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77

황성 2025. 8. 1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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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친구와 제자들과의 문답)(知舊門人問答)

 

 

 

여자약(조검)에게 답함 (1) 答呂子約(祖儉)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기축, 1173, 44)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순서대로 차근차근 독서하라고 권하였다.

 

示喩縷縷, 足見力學之志. 然所讀書似亦太多矣. 大抵今人讀書務廣而不求精, 是以刻苦者迫切而無從容之樂, 平易者泛濫而無精約之功. 兩者之病雖殊, 然其所以受病之源則一而已. 今觀來喩, 雖云數書之外有所未暇, 然只此已是多少功夫? 又論中庸大學乃學問根本, 尤當專一致思, 以求其指意之所在. 今乃或此或彼, 泛然讀之, 此則尤非所以審思明辨而究聖學之淵源也. 愚意此四書者當以序進, 每畢一書, 首尾通貫, 意味浹洽, 然後又易一書, 乃能有益. 其餘亦損其半, 然後可以硏味從容, 深探其立言之旨而無迫切泛濫之累. 不審賢者以爲如何?

보내주신 하나하나에서 학문에 힘쓰는 뜻을 볼 수 있었지만, 독서량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독서 태도는 양에 힘쓰면서 정밀하기를 구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힘들여 노력하는 사람은 억지로 다그쳐서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없고, 평이하게 공부하는 사람은 가득 넘치나 정밀히 요약하는 공력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의 병이 다를지라도 병에 걸리는 근원은 하나입니다. 지금 보내신 글을 보니 여러 권의 책 이외에 공부할 겨를이 없을지라도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공부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은 한문의 근본이므로 우선 마음을 집중하여 생각하여서 그 뜻을 구해야 합니다. 이제 이것이나 저것을 범범하게 읽는다면 살펴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여 성학(聖學)의 연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건대 사서(四書)는 순서에 따라서 배워야 하며, 한 책을 마칠 때마다 처음과 끝을 관통하여 의미에 무젖은 뒤에 다른 한 책으로 바꾸어야 유익합니다. 그 나머지도 그 반을 덜어낸 뒤에야 자연스럽게 의미를 연마하여 그 말의 뜻을 깊게 탐구하면서 억지로 다그치거나 근본 없이 넘쳐나는 폐단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2)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기축, 1173, 44)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청명하고 조화로운 기상으로 수양할 것을 권하였다.

喩及日來進學之功, 尤慰孤陋, 且深有助於警省, 爲惠厚矣. 氣質未化, 偏重難反, 學者之通病. 今亦但當用力於恭敬持養之地而玩意義理以培養之, 不必反復較計悔咎剋責, 如此太深, 却恐有害淸明和樂之氣象, 亦足以妨日新之益也.

날마다 학문을 진척시키는 공부에 대해 말하시니 저의 누추함에 위로가 되고 경계하고 살피는데 깊이 도움이 되니, 그 은혜가 두텁습니다. 기질이 교화되지 못하여 지나치게 편중되어 고치기 어려운 것이 배우는 사람들의 공통된 병입니다. 지금도 단지 공경하는 마음으로 수양하는 것에 힘쓰면서 의미를 완미하여 키워가야지, 이와 같이 심하게 반복적으로 계산하면서 허물을 후회하며 지나치게 책망하여 도리어 청명하고 조화로운 기상을 해쳐서 날로 새로워지는 유익함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3)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기축, 1173, 44)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단계를 뛰어넘지 말고 차근차근 독서하라고 권하였다.

 

示諭縷縷, 備見篤學力行之意. 然未免較計務獲之病, 著此意思橫在方寸間, 日夕紛擾, 非所以進於日新也. 所讀書亦太多, 如人大病在床, 而衆醫雜進, 百藥交下, 決無見效之理. 不若盡力一書, 令其反復通透而復易一書之爲愈. 蓋不惟專力易見功夫, 且是心定不雜, 於涵養之功亦有助也. 又謂不欲但爲聞見之知, 此固當然. 然聞見之知要得正當, 亦非易事, 誠未可輕厭而躐等也.

보내주신 세세한 사항은 두터이 배우고 힘써 실천하는 뜻을 갖추었지만, 비교하여 계산하고 힘써 얻으려는 병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뜻을 마음 사이에 가로질러 두고서 밤낮으로 어지러운 것은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량이 너무 많은 것은 마치 사람이 큰 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있으면 여러 의원들이 교대로 진찰하고 백약을 투여해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책을 힘을 다하여 읽고서 그것을 반복하여 투철히 한 다음에 다른 한 책으로 바꾸느니만 못합니다. 대개 견해를 바꾸는 공부에 힘을 다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어 뒤섞이지 않아야 무젖어 기르는 공부에도 도움이 됩니다. 또한 단지 듣고 보는 앎을 위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마땅하지만, 듣고 보는 앎이 바름을 얻도록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므로 무시하면서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됩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4)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기축, 1173, 44)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논어󰡕의 여러 구절과 󰡔중용󰡕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는 구절에 대해 답하였다.

 

時習之義, 程子云, 重習, 時復思繹, 浹洽於中則說’, 此恐是學原於思之意. 凡所當事者皆學也, 不致其思繹以通之, 則無自而進. 苟苦思力索, 則淺迫無味, 亦失所謂說矣. 惟學焉而時復思繹, 勿忘勿助, 積累停蓄, 浹洽涵養, 杜元凱所謂如江海之浸, 如膏澤之潤, 渙然冰釋, 怡然理順, 然後爲得. 此卽時習而說之注釋也. (張先生所云似與程子之意未合.)

물음: ‘때로 익힌다.’는 뜻은 정자에 의하면 “‘()’이란 거듭 익힘으로 때때로 다시 생각하고 풀어내어 가슴속에 무젖으면 기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배움이 생감함에 근원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일에 마땅한 것이 모두 배움의 대상이니, 그것을 생각하고 풀어내어 통달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근거가 사라집니다. 괴롭게 생각하면서 힘써 찾는 것은 얕게 재촉하여 맛이 없으니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을 잃었습니다. 배워서 때때로 다시 생각하고 풀어내어 잊지 말고 조장하지 말면서 거듭 쌓고 모아서 무젖어 담가 기르는 것이, 두원개(杜元凱: 杜預)가 말하였던 마치 강이나 바다의 물이 땅을 적시고, 큰 빗물이 곡식을 윤택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르르 얼음이 녹듯이 기쁘게 이치를 따른 뒤라야 뜻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때때로 익혀서 기쁜 것에 대한 주석입니다. (장 선생이 말한 것은 정자의 뜻에 부합하지 않은 것 같다.)

 

此說甚佳. 南軒解義爲人借去, 不盡記其說, 然覺得儘有未安處也.

대답: 남헌(南軒: 張軾)󰡔해의(解義)󰡕는 사람들이 차용하면서 그 말을 다 기록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온당치 못한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巧言令色鮮矣仁’, 恐止當從尹氏說.

물음: “말을 교묘히 하고 낯빛을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이가 드물다.”는 말은 윤씨(尹氏: 尹焞)의 말을 따라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尹說固好, 然其間曲折恐亦不可不講. 若有人引上蔡所引許多同異, 問之尹公, 他必有說, 不只如此打過也.

대답: 윤씨(尹氏: 尹焞)의 말이 참으로 좋지만 그 사이의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상채(上蔡: 謝良佐)가 인용한 허다하게 같고 다름을 가지고 윤공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윤공에게는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이 대충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傳不習乎’, 恐止當從明道說. 蓋恐不習而傳之, 則在己審問明辨之功有加無已, 篤於自反而懼於傳之或差. 上蔡之說恐與章指未合.

물음: ‘전수한 것을 익히지 않았는지?’라는 구절은 명도(明道: 程顥)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대개 익히지 않으면서 전수하는 것을 걱정한 것으로 자기에게 깊게 묻고 밝게 분별하는 공부를 그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데 두터울지라도 전수받는데 차질이 있을까 두려워합니다. 상채(上蔡: 謝良佐)의 말은 이 구절의 뜻에 부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如明道說, 文勢似不甚順. 若從上蔡之說, 則先忠信後講學, 乃與上下章意思相似, 又文勢安帖, 不煩多訓, 似亦有理. 試更思之.

대답: 명도(明道: 程顥)의 말은 문세가 순조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상채(上蔡: 謝良佐)의 말을 따른다면 충성과 믿음을 먼저하고 배우고 익히는 것을 뒤로 합니다. 이것이 위와 아래 문장의 뜻이 서로 부합하고 문세도 편안하며 잡다하게 뜻을 다는 번거로움도 없어서 이치에 맞는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父在觀其志一章, 恐指意在下. 又志所存也, 行所爲也, 有父兄在, 安得聞斯行之? 雖欲成父之美, 而親心未順焉 : 雖欲爲不善, 而莫得肆焉, 止觀志之所存可也. 若親沒矣, 吾之所欲爲者遂矣, 故必觀其所爲之專與不專而後可. 蓋雖爲之善, 然不能忍而遽改, 則亦謂之死其親可也. 至於三年之間, 事死如事生而無伸己之意, 乃謂之孝. ‘可謂孝矣云者, 深嘉之辭. 若曰如其非道, 則何待三年’, 是未深體觀其行之意也. 夫不幸而有所當改, 是乃吾平日之拳拳而未能孚於吾親者. 今也哀痛之深, 固有所斡旋改移於不動聲氣之中者矣, 苟有決厲之意, 則縱有丘山之善, 然此心不幾於息乎?

물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 뜻을 본다.’는 구절은 가리키는 뜻이 아래에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란 품은 것이고 행위란 실천하는 것인데, 아버지와 형이 계실 때에 어떻게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이 따르지 않고, 비록 좋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할지라도 방자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서, 품은 뜻을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어버이가 죽으면 내가 하려는 것이 이루어지므로 그가 행하는 것이 멋대로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볼 수 있습니다. 대개 비록 선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차마 갑자기 바꿀 수 없는 것이니,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어버이를 죽였다고 할 만합니다. 삼년상 동안에는 죽은 어버이를 섬기기를 살았을 때처럼 하면서 자기의 뜻을 펼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말합니다. “효자라고 할 만하다.”는 것은 매우 경하하는 말입니다. 만약 도가 아니라면 삼 년을 기다리는 것은 그 행위를 본다는 뜻을 깊게 체험하지 않은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평소에 가슴에 붙들어 두었으나 어버이에게 믿음을 얻지 못한 것으로, 이제 깊게 슬퍼하고 아파하면서 진실로 소리와 기색으로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주저하면서 차츰 고치는 것입니다. 만약 단호한 뜻이 있다고 한다면 높은 산과 같은 선함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마음은 거의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此說甚好, 但謂固有斡旋改移於不動聲氣之中者, 此句未安. 熹舊來亦嘗有此意, 後看史書, 見有居官不改前人之政, 但因事遷就, 使人不見其迹者, 必大悅之, 以爲代人居官, 猶有能如此者, 况於所天乎. 因以此問於李先生, 先生曰: ‘此意雖好, 但每事用心如此, 恐駸駸然, 所失却多. 聖人所謂無改者, 亦謂尙可通行者耳. 若不幸而有必不可行者, 則至誠哀痛而改之, 亦無可奈何, 不必如此回互也.’ 此意竊謂學者不可不知, 恐當更思之也. 又有謂其志其行皆指父而言, 意亦自好. 試幷思之, 如何?

대답: 이 말이 매우 좋지만, “진실로 소리와 기색으로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주저하면서 차츰 고치는 것이라는 구절은 알맞지 않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이러한 뜻이 있었으나 나중에 역사책을 보니 관직에 있으면서 앞 사람의 정책을 바꾸지 아니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경우 그 일의 사정에 따라 옮기거나 나아가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취를 보이지 않게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크게 기뻐하면서 대리인으로 하여금 관직에 거처하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하늘이 내린 것에 대해서야 어떻겠습니까? 이것에 대해 이 선생(李先生: 李侗)에게 묻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 뜻이 비록 좋지만 일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쓴다면 성급하여 잃은 것이 많을 것이다. 성인이 말한 고치지 않음이란 오히려 보편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따름이며, 불행하게도 실천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 경우라면 지극정성으로 슬퍼하고 아파하면서 고쳐야지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빙글빙글 돌려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배우는 사람들이 이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그 뜻그 행위라는 것도 다 아버지를 가리켜 말한다고 하였는데 의도가 그 자체로 좋습니다. 시험 삼아 그것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보시지요?

 

日月, 謂一日一箇亦得, 論氣之感也. 謂古今一箇亦得, 論氣之本也.

물음: 해와 달에 대하여 하루에 하나씩 얻는다.는 것은 기()에 대한 느낌을 논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기의 근본을 논한 것입니다.

 

字未安. 李文饒謂, 日月終古常見而光景常新, 此亦善言天者.

대답: ‘느낌이라는 말은 온당치 않습니다. 이문요(李文饒: 李徳裕)해와 달이 태고 적부터 항상 나타났으나 그 빛은 항상 새로워라.”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하늘에 대해 잘 말한 것입니다.

 

季路問事鬼神, 告以事人 : 問死, 告以知生, 欲令子路原始觀終, 聚而通之也. 未知生, 焉知死, 是固然矣. 未能事人, 焉能事鬼, 恐救子路忽於近之病. 蓋在目今雖曰未能事人, 然隱微之間, 如執虛奉盈, 所以事之者, 自當深用其力. 苟於此知所事, 則事人之道亦可進. 但闕略於事人, 則益不能事鬼矣.

계로(季路: 子路)가 귀신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사람 섬기는 것으로 말해 주었고, 죽음에 대해 묻자 삶을 아는 것으로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자로로 하여금 시작에 근원하여 끝을 살피고, 두루 모아서 관통하도록 한 것입니다. “삶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사람을 섬기는데 아직 능하지 않은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은 아마도 자로가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는 병을 구제하려는 것입니다. 대개 눈앞에서 지금 사람을 섬기는데 아직 능하지 않다고 하였을지라도, 은미한 사이에 자신을 비우고서 성대함을 받들 듯이, 사람을 섬기는 자라면 스스로 자기의 힘을 깊게 쏟아야 합니다. 진실로 은미한 사이에 섬길 대상을 안다면 사람을 섬기는 도리에도 진척이 있습니다. 다만 사람 섬기는 일을 생략한다면 귀신을 더욱 섬길 수 없습니다.

 

熹嘗謂知乾坤變化萬物受命之理, 則知生而知死矣 : 盡親親長長貴貴尊賢之道, 則能事人而能事鬼矣. 只如此看, 意味自長. 戒愼隱微, 又別是一事, 不必牽合作一串也.

대답: 제가 건곤(乾坤)의 변화와 만물이 천명을 받은 이치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삶과 죽음을 안 것입니다. 친한 이를 친히 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하고, 귀한 이를 귀하게 대하고, 현자를 높이는 도리를 다한다면 사람을 섬길 수 있고 귀신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의미가 스스로 자라날 것입니다. 은미(隱微)한 사이에 경계하고 신중히 하는 것은 따로 하나의 일이니, 억지로 합쳐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體物而不可遺之義, 蓋物是形而下者. 物其物則息生不窮, 是所謂體物而不可遺也, 卽形於上者也. 苟物而不物, 則死矣. ‘云者, 其流行發見, 非物自爾, 而必有體之者也.

물음: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는 말에서 사물이란 형이하자입니다. 그 사물을 사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 생겨남이 끝나지 않으니, 이것이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곧 형이상자입니다. 진실로 사물이었다가 사물이 아니면 죽게 됩니다. ‘본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유행하여 드러나 보이는 것이지 사물 자체가 아니니, 반드시 사물을 근거 지워주는 것입니다.

 

體物之意剖析得甚好, 但本是鬼神之德爲此萬物之體, 非是先有是物, 而鬼神之德又從而體之也. ‘物而不物則死矣’, 此句有病. 須知若初無體之者, 則亦無是物矣.

대답: 사물의 본체가 된다는 뜻을 배우 잘 분석하였지만, 본래 귀신의 덕()은 만물의 본체여서 먼저 사물이 생기면 귀신의 덕이 거기를 따라서 사물을 근거 지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었다가 사물이 아니면 죽게 된다.”는 구절은 병이 있습니다. 만약 애초부터 근거 지워주는 것이 없다면 역시 이 사물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游魂爲變之義如何?

물음: “떠다니는 혼이 변화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 魄也. (耳目之精明爲魄.) , 魂也. (口鼻之噓吸爲魂.) 二者合而成物. 精虛魄降, 則氣散魂遊而無不之矣. 魄爲鬼, 魂爲神. 禮記有孔子答宰我之問, 正說此理甚詳. 雜書云: ‘, 人陽神也 : , 人陰神也’, 亦可取. 橫渠上蔡論此亦詳.

대답: ()은 백()입니다. (귀와 눈의 정밀하고 밝은 것이 백이다.) ()는 혼()입니다. (입과 코의 호흡이 혼이다.) 두 가지가 합하여 사물이 됩니다. ()이 비고 백()이 내리면 기()가 흩어지고 혼()이 떠다니면서 움직이지 않음이 없습니다. 󰡔예기󰡕에 공자가 재아(宰我)의 물음에 답하는 구절이 이러한 이치를 매우 상세하게 말해 줍니다. 여러 책에서도 혼이란 사람의 양신(陽神)이고 백이란 사람의 음신(陰神)이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취할 만합니다. 횡거(橫渠: 張載)와 상채(上蔡: 謝良佐)가 이에 대해 논한 것도 상세합니다.

 

誰毁誰譽一章, 恐當看. 此正見聖人大公無我之心. 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 此又聖人無所私好, 而於善善之意亦不侵過分毫. 來誨所謂但有先褒之善而無預詆之惡, 似恐於公平之意思未完.

물음: “누구를 헐뜯고 누구를 칭찬하리오?”의 구절은 무구라는 말을 보아야 크게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성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칭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 대해 시험해본 내용이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은 성인에게 사사로이 좋아하는 것이 없고 선을 좋아하는 뜻에 대해서도 털끝만치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기를 단지 먼저 선을 표창하지만 미리 악을 꾸짖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공평한 뜻이 아닌 듯합니다.

 

熹昨來之說善善速惡惡緩, 正書所謂與其殺不辜, 寧失不經, 罪疑惟輕, 功疑惟重’, 春秋傳所謂善善長惡惡短, 孔子樂道人之善, 惡稱人之惡之意, 而仁包五常元包四德之發見證驗也. 聖人之心雖至公至平, 無私好惡, 然此箇意思常在, 便是天地生物之心. 若但一向恝然無情, 則恐或有流於申商慘覈之科矣. 試更思之. (洪範皇極亦有此意.)

대답: 제가 지난번에 선을 좋아하는데 빠르고 악을 미워하는데 느슨하다는 것은 󰡔󰡕에서 죄 없는 이를 죽이기보다 차라기 실수로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겠다.”라고 하였고, “죄가 애매하면 가볍게 해주고, 공이 애매하면 무겁게 해준다.”라고 하였습니다. 󰡔춘추전󰡕에서 선을 좋아하는 것은 길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짧다.”고 하였고, 공자는 남의 선을 말하기를 즐기고 남의 악을 일컫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인이 5()을 포괄하고 원()4덕을 포괄한다는 것을 증험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마음이 비록 지극히 공평하여 사사롭게 좋아하거나 미워하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뜻이 항상 있어야만 천지가 사물을 낳는 마음입니다. 만약 항상 소홀히 하고서 감정이 없고자 한다면 신불해나 상앙과 같이 무참하게 잘잘못을 따지는 부류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홍범황극(皇極)’에도 이러한 뜻이 있다.)

 

여자약에게 답함 (5)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기축, 1173, 44)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所喩日用工夫, 足見爲己之意, 甚善. 然別紙所論論語首章, 便是讀書玩理之樣轍, 更無別塗. 請只如此用功, 不必切切論功計獲也.

말씀하신 일용공부에서 자기에 근본을 두는 뜻을 볼 수 있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별지에서 󰡔논어󰡕1장을 논의한 것이 곧 책을 읽고 이치를 음미한 자취이며 따로 방법이 없습니다. 꼭 이와 같이 공부를 해야지 구구절절 효과를 논의하고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6)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기축, 1173, 44)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계산하고 비교하면서 지리멸렬하지 말고 핵심을 차근차근 공부할 것을 권하였다.

 

示喩日用功夫有未到處, 此見省身克己用力之深, 不勝歎仰. 然前後已屢奉聞, 不必如此計較迫切, 但措其心於中和平正之地, 而深以義理灌漑培養之, 自然日有進益. 如其不然, 則存養講習之功未及一二, 而疑悔勞殆之病已奪其千百矣. 試更思之. 至如讀書, 只且立下一箇簡易可常底程課, 日日依此積累功夫 : 不要就生疑慮, 旣要如此, 又要如彼, 枉費思慮言語, 下梢無到頭處. 昔人所謂多岐亡羊者, 不可不戒也.

말씀하신 일용공부에 아직 이르지 못한 곳이 있어 자신을 살피고 자기를 이기는데 깊게 힘쓰는 것에 감탄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에 대해 이미 자주 들었으나 이와 같이 계산하고 비교하면서 억지로 다그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바르고 조화로운 곳에 두고서 의리로써 물 주어 기른다면 저절로 날마다 유익함을 진척시킬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보존하여 기르고 익히는 공부에서 한두 가지를 놓칠지라도 의심하고 후회하고 수고롭고 위태로운 병이 이미 천 가지 백 가지를 빼앗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독서의 경우에는 우선 평소에 할 수 있는 간단한 계획을 세우고서 날마다 이에 의거하여 공부를 쌓아가야지, 의심과 고민을 늘어놓으며 이미 이와 같이 하려고 했으면서도 다시 저와 같이 하려고 하면서 사색과 말을 크게 허비하며 말단으로 내려가 핵심에 이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옛 사람들이 말한 갈래가 많은 길에서 양을 잃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7)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건도(乾道) 9(기축, 1173, 44)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논어󰡕의 여러 구절과, 귀신, ()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巧言令色鮮矣仁’, 論章旨則尹氏之說爲完. 若旁通其義, 如辭欲巧之類, 是迺修省細密工夫, 其發原自別. 然修辭之功亦易得入於安排計較, 而不自知其所發之偏者, 亦爲鮮矣仁也.

물음: “말을 교묘히 하고 낯빛을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이가 드물다.”는 구절의 뜻을 논한 것으로 윤씨(尹氏: 尹焞)의 말이 완전합니다. 그 뜻을 널리 확대하여 구해보면 말이 교묘하고자 한다.”는 종류는 세밀한 공부를 닦고 살피는 것으로 그 생겨난 근원이 본디 다릅니다. 그러나 말을 꾸미는 공부는 안배하고 비교하는 데로 쉽게 빠져도 그러한 치우침을 스스로 알지 못하니 역시 어진 이가 드물다.”는 경우입니다.

 

發原自別之說甚好. 修辭之功固易入於安排計校, 然亦只得就發原處謹之耳. 若捨此而別生疑慮, 則又轉見繳繞, 不得剖決也.

대답: ‘생겨난 근원이 본디 다르다.’는 말은 매우 좋습니다. 말을 꾸미는 공부는 안배하고 비교하는 데로 참으로 쉽게 빠지지만, 다만 발원처에 나아가서 삼갈 따름입니다. 만약 이것을 버리고서 따로 의혹을 갖고 고민한다면 어지러이 얽히고설키어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曾子之三省, 爲人謀與朋友交傳諸人, 惟恐應物之或不如己而篤於自反也. 尹子言: ‘諸公遠來, 依先生之門, 某豈敢輒爲他說? 萬一有少差, 豈不誤他一生? ’恐正是傳不習之意. 先忠信後講學, 固是如此 : 但忠因謀言, 信因交言, 恐與行有餘力則以學文之意未類. 上蔡之說竟未敢安.

물음: 증자가 하루에 세 번 살핀 것은 남을 위하여 일을 추구할 때, 벗과 사귈 때,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때였습니다. 오직 사물에 응할 때에 혹 자기와 같지 않으면 스스로 반성하기를 두터이 했습니다. 윤자(尹子: 尹焞)가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멀리서 와 선생의 문하에 의탁하여 배움을 받고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다른 학설을 만들겠습니까? 만일 조금이라도 차이가 생긴다면 어찌 다른 한 생명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한 것이 바로 전수받은 것을 익히는 뜻입니다. 충성스러움과 믿음을 먼저하고 익히고 배우는 것을 뒤로 하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지만 충성스러움은 일을 추구하는 것에 근거하여 말하였고, 믿음은 벗과 사귀는 것에 근거하여 말했으니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운다.”는 구절의 뜻과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상채(上蔡: 謝良佐)의 말은 끝내 온당치 못합니다.

 

所引尹公語甚好. 然於此文句中似覺少兩三字, 聖賢立言不如是之巧而晦也. 謀不忠則欺於人, 交不信則欺於友, 傳不習則欺於己欺於師, 是亦忠信之類耳. 更思之.

대답: 인용한 윤공(尹子: 尹焞)의 말은 매우 좋지만, 이곳의 글귀 중에는 두세 글자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성현이 말을 세운 것은 이렇게 교묘하게 숨기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일을 추구하면서 충성스럽지 않으면 남을 속이는 것이고, 벗과 사귀면서 믿지 않으면 벗을 속이는 것이고, 전수받은 것을 익히지 않으면 자기와 스승을 속이는 것이니, 이 역시 충성스러움과 믿음의 종류일 따름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其志’‘其行皆指父而言, 意亦好, 但於本章之旨恐未安. 父在觀其志, 觀其所志之善惡也 : 父沒觀其行, 觀其所行之肆與否也. 三年無改於父之道, 則事亡如事存而不忍死其親焉, 故曰可謂孝矣.’ 斡旋改移, 其始止於隱惡諱過, 本在於愛親. 駸駸而往, 易入於私, 其病固不細, 然彌縫調停之工又不可廢. 所謂度不可行, 至誠哀痛而改之’, 固不必回互, 但弗知所以改之之方, 則或傷於張皇驟快而無遲遲浸漸之意味, 亦非篤於愛親者也. (謝方明事, 祖儉舊看得甚可爲法, 然李先生之言亦要於此致察.)

물음: ‘그 뜻그 행동이란 모두 부모를 가리켜서 말한 것으로 뜻이 좋지만, 본래 문장의 뜻에 대해 온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모가 계시면 그 뜻을 본다는 것은 그 뜻이 선한지 악한지를 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행동을 본다는 것은 그 행위가 방자한지 않은지를 보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부모의 도리를 고치지 않으면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이 섬기듯이 하면서 그 친한 이가 죽는 것을 차마하지 못하므로 효자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저하면서 차츰 고치는 것이란 그 애초의 의도가 악을 감추고 허물을 피하는 데에 그치고, 그 근본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빨리 나아가서 쉽게 사사로움에 빠진다면 그 병이 진실로 작지 않지만, 임시적으로 조정하는 공부 또한 폐해서는 안 됩니다. ‘실천해서는 안 되는 것을 헤아려 지극정성으로 슬퍼하고 아파하면서 고친다는 것은 진실로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다만 어떻게 고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혹 장황하게 서둘러 통쾌함을 좇으면서 서서히 젖어 들어가는 맛이 사라지는 것 역시 부모를 사랑하는데 두텁지 않은 것입니다. (사방명(謝方明)의 일은 나의 예전 견해가 매우 모범으로 삼을 만하지만 이 선생의 말도 이곳에서 자세히 살펴야 한다.)

 

先生之言, 恐更當思之. ‘至誠哀痛四字儘有意思, 存得此心, 自不至張皇也. 據今日病證, 似當且服此藥, 便自胸次開闊, 黑白分明. 若更主張調停兩字, 正是以水濟水, 竊恐昏昧隘促, 轉見無進步處. 父沒觀行必如舊說, 亦爲是非邪正之類, 所包甚廣. 今只云肆與否’, 却覺拘滯. 兼又與上句參差, 下句重倂, 尤未穩當.

대답: 선생의 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슬퍼하고 아파한다는 것은 뜻이 생겨나자마자 이러한 마음을 보존하여야 저절로 장황한 데 이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병에 의거한다면 우선 이 약을 복용해야만 저절로 가슴이 열리고 검은색과 흰색이 분명해집니다. 만약 조정이라는 말을 거듭 주장하는 것은 물로써 물을 다스리는 것으로 어둡고 혼미해져서 견해에 진보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행동을 본다는 것이 반드시 옛 설명과 같다면 옳음/그름, 삿됨/바름 따위에 의해서 포괄하는 내용이 매우 광대해집니다. 이제 오직 방자한지 않은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도리어 견해가 협애하게 막히게 되고, 아울러 위 구절과도 어긋나고 아래 구절과도 중복되어 더욱 온당치 않습니다.

 

日月終古常見而光景常新, 其理固如此. 然所謂常見, 所謂常新, 必有科別.

물음: 해와 달이 아주 옛날부터 항상 떠올랐으되 그 빛은 언제나 새로웠으니, 그 이치가 참으로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떠오른다는 것항상 새롭다는 것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습니다.

 

日月陰陽之精終古不易, 然非以今日已昳之光復爲來日將升之光也, 故常見而常新.

대답: 해와 달 그리고 음과 양의 정기가 아주 옛날부터 바뀌지 않았지만, 오늘 이미 밝았던 빛이 다시 내일 떠오르는 빛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항상 떠오르되 언제나 새롭습니다.

 

 

未能事人而欲事鬼, 未能知生而欲知死, 是猶未知其首而欲知其尾也. 知首之旨, 當如來敎. 又思事人之旨, 恐止是不敢欺, 不敢慢, (出門如賓之類皆是.) 如此而致敬密察, 庶幾可以交神明矣. ‘祗事’, 所謂盡親親長長貴貴尊賢之道, 恐於字未叶.

물음: 아직 사람을 섬길 수 없으면서 귀신을 섬기려고 하고, 아직 삶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죽음을 알려고 하는 것은, 아직 머리를 알지 못하고서 꼬리를 알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머리를 안다는 뜻은 마땅히 가르쳐 주신 것과 같습니다. 또한 사람을 섬기는 뜻은 단지 감히 속이지 않고 감히 게으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을 나섬에 손님을 맞이하듯이 한다는 종류가 다 이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공경을 다하여 세밀히 살펴야 신명(神明)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섬김이란 신중히 섬긴다고 할 때의 섬김과 같습니다. 어버이를 친히 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하고, 귀한 이를 귀하게 대하고, 현자를 높이는 도리를 다한다고 하는 것은 자에 대해 부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此說甚好, 比熹說尤親切. 蓋親親長長貴貴尊賢之道固不外乎愛敬, 但如此說方親切耳. 然四者之目亦不可廢, 請更思之.

대답: 이 말은 매우 좋으며, 저의 말보다 더욱 친절합니다. 대개 어버이에게 친히 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하고, 귀한 이를 귀하게 대하고, 현자를 높이는 도리는 본디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지만, 이와 같이 말해야 친절합니다. 그러나 네 가지 조목도 폐할 수 없으니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視之不見, 聽之不聞, 體物而不遺’, 此三句乃指鬼神之德而言. 視不見, 聽不聞, 無形聲臭味之可聞可見也, 然却體物而不遺, 則甚昭然而不可揜也. 所謂體物者, 固非先有是物而後體之, 亦非有體之者而後有是物. 萬物之體卽鬼神之德, 猶云氣卽性, 性卽氣而不可離也, 可離則無物矣. 所謂不可遺者, 猶言無遺闕滲漏, 蓋常自洋洋生活, 不間乎晦明代謝也.

물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트리지 않는다.”는 세 구절은 귀신의 덕을 가리켜 말하였습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형체와 소리와 냄새와 맛이 없지만, 도리어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트리지 않으니, 그렇다면 매우 밝아서 가릴 수 없습니다. 사물의 본체가 된다는 것은 본디 먼저 이 사물이 있은 뒤에 그것의 본체가 된다는 것이 아니니, 역시 사물을 본체로 하는 것이 있은 뒤에 이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본체가 곧 귀신의 덕이니, ()가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기여서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떨어질 수 있다면 사물이 아닙니다. 빠트릴 수 없다는 것은 빼먹거나 누락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개 항상 스스로 대범한 자세로 생활하면서 어둠과 밝음이 바뀌는 것에 간여하지 않습니다.

 

物之聚散始終, 無非二氣之往來伸屈, 是鬼神之德爲物之體, 而無物能遺之者也. 所謂非有體之者而後有是物與所謂無遺闕滲漏, 皆非是.

대답: 사물이 모이고 흩어지고 시작하고 끝나는 것은 가고 오고 펴고 굽히는 두 기의 작용이 아님이 없으니, 귀신의 덕이 사물의 본체가 되면 빠트릴 수 있는 사물이 없습니다. “사물을 본체로 하는 것이 있은 뒤에 이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빼먹거나 누락함이 없음은 다 옳지 않습니다.

 

魂者其氣也, 氣散魂遊而無不之’, 所謂無不之者, 已屈之氣尙有在於天地之間邪? 抑否也? 然氣聚則生, 氣盡則死, 何者爲遊魂? 之一字, 謂其卽便消散, 又似未盡也. 體魄藏於地, 恐指成質而言. (如月魄以無光明者言.) 謂耳目之聰明爲魄, 有所未曉. 合耳目之聰明而言, 則魂不離魄. (聰明卽氣之運, 乃是魄也.) 失其耳目之聰明而言, 則魂去魄存, 恐難以耳目聰明命之爲魄也.

물음: “()이란 기()이니, 기가 흩어지고 혼이 떠다녀서 가지 않음이 없다.”라는 것에서 가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굽혔던 기다 오히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그러나 기가 모이면 태어나고 기가 다하면 죽으니, 무엇이 떠다니는 혼일까요? ‘떠다니다는 말을 헤아려보면 그것은 곧 소멸되어 흩어지더라도 또한 다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와 백()은 땅에 속하고, ()을 이루는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 같습니다. (예컨대 달의 백은 빛이 없는 부분을 말한다.) 귀가 잘 들리고 눈이 밝은 것이 백()이라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귀의 잘 들음과 눈의 밝음을 합하여 말한다면 혼은 백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잘 듣고 잘 보는 것은 기의 운동으로 이것이 백이다.) 귀의 잘 들음과 눈의 밝음을 읽고서 말한다면 혼()이 사라지고 백()이 보존되니, 귀의 잘 들음과 눈의 밝음을 백()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程子曰魂氣歸于天, 消散之意, 遊魂亦是此意. 蓋離是體魄, 則無所不之而消散矣. 雖未必皆卽時消散, 要必終歸於消散也. 魂魄之分, 更當熟究陰陽之分. 魄自是二物, 魄之降乎地, 猶今人言眼光落地云爾. 體卽所謂精氣爲物, 蓋必合精與氣, 然後能成物也.

대답: 정자가 말하기를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니 소멸하여 흩어지는 뜻이고, 떠다니는 혼도 이러한 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체()와 백()을 떠나면 가지 않음이 없이 소멸하여 흩어집니다. 비록 모든 것이 곧바로 소멸하여 흩어질 필요가 없을지라도 끝내 소멸하여 흩어지는 데로 귀착되어야 합니다. ()와 백의 구분에 대해서는 다시 음양의 구분을 익숙하게 궁구해야 합니다. 체와 백은 본디 두 가지 것이니, 백은 땅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요즘 사람들이 눈빛이 땅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체란 ()과 기()가 사물이 된다.”라고 할 때의 것으로, 반드시 정과 기를 합한 뒤에야 사물을 이룰 수 있습니다.

 

洙泗言仁及契丈仁說, 竊得諷味. 復之六二休復之吉, 以下仁也’, 謂初九也. 易傳云: ‘一陽復於下, 乃天地之心’, 此正與元者善之長同理. 竊謂五常之仁猶四時之春, 至善醇醲不雜. 孟子指乍見之心爲仁之端, 下卽論非內交要譽而然, 蓋因乍見之眞而可知其有仁也. 端云者, 苗裔端倪之謂也. 覺痛痒則非不仁, 則覺者所以驗乎仁. 有彼我心則爲不仁, 則公者是仁之意思, 愛是仁之用, 恕是仁之施. 而樂山靜壽, 又乃形容仁之體段也. (程子氣類相合之言殊覺有味.) 要須先以萬善之先名仁, 而後可以用工致力. 若所謂克己復禮, 如見如承之類, 皆用工致力之道也. (要皆當一一剖析, 又不敢太成支離, 失其全體.)

물음: 공자가 말한 인과 선생님의 인설(仁說)은 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괘의 육이(六二)“‘아름답게 돌아오니 길하다는 것은 아래가 어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초구(初九)를 말합니다. 󰡔역전󰡕에 의하면 하나의 양()이 아래로 돌아가니 천지의 마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 선의 어른이다.”는 것과 이치가 같습니다. 생각건대 오상(五常)의 인이 오히려 네 계절 중에서 봄과 같이 지극히 선하고 티끌 없이 순수함을 말합니다. 󰡔맹자󰡕에서 아이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고 깜짝 놀라서 구하려는 마음이 인의 단서이지, 내밀히 사귀려고 하거나 명예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논의하였으니, 대개 순간적으로 보는 참됨에 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서라는 것은 싹의 끝을 말합니다. 아프고 가려운 곳을 깨닫는다면 인이 아닌 것이 아니니, 깨닫는다는 것이 인에서 징험됩니다. 저것과 나를 구분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질지 않으니, 공평함이란 인의 뜻입니다. 사랑은 인의 쓰임이고 헤아림은 인의 베풂입니다. 산을 좋아하면서 고요하고 장수하는 것 또한 인의 풍모를 형용한 것입니다. (정자의 기는 같은 것끼리 서로 합한다.”는 말이 특히 맛이 있다.) 반드시 먼저 온갖 선() 중에서 앞서는 것을 인이라고 이름 지은 뒤라야 힘써 공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간다는 것문을 나섬에 큰 손님을 보듯이 하고 백성을 부림에 큰 제사에 임하듯이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다 힘써 공부하는 도리입니다. (모두 하나하나 분석해야 하고, 또한 너무 지루하게 하여 그 온전한 본체를 잃어서는 안 된다.)

 

以萬善之先名仁’, 殊不親切, 且以所引易傳及四時之春者體之卽見. 熹前所論統仁智及四端而言者, 其分界限明而血脈通貫, 不必別立名字. 但要用工致力, 使眞不失此心, 然後爲得耳.

대답: ‘온갖 선 중에서 앞서는 것을 인이라고 이름 한다는 것은 특히 절실하지 않습니다. 우선 인용하였던 󰡔역전󰡕과 네 계절 중의 봄에 대해 몸소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 논의하면서 인지와 사단을 총괄하여 말하였던 것이 구분이 분명하고 맥락이 관통하여 따로 이름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힘써 공부하려고 한다면 참된 것으로 하여금 이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한 뒤라야 얻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여자약게 답함 (8)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하나에 집중하는 것主一일에 집중하는 것主事에 대해 논의하였다.

 

承喩專看論語, 浸覺滯固, 因復看易傳及繫辭, 此愚意所未喩. 蓋前書布此曲折已再三矣, 似已略蒙聽察, 不知何爲而復蹈舊轍也? 夫論語所記, 皆聖人言行之要, 果能專意玩索, 其味無窮, 豈有滯固之理? 竊恐却是不曾專一, 故不見其味而反以爲滯固耳. 至如讀易, 亦當遵用程子之言, 繫辭自有先後. 今亦何所迫切而手忙脚亂一至於此邪? 所論主一主事之不同, 恐亦未然. 主一只是專一, 蓋無事則湛然安靜而不騖於動, 有事則隨事應變而不及乎他. 是所謂主事者, 乃所以爲主一者也. 觀程子書中所論敬處, 類集而考之, 亦可見矣. 若是有所係戀, 却是私意. 雖似專一不舍, 然旣有係戀, 則必有事已過而心未忘, 身在此而心在彼者. 此其支離畔援, 與主一無適非但不同, 直是相反. 今比而論之, 亦可謂不察矣. 惟其不察於此, 是以未能專一而已有固必矜持之戒, 身心彼此實有係戀支離之病, 而反不自知其非. 又凡前後所言, 類皆瞻前顧後一前一却之論, 不曾坦然驀直行得數步. 此亦一箇大病根株, 恐當痛下功夫刊削. 不可悠悠, 又只如此說來說去, 久之看得只似尋常也.

보내신 편지에 의하면 오로지 󰡔논어󰡕를 보았는데 견해가 막히고 고루하여 그 때문에 다시 󰡔역전󰡕󰡔계사󰡕를 본다고 하였는데, 이것에 대해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앞 편지에서 이에 대한 곡절을 이미 여러 차례 밝혀 이미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을 텐데, 왜 다시 옛 자국을 밝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어󰡕의 기록은 다 성인이 말하고 실천했던 요점이어서 실제로 뜻을 집중하여 씹어보고 궁구해보면 그 맛이 끝이 없으니, 어찌 막히고 고루한 이치가 있을까요? 아마도 뜻을 하나로 집중하지 않았으므로 그 맛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막히고 고루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을 읽는 경우에도 정자(程子)의 말을 따라야만 괘와 효와 계사󰡕에 저절로 앞뒤가 갖추어집니다. 왜 급하게 서두르면서 손이 바쁘고 다리가 어지러우면서 줄곧 이러한 지경에 이릅니까? 논의하셨던 하나에 집중하는 것主一일에 집중하는 것主事이 다르다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란 하나에 오로지 하는 것일 뿐이니, 대개 일이 없으면 담담한 자세로 편안하고 고요하여 움직임으로 치닫지 않고, 일이 있으면 일에 따라 응대하고 변화하면서 다른 것에 미치지 않습니다. 일에 집중한다는 것이 하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정자의 글에서 논의한 경()의 경지를 종류별로 모아서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몹시 애착이 있다면 도리어 사사로운 뜻입니다. 비록 오로지 집중하여 버리지 않은 것 같을지라도 이미 애착이 있다면 반드시 일에 지나침이 있어도 마음으로 잊지 못하고, 몸이 이곳에 있어도 마음은 저곳에 있게 됩니다. 이것은 지루하게 겉돌아서 하나에 집중하여 떠남이 없는 것主一無適과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반대되기까지 합니다. 이제 비교하여 논의하는 것도 살피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을 살피지 않으므로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서 이미 억지로 기필하며 단단히 붙잡는 것을 경계함이 있게 되고, 몸과 마음 저것과 이것이 실제로 밀착되어 지루해지는 병이 있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그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앞뒤에서 말한 내용은 모두 앞을 살피다가 뒤를 돌아보거나 앞으로 한 번 나아갔다가 뒤로 한번 물러나는 논의여서, 평탄하게 빨리 곧게 몇 발자국을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도 큰 병의 근원 중의 하나입니다. 마땅히 간절히 공부하면서 깎아내야지 단지 한가롭게 이와 같이 말만 주고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래도록 살펴보는 것은 단지 범상함을 찾는 것일 뿐입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9)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말을 교묘히 하는 것, 해와 달의 현상, 귀신, 음양오행 등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修省言辭, 誠所以立也. 修飾言辭, 僞所以增也. 發原處甚不同. 夫子所謂巧令鮮仁, 推原辭意而察巧令之病所從來, 止是有所爲而然. (如未同而言, 以言餂人, 脅肩諂笑, 以喜隨人之類, 皆有所爲也.) 曰鮮矣仁云者, 獨言巧令之人於仁或幾乎息而不敢謂之全無也.

물음: 말을 닦고 살피면 정성스러움이 서고 말을 닦고 꾸미면 거짓이 증가하니, 그 근원이 매우 다릅니다. 공자가 말했던 말을 교묘히 하고 낯빛을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자가 드물다.’고 하였으니 그 말뜻을 뿌리에서부터 헤아려 교묘함과 꾸밈의 원인을 헤아려보면 단지 억지로 만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예컨대 상대와 뜻이 다르면서 꾸며서 말하는 것은 말로써 남을 꼬이는 것이고, 어깨를 움츠리면서 아첨하며 웃는 것은 기쁘게 함으로써 남을 따르는 종류가 다 억지로 하는 것이다.어진 자가 드물다는 것은 교묘히 꾸미는 사람이 인에 대해 거의 소멸하였다고 할 수는 있으나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有所爲之說甚善, 不敢謂之全無’, 指意畢竟如何, 幸更喩及. 伊川先生解中却云謂非仁也’, 便如此直截說破, 意又如何?

대답: 억지로 한다는 설명은 매우 좋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그 궁극적인 뜻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다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이천 선생의 해설 안에는 도리어 그에 대하여 어질지 않음을 말한다.”라고 하면서 바로 잘라서 설명하였으니, 또한 이러한 뜻은 어떠한지요?

 

曾子之三省, 忠信而已, 則程子包傳不習乎一語解之矣. 所謂欺於己欺於師, 想是程子之意. 但祖儉竊謂傳不習乎亦須兼就不習而傳於人上說. 蓋不習而傳, 則是中有未盡而與欺人無異也, 與上文同旨. 而傳習又所當省者, 故專言之. 如子夏後爲莊周之類, 皆由傳之有所未習, 故流傳之久, 不能無弊. (觀老於西河之上氣味, 謂之講習之功全盡, 未可也.) 惟曾子謹其所傳, 故至今無弊. 彼以其富之言摽使者出大門之義․․說大人則藐之之訓, 其血脈貫通, 皆似有少傷和粹處. 信乎, 傳而習之爲難也(所謂傳, 非如釋氏半夜傳法之謂. 蓋在己有所未克, 則其動止之間不能無失. 苟時習之功有所未至, 流傳於後, 豈不有害?)

물음: 증자가 하루에 세 번 살핀 것은 충성과 믿음일 따름이니, 정자(程子)전수한 것을 익히지 않았는지라는 한 마디를 포괄하여 해석하였습니다. 자기를 속이고 스승을 속인다는 것이 정자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전수한 것을 익히지 않았는지라는 구절도 반드시 익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전수한다는 뜻도 겸해 말해야 합니다. 대개 익히지 않고 전수한다면 그 안에 다하지 못함이 있어서 남을 속이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위의 글과 뜻이 같습니다. 전수하고 익히는 것 또한 마땅히 살펴야 할 것이므로 지적하여 말했습니다. 예컨대 자하(子夏)가 전한 것은 나중에 장주(莊周: 莊子)의 유파가 되었으니, 모두 전한 것에 대해 익히지 않음이 있었으므로 오랫동안 전해가면서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서하(西河)의 가에서 늙었다는 것의 어투를 보면 배우고 익히는 공부를 온전히 다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증자는 그가 전수하는 것을 신중히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폐단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부유함으로써 한다는 것사자에게 내저으며 대문으로 나가는 것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유세할 때에는 가볍게 대하는 것 등의 뜻은 맥락이 서로 통하는 것으로 모두 조화로움을 조금 해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로 전수하여 익히는 것이 어렵습니다. (전수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한밤중에 법을 전하는 것과 같지 않다. 대개 자기에 대해 이기지 못하였다면 움직이고 멈추는 사이에 잃지 않을 수 없으니, 진실로 때에 따라 익히는 공부가 지극하지 않으면 후세에 전해질 때 어찌 해롭지 않겠는가?)

 

所論甚善, 末後注脚尤好, 但恐文意未如此耳. 恐當放下許多道理, 且平心看他文義向甚處去, 都不要將道理向前牽拽他. 待他文義有歸著去處, 穩帖分明後, 却有箇自然底道理出來, 不容毫髮有所增損抑揚. 此處正好玩味也. 大抵先要虛心爲要耳. (禹無間然一段, 五峰說得甚好. 然近日細看, 恐聖人當日贊歎之時未有此意. 他似此者甚多.)                   

대답: 논의하신 내용이 매우 좋으며 특히 뒤의 주석은 더욱 좋지만, 문맥의 뜻이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많은 도리들을 버려두고서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글의 뜻이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를 보아야지, 앞에 있는 도리를 가지고서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글의 뜻이 귀결되는 곳이 있기를 기다려서 평온하게 밝혀진 뒤에야 자연스러운 도리가 흘러나와 털끝만치라도 더하고 빼고 누르고 올리는 것을 용납지 않게 되니, 이 경지를 바로 잘 완미해야 합니다. 대저 마음을 비우는 것을 요점으로 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 임금에 대해 흠잡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부분은 오봉(五峰)의 말이 매우 좋지만, 요즘에 자세히 보니 성인이 당시에 찬탄하던 때에는 이러한 뜻이 없었다. 다른 곳도 이와 비슷한 것이 매우 많다.)

 

李先生之論, 蓋欲拯世人計較之病, 大要恐人思前算後, 遷就回互, 入於不誠不直而弗自覺知. 然人之資禀剛柔不齊, 則藥其所偏者, 又恐難一槪論. 止是要認得此意旨所發, 而於計較思算時常常點檢也.

물음: 이 선생(李先生: 李侗)의 논의는 세상 사람들이 계산하고 비교하는 병을 구제하려는 것입니다. 그 병의 큰 요점은 사람들이 미리 계산한 뒤에 의심하는 데로 옮겨가 진실하지 않고 곧지 않은 데로 들어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품부 받은 바탕에는 강하고 부드러운 차이가 있어서 그 치우친 부분에 약을 쓰는 것이니 하나의 틀로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단지 이러한 뜻이 발생한 곳을 알아서 계산하고 비교하는 때에 대하여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日用功夫固當縝密, 然覺得如此煩碎繳繞, 又似自縛殺了. 故先生之意大抵且要簡節疎目, 先整頓得大體是當, 然後却就上面子細點檢. 是亦學不躐等之意也.

대답: 일용의 공부가 진실로 세밀해야 하지만 견해가 이와 같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면 또한 스스로를 옭아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생의 뜻이 우선 절목을 간단히 하고 먼저 큰 본체를 마땅하게 정돈한 뒤에야 도리어 윗부분의 공부를 자세하게 점검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역시 배울 때 단계를 뛰어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坎離, 陰陽之成質, 故爲上篇之終. 旣濟坎離之合 : 未濟坎離之交, 故爲下篇之終. 五行之運, 獨言水火, 又謂爲成質, 何也?

물음: 감괘와 이괘는 음과 양이 질()을 이루는 것이므로 상편의 끝이 됩니다. 기제괘는 감괘와 이괘의 교합이고, 미제괘는 감괘와 이괘의 교합이므로 하편의 끝이 됩니다. 5행의 움직임에서 물과 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나아가 질을 이룬다고만 말하는 것은 왜입니까?

 

陰陽成質, 水火爲先, 故洪範一曰水, 二曰火. 正蒙中亦有一段論五行次序, 說得分明, 可更檢看. 數學有乾坤付正性於離坎之說, 似亦有理.

대답: 음과 양이 질을 이루고 물과 불이 앞서므로, 홍범에서는 첫째가 물이고 둘째가 불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몽(正蒙󰡕에서도 오행의 순서를 논의한 부분이 한 곳 있는데 말이 분명하여 다시 검토해볼 만합니다. 상수학(象數學)건괘와 곤괘가 이괘와 감괘에 바른 본성을 부여한다는 말이 있으니 그것도 이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日月, 陰陽之精氣, 向時所問殊覺草草. 所謂終古不易與光景常新者, 其判別如何? 非以今日已昳之光復爲來日將升之光, 固可略見大化無息而不資於已散之氣也. 然竊嘗觀之, 日月虧食, 隨所食分數, 則光沒而魄存, 則是魄常在而光有聚散也. 所謂魄者在天, 豈有形質邪? 或乃氣之所聚而所謂終古不易者邪?

물음: 해와 달은 음과 양의 정미한 기운이니, 저번에 물었던 것은 특히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태고 적부터 바뀌지 않는다는 것그 빛이 언제나 새롭다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까요? 오늘 이미 떠올랐던 빛이 다시 내일 떠오르는 빛이 되는 것이 아니니, 진실로 커다란 변화가 쉬지 않으며 이미 흩어졌던 기에 도움을 받지 않음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펴보니 일식과 월식 현상이 정해진 분수에 따라 빛이 사라져도 백()이 보존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백이 항상 있으나 빛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백이라고 하는 것이 하늘에 있는데 어찌 형체와 실질이 있을까요? 혹시 기가 모인 것으로 태고 적부터 바뀌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日月之說, 沈存中筆談中說得好, 日食時亦非光散, 但爲物掩耳. 若論其實, 須以終古不易者爲體, 但其光氣常新耳. 然亦非但一日一箇, 蓋頃刻不停也.

대답: 해와 달에 대한 설명은 심존중(沈存中: 沈括)󰡔필담󰡕 중의 말이 매우 좋으니, 일식 때에도 빛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다만 다른 사물에 가릴 따름입니다. 만약 그 실제를 논하자면 태고 적부터 바뀌지 않은 것이 체()이며, 그 빛과 기운은 항상 새로울 따름입니다. 하루에 하나일 뿐만 아니라 찰나에도 그 새로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二氣五行, 造化萬物, 一闔一闢, 萬變是生. 所謂五行之氣, 卽雷火之運邪? 又卽二氣之參差散殊者邪? 先儒謂物物皆具, 則人之氣禀有偏重者, 謂之皆具可乎? 或謂雖物皆具, 而就五行之中, 有得其多者, 有得其少者. 於此思之, 殊茫然未曉.

물음: 두 기와 오행이 만물을 만들고 변화시키면서 한번은 닫혔다가 한번은 열리면서 온갖 변화가 생겨납니다. 오행의 기라는 것은 우레바람불 따위의 움직임일까요? 나아가 두 기가 서로 섞여 흩어져 다르게 되는 것일까요? 옛 유자들이 사물마다 다 갖추고 있다고 했다면 사람의 기품에 치우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혹자는 비록 사물마다 다 갖추었으나 오행 중에서 어느 것을 더 많이 얻고 어느 것을 더 적게 얻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 특히 막막하여 알기 어렵습니다.

 

五行之氣, 如溫凉寒暑燥濕剛柔之類, 盈天地之間者, 皆是擧一物無不具此五者, 但其間有多少分數耳. 五音五色五味之類皆是也.

대답: 오행의 기란 따뜻하고 서늘함차고 더움건조하고 습함강하고 부드러움 등과 같이 천지의 사이를 채우는 것은 모두 하나의 사물일지라도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지만, 다만 그 사이에 많음과 작음으로 나뉘는 질서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 소리다섯 가지 색깔다섯 가지 맛 따위가 다 이것입니다.

 

鬼神之德蓋甚難知, 於此粗入思慮, 竟於體物不遺上看得未極分明. 於此不透, 故不自知而溺於釋氏處多. 明道答上蔡語謂: ‘向你道有來, 又恐賢問某討 : 向你道無來, 你又恁生信得及?’ 每每於此思量, 乍得乍失. 近因相識有饋生鵝者, 欲殺之, 則甚不忍 : 欲貨之, 則取其利而殺其身, 恐有冤之之意, 常感於中. (此病不已, 便入因果上去.) 又因夜夢, 疑若有世間所謂鬼者欲出, 雖未睡覺, 然心知其無, 以理却之, 竟無有也. 雖曰以理却之, 然中心不無驚悸. 若此類, 則釋氏之說久久, 極易惑人, 但先入者爲主, 可以主張. 然非實曉, 亦安能保也?

물음: 귀신의 덕이란 매우 알기 어려운 것이어서, 이에 대해 거칠게나마 생각해보더라도 필경 사물의 근간이 되어 빠트리지 않는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투철하지 못하므로 저도 모르게 석씨(釋氏)에게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도(明道: 程顥)가 상채(上蔡: 謝良佐)에게 답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에게 (귀신이) 있다고 말하면 또한 그대가 나에게 물으면서 토론할 것이고, 그대에게 없다고 말하면 그대가 또한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매번 이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잠시 얻었다가 곧 잃고 맙니다. 근래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살아있는 거위를 선물로 준 사람이 있었는데 죽이려고 하니 차마 그러지 못하겠고, 재화로 쓰려니 그 이로움을 취하면서 그 몸을 죽이는 것이어서 원한을 사는 뜻을 항시 마음속으로 느낍니다. (이 병이 그치지 않으면 원인과 결과의 측면으로 들어간다.) 또한 밤중의 꿈에 귀신이 나오려고 한다고 의심된다면, 비록 잠을 깨어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으로 귀신이 없다는 것을 알아 이치로써 물리친다면 결국에는 사라지게 됩니다. 비록 이치로서 물리칠지라도 마음속으로 놀라 두근거림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것이라면 석씨의 말이 오래 전부터 매우 쉽게 사람들을 속여 단지 선입견을 위주로 하여 주장하지만 실제로 깨우친 것이 아니니,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까요?

 

鬼神只是氣之屈伸, 其德則天命之實理, 所謂誠也. 天下豈有一物不以此爲體而後有物者邪? 以此推之, 則體物而不可遺者見矣. 著實見得此理, 則聖賢所論一一分明. 不然, 且虛心向平易分明處別理會箇題目, 勿久留情於此, 却生別種怪異底病痛也. 生鵝之論, 只以子釣而不綱弋不射宿孟子遠庖廚之義斷之, 便自直截.

대답: 귀신이란 단지 기의 굽힘과 폄으로, 그 덕은 천명의 참된 이치이며 성()이라고 부릅니다. 천하에 하나의 사물이라도 어찌 귀신으로써 본체를 삼지 않고서 사물이 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로써 헤아려본다면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트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이치를 얻는다면 성현이 논의한 내용이 하나하나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선 마음을 비우고서 쉽고 분명한 곳을 향하여 따로 하나의 제목을 만들어 이해해야지, 오래도록 여기에 정을 두어서 다른 종류의 괴이한 병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거위에 대한 논의는 오로지 공자의 낚시질을 하면서도 그물질을 하지 아니하고, 화살을 쏘면서도 잠자는 새를 겨냥하지 않은 것과 맹자의 주방을 멀리하는 뜻으로써 단정해보면 저절로 바르게 됩니다.

 

吳才老之論亦是一意, 然覺得未完. ‘吾必謂之學云者, 謂夫世人不知以是爲學而專以講論爲學也. ‘則以學文, 謂夫世人不知修其當位之職而徒欲學文也. 意各有當, 言各有指, 似難以未該徧論之.

물음: 오재로(吳才老)의 논의도 하나의 뜻이지만 견해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것이 배움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오로지 강론하는 것만을 배움으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글을 배운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마땅히 위치해야할 직무를 닦을 줄 모르면서 한갓 글을 배우려는 것을 말합니다. 뜻에는 각기 마땅함이 있고 말에는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으니, 해당하는 것들을 두루 논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伯恭論得此意甚好, 謂才老之論不可謂不然, 但其發處有病耳. 誠然誠然. 今日兩端之論, 恐亦正坐此也. 但若論文義, 子夏所說終是倚著一邊, 豈亦矯枉過直而然邪?

대답: 백공(伯恭)의 논의가 이러한 뜻을 매우 잘 얻었으니 오재로(吳才老)의 논의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발단 처에는 병이 있습니다. 진실로 오늘날 두 개로 나누는 논의가 이로부터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다만 글의 뜻을 논의하자면 자하가 말한 내용은 끝내 한쪽으로 기울었으니, 어찌 굽은 것을 바로잡으면서 곧은 것을 지나쳐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乾知大始’, 程子云: ‘乾當始物, 乾以易知.’ 程子又云: ‘, 始物之道易’, 似不以此字爲知崇及極高明之意. ‘字如何形容?

물음: “건은 큰 처음을 안다.”에 대해 정자가 이르기를 건은 마땅히 사물을 시작하고 건은 쉬움으로써 안다.”라고 하였고, 정자가 또 이르기를 건은 사물을 시작하는 역의 도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자는 높은 것을 알고 고명(高明)함을 다하는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는 무엇을 형용한 것일까요?

 

乾便是物之太始, 故以字言之最爲密切.

대답: 건은 곧 사물의 큰 처음이므로 자로써 말하는 것이 가장 세밀하고 적절합니다.

 

, 陽也, 屬天 : , 陰也, 屬地. 魂氣歸于天, 體魄藏于地是也. 聚而復散者爲魂, 聚而不散者爲魄. , 非氣也. 精氣爲物者, 合氣之聚而復散與夫聚而不散言也. 遊魂者, 專指聚而復散言也. 來敎謂體魄自是兩物, 未能深曉, 更願詳賜批誨.

물음: ()은 양()이고 하늘에 속하며, ()은 음()이고 땅에 속합니다. 혼과 기는 하늘로 돌아가고 체와 백은 땅에 소장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것이 혼이고, 모였다가 흩어지지 않은 것이 백입니다. 백은 기가 아닙니다. 정미한 기가 사물이 된다는 것은 기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것과 모였다가 흩어지지 않은 것을 합하여 말하였습니다. 떠다니는 혼이라는 것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것만을 오로지 말했습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체와 백이 본래 두 가지 사물이라고 한 것은 잘 이해할 수 없으니, 다시 상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魂陽而魄陰, 故魂之盡曰散.(散而上也.) 魄之盡曰降. (降而下也.) 古人謂之徂落, 亦是此義. (林少穎云然.) 今以聚而不散者爲魄, 恐未然. 魄是二物, 精氣爲物, 猶言魂魄爲體爾. (以此推之, 更有曲折.)

대답: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므로 혼이 다하는 것을 흩어진다고 말합니다. (흩어져서 올라간다.) 백이 다하는 것을 내린다고 말합니다. (내려서 아래고 간다.) 옛 사람들이 가서 떨어진다고 하는 것도 이 뜻입니다. (임소영이 그렇게 말한다.) 이제 모여서 흩어지지 않은 것이 백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체와 백은 두 가지 사물이어서 정미로운 기가 사물이 된다.’는 것은 혼과 백이 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써 헤아려보면 다시 곡절이 있다.)

 

仁者, 天下之正理’, 此一語與仁意義如何?

물음: “()이란 천하의 바른 이치이다.”라는 한 마디 말은 ()’의 뜻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此是對下文禮樂而言, 非專以訓仁之名義也. 大率前賢語意寬廣, 不若今人之急迫. 今人見得些道理, 便要鐫鑿開却, 正是心量小, 不耐煩耳. 近日甚覺前日說得惡模樣也. 然說得如此, 人尙不會, 况不說乎? 此又不可廢也.

대답: 이것은 아래 글귀인 예악(禮樂)과 대구하여 말한 것이지 인의 뜻으로만 새긴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옛 현인의 말뜻은 관대하고 넓어서 오늘날 사람들이 급하게 다그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조금 도리를 알게 되면 쪼고 파서 벌리어 물리치려고 하니, 이것은 바로 마음의 국량이 좁아 수고로움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예전에 말했던 것이 어떤 모양인지 깊이 깨닫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이 이와 같이 분명하더라도 오히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말하지 않아서야 어떨까요? 이것을 또한 폐할 수 없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0)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조상과 자손의 관계, 상채의 자기를 내세우는 공부, 정이의 󰡔󰡕에 대한 말, 󰡔맹자󰡕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다.”는 구절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程氏葬說父祖子孫同氣, 彼安則此安, 彼危則此危. 墓以藏體魄也, 所謂安者, 何所指邪?

물음: 정씨(程氏)의 장례에 대한 말에 의하면 조상과 자손이 같은 기()여서 조상이 편안하면 자손도 편안하고 조상이 위태로우면 자손도 위태롭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편안하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正指體魄而言耳. 程子論此意思甚詳, 讀之使人惻然感動. 有此疑者, 豈非惑於莊生愛其使形者之論邪? 此異端之言, 賊恩之大者, 不可以不辨.

대답: 바로 체백(體魄)을 가리켜서 말했을 따름입니다. 정자가 논의한 이 뜻을 논한 것이 매우 상세하여 그 부분을 읽는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측은하게 감동하게 합니다. 이러한 의심이 있는 사람은 어찌 장생(莊生: 莊子)형체를 부리는 것을 사랑한다.”는 논의에 의혹된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이단(異端)의 말로 은혜를 크게 해치는 것이어서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上蔡以我視我聽等言, 子絶四之旨觀之, 終未免有底意思. 雖與放而不知求者遠甚, 然其究極似未平正也. 見於文句者, 每每有底意思.

물음: 상채(上蔡: 謝良佐)나로써 보고 나로써 듣고---.”의 말은 공자가 네 가지를 끊은 뜻으로써 본다면 끝내 를 두는 생각을 면치 못합니다. 비록 놓아두고서 구제할 줄 모르는 것과 매우 차이가 날지라도 궁극적으로 평정함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글귀에서 본다면 매번 를 앞세우는 뜻이 있다.)

 

五峰作復齋記云: ‘知自反而以理視’, 此語無病. 如此所引, 非惟有不平於下學切己功夫, 亦有任而失理之病. 其流弊之甚, 多至於妄作.

오봉(五峰: 胡宏)복재기에 의하면 스스로 반성하여 이치로써 볼 줄 안다.”는 말에는 병이 없습니다. 예컨대 여기에서 인용하였던 것은 아래로 자기에게 절실한 공부를 배우는 데 편안하지 않으면서 를 앞세울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에 맡기다가 이치를 잃는 병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폐단이 심하여 대부분 거짓으로 짓는데 이르렀다.)

 

主忠信之言後於不重則不威’, 其意如何?

물음: “충성과 믿음에 주로 한다.”는 말이 무겁지 않으면 위엄스럽지 않다.”는 말보다 위에 있으니, 그 뜻이 어떠한지요?

 

聖賢所言爲學之序例如此, 須先自外面分明有形象處把捉扶竪起來, 不如今人動便說正心誠意, 却打入無形影無稽考處去也.

대답: 성현이 말한 것은 배움의 순서와 사례가 이와 같다는 것으로 반드시 먼저 모습이 분명한 밖에서부터 붙들어 세워야지, 요즘 사람들처럼 움직일 때마다 마음을 바로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한고 말하면서도 도리어 장난치면서 모습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傳不習乎’, 據文勢意脈, 當以明道言爲正.

물음: “전수한 것을 익히지 않았는지라는 구절은 문세와 맥락에 의거한다면 명도(明道: 程顥)의 말로써 바로 잡아야 마땅합니다.

 

此等處義理亦兩通, 存之可也.

대답: 이러한 곳의 뜻은 양쪽으로 통하므로 보존하여야 옳습니다.

 

程子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釋之曰義之所包知也’, 文意如何?

물음: 정자(程子: 程頤)만물을 두루 알아서 천하를 도로써 구제하므로 지나치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 뜻이 포함한 것이 앎이다.’라고 해석한다면 글의 뜻이 어떤지요?

 

程子說, 皆爲易之書而言, 故其說如此. 但鄙意似覺未安. 蓋易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 此固指書而言. 仰觀俯察以下, 須是有人始得. 蓋聖人因易之書而窮理盡性之事也. 近讀此書, 方見得一端緖, 非面論不能旣也.

대답: 정자가 ()’자를 말한 것은 모두 󰡔󰡕의 책을 말한 것이므로 그 말이 이와 같지만, 제가 보기에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개 󰡔󰡕은 천지와 더불어 법도가 되므로 천지의 도를 두루 경륜할 수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책을 가리켜서 말했습니다. ‘우러러 보는 것과 구부려 살피는 것이하는 반드시 사람이 처음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성인이 󰡔󰡕이라는 책에 근거하여 이치와 본성을 궁구하였습니다. 이 책을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하나의 단서를 알 수 있으니, 직접 보고 논의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습니다.

 

夏商損益, 繼周者亦必有損益. 蓋氣運升降, 不容不爾. 特聖人能因時而不逆之耳.

물음: 하 나라와 상 나라의 관계에서 더하고 뺀 것이 있으니 주 나라를 계승한 자라도 반드시 더하고 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기운이 오르고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특히 성인이 때에 따르더라도 그것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理大槪如此, 然非夫子告子張之意, 請更詳之.

대답: 이치가 대개 이와 같지만 공자가 자공에게 설명한 뜻은 아니니, 다시 상세하게 살피십시오.

 

林放問禮之本, 歷考程子之言有曰飾過則失實, 故寧儉’, 又曰儉則實所出, 又曰節文太過, 則和那些誠意都不見’, 則儉近本而不可正名曰本也.

물음: 임방(林放)이 예의 근본을 물은 것에 대하여. 정자(程子)의 말을 계속 살펴보니 꾸밈이 지나치면 실질을 잃으므로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말하기를 검소함은 실질에서부터 나온다.”라고 하였고, “절제와 무늬가 너무 지나치면 아울러 진실한 뜻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검소함이 근본에 가까우나 바로 근본이라고 이름 할 수는 없습니다.

 

禮正在恰好處. 泝而上之則儉爲本, 沿而下之則奢爲末, 當以易傳之言爲正. 龜山發明得亦佳.

대답: 예란 바로 매우 좋은 곳에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위로 받들면 검소함이 근본이고, 따라 내려가 아래로 하면 사치함이 말단이 되니, 마땅히 󰡔역전󰡕의 말이 정확합니다. 구산(龜山: 楊時)이 밝힌 것도 훌륭합니다.

 

生死者, 氣運往來之常也. 異端以有生爲幻而謂之無常, 是不明乎天地之性陰陽之本也.

물음: 살고 죽는 것은 기운이 일정하게 가고 오는 것입니다. 이단에서 삶을 거짓으로 여기면서 무상(無常)하다고 말하니, 이것은 천지의 본성과 음양의 근본에 밝지 못한 것입니다.

 

此說固然, 程子蓋言之矣.

대답: 이 말이 정확하며, 정자가 대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每事問’, 程子謂雖知亦問, 欽愼之至. ’問者, 問所未知也. 問所知焉, 似於未誠. 謝氏之說, 聖人之心恐不如是. (程子之意雖知其意味甚深, 然看得未分明.)

물음: “일마다 물었다.”는 구절에 대해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알더라도 물은 것은 매우 신중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음이란 아직 모르는 것을 묻는 법인데, 알고 있는 것을 물은 것은 진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씨(謝氏: 謝良佐)의 말에 의하면 성인의 마음이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정자의 뜻은 그 의미를 매우 깊게 알았을지라도 이해가 아직 분명하지 않다.)

 

以石慶數馬與張湯陽驚事相對觀之可見. 雖知亦問, 自有誠僞之別. 兼或人謂夫子爲鄒人之子, 則亦夫子始仕, 初入太廟時事. 雖平日知其說, 然未必身親行之而識其物也, 故問以審之. 理當如此, 必不每入而每問也. 然大綱節目與其變異處亦須問也.

대답: 석경(石慶)의 여러 마리 말과 장탕(張湯)이 겉으로 놀란 척 했던 일로써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알더라도 묻는 것에는 본디 진실함과 거짓됨의 구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자를 추() 나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라면 공자가 처음으로 벼슬하여 태묘에 들어간 때의 일입니다. 비록 평소에 그 말을 알았더라도 직접 몸소 실천하여 그 사물을 알 필요는 없었으므로 물어서 살폈던 것입니다. 이치가 마땅히 이와 같으니 들어갈 때마다 언제나 물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 강령이나 절목과 그에 따른 변화된 사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不以其道得去貧賤’, 當如明道說. 若曰不以其道得貧賤則不去’, 恐君子之心不如是也.

물음: ‘가난과 천함을 도로써 얻지 않은 것은 명도(明道: 程顥)의 말과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난과 천함을 도로써 얻지 않으면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군자의 마음은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明道說意甚密, 但文義似費力耳.

대답: 명도의 말뜻이 매우 세밀하지만, 문장의 뜻에 힘을 허비하는 것 같습니다.

 

近看得忠恕只是體用, 其體則純亦不已, 其用則塞乎天地 : 其體則實然不易, 其用則擴然大通. 然體用一源而不可析也, 故程子謂看忠恕二字自見相爲用處’, 而夫子曰: ‘吾道一以貫之.’

물음: 요즈음 충()과 서()가 단지 본체와 작용의 관계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 본체라면 순수함이 그치지 않고, 그 작용이라면 천지에 가득 찹니다. 그 본체라면 실질이 바뀌지 않고, 그 쓰임이라면 확장되어 크게 통합니다. 그러나 본체와 작용은 뿌리가 하나여서 쪼갤 수 없으므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충과 서 두 글자를 보면 서로 작용하는 곳이 저절로 드러난다.”라고 하였고, 공자는 내 도는 하나로써 꿰뚫는다.”라고 하였습니다.

 

此說甚善.

대답: 이 말이 매우 좋습니다.

 

出入無時, 莫知其鄕’, 只是大槪言人之心如是, 甚言此心無時不感而不可以不操也. 不操則感動於不善而失其本心矣. 雖曰失其本心, 而感處卽心也, 故程子曰感乃心也. ’而程子答心有亡也之問又曰: ‘纔主著事時, (先生以目視地.) 便在這裏, 纔過了便不見. ’又云: ‘心豈有出入? 亦以操舍而言. ’蓋寂然常感者, 心之本體. 惟其操舍之不常, 故其出入之無止耳. 惟其常操而存, 則動無不善, 而瞬息頃刻之間亦無不在也. 顔氏之子三月不違, 其餘則日月至, 政以此心之常感而易危故也.

물음: “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다.”라고 한 것은 단지 대체로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마음이란 느끼지 않은 때가 없어서 잡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잡지 않으면 선하지 않은 것에 느끼고 움직여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고 맙니다. 비록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느끼는 것이 곧 마음이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느끼는 것이 마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자가 마음이 사라지는 경우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를 일에 착수하여 주관하자마자 (선생은 눈으로 땅을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마음이) 이 안에 있고, 지나가자마자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르기를 마음에 어찌 들고 남이 있겠는가? 역시 잡거나 놓는 것으로 말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고요하게 항상 느끼는 것이 마음의 본체입니다. 마음을 잡고 놓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들고 남에 그침이 없습니다. 마음을 잡아서 보존하면 움직임마다 선하지 않음이 없고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도 있지 않음이 없습니다. 안씨(顔氏)의 아들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이 하루나 한 달 동안까지에만 이른 것은, 바로 마음이 항상 느낌으로써 쉽게 위태로워지는 것입니다.

 

寂然常感者, 固心之本體也, 然存者, 此心之存也 : 亡者, 此心之亡也. 非操舍存亡之外別有心之本體也. 然亦不須苦說到此, 只到朱勾處便可且住也.

대답: 고요하게 항상 느끼는 것이 진실로 마음의 본체이지만, 보존하는 것은 마음의 보존이고, 잃는 것은 마음의 잃음입니다. 붙잡고 놓고 보존하고 잃는 것 밖에 따로 마음의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시 억지로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고, 단지 붉은 갈고리 모양을 해둔 곳이라면 살려두어도 좋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1)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마음의 작용과 관련하여 사량좌, 호굉, 여조겸, 이동 등의 견해를 언급하였다.

 

示喩讀書用力之意, 甚善. 所謂收拾向裏, 固爲急務, 但亦當虛以待之, 則心體自存, 善端自著, 不可一向抑遏安排也. 近作一文字, 正述此意. 錄寄伯崇矣, 亦屬轉以奉呈也. 謝說未安者多此類, 所論孝弟之說, 蓋本有不屑卑近之意, 故其言日用切身處往往多有此意思. 且如此章不以事親從兄爲本分當然之事, 而特藉之以爲知仁之資, 則方其事親從兄之時, 其心亦不專於所事, 而又別起知仁之想矣. 往年與正字兄論知言中病痛, 亦多如此. 蓋其所授受有自來也. 却是呂與叔先生論民可使由之處意思極好. 昔侍李先生論近世儒佛雜學之弊, 因引其說, 先生亦深然之. 凡百但以此等意思存之, 便自平實. 至於近世專門之說, 蓋亦不必深論其失, 取其可取者焉可也.

말하신 독서하며 노력하는 뜻은 매우 좋습니다. 자기 내면을 거두어 모으는 것에 진실로 급히 힘써야 하지만, 다만 자신을 비우고 대해야만 마음의 본체가 저절로 보존되고 선의 단서가 저절로 드러나니, 한사코 억눌러 막으며 안배해서는 안 됩니다. 근래에 한편의 글을 지어서 이러한 뜻을 서술하여 백숭(伯崇: 范念德)에게 보냈으며, 또한 그것을 다시 드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 謝良佐)씨의 말에서 온당치 않은 것이 대부분 이러한 종류이니, 그가 논한 효도와 공손함에 대한 말은 본래 비근한 것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일용에서 경험하는 것이란 대부분 이러한 뜻을 지닙니다. 또한 이 문장과 같이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을 본래의 당연한 분수로 여기지 않고, 다만 그것을 빙자하여 인()을 아는 토대로 삼는다면,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를 때에 그 마음도 섬기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고, 더구나 따로 인을 아는 생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예전에 정자형(正字兄: 呂祖謙, 1137~1181)󰡔지언(知言)󰡕의 병을 논의한 것도 대부분 이와 같으니, 학문을 주고받은 데서 저절로 유래하였을 것입니다. 도리어 여여숙(呂與叔) 선생이 논의하였던 백성은 말미암게 할 수 있다.”는 곳의 뜻이 매우 좋습니다. 예전에 모셨던 이선생(李先生: 李侗)이 근세의 유교와 불교 등을 섞어서 배우는 폐단을 논하였으니, 그 말을 인용하자면 선생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모든 일에 대해 단지 이러한 생각을 보존한다면 저절로 평안하고 참될 것입니다. 근세 전문가의 말에 대해서는 그 과실을 깊게 논할 필요가 없으며, 그 중에서 취할 만한 것을 취하면 됩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2)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논어󰡕 「학이편의 여러 구절과 성()과 충() 등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時復思繹之義如何? 長沙說中謂紬繹其端緖, 又何也? 又時習專以思繹爲訓, 又何也?

물음: “때로 다시 생각하여 풀어낸다.”는 뜻은 어떠합니까? 장사(長沙: 張栻)가 말한 것 중에 그 단서를 뽑아서 풀어낸다고 하였는데 또한 어떠합니까? 또한 때로 익히는 것을 오로지 생각하여 풀어내는 것으로 뜻을 새기는 것은 어떨까요?

 

凡言學 : 多指講論誦讀言之, 故以習爲思繹. 長沙說不記云何, 紬繹端緖亦苦無異義也.

대답: 일반적으로 배움을 말할 때 대부분 강론하고 외우고 읽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므로 익히는 것을 생각하여 풀어내는 것으로 여깁니다. 장사(長沙: 張栻)의 말이 어떠한지 기록하지 않았으나 단서를 뽑아서 풀어낸다고 하는 것도 크게 다른 뜻이 없습니다.

 

學卽行也, 所謂所以學者, 將以行之也’, 意必有在.

물음: 배움이란 곧 실천하는 것이니, “배우는 까닭은 장차 실천하려는데 있다.”라고 하는 말은 고의적으로 기필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中庸言博學, 又言篤行, 則學與行自是兩事.

대답: 󰡔중용󰡕에서 널리 배우라고 말했고 다시 두터이 실천하라고 했다면 배움과 실천은 본래 두 가지 일입니다.

 

樂之分如何? 所謂說在心, 政孟子理義悅我心, 猶芻豢悅我口之意. 但所謂樂主發散在外, 朋友之樂蓋亦實見其可樂, 但比說爲發舒耳. 謂之主發散在外, 願明其說.

물음: 기쁨과 즐거움의 구분은 무엇입니까? “기쁨은 마음에 있다.”는 것으로 맹자가 이치와 의로움이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할 때의 뜻과 같습니다. 다만 즐거움은 밖으로 발산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고 한 것은 벗들 사이의 즐거움으로, 즐거워할 만한 것을 실제로 본 것이니, 단지 기쁨에 비해 발산하여 펼쳐졌을 뿐입니다. ‘밖으로 발산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謂之發散在外, 卽是由中而出, 字之義主於發散在外而得名耳.

대답: ‘밖으로 발산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는 것이란 곧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즐거움이라는 뜻은 밖으로 발산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이름을 얻었을 뿐입니다.

謝氏時習朋來不慍一章, 意脈似與本章之旨不貫. 所謂不必同堂合席謂之朋’, 則於朋來而樂之意似不切. 所謂知我者希則我貴’, 旣以知者希爲貴, 則亦與人不知而慍者相去只一間耳, 非所謂不見是而無悶者也.

물음: 사씨(謝氏: 謝良佐)때로 익히는 것, 벗이 오는 것, 성내지 않은 것에 대한 한 구절에 대해 말한 것은 본래 구절의 뜻과 상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건물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가리켜 벗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은 벗이 와서 즐겁다는 뜻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면 내가 귀해진다.”라는 말은 이미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을 귀하게 여긴 것이니, 그렇다면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성내는 사람과 더불어 단지 한 칸의 차이가 날 뿐이어서, 알아주지 않더라도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謝氏說多類此, 大抵過於高遠也.

대답: 사씨의 말이 대부분 이와 같으며, 대저 지나치게 고원한 것입니다.

 

孝弟爲仁之本, 程子謝氏之旨如何? 程子謂孝弟行於家而後仁愛及於物’, 蓋以本立而道生也. 謝氏謂知此心則知仁’, 蓋以自是而仁可見. 是固然也, 却恐非爲仁自孝弟始之意.

물음: “효도와 공손함이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라는 구절에 대한 정자(程子)와 사씨(謝氏: 謝良佐)의 뜻이 어떠합니까? 정자가 효도와 공손함을 집에서 실천한 뒤에 인과 사랑이 사물에 미친다.”라고 말한 것은 대개 근본이 서고 도가 생하기 때문입니다. 사씨가 이 마음을 알면 인을 안다.”라고 말한 것은 대개 이로부터 인을 알 수 있음이 확실하니, 인을 실천하는 것이 효도와 공손에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只當從程子說. 近年論者多欲設爲機械, 以求知仁, 其原蓋出於謝氏. 且若如其說, 則其事親從兄之際心亦不專於所事矣.

대답: 오직 정자의 말을 따라야 마땅합니다. 근년에 논의한 한 것은 대부분 비결을 세워서 인()을 알려고 하는 것으로, 그 근원이 사씨(謝氏: 謝良佐)에게서 나왔습니다. 또한 그 말과 같다고 한다면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사이에 마음도 섬기는 것에 대해 집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明道論孝弟本其所以生乃爲仁之本’, 而又論守身, 守之本, 不失其身而能事其親, 乃誠孝也, 推此可以知爲仁之本.’ 此意如何?

물음: 명도(明道: 程顥)효도와 공손함은 자기가 본래 생겨나는 까닭이며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라고 논의하였고, 또한 몸을 지키는 것이 지킴의 근본이다. 자기의 몸을 잃지 않고서 자기의 어버이를 섬길 수 있어야 참으로 효도이니, 이것을 미루어 인을 실천하는 근본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뜻은 어떠합니까?

 

明道因論事親, 又推本守身之意, 以明必如此, 然後爲能事其親, 乃所謂孝子成身之義.

대답: 명도는 어버이 섬기는 것을 논의하였고, 나아가 근본을 헤아리고 몸을 지키는 뜻을 논의하였습니다. 반드시 이와 같은 뒤라야 자기의 어버이를 섬길 수 있으며, 효자로서 몸을 이루었다고 할 만합니다.

 

其爲人也孝弟, 自然和順慈祥, 豈復萌犯上之心? 况於爲逆理亂常之事乎?’ 此蓋深言孝弟之爲順德而人道之根柢也. 自是而積習著察, 則爲仁之道自然周溥充大. 所謂老吾老以及人之老, 幼吾幼以及人之幼’, 而非過情違道之小仁也. 故曰本立而道生’, 而又贊之曰孝弟也者, 其爲仁之本歟. ’若夫仁民而推親親, 固曰無本, 然所謂仁民者, 亦必有甚不仁者矣.

물음: ‘그 사람됨이 효도하고 공손하면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따르고 자애롭고 상서로우니, 어찌 다시 위사람 범하는 마음이 싹트겠는가? 하물며 이치를 어기고 떳떳함을 어지럽히는 일이야 어떠하겠는가?’ 이것은 대개 효도와 공손함이 순종하는 덕성이며 인도(人道)의 근본이라는 것을 깊이 말한 것이다. 이로부터 계속하여 익히고 잘 살핀다면 인을 실천하는 도리가 저절로 두루 충만해질 것이니, “나의 노인을 노인으로 대함으로써 남의 노인에게까지 미치고, 나의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함으로써 남의 어린이에게까지 미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실정에 지나치고 도리를 어기는 작은 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또한 그것을 기리면서 효도와 공손함이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리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백성에게 어질게 대하고서 어버이를 어버이로 대하기를 헤아린다면 참으로 근본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어질게 대한다고 하는 것에도 반드시 매우 어질지 않은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自仁民而推親親, 本不足辨, 然亦不必言必有甚不仁者.

대답: 백성을 어질게 대함으로써 어버이를 어버이로 대하기를 헤아린다는 것은 본래 변론할 만한 것이 못되지만, 또한 반드시 매우 어질지 않은 것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巧令鮮仁, 尹氏之說爲完. 程子直指爲非仁, 何也? 詳考程子辭意, 蓋直指修飾之爲非仁, 欲學者深知乎仁與不仁之分, 故他有所未暇論也. 昨領來喩, 謂程子如此直截說破, 恐是此意否?

물음: 말을 교묘히 하고 낯빛을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이가 드문 것에 대해서는 윤씨(尹氏: 尹焞)의 말이 완전합니다. 정자(程子)가 인이 아니라고 직접 가리킨 것은 왜일까요? 정자의 말뜻을 살펴보면 대개 꾸밈에 힘쓰는 것이 인이 아니라고 직접 가리킨 것으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과 불인(不仁)의 구분을 깊게 알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가하게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정자가 이와 같이 직접적으로 말했다고 하신 것이 이런 뜻이 아닐까요?

 

程子固是直指修飾之爲非仁, 而聖人本意初亦不兼持養者而爲言也. 但聖人辭氣舒緩, 程子恐人不會, 更向巧令中求其少有之仁, 故如此直說破耳.

대답: 정자는 진실로 꾸밈에 힘쓰는 것이 인이 아니라고 직접 가리켰으며, 성인의 본래 뜻 역시 잡아서 기르는 것을 겸하지 않고서 말했습니다. 다만 성인의 말투가 부드러우므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서 다시 말을 교묘히 하고 낯빛을 꾸미는 것에도 조금의 인이 있다고 생각할까 정자가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직접적으로 설파하였을 뿐입니다.

 

曾子之三省, 忠信而已, 而不及傳不習乎一語, 何也? 前雖求敎, 謂已兼釋之, 今却未曉.

물음: 증자가 세 가지를 살핀 것이 충성과 믿음일 뿐이라면 전수한 것을 익히지 않았는지라는 한 마디 말에는 미치지 않으니 어째서일까요? 전에 가르침을 구하여 이미 함께 풀이하였을지라도 이제 도리어 이해되지 않습니다.

 

程子說傳不習乎是不習而傳與人, 是亦欺人之事, 故以忠信擧三省. 此句須更思之, 與謝氏孰長?

대답: 정자(程子: 程顥)에 의하면 전수한 것을 익히지 않았는지는 익히지 않고서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것이니, 이것도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므로 충성과 믿음으로써 세 가지 반성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 반드시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사씨(謝氏: 謝良佐)의 말과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나을까요?

 

入孝出弟謹行信言泛愛親仁, 蓋爲弟爲子日用出入之實職. 曠此而徒區區於文義章句間, 抑末也. 程子謂非爲己之學, 意蓋如此. 然必曰學文者, 誠以未能著察, 而品節等差重輕緩急不得其宜, 則或有所害. 以此見周伯忱之說甚當. 謝氏盡孝盡弟以及乎親仁成己, 至行有餘力, 則以學文, 則看得學文頗輕. 而說得入孝出弟之類一節便做成德, 似非本旨意.

물음: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고, 행동에 신중하고, 말에 믿음이 있고, 널리 대중을 사랑하고, 어진 이와 친한 것 등은 대개 동생과 자식이 일상적으로 나고 들 때에 실제로 행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고서 헛되이 글의 뜻과 문맥만을 자잘하게 따지는 것은 말단일 뿐입니다. 정자(程子)가 자기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는 뜻이 아마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글을 배운다고 한 것은 진실로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 절차와 경중에 대해 마땅함을 얻지 못할 것이어서 해로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백침(周伯忱)의 말이 매우 옳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씨(謝氏: 謝良佐)의 경우에는 효도를 다하고 공손함을 다하여 어진 이와 친하고 자기를 이루는데 미치고,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우는 것에 이르면 글을 배우는 것이 사뭇 가볍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효도하고 나가 공손한 것에 관한 한 구절에 대해 덕을 이루는 것을 언급한 부분은 본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修弟子之職, 固所以爲己, 然博學於文以明義理之歸, 亦爲己也. 洪慶善說未有餘力而學文, 則文滅其質 : 有餘力而不學文, 則質勝而野. 此意亦好.

대답: 자제의 직분을 닦는 것은 참으로 자기를 위한 것이지만, 글을 널리 배워서 의리의 요지를 밝히는 것도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홍경선(洪慶善)이 남는 힘이 있지 않은데도 글을 배우면 글이 그 실질을 소멸시키고, 남는 힘이 있는데도 글을 배우지 않으면 실질이 이겨 조야해진다고 했습니다. 이 뜻도 좋습니다.

 

道千乘之國’, 政與道之以德道之以政. ‘猶導也, 與齊治之義別. ‘敬事而信以下, 或以爲五者, 或以爲三者, 當從何說? 程子釋此章謂今之諸侯能如是, 足以保其國矣’, 非小乎此也, 政以今之諸侯所以導其國者不能如是也. 然否?

물음: ‘천승의 나라를 다스린다.’는 구절은 덕으로써 인도한다.’정치로써 인도한다.’고 할 때와 ()’자의 쓰임이 같습니다. 도란 인도함과 같으며, 가지런히다스림과 다릅니다. “일을 공경히 하되 믿음이 있다.”는 구절 이하에 대해 혹자는 다섯 구절로 삼고 혹자는 세 구절로 삼으니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정자는 이 문장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지금의 제후가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그 나라를 보호하기에 족하다.”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을 하잖게 여긴 것이 아니고, 지금의 제후가 나라를 인도하는 것이 이만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分別二字甚善. 此章當爲五事, 然先後相因, 不可相無, 則亦一事而已. 程子之言固非小此, 蓋以其略, 故其言之若不足耳.

대답: ‘인도함가지런함의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이 문장은 마땅히 다섯 가지 일이지만 앞과 뒤가 이어져 서로 없어서는 안 되니, 역시 하나의 일일 뿐입니다. 정자의 말은 이 부분을 하잖게 여긴 것이 아니라 그 대략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충분치 못한 것과 같을 따름입니다.

 

程子謂論性則以仁爲孝弟之本’, 又謂仁是性也’, 孝弟是用也, 因此得求仁之方, 要須是從克己入. 程子論季路顔淵言志一段可見. 蓋喜怒好惡之偏, 頃刻胡越霄壤之判, 如何得氣脈通貫, 本末連屬? 每覺於至親上尙有物我處多, 况於他人乎. 直須是由身至家, 由家至外, 檢察消磨, 漸漸融通, 則庶乎仁矣. 前輩謂公近仁, 愛屬仁, 而魯論所謂己欲立達而立人達人爲仁之方, 而孟子所謂仁者如射, 正己而發, 發而不中, 不怨勝己, 反求諸己’, 如此之類, 皆是欲人之求仁當自克治己私而入. 學者但當於此下手耳. 向者所謂以萬善之先名仁, 誠不親切.

물음: 정자(程子: 程頤)가 이르기를 본성을 논하자면 인으로써 효도와 공손함의 근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고, 또한 이르기를 인이 본성이다.”라고 하였으니, 효도와 공손함은 작용이고 이로부터 인()을 구하는 방법을 얻으며, 반드시 자기를 이기는 공부로부터 들어가야 합니다. 정자(程子)가 계로(季路: 子路)와 안연(顔淵)이 말한 뜻을 논의한 한 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개 기쁨성냄좋아함싫어함 등의 치우침이 아주 조그만 사이에도 호() 나라와 월() 나라 혹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게 갈라지니, 어떻게 해야 맥락이 관통하고 본말이 연속될 수 있을까요? 매번 지극히 친한 관계에서도 오히려 사물과 나의 구분이 많다는 것을 느끼는데 하물며 타인에 대해서야 어떻겠습니까? 반드시 몸에 말미암아 집에 이르고, 집에 말미암아 밖에 이르기까지 사라진 것들을 검사하고 살펴 점차 융화하여 관통한다면 인에 가까울 것입니다. 선배들이 공정함이 인에 가깝고 사랑이 인에 속한다고 하였고, 󰡔노논(魯論)󰡕에서 자기가 서거나 달성하고자 함에 남을 세우고 남을 달성하게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말하였고, 󰡔맹자󰡕에서 인이란 활을 쏘는 것과 같이 자기를 바르게 한 뒤에 발사하고, 발사하여 적중하지 않더라도 남이 자기를 이기는 것을 원망하지 않고 반성하여 자기에게서 구한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사람이 인을 구하고자 함에 마땅히 자기의 사사로움을 스스로 이기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니, 배우는 사람들은 단지 이곳에서 실천해야 마땅합니다. 예전에 말했던 모든 선함에서 앞서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論性則以仁爲本, 此只是泛說. 論義理則性中只有仁義禮智, 而孝弟本出於仁. 論爲仁之功夫, 則孝弟是仁中之最緊切處, 當務此以立本而仁道生也. 來喩雖善, 然非程子立言之本意也.

대답: 본성을 논하자면 인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범범한 말입니다. 의리를 논하자면 본성 안에 단지 인지가 있고 효도와 공손함은 본래 인에서 나옵니다. 인을 실천하는 공부를 논하자면 효도와 공손함은 인() 안에서 가장 긴요한 것으로, 마땅히 여기에 힘써 근본을 세우면 인의 도리가 생깁니다. 보내신 편지가 비록 좋지만 정자가 말을 세운 본뜻이 아닙니다.

 

一心之謂誠, 盡心之謂忠, 其分如何? 又謂忠, 天道也, 其與盡心之義同否?

물음: 한 마음을 성()이라고 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고 하면, 그러한 구분이 어떠한지요? ()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도이니, 그것과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 같을까요?

 

一心之謂誠, 專以體言. 盡心之謂忠, 是當體之用. , 天道也, 對恕推己而言, 正指盡心之義.

대답: 한 마음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은 오로지 본체로써 말했습니다.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본체의 작용에 해당합니다. 충이 하늘의 도라는 것은 자기를 헤아리는 것에 짝하여 말하였으니, 바로 마음을 다한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3)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하나에 집중하여 떠남이 없는 것主一無適것으로써 마음에 대해 설명하였다.

所示心無形體之說, 鄙意正謂如此, 不謂賢者之偶同也. 然所謂寂然之本體殊未明白之云者, 此則未然. 蓋操之而存, 則只此便是本體, 不待別求. 惟其操之久而且熟, 自然安於義理而不妄動. 則所謂寂然者, 當不待察識而自呈露矣. 今乃欲於此頃刻之存遽加察識, 以求其寂然者, 則吾恐夫寂然之體未必可識, 而所謂察識者, 乃所以速其遷動而流於紛擾急迫之中也. 程夫子所論纔思便是已發, 故涵養於未發之前則可, 而求中於未發之前則不可’, 亦是此意. 然心一而已, 所謂操存者, 亦豈以此一物操彼一物, 如鬪者之相捽而不相舍哉? 亦曰主一無適, 非禮不動, 則中有主而心自存耳. 聖賢千言萬語, 考其發端, 要其歸宿, 不過如此. 子約旣識其端, 不必別生疑慮, 但循此用功, 久而不息, 自當有所至矣.

마음은 형체가 없다고 하였는데, 제 생각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지 당신이 우연히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요한 본체가 특히 밝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라면 옳지 않습니다. 대개 잡으면 보존되는 것이 단지 본체이니 따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고 익숙하게 잡아서 저절로 의리에 편안하고 거짓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고요하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세밀히 알지 않더라도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제 아주 짧은 사이에 보존된 것에 대해 더욱 세밀히 살펴 그 고요함을 구하려고 한다면, 고요한 본체가 꼭 알려지는 것은 아니며 세밀히 살피는 것이 마음을 급히 움직여 어지럽고 급박한 데로 흐르게 합니다. 정부자(程夫子)께서 생각하면 이미 발생하므로 발생하기 전에 무젖어 기르는 것이 옳으며, 발생하기 전에 안에서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논하신 것도 이 뜻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일 뿐이니 잡아 보존한다고 하는 것도, 어찌 마치 싸우는 사람들이 서로 머리채를 붙잡고서 놓지 않듯이 하나의 사물로 저 하나의 사물을 잡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하나에 집중하여 떠남이 없는 것主一無適이라고도 하니, 예가 아닐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안에 주재자가 있어서 마음이 저절로 보존됩니다. 성현의 온갖 말에 대해 그 발단과 근원을 살펴보면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미 그 단서를 알았으니 따로 의심스런 생각을 만들 필요가 없으며, 단지 이에 따라서 공부하기를 오래하여 그치지 않으면 저절로 도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4)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자기에게 근보한 학문을 설명하였다.

 

向來所喩數條, 亦皆窮理之要. 今承喩及有不曉毫髮之語, 此又范太史所謂小其所知以爲不知之弊. 竊謂莫若因其所知者玩繹而推廣之, 自當有味, 不可捨此而別求, 恐轉益荒遠而終無得也. 此類猶是好高之病, 不可不警.

예전에 말씀하신 여러 조목도 다 이치를 궁구하는 요점입니다. 이제 말하신 것을 보니 약간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범태사(范太史: 范仲淹)가 말했던 자기가 아는 것을 줄여서 알지 못한다고 여긴다.’고 하는 폐단입니다. 제가 보기에 자기가 아는 것에 따라서 완미하고 풀어내어 미루어 넓히면 저절로 맛이 있느니만 못하니, 자기 것을 버리고 따로 구함으로써 더욱 황폐해지고 소원해져 끝내 얻은 것이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종류는 고원한 것을 좋아하는 병과 같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5)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示喩縷縷, 具悉. 但泛說尙多, 皆委曲相合. 恐更當放下, 且玩索所讀書, 依本分持養爲佳耳. 陸子靜之賢, 聞之蓋久, 然似聞有脫略文字直趨本根之意. 不知其與中庸學問思辨然後篤行之旨又如何耳.

보내주신 세목들은 다 완비되었습니다, 다만 군더더기 말이 상당히 많지만 다 부분적으로 서로 부합합니다. 아마도 다시 놓아두고서 읽은 내용을 맛보면서 생각해보고 본분(本分)에 의거해서 수양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육자정(陸子靜: 陸九淵)이 현명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들어왔지만, 문자를 버리고서 바로 근본으로 나아가려는 뜻이 있다고 하는 것 같으니, 그가 󰡔중용󰡕의 구절에 대해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한 뒤에 두터이 실천한다고 하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6)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소학(小學) 공부와 마음의 본체와 경()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였다.

 

所喩日用功夫甚善, 然必謂博學詳說非初學事, 則大不然. 古人之學固以致知格物爲先, 然其始也, 必養之於小學, 則亦灑掃應對進退之節, 數之習而已. 是皆酬酢講量之事也, 豈以此而害夫持養之功哉? 必曰有害, 則是判然以動靜爲兩物, 而居敬窮理無相發之功矣. 大抵聖賢開示後學進學門庭先後次序極爲明備, 今皆舍之, 而自立一說以爲至當, 殊非淺陋之所敢聞也.

말하신 일용의 공부는 매우 좋지만, 널리 배우며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초학자의 일이 아니라고 한 것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옛사람의 학문은 진실로 앎을 이루고 사물에 이르는 것致知格物을 우선으로 하면서도, 배우는 처음에 반드시 소학(小學)에서 수양하였으니 역시 물 뿌리고 마당 쓸고 응대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목과 예절음악활쏘기말타기글쓰기셈하기 등을 익혔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다 응대하며 헤아리는 일이니 어찌 이것 때문에 마음을 잡아 수양하는 공부를 해치겠습니까? 반드시 해로움이 있다고 말한다면 움직임과 고요함을 갈라서 두 가지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공경에 거처하는 것과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긴밀히 관련되어 드러나는 공효가 사라집니다. 대저 성현이 후학들에게 열어 보여 학문의 입문 처에 나아가게 할 때 앞과 뒤의 순서를 매우 분명하게 갖추었거늘, 이제 모두가 그것을 버리고 홀로 하나의 설을 세워서 매우 타당하다고 여기니 특히 제가 감히 듣지 못하겠습니다.

 

向示心說, 初看頗合鄙意, 細觀乃復有疑. 亦嘗竊與朋友論之, 而未及奉報. 今得所論, 益知向所疑者之不謬也. 蓋操舍存亡雖是人心之危, 然只操之而存, 則道心之微便不外此. 今必謂此四句非論人心, 乃是直指動靜無端無方無體之妙, 則失之矣. 又謂荒忽流轉, 不知所止, 雖非本心, 而可見心體之無滯, 此亦非也. 若心體本來只合如此, 則又何惡其不知所止, 而必曰主敬以止之歟? 近與一朋友論此, 錄以奉呈. 幸試思之, 復以見告. 昨日得欽夫書, 亦論此, 於鄙意亦尙有未盡者. 異時相見面論之, 筆札不能旣其曲折也.

예전에 마음에 대해 말하신 것은 처음에는 나의 뜻과 매우 합치한다고 보았으나 자세히 보니 다시 의심이 생겼습니다. 예전에 제가 벗들과 그것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답장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논의한 내용을 얻어 보니 지난번에 의심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더욱 잘 알겠습니다. 대개 (마음에 대해) 잡고 놓고 보존되고 사라지는 것 등이 비록 위태로운 사람의 마음일지라도 단지 잡아서 보존한다면 작은 도의 마음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반드시 이 네 구절이 사람의 마음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고요함에 단서가 없고 위치가 없고 형체가 없는 신묘한 경지를 곧바로 가리킨다고 한다면 틀립니다. 또한 황홀하게 흐르고 굴러서 그칠 곳을 모르는 것이 비록 본래 마음이 아닐지라도 마음의 본체가 막히지 않음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도 틀립니다. 예컨대 마음의 본체가 본래 이와 같을 뿐이라면 어떻게 그칠 곳을 모르는 것을 싫어하면서 반드시 공경을 위주로 하여 그친다고 말하겠습니까? 근래에 한 친구와 이에 대해 논의한 것을 기록하여 올렸으니 생각해보고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번에 흠부(欽夫: 張栻)에게 받은 편지에서도 이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나의 뜻에 대해 여전히 다 이해하지 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다른 날에 서로 만나 직접 논의해야 합니다. 편지로는 이미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7)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갑오, 1174, 4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육구연 수양론의 선학적 경향을 비판하였다.

 

所示內外兩進之意甚善, 此是自古聖賢及近世諸老先生相傳進步直訣, 但當篤信而力行之, 不可又爲他說所搖, 復爲省事欲速之計也. 近聞陸子靜言論風旨之一二, 全是禪學, 但變其名號耳. 競相祖習, 恐誤後生. 恨不識之, 不得深扣其說, 因獻所疑也. 然想其說方行, 亦未必肯聽此老生常談, 徒竊憂歎而已. 操舍存亡之說, 諸人皆謂人心私欲之爲乃舍之而亡所致, 却不知所謂存者亦操此而已矣. 子約又謂存亡出入皆神明不測之妙, 而於其間區別眞妄又不分明, 兩者蓋胥失之. 要之存亡出入固皆神明不測之所爲, 而其眞妄邪正始終動靜又不可不辨耳.

안과 밖을 함께 진척시킨다는 뜻은 매우 좋습니다. 이것은 옛 성현과 근세의 여러 선생께서 서로 전하여 나아가면서 인정하였던 것으로, 마땅히 두터이 믿고 힘써 실천해야지 다른 말에 흔들리면서 다시 일을 줄여 빨리 하려고 계획해서는 안 됩니다. 근래에 육자정(陸子靜: 陸九淵)이 논의하면서 풍미한 뜻 중에 한두 부분이 모두 선학(禪學)인데 그 명칭만 바꾸었을 뿐입니다. 서로 앞 다투어 익히면서 뒤 세대를 그릇되게 할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관계로 그의 말을 깊이 물어볼 수 없어서 의심하는 내용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유포될 즈음에 역시 저의 평소 논의를 들으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니, 한갓 근심스럽게 한탄할 뿐입니다. (마음에 대해) 잡고 놓고 보존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말은 많은 사람이 모두 사람의 마음과 사사로운 욕구의 활동을 놓아두고 이르는 바가 없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보존한다는 것이 이것을 잡는 것임을 모릅니다. 당신 또한 보존하고 사라지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명(神明)의 오묘함이어서 그 사이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양쪽이 서로 잃었습니다. 요컨대 보존하고 사라지고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진실로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신명(神明)이 하는 것이지만 그 참과 거짓, 사사로움과 바름, 처음과 끝, 움직임과 고요함 등에 대해 분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18)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4(정유, 1177, 48)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來書所喩程門議論, 鄙意正謂如此. 此或問之書所爲作也. 但掎摭前賢, 深負不韙之罪耳. 管仲之喩甚正, 但以夫子之言考之, 恐無此意. 程子之意蓋欲主張名敎, 而以爲夫子許其不死, 却不如以爲存而不論之可畏也. 試更思之.

보내신 편지에서 말한 정(: 二程)씨 문하의 논의를 말씀하셨는데 제 뜻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혹문󰡕에서 썼지만, 이전의 현자를 끌어와서 마음속으로는 바르지 못한 것을 짊어지는 죄를 지는 것입니다. 관중(管仲)의 비유가 매우 옳지만 공자의 말로써 본다면 이러한 뜻이 없습니다. 정자(程子: 程頤)의 뜻은 대개 명교(名敎)를 주장하고자 한 것으로 공자가 그가 죽지 않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여겼지만, 도리어 보존하되 논의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워할 만한 것으로 여기느니만 못합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여자약에게 답함 (19)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4(정유, 1177, 48)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반숙도와 여백공이 불학에 경도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叔度忽爲佛學, 私竊憂之. 前嘗因書扣之, 今此書來, 不答所問, 但云實病難除, 實功難進, 不敢容易言之而已. 如此則是以爲求進實功除實病必求之釋氏然後可, 而吾聖賢立言垂訓與吾黨平日講學存養, 皆容易之空言也. 叔度所見不應如此, 蓋不欲人之議己而設此以峻却之耳. 區區雖欲再進其說, 而已覺難於發口. 然鄙意猶有未能已者. 願子約從容自以己意言之, 勸其且讀論語, 看諸先生說而深思之, 以求聖人之意. 聖人之意卽是天地之心, 思而得之, 則實理可見而實病可除, 實功可進, 初不待求之釋氏之言矣. 且求之釋氏, 却是適越北轅, 却行求進, 此區區所以深惜叔度平日之用心, 而不欲其陷於此也.

숙도(叔度)가 갑자기 불교를 배우니 걱정스럽습니다. 앞 편지에서 글을 써서 물었는데 이리 보낸 편지에는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만 실제의 병을 제거하기 어렵고 실제의 공력을 진전시키기 어려워서 감히 쉽게 말하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실제의 공력을 진전시키고 실제의 병을 제거하기를 구함에 반드시 석씨(釋氏)에게서 구한 뒤라야 옳고, 우리 성현이 세운 가르침과 우리 벗들이 평소에 배우고 익히면서 수양한 것이 다 쉬우면서 쓸데없는 말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숙도의 견해가 마땅히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니, 대개 남이 자기를 의논하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이것을 세워서 엄하게 그것을 물리쳤을 뿐입니다. 제가 비록 다시 그의 말을 진척시키고 싶으면서도 입을 열기가 어렵지만, 제 뜻에 그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가 자연스럽게 스스로 자기의 뜻을 말하여 그에게 우선 󰡔논어󰡕를 읽고 여러 선생의 말을 보고 깊이 생각하여 성인의 뜻을 구하라고 권해보십시오. 성인의 뜻이 곧 천지의 마음이어서, 생각해서 얻으면 실제의 이치를 볼 수 있고 실제의 병을 제거할 수 있고, 실제의 공력을 진척시킬 수 있으니, 애초부터 석씨의 말에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석씨에게서 구하는 것은 (남쪽의) 월 나라로 가면서 북쪽으로 멍에를 매는 격으로 가려는 곳과 반대로 나아가는 것이니, 이것이 숙도가 평소에 마음을 쓰는 것에 대해 깊게 애석해하면서 그가 이러한데 빠지지 않기를 바란 까닭입니다.

 

頃在靜安, 見其議論之間, 每不欲人攻釋氏之非, 私心固已疑之, 今果如此. 蓋本其平日用功只以博學力行爲事, 而未嘗虛心平氣熟玩聖賢之言, 以求至理之所在, 故其弊至於如此. 熹恐伯恭亦不得不任其責, 不知其聞此消息以爲如何? 然熹之愚猶竊有疑於伯恭詞氣之間, 恐其未免有陰主釋氏之意. 但其德性深厚, 能不發之於口耳. 此非小病, 吾輩於此若猶或有纖芥之疑, 速須極力講究, 以去其非而審其是, 不可含胡隱忍, 存而不決, 以貽他日走作之患也. 大抵彼中朋友立說過高, 立心太迫, 不肯相聚討論, 只欲閉門劇讀以必其自得, 故人自爲學, 而或不免蔽於一己之私見. 此亦殊非小病耳.

지난번에 정안(靜安)에서 그의 논의를 볼 즈음에 항상 남들이 석씨의 잘못을 공격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혼자 속으로 그것을 의심했는데 이제 과연 이와 같습니다. 본래 그가 평소에 공부하는 것이 단지 널리 배우고 힘써 실천하는 것을 일을 삼으면서도 마음을 비우고 평정한 기운으로 성현의 말을 익숙하게 완미하지 않으면서 지극한 이치가 무엇인지 구하므로, 그 폐단이 이와 같은데 이르렀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백공(伯恭)도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사이에 이러한 소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백공의 말에 대해서도 의심이 있으니, 그가 속으로 석씨의 뜻을 주장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의 덕성이 깊고 온후하여 입에 담지 못할 뿐입니다. 이것은 작은 병이 아니어서 우리 벗들이 이에 대해 혹시 티끌만한 의심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속히 매우 힘써 연구함으로써 그러한 잘못을 제거하고 옳은 것을 살펴야지, 대충 숨기면서 방치하여두고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훗날 이단으로 달려가는 근심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대저 저 벗들이 세우는 말이 너무 고원하고 너무 다그쳐서 마음을 세우며, 서로 모여 토론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문을 닫고 힘들여 독서만 하면서 스스로 도를 얻으려고 기필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학문을 추구하면서도 혹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견해에 가리는 것을 면치 못하니, 이것도 특히 작은 병이 아닙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20)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갑진, 1184, 5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所喩數條, 足見玩理之深. 然論孟兩說恐看得太幽暗支離了, 所謂欲密而反疎者. 須更就明白簡約處看, 一句只是一句, 截斷兩頭, 都無許多枝蔓, 方是眞實見處也. 太極諸說亦未見端的處. 又所謂萬化未嘗止息者, 是矣, 然却爲甚於復然後見天地之心邪? 請更下此一轉語, 如何如何?

말씀하신 몇 조목은 깊게 이치를 완미했다고 보이지만, 󰡔논어󰡕󰡔맹자󰡕에 대한 두 설명은 견해가 매우 어둡고 지루하여 정밀하고자 하나 도리어 성글어지는 경우입니다. 반드시 분명하고 요약된 곳으로 나아가 한 구절을 분명하게 하여 두 개의 머리를 끊어 허다한 지리멸렬함을 없애야 진실하게 보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태극에 대한 여러 말도 분명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변화가 그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옳지만 무엇 때문에 돌아온 뒤에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하였을까요? 다시 한 번 깨치는 말을 해주심이 어떨까요?

 

여자약에게 답함 (21)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갑진, 1184, 5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前書所喩原憲一條, 似於鄙意有未安者. 而來書云云支蔓繳繞, 只如舊日. 更望詳細思繹, 勇猛掃除, 庶於正大光明之域有進步處也.

앞 편지에서 설명했던 원헌(原憲)에 관한 한 조목은 제 뜻에 편안치 못한 것이 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은 복잡하게 얽히어 옛날과 같을 뿐입니다. 다시 자세히 생각해보시고 용맹하게 제거하여 광명정대한 곳으로 나아감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22)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갑진, 1184, 5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所論江西之弊切中其病, 然前書奉告者, 非論其人也, 乃論吾學自有未至, 要在取彼之善以自益耳. 謂彼全無本原根柢, 則未知吾之所恃以爲本原根柢者果何在邪? 幸更思之, 復以見敎.

논의하신 강서(江西: 陸九淵)의 폐단은 그 병에 꼭 맞습니다. 그러나 앞 편지에서 말씀드렸던 것은 그 사람을 논의한 것이 아니고 내 학문에 아직 스스로 이르지 못한 것을 논하여 저들의 선함을 취함으로써 스스로 유익함이 있고자 한 것입니다. 저들에게 근본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내가 근본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보시고 가르침을 주십시오.

 

여자약에게 답함 (23)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갑진, 1184, 5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역사서보다는 유교의 경전을 읽으라고 권하였다.

 

熹衰病如昨, 無足言者. 暇日自力觀書, 惟覺聖賢之言意味深長, 儘有向來見不到處. 若於子約所謂經史貫通之妙, 則未有得也. 然旣曰千里一曲, 則便不如且就不曲處理會之爲愈. 且如史記禮書篇首四言, 恐只是大槪說道理如此, 豈爲秦漢把持天下而設? 且旣曰把持天下矣, 則又豈有不由智力而致者邪? 此等處恐是舍却聖賢經指而求理於史傳, 故只見得他底高遠, 便一向隨他脚跟轉, 極力贊歎他. 若看得聖賢說禮樂處有味, 決定不作此見. 兼謂其爲秦漢而發此四言, 亦恐反說低了他意思也. 讀詩諸說, 乃是詩小序說, 非詩說, 疑亦是從前太於世變一事留意得重, 故只見得此意思. 大率向外底意思多, 切己底意思少, 所以自己日用之間都不得力. 前書因論陸子靜處及說韓岩時話, 似已詳說此病, 奈何都不見察, 至今日然後始覺身心欠收拾乎? 兼此語前此已屢聞之, 恐今日所覺亦未必是眞覺也. 所謂秦漢把持天下有不由智力者, 乃是明招堂上陳同甫說底. 平日正疑渠此論未安, 不謂子約亦作此見爲此論也.

제가 과거처럼 쇠하고 병들어 충분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가한 날에 자력으로 책을 보면서 성현의 말이 뜻이 깊어서 예전의 견해에 이르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만약 당신이 말한 경전과 역사서를 관통하는 오묘함에 대해서는 아직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리로 뻗은 양자강에 하나의 굽음이 있다는 것은 굽지 않은 데로 나아가서 이해하느니만 못합니다. 또한 󰡔사기󰡕 「예서편의 머리에 나오는 네 구절은 도리가 이와 같다는 것을 대체적으로 말하였을 뿐이니, 어찌 진() 나라와 한() 나라가 천하를 붙잡았다고 여겨서 이 말을 했겠습니까? 또한 이미 천하를 붙잡아 세운다고 하였다면 어찌 지혜의 힘에 말미암지 않고서 이루겠습니까? 이러한 곳은 성현이 말한 경의 뜻을 버리고 전해오는 역사에서 이치를 구하는 것이므로 단지 사마천의 고원한 것을 얻으면 오로지 그를 따라서 다리와 발을 옮기면서 힘을 다하여 그를 찬미합니다. 만약 성현이 말한 예악(禮樂)에 맛이 있음을 안다면 결단코 이러한 견해를 짓지 못할 것입니다. 아울러 진 나라와 한 나라 때문에 이러한 네 구절을 말했다는 것도 사마천의 뜻을 뒤집어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를 읽으면서 썼던 여러 말들은 󰡔󰡕 「소서(小序)의 말로 󰡔󰡕의 말이 아니니, 전에 세상의 변화라는 한 사항에 과대하게 뜻을 두었으므로 단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될 뿐입니다. 대저 밖으로 향한 뜻이 많고 자기에게 절실한 뜻이 적으므로 자신의 일상생활에 도무지 힘을 얻지 못합니다. 앞 편지는 육자정(陸子靜: 陸九淵)을 논의한 곳과 한암(韓岩)에서 당시에 말했던 것에 근거하여 이미 이러한 병을 자세히 말한 것인데, 어떠한 것도 살피지 않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마음과 몸을 수습하는 것에 흠이 있다고 느끼십니까? 아울러 이 말에 대해 전에 이미 자주 말해주었는데도 이제야 깨닫는 것도 반드시 참된 깨달음이 아닐 것입니다. 진 나라와 한 나라가 천하를 붙잡아 세운 것이 지혜의 힘에 말미암지 않았다는 것은 명소당(明招堂: 呂祖謙)이 진동보(陳同甫: 陳亮)에게 올린 말입니다. 평소에 그의 이러한 논의가 온당치 않다고 의심한 것은 당신도 이러한 견해를 짓고 이러한 논의를 일삼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大抵讀書寬平正大者多失之不精, 而精密詳審者又有局促姦巧之病. 雖云人之情僞有不得不察者, 然此意偏勝, 便覺自家心術亦染得不好了. 近年此風頗盛, 雖純誠厚德之君子, 亦往往墮於其中而不自知, 所以區區常竊憂之, 而不願子約之爲之也. 子約何不試取論語孟子中庸大學等書讀之, 觀其光明正大簡易明白之氣象, 又豈有如此之狡獪切害處邪? 世路險窄, 已無可言 : 吾人之學聖賢者, 又將流而入於功利變詐之習, 其勢不過一傳再傳, 天下必有受其禍者, 而吾道益以不振, 此非細事也. 子約思之, 如何?

대저 독서를 여유롭고 바르게 한다는 사람은 대부분 정밀하지 못한데서 잃고, 정밀하고 상세하게 살핀다는 사람은 또한 국량이 좁고 간교한 병이 있습니다. 비록 옛 사람의 참과 거짓에 대해 살피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러한 뜻에는 한 쪽 만이 우세하여 자기의 마음 씀에 대해서는 훌륭하지 못합니다. 근년에 이러한 유행이 성행하여 비록 순수하고 후덕한 군자라고 할지라도 역시 자주 그 가운데 빠져도 스스로 알지 못하니, 그것이 제가 항상 근심하는 것으로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은 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의 책을 구하여 읽으면서 그 광명정대하고 쉽고 분명한 기상을 살피지 않습니까? 또한 어찌 이와 같이 교활하게 매우 해로운 곳이 있습니까? 세상의 길이 험하고 좁은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말할 것이 없으나, 성현을 배우는 우리가 장차 이로움에 힘쓰고 거짓을 꾸미는 데에 흘러들어, 그 힘이 한번 전하고 두 번 전하는데 불과하더라도 세상에는 반드시 그 재앙을 받은 사람이 생기고 우리의 도가 더욱 쇠퇴할 것이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어떠한지요?

 

大事記尙有第十一卷半卷未寫, 今附元冊去, 幸爲寫足附來. 不須裁截裝背, 却恐與前後冊大小不同也. 此書固佳, 然昨看論張湯公孫弘處, 亦不能無疑也.

󰡔대사기󰡕는 오히려 제11권 반이 아직 필사되지 않아서 이제 원래 책을 붙여서 보내니 필사하여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잘라서 배첩(褙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앞과 뒤의 책의 크기가 크고 작아 서로 다를 것입니다. 이 책이 참으로 훌륭하지만 어제 장탕(張湯)과 공손홍(公孫弘) 부분을 보았더니 역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24)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1(갑진, 1184, 55)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유교 경전의 독서에 대한 당부, ‘천맥(阡陌)’의 뜻풀이, 진량이 화를 입었다 풀려난 일 등이 나온다.

 

前書所喩正容謹節之功, 比想加力. 此本是小學事, 然前此不曾做得工夫, 今若更不補塡, 終成欠闕, 却爲大學之病也. 但後書又不免有輕內重外之意, 氣象殊不能平, 愚意竊所未安. 大抵此學以尊德性求放心爲本, 而講於聖賢親切之訓以開明之, 此爲要切之務. 若通古今考世變, 則亦隨力所至, 推廣增益, 以爲補助耳. 不當以彼爲重, 而反輕凝定收斂之實, 少聖賢親切之訓也. 若如此說, 則是學問之道不在於己而在於書, 不在於經而在於史, 爲子思孟子則孤陋狹劣而不足觀, 必爲司馬遷班固范曄陳壽之徒, 然後可以造於高明正大簡易明白之域也. (八字乃來書本語.)

앞 편지에서 말하신 용모를 바르게 하고 삼가 절도를 갖추는 공부는 생각보다 힘을 더하였습니다. 이것은 본래 소학(小學)의 일이지만 전에 공부해두지 않았으면서 지금 다시 보충하지 않는다면 끝내 흠이 생겨 도리어 대학(大學)의 병이 됩니다. 다만 나중 편지 또한 안을 가볍게 하고 밖을 중시하는 뜻을 면치 못하여 특히 기상(氣象)을 평화롭게 할 수 없으니, 제가 생각하기에는 온당치 않습니다. 대저 우리 학문은 덕성을 높이고 놓친 마음을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성현의 친절한 교훈을 익혀서 열어 밝히는 데 힘써야 합니다. 만약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여 세상의 변화를 헤아린다면 역시 힘이 미치는 곳에 따라서 더욱 미루어 넓혀야 도움이 됩니다. 저들을 중하게 여기면서 반대로 평정하게 수렴하는 실제를 경시하고 성현의 친절한 교훈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배우고 묻는 도리가 자기에게 있지 않고 글에 있을 것이고, ()에 있지 않고 역사에 있을 것이며, 자사와 맹자에 대해서는 고루하고 협소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범엽(范曄)진수(陳壽)의 무리가 된 뒤라야 높고 바르고 쉽고 분명한 구역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덟 글자는 보내온 편지의 본래 말이다.)

 

夫學者旣學聖人, 則當以聖人之敎爲主. 今六經中庸大學之書具在, 彼以了悟爲高者旣病其障礙而以爲不可讀, 此以記覽爲重者又病其狹小而以爲不足觀, 如是則是聖人所以立言垂訓者徒足以悞人而不足以開人, 孔子不賢於堯舜而達磨固賢於仲尼矣, 無乃悖之甚邪

대저 배우는 자가 이미 성인을 배웠다고 한다면 성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 6․󰡔논어󰡕․󰡔맹자󰡕․󰡔중용󰡕․󰡔대학󰡕의 책이 갖추어졌는데도 저 급작스런 깨달음을 높이 사는 자들은 책의 장애를 병이라고 하면서 읽을 수 없다고 여기고, 이 기억하여 보는 것을 중시하는 자들 또한 그것이 협소한 것이 병이라고 하면서 볼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깁니다. 이와 같다면 성인이 말하여 가르친 것들이 한갓 사람을 그릇되게 하면서 사람을 열어주지 못할 것이며, 공자가 요 임금과 순 임금보다 지혜롭지 못하되 달마와 사마천과 반고가 공자보다 현명할 것이니, 너무 어긋난 것이 아닐까요?

 

前書所示中庸西銘等說皆極精密, 意者後書所謂不能下心細意, 特一時憤激所發耳. 如其不然, 則不能下心細意於孔, 乃能下心細意於遷, 何邪? 此則尤非區區所素望於賢者, 不敢不盡所懷也. 禮樂之云, 前此只恐未必史遷有此意耳. 正使有之, 乃是挾禮樂動化之權以爲智力把持之用, 學者所以謹於毫釐之差而懼其有千里之繆者, 正爲此耳. 今不之察, 而遂指人欲爲天理, 吾恐其不止於議論之小失, 而且爲心術之大害也.

앞 편지에서 보여준 󰡔중용󰡕․󰡔󰡕 「()」․󰡔서명󰡕 등의 말은 다 매우 정밀하며, 생각건대 뒤 편지에서 말한 마음을 두어 뜻을 세밀히 할 수 없다는 것은 특히 한 때에 격분하여 나왔던 것일 따름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공자와 맹자에게 마음을 두어 뜻을 세밀히 할 수 없고 사마천과 반고에게 마음을 두어 뜻을 세밀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요? 이것이라면 더욱 제가 평소에 당신에게 바라는 것으로 품은 바를 감히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악(禮樂)에 대한 언급은 사마천에게 이러한 뜻이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예악으로 교화하는 방편을 끼고서 지력(智力)을 붙잡는 쓰임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배우는 사람이 털끝만치의 차이가 천리의 어긋남을 낳는 것에 주의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제 살피지 않고서 사람의 욕심을 가리켜 하늘의 이치라고 하니, 나는 의론의 작은 과실에 그치지 않고 마음 씀의 커다란 해로움이 될까 걱정됩니다.

 

阡陌二字, 熹前說亦未是, 當如風俗通, 後說乃爲得之, 之爲言, ‘之爲言. 遂人徑是百畝之界, 涂是百夫之界, 而二者皆從, 卽所謂南北之陌. 畛是千畝之界, 道是千夫之界, 而二者皆橫, 卽所謂東西之阡. 蓋二字名義本以夫畝之數得之, 決是井田舊制所本有. 若曰秦始爲之, 則決裂二字, 牽彊說合, 費氣力而無文理. 且井田旣有徑畛之制, 而秦人去之, 則又何必更取東西南北之正以爲阡陌, 然後可以靜生民之業而一其俗哉? 此細事, 不足辨, 或恐有助於古今事變之學耳.

천맥(阡陌)’이라는 두 글자는 제가 전에 말한 것도 옳지 않으며, 마땅히 󰡔풍속통(風俗通)󰡕과 같으니 나중의 설명이 옳습니다. 대개 '()'이라는 말은 ()’을 뜻하고, ‘()’이라는 말은 ()’을 뜻합니다. ‘수인(遂人)’의 경()은 백묘(百畝)의 경계이고 도()는 백부(百夫)의 경계이며, 두 가지는 모두 세로로 난 것으로 곧 남쪽에서 북쪽으로 난 맥()을 말합니다. ()이란 천묘의 경계이고 도()란 천부의 경계이며, 두 가지는 모두 가로로 난 것으로 곧 동쪽에서 서쪽으로 난 천()을 말합니다. 대개 두 글자의 이름과 뜻이 본래 장부와 묘()의 수로써 얻은 것으로 본디 정전(井田)의 옛 제도에 있었습니다. 만약 진() 나라가 처음으로 그 제도를 시행했다고 말한다면 두 글자를 갈랐다가 억지로 합하여 말하는 것으로 기력을 허비하면서도 글의 조리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정전(井田)에 이미 경()과 진()의 제도가 있었으나 진 나라 사람들이 제거하였다면 또한 어째서 반드시 다시 동서남북을 바르게 하여 천맥(阡陌)으로 삼은 뒤에야 민생을 안정시키고 풍속을 통일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세한 사항은 충분히 변론할 수 없으나, 혹 예와 지금의 일의 변화에 관한 학문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徽錄新書近方看得數卷, 大抵是用長編添修, 然亦有不盡處. 長編亦據曾布蔡絛爲多, 此二書雖無狀, 然亦見其不可掩者. 禍敗之釁, 豈偶然哉? 讀之令人憤鬱, 殊損道心也.

󰡔휘록신서(徽錄新書)󰡕를 근래에 여러 권을 보았는데, 대저 󰡔장편(長編)󰡕을 보충하여 수정했지만 역시 미진한 곳이 있습니다. 󰡔장편󰡕도 증포(曾布)와 채조(蔡絛)에게 의거한 것이 많아서 이 두 책이 비록 형체가 없을지라도 역시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여러 재앙이 어찌 우연일까요? 그것을 읽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울분을 솟구치게 하고 도의 마음을 덜어냅니다.

 

同父事解後得書, 亦甚呶呶. 前此蓋已作書慰勞之, 勸其因此一洗舊轍, 歛就繩墨. 若能相信失馬, 却未必不爲福耳. 此事向來朋友畏其辯博, 不究其是非而信奉其說, 遂無一言及於儆戒切磋之意, 所以使渠至此. 蓋有不得不任其責者. 子約旣敬之, 於此恐不可不盡情也.

동보(同甫: 陳亮)가 화를 만나고 풀려난 뒤에 편지를 받고는 역시 매우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이미 편지를 써서 그를 위로하면서 이번에 옛 자취를 한꺼번에 씻어버리고 자신을 거두어 법도에 나아가기를 권했습니다. 만약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서로 믿을 수 있다면 도리어 복이 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 일은 예전에 벗들이 그의 변론이 넓을까 두려워 그 시비를 궁구하지 않고 그의 말을 신봉하였으나, 마침내 경계하고 수양하는 뜻에 대해 한 마디 언급이 없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대개 그에게 책임지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미 그를 공경한다면 이에 대해 품은 감정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叔晦必且家居待除, 象先呈身之說, 恐是且欲揚此虛聲, 以避守高之嫌, 然亦不必如此也. 季和聞亦不爲久計, 相見勸其早歸, 亦是一事. 渠却甚歸心恭兄敎誨, 與他人不同也. 誠之恐難說話, 蓋本是氣質有病, 又被杜撰扛夯作壞了. 論其好處, 却自可惜也.

숙회(叔晦)가 반드시 집에 기거하면서 벼슬의 재수를 기다리고 상선(象先)이 몸을 드러낸다는 말은 헛된 소리를 유포하여 고상함을 지킨다는 혐의를 피하려는 것이지만, 이와 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계화(季和)가 들은 것도 오래 관직에 머물지 않는 계책이니 서로 만나 그에게 일찍 돌아오기를 권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가 도리어 공() 형의 가르침에로 너무 마음을 돌린다면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성지(誠之: 游九言)가 두려워하며 비난했던 말들은 본래 기질에 병이 있는데다 또한 억지로 꾸며낸 주장에 의해서 무너진 것으로, 그의 훌륭한 곳을 논하자면 도리어 저절로 애석합니다.

 

恭兄文字狀子已投之, 當路如醉如夢, 面前事尙不能管得, 何可望以此等? 但近日百怪競出, 不可禁遏, 又甚於前. 此旣無可奈何, 但當修其本以勝之, 早爲收拾平生文字訓說之略成書而可傳者, 著爲篇目而公傳道之, 則彼託眞售僞者將不禁而自息矣. 若但築堤堙水, 決無可救之理也.

() 형의 쓴 문자를 이미 던져버린 데다가 요직을 맡아 취하거나 꿈꾸는 듯이 눈앞의 일도 관리할 수 없으니, 어찌 이와 같은 것에 대해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요즘에 온갖 괴상한 일들이 다투어 생겨나는데도 막을 수 없음이 이전보다 심합니다. 이것에 대해 이해 어찌할 수 없지만 마땅히 근본을 닦아서 그것을 이기고, 일찍 평생의 문자와 가르침 중에서 대략 책으로 만들어 전할 만한 것들을 모아서 편목을 만들고 그대가 도를 전한다면, 진짜에 의탁해서 거짓을 파는 저들을 금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만약 제방을 쌓아서 물을 막으려고만 한다면 결코 구제할 수 있는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25)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2(기사, 1185, 56)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한 나라 당 나라보다는 유교의 옛 성현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논어󰡕󰡔맹자󰡕 등에 나오는 인, , , 호연지기 등을 논의하였다.

 

熹再叨祠祿, 遂爲希夷法眷. 冒忝之多, 不勝慚懼. 今年病軀粗覺勝前時, 但心目俱昏, 不堪繙閱, 深以爲撓耳.

제가 다시 외람되이 사록(司祿)을 맡다가 마침내 희이(希夷)의 법권(法眷)이 되었습니다. 많은 욕됨을 받아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올해는 병든 몸이 거칠게나마 예전보다 낫다고 생각되지만 마음과 눈이 모두 어두워 되풀이하여 검열하지 못하는 것이 깊이 좌절하게 합니다.

 

所喩向來立論之偏, 近日用功之實, 甚慰所望. 兩卷所論, 皆精義也. 其間亦有鄙意未合處, 具之別紙, 幸更思之. 或猶未安, 却更反復極論, 以歸至當乃佳耳.

예전에 세웠던 논의가 치우쳤다는 것과 요즘에 힘쓰는 실제에 대해 말씀하시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두 권에서 논한 것은 다 정밀한 뜻입니다. 그 사이에도 제 뜻에 합치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별지에다 갖추었으니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온당치 않은 곳이 있다면 도리어 반복하여 논의를 지극히 하여 매우 타당한 곳으로 귀착되어야 좋을 것입니다.

 

同父後來又兩得書, 已盡底裏答之. 最後只問他三代因甚做得盡, 漢唐因甚做得不盡, 見頓著聖賢在面前, 因甚不學, 而必論漢唐, 覓他好處, 幷文中子, 一倂破除一上, 似頗痛快著題, 未知渠復如何做轉身一路也. 可因書扣之, 令錄去, 此無人寫得也. (兩書皆引惟精惟一者是.)

동보(同父)가 나중에 또 보내와 두 번 편지를 받아보고, 이미 진심을 다하여 답하였습니다. 최후의 답장에서는 단지 삼대(三代)의 시대가 무엇 때문에 도리를 다하였고, 한 나라와 당 나라의 시대가 무엇 때문에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며, 성현이 면전에 있다는 것을 단번에 보고서도 무엇 때문에 배우지 않고, 반드시 한 나라와 당 나라를 논하면서 좋은 곳을 찾는지 물었습니다. 󰡔문중자(文中子)󰡕를 아우르면서 한꺼번에 타파한 것이 몹시 통쾌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가 다시 왜 진로를 바꾸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써서 그에게 부탁하여 (당시의 편지를) 필사하여 보내게 하십시오. 이곳에서는 필사할 수 없습니다. (두 편지란 모두 유정유일(惟精惟一)’을 인용한 것이다.)

 

來書亦於智力二字必竟看不破放不下, 殊不知此正是智力中之仁義, 賓中之主, 鐵中之金. 若苦向這裏覓道理, 便落在五伯假之以下規模裏, 出身不得. 孟子董子所以拔本塞原, 斬釘截鐵, 便是正怕後人似此拖泥帶水也. 熹嘗語此間朋友, 孟子一生忍窮受餓, 費盡心力, 只破得枉尺直尋四字. 今日諸賢苦心勞力, 費盡言語, 只成就枉尺直尋四字. 不知淆訛在甚麽處? 此話無告訴處, 只得仰屋浩歎也.

보내주신 편지도 지력(智力)’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궁극적으로 깨트리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였으니, 특히 이것이 바로 지력 안의 인의(仁義)이고 손님 안의 주인이고 쇠 안의 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고생하면서 이 안에서 도리를 찾는다면 다섯 패자가 거짓으로 (인의를) 꾸민 것과 같은 규모에 떨어져서 몸을 빼지 못하게 됩니다. 맹자와 동자(董子: 董仲舒)가 근원을 뿌리 뽑으면서 못을 부러뜨리고 쇠뭉치를 절단한 것은 곧 뒷사람들이 이와 같이 터무니없을까 두려워해서입니다. 제가 이곳의 벗들에게 말하였으니, 맹자가 평생 곤궁하게 굶주리면서도 마음의 힘을 다한 것은 단지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편다枉尺直尋는 네 글자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 현자들이 고심으로 노력하면서 언어에 힘을 쓰는 것이 단지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펴는 것을 성취할 뿐입니다. 섞여 와전된 곳이란 어느 부분인지요? 이 말은 흠잡을 곳이 없으니 단지 그 규모를 우러르며 크게 감탄할 뿐입니다.

 

史遷固非班范之比, 然便以爲學者於此不可有所未足而欲專就此處尋討道理, 則亦陋矣. 公謹前日一二書來問所疑, 覺得却似稍通曉, 勝往時也. 此一等人不能談王說霸, 然終是慤實謹厚, 是這一邊人. 鄙意近來覺得只愛此等人也.

사마천은 참으로 반고(班固)와 범엽(范曄)에 견줄 바가 아니지만 배우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부족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면서 오로지 이러한 곳에 나아가 도리를 찾으려고 한다면 역시 누추합니다. 공근(公謹)이 예전에 한두 차례 편지를 보내 의심난 것을 물은 것은 도리어 조금 이해되어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왕도와 패도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끝내 진실하게 삼가고 두터우니, 이것이 이쪽 사람들입니다. 저는 근래에 단지 이러한 사람들을 아끼려고 합니다.

 

兩卷之說, 今亦不能易紙. 仁字固不可專以發用言, 然却須識得此是箇能發用底道理始得, 不然此字便無義理, 訓釋不得矣. 且如元者善之長, 便是萬物資始之端, 能發用底本體, 不可將仁之本體做一物, 又將發用底別做一物也. ‘平旦之氣以下一節, 譬喩得不甚相似. 至以元氣淋漓星斗淸潤爲利貞之象, 亦不可曉. ‘合而言之一句, 文意亦似未安. 大抵仁之爲義, 須以一意一理求得, 方就上面說得無不通貫底道理. 如其不然, 卽是所謂儱侗眞如顢頇佛性, 而仁之一字遂無下落矣. 向來鄙論之所以作, 正爲如此. 中間欽夫蓋亦不能無疑. 後來辨析分明, 方始無說. 然其所以自爲之說者, 終未免有未親切處. 須知所謂純粹至善者, 便指生物之心而言, 方有著實處也. 今欲改性之德, 愛之本六字爲心之德, 善之本’, 而天地萬物皆吾體也, 但心之德可以通用, 其他則尤不著題. 更須細意玩索, 庶幾可見耳.

두 권에 대한 말은 이제 또한 종이를 바꿀 수 없습니다. ‘()’자는 참으로 발용(發用)으로만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도리어 이것이 능히 발용할 수 있는 도리能發用底道理라는 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뜻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글자는 의리가 사라져서 뜻을 얻지 못합니다. 게다가 예컨대 ()이 선()의 수장이라면 이것은 만물이 도움을 받아 시작하는 단서이고 능히 발용할 수 있는 본체이니 인의 본체를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발용하는 것으로써 따로 하나의 사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깨끗한 아침의 기운 이하의 한 절은 비유가 서로 유사하지 않습니다. ‘원기(元氣)가 젖어들고 북두칠성이 맑게 젖은 것이 이롭고 바른 모양이라는 것에 이르러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합하여 말하자면이라는 한 구절은 글 뜻이 역시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대저 인의 뜻은 반드시 하나의 뜻과 하나의 이치로 구해야 위쪽으로 나아가 관통하지 아니함이 없는 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멍한 진여(眞如)나 대머리 같은 불성(佛性)”이라고 한 것으로 인()이라는 한 글자가 마침내 근거할 곳이 없게 됩니다. 지난번에 제 논의를 지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중간에 흠부(欽夫: 張栻) 역시 의심하였으며, 나중에 분명하게 분석하자 비로소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말은 끝내 친절하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순수지선(純粹至善)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사물을 낳는 마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야 사실에 부합할 것입니다. 이제 본성의 덕사랑의 근본性之德, 愛之本이라는 여섯 글자를 마음의 덕선의 근본心之德, 善之本이라고 고쳐 천지만물이 다 나의 몸이라고 여겼지만, ‘마음의 덕은 통용될 수 있으나 그 나머지는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자세하게 완미해보아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求其放心與克己復禮, 恐亦不可分爲兩事. 蓋放却心卽視動皆非禮, 非禮而視動卽是放却心, 此處不容更作兩節. 今所論却似太支離也.

그 놓아둔 마음을 구하는 것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대개 마음을 놓아두고 물리치는 것은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다 예가 아닌 것이고, 예가 아니고서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곧 마음을 놓아두고 물리치는 것이니, 이곳에는 다시 두 개의 절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제 논의한 내용은 도리어 너무 지리멸렬한 것 같습니다.

 

養氣一節, 只說得程子意. 若論孟子門庭指意, 又却不然. ‘至大至剛’, 只合四字爲句. ‘以直養而無害’, 字便是上文, 下文. 孟子之意只是說每事做得是當, 卽自然無所愧怍, 意象雄豪, 所以雖當大任而無所畏懼耳. 推其本原, 固未有不立敬而能集義者, 然此章之意則未及夫敬字也. 此自程子門庭功夫, 因此說出來耳.

기운을 기르는 것에 대한 한 구절은 정자(程子)의 뜻을 얻었을 뿐입니다. 만약 󰡔맹자󰡕 문호에서 가리키는 뜻을 논의한다면 도리어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다至大至剛이라는 네 글자로 구를 삼아야 합니다. “곧게 길러서 해침이 없다.”는 곳에서 곧다는 것은 윗글에서의 곧음이고 아래 글에서의 ()’입니다. 󰡔맹자󰡕의 뜻은 단지 매사에 마땅함을 얻으면 저절로 부끄러움이 없어서 기상이 웅장해지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큰 임무를 맡더라도 두려움이 사라지는 까닭입니다. 그 본원을 미루면 참으로 경()을 세워서 의를 모으지 못하는 자가 없지만, 이 장의 뜻은 ()’자에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본디 정자(程子) 문호의 공부이며 이로부터 말이 나왔습니다.

 

易所謂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乃指蓍卦而言之. 推之天下萬物, 無一不如此者. 初不爲心而發, 而遂不可以言性也. 五峰議論似此拘滯處多, 惜乎不及其時而扣之, 反復究窮, 必有至當之論也.

󰡔󰡕에서 말한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다가 느끼어 천하의 연고에 통하는 것은 시초로 괘를 만드는 것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그것을 천하의 만물에 미루면 하나라도 그와 같지 않음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마음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어서 결국 본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봉(五峰: 胡宏)의 논의는 구애되고 막힌 곳이 많은 것 같으니, 그가 살던 때에 미치어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애석합니다. 반복하여 궁구하면 반드시 지당한 논의가 있을 것입니다.

 

孝悌則心下, 心下則此心溥’, 此意甚巧, 然却走了孝弟二字親切本意. 若但如此, 則只卑巽兩字亦得, 不必云孝弟矣. 此蓋本因立下仁人心也四字, 要得貫穿許多去處道理, 又怕惹著, 故不免有此牽彊. 似不必如此, 却只成立議論做文字也.

효도와 공손함은 마음을 아래로 두는 것이고, 마음을 아래로 두면 이 마음이 넓어진다.’는 것은 뜻이 매우 교묘하지만, 효도와 공손함이라는 적절한 본뜻에서 멀어졌습니다. 만약 이와 같을 뿐이라면 낮추어 따르다卑巽는 말도 옳을 것이니, ‘효도와 공손함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개 인은 사람의 마음이다仁人心也는 네 글자를 세우는 것에서 근본 하여 수많은 도리를 꿰뚫어야 하며, 또한 사랑이라는 말을 숨기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견강부회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을 필요는 없을 것 같으며 도리어 논의를 완성하여 글을 써야만 합니다.

 

未知焉得仁’, 文義句讀恐亦不如此. 若如此說, 則前所謂不知其仁等句又作如何說耶? 程子所謂仁者, 天下之公, 善之本也’, 止是贊歎仁字之言, 非是直解字義. 如云仁者, 天下之正理’, 此亦只是包含在內, 不可便以此爲盡得仁字之義也.

모르겠지만 어찌 인을 얻었겠는가?”라는 글의 뜻과 구두는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전에 말했던 그가 인()한지 모르겠다.”는 등의 구절은 또한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정자(程子)가 말한 ()은 천하의 공평함이요 선의 근본이다.”는 것은 단지 인()이라는 말을 찬탄한 것이지 바로 글자의 뜻을 풀이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인이란 천하의 바른 이치이다.”는 것도 단지 안으로 포함한 것이지, 이것으로써 인()자의 뜻을 다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正顔色斯近信矣’, 蓋謂學者平日心不誠實, 則雖正顔色而不免於欺僞, 如所謂色取仁而行違者, 故以正顔色而能近信爲貴耳. 亦非如來示注中所云也.

낯빛을 바르게 하는 것이 믿음에 가깝다.”는 것은 대개 배우는 사람이 평소에 마음이 성실하지 않으면 비록 낯빛을 바르게 하였을지라도 거짓됨을 면치 못하여, 예컨대 겉으로는 인을 취하면서도 행동은 어긋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낯빛을 바르게 하여 믿음을 가까이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역시 보내신 각주에서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論語所記有失無失, 須見到夫子地位, 方判斷得. 今此所論, 亦侏儒之觀優耳. 吾人但當玩索涵養, 以到爲期, 自不必如此預先安排此等閑議論, 無益於學也.

󰡔논어󰡕의 기록에는 과실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으니 견해가 반드시 공자의 위치에 도달해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논의한 내용도 난장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광대의 놀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맛보고 찾고 무젖고 길러서 이르기를 기약해야지, 이와 같이 학문에 무익하고 한가한 논의를 미리 안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所過者化’, 程子於易傳中引之, 革九五. 及其語錄中說, 似皆以爲身所經歷處人化其德. 此意平實, 亦與上下文意相應, 似不必更爲他說. 若論人心本虛, 事物過了便無朕迹, 却自不妨有此理也. 凡此數說, 不知賢者以爲如何? 如有未安, 幸更反復也.

지나가는 것이 감화된다.”는 구절에 대해 정자(程子)󰡔이천역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혁괘의 구오) 그의 어록 안의 말에 의하면 몸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의 덕에 감화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 뜻이 타당하니, 역시 위와 아래의 글뜻이 상응하여 다시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사람의 마음이 비어 있다는 측면에서 논하자면 사물이 지나가고 나면 자취가 사라지니, 본디 이치가 있다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 여러 구절의 말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온당치 않은 곳이 있다면 거듭 생각하여 주십시오.

 

여자약에게 답함 (26)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2(기사, 1185, 56)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안부를 묻고 나서 성인의 학문, , 호연지기 등을 말하였다.

 

自頃承書, 有專介存問之約, 日望其至. 忽得郭希呂書, 聞嘗感疾不輕, 甚以爲慮. 而無從附問, 但切懸情. 前日使至, 忽領手書, 未及發視, 亟問來人, 知已無他, 憂疑頓釋. 旣而細讀, 乃審向來疾證誠亦可畏. 今幸平復, 而又自能過意調攝, 尤副所望. 比日竊惟體候益佳健矣. 但來書以爲勞耗心力所致, 而諸朋友書亦云讀書過苦使然, 不知是讀何書? 若是聖賢之遺言, 無非存心養性之事, 決不應反至生病, 恐又只是太史公作祟耳. 孟子言學問之道惟在求其放心, 而程子亦言心要在腔子裏. 今一向耽著文字, 令此心全體都奔在冊子上, 更不知有己, 便是箇無知覺不織痛癢之人. 雖讀得書, 亦何益於吾事邪? 况以子約平日氣體不甚壯實, 豈可直以耽書之故遂忘饑渴寒暑, 使外邪客氣得以乘吾之隙? 是豈聖人謹疾孝子守身之意哉今旣能以前事爲戒, 凡百應酬, 計亦例加節嗇. 然區區之意於此猶不能忘言. 更祝深以門戶道學之傳爲念, 幸甚幸甚

지난번에 편지를 받아보니 안부 차 만나자는 약속이 있어서 날마다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득 곽희려(郭希呂)의 편지를 받고서 가볍지 않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걱정하였으나 물어볼 데가 없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사자가 왔길래 문득 편지를 수령하였는데, 펴보지 못한 채 왔던 사람에게 서둘러 물어서 다른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근심하고 의심하면서 편지를 열어보았습니다. 자세히 읽어보고서야 예전의 병세가 참으로 무서웠는데 이제 다행히 회복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스스로 몸조리 하는데 뜻을 둘 수 있기를 더욱 바랍니다. 요즘은 건강이 더욱 좋아졌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보내신 편지에서 보면 수고롭게 정신을 소비한다는 생각이 들며, 다른 벗들의 편지에서도 독서하는데 지나치게 힘을 들인다고 하는데, 무슨 책을 읽는지요? 만약 성현이 남긴 말이라면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일이 아님이 없어 결단코 병을 일으키는데 이르지 않아야 하니, 아마도 태사공(太史公: 司馬遷)이 병의 빌미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맹자가 말한 배우고 묻는 도리는 놓은 마음을 구하는데 있을 뿐이고, 정자도 마음을 몸 안에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줄곧 문자에 달라붙어 마음의 온전한 본체를 모두 책 위로 달아나게 하고서 (본체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지각(知覺)이 없어 아픔과 가려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비록 책을 읽을지라도 자신의 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당신은 평소의 건강이 아주 씩씩하고 실하지 않으니, 어찌 바로 굶주림과 목마름과 추위와 더위를 잊고서 독서에 심취하였다가 밖에서 삿된 기운이 몸의 틈으로 들어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성인이 병에 조심하고 효자가 몸을 지키는 뜻이겠습니까? 이제 이미 앞의 일로써 경계를 삼는다면 모든 일에 계획을 세워서 더욱 절제해야 하지만, 제가 생각건대 도학의 전수를 문호로 추구하는 것에 대해 축하드린다는 것을 잊지 않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枉尺直尋, 素未嘗以此奉疑也. 但見頃來議論一變, 如山移河決, 使學者震蕩回撓, 不問愚智, 人人皆有趨時狥勢馳騖功名之心, 令人憂懼, 故不得不極言之. 蓋非獨爲子約惜, 實爲伯恭惜, 又重爲正獻滎陽諸公惜也.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편다枉尺直尋는 것에 대해 평소에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번에 보내신 논의가 한 차례 변한 것을 보니, 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터진 것처럼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레처럼 흩어져 어지럽게 요동치게 하고,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때를 따르고 세를 좇으면서 명예를 구하는 데로 내달리는 마음이 들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하고 두려워하게 하므로 자세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개 당신만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실은 백숭(伯崇: 范念德)도 안타깝고, 나아가 정헌(正獻 : 呂公著)과 형양(滎陽 : 呂希哲) 등도 안타깝습니다.

 

漢唐本體, 只是智力, 就中有暗合處, 故能長久’, 如此言之, 却無過當. 但若講得聖門學問分明, 則此固無足言者. 而王道正理未嘗一日而可無者, 亦不待引此然後爲有徵也. 設若接引下根, 亦只須略與說破, 仍是便須救拔得他跳出功利窠窟, 方是聖賢立敎本指. 今乃深入其中, 做造活計, 不惟不能救得他人, 乃幷自己陷入其中而不能出, 豈不誤哉陳正己書來, 說得更是怕人. 今錄所答渠書去, 幸一觀. 此尤可爲歎息也.

한 나라와 당 나라의 본체가 지력(智力)일 뿐으로 우연히 모르는 중에 (성인과) 합치한 곳에 나아갔으므로 오랠 수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말한다면 도리어 마땅함을 벗어남이 없습니다. 다만 성인의 문호에서 추구했던 학문을 분명하게 익힌다면 이것은 참으로 언급하기에 부족합니다. 왕도(王道)와 바른 이치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인용한 뒤라야 징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하근기의 사람을 접하여 끌어내는 일도 대체적으로 설파(說破)하는 것일 뿐이니, 좁게 이득에 힘쓰는 것을 구제하여 뛰쳐나가야만 비로소 이것이 성현이 가르침을 세운 본래 뜻입니다. 이제 그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 살아날 계책을 만드는 것은 타인을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니, 어찌 그릇되지 않겠습니까? 진정기(陳正己)의 편지가 왔는데 그 말이 더욱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이제 그에게 답하는 편지를 적어 보냈으니 한 번 보신다면 더욱 탄식할 것입니다.

 

仁字之說, 論之愈詳, 愈覺迷昧. 然竊恐所謂祗就發用之端而言, 則無由見仁之本體’, 只此一句, 便是病根也. 蓋孟子論仁雖有惻隱人心之殊, 程子於此亦有偏言專言之別, 然若實於惻隱之偏言處識得此人心專言者, 其全體便可見. 今只爲於此認得不眞, 故不能有以識其全體. 乃欲廣大其言, 以想象而包籠之, 不知言愈廣大而意愈不親切也. 程子之言, 惟穀種一條最爲親切, 而非以公便爲仁者, 亦甚縝密. 今乃反皆不認, 而必以易傳偏旁贊歎之言爲直解字義, 則不惟不識仁, 亦錯看了易傳矣. 克己復禮前說已得之, 却是看得不子細, 誤答了. 今承再喩, 愈詳密無疑矣.

()자에 대한 말은 상세하게 논의할수록 더 그릇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밝혀 쓰는 단서에 나아가서 말한다면 인의 본체를 볼 길이 없다.’는 이 한 구절만은 병의 뿌리입니다. 대개 맹자가 인을 논한 것이 비록 측은한 마음과 사람의 마음의 구별이 있고, 정자(程子)가 이에 대해 부분적인 말과 전체적인 말로 구분하였을지라도, 측은한 마음을 부분적으로 말하는 곳에서 참되게 하여 마음을 전체적으로 말한 것을 얻어야 그 온전한 본체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단지 이에 대해 참되지 않게 알기 때문에 그 온전한 본체를 알 수 없고, 그러기에 그 말을 크게 하여 상상하면서 포괄하여 가두려고 하므로, 모르는 사이에 말이 커질수록 뜻은 더욱 적실하지 않게 됩니다. 정자(程子)의 말 중에서 곡식의 종자를 언급한 한 조목이 가장 친절하며, “공정함이 곧 인()인 것은 아니다.”는 구절도 매우 정밀합니다. 이제 돌아오는 것에 대해 모두 알지 못하니, 반드시 󰡔이천역전󰡕에서 부분적으로 에둘러서 찬탄한 말로써 글자의 뜻을 직접 풀이한다면 인()을 모를 뿐만 아니라 󰡔이천역전󰡕을 잘못 본 것입니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은 전에 말했던 것이 이미 옳았으나 자세히 보지 않고서 잘못 답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설명하신 것을 보니 더 상세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浩然之氣一章, 恐須先且虛心熟讀孟子本文, 未可遽雜他說. 俟看得孟子本意分明, 却取諸先生說之通者錯綜於其間, 方爲盡善. 若合下便雜諸說混看, 則下梢亦只得周旋人情, 不成理會道理矣. 近日經說多有此弊, 蓋已是看得本指不曾分明, 又著一尊畏前輩, 不敢違異之心, 便覺左右顧瞻, 動皆窒礙, 只得曲意周旋, 更不復敢著實理會義理是非文意當否矣. 夫尊畏前輩, 謙遜長厚, 豈非美事? 然此處纔有偏重, 便成病痛, 學者不可不知也.

호연지기한 구절은 우선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서 󰡔맹자󰡕의 본문을 익숙하게 읽어야지 갑자기 다른 말을 섞어서는 안 됩니다. 󰡔맹자󰡕의 본래 뜻을 분명하게 알기를 기다렸다가 여러 선생들의 말 중에서 통하는 것을 취하여 그것과 종합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만약 당장 여러 말들을 복잡하게 섞어서 본다면 말단으로 내려가 인정을 맴돌 뿐 도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의 경전에 대한 말들에 대부분 이러한 폐단이 있으니, 이미 본지를 본 것이 분명치 않고 나아가 선배들을 언제나 존경하고 외경할 뿐 그와 다르거나 어긋난 마음을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우러러봄을 느끼고서 행동이 항상 좁게 막히어, 단지 뜻을 완곡히 하여 빙빙 돌면서 다시는 의리와 글 뜻의 옳고 그름을 참되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배에 대한 존경과 외경은 나이든 후덕자에게 겸손히 양보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 치우치자마자 병이 생겨나므로 배우는 사람들이 몰라서는 안 됩니다.

 

非義襲而取之句內, 亦未見外面尋義理之意, 請更詳之. 橫渠先生言觀書有疑, 當且濯去舊見, 以來新意’, 此法最妙.

의를 엄습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다.”는 구절 안에도 밖에서 의리를 구하는 뜻이 나타나지 않으니 다시 상세하게 보십시오. 횡거(橫渠: 張載) 선생이 말하기를 책을 볼 때 의심이 생기면 마땅히 옛 견해를 씻어 새로운 뜻이 오게 해야 한다.”라고 했으니, 이 방법이 가장 신묘합니다.

 

凡言, 多只是指蓍卦而言. 蓍卦何嘗有思有爲? 但只是扣著便應, 無所不通, 所以爲神耳. 非是別有至神在蓍卦之外也.

󰡔󰡕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시초로 괘를 만드는 것만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시초로 괘를 만드는 것에 어찌 의도적인 생각이 있겠습니까? 다만 물으면 응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신묘한 까닭입니다. 따로 지극한 신비로움이 시초로 만든 괘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曾子告孟敬子三句, 不是說今日用功之法, 乃言平日用功之效. 如此看得, 文義方通. 來喩糾紛, 殊不可曉也.

증자(曾子)가 맹경자(孟敬子)에게 말해주는 세 구절은 오늘날 공부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공부하는 효과를 말합니다. 이렇게 보아야 문맥이 통합니다. 보내신 편지는 어지러워서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不知其仁之說恐未安, 且未論義理, 只看文勢, 已自不通 : 若更以義理推之, 尤見乖戾矣. 蓋知自是知, 仁自是仁. 孔門敎人, 先要學者知此道理, 便就身上著實踐履. 到得全無私心, 渾是天理處, 方喚作仁. 如子路諸人, 正爲未到此地, 故夫子不以許之, 非但欲其知之而已也. 若謂未知者做得皆是, 而未能察其理之所以然, 則諸人者又恐未能所爲皆是, 固未暇責其察夫理之所以然也.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다.”는 것에 대한 말은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의리를 논하지 않고 문세만을 보는 것은 이미 통하지 않습니다. 만약 다시 의리로써 헤아려 본다면 더욱 괴리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 아는 것은 저대로 아는 것이고 인()은 저대로 인이니, 공자의 문호에서는 사람을 가르칠 때 먼저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도리를 알아서 몸으로 착실하게 실천하게 하였습니다. 전혀 사사로운 마음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혼연히 하늘의 이치와 합하여 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자로(子路) 등의 사람은 아직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공자가 허여하지 않았으니,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이 실천하는 것들이 모두 옳을지라도 이치의 소이연(所以然)을 살필 수 없다면, 많은 사람들이 또한 실천하는 것들이 모두 옳을 수 없음을 걱정할 것이니, 진실로 이치의 소이연을 살피라고 꾸짖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27)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2(기사, 1185, 56)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日用功夫, 比復何如? 文字雖不可廢, 然涵養本原而察於天理人欲之判, 此是日用動靜之間不可頃刻間斷底事. 若於此處見得分明, 自然不到得流人世俗功利權謀裏去矣. 熹亦近日方實見得向日支離之病, 雖與彼中證候不同, 然其忘己逐物貪外虛內之失則一而已. 程子說不得以天下萬物撓己, 己立後自能了得天下萬物. 今自家一箇身心不知安頓去處, 而談王說霸, 將經世事業別作一箇伎倆商量講究, 不亦誤乎? 相去遠, 不得面論, 書問間終說不盡, 臨風歎息而已.

일용공부는 어떠한지요? 문자를 폐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본원에 무젖어 기르면서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욕심의 구분을 살피야 하니, 이것은 평소에 움직이거나 고요할 때에 잠시라도 끊어져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만약 이곳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저절로 세속의 공리와 권모술수에로 빠져들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요즘에야 비로소 예전의 지리멸렬했던 병을 깨닫습니다. 비록 저들과 증후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잊고 사물을 좇고 밖을 탐하면서 안을 비우는 과실은 한가지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하만물로써 나를 어지럽힐 수 없으니, 스스로 선 뒤에 스스로 천하만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스스로 하나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정돈할 줄 모르면서 왕패(王覇)를 담론하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사업을 가지고 따로 하나의 기량을 헤아리고 강구하는 것이니 또한 그릇되지 않겠습니까? 서로 멀리 떨어져 얼굴을 마주하여 논의하지 못한 채 편지로 안부를 묻자니 끝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바람을 마주하고서 탄식할 뿐입니다.

 

여자약에게 답함 (28) 答呂子約

해제이 글은 효종 순희(淳熙) 12(기사, 1185, 56)에 여자약에게 쓴 편지이다.

 

所論爲學之意, 比向來儘正當矣. 但所謂省節視聽閑得心地半時, 便是半時功夫, 却似微有趣靜之偏. 所謂鬼神雖無形聲可求, 而須著視聽, 又似推求考索之過. 由前之說, 且可爲目前養病之計, 而非所以爲學. 由後之說, 則不惟義理有差, 而亦非所以休養已憊之精神也.

논하셨던 배움의 뜻은 예전보다 조금 더 좋아졌습니다. 다만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살펴서 절도 있게 한다는 것마음을 반시간 정도 한가하게 한다면 이것이 반시간의 공부이다.’고 한 것은 도리어 미세하나마 고요함으로 향하는 치우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귀신이 비록 구할 수 있는 형체와 소리가 없을지라도 반드시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드러난다.’는 것 또한 지나치게 미루어 모색하는 것입니다. 앞의 말에 말미암는 것은 눈앞에서 병을 기르는 계책일 뿐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뒤의 말에 말미암는 것은 의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피곤한 정신을 휴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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