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권
書(汪․張․呂․劉問答)
왕상서에게 답함(계미년 6월 9일) 答汪尙書 癸未六月九日
【해제】이 글은 남송 효종 융흥 원년(계미; 1163, 34세)의 편지이다. 원주에 계미년 6월 9일이라고 하였다.
『어록』 중에서 의심스런 곳을 지적한 가르침을 받고 당신의 가려 뽑는 이치가 정밀함을 우러러 보며 탄복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예컨대 한기와 부필은 조정에 함께 있은 적이 없었다든지, 왕안석과 한강은 서로 앞뒤를 이어 재상에 제수되었다든가 등은 고증한 대로 의심이 없습니다. 귀산의 말씀은 아마도 깊이 고찰하지 않고 전해들은 것이니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고찰하신 연월은 그 아래에 주로 달아 주고,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전하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떨지요?
蒙垂喩語錄中可疑處, 仰見高明擇理之精, 不勝欸服. 如韓․富末嘗同朝, 王․韓拜相先後, 如所考證, 蓋無疑矣. 龜山之語, 或是末嘗深考, 而所傳聞不能無誤. 竊謂止以所考歲月注其下, 以示傳疑, 如何?
『상서해』 세 단락은 답문을 기록한 말과 같은 유형이 아닙니다. 「귀산행장」을 살펴보니 본래「서해」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중용』을 해석한 것입니다. 공과 두에 관한 일은 『삼경의변』에서도 운운하고 있는데, 만약 경전의 기록에 근거한다면 소두의 죄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요전」에서 기록한 것은 모두 후사의 기본이니, 반복해서 자세히 고찰해 보면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형 두 구절은 분명 왕씨의 것과 유사한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단서를 꼼꼼히 추론해 보면, ‘道不可以在之’라는 말은 『장자』에서 나온 것이고 그래서 더욱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학문은 성인의 학문과 절대 해를 함께하여 논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書解三段不類記錄答問之言, 按行狀自有書解, 卽解中說也. 共·兜事三經義辨中亦云, 若據經所記卽騷兜之罪正坐此, 堯典所記, 皆爲後事起本, 反復詳考, 卽一自見免′. 典刑兩句絶類王氏, 殊不可曉. 細推其端, 卽‘道不可以在之’ 一語自莊(3-1263)子中來, 所以尤覺不粹. 以此知異學決不可與聖學同年而語也明矣.
귀산이 호적공의 질문에 대답한 단락에서 “노자 오천 자는 자연을 종지로 하므로 그것은 억지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고 했는데 저 역시 이 말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만약 『논어』에 보이는 노팽의 말을 단지 「증자문」에서 예를 언급한 몇 단락으로 증명한다면, 그것은 바로 서술하기는 하되 창작하지 않으며, 옛 것을 믿고 좋아한다는 뜻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노담은 주 나라의 사관으로 나라의 전적과 삼황오제의 서적을 관장했으므로 옛 일을 서술하며 믿고 좋아할 수 있었습니다. 오천 자로 된 노자의 저작 역시 옛날 있었던 말을 노자가 기록하여 전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열자』가 인용한 황제의 책은 바로 『노자』의 ‘곡신불사장’입니다. 어찌 삼황오제의 책이겠습니까? 즉 귀산의 생각은 오히려 익히 보고 들었던 것에 이미 습관이 되어 장자와 노자를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니 참으로 모를 노릇입니다. 순 임금은 그것을 거듭했다는 귀산의 말씀도 일찍이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 그 글을 고찰해 보니 이 서문은 바로 세 편의 서문이었습니다. ‘臯陶矢厥謨’는 바로 「고요모편」을 말한 것이고, ‘禹成厥功’은 바로 「대우모편」을 말합니다.(원주: 진구공의 일이므로 그 공을 이루었다고 했다.) 신은 거듭이라는 뜻입니다. 순 임금은 고요를 따라 구덕을 펼치며 우에게 명하고, 따라서 다시 우에게 명을 진술하여 말하기를 ‘이리 오너라, 우여! 너에게 말하겠다.’고 하자, 우가 드디어 「익직」편의 말을 진술했는데, 이 구절이 「익직」편의 서문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문장의 의미가 매우 분명하고 쓸데없는 의미가 번거롭게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법도의 위엄에 굴하지 않으니, 기상이 오히려 천근하다고 말한 것은 사실 순 임금을 말한 것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龜山答胡廸功問中一段, “老子五千言以自然爲宗, 謂之不作可也”, 熹亦疑此語. 如論語老彭之說, 只以曾子問中言禮數段證之, 卽述而不作, 信而好古皆可見. 蓋老聃周之史官, 掌國之典籍, 三皇五帝之書, 故能述古事而信好之. 如五千言, 亦或古有是語而老子傳之, 未可知也. 蓋列子所引皇帝書, 卽老子“谷神不死”章也, 豈所謂三皇五帝之書? 卽龜山之意, 却似習於見聞, 不以莊老爲非者, 深所未喩也. 帝舜申之之說, 亦嘗疑之. 旣而考其文, 則此序乃三篇之序也. ‘臯陶矢厥謨’, 即謂臯陶謨篇也. ‘禹成厥功’, 即謂大禹謨篇也. (陳九功之事, 故曰成厥功也.) 申, 重也. 帝舜因臯陶陳九徳而禹俞之, 因復申命禹曰: ‘來, 禹, 汝亦昌言,’ 而禹遂陳益稷篇中之語, 此一句序益稷篇也. 以此讀之, 文意甚明, 不煩生意. 今曰不屈於法度之威, 意象却殊淺近, 信乎其非所以言舜也.
사량좌와 양시 두 선생의 일은 근래 호명중의 집안에서 기록한 후사성의 말씀을 보니 이렇습니다. “명도 선생이 말씀하기를 사량좌는 비록 조금 노둔하지만 단지 성실하고 돈독할 뿐이고, 일을 이해하는 것이 투철하지 못하면 이마에 땀을 흘리며 분발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라공이 기록한 것과 암암리에 부합하며 이른바 ‘완물상지’라는 평가와 서로 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실로 총명하고 논변이 뛰어나고 박식한 사람이 있지만, 도를 듣는 데에는 명민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이 도에서 그릇되지 않고 의지를 버리지 않아야 끝내 도를 듣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것은 반드시 모두 힘껏 실행하여 깊이 나아가 얻는 것이 있어야 광명탁월하여 곧바로 본원을 지목하게 됩니다. 『어록』·『논어해』 등을 자세히 고찰하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논어해』의 ‘자로는 하나를 들으면’이라는 장에서 그가 힘쓰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귀산은 오히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훌륭하여 평이한 곳에서 얻었으니 그가 한 말을 보면 역시 알 수 있습니다. 참월하게 망론하여 실로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올바름을 얻는데 도가 있으니 감히 스스로 그 고루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옳은지 그른지 가르침을 내려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謝楊二先生事, 頃見胡明仲家所記候師聖之言有曰: ‘明道先生謂謝子雖少魯, 直是誠篤, 理會事有不透, 其顙有泚, 其憤悱如此.’ 此語却與羅公所記暗合, 恐與所謂玩物喪志者有不相害. 蓋世固有人聰明辨博而不敏於聞道者矣, 惟其所趣不謬於道而志之不舍, 是以卒有所聞. 而其所聞必皆力行深造之所得, 所以光明卓越, 直指本原. 姑以語錄․論語解之屬詳考, 卽可知矣. 如語解中論子路有聞一章可見其用力處也. 龜山却是夫質粹美, 得之平易, 觀其立言亦可見. 妄論儧越, 良犯不韙. 然欲取正有道, 不敢自隱其固陋耳. 乞賜鐫喩可否, 幸甚幸甚.
‘그는 성인의 경지에 있음을 자부하지 않았다’ 등의 설명에도 역시 의심스런 것이 있으니 감히 침묵할 수 없습니다. 함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성인의 경지를 자부하지 않았다를 만약 겸손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얻어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과 동류가 아닙니다. 지금 (당신은) 귀산이 이렇게 말한 것은 겸손하려고 이것을 이끌어 비유한 것이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의도와 일치합니다. 상채는 『논어해』의 ‘옛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구한다’는 장에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자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의미는 양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고 한 것 역시 이런 의미입니다. 형색은 바로 타고난 천성이다는 것은 형색을 떠나 따로 천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니, 그러므로 색즉시공으로 밝힌 것입니다. 귀산은 또 『논어해』에서 누차 ‘공’에 관해서 말했는데, “크게 변화되면 형색과 천성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치가 없고, 어떤 사물도 공이 아님이 없다”고 한 것 역시 이런 뜻입니다. 하지만 아마 이러한 유형의 것들은 모두 저것(불교)을 빌어 이것(유학)을 밝힌 것이지, 실제로 이것(유학)의 이치가 바로 저것(불교)의 학설이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至於不居其聖等說, 則又有所疑, 亦不敢嘿, 幷以請敎. 不居其聖, 若以爲謙辭, 卽與得無所得不類. 今龜山旣云非謂謙而引此爲比, 則其意正合矣. 上察於語解好古敏求章亦云‘其言則不居, 其意則不讓’矣, 亦此意也. 形色卽是天性, 非離形色別有天性, 故以色卽是空明之. 龜山又於語解屢空處云, ‘大而化之, 則形色․天性無二致也, 無物不空矣’, 亦此意也. 然恐此類皆是借彼以明此, 非實以爲此之理卽彼之說也.
저에게 보여준 천민과 대인은 분리할 수 없다는 왕장(왕안석)의 논의는 대인 성인 신인은 그 우열을 나눌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러한 향상지위를 가진 사람과 오늘날 학자들의 입신처에는 큰 단절이 있으므로 멀리까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지금 여러 선생들의 말씀을 구해본다면, 성인과 신인은 실로 구분할 수 없지만(횡거는 이렇게 말했다.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을 신이라고 한다. 장생은 잘못 알고 허망하여 또 신인이 있다고 말했다.” 이천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성인으로도 알지 못하는 것이지, 성인보다 위에 있는 또 한 등급의 신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인과 성인은 구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천은 이렇게 말했다. “크게 변화하면 이미 이치와 합일된 것이다. 아직 변화하지 않은 것은 마치 자를 들고 물건을 재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용해도 아직 그 잘못을 면하지 못한다. 이미 변화한 사람은 자신이 바로 척도이자 척도가 바로 자신이다. 안자는 위대하지만 아직 변화하지 못했던 사람인데, 만약 변화했다면 공자의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횡거는 이렇게 말했다. “크게는 할 수 있지만 크게 변화시키는 것은 할 수 없다. 익숙함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역』에서 말한 궁신지화는 덕이 성대하고 인이 성숙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지력으로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또 말씀하기를 “대인은 아직 변화하지 못한 사람이며 아직 그 위대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변화한 후에야 그 위대함을 갖출 수 있다.” 또 이렇게 말했다. “큰 조짐을 갖춘 사람이 성인이다. 변화하면 천덕의 지위에 이르게 된다.”) 다시 언어와 기상으로 헤아려 본다면 자신의 도를 천하에 실행할 수 있을 때가 된 후에 실행하는 것과 자신을 바르게 하고 타인을 바로잡는 것 역시 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어찌 이 임금(탕)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드는 것만 같겠는가?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만 같겠는가? 어찌 내 몸소 친히 요순의 성세를 보는 것만 같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장차 이 도로 이 백성들을 깨우칠 것이다. 내가 깨우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이것은 자신의 도를 천하에 실행할 수 있을 때가 된 후에 실행하는 것이니, 순 임금이 “자신을 단정하고 엄숙하게 하고 제왕의 자리에 똑바로 하고 있을 뿐이다”고 한 것은 또 어떻습니까? 이것은 아무래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구분을 보기 어려운데, 안자가 도달하지 못한 한 칸은 안자 스스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제멋대로 풀이하고 경솔하며 방자한 뜻이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엎드려 바라건대 고명하신 당신께서 기꺼이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게 생각하시니 반드시 죄를 주지 않고 가르침을 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구구하게 정을 내려 주시니 지극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所示王丈云天民․大人不可分, 如大․聖․神之不可優劣. 熹竊意此等向上地位與學者今日立身處大故懸絶, 故難遙度. 今且以諸先生之言求之, 則聖․神固不可分, 橫渠曰: ‘性不可知謂神. 莊生謬妄, 又謂有神人焉.’ 伊川曰: ‘神則聖而不可知, 非聖人之上又有一等神人也.’ 大與聖則不可不分. 伊川曰: ‘大而化之, 已與理一也. 未化者, 如操尺度量物, 用之尙不免差. 已化者, 己卽尺度, 尺度卽己. 顔子大而未化, 若化則達於孔子矣.’ 橫渠曰: ‘大, 可爲也, 化, 不可爲也, 在熟之而已. 易所謂窮神知化, 乃養盛自致, 非知力能强也.’ 又曰: ‘大人未化, 未能有其(3-1265)大, 化而後能有其大.’ 又曰: ‘大幾聖矣, 化則位乎天德矣.’ 更以言語氣象揣度, 則達可行於天下而後行之語正己而物正者, 亦不得不異. 且如伊尹曰: ‘吾豈若使是君爲堯舜之君哉? 使是民爲堯舜之民哉? 豈若於吾身親見之哉? ’ 又曰: ‘予將以斯道覺斯民也, 非予覺而誰也? ’ 此可謂達可行於天下而後行之矣, 其於舜之‘恭己正南面而已矣’如何哉? 似此恐末可謂不可分也. 但其分難見, 如顔子之未達一間處, 只是顔子自知耳. 狂妄率爾, 肆意及此, 伏惟高明樂與人爲善, 必不罪而終敎之, 區區下情不勝至望.
왕상서에게 답함 答汪尙書
【해제】편년고증(p.24)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융흥 원년(계미; 1163, 34세)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연보』에서 계미년에 배열했는데 그 근거는 자세하지 않다. 제3서가 갑신년의 것이니 순서로 미루어 보면 계미년에서 갑신년 사이에 쓴 것 같다. 또 제1서에서 “상채와 귀산의 『논어해』에는 불교 용어로 『논어』를 풀이한 곳이 있는데 이러한 유형의 것들은 모두 저것(불교)을 빌어다 이것(유학)을 밝힌 것입니다”라고 했고, 이 편지에서는 “상채가 말한 지관의 학설은 아마도 저들(불교)의 수행 조목을 빌어다 우리(유학)의 학문에 나아가는 일을 밝힌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두 편지는 내용상 서로 이어지는 흔적이 있으므로 『연보』의 배열을 따르는 것이 옳다.
별지에서 보여주신 불교의 학설에 대하여 전에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설명을 청했던 것입니다. 참람하여 당신에게 죄를 짓고, 뜻하지 않게 당신을 깎아 내렸던 것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저와 응대해 주시니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불교의 학설에 대하여 저는 일찍이 그 분(도겸)을 스승으로 삼고 그분의 도를 존중하였으며 불도를 구함이 간절하고 지극했었지만 불도에서는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후 선생과 군자의 가르침으로 선후와 완급의 순서를 바로잡고, 따라서 잠시 그 학설을 제쳐놓고 우리 학문에 종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불교학설이 하루라도 마음에서 들고 나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우리 유학에 대한 공부를 끝낸 다음에 불교를 탐구하더라고 너무 늦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지 갑자기 이것을 끊어버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년 지나면서 마음은 저절로 편안한 해지니, 비록 곧바로 자기가 있는 경지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다시 외학(불교)을 탐구하여 애초에 마음먹었던 것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은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선배들이 편안히 여기는 마음에도 분명 이와 같은 점이 있을 것이고, 혹은 이보다 심할 것이니 어찌 경솔하게 입으로 언쟁하겠습니까? 제 생각에, 우리 학문에 더욱 매진하여 편안히 여기는 바의 옳고 그름을 구한다면 그들이 우리 유학의 학문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불교에서 그것을 구한 연후에 편안히 여기는 자와는 반드시 논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안하게 여기는 것의 시비가 이미 판단되면 이른바 하늘의 법도에 반역되고 인류를 다 없앨 것이라는 점은 논박해도 가하고 논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니, 실로 이 점에 나아가 취사를 정할 것은 아닙니다.
別紙示及釋氏之說, 前日正以疑晦未祛, 故請其說. 方虞僭越, 得罪於左右, 不意貶損高明, 與之酬酌如此, 感戢亡已. 熹於釋氏之說, 蓋嘗師其人, 尊其道, (3-1266)求之亦切至矣, 然未能有得. 其後以先生君子之敎校夫先後緩急之序, 於是暫置其說而從事於吾學, 其始蓋未嘗一日不往來於心也, 以爲俟卒究吾說而後求之, 未爲甚晩耳, 非敢遽絀絶之也. 而一二年來, 心獨有所自安, 雖未能卽有諸己, 然欲復求之外學以遂其初心, 不可得矣. 然則前輩於釋氏未能忘懷者, 其心之所安, 蓋亦必有如此者, 而或甚焉, 則豈易以口舌爭哉? 竊謂但當益進吾學, 以求所安之是非, 則彼之所以不安於吾儒之學, 而必求諸釋氏然後安者, 必有可得而言者矣. 所安之是非旣判, 則所謂反易天常, 殄滅人類者, 論之亦可, 不論亦可, 固不卽此以定取舍也.
상채가 말한 지관(止觀)의 학설은 아마도 저들(불교)의 수행법을 빌려 우리 유학의 학문에 나아가는 일을 밝힌 것입니다. 마치 “불교의 참선을 통한 悟道가 유학의 치지이고, 불교의 지관이 우리 유학의 극기이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사상채의 어록을 살펴보면 지관과 극기를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후일 불교를 좋아하는 이들이 머리와 꼬리를 떼어 버리고 이 구절만을 고립적으로 사용하여 자기를 합리화 했습니다. 마치 공자가 말한 “오랑캐에게도 군주가 있으니, 중국의 여러 제후국에 없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것과 같은데, 이것이 어찌 진정으로 오랑캐를 흠모한 것이겠습니까? 명도선생이 사찰에 가서 그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삼대의 위의가 여기에 다 있구나’라고 한 것이, 어찌 참으로 총림에 들어가고 싶어 한 말씀이겠습니까? 호문정이 능엄경(楞嚴經)과 원각경(圓覺經)을 취한 까닭도 아마 불교의 도(術) 중에도 취할만한 것이 있어서 한 것이지, 우리 유학은 마땅히 불교를 취해야 우리의 학문에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해서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이것은 해가 될 뿐이다”고 했고, 여박사는 “군자는 변하지 않는 법칙으로 돌아와 구할 뿐이다. 경이 바르면 간사함과 사특함은 없다. 지금 사특한 학설의 해를 미워하여 그것을 바로잡겠다고 공격하는 것은 바로 스스로를 가로막는 것일 뿐이다”고 했는데, 이 말은 실로 맛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불학에 비록 편안하게 여기지 않는 점이 있지만 그러나 감히 드러내놓고 욕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강학하다 보면 말꼬리가 여기에서 말미암기 때문에 전에 대략 그 단서를 꼬투리 잡은 것일 뿐입니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저의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기꺼이 고치겠습니다. 바라건대 저의 주장을 남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요점은 정론이 있을 뿐입니다.
上蔡所云止觀之說, 恐亦是借彼修行之目, 以明吾進學之事. 若曰彼之參請猶吾所謂致知, 彼之止觀猶吾所謂克己也, 以其語錄考之, 其不以止觀與克己同塗共轍明矣. 後之好佛者遂掇去首尾, 孤行此句, 以爲己援. 正如孔子言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豈眞慕夷狄? 明道適僧舍, 見其方食, 而曰三代威儀盡在是矣, 豈眞欲入叢林耶? 胡文定所以取楞嚴圓覺, 亦恐是謂於其術中猶有可取者, 非以爲吾儒當取之以資己學也. 孔子曰: ‘攻乎異端斯害也已.’ 呂博土謂 ‘君子反經而已矣, 經正斯無邪慝. 今惡邪說之害正而攻之, 則適所以自敝而已.’ 此言誠有味(3-1267)者 故熹於釋學雖所未安, 然未嘗敢公言詆之. 特以講學所由有在於是, 故前日略扣其端. 旣蒙垂敎, 復不敢不盡所懷, 恐未中理, 乞賜閑示, 不憚改也. 更願勿以鄙說示人, 要於有定論而已.
주화와 주전의 주장에 대하여 근래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보여주신 견해를 보니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이해를 따지고 있는 듯하니 제 생각은 끝내 편치 않습니다. 위나라의 군주가 부자(공자)를 대하며 정치하는 것에 관하여 물었을 때 부자께서는 정명을 우선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자로처럼 현명한 사람도 오히려 그것을 우활한 것이라고 의심하자 부자께서는 자세하게 말씀하면서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그 화가 백성들이 수족을 둘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이고 만세의 법이니 어찌 구차한 것이겠습니까? 생각건대 인륜을 밝히고 천리에 통달하여 위로는 그 끝을 알고 아래로는 그 가장자리를 알아 극치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도망갈 곳이 없는 연후에 이 말이 과연 허망한 것이 아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지금 강화를 명분으로 자치의 실속을 닦자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가 말씀한 정명을 우선시하는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마음의 자취가 판연히 두 갈래 길로 나누어져 있으니 비록 요행히 성공한다 하더라도 역시 유학자는 꺼려야 할 일입니다. 하물며 먼저 맹약을 배신하고 명을 어기는 지경에 자처하면 저들은 올바름을 점유하고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다. 내부에서는 상하의 마음을 의심하고 밖에서는 원수와 적의 세력을 이루도록 하는 것은 모두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요동치는 것을 꼭 근심한다면 이른바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오직 관문을 걸어 잠그고 목책을 굳건히 하여 도적이 침입해 오면 싸울 뿐이지 물러가도 쫓아가 추격하지는 않으니, 수고로움과 비용을 아끼고 쉬면서 날카로움을 기르며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이것을 자치라고 한다면 방아쇠를 따라 바로 터지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부는 것과는 실로 다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함께 여기에 돌아오면 그것은 강화의 계책과는 완전히 함께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和戰之說, 頃嘗蒙面誨. 及今所示, 非不明白, 利害較然矣, 然愚意終未敢安. 蓋衛君待夫子而爲政, 夫子以正名爲先. 以子路之賢, 尙疑其迂, 然後夫子極言之, 以爲名之不正, 其禍至於使民無所措其手足. 聖人之言, 萬世之法, 豈苟然哉? 惟明人倫․達天理, 知其上際下蟠, 無所不極, 無所逃於天地之間, 然後信斯言之果不妄也. 今欲以講和爲名而修自治之實, 恐非夫子正名爲先之意. 內外心迹判爲兩途, 雖使幸而成功, 亦儒者之所諱也. 况先自處於背盟違命之地, 而使彼得擅其直以責於我, 內疑上下之心, 外成讎敵之勢, 皆非計之得也. 必以搖動爲慮, 則所謂自治者, 其惟閉關固圉, 寇至而戰, 去不窮追, 庶可以省息勞費, 蓄銳待時乎. 以此自治, 與夫因機亟決․電掃風馳者固不同, 然猶同歸于是, 其與議和之計不可同年而語矣. 不審台意以爲如何?
왕상서에게 답함(갑신 10월 22일) 答汪尙書 甲申十月二十二日
【해제】이 글은 원주에 갑신년 12월 22일이라는 일자가 명기되어 있다. 이 해는 남송 효종 융흥 2년(1164, 35세)이다.
저는 이 곳에서 여러 날 모시면서 몸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도덕을 크게 갖추었으니, 저처럼 천박하고 좁은 소견을 가진 사람은 실로 엿볼 수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겸허하고 묻기를 좋아하며 모든 말을 다 용납하고 수용하니 저는 더욱 감동했습니다. 앞으러 이러한 마음을 밀고 나가면 장차 천하의 선한 이들이 모두 귀의할 것이니 천하의 중책을 맡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저는 후일 보통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어떤 일을 합하께서 끝내 사양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고 매번 유학과 불교, 사도와 정도의 구분을 변론하는데, 혹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드릴 말씀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다시 말씀을 드리니 들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근세의 도학을 말하는 사람들은 너무 고원한 것이 잘못이고, 독서와 강의는 항상 가로질러 가 쉽게 하고 초절하여 차근차근 단계를 거치지 않고 빨리하려고 하니, 그 간의 곡절과 정미한 곳에서 완색해야할 곳은 으레 모두 소홀히 하고 싫증내며 비근하고 자질구레하다고 생각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비록 혹 들은 것이 많고 박식한 선비라도 천하의 의리에는 역시 미진한 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많이 듣고 박식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일이지만, 그 이치가 근원한 바를 매우 정밀하게 살피지 않는 것은 따로 형이상의 것을 향하여 고착한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서로 관계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윤화정은 “이 세 가지 일 중에서 한 가지 일을 간파한다면 이러한 근심은 없을 것이다”고 한 말씀은 그 병폐에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치를 아직 다하지 않았으면 가슴 속에는 의심이 없을 수 없고 다시는 가까운 곳에서 반성하여 구할 수 없으니, 돌아보면 이단의 학설에 미혹되어 미루어 가면 갈수록 어둡고 막막하여 헤아려 알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되니, 갑자기 하루 종일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맛보며 확연히 한번 깨닫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사물은 반드시 궁구한 후에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윤리는 반드시 잘 살핀 후에 다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격물이란 단지 궁리일 뿐이고, 물격이란 바로 이치가 분명해진 것이니, 이것은 『대학』 공부의 시작입니다. 침잠하여 완색하고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데 각각의 깊이와 낮음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돈오와 험절의 곳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근세의 유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 역시 너무 고원한 것 같습니다. 여사인의 편지를 별지에 적어 보냅니다.) 그들(불교)은 이미 스스로 확연하게 한번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실 아직 이 점을 모르니 어찌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자가 유학을 배우면서 스스로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비록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는 분명 살핌이 자세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 하물며 그것을 기다려도 꼭 얻는다고 할 수 없고, 사람으로 하여금 해결하지 못하는 의심을 품게하여 의지가 분산되고 기개는 빠져 세월만 헛되이 보내면서 무엇을 따라야할지를 모릅니다. 한결같이 우리의 종지를 따르고 하학상달의 순서를 따라 입으로는 강론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몸소 실천하고 힘껏 궁구하면서 차라리 번거로운 것을 할지언정 소략히 하지 않고, 차라리 하학을 할지언정 고원한 것을 하지 않으며, 차라리 천근한 것을 할지언정 심원한 것을 하지 않고, 고졸한 것을 할지언정 기교 있는 것을 하지 않으면서 편안히 잠심 완색하고 오랫동안 보존하며 점점 밝게 알면 모든 이치가 밝아지고 순서는 숨김이 없게 됩니다. 그런 뒤에 대중과 지정의 극치와 천리와 인사의 온전함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면 처음부터 현저히 초절하여 미치지 못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미가 아주 미미한 사이에서 털끝만한 작은 것도 모두 살피고, 서로 응대하는 즈음에도 체용이 혼연하면 비록 혹 지극이 중요한 일을 맡겨 처리하는 것이 어렵다하더라도 역시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아무 일 없는 듯이 실행할 수 있으니 또 어찌 의혹을 풀지 못하고 기백이 완전치 못함이 있겠습니까? (제멋대로 하는 말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엽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하의 현명함으로 힘껏 나아가면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학에서 말하는 확연히 한번에 깨닫는 것과 비록 누가 더 우수하고 열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이고 저것은 둘이며, 이것은 가득 차 있고 저것은 텅 빈 것임이 분명합니다. 가령 그들의 학설에 사실 우리 유학이 미치지 못할 것이 있더라도 이것은 대중과 지정의 법도를 넘어선 것이니, (법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극단을 궁구하고 심오한 것을 연구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며 윤리에 어긋나고 의리에 위배되는 것은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대본이 이미 확립되면 준칙은 스스로 밝아지니, 이것은 맹자가 말씀한 지언으로 편벽된 말과 과도한 말 바르지 못한 말과 궁색해서 숨기는 말을 우리가 대하면 모두 그것을 감정하는 일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서 생겨나 그 정사를 해치고 그 일에 해가되는데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저의 생각은 이와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취할 점이 있다면 조금 유의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미 자임하시고 또 이것으로 잘못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근본으로 삼는다면 이번에 드린 말씀 거의 당신(군자)에게 죄를 얻지는 않을 것입니다. 혹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역시 분명하게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바라오며 장차 다시 생각해 보고 가르침을 더해주기를 바란다면 듣고 받아들임이 크지 않다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루하고 과문하니 간절히 바랍니다.
중국이 믿는 것은 덕이고 이적이 믿는 것은 힘입니다. 지금 국사를 염려하는 사람은 그들과 자신을 살피고 강함과 약함을 비교하여 말하는데 이것은 이적을 서로 공격하는 책략을 아는 것이지만 중국이 이적을 다스리는 도에는 아직 미치지 못합니다. 힘으로 말하면 그들은 항상 강하고 우리는 항상 약하니 이것은 언제나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강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덕으로 말하면 삼강을 떨치고 오상을 밝히며 조정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은 모두 우리가 힘쓸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중국이 이적을 다스리는 도로서 지금 당장 논의할 일입니다. 실로 이것으로 스스로 떨쳐 일어난다면 어찌 강화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우려하는 것은 오직 힘도 진흥하지 못하고 덕도 닦지 못하면서 싸우자 혹은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상책이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것에 도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며, 자신을 진실하게 하는데 도가 있으니 그것은 선을 밝히는데 있습니다. 지금 주화와 주전은 비록 서로 다른 길이고, 두 곳의 궁전에서 논의가 다른데, 가을철의 방비가 이미 급박하니 대계를 그르칠까 두렵습니다. 자신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 아직 지극하지 않고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힘을 쓰지 않으면 어버이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영을 어기고 의를 행하여 공적을 이루고 싶으면 그 세가 심히 어긋나 어렵습니다. 무가 만약 자신을 진실하게 하는 일을 몇 차례 간언하여 감오하기를 희망하면 그 이치가 지극히 순조롭고 쉬울 것입니다.
熹玆者累日侍行, 得以親炙. 竊惟道德純備, 固非淺陋所能窺測. 而於謙虛好問, 容受盡言之際, 尤竊有感焉. 蓋推是心以往, 將天下之善皆歸之, 其於任天下之重也何有? 愚恐他日之事常人所不能任者, 閤下終不得而辭也. 是以不勝拳拳, 每以儒釋邪正之辨爲說, 冀或有助萬分. 而猶恐其未足於言也, 請復陣之, 幸垂聽焉.
大抵近世言道學者失於太高, 讀書講義, 率常以徑易超絶, 不歷階梯爲快, 而於其間曲折精微正好玩索處, 例皆忽略厭棄, 以爲卑近瑣肩, 不足留情. 以故雖或多聞博識之士, 其於天下之義理, 亦不能無所末盡. (蓋以多間博識自爲一事, 不甚精察其理之所自來, 却謂別有向上一著, 與此兩不相關. 此尹和靖所以有‘此三事中一事看破, 則此患亡矣’之說, 可謂切中其病矣.) 理旣未盡, 而胸中不能無疑, 乃不復反求諸近, 顧惑於異端之說, 益推而置諸冥漠不可測知之域, 兀然終日, 味無義之語, 以俟其廓然而一悟. 殊不知物必格而後明, 倫必察而後盡 (格物只是窮理, 物格卽是理明, 此乃大學功夫之始, 潛玩積累, 各(3-1269)有淺深, 非有頓悟險絶處也. 近世儒者語此, 似亦太高矣. 呂舍人書別紙錄呈.) 彼旣自謂廓然而一悟者, 其於此猶懵然也, 則亦何以悟爲哉? 儒者爲此學而自謂有悟者, 雖不可謂之懵然, 其察之必不詳者矣.
又況俟之而未必可得, 徒使人抱不決之疑, 志分氣餒, 虛度歲月而倀倀耳. 曷若致一吾宗, 循下學上達之序, 口講心思, 躬行力究, 寧煩毋略, 寧下毋高, 寧淺毋深, 寧拙毋巧, 從容潛玩, 存久漸明, 衆理洞然, 次第無隱, 然後知夫大中至正之極․天理人事之全無不在是, 初無逈然超絶, 不可及者. 而幾微之間, 豪釐畢察, 酬酢之際, 體用渾然, 雖或使之任至重而處所難, 亦沛然行其所無事而已矣, 又何疑之不決而氣之不完哉? (縱言至此, 亦可謂躐等矣. 然以閤下之明, 勉而進之, 恐不足以爲難也. 此其與外學所謂廓然而一悟者, 雖未知其孰爲優劣, 然此一而彼二, 此實而彼虛, 則較然矣. 就使其說有實非吾儒之所及者, 是乃所以過乎大中至正之矩, 而與不及者亡以異也. 窮極幽深, 過也, 反倫悖理, 不及也. 蓋大本旣立, 準則自明, 此孟子所以知言, 而詖淫邪遁接於我者皆不能逃其鑒也. 生於其心, 害於其政, 發於其政, 害於其事, 可不戒哉!可不懼哉!
愚意如此, 不識高明以爲如何? 如其可取, 幸少留意焉, 旣以自任, 又以是爲格非定國之本, 則斯言之發, 庶不得罪於君子矣. 或未中理, 亦乞明賜誨喩, 將復(3-1270)思而請益焉, 固無嫌於聽納之不弘也. 孤陋寡間, 企望之切.
中國所恃者德, 夷狄所恃者力. 今慮國事者大抵以審彼己․較强弱爲言, 是知夷狄相攻之策, 而未嘗及中國治夷狄之道也. 蓋以力言之, 則彼常强, 我常弱, 是無時而可勝, 不得不和也. 以德言之, 則振三綱, 明五常, 正朝廷, 勵風俗, 皆我之所可勉, 而彼之所不能者, 是乃中國治夷狄之道, 而今日所當議也. 誠能自勵以此, 則亦何以講和爲哉? 愚之所憂, 獨恐力旣不振, 德又不修, 則曰戰曰和, 俱無上策耳.
悅親有道, 在於誠身, 誠身有道, 在乎明善. 今和戰殊途, 兩宮異論, 秋防已迫, 恐誤大計. 蓋由誠身未至, 自治未力, 無以取信於親而然耳. 必欲違令行義, 以圖事功, 其勢甚逆而難. 孰若誠身幾諫, 以冀感悟, 其理至順而易哉?
왕상서에게 답함(7월 17일) 答汪尙書 七月十七日
【해제】편년고증(p.4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4년(무자; 1168, 39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여여숙이 기록한 「이선생어」에 보이는데, 그곳에서 옛날 주무숙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으므로 이것에 근거하여 말한 것입니다”고 했다.
저의 어리석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멋대로 좁은 견해를 말씀드렸습니다. 당신께서 내려주신 가르침과 답안을 받고 반복해서 맛보며 우러러 탄복함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니 감히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는 육경에 있으니 어찌 꼭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내려준 가르침처럼 역시 요점이 되는 말은 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군자들 역시 그것(불교)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빠져드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육경에서 구하는 것은 본성을 알고 천리를 아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도(불교)를 따르면 머리를 조아려 글을 받는 수고로움은 없지만 그 효과는 있습니다’고 합니다. 그의 견해는 진실하지만 과도한 점도 모자란 점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군자들은 이미 샛길을 좋아하고 속히 일을 이루려는 마음에 빠져 그렇게 구하는 것이 도를 해친다는 사실은 살피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또 왕왕 왕도를 이루는 일과 집안의 사적인 일에 얽매이고, 음악 소리와 여색 권세와 이로움의 즐거움에 빠져 날마다 힘을 써도 역시 부족합니다. 이 때문에 비록 지극한 도는 육경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할 겨를이 없으니 저것에 한번 마음을 쏟아 만에 하나라도 요행이 있기를 구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필이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것입니다만 그러나 저는 그것이 엄격하지 않음을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만약 “필”을 “가”로 바꾼다면 아마 거의 근사할 것 같습니다. “불필”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익한 말 같습니다. “불가하다”고 말하는 것은 해가 되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멉니다. 만약 오훼를 먹여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기를 반드시 “먹을 수 없다”고 말하지, “먹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생각은 이와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두 소씨의 학문은 왕씨와 동류라고 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제가 천박한 글을 따로 아뢰지 않아 그 뜻이 매우 분명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니 뒤에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또 구양수 사마광은 소씨와 같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런 견해를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양수와 사마광의 학문은 성현의 높은 이룸이니 사실 말학이 감히 의론할 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고 지키는 것은 모두 유자의 옛것을 잃지 않은 것으로 단지 미진한 바가 있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왕씨와 소씨 같은 경우에는 모두 석가와 노자를 성인으로 여기고 있으니 유자의 학문에 순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와 같은 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기에서 우리 유학은 얻을 것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 왕씨는 지루하고 천착하여 더욱 의미가 없으며, 심지어는 거의 배우에 가깝습니다. 본래는 대중을 미혹하기에도 부족하고 단지 한 때 군주에 취합할 뿐으로 이익과 세력을 빌어 행한 것입니다. 이미 심해지자 특히 여러 노선생들의 배척과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귀산이 호문정께 보낸 서신과 소자장에게 회답한 서신에서 그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의 세력이 곤궁하고 화는 지극히 크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사람들마다 알 고 있습니다. 소씨의 말에 관해서 말하자면, 고원한 것은 유와 무를 드나들면서도 굽이굽이 의리를 이루며 (예컨대 『주역』의 성명음양, 『상서』의 인심도심, 『고사』의 중일성선, 『노자』의 도기중화와 같은 것들), 천근한 것은 이로움과 폐해를 진술하여 인정에 간절하고 가까우니 (소씨의 이러한 의론은 이루 다 거론할 수조차 없습니다. 또 『논어』에 근거하면 동파의 논의는 양화에 보이고, 자유의 논의는 자서에게 입혔는데 모두 이해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식과 재변은 도모하면 기개가 되고 또 떨쳐 빛을 발할 수 있고 장황하니 듣는 사람은 흔연히 기뻐하며 싫증낼 줄 모릅니다. 왕씨와 비교할 바 아닙니다. 그러나 도학을 말하는데 있어서는 대본을 잃고, (예컨대 앞의 주에서 성명에 관한 여러 설명은 대부분 사사로운 뜻에서 나온 것으로 불교와 도가를 섞어 말한 것입니다. 성명의 학설은 더욱 우습습니다. 저는 일찍이 노자를 변설한 한 문단이 있는데 지금이 절하며 올리니 그 대강의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을 논할 때는 권모를 숭상하며, (예컨대 양화 자서의 일에 대하여 이것으로 성인을 논하고 있으니 그 바닥에 숨겨진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화를 팔고 본실을 잃고 통달을 귀하게 여기며 명검을 천하게 여기니 이것은 그가 천리를 해치고 인심을 어지럽히며 도술을 방해하고 풍교를 퇴폐시킨 것입니다. 또 어찌 모두 왕씨 아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그 자신이 그의 무리와 함께 당시에 그리 뜻을 얻지 못하여 이로움과 권세로 보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학설이 비록 실행되더라도 그리 오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릇 이러한 우려와 해로움을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노선생들께서 제쳐두고 의론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지금 당세에 실행된다면 역시 왕씨처럼 크게 성행할 것이니 그 화가 왕씨의 수준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교를 주장하는 사람 역시 아무 걱정 없는 듯 아무 말 없으면 안 됩니다. (『귀산집』에 있는 잡설 몇 단락은 소씨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당시 실로 이미 이러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정씨의 어록에서 현량을 논한 곳 역시 지목한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왕씨의 학문은 비록 공허한 것을 담론하지만 뛰어난 것이 없으며 비록 공리에 급급하지만 기변이 적어 지극히 비루하여 설앙의 무리와 같습니다. 채경이 비록 명목상으로는 왕씨를 추존하지만 그러나 간샇하고 거만하여 천하를 패란케 한 자들이 모두 금릉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귀산이 논한 鳬鷖詩는 빌려다 호를 삼은 것입니다.) 소씨 같은 경우는 자신을 제약하는 것이 이미 형공 만큼 엄격하지 못하고 그의 학술의 요체는 공리를 잊지 못하고 속이고 숨기는 것이 과도합니다. 그의 무리인 진관이나 이천과 같은 부류는 모두 허망부탄하고 경박하여 사류와 맞지 않고 종횡가의 서로 어르고 달래는 변설로 선동하여 그의 학설을 유지하며 예의와 염치가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비록 그의 세력과 이득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못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방종을 즐기고 구속과 검속을 싫어하는 것이 이미 분연히 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뜻을 얻었다면 채경이 했던 것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인들은 한갓 이미 이와 같은 것에 근거하여 논했기 때문에 소씨는 근세의 명경의 반열에 놓일 수 있었고, 군자는 즐거이 타인의 훌륭한 점을 이루어 주느라 역시 아직 드러나지 않은 화를 거슬러 탐구하여 기롱하고 폄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학의 사특함과 올바름의 차이를 논하는데 있어서 그 구별은 털끝만한 작은 차이에 있으니 비록 너그러이 하고 싶지만 그러나 사사로이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왕씨만을 폄하하기 위해 두 소씨를 구부려 빌려주는 것이야말로 도술이 밝아지지 않고 이단이 더욱 왕성해지는 이유가 사실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저는 왕씨가 다시 살아나 그의 입은 침묵하지 않고 그의 마음은 굴복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熹不揆愚鄙, 妄陳管見, 伏蒙高明垂賜誨答, 反復玩味, 欽佩無忘. 然有所疑, 敢不自竭. 道在六經, 何必他求, 誠如台諭, 亦可謂要言不煩矣. 然世之君子亦有雖知其爲如此而 不免於淪胥者, 何哉 以彼之爲說者曰, 子之所求於六經者, 不過知性知天而已. 由吾之術, 無屈首受書之勞而有其效. 其見解眞實, 有過之者, 無不及焉. 世之君子旣以是中其好徑欲速之心, 而不察乎它求之賊道, 貴仕者又往往有王務家私之累, 聲色勢利之娛, 日力亦不足矣, 是以雖知至道不外六經而不假求, 不若一注心於彼而徼幸其萬一也. 然則‘何必’云者正矣, 而熹竊恨其未嚴也. 若易‘必’以‘可’, 可儻庶幾乎. 蓋不必云者, 無益之辭也. 不可云者, 有害之辭也. 夫二者之間, 相去遠矣. 如烏喙食之而殺人, 則世之相戒者必曰不可食, 而未有謂不必食而已者也. 妄意如此, 不審高明以爲如何?
又蒙敎喩以兩蘇之學不可與王氏同科, 此乃淺陋辭不別白, 指不分明之過, 請復陳之於後. 而來敎又以歐陽․(3-1272)司馬同於蘇氏, 則熹亦未能不以爲疑也. 蓋歐陽․司馬之學, 其於聖賢之高致, 固非末學所取議者, 然其所存所守, 皆不失儒者之舊, 特恐有所未盡耳. 至於王氏․蘇氏, 則皆以佛老爲聖人, 旣不純乎儒者之學矣, (非惡其如此, 特於此可驗其於吾儒之學無所得.) 而王氏支離穿鑿, 尤無義味, 至於甚者, 幾類俳優. 本不足以惑衆, 徒以一時取合人主, 假利勢以行之, 至於己甚, 故特爲諸老先生之所排詆. (龜山與胡文定書及答蕭子莊書可見其意矣.) 在今日則勢窮禍極, 故其失人人得見之. 至若蘇氏之言, 高者出入有無而曲成義理, (如『易』之性命陰陽, 『書』之人心道心, 『古史』之中一性善, 『老子』之道器中和.) 下者指陳利害而切近人情, (蘇氏此等議論不可殫擧, 且據論語, 則東坡之論見陽貨, 子由之論彼子西, 皆以利害言之也.) 其智識才辨, 謀爲氣槪, 又足以震耀而張皇之, 使聽者欣然而不知倦, 非王氏之比也. 然語道學則迷大本, (如前註中性命諸說, 多出私意, 雜彿老而言之. 性命之說尤可笑, 熹嘗辨老子說中一段, 今以拜呈, 可見其梗槪矣.) 論事實則尙權謀, (如陽貨․子西事, 乃以此論聖人, 可見其底蘊矣.) 衒浮華, 忘本實, 貴通達, 賤名檢, 此其害天理․亂人心․妨道術․敗風敎, 亦豈盡出王氏之下也哉? 但其身與其徒皆不甚得志於時, 無利勢以輔之, 故其說雖行而不能甚久. 凡此患害, 人末盡, 故諸老先生得以置而不論. 使其行於當世, 亦如王氏之盛, 則其爲禍不但王氏而已, 主名敎者亦不得恝然而無言也. (歸山集中雜說數段, 爲蘇氏發也. 當時固已慮此矣. 程(3-1273)氏語錄中論賢良處 亦似有所指.) 蓋王氏之學雖談空虛而無精彩, 雖急功利而少機變, 其極也陋, 如薛昻之徒而已. 蔡京雖名推尊王氏, 然其淫侈縱恣, 所以敗亂天下者, 不盡出於金陵也. (歸山所論鳬鷖詩, 乃其所假以爲號耳.) 若蘇氏, 則其律身已不若荊公之嚴, 其爲術要未忘功利而詭秘過之. 其徒如秦觀, 李廌之流, 皆浮誕佻輕, 士類不齒, 相與扇縱橫捭闔之辨以持其說, 而漠然不知禮義廉恥之爲何物. 雖其勢利末能有以動人, 而世之樂放縱․惡拘檢者, 已紛然向之. 使其得志, 則凡蔡京之所爲, 未必不身爲之也. 世徒據其已然者論之, 是以蘇氏猶得在近世名卿之列, 而君子樂成人之美者, 亦不欲逆探未形之禍, 以加譏貶. 至於論道學邪正之際, 則其辨有在豪釐之間者, 雖欲假借而不能私也. 今乃欲專貶王氏而曲貸二蘇, 道術所以不明, 異端所以益熾, 實由於此. 愚恐王氏復生, 未有以黙其口而厭其心也.
망녕되고 참람하여 극언이 여기까지 달했는데 합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제가 전에 전해 드린 몇 가지 책의 설명을 취해 보십시오. 합하의 현명함으로 천리를 붙잡아 인욕을 바로잡으며 정도에 근거하여 이단을 내치면 그들 역시 장차 어찌 그 실정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제가 우매하고 무능한 사람이지만 어찌 그 힘이 부족한줄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불끈 분을 내도 그칠 수 없으니 역시 여기에서 그칠 뿐입니다. 천하에 어찌 두 가지 도가 있겠습니까?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여여숙이 기록한 「이선생어」에 보이는데, 그곳에서 옛날 주무숙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으므로 이것에 근거하여 말한 것입니다. “따라 유학했다”는 것은 존경의 표현이고, 스승과 제자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범내한은 두 분 선생께, 호문정은 삼군자에게, 주희는 모두 이 문자를 썼습니다. 하지만 두 분 선생은 강절을 너무 중시한 것 같아 “함께”라는 말로 고치려고 했지만, 이것은 또 너무 가벼운 것 같으니 따로 아래에 어떤 글자를 쓰는 것이 마땅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정과 소옹의 학문은 실로 서로 다르지만 그러나 두 분 선생은 강절을 지극히 높였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도를 믿음에 의혹이 없고 이단이 섞여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공과 횡거의 사이에 반열을 올려 두고 있으니 역시 그의 도가 다르다고 해서 곧바로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화정의 말은 아무래도 맹자가 백이 이윤을 공자와 같은 도가 아니라고 비유한 것과 같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러한데,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강절의 학문은 깊고 은미한 것을 들춰내고 있으니 불교 노자의 말과 어찌 한 두 가지 비슷한 것이 없으리오? 그러나 탁연히 자신하여 오염된 것이 없으니 이것은 그의 소견에 분명 내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공이 명교를 지키고 싶으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또 간격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강절을 논하는 것이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더불어 가르침을 구합니다.
狂妄僭率, 極言至此, 恐閤下未以爲然. 胡不取熹前所陳者數書之說而觀之也? 以閤下之明, 秉天理以格人欲, 據正道以黜異端, 彼亦將何所遁其情哉? 熹之愚眛么麽, 豈不知其力之不足? 所以慨然發憤而不能已, 亦決於此而已矣, 天下豈有二道哉?
受學之語見於呂與叔所記二先生語中, 云昔受學於周茂叔, 故據以爲說. ‘從(3-1274)遊’蓋所尊敬而不爲師弟子之辭, 故范內翰之於二先生, 胡文定之於三君子, 熹皆用此字. 但二先生於康節, 誠似太重, 欲改爲‘與’, 又似太輕, 不知別下何字爲當. 更乞示誨, 幸甚. 程․邵之學固不同, 然二先生所以推尊康節者至矣. 蓋以其信道不惑, 不雜異端, 班於溫公․橫渠之間, 則亦未可以其道不同而遽貶之也. 和靖之言, 恐如孟子言伯夷․伊尹之於孔子, 爲不同道之比. 妄意其然, 不識台意以爲然否? 抑康節之學抉摘窈微. 與佛老之言豈無一二相似? 而卓然自信, 無所汚染, 此其所見必有端的處. 比之溫公欲護名敎而不言者, 又有間矣. 因論康節及此, 幷以求敎.
(二)之: 原作‘銳’, 磯右引改.
(三)紛: 考異云一作‘歙’.
왕상서에게 답함(11월 16일) 答汪尙書 十一月旣望
【해제】이 글은 건도 4년(무자; 1168, 39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염계와 하남이 서로 주고받을 즈음 말학은 감히 의론할 바가 아니었습니다”고 했는데, 네 번째 편지를 이어 주돈이와 이정의 학술 연원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답왕상서」제6서에서 “이정과 주렴계의 관계는 횡거와 범문정의 관계와 같을 뿐입니다. 선각들이 서로 전수한 비의를 후학들이 반드시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고 했는데, 이는 제4서와 제5서를 이은 것이다. 또 제4, 5서는 소씨 학문의 잘못을 자주 논하고 있고, 제6서의 첫머리에서도 “지난 봄에 보내주신 편지에서 소씨의 학문에 관해 말씀하시니”라고 했으므로 주자와 함께 소씨 학문의 잘못을 논한 편지는 당연히 제6서 앞이어야 하고, 제6서 주에서 기축년이라고 했으니, 제4, 5서에서 소씨의 학문을 논한 것은 당연히 무자년에 앞선 해임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제5서의 주에 “11월 기망”이라 한 것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별지에서 타이르고 가르쳐 준 것이 실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 근래 편지를 올린 뒤로 저는 두렵고 송구하여 꾸지람과 책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찌 고명하신 당신께서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제가 경복하고 탄모함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매우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글자 하나 틀린 것에 대하여 그것의 원인을 추론하고 그것의 종극을 궁구하면 아마도 그 잘못은 한 자에 그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조금 더 유의해 주십시오. 염계와 하남이 주고받을 즈음에 대하여 말학인 제가 감히 의론할 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자취를 논하자면, 보내 주신 가르침은 그 사실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 감히 명을 받들어 고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시 바라건대 『통서』와 『태극도』 등을 틈 있을 때 시험 삼아 한번 연구하고 맛보시면 조금 도움이 있을 것이니 그런 후에 이정 선생이 부자(주돈이)에게 한 것은 공자가 노담과 담자 장홍에게 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別紙諄誨, 良荷不鄙. 自頃致書之後, 方竊悚懼, 以俟譴訶, 豈意高明不以爲 罪而虛受之, 此眞熹所敬服歎慕而不能已者, 幸甚幸甚!然所謂一字之失者, 若推其所自來, 究其所終極, 恐其失不但一字而已. 更望少留意島, 則熹之願也. 濂溪․河南授受之際, 非末學所敢議. 然以其迹論之, 則來敎爲得其實矣, 敢不承命而改焉. 但通書太極圖之屬, 更望暇日試一硏味, 恐或不能無補萬分, 然後有以知 二先生之於夫子, 非若孔子之於老聃․郯子․萇弘也.
소씨의 학문이 사특한 것인지 바른 것인지에 대한 변론은 끝내 마음에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전에 드린 말씀에서 그가 배운 유학은 지극하지 못하여 편벽된 말과 과도한 말 바르지 못한 말과 궁색해서 숨는 말의 지경으로 흘러가버렸다고 논했습니다. 보내 주신 가르침을 제가 음미해 보고 그가 배운 불교는 정밀하지 못하고 지모와 언어의 사이에 막혔음을 병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말은 많아도 더욱 합치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비록 선학을 내쳤다 한들, 어찌 하늘과 인간의 의미를 밝히고 성명의 근원을 추단하여 황탄하고 부허한 학설을 깨트리고 올바른 도에 되돌아 올 수 있었겠습니까? 「대비각」, 「중화원기」와 같은 것들은 그들(불교)의 조악한 것만을 내치고 그들의 정밀한 것은 보듬어 싸며, 그들의 외피에 근거하여 그들의 내면을 공격하니 이것은 자제를 거느리고 부모를 공격하는 것이고 지엽을 믿으면서 근본을 의심하는 것이니 역시 어찌 말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근세에 불교를 공격했던 한유 구양수 손복 석개 같은 사람은 올바른 것이었고, 귀산은 오히려 한 잔의 물로 한 수레 가득 섶을 실은 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하물며 소씨처럼 바르지 않은 것으로 바르지 않은 것을 공격하는 것은 헝클어진 삼을 묶고 기름을 부어 가는 것과 같으니, 단지 자신을 모두 태운 후에야 그칠 수 있을 뿐입니다.
惟是蘇學邪正之辨, 終未能無疑於心. 蓋熹前日所陳, 乃論其學儒不至而流於詖淫邪遁之域. 竊味來敎, 乃病其學佛未精, 而滯於智慮言語之間, 此所以多言而愈不合也. 夫其始之闢禪學也, 豈能明天人之蘊, 推性命之原, 以破其荒誕浮虛之說而反之正哉? 如大悲閣․中和院記之屬, 直掠彼之粗以角其精, 據彼之外以攻其內, 是乃率子弟以攻父母, 信枝葉而疑本根, 亦安得不爲之詘哉? 近世攻釋氏者, 如韓․歐․孫․石之正, 歸山猶以爲一杯水救一車薪之火, 况如蘇氏以邪攻邪, 是(3-1276)束縕灌膏而往赴之也, 直以身爲燼而後已耳.
또 보내 주신 편지에서 소씨는 습관과 기질의 폐단이 있어 비록 도를 모르지만 사특한 마음은 없어 왕씨처럼 천착과 부회로 자신의 사사로움과 사특한 학문을 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학문은 도를 아는 것이 근본이며 도를 알면 학문의 순수함과 마음의 올바름은 행사에 나타나고 언어에 드러나니 역시 어디에 가도 그 올바름을 얻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왕씨와 같은 사람은 처음 학문할 때 양웅과 한유를 뛰어 넘고 안자와 맹자의 자취를 가리려고 했으니, 애초부터 어찌 사특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단지 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순수하지 않았고 마음을 쓰고 일에 나아가는 것이 드디어 사특한 곳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또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크게 천착하고 부회한 글을 지으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성인의 문하에 무거운 죄를 지은 것입니다. 소씨의 학문은 비록 왕씨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는 도를 알지 못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점은 (왕씨와) 같습니다. 배워도 도를 알지 못하고 그 마음에는 실로 취할 만한 법이 없는데도 스스로 바르다고 생각하고 또 옳다고 여기며 제멋대로 말하니, 그가 왕씨가 되지 않은 것은 단지 천하가 아직 그의 화를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천착 부회의 기교는 여래교에서 일컫는 성불을 논하고 노자를 설파하는 것과 같으니 왕씨가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은 바르지 않아 탕 임금과 무왕이 찬탈하고 시해했다고 하고, 순욱을 크게 칭찬하여 성인의 문도라고 평가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무릇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그의 사심과 사특함을 드러낸 것이고 어떤 거리낌도 없으니 결코 왕씨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來敎又以爲蘇氏乃習氣之弊, 雖不知道而無邪心, 非若王氏之穿鑿附會, 以濟其私邪之學也. 熹竊謂學以知道爲本, 知道則學純而心正, 見於行事, 發於言語, 亦無往而不得其正焉. 如王氏者, 其始學也, 蓋欲凌誇揚․韓, 掩迹顔․孟, 初亦豈遽有邪心哉? 特以不能知道, 故其學不純, 而設心造事遂流入於邪. 又自以爲是, 而大爲穿鑿附會以文之, 此其所重得罪於聖人之門也. 蘇氏之學雖與王氏若有不同者, 然其不知道而自以爲是則均焉. 學不知道, 其心固無所取則以爲正, 又自以爲是而肆言之, 其不爲王氏者, 特天下未被其禍而已. 其穿鑿附會之巧, 如來敎所稱論成佛, 說老子之屬, 蓋非王氏所及. 而其心之不正, 至乃謂湯․武簒弑而盛稱筍彧, 以爲聖人之徒. 凡若此類, 皆逞其私邪, 無復忌憚, 不在王氏之下.
가령 그렇지 않다고 하고 사실을 조사하여 그의 죄에 차등을 둔다 해도 역시 조금 경감하는 조목이 다를 뿐이니 어찌 이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에서 말하기를 “하늘이 죄 있는 사람을 토벌하리니 오형은 다섯 가지 죄목에 쓰리라”고 한 것이 형법의 본의입니다. 만약 천리가 밝지 못하여 준칙이 없다면 허둥지둥 사실을 조사하는 것만을 일삼을 것이고, 사사로운 감정을 따르고 법을 폐지하며 악을 제멋대로 행하여 간사함을 열어 주는 것이 어쩔 수 없겠지요? 양주는 학문을 하여 의리를 행한 사람이지만 자신만을 위하는 측면에 치우친 사람이고, 묵적은 학문하여 인을 행한 사람이지만 겸애로 흐른 사람입니다. 본래 그의 마음 씀씀이에 어찌 사특함이 있었겠습니까? 모두 선을 행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단지 본원의 사이에 미미하게 작은 잘못이 있으니 이 때문에 맹자는 그 화를 미루어 말하기를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는 금수의 지경에 빠지게 한다고 하여 사절하고 이단으로 내치는데 조금도 가차가 없었습니다. 맹자 또한 어찌 그 사실을 살피지 않고 과도하게 이런 각박한 논의를 했겠습니까? 기미의 사이에서 그들이 천리를 해치고 인심을 해치며 사람을 이단에 빠트리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하니 형명가의 교묘하게 속이는 술수처럼 그 화는 잔절하여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그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는데 부득불 이렇게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에서 말하기를 “나는 상제가 두려워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없다”고 했고, 또 “내가 하늘을 따르지 않으면 그 죄는 모두 같다”고 했는데 맹자의 마음 역시 이와 같을 뿐입니다. 이렇게 논한다면 오늘날의 일은 왕씨는 겨우 신 한 의 연이 되기에 족할 뿐이지만, 소씨의 학문은 옳지 않아도 말은 이치가 있으니 양주 묵적과 비교할 바 아닙니다. 저는 맹자가 다시 태어나더라도 취사와 선후가 분명 있을 것이며 보내신 편지처럼 말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구한 제가 참월하여 변론을 그만 두지 못했는데, 감히 스스로 옛 사람을 크게 꾸짖어 꼭 그렇다는 응낙을 얻으려고 한 것은 아니고, 사실 고인의 치지격물의 학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로움을 구했으니 역시 고명하신 당신께 도움이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借曰不然, 而原情以差其罪, 則亦不過稍從末減之科而已, 豈可以是爲當然而莫之禁乎? 書曰..‘天討有罪, 五刑五用哉’, 此刑法之本意也. 若天理不明, 無所準則, 而屑屑焉惟原情之爲務, 則無乃徇情廢法而縱惡以啓姦乎? 楊朱, 學爲義者也, 而偏於爲我, 墨翟, 學爲仁者也, 而流於兼愛. 本其設心, 豈有邪哉? 皆以善而爲之耳. 特於本原之際微有豪釐之差, 是以孟子推言其禍, 以爲無父無君而陷(3-1277)於禽獸, 辭而闢之, 不少假借. 孟子亦豈不原其情而過爲是刻核之論哉? 誠以其賊天理․害人心於幾微之間, 使人陷溺而不自知, 非若刑名狙詐之術, 其禍淺切而易見也. 是以拔本塞源, 不得不如是之力. 書曰, ‘予畏上帝, 不敢不正’, 又曰, ‘予弗順天, 厥罪惟均’, 孟子之心, 亦若是而已爾. 以此論之, 今日之事, 王氏僅足爲申․韓․儀․衍, 而蘇氏學不正而言成理, 又非楊墨之比. 愚恐孟子復生, 則其取舍先後必將有在, 而非如來敎之云也
區區僭越, 辨論不置, 非敢自謂工訶古人而取必於然諾, 實以爲古人致知格物之學有在於是, 旣以求益, 而亦意其未必無補於高明也.
왕상서에게 보냄(기축) 與汪尙書 己丑
【해제】이 편지에는 기축년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즉 건도 5년(기축; 1169, 40세)의 편지이다.
작년 봄 편지를 보내 주시면서 소씨의 학문에 대하여 언급하며 세상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문장의 묘미만 취하려 하고 애초부터 여기에서 도를 구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무릇 학자가 도를 구하는 것은 사실 소씨의 문장에서 하는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미 그의 문장을 취한다면 문장이 서술하는 것에 사특한 것과 바른 것이 있고 옳고 그른 것이 있으니, 이 역시 모두 도가 있는 것으로 도를 구하는 사람이 강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론하여 그것의 잘못을 제거하고 옮음을 보존하면 도는 실로 여기에 있게 되니 어찌 불가함이 있으리오? 만약 오직 그의 문장만을 취하고 다시는 이치의 옳고 그름을 논의하지 않으면 이것은 도는 도 자체이고 문장은 문장 그 자체인 것입니다. 도 밖에 사물이 있으면 실로 도라고 할 수 없으며, 문장에 이치가 없으면 또 어찌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도는 어디에 가도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장에 나아가 도를 구하면 문장과 도 두 가지를 함께 얻어 일관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역시 두 가지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주장하는 것이 없고 마음 밖에서 고르는 것이 없으면 헛된 자랑과 위태로운 편견이 들어가 그의 앎과 사고를 어지럽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드뭅니다. 하물며 그가 자임하는 것은 문장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그의 득실을 고찰할 수 없으니 제멋대로 천하에 도덕을 말하는 것을 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의 견해는 이와 같으니 누차 가르침을 받아도 끝내 바꿀 수 없습니다.
去春賜敎, 語及蘇學, 以爲世人讀之, 止取文章之妙, 初不於此求道, 則其失自可置之. 夫學者之求道, 固不於蘇氏之文矣, 然旣取其文, 則文之所述有邪有正, 有是有非, 是亦皆有道焉, 固求道者之所不可不講也. 講去其非以存其是, 則道固於此乎在矣, 而何不可之有? 若曰惟其文之取, 而不復議其理之是非, 則是道(3-1278)自道, 文自文也. 道外有物, 固不足以爲道, 且文而無理, 又安足以爲文乎? 蓋道無適而不存者也, 故卽文以講道, 則文與道兩得而一以貫之, 否則亦將兩失之矣. 中無主, 外無擇, 其不爲浮誇險詖所入而亂其知思也者幾希. 況彼之所以自任者, 不但曰文章而已. 旣亡以考其得失, 則其肆然而談道德於天下, 夫亦孰能禦之? 愚見如此, 累蒙敎告, 終不能移也.
또 이정이 염계에게 나아간 것은 횡거가 범문정에게 나아간 것과 같을 뿐이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선각들이 서로 전하는 비의를 후학이 엿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시를 외우고 그의 책을 읽어보면 주돈이와 범문정의 조예는 실로 다르며, 이정과 장재의 깨달음 역시 다릅니다. 마치 중니와 안자가 음풍농월하며 돌아오는 것을 즐겼다는 것은 모두 당시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전해 받았던 것으로 적당하고 친절한 곳입니다. 후일 이정 선생이 후학들에게 제시한 것 역시 부차적 의미로 간주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행장에서 말하는 육경으로 되돌아와 구한 후에 얻었다는 것은 단지 공용의 대전(功用之大全)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가 (성인의 도에) 들어간 곳에 관해서는 본래 염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횡거가 문정에게 나아간 것은 이와 달리 아마도 당시 대략 그 단서를 펴 보인 것일 뿐입니다. 수학했다는 말은 (이정)선생 스스로 하신 말씀이니 이것을 어찌 스스로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又蒙喩及二程之於濂溪, 亦若橫渠之於范文正耳. 先覺相傳之秘, 非後學所能窺測. 誦其詩, 讀其書, 則周․范之造詣指固殊. 而程張之契悟亦異. 如曰仲尼․顔子所樂, 吟風弄月以歸, 皆是當時口傳心受, 的當親切處. 後來二先生擧似後學, 亦不將作第二義看. 然則行狀所謂反求之六經然後得之者, 特語夫功用之大全耳. 至其入處, 則自濂溪不可誣也. 若橫渠之於文正, 則異於是, 蓋當時粗發其端而已. 受學乃先生自言, 此豈自誣者耶?
대저 근세의 여러 공들은 염계에 대한 이해가 매우 일천한데, 예컨대 여씨의 『동몽훈』에서 그가 일찍이 『통서』를 지었다고 기록하면서 “그의 의도가 고원하다”고 했습니다. 『통서』와 태극에서 한 설명은 천리의 근원을 밝히고 만물의 시작과 끝을 궁구한 것인데 어찌 의도해서 한 것이겠습니까? 또 어찌 고하와 원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 임황중이 구강에서 그가 지은 사당기의 문장을 보내왔는데, ‘렴’자의 편방에 대하여 지극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에 해가 되니 더욱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그리고 『통서』 뒤의 차례가 맞지 않은데, 포종맹의 「묘갈명」 전문을 싣고 있어서 그 해가 더욱 심합니다.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었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따로 차례를 배열하여 간행하려고 도모하고 있는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용릉의 기문도 역시 이해할 수 없으니 우리 도의 쇠락이 오늘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를 어찌할까요!
大紙近世諸公知濂溪甚淺, 如呂氏童蒙訓記其嘗著通書, 而曰用意高遠. 夫通書太極之說, 所以明天理之根源, 究萬物之終始, 豈用意而爲之? 又何高下遠近之可道哉? 近林黃中自九江寄其所撰祠堂記文, 極論‘濂’字偏旁, 以爲害道, 尤可駭歎. 而通書之後, 次序不倫, 載蒲宗孟碣銘全文, 爲害又甚. 以書曉之, 度未易(3-1279)入. 見謀於此別爲叙次而刊之, 恐却不難辦也. 舂陵記文亦不可解, 此道之衰, 未有甚於今日, 奈何奈何!
왕상서에게 답함 答汪尙書
【해제】이 글은 건도 8년(임진; 1172, 43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태극도·서명은 근래 벗들과 논의하고 있는데, 일찍이 저는 이것에 대한 설명을 사적으로 기록한 것이 있으므로, 이번에 베껴 보냅니다. 근래 백공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는 지금까지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동래집을 살펴보면 여백공이 주자에게 회답한 제7서에서 “태극도해는 어제 장장(장식)과 의논했는데, 논의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로 훌훌 헤어졌습니다”(신묘년)고 하였다. 남헌문집에서 장식이 주자에게 회답한 제4서에서는 “백공에게 어제 편지를 받았는데 아직도 태극설의 체용 선후의 설명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신묘년)고 하였다. 백공이 주자에게 보낸 제13서에서 “본체가 우선이고 작용은 그 후 일이며, 드러나는 것은 먼저이고 은미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는 설명은 아마도 당시에는 이런 의미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신묘년)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태극도해를 논의 한 것이다. 주자가 장식과 여조겸에게 태극도를 보내 논의한 것은 경인년과 신묘년이니, 이 편지는 임진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연보에서도 역시 이 해에 배열하고 있다.
(제 생각이 미처) 미치지 못한 바에 가르침을 주시니 거듭 거듭 (저의 생각을) 개발해 주심이 정말 많았습니다. 여기에서 한가히 거처하며 도를 맛보고 조예가 날로 깊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겸허히 물러나 의탁하시고 스스로 이렇게 현명함과 지혜를 자랑하지 않으시군요. 구구한 저의 마음은 더욱 간절하고 기쁩니다. 이에 저의 천루함을 되돌아보니 이끌어주고 지지해 주는 일이 이제 부끄럽고 두려울 뿐입니다. 제가 생각해 보면 「동명」과 「서명」은 비록 같은 시기에 지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말과 의미가 가리키는 것과 기상이 미치는 것에 얕고 깊음과 넓고 좁음의 차이가 특별히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정의 문하에서는 「서명」만을 학자들에게 보여 가르치고 「동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는 「서명」의 말을 반복해서 완미하여 스스로 얻음이 있으면 마음은 넓고 이치는 분명하여 그 의미는 저절로 구분됩니다. 「동명」과 같은 것은 비록 오만한 기운을 기르고 과오를 꾸미는 잘못이 털끝만한 작은 틈에서 분별되어 나옴을 말하고 있으므로 후학에게 경계를 열어 보이는 의미 역시 간절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한계가 있고 하학 공부에 아직 미진한 것이 있으니 또 어찌 「서명」의 형이하부터 형이상까지 철저하고 일관되게 관통하는 (서명의) 의미와 함께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생각에 선현이 그것을 취하고 버린 뜻이 아마도 여기에서 나온 것인데 고명하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伏蒙垂敎以所不及, 反覆再四, 開發良多. 此足以見閒居味道, 所造日深, 而又謙虛退託, 不自賢智如此. 區區下懷, 尤切欣幸. 第顧淺陋, 不足以當誘掖之勤, 玆爲愧懼耳. 然竊思之, 東․西銘雖同出於一時之作, 然其詞義之所指, 氣象之所及, 淺深廣狹, 逈然不同. 是以程門專以西銘開示學者, 而於東銘, 則未之嘗言. 蓋學者誠於西銘之言反復玩味而有以自得之, 則心廣理明, 意味自別. 若東銘, 則雖分別長傲遂非之失於豪釐之間, 所以開警後學, 亦不爲不切, 然意味有窮, 而於下學功夫蓋猶有未盡者, 又安得與西銘徹上徹下․一以貫之之旨同日而語哉? 竊意先賢取舍之意或出於此, 不審高明以爲如何?
본체와 작용은 근원이 같고 드러난 것과 은미한 것에는 어떤 간격도 없다는 말을 근래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 말을 볼 때 대강대강 그럭저럭 보았는데, 자세히 완미하고서야 비로소 이 서문은 한 글자도 귀속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한 마디 말도 그 순서가 없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지극히 은미한 것은 이치이고 지극히 드러난 것은 형상이다. 본체와 작용은 근원이 같고, 드러난 것과 은미한 것에는 어떤 간격도 없다”고 한 것은, 이치로부터 말하면 바로 본체에 나아가면 작용이 그 안에 있다는 것으로 이른바 근원이 같은 것입니다. 현상으로부터 말하면 드러난 곳에 나아가도 은미한 것은 벗어날 수 없으니 이른바 간격이 없습니다. 그 문장의 논리가 엄밀하고 분명하여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않음이 이와 같습니다. 만약 이 점을 분명하게 안다면 「서명」이라는 글에 나아가서도 이른바 동일한 근원과 간격 없는 사실이 이미 마음과 눈 사이에 환하게 밝을 것이니, 역시 어찌 「동명」을 기다리고 난 후에야 만족하겠습니까? 만약 「동명」을 기다리고 난 후에야 만족스럽다면 본체와 작용의 드러남과 은미함은 판연히 다른 두 가지 사물로 구분되어 분명 각각 하나의 글이 되고 난 후에야 그 의미를 드러내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의 뜻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명하신 당신은 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至於體用一原․顯微無間之語, 則近嘗思之. 前此看得大段鹵莽, 子細玩味, 方知此序無一字無下落, 無一語無次序. 其曰 ‘至微者, 理也 : 至著者, 象也. 體(3-1280)用一原, 顯微無間’, 蓋自理而言, 則卽體而用在其中, 所謂一原也. 自象而言, 則卽顯而微不能外, 所謂無間也. 其文理密察, 有條不紊乃如此. 若於此看得分明, 則卽西銘之書, 而所謂一原無間之實已僚然心目之間矣, 亦何俟於東銘而後足耶? 若俟東銘而後足, 則是體用顯微判然二物, 必各爲一書, 然後可以發明之也. 先生之意, 恐不如此. 不審高明又以爲如何?
「태극도」와 「서명」은 근래 벗들과 토론했는데, 전에 저의 학설을 사적으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베껴 보내며 가르침을 구하려고 했는데 마치기도 전에 명중의 종이 와서 책을 요구했습니다. 남겨두고 싶지 않으니 후일 바로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근래 백공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는 지금까지 의심을 없애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모호하고 가려진지 오래되어 하루아침에 문득 그것을 분석하고 분명하게 깨우쳐 말하고 설명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 이전에 망녕되게 평이하게 지나가는 말을 논한 적이 있는데 칭찬하고 허락해 주심이 심히 지나쳐 더욱 황공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마치 먼저 견처가 있으면 평이함에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또 선가의 말 같으니, 저는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성인 문하에서의 가르침은 형이하의 것을 배워 형이상에 통달하는 것이고, 평이한 곳으로부터 강구하고 토론하여 생각을 쌓고 잠심하며 조용히 탐구하여 깊이 맛보기를 오래하면 점점 얻음이 있을 것이니 날마다 그 높고 깊음과 멀고 큼을 보아도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부자(이정)가 말씀하기를 훌륭한 학자는 말은 반드시 가까운 곳으로부터 구한다. 가까운 것을 쉽게 여기는 자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일은 말과 억지 추측으로 미칠 바가 아니니 반드시 먼저 견처가 있은 후에야 평이한 곳에 나아감이 있을 것이니, 그러면 이것은 먼저 형이상의 것에 통달하고 형이하의 것을 나중에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먼저 추호와 같은 작은 것을 살피고 난 후에 산악을 보는 것이고, 먼저 만석을 들고 난 후에 한 마리 메추리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무릇 도란 실로 언어와 억측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안자와 증자 이상으로 변화에 가까운 자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학문을 함에 처음 힘 써야할 것은 바로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론하며 힘껏 실천하여 기질을 변화시키고 도에 들어가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먼저 자기 스스로 막고 끊어 배우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이유 없이 홀연히 견처가 있기를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아무 쓸모없는 곳에 마음이 빠져 세월을 놀며 보내면서 끝내 성공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요행히 황홀한 사이에서 천리 인심과 서일 명토의 실질이 아무런 교섭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얻음이 있는 사람은 적당하고 만족스러운 것을 자사자리의 바탕으로 삼을 뿐입니다. 이것은 석씨의 화가 제멋대로 흘러 하늘에 이르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니, 뜻있는 선비가 숨어서 근심하고 크게 탄식하며 그들의 서적을 불태우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太極圖西銘近因朋友商確, 嘗竊私記其說. 見此抄錄, 欲以請敎, 未畢而明仲之僕來索書. 不欲留之, 後便當拜呈也. 然頃以示伯恭, 渠至今未能無疑. 蓋學者含糊覆冒之久, 一旦遽欲分剖曉析而告語之, 宜其不能人也.
又蒙語及前此妄論平易蹉過之言, 稱許甚過, 尤切皇恐. 然竊觀來意, 似以爲先有見處, 乃能造夫平易, 此則又似禪家之說, 熹有所不能無疑也. 聖門之敎, 下學上達, 自平易處講究討論, 積慮潛心, 優柔饜飫, 久而漸有得焉, 則日見其高深遠大而不可窮矣. 程夫子所謂善學者求言必自近, 易於近者非知言者也, 亦謂此耳. 今曰此事非言語臆度所及, 必先有見, 然後有以造夫平易, 則是欲先上達而後下學, 譬之是猶先察秋豪而後睹山岳, 先擧萬石而後勝匹雛也. 夫道固有非言語臆度所及者, 然非顔曾以上幾於化者, 不能與也. 今日爲學用力之初, 正當學文思辨(3-1281)而力行之, 乃可以變化氣質而入於道. 顧乃先自禁切, 不學不思, 以坐待其無故忽然而有見, 無乃溺心於無用之地, 玩歲愒日而卒不見其成功乎? 就使僥倖於恍惚之間, 亦與天理人心․叙秩命討之實了無交涉, 其所自謂有得者, 適足爲自私自利之資而已. 此則釋氏之禍橫流稽天而不可遏者, 有志之士所以隱憂浩嘆而欲火其書也.
옛날 「명도행장」을 읽을 때 그의 학행과 사업에 대한 기록이 수 천자에 이르지만 결국 그가 말씀한 것은 석씨를 힘껏 배척한 것에 불과하며 반드시 그들을 내친 후에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후에 여형공의 『가전』을 얻어 보니, 일찍이 그는 이정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정을 추존하고 칭찬하는 말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 사실을 살펴보니, 실로 그 점에서 남들 보다 크게 뛰어 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졸장에 이르러 그의 말을 읽어 보면 부처의 도와 성인이 합치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는 그의 스승과 학생 사이가 나누어지고 등지며 모순된 것이, 한쪽은 남쪽으로 한쪽은 북쪽으로 간 것과 같으니 당신께서는 평소 이러한 시비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 그것들이 하나의 근본을 갖게 하니 이것이 옳으면 그것은 그르고, 이것이 그르면 그들이 옳으니, 병립하며 두 가지 함께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우매하고 무지한 제가 인도하여 이끌어 주신 은혜를 잘못 입어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다했으니 저의 의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저의 광망함을 용서하시고 끝내 가르쳐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舊讀明道行狀, 記其學行事業累數千言, 而卒道其言不過力排釋氏, 以爲必闢之而後可以入道. 後得呂滎公家傳, 則以爲嘗受學於二程, 而所以推尊稱美之辭甚盛. 考其實, 亦誠有以大過人者. 然至其卒章而誦其言, 則以爲佛之道與聖人合, 此其師生之間分背矛盾, 一南一北, 不審台意平日於此是非之際何以處之? 天之生物, 使之一本, 此是則彼非, 此非則彼是, 蓋不容並立而兩存也.
愚味無知, 謀蒙誘進, 敢揭愚慮, 庶幾決疑. 伏望恕其狂易而終敎之, 幸甚幸甚.
왕상서에게 답하며 가묘를 논함(계사) 答汪尙書論家廟癸已
【해제】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9년(계사; 1173, 44세)의 편지이다.
묘제의 설명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저는 어제 진명중에게 부탁하여 『고금제가제의』를 빌렸는데, 그 이유는 바로 고루하고 과문한데다 물어 바로잡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구하여 자세하게 그 내용을 갖춘 후에 고명하신 당신에게 청하여 그 논의를 확정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저에게 물으시는 말을 받고 보니 저는 망연하여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보여준 두 가지 조목을 고찰해 보니, 지화의 제도는 비록 옛날의 제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의미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미진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화의 제도는 비록 옛날의 것을 고찰해 보면 간혹 그 법을 얻은 것도 있지만 그 의미를 잃은 것이 더 많습니다. 옛날 제후는 오묘를 두었는데 이른바 이소와 이목이란 것은 고조 이하 사세가 복을 입는 친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태조란 처음 봉읍된 임금이고 백세를 흘러도 훼손되지 않는 묘입니다. 지금 세상의 공후에게는 가(家)는 있지만 국(國)은 없으니 태조의 묘를 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화의 사묘는 단지 이소 이목을 말한 것으로 사세가 복을 입는 친함은 있지만 태조의 묘를 둘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옛 제도와 비록 다른 점이 있지만 실은 그 의미를 얻는데 있어서는 해가 없습니다. 또 비유하자면 옛날 천자의 삼공과 팔명은 봉지를 받아 나가게 된 후에 제후의 예를 쓸 수 있었습니다. 왕의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은 예에 있어서 오히려 싫어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공경도 역시 마땅히 제후의 예를 완전히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하 나라는 사묘를 사용하다가 자손에 이르러 오묘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오묘를 세우는 것은 역시 오세 이후의 일입니다. 처음 봉지를 받은 군주는 신위를 정동향으로 모시고 그 뒤에 그 수를 얻어 갖추는데, 오늘날 묘를 처음 세울 때처럼 바로 태조의 묘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정화의 제도는 모두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소 이목의 위에 고조의 부친까지 모두 헤아려 오세를 갖추었습니다. 이미 처음 봉지를 받은 군주도 아니고 또 이미 친함을 다하고 복은 끊겼는데 만약 오세를 갖추어 제사한다면 의리에 어찌 마땅함이 있겠습니까?
熹伏蒙垂問廟制之說, 熹昨託陳明仲就借古今諸家祭儀, 正以孤陋寡聞, 無所(3-1282)質正, 因欲講求, 俟其詳備, 然後請於高明, 以定其論耳. 不謂乃蒙下詢, 使人茫然不知所對. 姑以所示兩條考之, 竊謂至和之制雖若不合於古, 而實得其意, 但有所未盡而已. 政和之制則雖稽於古者, 或得其數, 而失其意則多矣. 蓋古者諸侯五廟, 所謂二昭二穆者, 高祖以下四世有服之親也. 所謂太祖者, 始封之君, 百世不毁之廟也. 今世公侯有家而無國, 則不得有太祖之廟矣. 故至和四廟, 特所謂二昭二穆, 四世有服之親, 而無太祖之廟, 其於古制雖若不同, 而實不害於得其意也. 又況古者天子之三公八命, 及其出封, 然後得用諸侯之禮. 蓋仕於王朝者, 其禮反有所厭而不得伸, 則今之公卿, 宜亦未得全用諸侯之禮也. 禮家又言, 夏四廟, 至子孫而五, 則是凡立五廟者, 亦是五世以後, 始封之君正東向之位, 然後得備其數, 非於今日立廟之初, 便立太祖之廟也. 政和之制, 蓋皆不考乎此, 故二昭二穆之上, 通數高祖之父以備五世. 夫旣非始封之君, 又已親盡而服絶矣, 乃苟以備夫五世而祀之, 於義何所當乎?
대부는 삼묘를 세운다는 것에 관하여 이를 주장하는 사람은 천자와 제후의 대부는 모두 같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천자의 대부와 제후의 대부는 품계와 서열의 수가 서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그 제도 역시 이와 같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오직 시종관 이상만이 천자의 대부라 할 수 있고, 제후의 대부에 관해서는 주와 진의 막직관만 해당될 뿐이니, (횡거 선생은 단지 경관에 그쳤으므로 온공은 관직은 제후의 대부에 비견되니 이미 고귀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어찌 고대의 제도에 얽매어 일등의 예를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화의 제도는 오로지 천자의 대부만을 법으로 삼은 것으로 역시 제도와 예의의 의미를 깊이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동궁 삼소로부터 그 이상은 대부가 된다고 한다면 의심컨대 그것은 미진합니다. 적사는 이묘이고 관사는 일묘다는 제도 역시 미비한 점이 있습니다. 정화의 제도는 실로 옛날 천자 제후의 대부는 동일한 등급이라는 학설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사실 가깝습니다. 하지만 대시종부터 승조관까지 함께 동일한 법도를 쓰는 것은 역시 높이고 내리는 구분을 너무 없앤 것 같습니다. 관직의 고하는 예와 지금이 서로 다르지만 그러나 명수는 지금의 품수에 준거하여 논하면 예의 등차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그 득실을 논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시행코자 한다면 정화의 예법을 오늘날 시행하면서 전혀 고치지 않는 것은 무릇 오늘날 벼슬하면서 묘당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어찌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른바 묘당이란 제도가 초략하여 이미 당 나라의 제도마저도 제도로 할 수 없거늘 하물며 고대의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예의를 좋아하는 선비들도 이 점을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至於大夫三廟, 說者以爲天子諸侯之大夫皆同. 蓋古者天子之大夫與諸侯之大夫品秩之數不甚相遠, 故其制可以如此. 若今之世, 則唯侍從官以上乃可於稱天子之大夫, 至諸侯之大夫, 則州鎭之幕職官而已爾. 橫渠先生止爲京官, 而溫公云官比諸侯之, 大夫則已貴. 是安可以拘於古制而使用一等之禮哉? 故至知之制專以天之大夫爲法, 亦深得制禮之意. 但其自東宮三少而上乃得爲大夫, 則疑未盡, 而適士二廟, 官師一廟之制, 亦有所未備焉耳. 政和之制固未必深考古者天子諸侯之大夫同爲一等之說, 然其意實近之. 但自大侍從至陞祖官並爲一法, 則亦太無隆殺之辨矣. 蓋官職高下, 則有古今之不同, 但以命數準今品數而論之, 則禮之
等差可得而定矣. 然此亦 論其得失而已, 若欲行之, 則政和之禮行於今日, 未之有改, 凡仕於今日而得立廟者, 豈得而不用哉? 但基所謂廟者, 制度草略, 已不能如唐制之盛, 而況於古乎? 此好禮之士所以未嘗不歎息於斯也.
그러나 정자의 말씀을 고찰해 보면, 고조는 상복을 입으니 제사지내지 않을 수 없고, 칠묘든 오묘든 간에 역시 고조에서 그치고, 삼묘든 일묘든 간에 정침에서 제사지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고조까지 제사를 모시지만, 그러나 가깝고 멀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의심컨대 이것이야말로 제사의 본의를 가장 잘 얻은 것입니다. 지금 『제법』을 고찰해 보면, 비록 제사는 반드시 고조까지 지내야 한다는 문구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월제와 향상(享嘗)의 구별이 있으니, 옛 사람들은 제사로 멀고 가까움 소략함과 가까움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는 큰 일이 있으면 자신의 임금을 잘 모시고 협제를 고조까지 지낸다고 하니, 이것은 3묘를 세워 고조까지를 제사하는 증거입니다. 보내주신 가르침에서 사가에서 합사한다는 문장을 의심하고 있음을 역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협제를 지내는 제도는 아직 자세히 상고할 수 없습니다.
묘제의 예법은 정씨도 옛날에는 없던 것이지만 단지 풍속을 따라 할 뿐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리에 해가되지 않으면 단지 사시의 제사로 간단하게 지내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모두 비루한 견해와 소문으로 들었던 것을 근거로 논의한 것이니 당신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고명하신 당신께서 판단하여 결정하시고 한 말씀 회답해 주어 시비를 결정할 수 있다면 저는 고마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또 정씨의 학설을 따라 정침에서 제사하는 의례의 초고를 완성하고 사가에서 시행하려고 했는데 해를 이어 상을 당하니 전혀 시험해 보지 못하여 감히 문득 절하고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조금 더 준비하여 바로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然考諸程子之言, 則以爲高祖有服, 不可不祭, 雖七廟五廟, 亦止於高祖, 雖三廟一廟, 以至祭寢, 亦必及於高祖, 但有疏數之不同耳. 疑此最爲得祭祀之本意. 今以祭法考之, 雖未見祭必及高祖之文, 然有月祭享嘗之別, 則古者祭祀以遠近爲疏數亦可見矣. 禮家又言, 大夫有事, 省於其君, 干祫及其高祖, 此卽可爲立三廟而祭及高祖之驗. 而來敎所疑私家合食之文, 亦因可見矣. 但干祫之制, 它未有可考耳.
墓祭之體, 程氏亦以爲古無之, 但緣習俗. 然不害義理, 但簡於四時之祭可(3-1284)也. 凡此皆直據鄙見與其所聞而論之, 以求敎於門下, 伏惟高明財擇. 因風還賜一言, 以次其是非焉, 則熹不勝幸甚. 熹又嘗因程氏之說草其祭寢之儀, 將以行於私家, 而連年遭喪, 未及盡試, 未敢輒以拜呈. 少俟其備, 當卽請敎也.
(一) 記疑云此句疑誤.
왕상서에게 답함 答汪尙書
【해제】이 글은 건도 9년(계사; 1173, 44세)의 편지이다. 앞 편지에서 “묘제의 설명에 대한 질문을 받고”라고 했고, 이 편지에서는 “전에 묘제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라고 했는데, 바로 앞의 제8서를 이은 것으로 역시 계사년에 쓴 것이다.
전에 묘제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경솔하게 제가 들은 바를 말씀드렸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변론과 힐문을 받지 못하니 자못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생각에 의심이 없다면 저는 안심입니다. 별지에서 내려주신 가르침에서 크나큰 겸손의 덕은 낮출수록 더욱 빛남을 보여 주었습니다. 되돌아 보건대, 저는 어리석어 발명한 것이 있기에는 부족합니다. 송공은 외조부에게 후사가 없자 해마다 때 맞춰 제사지냈는데 그의 뜻이 두텁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친족이 지내는 제사가 아니면 이치상 이미 옳은 것이 아니고, 세는 그의 자손에게 미치지 못하니 염려해 준 것이 멀지 않습니다. 어찌 그의 족친을 방문하여 그를 위해 후사를 두고 그가 때 맞춰 제사지내 주는 것이 편안하고 장구한 대책이 아니겠습니까? 빈천한 선비라면 이것을 하기에 혹 힘이 부족하고 혹 한다하더라도 그의 후사가 된 사람이 이 점을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역시 후사가 해야 할 일과 합치 할 수 없습니다. 송공 같은 사람은 그의 힘이 하기에 부족한 것은 아니니 만약 그 일을 하면서 전답을 떼어 주고 집을 지어 살면서 상주하여 관직을 제수 받고 봉록을 받게 한다면 후사가 된 사람은 분명 나의 친함에 감동하여 감히 그 제사를 빠트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의리가 매우 분명하고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송공은 친히 제사를 모심으로써 나는 외가를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이루려고 한 것이므로, 그의 염려는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후사가 된 자는 제사를 주재하면서도 나는 단지 가서 제사 음식을 올리는 일을 도우면 될 뿐인데 또 어찌해서 불가하다고 하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고명하신 당신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시고 만약 채납할 수 있다면 원컨대 조속히 채택하여 후일 사책에 기록되게 한다면 후세의 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송공의 일은 오로지 옛날에만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 되어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이 구구한 저의 깊은 바램입니다. 저의 견해는 이런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前蒙垂諭廟制, 率易薦聞, 未知中否. 不蒙辨詰, 殊失所望. 然若果於合意無疑, 則亦足自安矣. 別紙下詢, 尤見謙德之盛, 愈下而愈光. 顧熹之愚, 不足以有所發耳. 夫宋公以外祖無後而歲時祭之, 此其意可謂厚矣. 然非族之祀, 於理旣未安, 而勢不及其子孫, 則爲慮亦未遠. 曷若訪其族親, 爲之置後, 使之以時奉祀之爲安便而久長哉? 但貧賤之士, 卽其力或不足以爲此, 或雖爲之, 而彼爲後者無所顧於此, 則亦不能使之致一於所後. 若宋公, 則其力非不足爲, 若爲之而割田築室而居之, 又奏授之官以祿之, 則彼爲後者, 必將感吾之誼而不敢乏其祀矣. 此於義(3-1285)理甚明, 利害亦不難曉. 竊意宋公特欲親奉嘗之, 以致吾不忘母家之意, 而其慮遂不及此耳. 若果如此, 則使爲後者主其祭, 而吾特往助其饋奠, 亦何爲而不可? 伏惟高明試一思之, 如有可采, 願早爲之, 使異時史策書之, 可以爲後世法, 而宋公之事不得專美於前, 則區區之深願也. 愚見如此, 不審臺意以爲如何?
왕상서에게 답함 答汪尙書
【해제】이 글은 건도 9년(계사; 1173, 44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제의의 잘못에 대하여 내려준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는데, 제8서와 제9서는 모두 예에 관한 일을 논의한 것이다. 또 제8서에서 “어제 진명중에게 부탁하여 고금제가제의를 빌렸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제8, 9서를 이어 제례를 논의한 것으로 역시 계사년에 쓴 것이다.
제의의 잘못에 대하여 내려준 가르침을 받았는데 요 며칠동안은 그것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정묘의 배사는 처음의 배필 한 분만을 써야하고, 재취와 서모 등은 모두 각각 별묘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 인정과 의리 두 가지를 다한 것이라고 보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근세에 들어 묘지에서 축문을 태우는데 어떤 예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에 흠부가 위공에게 내린 시호에 감사하는 글을 보았는데 단지 가묘에 고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근세에 행하는 것과 누가 맞고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왕언보의 『주사』를 보면 부문충과 이문정은 일식이 일어나면 상복 입는 일을 변화시켰다고 했고, 횡거의 『이굴』에도 변복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그러나 그 제도는 모두 서로 다릅니다. 제가 전에 정한 것은 사와 서민의 길복이 서로 혼란스러우니 아마도 시행할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의 학설 중에서 어떤 것을 따르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비평과 가르침을 구하며 마땅히 계속 수정하겠습니다.
伏蒙垂諭祭儀之闕, 此間前日蓋亦有疑之者. 熹竊以爲正廟配食, 只合用初配一人, 其再娶及庶母之屬, 皆各爲別廟祠之, 乃於情義兩盡, 不審台意如何? 焚黃近世行之墓次, 不知於禮何據. 昨見欽夫謝魏公贈諡文字, 却只云告廟, 此與近世所行, 又不知孰爲得失也. 更乞台諭, 幸甚. 又見王彦輔麈史記富文忠․李文定忌日變服事, 橫渠理窟亦有變服之說, 但其制度皆不同. 如熹前日所定, 則與士庶吉服相亂, 恐不可行. 不知三家之說當從何者爲是? 亦乞批誨, 當績修正也.
왕상서에게 보냄 與汪尙書
【해제】이 글은 언제 쓴 것인지 자세하지 않다. 문집의 편집 순서에 따라 추론하자면 응당 계사년 이후일 것이다. 또 왕응진은 병신년에 죽었으니, 이 편지는 혹 갑오년이나 을미년에 쓴 것일 수도 있다. 첸라이는 이 편지를 남송 효종 건도 9년(계사; 1173, 44세)에 배열하고 있다.
곽자화가 변론한 주택 매매에 관한 일의 원본은 아직 되돌려 보내지 못했는데, 지금 우연히 찾아보아도 찾지 못하여 따로 하나를 적어 올리니 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변론한 것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증거가 있다면 응당 정자의 책 본권 뒤에 간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아직도 의심스러운 것인지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그 사이에 있다면 역시 반드시 전할 필요는 없습니다. 돌아오는대로 답장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가 변론하고 있는 병환 때 모셨다는 일은 『청문록』 『상학설』과 이천과 왕래한 편지에 있다고 하는데, 비록 이미 불타고 흩어졌지만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편지를 통해 시험 삼아 묻고 방문하고 싶은데, 혹 대략의 줄거리라도 얻는다면 응당 학자들에게 유익함이 있을 것이며 또 그의 설명이 망녕스럽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또 말하기를 초천수도 당화 이후의 문인이다고 했습니다. 제가 볼 때, 호씨와 유씨 두 어르신의 말씀에 친히 초공을 뵌 적이 있다고 했고, 스스로 이천을 부릉에서 알게 되어 낙중에서 함께 살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낙양에 이르렀을 때 이천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이천의 역학을 물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타 언행을 생각해 보면, 자못 불교와 노자의 학문도 섞여 있는 사람이니 아마도 문인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일과 그가 지은 상학 문자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그는 정자의 문하에서도 역시 순일하게 스승을 섬겼던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졸업이란 과연 어떤 일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릇 이것은 모두 제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므로 감히 부탁을 드립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郭子和所辨買宅事, 元本尙未還納, 今偶尋不獲, 別錄一本拜納, 伏乞視至. 其所辨論, 不審台意以爲如何? 如其有徵, 卽合刻之程書本卷之後. 若其尙在疑信之間, 則亦不必傳也. 便還, 乞示一的報, 幸甚. 但其所辨侍疾事, 云有請問錄象學說及伊川往來書, 雖已焚蕩, 想渠尙及記憶. 欲乞因書試爲詢訪, 或得其大略梗槪, 當有益於學者, 而亦可以證明其說之不妄矣.
渠說又云, 譙天授亦黨事後門人. 熹見胡․劉二丈說親見譙公, 自言識伊川於涪陵, 約以同居洛中. 及其至洛, 卽伊川已下世矣. 問以伊川易學, 意似不以爲然. 至考其它言行, 又頗雜於佛․老子之學者, 恐未得以門人稱也. 以此一事及其所著象學文字推之, 卽恐其於程門亦有未純師者. 不知其所謂卒業者果何事耶? 凡此皆熹所疑, 敢幷以請. 得賜開喩, 幸甚幸甚.
장흠부에게 보내는 별지 與張欽夫別紙
【해제】이 편지는 언제 쓴 것인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첸라이의 편년고증에도 이 편지에 대한 고증은 빠져있다. 다만 편지에서 “지난 번 예장에 있을 때” 운운한 구절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간보에 의하면, 주자는 갑신년(1164년)과 정해년(1167년), 두 차례에 걸쳐 예장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이 편지에서 말하는 때가 두 경우 중 어느 때인가는 알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유술선의 주자철학의 발전과 완성(학생서국, 민국71년, 대만. pp.79~81 참조.)에 따르면, 주자가 장남헌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대개 건흥 원년(1163년) 겨울이고, 다음 해 가을 장남헌의 아버지 위공(1096~1164)의 장례 때, 즉 9월 20일에 예장에서 두 번째로 3일 동안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바쁜 가운데 만났기 때문에 깊이 있는 학술적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건도 3년 정해년(1167년), 주자 38세 때에 담주로 남헌을 방문하여 두 달을 머물면서 함께 형산에 오른다. 이 때 두 사람이 함께 탐구하고 토론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만남을 통해 주자는 남헌의 찰식단예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의 사상에 더욱 매료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예장에 들린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이 편지는 갑신년과 정해년의 시기, 즉 그의 나이 35세와 38세를 즈음한 시기에 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후자(후사성)의 『논어』를 다 베끼고 올립니다. 그 중에 오자임이 분명한 것은 이미 바로잡았습니다. 다만 그의 말이 때로 밝지 못한 곳이 있는데 그가 어찌 문자에 뛰어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따로 까닭이 있을까요? 얼마 전 예장에 있을 때 부경이 전하던 어록을 보았는데 윤화정이 이천어라고 말한 것 중에서 후사정의 의논은 단지 벽을 등지고 들으면 좋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하면서 이 책으로 증명하면, 제 생각에 그의 학문은 분명하고 힘 있고 올바르지만 깊이 침잠하여 엄밀하고 깊이 베어 푹 익은 술과 같은 맛은 없습니다. 그래서 정밀하고 미묘하며 곡절한 사이에 소략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때로 틈을 꿰메야 합니다. 말에서 그 의미를 얻지 못했으면 마음에서 구하라고 했으니, 그에게 보이고 그가 갖고 있는 이러한 기상은 문자의 하자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제멋대로 망녕되게 전배를 가벼이 의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역시 강학의 일단이니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돌려보낼 때 비평과 가르침을 내려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侯子論語抄畢內上. 其間誤字顯然者, 已輒爲正之矣. 但其語時有不瑩, 豈其不長於文字而然耶? 抑別有以也. 頃在豫章, 見阜卿所傳語錄, 有尹和靖所稱伊川語云, 侯師正議論只好隔壁聽. 詳味此言, 以驗此書, 竊謂其學大抵明白勁正, 而無深潛縝密․沈浸醲郁之味, 故於精微曲折之際不免疎略, 時有鏬縫. 不得於言而求諸心, 乃其所見所存有此氣象, 非但文字之疵也.
狂妄輒爾輕議前輩, 可謂不韙, 然亦講學之一端, 所不得避. 不審高明以爲如何? 人回却望批誨, 幸甚幸甚.
장흠부에게 답함 答張欽夫
【해제】편년고증(p.5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5년(기축; 1169, 40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사물이 자욱이 밀려들어올 때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밀하게 살핀다면 이것은 사태에 응하는 마음 이외에 따로 또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 이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살피는 것은 번거롭게 뒤흔드는 것이 더욱 심한 것이고, 또 사물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힘 써야할 요체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유가 아직 발동하지 않고(未發) 사물이 아직 이르지 않은 때의 공부방법으로 이미 발동한 후(已發)에 살펴 아는 것(察識)을 위주로 하는 방법을 반대한 것이니 바로 기축년의 새로운 인식을 다룬 학설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기축년에 쓴 것이다.
호광중과 표덕미에게 답신한 두 통의 편지와 여씨의 중용에 대한 변론을 보여주셨는데, 매우 친절하게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 주시니 깨달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해하지 못한 점이 있기에 감히 그 이유를 조목조목 적어 당신께 답을 청합니다. 호광중에게 보낸 답장에서 학자들의 병폐를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이러한 병폐는 평소에 바르게 앉아 있을 때 이치를 밝히는 일이 분명하지 않고, 함양이 아직 익숙하지 않고, 사물이 들어 올 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물이 자욱이 밀려들어올 때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밀하게 살핀다면 이것은 사태에 응하는 마음 이외에 따로 또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 이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살피는 것은 번거롭게 뒤흔드는 것이 더욱 심한 것이고, 또 사물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힘 써야할 요체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유자의 학문에서 대요는 궁리를 우선으로 합니다. 무릇 한 사물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으니 모름지기 먼저 이것을 분명하게 한 후에 마음이 발동한 바는 경중장단에 각각 준칙이 있습니다. 『상서』에서 말한 천서 천질 천명 천토와 『맹자』가 말씀한 “사물은 모두 그러한데 마음이 더욱 심하다”고 한 것은 모두 이것을 말합니다. 만약 여기에서 먼저 앎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그것이 마음이 되는 까닭이 이와 같음을 보고, 그것이 마음이 되는 까닭이 이와 같음을 알기만 한다면 범연하여 어떤 준칙도 없으니, 그가 갖고 있고 그가 발동한 것 역시 무엇으로부터 이치에 적중하겠습니까? 불교에서 합장하고 불자를 세우며, 물 긷고 땔감을 나른다고 하는 말에서 어찌 이 마음을 보지 못하고 또 어찌 이 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끝내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바로 천리를 보지 못하고 오로지 이 마음을 주재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자신만을 사사롭게 여기는 곳으로 흘러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전배께서 말씀하기를 성인은 하늘에 근본하고 불교는 마음에 근본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또 마음은 텅 비지 않은 때가 없다고 했는데, 마음의 본래 모습은 사실 텅 비지 않은 때가 없지만 그러나 인욕과 자신의 사사로움에 매몰된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어찌 하루 아침에 문득 이런 경계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은 반드시 그 마음을 바르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뜻을 진실되게 하고, 뜻을 진실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앎을 이룩해야 한다고 했으니, 힘을 쓰는 차례가 이와 같은 후에 마음의 올바름을 얻어 그것의 본체가 텅 빈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데, 역시 하루의 힘을 쏟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 단지 때로 텅 비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하고 또 이미 이 마음을 알면 그것의 작용은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역시 너무 빠르고 이단의 학문으로 빠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유학자의 말이라면 반드시 정밀한 의리가 신의 경지에 들어간 후에야 그 작용은 불리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맹자의 존망출입에 관한 설명 역시 학자가 조존하기를 바랄 뿐이지 이 마음의 발동을 찰식하기 위해 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항상 조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경이 순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하면 움직일 때도 멈춰 있을 때도 한결같아 이 마음이 있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반드시 움직이는 곳에서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의도적으로 정 한 편으로 치우친 것을 구하려고 한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동 한편으로 치우친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조존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안자 이상의 지위를 갖는 사람이어야 이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또 말씀하기를 찰식하면 바로 지킬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또 그 말이 경솔하다고 생각합니다. 명도선생이 말씀하기를 이미 몸으로 체득하여 즐길 수 있다면 역시 지키지 못할까 근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이렇게 말을 해야 비로소 내치고 때려도 깨지지 않으며 새는 것을 막고 병폐가 없을 것입니다. 고명하신 당신의 뜻은 대체로 베풀어지는 곳을 운용처로 삼아 구하는데 바로 선가에서 말하는 석화와 전광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넉넉하게 노닐며 함영하는 공부에는 아직 크게 유의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때문에 구하는 것을 너무 급박하고 얻는 것이 마치 놀라는 것 같으며, 기대는 것이 깊지 못하고 펴는 것이 너무 드러납니다. 『역』에서 말하는 너그러움으로 거처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지 않고 싶어서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는데 고명하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蒙示及答胡彪二書․呂氏中庸辨, 發明親切, 警悟多矣. 然有未諭, 敢條其所以而諸於左右. 答廣仲書切中學者之病, 然愚意竊謂此病正坐平時燭理未明, 涵養未熟, 以故事物之來, 無以應之. 若曰於事物紛至之時, 精察此心之所起, 則是似(3-1288)更於應事之外別起一念, 以察此心. 以心察心, 煩擾益甚, 且又不見事物未至時用力之要. 此熹所以不能亡疑也. 儒者之學, 大要以窮理爲先. 蓋凡一物有一理, 須先明此, 然後心之所發, 輕重長短, 各有準則. 書所謂天敍․天秩․天命․天討, 孟子所謂“物皆然, 心爲甚”者, 皆謂此也. 若不於此先致其知, 但見其所以爲心者如此, 識其所以爲心者如此, 泛然而無所準則, 則其所存所發, 亦何自而中於理乎? 且如釋氏擎拳竪拂․運水般柴之說, 豈不見此心? 豈不識此心? 而卒不可與入堯舜之道者, 正爲不見天理, 而專認此心以爲主宰, 故不免流於自私耳. 前輩有言, 聖人本天, 釋氏本心, 蓋謂此也.
來示又謂心無時不虛, 熹以爲心之本體固無時不虛, 然而人欲己私汨沒久矣, 安得一旦遽見此境界乎? 故聖人必曰正其心, 而正心必先誠意, 誠意必先致知, 其用力次第如此, 然後可以得心之正而復其本體之虛, 亦非一日之力矣. 今直曰無時不虛, 又曰旣識此心則用無不利, 此亦失之太快而流於異學之歸矣. 若儒者之言, 則必也精義入神, 而後用無不利可得而語矣.
孟子存亡出入之說, 亦欲學者操而存之耳, 似不爲識此心發也. 若能常操而存, 卽所謂敬者純矣. 純則動靜如一, 而此心無時不存矣. 今也必曰動處求之, 則(3-1289)是有意求免乎靜之一偏, 而不知其反倚乎動之一偏也. 然能常操而存者, 亦是顔子地位以上人方可言此. 今又曰識得便能守得, 則僕亦恐其言之易也. 明道先生曰, 旣能體之而樂, 則亦不患不能守. 須如此而言, 方是攧撲不破, 絶滲漏․無病敗耳. 高明之意, 大抵在於施爲運用處求之, 正禪家所謂石火電光底消息也. 而於優游涵泳之功, 似未甚留意, 是以求之太迫而得之若驚, 資之不深而發之太露. 易所謂寬以居之者, 正爲不欲其如此耳. 愚慮及此, 不識高明以爲如何?
장흠부에게 보냄 與張欽夫
(선생이 스스로 주를 달아서 “이 편지는 옳지 않다. 다만, 보존해서 의론의 본말을 알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고 했다. 아래 편지도 이와 같다.)
(先生自往云: “此書非是, 但存之以見義論本末耳.” 下篇同此.)
【해제】편년고증(p.35)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의 편지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지각과 의식을 갖습니다. 사물의 끊임없는 자극에 대응하느라 틈이 없습니다. 한 생각 한 생각 할 때마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죽을 때 까지 지속되는데, 그 중간에는 애초 잠깐이라도 어떤 정지와 쉼이라곤 없으며, 온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현의 말씀에 이른바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적중하며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찌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것은 이발이고, 잠시 휴식하고 있는 상태로 사물과 접촉하지 않는 그 시간은 미발의 시기이다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이제 시험 삼아 이 말의 의미를 구해보겠습니다. 망연하여 아무런 지각이 없는 속에서 간사함과 어두움에 막히면 사물에 대응하는 허명한 본체가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은미한 조짐이 있을 때에 한번이라도 깨우침이 있으면 또 바로 이발이 되는데, 이것은 적연한 것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대개는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 볼 수 없으니 여기에서 물러나 일상생활에서 증험하면 무릇 그것을 느끼는대로 통하고 닿는대로 느끼게 되니, 혼연한 전체는 사물에 대응하는 작용이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명이 흘러 행하고 끊임없이 낳고 또 낳는 기틀로 비록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적연한 본체는 일찍이 적연한 적이 없습니다. 이른바 미발이란 이와 같을 뿐이니 무릇 어찌 따로 하나의 사물이 있으면서, 한 때에 한정되고 한 곳에 구속되는 것을 적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천리의 참된 본모습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고 조금도 멈추거나 쉬지 않으며 그것의 본체와 작용은 실로 이와 같으니 어찌 물욕의 사사로움이 그것을 막고 족쇄를 채워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비록 물욕의 흐름 속에 빠진다하더라도 그 양심의 싹은 일찍이 사태를 따라 발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학자는 여기에서 잘 살펴 알고 조존하면 거의 대본과 달도의 전체를 관통하여 그 처음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 살펴 알지 못하고 반복해서 족쇄를 채워 야기를 붙잡아 두지 못하고 금수에 빠지는 경우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누구의 죄이겠습니까? 주자(주돈이)가 말씀하기를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무극에서 근본한다”고 했는데 그의 주장은 지극히 진실하며, 고요함은 무이고 움직임은 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자가 말씀하기를 “아직 발동하기 이전의 상태를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단지 평상시의 함양이 바로 이것이다”고 했고, 또 “잘 살펴 아는 사람은 이발할 때를 관찰한다”고 했습니다. 두 분 선생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역시 대본은 있지 않은 곳이 없고, 양심은 발동하지 않은 때가 없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人自有生卽有知識, 事物交來, 應接不暇, 念念遷革, 以至於死, 其間初無頃刻停息, 擧世皆然也. 然聖賢之言, 則有所謂未發之中, 寂然不動者. 夫豈以日用流行者爲已發, 而指夫暫而休息, 不與事接之際爲未發時耶? 嘗試以此求之, 則泯然無覺之中, 邪暗鬱塞, 似非虛明應物之體, 而幾微之際一有覺焉, 則又便爲已發, 而非寂然之謂. 蓋愈求而愈不可見, 於是退而驗之於日用之間, 則凡感之而通, 觸之而覺, 蓋有渾然全體應物而不窮者. 是乃天命流行, 生生不已之機, 雖一日之間萬起萬滅, 而其寂然之本體則未嘗不寂然也. 所謂未發, 如是而已, 夫豈別有一物, 限於一時, 拘於一處, 而可以謂之中哉? 然則天理本眞, 隨處發見, 不少停息者, 其體用固如是, 而豈物欲之私所能壅遏而梏亡之哉? 故雖汨於物欲流蕩之中, 而其良心萌蘖, 亦未嘗不因事而發見. 學者於是致察而操存之, 則庶乎可以貫乎大本達道之全體而復其初矣. 不能致察, 使梏之反覆, 至於夜氣不足以存而陷於禽獸, 則誰之罪哉? 周子曰: ‘五行, 一陰陽也, 陰陽, 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其論至誠, 則曰靜無而動有. 程子曰: ‘未發之前更如何求? 只平日涵善便是.’ 又曰: ‘善觀者却於已發之際觀之.’ 二先生之說如此, 亦足以驗大本之無所不在, 良心之未嘗不發矣.
장흠부에게 보냄 與張欽夫
(선생이 스스로 주를 달아서 “이 편지에서 논한 내용은 더욱 잘못이다. 의심한 어록도 모두 옳지 않다. 나중에 스스로 변설한 것이 아주 상세하다”고 했다.)
(先生自注云: ‘此書所論尤乖戾, 所疑語錄皆非是, 後自有辨說甚詳.’)
【해제】편년고증(p.35)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의 편지이다. 이 해 가을에 쓴 것으로 주희집권32 「답장경부」제4서(1373쪽)를 이어 쓴 것이다.
앞 편지에서 질문한 것에 대하여 아직 그 시말을 얻지 못한 것 같아 올바른 지적을 구합니다. 이번에 수고롭게도 가르침을 주셨는데 아직도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폐단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깊이 듣고 싶습니다. 당시 이러한 이치를 언뜻 보니 말씀이 친절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동쪽을 가리키는데 서쪽을 그리며 장황하게 가는 모양새가 있습니다. 지금 보면 단지 한 생각 사이에 이미 이것의 체용을 갖추고 있으며 발동한 것은 가고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은 오니 간단과 격절의 곳은 전혀 없습니다. 어찌 따로 어떤 사물을 두고 그것을 가리켜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천리는 무궁하고 사람의 견해는 원근과 심천이 다르니 이렇게 보는 것이 또 무슨 잘못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한 말씀 가르침을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귀산의 『중용해』에서 의심스런 곳을 논의하셨는데 제 생각도 근래 역시 그렇습니다. 또 이른바 학자는 희노애락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때에 마음으로 증험하면 중의 본체는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고 한 것 역시 완벽하게 옳은 것은 아닙니다. 대저 이 일은 혼연하여 시간을 선후로 분단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 “때” 한 “즈음”이라는 글자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병입니다. 당시에는 단지 조용하여(적연) 움직이지 않는 본체를 말한 것뿐인데 또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록』한 곳에서는 일찍이 미발일 때 존양한다는 구절을 의심했는데, 질문한 사람이 중일 때는 마땅히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답어가 자못 통쾌하지 않으니 당신이 의심하는 것이 이곳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가르침을 바랍니다.
전에 당신이 지은 『중론』을 본적이 있는데, “아직 발동하기 이전에 마음은 본성과 묘합해 있고, 이미 발동하면 본성은 마음의 작용에서 운행한다”고 했더군요. 여기에 대하여 저는 또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본성이란 마음의 작용에서 운행하지 않는 때가 없지만 그러나 마음의 작용에서 아직 운행하지 않는 본성이 항상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지금 아래에 있는 “전”자에도 역시 전후를 끊어 막는 기상은 없는데 어떤지요? 『중용』을 익숙하게 완색하면, 단지 “미”자 하나를 소화시키는 것이 바로 살아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어찌 한 숨이라도 정지할 때가 있겠습니까? 단지 다가오는 것이 끝이 없으니 항상 미발의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이런 사물이 없다면 천명은 이미 발동한 때가 있을 것이고 사물을 생성하는 것도 끝이 있을 것이며 기의 변화는 단절되어 과거는 있어도 현재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하의 대본이니 만약 진실로 보고 얻은 것이 아니라면 역시 더듬어 찾을 곳이 없을 것입니다.
前書所扣, 正恐末得端的, 所以求正. 滋辱誨喩, 乃知尙有認爲兩物之蔽, 深所欲聞, 幸甚幸甚. 當時乍見此理, 言之唯恐不親切分明, 故有指東晝西, 張皇走作之態. 自今觀之, 只一念間已具此體用, 發者方往而未發者方來, 了無間斷隔截(3-1291)處, 夫豈別有物可指而名之哉? 然天理無窮, 而人之所見有遠近深淺之不一, 不審如此見得又果無差否? 更望一言垂敎, 幸幸.
所論龜山中庸可疑處, 鄙意近亦謂然. 又如所謂學者於喜怒哀樂未發之際以心驗之, 則中之體自見, 亦未爲盡善. 大抵此事渾然, 無分段時節先後之可言. 今著一‘時’字一‘際’字, 便是病痛. 當時只云寂然不動之體, 又不知如何. 語錄亦嘗疑一處說存養於未發之時一句, 及問者謂當中之時, 耳目無所見聞, 而答語殊不痛快, 不知左右所疑是此處否? 更望指誨也.
向見所著中論有云: ‘未發之前, 心妙乎性, 旣發則性行乎心之用矣.’ 於此竊亦有疑. 蓋性無時不行乎心之用, 但不妨常有未行乎用之性耳. 今下一‘前’字, 亦微有前後隔截氣象, 如何如何? 熟玩中庸, 只消著一‘末’字, 便是活處. 此豈有一息停住時耶? 只是來得無窮, 便常有箇未發底耳. 若無此物, 則天命有已時, 生物有盡處, 氣化斷絶, 有古無今久矣. 此所謂天下之大本, 若不眞的見得, 亦無揣摸處也.
장흠부에게 보냄 與張欽夫
【해제】편년고증(p.3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어제 공보 집에 보내는 안부 편지를 보고, 이정선생의 문집에 있는 오자에 대하여 노형은 일찍이 문정의 손을 거친 것이니 다시는 고칠 수 없습니다”고 했다. 이것은 이정의 문집 교정을 논의한 것인데, 문정은 호안국이다. 「답라참의」제8서(『주희집·속집』권5)에서 주자는 유공 장식과 이정의 문집 교정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데 병술년에서 정해년 사이의 일이다.
어제 공보 집에 보내는 안부 편지를 보니, 이정선생의 문집에 있는 오자에 대하여 노형은 일찍이 문정의 손을 거친 것이니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하는데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문정의 손을 거쳤으니 더 이상 고칠 수 없다는 것이 예컨대 군주와 부친을 높이 받들고 오랑캐와 이적을 내치고 난신을 토벌하고 적자를 목 베는 것과 같은 큰 윤리 큰 법도라면, 비록 성현이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문자 같은 경우에는 당시 전하는 것도 완벽하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선본으로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겠습니까? 특별히 몇 군데 고친 곳을 의리로 구해 보면 아마도 선생의 옛 글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형께서 논한 것은 이천이 말씀하신 “옛날에 겨를이 없어 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 다시 만들 수 없으며, 전에 불편했던 것을 후에는 다시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런 생각이 오늘날 다시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미 공보에게 편지를 보내 자세하게 말했고 다시 이렇게 갖추어 올립니다. 바라건대 다시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화평하게 하여 그와 나의 혐의를 없애고 오로지 의리만으로 구한다면 취사와 종위의 사이에서 처한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도술은 쇠미하고 속학은 지극히 천박합니다. 도학을 떨쳐 일으키는 임무를 평상시 당신에게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논의를 들으니 크게 염려 됩니다. 만약 매사를 이렇게 주장한다면 분명 묻기를 좋아하고 말을 살피는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장래 일을 맡으면 반드시 사람들의 생각에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행하는 풍속에 폐단이 남고 그것이 또 장차 후학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단지 한 때의 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세의 여러 선달들처럼 도를 듣는데도 실로 깊고 낮은 차이가 있고 함양에도 실로 후박이 있으며 확충과 운용에는 실로 넓고 좁음이 있다고 하니, 역시 각자 치우친 곳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그 기상을 완색하면 저절로 교정하고 변혁할 곳이 있을 것이니, 불로 화재를 끄고 물로 수재를 구하면서 그 병을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늦게 도를 들었지만 노형께서 끌어주고 부축해준 은혜를 입어 지금은 다행히 대략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감히 명철하신 당신께서 저를 비천하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모든 것을 기울여 토해내고 싶은 말을 다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또 공보에게 보낸 편지에 갖추었으니 얻어다 함께 보시고 저의 말이 너무 직설적인 것을 탓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昨見共父家問, 以爲二先生集中誤字, 老兄以爲嘗經文定之手, 更不可改, 愚意未曉. 所謂夫文定, 固有不可改者, 如尊君父, 攘夷狄, 討亂臣, 誅賊子之大倫大法, 雖聖賢復出, 不能改也. 若文字之訛, 安知非當時所傳亦有未盡善者, 而未得善本以正之歟? 至所特改數處, 竊以義理求之, 恐亦不若先生舊文之善. 若如老兄所論, 則是伊川所謂昔所未遑, 今不得復作, 前所未安, 後不得復正者, 又將起於今日矣. 已作共父書詳言之, 復此具稟. 更望處心平氣, 去彼我之嫌, 而專以義理求之, 則於取舍從違之間知所處矣.
道術衰微, 俗學淺陋極矣. 振起之任, 平日深於吾兄望之. 忽聞此論, 大以爲憂. 若每事自主張如此, 則必無好問察言之理. 將來任事, 必有不滿人意處. 而其流風餘弊, 又將傳於後學, 非適一時之害也. 只如近世諸先達, 聞道固有淺深, 涵養固有厚薄, 擴充運用固有廣狹, 然亦不能不各有偏倚處. 但公吾心以玩其氣象, 自見有當矯革處, 不可以火濟火, 以水濟水而益其疾也.
(3-1293)熹聞道雖晩, 賴老兄提掖之賜, 今幸略窺彷彿. 然於此不能無疑, 不敢自鄙外於明哲, 故敢控瀝, 一盡所言. 不審尊意以爲如何? 其詳則又具於共父書中, 幸取而幷觀之, 無怪其詞之太直也.
장흠부에게 보냄 與張欽夫
【해제】편년고증(p.3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호본에서는 ‘선천’을 ‘선시’라고 썼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는데 앞 편지에서 말한 문정이 손수 개정한 것을 가리킨다.
“하늘 보다 앞에서 사람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각 때에 따라 정사를 세운 것 이다.”(호본에서는 ‘천’자를 ‘시’자로 썼는데, 흠부는 ‘천’자로 쓴 것은 일에 크게 해가된다고 했다.)고 했는데, 제가 생각할 때 여기에서 말하는 선천이란 「문언전」에서 말하는 선천과 다릅니다. 「문언전」에서 말한 선천 후천이란 주변에서 협조하여 계획한다는 뜻입니다. 『좌전』에서 말하는 “실로 앞에 하고 뒤에 한다”는 말은 중간에 있다는 뜻을 말한 것으로, 바로 천운과 합치하여 터럭만큼의 잘못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부르는 것과 쪼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서문에서 말하는 선천이란 천시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인데, 망녕스럽게 사사로운 생각으로 먼저 앞서하는 것은 마치 밭 갈지 않으면 수확하지 않고 개간하지 않으면 좋은 밭을 도모하지 못한다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이 두 가지 선천은 문자는 같지만 그 의미는 다르며, 선천 선시는 애당초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에서는 천을 말하고 아래에서는 인을 말하며, 위에서는 시를 말하고 아래에서는 정치를 말하니 문장이 서로 부합합니다.
“성인의 마음 씀을 엿본다”(호본에는 ‘심’자가 없는데, 흠부는 ‘심’자에 집착하는 것 역시 크게 해가 되는 일이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했다)는, 제가 생각할 때 맹자가 요순이 천하를 다스릴 때 어찌 그의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까? 라는 뜻이니 마음을 쓴다는 말이 이치에 무해한 것은 아닌가요?
‘不先天而開人, 各因時而立政’, (胡本‘天’作‘時’, 欽夫云作‘天’字大害事.) 愚謂此言先天, 與文言之先天不同. 文言之云先天․後天, 乃是左右參贊之意. 如左傳云‘實先後之’, 意思卽在中間, 正合天運, 不差豪髮. 所謂啐啄同時也. 此序所云先天, 却是天時未至, 而妄以私意先之, 若耕穫畜畬之類耳. 兩先天文同而意不同, 先天先時却初不異. 但上言天, 下言人, 上言時, 下言政, 於文爲協耳. ‘窺聖人之用心’, 湖本無‘心’字, 欽夫云著‘心’字亦大害事, 請深思之. 愚謂孟子言堯舜之治天下, 豈無所用其心哉? 言用心, 莫亦無害於理否?
별지 別紙
【해제】편년고증(p.3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의 편지이다. 편지의 표제가 ‘별지’이고, “선천 이 글자는 권에서 이미 자세히 논의했습니다”고 했으니, 분명 앞 편지의 별지로 같은 시기에 지은 것이다. 또 이 편지에서 호본은 ‘질’자를 ‘유자’로 지은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다.
‘조카’(侄)라고 호칭한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하며, ‘유자’(猶子)라고 호칭하는 것도 역시 법도에 맞지 않습니다. 『예기』에 따르면 종조와 종부라는 명칭이 있으니, 종자 종손이라는 명목이 있는 것도 마땅합니다. 이것으로 호칭하면 조금 온당할 듯 싶습니다. 저의 생각이 우연히 여기에 미쳤으니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지 감히 다시 선생의 문장을 고치려고 의논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공과 사수의 책 전체를 반복해 보아도 의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졸장의 말씀은 단지 의리의 효과를 직언한 것이니 감응하는 것이 상도에 맞습니다. 예컨대 『주역』 64괘는 길흉화복을 말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상서』 48편은 재난과 상서로운 일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말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시』의 아송은 복록과 수고의 성대함을 지극히 진술하여 그 임금을 흠동하니 아뢰어 경계하는 자 더욱 적지 않습니다.(「권아」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맹자가 이로움에 대하여 가장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양혜왕에 대해서는 “어질고 의로우면서 그의 임금과 어버이를 뒤로 물리는 사람은 없습니다”고 하셨고, 송경에게 대답하면서 “하지만 왕도를 행하지 못한 군주는 없습니다”고 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로움과 해로움으로 (임금을) 움직이려 한 것입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사사로운 마음으로 계산하여 그것을 이로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초한 사람은 탐욕스런 마음을 일으키고, 어진 사람은 싫어하고 피하려는 뜻을 갖게 됩니다. 나아가는 바가 비록 다르지만 그러나 사사로운 마음에 처하는 것은 같습니다. 만약 성현이라면 위대한 공평함과 지극히 올바른 마음과 지대한 공평함과 지극히 올바른 말을 내어 시작을 탐구하고 끝을 요약함에 지극한 이치 아닌 것이 없으니, 또 무슨 피할만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만약 선생께서 전편의 주의를 오로지 이 말씀에만 사용하셨다면 실로 이치에 해가 됩니다. (지난번에 가르쳐 주신 동행이정의 학설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춘추서」 두 곳의 문맥을 살펴보면 제가 근거한 판본이 옳은 것 같습니다. “선천” 두 자는 권 안에서 논한 것이 이미 자세한데, 이치에 해는 없는지요? 이치에 무해하고 문장의 의미도 조화롭다면 어찌해서 따를 수 없는지요? “성인의 쓰임” 아래에 “심”자가 붙어 있으니, 말뜻은 만족스럽고 친절하고 주재하는 곳을 더욱 볼 수 있습니다. 아래 문장에서 말하는 그 뜻을 얻었다는 것이 옳습니다. 그 마음 씀을 엿볼 수 없다면 그 쓰임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뜻을 얻은 뒤에 그 쓰임을 본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말의 순서 그대로입니다. 그 정미함과 곡절이 실로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마음 씀이라는 것이 성인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맹자』와 『역전』에서 성인의 마음 씀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대저 사람은 이 마음을 쓰지 않는 곳이 없으니 성인으로부터 가장 어리석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쓰는 까닭은 정밀함과 조악함 사특함과 올바름의 차이가 있으니 그러므로 성현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구별이 있는 것이지 성인은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으며, 또 성인은 쓸 마음도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사용하는 미묘함이 보통사람들과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나아가고 쓰임새에 나아가는 것은 이 마음이 있고 또 사용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稱姪固未安, 稱猶子亦不典. 按禮有從祖從父之名, 則亦當有從子從孫之目矣. 以此爲稱, 似稍穩當. 慮偶及此, 因以求敎, 非敢復議改先生之文也. 與富公及謝帥書, 全篇反復, 無非義理. 卒章之言, 止是直言義理之效, 感應之常. 如易六十四卦, 無非言吉凶禍福. 書四十八篇, 無非言災祥成敗. 詩之雅頌, 極陳福祿壽考之盛, 以歆動其君, 而告戒之者尢不爲少. 卷阿尤著. 孟子最不言利, 然對粱王亦曰‘未有仁義而遺後其君親者’, 答宋牼亦曰‘然而不王者未之有也’, 此豈以利害動之哉? 但人自以私心計之, 便以爲利, 故不肖者則起貪欲之心, 賢者則有嫌避之意, 所趣雖殊, 然其處心之私則一也. 若夫聖賢, 以大公至正之心, 出大公至正之言, 原始要終, 莫非至理, 又何嫌疑之可避哉? 若使先生全篇主意專用此說, 則誠害理矣. (向所見敎同行異情之說, 於此亦可見矣.)
春秋序兩處, 觀其語脈文勢, 似熹所據之本爲是. ‘先天’二字, 卷中論之已詳, 莫無害於理否? 理旣無害, 文意又協. 何爲而不可從也? ‘聖人之用’下著(3-1295)‘心’字, 語意方足, 尤見親切主宰處. 下文所謂得其意者是也. 不能窺其用心, 則其用豈易言哉? 故得其意然後能法其用, 語序然也. 其精微曲折, 蓋有不苟然者矣. 若謂用心非所以言聖人, 則孟子易傳中言聖人之用心者多矣. 蓋人之用處無不是心, 自聖人至於下愚一也. 但所以用之者有精粗邪正之不同, 故有聖賢下愚之別, 不可謂聖人全不用心, 又不可謂聖人無心可用, 但其用也妙異乎常人之用耳. 然又須知卽心卽用, 非有是心而又有用之者也.
장흠부에게 편지를 보내 이정문집의 글자 수정을 논함(27일 별지) 與張欽夫論程集改字二十七日別紙
【해제】편년고증(p.3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2년(병술; 1166, 37세)의 편지이다. 편지 표제가 “장흠부에게 편지를 보내 이정문집의 글자 수정을 논함”이라고 한 것을 보니,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논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 역시 앞의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병술년에 쓴 것이 틀림없다.
편지를 받고 보니, 지난번 이정 문집의 오류에 대한 저의 의론과 「정성서」·「사관표」 두 곳에 대한 의론을 이미 수록하고, 나머지 것도 또한 많이 채납해 주시니, 여기에서 고명하신 당신께서 좋은 것을 택하여 따르며 애당초 후하게 대하거나 박하게 대하는 뜻이 없음을 알겠습니다. 지난번 저의 망녕된 말이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꼭 고칠 필요는 없다’라든가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반복해서 구하면, 또 마음에 의혹이 없을 수 없으니 바로 다시 조목조목 진술하여 지적과 가르침을 구합니다.
‘꼭 고칠 필요 없다’는 것이 어찌 문구간의 작은 차이일 뿐이고 의리의 득실과 연관된 것이 없어서 꼭 고칠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습니까? 제가 논의한 것은 개인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이렇게 말씀하시면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여러 판본을 모아서 증명한 것입니다. 구본의 문장을 살펴본 연후에 바로잡아 간행하면 비록 하나하나가 모두 같지는 않더라도 역시 여러 가지 학설을 종류별로 모아 문맥의 흐름을 구하는데 편리합니다. 이른바 “의심스러운 것은 마땅히 어떤 글자로 바꿔야 한다”는 사례를 제외하고, 감히 망녕되이 자신의 생각으로 점 하나 획 하나도 고치거나 바꿔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선생 당시의 본래 문장과 일치한다는 것에 의심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존경하여 거듭 바로잡으면서 감히 홀시하고 쉽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한결같이 그 옛것을 따라야 하며, 다시는 터럭만큼이라도 구차하게 그 사이를 옮겨 다니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글자의 의미에 어두운 자는 분명 잘못된 것을 이어 억지로 설명하면서 통하려고 합니다. (예컨대 “준”을 잘못하여 “존”으로 오해하고 ‘그가 들은 것을 존경한다’고 억지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구가 지워지고 빠진 것은 의미를 붙여 읽은 후에 갖추어야 합니다. (예컨대 “嘗食絮羹叱止”에 “皆”자가 없으면 문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문자에 해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반성해 보면 은미한 사이에 자신을 속이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붓을 들고 책을 쓰는 일은 오로지 분명하게 뜻을 전하는 일에 힘쓸 뿐이니, 마땅히 써야할 글자를 기꺼이 버리고 다시 다른 글자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억지로 설명한 후에야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기꺼이 문구를 지우거나 빼버리고 사람들이 문구를 붙여 넣어 읽은 후에야 의미가 갖추어지도록 하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은 크게 서로 다르지 않으니 그것이 반드시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인쇄본의 자수가 드물거나 빽빽하여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일 뿐이니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다른 것에는 해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고치지 않겠습니까? 권자 내의 이와 같은 곳은 이미 모두 붉은 색 동그라미를 그 글자 위에 그려놓고 다시 이것을 올립니다. 하지만 아직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은 것 중에도 취할 만한 것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집필할 때 조금이라도 혐의를 피하려는 사사로운 생각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사람이 또 독촉하는 편지를 보내오니 다시 읽어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자세히 살펴 주십시오.
伏蒙垂諭向論程集之誤, 定性書辭官表兩處已蒙收錄, 其它亦多見納用, 此見高明擇善而從, 初無適莫, 而小人向者妄發之過也. 然所謂不必改․不當改者, 反復求之, 又似未能不惑於心, 輒復條陳, 以丐指喩.
夫所謂不必改者, 豈以爲文句之間小小同異, 無所繫於義理之得失而不必改耶? 熹所論出於己意, 則用此說可也. 今此乃是集諸本而證之, 按其舊文, 然後刊正, 雖或不能一一盡同, 亦是類會數說而求其文勢語脈所趨之便. 除所謂‘疑當作某’一例之外, 未嘗敢妄以意更定一點晝也. 此其合於先生當日本文無疑. 今若有尊敬重正而不敢忽易之心, 則當一循其舊, 不容復有豪髮苟且遷就於其間, 乃爲盡善. 惟其不爾, 故字義迂晦者, 必承誤彊說而後通 : 如‘遵’誤作‘尊’, 今便彊說爲尊其所聞之類是也. 語句刓闕者, 須以意屬讀然後備. 如‘嘗食絮羹叱止’之無‘皆’字, 則不成文之類是也. 此等不惟於文字有害, 反求諸心, 則隱微之間, 得無未免於自欺耶? 且如吾輩秉筆書事, 唯務明白, 其肯故舍所宜用之字而更用它字, 使人彊說而後通耶? 其肯故爲刓闕之句, 使人屬讀而後備耶? 人情不大相遠, 有以知其必不然矣. 改之不過印本字數稀密不勻, 不爲觀美, 而它無所害, 然則胡爲而不改也? 卷子內如此處已悉用朱圈其上, 復以上呈. 然所未圈者, 似亦不無可取. 方執筆時, 不能不小有嫌避之私, 故不能盡此心. 今人又來督書, 不容再閱矣, 更乞詳之可也.
이른바 다시 고칠 수 없다는 것이 어찌 부정공과 사수사에게 보내는 편지와 「춘추서」 뿐이겠습니까? 편지에서 말씀하신 ‘연’과 ‘소’, ‘유자’에 대한 두 가지 설명도 다시 고쳐서는 안 될 것이지요? 제가 보았을 때 이른바 더욱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바로 더욱 고쳐야 할 것입니다. 저의 어리석의 생각은 단지 제멋대로 이전 현인의 문자를 고치고 싶지 않을 뿐이니 겸손하게 물러나고 공경히 양보하는 마음을 조금 둔 것일 뿐입니다. 만약 성현이 이루어 놓은 책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끼어 넣고 감정대로 붓을 휘두른다들지 제멋대로 분칠하고 고쳐서는 안 되는데, 아무래도 이러한 기상은 본래 옳지 못합니다. 비록 고친 것이 완전하다하더라도 말류가 가볍고 제멋대로 하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폐단을 열게 되거늘 하물며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천선생께서 전에 학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자신의 말에 합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병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버려두고 다시 반복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이 끝내 합치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고 했습니다.(양적과 문인에게 회답한 두 서신이 문집에 보인다.) 지금 이렇게 글자 수정한 곳을 볼 때 저는 선생의 뜻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곳이 있으며 고친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후인들에게 선생이 손수 쓴 본문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만든 것이니, 비록 선생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각한 것이더라도 역시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해가되는데 어찌 심하지 않습니까? 무릇 자신에게 말하면 공경 퇴량의 마음을 잃고, 남에게 말하면 경솔하여 망녕되이 만드는 폐단을 열며, 선생의 뜻으로 말하면 아무래도 아직 미진함이 있고 사람의 생각을 끊어버립니다. 그것을 수정한 득실을 묻지 않고 이 세가지 것으로 논하자면 그것은 이미 깨달을 수 없습니다. 노형께서 이전의 성인은 태묘에 들어가면 매사를 물었고, 희생으로 쓴 양을 두고, 신중하여 빼놓고 쓴 글을 보았고, 기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으며, 믿으며 옛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알지 못하면서 창작하는 것을 깊이 경계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많이 듣고 의심스런 것은 빼놓도록 하는 마음은 어떠한지를 노형께서는 한번 생각해 보시고, 오늘날 어지럽게 바꾸는 것을 제멋대로 하는 의상은 또 어떠한지를 살펴보시고, 이것을 살펴 보시면 여기에서 저의 말씀을 기다지지 않고도 의당 결정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제가 재삼 당신을 모독하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즐겨 듣지 않는 말씀을 드리는 까닭이 어찌 저의 주장의 승리를 얻으려고 이제 그만 둘 일을 그만 두지 않고 고집 피우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연’·‘소’·‘유자’의 설명을 다시 논의하여 이전의 논의을 사실대로 하기를 청합니다.
所謂不當改者, 豈謂富謝書春秋序之屬? 而書中所喩‘沿’‘泝̀’․猶子二說, 又不當改之尤者耶? 以熹觀之, 所謂尤不當改者, 乃所以爲尤當改也. 大抵熹之愚意止是不欲專輒改易前賢文字, 稍存謙退敬讓之心耳. 若聖賢成書稍有不愜己意處, 便率情奮筆, 恣行塗改, 恐此氣象亦自不佳. 蓋雖所改盡善, 猶啓末流輕肆自大之弊, 況未必盡善乎? 伊川先生嘗語學者, 病其於己之言有所不合, 則置不復思, 所以一終不能合. (答楊迪及門人二書, 見集.) 今熹觀此等改字處, 竊恐先生之意尙有不可不思者, 而改者未之思也. 蓋非特己不之思, 又使後人不復得見先生手筆之本文, 雖欲思之以達於先生之意, 亦不可得. 此其爲害, 豈不甚哉? 夫以言乎己, 則失其恭敬退讓之心 : 以言乎人, 則啓其輕肆妄作之弊 : 以言乎先生之意, 則恐猶有未盡者而絶人之思. 姑無問其所改之得失, 而以是三者論之, 其不可已曉然矣. 老兄試思前聖入太廟每事問, 存餼羊, 謹闕文, 述而不作, 信而好古, 深戒不知而作, 敎人多聞闕疑之心爲如何, 而視今日紛更專輒之意象又爲如何, 審此則於此宜亦無待乎熹之言而決, 且知熹之所以再三冒瀆, 貢其所不樂聞者, 豈好己之說勝, 得已而不已者哉. 熹請復論‘沿’‘泝’․猶子之說, 以實前議.
무릇 ‘연’을 ‘소’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은 저 역시 슬쩍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설파하면 무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칠 수 없는 이유가 선생의 말씀이 세상이 전한지 이미 오래되었고, 이 글자도 의리에 큰 해가 없으며, 문장과 단어가 그 의미에 해가 되지 않으니, 단지 ‘연’자 때문에 ‘인’자 ‘심’자 ‘순’자 등으로 새긴다면 문장에 해가 없는 것 같고 의미도 자못 넉넉해집니다. 반드시 ‘소’자로 고치려고 한다면 비록 번쇄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그 기상은 오히려 급박해져 억지로 찾고 힘으로 취하는 폐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 이 글자를 사용하지 않은 뜻은 아마 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연’과 ‘소’의 구별을 모르는 이런 오류가 있겠습니까? 고서에서도 ‘연’자는 모두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간다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순자』가 말하기를 “반연찰지”라고 했는데, 주에서 ‘연’은 ‘연’과 같다. 따르다는 뜻이다고 했습니다.) 아쉽게도 당시 누군가 의심하고 따져 물어 후대인의 의혹을 털어주지 못했으니, 후대의 의심하는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남겨놓지 않고 문득 고쳤습니다. 그러므로 선생의 뜻은 끝내 밝혀지지 못했고 온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고서에 타당치 못한 곳이 있으면, 그 일에 따라 논의하여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게 옳습니다. 만약 갑자기 고쳐 그 사실을 없애버리면 아직 다하지 못한 뜻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대 유학자가 경전을 풀이할 때 바꾸고 싶은 곳이 있으면 단지 ‘어떤 것은 응당 어떤 것으로 써야한다’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비난하거늘 하물며 갑자기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한대 유학자 뿐만이 아니라 공자께서 『상서』를 산정할 때 ‘흐르는 피에 절구공이가 떠다닌다’는 문장을 그대로 인습하고 고치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그것을 계승하여 ‘나는 「무성편」에서 두세 가지 부분만 취할 뿐이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이 문장을 산거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곰곰이 헤아려 보면 이 글자를 고치는 것은 당시 생각에도 단지 사람들이 이러한 의미를 알게 하고 싶은 것일 뿐이지 꼭 맹자가 「무성편」에 대하여 취했던 태도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후대인의 숭배와 믿음이 너무 과하여 이 말에 기대어 구문을 흙칠하여 고치니 본래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글자는 당연히 구문을 따라 마땅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만약 노형께서 반드시 보존하고 싶고 ‘소’자가 유력하다고 보신다면 정문은 ‘연’자만을 쓰고, 주를 달아 그 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연은 마땅히 소라고 써야한다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호본에서 연자를 소자로 썼다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어떤 사람은’이라고 써도 될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모두를 병존하면 독자는 힘 써야 할 방법을 알 수 있고, 고친 사람은 제멋대로 한다는 허물이 없을 것이며, 선생의 은미한 소리와 여운을 후세에 묵묵히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옳은 것을 모두 온전히 하여 손상됨이 없도록 하지 않으렵니까?
夫改‘沿’爲‘泝’之說, 熹亦竊聞之矣. 如此曉破, 不爲無力. 然所以不可改者, 蓋先生之言垂世已久, 此字又無大害義理, 若不以文辭害其指意, 則只爲‘浴’字而以‘因’字‘尋’字‘循’字之屬訓之, 於文似無所害, 而意亦頗寬舒.
必欲改爲‘泝’字, 雖不無一至之得, 然其氣象却殊迫急, 似有彊探力取之弊. 疑先生所以不用此字之意, 或出於此. 不然, 夫豈不知‘沿’‘泝’之別而有此謬哉? 蓋古書‘沿’字亦不皆爲順流而下之字也. (荀子云: ‘反鉛察之’. 注云: ‘鉛與沿同, 循也.’) 惜乎當時莫或疑而扣之, 以祛後人之惑, 後之疑者又不能闕而遽改之, 是以先生之意終已不明, 而擧世之人亦莫之思也. 大抵古書有未安處, 隨事論著, 使人知之可矣. 若遽改之, 以沒其實, 則安知其果無未盡之意耶? 漢儒釋經, 有欲改易處, 但云‘某當作某’, 後世猶或非之, 況遽改乎? 且非特漢儒而已, 孔子刪書, ‘血流漂杵’之文因而不改, 孟子繼之, 亦曰‘吾於武成取二三策而已’, 終不刊去此文, 以從己意之便也. 然熹又竊料改此字者, 當時之意亦但欲使人知有此意, 未必不若孟子之於武成. 但後人崇信太過, 便憑此語塗改舊文, 自爲失耳. 愚竊以爲此字決當從舊, 尤所當改. 若老兄必欲存之, 以見‘泝’字之有力, 則請正文只作‘沿’字, 而汪其下云‘某人云‘沿’當作‘泝’, 不則云‘胡本‘沿’作‘泝’, 不則但云‘或人’可也. 如此兩存, 使讀者知用力之方, 改者無專輒之咎, 而先生之微音餘韻後世尙有黙而議之者, 豈不兩全其適而無所傷乎?
‘유자’의 호칭을 고칠 수 없다는 말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질’은 단지 서로 이어 부르는 호칭이다고 했을 뿐이고, 의리에 해가되니 이 호칭을 쓸 수 없다는 뜻은 보이지 않습니다. 유자라고 호칭하면 거의 가깝다고 하셨는데, 또 거의 가깝다고 한 까닭을 설명하지 않고 있으니 이 때문에 저는 어리석어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적에 전해 내려오는 것을 고찰해 보면 역시 유래가 있습니다. 『이아』에서 말하기를 “여자는 형제의 자식을 질이라고 한다”고 했고, 주에서 “질은 종고이다”는 좌씨의 말을 인용하여 풀이했습니다. 반복해서 살펴보고 찾아봐도 끝내 만자는 형제는 자식을 무엇이라고 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한서』를 찾아보면, 이소는 지금 세상에서 말하는 숙질인데 전하기를 부자라고 호칭합니다. 고인은 그것을 단지 ‘자’라고 했고 한대인도 아직은 그렇게 불렀습니다. 고인은 순박하여 꺼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호칭하고 스스로 편안히 여겼던 것입니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마음에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었으므로 스스로 ‘고모’라고 이름하던 것을 빌어다 호칭했습니다. 비록 고제는 아니지만 그러나 역시 꺼림직한 것을 구별하고 은미한 것을 밝히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부와 숙부 그리고 고모란 모두 내 아버지의 동기이니, 어찌 친한 이를 친히하는 의리에 해가 되겠습니까? 이제 만약 옛 것을 따르고자 하면 단지 ‘자’라고 호칭할 뿐입니다. 풍속을 따르는 일은, 이천 횡거 두 선생께서도 모두 일찍이 칭찬하던 것입니다. 이천은 예는 마땅함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했지만, 만일 풍속을 따르는 것이 의리에 크게 해가된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 말씀이 이와 같은데도 아직 ‘질’이라고 호칭했으니 이것은 분명 의리에 큰 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남긴 문장이 그의 집에서 나오고 그의 자식이 서문을 지어 세상에 유행하는데 이른바 유자라고 말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호본에서만 특별히 그렇게 호칭하는데, 이것은 분명 가정에서 필삭한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무슨 이유로 다른 곳에서는 고치지 않았느냐고 말씀한다면 고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제문 같은 것에는 대우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질’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잘못이고 고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면 역시 그 구문을 그대로 두고 새 뜻을 붙여야 합니다. 하물며 본래 이치에 해가 없는데 갑자기 고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고치는 것은 「단궁」의 문장에서 출현한 것인데 그 문장은 단지 형제의 자식과 자신의 자식을 위해 상복 입는 것은 같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자식은 자식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래 문장에서 “수숙 간에는 상복을 입지 않는다”, “고자매 간은 상복을 조금 입는다”는 문장도 마찬가집니다. 어찌 친속의 명분을 정한 것이겠습니까? ‘유’(猶)는 ‘如’입니다. 그 의미가 윗글에 걸려 있으니 끊어 나눌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단독으로 호칭하면 세속의 헐후의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평상시의 가차로 호칭하면 오히려 옳지만 어찌 친속의 정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옛날처럼 쓰는 것은 한 집안의 풍속이 될 뿐이니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전의 현달을 억지로 만류하여 자기와 같게 하여 후세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점에 마땅히 고쳐 옛 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반드시 보존하고자 한다면 청컨대 전례를 따라 정문에서는 ‘질’이라고 쓰고, 주에서는 ‘호본은 유자라고 썼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猶子之稱謂不當改, 亦所未喩. 蓋來敎但云姪止是相沿稱之, 而未見其害義不可稱之意, 云稱猶子尙庶幾焉, 亦未見其所以庶幾之說, 是以愚瞢未能卒曉. 然以書傳考之, 則亦有所自來. 蓋爾雅云: ‘女子謂兄弟之子爲姪.’ 注引左氏‘姪其從姑’以釋之, 而反復考尋, 終不言男子謂兄弟之子爲何也. 以漢書考之, 二疏乃今世所謂叔姪, 而傳以父子稱之, 則是古人直謂之子, 雖漢人猶然也. 蓋古人淳質, 不以爲嫌, 故如是稱之, 自以爲安. 降及後世, 則心有以爲不可不辨者, 於是假其所以自名於姑者而稱焉. 雖非古制, 然亦得別嫌明微之意. 而伯父叔父與夫所謂姑者, 又皆吾父之同氣也, 亦何害於親親之義哉? 今若欲從古, 則直稱子而已. 若且從俗, 則伊川․橫渠二先生者皆嘗稱之. 伊川嘗言禮從宜, 使從俗有大害義理處, 則須改之. 夫以其言如此而猶稱姪云者, 是必以爲無大害於義理故也. 故其遺文出於其家, 而其子序之, 以行於世, 擧無所謂猶子云者. 而胡本特然稱之, 是必出於家庭之所筆削無疑也. (若曰何故它處不改, 蓋有不可改者. 如祭文則有對偶之類是也.) 若以稱姪爲非而改之爲是, 亦當存其舊文而附以新意. 况本無害理, 而可遽改之乎? 今所改者出於檀弓之文, 而彼文止爲喪服兄弟之子與己子同, 故曰‘兄弟之子猶子’也. 與下文‘嫂叔之無服也’․‘姑姉妹之薄也’之文同耳, 豈以爲親屬之定名哉? 猶卽如也, 其義繫於上文, 不可殊絶明矣. 若單稱之, 卽與世俗歇後之語無異. 若平居假借稱之, 猶之可也, 豈可指爲親屬之定名乎? 若必以爲是, 則自我作古, 別爲一家之俗, 夫亦孰能止之? 似不必强挽前達, 使之同己, 以起後世之惑也. 故愚於此亦以爲尤所當改以從其舊者. 若必欲存之, 則請亦用前例, 正文作‘姪’, 注云‘胡本作‘猶子’’, 則亦可矣.
「춘추서」와 부정공 사수사에게 쓴 편지는 그 설명이 대략 그 속에 갖추어져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자세히 논의하여 옳고 그름을 구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빨리 가서 누차 독촉하는 편지를 보내오니 겨를이 미치지 못합니다. 만약 아직도 의심스럽게 생각하면 그 아래에 주를 달아 “원본에는 모모 몇 글자가 있다”라고 하시면 독자는 당시 말하는 뜻의 실체를 거의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후현이 산각한 공을 감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도 이와 같은 것이 많으니 다행히 자세히 관찰하신다면 저의 편벽된 주장이 반드시 이기려는 사사로움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이 문집을 조속히 책으로 완성하여 후학들을 그릇되지 않게 하고 싶을 뿐입니다. 노형의 뜻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치를 보는 것이 너무 밝기 때문에 문장의 의미가 번쇄한 사이에 활략한 곳이 없지는 않으니 마음을 쓰는 것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한 때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반드시 끝까지 주장하고 싶어지므로 분분해져 마침내 정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천박하고 어두우며 느리고 둔하여 일생을 문장의 의미를 굴 파듯 하고 있으니 실로 소견은 밝지 못하여 감히 망녕스럽게 주재할 수 없으니 늙은 농부와 늙은 말의 지식은 전문적이듯이 이러한 곳에서 감히 당신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참역한 것임을 스스로 모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조금 시간을 너그러이 주어 저의 어리석음을 다하여 장래 새 판본을 확정할 때 그 중에 공보에게 말하여 두 권을 보내오게 하여 참고하여 확정하고 천주에서 가르침을 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두 권을 받으려고 하는 이유는 한 권은 저본으로 남겨 후일 다시 계고할 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어여삐 여겨 용서해 주심을 받는다면 저의 허물을 기록하거나 남겨 두고 듣지 않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春秋序․富謝書其說略具卷中, 不知是否. 更欲細論, 以求可否. 此人行速, 屢來督書, 不暇及矣. 若猶以爲疑, 則亦且注其下云‘元本有某某若干字’, 庶幾讀者旣見當時言意之實, 又不揜後賢刪削之功. 其它亦多類此, 幸賜詳觀, 卽見區區非有偏主必勝之私, 但欲此集早成完書, 不悞後學耳. 計老兄之意豈異於此? 但恐見理太明, 故於文意瑣細之間不無闊略之處, 用心太剛, 故於一時意見所安必欲主張到底, 所以紛紛, 未能卒定. 如熹則淺暗遲鈍, 一生在文義上做窠窟, 苟所見未明, 實不敢妄爲主宰, 農馬智專, 所以於此等處不敢便承誨諭, 而不自知其僭易也. 伏惟少賜寬假, 使得盡愚, 將來改定新本, 便中幸白共父寄兩本來, 容更參定, 箋注求敎. 所以欲兩本者, 蓋欲留得一本作底, 以備後復有所稽考也. 儻蒙矜恕, 不錄其過而留聽焉, 不勝幸甚幸甚.
存: 原缺, 據正訛補.
장흠부에게 답함 答張欽夫
【해제】편년고증(p.4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4년(무자; 1168, 39세)의 편지이다. 살펴보건대, 임택지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정해년 무자년)에서, “경부에게 또 편지가 왔는데, 祭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墓祭와 절기에 맞춰 올리는 제사는 불가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정 선생께서는 모두 묘제가 의리를 해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편지의 첫머리에서 “제설에 대한 변정이 정밀하고 자세하여, 저를 더욱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처음부터 의심을 살만하지만, 이정 선생께서는 모두 풍속에 따라 묘제를 지내는 것이 의리를 해치는 것은 아니라는 이론이 있으니, 그러므로 경솔하게 폐지할 수 없습니다. 절기에 맞추어 올리는 제사에 관한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에서 논하는 것은 곧 임택지에게 답장한 두 번째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묘제와 절기에 맞추어 올리는 제사에 관한 일이다. 이 편지는 대개 주자가 祭說(祭儀)을 정정하면서 보낸 것이다. 당연히 임택지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와 같은 시기이거나 혹은 조금 뒤일 것이니, 아마도 무자년(1167)에 더 가까울 것 같다. 年譜考異에서도 이 편지는 아마도 丁亥년(1167)과 戊子년(1168) 사이라고 했는데, 옳다.
「제설」에 대한 구분과 수정이 정밀하고 자세하니 더욱 조심하여 발간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묘제와 절사)은 애초부터 의심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두 분 선생께서 모두 풍속을 따라 묘제 지내는 것은 의리에 해가되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니, 감히 가볍게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시절에 따라 지내는 제사(절사)에 대해서는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에 지내는 시절 제사는 옛날에 없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날 사람들은 비록 제사 지내지 않아도 마음(정)은 역시 편안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이 날이 되면 반드시 효수를 준비해 서로 잔치를 베풀어 즐기고, 절기에 따른 음식물에도 각각 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속 사람들의 마음은 오늘날에도 자신의 조부와 선고를 생각하며 그 물건으로 제사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비록 올바른 예의는 아니지만 그러나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이것만을 사용하고 사시에 맞춰 지내는 올바른 예법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뜻은 이미 바른 제사가 있다면 이것을 보존하는 것도 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가르침을 받고 보니, (귀신을) 모독하고 공경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실로 그 병폐를 적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폐지하려고 하면 아마도 시절에 따라 느끼고 사물을 접촉할 때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멈출 수 없을 것이니 생각하기에 자못 쉽지 않은 곳입니다. 옛 사람들은 제사하지 않으면 감히 잔치를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오늘날 이러한 세속의 풍속을 경전에 근거하여 제사를 폐지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음식과 잔치와 음악이 풍속을 이렇게 따르니, 죽은 이를 섬기는 것이 산 사람을 섬기는 것 같고 망자를 섬기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을 섬기는 뜻이 아닙니다. 반드시 모두 폐지해야 옳다면 또 애초부터 의리에 해가 없는데도 특별히 폐지하는 것이니 한갓 풍속을 놀래게 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오래도록 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폐지한 제사가 정해진 제도에 구속되는 것이니 다시 조치할 수 없고, 잔치 벌이고 시절에 맞는 것을 마시고 먹는 것이 점점 유행하는 풍속이 되어 언젠가는 본래 그랬던 것처럼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에 어찌 편안한 것일 수 있겠습니까?
祭說辨訂精審, 尢荷警發. 然此二事初亦致疑, 但見二先生皆有隨俗墓祭不害義理之說, 故不敢輕廢. 至於節祠, 則又有說. 蓋今之俗節, 古所無有, 故古人雖不祭, 而情亦自安. 今人旣以此爲重, 至於是日, 必具殽羞相宴樂, 而其節物亦各有宜, 故世俗之情至於是日不能不思其祖考, 而復以其物享之. 雖非禮之正, 然亦人情之不能已者. 但不當專用此而廢四時之正禮耳. 故前日之意, 以爲旣有正祭, 則存此似亦無害. 今承誨諭, 以爲黷而不敬, 此誠中其病. 然欲遂廢之, 則恐感時觸物, 思慕之心又無以自止, 殊覺不易處. 且古人不祭, 則不敢以燕, 況今於此俗節旣已據經而廢祭, 而生者則飮食宴樂, 隨俗自如, 殆非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之意也. 必盡廢之然後可, 又恐初無害於義理而特然廢之, 不惟徒駭俗聽, 亦恐不能行遠, 則是已廢之祭拘於定制, 不復能擧, 而燕飮節物漸於流俗, 有時而自如也. 此於天理, 亦豈得爲安乎?
무릇 삼왕이 예를 제정할 때 인습하고 고친 것이 달라 모두 풍기의 마땅함에 합치하면서도 의리의 올바름에 위배되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오늘날의 논의에 대해서는 분명 처리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시제 이외의 것은 각각 오랜 향속을 따라 그들이 숭상하는 때와 사용하는 물건으로 대반을 받들고 사당에 진설하여 초하루에 고하는 예를 제사하면 융쇄의 절도에 거의 맞고 곡진한 감정을 다하며 오래도록 행하여도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정월 초하루와 단오에 지내는 제사는 예기에도 기록이 없고 오늘날도 단지 이러한 사례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또 초정의와 시제를 춘추분과 하동지에 지내면 동지 때 두 제사가 서로 이어지니 역시 번다하고 모독하기에 가깝습니다. 오늘 복일의 제도를 고쳐 쓸 때 더욱 신에게 명을 듣게 되니 감히 제 멋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수정한 곳이 매우 많으니 대부분은 정씨에게 근본하고 여러 학자들을 참고하였기에 특별히 두 분 선생의 학설에서 지금도 이어 사용하는 것을 취하여 제설 한 편을 짓고, 또 제의·축문을 각각 한편으로 만드니 지난번 것과 비교했을 때 조금 더 정밀해졌습니다. 엮어내 올리니 자세히 살펴보시고 수정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夫三王制禮, 因革不同, 皆合乎風氣之宜, 而不違乎義理之正. 正使聖人復起, 其於今日之議, 亦必有所處矣. 愚意時祭之外, 各因鄕俗之舊, 以其所尙之時, 所用之物, 奉以大槃, 陳於廟中, 而以告朔之禮奠焉, 則庶幾合乎隆殺之節, 而盡乎委曲之情, 可行於久遠而無疑矣. 至於元日履端之祭, 禮亦無文, 今亦只用此例. 又初定儀時祭用分至, 則冬至二祭相仍, 亦近煩濆. 今改用卜曰之制, 允見聽命於神, 不敢自專之意. 其它如此修定處甚多, 大抵多本歷庇而參以諸家, 故特取二先生說今所承用者, 爲祭說一篇, 而祭儀․祝文又各爲一篇, 比之昨本稍復精密. 繕寫上呈, 乞賜蕃訂示及, 幸甚.
장흠부에게 답함 答張欽夫
【해제】이 글은 남송 효종 건도 4년(무자; 1168, 39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말하기를, “보내주신 표장의 편지에서 논한 천명과 합치하지 못한 곳에 관해 당신께서 이미 상세하게 말씀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남헌문집 권25에 「彪德美에게 답하는 천명을 논한 편지」가 있는데, 논의하고 있는 바가 주자의 이 편지와 일치한다.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知言序」는 가히 犯不韙, 見敎處極幸”이라 했고, 주자가 임택지에게 답한 別集 권6, 제1서에서 “지언서와 유서의 두 서문을 함께 기록하여 올립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지언서는 마땅히 무자년에 지은 유서의 두 서문과 같은 시기에 쓴 것이요, 남헌이 표덕미에게 답한 편지와 주자의 이 편지가 모두 무자년(1168)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명과 계합하지 않는 곳에 관한 논의를 보여 주셨는데, 존형께서 이미 상세히 말씀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표장의 의도는 다시 말씀을 내리게 하려고 한 것 같은데, 비록 저 스스로 생각할 때 존형의 뜻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러나 스스로를 다하여 가르침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들으니 표장께서는 천명은 오직 인간만이 얻을 수 있고 사물은 함께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제 생각에 사실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논의하신 것을 보니 품수 받아 나고 형체를 부여하기 이전은 천명의 전체가 되며, 사람과 사물이 받은 것은 모두 부득이해서 함께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 같은데, 이것은 제가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천명은 멈추지 않으니 실로 사람과 사물이 함께 얻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사람과 사물이 받은 것을 떠나 따로 전체가 있겠습니까? 사람과 사물이 낳고 낳는 작용이 무궁한 것을 보면 천명의 유행이 멈추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타고 있는 기질에는 치우침과 올바름 순수함과 박잡함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품수 받아 태어나는 것에는 사람과 사물 모두 어짐과 어질 못함이 다릅니다. 사물은 실로 기에 가려져 알지 못하고, 사람들도 욕심에 가려져 보존하지 못하니, 이것은 모두 스스로 하늘과의 계합처를 끊어버린 것이니, 천명이 멈추지 않다는 것은 애당초 일찍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반성하여 일상생활에서 스스로를 구하며 존양하고 체찰하여 물욕의 가림을 제거하면 인을 구하면 인을 얻고 본심은 밝게 빛나며 천명 유행의 전체는 실로 이 몸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성현으로부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도를 다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으니 인은 그 속에 있으며 성명의 이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천선생께서 본성을 다하고 명에 도달함은 반드시 효제에서 근본한다고 말씀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할 뿐입니다.(『유서』제18권의 첫 단락은 이것을 매우 자세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무릇 어찌 천명 전체를 명을 받아 태어나는 것 앞과 사단 오전의 밖에 두고 따로 또 하나의 방법을 만들어 그것에 이르기를 구하겠습니까?
所示彪丈書論夫命未契處, 想尊兄已詳語之. 然彪丈之意, 似欲更今下語, 釀自度無出尊兄之意外者, 然不敢不自揭以求敎也. 熹昨聞彪丈謂天命惟人得之, 而物無所與, 鄙意固已不能無疑. 今觀所論, 則似又指稟生賦形以前爲天命之全體, 而人物所受皆不得而與焉, 此則熹之所尤不曉也. 夫天命不已, 固人物之所同得以生者也, 然豈離乎人物之所受而別有全體哉? 觀人物之生生無窮, 則天命之流行不已可見矣. 但其所乘之氣有偏正純駁之異, 是以禀而生者, 有人物賢否之不一. 物固隔於氣而不能知, 衆人亦蔽於欲而不能存, 是皆有以自絶于天, 而天命之不已者, 初亦未嘗已也. 人能反身自求於日用之間, 存養體察, 以去其物欲之蔽, 則求仁得仁, 本心昭著, 天命流行之全體固不外乎此身矣. 故自昔聖賢不過使人盡其所以正心修身之道, 則仁在其中而性命之理得. 伊川先生所謂盡性至命必本於孝弟, 正謂此耳. 夫豈以天命全體置諸被命受生之前, 四端五典之外, 而別爲一術以求至乎彼哉?
인이란 마음의 도이고, 사람이 본성을 다하여 명에 이르는 요체입니다. 지금 성인은 비록 인으로 사람을 가르치지만 성명에 근본하여 펴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인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또 성명이라는 말을 빌어 돕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본이라고 하면 천하의 이치는 여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만을 두고 말하면 인이 아니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인 문하의 학문에서 인을 구하는 것으로 요체를 삼는 것은 바로 대본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인께서 인을 말씀한 것은 대본을 겸해서 말씀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시면, 이것은 인과 대본을 각각 다른 것으로 여기고, 이것을 저것을 겸한 후에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들 모두 깊이 이해되지 않는데, 표장의 뜻은 과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지언』의 첫 장은 바로 이 일을 설파한 것이고, 그 뒤는 인자를 계속 끌어 쓴 것이 가장 긴요한데 학자들이 두 가지 근본이나 세 가지 근본으로 볼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역시 사람들을 깨우치는데 급급하여 쪼개고 나눔이 너무 과하며, 하학에 소략하고 미루어 설명함이 너무 고원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아마 오늘날의 폐단을 열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문을 지을 때 본래의 의미를 미루어 밝혀 말류로 흐르는 것을 구제하였는데 이 책에 공이 있고 학자들에게는 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석씨가 비록 오직 한 마음을 밝힌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마음의 본체를 몰랐고, 비록 마음이 모든 일을 일으킨다고 말했지만 사실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우지 못했고 안과 밖의 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학설을 말하는 자들도 오히려 서로 속이고 속이며 굽혀 속이고 피하며 끝내 한 마음 밖에 따로 대본이 있음을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말하는 마음은 천서 천질 천토 측은 수오 시비 사양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마음을 벗어난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알고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 본성과 천명에 어찌 두 가지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도를 행하는 자들은 오히려 이 마음 밖에 따로 대본을 두고 인을 행하는 밖에 따로 본성을 다하고 천명에 이르는 방법을 두니, 성현께서 말씀하여 후세에 모범을 내려주는 뜻과 평생 스승을 이어 도를 묻는 마음에 등질뿐만 아니라 이러한 학설이 유행하면 도리어 이학의 공격을 받아 거듭 우리 도에 누가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보내 주신 가르침을 따라 저의 어리석은 의견을 말씀드리니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살피고 다시 표장에게 가르침을 구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蓋仁也者心之道, 而人之所以盡性至命之樋要也. 今乃言聖人雖敎人以仁, 而末嘗不本性命以發之, 則是以仁爲未足, 而又假性命之云以助之也. 且謂之大本, 則天下之理無出於此, 但自人而言, 非仁則無自而立. 故聖門之學以求仁爲要者, 正所以立大本也. 今乃謂聖人言仁未嘗不兼大本而言, 則是仁與大本各爲一物, 以此兼彼而後可得而言也. 凡此皆燦所未愉, 不知彪丈之意竟何如耳.
知言首章卽是說破此事, 其後提綴仁字, 最爲緊切, 正恐學者作二本三本看了. 但其間亦有急於曉人而箚析太過, 略於下學而推說太高者, 此所以或敗今日之弊. 序文之作, 推明本意, 以救末流, 可謂有功於此書而爲聿於學者矣, 尙何疑之(3-1304)有哉?
釋氏雖自謂惟明一心, 然實不識心體, 雖云心生萬法, 而實心外有法, 故無以立天下之大本, 而內外之道不備. 然爲其說者猶知左右迷藏, 曲爲隱諱, 終不肯言一心之外別有大本也. 若聖門所謂心, 則天序․天秩․天命․天討․側隱․羞惡․是非․辭讓莫不該備, 而無心外之法. 故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 知其性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是則天人性命豈有二理哉? 而今之爲此道者, 反謂此心之外別有盡性至命之方, 竊恐非惟孤負聖賢立言垂後之意, 平生承師問道之心, 竊恐此說流行, 反爲異學所攻, 重爲吾道之累. 故因來示得效其愚, 其是否而復以求敎於彪丈, 幸甚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