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54

황성 2025. 8. 4.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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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상에게 답하는 편지 答梁丞相書

 

해제이 글은 순희 12(乙巳, 1185, 56)에 당시 승상이던 양극가(梁克家, 자는 叔子)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그러나 󰡔절보(節補)󰡕에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편집한 년대의 순서를 볼 때, 임인년(壬寅, 1182, 주자 53)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저는 엎드려 승상께서 주신 가르침을 봉독(奉讀)합니다. 성덕(盛德)에 거()하지 못하고 물러나 기탁해 있는 어리석고 나약(退託愚懦)한 저입니다만, 오직 명공(明公)의 마음은 정대광명(正大光明)하고 표리통철(表裏洞徹)하시어 조그마한 아집이나 사심조차도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망령되고 용렬한 저를 오랫동안 알아주시고 또 이처럼 하문(下問)에 힘쓰시니 저로서는 어찌 아무 근심 없이 스스로를 막기만 하고, 작으나마 저의 어리석은 견해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로서는 지금 바로 이곳에 물러나 있는 형편이기에 이러한 저의 위()를 벗어나는 것은 부당하기에 이 때문에 정체(政體)의 시비(是非)나 인재(人材)의 사정(邪正)에 관해서는 감히 조금도 말씀드리지 못하겠고 오직 왕통(王通)이 이른바 군후(君侯)께서 일신을 바르게 하시어 천하를 통솔해주시기를 바란다는 그 말경건하게 명공(明公)을 위해 외우기를 청합니다. 그 말 은 비록 비근하나 그 뜻은 원대(遠大)하오니 오직 명공(明公)께서는 이점에 유의(留意)하시어 널리 인재(人材)를 모아 자신의 부족한 점을 부지런히 연마(勤攻己闕)”하심으로써 명공(明公)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정사(政事)로 하여금 조금의 허물도 없이 하신다면 곧 위로는 이로써 임금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이로써 남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어 장차 구()하여 얻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여 곧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옳지 않은 것이 많이 누적되면 또한 우리의 큰 일에 있어서의 올바름(大正)에도 충분히 해()를 끼칠 수 있게 됩니다. 그리되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날로 속에서 굴복(屈伏)될 것이고, 덕망(德望)과 위명(威名)은 날로 밖에서 손상될 것입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장차 내가 남에게 시정(是正)을 받을 여가도 없는 마당에 어찌 임금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공로 세우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임금님의 마음은 여전히 기쁘지 않은데 백성의 힘은 이미 지쳐 있으며, 나라의 위엄은 떨치지 못하고 있는데 오랑케의 실정에 대해서는 예측조차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그러니 오직 명공(明公)께서 이 점을 깊이 염두에 두시어 빨리 계책을 세우신다면 저 또한 승상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많을 것입니다. 저의 말이 미치광스럽고 또 제 분수를 범()했습니다만 고명(高明)께서는 또한 이 점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伏讀賜敎, 盛德不居, 退託愚懦, 仰惟明公之心正大光明, 表裏洞徹, 無一豪有我自私之意. 以妄庸受知之久, 又勤下問至於如此, 亦豈能[근심없을 개, 1149]然自閉, 一無所進, 以效其尺寸之愚哉? 但以正此退藏, 不當出位, 是以於政體之是非, 人材之邪正, 一豪不敢有所陳說, 而獨請以王通所謂願君侯正身以統天下者, 敬爲明公誦之. 其言雖近, 其指則遠. 伏惟明公於此試留意焉, 廣引人材, 勤攻己闕, 使凡政事之出於我者無一疵之可指, 則上以正君, 下以正人, 將無所求而不得. 如其不然, 則事之小不正者, 積之之多, 亦足以害吾之大正, 使吾至大至剛之氣日有所屈於中, 而德望威名日有所損於外, 是則且將見正於人之不暇, 尙何望其能有正君定國之功哉? 今天心未豫而民力已殫, 國威未振而虜情叵測, 惟明公於此深念而亟圖(3-1150), 則熹也受賜多矣. 狂言犯分, 亦惟高明有以寬之.

 

 

 

진복공에게 보내는 편지 與陳福公書

 

해제이 글은 순희 12(乙巳, 1185, 주자 56)경에 진준경(陳俊卿)에게 보낸 편지이다. 즉 이 편지 첫머리에 북방(北方) 소식(消息)은 전해 듣기는 하나 참되지는 않습니다. 봄 사이에 봉사(封事)를 올린 자가 있었는데, 봉사문의 앞쪽에 오랑케가 서하(西夏)의 핍박(逼迫)을 받아 나라를 옮겨 피했다라고 했습니다.” 했고, 지진(地震)의 경우 동남쪽 여러 로()에 지진이 없는 곳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속자치통감150, 순희 12(乙巳, 1185, 56))조에 “(4) 이 달에 변경의 첩자(諜者)가 말하기를 서료(西遼)가 서하(西夏)에게 길을 빌려 금()을 공격한다.’ ...... 5월 경인(庚寅)일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신묘(辛卯)일에 복주(福州)에 지진이 있었다.”라고 했다. 주필대(周必大)서고(書稿)6에 실린답조자직(答趙子直)(순희 12년 여름)에 말하기를 “58일에 지진이 있었는데, ()()()()이 모두 그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편지에서 말한 북방전문(北方傳聞)’지진(地震)’은 을사년의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편지는 을사년에 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절보(節補)󰡕에서는 이 편지가 임인년(壬寅, 1182, 주자 53)에서 을사년(乙巳, 1185, 56) 사이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북방(北方) 소식(消息)은 전해 듣기는 하나 참되지는 않습니다. 봄 사이에 봉사(封事)를 올린 자가 있었는데, 봉사문의 앞쪽에서는 오랑케가 서하(西夏)의 핍박(逼迫)을 받아 나라를 옮겨 피했다고 말하고 그 뒤에는 이에 그들이 거짓을 꾸며 우리를 도모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어림짐작(揣摸)에 불과한 것으로 일정(一定)한 계책도 없습니다. 또 봉사문 가장 뒤편에서는, 또 추정(樞廷)에세 변방을 위한 대비를 엄격하게 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바란다고 범범하게 말하고 있을 뿐인데도 이에 임금의 뜻에 크게 맞아서 순서를 바꾸어가며 관()에 제수(除授)되었습니다. 그 후에 들으니 () 왕희려(王希呂)가 이뢰기를 오랑케는 거란(契丹)유종(遺種)인 대석림아(大石林牙)의 습격을 받아 망실(亡失)됨이 이미 많으며, 늙은 추장(老酉)은 도망가서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3일 후에야 찾아낼 수 있었다라고 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자못 그의 말을 신임했습니다. 그러나 지난겨울 친척(親戚) 중에 회()지방로부터 이리로 온 자가 있어서 이미 이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그 친척의 말이 따르면 ‘[오랑케를 습격한 것은 거란이 아닌] 발해(渤海)습격한 것이라며 이윽고 [그것이] ‘정확한 소식(的耗)을 들은 것은 아니다고 하니 그렇다면 이 소식 또한 믿을만한 소식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저의 비루한 생각으로는 이 오랑케의 세력이 극성(極盛)했으나 이제 쇠퇴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거동과 조처들이 전도(顚倒) 착란(錯亂)되어 있어서 들려오는 소문을 그대로 실()한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 형세는 깊이 우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들이 성()을 수리하고 변()彼其脩城浚, 다만 빈 소리(虛聲)를 내어 우리를 두렵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이미 해주(海舟)를 징발(調發)했으니, 이는 한 번의 소동(騷動)을 일으킨 셈입니다. 이것은 바로 고영(高潁)이나 왕박(王朴)의 유책(遺策)으로서 우리는 이미 그들의 계락 가운데 떨어진 것입니다.

北方消息傳聞不眞, 春間有上封事者, 前言虜爲西夏所逼, 故遷國以避之, 其後乃慮其設詐以謀我. 此已是揣摸, 無一定之計. 最後又只泛言乞詔樞廷嚴爲邊備而已, 乃大中上意, 改秩除官. 其後乃聞王希呂, 虜爲契丹遺種大石林牙所襲, 失亡甚夥, 老酉遁走, 不知所在, 三日而後得之, 朝廷頗信其言. 然去冬有親戚自上歸, 已傳此言, 却云渤海所襲, 尋亦不聞的耗. 然則此報又未知其信否也. 若鄙意, 則以爲此虜盛極而衰, 擧措顚錯, 就如所聞未必得實, 其勢不足深慮. 彼其脩城浚, 特爲虛聲以懼我耳. 然朝廷已爲之調發海舟, 一番騷動, 此正高潁王朴之遺策, 而我已落在計中.

 

천문(天文)은 위에서 변하고 지축(地軸)은 아래에서 움직이듯 지금은 군신상하(君臣上下)가 안색을 변해가며 서로 경계하고 몸을 단속하여 일을 바로잡음으로써 재앙을 물리치기(消弭) 위해 노력할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보건대 [군신상하(君臣上下)가 사태를] 바라봄이 그저 안이하기만 하여 조금도 놀라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위로 구중(九重) 궁궐에 계시는 천자께서 옆자리 앉아있는 신하에게 구언(求言)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으며, 아래로는 제부(諸府)가 있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허물을 통감하여 자리를 물러났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온 조정이 머뭇거리며 서로 따르기만 하며 시간을 보낸 것이 이미 오래되었고,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약간의 기절(氣節)이 있어 감히 의론(議論)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조정으로부터 먼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 적막하기만 하여 능히 명주(明主)를 위해 충언(忠言)하여 간영(姦佞)한 자를 지적해내고 빠진 곳을 보충하며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고 백성의 실정에 통달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듣자하니 그 말이 하늘의 변화에 이르면 모든 것을 오랑케 우두머리(虜酉)에게 돌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천도(天道)에 부응하는 것이 되도록 하니 이 자체가 이미 너무나 큰 아첨이요 불충입니다. 지진(地震)의 경우 동남쪽 여러 로()에 지진이 없는 곳이 하나도 없는데 또 장차 누구로 하여금 그것을 감당케 함으로써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至於天文變於上, 坤軸動於下, 正是君臣上下動色相戒, 飭躬正事, 以圖消弭之時, 顧乃視之恬然, 略無驚懼之意, 上之則九重不聞有側席求言之詔, 下之則諸府不聞有引愆避位之章, 擧朝媕阿相徇, 爲日已久, 士大夫稍有氣節敢議論者, (3-1151)盡在遠外, 寂然不聞有一人能爲明主忠言, 以指姦佞裨闕失固邦本達民情者. 聞其語及天變, 則盡以歸之虜酉, 使應天道, 此已爲諂諛不忠之大. 至於地震, 東南數路無一不然, 又將使誰當之而不以爲慮耶?

 

제가 보기에 오늘날 마땅히 걱정해야 할 일 가운데 이보다 큰 일이 없습니다. 지경 밖의 일은 이애 포함되지 않습니다. 명공(明公)께서는 왕실내심果有乃心王室之意, 그러나 마땅히 이러한 곡절(曲折)로 상()께 극언(極言)하시어 널리 꼴 베고 나무하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芻蕘)에게까지 자문을 구하여 자신이 부족한 뜻을 심도 있게 추구하도록 권유하신다면 명공(明公)께서는 비록 천하의 일을 다 진언(進言)한 것은 아니라 해도 천하의 말이 명공(明公)으로 인해 임금에게 전해진 것이니 이는 참으로 큰 공()입니다. 또 어찌 반드시 은모(隱謀)를 정탐하고 비계(秘計)를 긴밀히 진술한 연후에야 비로소 일을 의론한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살피건대 부한공(富韓公)은 서도(西都)에 물러가 있을 때 이미 여주(汝州)의 청묘(靑苗)로 인한 삭탈(削奪)의 견책(譴責)이 있었고, 사마공(司馬公)과 여신공(呂申公)도 모두 신법(新法)에 이의를 제기하여 죄와 혐의를 얻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일이 생기면 항장(抗章)하여 숨김없이 다 진언(進言)하였으니 입조(立朝)하고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당시 그분들은 형적(形迹)이 외롭고 위태한 형편이었으니, 이런 입장에 있던 그분들이 주의(主意)를 거듭 어기고 권귀(權貴)를 반복해서 거스르는 것이 환난(患難)이 될 것임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마음속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절실하여 이런 점들을 돌아볼 여가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물며 명공(明公)께서는 걸신(乞身)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또 오늘날 [명공께] 작은 원한(睚眦之怨)조차도 가진 사람도 없으니, 본디 앞의 여러 공들과 같은 혐의(嫌疑)는 없습니다. 나아가 임금님은 명공(明公)을 잊지 못하시어 명공을 울타리로 여기시며 은총을 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앞의 여러 공들이 일찍이 윤락(淪落) 빈기(擯棄)한 지경에 빠진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니 또한 무엇을 애석하게 생각하시기에, ‘명주(明主)를 위해 한 말씀 하시어 위험한 상황에서 종사(宗社)의 평안을 도모하고 물불 가운데 빠져 허덕이는 생령(生靈)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까? 근년(近年)이래로 장상(將相) 대신(大臣)이 시종(始終) 덕을 온전히 하여, 명공(明公)처럼 지의(指議)할만한 점이 없는 분들조차 [명공께서] 두 번 굴()해서는 안 된다고들 하십니다. 명공(明公)의 정성이 이런 경지에 도달하시어 다시금 이 일을 해 내신다면 당년(當年)에 입게 될 공렬(功烈)과 후세에 드리워질 성칭(聲稱)은 전일(前日)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명공(明公)께서 오늘날 그저 상하(上下)의 교제를 구차하게 보전(保全)하는 데 불과한 것이 될 터이니, 후세에 역사를 깊이 연구하여 안위(安危)를 계교하고 염려하는 충신(忠臣) 의사(義士)가 나타나 반드시 명공(明公)께 큰 불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대저 배령(裴令)과 같은 현자(賢者)도 오히려 만절(晩筋)에 부침(浮沈)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으니, 명념(銘念)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우러러 부디 밝게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 길어졌습니다. 부디 고명(高明)께서 양찰(亮察)해 주시길 빕니다.

以爲今日之事所當憂者莫大於此, 而境外之事不與焉. 明公果有乃心王室之意, 但當以此曲折極言於上, 勸以博詢芻蕘, 深求己闕之意, 則明公雖不盡言天下之事, 而天下之言因我而達, 此功固已大矣, 又何必刺探隱謀, 密陳秘計然後爲論事哉? 富韓公退居西都, 已嘗坐汝州靑苗削奪之譴, 司馬公呂申公又皆新法異論, 得罪有嫌之人, 然因事抗章, 盡言無隱, 不少異於立朝之時. 彼豈不知迹方孤危, 重咈主意, 復忤貴權之爲患? 誠以愛君憂國之誠切於中而不暇顧也. 又况明公乞身已久, 於今日諸人本無睚眦之怨, 固無諸公之嫌, 而上心不忘, 便蕃寵錫, 又非若諸公之嘗在淪落擯棄之域也, 亦何惜而不爲明主一言, 以安宗社於阽危之際, 救生靈於水火之中乎? 近年以來, 將相大臣始終全德, 無可指議如明公者, 指不可以再屈. 誠能及此更爲此擧, 則功烈被於當年, 聲稱垂於後世者, 又不止於前日矣. 不然, 不過今日苟全上下之交, 而後之忠臣義士考觀歲月, 計慮安危, 必將有大不滿於明公者. 夫以裴令之賢, 猶不免於晩筋浮沈之譏, 可不念哉可不戒(3-1152)仰恃知照, 不覺縷縷, 伏惟高明有以亮之.

 

 

 

진승상에게 보내는 편지 與陳丞相書

 

해제이 글은 순희 12(乙巳, 1185, 주자 56) 겨울 경에 당시 승상이었던 진준경(陳俊卿)에게 보낸 편지이다. 즉 이 편지 모두(冒頭)가만히 듣자 하니 [승상(丞相)으로 하여금] 시사(侍祠)하라는 조서(詔書)가 두 세 번이나 있었다 하니 이는 성주(聖主)께서 나라의 원로를 뵙고 상의(相議)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고 했다. 속자치통감150, 순희 12년 조에 “(겨울 11) 신축(辛丑)일 동지(冬至)날에 교제(郊祭)를 지냈다. 이 일에 앞서 사호(史浩), 진준경(陳俊卿)으로 하여금 배사(陪祠)할 것을 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고 했는데, 이 편지에 나오는 시사(侍祠)에 관한 말은 바로 이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편지는 을사(乙巳)년 겨울에 쓴 것이 틀림없다.

 

가만히 듣자 하니 [승상(丞相)으로 하여금] 시사(侍祠)하라는 조서(詔書)가 두 세 번이나 있었다 하니 이는 성주(聖主)께서 나라의 원로를 뵙고 상의(相議)할 일이 있는 것이지 그저 평소 늘 하던 대로 예를 갖춘 것만은 아닙니다. 임택지(林擇之)의 편지를 받고 승상(丞相)께서도 떠나실 의향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오랜 동안 조정(闕庭)을 떠나 있다 보니 나라를 위한 충성심과 승상에 대한 그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또 일찍부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지만 인순(因循)하여 과감하게 이를 결행하지는 못했는데, 이제 [승상께서] 이런 기회를 갖게 되니 참으로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지금이야말로 성주(聖主)를 도()에 들게 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오랑케들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조정(朝廷)의 근심은 바로 우리 정예병(精銳兵)이 무기력해져서 관습(慣習)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나아가 묘당(廟堂)에서는 원대한 도모(圖謀)가 없으며 근신(近臣)의 항렬(行列)에서도 규범(規範)에 부합하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아첨(阿諂)을 일삼고 붕당(朋黨)을 짓는 동안 현자(賢者)와 지자(知者)들은 엎드리고 숨어 버리는 형편입니다. 군정(軍政)은 형신(刑臣)들에게 농간당하고 있으며, 나라의 법(邦憲)은 호리(豪吏)들 때문에 왜곡되어 가고 있습니다. 백성은 곤궁해지고 병사들은 원망하고 있으니, 오랜 동안 편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계손(季孫)의 근심은 아마도 전유(顓臾)에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살피지 못합니다만 승상(丞相)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竊聞侍祠之詔至于再三, 此蓋聖主思見故老, 有所咨詢, 非獨循常備禮之所爲. 而得林擇之, 側聞丞相亦有行意. 伏惟久去闕庭, 不勝忠戀. 且以向來嘗欲有言, 因循未果, 乃復有此幾會, 誠不可失, 計程今或已在道矣. 虜中事不足言, 今日之憂, 正在精銳鎖耎, 慣習燕安, 廟堂無經遠之謀, 近列無盡規之義, 阿諛朋黨, 賢知伏藏, 軍政弄於刑臣, 邦憲屈於豪吏, 民窮兵怨, 久不自聊. 季孫之憂, 恐不在於顓臾. 不審尊意以爲如何?

 

정백(井伯)의 편지에 따르면, 염부(廉夫)주역(周易)을 배울 뜻이 있다니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 주역(周易)이란 책은 읽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의 주역해설가들 중에는 대부분 성인(聖人)께서 본래 경()을 지어 입론한 본래의 뜻을 모른 채 글귀에 매여 멋대로 의미를 만들어내면서 무리하게 도리(道理)를 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그 학설이 그럴듯하다 하더라도 인정(人情)에 비추어보면 의미가 없습니다. 근래에 와서 나도 나름대로 깊이 고심하면서 주역(周易)을 연구했지만 겨우 그 중 한 둘을 터득한 정도이니 아직도 깨치지 못한 것이 더 많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염부(廉夫)우선은 시경(詩經),서경(書經),논어(論語),맹자(孟子)와 같은 등속의 책을 읽는 것이 더 나을 성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책들의 경우, 언어는 평이하지만 그 뜻은 심원(深遠)하여 배우는 자의 일용공부에 매우 절실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듣자하니 원성(元城) 유청정공(劉忠定公)이 하신 말씀 중에 자제(子弟)들을 한 해가 끝날 때가지 독서를 시키지 않을지언정, 단 하루라도 소인(小人)을 가까이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깊은 맛이 있습니다. 대저 젊은이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마땅히 훌륭한 스승 찾는 일을 급하게 여기고, ‘훌륭한 벗을 가려 사귀는 것을 어렵게 여겨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井伯書云, 廉夫有學之意, 甚善. 然此書難讀, 今之說者多是不得聖人本來作經立言之意, 而綠文生義, 硬說道理. 故雖說得行, 而揆以人情, 終無意味. 頃來蓋嘗極意硏索, 亦僅得其一二, 而所未曉者尙多. 竊意莫若且讀之屬, 言近指遠而切於學者日用功夫也. 抑嘗聞之, 元城劉忠定公有言, 子弟寧可終歲不讀書, 而不可一日近小人, 此言極有味. 大抵諸郞爲學, 正當以得師爲急, (3-1153)擇友爲難耳.

 

 

 

진복공에게 보내는 별지 與陳福公別紙

 

해제이 글은 순희 12(乙巳, 1185, 주자 56) 경에 진준경(陳俊卿)에게 보낸 편지이다. 즉 이 편지에 근자에 천주(泉州) 황사승(黃寺丞)이 제게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진휴재(陳休齋)가 병중(病中)에 일찍이 그 말을 저(주선생)에게 한 적이 있으니, (주선생)로 하여금 승상(丞相)께 간곡히 부탁하여 그(黃寺丞)의 딸을 위해 가자(嫁資)를 구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생각건대 승상(丞相)께서는 그가 임종 시에 했다는 그 슬픈 말을 들으시고는 반드시 측은(惻隱)하고 가련(可憐)히 여기셨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런데문집(文集)87, 제진휴재문(祭陳休齋文)에는 진휴재(陳休齋)가 갑진년(甲辰) 봄에 죽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제문(祭文)은 마땅히 그보다 약간 후에 쓴 것이다. 문집(文集)의 위아래 순서로 미루어볼 때, 이 글은 을사년(乙巳)에 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이는 앞의 절문시사지조(竊聞侍祠之詔)”로 시작되는 편지의 별지(別紙)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제가 함부로 나서서 간고(干扣)한 점이 있으니, 지극히 옳지 못한 짓을 했습니다. 근자에 천주(泉州) 황사승(黃寺丞)이 제게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진휴재(陳休齋)가 병중(病中)에 일찍이 그 말을 저(주선생)에게 한 적이 있으니, (주선생)로 하여금 승상(丞相)께 간곡히 부탁하여 그(黃寺丞)의 딸을 위해 가자(嫁資)를 구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黃寺丞)가 내게 한 말을 다시 승상께 품문(稟問)합니다. 저로서는 기실 [진휴재(陳休齋)가 병중(病中)] 이런 말을 제게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감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잘 생각해 보니 이 노인(陳休齋)으로서는 그저 저()와 황사승(黃寺丞)이 함께 나서서 [진승상께] 이 부탁을 하도록 하고 싶었지만 그러만한 단서(端緖)가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을 가설(假設)하여 단서를 마련한 듯합니다. 생각건대 승상(丞相)께서는 그가 속광(屬纊)시 했다는 그 슬픈 말을 들으시고는 반드시 측은(惻隱)하고 가련(可憐)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감히 황사승(黃寺丞)이 보내온 인편에 먼저 이 차()를 부칩니다. 상세한 내용은 황()이 반드시 갖추어 품문(稟問)할 것이니 저는 감히 길게 말씀드리지(覶縷)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벌써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熹冒昧有所干扣, 極犯不韙. 近得泉州黃寺丞書, 云陳休齋病中嘗爲渠言, 曾令熹致懇丞相, 爲其女求嫁資, 令其見語, 復以禀聞. 熹實不記曾有此說, 初不敢爲言. 旣而思之, 此老之意, 止是欲令熹與黃寺丞共致此懇, 而無其端, 故設此言以發之. 意丞相聞其屬纊深悲之言, 必當惻然憐之也. 故敢因廣回便, 先附此箚. 其詳黃必具禀, 熹更不敢覶縷, 然已不勝其恐懼矣.

 

 

 

사태보에게 보내는 편지 與史太保書

 

해제이 글은 주자가 당시 태보(太保)로 있던 사호(史浩)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27에 실려 있다. 첸라이(陳來)는 이 편지가 순희 12년 을사년(乙巳, 1185, 주자 56) 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즉 이 편지에 제가 가만히 듣자 하니, 근자에 궤장(几杖)을 갖추어 조정(朝廷)에 나아가신다 하니, 이는 예()로서 교제하는 풍습이 왕성하게 전파된 것입니다. 대개 조종(祖宗)이 성()했을 때로부터 고로(故老)를 기리고 숭상하며, 원훈(元勳)에게 보답(報答)한 것이 이처럼 성()할 때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을사년(乙巳) 이 해에 쓴 여진승상서(與陳丞相書)의 해제에서 이미속자치통감150, 순희 12년 조에 “(을사년 겨울 11) 신축(辛丑)일 동지(冬至)날에 교제(郊祭)를 지냈다. 이 일에 앞서 사호(史浩), 진준경(陳俊卿)으로 하여금 배사(陪祠)할 것을 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는 내용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사조문견록(四朝聞見錄)에는 사호(史浩)가 명()을 듣고 양자강을 건너 배사(陪祠)하였다고 했다. 또 주자가 이 편지(與史太保書)에서 지금은 변이(變異)가 거듭되고 있고 오랑케의 사정도 헤아리기 힘든 상황이라 했는데, 을사년에 쓴여진복공서(與陳福公書)등을 참고하면 이는 을사년에 일어난 일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이 편지는 을사년에 쓴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翼增󰡕에서는 계묘년(癸卯, 1183, 주자 53)에서 기유년(己酉, 1189, 주자 60) 사이에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제가 가만히 듣자 하니, 근자에 궤장(几杖)을 갖추어 조정(朝廷)에 나아가신다 하니, 이는 예()로서 교제하는 풍습이 왕성하게 전파된 것입니다. 대개 조종(祖宗)이 성()했을 때로부터 고로(故老)를 기리고 숭상하며, 원훈(元勳)에게 보답(報答)한 것이 이처럼 성()할 때가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우자(愚者)나 지자(智者)를 가릴 것 없이 매우 감탄하면서 성주(聖主)께서 스승을 존중하고 도()를 무겁게 여기는 뜻이 이처럼 두텁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명공(明公)께서 평소에 자임(自任)하는 것이 무거우니, [명공(明公)에 대한 성주(聖主)] 이와 같은 특별한 대우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명공(明公) 자신이]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이전 사람을 뛰어 넘어, 결코 장우(張禹)와 공광(孔光) 아직도 악취를 풍기고 있는 근세(近世) 명랑경회(明良慶會)로 자처하는 자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은 변이(變異)가 거듭되고 있고 오랑케의 사정도 헤아리기 힘든 상황인지라 천자께서도 좌불안석하시니 이러한 사정을 아는 자들은 모두 마음이 차가와집니다. 이 때문에 저는 가만히 생각하기를 원로대신(元老大臣)은 나라와 함께 휴척(休戚)을 함께하시는 분들입니다.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가 지금 이 때보다 더 급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명공(明公)이 한 말씀 해 주실 수 없게 된다면, 곧 명공으로서는 영원히 보효(報效)를 기약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 천자께서 주신 은총과 이익만을 마음에 품는다는 의혹을 남길 것입니다. 따라서 원컨대 저의 말을 깊이 살피시어 자주 문하(門下)의 직량(直諒)하고 다문(多聞)한 선비들을 불러서 자세히 상의하고 물어서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다 펼칠 수 있게 하신 다음, 명공께서는 이들 의견을 겸하여 총람(總攬)하여 조리(條理)가 통하게 한 다음 이를 남김없이 천자께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명공께서 천자의 은혜로운 대우에 보답하는 것이며, 군정(群情)에 위로하는 응답을 하는 것이며, 전수(前修)에 추배(追配)될 만한 일을 하시는 것이니, 한 차례 [명공(明公)] 의심하는 여론을 씻어내는 데는 이보다 더 편(便)한 것은 없을 듯합니다. 살피지 못하겠습니다만 명공(明公)께서도 동의(同意)하시는지요? 미치광스럽고 눈먼 듯한 망발(妄發)을 늘어놓았으니, 그 죄가 주륙(誅戮)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오직 명공의 관용을 바랄 뿐입니다.

竊聞頃者几杖造朝, 禮際隆洽, 蓋自祖宗盛時, 所以褒崇故老報答元勳, 未有若斯之盛者也. 自是以來, 人無愚智, 莫不咨嗟歎息, 以爲聖主尊師重道之意若此其厚, 而以明公平日自任之重卜之, 知其所以報此殊遇者, 必當有以度越前(3-1154), 決不肯爲張禹孔光以及近世之以明良慶會自居者之遺臭於無窮也. 今者變異重仍, 虜情叵測, 當宁側席, 有議寒心. 愚竊謂元老大臣同國休戚, 告猷之會, 誠未有急於斯時者. 明公不能及此發口一言, 則永無報效之期, 終懷寵利之愧矣. 故願深察愚言, 亟召門下直諒多聞之士, 曲加訪問, 俾盡其說, 兼總條疏, 悉以上聞. 於以報塞恩遇, 慰答群情, 追配前修, 一洗疑論, 計無便於此者. 不審明公亦有意乎? 至於狂瞽妄發, 罪當誅斥, 則惟明公有以寬之.

 

 

 

사태보에게 답하는 별지 答史太保別紙

 

해제이 글은 주자가 당시 태보(太保)로 있던 사호(史浩)에게 보낸 글이다. 주자대전 권 27에 실려 있다. 첸라이(陳來)는 이 편지가 순희 12년 을사년(乙巳, 1185, 주자 56) 겨울에서 병오년(丙午, 1186, 주자 57) 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즉 위에 나오는 여사태보서(與史太保書)의 말미에 미치광스럽고 눈먼 듯한 망발(妄發)을 늘어놓았으니라고 했는데 이 편지의 첫 머리에 제가 어제께는 광망(狂妄)하여 문득 고언(瞽言)으로 명공(明公)의 귀를 더럽혔습니다. 나 스스로의 분수(分守)를 따르자면 마땅히 견척(譴斥)을 받아야 할 죄를 저질렀습니다. 뜻 밖에 고명(高明) 박대(博大)하신 명공께서는 이 모든 것을 포용하시고 마음속을 다 털어내어 순순(諄諄)히 회답(誨答)해 주심에 재삼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이라 했으니 이 별지는 당연히 앞의 편지를 이어 보낸 것이다. 또 앞에 나온 여사태보서(與史太保書)지금은 변이(變異)가 거듭되고 있고 오랑케의 사정도 헤아리기 힘든 상황이라 했는데, 이 별지에도 지금 변방의 일은 더욱 위급해지고 변이(變異)가 거듭 생겨나고 있으니...”라고 했으니 이 글은 명백히 앞의 편지에 이어 보낸 글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역시 을사년 겨울 혹은 병오년에 쓴 것이다. 그러나 󰡔익증󰡕에서는 이 글이 계묘년(癸卯, 1183, 주자 53)이후 기유년(己酉, 1189, 주자 60) 이전에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제가 어제께는 광망(狂妄)하여 문득 고언(瞽言)으로 명공(明公)의 귀를 더럽혔습니다. 나 스스로의 분수(分守)를 따르자면 마땅히 견척(譴斥)을 받아야 할 죄를 저질렀습니다. 뜻 밖에 고명(高明) 박대(博大)하신 명공께서는 이 모든 것을 포용하시고 마음 속을 다 털어내어 순순(諄諄)히 회답(誨答)해 주심에 재삼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저의 죄려(罪戾)를 면하게 된 기쁨일 뿐 아니라 또 이전에 명공께서 고유(告猷)하신 것을 전해들을 수 있게 된 유익함이 있었습니다. 천하(天下)에 이미 그 혜택을 받은 사람은 더욱 기운(氣運)이 나게 되었습니다. 명공(明公)의 훌륭한 말씀을 조목조목 전해 듣고 저의 몽매(蒙昧)함을 깨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지금 변방의 일은 더욱 위급해지고 변이(變異)가 거듭 생겨나고 있으니, 지자(智者)나 우자(愚者) 할 것 없이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루(淺陋)한 저가 보기에, 국경 밖에서 전해오는 일에 대해서는 아직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그에 대해 깊이 견고(譴告)하고 있으니 이것이 도리어 두려워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조정(朝廷)에서는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치게 방비(防備)하면서 그 깊이 두려워할만한 일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으니 저로서는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대저 재이(災異)로 인해 직언(直言)을 구하는 것은 역대(歷代)로 상전(相傳)되어 온 것으로써 고실(故實)을 갖추고 있습니다. 명공(明公)은 천하(天下)의 대로(大老)이시니, 참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지녀야지 세무(細務)를 살피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원컨대 이런 뜻을 가지고 상()께 한 말씀 하시어 명공(明公)의 유은(幽隱)한 정()이 상()께 전해지도록 하신다면 천하의 말이 모두 명공(明公)의 말이 될 것이고, 또 이로 인해 명목달총(明目達聰)함으로써 화기(和氣)를 불러오게 된다면 이는 모두 명공(明公)의 공()이 될 것입니다. 용서해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다시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죄를 기다립니다.

昨者狂妄, 輒以瞽言仰瀆崇聽, 自循分守, 當得譴斥之罪. 不謂高明博大, 無所不容, 誨答諄諄, 罄竭底蘊. 三復自幸, 不惟私以免於罪戾爲喜, 而又得側聞前此告猷之益, 天下已有陰受其賜者, 允竊增氣. 尙恨未得躬扣昌言之目以發蒙昧耳. 今者邊事益急, 變異薦臻, 人無智愚, 共以爲懼. 熹淺, 竊以爲境外之傳未足憂, 而譴告之深爲可畏也. 今朝廷於其不足慮者旣已過爲之防, 而於其深可畏者反未有處, 甚惑焉. 夫以災異而求直言, 歷世相傳, 具有故實. 明公身爲天下(3-1155)大老. 誠有憂國之心, 亦不當俯及細務. 願以此意爲上一言, 使幽隱之情得以上通, 則天下之言皆明公之言, 而明目達聰, 感召和氣, 皆明公之功矣. 感激容貸之恩, 懷不能已, 敢復言之, 俯伏俟罪.

 

 

 

첨수에게 답하는 편지 1 答詹帥書 一

 

해제이 글은 주자가 당시 광서(廣西)의 수사(帥司)로 있던 첨의(詹儀)에게 보낸 글이다. 주자대전 권 27에 실려 있다. 첸라이(陳來)는 이 편지가 순희 13년 병오년(丙午, 1186, 주자 57)이나 그보다 조금 이른 사기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즉 답첨수서(答詹帥書)1, 답첨수서(答詹帥書)2, 답첨수서(答詹帥書)3은 모두 광서(廣西)의 염법(鹽法) 등의 일을 다루고 있으므로 당연히 첨의(詹儀)가 광서(廣西)의 수사(帥司)로 있을 때 쓴 편지이다. 남송제무연표(南宋制撫年表)에 따르면, 첨의(詹儀)가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서 정강부(靜江府) 지사(知事)가 된 것은 순희 10년에서 13년까지이다. 따라서 이 편지들은 당연히 병오년 이전에 쓴 것이다. 별집(別集)3답정가구(答程可久)고운(古韻)의 통식(通式)을 언급하면서(示及古韻通式)” 편지 가운데 말하기를 광서(廣西)의 염법(鹽法)에 관해 근자에 첨장(詹丈)으로부터 받은 편지에 의하면, [이 제도가] 매우 편리하다 합니다. 그러나 그곳으로부터 온 사람들은 주군(州郡)이 군색(窘塞)하고 궁핍(窮乏)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답첨수서(答詹帥書)2이 일(소금 정책)에 대해서는 비록 여러 차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만, 그러나 한 사람도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군요. 광우(廣右)에서 벼슬한 사람 중에 그 주현(州縣)이 군색(窘塞)하고 궁핍(窘乏)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답정가구(答程可久)는 병오년에 쓴 것이니 답첨수서(答詹帥書)2 역시 동일한 시기에 쓴 것이 틀림없다. 또 답첨수서(答詹帥書)3양자직(楊子直)이 근자에 조수(趙帥)를 위해 조수(趙帥)가 촉()에 들도록 초치(招致)했다.”라고 하고 있는데, 살피건대 조여우(趙汝愚)가 촉()의 수사(帥司)로 제수(除授)된 것은 순희 12년 을사년 12월이고, 병오년에 비로소 촉중(蜀中)에 들어갔다. 따라서 답첨수서(答詹帥書)3는 병오년에 쓴 것이 틀리없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답첨수서(答詹帥書)1도 병오년이나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절보󰡕에서는 이 편지가 임인년(壬寅, 1182, 주자 53)에서 계묘년(癸卯, 1183, 주자 54) 사이에 쓴 것으로 보고 있다.

 

근자에 제가 그대의 글을 받은 이후 가을을 거쳐 지금까지도 온갖 병이 교대로 나를 공격해 오는군요. 다행히도 그대가 걱정해 주신 덕분에 위돈(委頓)한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대가 부탁한 문자(文字)를 오랜 동안 다 써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대가 보낸 심부름꾼이 이곳에 도착하여 보내오신 글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하필(下筆)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삼산(三山)으로부터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전해드리고자, 여러 차례 써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올 즈음까지도 여전히 서너 차례 종이를 바꾸어가며 수습보철(收拾補綴)하고 있었는데, 그러고서도 5-6일이 더 지난 후에 일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저는 본래 모필로 쓰는 글쓰기에는 능()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또 고인(古人)의 서법(書法)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히 내 손만 믿고 함부로 써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부탁하신 그대의 뜻을 돌아보면서 힘써 노력해 보았지만 끝내 마음에 드는 글자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이미 지금 이상으로 더 잘 써서 마무리를 잘 해낼 수는 없기에 이것을 그대로 봉()하여 그대에게 보내 드리니, 이를 사용할 수 있을지 여부는 고명(高明)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보첩(補帖)한 곳은 글줄(行道) 안에 들지 않으니, 반드시 글자체(字體)를 아는 선공(善工)을 구하여 이들을 적절히 이동시켜서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또 먹물이 배어들어서 붓이 간 원래의 자국이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대해서는 글자를 비추어 보게 하여 다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해야만 좋아질 것입니다. 비액(碑額=碑首)에는 원래는 단지 첩직(貼職)만 쓸 생각이었는데, 이제 자세히 살펴보니 계관(階官)과 봉작(封爵)이 모두 직명(職名)보다 높기에 이들을 나란히 써 두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단지 폭지(幅紙)만 사용했으니 비석(碑石)에 이들 내용을 다 써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本文) 한 두 군데는 여전히 온당(穩當)치 못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별지(別紙)에 다 드러내었으니 바라건대 다시금 자세히 짐작해 보십시오. 아마도 조금만 더 수정(修定)을 한다면 거의 오랫동안 전할 수 있을 듯합니다.

自頃拜狀之後, 涉秋以來, 百病交攻, 幸以餘庇, 未至委頓, 以故所委文字久未能寫. 及來使到, 伏奉賜書, 乃始下筆, 欲俟其還自三山而授之. 而屢寫輒不入意, 比其還也, 猶三四易紙, 收拾補綴, 又五六日然後畢. 要是本不能書, 而又嘗略識古人書法, 不敢信手胡寫, 以孤見屬之意, 勉彊爲之, 終是不能成字. 今旣無收殺, 只得封納, 可用與否, 更在高明財之也. 補帖處不入行道, 須得善工識字體者儹那取正. 其墨水浸漬, 不見元筆路處, 幷令照應修減乃佳. 碑額元只欲題貼職, 今詳階官封爵皆高於職名, 今幷書之. 然亦只用幅紙, 碑石必可容也. 但本文一二處未穩, 別紙具呈, 望更詳酌, 恐可略脩定, 庶可傳久遠耳.

 

시랑장(待郞丈)께서 천자를 가까이 모시고 있을 때는, 날로 논사(論思)의 유익함이 있었기에 선류(善類)들은 바야흐로 이점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구구(區區)한 일방(一方)의 염협(鹽筴) 때문에 가볍게 조정을 떠나게 되니, 아는 자들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중(謙仲)의 시()는 비록 훌륭하지만 지엽(枝葉)을 급하게 여기고 근본(根本)을 느슨히 여기니 또한 지론(至論)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待郞丈入陪近班, 日有論思之益, 善類方以爲喜, 今乃以區區一方鹽筴之故輕(3-1156)去朝廷, 識者不能不以爲恨. 謙仲詩雖佳, 然急於枝葉而緩其根本, 亦未得爲至論也.

 

주현(州縣)에서 매염(賣鹽)을 하면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 지역 가운데서도 지금 이점을 문제 삼을 만한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초법(鈔法)을 추진(推行)하고 또 주현(州縣)의 수입을 빼앗아 조정(朝廷)에 돌리다 보니, 이 때문에 주현(州縣)에서는 손이 묶이게 되어 군병(軍兵)의 의복과 식량조차도 지급해줄 수 없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이에 거의 일(반란)이라도 생겨날 지경입니다. 지금 광서(廣西)에서는 이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미리 인자(仁者)의 우려(憂慮)를 거쳤을 것이므로 반드시 이러한 금심거리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소금으로부터 나오는 이익이 모두 상인(商賣)들에게로 돌아가고 주현(州縣)에서는 단지 정리전(淨利錢)만 얻을 수 있을 뿐이어서, 이미 지금까지 관매(官賣)한 수()에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모잉(耗剩)을 협대(夾帶)하는 이익을 잃어버리고 있으니, 장차 반드시 비용을 들여야 할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또한 지나칠 정도의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께 회계(會稽)로 와서 이성지(李誠之)의 광서(廣西)에 관한 몇 가지 일을 기록한 글을 보았는데, 염법(鹽法)가 가장 먼저 나오더군요. 대저 고인(古人)이 법을 세울 때는 구차스럽게 관이(寬弛)하지는 않습니다. 유안(劉晏)선박(船舶)을 건조(建造)한 것과 같은 부류는 참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제 이를 기록해 보내드리니 한 번 눈여겨보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또 반년(半年)에 천라(千籮)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5일에 10배를 한다 해도 이는 채윤(蔡尹)의 역법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왕정지(王正之)를 근자에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비록 대단히 정성스런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의 노성(老成)함이 더욱 노련(老鍊)졌을 것이니 그의 생각이 반드시 깊을 것입니다. 그를 방문해서 이익과 병통(利病)의 실상(實相)에 관해 자문(諮問)해보는 것은 고명(高明)께서도 꺼리실 일이 아닐 듯 합니다. 저를 알아주심이 두터우시니 감히 묵묵히 있을 수 없어서 참이(僭易)함이 이 지경에 미치었으니, 너무나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州縣賣鹽不能無弊, 中今亦尙有病此之處. 然頃來推行鈔法, 又奪州縣入以歸朝廷, 緣此州縣束手, 雖軍兵衣糧, 亦有支不行處, 幾致生事. 今者廣西所行旣經仁者之慮, 必無此患. 然鹽利盡婦商賣, 而州縣只得淨利錢, 已是不及向來官賣之數. 又失夾帶耗剩之利, 將來必是不免須有費力去處. 此恐今日亦不得不爲之過慮也. 昨來會稽見一書記李誠之廣西數, 而鹽法爲之首. 大抵古人立法, 非是苟爲寬弛, 劉晏造船之類, 正自有深意耳. 今謾錄呈, 幸一過目. 又如半年能千籮, 而五日乃十倍之, 此得無近於蔡尹之役法否? 王正之頃嘗一見, 雖不甚款, 然意其老成更練, 所盧必深, 恐尙可咨訪, 以盡利病之實. 此固高明所不憚也. 辱知之厚, 不敢黙黙, 僭易及此, 愧悚亡已.   

 

흠부(欽夫)의 옛 정사(政事)는 본디 그가 명덕(明德)을 닦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대 역시 명목(明牧)이시니 반드시 사방(四方)의 소망(所望)을 깊이 위로해줌이 있을 것입니다. 근자에 절동(浙東)에 있을 때 보니, 주군(州郡)이 최과(催科)하는데 판조(版曹)의 문서(文書)를 봉행(奉行)하면서 성한(省限)에 의거하지 않더군요. 이처럼 이미 기한(期限)에 앞서 취()하면, 백성들은 더 이상 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소보(小報)를 보니, 신파(新坡) 중에 주군(州郡)에서 전()을 상공(上供)할 때 상() () 반년마다 비교(比較)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형세가 더욱 위급하고 각박해집니다. 요직(要職)에 있는 분들이 대략 충언(忠言)과 기책(奇策)으로 덕음(德音) 넓게 열어주지 못하다 보니 나라의 근본을 손상(損傷)시키는 자들만 날로 더욱 심()해지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欽夫舊政固有賴於脩明, 然在明牧, 必自有以深慰四方之望者. 頃在浙東, 見州郡催科奉行版曹文書, 不依省限, 旣先期取了, 民固已不堪命矣. 今見小報, 新坡有請州都上供錢上下半年比校, 此其勢愈急刻矣. 當路之人略無忠言奇策以開廣德意, 而所以椓喪邦本者日甚一日, 爲之奈何! 

 

학술(學術)에 관한 소장(疏章)을 보면 참으로 그들이 그럴만한 점이 내게 있음을 알겠습니다. 그러기에 실제로 나 자신을 반성해 보니 기실 그들의 말에 대해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병 가운데나마 중용(中庸)맹자(孟子)를 정돈(整頓)할 수 있었는데 이전에 비해 자못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대 계신 곳이 너무 멀어 이들을 휴대하고 가서 그대의 가르침을 청할 수 없는 것이 한()이 됩니다. 한가한 중이라 해도 사람이 없으니 초사(抄寫)하여 그대에게 한 부 올릴 수 없는 것이 또한 매우 한()이 됩니다. 더욱 성광(聲光)을 원대히 하시고, 엎드려 바라건대 이 도()와 이 백성을 위해 천만(千萬) 자중(自重)하소서. 구구(區區)히 기도합니다.

(3-1157)學術之章, 固知有謂, 然所以反身之實, 亦實有愧於其言者, 但知皇恐自修而已. 此其爲賜, 亦不可謂不厚也. 病中整頓得中庸孟子, 頗勝於前. 恨地遠不得携以請敎, 閑中又無人抄寫拜呈, 深以爲恨耳. 益遠聲光, 伏幾爲斯道斯民千萬自重, 區區至禱.

 

 

 

첨수에게 답하는 편지 2 答詹帥書 二

 

해제이 글은 주자가 당시 광서(廣西)의 수사(帥司)로 있던 첨의(詹儀)에게 보낸 글이다. 주자대전 권 27에 실려 있다. 첸라이(陳來)는 이 편지가 앞의 답첨수서(答詹帥書)1, 및 다음에 나오는 답첨수서(答詹帥書)3과 함께 순희 13년 병오년(丙午, 1186, 주자 57)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이전에 제경(諸經)에 관한 저의 비설(鄙說)을 보고 싶다는 그대의 하유(下喩)가 있었습니다만 처음에는 저의 비설(鄙說)이 천루(淺陋)하여 보여드리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가르침을 구할 수 있겠다 싶어서 곧 베껴 올리게 되었고 감히 스스로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사이에는 반드시 어긋나고 잘못되어 성현(聖賢)의 본지(本指)를 잃고 학자(學者)의 안목(眼目)을 오도(誤導)할 곳이 있음을 제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이 글을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기를 간곡하게 바란 것입니다. 이처럼 구구(區區)한 저의 뜻은 한 때의 아름다운 겸손(謙遜)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저의 성의(誠意)가 부족하여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었습니다. 지금 받은 그대의 편지에 따르면 이미 간각(刊刻)을 거의 마쳤다 하시는군요. 이 소식을 듣고서는 정신이 멍해지면서 곧이어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전에 그대가 사람을 보내 저의 비설(鄙說)을 초록(抄錄)하신 뜻이 이처럼 하실 요량에서 그리 하신 것임을 만약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오래 전에 그대의 명을 감히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너무 늦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向蒙下喩欲見諸經鄙說, 初意淺陋, 不足薦聞. 但謂庶幾因此可以求敎, 故卽寫呈, 不敢自匿. 然亦自知其間必有乖繆以失聖賢本指 誤學者眼目處, 故嘗布懇, 乞勿示人. 區區此意, 非但爲一時謙遜之美而已也. 不謂誠意不積, 不能動人, 今辱垂喩, 乃聞已遂刊刻. 聞之惘然, 繼以驚懼. 向若知遣人抄錄之意已出於此, 則其不敢承命固已久矣. 見事之晩, 雖悔莫追.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일과 관련된 이해(利害)는 이미 작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물며 저의 천한 자취가 바야흐로 사람들의 입에 헛되이 오르내리게 되고 이로 인해 발생한 재앙이 위로 전현(前賢)에까지 미칠 수 있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제의 계책은 그저 나 스스로를 매우 어둡게 숨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오히려 재앙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지금 시랑장(侍郞丈)께서는 천자의 깊은 사랑을 받고 계시고, 또 도()를 수호하려는 정신이 절실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식영허(消息盈虛)의 이치에 입각하여 이 사태를 차분히 생각해볼 여유를 갖지 않으시고 결국 그 글을 새겨서 원근(遠近)에 유포(流布)하시게 될 경우, 그리하여 만약 이로 인해 서로 더불어 강약(彊弱)을 비교하고 승부(勝負)를 다투게 되는 일이라도 발생할 경우, 이는 세교(世敎)에 도움이 되지도 않거나와 그저 불민(不敏)한 죄를 거듭하게 되고 또 문하(門下)에 이런 저런 붕당을 생겨나게 만든다는 비난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대개 동경(東京)의 금고(禁錮)나 백마청류(白馬淸流)의 재앙은 논하지 않더라도 근세(近世)의 정백우(程伯禹)와 홍경선(洪慶善)의 일을 귀감으로 삼을 만합니다. 어찌 갑자기 지금의 군자(君子)는 전일(前日)의 일덕대신(一德大臣)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제가 경전을 설한 것 중에는 본래 시사(時事)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는 혐의(嫌疑)를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는데, [; 예를 들어중용(中庸)의 구경(九經)에 관한 설()과 같은 부류가 그렇습니다.] 이를 두고, 윗사람을 비난한 것이라 하면서 형벌(刑罰)이나 죽임을 가하는 것이 어찌 불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지난해에 건창(建昌)의 학관(學官)에서 우연히 예전에 지은 감흥시(感興詩)를 판각했을 때, 드디어 제생(諸生)들이 이에 주석(注釋)하여 이 시가 특정 사건을 비방한다고 하면서 대간(臺諫)에 들여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교관(敎官)은 임자방(林子方)과 함께 거의 논렬(論列)당할 뻔했습니다. 이는 근래 일어난 일 중에서 더욱 거울로 삼을만한 일입니다. 비록 두려워하여 피할 정도는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고초를 겪어야만 참으로 이러한 간특(姦慝)한 예봉(銳鋒)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竊惟此事利害如前所陳, 所繫已不細矣. 又況賤迹方以虛費橫遭口語, 玷黜之禍, 上及前賢, 之計, 政使深自晦匿, 尙恐未能免禍. 今侍郞丈乃以見愛之深, 衛道之切, 不暇以消息盈虛之理推之, 至爲刻畫其書, 流布遠近, 若將以是與(3-1158)之較彊弱爭勝負者. 恐其未能有補於世敎, 而適以重不敏之罪, 且於門下或未免分朋樹黨之譏. 蓋未論東京禁錮, 白馬淸流之禍, 而近世程伯禹洪慶善之事亦可鑒矣. 豈可遽謂今之君子不能爲前日之一德大臣耶? 况所說經固有嫌於時事而不能避忌者, [; 中庸九經之類.] 指爲訕上而加以刑誅, 亦何不可乎? 去歲建昌學官偶爲刻舊作感興詩, 遂爲諸生注釋, 以爲語讟而納之臺諫. 此敎官者, 幾與林子方俱被論列, 此尤近事之明鏡. 雖若無足畏避, 然亦何苦而眞觸此姦慝之鋒耶?

 

제가 간곡(懇曲)하게 요청(要請)하고 싶은 것은 곧 그대가 이 일을 침파(寢罷)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 혹시라도 이미 공역(工役)을 일으켜 관전(官錢)을 사용했기 때문에 스스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하여 두렵습니다. 제가 지금 공장(公狀)을 사부(使府)에 보내니 서압(書押)하여 문안(文案)에 넣어 판각(板刻)을 거두어들여 태워 없애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공비(工費)를 사용한 상태라면 실수(實數)를 제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비록 가난하지만 파산(破産)하는 한이 있어도 그 비용을 사양하지 않고 제가 납부하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무리(此輩)들이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나 한 몸의 눈앞의 이해(利害)관계는 애초부터 말할 것이 못됩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로 인해 도리어 이 도()에 무궁(無窮)한 해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시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거리낌 없이 속히 고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欲布愚懇, 便乞寢罷其事, 又恐已興工役, 用過官錢, 不可自已. 今有公狀申使府, 欲望書押入案, 收索焚毁. 其已用過工費, 仍乞示下實數, 雖貧, 破産還納, 所不辭也. 如其不然, 此輩決不但已. 一身目前利害初不足道, 正恐以是反爲此道無窮之害耳. 切乞更入思慮, 不憚速改, 千萬幸甚.   

 

덕경간본(德慶刊本)에 대해 거듭 서인(序引)을 써 주시는 은혜를 입으니 더욱 송측(悚仄)합니다. 이 글은 금본(今本)에 비해 쟁점(爭點)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긴절(緊切)한 곳 가운데 만족스럽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서문 가운데 쓰신 성현(聖賢)을 잘 배웠다(善學聖賢)”는 말씀은 극히 의미(意味)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분분(紛紛)한 말들은 본디 정씨(程氏) 때문에 한 말들이 아니고 다만 풍지(風旨)에 영합한 것으로서 그 사람이 입각한 곳을 보아 공격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혹 이 사람(此人)이 청허(淸虛)를 담론하기라도 하면 저들은 곧 노자(老子)를 싸잡아 공격할 것입니다. 나아가 만약 이 사람이 혹 재계(齋戒)를 닦기라도 한다면 저들은 곧 석가(釋迦)를 싸잡아 비방할 것이고, 이 사람이 일찍이 [왕안석의]삼경(三經)자설(字說 읽기라도 했다면 저들은 곧 왕씨(王氏)를 공격할 것이고, 이 사람이 일찍이 권서(權書)와 형론(衡論)을 읽기라도 하면 저들은 삼소(三蘇)를 배척할 것입니다. 집에서 노여움이 일었으나 저자에서 얼굴을 붉힌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저들이 또 어찌 일찍이 무슨 정론(定論)이 있기에, 더불어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점을 살피지 않은 채 그들과 더불어 힘써 다투고자 한다면, 이로 인해 도리어 그 형세가 격화되어 그들의 주장을 더욱 강화시키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참으로 도학(道學)에 해를 끼치게 되기 십상이니 이 점을 더욱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에 왕신백(王信伯)과 논변(論辨)한 자는 아마도 도리(道理)에 가까이 간 사람인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신백(王信伯)이 이말로 그를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게지요. 만약 왕신백(王信伯)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저들이 어찌 그의 이 말을 꺼려하겠습니까?

德慶刊本重蒙序引之賜, 尢以悚仄. 此書比今本所爭不多, 但緊切處多不滿人意耳. 序中所用善學聖賢之語極有意味, 但今日紛紛, 本非爲程氏, 但承望風旨, 視其人之所在而攻之耳. 若此人尙談淸虛, 則幷攻老子 : 幸修齋戒, 則兼詆釋迦, 曾讀三經字說, 則攻王氏, 曾讀權書衡論, 則斥三蘇. 怒室色市, 彼亦何嘗有定論而可與之較是非曲直哉? 但不察此而欲力與之爭, 則必反以激成其勢而益堅(3-1159)其說, 或遂眞爲道學之害, 亦不爲難. 此尤不可不慮耳. 當時與王信伯辨者, 恐亦尙是近道理人, 故得以此言屈之. 若在今日, 彼豈有憚於此耶?

 

그대는 흠부(欽夫)가 증점(曾點)에 관해 언급한 곳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의심되는 점에 관해서는 근자에 중용혹문(中庸或間)연어장(鳶魚章)에서 이미 다 말했습니다. 대개 명도선생(明道先生)이에 맹자(孟子)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勿忘勿助)’는 말을 빌려 말로 다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뜻을 명백히 드러낸 것인데 후인(後人)들은 도리어 [명도의 그 말을] 실어(實語)로 간주했기 때문에 명도의 뜻을 상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蒙喩欽夫曾點, 鄙意所疑, 近已於中庸或間鳶魚章內說破. 明道先生乃借孟子勿忘勿助之語發明己意說不到處, 後人却作實語看了, 故不能不失意耳.

 

경전(經典)의 제목(題目)에 관한 그대의 설()은 더욱 정밀(精密)하니 이는 쉽사리 방과(放過)할 일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대저(大抵) 이 이치가 어디인들 없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애초부터 이 이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체(事體)가 대단치 않다는 판단이 들면 해로울 게 없다면서, [작은 일에까지] 반드시 이치(理致)를 따지는 것은 지나치다(過當)고들 하니 비단 이 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찍이 전에 양자직(楊子直)으로부터 일전에 조 경우(晁景迂)()을 풀이한 선유(先儒)들이 책 제목에 관해 말한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조 경우(晁景迂)에 따르면, 선유(先儒)들이 책 제목을 달 경우에는] 감히 자기의 성명(姓名)을 경() 앞에다 두지 않는 것이 상례(常例)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상서공씨전(尙書孔氏傳), 주례정씨주(周禮鄭氏注)와 같은 경우, 모두 경()이 제목의 앞에 있고 성씨(姓氏)는 제목의 뒤에 있으니, 이것이 제대로 된 체제(體制)라는 것입니다. 저도 오래 전에 이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선생(程先生)역전(易傳)에 제목을 달 때는 반드시 주역정씨전(周易程氏傳)이라 했습니다. 그 후에 이를 여백공(呂伯恭)에게 말했더니 그 역시 이를 깊이 시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도 무학역전(婺學易傳)의 제목을 변경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지금 그대의 말씀 중에는 오히려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經題之說尢見精密, 不肯容易放過. 大抵此理何所不在? 今人初不理曾, 只見事體小可, 便謂無害, 而以必整理者爲過當, 非獨此事爲然也. 頃嘗見楊子直晁景迂嘗言先儒經解之題, 例不敢以己之姓名之經上. 春秋左氏傳尙書孔氏傳, 周禮鄭氏注, 皆經題在上, 姓氏在下, 此爲得體. 鄙意舊亦嘗謂如此, 故每題程先生易傳, 必曰周易程氏傳. 後來以告伯恭, 伯恭亦深以爲然, 爲換却易傳籤子. 以此論之, 則今者所喩猶若有所未盡也. 如何如何?  

 

근자에 전해들은 짧은 소식(一文字)에 따르면, 저염책(詆鹽策)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다고 하는데, 이미 이 소식을 알고 계신지요? 이 일에 대해서는 비록 여러 차례 가르침을 입었습니다만, 그러나 매번 상의할 일이 생길 때마다 왕래하면서 이를 전해 줄 사람이 없군요. 광우(廣右)에서 벼슬한 사람 중에 그 주현(州縣)이 군색하고 궁핍(窘乏)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근자에 또 상세히 물어보았더니, 단지 계주(桂州)의 여러 읍()에서 시행한 초법(鈔法)은 이미 생산량을 계산하여 소금을 공급하고 돈을 거두는 것(等第科賣)’을 면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무릇 이는 모두 그대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으니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구구(區區)히 너무 지나치게 따진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그대가 더욱 순구(詢究)해서 백성들에게 이익이 많이 돌아갈 수 있는 정책을 헤아려 실행해주기 바랍니다. 그 범수(范守)의 문자(文字)는 삼가 원본(元本) 그대로 봉정(奉呈)하니 한 번 보아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취할 점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단점을 저들의 공격이 곧 나의 장점을 완성시키는 근거가 되는 것인 셈이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라면 이를 차마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참이(僭易)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어 너무나 두렵습니다만 아무쪼록 널리 살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近傳得一文字, 詆鹽策尤力, 不知已見之否? 此事雖累蒙誨諭, 然每詢之往來, 無一人以爲便, 而仕於廣右者無一人不以州縣窘乏爲言. 近又細詢, 桂州諸邑之鈔, 已是不免等第科賣. 凡此皆與尊喩不同, 不知果如何. 區區過計之憂, 尙欲高明更加詢究, 算其利於民之多者而從之也. 范守文字, 謹以元本呈, 幸一(3-1160)過目. 或有所取, 則彼攻吾短者乃所以成吾之長, 固仁人之所不忍棄也. 僭易及此, 悚恐之深, 尙幸垂察.

첨수에게 답장하는 글 答詹帥書

 

해제이글은 주자가 1184(순희 11, 갑진) 그의 나이 55세에 조첨사에게 태극과 서명에 대한 의견을 개진해서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편집상의 오류를 시정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현물 경제에서 소금이 가지는 의미와 민생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 정책에 입안하여 민생을 돌아보기를 소원하고 있다.

 

엎드려 생각하니 허가하는 글의 이익과 병통을 깨우쳐 주시니 공경히 고아한 뜻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이 본래 드러난 것이 차례를 이루지 못해서 매번 경전을 점고함에 반드시 고칠 것이 있어서 마음에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있어서 전해서 후학들을 잘못되게 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도리로 연내에 바야흐로 군소들이 곁눈질하게 될 것이니 가만히 성현들이 경계를 드리운 것을 음미해 보니 진퇴존망을 알고자 하지만 다만 문을 걸고 쓰는 것에 맞아서 몰래 동지들과 더불어 깊이 연구하고 힘써 행해서 도가 장차 행해지기를 기다리니 이와 같이 관전을 사용해서 개인의 책을 새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듣고자 하는 곳에 저촉해서 지적한 것으로 병통으로 삼게 하니 그 재앙이 장차 이 학문 위로 흘러서 천하로 하여금 입을 재갈질 하고 혀를 묵게 해서 감히 믿음을 향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도리를 행하고자 하면서 도리어 수갑 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직의 아래가 능멸하고 꺾이는 것을 달가워하여 분서갱유하고 가두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쁜 가르침을 맛보니 반드시 이해휴척을 법 밖에 둔 것으로 설명을 한다면 또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두 해 이래로 절차가 개정된 것이 이미 적지 않아서 그 사이에 대의로 쪼개고 묶어서 고치지 아니할 수 없고 또한 한 두 문자가 마치 이해가 없는 것 같아서 끝내 그 병통을 깨달아 고칠 수 없습니다. 지금 보고 추인한 본을 개정하여 납부하는 것에 나아감을 면하지 못하니 청컨대 여가 날에 한번 살펴보시면 곧 전일의 잘못이 보일 것입니다. 본래 전할 만한 책이 아니니 태우는 것이 상책이고 갈무리 하는 것이 그 다음이거늘 반드시 부득이 하다면 고쳐 바로잡아야합니다. 글자가 옛날 것보다 많으니 나누어 두 줄로 만들어 글자를 들임이 가능하니 이것은 가장 아래의 계책입니다. 비록 반드시 문득 학자들을 잘못되게 하지 않더라도 또한 거칠게 오늘의 마음을 채워나갈 것이니 뒷날의 근심은 서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 아끼고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망령되이 지음을 알지 못해서 이 도와 이 백성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이 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집사께서 깊이 생각해서 만약 제가 개진한 상책을 쓸 수 있다면 곧 안건 앞의 두 차례의 장계를 들어 태우는 것은 손바닥을 뒤 집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혹여 전에 올린 장계가 아직 부서의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오늘 거듭 드리는 한 본을 깊이 살펴 주심을 간절히 바랍니다.

공경히 문집을 새겨 이루지 못하였는데 속인들이 이익을 즐겨 더불어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 면으로 감독해서 가납함을 얻었습니다. 맹자 설에 이미 다행스럽지 못하여 다시 보태어 닦을 수 없다 하니 새겨도 해가 없으나 구원에 유감이 없게 할 수 없을 까 두렵습니다. 백공이 큰일에 기록함이 매우 정밀해서 예나 지금에 이러한 책이 있지 않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룰 수 있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글을 읽음이 많지 않고 더욱이 쇠락하고 흐릿해서 어찌 다시 이 일을 논변할 수 있겠습니까? 세간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숲처럼 많으니 모름지기 반드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을 운영하는 뜻이 공리와 술수의 사이를 떠나지 못한다면 붓으로 본뜻을 깎을 뿐만이 아닙니다. 요사이 괴이한 의논들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놀래게 해서 마음을 무너뜨려서 강자가 부르짖음에 약자가 화답해서 음란한 허물이 곳곳에서 나와서 자못 또한 스스로 백공에게 붙입니다. 낭장을 모시고 멀리 있어서 아직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날에 조정에 돌아가면 마땅히 깊이 탄식할 것입니다. 양자단이 근자에 조첨사를 촉 땅에 불러 이르게 해서 이미 임천미를 출발했는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오히려 아직 편지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이에 관청의 소금에 대한 이해의 병통이 생겨서 물가에 다다라 폐단을 받음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조첨사가 고치고자 하지만 제사들이 의논으로 협조하지 않아서 말을 어기는데 이르니 그대는 다만 지목함을 만났으니 일을 일으키는 어려움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소금의 계교를 주달한 조목과 별지에서 자세히 깨우치신 내용을 살펴보니 때에 따라 폐단을 구원할 방법을 볼 수 있어서 한 방법의 본을 더합니다. 다만 알지 못하겠습니다. 주현이 과연 궁핍함과 관계있는지 아닌지? 사서 취함이 과연 과목이 요란한지 아닌지? 장차 다시 쌀을 모우고 묘를 꺾는 계교에 이르는지 아닌지? 근자에 보고 한번 서로 알아서 말하기를 황동에 있었던 일이 다만 법이었는데 그 일을 논의함이 매우 자세함을 들었는데 집집마다 말하기를 황석 수십 년에 평일에 또한 일찍이 깊이 소금을 취하는 의논을 하였거늘 지금 집들이 얻었으니 곧 쉽게 행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마을의 공론이니 그것을 이미 광서로 운반했음을 들었으니 반드시 서로 직접 보고서 의논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매우 지조와 절개가 있어서 반드시 구차스럽게 다르고 같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상세히 반복해서 특별히 먼 곳까지 전해야 할 것이니 그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하지 못하고 말도 반드시 다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일에 본래 참여한 것이 없어서 위를 벗어나서 말함이 인증서의 이해와 병통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에게 관계됨이 있습니다. 다만 즐거이 도덕의 깊이를 흠모해서 전해줄 무리를 얻었으니 그 말이 또한 혹 평생토록 충신불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으니 이 때문에 깊이 의심하지 아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간절한 깨우침을 입었으니 비록 중매한 듯 의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또한 어른의 말이 반드시 믿을 만 한 것으로 감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바라건대 깊이 계산하고 멀리 생각해서 누차 이루어짐을 살폈으나 편안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일에 따라 변통해서 하여금 내가 전일에 변법한 근본 뜻을 잃지 않게 할 따름이니 자취가 진실로 깊고 넓게 길이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단지 모든 주의 봉급을 뒤에 보탠 숫자가 예부터 사람들이 살피고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이니 여기에 제공할 만합니다. 지금 이미 파직되어 비록 조정과 조사가 돈을 다스림을 얻을 수는 없지만 또한 공가의 지탱함을 도와서 공급하는 종류가 취하여 갖추지 못할 까 두렵습니다. 만약 곧바로 자르고 덜어서 밝게 지휘해서 한 푼이라도 지나치게 취해서 사람들이 이미 논의한 장법과 같지 않다면 단지 이 한 조항이 끝내 오래도록 멀리 해가 될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일은 어떻습니까? 아마 합하여 토론하고 연구하고 찾아서 미리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동남쪽 여덟 고을이 위의 네 고을은 소금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예로부터 나그네가 취하고 관의 일이 나란히 행해졌습니다. 아래 네 고을은 소금이 생산되므로 예로부터 백성들로 하여금 두 번 납부한 소금을 돈에 따라서 관청에서 떨어진 것을 받아서 먹게 하였습니다. 근자에 상주 객이 취하는 것이 없어지고 하주 관에 소금이 공급되지 않아서 관청의 일이 이해의 병통이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전에 말한 것과 같으면 돈을 납부해서 소금을 받지 않는 것이 혹 스스로 사사로이 소금을 사서 먹으니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광서 물가를 따라 소금이 나는 모든 주를 사사로운 소금으로 나누면 한 근에 얼마를 받아야 합니까? 소금을 취함에 한 근에 얼마를 받아야 합니까? 만약 사사로운 가격이 매우 낫고 관청의 가격이 매우 높으면 마땅히 실제로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범군이 말하는 것과 같다면 또한 생각을 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절동 칠군 사도 읍이 바다를 따라 소금을 먹는 것을 용납한다면 현도들이 결과를 갖추는데 급급해서 수포하는데 힘써서 세민들이 법에 저촉되고 함정에 빠지는 이들이 이루다 그 무리를 셀 수 없을 것이니 일찍이 토론하고자 신청한 것이 복건 아래 네 고을이 참여되어 법을 적용해도 결과하지 못한 것을 지금에 거론합니다. 이것은 아마 요새법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용과 대학의 근본을 떨쳐 이미 조목을 두었으니 두 책이 고친 곳이 진실로 많아서 간행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면서 감히 다시 근본을 거슬러 절하여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행히 장차 의논을 혁파해서 다른 날에 제거하고 붙이기를 요청합니다. 중용 서문 가운데에 요순이 전수한 내역을 미루어 근본해서 사람들의 매우 자세한 한 단락을 첨가하였습니다. 대학 격물 장 가운데에 공정의 정도를 개정한 것이 매우 밝으니 제거하여 변론한 우뚝한 설이 매우 많습니다. 구본의 진실함이 미진한 것입니다. 만약 논어 맹자 두 책이 모두 밝은 혜안을 얻어 간파했다면 비루하고 졸렬한 것은 다행히 오늘날 오래도록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고 교수가 학교에 뜻을 머물러 두었으니 매우 좋습니다. 그가 일찍이 육자의 정학을 따라서 위기지학에 뜻을 두었으니 반드시 그 사람을 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자에 모든 곳의 교관이 또한 즐겨 가르치고 인도하는데 뜻을 둡니다. 그러나 그들이 익히는 것이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아서 기량이 더욱 자세하나 마음의 허물은 더욱 무너지니 대대로 가르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합니다. 오히려 넉넉히 순수하고 어리석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났습니다. 태극과 서명 두 해석이 근자에 또한 일찍이 다시 정해진 것이 있으니 지금 함께 붙이니 바라건대 나란히 자세히 살펴서 뜻을 보태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백록당에 걸어 보여서 시대의 무리들에게 행하고 말하게 해서 마땅히 고상한 그대의 앞에 둘 것이 못 되거늘 개정하기를 바라니 이에 고씨가 수학한 문정으로 조목을 삼는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교관이 발문에서 기쁜 듯 인색한 얼굴빛이 없다하니 이하 여러 말은 흡사 제가 이 글로부터 이미 나아가서 나에게 흘러 다니는 것 같으니 진실로 편안하지 않습니다. 구구한 이때에 만약 막부의 이미 흘러 행하는 뜻을 안다면 감히 명령을 받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이 서문을 훼손해 버린다면 진실로 베풀 것이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곧바로 이 말과 하문의 여러 구를 바꾸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伏蒙開喩印書利病, 敬悉雅意. 然愚意本爲所著末成次第, 每經繙閱, 必有脩改, 是於中心實末有自得處, 不可流傳, 以誤後學. 加以此道年來方爲群小仄目, 竊味聖賢垂戒, 欲知進退存亡而失其正之指, 只合杜門却掃, 陰與同志深究力行, 以俟道之將行, 不當如此用官錢刻私書, 故觸其所不欲聞者, 使其有所指以爲病, 而其禍且上流於此學, 使天下鉗口結舌, 莫敢信鄕. 是則欲道之行而反以柅之. 此稷下甘陵折以基坑焚黨錮之禍也.

 然今竊味台誨, 必以利害休戚置之度外爲說, 則亦無可言者. 但兩年以來, 節次改定又已不少, 其間極有大義斫繫, 不可不改者, 亦有一兩文字, 若無利害, 而不改終覺有病者. 今不免就所示印本改定納呈, 欲乞暇日一賜省覽, 卽見前日之繆. 本非可傳之書, 削而焚之上也, 鑴而藏之次也, 必不得已, 則改而正之. 其字多於舊處, 分作兩行注字亦可, 此則最爲下策. 雖未必便能不誤學者, 亦且粗滿區今曰之心. 然後患之來, 可以立竢. 熹非自愛而憂之, 實懼其不知妄作, 未能有補於斯道斯民而反爲之禍也. 伏惟執事試深思之, 若能斷然用熹所陳之上策, 卽案前此兩次公狀擧而焚之, 如反手耳. 或恐前狀未蒙筆白判付曹, 今再納一本, 切望深察也.  

欽夫文集久刻未成, 俗人嗜利, 難與語. 然亦一面督之, 得卽納去次. 孟子說渠已不幸, 無復增修, 刻亦無害, 恐未能使其無遺憾於九原耳. 伯恭大事記甚精密, 古今蓋未有此書. 若能續而成之, 豈非美事? 但讀書本自不多, 加以衰老昏憊, 豈復能辨此事? 世間英俊如林, 要必有能爲之者. 但恐其所謂經世之意者未離乎功利術數之間, 則非筆削之本意耳. 浙中近年怪論百出, 駭人聞聽, 壞心術, 彊者唱, 弱者和, 淫衍四出, 而頗亦自附於伯恭. 侍郞丈在遠, 未必聞之. 他日還朝, 當爲深歎息也.  

楊子亘近爲趙帥招致人蜀, 不知已發臨川未, 尙未得書也. 此間官鹽利病參半, 而臨汀受弊爲尢甚. 趙帥欲更之, 而諸司議多不協, 至有違言, 子直亦遭指目, 興事之難蓋如此.   

錄示鹽筴條奏及別紙誨諭詳悉, 見所以因時救弊, 加惠一方之本. 但不知州縣果無關乏否? 賣鈔果無科擾否? 將不至復爲招糴折苗之計否? 近見一相識來此云, 在黃東事但憲, 聞其論此事甚悉. 云家黃石數十年, 平日亦嘗深持鈔鹽之論, 今得家間, 乃知其有不易行者. 此必閭之公論, 聞渠已移廣西漕, 必相見面議也. 此人亦甚有志節, 必不苟爲同異. 更與詳細反復, 殊勝遠方傳聞, 其人未必皆賢, 而言未必皆可信也. 熹於此事本無所預, 出位而言, 非若印書之利病, 猶有關於己也. 但樂慕道德之深, 得之傳聞之衆, 其言亦或出於平生所謂忠信不妄者之口, 是以不能不深疑耳. 今旣蒙喩懇切到, 雖亦未有以妁然見其無可疑者, 且以長者之言必當可信而不敢不信耳. 然亦願深計遠廬, 屢省其成, 有所未便, 隨事變通, 使不失吾前曰變法之本意而已, 其迹固不必深狥而長守也. 不審台意以爲如何? 只如諸州俸給後來增添之數, 舊來息不人省計, 故可供此. 今旣罷去, 雖得朝廷及漕司撥錢, 恐亦只可助公家支俸, 而供給之屬無所取辨. 若不徑行裁損, 明乞指揮, 過取一錢, 論如人己臟法, 則只此一項終爲久遠之害. 又不知他事如何, 恐亦合討論究索, 預爲之防也.  

閩中八郡, 上四州不産鹽, 故舊以客鈔官般並行. 下四州産鹽, 故舊來只令百姓隨二納産鹽錢, 而受墮於官以食. 近歲上州客鈔廢而下州官不給鹽, 其官般者利病參半. 如前所云, 其納錢而不受鹽者, 或自買私鹽而食之, 人亦不以爲病也. 不知今廣西瀕海諸州産鹽地分私鹽一斤爲錢幾何? 鈔鹽一斤爲錢幾何? 若私價甚低, 官價甚高, 則宜實有不便, 如范君所言者, 恐亦不宜不加思也. 向見浙東七郡四都瀕海例食容鹽, 縣道急於辨課, 力於搜捕, 細民冒法陷刑, 不勝其衆, 嘗欲爲討論申請, 參用福建下四州法而未果, 至今浪之. 此亦恐可以補今法之不及也.  

中庸大學奮本已領, 二書所改允多, 幸於未刻, 不敢復以浙本拜呈. 幸且罷議, 他日却附去請敎也. 中庸序中推本堯舜傳授來歷, 添人一段甚詳. 大學格物章中, 改定功程度甚明, 珊去辨論冗說極多. 舊本眞是見得未眞. 若論語孟子二書, 皆蒙明眼似此看破, 則鄙拙幸無今日之憂久矣. 高敎授能留意學校, 甚善. 渠嘗從陸子靜學, 有意爲己, 必能開道其人也. 近曰諸處敎官亦有肯留意敎導者, 然其所習不過科擧之業, 伎倆愈精, 心衍愈壞, 蓋不如不敎, 猶足以全其純愚之爲愈也. 太極西銘二解, 近亦嘗有所更定, 今同附呈, 欲乞幷賜詳酌而去留之, 幸甚. 白鹿堂揭示, 以時世輩行言之, 不當在高君之前, 亦乞改正, 仍以高氏修學門庭爲目, 幸甚. 敎官跋語所謂欣然無吝色以下數語, 似熹自以此書已就而喜於流行者, 允爲非便. 區區此時若知幕府已有流傳之意, 卽不敢承命納呈矣. 今若毁棄此序, 固無所施 : 如其不然, 卽乞易去此言及下文數句, 幸甚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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