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참정에게 보내는 차자 與鄭參政箚子
【해제】이 글은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시론이 크게 바뀌고 위복(威福)이 떨어지는 때를 만나니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이 쫓겨나고 세상은 흔들리고 크게 놀라니 병중에 그런 소식을 듣고 분하고 답답해서 죽고자 해도 길이 없습니다. 급하게 소장(䟽章)을 써서 자통하여(폐하에게 알려) 혹 깨닫기를 바랬지만, 자제와 문생들이 서로 찾아와 거듭 간언하길 이와 같이 하시면 국가에 누만 더할 뿐 이익이 없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연보』에 따르면, 을묘년 5월 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부사승 여조검은 승상을 소주로 폄척하는 것을 논의에 붙여 구하려고 하였다. 선생께서는 여러 조대에 걸쳐 알아준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또 아직 종신의 직명을 갖고 있으므로 의리상 침묵하고 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봉사 수 만언을 바로 적어 간사하고 임금을 무너뜨리는 화를 극렬히 진언하여 승상의 억울함을 밝혀주려고 했다. 자제와 제자들이 연달아 간언하며 그러면 반드시 화를 사게 될 것이라고 하니 상주하려던 글을 취소하고 불태웠다.” 또 『별집』권1 「답유덕수」제8서에서도 역시 점을 쳐 물러나 원고를 불태웠다고 했는데, 그 편지는 을묘년 6월에 쓴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참정에게 보내는 이 편지 역시 을묘년 여름 끝자락이라고 보는 것이 가깝다.
저는 산골에 묻혀 사는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세상에 처신하는 것이 조화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당세의 한두 분 훌륭한 선생의 가르침과 인정을 받아 국사로써 대접해 주셨기에 항상 그 뜻을 가다듬으면서 감히 조금이라도 깎아 내려 그 문호를 욕되게 할 수 없었고 또한 때와 기회를 만나면 털끝만큼이라도 세상에 작은 힘을 바치기 바랐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늙어서도 이 뜻을 이루지 못했고 또 마침 시론이 크게 바뀌고 임금의 권위(威福)가 떨어지는 때를 만나서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이 흩어지고 세상은 흔들리고 크게 놀라니 병중에 그런 소식을 듣고 분하고 답답해서 죽고자 해도 길이 없습니다. 급하게 소장(䟽章)을 써서 임금께 알려 혹 깨닫기를 바랐지만, 자제와 문생들이 서로 찾아와 거듭 간언하길 “이와 같이 하시면 국가에 누만 더할 뿐 이익이 없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혼란스럽다 마침내 병이 깊어졌습니다. 이것은 이내 곤궁한 운명이 그렇게 한 것이라서 말할 것도 못됩니다. 지금 만약 병으로 인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아울러 명분도 없는 직함을 벗어난다면 세상과 길이 하직하고 웃으면서 죽을 수 있으니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참정께서 평소 저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니 간절히 바라건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곡진히 저를 보전해 주십시오. 만일 다시 얽히고 혼란스러움이 있어 마음속에 있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저는 본래의 마음이 오히려 남아 있어서 근본을 평정할 수 없기에 언제라도 일을 만나게 될 경우 감정이 일어나 스스로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니, 다시 죽음을 앞에 둔 나이에 쫓겨나는 화를 당하는 것 또한 참정께서 바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時事가 이와 같으니 유식한 사람들은 한심스러워 하는데 참정께서는 조용히 그 때를 용납하면서 몸소 그 책임을 맡으려고 하지 않으니 이 또한 안팎에서 깊이 의심하는 것이지만 저는 오히려 당신께서 때를 기다려 하려는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그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그것이 과연 그러하다면 안위의 기틀은 서로 거리가 날로 멀어지니 또한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하는 말이라 조리가 없습니다만 오직 이 한 가지 마음은 붉은 빛처럼 빛나니 삼가 생각하건대 당신께서 그것을 유념해주십시오.
熹山野伉拙, 處世不諧, 然自少日卽蒙當世一二鉅公敎誨期許, 待以國士, 居常厲志, 不敢少貶, 以辱其門, 亦庶幾得因濟會, 少有毫髮以自效於當世. 不意暮(3-1248)年此志不遂, 而又適遭時論大變, 威福下移, 忠賢奔波, 海內震駭, 病中聞之, 憤悶鬱結, 覓死無路. 亟欲草疏自通, 幾或開悟, 而子弟諸生交謁更諫, 以爲如此適增國家之累而無益. 紛拏累日, 疾勢遂侵, 此乃窮命使然, 是亦無足言者. 今若得因病辭官, 幷脫無名之職, 則與世長辭, 含笑入地, 無所恨矣. 伏惟參政矜憐有素, 切望乘此機會, 曲賜保全. 萬一更有纏撓, 不遂所懷, 則熹素心尙在, 本未能平, 一旦遇事感觸, 不能自已, 更以垂死之年, 自貽投竄之禍, 亦非參政之所欲也. 抑時事如此, 有識寒心, 而參政從容其間, 未肯身任其責, 此亦中外所深疑者, 而熹猶竊恐高明之有待而發也. 不知其果然耶? 其不然耶? 如其果然, 則安危之機相去日遠, 亦不可以少緩矣. 垂絶之言, 無復倫次, 唯此一念, 炳然如丹, 伏惟明公念之.
이계장에게 보내는 편지 與李季章書
【해제】이 글은 경원 2년(병진; 1196, 67세)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형양에서 온 부고를 들은 사람들이 슬퍼하는데 하물며 우리처럼 그(조여우)와 잘 지냈던 사람들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내게 한 은혜에서 임금께서 잊지 않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 했다. 조여우가 한탁주의 시기를 받고 경원 원년 을묘 2월에 재상에서 파직되어, 대관문을 통해 복주 지주로 쫓겨났다. 조금 후에는 다시 복주 지주에서 파직되었고, 7월에는 다시 궁관에서 파직되었다. 11월에는 조서를 내려 영주에 안치토록 하였다. 『속자치통감』권154 경원 2년 정월 정해조에 “조여우가 형주에 이르렀을 때 병이 났다. 형주를 다스리던 전금승은 한탁주의 지시를 받고 여러 가지로 조여우가 곤욕을 치르게 했다. 경자년 조여우는 갑자기 죽었다. 천하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여겼다. 황제는 명을 내려 원래의 관직을 추증 복원케 하고 돌아와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했다”고 하였다. 또 『송사』「영종본기』에서는 병진년 2월 신유에 조칙을 내려 조여우의 귀장을 허락했다고 하였다. 주자의 이 편지는 귀장의 조칙을 이미 알고 있으니 병진년 2월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젊은 시절엔 서로 헤어져도 후일 만날 기약이 있지. 지금 이렇게 같이 늙어가니 다시는 이별할 때가 아니네. 한 잔 술 내일이면 또 다시 들기 어렵다고 마오. 꿈속에서도 길을 모르니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위로할까?
사원의 동료와 영지사에서 송별연을 할 때 앉아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 이 시를 읊었습니다. 이계장이 저를 보고 말하길 “내 평생 이 시를 매우 좋아하는데 어찌 글로 써 주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내가 말하길 “나와 같이 늙은 사람은 이 맛을 알겠지만 계장은 아직 젊어서 모를 것인데 어찌 이 시를 좋아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있다가 생각해보니, 헤어질 때에 단지 한 사람이라도 늙음을 탄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기분이 나빠지기에, 비로소 심은후(沈隱侯)의 시에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시를 적어 함께 보내는데 계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平生少年日, 分手易前期. 及此同衰暮, 非復別離時. 勿言一樽酒, 明日難重持. 夢中不識路, 何以慰相思?
(3-1249)史院同僚餞別靈芝, 坐間或誦此言. 李季章見謂, ‘平生亦甚愛此, 盍書以見贈’? 予謂如僕乃知此味, 季章未也, 胡爲亦愛此耶? 旣而思之, 解携之際, 但有一人衰暮, 便足令滿坐作惡, 乃知隱侯之言猶有所未盡也. 因幷書以寄, 季章以爲如何也?
이미 지난번 편지에 써서 행지가 있는 곳으로 보냈는데, 그가 아직 그 편지를 보내지 않아서 저는 다시 그에게 사람을 빌어 감사하는 표문을 올려 보내면서 비로소 함께 갖고 가게 했습니다. 형양에서 온 부고를 듣고 사람들이 슬퍼하는데 하물며 우리처럼 그(조여우)와 잘 지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내게 한 은혜에서 임금께서 잊지 않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직의 회복이 비록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오래도록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전에 청했던 봉증과 음보 등의 다섯 가지 일은 아직 지휘를 얻지 못했으니 다시 조정에 아뢰는 것을 피할 수 없고 단지 유사에게 보내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족합니다. 만약 사직할 수 없다면 저도 꼭 고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여러 의론이 분분하여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는데 제가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행이 여러 공들을 만나거든 한 말씀 언급해 주시고 정참정에게 조속히 회답을 내려주라고 간절히 말씀하여 보냈던 사람이 돌아올 때 보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 사람은 빌린 사람이니 오래 기다리게 하기 어렵습니다. 일전에 임금께서 시험관에 들어오게 했다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은 이미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 편지에서 말했던 귀향할 생각은 과연 어떻습니까? 행지가 일전에 여기를 지나면서 아마 한 동안은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已作前幅送行之處, 渠未遣行, 而熹復從渠借人去上謝表, 方得幷令帶去. 衡陽之訃, 聞者傷歎, 况吾人相與之厚耶? 歸葬之恩, 可見上意未嘗忘之. 復書 雖未遂, 恐終不能久沮格也. 熹前所請封贈蔭補等五事未得指揮, 不免再申朝廷, 只得付之有司, 使以法裁之足矣. 若不可辭, 熹亦無固必. 但衆議論紛紛, 至今未已, 熹非固欲如此也. 幸因見諸公一言及之, 仍懇鄭丈早得回降, 付去人歸爲幸. 此是借人, 難令久伺候也. 昨聞宣入試闈, 今想已出. 前書所說歸計, 果如何耶? 行之昨日過此, 亦疑久未踐也.
유승상에게 보낸 편지 與留丞相書
【해제】이 글은 경원 2년(병진; 1196, 67세)의 편지이다. 편년고증(p.404)에 의하면 편지에서 “잘한 것이 없는 저는 우연히 세상에서 죄를 얻어 남들을 그르치고 연루되어 위로는 유학의 도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여러 현자에게까지 누를 미쳐서, 줄지어 사람을 속이고 거짓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고, 부도한 법에 저촉되었는데”라고 했다. 이것은 경원 위학의 의론을 가리킨 것이다. 이 편지에서 아직 낙직과 사관직의 파직은 언급하지 않고 있으니 병진년 겨울 이전임에 틀림없다. 또 편지 속에서 제생들이 이러한 사정을 알면 감히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당금이 더욱 엄해진 것이니, 을묘년이 아니라 역시 병진년에 쓴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가깝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리석고 재주 없어 모든 일에 남들만 못했으나, 오직 옛 사람의 위기지학을 듣고서 마음속으로 좋아했고, 또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요,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침내 스스로 이 학문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천지의 중을 받아 태어난 책임을 대강 채우려고 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처음부터 감히 특별한 명성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윽고 시골 후생 중에 묻고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들은 대로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소문을 듣고 멀리서 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재주의 고하와 그 바탕의 후박은 비록 같지 않지만 그러나 모두 이런 마음을 갖고 저에게 오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熹自少所鄙拙, 凡事不能及人, 獨聞古人爲己之學而心竊好之, 又以爲是乃所當爲而力所可勉, 遂委己從事焉, 庶幾粗以塞其受中以生之責, 初不敢爲異以求名也. 旣而閭里後生有相問者, 因以所聞告之. 而流傳之誤, 乃有自遠至者. 其才之高下· 質之厚薄雖爲不同, 然皆以是心至, 熹不得拒也.
잘난 것이 없는 제가 우연히 세상에 죄를 얻어 남들을 그르치고 연루시켜, 위로는 유학의 도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여러 현자에게까지 누를 끼쳐, 줄지어 사람을 속이는 거짓 학문을 한다는 오명을 얻은 말할 것도 없고, 부도한 법에 저촉되어 애당초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화가 미치게 되었습니다. 두문불출하고 자신의 습관만 따르니,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입니다. 비록 그것을 후회하지만 길이 막혀 할 수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계속해서 오는 자들 또한 차마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할 때 마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저 보다 더 어리석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한 달 후 각각 일 때문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외간에서 위학당으로 몰렸다는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니, 감히 다시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편지를 받았는데, 당신께서 보전의 뜻을 깨우쳐 주셨기 때문에 매우 감사하여 감히 자세하게 곡절을 아뢰는 것입니다. 어제 이원주가 이곳을 지나게 되어 근자의 일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당신의 뜻을 제가 얻어 더 잘 알게 되었으니, 더욱 스스로 경축하고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不謂熹之無狀, 偶自獲罪於世, 而詿誤連染, 上累斯道, 下及衆賢, 例得詭僞之名, 詆以不道之法, 至有初不相識而橫罹其禍者. 杜門循習, 私竊負愧. 雖欲悔之, 而厥路無繇矣. 顧其繼而來者, 又未忍却. 然每對之, 未嘗不自笑其愚, 而又憐彼之愚甚於熹也. 今幸旬月以來, 各以事歸, 計亦聞知外間風色, 自不敢復來矣. 垂問之及, 深感鈞慈風諭保全之意, 故敢詳布委折. 昨日李袁州過此, 能言近事. 又知僥冒獲附下風之義, 尤竊自慶幸也.
임행보에게 답하는 편지 答任行甫書
【해제】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 69세)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지금 부공에게 보내는 장계와 편지는 보명을 빌고 치사를 신청하기 위한 것이니 번거롭지만 처리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연보』에 따르면“(경원) 4년 병술…겨울 12월 나이가 많다고 치사를 요청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응당 무오년에 쓴 것이다.
노쇠하니 질병이 더욱 심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부공에게 보내는 장계와 편지는 보명을 구하고 치사를 신청하기 위한 것인데 번거롭지게 보냅니다. 거듭 제가 올리는 주장의 문장을 헤아려 보시고 보낸 사람에게 보내주시고, 다른 한편 치사 신청하는 글을 내년 정월에 문서로 만들어 조정에 올려준다면 좋겠습니다. 막료에게 보내는 두통의 편지도 아울러 보내주십시오. 또 이번에 치사를 신청하는 글은 그간의 이력서를 백색의 종이에 작성하여 제출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부 문안에서 사용하는 용지와 상서성 이부에서 사용하는 용지 또한 마땅한 상례가 있을 것이니 번거롭지만 물어봐 주십시오. 이것은 이미 담당자에게 맡겨 규정대로 들려 보냈으니 불러보면 좋겠습니다. 상서성 이부에서 보낸 것을 저에게 자세히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衰病益侵, 無足言者. 今有申府公狀及府公手書 爲乞保明申請休致 煩爲投之. 仍計會申奏一宗文字, 付之去人, 仍作來年正月押下申發乃佳. 幕僚二書 倂以囑之矣. 又此休致文字, 不知更要錄白繳申脚色之類否? 案中紙札及省部亦應有合用常例, 悉煩問之. 此間者已批付幹人, 依例支與, 幸呼來. 付之省部者, 得子細批報爲佳.
임행보에게 답하는 편지 答任行甫書
【해제】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 69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치사를 신청하는데 필요한 건안부의 보증 주장이 심히 마음에 걸립니다.…행로의 여정을 계산하면 아직 도착하지 않아야 하므로 정월 하순 이후에 제출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주자는 경원 4년 무오에 치사를 신청했고, 5년 4월에 치사를 허락받았다. 그러므로 이 편지에서 정월이라고 말한 것은 5년 기미년 정월을 가리킨다. 주자가 이 편지를 쓸 당시는 아직 정월이 아니었으므로, 무오년 겨울이었다.
치사를 신청하는데 필요한 건안부의 보증 주장이 심히 마음에 걸립니다. 빨리 그 글을 얻고 싶은 까닭은 단지 상서성에 가는 사람에게 갖고 가게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착한 날 바로 제출하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인데, 행로의 여정을 계산하면 아직 도착하지 않아야 하므로 정월 하순 이후에 제출해야 결코 주군에 누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다시 편지를 보내 문창에게 간청하고, 임추에게 부탁하여 말씀을 전하니 반드시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색의 종이를 사용하는 것이 법령에서는 어떻게 규정 되어 있는지 검토해 보고 난 후, 만약 반드시 백색의 종이를 사용해야 한다면 바로 이어 부쳐 보내겠습니다. 수일 동안 강론의 즐거움이 있는데 당신께서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유감입니다.
休致文字極荷留念. 所以亟欲得之, 只爲欲因赴省人帶行. 然亦不敢令到日卽投, 計程未合到, 須令正月下旬以後投之, 決不至爲州郡之累也. 今再有書懇文昌, 及託林推言之, 想必可得也. 錄白俟檢法看如何, 若須用, 卽續寄去. 數日來頗有講論之樂, 恨賢者不聞之也.
임행보에게 답하는 편지 答任行甫書
【해제】이 글은 경원 4년(무오; 1198, 69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듣자하니 부공께서는 내년 정초에 치사를 보증하는 글을 발급하겠다고 허락하셨다”라고 했다. 개정은 기미년 정초를 가리키니, 이 편지는 그 이전이다. 그러므로 역시 무오년 겨울에 쓴 것이다.
저의 병은 날로 심해지니 아마 하늘도 치사를 신청하고 쉬라고 재촉하는 소식 같습니다. 이러 저러한 황당무계한 논의들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상관없습니다. 듣자하니 부공께서는 내년 정초에 치사를 보증하는 글을 발급하겠다고 허락하셨고, 유건안 역시 여러 차례 유세한데다 오늘 또 다시 글을 올려 간청을 드렸습니다. 이곳에서는 12월 초 엿새나 이레 쯤 사람을 보내 경사에 들어갈텐데 그 전에 보명의 글이 저에게 도착하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편지에서 이미 건안에게 부탁하기를 당신을 직접 만나 말씀하라고 했는데, 하루라도 빨리 유념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직접 만나기 어려우시면 건안에게 말씀해주셔도 되겠습니다. 임추는 편지에서 백지에 기록한 문장 등이 필요하다고 하니 지금 써서 보고합니다. 하지만 치사를 요구하는 주장은 완전히 정해진 양식에 맞추고 싶지 않은데, 이것이 혹 혐의가 될까 두렵습니다. 나머지 것은 건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서로 보실 수 있으니 여기에 일일이 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熹病愈甚, 蓋是天意催促休致消息, 可見悠悠之論殊無所謂. 府公聞已許開正發文字, 而兪建安亦數爲游說, 又今再與書致懇. 此中初六․七間有人入都, 須趁此前到此乃佳. 書中已說託建安及賢者面言, 幸早留念. 若難相見, 只建安言之可(3-1252)也. 林推書說要錄白文字等, 今亦有書報之. 但陳乞狀不欲全依式, 恐有嫌疑. 其他建安書中可互見, 此不能盡布也.
임행보에게 답하는 편지 答任行甫書
【해제】편년고증(p.451)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4년(무오; 1198, 69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치사를 신청하는 글이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임추가 깨우쳐 준 인쇄 종이는 이미 사람을 빌려 필사하고 있으니 2-3일 지나면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세 번째 편지의 “임추는 편지에서 백지에 기록한 문장 등이 필요하다”고 운운한 것을 이어 말한 것이다. 또 네 번째 편지에서 “치사를 보증하는 관리인 유재에게 보낸 서신 속에서 이미 말했습니다만 역시 그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싶지는 않고”라고 했다. 생각하건대, 주자는 정사년 이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임위”라는 사람을 여러번 언급하는데, 바로 임행보를 가리킨다. 당시 그는 건양현위에 재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자가 보낸 편지는 당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임행보에게 보낸 제1, 제2, 제3, 제4서는 모두 무오년 겨울에 쓴 것이 틀림없다.
치사를 신청하는 글이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임추가 깨우쳐 준 인쇄 종이는 이미 사람을 빌어 필사하고 있으니 2-3일 지나면 마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바로 사람을 보내 발송하려고 합니다. 번거롭지만 저의 뜻으로 감사를 표시해 주십시오.사람을 따로 보내 주장을 올릴 생각입니다. 치사를 보증하는 관리인 유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미 말했습니다만 역시 그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싶지는 않고 단지 그에게 완곡하게 에돌러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상했던 것과 같으니, 그 일은 일소에 붙일 뿐입니다. (보증을 해 주리라 말했던) 여러 사람들은 혹 아직 조관에 오르지 못했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다시는 입을 열어 부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남검의 전우사 만큼은 비록 파직 당했지만 누차에 걸쳐 사면을 경험했고, 파직 당한 후에도 마감 전관을 했으니, 혹시 (보명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미 오정에게 가서 부탁해 보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지금은 만약 거지가 아니면 누구도 기꺼이 문둥병 환자 같은 저에게 보증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번거롭지만 법의 규정이 어떤지 다시 물어 보십시오. 주장의 형식을 보니 분사 치사 등을 신청하는 사람은 자신이 쓸 수 없습니다. 또 이미 간청인에게 일러주고 정월 이후 봉록은 증가하지 말라고 했는데, 번거롭지만 봉록의 표 등을 수습했다가 바로 보여 주는게 편할 것 같습니다.
謝事文字極荷留念. 林推所喩印紙已借人寫, 須更兩三日方可得, 卽遣人送去. 且煩爲道鄙意謝之, 俟遣人別上狀也. 保官兪宰書中已說, 但亦恐其難之, 故不欲直求之, 但云託其宛轉而已. 今果如所料, 可付一笑. 所說諸人, 或恐未升朝, 或恐亦有所畏, 不欲更啓口. 只南劍田右司雖是放罷, 然屢已經赦, 罷後又曾磨勘轉官, 恐或可作, 已專令吳定往求之. 今若不是乞兒, 不肯與癩子作保. 然亦煩更問法意如何, 以狀式觀之, 但非分司致仕等人自可作也. 亦已喩幹請人, 令勿幫正月以後俸錢, 幷煩爲收起券身之屬, 便中示及也.
임행보에게 보내는 편지 與任行甫書
【해제】편년고증(p.451)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4년(무오; 1198, 69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치사를 보증하는 관리의 글을 오랫동안 구해도 얻지 못하니 이제는 아에 구할 생각을 끊었습니다”라고 했는데 역시 임행보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를 이은 것이다. 임행보에게 보내는 제5서는 아마 기미년 초에 쓴 것 같은데, 아직은 알 수 없다.
치사를 보증하는 관리의 글을 오랫동안 구해도 얻지 못하니 이제는 아에 구할 생각을 끊었습니다. 단지 주부에 간청하여 상서성에 올릴 주장 하나만 요청하려고 합니다. 또 임지를 옮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편지를 보내 축하하고, 따로 편지를 보내 이 일을 간청했습니다. 사람을 보냈는데, 문득 소무의 황형주가 편지를 보내와 자신이 보증을 하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식견이 서로 어긋남이 이와 같으니, 할 수 없이 보낸 사람을 좇아가 불러와 고맙다는 편지를 써 보내니 번거롭지만 제출해 주십시오. 또 한편으로 사람을 소무로 보내 서명이 된 완비된 문서를 갖고, 인지를 빌려오게 했으니, 도착하면 바로 발송해 보내겠습니다. 구주장 안에 있는 편지 한통은 임추에게 보내는 것인데 지금 또 뽑아 보냅니다. 단지 권신은 여전히 가져오기 번거롭지만 돌아오는 인편에 보내주시기 기다립니다.
保官久求不得, 已絶意不求. 只欲懇州府, 乞一申省狀. 又聞府坐移鎭, 已亟作書賀之, 幷別緘致此懇. 遣行矣, 忽得昭武黃衡州書, 自求作保. 人之識度相越乃如此, 不免趕回, 且發去賀書, 煩爲投之. 亦一面遣人去昭武僉圓文字, 借印紙來, 俟到卽發去. 求奏狀內有一書至林推, 今亦且抽回. 只券身仍煩取回, 俟有回便却付來也.
양자직에게 보내는 편지 與楊子直書
【해제】편년고증(p.47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5년(기미; 1199, 70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저는 병이 들어 계속 앓아누워 있느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을 보내 치사하겠다는 글을 올렸는데, 허락을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살펴보면, 주자는 무오년 겨울에 이미 치사를 신청하는 글을 준비하고, 건안부에 보명을 요청하는 주장을 올렸는데, 도중에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다가 기미년 초에야 비로소 사람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기미년 초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저는 병이 들어 계속 앓아누워 있느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을 보내 치사하겠다는 글을 올렸는데, 허락을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의로움에 밝은 사람은 군자가 되고, 이로움에 밝은 사람은 소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한 가지 의론이 두 사람 사이를 감고 돌면서 서로 공방을 벌이느라 심기(心機)를 다 소모했는데, 끝내는 군자가 되지도 못하고, 소인이 되는 것도 충분하지 못했으니, 또한 그 마음을 잘못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장차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선하다고 하니 당신께서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熹一病沈綿, 遂不能起. 今遣人去下致仕文字, 不知尙及拜受否也. 世間喩於義者則爲君子, 喩於利者卽是小人. 而近年一種議論, 乃欲周旋於二者之間, 回互委曲, 費盡心機, 卒旣不得爲君子, 而其爲小人亦不索性, 亦可謂悞用其心矣. 人之將死, 其言也善, 惟老兄念之.
항평보에게 보내는 편지 與項平父書
【해제】편년고증(p.47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5년(기미; 1199, 70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저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기에 다시 편지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을 보내 치사를 요청하는 글을 올렸습니다”라고 했다. 이 편지는 위의 양자직에게 회답한 편지와 뜻이 같으니 역시 기미년 초에 쓴 것이다.
저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기에 다시 편지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을 보내 치사를 요청하는 글을 올렸는데, 당신을 평생의 친구라고 생각하니 몇 마디 이별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론이 한번 변하니 말을 다하는 사람은 화를 얻고, 온전함을 구하려는 사람은 비방을 당하니, 이로움과 해로움의 길고 짧음의 사이를 당신 역시 마땅히 살펴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熹老病死矣, 無復可言. 今漫遣人去下致仕文字, 念公平生故人, 不可無數字之訣. 時論一變, 盡言者得禍, 求全者得謗, 利害短長之間, 亦明者所宜審處也.
장정수에게 답하는 편지 答張定叟書
【해제】편년고증(p.378)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원년(을묘; 1195, 66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조정이 저를 버리지 않았던 은혜를 입어 누차에 걸쳐 받아들여 등용되었으나 결국에는 보답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바야흐로 잘못을 반성하면서 오히려 후일의 보답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시론이 한번 변하더니 안팎이 진동하고 놀라서 충신과 어진 이는 쫓겨나고, (그 여파가) 아래로는 벼슬 없는 선비들에게도 미치니, 근세에 없었던 일입니다. 병중에 분하고 답답하여 슬프게 탄식한 것이 여러 날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소원하여 말해봤자 보탬이 없었으니, 결국 저의 생각을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습니다.”고 했다. 또 “지금은 이미 다시 완전히 회복될 전망이 없으니 급히 벼슬을 그만두려는 청을 올렸습니다.”고 했다. 살펴보면, 여기에서 말한 것 역시 을묘년 한탁주가 권력을 독단하면서 충신과 현인을 쫓아낸 일이고, 관을 내걸기를 요청한 것은 을묘년 5월 치사한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편지 역시 을묘년 5, 6월 사이에 쓴 것이다.
저는 몸조리를 할 줄 몰라 온갖 질병이 연달아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매년 각기병만 있었는데 근본이 이미 쇠약하여 질병과 싸우지 못하더니 마침내 매우 피곤함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지금은 이미 다시 완전히 회복될 전망이 없으니 급히 벼슬을 그만두려는 청을 올렸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평생 제대로 닮은 것이 없고, 비록 당신의 선친이신 충헌공의 막부에 달려가서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으나 알아주시고 대우해주시는 뜻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당신 형제들과 교유하면서 도의와 덕업으로 서로 천년을 기약했습니다. 경부는 나를 버리고 먼저 돌아가신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는데, 지금 나는 이렇게 쇠약하고 병들었으니 살날이 오래남지 않았습니다. 조정이 저를 버리지 않았던 은혜를 입어 누차에 걸쳐 받아들여 등용되었으나 결국에는 보답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바야흐로 잘못을 반성하면서 오히려 후일의 보답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시론이 한번 변하더니 안팎이 진동하고 놀라서 충신과 어진 이는 쫓겨나고, (그 여파가) 아래로는 벼슬 없는 선비들에게도 미치니, 근세에 없었던 일입니다. 병중에 분하고 답답하여 슬프게 탄식한 것이 여러 날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소원하여 말해봤자 보탬이 없었으니, 결국 저의 생각을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이런 때에 병세가 심해져 드디어 이와 같은 하책을 내었으니 아마 머지않아 눈을 감으면 당신의 부형과 평생의 사우를 지하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밖에는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熹昧於攝理, 百病交攻, 初亦只是常年脚氣, 而根本已衰, 不能與病爲敵, 遂至沈困, 日甚一日. 今已無復生全之望, 亟上掛冠之請矣. 自惟平生無所肖似, 雖不及趨拜先忠獻公幕府, 而荷知遇之意不薄. 及遊兄伯仲間, 又以道義德業相期於千載. 敬夫棄我而先已十餘年, 而熹今衰病又如此, 則亦不得久留矣. 昨蒙朝廷不棄, 累加收用, 訖無補報, 狼狽而歸. 方此省愆, 尙期後效, 而時論一變, 中外震駭, 忠賢斥逐, 下及韋布, 蓋近世所無有. 病中憤悶無聊, 悲歎累日. 顧念疎遠, 言之無益, 竟不能發一語以效其愚. 適會疾亟, 遂姑出此下計, 庶幾旦夕瞑目, 有(3-1255)以見兄家父兄, 平生師友於地下耳. 此外尙何言哉!
지금 이 시대의 일들이 이와 같으니 유식한 사람들이 한심스러워 합니다. 묵묵히 생각해보니 안팎의 여러 공들 가운데 권위와 덕망이 높고 충성과 의리가 명백한 사람으로 정수 당신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다른 때에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고 패(敗)한 것을 도와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비록 눈을 감더라도 실재로 당신에게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좋은 계책을 힘써 생각하여 보강할 것을 더 구하고, 편안히 거처할 때에도 깊이 생각하여 마음의 근원을 편안하게 기르고, 눈과 귀의 자그마한 즐거움을 멀리하고, 국가를 위한 커다란 계책을 도모하십시오. 이것은 또 보잘 것 없는 제가 매우 바라는 것입니다. 유성지(游誠之)는 재주와 능력이 기대할만한데 단지 구황(救荒)이라는 한 가지 일 뿐만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거두어 문하에 두신다면, 다른 때에 쓸 곳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또 다시 바라건대 인재를 모아 아울러 양성하고 더욱 방정함과 엄중함을 얻어서 넉넉한 식견과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가히 경외(敬畏)하는 사람들이 그 사이에 운집할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결점을 지적하게 하는 것을 마치 최주평(崔州平)과 법효직(法孝直)이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했던 것처럼 하신다면, 천하의 일을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時事如此, 有識寒心, 黙計中外群公, 威望隱然, 忠義明白, 誰如吾定叟者? 異時扶傾補敗, 洪濟艱難, 熹雖瞑目, 實不能不以此望於門下也. 更願勉思令猷, 益求彊輔, 燕居深念, 恬養本原, 遠耳目之細娛, 圖國家之大計, 此又區區所深望也. 游誠之才力可仗, 不但救荒一事. 得收置門下, 異時儘有用處. 但亦更願兼收並蓄, 更得方正嚴重, 有餘識遠慮, 可敬畏者參錯其間, 使勤攻吾闕, 如崔州平, 法孝直之於孔明, 則天下之事庶乎其可濟也.
보내오신 편지에 장위공의 경전 해석은 수장(收藏)하고 있는 보물이라 별 문제가 없으니 지금 삼가 보내드립니다. 그 사이에 자못 들었던 것을 속기(續記)한 곳이 있는데 또한 의심스럽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득 더하거나 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인데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承喩先正經解, 寶藏無恙, 今謹封納. 其間頗有續記所聞處, 蓋亦疑而未定之詞. 今固不容輒有增損, 不審尊意以爲如何也.
저는 병이 심해져 글자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을 받아쓰게 하여 이 편지를 올리니 기운이 이미 서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곧 영원히 이별할 것이니 간절히 바라건대 당신께서 저의 말을 유념하여 제발 자신을 아끼시길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熹病甚, 不能作字, 口占布此, 氣已不相屬矣. 卽此永訣, 切望俯念愚言, 千萬自愛, 至懇至懇.
(一)宋浙本此句下尙有‘尙何言哉’四字.
유계장에게 답하는 편지答劉季章書
【해제】편년고증(p.47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5년(기미; 1199, 70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늙어 치사를 요청하여 허락을 얻으니 실로 매우 다행입니다”고 했다. 연보에 따르면 “경원 5년 기미 70세,…여름 4월 수조봉대부로 치사하라는 명이 내렸다. 조명에 절하며 감사를 표시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기미년 여름에 지은 것이 분명하다.
늙어 치사를 요청하여 허락을 얻으니 실로 매우 다행입니다. 볼품없는(無狀) 자취
때문에 다시 종지에게 누가 미치니 안절부절 하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문득 편지를 받고 그의 부음을 들으니 더욱 심히 애통합니다. 글을 보내 그의 자제들을 위로하고 싶은데 전에 어떤 관직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인편이 있으면 이 점에 대하여 대답을 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자수도 기운을 잃었다고 하니(憂悴) 자못 걱정입니다. 근일 누대방도 이미 쫓겨났으니, 일시에 우리 동료들이 대부분 쫓겨나 이제 거의 없으니, 그 형세가 반드시 우두머리부터 죄목을 씌워 한번 정리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듣자하니 지난날 호남 안무사로 있을 때 죄를 다스렸던 한 서리가 조정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하여, 이미 본로(本路)에 명을 내려 조사하여 바로 잡으라고 하니, 순서를 보면 제일 먼저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진보(晉輔)의 처소에서 서로 모인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심신을 수습하는데 더 힘쓰고 내면으로 힘을 쓰며 밖으로는 심신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시절을 만나면 다시 어떤 우환을 불러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석각(石刻)했던 것과 또 요즘 간행한 세 권의 책을 급히 걷어 감추도록 그에게 권하고 출간해서는 안됩니다. 향후라도 혹 다시 이런 거동은 제발 해서는 안 됩니다. 무의의 뜻과 추구함이 성실하나 시기와 의심을 갑자기 일으켜 스스로 한계를 지어 위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책 속에서 마음을 흩어뜨리며 낭비하고 있으니 애석합니다.
告老得謝, 固爲甚幸, 而無狀之蹤, 乃復累及從之. 方此踧踖, 不能自安, 忽得來書, 乃聞其訃, 尤深痛惜. 欲寄一書慰其子弟, 不知曾作何差遣來? 有便幸批報也. 子壽憂悴, 殊可念. 近日樓大防又已行遣, 一時流輩芟夷略盡, 其勢必從頭別尋題目整頓一番. 聞鄕日湖南所按吏有訴冤於朝者, 已下本路體量改正, 次第首見及矣(一. 知在晉輔處相聚, 甚善. 可更勉其收拾身心, 向裏用力, 不須向外枉費心神, 非唯無益, 當此時節, 更生患害不可知. 鄕日石刻及今所刊三冊, 勸其且急收藏, 不可印出. 鄕後或欲更爲此擧, 千萬痛止之也. 無疑志趣誠實, 但惜其橫起猜疑, 自立界限, 不肯鄕上進步, 書中枉費心力分疎.
(一 )‘近日’至此句又見別集卷二與劉季章.
황직경에게 보내는 편지與黃直卿書
【해제】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6년(경신; 1200, 71세)의 편지이다. 편지에서 “3월 8일 나는 편지를 쓰네. 사람이 편지를 갖고 돌아와 자네가 이미 삼산에 도착했고 일행도 별 탈 없이 안락하다는 것을 알았네.…병이 더 크게 악화되더니, 이 이틀간 병이 더욱 심해서 아마도 장차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네…편지는…기타 나머지 것은 조례를 참고하여 차례대로 수찬하여 완성하기를 바라네…불의에 이렇게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으니 각자 건강하기 바란다는 나의 뜻을 전해주게.”라고 했다. 채침은 『몽전기』에서 “경신년 3월 초8일,…황직경에게 편지를 쓰고 서찰의 저본을 수습하여 보충하고 마무리 짓게 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황직경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리킨다. 3월 9일 주자는 서거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자 일생의 마지막 서신이다.
3월 8일에 내가 편지를 쓰네. 사람이 편지를 갖고 돌아와 자네가 이미 삼산에 도착했고 일행도 별 탈 없이 안락하다는 것을 알았네. 또 학문을 전수하는데 차례가 있어서 사람들이 더욱 믿고 따른다는 것도 알겠네. 나에게 보여 준 고지문은 규약(規約)이 모두 좋으니 매우 위안이 되네. 이제 더욱 윤리(倫理)를 이루고 모든 일에 더욱 힘쓰기를 바라네. 나의 도를 자네에게 맡기니 이제 여한이 없네.
三月八日, 熹啓: 人還得書, 知已至三山, 一行安樂, 又知授學次第, 人益信向, 所示告文規約皆佳, 深以爲慰. 今想愈成倫理, 凡百更宜加勉力. 吾道之託在此者, 吾無憾矣.
병(衰病)이 약간 나은 듯한 기색이 있는데, 유몽달(兪夢達)이 천거한 장의(張醫)가 와서, 망사(䃃砂)와 파두(邑豆)등으로 치료하는 바람에, 병이 더 크게 악화되더니, 이 이틀간 병이 더욱 심해서, 아마도 장차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네. 태아(泰兒: 埜)는 또 멀리 천리 밖에 있으니, 모든 일을 분부할 곳이 없어 매우 심란하네. 하지만 모든 일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단지 편안하게 대할 따름이네. 후일 제자들과 자손들이 직경에게 간절하게 가르침을 바라거든 하나하나 정성껏 가르침을 내려 주어서 그들이 내 문호의 큰 수치가 되지 않도록 해 준다면 매우 좋겠네. 은노의 혼사는 여간에서 허락하는 뜻이 있는데, 그가 말한 것에 위로는 외가에 혐의가 있다고 하니 더 이상 묻지 말게.
衰病本自略有安意, 爲兪夢達薦一張醫來, 用碙砂巴豆, 等攻之, 病遂大變. 此兩日愈甚, 將恐遂不可支吾. 泰兒又遠在千里外, 諸事無分付處, 極以爲撓. 然凡百已定, 只得安之耳. 異時諸子諸孫切望直卿一一推誠力賜敎誨, 使不大爲門戶之羞, 至祝至祝. 恩老昏事餘干有許意, 彼所言者, 上有外家之嫌, 不可問也.
예서는 지금 용지와 이지가 오지 않아서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고 또 서로 상의할 사람도 없네.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알리고, 직경 자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서로 절충하라고 하게. 예전의 『상례』는 상세함과 대략이 이미 모두 제대로 잘 되었네. 『신례』는 구본을 겸비하여 지금 먼저 편지에 붙여 보내니 한번 정리하게. 기타 나머지 것은 조례를 참고하여 차례대로 수찬하여 완성하기를 바라네. 여러 곳에서 빌려온 것들은 교정도 하고 두 가지 판본을 만들었으니 행도대소를 함께 붙여 보내고, 게다가 종이도 각각 천매를 보내니 받아 두게.
겸지와 공서에게 번거롭지만 불의에 이렇게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으니 각자 건강하기 바란다는 나의 뜻을 전해주게. 인경에게도 아직 글을 보내지 못했으니 역시 나의 뜻을 전해주게. 병 때문에 어지럽고 피곤하여 글조차 쓸 수 없는데,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은 천만가지이니 그저 처량하고 슬플 뿐이네. 이만 줄이네.
禮書今爲用之․履之不來, 亦不濟事, 無人商量耳. 可使報之, 可且就直卿處折衷. 如向來喪禮, 詳略皆已得中矣. 臣禮一篇兼舊本, 今先附案, 一面整理. 其他幷望參考條例, 以次修成. 就諸處借來可校, 作兩樣本, 行道大小幷附去, 幷紙各千番, 可收也.
謙之․公庶各煩致意, 不意遂成永訣, 各希珍重. 仁卿未行, 亦爲致意. 病昏(3-1258)且倦, 作字不成, 所懷千萬, 徒切悽黯. 不具.
진건녕에게 보내는 차자 與陳建寧箚子
【해제】편년고증(p.47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5년(기미; 1199, 70세)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언제 쓴 것인지 자세하지 않다. 문집의 편집 순서로 보면 기미년에 쓴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엎드려 생각해 보건데, 우리 부의 여름철 세금 소맥과 가을철 세금 찹쌀은 작절전 외에도 정리전을 함께 납부하고 있습니다. 노인들에게 듣기로는 우리 부의 주세는 예전부터 원래 관의 전매품이었는데, 선화 정화 연간에 이르러 이미 돌아가신 어사중승 옹공이 진과 향방으로 이관하면서 비로소 관의 업무가 번거롭고 낭비적이며 얻는 이익도 적었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을 빚으면서 법을 어겨 본업을 못하고 형벌에 처해진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이런 연유로 주세와 관련된 관의 업무를 파기할 것을 신청합니다. 대신 일년 동안의 주세로 얻는 수입을 회계하여 쌀과 소맥의 본전과 관리의 급료를 제외하고, 얻는 이익 약간을 총괄해서 모두 소맥과 찹쌀 절전의 두 세금 금액 내에 산입하여 별도 항목으로 납입하게하면, 민간에서는 술 빚는 것을 금하는 일이 사라져 매우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伏見本府夏稅小麥․秋稅糯米除作折錢外, 竝納淨利錢.
聞之故老, 本府酒課舊來元係官榷, 至宣․政間, 故御史中丞翁公出鎭鄕邦, 始以官務煩費, 收息不多, 而民以私釀破業陷刑者不勝其衆, 於是申請罷去官務, 而會計一年酒課所入, 除米麥本柄官吏請給之外, 總計淨利若干, 均在二稅小麥․糯米折錢數內, 別項送納, 民間遂得除去酒禁, 甚以爲便.
그러나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리’라는 두 글자는 본래 주세를 부과한다는 의미가 보이지 않으니, 장래의 관리가 이 일의 본말을 알지 못하고 혹 다시 전매하려는 의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데 당신께서는 본말을 물어 살피시고 성도에 품신하여 ‘정리’ 두 글자를 ‘주식’으로 바꾸신다면, 아마도 옹공이 이 고을에 드리운 은혜가 영원할 것이니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 일의 곡절은 과거에 처가의 존장을 만났을 때 말이 나왔는데 당시에는 향당친척이었기 때문에, 친히 옹공을 만나 이 일을 조치했는데 지금까지도 이익이 됩니다.중간에 우연히 듣기를 관리가 다시 전매하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 말을 일러주었더니 그 의론을 그쳤습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늙은 유지들이 세상을 떠나 이제 그 논의를 아는 자가 없으니, 시일이 오래되면 다시는 계고하지 못하여 반드시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데 지부상서께서는 인척 간에 반드시 그 본말을 아는 이가 있을 것이요, 이제 또 이 고장으로 부임하셨으니 유의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但今竊詳‘淨利’二字不見本是酒課之意, 竊慮將來官司不知本末, 或有再榷之議. 欲望台慈詢究本末, 申明省都, 將‘淨利’二字改作‘酒息’, 庶幾翁公所以惠于鄕邦者垂於永久, 不勝幸甚.
此事曲折, 舊見妻家尊長說及, 當時以鄕黨親戚之故, 親見翁公措置此事, (3-1259)至今爲利. 中間偶聞官司有再榷之意, 因以此說告之, 得寢其議. 然數年以來, 耆舊凋零, 已無知其說者, 深慮日久無復稽考, 必有後患. 伏惟知府尙書於姻戚間必嘗知其本末, 今又屈臨此邦, 得賜台念, 幸甚幸甚.
유자를 준비하여 납세하는 인호들에게 주라고 비는 조목 乞給由子與納稅戶條目
여러 현의 옛 관례에 따르면 매년 두 차례 세금의 채납에 앞서 미리 유자를 인쇄하여, 매 호마다 산전의 출입과 납부해야 할 세물을 항목에 따라 수량과 목록을 갖추어 인호들에게 발급함으로써 세금 송납의 근거를 삼았습니다. 근년에 여러 현들 중에서 유자를 인쇄하여 발급하지 않는 곳이 있으니, 인호들은 세금 송납 할 근거가 없어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많이 납부하여 허비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조금 모자라거나 부족하여 관가의 소환을 당했습니다. 관리 감독을 행하여 관례에 의거하여 제때에 유자를 인쇄 발급토록 하십시오.
一․諸縣舊例, 每遇二稅起催, 前期印造由子, 開具逐戶産錢出入及合納稅物逐項數目, 給付人戶, 以憑送納. 近年諸縣間有都不印給由子, 致人戶無憑送納, 或有所納過多, 旣成虛費 : 或有少欠些小, 又被追呼. 欲乞行下約束, 依例及時印給.
여러 현의 인호들이 세물을 송납하고 관사가 그것을 수납했으면 주초를 발급해 주십시오. 현초는 곧 관할하는 주부가 기록을 말소하고, 호초는 인호들에게 지급하여 증서로 삼게 하여, 인호가 거듭 관에 소환당하는 소동을 면하게 하십시오. 근년에 여러 현들 중에는 전물을 수납하고도 곧바로 인초를 지급하지 않거나, 초단만을 인호에게 발급하고 있는데, 이미 관인이 없으니 증서로 사용용할 수 없습니다. 관에 소환되어서도 맞춰 대조할 수 없으니 죄를 따져 다시 납부하는 일이 있습니다. 산골짜기의 가난한 백성들의 피해가 더욱 심합니다. 바라건데 법조문을 조사하고 고찰하여 관리 감독을 시행하고 여러 현의 창고가 인호의 세물을 일전 이상 받으면 당일로 주초를 발급하여 납입한 사람이 담당관원 앞에서 영수증을 받도록 하여, 전처럼 초단만 발급함으로써 잘못하여 인호가 세금을 중복 납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一․諸縣人戶送納稅物, 官司交訖, 合給朱鈔. 縣鈔卽關主簿勾銷, 戶鈔卽付人戶執照, 使人戶免致重疊追呼搔擾. 近年諸縣間有受納錢物不卽印鈔, 卽以鈔單給付人戶, 旣無官印, 不可行用. 及至追呼, 不爲點對, 勘斷監納, 山谷細民被害尤甚. 欲乞檢坐勑條, 行下約束, 諸縣倉庫交到人戶稅物一錢以上, 須管當日印給(3-1260)朱鈔, 令所納人當官交領, 不得似前只將鈔單脫賺人戶.
여러 현에서 세금을 받으면 관인으로 날인한 영수증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즉시 부청으로 넘기지 않고, 이미 부청으로 넘긴 것도 주부가 그 즉시로 정부에서 말소하지 않으니, 비록 사부의 창고가 발행한 주초를 받는 일도 이렇게 태만하게 굴면서 즉시 말소하지 않아 현도가 백성들을 소환하는 망행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인호들이 비록 호초를 갖고 있어도 호초와 주초를 대조하여 석방하지도 않고, 향사의 안리를 거듭 파견해 보내 이미 세금을 납부한 인호를 매질하고 감금하며, 추서와 안리는 강제로 징수(誅求)하고 억지로 취하여(乞覓), 단지 30-50전의 누락이 있을 뿐인데도 소비하는 것은 십 수천에 달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또 옥으로 보내서 감금 결박하고 죄를 추궁해서 다시 세금을 납부하게 하니 백성들은 삶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데 법조문을 살피고 조사하여 관리들을 감독하고 검속하라는 명을 내려 보내고, 주부는 반드시 한계에 의거해서 말소하도록 엄히 책망하십시오. 세금을 독촉하는 관사는 만일 인호가 호초를 가지고 도착하면 즉시로 석방하고, 향사의 안리들이 단죄하는 일을 무겁게 행하십시오.
오른쪽은 앞과 같이 갖추었으니 아울러 바라건데 감독과 단속을 행하여 작은 방문을 인쇄하여 간략하게 그 말을 적어 인호들에게 널리 알리십시오. 그것을 받들어 행함에 어긋난 행동이 있으면 인호들이 속히 사부에 나와 하소연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관리를 거듭 파견해 주십시오.
一․諸縣受納, 亦有卽印鈔者, 又不卽時關過簿廳, 已關過者主簿又不卽時勾銷正簿, 雖承使府倉庫發下朱鈔, 亦是如此怠慢, 不卽勾銷, 以致縣道妄行追呼. 人戶雖有執到戶鈔者, 又不與照應釋放, 及將鄕司案吏重作行遣, 却將已納人決撻監繫, 追胥案吏誅求乞覓, 至有只欠三五十錢而所費十數千者. 甚者又遭送獄禁繫, 勘斷監納, 人不聊生. 欲乞檢坐勑條, 行下約束, 嚴責主簿須管依限勾銷. 其催稅官司, 如有人戶執到戶鈔, 卽仰畫時疎放, 仍將鄕司案吏重行勘斷.
右具如前, 竝乞行下約束, 仍印小榜, 簡約其詞, 令人戶通知. 其有奉行違戾去處, 許人戶徑赴使府陳訴, 將官吏重作行遣.
언중 이장간에게 보내 진제를 논하는 차자 與李彦中帳幹論賑濟箚子
【해제】편년고증(p.47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영종 경원 5년(기미; 1199, 70세)의 편지이다. 이 편지 역시 언제 쓴 것인지 자세하지 않다. 문집의 편집 순서로 추정하면 기미년에 쓴 것으로 보는 것이 가까울 것 같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부자들의 곡식을 빈민들에게 나눠주도록 권고하라는 말씀에서 어진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의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 직책도 없는 사람이 바깥일에 자주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전날에는 다만 배로 식량을 모두 성 안으로 운송해서 향리의 가난한 백성들은 먹을 것조차 없는 것이 혹 다른 우환이 있을까 염려되어 편지로 부공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래도록 회신을 받지 못했으니 결국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말씀은 또 보내 주신 편지에서 포성에서 미곡을 방출한다는 말씀과 정반대로 어긋나니, 아마도 본래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건데 향리의 여러 장로들을 불러 모아서 먼저 실행할만한 방책을 합의해서 성곽 안에 사는 사람과 향촌에 사는 사람, 부자와 빈민들이 모두 불편이 없게 한 후에 함께 우리 로를 다스리는 분에게 아뢰어 시행해야 해야 합니다. 이 일의 이해는 제법 광범위하니 한 사람의 지혜로 독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글로 쓰는 편지에서 드린 말씀이 제 뜻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니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자세한 의미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일을 행하실 때는 부자들에게 불리한 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백성을 구하는 일이 급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조금 참아야 할 것이 있으니, 잘 저울질해서 일을 구제하십시오. 만일 부자들을 위한 계책이 지나치면 끝내 행할 만한 방책이 없을까 우려됩니다.
示喩勸分之說, 足見仁人之心. 區區所慮, 蓋亦如此. 但閑中不敢數與外事, 前日但以船粟盡輸城中, 鄕落細民無所得食, 恐有他患, 不免以書扣府公. 久未得報, 未知竟如何. 但此說又與來喩浦城發米之說正相戾, 恐不容自有異同. 竊意莫(3-1261)若邀率鄕里諸長上, 先次相與合議可行之策, 使城郭鄕村․富民貧民皆無不便, 然後共以白於當路而施行之. 蓋此事利害稍廣, 非一夫之智所能獨決. 又筆札敷陳, 未必盡意, 不若面言之可究底蘊也. 但此事之行, 於富民必不能無所不利, 但以救民之急, 不得不小有所忍, 權以濟事. 若爲富民計較太深, 則恐終無可行之策也.
조정에 급한 사정을 보고하고 인근 지방에서 쌀을 사들이려 요청하더라도 아마도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 지방은 첩첩 산중에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으니 조정이 비록 부응한다 하더라도 어느 길로 미곡을 운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근 지방에서는 오직 광동에서 선박으로 천주와 복주까지 미곡을 운반할 수 있지만, 광동 지방들도 올해는 역시 한발이 들었다고 합니다. 근자에 복주의 아는 사람에게 온 편지에서 자세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실로 정해진 기준이 없으며 설사 있다고 한들 또 어떻게 이곳까지 운반해 올 수 있겠습니까?
告急朝廷, 丐糴鄰部, 恐亦不能有補. 吾鄕在重山複嶺之中, 朝廷縱有應副, 不識何路可以運致? 鄰部唯有廣東船米可到泉․福, 然彼中今年亦旱, 近得福州知織書, 言之甚詳. 此固無可指準, 就使有之, 亦如何運得到此?
포성의 미곡도 아주 많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방출하는 데 절제가 없다면 산골짜기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이 굶주려 장차 다시 주군의 여러 관리들의 근심을 끼칠 것으로 우려되니,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아려보니 지금 성 아래에서는 오직 두 현만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라고 권하는 말씀에 조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끼면서 절도에 맞게 하여 길고 먼 장래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지극한 방책이 될 것입니다. 만일 급하게 재촉하기만 하여 며칠 사이에 저장해 둔 것을 모두 흩어버린다면 뒷날을 위한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상호(上戶)들에게 곡식이 있는지 없는지 그 사실을 알아내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만일 산전의 고하로만 수량을 정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불편합니다. 돌이켜보니 지금의 형세가 이미 급박하니 상세한 것을 따지지 마시고 다만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다소를 불문하고 스스로 쌀을 내기를 권유하신다면 이런 이치는 만부당한 것입니다. 요컨대 반드시 별도로 그들이 갖고 있는 곡식의 실제 수량을 따져볼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포성의 쌀은 반드시 부득이한 상황에서 사들일 것이며 상인들에 거래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쌀을 사들이더라도 한계를 두어야 하는데, 상인들에게 맡긴다면 한계가 없는지라 반드시 이 현의 쌀을 모두 사들이고 난 후에야 그칠 것입니다. 이 몇 가지 단서들은 아마도 상인들과의 논의에 도움이 되는 말이기 때문에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浦城之米, 想亦不能甚多, 發之無節, 恐山谷間細民饑餓, 將復有貽州郡諸司之憂者, 尤不可不深慮也. 度今城下惟有兩縣勸分之說須作措置, 然亦且令愛惜撙節, 接續長遠, 乃爲至策. 若乘快督迫, 數日之間散盡所畜, 則無以爲後日之計矣. 但上戶有米無米之實最爲難知, 若一槪用産錢高下爲數, 此最不便. 顧恐今勢已迫, 不暇詳細, 不免只用此法耳. 若說不拘多少, 勸諭任其自糶, 則萬無是理也. 要須別有一法以核其實乃佳耳. 浦城之米, 必不得已可就糴, 而不可通販. 蓋就糴猶爲有限, 而通販則其出無窮, 必傾此縣而後已. 凡此數端, 恐可以裨商論之末, 故略陳之, 不識高明以爲如何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