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권
편지(친구와 제자들과의 문답)書(知舊門人問答)
이빈로(려)에게 답함 答李濱老(呂)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순희(淳熙) 6년(己亥, 1179년), 주자 나이 50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163쪽)
저는 어리석고 비루(鄙陋)하여 세상에 이름도 없는데, 당신께서 천박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편지를 내려주시니 대단히 극진한 예의입니다. 저는 어려서 정자의 책을 읽기를 좋아했는데, 스무 살 때에 비로소 서산선생이 지은 논어와 맹자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을 얻어서 읽었으며, 또한 양구산의 학문이 발전하여 분기(分岐)되었음을 알았으나, 미처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숙경을 따라 교유하고서야 당신께서 그 집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제가 거처하고 있는 집은 서쪽으로 당신이 계신 곳과 거리가 아주 멀다 할 수는 없는데 일에 매어서 한 번 가서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지 못하고, 한갓 날마다 마음속으로 왕래하여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南康]에 와보니 집에서 수 백리 떨어져 있다 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편지를 받아 읽으니 놀랍고 기쁜 마음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또 가벼운 병을 앓으면서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셨다고 듣고 나서 창연(悵然)히 며칠이 되었습니다.
熹愚陋無聞於世, 足下不鄙, 辱貺以書, 甚盛禮也. 熹少好讀程氏書, 年二十歲時, 始得西山先生所著論孟諸說讀之, 又知龜山之學橫出此枝, 而恨不及見也. 旣而得從何兄叔京遊, 乃知足下蓋得其家傳者. 是時家居, 西距高隱不能甚遠, 而以事牽, 不得一往質其所疑, 徒日往來於心不忘也. 不謂此來各去其家數百里之外, 乃承惠音, 許以臨辱. 奉讀驚喜不可言. 旣又聞以微疾東轅, 爲之悵然累日也.
지난번에 보내오신 편지에 학문을 하는 뜻은 가정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받는 요점을 아는 데 있다 하였는데 감탄하는 마음을 그칠 수 없습니다. 대개 가만히 생각건대 일찍이 오늘날의 학자들은 다행히도 여러 나이 드신 선생들이 앞장서서 주창한 것을 얻어서 요도(要途)를 가리켜 보여줌으로써 성현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순서에 따라 나아가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그윽하고 미묘한 뜻을 찾아내어 헤아려서 말의 뜻을 드러내는데 내달려 힘써 이것으로 한갓 담설(談說)의 밑바탕으로 삼으나 마침내 이치를 세우고 일을 행하는 실상에는 얻은 바가 없습니다. 그가 다행히 도중에 그만두는 데에 이르지 않는 자라면, 반드시 도가와 불교의 귀착처로 흘러간다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도리어 직접 만나 뵙고 그 상세한 곳에 대해 묻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示喩向來爲學之意, 有以知家庭授受之要, 感歎無已. 蓋竊嘗病今世學者幸得諸老先生爲之先唱, 指示要途, 以趣聖賢之域, 而不能自淺及深, 自近及遠, 循序以進. 或乃探測幽微, 馳騖於言意之表, 以是徒爲談說之資, 而卒無所得於造理行事之實. 其幸不至於中道而廢者, 則必流於老佛之歸而不悟. 今足下之學之傳遠有端緖, 其必有以異於此者, 顧恨未得面扣其詳耳.
자치통감은 요사이 자세히 살펴보니 정통과 비정통의 사이와 명분의 실상에서 완전하지 못한 점이 있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일찍이 가만히 춘추조례를 취하여 조금씩 은괄(檃括: 도지개, 틀)은 더하여 따로 하나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몸이 약해지고 눈이 흐려짐이 점점 심해져 초고(草藁)가 산더미와 같아서 일을 마치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의 한이 될까 크게 두렵습니다. 이제 듣건대, 당신께서 일찍이 깨우쳐서 지은 것이 있는데 또한 그것을 얻어서 바른 곳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글을 넓히고 예를 간략하게 하는[博文約禮] 가르침을 밑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通鑑之書, 頃嘗觀考, 病其於正閏之際․名分之實有未安者. 因嘗竊取春秋條例, 稍加檃括, 別爲一書. 而未及就, 衰眊浸劇, 草藁如山, 大懼不能卒業, 以爲終身之恨. 今聞足下亦嘗有所諭著, 又恨其未得就正, 以資博約之誨也.
여부는 진실로 동남쪽에서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이하고 특이한 경관이 있고, 또 도정절의 조손과 유서간[劉西澗; 유환(劉渙)] 부자가 남긴 풍속이 있으며, 주염계가 나이가 들어 일찍이 그 땅을 지켰고, 서산의 장인 진충숙공 또한 일찍이 유배되어 살았으니, 이제 노유들이 살아나서 오히려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일찍이 유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 마침 학관에 양원범(楊元範)이 방문하여 유환의 유상을 얻었으며, 원우(元祐)년간에 상서 이공택(李公擇; 이상[李常])과 학관에 함께 제사 모셨는데 이 때문에 다시 논의하여 정절[도간], 충숙 및 서한의 아들 비승공을 함께 취하여 합하여 제사지내고 다시 염계의 사당을 그 오른 편에 세우고, 정씨 이부자를 배향했습니다. 도연명에게는 취석이 있었는데 군의 서북쪽으로 수십리 되는 율리(栗里)라는 곳에 있습니다. 유공의 묘는 서문 밖의 거친 풀더미 속에 있는데 거의 다시 그 곳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모두 정(亭)을 지어 밝힙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당신께서 이것에 대해 유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울러 알려드리니, 크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廬阜固爲東南雄麗奇特之觀, 而又有陶靖節祖孫․劉西澗父子之遺風, 濂溪暮年嘗守其地, 而西山舅氏陳忠肅公亦嘗謫居焉, 今老儒生猶有及見之者. 然前此未嘗有留意者. 區區此來, 適會學官楊君訪得西澗遺象, 與元祐李公擇尙書竝祠於學, 因與復議, 幷取靖節․忠肅及西澗之子秘丞公合而祠之, 更立濂溪之柯於其右, 配以程氏二夫子焉. 陶公有醉石, 在郡西北數十里所謂栗里者也. 劉公之墓在西門外荒草中, 幾無復知其處考. 今皆作亭以表之. 以來敎之語及之, 知足下之有意乎此也, 故幷以告, 想聞之亦爲一太息也.
하숙경의 덕을 쌓아가는 공부는 그침이 없었는데 마침내 고인(古人)이 되었으니 언제나 한결같이 그를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지난번에 그의 유고에서 당신과 주고받은 시 구절을 보았는데, 조용히 생각건대 애달피 여겨 아끼는 마음이 저보다 덜하지 않으니, 단지 조카사위여서 좋아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황단명공은 덕이 두텁고 나이도 많이 드셨는데 중간에 한번 병이 들었다니 대단히 놀랐으나, 이제 그가 걸어 다닐 수 있다 하니 어찌 다만 군자 신명(神明)이 도운 것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지만 평상시의 지양(持養)의 공부를 알 수 있습니다. 무릇 이것은 모두 보내오신 편지에 언급한 것이나 당신께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구강(九江來)으로부터 돌아와,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어 수복(修復)하여 서둘러 썼으니 살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叔京進德未已, 遂爲古人, 每一念之, 潸然出涕. 往時見其遺藁有與足下往來詩句, 竊計傷惜之懷不減於此, 不獨爲姻戚之好也. 端明黃公盛德高年, 中間一病, 亦甚可駭. 今聞其已能步履, 豈弟君子, 神明所扶, 固當如此, 抑亦見其平日持養之功矣. 凡此皆因來敎之及, 所欲爲足下言者, 蓋不止此也. 來使還自九江, 撥冗修復, 草草, 幸察. 不宣.
왕백우에게 보냄 與汪伯虞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순희(淳熙) 7년(庚子, 1180년), 주자 나이 51세 때 쓴 것이다.(편년고증, 182쪽)
정월 11일에 당신과 동향 출신인 저 주희는 머리 숙여 재주가 뛰어난 백우 당신께 편지를 보냅니다. 저의 외가는 (당신의) 문하와 서로 돕고 지내는 좋은 관계에 있어서 당신께서 행차하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민 지방에 객지살이를 하다 보니 한번 뵙지 못하고 오직 친척과 벗을 좇아 다니면서 당신의 명성을 듣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더욱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멀리서 장문의 편지까지 보내주시니 예를 표하는 뜻이 극진하며 도를 칭찬하고 기허(期許)하는 것도 그 실상을 넘어서니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正月十一日, 同郡朱熹頓首復書伯虞茂才鄕丈執事. 熹之外家於門下有姻漣之好, 而執事丈人行也. 久客閩中, 末獲一見, 獨幸從親故間講聞聲譽之美, 差以自慰. 玆承不鄙, 遠致長書, 禮意旣隆, 而所以稱道期許之者又過其實, 熹不敢當也.
보내주신 편지에 상서 김공[김안절(金安節)]이 백우당(伯虞堂)이라고 이름 지은 뜻에 한마디 글까지 찬(贊)하여 내려주셨다니 다행입니다. 김공[김안절] 또한 선친의 친구[先友]입니다. 제가 지난해에 임안으로 찾아뵈었는데 (그를) 우러러 따른 지 17년이나 되었습니다. 세 번이나 다시 편지를 주셨으니, 만약 다시 그의 의관을 바라보고 그의 기침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공께서 당신을 도탑게 대하고 서로 소식을 전하고 안부를 묻는 것[相告]은 절실하고 마땅합니다. 장옹주(蔣邕州)께서 저[君]에게 오래전에 장형주[장남헌]와 여저작[여동래]를 만나보게 하였는데 모두 그 재능을 칭찬하였습니다. 이제 기문을 읽어보고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니, 더욱 한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한번 의론을 들을 수 있는 여가를 갖지 못한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두 공의 뜻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현명하신 당신께서 면밀하게 선택하여 힘써 행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물며 저와 같이 (소견이) 좁고 낮은 사람이 또한 장차 초빙하여 관직에 임명해주시는 일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더욱이 졸렬하고 능력이 없는 저는 잠시 이부(吏部)의 일을 가까이 하였으나,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로 바빠서 날로 나아갈 겨를이 없고, 더욱이 지극히 말재주가 없어서 마음속의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도 토로할 수 없으니, 因風敬謝先辱 이른 시간 내에 만일 (굴레와 다리 줄로 묶여있는 말과 같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시골로 돌아와 쉬면서 병들어 고통스러운 겨를에도 마땅히 당신께 답장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示諭尙書金公名堂之意, 俾得贊一詞焉, 幸甚幸甚. 金公亦先友也, 熹頃歲嘗獲拜之臨安, 俯仰十有七年矣. 三復來誨, 若復得望見其衣冠而聞其謦欬者. 甚矣!金公之厚於執事而所以相告者之切而當也. 邕州使君往見張荊州․呂著作皆稱其才. 今讀記文, 又有以見其所存者, 益恨未得一聽議論之餘也. 顧二公之意所以望於執事者皆非他人所能與, 獨在明者精擇而力行之耳. 况如熹之淺陋, 其又將何以辱禮命之勤哉? 加以拙疎, 乍親吏事, 公私倥傯, 日不暇給, 尤覺荒澀, 不能一吐胸中所欲言者, 因風敬謝先辱. 旦夕儻得脫此羈馽, 歸臥田間, 呻吟之暇, 乃當有報執事耳.
보내주신 글은 (내용이) 대단히 풍부하고 귀한 것인데 아직까지 답장 올리지 못하고 여기에서 돌에 새겨 각각 한 통씩 가져갔는데 볼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 만나뵐 날이 없을 것 같으니 덕을 쌓는데 힘쓰고 자중하셔서 이렇게 바라는 말에 위안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만 마칩니다.
惠墨甚富且珍, 末有以報, 此間石刻各往一通, 幸視至. 未有承晤之日, 正惟進德自重, 慰此願言. 不宣.
왕태초에게 답함[答汪太初]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순희(淳熙) 7년(庚子, 1180년), 주자 나이 51세 때 쓴 것이다.(편년고증 182쪽)
4월 8일 (당신과) 동향 출신인 저 주희는 머리 숙여 재주가 뛰어난 왕태초군에게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당신과 비록 다행히 같은 땅에서 태어났지만 선세(先世) 때부터 민(閩) 땅에서 떠도는 생활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옛 마을의 현인과 군자를 좆아 배웠으나, 마음으로는 일찍이 하루라도 부모의 땅을 잊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제가) 가까이 첩지를 받고 여부에 지남강군(知南康軍)으로 왔는데 고을의 여러 사람들은 서로 지나쳤는데 당신께서 손수 편지를 써서 먼저 보내주시고 세 번이나 가르쳐서 인도해주셨으니 가없이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 또한 책을 보내주시니 더욱 (당신의) 학덕(學德)의 융성함을 공경하였는데 아직 종용(從容)히 받들지 못한 점이 한이 됩니다.
四月八日, 同郡朱熹頓首復書汪君太初茂材足下. 熹於足下雖得幸同土壞, 而自先世流落閩中, 以故少得從故里之賢人君子遊, 願其心未嘗一日而忘父母之邦也. 屬隨宦牒來官廬阜, 同郡諸生間有肯相過者, 而足下乃以手書先之. 三復誨諭, 喜幸無窮. 又承示以文編, 益欽德學之盛, 而恨其未得少奉從容也.
그러나 요사이 일찍이 생각해보건대 근세학자들이 유학의 실학의 근본과 순서를 알지 못하고, 노자와 불교의 말에 빠져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도 없고, 힘써 행하는 실천정신도 없으며 항상 망령되게 천지만물과 인간의 일상 외에 따로 하나의 사물에 뜻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공허하고 현묘하여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마음은 허공에 걸려 있으면서, 요행이 한번 이 사물을 보게 되면 극치라고 하는 것을 병통으로 생각합니다. 천지만물의 본래 그러한 이치와 인간의 일상에서의 마땅히 그러한 일은 모두 옳고 그름의 요묘(要妙)가 되는 것이니 단지 잠시 보존하기만 해도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을 뿐입니다. 대개 세상의 학자들이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범연(泛然)히 붙잡아서 지키지 못하여 물욕을 드러내 보이며, 다행이 학문에 뜻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아직은 여기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병이 여기에서 오래되어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일찍이 강군과 호군 두 사람에게 자세하게 말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然間嘗竊病近世學者不知聖門實學之根本次第, 而溺於老佛之說, 無致知之功, 無力行之實, 而常妄意天地萬物․人倫日用之外別有一物空虛玄妙, 不可測度, 其心懸懸然惟徼幸於一見此物, 以爲極致 : 而視天地萬物本然之理․人倫日用當然之事皆以爲是非要妙, 特可以姑存而無害云爾. 蓋天下之士不志於學, 則泛然無所執持而徇於物欲, 幸而知志於學, 則未有不墮於此者也. 熹之病此久矣, 而末知所以反之. 蓋嘗深爲康․胡二君言之, 而復敢以爲左右之獻. 不識高明以爲然否?
일찍이 듣건대, 널리 학문을 하는 사람은 번거로우며, 축약하여 학문하는 사람은 (견문이) 좁습니다. 오직 먼저 널리 하고 뒤에 축약한 뒤에 번거로움에 흐르지 않고 좁은 데에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에서는 선을 밝히는 것을 자신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 앞에 두었으며, 대학에서는 성의(誠意)가 격물(格物) 뒤에 있으니, 성현의 말씀을 살펴본 사람들이 그러한 것이니 당신께서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도 분명하지 않으시다면, 오직 학문에 나아가서 자애(自愛)하시기 바랍니다. 바빠서 이만 줄입니다. 희가 다시 올립니다.
抑嘗聞之, 學之博者似雜. 其約者似陋. 惟先博而後約, 然後能不流於雜而不揜於陋也. 故中庸明善居誠身之前, 而大學誠意在格物之後, 此聖賢之言可考者然也, 足下其試思之. 未卽會晤, 惟進學自愛爲禱. 匆匆, 不宣. 熹再拜.
방경도(뢰)에게 답함 答方耕道(耒)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건도(乾道) 6년(庚寅, 1170년), 주자 나이 41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77쪽)
가르쳐 준 내용이 자세하여 학문에 나아가 게으르지 않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과 같이 명민(明敏)하고 굳센 자질을 가진 사람이 여기에 뜻을 두는데, 어찌 얻지 못할까 근심하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생각을 말하면, 말씨[詞氣之間]에 오히려 급박한 병통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니 이른바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운을 화평하게 하여 너그럽게 사는 데서 깨달음을 얻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다시 일상생활에서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때 행동하거나 조용히 있을 때 스스로 규칙[規程]을 세워 깊이 무젖어 기르는데 힘쓰며 빠른 효과를 바라지 말고, 요컨대 기질을 변화시키는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정자가 말한 경(敬)도 의관을 바르게 하고, 생각을 한결같이 하며, 모습을 엄숙하고 가지런하게 하며, 거만하거나 속이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다만 실제 공부를 할 때는 때때로 익혀 게으르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미루어 헤아려서 덧붙이거나 말을 지어 형용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가까이에 있는 분명히 드러난 후회나 걱정을 버리거나 미세하게 어긋난 것을 미리 근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 외에 오히려 의론할만한 곳이 많이 있으나, 보내오신 편지에 뜻하지 않게 한천정사에 머무르고 있다 하시니 곡절(曲折)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체적인 개요는 여기에 갖추어 썼습니다. 대개 학문의 길은 감히 스스로 옳다하지 않고, 마음을 비워 남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한번 들은 것이 있으면 곧 말을 지어 (자신의 말을) 지탱하여 떠받치고, 다른 사람의 말은 물리쳐 지나쳐 버리면 결국에는 실질적인 이득이 없을 것입니다.
開喩詳悉, 足見進學不倦之意. 以左右明敏彊毅之資, 厲志於此, 何患於不得? 然以愚見論之, 詞氣之間, 似猶未免迫急之病, 於所謂平心和氣․寬以居之者, 恐未有得力處也. 願更於日用語黙動靜之間自立規程, 深務涵養, 毋急近效, 要以氣質變化爲功. 若程夫子所謂敬者, 亦不過日正衣冠,一思慮․莊整齊肅․不慢不欺而已. 但實下功夫, 時習不懈, 自見意味. 不必懸加揣料, 著語形容, 亦不可近捨顯然悔尤, 預憂微細差忒也. 其他尙多有可論處, 來書偶留墳菴, 不能盡記曲折. 然其大槪亦具此矣. 大抵學問之道不敢自是, 虛以受人, 乃能有益. 若一有所聞, 便著言語撑拄過去, 則終無實得矣.
방경도에게 답함 答方耕道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건도(乾道) 6년(庚寅, 1170년), 주자 나이 41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77쪽)
물음 주신 것이 상세하고 복잡하니, 학문에 나아가 게으르지 않은 뜻을 살필 수 있어서 대단히 좋습니다. 다만 천박하고 비루한 제가 어떻게 여기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를 도타이 여겨주시는 뜻은 감히 헛되게 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망(妄)’이라 한 것은 스스로 규칙을 세우는 것을 말하고 ‘정(正)’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생각을 한결 같이 하며, 모습을 엄숙하고 가지런하게 하며, 거만하거나 속이지 않는 부류를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지만 사람에게는 이 몸이 있으니 안과 밖, 움직임과 쉼도 이러한 몇 가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떳떳한 법도를 지키는데 뿌리를 두고 있으니 각각 저절로 그러한 법칙이 있습니다. 만약 이에 대해 하나하나 이해하지 않고 늘 절실하게 다잡아 지키기만 한다면 비록 이치에 따라 그윽하고 깊은 것을 궁구(窮究)하고 논리적으로 아득하여 미세한 것을 파헤친다 하더라도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증자가) ‘선비는 뜻이 크고 꿋꿋해야만 한다.’고 한 것은 비록 성현이 가르쳐준 요점이긴 하지만 아마도 거기에 더욱 세밀하게 해야 바야흐로 실제로 쓸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바탕 이야기 거리로 삼아 고원(高遠)한 일에 힘쓸 뿐’이라고 한 것은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반드시 보이는 것이 있은 뒤에 주장하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정자의 이른바 “앎을 이루면서 경에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 것은 경이 보이는 것에 기대어 있다는 것입니까? 보이는 것이 경에 기대어 있다는 것입니까? 과연 한갓 그러한 경으로써 일삼기에는 부족해서 반드시 저절로 그러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장사에 두 선생의 문집이 있을 것이며, 친구들에게도 반드시 유서의 판목(版木)이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다시 이 두 책을 구하여 되풀이 하여 익숙하도록 읽되 가까운 시일에 성과를 꾀하지 않는다면 지혜가 마땅히 더욱 밝아져서 이것을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의 편지에 이른바 분명히 드러난 허물을 버리고 작은 잘못을 걱정한다고 한 것은 바로 밥숟가락을 크게 떠서 밥을 먹고, 물마시듯 들이마시면서 마른 고기를 이로 끊지 말라고 따지는 것과 같은 부류입니다. 이것[드러난 허물]을 버리고 저것[작은 잘못]을 걱정한다면 그 순서를 잃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일상생활에서 공부를 작은 일에서 과연 삼가 할 수 있어서 (허물이) 겉으로 드러나는데 이르지 않게 한다면 무엇을 더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다만 말이 너무 고원하여 실천하기 어려우면 ‘절실한 것부터 묻고 가까운 것부터 생각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示問詳複, 具審比日進學不倦之志, 甚善甚善. 顧淺陋何足以及此? 然荷意之厚, 不敢虛也. 向者妄謂自立規程, 正謂正衣冠․一思慮․莊整齊肅․不慢不欺之類耳. 此等雖是細微, 然人有是身, 內外動息不過是此數事. 其根於秉彝, 各有自然之則. 若不於此一一理會, 常切操持, 則雖理窮玄奧, 論極幽微, 於我亦有何干涉乎? 弘毅之云, 雖聖賢所示之要, 然恐其間更須細密, 方有實用功處. 不然, 則所謂只作一場話說, 務高而已者不可以不戒也. 若必謂有所見然後有所主, 則程子所謂未有致知而不在敬者, 是爲敬有待於見乎? 見有待於敬乎? 果以徒然之敬爲不足事, 而必待其自然乎? 長沙有二先生文集, 朋友間亦必有遺書本子. 暇日更求此二書, 反覆熟讀, 不計近功, 則智當益明而有以審乎此矣. 前書所謂捨顯過․憂小失, 正謂放飯流歠而問無齒決之類. 舍此憂彼, 則爲失其序耳. 若日用功夫果能謹之於微, 不使至於形顯, 則善何以加? 但恐言太高而難踐, 則非所謂切問而近思耳.
방경도에게 답함 答方耕道
【해제】이 편지는 효종(孝宗) 건도(乾道) 6년(庚寅, 1170년), 주자 나이 41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77쪽)
당신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과감하고 결단성 있는 자질로 높이 뛰어넘고 멀리 날아오르려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사우(士友)들 사이에서는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제 부임할 날을 기다리면서 잠시 한가한 시간을 얻었으니 마땅히 마음을 가라앉혀 도를 음미하면서 더욱 학문하는데 힘써 제가 기대하고 바랐던 뜻에 부응하려 합니다. 지난번에 찾고자 하는 것은 너무 고원하고 지니고 있는 것은 너무 간략한 것 같으며, 또 언제나 스스로 자기의 재능을 기뻐하고 오직 자기의 견해만을 내세우는 뜻이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작게는 과정(課程)을 세워 도탑게 지키고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점진적으로 나아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하여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취하여 (스스로) 좋은 일을 하면 덕이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마음이 깊어 장황함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분수에 지나친 점을 용서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老兄以明敏果決之資, 挾凌高厲遠之志, 士友間所難得. 今玆需次, 暫得閑日, 所宜潛心味道, 益進所學, 以副區區期望之意. 向來所探似亦太高, 所存似亦太簡, 又每有自喜己材․獨任己見之意. 今當小立課程而守之以篤, 博窮物理而進之以漸, 常存百不能․百不解之心而取諸人以爲善, 則德之進也不可禦矣. 愛慕之深, 不覺縷縷, 幸恕僭易也.
증절부(준)에게 답함 答曾節夫撙
【해제】이 편지는 효종(孝宗) 순희(淳熙) 7년(庚子, 1180년), 주자 나이 51세 때 쓴 것이다.(편년고증 182쪽)
보내 주신 편지에 오랑캐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마땅히 이것으로써 견주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 한마디 말은 곧 십 수년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원하건대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운을 안정되게 하여 서서히 옛적에 장남헌에게 들은 것에 따라 이 말의 근원[所從來]을 곰곰이 생각하여 교정한다[考校]면 여기에서 그것은 반드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평상시의 말이 도리어 요즈음의 마음이나 일과 서로 들어맞지 않은 것 같으니 아마도 죽은 친구 장남헌이 현명하신 당신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所喩夷狄之云, 恐不當以此爲比. 只此一語, 便是十數年泅泅之根. 願平心定氣, 徐以疇昔所聞於湖湘者考校此語所從來, 則於此其必有處矣. 不然, 平日之言却似與此心此事不相人, 恐非亡友所望於賢者也.
여사첨(송)에게 답함 答呂士瞻竦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순희(淳熙) 11년(甲辰, 1184년), 주자 나이 51세 때 쓴 것이다.(편년고증 219쪽)
도일이 멀리서 와서 외롭고 비루한 저에게 대단히 위안이 됩니다. (도일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한데, (힘을) 다하여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며칠 동안 마침 약간의 겨를을 갖게 되었는데 (모든 일을) 제쳐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 사람들이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의도하는 취지를 살펴보면 모든 일에 환하게 깨달았으나 단지 자기를 위해서는 한 가지 일도 기꺼이 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이것이 제가 깊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거듭하여 머무르도록 하고, 이제야 서로 믿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체대(體大)하고 (도일이 나이가 어려) 갈 길이 머니, 설령 실제로 얻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계속해서 공부하여 항상 끊임이 없어야 곧 서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한 때의 뜻은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없으니, 반드시 다시 뜰을 지나갈 때, 큰 풀무에 넣어 풀무질하여 단련해야만 비로소 행할 수 있다.
道一遠來, 甚慰孤陋. 天資明敏, 極不易得. 到此數日, 適値小冗, 撥置與語, 令人不倦. 觀其意趣, 事事通曉, 但於爲己一著未有肯心, 此區區所深惜. 故其告歸, 再三留之, 今日乃言有信得及處. 此事體大, 日月長遠, 政使實得, 亦須接績功夫, 常不間斷, 方可保任. 况一時意思, 末知果如何, 須更於過庭之際, 入大鑪鞴, 與之鍛鍊, 始可放行耳.
보내오신 편지에 간배(艮背)의 설은 주돈이 선생과 정이천 선생이 뜻이 이와 같으니 평상시에 또한 이와 같이 이해해야 도리를 공부하는데 옳지 않은 곳이(틀린 곳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요즈음 주역을 읽으면서 단사해에 “그칠 곳에 그침은 제자리에 멈추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을 보았는데, 바로 이 구절[간기배(艮其背])의 뜻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즉 간(艮)은 그침이니, 배(背)는 마땅히 멈춰야 할 곳이라는 것입니다. 정이천 선생은 이 구절의 아래에 또한 이러한 말을 썼으니 도리어 윗 글의 괘사의 뜻을 근본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이치는 저절로 아울러 통하지만 다만 문왕의 본 뜻은 마땅히 공자가 이해한 것에 의존하는 것이 옳으니, 모름지기 다시 불견(不見)의 설을 인용하여 번거롭게 하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示喩艮背之說, 周․程先生意是如此, 尋常亦只如此曉會, 於道理功夫無不是處. 但近讀易, 見得彖辭解云: ‘艮其止, 止其所也.’ 正說此句之意. 則所謂艮乃止也, 背乃當止之所也. 程先生於此句下亦作此說, 却不本上文卦辭之義. 蓋理自兩通, 但文王本意則只當依孔子所解爲是, 不須更引不見之說以雜之也. 不審尊意以爲如何?
장남헌이 여여숙의 중용을 변별한 것은 그 사이에 잘못이 많아 뒤에 나온 판본[後本]은 이미 없앴습니다. 다만 정이천선생이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기 전에 무젖어 기르면 옳지만, 아직 발현되기 전에 중을 구한다면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절실하고 마땅하니 옮겨 바꿔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연평 선생은 날마다 공부하고 있는데, 선생께서 이 두 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후학이 감이 가벼이 의론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 마땅히 정이천 선생의 말을 바른 것이라 한다면 장흠부[장남헌]의 설도 또한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뜻 일체는 드러내놓은 곳에서[공개적으로] 승인 받아야 하나 다시 정자의 무젖어 기르는 뜻이 없다면 또 저절로 큰 잘못이 될 것입니다. 그가 뒤에 이러한 뜻을 고쳤으니 만년의 설은 조금도 그 일에 관련되지 않습니다.
南軒辨呂與叔中庸, 其間病多, 後本巳爲刪去矣. 但程先生云涵養於未發之前則可, 求中於未發之前則不可, 此語切當, 不可移易. 李先生當日用功, 未知其於此兩句爲如何, 後學未敢輕議. 但今當只以程先生之語爲正, 則欽夫之說亦末爲非. 但其意一切要於鬧處承當, 更無程子涵養之意, 則又自爲大病耳. 渠後來此意亦改, 晩年說話儘不干事也.
여도일에게 답함 答呂道一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순희(淳熙) 11년(甲辰, 1184년), 주자 나이 51세 때 쓴 것이다.(편년고증 219쪽)
세 번 되풀이하여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말의 의미가 통창(通暢)하여 시원합니다. 다만 (당신께서) 논한 것이 저의 생각에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학문을 논할 때 마땅히 먼저 나아가는 바의 바름과 그름을 분별 한 뒤에 쓰일 수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바르다면 비록 그 사람이 혹시 쓰임새가 없다 할지라도 그 도가 쓰임새가 있는 데는 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바르지 않다면 비록 관중과 안자의 공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성현의 문하에 걸맞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옛날의 군자가 배우는데 바쁜 것은 그것이 마침내 만물과 달라서 부지런한 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또한 그것이 마침내 만물과 달라서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이름이 있다 해서 권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또한 이름이 없다 해서 저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이익이 된다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또한 그것이 이익이 없다 해서 그만두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마음을 세워 대개 제정신을 잃고 한결같이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니, 오직 하늘의 이치만이 마땅히 그러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三復來示, 詞義通暢, 爲之爽然. 但其所論有於鄙意未安者. 大凡論學, 當先辨其所趨之邪正, 然後可察其所用之能否. 苟正矣, 雖其人或不能用, 然不害其道之爲可用也. 如其不正, 則雖有管仲․晏子之功, 亦何足以稱於聖賢之門哉? 且古之君子所以汲汲於學者, 不爲其終有異於物而勤, 故亦不爲其終無異於物而肆也. 不爲其有名而勸, 故亦不爲其無名而沮也. 不爲其有利而爲, 故亦不爲其無利而止也. 是其設心蓋儻然一無有所爲者, 獨以天理當然而吾不得不然耳.
만약 만물이 흩어져 태허가 된다는 말이라면 비록 윤회설의 좁은 소견과 조금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지만 하늘과 땅의 화육(化育)은 깊이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할 수 없으니 이제 마땅히 성현의 책을 상세하게 읽으면서 점진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若夫萬物散爲太虛之說, 則雖若有以小異於輪回之陋, 然於天地之化育蓋未得爲深知之者也. 此未易言, 今且當熟讀聖賢之書而以漸求之耳.
여도일에게 답함 答呂道一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순희(淳熙) 11년(甲辰, 1184년), 주자 나이 51세 때 쓴 것이다.(편년고증 219쪽)
보내주신 편지는 상세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학문을 하는 일은 또 그 아는 것을 실천해야만 하지만, 오랫동안 실천하여 막히고 가로막는 것이 있음을 깨달으면 바야흐로 헤아려서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안 것을 실천하지 않았어도 앉아서 이야기하며 멀리 생각하는 것도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조용히 생각건대 한갓 크기만 하고 들뜨고 가벼운 기운이 옛적의 버릇을 변화시켜 정성스럽고 참된 것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示喩已悉. 但爲學之功且要行其所知, 行之旣久, 覺有窒礙, 方好商量. 今末嘗擧足而坐談遠想, 非惟無益, 竊恐徒長浮薄之氣, 非所以變化舊習而趨於誠實也.
첨겸선에게 답함 答詹兼善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乾道(건도) 5년(己丑, 1169년), 주자 나이 40세 때 쓴 것이다.(편년고증 63쪽)
보내주신 편지에 유교와 불교를 구별한 것에서 마음을 두어 깊이 생각하는 힘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한번 깨달은 것 외에 다시 분별하지 않아서 다시 일삼아 하지 않는데 우리 유교는 하늘의 이치 아닌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 유교 또한 깨우침 외에 이러한 분별이 있지 않지만, 다만 이렇게 깨우친 곳이 곧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그 중간에) 만물이 흩어져 존재하는데서 비롯하였으니 조금도 옮겨 바꿔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이 차례로 행하는 것[天敍]․하늘의 질서[天秩]․하늘의 명령[天命]․하늘이 죄 있는 사람을 토벌하는 것[天討]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맹자에 대해 논한 것은 대단히 좋지만, 그 대강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그 사이에 자세하게 연구하여 복잡한 내용을 깨달으면 바야흐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더욱 힘쓰셔서 제가 바라는 바를 위로해 주십시오.
示喩儒釋之分, 益見潛心之力. 所謂釋氏一覺之外更無分別, 不復事事, 而吾儒事事無非天理, 此語是也. 然吾儒亦非覺外有此分別, 只此覺處便自天高地下, 萬物散殊, 毫髮不可移易. 所謂天叙․天秩․天命․天討, 正在是耳. 所論孟子甚善, 其大槪不外此矣. 更於其間子細硏窮, 見得曲折處, 方有意味. 願益勉旃, 以慰所望.
증치허에게 답함 答曾致虛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乾道(건도) 5년(己丑, 1169년), 주자 나이 40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63쪽)
성과 경을 논한 것은 대단히 좋습니다만 장흠부의 뜻도 또한 곧바로 학자가 성실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대개 이미 지경(持敬)이라고 말했으면 곧 실제로 경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다시 진실되지 않은 경(敬)이 있어서 반드시 따로 성(誠)이라는 글자를 붙이기를 기다린 뒤에 진실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대체로 성(誠)이라는 글자는 도에 있어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이치[實有之理]가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실제로 그러한 마음[實然之心]이 되니, 실제로 존재하는 이치를 유지하고 실제로 그러한 마음을 주재하는 것은 완전히 경(敬)이라는 글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다만 실제로 경에 힘써 노력한다면 일상적인 공부는 저절로 통괄하여 모이는 곳이 있게 되고, 도의 본체 가운데 명칭과 실제의 다름과 같음․앞과 뒤 근본과 말단이 모두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경으로써 일삼아 (전념)하지 않고 한갓 (입으로) 성만 이야기한다면 이른바 성이라는 것은 장차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또 오상과 모든 행위는 바라는 것이 아닐 수 없지만, 마음과 눈 사이에 섞이게 되면 또 장차 어떤 것을 가려내서 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좁은 소견은 이와 같은데 식견이 높고 현명하신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일상생활에서 한번 그 실상을 검증해 보시고 추세에 따라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말씀해 주십시오.
所論誠敬之說甚善, 但欽夫之意亦非直謂學者可以不誠. 蓋以爲旣曰持敬, 便合實有持敬之心, 不容更有不誠之敬, 必待別著誠字, 然後爲誠也. 大抵誠字在道則爲實有之理, 在人則爲實然之心, 而其維持主宰, 全在敬字. 今但實然用力於敬, 則日用工夫自然有總會處, 而道體之中名實異同․先後本末皆不相礙. 若不以敬爲事而徒曰誠, 則所謂誠者不知其將何所錯? 且五常百行, 無非可願. 雜然心目之間, 又將何所擇而可乎? 鄙意如此, 不審高明以爲如何? 願於日用間一驗其實, 因風語其可否焉.
증치허에게 답함(을묘면 2월 1일) 答曾致虛 乙卯二月一日
[해제] 이 편지는 영종(寧宗) 경원(慶元) 원년(乙卯, 1195년), 주자 나이 66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381쪽)
당신이 남강에서 (수남강(守南康)으로 부임하여) 초상을 그려 제사지내고 국자감의 학문을 취하여 본받은 것은 이미 오광문(吳廣文)에게 상세하게 알렸습니다. 백록동에서 당시에 전자언(전문시[錢聞詩])과 의논하여 예전만 짓고 소상을 세우지 않았으며, 단지 개원례(開元禮)에 의거하여 임시로 자리를 세워 제사지낸 것은 가장 예의 올바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평상복을 입고 돌로 자리를 마련하여 땅에 앉는 것도 또한 옛날과 오늘날의 법도에 적합하니, 땅에 기어 다니면서 먹을 것을 좇는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제 이미 세워졌다면 헐어내는 것도 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시 당신의 생각을 짐작하여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대개 어렸을 때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일찍이 정포(鄭圃)를 지나면서 열자(列子) 사당을 참배하셨는데 땅에 앉아서 열자의 소상을 보았다고 말한 것을 들었으니, 이것은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南康從祀畫象, 乃取法監學, 已詳報吳廣文矣. 白鹿當時與錢子言商量, 只作禮殿,不爲象設, 只依開元禮臨祭設席, 最爲得禮之正. 不然, 則只用燕居之服, 以石爲席而坐於地, 亦適古今之宜, 免有匍匐就食之誚. 子言皆不謂然. 但今已成, 恐毁之又似非禮. 此更在尊意斟酌報之也. 蓋幼年聞先君言嘗過鄭圃, 謁列子廟, 見其塑象地坐, 則此不爲無據也.
주로숙에게 답함 答朱魯叔
[해제] 이 편지는 효종(孝宗) 순희(淳熙) 14년(丁未, 1187년), 주자 나이 58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257쪽)
유수(劉守)가 사록관을 청하였는데 아직 답을 받지 못했으니, 생각건대 마땅히 또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만간 (유수에게) 친히 가르침을 받고 또 정윤부(程允夫)와 강학하게 된 것을 알게 되니, 매우 좋습니다. 풍속이 좋지 않으면, 올바른 도로 다스리는 것(곧은 도가 행하여지도록 하는 것)도 곧 막혀서 방해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명분에서는 한 가지를 얻었으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논할 뿐, 이 외에 이해와 득실은 말할 것이 못됩니다. 학문을 하는 요체는 먼저 자신을 지킨 뒤에 의리(義利) 두 글자를 분별하고, 취향(趣向)이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큰 절목(節目)입니다. 그 외에 힘에 따라 미칠 수 있는 것은 하되, 자세하게 살피는데 힘쓰고 능력에 넘치게 섭렵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劉守請祠未報, 計須且留. 知早晩得親炙, 又與程弟講學, 甚善甚善. 風俗不好, 直道而行便有窒礙. 然在吾人分上, 只論得一箇是與不是, 此外利害得喪有所不足言也. 爲學之要, 先須持己, 然後分別義利兩字, 今趣向不差, 是大節目. 其它隨力所及爲之, 務在精審而不貴於汎濫涉獵也.
황상백(호)에게 답함 答黃商伯灝
[해제] 이 편지는 광종(光宗) 소희(紹熙) 5년(甲寅, 1194년), 주자 나이 65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362쪽)
‘심상(心喪)’에 대해 물은 대체적인 뜻은 대단히 좋으나, 본래 태어난 집[本生家]의 상복이 그 친족 집단의 가까움과 멈을 보여준다고 한 것은 도리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개 그 가까움과 멈을 묻지 않고 대개 자최(齊衰) ??? 본래 태어난 집의 계모는 대개 명복(名服)을 입습니다. 백부와 숙부의 아내가 나에게 어떻게 돌보아 길러준 은혜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아비는 아버지의 도에 속하고 아내는 모두 어머니의 도인데, 하물며 본래 태어난 집의 아버지가 다시 장가들어 맞이한 아내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 두 구절은 다시 살펴보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서(恕)’에 관한 설도 또한 좋습니다. 다만 대학의 혈구(絜矩)의 도는 항상 격물(格物)한 뒤에 있으니, 모름지기 이치가 밝아지고 마음이 바르게 되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과 하고자 하지 않은 것 모두 그 바름을 얻지 않을 수 없고, 그런 뒤에 미루어서 사물에 미치면 있는 사물 또한 모두 그 바름을 얻지 않음이 없어서 사물과 나 사이에 간극이 없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해서 사사로운 자기의 저절로 편한 마음을 주로 삼고 또 이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미치려 한다면 인간의 도리는 세워지지 않고, 한 세대를 몰아붙여[驅] 일시적인 임시변통의 궁색한 장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대학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장의 혹문가운데서 이 일을 극론(極論)하였는데, 이번 편지에서는 급한 나머지 부쳐 드리지 못했사오니, 빠른 시간 내에 따로 부쳐드리겠습니다.
心喪問大意甚善, 但云本生之服視其屬之親疏, 却似不然. 蓋不問其親疏, 而槪以齊衰不杖期服之也. 本生繼母, 蓋以名服. 如伯叔父之妻, 於己有何撫育之恩? 但其夫屬乎父道, 則妻皆母道, 况本生之父所再娶之妻乎? 此兩節幸更考之. 恕說亦佳, 但大學絜矩常在格物之後, 蓋須理明心正, 則吾之所欲所不欲莫不皆得其正, 然後推以及物, 則其處物亦莫不皆得其正而無物我之間. 如其不然, 而以私己自便之心爲主, 又欲以是而及人, 則人道不立而驅一世以爲姑息苟且之場矣. 此處亦幸更思之也. 熹嘗於大學‘治國平天下’或問中極論此事, 此便遽未及奉寄, 旦夕別附致也.
황상백에게 답함 答黃商伯
[해제] 이 편지는 광종(光宗) 소희(紹熙) 5년(甲寅, 1194년), 주자 나이 65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362쪽)
제가 사록관을 청했는데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생각건대 며칠 동안 나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개 그가 간지 이미 이십 여일이 지났는데, 노정(路程)을 생각해봐도 마땅히 돌아와야 할 때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반드시 이미 청한 바와 같이 되기를 조서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머물 뿐입니다. 만일 이루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제가 생각건대, (제가) 처한 상황이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새해가 되어 몸이 쇠약해지고 병들어 지리(支離)함이 날로 심해지니 이제 다른 바람이 없이 다만 남은 일생 동안 배불리 먹고 마시고 싶을 뿐입니다. 지난 해[往年]에 예장(豫章)을 여행할 때, 언제나 동호(東湖)에 이르렀으니, 개연히 진중거(陳仲擧)․서유자(徐孺子)의 고상한 풍모를 (마음에)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처에 화와 복이 같지 않으나 또한 각각 그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저 같은 사람은 마침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熹請祠人未還, 計亦不出數日. 蓋其去已餘兩旬, 計程當歸已久. 必是已如所請, 等候出敕留滯耳. 萬一未遂, 愚計所處正如來喩之云也. 年來衰病, 支離日甚, 今無他望, 但願殘年飽喫飯耳. 往年遊豫章, 每至東湖之上, 末嘗不慨然有懷陳仲擧․徐孺子之高風. 出處之間, 禍福不同, 然亦各行其志. 未知此漂漂者竟如何耳.
보내주신 편지에서 지난번에 말씀하신 상복제도에 대해, 사사로운 제 생각으로는 진실로 의문이 듭니다. 복두사각(幞頭四脚)에 대해서는 깨우친 바가 있었습니다. 다만 뒤에 (저리(邸吏)가) 보낸 답장 가운데에 복두(幞頭)도 있고 또 사각(四脚)도 있었는데 각각 하나의 종류로 여겼으니, 여기의 주문(注文)과는 또 같지 않습니다. 오늘날(지금) 수도에 있는 여러 관리들이 어떻게 받들어 행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한 사람도 물으러 오지 않아서 글을 써서 예관에게 알렸으나, 끝내 답장이 없었습니다. 직령(直領) 난삼(襴衫)에 상령(上領)을 두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기에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내 만드는 사람이 말한 것에 다만 베를 사용하여 (가로로) 꿰매어 감침질하여 목을 둘러싸 곧장 지나가면 대략 둥근 깃 모양이 만들어지며 사백(斜帛)을 사용하여 붙여 이어서 둥글게 에워싸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주현(州縣)에서는 많은 곳에서 이 제도를 사용합니다. 이에 대해 상세하게 말한 것은 단지 전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못한 것이나, 예관의 뜻도 도리어 반드시 이와 같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관리들도 반드시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구분하는 가운데서 드러날 뿐입니다.
示喩向來喪服制度, 私固疑之. 㡤頭四脚, 所喩得之矣. 但後來報狀中有㡤頭, 又有四脚, 各爲一物, 與此注文又不同. 不知當日都下百官如何奉行, 固無一人來問, 以書扣禮官, 竟亦未報也. 至於直領欄衫上領不盤, 此間無人曉得, 遂有爲之說者云, 但用布夾縫繞頸直過, 略作盤領之狀, 而不用斜帛接續盤繞. 州縣多用此制. 詳此只是杜撰, 但禮官之意却未必不是如此. 然想官人亦未必曉, 只是手分世界中化現出來耳.
가만히 생각건대 아마도 직령(直領)은 옛날의 예입니다. (삼례도(三禮圖)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난삼(襴杉)은 오늘날의 예입니다. (공복(公服)에 관한 문서에는 횡란(橫欄)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고사 가운데 일찍이 두 가지 설이 있었는데, 각각 하나의 설을 써서 이제 마침내 합하여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미 모순이어서 합치될 수 없는데 이에 이를 위하여 두찬(杜撰)의 설로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답장 가운데 한 조목으로 증명하면, 이미 사건(斜巾)이 있고, 또 모자가 있고, 사각이 있고, 관이 있는데, 하루의 정오에 머리 위에 사복(四服)을 더하니, 이것 또한 옛날과 오늘날의 잘못을 아울러 합해놓은 것입니다. 대개 사건(斜巾)은 본과 말을 갖추어서 상복을 입을 때 쓰는 관이니 옛날의 문모(免帽)와 같은 것으로 사계삼(四䙆衫)과 함께 일컬어집니다. 사각은 곧 난삼과 함께 일컬어집니다. 관은 삼례도에 보이는 것인데 마땅히 직령 삼군(杉裙)과 함께 일컬어집니다. 이제 네 가지 것을 더하고 하복(下服)에 난삼이 있고 치마[裙]가 있어, 또한 중복되니, 참으로 직령의 옷은 마침내 없애야 합니다. 이 한 가지 일은 사람들의 기운을 어둡게 합니다. 이제 다행히도 토론의 명이 있었으나, 찾아오는 사대부 가운데 옛것을 좋아하고 예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차제(次第)에 또 띠로 묶고 종이로 안을 채울 뿐 두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竊疑直領者, 古禮也; (檢三禮圖可見.) 襴杉者, 今禮也. (如公服之狀, 乃有橫襴.) 必是故事中曾有兩說, 各用一說, 而今遂合爲一. 旣矛盾而不合, 於是爲此杜撰之銳以文之耳. 更以報中第一項證之. 旣有斜巾, 又有帽, 又有四脚, 又有冠, 一日之中, 一元之上幷加四服, 此亦幷合古今之誤. 蓋斜巾本末成服之冠, 如古之免帽, 却與四䙆衫爲稱 : 四脚卽與欄衫爲稱. 冠卽見三禮圖者, 當與直領衫裙爲稱. 今則幷加四者, 而下服有襴有裙, 亦是重複, 而眞直領之衣遂廢. 只此一事, 便令人氣悶. 今幸有討論之命, 然亦未見訪尋士大夫之好古知禮者, 次第又只是茅纏紙裹, 不成頭緖.
최근에 백일 동안 졸곡(卒哭)한다고 알려졌는데 이것 또한 심하게 상도에 벗어납니다. 또한 당나라의 제도[唐制]는본래 왕공 이하에 적용되는데 어찌 국가에서 마땅히 쓸 수 있겠습니까? 예기(禮器)의 잘못은 단지 하나의 술잔 뿐만은 아닙니다. 지금 조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선화(宣和) 년간에 만든 예제국의 법식(法式)은 비록 반드시 모두가 옛것과 합치되지는 않지만 그것과 거의 가깝습니다. 당시에 예부에서 인쇄한 책은 무슨 이유로 옛 제도만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남강(南康) 또한 (경제적) 힘이 없었으나, 다만 술잔의 형태가 너무 보기 싫어서 구용(句容)에서 새로 만든 것이 있었으므로 바꿨을 뿐입니다. 그 실상은 모두 마땅히 사람을 보내서 예시(禮寺)에 물어보고 다 바꿨으니 아주 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비용이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서 주와 군의 경제력으로는 처리할 수 없을 까 걱정이 됩니다. 복주의 여승상[余丞相: 여심(余深)]의 집에 당시에 하사받은 것이 있었는데 대단히 정밀했으나 지금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近報作百日禮數, 此亦不經之甚. 且唐制本爲王公以下, 豈國家所宜用邪? 禮器之失, 不但一爵. 今朝廷所用宣和禮制局樣度, 雖未必皆合古, 然庶幾近之. 不知當時禮部印本何故只用舊制? 向來南康, 亦無力, 但以爵形太醜, 而句容有新鑄者, 故易之耳. 其實皆當遣人問於禮寺而盡易之, 乃爲盡善. 但恐其費不貲, 州郡之力不能辦耳. 福州余丞相家有當時所賜, 甚精, 然今亦莫能用也.
주염계의 사당은 군장(郡將)이 이와 같이 유의하였으며, 아울러 도정절(陶靖節)․유서간(劉西澗)의 사당도 또한 대단히 좋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세속의 관점에서 말하면 긴요할 것이 없을 듯 보이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보면 인간의 마음과 정체(政體)와 관련되어 있어 또한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닙니다. 지금 황정(荒政:흉년에 백성을 구하는 정치)이라 하는 것도 곧 이 일과 서로 안과 바깥의 관계에 있습니다. 만약 경자년(선화(宣和)2년, 1120년)에 수령의 식견과 같다면, 저들이 기꺼이 이러한 일을 하겠습니까?
濂溪之祠, 郡將乃能留意如此, 幷及陶․劉, 亦甚善. 此等事自世俗言之似無緊要, 然自今觀之, 於人心政體所繫亦不輕. 如今曰荒政, 便與此事相表裏. 若如庚子年中守令見識, 彼安肯作此事邪?
황상백에게 답함 答黃商伯
[해제] 이 편지는 광종(光宗) 소희(紹熙) 5년(甲寅, 1194년), 주자 나이 65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362쪽)
임금의 상을 당해[方喪] 담제(禫祭)를 지내지 않은 것은 통전에 보이는데, 정강성(鄭康成: 정현)이 말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편을 두루 검토해 보아도 그러한 글을 발견할 수 없으니, 감히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방상(方喪)’이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예제와 율령[禮律]이 더욱 분명해지니, 속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의례 「상복전」에 ‘군주의 조부모와 부모’조목의 아래 소에 조상(趙商)의 문답에 아주 상세하니, 분명히 이것에서 이번 일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지난번에 망령된 이론에서는 이것을 알지 못했는데, 돌아와서 알게 되어, 비로소 학문은 이와 같이 넓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좌씨[좌구명]와 두예(杜預)가 기록한 것은 선왕의 예법의 바른 도가 아닌 것이 많으므로 전거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컨대 삼대(三代)의 예는 길흉(吉凶)과 (복의) 가볍고 무거운 사이에도 반드시 서로 내려서 막은 곳이 있습니다. 「고명」․「강고지고」와 같은 데는 저절로 이와 같이 때와 경우에 합당한 제도[權制]가 있어서, 예가 끝나면 도리어 다시 상복을 입었으니, 이것을 곧 한결 같이 상복을 벗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方喪無禫, 見於通典, 云是鄭康成說. 而遍檢諸篇, 末見其文, 不敢輕爲之說. 但今日不可謂之方喪, 則禮律甚明, 不可誣耳. 儀禮喪服傳‘爲君之祖父母․父母’條下疏中趙商問答極詳, 分明是畫出今日事. 往時妄論, 亦末見此, 歸乃得之, 始知學之不可不博如此, 非細事也. 左․杜所記, 多非先王禮法之正, 不可依憑. 要之三代之禮, 吉凶輕重之間, 須自有互相降厭處. 如顧命康王之誥之類, 自有此等權制, 禮畢却反喪服, 不可爲此便謂一向釋服也.
심상(心喪)에 담제를 지내지 않는 것은 또한 통전에 보이는데, 육조시대에 태자가 어머니를 위하여 복을 입은 기일은 제외하고, 심상(心喪) 3년을 마친 것입니다.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담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또한 오늘날 영종께서 중통을 이어 받은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이 일은 본래 말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이로부터 한 가지 일을 강학하였으므로 언급하오니 결코 인간의 도리를 벗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心喪無禫, 亦見通典, 乃是六朝時太子爲母服期已除, 而以心喪終三年. 當時議者以爲無禫, 亦非今日之比也. 此事本不欲言, 以自是講學一事, 故及之, 切勿爲外人道也.
궤좌(跪坐)에 대해서는 최근에 양자미(楊子美)의 글을 받았는데, 중이 부처 앞에 예배하며 죄를 참회하고[禮懺], 도사가 주문을 외우는 것을 인용하여 비교하였는데, 저들이 대개 어렵게 여기지 않는 것은 단지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 또한 깨달았다 할 수 있습니다. 황우제식(皇祐祭式)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책이 있다면 인편에 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때 사용한 것은 개보통례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그 책이 있으니 한번 참고하여 교정하려고 합니다. 개보통례와 (대당)개원례는 대개 서로 이어진 것인데, 개원례에는 다만 선사(先師) 두 분의 위패만 있고, (여러분에게) 배향하지 않았으니 혹시 개보통례를 증보(增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법에 위패는 단지 땅에 눕혀 헌관(獻官)의 위판(位版: 제왕이 천지와 조종(祖宗)에 교사(郊祀)를 지낼 때 신위를 쓰는 판)과 서로 비슷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신위로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지금은 헌관의 위판을 땅에 심어서 책상다리를 하여 세운 것은 모두 잘못입니다.) 소상(塑象)을 개원례와 같이 하는 경우는 없으니, 생각건대 개원(開元) 당시에 처음으로 공부자(孔夫子)에게 문선왕(文宣王)의 호칭을 붙여서 곧 내전(內殿)에서 곤룡포와 면류관을 내서 입혔다면 상이 있게 되는데,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이 부딪쳐서 거스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찌 예서를 고치는 데 우선 옛 것을 보존하여 실제로 반드시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한퇴지[한유]․유우석의 여러 묘(廟)의 학비[儒學碑記]에도 또한 모두 상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본조(本朝)에도 본래 있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다시 고찰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跪坐近得楊子美書, 引僧人禮懺․道士宣科爲比, 彼蓋未嘗以爲難, 只是慣耳. 其說亦爲得之. 皇祐祭式却未之見, 如有本, 幸因的便借及. 彼時所用, 只是開寶通禮. 此有其書, 欲一參校也. 開寶與開元大槪相襲, 開元只有先師二位, 無諸從祀, 或是開寶所增也. 位牌於法亦只臥之於地, 與獻官位版相似, 非此爲神位也. (今獻官位版亦有植之以趺而立之者, 皆誤也.) 塑象如開元禮則無之, 想當時初加夫子王號, 卽內出袞冕以被之, 則爲有象, 不知何故牴牾如此. 豈所修禮書亦姑以存古而實未必行邪? 而韓退之․劉禹錫諸廟學碑亦皆言有象, 本朝則固有之久矣. 可更試考之也.
황상백에게 답함 答黃商伯4
[해제] 이 편지는 영종(寧宗) 경원(慶元) 4년(戊午, 1198년), 주자 나이 69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455쪽)
물음: 대학의 “그쳐야 할 것을 안 뒤에 ~ (지극한 선을) 얻을 수 있다”에 대하여 대학혹문에서 “‘그쳐야 할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물이 이르고 앎이 이르러서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 모두 그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쳐야 할 곳을 알면 각각의 모든 사물에 정해진 이치가 있게 된다.”고 하였으며, 깊이 생각하는 데 이른다면 “일에 따라서 이치를 살펴보는데 있어 지극히 깊이 탐구하고 미세한 부분까지 연구함으로써 각각 그쳐야 할 곳을 얻어 이에 그치지 않는 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격물(格物)은 세상의 사물을 속속들이 궁구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오늘 하나의 사물에 이르고, 내일 또 하나의 사물에 이르도록 해서, 거듭하여 쌓인 것이 많아지면 완전히 벗어나서 저절로 관통하는 것이 있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하나의 사물의 이치가 궁구되면 하나의 사물에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알 수 있고 또한 그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정(定)․정(靜)․안(安)․려(慮) 네 절이 있으니,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그쳐야 할 지극한 선을 알고 힘을 쓴 뒤에 그칠 바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대학혹문에서는 반드시 세상의 이치를 속속들이 궁구 한 뒤에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알아서 그칠 수 있게 된다고 보아, 정자가 말한 격물공부와 다른 듯한데 대학혹문이 가리킨 것은 대학의 전체 극치를 들어 말한 것이 아닙니까?
大學‘知止能得’, 或問云: ‘知止云者, 物格知至而於天下之事皆有以知其至善之所在. ’又曰: ‘能知止則事事物物皆有定理.’ 至‘能盧’, 則又曰.. ‘隨事觀理, 極深硏幾, 無不各得其所止之地而止之.’ 程子則曰: ‘格物非欲盡窮天下之物’, 又曰: ‘今日格一件, 明日格一件, 積習多後, 脫然有貫通處.’ 妄謂一物旣格, 則能知一物至善之所在, 而亦可得其所止. 然猶有定․靜․安․慮之四節, 學者必知止而用其力, 然後求得所止也. 今或問以爲必盡窮天下之理, 然後可以知至善所在而得所止. 與程子所言格物工夫似若不同, 得非或問所指是擧大學之全體極致而言之歟?
대답: 경문에서 ‘물격(物格: 사물의 이치가 궁구된 것)’은 오히려 한 가지 일로써 말할 수 있지만, ‘지지(知至: 앎이 이름)’는 내 마음이 알 수 있는 한 더 이상 다하지 않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자가 ‘하루에 하나의 일을 궁구한다’고 한 것은 격물공부의 차례입니다. ‘완전히 벗어나서 관통한다’는 것은 ‘지지’ 효험의 극치입니다. 그 순서를 따르지 않고 곧장 그 전체를 바라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단지 대충 알려고만 하고 관통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한정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경(古經)과 정자의 말에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經文物格猶可以一事言, 知至則指吾心所可知處不容更有未盡矣. 程子一日一件者, 格物工夫次第也. 脫然貫通者, 知至效驗極致也. 不循其序而遽責其全, 則爲自罔 : 但求粗曉而不期貫通, 則爲自畫. 故古經․程子之言未見其有不同也.
물음: 중용장구에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이 각기 부여한 이치를 얻어서 굳건하고 유순한 오상의 덕으로 삼으니 이것이 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음양과 오행의 정기(精氣)가 오묘히 합하여 응취되면 건순오상의 덕이 부여되는 것은 이치상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오상만을 말하고 건순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마음에서 체득하여 선을 행하는데 민첩한 것은 굳건함이고, 그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은 유순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로부터 오상만을 말하고 건순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中庸章句言人物之生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竊謂二五之精妙合而凝, 則賦健順五常之德, 理無可疑. 然自昔秖言五常而不及健順, 體之於心, 得非敏於爲善者是其健․循其自然者是其順乎? 然自昔秖言五常而不及健順, 何邪?
대답: 음양이 오행으로 되는 것은 나누어서 말하면 목(木)·화(火)는 양에 소속시키고 금(金)·수(水 )는 음에 소속시킨 것과 같고, 합하여 말하면 목은 갑에, 화는 병에, 토는 술에, 금은 경에, 수는 임에 연관 지은 것이니 모두가 양이며, 을·정·기·신·계는 모두가 음입니다. 이에 따라 유추해보면 건순오상의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陰陽之爲五行, 有分而言之者, 如木火陽而金水陰也., 有合而言之者, 如木之甲, 火之丙, 土之戊, 金之庚, 水之壬皆陽, 而乙․丁․己․辛․癸皆陰也. 以此推之, 健順五常之理可見.
물음: 중용장구에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이 각기 부여한 이치를 얻어서 굳건하고 유순한 오상의 덕으로 삼으니 이것이 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혹문에서도 또한 “사람과 사물에 있어서 비록 기품의 다름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이치는 같지 않은 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맹자집주의 ‘생의 본능을 성이라 한다’고 말한 장에서 “기로써 말한다면 지각과 운동은 사람과 사물이 다르지 않은 듯 하되, 이치로써 말한다면 인의예지의 본성을 받음이 어찌 사물이 얻어서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말은 다른 듯한데 기가 이미 같지 않다면 부여받은 이치도 또한 (이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까?
中庸章句謂人物之生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或問亦言在人在物雖有氣稟之異,而其理則末嘗不同. 孟子集注生之謂性章, 以氣言之則知覺運動人與物若不異也, 以理言之則仁義禮智之禀豈物之所得而全哉? 二說似不同, 氣旣不齊, 則所賦之理亦隨以異歟?
대답: 만물의 동일한 근원을 논하면, 이치는 같지만 기는 다릅니다. 만물의 서로 다는 형체를 살펴보면, 기는 오히려 서로 가깝지만 이치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기가 다른 것은 순수하고 잡박함의 같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고, 이치가 다른 것은 치우치고 온전함에 혹시라도 다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다시 상세하게 살피시면 저절로 마땅히 의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論萬物之一原, 則理同而氣異., 觀萬物之異體, 則氣猶相近而理絶不同也. 氣之異者, 粹駁之不齊 : 理之異者, 偏全之或異. 幸更詳之, 自當無可疑也.
물음: 석자중(石子重)의 집해에서 ‘태어난 그대로를 성이라 하니 성이란 기이며, 기란 성이다’라고 한 한 장을 인용하였는데, 가만히 생각건대 이 장은 먼저 이치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음을 밝히고 마침내 기질의 본성에 비록 선과 악이 있음을 말했으나, 본성 가운데는 원래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처음부터 선할 뿐입니다. 기품으로 말미암아 어둡고 흐림이 있게 되고, 또한 사사로운 욕심에 더럽게 물들어서 선한 사람이 마침내 악하게 됩니다. 악을 행할 때를 당하여 따로 하나의 선한 본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악도 성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흐린 것도 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은 마치 ‘도를 이루는 것은 성’이라 한 것을 가리킨 이후를 말한 것과 같아서, 맹자에서 근본으로 파헤쳐 성선의 근원을 궁구하는 논의와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악이 혹시라도 싹트지 않는다면 본체도 또한 때때로 드러납니다. 만약 맑게 다스릴 수 있다면 그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이 흘러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 ‘도를 계승하는 것은 선’이라고 한다면, 이로써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이미 발현된 뒤는 모두 ‘계승하는 것[繼]’을 가리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반드시 역해의 설과 같이 ‘이를 이루는 것은 성이다’ 앞에 두는 것이 바로 역의 본래 뜻입니다. 악에 견준 것은 전적으로 욕구가 움직이고 감정이 흘러나온 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흐림을 건대 반드시 대학집해의 설과 같이 기품이 다름에 따라 또한 사사로운 욕구가 그 사이에서 생겨나니, 이 두 구절을 나눈 뒤에야 (뜻이) 자세하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옳은가요, 그른가요?
石氏集解引‘生之謂性, 性卽氣, 氣卽性’一章, 竊謂此章先明理與氣不相離, 遂言氣質之性雖有善惡, 然性中元無此兩物相對而生, 其初只是善而已. 由氣禀有昏濁, 又私欲汙染, 其善者遂變而爲惡. 當爲惡時, 非別有一善性也. 故有惡不可不謂之性, 濁不可不謂之水之說, 似指‘成之者性’以後而言, 與孟子拔本窮源性善之論不同. 然惡或不萌, 則本體亦有時發見. 若能澄治, 則復其初矣. 至於水流而就下, 以爲繼之者善, 則是以喜怒哀樂已發之後皆指爲繼. 竊謂須如易解之說, 在‘成之者性’以前, 方是本旨. 以濁比惡, 亦是專指‘欲動情流’之後. 竊謂須如大學集解之說, 因氣稟之不齊, 而又私欲生其間, 分此兩節, 然後精盡也. 未審是否?
대답: ‘이를 계승하는 것은 선이다’는 주역 가운데서 본래 조화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아래 구절에 ‘이를 이루는 것은 성이다’는 사람과 사물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정자가 인용한 것은 위의 한 구절을 빌려 인간의 본성의 측면에서 말하여서 그것이 이미 발현하여 움직이는 행위를 가리킨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요하다’는 말 외에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곳은 곧 성의 본체입니다. 예컨대 물은 단지 물일 뿐 따로 한 글자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지극한 것을 선이라고 한다면 성의 발현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맑음과 흐림의 비유는 또 하나의 구절인데, 보내오신 편지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대체로 이 한 조목에서는 ‘성’이라는 글자를 가장 많이 말했습니다. 어떤 구절은 본래의 성이고 어떤 구절은 기질의 성인지 반드시 구별해야 말의 맥락이 저절로 분명해질 것입니다.
繼之者善, 易中本是就造化上說. 到下句‘成之者性’, 方以人物而言. 程子所引, 乃借上一句便就人性上說, 而指其已發動之所爲也. 不容說處, 卽性之本體. 如水則只是水, 別著一字不得. 至謂之善, 則性之發如水之下矣. 淸濁之喩, 又是一節, 來喩已得之矣. 大抵此一條說性字最多, 須分別得甚句是本來之性, 甚句是氣質之性, 卽語脈自分明矣.
물음: “아직 발현되기 전에는 마땅히 경으로써 보존하여 기르고, 이미 발현된 뒤에는 또한 마땅히 경으로써 살펴야 합니다.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 가운데서는 헤아려서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마음과 눈에[心目] 환해집니다. 한번 구하려는 마음이 있게 되면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은 본래 얻어서 볼 수가 없습니다.” 분석한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여씨가 아직 발현하기 전에 중을 구하여 지키려 한 것은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발현한 정은 마음의 쓰임이니 여기서 살펴보아야 마음으로 마음을 보는 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앞 장의 혹문에서 따로 한 마음으로 이 한 마음을 구하고 이 한 마음을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논어혹문의 ‘관과지인(觀過知仁: 그 사람의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이 인한가를 알 수 있다.)’장에 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경에 의거하여 (마음을) 보존하여 기르거나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지극히 할 수 없어서, 오직 마음에서 돌이켜 구하는데 힘쓰는데, 급박하고 위태로우며, 과정이나 등급에 의거하지 않으며, 혹은 이단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경을 지키고, 체와 용이 서로 갈마들며, 의미가 맞대어 이어진 것과 어찌 다르다 하지 않겠습니까?
未發之前, 唯當敬以持養 : 旣發之後, 又當敬以察之. 未發之中, 不待推求而已瞭然於心目. 一有求之之心, 則其未發者固已不得而見矣. 剖析可謂明白. 呂氏欲求中於未發之前而執之, 誠無是理. 然旣發之情是心之用, 審察於此, 未免以心觀心. 前章或問謂別以一心求此一心․見此一心爲甚誤. 論語或問‘觀過知仁’章亦有此說. 豈非學者不能居敬以持養·格物以致知, 專務反求於心, 迫急危殆, 無科級依據, 或流入於異端, 與始終持敬․體用相涵․意味接續者爲不同也?
대답: 이미 발현된 곳에서 마음의 본체와 법칙[權度:저울과 자]으로 그 마음의 발현된 것을 살펴서 가볍고 무거우며,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을 까 걱정할 뿐입니다. 이른바 “모든 사물이 다 그렇거니와 마음은 더욱 심하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만약 발현한 마음으로써 따로 마음의 본체를 구하려 한다면 이러한 이치는 없습니다. 이것이 호씨[胡明仲]의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이 인한가를 알 수 있다’는 설이 통용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已發之處, 以心之本體權度, 審其心之所發, 恐有輕重長短之差耳. 所謂‘物皆然, 心爲甚’ 是也. 若欲以所發之心別求心之本體, 則無此理矣. 此胡氏觀過知仁之說所以爲不可行也.
물음: 중용 제20장의 (애공이) 묻는 말에서 ‘성(誠)’에 대해 비로소 상세합니다. 선을 밝히고 선을 가리는 것은 성의 기본이 되는 것인데, 또한 이 장에서 비로소 아울러 말하였습니다. 예전에 시험삼아 건괘의 구삼(九三)·구사(九四)와 곤괘의 육이(六二)를 보았는데, 성인이 건괘의 닦음은 역이 되고, 곤괘는 공부가 번성하여 결실을 맺음을 말하여 성인과 현인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학은 처음부터 치지와 격물을 말하고, 중용 머리 장에서는 오직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혼자인 데를 삼감을 말했기 때문에 공부의 규모가 대학에 비해 고원하다고 느꼈습니다. 곧장 20장에 이르러서 비로소 선을 밝히고 선을 가리는 것을 말하였으니 대학과 가르치는 것은 같습니다. 또한 두 책이 배우는 사람의 그릇과 바탕에 따라 가르치는 것도 비슷합니다.
中庸第二十章之問語誠始詳, 明善擇善所以爲誠之基本者, 亦始於此章倂言之. 舊嘗觀乾九三․九四與坤六二, 覺聖人說乾之脩爲易, 而坤則工夫繁實, 似有聖賢之分. 大學初說致知格物, 中庸首章惟言戒懼謹獨, 工夫規模, 覺得似比大學爲高遠. 直至二十章, 始言明善擇善, 與大學所以敎者同. 亦似二書隨學者器質爲敎也.
대답: 대학은 배움의 처음과 마지막을 통틀어서 말한 것이고, 중용은 곧장 본원의 극치를 가리킨 것이니, 크고 미세한 것이 서로 갈마들며, 정미한 것과 거친 것이 서로 관통하니 모두 빠뜨릴 수 없어서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大學是通言學之初終, 中庸是直指本原極致處, 巨細相涵, 精粗相貫, 皆不可闕, 非有彼此之異也.
물음: 오행은 각각 하나의 본성이 있으며, 마땅히 오행도 각각 하나의 덕이 있습니다. 예전에 듣건대 선생께서 의리상 경계를 나누어서 이르는 곳은 모름지기 끊어야 하지만 관통하는 곳은 저절로 관통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인이 발현되어 애(愛)가 되고 애가 마땅함을 얻은 것이 바로 의(義)며, 차등을 두어 절차를 매긴 것이 바로 예의 부류라면 본체는 비록 각각 세워지지만 또한 서로 관통하는 것입니다. 오행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찍이 사람들이 오행의 체질을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곧 토(土)가 목(木)의 단단함과 같다면 또한 금(金)이 있습니다. 금이 따르면서 바꾸는 것도 굽고 곧은 성질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이치에 분명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비록 일에 급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략이라도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五行各一其性, 宜五行亦各一其德. 舊聞先生說義理分界至處須要截然, 要貫通處又自貫通. 竊謂仁發而爲愛, 愛而得宜便是義, 有品節便是禮之類, 則體雖各立, 而亦相貫通. 竊恐五行亦如此. 嘗見人言五行之體質, 便是土如木之堅, 則亦有金 : 金之從革, 亦有曲直之性也. 未審是否, 理有未明. 雖於事非急, 亦不可終於不知. 略乞賜敎.
대답: 굽으면서 곧은 것, (곡식을) 심어서 수확하는 것은 각각 두 가지 일이니, 나머지도 이러한 예를 준거로 삼아야 합니다. ‘윤하(潤下)’는 적셔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고, ‘염상(炎上)’은 불타 오르는 것입니다. ‘종혁(從革)’은 한편으로는 따르고 한편으로는 바뀌는 것이니, 서로 변하면서도 본체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曲直稼穡各是兩事, 餘亦合凖此例. 潤下者, 潤而下也 : 炎上者, 炎而上也., 從革者, 一從一革, 互相變而體不變也.
물음: 첫째 수, 둘째 화, 셋째 목, 넷째 금, 다섯째 토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기는 처음에는 따뜻할 뿐인데 따뜻하면 무더워지고, 무더우면 갑자기 다다르며, 갑자기 다다르면 굳게 엉기고, 굳게 엉기면 형질이 있게 됩니다. 다섯 가지는 비록 하나가 있으면 (네 가지가) 함께 있다 할지라도, 앞과 뒤의 순서를 헤아려보면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一日水, 二日火, 三日木, 四日金, 五日土. 竊謂氣之初, 溫而已, 溫則蒸溽, 蒸溽則倏達, 絛達則堅凝, 堅凝則有形質. 五者雖一有俱有, 然推其先後之序, 理或如此.
대답: 지난번에 오두남이 오사(五事)와 서증(庶證)은 모두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순서를 정해야 한다고 말했으니, 시험 삼아 헤아려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向見吳斗南說五事庶證皆當依此爲序, 其言似有理, 幸試推之.
물음: 귀신의 이치는 헤아려서 알기 쉽지 않지만 배우는 사람들은 (그들이) 본 것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선조를 제사지내는 뜻은 지난번에 ‘성인은 (귀신의) 있고 없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말에 따르면 가만히 생각건대 기가 흩어져도 없어지지 않아서 진실로 이른다면 느껴서 통하는 이치가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자손은 그 혈기가 전해진 것이라면 느껴서 이르는 것도 더욱 빠를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옳은가요, 그른가요?
鬼神之理未易測識, 然學者亦欲隨所見決其是非. 祀先之義, 向來因‘聖人不言有無’之說, 竊謂氣散而非無, 苟誠以格之, 則有感通之理. 况子孫又其血氣之所傳, 則其感格尤速也. 未審是否?
대답: 세 조목은 모두 좋습니다. 장횡거가 오행에 대해 말한 여러 단락은 대단히 자세하니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三絛皆善. 橫渠說五行數段甚精, 可幷考之.
물음: 진승사(陳勝私)가 일찍이 우레 소리가 나고 벼락이 치는 것은 참으로 귀신같은 사물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선생께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바른 이치에 근거해서 견식(見識)을 세우고 뒤에 이치가 변한 것은 순서에 따라 통하면 된다. 만약 이치가 변한 것이 먼저 마음에 들어와서 일정한 견해를 세우면 바른 이치는 마침내 깨우칠 수 없게 된다.”고 말씀하였는데, 조용히 가슴 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과 재아의 물음에 답하신 것, 정자와 장자의 말은 바른 이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장자가 ‘신과 성은 기가 본래부터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 말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듯해서 도리어 배우는 사람들이 성이 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의심하고 리가 기보다 앞선다는 점을 깨닫지 못할 까 걱정이 되니, 말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사상채의 설에 대해 혹문에서 좋다고 하였습니다. 석자중이 모은 말에 이치의 변화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는지 적이 의문이 드니, 예컨대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데서 비로소 얻어진다.”는 것도 마음으로 일어나고 없어져서 있고 없음의 바른 이치를 물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상채의 뜻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은 사람을 보내는 데 있어서) 완전히 죽은 사람에 대한 예로 대하면 불인하고, (죽은 사람을 보내는데 있어서) 완전히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예로써 극진히 한다면 지혜롭지 못하다.”는 뜻에 따라 생각하여, 종묘에서 제사지내는 데 완전히 죽은 사람에 대한 예로써 대하지 않고, 매장하여 단선(壇墠)을 설치하여 제사지내는 데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예로써 대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치에 맞는 것으로 성인이 예를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로써 마음을 움직여 통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사정이 정미(精微)하여 인과 지혜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만약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라면 성인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치가 변한 것은 가만히 생각건대 모두 기가 한 것이며, 모두 사람에 기인한 것이니, 비록 다시 다단(多端)할지라도 순서에 따라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른바 천지의 묘용이 어찌 음양을 조화시키는 이치와 인심정신의 모임이 위아래로 감화하는 데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저의 생각은 이와 같으나 자못 분명하게 통하지 않습니다. 지적하여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陳勝私嘗說雷霆震擊, 眞有鬼物, 先生不答. 次日乃言, 學者當於正理上立得見識, 然後理之變者可次第而通. 若將理之變者先人於心, 立爲定見, 則正理終不能曉矣. 竊嘗服膺. 妄謂夫子所言與答宰我之問, 程子․張子之論, 無非正理. 但張子‘神與性乃氣所固有’之語似主氣而言, 却恐學者疑性出於氣, 而不悟理先於氣, 語似末瑩. 未審然否? 上察之說, 或問以爲善. 竊疑石氏所集其言有及於理之變者, 如‘自家要有便有, 要無便無, 始得’, 又似以心起滅, 不問有無之正理. 上蔡之意必不如是. 某因‘致死不仁, 致生不智’之訓思之, 恐宗廟祭祀, 不致死之也; 葬埋壇墠, 不致生之也. 理之有者, 聖人制禮, 使人誠意以感通. 其間曲折精微, 莫非仁智之盡. 若理所無者, 聖人不道也. 至於理之變者, 竊謂皆氣之所爲而皆因於人, 雖復多端, 似可以次第而曉. 所謂天地之妙用, 豈非造化陰陽之理․人心精神之聚上下感化之所自歟? 妄意如此, 殊未明徹. 乞指敎.
대답: 이 논의는 대단히 좋습니다. 다만 장자의 말은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귀신을 논한 것은 기에 가깝기는 하지만 섣불리 (기를) 리보다 앞에 두었다는 의심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사상채의 논어위정」 마지막 편에서 귀신을 논한 것이 대단히 상세합니다. 대체로 보내주신 편지와 같지만, 참고하면 좋을 듯 합니다.
此論甚善, 但張子語不記子細. 然論鬼神, 則氣爲近, 未至遽有先於理之嫌也. 上察論語爲政卒篇論鬼神甚詳, 大槪亦如來喩, 恐可參攷也.
황상백에게 답함 答黃商伯5
[해제] 이 편지는 영종(寧宗) 경원(慶元) 4년(戊午, 1198년), 주자 나이 69세 때 쓴 것이다. (편년고증 455쪽)
저는 어려서부터 스승과 친우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성학의 문호(門戶)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물러나 친구들과 더불어 강론하면서 들어서 믿은 것이 참으로 많았으나, 시작과 마무리에 힘을 썼으나 중도에 그만둔 것이 아주 적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나이가 많이 들어 관직에 나가면 갑자기 잊어버리는 것은 더욱 빨라집니다. 저는 이것을 항상 깊이 걱정하였는데, 선사(先師)께서 전해 준 뜻이 여기에 이르러서 마침내 끊어질까 두렵습니다. 이제 보내온 물음을 받고 항상 이 일을 생각하였는데, 그 논하신 말이 또한 저의 뜻과 들어맞아서 이 도가 오히려 유망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전에 논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설(이것은 지난해에 신주에 부쳐온 편지입니다.)과 이제 논하신 주역을 읽는 (방법에 관한) 설은 참으로 욕심이 없는 말이어서 모두 공평하고 올바르며 정밀하고 적절하여 한번 개괄해보는 한가한 논의가 아닙니다. 또한 나이도 오십을 넘었고, 게다가 세상일을 살펴야 할 것도 많은데, 간절하게 여기에 힘을 써서 나이가 어린 사람이 새로이 배움에 힘쓰는 것보다 더욱 열심히 하니 가상(嘉尙)하게 여길만 합니다. 다시 바라건대 힘써 노력하여 마침내 바라는 것에 부응할 수 있으면 또한 큰 다행이겠습니다. 희가 삼가 드립니다.
熹自少日幸蒙師友之訓, 得窺聖學門戶. 退與朋友講之, 聞而信者固多, 然能終始用力而不爲中道之廢者甚少. 况年大官達, 則其忽然忘之者益以速矣. 區區以此每深憂之, 恐先師傳付之旨至此而遂絶也. 今得來問, 每以此事爲念, 而其論說亦多與鄙意合, 乃知此道猶有望也. 幸甚幸甚. 如前時所論仁義禮智之說,(此是去年信州發來書.) 今者所論讀易之說, 眞無欲之說, 皆平正精切, 非一槪悠悠之論. 且年亦過中, 而更閱世故又巳多矣, 乃能切切用力於此, 愈於年少新學之爲者, 是可尙已. 更願勉旃, 有以卒副所望, 則又大幸之甚也. 熹再拜.
첨원선(체인)에게 답함 (1) 答詹元善體仁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5년(기축, 1169, 40세)에 첨원선에게 쓴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원리(元履: 魏掞之)가 이미 돌아갔으니---.”라는 구절과 “원리(元履: 魏掞之)께서 한 번 벼슬에 나아갔으나 포부를 펼칠 수 없었습니다.”라는 구절로 보건대, 원리가 집으로 돌아간 것(권24 「장흠부에게 답함」에 나옴)이 기축년 여름과 가을 사이므로 이 편지는 기축년 가을의 것이다.
雅聞左右才雋行馴, 好學不倦, 私竊歎慕, 以爲天之賦豫如是, 其不苟然矣. 獨恨未獲從容, 未知所學者果何學耳. 世衰道喪, 俗學多岐, 天理不明, 人心頗僻, 未有甚於此時者. 熹竊不自知其淺陋, 方以其所聞於師友者夙夜勉焉, 而志力不强, 未知攸濟, 是以樂聞賢者之風而有望於切磨之助. 伏惟益厲初心, 求知所至而用力焉, 有以慰此懷也. 僭易, 皇恐皇恐.
듣자하니 주위의 재주가 뛰어나고 행동이 준수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면서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이 속으로 탄미하고 사모하며 하늘이 이와 같은 재주를 내렸다고 생각한다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순조로움을 얻지 못한 것과 배웠던 것이 과연 어떤 학문이었는지에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 홀로 한탄할 뿐입니다. 세상이 쇠하고 도가 상실되어 저속한 학문이 많이 갈래를 쳐 천리가 밝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매우 편벽된 것이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 얕고 비루함을 자각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스승과 벗들에게 들은 것으로써 밤낮으로 힘썼으나 의지가 강하지 못하여 진척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즐겁게 당신의 풍모에 대해서 듣고는 수양공부에 도움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더욱 초심을 단단히 하여 이를 곳을 알아서 힘쓴다면 이러한 소망을 위로해줄 것입니다. 참람하여 크게 두렵습니다.
承喩請祠之意, 深所未曉. 然元履已歸, 不知曾爲辨此事否. 若熹之意, 則以爲政煩民困, 正有官君子盡心竭力之時. 若人人內顧其私, 各爲自逸之計, 則分義廢矣. 至於盜賊公行, 善良蒙害, 尉捕之職也, 何不忍之有? 若以爲實有可哀矜者, 則當明言於上而求所以振業之, 使不至於爲盜, 雖以獲戾, 所不辭也. 又何避此而求去之亟乎? 若夫祠官, 無事之祿, 本非義理所安, 前輩蓋非辭尊辭富, 則莫之肯爲. 熹之不肖, 固不足言. 然居此官最久, 前後三請, 亦皆有故, 非以辭難就逸而爲之也. 故區區之意, 願左右少俟終更而後求之. 未去之前, 盡心所職, 思其出於分義之所當爲而無敢有厭斁之心焉, 則庶乎其可以自安矣. 慕用之深, 不覺覼縷, 伏惟有以亮之.
보내주신 편지에서 사록관을 청하는 뜻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리(元履: 魏掞之)가 이미 돌아갔으니, 벌써 이 일을 변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정치가 번란하고 백성이 괴로우니,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다해 힘쓸 때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안으로 자신의 사사로움을 돌아보면서 각자 자신이 편안할 계책을 추구한다면 정의의 체계가 무너질 것입니다. 도적들이 공공연히 다니고 선량한 사람들이 해를 입는 것과 관련하여 현위(縣尉)가 도적을 잡는 것에 어찌 차마하지 못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정말로 불쌍히 여길만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황제에게 분명히 말하여 그들을 진작시켜 일할 수 있게 하여 그들이 도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죄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사양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어찌 이것을 피하여 빨리 그만두기를 구하겠습니까? 예컨대 사록관이라는 직책이 하는 일 없이 녹을 받는 것이라서 본래 의리에 편안한 바가 아닙니다. 선배들은 대개 존귀함과 부귀를 사양하지 않을 경우에는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똑똑하지 못해서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직책에 가장 오래 머물면서 세 차례 청한 것도 다 까닭이 있어서이지 어려움을 사양하고 편안한데 나아가려고 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는 벼슬이 바뀌기를 조금 기다린 뒤에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는 직분에 마음을 다하여 마땅히 해야 할 분수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생각하면서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신다면 저절로 편안해질 것입니다. 깊게 마음을 써 주심이 작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元履一出, 未能有爲. 然士大夫始復知天下之有正論, 廉貪激懦, 所助多矣. 熹官期已及, 坐此末敢遽出, 然亦不敢有忘當世之意. 賢者當有以識此心耳. 未由面論, 臨風耿耿.
원리(元履: 魏掞之)께서 한 번 벼슬에 나아갔으나 포부를 펼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대부가 천하에 정론(正論)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면 검소함과 탐냄, 격동과 나약함 등에 대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도 벼슬의 기한이 이미 되었음에도 여기에 연루되어 급히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역시 처한 세상을 잊으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알아 주셔야 합니다. 직접 만나서 의론하지 못하여 바람을 쏘이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첨원선에게 답함 (2) 答詹元善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5년(기축, 1169, 40세)에 첨원선에게 쓴 편지이다. 이 편지의 머리에서 “지난번에 편지를 보낸 뒤에---”라는 구절로 보건대 「첨원선에게 답함 (1)」과 같은 해에 쓰였을 것이다.
昨致書後, 宋臣見過, 能道比來賢者所誦書, 若將應科目之爲者, 已竊憂之. 又於元履處見所著書及孟子說, 然後慨然發歎, 不意賢者用心之差乃至於此!便欲致書相曉, 而久不値便, 以至于今, 蓋未嘗一日不往來于懷也.
지난번에 편지를 보낸 뒤에 송신(宋臣)이 들렀는데 근래에 당신이 암송하는 책에 대해 말했습니다. 장차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우려하였습니다. 또한 원리(元履: 魏掞之)의 처소에서 지었던 책과 맹자에 대한 설명을 본 뒤라야 감동하여 탄성을 자아냈는데, 당신이 마음을 쓰는 잘못이 이러함에 이를 줄이야 몰랐습니다. 편지를 보내어 서로 밝히려고 하면서도 오래도록 적당한 인편이 없이 지금에 이르렀으나, 하루라도 마음속으로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夫義利之間, 所差毫末, 而舜․跖之歸異焉. 是以在昔君子之爲學也, 莊敬涵養以立其本, 而講於義理以發明之, 則其囗之所誦也有正業, 而心之所處也有常分矣. 至於希世取寵之事, 不惟有所愧而不敢, 實亦有所急而不暇焉. 今左右乃方讀本經而治詞業(一), 是何外慕之重而自待之輕邪? 竊謂此心不除, 決無入道之理.
의로움과 이로움의 사이가 털끝만치의 차이일지라도 요 임금과 도척의 다름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군자가 학문을 할 때에 씩씩함, 공경함, 함양 등으로써 근본을 세우고 의리를 익혀서 밝혀냈으니, 입으로 외운 내용에는 일정한 일(正業)이 있었고 마음이 처한 곳에는 일정한 분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총애를 바라는 일에 이르러서는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감히 하려고 하지 않으니, 참으로 급히 여기면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 주위에서 경전을 읽고서 과거시험의 일에 종사하니, 어째서 밖으로 사모하는 것이 무거우면서도 스스로를 대하는 것은 가벼울까요? 생각건대 이런 마음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도에 들어가는 이치란 없습니다.
至於談經之際, 則又專以人欲之私妄意聖賢, 其言險語乖戾, 不近人理, 聞之使人耳聾心悸, 不謂斯言一旦而出於賢者之口也. 養氣之說雖不至是, 然掇拾老莊荒誕之餘, 以求入乎聖賢敬義之實, 亦非熹之所敢聞也. 前書所謂儒名而釋學, 潘張特其小小者耳. 蘇氏兄弟乃以儀․秦․老․佛合爲一人, 其爲學者心術之禍最爲酷烈, 而世莫之知也. 前書微發其端, 蓋預憂左右之將陷焉, 而不知其深入之久巳如此矣. 感下問之勤, 不忍隱嘿, 不識能聽之否?
경전을 담론할 때면 오직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가지고 거짓으로 성현을 추구하니 그 말이 엉터리이고 괴리가 있어 사람의 이치에 가깝지 않습니다. 듣자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귀가 열리게 하고 마음이 두근거리게 한다는 것은 이 말이 하루아침에 당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기질을 양성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비록 이러한 엉터리에 이르지 않았을지라도 노장 사상의 허망한 것을 주워 모아서 성현의 공경과 의로움에 들어가기를 구하니, 이것 역시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앞 편지에서 유학을 말하면서도 석씨의 학문을 추구한다고 하였던 반청일(潘淸逸)과 장자소(張子韶)는 특히 자잘한 사례일 따름입니다. 소씨(蘇氏) 형제는 장의, 소진, 노장, 불가 등을 합쳐 한 사람으로 삼았으니, 그들의 학문은 심술(心術)에 대한 재앙이 극심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앞 편지에서 그러한 단서를 발명하지 못하였기에 주위에서 그러한 재앙에 빠질까 미리 염려하면서도 이미 오랫동안 이와 같은 지경에 깊게 빠져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열심히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차마 말을 참지 못하였는데 제 말을 들어주실 런지요?
첨원선에게 답함 (3) 答詹元善
【해제】이 글은 광종 소희(紹熙) 4년(계축, 1192, 64세)에 첨원선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 안의 “육자정(陸子靜: 陸九淵)의 객지에서의 영구”라는 구절로 볼 때 육자정이 죽은 다음 해인 계축년에 쓴 것이다.
歸宗之請, 計已報可. 此於人情恩義之間有難處者, 而輕重本末事理甚明, 自見賢者之不安於此者有年矣. 今追贈之榮旣及泉壤, 則於恩意已爲曲盡. 但異時所以益致其惓惓不忘之意, 如范公之於朱氏者, 此論想已素定也. 但近至城中, 見羅養蒙之孫示及其祖事狀有此一條, 事與今曰極相類. 今謹錄去, 恐更合稽參禮律, 以盡情文之變, 乃爲盡善. 此非小節, 不可草草耳.
본래의 종가(宗家)로 돌아가려는 청에 대하여 이미 허가를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감정과 은혜의 의리 사이에서 처신하기 어려움이 있는 것이지만 경중과 본말로서 본다면 사리가 매우 분명하니, 당신이 이것에 대해 불안해 한지가 여러 해가 되었음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이제 은혜를 헤아리는 성대함이 이미 땅속에까지 미쳤다고 한다면 은혜로운 뜻이 이미 곡진한 것입니다. 다만 다른 때에 간절하게 잊지 못하는 뜻을 더욱 발휘하는 것이 범공(范公: 范仲淹)이 주씨 집안에 대해 보답한 것과 같으니, 이 논의는 이미 합당하게 결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근래에 성 안에 도착해서 나양몽(羅養蒙: 羅薦可)의 손자가 보여준 그의 할아버지의 일 중에 이와 같은 하나의 사항이 있으니, 일이 오늘날과 매우 유사하였습니다. 이제 신중히 기록하였으니, 참례율(參禮律)을 더욱 잘 헤아려서 감정과 문채의 변화〔情文之變〕를 다해야 매우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부분이 아니므로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近日大除拜, 一番紛紜, 雖公議幸伸, 然自此中外之責愈重. 而其人之才智局度猶昔人也, 不知何以處此乎? 來書所賦蕩之卒章, 眞可爲流沸痛哭也. 進對之際, 言之不切不足以盡吾心, 而吾言雖切, 度亦未有轉移之勢, 不知明者又將何以處此也. 偶得黃子由奏疏, 謾錄去. 其言至此, 不爲不切, 蓋已下到大承氣湯矣, 而略無動意, 奈何? 境外之事, 彼若爲萬全之計, 固不輕發. 但恐萬一狂謀輕襲, 而我之邊障未有以當之, 此則慮外之慮, 而所繫亦不小也. 故都之事不成, 乃是天幸. 如其不然, 趙豹無故之疑․梁武金甌之戒直可爲寒心. 不知今日諸公何以處之? 大抵近年風俗浮淺, 士大夫之賢者不過守文墨․按故事, 說得幾句好話而已. 如狄梁公․寇萊公․杜․范․富․韓諸公規模事業, 固末嘗有講之者. 下至王介甫做處, 亦摸索不著. 其有讀得楚․漢․孫․劉․楊․李間數十卷書者, 則又便有不作士大夫之意, 善人君子莫能抗也. 端居深念, 爲之永慨, 未知夫意竟如何耳.
요즘 크게 벼슬을 임명하는 것을 두고 한 차례 소란이 있었습니다. 비록 공적인 논의가 전개되었다고 하나 이 일로 인하여 안팎의 꾸지람이 더욱 무거운데 그 사람의 재주와 국량이 이전 사람과 같다고 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탕(湯)의 마지막 구절은 정말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할 만합니다. 나아가 대면할 때에 말한 것이 절실하지 않아서 내 마음을 다하기에 부족하였습니다. 내 말이 비록 절실할지라도 역시 옮길만한 힘이 없으니, 당신이 장차 어떻게 여기에 대처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황자유(黃子由: 黃由)의 주소(奏疏)를 얻어서 기록하였는데, 그 말이 이곳에 이르자 절실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은 이미 아래에서 대승기탕(大承氣湯)이라는 구절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인데, 감동하는 뜻이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국경 밖의 일과 관련하여 금 나라 오랑캐들이 만일 만전의 계책을 세웠다고 한다면 진실로 가볍게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다만 만일 사납게 모의하고 가볍게 공습하여 우리의 변경에서 당해내지 못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 문제는 곧 밖을 염려하는 것이어서 관련된 것이 작지 않습니다. 옛 도읍을 회복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조표(趙豹)의 이유 없다는 것에 대한 의심과 양 나라 무제의 쇠그릇에 비유한 경계는 한심하다고 할 만하니, 오늘 날 여러 선생들께서 어떻게 처리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근년에 풍속이 천박해지고, 현명한 사대부들이 글자만을 고수하며 고사만을 살피는데 불과하여 말하는 것이 좋은 몇 구절일 따름입니다. 예컨대 적양공(狄梁公)․구래공(寇萊公)․두(杜)․범(范)․부(富)․한(韓) 등의 규모와 사업에 대해서 진실로 강론한 사람이 없었으며, 아래로 왕개보(王介甫: 王安石)가 지은 것에 이르러서도 모색하지 않았습니다. 초(楚)․한(漢)․손(孫)․류(劉)․양(楊)․이(李) 등의 수십 권의 책에 대해서 읽은 자라고 한다면 사대부를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뜻이 있을 것이니, 훌륭한 군자라도 저항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정하게 거처하며 깊게 생각하면 길게 탄식이 나오니, 하늘의 뜻이 필경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季通一出, 飽觀江湖表裏形勢, 不爲無補. 甚恨匏繫, 不能與之俱行. 其律書法度甚精, 近世諸儒皆莫能及. 但吹律未諧, 歸來更須細尋訂耳. 此行所資, 亦足爲晩年休息之計. 元善篤於友誼, 固自不薄, 而張帥之傾蓋勝流, 今之君子亦鮮能及也. 子靜旅櫬經由聞甚周旋之, 此殊可傷. 見其平日大拍頭․胡叫喚, 豈謂遽至此哉! 然其說頗行於江湖間, 損賢者之志而益愚者之過, 不知此禍又何時而已耳. 許敎似亦小中毒也. 如何如何?
채계통이 한번 나갔으니 강호(江湖) 안팎의 형세를 여유롭게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처럼 매달려서 그와 함께 갈 수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가 지은 율려에 대한 책은 법도가 매우 정밀하여 근세의 모든 유자들이 미칠 수 없습니다. 다만 취율(吹律)이 아직 조화롭지 않으니, 돌아올 때 다시 자세히 살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곳에서 도와준 것도 만년에 휴식을 위한 계책으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당신은 우의에 돈독하여 진실로 경박하지 않았으며, 장수(張帥)의 곧 친해져서 훌륭히 교류함〔傾蓋勝流〕은 지금의 군자라도 미칠 수 있는 이가 드뭅니다. 육자정(陸子靜: 陸九淵)의 객지에서의 영구가 지나갈 때 매우 멀리 돌아서 갔다고 들었는데, 이는 매우 슬픈 일입니다. 육자정은 평소에 크게 기세를 올려서 어지럽게 부르짖었으니, 어찌 갑자기 우리의 도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학설이 강호(江湖)에 널리 퍼져서 현명한 사람의 뜻을 덜고 어리석은 자의 과실을 증가시켰으니, 이러한 재앙이 언제 그칠까 모르겠습니다. 허교(許敎: 許中應) 역시 상당히 중독된 것 같은데 어찌해야 좋을까요?
반숙도에게 답함 (1) 答潘叔度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년(계사, 1173, 44세)에 반숙도에게 쓴 편지이다. 주자가 처음에는 반숙도와 반숙창 형제와 교류하지 않다가 계사년에 아들을 여백공에게 보내 배우게 하였을 때 반숙도가 여택(麗澤)서원에서 강의를 주재하였는데, 여백공이 주자의 아들을 반숙도의 서원에서 거처하게 하였으며, 주자가 처음으로 반숙도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주자가 계사년 여름에 「여백공에게 답함 (19)」에서 “반숙도의 편지에서 그의 논설을 보건대 기질이 어질고 온후하여 얻기 쉽지 않은 않다.”라고 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邵子文記明道先立標準之言深中近日朋友之病, 且孟子亦有襲而取之之戒, 尤當深念也.
소자(邵子)가 기록한 명도의 ‘먼저 표준을 세운다.’는 말은 요즘 친구들의 병에 잘 들어맞습니다. 맹자도 갑자기 엄습하여 취하는 것에 대한 경계가 있었으니 더욱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반숙도에게 답함 (2) 答潘叔度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년(계사, 1173, 44세)에 반숙도에게 쓴 편지이다. 이 편지 첫머리의 “논의하신 ‘표준’과 ‘엄습하여 취함’에 대한 경계는---”이라는 구절로 볼 때 「반숙도에게 답함 (1)」과 같은 해의 것이다.
所論標準襲取之戒極爲精密, 然所謂‘有爲若是’, ‘如舜而已’者, 必自有的實平穩下功夫處, 非是徒然晝思夜度, 以己所爲校舜所爲而切切然惟恐不如舜也. 譬如病人, 正當循序服藥, 積漸將理, 使氣體浸充, 可及平人而後已, 豈可責效於一丸一散․一朝一夕之間而遽怪其不及平人哉? 黙誦中庸一卷於寐覺之時, 此亦甚善. 然與其必誦一過, 不若虛心玩理之從容而有味也.
논의하신 ‘표준’과 ‘엄습하여 취함’에 대한 경계는 매우 정밀하지만,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이와 같을 것’, ‘순과 같아지려는 것일 뿐이다.’ 등의 구절은 스스로 참되고 평온함을 소유하는 공부의 경지이지 한갓 밤낮으로 줄곧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자기의 행위로써 순(舜)의 행위를 본받으면서 절실하게 순과 같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마땅히 순서를 따라서 약을 복용해 점차 조리를 얻어서 기운이 충실하게 하여 건강한 상태에 이른 뒤에 그만 두어야 하니, 어찌 하나의 알약과 한 첩의 약을 써서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효험이 있기를 다그치면서 갑자기 건강한 상태에 이르지 못한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속으로 중용 한 권을 잠잘 때와 일어날 때 외우는 것도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한 차례 외우는 것이 마음을 비우고서 여유롭게 이치를 완미하는 것만 못합니다.
반숙도에게 답함 (3) 答潘叔度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년(갑오, 1174, 45세)에 반숙도에게 쓴 편지이다. 경(敬)에 대해 논의하였다.
來喩縷縷, 備見立志之遠, 歎服良深. 但所謂敬之爲言所以名持存之理者, 於鄙意似未安. 蓋人心至靈, 主宰萬變, 而非物所能宰, 故纔有執持之意, 卽是此心先自動了. 此程夫子所以每言坐忘卽是坐馳, 又因黙數倉柱發明其說 : 而其指示學者操存之道, 則必曰敬以直內, 而又有‘以敬直內便不直矣’之云也. 蓋惟整齊嚴肅則中有主而心自存, 非是別有以操存乎此而後以敬名其理也. 此類初若名言小失, 不足深辨, 然欲放過, 則恐於日用之功不能無害, 故輒言之. 子約書中有所反覆, 亦是此意. 幸參考而互評之, 則其辨益明而儒釋之殊亦可因以判矣. 橫渠集云云,大凡作事匆匆, 不能博盡異同, 便有遺恨. 前輩所謂‘甚事不因忙後錯了’者, 誠有味也.
보내주신 편지에서 세세하게 멀리 뜻을 세우는 것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고 매우 깊게 탄복하였습니다. 다만 경(敬)이라는 말이 붙잡아 보존한 이치를 이름붙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제 생각에는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마음이란 지극히 신령스러워 모든 변화를 주재하고 사물이 주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붙잡으려는 뜻이 생기면 마음이 먼저 스스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정부자(程夫子)께서 항상 “앉아서 잊어버리는 것이 곧 앉아서 달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던 까닭입니다. 또한 조용히 창고의 기둥들을 세는 것으로써 그에 대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배우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 도리를 알려준 것은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텐데도 나아가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면 곧지 않다.”고 언급한 구절도 있습니다. 대개 가지런히 정돈하고 엄숙하게 한다면 안으로 주재함이 있어서 마음이 저절로 보존되는 것이지, 별도로 마음을 붙들어 보존한 뒤에 경으로써 그 이치를 이름붙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종류는 애초부터 이름을 분류할 때의 작은 과실에 대해서는 변론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방치하고서 지나가고자 한다면 일용의 공부에 해를 줄 수 있으므로 생략하고 말하였습니다. 자약(子約: 呂祖儉)의 편지 안에 반복하여 말한 내용도 역시 이러한 뜻입니다. 다행히 참고하여 서로 평가해본다면 그에 관한 논변이 더욱 분명하게 되어 유가와 불가의 차이도 구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횡거집에서 언급한 내용도 대체로 생략하고 있어서 같고 다름을 널리 다할 수 없으니 유감입니다. 선배들이 말한 “어떤 일이든 바쁜 뒤에 어긋나지 않겠는가?”라는 구절이 진실로 맛이 있습니다.
반숙도에게 답함 (4) 答潘叔度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년(갑오, 1174, 45세)에 반숙도에게 쓴 편지이다. 경(敬)에 대해 논의하였다.
所喩敬者存在之謂, 此語固好, 然乃指敬之成功而言. 若只論敬字下功夫處, 蓋所以持守此心而欲其存在之術耳. 只著一畏字形容, 亦自見得. 故和靖尹公只以收斂身心言之. 此理至約, 若如來喩, 却似太瀾翻也. 大抵諸所誨諭, 似皆傷於語言道理頭緖多, 云云. 愚意且欲賢者於此稍加屛置, 而虛心觀理於平易專一之地, 不審於意果如何也?
보내신 편지에서 ‘경(敬)이란 보존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훌륭하지만, 경은 공효를 이룬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만약 ‘敬’자가 공부를 착수하는 곳일 뿐이라면 대개 이 마음을 잡아 지켜 보존하고자 하는 기술일 뿐입니다. 단지 ‘畏’자 한 글자를 붙여 형용하더라도 저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정(和靖: 尹焞)은 몸과 마음을 수렴하는 것으로써 말합니다. 이치란 지극히 간략한 것이니, 만약 알려 주신대로 한다면 오히려 크게 뒤바뀔 것 같습니다. 대저 말씀해주신 부분들은 모두 말의 이치에서 어긋나는 것들이 대부부인 듯합니다. 제가 생각건대 당신이 이에 대해 조금 더 병치(屛置)하시어 마음을 비우고 화평하게 하여 한결같은 입장에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제 생각이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반숙도에게 답함 (5) 答潘叔度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3년(병오, 1186, 57세)에 반숙도에게 쓴 편지이다.
熹衰病今歲幸不至劇, 但精力益衰, 目力全短, 看文字不得. 暝目閑坐, 却得收拾放心, 覺得日前外面走作不少, 頗恨盲廢之不早也. 看書鮮識之喩誠然, 然嚴霜大凍之中, 豈無些小風和日暖意思? 要是多者勝耳. 江南之業, 恐自是慶曆․元祐之功, 不當以此論也. 此語甚長, 非面莫旣. 大抵鄙見與彼中議論不同處非一, 而此爲其最. 是乃天理人欲之分, 直截剖判, 不相交雜處, 安得相與極論, 以會至當之歸乎? 忿疾之意, 發於羞惡之端, 固有不可已者. 然至於加一忿字, 便和自家這裏有病了. 此亦深欲面諭之尤緊切者, 恨未有其便耳. 醍醐毒藥之喩恐亦過當. 聖賢只得立言垂世, 從違眞僞却在他人, 如何必得? 况吾輩所急在於自明, 正不當常以此念橫在胸中也. 陳膚仲近得書, 云欲旦夕過此. 此等人未欠講論, 却是欠收斂. 此又是別一箇話頭, 要之須面論乃究耳. 吾人無用於世, 只自己身心一段事, 又不曾謂究得徹, 衆盲摸象, 各說異端, 不知却如何收殺? 可慮可慮! 奈何奈何!
제가 쇠약하고 병들었는데 다행히 올해에는 극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력이 더욱 쇠약해지고 눈의 힘이 현저히 줄어들어 글자를 볼 수 없습니다. 눈을 감고 한가히 앉아서 놓친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예전에 밖으로 달려 나간 것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일찍 눈이 멀지 않은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책을 보아서 아는 것이 드물다는 비유가 정말 옳습니다만, 매서운 서리와 혹독한 추위 안에 어찌 훈훈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볕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없겠습니까? 요컨대 많은 것이 이길 뿐입니다. 강남(江南)의 일은 본디 경력(慶曆)․원우(元祐) 연간의 공이어서, 이것으로써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관련한 말이 매우 많으므로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는 다할 수 없습니다. 대저 저의 견해는 당신의 견해와 다른 곳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에 대한 것이 가장 심합니다. 이에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욕심의 구분은 매우 다른 것이어서 서로 섞이지 않으니, 어찌 서로 극론하여 지극히 당연한 귀결 처에 이르겠습니까? ‘성내고 화냄〔忿懥〕’의 뜻은 ‘수오(羞惡)’의 단서에서 나오니 진실로 그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분(忿)’자를 더한데 이르면 자신이 행한 것과 더불어 이 안에 병이 생깁니다. 이것도 마음속으로는 직접 만나서 더욱 절실하게 설명하고 싶은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호(醍醐)와 독약(毒藥)의 비유는 역시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성현은 단지 세상에 말을 드리울 뿐이며, (그 말을) 따르기도 하고 어기기도 하며 참되다고 하기도 하고 거짓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달렸으니, 어찌 반드시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급선무로 여기는 것이란 스스로 밝아지는데 있으니, 항상 생각이 가슴 속에서 가로지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부중(陳膚仲)에게 근래에 편지를 받았는데 아침저녁으로 이곳을 들르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강론이 부족하지 않으나 도리어 수렴 공부가 부족합니다. 이것은 또한 별도의 화두이니 반드시 얼굴을 맞대고 논의하면서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쓸모가 없어서 단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강론하여 궁구하지 못하고서, 눈이 먼 상태에서 손으로만 형상을 모색하여 각기 다른 단서를 말하니, 어떻게 해야 거두어서 없앨 수 있을까요? 염려되고 염려됩니다. 어찌해야 좋을까요?
반숙창에게 답함 (1) 答潘叔昌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년(계사, 1173, 44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주자가 계사년에 아들을 여백공에게 보냈을 때 처음으로 반숙창 형제에게 편지를 주고받았으므로(「여백공에게 답함 (22)」에 보임) 이 편지는 계사년 가을의 것이다.
熹講聞雋譽, 爲日蓋久, 每恨未及際晤, 以慰所懷. 玆承不鄙, 遠貽誨帖, 傾倒甚至. 自顧凉薄, 何以堪之? 反復再三, 有愧而已. 卽日冬寒, 伏惟進德日新, 尊履多福.
제가 당신의 명예로움을 익히 들었는데, 많은 날이 지나는 동안 매번 만나보지 못하고 그리움만 달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면서 멀리서 가르치는 첩(帖)을 보내주시며 깊이 마음을 써 주십니다. 제 스스로가 얇으니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거듭 부끄러울 뿐입니다. 추운 겨울을 맞이하여 덕에 나아감이 날로 새로우시고, 많은 복 누리시길 바랍니다.
熹蚤獲執侍先生君子之側, 粗知以問學爲事, 而躬行不力, 老大無聞, 顧省平生, 第有愧恨. 左右才高識明, 所以自期蓋已不淺, 乃不知其如此而辱垂問焉, 則已誤矣. 况所謂日用之間不放不亂者, 又熹之所以早夜竭力而未能彷彿者, 其何以有助於高明之萬一乎? 然先其所難而不計其獲, 聖賢所以示人爲仁之方也. 熹雖不敏, 願與賢者共勉焉. 因風修報, 未究所懷. 繼此有可以開警者, 願日聞之. 幸甚幸甚!
제가 일찍이 군자이시던 선생님들을 곁에서 모시고 있을 때, 학문에 종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으나 실천이 달려 늙도록 소문이 없으니, 평생을 돌아보건대 거듭 부끄럽고 한스럽습니다. 주위의 재주가 높고 식견이 뛰어난 사람들이 자신이 이미 얕지 않다고 기약하는 까닭에 자신이 얕다는 것을 모르면서 욕되게 질문을 하니, 그렇다면 이것은 이미 그른 것입니다. 하물며 일상생활에서 방만하지 않고 어지럽지 않은 것 또한 제가 아침저녁으로 힘을 다하였으나 근접하지 못했던 것들이니, 그것이 어찌 당신에게 만분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운 것을 먼저 하면서 얻기를 계산하지 않는 것은 성현이 사람들에게 보여준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지만, 당신이 함께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빨리 답장을 쓰느라 그리운 마음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이어서 경계하는 마음을 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운을 빕니다.
반숙창에게 답함 (2) 答潘叔昌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년(계사, 1173, 44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細讀來喩, 足見爲己之力. 但學者先須置身於法度規矩中, 使持於此者足以勝乎彼, 則自然有進步處. 如孔子之告顔淵, 以非禮勿視․聽․言․動爲克己之目, 亦可見矣. 若自無措足之地, 而欲搜羅抉剔於思慮隱微之中, 以求所謂人欲之難克者而克之, 則亦代翕代張, 沒世窮年而不能有以立矣. 躬所未逮, 姑誦所聞, 已深愧靦. 惟明者有以裁之.
보내신 편지를 자세히 읽고서 자기를 위한 공부에 힘쓰시는 것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다만 배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법도와 규범 안에 몸을 두어 이것을 잡아서 저것을 충분히 이기게 한다면, 저절로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공자가 안연에게 말한 것에 의하면 ‘예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써 자기를 이기는 덕목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스스로 발을 둘 곳이 없으면서도 은미하게 사려함으로써 찾고 들추어내어 이기기 어려운 사람의 욕심을 구하여서 이기려고 한다면, 역시 한번 흡수하였다가 한번 펼치는 것으로 죽을 때까지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실천이 미치지 못했는데 우선 들은 것을 외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것입니다. 오직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반숙창에게 답함 (3) 答潘叔昌
【해제】이 글을 쓴 시기는 알 수 없다. 역사서를 읽는 이유를 말하고, 반숙도가 불학에 경도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示喩讀史曲折, 鄙意以爲看此等文字但欲通知古今之變, 又以觀其所處義理之得失耳, 初不必於玩味究索以求變化氣質之功也. 若慮其感動不平, 遂廢不讀, 則進退之間, 又恐皆失之太過而兩無所據也.
보내신 편지에서 역사서를 읽는 곡절에 대해서 설명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이러한 글을 보는 것은 단지 옛날과 지금의 변화를 두루 알기 위해서이고, 나아가 그 처한 상황에서 의리를 얻고 잃음에 대해 보기 위해서일 따름이니, 처음부터 완미하고 궁구하여 기질을 변화하는 공부를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역사서가 감정을 평화롭지 않게 움직이게 한다고 염려하여 마침내 폐하고서 읽지 않는다면, 나아가고 물러나는 사이에 항상 읽은 것이 너무 지나쳐서 어디에도 의거할 곳이 없게 될까 걱정입니다.
昨聞叔度兄頗爲佛學, 因獻所疑, 大蒙峻却, 愧悚深矣. 今不敢復言, 而其未已之意不免因子約達之. 恐其過江未還, 煩爲略道鄙意. 大抵近世儒者於聖賢之言未嘗深求其義理之極致, 而惟以多求劇讀爲功, 故往往遂以吾學爲容易之空言, 而求所以進實功․除實病者, 皆必求之於彼. 殊不知將適千里而迷於所向, 吾恐其進步之日遠而稅駕之日賖也. 今若未能決意自拔, 得且姑置其說, 而專意於吾學, 捐去雜博, 專讀一書, 虛心游意, 以求夫義理之所在. 如此三年不得, 而後改圖, 則朋友之心無所復恨, 而於其所以進功除病之實亦未爲晩也. 如何如何?
어제 듣기로 숙도(叔度) 형께서 자못 불학(佛學)을 위한다고 하여, 의심된 내용을 올림으로써 준엄한 물리침을 받았으니, 매우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이제 감히 다시 언급하지 못하지만 그것과 관련하여 아직 다하지 못한 뜻은 자약(子約: 呂祖儉)을 통하여 전달했습니다. 그가 강을 건너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으니 수고스럽더라도 저의 뜻을 대략 말해주십시오. 대저 근래의 유자들이 성현의 말에 대해 그 궁극적 의리를 탐구한 적이 없으면서도 오직 많이 읽는 것이 공부인 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주 우리의 유학이 쉬운 빈말인줄로 알지만, 실제의 공부에 나아가고 실제의 병을 없애는 방법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반드시 저기에서 구해야 합니다. 특히 장차 천리를 가려고 하면서 방향이 미혹되었다면 나아갈 거리가 날로 멀어지고 멍에를 풀 날이 날로 길어질 것입니다. 이제 만약 결의하여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면 우선 그 말들을 버리고, 오로지 뜻을 우리의 유학에 두어 잡박함을 버려야 하고, 오로지 한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비워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의리가 있는 곳을 구해야 합니다. 삼년 동안 해보고서 얻지 못한 뒤에 공부의 방향을 바꾼다면 친구의 마음에 다시 유감이 없을 것이며, 공부에 나아가 병을 제거하는 실제 과정에 대해서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반숙창에게 답함 (4) 答潘叔昌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承喩讀李․陸․孫氏之書, 慨然有感, 此見進學不倦之意. 然熹愚意學者當且就華門文字中硏究, 得箇入頭處, 却看此等. 其合者固所不遺, 而其不合者亦易看破, 自然不費功力也. 嘗竊私怪彼中朋友不肯於論語․孟子․中庸․大學深下功夫, 而泛觀博取於一時議論之間, 所以頭緖多而眼目少, 規模廣而意味不長. 試以孟子論子路․管仲處觀之, 可見其得失矣. 不審明者以爲如何? 沈叔晦章疏出於何人? 大抵世俗近年一種議論愈見卑狹, 今人抬頭不起, 轉身不得. 看此頭勢, 只有山林是安樂處, 別無可商量也.
보내신 편지에서 이(李)씨․육(陸)씨․손(孫)씨 등의 책을 읽는다고 하셔서 감격하였으며, 학문에 나아가고 게으르지 않은 뜻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건대 배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성현의 글에 나아가 연구하면서 기초를 얻어야 이러한 책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합당한 것들은 진실로 버리지 말고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쉽게 간파한다면 저절로 힘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사는 곳의 친구들이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에 대해 깊게 공부하지 않으려 하면서 한 때의 의론들을 잡다하게 보고 넓게 취함으로써, 단서가 많지만 안목이 작고 규모가 광대하지만 뜻이 깊지 않은 것에 대해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맹자에서 자로와 관중을 논한 것으로써 보더라도 그 득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심숙회(沈叔晦)의 장소(章疏)는 누구에게서 나왔습니까? 대저 세속에서 근래에 한 종류의 의론이 더욱 비속하고 협애해져, 사람들이 머리를 들 수 없게 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합니다. 이러한 형세를 본다면 산림만이 편안한 곳으로 달리 헤아릴 것이 없습니다.
반숙창에게 답함 (5) 答潘叔昌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여러 잡서보다는 경학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示喩天上無不識字底神仙, 此論甚中一偏之弊. 然亦恐只學得識字, 却不曾學得上天, 卽不如且學上天耳. 上得天了, 却旋學上大人亦不妨也. 中年以後, 氣血精神能有幾何? 不是記故事時節. 熹以目昏, 不敢著力讀書, 閑中靜坐, 收歛身心, 頗覺得力. 間起看書, 聊復遮眼. 遇有會心處, 時一喟然耳. 蜀學之弊誠如所喩, 唐論却未暇細看也. 六國表議論乃是衰世一種卑陋之說, 吾輩平日講誦聖賢, 何爲却取此等議論以爲標的? 殊不可曉. 建州有徐柟者, 常言秦始皇賢於湯․武, 管仲賢於夫子, 朋友間每每傳以爲笑. 不謂來說亦頗似之也. 此恐是日前於根本上不曾大段用功, 而便於討論世變處著力太深, 所以不免此弊. 向答子約一書, 亦極言之, 正恐赤幟已立, 未必以爲然耳. 熹老矣, 不復有意於此世, 區區鄙懷, 猶欲勉率同志之士熟講勤行, 以趣聖賢之域. 不謂近年異論蠭起, 高者溺於虛無, 下者淪於卑陋, ․各執己見, 不合不公, 使人憂歎, 不知所以爲計. 而今而後, 亦不復敢以此望於今世之人, 姑抱遺經以待後之學者而已. 不審明者以爲如何?
보내신 편지에서 ‘하늘 위의 글자를 알지 못함이 없는 신선〔天上無不識字底神仙〕’을 말씀하셨는데, 이 논의는 한쪽으로 치우친 폐단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역시 글자를 배워 아는 것일 뿐이어서 도리어 위의 하늘을 배운 것이 아니니, 당장 위 하늘을 배우는 것만 못합니다. 위의 하늘〔上天〕을 얻었다면 도리어 위의 큰 사람〔上大人〕을 배우는 것도 방해되지 않습니다. 중년 이후로 기혈과 정신이 얼마나 남아 있겠습니까? 옛 시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눈이 어두워 책을 힘이 없어서 한가할 때에 고요히 앉아서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자못 힘을 얻게 됩니다. 간혹 일어나서 책을 볼라치면 다시 바로 눈이 어두워집니다. 어쩌다 마음을 집중함이 있을 뿐 항시 탄식할 따름입니다. 촉(蜀) 지역의 학문은 참으로 설명해주신 바와 같고, 당론(唐論)은 자세히 볼 틈이 없었습니다. 육국표(六國表)의 논의는 쇠미한 세상에서 나온 일종의 비루한 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성현을 배우고 암송해야지, 어째서 이러한 의론을 표준으로 취하려고 합니까?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건주(建州)에 서남(徐柟)이란 사람이 있는데 항상 진시황제가 탕 임금과 무왕보다 현명하고 관중이 공자보다 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 항시 그 말을 하면서 웃고 있는데, 보내주신 말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것은 예전에 근본에 많은 힘을 쏟지 않고서 세상의 변화를 토론하는 데에만 너무 힘을 들였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을 면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전에 자약(子約)에게 답하는 편지에서도 자세히 말했는데, 붉은 깃발이 이미 세워졌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늙어서 다시 이 세상에 대해 의지가 생기지 않습니다만, 제 소망은 뜻을 같이 하는 학자들이 익숙히 배우고 열심히 실천하여 성현의 경지에 나아가도록 면려하는데 있습니다. 근년에 이단의 논의가 벌떼처럼 일어난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높은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허무에 빠지고 낮은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비루함에 빠져, 각기 자기의 견해를 잡고 합당하지도 하고 공정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하고 탄식하게 만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지금 세상의 사람들에게서 성현의 학문을 감히 희망할 수 없으니, 우선 남겨진 경전을 품고서 나중의 학자를 기다릴 뿐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숙창에게 답함 (6) 答潘叔昌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示諭漢唐初事, 以兩家論優劣則然, 以三代之天吏言之, 則其本領恐不但如此. 若子房․孔明之所黽勉, 亦正是渠欠闕處. 吾輩正當以聖賢爲師, 取其是而監其非, 不當以彼爲準則也. 今人只爲不見天理本原, 而有汲汲以就功名之心, 故其義論見識往往卑陋, 多方遷就, 下梢頭只是成就一箇私意, 更有甚好事? 若必以爲然, 卽程正叔寧可終身只作國子祭酒, 却讓他陳正己作宰相也. 可怪可怪!
보내신 편지에서 말한 한 나라와 당 나라가 창업할 때의 일은 양 쪽의 사례로써 우열을 논한다면 그렇지만, 삼대의 하늘이 내린 관리로써 말한다면 그 본령이 이와 같지만은 않습니다. 예컨대 자방(子房: 張良)과 공명(孔明: 諸葛良)이 힘쓴 것에도 바로 큰 결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성현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옳음을 취하고 그름을 감시하기 때문으로, 저들로 준칙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요즘 사람들이 단지 천리의 본원을 보지 않고서 공명에 나아가려는 마음에 급급하므로, 그들의 의론과 견식이 자주 지루하게 되어 여러 방향으로 옮겨다며 끄트머리에서 한 개의 사사로운 뜻을 성취할 뿐이니, 다시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기어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정숙(程正叔)이 죽을 때까지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될 만한데 도리어 진정기(陳正己)에게 재상이 되라고 양보하니, 이상합니다.
반숙창에게 답함 (7) 答潘叔昌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군자가 소인배들의 화를 입을 수 있음을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 설명하였다.
前書示及易傳二義, 陰陽交和, 恐非是指君子小人而言. 君子之於小人, 固不當過爲忿疾, 然無交和之理. 韓․富當時事力蓋不足以勝二姦, 非固欲與之和也. 元祐誠有過甚處, 然當時事勢, 恐不如此亦不免禍. 要當有以開悟人主之心, 乃絶後患耳. 東漢誅宦官事, 前輩多論之, 大略皆如來喩. 然嘗細考其事, 恐禍根不除, 終無可安之理. 後人據紙上語指點前人, 甚易爲力, 不知事到手頭, 實要處斷, 毫髮之間便有成敗, 不是容易事. 若使陳․竇只誅得首惡一二人, 後來未必不取王允五王之禍也.
앞 편지에서 역전의 두 가지 뜻을 언급하셨는데, 음양(陰陽)이 서로 조화한다는 것은 군자와 소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군자는 소인에 대해 진실로 지나치게 화를 내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서로 조화하는 이치는 없습니다. 한(韓: 韓崎)과 부(富: 富弼)가 당시에 힘을 행사했음에도 두 명의 간사한 사람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은 그들과 더불어 화합하려고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원우(元祐) 연간에는 참으로 너무 심한 부분이 있었지만, 당시의 상황이 이와 같지 않고서는 화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요컨대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열어 깨우쳐주어야 후환을 끊을 수 있습니다. 동한(東漢) 때에 환관을 죽인 일에 대해서 선배들이 많이 논의한 것은 대략 모두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그 일에 대해 자세히 고찰한 것은 화의 뿌리가 제거되지 않아서 끝내 편안한 이치가 없을까 걱정해서였습니다. 나중 사람들이 종이 위의 글자에 근거하여 앞 사람을 지적하기는 매우 쉽지만, 일이 손 안에 주어졌을 때 실제로 처리하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털끝만한 사이에 성패가 달렸으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진번(陳蕃)과 두무(竇武)로 하여금 악의 우두머리 한두 사람을 죽이게 하였더라도 나중에 왕윤(王允) 오왕(五王)의 화를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반숙창에게 답함 (8) 答潘叔昌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向來鄙論初無深旨, 來書誦及, 足見不遺一善之意. 然所謂有主於中者, 亦只是此持守之意耳. 遺書首篇答李端伯之問者, 正是此意, 不可離此持守, 別想像一物以主乎中也.
예전 저의 논의는 처음부터 깊은 뜻이 없었습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언급한 것에서 하나의 선함도 버리지 않은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에서 주재한다는 것은 역시 이와 같이 잡아 지킨다는 뜻일 뿐입니다. 이정유서 수편(首篇)에서 이단백(李端伯)의 물음에 답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니, 잡아 지키는 것을 떠나서 따로 하나의 물건을 상상하여 안에서 주재해서는 안 됩니다.
반숙창에게 답함 (9) 答潘叔昌書杜生二論後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荀彧之死, 胡文定引宋景文說, 以爲劉穆之․宋齊丘之比, 最爲得其情狀之實, 無復改評矣. 考其議論本末, 未見其有扶漢之心也, 其死亦何足悲? 又據本傳, 彧乃唐衡之婿, 則彧之失其本心久矣. 顔公之智誠有所不足, 非獨棄平原一事也. 但仁․義․禮․智․信列於五常, 聖人皆顯之以爲敎, 未嘗偏有所隱也. 今曰聖人獨顯仁義․忠信以爲敎, 而神智以爲幾, 不知何據而言? 若其果然, 則是仁義忠信乃無用之樸, 而智乃仁義忠信之賊矣. 學術不正, 使人心頗僻如此, 甚可憂懼. 不知老兄曾見此論否? 聞其託於賓館, 必嘗相與講學者. 聿有以警之, 毋使東萊宗旨轉而爲權謀機變之學也.
순욱(荀彧)의 죽음과 호문정(胡文定: 胡宏)이 송경문(宋景文)의 말을 인용한 것 등을 유목지(劉穆之)와 송제구(宋齊丘)에 견주었던 것은 그 실상을 가장 잘 얻었기에 다시 고치거나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논의의 본말을 고찰해보면 한 나라를 도왔던 마음이 보이지 않으니, 그 죽음 역시 무엇을 슬퍼할 만하겠습니까? 또한 본전(本傳)에 의거한다면 순욱은 당형(唐衡)의 사위이니, 그렇다면 순욱은 그의 본래 마음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안공(顔公)의 지혜에 진정으로 부족함이 있는 것은 평원(平原)을 버렸던 한 가지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만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다섯 가지가 영원한 이치여서 성인이 그것들을 드러내어 가르침으로 삼아 치우쳐 숨기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제 말하기를 ‘성인이 오직 인의충신(仁義忠信)을 드러내어 가르침으로 삼고, 신령스러운 지혜로서 기미를 삼았다.’고 하였는데, 무었을 근거로 말하였는지요? 만약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인의충신은 쓰임이 없는 본바탕이고 지혜는 인의충신을 해치는 적일 것입니다. 학문의 방법이 바르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매우 편벽되게 하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형님께는 이러한 논의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듣자하니 그(두생)가 당신의 빈관(賓館)에 의탁할 때에는 반드시 함께 강학한다고 하니, 그를 경계하여 동래(東萊)의 종지가 와전되어 권모술수의 학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반숙창에게 답함 (10) 答潘叔昌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년(갑오, 1174, 45세)에 반숙창에게 쓴 편지이다.
所示內外交養, 勿使偏枯, 聞斯行之, 不必猶豫, 此正今日應病良藥也. 薛氏書已領, 觀其用功纖密, 良可歎服. 而昨得其論語及春秋, 却有難曉解處. 豈其用力於彼者深, 固所謂藝之至者不兩能邪? 學者於此要當知所擇耳. 仁傳正類南軒所爲, 鄙意亦所未安. 伯恭昨補外書震澤語錄問聖賢之言要切處思一段, 意思却極好也. 陳齊之文乃如此, 尤所不解. 亦嘗究其失否? 微言旣絶, 大義益乖, 甚可悼懼, 不覺傾倒至此. 此紙不可以示人也, 只欲賢者知之, 不枉用心耳.
보여주신 ‘안팎을 서로 수양하여 치우쳐 마르지 말게 하고, 들은 것을 행함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요즈음 병에 따라 좋은 약을 쓰는 것에 해당합니다. 설씨(薛氏)의 편지를 이미 받아 그가 공부하는 것이 섬세하고 정밀한 것을 보니 참으로 탄복할 만합니다만, 어제 그의 논어와 춘추를 얻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었습니다. 어찌 그가 저것들에 힘쓰는 것이 깊다하여 진실로 ‘지극한 기술을 가진 자가 두 가지에 능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배우는 사람은 이에 대해서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전(仁傳)의 바른 부류들은 남헌(南軒: 張軾)이 만든 것으로 제 생각에도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 백공(伯恭)이 어제 이정외서의 「진택어록」에서 ‘성현의 말에서 긴요한 곳에 대해 사색하는 부분’은 뜻이 매우 좋습니다. 진제지(陳齊之)이 글이 이와 같아서 더욱 이해되지 않으니, 역시 그 과실을 궁구해보셨는지요? 미언(微言)이 이미 끊기고 큰 뜻이 더욱 어그러져 매우 슬프고 두려울 만한데도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편지를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니, 당신만 아시고 크게 마음 쓰지 마십시오.
유숙문에게 답함 (1) 答劉叔文
所謂理與氣, 此決是二物. 但在物上看, 則二物渾淪, 不可分開各在一處, 然不害二物之各爲一物也. 若在理上看, 則雖未有物而已有物之理, 然亦但有其理而已, 末嘗實有是物也. 大凡看此等處須認得分明, 又兼始終, 方是不錯. 只看太極圖熹所解第一段, 便見意思矣. 若未會得, 且虛心平看, 未要硬便主張, 久之自有見處, 不費許多閑說話也. 如此虛心理會不得時, 却守取舊來所見, 亦未爲晩耳. 如或未然, 且放下此一說, 別看他處. 道理尙多, 或恐別因一事透著此理, 亦不可知. 不必守此膠漆之盆, 枉費心力也.
이(理)와 기(氣)라고 하는 것은 결단코 두 가지 것입니다. 다만 사물의 측면에서 보자면 두 가지 것이 혼륜(渾淪)하여 나누어 벌려서 각각 한 곳에 있을 수 없지만, 두 가지 것이 각기 하나의 사물이 되는데 해롭지 않습니다. 만약 이(理)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직 사물이 있지 않을 때 이미 사물의 이치가 있을지라도, 역시 그 이치가 있을 뿐이고 실제로 사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무릇 이러한 부분을 분명하게 이해하고서 처음과 끝을 겸하여야 어긋나지 않습니다. 태극도에 대해 제가 해설한 첫 부분을 본다면 뜻을 이해할 것입니다. 만약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마음을 비워 공평하게 보고 억지로 주장하지 않으면서 오래되어 저절로 알게 되면, 허다한 한가로운 말에 힘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을 비우고서도 이해하지 못하였을 때 도리어 예전의 견해를 지키고 취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혹시 아직 그렇지 않다면 우선 이러한 (이기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버려두고서 다른 곳을 보는 것이 도리가 오히려 풍부해질 것입니다. 혹시 별도로 하나의 일에 말미암아 이러한 이치를 투철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서도 알 수 없으니, 이와 같이 아교와 옻으로 붙여놓은 화분을 지키면서 마음의 힘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숙문에게 답함 (2) 答劉叔文
細詳來喩, 依舊辨別性氣兩字不出. 須知未有此氣已有此性, 氣有不存, 性却常在. 雖其方在氣中, 然氣自氣, 性自性, 亦自不相夾雜. 至論其徧體於物, 無處不在, 則又不論氣之精粗而莫不有是理焉 : 不當以氣之精者爲性, 性之粗者爲氣也. 來說雖多, 只以此意思之, 便見得失. 如云精而又精, 不可名狀, 所以不得已而强名之日‘太極’ : 又曰氣愈精而理存焉, 皆是指氣爲性之誤. 又引通書解云云, 亦是不察陰陽二字是形而下者, 便指爲誠. 不知此是誠之流行歸宿處, 不可便指爲誠也. 又引無極之眞, 以爲眞固是理, 然必有其氣, 是以可與二五妙合而凝, 此尤無理矣. 夫眞者理也, 精者氣也. 理與氣合, 故能成形. 豈有理自有氣, 又與氣合之理乎? 其間瑣細, 不暇一一辨論. 但更看太極圖解第一段初兩三行, 便見理之與氣各有去著, 不待如此紛紜矣.
자세히 설명하신 것 중에서 예전처럼 ‘性’과 ‘氣’ 두 글자를 변별하는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가 있지 않을 때 이미 본성이 있으니, 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도리어 본성이 항상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비록 본성의 위치가 기 안에 있을지라도 기는 저대로 기이고 본성은 저대로 본성이니, 역시 본디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본성이 편재하여 사물의 본성이 되는 것을 논의하자면 없는 곳이 없으니, 또한 기의 정밀함과 조야함에 대해 논의하지 않더라도 이치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정밀한 기를 본성으로 삼고 조야한 기를 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보내 주신 설명이 비록 많을지라도 단지 이러한 뜻으로 생각해야만 득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정밀하고 더욱 정밀하여 모양을 이름 지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태극’이라고 불렀다고 하거나, 기가 더욱 정밀하여 이치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 따위는 모우 기를 가리켜서 본성이라고 하는 오류에 해당합니다. 통서해를 인용하여 언급한 것들도 ‘음양’ 두 글자가 형이하자임을 살피지 않고 그것들을 가리켜 참된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것이 유행하여 귀착한 것으로, 바로 가리켜서 참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참된 무극(無極)’을 인용하여 진실로 참된 이치라고 하였으나, 반드시 기가 있어야 음양오행이 묘하게 합하여 응결할 수 있으니, 이것은 더욱 이치가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이치이고 정밀한 것이 기이니, 이치와 기가 합해야 형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찌 이치가 있으면 저절로 기가 생기고 기와 합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사이에 자잘한 부분들은 하나하나 변론할 겨를이 없지만, 다만 다시 태극도해 첫 부분의 두세 줄을 본다면 이치와 기가 각기 가서 붙음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니, 이와 같이 분분하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왕자충에게 답함 (1) 答王子充
老兄深靜篤實, 夭資甚美, 平時於輩流中心所敬仰. 顧恨相從日淺, 未得漆深扣所存, 以自警策. 今讀來敎, 乃有懶弱自安之語, 何邪? 大抵今日之弊, 務講學者多闕於踐履, 而專踐履者又遂以講學爲無益. 殊不知因踐履之實以致講學之功, 使所知益明, 則所守日固, 與彼區區口耳之間者固不可同日而語矣. 不然, 所存雖正, 所發雖審, 竊恐終未免於私意之累, 徒爲拘滯而卒無所發明也. 愚意如此, 不審高明以爲如何?
형님께서 고요하고 독실하여 본래의 자질이 매우 아름답기에 평소에 무리들 중에서 마음속으로 우러러 공경하였습니다. 서로 만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음에 보존한 것을 깊게 구하여 스스로를 경계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보내신 가르침을 읽어보면 나약하게 만족하는 말이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요? 대저 오늘의 폐단은 강학에 힘쓰는 사람들이 실천에 소홀하거나, 오로지 실천만 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강학을 무익하다고 여김으로써, 실천에 말미암아 강학의 공부에 이른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더욱 밝힌다면 지키는 것이 날로 단단해져서 저 자잘한 입과 귀의 사이에 있는 자들과 함께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보존한 것이 바르고 발생한 것에 대해 살폈을지라도 끝내 사사로운 뜻에 걸리는 것을 면치 못하여 한갓 구애되고 응체되어 마침내 밝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제 생각이 이러한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호백봉에게 답함 (1) 答胡伯逢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3년(정해, 1167, 38세)에 호백봉에게 쓴 편지이다.
赤子之心固無巧僞, 但於理義未能知覺, 渾然赤子之心而已. 大人則有知覺擴充之功, 而無巧僞安排之鑿, 故日不失赤子之心. 著箇‘不失’字, 便是不同處. 南軒所說固善, 然必謂從初不失, 此恐太拘. 旣失而反之, 却到此地位, 亦何害其爲不失乎?
아기의 마음은 본디 교묘히 꾸미는 것이 없지만, 다만 의리(義理)에 대해 지각할 수 없어 뭉뚱그려 있는 아기의 마음일 뿐이다. 대인(大人)이라면 지각하여 확충하는 힘이 있고 교묘히 꾸며서 안배하는 천착이 없으므로 아기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잃지 않았다.’는 말에서 본다면 서로 경지가 같지 않습니다. 남헌(南軒: 張軾)이 말한 것이 참으로 좋지만 반드시 애초의 상태를 따라 잃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면 이것은 매우 좁은 것입니다. 이미 그것을 잃고 나서 돌이킨다면 다시 이 경지에 이르게 되니, 역시 잃지 않은 것에 대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호백봉에게 답함 (2) 答胡伯逢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3년(정해, 1167, 38세)에 호백봉에게 쓴 편지이다. 「임택지에게 답함 (2)」에 “백봉이 부부에게서 단서를 짓는다는 말에 대해 물어왔다.”고 하는 내용으로 보건대 그 편지와 이곳의 편지는 같은 해(정해)에 쓰였다.
男女居室, 人事之至返而道行乎其間, 此君子之道所以費而隱也. 然幽闇之中, 袵席之上, 人或褻而慢之, 則天命有所不行矣. 此君子之道所以造端乎夫婦之微密, 而語其極則察乎天地之高深也. 然非知幾愼獨之君子, 其孰能體之? 易首於乾坤而中於感恒, 禮謹大昏, 而詩以二南爲正始之道, 其以此歟. 知言亦曰‘道存乎飮食男女之事, 而溺於流者不知其精’, 又日‘接而知有禮焉, 交而知有道焉, 惟敬者能守而不失耳’, 亦此意也.
남녀가 함께 사는 것은 사람의 일 중에서 제일 비근한 것으로 그 사이에 도가 운행하니, 이것이 군자의 도가 넓되 은미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구석진 곳과 옷 입고 자리에 앉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소홀히 하면서 무시한다면 천명이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군자의 도가 부부의 미천하고 사밀한 것에서 단서를 지으면서도 그 궁극처를 말하면 천지의 높고 깊은데서 보이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기미를 알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군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그것을 체득할 수 있겠습니까? 역은 머리를 건괘와 곤괘로 시작하여 가운데는 함괘와 항괘가 있고, 예기는 국왕의 혼례를 삼갔고, 시는 「주남」과 「소남」으로 처음을 바르게 하는 도로 삼았으니, 그것들이 바로 이러한 사례일 것입니다. 지언에서도 말하기를 “도란 음식남녀의 일에 보존되어 있으나 흘러 빠져드는 자는 도의 정밀함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접할 때 예가 있다는 것을 알고, 교제할 때 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공경하는 사람이야 말로 지키면서 잃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들도 그 뜻입니다.
호백봉에게 답함 (3) 答胡伯逢
昨承喩及知仁之說, 極荷開曉之詳. 然愚意終覺未安. 來諭大抵專以自知自治爲說, 此誠是也. 然聖人之言有近有遠, 有緩有急. 論語一書, 言知人處亦豈少耶? 大抵讀書須是虛心平氣, 優游玩味, 徐觀聖賢立言本意所向如何, 然後隨其遠近淺深․輕重緩急而爲之說, 如孟子所謂以意逆志者, 庶乎可以得之. 若便以吾先入之說橫於胸次, 而驅率聖賢之言以從己意, 設使義理可通, 已涉私意穿鑿而不免於郢書燕說之誚 : 况又義理窒礙, 亦有所不可行者乎.
어제 보내주신 ‘인(仁)을 아는 것’에 대한 말을 보았는데 매우 상세하게 열어 밝히셨지만, 저는 끝내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내신 설명이 대부분 오로지 스스로 알고 스스로 다스리는 것으로써 말을 하니, 이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말에는 가까운 것도 있고 먼 것도 있으며, 느슨한 것도 있고 급한 것도 있으니, 논어 한 책에서 사람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하는 곳이 어찌 적겠습니까? 대저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평이하게 하여 여유롭게 노닐면서 맛을 보면서 천천히 성현이 세운 말의 본래 뜻이 무엇을 향하는지를 본 뒤라야, 멀고 가까움, 얕고 깊음, 가볍고 무거움, 느슨하고 급함 등에 따라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맹자에서 “의(意)으로써 지(志)를 헤아린다.”는 라는 말과 같아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편의대로 나에게 먼저 들어온 말을 가슴에 가로질러 놓고서 성현의 말을 몰아다가 나의 뜻을 따르게 한다면, 설사 의리에 통할 수 있을지라도 이미 사사로운 뜻으로 천착하여 영(郢)의 글과 연(燕)의 말에 대해 꾸짖는 것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의리에 막혀 실천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서야 어떻겠습니까?
竊觀來敎所謂‘苟能自省其偏, 則善端已萌. 此聖人指示其方, 使人自得, 必有所覺知, 然後有地可以施功而爲仁’者, 亦可謂非聖賢之本意而義理亦有不通矣. 熹於晦叔․廣仲書中論之已詳者, 今不復論. 請因來敎之言而有以明其必不然者.
보내신 가르침에서 ‘진실로 자신의 치우침을 스스로 살필 수 있다면 선의 단서가 이미 싹트니, 이것은 성인이 그 방법을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얻어 반드시 깨달아 아는 것이 있게 한 뒤라야 공력을 베풀고 인을 실천할 수 있는 터전이 생길 수 있다.’라는 것도 성현의 본뜻이 아니며 뜻도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회숙(晦叔: 吳晦叔)과 광중(廣仲: 胡廣仲)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이미 상세하게 논한 것이므로 이제 다시 논의하지 않겠습니다. 보내신 편지에 말미암아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밝히십시오.
昔明道先生嘗言, 凡人之情易發而難制者, 惟怒爲甚. 能於怒時遽忘其怒而觀理之是非, 亦可以見外誘之不足惡, 而於道亦思過半矣. 若如來敎之云, 則自不必忘其怒而觀理之是非, 第卽夫怒而觀夫怒, 則吾之善端固已萌焉而可以自得矣. 若使聖賢之門已有此法, 則明道豈故欲捨夫徑捷之塗而使學者支離迂緩以求之哉? 亦以其本無是理故爾. 且孟子所謂‘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者, 正謂精思力行, 從容涵泳之久, 而一日有以洋然於中, 此其地位亦已高矣. 今未加克復爲仁之功, 但觀宿昔未改之過, 宜其方且悔懼愧赧之不暇, 不知若何而遽能有以自得之邪? 有所知覺然後有地以施其功者, 此則是矣. 然‘覺知’二字, 所指自有淺深. 若淺言之, 則所謂覺知者亦曰覺夫天理人欲之分而已. 夫有覺於天理人欲之分, 然後可以克己復禮而施爲仁之功, 此則是也. 今連上文讀之而求來意之所在, 則所謂覺知者乃自得於仁之謂矣. 如此則‘覺’字之所指者已深, 非用力於仁之久, 不足以得之, 不應無故而先能自覺, 却於旣覺之後方始有地以施功也. 觀孔子所以告門弟子, 莫非用力於仁之實事, 而無一日如來諭所云‘指示其方, 使之自得’者. 豈子貢․子張․樊遲之流皆已自得於仁, 而旣有地以施其功邪? 其亦必不然矣.
예전에 명도(明道: 程顥) 선생이 말하기를 “보통 사람의 감정은 쉽게 발생하지만 제어하기 어려우며 그 중에서 성냄이 더욱 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났을 때 급히 자기의 성남을 잊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관찰하는 것도 밖의 유혹이 미워할 만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고, 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반을 넘어서게 됩니다. 만약 보내신 편지에서와 같다면 스스로 자신의 성냄을 잊고서 이치의 옳고 그름을 관찰할 필요가 없으며, 다음으로 성났을 때 성남을 관찰한다면 나의 좋은 단서가 진실로 이미 싹터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성현의 문하에 이미 이러한 법도가 있다고 한다면 명도(明道: 程顥)가 어찌 지름길을 버리고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하고 느슨하게 구하게 하려고 하였겠습니까? 역시 그 근본에 이러한 이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맹자에서 말한 “군자가 도로써 깊게 이루는 것은 스스로 얻고자 함이다.”는 것이 바로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면서 자연스럽게 무젖기를 오래하다가 어느 날 아침에 속에서 풀리는 것인데, 어째서 급히 스스로 얻을 수 있다고 하신지요? “지각함이 있은 뒤에 자기의 힘을 쓸 수 터전이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지각(知覺)’이라는 두 글자가 가리키는 것에는 본디 깊고 얕음이 있습니다. 만약 얕은 것으로 말하자면 지각이란 역시 천리와 인욕의 구분을 아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천리와 인욕의 구분이 있은 뒤라야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 인을 실천하는 공부를 할 수 있으니, 그것이 이것입니다. 이제 위의 문장과 연속하여 읽으면서 다음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한다면 지각이라는 것이 인을 스스로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다면 ‘각(覺)’자가 가리키는 뜻이 깊어서 인에 힘씀이 오래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으니, 아무런 연고도 없이 먼저 스스로 깨우칠 수 있어서 도리어 깨우친 뒤에 비로소 힘쓰는 터전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가 문하의 제자에게 말한 것을 살펴보면 인의 실제 일에 힘쓰지 않음이 없으며, 보내신 편지에서 언급하신 ‘그 방법을 지시하여 보임으로써 스스로 얻게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어찌 자공, 자장, 번지 등이 모두 이미 인을 스스로 얻어서 힘을 쓰는 터전이 마련되었을까요? 그들도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然熹前說其間亦不能無病, (如云爲仁淺深之驗, 觀人觀己之說, 皆有病.) 以今觀之, 自不必更爲之說. 但以伊川․和靖之說明之, 則聖人之意坦然明白, 更無可疑處矣.
그러나 제가 전에 말했던 것에도 병이 없을 수 없습니다.(예컨대 인을 실천하는데 얕고 깊음이 있다는 것과, 남을 관찰하고 자기를 관찰하는 말 등에 다 병이 있다.) 이제 그것들을 관찰해보건대 저절로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천(伊川: 程頤), 화정(和靖: 尹燉)이 설명한 것이라면 성인의 뜻이 명백하여 다시 의심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호백봉에게 답함 (4) 答胡伯逢
知言之書, 用意深遠, 析理精微, 豈末學所敢輕議? 向輒疑之, 自知已犯不韙之罪矣. 玆承誨喩, 尤切愧悚. 但鄙意終有未釋然者. 知行先後, 已具所答晦叔書中, 其說詳矣. 乞試取觀, 可見得失也. 至於性無善惡之說, 則前後論辨不爲不詳. 近又有一書與廣仲丈論此, 尤詳於前. (因龜山中庸首章而發, 及引易傳大有卦及遺書第二十二卷者.) 此外蓋已無復可言者矣. 然旣蒙垂諭, 反復思之, 似亦尙有一說, 今請言之.
지언이란 글은 뜻이 심원하고 이치가 정밀한데 어찌 말단의 학문으로 가벼이 논의하겠습니까? 예전에 문득 그것을 의심한 것에 대해 이미 옳지 못한 죄를 범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이에 가르침을 받으니 더욱 송구스러운 마음 절실합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끝내 풀리지 않은 것이 있으니, 앎과 실천의 선후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오회숙에게 보내는 편지에 갖추어 놓은 설명이 상세하므로 그것을 보시면 득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성에 선악이 없다는 말에 대해서는 전후의 논변이 상세하며, 근래에 또한 광중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것을 논의한 것이 이전보다 더 상세합니다. (구산(龜山: 楊時)의 중용 머릿장에서 시작하여 역전(易傳) 대유(大有)괘와 유서 권22 인용하였다.) 이 밖에는 대개 다시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해 반복해서 생각해 보니 여전히 한마디 말씀이 있을 것도 같은데, 이제 말해주십시오.
蓋孟子所謂‘性善’者, 以其本體言之, 仁․義․禮․智之未發者是也. (程子曰“‘止於至善’, ‘不明乎善’, 此言善者, 義理之精微, 無可得而名, 姑以‘至善’目之”是也. 又曰‘人之生也, 其本眞而靜. 其未發也, 五性具焉, 曰仁․義․禮․智․信.’) 所謂‘可以爲善’者, 以其用處言之, 四端之情發而中節者是也. (程子曰 ‘繼之者善’, 此言善却言得輕. 但謂繼斯道者莫非善也, 不可謂惡’是也.) 蓋性之與情雖有未發已發之不同, 然其所謂善者則血脈貫通, 初未嘗有不同也. (程子曰: ‘喜怒哀樂未發, 何嘗不善? 發而中節, 則無往而不善’是也.) 此孟子道性善之本意, 伊洛諸君子之所傳而未之有改者也. 知言固非以性爲不善者, 竊原其意, 蓋欲極其高遠以言性, 而不知名言之失反陷性於搖蕩恣睢․駁雜不純之地也. (所謂極其高遠以言性者, 以性爲未發, 以善爲己發, 而惟恐夫已發者之混夫未發者也. 所謂名言之失者,不察乎至善之本然, 而槪謂善爲已發也. 所謂反陷性於搖蕩恣睢․駁雜不純之地者, 旣於未發之前除却‘善’字, 卽此‘性’字便無著實道理, 只成一箇空虛底物, 隨善隨惡, 無所不爲. 所以有‘發而中節, 然後爲善 : 發不中節, 然後爲惡’之說. 又有‘好惡性也, 君子好惡以道, 小人好惡以己’之說. 是皆公都子所問, 告子所言, 而孟子所闢者, 已非所以言性矣. 又其甚者, 至謂天理人欲同體異用, 則是謂本性之中已有此人欲也. 尤爲害理, 不可不察.) 竊意此等偶出於前輩一時之言, 非其終身所守, 不可易之定論. 今旣未敢遽改, 則與其爭之而愈失聖賢之意․違義理之實, 似不若存而不論之爲愈也.
대개 맹자가 말한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그 본체로써 말한 것으로 인의예지가 피어나지 않은 것이 이것입니다. (정자가 말하기를 “‘지극한 선에 그친다.’는 구절과 ‘선에 밝지 않으면--.’의 구절은 선이 정밀하고 미묘한 의리여서 이름 지을 수 없으므로 우선 지극한 선으로 지목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남에 그 근성이 진실하고 고요하다. 본성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다섯 가지 본성이 갖추어져 있으니, 인의예지신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선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쓰임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네 가지 단서로 된 감정이 발생하여 절도에 맞는 것이 이것입니다. (정자가 말하기를 “‘잇는 것이 선이다’는 것은 선을 말하면 도리어 말이 가벼워지므로 다만 이 도를 잇는 것이 선이 아니다.”고 말하였다.) 대개 본성과 감정이 비록 아직 발생하지 않음과 이미 발생함의 다름이 있을지라도 선이라고 하는 것은 혈맥이 관통하여 애초부터 같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정자가 말하기를 “희노애락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어지 선하지 않겠는가? 발생하여 절도에 맞으면 언제나 선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맹자에서 본성이 선하다고 말하는 본뜻으로 이(伊) 지역과 낙(洛) 지역의 학자들이 전하면서 고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언은 본성이 선하지 않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 뜻을 파헤쳐보면 고원한 것을 다하여 본성을 말하고자 하면서 개념들이 본뜻을 잃어 도리어 본성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헛갈리고 순수하지 않게 섞이는 지경에 빠지게 합니다. (높고 먼 것을 다하여 본성을 말하는 것은 본성에 대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선에 대해 이미 발생한 것으로 여긴 것이지만, 이미 발생한 것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섞어놓은 것이다. ‘개념이 본뜻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지극한 선의 본래성을 살피지 않고 선에 대해 이미 발생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도리어 본성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헛갈리고 순수하지 않게 섞이는 데에 빠지게 한다는 것’은 아직 발생하기 전에 ‘선(善)’자를 제거한 것으로 ‘본성’이라는 말이 근거할 도리가 사라지고 단지 하나의 공허한 사물이 될 뿐이어서,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악하여 하지 않은 것이 없음이다. 그래서 “발생하여 절도에 맞은 뒤라야 선이 되고, 발생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된다.”는 말한다. 또한 “좋아하고 싫어함이 본성이니, 군자는 도로써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소인은 자기 기준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라고 말하니, 이것은 다 공도자(公都子)가 묻고 고자(告子)가 말하자 맹자가 물리친 것으로 이미 본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심한 것은 천리와 인욕이 본체가 같으나 쓰임이 다르다고 하는데 이르니, 이것은 본성 안에 이미 인욕이 있다는 것으로 더욱 이치를 해치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이러한 것들은 선배들의 한 때의 말에서 우연히 나온 것으로 죽을 때까지 지키면서 바꾸지 말아야 할 정론은 아닙니다. 이제 갑자기 바꿀 수 없다면 그것과 씨름하면서 더욱 성현의 뜻에서 멀어지고 참된 의리를 벗어나게 되어, 보존하면서도 논의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것 같습니다.
知仁之說, 亦已累辨之矣. 大抵如尊兄之說, 則所以知之者甚難而未必是, 而又以知仁․爲仁爲兩事也. (所謂觀過知仁, 因過而觀, 因觀而知, 然後卽夫知者而謂之仁, 其求之也崎嶇切促, 不勝其勞, 而其所謂仁者, 乃智之端也, 非仁之體也. 且雖如此, 而亦曠然未有可行之貸又須別求爲仁之方, 然後可以守之. 此所謂知之甚難而未必是, 又以知與爲爲兩事者也.) 如熹之言, 則所以知之者雖淺而便可行, 而又以知仁․爲仁爲一事也. (以名義旨之, 仁特愛之未發者而已. 程子所謂‘仁, 性也 : 愛, 情也. ’又謂‘仁, 性也 : 孝弟, 用也. ’此可見矣. 其所謂‘豈可專以愛爲仁’者, 特謂不可指情爲性耳, 非謂仁之與愛了無交涉, 如天地冠屨之不相近也. 而或者因此求之太過, 便作無限玄妙奇特商量. 此所以求之愈工而失之愈遠. 如或以覺言仁, 是以知之端爲仁也. 或以是言仁, 是以義之用爲仁也. 夫與其外引智之端․義之用而指以爲仁之體, 則執若以愛言仁, 猶不矢爲表裏之相須而可以類求也哉? 故愚謂欲求仁者, 先當大槪且識此名義氣象之彷彿與其爲之之方, 然後就此慤實下功, 尊聞行知以踐其實, 則所知愈深而所存益熟矣. 此所謂知之甚淺而便可行, 又以知與爲爲一事者也. 不知今將從其難而二者乎? 將從其易而一者乎? 以此言之, 則兩家之得失可一言而決矣.)
‘인(仁)을 안다’는 말도 이미 여러 차례 변론하였습니다. 대저 형님의 말과 같다면 안다는 것이 매우 어려우나 꼭 옳지는 않을 것이며, 게다가 인을 아는 것과 인을 실천하는 것이 두 가지 일이 됩니다. (‘허물을 관찰하고 인을 안다.’라는 것은 허물에서부터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통하여 안 뒤라야 아는 것에 나아가 인이라고 말하니, 그 추구함이 험난하고 촉급하여 매우 수고로워 그러한 인이란 앎의 단서이지 인의 본체는 아니다. 또한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황량하여 실천할 만한 실제가 없고, 또한 반드시 따로 인을 실천하는 방도를 구한 뒤에야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알기가 매우 어려우나 꼭 옳지는 않을 것이며, 게다가 인을 아는 것과 인을 실천하는 것이 두 가지 일이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제 말과 같다면 아는 것이 비록 얕을지라도 쉽게 실천할 수 있고, 또한 인을 아는 것과 인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의 일입니다. (개념으로 말한다면 인이란 사랑이 아직 발행하지 않은 것이다. 정자(程子)가 “인은 본성이고 사랑은 감정이다.”라고 말했고, “인은 본성이고 효제는 쓰임이다.”라고 말했으니, 이것들에서 알 수 있다. 그가 “어찌 오로지 사랑만을 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특히 감정을 가리켜 본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인과 사랑이 하늘/땅이나 갓/신발 등이 서로 가깝지 않듯이 아무런 교섭이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다. 혹자는 이것에 근거하여 추구함이 너무 과도하여 무한하고 현묘하고 기특한 생각을 한다. 이것이 바로 추구하는 것이 더욱 교묘하면서도 잃은 것이 더욱 많은 까닭이다. 혹은 지각으로써 인을 말한다면 이것은 지혜의 단서로 인을 삼은 것이고, 혹은 옮음으로써 인을 말한다면 이것은 의(義)의 쓰임으로 인을 삼은 것이다. 대저 밖에서 지혜의 단서와 의의 쓰임을 끌어다가 그것을 가리켜 인의 본체라고 여기기보다 차라리 사랑을 인이라고 말하여 겉과 속의 긴밀한 관계를 잃지 않고서 같은 것으로써 구할 수 있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는 인(仁)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대체와 관련하여 이름의 뜻과 기상(氣象) 그리고 그 실천 방법을 안 뒤에, 감가 실천하는 공부에 나아가 들은 것과 안 것을 신중히 실천한다면, 아는 것이 더욱 깊어지고 보존한 것이 더욱 익게 된다. 여기에서 “아는 것이 매우 얕으나 실천할 만하고, 또한 앎과 실천을 하나의 일로 삼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제 장차 그 어렵고 둘로 나뉘는 것을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그 쉽고 하나인 것을 따르겠습니까? 이로써 본다면 두 주장의 득실을 한 마디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來敎又謂方論知仁, 不當兼及不仁. 夫觀人之過而知其愛與厚者之不失爲仁, 則知彼忍而薄者之決不仁, 如明暗黑白之相形, 一擧目而兩得之矣. 今乃以爲節外生枝, 則夫告往知來․擧一反三․聞一知十者, 皆適所以重得罪於聖人矣. 竊謂此章只合依程子․尹氏之說, 不須別求亥妙, 反失本指也. 頁敍胸臆, 不覺言之太繁, 伏惟高明財擇其中. 幸甚幸甚!
보내신 편지에서 또한 ‘인을 아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인하지 못함에까지 이르러서는 안 됩니다. 대저 남의 허물을 관찰하여 자기의 사랑과 두터움을 잃지 않은 것이 인(仁)임을 안다면, 저것의 잔인하고 얕은 것이 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밝음/어두움, 흑/백이 서로 형체를 이루는 것이나, 한번 눈을 들어 두 가지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마디 밖에서 가지를 만든 것이라고 여긴다면, 옛 것을 알려주자 다가올 것을 알고, 하나를 들자 세개를 추론하고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것 등이 모두 마침내 성인에게 무거운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생각건대 이 장은 단지 정자(程子)와 윤씨(尹氏)의 말에 따라야지 따로 현묘함을 구하다가 도리어 본지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 속 생각을 곧바로 서술하느라 말이 너무 번거로워졌는지 모르겠으나, 그 중에서 적절한 것을 선택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황인경(동)에게 답함 (1) 答黃仁卿東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2년(을미, 1175, 46세)에 황인경에게 쓴 편지이다. 춘추를 읽을 때 의리에 무젖을 것을 당부하였다.
所示春秋大旨甚善. 此經固當以類例相通, 然亦先須隨事觀理, 反復涵泳, 今胸次開闊, 義理貫通, 方有意味. 若便一向如此排定說殺, 正使在彼分上斷得十分的當, 却於自己分上都不見得箇從容活絡受用, 則亦何益於事邪? 大抵不論看書與日用功夫, 皆要放開心胸, 今其平易廣闊, 方可徐徐旋看道理, 浸灌培養. 切忌合下便立己意, 把捉得太緊了, 卽氣象急迫, 田地狹隘, 無處著功夫也. 此非獨是讀書法, 亦是仁卿分上變化氣質底道理也. 然看春秋外, 更誦論孟及看近思錄等書以助其趣乃佳. 若只如此, 實恐枯燥, 難見功耳.
보내주신 춘추의 큰 뜻은 매우 좋습니다. 이 경은 본디 종류와 사례로서 서로 통하지만, 역시 먼저 일에 따라 이치를 보고 반복하여 무젖어서 가슴이 열리고 의리에 관통하여야 맛이 생깁니다. 만약 한사코 이와 같이 안배하여 말한다면 설사 춘추에 대하여 매우 적당함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자기의 입장에서 살아있는 맥락을 따라 활용하지 못하는 일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대저 책을 보는 것과 일용의 공부를 막론하고 언제나 마음을 놓아 열고서 화평하고 넓게 하여야 서서히 도리를 좇아 무젖어 배양할 수 있습니다. 본디 자기의 뜻을 세우는 것을 절실히 삼가야 하니, 붙잡는 것이 너무 심하면 기상이 급박해지고 터전이 좁아져서 안착하는 공부가 사라집니다. 이것은 독서법뿐만 아니라 당신의 처지에서 기질을 변화시키는 도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춘추를 보는 것밖에 다시 논어와 맹자를 외우고 근사록 등의 책을 보아서 그러한 취지를 돕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을 뿐이라면 건조하여 효과를 보기 어려울까 걱정스럽습니다.
황인경에게 답함 (2) 答黃仁卿
【해제】이 글은 광종 소희(紹熙) 3년(임자, 1185, 63세)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 안에 나오는 “제가 스스로를 탄핵하는 문장”이라는 언급으로 볼 때 임자년의 것이다.
示諭食貧之狀, 深爲歎息. 向見擬此闕, 意官期必甚近, 不謂尙許久也. 然從官兩世, 淸貧如此, 益見家法之有傳, 足使貪濁知所愧矣. 所恨自困涸轍, 不能少致濡沫之助, 但有歎恨耳. 改葬之議, 旣非人謀所及, 假卜筮以決之, 亦古人所不廢, 更詳思之, 如何? 熹自劾之章已批, 上旨喩以事不相關, 則是已經進呈矣. 遜詞避寵, 亦事之宜, 紛紛不已, 又似過甚. 今已幸得請矣, 只用省箚今還故官, 更不再出敕牒, 亦甚省事. 位高言廢, 又是上一等人. 今人則位未高時已無及物之志矣, 可爲深太息也. 此間親知有仕於汀者書來說彼民望行經界尤切, 韜仲歸, 說趙書亦請行之, 當軸頗難之. 彼於汀無利害, 只恐牽連, 幷及泉․漳耳. 囗囗之政且得如此亦善, 人固難得每事皆善也. 漳人亦淳, 但淳者太淳, 故其有勢力者得肆殘暴, 爲可憐耳. 向來繆政撫其淳者甚至, 而治其豪猾不少貸, 亦有精力不及而誤縱舍者. 然或者至今以爲嚴, 殊不可曉. 深自愧恨, 不得如仁卿者爲寮友而規正之也.
보내신 편지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깊이 탄식이 나옵니다. 지난번에 이 관직을 의망 받고 부임할 시기가 매우 가까웠을 것인데 오히려 매우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직에 종사하며 세상을 둘로 나누면서도 이와 같이 청빈하고 전해오는 가법을 더욱 빛내시는 것이 혼탁한 지식을 탐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스스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곤란하여 좁쌀만큼의 작은 도움도 드릴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장지를 바꾸는 것에 대한 논의는 사람의 힘으로 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점에 따라서 결정하는 것을 옛 사람들도 폐하지 않았으니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제가 스스로를 탄핵하는 문장을 이미 올려 황제께서 조칙을 내려 현재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황제에게 올렸던 것입니다. 사양하는 말로 총애를 물리치는 것도 마땅한 일이지만, 소란이 그치지 않은 것도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이제 다행히 청(請)을 얻게 된 것은 단지 상서성의 회답에 의거해 옛 관직으로 돌아가라는 것뿐으로 다시 칙첩(敕牒)을 내지 않았으니, 잘 살펴야 할 일입니다. 자리가 높으면 말이 폐해지는 것은 또한 맨 윗자리 사람입니다. 요즘 사람은 자리가 높지 않을 때에 이미 실천하려는 뜻이 없으니, 크게 탄식할 만합니다. 이곳에서 정주(汀州) 지역에 벼슬한 사람을 직접 알고 있는데, 편지를 보내와 백성이 경계법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고 말합니다. 도중(韜仲)이 돌아가서 조상서(趙尙書)에게 말하여 경계법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류승상(留丞相)이 매우 비난합니다. 류승상이 정주(汀州)와 이해관계가 없으나 단지 억지로 끌어 붙여 천주(泉州)와 장주(漳州)에까지 시행할까 걱정합니다. □□의 정책이 또한 이와 같이 훌륭할지라도 사람이 일마다 모두 훌륭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장주 사람들도 순박하지만, 순박한 사람은 너무 순박하므로 그 중에서 세력을 얻은 사람은 방자하고 난폭하니, 애석할 따름입니다. 예전에 옭아매는 정치로 그 순박한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것이 매우 지극하여 그 교활한 토호들이 조금도 빌리지 못하도록 다스렸으나, 역시 정력이 부족하여 그릇되게 탕감해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금이 엄하다고 여기니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매우 부끄러우니, 당신이 저를 위하여 바로잡아 주시는 것만 못할 것 같습니다.
황직경(간)에게 답함 (1) 答黃直卿榦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황직경에게 쓴 편지이다.
別紙之喩 如此處心甚善, 然亦似有先立標準之病. 武侯所謂鞠躬盡力, 死而後已, 成敗利鈍, 非能逆睹者, 非獨建立事功爲然也. 如此則知處不期寬而自寬, 行處不期遠而自遠矣. 試更思之.
별지에서의 말은 마음 씀씀이가 매우 훌륭합니다만, 역시 미리 표준을 세우는 병이 있는 듯합니다. 무후(武侯: 제갈량)가 말하기를 “몸소 힘을 다하면서 죽은 뒤에 그칠 뿐이니, 이루느냐 패하느냐 날카로우냐 무디냐 등은 거슬러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니, 일의 성공만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아는 것이 너그럽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너그러워질 것이고, 실천하는 것이 원대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원대해질 것입니다. 더 생각해보십시오.
황직경에게 답함 (2) 答黃直卿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황직경에게 쓴 편지이다.
子春聞時相過, 甚善. 爲學直是先要立本, 文義却可且與說出正意, 令其寬心玩味, 未可便令考校同異, 硏究纖悉, 恐其意思促迫, 難得長進. 將來見得大意, 略擧一二節目漸次理會, 蓋未晩也. 此是向來差誤, 今幸得見, 却須勇革, 不可苟避譏笑, 却誤人也.
자춘(子春)이 듣기로는 때로 서로 들른다고 하니 매우 좋습니다. 학문을 할 때 우선 근본을 세우고 글의 뜻에 대해 바른 의미를 말할 수 있어야 하니,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완미하게 해야지 편의대로 같은 점과 다름 점을 헤아려 검사하고 세세한 사실을 모두 연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급박하여 길게 나아가지 어렵습니다. 장차 큰 뜻을 이해하려면 대략 한두 절목을 들어 점차 이해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착오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면 용감하게 바꿔야지 구차하게 남들의 비웃음을 피하면서 사람들을 그릇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황직경에게 답함 (3) 答黃直卿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황직경에게 쓴 편지이다.
前書所論先天太極二圖, 久無好況, 不暇奉報. 先天乃伏羲本圖, 非康節所自作. 雖無言語, 而所該甚廣. 凡今易中. 一字一義, 無不自其中流出者. 太極却是濂溪自作, 發明易中大槪綱領意思而已. 故論其格局, 則太極不如先天之大而詳 : 論其義理, 則先夭不如太極之精而約. 蓋合下規模不同, 而太極終在先天範圍之內, 又不若彼之自然, 不假思慮安排也. 若以數言之, 則先天之數自一而二, 自二而四, 自四而八, 以爲八卦 : 太極之數亦 自一而二, 剛柔自二而四, 剛善․剛惡․柔善․柔惡. 遂加其一, 中以爲五行, 而遂下及於萬物. 蓋物理本同而象數亦無二致, 但推得有大小詳略耳. 近日講論及脩改文字頗多, 當候相見面言之.
앞 편지에서 논의한 선천도와 태극도 두 그림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상황이 좋지 못하여 답장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선천도는 복희의 그림이지 강절(康節: 邵雍)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언어가 없었을지라도 갖춘 내용이 매우 광대합니다. 지금 역 안의 한 글자 한 뜻도 본디 그 안에서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태극도는 염계(濂溪: 周敦頤)가 스스로 지은 것으로 역 안의 큰 강령과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그 규모를 논하자면 태극도가 선천도의 크고 상세함만 못하고, 그 의미를 논하자면 선천도가 태극도의 정밀하고 요약됨만 못합니다. 본래 그 규모가 다르지만 태극도는 결국 선천도의 범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선천도가 자연스럽고 사려에 의지하여 안배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만약 수(數)로써 말한다면 선천도의 수는 1에서 2로, 2에서 4로, 4에서 8로 가서 8괘가 됩니다. 태극도의 수도 1에서 2로(강/유), 2에서 4(강선/강악/유선/유악)로 되었다가 1(중)을 더하여 5행이 되어 아래로 만물에 미칩니다. 대개 사물의 이치는 본래 같고 상수(象數)도 둘로 나뉘지 않지만, 거기에 크고 작고 상세하고 간략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요즈음 강론하면서 많은 글자를 수정하였는데, 서로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황직경에게 답함 (4) 答黃直卿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황직경에게 쓴 편지이다.
示喩讀書次第, 甚善. 但所諭先天太極之義, 覺得大段局促. 日用之間, 只敎此心常明, 而隨事觀理以培養之, 自當有進. 才覺如此狹隘拘迫, 却恐不能得展拓也. 子細已別錄去, 可更詳之.
말씀하신 독서의 순서가 매우 좋지만, 선천도와 태극도의 뜻은 대단히 촉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항상 밝게 하여 일에 따라 이치를 보아가며 배양하면 저절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좁고 급박하다면 도리어 열어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미 따로 기록하여 보냈으니 더 상세히 살피십시오.
황직경에게 답함 (5) 答黃直卿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년(갑진, 1184, 55세)에 황직경에게 쓴 편지이다.
所論太極散爲萬物, 而萬物各具太極, 見得道不可須臾離之意, 而與一貫之指․川上之歎․萬物皆備之說相合, 學者當體此意, 造次顚沛不可間斷, 此說大槪得之. 但周子之意若只如此, 則當時只說此一句足矣, 何用更說許多陰陽․五行․中正․仁義及通書一部種種諸說邪? 通書中所謂誠無爲者, 太極也 : 幾善惡者, 陰陽也 : 德日仁․義․禮․智․信者, 五行也. 皆就圖上說出. 其餘如靜虛․動宜․禮先․樂後․淡且和․果而確之類,亦是圖中陰陽動靜之意. 蓋旣曰各具太極, 則此處便又有陰陽五行許多道理, 須要隨處一一盡得. 如先天之說, 亦是太極散爲六十四卦, 三百人十四爻. 而一卦一爻莫不具一太極, 其各具一太極處又便有許多道理, 須要隨處盡得, 皆不但爲塊然自守之計而已也. 然此亦只是大槪法象, 若論日用功夫, 則所見所守須先有箇自家親切要約處, 不可必待見圖而後逐旋安排. 其隨處運用, 亦須虛心平氣, 徐觀事理, 不可只就圖上想像思惟也. 旣先有箇立脚處, 又能由此推考證驗, 則其胸中萬理洞然, 通透活絡, 而其立處自不費力而愈堅牢開闊矣. 若但寸寸銖銖比量湊合, 逐旋將來做工夫, 則亦何由有進步處邪?
논의하셨듯이 ‘태극이 흩어져 만물이 되고 만물이 각기 태극을 갖추었다는 것에서, 도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는 뜻을 알 수 있고, 공자의 하나로 꿰뚫는 가르침과 시냇가에서의 탄식과 맹자의 만물을 다 갖추고 있다는 말 등과 서로 부합하니, 배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고꾸라지고 넘어지는 틈에도 이탈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말은 대체적으로 뜻을 얻었습니다. 다만 주자(周子: 周敦頤)의 뜻이 이와 같을 뿐이라면 당시에 이 한 구절만 말했더라도 충분했을 것인데, 왜 음양, 오행, 중정, 인의 등의 많은 말과 통서에서 여러 종류의 말을 했을까요? (통서 안에서 말한 “정성스러움은 함이 없다.”라는 것은 태극을 가리키고, “기미에서 선과 악이 갈라진다.”는 것은 음과 양을 가리키고, 인의예지의 덕이란 오행을 가리키니, 다 태극도에 나아가 말한 것이다. 그 나머지 “고요함․비움․움직임․곧음․예가 먼저고 음악이 뒤라는 것․맑고 조화로움․과감하면서 확고함 등의 말도 태극도 안의 음양과 동정의 뜻이다.) 대개 이미 각기 태극을 갖춘다고 했다면 이곳에 음양과 오행의 허다한 도리가 있으니, 때에 따라서 하나하나씩 다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선천도의 말도 태극이 흩어져서 64괘와 384효가 되고 1괘와 1효는 하나의 태극을 갖추지 않음이 없으므로, 각기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도리도 갖추었으니, 상황에 따라서 다 이해해야지 모든 것을 뭉뚱그려 스스로 지키려는 계획을 위하는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반적으로 본받아야 할 모습일 뿐이며, 만약 일용공부로써 논한다면 스스로 몸소 절실하게 요약하는 경지를 먼저 지켜야지 그림을 보고난 뒤에 그에 따라 안배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적용하는 것도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기를 평이하게 하여 서서히 일의 이치를 보아야지 그림에만 나아가 상상하여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먼저 하나의 입각 처를 세웠다면 다시 여기에서 추리하여 징험하여야 가슴 속의 모든 이치가 환히 뚫리어 맥락이 살아나고, 입각 처는 힘들이지 않더라도 저절로 더욱 견고하고 넓어질 것이다. 만약 세세하게 비교하여 합쳐 나아가고 빙빙 돌면서 공부한다면 역시 무엇에 말미암아 진보하겠는가?
황직경에게 답함 (6) 答黃直卿
【해제】이 글은 영종(寧宗) 경원(慶元) 3년(정사, 1197, 68세)에 황직경에게 쓴 편지이다. 이 편지와 속집 권1 「황직경에게 답함 (30)」에 나오는 맹자요략은 한 편지의 앞부분과 뒷부분이다. 속집 권1 「황직경에게 답함 (30)」 끝부분에 “채계통이 이미 도주(道州)에 도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채계통이 화를 입은 것이 경원 3년 정사년 정월의 일이므로 여정을 계산해보면 이 편지는 정사년 늦봄이나 초여름의 것이다.
前書所論大學兩條似末然, 如此則是明德新民其初且苟簡做一截, 到‘止於至善’處又子細做一截也. ‘知至’之‘至’, 向來却是誤作‘切至’之‘至’, 只合依舊爲‘極至’之‘至’. 然此‘至’字雖與‘至善’之‘至’皆訓‘極’字, 而用處不同. 至善是自然極至之‘至’, 知至是功夫極至之‘至’, 難作一例說也. 可試思之. 此義非獨熹不謂然, 以示季通諸人, 亦皆疑直卿不知何故作此見也. 病中看得孟子要略數章分明, 覺得從前多是衍說, 已略修正寫去. 此書似有益於學者, 但不合顚倒却聖賢成書, 此爲未安耳. 大學諸生看者多無人處, 不如看語孟者漸見次第. 不知病在甚處? 似是規模太廣, 今人心量包羅不得也.
이전 편지에서 논의하신 대학의 두 조목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그와 같다면 ‘밝은 덕’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그 처음에 매우 간단하게 하나의 구절로 만들고, ‘지극한 선에 그치는 것’에 이르러서 또 자세하게 하나의 구절을 만들게 됩니다. ‘앎이 지극함〔知至’〕의 ‘지극함’이란 예전에는 ‘절실히 지극함〔切至〕’의 ‘지극함’으로 잘못 썼으니, 옛 전거에 의거하여 ‘극히 지극함〔極至〕’의 ‘지극함’으로 여겨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 ‘지극함’이라는 말이 비록 ‘지극한 선’이라고 할 때의 ‘지극함’과 함께 모두 ‘극(極)’자로 뜻을 새길지라도 그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지극한 선’이란 ‘저절로 지극하다.’고 할 때의 지극함이고, ‘앎이 지극함’이란 ‘공부가 지극하다.’라고 할 때의 지극함이어서 하나의 사례로서 말하기 어려우니 더 생각해보십시오. 이러한 뜻은 저 혼자만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계통(季通) 등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었는데도 모두 당신이 왜 이러한 의견을 말했는지 모른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아픈 중에 맹자요략 여러 구절을 자세히 보고는 이전의 말들이 대부분 군더더기여서 대략 수정하여 썼습니다. 이 책이 배우는 사람에게 유익할 것 같지만 성현의 글을 거꾸로 뒤집어서는 안 되니, 이 점이 온당치 않습니다. 학생들 중에 대학을 보는 자들이 대부분 들어갈 곳이 없어서 논어와 맹자를 보는 자들이 점차 순서를 아는 것과 다르니, 어디에 병이 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규모가 너무 광대하여 사람들의 헤아림으로 하여금 펼쳐지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황직경에게 답함 (7) 答黃直卿
【해제】이 글은 영종(寧宗) 경원(慶元) 3년(정사, 1197, 68세)에 황직경에게 쓴 편지이다. 이 편지는 황직경과 함께 예서의 상례부분에 대한 편찬을 논의하였다. 예서의 편찬을 경원(慶元) 2년(병진, 1196, 67세)에 시작했으며 당시에는 처음으로 강목을 정하였을 것이다. 이 편지는 논의한 내용이 더 상세하니, 아마도 정사년 이후에 썼을 것이다.
喪服篇 (所說析出經傳, 破碎重複, 不相連屬, 不可行也.)
「상복」편 (말한 내용이 쪼개져서 경전에 나오고 자잘하게 중복되므로 서로 이어놓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다)
此篇已略修定, 似有條理. 且其間有‘見上絛’․‘見本絛’之類, 尙涉重複. 然去之又似太疎略, 可更裁之. (或於本倏下依重出例注之, 而逐絛之下却皆削去, 亦自簡便.) 後有通例一條甚好, 恐更有可人者當補之.
이 편은 이미 대략적으로 수정하여 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사이에 ‘위 조목에 나온다.’거나 ‘본 조목에 나온다.’와 같은 것들은 오히려 중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장들을 제거하면 또한 너무 소략할 것 같으니 다시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혹은 본 조목 아래에 중복되어 나오는 사례에 의거하여 주를 달고서 아래의 해당 조목들을 모두 삭제하는 것도 편리하다.) 뒤에 통용되는 사례 한 조목을 둔 것이 매우 좋지만, 다시 넣어야 할 것이 있다면 보충해야 합니다.
喪服義
「상복의」
此篇都未編, 可更考之. 恐當以‘三年問’一篇爲首, 蓋其言所以制服行喪, 出於人情之實, 最爲明切, 又包三年期功以下皆盡. 其後乃取諸篇中論喪輕重意義者附之. (若此類不多, 卽不苦依舊只附前篇作傳記亦得._
이 편은 모두 편집되지 않았으므로 다시 상고해야 합니다. 마땅히 「삼년문」 한 편으로 머리를 삼아야 합니다. 대개 그 말들이 복장과 상례를 행하는 것으로 사람의 실제 정서에서 벗어나며, 가장 적절한 것 또한 삼년의 기간과 상복을 포함하면 다 끝납니다. 그 뒤에 여러 편 안에서 상(喪)의 경중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것들을 모아서 붙였습니다. (이러한 종류가 많지 않으니 옛 것에 의거하여 앞 편에 전하는 기록을 써 붙이는 것만 못하다.)
士喪禮上下
「사상례상」과 「사상례하」
兩卷略定, 更詳之.
두 권은 대략 정비하였으니 더 상세하게 보십시오.
士虞禮
「사우례」
當以士卒哭․祥․禫之禮附其後, 而於篇目下注云 : ‘祔․卒哭․祥․禫禮附. ’
마땅히 선비의 졸곡(卒哭)․상(祥)․담(禫) 등의 예를 그 뒤에 붙여야 합니다. 편 목차 아래 주석에서 이르기를 “부(祔)․졸곡(卒哭)․상(祥)․담(禫) 등의 예가 부가된다.”라고 하였습니다.
喪大記上下
自天子達於庶人者, 居喪之禮也. 若其送死之節․禮文制數, 則貴賤之等固不同矣. 今以夭子․ 諸侯․大夫之禮附於禮攪之篇, 殊不相人, 自合採集, 別爲一篇. 但以世俗拘忌, 不敢別立篇名, 故欲只因喪大記篇包擧王侯士庶之禮, 而放士禮次第分其章段. 凡言禮之法而似經者, 則依經例雜法, 與此篇相表裏. 凡記事實有議論者, 則依記例, 似稍明白. 但恐其間尙有脫漏差舛, 可更詳之. 其虞禮以下尙闕, 如‘夭子九月而卒哭’及‘九虞’‘七虞’等語, 當別爲下篇, 依士禮次第編集, 却於見編卒哭等禮篇內刪出. 三傳作主等說, 亦當附人. 其杜預邪說, 前輩已有掊擊之者, 亦當載. 王侯․大夫制度, 皆人此篇. 其書․禮․論語內說諒陰制度及左傳說夭子諸侯喪事, 亦皆依記例, 隨事附於章目之後. 如諒陰及后․世子皆爲三年之類, 卽附祥禫章後. 譏華元․樂擧及仲幾對宋公楄柎藉幹語之屬, 卽附棺椁窆葬等章. 楚恭王能知其過之類, 卽人誄謚章. 如此類更推廣求之, 可附卽附. 但顧命․康王之誥, 恐尤不可遺. 然又不可分, 只於篇末附人, 如何?
천자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에 처하는 예입니다. 만약 죽음을 보내는 절차, 예법, 문채, 제도 등이라고 한다면 귀함과 천함에 따라 진실로 서로 다릅니다. 이제 천자, 제후, 대부 등의 예를 ‘선비의 예’ 편에 붙였고, 특히 거기에 부합하지 않은 것은 합쳐 보아서 따로 한 편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세속에서 꺼리기 때문에 따로 편 이름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단지 「상대기」편에 말미암아 왕후․선비․서인의 예를 포괄하여 ‘선비의 예’의 차례에 따라서 장을 나누었습니다. 예의 법례(法例)이면서 경과 비슷한 것은 경의 법례와 섞여 있는 법례에 의거해야 이 편과 서로 표리를 이룹니다. 기(記)에 나오는 일에 대해 의론이 있는 것은 기(記)의 사례에 의거하여야 조금 더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도 오히려 빠지고 어긋나는 것들이 있을 것이므로 다시 자세히 살피십시오. 우(虞) 제사에 관한 예법 이하는 빠져있고, “천자는 9개월이 지나 졸곡을 한다.”는 것과 “구우(九虞)”와 “칠우(七虞)” 등의 말은 따로 밑에 한 편을 만들어 선비의 예의 차례에 의거하여 편집하여야 하며, 졸곡 등의 예를 편집할 때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편 안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3전(三傳)의 신주를 만드는 것 등의 말 역시 부가하여 넣어야 합니다. 두예(杜預)의 사특한 말에 대해서는 선배가 이미 비판 한 적이 있으므로 실어야 합니다. 왕후(王侯)와 대부(大夫)의 제도에 대해서도 모두 이 편에 넣어야 합니다. 서, 예, 논어 안에서 말한 양음제도(諒陰制度)와 좌전에서 말한 천자와 제후의 상에 관한 일도 다 기(記)의 사례에 의거하여 일에 따라 해당 장구의 해당 조목 뒤에 붙여야 합니다. 예컨대 양음(諒陰)과 후(后)와 세자(世子) 등은 모두 삼년이므로 상(祥)과 담(禫)의 장구 뒤에 붙여야 합니다. 화원(華元)과 악거(樂擧)를 꾸짖은 것과 중기(仲幾)가 죽고 나서 시체 밑에 칠성판을 깔라는 것에 대답한 말 등은 널과 덧널과 장지를 파는 것 등의 장구에 붙여야 합니다. 초 나라 공왕이 자신의 허물을 알았던 일은 뢰시(誄謚) 부분 장구에 넣어야 합니다. (이러한 종류를 다시 추론하여 널리 구한 다음 부가해도 좋은 것은 부가한다.) 다만 「고명」과 「강왕지고」는 버릴 수 없으나 또한 나눌 수도 없으므로 편 마지막에 부가하여 넣으면 어떨까요?
奔喪
분상
道喪附此篇之目下, 依虞禮例. 竝喪恐更有說, 此所取似疏略, 可更考之.
도상(道喪)을 이 편의 조목 아래에 붙이고 「우례」의 사례에 의거하였습니다. 병상(幷喪)이란 다른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가습니다. 이곳에서 취한 것은 소략한 것 같으니 다시 살펴야 합니다.
居喪記
거상기
弔喪附此篇之目下, 依虞禮例.
조상(弔喪)은 이 편의 조목 아래에 붙였고 「우례」의 사례에 따랐다.
喪義
상의
以檀弓‘哀戚之至’一絛爲首, (此條甚長, 今注疏皆誤分斷了, 今當合之.) 其餘有通說喪禮或沿喪事, 如‘孔子早作’․‘子張庶幾’等語, 皆合附立入. (別紙更有說.) 又剪下碎段一束, 恐亦可附. (邾婁復以矢․天生地藏․子羔之襲․喪不剝奠之類已削去, 皆可人.)
「단궁」의 ‘슬픔의 지극함〔哀戚之至〕’이라는 한 조목으로 머리를 삼았습니다. (이 조목이 매우 길고, 지금의 주소들이 모두 잘못 나누었으므로 합쳐야 한다.) 그 나머지는 상례를 종합적으로 말하였거나 아니면 상례의 일을 부연하였습니다. 예컨대 ‘공자가 일찍 일어났다.〔孔子早作〕’는 구절이나 ‘자장이 거의 가깝다〔子張庶幾〕’ 등의 구절을 모두 합하여 붙여 넣었습니다. (별지에 다시 설명하였다.) 또한 잘라낸 자잘한 단락들을 하나로 묶었으니 붙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루가 화살로써 죽은 이의 혼을 돌아오라고 부르는 것, 하늘을 바라다보고 땅에 묻는다는 것, 자고의 염습, 초상에서 음식물의 가리개를 벗기지 않은 것 등의 사례를 이미 삭제하였으니, 모두 넣어야 한다.)
以上共十篇.
이상은 모두 10편이다.
重出例不須如來喩, 但於初見處注尾著圈而注其下曰 ‘後某章某章放此.’ (喪服篇說中亦有一例依此, 可幷詳之.) 士虞禮記‘旣封’至‘除之’, 此一項不入例, 可更詳之.
중복되어 나오는 사례들은 설명하신 것처럼 해서는 안 되고, 다만 처음 나오는 곳의 주 끝에 동그라미를 표시하고 그 아래에 주를 달아서 말하기를 “뒤의 어떤 곳과 어떤 곳이 이곳과 같다.”고 해야 합니다. (「상복」편의 말 중에서도 하나의 사례가 이에 의거하였으므로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우례」의 기(記)에 ‘이미 봉문을 썼으면---상복을 벗는다.’는 하나의 항목이 사례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 다시 살펴보십시오.
‘上大夫之虞’, 此絛當入大記下篇.
‘상대부의 우(虞)제사’ 조목은 「대기」 아래편에 들어가야 합니다.
周禮喪車更詳之, 若是上下通用, 卽入喪服通例經中: 若是王禮, 卽入大記初用車處.
주례의 상거(喪車)는 다시 살펴보십시오. 만약 위와 아래가 통용된다면 「상복」의 주요한 사례 안에 넣어야 합니다. 왕례(王禮)의 경우에는 「대기」 처음의 수레를 쓰는 곳에 넣어야 합니다.
凡已剪下重複碎段, 恐有漏落或當載者, 可更詳之. 所奇數卷若前此旋次得之, 卽可子細看. 今幷寄來, 又値事冗目痛, 只看得一兩卷子細. 自‘旣夕’以後, 多不及詳. 可更加功, 修此數卷也. 卒哭篇附虞禮後, 以本記補經.
이미 중복되는 자잘한 단락들을 잘라낸 것들 중에 누락되거나 아니면 마땅히 실어야 할 것들이 있을지 모르니 다시 살펴보십시오. 보내주신 여러 권이 이전 것에 이어서 작업한 것이라면 자세하게 볼 수 있지만, 이제 (전의 것에) 합쳐서 붙여 온데다가 형편이 어렵고 눈병이 나서 한두 권만을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의례 「기석(旣夕)」편 이후는 대부분 살펴보지 못했으니 다시 공력을 더하여 이 여러 권을 고쳐야 합니다. 「졸곡」편을 「우례」 뒤에 붙이고, 해당 기(記)로써 경(經)을 보충해야 합니다.
‘始死三日而殯’止‘遂卒哭’注. ‘用剛日, 曰哀薦成事’節注. ‘將旦而附’止‘辭一也’注. (末云: ‘‘哀薦成事’-句, 未知當附何處.’ ‘饗辭’止‘之饗’注.)
“죽으면 사흘만에 빈소를 차리고---마침내 졸곡을 한다.”는 것으로 주(註)를 달 것. “강일(剛日)에 슬피 음식을 올려 일을 마친다.”는 것으로 요점을 간추려 주를 달 것. (“슬피 음식을 올려 일을 마친다.”는 구절은 어디에 붙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향사(饗辭)---드십시오..”라는 문장으로 주를 달 것.
右卒哭. ○記云云
오른쪽은 졸곡이다. ○기(記)에서 언급.
‘明日以其班祔’止‘尙饗’.
“졸곡을 한 다음날 부(祔)제사를 지낸다.---드십시오.”
右祔. ○云云. ○祔杖不上於堂.
오른쪽은 부제사이다. ○언급 ○부제사의 지팡이는 당(堂)에 올리지 않는다.
‘期而小祥, 曰薦此祥事.’
“일 년이 되면 소상(小祥)을 지내니, 이 상서로운 일을 올린다고 말한다.”
右小祥. ○記云云
오른쪽은 소상이다. ○기(記)에서 언급.
‘又期而大祥, 曰薦此祥事.’
“일 년이 되면 대상(大祥)을 지내니, 이 상서로운 일을 올린다고 말한다.”
右大祥. ○記云云
오른쪽은 대상이다. ○기(記)에서 언급.
‘中月而禫’止‘未配’.
“한 달이 지나서 담(禫)제사를 지낸다.---짝하지 않는다.”
右禫. ○記云云
오른쪽은 담제사이다. ○기(記)에서 언급.
注中云‘見某篇云云’者, 更契勘今所定本, 恐己刪去, 隨事改正.
주 안에서 이르기를 “어떤 편에서 ---라고 보인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 수정한 판본을 다시 살피고, 이미 제거했을지 모르니 상황에 따라서 바로 잡으십시오.
所論士廟之制, 雖未能深考, 然所論堂上前爲三間, 後爲二間者, 似有證據. 但假設尺寸大小, 無以見其深廣之實. 須稍展樣, 以四五尺以上爲一架, 方可分畫許多地頭, 安頓許多物色. 而中間更容升降․坐立․拜起之處, 淨掃一片空地, 以灰畫定, 而實周旋俯仰於其間, 庶幾見得通與不通, 有端的之驗耳.
논의하셨던 사묘(士廟)의 제도에 대해 비록 깊게 헤아릴 수 없을지라도, 당상(堂上)은 앞을 세 칸으로 하고 뒤를 두 칸으로 한다고 논의하신 것은 증거가 있는 듯합니다. 다만 척(尺)과 촌(寸)의 크기를 임의적으로 설정해서는 그 실제의 길이와 너비를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형태를 더 넓게 벌려야 하니 4척 내지 5척 이상으로 하나의 가(架)를 삼아야 충분한 공간으로 나눌 수 있고 많은 물건들을 놓아둘 수 있습니다. 가운데 칸은 편리하게 오르고 내리고 앉고 서고 절하고 일어서는 곳이니 한 곳의 빈 땅을 깨끗이 청소하고 거기에 회(灰)로써 구획을 그린 다음 실제로 그 사이에서 움직여 본다면 충분한지를 알 수 있고 정확하게 실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若如此圖, 則堂基之上便分前段三間․後段四間及兩邊夾室之位矣, 卽不見得殿屋橫棟從甚處斷, 兩霤之分從甚處起, 又不見厦屋兩翼如何似今之門廡, 又不見兩夾堂外旣無墉, 亦合有柱與否. (云有柱, 則於經無文 : 云無柱, 則兩屋角懸空, 無寄託處.) 又恐間架次第雖如所說, 其殿屋分四霤處亦合如前來寄去之說, 但移得洗更稍向東當簷滴水處耳. 夏屋亦須作次棟以覆兩夾, 但設搏風版於兩夾之外次棟盡頭, 而設洗於其南, 如此乃有門廡之狀. 先之說福州人所謂君臣門也. 蓋屋之前後皆爲五間, 而中三間爲頁棟, 旁兩間爲兩夾. 其上椽瓦或爲東西霤之上流, 或爲次棟而設搏風於其外也. 若不如此, 則殿屋直棟反短於夏屋之棟, 等殺不應爾也.
만약 이 그림과 같다고 한다면 당(堂)의 기초 위는 앞부분이 세 칸으로 나뉘고, 뒷부분이 네 칸으로 나뉘고, 양쪽 옆에 협실(夾室)을 둡니다. 그렇다면 집의 횡동(橫棟)이 어느 곳에서 끝나고 두 류(霤)의 나누어짐이 어느 곳에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하옥(厦屋)의 양 날개가 어떻게 지금의 문 처마와 유사한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두 개의 협당(夾堂) 밖에 벽이 없다면 본래 기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기둥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실이 경문에 실려 있지 않고, 기둥이 없다고 한다면 두 지붕이 허공에 매달려서 기탁할 곳이 사라진다.) 또한 칸의 구조물 순서가 말씀하신 것과 같을지라도 그 전옥(殿屋)이 네 개의 류(霤)로 나누어지는 것은 역시 이전에 보낸 말처럼 해야 합니다. 다만 씻는 대야를 조금 더 동쪽으로 옮겨야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옥(夏屋)도 차동(次棟)을 만들어서 양협(兩夾)을 덮어야 합니다. 다만 바람막이 판을 양협(兩夾)의 밖 차동(次棟)이 끝나는 지점에 설치하고 그 남쪽에 씻는 곳을 설치하니, 이와 같아야 문 처마의 모양이 됩니다. (선지가 말한 복주 사람들의 군신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개 옥(屋)의 앞과 뒤는 모두 다섯 칸이고, 가운데 세 칸은 직동(直棟)이고, 곁의 두 칸은 양협(兩夾)입니다. 위의 서까래와 기와는 혹은 위 물줄기인 동쪽과 서쪽 류(霤)가 되거나. 아니면 차동(次棟)이 되며 그 밖에 바람을 막는 것을 설치합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전옥(殿屋)의 직동(直棟)이 반대로 하옥(夏屋)의 동(棟)보다 짧아져서 등급에 부합하지 않게 됩니다.
古者降殺以兩, 恐士廟深廣, 當自天子制度三降而得之. 又於其間細分間架, 乃見其實也.
옛날에는 두 단계를 내렸으니, 선비의 묘가 깊고 넓었을 것이지만 천자의 제도보다 세 단계를 내려서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 사이에 칸(間)과 가(架)를 세분한 것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適又思之, 恐只是作三大間, 旁兩間之中爲牆, 以分房室, 兩夾之界, 略如趙子欽說, 但‘門廡’二字未合耳. 可更考之.
또 생각해보니 큰 세 칸을 지어서 양쪽의 두 칸의 가운데에 담을 쳐서 방(房)과 실(室)로 나눕니다. 양협(兩夾)의 경계에 대해서는 대략 조자흠(趙子欽)의 말과 같지만 ‘門廡’라는 두 글자가 부합하지 않습니다. 다시 살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