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대면하고 조묘에 관해 아뢴 차자(그림 포함) (2-610)面奏祧廟箚子(幷圖)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에 「조묘의장」을 올리고 난 후에 영종을 직접 대면하고서 올린 것이다. 차의에 의하면 영종 갑인년 윤10월 신유일 저녁 경연에서 올린 것이라고 한다. 「조묘의장」에서 진술한 내용을 반복하면서, 희조를 조묘로 옮기는 일의 부당성을 재삼 지적하고 있다.
그림(2-610~611)
협실 | 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
순조 익조 |
희조 | 선조 | 태조 태종 |
진종 | 인종 | 영종 | 신종 | 철종 휘종 |
흠종 고종 |
과거의 제도 | |
희조 순조 익조 선조 |
태조 태종 |
진종 | 인종 | 영종 | 신종 | 철종 휘종 |
흠종 고종 |
효종 | 현재의 의론 | ||
순조 익조 선조 진종 영종 |
희조 (시조) |
태조 (세실) |
태종 (세실) |
인종 (세실) |
신종 | 철종 | 휘종 | 흠종 | 고종 (세실) |
효종 | 신 주희의 제안 |
(2-612)臣竊見太祖皇帝受命之初, 未遑他事, 首尊四祖之廟, 而又以僖祖爲四廟之首. 累聖尊崇, 罔取失墜. 中間雖以世數寖遠, 遷之夾室, 而未及數年, 議臣章衡復請尊奉以爲太廟之始祖. 宰相王安石等遂奏, 以爲本朝自僖祖以上, 世次不可得而知, 則僖祖有廟, 與稷契疑無以异. 今欲毁其廟而藏其主, 替祖宗之尊而下祔於子孫, 非所以順祖宗之孝心也. 於是神宗皇帝詔從其請, 而司馬光․韓維․孫抃․孫固等以爲非是, 力奏爭之. 其說甚詳, 然其立意不過以爲太祖受命立極, 當爲始祖而祫享東向, 僖祖初無功德, 親盡當祖而已.
신이 가만히 보건대, 태조 황제께서 천명을 받으시던 초기에 다른 일은 서두르지 않으시고 무엇보다 먼저 네 분 선조의 묘를 높이시고, 또 희조를 네 분 선조의 묘 가운데 으뜸으로 삼으셨습니다. 여러 천자들도 높이고 숭앙하며 (네 분 선조의 묘를)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비록 세대의 간격이 점점 멀어져 협실로 옮기기는 했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의신 장형(章衡)이 다시 태묘의 시조로 받들어야 한다고 청했습니다. 재상인 왕안석 등도 마침내 아뢰기를 ‘본조는 희조 이상에 대해서는 세계(世系)를 알 수 없으므로 희조를 위한 묘를 두는 것이 주나라가 직이나 설의 묘를 두는 경우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묘를 허물고 신주를 옮겼으며,, 역대의 조종들이 존중하던 것을 폐하고 아래로 내려 자손에게 부묘했으니, 조종의 효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신종황제는 조칙을 내려 그들의 청을 따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광(司馬光)․한유(韓維)․손변(孫抃)․손고(孫固) 등은 옳지 않다고 여기고 애써 주장을 올리고 다투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매우 상세하지만 그들의 근본 의도[立意]는 태조는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웠으므로[受命立極] 당연히 시조로 모시고, 협제를 모실 때 동쪽을 향해야 하고, 희조는 애초부터 공덕이 없으므로 친소 관계가 다하면[親盡] 당연히 조묘로 옮겨야 한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臣嘗深考其說, 而以人心之所安者揆之, 則僖祖者, 太祖之高租考也, 雖歷世久遠, 功德無傳, 然四世之後篤生神孫, 順天應人, 以寧兆庶, 其爲功德, 蓋不必身親爲之然後爲盛也. 是以太祖皇帝首崇立之, 以爲初廟. 當此之時, 蓋已歸德於祖而不敢以功業自居矣. 今乃以欲尊太祖之故而必使之奪據僖祖初室東向之位, 臣恐在天之靈於此有所不忍而不敢當也. 安石之爲人雖不若光等之賢, 而其論之正則有不可誣者. 世之論者不察乎此, 但見太祖功德之盛, 而不知因太祖當日崇立僖祖之心以原其所自, 但見光等之賢非安石․章衡之所及, 而不知反之於己, 以卽夫心之所安. 是以紛紛, 多爲異說.
신이 일찍이 그들의 이론을 깊이 살펴보고서 (어떤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할 것인가 하는 면에서 헤아려 보았습니다. 희조는 태조의 고조 할아버지입니다. 비록 시대가 오래 떨어졌고 전하는 공덕도 없지만 4세 다음에 태조[神孫]를 낳으셨고, (태조께서는) 하늘에 순종하고 인심에 호응해서 천하 백성[兆庶]들을 평안케 하였으니, 그 공덕이란 반드시 자신이 직접 이룩한 이후에야만이 성대한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태조황제께서 무엇보다 먼저 추숭해서 희조의 묘를 만들고서 초묘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미 조상에게 덕을 돌리고 감히 자신이 공업을 이루었다고 자처하지 않으셨습니다. 왕안석의 인물됨이 비록 사마광 등 처럼 현명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의론에는 굽힐 수 없는 정당성이 있습니다. 세상의 의론하는 자들은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 단지 태조의 성대한 공덕만을 보고 태조께서 당시에 희조를 높여 묘를 세우려던 마음으로 인하여 자신의 계통[所自]을 돌이키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또 단지 사마광 등의 현자들이 왕안석과 장형이 언급한 것을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것만을 알 뿐 자기에게 돌이켜서 마음에 편안한 것에 나아갈 줄도 모릅니다. 이런 까닭에 분분하게 다른 이론들이 많은 것입니다.
臣嘗病其如此, 每恨無以正之. 不謂今者之來, 適逢此議, 而又以疾病(2-613)之故, 不獲祗赴, 謹已略具鄙見申尙書省, 乞與敷奏, 幷畫成圖本, 兼論古今宗廟制度得失. 因又訪得元祐大儒程頤所論, 深以安石之言爲當, 貼說詳盡, 而所論幷祧二祖, 止成八世之說, 尤爲明白, 未知已未得達聖聽? 欲乞宣問, 詳賜覽觀, 幷下此秦別令詳議, 以承太祖皇帝尊祖敬宗․報本反始之意, 上延基祚, 下一民聽, 千萬幸甚! 取進止. 乞降付尙書省.
신은 일찍이 이와 같은 것을 병폐라고 여기고 매양 바로 잡을 수 없는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뜻밖에도 오늘날에 이르러 마침 이러한 의론에 부닥치고 보니, 질병으로 인하여 (조정에) 나아갈 수는 없지만, 삼가 이미 대충 저의 견해를 갖추어 상서성에 품신하면서 폐하께 진달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아울러 그림을 그려서, 고금 종묘제도의 득실을 논했습니다. 또 원우 년간의 대신이었던 정이가 왕안석의 의론을 정당하다고 여긴 의론을 찾아서 얻은지라, 황첩에 상세하게 다 설명했습니다. 논의한 내용 가운데 두 분 선조의 신주를 조묘로 옮기면 단지 8세만을 태묘에 모시는 격이 된다는 설명은 더욱 명백합니다. 모르겠거니와 이미 천자께서는 들으셨는지요? 바라건대, 묻고 자세히 관찰하시며, 아울러 이 주장을 아래로 내려보내 따로 자세히 의론토록 명령하셔서 태조황제께서 조종을 받들고 공경하며,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을 돌이키려는 뜻을 이으신다면, 위로는 국가의 기초와 하늘의 복을 늘이고 아래로는 민의[民聽]를 통일시킬 것이니 천만 다행일 것입니다. 결정을 내리시기 바랍니다.(바라건대 상서성으로 내려보내 주십시오.)
(貼黃) 臣竊見今者群臣所議奉安四祖之禮多有未安, 蓋不遷僖祧則百事皆順, 一遷僖祖則百事皆舛, 雖復巧作回互, 終不得其所安. 而又當此人心危疑之際, 無故遷移國家始祖之祀, 亦惑衆聽, 實爲非便. 而或者以謂前日之議已奉聖旨恭依, 難復更改. 臣竊詳治平四年三月議者請遷僖祧, 已詔恭依, 至熈寧五年十一月, 因章衡․王安石等申請復還僖祖, 又詔恭依. 蓋宗廟事重, 雖已施行, 理或未安, 不容不改. 伏乞聖照.
(첩황) 신이 가만히 살피건대 오늘날 뭇 신하들이 의논하는 네 분 선조를 받들어 안치하는 예는 대부분 온당치 못합니다. 희조를 조묘로 옮기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한 번 희조를 옮긴다면 모든 일이 어긋날 것입니다. 다시 교묘하게 돌이키려 하여도 끝내 평안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또 이처럼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하는 시기를 당하여 까닭없이 국가의 시조의 신주를 옮긴다는 것도 백성을 미혹시키는 것으로 진실로 편리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일의 의론은 이미 (신하들의) 소청에 의거한 성지를 받든 것이라 다시 고치기 곤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자세히 살펴보니, 치평 4년 3월에 의론하는 자들이 희조를 조묘로 옮기자고 청했을 때도 이미 소청에 의거해서 조칙을 내리셨고, 희령 5년 11월 장형과 왕안석들이 희조를 다시 태묘로 모시자고 신청했을 때도 역시 소청에 의거해서 조칙을 내렸습니다. 종묘의 일은 소중한 것이니 비록 이미 시행했다 하더라도 이치에 혹 온당치 못한 점이 있다면 다시 고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묘에 관해 의논한 차자 (2-614)議祧廟箚子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에 「조묘의장」과 「면주조묘차자」를 올리고 난 직후에 쓴 것이다. 조묘에 대한 의론을 둘러싼 황제의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
臣前日面奏祧廟事, 伏蒙聖慈宣諭, 若曰: “僖祖自不當祧, 高宗卽位時不曾祧, 壽皇卽位時亦不曾祧, 太上卽位時又不曾祧, 今日豈可容易?” 臣恭承聖訓, 仰見陛下聖學高明, 燭見事理, 尊事宗廟, 決定疑惑, 至孝至明, 非群臣所能及, 不勝嘆仰. 然今已多日, 未聞降出臣元奏箚子, 付外施行, 竊慮萬機之繁, 未及指揮, 欲望聖明早賜處分, 臣不勝幸甚. 取進止. 乞降付尙書省.
신이 지난 번에 직접 뵙고서 아뢴 조묘에 관한 일은 삼가 천자의 어지를 받았는데, “희조는 마땅히 조묘로 옮기지 않아야 한다. 고종이 즉위할 때도, 수황께서 즉위할 때도, 태상께서 즉위할 때도 옮기지 않았는데, 지금 어찌 옮길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천자의 훈계를 듣고서 우러서 폐하의 성학이 높고 밝아, 사리를 밝게 비춰 보시고, 종묘를 높이 받드시고, 의혹을 결정하시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고 지극히 명철하시니, 뭇 신하들이 능히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우러러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신이 애초에 올린 차자를 내려보내서, 시행하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일은 천자의 온갖 일[萬機]과 관계된 것인데도 지휘가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천자께서는 속히 처분을 내리신다면 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행일 것입니다. 결정을 내리시기 바랍니다.(바라건대 상서성으로 내려보내 주십시오.)
황제의 뜻을 헤아려 직접 조칙을 지어 올림 進擬詔意
【해제】익증에 의하면 ‘의조’란 천자가 명령을 내리기가 마땅치 않을 경우, 신하가 직접 조칙의 문장을 지어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서에서도 종종 ‘의조’란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은 ‘면주조묘차자’를 올린 후 ‘의조묘차자’를 쓴 시기를 전후해서 쓴 것이다. 송사에 의하면 이 글이 올리기 이전에 이미 네 분 선조의 신주를 옮기라는 명이 내렸다.
묘제를 논한 차자는 그림을 아울러 고금의 제도를 포괄했고, 모든 온축을 다 표현했으니, 오늘날에만 실행할 수 있는 법도가 아니요, 또한 훗날에도 참고할 수 있는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조정으로 내려보내어 자세히 의논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들의 설명이 망령된 것이라면 곧 거듭 분석해서 차이를 모두 밝혀야 할 것이요, 저들의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마땅히 이것을 고집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단지 애매모호한 채로[含糊] 곧장 지휘를 내린다면 오히려 뭇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도 못하고, 거꾸로 경솔하게 치우친 의견을 좇는다는 비난이 있을까 우려됩니다. 만일 (폐하께서) 조칙을 내려 다시 의론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즉 (제가) 조칙의 뜻을 추정해서, 폐하의 지휘를 내려달라고 청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시 의론케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조칙의 뜻은 아래와 같습니다.
: 지난 번에 신료들이 희조황제의 신주를 옮기고 태조황제를 태묘의 초실에 모시며, 나중에 협제를 지낼 때 동향시키자고 청해서, 마땅히 이미 소청에 의거하도록 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자못 편안치 못한 점이 있다. 태묘의 현재 제사는 9세 12실인데, 희조는 희령 이래로 시조로 받들면서 초실에서 제사를 드리던 분으로, 영원히 신주를 옮기지 않고, 협제를 드리는 날이 되면 동향의 자리에 모시는 것이 이미 전례에 합당하니, 이것이 “제사를 모셨으면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조는 오히려 4소4목의 차례 안에 있으니, 또한 초실에 모시고, 동향을 시키게 되면 도리어 태묘는 8세를 모시게 될 뿐이요, 네 분의 선조도 함께 제사를 흠향할 수[合食] 없게 되니 역시 마땅치 않다. 희조는 초실에 그대로 두고, 예전처럼 동향의 자리에 모시며, 선조(宣祖) 한 분의 신주를 태묘의 서협실로 모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태조․태종․인종 세 분의 묘실은 영원히 옮기지 않는 묘실로 만들어서, 장래에도 영원히 옮기거나 허물지 않는다면, 거의 우러러 조종의 효심에 순종해서, 망령되게 태묘의 세대 수[世數]를 줄이는 경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요, 또한 (조상의 신령들이) 함께 제사를 흠향한다는 의리에도 들어맞아서 짐이 종묘를 계승한 뜻에도 부응할 것이다. 모년 모월 모일․윤10월 모일 두 번에 걸쳐 이미 내린 지휘는 시행치 말라.
廟議箚狀幷圖包括古今, 曲盡底蘊, 非獨可爲今日之法, 亦可留備他日稽考, 不若降出, 更令詳議. 如彼說妄, 便可反覆剖析, 以盡同異. 如彼說是, 此便不當固執. 如但含糊, 直降指揮, 却恐不厭衆心, 反有輕率偏徇之誚. 若必不欲降(2-615)出再議, 卽當擬定詔意, 乞降御筆指揮. 然終不若再議之爲善也. 其詔意如左云:
昨因臣僚請遷僖祖皇帝, 而尊太祖皇帝爲初室, 將來祫享, 卽正東向之位, 當已恭依. 今復思之, 殊有未便. 蓋太廟見祀九世十二室, 僖祖自熙寧以來尊爲始祖, 祭于初室, 百世不遷, 遇祫享日, 卽居東向之位, 已合典禮, ‘有其擧之, 莫敢廢也’. 太祖尙在四昭四穆之內, 亦未合便居初室, 亟正東向, 却使太廟止成八世, 而四祧不得合食. 不若上存僖祖爲初室, 東向如故, 而遷宣祖一世於西夾室. 太祖․太宗․仁宗三室亦爲百世不遷之廟, 將來永不祧毁. 庶幾有以仰順祖宗之孝心, 不至妄減太廟世數, 且符合食之義, 以副朕欽承宗廟之意. 其囗月囗日․閠十月囗日兩次已降指揮更不施行.
산릉에 관해 의논한 장 (2-616)山陵議狀
【해제】이 글은 소희 5년(갑인, 1194, 65세) 효종이 세상을 떠난 해에 올린 것이다. 주장의 첫머리에 10월 9일자 손봉길(孫逢吉)의 장계를 언급하고 있는데, 송사에 의하면 11월 을묘일에 효종을 영부릉(永阜陵)에 임시로 장례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 사이에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효종의 장지―즉, 산릉―를 결정하기 위한 의론을 개진하고 있다는 점과 손봉길의 장계가 3일이란 기한을 정하고 있는 점, 주장 가운데 ‘속히 의견을 개진하지 않으면 큰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서, 중신들과 수렴해서 올린 의견에 대한 지휘가 내려오기 이전에 먼저 이 주장을 올린다’는 표현을 보면 3일의 기한을 넘기고 불과 며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11월보다는 10월 중순 경의 것으로 여겨진다.
具位臣朱熹: 準尙書吏部牒, 十月九日, 歹+贊宮覆按使孫逢吉狀, 定到大行至尊壽皇聖帝神穴事, 三省․樞密院同奉聖旨, 令侍從臺諫限三日集議聞奏.
모관 모위 신 주희는 아룁니다. 상서성과 이부의 첩지에 준해 보니 10월 9일 찬궁복안사 손봉길의 장계가 도착했으니, 대행지존수황황제(효종)의 묘자리[神穴]를 정하는 일을 3성과 추밀원이 함께 성지를 받들어 시종 대간들에게 명하여 3일 기한으로 의론을 모아 주장으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臣方欲赴臺集議, 忽聞朝廷已別差官前去宣諭, 卽與衆官具狀申省, 別聽指揮外, 臣竊有愚見, 深恐言之不早, 有誤大計, 須至先具奏聞者.
신이 바야흐로 대에 나아가 의론을 모으려다가, 갑자기 조정이 이미 따로 관리를 파견해서 명을 전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곧장 뭇 관리들과 함게 장계를 갖추어 성에 보고하고, 별도로 지휘를 기다리는 외에 신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견해를 속히 말하지 않으면 큰 일을 그르칠까 깊이 우려되어 먼저 주장을 갖추어 아룁니다.
右臣竊惟至尊壽皇聖帝聖德神功覆冒寰宇, 深仁厚澤浸潤生民, 厭世上賓, 率土哀慕, 宜得吉土, 以奉衣冠之藏, 垂裕後昆, 永永無極. 而因山之卜累月于玆, 議論紛紜, 訖無定說. 臣嘗竊究其所以, 皆緣專信臺史而不廣求術士, 必取國音坐丙向壬之穴, 而不博訪名山, 是以粗略苟簡, 唯欲祔於紹興諸陵之旁, 不唯未必得其形勢之善, 若其穴中水泉之害, 地面浮淺之虞, 偪仄傷破之餘, 驚動諸陵之慮, 雖明知之, 亦不暇顧. 群臣議者又多不習此等猥賤之末術, 所以不能堅決剖判, 致煩明詔, 博訪在廷. 臣實痛之, 其敢無辭以對?
신이 생각하건대, 지존수황황제의 성스런 덕과 신성한 공적은 천하[寰宇]를 뒤덮었고, 깊고 두터운 인자함과 은택은 백성들에게 젖어들었습니다.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오르시니[厭世上賓] 온 국토가 슬퍼하고 추모합니다. 당연히 좋은 땅을 골라 의관을 보관할 장지로 삼고, 후세에 넉넉히 두리우기를[垂裕後昆] 영원토록 끝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장[因山]을 결정하는 일이 몇 개월이 되었지만, 지금에 이르도록 의론만 분분할 뿐 끝내 정론은 없는 지경입니다. 신이 일찍이 그 까닭을 고구해 보았더니, 이 모두가 오로지 대사(臺史)에게만 전담을 시키고 널리 술사들을 구하지 않는 때문이요, ‘국음(國音)’의 이론에 근거한 좌병향임의 자리[穴]만을 구하려고 기필할 뿐, 널리 이름난 산을 찾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대충대충 엄벙덤벙거리면서[粗略苟簡] 오직 소흥부의 여러 능들 곁에 부장하려고만 합니다. 좋은 형세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예를 들어 묘자리에서 물이 샘솟는 폐해나, 땅 표면이 뜨고 얕을 근심 등이 있어, 비좁은 곳을 파내고 부수는 사이[偪仄傷破之餘]에 (주변의) 여러 능을 놀래킬까 우려되는 데도, (이런 사실을) 밝게 알면서도 겨를을 내어 돌아다 보지도 않습니다. 군신들 가운데 의론하는 자들은 또 대부분이 이러한 천한 말술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굳게 결정하고 베듯이 판단하지 못하며, (천자의) 조칙을 번거롭게 초래하면서도 조정에서만 널리 묻고자 합니다. 신은 진실로 이를 애통하게 여기는데 감히 말없이 대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蓋臣聞之, 葬之爲言藏也, 所以藏其祖考之遺體也. 以子孫而藏其祖考之遺(2-617)體, 則必致其謹重誠敬之心, 以爲安固久遠之計. 使其形體全而神靈得安, 則其子孫盛而祭祀不絶, 此自然之理也. 是以古人之葬, 必擇其地而卜筮以決之, 不吉則更擇而再卜焉. 近世以來, 卜筮之法雖廢, 而擇地之說猶存, 士庶稍有事力之家, 欲葬其先者, 無不廣招術士, 博訪名山, 參互比較, 擇其善之尤者, 然後用之. 其或擇之不精, 地之不吉, 則必有水泉․螻蟻․地風之屬以賊其內, 使其形神不安, 而子孫亦有死亡絶滅之憂, 甚可畏也. 其或雖得吉地, 而葬之不厚, 藏之不深, 則兵戈亂離之際, 無不遭罹發掘暴露之變, 此又其所當慮之大者也. 至於穿鑿已多之處, 地氣已洩, 雖有吉地, 亦無全力. 而祖塋之側, 數興土功, 以致驚動, 亦能挺災. 此雖術家之說, 然亦不爲無理. 以此而論, 則今日明詔之所詢者, 其得失大槪已可見矣.
신은 이렇게 들었습니다. ‘장(葬)’이란 말은 감춘다[藏]는 뜻이니 조상의 유체를 감추는 것입니다. 자손으로써 조상의 유체를 감추려한다면 반드시 삼가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정성과 공경하는 마음을 다함으로써 오래도록 편하고 영원히 쉴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하려 할 것입니다. 죽은 이의 형체를 온전하게 하고, 신령은 편안함을 얻게 한다면 자손은 융성하고 제사는 끊이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의 장례는 반드시 땅을 고르고, 점을 쳐서 결정했습니다. 점괘가 불길하면 다시 땅을 고르고 다시 점을 쳤습니다. 근세 이래로 점치는 법은 비록 사라졌지만, 땅을 고르는 이론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사대부나 서인들 가운데 조금이라고 힘있는 집안에서 그 선조를 장례지내려는 자들은 널리 술사를 초빙하고, 이름난 산을 널리 찾아서, 서로 비교하고 좋은 곳 가운데 더욱 좋은 곳을 선택한 다음에 장지로 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혹 정밀하게 땅을 고르지 못해서, 길하지 못한 땅을 고르게 되면 반드시 물이 샘솟듯이 나오고, 개미나 벌, 지풍(地風) 같은 것들이 그 안을 해치고, 유체와 신령을 편안치 못하게 만들며, 자손도 역시 죽거나 대가 끊길 우려가 있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 합니다. 혹 좋은 땅을 구했다 하더라도 장례를 두텁고, 깊이 하지 않으면 병란이 발생한 와중에 발굴되고 겉으로 노출되는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또한 크게 우려해야 할 것입니다. 땅을 너무 많이 뚫은 곳은 지기가 이미 새어나갔으므로, 비록 좋은 땅이라고 한들 (원래 땅이 가지고 있던) 온전한 힘이라고는 없습니다. 조상의 묘소 곁에 흙을 북돋우는 공사를 자주 벌리는 것도 조상의 신령을 놀라게 해서 재앙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비록 술수가들의 말이지만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논하자면 오늘날 천자의 조칙이 묻고자 하는 것도 그 득실을 대개는 이미 알 수 있습니다.
若夫臺史之說, 謬妄多端. 以禮而言, 則記有之曰: “死者北首, 生者南向, 皆從其朔”, 又曰: “葬於北方北首, 三代之達禮也”, 卽是古之葬者必坐北而向南. 蓋南陽而北陰, 孝子之心不忍死其親, 故雖葬之於墓, 猶欲其負陰而抱陽也. 豈有坐南向北, 反背陽而向陰之理乎?
대사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망령된 잘못이 많습니다. 예(禮)로 말하자면 예기 ‘예운’에서는 “죽은 사람은 머리를 북쪽에 눕히고, 산 사람의 거처는 남쪽을 향한다. 모두 그 처음[朔]을 따른다”고 했고, 또 ‘단궁 하’에서는 “살 던 곳의 북쪽에 장례를 지내고 머리를 북쪽에 두는 것은 하은주 3대에 통용되던 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즉 과거에 장례를 지낼 때 반드시 시신을 북쪽에 앉히고 남쪽을 향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남쪽은 양(陽)이요, 북쪽은 음(陰)입니다. 효자의 마음이 어버이의 죽음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묘소에 장례지낼 때 오히려 음을 등지고 양을 감싸안기를[負陰而抱陽] 바라는 것입니다. 어찌 남쪽에 앉아서 북쪽을 향하게 해서, 거꾸로 양을 등지고 음을 향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若以術言, 則凡擇地者, 必先論其主勢之彊弱, 風氣之聚散, 水土之淺深, 穴(2-618)道之偏正, 力量之全否, 然後可以較其地之美惡. 政使實有國音之說, 亦必先此五者, 以得形勝之地, 然後其術可得而推. 今乃全不論此而直信其庸妄之偏說, 但以五音盡類群姓, 而謂塚宅向背各有所宜, 乃不經之甚者. 不惟先儒已力辨之, 而近世民間亦多不用. 今乃以爲祖宗以來世守此法, 順之則吉, 逆之則凶, 則姑亦無問其理之如何, 但以其事質之, 則其謬不攻而自破矣. 蓋自永安遷奉以來, 已遵用此法, 而九世之間, 國統再絶. 靖康之變, 宗社爲墟. 高宗中與, 匹馬南渡, 壽皇復自旁支入繼大統. 至於思陵, 亦用其法, 而壽皇倦勤之後, 旋卽升遐. 太上違豫日久, 以至遜位. 赤山亦用其法, 而莊文․魏邸相繼薨謝. 若曰吉凶由人, 不在於地, 不有所廢, 其何以興, 則國音之說自爲無用之談, 從之末必爲福, 不從未必爲禍矣. 何爲信之若是其篤, 而守之若是其嚴哉? 若曰其法果驗, 不可改易, 則洛越諸陵, 無不坐南而向北, 固已合於國音矣, 又何吉之少而凶之多耶? 臺史之言, 進退無據, 類皆如此. 試加詰問, 使之置對, 必無辭以自解矣.
만일 술수로 말하자면 땅을 고르는 것은 반드시 먼저 주세(主勢)의 강하고 약함, 풍기(風氣)의 모이고 흩어짐, 물과 흙의 깊고 얕음, 혈도(穴道)의 치우침과 바름, 역량의 온전함과 그렇지 못함을 논한 다음에야 그 땅의 좋고 나쁨[美惡]을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사 실제로 국음의 이론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다섯 가지를 앞세워 형세가 좋은 땅을 얻은 다음에 (국음의) 술을 얻어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것들은 전연 논하지 않은 채로 곧장 용렬하고 망령된 치우친 이론을 믿고, 단지 (궁․상․각․치․우란) 다섯 가지 음(五音)으로 모든 성(姓)들을 다 분류할 수 있다고 하고, 무덤[塚宅]의 방향에는 각각 마땅한 방향이 있다고 하니, 이것은 매우 불경한 것입니다. 선유들이 이미 힘써 변론했을 뿐 아니라, 근세의 민간에서도 대부분 (이런 방법은)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종 이래로 세세토록 지켜온 법이라고 여겨, 그대로 따르면 길하고, 어긋나면 흉하다고 하니, 잠시 그 이치가 어떠한 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기로 하고, 다만 사실로만 물어보아도 그 이론의 잘못은 논파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논파될 것입니다. 선조의 영안릉을 옮긴 이래로 이미 이 법을 준용하고 있는데 9세 사이에 국통이 두 번이나 끊겼습니다. 정강(정강)의 난으로 종사가 폐허가 되었으며, 고종이 중간에 흥기하사 필마로 남쪽으로 천도하였으며, 수황은 다시 곁가지[旁支]에서 나와 대통을 계승하셨습니다. 사릉에도 이 법을 썼는데 수황은 제위를 물려준 다음에 곧 승하하셨습니다. 태상의 질병도 고질이 되어 제위를 물려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적산도 이 법을 썼는데, 장문과 위저가 계속해서 죽었습니다. 만일 길흉은 사람에게 달려있지, 땅에 달려있지 않으며, 무너지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흥기하겠는가라고 한다면 국음의 이론은 저절로 쓸데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른다 한들 반드시 복되지도 않고, 따르지 않는다고 한들 반드시 화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처럼 독실하게 믿고 이처럼 엄하게 지키려 하십니까? 만일 그 국음의 법이 과연 효험이 있는 것이어서,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낙월의 여러 능들은 남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향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본시 이미 국음의 이론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길한 일은 작고 흉한 일은 많았단 말입니까? 대사들의 말은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으며, 모두가 이런 부류들입니다. 시험삼아 힐문하시면서 그들에게 대답하도록 시켜보시면 스스로 해명할 (어떤) 말도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若以地言, 則紹興諸陵臣所未睹, 不敢輕議. 然趙彦逾固謂舊定神穴土肉淺薄, 開深五尺, 下有水石, 難以安建矣. 而荊大聲者乃謂新定東頭之穴比之先定神大高一尺一寸五分, 開深九尺, 卽無水石. 臣嘗詳考二人之言, 反復計度, 新穴比(2-619)之舊穴只高一尺一寸五分, 則是新穴開至六尺一寸五分, 則與舊穴五尺之下有水石處高低齊等, 如何却可開至九尺而其下二尺八寸五分者無水石耶? 且大聲旣知有此無水吉穴, 當時便當指定, 何故却定土肉淺薄, 下有水石之處以爲神穴, 直至今日, 前說漏露, 無地可葬, 然後乃言之耶? 其反覆謬妄, 小人常態, 雖若不足深責, 然其奸心乃欲奉壽皇梓宮置之水中而略不顧忌, 則其罔上迷國․大逆無道之罪不容誅矣.
만일 땅으로 논한다면, 소흥부의 여러 능은 신이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언유(趙彦逾)는 본시 이전에 정한 묘자리는 토질[土肉]이 천박하고, 5척 깊이로 팠더니 아래에서 물과 바위가 있어서 편안히 모시기에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대성(荊大聲)은 새로 동쪽 앞부분에 잡은 묘자리는 앞서 정한 묘자리보다 높이가 1척 1촌 5분이 높지만, 9척을 파들어가도 물과 바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 두 사람의 말을 살펴보고, 거듭 헤아려 보았는데, 새 묘자리가 옛 묘자리에 비해서 단지 1척 1촌 5분이 높을 뿐이니, 새로운 자리는 6척 1분 5분만 파보면, 옛 자리의 5척 아래에 물과 바위가 있는 곳과 높낮이가 같아지는데, 어째서 9척이나 파들어가, 그 아래로 2척8촌5분을 더 내려가고서야 물과 바위가 없단 말입니까? 또 형대성이 이미 물과 바위가 없는 자리인줄 알았다면 당시에 곧장 지적해서 정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어째서 토질이 천박하고, 아래에서 물과 바위가 나오는 곳을 묘자리로 지정한 다음에 곧장 오늘에 이르러 과거의 이론은 잘못이요, 장례할 만한 땅이 없다고 한 다음에야 말하는 것입니까? 거듭되는 오류와 망령됨은 소인들의 항상 하는 작태[常態]인지라, 비록 깊이 책망할 것도 아니지만, 간사한 마음은 수황의 관[梓宮]을 물 속에 받들어 모시고도 조금도 돌아보거나 거리낌이 없으니, 윗사람을 속이고 나라를 어지럽히며, 대역무도한 죄는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脫使其言別有曲折, 然一坂之地, 其廣幾何? 而昭慈聖獻皇后已用之矣, 徽宗一帝二后又用之矣, 高宗一帝一后又用之矣, 計其地氣已發洩而無餘, 行圍․巡路․下宮之屬又已迫狹之甚, 不可移減. 今但就其空處卽以爲穴, 東西趲那, 或遠或近, 初無定論. 蓋地理之法譬如針灸, 自有一定之穴, 而不可有毫釐之差. 使醫者之施砭艾皆如今日臺史之定宅兆, 則攻一穴而徧身皆創矣, 是又安能得其穴道之正乎?
설사 그들의 말에 따로 곡절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비탈의 땅이 얼마나 넓단 말입니까? 소자성헌황후도 이미 (그 주변에) 모셨고, 휘종황제와 두 분의 황후도 거기에 모셨으며, 고종황제와 황후도 거기에 모셨습니다. 그 땅의 기운[地氣]를 헤아려보아도 이미 모두 새어나가버리고 남은 힘이라곤 없을 것이요, 행위, 순로, 하궁 등등도 이미 지나치게 좁은데도 옮기거나 줄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단지 빈 자리에만 나아가서 그곳이 바로 묘자리라고 하면서 동서로 이리저리 옮기고, 혹은 멀리했다 혹은 가까이했다 하면서 애초부터 정론이 없습니다. 지리에 관한 법은 침이나 뜸과 같으니, 스스로 일정한 혈이 있는 것이어서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의사로 하여금 돌침이나 쑥뜸을 놓는 것을 모두 오늘날 대사들이 황제의 유택을 정하는 일처럼 하게 한다면 한 혈을 공격하면서 온 몸을 들쑤시는 꼴입니다. 이것이 또 어찌 혈을 구하는 올바른 방법[穴道之正]이라고 하겠습니까?
若果此外別無可求, 則亦無可奈何. 而今兩浙數州皆爲近甸, 三二百里, 豈無一處可備選擇, 而獨遷就偪仄於此數步之間耶? 政使必欲求得離山坐南向北之地, 亦當且先泛求壯厚高平可葬之處, 然後擇其合於此法者. 况其謬妄不經之說, 初不(2-620)足信也耶? 臣自南來, 經由嚴州富陽縣, 見其江山之勝, 雄偉非常. 蓋富陽乃孫氏所起之處, 而嚴州乃高宗受命之邦也. 說者又言臨安縣乃錢氏故鄕, 山川形勢寬平邃密, 而臣未之見也. 凡此數處, 臣雖未敢斷其必爲可用, 然以臣之所已見聞者逆推其未見末聞者, 安知其不更有佳處, 萬萬於此而灼然可用者乎? 但今偏言臺史之言, 固執紹興之說, 而不肯求耳. 若欲求之, 則臣竊見近年地理之學出於江西․福建者爲尤盛, 政使未必皆精, 然亦豈無一人粗知梗槪, 大略平穩, 優於一二臺史者?
만일 이 외에 따로 구할 곳이 없다면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절동․절서의 여러 주가 모두 왕도에서 가까운데 2~3백리 사이에 어찌 한 곳도 선택할만한 곳이 없어서 유독 이 몇 걸음 사이의 비좁은 곳에 나아가려는 것입니까? 가령 반드시 리산(離山)에서 좌남향북의 땅을 고른다고 한 들, 응당 앞서서 웅장하고 두터우며, 높고 평탄해서 장례지낼 만한 장소를 찾은 연후에, 이 법에 합치하는 장소를 골라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망령되고 불경스런 이론은 애초부터 족히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경우야 어떻겠습니까! 제가 남쪽에서 오면서 엄주 부양현을 지났는데, 그 곳 강산의 승경을 보았더니 웅위한 자태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부양은 손씨가 굴기한 곳이요, 엄주는 고종께서 천명을 받은 지역입니다. 말하는 사람들은 또 임안현이 전씨들의 고향이요, 산천의 형세가 여유가 있고 평탄하며, 삼림이 빽빽하고 조용하다고 하는데 신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몇몇 장소들이 반드시 쓸만한 곳이라고 경솔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신이 이미 보고 들은 것으로 보고 듣지 못한 곳을 거꾸로 추론해보면, 이곳보다 훨씬 뛰어나고 쓸만한 좋은 장소가 다시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지금은 단지 대사들의 말만을 편벽되게 듣고서, 소흥부에 장례지내야 한다는 이론을 고집하면서 다른 땅을 구하려고 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만일 (다른 땅을) 구하려고 한다면 제가 가만히 보건대 근년의 지리에 관한 학문이 강서․복건에서 나온 것이 더욱 성행합니다. 설사 반드시 정치하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어설프게나마 그 대강을 알고, 대충은 평이하고 온당해서 (조정의) 한 두명 대사들보다 나은 이가 한 사람도 없겠습니까?
欲望聖明深察此理, 斥去荊大聲, 置之於法, 卽日行下兩浙帥臣監司, 疾速搜訪, 量支路費, 多差人兵轎馬, 津遣赴闕, 令於近甸廣行相視得五七處, 然後遺官按行, 命使覆按. 不拘官品, 但取通曉地理之人, 參互考校, 擇一最吉之處, 以奉壽皇神靈萬世之安. 雖以迫近七月之期, 然事大體重, 不容苟簡. 其孫逢吉所謂‘少寬日月, 別求吉兆爲上’, 此十字者實爲至論. 惟陛下采而用之, 庶幾有以少慰天下臣子之心, 用爲國家祈天永命之助.
바라건대, 천자께서는 이런 이치를 깊이 살피시고, 형대성을 물리쳐 법에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날로 절동․절서로의 수신과 감사에게 명을 시달해서, 속히 널리 찾아 묻도록 하시고, 비용을 지출해서, 인병과 교마를 많이 파견하며, 지리에 밝은 자들에게 비용을 주어 궐에 나아오게 해서, 그들에게 명령하여 왕도 가까운 곳에서 널리 돌아다니며 서로 비교해서 5~7곳 정도를 보아 둔 연후에 관리를 파견해서 돌아보게 하시고, 명을 내려 더욱 자세히 살피게 하십시오. 관직의 품계에 얽매이지 말고 단지 지리에 능통한 사람을 골라 서로 비교 검토하고, 그 중에 가장 좋은 장소를 한 곳 선택해서 수황의 신령을 영원토록 평안히 모시기 바랍니다. 비록 7일의 기한이 촉박하지만 일의 성격상 크고 중하기 때문에 엄벙덤벙[苟簡] 처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손봉길이 말하는 “날짜가 조금 여유가 있으니 따로 조짐이 좋은 곳을 구하는 것이 상책입니다”라는 열 글자는 실로 지당한 의론입니다. 오직 폐하께서 채택해서 사용하신다면 거의 천하의 신하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것이요, 국가의 천명이 영원토록 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臣本儒生, 不曉術數, 非敢妄以淫巫瞽史之言眩惑聖德, 自速譏誚. 蓋誠不忍以壽皇聖體之重委之水泉沙礫之中, 殘破浮淺之地, 是以痛慣激切, 一爲陛下言(2-621)之. 譬如鄕鄰親舊之間, 有以此等大事商量, 吾乃明知其事之利害必至於此, 而不盡情以告之, 人必以爲不忠不信之人. 而况臣子之於君父, 又安忍有所顧望而黙黙無言哉? 惟陛下詳賜省察, 斷然行之, 則天下萬世不勝幸甚! 謹錄奏聞, 伏候敕旨. 乞付尙書省.
저는 본래 유생(儒生)인지라 술수에는 밝지 못합니다. 감히 망령되게 요망한 무당[淫巫]이나 눈먼 사신[瞽史]의 말로 천자를 현혹시켜 스스로에게 천자의 꾸짖음을 초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수황의 소중한 유체를 물이 솟는 모래나 자갈 가운데, 손상되고 얕은 물위에 떠 다니는 듯한 땅에 버려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애통해하며 솟구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폐하를 위해 말씀드립니다. 비유컨대 향촌과 친구들 사이에 이러한 큰 일을 상량해야할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그 일의 이해 관계가 반드시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것을 밝게 알면서 정성을 다해 고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저를) 충성스럽지 못하고 믿음직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할 것입이다. 하물며 자식같은 신하가 부모같은 군주를 위해서 또 어찌 (다른 곳을) 돌아다 보면서 묵묵히 말없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폐하께서는 자세히 성찰하시어 결연한 태도로 행하신다면 천하 만세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다행일 것입니다. 삼가 기록해서 주장으로 아뢰고, 엎드려 어지를 기다립니다.(바라건대 상서성에 맡겨주십시오.)