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편지(시사와 출처) 書 時事出處
승상 사호에게 보내는 차자 與史丞相箚子
【해제】편년고증(p.15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병든 몸을 억지로 이끌고 부임하는 길에 올라 이곳에 도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저의 초심에 어긋납니다”라고 했다. 송사․본전과 연보에 근거하면, 순희 5년 무술년에 사호가 다시 재상이 되자 기필코 주자를 기용하여 남강군을 맡기려고 하였다. (주자는) 간절히 사양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자 기해년 정월 부임하는 길에 올라 3월 임지에 도착했다. 이 편지는 남강으로 가는 도중에 쓴 것으로 기해년 봄의 일이다.
저는 사상례를 보내면서 이미 공함을 갖추었고 삼가 정성을 다해 문후를 여쭙니다. 앞의 편지를 보고 감히 다시 말씀 올리지 못한 것을 욕되이 들어주셨습니다. 어리석고 천박한 저의 속마음을 일 맡은 분들을 위해 말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전부터 도리에 어긋나게 인재 양성의 은혜를 입어 간절하게 사양했지만 허락을 얻지 못했습니다. 감히 누차에 걸쳐 조정의 명을 더럽히다 이제는 병든 몸을 억지로 이끌고 부임하는 길에 올라 이곳에 도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저의 초심에 어긋나니 부끄러움과 분노가 쌓이고, 오랫동안 한가하게 놓여있다 갑자기 벼슬아치의 일을 목에 걸게 되니 닥치는 일마다 갈피를 못 잡고 막히며 손가락에는 피가 나고 얼굴에는 땀이 흐르는 일이 생깁니다. 게다가 본래부터 (사람들과) 맞서고 재주 없는데다 세사의 흐름에 따라 행동하지도 못하니 억눌러 가며 하려고 하지만 이미 시의에 들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문득 다시 시원하게 스스로 그만두고 싶습니다. 이렇게 외롭고 위태로운 것을 생각하면 저는 아마 감히 떠나겠다고 말씀 올리지도 못한 사이에 이미 탄환을 맞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고 천박하여 크게 아깝게 여기기에는 부족합니다. 명공께서 이 세상의 이름 있는 선비들을 조정에 천거하는데 지금 조정에서 세울 수 없거나 심지어는 거듭 비난을 받아 악명을 입고 떠난다는 일이 더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또 저의 일로 다시 문장의 욕을 입게 되면 도의상 제가 실로 감히 편안하지 못하게 됩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조속히 자애로운 염려를 내려주어 먼저 갑자기 생길 수 있는 화난이 발생치 않고 이 못난 몸을 붙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명공께서 후하게 내려주신 은혜는 전에 입은 것보다 백배나 될 것입니다. 위엄과 존위를 무릅쓰고 엎드려 두려움이 더 합니다. 병으로 몸은 쇠하고 눈조차 어두워 글도 대강 대강 썼습니다만 넓으신 아량으로 양해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熹申謝常礼, 已具公函, 候問勤誠, 又見前幅, 不敢复有陳及, 以慁鈞聴. 唯其愚賎之鄙懐, 則有不得不為執事言者. 熹伏自頃者誤蒙陶鋳, 懇辞不獲, 不敢屡涜朝聴, 即已力疾上道, 来見吏民. 違負初心, 已積慚憤, 而閑放之久, 驟嬰吏役, 触事迷塞, 复有血指汗顔之差. 加之伉拙有素, 不能俯仰流俗 , 雖欲抑而為之, 念已不入時宜, 輒复慨然自廃. 計此孤危, 窃恐未敢告去之間, 已不免於弾射之禍矣. 在熹愚賎, 不足深惜. 所可惜者, 明公薦延海内名士, 今無得立於朝者, (3-1087)甚或重遭詆毀, 被以悪名而去. 若又以熹之故, 重為門牆之辱, 則於私義誠有所不取安者. 切望鈞慈早賜垂念, 使得先駭機之未発而奉其不肖之身以帰老於故丘, 則明公之賜之厚, 又百倍於前日之所蒙矣. 冒昧威尊, 伏増恐懼. 至於病衰目暗, 作字草略, 并冀寛度有以亮之. 幸甚幸甚.
왕추밀에게 보내는 차자 與王樞密箚子
【해제】편년고증(p.15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저는 연산에서 내려 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라고 했고, 또 “감히 다시 청하지를 못하고 삼가 병든 몸을 억지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관리들과 백성들을 봅니다”라고 했다. 이 편지의 말은 대부분 위에서 고찰한 「사승상께 보내는 차자」와 같으니, 동시에 쓴 것이 틀림없다. 또 연보에 따르면, 주자는 기해년 정월 25일에 길을 떠나 연산에 도착한 후 명을 기다렸다고 한다. 이 편지는 연산에 도착한 후, 그리고 군에 도착하기 전에 쓴 것이므로 기해년 춘 2월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저는 사상례를 보내면서 이미 공함을 갖추었고 삼가 정성을 다해 문후를 여쭙니다. 앞의 편지를 보고 감히 다시 말씀 올리지 못한 것을 욕되이 들어주셨습니다. 어리석고 천박한 저의 속마음을 일을 맡은 분들을 위해 말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연산에서부터 내려 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열어주신 비유가 매우 상세하고 아껴주는 마음이 매우 두텁습니다. 드디어 감히 다시 청하지를 못하고 삼가 병든 몸을 억지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관리들과 백성들을 봅니다. 하지만 저의 초심에 위배되니 부끄러움과 분노가 쌓이고, 오랫동안 한가하게 놓여있다 갑자기 벼슬아치의 일에 종사하게 되니 닥치는 일마다 갈피를 못 잡고 막히며 부끄러워 손가락에는 피가 나고 얼굴에는 땀이 흐릅니다. 게다가 본래부터 (사람들과) 맞서고 재주 없는데다 세사의 흐름에 따라 행동하지도 못하니 억눌러 가며 하려고 하지만 이미 시의에 들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동안 지켜오던 것을 차마 바꾸지 못하니 문득 다시 시원하게 스스로 그만두고 싶습니다. 이렇게 외롭고 위태로운 것을 생각하면 저는 아마 이끌어 오고 떠나는 사이에 이르지도 못한 채 혹 맞는 일이 있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비록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잘 때까지 마음을 궁구하고 백성들의 병을 묻고 구하며 이 하나의 방도를 위해 깊이 채워진 해악을 제거하고 오래하고 멀리갈 수 있는 이로움을 일으켜 성상께서 특별히 통달하게 해준 지혜와 여러 공들께서 천거하고 아껴준 뜻에 부합하고 싶지만 또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글은 줄이고, 반랑중 원시승에게 부탁하여 뵙고 말씀드리도록 했습니다. 만약 어여삐 여기는 생각을 입게 되면 조속히 완곡한 뜻을 내려 주어 먼저 갑자기 생길 수 있는 화난이 발생치 않고 떠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제가 받은 은혜는 전에 입은 것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외람되이 위엄과 존위를 모독했으니 심히 두렵습니다. 병으로 몸은 쇠하고 눈도 어두워 글씨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어여삐 여기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熹申謝常礼, 已具公函, 候問勤誠, 又見前幅, 不敢复有陳及, 以慁鈞聴. 唯其区区之鄙懐, 則有不得不為執事言者. 熹伏自鉛山拝領鈞翰之賜, 開譬詳悉, 愛念良厚, 遂不敢复請, 謹已力疾来見吏民. 違負初心, 已積慚憤, 而閑放之久, 遽従吏役, 触事迷塞, 复有血指汗顔之差. 加之伉拙有素, 不能俯仰流俗 , 雖欲抑而為之, 念已不入時宜, 不忍徒変所守, 輒复慨然自廃. 計此孤危, 窃恐未敢告去之間, 而有或撃之者. 雖欲夙夜究心, 詢求民瘼, 為此一方除深錮之害, 興久遠之(3-1088)利, 以副聖上特達之知, 群公薦寵之意, 亦不可得矣. 有少文字, 託潘郎中․袁寺丞面稟. 若蒙矜念, 早賜宛転, 使得先駭機之未発而去之, 則熹之受賜, 又不啻前日之所蒙矣. 冒涜威尊, 伏深戦栗. 病衰目暗, 字畫不謹, 并乞矜恕.
원사승에게 보내는 편지 與袁寺丞書
【해제】편년고증(p.15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올해 나이 50세”라고 했으므로, 이 편지는 기해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제가 잘못 생각해서 여기에 왔다”라고 한 것은 남강군에 부임한 것을 가리키고, 또 “부임한지 두 달이 지났는데,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다”라고 했는데 연보에 따르면, 주자는 기해 3월에 남강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5월에 지은 것이다.
이 편지는 남강군 지사를 물러나고자 하는 뜻을 7가지를 이유를 들었으며,
봉사직을 바라는 심정을 간곡하게 말하여 원사승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제가 잘못 생각해서 여기(남강)에 왔으니 (더 이상)할 말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버틸만해서 또한 감히 반드시 떠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안으로는 정신이 혼미하고, 두 눈이 침침해서 한낮에 사람을 대면해도 왕왕 앉아서 졸고 있는데 문서를 살피는 것과 장부에 서명하고 재판하여 처벌할 때에는 더욱 심합니다.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할 첫 번째 이유입니다.
熹失計此来, 無可言者. 初若稍可支吾, 亦不敢必為去計. 今内則精神昏憒, 兩目生花, 白昼対人, 往往坐睡, 而省閲文案․簽書決遣之際為尤甚, 此一当去也.
밖으로는 재용이 다 고갈되어서 지출이 행해지지 않지만 성품이 본래 거칠고 옹졸하여 능히 헤아려 수습을 하지 못하니 아마도 한두 달 지나면 낭패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할 두 번째 이유입니다.
外則財用耗竭, 支遣不行, 性本疎拙, 不能稽古収拾, 恐更一二月, 転見狼狽, 此二当去也.
형벌과 옥사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한번 감사에게 힐문을 받고 나면 관리들은 바로 기회를 보아 다른 사람의 뜻에 영합하여 사정을 변경하려고 하니 이 일 또한 제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할 세 번째 이유입니다.
至於刑獄, 最是重事, 而一経監司何問, 官吏便欲望風希旨, 変異情節, 則是此事亦复不得自専, 此三当去也.
저의 못난 성품이 맞서기를 좋아하고 곧기만 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우러러 보지는 못하기 때문에 굶주림을 참으며 바깥출입을 끊고 감히 벼슬에 나아갈 뜻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이 50에 다시 제가 지켰던 지조를 바꾸어 이것 때문에 남의 눈치를 살피며, 견책과 모욕을 구차하게 면하길 구하니 한 밤중에 생각해도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우러러볼 때(폐하를 모시는 때)에 당해서는 커다란 번민을 의지하지 못하는데, (이것을) 능히 스스로 억제하지 못해서 갑자기 미친 발작이나 저지를까 매우 두렵습니다. 이것인 마땅히 물러나야 할 네 번째 이유입니다.
鄙性伉直, 不能俯仰, 所以忍饑杜門, 不敢萌仕進意, 今行年五十, 乃复変其所守, 為此睢盱, 以求苟免於譴辱, 中夜思之, 既以自愧 ; 而当其俯仰之時, (3-1089)大悶不聊, 深恐不能自抑而忽発其狂疾, 此四当去也.
부임한지 두 달이 지났는데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능히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왕왕 말과 편지에 드러내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관리들이 이것을 알고서 또한 다시는 존중하고 어렵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기약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재정과 부세도 처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한 외로운 손님으로서 어린아이와 생질을 데리고 왔는데 보살펴줄 부녀가 없어서 병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때때로 스스로 살펴보고 의약을 처방하며, 집안의 자잘한 일들은 수습할 사람이 없으니 또한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머무를 계획이 아니었고 또 다시 가서 운반해 오는데 공가를 소모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할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到官兩月, 思帰之情不能自閟, 往往無日不発於言語書問之間. 官吏知之, 亦不復以尊重難危見期. 所以号令不行, 財賦不辦. 而熹以一身孤客於此, 携小児甥在此, 無婦女看当, 無日不病. 熹時又須自視問其医薬, 家中砕小, 想見無人収拾, 亦复不成模様. 業已不為久計, 又不容復往般取, 以耗公家, 此五当去也.
시종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과 언로를 맡고 있는 제공들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것을 꺼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처음 생각은 단지 한 두 달 사이에 물러나려고 했기 때문에 헛되이 이것으로 평소의 마음을 어긋나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물러가지도 못하였고 주청함에 사세가 모름지기 관백할 것이 있으니 이미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주는 것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언어가 투박하고 공손하지 못해서 그 사이에 반드시 그 꺼려함에 저촉된 것이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 도리어 이것이 탄핵을 초래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할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蒙喩作書従班言路諸公, 此非所憚. 但初意只一二月間便去, 故不能虚為此以違素心. 今既不能得去, 又有所奏請事勢須関白, 已不免作書与之. 但言語拙直, 不能婉順, 其間未必不有触其忌諱者. 或反以速其抨弾, 亦不可知, 此六当去也.
과거에 한가한 때에 개인적으로 가만히 저술한 것이 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 옛 성현들의 마음을 전하고 후학들의 눈과 귀를 열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미 여기에 왔으니 다시 (이에 대한) 공부를 향상시킬 수 없고 몸은 쇠약하여 고달픔에 지쳐서 죽음이 이웃이 되었으니 만일 여기에서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이 일은 마침내 천고의 한이 될 것이니 비단 제가 눈을 감지 못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할 일곱 번째 이유입니다.
向来閑中私窃有所論著, 自謂庶幾可以伝前聖之心, 開後学之耳目, 実非細事. 今既来此, 無復功夫可以向此, 而衰困澌尽, 与死為鄰, 万一溘然於此, 則此事遂成千古之恨, 非独熹不暝目而已也. 此七当去也.
당연히 물러나야할 일은 대략 헤아려 이렇게 일곱 가지 조목이 있으며, 그 나머지 곡절은 모두 거론할 겨를이 없습니다. 저 또한 이미 여러 공들에게 사관직을 바라는 간절한 편지를 썼지만 또한 감히 이러한 뜻을 다 말할 수는 없으며, 다만 당신에게 힘써 한 말씀하시어 반드시 청한 것을 따르도록 하신다면 이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무릇 능력과 일의 세를 스스로 생각해보건대 사관직 외에 논할 것도 없이 어느 관직에 임명되더라도 모두 맡을 수가 없으니 작은 일에는 작은 낭패, 큰 일에는 큰 낭패가, 멀면 먼 낭패, 가까우면 가까운 낭패가 있을 것입니다. 제공들이 만약 저를 애처롭게 여기시어 반드시 돕고 거들어 편안히 해주고자 하신다면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시겠습니까? 다행이 이러한 뜻을 힘써 말로 다하였으니 다시 청해서 당신을 번거롭게 하는데 이르지 않게 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을 이어서 또한 반드시 청함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전에 아뢰었던 것 중에 혹 좋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어서 여러 공들이 비록 여실히 서로 붙들어 주고자 할지라도 또한 그 힘을 쓰는 것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当去之事, 略数之有此七条, 其他曲折, 不暇徧挙. 熹亦已有書懇諸公丐祠, 然又不敢尽言此意, 只告尊兄力為一言, 使必従所請, 乃千万之幸. 大抵自度材力(3-1090)事勢, 祠廟之外, 不選甚差遣, 都做不得, 小即小狼狽, 大即大狼狽, 遠即遠狼狽, 近即近狼狽. 諸公儻相哀憐, 必欲扶持而全安之, 豈応使至此極耶? 幸以此意極力尽言, 使不至於再請, 以煩尊聴, 則大善. 不然継此亦須有請. 但恐前所陳者勿有一事不恰好, 則諸公雖欲曲相維持, 亦無所用其力耳.
조진숙에게 보내는 편지 與曹晋叔書
【해제】편년고증(p.15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저는 요즘에 이미 병이 많고 군은 궁핍합니다”고 했도, 또 “여부에서는 삼협과 옥연의 풍광이 가장 좋다”고 했는데, 여산은 남강군 경내에 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남강에 있을 때 쓴 것이다. 또 “직경은 이미 되돌아갔다”고 하고, “자징이 요사이 이곳에 와서 서로 모여 매우 즐거웠습니다”고 했는데, 문집권35 「답여백공」제68서에서 “황직경에게 어제 들으니 존형께서 상을 당해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 편지는 기해년 6월에 쓴 것이다. 「답여백공」제74서에서는 “자징이 마침 이곳에 왔다”고 했는데, 그 편지는 기해년 가을에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 역시 기해년 가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저는 요즘에 이미 병이 많고 군(軍)은 궁핍하며 주변의 県은 무너지고 있는데, 본래 처음부터 오랫동안 계획하지 않았고 깊이 처리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결코 오랫동안 편안히 지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난 달 말에 이미 위에 사관을 청했는데 다시 보름이 지났으니 반드시 회답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회답이 없으면 다시 청하여 반드시 허락을 얻어야만 하겠습니다. 학관에 가끔 가는데 이제 점점 깊이 있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객이 아니니, 일러주고 설명하는 뜻을 다할 수 없습니다. 여부에서는 삼협과 옥연의 풍광이 가장 좋지만 그러나 잠시 들러 노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빈객과 수행원이 많아 수고로움과 혼잡이 없지 않으니 감히 자주 가지도 못합니다. 관직에 있으면 좋지 않다는 것은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산 또한 유람할 수 없으니, 하물며 다른 곳은 어떻겠습니까? 곡렴은 멀어서 갈 수 없습니다. 단지 그 물을 가져다 마셔보면 실로 좋은데 거리가 멀어서 보내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할 수 없음을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조승의 책은 이미 봉함하여 보냈습니다. 그가 전에 사람을 보내 왔는데, 책이 있길래 이번에 붙여 보냈습니다. 직경이 이미 돌아갔으니 보낸 편지의 답장을 받을 것입니다. 주자의 책 한 권과 두 개의 그림(図)는 이미 완성했으니 지금 보냅니다. 또한 한 권은 백모에게 보내는 것인데 별도의 서신은 보내지 않겠습니다. 인편을 통해 편지를 받으니 심히 위안이 됩니다. 자징이 요사이 이곳에 와서 서로 모여 매우 즐거웠습니다, 늦게나마 알려 드립니다.
熹此既多病, 而軍中窘闕, 外県廃壊, 本初不為久計, 不欲深料理, 今決不容久安. 前月末已上祠請, 度更半月, 必有報. 万一不遂, 不免再請, 以必得為期耳. 学中時到, 今已漸有能致思者. 但恨非久客, 不能尽所以告語之意. 廬阜亦唯三峡․玉淵為最勝, 然暫遊不款, 賓従猥多, 不無勞擾, 亦不敢数出也. 作官不好, 相此可見. 山亦不可得遊, 而況其他乎? 谷簾遠, 未能至. 但飲其水信佳, 恨遠, 不能奉寄, 以助甘旨之奉耳. 趙丞書掩已附的便. 渠前日遣人来, 有書, 今却附納. 直卿已帰, 所与之書亦回納也. 周子一冊二図已就, 今内去. 又一本寄伯謨, 不及別書. 便中承書, 甚慰意也. 子澄近到此, 相聚甚樂, 謾知之.
양교수에게 보내는 편지 與楊敎授書
【해제】편년고증(p.157)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양교수는 바로 양원범으로 남강군 군학의 교수였다. 이 편지에서 “욕되게도 여기에서 장리가 되어 동료 관리들로 하여금 학사를 양성하는 식량과 돈을 사용하여 제가 저술한 책을 새기게 한다면 안으로는 붕우들의 꾸짖음이 있을 것이고 밖으로는 속세의 기롱과 웃음거리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아마 남강군 군학에서 주자의 저서를 판각하려고 하니 주자는 군수로서 불가하다고 힘주어 말한 것이다. 이 편지는 기해년과 경자년 사이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제가 일전에 판각하는 일에 대하여 그만두기를 면전에서 간청했는데 아직 깊이 살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성의가 미덥지 못하고 언변은 당신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을 스스로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깁니다. 결국에는 아무 말하지 않고 침묵하려고 했는데 일에는 이로움과 해로움이 있으니 여기에 그칠 수 없어서 거듭 (당신을) 더럽히고 모독함이 있습니다. 이 일이 옳지 않은 이유가 네 가지인데 당신이 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한결 같습니다.
熹昨日面懇寢罷鏤板事, 未蒙深察. 竊自愧恨誠意不孚, 言語不足以取信於左(3-1092)右. 欲遂息黙, 則事有利害, 不容但已, 須至再有塵瀆. 蓋玆事之不可者四, 而長者之未喩區區之心者一.
이 책이 비록 전 성현들의 설을 많이 담고 있지만 그러나 거취와 취사선택은 모두 저의 좁은 견해에서 나온 것이므로 꼭 이치에 맞다고 할 수 없고 혹 후인들을 그르치게 할 수도 있으니 이것이 불가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설령 전할만 할지라도 보충과 개정이 완성되지 않아서 저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지금도 이미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관 뚜껑을 덥은 뒤에 정본이 나온다면 아무래도 피차간에 다른 부분과 같은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저에게는 평생의 한이 될 것 입니다. 이것이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욕되게도 여기에서 장리가 되어 동료 관리들로 하여금 학사를 양성하는 식량과 돈을 사용하여 제가 저술한 책을 새기게 한다면 안으로는 붕우들의 꾸짖음이 있을 것이고 밖으로는 속세의 기롱과 웃음거리가 있을 것이니 비록 본심이 아닐지라도 어찌 스스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물며 외롭고 위태로운(병이 무거운) 저는 까닭 없이 항상 입에 오르는데 지금 스스로 이런 일을 만든다면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표적으로 삼아 비판하게 되어서 그 떠들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것을 트집 잡아 죄를 만드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근래에 위안행이 정상서의 『논어를 새겼다가 뇌물을 받았다고 죄를 추궁 당했는데, 이것은 그리 멀지 않은 본보기입니다. 이것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근래에 듣건대 무원의 어떤 사람이 저의 西名 등의 설을 새겼는데 이것은 서신을 보내서 없앴습니다. 서신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스스로 이것을 만든다면 듣는 사람들이 어찌 비웃지 않겠습니까? 그 훼손을 입은 사람은 어찌 원망스럽고 노여워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또 저로 하여금 향당의 종족[무원 사람들]에게 거듭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此書雖多前賢之說, 而其去取盡出鄙見, 未必中理, 或誤後人, 此不可之一也. 政使可傳, 而修改未定, 其未滿鄙意者尙多. 今日流傳旣廣, 卽將來蓋棺之後, 定本雖出, 恐終不免彼此異同, 爲熹終身之恨. 此其不可之二也. 忝爲長吏於此, 而使同官用學糧錢刻己著之書, 內則有朋友之譙責, 外則有世俗之譏嘲, 雖非本心, 豈容自辨? 又況孤危之蹤, 無故常招吻脣, 今乃自作此書, 使不相悅者得以爲的而射之, 不唯其啾喧呫囁使人厭聞, 甚或緝以成罪, 亦非難事. 政如頃年魏安行刻程尙書論語, 乃至坐贓論, 此不遠之鑒. 此其不可之三也. 近聞婺源有人刻熹西銘等說, 方此移書毁之. 書行未幾, 遽自爲此, 彼之聞者, 豈不怪笑? 其被毁者, 豈不怨怒? 此又使熹重得罪於鄕黨宗族, 此其不可之四也.
일전에 일찍이 이런 이유를 들어 간청을 했지만 집사께서는 깊이 이해하지 못하시고 오히려 제가 그릇되게 여기는 것을 겸손한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부득이하게 이번 편지를 썼으니 그것은 더욱 불손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한 때에 구차하게 지은 글이 아니기 때문에 삼가 하고 신중히 해서 감히 가볍게 낼 수 없습니다. 평소에 친구들이 미완의 글을 가볍게 내고 사람들이 베껴 널리 전해도 금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自任하던 것을 신중하게 여기지 않고 自期하던 것을 원대하게 여기지 않은 병폐가 아님이 없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는 여기에서 실재로 자신을 존경하여 과대평가한 부끄러움이 있는데 당신께서 도리어 그 그릇된 것을 겸손한 것으로 여기시고, 이것을 진실하지 못한 말이라고 생각하시니 서로 살피지 않으신 것이 심합니다.
昨日蓋嘗以此爲懇, 而執事不深曉, 直以熹爲謬爲謙遜者. 熹之不得已而爲此書, 其不遜甚矣. 正以非其一時苟作之文, 是以謹之重之, 而不敢輕出. 而平日每見朋友輕出其未成之書, 使人摹印流傳而不之禁者, 未嘗不病其自任之不重自期之不遠也. 區區於此實有廣己造大之羞, 而執事者反謂其謬爲謙遜, 而爲此不情之(3-1093)語, 其不相察亦甚矣
저의 뜻이 절박하여 당신에게 힘써 간청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다행히 긍휼히 여겨주심을 입는다면 한마디로 그만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판각했던 것은 제가 청하건대 저의 돈으로 사서 없애고, 이미 준비해 두었던 인판은 얼굴을 맞대고 의논하여 별도로 하나의 책을 새겨서 당신께서 도술을 열고 넓히는 뜻을 이루는데 쓰신다면 절로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펴서 보이니 간절히 바라건대 힘껏 살펴주십시오.
愚意迫切, 不得不力懇於左右, 幸辱矜照, 一言罷之. 其所已刻者, 憙請得以私錢奉贖毁去, 而其已置之版, 却得面議, 別刻一書, 以成仁者開廣道術之意, 自不失爲善事. 不審尊意以爲如何? 專此布露, 切冀痛察.
대단에게 보내는 편지與臺端書
【해제】편년고증(p.172)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780, 51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근래 3월 9일 지휘에 의거해서 이미 대략 임금께 이 일을 말씀 드렸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자가 경자년에 올린 봉사를 가리킨다. 문집권11 「경자응조봉사」에서 “신이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3월 9일 폐하께서는 신의 상주문을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연보에서는 경자년에 올린 봉사는 4월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을 따를 수도 있다.
저는 아직 얼굴을 대면한 적도 없는데 근래에 문득 망령되게 성명을 스스로 알려 참람과 모독으로 자신을 허물하던 중 이내 가르침의 답장을 받았으며, 또 자신을 굽혀 손수 작성하신 글로 깨우쳐주시고 높은 위엄을 낮추어 도모하는 일이 소원한데까지 미쳤습니다. 이것은 옛 사람들의 일인데 당신께서 이것을 행하시니 대단히 극진합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돌아보면 감당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감히 대답할 말이 없겠습니까?
熹未見顔色, 比輒妄以名姓自通, 方以僣涜自咎, 乃蒙教答, 又枉手帖之誨降屈威重, 謀及疎遠. 此古人之事, 而執事者行之, 甚盛甚盛. 顧熹之愚, 不足以当之. 然敢無詞以対?
일찍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황의 병을 고치고자 하면 반드시 그 병든 곳을 다스려야합니다. 힘을 천천히 쓰거나 혹은 빨리 쓸 것이 있고, 약을 차게 짓거나 혹은 뜨겁게 지을 것이 있으며 또 순간의 조그마한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천하의 병통이 고황에 든 지 이미 오래되어 사람이라면 그것을 알고 사람이라면 그것을 말하고자 하지만, 책임을 맡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기량을 한 번 보태고자 해도 펼칠 방법이 없습니다.
蓋嘗窃謂欲起膏肓之疾者, 必攻其受病之処, 而其用功之緩速, 制薬之寒温, 又有不可以頃刻毫釐差者. 今天下之病在膏盲者久矣, 夫人而能知之, 夫人而欲言之, 顧以不当其任, 則雖欲一效其伎而無所施耳.
이제 천자께서 당신을 청렴 침착하고 곧은 지조가 있는 사람으로 발탁하여 간원에 두시고 당신의 말을 채택하여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였으니 그들은 모두 이른바 고황의 여증입니다. 천하의 뜻있는 선비들은 천자께서 이미 몸 안에 숨겨진 병통을 깊이 깨달으시고 당신의 약을 빌려 제거하려고 하신 뜻을 알고 있으며, 또 당신께서 우선 여기(간악한 무리를 제거하는 것)에 나선 까닭이 또한 그 조짐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반드시 그것을 꾸짖으신다면 이른바 병통의 근본을 의심할 여지없이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乃者天子以執事有廉靖貞孤之操, 擢寘諫垣, 納用其言, 屏去姦悪, 皆所謂膏盲之余証. 海内有志之士知上之心蓋已深悟隠疾之在躬, 而欲暇執事之薬以去之也, 又知執事之心所以姑従事於此,(3-1094)者 蓋亦以為之兆耳. 其必将有以譴之, 則夫所謂病本者可去無疑也.
그러나 제가 몸을 기울여 들은지가 몇 달이 되었는데도 들려오는 소식이 없고, 또 두 더벅머리 아이는 양의가 자기를 다치게 할 것을 알고 먼저 술수를 써서 (양의를) 제거하려고 할까 두렵기 때문에 걱정되고 의심이 나서 안정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다행히 폐하께서 마음을 굳건히 정하시어 소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당신을 대단의 중책에 나아가게 했는데 이것은 분명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미 일정한 계책이 있는 것이니 사대부들의 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제가 가만히 홀로 지나치게 염려하건대 무릇 간사한 적들이 정해진 계책의 단서를 엿보게 되면 그 자신들을 위한 계획이 반드시 더 심각하고 절실해져 집사보다 앞서서 그 기선을 제압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집사께서는 어떻게 대처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나무를 제거하려면 그 가지나 입을 자르기보다는 도끼로 그 뿌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 나으며, 물을 막는데는 갈라진 물줄기를 막기보다는 그 근원부터 차단하는 것이 나으며, 징과 북을 치고 창과 갑옷을 번쩍거리며 떠들썩하게 해서 호랑이를 쫓기보다는 잠자는 틈을 타 죽여 버리는 것이 빠릅니다. 지금 집사는 곧 호랑이를 흔들어 깨우고 있는데도 오히려 만만하게 보고 느슨하게 쫓아가 호랑이가 성내며 할퀴고 달려드는 형세에 대적하려고 하시니 저는 가만히 집사를 위해 위태롭게 여깁니다.
然而側聴累月, 未有所聞, 則又懼夫二竪子者知良医之傷己, 而先為術以去之, 以是憂疑, 不知所定. 尚幸聖心堅定, 不入其言, 而又進執事於台端之重, 是必君臣之間已有一定之計, 足以少慰士大夫心. 然熹之愚窃独私憂過計, 意夫姦賊窺見端倪, 則其所以自為謀者, 必将愈深切, 而有先執事以発其機者. 不審執事何以処之? 蓋伐木而翦其枝葉, 不若斧其根., 壅水而捍其波流, 不若塞其源., 鳴金鼓․耀戈甲而噪呼以逐虎, 不若乗其方睡而斃之之速也. 今執事則既撼而覚之矣, 又猶欲緩視徐趨, 以当其虓怒決裂之勢, 熹窃為執事者危之也.
그러나 이 소인배들은 생겨난 이래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죄악이 아닌 것이 없어그 죄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임금은 평소에 이들을 광대나 노복처럼 길들여서 처음부터 명예나 예절을 따지지 않습니다. 요즘 의신들이 다시 들추어내고 세세하게 살펴 일일이 아뢰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마땅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곁에서 시중들면서 편안하고 한가한 때에 떠받들고 아첨하며 임금의 마음이 안일함에 젖어들게 하여 법을 지키는 신하와 보필을 잘하는 선비의 말은 들을 수 없도록 막습니다. 비근한 것만 탐내어서 정대하고 구원한 계책은 들을 수가 없고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간사한 무리들이 담장(조정)에 서있어서 무릇 천하국가의 기강이 날로 기울고 달로 무너지는데도 위아래가 서로 모른 체하며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곧 이 한 두 사람의 죄악이 위로 하늘까지 통하여 심히 오늘의 고황의 병이 되었습니다. 집사께서는 이러한 죄목을 성토하고 조정에 드러내어 폐하께서 사악한 무리를 제거하는데 의심하는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심히 도와주시고, 또 조정에서 함께 일하는 어진 선비들을 이끌어 계책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결단코 그들을 제거하신다면 천하의 고황의 병이라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평만세에 저는 비록 무용은 없지만 오히려 능히 집사를 위해 노래할 수 있는데 집사께서는 뜻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然此等小人有生以来, 自朝至暮無非罪悪, 不可殫数. 且又人主素以倡優奴僕畜之, 初不責以名倹, 而間者議臣乃复抉擿苛細而一一以陳之, 其不納則宜矣. 唯其日時燕閑, 逢迎縦臾, 使人主之心恬於逸欲, 而法家払士之言不得以進 ; 狃於卑近, 而正大久遠之計不得以聞, 賄賂公行, 姦邪堵立, 蓋凡所以為天下国家之綱紀者, 日傾月壊, 而上下相蒙, 莫敢以告, 是則此一二人之罪所以上通於天, 而深為今日膏盲之病者. 執事誠能声此為罪, 揚于王庭, 深賛聖主去邪勿疑之志, 又引同列之賢, 合謀并力以決去之, 則天下膏盲之病者庶幾其可去矣. 太平万歳, 熹雖(3-1095)不武, 尚能為執事誦之, 不識執事亦有意乎?
저는 근래 3월 9일 지휘에 의거하여 이미 대략 임금에게 이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돌이켜보건대 거칠고 보잘것없는 말이라 족히 믿지 못하시겠지만 혹시 허물이 있을까 해서 삼가 이미 행장을 꾸려놓고 엄격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께서 경계하지 마시고 조속히 신중하게 도모하신다면 천하에 큰 다행일 것입니다.
熹比因三月九日指揮, 已略為明主言之矣. 顧疎賎之言, 未足取信, 而或以取戻, 謹已束装, 恭俟厳譴. 惟執事者毋以為戒而亟深図之, 則天下幸甚.
이것을 빨리 인편으로 보내느라 오로지 이 일만을 아뢰니 서로 친분은 적지만 일을 말하는 것이 절실하며, 신분은 소략하지만 예절이 품격에 맞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의 마음은 깊이 고인의 일을 당신께 바라면서 다시 세속의 일상적인 작태를 스스로 의심하지 않으니 삼가 생각하건대 깊이 살펴주십시오. 그러나 이 편지는 한 번 읽고 그 의미를 살핀 연후에 불 속에 던져서 없애버릴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에게 목을 길게 빼고 힘쓰는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亟遣此人, 専此布稟, 交浅言深, 分疎礼簡. 蓋区区之心深以古人之事望於執事, 而不复以世俗之常態自疑, 伏惟深察. 然此書也, 一読焉而采其意, 然後削而投之火中, 不足為外人道也. 引領台寺, 不勝拳拳.
[소첩자] 이 일은 연계된 것이 가볍지 않으니 그것을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은 기약할 필요는 없지만, 단지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에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라건대 조속히 계책을 결정해주십시오. 만일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이 마음에 진실로 유명을 저버림이 없다면 사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이 반드시 소문을 듣고 흥기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직언이 날로 들려 폐하의 마음이 마침내 반드시 감동 받아 깨우칠 것입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야심을 여기에 언급하면서 분격하고 통한하는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小貼子] 此事所繋不軽, 其成否不可必, 但義所当為, 有不得而避者, 願早決計. 万一不済, 此心固無負於幽明, 四方忠義之士必有聞風而興起者. 直言日聞, 聖主之心終必感寤矣. 葵藿野心, 言及於此, 不勝憤激痛恨之至.
황보수에게 보내는 편지 與皇甫帥書
【해제】편년고증(p.172)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780, 51세)의 편지다. 황보수는 황보척을 가리킨다. 당시 그는 강주도통으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송회요집고 「식화」60의 16에 보인다. 이 편지는 자세하게 고증할 수 없지만, 서신의 배열 순서를 따라 유추해 본다면 아마 경자년에 쓴 것이라고 본다.
병거가 호광지방에서 도적 토벌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언제 출발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반드시 승리할 계책을 생각했는데, 본래 이미 생각하신 방책이 있을 것입니다. 소원한데 제가 외람되이 말씀드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을 써주시기를 원하는 마음 그만둘 수 없어서 문득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니 삼가 당신께서 헤아려 주십시오.
似聞戎車將有湖廣之役, 不審定以何日戒塗? 伏計運籌決勝, 自有成算, 疎遠不當僭有所陳. 然慕用之私懷不自已, 輒效其愚, 惟高明裁之.
저는 민(閩)땅에서 나고 자랐으며 또한 일찍이 천(泉)․ 장(漳)주 사이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그 지역은 강서에서 근래 몇 년 사이에 산적이 출몰하는 곳과 가까운 곳입니다. 소흥 18․9년 사이에 조정에서 여러 번 많은 병사를 보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심지어는 패배하고 궁지에 빠져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또 후에 태위 진민을 파견하여 토병(土兵)을 불러 모은 후에야 그들을 이겼는데, 이른바 좌익군이 이들입니다. 대개 이 무리들은 처음에는 대오를 갖춰 진을 펴지도 못했는데, 험한 지형을 믿고 산골짜기 사이에서 발호하니 바로 그들의 장기를 쓴 것이며, 관군이 버젓이 진을 갖춰 맞서니, 지형과 병사들의 세력이 무릇 저들의 장점이 모두 우리의 단점인 바, 이 때문에 매번 싸울 때마다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근래 몇 년 동안 차 도적들의 형세가 바로 또한 이와 같으니, 강서의 관병들이 누차 패배하고 끝내는 광동군(摧鋒)의 죽음을 무릎 쓴 용맹으로 차 도둑들을 소탕했으니 이것은 지나간 일의 명백한 증험입니다. 삼가 생각하기에 요즘 호광 지역의 도적들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부류인데, 저의 바램은 태위께서 위엄을 기르시고 지중하시어 승리할 수 있는 형세의 지형을 택해서 수비를 견고히 하고 기다려 널리 토인(土人)으로 향병(郷兵)을 모집해 황금과 비단을 두터히 해서 은혜로운 뜻으로 결집해 그들로 하여금 산림에 드나들게 해 계곡을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이 요(獠)인들과 더불어 종사하게 하시면 그들의 장기가 바로 적들과 같아 질 것입니다. 또한 태위의 위엄에 의지해 순으로써 거스르는 자들을 토벌하면 그들은 남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는 무리들이 또한 장차 어디에 그 명(命)을 피할 곳이 있겠습니까?
熹生長閩中, 又嘗試吏泉․漳之間, 其地密邇江西頃歲山寇出沒之處. 紹興十八九年間, 朝廷屢遣重兵, 卒不得志, 甚者志於敗衄, 狼狽不還. 及後專委陳太尉敏招募土兵而後克之, 所謂左翼軍者是也. 蓋此輩初無行陳部伍, 憑恃險阻, 跳踉山谷之間, 正得用其長技, 而官軍乃以堂堂之陣當之, 地形兵勢, 凡彼之所長者皆我之所短, 是以每戰而每不勝也. 近年茶寇形勢正亦如此, 所以江西官兵屢爲所敗, 而卒以摧鋒敢死之兵困之, 此往事之明驗也. 竊計今日湖廣之寇正亦類此, 熹願太尉養威持重, 擇形勝之地, 堅壁以待之, 而廣募土人鄕兵, 厚其金帛, 結以恩意, 使之出入山林, 上下溪谷, 以與此獠從事, 則彼之長技正與賊同. 又倚太尉之威聲, 以順討逆, 彼假息遊魂之衆, 亦將何所逃其命哉?
저는 서생인데, 별안간 군무를 이야기 하니, 분수를 모르고 경솔하며 가소롭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두려운 것은 태위께서 충의 분발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바로 소수의 병사로 급히 나아가 깊숙한 소굴로 들어가 모두 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계책의 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대개 동남 지역의 형세는 서북 지역과 떨어져 같지 않으니, 원컨대 다시 두루 문의하고 깊이 헤아리시어 만전의 공을 도모하신다면 저의 바램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저의 뜻을 알아주시리라 믿고 감히 말씀드렸으니 채택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삼가 망령되이 겁낸다고 경멸하지 않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熹書生也, 輒語兵事, 近於僣率而可笑. 然私心惓惓, 竊恐太尉不勝忠義奮發(3-1097)之心, 直欲以輕兵銳進, 深窮巢穴草薙而禽獮之, 則非計之得也. 大率東南形勢絶與西北不同, 願更博訪而審度之, 以圖萬全之功, 則區區之望也. 仰恃知照, 敢布陳之, 以竢采擇. 惟不以其狂妄畏怯而鄙弃之, 則幸甚幸甚.
왕조사에게 보내는 차자 與王漕箚子
【해제】편년고증(p.172)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780, 51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제가 근자에 성은을 입어 그릇되이 군수 일을 받았는데, 간절히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또 “본 군의 세 읍이 소관하는”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남강군에 재임하고 있을 때임이 분명하다. 문집권26에서 배열하고 있는 편지 순서로 미루어 볼 때, 역시 경자년에 쓴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제가 문득 정성스런 마음으로 아뢰어 당신을 모독하게 됐습니다. : 제가 근자에 성은을 입어 그릇되이 군수 일을 받았는데, 간절히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미 일을 보고 있습니다. 이 작은 지방은 백성이 가난하고 재물이 없어서 해마다 꼭 수개월의 양식이 부족하니, 제가 도임한 이후로 관병의 녹봉용 미곡으로 사용할 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폐단의 원인을 궁구해보니 본 군의 세 읍이 소관하는 묘미가 사만 육천여석에 이르는데, 매년 할당되어 올려 보내는 사만석 외에 나머지 육천여석 또한 사대가 모든 수량을 수탈해 가니 저희 군은 장차 어디서 (쌀을) 구해 용도를 쓰겠습니까? 주변의 군과 비교해보면, 요주와 지주는 모두 관병이 먹을 쌀의 수량에 대한 공급 비용을 남겨 두었는데, 저의 군만은 (저희 군의) 지출용으로 남겨달라고 신청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지금 위로 올려 보낸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직 보내지 못한 쌀의 수량은 여러 현이 지난번의 가뭄과 장마로 인해 도망가거나 죽고 또 몰락하고 세금을 내지 않아 재촉할만한 집이 없으며, 설령 재촉한다 해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잘못된 정사를 따라 제멋대로 빌려 낸다면 눈앞의 미납 장부에만 헛되이 적어두는 꼴입니다. 감히 별안간 공문을 올리니 처벌을 기다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당신께서 임금의 간절하신 뜻을 우러러, 찬 것과 빈 것을 헤아리시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해서 순희 3․4․5년에 아직 올리지 못한 수량을 모두 면제해 주십시오. 현재 이후로도 역시 남겨서 관병의 비용으로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주십시오. 창고에서 썩도록 남겨 두어 끝내 후인이 헛되이 쓰게 하는 것보다는 천리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은택을 받고 백성의 힘이 커다란 곤란에 이르지 않게 하심이 낫지 않겠습니까? 오직 당신께서 도모하십시오. 당신의 위엄을 간범하였으니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熹輒布誠悃, 仰涜台聴 : 熹比蒙聖恩, 誤膺郡寄, 懇辞弗獲, 亦既視事. 唯是小邦民貧財匱, 歳必乏数月之糧, 熹到任以来, 官兵廩給全無顆粒可以支遣. 究原其弊, 縁本軍三邑所管苗米止四万六千余石, 毎年科撥起四万外, 余米亦係使台尽数刷発, 如此則本軍将何所取以供用度? 較之旁郡, 如饒․池州, 皆有存留贍用官兵米数, 独本軍先来有失申請存留支遣. 況今来除上供已起外, 自余未発米数, 係諸県先因旱澇, 有逃移死亡及零残拖欠無戸可催之数, 縦有催到, 非惟不多, 又且累政随即借兌, 目今虚掛欠籍. 用敢輒拝公牘, 冒浼控告. 欲乞台慈仰体迩者聖詔丁寧之意, 計盈虚, 通有無, 将淳煕三年․四年․五年未起零残之数悉従蠲免. 継自今以往, 亦乞存留, 以為贍用官兵之費. 高明必有以矜憐之. 与其留腐倉庾, 終(3-1098)為後人之妄費, 孰若使千里並受其賜, 而民力不至於重困耶? 惟執事図之. 干冒台厳, 不勝恐悚.
안제거에게 보내는 차자 與顔提擧箚子
【해제】편년고증(p.158)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안제거에게 보내는 차자」(熹瞻望使臺)에서 “쌀을 조달하는 두 가지 일은 당신께서 유념해 주셨으니”라고 했는데, 이 편지에서는 “일전에 문득 쌀을 조달하기 위해서 당신을 간범했는데”라고 했으니, 그 편지와 같은 시기에 쓴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역시 기해년 가을에 쓴 것이라고 본다.
저는 일전에 문득 쌀을 조달하기 위해서 당신을 간범했는데 우러러 긍휼히 여겨주심을 받았으며 굽어 청했던 것을 좇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삼가 오래 기다렸지만 아직 정식 문서를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다시 특별히 인편으로 갖추어 아뢰니 빌건대 당신께서 옛 사례를 특별히 살피시어 조속히 윤허를 내려주신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거듭 조금 아뢸 것이 있습니다. 본군의 미곡은 과거에 대부분 건강부에 나아가 납부하였는데, 근래 1~2년에 갑자기 사대께서 바꿔 도성으로 들이도록 하니 작은 군에 수로로 옮기는 비용이 갑자기 늘어나서 나올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선박을 얻기 어려워 발송하는 것이 늦어지고, 운반하는 것이 정체되어 적자가 많으니 일에 대단히 불편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또 장계를 갖추어 아뢰니 바라건대 태지를 내리시어 단지 건령부에 나아가 납부하도록 해주십시오. 만약 유념해주신다면 후하고 다행임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熹昨者輒以撥米, 干冒台聽, 仰荷矜憐, 俯從所請. 然顒俟久之, 未蒙明文行下. 今復專人具稟, 欲乞台慈特照舊例, 早賜開允, 不勝幸甚. 復有少稟: 本軍米斛舊來多就建康交納, 近一兩年, 忽蒙使臺改撥入都, 不唯小郡頓增水脚之費, 無所從出, 而舟船艱得, 裝發遲緩, 盤剝留滯, 耗折百端, 於事有甚不便者. 今亦有狀申稟, 乞賜台旨, 只令赴建康府交納. 儻蒙垂念, 不勝厚幸.
안제거에게 보내는 차자 與顔提擧箚子
【해제】편년고증(p.158)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저는 일전에 성자현의 세전이 너무 무거워 상소를 올려 견감해주기를 빌었던 일은 또한 이미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지금 듣자하니 예지가 이미 사대에 내렸다”고 했다. 연보에서는 “(기해년) 6월, 상주문을 올려 성자현의 세전을 감면해 주기를 요청하고”, 아래 조사에게 실정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편지에서 또 “바라건대 당신께서 조속히 유념해주시고 관리를 파견하여 실상을 조사해서 갖추어 보고 하십시오”라고 했는데, 이것으로부터 이 편지는 기해년 가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저는 소원하고 비천한 종적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이곳에 부임한 이래로 자주 직무로 당신에게 요구할 때마다 거의 다 긍휼히 살펴주심을 입었으니 감격과 다행스러움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아직 정식 공문서를 내려주지 않으시니 저는 한 군의 관리 군민들과 더불어 간절히 바라면서 좋은 명을 기다립니다. 오늘 또 이렇게 아뢰는 것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빌면서 속으로는 주제 넘는 일을 좇으니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일전에 성자현의 세전이 너무 무거워 상소를 올려 견감해주시기를 빌었던 일은 또한 이미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지금 듣자하니 예지가 이미 사대에 내렸다고 하니 가만히 생각하건대 천자의 밝게 보고 널리 듣는 뜻이 비록 저의 비천한 견해와 다르지 않을지라도 그 결연히 믿음을 취하여 의심이 없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현명한 관리의 한마디 말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 조속히 유념해주시고 관리를 파견하여 실상을 조사해서 갖추어 보고하고 한편으로 병든 백성들이 인자한 천자의 은택을 조속히 입는다면 대단히 다행이겠습니다. 앞에서 청했던 것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 저의 바램을 위로해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熹不揆疎遠疵賤之跡, 自到任來, 數以職事仰干台聽, 例蒙矜照, 感幸已深. 惟是至今未被明文行下, 竊與一郡官吏軍民同切翹跂, 以俟嘉命. 今此又有所稟, (3-1099)仰祈恩施, 內循進越, 不勝恐悚. 熹昨以星子一縣稅錢偏重, 奏乞蠲减, 亦已具申聞矣. 今聞睿旨已下使臺, 竊惟聖天子明目達聰之意, 雖不間於芻蕘, 至於其所決然取信而亡疑, 則在明使者之一言耳. 欲望台慈早賜垂念, 遣吏核實, 具以上聞, 使一方疲瘁遺氓速霑仁聖之休澤, 不勝幸甚. 至於前請, 亦乞始終大賜, 以慰顒顒之望. 千萬幸甚幸甚.
안제거에게 보내는 차자 與顔提擧箚子
【해제】편년고증(p.158)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조세를 감면해 달라는 청 또한 이미 시행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위 편지에서 성자현의 세전을 감면해 달라는 내용을 이어 논의한 것이니 역시 기해년 가을에 지은 것이다.
저는 사대를 우러러 바라볼 뿐 삼가 알현할 방도가 없으니 마음을 다하여 사모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지가 임박했는데도 또 여러 관리의 뒤에서 잔을 들어 술을 권할 수 없으니 달려가고 싶은 마음 더욱 절실합니다. 이미 공문서를 갖추어 축하 올렸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당신의 청렴한 명성과 두터운 덕은 선비들의 논의가 귀착할 곳이며, 이에 강이 자라는 지위에 오른 때이니 진실로 축하를 기다리지 않아도 여러 가지 복을 가지고 벗들이 올 것입니다. 저는 일전에 돌아오는 인편에 편지를 받았는데 다시 표준으로 새로 그린 노공의 묘첩을 내려주시니 하찮게 여기지 않는 뜻을 더욱 입었습니다. 이에 앞서 아리를 파견해서 운반을 통괄하게 함으로 인하여 일찍이 차자를 갖추어 아뢰어 대략 저의 고루한 생각을 말씀드렸는데 지금은 이미 보고한 것을 살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 옳지 못한 것이 있거든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쌀을 조달하는 두 가지 일은 당신께서 유념해 주셨으니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조세를 감면해 달라는 청 또한 이미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는 쇠약하고 졸렬하여 관리가 되는 일을 감당할 수 없는데 여기에 뻔뻔한 얼굴을 한다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입니다. 만약 현명한 관리가 긍휼히 여기는 것을 허용해 가지고 종종 관직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다시 조그마한 간청이 있어서 별지로 그것을 펴니 삼가 당신이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熹瞻望使臺, 無由伏謁, 傾仰不自勝. 長至節臨, 又不獲奉觴羣吏之後, 尤切馳情. 已具公牘修慶. 竊惟淸名重德, 士論所歸, 履玆剛長之辰, 固不待祝而諸福朋來也. 熹昨者使還, 蒙賜手敎, 復以標準新圖魯公墓帖爲貺, 尤荷不鄙之意. 前此因遣牙吏部綱, 嘗具稟箚, 略陳固陋, 計今當已徹聽聞矣. 恐或未安, 更望垂誨, 幸甚幸甚. 撥米二事, 仰荷台念, 感激尤深. 蠲租之請, 亦當已蒙施行矣. 區區衰拙, 不堪爲吏, 强顔於此, 百事隤廢. 若非明使者矜而容之, 種種假借, 久已罪去矣. 復有少懇, 別紙布之, 伏乞台照.
안제거에게 보내는 차자 與顔提擧箚子
【해제】편년고증(p.159)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저의 군은 금년 가을에 비가 적어서 늦게 경작한 전답은 대부분 가뭄 피해를 입었습니다”라고 했는데, 남강군은 경자년 여름에 크게 한재가 들었으니, 여기에서 가을에 비가 적었다는 말은 경자년이 아니라 기해년의 일이다. 연보에서는 기해년 10월에는 그 해 가을 한재를 입었기 때문에 글을 올려 자신을 탄핵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편지에서도 “저는 이미 장계를 갖추어 상서성에 아뢰어 스스로 탄핵했습니다”라고 했기에 이 편지는 기해년 겨울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저는 다시 조금 아뢸 것이 있습니다. 저의 군은 금년 가을에 비가 적어서 늦게 경작한 전답은 대부분 가뭄 피해를 입었습니다. 성자현과 도창현은 대부분 일찍 경작한 전답이라 피해를 입은 곳이 적은 것을 제외하고, 오직 건창의 한 현에 만전의 수가 많이 있는데도 이에 앞서 찾아가 조사하지 않고서 마침내 재한을 검사하고 진휼하는 기한을 서둘러 마쳤습니다. 근래에 보좌하는 관원을 현에 파견해 보내고서야 이내 그 실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이미 주장을 갖추어 아뢰었고 또 사사에 보고하였으며, 그리고 저는 이미 장계를 갖추어 상서성에 아뢰어 스스로 탄핵하였습니다. 저의 견해는 한편으로 관리 파견하여 가서 보고 가뭄피해를 당한 분수를 기다렸다가 마땅히 다시 갖추어 사사에 보고하고 긍휼히 좇아주시어 대략 감방을 주신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성자현의 왕령은 노성하고 돈독하여 읍인들이 매우 좋아하는데 동료 관리들 중에는 그와 견줄만한 사람이 적은 것 같습니다. 작은 군은 황량하고 인재는 쇠퇴하여 동료 관리 중에 임명할만한 사람이 3명 정도에 불과하며 그 사이에 재주는 있지만 타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기타는 곧 또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더욱 힘이 많이 들어 능히 사람의 뜻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진실로 오래도록 하는 일 없이 영화로운 봉록을 축낼 마음과 면목이 없어서 스스로 탄핵하는 청을 이미 올렸으니 곧 행장을 꾸리고 관직을 파면하기 기다립니다. 항상 유념해주심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아울러 이것을 언급합니다.
熹復有少禀: 敝郡今秋少雨, 晩田多旱, 除星子․都昌多是早田, 被災處少, 唯有建昌一縣晩田數多, 前此失於訪問, 遂速檢放之限. 近因遣佐官行縣, 乃知其實, 則又不容坐視, 已具奏聞及申使司, 而熹已具狀申省自劾矣. 見亦一面遣官行視, 俟見分數, 當復具申使司, 得賜矜從, 略與減放, 不勝幸甚. 星子王令老成篤實, 邑人甚愛之, 同官中如其比者蓋少也. 小郡荒凉, 人材衰乏, 同官中可任者不過三數人, 其間又有有才而過當, 其他則又難言. 所以凡事費力, 不能滿人意. 誠無心顔久尸榮祿, 自劾之請旣上, 卽束裝以俟罷遣矣. 每荷垂念, 故敢幷及之..
집정에게 보내는 차자(기해년 겨울) 與執政箚子(己亥冬)
【해제】편년고증(p.159)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6년(기해; 1179, 50세)의 편지다. 편지의 제목 아래에 작은 글자로 “기해년 겨울”이라고 편지를 쓴 시일이 명기되어 있다. 즉 기해년 10월에 남강군 지부로 재직하면서 승상 조웅에게 보낸 차자이다. 건창현에 가을 가뭄이 들었는데, 주자는 자신이 검방(檢放)을 못한데다가 세금을 독촉함으로 인해 인호들이 유리하기에 이르렀으니, 집정에게 남강군지사를 파면시키고 사관직으로나 보내 달라고 청하는 차자이다.
저는 전에 병이 들고 욕을 당하여 관리의 책무를 감당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사관으로 보내 달라는 청을 드려 조정의 명을 모독했습니다. 삼가 당신께서 헤아려 주심을 입어, 모질게 내치지 않으시고 가르침을 펴서 아래로 살펴주신 위로가 간절할 뿐만 아니라 사우들 사이에서도 가르쳐 인도해 주시고 훈계해 주신 뜻을 전하니 또한 간곡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결함이 있고 천한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감격한 마음은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이에 노둔하지만 힘을 다해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생각건대 우선 위로 조정에 죄를 짓지 않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죄가 되지 않는 것은 또한 조금 시간을 끌면서 천천히 전에 간청한 것을 빌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산야의 우매한 저는 일의 마땅함을 헤아릴 수 없어서 근래에 속현(건창현)의 가뭄 피해를 검방하지 못했고 게다가 세금을 독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마침내 인호들이 유리하게 되어 원망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우러러 조정의 위임을 생각해 보건대, 본래 백성을 위함이고 평소의 마음을 굽어 살펴 또한 사물에 미칠 것을 기약했으나 지금 이내 한번에 두 가지를 잃었습니다. 밤낮으로 근심스럽고 부끄러우며 질병이 더욱 심하니 형편이 다시 억지로 힘쓰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 부득불 빨리 도모하여 삼가 이미 갖추어 도성에 보고했습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 특별히 말씀하시어 지위를 강등시켜 파면하신다면 무고한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비록 종신토록 끼니나 이은들 감히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혹시 아껴주심을 입어 곡진히 보호 받고 계속 사관의 녹을 받으며 남은 생을 마치게 해주신다면 심히 다행일 것입니다. 높으신 위엄을 간범하니 전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熹昨以疾病侵凌, 不堪吏責, 屢以祠官之請冒瀆朝聽. 伏蒙鈞慈垂念, 未忍棄損, 不惟發敎下臨, 慰藉勤懇, 至於士友之間, 傳道所以誨飭存撫之意, 又諄諄(3-1101)焉. 自惟疵賤, 何以堪之? 感激之心, 無以爲喩. 自是遂欲勉竭駑頓, 冀以仰答恩私. 意謂姑使上不得罪於朝廷, 下不得罪於百姓, 則亦可以少延時月, 徐罄前懇. 而山野愚瞢, 不能斟酌事宜, 近因屬縣旱傷失於檢放, 加以催科不無追擾, 遂致人戶流移, 怨讟蜂起. 仰惟朝寄, 本以爲民, 俯循素心, 亦期及物, 今乃一擧而兩失之. 日夕憂愧, 疾病益侵, 勢恐不堪復加勉彊, 不得不早爲計, 謹已具申都省. 欲望鈞慈特與敷秦, 絀削罷遣, 以謝無告之民. 熹雖飯蔬沒齒(一), 何敢有怨? 或蒙矜憐, 曲加全護, 使其仍得祠官之綠以終餘年, 則其幸抑又甚矣. 干冒崇嚴, 不勝戰栗.
승상에게 보내는 차자 與丞相箚子
【해제】편년고증(p.172)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저는 일전에 잘못된 은혜를 입어 부신을 받았는데, 스스로 생각해보건대 예의가 없고 야비하여 맡긴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여러 번 사양하였지만 허락을 얻지 못하고 힘써 일한 지가 이제 10달이 지났습니다”라고 했다. 주자는 기해년 3월 그믐에 남강군에 도착했으니, 10달을 계산하면 그 다음해 즉 경자년 정월이 된다. 또 이 편지에서 “작년 겨울에 일찍이 공장으로 상서성에 아뢰어 스스로 탄핵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해년 10월 건창현의 한재를 검사하는 일로 인하여 스스로를 탄핵한 것을 가리키니 역시 이 편지가 경자년 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저는 급한 청이 있어 갑자기 커다란 은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일전에 잘못된 은혜를 입어 부신을 받았는데, 스스로 생각해보건대 예의가 없고 야비하여 맡긴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여러 번 사양하였지만 허락을 얻지 못하고 힘써 일한 지가 이제 10달이 지났습니다. 생각하건대 임금과 재상이 사령의 뜻을 돌보아주시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노둔한 재주를 다해서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재주는 한계가 있고 질병이 연달이 이어지니, 몸과 마음이 괴롭고 수고스러워서 마침내 공로가 없고, 정적은 황량하고 재정마저 궁핍하니 흉년이 들고 백성이 떠돌아다닙니다. 작년 가을부터 오고 가는 친구들 중에 그 경계를 지나는 자가 길에서 물으면 어린아이와 늙은이가 수심에 젖어 탄식하고 근심하고 고뇌하지 않음이 없으며, 혹은 형정의 가혹함에 괴로워하고 혹은 무거운 조세 부담에 고통스러워하여 멀거나 가까운데서 들려오는 것이 또한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편지를 보내 견책하고 귀에 대고 계고하는 날이 거의 없는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작년 겨울에 일찍이 공장으로 상서성에 아뢰어 스스로 탄핵하였으며, 또 차목으로 애처롭게 아뢰면서 조속히 폐하에게 아뢰어 빨리 파면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포용하고 보호해주셨던 당신은 불쌍히 여기고 따라주지 않으셨습니다. 성격은 치밀하지 못하고 재주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데 어찌 감히 고집하고 기필하겠습니까? 삼가 마음을 억누르고 스스로 힘써 공손히 관직를 받았으니 감히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두 달 이래로 나라 사람의 비방이 더욱 심하고, 사우들의 질책이 더욱 심하여 저는 밤낮으로 근심스럽고 두려워 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릇 정치를 하는데 백성에게 마땅치 않고, 싫어하고 괴로워하는 바가 됨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관부에 거처할 마음이 없고 봉록을 받아먹을 면목이 없어서 다시 당신의 위엄을 무릅쓰고 거듭 진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가만히 생각하건대 당신이 마침내 곡진히 보전하여 주고자하니 차마 저의 잘못된 흔적을 천자의 귀에 들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공차에는 감히 앞에서와 같이 세세한 곡절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만약 저를 길러준 은혜를 입어 병을 핑계로 관직을 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고명한 당신을 욕보였으니 엎드려 죄를 기다릴 뿐입니다.
熹輒有危懇, 仰干洪造; 熹昨蒙誤恩, 畀以符竹, 自度疎野, 不堪委寄, 累辞不獲, 黽俛就事, 今十閲月矣. 惟念君相所以眷顧使令之意, 不敢不竭駑頓, 以図(3-1102)報称. 而材力有限, 疾病相仍, 形苦心勞, 卒無善状, 政荒財匱, 歳悪民流. 自去秋以来, 知旧往来渉其境者, 問於道塗, 黄童白叟無不愁歎蹙頞, 或苦其刑政之苛, 或病其征賦之重, 以至流聞遠迩, 亦莫不然, 貽書譙責, 提耳告戒者, 殆無虚日. 以故去冬嘗以公状申省自劾, 又以箚目哀鳴, 冀得早蒙敷奏, 亟賜罷免. 而鈞慈含覆, 未遽矜従. 疎遠賎微, 何敢固必? 謹以抑心自強, 祗服官次, 不敢复有所言矣. 而一二月来, 国言愈甚, 士友之責愈深, 使人日夕憂惶, 不知所以自処. 夫為政而不宜於民, 為所厭苦至於如此, 誠無心可居官府, 無顔可食俸禄, 不免复冒威厳, 再有陳請. 而又窃惟某官終欲曲賜保全, 不忍以其罪戻之跡聞于天聴, 故於公箚更不敢具述如上曲折. 儻蒙陶鎔, 得以病免, 其何幸如之! 仰涜高明, 俯伏俟罪.
승상에게 보내는 별지 與丞相別紙
【해제】편년고증(p.173)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의 편지다. 이 글은 앞 편지의 별지이다. 이 서신에서 “작년에 산간에서 농업을 장려하면서 이른바 백록동을 알게 되었는데 ……이미 주장을 갖추어 상서성에 아뢰었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해년 10월 「신수백록동서원장」(문집권20)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경자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저의 구구하고 어리석은 간청은 이미 앞의 편지에 갖추었습니다.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분수를 넘는 청을 했지만 그 잘못을 잊고 감히 사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우매한 자질에다 젊은 시절에는 거칠고 게을러 書史(경서와 사서) 외에는 산수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당신의 조화의 힘으로 이내 여부의 아래에서 관리가 되었습니다. 이곳의 언덕과 산림 강과 바위들은 동남쪽에서 가장 뛰어난 곳으로 불리는데 실로 제가 원하는 것과 잘 맞습니다. 그러나 작년에 산간에서 농업을 장려하면서 이른바 백록동을 알게 되었는데 계곡과 산림이 빽빽하고 고요하며, 숲이 무성하고 아름다우니 더욱 그윽한 절경의 극치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곳이 비록 멀고 후미지지만 사실 선대 임금께서도 일찍이 뜻을 두었던 곳이니 이렇게 부당하게 파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내 그곳에 일곱 칸의 작은 집 다섯 채를 다시 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이미 주장을 갖추어 상서성에 아뢰었습니다.
熹区区愚懇已具前幅, 复不自量, 輒有踰涯之請, 忘其罪戻, 敢私言之. 熹愚昧之資, 少即疎懶, 書史之外, 酷好山水. 今以某官造化之力, 乃得為吏廬阜之(2-1103)下. 其丘林泉石, 号為東南最殊勝処, 固已私愜所願. 而去歳勞農山間, 又得所謂白鹿洞者, 渓山邃密, 林趣茂美, 尤有幽絶之致. 熹惟是雖遐僻, 而実先朝所嘗留意, 不当廃墜至於如此, 乃即其処复立七架小屋五間, 亦已具狀申省矣.
저의 망령된 뜻으로 인하여 조정이 만약 다시 폐했던 건물을 수리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문을 숭상하는 조정의 조화를 열고자 한다면 제가 비록 불초할지라도 청하건대 동주(백록동을 주관하는)의 인원을 충당하여 앞으로 한 두 학도와 더불어 그 사이에서 책을 읽고 도를 강의하면 위로는 친구들과 사령의 뜻에 부응할 수 있고 아래로는 그 평생의 회한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시 긍휼히 여겨주시고 조금의 봉록을 빌리어 대략 사관의 수입과 같게 한다면 저에게 있어서 또한 지나친 바램이 되겠지만 주현에서는 또한 다 허비해 버리는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일의 실체에 대한 설명이 매우 부족하여 마치 초야의 거만한 자들이 말한 것과 같기 때문에 감히 문득 공장을 갖추어 아뢰지 못했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당신이 저의 정성을 깊이 살펴주시어 조정에서 논의하는 사이에 일에 의거해서 언급하여주십시오. 만일 좇아 주신다면 제가 받은 은혜는 적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의 망령된 죄는 또한 오직 관대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因窃妄意, 以為朝廷儻欲复修廃官, 以闡祖宗崇儒右文之化, 則熹雖不肖, 請得充備洞主之員, 将与一二学徒読書講道於其間, 庶幾上有以副知遇使令之意, 下有以遂其平生之懐. 若复更蒙矜憐, 仮之稍廩, 略如祠官之入, 則在熹又為過望, 而於州県亦不甚至有糜耗. 顧以事体希闊, 言之若草野而倨侮者, 是以不敢輒具公狀申聞. 惟冀鈞慈深察愚悃, 都兪之暇, 因事及之. 万一可従, 則熹之受賜為不浅矣. 狂妄之罪, 亦惟有以寛之.
왕추밀사에게 보내는 차자 與王樞(密)使箚子
【해제】편년고증(p.173)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저는 평소에 어리석어서 물정에 밝지 못하고 게다가 일없이 한가하게 지낸 날이 오래되어서 더욱 모든 관리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여기에 이른지 거의 1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관리의 일이 1년이 되었다는 것은 남강에 부임한 일을 가리키는데 주자는 기해년 3월 말에 군에 도착했는데, 여기에서 장차 1년이 된다고 말했으니 경자년 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저는 망령되고 주제넘게 존위를 모독하는 죄를 피하지 못하고서 다시 절박한 간청이 있으니 모름지기 모두 펴서 아뢰겠습니다. 저는 평소에 어리석어서 물정에 밝지 못하고 게다가 일없이 한가하게 지낸 날이 오래되어서 더욱 모든 관리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여기에 이른지 거의 1년이 되었으며 무릇 제가 처리한 것이(베푼 것이) 비록 저의 생각을 다하지 않음이 없을지라도 저의 견해가 잘못되어 걸핏하면 민중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사방의 사우들이 편지를 보내 나를 책망하는 것이 책상과 책꽂이에 쌓여도 그 기미를 알지 못했는데 앞에서 진극기라는 사람이 더욱 그 상세함을 다하였습니다. 그 중에 잘못된 정사를 일일이 헤아려보니 하나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그 소문을 (사실에 근거해서) 생각해보니 모두 실상이 있습니다. 보잘것없고 비열한 저는 또한 어찌 통렬하게 스스로 바로잡아서 앞의 허물을 고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신이 시들고 손상되어서 이미 미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것은 간사한 백성과 교활한 관리들이 근거 없이 말하고 비방을 말하는 글이 아니라 이내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앞으로 학문할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니 더욱 믿음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연이어서 진언합니다. 만약 당신의 생각을 입어 두루 동부의 양공에게 받칠 수 있다면 저의 앞말이 망령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니 조속히 개진하시어 빨리 파면을 내리시고, 혹 앞의 두 차자로 청한 것과 같다면 저는 오히려 이 백성들에게 죄를 얻음이 무겁지 않을 것이며, 이 나라 사람들도 오히려 그 생업에 편안할 것이며, 도망 다니고 죽는 걱정을 면할 것이니 매우 다행입니다. 계속해서 간범하니 더욱 굴러 떨어짐(죽을죄를 지음)이 더합니다.
熹不避狂僣涜尊之罪, 复有迫切之懇, 須尽布陳. 熹素愚昧, 不暁物情, 加以閒散日久, 尤不諳悉吏事, 至此将及一年, 凡所施為, 雖不敢不竭愚慮, 而所見乖謬, 動失民和, 四方士友貽書見責者, 積於几閣不知其幾, 而前件陳克己者尤其詳(3-1104)尽. 其間歷数謬政, 無一可者. 迹其所聞, 皆有実状. 区区鄙劣, 亦豈不欲痛自矯厲, 以補前愆? 而精力凋残, 已有所不能及者矣. 窃以為此非姦民猾吏流言飛文之書, 乃出於相愛慕来問学之口, 尤足取信, 故敢冒昧繳連陳献. 若蒙鈞念, 得以徧呈東府兩公, 庶幾有以察熹前言之非妄者, 早為開陳, 亟賜罷免, 或如前兩箚所請者, 則熹猶可以不重得罪於此民, 而此邦之人猶可以安其生業, 而免於流亡死徙之患, 不勝幸甚. 干犯頻仍, 伏紙尤増隕越.
승상에게 보내는 차자 與丞相箚子
저는 당신의 보살핌을 믿고 저의 잘못을 잊고 오히려 다시 별도로 사적인 간청이 있어서 문득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제가 근래에 백록동의 옛 터를 탐방하고 조금 수리하였는데 그 곡절은 이미 상서에 아뢰었습니다. 지금 잘못 때문에 의리상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지만 망령되고 주제넘게, 오히려 이 일과 함께 연유해서 문득 사적인 청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 편지에서 간청했던 두 가지 일은 가만히 헤아려보건대 반드시 한번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만약 곧바로 파면을 내려주신다면 진실로 다시 감히 말하는 것이 없을 것이요, 만약 커다란 사적인 은혜를 곡진히 입는다면 다시 사관의 반열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니, 곧 저는 가만히 바라건대 승상께서 천자께 아뢰어 주시어 선조의 고사를 들고 동주의 폐관을 닦아 저로 하여금 여기에서 경서를 갖추어 잡게 하고, 그 녹봉은 사관에 약간 견주어서 내리신다면 저는 영화로움과 다행스러움이 깊을 것입니다. 이교(도교)의 향화를 숭상하여 받드는 것을 명목으로 삼아 일없이 앉아서 먹기보다는 조정의 영전을 닦아 문학예의를 일로 삼아 그 식록을 먹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먼 외지에 있는 저의 종적은 경솔하게 이것을 언급하여 초야의 선비가 거만하게 군다는 혐의가 있지만 그 실상은 또한 조정의 명을 바로잡고 폐단을 혁파하는 하나의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성군과 현좌께서 반드시 이것을 살펴주실 것이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말합니다.
熹仰恃知照, 忘其罪戻, 猶复別有私懇, 輒以仰干鈞聴. 熹近因尋訪白鹿洞故基, 稍加興葺, 已具曲折上之尚書矣. 今以罪戻, 義当自屏, 而狂妄進越, 猶欲並縁此事, 輒有私請. 蓋熹前幅所懇二端, 窃計必有一遂, 若直蒙賜以罷免, 則固無复敢有所言., 若以洪私曲被, 使得复備祠官之列, 則熹窃願丞相特為敷奏, 挙先朝之故事, 脩洞主之廃官, 使熹得備執経焉, 而其祿賜略比於祠官, 則熹之栄幸甚矣. 蓋与其使之以崇奉異教之香火為名而無事而坐食, 不若修祖宗之令典, 使之以(3-1105)文学礼義為官而食其食之為美也. 熹遠外之蹤, 率易及此, 誠有草野倨侮之嫌, 然其実亦朝廷正名革弊之一事. 窃惟聖君賢佐必垂察焉, 是以敢冒言之.
조진숙에게 보내는 편지 與曹晉叔書
【해제】편년고증(p.173)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듣기에 경부의 병이 매우 우려할 만 하다”고 하고, 또 “계통과 자직이 이곳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장경부는 경자년 2월에 죽었는데, 주자가 그를 위해 지은 「우문전수찬장공신도비」(문집권89)에서 알 수 있다. 채계통은 경자년 봄에 남강을 방문했는데, 별집권7 「제낙성사」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경자년 봄에 쓴 것이 틀림없고, 그 때까지는 아직 경부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저는 떠나고자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근래에 갑자기 기중(機仲)과 몇몇 친구들의 소식을 들으니 여러 공들이 이미 서로 칭찬하는 뜻이 있다고 하니 그 소문에 웃습니다. 때마침 며칠 전에 이미 사람을 보내 이 일에 참석하니 반드시 얻을 상황입니다. 증원백(曾原伯) 또한 아마도 힘을 다할 것입니다. 다만 듣기에 경부의 병이 매우 우려할 만 하니 앞서 한번 가서 그를 보려 했습니다. 만약 이미 호남으로 갔다면 곧 강서에서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사이 (저의) 그릇된 정사는 이미 전해 들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근자에 진승사의 편지를 얻어 보니 번쇄한 형벌과 가혹한 세금 등 여러 조목을 비판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왕계해에게 봉해 주어 동부에 제출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지금은 다만 떠나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고 다시는 시비허실은 논하지 않습니다. 계통과 자직이 이곳에 도착하여 서로 연구함이 또한 열심이어서 순서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유공도(劉公度)가 이곳에 왔는데, 오래 머물 수 없으니 그 기질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덕광(徳広)이 이곳에 머물다가 갑자기 임강(臨江)으로 돌아갔습니다. 동로(東老)가 슬프게도 죽어서 이 사람이 바삐 갔는데 제사를 바칠 겨를이 없어서 그 아들을 보고 다행이 전해 주었습니다. 택지(択之)에게 서각을 번거롭게 맡겨 보내니 근자에 새긴 소강절(康節)의 글인데, 다른 것은 의탁할 것이 없습니다.
熹求去久不獲, 近忽得機仲及一二知識報, 諸公已有見許之意, 其説可笑. 会前数日已遣人行, 投此機会, 勢必得之. 曾原伯亦許為致力也. 但聞敬夫病殊可憂, 前此得請, 意欲一往視之. 若已帰湖南, 即自江西便道以帰也. 此間謬政, 想亦伝聞. 近得陳勝私書, 責以煩刑暴斂数条, 已封与王季海, 託其転呈東府矣. 今但得脱去為上, 更不論此是非虚実也. 季通․子直到此, 相攻亦甚力, 次第不虚伝也. 劉公度来此, 不能久居, 其気質不易得也. 徳広留家於此, 暫帰臨江矣. 東老可傷, 此人行遽, 未暇致奠, 因見其子幸及之. 択之書角煩付往, 近刻康節書納一本, 他無可寄也.
(3-1106)황교수에게 답하는 편지 答黃敎授書
【해제】편년고증(p.173)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의 편지다. 이 편지는 황상백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에서 “목탄전의 일은 주군의 당연한 일이어서 다행히 상부에서 들어 주었으나,……이 세금을 도창현이 유독 많이 경감 받은 것은”이라고 했는데, 연보에 근거하면, 주자가 처음 남강군에 부임하여 바로 속현의 목탄전을 감면해 달라고 공장을 올렸는데(이 일은 황상백에게 보낸 기해년의 몇 가지 서신에서도 논의하고 있는 일이다), 경자년 4월에 이르러서야 요청했던 것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경자년 4월 조금 뒤에 쓴 것이다. 또 주자는 그 전해인 기해년 3월에 군에 도착했고 이 서신에서 1년 여 있었다고 했으니 역시 경자년 여름에 쓴 것이 분명하다.
아무 공적도 없는 제가 이곳에 일년 남짓 머물렀는데, 마음대로 앞으로 나아가 道에 거스르며 명성을 구해 백성들에게 많은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사관직을 청한 것이 비록 이미 허락을 얻었다고 들었으나 아침저녁으로 다른 죄로 인해 쫓겨나야 오래도록 이곳의 해악이 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여 주신 가르침이 매우 자세하고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저로 하여금 잔인무도한 자들을 먹여 기르고 악독한 자들을 보호해 그들로 하여금 교활하고 간교하며 제멋대로 굴고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는데도 칭송하는 소리가 주변에 넘쳐 나게 하는 것은 평생토록 본래 마음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高)씨의 일도 문숙(文叔)이 여기에 갖춰 전모를 밝혔습니다. 이것이 용서할만 하다면 또한 관리로써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목탄전의 일을 예로 들면 또한 주군(州郡)의 당연한 일이어서 다행히 상부에서 들어 주었으나, 바야흐로 한스러운 것은 널리 (토호들의) 학대를 다 제거할 수 없으니 본래 올바르게 이 사람에게 칭송을 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금을 도창(都昌)현이 유독 많이 경감 받은 것은 또한 모연(毛掾)이 신경쓴 덕택입니다. 이 사람이 본래 지나친 것이 있으나, 민간의 말을 자세히 조사하고 공문서를 상고해서 그 실상을 구했으니, 전일의 비방으로 사람이 파멸에 이른 것은 또한 심하다 하겠습니다. 임용과 폐출, 是와 非의 사이는 밝히기 어려운 까닭에 道로써 살핌이 있지 않으면 스스로 공정하다고 여긴 바가 반드시 개인의 과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또 당신께 숨기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까닭에 오래도록 알릴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연히 인편이 있어 붓 가는 대로 써서 보내니, 시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고 당신께서 공사와 명실의 사이를 깊이 살펴 이른바 본심의 바름을 진실로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태극에 관한 이론은 매우 좋은데, 남헌이 전해준 두 구절은 그 본문의 위아래 어떤 일을 지칭하는지 모르겠으니, 기다려 정수(定叟)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熹無状, 居此一年有余, 率意直前, 不能違道干誉, 得罪於士民多矣. 請祠雖已報聞, 然旦夕自当以他罪行遣, 不至久為仁里之害也. 示喩曲折, 深荷愛念. 然必欲使熹餧啗虎狼, 保養蛇蝎, 使姦猾肆行, 無所畏憚, 而得歌頌之声洋溢遠近, 則亦平生素心所不為也. 姓高人事, 文叔在此備見首尾. 此而可恕, 則亦無以官吏為矣. 至如木炭銭事, 亦是州郡所当為, 而幸上司之見聴, 方恨不能推類, 尽蠲苛擾, 初不以是而求歌頌於斯人也. 此銭都昌所減独多, 又是毛掾考究之力. 此人固有過当処, 然細詢田野之言考之案牘以求其実, 則前日鎖骨之毀, 亦云甚矣. 此挙錯枉直之間, 所以難明, 非有道以照之, 則所自謂公正者, 未必非私意之尤也. 区区不喜自辯, 又於老兄不可有隠情, 故久不知所以為報. 今偶有便, 信筆及之, 非欲較比是非, 亦欲老兄深察於公私名実之間, 而真得其所謂本心之正耳. 太極之説甚善, 南軒遺言兩句, 不知其本文上下所指何事, 俟更問之定叟也.
강동수신 진준경에게 보내는 편지 與江東陳帥書
【해제】편년고증(p.173)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저의 소략하고 천박하며 미치고 눈 먼 사람의 말은 생각하면 분명 우뢰치고 번개치는 듯한 커다란 노여움을 건드렸습니다. 오늘 들으니 이미 후성에 분부를 내렸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자가 경자년 4월 조칙에 응하여 봉사 올린 일을 가리킨다. 속자치통감권147, 순희 7년 하4월조에 “남강군 지부 주희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황제가 읽고 크게 노했다”고 했다. 이 편지는 순희 7년 경자년 여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이제 엎드려 살펴보니 영광스럽게도 황제의 조령을 입어 아보의 반열에 올랐으니, 제가 생각할 때 명주께서 어진 인재를 생각하고 옛 사람을 염려하는 뜻이 성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상공께서 아직 심복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치리를 보좌하는 일을 궁구할 수 없게 하시니, 식견 있는 세상의 선비들이라면 아직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직책을) 옮기면 저 권행총리의 신하들에게는 좋겠지만, 상공에게 베풀어진 것은 사방에서 지켜보고 듣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의심할 바가 없을 수 없습니다. 고명하신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살며시 당신을 위해 근심할 뿐 감히 축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애롭게 멀리서 편지를 내려 주시는 은혜를 입으니 저는 일찍이 의논하고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스스로 생각할 때 문장은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아 그만두었는데, 저는 이제 살며시 당신을 위해 기뻐하며 감히 무릅쓰고 말씀을 올립니다.
무릇 간언하고 설득할 때는 충심과 정성을 위주로 해야 하며 꾸미는 것을 숭상하지 않습니다. 오늘 드리는 말씀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것은 불을 끄고 죽은 사람을 찾는 것처럼 급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상공의 충의와 간절함을 생각할 때 어찌 참으로 문장이 부족함을 병폐로 여기고 말씀 올리는 일을 태만히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장차 (때를) 기다렸다 드릴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무릇 진실로 (때를) 기다렸다 말씀을 드린다면 그 기다릴 것이란 요즘 당한 일 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상공께서는 사양하고 감사하는 문장으로 인하여 그리고 그 말씀을 덧 붙여 보여주심으로 인하여 근거를 끌어다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고 서로 완곡하게 주고받을 필요도 없으며 단지 마음이 말하고 싶고 시절이 심히 근심하는 사안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명주를 위해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병폐로 여기는 것은 문장의 과도함에 있는 것이지 부족한 것은 병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듣고 따르시면 천하는 실로 내려 준 은덕을 받게 되니 상공의 영예는 어찌 오늘에 그치겠습니까? 불행히도 들어주시지 않으면 상공께서도 (새로운 벼슬) 받아들이는 것을 사양하겠다고 결단한다면 역시 그리 어려운 처사는 아닐 것입니다. 때를 잃고 지금 말씀하지 않으면 천하의 일에서도 실로 그 기회를 잃을 것이고, 나에게 있는 것도 이득에만 빠져있다는 혐의가 없지는 못합니다. 일단 비록 다시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사람 역시 듣지 않습니다. 장손무기의 일과 근세의 이참정(광)의 전철이 아직 멀지 않습니다.
하물며 오늘 내려 주신 (벼슬)은 바로 그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처하는 것이니 만약 과연 무심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 될 것이고 또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 일로 상공을 풍자하고 비난하며 그와 함께 하려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저의 소략하고 천박하며 미치고 눈 먼 사람의 말은 생각하면 분명 우뢰 치고 번개 치는 듯한 커다란 노여움을 건드렸습니다. 오늘 들으니 이미 후성에 분부를 내렸다고 하니 이것은 명주께서 실로 우대하여 용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이 읽히고 노출되면 저의 자취는 이제부터 더욱 고독하고 위태로울 것입니다. 무릇 성은의 관대함이 오히려 저에게도 용납되거늘 하물며 상공에게는요? 만일 아직 마음을 열어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후일의 허물과 나머지 책망이 없고 또 보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상공께서는 의심치 마시고 뜻을 다하고 말씀을 다 올려 종사를 부지하고 생령을 구하기 바랍니다. 저는 격절하고 간절한 기도를 이기기 못하겠습니다.
玆者伏審栄被明綸, 進班亜保, 窃惟明主思賢念旧之意, 可謂盛矣. 然使相公尚淹瀋服而未得究其輔賛弥綸之業, 則海内有識之士猶以為恨. 抑無故而驟遷, 在彼権幸寵利之臣則可, 而施於相公, 則於四方之観聴亦不能無所疑也. 不審高明何以処此? 熹則窃為門下憂之, 而未敢以為賀也. 玆承鈞慈遠賜手書, 窃審嘗欲有所論建, 自以文不逮意而罷, 熹於是窃為門下喜焉, 而敢冒進其説.
夫諫説主於忠誠, 不尚文飾. 且今日之言有不可緩者, 猶救火追亡人也. 況以相公之忠義懇切, 豈真以文不足為病而怠於納誨者哉? 亦曰将有待而言之耳. 夫苟誠有待而言之, 則其所待無有大於今日之所遭者. 願相公因辞謝之章而因有以附見其説, 不必引拠鋪張, 不須委曲回互, 直以心之所欲言· 時之所甚患者条件剖析, 為明主言之. 其所病者, 乃在於文之過, 而不病其不足也. 幸而聴従, 天下固受其賜, 而相公之栄豈止於今日? 不幸而不入, 則相公辞受之決, 亦不難処矣. 失今不(3-1108)言, 於天下之事固失其機, 而在我者不無昧利之嫌. 一旦雖欲复有所言, 人亦莫之聴矣. 長孫無忌之事与近歳李参政光前車尚未遠也.
況今所授, 正与其人併肩而処, 若果出於無心, 尚為可恥(取), 且又安知其不故以是風切相公, 而使与之同哉? 熹疎賎狂瞽之言, 意謂必触雷霆之怒, 今聞已降付後省矣, 是明主固優容之. 但此章宣露, 賎迹自是愈孤危耳. 夫以聖恩之寛大, 於熹猶且容之, 而況於相公乎? 万一未即開納, 無後咎余責, 亦可保矣. 願相公勿疑, 極意尽言, 以扶宗社, 以救生霊. 熹不勝激切懇祷之至.
수신 진준경에게 보내는 조목별 차자 與陳帥畫一箚子
【해제】편년고증(p.173)에 의하면 이 글은 남송 효종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의 편지다. 이 편지에서 “본군의 건창에서”라고 운운했는데, 남강에 있을 때의 일이다. 또 “요즘 한재의 형세가 이와 같은데”, “한재가 이와 같은데”라고 했는데, 모두 남강이 한재의 피해를 입었을 때 빨리 구제해 달라는 일을 논한 것이다. 연보에서 “(경자년) 가을 7월 다시 남강군의 한재를 상주하고 재난이 있을 때의 정사를 크게 닦았다”고 했는데, 이 편지는 경자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쓴 것이 분명하다.
본 로의 여러 군은 한재로 인한 손해를 입은 곳이 많습니다. 제가 헤아려 보건대 진재용으로 쓸 쌀이 적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요즘도 한재를 입은 상황이 매우 넓고, 가까이에 있는 군의 곡물도 다시는 바랄 수 없으니 널리 규획하여 양곡을 널리 이르게 해야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건도 7년 본군은 미곡 5만석을 얻었지만 떠돌아다니며 죽은 백성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전답에는 사람이 텅 비어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했으니 이 점을 조속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듣자하니 총제소에 쌓인 양곡은 자못 많아서 날로 썩어가고 있으며 더 오래가면 차마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상의하여 조치하시고 그리고 이 미곡을 여러 군에 식량으로 지급할 때 여러 로에서의 강운을 계산하여 검방을 제외하고 다시 잘라 남겨놓고 여러 주에 나누어 주고 진재미를 운반하도록 하며 구휼미를 구입하기 위해 모은 돈을 관리하고 혹 풍년을 기다렸다가 이전의 본색과 곡두를 보충하게 하면 역시 이롭고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一․本路諸郡旱損処多, 窃料将来賑済用米不少. 然今来旱勢甚広, 近郡之穀不复可仰, 須広為規昼, 多致米斛, 乃可接済. 至如乾道七年本軍得米凡五万石, (3-1109)然流殍之民不可勝数, 田里空虚, 至今末复, 此不可不早慮也. 似聞総所積穀頗多, 日就陳腐, 更久亦不堪用. 若得商量措置, 且就支此米餉給諸軍, 而計諸路綱運, 除検放外, 更許截留, 分与諸州般運賑糶, 収簇価銭所管, 或候豊年補前本色斛斗, 亦為利便.
요즘 한재의 상황이 이와 같은데 조사는 사람을 이곳에 보내 옛날 모자랐던 것을 발운 하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모자란 것을 재촉하는 것과 재해를 구제하는 일이 각기 달라 함께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한 말씀 해주시고 그리고 이곳에 파견된 사람을 되 불러가 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주군도 같은 생각이니 함께 시행해 주시면 더욱 다행이겠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호부가 지휘하는 일이니 조사는 응당 그만두도록 신청해야 합니다. 감히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승상께서 스스로 말씀해 주시면 역시 화합을 이루고 화를 없애는 방법이 될 것이고 급한 재난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절박한 일이 되겠습니다.
一․目今旱勢如此, 而漕司差人在此, 催発旧欠. 夫催欠之与救災, 事体各別, 不可双行. 欲乞一言, 且与追回. 其他州郡想亦有此, 并得一例施行, 尢為幸甚. 若是戸部指揮, 漕司自合申請停緩. 或不敢言, 則丞相自当言之, 亦致和消沴之一術, 而救急安民之切務也.
지난 해 은혜를 내려 그만 두었던 관물의 징수를 여러 담당기관에서는 여전히 처리하며 독촉합니다. 바라건대 수사께서 이번 한재 피해를 이유로 휘하의 여러 주를 방문하여 단속하고 하나씩 갖추어 보고하게 하여 특별히 그런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一․去年赦恩所放官物, 諸司依旧理催. 欲乞帥司因此旱傷, 作訪聞検挙行下諸州, 令逐一具申, 特与蠲放.
한재가 이와 같은데 본래부터 부세를 취렴하는 것이 가혹하고 급박하여 백성의 기운이 불화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 건의하여 장차 은혜를 내려 1년 동안의 관물의 취렴을 그만두고 더불어 면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一․旱災如此, 良由賦斂苛急, 民気不和所致. 欲乞丞相建言, 乞将赦恩折放之後一年官物并行除放.
본군의 건창현은 작년에 한재를 구제하는 미곡 3천 여석을 풀었는데 총제소의 조사는 누차 공문을 내려 보내 위로 올리는 군용의 수량 내에서 분할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올바른 조치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사는 그 말씀을 갑자기 바꿔 본군은 군용 수량을 온전하게 하는 안에서 제할하게 하니 위에 올리는 수량을 감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차자를 보내 양조에 간청하고 별본을 갖추어 바치니 염려하는 마음을 내려 한 말씀 해 주시면 이 역시 구황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一․本軍建昌県去年放阜米三千余石, 総所漕司累次行下, 令於上供軍用数内分豁, 此甚允当. 今漕司忽変其説, 令本軍全於軍用数内除豁, 不得滅上供数. 熹有箚子懇兩漕, 別本具呈, 乞賜鈞念, 一言及之, 是亦救荒之助也.
본군에서는 조창 양사에 공문을 보내 양곡 구입비를 없애고 돌로 제방을 쌓는 수리 사업을 보수하고 매듭짓도록 바라며 사본을 갖추어 올리니 더불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응부를 입으면 역시 여러 주에 공문을 내려 보내 이것을 시행하도록 하시고, 백성을 모집하여 부역을 채우게 하시면 관부의 일을 모으고 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며 도적을 없앨 수 있습니다.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3-1110)一․本軍申漕倉兩司乞撥銭米修結石寨状別本具呈, 并乞鈞念. 或蒙応副, 亦可并下諸州, 放此施行, 募民充役, 可以集官事, 済饑民, 消盗賊. 伏乞鈞照.
저는 또 어리석은 간청이 있는데 조사로부터 건도6년에 빌려 남겨둔 상공영미 5천여석은 대략 올 겨울이나 내년 봄에 갚고자 합니다. 공문을 갖춰 조사에게 올렸고 오늘 또 베껴 올리니 바라건대 조사에게 완곡하게 전달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마침 또 검사하다 건도 7년의 성차를 얻어 역시 대강의 내용을 베껴 올리는데 아마 올 해는 일이 이것보다 감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거 체포사의 첩에 비 내리는 날이 많다는 말을 했는데, 아마도 강동은 이미 촉촉하게 적신 것 같습니다. 이곳만 유독 비가 내리지 않으니 어찌할까요?
熹复有愚懇, 欲従漕司借留六年上供零米五千余石, 約今冬或来春可還. 有状申漕司, 今亦錄呈, 乞賜宛転及之, 幸甚. 適又検得乾道七年省箚, 亦錄梗概上呈, 恐今歳事体不減此也. 提挙逓鋪司牒有近日雨水日多之説, 恐江東已霑足矣. 此独無有, 奈何?
수신 진준경에게 보내는 편지 與陳帥書
【해제】이 글은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에 수신인 진준경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 편지는 쌀을 사들여 구황하는 일을 논하고 있는데, 역시 경자년 가을에 쓴 것이 틀림없다.
이전에 누차 상류에서 쌀 사들이는 것을 막는 것에 대한 이로움과 해로움을 말씀 올렸지만 아직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본군에서 쌀을 사들이는 사람과 배가 이미 융흥에서 잡히고 가로 막혀 풀려나지 못하고 있으며 또 객판 조차도 모두 막히고 끊겼습니다. 강서에는 곡식이 잘 익은 주와 군이 자못 있으니 본래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또 명령을 받들고 누차 지휘가 내려 모두 명문이 있는데 말입니다. 이미 편지를 드려 힘껏 간청했지만 아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처음 쌀을 사들일 때부터 이미 그 절차를 간청했는데 지금 이렇게 묶여 있는게 더욱 엄준하니 그 의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조속히 공문을 보내고 거듭 조정에 주문을 갖추어 보고하여 두루 여러 로에 약속을 내려 보내시면 이 나라만 큰 은혜를 입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지난번 유구께서 한재를 입었을 때 이 일을 처음 상주하여 그 후에는 객선이 수레바퀴 살처럼 몰려와 쌀값이 크게 내렸으니 이것이야말로 구황의 급선무입니다. 지난번 내려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시기를 상류 지역도 모두 한재를 입어 쌀 사들이라고 말씀할 곳이 없어 단지 쌓아둔 쌀을 덜아낼까 계획중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지 건강군 한곳만을 위한 계책일 뿐입니다. 그리고 공주, 길주, 정주, 풍양과 호남의 여러 군은 모두 곡식이 익었으니 만약 유구의 구례처럼 주청을 올린다면 이 곳의 쌀은 모두 이끌어 와서 일로가 모두 은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쌓아둔 쌀을 덜어내 여러 군이 각각 3, 5만석씩 얻을 수 있게 한다면 이 역시 매우 다행입니다. 조사께서는 본래 따로 올리는 글을 갖췄지만 저는 우연히 발병이 크게 일어 그 아픔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 감히 많은 글을 쓰지 못하니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이 간절함을 이해하시고 이 곳에도 함께 은혜를 내려주시고 조속히 처리해 주시면 상책이 되겠습니다. 공문이 강서의 우체에 이르면 아마도 늦어질 것 같아 사람을 곧바로 보냅니다. 부디 다행하시기 바랍니다.
前此屢以上流遏糴利害申稟, 未蒙施行. 今本軍糴米人船已為隆興邀截, 不許解離, 又凡客販, 皆為阻絶. 江西頗有得熟州郡, 本自不須如此, 又况著令及累降指揮皆有明文. 已作書力懇之, 恐其未必経意. 蓋自初糴, 已節次懇之, 今乃約束愈峻, 其意亦可見矣. 切乞早賜移文, 仍申朝省或具奏聞, 乞遍下諸路約束, 不独此邦蒙大賜也. 頃時劉枢遭旱, 首奏此事, 其後客船輻湊, 米価自減, 此最為救荒之急務. 向蒙賜教, 乃謂上流皆旱, 無所告糴, 但擬撥樁積米, 此但為建康一郡計(3-1111)耳(一). 然贛․吉․鼎․灃․湖南諸郡皆熱, 若用劉枢旧例奏諸(二), 此米皆可致而一路受賜矣. 不然, 則椿積之米得賜取撥, 使諸都各得三五万石, 亦為幸甚. 漕使本別具禀, 熹偶足疾大作, 疼痛亡憀, 不敢多作字, 只乞鈞念, 為達此懇, 同賜区処, 以速為上. 移文至江西附逓恐遅, 得為専人徑往, 千万之幸.
(一): 原作‘州’, 拠宋浙本改.
(二)奏請: 原倒, 拠右引․明天順本乙.
강동 왕조사에게 보내는 차자 與江東王漕箚子
【해제】이 글은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에 강동조사에게 보내는 차자이다. 이 글에서 “올해 한재의 상황이 매우 심합니다. 이 곳은 5월 중간에 비가 내린 후로 지금까지 가물고 있습니다”고 했다. 또 “바야흐로 구황이 급한 일입니다”고 했는데, 모두 경자년 가을 남강이 크게 한재가 든 일을 가리키니, 경자년 가을에 쓴 편지가 틀림없다. 이 글은 주자가 강동 왕조(師愈)에게 보낸 것이다. 주자가 남강군 지사로 있었는데, 이해 7월 남강군에 큰 가뭄이 들어 세금을 감면해 주길 청하는 내용이다. 아울러 성채를 신축하는 일을 유념해 준 것을 감사하고, 백록동 서원에 관의 책을 보낸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과 석제 수축을 지원해 주길 바라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제가 오랫동안 문안을 여쭙지는 못했지만 날마다 우러러 봄이 있습니다. 사람이 돌아와 가르침을 받으니 감격과 위안이 다함이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 축대를 신축하는 일에 가르침을 주시니 당신의 염려를 크게 입었습니다. 다만 일이 이미 들쭉날쭉하고, 지금 또 이 지역의 재해를 구하는 급한 일이 있다보니 다시 가르침을 청할 겨를이 없습니다. 만약 구재하는 일이 조금 안정되고 갑자기 벼슬을 떠나지 않는다면, 끝내 마땅히 처리해야 할 따름입니다. 세금 감면하는 일에서 은근히 베풀어주신 뜻에 더욱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반드시 청을 이룰 것이라고 여겼는데, 때마침 아리(牙吏)가 임안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길, 상서성의 관리는 조사가 아직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하니, 형편상 거듭 청하오니 결국 도움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에서 백록동(白鹿洞) 서원에 책을 보내 주고 배사한 깊은 은혜는 삼가 이미 별도의 감사 편지를 갖추어 보냈습니다. 다만 올해 가뭄이 매우 심해서 5월 중순에 비가 내린 후로 혹독한 가뭄이 지금까지 계속되니 비록 조금 비 온 곳이 있더라도 아직 흡족하지 않습니다. 올벼는 이미 말할 것도 없고, 늦벼 또한 거둘 것이 없으니 민심이 흉흉하여 위로할 방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사(使司)께서 군에 사람을 보내 관리들을 추궁해 관에서 충당할 물건을 재촉한 것이 무릇 서너 명에 이르니, 제가 비록 당신의 명령을 감히 거역하는 것은 아니나 이 때를 당하여 현(県)과 도(道)를 독촉하고 농민을 재촉한다면 실로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 사람들을 불러 들이셔서 오직 구휼을 위한 정책을 대비하고 강구하도록 해서 이 유민들을 참담한 지경에서 구하신다면 심히 다행입니다. 해야 할 일은 제가 감히 미루지 않겠습니다. 또한 건창현의 작년 세금을 검사하여 방면하는 일은 총제소에서 이미 시행해 내리기를, 군용으로 상공하는 것을 균등하게 하라고 했는데, 도리어 당신께서 상공의 수량을 면제해 주심을 입지 못했으니 더욱이 인자하신 군자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저도 의혹되니 다시 바라건대 깊이 살펴보십시오. 광망스럽게 당신을 모독했으니 황공하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熹久不拝起居之間, 日有瞻仰. 人還被教, 感慰亡窮. 蒙喩置寨事, 極荷台念. 但事已差池, 今又方有救災之急, 未暇再請. 若稍定未去, 終当料理耳. 減税事允感垂意之勤, 初謂必可遂請, 適有牙吏還自臨安, 云省吏果以使司未保明為言, 勢須再下, 此終有望於維持也. 白鹿官書拝賜甚寵, 謹已別具謝箚矣. 但今歳旱勢甚盛, 此自五月半間得雨之後, 枯旱至今, 雖有得少雨処, 殊不沾洽. 早稲已(3-1112)無可言, 晩禾亦未可保, 民情皇皇, 未知所以慰安之者. 而使司差人在郡追人吏․催官物者凡三四輩, 熹雖不敢拒違台命, 然当此之時, 督責県道, 追擾農民, 則実有所不忍. 得賜追還, 令得一意講求備禦賑恤之政, 以救此遺民於溝壑之中, 不勝幸甚. 其可辦者, 熹固自不敢緩也. 又建昌去歳検放, 総所已行下, 令均在上供州用数中, 而反未蒙使司除豁上供之数, 允非所望於仁人君子者. 熹窃惑之, 更乞深賜省察. 狂妄冒涜, 皇恐死罪.
제가 전에 보고 드린 것 외에 다시 돌 제방에 관한 일은 이미 공장을 갖추어 보고 드렸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당신께서 유념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지금의 군자라면 진실로 감히 이것으로써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혹시라도 우 임금과 직이 백성을 구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써주신다면 이 한번의 일로 두 가지를 다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념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것을 혹시라도 알아주시고 아울러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熹前幅所禀之外, 更有石隄一事, 巳具公状申聞, 不審台慈賜念否? 若今之君子, 則固不敢以此望之. 惟執事者儻以禹․稷之心為心, 則此一役也而可以両済. 得蒙垂意, 不勝幸甚. 此或有委, 并乞垂示.
제가 앞 편지에서 말씀 올린 지난 겨울 한재로 인한 세금 감면에 대하여 본래 처음에 이미 사사(使司)의 첩지를 받았었는데 총사(総司)께서 말한 것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고쳐져 하나는 주고 하나는 빼앗으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별도의 공장(公狀)과 차자(箚子)를 갖추어 올리니 당신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저는 여기에 하루도 머물 수 없고, 곧 스스로 탄핵하고 관직을 버려야 하니, 비록 거듭 죄를 짓더라도 감히 사양할 수 없습니다. 본래 초가을에 사관직을 청하고자 했으나 심한 가뭄을 만나는 바람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의리상 혼자만 안일을 구할 수 없기에 여기에 억지로 있었습니다. 만약 (세금 감면을) 얻을 수 없다면 또한 이 혐의(거듭 죄를 짓는)를 면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평생 곤궁함을 참으며 감히 벼슬하기를 구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아직 부임해 오지 않았을 때는 친구들이 모두 우공(于公)의 어짊이 반드시 최군(崔君)을 믿고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오히려 과오를 범했습니다. 요제점(姚提点)은 평생 서로 알지 못했는데도, 이에 저의 말을 살펴 주어서 한번 주청해서 본 군(軍)의 목탄전(木炭銭) 2천관을 면제 받았으니, 일찍이 듣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늙어서 이미 속세에 뜻이 없으니 오랫동안 이 울적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熹前幅所禀去冬放旱事, 初巳得使帖, 如総司之云矣. 既而中改, 一予一奪, 殊不可暁. 今別具公状及箚子, 乞賜台覧. 若決不可行, 則熹於此不容宿留, 便当自劾去官, 雖重得罪, 不敢辞矣. 本欲初秋即申祠請, 又遭旱虐, 自以為義不当求自逸, 故勉強於此. 若不獲已, 則亦不免冒此嫌耳. 一生忍窮, 不敢求仕, 正為如此. 且未来此時, 知友皆以為于公之仁必能庸崔君, 今乃反為所誤. 而姚提点平生不相識, 乃能俯聴愚言, 一奏減本軍木炭銭二千貫, 不審亦嘗聞之否? 熹老矣, 巳(3-1113)無意於人間, 不堪久此欝欝也.
조사에게 보내는 조목별 차자 與漕司畫一箚子
【해제】이 글은 순희 7년(경자; 1180, 51세)에 조사에게 보내는 차자이다. 이 글에서는 남강의 구황을 논하고 있으니 역시 경자년의 일이다. 또 편지에서 “돌 제방 쌓는 일은 이미 관리를 보내 계산하고 헤아리도록 했다”고 했는데 연보에 따르면 “(경자년) 9월 연강의 돌 제방 수축하는 일을 신청했다”고 했다. 이 편지는 마땅히 가을 9월에 쓴 것이 틀림없다.
본군은 전에 주장을 갖추어 건도 7년의 사례에 의거해 돈과 쌀을 지출해서 처리해 주시기를 빌었습니다. 나중에 처음의 수량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처리하기 힘들까 두려워 군량미의 実欠을 다시 갖추어 아룄으니, 6년의 나머지 부족분 5천석을 유보해주시고, 올해의 삼분(三分)의 쌀 1만 여석 또한 헤아려 방면해 주시면 아마도 수가 작으니 쉽게 지불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계속 여러 현(県)을 검방하여 나눈 곳을 헤아려 보니 대략 가뭄 피해를 입은 곳이 많아서 아마도 삼분(三分)의 수에 미치지 못할 것 같으니 비록 상건의 쌀을 유보하라는 조정의 허락을 받더라도 아마 사용하는 데 부족할 것입니다. 다시 실제로 방면한 수 외에 마땅히 바칠 수가 모이길 기다린 후에 부족분은 계산해서 보고하거나 혹은 별도의 주장을 갖춰 사사(使司)에게 보내 아뢸 것이니 미리 당신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一․本軍昨具奏, 乞依乾道七年例, 支撥銭米応副. 後来照得元数頗多, 恐難応副, 遂再具実欠軍糧米奏, 乞截留六年残欠五千石, 及今年擬放七分外三分米一万余石, 庶幾数少易撥. 今続契勘諸県検放分処大段 乾損処多, 恐不能及三分之数, 即雖蒙朝廷許截上件米, 亦恐不足支遣. 更俟取到実放数外合納之数, 却行紐計欠数申禀, 或別具奏乞送使司, 預乞台照.
본 군의 상평미는 두 현을 통틀어 5만석인데 현재 조사해보니 하호(下戸)의 빌붙어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수에도 미치지 못해 계절이 장차 겨울이 된 후에는 끼니를 거를 것이기 때문에 상건의 미곡을 등급과 순서를 나누어 쌀을 팔아 지급할 것이니, 별도로 갖춰 조치한 것을 상세히 보고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쌀의 수량이 부족하면 금전을 지출하여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모든 종류의 관전을 바꾸어 인근으로 보내 양식을 사들였는데 대략 만여 석이 될 것입니다. 다만 돈이 부족하고 주변의 쌀 가격이 이미 올라서 운반해 오기 힘들 뿐입니다.)
一․本軍常平米通両県計五万石, 見行取会下戸仰食之人数目未到, 候将来冬後闕食, 即将上件米斛分等第糶給, 別具措昼詳細申聞. 或恐米数不足, 即乞支撥応副. (熹已見那諸色官銭往鄰近収糴, 約可得万余石. 但苦銭少, 而近地米価已高, 難運耳.)
석축을 쌓는 일은 이미 관리를 파견해 조사하게 했으니 서추(徐推)가 오길 기다리겠습니다. 이 일은 본래 쉽지 않고, 대개 이것으로 인해 기민을 구제하고자 하니,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익이 되니 유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一․石提已差宮計料, 以挨徐推之来. 此挙本不敢容易, 蓋欲因此贍給饑民, 一挙兩利, 切乞留念.
지난 가을 건창(建昌)현의 검방한 쌀은 마땅히 당신의 가르침에 따라 성부에 보고했으니 바라건대 사사에게 내려 보내시고 위에 보고하여 제할을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거듭하여 왕복하는 것이니, 사사가 곧바로 보고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이미 한편으로 성부에 보고했습니다.
一․去秋建昌検放米, 当依台喩申省部, 乞下使司, 乞賜保明除豁. 然此又是(3-1114)一重往复, 不知徑自使司申請如何? 此已一面申部矣.
성자(星子)현의 세금 감면에 대하여 성부에서 대보하라는 말씀은 육미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우습습니다. 만약 본군과 본현에 스스로 명색이 있어 보충할 수 있다면 어찌 다시 감면하고 방면해 달라는 청을 드렸겠습니까? 요즘의 의론이 대개 이와 같으니 기가 막힙니다. 지금 이미 별도의 공장을 갖춰 아뢰고 여전히 조정에 보고해 그 잘못을 자세히 논했습니다. 당신께서 미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一․星子减税, 省部対補之説, 乃似肉糜之論, 可付一笑. 若本軍本県自有名色可補, 即何用更乞減放耶? 近世議論大抵如此, 令人気塞. 見已別具公状申聞, 仍申朝省, 極論其繆, 預乞台悉.
공주 길주 및 호북의 정주 풍주 모두 풍년이라고 들었습니다. 호남 첨헌의 편지를 받았는데 호북의 쌀을 실은 배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마을을 가득 채워 값을 올려주면 불러들일 수 있으니 상황이 매우 좋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수상과 상의하고 헤아려 주시고 주장을 올려 양로에서 행상을 막지 않도록 지휘하게 요청하고, 하류의 해를 입은 주군이 빨리 주장을 갖춰 아뢰도록 허락하시고, 다시 한번 관리를 파견해 주십시오. (주: 이 항목은 일찍이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一․聞得贛․吉諸州及湖北鼎․灃諸州皆熟, 得湖南詹憲書云, 湖北米船填街塞巷, 増価招邀, 気象甚可喜. 欲乞更与帥相商度, 奏乞指揮両路不得阻節客販, 許下流被害州軍徑具奏聞, 重作行遣. 此ー項早乞留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