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73

황성 2025. 8. 1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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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친구와 제자들과의 문답) (知舊門人問答)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1

 

[해제] 이 편지는 건도 4(무자 1168, 주자 나이 39)에 쓴 편지다. 진래는 궁벽한 곳에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도의에 맞는 본분에 별고없이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1169(己丑) 95일 어머니 상을 당하기 전에 쓴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저는 시골에서 지내며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도의에 맞는 본분에 별고 없이 그럭저럭 편안하게 지내고 있어서 더 이상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정력에 한계가 있는데 반해, ()의 본체(本體)는 무궁하고, 인욕(人欲)은 쉽게 혼미해지는데 천리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두려워 삼가며 날마다 근심과 두려움으로 지내지만 소인의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나머지 견해를 물어서도 스스로 경계하여 깨우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문득 보내오신 편지를 받고 당신의 견해가 이미 이와 같다는 것(공맹의 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몸이) 피로하고 재능이 없는 제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한들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두려워서 놀라고 탄식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살펴보니 의심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스스로 이르기를, “일찍이 내 마음이 바로 공자 맹자와 다름이 없어, 말과 행동이 저절로 도에 들어맞았음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라고 했는데, 이와 같다면 당신의 학문은 이미 성현의 경지에 이른 것이니, 오히려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그러나 뒤에 다시 배워도 성취한 것이 없는데 늙음이 장차 이른다.”라고 탄식하였는데, 제가 걱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비록 겸손하여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처음에 말한 것과는 너무나 상반 됩니다. 제가 어떤 말에 근거하여 당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窮居奉養, 粗安義分, 無足言者. 惟是精力有限而道體無窮, 人欲易迷而天理難復, 凜乎日以憂懼, 蓋未知所以脫於小人之歸者. 方念未能得叩餘論以自警發, 忽得來敎, 乃知高明之見已如此. 自顧疲駑, 雖殫十駕之勤, 亦無以相及矣. 矍然驚歎, 不知所言. 至於反復再三, 則有不能無疑者. 蓋來喩自謂嘗有省處, 此心直與孔孟無異. 言行之間, 旣從容而自中矣. 如此則是老兄之學已到聖賢地位, 尙復何疑? 而其後乃復更有學無得, 老將至之歎, 則又無以異於某所憂者. 此雖出於退讓不居之意, 然與初之所言亦太相反矣, 使將何取信而能亡疑於長者之言耶?

 

또 그 밖의 논의로써 참고해보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당신의 무젖어 기르는[涵養] 공부는 지극한 반면 이치를 궁구하는 학문이 분명하지 못하여, 이런 까닭에 일상생활에서 살피지 못한 바가 많아, 비록 말한 것이 지나쳤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의 어리석음을 천박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물어 주시니, 제가 비록 학문이 얕고 고루하지만 감히 당신의 도탑게 여기는 뜻을 헛되이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좁은 견해로는, 당신께서 격물(格物) 치지(致知)의 학문에 조금 유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현의 말씀에 대해서는 자기 마음에서 돌이켜 구하여 무젖어 잠기는[涵泳] 공부를 하시고, 일상생활에서는 그 이치를 정밀하게 살피고 미세한 분변(分辨)도 자세하게 연구하십시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징험하고 확충해 나간다면, 아마도 참으로 깨달음이 있어 공자와 맹자의 마음을 거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又以其他議論參考之, 竊意老兄涵養之功雖至, 而窮理之學未明, 是以日用之間多所未察, 雖言之過, 而亦不自知也. 老兄旣不鄙其愚而辱問焉, 雖淺陋, 亦不敢以虛厚意也. 區區管見, 願老兄於格物致知之學稍留意焉. 聖賢之言, 則反求諸心而加涵泳之功; 日用之間, 則精察其理而審毫釐之辨, 積日累月, 存驗擴充, 庶乎其眞有省而孔孟之心殆可識矣.

 

보내 주신 편지에 제시한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아마도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우선은 과정(課程)대로 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 많은 책들을) 조용히 음미하면서 이치와 정신을 합치시키려고 해도 아마도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자의 책과 사마광, 장재, 양시의 학설은 하나의 노선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이 있습니까? 이러한 곳은 절실하게 보아야 하며, 문장을 위하여 오로지 어구만 공부해서는 안 될 것이니, 예를 갖추어서 보아야 할 뿐입니다. 이미 당신이 이렇게 아껴주고 허여해 준 것은 바로 이 도()로써 서로 기대하기 때문인데 분수에 지나침을 깨닫지 못하고 저의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생각건대, 당신이 온공(溫公)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니 반드시 이를 수용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아하면서 뜻을 캐고 따르면서 고치는 태도는 당신에게 오히려 바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정이천의 이른바, “스스로를 감히 믿지 말고 그 스승을 믿어라한 것처럼, 이렇게 이삼년 정도 노력하면 저절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장(汪丈)은 항상 여신공(呂申公: 呂公著)을 준칙으로 삼았는데, 최근에 그의 󰡔가전(家傳)󰡕에 실린 불교를 배운 일을 보고 웃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는 덕망과 인품[德器]이 혼후(渾厚)하고 근엄하여 찾기 힘든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일단 불교에 빠지자 세속의 식견을 가진 사람과 다른 바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확고한 주견이 없이 중립을 취하는 계책으로 불교를 배운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했으니, 그 마음씀씀이가 매우 지리멸렬하다 하겠습니다. 도리어 스스로는 간결하고 수월하다고 여기지만, 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정자(程子: 정이), “불교를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곧 자연스럽게 배우지 않게 된다.”라고 하셨는데, 참으로 식견이 있는 말씀입니다.

示喩讀書之目, 恐亦太多, 姑以應課程可矣. 欲其從容玩味, 理與神會, 則恐決不能也. 程子之書, 司馬之說, 不知其果皆出於一轍耶? 抑有所不同也? 此等處切須著眼, 不可尋行數墨, 備禮看過而已. 旣荷愛予, 直以此道相期, 不覺僭易, 盡布所懷. 伏惟旣以溫公之心爲心, 必有以容之. 然說而繹, 從而改, 尙不能無望於高明也. 但能如程子所謂不敢自信而信其師, 如此著力, 兩三年間, 亦當自見得矣. 汪丈每以呂申公爲準則, 比觀其家傳所載學佛事, 殊可笑. 彼其德器渾厚謹嚴, 亦可謂難得矣. 一溺其心於此, 乃與世俗之見無異. 又爲依違中立之計以避其名, 此其心亦可謂支離之甚矣. 顧自以爲簡易, 則吾不知其說也. 程子: ‘欲不學佛, 見得他小, 便自然不學’, 眞知言哉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2

 

 

보내주신 여러 설은 유의하여 잘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빠서 하나 하나 대답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대체로 아직 선학(禪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평이하게 실상에 근거하여 이해하시고, 반드시 한 순간에 깨달음이 있는 것을 기발하게 여길 필요는 없으며, 다만 점진적으로 깨달아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깊어지면 공효(功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효를 헤아리고 비교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다만 순서에 따라 계속하여 그만 두지 않는다면 저절로 이르름이 있을 것입니다.

所示諸說, 足見留意. 便遽, 未暇條對, 大抵終有未脫禪學規模處. 更願於平易著實處理會, 不必以頓然有省爲奇, 只要漸覺意味明白深長, 便是功效. 然亦不可存此計較功效之心, 但循循不已, 自有至矣.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3

 

[해제]

이전의 편지에서 편안함과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일하는데 부지런히 힘쓴다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도리어 글의 뜻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함축하는 의미 또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개 오직 배부름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어야만, 일에 부지런할 수 있습니다. 말을 삼가는 것도 전적으로 행동이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말은 마땅히 삼가야 합니다. 부족한 저의 생각은 이와 같습니다만,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습니다.

前書所論不求安飽, 惟在敏於事上著力, 此恐倒却文意, 兼義亦不如此. 蓋惟無求飽求安之心, 乃能敏於事耳. 謹於言, 亦不專爲耻躬之不逮, 大凡言語皆當謹也. 愚見如此, 未知是否?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4

 

[해제]

󰡔논어󰡕의 여러 구절에 대해 깨우쳐 주셨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살펴보건대 대체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탐모하고, 말씀하신 것도 마땅함을 지나친 곳이 많아서, 도리어 말씀해주신 올바른 의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컨대 첫머리에 행동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함을 논하면서, 옛 사람들은 진실로 천지를 관통하여 행동이 신명과 통하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를 써서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도둑질한다고 말하였으나, 그 말과 부합되지 않음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옛 사람들이 말을 먼저 하기 전에 행동이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고 한 말의 긴요하게 힘쓴 곳이 무엇인가를 깊이 음미하여야지 반드시 전과 같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하면 의미가 저절로 다르게 될 것입니다. 또 윤화정이 강설한 것도 곧 모두 이와 다르게 간략하고 정미하여 지극히 함영(涵泳)함을 좋아합니다. 이 한 장을 미루어 보면 나머지는 모두 알 수 있습니다.

喩及論語諸說, 以此久不修報. 然觀大槪貪慕高遠, 說得過當處多, 却不是言下正意. 如首章論耻躬不逮, 便說古人誠貫天地, 行通神明, 今人作僞行詐, 欺世盜名, 都未合說到此. 且熟味古者言之不出, 耻躬之不逮也緊要用力處是如何, 不必說向前去. 如此久之, 意味自別. 且如尹和靖講說, 便都無似此, 簡約精微, 極好涵泳也. 推此一章, 餘皆可見.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5

 

 

 

이정집을 빌려주셔서(빌려주신 이정집을) 대충 한 두 군데 살펴보았는데, 다만 장사에서 처음 발행된 판본 같습니다. 󰡔역전󰡕서문에 연류소류로 쓰고, 제문에 아들과 같다고 한 것들은 모두 호가(胡家)에서 의도적으로 바꾼 것입니다. 뒤에 고친 많은 부분은 자비에게서 구할 수 있었는데 특별히 이 판본보다 낫습니다.

集荷借及, 略看一二處, 止是長沙初開本. 易傳序沿流泝流’, 祭文猶子之類, 家以意改者. 後來多所改正, 可從子飛求之, 殊勝此本也.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6

 

 

여러 차례 보내주신 경전에 관한 설을 받아 보니, 예전에 비하여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너무 넓은 곳을 탐구하여 도리어 본래의 뜻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 하나 자세하게 아뢸 겨를이 없습니다. 다른 때 직접 뵙고 하나 하나 지적하여 아뢰어 옳고 그름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대개 독서를 할 때는 마땅히 선유(先儒)들의 설 가운데서 이치에 합당한 것을 골라 반복하여 음미하고 아침저녁으로 함영하여 경서 본문의 바른 말의 뜻과 더불어 마음 속에 관통하고 무젖어 들어 흡족하게 한 뒤에라야 유익하게 될 것이니, 반드시 단락마다 스스로 설()을 세워 한갓 아름답게 보이려고만 하고 실제로 마음에 깊이 터득한 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강학(講學)은 모름지기 반복하여 연구하고 궁리하여야만 의리의 귀결하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대강 말하여 지나치고 그만 두어서는 안 됩니다.

累承示經說, 比舊益明白矣. 然猶有推求太廣處, 反失本意. 今不暇一一具禀, 異時面見, 當得一一指陳, 以求可否. 大抵讀書當擇先儒舊說之當於理者, 反復玩味, 朝夕涵泳, 便與本經正言之意通貫浹洽於胸中, 然後有益, 不必段段立說, 徒爲觀美而實未必深有得於心也. 講學正要反復硏窮, 方見義理歸宿處, 不可只略說過便休也.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7

 

[해제]

지난 번에 보내주신 편지에 정씨의 학문에 뜻을 두고 있다 하셨는데,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나 전에 불문의 선가에 뜻을 두신 것이 매우 간절하다고 들었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까닭으로 다시 선가를 버려두고 장차 정씨의 학문에서 구하려고 하십니까? 전날의 잘못을 알아서 그러는 것입니까? 아니면 불문의 선가나 정씨의 학문이나 애초에 서로 방해가 되지 않으므로, 이미 불교를 공부했지만 유자(儒者)가 되는데 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입니까? 두 가지 가운데서 반드시 한 가지는 해당될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에 말미암는다면, 정씨는 사람을 가르칠 때, 󰡔논어󰡕․󰡔맹자󰡕․󰡔대학󰡕․󰡔중용󰡕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모름지기 이 몇 권의 책을 면밀하게 읽고 상세히 음미하여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스스로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을 익숙할 때까지 읽는 것을 싫증내지 말고, 강론(講論)할 때 번거로움을 싫증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부처가 리를 가리켜 장애(障礙)라고 하면서 우뚝하게 앉아서 의미 없는 말이나 붙들고서 요행히 한번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 몇 권의 책에 대해서 정씨(程氏)와 그의 문인과 뛰어난 제자들이 매우 상세하게 해설을 하였으니, 한 번 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에 맞추어 공부하십시오. 모름지기 어린애들이 책을 가르침 받는 것 같이 한 구절 한 구절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게 급하게 대충 훑어보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설들을 섞어서 헛되이 종지를 어지럽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소식과 같은 부류이다.] 만약 불문의 선가와 유학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으므로 유교와 불교가 함께 나아가도 괜찮다라고 말하신다면, 학문이 얕고 고루한 저는 감히 들을 바가 아닙니다.  

向辱書喩有意於程氏之學, 甚善甚善. 然向聞留意空門甚切, 不知何故乃復舍彼而將求之於此? 豈亦知前之失而然邪? 抑以爲彼此初不相妨, 而不害其爲儒也? 二者必有一矣. 由前之說, 程氏敎人以大學中庸爲本, 須於此數書熟讀詳味, 有會心處, 方自見得. 如其未然, 讀之不厭熟, 講之不厭煩, 非如釋氏指理爲障, 而兀然坐守無義之語, 以俟其僥倖而一得也. 此數書程氏與其門人高弟爲說甚詳, 試訪求之, 自首至尾, 循守加功. 須如小兒授書, 節節而進乃佳, 不可匆匆繙閱, 無補於事 : 又不可雜以他說, 徒亂宗旨也.蘇氏之類. 若曰彼此不相妨, 可以竝進, 則非淺陋所敢聞也.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8

 

[해제] 이 편지는 건도 9(계사 1173, 주자 나이 44)에 쓴 편지다. 편지에 󰡔󰡕을 읽는 것 또한 좋기는 하지만, …… 소략하여 글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책은 주자의 󰡔주역본의(周易本義)󰡕 초고다. 󰡔년보󰡕에서는 계사년(1173) 이후에 이 책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계사년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독서할 때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이는 사우(士友)들이 두루 갖고 있는 걱정으로서, 치료할 약이 없습니다. 다만 조금만 읽고 깊이 생각하여 그 의미에 깊이 젖어 들게 한다면 당연히 조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을 읽는 것 또한 좋기는 하지만, 경서는 읽기 어려운데, 이 책은 더욱 어렵습니다. 대개 책을 펼쳐 보지 않았을 때는 이미 일중상수(一重象數)’에 대해 대체적으로 공부하고, 책을 펼쳐 본 후에는 경문의 본래 의미 또한 선유들의 경설(硬說)에 의해 축소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뜻이 협소함을 보게 하고 본래의 개물성무의 활법을 볼수 없게 합니다. 정로가 전한 도설은 바로 이러한 폐단을 구하려 한 것입니다. 다만 당신 대충 베껴써서 소략하여 글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험삼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또한 대충이나마 문호의 대략적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설이 있다면 제가 감히 들을 바가 아닙니다.

示喩讀書遺忘, 此士友之通患, 無藥可醫. 只有少讀深思, 令其意味浹洽, 當稍見功耳. 亦佳, 但經書難讀, 而此書爲尤難. 蓋未開卷時, 已有一重象數大槪工夫, 開卷之後, 經文本意又多被先儒硬說殺了, 令人看得意思局促, 不見本來開物成務活法. 廷老所傳鄙說, 正爲欲救此弊. 但當時草草抄出, 疏略未成文字耳. 然試略考之, 亦粗見門戶梗槪. 若有他說, 則非吾之所敢聞也.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9

 

 

[해제] 이 편지는 건도 9(계사 1173, 주자 나이 44)에 쓴 편지다.

 

현승의 일 중에 전업(田業)을 분할하는 하나의 조항은 또한 백성들의 기쁨과 걱정[休戚]에 관계가 있습니다. 요사이 동안에서 관호와 부자집, 이인(吏人)과 시호(市戶)들이 전업을 전매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전업을 받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였으며, 여유가 있는 세력을 조종하여 전업을 다 팔아 가계가 낭패의 지경에 있는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려 특히 사람들로 하여금 한탄과 슬픔에 빠지게 합니다. 매 현마다 송부되어온 문서를 받아 정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반드시 하루 중에 (일을) 완료하였습니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농촌의 백성들이 숙식과 전업을 폐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저자거리의 사람과 부자들이 자기 것만을 지켜 곤란에 빠져 감히 다스릴 수 없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폐해입니다. 일찍이 친구 진원방(陳元滂)을 만났는데, 작년에 소양에서 이부의 허공 밑에서 일을 할 때, 허공(許公)내가 현을 다스리는데 백성을 사랑하는 법이 있다.”고 스스로 말하자, 듣고 싶다 했더니, 말하기를 개수인정(開收人丁)과 추할산세(推割産稅)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정치하는 근본을 알았다 할 만 하니, 원컨대 당신께서 이에 뜻을 두십시오. 명도행장 및 문인들이 서술한 것 가운데 정사를 논한 것은 뜻을 서술하여 겨를이 있을 때 마땅히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 특별히 사람들의 뜻을 개발시켜 줍니다.

丞事如過割一條, 亦是民間休戚所係. 頃在同安, 見官戶富家吏人市戶典買田業, 不肯受業, 操有餘之勢力, 以坐困破賣家計狼狽之人, 殊使人扼腕. 每縣中有送來整理者, 必了於一日之中. 蓋不如此, 則村民有宿食廢業之患, 而市人富家得以持久困之, 使不敢伸理. 此最弊之大者. 嘗見友人陳元滂說昔年趨事吏部許公於邵陽, 許公自言吾作縣有人字法’, 請問之, 則曰開收人丁, 推割産稅而已. 此可謂知爲政之本者, 願高明志之. 明道行狀及門人叙述中所論政事叙指, 無事亦宜熟看, 殊開發人意思也.

 

문의하신 상례(喪禮)에 관한 것은 별지(別紙)에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다만 고구(考究)한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또 요사이 얼마 동안 소란하여 자세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반드시 옳지는 않을 것이니, ()를 아는 분을 찾아서 다시 물으신다면 아마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所詢喪禮別紙具禀, 顧亦考未精, 又適此數時擾擾, 不及致思, 恐未必是. 更可轉詢知禮之士, 庶不誤耳.

 

별지 別紙

질문 : 혼령(魂靈)의 자리는 중당(中堂)에 두어야 합니까?

靈席居中堂

 

: 집에 두 명의 신주(神主)가 없다면, 조금 서쪽에 가깝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家無二主, 似合少近西爲宜.

 

질문 : 초하루의 제사에 아들이 제주(祭主)가 되어야 합니까?

朔祭子爲主

 

: 상례(喪禮)를 살펴 보니, “모든 상()에 있어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지가 주()가 된다.”고 했으니, 아버지가 계시면 아들이 상주(喪主)가 되는 예()는 없습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제가 함께 살면 각각 그 상()의 주재자가 된다.”라고 했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각각 처의 상에 주재자가 된다.”라고 했으니, 이는 무릇 처의 상에는 남편이 스스로 상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들을 상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喪禮, 凡喪, 父在, 父爲主, 則父在子無主喪之禮也. 又曰: ‘父沒, 兄弟同居, 各主其喪. ’注云: ‘各爲妻子之喪爲主也.’ 則是凡妻之喪, 夫自爲主也. 今以子爲喪主, 似未安.

 

질문 : 먼저 영구(靈柩)를 보내어 돌아 가게 하여 혼백(魂帛)을 받들었다가, 상례를 마치면 혼백을 묻고 신주를 세우지요?

先遣柩歸而奉魂帛, 終喪, 埋帛立主. 時在官所.

 

: 이는 옛날에는 없는 것이므로 애초에 옛날 제도를 완전히 따를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하는 것도 또한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옳은 것은 아닙니다.

此於古無初. 旣不能盡從古制, 卽且如此亦可, 然終不是也.

 

질문 : 제사를 받드는 사람으로 아들 이름을 씁니까?

奉祀者題其子

 

: 이것도 또한 미안합니다. 또 꼭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此亦未安, 且不須題奉祀之名亦得.

 

질문 : 가묘(家廟)에 삼대의 조상들과 구별하여 그 아래에 처의 신주를 둘 곳을 따로 하나 설치하면 어떻겠습니까?

廟別三世, 別設一位於其下.

 

: (), “졸곡(卒哭) 이후에 조상이나 시어머니와 함께 신주를 모시고, 3년이 지난 뒤에 가묘에 들인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삼우(三虞)나 졸곡의 예제(禮制)를 시행할 수 없습니다. ()을 마치고 신주(神主)를 만들어서 함께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신주를 함께 두기를 마치면 가묘 곁에다 조그마한 위치를 설치하여 그 신주를 받드는 것이 낫습니다. 가묘 안에 따로 신위(神位)를 설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옳고 그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리건대, 다시 사마천의 󰡔서의(書儀)󰡕와 고항(高閌)󰡔송종례(送終禮)󰡕를 참고하면 당연히 정론이 있을 것입니다.

: 卒哭而祔於祖姑, 三年而後人廟. 今旣未葬, 則三虞卒哭之制無所施. 不若終喪立主而祔, 祔畢, 於家廟旁設小位以奉其主, 不可於廟中別設位也. 愚見如此, 未知是否? 告更以溫公書儀高氏送終禮參考之, 當有定論也.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10

 

[해제] 이 편지는 건도 9(계사 1173, 주자 나이 44)에 쓴 편지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상례(喪禮)의 기년(朞年)을 지났을 때 제사를 주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언급하셨던데, 이것에 대해서는 고찰할만한 것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사마씨(司馬氏)는 대상(大祥)이나 소상(小祥) 제사를 지내고 이미 복()을 벗은 사람은 모두 제사에 참여한다고 했으니,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이 누구라도 이미 복을 벗었으면, 또한 제사를 주재하는 데 해로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순전히 길복(吉服)만을 착용하는 것은 안 되고, 모름지기 대체로 조복(弔服)과 같이 하거나, 혹은 기일(忌日)에 입는 의복으로 하면 되겠습니다.

喩及喪禮踰期主祭之疑, 此未有可考. 司馬氏大小祥祭已除服者皆與祭, 則主祭者雖已除服, 亦何害於主祭乎? 但不可純用吉服, 須略如弔服或忌日之服可也. 更告博詢深於禮者議之.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11

 

[해제] 이 편지는 건도 9(계사 1173, 주자 나이 44)에 쓴 편지다.

 

제사지낼 때의 예에 대해서는 최근에 책을 얻었는데 또한 이에 관해 언급한 것이 몇 개 조목이 있으니, 각각 이미 일에 따라 바르게 고치십시요.

祭禮比得書, 亦及此數條, 各已隨事釐正.

 

부군의 제사에 배위(配位)를 같이 모실 때, 다만 원래의 배위만 지내고 계실(繼室)은 별묘(別廟)를 만드며, 혹 서모(庶母)가 있으면 또 별묘를 만들고, 혹 처가 먼저 죽었으면 또 별묘를 만들고, 아우가 먼저 죽어 후사가 없으면 또 별묘를 만들고, 백부와 숙부, 조부, 형 가운데 후사가 없는 사람까지 모두 다섯 가지 등급은 모름지기 각각 사당에 방 하나씩을 마련해야지 뒤섞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如配祭只用元妃, 繼室則爲別廟 : 或有庶母, 又爲別廟 : 或妻先亡, 又爲別廟 : 弟先亡無後, 亦爲別廟 : 與伯叔祖父兄之無後者, 凡五等, 須各以一室爲之, 不可雜也.

 

동지에 이미 시조를 제사지냈는데, 이 달이 또 중월(仲月)이므로 자체로 시제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따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풍속의 절차는 각각 고을의 풍속에 의거한다는 글에 이미 있으니, 풍속에 따라 더하고 줄이는데 자체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정월 초하루에 관직에 있는 사람은 조회에 천자를 만나 뵙는 예가 있어 제사에 정성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향리에서 섣달 그믐날 밤 전에 3,4일 행사에 참석할 수 있을 뿐이니, 이것 또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기일의 복제에 대해서는 왕언보의 주사(麈史)에 부정공(富鄭公)이 다리에 드리우는 옅은 검은 색의 천과 두건, 옅은 검은색으로 만든 적삼, 지피대(脂皮帶)를 사용한 것을 싣고 있는데, 지금 사람들의 선복(禪服)의 제도에 대해서 이것 또한 왕장의 답장을 받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冬至已有始祖之祭, 是月又是仲月, 自當時祭, 故不更別祭. 其他俗節, 則已有各依鄕俗之文, 自不妨隨俗增損. 但元旦則在官者有朝謁之禮, 恐不得專精於祭事. 熹鄕里却止於除夕前三四日行事, 此亦更在斟酌也. 忌日服制, 王彦輔麈史載富鄭公用垂脚黲紗幞頭黲布衫脂皮帶, 如今人禪服之制, 此亦未得汪丈報, 不知以爲如何也.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12

 

상복에 대해서는 앞의 편지에서 이미 갖추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제 또 대략 원백에게 한 두가지 말씀드렸으니, 아마도 옛날의 제도는 분명하지 못하니, 복두(幞頭)와 난삼(襴杉)의 제도를 사용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다만 우제(虞祭)를 지낸 뒤에는 옷을 벗을 수 있으니, 그런 후에 상주를 받들어 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계빈(啓殯)으로부터 우()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길례는 때에 따라서 그만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 날 갑자기 하례를 강론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사(令嗣: 좋은 嗣子)도 완전치 못한 것 같은데, 당신께서 예의로써 비유하였다면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의 가장 큰 절목이며, 자세한 뜻이 있는 곳이니, 의상(衣裳)제도는 그 다음일 뿐입니다.

喪服前書已具去, 昨日又略爲元伯道一二, 恐古制未明, 或且只用四脚襴衫之制亦可. 但虞祭後方可釋服, 然後奉主歸廟耳. 自啓殯至虞, 其間吉禮權停可也. 次日恐亦未宜遽講賀禮, 恐令嗣有未安, 尊兄以禮意喩之, 則無疑矣. 此最禮之大節, 精意所在, 衣裳制度抑其次耳.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13

 

진실로 허물을 듣고자 하여 마땅히 하나 하나 받아 들이고, 다시 그것의 허와 실을 따지지 않으면,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알려 주어 허물을 덮어두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철저하게 비교하여 따지고 반드시 함께 분변하고 다툰다면, 아마도 허물이 있다고 알려 주면 기뻐하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苟欲聞過, 但當一一容受, 不當復計其虛實, 則事無大小, 人皆樂告而無隱情矣. 若切切計較, 必與辨爭, 恐非告以有過則喜之意也.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14

 

󰡔논어󰡕멀리 가서 놀지 않으며 ……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방법을 고치지 않아야 ……는 각각 한 장()으로서, 글의 뜻이 서로 얽혀 있지 않습니다. 혹 끌어다 붙여 억지로 한 가지 설()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공자의 이 말은 다만 효자의 마음을 밝힌 것일 뿐입니다. 대개 아버지가 행했던 것 가운데서 비록 혹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일지라도 진실로 하루아침도 그대로 둘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 아니라면, 그 아들 된 사람은 차마 갑자기 고치지 못하고 삼 년 동안 기다림이 있나니, 그가 차마 아버지의 마음을 없애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근본이니, 다만 이런 마음만 간직할 수 있다면, 아버지의 도() 가운데서 혹 종신토록 고칠 수 없는 것이나, 혹 하루도 행할 수 없는 것도 모두 그 일의 경중에 따라서 처리하여 그 알맞음을 잃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성인은 다만 이런 마음을 가리켜서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이른바 아래 위를 꿰뚫는 말이니, 어찌 다만 이것으로써 중간 되는 제도로 삼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보내 주신 편지에서, 장구(章句)의 글 뜻이 진실로 이미 통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사이에는 또 극도로 의리를 해치는 곳이 있습니다. 대저 삼 년이 되어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다.’라고 한 말을 가지고 재여(宰予)를 책망했을 따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나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모두 자연스러운 데서 나온 것으로서 끝이 없습니다. 어찌 세월로써 계산하여 베풀고 보답하는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이란 것은 곧 천리(天理)와 인륜의 극치로써, 때에 따라서 그 있는 곳이 같지 않습니다. ()임금, (), 안자(顔子)의 일로써 본다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만 중간의 제도로써 그것을 말했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이는 반쯤 올라 갔다가 떨어져 내리는 사이를 한결같이 정해진 중간이라고 가리킴으로써 세상에 유행하는 일반적 풍속과 같은 것이 되고 더러운 세상에 휩쓸릴 따름입니다. (이것이) 어찌 성인이 말한 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不遠遊三年無改各是一章, 文義自不相蒙. 或欲牽合, 彊爲一說, 非聖人本意也. 竊謂夫子此言只是發明孝子之心耳. 蓋父之所行雖或有所當改, 然苟未至於不可一朝居, 則爲之子者未忍遽革而有待於三年, 亦可見其不忍死其親之心矣. 此心是本, 但能存得此心, 則父之道或終身不可改, 或一日不可行, 皆隨其事之重輕而處之不失其宜矣. 聖人特指此心以示人, 所謂貫徹上下之言, 而豈曰姑以是爲中制也哉? 若如所喩, 章句文義固已不通, 而其間又極有害義理處. 夫謂三年而免於父母之懷者, 宰予. 父母之愛其子而子之愛其親, 皆出於自然而無窮, 豈計歲月而論施報之爲哉? 若所謂中, 乃天理人倫之極致, 隨時而所在不同. 顔子之事觀之, 則可見矣. 今曰姑以中制言之, 則是欲於半上落下之間指爲一定之中, 以同流俗合汙世而已, 豈聖人之所謂中也哉?

 

 

진명중에게 답함 答陳明仲

 

 

‘(노나라 사람이) 장부를 고치려 했다[爲長府]’와 염구가 계씨를 위해 세금을 모아 거둔 일은 인과 관계 여부를 알 수 없으므로 반드시 억지로 갖다 붙여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爲長府與季氏聚歛事相因與否不可知, 不必附會爲說.

자로가 거문고를 타는 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대개 그 기질을 다 변화시키니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상달(上達)하지 못했으면 그만 두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절실하지 못합니다.

子路鼓瑟不和, 蓋未能盡變其氣質. 所云未能上達不已, 語不親切.

 

누공[屢空: 자주 끼니를 굶었다]’()’은 아마도 공핍(空乏)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자주 지독한 가난에 이르면서도 능히 편안한 데 (마음을) 둘 수 있었으니, 이것이 안자가 도에 가까운 이유입니다. 아래 문장에 자공이 재화를 늘린 것으로 대답하였으니, 글의 뜻이 더욱 분명합니다. 만약 ()’을 마음이 비어 있는 것[心空]이라 하고 누공(屢空)’빈복(頻復)’와 같다고 한다면, 안자는 곧 󰡔역전󰡕에서 말하는 선으로 돌아오면서도 굳게 지킬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어찌 안자가 되겠습니까?

屢空’, 恐是空乏. 屢至空乏而處之能安, 此顔子所以庶幾於道也. 下文以子貢貨殖爲對, 文意尤分明. 若以空爲心空, 而屢空猶頻復, 則顔子乃是易傳所謂復善而不能固之人矣, 何以爲顔子?

 

자로가 배우지 않고서도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고 단지 배우는데 반드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옛날에 문자가 없었을 때, 배우는 사람들은 본래 읽을 책이 없어서 중인 이상 가운데는 본디 책을 읽지 않고서도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만 성현이 책을 지은 뒤부터는 도가 경에 실려 있는 것이 상세합니다. 비록 공자가 성인이라 해도 여기에서 떠나 학문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버려두고 구하지 않으면서 정사를 하면서 배우려고 해도 이미 잃은 것이니, 하물며 보통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로가 (계씨의 읍제가 되어) 자고를 (비땅의) 원으로 삼은 것은 본래의 뜻이 여기에 미치지 않으니, 다만 공자의 말에 따라 여기에 가탁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으므로 공부자가 망령된 것으로 생각하여 미워한 것입니다.

子路非謂不學而可以爲政, 但謂爲學不必讀書耳. 上古未有文字之時, 學者固無書可讀, 而中人以上, 固有不待讀書而自得者. 但自聖賢有作, 則道之載於經者詳矣. 雖孔子之聖, 不能離是以爲學也. 捨是不求而欲以政學, 旣失之矣, 况又責之中材之人乎? 然子路使子羔爲宰, 本意未必及此, 但因夫子之言而託此以自解耳, 故夫子以爲佞而惡之.

 

증점이 도를 깨달은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니, 마음이 일에 매이지 않고 그 마음 속이 초연하고 대범해서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록 부자께서 “‘나를 알아 주지 못한다 하는데 …… 어찌 하겠느냐?”라고 물었는데, 그 대답 또한 조금도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대체로 마치 장차 죽을 때까지 이 일에 몰두하겠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말과 기상이 진실로천지를 제자리에 편안히 하고, 만물을 잘 기르는일입니다. 다만 하학공부(下學工夫)는 실제로 여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부자께서 비록 ! 하고 감탄하시며 (나는 증점을) 허여한다고 말하였지만 마침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曾點見道無疑, 心不累事, 其胸次灑落, 有非言語所能形容者. 故雖夫子有如或知爾之問, 而其所對亦未嘗少出其位焉, 蓋若將終身於此者. 而其語言氣象, 則固位天地育萬物之事也. 但其下學工夫實未至此, 故夫子雖喟然與之而終以爲狂也.

 

극기(克己)하는 것의 항목에서 생각하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논하신 바는 대개 괜찮습니다만,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홍범(洪範)’의 다섯 가지 일생각을 주로 삼고 있는데, 대개 볼 수는 없지만 네 가지의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잡아 간직하기를 점진적으로 하여 반드시 그 볼 수 있는 것으로부터 법도로 삼는다면 절근(切近)하고 명백하여져 쉽게 유지하여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일의 차례에서 생각이 가장 뒤에 있는 것이고, 공자도 이 가운데서도 네 가지 하지 말라라는 것은 골고루 들었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에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고 쉽게 지킬 수 있는 법도를 따라서 볼 수 없고 묶어 둘 수 없는 마음을 기르도록 하려 한 것입니다. 오래 되어도 해이해지지 않고 안팎이 한 가지로 된다면 사사로운 마음은 용납될 곳이 없습니다. 정자(程子)사물잠(四勿箴)’의 뜻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세히 음미하신다면 또한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克己之目不及思, 所論大槪得之, 然有未盡. 熹竊謂洪範五事, 以思爲主, 蓋不可見而行乎四者之間也. 然操存之漸, 必自其可見者而爲之法, 則切近明白而易以持守. 故五事之次, 思最在後, 而夫子於此, 亦徧擧四勿而不及夫思焉. 蓋欲學者循其可見易守之法, 以養其不可見不可係之心也. 至於久而不懈, 則表裏如一而私意無所容矣. 程子四箴, 意正如此. 試熟玩之, 亦自可見.

 

()’은 본래 지극한 성스러움을 목표로 하며,‘()’은 본래 성스러움을 일으키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말처럼 하지 못할 까 걱정됩니다. 또 성인이 배워야할 것이 어떤 일이며 익혀야 할 것이 어떤 방법인지 마땅히 이해해야 덕에 들어가는 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절실하게 묻고 비근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 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는 윤화정(尹和靖)의 이른바 배움은 나에게 달려 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 달려있으니 어떻게 성낼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가장 적당합니다. 대개 이와 같이 말하면, 자기 수양을 위하여 심력을 기울이는 공부의 대략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말하면, 자기 수양을 위한 마음이 절실하지 못하고 또 자신은 넓히고 다른 사람은 좁아지게 하는 병폐에 이르게 되어 도에서 더욱 멀어지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이것이 곧 하늘에 받아들여지는 논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 또한 (자신을) 크게 무궁하고자 하여 경솔하게 어리석음에 빠진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學固以至聖爲極, 習固是作聖之方, 然恐未須如此說. 且當理會聖賢之所學者何事, 其習之也何術, 乃見入德之門. 所謂切問而近思也. ‘人不知而不慍’, 和靖所謂學在己, 知不知在人, 何慍之有者最爲的當. 蓋如此而言, 乃見爲己用心之約處. 若以容人爲說, 竊恐爲己之心不切, 而又涉乎自廣狹人之病, 其去道益遠矣. 嘗見或人說此乃有容天之論, 此又欲大無窮而不知其陷於狂妄者也.

 

 

이백간에게 답함(갑신) 答李伯諫甲申

 

[해제] 이 편지는 융흥 2(갑신년, 1164, 주자 나이 35)에 이백간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이다.

 

논하신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았더니, 대체로 불교를 위주로 하여 우리 유가의 설 가운데 불교에 가까운 것은 채택하고, 불교와 다른 것은 공자 맹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리 저리 이유를 붙여[遷就] 그릇되이 부합시키려 하였습니다. 정자의 학설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바로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곧장 잘못을 지적한 것은 진실로 그 뜻을 알지 못하여 그렇게 했겠지만, 채택한 것과 부합시킨 것 또한 (겉으로는) 옳은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잘못된 것을 슬그머니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의 뜻 사이에 본래의 규범에서 벗어남을 면치 못했습니다. 말에서 깨닫지 못하면서 마음에서 구한다면 애당초 공자와 맹자, 정자의 글을 읽은 것은 다만 과거 공부에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는 보내온 편지에 있는 말이다.)일뿐 입니다. 진실로 그 지향점[指歸]을 깨달을 길이 없어서, 감히 성인의 학문이 이와 같은 데서 그쳤다고 한 것입니다. 뒤에 불교를 배운 것은, 곧 죽고 사는 것을 두려워해서 힘써 그것을 연구하였다.’(이 역시 보내온 편지에 있는 말이다.) 그래서 거기에 깊이 빠진 것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미세한 차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정자(程子)를 헐뜯으면서도 공자 맹자를 감히 비난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온 세상에서 공자 맹자를 존경하고 또 자신이 유자(儒者)이기 때문에 감히 못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어찌 공자 맹자는 믿을만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고서 믿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비록 드러내 놓고 배반은 못하지만, 관을 부수고 면을 찢어 버리며, 근원을 막으려는 마음이 은연 중에 나타난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이 어찌 이런 마음이 마음 속에 싹트게 해서 되겠습니까?

詳觀所論, 大抵以釋氏爲主, 而於吾儒之說, 近於者取之, 異於, 孔孟, 則多方遷就, 以曲求其合 : 伊洛則無所忌憚而直斥其非. 夫直斥其非者, 固未識其旨而然, 所取所合, 亦竊取其似是而非者耳. 故語意之間, 不免走作. 不得於言, 而求諸心, 則從初讀孔孟伊洛文字, 止是資擧業, 此來書之語. 固無緣得其指歸, 所以敢謂聖學止於如此. 至於後來學佛, 乃是怕生死此亦來書中之語. 而力究之, 故陷溺深. 從始至末, 皆是利心, 所謂差之毫釐者, 其在玆乎. 然敢詆伊洛而不敢非孔孟, 直以擧世尊之而吾又身爲儒者, 故不敢耳, 豈眞知孔孟之可信而信之哉? 是猶不敢顯然背畔, 而毁冠裂冕拔本塞源之心已竊發矣. 學者豈可使有此心萌於胸中哉

 

보내 온 편지에서 이르기를, “정씨(程氏)에게서 비록 학문의 심오한 경지는 바라볼 수 없었지만, 이미 그 경계는 엿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인의 도가 육경에 있는 것은 해와 별이 밝은 것과 같습니다. 정씨의 설이 그 책에 보이는 것은 또한 상세합니다. 그러나 만약 다만 인쇄된 책만을 가지고 처음부터 들춰 보아 그 글의 뜻을 대충 이해하고 곧 깨달은 것으로 여긴다면, 당시의 공자나 정자의 문인 제자들도 천성이 아주 둔하여 지혜를 운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데, 어찌 당신처럼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공자 문하의 제자들은 그 스승을 좇아서 액을 당하거나 곤궁하고 굶주려도 그 몸을 마칠 때 까지 감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자의 문하에서도 이미 벼슬에 있는 사람은 작위와 봉록[爵祿]을 잊고,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사람은 굶주림과 추위를 잊었으니(유작(游酢)의 말이다.), 이렇게 된 데는 역시 반드시 할 이야기를 있을 것입니다. 성현의 학문을 선학(禪學)처럼 간주하여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 나아간다면, 아마도 다시 도와 학문을 알게 되는 일이 앞에 있게 될 것이며, 그런 뒤에 정씨의 학문적 경계를 깨달아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來書云, 程氏雖未能望其堂奧, 而已窺其藩籬矣. 竊謂聖人道在六經, 若日星之明. 程氏之說, 見於其書者亦詳矣. 然若只將印行冊子從頭揭過, 略曉文義, 便爲得之, 則當時門人弟子亦非全然鈍根無轉智之人, 豈不能如此領會? 門弟子之從其師, 厄窮飢餓, 終其身而不敢去 : 程氏之門已仕者忘爵祿, 未仕者忘饑寒(此游察院語.) 此亦必有謂矣. 試將聖學做禪樣看, 日有孜孜, 竭力而進, 竊恐更有事在, 然後程氏藩籬可得而議也.

 

보내오신 편지에 공자의 문하는 인을 요체로 삼는데, 불교 또한 바른 깨침[正覺]을 말하고, ‘인을 행할 수 있다[能仁]’고 외치는데 이 또한 정씨의 말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정씨의 설을 불교의 깊숙하고 그윽하며 지극히 미세한 논리로 보면, 아마도 기꺼이 지극한 논의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당신과 유학자를 변별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차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학자는 인의 본체를 말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인의 실제적 적용[]을 말하는데 이르러서도 아주 미세한 점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의 실상은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다라 하고, 효제는 인의 근본이 된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체와 용이 하나의 근원을 이루는 까닭이며,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과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것이 사이가 없는 원인입니다. 석씨가 바른 깨침’, ‘인을 행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그 논의는 높고 아름답지만 그 본질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來書謂聖門以仁爲要, 釋氏亦言正覺, 亦號能仁, 又引程氏之說爲證. 竊謂程氏之說, 釋氏窮幽極微之論觀之, 似未肯以爲極至之論. 但老兄與儒者辨, 不得不借其言爲重耳. 然儒者言仁之體則然, 至語其用, 則毫釐必察. 故曰仁之實, 事親是也’, 又曰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此體用所以一源而顯微所以無間也. 釋氏之云正覺能仁者, 其論則高矣美矣, 然其本果安在乎?

 

보내온 편지에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인용하여 보통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말을 증명하였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서로 비슷한 듯 하지만 실제로는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천선생이 말하기를 나의 사적인 욕망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면 일상사 모두가 인이므로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에 근거하여 생각하면 조금도 어그러질 수 없을 것이니 어그러진다면 이단의 학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來書引天下歸仁以證滅度衆生之說, 竊謂恐相似而不同. 伊川先生: ‘克己復禮, 則事事皆仁, 故曰天下歸仁.’ 試用此意思之, 毫髮不可差, 差則入於異學矣.

 

보낸 온 편지에서, “공자는 인()을 말하면서 사적인 욕망을 극복하는 것으로써 요체(要諦)를 삼았는데, 불씨는 성을 논하면서 무심을 종지로 삼았으니, 양구산의 마음이 없다 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잘못이다고 했더군요. 제가 생각해 보건대, 이른바 자기[]’라는 것은 사물에 대비하여 일컬은 것으로, 곧 사적인 욕망을 자기라고 여기는 것인데, 여기에 나아가서 따지고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애욕(愛欲)이 생겨나므로 마땅히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적인 욕망을 이겨서 스스로 천리로 돌아간다며 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으로 허명(虛明)하고 순일(純一)하고 꿰뚫고 느껴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성을 다하고 도()를 체득(體得)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이제 망령되다고 여겨 그것을 제거하려 하다가, 또 스스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참된 마음이 존재한다”(이 말 또한 보내온 편지에 있는 말입니다.)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마음이 없다는 말이 어찌 반드시 완전히 옳겠으며 마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설은 어찌 반드시 완전히 잘못되었다 하겠습니까? 만약 마음이 없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사욕을 이기는 것은 곧 마음이 있는 것인데, 마음이 없으면서 어떻게 사욕을 이기겠습니까? 만약 자신의 사욕을 이기는 것을 옳게 여긴다면, 청컨대 이 학문에 종사하시면 될 것입니다. 또 어찌 반드시 여기에서는 사적인 욕구를 이기려고 하면서 저기에서는 마음을 없애려고 하여 이렇게 근본을 두 가지로 만들어 말을 산만하게 하십니까?

來書云, 夫子語仁以克己爲要, 佛氏論性以無心爲宗, 而以龜山心不可無之說爲非. 謂所謂己者, 對物之稱, 乃是私認爲己而就此起計較, 生愛欲, 故當克之. 克之而自復於理, 則仁矣. 心乃本有之物, 虛明純一, 貫徹感通, 所以盡性體道, 皆由於此. 今以爲妄而欲去之, 又自知其不可而曰有眞心存焉, 此亦來書之語. 則又是有心矣. 如此則無心之說何必全是, 而不言無心之說何必全非乎? 若以無心爲是, 則克己乃是有心, 無心何以克己? 若以克己爲是, 則請從事於斯而足矣, 又何必克己於此而無心於彼, 爲此二本而枝其辭也?

 

보내 오신 편지에 이르기를, “윤회설(輪回說)과 인과설(因果說)은 요상스럽고 괴이한 것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고 보통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도 또한 그것을 배척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윤회설과 인과설은 불교의 논리입니다. 이제 부처를 성인으로 인정하면서 그 말을 배척하는 것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다면 당신은 다만 공자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부처까지도 비방하는 것입니다. 어찌 당신의 말에 궁색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때문에 애둘러 말을[遁辭] 하여 스스로 책임을 면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유자로서 어쩔 수 없어서, 잠시 이런 계책을 내서 공격을 늦추려 하는 것인지요? 아아! 저는 성인이 말을 만들어내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고 보통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며 성인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들고 스승을 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과 말이 귀결하는 곳을 달리하고 머리와 꼬리가 이처럼 어긋나면서도 오히려 도가 될 수 있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來書云, 輪回因果之說, 造妖捏怪, 以誑愚惑衆, 達磨亦排斥之. 竊謂輪回因果之說乃佛說也, 今以佛爲聖人而斥其言至於如此, 則老兄非特叛孔子, 又謗佛矣. 豈非知其說之有所窮也, 而爲是遁辭以自解免哉? 抑亦不得已於儒者, 而姑爲此計以緩其攻也? 嗚呼吾未見聖人立說以誑愚惑衆, 而聖人之徒倒戈以伐其師也. 孰謂本末殊歸首尾衡決如是, 而尙可以爲道乎?

 

보내오신 편지에서 이르기를, “한퇴지가 불교를 배척하면서 대전을 공경하였다면 참으로 불교를 배척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한퇴지가 대전이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았으며,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이치로써 스스로 이겨내서 사물에 의해서 침란(侵亂)되지 않은 것을 칭찬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과 원도에서 도에 기초하여 자기 수양을 한다면 (천명에) 순응하여 상서로운 일이 있을 것이며, 이 도로써 다른 사람에게 베푼다면 서로 사랑하여 공명하게 될 것이다. 이 도로써 천하국가를 다스리면 어디에도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칭하였는데 과연 어떻습니까?

來書云, 韓退之排佛而敬大顚, 則亦未能眞排佛也.[]. 退之大顚頗聰明, 識道理, 能外形骸, 以理自勝, 不爲事物侵亂而已. 其與原道所稱以之爲己則順而祥, 以之爲人則愛而公, 以之爲天下國家則無所處而不當, 果如何耶?

 

보내 오신 편지에서 이르기를, “형체에는 죽고 사는 것이 있지만 참된 본성은 항상 존재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본성에는 거짓됨과 꾸며낸 것(僞冒)이 없으니 참되다고 말할 필요가 없으며,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존재한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개 이른바 본성이란 것은 천지가 사물을 낳은 이치인 것이니, 이른바, “하늘의 명()함은 아아! 심원(深遠)하여 그치지 않도다. 크도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건의 원을) 바탕하여 비롯하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어찌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있었으며, 어찌 내가 능히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석씨의 이른바 참된 본성이란 것이 이것과 같은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과 같다면, 옛날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본성을 알고 하늘을 알았던 것이니, 그 학문에는 진실로 무언가 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게 하여 진성이 항상 있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것과 달라서 망령된 마음을 비우게 하여 진성(眞性)을 보려는 것이라면, 오직 죽으면 그것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사사로이 하고 스스로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이른바, ‘깨끗한 장사가 다섯 배의 이득을 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를 일러 돈벌이 하는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천(伊川)의 논의는 섣불리 비난하기에 쉽지 않고, 갑작스레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다른 날 유학(儒學)의 하나의 규모를 보신다면, 이천의 말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일 따름입니다.

來書云, 形有死生, 眞性常在. 謂性無僞冒, 不必言眞 : 未嘗不在, 不必言在. 蓋所謂性, 卽天地所以生物之理, 所謂維天之命, 於穆不已, 大哉乾元, 萬物資始者也, 曷嘗不在而豈有我之所能私乎? 釋氏所云眞性, 不知其與此同乎? 否也? 同乎此, 則古人盡心以知性知天, 其學固有所爲, 非欲其死而常在也. 苟異乎此, 而欲空妄心, 見眞性, 惟恐其死而失之, 非自私自利而何? 是猶所謂廉賈五之, 不可不謂之貨殖也. 伊川之論未易遽非, 亦未易遽曉. 他日於儒學見得一箇規模, 乃知其不我欺耳.

 

보내 온 편지에서, “이천(伊川) 선생이 이른바, ‘불교는 내외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한 말은 그러하지 않다. 대개 내면의 마음을 곧게 유지하면서 외면의 행동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라고 하셨는데, 이 논의는 매우 타당합니다. 제가 의심하는 곳도 이에 근거한 것입니다. 설령 석씨(釋氏)가 과연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의리로써 바깥을 반듯하게 할 수 있으려면 곧 모름지기 부자관계, 군신관계도 있어서 삼강오륜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안을 곧게 할 수 있었다. 그 까닭으로 바깥은 반듯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또 어찌 이 몇 가지 이외에 따로 의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천의 말은, ‘이해하려다가 실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그것을 살피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이천이 이른바, ‘안을 곧게 하는 것은 있다라고 한 것은, 불교에도 일단의 마음 공부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다만 그 공력을 들이는 방법이 같지 않은 곳이 있기 때문에 나타남에 차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전혀 서로 관계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깥을 반듯하게 함이 없다는 한 가지 사실입니다. 진실로 뿌리가 있으면 반드시 가지와 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곡의 뿌리는 오곡의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생산하여 먹을 수가 있으나 피의 뿌리는 피의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생산하지만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같지 않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인삼과 백출(白朮)은 뿌리로써 병을 낫게 하지만, 구문(鉤吻)은 뿌리로써 사람을 죽입니다.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이 어찌 뿌리의 바깥에 있으면서 독()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명도(明道) 선생은 또 이르기를, “석씨(釋氏)는 오직 상달(上達)에만 힘쓰고 하학(下學)이 없다. 그렇다면 그 상달하는 곳도 어찌 옳겠는가? 원래 서로 연관되지 않고 중간에 끊어지니 도()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안팎이 갖추어지지 않은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 말은, 그래도 그대는 유가(儒家)로부터 불교로 향했으므로, 오히려 이천선생의 말에 의지하여 무게를 더하려고 한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정말 서역(西域)의 오랑캐 족속이었다면, 또한 기꺼이 이천의 말을 끌어와 그 초사(招辭)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來書謂伊川先生所云內外不備者爲不然, 蓋無有能直內而不能方外者, 此論甚當. 據此正是所疑處. 若使釋氏果能敬以直內, 則便能義以方外, 便須有父子, 有君臣, 三綱五常, 闕一不可. 今曰能直內矣, 而其所以方外者果安在乎? 又豈數者之外別有所謂義乎? 以此而觀伊川之語, 可謂失之恕矣. 然其意不然, 特老兄未之察耳. 所謂有直內者, 亦謂其有心地一段工夫耳. 但其用功却有不同處, 故其發有差, 他却全不管著, 此所以無方外之一節也. 固是有根株則必有枝葉, 然五穀之根株則生五穀之枝葉華實而可食, 稊稗之根株則生稊稗之枝葉華實而不可食, 此則不同耳. 參朮以根株而愈疾, 鉤吻以根株而殺人, 其所以殺人者, 豈在根株之外而致其毒哉? 來書云, 不能於根株之外別致其巧也. 明道先生又云 : ‘釋氏惟務上達而無下學, 然則其上達處豈有是也? 元不相連屬, 但有間斷, 非道也.’ 此可以見內外不備之意矣. 然來書之云, 却是從儒向佛, 故猶籍先生之言以爲重. 若眞胡種族, 則亦不肯招認此語矣. 如何如何?

 

보내온 편지에 리를 장애로 여긴 것은 특히 사사로운 뜻과 작은 지혜를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저는 사사로운 뜻과 작은 지혜를 자로 인식한 것은 바로 리자를 알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내온 편지에 또 사상채가 불씨는 기꺼이 리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다 했습니다. 저는 만약 자를 알지 못한다면, 이것 또한 쉽게 말장난으로 다퉈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를 이해한다면 (당신이) 말한 것이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유교와 불교가 발견한 곳은 이미 두 가지 이치가 없다하였는데, 그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다릅니까? 대개 유교는 인간의 현실적인 일[人事]에 근본하고, 불교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근본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일에 근본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데 느슨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에 근본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데 빠릅니다. 저는 이미 근본한다고 말했다면, 이 위에 다시 사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이미 근본이 둘이라면 같은 것은 어떤 일입니까? 이른바 유교가 인간의 현실적인 일에 근본하여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데 느슨하다는 것도 특히 조리가 없습니다. 자사가 󰡔중용󰡕을 지으면서 머리 장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 한다.”하고, 공자가 성과 천도를 말했으며, 맹자가 인간본성은 선하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일에 근본한 것입니까? 천도에 근본한 것입니까? 본성에 느슨한 것입니까? 본성에 빠른 것입니까? 그러나 자를 드러낸 것 또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유자들은 정좌하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이치가 크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성학은 인간의 현실적인 일을 알면서도 삶과 죽음의 문제를 모른다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성현이 사람을 가르칠 때 마음을 다하여 본성을 알고 몸소 실천하여 본성을 다하며, 시작과 마침, 근본과 말단에 스스로 순서가 있으며, 한결같이 모두 천리에 근본하고 있으니, 늦출 것을 늦추지 않고, 빨리 할 것을 빨리 하지 않고 곧장 본성을 다하고 천명을 지극히 하여 바야흐로 궁극적인 법칙이 됩니다. : 불교의 견성의 설과 같지 않으면 한 번 보고 마침내 그만 둡니다. 사상채가 이르기를 석씨가 본성에 대해 논한 것은 유학자들이 마음에 대해 논한 것과 같다. 석씨가 마음에 대해서 논한 것은 유학자들이 의지에 대해 논한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대단히 분석적이고 지극히 정밀하니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來書云, 以理爲障者, 特欲去其私意小智. 謂認私意小智作, 正是不識. 來書又謂上蔡云佛氏不肯就理者爲非. 謂若不識, 則此亦未易以囗舌爭也. 他日解此, 乃知所言之可笑耳.

來書云, 儒佛見處旣無二理, 其設敎何異也? 蓋儒敎本人事, 敎本死生. 本人事故緩於見性, 本死生故急於見性. 謂旣謂之本, 則此上無復有物矣. 今旣二本, 不知所同者何事? 而所謂儒本人事, 緩見性者, 亦殊無理. 三聖作, 首曰: ‘, 元亨利貞. ’子思中庸, 首曰: ‘天命之謂性.’ 孔子言性與天道, 孟子道性善, 此爲本於人事乎? 本於天道乎? 緩於性乎? 急於性乎? 然著字亦不得. 俗儒正坐不知天理之大, 故爲異說所迷, 反謂聖學知人事而不知死生, 豈不誤哉聖賢敎人盡心以知性, 躬行以盡性, 終始本末, 自有次第, 一皆本諸天理, 緩也緩不得, 急也急不得, 直是盡性至命, 方是極則 : 非如見性之說, 一見之而遂已也. 上蔡: ‘釋氏之論性, 猶儒者之論心 : 釋氏之論心, 猶儒者之論意’, 此語剖析極精. 試思之, 如何?

 

보내온 편지에 자공의 명달, 성과 천도에 대해서는 오히려 듣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바보) 앞에서 꿈을 말하는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내온 편지에 석씨는 삶과 죽음에 근본한다하였는데, 깨달은 자는 모름지기 철저하게 깨우쳐 나가므로 조사이래로 이로 말미암아 도를 터득한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생각하건대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이라면 본원과 말단, 내면의 세계와 외면의 세계가 하나인지 둘인지 알지 않을까요? 둘이라면 도에도 두가지 길이 있고, 하나라면 삶과 죽음의 문제과 현실의 문제가 하나로 관통할 것이니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전등록󰡕 가운데 (들어 있는) 많은 조사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 요직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을까요? (과연) 몇 사람이 문주공과 같이 되었을 까요? 반드시 징험해야 할 것입니다.

來書云, 子貢之明達, 性與天道猶不與聞. 竊謂此正癡人前說夢之過也. 來書又謂釋氏本死生, 悟者須徹底悟去, 故祖師以來, 由此得道者多. 謂徹底悟去之人, 不知本末內外是一, 是二? 二則道有二致, 一則死生人事一以貫之, 無所不了. 不知傳燈錄中許多祖師, 幾人做得堯舜禹稷? 幾人做得文武周孔? 須有徵驗處.

 

보내 오신 편지에 이르기를, “다만 성인은 중도로써 자임할 뿐,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계를 뛰어 넘게 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했는데, 제가 생각하건대 이는 바로 왕안석, ‘고명(高明)함으로써 자기를 처신하고 중용(中庸)으로써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설입니다. 귀산(龜山)이 일찍이 힘써 비판했습니다. 이른바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계를 뛰어 넘게 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천리(天理)의 본래 모습이지, 성인이 이렇게 교육하도록 안배(安排)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름지기 알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초목은 종류로써 구별되는데, 한 줄기의 조그만 나무의 경우에는 초목의 본성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성장은 모름지기 점진적인 것이 있는 것이니, 이것 역시 본성인 것입니다. 이른바, “사람을 그 선 자리에서 부처로 만든다. 보내 온 편지 속에 있는 말이다. 라고 한 것은, 바로 조그만 나무에다 한 모금의 물을 뿜어서 그것으로 하여금 곧 하늘을 찌르고 해를 가릴 나무로 자라기를 강요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설령 이런 마술이 있다고 해도, 또한 이치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도 스스로 사사로이 하고 스스로 이익을 챙기는 규모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來書云, 特聖人以中道自任, 不欲學者躐等. 謂此正是王氏高明處己, 中庸處人之說, 龜山嘗力詆之矣. 須知所謂不欲學者躐等者, 乃是天理本然, 非是聖人安排敎如此. 譬諸草木, 區以別矣. 且如一莖小樹, 不道他無草木之性, 然其長須有漸, 是亦性也. 所謂便欲當人立地成佛者, 正如將小樹來噴一口水, 便要他立地干雲蔽日, 豈有是理? 便欲當人立地成佛, 亦是來書中語. 設使有此幻術, 亦不可謂之循理. 此亦見自私自利之規模處.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대역의 생사설과 정씨의 어묵, 일월, 홍로의 논을 인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건대 이 네 가지의 설은 애당초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그 가운데 세 가지를 허용하면서도 하나를 배제하셨는데, 어떻게 절충하여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세 가지 설을 허용한 것도 그 본래의 뜻을 얻지 못할 까 걱정이 됩니다. 저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반드시 여기에서와 같이 이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마땅히 유학의 하학공부에 근거하여 추구한다면 오랜 수양 후에 스스로 상달 할 것입니다. 이른바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來書云引大易生死之說程氏語黙日月洪鑪之論. 按此四者之說初無二致, 來書許其三, 排其一, 不知何所折衷而云然? 然則所許三說, 恐未得其本意也. 愚意以爲不必更於此理會, 且當按聖門下學工夫求之, 久自上達. 所謂未知生, 焉知死也.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성인이 역을 체득하여(몸에 익혀서) 신묘함을 궁구하여 (우주의) 변화를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의 맥락 가운데 잘못이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반드시 이와 같이 任滅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임멸두 글자는 또한 석씨가 말한 것이며, 성인은 삶과 죽음에 대해 본래 임멸이라 하지 않았으며, 또한 애당초 임멸의 잘못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이전의 문단을 참고해 보십시오.

來書云, 聖人體易, 至於窮神知化未之或知之妙. 疑此語脈中有病. 又云生死之際, 必不如是之任滅也. 任滅二字亦是釋氏言之, 聖人於死生固非任滅, 亦初不見任滅之病. 更以前段參之.

 

보내 온 편지에서 이르기를, “조참(曹參)과 양억(楊億)은 유학을 배우지 않았지만, 위대한 인물이 되기에 해롭지 않다라고 하셨는데, 조참과 양억 두 사람을 서로 비기는 것은, 정말 그 자체가 이치에 닿지 않는 것입니다. 조참은 한()나라 초기의 공신 가운데서 인품이 아주 거칠고 엉성한 사람이지만, 뒤에 도리어 이와 같이 자기의 집을 비워서 개공(蓋公)에게 살게 한 일이나 제()나라를 다스리고 한나라를 도우며 백성들과 같이 휴식한 일 등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소견도 또한 높은 것 같습니다. 애석하게 여기는 바는 성인(聖人)의 도를 듣지 못하여 여기에 그친 것을 따름입니다. 양억(楊億)은 섬세하고 곱고 내용없는 정교한 글을 잘 지었지만 이미 도()를 아는 사람이 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질은 맑고 곧아서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건의한 것 가운데서 볼만한 것이 조금 있습니다. 그런데 불자(佛者)들이 그를 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가 팔각마반(八角磨盤)의 구절이 있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를 일러 석씨(釋氏)의 도를 안다고 했으면, 죽고 사는 때에 마땅히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바가 있어야 할텐데도, 바야흐로 정위(丁謂)가 구래공(寇萊公)을 내쫓을 때 다른 일로 양억을 불러 중서성(中書省)에 이르게 했더니, 양억은 두려워서 대소변을 다 싸고 얼굴에 사람 빛이 없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여덟 모난 맷돌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지요?(이 사실은 소철(蘇轍)용천별지(龍川別紙)에 보인다.) 그러한즉, 이 두 사람의 일은 비록 모두 다 도를 아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지만 양억은 조참의 무리가 아닙니다. 당신께서 비교하여 같은 것으로 본 것은 잘못입니다.

來書云, 曹參楊億不學儒, 不害爲偉人. 前書已奉答矣, 而細思之, 則老兄固云夫子之道乃萬世仁義禮樂之主, 今乃有不學儒而自知道者, 則夫子何足爲萬世仁義禮樂之主也? 且仁義禮樂果何物乎? 曹參楊億二人相擬, 正自不倫. 曹參初功臣中人品儘粗疏, 後來却能如此避正堂, 蓋公, , 與民休息, 亦非常人做得, 其所見似亦儘高. 所可惜者, 未聞聖人之道而止於是耳. 楊億工於纖麗浮巧之文, 已非知道者所爲. 然資禀淸介, 立朝獻替略有可觀. 而釋子特以爲知道者, 以其有八角磨盤之句耳. 然旣謂之知釋氏之道, 則於死生之際宜亦有過人者. 而方丁謂之逐萊公, 以他事召至中書, 乃恐懼至於便液俱下, 面無人色. 當此時也, 八角磨盤果安在哉? 事見蘇黃門龍川別志第一卷之末. 蘇公非詆佛者, 其言當不誣矣. 然則此二人者雖皆未得爲知道, 之倫也. 子比而同之, 過矣.

 

대개 노자의 학문은 불교보다 얕아서 그 잘못 또한 적은 것이 마치 신불해한비자의 학문이 양주·묵자의 학문보다 얕아서 그 피해 또한 적은 것과 같습니다. 인론에 대해서 두 사람이 소홀한 것 또한 알아야 할 것입니다.

老氏之學淺於佛, 而其失亦淺, 正如申韓之學淺於楊墨, 而其害亦淺. 因論二人謾及之, 亦不可不知也.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염관의 강의는 학자들이 도를 깨우치는데 급급하여 곧 사람들이 입지성불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앞의 단락에서 이에 대해 이미 논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 또한 전적으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로부터 보아서 지나친 것 가운데 착실[着實]한 곳이 없습니다. 기상의 사이에서 아마도 또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來書云, 鹽官講義急於學者見道, 便欲人立地成佛. 於前段已論之矣. 然其失亦不專在此, 自是所見過中, 無著實處. 氣象之間, 蓋亦可見.

 

보내온 편지에 이른바 서락의 여러 공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발명했다고 한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일찍이 이에 대해 선생님께 들었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소식과 소철의 총명함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논어󰡕󰡔맹자󰡕에 대해 말한 것이 다소 뛰어난 점이 있었다. 대개 천지간에 도리가 이와 같은데 불과하니, 때때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모두 총명함의 발현이다. 다만 깨달음에 도달한 곳에도 흠[부족한 점]이 있으니, 만약 이치를 궁구하고자 하면 논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곳에도 도리어 흠이 있다는 말에도 자못 (음미할만한) 뜻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고 평상시처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來書所謂發明西洛諸公所未言者, 卽其過處也. 嘗聞之師曰: ‘二蘇聰明過人, 所說語孟儘有好處. 蓋天地間道理不過如此, 有時便見得到, 皆聰明之發也. 但見到處却有病, 若欲窮理, 不可不論也.’ ‘見到處却有病’, 此語極有味. 試一思之, 不可以爲平常而忽之也.

 

 

 

 

 

이백간에게 답함 答李伯諫

[해제]

 

보내 오신 편지를 받들어 보니, 심성의 근본에 종사하여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을 구하는 설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이 뜻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이치는 애당초 안과 밖, 본원과 말단[本末]의 간극이 없습니다. 무릇 일상생활에서 본원에 무젖어 들어 일의 변화에 수작[酬酌: 호응하여 대처하]면서 강설하고 변론하며, 고찰하고 연구하여 이치를 찾는데 이른다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에 있어서[一動一靜] (도덕적인)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며 기질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배우는 사람들의 병통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를 하는데 있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수양을 위하여 공부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서 보아 조금이라도 바깥으로 향한 것은 모두 바깥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실제로 자기 수양을 위한 공부를 할 마음이 있다면 다만 이와 같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에서 규정을 엄격하게 세워 힘써 지켜나가 끊임없이 발전하여 퇴보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니, 곧 맹자의 이른바, ‘도로써 깊이 나간다라는 것입니다. 대개 이른바 깊다는 것은, ‘공부가 쌓인 것이 깊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일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참되게 쌓아 오래도록 힘써 안과 밖이 한결같이 된다면 심성의 오묘함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기질의 치우침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스스로 터득하여 거기에 편안하게 머무르고 깊은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처해 있는 것이 편안하고 바탕으로 삼는 것이 깊다)라는 것입니다. 어찌 바깥을 떠나 안으로 들어가며 얕은 것을 싫어하면서 깊어지며, 학문과 사변(思辨)과 역행(力行)의 실질을 버리고 따로 심성의 오묘함에 종사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承喩及從事心性之本以求變化氣質之功之說, 此意甚善. 然愚意此理初無內外本末之間, 凡日用間涵泳本原, 酬酢事變, 以至講說辯論, 考究尋繹, 一動一靜, 無非存心養性變化氣質之實事. 學者之病在於爲人而不爲己, 故見得其間一種稍向外者, 皆爲外事. 若實有爲己之心, 但於此顯然處嚴立規程, 力加持守, 日就月將, 不令退轉, 則便是孟子所謂深造以道者. 蓋其所謂深者, 乃功夫積累之深 : 而所謂道者, 則不外乎日用顯然之事也. 及其眞積力久, 內外如一, 則心性之妙無不存, 而氣質之偏無不化矣. 所謂自得之而居安資深也, 豈離外而內, 惡淺而深, 舍學問思辯力行之實而別有從事心性之妙也哉?

 

󰡔󰡕이라는 책에는 음과 양의 변화를 근거로 사물의 이치를 드러내고, 큼과 작음, 정밀함과 거칠음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으니, 안은 옳고 밖은 그르며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읽어서는 더욱 안 될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뜻이 이와 같아서 보내오신 편지에 대부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저윽히 생각하건대 지난 번에 불교를 배우는 병폐의 근원을 아직 없애지 못한 것 같아서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반드시 이치에 합당하다 할 수 없으니, 당신께서 선택하십시요.

至於之爲書, 因陰陽之變以形事物之理, 大小精粗無所不備, 尤不可以是內非外厭動求靜之心讀之. 鄙意如此, 故於來喩多所未安. 竊恐向來學佛病根有未除者, 故敢以告. 然恐亦未必盡當於理, 惟高明擇之.

 

 

이백간에게 답함 答李伯諫

 

[해제]

보내 주신 가르침이 아주 진지하였는데, 저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것은 각각 견해가 있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모두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각자 자기가 믿는 바를 믿고서 힘 쓸 따름입니다. 이제 높으신 당신의 조예는 날로 깊어지고 원대해져 가는데, 어리석고 몽매한 저는 가로 막혀서 애초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반드시 합치될 리가 없습니다. 보내 온 편지에서 곡진하게 타일러 다른 날을 기약하셨는데, 비록 옛날의 사사로운 정을 돌아봐 주시는 것이긴 하지만, 쓸 데 없이 다투어서 논변만 하고 덕을 쌓고 학문을 닦는 실상에는 도움이 없을까 걱정됩니다. 삼가 이에 저에게 베풀어 준 후의에 조금이나마 감사를 드리오니, 살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誨諭勤勤, 深荷不鄙. 然人之爲學, 各有所見, 豈能必於盡同? 亦各信其所信而勉焉耳. 今高明所造日深日遠, 而愚蒙底滯, 不能變其初心, 竊意必無可合之理. 來書乃欲曲加鎨誨, 期之異日, 雖荷眷舊之私, 然恐亦徒爲競辨而無補於進修之實也. 謹此少謝厚意之辱, 伏幸裁照.

 

 

오공제에게 답함 答吳公濟

 

[해제]

보내 온 편지에서, “유교와 불교의 도는 근본은 같고 끝만 다르다라고 하셨던데, 저는 근본이 같으면 끝도 반드시 다르지 않고, 끝이 다르면 근본도 반드시 같지 않는 것은 마치 두 그루 나무가 한 가지 종류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두 가지 종류의 열매를 맺을 까닭이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來書云, 之道, 本同末異. 謂本同則末必不異, 末異則本必不同. 正如二木是一種之根, 無緣却生兩種之實.

 

보내온 편지에서 부자께서는 오로지 현실적인 인간사와 삶의 이치를 말하고, 불씨는 인간과 귀신, 삶과 죽음을 함께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살펴본 것으로는 이백간의 편지에도 이러한 뜻이 있었는데, 이미 이백간에게 보낸 답장에서 논의하였습니다. 언젠가 (이백간에게 보낸 답장)을 취하여서 보시면 저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저는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삶과 죽음, 인간과 귀신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만약 하나라면 오로지 인간사와 삶의 이치를 말한 것은 거기에 죽음과 귀신을 본래 이미 포함[]하고 있으니, 포함되기를 기다린 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모름지기 따로 하나의 항목을 만들어서 이치를 궁구하고 깨달으면, 시작과 마지막, 그윽하게 감추어진 것과 분명하게 드러난 것[幽明]은 간격이 있습니다. 이처럼 보게 되면 아마도 완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來書云, 夫子專言人事生理, 而佛氏則兼人鬼生死而言之. 伯諫書中亦有此意, 已於答伯諫書中論之矣. 他日取觀, 可見鄙意. 抑又有說焉, 不知生死人鬼爲一乎? 爲二乎? 若以爲一, 則專言人事生理者, 其於死與鬼神固已兼之矣, 不待兼之而後兼也. 若須別作一頭項窮究曉會, 則是始終幽明却有間隔. 似此見處, 竊恐未安.

 

보내온 편지에 공자가 말을 드물게 한 것은 바로 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이 말을 듣고 의혹이 생겼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인이 삶과 죽음, 귀신에 대해서 비록 절실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육경의 말과 격물과 성의의 방법, 천도와 성명(性命)의 말에서 사람들에게 시작과 마침, 그윽함과 밝음의 이치를 보이지 않을 수 없으니,대개 이미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만약 여기에서 강구하고 분명히 하여 마음으로 깨달으면 우러러 천문을 살피고 아래로 지리를 살펴서 환하여져서 의심할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이를 듣고서 도리어 의혹할 바가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배우지 않기 때문에 성인은 반드시 알게 할 수 없으니, 감춘 것이 있는데도 말하는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제 도리어 성인이 감추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니, 다른 견해에 대해서 의혹을 두면서 그칠 바를 모를 것입니다.

來書云, 夫子罕言之者, 正謂民不可使知, 恐聞之而生惑. 謂聖人於死生鬼神雖不切切言之, 然於六經之言, 格物誠意之方, 天道性命之說, 以至文爲制度之間, 名器事物之小, 莫非示人以始終幽明之理, 蓋已無所不備. 若於此講究分明而心得之, 則仰觀俯察, 洞然其無所疑矣, 豈聞之而反有所惑耶? 但人自不學, 故聖人不能使之必知耳, 非有所秘而不言也. 今乃反謂聖人秘而不言, 宜其惑於異說而不知所止也.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현자와 사대부는 불학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깨달은 후에야 공자가 과연 전하지 않은 묘리가 있음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논어󰡕라는 책은 말하고 들어서 전수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논어는 본래 말하고 들어서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스스로 공부하여 내려간 곳이 있으면 불교를 배우기를 기다려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를 배운 뒤에 알 수 있다면 이른바 󰡔논어󰡕라는 책은 불씨의 󰡔논어󰡕이며 공자의 󰡔논어󰡕가 아닙니다.(비파와 진쟁, 방향, 필률(觱栗)을 사용하여 아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으니, 곡조와 박자[節拍]는 같지만 음운은 어긋나는 것입니다.)

來書云, 賢士大夫因佛學見性, 然後知夫子果有不傳之妙. 論語之書, 非口耳可傳授. 論語固非口耳所可傳授, 然其間自有下工夫處, 不待學佛而後知也. 學佛而後知, 則所謂論語, 乃佛氏之論語, 而非孔氏論語. 正如用琵琶秦箏方響觱栗奏雅樂, 節拍雖同而音韻乖矣.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논어󰡕󰡔맹자󰡕를 통하여 이치를 발견한 뒤에 불씨의 현상과 이치가 모두 장애가 없다는 설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위의 글에서 불학으로 인하여 성을 알았다고 말한 것과 여기서 󰡔논어󰡕󰡔맹자󰡕로 인하여 이치를 알게 되었다고 한 말에서 이치와 성은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자세하게 분석하여 말씀하셔서 (저의) 깨닫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다만 참으로 󰡔논어󰡕󰡔맹자󰡕에서 말한 이치를 알았다면 석씨의 현상과 이치에 장애가 없다고 한 것에도 장애가 많지 않을까 합니다.

來書云, 語孟見理, 然後知佛氏事理俱無礙之說. 按上文言因佛學見性, 此言因語孟見理, 理與性同乎? 異乎? 幸剖析言之, 以曉未悟. 但恐眞見語孟所言之理, 釋氏事理無礙之間所礙多矣.

 

보내주신 편지에 어둠과 밝음의 이유, 삶과 죽음에 관한 말, 낮과 밤의 도는 애당초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밝아지고 죽음에서 살게 되는 것은 밤 속에 낮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來書云, 幽明之故, 死生之說, 晝夜之道, 初無二理. 明之於幽, 生之於死, 猶晝之於夜也.

 

보내 온 편지에서 이르기를, 귀신의 정상(情狀)은 그윽한 데서 나타나는 것인데도 속일 수가 없다면, 윤회설이나 인과설도 비난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최고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 경지에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무()가 리()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그윽함과 분명히 드러남, 삶과 죽음, 낮과 밤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대본(大本)에서 밝혀 그 시초를 궁구한 뒤에 실제로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른 바 둘이 없다는 것이 대충 붙이고 억지로 합하여 도리어 둘이 있게 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할 까 걱정이 됩니다. 귀신은 조화의 자취이며(정이천의 말이다.) 음과 양 두 기운의 양능이니,(장횡거의 말이다.) 어두운 데서 발견한 것만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윽한데서 깨달았다고 하면 이는 귀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윤회와 인과의 설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어두운 데 귀신이 있다고 한 것은 예악에 대응하여 말한 것입니다.) 대체로 아직 성인이 육경에서 말한 뜻을 완전하게 구명하지 못하고, 급히 학문에서 벗어난 것에서 얻은 것으로써 자기 중심적으로 억지로 추측하여 말하려 한 것이니, 이것이 말이 많아지면 더욱 들어맞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이런 이치가 없다고 할 수 없다고 한데 이르러서는 특히 상지는 이러한 경지에 없으니, 이것이 더욱 이치를 해칩니다. 대개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치는 마땅히 있는 것입니까, 마땅히 없는 것입니까? 이 이()는 마땅히 있음인지 마땅히 없음인지를 알지 못하고서 반드시 무()가 이()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마땅히 있음인 것입니다. 마땅히 있다면, 천지간에 가득찬 것이 모두 이 이()라서 빈 곳이 없건만 상등 가는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유독 거기에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어느 곳을 향해 몸을 편안히 학 목숨을 붙일런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없음[]에 합당하다면 모든 이 이른바 없음이다고 해서는 안되는 이()는 모두 중생(衆生)들의 어리석은 의견[妄見]으로 진체(眞諦)가 아닌 것입니다. 이는 성인(聖人)의 마음과 크게 서로 먼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은 두 가지 마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鬼神之情狀見乎幽者爲不可誣, 則輪回因果之說有不可非者. 謂上智不在此域可也, 謂必無是理不可也. 竊謂幽明死生晝夜固無二理, 然須是明於大本而究其所自來, 然後知其實無二也. 不然, 則所謂無二者, 恐不免於彌縫牽合而反爲有二矣. 鬼神者, 造化之跡,伊川. 乃二氣之良能也,橫渠. 不但見乎幽而已. 以爲專見乎幽, 此似未識鬼神之爲何物, 所以溺於輪回因果之說也. 幽則有鬼神者, 對禮樂而言之. 大抵未嘗熟究聖人六經之旨, 而遽欲以所得於外學者籠罩臆度言之, 此所以多言而愈不合也. 至又謂不可謂無此理, 特上智不在此域, 此尤害理. 蓋不知此理是合有耶? 合無耶? 以爲不可謂必無是理, 則是合有也. 合有則盈天地之間皆是此理, 無空闕處. 而上智之人獨不與焉, 不知又向甚處安身立命? 若是合無, 則凡此所謂不可無之理, 乃衆生之妄見, 而非眞諦也. 此其與聖人之心大相遠矣. 而曰聖人無兩心, 吾不信也.

()此似: 原倒, 宋閩本乙.

 

 

조좌경에게 답함 答趙佐卿

 

[해제]

보내온 역설에서 의미를 탐구하는 깊이를 볼 수 있어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은 옛날부터 일찍이 심취하여(마음에 품고) 읽어 왔지만, 항상 이해하지 못한 곳을 흠으로 여겨왔었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깨우쳐 준 것을 보니, 그 논의를 반복하여 대개 오랫동안 대답할 까닭을 알지 못했습니다. 도리어(그러나) 자네의 투터운 뜻은 마침내 사양할 수 없어서, 다만(잠시) 내 의견을 소략(疏略)하게 뒤에 붙이지만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판단하시고 다시 가르쳐서 깨우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체로 성경 가운데 오직 󰡔논어󰡕󰡔맹자󰡕 만이 글[文詞]이 평이하고 일상적인 것에 절실하여, 읽으면 의심나는 곳은 적고 유익한 곳은 많습니다. 만약 󰡔󰡕󰡔춘추󰡕라면 더욱 은밀하고 깊어서 알기 어려울 것이니, 이 때문에 평상시에 두려워하여 감히 가볍게 읽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所示易說, 足見玩意之深, 不勝歎服. 此經舊亦嘗伏讀, 然每病其未有入處. 乃承見喩, 使反復其論, 蓋久不知其所以對也. 顧厚意不可以終辭, 姑以己意略疏其後, 未知當否. 惟高明裁之, 復有以誨警之, 則幸甚. 大抵聖經, 論孟文詞平易而切於日用, 讀之疑少而益多.

春秋, 則尤爲隱奧而難知者, 是以平日畏之而不敢輕讀也.

 

조진숙에게 답함 答曹晉叔

 

[해제] 이 편지는 건도 3(정해년, 1167, 주자 나이 38)에 쓴 편지이다. 󰡔

 

()에 가깝다는 설에 대해서는 보내오신 편지의 내용이 진실로 온당하지 못합니다. 임택지의 설도 또한 잘못이 있습니다. 성인의 뜻을 가만히 궁구해 보니, 사람들에게 여기서 인()을 체득하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사람은 인을 구하는 데 있어서 가깝다는 것을 말했을 따름입니다. 비록 이러한 자질이 있다 해도 정말 모름지기 인을 구하는 공부를 실질적으로 해야만 그 가까운 곳을 실질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지 못하다면, 곧 모름지기 바로 잡고 길들여 이런 경지에 이른 뒤에라야 인에 가깝게 될 수 있고 공부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지 강하고 의젓하고 질박하고 어눌함네 글자만 붙들고서 상상하고 생각하기만 하면서 인()의 체()가 다가오기를 바란다면, 아마도 그런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近仁之說來喩固未安, 擇之說亦有病. 竊原聖人之意非是敎人於此體仁, 乃是言如此之人於求仁爲近耳. 雖有此質, 正須實下求仁功夫, 乃可實見近處. 未能如此, 卽須矯揉到此地位, 然後於仁爲近, 可下功夫. 若只守却剛毅木訥四字, 要想象思量出仁體來, 則恐無是理也.

 

 

 

임택지(용중)에게 답함 答林擇之(用中)

 

[해제] 이 편지는 건도 3(정해년, 1167, 주자 나이 38)에 쓴 편지이다. 󰡔년보󰡕건도 3년 정해년 38세 때, 7월에 숭안현에 큰 물난리가 일어나 부에 통지를 보내 수재 현장을 시찰했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편지는 정해년 7월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저는 숭안현의 수재로 인하여 여러 관아의 통지를 받고 현관과 백성들을 구호하는 일을 논의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산골짜기를 돌아다니다 열흘이 지난 뒤에 돌아 왔습니다. 대개 지금 고기를 먹는 높은 벼슬아치들은 멍하니 백성들의 일에 뜻이 없으니 정말 함께 일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무엇 때문에 얼굴이나 그림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이 학문이 분명하지 못하면 세상의 일에 대해 결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현승(縣丞) 왕씨(王氏)를 탄핵한 문자를 보니, 그는 파면될만 하더군요. 그리하여 하숙경이 그 일을 맡도록 힘써 천거하였습니다. 만약 하숙경이 천거 받아 여기에 오게 된다면, 재해를 조사하여 세금을 감면하는 등의 일련의 일에 마땅히 조리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재주가 부족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지금의 여러 사람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번 수재가 미친 곳이 넓지는 않았습니다만, 물이 발원(發源)한 곳은 모두 높은 산인데, 돌이 갈라지고 물이 넘쳐, 냇가의 전답은 다시는 동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돌 무더기가 되었고,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도 몇 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시골을 다니면서 떠내려 간 길을 보고 원통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서는 거의 마음을 다시 가눌 수가 없었답니다.

崇安水災, 被諸司檄來, 與縣官議賑恤事, 因爲之遍走山谷間, 十日而後返. 大率今時肉食者漠然無意於民, 直是難與圖事. 不知此箇端緖何故汨沒得如此不見頭影? 因知若此學不明, 天下事決無可爲之理. 王丞文字足罷去, 因力薦何叔京攝其事. 若得此人來, 將來檢放一段事須有條理. 但只恐才不足, 然終是勝今日諸人耳. 此水所及不甚廣, 但發源處皆是高山, 裂石涌水, 川原田畝無復東西, (4-2027)爲巨石之積, 死傷幾百人. 行村落間, 視其漂蕩之路, 聽其冤號之聲, 殆不復能爲懷. 云云.

보내오신 이선지의 기문은 문체 면에서 대단히 좋고, 취향도 아주 바릅니다. 다만 중요한 곳에서 자못 바르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인이 되고 의가 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로 말미암아 사용하겠습니까? 또한 만약 참으로 인의의 실질을 알았다면 以誠而意, 以正而心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와 비슷한 곳이 하나가 아니지만, 대개 이 곳은 더욱 중요한 곳인데, 이와 같다면 다른 것은 논할 것도 없습니다. 아마도 다시 지적할 곳이 있을 것 같으니, 편지를 보내오면 다시 논하여서 게으른 기질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所寄李先之記文體面甚佳, 趣向甚正, 但緊切處殊不端的. 只云此爲仁, 此爲義, 却何如便由此而用之? 且若眞知仁義之實, 則又不可云以誠而意, 以正而心. 此類非一, 大抵此是尤緊切處, 只如此, 他可勿論也. 恐更有可指處, 因來更論之, 以起惰氣也.

 

 

임택지에게 답함(答林擇之)2

 

[해제]이 편지는 건도 3(정해년, 1167, 주자 나이 38)에 임택지에게 쓴 두 번째 편지이다.

 

저는 어머님을 봉양하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옛날의 학문은 감히 그만둘 수 없는데, 확지와 의론할 수 있어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장경부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마침내 과실을 보는 설을 주로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다시 자세하게 생각해 보니, 이 설은 일에 크게 해가 되어 다시 편지를 써서 묻습니다. 확지가 베낀 초고를 올려 보냈는데,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호백봉이 도의 단서가 부부에서 시작된다[造端夫婦]’는 설에 대해 물어 왔는데, 뜻밖에 또한 일찍이 생각해보니, 이전보다 말에 겉돌고 지나친 곳이 있고, 꼼꼼하고 치밀하지 못하여 이제 이와 같이 답장을 씁니다. 확지 또한 이미 기록해 갔습니다.

 

奉養粗安. 舊學不敢廢, 擴之朝夕議論, 相助爲多, 幸甚. 敬夫得書, 竟主觀過之說. 因復細思, 此說大害事, 復以書扣之. 擴之錄得稿子奉呈, 不知擇之以爲如何也? 伯逢來問造端夫婦之說, 偶亦嘗思之, 前此說得汎濫, 不縝密, 今答之如此. 擴之亦已錄去矣.

 

요즈음 옛사람들의 공부하던 곳을 보았더니 매우 정밀해서, 일상생활에서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날 서로 만나게 되면 혹 조그마한 진보라도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近見古人下工夫處極是精密, 日用之間不敢不勉, 庶幾他時相見或有尺寸之進耳.

 

장경부가 또 편지를 써 제의를 이해시키고, 묘제절사는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선생께서는 모두 묘제가 의리를 해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또 사물을 절약하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옛 사람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시제에 그친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시절에 풍속에 따라 연음(燕飮)할 때 각각 그 물건을 사용하는데,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에도 대개 일찍이 이것을 사용했습니다. 이제 자손들이 이를 폐지하지 않으면서 조상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너무 옛 것을 어지럽힐까 걱정되어 살아계신 분을 모시는 뜻과 같이 다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옛 의례는 너무 草草하여 근래에 다시 고치고 삭제하였더니 제법 참고할만[볼만] 합니다. 한 해에 일곱 번 제사 지내는 것을 정제로 하고, 정원 초하룻날 이후로는 모두 고삭의 예를 사용하고, 융쇄(隆殺)의 예를 행할 때에 물건을 절약하여 올리는 것이 옛날의 의례보다 나을 것 같습니다. 너무 급해서 베껴 쓰지 못했습니다.

敬夫又有書理會祭儀, 以墓祭節祠爲不可. 然二先生皆言墓祭不害義理, 又節(4-2028)物所尙, 古人未有, 故止於時祭. 今人時節隨俗燕飮, 各以其物, 祖考生存之日蓋嘗用之. 今子孫不廢此, 而能恝然於祖宗乎? 此恐太泥古, 不盡如事存之意. 方欲相與反復, 庶歸至當, 但舊儀亦甚草草. 近再脩削, 頗可觀. 一歲只七祭爲正祭, 自元日以下皆用告朔之禮, 以薦節物於隆殺之際, 似勝舊儀. 便遽, 未及寫去.

 

 

임택지에게 답함[答林擇之]3

 

[해제] 이 편지는 건도 5(정해년, 1169, 주자 나이 40)에 쓴 편지이다. 주로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관계와 공부방법을 논의하고 있다.

 

저는 예전처럼 어른을 곁에서 모시고 지냅니다. 사록관을 두 번 청했는데, 만약 다시 청한 대로 되지 않는다면 마땅히 훈계하신 바와 같이 하겠습니다. 요사이 일은 말씀 드릴만한 것이 없습니다. 좌사에 제수된 것을 보건대, 기강이 문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만약 여러 분들이 놓아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한 번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장남헌을 초청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오히려 근접하기는 했습니다만, 끝내 쓰지 못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매우 많지만, 멀리 보내는 편지에 많은 말 하지 않으려 하니, 마음 속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위원리(元履)가 마침내 정승에게 쫓겨났습니다. 비록 그가 말을 많이 했지만 꼭 낱낱이 절도(節度)에 맞지는 않았고, 또 베낀 초고가 여러 곳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군을 위한 도모는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사대부가 말 때문에 쫓겨나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고, 또 숨어 사는 현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侍旁如昨. 祠官再請, 若更不得請, 當如所戒. 近事則無可說, 觀左史之除, 可見綱紀之紊. 但如諸公若不相捨, 不得不一行. 又聞亦有招致南軒之意, 果爾猶或庶幾, 但恐終不能用爾. 所欲言甚衆, 遠書不欲多談, 可黙會也. 元履竟爲揆路所逐, 雖其多言, 未必一一中節, 亦坐謄稿四出之故, 然其爲吾君謀也則忠. 士大夫以言見逐, 非國家美事, 亦使幽隱之賢難自進耳.

 

요즈음 장남헌의 편지를 받았는데, 여러 가지 설을 다 인정해 주었습니다. 다만 살펴 아는 것을 먼저 하고 함양(涵養)을 나중에 한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굳게 고집하고 있습니다.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에 관한 조리 또한 아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대개 옛날의 설을 갑자기 바꾸자면, 그래도 편안히 여기게 되기를 기다려야 될 뿐입니다.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는 것은 초학자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라 한 것은 진실로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미 장남헌에게 답장하여 이르기를, “임택지는 여기에 대해서 이론(異論)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전체에 걸쳐서 잡아 유지하고 두 단계로 나누지 않아야 일상생활에서 깊이 깨달아서 확고한 힘을 얻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일찍이 체험하신 적이 있는지요? 소강절(邵康節)이 이르기를, “만약 앞 시대의 성인이 몽매하고 인색함을 깨우쳐 주지 않았더라면 거의 인간 세상의 졸장부가 될 뻔하였네[若非前聖開蒙吝, 幾作人間小丈夫]” 라고 하였는데, 진실하도다! 이 말씀이여. 요사이 역전을 읽었는데, 음양과 강유의 도리에 대해 깨달아 헤아려 보았지만 아직 쉽게 그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두 단락의 의심되는 것 가운데 동정의 설은 대단히 좋습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에 대해서는 앞 편지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그 본체를 말하면 현명함과 어리석음, 어린애와 어른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한 것은 이미 그 쓰임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이전에 이러한 점을 깨달아 알지 못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보내오신 편지에 그 말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과 미발은 같지 않기 때문에 장차 움직임과 고요함으로 (설명하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라 하셨는데 애초에는 이러한 뜻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를 전적으로 하여 말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이미 발현하여 감통한 용은 그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이제 이전의 편지에서와 같이 정자의 뜻을 미루어 밝히려 한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분별하는데 힘을 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近得南軒, 諸說皆相然諾. 但先察識後涵養之論執之尙堅, 未發已發條理亦未甚明. 蓋乍易舊說, 猶待就所安耳. 敬以直內爲初學之急務, 誠如所諭. 亦已報南軒, 擇之於此無異論矣. 此事統體操存, 不作兩段, 日用間便覺得力, 嘗驗之否? 康節: ‘若非前聖開蒙吝, 幾作人間小丈夫.’ 誠哉是言! 近讀易傳, 見得陰陽剛柔一箇道理儘有商量, 未易以書見也. 兩段之疑, 動靜之說甚佳 : ‘赤子之心’, 前書已嘗言之. 謂言其體則無賢愚少長之別. 今曰赤子之心, 已是指其用而言之. 前此似亦未理會到此, 試爲思之, 如何? 來諭謂其言非寂然不動, 與未發不同, 爲將動靜做不好說, 似初無此意. 但言不專此而言, 則兼已發感通之用在其中耳. 今者只如前書推明程子之意, 則亦不須如此分別費力矣.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4

 

[해제] 이 편지는 건도 5(정해년, 1169, 주자 나이 40)에 쓴 편지이다.

 

여기에 이백간(李伯諫)이란 사람이 있는데, 전에는 선학(禪學)에 빠졌다가 최근에 문득 그것의 그릇됨을 조금 알았습니다. 어제 여기에 와서 며칠 머물었는데, 채계통(季通)도 왔기에 모여 극렬하게 논의를 하여 마지 않았더니, 드디어 옛날에 지녔던 습기(習氣)을 기꺼이 버리려 했습니다. 이 또한 아주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대개 그 사람은 자질은 본래 아름답고 성실한 마음으로 자기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하려 하였습니다. 비록 한쪽으로 빠지긴 했지만 매사에 있어 강구(講究)하여 의리에 맞는 것을 구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하늘이 명()한 본성(本性)이 공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오히려 옛날 견해에 연연해 하면서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이미 시원하게 벗어났습니다. 가상하게 여길만 합니다.

此有李伯諫, 往時溺於禪學, 近忽微知其非. 昨來此留數日, 蔡季通亦來會, 劇論不置, 遂肯捨去舊習. 此亦殊不易, 蓋其人資禀本佳, 誠心欲爲爲己之學. 雖一邊陷溺, 而每事講究, 求合義理, 以故稍悟天命之性非空虛之物. 然初猶戀著舊見, 謂不相妨. 今則已脫然矣, 可尙可尙!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5

[해제]

어제 진숙(晉叔)의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서 언급하기를, “강직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한 것이 인()에 가깝다.”는 것에 대해서 자네가인이란 사람이 천지의 요체天地之機要를 닮은 까닭으로 반드시 발현(發見) 처에서 신통하게 보아야 저절로 알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보면 사람들을 깨우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혹되게 한 것입니다. 진숙이 이 말에 의거하여 보내온 것은 와전되어 마땅하지 않으니, 그 말에 나아가 답하는 것이 더 온당할 듯합니다. 지금 써서 보낸 것이 다시 병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공자 문하에서 인을 구하는 공부는 단지 이와 같이 사실에 근거한 말일 뿐이어서, 후대에 추구한 많은 현묘함이 있지 않습니다. ‘신통(神通)’이라는 말에는 병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근본에 함양하는데 힘쓰지 않고 곧바로 발현 처를 보는 것은 더욱 온당하지 못합니다. “인이란 사람이 천지의 요체天地之機要를 닮은 까닭이다.”는 구절은 매우 좋지만, 단지 한 구절의 좋은 말일 뿐입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거는 그림卦影과 같은 것은 인을 모르는 자가 이해할 수 없으며, 인을 아는 자 또한 이 말과 같이 그것에 간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성현이 인을 말한 것은 이와 다릅니다. 󰡔논어󰡕󰡔맹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지요?

昨得晉叔書, 剛毅木訥近仁’, 云擇之嘗告以仁者, 人所以肖天地之機要, 須就發見處看得通神, 自然識得.’細看此說, 似非所以曉人, 乃所以惑人. 晉叔緣此說得來, 轉沒交涉, 不免就其說答之, 似稍平穩. 今謾錄去, 不知還更有病否? 孔門求仁功夫似只是如此著實說, 未有後來許多玄妙也. ‘通神之語, 恐亦有病. 况不務涵養本根而直看發處, 尤所未安. ‘仁者, 人所以肖天地之機要’, 此句極好, 然却只是一句好說話. 正如世俗所謂卦影者, 未知仁者定理會不得, 知仁者又不消得如此說與它. 要之聖賢言仁自不如此, 觀論語孟子可見矣. 如何如何?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6

 

[해제] 이 편지는 건도 5(정해년, 1169, 주자 나이 40)에 쓴 편지이다.

 

두 분의 질문에 답한 것은 매우 정밀하고 타당하더군요. 저도 일찍이 그들에게 답했지만, 다만 그 대략적인 것만 이야기했을 뿐, 이처럼 정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심보(深父)에게 논어』『맹자』『대학을 읽도록 권한 것은 그 뜻이 보내 오신 편지의 뜻과 같았습니다. 중궁(仲弓)에 관한 한 단락은 너무 박절합니다. 그의 기질과 식견과 정치(情致)가 미치는 바를 보건대, 이러한 엄격한 통제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숙(晉叔) 또한 스스로 덤덤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느낌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현승(縣丞) 하씨(何氏)에게서 요사이 편지를 받았는데, 또한 진보한 곳이 있지 않더군요. 그밖에 사람들은 소식을 듣지도 묻지도 못했습니다. 계통(季通)은 이틀 동안 꼬박 강론을 했는데, 편지를 부치려고 해도 겨를이 없습니다. 그는 결국 전일(專一)하지를 못하는데, 만약 이 병통을 이겨 통렬하게 공()을 들인다면 바야흐로 힘을 들이는 곳이 깊을 수 있다는 것으로써 그에게 말해 주려고 합니다만,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토록 마음이 어수선하여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면서 다시 다른 사람을 훈계하는 이런 누()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택지(擇之)와 만나서 보고 느끼고 훈계를 받고 유익함을 얻는 도움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때면 될 수 있을런지요. 우러러 그리워한다는 말이 헛말이 아닙니다.

所答二公問甚精當, 亦嘗答之, 只說得大槪, 不能如此之密. 然勸深父且看大學, 其意亦如所示也. 仲弓一段太迫切, 觀渠氣質與識致所及, 似禁不得如此鉗鎚也. 晉叔亦是自悠悠, 諸公覺得且如此. 何丞近得書, 亦未有進處, 餘則不聞問也. 季通兩日儘得講論, 亦欲附書, 未暇. 渠終是未專一, 若降伏得此病痛下, 方有可用力處. 已深告之, 未知如何. 終日憒憒, 自救不了, 更添得此累, 思與吾擇之相聚, 觀感警益之助, 何可得耶? 瞻仰非虛言也.

 

어제 보낸 편지에서 미발(未發)’에 대해 논한 것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틀 동안 생각해 보니 옛날에 말한 것이 의심이 갑니다. ()과 성()의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 않은데도, ‘미발(未發)’이발(已發)’을 배치를 한 것은 별로 온당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미발은 생각과 사물이 아직 접하지 아니한 때이니, 여기에서 성()의 체단(體段)을 볼 수가 있으므로 이것을 ()’이라고 할 수 있지마는 ()’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 절도(節度)에 맞는 것은 사려(思慮)와 사물이 이미 접한 때로서 그 이()를 다 얻은 것이므로 이것을 일러 ()’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발(已發)’미발(未發)’의 사이를 통관(通貫)하였으므로, 위대한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낳고 또 낳고 하여 유행(流行)하는 일동(一動)과 일정(一靜)의 전체(全體)”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정자(程子)의 유서(遺書) 가운데 기록된 바가 잘 살피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지금 이것으로써 고찰해 보니, 한 가지도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천하의 책들을 가벼이 읽어서는 안되고, 성현이 가르친 뜻은 쉽게 밝힐 수가 없고, 도체(道體)는 정미(精微)하여 쉽게 궁구(窮究)할 수 없다는 것이 정말이군요.

昨日書中論未發者看得如何? 兩日思之, 疑舊來所說於心性之實未有差, 未發已發字頓放得未甚穩當. 疑未發只是思慮事物之未接時, 於此便可見性之體段, 故可謂之中而不可謂之性也. 發而中節是思慮事物已交之際, 皆得其理, 故可謂之和而不可謂之心. 心則通貫乎已發未發之間, 大易生生流行, 一動一靜之全體也. 云云. 舊疑遺書所記不審, 今以此勘之, 無一不合. 信乎天下之書未可輕讀, 聖賢指趣未易明, 道體精微未易究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7

 

 

[해제] 이 편지는 건도 7(신묘년, 1171, 주자 나이 42)에 쓴 편지이다.

 

태산(太山)이 높다지만 태산의 꼭대기는 이미 태산에 속하지 않는다정자(程子)가 한 이 말은 도체(道體)는 다함 없고, 일은 비록 커도 결국은 한계가 있을 따름임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글에서 말한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 “이미 얻은 뒤에는 모름지기 열어 펼쳐야 한다라는 말은, 모름지기 꼭 열어 펼쳐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고, 다만 이미 얻은 바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넓어지고 규모(規模)가 넓게 열리는데,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곧 얻은 바가 있지 않은 것과 같아, 다만 붙들고 있는 것만 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열어 펼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가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의 징험(徵驗)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모름지기 열어 펼치게 한다고 말한다면, 크게 일을 해치는 것입니다. 상채(上蔡)가 주공숙(周恭叔)을 논하기를, “열어 펼치는 것이 너무 조급하다라고 했는데, 이 말에도 역시 병통이 있습니다. 상채(上蔡)“‘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라는 말에서 천리(天理)를 살핀다라고 말했는데, 이말은 중용본문의 ()’와는 가리키는 바가 다릅니다. 상채가 또, “곧 요순(堯舜)의 기상(氣象)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했는데, 이 역시 다만 천리(天理)의 자연스러움만 보았지, 번거롭게 생각하고 힘쓰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실제로 이런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다시 많은 공부(工夫)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상채의 이 말 역시 쾌활함을 해치는가 의심스럽습니다. 요즈음 글의 뜻을 음미하면서 그 뜻을 찾노라니, 성문(聖門)의 학문이 실질적(實質的)인 것에 나아간 것을 점점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게으름 피우고 일을 팽개쳐 저의 뜻대로 될 수 없을 따름입니다.

太山爲高矣, 太山頂上已不屬太山’, 此喩道體之無窮, 而事業雖大, 終有限量爾. 故下文云云, 意可見也. 又旣得後須放開, 此亦非謂須要放開, 但謂旣有所得, 自然意思廣大, 規模開廓. 字如用. 若未能如此, 便是未有所得, 只是守爾. 蓋以放開與否爲得與未得之驗, 若謂有意須放敎開, 則大害事矣. 上蔡周恭叔放開忒早, 此語亦有病也. ‘鳶飛魚躍, 察見天理’, 正與中庸本文字異指. ‘便入堯舜氣象’, 亦只是見得天理自然, 不煩思勉處爾. 若實欲到此地位, 更有多少功夫而可易其言耶? 上蔡此語亦傷快也. 近來玩索, 漸見聖門進趣實地, 但苦惰廢, 不能如人意爾.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해제] 이 편지는 건도 7(신묘 1171), 주자 나이 42세 때 쓴 편지다. 앞 편지에 이어서 도체(道體)의 무궁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장흡부가 처한 상황을 알고 싶어하는 내용이다.

 

죽척(竹尺) 하나로 번거롭겠지만 하지 날에 옛날 제도의 입표(立表)에 의거하여 그 날의 그림자를 재서 그 길고 짧음을 자세하게 헤아려서 보여주십시오. 제가 주해한 맹자의 설은 번거롭겠지만 바로 정정하려고 하니 만나서 직접 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여러 차례 편지를 통해 강론한 것은 또한 만나 뵙고 논의하기를 기다립니다. 다만 사현도가 이억한 말 가운데 몇 단락은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좋습니다. 다만 태산의 꼭대기는 이미 태산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체(道體)의 무궁함을 논한 것이니, 사엄이 비록 원대하다해도 마침내 한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문장에서 뜻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장흠부에게서는 봄이 왔어도 아직 편지가 없는데, 작년에 자주 임금을 뵈었고, 임금의 뜻도 그에게 향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매서운 추위와 가시덤불에 갇힌 것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서 (그를) 아끼면서도 도울 수가 없으니 마침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장(鄭丈)은 지극히 성실하고 선을 좋아하여 당시에 나이가 어렸지만 반드시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덕성과 기품이 순수하고 조용하며 (인품이) 후중(厚重)해서 또한 아름답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竹尺一枚, 煩以夏至日依古法立表以測其日中之景, 細度其長短示及. 孟說正欲煩訂正, 俟見面納. 向來數書所講, 亦倂俟面論. 但顯道記憶語中數段, 子細看皆好, 太山頂上已不屬太山’, 此但論道體之無窮, 而事業雖大, 終有限量耳. 故下文云云, 意可見矣. 欽夫春來未得書, 聞歲前屢對, 上意甚向之. 然十寒衆楚, 愛莫助之, 未知竟何如耳. 鄭丈至誠樂善, 當時少比, 必能相親. 其德器粹然, 從容厚重, 亦可佳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9

 

[해제] 이 편지는 건도 6(경인 1170), 주자 나이 41세 때 쓴 편지다. 주로 지경(持敬)공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요사이 친구들과 강론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숙경(何叔京)존심주경(存心主敬)’의 문제를 변론한 것을 가리킨다.

 

요사이 친구들과의 강론(講論)을 통해서 요즈음 세상의 배우는 사람들의 병통에 대해서 깊이 궁구해 보니, 결국 지경(持敬) 공부가 결핍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일마다 체계가 없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습니다. ()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다만, ‘능히 이 마음을 유지하면 저절로 이치에 맞을 수 있다라고만 말할 뿐, 용모나 말투에 이르러서는 왕왕 전혀 공을 들이지 않으니, 설령 이렇게 유지할 수 있다 할지라도 석씨(釋氏)나 노자(老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상채(上蔡)의 설()에도 이런 병통이 있다.) 하물며 마음이란 어두워서 분명하지 못한데 반드시 진실로 보존될 있겠습니까??

比因朋友講論, 深究近世學者之病, 只是合下欠却持敬工夫, 所以事事滅裂. 其言敬者, 又只說能存此心, 自然中理. 至於容貌詞氣, 往往全不加工. 設使眞能如此存得, 亦與釋老何異? 上蔡說便有此病了. 又況心慮荒忽, 未必眞能存得耶?

 

정자(程子)께서 말하기를, “()은 정제(整齊)엄숙하고 의관을 바로잡고 보는 바를 존엄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라고 했고, 다리를 쭉 뻗고 앉았으면서도 마음이 거만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말해야 곧 지극한 논의인데,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이야기하면서 평범하게 ()’자 위에서 이야기했는데, 매양 마음에 시원하지 않으면 반드시 ()’자를 ()’자라고 뜻을 풀이한 뒤에라야 그만 두었습니다. 이제 성인의 교육방법이 정미(精微)하고 치밀하여 범상한 심정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즈음맹자설(孟子說)을 대략 정리하였는데, 맹자만이 바로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늘 교훈을 남기는 것이 극도로 위험한 곳에까지 이른 뒤에라야 바야흐로 한 번 전환을 하고 전환을 한 뒤에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바로 뚜렷하게 구별이 되니, 천명(天命)을 받고 세상에 태어난 재주로서 도()를 보는 것이 극히 분명하지 않으면, 이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또한 뛰어난 기질이 일을 해치는 곳이고, 재주가 높아 의거(依據)할 데가 없는 곳이니, 배우는 사람들이 몰라서는 안됩니다.

程子言敬, 必以整齊嚴肅正衣冠尊瞻視爲先, 又言未有箕踞而心不慢者, 如此乃是至論. 而先聖說克己復禮, 尋常講說於字每不快意, 必訓作字然後已. 今乃知其精微縝密, 非常情所及耳. 近略整頓孟子, 見得此老直是把得定, 但常放敎到極險處, 方與一斡轉, 斡轉後便見天理人欲直是判然. 非有命世之才, 見道極分明, 不能如此. 然亦只此便是英氣害事處, 便是才高無可依據處, 學者亦不可不知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0

 

[해제] 이 편지는 건도 6(경인 1170), 주자 나이 41세 때 쓴 편지다. 앞 편지와 마찬가지로 지경(持敬)공부를 다루고 있다.

 

저는 슬프고 애닯은 나머지 바깥의 다른 유혹은 없습니다. 날마다 매섭게 저 자신을 단속하다 보니, ‘()’자의 공()이 친절하고 중요하고 정묘(精妙)하다는 것을 알았고, 전날에는 여기에 공력(功力)을 들일 줄은 모르고 한갓 입과 귀를 가지고서 시간만 낭비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인욕이 멋대로 흘러 천리(天理)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일을 생각해 보니, 경악하여 몸이 떨리도록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哀苦之餘, 無他外誘, 日用之間痛自歛飭, 乃知敬字之功親切要妙乃如此. 而前日不知於此用力, 徒以口耳浪費光陰, 人欲橫流, 天理幾滅. 今而思之, 怛然震悚, 蓋不知所以措其躬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1

 

[해제] 이 편지는 건도 5(기축 1169), 주자 나이 40세 때 쓴 편지다. 이 편지에서 여공(呂公)의 가전(家傳)은 깊이 사람을 훈계하고 깨우쳐 주는 곳이 있습니다. 선배들의 함양하는 공부가 깊고 두터움이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별집󰡕여섯번 째 편지에서도 여공의 가전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당연히 기축년(1169)에 쓴 것이다.

 

 

안자(顔子)와 맹자의 같지 않은 곳을 논한 것은 매우 좋습니다. 매우 좋습니다. 바로 이 다른 점의 세세한 내용을 보려고 해야만 비로소 막힘이 없을 따름입니다. 요즈음 생각해 보니, 또한 이렇게 공력(功力)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저가 요즈음 여기에 나아가서 접 때 보지 못했던 뜻을 보게 되었고, 이에 간직하기를 오래 하면 저절로 밝아지는데 어찌 궁구하여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정자의 말씀이 진실로 사람을 속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간직하기를 능히 오래 하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이런 징험(徵驗)이 있는데, 하물며 진실로 능히 오래도록 간직함에랴? 다만 마땅히 더욱 노력하여 감히 그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늦추지 말아야 할 따름입니다.  

所論不同處, 極善極善, 正要見此曲折, 始無窒礙耳. 比來想亦只如此用功. 近只就此處見得向來所未見底意思, 乃知存久自明, 何待窮索之語是眞實不誑語. 今未能久, 已有此驗, 況眞能久邪? 但當益加勉勵, 不敢少弛其勞耳.

 

졸재(拙齋)가 화답(和答)한 시는 장중(莊重)하고 화평(和平)하여 그 시를 읽으면 마치 그 사람을 만나 본 듯합니다. 번거롭겠지만 저를 위해서 감사하는 뜻을 잘 전해 주십시오. 장자(莊子)에 관한 시도 모두 음미할만 합니다만, 다만 여기에 온통 마음을 쏟는 것이 애석할 뿐입니다. 아마도 논어,맹자, 정자(程子)의 책이 평이(平易)하고 진실되어서 더욱 재미가 있을 것인데, 종전에는 이런 책들을 철저히 음미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졸재(拙齋)가 이런 장자(莊子)같은 곳을 지향하여 생계로 삼는 것 같습니다. 참람하게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지 못하노니, 번거롭겠지만 택지(擇之)께서 이런 마음을 전달해 주십시오.

拙齋和篇莊重和平, 讀之如見其人, 煩爲多致謝意. 莊子詩亦皆有味, 但可惜只玩心於此耳. 竊恐論語孟程之書平易眞實處更有滋味, 從前咬嚼未破, 所以向此作活計. 然不敢僭易獻此說, 顧無以謝其不鄙之意, 只煩擇之從容爲達此懷也.

 

여공(呂公)의 가전(家傳)은 깊이 사람을 훈계하고 깨우쳐 주는 곳이 있습니다. 선배들의 함양(涵養)의 공부가 깊고 두텁기가 이러하였습니다. 다만 그 학문을 논한 것은 병통(病痛)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 부문(部門)을 주로 하지 않고, 한 가지 설()만 사사로이 취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 같은 것은 넓지만 잡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빠른 길로 성인(聖人)의 경지에 나아간다라고 말한 것 같은 것은, 요약되었지만 고루(固陋)합니다. 이 두 가지만 예로 들어도 본말(本末)에 다 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이단(異端)의 학문에 흘렀으면서도 스스로 그 잘못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맨 마지막에 불교의 학문에 대해서 논했지만, 더욱 놀라고 탄식스럽습니다. 정씨(程氏) 문하의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다만 유자(儒者)와 석씨(釋氏)의 같지 않은 곳을 보려는 것인데, 여공(呂公)은 정씨(程氏)에게 배워, 마음으로는 바로 성인의 경지에 나아가려고 평생의 힘을 다 쏟으면서도, 이에 도리어 부처와 성인의 합치되는 것을 보니, 어찌 매우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무릇 그 자질(資質)이 순수하고 아름답고, 함양(涵養)이 깊고 두터워, ()에 어긋나지 않는구나 했더니, 궁리(窮理)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오류가 이와 같아 세상에 흘러 전하게 되어, ()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선택할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로 인해서 그릇되게 만들겠습니다. 대개 가라지가 곡식 싹을 어지럽히거나 보라색이 붉은 색을 어지럽히는 것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呂公家傳深有警悟人處, 前輩涵養深厚乃如此. 但其論學殊有病. 如云不主一門, 不私一說’, 則博而雜矣. 如云直截勁捷, 以造聖人’, 則約而陋矣. 擧此二端, 可見其本末之皆病. 此所以流於異學而不自知其非耶? 而作此傳者, 又自有不可曉處. 如云雖萬物之理本末一致, 而必欲有爲’, 此類甚多, 不知是何等語. 又義例不明, 所載同時諸人或名或字, 非褒非貶, 皆不可考. 至如蘇公, 則前字後名, 尤無所據. 豈其學無綱領, 故文字亦象之而然邪? 最後論佛學, 尤可駭歎. 程氏之門千言萬語, 只要見儒者與釋氏不同處. 呂公學於程氏, 意欲直造聖人, 盡其平生之力, 乃反見得佛與聖人合, 豈不背戾之甚哉夫以其資質之粹美, 涵養之深厚如此, 疑若不叛於道, 而窮理不精, 錯謬如此, 流傳於世, 使有志於道而未知所擇者坐爲所悞, 蓋非特莠之亂苗紫之亂朱而已也. 奈何奈何

 

임택지에게 답함(答林擇之)

 

 

[해제] 이 편지는 건도 6(경인년, 1170, 주자 나이 41)에 쓴 편지다.

 

당신이 논하신 것들이 대체로 모두 맞습니다만, 제 생각에 미진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몸에 꽉 찬 것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몸에서 이 이치가 꽉 찬 곳을 가리킨 것으로 가장 친절합니다. 만약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곧 만물이 나와 한 몸이 되어 더 이상 안팎의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도리어 몸 밖에서 찾게 되니, 넓고 넓어서 더욱 교섭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경졍이 내가 보는 천지 만물 모두가 나의 본성이니, 더 이상 내 몸만이 내가 아님을 안다.’고 말하자, 이천선생이 다른 사람이 배부르게 먹으면, 그대는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가?’라고 말씀하였으니, 바로 이 문제를 설파한 것입니다. 󰡔지언󰡕에도 석씨(불교)는 끝없는 허공의 세계를 자신의 몸이라 여기고, 부모가 낳아준 몸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니, 역시 이 문제를 설명한 것입니다.

所論大抵皆得之, 然鄙意亦有未安處, 滿腔子是惻隱之心’, 此是就人身上指出此理充塞處, 最爲親切. 若於此見得, 卽萬物一體, 更無內外之別. 若見不得, 却去腔子外尋覓, 則莽莽蕩蕩, 愈無交涉矣. 陳經正: ‘我見天地萬物皆我之性, 不復知我身之爲我矣.’ 伊川先生: ‘他人食飽, 公無餒乎?’ 正是說破此病. 知言亦云: ‘釋氏以虛空沙界爲己身, 而不敬其父母所生之身, 亦是說此病也.

 

하은주 시대의 역법(曆法: 正朔)을 원사(元祀) 12월로 고찰해보면, 상나라 사람들은 건축(建丑)의 달로 한 해의 처음을 삼고서 달의 이름(月號)를 고치지 않았습니다. (()도 반드시 개정하지 않았습니다.) 󰡔맹자󰡕78, 1112의 설로 고찰해보면, 주나라 사람들은 건자(建子)의 달을 정월로 삼고 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달을 바꾼 사람은 後王之彌文. ()를 바꾸지 않은 것은 천시는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와 전렵에는 오히려 하나라의 시()를 정월로 삼았습니다.) 󰡔상서󰡕‘1월 무오일, 4월 재생명(哉生明)과 같은 종류로 살펴보면, 옛날의 사서에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정자가 천시(天時)를 빌려 의()를 세운다 운운한 것으로 살펴보면, 공자가 󰡔춘추󰡕를 지을 때에 년도에 이 네 글자를 특별히 써서 하나라의 시()를 행하는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만약 󰡔호전(胡傳)󰡕의 설과 같다면, 주나라 역시 달을 바꾸지 않았고, 공자께서는 특별히 하나라가 정월로 삼은 건인(建寅)의 달을 한 해의 처음으로 하고, 달 아래에 기록한 일은 도리어 주나라의 정월인 건자(建子)의 달의 일이 됩니다. 이로부터 달과 일 사이에 항상 서로 두 달 차이가 난 것입니다. 아마 성인의 제작한 뜻이 이와 같이 어지럽고 또 번거롭지 않을 것이며, 성인이 제작한 것 역시 이와 같이 무질서하고 법도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견해는 이와 같습니다. 유질부의 설을 살펴보아도, 선서(先書)춘왕정월(春王正月)’과 후서(後書) 242년의 일은 모두가 천리이다고 했으니, 아마도 ()’자를 공자께서 더하신 것으로 본 것 같습니다. (‘()’자 역시 사책의 구문이 아닙니다.) 다만 노나라의 사서에서는 본래 󰡔춘추󰡕라고 했고, 또 원래 이 (춘추라는) 글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원개의 󰡔좌전후서󰡕에 실려 있는 급총의 󰡔죽서󰡕는 진나라 사서인데, 이 책에서는 도리어 하나라의 정월인 건인의 달로 해의 처음을 삼고 있으니, 아마도 호씨의 설을 근거로 삼은 것 같습니다. 이 곳에는 󰡔죽서󰡕라는 책이 없어서 졸재에게 부탁했는데, 혹시 이 책이 있으면, 1-2년 정도 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한서󰡕원년(元年) 겨울 10에 대해 주석가들은 무제가 하나라의 역법으로 바꾸어 사용한 이후라고 했고, 사관들은 그 일을 바로잡았는데,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번거롭겠지만, 이것도 자세하게 살펴주십시오.

三代正朔, 以元祀十有二月考之, 人但以建丑之月爲歲首而不改月號 : 時亦必不改也. 孟子八月, 十一月十二月之說考之, 人以建子之月爲正月而不改時. 改月者, 後王之彌文. 不改時者, 天時不可改, 故祭祀田獵猶以時爲正. 一月戊午, 厥四月哉生明之類考之, 則古史例不書時. 程子假天時以立義之云考之, 則是夫子作春秋時特加此四字以繫年, 見行時之意. 若如胡傳之說, 則是亦未嘗改月, 孔子特以正建寅之月爲歲首, 月下所書之事, 却是正建子月事. 自是之後, 月與事常相差兩月. 恐聖人制作之意不如是之紛更煩擾, 其所制作亦不如是之錯亂無章也. 愚見如此, 而考之劉質夫, 亦云先書春王正月而後書二百四十二年之事, 皆天理也, 似亦以字爲夫子所加. 字亦非史策舊文. 史本謂之春秋, 則又似元有此字. 杜元凱左傳後序汲冢竹書國之史, 却以正建寅之月爲歲首, 則又似胡氏之說可爲據. 此間無竹書, 煩爲見拙齋扣之, 或有此書, 借錄一兩年示及, 幸甚幸甚漢書元年冬十月’, 注家以爲武帝改用時之後, 史官追正其事, 亦未知是否. 此亦更煩子細詢考也.

 

()의 소리가 혹 웅장하기도 하고 혹은 덜 하기도 하며 맑음과 탁함이 수만 갈래이며, 옥 소리의 맑음이 더욱 화평하여 처음과 끝이 한결 같습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작곡함에 여덟 음이 능히 조화를 이룹니다. 비록 선후가 없는 것 같지만 금으로써 연주하고 옥으로써 조절하니, 그 순서 역시 문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그 변화를 다하는 것이고, 그것을 조절하는 것은 그 법도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변화는 비록 다양하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하나 아닌 적이 없고, 완성하는 것은 비록 하나이지만, 그것이 거치는 변화의 웅장함과 섬세함, 맑음과 탁함은 지극한 하나의 가운데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성인의 지혜는 거칠고 정밀함, 크고 작음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성인의 덕은 거칠고 정밀함, 크고 작음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으니, 그 시작과 끝이 서로 이루어줌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이것이 금으로 소리를 퍼뜨리고 옥으로 거두는 것으로 공자의 집대성을 비유하고 세 현자가 이와 같은 공자의 경지에 참여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그 온전함에서 그 치우침을 논하면, 웅장하되 섬세하지 못하고, 맑되 탁하지 못하는 것이 그 금성(金聲)의 불비함입니다. 금성(金聲)을 갖추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옥으로 거두는 것은 비록 그 거두는 바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한 번 온전하고 한 번 온전하지 못함을 진작하는 것은 그 옥의 소리 역시 같을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내주신 편지와 큰 틀은 같지만 구체적인 내용의 다른 점입니다. 다시 자세히 살펴주시고 알려주십시오.

金聲或洪或殺, 淸濁萬殊, 玉聲淸越和平, 首尾如一. 故樂之作也, 八音克諧, 雖若無所先後, 然奏之以金, 節之以玉, 其序亦有不可紊者焉. 蓋其奏之也, 所以極其變也 : 其節之也, 所以成其章也. 變者雖殊, 而所以成者未嘗不一 : 成者雖一, 而所歷之變洪纖淸濁, 亦無所不具於至一之中. 聖人之知, 精粗大小無所不周 : 聖人之德, 精粗大小無所不備, 其始卒相成蓋如此. 此金聲而玉振之所以譬夫孔子之集大成, 而非三子之所得與也. 然卽其全而論其偏, 則洪而不能纖, 淸而不能濁者, 是其金聲之不備也. 不能備乎金聲而遽以玉振之, 雖其所以振之者未嘗有異, 然其所振一全一闕, 則其玉之爲聲亦有所不能同矣. 此與來喩大同小異, 更請詳之, 却以見告.

 

중니는 무엇을 배웠는가?’ 이 문단에 대한 구설은 너무 고원합니다. 문장의 의미를 자세히 새겨보면, 문와 무왕의 도는 단지 선왕의 예악과 형정교화와 문장을 가리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문무라 했고,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도의 본체를 논하는 경우였다면 이와 같이 입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번 탐구하신 설명은 의미가 지나치게 고원하니, 이 한 구절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이광조 역시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헛수고이니, 모든 곳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의미가 깊고 장구함만 같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성인이 배우지 않을 수 없고 스승을 두지 않을 수 없는 바로써 일관하여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본령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요즘의 잡다하게 박식한 학문이 되어버려 공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공의 대답이 마치 겸손한 말인 것 같지만, 그가 공자를 추존하는 뜻은 숨길 수 없습니다.

仲尼焉學’, 舊來說得太高. 詳味文意, 文武之道只指先王之禮樂刑政敎化文章而已, 故特言文武’, 而又以未墜於地言之. 若論道體, 則不容如此立言矣. 但向來貪說箇高底意思, 將此一句都瞞過了. 李光祖雖亦曲爲之說, 然費氣(4-2038), 似不若四平放下意味深長也. 但聖人所以能無不學無不師而一以貫之, 便是有箇生而知之底本領. 不然, 則便是近世博雜之學, 而非所以爲孔子. 子貢之對雖若遜辭, 然其推尊之意亦不得而隱矣.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3

  

산을 유람할 계획으로 행장을 꾸리고 필요한 사람을 구하고 날짜를 잡았습니다. 백공(伯恭)의 편지를 받아 보니, 도리어 이 곳으로 오고 싶다기에, 드디어 다시 중도에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산수에 대한 흥취는 비록 잊을 수가 없지만, 문을 닫고서 일을 더는 것도 꼭 좋지 않은 것은 아니랍니다.

遊山之計, 束裝借人, 行有日矣. 伯恭, 却欲此來, 遂復中輟. 山水之興雖未能忘, 然杜門省事, 未必不佳也.

 

반장(潘丈)의 정사(政事)는 민중(閩中)에서 제일입니다. 그처럼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요즈음 세상에서 정말 견줄 데가 적습니다.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단숙(端叔), 접때 흠부(欽夫)를 만났더니, 칭찬하더군요. 공숙(恭叔)은 어제 건녕부(建寧府)에서 한 번 만나 보았는데, 바빠서 견해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가 세속의 고묘(高妙)한 헛된 이야기에 현혹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저 높은 것을 좋아하고 빨리 이루려고 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들에게 두루 있는 병통입니다. 이런 헛된 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고묘한 이론을 세우지만 노력은 하지 않고, 높은 것을 좋아하고 빨리 이루려는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런 설을 들은 사람들은 기꺼이 따르면서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늘 실제 사물을 버리고 경전의 장구를 벗어나 허황되고 어둡고 막막한 가운데서 헤매고 다닙니다. 사실에 있어서는 선학(禪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하자, 우리 유학에 의탁하여 선학을 공부했다는 이름을 조금 피하려는 것일 따름입니다. 도학은 밝혀지지 않는데, 변괴(變怪)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 세상을 속이고 풍속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후생(後生) 가운데서 뜻이 있는 사람들이 끌려 들어가 사악하고 망령된 데로 빠져 들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으니, 깊이 슬프고 두렵습니다. 그대는 이미 그의 초청에 응하였으니, 요컨대 마땅히 그를 열어 깨우쳐 절대 거기에 현혹됨이 없도록 하는 것이, 그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도 전에는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병폐가 자못 있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뜻을 낮추어, 평실(平實)한 곳을 향해서 푹 젖어 들어 음미하는 공력(功力)을 들여,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뜻이 조금도 없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되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되는 두 가지의 공에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潘丈之政爲中第一, 其愛民好士, 近世誠少比, 恨未識之耳. 端叔向見欽夫稱之, 恭叔昨在建寧得一見, 匆匆不能款, 然知其惑於世俗高妙之虛談矣. 大抵好高欲速, 學者之通患, 而爲此說者立論高而用功省, 適有以投其隙. 是以聞其說者欣然從之, 唯恐不及, 往往遺棄事物, 略脫章句, 而相與馳逐於虛曠冥漠之中. (4-2039)實學禪之不至者, 而自託於吾學以少避其名耳. 道學不明, 變怪百出, 以欺世眩俗, 後生之有志者爲所引取, 陷於邪妄而不自知, 深可悼懼也. 擇之旣從其招致, 要當有以開之, 使決然無惑於彼, 乃爲不負其相向之意. 擇之向來亦頗有好奇自是之弊, 今更當虛心下意, 向平實處加潛玩浸灌之功, 不令小有自主張之意, 則自益益人之功庶乎其兩進矣.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4

보여 주신 의의(疑義)는 이미 대략 보았습니다. 단숙(端叔)과 공숙(恭叔)이 편지를 보내 주었으니, 그 뜻에 아주 감격합니다. 다만 이와 같이 공부하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요컨대 모름지기 이 일[도학, 유학]을 하나의 일상적인 일로 보아 소박하고 실제적인 곳에서부터 해나가 오래되면 자연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꼭 괴이하고 특수한 것을 모방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친구들과 서로 모여 만나 이야기하고 눈으로 보고 알면, 도움되는 바가 이미 많을 것입니다. 어찌 꼭 이처럼 마음을 수고롭게 하면서 종이와 붓을 놀린 뒤에라야 강학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수고롭고 힘만 들고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기상도 좋지 않습니다. 그 잘못된 영향의 폐단은 장차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작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所示疑義已略看. 端叔恭叔惠書, 極感其意. 但如此用功, 鄙意不能無疑. 要須把此事來做一平常事看, 樸實頭做將去, 久之自然見效, 不必如此大驚小怪, 起模畫樣也. 且朋友相聚, 逐日相見, 晤語目擊, 爲益已多, 何必如此忉忉, 動形紙筆, 然後爲講學耶? 如此非惟勞攘無益, 且是氣象不好, 其流風之弊, 將有不可勝言者. 可試思之, 非小故也.

 

그 중간에 논의한 것 가운데서 조존(操存)’함양(涵養)’을 굳이 선후로 나누려고 하셨는데, 이는 그리 핵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원례(元禮)가 홀연히 마음은 일찍이 펼친 적이 없다는 한 구절을 만들어 내고 드디어 이에 입각하여 끝없는 지엽적인 것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제 애쓰고 애써 이 한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일상생활의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에 무슨 중요하고 절실한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하고 싶어 하는 선의 경우, 지난번의 설명은 지나치게 고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단숙의 논의가 비록 잘못되었지만, 당신 역시 올바르지 않았습니다. 확지가 자기가 이미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를 알려주었다고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시 이러저러하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책 끝 부분의 두 문단은 매우 좋고, 설명도 대체로 온당하니 자연스럽게 그에 따라 실천하여도 괜찮을 것이요 매우 위태로운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또 두 분이 논의한 하고자하는 선의 경우, 어느 곳이 안착하려는 곳입니까?

其間所論操存涵養苦要分別先後, 已是無緊要 : 元禮忽然生出一句心有未嘗放者’, 遂就此上生出無限枝葉. 不知今苦苦理會得此一句, 有甚緊切日用爲己(4-2040)功夫處耶? 又如可欲之善, 向來說得亦太高了, 端叔所論雖失之, 擇之亦未爲得也. 擴之云已子細報去, 此不復縷縷矣. 卷尾二段却好, 大抵說得是當, 自然放下穩帖, 無許多枝蔓臲陧處. 且如二公所論可欲之善, 是欲向甚處安頓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5

  

인하지 못한 사람은 오랫동안 곤궁한 데 처할 수 없으며 장구하게 즐거움에 처할 수 없다는 부분에서, 뒤의 설명이 맞습니다. 대개 군자로서 인하지 못한 사람은 있지만, 소인으로서 인한 경우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인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 단지 그 실수에 얕고 깊음과 짧고 장구함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대개 성인의 말씀이 두루뭉술하지만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배우는 이는 말씀 가운데의 자세한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不仁者不可以久處約長處樂, 後說得之. 蓋君子而不仁者有矣夫, 未有小人而仁者也. 此皆所謂不仁者, 但所失亦有淺深久速之差耳. 大抵聖人之言雖渾然, 無所不包, 而學者却要見得中間曲折也.

 

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좋아하는 것을 바꿀 수 없으니, 바라는 것도 스스로 바라는 것입니다. 불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 불인한 것을 자기 몸에 가해지지 못하게 하니, 가하는 것도 스스로 가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더 이상 더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의미가 아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내가 여기에서 불인을 미워하는데, 또 어떻게 그가 又安能必彼之不見加乎? 인에 힘쓰는 것도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자도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만약 인을 좋아하고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지위는 높아서 곧바로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예기󰡕욕심이 없이 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두려움이 없이 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천하에 한 사람 뿐이다고 했으니, 바로 이 뜻입니다.

好仁者無以易其所好, 則尙自尙也. 惡不仁者不使加乎其身, 則加自加也. 若謂人不能加尙之, 恐未遽有此意也. 兼我方惡不仁於此, 又安能必彼之不見加乎? 用力於仁, 又是次一等人, 故曰蓋有之矣. ’若好仁惡不仁之人, 則地位儘高, 直是難得. 禮記無欲而好仁, 無畏而惡不仁者, 天下一人而已’, 正是此意.

 

조교는 식견이 낮았고, 또 부귀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맹자가 그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알려준 것은 매우 친절했고, 끝내 거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이로 인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힘써 실천하여 스스로 체득한다면, 맹자께서 자기를 깊이 계발하였음을 알 것입니다. 생각해보건대, 조교는 반드시 하지 않을 뿐입니다.

曹交識致凡下, 又有挾貴求安之意, 孟子拒之. 然所以告之者, 亦極親切, 非終拒之也. 使其因此明辨力行而自得之, 則知孟子之發己也深矣. 必不能(4-2041).

 

자사와 설류의 일에 머물지 않음과 도를 행함의 구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목공이 자사를 머물게 하려는 것은 성의에서 나온 것이고, 지금 손님이 온 것은 왕명이 있어서가 아닐 뿐입니다.

子思泄柳之事, 恐無空留行道之別. 但謂穆公之留子思出於誠意, 今客之來, 非有王命耳.

 

정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뜻도 하나이고 기도 하나이다. 전일의 의미이다. 만약 뜻이 매우 치우쳐 있다면, 어떻게 기가 부동할 수 있겠는가? 기가 전적으로 기쁨과 노여움 속에 놓여 있다면, 어찌 뜻이 부동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이 설명에 의거해야 합니다. 보내주신 편지의 이 부분은 모두 좋습니다. 다만 이 구절은 거꾸로 설명되어 있어서 본문의 아래 구절과 상응하지 못합니다.

程子有言: ‘志一氣一, 專一之意. 若志專在深僻, 豈不動氣? 氣專在喜怒, 豈不動志?’ 當只依此說. 來喩此一段皆好, 但此兩句正倒說, 却與本文下句不相應耳.

 

󰡔상복전󰡕을 살펴보니, 출모(出母)의 복기에 대해, 아버지의 후계자만 복을 입지 않을 뿐입니다. 자사는 이 일을 알지 못했고, 아울러 오륭(汚隆)의 설 역시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기록한 사람의 잘못이겠지요.

喪服傳, 出母之服期, 但爲父後者無服耳. 子思此事不可曉, 兼汙隆之說亦似無交涉, 或記者之誤與.

 

누워있던 깔자리를 바꾼 일은, 증자 자신의 말에 의거하면, 알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계손이 보내줘서 사용하였으니, 비록 복잡한 사연이 있다하더라도, 끝내 잘못이 없다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부축하여 바꾸였으니, 곧바로 그 잘못은 없어진 것입니다.

易簀事據曾子自言, 則非不知者. 蓋因季孫之賜而用, 雖有所緣, 然終是未能無失. 但擧扶而易之, 當下便冰消凍釋耳.

 

()에 질()이 없을 수 없으니, ()에 문()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질박하기만 하고 문()하지 않으면, 호랑이와 표범의 털 없는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다.’()’에 대한 설명은 구설을 따라야 할 것이니, 보내주신 글을 자세히 보니 도리어 문장의 뜻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文之不可無質, 猶質之不可無文, 若質而不文, 則虎豹之鞹猶犬羊之鞹矣.’ ‘須依舊說, 細看來喩, 却覺文義不通.

 

하늘은 성()으로써 만물에게 명령하고, 만물은 성()으로 하늘을 따른다고 한 이 말은 참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만물에게 명령하고, 만물이 하늘을 받드는 것은 성이다라고 고쳐서 말씀하였는데, 역시 헛수고입니다. 만약 하늘이 만물에게 하는 명령은 그 성으로써 하니, 만물이 가지고 있는 성을 하늘이라 한다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天以誠命萬物, 萬物以誠順天’, 此語固有病, 而所改云天命萬物, 萬物奉天, 誠也’, 亦枯槁費力. 若曰天之命物也以其誠, 誠之在物也謂之天’, 不知如何?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6

 

[해제] 이 편지는 건도 7(신묘 1171, 주자 나이 42)에 쓴 편지다. 임택지의 󰡔논어󰡕에 대한 질문에 항목별로 대답하고 있다.

 

정성스러움이 사물에 있는 것을 하늘이라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 편지에서 논한 것이 이미 상세합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한 내용은 옛 것에 의거한 것으로 제가 말한 본뜻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 말을 한 것은 사물이 다 거짓됨이 없다.”는 뜻에 근본한 것으로 천명이 만물에 흩어져 있으면서 각각 그 사물의 하늘이 될 뿐임을 말하였습니다. 뜻이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막히고 박절하여 별로 좋은 말이 아님을 스스로 알겠습니다.

誠之在物謂之天, 前書論之已詳. 來書所說, 依舊非本意. 向爲此語, 乃本物與無妄之意, 言天命散在萬物而各爲其物之天耳. 意雖如此, 然窮窘迫切, 自覺殊非佳語也.

 

허물을 관찰하고 인()을 아는 것은 이천의 말에 의거하였을 뿐이고 거기다 화정(和靖)의 말로도 충분하니, 성인의 본뜻은 이와 같은데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기󰡕 「표기에서 말하기를 인자의 허물이란 쉽게 말할 수 있다.”고 하였고, 󰡔논어󰡕에서 말하기를 진실로 인에 뜻을 두면 흉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헤아리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觀過知仁, 只依伊川說, 更以和靖說足之. 聖人本意似不過如此. 記曰: ‘仁者之過易辭也: ‘苟志於仁矣無惡也如此推之, 亦可見矣.

 

자장이 자문(子文)과 문자(文子)에 대해서 물은 것은 단지 일처리에 옳았음을 말한 것으로, 그 마음이 여기에 처한 까닭이 적실(的實)한지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들의 어짐과 어질지 않음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이천이 말하기를 만약 기뻐함과 성냄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어질지 않음을 알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이해하여야 성인의 문호에서 말한 인()자가 곧 가깝고 절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오봉의 말과 같다고 한다면 도리어 말하는 것이 더욱 고원하여 인()자의 가깝고 절실한 곳과 서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지언󰡕 안에서 말한 인()자는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子張所問子文文子, 只說得事, 不見其心所以處此者的實如何, 所以見他仁與不仁未得. 伊川: ‘若無喜慍, 何以知其非仁乎?’ 如此理會, 方見得聖門所說字直是親切. 若如五峰之說, 却說出去得更遠了, 與仁字親切處轉無交涉矣. 知言中說仁字多類此.

 

()을 짚고’ ‘닭을 본다라는 설은 진실로 좋습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맥을 짚고 닭을 볼 적에는 곧 상당히 많은 곡절이 있으니, 한 마음에 두 가지 작용이 일어나 서로 방해하고 쟁탈하고 합니다. ()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맥의 부침(浮沈)완급과 닭의 모양 색깔 표정 자태 등에 대해서 모두 볼 겨를이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말은 맥을 짚음으로 인해서 혈기(血氣)가 두루 흐르는 것을 보고, 닭을 봄으로 인해서 만물을 낳는 뜻의 나타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뜻에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의가(醫家)에서 손과 발이 뻣뻣하게 마비되는 말을 인용하고 주자(周子)가 뜰의 풀을 베어 버리지 않는 일을 예로 든 것 등이 다 이런 뜻입니다. 만약 보내오신 편지처럼 본다면, ‘닭을 본다는 설은 그래도 글의 뜻이 혹 통할 수 있지만, ‘맥을 짚는다고 말한 것은 글의 뜻이 결코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 ‘동일한 기틀이라고 말한 것은 무구(無垢)의 구법과 매우 비슷합니다.

切脈觀雞之說固佳, 然方切脈觀雞之際, 便有許多曲折, 則一心二用, 自相妨奪, 非唯仁不可見, 而脈之浮沉緩急, 雞之形色意態, 皆有所不暇觀矣. 竊意此語但因切脈而見血氣之周流, 因觀雞雛而見生意之呈露, 故卽此指以示人. 如引醫家手足頑痺之語, 周子不去庭草之事, 皆此意爾. 若如來諭, 觀雞之說文義猶或可通, 至切脈之云, 則文義決不如此. 又所云同一機, 頗類無垢句法.

 

맹경자가 병에 대해 묻는 하나의 장에 대해서는 단지 두 선생과 윤화정의 말을 보면 증자의 본뜻을 알 수 있고, 상채가 억지로 말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공부가 얕고 급박할 뿐만 아니라 문장의 뜻에서도 말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孟敬子問疾一章, 但看二先生及尹和靖, 可見曾子之本意, 而知上蔡之爲强說矣. 蓋非惟功夫淺迫, 至於文義亦說不去也.

 

마음을 다하는 것에 대한 말은 다한다는 낱말에서 더욱 공부해야 함을 가리킨다고 하였는데, 역시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盡心之說, 字上更有工夫, 恐亦未然.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7

 

[해제] 이 편지는 건도 6(경인 1170, 주자 나이 41)에 쓴 편지다. 주로 미발재중(未發在中)의 의미를 논하고 있다.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이 혼연하게 안에 있으면서 아직 사물에 감()하지 않고 기대어 달라붙어 한쪽으로 치우치는 근심이 있지 않을 때도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자로서 이름 하였고 나아가 천하의 큰 근본으로 여겼습니다. 정자가 말한 ()이란 안에 있다는 뜻이다.”라고 한 것, “단지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이 발생하지 않으면 중()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 “중이란 본성의 풍격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한 것, “중이란 본성의 덕이다.”라고 한 것, “기대고 달라붙는 곳이 없다.”라고 한 것 등은 다 이것을 말한다. 택지가 말한 안에 있다.”는 뜻이 내면의 도리라는 것을 매우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천 선생이 또한 말하기를 중이 곧 도이다.”, “치우치지 않음을 중이라 한다.”, “도란 적중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중으로써 도를 형용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말들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대채로 천명의 본성이란 천리의 온전한 본체이고, 본성에 따르는 도란 사람 본성의 마땅한 것입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중()이란 온전한 본체로써 말한 것이고, 시중(時中)의 중이란 마땅한 것으로써 말하였습니다. 요컨대 다 본체를 가리켜서 말하였습니다. 예컨대 여씨(呂氏)가 곧바로 본성에 따르는 것率性이 본성을 좇아 실천하는 것循性而行이라고 본 것은, 그가 중()이 바로 도가 말미암아 나오는 곳으로 여긴 것에 틀림없으니, 뜻을 잃었습니다.

喜怒哀樂, 渾然在中, 未感於物, 未有倚著一偏之患, 亦未有過與不及之差, 故特以中名之, 而又以爲天下之大本. 程子所謂中者在中之義’, 所謂只喜怒哀樂不發便是中’, 所謂中所以狀性之體段’, 所謂中者性之德’, 所謂無倚著處皆謂此也. 擇之謂在中之義是裏面底道理, 看得極子細. 伊川先生又曰中卽道也’, 又曰不偏之謂中’, ‘道無不中, 故以中形道’, 此言又何謂也? 蓋天命之性者, 天理之全體也 : 率性之道者, 人性之當然也. 未發之中, 以全體而言也 : 時中之中, 以當然而言也. 要皆指本體而言. 呂氏直以率性爲循性而行, 則宜乎其以中爲道之所由出也, 失之矣.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8

 

[해제] 이 편지는 건도 6(경인 1170, 주자 나이 41)에 쓴 편지다.

 

어찌 인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느냐?”는 구절은 자가 자까지 걸리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아래 두 구절은 서로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대개 널리 베풀어서 대중을 구제하는 것은 인에 그칠 뿐이 아니니, 비록 성인도 병으로 여겼을지라도 인자(仁者)가 할 수 없고 성인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백성 중에 능한 이가 드문지 오래되었다.”는 것은 경에 의거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단지 󰡔중용󰡕에서는 백성 중에 능한 이가 드문지 오래다.民鮮能久고 하였고, 아래 문장에는 한 달 동안 지킬 수 없다.”는 말이 있으므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다 그 도에 오래하다久於其道()’로 여깁니다. 두 문장을 자세히 살며보면 서로 차이가 배우 멀어서 본디 합치하지 않으니, 역시 󰡔논어󰡕에 의거하여 설명해야 합니다. 대개 그 아래의 문장에서 바로 도가 밝혀지지 않고 실천되지 않아 그 맛을 알 수 있는 이가 드물다말한 것이 바로 이천의 뜻과 부합합니다. 전에 보냈던 세 문장은 개요가 다 옳지만 말의 뉘앙스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석형(石兄)께서 안에 있음在中에 대한 말은 매우 정밀하지만 자기를 다하는 것이 쓰임이라고 한 것이 의심스러우니. 그렇게 본다면 지나친 것입니다. 대저 자기를 다하는 것과 자기를 헤아리는 것은 다 현인의 일이지만, 두 가지가 서로 대대함으로써 본체와 쓰임의 뜻을 나타냅니다. (자기를 다하는 것은 본체 측면의 공부이고 자기를 헤아리는 것은 쓰임 측면의 공부이다.) 예컨대 성인의 충서(忠恕)는 그치지 않고 유행하여 만 가지에 흩어져서 다르게 적용될 뿐이니, 어찌 자기를 다하는 것과 자기를 헤아리는 것 등으로 언급하겠습까? 師訓에 나오는 한 부분이 매우 분명하고 바로 이 뜻이니, 다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何事於仁’, 恐是何止於仁, 但下兩句却須相連說. 蓋博施濟衆非但不止於仁, 雖聖人猶以爲病, 非謂仁者不能而聖者能之也. ‘民鮮久矣’, 只合依經解說. 中庸民鮮能久’, 緣下文有不能期月守之說, 故說者皆以爲久於其道’. 細考兩章相去甚遠, 自不相蒙, 亦只合依論語. 蓋其下文正說道之不明不行, 鮮能知味, 正與伊川意合也. 前寄三章大槪皆是, 但語氣有未粹處耳. 石兄向論在中之說甚精密, 但疑盡己便是用, 此則過之. 大抵此盡己推己皆是賢人之事, 但以二者自相對待, 便見體用之意. (盡己是體上工夫, 推己是用上工夫.) 若聖人之忠恕, 則流行不息, 萬物散殊而已, 又何盡己推己之云哉? 師訓中一段極分明, 正是此意, 可更詳之.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19

 

[해제] 이 편지는 건도 6(경인 1170, 주자 나이 41)에 쓴 편지다. 이 편지에서는 인설(仁說

) 및 먼저 치지(致知)하고 후에 함양(涵養)한다는 논리에 반대하고 있다.

 

희지(熙之)에게 답하는 인()에 대한 설명은 매우 좋지만 자못 미진한 곳이 있어서, 제가 그 편지에 답하면서 다시 자세히 언급하였습니다. ‘인은 쓰임에서 드러나고 쓰임은 인에 근본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당시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고쳐서 인이란 마음이 온전한 본체이고 그 쓰임은 일에 따라 드러난다.’라고 하고자 합니다. 제시하였던 이천 선생의 격물(格物)에 대한 두 조목은 매우 적절하고 상채의 뜻도 참으로 좋지만, 단지 앎의 측면을 말했을 뿐입니다. 이제 또 함양(涵養) 한 구절에 대해서 논하자면 옛사람들은 아마도 소학(小學)에서부터 함양하여 성취하여 그런 다음 대학(大學)의 도()는 다만 격물(格物)을 따라 실천한 것 같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종전에는 소학에 대한 함양공부가 없이 다만 대학만 보고서, 격물(格物)을 맨 처음의 단계로 치고서 다만 사려(思慮)와 지식(知識)으로써 그것을 구하려고 합니다. 더욱이 잡아 보존해야 할 곳에 힘을 들이지 않았으므로, 비록 충분히 헤아렸다 할지라도 의거할 만한 실제적인 바탕이 없습니다. ‘()’ 자는 위와 아래를 다 꿰뚫는 의미이고,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는 그 사이에서 절차에 따라 진보하는 경지일 따름입니다.

熙之仁說甚佳, 其頗未盡處, 答其書復詳言之. 仁著於用, 用本於仁, 當時自不滿意. 今欲改云: ‘仁者, 心體之全, 其用隨事而見.’ 所擧伊川先生格物兩條極親切, 上蔡意固好, 然却只是說見處. 今且論涵養一節, 疑古人直自小學中涵養成就, 所以大學之道只從格物做起. 今人從前無此工夫, 但見大學以格物爲先, 便欲只以思慮知識求之, 更不於操存處用力. 縱使窺測得十分, 亦無實地可據. 大抵敬字是徹上徹下之意, 格物致知乃其間節次進步處耳.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20

 

인용하신, ‘사람이 나면서 고요한 것라는 말에서 고요하다라는 뜻의 ()’자를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 역시 아직 사물에 감응(感應)하지 않았을 때를 가리켜 말한 것일 따름입니다. 대개 이런 때를 당해서는 이 마음은 혼연(渾然)히 천리(天理)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이른바 ()이 본성(本性)의 체()를 형상(形狀)한 것임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중용(中庸)악기(樂記)에서 한 말은 성기고 조밀한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중용에서는 철두철미하게 홀로를 삼가는 공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곧 이른바 ()을 실천하여 평소의 함양(涵養) 공부를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악기󰡕에서는 좋아하고 싫어함에 절도가 없는 곳에 바로 나아가서 자기 몸을 돌이켜 반성하지 않으면 천리(天理)가 소멸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물에 감응하기 전에 만약 주재함이 없다면 역시 그 고요함에 편안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른 것입니다. 이럴 뿐이면 스스로 천성(天性)이 혼미해지니, 사물과의 교류를 기다린 뒤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중화(中和)’란 두 글자는 모두 도()의 체용(體用)인데, 사람으로 말하자면,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다만 홀로를 삼가지 못하면, 사물이 이르기 전에 본디 이미 어지럽고 뒤엉켜서 다시는 미발(未發) 상태의 때가 있지 않게 됩니다. 이미 이른바 ()’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면 그 발()하는 것은 반드시 어그러지게 되고, 또 이른바 ()’라는 상태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오직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여 감히 잠시라도 떠나지 않은 뒤에라야 중화(中和)’에 이를 수 있고, 큰 근본에 두루 통하는 도()가 나에게 있게 됩니다. 이 도에 대해서는 두 정 선생(程先生)이 대개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구산(龜山)이 말한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이른바 ()’을 체득할 수 있고, 이발(已發)의 상태에서 이른 바 ()’라는 것을 능히 얻을 수 있다.”라고 한 말은 그럴 듯하지만 병을 면하지 못합니다. 옛날에 듣자하니 이 선생(李先生)이 이에 대해서 논한 것이 가장 상세하나, 나중에 견해가 같지 않아 마침내 다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사람됨이 깊이 있고 친절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그 상세한 내용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예컨대 말하기를 사람에게 진실로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이 없을 때가 있는데, 그러나 그것을 일러 미발(未發)이라고 한다면 주재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자는 치사(致師)할 때의 ()’자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홀로를 삼가는 것을 먼저 말한 뒤에 중화(中和)’에 대해서 언급하였으니, 이 뜻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당시에 제가 이해하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 마침내 소홀히 지나가면서 이 어른을 저버렸을 따름입니다. (등등의 언급) ‘자와 자는 성인이 아니면 말할 수 없으니, 이로써만 보아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대개 무궁한 뜻을 포괄하여 말한 것으로 애초부터 힘을 쓰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미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所引人生而靜’, 不知如何看? 恐此亦指未感物而言耳. 蓋當此之時, 此心渾然, 天理全具. 所謂中者狀性之體’, 正於此見之. 中庸樂記之言有疏密之異, 中庸徹頭徹尾說箇謹獨工夫, 卽所謂敬而無失平日涵養之意. 樂記却直到好惡無節處, 方說不能反躬, 天理滅矣. 殊不知未感物時, 若無主宰, 則亦不能安其靜, 只此便自昏了天性, 不待交物之引然後差也. 中和二字皆道之體用, 以人言之, 則未發已發之謂. 但不能愼獨, 則雖事物未至, 固已紛綸膠擾, 無復未發之時. 旣無以致夫所謂中, 而其發必乖, 又無以致夫所謂和. 惟其戒謹恐懼, 不敢須臾離, 然後中和可致而大本達道乃在我矣. 此道也二先生蓋屢言之, 龜山所謂未發之際能體所謂中, 已發之際能得所謂和’, 此語爲近之, 然未免有病. 舊聞李先生論此最詳, 後來所見不同, 遂不起復致思. 今乃知其爲人深切, 然恨已不能盡記其曲折矣. 如云人固有無所喜怒哀樂之時, 然謂之未發, 則不可言無主也又云致字如致師之致 .又如先言愼獨, 然後及中和, 此意亦嘗言之. 但當時旣不領略, 後來又不深思, 遂成蹉過, 孤負此翁耳.云云 , 非聖人不能言, 只以此觀之, 亦自可見. 蓋包括無窮意義而言之, 初不費力, 此其所以難及耳.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21

 

옛날 사람들은 다만, ‘어린애들은 늘 속이지 않음을 보여야 한다에서부터 물 뿌리고 비질하고 손님 접대하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하는 사이에 올라가는 데까지를, 함양(涵養)공부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어찌 먼저 시작과 끝을 안 뒤에 함양공부를 더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이런 함양공부에서부터 점점 이것의 처음과 끝을 체득(體得)해 내면, 곧 하나 하나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만 평상시처럼 함양해 나가면 자연히 순숙(純熟)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그 날 배운 바에서 곧 마땅히 이것의 시작과 끝을 살펴서 함양(涵養)의 공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옛사람의 학문하는 차례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함양을 하면 그 근본이 더욱 밝아지고, 학문에 나아가면 그 지혜가 더욱 확실해 지나니, 안팎이 상호적으로 발전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매우 좋습니다. 다만 인용하신 삼전(三傳), 처음 배울 때부터 덕을 이룰 때까지의 절차를 말하였는데, 어느 곳에서든지 응용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꼭 세 가지 말을 앞 뒤로 나눌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대개 의리(義理)는 사람의 마음에 본디 있는 것인데, 진실로 그 기름을 얻으면 물욕(物慾)의 혼미(昏迷)함이 없어져,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밝아지니, 따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역시 그 밝아진 것에 바탕해서 그것을 밝힐 따름입니다. 이제 이르기를, “먼저 처음과 끝을 살펴 알지도 않고서 무엇을 함양하느냐?”라고 한다면, 너무 급박하지 않습니까?

古人只從幼子常視無誑以上, 灑掃應對進退之間, 便是做涵養底工夫了. 此豈待先識端倪而後加涵養哉? 但從此涵養中漸漸體出這端倪來, 則一一便爲己物. 又只如平常地涵養將去, 自然純熟. 今曰卽日所學, 便當察此端倪而加涵養之功”, 似非古人爲學之序也. 又云涵養則其本益明, 進學則其智益固, 表裏互相發也”, 此語甚佳. 但所引三傳語, 自始學以至成德, 節次隨處可用, 不必以三語分先後也. 蓋義理人心之固有, 苟得其養而無物欲之昏, 則自然發見明著, 不待別求. 格物致知, 亦因其明而明之爾. 今乃謂不先察識端倪, 則涵養箇甚底, 不亦太急迫乎?

 

()’자는 동()과 정()을 통관(通貫)해 있습니다. 다만 미발(未發)의 상태에서는 혼연(渾然)하니, 이는 경()의 체()입니다. 미발인 것을 알고서 경()의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발하면 일마다 성찰(省察)하여서 경()의 용()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체()가 평소에 서 있지 않으면 성찰(省察)의 공()을 어디로부터 베풀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경()과 의()는 두 가지로 딱 끊어진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일삼음이 있되 반드시 되리라고 기약하지 말며 마음에 잊지도 말고 조장(助長)하지도 않는다면, 이 마음이 우뚝히 동()과 정()을 관통하여, 경이 서고 의가 행해져, 어디를 간들 천리(天理)의 바름이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천(伊川)의 논의 가운데서 ()’자와 ()’자 두 글자를 일러, “본체(本體)에 나아가서 형용했다라고 한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자는 아직 사물에 감응되지 않은 본연(本然)의 모습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대개 사람이 태어났을 처음에는 아직 사물에 감응하지 않아 하나의 본성이 참됨이 깨끗할 따름입니다. 어찌 본체의 본연의 모습이 일찍이 고요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오직 사물에 감응한 까닭으로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응하는 바가 이미 쉽게 되면 그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성 ()’으로써 본성의 정()으로 삼습니다. 현명하신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정(主靜)이란 두 글자는 곧 성인(聖人)의 일을 말한 것으로, 대개 위의 글을 받아서 확정한 것입니다. 중정인의(中正仁義)를 가지고서 말하여 이 네 가지 가운데 또 저절로 손님과 주인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을 본다면 배우는 사람들이 용공(用功)함에 있어서 본디 스스로 차례가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먼저 입각(立脚)할 곳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성찰(省察)을 할 수가 있고, 이에 나아가서 진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요한 곳에는 전혀 힘을 쓰지 않는 것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만 힘을 쓸 수 있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 이전에 경()과 의()에 대해서 논한 것은 모두 이런 이치입니다.

敬字通貫動靜, 但未發時則渾然是敬之體, 非是知其未發, 方下敬底工夫也. 旣發則隨事省察而敬之用行焉, 然非其體素立, 則省察之功亦無自而施也. 故敬義非兩截事,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 則此心卓然, 貫通動靜, 敬立義行, 無適而非天理之正矣. (4-2048)伊川之字, 謂之就當體形容是也. 字乃指未感本然言. 蓋人生之初, 未感於物, 一性之眞, 湛然而已, 豈非當體本然未嘗不靜乎? 惟感於物, 是以有動. 然所感旣息, 則未有不復其常者. 常以爲靜者性之貞也. 不審明者以爲如何? ‘主靜二字, 乃言聖人之事, 蓋承上文定之以中正仁義而言, 以明四者之中又自有賓主爾. 觀此則學者用工固自有次序, 須先有箇立脚處, 方可省察, 就此進步. 非謂靜處全不用力, 但須如此方可用得力爾. 前此所論敬義, 卽此理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精一之說誠未盡, 擇之之說乃是論其已然, 須見得下工夫底意思乃佳. 伊川: ‘惟精惟一, 言專要精一之也. 如此方有用力處.’ 擇之之說, 却不見字意思如何.

 

전날의 중화(中和)’에 관한 설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다만 그 가운데서 말이 병통이 없을 수가 없고, 그 큰 체재에 있어서 의심할만한 것이 없지 않아 두렵습니다. 며칠 동안 이 뜻을 음미해 보고, 일상생활에서 대단히 힘을 얻었음을 느꼈습니다. 이에 얼마 전까지 있는 듯 없는 듯하여 순숙(純熟)할 수가 없고 기상(氣象)이 뜨고 얕아 쉽게 동요하던 병통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호남(湖南)의 여러 친구들도 그 병통이 이와 비슷한 듯합니다. 요즈음 남헌(南軒)의 글을 보니, 전혀 함양(涵養) 공부가 없더군요. 대저 마음의 체()는 유무(有無)를 통하고 동정(動靜)에 두루 미쳐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또한 유무(有無)를 통하고 동정(動靜)에 두루 미쳐 있어야만 바야흐로 새는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만약 반드시 그것이 발()한 이후에라야 살피고, 살핀 뒤에라야 유지한다면 공부의 이르지 않은 바가 많을 것입니다. 오직 발하기 전에 함양(涵養)을 한다면, 그 발하는 곳이 저절로 절도(節度)에 맞는 것이 많고,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적어져, 체찰(體察)할 적에도 또한 매우 분명해지고, 힘을 들이기가 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때 본래 의거(依據)할 곳이 없다는 설과는 크게 같지 않습니다. 이런 뜻을 갖고서 유서(遺書)를 보신다면, 부합되는 바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아래 위의 글을 읽어 보시면 매우 영활(靈活)하게 맥락이 통하니, 분명하여 막히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이렇게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前日中和之說看得如何? 但恐其間言語不能無病, 其大體莫無(4-2049)可疑. 數日來, 玩味此意, 日用間極覺得力. 乃知日前所以若有若亡, 不能得純熟, 而氣象浮淺, 易得動搖, 其病皆在此. 湖南諸友其病亦似是如此, 近看南軒文字, 大抵都無前面一截工夫也. 大抵心體通有無, 該動靜, 故工夫亦通有無該動靜, 方無透漏. 若必待其發而後察, 察而後存, 則工夫之所不至多矣. 惟涵養於未發之前, 則其發處自然中節者多, 不中節者少, 體察之際, 亦甚明審, 易爲著力, 與異時無本可據之說大不同矣. 用此意看遺書, 多有符合, 讀之上下文極活絡分明, 無凝滯處. 亦曾如此看否?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心有忿懥之說, 似亦無可疑. ‘字只是喚起下文不得其正, 非謂心有是四者也. 遺書云: ‘易無思無爲也, 此戒夫作爲也’. 向來欲添, 以今觀之, 似不必然. 此意蓋明聖人之所謂非漠然無所爲也, 特未嘗作爲耳. 只此便是天命流行, 活潑潑地. 戒之者, 非聖人, 特以作爲爲不可耳. 大抵立言欲寬舒平易. 云云

 

임택지에게 답함 (4-2050)答林擇之

 

저 인위적으로 하는 것을 경계한 것은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에 상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이미 노자의 무위도 하지 않고 또 인위적으로 함도 없다면, 이는 곧 천명(天命)이 유행하여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전체적인 모습으로써, 느껴서 드디어 천하의 연고(緣故)에 통한 것이, 일찍이 이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체()와 용()은 각자 다르므로, 분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이른바 하나의 근원이란 것을 알아야만 할 따름입니다.

戒夫作爲’, 此對老子之無爲而言. 旣不爲老子之無爲, 又非有所作爲, 此便是天命流行, 鳶飛魚躍之全體. 感而遂通天下之故未嘗離此, 然體用自殊, 不可不辨. 但當識其所謂一源者耳.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25

 

비이은(費而隱)’ 한 절은 그 두 끝을 두드려서 말한 것인데, 사실은 군신(君臣), 부자(父子) 등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인륜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부부만을 예로 들어 말한 것은, 그것이 더욱 간절하고 비근(卑近)함을 보이려는 것이니, 군자의 도가 거기서 실마리를 만드는 까닭으로 서, 그 미미함이 여기에까지 이르고 부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래 위의 글의 뜻 및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함은 아래 위를 살피라는 말이다는 뜻을 자세히 음미하면 나타나고 미미한 것과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이 이()라는 것을 보게 되어 그 속 뜻이 분명할 것입니다.

費而隱一節, 正是叩其兩端處. 其實君臣父子人倫日用無所不該, 特擧夫婦而言, 以見其尤切近處. 而君子之道所以造端, 其微乃至於此而莫能破也. 但熟味上下文意及鳶飛魚躍上下察之意, 卽見得顯微巨細渾是此理, 意義曉然也.

 

 

임택지에게 답함 (4-2051)答林擇之

 

이곳에 지금 몇 사람의 벗들이 강학(講學)을 하고 있지만, 박실(朴實)한 곳에서 받아 들이는 사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전에 강론(講論)한 것을 생각해 보니, 단지 입으로만 말했을 뿐 실질적으로 몸에 체득(體得)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모두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벗들과 더불어 일상생활에서, 기습(氣習)이 치우친 곳과 의욕이 싹트는 곳이 평소에 강론한 바와 서로 비슷한지 비슷하지 않은지를 항상 긴절하게 점검해 보아, 여기에 나아가 매섭게 공부를 한다면, 아마도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육자수(陸子壽) 형제는 요즈음 의론이 강학(講學)하는 방향으로 이해하려고 하는지요? 그 문인들 가운데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던데, 모두 기상(氣象)이 좋더군요. 다만 그들 사이에도 옛병통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도리어 그들과는 상반됩니다. 처음에 저는, ‘다만 이렇게 강학해 나가면 점점 함양하여 스스로 능히 덕()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지, ‘말류(末流)의 폐단이 다만 말만 할 뿐, 인륜 가운데서 일상생활에 가장 긴절하고 비근한 곳에 이르러서도 도무지 털끝만한 기력(氣力)도 얻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것은 깊이 징치(懲治)하고 따끔하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此中見有朋友數人講學, 其間亦難得樸實頭負荷得者. 因思日前講論只是口說, 不曾實體於身, 故在己在人都不得力. 今方欲與朋友說日用之間常切點檢氣習偏處意欲萌處與平日所講相似與不相似, 就此痛著工夫, 庶幾有益. 陸子壽兄弟近日議論却肯向講學上理會, 其門人有相訪者, 氣象皆好. 但其間亦有舊病. 此間學者却是與渠相反, 初謂只如此講學漸涵, 自能入德, 不謂末流之弊只成說話, 至於人倫日用最切近處, 亦都不得毫毛氣力, 此不可不深懲而痛警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최근에 보중(莆中)󰡔서명해의󰡕를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호공설은 지난 번에 말한 여씨의 별본이 아닌가요? 본래 호씨의 설이 아니라 하였는데, 그러나 또한 여씨의 설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애초에 깊이 발명(發明)한 것이 없어 누가 지은 것이 알 수 없어서 이와 같이 사람을 오인한데 까지 흐른 것 같습니다. 아울러 그 뒤에 몇 단락의 말씀도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近見莆中西銘解義, 胡公莫是向來所說呂氏別本否? 謂之說固非, 然恐亦不是. 似初無甚發明, 不知何人所作, 而如此流行誤人. 兼其後有數段言語, 極可怪也.

 

 

임택지에게 답함 (4-2052)答林擇之

 

장경부가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두 선생의 사실 가운데 몇 단락에서 잘못된 곳을 바로 고쳐서 도움 받은 곳이 자못 많습니다. 그러나 소식이 정이천을 배척했다.’고 기록한 곳은 단지 같은 조정에 종사한 선비들도 서로 알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고치고자 하였는데, (저는) 그 설이 소식이 선생에 대해서 다만 도가 달라서 서로 알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한 상이보(常夷父)장무칙(張茂則) 두 단락을 삭제하여 결코 이러한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의론할 것도 오히려 많지만 하나 하나 언급할 수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함께 정정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敬夫寄得書論二先生事實中數段來, 改正謬訛, 所助頗多. 但記二蘇伊川, 只欲改正云同朝之士有不相知者’, 其說以爲二蘇之於先生, 但道不同, 不相知耳. 不審賢者以爲如何? 又欲削去常夷父張茂則兩段, 以爲決無此事. 他議論亦尙多, 不能一一及之. 甚恨地遠, 不得相與訂正也.

 

 

答林擇之 二十八

二先生事實(舊四十九板)

󰡔절보󰡕 󰡔연원록󰡕에 기록되어 실린 것을 가리킨다.(󰡔節補󰡕 指淵源錄所載)

二蘇排伊川(舊四十九板)

󰡔차의󰡕 예컨대 소식이 주장을 올려 신은 본래 정모의 간사함을 미워했습니다.”라고 했으며, 왕사시와 숙손통이 이 예를 제정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태중공(太中公) 정향(程珦)이 화내지 않고 정숙하게 상례를 읽었다. 숙 또한 유씨를 위하여 좌단하였다고 말했다.(󰡔箚疑󰡕 如蘇軾奏云臣素疾程某之姦 又曰枉死市叔孫通制此禮也 又太中公無恙正叔讀喪禮也 熟又曰爲劉氏左袒)

󰡔절보󰡕 정이천의 년보에 보인다.(󰡔節補󰡕 見伊川年譜)

[역자주]󰡔宋史󰡕 「全文13. “今士大夫皆曰 程頥與朱光庭友而親 蘇軾常戱薄程頥 光庭爲程頥報怨也 又言明堂降赦臣僚稱賀訖兩省官欲徃奠 司馬光程頥言曰子於是日哭則不歌豈可賀赦纔了却往弔喪坐客有難之曰 孔子言哭則不歌即不言歌 則不哭蘇軾遂戱程頥云 此乃枉死市叔孫通所制禮也 衆皆大笑 結怨之端蓋自此始

欲改正(舊四十九板)

󰡔차의󰡕 장남헌이 개정하고자 한 것이다. (󰡔箚疑󰡕 南軒欲改正)

󰡔절보󰡕 년보의 글을 개정하고자 한 것을 말한다.(󰡔節補󰡕 謂欲改政年譜之文也)

常夷兩段(舊四十九板)

󰡔차의󰡕 양시가 말하기를 벼슬에 나아가는 도와 녹봉을 받고 벼슬하는 것은 다르다. 상이보가 포의(布衣)로써 조정에 들어갔는데, 왕실에서는 그를 고원(鼓院)염원(染院)의 유와 같은 예령겸수국(禮令兼數局)으로 우대하고자 하였는데 상이보는 모두를 받아들였다. 정이천이 강관벼슬을 맡았는데, 조정에서 다른 직책을 겸하게 하고자 했으나 고사하였다. 대개 예전에 벼슬을 맡지 않는 이유가 도가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면 오늘 날의 사태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그 관직이 도를 행할 만 하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구차하게 녹봉을 받는 셈이 된다. 그러나 후세의 도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보가 (벼슬을 모두) 받아들인 것을 사람들은 잘못이라 하지 않았으며, 선생이 (관직을) 고사한 것을 사람들이 옳다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경연 벼슬을 받은 장무칙이 일찍이 강관 벼슬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차를 마시며 그림이나 보자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동안 차를 마시지 않았으며 또한 그림도 알지 못한다.”하고 마침내 가지 않았다.(󰡔箚疑󰡕 龜山曰 仕道與祿仕不同 常彝甫以布衣入朝 祖宗欲優其禮令兼數局 如鼓院染院之類 彝甫一切受之 及伊川爲講官司 朝廷亦欲使兼他職則固辭 蓋前日所以不仕者道也 則今日之事須其官足以行道乃可受 不然是苟祿也 然後世道不明 故常公之受 人不以爲非 而先生之辭 人亦不以爲是也 經筵承受張茂則嘗招講官司 啜茶觀畫 先生曰 吾平生不啜茶 亦不識畫 竟不往)

󰡔절보󰡕 또한 년보에서 없앤 것을 말한다.(󰡔節補󰡕 亦謂削去於年譜)

[역자주]󰡔宋名臣言行錄󰡕外集 卷3. “楊時曰 仕道與祿仕不同 常夷甫以布衣入朝 祖宗欲優其禮令兼數局 如鼓院染院之類 夷甫一切受之 及伊川爲講官 朝廷亦欲使兼他職則固辭 盖前日所以不仕者爲道也 則今日之事須其官足以行道乃可受 不然是苟祿也 然後世道學不明 君子辭受取舍 人鮮知之 故常公之受 人不以爲非 而先生之辭 人亦不以爲是也

[역자주]󰡔二程集󰡕 「河南程氏遺書附錄(臺北: 漢京文化事業有限公司, 1983), 343. 經筵承受張茂則嘗招諸講官啜茶觀畫. 先生曰, 吾平生不啜茶, 亦不識畫, 竟不往.(見龜山語錄. 或云恐無此事.)

他議論(舊四十九板)

󰡔차의󰡕 장남헌이 다른 것을 의론한 것이다.(󰡔箚疑󰡕 謂南軒他議論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유위는 사노와 함께 어울렸는데 반드시 뜻한 것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한 가지를 보고, 그 요점을 개발하면 다른 일은 볼 것도 없을 것이니, 또한 백성들의 또한 한 가지 일입니다.

游尉能與師魯, 必有志者. 因一見之, 啓其要未見他事, 且令於百姓分上稍發些不可得身心, 亦是一事也.

임택지에게 답함 (4-2053)答林擇之

 

당신이 󰡔지언서󰡕에 논한 바와 같은 것은 더욱 정신이 (살아) 있어서, 또 앞을 훤하게 꿰뚫고 있을 정도로 비춰 보고 있어서 대단히 좋습니다. 장남헌이 보내온 임학기확재기를 받아보았는데, 그 문장 또한 󰡔지언서󰡕와 같은 부류이니,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다만 언어 문자 상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으니, 시험 삼아 생각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상강(湘江) 부근에 사는 여러 사람들의 욕심은 과연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불에 다 타지 않아 봄바람이 불면 또 자라난다네라는 꼴이 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들은 말을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니, 바로 호광중(胡廣仲)부모와 사귀고자 하는 마음이나 칭찬을 들으려는 마음을 제거하기가 쉽다고 말하는 것과 한 가지입니다.

知言序如所論, 尤有精神, 又照管得前來貫穿, 甚善甚善寄得郴學擴齋二記, 其文亦此類, 不知何故如此? 不只是言語文字之病. 試爲思之, 如何? 書中云常與右府書云: ‘願公主張正論, 太山之安, 綢繆國事, 無累卵之慮’, 此語却極有味. 大抵長於偶語韻語, 往往嘗說得事情出也. 湘江諸人欲心不知果能便消否, 第恐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渠如此易其言, 正如廣仲說納交要譽易去一般.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주고는 이미 받아 보았습니다만, 예전에 상세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의심나는 곳은 모두 당신께서 보내온 편지와 같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또한 (주고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내가 글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장애가 됨을 깨달았습니다.

酒誥已領. 前日讀之不詳, 但所疑悉如來示. 然初亦不曾得致思, 但覺礙人耳.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擇之

 

보내 주신 편지에서, “사람들이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명과 인, 학문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말을 들으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이는 또한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지나치게 바르게 한 논의입니다. 그 아래 주소와 여러 선생의 얻음과 잃음을 논한 것 또한 그렇습니다. 대체로 최근에 당신이 문자와 시편에 대해 의론한 것과 일에 나타난 것을 보건대, 모두 그 뜻이 박절하며 가볍고 얕아 보이는데, 그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에서 논한 것과 같이 한다면, 경전 가운데 성학을 논한 곳은 모두 없애야 할 것이며, 정자, 장자 등 여러 학자들의 저술도 전부 불살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깊이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아마도 작은 잘못이 아닌 것 같습니다.  

所諭聞人說性說命說仁說學等語, 自覺羞愧, 此又矯枉過直之論. 其下論注疏與諸老先生得失亦然. 大抵近見擇之議論文字詩篇及所以見於行事者, 皆有迫切輕淺之意, 不知其病安在? 若如此書所論, 則凡經典中說性命仁學處皆可刪, 程張諸公著述皆可焚矣. 願深察之, 此恐非小病也.

 

 

 

 

 

 

 

 

 

 

임충지에게 답함 答林充之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음과 양의 움직임과 고요함에 대한 말은 다만 사방과 오행의 위치로서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넉넉하고 부드러우며 평정하고 치우치지 않음[優柔平中]에 대해서는 확지가 말한 바와 같이 하면 될 것입니다. (‘넉넉하고 부드러우며 평정하고 치우치지 않음에서) 자에 대해서 움직임과 쓰임의 측면에서 말한 것 또한 옳습니다. 정명도가 “‘오직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한다는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이고, ‘진실로 그 중을 지켜 나가라는 행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러나 움직임과 쓰임에서 말한 것이라고만 하면 완전하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움직임과 쓰임에서 본체를 포함해 말한 것이라고 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례에 관한 일은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다.’는 것도 아마도 하나의 구절인 것 같습니다. 정자 또한 상례에 관한 일은 사람들이 힘쓰지 않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해설 가운데 또 글을 만들고자 하여 이와 같이 하나의 구절을 쓰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반드시 네 글자로써 위의 세 글자를 포함시킨 것은 아닙니다.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면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은 위와 아래를 관통하여 말한 것이니, 이른바 절차가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정이천이 인용한 충실광휘는 특별히 한 가지 일만을 들어서 밝힌 것이니, 반드시 문장을 이루려 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충실광휘의 경지를 위한 것이다.

所諭陰陽動靜之說, 只以四方五行之位觀之, 便可見矣. 優柔平中, 擴之所論得之. ‘字於動用上說亦然. 明道惟精惟一, 所以至之, 允執厥中, 所以行之’, 卽此意也. 然只云於動用上說, 却覺未盡. 不若云於動用上該本體說, 如何? ‘喪事不敢不勉’, 恐只是一句. 程子亦有云 喪事人所不勉’, 恐解中亦且欲成文, 不免如此作句, 未必以四字包上三字也.不成章不達’, 此通上下而言, 所謂有節次者是也. 伊川所引充實光輝, 特擧一事以明之耳, 非必以成章, 專爲此地位也.

 

 

 

임택지에게 답함 答林擴之

 

확지는 요즈음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요? 다시 일상생활에서 인을 행하는 근본이 되는 것에서 마땅히 더욱 깊이 성찰하여 이에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외우고 이야기하는 것이 정밀하다 해도 그 실질적인 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을 대개 군자는 깊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확지가 평소에 강론하여 들은 바일 것입니다. 

擴之近讀何書? 恐更當於日用之間爲仁之本者深加省察, 而去其有害於此者爲佳. 不然, 誦說雖精而不踐其實, 君子蓋深耻之. 此固擴之平日所講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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