行之體示之 卽生物之原者也 遺書云天只是以生爲道 天地之心固在於生物 然於生處觀之 則偏於動而不知動之所以然 非指其端無以見生生之理也 在人則惻隱之心是也 乍見孺子將人井 必有怵惕側隱 此心不遠 於此察之 庶可見矣 此心雖非心之本體 然始發見在是 故推此心則廓乎天地之間 無所不愛 人惟汨於欲而不知復 則是心泯然不見 猶窮陰沍蔽 萬物歸根 生生之理雖未嘗或息 何自見之 一陽微動 生意油然 此復所以見天地之心也 在學者工夫 則平日涵養 語黙作止須要識得端倪 則心體昭然 可黙識矣 故伊川云 善學者不若於已發之際觀之 觀於已發 識其未發 克己不已 一旦復之 則造次顚沛皆見此心之妙 始可以言仁矣
別紙所喩復見天地心之說甚善 然此須通動靜陰陽善惡觀之 見得各是一理 而此意無所不通 始盡其曲折耳 學者工夫則只如易傳所說 知其不善 則速改以從善 此是要約處 若說須要識得端倪而心體可識 則却是添却一事也 鄙見如此 或恐末然 更告諭及 子晦相見煩致意 未及奉書 歐陽慶嗣書云甚賴切磨之益 想日有至論也 熹再拜
왕자합에게 답함 (4-2357)答王子合
깨우처주신 생각이 같지 않아 가슴 속에 막혀 있으니 이것이 배우는 사람의 통열한 근심입니다. 그러나 신속하게 고치기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이 마음을 옮기어 이치를 궁구해서, 오로지 저것을 향하게 한다면 여기에 매어 있는 것은 풀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리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所喩思慮不一 胸次凝滯 此學者之通患 然難驟革 莫若移此心以窮理 使向於彼者專 則繫於此者不解而自釋矣
왕자합에게 답함 答王子合
자회의 이른바 “만일 동자의 말이 없다면 증자 역시 조용하고 욕심 없이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랐을 것이니 그 죽음을 족히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동자의 말이 한 번 그 청력에 들어왔는데, 선비가 대부의 자리에서 죽게되면 불안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굳이 몸을 들어 부축하여 자리를 바꾼 후에 털끝만큼이라도 부끄러운 마음 없이 그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었다”는 말, 이 몇 구절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대부가 사(士)에게 하사하는 예가 있으니 의거할 바를 모른 것이라고 한다면 옳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합의 이른바 “대부의 자리를 계손이 어찌 증자에게 줄 수 있겠는가? 증자 역시 어찌 계손에게 받을 수 있겠는가? 증자가 진실로 ‘나는 능히 바꿀 수 없다’고 했다면 그는 평소는 그것을 바꾸고자 했을 것이다”는 이 의론 역시 좋습니다. 그러나 증자가 계손의 벼슬을 사양하였다고 한다면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심한것이 되지 않는데에도 억지로 그 주는 것을 받고자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또한 세속의 왜곡되고 따지고 비교하는 사사로움에서 나와 성현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또 말하길 “죽고 사는 즈음은 이와는 다르니, 대개는 털끝만큼이라도 옳지 않음이 있으면 그 삶에 누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이 사람의 삶은 하지 않음이 없을 수 있어서 반드시 장차 죽은 후에나 비로소 따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 또한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다만 평소의 마음으로 논한다면 계손이 주고 증자가 받은 것은 모두 예가 아닙니다. 혹자는 여전한 습속으로 인해 일찍이 이러한 일이 있더라도 능히 바룰 수 없을 뿐입니다. 다만 그 질병이 변할 수 없는 때에 미쳐 한 번이라도 남의 말을 듣고 부축하여 자리를 바꾼다면 대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의 절실하고 긴요한 곳은 다만 이 털끝 만큼의 경각의 사이에 있으니, 진실로 반드시 그 받는 것을 예에 합한다고 여겨 편할 수는 없고, 또한 반드시 세속과 더불어 주선하여 부득이하게 그것을 받는다고 여길 수만도 없습니다. 하물며 나의 삶을 선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삶을 선하게 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평소에 정을 따를 것을 힘써 예를 참람함을 편히 여기고, 굳이 죽은 다음을 기다려 털끝만큼의 차이가 남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족히 그 죽음을 선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만약 이와 같다면 성현은 죽음에 임했을 때에 여러 가지 어지러운 것들을 일삼게 될 것이니, 또한 그 개혁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증자의 일과 같은 것은 그가 아직 죽기 전에 어떤 사람의 말을 헤아린 것이니 반드시 즉시에 바꾸어 장차 죽을 날을 기다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두 설에 나아가 논하면, 대자리를 받는 것이 예에 합한다고 하는 사람은 다만 가볍고 평이하며 거칠고 소략한 것에 있어서 잘못하여 상고함이 정밀하지 못한 것이고, 억지로 힘써 주선했다고 하는 사람은 그 공교하고 왜곡되며 지루하여 심술의 해가 되는 것이 매우 크니 아마도 이 한 가지 일에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땅히 유를 미루어 연구하고 탐색해서 발본색원해야, 그런 후에 마음이 그 올바름을 얻게 되어 성현의 학문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견해가 이와 같으니 행여라도 다시 서로 상고해 보신다면 거듭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희(熹) 올림.
子晦所謂使無童子之言 則曾子亦泊然委順 未足以病其死 唯童子之言一入其聽 而士死於大夫之簀 則有所不安 故必擧扶而易之 然後無一毫愧心而安其死 此數句甚善 但謂大夫有賜於士之禮 則未知所據 似未安也 子合所謂大夫之簣 季孫安得賜諸曾子 曾子亦安得受諸季孫 曾子固曰我未之能易則其平日蓋欲易之矣 此論亦善 但謂曾子辭季孫之仕 則亦無據 而曰不欲爲已甚而黽勉以受其賜 則又生於世俗委曲計較之私 而非聖賢之心矣 又云死生之際則異於是 蓋有一毫不正 則有累於其生 如此則是人之生也可無不爲 必將死而後始爲計也 此亦必不然矣
今但平心而論 則季孫之賜曾子之受皆爲非禮 或者因仍習俗 嘗有是事而未能正耳 但及其疾病不可以變之時 一聞人言而必擧扶以易之 則非大賢不能矣 此事切要處只在此毫釐頃刻之間 固不必以其受之爲合禮而可安 亦不必以爲與世周旋 不得已而受之也 况善吾生乃所以善吾死 豈有平時黽勉徇情 安於僭禮 必俟將死而後不肯一毫之差而足以善其死耶 且若如此 則聖賢臨死之際 事緖紛然 亦不勝其改革矣 若曾子之事 計其未死之前有人言之 則必卽時易之 而不俟將死之日矣
然就二說論之 謂受簀合禮者 但失之輕易粗略 考之不精 而謂黽勉周旋者 其巧曲支離 所以爲心術之害者甚大 恐不止於此一事 要當推類究索 拔本塞源 然後心得其正 而可語聖賢之學也 鄙見如此 幸復相與考之 再以見喩 熹上呈
왕자합에게 답함 (4-2359)答王子合
어제 질문과 복괘에 대한 설을 받들고 보니 깨우쳐 주신바와 같은 것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또한 말할 것이 있습니다. 대개 음과 양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은 진실로 간단(間斷)함이 없으면서도 또한 병행할 수도 없습니다. 또 예를 들면 사람이 바야흐로 물욕을 끝까지 부리려고 할 때를 어찌 곧 그 사이에 천리가 완전히 중간에 끊어지지 않아서 또한 그 욕심을 멋대로 부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욕심을 다하고자하는 마음을 멸식시켜야 그런 후에 천리가 싹틀 수 있을 뿐입니다. 정부자(程夫子)의 이른바 “천지간에 비록 확실하게 구분해 놓은 음이 되고 양이 되는 이치는 없지만 그 오르내리고 생겨나고 소멸되는 커다란 구분은 없을 수가 없다.”는 이 말이 가장 완비된 것입니다. 그러나 음양동정은 조화의 기틀이니 서로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진실되고 망령된 구분이 있으니 사람들은 마땅히 저것을 이기고 이것을 회복한 연후에나 바람직할 따름입니다.
이른바 심체를 알 수 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끝내 병통이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대개 궁리의 학문은 다만 어떻게 해야 옳고, 어떻게 하면 그르며, 사물이 올 때에 의혹되는 바가 없고자할 따름이지, 이 마음을 가지고 또 하나의 마음을 인식한 연후에 이치를 궁구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증자가 계손이 하사한 것을 받음은 외관을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만 옳지 못함이 될 분입니다. 그러므로 뒤에 반드시 자리를 바꾸어 마침내 죽고자 한 것입니다. 다만 이와같이 보아야 어느정도 직절함이 됩니다. 만약 습속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지, 증자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난 번 이른바 힘써 주선했다고 한 것은 또한 어찌 증자가 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한결같이 이 부분이 잘못되었으니, 다만 이와같이 보아서, 오히려 인을 행하는 사람이 말을 쉽게하는 허물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어떠신지요? 어떠신지요?
昨承問及復卦之說 如所諭固善 然亦有說 蓋陰陽生殺 固無間斷 而亦不容竝行 且如人方窮物欲 豈可便謂其間天理元不間斷 而且肆其欲哉 要須窮欲之心滅息 然後天理乃得萌耳 程夫子所謂天地間雖無截然爲陰爲陽之理 然其升降生殺之大分不可無也 此語最爲完備 然陰陽動靜是造化之機 不能相無者 若善惡 則有眞妄之分 人當克彼以復此 然後可耳
至所謂可識心體者 則終覺有病 蓋窮理之學只是要識如何爲是 如何爲非 事物之來 無所疑惑耳 非以此心又識一心 然後得爲窮理也
曾子受季孫之賜 無可緣飾 只得做不是 所以後來須要易了方死 只如此看 多少直截 若謂因仍習俗 非曾子之爲 然則向所謂黽勉周旋者 又豈得爲曾子之爲邪 要之一等是錯了 不若只如此看 猶不失爲仁者易辭之過也 如何如何
왕자합에게 답함 (4-2360)答王子合
질문하셨던 예문(禮文)의 곡절은 경훈(經訓)에 매우 분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지금 세상 사람들의 실정상 능히 돌아보지 못할 뿐이고 또한 온공(溫公)의 서의의 설에 의거하니 또한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성복(成服) 및 상담(祥禫) 처에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도모함이 이미 이와같이 행해진 것입니다. 가제(家祭) 일절은 내가 근래에 상에 거하면서 일찍이 행하지 않았던 것이고, 다만 시절마다 대략 음식을 마련하고, 검은 상복을 입고 사당에 들어가, 잔을 올리고, 절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또한 졸곡 후에도 이와 같이 하고 있으니, 이 이전에는 사당에 입고 들어갈 만한 옷도 없었습니다. 지금 그 상에 맞는 복을 입고 있으면서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했으니, 역시 감히 제사를 지낼 수도 없습니다. 이는 소략하게 함이 아니라 바로 삼가는 것입니다. 현명하신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所問禮文曲折 此在經訓甚明 但今世人情有不能行考 且依溫公書儀之說 亦不爲無據也 見成服及祥禫處 然今日月已久 計已如此行之矣 家祭一節 熹頃居喪不曾行 但至時節略具飯食 墨衰人廟 酌酒瞻拜而已 然亦卒哭後方如此 前此無衣服可人廟也 今服其喪未葬 亦不敢行祭 非略之 乃謹之也 不審明者以爲如何
왕자합에게 답함 答王子合
지난 편지에서 논한 실지의 공부라는 것은 매우 좋았습니다만, 항상 이 뜻을 보존하고, 그때 그때 다시 끌고 잡아 당겨 떨어짐이 없게 해야 이에 좋아질 것입니다. 지금의 학자들은 아직 밖의 유혹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대체로 단지 구습에 따라 나태하고 게을러 스스로 방종하여 자빠져 있을 뿐이니, 참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하에서 나온 막힘이 있는 설에 대해서는 아직 그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지켜야 할 곳에서는 진실로 방과할 수 없는데, 세상에 응하고 사물에 접함에 이르러서는 같고 다름과 깊고 얕음을 어찌 굳이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깨치고 잡음을 봄이 정해질 수만 있다면 스스로 각각 분수에 따라 헤아리고 응해 나아감에 방해되지 않을 것이니, 하필이면 이와같은 고르지 않은 마음을 품고서 방자하게 스스로를 괴롭히겠습니까? 잠간이라도 이러한 생각이 있기만 하면 아마도 또한 곧 본원에 살피지 못한 곳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빗줄기처럼 여겨 끊어서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前書所論實地功夫者甚善, 但常存此意, 時復提撕, 勿令墜墯乃佳. 今時學者未論外誘, 多只是因循怠惰, 自放倒耳, 眞不可以不戒. 至於出門有礙之說. 則似未然. 自家持守處固是不可放過, 至於應世接物, 同異淺深豈容固必? 但看得破․把得定, 自不妨各隨分量應副將去, 何必如此懷不平之心而浪自苦哉? 纔有此等意(4-2361)思, 恐亦便是本原有不察處, 政不可作雨截看也.
지금 편지에서 논하신 중용의 큰 요지는 대체로 옳습니다. 그러나 ‘그 위아래로 밝게 드러남’이라고 한 것에서 ‘기(其)’라는 것은 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찰(察)’이란 것은 밝게 드러난다는 뜻이니, 도체가 유행하고 발현하여 밝게 드러남이 이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謝)ㆍ양(楊)의 뜻은 모두 관찰(觀察)이라고 할 때의 찰(察)로 여긴 것 같습니다. 만약 그들의 말과 같다면 이 ‘기(其)’자는 마땅시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인데, 이 때 어떻게 가리킬 만한 사람이 있는지, 또 어찌 문장의 뜻을 위 아래로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씨는 부부(夫婦)가 아는 것과 능한 것을 가지고 비(費)로 삼았고, 성인은 모르고 능하지 못한 것을 은(殷)으로 여겼는데, 이것은 횡거의 설을 인용한 것으로 이천의 설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 역시 ‘費隱(비은)’ 두 글자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단지 그 뜻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될 뿐입니다. “천지가 닫힘이 불서(不恕)가 된다”는 한 마디 말은 비록 병통이 있지만 대의가 형상을 취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역의 음양과 같이 천지자연의 기를 가지고 논하면 서로 없을 수 없고, 군자나 소인의 형상을 가지고 말하면 성인의 뜻은 일찍이 천하가 모두 군자가 되어 한 사람의 소인도 없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없으니, 어찌 서로 병통이 되겠습니까? “그 귀(鬼)가 신묘하지 않다”는 것은 노자의 말입니다. 사씨의 어해(語解)에서 인용한 것은 바로 그 어록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니, 어떻게 우열한 곳을 보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와같이 분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별도로 설이 있을 것 같으니, 다시 번거로우시겠지만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27장의 설은 구분한 것이 전혀 옳지 않은 것 같으니, 다시 마땅히 장구의 설을 가지고 상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건에서 태시(太始)를 안다” 는 것은 말한 것이 대체로 주재(主宰)를 논한 것이 되어, 마치 미묘한 것 같아 도리어 조잡하고 천박합니다. 만약 이와같다면 건과 태시는 각각이 하나의 물(物)이 되어 이 하나의 물(物)로써 저 하나의 물(物)을 주관하여 마치 지금 아무개가 아무아우 주의 지사를 담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천선생은 다만 ‘당(當)’자를 가지고 해석을 하였으니, 그 말이 비록 천근하긴 해도, 오히려 두 가지 물(物)이라는 혐의는 없으니, 의미가 저절로 혼연하여 완전합니다. ‘불현(不顯)’이라는 두 글자는 26장에서는 별도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시경의 뜻만을 인용하였고, 끝장에서 인용하여 기록한 것은 장의 첫머리에서 ‘상형(尙炯)’이라고 한 것부터 장 끝의 ‘무성무취(無聲無臭)’라고 한 것과 더불어 모두 은미하고 매우 치밀한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뜻이 되어 기경과는 같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멂이 가까움을 알고 바람이 시작되는 곳을 안다’는 말은 겉에 의거하여 안을 안다는 것입니다. ‘은미함이 드러남을 안다’는 것은 안을 말미암아 밖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종묘는 남쪽을 항하고, 집이나 방도 모두 남향을 합니다. 다만 방의 문은 방 남쪽 벽의 동쪽에 있으면서 남향을 하는 것이고, 창은 방의 남쪽 벽의 서쪽에 있으면서 남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의 서남쪽 모퉁이를 아랫목으로 삼고 높은 사람의 거처로 삼는 것이니, 이르바, ‘종실(宗室)의 창 아래’라는 것입니다. 이미 서남쪽을 높은 사람의 자리로 삼았다면 방 중앙의 자리는 진실로 동쪽 방향을 높은 곳으로 삼지만, 사당이 동쪽을 향함에 태조가 동쪽을 향한다는 것을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비단 태조뿐 아니라 모든 사당이 모두 남향을 하니, 본묘(本廟)의 신주(神主)가 사당이나 방의 가운데에 있을 경우에는 모두 동향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태묘(太廟)에서 겁제(袷祭)를 지낼 때에는 유독 태조만이 그 자리를 바꾸지 않고, 앞에 합사해 놓은 뭇 사당의 신주들은 모두 남향이나 북향을 하여 소(昭)와 목(穆)을 순서지울 따름입니다. 태묘에서 체제(禘祭)를 지낼 때엔 또 거기에서 나온 임금을 동향하게 하고 태조는 반대로 거하여 남향하고 자리에 배치합니다. 통전ㆍ개원래에서는 석존(釋尊)이나 선성(先聖)은 동향을 하였고, 선사(先師)는 남향을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옛날의 예입니다. 당상(堂上)의 자리는 남향을 높은 자리로 삼습니다. 예컨대 의례(儀禮)ㆍ향음주(鄕飮酒)에는 손님의 자리는 창 앞에 있으면서 남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심존중(沈存中)은 제례는 아침에 사당에서 거행을 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역시 남향을 높은 자리로 삼은 것이고, 정화신의(政和新儀)에서 역시 이러한 설이 있으나, 다만 아직까지 의거할 만한 본문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또 진ㆍ한 사이의 광무군ㆍ왕릉의 어머니는 모두 동향하여 자리했다고 하고, 전분전(田蚡傳) 역시 ‘앉은 곳으로부터 동향하고, 그 형의 자리는 남향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방의 가운데가 되는지, 당상(堂上)이 되는지 모르겠으나, 다만 그래도 동향을 높은 자리로 삼은 것은 알 수 있습니다.
今書所論中庸大旨 蓋多得之 但言其上下察也 其者指道體而言 察者昭著之義 言道體之流行發見昭著如此也 謝楊之意 似皆以爲觀察之察 若如其言 則此其字應是指人而言 不知此時豈有人之可指 而亦豈上下文之意耶 呂氏以夫婦所知所能爲費 聖人所不知不能爲隱 此爲用橫渠說而異乎伊川者 然伊川亦不說著費隱二字如何分畫 但想其意不如此耳 天地閉爲不恕一語雖有病 然大意取象是如此 如易之陰陽 以天地自然之氣論之 則不可相無 以君子小人之象言之 則聖人之意未嘗不欲天下之盡爲君子而無一小人也 豈相病哉 其鬼不神 是老子語 謝氏語解所引 正與其語錄相表裏 不知如何見得優劣處 恐不必如此分別也 恐別有說 更煩詳喩 二十七章說 則所分畫似全未是 恐更當以章句之說考之 乾知太始 說者多爲主宰之論 似若微妙而反粗淺 蓋若如此 則乾與太始各是一物 而以此一物管彼一物 如今言某官知某州事也 故伊川先生只以當字釋之 則其言雖若淺近 却無二物之嫌 意自渾全也 不顯二字 二十六章者別無他義 故只用詩意 卒章所引綠自章首尙炯之云與章末無聲無臭皆有隱微深密之意 故知其當別爲一義 與詩不同也 知遠之近 知風之自 據表而知裏也 知微之顯 由內以達外也
宗廟南向 堂室皆南向 但室戶在室南壁之東偏而南向 牖在室南壁之西偏而南向 故以室西南隅爲奧而爲尊者之居 所謂宗室牖下也 旣以西南爲尊者之位 則室中之位固以東鄕爲尊矣 非謂廟東鄕而太祖東向也 然亦非獨太祖也 凡廟皆南鄕 而本廟之主在其廟室中皆東鄕 但袷祭於太廟之時 則獨太祖不易其位 而羣廟之主合食於前者 皆南鄕北鄕以叙昭穆耳 禘祭於太廟 則又以所出之帝爲東鄕 而太祖反居南鄕爲配位也 通典開元禮釋奠先聖東向 先師南向 乃古禮也 堂上之位 則以南向爲尊 如儀禮鄕飮酒 賓席牖前 南向 今沈存中說祭禮朝踐於堂 亦以南向爲尊 而政和新儀亦有是說 但未見所據之本文 又秦漢間廣武君王陵母皆云東向坐 田蚡傳亦云自坐東鄕 而坐其兄南鄕 此則不知其爲室中 爲堂上 但猶以東鄕爲尊則可見矣
(一)席..周作‘廣’,據宋閩, 浙本改
왕자합에게 답함 (4-2363)答王子合
별지에서 논한 것은 다 끝까지 궁구해 보았는데, 다만 이와같이 강론하기만 한다면 더욱 깨닫는 것이 지리해질 뿐입니다. 형세상 반드시 다른 때에 마주보고서 직접 대화를 나누고 획을 그어야 이에 깊은 뜻을 궁구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선 마땅히 의리가 분명한 곳에 나아가 이해해서 경로(徑路)가 매끄럽고 익숙하게 해야 거의 상달처에 있어서 점진적인 단계가 있을 수 있을 뿐입니다. 제례나 사당ㆍ방에서 서쪽을 높은 곳으로 삼는 것은 증거가 매우 많으니, 다만 통전의 주(注) 중에 “사람이주로 삼는 곳은 오른쪽이다”는 설이 있고, 가욱(賈頊)의 제의에서는 또 “사람의 명부는 모두 부군(府君)의 왼쪽에 설치한다”고 하였으며, 한위공(韓魏公)의 제도에서도 어머니의 신위를 아버지의 동쪽에 두었습니다. 이 묘실(廟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서쪽을 높은 곳으로 삼았으니, 응당 아버지가 동쪽이고 어머니가 서쪽은 아니니, 아무래도 통전에서 혹 글자가 잘못된 것일 뿐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비록 오래 되었지만 항(杭) 본에 역시 어그러지고 잘못된 부분이 많습니다. 효자에 대한 칭호는 예기에 근거해 보더라도 또한 이와같은 통칭이 있으니, 예컨대 ‘효자 모는 서자 모로 하여금 그 상사(常事)를 담당하게 하였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다만 지금 마땅히 각각 그 등속을 가지고 편지를 써야 온당할 것 같을 뿐입니다.
別紙所論甚悉 但如此講論 愈覺支離 勢須異時面見 口講指畫 乃可究見底蘊 今且當就理義分明處理會 令徑路滑熟 庶於上達處有可漸進之階耳 祭禮廟室西上 證據甚多 但通典注中有夫人之主處右之說 而賈頊祭儀又云夫人版皆設於府君之左 韓魏公祭圖亦以妣位居考之東 詳此廟室 旣以西爲上 則不應考東而妣西 恐通典或字誤耳 此書雖舊 杭本亦多舛誤 孝子之稱 據禮亦有如此通稱者 如云孝子某使介子某執其常事之類 但今當各以其屬書之 似爲穩當耳
(一)舛: 原與上句‘舊’字互倒, 據宋閩․浙本改正.
왕자합에게 답함 (4-2364)答王子合 丁未十二月二十五日
사(謝)씨의 치생치사(致生致死)의 설은 역시 또한 이 글자를 빌어 마땅히 제사지냄과 마땅히 제사지내지 않음의 의미를 밝혀야 합니다. 치생(致生)하는 것은 죽은 이를 섬기기를 마치 산 사람을 섬기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며, 죽은 사람 섬기는 것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이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치사(致死)라는 것은 땅이 하늘과 통함을 끊고, 음사(淫祀)를 근절시킴과 같은 류가 이것입니다. 만약 마땅히 제사지내야할 바에 그 있음을 의심하고 또 그 없음을 의심한다면 성의가 지극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치생(致生)하지 않음이 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제사지내지 않아야할 바에 대해서 그 없음을 의심하고 또 그 있음을 의심한다면 두려워하거나 겁냄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치사(致死)하지 않음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뜻과 「단궁」에서 명기(明器)를 논한 곳이 저절로 서로 해가되지 않습니다. ‘귀신’ 두 글자와 같이 혹은 일기(一氣)가 소멸되고 식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이기(二氣) 음양(陰陽)을 가지고 말하기도 합니다. 말한 곳이 비록 같지는 않지만 그 이치는 하나일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신(神)은 곧 치생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불신(不神)은 곧 치사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유독 도리어 병통이 있는 것 같아 보이니, 반드시 위 문장과 연결해서 ‘가(可)’와 ‘불가(不可) 두 글자를 보아야 비로소 도리의 실한 곳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사사로운 뜻으로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로 “마땅히 법계의 성(性)을 보아야 할 것이니,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다”는 설이 될 것입니다. 그 외에는 자세히 논할 겨를이 없고, 대체로 성백(成伯)이 돌아갈 것을 고함이 매우 절박하므로 우선 이 편지를 부치니 나머지는 오는 봄에 서로 만나보고 논할 것을 기다리겠습니다. 대개 존덕성(尊德性) 한 대목은 장구에 이미 자세히 갖추어진 것 같으니 더욱 익히고 완미하시면 저절로 공부의 분별처를 보게될 것입니다.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항상 절실하게 제시하여 착실하게 공부를 하면 바야흐로 득력처를 보게될 것입니다. 만약 다만 기약할 수 없는 것을 해설하기만 한다면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謝氏致生致死之說 亦是且借此字以明當祭與不當祭之意 致生之者 如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是也 致死之者 如絶地天通廢撒淫祀之類是也 若於所當祭者疑其有又疑其無 則誠意不至矣 是不得不致生之也 於所不當祭者疑其無又疑其有 則不能無恐懼畏怯矣 是不得不致死之也 此意與檀弓論明器處自不相害 如鬼神二字 或以一氣消息而言 或以二氣陰陽而言 說處雖不同 然其理則一而已矣 人以爲神便是致生之 以爲不神便是致死之 然此兩句獨看却有病 須連上文看可與不可兩字 方見道理實處 不是私意造作 若不然 卽是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之說矣 其他未暇詳論 蓋成伯告歸甚迫 故且附此 餘俟來春相見面論 大率尊德性一條 章句似已詳備 更熟玩之 自見功夫分別處 日用間常切提撕 著實下手 方見得力處 若只解說無有了期 不濟事也
왕자합에게 답함 (4-2365)答王子合
지난 편지의 여러 설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사씨의 말이 대체로 옳습니다. 만약 본문의 위 아래를 가지고 살펴보면 곧 진실로 병통이 있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뜻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라는 것은 이른바 치생(致生)하는 것이니 이것은 사람을 신(神)으로 여기는 것이고, 치사(致死)하는 것은 곧 사람을 불신(不神)으로 여긴다는 뜻일 뿐입니다. 천신(天神)ㆍ지시(地示)ㆍ인귀(人鬼)은 다만 하나의 이(理)이며, 또한 하나의 기(氣)일 분입니다. 중용에서 말한 “일찍이 사람과 귀신을 분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나 귀신은 진실로 결국에는 다하는 곳으로 돌아가지만 성의(誠意)가 이르는 곳은 곧 그 상하 좌우에 있는 듯하니 어찌 제사의 전적에 실려있는 것이 이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괴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두 진실로 이와 같지만 그러나 또한 반드시 합함이 있고 합함이 없음을 분변해야 합니다. 만약 전혀 분별하지 않는다면 또한 단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설일 뿐이니, 예와 지금에 말한 것에 실려있는 기괴한 일들이 모두 실제가 있게 됩니다. 이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細看前書諸說 謝氏之言大槪得之 若以本文上下考之 卽誠不免有病 乃若其意 則所謂致生之者則是人以爲神 致死之者卽是人以爲不神之意耳 天神地示人鬼只是一理 亦只是一氣 中庸所云未嘗分別人鬼不在內也 人鬼固是終歸於盡 然誠意所格 便如在其上下左右 豈可謂祀典所載不謂是耶? 奇怪不測 皆人心自爲之 固是如此 然亦須辨得是合有合無 若都不分別 則又只是一切唯心造之說 而古今小說所載鬼怪事皆爲有實矣 此又不可不察也
왕자합에게 답함 答王子合五月十七曰(一)
동정(動靜)은 끝이 없고, 음양은 시작이 없으니 본래 선후를 가지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나아가 잘라 말하면 역시 그 선후가 있음에 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자(周子)가 말한 태극이 동(動)하여 양을 낳는다는 말을 보면 그 아직 동하지 않은 이전은 진실로 이미 일찍이 정(靜)이었습니다. 또 정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한다고 했으니 이미 정한 후에는 진실로 반드시 동이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춘추동하ㆍ원형이정과 같이 진실로 선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아니면 어찌 봄이 될 수 있겠으며, 정(貞)이 아니면 또 어찌 원(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나아가 보면 또 본래 선후가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긴 후에 인(仁)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이 진실로 이 전이라고 해서 인이 없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정을 말미암은 후에 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정하고 오직 한결같은 후에 중(中)을 잡을 수있으니, 진실로 이 전이라고 해서 중(中)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시 정을 말미암은 후에 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류를 들어 미루어 나아가 반복 순환하면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곳으로부터 말을 제기했는가를 보아야 하니, 당처(當處)는 곧 본래 선후가 있는 것입니다.
“성이 선(善)함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의 “선(善)”자는 오히려 사람과 만물이 부여받은 이후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발용한 처음에 의거하고, 그 성취의 지극함에 상대해보면 또한 저절로 음양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생각은 서로 이어져 있고, 일일이 서로 연속되어 있으니 경각에도 이와같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대의는 또한 전 단락과 서로 비슷하니 자세히 미루어 보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인용한 것은 바로 구본이니, 나중에 생각해보니, 또한 가지와 마디가 생겨날 수 없고, 도리어 심력을 허비할 것이 분명하므로 일찍이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합의 이와같은 좋은 헤아림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이 뜻은 끝내 분명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말은 역시 아주 정밀하지는 않아, 후에 이미 깍아 냈습니다. ‘인(仁)’ 자는 모름지기 한 가지 일에 나아가 통체(統體)의 전부를 보고, 통체처에 나아가 한 가지 일의 실질을 보아야 비로소 살아 움직여 서로 관련을 맺고 막히는 곳이 없게 됩니다.
이 단락은 매우 좋지만. 예를 들어 “기(氣)가 모인 곳에 이(理)는 바로 있다. 그러나 이가 끝내 주가 되니 이것이 곧 이른바 묘합이라는 것이다”고 하고, 또 “그 생화(生化)가 부터나온 곳으로부터 말하였기 때문에 ‘묘합’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구절들은 도리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귀신 제 1단은 매우 좋습니다.
이기(二氣)의 나뉨은 바로 일기(一氣)의 운행입니다. 이른바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뉨에 양의가 거기에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 말하면 정(靜)은 음이 되고 기(氣)는 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백(魄)은 귀(鬼)가 되고 혼(魂)은 신(神)이 되는 것입니다. 운행을 가지고 말하면 소멸되는 것은 음이 되고 쉬는 것은 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펴지는 것이 신(神)이 되고 돌아가는 것이 혼(魂)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의 성질은 움직이는 것이므로 마땅히 그 펴지는 때라도 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혼을 주로 삼는 것입니다. 백의 성질은 고요한 것이므로 바야흐로 그 돌아갈 때라 하더라도 혼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반드시 백으로 주를 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시 애초에 두 개의 이(理)란 없는 것입니다.
그윽하게 막혀있는 백은 끝내 다함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을 가지고 백유(伯有)의 위려(爲厲)의 일을 논하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모름지기 혼백을 겸해서 말해야지 오로지 유음(幽陰)만을 가리켜서는 아니됩니다. 만약 혼백의 바름을 논한다면 곧 다만 음양일 뿐이지 완전히 다른 물건이 아닙니다. 천지의 음양이 무궁한 것과 같이 사람과 만물의 혼백도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의가 이르는 곳에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는 것이니, 더욱이 오로지 ‘음이 막혀 흩어지지 않아 끝내 다 하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설을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직경(直卿)이 간과한 것 중에 의심나는 곳은 이미 안에 붙여 두었으니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만 ‘지지(知止)’에서는 ‘지(止)’ 자가 중요하니, 그 마땅히 그쳐야할 곳을 말한 것입니다. ‘지지(知至)’에서는 ‘지(知)’ 자가 중요하니, 그 앎이 지극한 곳에 이름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격(格)’은 앎을 지극히 함에 이르는 것이니, 그 지위가 진실로 이와같습니다. 그러나 그 문장의 뜻이 같지 않으니 역시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動靜無端 陰陽無始 本不可以先後言 然就中間截斷言之 則亦不害其有先後也 觀周子所言太極動而生陽 則其未動之前固已嘗靜矣 又言靜極復動 則已靜之後固必有動矣 如春秋冬夏元亨利貞 固不能無先後 然不冬則何以爲舂 而不貞又何以爲元 就此看之 又自有先後也 又如克己復禮然後可以爲仁 固不可謂前此無仁 然必由靜而後動也 惟精惟一而後可以執中 固不可謂前此無中 然亦由靜而後動也 擧此類而推之 反復循環 無非至理 但看從甚處說起 則當處便自有先後也
性之善猶水之下 此善字却是就人物禀受以後而言 據其發用之初 對其成就之極 又自爲陰陽也 念念相連 事事相續 無頃刻不如此 大意亦與前段相似 細推之可見 來喩所引乃舊本 後來思之 不能又生支節 轉費分疎 故嘗削去 然今得子合如此商量却好 不然 則此意終不分明也
愛人利物等語亦不甚精 後已刪去矣 仁字須是就一事上見統體之全 就統體處見一事之實 方始活絡無滯礙處
此段甚好 如云氣之所聚 理卽在焉 然理終爲主 此卽所謂妙合也 又云自其生化之所自出而言 故曰妙合 此句却不甚親切
鬼神第一段甚好
二氣之分 卽一氣之運 所謂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者也 在人者以分言之 則精爲陰而氣爲陽 故魄爲鬼而魂爲神 以運言之 則消爲陰而息爲陽 故伸爲神而歸爲鬼 然魂性動 故當其伸時非無魄也 而必以魂爲主 魄性靜 故方其歸時非無魂也 而必以魄爲主 則亦初無二理矣
幽滯之魄終歸於盡 以此論伯有爲厲之事則可矣 然亦須兼魂魄而言 不可專指幽陰也 若論魂魄之正 則便只是陰陽 元非他物 若天地之陰陽無窮 則人物之魂魄無盡 所以誠意所格 有感必通 尤不得專以陰滯未散 終歸於盡爲說矣
大學直卿看過 有疑處已貼在內 可詳之 但知止則止字爲重 言知其所當止也 知至則知字爲重 言其知識到極處也 今日格物致知 格是極乎知之至 其地位固如此 然其文意不同 亦不可以不察
(一)題注原缺, 據宋浙本補.
(二)連..周作逢, 據右引改
왕자합에게 답함 (4-2368)答王子合
음양의 기(氣)는 상승(相勝)하는 것이므로 서로가 없을 수 없지만 그 선악이 되는 형상은 이와는 다릅니다. 대개 기를 가지고 말하면 동정은 끝이 없고, 음양은 시작이 없으니, 그것은 본래 병립하여 선후의 순서와 선악의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선악의 상(象)을 가지고 말하면 사람의 성(性)은 본래 유독 선만 있고 악이 없으므로, 그 학문하는 것 역시 악을 제거하고자 하면 완전히 선해지는 것이므로 다시는 서로 없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음양을 가지고 선악의 상으로 삼고, 또 말하기를 ‘서로 없을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반드시 ‘소인은 날마다 불선을 행하지만 선한 마음은 일찍이 틈틈이 드러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여 음에는 양이 없을 수 없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군자는 날마다 선을 행하지만 악한 마음이 틈틈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고 하여 양에는 음이 없을 수 없다는 증거로 삼지 않습니까? 아마도 또한 그 이러한 이치가 없음을 안 것이겠지요. 또 자기의 사사로움을 다 없애면 순수한 의리이니 역시 음양의 바름에서 떠나지 않으니 선이란 진실로 악이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서로 없을 수 없다는 것은 또한 어디에 있습니까? 대체로 의리가 정미한 즈음에 합하고 흩어지며 번갈아 섞여 그 변화가 무궁하지만 그 서로 위배되거나 어그러지지는 않습니다. 또 음양선악을 가지고 논하면 음양의 바름은 모두 선이고 그것을 해침은 모두 악입니다. 주자(周子)의 이른바 ‘강한 선과 강한 악[剛善剛惡]이니, 유(柔) 역시 이와 같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상(象)의 류로 말하면 양은 선이고 음은 악입니다. 동정으로 말하면 양은 객이고 음은 주입니다. 이러한 종류는 매우 많으니 요컨대 마땅히 그 마음을 크게하여 살펴야 할 것이요, 한 가지 설에만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궁리의 학문은 진실로 문득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점진적으로 이치를 궁구하여 그것이 쌓임이 많아지기를 기다려야 확연히 관통하게 되는 것이니, 바로 대체를 알게될 뿐입니다. 지금 궁리의 학문이 문득 나아갈 수 없다고 해서 먼저 대체를 알려고 해야 한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이른바 대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입니까?
도란 곧 이(理)이니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는 것으로 말하면 도라 이르고, 그 각각 조리가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이(理)라고 합니다. 그 조목은 군신ㆍ부자ㆍ형제ㆍ부부ㆍ붕우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사실은 두 개의 물(物)이 아닙니다. 자금 자공ㆍ증점은 도를 알았다고 하면서 궁리는 미진했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이른바 도라는 것은 또 어떤 것 입니까?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다만 먼지나 때의 가림이 없으면 본체가 저절로 밝아져 사물이 옴에 능히 비출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마음을 알고자 하는데, 이것은 마치 거울을 가지고 스스로 비추면서 거울을 보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이러한 이치가 없으니 별도로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도 하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뒤의 편지에서 논한 ‘끝을 알고자하면 조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체는 알지 못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역시 지난날의 허물을 여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세한 것은 뒤의 편지에 보이는데, 이미 ‘식(識)’ 자를고쳐 ‘지(知)’ 자로 하였고, 또 ‘심체(心體)의 지(知)’라고 하였으니, 역시 이미 앞의 폐단을 안 것 같은데, 다만 분명하지 않을 뿐입니다.
陰陽之氣相勝而不能相無 其爲善惡之象則異乎此 蓋以氣言則動靜無端 陰陽無始 其本固竝立而無先後之序善惡之分也 若以善惡之象而言 則人之性本獨有善而無惡 其爲學亦欲去惡而全善 不復得以不能相無者而爲言矣 今以陰陽爲善惡之象 而又曰不能相無 故必曰小人日爲不善 而善心未嘗不間見 以爲陰不能無陽之證 然則曷不曰君子日爲善而惡心亦未嘗不間見 以爲陽不能無陰之證耶 蓋亦知其無是理矣 且又曰克盡己私 純是義理 亦不離乎陰陽之正 則善固可以無惡矣 所謂不能相無者 又安在耶 大凡義理精微之際 合散交錯 其變無窮而不相違悖 且以陰陽善惡論之 則陰陽之正皆善也 其沴皆惡也 周子所謂剛善剛惡 柔亦如之者是也 以象類言 則陽善而陰惡 以動靜言 則陽客而陰主 此類甚多 要當大其心以觀之 不可以一說拘也
窮理之學 誠不可以頓進 然必窮之以漸 俟其積累之多而廓然貫通 乃爲識大體耳 今以窮理之學不可頓進 而欲先識夫大體 則未知所謂大體者果何物耶
道卽理也 以人所共由而言則謂之道 以其各有條理而言則謂之理 其目則不出乎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之間 而其實無二物也 今曰子貢曾點知道矣 而窮理未盡 則未知所謂道者又何物耶
心猶鏡也 但無塵垢之蔽 則本體自明 物來能照 今欲自識此心 是猶欲以鏡自照而見夫鏡也 旣無此理 則非別以一心又識一心而何 後書所論欲識端倪 未免助長者得之矣 然猶曰其體不可不識 似亦未離前日窠臼也 細看後書 已改識字爲知字 又云心體之知 亦似已覺前弊 但未脫然耳
왕자합에게 답함 答王子合
성인은 이것을 가지고 마음을 씻습니다.
“성인은 이것을 가지고 마음을 씻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것’이란 시괘(蓍卦)의 덕과 육효(六爻)의 의(義)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을 씻는다’는 것은 성인은 이 이치를 완미함에 묵묵히 그 오묘함에 합한다는 말입니다. ‘물러가 은밀한데 감추어 진다’는 말은 다만 아직 사물에 감응하지 않았을 때를 말할 뿐입니다. ‘그 길흉에 미쳐서는 백성과 더불어 함께 근심한다’고 하였으니 쓰는 것은 또한 이 이치일 뿐입니다. 그 오는 것을 아는 것은 지난 번에 말했던 원만하면서도 신비하다는 것입니다. 그 지나간 것을 보관하는 것은 지난 번에 말했던 바야흐로 안다는 것입니다. ‘신무부살(神武不殺)’이란 성인은 점을 빌지 않더라도 길흉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 장의 문의는 다만 이와같을 뿐입니다. 정선생의 말에는 혹 한 때의 뜻이 다다라 말한 것 같으니 그 문의를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이제 다만 그 뜻을 완미해서 별도로 봄이 옳을 것입니다. 만약 경전의 종지를 끌어다가 합치시킨다면 힘만 낭비하는 것일 것입니다.
맹자가 말한 성선 일장을 이천선생은 ‘성(性)의 본(本)’이라 하였고, 또 ‘근본을 지극히 하고 본원을 끝가지 한 성’이라고 하였으며, 명도선생은 ‘사람이 태어나 고요하기 이전은 말할 수 없으니, 성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바로 이미 성이 아닌 것이 된다. 무릇 사람들은 성을 말하는데, 다만 이은 것이 선이라는 것을 말할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천은 본(本)이라고 여기고 명도는 ‘계(繼)’라고 말했는데, 어째서인지요? 이천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만 성의 본연을 말한 것일 뿐이고, 명도가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하기 이전은 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즉 주자(周子)의 이른바 무극(無極)이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극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성을 이르는 것입니다. 태극은 진실로 순수한 선이므로 무극으로부터 말하면 다만 ‘계(繼)’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명도의 말은 주자(周子)의 뜻을 발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천의 뜻은 다만 성의 본연은 불선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을 지극히 하고 본원을 궁구하는 성과 명도의 뜻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 견해는 이와 같습니다.
주자(周子)의 이른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는 말은 태극의 위에 별도로 무극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다만 태극이 어떤 물건이 아님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상천의 때에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하래 문장에서 “무극의 참됨과 이오의 정수”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무극이라고 하였으니, 다시는 별도로 태극을 거론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지금의 설과 같다면 여기에서 어찌 하나의 ‘태극’이라는 글자가 부족하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함’이라고 했는데, 고요한 것은 진실로 성입니다. 그러나 다만 ‘생(生)’이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곧바로 기질을 두르게 된 것입니다. 다만 ‘생’ 자 이상에 또 말을 할 수 없을 뿐이니 대개 이 도리는 아직 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곧 반드시 기질을 띠게 되므로 허공에 매달아서 성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도의 작용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이 선이다’는 것은 본래 조화와 발육의 공을 말한 것인데, 명도는 여기서 오히려 인성의 발용처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맹자가 “그 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선이 될 수 있다”고 이른 것과 같은 류들이 이것입니다. 이천이 말한 근본을 지극히 하고 본원을 궁구하는 성은 바로 기질지성에 상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기질은 비록 선악이 같지 않지만 근본을 지극히 하고 본원을 궁구하여 논하면 성은 일찍이 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역(易)은 변역(變易)이니, 때에 따라 변하여 도를 따르는 것이다”고 했는데, 역은 곧 도이지만 변역함으로써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도라는 것은 자연의 바뀌지 않는 이치입니다. 그것을 따르는 것 역시 적당히 할 분이니 이것으로써 저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역이 변역하는 까닭은 진실로 이치의 당연한 것입니다. 성인이 역을 지음에 그 효상(爻象)의 변화에 따라 이치의 당연한 것을 보고 말을 이어 사람들에게 변역과 도를 따르는 방법을 가르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건괘의 초효는 잠김ㆍ이효는 드러남의 류가 모두 때에 따라 변역하여 도를 따름을 이르는 것입니다.
건은 성인의 분수이니 하고자 할만한 선이 거기에 속합니다. 곤은 학자의 분수이니 자기에게 있는 신(信)이 거기에 속합니다. 운운
이 설은 대체로 옳지만 다만 건곤은 모두 성정(性情)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무형과 유형을 구분하는 것은 마땅치 않고, 다만 자연과 힘씀의 다름을 논할 수 있을 뿐입니다.
팔괘(八卦)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강절(康節)은 복희 팔괘를 설명하면서 건의 자리는 본래 남쪽에 있고, 곤의 자리는 본래 북쪽에 있으며, 문왕이 역을 중수할 때 다시 이 자리를 정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설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대개는 견강부회하고 천착함에 가깝기 때문에 일찍이 깊이 유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설괘」에서 말하는 괘의 위치는 결국 역시 사람으로 하여금 깨달을 수 없게 하니, 우선은 빼 놓고 구지 억지로 통하지 않음이 마땅합니다.
聖人以此洗心
聖人以此洗心 此字指蓍卦之德六爻之義而言 洗心言聖人玩此理而黙契其妙也 退藏於密 但言未感物之時耳 及其吉凶與民同患 則所用者亦此理而已 其所以知來者 向之所謂員而神者也 其所以藏往者 向之所謂方以知者也 神武不殺 言聖人之不假卜筮而知吉凶也 是以明於夫之道以下 乃言敎民卜筮之事 而聖人亦未嘗不敬而信之 以神明其德也 此章文義只如此 程先生說 或是一時意到而言 不暇考其文義 今但玩味其意 別看可也 若牽合經旨 則費力矣
孟子言性善一章 伊川先生謂性之本 又謂極本窮源之性 明道先生則謂人生而靜 以上不容說 纔說性時便已不是性 凡人說性 只是說繼之者善也 伊川以爲本而明道言其繼 何也 竊思伊川之言只謂性之本然耳 明道言人生而靜 以上不容說 則周子之所謂無極也 不可容言也 若太極 則性之謂也 太極固純是善 自無極而言 則只可謂之繼 明道之言 所以發明周子之意也 伊川之意 只是說性之本然無不善耳 所以爲極本窮源之性 與明道之意不相妨 鄙見如此
周子所謂無極而太極 非謂太極之上別有無極也 但言太極非有物耳 如云上天之載 無聲無臭 故下文云無極之眞 二五之精 旣言無極 則不復別擧太極也 若如今說 則此處豈不欠一太極字耶 人生而靜 靜者固是性 然只有生字便帶却氣質了 但生字已上又不容說 蓋此道理未有形見處 故今纔說性 便須帶著氣質 無能懸空說得性者 繼之者善 本是說造化發育之功 明道此處却是就人性發用處說 如孟子所謂乃若其情 則可以爲善之類是也 伊川所言極本窮源之性 乃是對氣質之性而言 言其氣質雖善惡不同 然極本窮源而論之 則性未嘗不善也
易 變易也 隨時變易以從道也 易卽道也 然以變易而得名 道者 自然不易之理也 從之者 亦適當之而已 非以此而從彼也
易之所以變易者 固皆是理之當然 聖人作易 則因其爻象之變灼見理之所當然者 而繫之辭 敎人以變易從道之方耳 如乾初則潛二則見之類 皆隨時變易以從道之謂也
乾 聖人之分也 可欲之善屬焉 坤 學者之分也 有諸己之信屬焉言云云
此說大槪得之 但乾坤皆以性情爲言 不當分無形有形 只可論自然與用力之異耳
八卦之位如何
康節說伏羲八卦乾位本在南 坤位本在北 文王重易時更定此位 其說甚長 大槪近於附會穿鑿 故不曾深留意 然說卦所說卦位竟亦不能使人曉然 且當闕之 不必彊通也
(一)矣 : 原作‘耳’, 據宋閩․浙本改.
왕자합에게 답함 (4-2372)答王子合
가만히 생각해보니 성인은 이미 역을 완미하여 그 오묘함에 묵묵히 합하고 자연이 물러나 은밀한데 감추어지며, 길흉을 백성들과 더불어 같이 근심하니 다시는 말할 만한 선후가 없습니다.
이(理)는 진실로 선후가 없습니다. 그러나 때와 일은 선후의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반드시 제세하고 착실하게 이해 해야지 한결같이 스처지나가면서 한갓 위를 향해서만 말해 나아가 거두어 들임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성의 처음에는 다만 선만 있을 뿐 본래 말할 만한 악이 없으니 바로 사덕(四德)의 원(元)ㆍ오상의 인(仁)입니다. 맹자의 이른바 성선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명도는 도의 작용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이 선이다고 하면서 바야흐로 성의 발용을 이야기 했으니, 사단의 마음이 이것입니다. 어찌 정과 합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의 시작과 처음은 선에서는 하나일 뿐이니, 성의 처음은 다만 선이 있을 뿐이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만약 말한 것과 같다면 성의 끝을 일러 악이 있게 된다고 하면 옳겠습니까? 성의 발용이 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의 처음은 선은 있으되 악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 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이라고 할 때의 ‘약(若)’ 자는 아마도 또한 구지 ‘순(順)’으로 뜻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竊謂聖人旣已玩易而黙契其妙 自然退藏於密 吉凶與民同患 更無先後之可言
理固無先後 然時與事則不能無先後之殊矣 此等處須子細著實理會 不可一向掠空說向上去 無收殺也
性之初只有善 本無惡之可言 乃四德之元五常之仁也 孟子所謂性善者 此是也 明道言繼之者善 方言性之發用 則四端之心是也 烏得與情合而言之
性之始終 一於善而巳 不當云性之初只有善也 若如所云 則謂性之終爲有惡 可乎 性之發用 非情而何 情之初則可謂有善而無惡耳 乃若其情 若字恐亦未必訓順也
왕자합에게 답함 (4-2373)答王子合己酉閏五月十人日
깨우쳐주신 사기(祀記)는 지난 날의 편지에서 이미 회답을 받들어 보낸 것 같은데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라도 자못 회답이 이른 것을 보지 못하셨는지요? 말하고 묵묵함에 은미하고 드러남이 스스로 시절이 있습니다. 지난 날 부중(膚仲) 역시 학문을 닦아 기록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삼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만 경전의 뜻만 해석함에 시사(時事)와는 큰 상관이 없고 또 세상에서도 보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구차하게 정돈함을 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한 늠름하게 감히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감히 문장을 짓고 도리를 말하며, 큰 글을 깊이 새기고, 남과 더불어 집의 담벼락을 막고, 만일 그 성명을 들으면 허물을 지적하고 흠을 잡아 세상이 미워하는 병통을 거듭할 수 있겠습니까? 이백간(李伯諫)이 처음 떠났을 때 학교를 정돈할 것을 지극히도 요구 했는데, 뒤에 병통의 대부분은 입각처에 머물지 않아서 모두 흩어지고 뒤집혔습니다. 대체로 우리들은 재물이나 색 양 방면으로는 뛰어나질 못하니, 다시 할 만한 말이 없습니다.
대학해의는 평이하고 은미하지만, 다만 제생들 중에 듣는 자들은 모름지기 항상 추적하고 어려운 것을 묻는다면, 그 들은 것을 살핀 후에 과연 능히 반복하여 찾고 연역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근래에 강학의 효과가 앞을 향해 있지 않고 다만 뒤로 물러나 있음을 알았으니, 그러므로 옛것을 익히지 않으면 새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대개 오직 새 것만을 알지 못하는 것 뿐 아니라 아울러 옛것도 기억할 수 없어 일상행활하는 가운데 곧 서로 잊게 됩니다. 비록 그 양심을 놓아버리려 하지 않아도 할 수 엇습니다. 이 일은 절실한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경계하고, 아울러 학자들에게 제시함을 좋은 일로 삼아야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남전(呂藍田)의 이른바 강구할만한 것은 진실로 텅 비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여기에 나아가 이러한 재미와 취향을 얻어 하나의 기초를 세울 수 있다면 향후에는 스스로 안주하려 하여도 할 수 없게될 것입니다. 만약 도무지 망연하여 근거할 만한 근본이 없으면 다만 남의 사설(詞說)만 허비하여 오래한다 한들 어떤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절실히 바라건대 여기에 유의하여 반드시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새겨 다만 한 때 보기에 좋게만하고 사람에게 유익함이 없게하지 않으신다면 서로 만나봄에 혹 일을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所喩祠記 前日之書似已奉報 不知後來頗見邸報否 語黙隱顯 自有時節 前日膚仲亦以修學來求記 謹不敢作矣 今只有解釋經義 與時事無大相關 且流俗所不觀 故猶不免偸閑整頓 然亦凜凜不敢自保 况敢作文章說道理 大書深刻 與人遮屋壁 使見其姓名 指瑕求釁 以重世俗之憎病乎 李伯諫初去時極要整頓學校 後來病痛多般 立脚不住 都放倒了 大抵吾輩於貨色兩關打不透 便更無話可說也
大學解義平隱 但諸生聽者須時時抽摘問難 審其聽後果能反復尋繹與否 近覺講學之功不在向前 只在退後 若非溫故 不能知新 蓋非惟不能知新 且幷故者亦不記得 日用之間 便成相忘 雖欲不放其良心 不可得矣 此事切宜自警 幷以提撕學者爲佳 如其不然 則呂藍田所謂無可講者眞不虛矣 若得它就此得些滋味趣向 立得一箇基址 卽向後自住不得 若都茫然無本可據 徒然費人詞說 久遠成得甚事 切望於此留意 不須鐫碑立名 只爲一時觀美 無益於人 邂逅或能生事也
왕자합에게 답함 答王子合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 이치를 알아 그치기를 구하는 것은 진실로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일이지만 그들로 하여금 이와같게 하는 대에는 반드시 방법이 있습니다. 표의(表儀)를 보여주는 것은 진실로 새롭게 하는 근본이지만 이미 밝은 덕을 밝히는 분수에 속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를 백성에게 배푸는 것 역시 그 지극히 선함에 그치고자 하지 않음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다섯 글자는 공혀의 차제이지 공부의 절목이 아닙니다.
효를 일으키고 공손함을 일으키는 것이 위에서 행함에 아래에서 본받음을 배가 시킨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윗장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치국(治國)에 대해 이 장에서 거듭 거론한 것은 평천하(平天下) 바로 아래 문장의 ‘군자는 반드시 자로 젠 연후에 평천하할 수 있다는 뜻을 끌어 일으키려한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그 위에서 백성이 교화되어 선에서 흥기된다 하더라도 천하는 끝내 불평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 장은 처음과 끝이 모두 혈구(絜矩)의 뜻을 가지고 추구하였고, 일찍이 다시는 몸소 행하여 아랫사람을 교화시킨다는 설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가 비록 두 개의 길이 아니지만 그것을 베푸는 즈음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使天下皆知此理而求止焉 固是新民之事 然其所以使之如此者 必有道矣 示之表儀 固是所以新之之本 然已屬明明德之分矣 須知政敎法度之施於民者 亦無不欲其止於至善也
定靜安慮得五字是功效次第 不是工夫節目
興孝興弟 不倍上行下效之意 上章已言之矣 治國此章再擧之者 平天下乃欲引起下文君子必須絜矩 然後可以平天下之意 不然 則雖民化其上 以興於善 而天下終不免於不平也 故此一章首尾皆以絜矩之意推之 而未嘗復言躬行化下之說 然則治國平天下雖無二道 然其設施之際 不可謂無異術也
意雖心之所發 然誠意工夫却只在致知上做來 若見得道理無纖毫不盡處 卽意自無不誠矣 意誠然後心得其正自有先後 今曰主於心而由中以出 安有不誠 正是顚倒說了
以上四說請詳之橫渠先生有言 義理有疑 卽濯去舊見 以來新意 此言最有理 蓋舊見已是錯了 今又就上面更起意思 擘畫分疎 費力愈多 而於本經正文意思轉見昏了 須是一切放下 只將經文虛心涵泳 今其本意瞭然心目之間 無少差互 則却回頭來看舊來見處 其是非得失不崇朝而決矣
왕자합에게 답함 答王子合
보내주신 곡절은 이르신 바를 모두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구구한 뜻은 처음 보니 저 사이의 풍속이 비루하고 더러워 위로는 예법이 있는지도 모르고, 아래로는 조리와 금법이 없으며, 그 보잘 것 없는 백성들은 무지하니, 오히려 가련합니다. 그리고 선비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굳셈을 믿고 속임수를 써서, 하지 말아야할 것에 쏠리니 미워할 만함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리들에게 진실로 그 정(情)을 얻으면 반드시 통렬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대개는 오직 그 엄격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것이며 어리석은 풍속에 놀라 날뜀이 없어야 겠습니다. 청렴하고 겸손하며 수행을 좋아하는 선비라든가, 부드럽고 선량한 홀아비나 과부 등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것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세민(細民)들은 왁자지걸하지만 이 뜻을 모르고 망령되이 두려움을 낳으니 저 선비된 자들 역시 어찌 갑자기 두려워 위축됨에 이르러 감히 와서 서로 보지 않겠습니까? 만약 과연 그러함이 있다면 이는 그 견문과 지식이 높지 않고, 추향하는 바도 모두가 낮은 것이니 어리석은 백성을 이상히 여길 것도 없습니다. 위정자라고 해서 또한 어찌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경계법 한 가지 일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참으로 자그마한 어지러움이 없을 수 없음을 알겠습니다. 대개 시골의 백성들을 몰아다가 그들로 하여금 관원을 따라 삼태기를 쥐고 가래를 잡으며 장대를 들고 먹줄을 끌어 산림과 받 두둑 사이에서 분주하게 하면 어찌 문을 닫고 편안히 앉아 배불리 먹고 놀면서 편안히 지내는 것만 같겠습니까? 다만 이것을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가난한 백성들이 해를 받음이 끝날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마 그것을 하는 것인데 거의 한 번 수고하고 길이 편안할 따름입니다. 만약 이들을 일일이 구휼하고자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사람마다 진심으로 원하기를 기다린 후에 그것을 행하시면 행할 수 있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또 요사이 소흥(紹興) 연간에 바로 시행할 때와 같으니 사람 사람마다 탄식하고 원망하여 마치 홍수와 화재 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에는 진실로 눈으로 보기만 하여도 마땅히 행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일을 마친 후에 전세(田稅)가 균등하고, 마을이 편안해지면 공사(公私)가 모두 그 이로움을 누릴 것이니, 결국 한 사람도 비난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일은 또한 그 어떻게 구원(久遠)할 것인가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이 일이 아직 착수하기도 전에 위아래가 함께 사사로운 뜻으로 허물어 뜨려 사람으로 하여금 미리 그 어지러움을 근심하여 그 이로움을 입지 못하게 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니, 당세(當世)에 저절로 그 책임을 맡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당시에 다시 시행하였다면 그 어지러움은 농지의 경계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니, 수군거림이 또한 어떠 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농지의 경계가 어지러움을 지적하여 경계법을 좋지 않다고 한다면 자합과 같은 분도 또한 이 이해(利害)를 궁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계림(桂林)의 행위 역시 이것을 끌어다 스스로 줄을 세운 후에 면할 수 있었으니, 후세에 마땅히 이 마음을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학문이 이미 완성되고, 기상이 막혔다가 열렸으니, 다만 지금 이후로는 그 사이에서 노는 자들 역시 각각 심흉을 크게 열고, 예전의 비루하고 어두운 견문 지식을 짓지 않아서 이에 훌륭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示喩曲折 具曉所謂 但區區之意 初見彼間風俗鄙陋汙濁 上不知有禮法 下不知有倏禁 其細民無知 猶或可憐 而號爲士子者恃彊挾詐 靡所不爲 其可疾爲尤甚 故於此輩苟得其情 則必痛治之 蓋惟恐其不嚴 而無以警動於愚俗 至於廉退好修之士 柔良鰥寡之民 則未嘗以此加之也 細民籍籍 不知此意 妄生恐懼 而彼爲士者亦何遽至畏縮而不敢來相見乎 若果有之 卽是其見識不高 趨向凡下 無以異於愚民 爲政者亦安能每人而悅之哉
至如經界一事 固知不能無小擾 蓋驅田里之民 使之隨官荷揭畚持鍤 揭竿引繩以奔走於山林田畝之間 豈若其杜門安坐 飽食而嬉之爲逸哉 但以爲若不爲此 則貧民受害無有已時 故忍而爲之 庶其一勞而永逸耳 若一一恤此 必待其人人情願而後行之 則無時而可行矣 且如此間紹興年間正施行時 人人嗟怨 如在湯火之中 是時固目見之 亦以爲非所當行 但訖事之後 田稅均齊 里閭安靖 公私皆享其利 遂無一人以爲非者 凡事亦要其久遠如何耳 但惜乎此事未及下手 而上下共以私意壞之 使人預憂其擾而不見其利 此則非熹之罪 而當世自有任其責者 尙何言哉 然當時若更施行 則其擾不但土封而已 不知噂沓又復如何也 若便指土封爲擾而謂經界之不善 則如子合者亦未究此利害也 桂林之行 亦引此自列 然後得免 後世當有知此心者耳
新學旣成 氣象閑開豁 但願自今以往游其間者亦各放開心胸 莫作舊時卑汚暗味見識 乃爲佳耳
왕자합에게 답함 答王子合
보내주신 농토의 경계에 대한 일은 당시에는 도리어 왈가왈부하거나 하소연하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자세하게 설명하고 언급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는 또 찾으면 바로 고을로 갔으므로 그 일은 폭로되기에 미치지도 않아서 연구하고 다스림을 잃게 되었을 뿐입니다. 다만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하신 것처럼 소비가 많지 않아 그와 더불어 관부에 소송을 할 수 없으면 그 해됨은 응당 역시 지나치게 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이미 행해지지 않았으니 말할 만한 게 없고 또 이것을 빌어다가 말의 단서를 삼아 비방하는 의론으로 삼을 뿐입니다. 만약 과연 다 시행한다면 나는 스스로 헤아려, 비록 가령 엄격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작은 어지러움 역시 끝내 면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그 비난은 반드시 이것 보다 더 큰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합과 같은 사람들 역시 장차 청묘법에 대한 논의를 서로 뉘우침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 번 웃을 만한 일입니다. 젊었을 때 농지의 경계를 수립하는데 있어서의 소견은 모두 ‘이춘년묘(李椿年墓)’라고 표제를 붙였으니, 어찌 수고로움을 싫어하고 편안함을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임을 몰랐겠습니까? 우선 이해의 실질을 부득이 해서 피함이 있다고 여길 뿐입니다. 우(禹)가 물을 다스리고, 익(益)이 산을 태우고, 주공(周公)이 맹수를 몰아낸 것 같은 것을 어찌 사람을 부리지 않고 앉아서 성공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당시를 생각해 보아도 역시 반드시 즐거워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스스로 이해의 실질을 보고 나를 수고롭게 하는 것이 곧 나를 편하게 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 원망하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자합께서 한(漢)을 의론한 일은 매우 상세하니 역시 일찍이 한고(漢高)가 처음 전하를 정하고, 소하(蕭何)가 궁실을 크게 다스림을 보고, 또 누경(婁敬)의 설을 따르며, 제ㆍ와 초의 대 가족 수심만을 장안으로 옮긴 것을 보면, 당시에 어느 정도의 농지의 경계를 정하는 노력을 허비했는지 모르겠으며, 천하의 사람들이 불안해함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 오늘 날 일의 형세에 있어 어떠한지요?
자여(子餘)가 여기에 머문지 오래되었지만, 마침 내가 병이 들어서 아침 저녁으로 서로 모일 수 없었습니다. 또 그 어른을 뵈니, 통렬하게 잠그거나 내려 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뒤에 이와 같은 모호함이 벗을 그르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스스로 깨달아 비로소 공부에 힘쓰고 모으기를 재촉한다면 그는 이미 행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오히려 머물고 있는 자가 신법의 과정을 씀에 요즘은 도리어 자못 크게 진전 되었습니다. 참으로 작은 인(仁)은 큰 인(仁)의 적이며, 면목이 없는 것이 바로 오래된 인정입니다.
所喩土封事 當時却無人來論訴 亦無人子細說及 熹又尋卽去郡 故其事不及露而失於究治耳 但如來喩所云 所費不多 不能與之訟於官府 則其爲害應亦不至太甚 但今已不行 無可得說 便且借此爲話端而興謗議耳 若果盡行 則熹自料雖使更用嚴刑峻法 此等小擾亦恐終不能免 其謗必有大於此者 而如子合者 亦將有番悔靑苗之議矣 此可付一笑也 少時見所在立土封 皆爲人題作李椿年墓 豈不知人之常情惡勞喜逸 顧以爲利害之實 有不得而避者耳 如禹治水 益焚山 周公驅猛獸 豈能不役人徒而坐致成功 想見當時亦必須有不樂者 但有見識人須自見得利害之實 知其勞我者乃所以逸我 自不怨耳 子合議漢事甚熟 亦曾看漢高初定天下 蕭何大治宮室 又徙婁敬說 從齊楚大姓數十萬於長安 不知當時是費幾箇土封底功夫 而不聞天下之不安 其於今日事勢何如也
子餘留此久 適熹病 不得朝夕相聚 又見渠長上 不欲痛下鈐鎚 後來自覺如此含胡恐誤朋友 方著力催儹功夫 則渠已有行日矣 其有尙宿留者用新法課程 近日却頗長進 信乎小仁者大仁之賊 而無面目者乃長久人情也
(一)鈐: 正訛改作‘鉗’.
임백화에게 답함 答林伯和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 이전은 대개 일찍이 사우(師友)를 널리 구했지만 지금에 이르기 까지 얻음이 없다 하시니 도를 구하는 모습이 간절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입장에서 보니 이것은 거의 사우의 사이에서 서로 일러주어야 할 것으로 반드시 성인 문하의 학자들이 덕으로 들어가는 순서로 다 이야기할 것은 아니니, 현자로 하여금 친절하게 힘쓸 곳이 있게하지 않아 그러할 따름입니다. 대개 성인의 가르침은 글로써 넓힌 다음에 예로써 요약하고, 대학의 도러써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백성을 새롭게 함을 뒤로 삼습니다. 요즈음 도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높고 오묘하며 직절한 것에 힘을 써서 이미 박문(博文)의 노력이 없고 그런 까닭에 요약함 역시 복례(復禮)의 실제가 이는 것이 아닙니다. 분장을 암송하는데 힘쓰는 자들은 또 일찍이 자기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지 않고 떠들썩하게 대번에 고금을 판단하고 예를 다스림을 고담하는 것으로 자임을 합니다. 이는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덕에 들어가는 순서를 헤매고 공허하고 잡박한 가운데로 빠지게 합니다. 그 자질이 돈독하고 성실하여 선을 행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혜와 견식이 혹 남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왕왕 더욱 그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형(林伯和)의 오늘의 설계를 위해서는 지경(持敬)을 우선적으로 하고 강학(講學)․성찰(省察)의 부가하는 것이 더없이 좋습니다. 대개 인심의 병통은 방종하지 않으면 혼미하고 게을러집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방종에 대한 걱정이 없지만, 다만 혼미하고 게으르게 될지 모릅니다. 일상적인 가운데, 힘써 정제엄숙(整齊嚴肅)을 스스로 지녀 항상 채찍질을 가하면 혼미하고 게을러지지 않습니다. 강학은 논어와 맹자보다 우선적인 것이 없으니, 논어와 맹자를 읽는 사람은 장구를 따라 숙독하고, 자기에게 관련지어 깊이 생각하여 통하지 않은 뒤에 선유의 학설을 살펴 밝혀내야 합니다. 이정(二程)선생과 같은 사람은 세밀하게 말하였으니, 바로 난숙함을 보고 경문과 마찬가지로 마음 속으로 외우고 있어야 하며, 여기에 성찰의 공부를 더하니, 대개 강학과 더불어 서로 발명하는 것입니다. 다만 일상적인 가운데의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하거나 생각이 은미한 가운데 매양 더욱 살펴 그 선한 싹이 발함이 내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아도 성현의 말에 합당하다면, 힘써 행해야 합니다. 그 그릇된 뜻의 싹은 내 마음에 부끄럽고 성인의 교훈에도 어긋난다면 과감히 결단하여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대개 선을 보면 반드시 행하고, 악을 들으면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조그만 사이라도 유유한 태도를 갖게 하지 않는다면 학문하는 근본이 서게 됩니다. 이것을 힘쓰지 않고서 본분에 의거하여 지나치거나 악독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날로 진보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바로 근거할 근본도 없으니, 과연 본분에 의거하고 지나치거나 악함이 없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보고 깨우쳐드릴 수 없으므로 우선 이것을 보내 드리니 만분의 일이라도 여기에 뜻을 두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 편지는 남에게 보이지는 마시고 다만 숙화(叔和)․기도(幾道) 및 임형(林兄)의 여러 형제들이라면 또한 몰라서는 안될 따름입니다.
示諭前此蓋嘗博求師友 而至今未能有得 足見求道懇切之意 以熹觀之 此殆師友之間所以相告者未必盡循聖門學者入德之序 使賢者未有親切用力之處而然耳 大抵聖人之敎博之以文然後約之以禮 而大學之道以明明德爲先 新民爲後 近世語道者務爲高妙直截 旣無博文之功 而所以約之者又非有復禮之實 其工於記誦文詞之習者 則又未嘗反求諸身 而囂然遽以判斷古今 高談治體自任 是皆使人迷於入德之序而陷於空虛博雜之中 其資質敦篤慤實 可以爲善而智識或不逮人者 往往尤被其害 此不可不察也
爲老兄今日之計 莫若且以持敬爲先 而加以講學省察之助 蓋人心之病 不放縱卽昏惰 如賢者必無放縱之患 但恐不免有昏惰處 若曰用之間務以整齊嚴肅自持 常加警策 卽不至昏惰矣 講學莫先於語孟 而讀論孟者又須逐章熟讀 切己深思 不通然後考諸先儒之說以發明之 如二程先生說得親切處 直須看得爛熟 與經文一般成誦在心 乃可加省察之功 蓋與講學互相發明 但日用應接思慮隱微之間每每加察 其善端之發 慊於吾心而合於聖賢之言 則勉厲而力行之 其邪志之萌 愧於吾心而戾於聖賢之訓 則果決而速去之 大抵見善必爲 聞惡必去 不使有頃刻悠悠意態 則爲學之本立矣 異時漸有餘力 然後以次漸讀諸書 旁通當世之務 蓋亦末晩 今不須預爲過計之憂 以失先後之序也 若不務此而但欲爲依本分無過惡人 則不惟無以自進於日新 正恐無本可據 亦未必果能依本分無過惡也 無由面諭 姑此布萬一 幸試留意焉 此紙勿以示人 但叔和幾道及林兄昆仲諸人 亦不可不知耳
(一)囂 : 考異云一作‘囂’.
임숙화에게 답함 答林叔和
깨우쳐주신 위학(爲學)의 본말은 단아한 뜻을 보기에 충분합니다. 일찍이 당시의 선유들이 학문을 논한 처음을 살펴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봄이 크지 지나침으로 인해 반드시 다른 사람이 논한 것은 하나도 취할만한 것이 없다고 하니, 결국은 각각 문정(門庭)을 세워 서로 간에 비방하거나 헐뜯어 학자들이 보고 듣는 것으로 하여금 당황하고 미혹해서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내 생각은 평소 저들과 자기를 보고, 공개적으로 듣고 나란히 보아 여러 장점을 아울러 취하여 자기의 선(善)으로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니, 자기에게 절실한 것을 가려 우선 힘을 쓰고,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선 놓아두어 둘 다 간직하였다가 힘써 과연 하나라도 입두처(入頭處)가 있기를 기다린 후에 순서대로 추구하여 섬세하게 모두 다 자세히 살피시고, 혹시 한가지 일이라도 빠뜨림이 없게한 후에 학문을 잘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번에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고, 주인을 들어가게 하고 노비를 나오게 해서는 안됩니다.
示喩爲學本末 足見雅志 嘗觀當世儒先論學初非甚異 止緣自視太過 必謂它人所論一無可取 遂致各立門庭 互相非毁 使學者觀聽惶惑 不知所從 竊意莫若平視彼己 公聽竝觀 兼取衆長以爲己善 擇其切於己者先次用力 而於其所未及者姑置而兩存之 俟所用力果有一入頭處 然後以次推究 纖悉詳盡 不使或有一事之遺 然後可謂善學 不可遽是此而非彼 入主而出奴也
임숙화에게 답함 答林叔和
장례는 이미 가을과 겨울에 있었으니, 날마다 생각해 보아도 역시 조금은 여유로워 졌습니다. 비록 혹 바빠서 서책을 가까이 할 수 없더라도 이 마음과 이 이치를 곳에 따라 잡고 보존하고, 곳에 따라 체득하고 살펴야 역시 가는 곳 마다 배움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항상 절실하게 경계하고 살펴 어둡고 게으르게 하지 말아야할 뿐입니다.
襄事旣在秋冬 日下想亦少寬 雖或紛冗 不得近書冊 然此心此理隨處操存 隨處體察 亦無往而非學也 只在日間常切警省 勿令昏惰耳
임숙화에게 답함 答林叔和
맹자와 정자가 말한 ‘재(才)’ 자의 뜻은 같지 않으니, 이미 성현의 말인 것을 후학이 어찌 감히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의 도리는 단지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 체인해야 곧 스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대 그 시비와 득실이 되는 까닭은 역시 분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집주 중에서 정자를 은밀하다고 한 것은 바로 맹자가 말한 것을 봄이 조금 거친 곳이 있음을 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만 정자만을 위주로하여 그 설을 미루어 음으로 맹자의 부족한 점을 보완을 하면 이치에 빠짐이 없을 것이고, 두 책의 설 역시 크게 서로 방해됨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孟子程子所說才字之意不同 旣是聖賢之言 後學如何便敢判斷 但此事道理只就自己身上體認 便自見得 而其所以爲是非得失者 亦不容無分別也 如集註中以程子爲密 卽是見得孟子所說未免少有疎處 今但以程子爲主 而推其說以陰補孟子之不足 則於理無遺 而兩書之說亦不至甚相妨矣
임희지에게 답함 答林熙之
역ㆍ문언의 “덕불고(德不孤)”는 바로 ‘대(大)’ 자의 뜻을 발명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덕이 성대한 자가 그것을 얻었지만, 만물과 더불어 같으니, 역시 이 뜻입니다. 우선 “경(敬)과 의(義)가 확립되면 만물과 더불어 똑같다”는 뜻을 완미해 보시면 마땅히 이해되실 것입니다. 아마도 다만 만물과 더불어 똑같음을 말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되겠지요.
易文言德不孤 正是發明大字意思 謂德盛者得之矣 然與物同亦是此意 試玩敬義立而與物同之意 當得之 恐不可云只是說與物同也
진부중(공석)에게 답함 答陳膚仲孔碩
【해제】1184년(甲辰, 宋 孝宗, 淳熙 11년) 주자 55세 때의 편지이다. 시경의 서문을 논하면서, 경전의 傳注는 오히려 경전 본래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뒷부분에서는 陸學이 禪學과 유사하다고 하면서도 그 좋은 점을 취하여 心身이 안정되어야 진보가 있다고 하였다.
시의 서문 가운데 의심나는 것에 대해 논하셨는데, 예전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벗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또한 그들과 극력 논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나의 생각을 드러내고 훗날의 아는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저(關雎)」 서문의 잘못은 물론이고, 논어의 뜻 또한 숙녀를 얻어 즐거워함이 지나쳐 음란해지지 않고, 얻지 못하여 슬퍼함이 지나쳐서 상하게 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바로 시의 글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서(序)는 분명하지 않으니, 애(哀)․락(樂)․음(淫)․상(傷)을 네 가지로 나누어 보았고, 또 이른바 ‘선(善)을 상하는 마음’이라고 한 것은 더욱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저 묵묵히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분주하게 다른 사람들과 변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구이지학(口耳之學)은 모두 마음으로 애써 찾으려 하지 않으니 함께 시비를 논하기가 어렵습니다. 대개 여러 경전의 글자들은 예전과 지금이 다르고 또 전주(傳注)가 방해가 되어서,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가 정밀하지 않으면 결국 명쾌하게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체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읽는 것만 못한데, 그것은 평이하고 분명하면서도 의미가 본래 깊고 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깊이 음미하고 의미를 찾고 연구하기만 하면 곧 바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육학(陸學)은 참으로 선학(禪學)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근래에 깨달은 것은 무주(婺州)의 벗들이 오로지 지식만을 일삼고 자신의 심신(心身)에 대한 공부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번 학자들에게 그 좋은 점을 겸하여 취하라고 권하였는데, 그것은 심신이 점점 바르고 안정되어야 비로소 의리(義理)에서 이치를 분별할 줄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하루아침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기를 바라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도(道)가 쇠하는 것은, 바로 학자들이 각자 자기 편의 것만을 지키려고 하여 여러 좋은 것들을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행하지 않는 폐단이 생기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答陳膚仲孔碩
所論詩序之疑 舊嘗有此論 而朋友多不謂然 亦不能與之力爭 姑著吾說 以俟後之知者而已 關雎序文之失固然 論語之意 亦謂其樂得淑女也不過而爲淫 其哀夫不得也不過而爲傷 正如詩文之謂耳 但序者不曉 乃析哀樂淫傷爲四事 而所謂傷善之心者 尤爲無理 此則不可不察也 然此等處姑黙識之 不須遽與人辨 今人耳學 都不將心究索 難與論是非也 大抵諸經文字有古今之殊 又爲傳注障礙 若非理明義精 卒難決擇 不如且讀論孟大學中庸 乎易明白而意自深遠 只要人玩味尋繹 目下便可踐履也 陸學固有似禪處 然鄙意近覺婺州朋友專事聞見 而於自己身心全無功夫 所以每勸學者兼取其善 要得身心稍稍端靜 方於義理知所決擇 非欲其兀然無作 以冀於一旦豁然大悟也 吾道之衰 正坐學者各守己偏 不能兼取衆善 斫以終有不明不行之弊 非是細事
진부중에게 답함 答陳膚仲
【해제】收心은 독서할 때만이 아니라 動靜의 상태 모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涵養 역시 마찬가지임을 말하고 있다. 뒷부분에서는 가용의 씀씀이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또 반복해서 여러 서적을 읽어 마음을 거두어들이는데, 함양(涵養)공부에 이르면 날마다 잃어버리는 것이 있어,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대저 독서라는 것은 마음을 거두어들이는데 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단지 독서를 할 때만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독서를 하지 않을 때는 곧 없어지는 것을 일삼는다면, 이 마음을 간직할 때는 항상 적고 방치할 때는 항상 많은 것입니다. 또 무슨 이유로 이 독서 공부를 독서하지 않을 때의 노력으로 옮겨서 동정(動靜) 양쪽에서 이 마음을 간직하지 않을 때가 없게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이른바 함양공부라는 것도 역시 눈을 감고 토우(土偶)같이 된 다음에야 그것을 함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일에 응하고 사물을 접할 때에 이 마음을 잃지 않아서 각각 그 이치를 얻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 서적에 대한 주해가 아직 정본(定本)이 없어서 그냥 이러한 답장만을 보내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기에서 힘을 얻으면 도리어 (경서의) 풀이를 보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가용(家用)이 부족한 걱정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의기가 지나치게 커서 일상생활에서 절약하고 따지는 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또 인정(人情)을 지나치게 자랑하고, 일에 대처하면서 헛되이 대단하게 보이려 하다가, 안은 비워 놓고 바깥의 것만 일삼는 폐단이 생기는 것을 면하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비록 인색하고 자질구레한 것과는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중(中)을 잃는 것은 같으니, 또한 마땅히 스스로 살펴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答陳膚仲
來書云 今且反復諸書以收心 至涵養工夫 日有所奪 未見其效 此又殊不可曉 夫讀書固收心之一助 然今只讀書時收得心 而不讀書時便爲事所奪 則是心之存也常少 而其放也常多矣 且胡爲而不移此讀書工夫向不讀書處用力 使動靜兩得而此心無時不存乎 然所謂涵養功夫 亦非是閉眉合眼如土偶人 然後譖之涵養也 只要應事接物處之不失此心 各得其理而已 諸書解偶未有定本 謾此奉報 可試思之 若於此得力 却遠勝看解也
聞有用度不足之憂 何故如此 豈非意氣太豪 日用間羞言撙節計量之事 而又多徇人情 應副求假 不免有虛內事外之弊耶 此雖與吝嗇鄙細者相去懸隔 然其爲失中則均 恐亦當自省而改之也
진부중에게 답함 答陳膚仲
【해제】1189년(己酉, 宋 孝宗 淳熙16) 주희 60세 때의 편지이다. 科擧文字의 폐단을 걱정하고 있다. 또 辭職을 청하는 것은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 아닌데 세속에서는 그 뜻을 몰라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희의 거듭된 사직요청을 두고 세상에서 여러 말이 있었던 듯하다.
여러 글에서 교도(敎導)하시는 자세한 사정을 깨우쳐주신 것은 매우 좋습니다. 이 편지가 부승(傅丞) 편에 와서 비록 그 글을 얻지는 못했지만 부승이 근황을 다 말해주어서 인정이 자못 서로 믿음을 알았으니 충분히 기뻐할만합니다. 그러나 또 모름지기 스스로 힘써 의리에 정밀하게 통하고 실천이 견고하게 하시면 학자의 물음에 답하여 그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으니, 자신을 이루고 사물을 이루어주는 양쪽에 모두 결함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단지 규율과 상벌에만 의지하여 구속하면 또한 그 외적인 것들만을 가지런히 할 수 있을 뿐이니 결국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과거문자(科擧文字)는 실로 폐할 수는 없으나, 근래에는 신기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이 쏟아져 나와 휘저어놓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성실하고 정당한 생각이 없고, 오로지 한가지에만 천착하거나 곁가지로 구불구불 돌아가는 것을 신기하게 여깁니다. 영가(永嘉)가 가장 헛되고 정교하여 불미함이 더욱 심한데, 많은 후생들이 그를 종사(宗師)로 삼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막대한 폐단입니다. 지금까지 지공거(知貢擧)들은 대개 그것을 싫어할 줄은 알면서도 그 병통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도리어 한 글자나 한 구절을 들추어내어 하자로 삼아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습니다. 지금 그것을 바꾸고자 한다면 삼십년 전의 질박하고 중후하며 순정하고 분명하고 뛰어난 글을 취하여 외워서 모범으로 삼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이것은 또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고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는 한 가지 일이기도 합니다.
대학에 대한 설명은 어떻습니까? 근래에 왕자합(王子合)의 책을 얻었는데 그도 역시 이렇게 말하였고, 해석하신 뜻을 보내왔는데, 자못 상세하였습니다. 부중이 해석하신 것을 보지 못해 한스러웠는데 인편이 있어 다행히 기록하여 왔습니다. ‘혈구(絜矩)’란 글의 의미는 마땅히 상하 구절의 뜻을 반복해 보아야 하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말씀하신 것과 같다면 ‘노노흥효(老老興孝)’ 등의 구절과 혈구지도(絜矩之道)는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저는 두 해 동안 번잡스러웠는데 지금은 다행히 대강 안정되었습니다. 사직(辭職)이 아직 윤허가 나지 않아 이미 거듭 청하였습니다. 이것은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받을 만한 도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힘써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속에서는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람을 더 번민하게 합니다. 대학은 근래 더욱 정밀하고 안정되게 고쳐졌는데, 별도의 책이 없어 부쳐드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역계몽(易啓蒙) 태극(太極) 서명(西銘) 통서해의(通書解義) 학기(學記)각 한 권씩을 늦게나마 보냅니다. 사명(四明)과는 가끔이라도 소식을 주고받으십니까? 그의 서명설을 읽어 보셨습니까? 문리(文理)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감히 선배를 함부로 평가하여 사람을 평안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매우 가소롭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변론한 이치가 바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스스로 부끄러운 것은, 애초에 간절하고 지성스러운 마음이 없으면서 희롱하고 모욕하는 마음으로 실소를 했다는 것이니, 그리하여 (임률의) 원망하고 성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答陳膚仲
累書喩及敎導曲折 甚善 此傳丞便來 雖不得書 傳亦具言近况 知人情頗相信 足以爲喜 但更須自家勉力 使義理精通 踐履牢實 足以應學者之求而服其心 則成己成物兩無虧缺 如其不然 只靠些規矩賞罰以束縛之 則亦粗足以齊其外而已 究竟亦何益乎
科擧文字固不可廢 然近年翻弄得鬼怪百出 都無誡實正當意思 一味穿穴 旁支曲徑 以爲新奇 最是永嘉浮僞纖巧 不美尤甚 而後生輩多宗師之 此是今日莫大之弊 向來知畢輩蓋知惡之而不能識其病之所在 顧反決摘一字一句以爲瑕疵 使人嗤笑 今欲革之 莫若取三十年前渾厚締正明白後偉之文誦以爲法 此亦正人心作士氣之一事也
大學說得如何 近得王子合書 彼亦說此 寄得講義來 頗詳悉 恨未見膚仲所講 有便幸錄來也 ‘絜矩’文義更宜反復上下旬意 末可容易立說 若如所喩 則‘老老興孝’等句與絜矩之道有何交涉耶
熹兩年擾擾 今幸粗定 辭職未允 已再請矣 此非欲爲高 自是義無可受之說 不得不力辭 世俗不解人意 尤悶人也 大學近修得益精密平實 恨未有別本可寄去 易啓蒙太極西銘通書解義學記各一本謾往 四明頗通問否 曾見其讀西銘說否 全然不識文理 便敢妄議前輩 今人不平 然亦甚可笑也 向來辨論理非不直 所自愧者初無懇惻之意 而以戲侮之心出之 所以召怨而起鬧也
진부중에게 답함 答陳膚仲
【해제】1189년(己酉, 宋 孝宗 淳熙16) 주희 60세 때의 편지이다. 진부중이 질문한 내용에 대하여 독서를 비롯한 모든 일을 대충하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또 편지의 뒷부분을 보면 이 때 도학이 붕당을 짓는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희는 이러한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해 상당히 노력한 듯하다.
강설하는 순서가 또 이와 같아도 됩니다만 그러나 결국 평소에는 공부하지 않다가 이제와서 멋대로 임시변통으로 꾸며내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본래는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끝내 그렇게 되었거나, 본래 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할 수 없었던 것은 모두 규모가 정해지지 않고, 절조를 지키는 것이 견고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일을 지금부터는 더욱 자세하고 세밀하게 하여, 옳다고 생각하면 곧 자신의 생각을 굳혀서 결코 바꾸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와같이 해야 비로소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단지 이렇게 경솔하고 조급하게 대충 해버리면 결국 무엇을 이루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교도하는 한 가지 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혈구(絜矩)’는 의심할 만한 것이 더는 없으니, 다시 더 상세하게 음미하여 모름지기 구설(舊說)을 깨트려야 비로소 신설(新說)을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아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면, 쉽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근래에 벗들의 독서가 대부분 대충대충 되는 대로이고, 분명하게 이해한 적도 없으면서 바로 이렇게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또 그것이 이미 깨달은 것을 반복하여 완미하여서 언외의 다른 새로운 뜻을 알려는 것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문자를 이해하는 것은 다만 형식만 갖추는 것이니, 한 가지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알 듯 모를 듯 넘어가게 되어 전혀 성과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발분망식하고 시원스럽게 이해하여 모두 깨달아서 늙은이의 바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겠습니까?
서명(西銘)의 후제(後題)는 지난 해 아직 집을 떠나지 않았을 때 쓴 것이어서 후에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가 관련되어 있는 것이고 내가 또 그것을 바로잡았으므로 참으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중(仁仲)이 말한 것은, 편지를 받고 알려 주십시오. 그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인중은 반드시 변론할 필요가 없고, 오늘날의 세속이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스스로 도리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겨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곧 이 말이 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행(許行)의 병경(幷耕)과 백규(白圭)의 치수(治水), 20분의 1을 취하는 것과 같으니, 만약 요즘 사람들의 소견과 같다면 맹자가 또한 어찌 그들과 더불어 변론을 하셨겠습니까?
석전(釋奠) 의례는 정화오례(政和五禮) 중 <진설(陳設)>과 <행사(行事)> 두 조목 가운데 본래 서로 어긋나는 곳이 있는데, 저전(著奠)․희전(犧奠)․상전(象奠)․작헌(酌獻)․선성(先聖)․선사(先師) 일찍이 이 실수를 알지 못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남강(南康)에서 일찍이 예부(禮部)에 아뢰는 장계를 쓴 적이 있어 매우 상세히 그것을 논했습니다. 지금 그 판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왕백조(王伯照) 본은 아직 보지 못했으니 인편이 있으면 기록하여 보내주십시오. 아울러 완성된 수지(須知)를 보내주시어 더 참고해 보면 비로소 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화례는 다만 첫 장 ‘중추(中秋)’ 아래에 소략하고 빠진 것이 있어 이전에 내 생각을 밝힌 글 중에서 이미 개정했습니다. 근래에 베낀 판본은 바로 이 조목입니다. 만약 예전에 반포한 간행본이 있으면 살펴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태상(太常)에게 그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학기(學記)는 본래 마땅히 지어야 합니다만 근래에 도학(道學)이 붕당(朋黨)을 짓는다는 논의가 막 일어나는데, 무슨 이유로 이러한 주장을 하여서 비난을 야기하겠습니까? 이미 펼쳐진 것은 줄어들 수 없으니, 이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또 더군다나 한문공(韓文公)이 바로 문장을 지은 곳도 아니니, 사람들이 비웃어도 그것을 괴이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答陳膚仲
講說次第且如此亦得 但終是平日不曾做得工夫 今旋捏合 恐未必能有益耳 又有本不欲爲而卒爲之 本欲爲而終不能爲者 此皆規模不定 持守不固之驗 凡事從今更宜審細 見得是當 便立定脚跟 斷不移易亅如此方立得事 若只如此輕易浮泛 終何所成 不但敎導一事也 ‘絜矩’更無可疑 且更詳味 須破得舊說 方立得新說 不然 只是看得未透 末可容易下語也 近覺朋友讀書多是苟簡 未曾曉會得 便只如此打過 何况更要它更將已曉會得處反復玩味 言外別見新意 決是有所不能矣 以此理會文字 只是備禮 無一事做得到底 悠悠泛泛 半明半暗 都不成次第 如何得有一箇半箇發憤忘食索性理會敎十分透徹 少慰衰朽之望乎
西銘後題是去年未離家時所題 後來不能去得 然此是道理所繫 我且直之 固不容有所避也 仁仲所說 因書報及 謾欲知耳 所云不必置辨 今時流俗例爲此說 乃是自見道理不明 纔有此說 便有此說之害 如許行之竝耕 白圭之治水 二十取一 若似今人所見 則孟子亦何用與之辨耶
釋奠儀政和五禮中陳設行事兩條中有自相抵悟處 著尊犧尊象尊酌獻先墾先師 不知曾見此失否 向在南康 曾有申禮部狀 論之頗詳 今末必有本 但細考之可見 王伯照本却末見 有便幸錄寄 幷所定須知見寄 更加參考 方可刊行也 政和禮只首章仲秋下便疎脫 舊見申明中已改正 近寫得一本 却是此絛 如有舊日頒降印本 可檢看 不然卽託人於太常問之也
學記本當作 但近日道學朋黨之論方起 著甚夾由立此標棧 招拳惹踢耶 已展者不可縮 此却容斟酌耳 又况韓文公脚下不是做文章處 爲人指笑 却怪他不得也
진부중에게 답함 答陳膚仲
【해제】1189년(己酉, 宋 孝宗 淳熙16) 주희 60세 때의 편지이다. 絜矩之道에 대해서 진부중이 말한 것이 온당하지 않은 것은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 독서가 자세하지 않기 때문이니, 독서는 번거롭더라도 정밀하게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해 주고, 어른을 어른 대접 해주며, 외로운 사람을 구휼해 주는 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니, 모든 임금이 궁행(躬行)하여 그 아랫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대개 이 세 가지의 효과가 생겨나는데 이르게 되면 곧 나라가 다스려집니다.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이 본령(本領)의 효험(效驗)이 있고난 후에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혈구지도(絜矩之道)의 공에 이르게 되니, 이른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글의 형세가 매우 분명하여 의심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혈구지도를 할 수 없는 병통은 장구와 혹문의 세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그 재력을 빼앗아서 그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과 같은 것 역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또 어찌 다시 “고르지 않은 것에 분개하여 선심(善心)이 그것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십니까? 무릇 이러한 것들은 모두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지 않고, 책을 보는 것이 자세하지 않은 병통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석전례(釋奠禮)를 논한 글이 소략한 것과 대체로 서로 비슷하니, 마땅히 다시 깊이 살펴서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독서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다만 번거로움을 참고 자세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答陳膚仲
老老長長恤孤 正是治國之事 皆人君躬行以化其下者 至於有夫三者之效 則國治矣 故欲平天下者 必須先有此箇本領效驗 然後有以爲地而致其絜矩之功 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也 文勢甚明 無可疑者 其不能絜矩之病 章句或問三處說極分明 如來喩所謂奪其財力 使不得養其父母者 亦無疑矣 又何以更有 憤然不平 善心爲之不生之說耶 凡此等處 皆是處心不寧靜看書不子細之病 與前日所論釋奠禮文疎略處大抵略相似 更宜深以爲戒 讀書別無法 只要耐煩子細是第一義也
진부중에게 답함 答陳膚仲
【해제】1189년(己酉, 宋 孝宗 淳熙16) 주희 60세 때의 편지이다. 집안에 일이 많더라도 바로 거기가 학문의 장임을 역설하고 있다.
집안 일이 산적해 있다는 편지를 받고 학문에 방해가 될까 걱정했습니다만, 이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곧 힘써 배울 수 있는 현장일 뿐입니다. 다만 매사에 도리를 보고 쉽게 놓치지 않게 하며, 또 그 가운데서 평소의 병통을 보아서 통렬하게 잘라버리면 학문을 하는 도가 어찌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물리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이치와 일이 오히려 두 가지로 나누어지니 독서 또한 쓸데가 없습니다. 다만 잠깐의 틈이 생기면 한가하게 않아 이야기나 하면서 시일을 보내버리면 안되니, 반드시 남몰래 조금의 공부라도 하고, 약간의 문자라도 보아서 성현께서 말씀하신 도리를 궁구하면, 본원(本原)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지엽(枝葉)도 자연히 넓고 왕성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答陳膚仲
承以家務叢委 妨於學問爲憂 此固無可奈何者 然亦只此便是用功實地 但每事看得道理 不今容易放過 更於其間見得平日病痛 痛加翦除 則爲學之道何以加此 若起一脫去之心 生一排遣之念 則理事却成兩裁 讀書亦無用處矣 但得少間隙時不可閑坐說話 過了時日 須偸些小工夫 看些小文字 窮究聖賢所說底道理 乃可以培植本原 庶幾枝葉自然張旺耳
등덕수(린)에게 답함 答滕德粹璘
【해제】1176년(丙申, 宋 孝宗, 淳熙 3년) 주희 47세 때의 편지이다. 여기에서 주희는 과거공부와 노․불에 대한 공부는 그만두고, 공맹과 정자의 학문을 연구하라고 권하고 있다. 특히 논어로부터 공부를 시작할 것을 말하였다.
저와 그대가 비록 다행히 같은 지역 사람이지만, 선대로부터 이미 고향을 떠나서 중간에 겨우 한번 돌아가 무덤을 쓸고, 인척들을 돌아보았을 뿐입니다. 지금 또 20여년인데, 그간에 향리에 연고를 둔 뛰어나고 젊은 후배들을 사귀어 알게 되었는데, 헤아려보니 서로 기록하여 남기지 않은 것 또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분께서는 여전히 순순히 글을 바로잡으며, 말씀하시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성대해지니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의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바로 제가 고향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니 매우 다행입니다.
대개 학자가 그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할까 걱정하고, 그것이 폐해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할까 걱정하는 것은, 이 때문에 갈림길에서 배회하다가 좆아 들어갈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대가 이미 정(程)씨의 학문이 공맹(孔孟)이 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그 책을 읽었고, 또 과거(科擧)가 뜻을 빼앗는다는 것과 불노(佛老)가 결국 귀의하는 것은 모두 부족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또한 옳은 것을 쫒아서 취사(取舍)를 정하면 그뿐이지, 다시 무슨 의심이 있어 천리나 떨어져 있는 제게 물으십니까? 물리쳐버리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국 가슴 속에서 털어버릴 수가 없고,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또 번잡스럽게 한꺼번에 진행되어, 많이 하려하고 빨리 하려는 뜻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러한 것을 알아도 망연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탄식을 벗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그대가 진실로 뜻을 가지고 있으면 저것은 잠시 놓아두고 여기에 정밀함을 다하여, 책 한권을 취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날마다 완미하여 한 두 장도 지나치지 말고, 생각하고 궁행하여 다시 다른 책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책을 끝내고 후에 다시 수업을 하면, 오래도록 점차 젖어 들어서 마음이 안정되고 이치가 밝아져 장차 자득함이 있을 것입니다. 논어 한 책은 성문(聖門)의 절실한 가르침이니 정(程)씨가 가르침에 우선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대가 저의 말을 불신하지 않는다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손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니 다른 것은 언급할 겨를이 없습니다. 형제분의 편지는 달리 지적할 것이 없으니 다시 따로 편지를 보내지는 않겠습니다.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答滕德粹璘
僕與足下雖幸獲同土壞 而自先世已去鄕井 中間才得一歸 掃丘墓省族姻 今又二十餘年 以故於鄕里後來之秀少所接識 計其不相存錄亦已久矣 而昆仲乃獨惠然枉書 道說過盛 非所敢當 然所論爲學之意 則正區區所望於鄕人者 甚幸甚幸
夫學者患不知其所婦趣與其所以蔽害之者 是以徘徊岐路而不能得所從人 今足下旣知程氏之學不異於孔孟之傳而讀其書矣 又知科擧之奪志佛老之殊歸皆不足事 則亦循是而定取舍焉爾 復何疑而千里以問於僕之不能耶 意者於其所欲去者旣未能脫然於胸中 所欲就者又雜然竝進而不無貪多欲速之意 是以雖知其然而未免於茫然無得之歎耳 足下誠若有志 則願暫置於彼而致精於此 取其一書 自首而尾 日之所玩不使過一二章 心念躬行 若不知復有他書者 如是終篇 而後更受業焉 則漸涵之久 心定理明而將有以自得之矣 論語一書 聖門親切之訓 程氏之所以敎尤以爲先 足下不以愚言爲不信 則願自此書始 因風寓謝 他未暇及 昆仲書無異指 故不復別致 幸察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76년(丙申, 宋 孝宗, 淳熙 3년) 주자 47세 때의 편지이다. 등덕수가 병이 들어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 낫기를 빌었다는 말을 듣고, 그러한 행위는 자신의 입지가 안정되지 못해서 생긴다는 말로 깨우치고 있다.
병이 있어서 신에게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미혹된 일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대개 이치를 분명하게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환이 닥쳐오는데 본래의 입지가 안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갑자기 미혹됨이 밝아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또 스스로 규범을 삼가 지키고, 한편으로 강학(講學)하고 궁리(窮理)해야 합니다. 성현(聖賢)께서 이 일에 대해 말씀하신 곳을 만나면 곧 더욱 힘을 쓰고 특별히 주의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공부가 쌓이고 오래도록 젖어가면 하루아침에 홀연히 밝게 열리는 곳이 있어 자연히 미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그렇지 못하니, 또 성현의 훈계를 삼가 지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신 “감히 자신(自信)하지는 못하나 그 스승은 믿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이 하면 비로소 머무를 곳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저리 흔들리고 깊이 빠져서 끝내 스스로 설 수 없게 됩니다.
答滕德粹
所問檮枸之惑 此蓋燭理未明之故 又爲憂患所迫 故立不定 今雖未能遽明 但且謹守自家規矩 一面講學窮理 遇聖賢有說此事處 便更著力 加意理曾 積累功夫 漸漬日久 一旦忽然有開明處 便自然不爲所惑矣 今未能然 且當謹守聖賢訓戒 以爲根脚 如程子所謂不敢自信而信其師者 始有寄足之地 不然 則飄搖沒溺 終不能有以自立矣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81년(辛丑, 宋 孝宗, 淳熙 8년) 주자 52세 때 등덕수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보시(補試)의 득실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보시의 방(牓)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것을 계획하는 것은 또한 득실의 구분이 정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득실을 헤아리는 마음을 끊어버릴 수 없어 쓸데없이 스스로 혼란스러우면 어찌 득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또 그것이 학문의 도에 해가 되는 것은 작지 않습니다. 대개 물욕(物欲)과 이해(利害)의 사사로움이 날마다 가슴 속에서 싸우면 또한 어느 틈에 완색(玩索)하고 존양(存養)의 공부를 하겠습니까? 근사록에 의심되는 것이 있더라도 깊이 그것을 완미하면 저절로 그 차제(次第)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전일(專一)하지 않으면 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答滕德粹
補試得失如何 此不見補試牓 然計此亦分定矣 雖斷置不下 徒自紛紜 豈能移易毫髮於其間哉 而其所以害夫學問之道者 則爲不細 蓋物欲利害之私日交戰於胸中 亦何暇而及於玩索存養之功也耶 近思所疑 但熟玩之 自當漸見次第 但恐心不專一 則無由可通耳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84년(甲辰, 宋 孝宗, 淳熙 11년)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지방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임지(任地)에 도착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민정(民情)의 득실을 필경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마땅히 매사에 특별히 주의하여, 일의 사정에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칠 수 있으면 그 맡은 일에 충실할 수가 있고, 또 녹미(祿米)에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현자들을 가까이 하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항상 더욱 더 지수(持守)하고 강습하는 노력을 더하여 그 원대한 것을 구하는 것이 곧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答滕德粹
到官旣久 民情利病必已周知 更宜每事加意 使隨事有以及人 則亦可以充其職業而無愧於廩食矣 親炙諸賢 想亦有益 日用之間 常更加持守講習之功 以求其遠者大者 則區區之所願也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84년(甲辰, 宋 孝宗, 淳熙 11년)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지방관으로 일하면서도 틈틈이 독서를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등덕수의 종조부인 등남부의 문집인 계당잡문에 서문을 짓는 일을 말하고, 불교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관리가 한가하면 독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는 모르십니까? 세월이 유수와 같으니 헛되이 지내기가 쉽습니다. 그곳의 친구들이 편지를 보냈는데 덕수(德粹)의 어짊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원컨대 더욱 힘쓰고 탐구하는 노력을 더하여 다른 때에 서로 만났을 때 물어볼 만한 의심이 없게 하지 않는 것이 소망일뿐입니다.
계당잡문(谿堂雜文)은 오래전에 서문을 쓰고자 했으나 당시 수습된 것이 너무 적어, 시편(詩篇)과 사륙문(四六文) 이외에 잡문(雜文)이 겨우 두 편이 있었는데, 또 당시에 힘쓸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드러내 밝힐 만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통상 제목을 붙이지 않은 글 한편을 짓지 못한 까닭으로 지지부진하게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여전히 이 사람에게 서문 짓는 일을 맡겨두려 하시니, 초고가 완성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또 요 며칠간 여러 곳의 사람들이 글을 독촉하여 매우 피곤하여 조금 더 기다려야만 할 듯 합니다. 석(釋)씨의 설이 쉽게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은 참으로 편지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좋아할 것이 있는 것 같다’는 말과 같은 것은 이미 중독된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 유학에서 진보한 곳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음성(淫聲)이나 미색(美色)과 같이 그것을 멀리하고자 해도 이미 일에까지 미칠 수 없을 것이니, 해독(害毒)이 점점 스며들고 점점 허물어트리는 것이 날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答滕德粹
知官閑頗得讀書 不知做得何工夫 歲月如流 易得空過 彼中朋友書來 多稻德粹之賢 然鄙意所望者 則不止此 願更勉力 益加探討之功 勿今異時相見無疑可問 乃所望耳 谿堂雜文久欲爲作序 但以當時收拾得太少 詩篇四六之外 雜文僅有兩篇 想亦未是當時著力處 未有意思可以發明 又不成只做一篇通用不著題底文字 以故遲遲至今 欲留此人 等候草成附去 又此數日正爲諸處人督迫文字 困憊殊甚 不免且小須也 釋氏之說易以惑人 誠如來喩 然如所謂若有所喜 則已是中其毒矣 恐須於吾學有進步處 庶幾可解 不然 雖欲如淫聲美色以遠之 恐已無及於事 而毒之浸淫侵蝕日以益深也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논어의 해석에서 정자의 설을 중요시 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말로 학문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보내주신 논어 설의 한 구절은 매우 좋습니다만 정(程)선생의 설은 본래 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실질적인 일을 하면서 거기에서 설을 미루어서 크게 넓힌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또 장애만 생길 것입니다. 또 글을 보고 또 마음을 비워 실제 노력할 곳을 체인(體認)하여, 자신이 힘쓸 곳에 나아가야 비로소 실효(實效)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한결같이 이렇게 글만 지으신다면 도리어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대개 학문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공부로 여깁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유유자적 머뭇거리기 하면서 자못 개혁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마땅히 통렬하게 스스로 채찍질해야 바라는 바에 부합할 것입니다.
答滕德粹
所示語說一絛甚善 但程先生說自不可廢 今作實事推說太廣 却恐又有礙也 兼看文字且虛心體認實用工處而就己分用力 方有實效 若一向只如此立說 却不濟事也 大抵學問以變化氣質爲功 不知向年遲緩悠悠意思頗能有所改革否 若猶未也 更須痛自鞭策 乃副所望耳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학문의 대의를 알지 못하고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책을 보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편지에서 장주(莊周)의 책을 읽었다고 하셨는데, 그냥 대충 보는 것은 무해(無害)하지만 깊이 유의(留意)하여 보시면 안됩니다. 만약 이미 학문을 하는 중요한 단서를 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명도(明道)에 견준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 듯 합니다. 명도는 당시에 이미 대의를 알았으나 아직 그 설이 서로 비슷한 것을 의심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중시했으나 결국에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을 서로 모아보면, 덕수가 이 이치에서 본 것이 어떤 단적(端的)인 것은 아닌 듯하나, 또 아직 불가(佛家)의 이론에 대해 의심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다시 장주(莊周)의 설로 그것을 조장하면, 아마도 정처없이 떠돌게 되어 스스로 확고히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여러 선생들의 논의가 세상에 전하여 득실이 이미 분명해졌으니 다시 그 때에 비유할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저 대충 보는 것을 논한다면 곧 세간의 글을 모두 보고 지나가야하니 또 장자(莊子)만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오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기회를 타서 이 계획을 빨리 결정짓는 것이 낫겠습니다. 세월은 쉽게 지나가고 노쇠한 사람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정말 필경 이 일을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너무 꾸물거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答滕德粹
示喩讀莊周書 泛觀無害 但不必深留意耳 若謂已知爲學之大端而自比於明道 則恐未然 明道乃是當時已見大意 而尙有疑其說之相似 故始雖博取而終卒葉之 向來相聚 見德粹似於此理見得未甚端的 且尙不能無疑於釋子之論 今若更以莊周之說助之 恐爲所漂蕩而無以自立也 况今日諸先生議論流傳於世 得失已分明 又非當日之比耶 若論泛觀 則世間文字皆須看過 又不特莊子也 承有意此來 不如乘間早決此計 流光易失 衰老尤不可恃 果欲究竟此事 似不宜太因循也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89년(己酉, 宋 孝宗 淳熙16) 주희 60세 때의 편지이다.
제가 지난번에 황제의 명령을 거듭 사직하고 다시 함부로 사록을 차지하였으니 또 문을 닫아걸고 말할 만한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전의 편지에서 깨우쳐 주신 바, 도(道)를 배우고 사람을 사랑하는 뜻을 잘 알았으나, 물러나 숨으려는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선생님의 말씀을 받들어 응할 수가 없습니다. 고향의 견세(絹稅)는 근래에 드디어 조세를 감면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또한 매우 다행입니다.
答滕德粹
熹昨者再辭恩命 復叨祠祿 幸且杜門 無足言者 前書所喩 深悉學道愛人之志 然退藏之計已決 不獲奉以周旋 囗鄕州絹稅近遂有蠲減之命 亦足爲慶也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86년(丙午, 宋 孝宗 淳熙13년) 주희 57세 때의 편지이다. 등덕수가 논어의 ‘禮之用 和爲貴’라는 구절과, 仁과 知의 動靜에 대하여 질문하였는데, 이 편지에서는 등덕수의 물음에 주희가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가 근래에 논어의 “예(禮)의 쓰임이 조화가 귀하다”라는 구절을 읽고, 여러 사람들이 대부분 화(和)를 락(樂)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를 조화는 참으로 즐겁지만 곧 화(和)를 락(樂)으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듯하니, 모름지기 예(禮) 가운데서 스스로 소위 화(和)를 구해야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장로(長老)에게 여쭈어보니 혹 가르침을 베풀어 말하기를, “이른바 예(禮)라는 것은, 천존지비(天尊地卑)하니 건곤(乾坤)이 정하여지고, 낮고 높음이 진설되니 귀천(貴賤)이 자리 잡는 것과 같으니, 분명하고 매우 엄하다. 그 쓰임에 이르면 천도(天道)는 아래로 사귀어 광명(光明)하고, 지도(地道)는 낮아서 위로 행하니, 이것이 어찌 화(和)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당시에 그것을 듣고 아주 그렇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니 또한 모호하기만 하여 필경에는 예(禮)중의 화(和)는 드러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곡례(曲禮)에서 늘어놓고 있는 예(禮)의 조목이 매우 자세한데 어떤 것이 화(和)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화(和)는 실로 곧 락(樂)을 가리킬 수는 없지만 락(樂)이 말미암아 나오는 바입니다. 말씀하신 것 또한 매우 마땅하니, 예컨대 곡례의 조목은 모두 예입니다. 그러나 모든 도리와 정의가 마땅하고, 인정(人情)이 편안해 하고, 그것을 행하여 상하(上下)와 친소(親疎)가 각각 그 자리를 얻으면 어찌 화(和)가 아니겠습니까?
집안 동생인 공(珙)이 근래 태학(太學)으로부터 편지를 보내어 인(仁)․지(知)의 동정(動靜)에 관한 설을 물어왔는데, 아마도 태학에서 요즘 논제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한 것은 다만 “인(仁)의 정(靜) 또한 일찍이 동(動) 아닌 적이 없으나 대체(大體)는 곧 정처(靜處)가 인(仁)이고, 지(知)의 동(動) 역시 일찍이 정(靜) 아닌 적이 없으나 대체(大體)는 곧 동처(動處)가 지(知)”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장이 모호하여 결국은 동정(動靜)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의(精義)를 취하여 읽었는데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구절을 자세히 완미했더니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합니다. 대개 어진 사람이 정(靜)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동(動)할 뿐이지, 인(仁)․지(知)는 동(動)하고 정(靜)하지 않으니, 곧 어진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정(情)과 성(性)이 혹은 동(動)하거나 혹은 정(靜)할 뿐입니다. 그런데 말하는 자는 다만 인(仁)․지(知)에 나아가 동정(動靜)을 구하므로 대부분의 말이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원(圓)은 동(動)이고, 모난 것<方>은 정(靜)이지만 곧 방(方)과 원(圓) 자체를 가리켜 동정(動靜)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비록 이렇게 이해했지만 아직 인자(仁者)가 정(靜)한 것과 지자(知者)가 동(動)한 것이 어떻게 형용되는지 알지 못하니 선생님께서 자세히 살펴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인자(仁者)는 돈후(敦厚)하고 화수(和粹)하여 의리(義理)에 편안하므로 정(靜)하고, 지자(知者)는 명철하고 확 트여서 일의 변화에 통달하므로 동(動)합니다. 그러나 인지(仁智) 두 글자의 기상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저절로 동정처(動靜處)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니 비단 문자에서만 행하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答滕德粹
璘近讀論語禮之用 和爲貴 觀諸家解多以和爲樂 璘思之 和固是樂 然便以和爲樂 恐末穩當 須於禮中自求所謂和乃可 因問之長上 或設喩以見告曰 所謂禮者 猶夫尊地卑而乾坤定 卑高以陳而貴賤位 截然甚嚴也 及其用 則天道下濟而光明 地道卑而上行 此豈非和平 璘當時聽之 甚以爲然矣 已而思之 亦恐只是影說過 畢竟禮中之和不可見 望先生有以敎之 如曲禮所陳禮之倏目甚詳 不知何者爲和乎
和固不可便指爲樂 然乃築之所由生 所設喩亦甚當 如曲禮之目皆禮也 然皆理義所宜 人情所安 行之而上下親疎各得其所 豈非和乎
舍弟珙近自太學附信歸 問仁知動靜之說 蓋學中近以爲論題也 然說者只云仁之靜亦未嘗不動 而大體則靜處是仁 知之動亦未嘗不靜 而大體則動處是知 多是以文辭影說過 畢竟不明言動靜如何 璘取精義讀之 亦未能曉 因子細玩味此兩句 乃若有所曉 蓋仁者靜 知者動 仁知非動靜也 乃仁知之人其情性或動或靜耳 而說者只就仁知上求動靜 所以多說不明 警如圓者動 方者靜 不可便指方圓爲動靜也 然璘雖曉得如此 却未知仁者之所以靜知者之所以動如何形容 望先生詳賜指敎
仁者敦厚和粹 安於義理 故靜 知者明徹疏通 達於事變 故動 但詳味仁智二字氣象 自見得動靜處 非但可施於文字而已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90년(庚戌, 宋 光宗 紹熙元年) 주희 61세 때의 편지이다. 편지 가운데 ‘ 노쇠함과 병이 날로 침노하여 물러나고자 해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바로 장주(漳州)의 태수로 있을 때이다.
자세한 편지를 보내주시어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진실로 사사로운 정(情)이 정리(正理)를 이길 수 없게 할 수 있다면 분명 의탁할 만한 경지이니, 반드시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혹 그렇게 할 수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서(序)와 기(記)를 지은 것이 혹 세속의 정서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했다는 것은 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는 또한 감히 그 실질을 아주 멀리 하지는 않았으니, 후일에 좋은 독자는 당연히 그것을 자득(自得)할 것입니다. 노쇠함과 병이 날로 침노하여 물러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으니 곧 백성의 일은 감히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부(可否)는 또 어찌 기필할 수가 있겠습니까? 잠시 열 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이전에 했던 청을 다시 거듭할 뿐입니다. 순수(淳叟) 국정(國正)과는 때때로 서로 만나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강론이 있었습니까? 방장(方丈)의 계획 또한 때때로 만나보는 것입니다. 인편이 있어 이 편지를 부치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항상 학문에 힘쓰고 자중하시기를 천만번 바랍니다.
答滕德粹
示喩縷縷 備悉 但若果能眞使私情不勝正理 便是確然可據之地 不必舍此而他求也 顧恐或未能耳 記序之作 或不免俯徇俗情 誠如來喩 然其間亦不敢甚遠其實 異時善讀者當自得之也 衰病日侵 求去未獲 便民之事 所不敢忘 然其可否亦何可必 少須旬月 復申前請耳 淳叟國正想時相見 有何講諭 方丈計亦時會見也 因便附此 草草 惟千萬以時進學自重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84년(甲辰, 宋 孝宗, 淳熙 11년)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鄞縣에 부임한 등덕수에게 백성을 사랑할 것을 당부하고, 그것의 선비들과 교유할 것을 권하고 있다.
보내주신 사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대저 관직을 지켜서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 다른 일은 미리 논하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사명(四明)에는 현사(賢士)들이 많아 종유할 만합니다. 의심스러운 것을 상의하여 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을 하고 수신(修身)을 하는데 이르기까지도 모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양경중(楊敬仲簡)과 여자약(呂子約監米倉)이고, 소문을 들은 자는 심국정(沈國正煥), 원화숙(袁和叔燮) 등이니 거기에 도착하면 모두 종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答滕德粹
示問曲折具悉 大抵守官且以廉勤愛民爲先 其它事難預論 幸四明多賢士 可以從遊 不惟可以咨決所疑 至於爲學修身 亦皆可以取益 熹所識者楊敬仲簡 呂子約監米倉 所聞者沈國正煥 袁和叔燮, 到彼皆可從游也
등덕수에게 답함 答滕德粹
【해제】1187년(丁未, 宋 孝宗, 淳熙 14년) 주희 58세 때의 편지이다.
저는 겨울이 오면서 오히려 조금씩 건강해져서 다행인데, 정사(正思)와 숙중(叔重)이 와서 며칠간 머물렀으니 또한 홀로 떨어져서 쓸쓸히 지내는 처지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벗인 형제분께서는 요즘 공부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절실하고 통렬하게 더욱 힘쓰고 전일하게 공부하여 엉뚱한 곳에 이르지 않고 헛되게 시일을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答滕德粹
熹冬來却幸稍健 正思 叔重來 得數日之款 亦足少慰離索 但念吾友昆仲不知近日功夫如何 切宜痛加矯厲 專一用功 庶幾不至悠悠 虛度時日也
등덕장(공)에게 답함 答滕德章珙
【해제】1184년(甲辰, 宋 孝宗, 淳熙 11년)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등덕장은 등덕수의 동생이다. 당시의 학자들이 과거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병통을 말하고 그것을 깨우쳐주도록 말하고 있다. 또 글은 지나치게 꾸밀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가르치시는 마을에 와서 배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나니 매우 좋습니다. 대개 요즘의 후생들은 과거(科擧)를 중요하게 여겨 다른 사람이 좋은 말을 하는 것을 들을 겨를이 없으니 이것이 큰 병통입니다. 마땅히 먼저 함께 이 병에 대하여 털어놓고 말하여, 그들이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명(命)을 기다리도록 한 후에야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신(心身)을 수습하도록 깨우쳐주고 의리(義理)를 토론하면 차제에 당연히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서문은 매우 아름답지만 문자는 다만 뜻을 통하는 것을 취하면 될 뿐이니, 반드시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럽거나 변론이 공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答滕德章珙
知敎授里門 來學者衆 甚善甚善 大抵今日後生輩以科擧爲急 不暇聽人說好話 此是大病 須先與說破此病 今其安心俟命 然後可敎 告以收拾身心 討論義理 次第當有進耳 序文甚佳 文字只取達意而已 正不必過爲華靡辨巧也
등덕장에게 답함 答滕德章
【해제】1184년(甲辰, 宋 孝宗, 淳熙 11년)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등덕장이 경전의 여러 구절에 대하여 물어온 듯한데, 거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대답하고 있다.
보내주신 대학에 대한 설은 매우 좋습니다. 제가 예전에 썼던 것은 근래에 수정을 가하여 조금 조리를 갖추었습니다. 부족한 것을 보충한 부분은 바로 편지로 보내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사람을 시켜 베껴 쓰게 하였는데 아직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의(義)와 이(利)에 대하여 말한 것은 좋지만 ‘청송(聽訟)’에 대하여 운운한 것은 반드시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자(君子)는 인(仁)에 머문다’ ‘인(仁)을 체득(體得)하여 충분히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수 있다’ ‘윗 자리에 있으면서 관대하지 않다’는 등의 말은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윗사람이 되어서 이러한 뜻이 없으면 상하(上下)가 서로 어긋나고 단절되어 서로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인용하신 기오(淇奧)의 시는 다만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이 충만하고 성대하게 베풀어지고 드러나는 것을 형용한 것일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예전의 해석이 매우 상세하니 다시 숙고하면 마땅히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答滕德章
示喩大學之說 甚善 熹舊所爲書 近加修訂 稍有條理 補闕處正如來喩矣 令人抄寫 未得奉寄也 所論義利之說得之 聽訟之云 則不必如此說 君止於仁 以體仁足以長人 居上不寬等語 觀之可見 蓋爲人上者無此意思 卽上下乖睽壅隔而無以相有矣 所引淇奧詩但以形容盛德至善之充盛宣著耳 其餘則舊解已詳 更熟考之 當自見也
등덕장에게 답함 答滕德章
【해제】1184년(甲辰, 宋 孝宗, 淳熙 11년)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등덕장이 향시에서 떨어진 일을 위로하고, 육상산이 중요시하는 마음을 지키는 일과 강학을 함께 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내 벗이 향시(鄕試)에서 성공하지 못하여 사우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머무르고 빨리 나가고는 때가 있어 깊이 생각할 만한 것이 못되니, 또 마땅히 힘써 배우고 자신을 닦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육선생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학자들이 어지러운 심신을 거두어들이는데 매우 공이 있지만, 강학취향은 역시 느슨하게 할 수 없으니 마땅히 양 쪽이 함께 나아가도록 해야 좋을 것입니다. 저는 병을 앓고 나서 쇠약해져서 감히 글을 볼 수가 없고 애를 쓰다가 병이 날까 두려울 뿐입니다. 후생이 사리에 밝고 민첩하니 또 마땅히 힘써 공부하고, 이것을 본보기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答滕德章
吾友秋試不利 士友所歎 然淹速有時 不足深計 且當力學修己爲急耳 陸丈敎人 於收歛學者散亂身心甚有功 然講學趣向亦不可緩 要當兩進乃佳耳 熹病餘衰耗 不敢看文字 恐勞心發病耳 後生精敏 且當勉學 未可以此爲例也
등덕장에게 답함 答滕德章
【해제】1184년(甲辰, 宋 孝宗, 淳熙 11년) 주자 55세 때 의 편지이다. 장남헌과 여동래의 글을 모아 편집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저는 쇠약함과 병이 더욱 심하여 말할 수도 없습니다. 남헌(南軒)의 글을 근래에 비로소 엮어서 한 권을 얻었으나 아직 감히 다 싣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동래(東萊)의 글은 그 동생이 편정(編定)하면 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서점들이 모두 이미 함부로 유통시키고 있는데, 그것을 금하여 못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계당(溪堂)의 서발(序跋)을 보내주셨는데 이것은 참으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병으로 생각이 혼미하고 심란하여 글을 짓기가 매우 어렵고, 또 부족한 제가 빚을 지고 있는 글이 너무 많아서 반드시 조금 틈을 내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덕수(德粹)가 새로운 사람이 오는 것 때문에 행적이 자못 불안하다고 들었습니다. 벼슬을 하는데 이런 일을 당하는 것 역시 명(命)입니다. 다만 마땅히 도로써 스스로를 지키고 가볍게 굽혀서는 안됩니다.
答滕德章
熹衰病益侵 無足言者 南軒之文近方爲編得一本 然尙有不敢盡載者 東萊文字 須其弟編定乃可行 然近日書坊皆已妄有流傳 不可得而禁戢矣 示諭溪堂序跋 此固所不忘 但年來病思昏憒 作文甚艱 又欠人債負頗多 須少暇乃可爲耳 聞德粹以新侯之來 頗不安迹 仕宦遭此 是亦命 但當以道自守 不可輕爲之屈也
등덕장에게 답함 答滕德章
【해제】1187년(丁未, 宋 孝宗, 淳熙 14년) 주희 58세 때의 편지이다.
덕수(德粹)가 와서 다행히 정성스럽게 대접하였는데, 한스러운 것은 그대가 멀리에 있어 서로 함께 모이는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조정에서 황제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 매우 훌륭하여 여러 번 거듭 찬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등제(登第)하였으니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둘 수 있을 것이고, 또 열심히 하시어 평소에 기약하고 바라던 뜻에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간의 자세한 사정은 덕수가 돌아가서 말 할 것이니 누누이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答滕德章
德粹之來 幸此款曲 所恨賢者在遠 未遂合幷之願耳 廷對甚佳 三復增歎 然今旣得脫去場屋 足以專意爲己之學 更望勉力 以慰平日期望之意 此間曲折 德粹歸想能言之 不復縷縷也
등덕장에게 답함 答滕德章
【해제】1187년(丁未, 宋 孝宗, 淳熙 14년) 주희 58세 때의 편지이다. 合肥令으로 가있는 덕수에게 정사(政事)와 학문에 모두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고을이 궁벽지고 벼슬은 낮으니 생각 역시 쓸데없는 일을 삼가십시오. 그러나 장부에 기록하는 일을 다 없애는 것은, 그와 관련되어 있는 일이 가볍지 않고 정사(政事)란 본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가한 날에는 어떤 책을 읽으십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학문은 따로 다른 기교가 없으니 다만 전일함을 지키고, 익히고 외는 일을 정밀하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은 모두 전일(專一)하고 유구(悠久)함을 공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주 바뀌고 사이가 생기면 실패하게 되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안정(安定)의 시는 예전에 보지 못한 것인데, 온화하고 화평하여 진정으로 덕이 있는 언어입니다.
答滕德章
縣僻官卑 想亦少事 然勾銷簿鈔 所繫不輕 政自不可忽也 暇日讀何書 作何事業 學問別無他巧 只要持守純固 講誦精熟耳 兩事皆以專一悠久爲功 二三間斷爲敗 不可不深念也 安定語舊所未見 溫潤和平 眞有德之言也
등덕장에게 답함 答滕德章
【해제】1195년(乙卯, 宋 寧宗 慶元元年) 주희 66세 때의 편지이다. 여러 책의 간행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는데, 편지의 말미를 보면 주희가 사람들이 道學을 僞學이라고 비난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가 된지 이미 오래되어 학정(學政)을 듣는 일도 많이 익혔으니, 학자들과 책을 펼쳐놓고 논의할 겨를도 있을 것이고, 또한 자연히 수양을 하는 유익함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쇠약함이 더 심해져서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곳에 있을 때 사경(四經)과 사자(四子)를 간행했는데, 당시에는 교감이 매우 자세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보니 그 중에 여전히 오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경 「우공(禹貢)」의 ‘궐공우모(厥貢羽毛)’의 우(羽)는 우(禹)로 잘못 쓰였고, 시경 「하무(下武)」의 ‘삼후재천(三后在天)’의 삼(三)은 왕(王) 자로 잘못 쓰였습니다) 지금 다 기록할 수는 없으니, 혹 훑어보다가 이러한 종류의 것을 만나면 장인(匠人)을 시켜 그때그때 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역음훈(古易音訓)의 가장 나중의 몇 판은 고치고 싶은 곳이 있어서 지금 적어 보냅니다. 모두 바꾸고 싶은 것은 두 판이고, 아울러 제 34판 끝 줄의 다섯 글자도 바꾸고 싶습니다. 이것은 이미 원판의 크기와 행과 글자의 소밀(疏密)함에 따라 쓴 것이니, 지금 사람을 시켜 이것을 따라 옮겨 적게 하여, 보는데 착오가 없도록 한 다음에 장인에게 분부하여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다만 구판(舊版)을 개수(改修)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조용하게 하여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과 함께 따지다보면 반드시 위학(僞學)이라 하여 서로 헐뜯고 비난하며 도리어 그것을 널리 퍼트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答滕德章
到官旣久 聞學政甚修 想見橫經之暇 亦自不妨進修之益也 熹衰病益侵 無足言者 鄕在彼刊得四經四子 當時校勘自謂甚子細 今觀其間乃猶有誤字 如書禹貢 厥貢 羽毛 之羽誤作禹字 詩下武 三后在天之 三誤作王’字 今不能盡記 或因過目遇有此類 幸今匠人隨手改正也 古易音訓最後數版有欲改易處 今寫去 所欲全換者兩版 幷第三十四版之末行五字 此已是依元版大小及行字疎密寫定 今但只今人依此寫過 看今不錯誤 然後分付匠人改之爲佳 此只是脩改舊版 但密爲之 勿以語人 使之如不聞者乃佳 若與人商量 必有以僞學相沮難 反致傳播者 此不可不戒也
임자옥(진)에게 답함 答林子玉振
【해제】1173년(癸巳, 宋 孝宗, 乾道 9년) 주자 44세 때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주희의 태극도해와 중용, 맹자 등에 대하여 임자옥이 묻고 주자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태극도해가 1173년에 완성되었으므로 이 편지는 1173년 이후가 되어야 한다.
태극도전(太極圖傳)을 읽어보니 “양(陽)의 변화이다” “음(陰)의 합함이다”고 하셨습니다. 양은 왜 변한다고 하고, 음은 왜 합한다고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이 움직이면 음이 그것을 따르므로 변하고 합한다고 한 것입니다.
또 수음(水陰)이 성(盛)하므로 오른쪽에 거(居)하고, 화양(火陽)이 성하므로 왼쪽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음이 성하면 왜 오른쪽에 거하고, 양이 성하면 왜 왼쪽에 거합니까?
좌우(左右)는 다만 음양의 나뉨으로써 할 뿐입니다.
또 목(木)은 양(陽)이 어리므로 화(火) 다음이고, 금(金)은 음(陰)이 어리므로 수(水) 다음이라고 하셨는데, 어찌 수(水)가 목(木)을 낳고 토(土)가 금(金)을 낳습니까?
사시(四時)의 순서로 미루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수이실(五殊二實)은 남거나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 남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음양(陰陽)은 하나의 태극(太極)이니 정조본말(精粗本末)에 피차(彼此)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피차가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또 “오행(五行)이 생겨날 때 각각 하나의 성(性)을 가지니 가차(假借)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가차함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이 세 단락의 의미는 이미 분명하니 다시 완미해보면 당연히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건남곤녀(乾男坤女)는 기화(氣化)로 말한 것이고, 만물화생(萬物化生)은 형화(形化)로 말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기화로 말했다는 것을 아시고, 형화로 말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천지(天地)가 만물을 내는데 그 순서는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이정유서(二程遺書) 중에 기화를 논한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가 세워진다. 나뉘는<分> 까닭이 일정하여 바뀔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명분(名分)의 분(分)입니까? 성분(性分)의 분(分)입니까?
나뉜다<分>는 것은 위치를 정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또 동정(動靜)은 타는 기틀입니다. 이것이 어찌 명(命)이 유행(流行)하여 그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구절은 윗 구절과 연결하여 완미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질(質)로 그 태어나는 순서를 말하면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다. 그런데 수와 목은 양(陽)이고, 화와 금은 음(陰)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태극도」에 나아가서 그 순서를 가리킨 것이겠습니까? 수와 목이 어찌 양이고, 화와 금이 어찌 음입니까?
천일(天一)이 수(水)를 낳고 지이(地二)가 화(火)를 낳으며, 천삼(天三)이 목(木)을 낳고 지사(地四)가 금(金)을 낳습니다. 일(一)․삼(三)은 양(陽)이고, 이(二)․사(四)는 음(陰)입니다.
또 “기(氣)로 그 생겨나는 순서를 말하면 목․화․토․금․수다. 그런데 목․화는 양이고, 금․수는 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운용하는 곳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까? 또 목․화는 어찌 양이라 하고, 금․수는 어찌 음이라 하셨습니까?
이것은 사시(四時)로 말한 것이니 봄과 여름은 양이고, 가을과 겨울은 음입니다.
또 이천선생께서 맹자를 해석하여 말씀하시기를 “말에서 얻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 이것이 사람을 보는 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임택지(林擇之)는 말에서 얻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말에서 잃었다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맹자(孟子)와 공손추(公孫丑)의 문답은 지언(知言)을 논하는 것이니, 대개 사람의 말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임택지의 말을 따를만한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글 뜻은 바로 자신에게 있는 것을 말에서 잃은 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만, 그러나 말이 마음의 소리가 되면 자신에게 있든 다른 사람에게 있든 이와 같습니다.
또 이천선생이 말하기를 “뜻<志>은 기(氣)를 통솔하는 것이니 작게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 지(志)로 기(氣)를 통솔한다는 것은 기(氣)를 기르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작게 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작게 볼 수 없다는 것은 다만 경시할 수 없다는 의미일 뿐이니 다시 상세히 음미해 보십시오.
“절실하고 요긴한 도(道)는 경(敬)으로 안을 바르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하고, 또 “마음 안에 주(主)가 되는 것이 있으면 허(虛)하다”고 했습니다. 안을 바르게 하는 것이 곧 안을 허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까?
경(敬)하면 굽음이 없으므로 바릅니다. 바르면 곧 얽매임이 없으므로 허(虛)합니다. 그러나 곧 안을 바르게 하는 것을 안을 허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덕(德)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 덕이 성한데 이른 후에는 저절로 막힘이 없어져서 좌우가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고 했는데 저는 결국 ‘외롭지 않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외롭지 않다는 것은 다만 성(盛)한 덕(德)의 의미입니다.
또 “의(義)를 쌓아서 생긴다는 것은 많은 의(義)를 쌓아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생하는 것이지 의(義)가 밖에서 엄습하여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의(義)를 쌓아서 어찌 기(氣)를 생할 수 있는지요. 또 생한다는 의미가 또 어찌 의(義)가 밖에서 나를 엄습하여 기(氣)를 취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맹자의 뜻은 대개 이 기(氣)는 곧 의(義)를 쌓아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모두 의(義)에 합당하면 가슴속이 호연(浩然)하여 굽어보나 우러러보나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의(義)를 행하지 않고 밖에서 이 기(氣)를 엄습하여 취하는 것은 엄습(掩襲)의 습(襲)과 같으니 이것으로 저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또 제지(濟之) 형이 말하기를 중화(中和)는 성(性)으로 말하고 적감(寂感)은 심(心)으로 말했다고 했는데, 이천 또한 일찍이 이러한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천선생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단지 이곳의 벗들이 이렇게 헤아려보는 것일 뿐입니다.
또 제지 형이 말하기를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는데, 이 중(中)은 ‘안에 있다’는 의미이니, 희노애락은 마음 가운데 있는 도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 이천선생이 말하기를 “중(中)은 성(性)의 체단(體段)을 형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제지는 “이것은 가운데 있다는 뜻과 한가지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근래에 석형(石兄)이 이것을 논한 것을 보았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다시 질문하고 헤아려볼 수 있으면 마땅히 다고 같은 점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중용에서는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고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고 했는데, 저는 이 찰(察) 자는 도리가 드러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찰(察)은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떤 물건이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질문하신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사색이 깊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범범하게 물으면 얻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고고한 것을 좋아하는 폐단을 바꾸고 또 평이한 데에 나아가 깊이 생각하고, 구두(句讀)를 반복하며, 뜻과 의미에 침잠하여 그렇게 오래되면 자연히 습관이 사라지고 생각이 확 트일 것입니다.
答林子玉振
竊讀太極圖傳云 陽之變也 陰之合也 不知陽何以言變 陰何以言合
陽動而陰隨之 故云變合
又水陰盛故居右 火陽盛故居左 不知陰盛何以居右 陽盛何以居左 左右但以陰陽之分耳
又木陽穉 故次火 金陰穉 故次水 豈以水生木土生金耶 以四時之序推之可見
又五殊二實 無餘缺也 不知何以見得無餘欠 又云陰陽一太極 精粗本末無彼此也 不知何以見得無彼此 又云五行之生也各一其性 無假借也 不知何以謂之無假借
此三段意已分明 更玩味之 當自見得
又乾男坤女 以氣化者言 萬物化生 以形化者言 不知何以見得以氣化言 又何以見得以形化言
天地生物 其序固如此 遺書中論氣化處可見
又分陰分陽 兩儀立焉 分之所以一定而不可移也 不知謂名分之分 性分之分
分猶定位耳
又動靜者 所乘之機也 此豈言其命之流行而不已者耶 此句更連上句玩味之 可見其意
又以質而語其生之序 則日水火木金土 而水木 陽也 火金 陰也 此豈就圖而指其序耶 而水木何以謂之陽 火金何以謂之陰 天一生水 地二生火 夫三生木 地四生金 一三 陽也 二四 陰也
又以氣而語其生之序 則木火土金水 而木火 陽也 金水 陰也 此豈卽其運用處而言之耶 而木火何以謂之陽 金水何以謂之陰 此以四時而言 春夏爲陽 秋冬爲陰
又伊川先生解孟子云 不得於言 勿求於心 此觀人之法 擇之乃謂不得於言 謂在己失之於言也 而孟子與公孫丑問答論知言 大槪謂知人之言 不知擇之之說還可從否 孟子文義正謂在己者失之於言耳 然言爲心聲 則在己在人皆如此也
又伊川先生云 志 氣之帥 不可小觀 某竊謂以志帥氣 此爲養氣者而言 不知所謂小觀之意如何 不可小觀 只是不可小看了之意 更熟味之
又切要之道 無如敬以直內 又云有王於內則虛 不知直內還只是虛
其內耶 敬則無委曲 故直 直則無係累 故虛 不可便以直內爲虛其內也
又云 德不孤 必有鄰 到德盛後 自無窒礙 左右逢其源也 某畢竟曉不孤之義未得 不孤只是盛德意
又云集義所生者 集衆義而生浩然之氣 非義外襲而取之也 不知集義何以能生氣 而生之意義又如何義外襲我而取氣
熹常謂孟子之意蓋謂此氣乃集義而生 事皆合義 則胸中浩然 俯仰無所愧怍矣 非行義而襲取此氣於外 如掩襲之襲 以此取彼也
又見濟之兄云 中和以性言 寂感以心言 言伊川曾有此語 不知此語如何 伊川無此語 只是此間朋友如此商量耳
又見濟之兄云 喜怒哀樂未發謂之中 此中是三在中之義 猶言喜怒哀樂是在中底道理 而伊川云 中所以狀性之體段 濟之云 此與在中之義一般看 某竊恐有異同 頃見石兄論此甚好 可更質問商量 當見異同之實
又中庸言鳶飛戾天 魚躍于淵 上下察也 某竊謂此察字是道理著見之義 不知如何
察是著見之義 然須見其所著見者是何物始得 細觀所問 似思索未深如此汎問 恐無所益 當更革去好高之弊 且就平易處深思 反復句讀 況潛訓義 久之自然習氣消除 意思開闊也
요계석(오)에게 답함 答廖季碩俣
【해제】1185년(乙巳, 宋 孝宗 淳熙12년) 주희 56세 때의 편지이다. 요계석은 주희에게서 배운 적이 있는데, 양성재가 요계석을 천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차집보의 내용을 보아도 요계석이 주희에게 천거해줄 것을 구했는데 사양하는 글인지, 주희가 천거하고 그 천거하는 말이 부족하다는 겸사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여 실로 마음이 쓰이고 있었는데 조대사(漕臺使)가 와서 갑자기 황송한 소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즘과 같은 무더위에도 변함없이 정사(政事)를 돌보시고, 태후만복하시다는 소식을 자세히 들었으니 위로가 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성재(誠齋)가 천거한 말은 정확하고 이치에 합당하여 참으로 괴이한 말이 없습니다. 쇠잔한 자취를 차례로 돌아보니 너무 부족하여 혹 도리어 누가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서명(西銘)의 첫 머리에 천지만물(天地萬物)과 내가 동체(同體)라는 의미를 논하였는데, 실로 지극히 광대하고 큽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논한 사천(事天) 공부는 ‘우시보지(于時保之)’ 이하로부터 비로소 아주 친절합니다. 편지를 받고 날마다 이 글을 외고 있는데, 여기에서 깊이 깨달을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재백(戴在伯)은 일전에 붕우들 사이에서 칭찬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答廖季碩俣
久不聞動靜 正此馳情 漕臺使至 忽辱惠問 獲審比日熱暑 關決有相 台候萬福 爲慰爲感 誠齋薦語精當 眞無愧詞 第顧衰蹤不足爲重 而恐或反爲累耳 西銘首論天地萬物與我同體之意 固極宏大 然其所論事天功夫 則自于時保之以下方極親切 承喩日誦此書 計必有以深得乎此矣 戴在伯向見朋友間多稱之 恨未之識也
요계석에게 답함 答廖季碩
【해제】내용으로 보아 앞의 편지에 이어서 쓴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두 통의 편지를 받으니 참으로 위로가 되지만 또 매우 부끄럽기도 합니다. 특히 뛰어난 치행(治行)으로 천거되었으니 사우들도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길을 닦으며 한가하게 수레를 타는 것을 여기서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 편지에서 간절하게 하문 하셨는데, 어찌 다만 한마디 말을 아끼겠습니까? 그러나 제 스스로 믿고 스스로 지키는 것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면 곧 우활(迂闊)하여 행할 수 없는 지경으로 현자를 이끄는 것이고, 스스로 믿고 스스로 지키는 것을 버리고 말하려고 하면 또 말할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오래되면 대답할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고명하신 선생께서 선택하여 주시면 이 두 가지 가운데 처할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答廖季碩
比兩辱書 良以爲慰 又深愧感 尤異登聞 士友咸喜 修塗逸鴐 自此其可量耶 累書下問勤懇 顧何愛於一言 但欲以其所以自信自守者爲獻 則誤賢者於迂闊而不可行之地 欲舍其所以自信自守者爲說 則又不知所以言也 是以久而不知所以對 惟高明之有以擇焉 則於此二柄其必有所處矣
요계석에게 답함 答廖季碩
【해제】1191년(辛亥, 宋 光宗 紹熙2年) 주희 62세 때의 편지이다. 이 해 3월에 장자 숙(塾)이 무주에서 죽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하여 漳州에서 물러나 돌아온 다음 쓴 것이다.
제가 늘그막에 이러한 큰 화를 당하니 고통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사록관을 청하여 돌아와 이미 향리에 이르렀습니다. 집에서부터의 거리가 더욱 가까울수록 눈길이 닿는 것마다 슬픔이 느껴지니 더욱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강함을 보셨다는 말씀은 재삼 황송하고 감탄스러워 분발하게 해주시는 뜻이 독실함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부탁받은 뜻은 감히 받들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성재는 바른 길에 홀로 섰는데 조정에 용납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은혜를 베풀기를 바라면 충분히 사람들에게까지 그 은혜가 미칠 것입니다. 강평(講評)하는 즐거움을 아셨다니 더욱 부럽습니다. 월(越) 지역의 친지들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태주(泰州)는 머지않아 임기가 만료되어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생각하니, 다만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슬픔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은 참으로 기쁜 일이 드뭅니다.
答廖季碩
熹衰晩遭此大禍 痛苦不可爲懷 請祠得歸 已及里門矣 去家益近 觸目傷感 尤不易堪也 見剛之詞 三復悚歎 足見厲志之篤 至於見屬之意 則有所不敢承也 誠齋直道孤立 不容於朝 然歛其惠於一路 猶足以及人也 知有講評之樂 尤以歆羨 越上親朋久不聞問 泰州計亦不久當受代 乃有悼亡之悲 人生信鮮歡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