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78

황성 2025. 8. 1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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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친구 제자들과의 문답) (知舊門人問答)

 

 

 

 

여자약에게 답함(정미년 513) 答呂子約(丁未五月十三日)

 

듣자하니 시강의 자리에 와서 의거하는 후배들의 가르치고 배우는 공이 서로 도움이 됨에 정사가 자연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다만 논한 것이 낱낱이 지적한 것은 자못 지루하게 얽힌 것 같을 뿐입니다. 만일 유청일편을 또 󰡔주례󰡕가 속해있는 곳이다.”고 한다면 이러한 등의 의론은 지루하게 얽힌 것이 더욱 심하니 다만 당시의 글과 같을 뿐입니다. 이와 같다면 아장편도 또한 󰡔주례󰡕가 속해있는 곳입니다. 태고(太皥)와 고요(皐陶)의 제사가 하루 아침에 폐기되어 끊어졌다면 진실로 충분히 세상이 쇠하고 도가 사라지는 징조를 볼 수 있겠지만, 아직도 그것이 없어지지 않았기에 세상의 도가 그래도 아직은 크게 도움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호치당 형제는 󰡔시경󰡕「관저는 오로지 후비가 투기하지 않은 것을 찬미한 것이라고 극론하면서 독호황후가 수나라를 망하게 한 것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나는 일찍이 그것을 논하면서 투기의 화가 충분히 국가를 파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투기하지 않는 미덕이 나라를 세우고 일으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곳은 아무래도 도리가 지나치게 많으니 말에 따라 이해해 나아가야 될 것 같습니다. 반드시 마음의 때를 씻어 없애어 마음속에 품은 생각으로 하여금 허명하고 직절하게 한 후라야, 참된 도리가 비로소 유행하게 되어 지루하게 얽히고 수고로워 단지 마음에 해가 될 뿐 손해만 있고 무익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될 것입니다. 󰡔시경󰡕에서 말한 내 생각이 비록 반드시 옳지는 않겠지만 자약의 의론이 이와같음을 보니 본래부터가 뜻이 합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시한 번 이 일련의 영락한 견해들을 쓸어 없앤 후에 보고서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있기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聞後來有來依講席者 斅學之功 交相爲助 政自不惡 但所論經指頗覺支蔓 如云維淸一篇又周禮之所寓 此等議論 又支蔓之尤甚者 只似時文. 如此卽我將亦周禮之所寓矣 太皥皐陶之祀一旦廢絶 固足以見世衰道喪之徵 然其未泯 則於世道却未能大有所扶助 如胡致堂兄弟極論關雎專美后妃之不妬忌 而以獨孤爲證 嘗論之 以爲妬忌之禍 固足以破家滅國 而不妬忌之美 未足以建極興邦也 此等處恐皆是道理太多 隨語生解 要須滌除 令胸次虛明直截 然後眞箇道理方始流行 不至似此支蔓勞攘 徒爲心害 有損無益也 說鄙意雖未必是 然看子約議論如此 自是無緣得契合 更請打倂了此一落索後看 却須有會心處也

 

 

여자약에게 답함(정미년 73) 答呂子約(丁未七月三日)

 

보내주신 유청과 수구의 두 뜻을 이미 진실로 이해하여 충분히 자신할 수 있다면 또한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리겠습니까? 다만 내 생각으로는 여기에서 모두 한 쪽으로만 치우쳐서 제기한 의론은 광명정대한 기상이 없으므로 끝내 매우 기쁘게 들리지 않는다고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앞서 우선 그대에게 의심나는 것을 보내는 바입니다. 이제 비록 편지로 보내주신 모든 내용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역시 깊이 깨달을 수 없군요. 전국시대에 진나라와 조나라는 백익에게서 나왔고, 제나라는 순에게서 나왔으며, 초나라는 축융에게서 나오고, 위나라는 필공에게서 나왔으며, 연나라는 소공에게서 나왔고, 한나라 역시 희씨성을 가진 나라인데 이 나라만 유독 성현의 후예가 아니란 말입니까? 또 한가지 일이 있으니, 지난번 󰡔원성담녹(元城譚錄)󰡕에서 유장여의 글자와 획을 논한 곳을 읽고 일찍이 그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것을 보니 믿을만 하면서도 징험(徵驗)할만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현명하신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공근의 말은 무어라 했는지 기록하지 않고 보내주신 편지에서 운운하시니 사람을 걱정시키는 뜻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示喩維淸須句二義, 旣是眞實見得 足以自信 則亦何待他人之言 但鄙意覺得此般偏旁寄搭議論 無光明正大氣象 終不甚喜聞. 故前此輒爾獻疑 而今雖承誨諭之悉 竟亦不能深曉也 戰國秦趙伯益 祝融 畢公 召公 姓之國 此獨非聖賢之後邪 又有一事 向讀元城譚錄劉壯輿字畫處 嘗疑其言之過 以今觀之 則似信而有徵者 不審明者以爲如何 公謹之言不記云何 來喩云云 得無有尤人之意邪

 

여자약에게 답함(713) (4-2312)答呂子約(九月十三日)

 

날마다 해야할 공부는 감히 노환을 핑계로 스스로 게을리 할 수가 없고, 이 마음은 잡으면 보존되지만 놓으면 없어지는 것이니 다만 손바닥 뒤집는 사이에 있음을 알겠습니다. 예전엔 진실로 매우 지루하게 지냈었는데, 아무래도 근본이 없이 자립한다면 일마다 모두 병통일 따름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지적하신 유강공의 말은 참으로 좋습니다. 다만 위에 말머리를 지나쳐버린 것은 아마도 의리가 지나치게 많아 정신을 허비하게 되었으므로, 따라서 내면을 향할 때가 적었기 때문일 뿐인 것 같습니다. 󰡔시경󰡕에 대해 말한 것이 오래 됨에 이미 책으로 만들어 졌지만 베껴 쓸만한 사람이 없어 붙일 수가 없군요. 역시 자약이 멋대로 소서(小序) 손질한 것을 보니 󰡔시경󰡕을 읽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스스로 그 설이 쉽게 합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부치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변풍을 예의에서 그친다고 했으니 그 잘못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만약 단지 소서만을 가지고 논해보면 아직 그 잘못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옛사람의 글을 읽을 때에는 바로 마음을 비우고 가슴을 크게 하고 눈을 높이 해야 비로소 작은 분수나마 서로 응함이 있게됩니다. 만일 좌우로 막히고 앞뒤로 끌어당겨 말에 따라서 이해 하여 마디마다 가지가 생기면 다시 만권의 책을 읽더라도 역시 쓸데가 없습니다. 󰡔󰡕서는 이미 보낸 것 같은데 어째서 아직 안보셨는지요? 아마도 이것은 오기인 듯하니 뒤의 편지가 당도하면 보내겠습니다. 이 역시 요사이 말한 것이 단서가 많아 모두 장차 자연스러운 도리가 천착하여 무너지게 될 것을 보고 진실로 부득이 해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듣자하니 자약은 학자들을 가르치며 󰡔예기󰡕를 읽는다고 하니 매우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하나의 강령도 없고, 착수할 곳도 없어서 늘그막에 한 가지 일이라도 해 보려고 하지만 후각의 정력이 쇠약해져 결국은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반공숙이 토론한 것을 정돈했는데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기󰡕와 관련된 글은 이제 다만 주소에 의지할 뿐이니 정씨일가의 설에 불과할 뿐이니 이것은 마땅히 다시 헤아려봐야 할 것입니다.

서재 중에서는 보고들 어떻게 이해하셨는지요? 반드시 하나의 규모와 양식을 가지고 풍속을 따라야 다행히 한 두 가지라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듣자하니 강학과 수업도 역시 자못 부지런히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편치 못함이 있을까 염려되는군요. 이제 바로 근원을 맑게 하고 근본을 바르게 하여 사변의 기미를 살필 것을 요구하는데, 어찌 한결같이 쌓아놓은 옛 전적에 빠져 정신을 혼폐하게하고 앞뒤를 잃게 하면서 그것을 학문이라 이를 수 있겠습니까?

 

日用功夫不敢以老病而自懈 覺得此心操存舍亡 只在反掌之間 鄕來誠是太涉支離 蓋無本以自立 則事事皆病耳

來喩拈出劉康公語 甚善甚善 但上面蹉却話頭 恐亦是義理太多 費了精神 故向裏時少耳 說久已成書 無人寫得 不能奉寄 亦見子約專治小序而不讀 故自度其說未易合而不寄耳 謂變止乎禮義 其失甚明 但若只以小序論之 則未見其失耳 讀古人書 直是要虛著心 大著肚 高著眼 方有少分相應 若左遮右攔 前拖後拽 隨語生解 節上生枝 則更讀萬卷書亦無用處也 書似已納去 何爲未見 恐此誤記 後便喩及却納去 此亦是見近日說者多端 都將自然底道理穿鑿壞了 固不得已而出之耳 聞子約敎學者讀 甚善 然此書無一綱領 無下手處 頃年欲作一功夫 後覺精力向衰 遂不敢下手 近日潘恭叔討去整頓 未知做得如何 但文今日只憑注疏 不過鄭氏一家之說 此更合商量耳

齋中見作如何理會 必有一規模樣轍 因風幸示一二也 又聞講授亦頗勤勞 此恐或有未便 今日正要淸源正本 以察事變之幾微 豈可一向汨溺於故紙堆中 使精神昏弊 失後忘前 而可以謂之學乎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두 벗과 더불어 함께 오려 하다가 다시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요즘 들어 전에 해 왔던 학문이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 스스로 몸의 주재(主宰)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문자에 의해 정신을 빼앗겨 버리니 작은 병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한 번 씩 생각할 때마다 화들짝 스스로 두려워하고 또 벗을 위해 그것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약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문득 또다시 미묘하여 알 수 없으니, 더욱이 현자가 되기 위한 도모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일에 임하여서는 머뭇거리고 앞을 보고 뒤를 돌아보니, 다만 여기에서만 또한 마음 씀씀이의 자취를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시에 만약 한 번이라도 서로 모여 피차간에 극론을 할 수 있었더라면 거의 혹시라도 판결의 도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또 이런 기회까지 잃어버렸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참으로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하는 군요. 후생을 훈도하면서 만약 말한 것이 옳다 하더라도 마땅히 끝까지 스스로 경계하고 살피는 곳을 두어야 사람의 기력을 빼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단지 이와같이 지루할뿐 어지러워 계통이 없다면 비록 후생을 가르치지 않더라도 또한 다만 빙빙돌고 미혹되어 나아갈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聞欲與二友俱來 而復不果 深以爲恨 年來覺得日前爲學不得要領 自做身主不起 反爲文字奪却精神 不是小病 每一念之 惕然自懼 且爲朋友憂之 而每得子約書 輒復恍然 尤不知所以爲賢者謀也 且如臨事遲回 瞻前顧後 只此亦可見得心術影子 當時若得相聚一番 彼此極論 庶幾或有判決之助 今又失此幾會 極令人悵恨也 訓導後生 若說得是 當極有可自警省處 不會减人氣力 若只如此支離 漫無統紀 則雖不敎後生 亦只見得展轉迷惑 無出頭處也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내주신 학문을 가르치는 뜻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조금의 과정을 더해 그 정밀하고 익숙함을 쌓아야 유익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단지 예전과 같이 많이 마시고 먹고, 많은 것을 탐하고 빨리할 것만을 힘쓴다면 일을 이룰 수 없을 뿐입니다. 물뿌리고 쓸고 응대하는 것은 바로 소자들의 학문인데, 이제 이미 그것을 앞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장정으로 자라났으니, 오로지 힘을 여기에 쓰게 한다면 아마도 또한 무미하다고 여겨 들어가기 어려워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안과 밖 본과 말 양쪽으로 진작하여 치우침이 없게 하여야 좋아질 뿐입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편지를 보니 곁으로 옮겨가고 말이 왜곡되어 만연함이 지나치게 많으니 이것이 큰 병통입니다. 만약 초학자들이 문득 이와 같이 뒤엉겨 매이게 되면 바로 빙빙 돌고 미혹되어 다시는 초탈할 기회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마땅히 우선은 대의가 정당하고 정밀하며 요약됨을 보게 할 수 있다면 그 취미가 저절로 자라날 것이니 이처럼 지루하고 말이 많은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示喩授學之意 甚善 但更須小作課程 責其精熟 乃爲有益 若只似日前大餐長啜 貪多務速 卽不濟事耳 灑掃應對 乃小子之學 今旣失之於前矣 然旣壯長而專使用力於此 則恐亦無味而難入 要須有以使之內外本末兩進而不偏 乃爲佳耳 向見說書旁推曲說 蔓衍太多 此是大病 若是初學便遭如此纏繞 卽展轉迷闇 無復超脫之期矣 要當且令看得大意正當精約 則其趣味自長 不在如此支離多說也

 

 

 

여자약에게 답함(1117) 答呂子約(十一月二十七日)

 

자합이 여기에 당도하였으니 또한 대략 저들 가운데 서로 모인 곡절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약이 자못 내 편지 중의 말이 지나치게 고준함에 놀랐다고 하는데,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일인지요? 만약 단지 󰡔󰡕을 설한 곳이라면 보내주신 편지에는 또 권모술수(權術)’ 백공의 마음씀씀이가 밝지 않다는 등의 말은 특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지금 역시 모름지기 이와 같이 지루하게 얽히지 않게하고 다만 우선 하나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마음을 비우고 성현이 설한 말씀을 이해해야지, 곧바로 스스로 많은 도리와 식견을 가지고 그들과 더불어 형평을 다퉈서는 않될 것 같습니다. 뒤로 물러남이 오래되면 도리어 모름지기 스스로 융회되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도리나 식견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옳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지나치게 많으면 도리어 모두 그것이 옛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지 못할 것 같고,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말한 도리를 지나쳐 버릴 뿐입니다. 심지어 앞사람들의 의론과 득실 같은 것은 지금 또한 어느 겨를에 물꼬를 터 나뉘고 트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자신의 눈으로 현제 본 곳을 구해서 취하는 것이야말로 긴요하고 절실한 일입니다. 만약 자기를 버리고 또 어떤 하나의 두서를 구한다면 두루 많은 일을 보게 되더라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지난 날 빌려온 형공의 󰡔일록󰡕을 한가하게 읽다보니 그가 아무개는 다만 약고(若古)에는 능하고 계고(稽古:옛날을 상고함)에는 능하지 못하다고 논하였는데, 이런 말은 평소에 이미 그 잘못을 알았다고 생각해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병통이 여기에까지 이르게된 까닭이 또한 다만 도리가 지나치게 많고, 성현의 언어 가운데 써놓은 한두 가지 한가하고 느슨한 글자를 모르고 곧 긴요하게 많은 도리를 말한 것이라고 여겨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막아버린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것이 곧 병의 근원이니 말씀하신 옳고 그름과 득실은 아직 논하지 않았습니다.

󰡔󰡕은 성인이 음양의 조화를 모사한 것이라고 논하셨는데, 이 말씀이 참으로 좋습니다. 다만 그 말을 다 한 곳에서 도리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벗어나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말을 줄인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얼굴을 마주대하고 의론하지 않으면 쉽게 결론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계몽󰡕의 뒤에 말했던 네가지 말과 몇 장을 실어 놓은 것은 말한 것이 이미 분명한 것 같고, 끝장은 더욱 절실한데, 일찍이 자세히 살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살펴 보시고 잘못된 곳이 있으면 가르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경연은 언제나 있습니까? 지금도 이야기를 나누기가 참으로 어려운데, 멀리 있게 되면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단지 사람의 주된 마음과 생각을 수렴하기만 하더라도 크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의의임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외의 도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니, 다만 말한 것이 반드시 병통을 급히 구제하는데 마땅치 않을까 염려스러울 따름입니다. 만약 여기에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곧 안정되고 화평한 가계(家計)를 날아오르고, 갈라지고 씻겨나게 하여 어렵고 힘든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니 더욱 서로 부합하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예서󰡕는 이미 받았습니다. 다만 상례제례앞에 합해서 있어야 옳습니다. 단지 이 책의 권질(卷帙)을 고치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선은 이와 같이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다만 사서인의 제례는 전혀 한 글자도 없으니 어째서 빠진 것인지요? 만약 그게 본래 없었다면 역시 지나치게 대강대강 한 것입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매우 많아 곧 편지를 보내고자 하여 방에서 판에 새기는 바람에 이러한 의문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소식을 기다리니 빨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침 베낀 것이 여기에 이르렀어나 예기치 않은 소식으로 농부(農簿)의 명이 이미 있으니 이 역시 기뻐할 만 합니다. 다만 경연이 지나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석전(釋奠)제기(祭器) 등의 문자는 그대로 인습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예전에 함께 벼슬하면서 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정성스럽게 부탁할 수 있게 됨이 더욱 가상합니다.

기도가 또 관직을 옮길 수 있게 되었으니 역시 하나의 사건입니다. 여기에 있는 그의 아우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태주에서는 또 사공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으면서 또한 지혜와 용력을 다하였지만 바꿀 수가 없습니다. 자흠은 아직 면식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예도(禮圖)를 붙여 왔는데, 너무 정밀하여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사람은 도리어 한 명의 훌륭한 예관입니다. 그러나 󰡔󰡕을 말한 것은 또한 자질구레하게 파고든 곳이 많을 뿐입니다. 십제(十弟)가 일삼는 것은 뜻이 어떠한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하나의 풍속이 여기에 있지만 사대부들은 어떠한 식견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별지의 몇 가지 일은 모두 그 병통을 잘 지적하였으니, 예를들면 편집활소(闊疎)귀기(貴氣)라고 한 말은 더욱 친절합니다. 일종의 구습을 즐기는 자들은 이미 족히 말할 것도 없고 작위하려는 뜻이 있으면 또 이 병통이 있으니, 어찌 오늘날 하늘이 진실로 재목을 낳지 않겠습니까? 지난날 요정노가 떠나는 편에 일찍이 소식을 전해 그것을 통열하게 경계하였는데,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봉상(奉常)은 사람의 의지를 강인하게 해주는 직책인데 다만 깨달은 것이 또한 자세하게 헤아려봄이 부족하니 이전에 바빠서 심히 정성들일 수 없었던 것이 몹시 안타까울 뿐입니다. 기뻐할만한 곳은 간결하여 지루하게 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 써도 형세가 나뉘지 않습니다. 또 고요하게 가라앉아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기틀이 원만하면서도 말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안배할 수 있다면 모름지기 모두 다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숙창은 반드시 이미 관직에 나아갔을 것이고, 동보의 근황은 어떠한지요? 자못 또한 뒷날의 계획을 잘 꾸밀 것을 도모하고 있는지요? 편지로나마 통렬히 경계합니다. 지금은 개과천선할 시절과 기회이니 이른바 이제야 할만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일 뿐입니다. 유념하시기를 간절히 알려드립니다.

 

子合到此 亦略能言彼中相聚曲折, 子約頗訝書中語太峻 不記是何事 若只是說處 則來書又有權術及伯恭心迹未明等語 殊不可曉 竊恐今亦不須如此支蔓 只且做一不知不會底人 虛心看聖賢所說言語 未要便將自家許多道理見識與之爭衡 退步久之 却須自有箇融會處 蓋自家道理見識未必不是 只是覺得太多了 却似都不容他古人開口 不覺蹉過了他說底道理耳 至如前人議論得失 今亦何暇爲渠分疎 且救取自家目今見處 是要切事 若舍却自己 又救那一頭 則轉見多事 不能得了矣 前日借得荊公日錄閑看 其論某人但能若古未能稽古 此等說話 想平日已知其失而笑之 然不知其病所以至此者 亦只是道理太多 不得聖賢言語中下一兩箇閑慢字 便著緊說出許多道理來 楦塞得更轉動不得 只此便是病根 未論所說之邪正得失也

所論是聖人模寫陰陽造化 此說甚善 但恐於盡其言處未免多著道理 說殺了耳 此非面論未易究竟 然向於啓蒙後載所述四言數章說得似已分明 卒章尤切 不知曾細看否 幸試考之 有所未安 却望見敎也

對班在何時 今日極難說話 而在疎遠爲尤難 看得且只收歛得人主心念 不至大段走作 是第一義 其他道理非不可說 只恐說得未必應急救病耳 若此處不下功夫 便要翻騰拆洗了安靜和平底家計 做艱難辛苦底功夫 恐尤不相當耳

禮書已領 但喪禮合在祭禮之前乃是 只恐不欲改動本書卷帙 則且如此亦不妨也 但士庶人祭禮都無一字 豈脫漏邪 若其本無 則亦太草草矣 鄕人欲者甚多 便欲送書坊鏤版 以有此疑 更俟一報 幸早示及也 恰寫至此 忽報已有農簿之命 此亦可喜 但不知不蹉却對班否 又恐釋奠祭器等文字又因循也 然舊同官有可語者 得更叮囑之尤佳

幾道且得改秩 亦是一事 其弟在此亦佳 台州又有一師䢼在此 亦儘知用力 不易得也 子欽恨未識面 寄得禮圖來 甚精 未暇細考 此却好一員禮官也 但說亦多瑣碎穿穴耳 十弟事不知竟如何 今日一箇風俗如此 不知士大夫是何等見識也 別紙數事 皆切中其病 如偏執闊疎貴氣之云 尤是親切 一種樂因循者 已不足言 其有作爲之意 又有此病 豈天固不生材於今日邪 前日因饒廷老去 嘗寄聲痛箴之 不知能聽受否 奉常差彊人意 但覺亦欠子細商量 甚恨前此匆匆 不能甚款也 其可喜處 却是簡潔而不支蔓 故力專而勢不分 又沈靜而有思量 故機圓而語有力 若安排得在要地 須儘可望也 叔昌必已之官 同父爲况如何 頗亦謀所以善後之計否 因書幸痛箴之 此却是箇改過遷善底時節幾會 所謂乃今可爲者 正謂此耳 切告留念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내주신 편지에서 평소의 공부가 이와 같으시다니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선은 하나의 커다란 핵심을 분명히 알아야 곧 버리고 잡는 사이에 힘쓸 곳이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실재로 하나의 사물을 가지고 자신의 손 안에 잡아 두고 놓아 행하는 것이, 그 놓아버린 마음을 구함을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은 도리어 아득히 잡을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공적인 것으로로 사람이 그것을 체득한다는 것은 단지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이 이치가 자연히 유행하는 것일 뿐이니, 공적인 후에 또 이 뜻을 가지고 다른 것을 찾아 토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示喩日用功夫如此 甚善 然亦且要見得一大頭腦分明 便於操舍之間有用力處 如實有一物 把住放行在自家手裏 不是謾說求其放心 實却茫茫無把捉處也 公而以人體之 只是無私心而此理自然流行耳 非是公後又將此意尋討他也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내주신 편지에서 보여주신 평소의 공부는 바라던 바에 크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호자(胡子)지언(知言)에서 어떤 사람에게 놓아버린 마음[放心]’을 가지고 놓아버린 마음을 구한다고 답한 것을 읽고는 그 지나치게 곡진하고 산만하여 절실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일찍이 그 대신 그 놓아 버림을 알고 그것을 구하고자 하면 놓지 않게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학자들이 이 뜻을 깨닫지 못함을 한했었습니다. 이제 보내주신 의론을 살펴보니 거의 알 것 같습니다. 논하신 바 반드시 거기에 일삼음이 있다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 오르다는 말은 의미가 역시 매우 합당합니다. 공자가 단지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한다고 말한 한 구절이 바로 이 말입니다. 뒤에 자사맹자정자는 사람의 의미를 전환시키고 끊어버려 그 뜻이 와전되고 단절되었으므로 그 말이 점점 더 잘못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활발발한 곳에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음을 알기에는 이미 쉽지는 않지만 또한 마음을 비우고 뜻을 너그럽게하여 머리를 돌리거나 뇌를 굴려 따지고 논하며 헤아리지 않고 외면을 향하여 여러 이치를 널리 살펴 더욱 스스로를 북돋우고 기르면 근본이 더욱 견고해질수록 지엽이 더욱 무성해질 것입니다. 만약 단지 이 정좌처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만 한다면 도리어 정심(正心)을 조장하는 병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혹은 또 잘못되면 한 번 발을 내 디딤에 불교의 견해에 빠지게 될 것이니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독서를 함에 󰡔논어󰡕․󰡔맹자󰡕 같은 것은 평소 눈 앞의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므로 문리가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한 것이 비록 천근하더라도 별도로 천착하거나 잘못된 곳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시경󰡕․󰡔주역󰡕 같은 종류는 선유들의 천착에 의해 잘못되어 사람들로하여금 당시의 입언(立言)과 본의를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일종의 공부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평온하게 하여 본문을 알맞게 수습하여 텅비고 넓게 하여, 한 글자라도 선유들의 구설을 마음에 머물러 두지 말고, 그것이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인지 묻지 않게 하며, 높일 바와 친할 바미워할 바와 악하게 여길 것에 대해 일체 묻지 못하게 하고, 오직 본문의 본의만 이에 구해야 성현의 종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여기에 대해 선유들이 사사로이 주장했다면 곧 가려져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름철의 벌래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대처에 있는 자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까닭입니다.

또 지난 번에 주장하신 󰡔사기󰡕의 시변(時變)의 학문은 도읍의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보고 줄줄 눈물을 흘린다는 장을 가지고 보니 역시 그 유폐가 극에 달한 바를 알겠습니다. 이는 바로 앞사람들이 순후한 덕은 있지만 허심(虛心)이 없는 폐단으로서 도리어 거기에 유혹되어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자제들이 그 장점을 개발하고 그 단점을 덮어 버리려고 한다면 바로 오로지 자기 분수 내에서 공정히 듣고 나란히 살펴 상투적인 형식을 타파하여야 이에 옛 사람들의 본래 심사의 올바름을 발명하고 학자들로 하여금 그 치우친 바를 경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약에게 달려 있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이러한 일종의 부담이 있으니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所示日用功夫 大慰所望. 舊讀胡子知言答或人以放心求放心之問 怪其覼縷, 散漫不切 嘗代之下語云 知其放而欲求之 則不放矣 嘗恨學者不領此意 今觀來論 庶幾得之矣 所論必有事焉 鳶飛魚躍 意亦甚當 孔子只說箇先難後獲一句 便是這話 後來子思孟子程子爲人之意轉切 故其語轉險 直說到活潑潑地處耳 知得如此 已是不易 更且虛心寬意 不要回頭轉腦 計較論量 却向外面博觀衆理 益自培殖 則根本愈固而枝葉愈茂矣 若只於此靜坐處尋討 却恐不免正心助長之病 或又失之 則一蹴而墮於釋子之見矣 亦可戒也

讀書如論孟 是直說日用眼前事 文理無可疑 先儒說得雖淺 却別無穿鑿壞了處 如詩易之類 則爲先儒穿鑿所壞 使人不見當來立言本意 此又是一種功夫 直是要人虛心平氣 本文之下打疊交空蕩蕩地 不要留一字先儒舊說 莫問他是何人所說 所尊所親 所憎所惡 一切莫問 而唯本文本意是求 則聖賢之指得矣 若於此處先有私主 便爲所蔽而不得其正 此夏蟲井蛙所以卒見笑於大方之家也

且如向來主張史記時變之學 以近日都人觀美 出涕沱若之章觀之 亦可見其流弊之所極矣 此乃前人有醇德而無虛心之弊 反爲所誘 以墮一偏之見 今日子弟欲發其所長而覆其所短 正在專於自己分上公聽竝觀 打破前來窠臼 乃可以發明前人本來心事之正 而使學者戒其所偏 此在子約 比之他人又有此一重擔負 尤不可以不勉也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내주신 편지에서 공부는 우선 하나의 큰 두뇌처를 보아야 하니, 곧 잡고 놓아야 하는 사이에 힘쓸 곳이 있다. 예를들어 실재로 한 가지 물건이 있는데, 잡으면 머물고 놓으면 행함이 대 손 안에 달려 있는 것이지, 마음대로 그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고 하셨는데, 내가 일찍이 그것을 깊이 체득해 보니, 이 말의 큰 요점은 본래 밖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내가 원래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남에 고요함이라 하고 희노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음이라 하며,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음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여기에 빠져 세월을 보내면서 일찍이 보존하여 쉬지 못하고 이 체단을 실현하지도 못하니 어찌 힘쓸 수 있는 곳이 있겠습니까? 정자는 이 의리를 인자(仁者)는 인()으로 간주해서 보고, 지자(智者)는 지()로 간주해서 보지만 백성들은 평소에 알지 못하니 이것이 군자의 도가 드믄 가닭이다. 이것 역시 작은 것이 아니며 또한 남는 것도 아닌데,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믿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과 그가 말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사이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이 것을 평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이 모두 어둡지 않게 됩니다. 측은수오사양시비는 사단의 실마리인데, 잡아 보존함이 오래되면 발현됨이 많아집니다. 성냄[忿懥]우환호락(好樂)두려움[恐懼]은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없으므로 내버려둠이 심하면 날마다 불어나고 자라나게 됩니다. 남헌선생이 그 잡고 놓음을 증험해야 이에 나고 듦을 안다고 한 것을 기억하는데, 바로 이것이 주된 요점을 이해한 것이며, 잡고 놓아야하는 사이에 힘을 써야할 곳이 있다는 실재의 말인 것입니다. 진실로 주된 요점을 알고 내버려두지 않으면 비록 항상 붙잡아 보존할 수 없을 지라도 말하고 조용히 있으며, 응하고 주고 받는 사이에 낱낱이 스스로 살피고 증험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실재로 하나의 물건이 내 손 안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하고자할 만한 것은 나의 물건이니 놓아버리거나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고자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은 나의 물건이 아니니, 남겨서 보존해서는 않됩니다. 비록 그것을 일러 실재로 하나의 사물이 내 손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괜찮습니다.

만약 거짓말이라면 이미 결론 날 곳도 없고 또한 의거할 것도 없으므로 설사 억지로 붙잡아 머물게 하더라도 또한 다만 엄습하여 취할 뿐이니 어찌 내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내 견해는 이와 같으니 감히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단락은 대개가 매우 정당하고 친절합니다. “붙잡아 보존함이 오래되면 발현 됨이 많고, 놓다두고 버려둠이 심하면 날마다 불어나고 자라난다는 이 두 구절은 매우 좋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호자의 지언에서 어떤 사람이 놓아버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한다는 질문에 답한 것이 지나치게 곡진하고 산만하여 절실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일찍이 그 대신 그 놓아 버림을 알고 그것을 구하고자 하면 놓지 않게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내 생각에는 혹자의 질문은 처음부터 심체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대답한 것이 비록 사람으로 하여금 양심의 싹을 살피게 하고 붙잡고 보존하는 공부를 이루게 하고자 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한 것이 경황중이거나 삼가고 치밀하지 못하여 곧 힘쓸 곳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막 말을 할 때에 역시 이 놓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 아는 바는 진실로 넓고 좁으며 깊고 얕은 곳이 있지만 일찍이 살피라고 하였으니, 나의 원초(元初)인 것과, 나의 원초가아닌 것, 진실됨과 망령됨, 객과 주에 있어서 또한 어찌 체단과 모양을 모르겠습니까? 붙잡고 보존함이 조금씩 익숙해지면 성찰이 점차 정밀해질 것입니다. 성찰이 점차 정밀해지면 붙잡고 보존함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지난날의 이른바 놓음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엔 오히려 놓음이 됨을 깨닫고, 지난날의 이른바 서로 가깝다는 것이 오늘엔 오히려 그것이 더 멂을 께닫게 됩니다. 요사이 󰡔유서󰡕에서 그 성()에 대해 말하고 다듬어 놓은 것을 보니 바로 마땅히 스스로 경으로서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실제의 일을 체득한 것이며, 또 성현이 천만마디 말 한 것도 다만 사람들이 이미 놓아버린 마음을 요약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반복하여 몸에 들어오게 하고 스스로 찾아 올라갈 수 있게한 것일 뿐입니다.

아래로 배우면서 위로 통달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비로소 지나치게 곡진하거나 산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힘을 씀이 비록 아직 민첩하거나 과감하지 못하지만 실제로 여기에 종사하고자 함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또 일찍이 깊이 스스로 체험해 보니 진실로 그 놓은 줄 알고서 구하면 놓지 않게 되지만 그러나 그사이의 기미가 대체로 어렵고 매우 공교합니다. 바야흐로 그 뜻이 기()를 이기지 못하면 억눌리고 막히고 눌리고 가리고 덮힌다는 것을 미음으로는 진실로 알고 있습니다. 술취한 가운데 취하였음을 알면서도 깨지 못하고 꿈속에 꿈인줄 알면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맑게 다스려 평온하고 안정되게하지 않으면 또한 쉽게 갑자기 보존되지 않습니다. 그 몸과 마음이 안을 향함에 미쳐 갑자기 놓아버리는 곳이 있으면 내가 주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들뜬 생각이 홀연히 일어나 병의 근원이 숨들게 됩니다. 또 이것을 생각하는 것도 바야흐로 단서가 있게되어 그 생각이 곧 끼어들어 두루 끌어당겨 잡아도 머물지 않게 됩니다. 요사이 한 가지 방법을 터득했는데 생각을 할 때에 생각하고 헤아림이 홀연히 일어나되 만약 마땅히 생각해야할 것이라면 곧 붓으로 그것을 그것을 기록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내 마음에 누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개괄적으로 논하기에는 어렵고 마침 소감이 있으니 마땅히 찾아 연역하면 다만 제일 처음에 생각했던 것을 내려 놓을 수 있으니 도리어 여기에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마땅히 생각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깊이 살펴 사라지게하면 도한 자못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겨우 주일(主一)공부도 아직 지극해 지지도 않았다면 정자의 이른바 그 마음으로하여금 생각해야할 때 비로소 생각하게 함과 같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역량에 따라 이와 같이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할 수 있으니 거듭 가르침을 바랍니다.

이 뜻은 대개가 역시 좋습니다만 지나치게 지루하게 엉겨 있고, 직절하지 않아 도리어 이 마음을 놓아버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땅히 일체를 쓸어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대신했던 오봉의 한 마디 말을 조만간에 제시하여 요약된 곳이 있게 하여야 이에 훌륭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정자가 온공이 중() 때문에 어지러워졌다고 한 말과 같게될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반드시 거기에 일삼음이 있다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 오르다고 했는데, 공자가 단지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한다고 말한 한 구절이 바로 이 말이다. 뒤에 자사맹자정자는 사람들의 뜻이 와전되고 단절되었으므로 그 말이 점점 더 잘못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활발발한 곳에서 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의리는 진실로 스스로 완전한 것으로,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애초에 차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실제로 이 안에서 보아야지, 조금이라도 골돌함이 있어서는 않됩니다. 성현이 가르침을 세운 것은 진실로 아래로 배우면서 위로 통달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을 쓰고 말을 함에는 반드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논다는 말은 자사가 비록 위아래로 살핀다는 것으로 말하여 진실로 이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지만, 이락(伊洛)의 여러 군자들이 거듭 점철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어떻게 자사가 사람들을 위해 요긴하게 한 곳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거기에 일삼되 바로잡지 말라는 뜻과 같다고 한 것인 이미 말한 것이 친절하고 내 생각과도 상응합니다. 활발발한 곳을 이해 할 수 있어야지, 이해하지 못했을 때엔 다만 정혼(精魂)을 희롱할 뿐이다고 한 것은 또한 사람들이 이 장난과 희롱만을 한갓 일삼아 신통하고 묘용한 것으로 여겨 도리어 사사로운 뜻에 들어가 조장(助長)을 이루고, 원래 처음부터 있던 것을 잃어 그 해됨이 또한 말이 험해지는데 들어갈 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개 궁리공부가 만약 알아서 취할 수 없다면 내가 언급한 것 모두가 쓸데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십시오. 만약 알아서 취할 수 있다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이 모두 천리(天理)의 유행이요, 무극의 참됨[無極之眞]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정자는 또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것은 다만 양생의 법인데, 모르겠다. 어덯게 양생할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좋습니다. 중요한 핵심을 안다면 잊지 말고 조장하지도 않아 기름에 해가 없을 것이니, 잊지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것이 본체가 아니라, 잊지 않고 조장하지 않는 사이에서 알아 취하는 것이 본채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학자들이 자기 분수 안에서 스스로 체득하고 아는데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성현의 말과 선유의 이론이 모두 실제로 얻어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지 분수 밖의 일을 말한 것이 아님을 믿을 수 있으니 나의 대강의 깊고 얕음이 어떠한가를 돌아볼 따름입니다. 감히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단락에서 본 것 역시 아직은 친절하지가 않습니다. 모름지기 반드시 거기에 일삼음이 있다고 말한, 다만 이 한 구절이 곧 천리의 유행에 합치되는 활발발한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야흐로 여기에 뜻을 두고 찾고 토론하고자 하면 곧 막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려운 것을 먼저한다[先難]고 하였는데, 단지 이 두 글자는 이미 인()을 행하는 공부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잠간이라도 따지고 비교하기만 하면 곧 협잡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위의 구절을 말하기만 하면 곧 아래 구절을 말하여 급히 구제해 주었으니, 마치 바야흐로 여기에 하나의 물건이 안정되어 있기도 하며, 또한 즉시에 제거한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하여금 먼저 여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질정하지 말라는 양단을 안배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나아가 구하게 한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다만 정좌한 곳에서 찾고 토론하기만 하면 조장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혹시라도 또한 잘못되게 되면 한 번 발을 내디딤에 불교의 견해에 떨어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오래동안 이리저리 돌아보니 근래에는 조금씩 수습이 되어 거칠게나마 고요히 기르는 공부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천박하여 객생각이 오히려 많습니다. 비록 아직은 이 병통이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또한 어찌 감히 항상 스스로 경계하고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또한 아직은 불교의 견해에 떨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았으니, 대개 불교는 공()한 곳으로부터 구하지만 우리 유학은 실()한 곧으로부터 봅니다. 희노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애초에 공()도 무()도 아니니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음이 본래 모두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불교는 여기에서 본 것이 치우치고 빠져서 생병이 있는 곳을 따릅니다. 완전한 것은 선()의 으뜸이다는 생각은, 불교가 이미 완전이라는 것을 모르고 류()를 끊고 무리를 떠나 적멸(寂滅)로써 즐거움을 삼고, 도리어 천지의 마음을 가리켜 환망이라고 하여 사단의 싹을 막고 끊으며 그 유행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것이 발하는 곳에서 알아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근자에 주자(周子)움직이되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되 고요함이 없다는 말을 보고는 자못 살피는 바가 있었습니다. 움직이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불러도 그칠 곳이 있지 않다는 것이고, 고요하되 고요함이 없다는 것은 불러도 빽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천하의 지극한 신()이 아니면 여기에 참여할 수 없지만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함의 본체는 원래가 이와 같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요할 때에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 이미 번갈아가며 상호작용함이 없게되니 또한 공에 떨어지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한 것은 불교의 견해에 떨어진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평소 경()을 주로하고 의()를 지키는 공부에 있는데 스스로 접속하지 않을 다름입니다. 만약 여기에 스스로 힘쓸 수 있다면 경과 의가 서로 의지하여 이 마음이 조금 놓이게 되더라도 스스로 생병이 있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견이 이와 같으니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명도가 말한 술취한 사람을 부축해준다는 말과 같아서 허무공적(虛無空寂)에 빠지지 않으면 어지럽고 지리한 데에 바지게 됩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독서를 함에 󰡔논어󰡕․󰡔맹자󰡕 같은 것은 평소 눈 앞의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므로 문리가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선유(先儒)가 말한 것이 비록 천근하더라도 별도로 천착하거나 잘못된 곳은 없다. 예를 들어 󰡔시경󰡕․󰡔주역󰡕 같은 종류는 선유들의 천착에 의해 잘못되어 당시의 입언(立言)과 본의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 또한 일종의 공부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평온하게 하여 본문을 알맞게 수습한 것이 비교적 넓기는 하지만, 한 글자라도 선유들의 구설을 마음에 머물러 두지 말고, 그것이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인지 묻지 않게 하며, 높일 바와 친할 바미워할 바와 악하게 여길 것에 대해 일체 묻지 못하게 하고, 오직 본문의 본의만 이에 구하면 성현의 종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가르쳐 주신 것을 깊이 생각해보니 진실로 직절하게 가리켜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비록 내가 미칠바가 아니고, 말하면 바로 계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감히 묵묵히 이 뜻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겨우 논변하고자하는 바가 있으니 마땅히 토로할 것 역시 감히 자세하게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예전에 글을 읽는데, 어떤 때에는 마음먹은 대로 진실로 주석하고 가르쳐서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본 것이 명백해짐을 스스로 경험하기도 하지만 이 마음이 조금씩 가리고 이지러짐이 있게 되면 곧 망실되고 맙니다. 또 이치를 낱낱이 살피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정밀한 의를 크게 가리켜 주어도 능히 제대로 살필 수 없습니다. 만약 저절로 생겨난 의견이 아니라면 곧 문득 읽고 지나가 깨닫지도 못하고 끝내는 그대로 따르고 골돌하는데로 돌아갈 따름입니다. 날마다 어찌 감히 능히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조금씩 몸과 마음을 수습할 수 있게 되면 주요한 핵심이 있게 되어 의리의 실제가 점점 서로 친해지고, 선각이 말한 것을 완미하고 사색하면 때때로 마음에 들어맞게 됩니다. 반복해서 읽게되면 본문과 본의에 대해 진실로 능히 알맞게 수습하여 텅 비었으면서 넓은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용의가 깊은 곳에서 점차 그 아는 곳으로 나아가 그 문의를 따를 수 있어야 역시 각각 대략이나마 말한 바의 귀착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독서의 방법을 알았다면 진실로 입언과 본의를 알아야 하며, 이리저리 지루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공부함이 있으니 의리로하여금 서로 무젓어들게 하면 바야흐로 책과 더불어 서로 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색과 더불어 서로 응하게되면 비로소 생각하기를 잘 하는 것이며, 그 정미함에 통하여 의미가 무궁하게 됩니다. 비록 읽을 때에 당하여 진실로 구설이 흉중에 머물게 해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편온하게 하여 그것이 저절로 드러나기를 기다려야하니 그렇게되면 그것을 쓸어버리려고 생각해도 또한 할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쓸어버리려고 한다면 또한 내 의견 역시 아직은 반드시 진실로 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을 읽을 때엔 다만 정자의 󰡔역전󰡕을 위주로 해야 하지만 상()과 점()을 폐할 수 없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왕과 공자가 」․「」․「문언」․「대전을 지어 드러내 밝힌 것은 상()에 있지 않고,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을 이해하여 그 뜻에 통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은 변역이니 때에 따라 변하여 도를 따른다고 하였고, “길함과 흉함, 사라짐과 자라남의 이치와 나아가고 물러남, 보존되고 없어지는 도가 말에 갖추어져 있으니, 말을 미루어보고 괘를 상고하여야 변화를 알 수 있다. 상과 점은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으며, “지극히 은미한 것은 이()이고, 지극히 드러나는 것은 상()이다. ()와 용()은 하나의 근원이니, 드러남과 은미함은 틈이 없다고 하였고, “건과 곤은 알기 쉽고 여러 괘는 알기 어렵다고 했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상과 점에서 구하지 않으니 진실로 빠진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배움에는 본말이 있으니 만약 능히 이것을 완색하지 못하면서도 상과 점에서 구하고자 한다면 정자의 말에 갖추어져 있다그 가운데 있다는 뜻에 대해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맹자 이후로 󰡔󰡕서가 상과 점을 가지고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나라 시대 이후로 그 학문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비록 소견이 이와같지만 선생이 말씀하신 또한 일종의 공부라는 것은 특히 자세하지가 않습니다. 거듭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대체로 독서를 할 때엔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본문의 뜻을 구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임의대로 천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맞는 곳을 말한 종류와 같은 것은 바로 큰 병의 근본입니다. 󰡔󰡕의 말과 같은 것들은 바로 상과 점의 말입니다. 만약 상과 점을 버리고 말에서 이해한다면 나는 아직 그렇게 하고서 이해됨이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지나치게 고원한 것을 추구한 폐단입니다. 그러므로 심기를 수고롭게 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만 마음을 비우고 본문을 완미한다면 저절로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해가 없을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공평하면서 사람의 입장에서 체득하는 것은 다만 사사로운 마음이 없음에 이 이치가 자연스럽게 유행하는 것일 뿐이다. 공평한 후에 또 이 뜻과 생각을 가지고 찾고 토론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깊이 음미해보니 진실로 다른 사람이 찾고 토론할 생각을 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스스로 흔쾌함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인()이란 진실로 이름하기 어렵습니다. 깨달음[]을 인()이라 이름해 보아도 깨달음은 인이 아니고, 사랑[]을 인이라 이름하더라도 사랑은 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공평함[]을 인이라 이름하면 특히 인에 가까울 따름이지만 역시 공평함을 가리켜 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선생께서 ()이란 사랑의 이치로서 별도로 성()과 정()을 낸 것이 가장 명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자의 공평하면서 사람의 입장에서 체득했다는 의미는 ()”자에 있어서 사랑의 이치[愛之理]’라는 뜻을 겸하여 말한 것입니다. 공평함이 비록 인에 가깝지만 또한 반드시 실제로 노력하고 물물마다 모두 체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막히거나 틈이 있으면 각각 서로 상관되거나 연속되지 않아 곧 인이 아님이 있게 됩니다. 만약 다만 공()이라는 글자만 말한 것이라면 곧 이 이치가 저절로 유행하겠지만 인을 체득하는 공부에는 흠이될 것입니다. 근래에 남헌선생의 복괘찬(復卦贊)을 보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순수[]하면 측은이다. 움직임에 이것을 가지고 구미면 천명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위치가 비록 같진 않지만 그것이 기초하는 바를 헤아려보면 맥락이 서로 통한다.” 또 근래에 옥산(玉山)이 목판에 세긴 선생의 강설은 정자의 이른바 한쪽만 말하면[偏言]하나의 일이요, 오로지 말하면[專言] 네 가지를 포괄한다는 것 보다 비록 십분 분명하게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이 뜻과 맥락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쪽만 말한다고 한다면 본말(本末)과 차제(次第)를 섞어서 말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말한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시작하고 여기에 근본하여 하나로 관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맹자는 갑자기 어린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설을 논하였는데, 이것을 가지고 보면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이 아니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羞惡] 마음이 없으면 의()가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예()가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是非] 마음이 없으면 지()가 이닙니다. 다만 측은이라는 하나의 단서만 발현한 곳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머지 세 단서는 다시 일일이 집어서 들어내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생략됨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양심의 싹이 가장 먼저 발현되는 곳이요, 곧 천지의 마음이며, 만물의 으뜸으로서 반드시 이것으로부터 이후에 유행하여 쉬지 않고, 형통하며 이롭고 곧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비록 한쪽만 말한다고 하였지만, 이른바 오로지 말한다는 것도 또한 여기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란 본래 고유한 이치로서 공평함을 인하지 않고도 있는 것이니, 다만 공평함을 인하여 보존될 따름입니다. 예를들면 도랑이 막혔기 때문이 물이 통하여 흐르지 못하는 것이니, 그 막힌 곳을 제거하면 물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은 진실로 막힘을 제거함으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이미 그 막힌 곳을 제거하고 다시 별도로 일련의 노력을 들여 물이 흐르고 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논한 바의 득실은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 편언(偏言)과 전언(專言)을 논한 곳은 말의 뜻이 아직 분면하지 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렵게 합니다.

 

誨諭工夫且要得見一箇大頭腦, 便於操舍間有用力處. 如實有一物 把住放行在我手裏 不是漫說收其放心 某蓋嘗深體之 此箇大頭腦本非外面物事 是我元初本有底 其曰人生而靜其曰喜怒哀樂之未發 其曰寂然不動 人汨汨地過了日月 不曾存息 不曾實見此體段 如何會有用力處? 程子謂這箇義理 仁者又看做仁了 智者又看做智了 百姓日用而不知 此所以君子之道鮮 此箇亦不少 亦不剩 只是人看他不見 不大段信得 此話及其言於勿忘勿助長間認取者 認乎此也 認得此則一動一靜皆不昧矣 惻隱羞惡辭讓是非 四端之著也 操存久則發見多 忿懥憂患好樂恐懼 不得其正也 放舍甚則日滋長 記得南軒先生謂驗厥操舍乃知出入 乃是見得主腦 於操舍間有用力處之實話 蓋苟知主腦 不放下 雖是未能常常操存 然語黙應酬間歷歷能自省驗 雖非實有一物在我手裏 然可欲者是我底物 不可放失 不可欲者非是我物 不可留藏 雖謂之實有一物在我手裏 亦可也 若是謾說 旣無歸宿 亦無依據 縱使彊把捉得住 亦止是襲取 夫豈是我元有底邪 愚見如此 敢望指敎

此段大槪甚正當親切 操存久則發見多 放舍甚則日滋長 此二句甚好

誨諭胡子知言或人以放心求心之問 怪其覶縷 散漫不切 嘗代之下語云󰡔知其放而欲求之 則不放矣 󰡕某竊謂或者之問元不識心體 所對雖欲使人察夫良心之苗裔 致操存之功 然說得驚惶不縝密 便是用功處未到 恐方說時亦未免是放也 自家所知固有廣狹淺深處 然曾云省察 則是我元初者非我元初者 眞妄客主 亦豈不識箇體段模樣 操存稍熟 則省察浸精 省察浸精 則操存愈固 昨之所謂非放者 今猶覺其爲放 昨之所謂相近者 今猶覺其尙遠 近看遺書說修辭立其誠 乃是體當自家敬以直內 義以方外之實事 又說聖賢千言萬語 只是欲人將已放之心約之 使反復入身來 自能尋向上去

下學而上達 此語方是不覶縷散漫 自覺用力雖未能敏勇 然實欲從事於斯也 又嘗深自體驗 固是知其放而求之則不放 然其間幾多艱難曲巧 方其志不勝氣 其爲抑遏掩蔽 心固知之 如醉中知醉而未醒 夢中知夢而未覺 非澄治平帖 亦未易遽存 及其身心向裏 有頓放處 非不是我來爲主 然浮念忽起 病根隱然 又思乎此也方有端緖 他思便來間之 展轉牽引 把捉不住 近得一法 於致思之時而思慮忽起 若所當思也 則便以筆識之 不使之累吾心 然亦難槪論 蓋適有所感 當便尋繹 則只得放下元初所思 却致思乎此 若非所當思也 則當深省而消去之 亦頗有效驗 第於主一功夫未至 不能如程子所謂使他思時方思 然且得隨力量如此存察 更望指敎

此意大槪亦好 但太支蔓 不直截 不覺却將此心放了 恐當一切掃去 且將所代五峰一語早晩提撕 令有箇要約處乃佳 不然 又似程子溫公爲中所亂矣

誨諭謂必有事焉 鳶飛魚躍 孔子只說箇先難後獲一句 便是這話 後來子思孟子程子爲人之意轉切 故其語轉險 直說到活潑潑地 某竊謂此箇義理固是自家元有底 無少無剩 初無差異 然亦須實見到這裏 不可少有鶻突 聖賢設敎 固不越於下學而上達 然著書立言必有不容已者 如鳶飛魚躍 子思雖以上下察爲言 固已示諸人 然非得伊洛諸君子再拈掇出來 如何理會得是子思喫緊爲人處 其曰與必有事焉而勿正之意同 旣說得親切 與我相應 : 又曰會得活潑潑地 不會得時只是弄精魂 則又恐人將此玩弄走作 以爲神通妙用 却入私意 却成助長 却失了元初本有底 其爲害又不特入於語險而已 大抵窮理工夫若不能認取 則非我所及者皆爲涉虛 若能認取 則一動一靜天理流行 莫非無極之眞也 程子又云勿忘勿助 只是養生之法 不識怎養生 此語極善 蓋識箇主腦 則勿忘勿助而養而無害 非勿忘勿助是本體 於勿忘勿助之間認取本體也 此全在學者於己分上實自體認 方信得聖賢之言先儒之論都是將實得者說與人 不是說分外事 顧我之領略淺深何如耳 敢望誨示

此段看得亦未親切 須知必有事焉 只此一句便合見得天理流行 活潑潑地 方要於此著意尋討 便窒礙了 如說先難 只此二字已見得爲仁工夫 然於此處才有計較 便夾雜了 故才說上句 便說下句以急救之 如方安頓一物在此 又便卽時除却 是非敎人先安排此有事勿正之兩端 而就其中以求之也

誨諭謂只於靜坐處尋討 却恐不免助長之病 或又失之 則一蹴而墮於釋氏之見 某自顧渙散之久 近稍收拾 粗有靜養工夫 然工夫淺薄 客慮猶多 雖未至便有此病 然亦豈敢不常自警省也 兼亦自覺未墮釋氏之見者 蓋釋氏是從空處求 吾儒是自實處見 喜怒哀樂之未發 初非空無 寂然不動 本皆完具 釋氏於此看得偏闕 所以隨在生病 又元者善之長底意思 釋氏旣不識元 絶類離群 以寂滅爲樂 反指天地之心爲幻妄 將四端苗裔遏絶閉塞 不容其流行 若儒者 則要於此發處認取也 近看周子動而無動 靜而無靜之語 頗有所省 夫動而無動 則喚不有止 靜而無靜 則喚不森然 此雖非天下之至神不能與於此 然一動一靜之本體蓋元如是 因此靜存動察 旣無交互 亦不落空 今所慮者 非在於墮釋氏之見 乃在於日用之間主敬守義工夫自不接續而已 若於此能自力 則敬義夾持 此心少放 自不到得生病痛也 所見如此 更願指誨

此正如明道所說扶醉人語 不溺於虛無空寂 卽淪於紛擾支離矣

誨諭讀書如論語孟子 是直說日用眼前事 文理無可疑 先儒說得雖淺 却別無穿鑿壞了處 如詩易之類 則爲先儒穿鑿所壞 不見當來立言本意 此又是一種功夫 直是要人虛心平氣 本文之下打疊交空蕩蕩地 不要留先儒一字舊說 莫問他是何人所說 所尊所親 所憎所惡 一切莫問 而唯本文本義是求 則聖賢之指得矣 某深惟訓誨 眞可謂直截指示 雖非某所及 未能言下卽承 然敢不黙會此意 第有所欲論辨 當吐露者 亦不敢不詳陳之 某往者讀書 有時自驗於會心處固有不待注釋訓說而見得明白 然此心稍有蔽虧 卽便忘失 且又閱理不熟 大指精義弗能致察 若非自生意見 卽便讀過不覺 終歸之因循鶻突而已 日來豈敢以爲能讀 然稍能收拾身 有箇主腦 義理之實漸漸相親 玩索先覺所說 時時有契於心 反復讀之 其於本文本義固能打疊到空蕩蕩田地 然於用意深處 漸能進其所知 隨其文義 亦各略見所說着落 因此見得讀書之法固是要見得立言本意 不要繳繞支離 然須是自有工夫 使義理來相浹洽 方能與書相應 若與書相應 始能善思 通其精微而意味無窮 雖當讀時固不可先留舊說在胸中 然虛心平氣 待其自見 有意要掃去他亦不得 苟要掃去 則又是我底意見 亦未必是眞實指義也 如讀 只以程子易傳爲主 非不知象占爲不可廢 然文王夫子作彖象文言大傳 所發明者却不在於象上 直是要人得其辭以通其意 其曰易 變易也 隨時變易以從道也 其曰吉凶消長之理 進退存亡之道備於辭 推詞考卦 可以知變 象與占在其中 其曰至微者理 至著者象 體用一源 顯微無間 其曰乾坤爲易知 諸卦爲難知 今學者不求諸象占 固有所闕 然學有本末 若末能玩索乎此而欲求之於象占 則於程子備於詞在其中之意不能無失也 又自孟子書非不以象占而傳 然非所謂自而下 其學不傳者 果何所指邪 雖所見如此 然先生謂又是一種工夫 則殊未詳 更望指敎也

大凡讀書 須是虛心以求本文之意爲先 若不得本文之意 卽是任意穿鑿 如說會心處之類 正是大病根本 如之詞 乃是象占之詞 若舍象占而曰有得於詞 吾未見其有得也 此皆過高之弊 所以不免勞動心氣 若只虛心以玩本文 自無勞心之害

誨諭公而以人體之只是無私心而此理自然流行耳 非是公後又將此意思尋討也 某深味此語 固是恐人添箇意思尋討 然覺得下語自傷於快 竊謂仁固難名以覺名仁而覺非仁也 以愛名仁而愛則屬情也 以公名仁 特近仁耳 亦難指公爲仁也 先生謂仁者愛之理 別出性情 最爲明白 然程子公而以人體之意則於公字上兼愛之理意思言之 蓋公雖近仁 然又須實下工夫 物物皆體 若有扞格 各不相貫屬 便有未仁 若只是說箇公字 便此理自流行 却欠却體仁工夫也 又近看南軒先生復卦贊有云 其在於人 純是惻隱 動匪以斯 則非天命 曰義禮智 位雖不同 揆厥所基 脈絡流通 及近來玉山所刻先生講說 於程子所謂偏言之則一事 專言之則包四者雖未能十分昭晰 然却見得此意脈分明 其曰偏言 則本末次第不可以混言 其曰專言 則莫不始於此本於此而皆一貫也 孟子論乍見孺子 怵惕惻隱之心便說 由是觀之 無惻隱之心非仁 無羞惡之心非義 無辭讓之心非禮 無是非之心非智 其只擧惻隱一端發見處示人 餘三端更不一一拈出 夫豈有所略哉 蓋此乃良心苗裔發見最先處 乃天地之心 萬物之元 必自此而後流行不息 亨而利貞 則是章雖曰偏言 而所謂專言之者亦不離此矣

仁是本來固有之理 不因公而有 特因公而存爾 如溝渠窒塞 故水不通流 去其窒塞 則水流矣 水固不因去塞而有 然亦非旣去其塞而又別有一段工夫使水流通也 以此推之 所論之得失自見矣 又論偏言專言處 語意未瑩 使人難曉

 

(): 原缺, 宋浙本補.

(): 原作’, 程頤易傳序.

(): 正訛改作’.

()十分 : 原缺, 宋浙本補.

 

여자약에게 답함 (4-2326)答呂子約

 

대신 말씀하여 깨우쳐 주신 것이 매우 좋습니다. 망령되게 이 말을 하였었는데, 이제 벌써 10여년이 됨에 항상 사람들에게 일러줌에 대강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자약의 편지를 받고 그 지극히 중요한 말이 됨을 알고 비로소 분부하는 곳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지난 날 장부(張富)가 은혜로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서 논한 󰡔혹문󰡕 중의 말이 합당치 않은 듯 합니다. 청컨대 우선 스스로 마음에 돌이켜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경계를 분별하여 분명하게 하시어 책에서 말한 것과 합해서 본다면, 그래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마음에서부터 본 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곧 여러 설들이 서로 맞물려 얽혀 도리어 미혹될 것 같아 끊고 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또 자약이 평소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때와 같지 않겠습니까? 곧 제사에서 만약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눈에 뵈는 것이 없다면 곧 그 오르내리고 제사 음식을 올리는 것도 모두 그 시절의 마땅한 바를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돕고 인도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일러서 말해주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류(前旒)주광(黈纊)의 설도 또한 여기에 전일해서 다른 일이 섞이지 않게 하려는 뜻을 말한 것이지, 제사를 받들 때 아무 것도 보이고 들리는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왕이 중()에 있으니 더욱 교섭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니, 독서할 때에 이처럼 이리저리 갈라지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하물며 평소 아무일 없이 있을 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자는 만약 일이 없는 때라 하더라도 귀는 반드시 들어야 하며, 눈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미 귀는 받드시 듣고, 눈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했으니, 전항에서 답한 것과는 이미 같지가 않습니다. 또 어찌 왜곡시켜 말하여 억지로 같은 뜻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고요한 때에는 다만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만 있고 알는 바와 깨닫는 바의 일이 없으니, 이것은 󰡔󰡕 괘에 있어서 순수한 곤()이 되는 것으로 양()이 없는 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복()괘를 논한다면 반드시 알고 깨닫는 바가 있는 것을 가지고 거기에 해당시켜야 되니 동일한 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절 역시 하나의 양이 처음 움직이는 곳이 만물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때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극히 은미하고 지극히 오묘한 곳으로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고요히 해야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한 점의 치우친 주장을 가지고 생각을 억지로 말한다면 바로 마음 속이 먼저 어지러워질 것이니 무슨 인연으로 저들의 같고 다름을 살필 수 있겠습니까?

 

代語之喩甚善 妄爲此語 今已是十餘年 每以告人 無領略者 今乃得子約書 知其爲切要之語 始有分付處也 但前日張富歸所惠書 所論或問中語却似未安 請且自反於心 分別未發已發界分令分明 却將冊子上所說來合看 還是如此否 自心下看得未明 便將衆說回互 恐轉生迷惑 斷置不下也 且如子約平生還曾有耳無聞目無見時節否? 便是祭祀 若耳無聞目無見 卽其升降饋奠皆不能知其時節之所宜 雖有贊引之人 亦不聞其告語之聲矣 故前旒黈纊之說 亦只是說欲其專一於此而不雜他事之意 非謂奉祭祀時都無見聞也 所謂王乃在中 尤無交涉 讀書最忌如此支蔓 况又平居無事之時乎 故程子云若無事時 耳須聞 目須見旣云耳須聞 目須見 則與前項所答已不同矣 又安得曲爲之說而强使爲一義乎 至靜之時 但有能知能覺者而無所知所覺之事 此於卦爲純坤 不爲無陽之象 若論卦 則須以有所知覺者當之 不得合爲一說矣 故康節亦云一陽初動處 萬物未生時 此至微至妙處 須虛心靜慮 方始見得 若懷一點偏主彊說意思 卽方寸之中先自擾擾矣 何緣能察得彼之同異邪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여주신 네 가지 조목 중에서 그 앞의 두 뜻은 비록 조금은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지극히 분별하기가 어렵지 않아 각각 이미 대략 답을 보냈습니다. 미발(未發)호기(浩氣) 두 뜻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뒤섞여 어지럽고 어그러지고 번잡하여 정리할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하루 아침에 구별하여 결정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본래 재껴두고 논하지 않고 현자께서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려 했는데, 또 구설에 안주하여 기꺼이 의심을 일으키지 않으니 그 실마리를 대략 여는데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천만 번 이라도 마음을 비우고 귀를 기울여야지 한결같이 지만(支蔓)하게 고집해서 다만 앞사람이 빼놓거나 잘못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꾸며 대어 맞추려 해서 도리어 자기의 바른 견해를 방해하는 것도 몰라서는 안됩니다.

대개 지금 논한 것은 비록 여러 수 백 마디로 많지만 󰡔중용󰡕에 대해서는 다만 정자(程子)문하의 질문자들이 말한 것만을 지키려고 하니,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음을 이르는 것일 따름입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설에 대해서는 다만 이 기는 원래 도와 의(道義)에 짝하여 이루어 지니 도의가 없으면 기()는 굶주리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그 외의 끌어다 인용한 잘못은 모두 이 문장으로 인해 다른 뜻이 생겨나 저절로 번거롭고 쓸데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만약 일일이 연구하고 분석하여 왕복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그 설이 번거로우면 번거로울수록 그 뜻은 더욱 골돌해져 반드시 이익이 없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삼가 권하니, 다만 자사와 맹자의 말을 취하여 마음을 비우고 평범히 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 그들의 설을 갑자기 보테지 마시고, 다만 글자의 뜻만을 훈고하여 구절에 따라 대략 이해한 후에 돌이켜 마음에서 구하여 그 본체의 내용이 어떠한가를 증함하면 그 옳고 그름을 즉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시 의심이 생겨나면 다시 자세히 논하기를 청합니다.

미발(未發)이발(已發)은 자사의 말이 이미 스스로 명백합니다. 정자가 적연감통(寂然感通)을 인용한 몇 조목은 모두 자사의 본래의 취지와 부합하는 것인데, 다시 서로간에 발명한 것입니다. 다만 여여숙(呂與叔)의 질문에 답한 것이 뜻하지 않게 무릇 심()을 말한 것은 모두 이발(已發)을 가리킨다는 한 마디의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곧바로 스스로 합당치 않다고 했으니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뜻은 이미 매우 정미하니 미발(未發)의 경계를 말한 곳에서도 두뇌처는 십분 다 한 것이니 다시 더할 만한 것이 있지 않습니다. 질문하는 자들이 말을 대략 요령있게 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만 잘라 단지 앞을 향해서만 말하려고 해서 마침내 아무런 견해가 없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질문한 것이 절제되지 않은 것과 정자가 평소 사람을 접하던 엄격함에 근거해 보면 당시에 답하지 않은 것은 정히 합당한데,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까닭에 그 질문을 인용하고 그것을 끌어다 이와같이 기록하여 앞뒤가 어긋나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뒤에 읽는 사람들이 만약 감히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역시 마땅히 보존해 놓고 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오히려 그 설을 의거하고 지켜 글자마다 미루어 자세히 하고 정론으로 삼으나, 정자(程子)가 손수 쓴 글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마땅치 않은 말로서 차라리 다른 사람이 기록한 바 자신과 서로 모순이 되는 설이라고 믿어, 억지로 이발(已發)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미발(未發)의 실제를 점차 지나쳐 사람들로 하여금 생겨남이 있게된 이후와 아직 죽기 이전엔 곧 한 숨도 미발의 때가 없고, 오직 난숙하게 잠든 듯이 있어야 미발이 될 수 있고, 또 천하의 대본을 세울 수 없다고 여기니 이는 그 그릇됨을 또한 분명하게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혹문󰡕 가운데에서 그 단서를 거칠게나마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제 이미 믿지 못하고 다시 이러한 분분한 의론이 있으니 청컨대 마음으로 생각하고 귀로 들으며 눈으로 보는 세 가지 일을 비교하여 그 지위와 시절이 같지 않음을 보십시오.

대개 마음이 앎이 있는 것과 귀가 들음이 있음눈이 봄이 있음은 한 때의 일입니다. 비록 아직 발하지 않았지만 일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마음이 생각함이 있는 것과 귀가 들음이 있음눈이 봄이 있음은 한 때의 일입니다. 하나라도 이것이 있으면 미발(未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자는 생각함이 있음을 이발(已發)로 여겼으니 옳습니다만, 여러 사람들은 봄이 없고 들음이 없음을 미발(未發)로 삼았으니 이것은 불가합니다. 만약 심히 믿지 못하겠다면 청컨대 다시 정자의 말로 증명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허발(許渤)의 지경(持敬)을 칭찬하면서 그 아래 주를 달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은 성인이 있었겠는가?” 또 항상 좌선입정(坐禪入定)의 잘못을 힘써 비난하였는데, 이 말은 모두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 만약 굿이 미발(未發)의 때를 보고 듣는 바가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또 어찌 허발을 기롱하여 입정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미발(未發)이발(已發)의 구별입니다.

만약 기()가 도의(道義)에 짝한다면 맹자의 뜻은 이 기()는 도의에 짝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고, 만약 이 기가 없다면 그 체()가 충족되지 못하여 주린 듯 할 뿐입니다. 이는 그 빈주의 향배(向背)조리의 분합(分合)이 대략은 의심할 만한 것이 없으니, 단지 대충이나마 문리에 통한 사람이 먼저 들어온 치우치고 막힌 설을 가지고 그 흉중을 어지럽힘이 없다면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평하게 하여 그것을 읽으면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몸에 돌이켜 증험해 보면 기는 몸을 주로하는 것이고 도의는 마음을 주로하는 것입니다. 기는 형이하자이고 도의는 형이상자입니다. 비록 그 나뉨이 같지 않지만 기()가 몸 가운데 있고 도의가 피부 밖에 있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니, 또한 어찌 이것을 가지고 저것에 짝하는 것을 꺼려 험난하게 힐난하고 왜곡시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의는 본래 혈기에 있지만 다만 도의가 없으면 이 기는 곧 굶주려 혈기의 사사로움이 되는데 그칠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의와 도에 짝한 연후에야 능히 호연(浩然)하게 굶주림이 없을 수 있다.” 어세(語勢)가 불순하고 첨가한 말이 지나치게 많으니 어디에 근거해서 이와 같이 보았는지 모르겠 습니다.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맹자󰡕에는 여기에 마땅히 온() 자가 있어야 이 뜻의 곡절을 다할 수 있으니, 한낱 ()’자를 써서 두 가지를 분리시켜 하나의 본래 형태로 합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 또 기()를 주로하여 두 가지를 빈주(賓主)라는 항상된 형세로 도치시키는 것입니다. 또 그 위에서 이미 그 기()됨은이라고 말을 시작하고 그 아래서 다시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고 하여 말을 이어갔으니, 이른바 이것이란 진실로 이 기()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만약 이 기가 없다면 체()가 충족되지 않아 굶주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보내주신 편지와 같다면 이것은 도의를 가리켜 한 말이니, 만약 이 도의가 없다면 기는 그 때문에 굶주리게 되니, 맹자는 여기에서 또한 마땅히 별도로 몇 마디 말을 하여 이 뜻의 곡절을 다 하고, 또 이와 같이 그 문장을 도치시켜 그 뜻을 반대로 하여 뒤에 그 글을 읽는 자들을 의심하게 하여 지금 말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 만약 이와 같다면 그 위의 본말은 반드시 정직함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고, 그 아래도 역시 반드시 다시 이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의리(義理)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세 구절을 연이어어 없애는 것은 다만 하나의 뜻이니 향배(向背)나 피차(彼此)의 형세가 없다면 지나치게 심하게 중복되어 너무 번거롭고 쓸데 없게됩니다. 그리고 그 중간의 한 구절은 또 이와같이 어둡고 분명하지 않으며, 이와같이 산만하고 느슨하면서도 근골이 없으니, 여기에 의존해서 암송하고 설한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되고 번민하게 하여 입에는 아교와 칠을 머금고는 삼키지도 토하지도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의 흉중에서 명쾌하고 깨끗하며 속기(俗氣)가 없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이와같이 마구잡이로 빗어 잘못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또 하물며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미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는 것이 호연지기가 된다고 앞에서 지적하였고, 그 뒤에 또 도의가 없으면 기는 굶주리게 되어 다만 혈기의 사사로움이 될 뿐이라고 하셨으니, 또한 서로 모순됨이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자의 말로 말할 것 같으면 쇠를 가지고 그릇을 만들고 흙을 쌓아 산을 이루는 비유와 같으니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이 없게할 수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가 비록 감히 일정한 사실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생각한 바 두 가지 것이 될 것 같다는 것은 역시 정자의 평소 말입니다. 이제 또 그가 편안함을 베풀어준 마땅한 바를 살피지 않고 무릅쓰고 가져다 여기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 혈기호기, 소체대체를 분별하는 것은 모두 맹자의 바른 뜻이 아니니 망령되게 분리하거나 합하면 도리어 스스로 두 가지로 여기는 혐의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 까닭을 근원해보면 다만 의와 도에 짝한다는 한 구절을 기꺼이 문장에 의거해서 뜻을 풀어 착실하게 평설하지 않음으로 인해 모름지기 첫머리부터 이와 같이 손을 대어 번거로운 희롱 거리로 만들었으니, 이에 잇달아 옮겨 나아가 왜곡 시키고 견강부회하여 그 통하기를 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맹자는 그 기를 포악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해석하여 기체(氣體)의 충족이라 하고 또 그 기됨이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리켜 이 굶주림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몇 마디 말은 수미가 상응하고 표리가 서로 발명되니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하나일 뿐입니다. 이제 반드시 포악함이 없다는 것을 혈기로 삼고 그 기가 되는 것을 호연한 것으로 삼으니 또한 두 가지 물건의 경계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또 말하기를 호기(浩氣)는 혈기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하여 한낱 어지럽게 더하고 쓸데없이 길어지게 되었으니, 모두 맹자이 본의가 아닙니다.

이제 또한 낱낱이 세어서 보내주신 편지의 잘못된 자취에 빠질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와같이 말하기만 하여도 이미 그 쓸데없음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시고 또 자기 분수 상에서 이치를 밝히고 앎을 이루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지, 모름지기 전배들을 구호하는 것으로 일삼는데 급급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말의 득실은 흑백과 같이 판연하니, 이미 가릴 수 없고, 구제해도 미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의리가 일찍이 분명해지지 않으니 바로 마치 바야흐로 물 가운데 있으면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또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이 빠진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미발(未發)은 순수한 곤()에 비유할 수는 없고 마땅히 태극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도리어 작은 잘못이 아니니 감히 예에 따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우선 시험 삼아 밝혀 보겠습니다. 만약 미발을 태극이라고 한다면 이발은 무극이 됩니까? 만약 순수한 곤은 비발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어떤 괘를 가지고 미발을 삼아야 합니까? 아무래도 다시 마땅히 정좌하여 마음을 비우고 밝고 깨끗하게 하여 태극도12괘의 획을 안배하고 배치하여 버리고 남겨둘 것이 있어야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장자(張子)의 이른바 옛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새로운 뜻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결코 그렇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나는 실언을 한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임시방편이나마 잠시 유예하는 것이 낳음만 같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굳세게 떠들썩하게 해서 한갓 심력만 허비하여 손해만 있고 이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所示四條 其前二義雖有小差 然猶不至難辨 各已略報去矣 至於未發浩氣二義 則皆雜亂膠轕 不可爬梳 恐非一朝之辨所能決 本欲置而不論 以俟賢者之自悟 又恐安於舊說 未肯致疑 不免略啓其端 千萬虛心垂聽 不可一向支蔓固執 只要彌縫前人闕誤 不知却礙自家端的見處也

蓋今所論 雖累數百言之多 然於中庸但欲守門問者之說 謂未發時耳無聞目無見而已 於浩氣之說 但欲謂此氣元是配合道義而成 無道義則氣爲之餒而已 其他援引之失 皆緣此文以生異義 自爲繁冗 若一一究析 往復不已 則其說愈繁 其義愈汨而未必有益 故今奉勸不若只取子思孟子之言虛心平看 且勿遽增他說 只以訓詁字義隨句略解 然後反求諸心 以驗其本體之實爲如何 則其是非可以立判 若更疑著 則請復詳論之

夫未發已發 子思之言已自明白 程子數條引寂然感通者 皆與子思本指符合 更相發明 但答呂與叔之問 偶有 凡言心者皆指已發 一言之失 而隨卽自謂未當 亦無可疑 至遺書中 纔思卽是已發 一句 則又能發明子思言外之意 蓋言不待喜怒哀樂之發 但有所思 卽爲已發 此意已極精微 說到未發界至十分盡頭 不復可以有加矣 問者不能言下領略 切己思惟 只管要說向前去 遂有無聞無見之問 據此所問之不切與程子平日接人之嚴 當時正合不答 不知何故却引惹他 致他如此記錄 前後差舛 都無理會 後來讀者若未敢便以爲非 亦且合存而不論 今却據守其說 字字推詳以爲定論 不信程子手書 此固未當之言 而寧信他人所記自相矛盾之說 彊以已發之名侵過未發之實 使人有生已後未死已前更無一息未發時節 惟有爛熟睡著可爲未發 而又不可以立天下之大本 此其謬誤又不難曉 故或問中粗發其端 今旣不信而復有此紛紛之論 則請更以心思耳聞目見三事校之 以見其地位時節之不同

蓋心之有知與耳之有聞目之有見爲一等時節 雖未發而未嘗無 心之有思乃與耳之有聽目之有視爲一等時節 一有此則不得爲未發 故程子以有思爲已發則可 而記者以無見無聞爲未發則不可 若苦未信 則請更以程子之言證之 如稱許渤持敬而注其下云 曷嘗有如此聖人 又每力詆坐禪入定之非 此言皆何謂邪 若必以未發之時無所見聞 則又安可譏許渤而非入定哉 此未發已發之辨也

若氣配道義 則孟子之意不過曰此氣能配道義 若無此氣 則其體有不充而餒然耳 此其賓主向背條理分合略無可疑 但粗通文理之人 無先入偏滯之說以亂其胸次 則虛心平氣而讀之 無不曉會 若反諸身而驗之 則氣主乎身者也 道義主乎心者也 氣形而下者也 道義形而上者也 雖其分之不同 然非謂氣在身中而道義在皮外也 又何嫌於以此配彼而爲崎嶇詰曲以爲之說 曰 道義本存乎血氣 但無道義 則此氣便餒而止爲血氣之私 故必配義與道 然後能浩然而無餒乎 語勢不順 添字太多 不知有何憑據見得如此 若果如此 則孟子於此當別有穩字 以盡此意之曲折 不當下一 配字以離二者合一之本形 而又以氣爲主 以倒二者賓主之常勢也 且其上旣言 其爲氣也 以發語 而其下復言 無是餒也 以承之 則所謂是者 固指此氣而言 若無此氣 則體有不充而餒然矣

若如來喩 以是 爲指道義而言 若無此道義 卽氣爲之餒則孟子於此亦當別下數語 以盡此意之曲折 又不當如此倒其文而反其義 以疑後之讀者 如今之云也 且若如此 則其上本未須說以直養而無害 其下亦不須更說是集義所生矣 今乃連排三句 只是一意 都無向背彼此之勢 則已甚重複而太繁冗矣 而其中間一句又如此其暗昧而不分明 如此其散緩而無筋骨 依以誦說 使人迷悶 如口含膠漆 不可呑吐 竊意孟子胸中明快灑落 其發於言語者 必不至於如此之猥釀而紕繆也 又况來喩已指 無是而餒 者爲浩氣於前矣 其後又謂無道義則氣爲之餒而但爲血氣之私 不亦自相矛盾之甚邪 若程子之言 則如以金爲器積土成山之喩 皆有不能使人無疑者 來喩雖亦不敢據以爲說 然其所慮恐爲二物者 亦程子之常言 今又不察其施安之所當 而冒取以置於此也

其他分別血氣浩氣 小體大體 皆非孟子正意 而妄爲離合 却自墮於二物之嫌 原其所以 只因 配義與道 一句不肯依文解義 著實平說 故須從頭便作如此手勢翻弄 乃可以迤邐遷就 委曲附會而求其通耳 孟子言 毋暴其氣 而釋之曰 氣體之充 又言 其爲氣也 而指之曰 無是餒也 是數語者 首尾相應 表裏相發 其所指者正一物耳 今必以無暴者爲血氣而其爲氣者爲浩然 而又恐犯二物之戒 故又爲之說曰 浩氣不離乎血氣 徒爲紛擾 增添冗長 皆非孟子之本意也

今亦不暇悉數以陷於來喩之覆轍 然只如此說 已覺不勝其冗矣 幸深思之 且以自己分上明理致知爲急 不須汲汲以救護前輩爲事 蓋其言之得失白黑判然 已不可揜 救之無及 又况自家身心義理不曾分明 正如方在水中 未能自拔 又何暇救他人之溺乎

但所云未發不可比純坤而當爲太極 此却不是小失 不敢隨例放過 且試奉扣 若以未發爲太極 則已發爲無極邪 若謂純坤不得爲未發 則宜以何卦爲未發邪 竊恐更宜靜坐 放敎心胸虛明淨潔 却將太極圖及十二卦畫安排頓放 令有去著 方可下語 此張子所謂 濯去舊見 以來新意 者也 如決不以爲然 則不免爲失言者 不若權行倚閣之爲愈 不能如此紛拏彊聒 徒費心力 有損而無益也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장원덕(張元德)()’를 해석하여 ()’이라고 했는데, 진실로 거칠고도 우활한 것이어서 자약(子約)이 비난 했는데, 옳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자는 역시 전혀 내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여기에 나아가 그와 더불어 분석하지 않고 별도로 정자(程子)충막기상(沖漠氣象)’이라는 것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현하고 아득하며 황홀함에 빠지는 병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자가 말한 것은 바로 의()에 대가 되는 것으로 인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결론이 있어 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설을 깨뜨리려는 사람들은 또한 저들은 동쪽이고 나는 서쪽인 것과 같아 서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나의 소견이 스스로 투철하지 못하여 억지로 헤아려 대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억지로 말한 것이니 그 때문에 지루하고 들떠 발명하는 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내 뜻과 같다면 도()가 이름을 얻는 것은 다만 사물의 당연한 이치일 뿐입니다. 원덕은 곧바로 ()’이라고 해석하였으니 진실로 불가합니다. 당시에 만약 다만 마땅히 행해야 하는 길로 답하였다면 저들이 나의 뜻을 발설함으로 인하여 충막(沖漠)이라고 한 것도 또한 저절로 관통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또 보내주신 편지에서 인용하신 일음일양(一陰一陽)군신부자(君臣父子)형이상하(形而上下)충막기상(沖漠氣象) 등의 설을 합하여 분석하면 음양이나 군신부자는 모두 사물이며 인간의 소행이며, 형이하(形而下)의 것이고 만상이 어지럽게 벌여져 있는 것입니다. 이 몇 가지는 각각 당연한 이치가 있으니 곧 이른바 도()이고, 마땅히 가야하는 길이며, 형이상의 것이고 충막하여 조짐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형이상자를 가지고 말할 것 같으면 충막이라는 것은 진실로 체가 되고, 그것이 사물의 사이에서 발한 것이 용()이 됩니다. 만약 형이하의 것을 가지고 말하면 사물은 또 체가 되고 그 이가 발현한 것이 용이 됩니다. 개괄적으로 형이상자가 도의 체가 되고 천하에 공통된 다섯 가지의 도가 도의 용이 된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원덕의 도는 스스로 행할 수 없다는 말 이하는 본래 병통이 없으므로 답하는 말에 설을 전개했습니다. 그 설이 본래 좋은 말이지만 다만 그에게 답하여 붙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제 다시 한 마디 말을 하겠습니다. “형이상자를 도라 이르니 사물의 이치입니다. 형이상자를 기()라 이르니 사물의 물()입니다.” 우선 시험삼아 그의 말을 가리고 다만 이 두 구절을 가지고 미루어 보시고 만약 과연 분명하게 이해가 되시면 그의 설 역시 저절로 관통되어 결론지을 곳이 없게될 것입니다.

 

張元德訓道爲行 固爲疎闊 子約非之是也 然其所說行字 亦不爲全無來歷 今不就此與之剖析 而別引程子冲漠氣象者以告之 故覺得有墮於窈冥恍惚之病 程子所說 乃因對義而言 故自有歸著而不爲病 而所以破其說者 又似彼東我西 不相領略 此乃吾之所見自未透徹 未免臆度籠罩而强言之 所以支離浮汎而不能有所發明也 若如鄙意 則道之得名 只是事物當然之理 元德直以訓行 則固不可 當時若但以當行之路答之 則因彼之說發吾之意 而冲漠之云亦自通貫矣 今且以來示所引一陰一陽君臣父子形而上下冲漠氣象等說合而析之 則陰陽也 君臣父子也 皆事物也 人之所行也 形而下者也 萬象紛羅者也 是數者各有當然之理 卽所謂道也 當行之路也 形而上者也 冲漠之無朕者也 若以形而上者言之 則冲漠者固爲體 而其發於事物之間者爲之用 若以形而下者言之 則事物又爲體 而其理之發見者爲之用 不可槪謂形而上者爲道之體 天下達道五爲道之用也 元德所云道不能以自行以下自無病 而答語却說開了 其說自是好語 但答他不着爾 今更爲下一語云 形而上者謂之道 物之理也 形而下者謂之器 物之物也 且試屛去他說 而只以此二句推之 若果見得分明 則其他說亦自通貫而無所遺也

 

 

여자약에게 답함 (4-2333)答呂子約

 

원덕(元德)()’()’으로 해석한 것을 옳지 않다고 여기는 까닭은 대개 도를 행()이라고 여기면 도는 자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 모름지기 길을 가는 까닭을 가지고 말하면 하나로 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둘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자의 ()는 충막한 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말하여 높고 지극한 예를 크고 깊게 탐구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오묘함을 묵묵히 알고자 한다면 이라는 한 글자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될 것입니다. 만약 마땅히 가야하는 길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단지 달도(達道)를 말할 수 있을 뿐일 것 같습니다. ()의 근원을 논함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이와 같이 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형이하가 곧 형이상이긴 하지만, 󰡔역전󰡕에서 지극히 은미한 것은 이()이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른바 형이상자입니다. “지극히 드러난 것은 상()이다는 말은 곧 이른바 형이하자입니다. “()와 용()이 한 근원이요 드러남과 은미함이 간격이 없다는 말은 형이상형이하이지만 또한 단지 이러한 의리일 뿐입니다.

원덕이 말한 병통은 앞의 편지에서 다 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그를 공격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단지 자신만 옳다고 보고 제 의론에 대해서는 아직 깊이 살펴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땅히 행해야할 이치가 달도(達道)가 되고, 충막무짐(沖漠無朕)이 도의 본원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말이 되질 않습니다. 자약이 본 곳이 바로 다만 이와 같을 뿐이어서 역시 그가 말한 것이 아직 계합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다만 이 당연한 이치와 충막무짐을 보아야 하니, 이 이() 밖에 별도로 하나의 충막무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이상하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분별이 있습니다. 반드시 이것은 체()이고 저것은 용()이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근원을 말할 수 있고, 이것이 상()이고 저것이 이()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비로소 무간(無間)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단지 하나의 물건이라면 다시 일원(一源)무간(無間)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덕이 이라고 해석한 것은 곧 보내주신 편지에서 ()’을 의리가 쌓인 것과 같으니 한편으로는 능()한 바를 가지고 능()으로 삼고, 또 한편으로는 능을 가지고 능한 바를 삼은 것입니다. 불교 서적에 능과 소능(所能)에 관한 설이 있는데, 능은 사람이 한 것을 이르고 소능은 사람이 한 일을 이릅니다. 그 대의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은밀합니다. 예를 들면 도는 소능을 이르는 것이고 학은 곧 이른바 능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린 아이가 대구를 맞추어 꽃을 보고 버들을 꺽는다고 함에 있어 본다꺽다는 글자는 능이고, ‘버들은 소능(所能)이니 이것은 어지럽힐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등의 순서들은 도리어 통할 수 없고, 바로 마음과 뜻의 큰 구분이 거칠게 있으니 어찌 능히 그 깊고 은미한 속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所以不以元德以道訓行爲然者 蓋以道爲行 則道非行字所能盡 又須以所以行者言之 則毋乃欲一而反二乎 故以程子道有冲漠氣象告之 欲渠深探夫峻極之體 而黙識夫無聲無臭之妙 則自知非行之一字所能盡 若謂當行之路 則恐秖可言達道耳 於論道之原 則恐難如此著語也 形而下卽形而上者 易傳謂至微者理 卽所謂形而上者也 至著者象 卽所謂形而下者也 體用一源 顯微無間 則雖形而上形而下 亦只是此箇義理也

元德所說之病 前書盡之 如來喩之云 却攻他不著 恐是只見自家底是 於鄙論却未深考也

謂當行之理爲達道 而冲漠無朕爲道之本原 此直是不成說話 不謂子約見處乃只如此 亦無怪他說之未契也 須看得只此當然之理冲漠無朕 非此理之外別有一物冲漠無朕也 至於形而上下 却有分別 須分得此是體 彼是用 方說得一源 分得此是象 彼是理 方說得無間 若只是一物 却不須更說一源無間也

元德訓道爲行 便似來喩訓學爲義理之蘊一般 一則以所能爲能 一則以能爲所能也 佛書有能與所能之說 能謂人所做作 所能謂人所做作底事 其分別文義亦甚密 如道則所能之謂 學卽所謂能也 如今小兒屬對 看花折柳 看與折字是能 花與柳是所能 此不可亂也 此等倫類 尙不能通 是乃心意大段粗在 豈能及其深微之奧邪

 

여자약에게 답함(아래 논어에 대한 잡다한 논의도 같음. 무오년 25) 答呂子約 下論語雜論同 戊午二月五日

  

논하신 바 오제기(五帝紀)에서 취한 것은 대체로 󰡔고문상서󰡕 󰡔대대례󰡕가 주가 되니 상고하여 믿을 것을 알 게 된다고 하셨는데, 복희신농이 󰡔」「대전을 보았다는 것은 바로 공성(孔聖)의 말이고, 팔괘가 육경(六經)에 벌여져 있으니 만세 문자의 조상이 되는데 사천(史遷)이 무슨 까닭에 유독 빼놓고 기록하지 않아 마침내 󰡔사기󰡕 한 책으로 하여금 마치 사람이 몸은 있되 머리가 없는 것 같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상고하여 믿을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까?

태사공의 양양한 미덕은 곧 소황문(蘇黃門)추우(騶虞)와 절지(竊脂)이다고 했는데, 그 아래 문장을 보면 전서에서는 도리어 이 몇 구절을 버티어 일으킬 줄을 모른 것이 아닌지요? 배우는 자들은 성인의 도에 대해 다만 그 밖의 문장을 익히 듣고 그 가운데의 실질을 상고하지 않아 왕왕 이와 유사하게 됩니다. 왕개보(王介父)가 임금의 총명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그릇되게 한 것도 또한 단지 이와 같은 말일 뿐입니다. 어찌 이것을 아주 진지한 담론이라고 여겨 성현의 반열에 올려 이 도()의 전승에 속하게 할 수 있겠습니가? 이러한 등의 의론을 지극한 것으로 여긴다면 곧 스스로 이해한 성현의 도리는 일찍이 분명하지 않아 저들의 놀라움 만을 당하게 됩니다. 사천(史遷)은 복식(卜式)과 상양(桑羊)을 한 통속이라고 폄할 수 있었지만, 또한 관중(管仲)이극(李克)의 깊이 알고 이익에 힘쓰는 것이 해가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육국표(六國表)󰡕의 이른바 세상이 변하면 공을 이룸이 크다”, “의론이 낮으면 행하기 쉽다”, “옛날을 기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니, 󰡔화식전(貨殖傳)󰡕에서 길이 가난하고 천하면서도 인의(仁義)를 말하기 좋아하는 것이 부끄러워할 만하다는 것을 기롱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백이전(伯夷傳)에서 허유(許由)를 변론한 일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백이의 마음을 논한 것은 바로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는 것과는 서로 반대가 됩니다. 그 소씨(蘇氏)󰡔고사(古史)󰡕를 보면 누가 능히 공자의 말을 상고하여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마천은 공손홍(公孫弘)이 유학이 드러나는 것으로 자신이 족히 유자가 될 수 없다고 여겼는데,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이러한 뜻이 있는지요? 저것은 진실로 유자(儒者)가 많아지면 요구를 적게 하고, 수고로워도 적게 공을 드린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그 일은 끝까지 따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저들의 이른바 유자라는 것은 그 뜻이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보여주신 몇 개의 조목은 다 변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만약 마천(馬遷)과 반고(班固)를 나란히 논한다면 진실로 우열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책 수십만 마디가 또한 어찌 좋은 곳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대지(大旨)만을 논한다면 소씨(蘇氏)의 두 마디 말은 아마도 사천(史遷)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 단점을 숨기고 그 장점을 드러내어 하나도 성인의 뜻과 합하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 삼아 높이고 숭상하거나 심지어 육경과 똑같이 높여 그 잘못한 것을 의론함이 있음을 듣는다면 발연히 말에 드러나 주먹을 떨치고 팔뚝을 걷어 붙이고 일어나 끌어당기려 하니, 한결 같이 어찌 소견이 작은지요? 이 일은 견해가 치우치고 식견이 천박하며 버리고 취할 것이 차이가 나니 눈 밝은 사람의 웃음 거리가 될 뿐 아니라 또한 자식의 악을 보지 말며, 이삭의 큼을 보지 말라는 계를 범하는 것이니, 크게 심술의 해가 됨을 몰라서는 안됩니다.

 

 

所論五帝紀所取多古文尙書大戴禮爲主 爲知所考信者 然伏羲神農易大傳 孔聖之言 而八卦列於六經 爲萬世文字之祖 不知史遷何故乃獨遺而不錄 遂使史記一書如人有身而無首 此尙爲知所考信者邪

太史公之洋洋美德 卽蘇黃門之騶虞竊脂 觀其下文 全書不知還撑柱得此數句起否 學者於聖人之道徒習聞其外之文而不考其中之實者 往往類此 王介父所以惑主聽而誤蒼生 亦只是此等語耳 豈可以此便爲極摯之談而躋之聖賢之列 屬以斯道之傳哉 以此等議論爲極至 便是自家見得聖賢道理未曾分明 被他嚇倒也 史遷能貶卜式桑羊爲伍 又能不與管仲李克爲深知功利之爲害 不知六國表所謂世異變成功大 議卑易行 不必上古 貨殖傳譏長貧賤而好語仁義爲可羞者 又何謂邪

伯夷傳許由事固善 然其論伯夷之心 正與求仁得仁者相反 其視蘇氏古史孰爲能考信於孔子之言邪

公孫弘以儒顯爲譏之不足爲儒 不知果有此意否 彼固謂儒者博而寡要 勞而少功 是以其事難盡從 然則彼所謂儒者 其意果何如邪

所示數條 不暇悉辨 若以馬遷班固竝論 則固不無優劣 而其書數十萬言 亦豈無好處 但論其大旨 則蘇氏兩語 恐史遷復生不能自解免也 今乃諱其所短 暴其所長 以爲無一不合聖人之意 推尊崇獎 至與六經比隆 聞有議其失者 則浡然見於詞色 奮拳攘臂 欲起而扔之 一何所見之低矮邪 此事不唯見偏識淺 去取差謬 爲明眼人所笑 亦正犯子惡苗碩之戒 大爲心術之害 不可不知

 

 

(): 原作’, 宋閩本改.

(): 原作’, 據右引改.

(): 原作’, 據右引改.

 

논어 (4-2336)論語

 

()이라는 말은 대개 의리가 쌓인 것을 가리킵니다. 감동하여 믿는데 이르고 다시 강습하고 서로 보탠다는 설이 있으니 처음 배우면서부터 바라는 것이 밖의 것이라면 그 근본은 이미 이지러진 것입니다. 사씨(謝氏)앉음에 시동(尸童)과 같이 함은 앉아 있을 때의 익힘이요, 섬에 제계(齊戒)함과 같이 함은 서 있을 때의 익힘이다.”고 했는데, 성인이 말을 세운 뜻을 살펴보면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윤씨(尹氏)배움은 자기에게 달려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은 남에게 달려 있다.”고 했는데, 이 말에는 미세하게나마 자신을 세운 병통이 있습니다.

의리가 쌓인 것이라는 뜻으로 학()자를 해석하는 것은 글자의 뜻이 아닌지라 문리(文理)를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뒤에 후중하지 않다는 문장에 대해서도 어떤 말이 있습니다. “감동하여 믿는다는 말과 바라는 것이 밖의 것이라는 말은 뜻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정자(程子)는 벗이 찾아오는 즐거움에 대해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이 말하지 않은 것입니까? 아마도 다시 마당히 자세하게 생각해야 될 것 같습니다. 윤씨의 설에서는 아직 나를 세운 병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장은 초학자들이 도에 들어가는 문을 말한 것이니 모름지기 대단하게 현묘한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은 화순함이 가운데 쌓인 것이 아직 두텁지 않은 것입니다. 쌓인 것이 이미 두터워지면 이치를 거스르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은 반드시 없을 것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위를 범하는 허물은 적고 난을 일으키는 죄는 큽니다. 그러므로 그 말의 순서가 이와 같은 것이지 아직 후하지 않거나 이미 후해져서 그런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에 힘쓰면 도가 생겨난다는 것은 평벙한 말로써 아래 구절의 내용을 일으킨 것입니다. 집주의 설을 마땅히 다시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이 인()한 이가 적다.”는 이 장은 선을 밝히는 공부를 논한 것입니다.

이 장은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니 어떻게 선을 밝히는 공부를 말하겠습니까?

아직 익히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 전함이 혹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의 지나침이나 상()의 미치지 못함과 같은 것은 유폐(流弊)를 낳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전하면서 익히고 익히면서 전한 연후에 올바르게 전할 수 있습니다.

전수(傳受)받은 것을 익히지 않는가?”라고 한 말은 문세가 아마도 이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증자(曾子)의 학문은 그 전수받은 것이 차이가 나지 않아 근본적으로 환하게 꿰뚧고 적화하니 익힌 공부가 아닙니다. 만약 소견이 옳지 않은데에도 단지 익히기만 한다면 그 잘못을 더욱 증가시킬 뿐입니다.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며, 반드시 바른 뜻을 알고, 이와 같이 글자에 즉해서 뜻을 낳고 견강부회하여 구멍을 뚧듯이 함을 극력 피해야지, 다만 시대에 영합하는 문장 짓기를 좋아하는 것은 강학이 아닙니다.

공경은 일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믿음은 다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백성과 더불어 믿음이 있고, 상벌을 약속하며, 그 백성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천근하게 얘기하면 위문후(魏文侯)가 사냥을 약속하고 상군(商君)이 나무를 옮긴 것도 역시 그러한 유입니다. 반드시 이와같이 고원하게 이야기하여 성인의 말의 본의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행하고 남은 힘이 있은 후에 글을 배운다는 말이 어찌 강학의 절실함을 느슨하게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긴 것이겠습니까?

책은 진실로 읽지 않을 수 없지만 다만 행하고 실천하는데 비해 조금 느슨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또 굳이 행하고 남은 힘이 있은 후에 배운다고 했겠습니까?

의리가 쌓인 곳을 궁구한다는 말은 배우는 자들은 의리가 쌓인 곳을 궁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자하(子夏)의 말이라고 여김으로 인해 마침내 그 사이에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자하의 말이 공자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 역시 폄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이와 같이 감싸고 보호하지 않더라도 다만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살펴 마땅함에 따라 짐작해야할 따름입니다. “의리가 쌓인 곳이라는 말 앞에 하나의 ()’자를 놓았는데, 수장(首章)에 비해 조금 문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수장의 뜻은 실제로 마땅히 실천을 겸하여 말한 것이므로 사()의 설도 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말씀하신 바와 같다면 도리어 말한 것이 궁리(窮理) 일변일 따름입니다.

가운데를 말미암아 밖에 응하니, 밖을 제어하는 것은 그 가운데를 기르는 것이다

가운데를 말미암아 밖에 응한다는 말은 보고, 듣고, 말하고 들음 네 가지를 미루어 근원해보면 모두 가운데를 말미암아 나오는 것으로 그 이치가 이와 같음을 평범하게 말한 것일 뿐이지 안쪽으로부터 공부해 나옴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밖을 제어하는 것은 그 가운데를 기르는 것이다는 말은 비로소 공부하는 곳은 전반적으로 밖으로부터 안으로 하며 입사귀에서부터 뿌리로 들어간다는 뜻을 말한 것이지, 안과 밖이 번갈아 가며 서로 기름을 이르는 것이 아니니, 이 장의 글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지 않으려면 모름지기 이와같이 나누어 거칠게 해서는 안됩니다. 시잠(視箴)청잠(聽箴) 두 잠()에서 마음이여! 본래 허하니, 사람이 병이(秉彛)의 양심(良心)을 가지고 있음은 천성(天性)에 근본 하였다.”고 한 말 역시 모두 근본을 미루어서 말한 것입니다. 그 공부로 말할 것 같으면 전반적으로 밖에서 제어하는데 달려있으니 사특함을 막고 듣지 말라는 곳에서 다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난 번 叔昌의 아우가 윤화정(尹和靜)이 쓴 사잠을 베껴서 세긴 것을 보니, “가운데를 말미암음은 밖에 응하기 위해서이다.”고 되어 있기에, 일찍이 그 잘못을 변별하였습니다. 나중에 윤()이 쓴 다른 판본을 보니 도리어 모두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오류가 있으니, 윤공(尹公)의 생각 역시 그 선생의 뜻을 잘못 이해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學之爲言 蓋指義理之蘊 至於感孚而復有講習相滋之說 自夫始學而所願者外 則其本已虧矣 謝氏坐如尸 坐時習 立如齋 立時習 觀聖人立言之旨 有不在彼者 尹氏學在己 知不知在人 微有立我之病

以義理之蘊訓學字 恐非字義 不成文理 後不重章更有說 感孚之說與所願者外 意似相反 且程子於朋來之樂何故不如此說 恐更當細思之 尹氏說未見立我之病 此章是說初學入道之門 未須大段說得玄妙也

鮮則和順積諸中者未厚 所積者旣厚 其於逆理亂常之事可以保其必無也

犯上之過小 作亂之罪大 故其言之序如此 非謂未厚已厚而然也 務本道生是泛言 以起下句之實 集註之說 宜更詳之

巧言令色鮮矣仁 此章論明善之功

此章只是戒人勿爲巧言令色 如何便說得明善之功

有所未習 其傳或差 如之過 之不及 不能不生流弊 唯傳而習 習而傳 然後爲得其正傳

傳不習乎文勢恐不如此 曾子之學 其傳不差 乃是合下見得通透的確 非習之功也 若所見不是而徒習之 愈增其誤耳 讀書窮理 須認正意 切忌如此緣文生義 附會穿穴 只好做時文 不是講學也

敬以事言 而信則無不盡也

信是與民有信 期會賞罰 不欺其民 淺言之 則魏文侯之期獵 商君之徙木亦其類也 不須如此高說 失聖言之本意

行有餘力而後學文 夫豈以講切爲可緩哉

書固不可不讀 但比之行實差緩耳 不然 則又何必言行有餘力而後學邪

究義理之蘊 言學者不可不究夫義理之蘊也 因此語爲子夏之言 而遂致疑於其間

子夏之言爲不如孔子 亦未爲貶 不必如此回護 但當虛心觀理而隨宜斟酌耳 義理之蘊 上著一究字 比首章稍成文理 然首章之義實當兼踐履而言 故說亦不可廢 若如所說 却只說得窮理一邊也

由乎中而應乎外 制乎外所以養其中

由乎中而應乎外 是推本視聽言動四者 皆是由中而出 泛言其理之如此耳 非謂從裏面做功夫出來也 制乎外所以養其中 方是說做功夫處全是自外而內 自葉流根之意 非謂內外交相養 與此章之文本不相戾 不須如此分疎也 如視聽二箴云 心兮本虛 秉彝天性 亦皆是推本而言 若其功夫 則全在制之於外 閑邪勿聽處 可更詳之 向見叔昌之弟摹刻尹和靜所書四箴 作由乎中所以應乎外 嘗辨其謬 後見書他本 却皆不錯 然旣有此誤 則尹公想亦未免錯會其師之意也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홀로 있음을 삼가는 조목입니다. 그런데 홀로 있음을 삼간다는 것은 바로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바에 삼가고 두려워한다는 것의 총명(總名)이니, 아직은 두 가지 일로 나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란 진실로 가서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요긴하고 절실한 곳은 더욱 은미한 곳에 있다. 비록 감가지 않는 바가 없지만 삼가는 바는 더욱 홀로 있는데 있다고 말하니, 진실로 배우는 자들이 공을 쓰고 힘들 들이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운운. 만약 끝 장의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방 귀퉁이에 부끄럽지 않다를 나누어 두 구절로 만들었다면 비록 각각 서로 부속시킬 수 있지만 앞의 한 구절은 사람이 보지 않으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을 이르고, 뒤의 한 구절은 자기가 소유하였으면 도리어 자취가 있음을 이르는 것이니, 자기가 보지 않고 듣지 않음에 비유해보면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남이 보지 않은 바를 근독(謹篤)이라고 여기면 뜻은 비록 절실할 지라도 도리어 가볍고, 방 귀퉁이에 부끄럽지 않은 것을 가지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으로 삼으면 또 거의 엽등에 가깝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의심하신 󰡔중용󰡕 수장의 몇 구절은 문의(文義)가 역시 통하니, 장구의 설과 비유해보면 더욱 힘들 덜고도 맛이 있습니다. 다만 위의 문장을 가지고 상고하여보면 이미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정밀하고 거칠며 숨고 드러나는 틈이 없이 모두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두려워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만약 그 생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보는 바와 듣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지 않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는 것이다고 한다면 이 두 구절은 위 문장의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한 구절의 뜻을 결말 짓는 것이며, 아래 문장은 또한 경계하고 삼가지 않음으 없는 가운데, 은미한 사이에 염려의 싹을 더욱 소홀해서는 않됨을 제기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 홀로 있을 때에 삼가고자 한 것이며, 또한 별도로 위 문장의 은미라는 두 구절의 뜻을 결말짓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보내주신 설과 같다면 이미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마땅히 경계하고 삼가야 한다고 하니, 아래 구절은 도리어 실마리를 고치지 않더라도 오직 은미함만이 드러나는 것이 되니 그 홀로 있음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고만 말한다면 이 보는 바와 듣는 바은미하지 않은 곳은 모두 소홀해져서 삼가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끌어다 붙이게 되면 곧 윗 구절도 설이 치우치게됩니다. 다만 이것은 그대의 생각일 뿐 이치에는 장애가 있는 것 같고, 또 문세에 있어서도 역시 중복되고 번거로워 쓸때 없을 뿐인 듯 싶습니다. 이른바 진실로 배우는 자들이 공을 쓰고 힘들 들임에 삼가고 밀접하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는데, 나의 본의는 도리어 이와 같지 않습니다. 삼가고 경계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은 이발(已發)과 미발(未發)을 통틀어서 말한 것으로 그 홀로 있음을 삼간다는 것은 오로지 이발(已發)을 위해 가설한 것일 뿐입니다. 끝 장에서 인용한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다는 문장은 이 하나의 사물이 은미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어서 방 귀퉁이에 부끄럽지 않다면 안과 밖이 통연(洞然)하여 다시는 아주 작은 티끌이나 찌끼도 없게될 것입니다. 대개 첫장은 고요함으로부터 움직임으로 나간 것이고, 끝장은 얕은 곳으로부터 깊은 곳에 미친 것입니다. 또 보지 않는 바란 혼자 있는 바가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움직이지 않는데 공경하고 말하지 않는데 믿는 것이 그 보지 않고 듣지 않는바에 경계하고 삼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첫장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곳은 모두 산만해져서 통일감이 없게 됩니다.

 

戒懼於不睹不聞者 乃謹獨之目 而謹獨者 乃戒懼於不睹不聞之總名 似未可分爲二事也 今曰道固無適而不在 而其要切之處 尤在於隱微 雖無所不謹 而所謹者尤在於獨 固欲學者用功轉加切近云云 若末章潛雖伏矣 不愧屋漏 分爲兩節 雖可以各相附屬 然前一節謂人所不見則屬乎人 後一節謂己之所有則猶有迹 比之己之不睹不聞 則又有間矣 今以人之所不見爲謹獨 意雖切而反輕 以不愧屋漏爲不睹不聞 則又幾於躐等

來示所疑中庸首章數句 文義亦通 比之章句之說尤省力而有味 但以上文考之 旣言道不可須臾離 卽是無精粗隱顯之間 皆不可離 故言戒謹乎不睹不聞以該之 若曰自其思慮未起之時早已戒懼 非謂不戒謹乎所睹所聞 而只戒謹乎不睹不聞也 此兩句是結抹上文不可須臾離一節意思了 下文又提起說無不戒謹之中 隱微之間念慮之萌尤不可忽 故又欲於其獨而謹之 又別是結抹上文隱微兩句意思也 若如來說 則旣言不可須臾離而當戒謹矣 下句却不更端 而偏言唯隱微爲顯見而不可不謹其獨 則是所睹所聞不隱不微之處皆可忽而不謹 如此牽連 卽將上句亦說偏了 只這些子意思 恐於理有礙 且於文勢亦似重複而繁冗耳 所謂固欲學者用功轉加謹密 之本意却不如此 蓋無所不戒謹者 通乎已發未發而言 而謹其獨則專爲已發而設耳 卒章所引潛雖伏矣猶是有此一物藏在隱微之中 不愧屋漏則表裏洞然 更無纖芥査滓矣 蓋首章本靜以之動 卒章自淺以及深也 且所不見 非獨而何 不動而敬 不言而信 非戒謹乎其所不睹不聞而何? 若首章不分別 卽此等處皆散漫而無統矣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지 않고 듣지 않음이 이미 은미한 사이이며, 염려의 싹이라면 이른바 ()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미()보다 나타남이 없는 것은 별도로 한 단락의 공부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보지 않고 듣지 않은 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는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미()보다 나타남이 없다는 말이 같지 않고, “보지 않는 바에 경계함듣지 않는 바에 두려워함홀로있음을 삼감이 같지 않기 때문에 문의가 각각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대 지금 억지로 한가지 일로 만들려 하기 때문에 한결같이 섞여 버린 것입니다.

이미 보지 않고 듣지 않음을 자기가 모르는 것으로 삼으니, 만약 여기에 삼감을 이룰 수 있다면 이른바 은미한 사이와 염려의 싹은 진실로 이미 감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위 단락의 문의는 이미 충분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까닭에 또 모름지기 반드시 그 홀로 있음을 삼가라고 다시 말한 것인지요?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은 번뇌스럽고 헌 솜 같은 성인의 말이 있었겠습니까?

방 귀퉁이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 역시 아직 은미하나마 자취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겉과 속이 관통되어 다시는 찌끼가 없다고 한다면 거의 절도를 넘어 서는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만약 자취가 있는 것과 같다면 곧 아직 방 귀퉁이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말한 것은 더욱 지리하니 만약 다만 이와 같이 뒤엉켜 고집한다면 단지 자기의 견해만이 지극히 당연한 의론이 되니, 또한 모름지기 다시는 강론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편지의 사본이 이미 극히 분명한데, 다만 일찍이 자세히 보지 않고, 우선 한낱 남과 나의 견해만을 흉중에 가로놓여 있어서, 자기의 설에 대해서는 단지 옳은 곳만을 찾는다면 비록 옳지 못한 점이 있더라도 속고 지나갈 것이고, 남의 설에 대해서는 다만 옳지 않은 곳만을 찾고, 털을 불어 헤쳐서 상처를 찾는 다면 여러 방면으로 뒤섞여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길이 사견을 얻게 될 것이니 어찌 길이 진전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 역시 바로 사마천의 마음을 논한 것입니다. 이제 더욱이 다시 말할 수 없으니, 다만 구본을 다시 보시고 이 두 구절을 가지고 마음을 비우고 체인하시어 다만 그 구분을 구하실 것이며 그 합함을 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알아오고 알아가는 사이에 곧바로 두 단락을 이룸을 앎에 이르게 되면, 미로서 두뇌처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욱 모름지기 다시는 깨우침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또 마음에 생각이 있는 것과 귀가 들음이 있는 것눈이 봄이 있는 것은 똑같은 한 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범위지은 곳에에서 나온 ()’ 자는 처음 보면 곧 아마도 마땅히 ()’자가 되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본을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니, 당시에는 어떤 글자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혹시라도 붓이 잘못된 것같아 바야흐로 다시 청하여 구본을 가지고 와서 보고 자세하게 보고서 답장을 받들고자 하였는데, 우연찮게 구본을 찾을 수가 있었으니 과연 ()’ 자 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보내주신 편지에서는 무슨 까닭에 이와같은 착오가 있었는지요? 어째서 구본에서는 이 한 구절이 빠진 것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곳은 도리어 소략해지니, 또 어찌 능히 그 정미한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원본의 두 줄은 이제 다시 기록해서 보내니 더욱 자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구본에는 마음에 지()가 있는 것과 귀가 들음이 있는 것눈이 봄이 있는 것은 똑 같은 한 때의 일이니 비록 아직 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음에 생각이 있는 것은 곧 귀에 들음이 있는 것눈이 봄이 있는 것과 똑 같이 한 때의 일이다.” 운운 하였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다시 보니 그 곳에서 말한 것은 이미 ()’자가 있으니, 곧 구본에는 원래 빠진 것이 없으니, 바로 본 것이 거칠고 소략하여 ()’ 자와 ()’ 자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본 것일 뿐입니다.

지난 편지의 들음도 없고 봄도 없다는 설은 단지 아직 들은 것이 없고 아직 본 것이 없다는 것으로 간주해서 보았습니다. 만약 본 것이 지나치게 과중해서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다고 여긴다면 진실로 이단에 가까울 것입니다.

아직 듣고 봄이 없다는 것과 듣고 본 것이 없다는 것은 평소 보는 것과 거듭 보는 것이 어떻게 분별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아직 들음이 있지 않고 아직 봄이 있지 않다는 것을 일러 미발(未發)이라고 하니, 이른바 충막무짐(沖漠無朕)하여 만상(萬象)을 삼연하게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을 뭇 사람들이 과연 이것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학자들이 앎을 이루고 경에 거하는 공부는 잠차 쌓이고 함양되어야 거의 이것이 있게 될 뿐입니다.

자사(子思)는 단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말했을 분인데, 지금 도리어 보고 듣는 것으로 전향시켰으니 그 때문에 말이 많을수록 더욱 지리하고 쓸데 없이 어지러워 도무지 서로간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정자 문하에서 질문을 청하여 기록한 사람의 잘못이며. 그 후의 사람들 역시 제대로 읽지를 못했습니다. 내려 놓는 것만 같지 못하니, 다만 분명하게 자사가 말한 것만을 곧장 보십시오. 모름지기 위의 네 구절은 중화(中和)를 분별하는 것이지 성인의 일을 말한 것이 아니며, 다만 도리와 명색의 경계가 이와 같음을 평범하게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래에서 치중화(致中和)를 말한 것은 바야흐로 공부처를 말한 것으로 오직 성인만이 능히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구지 아직 보고 들음이 없는 것을 가지고 미발(未發)처로 삼는다면 다만 일종의 정신과 견식이 어두운 사람일 뿐, 잠을 자면서 때로 남의 놀래킴을 받아 깨닫기에도 부족하고, 경각(頃刻)의 사이에도 네 가지가 이르는 때를 알지 못하여 이러한 기상이 있는 것입니다. 성현의 마음은 담연하면서도 깊고 고요하며 총명하고 밝게 통하고 통쾌하여 이와 같지 않습니다. 마약 반듯이 이와 같다면 홍범(洪範)의 다섯 가지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모()()’이라 하고, ()()’라 하고, ()()’이라 하며, ()()’이라 하고 사()()’이라 해야 그 성()을 얻어 앎을 이루고 경에 거하게 되니 공부를 다 한다는 것은 도리어 다만 한 줄기 어리석음이 양한(兩漢)을 이룸을 기를 뿐입니다. 천부당 만부당하니, 통절히 받들어 말씀드리니 이러한 등의 견해를 짓지 마십시오. 만약 믿지 못하여 한결같이 의심하신다면 지금 이 후로는 다시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보내주신 뜻을 자세히 살펴보니 더욱 하나의 커다란 병통의 근원이 있으니, 바로 일찍이 스스로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있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때가 없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자세히 살펴 보시고, 다만이라는 등 한가한 말을 해서 진실한 주재를 잃지 말도록 하십시오.

미발(未發)을 태극(太極)으로 삼으셨습니다.

미발을 태극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다만 이 구절은 옳지 않으니, 그 때문에 아래 문장이 한결같이 잘못된 것입니다. 미발이라는 것은 태극(太極)의 고요함이고, 이발(已發)이라는 것은 태극의 움직임입니다. 반드시 이와같이 보아야 비로소 치우치거나 막힘이 없고 양의(兩儀)와 사상(四象)팔괘(八卦)와 십이괘(十二卦)의 설이 모두 서로 막히지 않게 됩니다.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으니 동하였다면 이발(已發)이 됩니다. ()하여 양을 낳는 것을 이발(已發)로 삼는 것이 옳습니다. 즉 모르겠습니다만, 고요하여 음을 낳음이 이발이 되는 것입니까? 미발이 되는 것입니까?

지난 날 여쭌 것은 일찍이 감히 이발을 가지고 태극이 없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이미 생겨난 양의와 사상팔괘는 미발이라고 여기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일찍이 이발을 태극이 없는 것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또 이미 생겨난 양의와 사상팔괘는 미발이라고 여기기 어렵다고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에서 무사(無思)무위(無爲)를 미발(未發)에 비유한 것은 그래도 마음을 가지고 말로 삼은 것이니, ()의 체단(體段)에 있어서 이미 오히려 흠집을 집어낸 것입니다.

무사(無思)무위(無爲)를 심()을 말한 것이라고 여기고 성()을 언급하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심성(心性)’ 두 글자는 하나의 물()입니가? 두 개의 물()입니까?

보내주신 편지에 이 기가 도()와 의()에 짝함이 있으면 비로소 능히 그 몸을 충족시켜 굶주림이 없고, 만약 이 기가 짝함이 없으면 비록 도와 의가 있더라도 주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맹자󰡕의 두 마디, “그 기됨은이라고 운운한 것은 마땅히 ()’ 자를 주로 삼고, 아래 문장의 천지, , 등의 글자는 객으로 삼아야 비로소 글의 뜻이 됩니다. 지금 도리어 억지로 문의를 얽어매고 변화시켜 도()와 의()를 주로 삼고 기()를 객으로 삼으며, 또 장차 나의 설 또한 하나의 ()’ 자를 더해 넣는다면 구구한 소견들이 오히려 그릇되더라도, 결코 이와같이 잘못된 데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지난 편지의 말은 이미 다하였으니, 이제 다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청컨대 우선은 이 뜻에 의거하여 예전에 보내온 화두를 전환시키고, 󰡔맹자󰡕의 본문에 의거하여 주객과 형세가 잘못된 것은 도가 이루어져 행해질 수 있게 하여 결론이 있게 하시어 곧바로 장차 보았던 옛 설이 전연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결론이 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아면 제 말이 더 낳은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不睹不聞旣卽是隱微之間念慮之萌 則所謂莫見乎隱莫顯乎微者 蓋非別有一段工夫在戒懼不睹不聞之後明矣

只爲道不可須臾離與莫見乎隱莫顯乎微不同 戒謹不睹恐懼不聞與謹獨不同 所以文意各別 今却硬說做一事 所以一向錯了也

旣以不睹不聞爲己所不知 若能於此致謹 則所謂隱微之間念慮之萌固已不能不謹

若果如此 則上段文意已足 不知何故又須再說必謹其獨邪 曷嘗有如此煩絮底聖賢

不愧屋漏 亦未免於微有迹也 謂之表裏洞然 更無査滓 則恐幾於陵節矣

若猶有迹 便是未能無愧於屋漏矣 此段說得愈更支離 若只管如此纏繞固執 則只己見便爲至當之論 亦不須更講論矣 前書寫去已極分明 只是不曾子細看 先橫著一箇人我之見在胸中 於己說則只尋是處 雖有不是 亦瞞過了 於人說則只尋不是處 吹毛求疵 多方駁難 如此則只長得私見 豈有長進之理 此亦便是論司馬遷底心也 今更不能再說得 只請將舊本再看 將此兩節虛心體認 只求其分 勿求其合 認來認去 直到認得成兩段了 方是到頭 如其未然 更不須再見喩也

來敎又謂心之有思與耳之有聞目之有見爲一等時節

所圈出思字 初看卽疑恐當作知字 而尋舊本未見 不知當時的是何字 又恐或是筆誤 方欲再請舊本來看 子細剖析奉報 偶復尋得舊本 果是知字 不知來喩何故如此錯誤 豈舊本脫漏此一節邪 如其不然 則此等處尙爾疎略 又安能得其精微之意邪 元本兩行 今再錄去 可更詳之 舊本云 心之有知與耳之有聞目之有見爲一等時節 雖未發而未嘗無 心之有思乃與耳之有聽目之有視爲一等時節云云 再看來書他處所說已有知字 卽是舊本元無脫漏 是直看得老草 將知字思字作一樣看耳

前書無聞無見之說 只做未有聞未有見乎看過 若看得過重 以爲無所聞無所見 則誠近於異端矣

未有聞見與無所聞見 平看重看不知如何分別 更請子細說

謂未有聞未有見爲未發 所謂冲漠無朕 萬象森然已具 不知衆人果能有此時乎 學者致知居敬之功積累涵養 而庶幾有此爾

子思只說喜怒哀樂 今却轉向見聞上去 所以說得愈多愈見支離紛冗都無交涉 此乃門請問記錄者之罪 而後人亦不善讀也 不若放下 只白直看子思說底 須知上四句分別中和 不是說聖人事 只是汎說道理名色地頭如此 下面說致中和 方是說做功夫處 而唯聖人爲能盡之 若必以未有見聞爲未發處 則只是一種神識昏昧底人 睡未足時被人驚覺 頃刻之間 不識四到時節 有此氣象 聖賢之心湛然淵靜 聰明洞徹 決不如此 若必如此 則洪範五事當云貌曰僵 言曰啞 視曰盲 聽曰聾 思曰塞乃爲得其性 而致知居敬 費盡工夫 却只養得成一枚癡獃罔兩漢矣 千不是萬不是 痛切奉告莫作此等見解 若信不及 一任狐疑 今後更不能說得也 詳看此段來意 更有一大病根 乃是不曾識得自家有見聞覺知而無喜怒哀樂時節 試更著精彩看 莫要只管等閑言語 失却眞的主宰也

以未發爲太極

以未發爲太極 只此句便不是 所以下文一向差却 未發者太極之靜 已發者太極之動也 須如此看得 方無偏滯 而兩儀四象八卦十二卦之說皆不相礙矣 太極動而生陽 動則爲已發矣 以動而生陽爲已發 是也 卽不知靜而生陰爲已發 爲未發邪

前日所禀 未嘗敢以已發爲無太極也 而又云已生兩儀四象八卦 難以爲未發

未嘗以已發爲無太極 是也 而又云已生兩儀四象八卦 難以爲未發 何邪

之無思無爲比未發 猶是以心爲言 於性之體段已是猶欠拈出

以無思無爲爲說心而不及性 不知心性兩字是一物邪 兩物邪

來敎謂有此氣來配道義 始能充其體而無餒 若無此氣來配 則雖有道義亦不能不餒矣

孟子兩言其爲氣也云云 卽當以氣字爲主 而以下文天地道義等字爲客 方是文意 今却硬將文義紐轉 以道義爲主而氣爲客 又將說亦添入一來字 則區區所見雖謬 決不至如此之顚倒也 前書之言已盡 今更不能說得 只請且依此意捩轉舊來話頭 依孟子本文主客形勢排齪 敎成行道 有歸著 直候將來見得舊說全然不是 方是究竟 如其不然 不若忘言之爲愈也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내주신 편지에서 지난 번 논한 것이계합하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우선 마땅히 본원을 함양하고, 힘써 실천하는 것을 일삼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견식이 크게 불분명하니 반드시 통렬하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침을 투철하게 하여야 비로소 마땅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이후로부터 비로소 함양하고 실천하는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횡거선생의 소견과 같은 것은 다만 소소할 뿐이라 분명하지 못하고, 이천선생은 오히려 그 우선은 의리를 함양하라 하였으니 단지 사려를 익숙히 기르고 곧 쉬라고 말한 것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대단히 잘못되고 어그러진 것 같은 것은 도리어 이 결론을 향해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서 한가하게 앉아 내의 본원을 함양하고 힘써 실천할 것을 말해야 합니다. 또 들으니 육경을 손수 베낀다고 하는데 역시 하릴 없이 날을 허비하는 것이니 전연 길이 진정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반드시 옛 구습을 용맹하게 버리고, 새로운 공부를 구하여야지 한결같이 이처럼 여유롭고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래는 덕화(德華) 사람을 기다려 답장을 붙이려 했는데, 오늘 뜻하지 않게 남풍(南豐)의 소식이 도부(道夫)가 있는 곳으로 이르니, 우선 이것을 붙여 화답을 보냅니다. 이 일은 평범한 일에 견줄 것이 아니니 잠시라도 길이나 맥락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대개 학문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니 치지(致知)역행(力行)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순서에 의지하여 십분 힘을 쏟아야 순서에 따라 효과가 드러나고, 그런 뒤에 또 어떤 곳의 잘못을 보면 곧 여기에 치우쳐서 더욱 공부를 가해야 이에 이치가 올바라 집니다. 지금은 도리어 기꺼이 이와같이 하지 않으니 남의 설을 보고는 스스로 본 곳이 옳지 않음을 드러내는 데에도 도리어 기꺼이 승복하지 않고 곧 우선은 나의 본원을 함양하기를 기다려 실천하기를 힘쓴다고 하니, 이것은 어린이들의 숨박꼭질에서 네가 동쪽 가에서 오면 나는 서쪽 가로 가서 너를 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쪽 가에서 오면 나는 또 동쪽 가로 가서 피하니 이와같이 출몰하면 어느 때 마칠 수 있겠습니까? 자질구레한 근본에 대한 것은 이미 말할 수 없고 이제 다시 이것을 한 번 이야기 하니, 만약 다시 서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곧 또한 망언으로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사람이 산을 오르는 것같이 각자가 스스로 노력하여 이러한 때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다시 남을 헐뜯는 심정이 있겠습니까?

 

所喩前論未契 今且當以涵養本原勉强實履爲事 此又錯了也 此是見織大不分明 須痛下功夫鑽硏勘覈敎透徹了 方是了當 自此以後 方有下手涵養踐履處 如橫渠先生所見 只是小小未瑩 伊川先生猶令其且涵泳義理 不只說完養思慮了便休也 如今乃是大段差舛 却不汲汲向此究竟 而去別處閑坐 道我涵養本原 勉强實履 又聞手寫六經 亦是無事費日 都不是長進底道理 要須勇猛捐棄舊習 以求新功 不可一向如此悠悠 閑過歲月也

本欲俟德華人回附書 今日偶有南豐便至道夫處 且先附此奉報 此事不比尋常 不可頃刻失其路脈也 大抵學問只有兩途 致知力行而已 在人須是先依次第十分著力 節次見效了 向後又看甚處欠闕 卽便於此更加功夫 乃是正理 今却不肯如此 見人說著自家見處未是 却不肯服 便云且待我涵養本原 勉强實履此如小兒迷藏之戲 你東邊來 我卽西邊去閃你 : 西邊來 我又東邊去避 如此出沒 何時是了邪 區區本已不能說得 今更說此一番 若更不相領略 便且付之忘言矣 如人上山 各自努力 到此時節 豈更有心情管得他人邪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두 편의 편지에서 깨우쳐 주신 것을 요사이 학문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노력을 갖추어 보고는 쓸쓸함을 심히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두 권은 다 이미 조목 별로 대답하여 드렸으니 다시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대개 학문은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두 갈래일 뿐입니다. 박문의 일은 강론사유를 지극히 정미하게 한 뒤에 도리를 얻는데 그 크고 작으며 세밀하고 거친 것이 다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쉽거나소략하거나지나칠 수 없수 없습니다. 약례의 일은 합당하다고만 알고 이와같이 공부한다면 곧 이처럼 착실하게 착수하게 되어, 다시는 앞뒤로 생각하고 계산하며, 계교(計較)商量(상량)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자(程子)󰡔중용󰡕의 미발처를 논하면서 답하고 질문하는 즈음에, 처음에는 대단히 자세하게 말하다가 결국은 경() 한 글자를 가져다가 모두 묶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이란 또한 다른 현묘하고 기특할 것이 없고,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매사에 전일(專一)함을 익히도록 하는 것일 뿐이며, 전혀 여러가지의 쓸데없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보내온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넓어야 할 곳에서 이미 빈 마음으로 이치를 보고서 참을 구하지 못하니. 예를 들면 󰡔󰡕󰡔󰡕를 논한 곳이 그것입니다. 마땅히 요약해야 할 곳에서는 곧 인증(認證)유추(類推)하는 말이 많아 도리어 어지럽게 되니, 예를 들면 그 놓아버린 마음을 구할 것을 논하면서 수천마디 말을 끌어다 인용하여 논설해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단지 이러한 것은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무릇 이러한 종류는 모두 내 생각으로는 매우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두가지의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으니, 일이 없을 때는 전일(專一)엄정(嚴正)하여 자기의 놓아버린 마음을 구하고,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완미하여 성현의 본의(本意)를 구해야지, 이와같이 두루 막고 힘써 물러쳐 마음과 힘을 허비하고 기운을 손상하여 병을 얻어, 실로 얻음에 이익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횡거(橫渠)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여기에서 한결같이 안정되면 눈앞에 비록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근심하지 않게 된다. 장차 생각에 있어 자세하게 분석함을 막지 말라고 하였으니, 근래에는 비록 이것을 보는 것이 점차 분명하지만, 기름이 익숙하지 않아 간혹 좋지 않은 생각 위로 마음이 오게되면 이 견해는 마치 어떤 물건이 어둡게 가리는 것과 같게 됩니다. 비록 눈 앞의 작은 일이라도 또한 능히 서로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도리어 자기에게 속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진실로 그러하지만 그러나 또한 반드시 진실로 앎이 지극해지고 사물이 다가가야 비로소 자연히 이와같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만 말할 때만 명쾌하고 활발하며, 간혹 또 이와같지 않다면 단지 상상으로만 오로지 헤아릴 뿐 족히 믿을 것이 못됩니다.

횡거는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여기에서 한결같이 정하여 포개어져 있으면 눈 앞에 비록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또한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장차 생각에서 가늘게 부수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였는데, 요사이 비록 이것을 보는 것이 점차 밝아 지지만 기름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 때로 좋지 않은 생각 위로 마음이 오면 이 견해는 곧 어둡게 가려진 사물이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눈 앞의 자질구래한 일이라도 또한 서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오히려 자기에게 귀속시키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진실로 그러하지만 또한 반드시 진실로 앎이 지극해지고 사물에 이르러야 비로소 저절로 이와 같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다만 말할 때만 쾌활하고 간혹 또한 이와같지 않다면 상상으로만 뭉뚱그려 헤아려 믿기에 부족합니다.

공자께서 냇가에 게시면서 운운했습니다. 여러 천지 고금의 일의 변화를 살펴보면 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것은 옛것이고 새 것은 새 것이라서 서로 인하여 그치지 않으니 무엇을 가지고 시작으로 삼으며 무엇으로 끝을 삼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周子)는 태극이 보존된 것을 발명하여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운운고 한 것입니다. 성인의 마음은 순수하면서도 또한 그치질 않으니 이것이 바로 천덕입니다. 천덕이 있으면 곧 왕도를 말할 수 있으니, 그 요점은 다만 홀로 있음을 삼감에 있습니다. 끝내 홀로 있음을 삼감에 귀의하는 것은 은()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 홀로 있음에 삼감을 이루지 않으면 천명이 유행하더라도 몸에 막혀 알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란 진실로 이와 같지만 지나치게 많이 끌어당기면 도리어 정의(正意)를 빠뜨리게 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인용한 것 역시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자(周子)의 무극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순수하여 또한 그치지 않으면 다만 중간에 끊어짐이 없을 뿐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 삼가지 않으면 중간에 끊어짐이 있게되어 천지와 더불어 서로 같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는다는 것은 본체를 가지고 말하면, 바로 󰡔󰡕의 이른바 도의 작용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이 선이다.”는 것이고, 기의 운행을 가지고 말하면 곧 󰡔󰡕의 이른바 ()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괘를 가지고 말하면 곧 진()괘의 첫번째로 구함이며, ()괘의 남자가 낮춤입니다. 그러나 역전에서 동하면 종()이 되어 다시 시작된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항상되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물()은 종시(終始)가 있지만 이 이치가 무궁하다면 비록 움직임이 극에 달하여 고요해지더라도 고요함이 극에 달함에 다시 움직입니다. 운운 배우는 자들은 진실로 마땅히 고요할 때 보존하고 움직일 때 관찰하는 공부를 아울러 이루어야 하지만 움직임의 단서에 있어서는 천지의 마음에 드러나는 것이 있으니, 여기에서 능히 태극의 온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원과 형은 성()의 통함이요, 이와 정은 성의 회복이다고 한 것과 이와 정이라고 하는 것은 건()의 성정(性情)이다고 한 것은 대개 사람이 다만 봄과 여름에 살려는 뜻이 발함을 보고, 뿌리에 보관되어 있음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목이 흔들려 떨어지는 때에 보면 살려는 뜻이 식은 것 같지만 뿌리는 살찌고 윤택하며, 밑동과 싹이 잠겨서 싹을 틔우니 이것이 바로 종()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개 정()과 성()이 그러합니다. 건의 성정을 밝힘이 있다면 태극의 성정을 알 것입니다. 천지의 마음을 봄이 있다면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는 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단락은 더욱 의심할 만한 것이 많습니다. 청컨대 우선 󰡔통서󰡕에 나아가 태극을 체인하고, 이 몇 항목을 낱낱이 분명해지도록 해야지, 복괘ㆍ진괘ㆍ함괘ㆍ성정 등의 설을 첨가해서 협잡해져서 분명하지 못하고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서는 않됩니다. 진괘ㆍ함괘는 더욱 간섭이 없어야 하니, 성정의 의도 또한 이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각각 스스로 보아야 이에 옳을 줄 압니다.

정자는 규괘전에서 물건이 비록 다르나 이치는 본래 같기 때문에 천하(天下)의 큼과 군생(群生)의 많음이 규산(睽散)하여 만 가지로 다르나 성인(聖人)이 같게 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나의 관점은 여기에 이르러 둘이 있지 않으면 하나도 없다는 뜻에 대해 조금 분명해 졌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이치가 본래 같다는 것은 정자의 설이 비록 자세하기는 하지만 끝내 그 이치를 실제로 보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베풂에 쌍이 낳고, 남자가 선창하면 여자가 따르며, 이것이 감()함에 저것이 응()하는 것은 대체로 서로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치가 본래 같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 기() 됨은운운 하셨는데, 내가 이 단락에서 말한 그 기 됨은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는 이 기의 호연함을 말한 것이니, 체단이 본래 이와 같으므로 그것을 기르는 법이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다면 없어지거나 상함이 없어 이 기가 유행하고 가득 채워져 억누르거나 막히는 바가 없어, 대개 스스로 돌이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정직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라는 한 글자는 마땅히 대강(大剛)으로 인해 삼덕(三德)이 되어야 하니, 곤괘의 직방(直方)과 같은 것은 바로 호기(浩氣)가 강직한 것이니, 이지러지거나 모자랄 수 있겠습니까? 아래에서는 이 기가 의와 도가 합하여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니, 혈기는 궤도를 따라 도는 것인데, 여기에 이르면 혈기는 곧 의와 도인 것입니다. 기를 기른 후에 또 이것을 기다려 도움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 됨은 의와 도와 더불어 짝한다고 거듭 말한 까닭은 대개 이 기의 발현은 본래가 의와 도임을 깊이 밝힌 것이니 만약 이 기의 본연을 안다면 기를 바를 알아 그 움직임은 혈기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굶주린다고 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몸이 주가 되는 것이 만일 혹시라도 이지러지거나 잘못되면 곧 텅 비게 됨을 알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제 견해가 이와 같지만 감히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정직함이란 본 장의 위 문장이고, ‘곤괘 효사의 곧고 방정함이란 다른 편지에서는 뜻을 달리하니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친절하고 거친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시험삼아 생각해 보신다면 득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는 형이하자이고 도의는 형이상자 인데 어떻게 합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와 도의 더불어 짝하니 분명 이 기를 가지고 저 도와 의에 짝하게 해서 도움이 되게 한다는 것이니 어찌 기를 기른 후에 또 이것을 가지고 돕는 것이겠습니까? 이와같이 보는 것은 전연 문의를 모르는 것이니 다시 마땅히 깊이 생각야 할 것이니, 쉽게 갑자기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흉중에 먼저 구설이 있어서 견제되어 허하고 공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막혀 쓸데 없이 심력만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구설은 임시로 유예시켜 두고 다만 본문만을 반복해서 완미하여 오래오래 저절로 점차 허해지고 공평해지게 되면 이에 의심이 없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요사이 정자의 이른바 몸을 제외하면 단지 이치일 뿐이다는 말을 보니, 여기에 대해서는 가장 친절합니다. 이몸에 사사로우면 이 몸에 주가 되는 것이 어떠한지 모르게 되어 그 살고 죽음이 진질로 취생몽사함과 같음이 있을 것입니다. 운운. 그러므로 대정자(大程子)동용(動容)하고 주선(周旋)함이 예()에 맞음은 성덕(盛德)의 지극함이요, 군자가 법()을 행하고 명()을 기다리는 것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는 뜻이다.”고 하였는데, 소정자(小程子)는 이미 죽은 것이 옳다고 하였고, 진실로 이 뜻이 있으면 기꺼이 하루라도 편안할 수 없다. 불안한 곳에 어찌 하루라도 머물겠는가? 잠시도 그럴 수 없다고 하였으니, 모두 몸을 제외하면 단지 이치일 뿐이다는 뜻을 발명한 것입니다. 󰡔유서󰡕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역시 대정자가 말한 모두 실제의 이치인데,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이 어렵다. 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 일이지만 진실로 도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저녁에 죽는 것을 괜찮다고 여겼겠는가?”라고 한 말이 실려 있으니, 비록 개괄적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주야와 사생에 똑같은 일월과 한서ㆍ굴신과 왕래의 항상된 이치는 모두 살필 수 있습니다. 소정자는 도를 들은 사람은 사람이 되는 까닭을 알았으므로 저녁에 죽어도 괜찮으니 이것은 헛된 삶이 아니다고 하고, 또 절실하게 말한 것을 지적하여 실제의 이치가 있는 곳을 밝혔습니다. 이것 역시 몸을 제외하면 단지 이치일 뿐이다는 뜻이니, 소정자의 경전해석에서 친히 쓴 것으로, 다만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해서는 않되니 진실로 도를 들을 수 있다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괜찮다고 한 것이니, 비록 한마디의 말을 더하지 않더라도 말의 의미는 그다지 경박하지가 않습니다. 지금 집주는 대정자의 실제 이치에 대한 설을 근본으로 하고, ‘사물의 당연한 이치를 가지고 이름하였으니, 진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한 것을 구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니 과연 충분히 이 뜻을 궁구할 수 있겠습니까? 또 대정자의 진실로 도를 아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윤씨가 말한 것으로 상고해보면 참으로 절실하지만 이른바 얻었다고 하는 것은 혹시라도 한 쪽으로 치우치고 차이가 나는 곳으로 흘러 받드시 그 총체적인 두뇌처를 얻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깨달은 것에 의거해서 토로하여 가르치고 분석할 것을 구합니다.

, ‘, ‘, ‘, ‘실리자와 해와 달, 추위와 더위, 가고 오고 굽히고 펴지는 당연한 이치’, ‘사물의 당연한 이치라고 하는 이 몇 가지 설들은 모르겠습니다만 같은 것입니까? 구별되는 것입니까? ‘몸을 제외하면 단지 이치일 뿐이다는 말은 다만 혈기와 형체로 주를 삼아 이 한결같이 이치를 따를 뿐만이 아니니, 몸 밖에 별도로 하나의 물건이 있어서 그것을 이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우치거나 어긋나는 곳으로 흐르게 되면 이른바 얻음이 아닙니다.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는 것은 천지의 인온(絪縕)입니다. ‘도의 작용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이 선이다는 것은 물건마다 무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도의 작용을 이룬 것이 성이다는 것은 각각 성과 명을 바룬다는 것입니다. 각각 성과 명을 바룸은 기붐에 속합니다. 󰡔유서󰡕에서는 무릇 사람들이 말하는 성이란 단지 도의 작용을 이어서 계속함을 말한다. 맹자가 사람의 성이 선하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고 했으니, 또한 먼저 기품을 말한 후에 여기에 미친 것 같습니다.

주자(周子)는 만물이 바탕으로 삼아 시작한다는 것을 선으로 삼고, 각각 성과 명을 바룸을 성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조화(造化)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다. 지금 물건마다 무망을 준다는 것을 가지고 말하려고 한다면 이 구절은 성에 속하고, 위 구절의 하늘 아래에 우레가 행해지다는 것을 가지고 선으로 삼아야 비로소 상대가 될 수 있습니다. 정자가 말한 지금의 사람들이 말하는 성이란 단지 도의 작용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이 선이다는 것일 뿐이다는 말은 이것은 또한 가깝게는 사람의 성에 나아가 말한 것입니다. 말이 각각 마땅함이 있으니 더욱 청컨대 자세히 하십시오. 단지 본문만 볼 것이지 전연 밖에서 한 글자라도 인용하지 말아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번 󰡔유서󰡕에 실려있는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한 이 전에는 말할 수 없으니, 성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바로 이미 성이 아니다. 무릇 사람들이 말하는 성은 단지 도의 작용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이 선임을 말할 뿐이다. 맹자가 말한 사람의 성은 선하다는 것이 이것이다.”는 글을 살펴보았지만 망연하여 무슨 말인 줄 알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대략이나마 이 문장의 뜻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함이란 하늘의 성입니다. 주자(周子)의 이른바 정을 주로 한다는 것이 이것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어찌 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주자(周子)는 부득이해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고 하였으니,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사람들에게 깨우쳐 준 것일 뿐입니다. 이른바 성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바로 이미 성이 아니다는 것은 도리어 위의 문장을 따라 말한 것이니, 혹 태극을 가리켜 성이라고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대개 천명(天命)을 성이라고 한다는 말은 사람에게 명하였을 때 비로소 그것을 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릇 무릇 사람들이 말하는 성은 단지 도의 작용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이 선임을 말할 뿐이다는 것, 이것이 성선을 말한 것 중에 가장 친절합니다. 만약 단지 이룸만을 논하고 이어서 함을 논하지 않는다면 두 개의 근본이 있게되어 성이 과연 선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성선을 말하면서 이미 그 이어서 함을 인하여 그 본원을 얻었고, 측은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는 의의 단서이다고 하였으니 또 그 발현한 싹을 인하여 그것이 본디 있었던 것임을 안 것입니다. 배우는 자들은 여기에 있어서 오직 조존(操存)의 공부를 가지고 버리지 않아야, 하여금 점차 드러나 살피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대목은 더욱 문란함을 알 수 있으니, 더욱 청컨대 우선 앞 단락의 설을 가지고 문의를 인식하여 조리가 있게 해야지 이와같이 크게 뒤섞인 것을 끌어들여 견해를 뒤바꿔 불분명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른바 실을 다루다가 엉키게 한다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兩書所喩 備見日來進學新功 甚慰牢落 兩卷悉已條對納呈 幸更詳之也

大抵爲學只是博文約禮兩端而已 博文之事 則講論思索要極精詳 然後見得道理巨細精粗無所不盡 不可容易草略放過 約禮之事 則但知得合要如此用功 卽便著實如此下手 更莫思前算後 計較商量

所以程子中庸未發處答問之際 初甚詳密 而其究竟 只就敬之一字都收殺了 其所謂敬 又無其他玄妙奇特 止是敎人每事習箇專一而已 都無許多閑說話也 今詳來喩 於當博處旣不能虛心觀理以求實是 如論易詩處是也 於當約處乃以引證推說之多反致紛擾 如論求其放心 而援引論說數十百言 不能得了 只此便是放其心而不知求矣 凡此之類 皆於鄙意深所未安 竊謂莫若於此兩塗各致其極 無事則專一嚴整 以求自己之放心 讀書則虛心玩理 以求聖賢之本意 不須如此周遮勞攘 枉費心力 損氣生病而實無益於得也

橫渠謂心寧靜 於此一向定疊 目前縱有何事 亦不恤也 休將閑細碎在思慮 近雖見此漸明 然養得未熟 有時不好底意思上心來 則此見便若有物昏蔽 雖目前小小事 亦能來相礙 因是知得尙未屬己

此理固然 然亦須是眞實知至物格 方得自然如此 若但說時快活 間或又不如此 則只是想象摶量 不足恃也

子在川上云云 觀諸天地古今事變 莫非逝者 然故故新新 相因不已 以何爲始 以何爲終 故周子發明太極之蘊 則曰太極本無極云云 聖人之心純亦不已 此乃天德 有天德便可語王道 其要只在謹獨 終歸於謹獨者 莫見乎隱 莫顯乎微 不於獨而致謹 則天命流行遏于躬而不知矣 理固如此 然援引太多 反汨沒了正意 兼所引亦有不相似者 如周子無極之語 純亦不已 只是無間斷 於獨而不謹焉 則有間斷而與天地不相似矣

太極動而生陽 以本體言之 卽所謂繼之者善也 以氣運言之 卽所謂復其見天地之心也 以卦言之 卽之一索 之男下也 然易傳謂動則終而復始 所以恒而不窮 雖物有終始 而此理無窮 則雖動極而靜 靜極復動也云云 學者固當兼致靜存動察之功 然於動之端而有見乎天地之心 斯能窺乎太極之蘊矣 其曰元亨誠之通 利貞誠之復 其曰利貞者乾之性情 蓋以夫人徒見生意之發於春夏 而不知夫藏於根荄也 觀諸草木搖落之時 生意若息矣 而根荄膏潤 苞芽潛萌 是乃終而復始 蓋情性然也 有以明乾之性情 則知太極之性情矣 有以見天地之心 則知太極之動而生陽矣

此段尤多可疑 請且就通書太極體認 令此數項歷落分明 未要添入震咸性情等說 夾雜得都不明 不濟事也 震咸尤無干涉 性情之義亦非是 須各自看乃佳

程子卦傳曰 物雖異而理本同 故天下之大 群生之衆暌散萬殊 而聖人爲能同之 某觀至此 於不有兩則無一之義稍分明 但所謂理本同者 程子之說雖詳 終未能實見其理

天施地生 男倡女隨 此感彼應 蓋不能以相無也 非理之本同 何以如此

其爲氣也云云 某竊詳此段所言其爲氣也非有異義 上言此氣之浩然 體段本如是 養之之法 勿忘勿助 則無所耗傷而此氣流行充塞 無所抑遏 蓋不待自反而縮也 故直之一字當因大剛而爲三德 若之直方 卽浩氣之剛直 其可虧欠乎 下言此氣合義與道而成 而血氣循乎軌轍 到此則血氣便是義道矣 非是養氣之後 又待此而爲助也 所以再言其爲氣也 配義與道 蓋深明夫此氣之發見本是義道 若識得此氣之本然 則知所養而其動非血氣矣 其曰無是餒也 欲人知夫此身之所以爲主者苟或虧失 則便枵然也 愚見如此 不敢不竭言之

自反而縮是本章上文 爻直方是他書異義 二者孰爲親疎 請試思之 得失可見

氣是形而下者 道義是形而上者 如何合得 况配義與道 分明是將此氣配彼義道而爲之助 豈是養氣之後又將此而爲助也 如此看得 全然不識文義 更宜深思 未易遽立說也 此是胸中先有舊說 爲所牽制 不得虛平 故爾滯礙 枉費心力 可且將舊說權行倚閣 而只將本文反復玩味 久久自然漸虛漸平 則於此無疑矣

朝聞道 夕死可矣 近看得程子所謂除了身只是理之說 於此最親切 蓋私乎此身 則莫知主乎此身者爲何如 其生其死 眞有同於醉夢矣云云 大程子謂動容周旋中禮者 盛德之至 君子行法以俟命而已 朝聞道 夕死可矣之意 小程子旣謂死得是 又謂苟有此志 則不肯一日安 於所不安 何止一日 須臾不能 皆是發明除了身只是理底意思 詳觀遺書亦載大程子有云皆實理也 人知而信者爲難 死生亦大矣 非誠知道 豈以夕死爲可乎 則雖槪言之 而日月寒暑屈伸往來之常理同乎晝夜死生者 皆可致察 小程子有云聞道者 知所以爲人也 夕死可矣 是不虛生也 則又指切言之 以明實理所存 是亦除了身只是理之意 至於小程子經解 乃親筆也 則止云人不可以不知道 苟得聞道 雖死可也 雖不加一辭 而語意則甚不輕矣 今集注大程子實理之說 而以事物當然之理名之 固不使人求之恍惚 然果足以究斯義乎 又大程子非誠知道之言 以尹氏所說考之 固爲切實 然恐所謂得者 或流於偏差而未必得其總腦也 某據所曉者吐露 以求誨剖

道字 理字 禮字 法字 實理字 日月寒暑 往來屈伸之常理 事物當然之理 此數說不知是同 是別 除了身只是理 只是不以血氣形骸爲主而一循此理耳 非謂身外別有一物而謂之理也 流於偏差 則非所謂得矣

一陰一陽之謂道 天地絪縕也 繼之者善 物與無妄也 成之者性 各正性命也 各正性命則屬乎氣禀矣 遺書言 凡人說性 只是說繼之者善也 孟子言人性善是也 又若先言氣禀而後及此

周子以萬物資始爲善 各正性命爲性 此是就造化處說 今欲以物與無妄言之 則此句屬性 而以上句天下雷行爲善 方始相對得過 程子所云今人說性只是說繼之者善 此又是近下就人性分上說 語各有當 更請詳之 只看本文 都不得引外來一字 方始見得

向觀遺書所載人生而靜 以上不容說 才說性時便已不是性也 凡人說性 只是說繼之者善也 孟子言人性善是也 茫然不曉所謂 今始粗曉此文義 人生而靜 天之性也 周子所謂主靜者 以此也 然所謂不容說者 是豈終不可得而說乎 周子不得已而言之曰無極而太極 則指不容說者以喩諸人耳 所謂才說性時便已不是性 此却因上文而言之 或指太極爲性 則非矣 蓋天命之謂性 命之於人始謂之性也 所謂凡人說性 只是說繼之者善 此說得性善最爲親切 若秖論成而不論繼 則有二本 非性之果善也 故孟子道性善 旣因其繼而得其本源 其言惻隱仁之端 羞惡義之端 則又因其發見之苗裔而知其爲固有 學者於此唯有操存之功不舍 使漸著察耳

此條尤覺紊亂 更請且以前段之說識認文義 令有條理 未可如此引援衮雜 轉見不分明也 所謂治絲而棼之也

 

 

여자약에게 답함 答呂子約

 

보내주신 편지의 박문약례(博文約禮)는 모두 조존(操存)하는 가운데를 따라 나온 것으로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박문(博文)은 나름대로 하나의 일이니 만약 다만 조존만 힘쓰고 앉아서 그 가운데서 박문의 공부가 생겨나기를 기다린다면 아무래도 이러한 이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학문이나 공부는 보아야할 규모가 정해진 후에 다만 한 방향으로만 힘을 들여 앞으로 매진해 나아가고, 어떻게 해야할지, 무엇처럼 해야할지를 묻지 말아야 하니, 이것이 곧 먼저 어려운 것을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막 토론을 해서 하나의 두서를 얻었다면 일찍이 보름이나 열흘도 해보지 않고, 또 헤아리고 따져 효험이 없다고 여겨 마침내 별도로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아무래도 일생돈안 다만 이와같이 동쪽을 떠나 서쪽으로 돌게되어 끝내 가계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익공은 요사이도 책을 정리하는데, 구씨의 문집에 대한 고정(考訂)이 더욱 정밀하니, 역시 늙어가면서 허다한 심력이 있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중용󰡕󰡔시전󰡕을 부탁 했는데, 이번 편에는 붙일 수가 없군요. 또 조존(操存)을 요구했지만 보고 읽을 겨를이 없으니 다시 뒤의 편지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소황문은 처음에는 불교를 배우지 않다가 다만 균주(筠州)에 있음으로 인해 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저 가운데의 풍토가 좋지 않아 일생동안 나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청컨대 이 정밀한 색채를 드러내어 단순히 머리만 돌리고 생각만 굴려 홀연히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빙빙 돌아 들어가지 않아야 할 것이니, 그리되면 서로 어찌하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풍색이 더욱 굳세어짐에 정사의 제생들은 이제야 다행히도 각각 흩어져 떠나갔습니다. 오늘 포한경이 갑자기 찾아 왔지만 능히 스스로 빼어나기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지난 번 임안에 있으면서 서로 모였었는데, 백공의 옛 문도들을 보았지만 거기에 미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말마다 모두 두서가 있고 헤아림이 좋으니 덕장의 여러 사람들이 견줄 바가 아닙니다.

 

所喩博文約禮盡由操存中出 固是如此 但博文自是一事 若只務操存而坐待其中生出博文功夫 恐無是理 大抵學問功夫看得規模定後 只一向著力 挨向前去 莫問如何若何 便是先難後獲之意 若方討得一箇頭緖 不曾做得半月十日 又却計較 以爲未有效驗 遂欲別作調度 則恐一生只得如此移東換西 終是不成家計也

益公近亦收書 於集考訂益精 亦不易老來有許多心力也 需中庸詩傳 此便未可寄 又恐且要操存 無暇看讀 更俟後便也 蘇黃門初不學佛 只因在筠州陷入此漩渦中 恐是彼中風土不好 一生出不得 今請著些精彩 莫只管回頭轉腦 忽然不知不覺也旋入去 卽不相奈何也 風色愈勁 精舍諸生方幸各已散去 今日輔漢卿忽來 甚不易渠能自拔 向在臨安相聚 見伯恭舊徒 無及之者 說話儘有頭緖 好商量 非德章諸人之比也

 

 

여자약에게 답함(1112) 答呂子約十一月十二日

 

지난 번 편지에서 논했던 네 가지 일은 그대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하지가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현자가 여기에 힘을 쓴 것이 오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 묻기를 절실히 하고 생각하기를 가까이 한다는 뜻도 돈독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강론했던 것과 여러 편지에서 스스로 글로 쓰고 말한 곳을 비교해서 살펴보니, 앞을 보고 뒤를 살펴 두서가 지나치게 많아 가슴 속에 이러한 온갖 잡것들이 석여 막히고 얽혀 명쾌하고 직절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도리어 새로운 학자들과 후생들이 한 마디 말을 듣고는 또 한 마디 말을 지키며, 한 가지 뜻을 이해하고는 또 한 가지 뜻을 지키는 것만 같을 수 없으니, 비록 능히 얻는 것은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또한 이러한 지루하고 어지러움을 벋어나지 못하고, 길에서 낭패보고, 날이 저무는 데에도 길이 멀어 귀숙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前書所論四事 不審雅意云何 竊意賢者用力於此不爲不久 其切問近思之意不爲不篤 而比觀所講與累書自叙說處 覺得瞻前顧後 頭緖太多 所以胸次爲此等叢雜壅塞纏繞 不能得明快直截 反不得如新學後生聞一言且守一言 解一義且守一義 雖未能便有所得 亦且免得如此支離紛擾 狼狽道途 日暮程遙 無所歸宿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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