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시사와 출처) 書 時事出處
수신 조자직에게 보내는 편지 與趙帥書(子直)
【해제】이 글은 순희 10년(癸卯, 1183, 54세)경에 조여우(趙汝愚)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러나 『주자대전차의집보』27권, 5판 ‘치립분벽(置立粉壁)’조 절보(節補)에는 이 편지가 경술년(庚戌, 1190, 주자 61세)과 신유년(辛亥, 1191, 주자 62세) 사이에 씌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가만히 살피건데, 사사(使司)께서 내려 보내신 바 ‘두 이웃에게 적(籍)을 붙여서 맡기는 일’은 관사(官司)에서 일찍부터 이미 시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의 애초의 뜻은 단지 향관(鄕官)에게 맡겨 인호(人戶)를 권유하여 스스로 와서 적(籍)을 붙이라는 것이었으니, 대개 관리로 하여금 그 사이에 간여하도록 하지 않은 것은 번요(煩擾)함이 있을까 두려워서였습니다. 비록 쌀을 청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있더라도 강제하지 않으며 다만 쌀을 청하기를 원하는 자는 이미 적(籍)을 붙이고도 공급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해(利害)가 자기에게 절실해서, 적(籍)을 붙이거나 붙이지 않거나 간에 모두 모름지기 스스로 그 책임을 맡으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오래되면 사람들은 점점 서로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홀연히 이러한 지휘(指揮)가 있으니, 이 이후로는 자식을 낳고 쌀을 얻으려는 사람은 편히 앉은 채로 묻지도 않은 채 그 이웃 사람을 책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웃 사람으로 쌀을 구하지 못한 자는 돌이켜 보건데 그를 대신해서 책임을 지고 또 죄상(罪賞)이 없는 데도 그 후를 감독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또 하물며 일갑(一甲) 안에서 애를 밴 집안을 제외하면 오히려 네 집이 있는데도 이제 오히려 다만 두 집만을 취하여 이웃이라고 합니다. 만일 집들이 정돈된 시가(市街)에 있다면, 오히려 두 이웃 집이 매우 가까이 있어서 이들이 핑계 대며 미루는 것(推託)을 용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향촌에 있어 사람들이 구름이나 별처럼 흩어진 곳이라면, 혹은 앞에 있기도 하고 뒤에 있기도 할 것이며 혹 오른쪽이나 왼쪽에 있기도 하고 혹은 듬성듬성하고 혹은 빽빽하기도 하여, 반드시 서로 추탁(抽擢)할 것이요, 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식을 낳고 쌀을 얻은 사람은 이미 관여하지 않겠지만, 이렇게 되면 오히려 이해관계가 없는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죄상(罪賞)이 없는 일을 떠맡으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네 집 가운데서도 또 ‘정해놓은 바 주관하는 사람의 이름(正定主名)’이 없는 상태에서, 만일 때에 맞춰 신부(申附)하는 사람이 없다면, 곧장 자식을 낳은 연후에 그 집이 혹 버리거나 죽이려고 하되 이웃과 통해서 비호하고, 다시 신고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 청미(請米)를 원하더라도 모름지기 이웃 사람을 논소(論訴)해서 신부(申附)하지 않은 것을 죄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향관(鄕官)이 이미 근구(根究)를 수리(受理)하기 어려운 상태라면, 그 형세는 반드시 번거롭게도 유사(有司)들이 추증(追證)할 수밖에 없게 되어 소동(騷動)이 있을 것이니 그 해로움이 작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추회(追回)하시겠습니까?
竊見使司行下委兩鄰附籍事, 官司嘗已施行. 但此事初議只委鄕官勸諭人尸自來附籍, 蓋不欲使吏與其間, 恐有煩攘. 雖有不願請米者, 亦不之彊, 但欲請米者, 非已附籍不給 , 卽其人利害切己, 附與不附皆須自任其責. 行之旣久, 人漸相信. 今忽有此指揮, 卽自此之後, 生子得米之人可以安坐不問, 而歸其責於鄰人, 鄰人不得米者, 顧乃代之任責, 而又無罪賞以督其後. 又況一甲之內, 除懷孕家外, 尙有四家, 今却只取兩家爲鄰. 若在街市人家齊整去處, 猶可責之兩畔切鄰, (3-1138)不容推託. 若在鄕村人煙星散去處, 卽或前或後, 或左或右, 或疎或密, 必是互相推託, 不肯爲任此責. 其生子得米之人旣不干預, 却使無利害之人任無罪賞之事. 而四家之中又無正定主名, 萬一無人及時申附, 苴至生子之後, 其家或欲殺棄, 卽通同蓋庇, 不復申擧. 或欲請米, 卽須論訴鄰人, 以爲不申附之罪. 鄕官旣難受理根究, 其勢必煩有司追證搔擾, 其害不細. 不知及今尙可回否?
만일 우선 향관(鄕官)으로 하여금 예전대로 인호(人戶)를 권유해서 스스로 적을 부치는 것(즉 附籍)을 행하도록 하고, 조치를 맡은 관인(措置官)으로 하여금 부적자(附籍者)의 허실(虛實)을 고찰하게 한 후, 그 가운데 더욱 태만한 자를 취하여 현(縣)에 보고해서 향관을 교체하도록 하고 조금 창피함을 가해서 나머지를 경계한다면 또한 예전의 폐단을 혁신하고 은의(恩意)를 넓히기에 족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곧 모름지기 죄(罪)와 상(賞)을 엄격하게 세워서 오가(五家) 내에 있는 사가(四家)로 하여금 함께 그 책임을 지도록 하십시오. 만일 애를 밴지 다섯 달이 된 집이 있으면, 곧 사린(四鄰)이 먼저 본가(本家)를 취하여 부적(附籍)을 구하는 문장(文狀)을 품신(稟申)하고 그런 다음에 청미(請米)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말하고, 사린(四鄰)이 연명으로 서명합니다. 상주문의 안에서 함께 지정(指定)해서 두 이웃 모모가 전담해서 상주문을 보내게 하며, 부적(附籍)을 취하고 향관은 이를 살펴 본가에 돌려보내 살피게 합니다. 출산하기까지를 기다렸다가 다시 사린(四鄰)의 보명(保明)을 취하여 애초의 허가와 연계해서 나아가 미곡을 거두어 보관하는 향관에게 쌀을 청합니다. 쌀을 청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도 또한 모름지기 사린이 모두 문장을 갖추어 애초의 회답과 연결해서 일찍이 죽이거나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명(保明)하여 향관에게 알리고 호적에 올립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책임을 미루어 누락되거나 헐뜯고 소동을 일으키는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와 같다면 곧 일의 바탕과 규모가 갑자기 지난날과 달라지는 것이니, 또한 장래에 마침내 번거로움을 면하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다시 바라건데 그 마땅함을 자세히 살피셔서 이해의 실질을 헤아려 행하시기 바랍니다.
若得且令鄕官依舊勸諭人尸自行附籍, 而委措置官考察附籍者之殿最, 取其尤怠慢者申縣改差而稍加沮辱, 以警其餘, 亦足以革舊弊, 廣恩意. 如其不然, 卽須巖立罪賞, 而使甲內四家同任其責. 如有懷孕五月之家, 卽四鄰先取本家申乞附籍文狀, 仍說願與不願請米, 四鄰連名簽押. 狀內公共指定, 專委兩鄰某人某人傳送, 取附籍鄕官批回付本家收照. 候生子訖, 再取四鄰保明, 繳連元批, 赴收支鄕官請米. 其不願請米人, 亦須四鄰具狀, 瀲連元批, 保明不曾殺棄, 關報注籍. 如此乃可關防推託遺滯、詞訴搔擾之弊. 然旣如此, 卽事體規模頓異前日, 而將來亦恐終不免於煩擾. 更乞詳其宜, 計其利害之實而行之也.
대개 이 일을 시초부터 생각해본다면, ‘이와 같이 조치하는 것이 결코 두루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믿는 것이 이미 번거로움의 폐단이 없고 은의(恩意)로 권유해서 감동시킬 수 있다면 구휼해 주는 은혜가 비록 두루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음(陰)으로 생활의 은혜를 받는 자가 저절로 장차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질 것입니다. 만약 이것으로 넓히지 않고 은의를 두루 미치게 하는 데만 서두른다면 결코 권유(勸諭)로는 될 일이 아니고 모름지기 온갖 법령으로 금지하고 핍박한 이후에 그 형세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 자체가 좋은 모습이 아닌 것은 아니나, 그리되면 관청에는 헛되이 문서만 있지 실상을 처리하지 않아 백성들은 모두 이 때문에 소요(搔擾)만 당하고 은혜는 없게 될 것이니, 이는 원래 이 일을 계획하고 조치한 본의(本意)은 아닐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삼가 받들어 올립니다.
大抵此事從初商量, 非不知如此措置決是不能周偏, 然所恃者旣無煩擾之弊, 而勸諭恩意有以感動之, 則賑給之惠雖不能周, 而陰受生活之賜者, 自將不勝其衆(3-1139)耳. 若以此爲不廣, 而欲其速得周偏, 則決非勸諭之所可及, 勢須一切以文法禁令驅迫, 然後可成. 如此非不美觀, 然恐官司徒有文移而無事實, 民間徒被搔擾而無恩惠, 非前日所爲思慮措晝之本意也. 不審高明以爲如何? 熹上覆.
근자에 창사(倉司)가 행한 바는 그저 온전히 문서만 갖추어 관리에게 맡겨 공고하되 갑호(甲戶)를 편성하여 흰 벽에다 부쳐 두니 곳곳에서 어지럽지만 하지 실제로 문서 한 장이나 곡식 한 알도 아이를 낳은 집에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실상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이지 배울 것은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近日倉司所行全是文具, 委官散牓, 編排甲戶, 置立粉壁, 處處紛然, 而實無一文一粒及於生子之家. 愚意此可以爲戒而不可學也.
수신 조자직에게 보내는 편지 與趙帥書 二
【해제】이 글은 순희 10년(癸卯, 1183, 주자 54세)경에 조여우(趙汝愚)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러나 『주자대전차의집보』27권 6판의 여조수서(與趙帥書)항 아래 차의(箚疑)에서는 임인년(壬寅, 1182년, 주자 53세)에서 정미년(丁未, 1187년, 주자 58세) 사이에 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때마침 듣기에 숭안(崇安)의 재상과 승상이 함께 정사(精舍)에 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격문(檄文)으로 집을 짓게 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이것은 개인의 재사(齋舍)이니 관청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의리(義理)에도 편안하지 않은 점이 있는데 게다가 저는 종적(蹤迹)이 외롭고 위태하여 걸핏하면 비방을 당하는데, 지금 다시 관청을 시켜 가옥을 짓게 한 것에 연루되게 생겼으니, 이는 바로 좋은 비방꺼리가 되겠습니다. 저들이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면서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런 비방거리 아니겠습니까? 이 점은 시랑(侍郞)께서도 다 알고 계시는데, 어찌 이런 재난을 내리신단 말씀이십니까? 봄에 무이정사(武夷精舍)에서 또한 친구 몇몇이 이를 수리하고자 해서 이미 약속을 정했습니다. 지난해에 어떤 자가 위조된 도방(圖牓)으로 저와 유평보(劉平父)의 명함(名銜)을 나열해 권연제소(勸緣題疏)한 것을 한 후생이 있어 몸소 인본(印本)그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해보니 이내 전의 비방이 사실이 될 것이니 끝내 여러 사람에게 그 도모한 것을 그만 둘 것을 알렸습니다. 하물며 지금 이내 관청을 번거롭게 한다면 어찌 온당하겠습니까? 전에 깨우쳐 주신 데서도 대체로 이미 이 뜻이 있었습니다. 그때 또한 일찍이 갖추어 아뢴 것도 관청에 맡기는 것이 온편(穩便)하지 못한 것임을 두려워한 것이었으나 다만 그 말을 궁구(窮究)하지 않았을 따름이었습니다. 관청에서 그리 하는 것은 의리(義理)에도 이미 불가하고 일에도 또한 불편합니다. 대개 그 첫 번째는 반드시 소요(搔擾)가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법에 맞지 않는 것이니, 만일 그렇게 하면 이로부터 저는 다시는 감히 정사(精舍)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는 근심 걱정이 되어 급히 이 글을 써서 간절함을 아뢰니 또한 부역을 그치도록 하는 명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만약 당신의 뜻이 반드시 전에 말씀해 주신 것을 헛되게 하지 않게 하시려거든 천천히 별도로 도모하셔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適聞崇安宰丞同到精舍, 云被使檄有所營造, 不知果然否? 此是私家齋舍, 不當慁煩官司. 不唯在熹私義有所不安, 加以蹤跡孤危, 動輒得謗, 今更坐役官司起造屋宇, 此正是好題目, 彼等所日夜窺伺而不可得者. 侍郞見念之悉, 豈當以此禍餉之乎? 春間在彼, 亦有朋友數人欲爲營葺, 已定要束矣. 尋聞去歲有人僞印圖牓, 列熹及劉平父名銜, 勸緣題疏, 有一後生親見印本. 因思如此乃是爲實前謗, 遂報諸人罷其所謀. 況今乃煩官司, 豈得爲穩便乎? 向嘗蒙喩, 蓋已有此意. 其時亦嘗具禀, 委之官司, 恐不穩便, 但未嘗究其說耳. 官司爲之, 於義旣不可, 於事亦不便. 蓋其一則必有搔擾, 其二則不能如法, 萬一爲之, 自此熹更不敢入精舍矣. 聞之憂恐, 急作此附遞拜懇, 乞且行下罷役. 若台意必欲不虛前諾, 徐別圖之, 亦未晩也.
수신 조자직에게 보내는 편지 與趙帥書 三
【해제】이 글은 순희 11년(甲辰, 1184, 55세)에 조여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민남(閩南) 지방의 가뭄에 관해 논한 글이다. 익증에서도 이 편지를 주자 55세 때에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전 편지에서 아뢴 것은 제 마음 속에 그대로 담아둘 수만은 없는 것이었기에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말이 정도를 넘어서서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반드시 받아들이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매염(賣鹽)의 일은 진실로 또한 편하지 않으니, 대개 아래 네 주(州)의 백성들이 바치는 산염전(産鹽錢)은 주현(州縣)에서 스스로 마땅히 소금을 공급함으로써 그것을 보상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미 관례적으로 소금을 주지 않고 수사(帥司)가 다시 전매를 행하니 의론하는 자들의 말 또한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단지 서로 관례로 이어진 것이 이미 오래되어 밑천에다 세금을 거두려 하나 그래도 그만두지 못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전에 왕(汪) 어른께서 민(閩) 지방에 와서 심조(沈漕)가 [왕여도(王與道)가] 주매(住賣)한 일 때문에 왕여도(王與道)를 파면한 일이 있은 이후에 또한 매우 이것을 의아해 했습니다. 후에 부득이하게 결국 다시 전매하니 생각건대 또한 달리 조치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사사(使司)께서 지금 어떻게 처리하려 하십니까? 제 생각에 이 일은 지금 또 화매(貨賣)를 은밀히 행하는 것과 같으니 잠시 부득이한 계책이라 하여 이를 행하더라도 나중에 혹 그만 둘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따져보고 주청하는데 이르러 분명한 지휘가 내린다면 이는 복주(福州)의 백성들에게 이 한가지의 명목 없는 부세(賦稅)를 늘리는 것이니 이는 조공(趙公)으로부터 시작하는 셈입니다. 더구나 천주(泉州)․장주(漳州) 및 흥화(興化)도 일의 형편이 같아서 형세가 반드시 관례에 따라 공공연히 행해진다면 그 해악이 또한 단지 복주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깊이 고려해주시기를 다시금 비니 조금이라도 늦추어서 조사(漕司)의 판단을 재촉할 필요가 없으며 혹 다만 차자를 지어 자세히 아뢰기만 해도 천자께서는 반드시 그러하다고 여기시게 될 것입니다. 다시 글로써 조정의 여러 공들에게 알린다면 그 분들 또한 마땅히 이러한 이해(利害)에 관해 확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前書所禀, 懷有不能自已者. 旣而思之, 言語過當, 深以自咎, 然有以知高明之必見容也. 賣鹽之事誠亦非便, 蓋下四州民間納産鹽錢, 州縣自合給鹽償之. 今旣例不給鹽, 而帥司復行榷賣, 議者之言亦未爲不當, 但相承巳久, 調度所資, 有不獲已者. 向時汪丈入閩, 正値沈漕罷去王與道住賣之後, 亦深以此爲疑. 後不得巳, 竟復榷之, 想亦是別無擘畫處也. 不知使司今欲作如何相度? 愚意此事今且如此暗行貨賣, 姑爲不得已之計, 則他日或有能弛之者. 若遂相度奏請, 明降指揮, (3-1141)則是福州民間增此一項無名之賦, 自我而始. 況泉․漳․興化事體一同, 勢必援例公行, 則其爲害又不但福州而已. 此事更乞深思, 少遼緩之, 不須催促漕司相度, 或只作手箚密奏, 上意未必不以爲然. 更以書白廟堂諸公, 亦當曉然見此利害也. 不審台意以爲如何?
사관(祠官)을 청한 것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시 글을 올려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군요? 듣기에 염사(鹽事)를 논하는 자들이 자못 못을 준설한 역사(浚湖之役)까지 함께 논란하면서 이익은 적고 해는 많은 일이라 한다니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임자방(林子方)이 건창(建昌)의 사인(士人)들이 교관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일을 다스린 일로 인해 거의 관직에서 배척당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만, 오늘날의 풍속은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추구하려 하지 않으니 사람의 가슴만 답답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여기에 대해 반드시 나름의 처분이 있을 줄 압니다.
祠請未遂, 不知再入文字否? 似聞論鹽事者頗及浚湖之役, 不知是否? 前日林子方因治建昌士人無禮敎官事, 幾爲要路所擠. 今日風俗大抵不甚賭是, 令人憤懣. 伏想高懷於此必有處也.
임택지에게 보내는 편지 1 與林擇之書 一
【해제】이 글은 순희 11년(甲辰, 1184, 55세)에 조여우의 막하(幕下)에 있었던 임택지(林擇之)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그 곳의 가뭄은 어떻습니까? 비가 와서 충분히 해갈은 되지 않았습니까? 마른 싹들은 살릴 수 있겠습니까? 이곳은 날씨가 가물었다 비가 왔다 고르지가 않아서 산간(山間) 지방에는 자주 비가 오는 곳도 있고 지나치게 가문 곳도 있으니, 그 기세의 장단을 헤아려서 서로 보충한다면 또한 서로를 구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사람들이 난리를 일으키길 좋아해서 굶주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난리를 일으키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또 적은 미곡이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판다면 끼니를 이어갈 방도가 없어져서 실제로 굶주림에 이를 우려가 있어서 난리를 재촉할까 걱정됩니다. 이미 여러 번 수신(帥臣)에게 편지를 써서 빨리 광주(廣州)와 태주(台州)의 식량을 사 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요즈음 듣자하니 영가(永嘉) 지방에서도 가져올 만한 곡식이 있다고 하니 이들은 모두 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입니다. [주 : 만일 복주(福州)조차 곡식이 부족하다면 이곳의 곡식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요사이 조치한 내용을 살펴보니 도리어 단지 상류(上流)에서 곡식의 수송을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시키고 사람을 보내 곡식을 사 모으는 것 뿐 입니다.
彼中旱勢如何? 得雨莫已沾足否? 槁苗尙可救否? 此中燥濕不均, 山間有頻得雨處, 有極枯槁處, 度其勢短長相補, 亦足以相救. 所患者人心喜亂, 不待饑餓而已生狂妄之意. 又患些小米穀爲他處般販, 則亦無以爲繼, 而實有饑餓之憂, 以速變亂耳. 已累書白帥, 宜亟糴廣米及台州米. 近聞永嘉亦有米可來, 此皆不可不早爲之計. (如福州闕米, 則此間米不可仰.) 近觀其所處置, 却只是禁上流攔米及遣人來收糴.
이 두 가지 시책은 우리 경계 안에서 가져오는 것에 불과하니, 마치 한 집안에서 두 아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갑의 곡식을 뺏어다 을에게 먹이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극론했습니다만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다행이 여러 해 동안 체험해 온 것들을 바탕으로 고한다면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오직 임오년과 계미년에 진응지(陳應之)가 건주(建州)를 지키고 있을 때 항구를 금지시킨 것이 매우 엄격했는데, 왕장(汪丈)이 복주(福州)에 있으면서 말 한 마디 따져 묻지 않았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후에 조청경(趙淸卿), 임원수(任元受)가 복주(福州)에 있을 때 진방언(陳邦彦)이 건주(建州)에서 함께 다투었고, 왕첨숙(王瞻叔)이 복주(福州)에 있을 때 임희순(任希純)이 건주(建州)에서 그와 더불어 다투었습니다. 세 분의 공(公)들이 비록 사납게 나왔으나 끝내 건주(建州) 사람들이 지키는 것을 빼앗을 수 없었고 그런 연후에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상류(上流)의 여러 주(州)의 경우, 그 작은 곳은 감히 대부(大府)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큰 곳 또한 반드시 백성들에게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니 또한 그 이해(利害)가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합니다. 수부(帥府) 또한 자기의 명령이 시행되어 우리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되는 것을 기뻐하지만 무릇 건(建)․검(劍)주의 풍속이 일단 한번 동요되면 장차 우리의 우려가 이것보다 커지게 되어 구제하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다만 건녕(建寧)과 같은 곳은 전에 여러 번 흉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여러 현에서 자급(自給)한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서, 쌀을 옮겨 배에 실을 수 없게 된 연후에 마을이 구제되었습니다. 성중(城中)에 또한 물을 거슬러 올라가 쌀을 내어 여러 현을 도왔으나 또한 성중(城中)에 기근이 있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이것을 살피지 않아 여러 현이 예전의 일로 보고하니 모두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설(說)을 지어 수사(帥司)에게 보고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전적으로 수사(帥司) 스스로 한 로(路)의 계책을 세워 그 좋은 것을 헤아려 행할 따름입니다. 듣자하니 연평(延平)지방의 축적한 곡식이 모두 이미 바닥났다고 하니 이것은 깊이 우려할 만합니다. 마땅히 여러 주(州)에 격문(檄文)을 보내 관례에 따라 항구를 막아 [주 ; 마을의 쌀을 옮겨 팔수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장래에 끼니를 굶고 난을 일으키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주 ; 대체로 도적은 모두 깊은 산과 관청으로부터 먼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수부(帥府)의 일로서도 대개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한편으로 다른 지방의 미곡을 다방면으로 불러 들여 운반해 와서 경계 내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최상의 계책이 될 것입니다. 광(廣) 지방은 풍년이 아니라고 하나 또한 본 로(路) 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온(溫)․태(台)와 같은 곳은 낱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정도로 풍년입니다. 지금 바로 추수할 때가 되었으니 [쌀을] 구할 수 있고 사들일 수 있으니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본 로에서 쌀 사들이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고 또한 아직 익지도 않았으니 헛되이 많은 돈을 쓰고 도리어 약간의 쌀만 얻을 것입니다. 차라리 장차 시기를 보아 다른 곳에서 쌀이 많이 들여오는 것이 나을 것이니, 모름지기 [본로의 쌀은 아직] 사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부득이하다면 또한 10월 이후 늦벼가 익은 후를 기다려야 바야흐로 사들일 만합니다. 이 이치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전에 보낸 편지 가운데 또할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 다시금 번거롭고 자세하게 말하니 한 글자라도 빠뜨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3-1142)此二策者, 不過取之吾之境內, 譬如一家之中, 二子皆饑, 乃奪甲以哺乙耳. 亦已極論其非是, 不知以爲然否? 幸以累年以來見聞之驗告之, 此非細事也. 唯壬午․癸未陳應之守建時禁港甚嚴, 而汪丈在福州, 一無所問, 此最爲得. 其後趙淸卿․任元受在福州, 則陳邦彦在建與之爭, 王瞻叔在福州, 則任希純在建與之爭. 三公雖悍, 然卒不能奪建人之守, 然後無事. 今上流諸州, 其小者不敢抗大府之命, 其大者又未必有意於民, 而亦不知其利害之若此也. 帥府又快於吾令之得行, 吾民之可以無饑, 而未及慮夫無禮敎官事,建․劍之俗一有紛紜, 則將爲吾之憂有大於此者而不及救也. 只如建寧, 向來屢饑, 亦不免用諸縣自給之說, 不得般米下船, 然後村落獲濟. 城中又泝流發米以助諸縣, 然亦不聞城中之饑. 今任事者曾不察此, 諸縣以舊事告, 皆不之信. 此必不能有說以告帥司, 全在帥司自爲一路之計, 算其長者而爲之耳. 聞延平積粟皆已匱竭, 此可深憂. 宜檄諸州照例禁港, (不得般販村米.) 無致將來闕食生事. (大凡盜賊皆起於深山遠官府處, 不可不慮.) 此於帥府事體, 蓋所當然. 而一面多方招邀運致外道米斛入界, 乃爲上策. 廣中雖云不熟, 然亦當勝本路. 如溫․台, 則粒米狼戾. 今正及時, 可招可糴, 不可失也. 如本路糴米, 則非計之得, 又非其時, 枉費多錢, 反得少米. 不若且看將來, 如他處米來多, 卽不須糴. (3-1143)若不得已, 亦且俟十月以後間晩禾成熟後方可糴. 此理的然, 前日書中亦說不盡, 更煩子細爲陳之, 不可有一字之遺也.
임택지에게 보내는 편지 2 與林擇之書 二
【해제】이 글은 순희 11년(甲辰, 1184, 55세)에 임택지(林擇之)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
근자에 편병(便兵)을 통해 서장(書狀)을 부쳤는데 지금쯤은 도착했을 것입니다. 가을 날씨가 서늘합니다. 멀리서나마 오직 그대의 덕(德)이 더욱 아름다워지길 바랍니다. 성중(城中)에 도착한 후 어디서 거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이미 다시금 학(學)에 들지는 않았을 테지요. 이전 편지에서 의론(議論)한 것을 일찍이 말씀드렸나요? 듣자하니 정구(汀寇)가 매우 설쳐 댄다고 하더군요. 생각건대 막부(幕府)에서는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겠군요. 요사이 와서는 으레 수신(帥臣)이 친히 도적이 있는 곳까지 가서 싸움을 독려해야 한다고 하니, 이는 매우 좋지 않은 계책입니다. 그러나 조정으로부터 이미 이렇게 하라는 지휘(指揮)가 있었으니 부득불 한 번 나가보지 않을 수 없겠으나 도적이 있는 곳까지 너무 깊이 들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선 연평(延平)까지 가서 더 나아갈 것인지 물러날 것인지를 차근차근 의론해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近因便兵附狀, 想達. 秋凉, 遠惟德履佳勝. 不知到城中居甚處? 必已不復入學矣. 前書所論, 曾言之否? 聞汀寇甚熾, 想幕府無暇及他事矣. 近例帥須觀到地頭督戰, 此甚非策. 然旣有此指揮, 恐不得不一出. 但未可遽深入, 且到延平, 徐議進退可也.
이 도적들은 이미 관병(官兵)을 물리치고 장리(將吏)를 죽이기까지 했으니 결코 불러들여서는 아니 될 것이며 오직 힘을 다하여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이 지경까지 내몰게 된 이유는 필시 이들에 대한 관사(官司)의 이런 저런 비리(非理)와 침요(侵擾)가 있었기에 이렇게 된 것일 터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그 연유를 추궁하여 그들에게 원한을 산 원래의 관리(元來官吏)에 대한 탄핵을 거듭 시행하여 그 사람을 사퇴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에 그 도적이 일어난 현(縣)에서 마땅히 기발(起發)해야 할 것과 마땅히 비용으로 사용할 전물(錢物)을 나누어 계산하고 아울러 일체를 의각(倚閣)한 채 인심을 위로함으로써, 별도의 향응(響應)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곧 비용 중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조사(漕司)로 하여금 별도의 돈을 내어 충당하도록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이를 시행할 수 있다면 한편으로는 인방(印牓)을 여럿 내고 그 말(詞)은 간략히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도적이 나타난 그 곳에 가서 인방(印榜)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켜 집 담벼락에 붙혀 그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곧 반드시 수시로 빈객(賓客)과 관원(僚吏)들을 접견하여 아래 백성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힘씀으로써 훌륭한 계책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주 ; 이 일을 평소에 이미 빠트리고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참으로 이전의 실수를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此賊已敗官兵, 殺將吏, 決不可招, 只有盡力撲討. 然其所以致此, 必是官司前後非理侵擾, 有以致之. 却須詢究其由, 將元來官吏奏劾, 重作施行, 以謝其人. 仍計盜起縣分合起發支遣錢物, 並令一切倚閣, 以慰人心, 不令別致響應. 卽支遣不可闕者, 令漕司撥錢應副. 此兩項是第一義, 若能行之, 卽一面多出印牓, 簡約其詞, 令人於地頭散貼曉諭. 其次卽須非時接見賓客僚吏, 務通下情, 以資計策. [주 ; 此事平日己是欠闕, 今允不可循舊失也.]
그 다음으로는 반드시 새롭게 장수와 병졸을 뽑아 힘쓰도록 독려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만약 지금의 병관(兵官)을 그대로 써서 지금의 병졸을 통솔한다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듣자하니 신유안(辛幼安)은 다만 그가 모집한 ‘감히 죽기를 각오한 역사(力士)’를 얻어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둔 것일 뿐입니다. 풍담(馮湛)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신유안(辛幼安)은] 또한 도적 가운데 몇몇(賊中徒黨)을 불러 안내를 맡은 병사(鄕導)로 삼을 수 있었기에 비로소 도적이 있는 산 속으로 진입해서 그들의 소굴을 깨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로(本路)의 좌익군(左翼軍)은 지금까지 줄곧 바로 이런 사람들로 구성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민(陳敏)이 그들을 써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옛 사람(舊人)이 없으니, [지금 이 곳의 좌익군은] 단지 여러 다른 주(州)들의 금군(禁軍)이나 토군(土軍)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부패 관료들 중에 새로 정신 차린 관리(歸正官)와 뇌성(牢城) 가운데 군 복무가 가능한 자 중에서 대담하고 재주가 있는 자(有心膽事藝者)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가 이전에 무슨 짓을 했든지 간에 불문에 부치고 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저 번에 만났을 때 수신(帥臣)께서는 그 곳에서 상영(商榮)이란 자를 얻었다고 큰 소리 친 적이 있는데, 후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사세견(沙世堅)이라는 자 역시 본래는 그저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지만 장흠부(張欽夫)께서 그를 도예(徒隷) 가운데서 발탁하여 그로 하여금 좀 도적들을 잡게 하여 문득 공을 이루더니 급기야 이접(李接)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드디어 그를 크게 쓰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其次須有將有兵, 乃可責効. 若只用見今兵官, 統見今兵卒, 此則決然敗事無疑. 聞辛幼安只是得所募敢死之力, 見馮湛說亦是招得賊中徒黨作鄕導, 方能入山破賊巢穴. 本路左翼軍向來便是此等人, 所以陳敏用之有功. 今已無復舊人, 只與諸州禁軍土軍無異. 却恐歸正官及牢城中有可募者, 但得有心膽事藝者, 勿問其所從來可也. 向見帥喚得商榮者在彼, 後來看得如何? 沙世堅者, 本亦只是此流, 欽夫拔之徒隷之中, 使捕小賊輒有功. 至李接之亂, 遂收其用耳.
여러 주(州)의 금군(禁軍)을 충동시키는 것은 결코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끝내 사람이 없는 형편이니 사정상 금군(禁軍)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금군(禁軍)을 동원하더라도] 또한 멀리서 소리를 내거나 위세만 보이는 데 그쳐야지 산 속으로 진입(進入)시켜 도적들과 직접 칼날을 맞붙게 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저 도적들의 위세만 길러주고 관군(官軍)의 세력은 오히려 저지시키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또한 도적을 방어하는 사람(防賊人)이 빈틈을 타고 가까운 이웃의 주군(州郡)을 충돌(衝突)해 들어가게 될 경우 혹 본처(本處)에 울부짖으며 어지럽게(嘯亂)도적에 대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진정시켜서 잠시 머물러 두도록 해야만 그들로 하여금 도적을 탄압(彈壓)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처지라면 차라리 조정에 알려 광동최봉군(廣東摧鋒軍)을 동원하여 좌익(左翼)군과 서로 기각(掎角)이 되도록 하는 것도 또한 한 가지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흉년(荒歉)을 만났으니 많은 곡식을 공급함으로써 대속(代贖)해야 할 터인데, 지금 그렇지 못한 형편이니 그렇다면 도대체 그 무엇을 계책으로 삼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起發諸州禁軍, 決是無用. 然今卒未有人, 其勢不可以不起. 但亦止可遙爲聲勢, 切不可使入山與賊交鋒, 適所以長賊威而沮官軍之勢. 亦防賊人乘虛衝突旁近州郡, 或本處有嘯亂應賊之人, 須稍分留, 令足彈壓. 必不得已, 寧可申朝廷撥廣東摧鋒軍, 與左翼相掎角, 亦是一事. 但正當此荒歉, 供億之費不貲, 不知何以爲計耳.
듣자 하니 사현(沙縣)의 재(宰)는 자못 재능이 있고, 남검(南劍)주의 추관(推官)인 조사연(趙師淵)과 검포(劍捕)의 령(令)과 승(丞)도 모두 일을 잘 처리할 줄 아는 분이라고 하더군요. 이분들은 장차 수신(帥臣)께서 남검(南劍)으로 오시게 되면 사령(使令)으로 삼을 수 있는 분들이니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이 늙은이(老生)가 늘상 하는 말일 뿐이니, 혹 사려(思慮)가 미치지 못하는 바에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돌아보니 괜히 번거롭게 괜한 말을 한 듯합니다.
聞沙縣宰頗有才, 南劍推官趙師淵․劍捕令丞皆曉事. 此是將來帥到南劍, 可(3-1145)備使令之人, 亦不可不知也. 此皆老生常談, 恐或可裨思慮之所不及, 相見煩爲言之.
전일(前日)에 ‘미선(米船)을 통과시켜 주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이러한 화색(火色)을 당하여 치우친 견해를 주장하여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그대가 조수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옳고, [그러면 조수는 그대를 방문하여 그대로부터] 건검(建劍)에서 시행한 것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것인 바, [이에 조수는] 말하기를 ‘아마도 상류(上流)의 주군(州郡)에 쌀이 모자라게 될 경우 본사(本司)에서 일전(日前)에 한 미선(米船)을 통과시키겠다는 약속은 더 이상 시행하지 말고 그대로 본주(本州)에다 위임하여 현(縣)의 형편에 따라 적절히 헤아려 나름대로 곡물을 저축함으로써 진휼(賑恤)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인데, 이처럼 해야만 일 처리가 정당하고 물정(物情)도 편안해 질 것입니다.
前日通放米船之說, 當此火色, 尤不宜力主偏見, 以搖人心. 更可細說, 得作訪聞行下建劍, 云恐上流州郡闕米, 本司日前行下通放米船約束更不施行. 仍委本州逐縣隨宜相度, 措置儲蓄, 以備賑恤. 如此卽事體正當, 物情便安矣.
오늘날 앞을 향해 나아가 도적을 토벌하여 이기고 지는 문제 이외에도 더욱이 충돌(衝突) 및 향응(響應)이라는 심각하게 우려할만한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주 ; 서남(西南)쪽으로는 충돌(衝突)이 우려되고, 동북(東北)쪽으로는 향응(響應)이 우려됩니다.] 요사이 여러 공(公)들 중에 단지 송창(宋倉)만이 고(告)할만한 말씀을 하셨더군요, 그러나 도적 잡는 일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신헌(新憲)께서는 어떠신가요? 만약 신헌(新憲)께서도 아직 훌륭한 계책(長策)이 없다면 곧 한 로(路)의 명(命)을 온전히 조수(趙帥) 한 사람이 홀로 담당(擔當)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어제 저녁에 이 소식을 들고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며 잠을 잘 수 없더군요. 우연히 구양경사(歐陽慶嗣)편(便)이 있어, 그에게 부탁하여 먼저 이 편지를 보냅니다. 이곳의 일은 언급할 여유가 없군요. 그가 도착하거든 반드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今日向前進討, 勝負之外, 更有衝突․響應二事, 甚可慮. [주 ; 西南慮衝突, 東北慮響應.] 此間諸公只宋倉尙可告語, 然非捕盜職事, 不知新憲如何. 若亦未有長策, 卽一路之命全在趙帥一身獨自擔當, 不是小事. 昨夕聞此, 令人展轉不寐. 偶有歐陽慶嗣便, 託渠先發此書. 此間事不暇及, 渠到必自相見也.
조자직에게 보내는 편지 4 與趙帥書 四
【해제】이 글은 주자가 조여우(趙汝愚, 자는 子直)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27에 실려 있다. 첸라이(陳來)에 따르면, 이 편지는 순희 11년 갑신년(甲辰, 1184, 55세)에 씌어진 것이다.
제가 가만히 들으니 황정(荒政)에 마음을 기울여 내년을 대비한 것이 매우 지극하다고 하니 이는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상류(上流)에서 사들이려는 미곡(米穀)의 수량이 너무 많은 듯합니다. 아직은 비록 아직은 수로(水路)를 통해 사들인 쌀을 운반해 오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미곡을 거두어 모아 관(官)에 두다 보니 민간(民間)에서는 곧 이만큼의 수량이 빠집니다. 또 곳곳에 장(場)을 설치하여 쌀을 사들이다 보니 겨울 사이에는 미가(米價)가 오를 수밖에 없으며, 이듬해 봄에는 쌀 사들이는 것이 어렵게 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형편이니 곧바로 이를 그만 둘 것을 감히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이 또한 민간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들으니 절(浙) 땅의 미곡(米穀)이 자못 많이 들어와서 시장 가격(市價)이 갑자기 내려감에 따라 방인(邦人)들은 매우 기뻐하지만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앞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있으니 이는 도(道) 전체의 안위(安危)가 걸려 있는 큰 문제(大機)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마땅히 다방면으로 미상(米商)들을 불러들여 시장 가격을 조금 올리고, 관(官)에서 미곡을 사들임으로써 오려는 자들을 권면(勸勉)해야 합니다. 이를 관(官)에서 계선(溪船)이나 해도(海道)를 통해 미곡을 운반할 때 미비(縻費)되거나 손실(損矢)되는 비용과 비교할 경우, 다툴 바가 결코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등속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첫째, 사태를 일찍 파악해야 한다는 점. 둘째, 상세히 따져 보아야 한다는 점. 셋째, 단호하게 조처하고 과감하게 결단하여 인순(因循)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난겨울 호수(湖水)를 준설하는 일에 대해 의론하는 것을 보고서 저로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런 일을 추진할 경우] 반드시 먼저 폐전(廢田)이 얼마나 될 것인지, 관전(漑田)이 어느 정도 될 것인지, 소용되는 공료(工料)가 어느 정도일 것인지 등에 관해 검토한 후, 이익이 많고 해는 적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살핀 연후에 그런 사업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러나 후에 보니 그저 급하게 일을 추진하였고, 지금에 와서 이 사업에 대해 의론하는 자들은 [이 사업이] 오히려 비용만 많고 이익은 적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면서 만 갈래로 뜬소리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록 이런 소리를 다 들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리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처음 계획 단계에서 자세히 살피지 못한 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로 여러 생각을 종합할 수 있는 자는 힘쓰기가 쉽고, 오로지 자신의 지혜에만 의존하는 자는 공(功)을 이루기 어려운 법입니다만, 이런 등속의 일을 처리할 때는 다만 관리들 중에 더불어 도모(圖謀)할만한 사람을 불러서 그와 함께 조목조목 따지고 계산해 본다면 그 일의 영축(贏縮)과 이해(利害)에 관해 단 하루 만에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문을 닫아걸고 깊이 고심함으로써 정신(精神)을 피폐(疲弊)하게 할 필요는 없으며, 또 반드시 이익을 추구하는 병통(利病)의 실상을 다 고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용렬하고 어둡고 또 소활(疎闊)하여 스스로를 도모할 지혜도 없으면서 과도하게 계교하고 많은 말을 하여 남의 일에 간여하기를 좋아하니, 이러한 나의 성벽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깊이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이 버릇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명(高明)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광망(狂妄)한 나의 죄에 관해서도 오직 관용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熹竊聞究心荒政, 以爲來歲之備者甚至, 甚善甚善. 但上流糴米之數似亦太多, 蓋雖未卽津發, 然收之官, 民間便闕此數. 又且處處置場收糴, 冬間米價便須增長, 來春糴貴亡疑. 今業已施行, 不敢便乞住罷, 若但得少損其數, 亦不爲無補也. 又聞浙米來者頗多, 市價頓減, 邦人甚喜, 而識遠者慮其將不復來, 此一道安危之大機也. 謂宜多方招致, 稍增市價, 官爲收糴, 以勸來者. 比之溪船海道官自搬運, 縻費損矢, 所爭決不至多. 此等事一是要早商量, 二是要審計度, 三是斷置果決, 不可因循. 去冬見議開湖事, 熹謂須先計所廢田若干, 所漑田若干, 所用工料若干, 炸見利多害少, 然後爲之. 後來但見匆匆興役, 至今議者猶以費多利少爲疑. 浮說萬端, 雖不足聽, 然恐亦初計之未審也. 大抵集衆思者易爲力, 專己智者難爲功. 此等事但呼官吏之可與謀者條畫而算計之, 其贏縮利害可以一日而決, 不必閉閤深念, 徒弊精神, 而又未必盡乎利病之實也. 庸闇疎闊, 智不謀身, 而過計多言, 喜與人事, 深自覺其可厭, 而未能遽已, 不審高明以爲如何? 狂妄之罪, 亦(3-1147)惟幷寬之也.
관(官)에서 자체적으로 미곡을 운반해오게 되면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를테면] 근자에 회계(會稽)지방에 ‘[미곡] 한 말에 두 되를 줄인 자’가 있어서 그 사신(使臣)을 좌압(坐押)해 달라는 탄핵을 상주(上奏)한 바 있는데, 왕중형(王仲衡)이 그를 힘써 비호하여 도리어 [이러한 비리를] 발각해낸 관리의 죄상을 [억지로] 주워 모으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비리를 발각해낸 그 관리는] 바로 섬현(剡縣)의 섭부(葉簿)인데 그는 황승(黃丞)의 표제(表弟)이니,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마땅히 출등(出等)한 상가(商賈)를 모집하여 그로 하여금 ‘나루에 보내는 일’을 스스로 담당하도록 한다면 비록 그 품삯으로 드는 비용을 넉넉히 잡더라도 또한 미곡을 관(官)에서 직접 운반해 오는 데 따른 수많은 절흠(折欠)의 폐단만큼은 아니라 합니다. 이 일은 전일(前日) 진교수(陳敎授)께서 돌아와 일찍이 그대에게 품문(禀聞)해 주기를 부탁한 일이니 또한 채택하여 시행해볼 만합니다.
官自運米, 弊病百端, 頃時會稽有一斛而虧兩斗者, 不免奏劾坐押使臣. 而王仲衡力庇之, 反欲捃拾發擧官吏, 乃剡縣葉簿, 卽黃丞之表弟, 問之可知也. 或謂當募出等商賈, 使之抱認津致, 雖或優其傭費, 亦未敵官運折欠之多也. 此事前日陳敎授歸嘗囑以禀聞, 似亦可釆用也.
진교수(陳敎授)는 비록 후배이지만 일에 대한 안목이 탁월합니다. 듣자하니 시랑(侍郞)께서도 그를 만나 자못 두터운 대접을 하시고 많은 문제들에 대해 그에게 하문(下問)하셨다 하니 마땅히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문을 구함에 있어서는 폭 넓게 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어서 오로지 한 사람 말한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찍이 선유(先儒)들이『맹자(孟子)』에 나오는 ‘이이(訑訑)’라는 두 글자에 대한 해석을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이(訑訑)’는 자기의 지혜를 스스로 만족히 여겨서 [남의] 훌륭한 말(善言)을 좋아하지 않는 모습인데 이 말이 매우 맛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들 역시 남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비록 현자(賢者)라 해도 이 기상(氣象)이 있음을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비록 그가 알고 있으며 허여(許與)하고 있는 것을 남김없이 말한 자가 있다 해도 여전히 그의 속마음(懷抱)을 진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소원(疎遠)하고 비천(卑賤)한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긴 탄식을 자아낼만한 일입니다.
陳雖後生, 然甚曉事, 聞侍郞遇之頗厚, 凡百更垂下間, 當有所助. 然詢謀貴廣, 亦不專在一人. 嘗記先儒解孟子‘訑訑’二字, 以爲自足其智, 不嗜善言之貌, 此言甚有味也. 今時土大夫非無愛人憂國之心, 但雖賢者, 不免有此氣象. 所以雖其所知所與可以盡言而無間者, 亦未必得竭懷抱, 而况於疎遠卑賤之人乎? 此可爲長太息也.
여러 공(公)들이 주장(奏狀)을 올려 의론(議論)한 것은 대체로 매우 옳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한두 편(篇)의 글, 예를 들어 채승희(蔡承禧)의 무리들이 의론(議論)한 것은 그다지 채택만한 것이 없으니 제로(諸老)의 의론들 사이에 나열하기엔 부족합니다. 그런데 독단수편(獨斷數篇)의 경우는 아마도 약을 먹고 병을 키우는 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온공(溫公)의 양편(兩篇)은 장돈(章惇) 때문에 지은 것인데 그것이 비록 그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절실함은 있으나 원대한 도모를 할 겨를이 없이 지은 책입니다. 그러기에 끝내 후세(後世)를 위한 법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령 소성(紹聖) ․ 숭녕(崇寧) 사이에 군소(群小) 사대부들이 이 종적(蹤蹟)을 얻게 될 경우 어찌 기이한 보물처럼 여기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듣자하니 명도(明道)의 왕패차자(王霸箚子)의 경우, 중간에 빈출(擯黜)했다가 지금은 이를 다시 거두어 넣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나머지 것들 - 즉 이 왕패차자(王霸箚子)처럼 우활한 듯하나 실제로는 절실하며, 작은 듯하나 실제로는 매우 큰 것들 - 에 대해서는 반드시 특별한 안목을 가지고 살펴야 할 것이요, 가볍게 유기(遺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후세에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냉정하게 오늘의 처사를 살핀 후 [오늘의 처사에 대해] 유한(遺恨)을 가지고 가만히 웃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백공(伯恭)의 문감(文鑒)에 실린 주소(奏疏)는 매우 상세합니다. 근자에 그 목록만 본 적이 있었고 자세히 살필 여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식의 취사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반드시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책에 실린 것 모두 빠트려서는 안 될 듯하며 싣지 않은 것을 오히려 더 보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조례(倏例) 가운데 한 가지 일입니다. 이 일에 관한 말은 매우 길 것입니다. 지난 해(去歲) 그대를 만났을 때, 인사(人事)에 곤란함이 있어서 그대에게 자세한 가르침을 청하지 못한 것이 한(恨)이 될 뿐입니다.
諸公奏議大體甚正, 其間一二篇, 如蔡承禧輩議論, 無甚可採, 不足列於諸老之間. 而獨斷數篇, 恐或飮藥以增病也. 溫公兩篇, 當爲章惇而發, 雖其救時之切, 不暇遠謀, 然亦終不可以爲後世法也. 使紹聖․崇寧之間群小得此蹤蹟, 豈不爲奇貸哉? 又聞明道王霸箚子中間雖遭擯黜, 今雖已復收, 然恐其他更有似此若迂而實切․若小而甚大者, 須別作一眼目看, 不可輕有遺棄, 恐後世有明眼人, 冷地(3-1148)看著, 有所遺恨竊笑於今日也. 伯恭文鑒所載奏疏甚詳, 頃但見其目錄, 亦不暇細考. 然恐其去取之間, 亦須有說. 鄙意以爲凡其所載似不可遺, 其所不載乃當增益, 此亦倏例中之一事也. 此事之說甚長, 恨去歲困於人事, 不得子細請敎耳.
조자직에게 보내는 편지 5 與趙帥書 五
【해제】이 글은 주자가 조여우(趙汝愚, 자는 子直)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이다. 주자대전 권 27에 실려 있다. 첸라이(陳來)에 따르면, 이 편지는 순희 11년 갑신년(甲辰, 1184, 55세)에 씌어진 것이다.
저(熹)가 쇠약해지고 병든 나머지 재환(災患)이 잇따르니, 더구나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대의 문안과 걱정해주심에 대해 참으로 감격(感激)합니다. 또한 핍절(乏絶)한 나의 형편을 마음 아파하여 그대는 그대의 청봉(淸俸)을 떼어 나를 주급(周急)했으나 [그대 역시도] 돌보아야 할 권속(眷屬)이 있음을 생각하니 더더욱 부끄럽습니다. 다만 궁벽한 거리의 서생(書生)으로서는 거친 밥과 나물국이 그 상분(常分)입니다. 모르긴 합니다만 아마도 후생(後生)들이 [내가 거친 밥과 나물국을 먹고 있는 것을 무슨] 창견(創見)이라도 되는 듯이 여겨 각자 편하게 말들을 전하게 되었고, 이 점이 그대를 오도(誤導)하여 급기야 그대로 하여금 나에 관해 깊은 우려를 하면서 급히 나의 어려움을 구(救)해야겠다 생각하게 되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 그대에 대한 나의 의리(義理)로 볼 때, 어찌 감히 그대의 후의(厚意)를 사양하고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실 근일(近日)에 와서 뜻하지 아니하게 어느 정도 다시 나를 지탱할 정도의 형편은 되니 아직까지는 감히 그대의 후의(厚意)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삼가 이미 이곳에 온 그 심부름꾼에게 주어 우선 돌려보냅니다. 만일(萬一) 다른 날 군색하고 급하기가 지금보다 더 심해지는 때가 오면 마땅히 따로 그대에게 품청(禀請)하여 그대의 아름다운 운혜(嘉惠)를 입도록 하겠습니다. 인삼(人參)과 부자(附子)는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熹衰病之餘, 災患踵至, 殊不自堪. 伏蒙問恤, 良以爲感. 又蒙軫其乏絶, 割淸俸以周之, 仰認眷存, 尤切愧荷. 但窮巷書生, 蔬食菜羹自其常分, 不知後生輩以爲創見, 便爾傳說, 致誤台慈以爲深憂, 亟加救接, 至於如此. 在熹之義, 豈當復有辭避? 實以近日偶復粗可支吾, 末敢虛辱厚意, 謹已復授來使, 且以歸納. 萬一他日窘急有甚於今, 當別禀請, 以卒承嘉惠也. 人參附子則己敬拜賜矣.
그런데 나에게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조금 있어서 이를 그대에게 말하려 합니다. 살피지 못하겠습니다만 고명(高明)께서 근일(近日) 처리한 유가전고사(劉家典庫事)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의 비루한 생각으로는 [그대가 일을 그와 같이 처리한 것은] 문하(門下)에서 평소 처리해온 일과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향리(鄕里)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 순월(旬月)이래로 여항(閭巷)에서는 모여서 수군거리고, 유식한 이들은 가만히 탄식합니다. 심지어 삼척동자까지도 모두 분연(憤然)히 불평(不平)하는 기운이 있을 정도입니다. 내 추측에는 아마도 그대의 문하(門下)에서 우연히 이 일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따라서 길을 잃은 것은 비록 멀지 않으나 오히려 빨리 생각을 고쳐 소절(.素節)을 온전히 함으로써 떠도는 의론들을 그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살피지 못하겠습니다만 문하(門下)에서도 또한 그렇게 할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천하의 선바들이 장차 그 문하(門下)는 오랑케의 도(道)를 따른다고 여기게 되어 그 마을에 들어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내가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니, 비단 유씨(劉氏)만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만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알아주시니 감히 품은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대의 꾸짖음과 거절을 당하더라도, 저로서는 감히 사양(辭讓)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그대는 이 점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 밖에 드릴 말씀이 여럿 있습니다만 아뢸 여가가 없습니다. 해가 저물어 갑니다. 다시금 때의 마땅함에 순종하면서 진덕(進德) 자중(自重)하시기를 바랍니다. 구구(區區)하나 그대에 대한 절실한 바람(祈望)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 점 아울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但少有鄙懷, 冒浼台聽: 不審高明以近日所處劉家典庫事爲如何? 若熹鄙見, 則竊以爲甚不類門下平日之擧措也. 鄕里自此旬月以來, 閭巷聚談, 有識竊歎, 下至三尺童子, 亦皆憤然有不平之氣. 熹恐門下於此偶未之思也. 行迷雖遠, 尙及改圖, 以全素節, 以息流議, 不審門下亦有意乎? 如其不然, 則天下之士將有以夷虜(3-1149)之道疑於門下而不入其鄕者矣. 此熹之所大恐, 蓋不特爲劉氏遊說也. 久辱知遇, 不敢不盡所懷. 雖被譴絶, 所不敢辭. 伏惟有以察之而已. 他喩數條, 未暇報禀. 歲晩, 更乞順時之宜, 進德自重. 區區不勝祈望之切, 幷幾台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