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원전자료/주자서

주자50

황성 2025. 8. 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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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공에게 보내는 편지 與呂伯恭書

 

 

해제】󰡔편년고증󰡕(p.13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3(병신; 1176, 47)의 글이다. 앞 편지를 이어 관직을 사양한 일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원리에게 표창의 명이 내렸다고 오늘 들었습니다고 했다. 󰡔속자치통감󰡕145의 순희 36월조에 황제가 집정에게 말씀하기를 위섬지는 어디에 있는가?’ 공무량 등이 대답하기를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직간하는 사람이어서 벼슬을 더 높여 발탁하여 등용하려고 했는데 뜻밖에 이미 죽었다니.’……또 말씀하기를 섬지가 비록 죽었지만 관직을 좀 더 올려 정별을 세우는게 마땅하다. 선교랑 직비각을 추증하는게 옳다’”고 했다. 이 서신에서 말한 일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서신 역시 병신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쓴 것이다.

 

 

저의 출처의 계획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다른 때 어려운 점이 있으면 역시 깊이 고려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러 가지 많은 막힌 일이 있어서 진퇴가 어렵습니다. 평생 동안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은 대부분 자신감이 부족하여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두 가지 일이 더 있는데, 평생 동안 쓸모없는 사람임을 알고 단지 자잘한 문자나 고치면서 후세를 기다리며 천지의 사이에 조금 보충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한번 출사하게 되면 이 일들은 완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다른 때 수습하여 완성한다 하더라도 장래에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오늘날 여러 공들께서 추천하여 미는 뜻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만약 그곳에 간 후에 나의 견해가 만일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모두 (나를 추천해준) 벗들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진료용과 같은 일 역시 현자들의 불행이고 그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매사를 예예하기만 하며 입을 다물고 무리들을 따른다면, 그들을 더 깊이 저버리는 것이니 역시 내 성격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출사하여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범하겠습니까? 오늘 원리에게 표창의 명이 추증되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마음이 상합니다. (원리) 역시 당시 여러 공들이 서로 깊고 얕게 아는 것과 취향의 같고 다름을 헤아리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기 때문에 후일 분분한 의론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강절의 우려는 전에 일찍이 강론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에 은혜로운 명을 받고 사양했던 이유 역시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오늘날 입은 은혜에 그치는데 만족하지 않고 도리어 실마리가 되었으니 이것은 또 어찌 계획하고 생각하던 것이 미칠 수 있겠습니까? 시기로 인하여 소원해지는 근심 또한 심히 우려됩니. 하지만 이미 나온 후에는 혹 망발이 있더라도 스스로 그만둘 수 있는 곳이 없으면 그의 시기로 인한 소원함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전에 공참정께서 편지를 보내온 이래로 당시 답답하고 어지러워 회신을 보내면서 이런 뜻을 다 말씀하지 못했기에 단시일 내에 따로 편지를 보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바라건대 노형께서 이 두통의 편지의 곡절을 한장께 전하면서 저의 뜻을 다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따로 고치거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조속히 그 말씀을 듣고 편안하고 무사했으면 합니다. 만약 다시 지휘를 내리시면 한번 내려오고 한번 올라가면서 범하고 무릅쓰는 일이 빈번하고 번거로워 전해진 소문이 널리 퍼지고 비웃는 의론이 많아질 것이니 결코 쓸데없는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전부터 사관에 만족하는데 지금은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할까를 근심합니다. 다시 한 차례만 더 할 수 있다면 매우 다행입니다. 이 밖의 것은 실로 조금이라도 뜻을 두고 하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앞의 편지에서 용감하게 나아간다는 말씀은 지금 보면 여전의 옛날의 병폐가 여전하여 아직 한두 푼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말을 바꾼 책임을 깊이 스스로 두려워할 뿐입니다.

区区出処之計, 極感誨喩. 異時難処, 亦深慮之. 但目下便有許多間阻, 使人難於進退. 平生多所愧恥, 於此自信未及, 打不過耳. 又更有一二事, 平生自知無用, 只欲修葺小文字, 以待後世, 庶小有補於天地之間. 今若一出, 此事便做不成. 設使異時収拾得就, 将来亦無人信矣. 又今日諸公推挽之意, 人人知之, 若到彼之後, 所見一有不同, 便為皆負知己, 如陳了翁事, 亦是賢者之不幸, 非其所欲也. 若毎事唯唯, 緘黙随衆, 則其為負益深, 又非鄙性所堪. 然則亦何為必出, 以犯此數患乎? 今日聞元履褒贈之命, 使人感傷. 渠亦正坐当時不量諸公相知之浅深, 趣向之同異, 故後来不免紛紛之論耳. 康節之慮, 前此固嘗講之. 所以受却前年恩命, 亦政為此. 然曾不足以止今日之所, 而或反以為梯, 此又豈計慮之所及乎? 猜阻之患, 亦深憂之. 但既出之後, 或有妄発, 不能自己処, 則其為猜阻甫益深耳.

前日龔參自以書來, 當時煩撓中, 答之不盡此意, 旦夕或別以書言之. 今日望老兄以此兩書曲折盡達韓丈, 今日別無醫治方法, 只有早聽其辭, 便自帖帖無事. 若便降指揮, 一下一上, 則干冒頻煩, 傳聞廣而譏議多, 必別致生事矣. 熹祠官向滿. 方患未敢再請, 只得再差一次, 爲幸甚厚. 此外實不敢有一毫意想也. 前書勇往之說, 以今觀之, 又似舊病依然, 略未痊減一二分. 易言之責, 深以自懼耳.

 

 

 

한상서에게 답하는 편지 答韓尙書書

 

 

해제】󰡔편년고증󰡕(p.13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3(병신; 1176, 47)의 글이다. 앞에서 고증한 공참정에게 보낸 서신을 살펴보면 본부의 한상서께서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와 여백공에게 보낸 서신에서 또 이미 한장께 편지를 보내 간절하게 말씀했습니다라고 한 것과 이 편지에서 제가 출행했다가 지난 달 보름에서야 비로소 집에 돌아왔습니다. 문득 관직을 제수했다는 명을 들었는데 의외의 일입니다라고 했다. 행역이란 무원에 가서 성묘하고 돌아온 일을 가리킨다. 앞에서 고증한 여백공에게 보낸 서신에 근거하면, 주자가 귀가한 것은 병신년 6월이다. 그리고 이 서신에서 이미 앞 달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병신년 7월이다.

 

 

제가 (무원으로) 일을 떠났다가 지난달 중순 집에 돌아왔습니다. 문득 비서랑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재능을 살펴보아도 어찌 이 선임에 합당하겠습니까? 부끄럽고 두렵고 군색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는 분명 상서 어르신께서 지나친 은혜로 밀고 이끌어 주신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미 건녕부에서 우편으로 유월 십오일에 보내신 편지를 받았고 부장께 별지로 내려준 가르침도 받아 읽고 이에 당신께서 줄곧 저를 생각하여 잊지 않은 뜻이 과연 이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사적인 정이 비록 깊지만, 그러나 제가 평소 당신께 소망한 본심은 아닙니다.

區區行役, 前月半間, 始得還家. 忽聞除命, 出於意望之外. 自視才能, 豈稱玆選? 愧戄窘迫 不知所爲. 然竊妄意此必尙書丈過恩推挽之力. 旣而府中遞到六月十五日所賜書, 傳丈亦以所得別紙垂示, 乃知台意所以眷念不忘者果如此. 私感雖深, 然非本心平日所望於門下也.

 

저의 고집스런 성격을 만방으로 고치려했으나 끝내는 돌릴 수가 없었고, 우활하고 소략한 학문이지만 많은 노력을 통해 자신감이 더욱 돈독하니, 이 때문에 결코 때에 맞춰 부앙하며 공명에 나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십 년간 숨어사는 것을 달갑게 여기며 저의 뜻을 구했습니다. 제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저 자신을 수양하고 도를 지키며 남은 여생을 마치고 한가한 날이 있으면 경전을 읽고 옛 성현의 말씀을 참고하여, 성현의 입론의 본의가 있는 곳을 구하며 스스로 자락하고, 간간히 책을 써서 학자들과 함께 하고, 또 후세의 군자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 밖에는 사실 조금도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중간에 소명을 간곡히 사양했다가 도리어 오해되어 은총과 포상을 받게 되었으니 애당초 감히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참동안 생각해 보니 이것은 바로 임금과 재상께서 무용한 것의 실질을 분명히 알고 민노와 혜양의 은혜를 빌리고자 한 것이므로 젊어서 그 관직에 나아가면 녹봉을 더 받고 한가함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니 받아 들일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 해를 넘기며 간절히 피하다가 마침내 절하며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이것은 위로는 조정의 아름다운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이름 있는 환로의 길을 스스로 끊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로부터 이후에는 장차 죽을 때까지 산림에 숨어 살며 제가 일 삼는 것을 성취할 뿐이자 벼슬을 쫒는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일이 이에 크게 잘못되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니, 제가 또한 어찌 침묵하며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까?

熹狷介之性, 矯揉萬方而終不能回, 迂疎之學, 用力旣深而自信愈篤, 以此自(3-1074)知決不能與時俯仰, 以就功命. 以故二十年來自甘退藏, 以求己志. 所願欲者, 不過修身守道, 以終餘年, 因其暇日, 諷誦遺經, 參考舊聞, 以求聖賢立言本意之所在, 旣以自樂, 間亦筆之於書, 以與學者共之, 且以待後世之君子而己. 此外實無毫髮餘念也. 中間懇辭召命, 反誤寵褒, 初亦不敢奉承. 旣而思之, 是乃君相灼知無用之實, 而欲假以閔勞惠養之恩, 故少進其官, 益其祿而卒許以投閑, 似若有可受者, 以故慰避踰年, 而終於拜受. 私竊以爲是足以上承朝廷之美意, 而下得以自絶於名宦之途, 自是以往, 其將得以優游卒歲, 就其所業, 而無蹙迫之慮矣. 而事乃有大繆不然者, 熹亦安得黙然而亡言哉?

 

무릇 저의 완고함과 우활함 때문에 시류에 영합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이미 소문을 듣고 저를 미워하는데, 유독 한 때의 현공과 명재상들께서 혹 잘못 알아주는데 힘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다니는 소문을 듣고 그 행사와 의론의 본말을 살펴보니, 제 생각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이제 만약 사양하지 않고 관직을 받는다면, 빈주(賓主)의 사이에서 동이(異同)의 논의를 분명 면할 수 없는 것이고, 다스림에도 이익이 없어 마침내 소인들의 조소를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저 개인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소원 역시 골몰되어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혹 말년에 다행히 성취하는 바가 좀 있더라도, 사람들은 분명 이미 증명되지 않은 책이라고 여겨 읽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 한번 (벼슬 자리에) 나아가면 전에 받아들일까 사양할까 생각하며 감히 구차하게 그러지 못했던 뜻도 암암(黯闇)하여 스스로 밝을 수 없습니다. 여러 공들께서 진실로 깊이 알고 두터이 아껴 주신다면 어찌 그 뜻을 펴고 그 지킴을 온전히 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반드시 위협하여 이끌고 종용하여 이러한 극단에 이르겠습니까?

夫以熹之狷介迂疎, 不能俯仰, 世俗固己聞風而疾之矣, 獨賴一時賢公名卿或有誤而知之. 然聽於下風, 考其行事議論之本末, 則於鄙意所不能無疑者尙多. 今若不辭而冒受, 則賓主之間, 異同之論, 必有所不能免者, 無益於治而適所以爲群小嘲笑之資. 且熹之私願所欲就者, 亦將衵沒而不得成. 其或收之桑楡而幸有所就, 人亦必以爲已試不驗之書而不之讀矣. 又況今日一出, 而前日所以斟酌辭受而不敢苟然之意, 亦且黯闇而不能以自明. 諸公誠知之深, 愛之厚, 則曷爲不求所以伸其志, 全其守, 而必脅敺縱臾, 使至此極也耶?

 

또 사대부가 사양하고 입조하는 것은 또 그 자신의 일일 뿐만 아니고, 그가 처한 득실은 바로 풍속의 성쇄에 관계되니 더욱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같은 자는 지난번에 이미 소명을 사양했지만 관직을 고쳐 얻었고, 이제 또 고친 관직으로 인하여 이 관직을 수수하시니, 제가 만약 받고 사양하지 않으면, 이는 좋은 자리와 요직을 조용히 사퇴하는 것인데 어찌 앉아서 반드시 나아가겠습니까. 근세 이래로 풍속이 무너져 사대부가 기만에 의지하여 작위를 취하는 자가 이루 셀 수 없는데 오직 이 한 가지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마침 불행한 일을 당했고 제공(諸公)들은 억지로 시켜 그 수를 충당하게 하니 제가 비록 불초하나 실로 이러한 욕을 입으며 천하 후세의 맑은 이론을 가진 자가 침 밷고 욕하고 비웃고 천하게 여기게 할 수 없습니다.

(3-1075)且士大夫之辭受出處, 又非獨其身之事而己, 其所處之得失, 乃關風俗之盛衰, 故尤不可以不審也. 若熹者, 向旣以辭召命而得改官矣, 今又因其所改之官而有此授, 熹若受而不辭, 則是美官要職可以從容辭遜, 安坐而必致之也. 近世以來, 風頹俗靡, 士大夫倚託欺謾, 以取爵位者不可勝數, 獨末有此一流耳. 而熹適不幸, 諸公必欲彊之, 使充其數, 熹雖不肖, 實不忍以身蒙此辱, 使天下後世持淸議者得以唾罵而嗤鄙之也.

 

또 제가 문하에 이 점을 몇 년 동안 말씀드려 고언과 슬프고 간절함이 이르지 않음이 없는데, 당신께서 이를 막연하게 듣고 바햐흐로 또 조용히 유담하여, 크게 끌어 중용하려 하니 귀착점으로 돌아가고 효과를 이루면 안으로 깨끗한 마음에 위배되고 밖으로 심한 꾸지람을 준 이후에 그친 것에 불과 합니다. 이는 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시 그 평생 언행을 스스로 생각함에 반드시 크게 서로 부응하지 않는 것이 있어, 당신으로 하여금 그 말을 믿지 않아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심히 스스로 후회하고 책함에 허물로 돌아갈 바가 없으나, 그러나 또한 당신께 잠자코 있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감히 다시 말하니, 업드려 바라건데 사랑으로 이를 살펴주십시오.

且熹之言此於門下有年, 苦言悲懇, 無所不至, 而執事者聽之藐然, 方且從容遊談, 大爲引重, 而其要歸成効則不過使之內違素心, 外貽深誚而後己. 此熹所不能識, 且復竊自計, 其平生言行必有大不相副者, 而使執事者不信其言以至此也. 深自悔責, 無所歸咎, 然亦不敢終黙黙於門下, 是以敢復言之, 伏惟憐而察焉.

 

제가 전에 대참께 올린 글에서는 바쁘다 보니 이러한 곡절을 다 진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참람하게도 (상대를) 바꿔 말씀 올리는 것은 제 뜻을 명공께 밝힐 뿐만 아니라 또한 이 편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공에게도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반드시 이미 내려진 조명을 시행하고 추침하고 싶지 않다면 바라건대 관직을 사양하는 저의 요청에 따라 다시 사관의 품계를 주신다면 이 역시 이미 나온 조명의 체면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찌 꼭 저의 광질이 발작하고서야 약을 주시려고 합니까? 문간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달려가 모실 수 없으니 저의 정과 뜻은 매우 박절하고 드리는 말씀은 조리가 없습니다. 고명하신 당신께서 불쌍히 여기고 통찰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熹前日所報大參書, 悤悤不及盡此曲折, 故今僭易有言, 非獨以伸鄙意於明公, 亦使因是以自達於龔公也. 必若成命已行, 不欲追寢, 則願因其請免, 復畀祠官之秩, 其於出令之體, 似未爲失. 何必待其狂疾之旣作, 然後藥之乎? 瞻望門牆, 無由趨侍, 情意迫切, 言語無倫. 伏惟高明垂賜矜察.

공참정에게 보내는 편지 與龔參政書

 

 

해제】󰡔편년고증󰡕(p.13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3(병신; 1176, 47)의 글이다. 이 편지에서 저는 늙고 소견이 좁아 쓸모가 없는데 잘못되어 (공참정)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저 스스로 칭찬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찍이 힘껏 사양하기를 간청하였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여 놀랍고 두려운 마음만 더해갑니다.”라고 했다. 여백공에게 보내는 서신(區區出處)에서 전에 공참정께서 편지를 보내온 이래로 당시 마음이 답답하고 어지러워 회신을 보내면서 이런 뜻을 다 말씀하지 못했기에 단 시일 내에 따로 편지를 보내 말씀드렸습니다.”고 했다. “전에는 답답하고 어지러워 답신을 보냈다는 말은 공참정에게 보낸 伏自去春拜啓之後라는 편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는 다시 여백공의 편지에 답하는 뜻을 설명하고 있으니 이른바 따로 편지를 보내 말씀하겠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편지 역시 병신년 가을에 쓴 것이다.

 

 

저는 늙고 소견이 좁아 쓸모가 없는데 잘못되어 (공참정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저 스스로 칭찬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일찍이 힘껏 사양하기를 간청하였지만 임금이 내린 허락을 받지 못하여 놀랍고 두려운 마음만 더해갑니다. 오늘 다시 글을 올리니 바라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조속히 상주문을 올려 시행하시면 저에게는 큰 다행이겠습니다. 집사에게 저의 글을 받아 보십시오. 저는 어려서부터 우매하여 본래 환로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라면서 조금 학문하는 방법을 알고 곁에서 선생과 군자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마음이 갑자기 바뀌어 비로소 잘못 생각하여 시대와 사람들을 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기질이 치우치고 막혀 있으며 뜻은 고원하지만 일 처리는 소략한데 망녕되이 움직이다 보니 세상을 따르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그래서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화합하지도 못했습니다. 우환까지 더해지니 마음과 뜻도 시들해져 이미 오랫동안 세사를 담당할 생각이 다시는 없습니다. 그런데 명공께서 저를 관리의 자리로 끌어 들이시는데 명공께서 장차 어떻게 저를 쓰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리들을 따라 들어가고 대오를 따라 물러나게 하시렵니까? 그렇다면 창성하고 수명한 아침에 많은 선비들이 뜰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모자란 인재는 저와 같은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아니면 제가 억지로 안색을 꾸며가며 구차하게 봉록이나 얻어 처자를 배부르게 하는데 쓰시렵니까? 그렇다면 저는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편안하게 여긴지 오래 되었으니 근심하는 것은 결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만두지 않고 꼭 저를 옛 것을 들어 오늘날을 증명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 모든 집사의 뒤에서 그 어리석음을 볻 받게 하시려고 한다면, 제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장차 도 있는 조정에서 숨길 수 없습니다.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한 때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던 사람이 즐겨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생각에 명공께서도 역시 광망하다고 생각하면서 내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의 두 가지를 따르면 명공의 계획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후자의 설명을 따르면 제가 죽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명공께 죄만 짓게 될까 두렵습니다. 저의 뜻은 급박하고 속마음은 간절한데 결국 말이 미치지 못하니 엎드려 이 편지로 죽을죄를 짓습니다.

熹衰陋亡庸, 誤蒙引拔, 自知不稱, 嘗力懇辭, 未奉兪音, 秪增震懼. 今再有狀, 欲望哀憐, 早賜敷奏施行, 則熹之幸也. 抑又有以聞于下執事者. 熹自幼愚昧, 本無宦情. 旣長, 稍知爲學, 因得側聞先生君子之敎, 於是幡然始復誤有濟時及物之心. 然亦竟以氣質偏滯, 狂簡妄發, 不能俯仰取容於世, 以故所向落落, 無所諧偶. 加以憂患, 心志凋零, 久已無復當世之念矣. 而明公乃欲引而致之搢紳之例, 不識明公將何所使之也? 使之隨群而入, 逐隊而趨耶? 則盛明之旦, 多士盈庭, 所少者非熹等輩也. 使之彊顔苟祿, 以肥妻子耶? 則熹於饑寒習安已久, 所病者又不在此也. 且必無已, 而使之得以其所聞於古而驗於今者, 效其愚於百執事之後, 則熹之所懷, 將不敢隱於有道之朝. 竊料非獨一時權倖所不樂聞, 意者明公亦未必不以爲狂而斥之也. 由前二者, 明公之計決不出此. 由後之說, 則懼熹之殺身無補而反得罪於明公也. 意迫情切, 言不及究, 伏紙隕越.

 

 

 

공참정에게 보내는 편지 與龔參政書

 

 

해제】󰡔편년고증󰡕(p.14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4(정유; 1177, 48)의 글이다. 이 편지에서 근년에 봉사에 임명하는 조서를 받들고 감사를 전하는 편지를 보낸 후로 아무 일도 없는데, 편지를 보내 예의를 표시하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주자는 병신년 여름 비서랑을 극력 사양하고 사관을 요청했는데, 8월에 이르러서야 궁관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병신년 이후에 쓴 것이다. 제가 들으니 재상으로 국사를 집정하는 일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귀향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공무량이 파직되어 귀향한 일을 가리킨다. 󰡔속자치통감󰡕145에서 순희 4“6월 정축에 공무량을 파직하였다고 하니, 이 서신은 순희 4년 정유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저는 가만히 들녘에 엎드려 지내면서 (당신의) 큰 은덕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근년에 봉사에 임명하는 조서를 받들고 감사의 편지를 보낸 후로,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편지를 보내 등급과 위엄을 범하지는 못하고, 저는 단지 간절히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이제 들으니 재상으로 국사를 집정하는 일을 되돌려 놓고 고향으로 귀향하셨다고 하는데, 도를 행하는 일이 어려우니 마음속으로 탄식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당신의 행차를 직접 보며 문후를 여쭙고, 직접 당신의 안색을 우러러 보고서야 몇 년 동안 저를 이끌어 주신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데, 병석에 누워 들녘에 있다보니 뜻하지 않게 묻고 엿보는 일을 놓치고 드디어 처음의 바램과 어긋나 더욱 망연합니다. 혼자 생각해 보니 근래 황정의 객사에서 당신을 뵙고 헤어진지도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 보니 15년이 되었습니다. 그간 여러 가지 일의 변화가 반복되어 일어났으니 무엇인들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일은 사람의 뜻과 같지 않고 사람을 근심하게 하여 남긴 한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이미 많습니다. 우려하고 근심스러워한 나머지 쇠하고 병들고 시들해져 비록 이미 다시는 세사를 맡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사사로운 요행과 바램은 오히려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열고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면 공도가 거의 행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명공께서 억지로 음식을 드시고 자신을 아껴 후일을 준비하고 초심을 이룬다면 이 세상에 큰 다행입니다. 여름날 귀향하느라 매우 힘들텐데 머리를 들어 마음이 쏠립니다.

熹竊伏田里, 仰依大造, 自頃拜勅奉祠, 以書陳謝之後, 無故不敢輒通牋敬, 以犯等威, 區區第切瞻仰. 玆者竊聞還政宰路, 歸榮故鄕, 行道之難, 不無私歎. 然意者必得參候車塵, 瞻望顔色, 以慰積年引領之懷, 而臥病田間, 偶失偵伺, 遂乖始願, 尤劇惘然. 獨念頃歲黃亭客舍拜違左右, 屈指於今十有五年. 其間事變反覆, 何所不有? 而其不如人意, 使人悒悒不能無遺恨者, 則已多矣. 憂患之餘, 衰病零落, 雖已無復當世之念, 然私所幸願, 猶冀天啓聖心, 日新厥德, 公道庶幾其復可行乎. 明公彊食自愛, 應之於後, 以遂初心, 則海內幸甚. 署行良苦, 引首馳情.

 

 

 

진승상에게 답하는 편지 答陳丞相書

 

 

해제】󰡔편년고증󰡕(p.14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4(정유; 1177, 48)의 글이다. “제가 얼마 전 사적인 우환을 겪었을 때 조문하고 근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지를 써 심부름꾼을 통해 되돌려 보냈는데 저의 속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따로 안부와 소식을 묻는 예의를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얼마 전 사적인 우환을 겪었다는 것은 병신년 10월 부인 유씨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병신년 조금 뒤에 쓴 것이다. 문득 (승상께서) 상소를 올려 관직을 사직하고 한가한 고향으로 물러나기를 바란다고 들었습니다. 성주께서 명공의 뜻을 거듭 물리치고 (승상의) 품급을 높인 후에 하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이 곳의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단 비의 윤택함을 잃게 되어 슬프고 섭섭함이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생각하면 이제 무거운 짐을 벗고 집으로 돌아와 편안하게 지내시겠습니다.”라고 했다. 󰡔문집󰡕96의 진준경 행장에 근거하면, 진준경은 순희 2년에 복건을 맡았고 4년에는 누차 상소를 올려 귀향을 요청하므로 특진하여 제거 동소궁에 제수하였다. 그러므로 이 서신에서 이 곳의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단 비의 윤택함을 잃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정유년에 쓴 것이다.

 

 

제가 얼마 전 사적인 우환을 겪었을 때 조문하고 근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지를 써 심부름꾼을 통해 보내면서 저의 속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따로 안부와 소식을 묻는 예의를 드리려고 하는데 문득 (승상께서) 상소를 올려 관직을 사직하고 한가한 고향으로 물러나기를 바란다고 들었습니다. 성주께서 명공의 뜻을 거듭 물리치고 (승상의) 품급을 높인 후에 하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이 곳의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단 비의 윤택함을 잃게 되어 슬프고 섭섭함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생각하면 이제 무거운 짐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지내면서 초연히 세사를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 즐거움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성주께서 잊지 못하는 마음은 벼슬자리에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이 함께 경하할 일이며, 저와 같이 우매한 사람도 깊이 감동하는 점이 있습니다. 지금 (승상의) 의향이 전과 더욱 다르다는 것을 의론하는 것은 후일 여러 공들께서 탁월하여 천자의 마음에 회응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보지 못했고 식견 있는 선비들이 밤낮으로 한심해 합니다. 명공께서 국가의 큰 은혜를 받아 포의에서 일어나 재상까지 이르렀으니 지위는 높고 봉록은 후하며 은덕은 자손에게까지 흐를 것입니다. 이제 또 성주께서 더욱 높이게 되었는데 사대부께서 이렇게 귀향하게 되면 어찌 내 한 몸의 즐거움으로 천하의 근심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고명하신 당신께서 이런 뜻을 깊이 생각하시고 이 때 빨리 자신을 반성하여 근본을 살피고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고 어진 사람을 친히 하며 성덕을 새롭게 하고 현업을 넓히시면 거의 다른 때 다시 일어나 임금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키며 낡은 것을 베어내고 간사한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이 사람의 바램에 위안이 되겠습니다. 부디 편안 하십시오?

熹昨罹私釁, 仰勤弔恤, 拜啓還使, 未足究盡鄙懷. 方欲別伸問訊之禮, 忽聞拜章公車, 祈就間退, 聖主重違明公之意, 峻其班秩而後賜可. 竊自惟念雖與一道窮民同失膏雨之潤, 不無怊悵, 然想稅駕里門, 雍容就第, 超然事物之外, 其樂有不可涯者. 至於聖主不忘之意, 則又海內搢紳之所共慶, 而熹之愚昧, 竊獨深有感焉. 蓋今時論歸趣益異於前, 後來諸公未見卓然有可望以回天意者, 有識之士日夕寒心. 明公受國家大恩, 起布衣至將相, 位尊祿厚, 德流子孫. 今又爲聖主所優尊, 士大夫所歸鄕如此, 誼豈以一身之樂而忘天下之憂哉? 伏惟高明深念此意, 亟於此時反躬探本, 遠佞親賢, 以新盛德廣賢業, 庶幾異時復起, 有以格君定國, 剗弊阻姦, 慰斯人之望者. 千萬幸甚!

 

 

 

진공에게 보내는 별지 與陳公別紙

 

 

해제】󰡔편년고증󰡕(p.146)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4(정유; 1177, 48)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앞에 올린 글에서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라는 뜻이라는 말은 바로 앞의 편지(昨罹私釁)에서 말한 자신을 반성하여 근본을 살피고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고 어진 사람을 친히 하여 성덕을 새롭게 하고 현업을 넓히시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앞 편지의 별지에 해당하며 역시 정유년에 쓴 글이다.

 

 

앞에 올린 글에서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라는 뜻을 말씀드렸는데, 이미 (저의) 버릇없는 (말씀을) 여러 번 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깊은 성찰을 받은 것 같지 않으니 마음속으로 그만 들 수 없어 문득 다시 편지를 올립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일의 이해를 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평소 나라에 충성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점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내 자신에게 되돌려 구해 본다면 그것의 득실의 수가 은연히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올바름이) 있고 난 후에 남에게 구하며,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후에 남을 그르다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 한 시대의 화를 구하려고 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내 자신에게 구하지 않고 평상시에 쌓아 놓기만 하면 하루 아침의 작은 지력으로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前幅所稟親賢遠佞之意, 蓋已屢瀆鈞聽. 然似頗未蒙深察, 懷不能已, 輒復陳之. 蓋在今日, 此事利害又不難見. 惟試思平日所以願忠於國者云何, 而反求諸其身, 則其得失之數, 隱然心目之間矣. 有諸己而後求諸己, 無諸己而後非諸人, 況欲格君心以救一時之禍, 此豈細事? 而可不責之於吾身, 積之於平日, 而苟焉以一朝之智力圖之哉?

진승상에게 보내는 편지 與陳丞相書

해제】󰡔편년고증󰡕(p.152)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5(무술; 1178, 49)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당신의 깃대가 아직 상요에 머무르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며칠에 동쪽으로 행차하실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주자가 진준경을 위해 지은 행장에서 순희 55, 애당초 융흥부 판사에 임명되었지만 아직 일을 살피지도 못한 상태에서 건녕부 판사, 강남동로 안무사 겸 행궁유수로 바꿔 임명되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궁궐에 올라와 일을 상주토록 하였다.”(󰡔문집󰡕96, 正獻陳公行狀)고 한다. 이 편지에서 이미 깃대가 상요에 머물고 있는데 머지않아 동쪽으로 행차 하겠군요 라고 하였으니, 당시 진준경은 이미 강서 안무사로 다시 임명되어 아직 궁궐에 나아가 보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속자치통감󰡕에 근거하면 진준경이 입조한 것은 무술년 9월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무술년 여름에서 겨울 사이에 쓴 것이다.

 

 

당신의 깃대가 아직 상요에 머무르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며칠에 동쪽으로 행차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반복해서 편지를 올려 말씀드린 방안에 대해서는 분명 이미 정해진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근래 궁궐에 와서 진언하는 사람들은 궁궐의 잘못만을 지목하여 말하며 헛되이 간사히 속이는 것만을 발언하는데 진력하므로 임금을 열어 깨우치는데 도움은 없고, 단지 근본이 옳지 못한 곳에 앉아 말단에서 올바름을 구하고, 도리에서 구하지 않고 사태에서만 구하며, 성덕을 증가하고 높이며 정체의 기강을 바로잡는 뜻은 말하지 않고 오직 자잘한 과오만을 공격하려고 하니, 이것이 바로 힘은 많이 쓰지만 보이는 효과는 적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고명하신 당신께서 이것을 깊이 살피고 되돌려 갖추신다면 거의 천하의 바램에 위로가 되겠습니다. 원로대신이 임금의 몸에 대해 말씀 올리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도리의 추세를 살펴보면 그 사람들(소인배)을 공격하는 것은 임금의 마음을 끌어 들이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한 말을 외우기만 하는 것은 그 말이 미치지 못한 것을 구제하는 것만큼 절실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와 같은데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으니 상공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수일 전 도중에 (만나) 일상생활에서의 묘함을 슬쩍 엿보았는데, 충성스러움과 후박한 뜻이 용모와 말씀의 사이에 가득 차 넘치는 듯 하였는데, 수 년 동안 덕에 나아간 모습이 이렇게 심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타인을 감동시킨다면 어디 간들 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임금이 총명하고 또 이 세상의 충신과 의사들이 마음으로 돕는 상황에서 더 말할게 없겠죠? 상공께서 더욱 면려하시기를 바랍니다. 불행히도 그 말씀을 실현하지 못하면 잠시라도 그 지위에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窃聞鈞旆尚留上饒, 不審幾日遂東? 所以反覆啓告之方, 必已有定論矣. 但熹窃料比来言者指陳闕失, 白発姦欺, 不為不尽, 而未有開悟之益, 正坐不正之於本而正之於末, 不求之於理而求之於事, 不言所以増崇聖徳紀綱政体之意, 而惟群小之過悪是攻, 此其所以用力多而見功小者与. 伏惟高明深察乎此而有以反之, (3-1080)乎其有以慰天下之望也. 蓋不惟元老大臣所以告君之体当然, 顧其理勢, 攻之於彼, 不若導之於此之為易. 誦衆人之所已言, 不若済其言之所不及者之為切也. 鄙意如此, 而不能達之於言, 不審相公以為如何? 数日道間窃窺日用之妙, 其忠誠博厚之意, 蓋盎然溢於容貌詞気之間, 知数年以来, 所以進徳者如此其深且遠也. 以此感物, 何往不通? 況吾君之聡明, 而又助之以海内忠臣義士之心乎? 願相公益勉旃. 不幸而不得其言, 則不可暫而立其位也.

 

제가 앞의 편지 말미에서 말씀 드렸듯이 더욱 관심 갖어 주시기 바랍니다. 견해가 일치하지 않아 떠나게 되면, 비록 우리 도를 지금 실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기에 있으니 다른 때에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치하지 않는데도 구차하게 나아가면 우리 도는 오늘날 실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훗날도 기약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기회이니 (당신에게) 매인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어리석고 불초한데다가 병들과 노쇠하여 이미 다시는 세사를 감당하고 싶은 바램도 결코 없습니다. 되돌아보면 가슴이 아리고 머리 아프고 잊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전에도 비록 말씀했지만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여기에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충의가 분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상공께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熹前幅之尾所稟, 尤願垂意. 蓋不合而去, 則吾道不得施於時, 而猶在是, 異時猶可以有為也. 不合而苟焉以就之, 則吾道不惟不得行於今, 而亦無可望於後矣. 此其機会, 所繋不浅. 熹愚不肖, 又病且衰, 蓋已決然無复当世之願, 顧其痛心疾首, 所不能忘者, 独在於此. 前日雖嘗言之, 然自覚有所未尽, 故复喋喋 於此. 忠憤所激, 至于隕涕, 伏惟相公念之.

 

 

 

여백공에게 답하는 편지 答呂伯公書

해제】󰡔편년고증󰡕(p.152)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5(무술; 1178, 49)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저는 내일 자계로 나가서 유구의 운구를 울며 맞이할 생각입니다라고 했다. 주자가 지은 관문전학사유공행장(󰡔문집󰡕97)에 따르면 유공은 순희 57월에 죽었고, 그 이듬해 2월 구녕현()에 장사 지냈다. 이 편지 말미에서 “ 817일에 성장을 올렸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술년 8월에 해당한다. 또 이 편지에서 남강으로의 새로운 임명을 고사하는 일을 논의하고 있는데, 󰡔연보󰡕에 근거하면 순희 5년 무술 8월에 남강군 지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무술년 가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역참에서 두 번이나 편지를 보내 주어서 감사합니다. 요즘 가을 날씨가 맑다고 들었는데, 부친께서도 건강하시고 편안하시다니 매우 감사하고 위로가 됩니다. 제가 받은 은혜로운 배명은 저의 자격과 이력, 분수와 의리, 그리고 정신과 근력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이치가 없습니다. 비록 임금과 재상들이 아끼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느끼고, 당신이 거듭 부지런히 일러주고 이끌지만 끝내 감히 일어나 절하며 공손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성장은 역참을 통해 이미 진주원의 관사로 회부했고 부본을 적어 올립니다. 저의 서술과 언설이 비록 자세하지만 과당한 말은 없을 것 입니다. 단지 이렇게 말씀해야 속뜻을 다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일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거든 되돌려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따로 몇 말씀 더 적어 가르침을 받는다면 아마도 거의 거스름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저 혼자만 쓴다면 끝내 이런 어투가 튀어나올 것입니다. 저의 이런 기상을 보건대 오늘날 어찌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길을 물색할 수 있겠습니까? 집정하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억지로 시키려고 하는데 이것은 재능을 굽히고 일을 바꾸는 것입니다. 저의 구구한 뜻을 성장에서 갖추어 보였습니다.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 수년 동안 명예와 환로에 뜻을 끊고 세상의 모든 일과 인정 예절 일체를 엎어놓고 있습니다. 요즘 비록 자주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지만 역시 시대에 맞게 들어가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산림에 있으니 이렇게 제멋대로하고 변덕을 부려도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기거나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느 날 출사하여 군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 위아래 사람을 받들고 보살펴야 하니 어찌 이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이미 (억지 부리는 일이) 심성에 습관이 되어 비록 힘써 열심히 하고자 해도 학문에 나아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저의 광질만 일어날까 이 한 가지 일이 두렵습니다. 또 수년 동안 몇 가지 책을 차례 짓고 편집하면서 근래에야 대략 두서를 이루었는데 만약 계속 아무 일 없이 지내면서 수년 동안 죽지 않는다면 제가 마음에 품은 것을 유감없이 할 수 있을 것이고, 후학들에게도 역시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데 지금 만약 출사하여 군의 관리나 채우게 되면 날마다 문서와 정기적인 모임 등으로 피로하고 가는 사람 보내고 오는 사람 맞이하면서 흐트러질 것이니 어느 겨를에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럭저럭 세월을 지내다 보면 혹 죽을 때까지 한이 될 것이고, 정사를 하더라도 꼭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미친다고 할 수도 없으니 이번에 한번 나가 출사하는 것은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식들을 위한 계책에 불과하고 잃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바깥사람에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장에서는 감히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노형께서만 아시고 더 완곡하게 중재하여 위로는 임금과 재상에게 죄를 얻지 않고, 아래로는 사대부에게 의심을 받지 않게 해주시면 만족하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보살펴주고 이끌어 주던 공을 바로 여기에 힘을 쏟아주신다면 답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규로(즉 재상)께는 감히 편지를 쓰 지 못하겠으니 번거롭지만 이런 뜻을 깊이 전달해 주십시오. 이 일이 잘 마무리되기를 기다리며 다시 예전처럼 궁관의 직책을 얻으면 바로 편지를 올려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무이에서 맡은 벼슬은 이번 겨울이면 만료되는데 지금도 명을 받지 못했고 또 감히 옛날의 벼슬을 버리지도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감히 녹봉을 청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혹 사관을 얻고 따로 더해진 것이 없다면 이 역시 결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은근한 비평과 완곡한 말씀이 때를 만나면 다시 분분하게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제발 유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외로운 자취를 잘 보전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고명한 당신께 깊이 바라겠습니다.

저는 내일 자계로 나가서 유구의 운구를 울며 맞이할 생각입니다. 어제서야 그가 죽음을 앞두고 쓴 이별의 편지를 받았는데, 아직도 씻지 못한 국치를 한으로 여기고 있으니 역시 슬픈 일입니다. 떠나기에 앞서 매우 바쁜데 또 급히 회신을 역참에 보내야 하기에 이렇게 대강 적다보니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817일에 성장을 올렸는데 아직 선고가 없습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절합니다.

자중은 올린 성장에서 언급하지 않았기에 어제 편지를 보내 정화로 가는 사람에게 보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일 역시 조정하여 보호해 주도록 말씀했는데 소홀히 하지 마시고 친구에게 후한 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흠부에게 오랫동안 편지를 얻지 못했는데 그곳에서는 때로 안부를 듣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왕명을 받들어 가는 일에 쫓기다 보니 조금도 쉬지 못할 것인데 이 일을 들으니 관직에 나서는 일이 더욱 두렵습니다.

遞中兩辱手敎, 獲聞邇日秋淸, 尊候萬福, 感慰之至. 但所被恩命, 以熹之資(3-1081)歷分義, 精神筋力, 皆無可受之理. 雖感君相矜憐之意, 重以仁賢說誘之勤, 終未敢起拜而恭受也. 申省狀已附遞回付奏邸, 副本錄呈. 敍說雖詳, 然似無過當之語, 只是須如此說, 方盡底蘊耳. 如以未安, 幸爲却回, 仍別爲作數語見敎, 庶幾可以無忤. 若只熹自作, 終只有此等詞氣出來也. 觀此氣象, 豈是今日仕途物色? 當路者必欲彊之, 大是違才易務, 參候車塵, 區區之志, 狀中備見.

更有一事, 自數年來絶意名宦, 凡百世務, 人情禮節, 一切放倒. 今雖作數行書與人, 亦覺不入時樣, 唯在山林, 則可以如此恣意打乖, 人不怪責. 一日出來作郡, 承上接下, 豈容如此? 又已慣却心性, 雖欲勉彊, 亦恐旋學不成. 徒爾發其狂疾, 此是一事. 又數年來次輯數書, 近方略成頭緖, 若得一向無事, 數年不死, 則區區所懷可以無憾, 而於後學亦不爲無補. 今若出補郡吏, 日有簿書期會之勞, 送往迎來之擾, 將何暇以及此? 因循歲月, 或爲終身之恨, 而其爲政又未必有以及人, 是其一出, 乃不過爲兒女饑寒之計, 而所失殊非細事.

此皆未易與外人道, 故狀中不敢及之. 只欲老兄知之, 更爲宛轉緩頰, 使上不得罪於君相, 下不見疑於士大夫足矣. 扶接導養之功, 正應於此用力, 想不以爲煩也. 揆路未敢作書, 煩爲深達此意. 只俟此事定疊, 再得宮觀如舊, 便自作書謝之(3-1082). 武夷今冬當滿, 今旣未受命, 亦未敢便落舊銜, 但未敢請俸耳. 或恐得祠, 別有所加, 此亦決然難受. 亦可微詞風曉之, 免臨時復紛紛也. 千萬留念, 至懇至懇! 保全孤跡, 使不至疎脫, 深有望於高明也.

熹來日出紫溪, 迎哭劉樞之柩. 昨得其訣書, 猶以國恥未雪爲恨, 亦可哀也. 臨行甚冗, 又急遣回遞中, 草草作此, 殊不盡意. 八月十七日上狀, 不宣. 熹頓首再拜.

子重不及拜狀, 昨日亦嘗以書附政和行者, 想未能卽達也. 此事亦告調護, 得免疎脫, 朋友之賜厚矣. 欽夫久不得書, 彼想時聞問也. 王程驅迫, 不得少休, 聞此尤使人怕出頭耳.

 

정자명에게 답하는 편지答鄭自明書

 

 

해제】󰡔편년고증󰡕(p.152)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5(무술; 1178, 49)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진장의 이번 행차는 관계된 일이 가볍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진준경이 무술년 가을 궁궐에 올라가 상주한 일을 가리킨다. 저의 출처는 지금 이 시기에 중요하지 않으니, 여러분들이 혹 저의 사양을 들어주시면 실로 다행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을 받고 다시 사관을 청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얻지 못하면 일을 잘 살피고 주청하여 가부를 묻겠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무술년 가을 제수 받은 남강군 지부를 사양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순희 5년 무술 가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지난 번에 부본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더니, 이제 다행이 읽어 볼수 있게 되었는데 감탄한 나머지 옷깃을 여미고 공경히 엎드리게 됩니다. 제 생각에 충량하고 간절함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재변과 지략 역시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원성, 진료옹 정도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총명하셔서 이렇게 받아 들였으니 일단 한번 감동하여 깨달으신다면 쥐새끼 같은 모리배들을 몰아내는 것은 손을 뒤집듯 쉬울 것입니다. 영원무궁한 태평성대를 내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거의 볼 듯하니 아주 다행입니다.

副封曩恨未見, 今玆幸得窃読, 感歎之余, 斂衽敬服. 嘗窃論之, 以為非独忠諒懇切有以過人, 於才辨智略亦非人所能及. 不知劉元城陳了翁輩如何爾. 上聖聡明, 開納如此, 一旦感寤, 去鼠輩如反覆手耳. 太平万歳, 雖老且病, 尚庶幾及(3-1083)見之, 幸甚幸甚.

 

군의 인장을 품고서 군을 떠맡게 된 것은 비록 공론이 막힌 것이지만, 이런 한가한 틈을 타서 덕에 나아가고 업을 닦으며 오래할 수 있고 크게 할 수 있는 규모에 더욱 힘쓴다면 하늘의 뜻도 우연히 넘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깊이 스스로를 배양하면서 기초를 두터이 하시고, 뜻을 굳게 갖고 학문을 강론해서 근원을 파고드십시오. 성의가 충만하게 쌓이고 날카로운 예지가 점점 축적되며, 의리가 드러나고 논의가 조리 있게 된다면 어느 날 다시 조정에 서게 될 것이요, 천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우치고 계발하는 것은 결코 오늘날의 성취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날의 글도 본래 사리에 합당했습니다만 시사를 논한 것은 많았고, 이치를 논한 것은 적어서 뭇 소인배들의 간교함과 기만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천자가 근원을 맑고 깨끗하게 하고 덕을 닦고 정사를 확립하려는 뜻에는 미비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이 그것을 우활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감히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거꾸로 헤아려 보는 일에 실패하였고 또 이런 이치를 강론하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여 스스로 우활하다고 생각하여 말할 수 없는 일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병폐를 겸해서 말하면, 단지 이 하나의 병폐가 가장 크기에 만약 약효가 없다면 기타 자잘한 증상들은 탕약을 두루 투약하지 않고도 약 기운을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이 병을 치유하고 싶으면 쓰는 약도 반드시 임금에게는 한 첩, 신하에게는 두 첩, 보좌하는 사람들에게는 세 첩 관리들에게는 다섯 첩 등 완급을 조절하고 순서를 분명하게 하여야 그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미 다른 증상을 잡다하게 치유했지만 쓰는 약은 병의 뿌리를 치유하는데 있어서 잘잘못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또 이미 당신을 위해 자세히 말했으니 돌아가거든 일일이 말씀 올리십시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쇠하고 고루하며 부족함이 여기에 이르렀는데 외람되이 비루하게 생각지 않고 그 사이에 참여하여 논의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시국에 대한 저의 논의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기울고 뒤집어진 줄도 모르고 저의 어리석음도 잊었습니다.

補郡懐章, 雖欝公議, 然得以此閒暇進徳修業, 益懋久大之規, 天意亦有非偶然者矣. 更願深自培養, 以厚其基, 篤志講学, 以濬其源, 使誠意充積而鋒穎潜蔵, 義理著名而議論条暢, 則一日复進而立於朝, 其所以動寤啓発者, 決不但如今日之所就而止也. 蓋前日文字固為剴切, 但論事多而論理少, 数群小之姦欺雖詳, 而於人主之所以端本清源修徳立政之意有未備也. 此其所以然者, 失於逆料聴者謂之迂闊而不敢言, 亦自於此理講之未精, 不免於自以為迂闊而不足言也. 兼今日之病, 只此一病最大, 若薬之未效, 則其他小小証候不必泛投湯剤, 以緩薬勢. 以欲攻此病, 所用之薬亦須一君二臣三佐五使, 多少緩急, 次第分明, 乃易見效. 今既雑洽他証, 而所用以攻病根者, 又未免互有得失. 亦已詳為令弟言之, 帰当一一稟白, 不審尊意以為如何. 衰陋不足而及此, 猥蒙不鄙, 見使与議其間, 亦私感時論之至此, 不覚傾倒而忘其愚耳.

 

이 밖에도 백공이 말씀한 독서를 통한 인재 등용의 뜻 역시 깊이 유의해야할 것입니다. 당신이 세운 바가 이미 이와 같은데, 하늘이 송을 도울 뜻이 없다면 그만 둘 일이지만, 만약 이런 뜻이 있다면 다른 날의 일을 어찌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진덕 수업은 다른 날 국가의 어지러움을 벗어나 올바름으로 돌아가는 일과 관계있고 결코 당신 한 몸의 득실과 영욕이 아닙니다. 고명하신 당신께서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강학의 방법은 얼굴을 마주보고 논의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자못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此外則伯恭所告読書取人之意, 亦所宜深留意者. 蓋吾人所立已如此, 使天無意於右宋則已, 若有此意, 異日之事豈得而辞其責哉? 然則今日吾人之進徳修業, 乃是異時国家撥乱反正之所繋, 非但一身之得失栄辱也. 惟高明深念之. 然講学之(3-1084)方未得面論, 猶頗以為恨也.

 

진장의 이번 행차는 관계된 일이 가볍지 않은데, 저를 만났을 때 밤낮으로 충성스러움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저의 출처는 지금 이 시기에 중요하지 않으니, 여러분들이 혹 저의 사양을 들어주시면 실로 다행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을 받고 다시 사관을 청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얻지 못하면 일을 잘 살피고 주청하여 가부를 묻겠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얻지 못하면 병을 핑계로 한가로움을 요구하려고 합니다. 이제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실로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하여 노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죽을 때까지 출사하지 않을 계획이라면 녹봉으로 봉양하지 못할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결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감히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으니 일을 따라 대응해야 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장을 반복해서 살피고 논의하는 것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집에서 다시 만나는 반가운 마음을 적게 드러내고 싶어서입니다. 바라건대 청광의 뜻을 한번 바라보고 본래 조서를 내려 제수하신 마음을 천박하게 여기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방법을 생각하여 몇 글자를 조진숙에게 남겨 두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에게 동봉하여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혹 꼭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평상시의 격식에 따라 써 보내십시오.

陳丈此行, 所繋不軽, 待於下流, 不勝日夕之拳拳也. 熹之出処不足為時重軽, 諸公或聴其辞固幸, 不爾, 則受命而复請祠. 又不得, 則当申審奏事, 以卜可否. 又不得, 則引疾丏閑. 此於進退固自以為有余裕者, 未審老兄以為如何? 若終身不出之計, 則自禄不逮養之時已決於心懐矣. 今亦不敢固必, 且得随事応之耳. 但申審狀中, 欲少露久違軒陛, 願得一望清光之意, 使知本無羞薄詔除之心, 不知可否? 幸為籌度, 留数字於曹晉叔処, 令尋的便附来見教為望. 或不必然, 即只依常格写去也.

 

사지의 문장은 과연 뛰어나니 저에게도 심히 위안이 됩니다. 노형께서도 더 열심히 갈고 닦아 때를 기다리십시오. 예전부터 일부 선배들은 젊은 시절 조금 당시의 성망이 있었지만 만년에 와서는 왕왕 사람들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했고, 강학하는 것도 정밀하지 못하여 성인 문하에서 규모를 넓히고 키우는 일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조금 세운 것이 있으면 곧 사업이 여기에 그친다고 생각하여 더 발전해 가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형공이 말한 말속에서 쉽게 높아지면 험난한 길에서 다하기 어렵다고 한 것 역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인재는 어려서 쇠퇴하고 풍속은 퇴폐하고 무너질 때 선비가 한 가지 선이 있으면 마땅히 부축하고 이끌어 들여 그 그릇과 사업을 이루게 하는 것도 역시 장차 우리들의 이해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선비가 평소에 함양하지 않으면 일이 닥쳤을 때 창졸하게 구하게 되니, 이것은 나라를 위해 멀리 생각한 것도 아니며, 일을 맡았을 때에도 결코 잃어서는 안 됩니다. 진후관의 처소에서 다시 호명중 시랑의 역사 평가가 있던데 의론도 대부분 사리에 맞습니다.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아직 보지 않았다면 빌려서 볼 수 있을텐데 의미가 있습니다.

어제는 서울에 있는 아는 이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백공이 말하기를 주희는 대면하기를 요청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의 뜻은 아마도 내가 다시 (황상을) 저촉하여 죄를 얻고 사림의 기운을 막고 떨어뜨릴까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런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고 단지 주희는 벼슬 나가는 일을 훔쳐 같은 일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의 뜻은 실로 좋지만 그러나 아마도 이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似之文字果佳, 甚慰人意. 老兄亦当勉其進修, 以俟時也. 向来一番前輩, 少日粗有時望, 晩年出来, 往往不満人意, 正坐講学不精, 不見聖門広大規模, 少有所立, 即自以為事業止此, 更不求長進了. 荊公所謂末俗易高, 険塗難尽者, 亦可念也. 人才衰少, 風俗頽壊之時, 士有一善, 即当扶接導誘, 以就其器業, 此亦吾輩将来切身利害. 蓋士不素養, 臨事倉卒乃救, 非所以為国遠慮而能無失於委任之間也. 陳侯官処更有胡明仲侍郎史論, 議論亦多切於事理, 不知嘗見之否? 若未, 可就借看, 発人意思也.

(3-1085)昨得都下知識書云, 伯恭説熹不必請対, 此其意蓋恐熹复以抵触得罪, 沮壊士気. 此意人少識之者, 只似熹偸得差遣做一般. 彼意固善, 然恐不可承用也. 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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